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二 바람아 불어라
진나라 이세(二世)황제 원년(元年) 칠월, 조정은 몇몇 고을의 이문(里門) 왼쪽에 사는 이들 중에서 장정을 뽑아 변방인 어양(漁陽)으로 보냈다. 이문이란 동네[이] 어귀마다 세워둔 문인데, 진나라 때는 세금과 부역을 면해주는 가난뱅이들을 그 왼쪽에 살게 하고, 부자들은 오른 쪽에 살게 했다. 따라서 이문 왼쪽에 사는 이들을 변방으로 보냈다는 것은 나라 안의 빈민들을 변방으로 이주시켜 그곳을 지키며 버려져 있는 땅을 개척하게 했다는 뜻이었다. 이른바 수졸(戌卒)이었다.
하지만 이문 왼쪽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가난해도 터잡고 정붙여 살던 곳을 떠나기 싫어했다. 이에 진나라 조정은 군사를 풀어 그들을 억지로 제 살던 곳에서 끌어낸 뒤, 짐승 몰 듯 어양으로 몰고 갔다. 그 때는 수졸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몰고 가는 진나라 병사들에게도 꼭 지켜야할 기한이 주어졌다.
그 무렵 양성(陽城)과 양하(陽夏) 현의 이문 왼쪽에 살던 가난뱅이 900여명도 어양으로 끌려가고 있었다. 그들이 대택향(大澤鄕)에 이르렀을 즈음 큰 비를 만나게 되었다. 원래 늪지와 큰 못 사이의 황무지를 개척해 연 향(鄕)이라 큰 비를 만나자 사방은 물바다가 되고 길은 모두 막혀버렸다. 할 수 없이 대택향에 머물며 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비는 쉬 멎지 않아 어양에 이르러야할 기한을 넘기도록 길이 열리지 않았다. 엄한 진나라 법에 따르면, 끌고 가는 진나라 병사들뿐만 아니라 수졸(戌卒)로 끌려가는 이문 왼쪽의 사람들도 모두 목이 날아가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수졸들의 둔장(屯長) 중에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승은 양성에서 나고 자랐는데 자를 섭(涉)이라 썼다. 보잘것없는 농군의 자식이라 많이 배우지 못했고, 배워 아는 게 없으니 벼슬길에 오르지도 못했다. 일찍부터 생업에 들어갔으나 그렇다고 크게 재물을 모은 것도 아니었다. 가생(賈生=賈誼)의 ‘과진론(過秦論)’에는 진승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진섭(陳涉)은 깨진 항아리의 주둥이를 (벽에) 끼워 창문을 만들고, 새끼로 지도리를 맬 정도로 누추한 집에 살았다.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머슴살이 농군으로 지내다가 변방으로 내몰리어 길을 떠나게 된 정부(征夫)였다. 재능은 보통 사람에게도 미치지 못했고, 중니(仲尼·공자)나 묵적(墨翟·묵자)같은 어짊과 덕도 없었으며, 도주(陶朱·월왕 구천의 신하였던 범려로서 뒷날 장사로 천금을 모았다) 의돈(猗頓 · 소금으로 거만의 부를 쌓았다는 노나라 사람)같은 재부(財富)도 없었다......’
하지만 진승의 기상만은 일찍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던 듯하다. 젊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남의 집 머슴살이할 때의 일이었다. 어느 날 밭두렁에서 잠시 일손을 멈추고 쉬는데, 홀로 침울해 있던 그가 갑자기 여럿을 보고 말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지금은 빈천하나 만약 부귀하게 된다면 서로를 잊지 맙시다!”
그때만 해도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지 오래되지 않은 때라 사회가 안정되고 제도가 정비되어 신분 변동이 쉽지 않을 때였다. 머슴들이 그를 비웃으며 대꾸했다.
“당신이나 우리나 반반한 땅 한 뙈기 없어 남의 머슴살이하는 처지가 아니오? 그런데 무슨 부귀를 얻는단 말이오?”
그러자 진승이 문득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제비나 참새가 어찌 기러기나 고니의 뜻을 알 수 있으리오[燕雀安知鴻鵠之志哉]?”
어찌 보면 자존 망대(自尊妄大)같기도 하지만 당시의 의식수준으로 보면 대단한 자기 확신이요 호기(豪氣)였다.
오광(吳廣)은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숙(叔)이었다. 진승이나 마찬가지로 한미한 집안 출신이라 가계나 어린 시절에 대해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자라서는 힘이 세고 몸이 날랬으며, 총명하지는 못해도 신의가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진승과 오광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그들의 고향으로 미루어 보면 수졸로 뽑히게 되면서부터 만나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한번 친해지자 곧 간담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나란히 둔장이 되어 적지 않은 수졸들을 거느리게 되면서부터는 죽음으로 뜻을 함께 한다는 맹서(盟誓)까지 나누게 되었다.
대택향에서 큰 비를 만나 어양에 닿아야할 기한을 넘기게 되자 진승이 오광을 불러놓고 가만히 의논했다.
“이제 우리는 어양에 가도 기일을 어겨 목을 베이게 되고, 도망을 친다 해도 막막한 진나라 천지에서 살아날 길이 없다. 진나라에 맞서 들고일어나도[義擧] 마찬가지로 강하고 날랜 진나라 군대에게 잡혀 죽음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무얼 해도 똑같이 죽을 뿐이라면 천하 뭇 백성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게 낫지 않겠는가?”
“천하 뭇 백성을 위해 싸우다 죽는다는 말이 무슨 뜻이오?”
오광이 놀란 눈으로 진승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승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천하 사람들이 진나라의 가혹한 다스림으로 고통받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제 마땅히 그들을 위해 진나라와 맞서 일어날 때다.
내가 들으니 이세 황제가 된 호해(胡亥)는 막내아들이므로 제위를 계승할 수 없으며. 마땅히 황제가 되었어야 할 이는 맏이인 부소(扶蘇)라 하였다. 부소가 여러 차례 귀에 거슬리는 간언을 하자 시황제는 그에게 군사를 주어 멀리 변방으로 쫓아버렸지만 사람들은 그가 아무 죄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시황제가 죽을 무렵 곁에 있던 막내 호해가 음모를 꾸며 그를 죽이고 황제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고 한다. 하지만 백성들은 부소가 어질고 재능이 있었음을 알고 있으나 정작 그가 죽었는지는 아직 모른다.
