卷四 흙 먼지 말아 일으키며
홍문의 잔치가 있고 며칠 뒤 항우는 드디어 군사를 몰아 함양으로 들어갔다. 이미 두 달 전에 패공에게 항복한 적이 있는 함양은 한번 짓밟힌 여인처럼 아무 저항 없이 항우를 받아들였다. 이세 황제가 마지막으로 기거하던 망이궁(望夷宮)에 자리 잡자 항우에게도 나름의 감회가 있었다.
일찍이 항우는 시황제가 회계산(會稽山)을 유람하고 절강(浙江)을 건너는 광경을 보고 소리친 적이 있었다.
“대단하구나! 하지만 저 자리를 내가 빼앗아 대신할 수도 있으리라[彼可取而代也].”
그때 숙부는 얼굴이 퍼렇게 질려 항우를 꾸짖었지만 항우로서는 솔직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항우는 그 시황제의 도성을 차지하고. 시황제가 기거하던 대궐에 자리를 잡아 진나라를 굽어보게 되었다.
비록 항우 자신이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것은 아니지만, 이제 천하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진나라나 그 땅의 사람들에게 이긴 자의 너그러움이나 천하를 얻은 자의 어진 다스림을 베풀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항우에게 그런 걸 바라기는 무리였다. 진나라의 주력(主力) 군사들과 싸우면서 악전고투를 거듭해오는 동안에 거칠어지고 뒤틀린 정서는 처음부터 관용이나 연민과는 멀었다.
항우는 항복한 진나라의 마지막 임금 자영(子영)부터 끌어내 죽이는 것을 함양에 들어온 뒤의 첫 일로 삼았다. 유방의 배려로 목숨을 건진 자영은 그 무렵 옥리(獄吏)의 감시를 받으며 망이궁의 한 전각에 유폐되어 있었다. 자영이 끌려오자 항우가 소리높이 꾸짖었다.
“진나라는 백성을 형벌로 학대하고, 세금과 부역으로 쥐어짰으며, 남의 나라를 삼키려는 싸움터로 내몰아 그 목숨을 무수히 잃게 하였다. 또 육국(六國)을 병탄하고 천하를 아우른 뒤에는 천하 만민을 끌어다가 제 백성을 학대하고 쥐어짜듯 하였으며, 제 아비 할아비의 나라를 되 일으키려 한다는 죄목으로 수많은 관동(關東)의 의사(義士)들을 도륙하였다. 네 그런 진나라의 왕으로서 천하에 지은 죄를 알겠느냐?”
겉으로는 그렇게 자영의 죄를 따졌으나 자영이 항우에게 지은 죄는 따로 있었다. 한 나라의 군왕(君王)답게 싸우다가 비장하게 죽지 못하고 항복을 한 죄, 그것도 패공 유방처럼 별 힘도 없는 허풍선이에게 덥석 나라를 내어준 죄였다. 거기다가 꼼짝없이 자영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동안의 마음 졸임으로 초췌해진 모습과 항우에게 목숨을 빌어 나약과 비굴을 한 번 더 내보인 일이었다.
“임금은 곧 나라이다. 진나라가 이미 망했는데 진나라의 임금 되어 어찌 살기를 바라겠느냐? 구차하게 목숨을 빌어 서북의 강국 진나라의 천년 사직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러면서 진왕 자영을 죽인 항우는 다시 진나라 왕실의 여러 공자(公子)들을 잡아들였다. 그들에게도 이런 저런 죄목을 씌웠으나, 실상 그들을 죽인 까닭도 겉으로 밝힌 죄목과는 달랐다. 진승과 오광의 기의(起義) 이래 육국의 복국(複國)과정에서 잘 보아왔듯, 그들도 나중에 진나라 회복을 구실로 자신에게 저항하는 세력의 중심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 다음으로 항우가 끌어내 죽인 것은 높고 낮은 진나라의 벼슬아치들이었다. 역시 겉으로는 포악한 임금을 도와 못된 짓을 한 죄[助傑爲惡]를 묻고 있었지만 그 또한 겉과 속이 다르기는 앞서와 다름없었다. 항우의 장수들에게 사감(私憾)을 산 적이 있거나, 뇌물을 바쳐 구명(救命)을 빌지 않은 진나라의 벼슬아치들은 그 직위가 높고 낮고를 가리지 않고 성하지 못했다. 마치 진나라 왕이라도 된 양, 항우는 관중의 성곽과 관애(關隘)를 지키는 데 소홀했던 장수들도 용서하지 않았다.
하지만 함양으로 들어간 항우가 저지른 잘못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이 거느린 장졸들에게 약탈을 허용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시황제나 다름없이 백성을 쥐어짜고 함부로 죽이게 된 일이었다. 약탈을 허용하는 것은 고대사회에서 일종의 포상으로 유방도 부분적으로는 약탈을 허용하였다. 하지만 부호들이나 관청의 부고(府庫)에 제한되어 있어 백성들을 해치지는 않았는데, 항우의 장졸들은 그렇지가 못했다.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약탈하고, 빼앗기기를 마다하거나 대들면 거침없이 죽였다.
항우의 장졸들이 그렇게 마구잡이로 백성들을 약탈하게 된 데는 까닭이 있었다. 관청의 부고나 궁궐의 창름(倉(늠,름))에 들어있는 재화와 보물은 항우 자신이 모두 거두어들인 탓이었다. 항우는 특별히 물욕이 많은 것이 아니면서도 남이 보면 인색하게 보일 만큼 재물에 집착했다. 지난 두어 해 먹을 것을 찾아 모이고 흩어지는 유민군(流民軍)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거느리게 되면서 터득한 요령 때문이었다. 그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제 사람으로 부리기 위해서는 재물이 필요했고, 그래서 재물은 그 어떤 것에 못지않게 날카로운 병기며 빼어난 전략이 될 수도 있었다.
유별난 자부심에서 비롯된 독점욕도 재물에 대한 항우의 이해 못할 집착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천하의 모든 것은 이긴 자, 가장 뛰어나고 힘 있는 자의 것이어야 한다―그런 의식이 값지고 귀한 것은 모두 자신의 차지여야 한다는 믿음을 항우에게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전리(戰利)의 중요한 품목이었던 여자에게도 적용되었다.
항우는 재화와 보물뿐만 아니라 궁궐 안의 여자들까지도 모두 거두어들이게 했다. 장졸들에게 나누어줄 것은 나누어주고 놓아줄 것은 놓아주며 곁에 두고 부릴 것은 부릴 것대로 골라두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궁궐 안의 여자들을 모두 모아들이는 가운데 부장(部將) 하나가 한 무리의 젊은 여자들을 데려와 별난 소리를 했다.
“궁궐 동북쪽의 한 전각에서 이들을 데려왔는데, 저기 나이든 것들은 궁녀임에 틀림없으나, 여기 이 젊은 것들은 어떻게 나누어야할지 난감합니다. 궁녀로 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비복(婢僕)으로 볼 수도 없고….”
“그게 무슨 소리냐?”
“원래 이것들은 조고가 호해(胡亥)에게 아첨하기 위해 전국 각처에서 끌어 모은 미인들이라 합니다. 궁궐의 예법에다 가무(歌舞)나 시문(詩文) 같은 것을 익히게 한 뒤에 궁녀로 삼으려 했는데, 조고와 호해 사이가 먼저 틀어져 서로 죽이고 죽는 통에 그대로 되지 못한 듯합니다. 아무도 손대지 않은 채 전각 한쪽으로 밀려나 천하의 새 주인이 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 주인이라면 자영(子영)도 있지 않았느냐?”
아무도 손대지 않은 미인들이란 말에 항우가 그렇게 물었다.
“자영은 삼세 황제가 아니라 오직 진왕(秦王)이 되었을 뿐이었고, 그나마 달포밖에 임금노릇을 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가 또 자영은 간악한 조고를 죽이느라 온 힘을 다 쏟는 바람에 저 미인들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패공도 이 궁궐에 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러면서 무심코 끌려온 여인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항우는 갑자기 움찔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한군데 몰려 오들오들 떨고 있는 듯한 여남은 명의 소녀들 사이에서 반짝 쏘아져 나온 한줄기 눈빛 때문이었다. 짧게 얼굴을 스쳐갔으나 항우에게는 마치 수십 개의 날카로운 창날이 가슴을 찔러오는 것 같았다.
항우는 놀라 그 눈빛의 임자를 살펴보았다. 항우의 눈길이 그 임자의 얼굴에 이르자 이번에는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이제 열여섯이나 되었을까, 얼른 보면 설익은 듯한 싱싱함과 풋풋함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애처롭게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단옷에 싸인 그녀의 자태를 바라보는 항우의 느낌은 또 달랐다. 가늘면서도 풍만하여 나이답지 않은 성숙을 드러내는 그 몸매에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찌르르한 이끌림을 느끼게 하는 요염함과 고혹이 깃들어 있었다. 까닭 모르게 사람을 후끈 달게 하는 것으로는 항우의 경험에도 더러 있는 느낌이었다.
“자영이 항복한 뒤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이들을 거두어 이때까지 보살피게 한 사람이 바로 패공이라고 합니다.”
부장(部將)이 좀 전의 물음에 그렇게 대답했지만 항우의 귀에는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 어떤 운명의 끌림이었을까, 그때 소녀도 말끄러미 항우를 올려보았다. 몇 달 왕궁에서 단련을 받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여염의 딸에 지나지 않았던 소녀였다. 그런데 천하를 떨게 하는 대장군 항우의 화경(火鏡) 같은 눈길을 한번 움찔하는 법조차 없이 마주 받고 서 있었다. 오히려 마비된 듯 한참이나 굳어있던 것은 항우였다.
“저 아이는 누구냐? 어디서 왔으며…누구의 자식이냐?”
이윽고 정신을 가다듬은 항우가 더듬거리며 물었다. 부장이 늙은 궁녀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항우의 물음을 전했다. 늙은 궁녀가 자주 겪은 일인 듯 나서서 대답을 대신했다.
“음릉(陰陵)땅 우자기(虞子期)의 딸이라 들었습니다.”
“음릉이라, 우자기의 딸이라….”
그렇게 되뇐 항우는 다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헤아려 보면 그때 항우의 나이 스물일곱, 여느 사내라도 한창 여자를 밝힐 혈기 왕성한 때였다. 더구나 용맹과 기력이 남다른 장군으로 마침내 진나라를 꺾어 천하에 두려울 게 없는 항우이고 보면 그때까지 처자를 거느리지 않은 게 유별날 수도 있었다. 다른 제후들이나 유민군(流民軍) 장수들은 웬만한 터전만 마련하면 보란 듯 처첩을 거느렸다.
그 시절의 관습으로 미루어, 항우가 숙부 항량을 따라 처음 군사를 일으킨 스물 넷 나이만 해도 혼인하기에는 오히려 늦은 때였다. 그런데도 항우가 그때껏 장가를 들지 않은 것은 숙부의 쓰라린 경험 탓이 많았다. 하상(下相)에서 그들 항씨(項氏) 형제들이 그토록 어이없이 진나라 관병들에게 당하고 만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지키고 보살펴야 할 가솔들 때문이었다.
“전란의 시대 큰 뜻을 품은 남자에게 처자는 적의 볼모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항량은 군사를 일으켜 오중(吳中)을 떠날 때까지도 조카의 혼인을 서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뒤 다시 3년 고달픈 전장을 헤매는 동안 이번에는 항우 스스로 하룻밤 잠자리 시중드는 여자조차 마다해 왔다.
항량이 죽은 다음부터, 특히 송의(宋義)를 죽인 뒤로 항우는 초나라 군사를 이끄는 실질적인 군장(君長)이었다. 멀리 회왕(懷王)이 있었으나 싸움터에서는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았고, 또 달리 항우가 금욕해야 할 까닭도 없었다. 하지만 항우가 유별날 만큼 성(性)에 엄격했던 것은 아마도 특유의 자부심과 그 자부심에서 비롯된 결벽(潔癖)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투성이 승리를 거듭하면서 턱없이 자라난 항우의 자부심은 자신이 저급한 욕망에 휘둘리는 것조차 용서하지 못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고 무엇에게도 꺾이지 않는다―그런 항우의 믿음이 성욕에까지 적용된 셈이었다. 어찌 보면, 나는 너희 천장부(賤丈夫)들과 다르다, 그런 욕망쯤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다,는 오기였는지도 모른다.
거기다가 스스로 하늘 아래 으뜸가는 사내라고 믿음으로써 항우는 또 하늘 아래 가장 행실 바르고 아리따운[窈窕] 여인을 짝으로 맞는 것을 당연한 일로 기다리게 되었다. 전란으로 값싸고 헤퍼진 몸가짐과 거칠고 비천해진 심성으로 군막 부근을 어슬렁거리는 여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항우의 세력을 보고 바치는 토호의 곱게 기른 딸들까지도 항우의 눈에는 그저 순하고 미련한 암컷으로만 보였다. 그리고 그런 항우의 자부심은 차츰 묘한 결벽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억누를 길 없는 젊음과 넘쳐나는 기력 때문에 육욕과의 힘든 싸움을 해오는 동안 항우에게도 마음속으로 그리는 여인의 모습이 생겨났다. 그 원형은 아마도 어렸을 적에 잃어 희미해진 어머니의 기억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숙부와 고달프게 떠돌던 소년 시절 마음 설레며 스쳐 지났던 소녀들의 모습이 항우의 상상력과 어우러져 그 무렵에는 제법 구체적인 여인상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항우는 바로 그 여인상을 우(虞)아무개의 딸이라는 소녀에게서 본 느낌이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가슴이 철렁하고 숨이 턱 막혔던 것도 아마 그런 느낌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대왕께서 저 아이들을 거두어들이시는 게 어떨는지요? 이제는 곁에서 시중들 여자들을 둘 때도 되었습니다.”
언제 왔는지 진평이 등 뒤에서 항우에게 넌지시 권했다. 잠시 말문이 막힌 듯 우씨(虞氏) 성의 소녀를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는 항우의 마음속을 읽고 있는 듯했다. 그 소리에 퍼뜩 깨어난 듯 항우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아직 천하가 어지러운데 내 어찌 계집에게 한눈팔 겨를이 있겠느냐?”
“거록(鉅鹿)에서 왕리(王離)를 사로잡고 은허(殷墟)에서 장함의 항복을 받았을 때 이미 천하대세는 결정된 것입니다. 그 뒤 함곡관을 넘어 진나라의 남은 세력을 쓸어내고 이제는 함양까지 차지했는데 대왕 말고 천하의 주인이 달리 어디에 있겠습니까? 게다가 대왕께서 저들을 모두 거두실 수 없다면 여러 장수들도 있지 않습니까? 저 중에서 한둘만 취하시고 나머지는 그들에게 비첩(婢妾)으로 나누어 주신다면 그들은 더욱 대왕의 우악스러운 은혜에 감격할 것입니다.”
진평이 다시 한번 그렇게 권하자 항우도 비로소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을 가다듬어 주변을 둘러보며 속으로 헤아렸다.
‘저 아이는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그리며 만나기를 기다려 온 그 아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자리다. 여기까지 와서 내가 구태여 저 아이를 마다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무엇을 더 참고 무엇을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나도 나이 스물일곱의 사내, 더구나 지난 3년 주검의 언덕을 넘고 피의 내를 건너 여기까지 왔다. 한 여인을 거느린다 해서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이제 저 아이를 내 여자로 거두겠다.’
이윽고 그렇게 마음을 정한 항우는 달아오르는 얼굴을 억지로 감추며 못이긴 척 말했다.
“경(卿)의 말도 반드시 그른 것 같지만은 않구나. 좋다. 저 아이들을 거두어 우씨 성 쓰는 아이만 내 군막에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공 있는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렇게 우희(虞姬)를 거두어들인 항우는 처음 그녀를 받아들일 마음을 먹을 때와는 달리 갑자기 급해져 그날 밤으로 잠자리 시중을 들게 했다.
항우가 다시 패공을 떠올리게 된 것은 그날 밤 작은 잔치로 맞아들인 우희와 한차례 정을 나눈 뒤였다. 흡족함을 넘어 감격에 가까운 기분으로 우희를 뜯어보던 항우가 불쑥 물었다.
“내 들으니 패공이 먼저 너희들을 거두어 보살피게 했다고 하는데 별일은 없었느냐? 특히 너를 보고는 어찌하더냐?”
“대왕처럼 한동안 물끄러미 저를 바라보시다가 이름을 물었을 뿐입니다.”
우희가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가만가만 대답했다. 항우가 까닭모를 질투를 느끼며 캐묻듯 물었다.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패공이란 자는 강동에 있을 때부터 호색하기로 이름이 난 자다. 싸움터에서도 냄새나는 농가의 아낙이나 갈 곳 없는 유민의 딸들을 둘씩 셋씩 끼고 잔다고 들었는데, 너를 보고도 그냥 두었다니….”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저희는 그날 낮에 한번 그분을 뵌 뒤로는 두 번 다시 뵙지 못하였습니다.”
우희가 여전히 별 감정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게 항우의 심사를 건드려 이번에는 우희에게 의심쩍어하는 눈빛을 보이며 물었다.
“그가 너를 바라볼 때 네 느낌은 어땠느냐?”
“장수라기보다는 그냥 부드럽고 너그러운 어르신 같았습니다.”
그래도 우희는 담담하기만 했다. 그게 항우를 더욱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완연히 비틀린 말투로 이죽거렸다.
“그토록 너그럽고 부드러운 도덕군자가 너를 못 본 척 하였으니 섭섭했겠구나.”
그 말에 비로소 우희도 항우의 감정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조금도 흔들림 없는 어조로 항우의 말을 받았다.
“그리 대단한 도덕군자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듣기로 패공은 그날 밤 그대로 대궐에 눌러앉아 미녀와 재보를 누리며 관중왕(關中王) 노릇을 하려고 했으나, 아랫사람들이 말려 패상(覇上)으로 돌아갔다 합니다.”
“그게 아랫사람들이 말린다고 될 일이냐?”
“그 또한 저희가 듣기로는, 대왕이 두려워서 그렇게 고분고분 물러난 것이라 합니다.”
우희는 그렇게 굳이 변명하는 기색 없이 항우의 심사를 풀어주었다. 은연중에 유방을 하찮게 여기는 감정을 섞은 것이지만 항우에게는 효과가 있었다.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패공의 목은 그 어깨 위에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실은 그게 그자가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지.”
항우가 그러면서 너털웃음을 흘렸다.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패공의 행적이 마음 한구석에서는 꺼림칙했으나, 항우는 애써 그런 느낌을 털어버렸다. 그리고 새로 맺은 정에 흠뻑 취해 다시 우희를 끌어안았다.
그날 망이궁(望夷宮)의 한 전각을 차지한 항우의 침실에는 새로 얻은 우희 때문에 밤새도록 신방이나 다름없는 봄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날이 밝은 함양 거리에는 여전히 살벌한 섣달 찬바람이 불고 있었다.
약탈로 함양 성안이 거덜 나자 항우의 장졸들은 성밖 멀리 아방궁(阿房宮)으로 밀어 닥쳤다. 아방궁은 한꺼번에 1만명이 앉을 수 있는 마루가 있을 만큼 규모가 클 뿐만 아니라 방마다 단청과 금박을 덮어씌웠다 할 만큼 호화로운 궁궐이었다. 하지만 시황제에 이어 겨우 짓기를 마친 이세 황제가 미처 궁궐로 써 보지도 못하고 죽어 재보를 쌓을 틈이 없었다.
먼 길을 달려가 온종일 뒤져도 별로 나오는 것이 없자 장졸들의 실망은 곧 분노로 변했다. 궁전을 함부로 들부수다 그것만으로는 한에 차지 않아 항우의 단순하면서도 단호한 의로움에 호소했다.
“백성들의 재물을 쥐어짜고 그 피와 땀으로 지은 아방궁을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장졸들은 그 큰 규모와 화려함에 오히려 치를 떨고 있습니다.”
아방궁 쪽으로 나간 장졸들로부터 그런 물음을 받자 우희와 함께 술을 마시고 있던 항우는 시원스레 그들이 듣고자 하는 말을 해주었다.
“태워버려라!”
그 말에 불길에 휩싸이게 된 아방궁은 그 뒤 석 달 동안이나 타올랐다고 한다.
시황제의 능묘를 파헤치게 된 경위도 아방궁을 태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음날 아직도 우희와의 첫정을 다 풀지 못해 궁궐 안에 머물고 있는 항우에게 계포(季布)가 와서 물었다.
“여산(驪山)에 있는 시황제의 능묘는 어찌했으면 좋겠습니까? 듣기로는 육국(六國)을 멸망시키고 빼앗아 온 온갖 진보가 그 안에 다 들어있다고 합니다.”
“파헤쳐라! 시황제의 능묘를 파헤쳐 보물들을 모두 꺼내라”
이번에도 항우는 한번 망설이는 법도 없이 그렇게 말했다. 진나라와 시황제가 한 일은 모두 악이고, 그걸 지우거나 부수는 일은 모두 선이 된다는 단순한 논리의 적용이었다.
여산(驪山)은 시황제가 즉위한 초기에 이미 능묘 터로 지정되어 일찍부터 치산(治山) 공사가 있었다. 그 뒤 천하를 아우른 시황제는 70만의 죄수와 역도(役徒)를 끌어다가 어마어마한 구리 외관(外棺)을 주조(鑄造)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 땅을 깊이 파 거푸집 형태를 만들고, 거기에 구리물을 부어넣는 방식으로 웬만한 궁궐보다 더 큰 구리 곽(槨)을 땅 속에 만든 일이 그랬다.
그 구리 곽 안에는 함양의 궁궐을 본떠 만든 작은 궁궐들이 들어서고, 그 궁궐 안에는 죽은 뒤에 쓰일 것들이 가득 채워졌다. 곧 저 세상에서 부릴 백관(百官)과 일용으로 쓸 물품들, 그리고 사치로 늘어놓는 진기한 보물 같은 것들의 모형이나 실물이었다. 그리고 그 궁궐 가운데는 자신이 쳐 없앤 육국(六國)의 궁궐들을 본 딴 것도 있었다고 한다.
구리 외관 안의 궁궐 밖으로는 백천(百川)과 강하(江河)와 대해(大海)의 모형을 만들고, 거기에 수은을 부어 흐르도록 장치하였다. 천장은 천문(天文) 도형으로 장식하였으며, 바닥은 지리(地理)를 본떠 높고 낮게 만들었다. 구리 외관 안에 줄여 넣은 한 세상이었다.
그 뒤 시황제가 죽고 난 다음 능묘의 완성은 이세 황제 호해의 몫이 되었다. 호해는 시황제의 주검을 무덤 안에 누이고, 인어(人魚)기름 양초로 불을 밝혀 오래 꺼지지 않게 했다. 또 장인(匠人)을 시켜 구리 외관 문틀에는 절로 화살을 쏘아대는 궁노(弓弩)를 만들게 해 도적이 함부로 무덤을 파고 들어오는 걸 막았다. 그리고 구리 외관 겉으로 봉분을 두껍게 올린 다음 풀과 나무를 심으니 능묘가 마치 산과 같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이세 황제 호해가 시황제를 거기에 묻은 지 아직 몇 년 되지 않는데도 능묘의 입구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여산으로 간 항우의 장졸들은 무턱대고 이곳저곳을 파헤쳐 보았으나 헛수고만 했다. 그러다가 며칠이나 수소문한 뒤에야 어렴풋하게나마 능묘 입구를 아는 늙은이 하나를 겨우 찾아낼 수 있었다.
그 늙은이를 앞세우고 어렵게 능묘 안으로 들어간 항우의 장졸들은 왜 능묘입구를 아는 사람들이 그리 드물었는지를 이내 알 수 있었다. 두꺼운 구리 벽을 뚫고 들어가자 활과 쇠뇌의 화살비가 쏟아졌고, 겨우 그걸 피해 안으로 들어가자 이번에는 백골들이 무더기로 묘도(墓道)를 막았다. 무덤 속 일이 바깥에 알려질 것을 꺼린 호해가 산 채 무덤 속에 가두어버린 장인과 인부들의 시체였다.
거기다가 이미 인어기름 양초불이 꺼진 무덤 속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벽은 함부로 앞을 막았으며 길은 거미줄처럼 얽혀 사방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무덤 속에 가득하다는 보물도 진짜보다는 모조품과 복제가 많아 값나가는 것은 드물었다. 시황제의 능묘가 진기한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재보가 아니라 갖가지 교묘한 장치와 설비 때문이었던 듯했다.
그 바람에 항우의 장졸들은 다시 항우에게 남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비난만 보태놓고 별로 얻은 것 없이 물러나야 했다. 그래서 투덜거리며 시황제의 능묘를 떠나올 무렵 인근의 농부 하나가 와서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여기서 동쪽으로 십리쯤 되는 곳 땅속에 시황제의 대군이 숨어 있습니다. 관동(關東)에서 군사들이 쳐들어오면 막기 위해 시황제 생전부터 감춰둔 대군입니다.”
그 말을 들은 항우의 장수 하나가 의심쩍은 눈길로 다그쳐 물었다.
“시황제의 대군이라니? 진나라에 아직 대군이 남았다면,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죽음을 당했는데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단 말이냐? 네놈이 헛것을 본 모양이로구나.”
“아닙니다. 수천수만의 인마가 땅속에 줄지어 선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농부가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사람과 말이 줄지어선 형태를 그려보이 듯 일러주었다. 항우의 장수가 들어보니 진나라 군사들의 행군법(行軍法) 그대로였다. 그제야 농부를 무턱대고 의심할 수만은 없게 된 그 장수가 다시 항우에게 사람을 보내 들은 말을 전했다.
진나라의 대군이란 말 때문인지 이번에는 항우가 직접 달려왔다. 싸움다운 싸움조차 없이 패공에게 항복해 버린 진나라의 무력함을 의심쩍게 여겨온 항우로서는 드디어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는 기대까지 품었다.
그 농부는 항우를 여산 동쪽의 황량한 벌판으로 데려갔다. 한때는 적잖은 군사가 진채를 벌인 흔적이 있는 곳이었는데, 그 한편에는 아직도 쓰임을 알 수 없는 움막들이 텅 빈 채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사람의 자취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상하다. 달포 전만 해도 군사들이 깔려 잡인의 출입을 엄하게 막았는데….”
그 농부도 아무도 없는 것이 뜻밖이라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항우 곁에 섰던 낭중(郎中) 하나가 두 눈을 부라리며 농부를 몰아세웠다.
“영감, 바로 말해. 공연히 거짓말로 상금이나 우려내려다가 목이 날아가는 수가 있어!”
“아닙니다. 틀림없이 몇 년째나 이곳에는 많은 군사와 인부들이 움막을 치고 있었습니다. 달포전만 해도 저쪽에는 골짜기 같이 깊은 구덩이가 파여 있고, 그 안에는 기마를 앞세운 보갑(步甲)과 궁수(弓手)들이 수천 명이나 넉 줄로 늘어 서 있었는데….”
그러면서 농부가 가리킨 곳은 풀 한포기 안 난 넓은 평지였다.
“그곳에는 골짜기도 구덩이도 없지 않나? 그리고 진나라 군사들이 잡인의 출입을 엄하게 막았다면서, 그건 어떻게 보았나?”
“저쪽 언덕에 숨어서 보았습니다. 무리를 벗어난 가축을 찾다가…. 먼빛으로 보았지만 틀림없어요. 한창 때의 우리 진나라 군병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군이었습니다.”
농부가 그 말과 함께 연방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억울하다는 듯 그 평지 쪽으로 우르르 달려가 이곳저곳을 뜯어보듯 살폈다. 항우도 그 일대에 가득한 이상한 살기(殺氣) 같은 것을 느끼며 가만히 주변을 살폈다. 도무지 군사를 매복시킬 데가 없는 평지인데도 왠지 대군이 숨어있는 골짜기를 지나는 느낌이었다.
그때 펄쩍펄쩍 뛰며 땅을 굴러보기도 하고, 땅바닥에 귀를 대고 뭔가를 엿듣기도 하던 그 농부가 갑자기 자신을 몰아대던 낭중을 보고 소리쳤다.
“여깁니다. 틀림없이 이쯤 돼요. 군사들을 시켜 여기를 파 보십쇼!”
“괭이와 삽가래를 가져와 어서 저것을 파보아라.”
그 낭중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항우가 나서 군사들에게 농부의 말을 따르게 했다.
오래잖아 괭이와 삽을 든 군사들이 와서 농부가 가리킨 곳을 파기 시작했다. 겨우 한 자나 팠을까, 정말로 괭이 끝에서 낯선 소리가 들렸다. 흙이나 모래를 파헤칠 때 나는 소리가 아니라, 비어 있는 나무상자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였다.
“이 아래 뭔가 있다. 어서 흙을 걷어내 보아라.”
항우가 그렇게 군사들을 재촉했다. 군사들이 서둘러 흙을 걷어내고 보니 바닥에는 두꺼운 널판이 마룻바닥처럼 깔려 있었다. 창대로 두드리자 쿵쿵 울리는 것으로 보아 그 아래가 비어 있는 듯했다.
“흙을 더 걷어내고 널판을 들춰보아라. 정말로 진나라 대군이 숨어 있는 땅굴 입구인지도 모르겠다.”
항우가 다시 그렇게 소리쳤다. 더 많은 군사들이 거들어 흙을 걷어내자 여덟 자 남짓의 두꺼운 널판으로 짜여진 평상 같은 것이 나왔다. 군사들이 여럿 힘을 합쳐 그것을 들치자 한눈에 땅굴 입구임을 알아볼 수 있는 커다란 구덩이가 입을 벌렸다. 아래로 비스듬하게 길이 나 있는 걸로 보아 땅굴은 꽤나 깊은 곳에 나 있는 듯했다.
항우가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장검을 움켜잡고 앞장서 뛰어내리려 했다. 그러자 부장(部將) 하나가 그런 항우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대왕, 자중하십시오. 이곳은 어둡고 비좁아 암습(暗襲)이라도 당하면 대왕의 용력으로도 낭패를 보기 십상입니다. 제가 한번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그리고는 몸을 훌쩍 날려 땅굴 입구로 내려서다 말고 군사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안이 어두울 듯싶으니 너희 중 둘만 홰를 마련하여 나를 따르라!”
가까이 있던 군사 둘이 한참이나 부산을 떨어 횃불 몇 개를 마련하고는 그 부장 곁에 붙어 섰다. 왼손으로는 횃불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칼을 빼든 부장이 군사들과 함께 한발 한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억!”
갑자기 땅굴 안쪽에서 놀라 지르는 비명 같은 소리가 들렸다. 앞선 부장이 낸 소리 같았다. 곧 그를 따르던 군사들의 목소리가 두서없이 뒤를 이었다.
“저, 저게 뭐야?”
“살아 있는 거야? 죽은 거야?”
궁금해진 항우가 땅굴 속을 들여다보며 큰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 안에 무엇이 있느냐?”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은 부장이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의 대군입니다. 흉갑(胸甲)을 갖춰 입고 항오(行伍)를 이룬 보졸들인데 선두에는 기마와 수레까지 갖췄습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군사들 같지는 않습니다.”
“살아 있지 않다?”
항우가 그렇게 되뇌며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횃불 든 병사 몇이 다시 항우를 호위하듯 따라나섰다. 땅바닥에서 한 길도 내려가기 전에 횃불이 아니면 한 치 앞도 보기 어려울 만큼 사방이 어두워졌다.
땅굴 입구는 서너 길 아래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들이 든 횃불로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던 항우는 갑자기 섬뜩한 느낌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지금껏 싸워온 어떤 부대보다 더 정예한 진군의 밀집(密集)부대가 수레와 기마병을 앞세우고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보니 토용(土俑) 같습니다. 진흙으로 구워 만든 군사 말입니다.”
항우가 멈칫하는 것을 보고 먼저 가서 살피고 있던 부장이 소리쳤다.
그 소리에 다소 긴장이 풀린 항우가 차분히 살펴보니 정말로 땅굴 안에 줄지어 서 있는 것은 살아있는 군사들이 아니었다. 사람 크기로 빚은 진흙을 구워 만든 군사들인데, 각기 생김이 다른데다 쥐고 있는 병장기나 맡은 일에 따른 자세가 또 각각이었다. 거기에다 방패나 갑주, 의복에는 채색까지 되어 있어 모두가 꼭 살아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말들도 수레를 끄는 것이건, 기병이 타는 것이건 사람과 다름없이 모두 살아있는 것 같았다. 조금 전 까닭을 모르게 항우의 전의(戰意)를 자극했던 살기는 그런 토용들로부터 뿜어져 나온 것임에 틀림없었다.
“모두 가까이 오라. 와서 좀더 안쪽 깊이 횃불을 비춰 보아라.”
항우가 줄지어 선 병마용(兵馬俑) 앞으로 다가가며 횃불 든 군사들을 불렀다. 그러자 횃불 대여섯 개가 일시에 항우 쪽으로 몰렸다. 하지만 촘촘히 세운 나무기둥 위로 두꺼운 널판을 얹고 그 위에 흙을 덮어 만든 땅굴은 폭이 별로 넓지 않아 불빛이 그리 멀리 비치지 못했다. 거기에다 땅굴은 안으로 길게 뻗어 있어, 보는 사람에게는 어깨를 겯듯 넉 줄로 늘어선 보갑(步甲)부대가 그 깊이 모를 어둠 속에서 끝없이 밀려나오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그 엄청난 토용 군단에 압도됐던 항우가 다시 평소의 투지와 패기를 되살렸다. 갑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앞선 기마 장수의 허리를 베었다. 그리 높은 온도로 구운 것이 아니었던지 그윽,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타고 있던 토용이 두 토막 나 말에서 떨어졌다. 항우는 다시 그 뒤에 창과 방패를 들고 선 병사의 토용을 후려쳤다. 이번에는 그 목이 쑥 뽑히듯 날아갔다. 사람의 형상을 한꺼번에 빚은 것이 아니라 머리와 몸통, 아랫도리 따위 몇몇 부분을 따로따로 만들어 구운 뒤에 끼워 맞춘 듯했다.
항우는 그 뒤로도 몇 개의 토용을 더 부수어 본 뒤에야 땅굴을 나왔다. 다른 곳에 있던 범증과 계포가 때마침 그곳에 이른 걸 보고 항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부(亞父)와 계포 장군은 어서 들어가 보고 저게 무엇인지를 살펴보시오. 시황제 생전부터 있었던 모양인데,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 것인지 통 알 수가 없소.”
그 말에 이번에는 범증과 계포가 항우를 대신해 땅굴로 내려가 안을 살펴보았다. 이윽고 입구로 되돌아 나온 계포가 다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는 필시 불로초니 신선이니 하며 허황된 것들을 믿던 시황제가 죽은 뒤를 위해 땅속에 마련해둔 토용군단입니다. 진나라에 있었던 순장(殉葬)의 습속이 폐지되어 죽은 뒤에 부릴 군사를 데려갈 수 없게 되자 토용으로 갈음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능묘 속에 세우지 않고 하필이면 이곳이오?”
항우가 얼른 믿지 못하겠다는 듯 되물었다.
“능묘 안에는 대군을 다 들일 수가 없어 죽은 뒤에 부릴 군사들의 진채를 따로 땅속에 마련한 것이겠지요. 또 예부터 진나라의 모든 적은 언제나 동쪽에서 왔습니다. 그래서 시황제는 자신의 능묘로부터 동쪽으로 십리 떨어진 이곳을 토용(土俑)군단의 지하진지(地下陣地) 터로 정했을 것입니다.”
계포가 그렇게 대답하며 동의를 구하듯 범증을 돌아보았다. 병마용을 들여다보며 서로 맞춘 의견이 있는지 범증도 계포의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항우가 다시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면 이 입구는 왜 이리 허술하오? 저 농부가 잠시 두리번거리는 것으로 쉽게 찾아냈으니, 다같이 죽은 뒤를 위한 일이면서도 이곳이 여산 능묘에 비해 너무 허술하지 않소?”
“그것은 아마도 이곳 일을 맡아하던 진나라 사졸들에게 입구를 제대로 감출 여유가 없었기 때문인 듯합니다. 달포 전이라면 자영이 패공 유방에게 항복할 즈음 아닙니까? 그런데 저 농부의 말대로 그때까지도 토용들이 묻혀 있지 않았다면, 토용을 굽고 있는 일꾼들이나 그들을 부리는 진병(秦兵)들이나 모두 무슨 경황이 있었겠습니까? 상하 모두 눈치를 보아 달아나기 바쁘다 보니 일이 그렇게 허술하게 마무리 지어졌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이 땅굴 안에 묘구(墓丘) 도적들이 노릴 무슨 굉장한 보물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렇게 엄중하게 입구를 봉할 까닭도 없었던 듯합니다.”
이번에는 범증이 나서 그렇게 추측했다. 그러자 항우가 다시 그곳을 일러준 농부를 불러오게 했다.
“시황제나 호해의 짓거리로 보아 토용이 묻힌 곳은 이곳 한 군데뿐만이 아닐 것이다. 여기 말고 또 어디에 구덩이가 파이고 군사들이 줄지어 서 있었느냐?”
그러자 그 농부는 한동안 기억을 더듬더니 두어 군데를 더 가리켰다.
항우가 군사들을 시켜 그 농부가 가리킨 곳을 파보게 했다. 이번에는 전같이 쉽지 않았으나, 그래도 땅굴의 입구를 몇 개 더 찾아낼 수는 있었다. 그리로 들어가 보니 모두 처음 보다는 규모가 작거나 만들다 만듯한 땅굴 들이었다.
“저것들을 모두 파내려 하십니까? 파내봤자 허술하게 구운 진흙덩이에 지나지 않을 터인데 무엇에 쓰시려는지요?”
항우가 많은 군사를 풀어 모든 땅굴 입구를 크게 파헤치도록 하는 걸 보고 계포가 물었다.
“파내려는 것이 아니라 부수고 태워버리려는 것이오. 그러함으로써 이런 허황된 믿음을 지켜주기 위해 여기 끌려와 피땀을 흘린 백성들의 한을 풀어줌과 아울러 진나라와 시황제의 어리석음을 영영 땅속에 묻어버리려 하오.”
항우가 그렇게 받았다.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죽이고 태운 소문만 남기게 되는 게 걱정된 계포가 넌지시 항우를 깨우쳤다.
“부수어 봤자 땅속에 있는 것이라 세상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고, 태우시려 해봤자 타지도 않는 흙덩이라 군사들만 수고롭게 할 뿐입니다. 부수고 태운 일은 우리 군사들이 아방궁에서 한 일만으로도 넉넉합니다.”
하지만 항우는 그런 계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이 저마다 공업(功業)을 이루려고 애쓰는 것은 고향 땅과 사람들에게 자랑을 삼기 위함이다. 부귀해진 뒤에 고향에 돌아가지 아니 하는 것은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가는 것[금의야행]과 같으니, 누가 그 부귀함을 알아주겠는가.”
항우가 그렇게 말하며 한생(韓生)의 유세를 물리쳤다. 초나라 땅에 원래 있던 말을 빌려 쓴 것인지, 항우가 처음으로 쓴 비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부터 금의야행(錦衣夜行)이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고 한다.
냉대를 받고 쫓겨난 한생은 군문(軍門)을 나서면서 항우의 군막 쪽을 돌아보고 빈정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초나라 사람들은 원숭이가 갓을 쓰고 있는(沐猴而冠) 것이나 진배없다더니, 참으로 그렇구나! 저 원숭이 대왕의 앞날이 훤히 보이는 듯하다.”
그런데 누가 그 말을 듣고 항우에게 일러바쳤다. 한생의 말을 전해들은 항우는 몹시 화가 났다. 제 성품을 이기지 못해 정말로 갓 쓴 원숭이 같은 짓을 하고 말았다. 그 자리에서 한생을 잡아들이게 한 뒤 가마솥에 삶아 죽인 일(烹殺)이 그랬다.
한생은 그 몸이 익어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항우를 비웃고 꾸짖기를 마지않았다고 한다. ‘초한춘추(楚漢春秋)’나 ‘양자법언(楊子法言)’에는 그리 죽은 사람이 한생이 아니라 채씨 성을 쓰는 서생(蔡生)이라고 나와 있는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잘 알 수가 없다.
항우가 한생을 삶아 죽이고도 분이 덜 풀려 불콰해 있을 때 팽성에 사자로 갔던 사람이 돌아와 회왕의 뜻을 전했다.
“관중(關中)의 일은 약조대로 하고, 그 나머지는 상장군의 뜻대로 처결하라. 나라는 밖으로부터 다스릴 수 없는 것이고, 군중(軍中)의 일은 안으로부터 간섭받아서는 아니 된다 하였으니, 그곳의 모든 일은 오직 상장군에게 맡길 뿐이다.”
회왕은 일견 모든 것을 항우에게 맡기면서도 관중의 일만은 슬며시 패공을 편들고 있었다.
“회왕은 우리 집안에서 임금으로 세웠다. 쌓은 공이 아무것도 없으면서 어찌 주인처럼 모든 일을 주무르려 드는가!”
항우는 그렇게 분통을 터뜨렸으나 당장은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이미 패공 유방과도 홍문에서 화해한 셈이라 따르는 장졸들에게도 드러내놓고 그 일을 불평할 낯이 없었다. 범증과 며칠 이마를 맞대고 의논을 맞춘 뒤에 여러 장수와 제후들을 모아놓고 말했다.
“처음 천하에 크게 난리가 일어났을 때 각국은 우선 옛 제후의 후예들을 왕으로 세워 진나라를 쳐부수게 했소. 그러나 단단한 갑옷에 날카로운 무기를 잡고 앞장서 싸운 것은 여러 장수들이나 나처럼 포의(布衣)로 일어난 이들이었소. 그 뒤 비바람을 맞으며 들판에서 지내기를 3년, 마침내 진나라를 쳐 없애고 천하를 평정한 것은 모두 여러 장수들과 나의 힘이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회왕을 잊어버릴 수는 없소. 비록 싸워 이룬 공은 없으나, 땅을 나누어 근기(近畿=직할 영지)로 삼게 하고 황제로 떠받듦이 마땅할 것이오.”
그리고 여러 장수의 동의를 받아 먼저 회왕을 의제(義帝)로 올려 세웠다. 하지만 의(義)는 의(擬)와 통하니 의제는 이름뿐인 황제란 뜻도 가진다. 의붓아버지나 의붓자식을 의부(義父) 의자(義子)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회왕(懷王)을 의제(義帝)로 올려 세운 항우는 이어 제후와 장상(將相)들에게 천하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로써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고 시행한 군현제(郡縣制)는 십여 년 만에 폐지되고, 천하는 다시 하 은 주 삼대(三代) 이래의 봉건(封建)제도로 돌아가게 된다. 제도적으로는 더욱 효율적인 고안인 군현제를 버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그 파탄을 드러내고 있는 봉건제를 되살린 데서 항우의 보수반동 성향을 따지는 사람도 있다.
먼저 항우는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어 양(梁)나라 초(楚)나라 땅 아홉 군[九郡]을 봉지로 삼고 팽성(彭城)에 도읍하기로 했다. 서초(西楚)는 회수(淮水) 북쪽 패(沛) 진(陳) 여남(汝南) 남군(南郡)을 아울러 이른다는 말도 있고, 팽성을 바로 서초라고 이른다고도 한다. 어쨌든 항우는 옛 초나라를 중심으로 가장 기름지고 군사적 요충이 되는 땅을 차지함으로써, 천하 서른여섯 군(郡)의 가운데 노른자위가 되는 아홉 군을 혼자 다스리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패왕(覇王)이란 칭호에 대해서도 항우의 좁은 안목과 보수적 사고를 탓한다. 봉건제를 부활시킴으로써 왕의 칭호를 쓰게 될 다른 제후들과 자신을 변별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춘추시대 오패(五覇)에서 따온 듯한 패(覇)란 말은 두 가지 부담이 있었다. 하나는 그 말이 왕도(王道)나 인의(仁義)보다는 권모술수와 호전성을 상기시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게 이미 몇 백 년 전의 권력재편 방식이었다는 데서 온 의고적(擬古的)이고 반동적인 인상이었다.
하지만 항우는 자신의 칭호와 차지하게 된 땅에 매우 만족했다. 그는 패왕이란 칭호에 실린 기세를 사랑하였고, 어려서 고생하며 떠돈 고향 인근의 땅 거의 모두를 봉지로 차지하게 된 게 기뻤다. 범증도 항우가 당장 황제가 되겠다고 나서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 여겨 그런 결정을 말리지 않았다.
항우의 몫이 결정되자 그 다음은 패공 유방의 차례였다.
“패공 유방이 마뜩지 않은 속내를 비친 적이 있으나 이미 화호하였고, 또 회왕은 지난날의 약조대로 하라 하니, 이대로라면 관중은 고스란히 패공에게 바쳐야 하게 생겼소. 하나 왠지 그를 관중왕으로 삼기는 싫구려. 아부(亞父)께서는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군막 안에서 범증과 이마를 맞대고 의논하던 항우가 자신의 봉지(封地)와 왕호(王號)를 정할 때와는 달리 그답지 않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러기에 홍문의 잔치 때 그를 죽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만약 유방에게 관중을 준다면 이는 범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범증이 그렇게 항우를 나무라 놓고 다시 정색을 하며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유방에게 파(巴·지금의 중경을 중심으로 하는 사천성 동부 일대)와 촉(蜀·성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천성 중서부)을 주어 거기에 묶어두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내 듣기로 파와 촉은 길이 험하고 땅이 천하 한 끄트머리에 치우쳐 있어 진나라에서도 죄수들이나 유배 보내는 곳이라 들었소. 그런 땅에 어떻게 패공을 보낼 수 있겠소?” “하지만 파와 촉도 관중의 땅입니다. 만약 패공이 그리로 가기를 마다하면, 대왕께서는 그 죄를 물어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를 잡아 죽이시고 후환을 없애십시오.”
그런데 마침 항백이 항우의 군막으로 들어왔다.
“숙부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패공을 파촉(巴蜀)으로 보내도 뒤탈이 없겠습니까?”
다시 패공을 죽이라는 범증의 말에 답답해진 항우가 무심코 항백에게 물었다. 하지만 실은 때맞춰 물어준 셈이었다. 항백은 바로 그 일로 조카의 군막을 찾아온 길이었다.
홍문의 잔치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패공 유방은 그 앞뒤로 공이 많은 장량에게 황금 백 일(鎰·20냥 또는 24냥)과 진주 2말을 상으로 내렸다. 그러나 장량은 패공을 살린 게 모두 항백의 공이라 보았다. 패공에게서 받은 상을 고스란히 항백에게 보내 고마움을 드러냈다. 그 소문을 들은 패공도 항백에게 많은 재물을 보내 지난 일을 감사했다.
그런데 항우가 천하를 나누기 시작하면서 패공은 좋지 못한 풍문을 들었다. 범증이 홍문에서 패공을 죽이지 못한 것을 한스러워하며 항우를 충동질하여 이번에는 패공에게 파촉을 봉지(封地)로 내리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범증이 그 무렵 파촉 땅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게 한 것이 그런 풍문을 낳은 듯했다.
패공도 파촉이 어떤 땅인지를 들어 알고 있었다. 놀라 장량을 불러들이고 물었다.
“범증이 항왕을 꼬드겨 나를 파촉에 가둬두려 한다니 이를 어찌 했으면 좋겠소?”
그러나 장량은 크게 걱정하는 낯빛이 아니었다.
“파촉은 감옥이 아니라 패공께서 안전하게 숨을 곳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항왕의 의심을 받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 급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살아남는 일이 먼저라 해도, 그 땅에 갇혀 다시 관중으로 나올 수 없다면 무슨 소용이겠소?”
그래도 장량은 별로 흔들림이 없었다. 듣기에 냉정할 만큼 잘라 말했다.
“다시 관중으로 나오고 나오지 못하는 것도 목숨이 살고 난 다음에 걱정할 일입니다.”
“아니오. 사람의 삶이란 달리는 말이 벽과 벽 사이의 틈새를 지나가는 것과 같소. 내 나이 이미 쉰 살에 가까우니 파촉에 갇혀 한없이 참고 기다리기는 너무 많은 나이요. 한중군(漢中郡)만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그래도 뒷날을 기약할 수 있겠지만, 아니면 차라리 여기서 죽기로 싸워 항왕과 결판을 보는 편이 옳을 것이오!”
그러자 장량도 비로소 정색을 하며 패공을 달랬다.
“한중 땅을 더 얻는 일이라면 달리 길을 찾아보시지요. 다시 한 번 항백을 통하여 항왕을 달래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패공도 그 말을 듣자 마음이 가라앉았다. 다시 장량에게 많은 보물을 주어 항백을 구워삶게 하였다. 이에 항백이 다시 나섰다. 하지만 뇌물보다는 맞서기 어려운 그 어떤 힘이 고비마다 패공을 돕게 만들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어쨌든 그날 항백은 패공에게 한중을 얻어주기 위해 찾아온 것인데, 항우가 오히려 먼저 그 일을 꺼낸 셈이었다.
“파촉도 관중의 땅이니 대왕이 약조를 어긴 것은 아니나, 그곳에 갇힐 것을 걱정한 패공의 장졸들이 들고 일어날까 두렵소이다. 차라리 한중군(漢中郡)을 보태 주고 한왕(漢王)으로 삼아 남정(南鄭)에 도읍하게 하면 어떻겠소? 길은 험해도 남정은 함양에서 그리 멀지 않으니 패공의 장졸들도 죄수가 되어 멀리 유배된 느낌이 덜할 것이오.”
항백이 그렇게 조카의 말을 받았다.
“하지만 패공이 남정(南鄭)에 자리 잡으면 언제든 관중(關中) 한복판으로 머리를 내밀 수 있는 형국이 되오. 파촉(巴蜀) 한중(漢中)에서 힘을 길러 멍석 말듯 온 관중 땅을 휩쓸어버리면 그때는 어떻게 하시겠소?”
곁에 있던 범증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항백을 보며 그렇게 물었다. 항백이 미리 장량과 의논해 짜낸 계책을 제 혼자만의 헤아림인 양 말했다.
“그 일이라면 아부(亞父)께서 바라시는 바처럼 패공 유방을 죽여 없앤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그런대로 쓸 만한 대비책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패공이 함부로 딴마음을 먹지 못하게 관중에 겹겹이 울타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장함은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으로서 누구보다도 관중의 지리와 민심을 잘 압니다. 장함을 옹왕(雍王)으로 삼아 함양 서쪽의 땅을 베어주고 폐구(廢丘)에 도읍하게 하면, 그가 패공 유방에게서 관중을 지키는 첫 번째 든든한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또 사마흔은 본시 역양(轢陽)의 옥연(獄椽)이었으나, 세상을 보는 눈이 밝고 병략과 책모가 뛰어난 사람으로 일찍이 무신군(武信君)의 곤경을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그를 새왕(塞王)으로 삼아 함양 동쪽에서 하수(河水)에 이르는 땅을 봉지로 주고, 역양을 도읍으로 삼게 하면, 관중을 지키는 또 다른 든든한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거기다가 도위(都尉) 동예는 장함으로 하여금 대왕께 항복하도록 권한 자로 역시 안목 있고 지모(智謀)가 넘치는 사람입니다. 그를 적왕(翟王)으로 삼고 상군(上郡)의 땅을 주어 고노(高奴)에 도읍하게 한다면 장함과 사마흔의 뒤를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 셋은 본시 진나라의 장수로 함께 대왕께 항복한 자들이라 생사고락도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에게 관중을 쪼개 맡겨놓으면 한 덩어리가 되어 유방으로부터 관중을 잘 지켜낼 것입니다.”
얼른 듣기에는 그럴듯하게 들리는 말이지만, 실은 장량의 차가운 살핌과 매서운 꾀가 어우러진 교묘한 계책이었다.
장함과 사마흔, 동예는 모두 진나라의 장수들로서, 비록 죄수나 노복들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수십만의 관중 사람을 군사로 이끌고 함곡관을 나간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수십만은 모두 죽거나 산 채 땅에 묻히고 항우에게 항복해 목숨을 건진 그들 셋만 살아서 관중으로 돌아왔다. 그러지 않아도 그들을 바라보는 관중 사람들의 눈길이 험하기 짝이 없는데, 항우가 관중의 왕으로까지 세우게 되면 그 뒤가 어찌될지는 뻔했다. 특히 신안(新安)에서 생매장 당한 진나라 사졸들의 부모형제는 기회만 닿으면 그들 셋을 죽여 그 고기를 날로 씹으리라 별렀다. 말하자면 그들 셋을 관중의 왕으로 세우는 것은, 겉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든든한 울타리를 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없는 것보다 못한 썩은 바자를 두르는 격이었다.
하지만 항백의 말을 들은 항우는 말할 것도 없고 범증까지도 그 그럴듯함에 넘어가고 말았다. 두 사람이 모두 고개를 끄덕여 항백의 말을 받아들이자 패공 유방과 더불어 관중의 세 왕까지 정해지고 말았다. 그러자 관중과 서초(西楚) 사이의 땅도 차례로 임자가 정해지기 시작했다.
위표(魏豹)는 진왕(陳王=진승)의 장수 주불(周불)에 의해 위(魏)나라 왕으로 옹립되었다가 그때는 진나라 장수였던 장함에게 져서 죽은 위구(魏咎)의 아우였다. 형이 죽자 초나라에 항복한 위표는 빌린 군사 수천 명으로 옛 위나라 성 스무 남은 개를 되찾아 그 공으로 위왕(魏王)에 봉해졌다. 그 뒤 날랜 병사 수만과 함께 항왕(項王)을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가 진나라 군사를 쳐부순 적이 많았으나, 원래의 제 땅을 지키지는 못했다. 양(梁=위나라) 땅은 서초패왕이 된 항왕의 봉지(封地)로 빼앗기고 하동(河東)을 대신 받아 평양(平陽)에 도읍하고 서위왕(西魏王)이 되었다.
하구(瑕丘)의 현령이었던 신양(申陽)은 원래 조(趙)나라 승상 장이(張耳)가 총애하던 장수였다. 항왕의 대군이 오기 전에 먼저 하남(河南)을 함락시키고, 하수(河水)가에서 항왕과 초나라 군사들을 맞아들인 공이 있었다. 항왕은 신양에게 삼천군(三川郡) 일대를 떼어주고 하남왕(河南王)으로 세워 낙양(落陽)에 도읍하게 하였다.
한왕(韓王) 성(成)은 죽은 무신군 항량이 세웠으나 크게 세력을 떨치지 못하다가, 패공 유방의 도움으로 양적(陽翟)을 차지하고 겨우 한(韓)나라의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중에 항왕을 따라 함곡관에 들게 되었으나, 세운 공이 없는데다 그 사도(司徒) 장량이 패공을 따라 관중으로 간 일이 흠이 되었다. 도읍과 왕호는 그대로 유지했으나, 뒷날 봉지로 돌아가지 못하고 항왕을 따라 팽성으로 가게 된다.
조나라 장수 사마앙(司馬앙)은 일찍부터 용력이 남다르고 기략이 뛰어난다는 말을 들었다. 항우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하내(河內)를 평정하는데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은왕(殷王)이 되어 하내 땅을 봉지로 받고 조가(朝歌)에 도읍하였다.
장이와 진여에 의해 조나라 왕으로 세워진 헐(歇)은 조나라를 쪼개 만든 대나라 왕으로 옮겨 앉았다. 항왕이 관중으로 쳐들어가는데 장졸을 내기는 했으나, 자신은 신도(信都)에 남아 이렇다 할 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항왕을 따라 함곡관 안으로 들어간 장이(張耳)는 상산왕(常山王)이 되어 조나라 땅 대부분을 봉지로 받고 옛 신도인 양국(襄國)에 도읍하게 되었다. 진나라를 쳐부수는데 공이 많았을 뿐더러 평소 교유가 넓어 많은 사람이 장이를 왕으로 추천한 까닭이었다.
당양군(當陽君) 경포는 항왕의 선봉장으로서 언제나 싸움터에서 세운 공은 군중(軍中)에서 으뜸이었다. 구강왕(九江王)이 되어 회수(淮水) 이남에서 강수(江水)까지를 봉지로 받고, 고향인 육(六=六縣)에 도읍하였다. 세운 공에 비해 봉지가 넓지 않았는데, 어떤 사람은 그때 보인 항우의 인색이 뒷날 경포가 배신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파군(파君) 오예(吳芮)는 백월(百越) 족속을 이끌고 제후군을 도왔으며, 나중에는 항왕을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다. 형산왕(衡山王)이 되어 구강왕 곁에 넓은 봉지를 받고 주(주)에 도읍하였다.
공오(共傲)가 임강왕(臨江王)이 된 것은 좀 별난 경우였다. 원래 공오는 의제(義帝)의 주국(柱國)으로서 황우를 따라 관중에 든 적이 없었다. 그러나 팽성에 남은 초나라 군사를 이끌고 남군(南郡)을 쳐서 떨어뜨린 공이 있으므로 임강왕이 되어 강릉에 도읍하게 되었다.
연(燕)나라 장수 장도(臧荼)는 일찍부터 초나라를 도와 조나라를 구원하였고, 또 항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싸운 공이 있었다. 연왕(燕王)이 되어 연나라 땅 대부분을 봉지로 받고 계(계)에 도읍했다. 그러나 본시 연왕이었던 한광(韓廣)은 제 땅에만 박혀 있다가 항왕의 눈 밖에 났다. 연나라 땅 한 조각을 얻어 요동왕(遼東王)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제(齊)나라 왕 전불(田巿)도 연왕 한광과 비슷한 처지가 되었다. 나라 안에 머물면서 진을 쳐부수는 데 별 공이 없어 제나라 땅 한 조각과 함께 교동왕(膠東王)으로 밀려났다. 그에 비해 제나라 장수 전도(田都)는 제후군과 더불어 조나라를 구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항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세운 공이 있었다. 전불을 대신해 제왕(齊王)이 되고 임치(臨淄)에 도읍하였다.
옛적 진나라의 속임수에 빠져 망한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아들 전안(田安)은 전에 항왕이 장하(帳下)를 건너 거록을 구원하려 할 때 군사를 이끌고 항복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도 항왕을 도와 세운 공이 적지 않아 제북왕(齊北王)이 되고 박양(博陽)에 도읍하게 되었다. 이에 비해 제나라 장수 전영(田榮)은 여러 번 항량을 배신한 적이 있는데다, 진나라를 쳐부수는 데도 힘을 더하지 않았으므로 봉지를 주지 않았다.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는 장이와 싸워 장군인(將軍印)을 내주었으며, 제후군이 관중으로 들어갈 때도 함께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나라를 구원하는 데는 공이 컸고, 또 평소에 현능하다는 평판을 널리 얻고 있어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그가 남피(南皮)에 있다는 말을 듣고 부근의 세 현(縣)을 주며 후(侯)에 봉하였다. 그밖에 파군 오예의 장수 매현(梅鋗)도 패공 유방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세운 공이 적지 않아 식읍 10만호(戶)를 거느린 후(侯)로 봉하였다.
하지만 서초패왕 항우는 그 모든 결정을 하고서도 바로 시행하지 않았다. 제후의 ‘인수(印綬)가 헤지고 도장모서리가 닳도록’ 제 손에 쥐고 우물쭈물하다가 두 달이 넘어서야 제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뒷사람들은 흔히 그 일을 패왕 항우의 인색으로 이해하지만, 실은 그렇게 다시 천하를 쪼개는 일을 그만큼 망설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4월이 되자 희수(戱水)가에 진채를 내리고 모여 있던 제후들은 하나둘 군사를 거두어 자신의 봉지(封地)로 돌아갔다. 한왕(漢王)이 된 유방도 도읍인 남정(南鄭)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러나 한왕의 장졸들은 풍(豊) 패(沛) 땅의 사람들이 많았고, 그렇지 않아도 대부분 동쪽에서 따라온 이들이었다. 자신들이 가야할 곳을 알게 된 그들은 낙담해 마지않았다.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우리만 다시 서쪽으로 험산 준령을 넘어 파촉 한중으로 가는구나. 거기다가 패왕은 진나라 땅에 범 같은 세 왕을 남겨 우리가 되돌아오는 것을 막게 하였다니 살아 고향에 돌아가기는 틀렸다. 보고 싶은 부모형제는 언제 만나보게 될 것이며, 가엾은 처자는 누가 돌봐 줄는지!”
그러면서 땅을 치고 통곡하는 사졸도 있었다. 장수들 중에도 파촉 땅에 평생 갇혀 지내기보다는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며 칼자루를 움켜잡는 자들이 많았다. 한왕도 패왕 항우의 기세에 눌려 봉지라고 받기는 했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새삼 서글프면서도 화가 치밀었다.
“아무래도 이대로는 아니 되겠다. 지금이라도 항우와 싸워 결판을 내자!”
그러면서 장수들을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 모으게 했다. 장수 중에서도 침착한 편인 주발과 관영이 그런 한왕 유방을 말리고, 뱃심 좋은 번쾌까지도 주발과 관영을 편들었다. 그래도 한왕은 분노를 삭이지 못했다. 여전히 싸우자고 고집하고 있는데 소하가 나섰다.
“대왕께서는 진정하십시오. 한중에서 왕 노릇 하기가 아무리 나쁘기로서니 죽는 것보다 낫기야 하겠습니까?”
바깥 싸움터에서는 빛이 나지 않았지만 안에서 살림을 살고 문서를 꾸미는 도필리(刀筆吏)로서는 누구보다 유능한 소하였다. 소하는 한왕이 자영의 항복을 받고 처음 함양에 들어갔을 때도 홀로 진나라의 승상부와 어사부의 도적(圖籍)과 문서들을 거두어 뒷날 한왕이 천하를 얻는 데 요긴하게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한왕이 패공으로 있을 때는 승(丞)으로 썼으나 왕이 되면서 승상(丞相)으로 삼았는데, 평소 별로 말수가 없어도 한번 입을 열면 반드시 옳고 요긴한 말만 골라 하는 그라 한왕도 그의 말은 언제나 귀담아 들었다.
“죽다니? 어째서 죽는단 말이오?”
한왕이 치미는 속을 억누르며 물었다. 소하가 차분하게 대꾸했다.
“지금 대왕이 거느린 장졸은 패왕에 비해 보잘것없으니 백 번 싸워봐야 백번 질 것입니다. 그리고 싸움에 지면 죽음이 있을 뿐이니, 대왕께서 죽지 않고 어찌하겠습니까? 무릇 한사람에게 몸을 굽혀 만백성 위에 우뚝 설수 있었던 사람으로는 탕왕과 무왕이 있었습니다. 탕왕과 무왕은 걸주(桀紂) 같은 폭군에게 몸을 굽힐 수 있었기 때문에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이대로 한중(漢中)의 왕이 되시어 백성을 잘 보살피고 어진 이들을 불러들이시며, 파촉 땅의 사람과 물자를 거두어 써서 힘을 기르도록 하십시오. 그런 다음 돌아와 삼진(三秦·셋으로 나뉜 진나라 땅)을 평정하신다면 천하를 도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한왕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성난 표정을 풀고 여럿을 돌아보며 말했다.
“승상의 말이 옳소. 좋소이다. 모두 돌아가 군사들에게 한중으로 떠날 채비를 하게 하시오.”
그때 한왕 유방의 군사는 10만이 넘었다. 그러나 패왕 항우는 유방이 큰 세력을 거느리고 가는 게 못 미더워 그중에서 3만만 데리고 갈 수 있게 하였다. 한왕이 그들 3만을 이끌고 한중으로 떠나자, 제후국의 군사들 중에서 한왕을 사모하는 자들이 몰래 도망쳐 나와 한군(漢軍)이 되어 따라갔는데 그 수가 오히려 3만을 넘었다.
한왕은 두현(杜縣) 남쪽으로 해서 식(蝕)으로 접어들었다. 식은 한중으로 들어가는 골짜기 길(谷道)의 이름으로 어떤 이는 뒷날의 자오곡(子午谷)을 이른다 하고, 또 어떤 이는 낙곡(駱谷)을 이른다고도 한다. 워낙 지세가 험해 바위벽을 뚫고 통나무를 박아 넣거나 벼랑에 나무다리를 매달아 만든 잔도(棧道)와 각도(閣道)가 유일한 길이었다.
그때 장량은 패왕을 따라온 한왕(韓王) 성(成)을 다시 만나게 되어 한나라의 사도(司徒)로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한왕 유방의 정에 이끌려 배웅을 핑계로 포중(褒中)까지 따라갔다. 유방이 돌아가려는 장량을 잡고 말했다.
“내 되도록이면 자방선생의 맑은 대의를 지켜주려 하였으나,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니 차마 이대로 보낼 수가 없구려. 한왕(韓王) 성(成)은 그 사람됨이 무르고 여려 큰일을 하기는 어려울 듯싶소. 이번에 겨우 왕호와 봉지(封地)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이 같은 전란의 시대에 아무 세운 공도 없이 혈통만으로 얻은 나라와 왕위가 가봐야 얼마나 가겠소? 게다가 자방이 나를 따라 관중에 들어온 일도 패왕의 심사를 적잖이 건드린 듯했소. 한왕 성은 아무래도 그 앞날이 밝지 못하니, 자방은 차라리 여기 남아 나를 도와주는 게 어떻소?”
그러자 장량이 여자처럼 고운 얼굴 가득 슬픔을 띠면서도 결연하게 한왕(漢王) 유방을 올려보며 말했다.
“대왕께서 제게 베푸신 무거운 은의로 보면 이 량(良)은 백번이라도 여기 남아 대왕과 흥망을 같이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왕 성은 죽은 무신군에게 제가 우겨서, 한나라의 여러 공자 중에서도 가려 뽑아 세우게 한 왕입니다. 또 저의 아비 할아비는 그 한나라 왕실에서 다섯 대에 걸쳐 은덕을 입었으니, 이제 형세가 좋지 않다고 아비 할아비의 나라와 그 왕실을 저버릴 수는 없습니다. 나라와 임금이 살아있다면 한(韓)나라는 저의 나라이며 그 임금은 제 임금입니다.” 그래놓고는 숨을 가다듬은 뒤에 차분하게 말했다.
“저는 이제 저의 나라와 저의 임금을 찾아 한나라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대왕께 입은 은혜를 못 잊어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이제 여기서부터는 대군이 지나는 대로 잔도(棧道)를 불살라 버리십시오. 그렇게 길을 끊어버리면 제후들의 도병(盜兵)이 뒤쫓는 것을 막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왕께서 동쪽으로 되돌아갈 뜻이 없으심을 보여주어 패왕의 의심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럼 나더러 한평생 파촉에 갇혀 지내란 말이오? 잔도를 불태워 길을 끊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다시 관중으로 나온단 말이오?”
한왕이 어두운 얼굴로 반문했다. 그러나 장량은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듯 깨우쳐 주었다.
“그때는 또 그때의 길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 대왕께 급한 것은 아무 탈 없이 패왕과 범아부((范亞父)의 독한 손길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왕 유방을 떠나 한나라로 돌아갔다. 한왕은 그런 장량을 십리나 배웅하며 아쉬움과 남은 정을 아울러 드러냈다.
포중에서 남정까지의 남은 길은 옛 시인들이 노래한 ‘촉도난(蜀道難)’의 시작이었다. 구름 걸린 산마루를 넘어가는데, 길이 꼬불꼬불하거나 기어 올라가야할 만큼 가파른 것은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중턱에 굴을 파듯 파고 사람 한둘이 겨우 어깨를 나란히 해 걸을 만큼의 길을 열어둔 곳이 있는가 하면, 아예 홈을 파고 통나무를 박아 넣어 사다리를 산 중턱에 뉘어서 걸어놓은 것 같은 구름다리 길을 만들어둔 곳도 있었다.
거기까지는 용기를 내어 따라왔던 장졸들도 차츰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말로 한중 파촉(巴蜀)까지 따라들어 갔다가는 영영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에 먼저 동쪽을 고향으로 둔 병사들이 대오를 빠져나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어 서북지방 출신의 사졸들마저도 마음이 흔들려 하나 둘 그 뒤를 따랐다.
남아 있는 한왕 유방의 장졸들 사이에서도 벌써 향수병(鄕愁病)의 조짐이 돌았다. 그들은 저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며 그곳에 있을 적의 대수롭지 않은 추억담에도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다른 제후들 밑에 있다가 한왕을 흠모해 스스로 따라온 사졸들도 그런 면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군사들을 이끌고 험한 잔도(棧道)를 지나 남정(南鄭)으로 가고 있는 한왕에게도 이따금씩 작은 위로는 있었다. 아직도 한왕을 흠모해 멀고 험한 길을 마다않고 찾아오는 다른 제후군의 장졸들이 바로 그랬다.
하기야 그들의 흠모는 뒷날의 아첨하는 선비들이 말하듯 너그럽고 어진 한왕의 덕을 향한 것이 아닐 수도 있었다. 한왕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를 따름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는 난세의 영악함에서 비롯된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힘이 없어 한구석으로 몰리는 한왕을 따라 거기까지 온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군(漢軍) 장졸들은 언제나 그들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하루는 생김과 차림부터가 좀 별난 손님 하나가 남정으로 가는 한군의 꼬리를 따라잡고 한편으로 받아주기를 청했다. 키가 여덟 자에 얼굴이 허여멀쑥한 데다 비단옷을 입고 긴 칼을 허리에 찬 것이 다른 제후군의 이름 없는 졸개 같지는 않았다.
“당신은 누구요? 어디서 무얼 하다 왔소?”
그 손님을 처음 맞게 된 한군 하나가 그 생김과 차림을 만만치 않게 보고 그렇게 물었다. 그 손님이 제법 거드름까지 피우며 대답했다.
“나는 초나라의 낭중(郎中) 한신(韓信)이라는 사람이요. 한왕을 따르고자 왔으니 윗전에 기별해 주시오.”
이에 그 군사는 한신을 먼저 번쾌에게로 데려갔다. 번쾌는 멀쑥한 허우대와 의젓한 차림에 넘어갔다. 장수로 대접해 자신의 군막에 들인 것까지는 좋았으나 한신을 알아볼 눈은 없었다. 먼저 음식을 내어 대접하면서 부리는 군사들 가운데 한신을 아는 자가 있는지 수소문해 보게 했다.
오래잖아 회음(淮陰) 출신의 보졸 하나가 먼저 한신을 잘 안다고 나서며 말했다.
“고향에는 그 한신을 한(韓)나라 왕손(王孫)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도 있으나, 실은 비렁뱅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벼슬을 할 만한 재주도 없고 장사로 먹고 살 만한 수완도 없어 늘 남에게 얻어먹고 살았지요. 처음에는 하양(下鄕)마을의 남창정장(南昌亭長)과 친해 그에게서 밥을 빌어먹었는데, 그 아내가 어느 날 새벽같이 밥을 지어먹고 한신이 가도 아침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공밥을 얻어먹는 한신을 밉게 보아 일부러 그런 것이지요.
그러자 한신은 남창정장과 의절(義絶)하고 회음 성 아래 물가에서 낚시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품삯 받고 빨래하는 아낙[표모]하나가 한신이 끼니도 거르고 낚시질하는 것을 불쌍히 여겨 빨래 일이 끝날 때까지 달포가 넘도록 밥을 나눠주었지요. 그런데도 한신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그 아낙에게 반드시 그 은혜에 보답하겠노라 큰소리를 쳤습니다. 그제야 빨래하는 아낙이 성을 내어 ‘대장부 되어 스스로 밥도 벌어먹지 못하기에 불쌍히 여겨 밥을 나눠 주었을 뿐이니, 어찌 보답을 바랐겠는가!’하며 한신을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 다음으로 한신을 잘 안다고 찾아온 군사 하나도 좋은 말은 들려주지 않았다.