또 항연(項燕)은 초나라의 이름난 장수로서, 거느린 장졸들을 아끼고 여러 차례 싸움에서 공을 세워, 초나라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러러 받들었다. 초나라가 망한 뒤에도 어떤 사람은 그가 죽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가 멀리 도망가서 숨었다고도 한다. 다시 말해,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 받들면서도 정작 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잘 모른다.
이제 만약 우리가 천하 사람들을 위해 부소와 항연을 가장하고 깃발을 세운다면 그들을 흠모하는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다. 거기다가 진나라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모두 팔을 걷어 부치고 도울 것이니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오광이 들어보니 그럴 듯했다. 하지만 조금씩 흔들리기는 해도 아직은 온전한 진의 천하라 서뿔리 나서기에는 켕기는 구석이 없지 않았다. 큰소리는 쳐도 두렵기는 진승도 마찬가지여서, 둘은 먼저 점쟁이를 찾아가 앞날을 물어보았다.
점쟁이는 한눈에 그들을 알아본 듯했다. 정성을 다해 시초(蓍草)를 뽑고 거북껍질[龜甲]을 굽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로 엄청난 일을 하려고 하는구려. 만약 당신들이 꾀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면 천하를 위해 큰 공을 세우게 될 것이오. 하지만 사람의 힘만으로는 아니 되오. 반드시 귀신들의 도움이 있어야할 것이오.”
진승은 그 말에 기뻐하였으나 오광은 걱정이 되었다. 점쟁이의 집을 나서기 바쁘게 진승에게 물었다.
“귀신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우리가 무슨 수로 귀신들의 도움을 청한단 말이오?”
그러자 진승이 빙그레 웃으며 오광을 안심시켰다.
“그것은 우리들이 귀신 노릇을 해 사람들로부터 위엄과 믿음을 사라는 뜻일세.”
그리고는 그날로 꾀를 부려 괴이쩍은 방도로 사람들을 홀렸다.
진승과 오광이 귀신의 뜻을 가장하기 위해 첫 번째로 이용한 것은 물고기였다. 그들은 흰 비단 위에 주사(朱砂)로 ‘진승이 왕이 된다[陳勝王]’ 고 쓴 뒤 몰래 어부가 그물로 잡은 큰 물고기 뱃속에 쑤셔 넣었다. 한 장이 아니라 여러 장을 써서 여러 마리의 물고기 뱃속에 넣었는데, 그것도 곧 수졸(戌卒)들에게 팔려갈 물고기들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물고기를 산 수졸들 사이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배를 따자 붉은 글씨가 쓰인 비단 조각이 나왔는데, 일이 기괴할 뿐만 아니라 적힌 내용이 너무도 엄청났다. 자칫하면 그런 글을 보았다는 것만으로 화를 당할 것 같아 얼른 없애버리고 말았지만, 진승이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진승과 오광이 귀신의 뜻을 전하러온 영물(靈物)로 내세운 것은 여우였다. 진승은 오광을 시켜 한 밤중에 몰래 그들이 묵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숲으로 숨어들게 했다. 그 숲 속에는 오래된 사당이 하나 있었다. 오광은 그 사당 앞 공터에 불빛이 별난 모닥불을 피우고 자신은 흰 여우 가죽을 뒤집어 쓴 체 뛰어다니며 여우 울음소리를 냈다.
그 시절 오래된 사당에 여우가 집을 짓고 사는 일은 이상할 게 없었고, 거기서 들리는 여우의 울음소리도 귀에 설지 않았다. 하지만 그 울음소리 사이에 끼어드는 높고도 맑은 가락 같은 목소리는 이내 수졸들의 이목을 끌었다.
“초나라가 크게 흥하리라[大興楚]
진승은 왕이 되리[陳勝王]”
오래 되어 음산하고 기괴한 사당 앞에서, 깊은 밤 푸르스름한 빛살 가운데 크고 흰 여우가 뛰노는 광경도 섬뜩했지만, 그게 노래한 내용은 더욱 그랬다. 아무도 감히 나서서 정말로 여우인지 아닌지 알아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다만 날이 밝자 끼리끼리 모여 간밤의 일을 수군거릴 뿐이었다.
거기서 다시 수졸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진승이란 이름은 절로 며칠 전 물고기 뱃속에서 나온 비단 조각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하늘이 물고기에 이어 이번에는 여우를 보내 거듭 자신의 뜻을 밝히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에 수졸들은 새삼 주의 깊게 진승이란 이름을 가진 사내를 찾아보고 또 살피게 되었다.
어느 정도 때가 익었다고 여기자 진승은 먼저 오광을 내세워 일을 벌였다. 오광은 평소 사람들을 자상하게 돌봐주어 많은 수졸들이 그를 따랐다. 오광은 그들을 데리고 그들 중에서는 가장 높은 벼슬아치인 장위(將尉)를 찾아갔다.
장위는 양성현의 두 현위(縣尉)중에 하나로서 병사 수십 명과 함께 그들 900명을 어양으로 끌고 가는 일을 맡은 자였다. 끌려가는 수졸들에게는 평소 똑바로 쳐다보기도 거북할 정도로 높은 벼슬아치였으나, 그날 오광은 조금도 어려워하는 기색 없이 그에게 다가갔다.
그때 장위(將尉)는 술에 취해 있었다. 큰비로 기한을 넘겨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 심사를 술로 풀고 있던 중이었다. 오광은 바로 그 앞으로 가서 자기를 따르는 수졸들을 돌아보며 짐짓 큰소리로 떠들어댔다.
“이젠 기를 쓰고 어양으로 가봐야 목 날아갈 일밖에 남지 않았어. 모두 도망치자구! 그래서 목숨이나 건지는 게 상책이야.”
그러잖아도 불쾌하게 술잔을 비우고 있던 장위는 그 말에 벌컥 성을 냈다.
“네 이놈. 너는 둔장(屯長)으로서 나서서 말려야 할 처지에 되레 그 무슨 되잖은 소리냐? 나라의 엄한 법이 무섭지도 않느냐?”
“나라 법이 무서우니, 우선 목숨이나 건지자고 하는 소리 아니요? 장위님도 무턱대고 미련 댈 처지는 아닌 듯싶소. 목이 날아가도 우리보다 먼저 날아 갈 테니......”
오광이 그렇게 이죽거려 장위의 부아를 돋우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장위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곁에 있던 채찍을 집어 들었다.
“네 이놈.”
장위(將尉)가 긴 말 할 것도 없다는 듯 채찍을 휘둘렀다. 오광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 채찍을 휘어잡고 한 번 더 이죽거렸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함께 목 없는 귀신이 될 처지면서…”
장위가 용을 써 보았으나 오광이 워낙 팔 힘이 좋아 채찍을 빼낼 수가 없었다. 그러자 참지 못한 장위는 차고 있던 장검을 빼들었다.
그러잖아도 자기들이 우러르고 따르는 오광을 장위가 함부로 욕보이는 것 같아 못마땅하던 수졸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칼까지 빼어드니 해도 너무 한다 싶었다. 평소 두려워하던 장위였으나, 이제는 모두가 오광 편이 되어 험한 눈길로 쏘아보았다.
오광이 기다린 것은 그런 분위기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수졸들이 모두 자신을 편들어 주리란 믿음이 생기자 처음부터 별렀던 대로 손을 썼다. 채찍을 감아쥐고 있던 손을 놓은 뒤, 날쌔게 장위를 덮쳐 오히려 그가 들고 있던 칼을 빼앗아 버렸다.
오랫동안 복종 받는데 익숙해 있던 장위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진(秦)제국의 권위를 빌어 오광을 억눌러 보려 했다.
“이놈, 네가 감히…”
한껏 소리를 높여 오광을 꾸짖으려 하는데 칼빛이 번쩍하더니 장위의 목이 떨어졌다. 그때 멀찌감치서 보고 있던 진승이 다가와 오광에게 말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먼저 사람들부터 모으게. 여기 있는 사람들부터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겠네.”
그 말에 오광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시켜 수졸들을 모두 불러 모으게 했다. 오광이 진나라 관리를 죽인데다가, 이미 그들 사이에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진승이 함께 있다고 하니 수졸들은 부르지 않아도 절로 그리로 모여들었다. 기다리고 있던 진승이 나서서 그들을 보고 외쳤다.
“여러분 내가 바로 진승이오. 여러분께 드릴 말씀이 있소!”
그러자 수졸들은 기대와 호기심에 찬 눈길로 진승을 바라보았다. 진승이 갑자기 어조를 바꾸어 간곡하면서도 결연하게 말했다.
“그대들은 큰 비를 만나 어양에 닿아야할 날짜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진나라의 모진 법에 따르면 기한을 어긴 자들은 모두 죽음을 당해 마땅하다. 곧 이대로 가면 그대들은 모두 죽게 되었다는 뜻이다. 용케 용서를 받아 변방의 수자리를 산다 해도 그대들이 살길은 별로 없다. 듣기로 변방은 땅이 험하고 오랑캐들은 흉악해 그곳을 지키다 죽는 사람이 열에 일고여덟이라 한다. 장사(壯士)가 죽지 않고 살아날 수 있다면 모르거니와, 만일 죽어야 한다면 반드시 세상에 큰 이름을 남기는 일에 목숨을 바쳐야 한다. 이제 그대들은 나를 따라 진나라를 둘러엎고 새 세상을 열어보지 않겠는가? 왕후장상(王侯將相)이 어디 씨가 따로 있는 것이라더냐!”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느냐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라는 말은 반드시 진승이 지은 말도 아니었다. 진나라의 폭정이 벌써 여러 해 거듭되면서 불평가나 야심가들 사이에서 은밀히 떠돌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날 진승이 여럿 앞에서 소리 높여 외치자 그 말은 우레소리처럼 사람들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삼가 크신 명을 받들겠습니다.”
수졸들이 한결같이 진승과 오광 앞에 엎드리며 그렇게 다짐했다. 진승과 오광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의 충성을 강요할 수 있는 권위까지 조작했다. 진작부터 짜놓은 대로 이번에는 오광이 나서 여럿을 보고 소리쳤다.
“여기 이 진승이란 분은 실은 부소(扶蘇) 태자님이시오. 어질고 재능 있는 분이었으나 일찍이 바른 말로 시황제에게 간언을 드리다가 미움을 받아 쫓겨나셨소. 하지만 시황제는 죽기 전에 그래도 맏이 되시는 여기 이 부소 태자님께 제위(帝位)를 물려주었다 하오. 그런데 지금 이세 황제가 된 영호해(嬴胡亥)가 대신들과 짜고 유조(遺詔)를 위조해 제위를 훔치는 바람에 이렇게 숨어살지 않으면 안 되게 되고 말았소! 또 여기 이 몸도 참된 이름은 항연(項燕)이오. 일찍이 초나라를 위해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육국(六國)을 차례로 쳐부수고 밀려드는 진나라의 세력에 밀려 잠시 몸을 감추고 초나라 복국(復國)을 도모하고 있는 중이외다. 이제 나는 부소 태자를 도와 태자께는 진나라의 제위(帝位)를 찾아주고, 천하는 예전처럼 칠웅(七雄)이 나란히 번창하는 형국으로 이끌려고 하오. 그리되면 우리 초나라도 다시 서게 될 뿐만 아니라, 천하 모두가 각기 자신의 옛 나라를 찾게 될 것이오.”
냉정하게 따져보면 진나라 태자 부소와 그 진나라에 맞서 싸우던 초나라의 장수 항연이 난데없이 한편이 되어 일을 벌이는 게 이상할 수도 있었으나 수졸들은 그대로 믿어주었다. 어쩌면 정말로 믿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믿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만큼 부소와 항연은 당시 백성들에게서 우러름을 받았고, 세상은 그들이 살아있어 바닥부터 뒤집어엎어 주기를 기다릴 만큼 살기가 어려웠다.
진승과 오광을 우두머리로 받든 수졸들은 모두 오른 쪽 어깨를 벗어 한편임을 나타내고 스스로 일컫기를 ‘대초(大楚)’의 군사라 했다. 또 높게 단을 쌓아 충성을 맹서하며 하늘에 제사를 드렸는데, 그때 제물은 바로 오광이 목 벤 장위의 머리였다.
거기서 장군으로 높여진 진승과 도위(都尉)가 된 오광은 먼저 대택향(大澤鄕)의 관아를 들이치는 것으로 자신들의 봉기를 천하에 알리기로 했다. 대택향은 인적이 드문 늪지와 못들 사이의 기름진 땅을 개척해 만든 외진 고을인데다, 그곳을 지키러 나와 있는 진나라 병사들도 많지 않았다. 그러나 병사들은 훈련되어 있었고 병기는 날카로웠다.