“그 사람 멀쩡한 허우대에 긴 칼만 차고 다녔지 실상은 보잘 것 없는 졸장부라고 들었습니다. 한번은 회음 저잣거리의 불량배 하나가 지나가는 그의 길을 막고 ‘네 비록 큰 키에 칼 차고 다니기를 좋아하나 속은 겁쟁이에 지나지 않음을 내가 안다’며 이죽거렸습니다. 그리고 또 ‘네가 사내다운 용기가 있다면 그 칼을 뽑아 나를 찌르고, 그럴 용기가 없다면 내 가랑이 밑을 기어 가거라’며 짐짓 욕을 뵈려 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가만히 그 불량배를 쳐다보다가 말 한마디 없이 몸을 구부려 그 가랑이 밑을 기어 나갔다고 합니다. 그 뒤 회음에서는 겁쟁이하면 누구보다도 먼저 그 사람, 한신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한신이 초나라에서 했다는 낭중(郎中) 벼슬도 실은 패왕의 군막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며 잡일이나 거들던 집극랑(執戟郞)에 지나지 않았음이 밝혀졌다.
번쾌가 원래 그리 사람 보는 눈이 어두운 사람이 아니나, 원체가 타고난 무골(武骨)인 데다 좋지 않은 소리만 듣고 보니 한신을 좋게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군막에서 내쫓지는 않은 채 한왕 유방에게 한신이 투항해 온 일을 알렸다.
번쾌의 말을 들은 유방도 한신을 별로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신을 한번 불러 보는 법도 없이 말했다.
“그래도 한창 기세를 떨치는 패왕을 버리고 나를 찾아온 사람을 모르는 척 할 수야 있겠느냐? 초나라에서 낭중이었다 하니 우리도 낭중 벼슬을 주고 연오(連敖)로 일하게 하여라.”
연오라면 주로 손님 접대를 맞는 벼슬아치로 창을 들고 다니는 일(執戟郞)보다 별로 나을게 없었다. 그런데도 한왕은 크게 보아주기라도 한 듯 한신을 연오랑으로 삼았다.
항량이 살았을 때부터 항우를 따랐던 한신은 좋은 계책을 내놓아도 항우가 써주지 않아 실망을 거듭해 왔다. 거기다가 함양에 들어온 뒤로 항우가 저지른 실책들은 더욱 한신의 실망을 키웠다. 그리고 한생(韓生)을 죽여 관중을 버리고 동쪽으로 돌아갈 뜻을 밝힘으로써 한신이 품고 있던 마지막 기대까지 접게 만들었다.
따라서 한신이 한왕을 찾아온 것은 처음부터 높은 벼슬을 구해서는 아니었다. 하지만 목숨을 걸고 초나라 군중을 빠져나와 험한 산길을 며칠씩이나 헤매다가 찾아온 길이라 그만큼 기대도 자라있었다. 한왕 유방의 그처럼 허술한 대우에 적잖이 상심했다.
(잘못 왔구나. 차라리 항우 밑에 남아 그의 남다른 기력이 뺏어 모은 부귀의 부스러기나 얻어먹고 있는 게 나았다. 항우와 같은 기력이 없으면 요순처럼 어질거나 세상 보는 눈이라도 밝아야할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유방이란 작자는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거만하고 무례할 뿐이로구나.)
그런 생각에 한신은 절로 탄식이 나왔다.
(내 팔자가 실로 기구하구나. 세상이 변하는 것을 보고 대장부의 뜻을 한번 펼쳐보나 했더니 여전히 밥 비럭질에서 벗어나지도 못하였다. 천하 한구석으로 쫓겨나는 제후의 연오가 되어 있지도 않은 손님 접대를 맡아 밥을 먹으니 비럭질과 무엇이 다르랴. 나는 결국 이렇게 살다가 끝나게 되어 있는가….)
한신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니 맡은 일을 제대로 할 리가 없었다. 한왕이 남정(南鄭)에 이른 뒤에도 군중의 일은 제쳐놓고 틈만 나면 술을 마시거나 군사들과 어울려 다니며 못된 짓을 했다. 술도 못된 짓도 맛들이면 늘어나는 법이라, 그 때문에 갈수록 한신의 평판은 나빠졌다. 그게 다시 자포자기로 번져 더욱 한신을 대담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동안 못된 짓을 함께 해온 군사 여남은 명과 진채를 벗어난 한신은 부근의 한 토민(土民) 마을을 덮쳤다. 범 같은 군사 여남은 명이 시퍼런 창칼을 들이대자 크지 않은 마을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그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마치 적지를 점령한 것처럼이나 마을을 뒤져 술을 거두어들인 뒤에 대낮부터 퍼마셨다. 그리고 술이 취하자 더욱 거칠어져 마음대로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자까지 겁탈했다.
하지만 결국은 술이 화근이 되었다. 아무도 말리는 사람 없이 마신 술에 그들 여남은 명 모두 곯아떨어지자, 성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을 꽁꽁 묶어 가까운 한군(漢軍) 진채로 끌고 갔다. 하필 성미가 불같기로 이름난 관영(灌영)의 진채였다.
마을 사람들이 울면서 한신네 패거리가 한 못된 짓거리를 일러바치자 관영이 불같이 성을 냈다.
“대왕께서는 무엇보다 민폐(民弊)를 엄히 금하시고 있거늘, 저놈들이 감히 벌건 대낮에 백성들을 약탈하고 욕보였단 말이냐? 여봐라. 저놈들을 끌어내어 여럿이 보는 앞에서 목을 베어라. 그 다음 그 머리를 군문에 높이 내달아 모든 사졸들에게 군율(軍律)의 무서움을 일깨워주라!”
그렇게 소리치며 아직 술에서 제대로 깨나지도 못한 그들을 끌어내 목 베게 했다. 그 바람에 군문 앞으로 끌려 나간 한신네 패거리는 누구 손에 왜 죽는지도 모르면서 하나둘 목을 잃어갔다.
한신이 제정신을 차린 것은 이미 패거리 열세 명이 모두 목을 잃은 뒤였다. 마지막으로 목을 잘린 군사의 끔찍한 비명 소리에 술에서 확 깨어난 한신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침 태복(太僕) 하후영이 그 소란에 이끌려 관영의 진채로 왔다가 여럿 사이에 끼어 구경을 하고 있었다.
“등공(등公), 등공. 나를 모르시겠습니까?”
한신이 하후영을 보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하후영은 예전 한왕이 항량의 군막을 드나들 때부터 언제나 그 수레를 몰고 함께 나타나 한신에게 낯이 익었다. 홍문의 잔치에 한왕을 따라 왔을 때는 등공이라 불리던 걸 기억하고 한신은 그에게 매달려 보기로 했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하후영이 그 죄수를 보니 어딘가 낯이 많이 익은 듯 했으나 누군지 얼른 기억나지 않았다. 손을 저어 일단 참수(斬首)를 멈추게 해놓고 떨떠름하게 물었다.
“너는 누구냐? 어떻게 나를 아느냐?”
“벌써 저를 잊으셨습니까? 서초패왕의 군막에서 집극랑으로 있던 한신입니다. 무신군이 살아계실 때부터 패왕을 곁에서 모셔 언제나 대왕과 함께 다니시는 등공을 알고 있었습니다.”
“패왕의 집극랑? 그런데 네가 왜 거기 있느냐?”
하후영이 더욱 어리둥절해 물었다.
하후영이 그렇게나마 아는 척 해주자 한신은 더욱 기가 살아났다. 묶인 중에도 낯빛에 위엄을 살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왕께서는 천하를 얻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말자는 것입니까? 어찌하여 장사(壯士)를 한번 써 보지도 않고 함부로 죽이려 하십니까?”
“장사를 함부로 죽이다니? 나는 벌건 대낮에 떼를 지어 마을로 내려가 백성들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부녀자를 겁탈한 죄수를 목 벤다는 말은 들어도 우리 대왕께 천하를 얻어줄 장사를 죽이고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다. 그럼 네가 바로 그런 장사란 말이냐?”
그제야 하후영이 한신의 죄목을 기억해내고 그렇게 차게 말했다. 그래도 한신은 기죽지 않고 받았다.
“나는 위로는 천문(天文)을 읽고 아래로는 지리(地理)를 알며 또 그 아래와 위를 이어주는 사람의 마음(人心)을 부릴 줄도 압니다. 아녀자처럼 다감한 마음으로 고향을 그리며 동쪽으로 돌아가는 패왕은 천하를 담을 그릇이 아니라 여겨 그를 버리고 한왕을 뒤따라 왔으나,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바로 써주지 못하니 이는 곧 장사를 함부로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할 일도 없는 연오(連敖)가 되어 술로 기구한 팔자를 달래다 군율을 어겨 이리 되었으니, 그것이 어찌 반드시 이 한신의 죄이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넉살맞은 데까지 있었으나 하후영은 왠지 그런 한신이 밉지 않았다. 거기다가 허여멀쑥한 얼굴과 크고 우람한 몸집도 이름 없는 죄수로 죽을 팔자 같지는 않았다. 먼저 아직도 새파란 얼굴로 집행을 재촉하는 관영을 찾아가 한신의 목숨부터 살렸다.
어자(御者·마부)가 하는 일은 윗사람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것이라, 모시는 사람의 마음을 잘 읽어내고 그 상대를 알아서 대접해주어야 했다. 그러려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한눈에 알아보는 재주가 필요한데 하후영에게 바로 그런 재주가 있었다. 어릴 적부터 패현의 마구간에서 자라고 현령의 수레를 몰았으며, 한왕을 따라나선 뒤에도 줄곧 그의 말과 수레를 몰아 사람을 보는 눈을 길러온 까닭이었다.
한신을 형틀에서 풀어내 제 군막으로 데려간 하후영은 다시 술상을 내어 그의 놀란 가슴을 달래주며 물었다.
“공은 항왕이 동쪽으로 돌아가는 걸 보고 그가 천하를 담을 그릇이 아니라고 보았소. 패왕을 감히 갓 쓴 원숭이(沐猴而冠)에 비하다가 죽은 한생(韓生)과 같은 뜻인 줄 아오. 또 공은 항왕의 위세에 눌려 파촉 한중으로 몰리는 우리 대왕에 오히려 앞날을 걸고 뒤쫓아 왔으니, 이는 파촉 한중에서 힘을 길러 뒷날을 도모하자는 우리 소(蕭) 승상의 뜻과 같소. 한생은 관중에서 학식 높기로 이름났고, 소 승상은 우리 한군(漢軍) 중에서 가장 살핌과 헤아림이 밝은 분이오. 그 같은 이들과 뜻을 같이 하니 공의 높은 안목을 알 수 있거니와, 그밖에 공은 특히 무슨 재주가 있소?”
“하늘과 땅과 사람의 모든 것을 공부하였습니다만 특히 시절이 어지러운 걸 보고 병법(兵法)을 공들여 익힌 바 있습니다.”
한신이 그렇게 대답했다. 아직도 그 말투에는 허풍스러운 데가 남은 듯해 하후영이 다시 물었다.
“병법도 크게 보면 사람을 부리는 것이라 들었소. 공은 사람을 얼마나 부릴 수 있소?”
“그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요. 날랜 군사 만 명이면 나라를 지키고 십만이면 제후를 호령하며 백만이면 천하의 형세를 결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신이 그렇게 시원스레 대답했다. 조금 전에 잡스런 죄목으로 목이 잘릴 뻔한 사람 같지 않은 호기였다. 하후영은 그런 한신의 말을 다 믿지는 않았지만, 그 재주가 남다르다는 것은 넉넉히 알 수 있었다. 훌륭한 인재를 얻게 된 것을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곧바로 한왕의 처소를 찾아가 한신을 다시 천거했다.
“그라면 알고 있다. 여러 날 전에 번(樊)장군이 이미 내게 천거하였는데, 그를 아는 다른 사람들의 평판이 신통치 않아 연오(連敖)로 일하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일도 못 견뎌 죄수로 목을 잃을 뻔한 자가 무슨 기이한 재주가 있겠느냐? 언변만 번지르르하고 실속은 없는 책상물림일 것이다.”
한왕이 그러면서 여전히 한신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다가 하후영이 두 번 세 번 그의 재주를 치켜세우자 못 이긴 듯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치속도위(治粟都尉)를 맡겨보자. 군사를 잘 부리자면 잘 먹일 줄부터 알아야 하고, 잘 먹이자면 군량부터 잘 되질할 줄 알아야할 것이다. 장수로 쓰고 아니 쓰고는 그 다음에 정할 일이다."
치속도위는 군대의 곡식과 재화를 맡아보던 치속내사(治粟內史)에 속한 벼슬아치였다. 낭중이나 별반 나을 게 없는 자리였으나 그때 치속내사를 겸하던 승상 소하(蕭何) 밑에 들게 되었다는 것이 한신의 운세를 바꾸어 놓았다.
하후영은 한신을 치속도위로 삼으라는 한왕의 명을 받아내자 몸소 승상 소하를 찾아가 한왕의 명을 전하고 한신을 소개했다. 도필리로 오래 사람과 물자를 다루어온 소하는 한눈에 한신의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바로 자기 곁에 두고 밤낮으로 그 재주와 학식을 떠보았다.
“공은 나처럼 우리 대왕이 파촉 한중에서 힘을 기르면 서초패왕과 천하를 다투어볼 수 있다고 하셨다고 들었소. 하지만 관중에 삼진(三秦)의 왕이 저렇게 버티고 있으니 그들은 어떻게 하시겠소? 더구나 장함은 진나라에서 으뜸으로 치던 장수였고, 사마흔과 동예도 저마다 그 꾀와 재주로 이름난 장재들이니, 그 셋이 힘을 합치면 관중은 철옹성을 두른 것보다 더 깨뜨리기 어려울 것이오.”
한번은 소하가 한신에게 걱정삼아 그렇게 물었다. 한신은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 셋은 진나라의 자제 수십만을 관동으로 끌고 가 모두 잃고 아무도 데리고 오지 못했습니다. 특히 신안에서 패왕에게 생매장당한 항병(降兵)들의 부모형제는 그들 세 사람의 고기를 산 채 씹지 못하는 게 한이니, 아무리 관중 땅이라지만 그런 백성을 데리고 그들이 무슨 힘을 쓰겠습니까?”
그렇게 소하를 후련하게 해주었다. 다시 여러 날이 지나 한신의 비범함을 온전히 믿게 된 소하가 한왕을 찾아보고 그 재주와 학식을 치켜세웠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번에는 소하가 말해도 한왕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뒷날 두 사람이 맞게 될 불행한 결말이 어두운 예감으로 닿아와 한왕을 그토록 주저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가 관중을 떠나 도읍인 팽성으로 군사를 돌린 것은 한(漢) 원년(元年) 4월 하순이었다. 희수(戱水) 가에 모였던 제후들이 저마다 탈 없이 봉지(封地)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군사를 돌리다 보니 출발이 남보다 보름 넘게 늦어졌지만, 당장은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 돌아가는 패왕의 호기는 한껏 치솟았다.
그런데 패왕이 홍문을 떠나려는 날 아침 그 호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있었다. 오중(吳中)부터 패왕의 전마(戰馬)를 도맡아 돌봐온 구장(廐將)이 찾아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대왕께서는 새로이 싸움 말을 고르셔야겠습니다. 간밤에 오추마(烏추馬)가 죽었습니다.”
“무어라? 오추마가 죽었다고?”
패왕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추마에 대한 패왕의 정은 남달랐다. 오중에서 얻어 전마로 탄지 3년. 힘든 싸움터마다 한 몸이 되어 달려준 말이었다. 거록(鉅鹿)에서의 피투성이 싸움부터 마지막 함곡관을 두드려 부술 때까지 크고 작은 수십번의 싸움에서 언제나 패왕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빼어난 용력 못지않게 오추마의 도움도 컸다.
“그렇습니다. 끝내 여물도 꼴도 마다하고 자진(自盡)하였습니다.”
구장이 마치 비장하게 죽은 사람 얘기를 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게 가슴 서늘하면서도 패왕이 짐짓 꾸짖듯 말했다.
“자진이라니? 구장은 말 못하는 짐승을 두고 무슨 당치 않은 소리인가?”
“오추마는 말 못하는 짐승이었으나, 그래도 여느 말은 아니었습니다. 대왕의 패업을 돕기 위해 하늘이 내리신 천마(天馬)였습니다”
“나도 오추마가 병들어 거동이 어렵게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럼 그게 병든 게 아니고 스스로 먹기를 마다하고 죽은 것이란 말이냐?”
“대왕이 걱정하실까 저어하여 숨겨왔으나, 실은 그랬습니다.”
“그럼 오추마가 언제부터 먹지 않았느냐?”
“대왕께서 함양에 드신 뒤로 먹는 게 신통치 않더니, 홍문의 진채로 되돌아 오신 뒤로는 아예 꼴도 여물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구장의 말에 실린 묘한 여운이 패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패왕은 은근히 치솟는 화를 억누르며 별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평소에 백락(伯樂)을 자처하며 말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안다고 하였다. 천마도 말이니, 그럼 천마인 오추마가 스스로 죽기를 바라며 먹기를 그만둔 까닭도 알겠구나.”
“그것은 하늘의 뜻이니, 저같이 하찮은 것이 하늘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대략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내가 함양에 들어가 한 일이라면 진왕(秦王) 자영(子영)을 죽이고 함양을 도륙한 것이며, 얻은 것은 진나라의 재보와 우미인(虞美人)이었다. 그럼 입맛을 잃을 만큼 오추마가 처음 못마땅하게 여긴 일은 그것들이겠구나.”
그때 패왕은 왕으로서 우희(虞姬)를 미인(美人 · 後宮의 한 직급)에 봉한 뒤였다. 그렇게 말하는 패왕의 두 눈에 이는 흉흉한 불길을 보고 비로소 구장의 낯빛이 변했다.
“또 홍문(鴻門)에 돌아와서는 내가 동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리는 한생(韓生)을 삶아 죽이고, 끝내 아부(亞父)의 말을 듣지 않고 유방을 살려 한왕(漢王)에 봉했으며, 이제는 동쪽에 치우쳐 있는 내 도읍 팽성으로 떠나려 하고 있다. 오추마가 드디어 먹기를 그만두고 마침내 숨이 끊어진 것은 내가 홍문에 와서 한 이 같은 짓들로 내 패업도 끝장났다고 보아 스스로 나를 떠난 것이겠구나. 하늘이 그리하라고 시킨 것이로구나.”
패왕이 한층 살기를 드러내며 그렇게 말을 마치고는 무섭게 그 구장(廐將)을 쏘아보았다. 그제야 놀란 구장이 후들후들 떨며 더듬거렸다.
“아닙니다. 감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황제란 하늘에서는 귀신의 우두머리(鬼神之首)요, 땅에서는 임금 중의 임금(王中之王)이라고 들었습니다. 대왕께서는 장차 황제가 되시어 천하를 다스리실 분이신데, 아무리 하늘인들 대왕께서 하신 일을 감히 어떻게 나무랄 수 있겠습니까? 오추마가 먹지 못하게 된 것은 물과 땅이 맞지 않고(水土不服), 여기까지 오는 동안의 힘든 싸움에 지쳐 그리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급하게 둘러댄 말이었지만 그래도 패왕의 자부심과 허영에 호소하는 데는 효험이 컸다. 여러 해 가까이서 패왕을 모시면서 그 성품을 익히 알게 된 덕분이었다. 패왕이 조금 살기를 누그러뜨리며 다짐받듯 물었다.
“네 정녕 솥에 삶기기 싫어 둘러대는 말은 아니렷다?”
“그렇습니다. 오중에서 대왕을 따라나선 이래 한 번도 대왕께서 받으신 천명을 의심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패왕이 깊숙한 한숨과 함께 얼굴에서 살기를 걷어내며 엄중하게 말했다.
“그렇다. 하늘의 뜻을 받들어 내려온 천마 같은 것이 어디 있겠느냐? 사람의 공력과 정성이 곧 하늘의 뜻이다. 너는 지금 가서 함양 궁궐에서 끌어온 말 중에 힘 좋고도 날랜 검은 털 섞인 부루 말(오추마 · 烏騅馬) 한 마리를 골라 보아라. 그리고 낯모르는 농부를 시켜 하늘이 죽은 오추마를 대신해 보낸 말이라고 하며 내게 끌어다 바치게 하라. 이제부터 그 오추마가 이 서초패왕의 대업을 돕기 위해 하늘이 보낸 천마(天馬)이다!”
진승과 오광이 여우를 가장하거나 물고기 배를 빌려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하늘의 뜻을 조작했던 것처럼 패왕에게도 자기현시(自己顯示)를 넘어서는 그런 재주가 있었다.
패왕이 대군과 함께 팽성에 이른 것은 여름 5월 중순이었다. 그동안 쌓인 전리(戰利)로 말이나 갑옷투구를 치장한 8천 강동의 자제들은 겉모습만으로도 눈부신 승리의 전사들이었다. 그들을 앞세우고 행군하는 서초(西楚) 30만 대군의 위세는 천지를 떨어 울리게 했다.
패왕 항우는 흰 비단 전포에 금은으로 장식한 갑주를 걸치고 새로 얻은 오추마 위에 높이 앉아 있었다. 시황제처럼 여러 대의 온량거(轀輬車)를 늘어세우지도 않았고, 앞뒤로 창칼을 번쩍이며 따르는 갑사(甲士)들과 번다한 기치도 없었으나 그 위엄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절로 떨리게 했다. 실로 그보다 더할 나위가 없는 금의환향(錦衣還鄕)이었다.
거기다가 팽성 사람들을 더욱 감탄시킨 것은 그 행렬을 뒤따르는 수레들이었다. 수레마다 함양에서 약탈한 재보로 가득했고, 그 마지막 비단 휘장을 드리운 수레에는 우미인(虞美人)이 타고 있었다. 부로(俘虜) 삼아 함양에서 끌고 온 부녀(婦女)들도 눈길을 끌었다.
팽성 사람들은 그런 패왕을 자기들의 임금으로 기꺼이 맞아들였다. 망해버린 옛 초나라의 비통한 역사를 상징하는 명장 항연(項燕)의 손자, 그러나 초나라 회복의 주춧돌이 된 항량과 더불어 민초 속에서 몸을 일으켰고, 마침내는 진나라를 쳐 없애 망국의 한을 씻어준 그를 서초(西楚) 땅이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이에 패왕은 새로 임금이 된 그 누구보다 백성들이 믿고 따르는 임금으로 팽성에 뿌리를 내려갔다.
패왕을 따르던 막빈과 장수들도 이제 더는 전장을 떠도는 농민군의 우두머리가 아니었다. 범증은 아부(亞父)라 불리며 군사(軍師)로서 그 어떤 막빈보다 아래위 모두의 믿음과 우러름을 받았다. 계포도 그 사이 믿음을 회복해 모사(謀士)보다는 장수로서 어엿하게 자리를 잡아갔다. 종리매(鍾離매)와 용저(龍且)도 젊고 날랜 맹장에서 패왕이 믿고 아끼는 장군들로 자라 있었으며, 소공 각(蕭公 角) 환초(桓楚) 정공(丁公) 등도 한 갈래 군사를 이끄는 관록 있는 장수들이 되었다. 항백 항장 항타(項타) 같은 항가(項氏家) 사람들도 그저 패왕의 혈육이란 것 때문에 장수 대접을 받지는 않았다. 저마다 싸움터에서 한몫을 했다.
하지만 패왕 항우를 따라 팽성으로 오게 된 사람들이 모두 그리 좋게만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한왕 성(韓王 成)이 받는 대접이 고약했다. 언제나 패왕 곁에 있으면서도 볼모나 포로와 다름없는 처지였다.
관중에서의 분봉(分封) 때만 해도 패왕은 한왕 성을 한(韓)나라의 왕으로 인정하고 양적(陽翟)으로 도읍을 삼게 했다. 그러나 관중을 떠나면서 패왕의 마음은 바뀌었다. 장량이 한왕 유방을 따라간 일 때문이었다.
“장량은 한나라의 사도(司徒)인데 어찌하여 한왕 유방을 따라갔소?”
패왕의 그 같은 물음에 한왕 성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한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어가 여러 달 함께 고생하는 동안에 생긴 정분 때문이겠지요. 하루 이틀 배웅하고는 이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을 받는 패왕의 눈길은 곱지 않았다.
한나라는 무관(武關)을 사이에 두고 한중과 이어져 있었다. 만약 장량이 유방과 한왕 성을 맺어놓으면 무관은 아무런 구실을 못하고 한중과 한나라는 한 덩이가 되고 만다. 다시 말해 유방은 굳이 삼진(三秦)을 뚫고 나오지 않아도 중원으로 고개를 내밀 수 있었다. 패왕이 장량의 움직임을 날카롭게 살피는 까닭은 그 때문이었다.
한왕 성의 말대로 장량은 며칠 안돼 되돌아왔다. 한왕 유방을 포중(褒中)까지 바래다주고 다시 옛 임금을 섬기려 돌아온 것이었다. 하지만 패왕은 제후들이 모두 봉지로 돌아간 뒤에도 한왕 성을 곁에 잡아두었다가 끝내는 자신과 함께 관중을 떠나게 하였다. 그리고 한왕 성을 끼고 가다시피 동쪽으로 돌아가던 패왕은 한나라에 이르러 갑자기 말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한왕은 나와 함께 팽성으로 가야겠소. 아직 천하가 안정치 못하니 무관 같은 요해처(要害處)는 다른 장수를 보내 지키게 함이 옳을 것이오.”
이 말에 한왕 성과 함께 패왕에게 불려갔던 장량이 뻔히 그 말뜻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고 패왕에게 물었다.
“무관을 지키신다 함은 누구로부터 무관을 지키신다는 뜻이옵니까?”
“배에는 허풍만 가득하고 머릿속은 계집 생각과 재물 욕심만 들어찬 주제에 엉뚱한 꿈을 꾸며 중원을 바라보는 것들 때문이오. 삼진(三秦) 땅은 명장과 책사(策士)를 왕으로 세워 겹겹이 울타리를 둘러쳐 두었으니, 중원으로 나오려면 당연히 무관을 넘어 한나라 땅으로 들어오는 길을 노리지 않겠소?”
말투로 보아 그 사이 범증이 적잖이 패왕을 쑤석거린 모양이었다. 한왕 유방에 대한 패왕의 의심은 미움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져 있었다. 장량이 이때다, 싶어 패왕 앞으로 나섰다.
“대왕께서 가리키시는 사람이 한왕 유방이라면 아마도 대왕께서는 잘못 헤아리고 계신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한왕은 다시 동쪽으로 나올 뜻이 전혀 없어보였습니다.”
“어째서 그렇단 말이오?”
“제가 포중에서 한왕과 작별하고 오다가 돌아보니 한군이 지나간 계곡에는 먼지와 연기가 자욱하였습니다. 바로 잔도(棧道)를 부수고 불사르는 통에 나는 먼지와 연기였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한왕께서는 두 번 다시 파촉 한중에서 되돌아 나올 뜻이 없음이 분명합니다.”
장량의 그와 같은 말에 패왕이 조금 밝아진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게 사실이오? 장(張)사도는 그 말을 보증할 수 있소?”
“이 량(良)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본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빠른 파발마를 포중으로 보내 알아보시면 어김없을 것입니다.”
장량이 그렇게 다짐하자 패왕의 얼굴은 더욱 밝아졌다. 하지만 끝내 한왕 성을 도읍인 양적(陽翟)으로 보내지 않고 팽성으로 데려갔다. 그 바람에 장량도 팽성까지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더욱 고약한 것은 팽성에 이른 뒤였다. 범증이 무어라고 쑤석였는지 한왕 유방에 대한 패왕의 의심은 갈수록 커져, 나중에는 천하에서 자신과 대적할 수 있는 게 한왕밖에 없는 것처럼 그를 걱정하고 미워했다. 장량은 그게 걱정이 되었다.
(큰일이다. 이대로 두면 패왕이 먼저 군사를 내어 한중으로 밀고 들지도 모르겠다. 누군가 이 의심과 미움을 나눠 갖지 않으면 한중과 우리 한나라가 아울러 무사하기 어렵겠구나.)
그런 생각으로 가만히 사람을 풀어 천하의 형세를 살펴보게 하였다. 패왕의 주의를 끌어줄 또 다른 맞바람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패왕의 엄청난 기세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모든 제후가 반드시 그 뜻을 받들고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제나라에서는 전영(田榮)이 이미 패왕에 맞서 일을 꾸미고 있었다.
전영은 제나라의 왕족으로 적현(狄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 제나라 왕이 된 전담(田儋)의 사촌 아우였다. 전담이 진군(秦軍)에 에워싸인 위(魏)나라 왕 구(咎)를 구원하러 갔다가 장함에게 기습을 당해 임제성(臨濟城) 아래에서 죽자, 전영은 그 아우 전횡(田橫)과 함께 패잔병을 모아 동아(東阿)로 달아났다.
제나라 사람들은 전담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자 옛 제나라 왕 전건(田建)의 동생 전가(田假)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역시 옛 왕족인 전각(田角)을 재상으로,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삼아 제나라를 이어가게 했다.
장함은 전영(田榮)이 동아(東阿)로 달아나자 그를 뒤따라가 그 성을 에워쌌다. 항량이 그 소식을 듣고 곧 동아로 달려가 그 성 밖에서 장함이 이끈 진나라 군사를 크게 쳐부수었다. 장함이 서쪽으로 달아나자 항량이 이긴 기세를 타고 장함을 뒤쫓았다.
하지만 전영은 제나라 사람들이 형 전담(田儋)을 가볍게 잊고 전가(田假)를 왕으로 세운 것에 화가 나서 항량을 따라가지 않았다. 곧바로 제나라로 돌아가 전가를 왕위에서 몰아냈다. 왕이었던 전가는 초나라로 달아났고, 재상 전각은 조나라로 달아났으며, 장군 전간은 먼저 조나라에 사신으로 가 있다가 형이 쫓겨 오는 걸 보고 그대로 조나라에 눌러 앉았다.
전영은 전담의 아들 전불(田巿)을 제나라 왕으로 세우고 자신은 재상이 되어 그를 보살폈다. 전영은 또 아우 전횡(田橫)을 장군으로 삼아 그들을 따르지 않는 세력을 평정하게 하였다. 그러자 오래잖아 제나라는 그들 형제의 손안에 들어왔다.
한편 장함을 뒤쫓아 간 항량은 갈수록 진나라 군사가 늘어가는 것을 보고 제나라와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두 나라 모두 군사를 내어 자신과 함께 장함을 쳐부수자는 내용이었다. 제나라의 실권을 쥔 전영이 초나라와 조나라에 사람을 보내 말하였다.
“초나라가 전가를 죽이고 조나라가 전각, 전간을 죽인다면 우리도 기꺼이 군사를 내겠소.”
그러자 초 회왕이 제나라 사신에게 대답했다.
“전가는 가깝게 지낸 이웃나라의 왕으로서 궁지에 몰려 우리에게 의지하러 왔소. 우리 초나라가 그를 죽이는 것은 실로 의롭지 못한 일이오.”
조나라 왕도 제나라 사신에게 말하였다.
“사냥꾼도 품안으로 날아든 새는 쏘지 않는다 했소. 전각과 전간은 일신의 환란을 피해 우리나라에 의지해 온 사람들이오. 그들을 죽여 가면서까지 제나라와 친하고 싶지는 않소.”
그러자 제나라 사신이 조나라 왕에게 말하였다.
“독사가 손을 물면 손을 자르고, 발을 물면 발을 자르는 까닭이 무엇이오? 독이 스민 그 손과 발이 몸에 해를 끼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가와 전각, 전간은 독사의 독이 스민 것과 같으면서도 초나라와 조나라의 손과 발은 아닌데 어찌하여 죽이려고 하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서로 돕지 못하고 진나라가 다시 천하의 호응을 얻는다면, 지금 군사를 일으킨 제후들은 모두 반란자가 되어 그 무덤까지 파헤쳐질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초나라와 조나라는 제나라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전영은 화가 나서 끝내 항량을 도울 군사를 내지 않았다.
오래잖아 장함은 다시 항량을 기습하여 죽이고 그 군사를 크게 쳐부수었다. 초나라 군사들이 기세를 잃고 동쪽으로 달아나니, 장함은 군사를 돌려 조나라를 치고 거록(鉅鹿)을 에워쌌다. 그 바람에 항우는 아버지나 다름없던 숙부 항량을 잃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도 거록에서 목숨을 걸고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패왕이 된 항우가 전영이 왕으로 세운 전불에게서 제나라를 거두고, 교동왕(膠東王)으로 내쫓아 즉묵(卽墨)에 도읍하게 한 것은 바로 그때 제나라가 한 짓 때문이었다. 패왕은 대신 장군 전도(田都)를 제나라 왕으로 세우고 임치(臨淄)에 도읍하게 하였다. 전도는 일찍이 패왕과 더불어 조나라를 구원하였고, 함곡관 안으로 따라든 뒤에도 세운 공이 많았다.
패왕은 다시 옛 제나라 마지막 왕 전건의 손자인 전안(田安)을 제북왕(濟北王)으로 세우고 박양(博陽)에 도읍하게 하였다. 전안은 패왕 항우가 막 하수(河水)를 건너 조나라를 구원하였을 때, 제수(濟水) 북쪽의 성 몇 개를 진나라로부터 빼앗은 뒤 패왕에게 투항해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패왕을 따라다니며 세운 공이 적지 않아 제나라 땅 일부를 봉지로 받게 되었다.
제나라의 실권을 쥐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세운 왕은 제나라 구석으로 쫓겨나고, 내쫓은 왕의 아우는 다시 제나라 왕으로 오게 되자 전영(田榮)은 그렇게 만든 패왕을 크게 원망하였다. 거기다가 또 전안까지 제북왕으로 세워 제나라를 세 토막으로 가르자 전영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가만히 군사를 일으켜 패왕이 새로 왕으로 세운 전도(田都)가 제나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전영은 패왕에게 맞서려고 군사를 움직인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엄하게 단속했지만, 장량이 풀어놓은 눈과 귀를 속이지는 못했다. 아직 전도가 도읍인 임치(臨淄)에 이르기도 전에 장량의 귀에 그 소식이 들어갔다.
장량은 패왕의 눈길을 한왕 유방과 한중(漢中)으로부터 전영과 제나라로 돌리게 하는데 그 일을 써먹기로 작정했다. 이번에는 패왕에게 글을 올려 전영이 꾀하는 바를 일러바쳤다.
<…전영은 일찍이 무신군(무신군)께서 정도(정도)의 외로운 넋이 되도록 군사를 내어 돕기를 마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왕께서 거록을 구원하실 때도 끝내 제후군에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대왕께서 관중을 평정하실 때도 전도만 따라 보내고 구경하더니 이제 전도가 그 공으로 제나라 왕이 되자 앙앙불락 대왕을 원망해왔습니다.
근래 신(신) 량(량)이 가만히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전영이 스스로를 높이고 스스로를 크게 여김(자존자대)은 끝이 없어 이제는 감히 대왕께 맞설 궁리마저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몰래 군사를 일으켜 새로 오는 제왕 전도와 제북왕 전안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흉악한 뜻은 그 두 왕을 모두 죽이고 교동왕 전불까지 없애 스스로 삼제(삼제)의 왕이 되려는 데 있습니다.
듣기로 하수(하수)의 둑도 개미구멍 하나로 시작하여 허물어진다 합니다. 대왕의 위엄과 기력은 천하를 뒤덮고, 전영이 하는 일이 버마재비가 수레바퀴에 맞서려함(당랑거철)과 다름없으나, 때를 놓치고 손을 늦춰 작은 부스럼을 큰 종기로 키워서는 아니 됩니다. 전영이 대왕의 너그러움과 참을성을 눈 어둡고 어리석은 것으로 잘못 알아 마침내 동북의 큰 우환으로 자라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패왕은 그런 장량을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거기다가 범증까지 전영보다는 한왕 유방이 더 큰 걱정거리임을 곁에서 되뇌자 여전히 한왕과 한중 땅만을 날카롭게 살폈다.
그런데 장량의 글이 올라온 지 보름도 안돼 곁에서 부리는 신하 하나가 패왕에게 급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사수(泗水) 쪽으로 나가 있는 용저(龍且) 장군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제나라 왕 전도가 산동에서 쫓겨 나와 패왕을 뵙고자 팽성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제나라 왕 전도(田都)가 쫓겨 왔다고? 누구에게서, 왜?”
장량이 올린 글은 깜빡 잊고 패왕이 놀라 물었다. 근시(近侍)가 대답했다.
“잘은 모르오나 제나라 전 승상 전영(田榮)이 임치(臨淄)를 치고 전도를 내쫓았다고 합니다. 나머지는 제나라 왕이 들거든 직접 하문하여 보시옵소서.”
이에 패왕은 전도를 불러들이게 했다. 한나절도 못돼 빠른 말로 먼 길을 달려온 전도가 패왕 앞에 후줄그레한 모습으로 엎드렸다.
“전영이 왕을 내쫓았다고 하는데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전영이 임치성 밖에서 기다리다가 저희 군사들을 불시에 들이쳤습니다.”
“그렇지만 왕도 적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지 않았소? 더구나 그 대부분은 함곡관 안으로 들어가 싸움을 거듭한 군사들이 아니었소?”
“워낙 뜻밖의 일이라…. 뿐만 아니라 누가 감히 대왕께서 정한 일을 거역하랴, 싶어 마음을 놓은 게 화근이었습니다.”
전도가 무안해하면서도 슬며시 패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패왕이 벌써 적잖이 뒤틀린 목소리로 물었다.
“전영, 이 쥐 같은 놈이…. 그래 왕은 내 이름을 앞세워 보았소?”
“그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대왕의 명이라 하였으나 전영은 되레 비웃기만 했습니다.”
“무어라? 전영이 나를 비웃었다?”
드디어 패왕이 범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미욱한 주제에 황소 같은 힘만 믿고 천하를 제멋대로 쥐락펴락 하려드는 고집불통이라 하였습니다. 언제든 산동에서 만나기만 하면 단단히 버릇을 가르쳐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여봐라. 무엇들 하느냐? 어서 장졸들을 모아들여라. 갑옷투구를 내오고 오추마에 안장을 얹어라. 내 전영을 목 베어 천하에 우리 서초(西楚)의 위엄을 떨쳐 보이겠다!”
패왕이 그렇게 소리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때 곁에 잇던 범증이 나서서 말렸다.
“제나라는 예부터 동쪽의 강국으로, 진나라 시황제조차도 맨 마지막에 가서야 속임수로 겨우 멸망시킬 수 있었습니다. 한쪽 말만 믿고 함부로 제나라를 적으로 돌려서는 아니 됩니다. 먼저 사람을 풀어 내막을 차분히 알아본 뒤에 군사를 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자 패왕도 퍼뜩 앞뒤 없는 분노에서 깨어났다. 억지로 숨결을 고른 뒤에 못마땅한 눈길로 전도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부(亞父)의 말씀이 옳소. 일에는 반드시 까닭이 있기 마련이니 먼저 그것부터 알아봐야겠소. 거기다가 전도 장군은 제나라를 받고서도 끝내 지켜내지 못했으니 더는 왕위에 머물 수가 없소. 당분간은 한 객장(客將)으로 내 군막에 머물면서 하회를 기다리시오!”
그리고 범증의 말을 따라 제나라에 가만히 사람을 풀어 일의 경과를 알아보게 했다.
한편 전영은 패왕이 보낸 제나라 왕 전도를 쳐부순 기세로 교동왕 전불을 덮쳐갔다. 그때 역시 패왕이 정해준 봉지(封地)인 교동으로 가고 있던 전불은 도중에 먼저 이른 전영의 사자를 만나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홀로 궁리하다가 마음을 정하지 못해 신하들을 모아놓고 물었다.
“패왕은 내게 교동왕이 되어 즉묵(卽墨)에 도읍하라 이르셨소. 그런데 또 승상 전영은 나더러 임치(臨淄)로 와서 전처럼 제나라 왕 노릇을 하라는구려. 힘이 약하고 거느린 군사가 적으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 수가 없소.”
전불의 이 같은 물음에 곁에 있던 신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지금 항왕(項王)의 힘과 기세는 천하에서 아무도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거기다가 성격이 포악하여 그 뜻을 거스르고는 살아남기 어려우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즉묵으로 가셔야 합니다. 임치로 가셨다가는 반드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게 되실 것입니다.”
이에 전불은 전영에게서 도망치듯 자기 봉지로 달아났다. 그 소식을 들은 전영은 몹시 화가 났다. 곧 대군을 휘몰아 전불을 뒤쫓았다.
패왕 항우는 멀리 팽성에 있고, 전불은 원래가 남의 힘에 세워진 왕이라 거느린 군사가 많지 않았다. 바닥부터 세력을 다져 제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는 전영을 그런 전불이 당해낼 길이 없었다. 싸움이랄 것도 없이 쫓기다가 도읍으로 정해준 즉묵 땅에 이르러 마침내 전영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전불은 제 백성과 제 나라를 버리고 초나라의 꼭두각시 임금 노릇이나 하려 했다. 거기다가 그릇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우리 군사에게 맞서기까지 했으니 임금 노릇은커녕 죽어 마땅한 죄인이다. 전불을 죽여 그 어리석음을 벌함과 아울러 천하를 제멋대로 나눈 항우의 미련스럽고 포악함을 널리 밝히자!”
전영은 그러면서 전불을 죽이게 했다. 한때는 왕으로 섬겼고, 사사롭게는 친형보다 더 우러르고 따랐던 종형 전담의 아들 되는 전불이었다.
제왕(齊王) 전도가 초나라로 쫓겨 가고 교동왕 전불이 죽자 패왕 항우가 셋으로 나누었던 제나라 땅 가운데 둘이 전영의 손 안에 들어왔다.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이 아직 남아 있었으나 땅이 북쪽에 치우쳐 있는데다 세력이 미약해 말할 만한 것이 못되었다. 그러자 전영의 장수들이 나서서 권했다.
“전가가 죽고 전불이 죽어 전건(田建)으로부터 이어오는 옛 제나라 왕통과 전담(田담)에서 시작된 새로운 제나라의 왕통이 모두 끊어진 셈입니다. 이제 승상께서 왕위에 오르시어 우리 제나라를 다시 일으키시고 이끄실 때입니다.”
전영도 은근히 기다리던 참이라 한번 사양하는 법도 없이 장수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스스로 제나라 왕위에 올라 전도와 전불의 땅을 아울러 다스렸다. 하지만 제북에 전안이 남아있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때 전영의 신하 하나가 묘한 꾀를 내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팽월을 거두어 쓰시지 않으십니까? 팽월이라면 제북왕 전안쯤은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팽월의 이름은 전영도 들어 알고 있었으나 근황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팽월이라면 거야택(巨野澤)에서 도둑질하던 그 팽월 말인가?”
“그러나 지금은 만 명이 넘는 무리를 거느리고 산동의 한 갈래 만만찮은 세력을 이끄는 우두머리입니다.”
“지난해 팽월은 거야택(巨野澤)을 나와 패공과 더불어 창읍(昌邑) 근처에서 싸우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왜 그 길로 패공을 따라 서쪽으로 가지 않고 아직도 거야택에 남았다고 하더냐?”
전영이 그렇게 묻자 신하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팽월이 원래 남의 밑에 들기를 좋아하지 않는 데다, 위왕(魏王) 구(咎)가 죽은 뒤 흩어진 위나라 군사들을 거둬들일 만한 세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팽월이 군사 천여 명과 남아 위나라 군사를 거두겠다고 하자 패공이 허락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람에 팽월은 관중으로 들어가 공을 세울 기회를 잃어, 군사를 만여 명이나 거느리고도 돌아갈 곳이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어 전영에게 권했다.
“대왕께서 지금이라도 팽월에게 장군인(將軍印)을 내리시고 제나라 장수로 부르신다면 팽월은 기꺼이 달려올 것입니다. 그런 팽월에게 명하시어 제북왕(濟北王) 전안(田安)을 쳐 없애게 하시면 대왕께서는 손바닥에 침 한번 뱉지 않고 삼제(三齊)를 모두 거두어들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 되면 패왕 항우는 팽월을 미워할 것이니, 팽월이 또 하나의 경포가 되는 것을 막는 길도 됩니다. 어서 팽월을 불러 쓰도록 하십시오.”
이에 전영은 온전하게 믿지 못하면서도 그 신하가 시키는 대로 해보았다. 장군인을 새겨 사자에게 주며 팽월을 찾아보게 하였다. 제나라 장수가 되어 제북왕 전안을 쳐달라는 전영의 당부와 함께였다.
뜻밖에도 제나라의 사자로부터 장군인을 받은 팽월은 몹시 기뻐했다. 천하를 갈라 여럿에게 나눠주면서 자신만은 빼버린 패왕에게 무슨 앙갚음이나 하듯, 전영의 장수가 되어 싸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팽월은 날래고 거친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바람처럼 제북으로 밀고 들었다. 전안이 맞선다고 맞섰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팽월의 세력에 밀려 약간의 장졸들과 함께 박양(博陽) 성 안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팽월이 다시 무리를 휘몰아 급하게 박양성을 들이쳤다. 더 물러날 곳이 없게 된 성안의 장졸들이 힘을 다해 맞섰으나 오래 견뎌내지 못하였다. 열흘도 안 돼 박양성은 팽월의 손에 떨어지고 전안은 어지럽게 뒤엉켜 싸우는 군사들 사이에서 누구에게 당한지도 모르는 채 어이없게 죽고 말았다.
팽월이 제북을 평정한 소식을 전하자 전영은 크게 기뻐했다.
<…장군의 공을 높이 치하하오. 이제 장군을 대장군으로 높여 세우나니 제음(제음)에서 남하하여 항우가 봉지로 삼고 있는 양(梁=魏)나라로 가시오. 어렵더라도 양나라 땅에 자리 잡고 항우와 맞서주시면 우리 제나라가 그 뒤를 든든히 받쳐줄 것이며, 다른 제후들도 대장군을 도와 마침내는 양왕(梁王)에 오르게 될 것이오…>
그렇게 팽월의 공을 치켜세움과 아울러 새로운 일을 맡겼다. 그러나 팽월은 왠지 이번에도 두 말 없이 전영의 명을 따랐다. 그 사이 배로 늘어난 무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 양나라 땅을 근거로 패왕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장량의 말을 믿지 않던 패왕도 삼제(三齊)가 차례로 전영(田榮)의 손에 떨어지자 전영의 모반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팽월의 군사들이 코앞인 양나라 땅까지 내려오자 비로소 손을 썼다.
“아부(亞父)께서 공연히 사람을 의심하는 통에 멀리 파촉 한중 땅과 한왕(漢王) 유방을 살피느라 우리 초나라로 보아서는 등짝이나 다름없는 삼제 땅이 전영의 손에 통째 떨어지는 걸 구경만 하였소. 장량의 말대로 한왕이 잔도(棧道)를 불사른 것은 다시 동쪽으로 돌아올 뜻이 없음을 드러낸 것임에 틀림없소. 눈앞의 우환거리인 제나라를 먼저 쳐 없애야겠소!”
먼저 범증을 불러 그렇게 말한 뒤에 다시 맹장으로 이름을 높여가고 있는 소공(蕭公) 각(角)을 불렀다.
“장군은 군사 3만을 데리고 지금 당장 양(梁) 땅으로 가서 거기서 날뛰는 팽월이란 자를 죽이고 그 목을 가져오라. 또 그 무리는 단 한 명도 살리지 말고 모두 땅에 묻어 뒷날의 본보기로 삼게 하라. 듣기로 팽월은 제나라의 대장군이라 하나, 원래는 거야택 물가에서 도둑질하던 무리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
범증도 패왕에게는 당장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패왕이 적을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 같아 소공 각에게 정색을 하고 말했다.
“하지만 도둑질도 도(道)가 있어 오래되면 무르익는 법이오. 팽월은 수십 년 도둑질로 늙고 닳아빠진 데다 거느린 군사까지 2만이나 된다 하니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오.”
“군사(軍師)의 말씀을 가슴에 새겨듣겠습니다. 살피고 삼가 반드시 팽월의 머리를 가져오겠습니다.”
소공 각은 그렇게 말하고 물러났으나 그 마음은 이미 팽월을 잔뜩 깔보고 있었다.
(거야택에 자리 잡고 텃세 삼아 좀도둑질이나 하던 약아빠진 늙은이가 어쩌다 흘러 다니는 백성들 몇 만 긁어모았다고 해서 너무 날 뛰는구나. 거록에서 함양까지 만리를 시체더미를 헤쳐 가며 싸운 우리 초나라 군사들에게 영문 모르고 죽어갈 그 졸개들이 불쌍하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군사 3만을 급하게 몰아 양(梁) 땅으로 달려갔다.
소공 각이 3만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문은 누구보다도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 데 밝은 팽월의 귀에 곧 들어갔다. 지금까지 들판에서 진세를 펼치고 정면으로 승부를 보는 싸움보다는 작게 나뉜 군사들로 모였다 흩어졌다 하며 바람같이 치고 빠지는 싸움에 재미를 보아온 팽월이었다. 이번에도 정면으로 맞서 좋을 게 없다 여기고 재빠르게 치고 빠지는 싸움으로 몰아갔다.
처음 팽월이 군사를 일으킬 때 따라나섰던 거야택 부근의 소년들 대부분이 그새 어엿한 장수로 자라 있었다. 팽월은 그들과 새로 얻은 장수 몇 십 명을 불러 놓고 말했다.
“적병은 함곡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온 역전의 용사들로 이루어진 대군이며, 그 대장 소공 각은 항우 밑에서도 쳐주는 맹장이다. 정면으로 맞서봤자 승산이 없다. 이제부터 장군들은 각기 오백명씩 거느리고 한 덩이가 되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괴롭힐 수만 있으면 적을 괴롭혀라. 하지만 언제나 탈 없이 빠져 나갈 길은 확보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닷새만 적을 괴롭히면 적은 틀림없이 군사를 나누어 우리를 뒤쫓을 것이다. 그때 우리는 지정한 곳에 다시 모여 집중된 힘으로 적의 중군(中軍)을 짓밟아 버리자. 이미 여러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보낸 뒤라 적의 중군은 그리 많은 병력을 지니고 있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힘을 다해 들이치면 반드시 쳐부술 수 있다!”
팽월의 장수들은 그 말을 잘 알아들었다. 이미 진나라 시절부터 그렇게 싸워 수많은 대군을 물리쳐온 그들이었다.
소공 각의 대군과 유군(遊軍)으로 분산된 팽월의 작은 부대들이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그 이틀 뒤부터였다. 팽월은 진작부터 대량(大梁) 근처의 마제산(馬蹄山)을 숨을 곳으로 삼고 밀려들어오는 소공 각의 초나라 대군을 요격하기 시작하였다. 한껏 몸을 가볍게 한 몇 백 명이 초나라 대군의 꼬리나 뒤처진 부대를 매섭게 후려치고는 빠른 바람처럼 빠져나가 버리는 방식이었다. 사흘 내리 그런 싸움으로 적잖은 피해를 본 소공 각은 마침내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팽월의 작은 부대들을 뒤쫓게 했다. 그게 바로 팽월이 기다린 바였다.
닷새 뒤 마제산 골짜기에서 가만히 병력을 집중한 팽월은 5000명도 남지 않은 초나라 중군을 벼락같이 들이쳤다. 갑자기 세 배가 넘는 팽월군의 기습을 받은 소공 각의 중군은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져 버렸다. 가까이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급히 구원을 왔으나, 결과적으로는 3만의 군사를 몇 천 명씩 쪼개 차례로 투입한 꼴이라, 집중되어 2만에 가까운 팽월의 대군을 물리칠 수 없었다. 팽월이 소공 각의 대군을 크게 쳐부숨으로써 항우를 향해 부는 맞바람은 이제 세상에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전영이 일으킨 맞바람만 해도 제나라의 내분(內分)과 비슷한 데가 있어 그리 강렬한 인상으로 제후들의 눈과 귀를 끌지 못했다. 그런데 팽월은 바로 패왕 항우가 믿는 장수 소공 각에게 딸려보낸 초나라 대군을 여지없이 쳐부순 것이었다. 그 소문이 퍼지자 맞바람도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전영 팽월에 이어 움직인 것은 하수 물가에서 낚시와 사냥으로 세월을 보내던 전 조나라 대장군 진여(陳餘)였다.
패왕이 관중에서 제후들에게 천하를 나누어줄 때 조나라 승상 장이(張耳)를 상산왕(常山王)으로 봉하자 진여를 높이 치는 사람들이 패왕에게 말하였다.
“진여는 장이와 똑같이 조나라에 공이 있습니다. 진여도 마땅히 왕으로 봉해야 합니다.”
그러나 패왕은 진여가 함곡관 안으로 따라오지 않아 세운 공이 적다는 핑계로 그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다만 진여가 남피(南皮)에 있다는 말을 듣고 부근의 세 현(縣)을 식읍으로 내주었을 뿐이었다. 또 장이와 진여가 세운 조왕 헐(趙王 歇)도 공이 적음을 들어 대(代)땅으로 옮겨 왕으로 봉했다.
“장이와 진여는 세운 공이 같은데, 장이는 왕이 되고 진여는 후(侯)에 그친 것은 항우가 공평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여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때부터 항우에게 이를 갈아왔는데 이제 항우를 향한 맞바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자신을 따르는 장동(張同)과 하열(夏說)을 가만히 제왕 전영에게 보내 달래었다.
“항우는 천하를 다룸에 있어 공평하지 못하여 자신을 따른 여러 장수들은 모두 좋은 땅에 왕으로 봉해주고, 이전의 왕들은 모두 나쁜 땅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그 바람에 우리 조왕(趙王)께서는 기름진 조나라를 내주고 궁벽한 대(代) 땅으로 쫓겨나시고 말았습니다. 바라건대 대왕께서 신(臣)에게 군사를 빌려주신다면 우리 조왕께 옛 땅을 찾아드릴 뿐만 아니라, 신이 봉지로 받은 남피(南皮)의 땅을 들어 대왕의 나라를 막고 지키는 울타리가 되게 하겠습니다.”
그런 진여(陳餘)의 말은 곧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칠 군사를 빌려 달라는 뜻이었다. 제나라 왕 전영에게는 결코 나쁠 게 없는 제안이었다. 이에 전영은 오히려 기뻐하며 군사 한 갈래를 떼어 진여에게 보냈다.
전영이 보낸 군사가 남피로 오는 동안 진여도 식읍으로 받은 하간(河間)의 세 현(縣)을 쥐어짜듯 하여 군사를 모았다. 그러자 산동에 이어 하간, 하북(河北)에 이르기까지 패왕에게 맞서는 군사들의 움직임으로 술렁거렸다. 거기다가 한나라 땅으로 돌아가 있던 장량이 다시 글을 보내 알려왔다.
“제나라가 이제는 조나라까지 부추겨 대왕께 맞서려 합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쳐 서초(西楚)를 쳐 없애고 의제께 천하를 돌려준다고 큰소리치고 있습니다.”
소공 각이 팽월에게 형편없이 당하고 쫓겨 오면서 벌겋게 달아있던 패왕은 그 말을 듣자 더 참지 못했다. 당장 대군을 일으켜 제나라를 짓밟아 버리겠다며 길길이 뛰었다. 하지만 나라 안팎의 사정이 그렇지가 못했다. 파촉 한중에 가둔다고 가뒀지만 한왕(漢王) 유방의 위협이 다 가시지는 않은 데다, 의제(義帝)는 회왕(懷王) 시절부터의 조신(朝臣)들과 옛 초나라 귀족 떨거지들에 둘러싸여 팽성에 남아 있었다.
“한(韓)나라는 한중(漢中)과 땅이 이어져 있고, 무관(武關)은 중원으로 들어오는 요긴한 길목이다. 그런데 한왕(韓王) 성(成)은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세운 공이 적을 뿐만 아니라, 무관에 걸터앉아 서쪽에서 밀고 드는 도적 떼를 막아낼 장재(將材)도 없다. 따로 마땅한 장수를 골라 한나라를 맡길 것이니, 한왕 성은 열후(列侯)로서 이대로 팽성에 머물도록 하라.”
패왕은 먼저 그렇게 하여 한나라가 한왕 유방에게 길을 열어주는 걱정부터 덜었다. 그리고 다시 의제에게도 사람을 보내 진작부터 정해놓은 대로 통보하게 하였다.
“옛부터 천자의 영토는 사방 천리로서 그 도읍은 반드시 물의 상류에 있었습니다. 이제 널리 살펴보니 장사(長沙) 침현(郴縣)이 바로 그러한 땅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장사군 천리를 근기(近畿)로 삼으시고 침현에 도읍하시어 천하를 굽어보시옵소서.”
말은 그렇게 공손하였으나 실상인즉 구석지고 막힌 곳으로 의제를 내쫓는 셈이었다. 의제는 기가 막혔으나 힘없는 천자가 무슨 수로 천하를 움켜잡고 있는 패왕의 뜻을 거스르겠는가. 패왕이 그렇게라도 보살펴주는 데 오히려 감사하면서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하지만 무상한 게 권력이요, 못 믿을 게 권력주변을 맴도는 군상들의 심성이었다. 그래도 의제로 받들어지고, 겉으로라도 천자대접을 받을 때는 충성을 내세우며 주변에서 웅성거리던 조신들과 옛 초나라 귀족 떨거지들은 하루아침에 등을 돌렸다. 모두 패왕의 눈치를 보며 팽성에 남을 궁리만 하니, 의제를 모시고 장사로 떠나려는 사람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
한왕(漢王) 유방이 처음 한중(漢中)으로 들 때만 해도 아직 봄기운이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정(南鄭)에 임시로 마련한 한왕의 왕궁은 한낮의 늦더위 속에 고요했다. 말이 왕궁이지 옛날 부호의 집을 빌려 급한 곳만 손본 것이라 대청을 대전(大殿)으로 쓰자니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고요하구나. 관(관)아. 그러나 나는 이 고요함이 싫다.”
그날따라 유난히 어두운 얼굴로 평상에 걸터앉아 있던 한왕이 문득 그림자처럼 곁에 붙어서 있는 노관을 쳐다보며 물었다. 직위를 붙이지 않고 어릴 적에 부르던 이름 그대로 노관을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무언가 사사롭게 풀고 싶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있는 듯했다. 노관이 말없이 한왕을 마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젯밤에는 장졸 합쳐 몇 명이나 달아났다고 하더냐?”
한참 뒤에 한왕이 그렇게 물었다. 유들유들하고 뱃심 좋은 그답지 않게 어둡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노관도 한왕이 무엇 때문에 울적해 하는지 알만 했다. 늘 그래왔듯 아는 대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위랑(衛郎)과 칠대부(七大夫)가 각기 한 사람씩에 사졸이 대략 쉰 명 남짓입니다.”
“그런가? 그럴 테지. 실은 나도 이곳이 지겹다.”
한왕이 다시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 솔직하게 말했다. 같은 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나 그 뒤 오십년 가까운 세월 붙어 살다시피 한 노관도 그런 한왕의 심사를 알듯했다.
한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나면서 마지못해 따라온 원래부터의 한나라 장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왕을 흠모해 제 발로 따라나선 다른 제후의 군사들까지도 마음이 변해갔다. 저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며 밤마다 잠 못 이룰 만큼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석 달이 다 돼 가는 그 무렵은 장졸을 가리지 않고 다섯 명씩 열 명씩 무리를 지어 군중(軍中)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달아났다.
“허나 대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소(蕭)승상이 말한 대로, 대왕께서는 오히려 이 파촉 한중 땅에서 힘을 길러 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는 기세로 되돌아가야(捲土重來) 합니다. 반드시 오늘의 이 구차함과 욕스러움을 씻고 당당히 동쪽으로 나아가셔야 백제(白帝)의 아들을 베어죽이고 새 세상을 열 적제(赤帝)의 아드님일 수 있습니다.”
노관이 한왕의 울적한 심사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렇게 말을 받았다.
그때 갑자기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가 급하게 대전으로 들어왔다. 한왕과 노관이 아울러 살펴보니 갑주를 삼엄하게 두르고 칼을 찬 번쾌였다.
“번(樊)낭중이 무슨 일로 이리 급하게 달려오셨소?”
노관이 한왕을 대신해 그렇게 물었다. 그 무렵 번쾌는 낭중(郎中)으로 벼슬이 올라 있었다. 번쾌가 숨결조차 제대로 가다듬지 못하고 일러바치듯 한왕을 보고 말했다.
“대왕. 기막힌 일이 터졌습니다. 오늘 아침 소하가 달아났다고 합니다.”
“승상 소하가?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한왕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번쾌가 멀리서도 들릴 만큼 숨을 씨근거리며 대답했다.
“아침상을 받는 척하다가 갑자기 수저를 내던지고 마구간으로 내닫더니 가장 빠른 말을 골라 타고 동쪽으로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무슨 급한 볼일이 있었겠지. 설마 승상이….”
한왕(漢王) 유방이 아무래도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그렇게 말끝을 흐렸다. 번쾌가 그게 더욱 분통 터진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저도 처음에는 그리 알고 기다렸지요. 그런데 한참 뒤에 폐구(廢丘)로 빠지는 동쪽 곡구(谷口)를 지키던 부장(部將) 하나가 알려 왔습니다. 소하가 승상임을 내세워 파수 보는 군사의 물음에 대답도 않고 말을 달려 동쪽으로 가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전 점심나절에는 다시 그 곡구에서 동쪽으로 삼십 리 떨어진 곳의 진장(鎭將) 하나가 똑같은 전갈을 해왔습니다. 그리고도 다시 한식경, 이제 더는 전갈이 없는 걸 보고 이렇게 달려온 것입니다. 이게 달아난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기는 번쾌도 그리 경박한 성품은 아니었다. 그제야 일이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렸는지 한왕의 낯이 일그러지며 숨결이 거칠어졌다.
“승상이 어찌하여 달아났단 말인가. 승상이 어찌하여 나를 버렸는가….”
그러면서 손발이라도 잃은 사람처럼 어찌할 줄 몰라 하며 허둥댔다.
돌이켜보면 소하는 장돌뱅이 유계(劉季)를 한왕 유방으로 올려 세우는 데 누구보다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소하는 패현의 주리(主吏)로서 일찍부터 유계의 비범함을 알아보았고, 또 저잣거리 건달들과의 마뜩찮은 거래로 언제나 범죄 언저리를 기웃대는 그를 보호하였다. 늦은 나이지만 유계가 정장(亭長) 노릇이라도 할 수 있게 주선한 것도 소하였으며, 그가 역도(役徒)들과 함양으로 부역 갈 때 패현의 다른 벼슬아치들은 300전인데 소하만은 500전을 여비로 내놓아 남다른 믿음과 기대를 드러냈다.
유계를 패공(沛公)으로 만든 데도 소하의 공이 가장 컸다. 현령을 부추겨, 죄를 짓고 숨어살던 유계를 패현으로 불러들이게 한 것도 그였으며, 현령이 다시 의심을 품었을 때는 조참과 함께 성을 빠져 나가 유계에게 투항함으로써 성 안의 사기를 꺾어놓았다. 나중에 유계가 글로 성안 부로(父老)들을 달랠 때도 소하가 유계 편에 서 있다는 게 큰 힘이 되었다.
유계가 패공 유방으로 다시 출발한 뒤에도 그랬다. 싸움터라 도필리(刀筆吏)인 소하의 업적이 그리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가 없는 패공의 군대는 유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번쾌나 주발, 관영 같은 장수들의 용력에 못지않게 소하가 빈틈없이 돌본 병참과 보급도 패공의 세력을 키우는 데 큰 몫을 했다. 특히 함양에서 소하가 손에 넣은 진나라의 문서와 전적은 당장이라도 한왕 유방이 천하대세를 읽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자료였다.
한왕은 그런 소하가 자신을 떠났다는 데 크게 상심했다. 먹고 마시기조차 잊고 하루를 보낸 뒤 이튿날 새벽같이 태복 하후영을 불러 말했다.
“아무래도 아니 되겠다. 태복(太僕)은 어서 나가 빠른 말들을 골라 수레에 매고 기다려라. 내가 소 승상을 직접 찾아봐야겠다.”
그러자 하후영이 왠지 감회에 찬 얼굴로 한왕을 가만히 올려보다가 억지 부리는 아이 달래듯 차분한 어조로 말렸다.
“소(蕭)승상을 찾는 일이라면 제게 맡기시고 대왕께서는 자중하십시오. 소승상은 제가 패현 마구간에서 막일을 할 때부터 가까이서 모셔 잘 아는 분입니다. 결코 그리 떠날 분이 아니십니다. 반드시 까닭이 있을 터, 저 홀로 뒤쫓아 가도 어떻게 찾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한번 먹은 마음이라 그런지 한왕이 그런 하후영의 말에 오히려 목소리를 높였다.
“소하라면 나도 태복에 못지않게 오래 알아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그 까닭을 짐작조차 못하겠는데 태복이 어떻게 떠나가 버린 지 벌써 하루가 지난 그를 찾는단 말인가?”
“마음에 짚이는 일이 있습니다. 소승상을 모셔온 뒤에 아뢰겠사오니, 대왕께서는 부디 마음을 편히 하시고 기다려 주십시오.”
하후영이 다시 그렇게 한왕을 달랬다. 그래도 한왕은 함께 나서겠다고 우기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하후영 혼자 소하를 뒤쫓도록 해주었다. 한왕의 허락을 받은 하후영은 가장 빠른 말 네 마리를 골라 참마(參馬)까지 달고 몸소 수레를 몰아 왕궁을 나갔다.
그런데 그날 해가 지기도 전이었다. 걱정하며 기다리는 한왕에게 노관이 달려와 말했다.
“태복이 소승상을 모시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한왕이 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한달음에 대전으로 달려 나가려는데 소하가 홀로 한왕을 찾아보러 내전으로 들어왔다.
“공은 나를 버리고 달아나려 했다고 들었소. 그 까닭이 무엇이오?”
한편으로는 괘씸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했지만, 한왕은 짐짓 꾸짖듯 소하에게 물었다. 소하가 별로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대꾸했다.
“신이 어찌 감히 달아나겠습니까? 신은 다만 달아나는 자를 뒤쫓았을 뿐입니다.”
“달아나는 자를 뒤쫓는 일이라면 다른 장수를 시킬 수도 있었고, 또 공이 직접 가더라도 내게 알리고 떠날 수는 있었을 것이오.”
“그럴 겨를이 없었습니다. 아침상을 받고 있다가 그가 이미 간밤에 달아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수저를 내던지고 마구간으로 달려가 빠른 말을 골라 타고 뒤쫓기에 바빴습니다.”
“그게 누구요? 누구를 뒤쫓았다는 말이오?”
한왕이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다시 물었다. 소하가 한왕을 지그시 올려보며 무언가를 일깨워주듯 말했다.
“한신(韓信)입니다. 다행히 뒤쫓은 지 하루 만에 한신을 붙잡아 되돌아가자고 달래는데, 태복이 빠른 수레를 몰고 뒤따라와 함께 데리고 돌아왔습니다.”
그 말에 한왕이 잠시 멈칫했다. 한신이라면 한왕도 알 만했다. 처음에 번쾌가 데려와 연오랑(連敖郞)으로 써보았고, 나중에 다시 하후영이 무겁게 써달라고 추천하기에 치속도위(治粟都尉)로 올려 세운 바 있었다. 그 뒤에는 소하도 몇 번 한신의 재주를 칭찬한 것 같았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오래전 항량이 살았을 때 그 군막에서 한신을 본 기억도 있었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한신에게 남다른 재주가 있음은 분명하였다. 그러나 한왕은 왠지 한신을 가까이 두고 무겁게 쓰고 싶은 마음이 선뜻 일지 않았다. 한신이 주군(主君)을 바꾼 데서 비롯된 의심이나, 젊은 시절의 마뜩치 못한 행실을 전해 들어서만은 아니었다. 어떤 근원적인 의구심, 또는 떨쳐 버릴 수 없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이 한왕을 망설이게 했다.
“이제까지 우리 장수들 중에 동쪽으로 달아난 자만해도 여남은 명은 넘을 것이오. 하나 공은 한 번도 그들을 뒤쫓아 간 적이 없었는데, 이제 한신을 그렇게 뒤쫓아 갔다니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소!”
한왕 유방이 여전히 꾸짖는 말투로 그렇게 따졌다. 소하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차근차근 말했다.
“이제까지 달아난 그런 장수들은 얼마든지 쉽게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신처럼 빼어난 인물(國士)은 천하를 뒤져 둘을 찾아내기 어렵습니다(無雙). 대왕께서 이대로 한중(漢中)에 눌러앉아 왕 노릇이나 즐기시려면 한신을 부리셔야 할 일은 없겠습니다마는, 만일 동쪽으로 돌아가 천하를 다투고자 하신다면 한신이 아니고서는 함께 일을 꾀할 만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하나 모든 것은 대왕께서 어떤 뜻을 품고 계신가에 달렸습니다.”
한왕이 그 말을 한번 멈춰 생각해보는 법도 없이 받았다.
“나도 또한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오. 이 답답한 곳에 언제까지 머물러야 한단 말이오!”
“대왕께서 반드시 동쪽으로 돌아갈 뜻을 품고 계시다면 한신을 무겁게 쓰실 수 있을 것이고, 무겁게 써준다면 한신은 우리에게 머물 것입니다. 그러나 한신을 무겁게 써주시지 않는다면 그는 끝내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소하가 다시 한 번 한왕을 다그치듯 말했다. 한왕은 그러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소하의 눈길에서 한신에 대한 믿음과 아울러 아직도 꺾이지 않은 그 나름의 자부심을 보았다.
(이 사람이 한신을 그렇게 보았다면 나도 한신을 그렇게 믿어야 한다. 이 사람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시골 저잣거리 건달인 내게서 천하를 떠받칠 재목을 보고 서슴없이 자신의 삶을 건 사람이다. 만약 이 사람이 한신을 잘못 보았다면 나도 잘못 본 것일 수 있고, 그렇다면 내 남은 삶은 실로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는 삶이 되고 만다….)
한왕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그때껏 한신에게 품었던 까닭모를 의구와 불안을 일시에 거두었다.
“알겠소. 내 공의 뜻을 따라 한신을 장수로 삼겠소!”
그러나 소하는 별로 밝은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더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말했다.
“장수로 삼는다 해도 한신은 우리에게 남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대장군으로 삼겠소!”
소하의 뜻을 알아본 한왕이 얼른 그렇게 한신을 높였다. 그제야 소하의 얼굴이 환해졌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그리하시면 한신을 머무르게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한왕은 그 자리에서 한신을 불러 대장군으로 삼으려했다. 소하가 다시 차분하게 한왕을 깨우쳤다.
“대왕께서는 평소의 오만하고 무례하심 그대로 지금 대장군 세우는 일을 마치 어린아이 부르듯 하려 하십니다. 이번에 한신이 떠나려한 것도 어쩌면 그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 정히 한신을 대장군으로 높이시려면 반드시 엄숙한 격식을 갖춰야 합니다. 좋은 날을 골라 재계(齋戒)하신 뒤에 크고 넓게 제단(壇場)을 쌓고 의례를 치른 뒤에 그를 대장군으로 세우십시오.”
한왕 유방은 소하의 말을 따라 다음날로 남정(南鄭) 교외의 한군(漢軍) 진채 안에 흙으로 높고 넓게 제단을 쌓게 했다. 여러 장졸이 그 제단을 쌓는 까닭을 궁금히 여기자 소하가 넌지시 알려주었다.