이에 비해 진승의 무리는 비록 수졸(戍卒)이라고는 하나, 아직은 훈련도 되어 있지 않고 병기도 지급받지 못했다. 오광이 죽인 장위와 그를 따르는 관병에게서 뺏은 창칼 몇 자루 외에는 변변한 무기조차 없었다. 육국을 쳐 없앤 시황제가 천하의 병기를 모두 함양에 모아 녹인 뒤 동인(銅人)과 농구(農具)를 만들어버린 탓이었다.
하지만 때가 무르익은 것인지 진승을 따르는 무리의 기세는 드높아,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내달았다. 비록 손쉬운 대로 구해 쥔 농구(農具)나 죽창에 몽둥이밖에 없었지만 그런 그들 900명이 한꺼번에 밀고 들자 대택향 관아는 힘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뒤 대택향은 진(秦)제국에 맞서 첫 번째로 봉기(蜂起)가 있었던 땅으로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하지만 진승과 오광은 그 운 좋은 승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그곳을 기반으로 군사를 더 모으고 병장기를 새로이 벼리게 해 다시 이웃 기현(祁縣)으로 쳐들어갔다.
기현만 해도 오래된 고을이라 대택향보다는 뺏기에 힘들어 보였다. 지키는 군사만 해도 현위(縣尉)가 거느린 그 지역 출신의 현군(縣軍)에다 적지 않은 진나라의 수비병까지 나와 있었다.
진승과 오광은 한바탕의 힘든 싸움을 각오했으나, 다행히도 기현 또한 힘들이지 않고 차지 할 수 있었다. 인근 백성들 사이에서 뽑은 현군은 진나라의 폭정에 시달린 끝이라 싸울 뜻이 없었고, 진나라 병사들은 워낙 처음 겪는 농민들의 저항이라 당황하고 혼란되어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이미 한 번 승리를 맛보아 기세가 오를 대로 오른 진승의 무리가 들이치니 당해낼 수 없었다.
대택향에 이어 기현까지 차지하자 봉기의 불길은 한층 거세게 타올랐다. 진승은 부리(符離) 사람 갈영(葛쒚)에게 군사를 나눠주며 기현 동쪽의 고을들을 아우르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오광과 더불어 나머지 장졸을 이끌고 인근의 다른 고을들을 휩쓸었다.
질현(9縣) 찬현(첯縣) 고현(苦縣) 자현 (쨞縣) 초현(춍縣) 등이 차례로 봉기군(蜂起軍)에게 떨어졌다. 진승과 오광은 그렇게 땅을 확장해 가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군사를 모으고 병장기를 늘려갔다. 그리하여 그들이 진(陳)땅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전거(戰車)가 7백대에 기병(騎兵)이 천여 기(騎)요, 보졸(步卒)은 수만 명이 넘었다. ‘과진론(過秦論)’에는 그 기세를 이렇게 요약했다.
‘…(진승이) 한번 병사들 사이에 몸을 던져 수많은 사람들을 굽어보는 그 우두머리가 되자, 피로에 지치고 혼란되어 흐트러진 수졸(戍卒)들을 이끌어, 그 수백 대오의 창끝[矛頭]을 진나라로 돌리게 하였다. 그들은 나무를 베어 병기를 만들었고 죽간(竹竿)을 높이 쳐들어 기치를 삼았는데, 진의 폭정에 시달리던 천하 백성들이 바람에 몰린 구름같이 모여들어 호응하고 떨쳐 일어났다...’
진군(陳郡)은 초나라의 서북에 치우쳐 있지만, 치소(治所)가 있던 진현(陳縣)은 초나라가 마지막으로 도읍을 삼았을 만큼 중원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아주 요긴한 땅이었다. 진승과 오광은 대군을 몰아 진현의 성곽을 에워쌌다. 그것은 진(秦) 조정이 임명한 군수가 적지 않은 정규군 장졸을 거느리고 방어하고 있는 굳건한 성을 훈련 안 된 농민군으로 공격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때의 진나라는 여섯 나라를 쳐 없애 천하를 위압하던 그 진나라가 아니었다. 군수와 현령은 앞을 다투어 달아나고 군사들도 달아나는 수령들을 따라 흩어져 버렸다. 겨우 수승(守丞 · 부군수 정도) 하나가 몇 안 남은 군사를 모아 성을 지킨답시고 초루(성곽의 전망대)위를 불안하게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 사이 갖춘 금 투구 은 갑옷에 공들여 벼린 보검을 찬 진승은 미리 농군을 가장해 들여보낸 첩자들로부터 그같은 진현(陳縣) 성안의 사정을 전해듣자 가슴을 쓸었다. 옛 초나라가 마지막으로 도읍 삼았던 땅이라 한바탕의 악전고투를 각오했으나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을 듯했다. 오히려 그 싸움을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는데 활용하기로 하고, 가장 용감한 체 군사들의 선두에 서서 칼을 빼들고 외쳤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늘은 포악한 진나라를 버리셨다. 비어있는 성과 장상(將相)의 자리는 먼저 차지하는 자의 것이다!”
그러자 역시 번쩍이는 투구와 갑주로 몸을 감싼 오광이 보기에도 무시무시한 큰칼을 휘두르며 달려나가고 다른 봉기군들도 기세가 올라 다투어 밀고 들었다. 얼마간의 군사와 남겨진 현(縣)의 수승(守丞)이 맞선다고 맞서 보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싸움이 시작된 지 한 나절도 안돼 수승은 죽고 남은 군사들은 모두 진승의 무리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날 진승이 얻은 것은 진현의 성곽과 관부(官府)만은 아니었다. 그 동안 진승의 군세는 크게 늘었지만 장수나 모사(謀士) 감은 별로 없었는데, 그곳에서 비로소 쓸만한 인재를 얻게 되었다. 백성들 사이에서는 거의 전설이 되어있던 위나라의 현사(賢士)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제 발로 찾아온 일이 그랬다.
장이는 하남(河南) 대량(大梁) 사람이었다. 젊어서 위(魏) 공자 무기(毋忌·신릉군)를 섬겨 그 빈객이 된 적도 있었으나, 무슨 일인가로 죄를 짓고 쫓겨 일찍부터 멀리 외황(外黃) 땅에서 떠돌았다. 그런데 외황의 한 부잣집에 매우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보잘것없는 남자에게 시집을 갔다가 도망을 쳐서, 한때 아버지의 빈객노릇을 했던 사람에게 몸을 숨겼다. 장이를 잘 알고 있던 그 사람이 옛 은인의 딸에게 권했다.
“내가 장이란 사람을 알고 있소. 반드시 어진 남편을 얻으려면 그를 따르도록 하시오.”
이에 그 여자는 남편과 헤어지고 장이에게로 시집을 갔다. 부잣집 딸을 아내로 맞게된 장이는 이후 자질구레한 세상살이의 근심을 잊어버리고 널리 벗들을 사귀며 다녔는데, 처가에서 후하게 뒤를 봐 주어 천리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위나라에 벼슬하게 되어 외황의 수령(守令)이 되었으며 이름도 더욱 높아졌다.
진여도 대량 사람으로 그는 유가(儒家)의 학술을 좋아하였다. 젊어서 조나라 고경(苦俓) 땅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곳의 부자인 공승씨(公乘氏)가 그를 좋게 보아 딸을 주었다. 고향이 같고 둘 모두 부잣집 사위가 된 게 무슨 인연이 되었는지, 진여는 젊어서부터 장이를 아버지처럼 섬기며 서로를 위해 목이 날아가도 아까워하지 않을 정도로 깊은 교분[문경지교]을 맺었다.
위나라가 망하자 두 사람은 모두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런데 몇 해 뒤 진나라는 그들이 위나라의 명사(名士)라는 소문을 듣고 혹시라도 사람들을 충동질해 딴 짓을 할까 걱정되었다. 장이에게는 천금, 진여에게는 오백 금을 상금으로 걸어 그들을 잡으려했다.
이에 장이와 진여는 이름을 바꾸고 함께 진(陳)땅으로 숨어들어 어떤 작은 마을의 문지기 노릇을 하며 살게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서서 문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돼먹잖은 아전바치 하나가 별 것 아닌 일로 꼬투리를 잡아 진여를 매질했다. 진여가 참지 못해 대들려고 하자 장이가 가만히 진여의 발등을 밟아 말렸다. 그리고 매질이 끝난 뒤 진여를 근처의 뽕나무 아래로 데려가 엄하게 꾸짖었다.
“내 일찍이 공에게 무어라 하였소? 작은 치욕을 참지 못하면 큰일을 그르치는 법이오. 이만 일로 하찮은 아전바치에게 목숨을 내던질 작정이시오?”
진여도 장이의 그같은 말을 옳게 여겼다. 그 뒤로는 더욱 조심하여 있는 듯 없는 듯 숨어살았다. 그리하여 지난 십 년 그 두 사람이 어디에 숨어있는지도 몰랐는데, 이제 홀연히 진승 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진승이 매우 기뻐하며 그들을 맞아들였음은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 때 진승은 삼로(三老·秦, 漢 때의 향관. 지방 敎化를 담당)를 비롯한 진현의 향임(鄕任)들과 지방의 호걸들을 모두 관아에 불러 모아놓고 있었다. 구실은 함께 진현의 앞날을 의논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은 수졸들과 형태를 달리하는 그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권위를 구축하기 위해서였다.
처음 진나라에 반기를 들 때 진승은 진나라 태자 부소(扶蘇)를 오광은 초나라 명장 항연(項燕)을 가장하였다. 아직까지 힘을 지닌 진(秦)제국의 권위에 의지함과 아울러 세월이 지나도 꺼질 줄 모르는 옛 초나라 유민들의 한(恨)에 호소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채 두 달이 지나기도 전에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반진(反秦)의 깃발 아래 몰려들면서, 진승과 오광을 알아보는 사람도 늘어, 이제 더는 그들이 양성(陽城)의 진(陳)아무개와 양하(陽下)의 오(吳)아무개였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생각보다 진의 권위는 약해 부소라는 이름은 큰 힘이 되지 못했고, 항연의 전설도 벌써 십여 년이 지나면서 희미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을 사칭하는 것은 효과도 없는 상징을 유지하기 위해 거짓말로 억지를 부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진승과 오광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꾀가 백성들의 추대라는, 낡았지만 그래도 아직 효과가 있는 권위형성 방식이었다. 그들은 믿고 부리는 졸개들을 몰래 풀어 진(陳)땅의 향신(鄕紳)과 부호(富豪)들을 한편으로는 달래고 한편으로는 위협했다.
“이미 진나라의 천운은 다했소. 당신들은 우리 장군(진승)을 왕으로 추대해 새 세상을 도모하시오. 그리되면 지금 가진 것을 모두 그대로 누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재물이든 땅이든 벼슬이든, 망해 가는 진나라로부터 뺏은 것은 모두 전리품으로 나눠 받게 될 것이오. 하지만 만약 우리 장군께 맞선다면 아무 것도 지켜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살아남기조차 어려울 것이오. 당신들의 재산은 우리의 군비로 몰수되고, 가솔들은 모두 병졸로 끌려갈 것이며, 종당에는 당신들의 목숨조차 천하를 뒤덮은 난군의 손에 넘겨질 것이외다!”
진현의 호걸들 일부는 겁을 먹거나 꾀임에 넘어가고, 일부는 나름의 신선한 기대에 차서 그 말을 받아들였다. 부름을 받고 관아에 모이기 바쁘게 입을 모아 진승에게 권했다.
“장군께서는 몸소 갑옷을 걸치시고 날카로운 칼을 잡으시어 무도한 군사를 무찌르고 포학한 진나라를 쳐 없앴습니다. 이제 옛 도읍이었던 이 땅에 걸터앉으시어 원통하게 망해버린 초나라를 되세우려 하시니, 그 공을 헤아려 볼 때 왕을 일컬음이 실로 마땅합니다. 게다가 아직 천하가 정해지지 않아 하실 일이 많으니,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제후들이 엇나가지 않게 살피기 위해서라도 장군께서 왕이 되셔야 합니다. 바라건대 부디 초나라 왕위에 오르시어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해 주십시오.”
그러자 진승은 겸손한 척 대답을 미루고 안으로 들어와 장이와 진여에게 가만히 물었다.
“지금 저들이 내게 초나라 왕이 되라는데 선생들은 어떻게 보시오?”