“대왕께서는 격식을 갖춰 대장군을 세우려 하십니다.”
하지만 누구를 대장군으로 세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자 장수들은 저마다 자신이 세운 공이 가장 크다 여겨 스스로 대장군이 되리라고 믿으며 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일자(日者·군중에서 천문을 보고 길흉을 점치는 사람=視日)가 고르고 고른 날이 오자 많은 장졸을 그 아래 불러 모은 한왕은 정하게 재계(齋戒)하고 제단에 올랐다. 그 뒤를 대장군의 인뒤웅이와 부월(斧鉞)을 받쳐 든 연오(連敖)들이 따랐다. 이어 홀기(笏記)를 부르는 예관(禮官)이 소리쳤다.
“치속도위(治粟都尉) 한신은 단장(壇場) 위로 올라와 대장군의 인수(印綬)와 부월을 받으라!”
그 뜻밖의 외침에 제단 아래 몰려 있던 장졸들은 모두가 놀라 마지않았다. 특히 자신이 바로 그 대장군이 될지도 모른다고 여겨 은근히 그날을 기다려온 장수들은 놀라움을 넘어 묘한 허탈감까지 느꼈다. 큰칼을 차고 언제나 한왕 곁에서 그를 지켜왔을 뿐만 아니라 싸움마다 가장 앞장서 적을 무찌른 번쾌, 기장(騎將)으로 날랜 말을 몰며 매서운 기세로 적진을 누벼온 관영, 옥리(獄吏)에서 몸을 일으켰으나 그 몇 년 싸움터를 헤쳐 오면서 누구 못지않은 맹장으로 자리 잡은 조참, 강한 활을 쏘며 가장 앞서 성벽에 뛰어올라 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주발, 전차(戰車)로 적진을 가르고 치열하게 싸워 등공(등公)에 이른 하후영 같은 장수들이 그랬다.
그런 장수들의 마음을 헤아렸던지 한왕이 인수와 부월을 한신에게 내리기 전에 높이 쳐들어 보이면서 엄숙하게 소리쳤다.
“여기 이 인수와 부월은 곧 이 몸을 갈음한다. 누구든 이 인수와 부월을 받든 이에 거역하는 것은 곧 나를 거역하는 것이다!”
뿐만이 아니었다. 한왕은 배례(拜禮)가 끝나자마자 한신을 윗자리에 큰 스승 모시듯 앉히고 물었다.
“전부터 승상이 여러 번 장군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소만 과인이 오만하고 무례하여 장군을 알아보지 못하였소. 이제 장군을 대장군으로 세우는 의례를 끝냈으니 장군은 어떤 계책으로 과인을 가르치시겠소?”
그런 게 바로 한왕 유방이었다. 매사에 느긋하고 유들거리지만 결단이 필요한 때를 당하면 칼로 베듯 명쾌했으며, 어지간한 사람은 눈앞에 없는 듯 얕보아도 한 번 믿음을 주면 모든 걸 통째 맡겼다.
달라진 것이 놀랍기는 한신도 마찬가지였다. 약간 머리를 숙이고 두 손을 모아 군례(軍禮)로 한왕의 믿음에 답하는데, 그 의젓함이 벌써 장졸들이 전부터 알고 있던 한신은 아니었다. 초나라를 버리고 왔는데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한나라에 불평만 가득한 연오랑도, 용케 목숨을 건진 주제에 허구한 날 하후영이나 소하를 잡고 허풍만 쳐대던 그 치속도위도 보이지 않는 대신, 어디 내놓아도 모자람이 없는 헌칠한 대장군이 거기 서 있었다.
“이제 대왕께서 동쪽으로 돌아가신 뒤에 더불어 천하를 다투시려고 하는 이는 항왕(項王)이 아니시옵니까?”
군례를 마친 뒤 그렇게 한왕에게 묻는 한신의 목소리도 불평으로 뒤틀리거나 허풍으로 들떠있던 지난날의 그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 맑고 우렁찬 목소리에 실린 물음을 전에 없이 진지하고 겸허해진 한왕이 받았다.
“그러하오.”
“대왕께서 스스로 헤아리시기에 씩씩함과 사나움, 어짊과 굳셈(勇悍仁强)에서 항왕과 견주어 어느 쪽이 낫다고 보십니까?”
한신의 그와 같이 거침없는 물음에 한왕이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다시 덤덤하게 받았다.
“과인이 항왕에 미치지 못할 것이오.”
그러자 한신이 문득 한왕에게 두 번 절하여 우러르는 뜻을 드러낸 뒤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번 이길 수 있다 하였으니, 예부터 나를 아는 것은 장수된 자의 으뜸가는 덕목(德目)이라 하였습니다. 대왕께서 바로 그 덕목을 지니셨음을 진심으로 경하(敬賀)드립니다.
실은 이 한신이 보기에도 대왕께서는 씩씩함과 사나움, 어짊과 굳셈에서 모두 항왕에게 미치지 못하십니다. 허나 신(臣)은 일찍이 항왕을 섬겨 보았기에 그 사람됨을 알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신이 아는 바대로 말씀드릴 수 있게 해주십시오.”
“대장군은 서슴지 말고 가르침을 이어주시오.”
“항왕이 성내어 큰소리로 꾸짖으면 뭇사람이 모두 떨며 엎드리게 됩니다. 허나 어진 장수를 믿고 군권(軍權)을 맡기지 못하니 이는 필부(匹夫)의 용맹일 뿐입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하는 듯하고 자애로우며, 그 말은 은근하고 부드럽습니다. 누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눠줄 만큼 인정이 넘칩니다. 하지만 자기가 부리는 사람이 공을 세워 마땅히 땅을 갈라주고 벼슬을 내려야할 때에 이르러서는, 내주기가 아까워 그 도장 모서리가 닳고 인수(印綬)가 헤지도록 붙들고 있습니다. 이는 이른바 여인네의 어짊(婦女之仁)에 지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항왕의 용맹도 어짊도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항왕이 비록 천하의 패자(覇者)가 되어 여러 제후들을 신하로 삼았지만 관중에 있지 못하고 팽성에 도읍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 안목이 보잘 것 없어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릴 땅을 버리고, 사방으로 적을 맞게 되는 길거리에 나앉은 꼴입니다. 또 항왕은 일찍이 의제(義帝)께서 제후들에게 하신 약조를 저버리고 자기가 가깝게 여기는 순서대로 땅을 갈라주며 왕과 제후를 세웠습니다. 이는 불공평한 일이니 반드시 그 뒤탈이 있을 것입니다.
항왕은 의제를 강남(江南)으로 옮겨 만족(蠻族)의 땅 한구석으로 내쫓으려 합니다. 자기 나라로 돌아간 제후들은 그걸 보고 자기 임금을 쫓아내고, 그 좋은 땅을 뺏어 스스로 임금이 되었습니다.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모두 떼죽음을 당하고, 그 성읍(城邑)은 모두 잿더미가 됩니다….”
그런 한신의 말은 거침없이 흐르는 물결처럼 이어졌다.
“백성들은 항왕(項王)을 가깝게 여겨 따라주지 않고, 다만 그 위세에 겁먹고 있을 따름입니다. 이름은 패자(覇者)이나 실상은 천하의 인심을 모두 잃었으니 항왕의 굳셈을 여림으로 만들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런데 이제 대왕께서는 항왕이 해온 그 같은 짓을 거꾸로 뒤집듯 해오셨습니다. 천하의 용맹하고 어진 자들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시니, 쳐 없애지 못할 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상의 성읍(城邑)을 모두 공 있는 신하들에게 나눠 봉해준다면 마음으로 따르지 않을 신하가 어디 있겠습니까? 의로운 군사들로 하여금 동쪽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장사(壯士)들을 뒤따르게 한다면, 그 앞을 누가 감히 막아설 수 있겠습니까?
거기다가 저 삼진(三秦)의 왕 장함(章邯)과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는 본디 모두가 진나라 장군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진나라 자제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여러 해 동안 죽거나 달아나 없어진 수가 얼마나 되는지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지경입니다. 그러고도 남은 군사들은 속여 제후에게 항복하게 하고 신안(新安)으로 왔는데, 항왕은 그렇게 항복해온 진나라 사졸 20만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오직 장함과 사마흔과 동예 세 사람만 살아남았으니, 죽은 진나라 사졸의 부형(父兄)들은 그들 셋을 원망하여 통한(痛恨)이 골수에 스몄습니다. 이제 초나라가 힘으로 밀어붙여 그들 세 사람을 삼진의 왕으로 세웠습니다만 진나라 백성들 가운데 그들을 좋아하고 섬기려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처음에는 무겁고 어두운 마음으로 한신의 얘기를 듣던 한왕도 거기까지 듣자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나 한신은 그걸로 그치지 않았다.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무관(武關)을 넘어 관중으로 드신 뒤에는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해치신 적이 없으셨으며, 진나라의 가혹한 법(法)을 폐지하고 삼장(三章)의 법만을 남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진나라 백성들 가운데 대왕께서 관중의 왕이 되시기를 바라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또 일찍이 제후들 가운데 가장 먼저 관중(關中)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관중의 왕이 된다는 약조가 있었던 만큼, 대왕께서 마땅히 관중의 왕이 되셔야 했습니다. 관중의 백성들도 모두 그 일을 알고 있는데, 대왕께서 항왕 때문에 마땅히 차지해야할 왕위를 잃고 한중(漢中)으로 들게 되시니 진나라 백성들 치고 한스럽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제 대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쳐들어가신다면, 저 삼진의 땅은 격문 한 장으로 평정될 것입니다.”
한신이 그렇게 말을 마치자 한왕은 매우 기뻐하며 늦게 만나게 된 것을 한탄하였다. 이야기를 들은 다른 장수들도 그 밝고 바른 식견에 감탄하며 한신을 전과 달리 보게 되었다. 거기다가 동쪽으로 쳐들어가자는 한신의 주장은 그 무렵 모든 한나라 장졸들이 부르는 애절한 노래와도 같은 것이어서 더욱 그들의 호감과 믿음을 샀다.
그런데 ‘사기’의 ‘한신 노관 열전(韓信 盧綰列傳)’에 보면 나중 한(韓)나라 왕이 된 또 다른 한신(韓信)이 한중에서 그 비슷한 말을 한 것으로 나와 있다. 아마도 회음후(淮陰侯) 한신과 이름이 같아 무슨 착오가 있었던 듯하다. 한왕(韓王) 신(信)은 장량이 세운 장수로서, 그때 한중으로 따라 들어간 것은 틀림없지만, 그런 큰일을 한왕 유방과 마주 논의하여 그 대군을 움직일만한 자리에 있지는 못했다.
한신이 한군(漢軍) 대장군이 되고, 동쪽으로 돌아가 패왕과 천하를 다투어보자는 그 주장이 한왕 유방에게 받아들여지자, 남정(南鄭)의 한군 진영은 아연 활기를 띠었다. 특히 관동(關東)에서 따라온 많은 장졸들은 천하의 향방보다도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데 마음이 들떠 한중을 떠날 날만 기다렸다.
하지만 동쪽으로 관중 땅을 평정하고 다시 관동으로 나가 중원을 다툰다는 게 몇 마디 그럴듯한 말이나 저만의 각오와 다짐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패왕 항우와 범증이 머리를 맞대고 의논 끝에 한왕 유방을 가둬둔다는 생각으로 보낸 파촉(巴蜀) 한중이라 거기서 빠져나오는 일이 쉬울 리 없었다.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은 돌아갈 길이었다.
“지난번 한중으로 들어올 때 잔도(棧道)를 모두 불살라 버렸으니 어떻게 돌아간단 말이오? 항왕의 의심을 덜거나 등 뒤를 두들겨 맞지 않고 남정까지 오는 데는 좋았지만 이제 다시 나가려니 우리 대군이 되돌아 나갈 길이 없구려.”
대장군의 배례(拜禮)가 끝나고 장수들만의 술자리가 되었을 때 한왕이 문득 그렇게 한신에게 물었다. 그러나 한신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길이야 새로 열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태울 잔도가 있었다면 다시 그 잔도를 만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먼저 군사들을 식(蝕) 골짜기로 보내 대왕께서 불태워 버리게 하신 잔도를 다시 얽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어느 세월에 그 숱한 잔도를 모두 다시 얽는단 말이오? 거기다가 그때쯤은 우리가 다시 돌아온다는 소문을 들은 삼진(三秦)의 대군이 그 곡도(谷道) 어귀를 굳게 틀어막고 있을 것인즉 그 일은 또 어쩌시겠소?”
“우리가 한꺼번에 대군을 보내 몰래 잔도를 다시 얽게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신은 그렇게 말해놓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문득 엄중해진 얼굴로 덧붙였다.
“대군이 들고 나는 것은 모두 엄한 군기(軍機)이니, 술자리에서 길게 말할 것이 아닙니다.”
그제야 한왕도 심상찮은 느낌이 들어 더 따져 묻지 않았다.
한신은 다음날 한왕과 단둘만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야 대군이 한중에서 나갈 계책을 밝혔다. 아침 일찍 대전을 찾아온 한신은 소매에서 흰 비단 한 자투리를 꺼내 한왕에게 바쳤다. 한왕이 받아 펼쳐보니 산과 물의 형상을 그려놓고 여러 가지 표시를 한 도적(圖籍)이었다.
“대장군, 이게 무엇이오?”
한왕이 그래도 잘 알 수 없다는 눈길로 물었다. 한신이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대군이 돌아갈 길입니다. 대왕께서 걱정하신 잔도를 대신할 수 있을 것 같아 눈 여겨 보아 두었다가 비단에 옮겨 그려본 것입니다.”
“이 길이 어디 있으며, 이리로 가면 삼진 어느 땅으로 나아가게 되오?”
“고도현(古道縣)을 지나 대산관(大散關)을 나서면 진창(陳倉) 서쪽으로 빠집니다. 식(蝕) 골짜기를 지나 두현(杜縣) 남쪽으로 나가지 않고도 곧 바로 옹(雍) 땅의 염통을 내지를 수 있는 길입니다”
“대장군은 어떻게 이 길을 알게 되었소?”
한왕이 그렇게 묻자 한신이 새삼 감회어린 얼굴로 대답했다.
“대왕께서는 이 한신이 대왕의 장졸들보다 한 달이나 늦게 한중으로 들어왔음을 알고 계십니까? 그때 신(臣)은 대왕의 자취를 더듬어 두현(杜縣)까지는 따라갔으나 식(蝕) 골짜기에 이르러 보니 잔도는 이미 모두 불타고 없었습니다. 그래서 부근을 헤매며 파촉 한중으로 들어갈 길을 찾게 되었는데 폐구(廢丘)를 지나 진창(陳倉)에 이르도록 서쪽으로 갈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산관(大散關)에 이르러 근처에 있다는 고도현(古道縣)이란 땅이름을 듣자 문득 짚이는 게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한왕 유방이 자신도 모르게 한신의 애기에 빨려들어 물었다.
“잔도가 크게 열리기 이전에도 파촉(巴蜀) 한중(漢中)은 진(秦)나라의 다스림을 받았고, 사람과 물자의 왕래도 빈번하게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에도 그리로 드나들 길은 있지 않았겠습니까? 비록 잔도보다 길이 험하거나 에돌아도 반드시 옛길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도(古道)란 바로 옛길이 아니겠습니까? 따라서 신은 고도현에 바로 그 옛길이 있으리라 믿고 그곳 지리에 밝은 토박이들에게서 한중으로 드는 옛길을 잘 아는 사람을 수소문해 보았습니다.”
“그럴 법하오.”
“오래잖아 아직도 그길로 남정(南鄭)을 드나든다는 사냥꾼 하나를 찾았습니다. 신은 지녔던 은덩이로 그를 사서 길라잡이로 삼고 대왕의 뒤를 쫓았습니다. 함양(咸陽)에서 떠나기로 한다면 길을 배나 도는 셈이기는 했지만 정말로 옛길은 있었습니다. 그것도 대군이 지나기에는 오히려 잔도보다 나을 것 같은 길이었습니다. 신은 뒷날 반드시 쓰일 데가 있을 것 같아 그 길을 구석구석 꼼꼼히 살펴두었다가 나중에 이렇게 비단에 옮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신은 처음 한왕 유방을 찾아올 때부터 장수가 되어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갈 일을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몇 달이나 연오(連敖)니 치속도위(治粟都尉)니 해서 하찮은 대접을 받았으니 그 실망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하지만 당장 한왕이 궁금한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런데 대산관이 그 끝에 있으니 그것은 어떻게 하겠소? 이는 진나라가 서쪽에서 오는 적에 대비하여 세운 관(關)이라 진나라 장수였던 옹왕(雍王) 장함도 잘 알고 있을 것이오. 거기에 대군을 보내 막고 있으면 우리가 무슨 수로 삼진의 땅을 밟는단 말이오?”
한왕이 그렇게 걱정스레 물었다. 한신이 문득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것은 장함의 눈길을 잔도 쪽으로 끌어두면 될 것입니다. 신에게 이미 계책이 서 있으나 이 또한 미리 새어나가서는 안 될 엄한 군기라….”
아무래도 대전 안팎의 이목이 걱정된다는 듯 한신이 그렇게 말끝을 흐리자 한왕이 자신 있게 말했다.
“대장군은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이곳에는 과인이 수족처럼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뿐이오.”
그러자 한신이 역시 준비해 온 듯 말했다.
“그렇다면 번(樊) 낭중을 불러주십시오. 번 낭중처럼 거칠고 사나운 장수만이 교활한 장함을 속일 수 있는 계책입니다.”
오래잖아 번쾌가 불려오자 한왕이 먼저 일깨워 주듯 엄하게 말했다.
“번 낭중은 대장군의 명을 받들라. 우리가 한중을 나가기 전에 먼저 장함을 속여 두어야만 될 일이 있다고 한다. 반드시 번 낭중 같은 맹장이라야 성사시킬 수 있는 계책이라 하니 결코 소홀히 듣지 말라!”
“무슨 일입니까?”
대장군이 한신으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새로 세운 대장군 감으로 가장 많이 물망에 오르내린 번쾌였다. 홍문의 잔치로부터 반년밖에 되지 않는 그 무렵으로 봐서는 실상으로도 공이 장수들 가운데 으뜸이라 할만 했다. 그런 만큼 전날의 배례(拜禮)에서 느낀 서운함과 놀라움도 커서 마음속의 응어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에 남아 있었다.
“번 장군은 군사 500명을 뽑아줄 테니 지금 당장 식(蝕)골짜기로 가서 우리가 불사른 잔도를 모두 새로 만드시오. 다음 달 초순에는 대군을 낼 터이니 그때까지는 반드시 잔도를 훤하게 닦아 놓아야 하오!”
가을 7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 장마가 다 걷히지 않은 때였다. 합쳐 2백리가 넘는 곡도(谷道)에 수백의 길고 짧은 잔도를 놓아야 하는 일을 겨우 500명 인부로 스무날 안에 마치라 하니 한왕이 듣기에도 무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번쾌가 퉁명스레 받았다.
“500명 가지고는 두현까지 그냥 갔다 오기에도 스무날로는 빠듯하겠소. 5000명이라도 넉넉하지는 못할 것이오.”
그러자 한신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다.
“지금 장군 번쾌는 무슨 소리를 하는가? 이는 군명(軍命)이고, 군명은 불가(不可)로 답할 수가 없다. 장수 되어 군명을 받들지 못한다면 참수(斬首)가 있을 뿐이다!”
그렇게 소리치며 번쾌를 쏘아보았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우렁차고 그 눈길이 얼마나 번쩍이던지 어지간한 번쾌도 움찔했다. 여덟 자 넘는 한신의 키가 그날따라 유난히 우뚝해 보이고 희멀쑥한 얼굴도 서릿발 같은 위엄으로 차게 빛났다. 거기다가 한왕이 다시 한신을 거들었다.
“번 낭중은 한군(漢軍)의 장수로서 대장군 앞에 서 있음을 잊지 말라!”
“신은 군명을 어기고자 함이 아니라 일이 실로 그러함을 밝히고 있을 뿐입니다. 대왕께서도 그 골짜기를 지나오셨으니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곳의 바위를 깎고 뚫어 십만 대군과 물자가 지나갈 잔도를 매다는 일이 어떻게 군사 500명으로 스무날 만에 이뤄지겠습니까?” “닥쳐라! 안 되면 되게 하는 것이 병법이다. 적이 뜻하지 않는 곳으로 나아간다(出其不意)거나 동쪽에서 소리친 뒤 서쪽을 두드린다(聲東擊西)고 하는 것은 적이 보기에는 안 되는 일을 해야만 쓸 수 있는 계책이다. 홍문의 잔치에서 번 장군이 우리 대왕을 구할 수 있었던 것도 장군이 바로 그렇게 항왕(項王)의 의표를 찔렀기 때문이다. 거록의 싸움 이래로 누가 항왕의 기세를 면전에서 꺾어낼 수 있다고 믿었겠는가?”
이번에는 한신이 다시 그렇게 받았다. 말은 그럴듯했으나, 한왕이 듣기에도 어딘가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소리였다.
“번 낭중은 어서 대장군의 명을 받들도록 하라!”
한왕은 그래도 한신을 편들어 번쾌를 억눌렀다. 그러자 번쾌도 더는 뻗대지 못하고 한신의 명을 받아들였으나, 대전을 나가는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였다.
“대장군. 정말로 군사 5백 명이 스무날 만에 잔도를 다 만들 수 있겠소?”
번쾌가 나가자 한왕이 아무래도 걱정스러운 듯 그렇게 물었다. 한신이 한왕의 물음을 동문서답으로 받았다.
“이제 대왕께서는 장군 조참(曺參)과 주발(周勃)을 불러 제 명을 받들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조참과 주발이 불려오자 또 엉뚱한 소리를 했다.
“두 분 장군은 오랫동안 사졸들과 함께 싸워온 터라 누구보다 그 사졸들의 출신이나 성품을 잘 아실 것이오. 진나라 땅에서 나고 자랐으며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마음으로 우리 한나라를 따르지 않는 자들과, 관동(關東)에서부터 따라왔더라도 달아나 고향으로 돌아갈 틈만 노리는 자들로 5백 명만 골라 주시오. 되도록이면 원망 많고 불평 많은 자들로 고르되, 일부러 그런 자들을 골랐다는 게 밖으로는 알려지지 않도록 하시오. 또 날이 많지 않으니 그들 5백 명을 고르는 데 하루를 넘겨서는 아니 되오.”
조참과 주발은 그런 한신의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 했으나 워낙 한신이 급하게 몰아대니 그 군사들의 쓰임조차 물어보지 못하고 나갔다. 그러나 한왕은 그 머릿수를 듣자 짐작이 갔다.
“원망 불평 많은 자들이 일을 제대로 할 리 있겠소? 그런 군사들에게 가뜩이나 어려운 잔도 일을 맡겨도 되겠소? 또 그러잖아도 이번 일을 못마땅해 하는 번 장군은 어떻게 달래겠소?”
한왕이 다시 걱정이 되어 그렇게 물었으나 한신은 여전히 모를 소리만 했다.
“대왕께서는 너무 심려 마십시오. 번 장군이 화를 많이 내면 많이 낼수록 우리 계책은 더 잘 먹혀들 것입니다.”
그렇게 대답하고는 한왕 앞을 물러나왔다.
다음날이었다. 조참과 주발이 충실하게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군사 5백 명을 골라왔다. 동쪽으로 달아나다가 붙잡힌 자들과 아직 몸은 한군(漢軍)에 남아있어도 마음은 이미 떠버려 동배들에게조차 따돌림 받고 있는 사졸들이었다.
한신은 궁궐 밖에 성안의 장졸을 모두 모아두게 하고, 대장군의 위의(威儀)를 갖춘 뒤 그리로 나갔다. 그리고 번쾌에게 여럿 앞에서 대장군으로서 첫 번째 군명을 내렸다.
“번 장군은 이들 5백 명을 데리고 식곡(蝕谷)으로 가서 스무날 안으로 우리가 한중으로 들어올 때 부수고 불태워버린 잔도를 다시 고쳐 세우시오. 우리는 바로 폐구(廢丘)로 치고나가, 한 싸움에 옹왕(雍王) 장함을 사로잡고 그 땅을 평정할 것이오.”
그 말에 번쾌의 얼굴이 시뻘겋게 부풀어 올랐다. 한군(漢軍)에서 으뜸가는 장수로서 한낱 역도(役徒)의 우두머리 꼴이 되어 길을 닦으러 가는 것도 성이 나는데, 주어진 병력마저 그렇게 한심한 것들이니 그럴 만도 했다. 무어라 한마디 하려는데 한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다시 번쾌의 심사를 건드렸다.
“이는 대군의 진퇴가 걸린 일이니 기한을 어겨서는 아니 되오. 번 장군은 군령장(軍令狀)을 써두고 가시오. 만일 기한을 어기면 허리를 베이게 될 것이오!”
“대장군께서는 이 번(樊) 아무개를 너무 작게 보시는 게 아니오? 내 대왕을 따라 패현을 떠난 뒤로 크고 작은 수십 번의 싸움에서 장수로서 부끄럽지 않게 싸워왔거늘, 장군의 반열에 오른 지금에 이르러 겨우 잡일꾼 몇백명 데리고 길이나 닦으란 것이오? 그리고 애초부터 지키지도 못할 기한을 주며 목숨을 내놓겠다는 군령장을 쓰라니 어찌 이리도 사람을 업신여기고 몰아대는 것이오?”
마침내 참지 못한 번쾌가 한신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머리칼이 곤두서고 눈꼬리가 찢어질 듯 눈을 부릅뜬 게 홍문의 잔치에서 보여주었던 풍모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한신은 한번 움찔하는 법도 없었다. 며칠 전 한왕 유방에게서 받은 부월을 높이 쳐들고 엄하게 번쾌를 쏘아보며 소리쳤다.
“이 부월은 대왕께서 대장군의 인수(印綬)와 함께 내리신 신표(信標)이다. 낭중 번쾌는 한나라 장수로서 대장군의 군령에 맞서려는가?”
“감히 군령에 맞서려 함이 아니라, 이 번쾌에게도 쳐들고 다닐 낯이 있어야 함을 말하고 있소이다. 대장군께서는 번쾌가 오늘 이처럼 짓밟히고도 다음날 장수로서 군사들을 이끌고 싸움터로 나설 낯짝이 남아있으리라고 보시오?”
번쾌가 좀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꺾이지 않는 기세로 맞섰다. 한신이 부월을 한층 높이 쳐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군령관(軍令官)은 어디 있는가? 군령관은 대장군의 명을 받들어 낭중 번쾌를 옥에 가두라. 감히 군령에 맞선 죄를 물어 내일 여럿 앞에서 그 목을 베고 군문에 높이 매달 것이다!”
그때 군령은 글을 읽어 법을 아는 역(酈)선생 이기(食其)가 맡아보고 있었다. 번쾌가 아무리 한군에서 으뜸가는 맹장(猛將)이요, 홍문의 잔치에서 한왕의 목숨을 구한 공이 크다 하나 당장은 서슬 푸른 대장군의 군명을 받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졸들을 풀어 번쾌를 옥에 가두게 했다.
그 소식을 들은 한왕 유방이 달려 나와 한신에게 빌었다.
“번쾌는 과인이 목숨을 빚진 장수일 뿐만 아니라, 사사롭게는 손아래 동서이기도 하오. 과인의 낯을 보아서라도 번 낭중을 용서해 주시오.”
하지만 한신은 성난 낯빛을 풀지 않았다.
“비록 임금이라 할지라도 대장군의 병권은 거둘 수 있지만 이미 발동된 군령을 막아서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히 번쾌를 살려주시려면 차라리 이 한신에게서 대장군의 인수와 부월을 거두어 가십시오!”
그렇게 버티다가 한왕 유방이 한신 앞에 무릎을 꿇는 시늉까지 하고서야 겨우 번쾌를 풀어 주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여러 장졸 앞에서 한 번 더 망신을 준 뒤였다.
“이번에는 대왕의 위엄을 거스를 수 없어 용서한다만 이런 일이 두 번 되풀이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서 가서 우리 대군이 동쪽으로 나갈 길을 엶으로써 떨어지다 만 그 목을 지켜라. 군사들을 엄하게 다잡아 반드시 기일 안에 잔도를 열어놓도록 하라!”
이에 쫓기듯 떠나기는 했으나 그렇게 무참한 꼴을 당하고 떠난 번쾌의 심사가 온전할 리 없었다. 곧 한신이 몰래 딸려 보낸 군사에게서 한신에게 전갈이 들어왔다.
“번(樊) 장군께서 연일 술에 취하여 군사들을 모질게 몰아대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게으르고 느리다며 매질인데, 심하면 죽이기까지 하니, 그러잖아도 불평 많던 군사들은 벌써부터 떼를 지어 달아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 길 떠난 지 닷새밖에 안 됐는데 머릿수가 이미 100이 넘게 줄었습니다. 이대로 가면 식(蝕)골짜기에 이르기도 전에 잔도(棧道)를 닦을 군사가 하나도 남지 않겠습니다.”
그 말로 미루어 번쾌는 뒤틀린 심사를 군사들에게 풀고 있는 듯했다. 한왕도 따로 소식을 듣는 데가 있는지, 오래잖아 그 일을 들어 알았다. 그날로 한신을 불러들여 걱정했다.
“원래도 그 머릿수로는 해내기 어려운 일인데 군사들까지 달아난다니 큰일이외다. 번쾌가 마침내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실로 걱정이오.”
그제야 한신이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며 새삼 한왕에게 빌듯이 말했다.
“장함을 속이기 위해 번 장군을 격동시키려 하다보니 대왕까지 속이게 되었습니다. 군사를 부리는 데는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하지만(兵不厭詐), 남의 신하되어 임금을 속이는 죄 또한 작지는 않을 것입니다. 실은 이번에 번 장군을 짐짓 몰아댄 것은 성난 번 장군이 더 모질게 군사들을 몰아대 더 많은 우리 군사가 장함 쪽으로 달아나도록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장함의 이목을 잔도 쪽에 잡아둘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이제 아무 염려 마시고 다시 노약한 군사 500명만 더 잔도 쪽으로 보내 주십시오. 번장군의 매질을 못 견뎌 달아난 우리 군사들은 반드시 장함의 군사들을 찾아갈 것인데, 그때도 잔도를 닦는 우리 군사들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동쪽으로 나가는 길은 잔도밖에 없음을 적이 믿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듣자 한왕도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이름 없는 부장(部將) 하나를 뽑아 노약한 군사 500명을 주며 번쾌를 뒤따라가게 했다.
“이제 고도(古道)로는 언제 군사를 낼 것이오?”
잔도를 닦으러 가는 두 번째 군사들을 보낸 날 한왕은 다음 일이 궁금하다는 듯 한신에게 은근히 물었다. 한신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번 장군이 군사를 모두 잃고 기일을 넘겨 죄를 빌러 올 때쯤이 좋겠습니다. 다만 그전에 먼저 해두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오?”
“첫째는 병력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장구한 계책입니다. 이제 우리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나가게 되면 짧아도 몇 년은 길고 힘든 싸움을 치러야 합니다. 옛날같이 유민들을 긁어모아 되는 대로 먹고 입히며 오직 함양(咸陽)만 바라보고 밀고나가는 그런 마구잡이 싸움이 아닙니다. 각기 봉지(封地)를 근거로 병력과 물자를 수급 받아 이곳저곳에서 세력을 다투면서, 한 발 한 발 천하의 대세를 결정해가는 나라들 사이의 길고 소모적인 전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싸움으로 비어버린 머릿수와 필요한 물자를 제때에 채우지 못하면 천하쟁패는 영 글러지고 맙니다.”
“군사들의 머릿수를 헤아려 그들을 먹이고 입히는 일이라면 소(蕭)승상이 잘 해나가고 있소. 앞으로도 승상에게 맡기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소(蕭) 승상께서 해 오신 일은 한낱 유민군(流民軍)의 징집관이나 군량관(軍糧官)이 하는 일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그때그때 생기는 사람과 재물 만으로 임시변통하는 식으로는 아니 됩니다. 이왕에 한중과 파촉 땅을 얻어 한왕(漢王)이 되셨으니, 하루 속히 한나라의 관부(官府)를 갖춰 군사로 불러 쓸 수 있는 장정과 거둘 수 있는 부세(賦稅)를 헤아린 뒤에 거기 맞춰 병력과 물자의 수급을 정해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먼저 소 승상께 군사 약간을 딸려주어 멀리 관중의 전화(戰火)가 미치기 어려운 파촉에다 승상부를 차리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거기서 거둔 것들로 우리 한군(漢軍)의 뒤를 대게 하신다면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까지는 넉넉할 것입니다.”
“대장군의 말을 듣고 보니 그것도 길게 내다보고 세운 양책인 듯싶소. 소 승상을 불러 그리 하도록 하겠소. 그 다음에 할 일은 무엇이오?”
한층 겸허해진 한왕이 다시 그렇게 물었다.
“삼군(三軍)과 오병(五兵)의 제도를 정비하고 기(奇) 외(外) 별(別) 삼부(三部)를 더하여 우리 한군(漢軍)에게 천하 쟁패의 싸움을 감당할 기틀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임금의 명을 받고 싸우는 군대(王師)로서 정면으로 대군을 맞아 싸우는 데는 삼군과 오병의 공고함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적을 유격(遊擊)하고, 간세(奸細)를 부리며, 척후와 반간(反間)을 맡아 하는 삼부도 천하 쟁패를 위해서는 결코 가볍게 여겨서 아니 됩니다. 그 모두를 갖춘 뒤에는 항오(行伍) 단병(短兵)의 법과 행군(行軍) 설진(設陣)의 요령을 가르치면 동쪽으로 나갈 채비는 대강 마련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일들은 모두가 군사를 부리는 일이니, 과인은 이미 대장군에게 모두 맡긴 터요. 따로 허락을 구할 것 없이 모두 대장군이 알아서 처결하시오!”
한왕이 그렇게 시원스레 한신의 말을 받아들여 주자 그날부터 한군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강 장수에 따라 나뉘고 그때그때 싸움 형편에 따라 몇 갈래로 합치거나 갈라졌던 대군은 엄격한 삼군 오병의 편제에 따라 다시 짜여졌다. 그리고 기병(奇兵)과 유군(遊軍)을 다루는 기부(奇部)에 간세와 척후를 맡는 외부(外部), 반간을 맡는 별부(別部)가 더해져 본부 한군의 감춰진 발톱과 이빨(爪牙)이 되었다.
그 다음 남정(南鄭) 교외의 벌판은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한 조련에 들어간 한나라 군사들의 열기와 함성소리로 가득 찼다. 오래된 사졸은 3년 넘게 전장을 누볐고, 나중 중원으로 들어와서 얻은 군사도 관중에서의 힘든 싸움을 몇 번이나 겪었지만, 한신이 가르친 대로 조련을 받자 열흘도 안돼 한군의 기세는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다.
조련과 더불어 한신은 또 필요한 헛소문을 퍼뜨리기도 잊지 않았다.
“승상 소하가 파촉에서 곧 5만 군사를 뽑아 보낼 것이다. 그들을 합쳐 10만의 정예군을 기른 뒤 식(蝕)골짜기를 지나 두현(杜縣)으로 나아간다. 그때쯤은 번쾌 장군이 새로 닦고 있는 잔도도 다 이루어져 남정에서 열흘이면 옹왕(雍王) 장함의 도읍인 폐구(廢丘)를 에워쌀 수 있다. 그 한 싸움으로 장함을 사로잡고 바로 함곡관을 나가 천하대세를 결정한다!”
말할 것도 없이 장함의 이목을 잔도 쪽으로만 끌어놓기 위해서였다.
잔도(棧道)를 다시 얽으려고 식(蝕) 골짜기로 간 번쾌가 이끌던 군사를 모두 잃고 남정(南鄭)으로 돌아온 것은 한신과 다투다가 떠난 지 꼭 스무 날 만의 일이었다. 곁에서 수발들던 사졸 몇 명과 더불어 왕궁으로 든 번쾌는 먼저 한왕 유방을 찾아보고 죄를 빌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진작부터 들은 소리가 있어 한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너무도 정확하게 한신의 말이 들어맞자 놀라 물었다. 번쾌가 무안한지 그답지 않게 기어드는 목소리로 받았다.
“할 일은 많은데 받은 머릿수는 적고, 그나마 기일까지 촉박해 군사들을 조금 심하게 다그쳤더니 일이 이리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둘 몰래 동쪽으로 달아나기에 목을 잘라 겁을 주려 했으나, 오히려 그때부터 떼를 지어 달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감시하러 보낸 군사들까지 그들을 따라 달아나버려 끝내는 손발 같은 사졸 몇 명만 남고 말았습니다. 그때 마침 후대(後隊)를 보내셨기에 그들에게 잔도 닦는 일을 맡기고 저는 이렇게 죄를 빌러 돌아왔습니다.”
번쾌의 그 같은 말에 문득 느껴지는 일이 있어 한왕이 정색을 하고 말했다.
“군사를 부리는 일은 내 이미 대장군 한신에게 모든 걸 넘겼소. 장군은 내게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대장군의 명을 어긴 것이니, 대장군을 찾아보고 군령을 받으시오.”
한신에게 그리 해달라고 당부를 받은 적은 없으나 왠지 그래야 될 것 같아 한 말이었다. 한왕이 그렇게 말하자 갑자기 번쾌의 얼굴이 굳어졌다. 떠날 때 한신과 다툰 일 때문인 듯했다. 한왕도 그 사정을 모르는 바 아니라 다시 한마디 덧붙였다.
“너는 젊은 시절부터의 벗일 뿐만 아니라, 사사롭게는 나와 동서간이 된다. 하지만 나는 이미 옛날 패현 저잣거리를 떠돌던 건달 유(劉)아무개가 아니고 너 또한 개백정 번쾌가 아니다. 나는 이제 한 나라의 왕이 되어 대장군을 세우고 그에게 군진(軍陣)의 일을 모두 맡겼으며, 너 또한 한 나라의 장수가 되어 그 군령 아래 서게 되었다. 지금 처지가 딱하게 된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나, 이제 와서 너 하나를 보살피고자 대장군의 군권을 거둬들일 수는 없구나. 가서 대장군에게 죄를 빌고 군령을 바로 세우도록 하여라.”
인정어린 말이었지만 또한 그만큼 흔들림 없는 원칙을 앞세운 군주의 명이기도 했다. 번쾌도 그 말을 알아들었다. 먼저 한왕을 찾아보려고 마음먹을 때와는 달리 결연하게 일어섰다.
한달음에 한신을 찾아간 번쾌는 군례를 마치기 바쁘게 말했다.
“낭중 번쾌는 군무를 기일에 맞추지 못한 죄와 이끌고 간 군사를 모두 잃은 죄를 대장군에게 빌고자 왔소. 일전에 써두고 간 군령장이 있으니 대장군께서는 이 번쾌를 베어 군율(軍律)을 엄히 세우시오!”
그리고 털썩 무릎을 꿇으며 두 눈을 질끈 감는 품이 이미 군령에 모든 걸 맡긴 사람 같았다. 그러자 한신이 달려 나와 번쾌를 일으켜 세우면서 말하였다.
“번 장군은 스스로를 너무 낮추지 마시오. 장군은 죄를 지으신 게 아니라 우리 한군(漢軍)을 위해 큰 공을 세우고 돌아오신 거요.”
그 뜻밖의 말에 번쾌가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군령을 어기고, 군사들은 모두 잃었는데 대장군은 그 어인 말씀이시오?”
“용서하시오. 장군. 실은 처음부터 일은 그렇게 되도록 꾸며져 있었소. 잔도(棧道)는 스무 날 만에 다시 고쳐 세울 수 있는 게 아니었고, 장군이 이끌고 간 군사들도 동쪽으로 달아날 틈만 살피고 있는 자들로만 골라 뽑은 것이었소.”
한신이 빙긋 웃으며 그렇게 털어놓았다. 번쾌가 얼른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해 물었다.
“그런데 왜 저를….”
“장함의 눈과 귀를 모두 식(蝕) 골짜기로 잡아두기 위함이었소.”
“장함의 눈과 귀라….”
“대왕께서 누구보다 믿고 아끼시는 장군이 잔도 놓는 일을 맡아야만 장함은 우리가 다시 그 잔도를 따라 식 골짜기로 나오려 함을 믿을 것이오. 그러나 그 일을 장함에게 알려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장군이 이끌고 간 군사들이 바로 그들이었소. 그러잖아도 달아날 마음뿐이던 그들은 기한에 몰린 장군이 심하게 다그치면 모두 달아나 장함에게 그 일을 전하리라 보았소. 그런데 이제 일이 그대로 되었으니, 장군은 우리 한군(漢軍)을 위해 큰 공을 세우신 것이나 다름없소.”
그제야 번쾌도 한신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너무 심하게 속은 게 속이 상해 잠시 할말을 잊고 있는데, 한신이 그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는 북으로 가만히 길을 돌아 고도현(古道縣)의 옛길로 나아갈 것이오. 그리하여 진창길로 빠지면 삼진(三秦) 가운데 옹(雍)땅을 바로 들이칠 수 있소. 진창으로 가는 길목에 대산관(大散關)이 있으나 지금쯤 장함의 군사는 모두 식 골짜기 어귀에 몰려 있을 것이니 우리 대군이 불시에 치고 들면 힘들이지 않고 지날 수 있을 것이오. 장군은 얼른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대군의 선봉이 될 채비나 하시오.”
그런 다음 한신은 그날로 한왕을 찾아보고 동쪽으로 돌아갈 대군을 일으키게 했다.
진작부터 채비해온 터라, 한왕이 군사를 내는 일은 조용하면서도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승상 소하와 약간의 이졸을 파촉(巴蜀) 땅에 남긴 한왕은 6만 군사를 긁어모아 다음날로 남정(南鄭)을 떠났다. 소하를 파촉에 남긴 것은 그곳에서 세금을 거두고 군사로 쓸 장정을 뽑아 동쪽으로 나아가는 한군(漢軍)의 뒤를 대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편 옹왕(雍王) 장함이라고 해서 매양 손 처매놓고 한왕이 하는 일을 바라보기만 하지는 않았다. 원래가 뛰어난 장수인데다, 항왕과 범증의 당부까지 있어 언제나 파촉 한중의 움직임을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한왕이 비록 잔도를 불살라 돌아올 뜻이 없음을 드러냈지만, 장함은 그게 속임수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넉 달도 안돼 잔도가 있던 식 골짜기가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장함이 사람을 풀어 알아보려 했으나 그럴 필요조차 없었다. 골짜기 안에서 먼저 한군(漢軍)들이 도망쳐 나와 일러바쳤다.
“한왕이 동쪽으로 돌아오려 합니다. 저희를 보내 잔도를 고치게 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장함에게는 의심이 남아 있었다. 잔도를 고치는 일을 맡은 장수가 번쾌란 소리를 듣고도 얼른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망쳐 나오는 군사가 점점 늘어가자 장함도 한왕이 다시 식 골짜기로 나오려 한다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도망쳐 나온 한군(漢軍)이 500명에 가깝고, 그들로부터 번쾌의 모진 다그침과 한왕(漢王)이 잔도 닦는 일을 재촉하기 위해 다시 보낸 군사들이 식(蝕) 골짜기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은 옹왕(雍王) 장함은 마침내 손을 썼다. 아우 장평을 불러 군사 3만을 딸려주며 말했다.
“너는 군사를 이끌고 두현(杜縣) 남쪽으로 내려가 식 골짜기 어귀를 막고 있거라. 한왕 유방이 잔도를 고쳐 그리로 나오더라도 우리 삼진(三秦)땅 안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곳은 골짜기가 좁고 양쪽의 지세가 험하니 우리 군사 한 사람이면 적군 백을 당할 수 있다. 비록 한군이 100만이 넘는다 해도 이 3만이면 넉넉할 것이다.”
그래놓고 자신도 다시 군사를 모아 만일에 대비했다. 옹(雍)땅을 비질하듯 장정들을 긁어내어 5만 대군을 폐구(廢丘)에 모아두고 언제든 움직일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한왕이 이끄는 군사들은 좁고 험한 고도현의 옛길을 소리 소문 없이 지나고 있었다.
고도현의 옛길 또한 적이 알고 막으려 들면 하나가 100명을 막아낼 수 있을 만큼 험한 산길이었다. 한신은 대군이 움직이기에 앞서 한 갈래 날랜 군사를 먼저 풀어 근처에 있는 나무꾼이나 사냥꾼들의 눈과 귀로부터 대군의 움직임을 가렸다. 그리고 정히 뜻 같지 못하면 그들을 죽여 입을 막음으로써 옹왕 장함의 군사들에게 한군의 움직임이 알려지는 걸 막았다.
그러나 정작 한군의 움직임이 끝내 적의 귀에 들어가지 않게 해준 것은 한왕 유방이 몇 달 관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거둔 인심이었다. 한신이 아무리 애를 써서 한군의 움직임을 숨기려 해도 워낙 많은 군사가 움직이는 것이라 그리 되지가 않았다. 고도현의 농부나 사냥꾼들 중에는 한군이 동쪽으로 밀고 들어오는 것을 아는 이들도 있었으나, 아무도 옹왕 장함의 군사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한군이 하루빨리 삼진으로 들어와 자신들을 구해주기만 기다렸다.
대산관(大散關)은 진나라 서남쪽 위수(渭水)가에 치우쳐 있기는 해도 원래부터 그렇게 만만하게 지나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특히 파촉이 진나라의 땅이 된 뒤부터는 교통의 요지로도 중시되어 관문이 두껍고 굳센 데다 적지 않은 군사가 머물며 지키고 있었다. 그런데도 땅에서 홀연히 솟아오르듯 서남에서 대군이 밀려와 관문을 짓두들기자 옹군(雍軍) 장졸들은 겁부터 먼저 먹었다.
“관문을 닫아 걸어라! 그리고 어서 날랜 파발마를 내어 도성에 위급을 알려라. 관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면서 기다리면 머지않아 폐구에서 우리 대왕의 구원병이 이를 것이다.”
대산관을 지키던 늙은 장수는 그렇게 외치며 한군에 맞서 보았으나, 워낙 갑작스러운 일인 데다 군세가 너무 달렸다. 겨우 이틀을 버텼으나 보낸 파발이 폐구에 도착하게도 전에 한군에 떨어지고 말았다.
“여기서 하루를 쉬고 진창(陳倉)으로 간다. 먼저 진창부터 차지한 뒤에 폐구를 치고 옹왕 장함을 사로잡을 것이다.”
어렵지 않게 대산관을 떨어뜨린 한신이 미리 작정하고 있었던 듯 그렇게 영을 내렸다. 진창은 대산관에서 서북쪽으로 몇 십 리 치우쳐 있는 곳으로 옹왕 장함의 도읍인 폐구와는 거리가 있었다. 걱정이 된 한왕이 슬며시 한신에게 물어보았다.
“뱀을 잡으려면 그 머리부터 쳐야 하지 않겠소? 우리가 길을 도는 사이에 폐구(廢丘)의 장함이 우리를 맞을 채비를 굳건히 할까 두렵구려.”
“그렇지 않습니다. 진창(陳倉)은 진나라 때부터 곡창(穀倉) 노릇을 해온 곳으로 함양 백만 인구가 먹을 곡식이 모두 거기에 갈무리 돼 있었습니다. 지금은 장함이 도읍으로 삼고 있는 폐구의 곡창으로 쓰고 있으니, 먼저 그곳부터 손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아군은 옹(雍)땅을 모두 평정할 때까지 군량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군민(軍民)을 먹일 곡식을 모두 잃은 폐구의 장함은 크게 낙담할 뿐만 아니라 성안에서 오래 버티지도 못할 것입니다.”
한신이 그렇게 말하여 한왕의 걱정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때는 궂은비가 잦은 초가을 8월이었다. 대산관(大散關)에서 하룻밤을 쉬는 사이에 내리기 시작한 가을비는 다음날 날이 밝아도 그칠 줄 몰랐다.
한군(漢軍)은 하는 수 없이 하루를 대산관에서 더 쉬었으나 가을비는 그 다음 날도 멎지 않았다. 한신은 행군을 더 미룰 수 없어 빗속에 대군을 출발시켰다. 그런데 진창으로 가는 길이 또 말이 아니었다. 위수 강변의 황토는 이틀이나 내린 비로 곤죽이 되어 길을 덮고 있었다. 짐을 실은 수레바퀴는 길바닥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말조차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려웠다. 바닥이 질어 곤죽이 된 길을 진창길이라 하는데 속설(俗說)로는 그 말이 바로 그때 한군이 진창으로 가면서 지나야했던 그 길에서 나왔다고 한다.
한편 옹왕 장함은 갑자기 달려온 군사로부터 한군이 대산관을 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몹시 놀랐다.
“아니 잔도(棧道)를 통해 오고 있다던 한군이 어찌하여 대산관을 넘고 있다는 말이냐? 혹시 파촉(巴蜀)에서 밀고 드는 도둑 떼를 잘못 본 거 아니야?”
그러면서 두 번 세 번 그 군사에게 캐물었으나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내 늙은 도적에게 속았구나! 파촉 한중에서 관중으로 들어오는 길이 어찌 잔도뿐이겠는가. 손발 같은 번쾌까지 식(蝕) 골짜기로 보내 수선을 떠는 바람에 깜박 우리의 눈과 귀가 가려지고 말았다. 대군이 아무 손실 없이 옛길을 지나 벌써 대산관에 이르렀다니 큰일이다….”
비로소 일이 엄중함을 깨달은 장함은 그렇게 한탄하며 앞뒤 없는 놀라움에서 깨어났다. 달리 믿을 만한 장수도 없어 스스로 적을 맞을 채비에 들어갔다.
진나라 땅에서 나고 자라 누구보다 그 지세를 잘 아는 장함이었다. 거기다가 기세 좋은 진승의 반란군을 희수(戱水)가의 한 싸움으로 기세를 꺾었을 뿐만 아니라, 함곡관을 나온 지 두 달도 안돼 그 수괴 진승까지 목 벤 진나라 제일의 명장이었다. 항왕에게 져서 항복한 뒤로 그 날카로움은 다소 무디어졌으나 아직도 옛 명장의 안목은 남아 있었다.
“우리가 성안 군사를 모두 이끌고 밤낮 없이 달려간다 해도 이미 대산관을 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이목을 온전히 식 골짜기로 끌어 모아 놓고 몰래 고도현을 통해 나올 정도의 지략을 가진 장수가 이끌고 있다면, 오랫동안 싸움 없이 보낸 대산관의 이름 없는 장수와 얼마 안 되는 군사가 무슨 수로 당해내겠느냐? 차분히 싸울 채비를 갖춰 진창으로 가자. 대군을 이끌고 진창성에 의지해 싸운다면 반드시 한군을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
장졸들에게 그렇게 영을 내리고 스스로 앞장서 진창으로 달려갔다.
옹왕 장함은 폐구를 떠나기에 앞서 다시 날랜 말을 탄 군사를 보내 아우 장평(章平)에게도 전갈을 보냈다.
‘한왕 유방이 고도현의 옛길을 따라 대산관을 넘었다. 대산관은 이미 지키기에 글렀을 뿐만 아니라 폐구의 군민을 먹일 곡식을 쌓아둔 진창(陳倉)까지 위태롭게 되었다. 일이 급해 내가 먼저 진창으로 가니, 너는 전군을 수습하는 대로 두현(杜縣)으로 해서 진창으로 나와 내 뒤를 받쳐주도록 하라.’
그런 장함의 살핌은 밝았으나 그 못지않은 게 한군(漢軍)의 빠르고 날카로운 기세였다. 진창에 이른 장함의 옹군(雍軍)이 미처 농성할 채비를 갖추기도 전에 한군이 밀려들어 진창을 에워싸려 했다. 대산관이 며칠은 버텨줄 걸로 믿은 데다, 궂은 가을 날씨를 믿어 여유를 부리던 옹군은 몹시 놀라 싸워보지도 않고 겁부터 먹었다.
‘아니 되겠다. 여기서 적의 기세를 한 번 꺾어 두지 못하면 진창성이 아무리 굳고 높아도 소용이 없다. 농성이 아니라 진창성에 갇혀 있는 사이에 옹(雍)땅을 모두 잃고 만다. 차라리 성 밖으로 나가 벌판에서 싸워보고 아니 되면 물러나 뒷날을 도모하는 것이 낫겠다. 게다가 적군은 먼 길을 온데다 대산관에서 한바탕 싸움을 치러 지친 군사들이다. 머릿수도 우리가 적지 않으니 적이 진세를 정비하기 전에 정면으로 나가 맞서 보자!’
장함이 그렇게 마음먹고 대군을 몰아 성을 나갔다.
깃발과 군세를 보고 옹왕 장함이 이른 것을 알아차린 한신이 가만히 장수들에게 말했다.
“옹왕 장함이 직접 나서 기세로 우리에게 맞설 작정인 듯하오. 장함은 집중된 힘으로 번개같이 치고 들어 싸움에서 여러 번 재미를 보았는데 이번에도 그럴 작정인 듯하오. 여러 장수들은 앞뒤 돌아볼 것 없이 저기 저 수자기(帥字旗)가 걸린 곳으로 돌진하여 여지없이 짓밟아 버리시오!”
그렇게 되자 싸움은 뜻밖에도 성밖 벌판에서 기세로 몰아붙이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장함에게 이롭기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다같이 왕이라고는 하나 장함은 항우 덕분에 갑자기 옹왕으로 세워져 왕으로서의 기반이 든든하지 못했다. 장수들의 층이 얇고 따르는 군사들도 대개는 옹왕이 되어 새로 뽑은 군사들이었다.
그런 옹왕에 비해 한왕 유방은 벌써 여러 해 독자적인 세력으로 자신을 키워왔다. 장수 층은 장함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두터웠고, 군사들도 대개가 오래 한왕을 따라다니며 고락을 함께한 자들이었다. 머릿수도 모자라지 않은데다 한 번 싸움에 이긴 기세가 있어 먼 길을 온 고단함쯤은 덮고도 남았다.
그런 한(漢)과 옹(雍) 양군이 맞붙자 처음에는 벼락 치는 듯한 격렬함이 있었으나, 그리 오래잖아 승패가 갈리었다. 장졸 모두 한군에 비해 질이 떨어지는 옹군 쪽이 차츰 밀리기 시작했다. 장함이 옛날의 관록을 되살려 전군을 거세게 몰아붙였으나 이미 기운 전세를 되돌려 놓을 수는 없었다.
“물러나라! 전군은 호치현(好치縣)으로 물러나 장평의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린 뒤에 다시 한군과 싸워 결판을 내자.”
장함이 마침내 그렇게 명을 내리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기세가 오른 한군은 달아나는 장함의 군사들을 쫓아가며 마구 죽였다. 그런데 한 30리나 뒤쫓았을까, 먼저 정탐을 나가 있던 군사들이 급히 돌아와 한신에게 알렸다.
“호치(好치) 동쪽에서 엄청난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폐구에서 장함을 구하러 달려온 옹군(雍軍)인 듯합니다.”
한왕의 장수들 중에는 가장 오래 항왕 쪽에 남아 있다 와서 장함에 대해서도 남보다 아는 것이 많은 한신이 가만히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장함에게는 장평이라는 용맹스러운 아우가 있었는데 이는 필시 장평이 이끄는 대군일 것이다. 아마도 식 골짜기를 막고 있다가 형의 위급을 듣고 달려온 것일 터인즉, 그 세력이 만만치 않을 것이니 더는 급하게 적을 쫓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는 쇠를 두드려 군사를 거두게 하였다.
한편 싸움에 져서 형편없이 쫓기던 장함은 아우 장평이 대군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말에 다시 기운이 솟았다. 게다가 한군의 추격까지 멎자 한숨을 돌리며 쫓겨 오는 군사를 거두어 호치 서쪽에 진채를 벌이게 했다.
“이곳 호치도 싸워볼 만한 지형이다. 장평이 오는 걸 알고 적이 쫓기를 그쳤으니 여기서 터를 잡고 기다렸다가 맞받아치도록 하자.”
그리고 장평에게는 따로 사람을 보내 호치 동쪽에 진채를 내리게 했다. 무턱대고 전군을 합치느니보다는 동서(東西)로 나누어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세(掎角之勢)를 이루도록 한 것이었다.
그때 한신은 싸움에 이긴 장졸들에게 고기와 밥을 배불리 먹이고 쉬게 하는 한편 정탐하는 군사를 풀어 옹왕 장함의 움직임을 살피게 했다. 그날 밤이 깊기 전에 정탐 나간 군사들이 돌아와 옹군의 움직임을 낱낱이 알려왔다. 한왕 유방을 모신 대장군의 막사에 장수들을 불러 모은 한신이 다시 명을 내렸다.
“옹왕 장함이 아우 장평의 구원에 힘입어 호치 동서에 진채를 벌이고, 서로 돕는 형세를 이루며 우리에게 맞서려 하고 있소. 장평이 맹장이고 군사도 3만이 늘었으나 크게 적을 두려워 할 것은 없소. 내일 아침 우리는 군사를 두 갈래로 쪼개 장함과 장평을 한꺼번에 잡을 것이오. 내일 새벽 조용하고 신속하게 양쪽을 동시에 들이쳐, 서로 돕고 의지할 틈을 주지 않으면 아침밥을 끓일 때쯤은 장함과 장평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리고는 바로 군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조참과 주발 두 분 장군에게는 장평을 맡기겠소. 각기 군사 만 명씩을 딸려줄 터이니, 어서 돌아가 떠날 채비를 하시오. 오늘밤 삼경 말발굽은 헝겊으로 싸고 군사들에게는 하무를 물린 뒤에 가만히 길을 돌아 호치 동쪽으로 옮겨가야 하오. 그리고 되도록이면 장평의 진채 가까이에 숨어 있다가, 서쪽에서 우리가 장함의 본대를 치며 지르는 함성이 들리면 두 분 장군은 한꺼번에 덮치도록 하시오. 반드시 장평을 사로잡지는 못해도 놀라 달아나도록 할 수는 있을 것이오.”
그렇게 조참과 주발을 떠나보낸 한신은 나머지 장수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장군들도 모두 돌아가 내일 새벽 전군을 들어 장함을 불시에 들이칠 수 있도록 채비하시오. 일찍 군사들을 재우고 사경(四更)이 되거든 깨워 날이 새기 전까지는 싸울 태세를 갖추어야 하오. 그리고 날이 새는 것을 군호(軍號) 삼아 적진으로 밀고 들어 단번에 형세를 결정지어야 하오. 이 한 싸움으로 옹(雍)땅을 평정하여야만 동쪽으로 나가 천하를 다툴 수가 있소. 삼진(三秦)이라고는 하나, 옹왕 장함만 사로잡으면 새왕(塞王) 사마흔이나 적왕(翟王) 동예는 그리 두려워할 게 없는 위인들이오.”
그동안 대장군으로서 한신을 믿게 된 장수들은 군소리 없이 그 명에 따랐다. 저마다 군막으로 돌아가 그 새벽의 기습 준비에 빈틈이 없도록 이끄는 군사들을 다잡았다.
이튿날 새벽이었다. 사경에 일어나 소리 없이 싸울 채비를 갖춘 한군은 전후좌우를 나눌 것도 없이 거센 물결처럼 장함의 진채를 덮쳐갔다. 워낙 많은 군사들이 한꺼번에 움직인 것이라 조심한다고 해도 이내 파수 보는 적병에게 들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군이 덮쳐오고 있는 낌새를 알아차린 옹군(雍軍) 망보기가 급히 그 일을 장함에게 알렸다. 아우 장평이 대군을 이끌고 온 게 반가워 잠시 마음을 놓고 있던 장함은 그 갑작스러운 전갈을 받자 깜짝 놀랐다. 누구보다 기습에 능한 장수답지 않게 허둥대며 장졸들을 깨우고 한군을 맞을 채비를 하게 했다.
하지만 새벽잠에서 깨어난 옹군 장졸들에게는 제대로 채비할 겨를이 없었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되는 대로 갑옷을 걸치고 병장기를 찾아 드는데, 벌써 한군의 선두가 진채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되자 싸움은 처음부터 승리가 한군 쪽으로 기울어진 것이 되었다.
“장평에게 사람을 보내 어서 군사를 움직이게 하라. 동쪽으로부터 적의 옆구리를 찔러 두 토막을 내고 우리와 합친 뒤에 함께 한왕을 사로잡자고 하여라.”
장함은 그렇게 명을 내리고 자신은 선두에 나서 장졸들의 기세를 돋우었다. 왕이 몸소 칼을 뽑아들고 진두에 선 모습은 볼만했으나 기울어진 전세를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한왕 유방과 대장군 한신도 앞장서 장졸들을 이끌고 있는 데다 한군은 이미 승세를 타고 있었다. 겁먹고 몰리는 옹군들을 북돋기는커녕 오히려 장함을 알아본 한군 장수들의 기세만 올려주고 말았다.
“저기 옹왕 장함이 있다. 장함을 사로잡아라!”
누군가의 고함소리에 이어 한군 장졸들이 모두 장함을 향해 몰려들었다.
옹왕 장함은 이끌고 있던 장수들을 모두 풀어 몰려오는 한군 장수들과 맞서게 하면서 어서 빨리 장평의 구원이 이르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헛된 바람이었다. 장함이 어렵게 한식경을 버티고 있는데 장평에게 보냈던 군사가 피투성이로 돌아와 말했다.
“장평 장군께서 구원을 오시기는 틀렸습니다. 장군도 이 새벽 우리처럼 한군의 기습을 받고 힘을 다해 버텼으나, 마침내 견디지 못하고 조금 전 호치(好치) 성안으로 피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그러잖아도 어렵게 싸움을 끌어오던 장함은 온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더는 견뎌내지 못하고 먼저 말머리를 돌리면서 소리쳤다.
“모두 물러서라. 과인은 폐구로 돌아가려 한다. 여러 장수들은 힘을 다해 패군을 수습하고 폐구로 돌아가 뒷날을 기약하자!”
옹왕 장함과 그 아우 장평이 이끄는 군사들이 길을 나누어 달아나자 뒤쫓는 한군(漢軍)도 절로 두 갈래로 나뉘었다. 조참과 주발이 이끄는 군사들은 그대로 장평을 뒤쫓아 호치(好치)성을 에워쌌고, 한신은 남은 장졸들과 더불어 장함을 뒤쫓아 동쪽으로 폐구(廢丘)성을 에워쌌다.
하지만 호치와 폐구 모두 옹(雍)나라의 염통과 간 같은 성이었다. 장함과 장평이 적지 않은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지키기만 하니 쉽게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특히 폐구는 옹나라의 도성으로 지난 몇 달 옹왕 장함이 마음먹고 성벽을 높이고 두텁게 한 터라 더욱 그랬다.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시일을 끌다가 항왕(項王)의 구원이라도 오게 되는 날이면 낭패가 아니겠소? 그때 성안에서 버티던 장함과 장평이 뛰쳐나오면, 우리는 등과 배로 강한 적을 맞는 꼴이 되어 갈 곳이 없어질 것이오.”
며칠이나 급하게 들이쳐도 호치와 폐구 모두 떨어지지 않자 한왕 유방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그러나 대장군 한신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항왕은 멀리 서초(西楚)에 자리 잡아 이곳의 위급을 아는데도 여러 날이 걸릴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를 물리칠 만한 구원병을 여기까지 보내는 일이겠습니까. 거기다가 관동(關東)에 풀어둔 간세들이 알려온 바에 따르면, 제(齊)나라의 재상 전영(田榮)은 항왕의 분봉(分封)에 크게 불만을 품고 기어이 일을 저질렀다 합니다. 항왕이 제왕(齊王)으로 보낸 전도(田都)와 자신이 제왕으로 세운 전불(田巿)을 모두 죽이고 스스로 제왕이 되어 항왕에게 맞선다 하니 항왕의 불같은 성미로 어찌 그냥 두고 보겠습니까? 신(臣)의 생각으로는 항왕이 관중으로 구원을 온다 해도 제나라를 먼저 평정한 다음의 일일 것입니다.”
그렇게 한왕을 안심시켰다. 한왕은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여전히 걱정스러운 눈길로 한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원병(援兵)은 항왕만 낼 수 있는 것도 아니잖소? 삼진(三秦)은 서로가 서로에게 이와 입술 같은 사이니, 가까이 있는 새왕(塞王) 사마흔이나 적왕(翟王) 동예도 구원병을 낼 수가 있소.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린 법(脣亡齒寒)이라, 그 둘이 힘을 합쳐 크게 구원병을 낸다면 그때는 또 어찌하겠소?”
“사마흔이나 동예는 그 사람됨이 둘 다 왕 노릇 하기에는 지나치게 살핌과 헤아림이 많습니다. 살핌과 헤아림이 지나치면 의혹과 망설임도 많아 결단이 더딘 법이니, 아직 평온한 제 땅을 두고 선뜻 옹왕 장함에게 원병을 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히려 지키기에만 급급해 제 땅에 웅크리고 있다가 우리 대군이 성문 앞에 이르러야만 맞으러 나설 위인들입니다.”
한신이 그렇게 받았으나 끝까지 한왕의 걱정을 몰라주지는 않았다. 잠시 말을 끊었다가 밝은 얼굴로 한왕을 마주보며 말했다.
“하나 이대로 대군을 호치, 폐구 두 성에 묶어놓을 수 없다는 대왕의 밝으신 헤아림은 옳습니다. 따로 계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게 어떤 계책이요?”
한신에게 이미 계책이 서 있는 듯해 한왕이 바로 물었다. 한신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신의 헤아림이 대왕의 뜻에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호치와 폐구를 뺀 나머지 옹(雍) 땅은 마치 머리 잃은 배암같이 되었습니다. 장함과 장평을 성안에 가두어둘 수 있는 군사만 남겨 호치와 폐구를 에워싸고 있게 하고 나머지 군사로는 옹 땅의 모든 성읍(城邑)과 관진(關津)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와 같은 한신의 말에 한왕 유방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과인의 뜻도 그러하였소. 다만 그리 많지 않은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는 꼴이 되어 뜻밖의 낭패가 있을까 두렵소.”
“그 일이라면 신이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습니다. 옹왕 장함은 전에 진나라 장수였을 적에 수십만 진나라 장정들을 이끌고 함곡관을 나간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장정들은 싸움터에서 죽거나 항왕이 신안(新安)에서 항병을 산 채 묻을 때 모두 땅에 묻혀 죽고, 저만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항왕의 고임을 받아 옹왕이 되었으니 관중에 있는 그 장정들의 부형이나 처자가 어찌 그를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거기다가 장함이 옹왕이 되어 이 땅을 다스린 지도 그리 오래지 않아 마음으로 따르는 군민(軍民)도 거의 없습니다. 아래위로 미워할 뿐, 그를 위해 싸워줄 사람이 없는데 우리에게 무슨 뜻밖의 낭패가 있겠습니까? 신의 소견으로는 장함과 장평을 호치와 폐구에 가두어두고 나머지 군사로 옹 땅을 평정하되, 먼저 진창 서북에 있는 군현(郡縣)을 차지한 다음 다시 폐구 동쪽으로 군사를 내어 함양까지의 성읍을 모두 거두어들이게 하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면 한 달도 안 돼 옹 땅은 모두 우리 한군의 깃발 아래 들게 될 것입니다.”
그제야 한왕이 환하게 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겠소. 장졸들을 부리는 일은 내 이미 대장군에게 모든 것을 맡겼으니 알아서 하시오.”
이에 한신은 역상(酈商)과 주가(周苛)에게 각기 군사 1만 명씩을 딸려 호치와 폐구를 에워싸고 있게 하고, 남은 장졸들을 풀어 먼저 호치 서쪽의 옹 땅을 평정하게 하였다.
낭중 번쾌는 군사 5000과 더불어 백수(白水) 북쪽으로 나아가 서현(西縣)과 옹현(雍縣)을 거둔 뒤 태성(4城)을 거쳐 다시 호치로 나오도록 하였고, 장군 조참은 5000 군사로 하변(下辯)과 고도(古道)의 땅을 아우른 뒤 옹현 태성을 거쳐 호치로 돌아오게 하였다. 또 장군 주발은 회덕(懷德) 괴리(槐里)를 거둔 뒤 다시 호치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중알자(中謁者) 관영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한왕과 대장군 한신 곁에 머물며 변화에 대응하게 하였다.
그렇게 배치를 마친 한신은 한왕과 더불어 호치 부근에 진채를 벌이고 중군(中軍)이 되어 머물렀다. 그런데 장수들이 떠난 지 열흘도 안돼 번쾌가 보낸 군사 하나가 달려와 한신에게 알렸다.
“번 낭중께서는 백수 북쪽에서 서현의 현승(縣丞)이 이끄는 대군을 무찔렀고, 옹현 남쪽에서는 옹왕이 기른 날랜 기병을 쳐부수었습니다. 이제 태현(斄縣)으로 가고 있는데, 그 성이 높고 성벽이 두터워 은근히 걱정하고 있습니다. 대장군께서 뒤를 받쳐 주셨으면 합니다.”
이에 한왕과 대장군 한신이 있는 한(漢) 중군은 태성으로 향했다. 그러나 태성에 이르러 보니 하변과 고도를 평정한 조참이 먼저 와 있었다. 거기다가 오래잖아 회덕과 괴리를 거둬들인 주발이 또한 태성으로 오니 한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세 갈래의 한군이 모두 모여든 데다 한왕과 한신까지 와서 보고 있으니 태성(4城)이 아무리 크고 굳다 해도 견뎌낼 수가 없었다. 다음날 번쾌가 큰칼을 휘두르며 앞장서 성벽을 기어오르고, 다른 장수들도 저마다 군사들을 휘몰아 성을 들이치자 태성은 하루도 배겨내지 못하고 떨어졌다.
보름도 안돼 옹(雍)나라의 서북을 모두 거둬들인 한신은 그 기세를 몰아 다시 호치로 돌아갔다. 호치(好畤)성 안에는 원래의 현군(縣軍) 3000명에 장평이 쫓겨들며 이끌고 온 군사 1만여명이 더 있었다. 합쳐 2만 가까운 군사가 지난번 관동(關東) 군사들이 왔을 때 싸움을 겪지 않아 손상을 입지 않은 성벽에 의지하니 태성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서북의 모든 성읍이 한군의 손에 들어간 뒤라 호치성의 기세는 전과 같지 못했다. 적군 가운데 외롭고 고단한 섬처럼 남아 있는 호치성의 처지를 알게 된 성 안 장졸들은 전보다 몇 배나 늘어난 한군이 다시 성을 에워싸자 겁부터 먹었다. 겁먹고 움츠러들기는 장평도 마찬가지였다. 마지못해 장졸들의 기세를 북돋우며 싸울 채비를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에움을 헤치고 달아날 길을 찾기에 바빴다.
그래도 한신은 적을 가볍게 보지 않았다. 전군을 들어 호치성을 들이치기 전날 밤 장수들을 불러놓고 당부했다.
“옛말에 이르기를, 궁한 도적은 급하게 쫓지 말라(窮寇莫追)고 했소. 지금 장평은 여러 날 호치성에 갇혀 지냈으나 성안에는 3만 군민이 함께 있소. 그들이 죽기로 싸운다면 우리가 성을 떨어뜨린다 해도 적지 않은 군사가 죽거나 다칠 것이오. 내일 힘을 다해 성을 들이치되 북문 쪽은 비워두어 저들이 달아날 길을 열어두시오!”