“저 진나라는 무도하여 남의 나라를 멸망시키고, 사직(社稷)을 없애버렸으며, 후사를 끊어놓았습니다. 잦은 싸움으로 백성들을 피폐하게 하였으며, 그 재물을 모두 긁어갔습니다. 이러한 때 장군께서는 두 눈을 부릅뜨고 담력을 크게 내시어 만 번 죽을지언정 구차히 살기를 바라지 않겠다는 결의로 잔악한 무리를 쳐 없앴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바야흐로 진(陳) 땅에 오셨는데, 여기서 왕위에 오르신다면 이는 사사로운 욕심을 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바라건대 장군께서는 왕위에 오르시는 것을 미루시고, 빨리 군사를 몰아 서쪽으로 가신 뒤에 사람을 풀어 옛 육국(六國)의 적통(嫡統)으로 뒤를 잇게 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장군에게는 한편이 늘어나고, 진나라에게는 적이 불어나게 될 것입니다. 적이 많아지면 힘이 분산되고, 한편이 많으면 군세는 강해지는 법입니다. 들에서는 싸우는 병사가 없고, 성에는 버티고 지키는 자가 없게 되면 저 포악한 진나라를 쳐 없애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진나라를 쳐 없애신 뒤에는 그 도읍 함양에 웅거하시어 천하의 제후들을 호령하십시오. 제후들은 모두 한번 망했다가 장군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게 된 이들이니, 덕으로서 그들을 복종시킨다면 제왕(帝王)의 대업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만 진(陳)땅에서 왕이 되신다면 이는 천하를 다시 조각나게 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실로 두렵습니다.”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그렇게 말렸다. 그러나 이미 먹은 마음이 있는 진승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더니 진현의 향관과 토호들의 권유에 못이긴 척 왕위에 오르고 말았다.
진승은 새 나라 이름을 ‘장초(張楚)’라 하고, 자신을 대초왕(大楚王)이라 부르게 했다. 바로 ‘초(楚)’를 나라이름으로 쓰지 못한 까닭은 아직 그 옛 왕족과 유신들이 많이 있어 혈통에 바탕한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까 꺼려서인 듯하다.
진승이 한낱 수졸(戍卒)에서 몸을 일으켜 여러 고을을 자리 말듯 휩쓸고 마침내 진(陳)땅에서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은 살별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자 마른 풀밭에 불길 번지듯 사방으로 반란의 불길이 번져갔다. 진나라 관리도 겁을 먹고, 그 장수도 달아나며, 그 군대도 싸움에 질 때가 있다는 것이 알려지자, 참고 있던 백성들이 일시에 들고일어났다. 그리하여 군수나 현령을 목 베고 그 군사를 쫓아버린 뒤 스스로 진승을 찾아와 그 밑에 들기를 빌었다.
진승은 마치 그런 변화를 미리 헤아리고 있었다는 듯이나 그들을 흡수하여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갔다. 뿐만 아니라 진나라와 천하를 다툴 세력으로 그들을 조직할 줄도 알았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진승을 열전(列傳)에 넣지 않고 세가(世家)에 넣어 육국(六國)의 왕들이나 제후들과 같이 대접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와 같은 왕자(王者)의 자질을 높이 산 까닭일 것이다.
진승은 먼저 오광을 가왕(假王·여기서는 代理王의 뜻)에 임명하여 여러 장수와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형양(滎陽)을 치게 했다. 또 진현 사람 무신(武臣)에게는 장이(張耳), 진여(陳餘)를 딸려 북으로 옛 조나라 땅을 공략하게 하고, 여음(汝陰) 사람 등종(鄧宗)에게도 군사를 나눠주어 남쪽 구강군(九江郡)으로 밀고 들게 했다. 일찍이 기현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게 한 갈영(葛쒚)의 군사까지 넣으면 동서남북으로 장수를 보내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셈이었다.
자신이 보낸 장수와 군대가 진의 영토를 사방으로 뒤엎고 있는 사이 진승은 진현(陳縣)을 도읍으로 삼고 그곳에 눌러 앉아 왕 노릇에 맛을 들여갔다. 처음에는 불타다 남은 옛 초나라 궁궐을 고쳐 거처로 쓰다가 곧 크고 으리으리한 부호의 집을 뺏고 급하게 전각(殿閣) 몇 채를 달아내 궁궐로 삼았다. 하지만 그 호사롭기는 옛 육국의 어떤 궁궐에 못지않았다.
젊어서 함께 머슴살이를 했던 옛 친구 하나가 진승이 왕이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현으로 찾아갔다. 그가 대궐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문 좀 열어주시오. 나는 진섭(陳涉)을 만나러 왔소!”
웬 초라한 농군하나가 함부로 왕의 성과 자(字)를 부르며 소란을 떨자 궁문령(宮門令·궁문을 지키는 관리)은 괘씸하게 여겨 그를 잡아 가두려 했다. 그제야 놀란 진승의 옛친구는 갖은 말로 변명해 겨우 벌을 면했다. 하지만 궁문령이 진승에게 그 일을 전해주지 않아 자신이 찾아온 걸 알릴 길이 없었다. 몇 날이고 대궐 밖에서 기다리다가 진승이 수레로 궁문을 나서는 걸 보고 그 길을 막으며 소리쳤다.
“어이, 진섭. 날세. 옛친구가 이렇게 찾아왔네.”
무심코 궁궐을 나서던 진승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수레의 휘장을 걷고 내다보았다. 젊었을 적 함께 고생하던 옛 친구가 초라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진승은 수레를 세우게 하고 그를 불렀다. 그리고 소박한 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빈한하던 시절의 친구에게 한번 으스대 보고 싶어서였는지, 그를 수레에 태워 궁궐로 데려갔다.
“정말로 화려하구나. 진섭이 왕이 되니 궁전은 크고 높고 치장은 오묘하구나!”
궁궐로 들어온 진승의 옛 친구는 크고 높은 건물과 으리으리한 치장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진승의 신하들이 보기에는 제 임금을 욕보인다 할 만큼 솔직한 감탄이었다. 하지만 더 큰 화근은 진승이 미천할 때의 이야기를 함부로 떠들어대는 일이었다. 거기다가 임금인 진승 앞에 들고나는 일이며 말투와 행동거지가 방자하기 그지없었다. 보다 못한 진승의 신하 하나가 일러바쳤다.
“저 손님이 우매하고 무지하여 하는 수작마다 허튼 소린데 그나마 눈치 없이 큰소리로 떠들어대니 큰일입니다. 대왕의 크신 위엄이 상할까 실로 걱정입니다.”
그때는 진승도 제법 권력에 맛을 들인 뒤였다. 그러잖아도 옛 친구의 무례와 무지에 적지 아니 마음이 상해 있는데 그런 말을 듣자 더 참지 못했다. 신하가 우기는 대로 옛 친구의 목을 베어 임금의 위엄을 지켰다. 어쩌면 그 일은 한 성실한 야심가가 권력에 도취된 새로운 폭군으로 변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진승이 옛 친구를 죽이자 그날부터 주변에 있던 옛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진승에게 진심으로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은 없어졌다. 그런데 그보다 더 걱정스러운 일이 군사를 이끌고 멀리 나가있는 장수들의 자립(自立)이었다. 그 첫 번째가 조나라를 치러 간 무신(武臣)이 그 땅에 눌러앉아 스스로 왕을 일컫게 된 것인데, 경위는 대강 이러했다.
간곡히 말렸음에도 진승이 기어이 왕위에 오르자 장이와 진여는 크게 실망했다. 진승에게는 더 바랄 것이 없다 여겨 몸을 빼낼 궁리를 하다가 어느 날 가장 충성스러운 체 말했다.
“대왕께서는 양(梁)과 초(楚) 땅의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가서 함곡관을 깨트릴 궁리를 하시느라 하북(河北)을 등한히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천하를 도모하려는 이에게는 기름지고 넓은 하북의 들판이 결코 등한히 해도 좋은 땅이 아닙니다.
신(臣)은 일찍이 조나라를 떠돌아다닌 적이 있어 그곳의 지형과 호걸들을 잘 압니다. 바라건대 기병(奇兵)을 북쪽으로 내시어 조나라의 옛 땅을 거둬들이십시오. 그때는 저희들이 있는 힘을 다해 도와 대왕의 위엄이 북쪽까지 널리 떨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넘어간 진왕(陳王·진승)은 오래 전부터 특히 가깝게 여겨온 진(陳)땅 사람 무신(武臣)을 장군으로 삼고, 소소(邵騷)를 호군(護軍)으로 딸린 뒤 군사 3천을 주어 조나라를 치게 했다. 그때 장이와 진여도 좌우 교위(校尉)가 되어 무신을 따라갔다.
무신이 이끄는 장졸들은 백마(白馬)에서 황하를 건너 조나라 땅으로 들어갔다. 무신은 싸우기에 앞서 장이와 진여를 보내 먼저 그곳의 호걸들을 좋은 말로 달랬다.
“진나라가 어지러운 정치와 모진 형벌로 천하를 잔혹하게 다스리어 백성들을 해쳐온 지 오래 됐습니다. 북쪽으로는 만리장성을 쌓는 수고로움이 있었고, 남쪽에서는 오령(五嶺)을 지키느라 피를 흘려야 했습니다. 안팎으로 난리가 잦아 백성들이 어려운데도 엄중하게 세금을 거두어 군사를 부리는데 쓰니, 재물은 마르고 힘은 다하여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 진왕께서 팔뚝을 걷어 부치시고 천하를 위해 앞장을 서시어, 초나라 땅에서 왕위에 오르시니, 사방 2천리 땅에서 이에 호응하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사람마다 스스로 떨쳐 일어나 저마다 원한을 갚고자 원수를 들이쳐, 현에서는 현령과 현승(縣丞)을 죽이고 군에서는 군수와 군위(郡尉)를 죽였습니다. (진왕께서는) 옛 초나라 땅을 회복하여 진(陳)에서 왕위에 오르신 뒤에는 오광(吳廣)과 주문(周文)으로 하여금 백만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격하여 진나라를 공격하게 하셨습니다.
이같은 때에 공을 세워 제후로 봉함 받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호걸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깊이 생각하시어 일을 꾀해 보십시오. 천하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진나라를 미워한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지금이 바로 그 힘을 빌어 무도한 임금과 벼슬아치들을 벌하고 부모의 원한을 풀어줄 때입니다. 더하여 그 공으로 나라를 얻고 땅을 차지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사내대장부가 해볼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옛 조나라 땅의 많은 호걸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현령과 군수를 죽이고 무신 아래로 모여드니 그 군사만도 몇 만이 되었다. 이에 힘을 얻은 무신은 스스로 무신군(武信君)이라 높인 뒤에 조나라의 성곽들을 들이쳐 여남은 개나 떨어뜨렸다.
무신군의 군대가 동북쪽으로 범양(范陽)을 치려할 무렵이었다. 범양 사람 괴철(蒯徹·이름이 漢武帝의 이름 徹과 같다 하여 史書에는 蒯通으로 나옴)이 죽기로 성을 지키려 하고 있는 현령을 찾아와 말했다.
“공께서 곧 돌아가시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을 드리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공께서는 이 괴철을 얻어 살아나게 되셨으니 또한 경하 드립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현령이 얼떨떨해서 물었다. 괴철이 자리를 잡고 앉아 차분하게 말했다.
“진나라는 법이 모질어 공께서 범양령(范陽令)이 된 뒤 10년 동안 남의 부모를 죽이고 남의 아들을 고아로 만들며, 사람의 목을 베고, 얼굴에 먹을 뜬 일이 한두 번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지만 자정(慈情) 많은 아비나 효성스런 아들이 비수로 공의 뱃가죽을 갈라놓지 못한 것은 또한 진나라의 엄한 법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천하는 크게 어지러워져 진나라의 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못하니, 자정 많은 아비나 효성스런 아들은 저마다 공의 뱃가죽을 갈라 그 이름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어찌 공을 조문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제후들은 진나라를 저버리고, 무신군의 군사도 곧 이곳에 이를 터인즉, 만약 공께서 굳이 이 범양성을 지키려 하신다면 젊은이들은 다투어 공을 죽이고 무신군에게 항복하러 들 것입니다. 그러나 공께서 급히 저를 보내시어 무신군을 만나보게 하신다면, 화를 오히려 복으로 돌릴 수가 있으니 이는 또한 공에게 경하드릴 일이 됩니다.”
그 말에 범양령은 괴철을 무신군에게 보냈다. 괴철이 무신군을 만나보고 말했다.
“장군께서는 전쟁을 벌여 적을 쳐부순 뒤에야 그 땅을 차지하고, 힘써 들이쳐 이기고 나서야 성을 얻으시려 하시니 이는 잘못된 일입니다. 만약 제 계책을 쓰신다면 싸우지 않고 성을 떨어뜨릴 수 있으며, 적을 쳐부수지 않고도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방금도 격문 한 장이면 천리를 평정할 수 있는데, 어떻습니까? 제 계책을 한번 따라 주시겠습니까?”
“그 계책이 무엇인가?”
무신군이 그렇게 묻자 이번에도 괴철이 물 흐르듯 하는 말솜씨로 엮어나갔다.