이튿날 한군이 호치성을 들이칠 때도 누구보다 두드러진 공을 세운 장수는 번쾌였다. 태성에서처럼 번쾌는 가장 먼저 성벽으로 뛰어올랐고, 성벽 한 모퉁이를 빼앗아 한군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때 앞을 가로 막는 옹군(雍軍) 가운데 현령(縣令)과 현승(縣丞) 한사람씩과 사졸 열한 명을 쳐 죽이고, 그 기세에 놀라 창칼을 내던지며 목숨을 비는 적병 스무 명을 포로로 잡았다. 나중 일이지만 번쾌는 그 공으로 낭중기장(郎中騎將)에 올랐다.
원래 장평을 호치성으로 몰아넣은 조참과 주발도 그날 싸움에서 남다른 공을 세웠다. 두 사람이 앞 다투어 성벽 위로 기어오르자 군사들도 바윗돌과 화살 비를 겁내지 않고 뒤를 따랐다. 특히 주발은 강한 활로 잇달아 적을 쏘아 죽이니 아무도 그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성루 높은 곳에서 행여나 하며 싸움 시늉을 내고 있던 장평은 그 같은 한군의 기세에 질려버렸다.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한군이 비워놓은 북문으로 한 목숨 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마음 같아서는 폐구에 있는 형 장함에게로 가고 싶었으나, 한군이 그쪽 길을 뒤덮고 있어 그리하지 못하고 멀리 길을 돌아 북지(北地)로 가서 숨었다.
“이제는 함양이다. 함양을 우려 뽑아 동쪽까지 깨끗이 쓸어버린 뒤에 다시 힘을 합쳐 폐구를 들이치고 장함을 사로잡자!”
한신이 그렇게 소리치며 이번에는 장졸들을 함양으로 몰았다. 장함이 폐구를 도읍으로 삼는 바람에 옹 땅 한구석으로 밀려나기는 했으나, 그래도 함양은 한때 진나라가 도읍하여 천하를 아우른 땅이었다. 지키는 군사가 많을 뿐만 아니라, 그 장수도 만만치 않았다.
그때 옹(雍)의 장수로서 함양을 지키던 것은 전에 진나라 장수였던 조분(趙賁)과 내사(內史·수도를 다스리는 행정관, 특별시장 격)인 보(保)였다. 둘 다 유민(流民) 가운데서 몸을 일으킨 어정뱅이가 아니라 한창 때의 진나라에서 제대로 배우고 익힌 장수들이었다. 한왕 유방이 대군을 이끌고 몰려온다는 말을 듣자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의논했다.
“우리 대왕께서는 폐구성에 갇히시고 장평 장군은 호치성에서 다시 패해 북지(北地)로 달아났다 하오. 양쪽 모두 한 싸움에 지고 쫓겨 가서 숨은 터라 당분간 어디서도 우리에게 구원병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런데도 적은 대군을 한군데 모아 서쪽으로부터 성을 하나씩 우려 빼며 오고 있으니, 어찌했으면 좋겠소?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도 한군(漢軍) 사이에 외로운 섬처럼 남아 성이 떨어질 날만 기다리게 될 것이오.”
먼저 내사 보가 조분을 보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조분의 얼굴도 밝지 못했다.
“거기다가 팽성에 계신 패왕께는 아직 기별조차 제대로 가지 못한 듯하니, 가까운 날에 서초(西楚)의 구원을 기대하기도 어렵게 되었소. 새왕(塞王)과 적왕(翟王)이 멀지 않게 계시나 위태로운 자기네 나라를 두고 여기까지 원병을 보낼지는 의문이오.”
그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내사 보가 한참이나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가 결연히 말했다.
“허나 그렇다고 싸워보지도 않고 함양을 내줄 수는 없는 일이오. 원병이 오든 아니 오든 먼저 새왕과 적왕에게 구원을 빌어봅시다. 그리고 팽성의 패왕께도 빠른 파발마를 보내 이 위급을 알려야 하오. 그런 다음 군량을 긁어모으고 성벽을 고쳐 성안 군민(軍民)들과 함께 죽기로 싸운다면 오히려 살길이 있을 것이오!”
그러자 조분도 한때의 맹장답게 기운을 냈다. 내사 보의 말을 받아 주먹까지 불끈 쥐어 보이며 말했다.
“여기저기서 긁어모으면 우리에게도 아직 2만이 넘는 군사가 있소. 그 대군을 성안에 묶어놓고 적이 에워싸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둘로 나누어 변화에 응하게 하는 게 어떻겠소? 내가 절반을 이끌고 나가 적의 기세를 꺾어볼 테니 장군은 남은 군사들과 백성들을 이끌고 성을 지켜주시오. 그리하여 안팎으로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어 싸우다가 정히 뜻과 같지 못하면 그때는 모두 성안으로 돌아와 함께 싸웁시다. 다행히도 패왕의 구원이 너무 늦지 않게 이르면 모두 살겠거니와 그렇지 못하면 성벽을 베개 삼아 죽을 뿐이오!”
“그 말씀을 들으니 절로 근심이 씻기는 듯하오. 만약 장군께서 그리 해주신다면 설령 적이 10만 대군으로 휩쓸어 온들 어떻게 우리 함양을 얻겠소? 자칫하면 갑옷 한 조각 찾지 못하고 한중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이오.”
내사 보가 다시 그렇게 기세를 올렸다. 조분이 제법 상세한 계책까지 밝혔다.
“나는 가려 뽑은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성을 나가 미현(郿縣) 쪽으로 가겠소. 거기서 숨어 기다리다가 불시에 적의 선두를 들이쳐 그 기세를 꺾고 괴리(槐里) 쯤에서 또 한 번 타격을 준 뒤에 유중(柳中)에 진채를 내리겠소. 그곳에서 위수(渭水)를 뒤로하고 성안의 장군과 호응하며 버틴다면 적이 아무리 대군이라 해도 쉽게 함양을 떨어뜨리지는 못할 것이외다.”
유중은 세류(細柳)라고도 하며 함양 서남쪽 30리 되는 곳에 위수를 등지고 있는 언덕 위의 마을이다. 함양성과 안팎으로 손발을 맞춰가며 진세를 펼쳐볼 만한 땅이었다.
이에 조분은 1만 군사를 이끌고 함양성을 나가 미현(郿縣)으로 가고, 내사 보는 성안에 남아 군민(軍民)을 단속하며 농성할 차비를 차렸다. 얼른 보아 조분과 보의 계책은 그럴싸했으나 시운(時運)과 민심이 그들을 돕지 않았다.
가만히 미현에 이른 조분은 한군(漢軍)이 올 만한 길목을 골라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기다렸다. 그러나 옹왕 장함을 미워하던 그 인근 농민이 한군의 선두인 번쾌에게 그 일을 알렸다. 3000 군사를 이끌고 앞장서 오던 번쾌가 군사들을 멈추고 말했다.
“중군(中軍) 선두인 조참 주발 두 분 장군에게 전하라. 행군을 두 배로 빠르게 하여 우리와 서로 깃발을 알아볼 수 있는 거리를 유지케 하라 이르라. 우리가 매복을 만나면 바로 이어 밀고들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조참과 주발의 군사가 바짝 뒤따라오기를 기다려 다시 군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번쾌의 행군은 두어 식경(食頃)이나 늦어졌지만, 전과는 반대로 부근의 민심은 그 일을 전혀 조분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조분이 보기에는 한군의 선봉이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이 쳐둔 그물 속으로 뛰어드는 것만 같았다.
“쳐라!”
한군이 어지간히 걸려들었다 싶자 조분이 기세 좋게 명을 내렸다. 골짜기며 숲 속에 숨어있던 1만 옹병(雍兵)이 벌떼처럼 일어나 번쾌가 이끈 3000군을 에워싸고 들이쳤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매복에 걸린 한군의 태도였다.
“놀랄 것 없다. 겁내지 말라! 우리 대군이 뒤따라온다.”
그렇게 외치며 큰칼을 휘둘러 적을 맞받아치는 번쾌를 따라 군사들도 병장기를 들어 맞서는데 놀라거나 겁먹기는커녕 기다렸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조분도 어제오늘만 장수노릇을 한 게 아니라 이내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거꾸로 걸려든 듯한 느낌에 군사를 거두려는데 함성과 함께 조참과 주발이 이끈 한군이 몰려들었다.
“어서 물러나라. 이미 이른 대로 괴리(槐里)로 간다. 거기서 군사를 정비해 다시 한 번 한군의 기세를 꺾고 유중(柳中)으로 가자.”
조분의 뜻은 그리하여 유중에 진채를 벌이고 함양성안과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겠다는 것이었으나 뜻과 같지 못했다. 대쪽을 쪼개는 듯한 기세로 밀고 드는 한군은 괴리에서도 조분에게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이번에는 번쾌와 주발이 한 덩이가 되어 미현에서 이미 반쯤 골병든 조분의 군사들을 짓두들겼다. 조분이 견디지 못하고 유중으로 달아났으나, 그때는 이미 진세를 벌이고 자시고 할 만한 군사가 남아있지 않았다. 겨우 몇 천 명 남은 군사로 진채를 얽는 시늉만 내다가 저만치 한군이 오는 걸 보자마자 진채를 거두어 함양성안으로 달아났다.
1만이 넘는 군사를 이끌고 기세 좋게 성을 나갔던 조분이 3000명도 안 되는 패군을 이끌고 돌아오자 함양성안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겉으로는 군량을 거둬들인다, 성가퀴에 통나무와 바윗돌을 쌓아놓는다, 부산을 떨었으나 속으로는 아래위 가릴 것 없이 두려워 떨었다. 한신은 서둘지 않았다. 장수들을 풀어 비로 쓸 듯 주변 고을들을 모두 거두어들인 뒤에야 5만 대군을 풀어 함양을 에워쌌다.
함양 성안에 갇힌 조분(趙賁)과 내사(內史) 보(保)는 팽성에 거듭 사람을 보내 위급을 알리게 하는 한편 성안 군민(軍民)을 다잡아 버텨보려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한군의 움직임이었다. 몇 겹으로 굳게 성을 에워싸고 있을 뿐 사흘이 지나도 화살 한대 쏘아오지 않았다.
그런 한신을 이상하게 여긴 것은 성안의 조분과 내사 보뿐만이 아니었다. 한왕 유방도 하루 이틀은 한신이 하는 대로 보고만 있었으나 사흘이 되자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옹왕 장함이 아직 폐구에 그대로 버티고 있는데 대장군은 어찌하여 이 함양에서 날을 끌고 있으시오?”
그러자 한신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가장 귀한 것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저는 지금 군사 한명 잃지 않고 함양성을 얻고자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조분이나 내사 보는 호락호락 항복할 위인들이 아니잖소? 쓸데없이 여기서 머뭇거리다가 폐구의 일을 그르치면 실로 난감하지 않겠소?”
“대왕께서는 벌써 잊으셨습니까? 처음 패현(沛縣)이 어떻게 대왕을 맞았습니까?”
그 물음에 비로소 한왕은 한신이 기다리는 게 무엇인지 알았으나, 아무래도 될성부르지 않게 보이는지 여전히 밝지 못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누가 성안에서 조분과 내사 보의 목이라도 베어 우리에게 바친단 말이오?”
“기다려 보십시오. 오늘 밤을 넘기지 않을 것입니다.”
한신이 무얼 믿는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자 한왕도 더는 따져 묻지 않았으나 별로 한신의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삼경 무렵 하여 성안에서 불길과 함성이 일더니 갑자기 서문 성루(城樓)가 횃불로 환해졌다. 한왕과 한신이 머무는 진채 쪽이었다. 한왕과 한신이 성루 쪽으로 다가가 바라보자 한 장수가 난간으로 나와 소리쳤다.
“나는 초나라에서 기장(騎將) 노릇을 여마동(呂馬童)이요. 한왕께서는 어디 계시오? 드릴 말씀이 있소!”
“나는 한나라 대장군 한신이다. 내가 대왕께 아뢸 테니 무엇이든 내게 말하라.”
여마동을 아는 한신이 한왕을 대신해 나서며 그렇게 받았다. 한왕이 너무 가까이서 적 앞에 드러나는 것이 걱정된 듯했다. 그러자 여마동이 무엇인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문루(門樓)아래 던지며 소리쳤다.
“여기 조분과 내사 보의 목이 있습니다. 이들을 아는 이들에게 물어보시고 틀림없으면 저희들이 열어둔 성문으로 대왕과 함께 드십시오.”
한신이 문득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장군이라면 내가 아오. 나는 바로 패왕의 군막에서 집극랑(執戟郎)으로 있던 바로 그 한신이오! 장군은 초나라 장수들 중에서도 대세를 보는 눈이 밝고 일의 기미를 꿰뚫어 볼 줄 아는 분이셨소. 나는 장군의 항복을 믿소.”
그리고는 바로 성안으로 군사를 몰고 들어갈 기세였다.
“어두운 밤중에 어찌 적장의 말 한마디만 믿고 성안으로 대군을 몰아넣는단 말이오? 저들 목이 정말로 조분과 내사 보의 것인지 알아본 뒤에 성안으로 들어가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한왕이 그래도 걱정되는 듯 그렇게 한신을 일깨웠다. 한신이 마지못해 조분과 내사 보의 얼굴을 아는 군사들을 불러 여마동이 던진 목들을 보였다. 둘 모두 여마동의 말 대로였다.
“대장군은 어떻게 성안에 여마동이 있으며, 또 그가 조분과 내사 보를 죽이고 항복할 줄 알았소?”
나중에 함양 성 안으로 든 뒤 한왕이 은근히 감탄하는 눈길로 한신을 보며 물었다. 한신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안에 여마동이 있는 것은 몰랐으나 이 같은 변고가 있을 줄은 짐작하였습니다. 항왕은 의심이 많아 삼진(三秦)을 옹왕 새왕 적왕에게 나누어 맡기면서도 따로 초나라 출신인 장수를 남겨 그들을 감시하게 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함양은 그대로 머물러 도읍 삼으라고 권한 한생(韓生)을 삶아 죽인 뒤로 항왕도 중히 여겨 특히 믿는 장수를 남겼으리라 여겼습니다. 이는 한 몸에 두 머리를 달아놓은 꼴이니 위급을 당해 어찌 온당하게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찌 옹왕의 장수인 조분과 내사 보는 죽기로 싸우고, 항왕이 남긴 장수는 항복을 했소?”
“조분이나 내사 보는 항복을 가장 욕되게 생각하는 진나라의 가르침 아래 자란 사람들이면서도 이미 한번 항왕에게 항복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다시 대왕께 항복하여 욕스러움을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함양은 고향땅이나 진배없는데, 겨우 항왕에게 얻어둔 것을 대왕께 항복하여 또다시 잃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에 비해 여마동은 초나라 장수로 이 땅에 매달려야 할 연고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항왕과 마찬가지로 같은 초나라 장수였던 대왕을 아직은 그리 멀게 여기지 않을 터이니 목숨 걸고 함양성을 지켜야 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한신의 그 같은 말에 비로소 한왕은 머리를 끄덕였다.
함양을 떨어뜨린 한왕과 한신은 다시 대군을 이끌고 폐구(廢丘)로 갔다. 역상(酈商)과 주가(周苛)는 그때까지도 탈 없이 옹왕 장함을 폐구 성안에 가둬놓고 있었다.
역상과 주가가 이끌고 있던 2만에다 대장군 한신이 이끈 5만 장졸이 보태지자 폐구성 밖은 온통 한군(漢軍)으로 뒤덮였다. 대군을 들어 성을 치기 전에 한신이 한왕에게 말하였다.
“성을 치는 데 반드시 이 많은 대군이 모두 쓰이지는 않습니다. 역상과 주가는 그 동안 이 폐구성을 에워싸고 있었으니, 이번에는 그들을 보내 아직도 다 거두어들이지 못한 옹 서북(西北)의 땅을 마저 거두어들이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폐구성을 우려 빼는 데는 우리가 이끌고 온 5만으로도 넉넉합니다.”
“정히 대장군의 뜻이 그러하다면 뜻대로 하시오.”
한왕이 다시 모든 걸 한신에게 맡겼다. 그러자 한신은 한왕이 해야 할 바를 일러주었다.
“역상((酈商)을 농서도위(隴西都尉)로 삼고 주가(周苛)와 함께 서북으로 보내시어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모두 거둬들이게 하십시오. 특히 북지에는 옹왕 장함의 아우 장평이 둥지를 틀고 있는 점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한왕도 거들었다.
“역상을 농서도위로 올린다면 주가도 마땅히 벼슬을 올려줘야 하지 않겠소? 주가는 지금까지 내사(內史)로 이 폐구성을 에워싸고 있었으나, 이제 역상과 함께 떠나는 마당이니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는 게 어떻겠소?”
그리고는 그날로 역상과 주가를 불러들여 각기 새 벼슬과 봉호를 내린 뒤 서북을 평정하러 보냈다. 한신은 성안의 장함이 보란 듯이나 역상과 주가에게 군사를 갈라주어 떠나보내고 다음날로 폐구성을 치게 했다.
폐구성은 옹왕이 된 장함이 도읍을 삼을 때 성벽을 높이고 허술한 곳을 고치게 하여 옹(雍) 땅에서 가장 굳고 든든한 성이 되어 있었다. 거기다가 농성의 주력이 되는 것은 오래 장함을 따라다니며 많은 싸움을 겪는 동안에 사납고 날래진 군사들이었다. 그들이 장함과 함께 성안의 군민을 다잡아 죽기로 싸우니, 거기까지는 자리를 말듯 밀고 온 한군의 기세도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한군의 맹장들이 저마다 앞 다투어 성벽을 기어오르고, 5만 군사가 화살비와 바위 우박을 무릅쓰고 그 뒤를 따랐으나 성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닷새가 지나도 성은 떨어지지 않고 장졸만 상하자 한왕 유방이 다시 걱정이 되는지 가만히 한신을 불러 물었다.
“우리가 대군을 이끌고 한중을 떠난 지 벌써 한 달이 넘었는데 아직 옹 땅도 온전히 평정하지 못했으니 걱정이오. 이곳에서 머뭇거리다 겨울이 깊어져 삼진에서 발이 묶이기라도 하는 날이면 관동으로 나가보지도 못하고 항왕의 반격을 받게 될 것이니 이를 어찌하면 좋겠소?”
“늦어도 정월까지는 관(關)을 나가 동쪽으로 갈 것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우리가 겨울이라 군사를 움직이기 어려우면 적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항왕이 방심하고 있을 때 우리가 몰래 군사를 움직이면 관을 넘기가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며칠만 더 말미를 주십시오.”
한신이 그렇게 자신 있게 말했으나, 곧 마음이 편하지는 않은 듯했다. 그날 하루 싸움을 쉬게 한 뒤 장졸 몇 명만 거느리고 진채를 나갔다.
그날 저물 무렵 해서야 진채로 돌아온 한신은 곧바로 한왕의 군막을 찾았다.
“대장군의 낯빛을 보니 무슨 좋은 일이 있는 듯하구려. 그래 낮에 나가 무얼 하셨소?”
한왕이 한신의 표정을 살피며 그렇게 물었다. 한신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은 낮에 폐구 주변 고을을 돌며 지세를 살피고 촌로에게 물어 지리(地利)로 이 성을 떨어뜨릴 방책을 알아냈습니다. 더는 무리하게 장졸을 상하지 않고 장함을 사로잡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방책이 무엇이오?”
한왕이 반가워하며 물었다.
“수공(水攻)입니다. 이곳 폐구는 위수(渭水)가에 자리 잡은 성으로서 상류로 20리만 가면 두 갈래 물길이 합쳐지는 곳이 있습니다. 그 위 두 물줄기에는 좁은 계곡이 많아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많은 물을 가둘 수 있는데다, 마침 가을비로 강물까지 불어있으니 수공을 한번 펼쳐볼 만합니다. 먼저 군사들을 그리로 보내어 두 물줄기를 막고, 이곳의 위수 물길을 폐구성 안으로 돌리게 한 뒤에 한꺼번에 터뜨리면 폐구성은 함빡 물에 잠기고 말 것입니다. 그리되면 우리는 배와 뗏목을 풀어 물에 빠진 장함을 건져 올리기만 하면 됩니다.”
한신의 그와 같은 대답에 한왕 유방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한신은 곧 장수들을 자신의 군막에 불러 모으고 영을 내렸다.
“장군 번쾌와 조참은 군령을 받도록 하시오. 번 장군은 군사 3000을 이끌고 폐구 서쪽 30리 되는 곳으로 가서 위수 본류의 흐름을 막으시오. 어귀 좁은 계곡을 골라 흙모래를 담은 가마니와 자루로 둑을 쌓으면 이틀 안으로 많은 물을 가둘 수 있을 것이오. 조 장군은 또 다른 군사 3000을 이끌고 폐구 서쪽 20리 되는 곳에서 위수로 흘러드는 지류를 막으시오. 번 장군과 같이 물을 가두되, 이틀 뒤 정오에는 양쪽이 한꺼번에 둑을 터뜨려 폐구를 쓸어버릴 수 있어야 하오.”
그리고 다른 장수들에게도 각기 할 일을 일러 주었다.
“장군들은 이제부터 대군을 풀어 위수를 끊고, 크고 넓은도랑을 파서 그 물길을 폐구성 안으로 끌어들이도록 하시오. 또 모든 장졸들에게 큰 모래주머니 하나씩을 만들어 지니게 했다가, 이틀 뒤 날이 새거든 그것들을 폐구 성안으로 돌려진 위수의 물길 동편에 쌓아 많은 물이 일시에 성을 휩쓸도록 하시오. 그밖에 오월(吳越)에서 와 물질에 능숙한 장졸들은 배와 뗏목을 마련하고 기다리다가 때가 오면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적병을 건져 올릴 수 있도록 해주시오.”
하지만 한편으로는 관영과 하후영, 주발에게는 기병(騎兵)과 전거(戰車), 그리고 잘 조련된 보갑(步甲)을 거느리고 성안의 돌발적인 반격에 대비하게 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명을 받고 떠나자 한신이 다시 한왕을 찾아보고 말했다.
“이번에 폐구성이 떨어지고 옹왕 장함이 우리에게 사로잡히면 항왕의 귀에도 그 말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대왕의 군사가 함곡관이나 무관을 넘으면 항왕은 놀라 대왕을 돌아보며 대왕을 억누를 방도를 찾게 될 것입니다. 그때 항왕에게는 패현에 있는 태공(太公) 내외분과 왕후마마, 그리고 두 분 금지옥엽이 대왕을 얽어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인질이 될 것입니다. 이제 그분들을 안전한 곳으로 모셔야할 때가 된 듯합니다.”
하지만 한왕은 느긋하기만 했다.
“나를 따라 싸움터를 떠도는 장졸들 중에 가솔들까지 돌볼 틈이 있는 이가 몇이나 되겠소? 더구나 아직 장함을 이기지도 못한 터에 왕인 내가 먼저 가솔들부터 챙긴다면 누가 바로 보겠소? 그 일은 폐구성을 떨어뜨리고 장함을 사로잡은 뒤에 다시 의논해도 그리 늦지 않을 것이오.”
그러면서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에 한신도 더는 우기지 못하고 폐구성을 수공(水攻)하는 일에만 힘을 쏟았다.
이틀이 지났다. 번쾌와 조참이 서쪽으로 위수(渭水)를 거슬러 올라간 뒤로 줄어들기 시작한 폐구 성밖의 물줄기는 그날 아침이 되자 원래의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들었다. 번쾌와 조참이 상류의 두 물줄기를 막아 많은 물을 가두어두었다는 뜻이었다.
폐구를 에워싸고 있으면서 위수의 물줄기를 끊어 폐구성의 해자(垓字)로 물길을 끌어대 놓고 있던 나머지 한군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마련해둔 수만 개의 모래주머니로 위수의 흐름을 끊고 있는 둑을 높이면서, 아울러 해자로 이어지는 물길 동쪽도 높였다.
한편 폐구 성안에 갇혀있던 옹왕(雍王) 장함은 한군이 갑자기 공성을 멈추자 슬며시 의심이 났다. 하루를 기다렸다가 성루 높은 곳으로 올라가 세밀하게 한군의 진채 쪽을 살폈다. 놀랍게도 한군이 위수를 끊어 성쪽으로 물길을 돌리고 있었다. 거기다가 다음날부터 위수 물이 차츰 줄어들자 장함도 한군의 계책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장함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성을 나가서 싸워봤자 두 곱절이 넘는 한나라 대군이 쳐둔 그물 속으로 뛰어드는 격이요, 그렇다고 에움을 헤치고 달아날 길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새왕(塞王) 사마흔과 적왕(翟王) 동예에게 올 것 같지도 않은 원병을 다시 재촉하는 한편 나름대로 수공에 대비했다. 성벽이 허술한 곳을 두텁게 쌓아 올리고, 군량을 성안 높은 곳으로 옮겨 놓아 물에 잠기는 것이나 면하게 하는 정도였다.
(강물을 끊어 성을 잠기게 하겠다는 한군의 계책이 무리한 것일 수도 있다. 지금은 가을도 늦은 9월이 아니냐. 수공(水攻)을 펼치기에는 수량(水量)이 너무 적을 뿐만 아니라 군사들을 물길 막는 일로 부리기에 너무 날이 춥다. 가을비가 왔다 하나 벌써 며칠 전이니,위수의 물이 줄어든 것도 절로 그리 된 것 일 뿐 사람의 힘으로 물을 가둔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한군의 공격이 멈춘 지 사흘 째 되는 날도 장함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성벽에 올라 바깥의 변화만 살폈다. 그런데 그날은 모든 게 심상치 않았다. 위수 물이 절반으로 줄어있을 뿐만 아니라 성벽 밖 해자로 이어지는 물길 동쪽으로는 모래주머니가 성벽높이로 쌓아올려지고 있었다.
(아무리 위수를 끊어 막았다 하나 설마 폐구성 같이 큰 성을 물에 잠기게 할 수야 있겠는가. 물이 들더라도 성안 낮은 곳이나 잠시 잠기게 할 정도일 것이다.)
장함은 그렇게 애써 자신을 달래며 성안 군민들을 다독여 싸움채비를 하게 했다.
그런데 정오가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성벽위에 나가있던 장졸들의 외침이 잠시 성루 안에서 쉬고 있는 장함의 귀에 들려왔다.
“물이다! 큰 홍수가 났다!”
장함이 놀라 밖을 내다보니 정말로 벌건 황토물이 발밑 해자로 물려들고 있었다. 전날 한군들이 파놓은 물길을 따라 해자로 휩쓸고 드는데 그 기세가 엄청났다.
물은 그날 한군들이 모래주머니로 높여둔 둑 때문에 점점 높이 차올랐다. 한식경도 안돼 성벽이 낮거나 허술한 곳을 밀어붙이고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가 낮은 곳부터 먼저 잠기게 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장함은 한 가닥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 대단한 물이 아니다. 기껏해야 성안을 한번 적시고 빠져나갈 것이니 너무 겁먹거나 놀라지 말라!”
옹왕 장함이 그렇게 장졸들을 북돋고 다그쳤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성안의 처지는 나빠져 갔다. 오래잖아 홍수는 폐구 성벽을 넘어 성안을 온통 물바다로 만들어 놓았다. 물에 젖은 성안 군민(軍民)들은 저마다 놀란 외침을 내지르며 조금이라도 높은 곳으로 기어오르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때 어디서 나왔는지 한군(漢軍)이 가득 탄 뗏목과 나룻배가 모래 자루로 막은 강둑을 따라 줄줄이 성안으로 흘러들었다. 뗏목과 배에 나누어 탄 한군들은 물고기나 건지듯 몇 군데 높은 성벽과 성루에 몰려있는 옹군(雍軍)을 거둬들였다. 위태로운 섬처럼 남아있는 곳에서 홍수를 피하고 있던 옹군 장졸들은 항복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한군들의 배로 옮아 탔다.
드디어 장함도 일이 글렀음을 알아차렸다. 한군들이 탄 여러 척의 배와 뗏목이 자신이 있는 성루로 몰려들고 몰려드는 걸 보고 가만히 칼을 빼들었다.
‘틀렸다. 하지만 이제는 저 은허(殷墟)에서처럼 항복해서 목숨을 빌 곳도 없구나. 내 남아대장부로 태어나 어찌 일생 두 번씩이나 항복으로 목숨을 구걸하겠는가. 그래도 명색 한 땅의 임금이었으니 임금답게 죽을 뿐이다.’
장함은 그렇게 자신을 다잡으며 빼든 칼로 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20만의 진나라 사졸들이 항우에 의해 산 채 흙구덩이에 묻힐 때조차도 모르는 척 아껴 살아남은 목숨이었다.
폐구를 수몰시키고 장함을 자살하게 한 한신은 다음날로 군사를 동쪽 새(塞)땅으로 몰았다.
“새왕(塞王) 사마흔은 대세의 향방을 가늠하는 눈이 밝은 자이나, 그도 장함처럼 이미 한번 항우에게 항복한 적이 있다는 게 우리에게 항복하기를 주저하게 만들 것입니다. 거기다가 사마흔은 옛날 역양현 옥연(獄椽)이었을 때부터 무신군 항량과 패왕 항우 숙질(叔姪)과는 별난 인연이 있어 쉽게 우리를 맞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빠르고 무서운 기세로 억눌러 항복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신이 한왕에게 그렇게 말하며 군사를 새왕 사마흔이 도읍으로 삼고 있는 역양((력,역)陽)으로 옮기게 하자 관영이 나서 말했다.
“빠르고 사나운 기세라면 말과 싸움수레로 적진을 휩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저와 등공(등公)에게 3000기(騎)와 싸움수레 100여대만 내어주신다면 한발 앞서 달려 나가 역양을 들이치고 사마흔의 항복을 받아보겠습니다. 그리하면 새 땅을 평정하는 데 드는 날수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구태여 대군을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곁에 있던 한왕도 관영의 말을 거들었다.
“아마도 중알자(中謁者) 관영과 등공 하후영이 폐구성을 수몰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번쾌와 조참을 부러워해서 하는 청인 듯싶소. 대장군이 못 이긴 척 들어주는 것도 대군을 번거롭게 하지 않고 하루빨리 역양을 우려 빼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오.”
그러자 한신도 굳이 관영과 하후영을 말리지 않았다. 진중에 있는 말과 수레를 있는 대로 긁어 둘에게 맡기고 3000군사와 더불어 역양성을 치게 했다.
한왕 유방이 한중을 나와 삼진(三秦)을 노린다는 소식을 처음 패왕 항우에게 전한 것은 옹왕 장함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장함은 한왕을 그리 크게 여기지 않았다. 패왕에게 대한 아첨을 겸하여 큰소리부터 먼저 쳤다.
“한왕 유방이 몰래 산관(散關)을 넘었습니다. 잔도를 불태우고 몰래 옛길을 따라 나와 용케 산관의 장졸은 속였으나 신이 그 늙은 도적을 더는 용서하지 않을 것입니다. 진창(陳倉) 길목에서 한군을 들이쳐 반드시 그 목을 대왕께 바치겠습니다.”
진작부터 유방을 막기 위해 관중에 남겨둔 장함이 그렇게 말하자 패왕도 믿었다. 항복하여 목숨을 빌 때부터 장함은 이미 옛날의 그 장함이 아니었지만, 패왕은 아직도 희수(戱水) 가에서 주문(周文)의 대군을 하루아침에 쳐부수고, 함곡관을 나온 지 두 달도 안 돼 진승(陳勝)을 죽인 그 장함만을 기억했다.
그런데 장함이 보낸 소식은 그걸로 끝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장함의 사자는 끊어지고,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가 소문만을 근거로 보내오는 구원 요청뿐이었다. 진창 싸움에서 한왕에게 크게 진 장함이 호치에 갇혀 있다고도 하고 폐구에 갇혀 있다고도 했다.
그쯤 되자 패왕도 관중(關中)의 일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대군을 일으켜 한달음에 관중으로 달려가고 싶지만 팽성의 사정이 그렇지가 못했다.
패왕이 의제(義帝)를 내몰다시피 장사(長沙) 침현(郴縣)으로 옮겨 앉게 한 것은 7월의 일이었다. 인심이란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것이라, 명색 천자인 의제를 따라 도읍인 장사로 따라간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옛 초나라에 대한 애정과 향수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초나라 왕실의 적통인 의제를 그렇게 쫓아내고 초나라를 차지한 패왕에게 드러내놓고 맞서지는 못해도 마음속으로는 적지 않은 사람이 분노와 원한을 품었다. 패왕이 아부(阿父)라고 부르며 곁에 두고 섬기는 범증마저도 그 일에 대해서는 패왕과 뜻이 다름을 감추지 않았다.
의제를 멀리 구석진 곳으로 보내버리기만 하면 될 줄 알았던 패왕은 일이 그렇게 되자 심기가 크게 상했다. 명쾌하고도 직선적인 해결을 좋아하는 패왕은 다시 마음속으로 한 결의를 굳혀갔다.
(한 하늘에 두 해가 있을 수 없듯이 초나라 땅과 백성들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 이 땅과 백성을 내 것으로 하고 나아가 천하를 호령하자면 의제를 없애야 한다. 사람들의 동정이 쏠려 힘으로 커가기 전에 누군가의 손을 빌려 가만히 의제를 죽여 버리자!)
그러나 팽성 안의 공기는 항우가 처음 패왕이 되어 개선했을 때와 같지 않았다. 몇몇 옛 초나라의 구신(舊臣)들은 의제가 침현으로 옮겨간 뒤에는 건들면 터질 것처럼 격앙되어 있어 함부로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럴 때 들어온 게 종잡을 수 없는 관중 소식이니, 아무리 성미가 불같은 패왕이라 해도 선뜻 관중으로 군사를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 미처 달포도 지나기 전에 이번에는 한(韓)나라를 지키는 정창(鄭昌)으로부터 급한 파발이 들어왔다. 정창은 오(吳)의 현령으로 패왕을 따라다니며 공을 세워 장수가 되었는데, 그때는 의심스러운 한왕(韓王) 성(成)을 대신하여 한나라를 맡아 지키고 있었다.
“한왕 유방이 지난 8월에 고도현의 옛길을 따라 대산관을 빠져나왔습니다. 옹왕 장함이 한왕을 맞아 진창, 호치에서 싸웠으나 이기지 못했고, 마침내는 폐구에 에워싸여 있다가 한군의 수공(水攻)을 당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합니다. 이에 거침없이 동쪽으로 밀고 나간 한왕은 이렇다 할 싸움도 없이 새왕(塞王) 사마흔과 적왕(翟王) 동예의 항복을 받아 관중을 모두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정창이 보낸 사자가 달려와 턱까지 숨이 차오르는 듯 허덕이며 알렸다. 패왕이 놀라 그 사자에게 물었다.
“옹왕이 그리된 것은 알 듯도 하다만, 새왕과 적왕은 어찌된 일이냐? 내 저희를 믿어 특히 삼진(三秦)의 왕으로 세운 지 아직 반년을 넘지 않았거늘 무슨 까닭으로 싸움조차 해보지 않고 항복하였다더냐?”
“새왕 사마흔은 도읍인 역양((력,역)陽)성에 기대 한왕에게 맞서볼 양으로 성문을 닫아걸고 버티었습니다. 그러나 한왕이 기장(騎將) 관영과 태복(太僕) 하후영에게 날랜 철기(鐵騎) 3000과 전거(戰車) 수십 대를 주어 보내 성을 에워싸고 옹왕 장함의 목을 보이며 겁을 주자 바로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또 적왕 동예는 옹왕이 죽고 새왕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제 발로 도읍인 고노(高奴)성을 걸어나와 적(翟)땅을 한왕에게 바쳤다고 합니다.”
정창의 사자가 이번에는 마치 그 모든 일이 제 죄라도 되는 것처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패왕이 터질 듯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그럼 지금 한왕과 그 군사들은 어디 있느냐?”
그 물음에 사자가 움찔하며 대답했다.
“여러 날째 관중에 머물러 쉬고 있을 뿐, 움직이는 기미가 없습니다. 사람을 풀어 알아보았더니 근거를 파촉 한중에서 관중으로 옮기는 중인 듯했고, 오직 무관(武關) 쪽으로만 한 갈래 한군의 움직임이 있었을 뿐입니다.”
“무관 쪽으로 한군이 움직였다? 그럼 한군이 무관을 넘었단 말이냐?”
“실은 그 일로 제가 이렇게 대왕께 달려오게 되었습니다. 가볍게 차린 한군 500이 험한 산길로 돌아 무관을 나왔다는 말을 듣고 우리 장군께서 즉시 군사를 내어 쫓으셨으나 간 곳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패왕이 성난 소리로 외쳤다.
“네가 너희 주인 정창(鄭昌)을 장군으로 세워 한(韓)나라를 맡긴 것은 바로 그 한왕 유방에게서 무관을 지키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제 유방의 군사를 넘겨 보내고도 그 행방조차 모른다니 정창 그자는 도대체 목이 몇 개나 된다더냐?”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범증이 나서서 항우를 말렸다.
“이는 아마도 정창의 죄가 아닐 듯싶습니다. 대왕의 한낱 충직한 장수가 저 간사한 유방의 술수를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또 정창에게 죄가 있다 하더라도 더 급한 것은 그 죄를 묻는 일이 아니라, 무관을 넘어온 한군이 무얼 하려 하는지부터 알아내는 일입니다.”
그런 범증의 말투가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데가 있어서 패왕이 이번에는 범증을 보고 물었다.
“왕릉의 무리는 머릿수가 1만이 넘고 남양에 뿌리 내린 지도 오래됩니다. 거기다가 많지는 않아도 한왕 유방이 특히 가려 뽑아 보낸 군사와 장수가 더 있으니, 이들을 모조리 때려잡자면 적어도 2만의 대군이 필요합니다. 또 남양까지는 군사들이 맨몸으로 내달아도 팽성에서는 닷새길이 됩니다. 설령 대왕께서 도성을 지키는 군사를 그대로 몰아 오늘로 떠나신다 해도 남양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도 유방처럼 믿을 만한 장수에게 날랜 기병 몇 백을 붙여 폐백과 인뚱이를 가지고 왕릉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래도 유방 밑에 들기 싫어했다하니, 10만호 식읍(食邑)의 제후면 왕릉을 달래 유방의 가솔을 오히려 우리에게 끌고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패왕의 간곡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범증이 삼가며 머뭇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대꾸했다. 잔꾀를 쓰고 재물로 사람을 매수하는 것은 패왕의 성미에 맞지 않은 일이라, 그걸 잘 아는 범증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이 그리 되고 보니 패왕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범증이 시키는 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장수 중에 특히 계포를 뽑아 날랜 300기(騎)를 딸려주며 말했다.
“장군은 당장 남양으로 달려가 왕릉을 찾아보고 과인의 뜻을 전하라. 만약 왕릉이 한왕의 가솔들을 잡아 과인에게로 귀순한다면 과인은 왕릉을 10만호후(侯)로 올리고 상장군을 삼을 것이다!”
이에 계포는 그 자리에서 패왕을 하직하고 바람처럼 남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떠날 때의 기세와 달리 계포는 사흘 만에 빈손으로 돌아와 낯없어 하며 패왕에게 말했다.
“왕릉은 이미 한왕에게 가기로 뜻을 굳힌 듯합니다. 사람을 풍읍으로 보내 한왕의 부모형제와 처자들까지 모두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들이 남양에 이르는 대로 무리를 모두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갈 작정인 듯합니다.”
“그래, 과인의 뜻을 전해보셨소?”
“그리 했습니다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대왕께서 내리신 폐백과 인뚱이를 내던지면서 제 임금을 구석진 땅으로 내쫓고 그 땅과 백성을 차지한 도적이 주는 것은 천하라도 받을 수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에 벌겋게 달아오른 패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감히 과인을 능멸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날랜 군사를 정창에게로 보내 왕릉이 관중으로 들어가는 길을 끊게 하라. 한왕 유방의 부모형제와 가솔은 모두 팽성으로 묶어 올리고, 왕릉을 따르는 자는 모조리 잡아 산채로 구덩이에 묻으라고 전하라.”
그때 다시 범증이 달래듯 말했다.
“약삭빠른 왕릉이 마침내 유방에게 붙기로 결정하고 제멋대로 끌어다 붙인 구실이니 대왕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그보다는 이제라도 왕릉을 되 불러들일 방책을 찾아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날아간 새를 어떻게 다시 잡아 조롱에 가둔단 말이오?”
분을 삭이지 못한 패왕이 그렇게 퉁명스레 범증에게 물었다.
“왕릉의 무리는 머릿수가 1만이 넘고 남양에 뿌리 내린 지도 오래됩니다. 거기다가 많지는 않아도 한왕 유방이 특히 가려 뽑아 보낸 군사와 장수가 더 있으니, 이들을 모조리 때려잡자면 적어도 2만의 대군이 필요합니다. 또 남양까지는 군사들이 맨몸으로 내달아도 팽성에서는 닷새길이 됩니다. 설령 대왕께서 도성을 지키는 군사를 그대로 몰아 오늘로 떠나신다 해도 남양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늦을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도 유방처럼 믿을 만한 장수에게 날랜 기병 몇 백을 붙여 폐백과 인뚱이를 가지고 왕릉을 찾아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래도 유방 밑에 들기 싫어했다하니, 10만호 식읍(食邑)의 제후면 왕릉을 달래 유방의 가솔을 오히려 우리에게 끌고 오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패왕의 간곡한 물음에도 불구하고 범증이 삼가며 머뭇거리는 말투로 그렇게 대꾸했다. 잔꾀를 쓰고 재물로 사람을 매수하는 것은 패왕의 성미에 맞지 않은 일이라, 그걸 잘 아는 범증으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이 그리 되고 보니 패왕도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아도 범증이 시키는 대로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다 장수 중에 특히 계포를 뽑아 날랜 300기(騎)를 딸려주며 말했다.
“장군은 당장 남양으로 달려가 왕릉을 찾아보고 과인의 뜻을 전하라. 만약 왕릉이 한왕의 가솔들을 잡아 과인에게로 귀순한다면 과인은 왕릉을 10만호후(侯)로 올리고 상장군을 삼을 것이다!”
이에 계포는 그 자리에서 패왕을 하직하고 바람처럼 남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떠날 때의 기세와 달리 계포는 사흘 만에 빈손으로 돌아와 낯없어 하며 패왕에게 말했다.
“왕릉은 이미 한왕에게 가기로 뜻을 굳힌 듯합니다. 사람을 풍읍으로 보내 한왕의 부모형제와 처자들까지 모두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들이 남양에 이르는 대로 무리를 모두 이끌고 관중으로 들어갈 작정인 듯합니다.”
“그래, 과인의 뜻을 전해보셨소?”
“그리 했습니다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대왕께서 내리신 폐백과 인뚱이를 내던지면서 제 임금을 구석진 땅으로 내쫓고 그 땅과 백성을 차지한 도적이 주는 것은 천하라도 받을 수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그 말에 벌겋게 달아오른 패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감히 과인을 능멸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날랜 군사를 정창에게로 보내 왕릉이 관중으로 들어가는 길을 끊게 하라. 한왕 유방의 부모형제와 가솔은 모두 팽성으로 묶어 올리고, 왕릉을 따르는 자는 모조리 잡아 산채로 구덩이에 묻으라고 전하라.”
그때 다시 범증이 달래듯 말했다.
“약삭빠른 왕릉이 마침내 유방에게 붙기로 결정하고 제멋대로 끌어다 붙인 구실이니 대왕께서는 노여움을 거두십시오. 그보다는 이제라도 왕릉을 되불러들일 방책을 찾아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이미 날아간 새를 어떻게 다시 잡아 조롱에 가둔단 말이오?”
분을 삭이지 못한 패왕이 그렇게 퉁명스레 범증에게 물었다.
말투는 퉁명스럽고 표정은 굳어 있어도 범증을 보는 패왕의 눈길에는 은근한 기대가 실려 있었다. 범증이 물을 때는 그 답을 알고 있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범증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말했다.
“제가 사람을 풀어 알아보니 왕릉의 늙은 어미가 아직도 풍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어서 사람을 보내 그 어미를 잡아다놓고 왕릉을 부르면 제가 아니 오고 어쩌겠습니까? 또 듣자 하니 그 동안 왕릉은 제법 효자 소리를 들으며 산 듯합니다. 한왕 유방의 가솔을 살리기 위해 대왕의 노여움을 사면서도 제 어미를 그렇게 버려두는 자의 효도가 오죽하겠습니까만, 그래도 세상의 이목이 있으니 어미의 목숨이 걸린 일을 함부로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말에 패왕은 당장 사람을 풍읍으로 보내 왕릉의 늙은 어머니를 잡아오게 했다. 사흘도 안돼 정말로 왕릉의 늙은 어머니가 팽성으로 잡혀왔다. 패왕은 그녀를 극진히 대접하며 달래는 한편, 사람을 왕릉에게 보내 그 늙은 어머니가 팽성에 잡혀와 있음을 알리게 했다.
그때 왕릉은 한왕의 부모인 태공(太公)과 유오(劉C)를 비롯하여 형제인 유백(劉伯) 유중(劉仲) 일가, 그리고 이제는 한나라 왕후가 된 여치(呂雉)와 번쾌의 아내 여수(呂須) 자매에다 나중에 효혜(孝惠)로 불릴 왕자와 노원(魯元)으로 불릴 공주 등 수십 명을 수레에 태우고 관중으로 떠나려던 참이었다. 무리 중에 가려 뽑은 5천 명으로 호위하여 은밀하고 신속하게 함곡관으로 나아가면 적어도 그 길목에는 그들을 막아낼 세력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팽성에서 패왕이 보낸 사람이 달려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패왕께서 장군의 자당(慈堂)을 군중에 모셔놓고 극진하게 모시면서 장군을 뵙기를 청하십니다. 장군께서 가지 않으시면 자당의 안위도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점잖았지만 내용은 왕릉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하는 패왕의 협박이었다. 그 말을 들은 왕릉은 기가 막혔다.
범증은 왕릉의 효성을 세상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겉꾸밈으로 낮춰 말했지만, 실은 왕릉만큼 타고난 효자도 없었다. 일찍 홀로 되어 자신만을 기른 어머니를 모시는데, 진작부터 왕릉의 효도는 흔히 세상이 칭송하는 반포(反哺)나 봉양(奉養)을 넘어서는 데가 있었다. 어려서부터 그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중년이 된 그때까지도 한 치 어김이 없었다.
한왕 유방과의 불화도 실은 그 어머니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로는 흔치 않게 유가(儒家)의 딸로 태어난 그 어머니는 왕릉이 어릴 적부터 삼강오륜을 가르치고 대의명분을 무엇보다 존중하게 했다. 그런데 건달시절의 유계(劉季)는 그런 왕릉을 설득할만한 대의도 명분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나중에 패공이 되고, 회왕의 명을 받아 관중을 평정할 초나라의 장수가 된 유방을 남양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겉으로는 그럴싸했지만 왕릉이 보기에 유방은 아직도 자신이 무엇이 되려는 지조차 모르는 한낱 유민군(流民軍)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게 유방을 따르는 묘한 행운과 엄청나게 불어난 그 세력에도 불구하고 왕릉으로 하여금 선뜻 유방을 따를 수 없게 했다. 그런 경원(敬遠)을 뒷골목의 세력다툼이나 왕릉의 시기심으로만 보는 것은 왕릉을 잘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 사이를 떠도는 헛소문일 뿐이었다.
왕릉이 늙은 어머니를 풍읍(豊邑) 근처에 그대로 남겨둔 것도 그 어머니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왕릉은 남양에 자리 잡기 바쁘게 사람을 어머니에게 보내 모셔오게 했다. 그러나 외아들이 떠난 뒤로 친정 마을에 몸을 의탁하고 숨어 지내던 왕릉의 어머니는 무겁게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네 효성은 갸륵하다만, 장부가 큰일을 하는데 늙은 어미가 짐이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여기 잘 있으니 너는 네 뜻을 펼치는데 온 힘을 쏟아라. 지금은 내가 있는 듯 없는 듯 여기 숨어 사는 게 오히려 너를 위하는 길이 될 것이다. 어미를 데려다 호강시키는 일은 네가 큰일을 한 뒤라도 늦지 않다.”
왕릉이 보낸 사람을 통해 그렇게 당부하고는 있던 그대로 작은 시골 마을에 조용히 묻혀 살았다. 그런데 뜻밖으로 그 어머니가 팽성으로 끌려갔다는 말을 듣자, 왕릉은 기가 막혀 어쩔 줄 몰라 하다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빠른 말에 안장을 얹어라. 내 패왕에게 달려가 이 한 목숨을 내주고 어머님을 구하리라!”
그때 빈객처럼 왕릉의 진채에 머물고 있던 한(漢)나라 장수 설구(薛歐)와 왕흡(王吸)이 말렸다.
“장군 먼저 마음을 가라앉히시고 모든 일을 차분히 헤아리시어 후회가 없도록 하셔야 합니다. 항왕은 기고만장하여 천하에 저밖에 없는 줄 아는 데다, 성정이 포악해 한번 저를 거스른 자를 용서하는 법이 없습니다. 장군께서 우리 한왕께로 드시기 전이라면 모르거니와, 이미 항왕이 내린 10만호와 상장군 벼슬까지 마다하고 그 사자까지 비웃어 쫓아 보냈으니, 이제 와서 돌아간다 해도 이미 늦었습니다. 장군뿐만 아니라 자당(慈堂)까지도 살아남기 힘들 것입니다.”
“그럼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제야 번쩍 정신이 든 왕릉이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물었다. 이번에는 왕릉의 조카가 되는 왕흡이 나서 말했다.
“먼저 사람을 보내 팽성의 동정을 살펴보신 뒤에 뜻을 정하셔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구나. 먼저 어머님의 가르침을 받은 뒤에 내가 움직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왕릉도 그렇게 머리를 끄덕이고는 곧 말 잘하는 이졸 하나를 뽑아 팽성으로 보냈다. 왕릉이 보낸 사자가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 항왕은 왕릉의 어머니를 불러내 얼러댔다.
“반드시 아드님을 바르게 가르쳐 한왕의 가솔들을 끌고 팽성으로 오게 하시오. 그리되면 모자분이 모두 부귀를 누리며 천수를 다할 것이나, 아드님이 기어이 마다하면 노부인은 가마솥에 삶기게 될 것이오!”
그런 다음 항왕은 따로 군막을 내어 왕릉이 보낸 사자를 만나보게 하였다.
왕릉의 어머니를 몹시 존대하는 척 동쪽을 향해 앉게 하고 아들의 사자와 단둘이 마주하게 할 때만 해도 항우에게는 패왕다운 자신감과 도량이 있었다. 왕릉의 어머니가 자신의 위엄에 눌려 아들을 불러들일 것이라 믿은 것이지만 곧 그것은 패왕의 터무니없는 자부심이요 허영이었음이 밝혀졌다.
아들이 보낸 사자를 맞은 왕릉의 어머니는 한동안 태연한 목소리로 왕릉이 항왕의 뜻을 따르도록 달래는 척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사자 앞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바라건대 이 늙은 어미를 위해 내 아들 능(陵)에게 전해주게. 너는 옳은 주인을 만났으니 부디 한왕(漢王)을 잘 섬기라고. 한왕은 너그럽고 어진 분이라 마침내는 천하를 얻으실 것이니, 만에 하나라도 이 늙은 어미 때문에 두 마음을 품지 말라고. 이제 나는 죽음으로 사자를 배웅해 내 이 뜻이 참됨을 보이겠네!”
그리고는 품안에서 칼을 빼내더니 그 위에 쓰러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왕릉의 어머니가 그렇게 죽자 항왕은 불같이 노했다. 이미 숨이 끊어진 왕릉의 어머니를 가마솥에 삶게 하는 한편, 왕릉이 보낸 사자를 목 베어 분을 풀었다. 그리고 사마용저에게 날랜 3000기를 내어주며 명을 내렸다.
“너는 얼른 양하(陽夏)로 달려가 왕릉이 관중으로 들어가는 길을 끊으라! 곧 종리매에게 대군을 딸려 보낼 테니 우선 왕릉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길목만 막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팽성에도 왕릉의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항왕 아래 들게 되었지만 건달 시절부터 왕릉을 우러르던 사졸 하나가 왕릉의 어머니가 삶기는 걸 보고 의분을 참지 못했다. 빠른 말 한 필을 구해 지름길로 왕릉에게 달려가 그 일을 알렸다.
한동안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피눈물을 흘리던 왕릉이 부드득 이를 갈며 설구와 왕흡에게 말했다.
“두 분 장군께서는 한왕의 가솔을 모시고 어서 양하를 지나 함곡관으로 가시오. 함곡관은 이미 한왕께서 손에 넣으셨다니, 급히 길을 재촉하면 별일 없이 한왕의 가솔들을 관중으로 모셔갈 수 있을 것이오. 부모를 죽인 원수와는 함께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불구대천] 법, 나는 이 길로 팽성으로 쳐들어가 항우와 싸우다 죽겠소!”
설구와 왕흡이 그런 왕릉을 말렸다.
“군자의 원수 갚음은 백년이 걸려도 늦지 않다고 했습니다. 장군께서는 어찌 소인의 효도와 필부의 용기로 헛되이 목숨을 버리려 하십니까? 지금 팽성에는 천하를 멍석 말 듯하여 함곡관에 든 지 한 달 만에 진나라를 멸망시킨 서초(西楚)의 50만 대군이 고스란히 살아 있습니다. 장군께서 이끌고 계신 군사로 그곳을 친다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이니, 차라리 관중으로 들어가 뒷날을 기약함이 어떻겠습니까? 한왕께서 다시 관동(關東)으로 대군을 내실 때 장군께서 그 이빨과 발톱[爪牙]이 되신다면, 부모 죽인 한을 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천하평정의 큰 공업을 아울러 이루시게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이 그렇게 거듭 달래자 마침내 왕릉도 군사를 움직여 양하를 벗어났다.
한편 사마용저를 재촉해 보낸 항왕은 또 종리매를 불러 급히 3만 대군을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적지 않은 군사라 그날로 사마용저를 뒤따라 보낼 수가 없어 속만 끓였다. 그런데 그날 밤 늦게 사마용저가 빈손으로 돌아와 알렸다.
“대왕께서 내리신 3000기와 더불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양하로 달려갔으나, 왕릉은 이미 반나절 전에 그곳을 지나갔다고 합니다. 어떻게 뒤쫓아 보려 해도 이미 날이 저문 데다 어디로 갔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어 이렇게 돌아와 아룁니다.”
왕릉이 한왕(漢王)의 가솔들과 함께 이미 양하를 벗어났다는 말을 듣자 항왕은 몹시 성이 났다. 길길이 뛰며 사마용저를 꾸짖고, 날이 밝는 대로 종리매의 대군을 풀어 그들을 뒤쫓게 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뒤쫓으려니 모두 어디로 갔는지 막막해 머뭇거리며 알아보는 사이에 며칠이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한왕(韓王) 성(成)을 대신해 한(韓)나라 땅을 지키고 있는 정창(鄭昌)이 사람을 보내 알렸다.
“왕릉이 무리 1만여 명과 함께 한왕(漢王)의 가솔을 보호하여 함곡관 쪽으로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 세력이 작지 않은 데다 밤중에 가만히 길을 돌아가는 바람에 지나 보낼 수밖에 없었다는 핑계였습니다. 하오나 신(臣)은 그 일을 용서할 수 없어 태만의 죄를 물어 그곳 수장(戍將)을 목 베고 이렇게 급히 대왕께 알립니다.”
그 사이 한나라 땅까지 지나쳤다면 이미 함곡관 동쪽에서 따라잡기는 틀린 일이었다. 이에 항왕은 분을 가라앉히고 다음 일에 대비했다.
“한왕 성은 포악한 진나라를 쳐 없앨 때도 세운 공이 없는 데다, 이제는 봉토까지 제대로 지키지 못했으니 그냥 둘 수 없다. 왕위를 폐하고 열후(列侯)로 삼는다. 대신 전(前) 오령(吳令) 정창을 한왕(韓王)으로 봉하니, 정창은 굳게 무관(武關)을 지켜 한왕(漢王) 유방으로 하여금 함부로 중원을 넘보지 못하게 하라!”
엉뚱하게도 왕릉을 지나 보낸 죄를 팽성에 끌려와 있는 한왕 성에게 물으며, 그렇게 정창을 격려하여 한왕 유방이 동쪽으로 나오는 것을 막게 했다.
그때 장량은 정창과 함께 한나라의 도읍인 양적(陽翟)에 있었다. 팽성으로 간 사자가 그 같은 패왕의 명을 받아오자 깜짝 놀랐다.
‘내가 여기까지 와서 정창을 돕는 척하고 있는 것은 한왕 성이 항왕에게서 받고 있는 의심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큰일이다. 한왕 성의 목숨이 위태롭게 되었구나.’
그렇게 속으로 탄식하면서 급하게 항왕에게 글을 올렸다. 조금이라도 항왕의 의심을 덜어 팽성에 잡혀있는 한왕 성의 목숨을 지켜주기 위함이었다.
‘한왕 유방이 이번에 관중으로 나온 것은 전날 회왕께서 하신 약조 때문입니다. 마땅히 관중왕(關中王)이 되어야 하는데, 대왕께서 그 땅을 거두시어 얻게 될 직위를 잃게 되자 한왕 스스로 관중을 얻고자 한 것뿐입니다. 만약 처음 약조대로 관중만 얻는다면 한왕은 더 동쪽으로 나올 뜻이 없는 걸로 들었습니다.’
먼저 그렇게 글을 올려 항왕을 마음 놓게 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다시 동북(東北) 쪽의 모반을 일러바치는 글을 올려 항왕의 눈길을 그리로 돌리려 했다.
‘제(齊)나라와 조(趙)나라가 힘을 합쳐 초나라를 치려 하고 있습니다. 전영(田榮)은 이제 제나라를 온전히 손아귀에 넣었을 뿐만 아니라, 진여(陳餘)를 앞세워 조나라까지 엿보고 있습니다. 만약 진여가 전영의 힘을 빌려 조왕(趙王)을 다시 세우고 전영과 손을 잡는다면 서초(西楚)와 대왕께 큰 우환거리가 될 것이오니 부디 유념하시옵소서.’
하지만 그와 같은 장량의 글이 올라오자 항우는 벌컥 화부터 냈다.
“이 잔꾀 덩어리가 또 수작을 부리는구나. 지난번에도 글을 올려 유방은 결코 동쪽으로 돌아올 마음이 없다고 과인을 속이더니, 이제 유방이 이미 관중을 차지하고 동쪽으로 나올 뜻을 분명히 하였는데 아직도 간사한 꾀로 거짓을 늘어놓다니. 내 먼저 한성(韓成)을 죽이고, 다시 이 오래 묵은 여우를 잡아 가마솥에 삶으리라!”
장량의 글을 읽고 난 항왕은 그러면서 오히려 한왕 성을 죽일 뜻을 굳혔다. 하지만 급변하는 동북(東北)의 형세가 항왕의 눈길을 끄는 바람에 결행은 잠시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먼저 항왕을 혼란케 한 것은 연(燕)나라의 변고였다. 홍문에서 천하를 나눠줄 때 전 연왕(燕王) 한광(韓廣)은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세운 공이 없어 요동왕(遼東王)으로 밀려나고, 연왕은 항왕을 따라 입관(入關)하여 큰 공을 세운 장도(臧荼)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한광이 봉지(封地)인 요동으로 가려 하지 않자 새 연왕 장도는 한광을 공격해 죽이고 그 땅까지 아울러 버렸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장도가 비록 심복이라 하나, 그래도 자신이 제후로 세운 한광을 함부로 죽이고 또 자신이 나눠준 봉토를 힘으로 가로챈 일은 크게 항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고 어떻게 죄를 물을까 궁리하고 있는데, 다시 범증이 좋지 않은 소식을 알려주었다.
“아무래도 제(齊)나라를 차지한 전영과 왕이 못돼 앙앙불락인 진여가 하는 짓이 심상치 않습니다. 진여는 대왕께 받은 세 현(縣)을 참빗으로 쓸 듯 장정을 긁어모으고, 전영은 적지 않은 제나라 군사를 보내 그런 진여에게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그리하여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를 내쫓고, 지금 대왕(代王)으로 있는 전 조왕(趙王)을 되세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되면 옛 제나라와 조나라가 손을 잡은 꼴이요, 전영은 진여를 도와 세력을 배로 키운 셈이니 그냥 보고만 있을 일이 아닌 듯합니다.”
내용은 장량이 올린 글과 비슷했으나 범증이 말하니 항왕에게는 사뭇 다르게 들렸다. 한왕 유방과 서북쪽 관중(關中)으로만 쏠려 있던 의심과 걱정이 일시에 동북으로 돌아섰다.
(내 멀리 있는 유방을 걱정하느라 발밑을 파고 있는 전영의 분탕질을 너무 오래 방치하였구나. 아무래도 아니 되겠다. 대군을 내어 동북쪽부터 안정시키자. 스스로 제왕(齊王)이 된 전영을 목 베고 그 무리를 모조리 산 채 땅에 묻어버리면 유방에게도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어쩌면 절로 겁을 먹고 저 홍문(鴻門)에서처럼 스스로 머리를 숙이고 내 발아래로 기어들지도 모른다.)
마침내 항왕은 그렇게 뜻을 정했다. 하지만 그래놓고 나니 다시 팽성 안의 일들에 새삼 마음이 쓰였다. 점점 변해가는 민심이 슬며시 걱정스러웠고, 특히 진작 장사(長沙) 침현(郴縣)을 근기(近畿)로 받고도 아직 평성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의제(義帝)는 안에서 심장을 겨누고 있는 비수라도 되는 듯했다.
한성(韓成)과 장량의 일도 항왕이 동북으로 대군을 이끌고 떠나기 전에 처결되어야 했다. 믿을 만한 정창을 왕으로 삼아 한(韓)나라를 맡겼으니, 한성이 옛 왕족과 신하들을 꼬드기거나 장량이 잔꾀만 부리지 않으면 무관(武關)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그리되기 위해서는 한성과 장량을 죽여 없애는 게 상책이었다.
궁리 끝에 항왕은 먼저 의제(義帝)에게 늙은 신하 몇과 군사 약간을 붙여 내몰 듯 장사(長沙) 침현(郴縣)으로 떠나보냈다. 겉으로는 엄연한 천도(遷都)인 셈이지만, 실은 궁벽하고 외진 곳으로 의제를 유폐시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초라한 천도에 분개하는 옛 초나라 신민(臣民)들로 팽성 안이 잠시 수런거렸으나, 워낙 항왕이 눈 부라리며 지켜보는 터라 별 일은 없었다.
은근히 힘들여 의제를 팽성에서 내쫓은 항왕은 다시 한나라를 뒤탈 없게 만드는 일에 손을 댔다. 팽성 안이 잠잠해지자 이번에는 한왕(韓王) 성(成)을 가만히 불러들여 말했다.
“과인은 이번에도 장 자방(子房) 선생의 진언을 들어 북으로 제나라를 먼저 정벌하고자 하오. 이왕이면 자방 선생의 꾀를 빌려 전영을 사로잡고자 하는데, 지금 양적(陽翟)에 있으니 이리로 불러들여야겠구려. 자방 선생은 열후(列侯)의 사람이니, 번거롭지만 열후께서 글을 내어 선생을 이리로 불러주시오.”
얼마 전 왕위에서 내좇을 때와 달리 은근하기 짝이 없는 항왕의 목소리에 의아했으나 한왕 성은 시키는 대로 했다. 근신들이 내미는 비단 자락에 장량을 팽성으로 불러들이는 글을 써주었다.
그런데 미처 비단에 먹이 마르기도 전이었다. 근신들이 비단 폭을 거둬들이기 무섭게 항왕이 성난 소리로 외쳤다.
“위사(衛士)들은 어디 있느냐? 당장 저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아니, 대왕 그 무슨 말씀이십니까? 어찌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죽이려 드십니까?”
그제야 놀란 한왕 성이 물었다. 항왕은 불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노려보며 잘라 말했다.
“너는 간사한 장량을 손발로 삼고 줄곧 유방과 내통해 왔다. 저번에는 유방이 파촉 한중에서 나올 뜻이 없다고 속여 과인으로 하여금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삼진을 잃게 하더니, 이제는 또 유방이 결코 관중에서 나올 뜻이 없다는 글로 나를 속이려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 대군을 몰고 입관하여 쥐새끼 같은 무리들을 쓸어버리고 싶다만, 당장은 전영이 지척에서 분탕질을 치고 있어 먼저 제나라의 쉬파리 떼부터 흩어버리려고 한다. 그전에 너희를 죽여 무관(武關)의 걱정을 덜려고 하니 죽더라도 까닭이나 알고 죽어라.”
그리고는 변명 한번 들어보는 법 없이 한왕 성을 끌어내 목 베게 했다. 그런 항왕에게는 이전의 그답지 않게 책략적이었으나 실은 그 뒤에 늙은 범증이 있었다.
한왕 성이 피 묻은 목으로만 돌아오자 항왕은 다시 가까이 두고 부리는 신하를 불러 한왕 성이 쓴 글을 주며 말했다.
“너는 이 길로 양적으로 달려가 장량에게 이 글을 주고 그를 팽성으로 불러오너라. 장량이 내 앞에 이를 때까지 결코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서는 아니 된다!”
명을 받은 사자는 그 날로 밤낮을 달려 양적으로 갔다. 먼저 한왕(韓王) 정창에게로 가서 장량이 있는 곳을 알아본 뒤, 다시 장량을 찾아가 한왕 성이 쓴 글을 내주며 말했다.
“열후(列侯)께서 급히 선생을 찾고 계시니 어서 팽성으로 돌아가십시오.”
갑작스레 한왕 성의 글을 받은 장량은 놀라 비단 폭을 펼쳤다.
비단 폭에 쓰여 있는 글씨는 틀림없이 한왕(韓王) 성(成)이 쓴 것이었다. 오래 그 밑에서 사도(司徒)로 일해 온 장량은 한눈에 그 글씨를 알아보았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려보니, 글을 보내온 때도, 전해오는 방식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장량은 진작부터 한왕 성에게 구실을 만들어 팽성을 빠져 나오도록 권해왔다. 그런데 성은 몸을 빼내기는커녕 오히려 장량을 팽성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또 비록 열후(列侯)로 밀려나기는 했으나 한왕 성에게는 아직도 수족같이 부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 글을 가지고 온 사자는 그들이 아니라 항왕(項王)의 근신이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방금 항왕이 의제(義帝)를 장사(長沙)로 내쫓아 팽성 안의 인심이 흉흉한 때에 한왕이 이리도 급하게 나를 팽성으로 불러들일 까닭이 무엇인가. 그것도 믿을만한 신하들을 제쳐두고 항왕의 근신을 시켜….틀림없이 무슨 변고가 있다. 이는 결코 한왕의 부름이 아니다.)
헤아림이 거기에 미치자 장량에게 퍼뜩 짚여오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장량은 조금도 내색 않고 항왕이 보낸 사자에게 말했다.
“알겠소. 비록 지금은 열후이시나 한때는 한(韓)나라의 사도로서 임금으로 받들던 분의 명이시니 내 어찌 잠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소? 그러나 떠나기 전에 반드시 처결해야할 일도 있고, 또 먼 길 떠날 채비도 해야 하니 내게 반나절만 말미를 주시오.”
그리고는 사자를 객관으로 안내한 뒤 부중(府中)의 사람을 불러 명하였다.
“팽성에서 오신 사자이시다. 내 한다만 일을 마무리 짓고, 짐을 쌀 때가지 정성껏 접대 하여라. 좋은 술과 맛난 고기를 아끼지 말고 아리따운 여자도 두엇 들여 주어라.”
명을 받은 사람이 그대로 하니 팽성에서 온 사자는 그 뜻 아니한 환대에 깜빡 넘어가고 말았다. 오래잖아 술과 미인에 취해 장량의 채비가 너무 빨리 끝날까 오히려 걱정하였다.
그 사이 약간의 금은만 챙긴 장량이 빠른 말을 골라 타고 부중을 나서며 다시 사람을 팽성에서 온 사자에게 보냈다.
“사도께서 이르시기를, 아직 보살펴야할 일이 적지 아니 남은 데다 곧 날이 저무니 차라리 내일 아침 일찍 길을 떠나시는 게 낫겠다고 하십니다. 왕사(王使)께서는 이대로 하룻밤 쉬시면서 우리 한나라의 풍류에나 흠뻑 젖어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사도께서도 밤이 깊기 전에 이리로 와서 함께 어울리리라 하셨습니다.”
그때 이미 한껏 흥이 올라 있던 사자는 그 말이 오히려 반가웠다. 거기다가 미녀들이 짐짓 권하는 술에 이기지 못해 장량이 오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곯아 떨어졌다.
한편 이미 날이 저물기 전에 양적을 떠난 장량은 밤새 지름길을 달려 함곡관으로 향했다. 그곳만 지나면 아무 일없이 한왕 유방이 있는 관중으로 들 수 있었다.
(아마도 한왕(韓王) 성(成)은 죽었거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처지에 빠져있을 것이다. 조상에게 면목 없는 일이지만 더는 주인으로 섬길래야 섬길 수가 없게 되었으니 어찌하랴. 이제는 한왕(漢王) 유방에게로 가 그에게 내 삶을 의탁하는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진작부터 내 주인은 한왕 유방이었는지도 모른다…)
닫는 말에 채찍질을 더하면서 장량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항왕이 장량을 데려오라고 양적(陽翟)으로 보낸 사자는 다음 날 해가 높이 떠오른 뒤에야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 술기운이 남은 흐릿한 머리로도 간밤 끝내 장량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떠오르자 퍼뜩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놀라 자리를 차고 일어난 사자는 부중(府中) 사람들을 불러 장량을 불러오게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장량은 오지 않았다. 그제야 급한 마음이 들어 부중 사람들을 다그쳤으나, 장량이 전날 해질녘 말을 타고 부중을 나선 것뿐, 아무도 그 간 곳을 알지 못했다.
놀란 사자는 급히 한왕(韓王) 정창(鄭昌)에게로 달려가 팽성에서 있었던 일과 아울러 장량이 사라진 것을 알렸다. 사자의 말을 듣고서야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짐작한 정창이 급히 군사를 풀어 장량을 뒤쫓게 했다. 함곡관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때가 너무 늦어 있었다. 진작부터 알아둔 지름길로 밤길을 재촉해 달아난 장량을 다음 날 해가 높이 솟은 뒤에야 뒤쫓아 간 군사들이 따라잡을 길은 없었다.
사자는 죽을상을 하고 팽성으로 돌아가 항왕에게 장량이 달아난 일을 알렸다. 항왕이 사자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위사(衛士)들은 어딜 갔는가? 어서 저 놈을 끌어내 목을 베어라!”
그리고는 범증을 불러들이게 했다.
“아부(亞父), 장량이 눈치를 채고 관중으로 달아났으니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차라리 전영(田榮)은 미뤄두고 유방부터 치는 것이 옳지 않겠소?”
항왕이 그렇게 묻자 범증이 못마땅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대군이 관중에 있었을 때는 마땅히 그랬어야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유방은 당분간 관중에 묶어두고, 먼저 제나라부터 평정하신 뒤에 따로 도모하셔야 합니다.”
“만약 유방이 함곡관을 나와 뒷덜미를 치면 어찌 하시겠소?”
“유방은 방금 힘들여 삼진(三秦)을 차지한 뒤라 그 군사는 지치고 물자도 넉넉지 못할 것입니다. 한왕 정창을 한 번 더 다그쳐 굳게 무관(武關)을 지키게 하고, 따로 사람을 낙양으로 보내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에게는 함곡관을 막게 하십시오. 하남왕이 섬성(陝城)에 대군을 내어 길목을 지키면 유방이 비록 함곡관을 나온다 해도 쉽게 관동으로 밀고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에 항왕은 빠른 말을 탄 사자를 정창과 신양에게 보내 서쪽 방비를 든든히 하고, 자신은 동북으로 대군을 낼 채비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러자니 다시 마음에 걸리는 게 장사 침현에 있는 의제(義帝)였다. 궁벽한 곳으로 몰아두기는 했으나, 언제 되잖은 것들이 근왕(勤王)을 구실로 의제를 끼고 자신의 등줄기에 칼을 들이댈지 몰랐다.
항왕은 다시 범증을 불러 의논하고 싶었으나 그 일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범증은 아직도 항왕이 의제를 팽성에 두고 황제로 떠받들지 않는 걸 못마땅하게 여길 만큼 옛 초나라를 가슴속에 품고 있었다. 공연히 범증과 의논했다가 긁어 부스럼이 될 것 같아 홀로 머리를 짜낸 끝에 항왕은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와 형산왕(衡山王) 오예(吳芮), 그리고 임강왕(臨江王) 공오(共敖)에게 몰래 사자를 보냈다.
<의제 웅심(웅심)은 오래전 진나라의 속임수에 빠져 부로(父老) 아닌 부로로 구차하게 사시다 원통하게 돌아가신 회왕(회왕)의 얼손(H손)으로 원래는 미천한 양치기였다. 우리 항씨(항씨) 집안에서 그를 민간에서 찾아내 윗대의 한을 풀어줄 새 회왕(회왕)으로 세웠으나, 진나라를 쳐 없애고 천하를 바로잡는 데는 아무런 공도 세운 바 없다. 오히려 앞서 그 일을 이끌어간 것은 갑옷 두르고 창칼을 짚어 일어난 여러 장군들과 과인 항적(항적)이었다. 우리는 들판에서 찬 서리를 맞아가며 싸우기를 삼년, 마침내 강포한 진나라를 쳐 없애고 뒤엎어진 천하를 바로 세웠다. 그래도 과인은 옛 초나라 왕실의 핏줄을 귀히 여겨 회왕을 의제로 올려 세웠으나, 한 하늘에는 두 해가 있을 수 없고 또 의제는 겸양할 줄 몰라 온갖 분란의 씨앗이 되고 있다. 이제 과인은 패왕으로서 명하나니, 그대들은 가만히 의제를 죽여 천하의 화근을 뽑아 없애도록 하라. 세 왕이 한꺼번에 구실을 만들어 의제를 몰아대다 사람의 눈과 귀가 없는 곳에서 슬며시 손을 쓰면 아니 될 일이 없다. 세상의 시끄러운 험구는 서로 서로 미루며 피할 수 있을 것이요, 천하의 근심을 던 공은 더 넓은 봉지(封地)와 보다 큰 상훈(賞勳)으로 보답 받을 것이다.>
한(漢) 2년 시월 항왕으로부터 그와 같은 글을 받은 구강왕(九江王)과 형산왕(衡山王), 임강왕(臨江王)은 잠시 망설였다. 그들도 옛 초나라의 유민(遺民)들이라 옛 왕실의 핏줄 앞에서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 세 왕은 오래 머뭇거리는 법 없이 항왕의 명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미 4년 전 처음 기의(起義)할 때의 그 순진한 유민군(遊民軍)의 우두머리는 아니었다. 전란을 통해 힘의 원리에 익숙해지고, 권력과 그에 따른 부귀에 한참이나 맛을 들인 패왕 측근의 제후(諸侯)들이었다.
항왕의 글이 이른 지 사흘도 안돼 장사(長沙)를 둘러싸듯 하고 있는 세 땅의 왕이 일시에 군사를 내어 사방에서 에워싸듯 의제를 몰아댔다. 이름이 좋아 황제이지 의제는 그중의 하나도 제대로 막아낼 힘이 없었다. 한 번 맞서보지도 못하고 사냥꾼에게 쫓기는 짐승처럼 놀라 허둥대다가 겨우 배 한 척을 구해 물길로 달아났다.
세 왕 중에서도 구강왕 경포(黥布)에게는 원래부터 강수(江水 · 양자강) 물가에서 수적(水賊)질하던 솜씨가 있었다. 날랜 배를 내어 뒤쫓게 하니 변변한 호위조차 없이 달아나던 의제로서는 벗어날 길이 없었다. 강수 한가운데서 사로잡힌 의제는 아무도 모르게 죽음을 당하고 그 시체는 물속 깊이 던져졌다.
<의제께서 근기(近畿)를 돌아보시던 중 강수에서 물놀이를 하시다가 도둑 떼를 만나 돌아가셨습니다. 의제를 죽이고 재물을 뺏은 수적(水賊)들은 배 밑바닥에 구멍을 내고 시신과 배를 강수 깊이 가라앉혀 버리니, 인근에 봉지(封地)를 가진 세 왕이 모두 모여 물질 잘하는 군사들을 풀어도 의제의 시신조차 수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경포가 천연덕스럽게 그런 글을 올리자 항왕은 이내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비로소 마음 놓고 팽성을 떠나 제나라를 치러갈 군사를 일으켰다. 그때 다시 항왕의 출발을 재촉하는 소식이 들어왔다.
“대왕께 받은 세 현(縣)의 군사를 모조리 긁어모은 진여(陳餘)가 전영이 보낸 제나라 군사들과 더불어 조(趙)나라를 들이쳤다고 합니다. 조나라 땅을 봉지로 받은 상산왕(常山王) 장이는 힘을 다해 맞섰으나 진여와 전영이 합친 힘을 당해내지 못해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도읍인 양국(襄國)을 버리고 서쪽 폐구(廢丘)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와 그렇게 알리는 군사에게 항왕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장이가 싸움에 져서 봉지를 잃었다면 응당 패왕인 과인에게로 와서 알려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찌하여 서쪽으로 달아나 폐구로 갔는가?”
“그곳에 있는 한왕 유방에게 의탁해 간 듯합니다. 듣기로 한왕은 장이를 예절바르게 맞아들였을 뿐더러 그지없이 두텁게 대접하였다고 합니다.”
눈치 없는 군사가 그렇게 대답했다.
장이가 한왕 유방에게로 달아났다는 말에 항왕은 울컥 화가 치솟았다. 그러나 소식을 가져온 군사의 잘못이 아니라 그를 꾸짖지는 못하고,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그럼 조나라는 그 뒤 어떻게 되었는가?”
“장이를 내쫓은 진여는 대왕(代王)으로 밀려나 있던 전 조왕(趙王) 헐(歇)을 다시 맞아들여 왕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에 조왕은 진여를 고맙게 여겨 그를 자기 봉지(封地)인 대나라 왕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진여는 조왕이 허약한 데다 조나라도 모든 것이 이제 막 새로 정해진 터라, 새로 얻은 자기 나라인 대(代)로 갈 수 없었습니다. 조왕 곁에 머물러 그를 도우면서, 조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고 있다고 합니다.”
“그럼 대나라는 비어있다는 말이냐?”
“그렇지는 않습니다. 진여는 제 밑에 두고 부리는 하열(夏說)을 상국(相國)으로 삼아 대나라에 보내 그 땅을 지키게 하였다고 합니다.”
진여나 조왕은 모두 항왕의 논공행상과 분봉(分封)에 불만을 품어온 자들이었다. 조나라가 안정되는 대로 자기들을 도와준 제왕(齊王) 전영과 손을 잡고 패왕에게 맞서올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들이 힘을 합치기 전에 제나라부터 서둘러 쳐 없애야 했다.
“일이 급하게 되었다. 어서 아부(亞父)를 모셔 오라!”
동북의 소식을 가져온 군사를 내보낸 항왕은 좌우를 재촉해 범증을 불러오게 했다. 의제를 죽이는 논의에서는 범증을 뺐으나, 이제 사정은 달라졌다. 무엇보다도 그는 대군을 움직이거나 나라의 큰 계책을 의논하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군사(軍師)였다.
오래잖아 상복차림의 범증이 어두운 얼굴로 항왕 앞에 나타났다. 의제의 죽음조차 숨길 수는 없어 그날 아침 경포가 보낸 글을 보여준 때문인 듯했다. 항왕이 진여와 조나라의 소식을 일러주며 군사를 내기를 서둘렀으나 범증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의제의 상중(喪中)이라 군사를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주(周) 무왕(武王)은 문왕(文王)의 상중에 군사를 일으켜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배척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세 군자들의 논란거리가 되었습니다.”
거기에 다시 한왕 유방이 함곡관을 넘었다는 소식이 들어와 제나라로 향하는 항왕의 발목을 잡았다.
샛길로 달아나 함곡관을 넘은 장량이 관중(關中)으로 들어간 것은 한왕 유방이 아직 폐구(廢丘)에 머무르고 있을 때였다. 한왕은 대쪽을 쪼개는 듯한 기세로 옹왕 장함을 죽이고 새왕 사마흔과 적왕 동예의 항복을 받아 삼진(三秦)을 평정했다고는 하나 아직 관중이 온전히 한나라 영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왕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도읍만 빼앗는다고 그 땅이 평정된 것이 아님을 잘 아는 한왕은 진작부터 장수들을 여러 곳에 나누어 보내 옛 진나라 땅을 차근차근 거두어들여 왔다. 진나라의 학정에 시달려온 데다 수십만 자제를 데려가 죽게 한 장함을 미워하는 관중 백성들은 대개 한군(漢軍)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하지만 삼진의 왕이 모두 항복한 뒤에도 여전히 세상이 바뀌었음을 알지 못해 맞서는 곳이 있었으니, 농서(隴西)와 북지(北地)가 그랬다.
한왕은 역상(酈商)을 농서도위(隴西都尉)로 삼고 따로 한 갈래 군사를 나눠주며 농서와 북지를 치게 했다. 그러나 북지에서는 장함의 아우 장평이 무리와 함께 버티고 있었으며, 어찌된 셈인지 농서도 군민이 한 덩이가 되어 한군에 굳게 맞서왔다. 이에 한왕은 삼진의 항복을 받자마자 다시 장군 근흡(靳歙)에게 한 갈래 군사를 딸려주며 역상을 돕게 했다.
“관중을 온전히 평정하지 않고는 함곡관을 나갈 수 없다.”
한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른 몇 곳에도 군사를 갈라 보내고 자신은 대군과 함께 폐구에 머물러 잠시 숨을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함곡관에서 빠른 말로 달려온 군사가 알렸다.
“장(張)자방 선생께서 며칠 전 관(關)으로 드셨습니다. 홀로 먼 길을 무리해 달려오시는 바람에 노독(路毒)이 들어 지금 수레로 모셔오고 있는 중입니다. 대왕께서 기뻐하실 일이라 여겨 특히 이렇게 달려와 아룁니다.”
장량이 강건하지 못하다는 것은 한왕도 잘 알고 있었다. 도인(導引)이나 벽곡(辟穀) 같은 도가(道家)의 비법으로 몸을 단련하고 있었지만 장량은 평소에도 길이 멀면 말보다는 수레를 타야 할 만큼 허약했다. 거기다가 또 지난봄 포중(褒中)에서는 그렇게 붙잡아도 기어이 한왕(韓王) 성(成)을 찾아 떠난 사람이었다. 그런 장량이 여섯 달도 안돼 그리 급하게 관중으로 되돌아왔으니 한왕은 그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방 선생이 갑자기 무슨 일이라더냐? 어쩐 일로 몸져누울 만큼 다급하게 관중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다더냐?”
“선생께 직접 들은 바는 없으나, 관외(關外)에 풀어놓은 눈과 귀로 알게 된 바로는 항왕에게 죄를 입은 것 같습니다. 새로 한왕(韓王)이 된 정창도 군사를 풀어 누군가를 쫓고 있고, 섬성(陝城)의 군사를 배로 늘린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도 함곡관으로 드는 길을 엄하게 끊고 있는데, 둘 모두가 항왕의 명을 받아 자방 선생을 사로잡으려 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때 곁에서 듣고 있던 한신이 불쑥 말했다.
“신이 헤아리기로는, 그렇다면 한왕 성은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대장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한왕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한신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차분하게 대답했다.
“한왕(韓王) 성(成)이 이렇다 할 공도 없이 왕이 된데다, 자방선생 때문에 대왕을 돕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오던 항왕은 그를 팽성으로 끌고 가 열후(列侯)로 낮추고 감시해왔습니다. 이제 여러 가지로 미루어 헤아리건대 항왕이 기어이 한왕 성을 죽이고 자방선생마저 죽이려 한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선생이 먼저 그 낌새를 알아차리고 급하게 몸을 피하다 보니 홀로 먼 길을 무리하여 달릴 수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한왕(漢王) 유방은 한편으로는 한왕 성이 가여워 마음이 어두워졌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은근히 기쁘기도 했다. 망해버린 조국 한(韓)나라에 대한 장량의 집착도 남달랐지만, 한왕 성이 자신이 세우다시피 한 왕이라 장량이 더욱 그에게 집착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이제 한왕 성이 죽었으니 장량은 갈데없이 한왕 유방 곁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항왕이 아무리 포악한들 설마 그렇게 함부로 한왕을 죽이기야 했겠소? 갑자기 쫓기게 된 연유는 자방선생이 오면 듣기로 하고, 당장은 과인의 꾀주머니[지낭]같은 선생을 맞을 채비나 해야겠소.”
한왕은 그런 말로 기쁜 마음을 감추고, 다시 근시들에게 소리쳤다.
“어서 수레를 내어 먼 길 떠날 채비를 하라. 내 몸소 함양까지 가서 자방 선생을 맞이할 것이다.”
말뿐이 아니었다. 한왕은 다음 날로 어가(御駕)를 내어 함양으로 떠났다. 그리고 타다 남은 함양 별궁에 거처를 정하고 장량이 이르기를 기다렸다.
장량도 다음날로 함양에 이르렀다. 수척한 얼굴로 수레에서 내린 장량은 한왕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말하였다.
“이제 아비 할아비의 나라 한(韓)은 다시 망하고, 그 왕실의 핏줄은 끊어졌습니다. 삼대(三代)에 걸친 은의를 갚을 곳도 목숨 바쳐 섬길 주인도 없어졌으니, 신(臣) 량(良)이 어디다 이 외로운 몸을 의탁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서초(西楚)를 쳐 없애고 항왕을 죽여 조국과 망주(亡主)의 원한이나 풀어주신다면 신은 대왕을 섬겨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겠습니다. 신에게는 따로 대군을 이끌고 싸움터를 내달릴 장재(將材)는 없으나, 장막 안에서 천리 밖의 일을 도모하는 주책(籌策)은 있습니다.”
실로 그랬다. 그로부터 죽어 헤어질 때까지, 장량은 장수가 되어 따로 군사를 이끄는 법 없이 언제나 책신(策臣)으로 한왕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장량과 함께 폐구로 돌아온 한왕은 그날로 한(韓)나라 양왕(襄王)의 얼손 한신(韓信)을 불렀다. 전에 장량이 한왕 성을 왕으로 세울 때 장수로 삼은 이로, 그때는 유방의 장수가 되어 있었다.
“장군은 이제 한(韓) 태위(太尉)로서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무관(武關)으로 나아가라. 가서 때를 보다가 항왕이 세운 거짓 왕 정창을 치고 한나라를 되 일으키라. 나도 곧 함곡관을 나가 무도한 패왕과 천하를 두고 자웅을 결하리라!”
한왕은 한(韓) 태위 신(信)에게 그렇게 명을 내려 망국의 한을 씻어달라는 호소에 응함과 아울러 장량을 성신후(成信侯)로 높여 그 울적한 심사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며칠 안돼 또 다시 반가운 소식이 폐구로 날아들었다.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가 약간의 장졸을 거느리고 함곡관으로 쫓겨 와 받아들여 주기를 청해왔습니다. 심하게 몰리는 눈치라 받아들여 주었더니, 이제는 폐구로 가서 대왕을 찾아뵙겠다고 합니다.”
그 같은 전갈을 받자 한왕 유방은 너무 뜻밖이라 잠시 어리둥절했다. 장량과 대장군 한신을 불러놓고 물었다.
“상산왕이라면 바로 옛날의 조왕(趙王) 아니요? 넓고 기름진 조나라 땅을 봉지로 받은 데다, 그 왕 장이는 또 현능하기로 이름난 사람인데 누구에게, 어찌하여 나라를 잃고 고단하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단 말이요?”
둘 중 더 오래 관외(關外)에 있었던 장량이 아는 대로 말했다.
“이는 아마도 진여(陳餘)의 짓일 겝니다. 장이와 진여는 지난날 서로를 위해 목을 내놓아도 아깝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으나, 거록(鉅鹿)의 싸움 때 한번 틀어지고는 끝내 옛 정분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특히 항왕이 장이를 상산왕으로 삼아 조나라를 주고 조왕 헐(歇)은 대왕(代王)으로 내치자, 진여는 장이와 한 하늘을 일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항왕에게 반기를 들자 그와 짜고 장이를 급습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장이는 마땅히 저를 상산왕으로 세워준 항왕에게로 달아나 구원을 청하는 것이 옳지 않겠소?”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만약 장이에게 고를 겨를이 있었는데도 항왕을 마다하고 대왕을 찾아왔다면 이는 몹시 경하할 일입니다.”
“장이가 날 찾아오는 것이 무슨 경하할 거리가 되오? 만약 항왕이 장이에게 화를 내면 오히려 우리에게 짐만 되는 게 아니겠소?”
그러자 이번에는 한신이 나서 말했다.
“항왕이 화를 낸다면 먼저 자신이 세운 왕을 함부로 공격해 내쫓은 전영과 진여에게 일 것입니다. 특히 전영은 이미 전도(田都)와 전불(田불)을 죽여 두 번이나 항왕의 속을 긁어둔 바 있어 이제 더는 용서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인은 장이를 어찌 대접해야 하겠소?”
한왕의 그 같은 물음에 장량이 다시 받았다.
“반갑게 맞아들여 후하게 대접하셔야 합니다. 비록 지금은 나라를 잃고 쫓기는 몸이 되었지만 장이는 결코 만만하게 볼 인물이 아닙니다. 장차 대왕께서 천하를 다투시려면 반드시 크게 써야 할 인물입니다.”
이에 한왕은 장이를 폐구로 불러들이게 했다. 과연 세상은 헛소문을 전하지 않아 만나보니 장이는 나이가 들어도 헌걸찬 장부요 호걸이었다. 자잘한 원한보다는 크고 넓은 포부로 한왕을 속 시원하게 해주었다.
한왕이 폐구를 떠나 함곡관을 나가볼 생각을 하게 된 것도 그런 장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폐구에서 쉰 지도 한 달이 다 된데다, 장량이 자기 사람이 되어 돌아오자 더욱 기세가 오른 한왕은 장이의 은근하면서도 끈질긴 권유에 다시 한 번 대망의 나래를 펼쳤다.
한(漢) 2년 시월 중순 한왕 유방은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함곡관을 나와 관동으로 밀고 나아갔다. 아직 농서와 북지가 평정되지 않았으나 장량과 장이가 잇따라 찾아와 알린 중원의 소식이 더는 한왕을 폐구에 쉬고 있을 수 없게 했다.
홍수처럼 함곡관을 빠져나온 7만 한군(漢軍)이 동쪽으로 한나절도 가기 전에 군사가 터질 듯 들어찬 섬성(陝城)이 앞을 가로 막았다.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이 패왕의 명을 받아 군비를 크게 증강한 성이었다. 척후를 보내 그와 같은 섬성 안의 사정을 알아낸 한신이 한왕을 찾아보고 가만히 말했다.
“섬성은 관동에서 보면 함곡관과 대적하고 있는 형세라 원래도 만만치 않은 성인데다, 지금은 항왕을 두려워하는 5만 군민(軍民)이 힘을 다해 지키고 있습니다. 힘으로 급하게 떨어뜨리자면 적지 않은 우리 장졸을 잃게 될 것이니 실로 걱정입니다. 차라리 우회(迂廻)로서 계책을 삼아 먼저 하남왕이 도읍하고 있는 낙양부터 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낙양은 이곳에서 5백리나 되고, 도중에는 신안(新安)처럼 작지 않은 현성(縣城)들도 여럿 있소. 만약 그들을 뒤에 두고 낙양으로 갔다가 그들이 뒤에서 들이치면 그때는 어쩌겠소?”
한왕이 걱정스런 얼굴로 그렇게 되물었다.
“신이 헤아리기로 그런 일은 없을 듯합니다. 섬성 뿐만 아니라 하남(河南)의 여러 현읍(縣邑)이 모두 굳게 성을 지키는 듯 보이는 것은 명을 내린 항왕을 진심으로 따르고 우러러서가 아닙니다. 그 힘을 두려워해서일 뿐이니, 항왕의 노여움을 사지 않을 정도로 지키는 것만 중하게 여길 뿐, 스스로 성을 나와 싸우려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약간의 군사를 남겨 에워싸고 있는 시늉만하면, 그들은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그저 지키기만 할 터, 어찌 우리가 등 뒤로 적을 맞게 되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낙양은 예부터 알려진 큰 성이요 하남왕 신양의 도읍이니, 작고 이름 없는 현읍들과는 다를 것이오. 더구나 하남왕 신양도 군사를 부릴 줄 아는 장수인데다, 왕이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성안에서 굳게 버티면 하루 이틀로는 떨어뜨릴 수 없을 것이외다. 그래서 날짜를 끄는 사이에 하남 각지에서 구원이 모여들면 그 아니 위태로운 일이겠소?”
한왕이 다시 걱정스레 물었다. 한신이 차근차근 그런 한왕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신양은 항왕의 재촉에 쫓겨 군사들을 모두 서쪽으로 보낸 터라 낙양에 남은 군사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우리가 지름길로 달려가 대군으로 낙양을 에워싸면 너무 뜻밖이라 놀란 나머지 싸울 마음이 없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을 보내 달래면 싸우지 않고도 신양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때 함께 있던 장량이 가만히 웃으며 끼어들었다.
“하남왕 신양을 달랠 사람은 상산왕 장이겠지요?”
한왕도 신양이 한때 장이를 섬긴 적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따로 공을 세워 나란히 왕이 된 마당에 옛 주인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줄 것 같지 않았다. 못미덥다는 듯 고개를 기웃거리며 물었다.
“그도 한 왕이 되었는데 이제 와서 상산왕의 말을 들어주겠소? 더구나 상산왕은 진여에게 땅까지 뺏기고 외롭게 쫓기는 신세인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은 상산왕 장이가 조나라의 승상으로 있을 때 미천한 졸오(卒伍)에서 뽑아 올려 장수로 삼은 사람입니다. 또 신양이 항왕에 앞서 하남을 휩쓸 수 있었던 것도 장이의 총애가 밑천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장이가 그에게 조나라의 대군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신양이 하남왕이 된 것도 실은 그때 항왕의 신임을 받던 장이가 주선한 덕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장량이 옆에서 그렇게 거들었다. 그제야 한왕 유방도 고개를 끄덕이며 상산왕 장이를 불어오게 했다.
불려온 장이가 하남왕 신양을 달랠 수 있다고 장담하자 한왕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한신의 계책을 따랐다. 조참에게 5천 군사를 남겨주며 허장성세(虛張聲勢)로 섬성을 에워싸고 있게 하고 자신은 대장군 한신과 더불어 대군을 낙양으로 몰아갔다.
그때 장량이 다시 한 계책을 내었다.
“무관에 있는 한(韓) 태위 신(信)에게 명하시어 군사를 이끌고 한나라 땅으로 나오게 하십시오. 한나라를 수복한 뒤에 대왕의 본진에 합류하라 이르시면, 비록 항왕이 세운 한왕(韓王) 정창을 이기지는 못한다 해도, 정창이 감히 하남을 구하러 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하남왕 신양의 뒤를 끊는 일이 되기도 하니, 나중에 상산왕이 그를 항복하도록 달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왕도 들어보니 그럴듯했다. 곧 사람을 무관으로 보내 한 태위 한신으로 하여금 동쪽으로 군사를 내게 했다. 급히 정창을 치고 한나라 땅을 되찾은 뒤 한왕의 본진에 합치라는 명이었다.
인마가 닫기를 배로 하여 밤낮으로 나아가니 한군(漢軍)은 그 뒤 열흘도 안돼 낙양에 이를 수가 있었다. 도중에 있는 하남의 현성(縣城)들도 섬성처럼 적은 군사를 남겨 깃발과 함성만으로 에워싼 척하거나 길을 돌아 피해온 터라, 낙양 성안에서 느끼기에는 한나라의 대군이 불쑥 땅에서 솟은 듯하였다.
이때 하남왕 신양은 낙양에 머물면서 불안한 마음으로 관중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항왕의 재촉에 이끌고 있던 병마(兵馬)를 갈라 섬성을 비롯한 관동(關東)으로 드는 길 어귀 현성들에 나누어 보낸 탓이었다. 그때 낙양 성안에 남은 군사는 늘고 힘없는 이졸(吏卒)을 합쳐도 2만을 다 채우지 못했다.
오래잖아 섬성이 한군에 에워싸였다는 급한 전갈이 오고, 잇따라 신안에서도 한의 대군이 성을 에워쌀 기세라는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그러나 하남왕 신양에게는 이미 원병을 보내려 해도 더는 보낼 군사도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며 팽성만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한군이 나타나 낙양성을 에워쌌다.
“팽성에 급히 사람을 보내 패왕께 위급을 알려라. 또 양적(陽翟)에도 사람을 보내 한왕(韓王)에게 구원을 청해라.”
아직도 패왕의 제후일 뿐인 하남왕 신양은 먼저 그렇게 명을 내려 저희 편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당장은 힘을 다해 버텨 보기로 했다. 그런데 양적에서 선수라도 치듯 신양의 기운을 빼는 소식이 왔다. 한왕 정창이 사자를 보내 오히려 구원을 청해온 일이 그랬다.
<한왕 유방의 장수 중에 스스로 한(韓)나라 태위(太尉)라 일컫는 신(信)이란 자가 대군을 이끌고 무관을 나왔습니다. 과인을 죽여 팽성에서 죽은 전 한왕(韓王) 성(成)의 원수를 갚고, 과인의 땅을 뺏어 옛 한나라를 되일으키겠다는데, 그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습니다. 이제 있는 대로 군사를 긁어모아 양성(陽城)어름에서 막아보려 하나 아무래도 한신(韓信)의 기세에 미치지 못하는 듯해 걱정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 했습니다. 대왕과 과인은 봉지(封地)가 이어져 있어 서로 의지하는 이치가 이와 입술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부디 한 갈래 군사를 보내시어 과인과 한나라를 도와주시고, 아울러 머지않아 대왕께 닥칠 앞날의 근심을 미리 없애도록 하십시오.>
하남왕 신양은 한왕 정창의 그 같은 글을 받자 온 몸에서 힘이 죽 빠졌다. 그런데 다시 기막힌 소식이 들려왔다. 팽성으로 보낸 사자가 한군(漢軍)에게 사로잡혀 귀를 베이고 돌아온 일이었다.
신양은 실로 막막했다. 관중의 심상찮은 움직임에 손을 쓴다고 썼는데도, 하루아침에 외로운 섬처럼 한나라 대군에 에워싸인 처지가 되고 만 까닭이었다. 그것도 빠른 구원조차 바랄 수 없게 되었으니, 스스로 둘러보아도 그 모든 일이 도무지 실감나지 않았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낙양성을 에워싼 한군의 움직임이었다. 무엇을 기다리는지 이틀이 지나도록 화살 한 대 날려 보내지 않았다.
“어찌된 셈인가? 한군은 어찌하여 이틀이 지나도록 가만히 우리를 바라보고만 있는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신양이 몇 안 되는 장수들을 불러 놓고 물었다. 그 까닭이 궁금하기는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추측으로 군신(君臣)이 함께 궁금함을 풀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루(門樓)쪽을 지키던 장수에게서 급한 전갈이 왔다.
“어떤 사람이 문루 앞에서 대왕께 뵙기를 청합니다.”
“그게 누구라더냐?”
신양이 전갈을 가지고 온 군사에게 물었다. 그 군사가 들은 대로 대답했다.
“조(趙)나라에서 온 장(張) 아무개라 하였습니다.”
신양은 그게 누군지 얼른 알 수는 없었으나, 같은 고향 사람이라는 바람에 만나보기로 했다. 그런데 문루 위에 나가 보니 옛 주인 장이가 말 등에 높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대왕께서 어인 일이십니까? 어찌하여 이렇게 오셨습니까?”
신양이 놀라 두 손을 모으며 장이에게 그렇게 물었다.
신양도 장이가 진여에게 나라를 뺏긴 일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말할 것도 없이 장이는 팽성으로 달려가 그 일을 알리고, 패왕의 힘을 빌려 원수를 갚을 줄 알았다. 아니면 적어도 제나라와 조나라의 반역을 다스리려고 패왕이 일으킨 대군의 선봉이라도 되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난데없이 한왕 유방의 대군 속에 섞여 왔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남왕은 그간 별고 없으셨는가? 내 오늘은 특히 하남왕에게 권할 일이 있어 왔네.”
장이가 옛 주인의 정을 담아 그렇게 말했다. 신양도 지난날의 공손함을 잃지 않고 받았다.
“어떤 경위로 이리 오시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대왕께서는 제 일생의 은인이십니다. 무슨 일인지 말씀하십시오.”
“하남왕은 내가 한왕(漢王)의 군중에 있는 게 의아스러울 것이네. 항왕이 나를 상산왕으로 세웠으니 나는 마땅히 팽성으로 달아나 항왕 밑에서 내 나라를 되찾을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잃고 쫓기다 보니 문득 깨달은 게 있어 나는 한왕께서 머무시는 폐구로 가게 되었네. 곰곰이 따져 보면 나를 쳐서 내쫓은 것은 의리부동한 진여(陳餘)나 포악한 전영(田榮)이 아니었네. 항왕의 공평하지 못한 분봉(分封)이요, 그 거칠고 모진 다스림이었네. 곧 천하는 시랑이 같은 진나라의 황제를 내쫓았으나 그보다 더 사납고 무서운 호랑이를 맞은 격이 되고, 진여와 전영은 그런 항왕에게서 떠난 민심을 등에 업고 일어난 걸세. 하남왕이 보기에도 과연 항왕이 천하를 온전히 담을 만한 그릇으로 보이는가?”
장이가 그렇게 묻고 잠시 숨을 고르며 문루 위에 나와 선 하남왕 신양을 올려 보았다. 신양이 굳은 얼굴로 듣고 있다가 담담하게 받았다.
“제가 어떻게 감히 천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다만 패왕께서는 거록(鉅鹿)의 싸움 이래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분이라 그 명을 받들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천명이 아니라 일시적인 세력일세. 불같이 노해 큰칼 휘두르며 적장을 쳐 죽이고 제멋대로 하기가 양떼 같은 군사들을 길들인 이리떼처럼 몰아 싸움터를 휩쓰는 것과 높이 남면(南面)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일은 다르네. 그런데 한왕께서는 너그럽고 어질어 백성들을 부모처럼 싸안고 보살피시니 지난번에는 관중의 백성들이 한왕께서 관중왕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였고, 이제는 천하 만민이 한왕께서 천하의 주인이 되지 못할까 걱정하네. 천하의 주인 될 이가 있다면 바로 이런 분이 아니겠는가. 내 옛날의 정분에 의지해 하남왕에게 권하겠네. 이제 천하의 주인은 정해졌으니, 더는 자존망대(自尊妄大)한 항왕을 도와 천명에 맞서지 말게. 우리 한왕께 항복하여 함께 한 주인을 모시고 저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를 다시 열어 보는 게 어떤가? 이제부터 날 저물 때까지 여유를 줄 것이니 깊이 헤아려 마음을 정하게. 나는 이만 물러가려니와 한왕을 너무 기다리게 해서는 아니 되네. 한나라 10만 대군도 오늘밤을 더 기다려줄 것 같지는 않네.”
장이는 그렇게 말하고 말머리를 돌려 한군의 진채로 돌아가 버렸다. 이미 장이 쪽으로 마음이 반나마 기울어져 성안으로 들어간 하남왕 신양은 다시 대신들과 장수들을 모아 의논했다. 하지만 그들이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달리 길은 없었다. 거기다가 장이의 뜻을 어기지 못하는 신양의 옛정이 더해지니 결국 성안의 결정은 항복이 되었다.
그날 날이 저물기도 전에 하남왕 신양은 낙양 성문을 활짝 열고 걸어 나와 한나라에 항복했다. 한왕이 함곡관을 나온 뒤로 처음 받아내는 항복이었다.
그런데 그 항복을 받는 데서 한왕 유방은 다시 패왕 항우와는 다른 일면을 보여주었다. 자신에게 천하를 다스릴 제도를 고를 기회가 왔을 때, 패왕은 당연한 듯 분권적(分權的)인 옛 봉건제를 부활시켰다. 그러나 한왕은 관중에서 이미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시황제 시절의 군현제(郡縣制)를 되살려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의 의지를 내비쳤다. 하남왕의 봉지를 하남군(河南郡)으로 삼고 한(漢)나라를 직접 다스리는 땅으로 만든 일이 그랬다. 전에 옹(雍) 새(塞) 적(翟) 세 나라로 나누어져 있던 옛 진나라 땅에다 위남군(渭南郡)과 하상군(河上郡) 상군(上郡)을 둔 것과 마찬가지였다.
낙양성 안이 안정되자 한왕 유방은 하남군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그냥 새로 얻은 땅을 으스대며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현읍(縣邑)의 실정을 살피고 그곳 부로(父老)들을 모아 위로하는 자리를 만드는 게 그 목적이었다.
“듣기로 나이든 이에게는 고기가 아니면 배부르지 않고 비단옷이 아니면 따뜻하지 않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 어르신은 거듭된 전란으로 연명할 곡식조차 넉넉하지 않고 베 조각으로도 몸을 가리기 어려우니, 비록 내 죄는 아니나 실로 만나 뵙기가 송구스럽습니다. 그러하되 어려운 때가 있으면 즐거운 때도 있기 마련, 여러 어르신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늘과 사람이 아울러 도와 과인이 무도한 도둑 떼를 쓸어버리는 날에는 반드시 옛말하고 살 만큼 평온하고 넉넉한 시절이 올 것입니다.”
한왕은 그런 말로 전란에 놀란 부로들의 가슴을 쓸어주고 그 어려움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리고 군사들을 단속하여 터럭만큼도 백성들을 해치지 못하게 하니, 관중에서처럼 하남의 인심도 한나라로 흠뻑 쏠렸다. 뒷날 천하를 다투는 이들이 되풀이 흉내 내는 혁명의 전략전술이었다.
그 사이 시월이 가고 동짓달 모진 추위가 시작되었다. 하남군을 대강 돌아보고 낙양으로 돌아온 한왕에게 대장군 한신이 말했다.
“이제 하남을 평정하셨으니 서위(西魏)로 올라가 보심이 어떻겠습니까? 서위를 차지하면 바로 조나라의 문턱에 이르니, 틈을 보아 상산왕 장이의 한도 풀어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량은 생각은 달랐다.
“상산왕의 한을 풀어준다는 것은 조나라를 쥐고 흔드는 진여와 제왕(齊王) 전영을 아울러 적으로 삼는다는 뜻입니다. 아직 항왕이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노려보고 있는데, 강한 적을 둘씩이나 만들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어 반대를 드러냈다. 한왕도 한겨울에 군사를 움직이는 게 마음 내키지 않았다.
“등 뒤가 되는 한(韓)나라가 여태 평정되지 않았는데 관중에서 그렇게 멀리 나아가도 괜찮겠소? 더구나 지금은 엄동이라 성안에 머물러 지키기는 좋으나 먼 길을 가서 굳게 지키는 성을 치기는 좋지 않은 철이오.”
그런 말로 엉거주춤 낙양에 머물러 있는데, 갑자기 양성에서 사자가 달려와 알렸다.
“삼가 승전보를 아룁니다. 대왕의 명을 받들어 무관을 나온 한(韓) 태위께서 한왕(韓王) 정창을 쳐부수고 그 왕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지난 달 중순 한왕은 장량의 말대로 한 태위 신(信)을 무관에서 불러냈지만 그가 그렇게 정창을 이길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태위 한신에게 맡긴 군사가 많지 않은데다, 상대인 정창이 예사 장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항우가 여러 장수들 중에서도 특히 아끼고 믿어 대군을 주며 무관을 지키러 보낸 터였다.
“과인이 한 태위에게 딸려준 군사는 기껏 1만 명을 넘지 않았다. 무슨 수로 정창의 대군을 이겼단 말이냐?”
한왕이 믿지 못해 한태위 신의 사자에게 그렇게 물었다. 사자가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일러주었다.
“한(韓) 태위께서는 전에 대왕께서 남전(藍田)을 치실 때 쓰신 계책을 흉내 내어 먼저 허장성세로 한왕(韓王) 정창(鄭昌)의 눈과 귀를 속였습니다. 무관을 나오자마자 널리 의병(疑兵)의 깃발을 세워 3만 군세로 위장하고는 멀리 양적(陽翟)의 정창에게 전서(戰書)를 내어 남양(南陽)에서 일전을 벌이자고 한 것입니다. 호랑이의 위세를 업은 여우처럼 항왕의 뒷받침만 믿고 그리 많지 않은 군사로 한나라를 지키고 있는 정창에게는 3만도 감당하기 어려운 대군입니다. 그런데 다시 남양은 왕릉(王陵) 장군이 오래 둥지를 틀고 있던 땅이라 아직도 우리 한나라를 따르는 세력이 많으니, 정창은 싸우기에 앞서 겁부터 먹었습니다. 한편으로는 팽성에 급히 구원을 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남왕 신양에게 사자를 보내 도움을 구하면서 며칠을 양적에서 머뭇거렸습니다.”
“신(信)에게 그런 꾀가 있었단 말인가? 겉보기와는 다르구나.”
한왕 유방이 사자의 얘기를 듣다가 너털웃음과 함께 그렇게 말했다. 한(韓) 태위 신(信)의 큰 키와 항시 희번덕거리는 듯한 굵은 눈망울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한왕의 웃음을 칭찬으로 알아들은 사자가 한층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하남왕 신양은 대왕께 에워싸여 정창을 도울 겨를이 없고, 항왕은 군사는 보태주지 않으면서 싸움만 재촉하니, 정창은 하는 수 없이 양적에서 2만 군사를 긁어모아 남양으로 떠났습니다. 자신이 없는 싸움을 하러 가는 길이니 행군인들 제대로 되겠습니까? 하룻길을 걸어 겨우 양성(陽城)에 이른 정창은 성 밖에 진채를 내리고 군사들을 쉬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한 태위께서 이끈 우리 군사가 정창의 진채를 급습하여 여지없이 짓밟아 버렸습니다.”
“정창이 그렇게 만만한 장수가 아니다. 거기다가 한 태위는 남양에 있다 했는데 어떻게 3백리나 떨어진 양성을 소리 소문 없이 급습할 수 있었느냐?”
이번에는 한왕이 궁금하다는 눈길로 물었다. 다시 한 번 숨을 고른 사자가 답했다.
“한 태위께서는 남양으로 간 적이 없습니다. 무관을 나오신 뒤 노약한 군사와 마구잡이로 모아들인 농군들만 요란스러운 깃발을 앞세워 남양으로 향하게 하고, 태위께서는 젊고 날랜 군사 5000을 골라 처음부터 양적으로 바로 달려갔습니다. 다만 보는 눈이 많은 큰길을 피하고 몰래 밤길을 달리느라 오히려 양성에 이른 게 더뎌졌을 뿐입니다. 따라서 그 야습은 남양만 바라보고 있던 정창에게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매서운 일격이었을 것입니다.”
“정창은 그날 밤 양성에서 항복하였느냐?”
“아닙니다. 정창은 용케 몸을 빼 양적으로 달아났으나, 다음날 하남왕 신양이 대왕께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성문을 열고 항복했습니다.”
그러자 한왕이 다시 빙긋이 웃으며 저잣거리의 노름꾼처럼 말했다.
“신(信)이 이번 패에 크게 걸었구나. 크게 따 마땅하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고 퍼뜩 정신이 들었던지 이내 군왕의 말투가 되어 덧붙였다.
“실로 과감한 돌진이었다. 그 땅을 얻을 만하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며칠 뒤 한 태위 신이 낙양에 이를 때까지는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한(韓) 태위 신(信)이 항복한 한왕(韓王) 정창을 앞세우고 낙양으로 온 것은 한(漢) 2년 동짓달 초(初)이렛날이었다. 성밖까지 나가 한 태위 신을 맞은 한왕 유방은 크게 잔치를 열어 싸움에 이기고 돌아온 장졸들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 흥겨운 잔치가 끝날 무렵 한왕은 여럿에게 알리듯 말했다.
“한 태위 신은 모든 것을 내던져 한나라 땅을 되찾고 정창의 항복을 받아냈다. 이제 왕이 되어서 자신이 싸워 얻은 땅을 다스릴 만하다. 신을 새 한왕(韓王)으로 봉한다.”
그 말에 곁에 있던 사람들은 비로소 며칠 전 한왕이 한 말의 뜻을 알아들었다. 관중에서나 하남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분봉(分封)을 시행한 것이었다. 그 뒤로도 한왕 유방은 종종 공을 세운 제후를 왕으로 봉하여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행시켰는데, 이 또한 정치제도나 통치방식에 대한 그의 유연한 자세를 짐작케 한다.
하루아침에 왕이 된 태위 신이 큰 키를 굽혀 절하며 사양하는 시늉을 했다.
“신(臣)은 대왕 곁에서 함께 싸우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온 한낱 무장입니다. 왕이 되고자 천리 길을 내달으며 싸운 것이 아닙니다. 부디 신에게 과분한 명은 거두어주십시오.”
그러나 내심으로는 은근히 바라고 있었음에 분명했다. 그가 쓰고 있는 기치와 의장(儀仗)은 ‘한(韓)’으로 벌써 한군(漢軍)과는 달리 쓰고 있었다. 이끌고 온 군사도 그랬다. 그새 1만으로 부푼 그들은 차림부터 번쩍이는 갑옷으로 치장한 듯 이채로웠는데, 그 사이 스스로를 한군(韓軍)이라 일컫고 있었다.
그와 같은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왕 유방이 다시 한 번 엄하게 권했다.
“공을 세워도 보답이 없으면 누가 목숨 걸고 싸우려 하겠는가? 한왕(韓王) 신은 너무 겸양하지 말라.”
태위 신이 못이긴 척 한왕 자리를 받아들이며 말했다.
“대왕의 지엄한 분부라 따르기는 합니다만 신은 어디까지나 대왕의 손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앞으로도 대왕 곁을 한 치도 떠나지 않고 목숨을 던져 안위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한왕(韓王) 신은 자기 군사 1만과 더불어 언제나 한왕(漢王) 유방 곁을 지켰다. 그 뒤 몇 번의 반복(反覆)이 있고, 마침내 한왕 신은 흉노의 앞잡이가 되어 한(漢) 제국(帝國)에 베임을 당하게 되지만, 그것은 또 그때의 일이다.
하남왕 신양에 이어 한왕 정창에게까지 항복을 받아내자 한군(漢軍)의 기세는 더욱 크게 떨쳤다. 그러자 이번에는 관동에서 따라온 장수들이 모두 들고 일어나 그대로 승세를 타고 동쪽으로 쳐나가기를 한왕 유방에게 졸라댔다. 매사에 생각 깊고 조심성 많은 장량이 다시 장수들을 말렸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장군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오. 항왕이 여러 달 째 팽성에 틀어박혀 꼼짝 않고 있다 해서 강대한 진나라를 쳐부수고 천하를 제패한 그 힘이 줄어든 것은 아니요. 그가 한번 움직이면 산이 뽑히고 바닷물이 넘치는 변고를 당할 것이니, 자는 범 콧등에 침을 놓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오. 먼저 사람을 풀어 팽성의 공기를 살피고, 항왕의 예봉이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를 알아본 뒤에 움직여도 늦지 않을 것이외다.”
한왕 유방도 장량과 뜻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수들을 달래 그대로 대군을 낙양에 머무르게 한 채 가만히 사람을 팽성에 들여보내 항왕의 움직임을 살펴보게 했다. 오래잖아 세작(細作)으로 갔던 자가 돌아와 알렸다.
“지난달 항왕은 제왕(齊王) 전영과 조나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일으켰으나, 대왕께서 함곡관을 나오셨다는 말을 듣고 출발을 미루었다 합니다. 그러다가 하남왕 신양과 한왕 정창이 모두 대왕께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이제는 서쪽으로 군사를 낼 채비를 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군사가 팽성 서쪽에 모여 먼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음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
한왕은 그 말에 홍문의 잔치가 떠오르며 절로 간이 떨려왔다. 아직은 패왕 항우의 그 엄청난 위세와 패기를 정면으로 받아낼 자신이 없었다. 적어도 그 불같은 예봉(銳鋒)은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때는 한왕 유방에게도 군주로서 지켜야 할 위엄과 품위가 있었다.
“옛말에 이르기를 만족할 줄 알면 위태로움이 없다(知足不殆) 하였소. 지난 8월 고도현(故道縣)의 옛길로 한중(漢中)을 빠져나온 이래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소. 멍석 말 듯 삼진(三秦)으로 밀고든 지 두 달도 안돼 세 왕을 모두 죽이거나 사로잡고, 드넓은 관중평야를 다 차지했소.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함곡관을 나온 뒤 이제 겨우 한달 남짓, 우리는 하남(河南)과 한(韓)나라를 평정하고 그 왕 신양과 정창의 항복을 받아내 위엄을 천하에 떨쳤소. 이만하면 만족해도 될듯하오. 거기다가 우리 장졸은 이제 지쳤고, 그들을 먹일 곡식과 싸움에 쓸 물자도 다해가오. 더하여 날은 차고 땅은 얼어붙어 대군이 행군하기에도 마땅치 않으니, 여기서 이만 물러나는 게 어떻겠소? 관중으로 돌아가 기력을 회복하고 곡식과 물자를 넉넉히 장만하였다가, 날이 풀리는 대로 다시 나오는 게 군사를 부리는 순리일 것이오.”
그렇게 팽성과 항왕의 말을 쑥 빼고 장수들을 달랬다. 대장군 한신도 이번에는 장량과 뜻을 같이 하여 그런 한왕을 거들었다. 그러자 동쪽으로 쳐들어가자고 우기던 장수들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불만스러운 대로 진채를 뽑아 관중으로 돌아갔다.
삼진을 차지한 뒤로 한왕은 도읍을 외진 남정(南鄭)에서 폐구나 함양으로 옮기려 했다. 특히 폐구는 옹왕(雍王) 장함이 도읍했던 곳이라 한왕은 내심 그곳을 새 도읍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함곡관을 들어서자 승상 소하(蕭何)가 보낸 이졸이 한왕을 기다리고 있다가 찾아와 말했다.
“승상께서 태자를 모시고 역양(轢陽)에서 기다리십니다. 대왕께서도 그리로 들라 하십니다.”
“파촉(巴蜀)에 있어야 할 승상이 어떻게 하여 역양에 있는가?”
한왕이 난데없어 하며 그 이졸에게 그렇게 물었다. 그 이졸이 들은 대로 알려주었다.
“대왕께서 군사를 이끌고 함곡관을 나가셨다는 말을 듣자 승상께서는 파촉에 있는 승상부(丞相府)를 닫고 관중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폐구와 함양을 두루 돌아보신 뒤에 마침내 역양에 자리 잡고 다시 승상부를 여셨습니다.”
역양은 새왕(塞王) 사마흔이 도읍했던 곳으로, 폐구나 함양에 비해 물이 멀고 외진 땅이었다. 한왕은 소하가 그곳을 도읍으로 고른 까닭이 궁금했지만 만나서 물어보기로 하고 역양으로 길을 잡았다.
며칠 뒤 한왕 유방이 역양((력,역)陽)에 이르러 보니 성안은 두어 달 전 새왕(塞王) 사마흔으로부터 항복을 받을 때와는 딴판이 되어 있었다. 성곽과 궁실(宮室)은 그새 새로 지은 듯 깨끗이 수축되어 있었으며, 거리도 전란의 시대 같지 않게 조용하고 가지런했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전보다 훨씬 늘어난 듯한 성안 백성들도 활기에 차 있었다. 모두 승상부를 파촉(巴蜀)에서 그리로 옮긴 승상 소하가 한 달 만에 바꾸어 놓은 역양의 모습이었다.
“폐구(廢丘)는 옹왕(雍王)의 도읍이었고 관중의 요충에 자리 잡은 땅입니다. 그러나 지난번에 우리 한군(漢軍)의 수공(水攻)을 당해 그 성은 허물어진 곳이 많고 백성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대왕의 도읍으로 삼기에는 마땅치 못했습니다. 또 함양(咸陽)은 진나라의 도성으로 오래 번성하였지만, 이제는 땅기운이 다해 새로 일어나는 우리 한나라의 운세를 감당해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거기에 비해 역양은 비록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끼고 있지는 않았으나, 잠시 행궁(行宮)이 머무르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땅입니다. 새왕 사마흔이 싸움 없이 항복한 덕분에 성 안팎이 온전하면서도, 적왕(翟王) 동예의 도읍이었던 고노(高奴)처럼 궁벽하지도 않으니, 한동안은 이곳을 우리 대한(大漢)의 도읍 삼아 썼으면 어떻겠습니까?”
새로 마련한 왕궁에서 한왕을 맞은 소하는 그렇게 물어 역양을 도읍으로 정한 까닭을 밝히는 것에 대신했다. 모든 일에 빈틈없는 소하가 정한 일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만 있던 한왕이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그렇지만 함곡관에서 너무 가까워 지키기에 어렵지 않겠소?”
“깊숙이 들어앉아 지키려고만 한다면 파촉이나 남정(南鄭)이 훨씬 더 좋은 도읍이겠지요.”
소하가 그렇게 말하고는 한왕을 달래듯 이었다.
“그렇지만 대왕께서는 곧 관외(關外)로 나가 중원(中原)의 사슴을 쫓으실 분입니다. 그때 관중에서 군사와 물자를 거두어 대왕의 뒤를 대기에는 함곡관에서 가까운 이 역양이 더 나을 듯합니다.”
그러자 슬며시 장난기가 인 한왕이 갑자기 소하를 나무라듯 말했다.
“승상은 전에 나를 파촉 한중으로 몰아넣지 못해 성화더니, 이제는 또 관외로 밀어내지 못해 안달이구려. 도읍을 어찌 당장 다스려야 할 땅을 보아 정하지 않고 멀리 나가 싸울 때를 위해 정한단 말이오?”
“신이 대왕께 파촉 한중으로 들기를 권한 것도 다시 관외로 나가 천하를 다툴 밑천을 장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삼진(三秦)까지 거두시어 밑천이 든든해지셨으니, 대왕께서는 마땅히 관외로 나아가 천하를 도모할 때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일이 일찍이 신이 헤아린 대로 되어가고 있는데, 어찌하여 대왕께서는 신을 한결같지 않다고 몰아대십니까?”
소하는 한번 웃는 법도 없이 그렇게 받고는 다시 덧붙였다.
“도읍을 옮긴다는 것은 나라를 옮기는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조정(朝廷)을 열 궁실을 마련해야 하며, 종묘(宗廟)를 옮기고 사직(社稷)을 새로 세워야 합니다. 새 도읍에 맞게 법령과 규약을 고치고, 현읍(縣邑)을 다스릴 제도도 다시 정비해야 하며…….”
소하가 그렇게 끝없이 할일을 늘어놓으며 복잡한 문서와 도적(圖籍)까지 꺼내자 그런 일에 밝지 못한 한왕은 이내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만 되었소. 내 더 묻지 않을 테니 이제부터 나라 안의 일은 승상이 모두 알아서 처결하시오.”
그렇게 소하의 입을 막은 한왕은 곧 안으로 들어가 그리로 옮겨온 가솔들을 만나 보았다.
그 사이 소하는 여치(呂雉)를 왕후로 세우고 어린 아들 영(盈)은 효혜(孝惠)태자, 딸은 노원(魯元)공주로 올려 한왕 유방이 없어도 아래위가 온전한 왕실(王室)을 짜놓고 있었다. 그들에게 예법을 가르치고 시중들 사람을 붙여 궁궐 안에서 살게 하니 풍읍(豊邑)의 농투성이 아낙이나 논두렁 밭두렁에서 뛰놀던 시골 개구쟁이들은 간곳이 없었다.
태공(太公)과 유오(劉C)도 잘 모셨다. 궁실에 못지않은 거처를 마련하고 따로 사람을 딸려 늙은 그들 부처를 정성들여 보살피게 했다. 뿐만 아니라 한왕의 형인 유백(劉伯)과 유중(劉仲)의 가솔들도 관중에 따라온 이들은 모두 살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뒤를 봐주고 있었다.
한왕이 함곡관을 나가 하남(河南)과 한(韓)나라를 치고 그들 두 왕의 항복을 받은 것은 파촉 한중을 나와 관중을 휩쓴 기세를 관외(關外)로까지 활짝 펼쳐본 셈이었다. 거기에 비해 당장은 앞길을 막는 세력이 없는데도 패왕의 위세에 지레 겁을 먹고 군사를 돌려 관중으로 돌아온 것은 비굴한 움츠림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왕은 역양에 든 지 열흘도 안돼 그 회군(回軍)이 비굴한 움츠림이 아니라 한층 드넓게 펼치기 위한 바닥 다지기임을 보여주었다. 먼저 역상(酈商)과 근흡(靳歙)에게 각기 적지 않은 장졸을 보태주고 아울러 글을 보내 하루빨리 농서와 북지를 평정하도록 재촉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관중 관외를 가리지 않고 크게 방을 써 붙이게 했다.
<대한(大漢)의 왕 유방은 함께 천하를 평정할 인재를 널리 구한다. 어느 땅에서 누구 밑에 있건, 우리 한(漢)나라에 군사 5000이나 현(縣) 하나를 바치면 장군으로 쓸 것이요, 군사 1만이나 군(郡) 하나를 바치면 만호후(萬號侯)에 봉하리라.>
대략 그와 같은 내용으로, 아직 귀순하지 않은 토호들이나 다른 제후를 섬기는 장수들을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소하도 관중의 자원을 거둬들이고 나누어 쓰는 법령을 새로 지어 관중에서 다시 시작하는 한(漢)나라의 바탕을 다져나갔다. 소하에게는 지난번 한왕이 아직 패공으로 함양을 차지했을 때 승상부(丞相府)와 어사부(御使府)에서 모조리 손에 넣은 진(秦)나라의 문서와 도적(圖籍)이 있었다. 그 문서와 도적에 따라 세금을 매기고 군사로 쓸 장정(壯丁)을 뽑으니, 육국(六國)을 쳐 없애고 천하를 아우른 진나라의 풍부한 자원은 그대로 한나라가 오롯이 차지한 듯하였다.
그 밖에도 소하는 제도를 고치고 새로운 질서를 정해 거듭된 전란으로 거칠어진 관중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켰다. 진나라 것이라고 쓸만한 것을 버리는 법은 없었으며, 전에 없던 것이라 해서 마땅히 세워야 할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또 옛 진나라 관리라도 유능하면 주저 없이 불러다 썼고, 전에 한신을 천거할 때 그러했듯 졸오(卒伍) 포의(布衣)라도 재주만 뛰어나면 무겁게 써주기를 한왕에게 힘써 권했다.
장량도 그런 소하와 함께 한왕이 민심을 거둬들이도록 도왔다. 어느 날 조용히 한왕을 찾아보고 말했다.
“관중은 진나라의 포악한 임금들과 시황제(始皇帝) 부자(父子)를 거치는 동안 곳곳에 백성들이 드나들 수 없는 땅이 생겼습니다. 진귀한 꽃과 나무를 심어놓고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동산[원]과 천자의 사냥에 쓸 날짐승과 들짐승을 기르는 숲[囿]과 궁중에 쓸 과일을 딸 과수를 기르는 들[園]과 제멋대로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못[池]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는 원래 백성들의 것이었으니 마땅히 백성들에게 돌려주어야 합니다.”
그와 같은 장량의 말을 한왕이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궁금한 게 있다는 듯 물었다.
“방금 전란에 시달리는 백성들에게는 보다 시급한 일이 많을 것이오. 그런데 하필이면 그리 넓지도 않은 왕실의 동산과 숲과 들과 물이겠소? 그리고 백성들에게 돌려준다 한들 논둑 밭둑도 없고 도랑도 쳐 있지 아니한 산과 들과 물을 어떻게 백성들에게 나눠준단 말이오?”
“옛적에 제선왕(齊宣王)이 맹자(孟子)에게 묻기를 ‘주(周) 문왕(文王)은 사방 70리가 되는 숲을 유(囿)로 가져도 백성들은 오히려 그걸 좁다 여겼는데, 나는 겨우 사방 40리의 유를 가졌건만 백성들이 너무 넓다 하니 어찌된 일이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의 유는 사방 70리가 되어도, 풀 베고 나무하는 백성들이나 토끼를 쫓고 꿩을 잡는 백성들이 마음대로 드나들며 왕과 함께 쓰니 백성들은 오히려 그걸 좁다 여긴 것입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비록 사방 40리 밖에 안 되는 유를 두셨으나, 그 안에서 사슴이나 고라니를 잡으면 사람을 죽인 것과 같이 벌한다 하니, 이는 나라 안에 사방 40리나 되는 함정을 판 것과 다름없습니다. 백성들이 어찌 그걸 넓다 여기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진나라의 군주들이 한 짓이 바로 제선왕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 동산과 숲과 들과 물을 엄한 법으로 얽어 마치 나라 안에 커다란 함정을 파놓은 듯하니, 비록 그 땅이 넓지 않아도 그 때문에 관중 백성들이 겪는 괴로움은 컸습니다. 거기다가 그 동산과 숲과 들과 못은 구태여 나누지 않고도 얼마든지 백성들에게 돌려줄 수 있습니다. 곧 엄한 진나라의 법이 금하던 바를 풀어 백성들로 하여금 함께 쓰게 하면 그게 바로 백성들에게 둘려주는 것이 됩니다.”
장량이 그렇게 차근차근 말해주었다. 듣고 난 한왕이 깊이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좌우를 돌아보며 큰소리로 명했다.
“이제부터 관중의 모든 원(苑) 유(囿) 원(園) 지(池)는 모두 원래의 임자인 백성들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백성들은 모든 산과 들에서 꼴과 장작을 얻을 수 있고 날짐승과 들짐승을 사냥해도 좋다. 또 관중의 모든 못과 소에서 마음대로 물고기와 자라를 잡아도 된다.”
도필리(刀筆吏)들이 그와 같은 한왕의 명을 방(榜)으로 써서 사방에 붙이자 관중 백성들은 또 한 번 한왕의 인정 많고 너그러움에 감격했다.
한왕은 또 하상군(河上郡)에 있는 요새와 진지들을 크게 수축하였다. 하상은 뒷날 풍익(馮翊)이라 불리게 되는 땅으로 역시 뒷날 경조(京兆)를 거쳐 장안(長安)이라 불리게 될 위남(渭南)의 왼팔 같은 곳이다. 당장 급하지도 않은 그곳의 방비를 그 어디보다 굳건히 한 것으로 미루어, 어쩌면 한왕은 그때 이미 장안을 뒷날의 도읍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정월에 들기 바쁘게 농서(隴西)에서 반가운 소식이 왔다. 농서도위 역상(酈商)이 보낸 사자가 역양((력,역)陽)으로 달려와 한왕에게 알렸다.
“도위(都尉)께서 마침내 농서를 모두 평정하셨습니다. 사흘 전 이양(泥陽)을 떨어뜨려 옹왕(雍王) 장함의 남은 세력을 모조리 쓸어버렸기로 이렇게 달려와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와 같은 사자의 말에 한왕이 흐뭇해하면서도 알 수 없는 게 있다는 듯 물었다.
“신성군(信成君) 역상이 결코 용렬한 장수가 아닌데 기껏해야 장함의 졸개들에게 이렇게 여러 달 끌려 다닌 까닭이 과인은 몹시 궁금하였다. 그동안 농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네가 아는 대로 말해 보라.”
그러자 사자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가 나름대로 간추려 말했다.
“도위께서 처음 상군(上郡)을 쳐서 그 현성(縣城)을 우려 뺄 때만 해도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옹왕 장함의 장수들이 여러 갈래로 군사를 나누고 흩어져 각기 현읍(縣邑)을 지키기 시작하면서 평정이 더뎌지기 시작했습니다. 죽기로 지킬 뿐만 아니라, 이웃 성에서 구원을 와 우리 등 뒤를 어지럽히니 성을 떨어뜨리는 데만 힘을 모을 수가 없었습니다. 특히 지난 섣달에 있었던 세 번의 싸움은 대왕께서 장함을 죽일 때에 못지않게 치열했습니다.”
“누가 어디서 그렇게 뻗대었단 말인가?”
“언지현(焉氏縣) 싸움에서 도위께 맞선 옹왕의 장수는 별로 이름 없는 자였으나 그가 이끈 군사들이 날래고 사나웠습니다. 듣기로는 옹왕 장함이 처음 함양을 떠날 때 죄수 중에서 뽑아 조련한 군사들의 일부라 하는데, 신안(新安)에서 용케 생매장을 면하고 살아남은 뒤로 장함에게 충성을 다했다고 합니다. 도위께서는 그들 1000여명이 지키는 언지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전군(全軍)을 들어 이레 밤 이레 낮을 싸우셔야 했습니다.
또 순읍(栒邑)에서는 옹왕 장함 밑에서 장군 노릇까지 한 주류(周類)와 싸웠는데 그 또한 예사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와 그의 졸개 30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기 위해 우리 한군(漢軍)도 그 못지않은 해를 입었습니다. 가까운 구원병이 없어 등 뒤 걱정 없이 사흘 만에 성을 떨어뜨릴 수 있었던 것만 해도 여간 다행이 아닙니다.
이양성 싸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성은 소장이라는 장수가 지키고 있었는데, 한때 옹왕 장함의 총애를 받았을 만큼 용맹과 무예가 뛰어난 자였습니다. 역시 열흘 가까이나 성을 에워싸고 기운을 뺀 뒤에야 소장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게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목을 얻게 된 것은 이틀 뒤 무성현(武成縣) 백성들이 그 목을 잘라 바쳐준 뒤였습니다.”
한왕은 거기까지 듣자 농서도위 역상이 얼마나 힘든 싸움을 해 왔는지 알 수 있을 듯했다.
“신성후 역상에게 무성현 6000호를 식읍(食邑)으로 내린다. 그를 따라 애쓴 장졸들에게도 비단과 금을 아낌없이 내려 그 고초를 위로해 주도록 하라!”
그렇게 명을 내려 역상과 그 장졸들을 상주고, 농서에는 다시 군(郡)을 설치해 한나라가 직접 다스리는 땅으로 삼았다. 또 북지(北地)에 가 있는 근흡(靳歙)에게도 사람을 보내 싸움의 경과를 알아보게 했다. 그런데 새로운 소식은 북지가 아니라 멀리 동쪽의 팽성에서 먼저 왔다.
<패왕이 마침내 대군을 이끌고 제(제)나라를 치러 팽성을 떠났습니다. 패왕이 이끄는 군사는 구강왕 경포의 군사를 빼고도 10만이 넘는다는 소문입니다. 제왕 전영도 지지 않고 5만군을 모아 성양 쪽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군사는 전영 쪽이 모자라나, 제 땅에서 먼 길을 오는 적을 기다리는 격이니 반드시 전영이 불리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거기다가 양쪽 모두 오래 쌓인 감정이 있어 거록에 못지않은 피투성이 싸움이 벌어질 듯합니다.>
장량이 관동에 풀어놓은 세작(細作)이 그런 글을 보내왔다. 다 읽은 한왕 유방은 곧 한신을 불러 그 글을 보여주며 물었다.
“대장군은 이 싸움을 어떻게 보시오?”
한신이 그리 밝지 않는 얼굴로 먼저 대답했다.
“항왕이 성난 칼끝을 제왕 전영에게로 돌리게 된 것은 경하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이 둘의 싸움이 우리가 바란 만큼 대왕께서 천하를 도모하시는데 도움이 될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대장군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보시오?”
“전영이 도읍 임치(臨淄)에 멀찌감치 물러앉아 성벽을 높이고 군량을 넉넉히 해서 기다렸다면 이번 싸움은 대왕께 크게 이로운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되면 항왕은 천리가 넘는 길을 걸어가 지친데다 군량까지 넉넉하지 못한 군사로 굳센 임치성을 쳐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영은 적어도 몇 달은 항왕의 발길을 북해(北海=여기서는 북쪽 변두리 땅의 뜻) 끝에 묶어두어 대왕을 도울 수 있었고, 아주 잘 되면 그 두 마리 호랑이가 모두 상해 대왕의 앞길을 크게 열어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전영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해 많지도 않는 군사로 천리 길을 마중 나가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성양쯤에서 오히려 제나라 군사보다 적게 걸은 항왕의 대군과 마주치게 되었으니, 그 싸움이 전영에게 좋게 끝나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공연히 항왕의 기세만 키워 우리에게로 몰아 보내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장량은 한신과 생각이 달랐다. 한신의 말에 금세 걱정스런 표정이 되는 한왕을 달래기라도 하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군의 헤아림이 어련하겠습니까만, 이번 싸움의 끝을 달리 볼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신이 보기에는 설령 일이 그릇되어 제왕 전영이 일찍 낭패를 보는 수가 있어도, 항왕이 쉽게 동북쪽의 수렁에서 쉽게 발을 빼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왕(趙王)을 낀 진여가 머지않은 곳에 만만찮은 기세로 버티고 있고, 연왕(燕王) 장도(臧荼)도 함부로 요동왕 한광을 죽인 죄가 있어 항왕을 전처럼 받들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제나라 사람들의 굽히지 않는 기질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천하의 시황제도 육국(六國)가운데 맨 마지막으로, 그것도 속임수를 써서야 옛 제나라를 제 땅으로 아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제나라 사람들의 기질과 항왕의 앞뒤 없고 무자비한 병략(兵略)이 부딪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런 장량의 말에 한왕의 얼굴이 조금 풀리기는 했지만 궁금한 것은 오히려 늘었다는 표정이었다. 항왕과 제왕의 싸움 결말을 달리 보는 두 사람의 눈치를 번갈아 살피다가, 다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오늘 자방(子房)과 대장군을 부른 까닭은 항왕과 제왕(齊王) 전영의 싸움이 어떻게 되는가보다는 이제 과인이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묻기 위해서였소. 그런데 두 분이 보는 바가 다르니 과인도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소.”
하지만 그런 한왕의 물음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답이 같았다.
“아직은 가볍게 움직일 때가 아닌 듯합니다. 당분간은 이대로 관중에 머물러 대한(大漢)의 기반을 다지면서 조용히 관동(關東)의 변화를 살피도록 하십시오. 그러다가 때가 무르익으면 함곡관을 나가 멍석을 말 듯 천하의 형세를 결정 지으셔야 합니다.”
한신이 그렇게 대답하자 장량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뜻을 같음을 나타냈다. 그런데 며칠도 안돼 다시 한왕의 마음을 관외(關外)로 쏠리게 하는 일이 생겼다. 마침내 북지(北地)가 한군(漢軍)에게 떨어졌다는 소식이 그랬다.
<기도위 근흡(靳歙)이 북지를 우려 빼고 옹왕 장함의 아우 장평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밖에도 기도위는 농서의 여섯 현(현)을 평정하고 거사마(거사마)와 군후(군후) 넷, 기장(기장) 열둘을 죽였으며, 수만 군사에게서 항복을 받아냈습니다. 이제 관중은 온전히 한나라 땅이 되었으니 대왕께서는 기뻐하시옵소서.>
그와 같은 글을 받은 한왕은 다시 장량과 한신을 불러 의논했다.
“근흡이 북지까지 우려 빼 이제는 등 뒤를 걱정할 일이 없어졌소. 또 우리 장졸들도 어지간히 쉬었으니, 패왕이 제나라에 묶여 있는 틈을 타 다시 한 번 중원으로 나가보면 어떻겠소?”
한왕이 그렇게 묻자 장량과 한신은 아직도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왕이 그 까닭을 묻자 두 사람이 서로 거들어 가며 말했다.
“듣기로 항왕은 성양(城陽)에서 한 싸움으로 제왕(齊王) 전영의 대군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합니다. 전영은 군사 약간과 겨우 몸을 빼내 평원(平原)으로 달아났으나 항왕의 무자비한 보복을 겁낸 그곳 백성들에게 목을 잃고 말았습니다. 평원 백성들에게서 전영의 목을 받은 항우는 옛 제왕 전건(田建)의 아우 전가(田假)를 찾아 다시 제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남은 전영의 세력을 쫓아 북해(北海)로 갔다고 하는데, 언제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달려올지 모릅니다. 아직은 가볍게 관외로 나갈 때가 아닙니다.”
그들의 말로 미루어 두 사람이 모두 관동에 풀어놓은 세작들을 통해 세심하게 관동의 형편을 살피고 있는 듯했다. 장량과 한신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리자 한왕도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때껏 해온 대로 다시 관중에서 내치(內治)를 다지는데 힘과 정성을 쏟았다.
한왕은 북지를 차지해 관중을 온전히 다스리게 되었음을 경축한다는 핑계로 크게 사면령을 내려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한 번 어루만져 주었다. 한왕이 처음 관중에 들었을 때, 모든 법을 없애고 다만 석 줄만 남긴 적이 있었다. 이른 바 ‘약법삼장(約法三章)’으로, 그 일은 한왕이 관중의 인심을 얻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뒤늦게 관중에 들어온 패왕 항우는 다시 진나라의 모든 법을 되살리고 오히려 자신의 엄한 군율을 보탰다. 따라서 백성들은 여전히 진나라의 엄한 법에 시달릴 뿐만 아니라, 어지럽게 뒤바뀌는 형세에 치여 이쪽저쪽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걸 한왕이 다시 풀어주었으니 관중 백성들이 고마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漢)2년 2월 한왕 유방은 마침내 진나라의 사직단(社稷壇)을 없애고 한나라의 사직단으로 바꾸어 세웠다. 겉보기에는 승상 소하의 말을 따른 것이지만, 이 또한 천하를 다투려 중원으로 나가기 전에 먼저 해두어야 할 한 제국(帝國)의 바닥 다지기였다.
사(社)는 토지신(土地神) 또는 그 토지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작게는 이정(里亭)에서 크게는 나라에 이르기까지 각기 모시는 신과 사당이 따로 있었다. 직(직)은 피나 메기장을 가리키지만, 신으로는 오곡(五穀)을 모두 관장하는 곡물신(穀物神)의 뜻을 가진다. 또 사(社)처럼 직(직)에도 제단이나 사당의 뜻이 있다.
이 토지신과 곡물신을 모시는 제단이 사직단이다. 마을이나 읍락(邑落)의 사직단에는 사당이 있으나 나라의 사직단에는 사당 대신 특별히 신성하게 여기는 작은 숲과 노천(露天)의 제단이 있을 뿐이다. 숲을 이루는 나무는 그 왕실이 특히 숭상하는 수종(樹種)으로 그 한곳 신이 깃든다고 하는 곳에 흙과 돌로 된 제단이 쌓여졌다. 아마도 뒷날 왕실의 조상신을 모신 종묘(宗廟)와 나란히 있게 되면서 생긴 변화인 듯하다.
이 사직단은 종묘와 더불어 그 나라를 상징하는 공간으로, 뒷날까지도 나라를 곧 사직(社稷)이라 일컫게 되었다. 진나라에도 진영(秦嬴 · 처음으로 진나라를 봉읍으로 받은 비자 · 非子) 이래의 사직단이 있어, 나라는 벌써 2년 전에 망해도 상징으로는 아직 살아있었다. 그런데 이때 한왕이 사직단을 허물어 진나라는 상징조차 없어지고, 그 빈자리를 한(漢)나라가 온전히 대신하게 된다.
그 사이에도 소하는 장정을 모으고 군량을 쌓아 한군의 전력을 증강시켰다. 한신은 군사들을 조련하는 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장량은 끊임없이 사람을 관동으로 보내 그곳의 형세를 살피게 했다.
그 사이 겨울이 가고 봄도 깊어졌다. 소생하는 봄기운과 더불어 한겨울을 싸움 없이 쉰 한군 진영에도 활기가 넘쳐흘렀다. 그런 어느 날 장량과 한신이 함께 한왕을 찾아왔다.
“대왕, 이제 동쪽으로 밀고 나아갈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항왕은 결국 쉽게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졌습니다.”
그와 같은 장량의 말에 한왕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자방 선생.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한 달 전만 해도 옷깃을 잡고 말리듯 하시던 분이 어찌된 일이오?”
“항왕의 지나친 혈기와 자부가 기어이 일을 낸 듯합니다. 죽은 제왕(齊王) 전영(田榮)을 따르던 세력을 쫓아 멀리 북해(北海)까지 간 그는 모반의 뿌리를 뽑는다면서, 가는 곳마다 성곽을 허물고 해자(垓字)를 메울 뿐만 아니라, 민가까지 모조리 불살라 버렸습니다. 전영을 따르던 군사들은 항복해도 산 채 땅에 묻어 죽였고, 여자와 아이들은 모두 부로(부虜)로 삼아 끌어가니, 제나라 북쪽 땅은 몇 십리를 가도 연기 나는 인가를 보기 어렵다 합니다. 그러자 제나라 사람들은 항복해도 죽고 싸워도 죽을 바에야 원 없이 싸우다 죽겠다며 저마다 들고일어나 지금 산동(山東)은 반란으로 들끓고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항왕이라도 당분간은 그곳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번에는 한신이 그렇게 차분히 일러주었다.
“항왕은 천하를 아우른 진나라의 수십만 갑병(甲兵)을 마소 잡듯 하며 마침내 함양까지 이른 사람이외다. 힘없는 제(齊)나라의 백성들이 무슨 수로 오래 맞설 수 있겠소?”
장량과 한신 두 사람이 한꺼번에 군사를 내자고 하자 오히려 뜨악해진 한왕이 그렇게 반문했다. 한신이 바로 받았다.
“하지만 그 진나라를 먼저 뿌리째 뒤흔든 것은 진승과 오광을 따라 일어난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따르는 수졸(戍卒) 몇 백 명이 있었다 하나 그들도 원래는 흙만 파고 살던 농투성이 들이었고, 나중에 합세한 수십만은 오갈 데 없던 유민(流民)들이 무리지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이 보기에도 이번에 제나라 백성들이 모두 들고 일어난 것은 대왕을 위해 하늘이 마련한 호기(好機) 같습니다. 어서 대군을 내어 비어있는 중원을 차지하십시오.”
장량도 한신을 거들었다. 그제야 한왕도 더는 두 사람을 떠보지 않고 명을 내려 장수들을 불러 모으게 했다. 날이 풀리면서 장수들도 주먹이 근질근질하던 차였다. 출병(出兵) 논의가 시작되자 두 손을 들어 환영하는 뜻을 드러냈다.
이에 한왕은 승상 소하에게 1만 명의 장졸을 딸려 도읍인 역양을 지키게 하면서, 아울러 호구(戶口)를 헤아려 장정(壯丁)을 모아들이는 일과 부세(賦稅)를 거두어 군량과 물자를 대는 일을 맡게 했다. 효혜(孝惠)왕자와 왕실을 보살피는 일도 소하 몫이었다. 그리고 다시 역이기(酈食其), 역상 형제에게 3만 군을 남겨 관중을 지키게 한 뒤, 한왕 자신은 가려 뽑은 5만 군을 이끌고 함곡관을 나왔다. 한(漢) 2년 늦은 봄 3월 초순의 일이었다.
하남왕 신양이 한왕에게 항복을 한 데다 제(齊)나라에 발목이 잡힌 패왕은 하남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 그 바람에 한왕이 대군을 이끌고 함곡관을 나와서도 한동안은 무인지경 내닫듯 했다. 한달음에 임진관(臨晉關)까지 나와 하수(河水)를 마주했다.
임진관은 하수 서편 물가에 세워진 관(關)으로, 동쪽 건너편은 옛 진(晉)나라 땅이었다. 달리 포진관(蒲津關)이라고도 하는데, 그때는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의 땅을 마주보고 있었다.
“남으로 내려가 한(韓)나라 땅을 가로지른 뒤 바로 서초(西楚)의 도읍인 팽성을 치는 것이 좋겠소? 아니면 물을 건너 동북쪽을 평정한 뒤 남으로 내려가는 것이 좋겠소?
임진관에 이른 날 한왕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바로 패왕의 도읍인 팽성을 칠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한왕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장량이 나서서 한왕의 속을 읽고 있는 듯이나 말했다.
“비록 항왕이 없다고는 하나 바로 팽성을 치는 것은 무리입니다. 먼저 하수를 건너 서위왕과 은왕(殷王)의 땅부터 거둬들이는 게 좋겠습니다.”
“서위왕 위표는 전에 임제성(臨濟城)에서 그때는 진나라 장수이던 장함에게 죽은 위왕(魏王) 구(咎)의 아우로서 용맹과 지략을 겸비했다 들었소. 그가 남쪽으로는 은왕 사마앙(司馬昻)과 손잡고 동쪽으로는 항왕에게 급한 구원을 청해 맞서오면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떨어지는 일은 없겠소?”
한왕이 다시 그렇게 능청을 떨었다.
“위표(魏豹)는 틀림없이 패왕이 서위왕(西魏王)으로 세웠으나 반드시 그의 사람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패왕이 제멋대로 천하를 갈라주는 바람에 위표 또한 적지 않은 불평을 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량이 한왕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렇게 곧이곧대로 대답했다.
지난날 임제성에서 장함에게 몰린 위왕 구(咎)가 백성들을 구하고자 항복하고 스스로 불에 뛰어들어 죽은 뒤 위표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때 초 회왕(懷王)은 송의(宋義)의 뒷받침으로 왕다운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위표가 항복해오자 수천 명의 군사를 딸려주며 다시 위나라 땅을 경략하게 했다.
위표는 힘을 내어 위나라 땅의 성 스무남은개를 함락시키고 때마침 장함의 항복을 받아낸 상장군 항우를 찾아갔다. 그전에 이미 송의를 죽여 회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항우는 그런 위표를 위왕(魏王)으로 봉하고 자신을 따르게 했다. 이에 위표는 날래고 씩씩한 병사들만 골라 데리고 항우를 따라 함곡관으로 들어가 공을 세웠다.
그런데 패왕이 된 항우는 다시 분봉(分封)에서 위표의 불평과 원망을 샀다. 원래 위표의 근거인 양(梁) 땅을 자신의 서초(西楚)에 넣고, 위표에게는 하동(河東)을 주며 서위왕으로 평양(平陽)에 도읍하게 한 때문이었다.
한왕도 그걸 알고 있었으나 여전히 시치미를 떼며 다시 물었다.
“하동이 양보다 더 좁지 않고 사람이 적거나 땅이 메마르지도 않거늘 어찌 위표가 항왕을 원망한단 말이오?”
그리고 기어이 한신까지 끌어들여 왜 그런가를 설명하게 한 뒤에야 하수(河水) 건너기를 허락했다.
임진관을 나와 하수를 건넌 한의 대군은 기세 좋게 하동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런데 하동에 들어선 다음날이었다. 척후로 몇 기(騎)를 이끌고 나갔던 기장(騎將) 하나가 돌아와 급하게 알렸다.
“30리 앞에서 서위왕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군사는 3만을 넘지 않아 보이나 갑주와 기치가 여간 삼엄하지 않습니다. 위표가 전력을 들어 맞서려 나온 게 틀림없습니다.”
그 말에 한신이 뜻밖이라는 듯 물었다.
“이제 우리가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평양으로 보내려고 하는데 언제 벌써 위표가 대군을 이끌고 내려왔단 말이냐? 혹시 무얼 잘못 본 것은 아니냐?”
“제 눈으로 똑똑히 서위왕의 기치를 읽었습니다. 은빛 갑옷을 입고 백마에 높이 올라 앞서 오는 그 모습도 틀림없이 지난날 관중에서 먼빛으로 본적이 있는 서위왕 위표였습니다.”
그 말에 한신은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윽고 가만히 이를 사려 물더니 한왕을 바라보며 말했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전군을 이끌고 제 발로 마중을 나왔다니 한 싸움으로 짓뭉개 항복을 받아내는 것도 동북을 평정하는 양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고는 장수들을 모아 싸울 채비를 하게 했다. 한왕도 일이 예상과 다르게 벌어지는 데 놀라면서도 잠자코 한신이 하는 대로 지켜보았다.
한신은 조참과 관영에게 보기(步騎) 5000을 주고 전군(前軍)으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은 중군(中軍)이 되어, 각기 군사 1만을 거느린 번쾌와 주발을 좌우익(左右翼)으로 삼고, 5000 갑병(甲兵)으로 한왕 유방을 호위하며 전군의 뒤를 받쳤다. 그때 한왕은 태복(太僕) 하후영이 모는 수레를 타고 있었으며, 그 곁을 장량과 장이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말을 타고 따랐다. 그런 중군의 뒤를 다시 한왕(韓王) 신(信)이 맡았다. 한왕 신은 정창(鄭昌)의 항복을 받아낼 때부터 이끌고 다니던 한군(韓軍) 1만으로 중군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그 밖에 주가(周苛)와 기신(紀信)이 이끄는 2만이 후군(後軍)으로 유군(遊軍)을 겸했다.
한군(漢軍)이 규모와 위세를 아울러 뽐내며 10리쯤 나아갔을 때였다. 갑자기 전군에서 전령이 달려와 대장군 한신에게 조참과 관영의 말을 전했다.
“위군(魏軍)과 곧 마주치게 되었는데, 알 수 없는 일은 위나라의 삼군(三軍) 오병(五兵)이 한 덩이가 되어 몰려오고 있는 점입니다. 어떻게 보면 전군이 거대한 유성추(流星鎚)처럼 한꺼번에 치고 들어 결판을 내겠다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그저 어지럽게 떼 지어 몰려오고 있을 뿐인 듯도 합니다. 두 분 장군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대장군의 분부를 기다리십니다.”
“조(趙) 관(灌) 두 장군께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하라. 내 곧 대왕을 모시고 그리로 가겠다.”
한신은 조참과 관영에게 그런 명을 전하게 하고, 곧 한왕 유방에게 전군에서 온 전갈을 알렸다. 그 말을 들은 한왕은 하후영에게 급히 수레를 몰게 해 전군쪽으로 달려갔다. 오래잖아 한신과 함께 전군에 이른 한왕은 장졸들을 헤치고 나가 위군쪽을 바라보았다. 어찌된 셈인지 위군은 행군을 멈추고 있었는데, 기치나 대오는 멀리서 보기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선생이 보기에는 어떻소?”
말을 탄 채 수레 곁을 따르고 있던 장량을 쳐다보며 한왕이 물었다. 장량이 한 번 더 적진을 살펴본 뒤에 가만히 말했다.
“글쎄요. 왠지 싸우려고 온 군대 같지는 않습니다. 북과 징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을 뿐더러 한 가닥 살기(殺氣)조차 느껴지지 않습니다.”
“기치는 정연하지만 높이 들려 휘날리지 아니하고, 창칼은 날카로워도 그 끝이 모두 앞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싸우러 온 군사가 아닌 듯합니다.”
한신도 나지막한 소리로 그렇게 맞장구를 쳤다.
그때 위군의 문기(門旗)가 열리며 은빛 갑주를 걸치고 백마를 탄 장수 하나가 부장(部將) 두엇을 뒤딸리고 나왔다. 한군(漢軍)쪽을 찬찬히 살펴보던 장수가 한신의 수자기(帥字旗)를 알아보고 크게 소리쳐 물었다.
“나는 서위왕(西魏王) 위표라 하오. 장군의 높으신 성과 크신 이름은 어찌 되오?”
“나는 한(漢) 대장군 한신(韓信)이라 하오. 우리 대왕의 명을 받들고 하동(河東) 땅을 거두러왔소!”
한신이 짐짓 목소리에 힘을 실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서위왕 위표가 가볍게 손을 모아 한신에게 예를 표하고 말했다.
“내 지난날 패왕의 군중에서 장군을 만난 듯도 하오만 그때는 알아 뵙지 못했구려. 한왕께서는 어디 계시오?”
서위왕(西魏王) 위표(魏豹)의 그 같은 물음에는 알 수 없는 위엄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한신도 지지 않겠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싸움터에서는 위로 하늘에 견주는 이도 아래로 못[연]에 이르는 이도 모두 장수의 명을 따라야 한다 했소이다. 그런데 우리 대왕은 왜 찾으시오?”
“이제 한나라의 대장군이 되셨으니 군진(軍陣)의 일은 마땅히 장군과 논의해야 할 것이오. 그러나 한왕께서 몸소 이곳까지 납시었다니 아무래도 한왕부터 먼저 뵈어야 될 듯싶소.”
그 같은 위표의 말에 한왕이 수레에서 일어나 윗몸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서위왕은 그간 무양(無恙)하시었소? 그런데 이제 창칼이 서로 부딪치게 된 마당에 과인을 찾는 까닭이 무엇이오?”
그러자 위표는 먼저 말 위에서 깊숙이 고개를 수그린 뒤 공손히 말했다.
“저는 대왕께서 하동으로 드셨다는 말을 듣고 서위(西魏)를 들어 바치고자 우리 장상(將相)들과 더불어 마중을 나왔습니다. 하지만 한때나마 대왕처럼 저도 왕호(王號)를 쓰며 한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더구나 항적(項籍=항우)이 제멋대로 주무르기는 해도 왕호를 내리고 땅을 나누어 주신 분은 의제(義帝)이셨으니 어찌 그것을 가볍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이에 아무에게나 함부로 내던지지 못하고 대왕을 찾았던 것입니다. 이제 격식을 갖춰 이 땅과 왕홀(王笏)을 대왕께 바치고자 하오니 물리치지 마시고 거두어 주옵소서.”
말뿐만이 아니었다. 위표는 곧 좌우에게 명을 하여 모든 깃발을 뉘고 병장기를 땅바닥에 내려놓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말 위에서 내려 보검을 풀고 갑옷투구를 벗은 뒤 홀로 한왕의 수레 앞으로 걸어와 엎드렸다.
한왕은 그렇게 시세에 밝고도 예모 반듯한 위표에게 흠뻑 반했다. 그를 다시 위왕(魏王)으로 봉하고 옛 위나라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또 한왕(韓王) 신(信)처럼 제 군대를 따로 이끌고 언제나 가까이서 자신을 따르게 했다.
위표를 따라 평양성으로 들어간 한왕은 크게 잔치를 벌여 장졸을 위로하고 자신도 장수들과 함께 마셨다. 술이 취하자 위표가 싸움 한번 없이 항복해 온 것이 모두 자신이 잘나 그리된 양 허세를 부리더니 다음 날은 술이 깨기도 전에 장수들을 불러 큰소리치듯 말했다.
“이제는 하내(河內)를 거둘 차례요. 은왕(殷王) 사마앙(司馬昻)에게도 글을 보내 항복을 권하시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대군을 보내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태워버릴 것이라고 하시오!”
그러자 장량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은(殷)나라는 작고 그 왕 사마앙의 군사는 많지 않으나 서위왕 위표와는 경우가 다릅니다. 또 신(臣)이 알기로 대왕께서는 이미 한번 은왕 사마앙을 실망케 하신 터라 이제 말이나 글로는 결코 그의 항복을 받아낼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또 무슨 소리요? 내가 언제 은왕을 실망케 했단 말이오?”
한왕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때 그 자리에 섞여 있던 위표가 나서서 말했다.
“신(臣)이 은왕(殷王) 사마앙과 이웃하고 있어 그 일을 잘 압니다. 대왕께서도 아시다시피 사마앙은 원래 조(趙)나라 장수로 항우를 따라 공을 세워 하내(河內)를 봉토로 얻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마앙 또한 하남왕(河南王) 신양처럼 장이(張耳)의 사람으로서, 장이가 진여에게 나라를 뺏기고 대왕의 슬하로 들자 그도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지난번 대왕께서 함곡관을 나오셨을 때 신양이 항복하는 걸 보고 그도 나라를 들어 항복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대왕께서는 낙양에서 군사를 물려 관중으로 돌아가시고, 사마앙의 속셈만 항왕에게 알려지고 말았습니다. 사마앙의 부장 가운데 하나가 팽성으로 달려가 항왕에게 그 일을 고자질한 탓이었습니다.
성이 난 항왕은 객경(客卿)으로 데리고 있던 진평(陳平)이란 자에게 군사를 주고 가만히 은왕 사마앙을 치게 했습니다. 진평은 형왕(兄王=魏王 咎)밑에서 태복(太僕) 노릇을 하다가 죄를 짓고 항왕에게로 달아난 자입니다. 하내 땅의 사정에 밝은 형왕의 옛 신하들과 장수들을 끌어 모아 갑작스레 조가(朝歌)를 치고, 사마앙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아내고 말았습니다. 그게 겨우 두 달 전의 일인데, 사마앙이 어찌 다시 대왕께 항복할 수 있겠습니까?”
위표의 그 같은 말에 한왕 유방은 입맛이 썼다. 그러나 그 진평이 지난날 홍문(鴻門)의 잔치에서 몸을 빼내는 자신을 눈감아주던 바로 그 사람인 줄은 기억해내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던가. 안타까운 일이다….”
한왕은 그러면서 혀를 찼으나, 사정을 알고 보니 하내 땅을 거둬들이는 길은 다시 한번 힘으로 은왕 사마앙을 사로잡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더는 따져 묻지 않고 그 일을 슬며시 대장군 한신에게로 미루었다.
사마앙을 사로잡고 하내 땅을 거둬들이라는 한왕의 명을 받은 한신은 그 사이 7만으로 부풀어난 대군을 이끌고 조용히 하동을 떠났다. 하내에 이르자 조참에게 군사 1만을 떼어주며 수무(修武)를 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군사를 휘몰아 곧바로 은왕의 도읍 조가를 두껍게 에워쌌다.
성을 에워싼 첫날 한신은 소용없을 줄 알면서도 옛 주인이었던 장이와 전우였던 하남왕 신양을 내세워 은왕 사마앙을 달래보려 했다. 하지만 은왕 사마앙은 이미 그들의 말을 들어줄 처지가 아니었다. 두 달 사이에 두 번이나 주인을 바꾸어 항복을 할 수도 없는 일이거니와, 부모처자가 모두 팽성에 볼모로 끌려가 있었다. 장이와 신양이 번갈아 성벽 아래서 불러대도 성가퀴에조차 나와 서지 않았다. 싸우다 죽어 부모처자라도 살릴 작정이었다.
그날 밤 한신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도읍이라 그런지 조가는 성이 높고 든든하여 힘으로 깨뜨리기에는 어려울 듯하오. 아무래도 꾀를 써서 사마앙을 성 밖으로 끌어낸 뒤에 사로잡는 수밖에 없소. 내일부터 장군들은 사졸들을 휘몰아 사방에서 매섭게 몰아치시오. 하지만 되도록이면 사졸들이 상하지 않도록 성을 치는 시늉만 내야 하오. 그러다가 내 명이 있거든 동문 쪽을 슬며시 열어주고 나머지 세 곳만 더욱 불같이 들이치시오. 이때는 구름사다리를 걸고 밧줄을 던지며 장졸이 아울러 성벽 위로 뛰어올라야 하오.”
그러고는 따로 관영을 불러 보기(步騎) 합쳐 5000을 딸려 주며 가만히 일렀다.
“장군께서는 내일 하루 동문 쪽을 맡아 성을 들이치다가 해가 지면 에움을 풀고 동쪽으로 가시오. 말발굽은 헝겊으로 싸고 군사들에게는 하무를 물린 채로 가야 하니 길은 더디겠지만, 날 새기 전에는 한단(邯鄲)으로 빠지는 관도(官途) 곁의 골짜기에 이를 수 있을 것이오. 그곳에 군사들과 숨어 조용히 기다리면 늦어도 사흘 안에 사마앙이 그리로 갈 것이외다. 그때 날랜 기병을 내어 길을 끊고 사마앙을 사로잡아 이리로 데려 오시오.”
그런 한신의 말에 관영이 얼른 믿지 못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사마앙이 한단을 거쳐 제나라로 갈수도 있겠지만, 정도(定陶)로 빠져 팽성으로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 부모처자가 모두 팽성에 끌려가 있다 하니 오히려 그쪽을 지키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마앙도 약하고 비굴한 것을 못 참는 항왕의 성격을 잘 알 것이오. 그저 한 목숨 부쳐 팽성으로 달아나서는 가솔들은커녕 제 한 몸도 건사할 수 없소. 항왕에게 군사를 빌리더라도 싸워서 제 땅을 되찾는 길만이 살길이니, 반드시 항왕이 있는 제나라로 갈 것이오.”
한신은 그렇게 잘라 말하고 다음날 아침 전군을 들어 조가(朝歌)를 들이쳤다.
한신의 말을 옳게 여긴 관영도 군사들을 휘몰아 금세라도 성문을 깨고 들이닥칠 듯 요란하게 동문을 짓두들겼다. 그러다가 날이 저물자 보기(步騎) 5000을 이끌고 가만히 동쪽으로 떠났다. 밤길을 걸어 조가 동북쪽 30리쯤 되는 골짜기에 이른 관영은 그곳에 군사를 숨기고 은왕 사마앙이 가까운 관도로 쫓겨 오기만을 기다렸다.
다음날 한신은 다시 아침부터 전군을 들어 조가 성(城)을 매섭게 들이쳤다. 전날과 달리 한군(漢軍) 장졸들이 성벽에 구름사다리[운제]를 걸치고 갈고리 달린 밧줄을 성가퀴에 걸어 성벽 위로 기어오르자 그러잖아도 겁을 먹고 있던 은왕 사마앙의 군사들은 크게 놀랐다. 하루 낮은 그럭저럭 버텨내는 시늉을 했으나, 그날 밤이 되자 구석구석 성을 빠져나가 한군에 투항해버렸다.
하룻밤 새 알아보게 줄어든 군민을 보고 사마앙은 낙담했다. 다시 한군이 성벽을 기어오르자 장졸들을 무섭게 몰아대 간신히 버티고는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성을 지키기는 글렀다 싶었다. 급한 곳을 막기 위해 동서남북 뛰어다니면서도 어디로 빠져 나갈까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나절을 싸우다 보니 한군데 빈 곳이 보였다. 동북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한단으로 빠지는 길이 있는 동문 쪽이었다. 전날부터 공격이 뜸하다 싶더니, 그날도 그쪽으로는 아무런 공격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에워싸고 있는 군사도 없는 듯했다.
“한왕은 내가 패왕이 있는 팽성으로 달아날 줄 알고 있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동북쪽은 상산(常山)이니, 우리를 미워하는 조왕(趙王)과 진여의 땅이라, 동문 쪽을 지키는 것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내 동문으로 치고나가 제나라로 가리라. 가서 패왕께 군사를 빌려 하내를 되찾으리라.”
사마앙은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그날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때마침 3월 초순이라 그날 밤은 달이 없었다. 믿는 군사 3000을 뽑아 길 떠날 채비를 시키고 밤이 깊기를 기다리던 사마앙은 삼경이 되기 바쁘게 군사들을 휘몰아 동문을 뛰쳐 나갔다.
은왕(殷王) 사마앙의 군사들이 갑자기 동문으로 빠져나오자 잠들어 있던 한군(漢軍) 진채가 잠시 술렁거렸다. 기병 한 떼가 횃불을 밝히고 한참이나 사마앙을 뒤쫓는 시늉을 했으나 오래는 아니었다. 그 바람에 마음을 놓은 사마앙은 곧장 관도(官途)로 접어들어 한단(邯鄲)을 바라고 달렸다.
그런데 한 30리나 달렸을까, 갑자기 관도 곁 골짜기가 횃불로 환해지며 한 떼의 인마가 몰려나와 사마앙의 길을 막았다.
“은왕 사마앙은 어디 있는가? 사마앙은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한(漢) 기장(騎將) 관영이 여기서 기다린 지 오래다.”
횃불로 보아서는 몇 만인지도 모를 보졸들을 뒤로 하고 수백 철기(鐵騎)와 더불어 앞장 서 길을 막고 섰던 장수가 크게 소리쳤다. 그래도 사마앙은 선선히 항복할 처지가 못 되었다. 어떻게든 헤치고 나아가볼 작정으로 이끌고 있던 장졸들에게 소리쳤다.
“겁먹지 말라. 적은 얼마 되지 않는다. 힘껏 부딪쳐 흩어버리고 산동(山東)으로 가자!”
하지만 사마앙의 장졸들은 사정이 달랐다. 골라 뽑은 3000이라지만, 목숨 바쳐 사마앙을 따라야할 대의 같은 것은 없었다. 거기다가 한군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나타나 놀라고, 횃불 때문에 실제보다 몇 배나 많아 보여 먼저 기가 죽고 말았다. 태반은 싸워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밤길을 쫓겨 온 1000명 남짓으로 이틀 전에 와서 쉬며 기다린 5000 사이를 뚫고 나가자니 일은 처음부터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사마앙이 장졸들을 다잡아 좌충우돌 한군과 부딪쳐 보았으나 끝내는 몇 겹으로 에워싸이고 말았다. 그래도 사마앙은 항복하지 않고 작은 언덕에 의지해 다시 한 시진을 싸웠다.
그때 다시 서쪽에서 수많은 병마가 달려왔다. 그 한 갈래가 한군을 헤치고 똑바로 사마앙의 군사들 쪽으로 달려오더니 두 장수가 횃불 앞으로 나서며 소리쳤다.
“은왕은 어디 계시오? 과인은 하남왕 신양이오.”
“사마 장군은 어디 있는가? 나 장이(張耳)가 할말이 있으니 잠시 얼굴을 내밀라!”
사마앙은 그 소리에 한편으로는 안도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맥이 쭉 빠졌다. 항복하면 죽지는 않겠지만, 그곳을 빠져나가 부모처자를 구할 길도 없어졌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다 마지못해 얼굴을 내밀었다.
“대왕은 어찌 한왕께 항복하여 대의를 밝히지 않고 어리석고 무도한 항우를 쫓아 죽으려 하시오? 한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정리로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이렇게 달려왔소.”
사마앙을 알아본 하남왕 신양이 먼저 그렇게 입을 열었다. 장이가 그 뒤를 이었다.
“사마 장군의 가솔들이 모두 팽성으로 끌려간 일은 한왕께서도 잘 알고 계시오. 하지만 우리 한군이 멀리 제나라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항왕보다 먼저 팽성으로 들어가면 무슨 걱정이 있겠소? 어서 한왕께 항복하여 가솔도 구하고 천하평정의 대업에도 공을 이루시오.”
그렇게 되자 사마앙은 더 버티려야 버틸 수가 없었다. 마침내 말에서 내려 항복하고 말았다.
은왕(殷王) 사마앙이 항복했다는 말을 듣자 한왕 유방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제 발로 찾아온 것이 아니라 사로잡혀 항복해서 그런지 위표(魏豹) 때와는 대접이 달랐다. 사마앙에게서 왕위를 거두고 은(殷) 땅에는 하내군(河內郡)을 설치했다.
한왕은 조가(朝歌)를 하내군의 치소(治所)로 삼고 그곳에서 한동안 대군을 쉬게 했다. 임진나루를 건넌 뒤로 피 튀기는 싸움은 없었으나 그래도 편하게 다리 한번 뻗지 못하고 내달아온 한군(漢軍)이었다. 거기다가 위표의 항복을 받고 사마앙을 사로잡을 동안 따로 험한 일을 맡아 한 장졸들이 적지 않아 그들을 상 주고 다독일 필요도 있었다.
하지만 한군이 조가에서 보름이나 머문 데는 한왕의 타고난 성품 탓이 더 컸다. 임진관에서 하수(河水)를 건넌 지 보름도 안돼 두 왕의 항복을 받고 하동(河東)과 하내의 기름진 들판을 얻게 되자, 한왕은 평소의 느긋함을 넘어 은근히 자만까지 느꼈다. 장졸들을 위로하기보다는 스스로 대견스러워 하면서 잔치와 술을 즐겼다.
그래서 한군이 아래위를 가리지 않고 흥청거리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데, 다시 기쁜 소식이 더해졌다.
“마침내 수무 성이 조참(曺參) 장군께서 이끄는 우리 한군 손에 떨어졌습니다. 조 장군께서는 저희 왕명을 어기고 끝까지 맞서던 위나라 장수와 그를 따르던 군민(軍民)들을 모조리 베어 우리 한나라의 위엄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항복한 군사들과 백성들은 조금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그 소식이 다시 한왕을 흥겹게 하여 그때까지 애매하던 한군의 진로를 그 자리에서 불쑥 결정하게 했다.
“우리도 이만 수무로 내려가면 어떻겠소? 거기서 며칠 쉬면서 하동을 다독인 뒤에 다시 하남으로 내려가 낙양쯤에 자리 잡으면 좋을 듯하오. 낙양은 관중(關中)에서도 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관외에서 새로 얻은 한(韓)과 하동 하내 하남의 한가운데에 있는 땅이오. 거기서 한번 더 군사를 키우고 싸움에 필요한 물자를 넉넉히 마련하면서 산동의 정세를 살피는 게 어떻겠소? 그러다가 때가 오면 남으로 한(韓)나라를 가로질러 서초(西楚)로 밀고 드는 것이오!”
한왕이 장수들을 모아놓고 천하는 꼼짝없이 자신의 손아귀에 있다는 듯 그렇게 큰소리를 쳤다. 장량이나 한신도 바로 동쪽으로 쳐들어가 패왕 항우와 결판을 낼 엄두는 못 내고 있었다. 그렇다고 한왕의 허풍처럼 서초로 밀고들 자신은 없었지만, 일단 군사를 하남으로 내자는 데는 뜻을 같이했다.
다른 장수들도 패왕 항우가 버티고 있는 산동으로 밀고 들기보다는 남쪽으로 내려가기를 바라 일은 한왕의 뜻대로 되었다. 한신이 이끄는 한군 본대는 먼저 수무로 옮겨 조참의 군사와 합치기로 했다. 그리고 며칠 편히 쉰 뒤에 다시 낙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수무로 옮겨 앉아 한 덩이가 된 한군은 거기서도 조가에서처럼 잔치와 술로 흥청거리며 쉬었다. 그런데 수무에 이른 지 닷새쯤 된 날이었다. 진작부터 한군 진중에서 일하고는 있었으나, 그리 드러나 보이지 않던 위무지(魏無知)란 하급 무관이 한왕을 찾아보고 말했다.
“신이 옛적 위왕(魏王) 구(咎)를 섬기고 있을 때에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진평이란 사람이 찾아와 대왕을 뵙고자 합니다.”
“위왕 밑에 있던 진평이라면 바로 얼마 전 항왕의 명으로 은왕 사마앙의 항복을 받아낸 서초(西楚)의 장수 아니오? 그런 사람이 무슨 일로 과인을 만나고자 한다는 것이오?”
들은 지 오래잖아 진평의 이름을 기억하는 한왕이 그렇게 되물었다.
“아마도 진평이 항왕을 떠나 대왕께 의탁하러 온 것 같습니다.”
한왕의 물음에 위무지(魏無知)가 조심스레 받았다. 그래도 한왕은 전혀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내 듣기로 진평은 전에 위왕을 섬기다 달아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 또 항왕에게서 달아나 과인에게로 오려한다니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진평이 전에 위왕을 떠나게 된 까닭은 그때 제가 곁에서 보아 잘 압니다. 그것은 간특한 자들의 참소 때문이지 결코 진평에게 허물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 듣기로는 이번 일도 반드시 진평에게 무슨 죄가 있어서는 아닌 듯합니다. 항왕이 귀가 얇아 헐뜯는 자들의 말만 믿고 그를 죽이려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달아난 것이라 들었습니다.”
위무지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간곡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실로 그랬다. 그해 정월 진평이 은왕 사마앙을 사로잡아 항복을 받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패왕 항우는 그를 아끼고 믿었다.
“그것 보아라. 내 무어라 하더냐? 이번에 진평은 적어도 그 멀쑥한 허우대 값은 넉넉히 하지 않았느냐?”
객경(客卿)에 지나지 않는 진평을 장수로 세우는 데 반대하던 사람들을 돌아보며 핀잔처럼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진평의 벼슬을 도위(都尉)로 올리면서 금 스무 일(鎰=스물 넉 냥)을 상으로 내려 그를 아끼고 믿는 정을 따로 표했다.
그런데 보름 전 사마앙이 다시 서초(西楚)를 저버리고 한왕 유방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패왕 항우는 사마앙이 처음 항복해 올 때 기뻐한 만큼이나 그 배신에 성을 냈다. 그러나 죽은 전영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발목이 잡혀 제나라에서 몸을 빼지는 못하는 바람에 당장 달려가 분을 풀 수가 없었다. 그저 길길이 뛰며 소리만 지르는데, 그 틈을 탄 간신배들이 항왕에게 속살거렸다.
“지난번에 진평은 대왕을 속였습니다. 옛날 위구(魏咎)의 패거리만 잔득 끌고 가 싸움도 않고 은왕과 그 장리(將吏)들을 꾀어 항복을 산 것입니다. 우리 서초(西楚)의 힘도 대왕의 위엄도 펼쳐 보이지 못하고 받아낸 그 항복이 어떻게 잘 지켜지기를 바라겠습니까? 과연 한왕 유방이 대군을 보내자 그들은 하루아침에 무릎을 꿇고 만 것입니다.”
그 말을 곧이 들은 항왕은 더욱 화가 나 제(齊)나라만 평정하면 바로 하내(河內)로 달려가 은왕과 그 장리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 버리겠다며 이를 갈았다. 이 뿐만 아니라 일을 그렇게 만든 진평도 구실만 생기면 잡아다 목을 베리라 별렀다. 그런데 마침 항왕의 근신 중에 진평과 가까운 사람이 있어 그 일을 가만히 진평에게 귀띔해 주었다.
진평(陳平)은 진작부터 패왕 항우의 오만과 편견 때문에 되풀이되는 실책에 실망을 키워왔다. 그러나 은왕 사마앙을 칠 때 항왕이 보여준 믿음이 고마워 겨우 마음을 붙이고 있는데, 이제 다시 항왕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들자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하나뿐인 목이 잘리기 전에 스스로 살길을 찾아 달아나기로 작정했다.
하지만 진평에게는 나름대로의 결벽이 있었다. 위왕을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항왕을 떠나면서도 벼슬과 재물로 마뜩찮은 의심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에 진평은 항왕으로부터 받은 관인(官印)과 상으로 받은 금은을 모두 봉한 뒤에 사람을 시켜 되돌려 주게 하고, 자신은 샛길로 빠져 항왕의 군중(軍中)을 벗어났다.
칼 한 자루만 차고 밤길로만 며칠을 달려 어렵게 산동을 빠져 나온 진평은 마지막으로 한왕 유방을 찾아가 몸을 의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수(河水)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가 한왕이 수무(修武)에 있단 소리를 듣고 백마(白馬) 맞은편에서 물을 건너려 했다.
어떤 한적한 나루에서 배를 찾던 진평은 쫓기는 듯한 마음에 이것저것 살피지 않고 배 한 척을 얻어 탔다. 그런데 전란 시절의 뱃사공이란 게 태반은 수적(水賊)이나 다름없었다. 진평이 배에 오르자 어디서 왔는지 우락부락한 사공 몇이 이런저런 핑계로 같이 배에 올랐다. 진평의 멀쩡한 허우대에다 걸치고 있는 옷이 헤져도 비단이요, 차고 있는 칼도 값싸 보이지 않아 수적을 꾀어 들인 듯했다. 틀림없이 진평이 많은 재물을 몸에 숨기고 있으리라 믿고 강물 한가운데서 재물을 턴 뒤에 죽여 버릴 작정이었다.
배가 강물 가운데로 들어간 뒤에야 그런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진평은 곧 꾀를 냈다. 먼저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나이든 사공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보시오, 사공. 나는 강을 건너면 이 칼이 소용없으니 당신이 받아두시오. 비록 보검은 아니나 여럿이서 술 한 잔 나눠 마실 만한 값은 될 것이오.”
그리고 진평은 옷을 훌훌 벗어 제쳤다. 이어 누가 보아도 그 안에 아무것도 감춰진 것이 없음을 알 수 있게, 벗은 옷을 뱃전에 내던지고 사공 사이에 끼어들며 말했다.
“보아하니 일손이 넉넉지 않은 듯하오. 내가 노 젓는 걸 돕겠소.”
뱃사공들이 머쓱해서 말했다.
“노 젓기는 어려서부터 익힌 일이라 우리만으로도 넉넉하오. 어찌했거나 물은 건너게 드릴 테니 손님은 그냥 뱃전에 앉아 계시오.”
그리고는 일없이 백마(白馬)쪽 나루에 내려 주었다. 진평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배에서 내리는데 다시 칼을 받은 늙은 사공이 말했다.
“우리에게는 이 칼이 술 한 잔 나눠 마실 값밖에 안 되지만, 손님에게는 훨씬 요긴하게 쓰일 듯하오. 이 칼도 가지고 가시오.”
이에 진평은 칼까지 되찾아 차고 수무로 올 수 있었다.
위무지(魏無知)가 그처럼 간곡하게 진평을 변호해 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 모든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왕도 그런 위무지의 정성을 물리칠 수 없었던지 마지못한 듯 말했다.
“그를 들게 하라.”
한왕 유방의 허락이 떨어지자 위무지는 곧 진평을 불러들였다. 그때 진평을 한왕의 유막(유幕)으로 데리고 들어온 것은 중연(中涓)인 석분(石奮)이었다. 나중에 다섯 부자(父子)의 녹봉이 합쳐 만석이 되었다 해서 만석군(萬石君)으로 불린 석분은 때마침 산동(山東)에서 도망쳐 온 다른 여섯 사람도 함께 데리고 왔다.
진평을 비롯한 그들 일곱이 한꺼번에 유막 안으로 들어서자 한왕이 그들을 보고 물었다.
“너희들 중 누가 진평인가?”
“제가 진평입니다.”
진평이 한 발 나와 길게 읍하며 대답했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왕이 문득 알 수 없다는 눈길이 되어 물었다.
“그대가 진평인가? 그런데 몹시 낯이 익구나.”
그러나 진평은 깊숙이 허리를 굽혀 군왕을 만나보는 예를 올릴 뿐 한왕의 물음에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왕이 잠시 기억을 더듬다가 불쑥 말했다.
“이제 알겠다. 그대는 지난해 홍문(鴻門)의 잔치에서 몸을 빼내는 나를 눈감아 준 항왕의 객경(客卿)이 아닌가?”
“대왕께서 기억하시니 바로 아룁니다. 실은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진평이 그렇게 대답했으나 얼굴에는 자랑하거나 내세우기는커녕 어딘가 민망스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그게 이상한지 한왕이 다시 물었다.
“만약 그때 그대가 과인이 패상(覇上)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로막으려 들었다면 과인은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어쩌면 범증(范增) 늙은이의 독한 손에서 끝내 빠져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때 그대는 과인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나 다름없는데, 어찌 이렇게 과인을 찾아오면서 먼저 그 일을 말하지 않았는가?”
홍문에서의 일이 새삼 고마운지 그렇게 묻는 한왕은 말투까지 달라져 있었다. 그러나 진평은 한층 민망스러워하는 낯빛이었다. 오히려 죄지은 사람처럼 한참이나 깊이 머리를 수그리고 있다가 처연하게 말했다.
“송구스러우나 그때 저는 패왕을 주인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또 대왕께서 무사히 몸을 빼내시면 제 주인 되는 패왕께 크게 해로우리란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대왕께서 떠나시는 것을 눈감아 주었으니, 이는 제 주인 되는 패왕께 불충한 짓을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장차 천하의 주인이 되실 분으로서, 비록 대왕을 다소 도운 공이 있다 해도 제 주인을 저버린 자를 높이 세워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더군다나 대왕은 하늘이 돌보는 분이시니, 그날 제가 그곳에 없었더라도 터럭 하나 상함이 없이 패상의 진채로 돌아가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말에 한왕이 잠시 말을 잃고 진평을 바라보았다. 자칫 모든 일에 성의 없고 소홀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너그럽고 대범한 한왕이었으나, 그런 진평의 말에는 무언가 한왕의 가슴 깊은 곳을 건드리는 것이 있었다. 이윽고 다시 한차례 깊이 고개를 끄덕인 한왕이 짐짓 엄한 표정으로 진평의 말을 받았다.
“하나 그대는 이제 그 주인을 떠났으니, 새삼 그대에게 그때의 불충을 물을 수는 없구나.”
“신(臣)도 이제는 돌아갈 곳이 없는 외로운 몸이 되었습니다. 대왕께서 받아주신다면 앞으로 두 번 다시 제 주인에게 불충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진평이 한층 깊숙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렇게 맹세하듯 말했다. 그러자 그것으로 치러야 할 의식은 다했다는 듯 한왕이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가 위무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사람들이 먼 길을 오느라 주리고 지쳐 보이는구나. 먼저 상을 내어 배불리 먹게 하고, 객관(客館)으로 보내 하룻밤 쉬게 한 뒤 다시 만나보기로 하자.”
그러자 다시 진평이 나서서 말했다.
“신은 큰일을 하고자 위태롭고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제가 대왕께 드리려는 말씀은 오늘을 넘겨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런 진평의 두 눈에서는 조금 전과 달리 은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주리고 지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에 한왕은 진평에게 따로 상을 차려 술과 밥을 내리고, 마주 앉아 기다리다가 그의 말을 들었다.
진평의 말을 한나절 듣고 나자 한왕은, 한신도 아니고 장량과도 다른,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인재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한신이 타고난 병가(兵家)라면 장량은 도가(道家)적인 사고로 단련된 책사(策士)였다.
이에 비해 진평은 귀곡(鬼谷)을 거치지 않은 종횡가(縱橫家)였다.
실천적이고도 실용적인 점에서 세 사람의 학식과 재주는 비슷했다. 그러나 모두 책을 읽었지만, 진평에게서는 전혀 서생(書生)티가 나지 않았다. 또 인간에 대한 지식도 세 사람 모두 남달랐지만, 진평은 특히 탐욕이나 허영 같은 인간의 약점에 밝아 이채로웠다.
한왕은 그 모든 걸 그저 막연한 직관으로 느끼고 있을 뿐이었으나 그 때문에 진평을 얻은 기쁨이 줄지는 않았다.
마침내 말을 끝낸 진평에게 한왕이 새삼 물었다.
“그대는 초나라에서 무슨 벼슬을 하였는가?”
“도위(都尉)였습니다.”
진평이 그렇게 대답하자 한왕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는 우리 한나라에서도 도위다. 하나 그냥 도위가 아니라, 참승(참乘)으로 과인과 함께 수레를 타며 호군(護軍)으로 과인에 갈음하여 여러 장수들을 보살피도록 하라.”
그리고 좌우에 명하여 그날로 진평을 참승과 호군을 겸하는 도위로 삼았다. 그 소문이 퍼지자 오래 한왕을 따라다니며 공을 세운 장수들이 그냥 보고 있지 않았다. 우르르 한왕의 유막으로 몰려가 한목소리로 따졌다.
“대왕께서는 어찌 초나라에서 도망쳐 온 졸개를 하루아침에 그렇게도 높이 세우셨습니까? 그 재주나 사람됨이 높고 낮음을 알아보지도 않고 참승을 삼아 함께 수레를 타시며, 또 호군으로 세워 오히려 우리 나이든 장수들을 감독하게 하셨습니까?”
하지만 한왕은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대들 모두 내게는 날카로운 손톱이나 어금니[조아] 같은 장수들이나, 사람의 재주와 쓰임은 여러 갈래다. 진평은 과인이 중원(中原)의 사슴을 쫓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사람이니, 그대들은 더 시비하지 말라!”
그러면서 오히려 진평을 더욱 아끼고 믿었다.
한(漢) 2년 3월 하순, 말 그대로 저무는 봄(暮春)의 햇살이 따가운 날이었다. 산동 임치(臨淄)에서 하룻길쯤 되는 제수(濟水) 동쪽의 높지 않은 황토 언덕 아래 수많은 사람이 한 덩이로 엉겨 일하고 있었다. 황토 언덕 사이로 난 좁고 얕은 골짜기 바닥을 넓히고 깊게 하는 것이 그들의 일이었다.
하지만 멀리서는 그저 한 덩이로만 보이는 그들도 가까이 가서 보면 두 종류로 나뉘었다. 하나는 날카로운 병기와 채찍을 들고 일을 시키는 쪽으로, 패왕 항우를 따라 제(齊)나라를 치러 온 초(楚)나라 군사들이었다. 우두머리가 죽은 뒤에도 항복 않고 맞서는 반도(叛徒)들을 뒤쫓아 멀리 북해까지 왔다가 마침내 그들을 쳐부수고 서쪽으로 되돌아가는 중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런 초나라 군사들에게 짐승처럼 몰리며 일하고 있는 쪽으로, 죽은 제왕(齊王) 전영(田榮)의 군사들이었다. 전영이 죽자 멀리 임치까지 도망쳐 와 버텼으나 끝내 패왕의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리하여 모진 고초와 학대를 받으면서 끌려가다가, 갑자기 그곳에 내몰려 벌써 이틀째 땅을 파고 있었다.
일을 시키는 초나라 군사들은 하나같이 독이 올라 있었다. 채찍을 날리고 창대를 몽둥이 삼아 휘두르면서 인정사정없이 제나라 항병(降兵)들을 몰아댔다.
“빨리 빨리 해. 이 버러지 같은 것들아!”
“어서 파라고. 이 썩어 자빠질 시체 같은 놈들아!”
“뭐? 제나라를 다시 세워? 죽은 전영의 원수를 갚는다고? 예라이, 순….”
그렇게 욕하면서 때리거나 차는 쪽은 차라리 점잖았다. 초나라 군사 태반은 일을 시키기 위해 욕하는 것이 아니라, 괴롭힐 구실을 찾기 위해 일을 다그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가 용케 죽일 만한 구실을 찾아내면 바로 창칼을 휘둘러 항병들의 목숨을 끊어 버리기도 했다.
“어이, 참아. 그런다고 저것들한테 죽은 고향 친구들이 되살아나나?”
“한둘 죽인다고 내일 당장 싸움 끝내고 부모처자에게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손에 피만 묻히지, 구석구석 쥐새끼들처럼 몰려다니는 것들을 다 어쩔 거야?”
초나라 군사들 중에도 그렇게 좋은 말로 말리는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살벌한 분위기가 자아내는 공포는 대단했다. 이미 지난 며칠 공포에 길들여진 제나라 항병들은 이제 체념을 넘어 일종의 마비에 빠져들고 있었다. 무얼 하는지도 모르면서 당장 자기들을 노려보고 있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허둥지둥 땅을 팠다.
이윽고 황토 언덕 사이의 얕은 골짜기는 길고 깊은 구덩이로 변했다. 1000여명의 포로들이 이틀에 걸쳐 판, 길이 한 마장에 너비와 깊이가 모두 세 길이 넘는 황토 구덩이였다.
황토 언덕 위에서 일의 진척을 살피고 있던 군사 하나가 저만치 작은 진세를 이루고 있던 저희 편에게 깃발로 신호를 보냈다. 일을 시키던 군사들보다 한층 엄중하게 무장한 초나라 군사 한 떼가 미리 준비된 긴 사다리를 들고 언덕으로 달려왔다. 그들이 들고 온 사다리를 구덩이 바닥에 걸치며 소리쳤다.
“어이, 그만하면 됐어. 모두 올라와 목이라도 축이고 다시 해.”
그러자 구덩이 바닥에서 포로들을 몰아대던 초나라 군사들이 하나둘 사다리를 타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일손이 멈춰지고 구덩이 바닥에 함께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줄지어 구덩이 밖으로 기어오르자 비로소 제나라 항병(降兵)들도 퍼뜩 정신이 든 듯했다. 무엇에 홀려 있다 깨어난 사람들처럼 화들짝 놀라며 사다리 쪽으로 몰려들었다.
“저희도 잠깐 나갔다 오면 안 될까요?”
“나도 저 밖에 볼일이 있는데….”
자기들의 운명을 어렴풋이 예감한 포로들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사다리 끝을 움켜잡고 위로 올라가고 있는 초나라 군사들을 올려보았다. 그러나 초나라 군사들은 이미 받은 명령이 있는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구덩이 바깥으로 기어나가기 바빴다.
더욱 불안해진 포로들은 아직 남아있는 초나라 군사들의 옷깃을 부여잡고 애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초나라 군사들은 저마다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물러나라! 우리는 되돌아 올 것이다. 너희들도 일을 마치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때 이미 포로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목숨을 건져줄 끈이라도 되는 듯 사다리 주변으로 모여들어 그들에게 엉겨 붙으려 했다.
마지막까지 바닥에 남아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한손으로는 사다리를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칼을 휘두르며 밖으로 기어 나왔다. 밖에 있던 초나라 군사들이 흔히 진과(秦戈)라고 불리는 낫 달린 창이나 기마병과 싸울 때 쓰는 긴 창으로 구덩이 위 언덕에서 그들을 도왔다. 뒤따라 올라오는 제나라 항병들을 무자비하게 찌르고 찍고 베었다.
그러자 구덩이 바닥은 순식간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사다리를 오르려하다 창칼에 찍혀 다치거나 죽은 항병들이 사다리 근처를 시뻘겋게 뒤덮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기를 쓰고 사다리를 기어오르다가 다시 창칼에 찔려 떨어지며 구슬픈 비명을 질러대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아예 올라가기를 단념하고 위를 향해 소리소리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자들도 있었다. 체념한 듯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 짓기도 하고, 구덩이 바닥에 실성한 듯 퍼질러 앉아 무언가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웅얼대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어느새 전갈을 받은 후진(後陣)에서 마른 생선 두릅 엮듯 줄줄이 묶은 항병들을 끌고 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거기까지 끌려온 항병들은 언덕 위에 줄지어 세워지고서야 자신들이 어디에 와 있는지 알아차렸다. 발아래 길고 깊게 입을 벌리고 있는 구덩이만으로도 눈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한순간에 절감케 했다.
그제야 새로 끌려온 항병들도 구덩이 아래쪽과 마찬가지로 저마다 죽음을 앞둔 생명의 처절한 안간힘을 펼쳐보였다. 그러나 몸부림쳐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을 끌고 온 초나라 군사들이 발로 차고 창대로 후려치자, 줄줄이 묶인 채로 구덩이 바닥에 처박히며 이미 펼쳐진 아비규환에 새로운 지옥도(地獄圖)를 보탤 뿐이었다.
뒤이어 임치(臨淄) 부근에서 뻗대다 사로잡힌 제왕(齊王) 전영의 잔병(殘兵) 9000명이 모두 산 채로 구덩이에 던져질 때까지 그런 참극이 몇 차례고 되풀이되었다.
나중에는 구덩이가 내던져진 사람의 몸으로 채워져, 묶이지 않은 자들은 그들을 딛고 언덕 위로 기어오를 수도 있었으나, 누구도 살아서 구덩이 밖으로 기어나가지는 못했다. 언덕 위에 기다리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의 창칼이 그들을 난자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시체와 뒤섞인 구덩이 안의 사람들이 야릇한 마비와 무력감에 빠져 두 눈만 껌벅이고 있을 때 말발굽소리와 함께 한 무리의 장수들이 나타났다. 오추마(烏U馬)에 높이 오른 패왕 항우와 그의 장수들이었다.
언덕 위에 이른 패왕은 말 위에서 잠시 발아래 구덩이를 내려보았다. 거기서 벌어지고 있는 참상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는 듯했으나, 이내 차가운 낯빛으로 고개를 돌려 좌우를 바라보며 짧게 명했다.
“묻어라!”
그리고 다시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 큰소리로 외쳤다.
“모두 산 채 묻어 과인이 받은 천명(天命)에 맞선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천하가 알게 하라. 우리 서초(西楚)를 두려워하지 않은 죄와 과인이 믿고 아끼는 장졸들을 죽고 다치게 한 죄가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만민에게 보여줘라.”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패왕 항우의 짧은 생애에서 되풀이되는 ‘산 채 묻기[갱]’란 포로 처리방식이다. 패왕은 구체적으로 기록된 것만도 세 번에, 암시되기로는 거의 통상적으로 항복한 적들을 산 채로 묻고 있다.
그때 패왕이 빠져 있던 격정이 눈먼 복수의 쾌감인지 아니면 믿고 아끼던 이들을 잃은 슬픔으로 뒤틀리고 모질어진 감상인지는 알 길이 없다. 그들을 산 채 묻기로 한 결정도 마찬가지다. 뒷사람들이 흔히 추측하듯, 포로 관리의 효율성만 따지는 냉정한 계산이었는지 아니면 타고난 잔인성과 흉포함의 발로였는지도 이제 와서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하지만 그런 생매장이 거지반 패왕의 손아귀에 들어온 천하를 다시 잃게 만든 원인 중에 하나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기록을 보면 패왕은 정당성과 효율성을 굳게 믿으며 그 일을 되풀이한 듯하다. 나중에 외황(外黃)의 열세 살 난 아이에게서 깨우침을 받고서야 비로소 항복하거나 사로잡힌 적을 산 채 묻는 일을 그만둔다.
따라서 그때의 패왕에게는 그 생매장이 당연하기만 했을 것이다. 산 채로 땅에 묻혀 꺼져가는 수많은 생명의 절규보다는, 자신을 거기까지 끌어내 세월과 기력을 허비하게 만든 제왕(齊王) 전영에게 느끼는 분노가 더 강하게 패왕의 정서를 사로잡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못된 놈. 그래도 편하게 죽은 걸 다행으로 여겨라. 내게 사로잡혔으면 가죽을 벗기고 살점을 저며 죽였을 것이다!”
두 언덕 사이가 메워져 평평해질 무렵에야 그곳을 떠나며 패왕은 머리만 상자에 담겨온 전영을 떠올리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돌이켜 보면 숙부 항량(項梁)이 처음 동아(東阿)에서 전영을 구해줄 때부터가 악연의 시작이었다. 항량은 있는 힘을 다해 장함을 쳐부수고 전영을 구해냈으나, 전영은 곧장 제(齊)나라로 돌아가 집안싸움에만 골몰하였다. 그리고 항량이 글을 보내 함께 싸워주기를 청해도, 초나라로 도망쳐 온 전가(田假) 패거리의 목을 요구하며 끝내 그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영만이라도 빨리 돌아와 항량 곁에 있었더라면 정도(定陶)의 참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패왕은 굳게 믿고 있었다.
거록(鉅鹿)의 싸움에서도 전영(田榮)은 패왕 항우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패왕이 왕리(王離)의 대군과 피투성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성안에 갇혀 있던 조왕(趙王)과 장이 외에도 적지 않은 제후들이 군사를 내어 함께 싸워주었다. 그러나 조카 전불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재상이 되어 제(齊)나라의 실권을 틀어쥐고 있던 전영은 화살 한 대 보태주지 않았다.
패왕이 관중으로 쳐들어갈 때도 그랬다. 천하의 제후들이 모두 패왕을 따라 진나라를 쳐 없애는 데 공을 다투었으나, 전영만은 제나라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때 패왕은 그의 힘이 아쉬워서가 아니라, 그 교만과 오기가 미워 가만히 이를 사려 물며 뒷날을 별렀다.
그 뒤 진나라를 쳐 없앤 패왕이 홍문에서 천하대세를 장악하자 가장 먼저 반기를 든 것도 전영이었다. 전영은 패왕이 제나라 왕으로 보낸 전도(田都)를 쳐부수어 내쫓고, 교동왕(膠東王)으로 돌린 전불을 즉묵(卽墨)까지 따라가 죽였다. 그리고 팽월을 시켜 패왕이 제북왕(齊北王)으로 보낸 전안(田安)마저 죽여 버렸다.
하지만 전영의 도전은 패왕이 정해 보낸 삼제(三齊)왕을 모두 죽이거나 내쫓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세 땅을 아우른 다음 스스로 제왕(齊王)이 되어, 천하를 분봉(分封)한 패왕의 권위에 정면으로 맞섰다.
직접은 아니라도 패왕이 된 항우에게 처음으로 패배를 맛보인 것도 전영이었다. 전영이 팽월을 시켜 서초(西楚)땅을 노략질하게 하자, 패왕은 소공(蕭公) 각(角)에게 군사 3만을 주어 팽월을 치게 했다. 팽월은 그 소공 각이 이끈 서초의 대군을 양(梁) 땅에서 여지없이 쳐부수어 버리는데, 그때 팽월의 신분은 제왕 전영의 장군이었고, 그 군사는 제군(齊軍)의 기호(旗號)를 쓰고 있었다.
한왕 유방에 가려 크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찌 보면 전영은 초기의 패왕을 가장 애먹이고 힘들게 한 맞수였다. 그리고 그가 근거했던 제나라도 끝까지 천하대세의 향방을 가늠하는 저울추 노릇을 한다.
하지만 패왕으로 하여금 죽은 뒤까지도 전영을 미워하게 만든 것은 무엇보다도 그런 때 그런 곳에다 자신을 끌어다 놓은 일이었다. ‘그런 때’란 한왕 유방이 관중을 모두 차지하고, 그것도 모자라 관외의 한(韓)나라와 하남(河南)까지 삼켜버린 심상찮은 때를 말한다. ‘그런 곳’은 유방이 다시 하동(河東)과 하내(河內)를 휩쓸고 있다는데, 자신은 엉뚱하게도 전영의 졸개들에게 끌려 다니고 있는 산동 북쪽 땅을 말한다.
원래 패왕은 한왕 유방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항량이 살아있을 때 유방에게 보인 까닭모를 호의가 기억에 남아있었고, 또 여러 달 함께 싸우며 진나라의 성읍(城邑)을 거둬들일 때 동고동락한 정도 있었다.
가까이서 보아 알게 된 유방의 무능이나 결함도 패왕을 마음 편하게 했다. 패왕은 개인적인 용력(勇力)도 군사를 부리는 재주도 신통찮은 주제에 맺고 끊는 데 없이 수하 장수들과 한 덩이로 어울려 뒹구는 유방을 장수로서는 처음부터 얕보았다. 거기다가 유방의 감출 줄 모르는 물욕과 군막 안까지 여자들을 끌어들일 정도로 지저분한 행실은 유방을 난세의 바람을 잘 탄 늙은 오입쟁이쯤으로 여기게 했다.
패왕이 한왕 유방을 달리 보기 시작한 것은 유방이 먼저 관중으로 들어가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낸 다음이었다. 관중으로 들어가려면 함곡관을 넘어야 한다는 통념을 깨고 유방이 남양(南陽)으로 길을 돌아 무관(武關)을 넘은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진 제국의 심장부에 바로 뛰어든 유방이 격렬했을 그 마지막 저항을 꺾고 마침내 진왕(秦王) 자영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충격과 함께 은근한 시샘까지 느꼈다.
그러다가 유방이 제 장수를 시켜 함곡관을 닫고 자신의 진입을 막으려 들자 패왕은 살의(殺意)가 들 만큼 그 컴컴한 속셈이 의심스러웠다. 관중에 든 지 두 달 만에 유방이 거둬들인 인심도 패왕의 경계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홍문의 잔치에서 보여준 비굴함은 다시 패왕을 방심하게 했다. 거기다가 한왕(漢王)을 받아들인 유방이 잔도(棧道)를 불사르고 파촉(巴蜀) 한중(漢中)으로 들어갈 때는 천하대세가 그걸로 모두 결정된 듯 보였다.
하지만 고도(故道)를 통해 파촉 한중에서 나오면서 유방은 다시 흉물스러운 야심가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달도 안돼 삼진을 평정하여 관중을 차지함으로써 더욱 밉살맞으면서도 정체모를 괴물같이 되어갔다. 그러다가 함곡관을 나와 중원으로까지 손을 뻗치자 홍문(鴻門)의 잔치 때 죽이지 못한 게 뼈저리게 후회되는 천하쟁패의 난적(難敵)으로 다가왔다.
가슴에 품은 미움과 분노대로라면 패왕은 한왕 유방이 한중을 나왔을 때 이미 관중으로 대군을 내어 결판을 봤어야 했다. 그런데 장량의 말에 속고, 의제를 둘러싼 서초(西楚) 내부의 형세가 뜻 같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이에 전영이 먼저 일을 내고 말았다. 멀리 관중에 있는 유방의 칼이 설령 염통을 겨냥하고 있다 해도, 당장 가까운 산동에서 콧등을 갈겨대는 전영을 버려둘 수는 없었다.
“못된 놈. 지독한 놈….”
패왕은 다시 그렇게 중얼거리고 혀를 차며 죽은 전영을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지난 정월에 있었던 성양(城陽)의 싸움은 어지간한 패왕에게조차 끔찍했다. 전영이 임치(臨淄)에서 성벽을 높여 기다리지 않고 거꾸로 천리 길을 마중와 준 것은 고마웠으나, 먼 길을 벼르고 와서 그런지 전영이 이끈 제군(齊軍)은 처음부터 만만치 않았다. 패왕의 이름과 서초(西楚)의 기치만 보아도 벌벌 떨며 손을 들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오히려 패왕이고 서초의 군사라 더욱 싸울 만하다는 듯 기세를 올렸다.
거기다가 패왕이 데리고 간 군사는 소문처럼 그리 많지 않았다. 전영을 얕봐 강동병(江東兵) 3만에 용저(龍且)와 종리매(鍾離매)가 이끄는 군사 3만이 전부였다. 그 바람에 성양에 이른 패왕은 전군을 들어 닷새나 성을 짓두드렸지만 떨어뜨리기는커녕 문루(門樓)하나 제대로 그슬지도 못했다.
“안되겠다. 아부(亞父)께 글을 올려 군사를 떠 뽑아 올리게 하라. 빨리 전영을 사로잡고 팽성으로 돌아가야 하니, 되도록 많은 군사를 이끌고 아부께서도 함께 오시도록 해야 한다.”
마침내 패왕은 그렇게 명을 내려 범증에게 증원을 요청했다. 범증도 중원으로 뻗어 나오기 시작한 한왕 유방을 꺾는 일이 더욱 급함을 잘 알고 있었다. 빨리 제나라를 평정하고 서쪽으로 갈 양으로 팽성을 지키는 군사들 중에서 굳세고 날랜 5만을 가려 뽑았다. 그리고 다음날로 팽성에 남아있던 계포와 함께 그들을 이끌고 성양으로 떠났다.
“이제 우리 서초(西楚)의 맹장(猛將)과 정병(精兵)은 거의 모두 이 성양(城陽)으로 데려온 셈입니다. 팽성에 아직 10만 대군과 여러 장수가 남았다 하나, 그래도 나라의 도읍을 너무 허술하게 비워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성양에 이른 날 범증이 그런 걱정을 했다. 그러나 패왕은 터무니없다는 듯 웃으며 받아넘겼다.
“과인이 없다 해도 10만 대군이 지키는 서초의 도성이외다. 누가 감히 넘겨본단 말이오?”
“한왕 유방이 다시 임진관(臨晉關)을 나와 하수(河水)를 건넜다니 아무래도 마음 놓이지 않습니다. 하동을 지키는 서위왕 위표도 믿을 수 없고, 하내의 은왕 사마앙도 그렇습니다. 이미 한왕(韓王) 정창과 하남왕 신양의 항복을 받아 기세가 오른 터에 다시 하동 땅과 하내 땅을 어우르게 되면 간이 부푼 유방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더구나 팽성의 지세는 드넓은 들판 가운데 있어 사방이 열려 있는 형국입니다. 깊은 물이나 험한 산이 가로막지 않아 밖으로 뻗어 나가기에는 좋으나, 제자리에 앉아서 지키기에는 결코 이롭지 못합니다. 사방으로 적을 받게 되어 있어 웬만한 대군으로는 지키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범증은 걱정스러운 기색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다. 패왕이 다시 너털웃음으로 범증을 안심시켰다.
“임진관에서 팽성까지는 2000리 가까운 길이니 아부께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성양은 내일이면 떨어지고 전영은 사로잡힐 터, 설령 유방이 오늘 당장 팽성으로 밀고 든다 해도 우리가 먼저 팽성에 돌아가 있게 될 것이오.”
그리고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맹렬히 성양을 공격했다. 범증의 말대로 서초의 맹장과 정병들이 모두 나선 공성(攻城)이었으나, 워낙 성벽이 두텁고 높은 데다 안에서 지키는 사람들이 악착같았다. 제왕(齊王) 전영의 군사들과 성안 백성들이 한 덩이가 되어 죽기로 맞서니 패왕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적지 않은 장졸만 다치고 다시 사흘이 헛되이 지나갔다. 하지만 서초의 군사가 워낙 많은 데다 지난 3년 곳곳에서 피투성이 싸움을 벌이며 날래고 모질게 단련돼 있었다. 다시 닷새째 되는 날 밤, 벌써 열흘이나 쉴 새 없이 싸워와 지친 성양 성안의 군민(軍民)들은 초나라 군사들의 매서운 야습을 견뎌내지 못하고 성을 내주었다.
“전영을 사로잡아라! 전영을 사로잡으면 천금(千金)의 상에 만호후(萬戶侯)로 올릴 것이다!”
성문이 열리자 패왕은 먼저 전영부터 사로잡아 오게 했다. 하지만 밉쌀 맞게도 전영은 성이 떨어지기 전에 300 여기(騎)를 거느리고 북문으로 달아나고 없었다. 패왕이 펄펄 뛰며 군사들을 풀어 전영이 달아난 곳을 알아보게 했다.
오래잖아 전영이 평원(平原)으로 갔다는 게 알려졌다. 패왕은 사마 용저(龍且)에게 5000 군사를 주며 전영을 뒤쫓게 했다. 용저가 밤을 낮 삼아 평원으로 달려가니, 다행히도 패왕을 두려워한 평원의 백성들이 전영을 죽여 그 목을 바쳐 왔다.
살아있는 전영에게 분풀이를 못한 게 패왕에게는 분통 터지는 노릇이었지만, 그래도 그 목을 얻은 것으로 급한 불길은 잡힌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뒤처리가 다시 패왕의 발목을 잡아 그 뒤 석 달 가까이나 더 수렁 같은 제나라 땅에 묶어두었다.
성양을 떨어뜨린 패왕은 사로잡힌 전영(田榮)의 군사들과 그들을 거들어 싸운 백성들을 모조리 성밖에 끌어내어 산 채로 땅에 묻었다. 그 머릿수가 군민(軍民)을 합쳐 3만이 넘었다. 또 초나라 군사들에게는 상 대신 약탈을 허용하니, 빼앗기지 않으려다 죽음을 당하는 백성들의 비명소리와 겁탈 당하는 부녀자의 애처로운 신음이 며칠이나 성안을 가득 메웠다.
“이만하면 과인과 서초에 맞선 죄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았을 것이다. 이제 제왕(齊王)을 다시 세워 그에게 제나라를 맡기고 우리는 팽성으로 돌아가자!”
사흘째 되는 날 패왕은 그렇게 말하고 제왕으로 내세울 만한 인물을 찾아보게 했다. 마침 옛 제나라의 마지막 왕 전건(田建)의 아우 전가(田假)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전가는 전에도 제나라 사람들이 왕으로 세운 일이 있었는데 항량이 동아(東阿)에서 구해준 덕분에 제나라로 되돌아온 전영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패왕이 전가를 제왕으로 세우고 성양을 떠나려 하자 전가가 덜덜 떨며 빌었다.
“대왕, 이대로 떠나셔서는 아니 됩니다. 대왕께서 이리 떠나시는 것은 저를 죽을 구덩이에 몰아넣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엎드려 빌건대, 천하가 안정될 때까지는 저를 팽성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제왕이 제나라에 머물지 않고 어찌 서초의 도읍으로 가겠다는 것이오? 제나라 백성들을 뽑아 군사를 기를 때까지 약간의 장졸을 남겨줄 터이니 이곳에 머물러 봉토를 지키시오.”
패왕이 그렇게 권했지만 전가는 눈물까지 보이며 간청했다.
“비록 전영은 죽었으나 지금 제나라는 전영의 잔당(殘黨)으로 덮여 있습니다. 대왕께서 떠나시면 제나라는 그날로 손바닥 뒤집히듯 뒤집히고 말 것입니다.”
“전영의 잔당? 그럼 제나라 백성들이 그토록 많이 전영을 따르고 있었단 말이오?”
“그 형 전담(田담)으로부터 산동의 민심에 내린 뿌리가 결코 얕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혼자서 삼제(三齊)의 왕을 모두 죽이거나 내쫓을 수 있었겠습니까? 제발 저도 그 삼제의 왕처럼 되지 않도록 굽어 살펴주십시오.”
전가가 그렇게 애걸하고 있는데 갑자기 급한 전갈이 들어와 전가를 거들어 주었다.
“전영의 부장(部將) 하나가 동아(東阿)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그 자는 성양을 우려 빼신 대왕께서 초나라 군사를 시켜 성안 남자들은 모두 산 채로 땅에 묻고, 부녀자들은 남김없이 겁간한 뒤 부로(俘虜)로 끌고 갔다고 제나라 백성들을 속였다고 합니다. 또 백성들의 재물을 모두 약탈하고 민가를 모조리 불살라 성안을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거짓말 하였으며, 성벽은 허물고 해자(垓字)는 메워 성양성이 있던 곳은 평지가 되었다고 충동질해 백성들을 저희 편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정녕 그렇게 해주기를 원한다면 그리 해주지.”
하지도 않은 일까지 덮어씌우는 데 화가 난 패왕이 그렇게 소리치고 다시 소식을 가지고 온 군사에게 물었다.
“그래, 그것들은 지금 어떻게 하고 있느냐?”
“동아에서 모은 군사가 저희 말로 3만인데, 다시 곡성(穀城)을 아울러 5만으로 키운 뒤에 성양으로 쳐들어오겠답니다.”
“알았다. 그렇다면 내 이제 그것들을 모조리 사로잡아 산 채로 묻고 그 처자는 또한 모조리 부로로 끌고 갈 것이다. 민가는 모두 불사르고 성은 평지를 만들어 주리라!”
패왕 항우는 그렇게 말하고 그날로 대군을 몰아 곡성(穀城)으로 달려갔다. 하루 낮 하룻밤의 끔찍한 싸움 끝에 곡성은 떨어지고, 싸움에서 1만여 명을 죽인 초나라 군사들은 사로잡은 5000명을 다시 산 채로 땅에 묻었다. 어린아이와 부녀자들을 모두 부로로 삼았으며 성은 태우고 허물어 평지를 만들어 버렸다.
패왕은 그 본보기가 제나라 사람들을 충분히 겁주어 저항의 의지를 꺾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그게 불씨가 된 듯 산동에는 크고 작은 저항의 불길이 잇따라 타올랐다.
제나라 백성들이 모두 들고일어나 여기저기서 힘대로 맞서니 산동은 곧 패왕에게 고약한 수렁 같은 땅이 되고 말았다. 무턱대고 대군을 쪼갤 수 없어 가까운 곳부터 하나하나 불길을 잡아가는 식으로 대군을 움직이는데, 그게 끝이 없었다. 여기를 비벼 껐다 싶으면 저기서 일고, 거기 가서 끄고 나면 다시 여기서 이는 식이었다.
방금도 패왕은 그 불길을 쫓아 멀리 북해(北海)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구석구석 비로 쓸 듯 산동 북쪽을 휩쓴 뒤에, 마지막으로 임치(臨淄)에 모여 힘을 기르고 있는 전영의 잔당들을 쓸고 나니 벌써 제나라에 온 지 두 달이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지난날 관중에 들 때처럼 이번에도 나는 엉뚱한 곳에서 너무 오래 발목이 잡혀 있는 것은 아닌가. 나는 너무 오래 제나라에 묶여 있고, 팽성에서 너무 멀리 와 있는 게 아닌가….’
지난 두 달 남짓을 돌이켜보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든 패왕이 자신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당장은 오고가는 것이 자신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게 다시 한 번 패왕의 심기를 상하게 했다. 좋다. 그렇다면 너희 제나라 쥐새끼들, 산동의 쉬파리 떼를 끝까지 뒤쫓아 철저히 짓밟아 주마….
본진으로 돌아간 패왕이 자신의 군막으로 들어가니 언제 왔는지 범증이 어두운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홍문의 잔치 이후 별로 웃는 낯을 본 적이 없어 그의 어두운 얼굴이 오히려 익숙하지만, 그래도 패왕은 건성으로 물어보았다.
“아부(亞父)께서는 무슨 걱정이 있으시오? 어째 얼굴이 밝지 않소.”
그러자 범증이 노여움과 비아냥거림이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
“홍문에서 관 뚜껑에 못질하다 놓친 그 교활 무쌍(無雙)한 장돌뱅이가 기어이 큰일을 저지르려는가 봅니다. 한왕 유방이 마침내 은왕 사마앙의 항복을 받고 군사를 남으로 돌렸다고 합니다. 지금 평음진(平陰津)으로 내려가고 있다는데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일이라면 그리 걱정 않으셔도 되겠소. 이제 임치에 둥지를 틀고 있던 도적 떼까지 쓸었으니 성양으로 돌아가면 될 것이오. 가서 전가(田假)에게 제나라를 맡기고 우리는 팽성으로 돌아가면 아무 일도 없으리다. 오히려 한왕 유방더러 제발 팽성으로 와 달라고 하시오. 그러면 우리는 먼저 가서 편히 쉬며 기다리다가 제 발로 찾아온 그 늙은 도둑을 잡을 수 있을 것이오!”
“그게 반드시 그렇게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지난 두 달을 돌이켜 보십시오. 당장도 또 어디서 악에 바친 제인(齊人)들이 들고 일어날는지…”
범증이 여전히 어둡고 무거운 얼굴로 그렇게 받았다. 그러잖아도 지쳐있던 항우는 울컥 화가 솟구쳤으나 상대가 범증이라 함부로 속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숨만 씨근거리고 있는데 군사 하나가 급히 달려와 알렸다.
“역성(歷城)에 또 반군(叛軍)이 들었다 합니다. 죽은 전영(田榮)의 종제가 이끄는 군사라고 하는데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롭습니다. 전횡(田橫)의 명을 받들어 성양(城陽)으로 몰려가는 길이라 합니다.”
전횡은 전영의 아우로서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전에 전영이 스스로 재상이 되어 전담의 아들 전불을 왕으로 세우고 제나라를 다스릴 때는 장군이 되어 형을 도왔으며, 전영이 마침내 제왕(齊王)이 되었을 때는 대장군으로 제나라의 대군을 모두 거느렸다.
“내가 전횡을 잊고 있었구나. 그래 전횡은 지금 어디에 있다고 하더냐?”
패왕이 문득 생각난 듯 그렇게 물었다. 그 군사가 알아온 대로 모두 말했다.
“성양이 떨어질 때 겨우 군사 몇 백만 데리고 멀리 달아났던 전횡은 형이 평원(平原)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자 보수설한(報수雪恨)을 맹서하며 군사를 모았습니다. 상복을 입고 검은 기를 세워 제나라 사람들을 충동질하니 금세 몇 만 군사가 그 아래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우리 군사가 가는 곳마다 항복한 자는 모두 산 채 묻고 성은 허물어 평지를 만들어버린다는 소문이 돌자 더 많은 사람이 모여, 지금은 그 세력이 전영이 살아있을 때에 못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역성에 있는 무리들에게 성양으로 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성양을 되찾을 작정인 듯합니다.”
그때 다시 범증이 조용히 물었다.
“역성에 있는 군사는 얼마나 된다고 하더냐?”
“저희 말로는 몇 만이라고 떠드나 인근 백성들에 따르면 5000을 크게 넘지 않을 거라 했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벼린 창칼조차 없는 농투성이들이라 우리 대군이 밀고 들면 모두 놀라 달아나고 말 것입니다.”
“달아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역성에 닫기 전에 먼저 성양으로 달려가 전횡과 합세하겠지.”
범증이 남의 말 하듯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뭔가 심상찮은 느낌이 든 패왕이 성난 기색을 감추고 물었다.
“아부(亞父),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어서 빨리 군사를 성양으로 돌려야 합니다. 늦어지면 돌아가도 성양은 이미 우리 것이 아니고, 성안의 전가(田假)는 이미 죽은 목숨일 것입니다.”
“역성의 적도는 어찌해야 하오?”
“성양으로 가는 길목이니 응당 쳐 흩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열에 아홉 적도들은 우리가 그곳에 이르기 전에 성양으로 달아나고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급해진 패왕은 그날로 대군을 휘몰아 역성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하루 밤 하루 낮을 내달아 역성에 이르러 보니 범증의 말대로 반군들은 이미 그 하루 전에 떠나고 없었다.
“적도들은 성안의 곡식을 모조리 거두고 장정들까지 뽑아 세력을 배나 불린 뒤에 급히 성을 떠났다고 합니다. 성안에는 곡식 한 톨, 장정 한 명 남아있지 않습니다.”
역성(歷城) 안을 돌아보고 온 집극랑(執戟郞) 하나가 패왕 항우에게 그렇게 알려왔다. 그 말에 패왕의 결기가 다시 울컥 치솟았다.
“쌀 한 톨 장정 하나 남아있지 않다면, 이는 틀림없이 빼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바친 것이다. 그리고 적도들에게 모든 것을 스스로 바친 성이라면 우리 서초(西楚)나 과인에게는 있으나마나한 성이다. 이제부터 성안은 불사르고 남아 있는 노소는 모두 부로(俘虜)로 잡으라. 성벽을 허물고 해자를 메워 다시는 적도가 몸담을 수 없는 곳이 되게 하라!”
그렇게 명을 내려 또 한 번 제나라 사람들의 가슴을 깊이 파 뒤집어 놓았다. 하지만 그 끔찍한 짓에 또 한나절을 허비해 성양으로 가는 길은 그만큼 더디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때 전횡(田橫)은 이미 3만 대군을 모아 성양을 에워싸고 있었다. 성양은 옛 노나라의 속국인 거(거) 땅에 세워진 성으로, 그 형 전영(田榮)이 패왕 항우와 싸워 크게 낭패 본 곳이기도 했다. 그때는 패왕이 왕으로 앉힌 전가(田假)가 역시 패왕이 딸려준 군사 만여 명과 더불어 지키고 있었다.
“항우가 멀리 임치까지 짓밟고 다시 길을 되짚어 이리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어서 성양을 떨어뜨려 근거를 마련하고 항우에게 맞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횡이 성을 에워싸고 있을 뿐, 선뜻 들이치지 않는 걸 보고 그 부장들이 그렇게 재촉했다.
하지만 전횡은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우리 군세로는 아무 손상 없이 성양을 손에 넣어도 항우로부터 성양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오. 그런데 다시 굳게 지키는 성을 공격하다가 군사라도 크게 상하는 날이면 그 일을 어찌하겠소? 반드시 계략을 써서 우리 군사를 상하지 않고 성을 떨어뜨려야 하오.”
그런 전횡의 말에 종제 전기(田旣)가 한 꾀를 내었다.
“성양은 선왕(先王=전영)께서 항우와의 싸움에 근거로 삼고자 공들여 민심을 수습한 땅입니다. 비록 선왕께서는 싸움에 지고 쫓겨나셨으나, 성안 백성들 가운데는 선왕의 위덕(威德)을 기리는 이들이 아직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밤 성안으로 글을 매단 화살을 날려 보내 그들을 한번 달래보면 어떻겠습니까? 먼저 전가(田假)를 목 베고 성문을 여는 자는 천금의 상을 주고 대장군으로 삼을 것이요, 그를 도운 성안 백성들도 모두 전보다 더한 은의로 대할 것이라고 하십시오. 그런 다음 이번에는 전가와 초나라에 빌붙으려하는 백성들을 겁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속아 미련스레 성안에서 머뭇거리다가 성이 깨어지는 날에는, 부조(父祖)의 나라를 저버린 죄를 물어 죽은 넋조차 돌아갈 곳이 없게 만들겠다고 하면, 성안 백성들의 마음이 달라질 것입니다.”
전횡이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곧 흰 비단을 찢어 글을 쓰고 화살 끝에 매단 다음 성안으로 쏘아 보내게 했다. 전횡의 군사들이 그런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보내기 수십 차례였으나 낮 동안 성안은 괴괴하기만 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뭔가 심상찮은 수런거림이 성 밖에서도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런 말을 전해들은 전횡이 가만히 명을 내렸다.
“모두 갑주와 투구를 여미고 단단히 싸울 채비를 하라. 동서남북 어느 쪽이건 성문이 열리기만 하면 적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들이쳐 단번에 성을 거둬들여야 한다.”
그 같은 전횡(田橫)의 명령에 장졸들도 진작부터 싸울 채비를 갖추고 성안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성양(城陽) 성안 백성들 가운데는 지난번 싸움 때 전영을 편들었다가 패왕 항우에게 부모형제를 잃거나 처자를 앗긴 사람이 많았다. 죽지 못해 초나라 군사들에게 눌려 지냈으나, 전횡이 성안으로 날려 보낸 글을 보자 더는 참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자 서로 모여 권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저마다 들고 일어나 성 밖 전횡의 군사들에게 호응했다.
이경(二更)을 넘기면서 성안 후미진 곳부터 여기 저기 불길이 일기 시작하더니 삼경에 접어들 무렵에는 성안 곳곳이 대낮처럼 타올랐다. 초나라 군사들이 눈에 불을 켜고 불을 지르는 자들을 잡으려 들었으나, 어둠 속인 데다 하도 여러 곳에서 불길이 솟아 군사만 성안 여기저기로 흩어지는 꼴이 되었다. 그러다가 함성과 함께 허술한 서문 쪽이 먼저 열렸다.
서문 쪽에는 마침 전기(田旣)가 날랜 장정 수천과 함께 숨어 기다리고 있었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함성을 지르며 성안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다. 이때를 놓치지 말라!”
“모두 성안으로! 어서 나머지 세 성문을 열어 전횡 장군을 안으로 모시자!”
전기의 군사들이 서문으로 뛰어들자 성안의 초나라라 군사들은 더욱 혼란되었다. 적이 서문으로 들어왔다는 말에 군사를 있는 대로 그쪽으로만 몰았다. 그러자 다른 성문들까지 느슨해지면서 다시 남문이 열리고, 이어 북문까지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전횡의 군사들이 사방에서 홍수처럼 몰려들자 그러잖아도 머릿수가 턱없이 모자라던 초나라 군사들은 더 싸울 뜻이 없어졌다. 장졸들이 저마다 성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패왕이 세운 허수아비 왕은 아무도 돌봐줄 겨를이 없어 제왕(齊王) 전가(田假)는 그 난판에 누가 그랬는지도 모르게 목이 떨어지고 말았다.
성안 백성들의 호응 덕분에 별로 힘 들이지 않고 성양을 떨어뜨린 전횡은 크게 기세가 올랐다. 사로잡은 초나라 군사들과 끝까지 그들에게 빌붙어 자기들에게 맞선 제나라 사람들을 모두 목 벤 뒤에 성양에 눌러앉아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다. 그리고 널리 사람을 풀어 지난번 난리 통에 흩어진 형 전영(田榮)의 아들들을 찾아보게 했다.
전영의 아들들 가운데 맏이는 전광(田廣)이라 했는데, 일찍부터 왕재(王才)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전횡의 군사들이 사방으로 수소문 한 지 며칠 안돼 그 전광이 어린 아우 하나와 성양에서 멀지 않은 민가에서 나왔다. 지난번 성양이 패왕에게 떨어졌을 때 초나라 군사들에게 쫓기다가 옷을 갈아입고 농부들 사이에 숨어 지낸 끝이었다.
전횡은 몹시 기뻐하며 조카 전광을 새로운 제왕(齊王)으로 모셨다. 한(漢) 2년 4월 초순의 일이었다.
전광이 왕위에 오르자 패왕 항우에게 의연히 맞서다가 죽은 그 아비 전영에 향한 존숭과 신망이 자연스레 그에게 쏠렸다. 그가 있는 성양은 도읍처럼 되고, 제나라의 사람과 물자가 모두 그리로 몰렸다. 전횡은 다시 대장군이 되어 패왕과 맞서 싸울 전의(戰意)를 불태웠다.
한편 간신히 목숨을 건져 성양을 빠져나간 초나라 군사는 두 갈래로 나뉘었다. 한 갈래는 무턱대고 제 도읍인 팽성을 바라 달아났고, 다른 한 갈래는 임치(臨淄)에서 돌아오고 있는 패왕 항우를 찾아 동쪽으로 내달았다. 따지고 보면 초나라 군사들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무참하게 져서 쫓기는 셈이라, 어느 쪽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 동쪽으로 달아나던 초나라 군사들이 정신없이 내닫기 이틀 만이었다. 멀리 동편으로 부옇게 먼지를 날리며 대군이 몰려오고 있었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더니, 그때의 초나라 군사들이 그랬다. 놀라 무턱대고 달아나려다 다시 한번 바라보니 저희 편 깃발이라 구르듯 그리로 달려갔다.
마주쳐 오던 초나라 군사들이 도망쳐 오던 군사들의 말을 듣고는 그중 기장(騎將) 하나를 패왕 항우에게로 데려갔다.
“어떻게 된 일이냐? 성양은 어쩌다가 잃었느냐?”
패왕이 터질 듯한 노기를 억누르고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전영의 아우 전횡이 5만 대군을 모아 성을 에워싼 바람에……”
“닥쳐라! 전횡의 군사라면 나도 들은 말이 있다. 저들은 5만이라 떠벌이지만 실제로는 갈까마귀 떼 같은 농투성이 3만에 지나지 않는다 하였다. 두텁고 높은 성을 의지하고 있는 너희 1만이면 넉넉히 지킬 수 있었다.”
패왕이 드디어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기장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변명을 보탰다.
“거기다가 성안에 남아 있던 제(齊)나라 놈들이 성 밖의 적과 내통하여 밤에 몰래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내 줄곧 손길에 인정을 남겨 그것들을 살려준 걸 걱정했더니 끝내 그리되고 말았구나. 이제 다시 성양이 내 손에 떨어지면 제나라 종자는 아무도 살려두지 않으리라!”
항우가 그렇게 말하고 이를 부드득 갈더니 다시 그 기장을 노려보며 물었다.
“성을 빠져나온 것은 너희들뿐이냐?”
“남문으로 한 갈래가 더 빠져나갔습니다. 아마도 팽성을 바라고 달아났을 것입니다.”
“그럼 제왕(齊王)은 어찌 되었느냐?”
“워낙 순식간에 성이 떨어지고 홍수처럼 적이 밀려들어 살필 경황이 아니었습니다. 난군 중에 죽었다는 풍문이 있으나, 저희 가운데 직접 보거나 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자 패왕은 불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그 기장을 노려보며 꾸짖었다.
“과인이 너희 1만을 성양에 남긴 까닭은 성과 아울러 제왕 전가(田假)도 지키라는 뜻이었다. 특히 네가 부장(副將)으로 이끈 철기 500은 일이 있을 때 무엇보다 먼저 제왕을 보호하라 일렀는데, 어찌하여 제왕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홀로 도망쳐 오느냐?”
그제야 패왕의 마음을 읽은 그 기장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패왕이 길게 기다려 주지 않고 좌우를 돌아보며 엄하게 명령했다.
“여봐라. 이자를 끌어내어 목 베어라. 과인이 세운 왕이 모두 전가와 같은 꼴이 난다면 앞으로 누가 과인에게서 제나라의 왕위를 받으려 하겠는가?”
좌우에 있던 장수들이 한꺼번에 나서 패왕을 말렸다. 군율을 세우는 데는 엄하지만 자신이 곁에 두고 부리던 장졸에게는 곧잘 정에 약해지는 패왕이었다. 못 이기는 척 그 기장(騎將)을 용서하면서도 제 속을 이기지 못해 주먹을 부르쥐었다.
“전횡(田橫) 그 겁 없는 촌놈이 제 형을 따라 죽기를 재촉하는구나. 이제부터 전군은 일정(日程)을 배로 하여 성양으로 달려간다. 가서 성을 우려 빼고 전횡을 사로잡아 목을 베리라. 성안의 목숨 있는 것은 모두 죽이고 성은 허물어 평지를 만들리라!”
그리고는 장졸들을 휘몰아 성양으로 달려갔다. 범증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성안에서 평안히 쉬며 기다리고 있는 적을 고단한 군사로 쳐서는 이기지 못합니다. 적은 어차피 성에 의지해 우리에게 맞설 것이니 서두르지 마십시오.”
범증의 말이라 못 들은 척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패왕은 급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사마 용저(龍且)와 정공(丁公)을 불러 3만 군사를 떼어주며 말했다.
“너희들은 밤을 낮 삼아 달려 먼저 성양으로 가라. 멀리서 에워싸고 전횡이 달아나는 걸 막고만 있으면 곧 내가 이끈 대군이 그곳에 이르러 한 싸움으로 성을 우려 빼리라!”
하지만 그 같은 패왕의 서두름이 다시 화근이 되었다. 용저와 정공이 먼저 떠난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직 성양이 70리나 남은 곳에 이르렀을 때 패왕은 다시 분통 터지는 꼴을 보아야 했다. 전날 밤낮을 달려 성양 성 밖 30리 되는 곳까지 밀고 들었던 용저와 정공이 전횡의 군사들에게 야습을 받아 되쫓겨 온 일이었다.
전영조차 여우 대접도 안 해준 패왕의 도저한 자부심에 그 아우 전횡은 쥐새끼나 다름없이 하찮아 보였다. 용케 성양을 차지하기는 해도 성안에서 벌벌 떨며 기다리고 있을 뿐, 감히 성을 나와 매복하고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도 성 밖 30리나 나와 용저 같은 맹장이 이끄는 3만군을 형편없이 짓두들겨 내쫓아 버린 것이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성을 내기에 앞서 궁금함부터 풀어볼 양으로 패왕이 용저에게 물었다. 언제나 곁에 두고 아끼는 장수라 그 목소리도 우선은 담담했다. 용저가 얼굴을 붉히며 더듬거렸다.
“전횡과 전기가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매복해 있다가 칠흑 같은 여명에 불시에 기습해 왔습니다. 놀란 군사를 수습해 맞받아치려 했으나 군사들이 워낙 지쳐 있어 뜻과 같지 못했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 싸운 것만도 대소 쉰 번이 넘는다. 밤중에 행군하면서 척후도 보내지 않았단 말이냐?”
“전횡 같은 것이 감히 성을 나와 매복을 펼칠 줄은 차마 몰랐습니다.”
용저가 더욱 낯을 붉히면서도 분하다는 듯 지그시 이를 사려 물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약점에 관대하기 마련인가, 그런 용저의 말을 듣자 패왕도 더는 꾸짖지 않았다.
“제나라 촌놈에게도 배울 것이 있구나. 알았다. 이제부터 내 너를 한 장수로 여겨주마.”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거기서 대군을 쉬게 하고 다시 한 번 싸울 채비를 단단히 갖추게 했다. 전횡을 다시 보게 되었다기보다는 그가 결코 성양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으리란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라 보는 편이 옳다.
패왕 항우의 대군이 성양을 에워싼 것은 다음날 한낮이었다. 패왕은 먼저 성루 아래로 가 전횡을 불러내고 항복을 권했다. 그러나 전횡이 욕설과 함께 내던진 것은 패왕이 세운 제왕(齊王) 전가(田假)의 목이었다.
이에 성이 난 패왕은 그날로 성양을 들이치기 시작했으나 싸움은 뜻과 같지 못했다. 미리 성안에 들어 싸울 채비를 하고 있던 성안의 제군(齊軍)은 먼저 화살비와 돌벼락으로 초군이 성벽으로 다가오는 걸 막았다. 그리고 간혹 용맹을 뽐내며 성벽을 기어오른 초나라의 장졸이 있어도 겁내거나 움츠리는 법 없이 성벽 아래로 밀어냈다.
“아니 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장졸을 물려 쉬게 하고 내일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성을 치도록 하시지요. 싸움이 길어질지도 모르니 따로 성벽을 허물고 성문을 깰 연장들도 마련해야 할 듯합니다.”
범증이 펄펄 뛰며 군사를 몰아대는 패왕을 말렸다. 거기다가 그사이 날도 저물어 와 패왕은 하는 수 없이 공격을 멈추었다.
하지만 하룻밤 편히 쉬고 채비를 갖춰 성을 쳐도 싸움은 전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초나라 군사들이 맹렬히 들이치면 들이칠수록 성안의 군민들도 결사적이 되어 맞섰다. 그 바람에 다음날도 패왕은 장졸만 숱하게 잃고 아무 얻은 것 없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전군을 들어 성양성을 들이쳤으나 잇달아 사흘을 내리 쫓겨나고 나서야 패왕은 점차 자신이 고약한 수렁에 빠져들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해 가까이 실질적으로 제나라를 다스리며 그 힘을 모아 맞섰던 전영보다 져서 쫓기는 군민들을 긁어모은 전횡의 항전이 더욱 치열한 듯했다. 그러나 그 치열함이 지면 죽는 길밖에 없다는 절박감으로 제나라 사람들을 내몬 자신의 엄혹함과 비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패왕은 아직도 깨닫지 못했다.
열흘이 지나도 성양이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패왕도 그곳의 싸움을 길게 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자 처음 겪는 어려움이 패왕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초나라의 허술한 보급과 병참에서 비롯되는 어려움이었다.
패왕이 숙부 항량을 따라 처음 군사를 일으킨 곳은 그들 숙질이 오래 기반을 닦아 온 오중(吳中)이었고, 크게 세력을 불린 곳도 대개 초나라의 옛 땅이라 군사들을 먹일 곡식이나 싸움에 쓸 물자를 모으는 데 군색함이 없었다. 옛 초나라 유민들의 성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나라 땅을 떠나 조나라를 구하고, 다시 서쪽으로 먼 길을 달려 함양까지 가서 싸웠지만 그때도 마찬가지였다. 진나라의 폭정과 압제에 대한 반감이 큰 어려움 없이 그 군사를 먹이고 입힐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런데 제나라 땅에 와서 싸움이 길어지자 사정은 달라졌다. 지니고 온 군량과 물자가 떨어지자 그 땅에서는 구해낼 길이 없었다. 민가를 뒤져 빼앗듯 곡식을 거둬들였으나, 백성들이 내놓을 마음이 전혀 없으니 거둬지는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에 패왕은 사람을 팽성으로 보내 급히 필요한 군량과 물자를 보내게 했으나 그마저도 바란 대로 되지 않았다. 군량과 물자를 실은 수레가 서초(西楚)의 경계를 벗어나 제나라 땅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이름도 모를 잡군(雜軍)의 공격을 받아 불살라지거나 빼앗기기 일쑤였다.
“창칼 없이 싸울 수 없듯이 아니 먹고 걸친 것 없이 싸울 수도 없습니다. 믿을 만한 장수에게 한 갈래 군사를 떼어주어 남쪽에서 오는 군량과 물자를 보존하게 하십시오. 창읍(昌邑)까지만 내려가 기다리다가 호위해 오게 해도 초적(草賊)이나 잡군이 감히 우리 군량과 물자를 넘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범증이 다시 그렇게 패왕에게 권했다. 벌써부터 군사들이 주린 기색을 보이는 터라 패왕도 어찌하는 수가 없었다. 종리매에게 3만 군사를 떼어주며 창읍에서 성양에 이르는 양도(糧道)를 지키게 했다.
전군을 고스란히 거느리고도 떨어뜨리지 못한 성인데, 거기서 다시 3만 군사를 떼어내고 나니 싸움은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연일 성을 들이치기는 해도 초군의 기세는 무디어져 겨우 싸우는 흉내나 낼 뿐이었다.
그렇게 되자 패왕은 문득 자신이 지난날 거록(鉅鹿)을 포위하였던 진나라 장수 왕리(王離) 꼴이 난 것 같아 불길하였다. 왕리는 장함에게서 20만 대군을 받아 거록성을 에워쌌다. 그러나 일종의 보급선인 용도(甬道)를 지키기 위해 소각(蘇角)과 섭간(涉閒)에게 군사를 갈라주었다가 패왕 자신이 이끈 7만 군사에 대군이 차례로 무너져 마침내는 사로잡히는 치욕까지 당했다.
왕리의 선례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패왕은 더욱 거세게 장졸들을 몰아대었으나 늘어나는 것은 죽거나 다치는 군사들뿐이었다. 그러다가 겨우 도착한 군량과 함께 다시 기막힌 소식이 들어왔다.
“한왕(漢王) 유방이 다섯 제후를 거느리고 마침내 평음진(平陰津)을 건너 하수(河水) 남쪽으로 내려왔습니다. 지금은 낙양 신성(新城)에 머물러 있는데 그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대왕께서 비워두신 우리 팽성을 엿보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이 불같이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 늙은 도적놈이 스스로 목숨이 끊어지기를 재촉하는구나. 그런데 다섯 제후란 또 무엇이냐?”
“항복하거나 사로잡힌 왕들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상산왕(常山王) 장이, 위왕(魏王) 표, 한왕(韓王) 정창, 은왕(殷王) 사마앙, 하남왕(河南王) 신양을 이른다 하고, 어떤 사람은 한왕과 하남왕 대신 새왕(塞王) 사마흔과 적왕(翟王) 동예를 들기도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이 있을 때마다 듣기는 하였으나, 다 모아놓고 보니 벌써 일곱이나 되는 제후들이 한왕 유방에게 넘어갔다는 게 새삼 패왕의 화를 돋우었다.
“그것들은 과인이 한번 서쪽으로 길을 잡으면 목 없는 귀신이 될 놈들이다. 제후라니 무슨 당찮은 소리냐!”
소식을 가지고 온 군사가 바로 그 다섯 제후나 되는 듯 노려보며 그렇게 소리치다 문득 목소리를 가다듬어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알았다. 유방 그 늙은 도적이 무슨 수작을 꾸미든 걱정할 것 없다. 모든 장졸은 동요하지 말라. 먼저 전횡을 사로잡아 그 가죽을 벗기고, 성양성을 허물어 평지를 만든 뒤에 서쪽으로 달려가도 늦지 않다. 먼저 간사한 토끼부터 잡고 살찐 사슴을 쫓으리라!”
뒷날 동한(東漢)의 수도가 되는 낙양(洛陽)은 그때 하남군(河南郡)에 속한 현이었다. 진나라 말기 그 낙양현의 남쪽 경계에 새로이 성 하나가 쌓였는데 사람들은 뜻 그대로 신성(新城)이라 불렀다. 수무(修武)에서 푹 쉰 한왕(漢王) 유방이 평음진을 건너 그 신성에 이른 것은 한 2년 3월 중순의 일이었다.
그 사이 불어나 10만이 넘는 대군에 항복받거나 사로잡은 왕 일곱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른 한왕은 거기서도 느긋하게 머물러 움직일 줄 몰랐다. 천하 형세를 살핀다는 핑계였지만, 어쩌면 아직도 관외(關外)로 나온 뒤의 잇따른 군사적 성공과 그 전리(戰利)를 즐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매사에 느긋한 한왕도 신성에서는 그리 길게 즐길 팔자가 못되었다.
며칠이나 이어진 술과 잔치에도 시들해진 어느 날 한왕이 장졸 몇과 성 밖을 돌아보고 있는데, 수염 센 늙은이 하나가 길게 읍을 하며 길을 막았다.
“앞에 오시는 분이 한왕이시라면 신이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왕이 틀림없으십니까?”
“그렇소. 그런데 공은 누구시오?”
한왕이 걸음을 멈추고 대답과 더불어 그렇게 묻자 이번에는 그 늙은이가 대답했다.
“신은 이곳 향(鄕=十里가 一亭이요 十亭은 一鄕이 된다)의 삼로(三老)로서 고을 사람들의 교화(敎化)를 맡고 있는 동(董) 아무개입니다.”
“원래가 동공(董公)이셨구려. 그래, 과인에게 들려주실 말씀은 무엇이오?”
그러자 삼로 동공이 옷깃을 여미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길게 말했다.
“신이 듣기로 ‘덕을 따르는 자는 번창하고 덕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順德者昌 逆德者亡)’ 했습니다. 또 ‘명분 없이 군사를 내면 아무 일도 이룰 수가 없다(兵出無名 事故不成)’는 말도 있습니다. 곧 ‘그 역적 됨을 널리 밝힌 뒤라야 비로소 적을 굴복시킬 수가 있는(明其爲賊 敵乃可服)’ 것입니다.
항우는 무도하여 함부로 그 임금인 의제(義帝)를 시해했으니 이는 천하의 역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릇 ‘어짊은 용맹을 부릴 일이 없고, 의로움은 힘을 쓸 일이 없다(仁不以勇 義不以力)’ 하는 바, 대왕께서는 엄숙하게 의제의 장례를 치르신 다음 삼군(三軍)에게 상복을 입히시고 크게 군사를 일으키도록 하십시오. 그 뒤 다시 천하 제후에게 그 일을 알리고, 그들과 더불어 항우를 치시면, 온 세상 사람들이 그 덕을 우러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삼왕(禹王 湯王 文王)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처음 동공에게 말을 시킬 때만 해도 술기운이 얼얼하게 남아 있던 한왕은 거기까지 듣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왕의 내면에 깃들어 있는 본능적인 정치 감각이 그 말의 크기와 무게를 알아듣게 한 까닭이었다.
의제가 항우의 명을 받은 구강왕 경포와 형산왕 오예 등의 핍박에 죽은 것은 너덧 달 전의 일이라 한왕도 풍문으로 그 일을 들은 바 있었다. 하지만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는 느낌은 있어도, 그 정치적 의미나 자신이 활용할 방도가 얼른 떠오르지 않아 그대로 지나치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 삼로 동공에게 듣고 보니 뭔가 알 듯했다.
“내 근래에 그런 풍문을 듣고 걱정했더니, 그럼 그게 사실이었단 말이오? 의제(義帝)께서 돌아가신 것이 정말로 항우가 몰래 구강왕(九江王) 등에게 시켜서 한 일이오?”
한왕 유방이 짐짓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삼로(三老) 동공(董公)이 격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강 한가운데서 시해하여 물고기 뱃속에 장사지냈으니 하늘과 사람이 아울러 성낼 일입니다. 저희 딴에는 아무도 모르게 한다고 했으나 눈 있고 귀 있는 초나라 사람 치고 그 일을 모르는 이는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 말에 한왕은 굳이 꾸민다는 느낌 없이 한바탕 크게 소리 내어 울고 말하였다.
“의제께서 결국은 그리 되신 것이구려. 알려주셔서 고맙소. 이제 과인은 돌아가 공의 말대로 의제를 위해 발상하고 그 원수를 갚아 천하의 대의를 바로 세울 길을 찾아보겠소.”
그리고는 성안으로 돌아가기 바쁘게 장량과 한신, 진평을 불러 그 일을 말했다.
의제가 시해당할 때 장량은 겨우 항우에게서 몸을 빼내 샛길로 한왕에게 돌아오는 중이었으며, 한신은 삼진(三秦)을 평정하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둘 모두 바로 그 일을 알았다 해도 한나라를 위해 활용할 여유가 없었다. 그 뒤 의제가 시해되었다는 풍문이 들어왔을 때도 그랬다. 겨우 삼진을 평정하고 이제 막 관외(關外)로 세력을 넓히려는 참이라, 그걸 활용해 바로 항우와 천하를 다투는 것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한왕을 통해 삼로 동공의 말을 듣고 보니, 장량과 한신뿐만 아니라 진평이나 다른 장수들에게도 해볼 만한 일로 보였다.
좌우 모두가 옳게 여기자 한왕은 그날로 의제를 위해 발상거애(發喪擧哀)하고 크게 장례를 치르게 했다. 한왕 자신도 장졸들과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왼 소매를 벗고[단(단)] 큰소리로 목 놓아 울어 슬픔과 충심을 아울러 드러냈다. 그리고 성복(成服)한 뒤에는 사흘 동안이나 줄곧 의제의 빈소를 지키며 애곡(哀哭)을 그치지 않았다.
돌이켜 보면, 의제가 한왕을 믿어 먼저 서쪽으로 가게 한 것이 한왕에게 누구보다 먼저 진나라의 항복을 받아낼 기회를 준 셈이었다. 나중에 항우가 제후들에게 천하를 나누어줄 때도 관중을 먼저 차지한 자를 관중왕을 삼는다는 의제의 약속이 있어, 한왕에게 파촉(巴蜀) 한중(漢中)이나마 돌아올 수 있었다. 따라서 한왕의 슬픔과 눈물이 반드시 겉꾸밈일 까닭은 없었다.
늦었지만 엄숙하면서도 성대한 의제의 장례와 함께 한왕은 또 천하의 제후들에게도 사자를 보내 알렸다.
<의제는 천하가 함께 천자로 올려 세우고 만민이 북면(北面)하여 섬기던 분이셨다. 그런데 이제 항우가 의제를 강남으로 쫓아냈다가 시해하였으니, 실로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짓이 아닐 수 없다. 과인이 친히 의제를 위해 발상(發喪)하니 모든 제후들도 흰 상복을 입어 의제를 애도할 일이다. 또 관중(關中)의 모든 병마를 일으키고 하동(河東) 하남(河南) 하내(河內) 세 군의 장사를 불러 모아 장강(長江)과 한수(漢水)를 따라 남으려 내려가려 하니, 모든 제후와 왕들은 과인과 함께 하기를 바라노라. 과인과 함께 서초(西楚)로 달려가 의제를 시해한 항우를 쳐 없애도록 하자!>
한왕의 사자가 이르자, 관동(關東)의 많은 제후와 왕들이 한편으로는 의분에 차고 다른 한편으로는 한군(漢軍)의 기세에 눌려 분분히 한왕의 뒤를 따랐다. 그러나 겉으로는 대왕(代王)이지만 실제로는 조(趙)나라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진여(陳餘)만은 달랐다. 사자가 가져간 글을 읽고난 뒤 무겁게 가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왕의 뜻은 가상하나 역적 장이(張耳)가 그 밑에 있는 한 우리 조나라로서는 한나라를 도울 수가 없소. 만약 장이를 죽여 그 목을 보내준다면 우리도 한왕을 따를 것이오!”
한때는 서로를 위해 목이 잘려도 좋다고 할 만큼 가깝게 지내던[刎頸之交] 그들이었으나 한번 틀어지니 원수라도 그보다 모진 원수가 없었다. 사자가 돌아와 그런 진여의 말을 전하자 한왕이 막빈들을 불러 모아 놓고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진여가 지난날의 사사로운 감정을 이기지 못해 저렇듯 억지를 부리니 실로 걱정이오. 이대로 두었다가는 항왕에게 붙어 동북(東北)의 우환거리가 될 것인즉 어찌하였으면 좋겠소?”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장이가 나서 결연히 말했다.
“조(趙)나라와 대(代)나라가 제(齊)나라를 평정한 서초(西楚)와 한 덩어리가 되고, 항우의 힘과 사나움에 진여의 꾀와 슬기가 합쳐지면 한나라와 대왕의 앞날은 없어집니다. 대왕께서는 망설이지 마시고 제 목을 쳐서 이 머리를 진여에게 보내십시오. 반드시 진여를 달래 대왕의 한 팔로 삼으셔야만 남쪽으로 내려가 대업을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동안 대왕께서 베푸신 은의만으로도 신은 원 없이 눈감을 수 있습니다.”
그 표정이나 어조가 결코 그냥 해보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 자리의 어떤 사람에게는 그 길밖에 없는 듯도 보였다. 그때 장량이 일어나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형편은 고약하지만 개 한 마리를 얻자고 호랑이 목을 미끼로 쓸 수는 없지요. 달리 좋은 길이 있을 것이니 상산왕(常山王)께서는 하나뿐인 목을 아끼시지요.”
그래놓고는 가만히 진평을 건너보았다. 미리 짠 듯 진평이 일어나 말했다.
“제게 독한 계책이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상산왕의 목을 보존하면서도 진여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계책입니다.”
“그게 무엇인가?”
한왕이 반갑게 되물었다. 진평이 무엇 때문인지 잠깐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안됐지만 상산왕을 닮은 사람의 목을 빌려 진여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속여 진여를 한번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 놓으면, 나중에 상산왕께서 살아있음을 알게 되더라도 쉽게 항우에게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상산왕과 진여는 여러 해를 함께 숨어 지내며 고락을 같이한 사이입니다. 아무려면 진여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보고 속아 넘어가겠습니까?”
듣고 있던 한신이 그렇게 걱정했다. 그러자 진평이 다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산사람에게 붙은 머리와 잘려진 목에 달린 머리는 다릅니다. 잘려온 머리만 보고 살아있을 때의 그 사람인지 알아보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린가?”
이번에는 한왕이 가볍게 찌푸린 얼굴로 진평을 보며 물었다.
“산사람의 머리라면 목소리와 표정이 있고, 또 말을 시켜 캐물어 볼 수도 있지만, 목을 잘라 보내온 머리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목을 자를 때 피가 빠지고 옮기는 길에 피부가 말라 생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벌써 여름 4월로 접어드는 터라 소금에 절여 보내야 하니 원래 얼굴을 더욱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몇 개의 드러나는 특징만 장이(張耳)와 같으면 아무리 진여(陳餘)라도 속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평이 그렇게 답해 놓고 까닭 모르게 무안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낸 계책이 너무 독한 것이라 여겨 그런 듯했다. 하지만 제 발로 찾아와 항복한 상산왕 장이를 목 잘라 보낼 수는 없었다. 그자리에 있던 딴 사람들은 오히려 진평의 계책이 절묘하다 여겼다.
한왕 유방도 장이의 목을 내주지 않고 진여를 한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그 길밖에 없다고 보았다. 곧 사람을 풀어 성 안팎을 가리지 않고 장이와 닮은 얼굴을 찾아보게 했다.
한나절도 안 돼 장이와 비슷한 얼굴을 가진 자들이 대여섯 끌려왔다. 진평이 그 중에서도 가장 장이와 비슷한 자를 골라놓고 보니 한군(漢軍) 보졸(步卒)이었다. 진평은 그를 데리고 자신의 장막으로 가 술과 고기를 대접한 뒤 말하였다.
“한왕께서는 자네 머리를 빌려 큰일을 이루시려 하네. 부모와 처자는 한왕께서 돌봐주실 것이니 아무 걱정 말고 죽어 주게. 만일 한나라가 천하 제후들을 모아 원통하게 돌아가신 의제(義帝)의 한을 풀어드리고 천하를 다시 아우르게 된다면 이는 모두 자네의 공으로 할 것이라고도 하셨네.”
그리고는 그 목을 잘라 머리를 조나라로 보냈다. 진평이 헤아린 대로 진여는 의심 없이 그 머리를 장이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날로 조왕(趙王) 헐(歇)을 달래 5만 군사를 한왕에게 보태기로 했다.
조나라가 한왕 유방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군을 보내자 관동의 다른 제후와 왕들도 다투어 군사를 보탰다. 항복했거나 사로잡힌 다섯 왕도 각기 제 봉토로 돌아가 적지 않은 군사를 긁어모아 왔으며, 스스로 항복해 와 왕위를 보존한 위왕(魏王) 표(豹)와 한왕 유방이 세운 한왕(韓王) 신(信)은 조나라에 못지않은 대군을 끌고 왔다.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에서도 적잖은 의군(義軍)이 이르렀다.
한왕도 관중으로 사람을 보내 군사와 물자를 끌어낼 수 있는 데까지 끌어냈다. 소하가 솜씨를 부려 긁어모은 수십만 석 군량과 3만 군사가 역상(酈商) 역이기(酈食其) 형제에게 이끌려 낙양에 이르렀다. 요관을 지킨다고 뒤처져 있던 주발의 군대도 한왕이 이끈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에 팽성으로 쳐들어가는 한나라 군사는 15만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관중(關中)은 폐구를 에워싼 군사들을 빼면 비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가 오면 천하가 모두 돕는다(時來天下皆同力)더니, 한왕의 기세가 치솟자 아직 제후의 열에 들지 못한 토호들과 뜻이 큰 초적(草賊)들도 가세했다. 그리하여 낙양현을 떠난 한군(漢軍)이 대량(大梁)을 지나 외황(外黃)에 이르렀을 무렵에는 한군과 한왕을 따르는 제후들의 군사를 합쳐 50만에 가까운 대군이 되었다. 그런데 그 대군은 외황에서 또 한 차례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들 엄청난 대군이 산과 들을 덮으며 외황현(外黃縣) 경계로 접어들 무렵이었다. 군사를 이끌고 앞서 가던 장수가 한왕 유방의 중군에 사람을 보내 급하게 알려왔다.
“앞에 서초(西楚)의 대군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기세가 제법 날카롭습니다.”
“낙양에서 천리 길을 무인지경 지나오듯 했는데, 아직도 초나라에 감히 우리 대군의 길을 막을 군사가 남았단 말이냐? 우리 기치만 보고도 모두 거미새끼들처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지 않았느냐?”
한왕이 가소롭다는 듯 그렇게 물었다. 전갈을 가지고 온 군사가 굳은 얼굴로 대답했다.
“알아보니 두 갈래 군사가 합쳐 세력을 키운 것 같습니다. 한 갈래는 고양(高陽)을 지키던 초군(楚軍)들로 왕무(王武)란 장수가 이끌고, 다른 한 갈래는 수양(睢陽)을 지키던 군사들로 정거(程遽)란 장수가 이끌고 있습니다. 아마도 홀로 대왕께 맞설 자신이 없는 왕무가 싸워보지도 않고 팽성으로 달아나다 정거를 꼬드겨 대왕께 맞서 보기로 한 듯합니다.”
“그렇다면 전군(前軍)은 무얼 하느냐? 단숨에 쓸어 대군의 길을 열어야 하지 않느냐?”
“실은 전군 선봉이 이미 한번 부딪혀 보았습니다만 뜻과 같지 못했습니다. 아장(亞將) 둘과 도위(都尉) 하나, 중연(中涓) 하나가 죽고 선봉군의 태반이 꺾였습니다. 알고 보니 우리 적은 전군보다 많은 5만 대군이라 합니다.”
그래도 한왕은 느긋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10만을 보내면 되겠구나.”
그렇게 대답하며 긴장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그때 대장군 한신이 나섰다.
“병진(兵陣)은 반드시 머릿수가 결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게다가 한번 싸움에 져서 기세가 꺾인 군사로 사나운 적을 맞을 때에는 신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이렇다 할 싸움도 없이 머릿수로만 거기까지 밀고 온 다른 장수들은 한왕과 생각이 다름없었다. 그들 중에서도 번쾌가 큰칼을 차고 나서 소리쳤다.
“비록 한 싸움을 이겼다고는 하나 적은 우리 기세에 겁먹고 쫓기던 군사들입니다. 거기다가 50만 대군이 뒤를 받치고 있는데 겁낼 게 무에 있습니까? 제게 군사 3만만 주시면 왕무와 정거를 사로잡고 우리 대군의 길을 열겠습니다.”
“번 낭중기장(郎中騎將)이면 넉넉히 그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 중군에서 3만을 갈라 줄 터이니 어서 과인의 앞을 막는 적을 흩고 길을 열라!”
한신을 제쳐놓고 한왕이 그렇게 흔쾌히 번쾌의 출정을 허락했다. 한신을 대장군으로 세운 뒤로는 별로 없던 일이었다.
지난해 호치현에서 장평과 싸울 때 번쾌는 가장 먼저 성벽 위로 뛰어올라 현령(縣令)과 현승(縣丞) 한 사람씩을 베어 죽이고, 적병 11명의 목을 잘랐으며 20명을 포로로 잡아 낭중기장에 올라 있었다. 그 뒤로도 여러 싸움에서 용맹을 떨쳐 모두 번쾌가 이길 줄 믿었으나 한신의 얼굴은 알아볼 만큼 어두워졌다.
(무언가 좋지 않다. 난조다……내 불길한 예감이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오래잖아 3만 군사를 이끌고 기세 좋게 중군(中軍)을 떠나는 번쾌를 보며 한신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번쾌는 다음날 일찍 외황성 서쪽 20리쯤 되는 곳에서 왕무(王武)와 정거(程d)가 이끄는 초나라 군사와 맞닥뜨렸다. 원래 왕무와 정거는 수양성에 의지해 한군의 진격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뒤따라오는 저희편의 머릿수만 믿고 앞뒤 없이 덤비는 한군(漢軍) 선봉대를 쳐부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한 번 더 싸워 적의 기세를 꺾고, 정히 머릿수에서 밀리게 되면 그때 수양성으로 돌아가 농성하자.”
왕무와 정거는 그렇게 의논을 맞추고 들판에 진세를 벌여 기다리다가 추격해 오는 번쾌를 맞았다. 하지만 초나라 장수들은 장터거리에서 개백정 노릇할 때의 불우한 날들로 단련한 번쾌의 분발을 이겨내지 못했고, 그 군사들도 한중(漢中)에서 나온 이래 줄곧 이기기만 해온 한군의 사기와 자신감을 당해내지 못했다. 거기다가 소문과는 달리 초나라 군사의 머릿수도 한군보다 그리 나을 것이 없어 처음부터 이기기는 어려운 싸움이었다.
(잘못되었구나. 들판에서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높고 든든한 성벽에 의지해 버티면서 우리 대왕께서 돌아와 구원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았다….)
왕무와 정거가 그렇게 후회를 했을 때는 모든 것이 이미 늦어버린 뒤였다. 대오고 진세(陣勢)고 가릴 것 없이 그저 한줄기 거센 홍수처럼 밀고 드는 한군 앞에 초나라 군사들은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밀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번쾌가 미리 갈라 보낸 5천 인마가 함성과 함께 등 뒤에서 나타나 길을 끊자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두려워 말라. 죽기로 길을 앗아 수양으로 돌아가자. 성안으로만 들어가면 모두 살 수 있다!”
왕무와 정거가 그렇게 군사들을 다그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총중에도 길을 앗아 달아난 날래고 모진 몇몇을 빼고는 모두 무기를 내던지고 한군에게 항복해버렸다. 그걸 보자 왕무와 정거도 생각이 달라졌다. 군사들 없이는 돌아가 봤자 성을 지킬 수 없고, 성을 지키지 못하면 곱게 보아줄 패왕이 아니었다.
“차라리 한왕에게 항복해 목숨이나 부지하며 뒷날을 도모하는 수밖에 없네.”
마침내 왕무와 정거는 그렇게 의논을 맞추고 군사들과 함께 번쾌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항복한 군사 거의가 초나라 사람이요, 그 대부분은 역시 초나라 사람인 한왕 밑에서 다시 싸우기를 원하니 결국은 한군이 3만 가까이 늘어난 셈이었다.
그런데 그날 한군의 머릿수가 늘어난 것은 그 3만뿐이 아니었다. 본진으로 돌아간 번쾌가 은근히 싸움에 이긴 자랑을 늘어놓고 있는데 다시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남쪽에서 또 대군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제 20리 밖에 이르렀는데, 그 기세가 어제 왔던 왕무와 정거의 군사들에 못지않다 합니다.”
“항왕은 대군과 더불어 제나라에 붙잡혀 있으니 와봤자 이름 없는 장수에 갈가마귀떼 같은 잡병일 것이다. 이번에는 누가 나가보겠는가?”
번쾌의 승리로 더욱 보이는 게 없게 된 한왕이 좌우를 돌아보며 호기롭게 물었다. 마침 곁에 있던 장수들이 저마다 나서 싸우기를 원했다.
그때 먼저 전갈을 가져 온 군사를 뒤따르듯 또 다른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저편에서 사자를 보내왔습니다. 대왕을 뵙고자 청합니다.”
“사자가 왔다고? 들라 하라.”
한왕이 그렇게 허락하자 그 군사가 나가 군막 밖에 기다리던 사자를 데려왔다. 한왕이 사자를 살펴보니 어딘지 낯익은 데가 있었다. 사자가 한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거야택(巨野澤)의 팽(彭)장군께서 대왕께 먼저 문후 올리라 하셨습니다. 대왕께서 서쪽으로 관중에 드신 뒤의 자취는 저희도 멀리서나마 눈부셔 하며 우러러 왔습니다.”
그제야 한왕은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다. 이태 전 패공(沛公)으로 창읍(昌邑)을 칠 때 함께 싸운 적이 있는 팽월(彭越)의 수하였다. 일찍이 팽월과 함께 거야택에서 몸을 일으킨 100여 명의 젊은이 가운데 하나로서, 그때는 팽월이 곁에 두고 손발처럼 부려 한왕도 그 얼굴을 익힐 수 있었다.
“나도 팽장군이 지난해 초나라 장수 소공(蕭公) 각(角)과 크게 싸워 이긴 일은 들어 알고 있다. 그래 팽장군은 지금 어디 계시냐?”
“대왕께서 이리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전군을 들어 마중 나오고 계십니다. 지금 20리 밖에 머물러 있는데, 대왕의 기치 아래 함께 싸우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를 바라십니다.”
“과인이 듣기로 팽 장군은 이미 전영(田榮)으로부터 장인(將印)을 받아 제나라의 장수가 되었다 하였는데, 이제 다시 과인의 기치 아래 들겠다니 그 무슨 뜻인가?”
한왕은 내심 반가우면서도 겉으로는 시치미를 떼고 그렇게 물었다. 어쩌면 이태 전 외로운 자신 밑에 들기를 마다하고 기어이 무리와 함께 거야택으로 돌아가 버린 팽월에게 느꼈던 서운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사자가 그런 한왕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팽월을 대신해 변명하듯 말했다.
“우리 장군님께서도 창읍에서 대왕을 따라 관중으로 들지 않은 일을 못내 후회하셨습니다. 그때 대왕이나 패왕을 따라간 이들은 세력이 크건 작건 저마다 제후나 왕이 되어 속한 곳이 있고 받은 땅이 있습니다만, 우리 장군님은 수만 군사를 거느리고도 속한 데조차 없는(무소속·無所屬)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 외로운 때에 전영이 장인을 보내 대장으로 삼아주니 그 정을 받아들였을 뿐 그의 신하가 된 것은 아닙니다. 이제 진심으로 대왕을 주군으로 받들고 전군을 들어 한나라의 기치 아래 들고자 하오니 부디 저희들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 말에 한왕은 마음속에 남아 있던 작은 응어리마저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바로 좀 전의 호탕한 기분으로 돌아가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이태 만에 팽장군을 다시 보게 되니 고맙고 반가운 나머지 마음에 없는 소리를 해 보았다. 가서 팽장군께 어서 이리로 오라 이르라. 과인도 군문(軍門)을 나가 팽장군을 맞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10리에 뻗친 군문 밖으로 나가 팽월을 맞아들였다. 오래잖아 그곳에 이른 팽월은 무릎 꿇고 군기(軍旗)를 바치며 한왕 밑에서 싸우기를 빌었다. 한왕이 이미 천하를 얻은 양 말했다.
“팽장군은 그간 위(魏)나라의 성 여남은 개를 얻어 그 공은 위나라의 왕이 되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하지만 지금 서위왕(西魏王)인 위표(魏豹)도 죽은 위나라 왕 위구(魏咎)의 종제이니 틀림없이 위 왕실의 자손이라, 장군을 다시 위왕(魏王)으로 세울 수는 없소.”
그리고는 크게 인심 쓰듯 덧붙였다.
“팽 장군을 위나라 상국(相國)으로 삼고, 거느린 군사는 이제껏 해 온 대로 장군의 뜻에 따라 부릴 수 있게 하겠소. 이제 장군은 거느린 군사와 더불어 양(梁)땅으로 가서 그곳을 경략하도록 하시오. 그 땅을 모두 평정하면 다시 장군을 그곳 왕으로 세울 수도 있을 것이오.”
양도 위나라 땅이니 그런 한왕의 말은 두 위왕(魏王)을 세우거나 언젠가는 팽월로 위표(魏豹)를 갈음하겠다는 뜻처럼 들렸다. 오래잖아 위표는 한왕을 버리고 패왕에게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데, 어쩌면 위표가 한왕을 배신할 마음은 그때 이미 싹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다시 팽월의 군사 3만이 붙자 한왕이 이끄는 제후군의 세력은 56만으로 늘어났다. 한군이 처음 관중에서 나올 때에 비하면 열배나 부풀어 오른 숫자였다. 하지만 그 엄청난 제후군의 머릿수는 점차 허수(虛數)가 되어갔다.
먼저 한왕의 장수들이 저마다 공을 서둘러 제후군의 알맹이가 되는 한군의 힘을 분산시켰다. 위나라 상국이 된 팽월이 제가 이끌고 온 3만을 데리고 양나라 땅을 평정하러 가자 다른 장수들도 길을 나누어 서초 땅을 평정하자고 나왔다. 지난번 삼진(三秦)을 평정할 때의 방식이었다.
“신에게 군사 한 갈래를 주시면 추현(鄒縣)으로 나가 노(魯)나라의 옛 땅을 거둬들이고 설현(薛縣)과 하구(瑕口)를 공략하여 패왕이 팽성으로 돌아오는 길을 끊겠습니다.”
왕무와 정거를 사로잡아 기세가 오른 번쾌가 한왕을 찾아가 그렇게 청했다. 56만이란 엄청난 허수에 취해버린 한왕이 아무 생각 없이 번쾌의 출병을 허락하고, 인심 좋은 부엌데기 밥 떠주듯 3만 군사를 갈라주었다. 그러자 관영 조참 주발 같은 패현(沛縣)부터의 맹장들이 줄줄이 나섰다.
“소장은 정도(定陶)로 가서 그 부근을 제압한 뒤 창읍(昌邑)과 방여(方與)를 되찾고 거기서 항우가 보낼 구원병을 막아보겠습니다.”
관영이 그렇게 말하며 한 갈래 군사를 원했고, 이어 평소 말이 없는 조참까지도 스스로 나서서 공을 다투었다.
“신도 관 장군과 더불어 정도로 갔다가 남쪽으로 선부(單父)를 거쳐 풍(豊) 패(沛)의 땅을 거둬들이겠습니다. 성양에서 팽성으로 오는 지름길은 그 두 곳을 지나게 되니, 설령 관영을 피해 내려온 초나라의 구원병이 있어도 반드시 신의 그물에 걸려들 것입니다.”
요관을 지키다 늦게 뒤따라온 주발도 질세라 나섰다.
“제게도 한 갈래 군사를 나눠주시면 곡우(曲遇)를 쳐서 떨어뜨린 뒤 유군(遊軍)이 되어 변화에 대응하겠습니다.”
말하자면 독립부대가 되어 상대편 영토에서 유격전을 펼쳐보겠다는 뜻이었다.
한왕은 그들의 뜻도 모두 들어주었다. 고향을 같이하는 맹장(猛將)들에게 각기 군사 2만, 3만씩을 나눠주며 원하는 곳에서 싸우게 했다.
한왕이 군권(軍權)을 직접 행사하기 시작하면서 자라가던 대장군 한신의 불길한 예감이 마비와 같은 무력감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한왕이 무엇에 취한 듯 장수와 군사들을 흩어버리는 것을 보고 한신은 속으로 한탄하였다.
(우리가 팽성을 치는 것은 급습(急襲)의 일종이고, 급습의 기본은 집중과 신속이다. 그런데 이 무슨 분산과 우회냐? 거기다가 제후군이 모두 합쳐 56만 대군이라 하나 그중에 우리 한군은 기껏해야 15만이다. 모두 데리고 있어도 각양각색의 56만 군사를 휘어잡기에 그리 넉넉한 숫자가 아니다. 그걸 다시 조각조각 내어 맹장들에게 딸려 보내고 남은 6만만 가지고 열배나 되는 제후군을 어떻게 부리겠다는 것이냐?)
하지만 한신은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어낼 수가 없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억눌러 한왕과 함께 떼밀려 가게 할 뿐이었다. 어쩌면 56만의 눈먼 욕망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열기와 떼밀 듯하는 그 엄청난 힘에 압도된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 뒷날처럼 군사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多多益善]고 큰소리칠 수 있기 위해서는 한신의 군사적 재능이 더 여물어지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런 한신에 못지않게 장량도 그 무렵부터 알 수 없는 망연함에 빠져들고 있었다. 남으로 내려갈수록 한왕 밑으로 들어오는 제후나 토호들은 늘고 군사도 폭발하듯 불어났으나 장량은 불안하고 막막해졌다. 심할 때는 그만큼 많은 적들 가운데 겹겹이 에워싸인 기분까지 들었다.
(이건 천하대세를 결정짓는 싸움을 앞둔 왕사(王師)의 모습이 아니다. 유융(劉隆)의 허(墟)나 목야(牧野)로 밀고 들던 탕무(湯武)의 군대는 결코 이렇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장량도 그렇게 중얼거리며 무겁게 한숨지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도 한신처럼 입을 열어 그런 느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임진관을 나와 하수를 건넌 이래 한 번도 꺾임 없이 부풀어온 한군의 기세와 잇따른 한왕의 승운(勝運)이 장량을 함부로 말할 수 없게 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 술 더 뜬 것은 진평이었다. 뒷날 진평은 특히 인간의 약점에 밝고 누구보다 그것을 잘 이용하게 되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그의 재주는 제대로 다듬어져 있지 않았던 듯했다. 그는 진작부터 한왕과 비슷한 느긋함으로 세상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여간 눈치 빠르고 영악하지 않으면 이 같은 난세에 제후로 몸을 일으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제후들이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한왕을 따르는 것은 대세가 그리로 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나도 주인을 바로 찾아왔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한왕처럼 불어나는 세력에 취해 은근히 그걸 즐기기까지 했다.
뒷날 돌이켜 보면, 사태를 꿰뚫어 보고 다가올 재난을 방비할 한신과 장량, 진평 모두가 어떤 야릇한 패신(敗神)에 홀려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보다 눈 밝은 그들이 몇 발짝 앞의 나락도 보지 못하고 앞사람의 발꿈치만 보며 내달은 셈이었다. 그리하여 셋 모두 무너지는 언덕 위의 돌 부스러기처럼 한왕과 함께 계곡 바닥으로 굴러 떨어져 갔다.
하지만 나락은 금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한왕이 이끈 제후군이 순수(巡狩)라도 하듯 느릿느릿 수양(휴陽)을 거쳐 우현(虞縣) 율현(栗縣)을 휩쓸며 지나가도 길을 막는 초나라 군사가 없었다. 들리는 것은 한왕과 그를 따르는 제후들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만드는 승전의 소식뿐이었다.
“번쾌 장군이 추현(鄒縣)과 노나라 땅을 휩쓴 뒤에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설현(薛縣)과 하구(瑕丘)를 공략하고 있습니다. 이제 팽성 북쪽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생긴 셈입니다.”
“관영 장군이 조참 장군의 도움을 받아 정도(定陶)에서 초나라 장수 용저(龍且)와 위나라 재상 노릇을 했던 항타(項他)가 이끄는 대군을 물리쳤습니다. 처음에는 관(灌) 장군 홀로 사납고 날랜 초나라 군사를 만나 한때는 몹시 위태로운 지경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조참 장군이 이끄는 군사가 때맞춰 이르러 뒤를 받쳐준 덕분에 크게 이길 수 있었습니다.”
“주발 장군도 곡우(曲遇)를 쳐서 떨어뜨렸습니다. 지금은 팽성 근처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그런 전갈대로라면 아직 팽성을 떨어뜨리기도 전에 산동 땅이 거지반 한왕의 손 안으로 들어온 셈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아주 하늘의 버림을 받은 것은 아니었던지 한왕을 긴장시키는 소식도 있었다.
“소현(蕭縣)에 초나라 대군이 지키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거기다가 소성(蕭城)은 팽성의 서쪽 50리밖에 안 되는 곳에 있어 팽성의 외성(外城)이나 다름없습니다. 성벽이 높고 두터워 쉽게 떨어뜨리기 어렵습니다.”
정탐을 나간 군사가 돌아와 한왕에게 그런 말을 했다. 곁에서 그 말을 들은 한신이 오랜만에 입을 열어 걱정을 드러냈다.
“만약 우리가 소성에서 싸움을 질질 끌고 그 사이에 팽성에서 초나라 군사들이 나와 우리 뒤를 치면 우리는 등과 배로 적을 맞는 꼴이 되어 일이 고약하게 됩니다. 자칫하면 팽성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패왕의 대군이 이르러 크게 낭패를 당할 수도 있습니다. 나가 있는 군사들을 불러들여 집중된 힘으로 한 싸움으로 소성을 깨뜨리고, 그 여세를 몰아 팽성도 패왕의 구원병이 이르기 전에 떨어뜨려야 합니다.”
아직도 50만 가까운 군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한왕은 그 같은 한신의 걱정이 쓸데없는 기우로만 보였다. 그러나 한신이 오랜만에 입을 연 터라 그런지 이번에는 별로 고집부리지 않고 한신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럼 관영과 조참만 불러들이는 게 좋겠소. 날랜 말을 탄 사자를 보내 관영과 조참에게 군사를 이끌고 탕현(탕縣)으로 돌아오라 하시오. 그리고 거기서 우리 군사를 정비하여 먼저 소성을 떨어뜨린 뒤에 하루 빨리 팽성으로 가도록 합시다.”
그리고 남은 한군(漢軍)과 자신을 따르는 제후군도 탕현으로 몰았다.
팽성에서 멀지 않아서인지 탕현에도 적지 않은 초나라 군사들이 있었다. 하지만 탕현은 한왕이 사상(泗上)의 정장(亭長) 죄를 짓고 한참이나 숨어 산 적이 있는 곳이었다. 그때 얽힌 인연이 있는 데다 한왕이 끌고 온 대군을 보자 성 안의 군민은 기가 죽고 말았다. 며칠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하는 시늉을 하다가 관영과 조참의 군사가 차례로 이르자 마침내 스스로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한왕은 다시 군사를 남으로 몰아 소현으로 갔다. 들은 대로 소현 성 안에는 패왕의 족제(族弟) 하나가 5만 군민을 다그쳐 싸울 채비를 단단히 갖추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저물녘에야 소성에 이르러 한 바퀴 성을 둘러본 한왕이 한신을 돌아보며 인심 쓰듯 말했다.
“탕현(碭縣)이 항복해 오기에 이대로 손에 피 묻히지 않고 팽성에 들게 되는가 했더니 아무래도 틀린 일 같소. 내일 날이 새는 대로 대군을 풀어 성을 깨뜨린 뒤 바로 팽성으로 밀고 들도록 합시다.”
그런데 이번에도 한왕은 알 수 없는 승운을 타고 힘든 싸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날 밤의 일이었다. 날이 저물자마자 소성(蕭城) 안에서 글을 매단 화살 한 대가 날아왔다. 그 화살을 주운 병사가 그걸 한왕에게 갖다 바쳤다.
<저희들은 성안의 부로(부로)들로 전부터 의제(의제)의 원통한 죽음을 슬퍼해왔습니다. 항씨(항씨)는 양치기 가운데서 왕손을 찾아 회왕(회왕)으로 세우고 또 황제로까지 떠받들었으되, 장사(장사) 강물 위에서 의제를 시해하니 이제는 초나라의 대역무도한 죄인일 따름입니다. 충의는 멀고 창칼은 가까워 비록 항우의 군사들에게 부림을 당하고는 있으나 어찌 그것이 저희들의 진심이겠습니까? 대왕께서는 낙양에서 의제를 위해 발상(발상)하여 그 외로운 넋을 위로하고, 다시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역적을 치러 이곳까지 이르셨습니다. 초나라의 백성 되고 그냥 있을 수 없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바, 오늘밤 성안 젊은이들로 하여금 성문을 열게 하기로 하고 이 글을 올립니다. 동쪽 성문과 북쪽 성문 두 곳에 몰래 군사를 숨겨두셨다가 삼경 되어 성루(성루)에 불길이 오르거든 바로 짓쳐 들도록 하십시오.>
화살에 매단 흰 비단에는 대략 그런 뜻의 잔글씨가 쓰여 있었다. 한왕이 기뻐하며 그대로 따르려하자 장량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라도 적의 속임수가 있을까 걱정입니다.”
그때 함께 있던 진평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성안의 군민은 기껏해야 5만이고 우리 군사는 50만이 넘습니다. 무슨 계략으로 5만이 50만에게 성문을 열어주고 이길 수 있겠습니까?”
모두 듣고 보니 진평의 말이 옳았다. 어둠 속에 두 갈래 군사를 내어 동문과 북문 가까이 숨어있게 하고 삼경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삼경이 되자 정말로 두 성루에서 불길이 오르고 이어 성문이 활짝 열렸다. 기다리고 있던 한군(漢軍)이 함성과 함께 열어젖혀진 성문으로 뛰어들었다. 제나라와 팽성 쪽으로 나 있어 싸움에 단련된 초나라 군사들보다 소현 백성들이 더 많이 지키던 북문과 동문이었다.
그러잖아도 무슨 높고 거친 파도처럼 성을 에워싸고 있는 한나라 대군에 은근히 겁을 먹고 있던 초나라 군사들은 성문이 두 곳이나 열렸다는 소리를 듣자 벌써 싸울 기력을 잃고 말았다.
거기다가 한군이 쏟아져 들어오고 성문들이 바로 자기들이 달아날 길임을 알게 되자 그대로 창칼을 내던지고 털썩털썩 무릎을 꿇었다. 죽을힘을 다해 빠져나가 팽성으로 달아난 것은 소성을 맡아 지키던 패왕의 족제(族弟)와 그 부장(部將) 몇 명뿐이었다.
“바로 팽성으로 가자. 오늘을 넘기지 말라!”
날이 샐 무렵 소성을 온전히 거둬들인 한왕이 갑자기 그렇게 서둘렀다. 한신이 가만히 말렸다.
“아무리 힘들 것 없는 싸움이라지만 밤을 새워 군사들이 지쳐 있습니다. 저들에게 밥을 지어먹이고 한나절 쉬게 한 뒤 가는 게 좋겠습니다.”
“하늘이 과인에게 팽성을 내리시려 하오. 아니 서초(西楚)와 천하를 내게 주시려 하오. 밤이 길면 꿈자리가 사나운 법, 하늘이 내리시는 것을 서둘러 받지 않으면 되레 화가 될 것이요. 밥을 지어먹고 쉬는 일이야말로 팽성에 든 뒤에 해도 늦지 않소.”
한왕은 무엇에 취한 사람처럼 그렇게 한신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장졸들을 몰아대 그 길로 팽성으로 달려갔다.
그래도 한신의 말을 들어준 것이 있다면 관영과 조참의 군사를 소성(蕭城)에 남긴 일이었다. 그곳에서 쉬면서 정도(定陶)에서 한바탕 힘든 싸움을 겪고 산동을 에돌아오는 동안의 피로를 씻는 한편 같이 남겨준 제후군 5만과 더불어 팽성의 서쪽 울타리가 되게 했다.
적어도 팽성을 얻는 일은 한왕의 말이 맞았다. 소성에 8만을 떼어놓고도 50만 가까운 대군으로 팽성에 이른 제후군의 전군(前軍) 선봉은 팽성 서문 앞에서 나아가기를 멈추고 중군(中軍)에 급한 전갈을 보내왔다. 소성을 떠난 지 반나절도 안 된 때의 일이었다.
“팽성의 서문이 활짝 열려 있고 성벽 위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피란하는 백성들만 이따금 성을 버리고 달아날 뿐입니다.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먼저 대장군께 알리고 하회를 기다립니다.”
“그래도 팽성은 서초의 도읍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요충(要衝)이기도 하다.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내줄 리가 없다. 전군은 성 밖에 잠시 진세를 펼치고 대왕께서 이르시기를 기다려라!”
한신이 먼저 그런 명을 내리고 한왕과 함께 전군 진채로 달려갔다. 전군 앞으로 나서 팽성을 바라보니 정말로 들은 대로였다. 성문은 활짝 열려 있고 성벽 위에는 지키는 군사 한명 보이지 않았다. 무슨 소문을 들었는지 그때는 그쪽 성문으로 나다니는 피란민도 없어 마치 텅 빈 성처럼 보였다.
“자방 선생. 이게 어찌된 일이오? 병법에 성문을 열고 성을 비워 싸우는 계책도 있소?”
한왕이 알 수 없다는 듯 곁에 있는 장량에게 물었다. 장량이 희고 단정한 이맛살을 찌푸려가며 이리저리 성안을 살피다가 역시 모르겠다는 듯 한신을 보고 말했다.
“대장군. 우리를 성안으로 꾀어 들여 들이치려는 계책치고는 너무 허술하고 위태롭지 않소? 아무리 매복을 하고 장치를 갖추었다 해도 50만 대군을 좁은 성안에 들여놓은 뒤에 무슨 수로 쳐부순단 말이오?”
“글쎄요….”
한신도 자신이 없는지 그렇게 대꾸하며 4월 한낮에 조는 듯 서 있는 팽성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때 갑자기 성문 안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 나왔다. 갑주도 걸치지 않고 손에 든 병기도 없는 것으로 보아 군사들은 아니었으나, 복색을 보니 여느 백성들도 아니었다.
“저건 무엇이냐?”
한왕이 그들을 쳐다보다 누구에게인지 모르게 물었다. 곁에 있던 눈 밝은 장수 하나가 대답했다.
“복색을 보니 유생(儒生)의 무리 같습니다. 누군가를 떠받들 듯 에워싼 채 이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유생들이라… 유생들이 무슨 일로?”
한왕이 이맛살부터 찌푸리며 그렇게 받았다. 저잣거리 시절부터 한왕 유방은 유자(儒者)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 실상도 없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사람을 귀찮게 하는 시끄럽고 까다로운 무리―그게 장바닥을 떠돌던 젊은 유방의 머릿속에 박힌 유자의 인상이었다.
패공(沛公)으로 몸을 일으킨 뒤에도 유자들을 보는 눈길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역이기(酈食其)처럼 존중하며 쓴 경우도 있었으나, 그때도 유자로서가 아니라 그 책모(策謀)를 높이 사서였을 뿐이었다. 오히려 대개의 경우 유자는 패공의 놀림거리거나 짓궂은 장난의 대상으로, 심할 때는 그들이 생명처럼 여기는 의관에 오줌을 누어 욕을 보이기까지 했다.
한왕이 되어 더 많은 유자들을 관리로 거느리게 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전해 8월 유자인 주가(周苛)를 어사대부(御使大夫)로 높인 적이 있지만, 그것은 유자로서는 드물게 갖춘 그의 장재(將材) 때문이었다. 또 기신(紀信) 같은 장수는 똑같이 패현부터 한왕을 따라 나서 싸워왔으나 유가의 가르침을 따른다 하여 주발이나 관영보다 한길 낮춰 보았다.
“아마도 성안의 유생들이 대왕께 항복하러 몰려나온 듯합니다.”
한신이 다가오는 유생들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한왕이 어이없다는 듯 빙글거리며 말했다.
“유생들이 무슨 일로 과인에게 항복을 한단 말이오? 내가 언제 그들과 싸우기라도 했단 말이오? 또 그들이 항복을 하면 어떻고, 안하면 어떻다는 것이오? 이제껏 항왕에게 빌붙어 살다가, 일이 글렀다 싶자 과인에게 달려와 아첨으로 말잔치나 벌이려는 것이라면 아예 쫓아버리시오.”
“대왕께서 진정으로 천하를 생각하신다면 그리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때에 따라 유생의 붓은 장수의 칼보다 날카롭고, 그 문장은 병가(兵家)의 법술(法術)보다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 박사(博士)의 복색을 하고 저들에게 에워싸여 오고 있는 저 사람은 대왕께서 천하를 다스리는데 일군(一軍)의 몫은 넉넉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장군께서는 저들을 아시는 듯하구려. 저들이 누구요?”
그제야 한왕이 이상한 듯 정색을 하며 한신에게 물었다. 한신이 아직도 다가오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저들 가운데 에워싸여 오고 있는 것은 진 이세황제 때 박사가 된 숙손통(叔孫通)이고 그를 에워싼 것은 곁에 머물며 시중드는 이만도 100명이 넘는다는 그의 제자들입니다.”
그 말에 한왕도 숙손통을 기억해냈다. 숙손통은 지난날 한왕이 무신군 항량(項梁)의 객장(客將)으로 있을 때 먼빛으로 본 적이 있는 유자였다. 그때 이미 숙손통은 큰 유학자로 항량의 막빈이었으나, 오래잖아 팽성으로 가 회왕(懷王) 밑에 들게 되어 한왕과는 오래 함께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 뒤 한왕이 들은 풍문은 별로 좋지 못했다. 팽성으로 간 숙손통은 송의(宋義)와 손을 잡고 회왕(懷王)의 사람이 되었다가, 송의가 항우에게 죽자 숙손통은 다시 항우 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회왕이 의제가 되어 장사 침현으로 옮겨갈 때도 팽성에 남아 항우를 섬겼다.
“말만 번지르르하고 처신은 반복 무쌍한 유자(儒者)구려. 오늘은 과인에게로 왔으나 내일은 어디로 갈지 누가 알겠소?”
한왕이 별로 반갑잖은 기색으로 그렇게 한신의 말을 받았다. 한왕이 그렇게 말한 것은 숙손통과 헤어진 뒤에 들은 마뜩찮은 후문(後聞)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전설이 되어 산동(山東)을 떠도는 숙손통의 전력(前歷)도 한왕은 못마땅하게 여겼다.
숙손통은 설(薛) 땅 사람으로 학문이 뛰어났는데, 진나라 말기 조정에 불려가 박사(博士=史實 기록과 서적을 관장하는 벼슬아치)를 바라며 벼슬살이를 시작했다. 몇 년 뒤 진승이 산동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이세 황제가 당시의 박사와 여러 선비들을 불러놓고 물었다.
“초나라에서 수자리 서던 병사들이 기현(祁縣)을 공격하고 진(陳) 땅에 이르렀다 하니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신하된 자는 반역의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 됩니다. 반역의 마음을 품었다는 것이 벌써 반역을 저지른 것이니, 이는 죽어 마땅한 죄로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급히 군사를 내어 그들을 치시어 천자의 위엄을 보이셔야 합니다.”
눈치 없는 박사와 서른 명이 넘는 선비들이 아첨삼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이세 황제는 그 말을 듣고 성이 나서 안색이 홱 변했다. 그걸 본 숙손통이 얼른 앞으로 나가 말했다.
“여러 선비들의 말은 다 틀렸습니다. 오늘날 천하는 통일되어 한 집안처럼 되었고, 여러 군(郡)과 현(縣)은 성벽을 허물어 앞으로는 거기 의지해 싸우는 일이 없으리라는 뜻을 밝혔으며, 나라는 모든 무기를 녹여 다시는 그걸 쓰지 않겠다는 뜻을 널리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위로는 영명하신 황제께서 계시고, 아래로는 제도와 법령이 완비되어, 백성들은 저마다 생업에 충실하며 삶을 풍족하게 가꿔가고 있는데, 누가 감히 반역을 꾀하겠습니까? 방금 폐하께서 말씀하신 무리는 좀도둑 떼로서, 쥐새끼가 곡식을 훔치고 개가 물건을 물어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제 군수(郡守)들과 군위(郡尉)들이 그들을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고 있으니 조금도 걱정하실 일이 아닙니다.”
그러자 이세 황제의 얼굴이 활짝 펴지며 다시 다른 선비들에게 같은 일을 물었다. 어떤 선비는 정말로 반란이 일어난 것이라 하고, 어떤 선비는 도적 떼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다 듣고 난 이세 황제는 어사(御使)를 불러 반란이 일어난 것이라고 말한 선비들은 모두 형리(刑吏)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말해서는 안 될 것을 말했다는 죄목이었다.
한편 진승의 무리가 좀도둑 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일없이 풀려났는데, 특히 숙손통은 비단 스무 필과 옷 한 벌을 하사받고 그날로 박사가 되었다. 숙손통이 궁궐에서 물러나 숙소로 돌아가자 소문을 들은 선비들이 몰려와 그를 나무라며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찌 그렇게 아첨하는 말을 하여 다른 선비들을 어렵게 만들었소?”
그러자 숙손통이 깊은 한숨과 함께 말하였다.
“그대들은 모르오. 나는 오늘 하마터면 범의 아가리를 벗어나지 못할 뻔하였소!”
그리고는 그날 밤으로 짐을 싸서 고향인 설 땅으로 달아났다가, 때마침 그곳으로 진격해온 항량을 따르게 되었다.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이세 황제에게서 빠져나온 숙손통의 기지를 높이 쳤다. 그러나 한왕은 왠지 그게 유자들을 못미덥게 하는 나약과 비굴의 전형 같았다.
“대왕께서 진정으로 천하에 뜻을 두고 계시다면 모진 임금과 못된 법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일을 너무 허물해서는 아니 됩니다. 물이 너무 맑으면 사는 물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따져 살피면 따르는 무리가 없는(水淸則無魚 人察則無徒) 법입니다.”
한왕의 속마음을 읽은 것인지 한신이 그렇게 말해 놓고 다시 덧붙였다.
“난세(亂世)를 만나 군진(軍陣)을 벌이고 성을 쳐서 떨어뜨리는 데는 쓸모없을지 모르나, 치세(治世)에 이르러 예의와 법제를 바로잡고 교화(敎化)를 펴는 일은 저기 오는 숙손통 선생을 따를 이가 없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선생을 대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십시오.”
그때 어느새 제자들을 뒤딸리고 다가온 숙손통이 한왕을 알아보고 그 앞에 엎드려 절을 했다. 한왕이 놀란 시늉을 하며 맞절을 한 뒤 숙손통의 손을 잡아 일으키며 물었다.
“돌아가신 의제 앞에서 선생을 봬온 이래 벌써 이태가 흘렀구려. 그래, 오늘은 과인에게 무슨 가르침을 내리시려 오셨소?”
그런 한왕의 목소리가 얼마나 은근한지 걱정하던 한신이 오히려 탄복할 지경이었다. 그게 한왕이었다. 모든 일에 태평스럽고 제멋대로였지만, 무슨 말이든 한번 옳게 여겨 받아들이면 얼마든지 커지고 작아질 수 있었으며 굽히고 펼 수 있었다. 숙손통이 여전히 엎드린 채 한왕의 물음에 대답했다.
“이제 팽성에 남은 서초(西楚)의 관리로는 신이 가장 높습니다. 성안 10만 군민의 뜻에 따라 팽성을 대왕께 바치고자 이렇게 나왔습니다.”
“항복은 원래 성을 지키던 장수가 군사들과 더불어 성을 들어 바치는 일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생께서 유생 백여명과 더불어 그 일을 대신하려 하십니까?”
한왕 곁에 있던 장량이 문득 나서 그렇게 물었다. 숙손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난 정월 패왕이 제나라로 떠날 때 팽성은 날랜 군사 5만과 함께 범아부(亞父)께 맡기셨습니다. 그러나 싸움이 뜻과 같지 않자 패왕은 다시 범아부와 3만군을 불러 가고, 이번에는 계포(季布)가 새로 뽑아 조련도 안 된 군사로 채운 5만으로 팽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오래잖아 계포마저 2만군을 데리고 군량을 호위하며 제나라로 가자, 팽성을 지키는 일은 패왕의 아재비 항양(項襄)과 노약하여 남겨진 군사 3만에게 맡겨졌습니다.
항양은 그 3만에다 성안 백성들 중에 힘꼴깨나 쓰는 장정 2만을 더 뽑아 성벽 위로 끌어내놓고 어제까지만 해도 팽성을 지키겠다고 큰소리쳐 왔습니다. 그런데 이 아침 소성(蕭城)을 지키던 그 조카가 부장 몇 명과 피투성이로 쫓겨오자 마음을 바꿔먹었습니다. 성안의 재보(財寶)와 미녀들을 모두 끌어내 수레와 마필에 싣고 제 임금이 있는 북쪽으로 허겁지겁 달아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성 안에는 이제 장수도 군사도 남아 있지 않아 저희가 이렇게 나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부디 성 안의 10만 생령을 불쌍히 여기시어 한(漢)나라의 신민으로 거두어 주옵소서.”
숙손통뿐만 아니라 그를 따라온 100여명의 유생으로 보아 성 안에 지키는 군사가 없다는 말은 더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패왕 항우의 도읍이 안겨오듯 항복해 오자 한왕은 몹시 기뻤다. 그 기쁨 때문에 숙손통에게 품었던 마뜩찮은 의심까지 깨끗이 털어버린 한왕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성이 비어 있는 듯해도 의혹이 많았는데, 선생께서 몸소 나서시어 이리 일러주시니 무어라 고마운 뜻을 드러내야 할지 알 수가 없소. 선생의 낯을 보아서라도 팽성의 군민은 터럭 하나 곡식 한 톨 다치는 일이 없을 것이오!”
그런 다음 한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대장군은 이제 여러 장수들과 제후들에게 통보하여 군사를 이끌고 팽성에 들되 지난번 우리가 진나라를 쳐부수고 함양(咸陽)으로 들 때의 예를 따르게 하시오. 백성들을 다치게 하거나 그 재물을 약탈하는 자는 목을 베고, 서초(西楚)의 부고(府庫)와 창름(倉廩)을 함부로 터는 자도 엄히 벌하겠다 이르시오!”
하지만 그럴듯한 것은 그런 한왕의 엄명뿐이었다. 한신은 충실히 한왕의 뜻을 전했으나 팽성 안으로 들어간 여러 갈래의 제후군은 금세 눈이 뒤집혀 많지 않은 한군(漢軍)으로서는 통제할 수 없는 약탈자들로 변해버렸다.
고대 경제의 한 형태였던 약탈은 황제(黃帝) 이래로 순치되어온 의식에 힘입어 많이 완화되기는 했지만, 하(夏) 은(殷) 주(周) 삼대를 거친 그때까지도 여전히 전쟁의 한 관행으로 남아있었다. 통상 전리(戰利)란 이름으로 군사들에게 허용되는 약탈의 이익은 때로 전투에 훌륭한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특히 체계적인 급여제도를 갖추지 못한 유민군(流民軍)의 우두머리에게는 비정규 급여라고 해도 좋을 경제적인 반대급부의 의미를 가지기도 했다.
그런데 제후군은 물론 규율이 엄한 한군 중에도 아직 유민군의 티를 벗지 못한 군사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약탈을 못하게 한다는 것은 약속된 급여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거기다가 제후군에는 처음부터 세력이 큰 한왕이 얻게 될 전리만을 바라 끼어든 초적(草賊)이나 토비(土匪)도 적지 않았다.
제후군 사이에 묻어온 정치적 군사적 원한도 문제였다. 먼저 제(齊)나라에서 온 병사들이 패왕의 군대로부터 당한 분풀이로 사람을 마구 죽이고 불을 질렀다. 거기에 다시 관중(關中)에서 뽑혀온 병사들이 함양에서 항우의 군사들에게 당한 분풀이를 더해 팽성을 더욱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한왕은 처음 제후들을 불러 모아 어떻게든 사태를 바로잡아 보려했다. 그러나 제후들이 서로를 부추겨가며 은근히 힘을 합쳐 한왕에게 맞서려드니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엄벌로 군기(軍紀)를 세우기는커녕 거꾸로 그들의 눈치를 보며 달래야 했다. 거기다가 한왕 자신의 무책임하고 향락적인 기질이 보태져 팽성 안은 연일 제후들과의 술잔치로 흥청거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한왕이 제후들과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데 항양(項襄)을 추격하러간 장수가 사람을 보내 알려왔다.
“항양은 제나라로 달아났지만 그가 패왕에게로 옮기려던 팽성의 재보와 미인은 모두 되찾았습니다. 내일이면 팽성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돌아온 재보와 미인이 다시 한왕을 그르쳤다. 패왕이 팽성에 쌓아두었던 재보는 진시황제가 천하에서 긁어모은 것이었다. 그것들이 수십 대의 수레와 바리바리 마소에 실려 돌아오자 원래부터 재물에 욕심이 없지 않던 한왕의 입은 귀밑까지 찢어졌다. 대신 천하를 넘보게 된 뒤로 애써 키워온 절제와 극기의 미덕은 그대로 스러져 버렸다.
줄줄이 끌려온 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패왕이 팽성에 모아놓은 미인들도 거의가 함양의 궁궐에서 끌고 온 여자들이었다. 시황제와 이세황제가 천하에서 꺾어 모은 꽃 가운데 꽃이라 이리저리 끌려 다녀 초췌해져도 아름다움과 향기는 그대로 살아있었다. 그들이 궁궐 뜰을 가득 메우자 그들을 내려다보던 한왕은 눈이 다 어질어질할 지경이었다.
패왕의 도읍인 팽성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거기 쌓여있던 재물과 미인까지 차지하게 되자 한왕은 한층 더 자신의 승리를 실감했다. 그러잖아도 잇따른 승리로 자랄 대로 자라 있던 한왕의 호기는 거기서 갑자기 어이없는 착각과 환상으로 바뀌었다. 자신은 이미 항우를 온전히 쳐부수었으며 그리하여 천하에는 오직 자신만 있다는 착각과 환상이었다.
한왕은 천자라도 된 듯한 기분으로 재보와 미인들을 제후들과 장수들에게 나눠 주었으며 자신도 그중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전보다 한층 더 풍성하고 흥겨운 잔치로 자신의 승리와 영광을 자축하였다.
그때 한왕이 얼마나 자신만의 환상에 취해있었는가는 관중 역양(轢陽)에 있는 가솔들을 다시 고향인 패현(沛縣)으로 옮겨 오게 한 일로도 짐작이 간다. 팽성을 든 지 뒤 며칠 안 돼 한왕은 패현 사람 심이기(審食其)를 불러 말했다.
“경에게 군사 500을 줄 터이니 이제 관중으로 가서 아버님과 어머님을 고향으로 모셔 오도록 하라. 아울러 과인의 가솔들도 함께 옮겨 그 나고 자란 땅에서 편히 살게 하라.”
“패왕의 대군이 아직 제나라에 버티고 있는데 대왕의 가솔들을 산동으로 모셔오는 것은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대왕의 가솔들이 고향을 찾는 일은 천하형세가 정해진 뒤라도 늦지 않습니다.”
장량이 그렇게 말렸으나 한왕은 조금도 귀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항우는 이제 근거를 잃고 떠도는 도둑 떼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소. 전횡 같은 어린아이 하나 잡지 못해 몇 달씩 끌려 다닌 터에 다시 우리에게 서초 땅 거의 모두를 뺏겼으니 그를 더 두려워할 게 무엇이오? 거기다가 항우도 말했듯, 부귀해서 고향에 돌아가지 않음은 비단옷 입고 밤길 가는 것과 같다 하였소. 도읍이야 그대로 관중에 둔다 해도, 가솔들까지 고향에 돌아와서 아니 될 일이 무엇이겠소?”
그러면서 심이기를 재촉해 기어이 가솔들을 패현으로 옮겨오게 했다. 장량이나 한신이 보기에는 꼭 무엇에 홀린 사람 같았다.
하기야 한왕이라고 해서 전혀 불길한 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힘에 내몰려 거센 물결 꼭대기에 올라탄 채 취해 지냈지만, 한왕도 가끔씩은 깨어나 중얼거렸다.
‘천하를 얻는 일이 이처럼 어이없고 갑작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왠지 이것은 아닌 듯하다. 어쩌면 나는 한바탕 늦은 봄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시 이어지는 제후들과의 질탕한 잔치 자리에서 술과 미인에 취해가다 보면, 패현 저잣거리를 빈털터리로 떠돌 때며 죄를 짓고 탕산(탕山)에 숨어 살던 시절이 아련히 떠오르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한바탕 봄꿈이라도 좋다. 여기서 이대로 한 세상 다한들 무엇이 한스러우랴….’
제나라에서 전횡을 몰아대던 패왕 항우가 등 뒤로 한군(漢軍)의 압박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한 2년 4월 중순의 일이었다.
“한나라 장수 번쾌가 외황(外黃)에서 동쪽으로 나와 추현(鄒縣) 노현(魯縣)을 치고 설군(薛郡)을 휩쓴 뒤에 지금은 하구(瑕丘)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대로 두면 팽성에서 제나라로 군량과 물자를 나르는 길은 아주 끊기고 맙니다.”
팽성에서 설군을 거쳐 성양에 이르는 양도를 지키고 있던 장수 하나가 빠른 말을 탄 군사를 보내 그렇게 급한 소식을 일러 왔다.
(전에 내가 홍문(鴻門)에서 잘 봐 주었더니, 그 개백정 놈이 감히….)
패왕은 벌컥 화를 내며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으나 그때만 해도 그리 깊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번쾌가 제 용맹만 믿고 홀로 날뛰는 것이라 보았다. 패왕은 곁에 두고 손발처럼 부리는 용저와 위나라 재상 노릇을 하다가 돌아온 족제 항타(項陀)를 불러 말했다.
“너희들은 각기 군사 1만을 이끌고 사수(泗水) 쪽으로 내려가 추로(鄒魯) 부근을 시끄럽게 하는 한왕 유방의 쥐새끼들을 쓸어버려라. 다만 그 대장 번쾌란 자는 제법 용맹이 있으니, 함부로 다루다가 되레 미친개에게 손을 물리는 일이 없게 하라.”
그리고 그들에게 군사 3만을 떼어 주는 대신 창읍 쪽으로 내려가 양도를 지키던 종리매를 다시 성양으로 불러들였다.
용저는 지난번 성양 근처에서 전횡에게 당한 수모를 씻을 기회라는 듯 군사들을 휘몰아 남쪽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런데 사흘도 안 돼 다시 패왕에게 기막힌 소식이 날아들었다.
“용저 장군과 항타 장군이 정도(定陶)에서 한나라 장수 관영(灌영)을 만나 크게 싸웠습니다. 첫날은 우리 군사가 우세하였으나 다음 날 한나라 장수 조참(曹參)이 다시 1만 군사로 관영의 뒤를 받쳐 주는 바람에 밀리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사수 북쪽으로 물러나 패군을 수습하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어지간한 패왕도 멈칫했다. 한군이 번쾌를 옛 노나라 땅에 그대로 두고 다시 두 갈래 군사를 내어 정도로 올라올 수 있었다면 예삿일이 아니었다. 팽성을 노린다는 소문도 거짓이 아닐 듯싶었다. 아무래도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일이라 여겨 패왕이 범증과 계포를 불렀다.
“한왕이 그 군사를 갈라 산동으로까지 보낸 것을 보니 들리는 소문이 반드시 허풍만인 것 같지는 않소. 제나라를 치는 것이 급하지만 등 뒤도 돌아보지 않을 수 없을 듯하오.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패왕이 범증과 계포에게 그렇게 묻고 의논을 시작하는데, 다시 용저가 보낸 군사가 와서 알렸다.
“정도 남쪽에 진채를 내리고 있던 조참과 관영이 탕현(탕縣) 쪽으로 물러났다고 합니다. 용저 장군과 항타 장군은 정도를 다시 회복하셨으나 한군을 뒤쫓지 못하고 대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뜻이오? 일껏 싸워 얻은 정도를 내주고 탕현 쪽으로 내려갔다니?”
패왕이 놀란 얼굴로 범증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나 정말 몰라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왕, 아무래도 군사를 물려야겠습니다. 팽성이 위태롭습니다.”
범증이 펄쩍 놀라는 얼굴로 대답했다.
“아부(亞父),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정도(定陶)의 적이 물러났다는데 팽성이 위태롭다니?”
패왕이 다시 그렇게 물었으나, 여전히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범증이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패왕의 물음을 받았다.
“싸움에 이기고도 그 땅을 내주고 다른 곳으로 물러갔다는 것은 그곳에 더 큰 일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군이 물러간 곳이 탕현(탕縣)이라면 이는 틀림없이 거기서 한왕의 본진(本陣)과 합쳐 팽성으로 가려 함입니다. 탕현에서 팽성까지는 빠른 말로 한 나절 길, 날랜 군사로 몰아가면 이틀로 넉넉합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한왕이 내놓고 펼친 허허실실(虛虛實實)의 꾀에 속은 듯합니다.”
“하지만 서쪽으로 소성(蕭城)에 우리 군사 1만이 있고 북쪽으로 하읍(下邑)에 또 우리 군사 1만이 있소. 거기다가 소성과 하읍은 모두 벌판에 선 우리 팽성의 외성(外城) 격이라 성벽이 두껍고 높으며 우리 군사들을 도와 싸울 백성들만도 각기 3만이 넘소. 한왕이 아무리 대군을 이끌고 간다 해도 하루아침에 떨어뜨리기는 어려울 것이오. 그리고 팽성은 족숙(族叔)께서 10만 군민(軍民)과 더불어 지키고 있는 서초(西楚)의 도읍이외다. 한왕이 100만 대군을 이끌고 에워싼다 해도 보름은 버텨줄 것이오. 그 보름이면 넉넉히 성양을 떨어뜨리고 전횡을 목 벤 뒤에 팽성으로 돌아갈 수가 있소!”
패왕이 그렇게 뻗댔으나 아무래도 해보는 소리 같았다. 범증이 그런 패왕의 마음속을 읽었는지 달래듯 말했다.
“모든 일에는 기세란 것이 있어 언덕을 구르는 바윗덩이처럼 한번 기세가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몰려가는 수가 있습니다. 전횡과 제나라 것들에게 품은 대왕의 노여움을 알지 못하는 바 아니나, 이만 군사를 물려 팽성으로 돌아가야 할 듯합니다. 대왕의 헤아리심이 옳다 해도 팽성에 그리 많은 날이 남아있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먼저 한왕부터 잡아 천하에 위엄을 떨치신 뒤에 다시 전횡과 제나라를 벌하십시오.”
그러자 패왕도 더는 억지를 부리지 않고 바로 속을 털어놓았다.
“아부, 실은 과인도 그리할 작정이오. 그런데 그전에 한 가지 아부와 계포 선생께 당부할 일이 있소.”
“그게 무슨 일이십니까?”
“과인은 오늘밤 3만 정병(精兵)을 뽑아 팽성으로 떠날 것이오. 하지만 아부와 계포 선생은 여러 장수들과 함께 남은 10만 군사를 거느리고 남으시오. 반드시 성양을 떨어뜨리고 전횡을 사로잡아 제나라를 평정하도록 하시오.”
그 말에 잠시 아연해하던 범증과 계포가 입을 모아 말했다.
“대왕께서는 자중하십시오. 풍문으로 한왕은 거느린 제후와 왕만 해도 일곱 명에 장졸 합쳐 50만이 넘는 대군이라 합니다. 아무리 가려 뽑은 군사라지만 3만으로 어떻게 50만 대군을 이길 수 있습니까?”
“계포 장군께서는 벌써 잊으셨소? 우리가 강동에서 처음 강수(江水)를 건널 때 장졸을 합쳐 얼마였소? 겉으로는 큰소리로 몇 만을 일컬었으나 정작 알맹이는 강동의 자제 8000뿐이었소. 우리는 그 군사로 산동을 휩쓸었고, 장수(장水)를 건너 마침내는 왕리(王離)의 15만 대군을 깨뜨렸소. 또 장함의 20만 대군에게서 항복을 받아내고 진나라를 쳐 없앨 때도, 천하 제후들의 군사가 도왔다 하나 내게는 언제나 강동 자제 8000뿐이었소. 지금 한왕 유방이 갈가마귀 떼 같은 군사들을 긁어모아 50만이라고 큰소리치지만 내가 보기에는 왕리의 15만 군사만큼도 못될 것이오. 3만이면 오히려 넉넉하니 두 분은 제나라에 남아 전횡(田橫)을 사로잡고 과인이 이겼다는 소식이나 기다려 주시오.”
그런 패왕의 얼굴에는 걱정하는 그늘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신나는 놀이를 앞둔 아이같이 밝고 환하기만 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듯 계포가 조심스레 물었다.
“장수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종리매(鍾離眛)를 비롯하여 환초(桓楚)와 조구(曺咎), 소공 각(蕭公 角) 같은 용장들은 모두 여기에 남겨두고 가겠소. 나는 장군의 외삼촌 정공(丁公)과 날랜 부장 몇이면 되오.”
그때 다시 범증이 걱정했다.
“대왕의 신무(神武)하심은 신이 익히 아는 바이나 아무래도 걱정됩니다. 가뜩이나 적은 군사에 장수까지 갖추지 못하고 어떻게 스무 배 가까운 대군과 맞설 수 있겠습니까?”
“아부께서는 너무 심려치 마시오. 정도에는 용저와 항타가 있고, 팽성 인근에 가면 또 과인이 수장(戍將)으로 남겨둔 왕무와 정거 주천후 등이 있소. 게다가 구강왕 경포도 이번에는 내 부름을 마다하지 못할 것이오.”
패왕이 그렇게 받았으나 범증은 아무래도 마음 놓이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비틀린 미소와 함께 패왕을 깨우쳐주듯 말했다.
“구강왕 경포는 우리가 제나라를 치러 올 때도 병을 핑계로 군사를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또 한왕 유방이 멍석 말듯 대왕의 도읍인 팽성으로 밀고들 때에도 강 건너 불구경 하듯 두 손 처매고 보고만 있었습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대왕의 부름에 달려올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패왕은 자신 만만했다.
“그렇소. 한왕 유방이 제후들을 끌어들일 때 내세운 대의명분은 의제(義帝)를 죽인 죄를 묻는다는 것이었으니, 경포는 침현 강물 위에서 의제(義帝)를 죽일 때부터 이미 과인과 한 배를 탄 셈이오. 과인도 경포를 빼고는 더불어 천하를 도모할 사람이 없소. 과인이 부르면 경포는 한달음에 달려올 것이오. 지난 일이 그리된 데는 반드시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오.”
그렇게 범증의 입을 막고 그날로 자신이 데려갈 3만 군사를 가려 뽑았다. 하지만 패왕의 군사가 성양을 떠나기도 전에 먼지를 뒤집어쓴 군사 하나가 말을 달려와 알렸다.
“팽성이 마침내 한왕의 대군에게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항양(項襄)장군께서는 팽성의 재물과 사람을 거두어 빠져 나오셨으나, 다음날 뒤쫓아 온 한군에게 모두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도 추격을 피하느라 길을 돌다 지금은 노현(魯縣)에 계십니다.”
그 군사는 다름 아닌 항양의 사자였다. 터질 듯한 얼굴로 듣고 있던 패왕이 아무 소리 않고 사자를 물리친 뒤에 범증과 계포를 불러 말했다.
“과인은 결코 믿고 싶지 않았으나 일은 두 분이 걱정하신 대로 된 듯싶소. 팽성이 떨어졌다니 과인은 오늘로 떠나거니와, 두 분께서도 이곳 싸움이 뜻과 같지 않거든 군사를 거두어 뒤따라와도 좋소. 하지만 그때는 강한 군사를 뒤에 세우고 전군을 한덩어리로 하여 전횡(田橫)의 추격에 낭패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오.”
패왕은 별로 표정 없는 얼굴로 한마디 덧붙이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범증은 그 말에 비로소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병(精兵) 3만으로 먼저 달려가는 패왕의 전략은 얼핏 터무니없어 보였으나, 실은 집중과 신속뿐만 아니라 미더운 단후(斷後)까지 함께 헤아리고 있었다. 전투의 미묘한 기미를 본능적으로 체득한 장수만이 할 수 있는 절묘한 선택이었다.
3만 군사를 가려 뽑은 패왕은 그날 날이 어둡기를 기다려 한줄기 빠른 바람 같은 기세로 성양을 떠났다. 떠나기 전에 패왕은 먼저 용저와 항타에게 사자를 보내 일렀다.
‘두 장군은 군사를 수습하여 노현(魯縣)으로 오라. 이틀 뒤 항보(亢父)에서 과인의 중군(中軍)에 들어야 한다.’
패왕이 길을 노현으로 돈 것은 그곳을 휩쓸고 있다는 번쾌의 부대를 의식해서였다. 팽성에서 쫓겨 온 항양(項襄)의 무리를 구하는 일도 급하지만, 번쾌의 군사들을 등 뒤에 그대로 두고 팽성으로 달려가는 것은 더욱 께름칙했다.
정병 3만과 함께 하룻밤 하루 낮을 달리듯 하여 항보에 이른 패왕은 거기서 전갈을 받고 달려온 용저와 항타를 만났다. 용저와 항타의 군사는 그새 5000도 안 되게 줄어 있었으나 그래도 기세로는 보탬이 되었다. 패왕도 그때는 어려운 싸움을 앞두고 장수들의 분발을 이끌어내는 군왕의 몫을 잘해냈다.
“두 장군 모두 다음 싸움으로 정도(定陶)에서 입은 욕됨과 부끄러움을 씻으라!”
그 한마디로 나무람을 대신하고 좌우에 갈라 세워 중군의 두 날개로 삼았다.
달려온 기세와는 달리 패왕은 항보에서 하룻밤 장졸들을 편히 쉬게 한 뒤 다음날 일찍 노현으로 밀고 들었다. 그런데 행군이 시작된 지 한 식경도 되기 전이었다. 앞서 살피러 보냈던 군사들이 돌아와 알렸다.
“노현 쪽에서 한 떼의 인마가 달려오고 있습니다. 깃발이 없어 어느 편 군사인지 알 수 없으나 그리 큰 세력은 아닙니다.”
그 말에 패왕이 바로 말배를 차며 소리쳤다.
“가자. 우리 군기(軍旗)에 제사 지낼 희생이 때맞춰 이른 모양이다!”
그러면서 보검 자루를 움켜쥐는 품이 그대로 먹이를 노리는 호랑이 같았다. 오래잖아 한 떼의 군마가 조심스레 다가오고 있는 게 보였다. 그대로 덮쳐가려던 패왕이 선두의 말 탄 장수들을 바라보며 탄식처럼 말했다.
“저들은 팽성을 지키던 자들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항양 장군과 그 부장들입니다. 한군(漢軍)의 추격을 뿌리치고 이제 성양으로 길을 잡은 것 같습니다.”
패왕의 말에 자세히 살펴본 정공(丁公)이 그렇게 받았다. 그 무렵 저편에서도 초군의 기치와 패왕을 알아본 듯 멈칫하더니, 이내 항양이 말을 달려 나와 패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어찌된 일이오? 서초(西楚)의 도성을 지켜야 할 장수가 어찌하여 이렇게 멀리 산동(山東)을 떠돌고 있소?”
패왕이 이번에는 성난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렇게 물었다. 패왕의 집안 아재비뻘 되는 항양이 사사로운 척분(戚分)을 떠난 군례(軍禮)로 패왕을 우러러보며 말했다.
“신을 목 베어 도성을 잃은 죄를 물어주십시오. 한왕이 60만 대군으로 불시에 밀려드니, 탕현(碭縣)과 하읍(下邑)에 이어 팽성의 외성(外城) 격인 소성(蕭城)과 유성(留城)까지 싸움 한번 제대로 하지 않고 떨어져 버렸습니다. 거기다가 팽성은 사방이 열린 땅에 세워진 성인 데다, 아부(亞父)와 계포 장군께서 떠나며 남긴 군사도 늙고 쇠약한 3만밖에 되지 않아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왕께 의지해 뒷날을 도모하고자 사람과 재물만 거두어 빠져나왔으나 그나마 한군(漢軍)의 추격을 만나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으니 죄만 더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말에 패왕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뒷날을 도모한다는 말은 비겁하게 살아남은 자들이 항용 내세우는 구실로만 여겨졌다. 사람과 재물을 보전하려 했다 하나 그것도 모두 빼앗긴 마당에는 비루한 핑계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성난 패왕이 군령관(軍令官)을 불러 항양을 끌어내게 하려 할 때였다. 항양 뒤로 부장(部將)이나 사졸의 복색을 하고 모여서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람들이 패왕의 눈길을 끌었다. 모두 갑옷투구로 몸을 싸고 있었으나 몸매나 생김이 아무래도 싸우는 장졸 같지가 않았다.
무심코 그들을 훑어보던 패왕은 곧 그들이 팽성의 궁궐에서 일하던 내시와 도필리(刀筆吏)들임을 알아보았다. 팽성에서 몸을 빼낸 뒤로 싸움터를 헤쳐 오다 보니 전포와 갑옷투구로 몸을 가리게 된 듯했다.
(팽성에서 용케들 빠져나왔구나. 그래도 항양이 팽성에서 빼내 데려오던 사람들을 모두 한군에게 빼앗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눈길로 그들을 더듬던 패왕은 그중에 한 사람 호리호리한 몸매와 희고 아리따운 얼굴의 소년 장수와 마주치자 갑자기 가슴이 울컥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조금 전까지만 해도 터질 듯하던 심사가 환히 풀어졌다.
그 소년 장수는 바로 우(虞)미인이었다. 그제야 패왕은 팽성이 한왕 유방에게 떨어졌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줄곧 자신의 심사를 터질 듯하게 한 것이 바로 그녀였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늙은 장돌뱅이 호색한의 품에 안긴 우미인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3만으로 60만의 심장을 비수처럼 찔러간다는, 그런 긴박하고 맹렬한 반격을 구상해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여, 우여, 너를 어찌 할꼬, 하였는데 이렇게 왔구나. 항양이 반드시 몹쓸 짓만 한 것은 아니었다….)
패왕이 다시 그렇게 중얼거리며 살피니 다른 것도 보였다. 군량이나 치중만은 아닌 수레가 여러 대 끌려오고 있는데, 짐작으로는 도성의 도적(圖籍)이나 문서와 인수(印綬) 같은 것들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항양은 패왕의 옥새를 비롯해 팽성 궁궐과 창름(倉(늠,름))에 있던 중요한 물품들은 거의 보존해 왔다.
“이기고 지는 것은 싸우는 자에게 늘 있는 일이오. 장군에게 참으로 죄가 있다면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난 죄일 것이나, 이는 먼저 팽성부터 찾아놓고 난 뒤에 묻겠소.”
패왕이 알아보게 풀린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항양에게 물었다.
“듣기로 노현(魯縣)에는 번쾌가 이끄는 대군이 있다 하였는데, 어떻게 이리 탈 없이 올 수 있었소?”
“신도 그 소문을 듣고 걱정했습니다만 무엇 때문인지 한군은 며칠 전 호릉(胡陵)으로 물러갔다 합니다. 풍(豊) 패(沛) 쪽을 굳게 지키기 위함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패왕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항양이 여전히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패왕은 새로운 사냥감을 본 맹수처럼 두 눈을 번쩍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장군은 이제껏 해 온 대로 이 사람들과 수레를 보호해 호릉으로 오시오. 다만 한 가지―우리와 함께 달려가지는 못한다 해도 너무 늦어서는 아니 되오. 내일 아침 밥 지을 때는 호릉에 이르러 우리와 함께 아침을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하오.”
그리고는 뒤따라오던 장수들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오늘밤 우리는 호릉에 있는 적을 친다. 여기서 호릉까지는 100리 길, 적을 야습하기 위해서는 바삐 달려가야 한다. 창칼과 주먹밥 하나만 지니고 짐은 모두 버려라. 그것들은 오늘밤 호릉에서 적에게 다시 얻으면 된다.”
패왕은 우미인에게 끝내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채 말머리를 돌렸다. 그런 패왕의 뒤를 가리고 가려 뽑은 3만 장졸이 한줄기 빠른 바람처럼 뒤따랐다.
초경 무렵 호릉 동북쪽 30리쯤 되는 골짜기에 이른 패왕은 다시 장수들을 불러 가만히 영을 내렸다.
“여기서 군사들에게 주먹밥을 먹이고 푹 쉬게 하라. 불을 피워서도 안 되고 소리를 질러서도 아니 된다. 그러다가 삼경이 되면 군사들은 깨워 일시에 호릉으로 짓쳐들게 하라.”
그때 번쾌의 3만 군사는 호릉 성밖 벌판에서 느긋하게 저녁밥을 먹고 있었다. 지난 보름 싸움다운 싸움 없이 노현에서 설군, 하구까지 휩쓸고 다니는 동안 자라난 만심(慢心) 때문이었다. 거기다가 며칠 전에는 초나라 도읍인 팽성까지 한왕에게 떨어졌다는 소문이 오자 신중한 번쾌까지도 마음이 풀어지고 말았다. 패왕 항우가 제나라에서 팽성으로 돌아가는 길목을 지킨다면서도 척후조차 제대로 내보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밤 삼경 무렵이었다. 진채 바깥쪽에서 파수를 서던 군사들이 번쾌의 군막으로 달려와 알렸다.
“동북쪽에서 말발굽소리가 들립니다. 적지 않은 인마가 달려오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난 번쾌는 그게 바로 패왕이 이끄는 3만의 정병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기껏해야 겁 없는 척후대거나 한군의 세력을 떠보려는 적의 전군 선봉일 것이라 여기며, 곁에 두고 부리는 부장 하나를 불러 명했다.
“너는 10여기(騎)를 이끌고 달려가 오고 있는 군사들이 어느 편이며, 그 세력은 얼마나 되는지 살펴보고 오너라.”
그리고는 천천히 전포를 걸치며 다른 장수들도 깨우게 했다.
한편 패왕 항우는 호릉에서 나온 한군(漢軍) 정탐병들이 횃불까지 앞세우고 태평스레 다가드는 걸 보고 그들의 만심과 해이를 알아차렸다. 가만히 장수들을 불러 모아 일렀다.
“일시에 밀고 나가 저들을 사로잡아라. 모조리 사로잡지 못하면 저들을 뒤따라 바로 한군의 진채를 들이친다. 한군에게 우리가 온 것을 알고 싸울 채비를 할 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는 군사를 휘몰아 한군 진채로 달려갔다. 번쾌의 본진으로 뛰어들기 전에 패왕이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부로(부虜)도 잡지 않고 항복도 받지 않는다. 군량은 내일 아침만 먹을 수 있으면 되고 물자는 여기서 팽성에 이를 때까지 이틀 꼭 필요한 것만 거둔다. 죽일 수 있는 데까지 죽이고, 부술 수 있는 데까지 부수고, 태울 수 있는 데까지 태워버려라. 잔병을 수습해 다시 반격할 기력이 남지 않게 철저히 쳐부수어야 한다!”
그때는 벌써 밤이 사경(四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번쾌가 정탐병을 내보내면서 깨운다고 깨웠으나 한군은 장졸을 가리지 않고 졸음에 취해 건들거리고 있었다. 서둘러 갑주를 걸치고 병기를 찾아들게 하고 있는데, 요란한 말굽소리가 가까워졌다.
“정탐 나갔던 군사들이 돌아오는가.”
겨우 갑옷투구를 갖춘 번쾌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소식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함성과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러잖아도 말발굽소리가 정탐 나간 병사들의 그것보다 많은 것 같아 이상하게 여기던 번쾌가 큰칼을 집어 들고 장막 밖으로 달려 나가 살펴보았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횃불 사이로 이리저리 내닫고 있는 초나라 기병대였다. 이어 함성과 함께 초군의 선두가 사나운 파도처럼 한군의 진채를 덮쳐 왔다.
“적이다! 모두 나와 적을 막아라!”
번쾌가 그렇게 외치며 칼을 빼들었으나 속으로는 이미 글렀다, 싶었다. 번쾌에게는 그 많은 군사가 마치 땅 밑에서 불쑥 솟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 엄청난 군사가 소리 소문 없이 밤길을 달려 3만 대군이 머무는 본진을 바로 덮쳐 왔다는 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 더욱 번쾌를 놀라게 한 것은 선두에서 그 군사를 이끌고 있는 장수였다. 번쾌가 얼결에 다가드는 기병(騎兵) 하나를 베고 누군가 제 말을 끌어오기를 기다리는데, 불붙은 진문(陣門) 쪽에서 낯익은 적장 하나가 달려왔다. 은빛 갑옷투구를 걸치고 오추마(烏U馬)에 높이 앉은 것이 멀리서 보아도 틀림없이 패왕 항우였다.
그새 달려 나온 한병(漢兵)들을 짚단 베어 넘기듯 하며 패왕이 소리쳤다.
“과인은 서초패왕 항적(項籍)이다. 누가 감히 과인에게 맞서려는가!”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6만의 군사가 뒤엉킨 싸움판을 뒤덮고도 남았다. 갑자기 싸움터가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창칼을 땅에 내던지는 소리와 함께 한군들이 털썩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중군(中軍) 군막까지 큰길이라도 난 듯 패왕 앞이 훤히 열렸다. 하지만 뒤이은 패왕의명은 뜻밖이었다.
“쳐라. 한 놈도 남기지마라!”
패왕이 갑자기 그렇게 소리치며 오추마의 배를 찼다. 그리고 닥치는 대로 한병들을 베며 번쾌가 있는 중군 쪽으로 휩쓸어 왔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기기만 해온 번쾌의 군사들이었으나 그 새벽 패왕 항우 앞에서는 뱀 만난 개구리나 진배없었다. 겁먹고 두려움에 질려 패왕에게 맞서기는커녕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패왕과 그를 따르는 초군(楚軍) 선봉은 마비된 듯 굳어 있는 한군을 베고 찌르며 무인지경 가듯 했다.
지난번 홍문(鴻門)에서 살기등등한 패왕에게 맞서 한왕 유방을 구해냈던 천하의 번쾌도 그런 사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번쾌가 가위눌린 사람처럼 어어, 하며 바라보는 사이에 초군 선봉은 한나라 중군을 휩쓸고 지나가버렸다. 그리고 부장(部將) 하나가 군막 근처에서 겨우 찾아온 말에 올랐을 때는 이미 한군의 진채가 패왕의 기세에 갈가리 찢긴 뒤였다.
“장군 아니 되겠습니다. 잠시 군사를 물려 패왕의 사나운 칼끝을 피해야겠습니다. 서쪽으로 물러나 군사를 수습한 뒤 다시 싸워보는 게 옳을 듯합니다.”
그래도 마지못해 말배를 박차 달려 나가려는 번쾌를 말을 끌고 온 부장이 말렸다. 번쾌가 그 말에 퍼뜩 정신을 가다듬어 사방을 돌아보니 그 부장이 한 말이 그르지 않았다. 한군의 군막들은 모두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고, 사졸들은 군대라기보다는 막다른 골목에 내몰려 도살당하는 사냥감들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사방을 휩쓸고 다니던 초나라 장수 하나가 번쾌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적장은 어디로 달아나는가? 비겁하게 달아나지 말고 내 칼을 받아라!”
평생 겁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온 번쾌였으나 그날따라 그런 적장의 외침에 간이 철렁했다. 입마저 얼어붙은 듯 대꾸조차 못하고 있는데, 달아나기를 권하던 부장이 창대로 번쾌의 말 엉덩이를 후려치며 말했다.
“장군 먼저 몸을 빼시어 내몰린 군사를 수습하십시오. 뒤는 제가 맡겠습니다.”
“알았다. 선보(單父)로 가서 기다릴 테니 그리로 오너라.”
펄쩍 뛰듯 내닫는 말에 몸을 맡긴 채 번쾌가 그렇게 대답했다. 패신(敗神)에 홀린다는 말이 그런 것이었을까, 그날 무엇에 내몰린 듯 진채를 버리고 달아나던 번쾌가 그 뒤 한 일은 도중에 만난 몇몇 한군 장수들에게 물러나 모일 곳이나 일러준 것이 고작이었다.
대장이 그렇게 달아나자 한군의 패배는 훨씬 더 참담하고 여지없는 것이 되었다. 싸움은 없고 초나라 군사들의 일방적인 살육과 방화와 파괴만이 날이 훤히 샐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호릉에는 달아난 자들을 빼고는 살아있는 한군이 더 남아 있지 않게 되어서야 초군은 창칼을 거두었다.
불타다 남은 한군 장수의 군막에 자리 잡은 패왕은 밤새운 행군과 야습으로 지친 장졸들을 쉬게 하는 한편 뒤따라 이른 시양졸(시養卒)들을 시켜 한군이 남긴 곡식과 고기로 푸짐한 아침밥을 짓게 했다. 미처 그 밥과 국이 끓기도 전에 항양(項襄)이 이끄는 후군이 이르렀다. 모두에게 배불리 아침밥을 먹게 한 뒤에 패왕이 장수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오늘 밤에는 하읍(下邑)을 떨어뜨릴 것이다. 여기서 반나절을 쉬고 하읍으로 달려가 다시 적을 야습한다.”
그러자 항양이 오다가 들은 말을 전했다.
“한왕의 고향인 풍읍과 패현에도 적의 잔병(殘兵)이 있다고 합니다.”
“간밤 우리는 번쾌가 이끈 한군(漢軍)의 주력을 쳐부수어 산산이 흩어놓았다. 풍(豊) 패(沛)에 한왕의 쥐새끼들이 좀 남아있다 해도 그 소문을 전해 들으면 모두 넋이 날고 얼이 흩어져[魂飛魄散] 달아나 버릴 것이다.”
패왕 항우가 그렇게 장수들을 안심시킨 다음 비로소 사람을 시켜 우(虞)미인을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팽성이 떨어졌단 말을 듣고 너를 걱정하였다. 한왕 유방이 호색(好色)하다 하나, 난군(亂軍)중에 어떻게 너를 가려 거둬들일 수가 있겠느냐?”
패왕이 우미인을 끌어당겨 안으면서 너털웃음으로 그렇게 말하였다. 우미인이 세차게 패왕의 품을 떨치고 나가더니 품안에서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대왕께서는 어찌하여 늙은 도적의 호색을 입에 담으십니까? 신첩(臣妾) 대왕을 다시 만나 섬길 수 없을 양이면 이 칼로 목을 찔러 세상을 버릴 작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패왕을 원망스레 올려보는 우 미인의 눈길에는 눈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다. 패왕의 여자가 된 지 이미 한 해 남짓이 되었으나 아직도 그녀에게 패왕은 임금이기보다는 태어난 뒤 첫 정을 나눈 정인(情人)이었다. 우미인이 마음으로 거둬들인 첫 정인이기는 패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눈물과 서릿발 같은 칼날을 보고 패왕도 웃음을 거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칼을 거두어라. 내 우스갯소리가 지나쳤다. 이제부터 다시는 너를 내 곁에서 떼어놓지 않으리라.”
실로 그러했다. 그로부터 채 삼년이 차기 전에 해하(垓下)에서 죽음으로 헤어질 때까지 패왕은 어디를 가든 우미인을 데리고 다녔다.
패왕이 이끈 3만 정병이 호릉을 떠난 것은 그날 오시(午時) 무렵이었다. 세 시진(時辰) 가까이 푹 쉰 초나라 군사들은 점심까지 배불리 먹고 하읍(下邑)으로 길을 잡았다. 그때는 성밖에 머물던 한군이 패왕이 이끈 대군에게 풍비박산난 일과 아울러 초군이 다음에는 하읍으로 갈 것이라는 소문까지 인근에 널리 나 있었다.
그런데 초군이 미처 호릉의 경계를 벗어나기도 전이었다. 패왕이 장수들을 불러 모아 갑자기 길을 바꾸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하읍으로 가지 않고 유현(留縣)으로 간다. 오늘밤 자정 전에 유성(留城)을 떨어뜨린 뒤 거기서 하룻밤을 쉬고 바로 팽성으로 달려갈 것이다. 유성에서 팽성까지는 100리가 못 되니 내일 저물기 전에는 팽성을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는 바람같이 군사를 휘몰아 그날 밤으로 비어있는 것이나 다름없는 유성을 차지해버렸다.
그때 하읍에는 한왕 유방의 손위 처남 되는 주여후(周呂侯) 여택(呂澤)이 한 갈래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저녁 무렵 호릉에 있던 번쾌의 3만 대군이 짓밟힌 깨강정 꼴이 나고 패왕이 그리로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놀라 성문을 닫아걸고 굳게 지키느라 이웃 성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유성에서 다시 하룻밤을 쉬면서 패왕은 비로소 팽성의 형편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한왕의 군사가 56만 대군이라 하나 팽성 안에 남아있는 군사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량(大梁) 땅으로 간 팽월로부터 대왕께서 어제 쳐 흩어버리신 번쾌와 하읍에 있는 여택(呂澤)의 군사에 이르기까지 팽성 북쪽에 벌여 놓은 군사가 10만이 넘고, 외성(外城)으로 삼는답시고 소성(蕭城) 안팎에 풀어놓은 대군이 또 10만이 됩니다. 거기다가 제후들의 군사는 팽성 안을 이 잡듯 뒤져 털고도 모자라 동쪽 곡수(穀水)와 사수(泗水)까지 노략질을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도는 군사가 다시 10만이 훨씬 넘는다 하니 팽성 안에 남아있다 해봤자 얼마이겠습니까? 그나마 아래 위가 함께 술에 취해 있어 제대로 싸울 군사는 10만에도 차지 못할 것이라 합니다.”
날이 밝기 바쁘게 정탐을 나갔던 군사가 패왕에게 그렇게 팽성의 소식을 전했다. 바로 그날 팽성을 빠져나왔다는 한 무리의 장사치들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반가워해야 할 소식이었으나 왠지 듣고 난 패왕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팽성은 과인이 도읍으로 삼으면서 다시 수축한 성이라 그 성벽의 높고 두꺼움을 잘 안다. 10만이 아니라 단 1만이라도 거기 의지해 지키려고만 들면 우리 3만 군사로는 어찌해볼 수가 없다.”
그러면서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그 군사에게 물었다.
“그럼 팽성 밖에 나가있는 군사들 중에 가장 날래고 굳센 갈래는 어디 있는 누구의 부대라더냐?”
“듣기로는 소성 안팎의 군사인 듯합니다. 그 동쪽 벌판에 관영과 조참이 이끄는 한군(漢軍) 3만을 주력으로 제후군 몇 만이 펼쳐져 있습니다. 또 성안에도 제후군 3만이 있어 성 밖 군사와 서로 돕고 의지하는 형세를 이루고 있는데, 그 기세가 자못 날카롭다 합니다.”
그 말에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패왕이 그 군사를 내보내고 장수들을 불러들였다.
“저물 때까지 군사들을 푹 쉬게 하라. 어두워지면 바로 팽성으로 갈 것이다. 그리고 호릉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벽에 성 밖에 진치고 있는 것들부터 쓸어버린 뒤 성안을 들이친다.”
패왕이 그 같은 명을 내리자 장수들도 각기 자신의 군막으로 돌아가 거느린 군사들에게 그대로 전했다. 초군(楚軍) 장졸들은 그 말에 따라 남은 한나절을 다시 쉬어 이틀 밤에 걸친 피로를 씻었다. 하지만 패왕이 다음날 일찍 팽성을 칠 것이란 말은 벌써 소문이 되어 초군의 진채를 벗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날이 저물었다. 패왕은 군사들에게 밥과 고기를 든든히 먹이게 한 뒤 장수들을 군막에 불러 모았다.
“이제부터 우리는 가장 바쁘고 고단한 하룻밤 하루 낮을 보내야할 것이다. 군사의 움직임은 소문보다 빨라야 하고, 싸움은 벼락 치듯 단숨에 적을 쳐부수어야 한다. 이제부터 길은 팽성이 아니라 소성으로 잡는다. 모두 닫기를 배로 하여 소성으로 가자!”
다음으로 들이칠 곳이 어디인가를 정하는 것은 군사를 움직이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패왕이 낯색 한번 변하지 않고 아침에 한 말을 바꾸어 버리자 장수들은 어리둥절했다.
“이 아침 대왕께서는 바로 팽성으로 가시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용저가 아무래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패왕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팽성에는 내일 새벽 우리가 간다는 소문만 갔으면 된다. 팽성의 한군이 벌벌 떨며 성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사이에 우리는 살별처럼 소성(蕭城)으로 달려가 거기 있는 적을 단숨에 짓뭉개 놓아야 한다. 그리고 쫓겨 가는 적을 위장하거나 그들의 꼬리에 바짝 붙어 팽성 안으로 들어가 숨 돌릴 틈을 주지 않고 팽성까지 우려 뺀다. 다만 소성까지는 우리가 간다는 소문보다 우리 군사가 빨리 이르러야 할 것이다. 또 팽성을 되찾을 때까지는 적에게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패왕의 말투는 마치 앞으로 있을 싸움의 모든 국면을 이미 장악하고 있는 듯했다. 용저가 그리 용렬한 장수가 아니라 그런 패왕의 말을 금세 알아들었다. 다른 장수들도 용저를 통해 패왕의 뜻을 알아듣고 거기에 맞게 사졸들을 이끌었다.
패왕이 이끈 3만 초군은 유현(留縣)에서 소성까지 내닫듯 달려 날이 샐 무렵 소성 동쪽 20리 되는 곳에 이르렀다. 거기서 패왕은 잠시 군사들을 쉬게 하면서 마지막으로 싸울 채비를 가다듬게 했다.
“고단하겠지만 방금도 팽성에서 한군에게 갖은 수모와 학대를 당하고 있을 부모형제와 처자를 생각하라. 소성의 적을 두고는 팽성으로 갈 수가 없다. 다시 한번 뒤를 깨끗이 하고 팽성으로 가서 그대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구하도록 하라!”
한 식경이나 쉬었을까, 패왕은 그런 말로 다시 장졸들을 휘몰아 소성으로 달려갔다. 오래잖아 앞서 살피러 간 군사들이 달려와 알렸다.
“소성 동문 밖 벌판에 적이 진세를 벌이고 있습니다. 왼쪽에 있는 것은 관영의 진채고 오른 쪽에 있는 것은 조참의 진채라 합니다. 또 성안에는 위왕(魏王) 표(豹)와 몇몇 제후들의 군사가 있고 북쪽 5리쯤 되는 곳에도 제후군 한 갈래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패왕은 곧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나, 우리는 뭉쳐 흩어져 있는 적을 하나씩 친다. 먼저 남쪽에 있는 관영의 진채로부터 짓밟아 조참과 성밖 다른 제후군까지 두들겨 부순다. 한곳에 머물러 싸우지 말고 세찬 물결처럼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쓸어가라. 호릉에서처럼 포로도 잡지 않고 항복도 받지 않는다. 과인이 앞설 터이니 기세로 먼저 적을 제압하고, 창칼이 맞닿거든 되도록 끔찍하고 모질게 적을 몰아 적으로 하여금 싸울 엄두가 나지 않게 하라. 또 우리는 이미 팽성을 떨어뜨리고 그곳 한군을 모조리 쳐부순 것처럼 꾸며라!”
패왕이 그와 같은 명을 내리고 스스로 갑옷 투구를 여몄다. 그리고 관영의 진채가 나타나자 먼저 보검을 빼들고 말을 박찼다.
“과인은 패왕 항적이다. 쥐새끼 같은 반적의 무리는 어서 항복하지 않고 무얼 기다리느냐?”
패왕의 우레 같은 외침에 이어 군사들의 입을 모은 함성이 그 뒤를 받쳤다.
“패왕께서 몸소 나셨다. 너희들은 거록(鉅鹿)의 싸움과 우리 패왕의 무용을 잊었느냐? 이미 팽성은 떨어지고 장돌뱅이 유방은 관중으로 달아났다. 어서 항복하라!”
“팽성에 있던 너희 20만 대군도 모두 항복했다. 너희들도 어서 항복하여 대왕의 자비를 구하고, 신안(新安)의 진나라 군사들처럼 산 채로 흙구덩이에 묻히는 화를 면하라.”
“산동에 있던 너희 한군은 모두 죽었고 번쾌도 머리 없는 귀신이 되었다.”
전날 저녁 잘 먹고 느긋하게 잠들었던 관영(瓘영)의 군사들로 봐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나 다름없었다. 이제 천하를 다투는 싸움은 끝나고 대세는 결정 난 것쯤으로 여겼는데, 한왕(漢王) 유방과 그를 따르는 제후들이 차지하고 있던 팽성 쪽에서 난데없이 초나라 군사가 나타나 엄청난 기세로 덮쳐왔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그 선두에는 이름만 들어도 으스스한 패왕 항우가 시퍼런 보검을 빼들고 우레처럼 외치며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패왕이다. 패왕 항우가 돌아왔다!”
초군의 함성에 관영의 군사들이 놀라 허둥대며 소리쳤다.
놀라기는 관영도 마찬가지였다. 패왕이 제나라에서 출발했다는 풍문은 있었지만, 관영이 헤아리기에 패왕이 팽성으로 돌아오기에는 너무 일렀다. 또 패왕이 팽성으로 돌아왔다 해도 관영이 먼저 들어야 할 것은 자기들을 덮쳐오는 패왕과 초나라 군사의 함성이 아니라, 그들과 한왕의 20만 대군이 팽성을 두고 벌이는 격전의 소식이었다.
“적에게 속지 말라. 거짓말에 흔들리지 말고 진문을 지켜라!”
겉으로는 그렇게 외치며 갑옷투구를 걸쳤으나 관영의 마음은 이미 어지럽기 짝이 없었다. 거기다가 그런 관영의 명을 차분히 받아들일 사졸이 없어 공들여 세운 한군의 녹각(鹿角)이나 목책(木柵)도 별 소용이 없었다. 이내 한군의 진세가 무너지고 초나라 군사가 관영의 진채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팽성은 떨어지고 패현 장돌뱅이 유방은 달아났다. 너희가 무엇을 기다리느냐?”
“머지않아 유방의 목 잘린 머리가 올 것이다. 그걸 봐야 항복하겠느냐?”
기세가 오른 초나라 군사들이 그렇게 소리 높이 외쳐 그러지 않아도 허둥거리는 한군들을 더욱 얼빠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은 대장인 관영마저 그런 거짓말에 넘어간 일이었다.
관영은 사서(史書) 여기저기에서 ‘치열하게 싸워(疾鬪)’ 또는 ‘온 힘을 다해 싸워(戰疾力)’라는 수식구가 특별하게 붙을 만큼 맹렬한 전투력을 자랑하던 장수였다. 적장의 기세가 사나우면 그보다 더 맹렬한 기세로 맞받아 쳐 전국(戰局)을 돌려놓는 게 그의 장기였는데 그날은 도무지 그 전투력이 살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초나라 군사들의 거짓 외침을 핑계 삼아 몸을 뺄 궁리부터 먼저 했다.
(우리 대군이 있는 팽성을 두고 그 서쪽에 있는 이 소성부터 먼저 치는 것은 싸움의 이치에 맞지 않다. 저들이 떠드는 대로 팽성은 떨어지고 우리 대왕께서는 낭패를 보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억지로 버텨봤자 무슨 소용인가. 팽성의 30만이 넘는 우리 대군을 무찌르고 온 패왕의 대군에게 맞서 봤자 장졸만 상할 뿐이다. 차라리 서쪽으로 물러나 군사를 수습한 뒤 우리 대왕을 찾아 재기를 도모함만 같지 못하다. 조참에게도 그리 전해 우리가 이끈 한군이라도 온전히 보전해야겠다.)
이렇게 마음을 정한 뒤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말 위에 뛰어올라 조참의 진중으로 달려갔다.
어쩌면 관영은 화경(火鏡) 같은 눈에 불길을 철철 흘리며 앞서 덮쳐오는 패왕과 그 좌우에서 두 날개처럼 패왕을 떠받들고 있는 용저(龍且)와 항타(項他)의 기세에 먼저 질려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관영(瓘영)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나자, 한 끈에 엮인 듯 그 북쪽으로 이어 진채를 펼치고 있던 조참(曺參)의 부대도 함께 무너졌다.
그날 새벽잠에 깊이 빠져 있던 조참은 관영이 쫓기면서 급하게 보낸 전갈과 뒤따라 다가오는 초나라 군사의 함성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당한 중에도 급하게 갑옷투구를 걸치고 장수들을 불러 모았으나 이미 초군에 맞서 싸울 형편은 아니었다. 조참은 겨우 모인 장졸들에게 관영에게서 받은 전갈을 들려준 뒤 미련 없이 진채를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뒷날 조참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야릇한 공포와 무력감의 전이(轉移)였다.
“서쪽으로 달아나는 적은 뒤쫓지 말라! 동쪽으로 팽성을 되찾는 일이 아직 남았다.”
패왕 항우가 다시 그런 명을 내려 관영과 조참의 군사들을 놓아주고 소성 밖에 있는 다른 제후들의 진채로 군사를 몰아갔다. 한왕의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매섭고 불같은 두 장수가 그렇게 무너지니 다른 제후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대개는 누구에게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무참하게 짓밟혀 흩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갈가마귀떼 같은 군사라 해도 5만이 넘는 대군이 지키던 소성 밖 벌판이었다. 패왕의 3만 군이 무인지경 가듯 휩쓸어도 성 밖 한군을 모조리 쓸어내는 데는 한 시진(時辰) 가깝게 걸렸다. 초나라 군사들이 마지막으로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의 군사들을 두드려 쫓고 있을 때는 벌써 해가 동녘 벌판 위로 벌겋게 솟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성 동문이 열리며 한 떼의 인마가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겨우 싸울 채비를 갖춘 위왕(魏王) 표(豹)가 성안의 장졸을 이끌고 제 편을 돕는답시고 달려 나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뜻은 가상해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때마침 허둥대며 달아나는 하남왕 신양을 한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린 패왕이 불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위왕 표를 보며 소리쳤다.
“이놈 위표(魏豹)야. 과인은 너를 어여삐 여겨 서위왕(西魏王)으로 세우고 대접도 박하지 않았거늘, 너는 어찌하여 과인을 저버리고 늙은 도적에게 항복하였느냐?”
위왕이 그 소리에 찔끔해 말고삐를 당기며 패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한때 위나라의 성 20여 개를 제힘으로 되찾고, 함곡관을 넘어 들어가 싸운 공으로 왕위까지 얻은 사람이었다. 패왕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의연히 맞받았다.
“대왕이야말로 어찌하여 의제를 시해하시어 천하의 공분(公憤)을 사시었소? 나는 대의를 받들어 천자를 시해한 역적을 벌하고자 일어난 한왕을 따랐을 뿐이오,”
그러자 패왕이 벌컥 화를 내며 큰 징이 깨지는 듯한 소리로 꾸짖었다.
“저놈이 그래도 붙어 있는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어서 그 목을 바치지 못할까!”
그리고 아직도 신양의 피가 마르지 않은 창을 쳐들고 몸소 위왕 표를 덮쳐갔다. 그 뒤를 승세를 탄 초나라 장졸들이 한 덩이가 되어 따랐다.
오추마가 워낙 빨라 얼결에 패왕과 맞닥뜨리게 된 위왕은 겨우 몸을 비틀어 한 창을 피했으나 애초부터 그 적수가 못되었다. 말이 엇갈리자마자 박차를 가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성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를 뒤따라 나온 1만여 명 장졸들도 마찬가지였다. 초나라 군사들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창칼조차 제대로 맞대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달아났다. 관영(瓘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나자, 한 끈에 엮인 듯 그 북쪽으로 이어 진채를 펼치고 있던 조참(曺參)의 부대도 함께 무너졌다.
그날 새벽잠에 깊이 빠져 있던 조참은 관영이 쫓기면서 급하게 보낸 전갈과 뒤따라 다가오는 초나라 군사의 함성소리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당한 중에도 급하게 갑옷투구를 걸치고 장수들을 불러 모았으나 이미 초군에 맞서 싸울 형편은 아니었다. 조참은 겨우 모인 장졸들에게 관영에게서 받은 전갈을 들려준 뒤 미련 없이 진채를 버리고 서쪽으로 달아났다. 뒷날 조참 스스로 돌이켜 보아도 야릇한 공포와 무력감의 전이(轉移)였다.
“서쪽으로 달아나는 적은 뒤쫓지 말라! 동쪽으로 팽성을 되찾는 일이 아직 남았다.”
패왕 항우가 다시 그런 명을 내려 관영과 조참의 군사들을 놓아주고 소성 밖에 있는 다른 제후들의 진채로 군사를 몰아갔다. 한왕의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매섭고 불같은 두 장수가 그렇게 무너지니 다른 제후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대개는 누구에게 어떻게 당하는지도 모르고 무참하게 짓밟혀 흩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갈가마귀떼 같은 군사라 해도 5만이 넘는 대군이 지키던 소성 밖 벌판이었다. 패왕의 3만 군이 무인지경 가듯 휩쓸어도 성 밖 한군을 모조리 쓸어내는 데는 한 시진(時辰) 가깝게 걸렸다. 초나라 군사들이 마지막으로 하남왕(河南王) 신양(申陽)의 군사들을 두드려 쫓고 있을 때는 벌써 해가 동녘 벌판 위로 벌겋게 솟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소성 동문이 열리며 한 떼의 인마가 쏟아져 나왔다. 그제야 겨우 싸울 채비를 갖춘 위왕(魏王) 표(豹)가 성안의 장졸을 이끌고 제 편을 돕는답시고 달려 나오는 길이었다. 하지만 뜻은 가상해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때마침 허둥대며 달아나는 하남왕 신양을 한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린 패왕이 불이 뚝뚝 듣는 듯한 눈길로 위왕 표를 보며 소리쳤다.
“이놈 위표(魏豹)야. 과인은 너를 어여삐 여겨 서위왕(西魏王)으로 세우고 대접도 박하지 않았거늘, 너는 어찌하여 과인을 저버리고 늙은 도적에게 항복하였느냐?”
위왕이 그 소리에 찔끔해 말고삐를 당기며 패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도 한때 위나라의 성 20여 개를 제힘으로 되찾고, 함곡관을 넘어 들어가 싸운 공으로 왕위까지 얻은 사람이었다. 패왕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의연히 맞받았다.
“대왕이야말로 어찌하여 의제를 시해하시어 천하의 공분(公憤)을 사시었소? 나는 대의를 받들어 천자를 시해한 역적을 벌하고자 일어난 한왕을 따랐을 뿐이오,”
그러자 패왕이 벌컥 화를 내며 큰 징이 깨지는 듯한 소리로 꾸짖었다.
“저놈이 그래도 붙어 있는 입이라고 함부로 말하는구나. 어서 그 목을 바치지 못할까!”
그리고 아직도 신양의 피가 마르지 않은 창을 쳐들고 몸소 위왕 표를 덮쳐갔다. 그 뒤를 승세를 탄 초나라 장졸들이 한 덩이가 되어 따랐다.
오추마가 워낙 빨라 얼결에 패왕과 맞닥뜨리게 된 위왕은 겨우 몸을 비틀어 한 창을 피했으나 애초부터 그 적수가 못되었다. 말이 엇갈리자마자 박차를 가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성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를 뒤따라 나온 1만여 명 장졸들도 마찬가지였다. 초나라 군사들의 엄청난 기세에 눌려 창칼조차 제대로 맞대 보지 못하고 돌아서서 달아났다.
위왕(魏王) 표(豹)나 그를 따르던 장졸들은 원래 소성(蕭城) 안으로 돌아가 성문을 닫아걸고 버텨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패왕과 초나라 군사들이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워낙 바짝 따라붙어 위왕의 군사들이 소성 안으로 쫓겨 들어간다 해도 성문을 닫아걸 새가 없었다.
“할 수 없다. 소성을 버리고 하읍(下邑)으로 가자! 거기 가면 우리 대군이 있다.”
위왕 표가 그렇게 소리치며 먼저 말머리를 북으로 돌리고, 어렵게 몸을 빼낸 장졸들도 정신없이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그런 위병(魏兵)을 초나라 군사들이 쉽게 놓아주지를 않았다. 한참이나 따라가며 짚단 베어 넘기듯 하다가 패왕의 외침을 듣고서야 비로소 뒤쫓기를 멈추었다.
“달아나는 토끼를 더는 뒤쫓지 마라. 이제는 팽성의 큰 사슴을 잡을 때다!”
패왕은 그렇게 외친 뒤에 한층 목소리를 높여 덧붙였다.
“장졸들은 모두 비어있는 소성으로 들어가라. 거기서 요기를 하고 잠시 숨을 돌린다. 팽성은 오늘 안으로만 가면 된다.”
그러자 장수들이 의아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대왕께서는 적을 위장하거나 달아나는 적의 꼬리에 붙어 단숨에 팽성까지 우려 빼야 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소성에서 늑장을 부리면 여기서 우리가 간다는 소문이 먼저 팽성에 들어가 적이 방비를 굳게 할까 걱정입니다.”
그래도 패왕은 태평스럽기 짝이 없었다.
“이번에는 소문으로 먼저 팽성을 치고, 그 다음에 군사로 밀고들 작정이다. 진작부터 떠돌던 과인이 돌아오고 있다는 풍문에다, 어제 오늘 호릉(胡陵)과 유현(留縣)에서 잇따라 들어간 소문으로 팽성 안은 지금 악머구리 들끓듯 하고 있을 것이다. 거기다가 이 새벽 여기서 있었던 일이 전해지면 성안은 더욱 겁먹고 혼란되어 싸울 마음을 잃을 것이니, 이것이 바로 소문으로 먼저 적을 친다는 뜻이다.”
덤덤한 얼굴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장졸들을 소성 안으로 몰고 들어갔다. 하지만 성안에서 서둘러 요기를 마치기 무섭게 패왕은 또 다른 명으로 장수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제부터 성 안팎에서 의병(疑兵)을 모은다. 성안 백성들 중에서 여자와 어린아이를 뺀 모든 남자들과 미처 달아나지 못해 사로잡힌 성 밖의 모든 적병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 대오를 짓게 하라. 그들에게 기치와 창검을 들려 우리를 뒤따르게 하면 우리 군세가 배로 늘어난 것처럼 꾸며 팽성의 적을 한층 더 놀라고 겁먹게 할 수가 있다.”
그런 패왕은 이제 기세와 용력만으로 내닫던 강동의 호랑이도 아니고, 집중과 속도만으로 전기(戰機)를 돌려놓던 거록(鉅鹿)의 맹장도 아니었다. 본능처럼 타고난 승패의 기미를 포착하는 능력에다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부리고 쓸 줄 아는 병가(兵家)의 심지(心地)까지 갖춘 싸움의 화신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패왕의 명을 받은 초나라 군사들이 소성의 군민(軍民)과 사로잡은 제후군을 긁어모아 의병을 얽어 보니 그 수가 무려 5만이나 되었다. 진시(辰時)에 들 무렵 패왕은 그들에게 시늉만 낸 창칼과 깃발을 주어 뒤따르게 하고, 자신은 3만 정병을 몰아 마침내 미루고 미뤄 온 팽성으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