“지금 범양령은 장졸을 정돈하여 농성을 준비하고 있으나, 실은 겁이 많아 죽음을 두려워하고 욕심이 많아 부귀를 탐내는 자입니다. 그래서 장군께 항복하고 싶어도 앞서 떨어진 열 개의 성에서처럼 진나라 관리라고 해서 죽음을 당할까봐 그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성안의 젊은이들은 그들대로 현령을 죽이고 자신들이 성을 근거로 삼아 장군께 항거하려 합니다. 이제 만약 장군께서 제게 제후의 인장[印]을 내리시어 범양령을 제후에 봉하신다면, 범양령은 기꺼이 성을 들어 장군께 항복할 것이고 젊은이들도 함부로 그를 죽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범양령으로 하여금 화려한 장식을 한 붉은 수레를 타고 연(燕)나라와 조(趙)나라의 국경을 달리게 하시면, 사람들은 항복한 그가 받는 대접을 보고 크게 감격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연나라와 조나라의 성들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격문 한 장으로 천리를 평정한다는 뜻입니다.”
무신군이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할 사람이 아니었다. 괴철에게 제후의 인장을 주어 범양령에게 보내니 범양성은 싸움 한번 없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그 소문이 널리 퍼지자 싸움하지 않고 항복해온 성이 서른 개나 되었다.
무신군의 군사가 옛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邯鄲)에 이르렀을 때였다. 장이와 진여는 함곡관으로 간 주문(周文)이 진나라 군과의 싸움에 져서 쫓겨났다는 소문과 함께 진왕이 간신들에게 넘어가 장수들을 함부로 대한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진왕이 자신들을 장수로 삼지 않고 교위(校尉)로 쓴 것이 새삼 분해 무신군을 쑤석거렸다.
“진왕은 대택에서 봉기한 뒤 진 땅에 이르러 왕위에 올랐는데, 천하 백성들의 바람과는 달리 더는 육국(六國)의 후손들을 찾아 왕으로 세울 것 같지 않습니다. 장군께서는 비록 3천의 군사로 출발하셨으나 지금은 수십 개의 성을 항복 받아 하북에 웅거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진왕처럼 왕위에 오르지 않고는 이곳 조나라를 모두 진압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게다가 듣기에 진왕은 간신배들의 모함을 들어 장수들을 죄 없이 죽인다 하니, 돌아가 그 밑에서 일하려 해도 화를 면하지 못할 듯합니다. 차라리 장군께서 왕위에 오르시어 조나라를 다스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 말이 그럴 듯했다. 이에 무신군은 스스로 조왕(趙王)이 되고, 진여를 대장군 장이를 우승상, 소소를 좌승상으로 삼아 자립하였다.
조나라를 시작으로 진승의 장수거나, 옛 왕실의 후예들에 의해 진시황에게 망한 육국이 줄줄이 되살아났다. 진승의 장수로서 무신을 따라 왔던 한광(韓廣)이 다시 자립하여 연왕(燕王)이 되었고, 적현(狄縣)에 살던 옛 제(齊)왕실의 후손 전담(田y)은 현령을 죽이고 제나라를 세웠다. 진승의 장수 주불(周F)은 옛 위나라 왕족인 영릉군(寧陵君) 구(咎)를 세워 위왕(魏王)으로 삼았으며, 좀 뒤의 일이지만 진승 밑에 든 적이 있는 항량도 초회왕(楚懷王)의 손자 심(心)을 초왕(楚王)으로 세우게 된다. 그렇게 - 처음 어줍잖게 보이던 대택의 회오리는 천하를 휩쓰는 바람으로 커져갔다.
피 튀기는 난전(亂戰)을 헤쳐나간 일행은 다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십리나 달려서야 추격을 벗어날 수 있었다. 뒤쫓는 함성소리가 들리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에 오르자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털썩 털썩 땅바닥에 주저앉으며 가쁜 숨들을 몰아쉬었다. 그 동안 잡고 있던 어린 조카 적(籍 · 항우)의 손목을 놓으며 항량도 한숨을 돌렸다.
(여기까지 빠져 나온 게 도대체 몇이나 될까......)
항량은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어둠 속에 희뜩 희뜩 늘어져 앉은 사람들의 머릿수를 가만히 헤아려 보았다. 자신과 어린 조카를 빼면 겨우 다섯이었다. 번쩍이는 비단 겉옷과 머리띠로 셋째형[項叔]이 있다는 것 이외에는 누구누구가 거기까지 성하게 따라왔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목소리가 귀에 익은 젊은 가동(家싔) 하나가 울먹이며 말했다.
“나으리, 저기.... ”
어둠 속이라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나 사방을 둘러보던 항량은 금세 그가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 하상(河相)에 자리 잡은 항씨(項氏) 일족이 여러 대를 살아온 장원(莊園)쪽이었다. 그곳에 큰 불길이 일어 하늘 한 모퉁이를 사르듯 타오르고 있었다.
“도대체 어떤 놈들이 우리 일을 알고 진군(秦軍)에게 밀고하였을까요?”
다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한스러운 듯 그렇게 말하며 이를 갈았다. 그들의 한 팔이 되어 진나라의 앞잡이들을 죽여 온 젊은 문객(門客)들 중의 하나였다. 셋째형이 격앙된 어조로 받았다.
“오사(吳奢)와 오서(吳胥·오자서) 이래로 대를 이어 초나라 왕가에 원한을 품어온 오가(吳哥)네 떨거지들일 것이다. 연횡책(連橫策)을 앞세워 진나라 앞잡이 노릇을 한지 오래 되었지. 하지만 세상 밑바닥을 구르면서 다진 그들의 세력이 만만치 않아 손을 못 대고 있었는데, 공연히 미루다가 거꾸로 우리가 당한 것 같다.”
듣고 보니 항량도 그들에게 혐의가 갔다. 그러나 다급한 그 자리에서는 아무런 쓸모없는 논의였다. 그보다는 다른 가족들이 어찌되었는지가 더 궁금했다.
“큰 형님[項伯]이 이끄신 쪽은 무사히 빠져 나갔을 런지요?”
항량이 그렇게 나직이 묻자 셋째형은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우리가 이만큼이라도 빠져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적의 주력을 피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진나라 병사들의 주력은 어디 있었겠느냐? 틀림없이 두 분 형님[項伯 項仲]께서는 그들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것이다. 다만 형님들이 이끌고 간 가동과 문객들이 더 많았으니 그게 다소나마 도움이 됐을는지…”
그러더니 문득 비장해진 목소리로 이었다.
“하지만 적의 주력을 헤치고 빠져나갔다 한들 얼마이겠는가. 특히 그 쪽에 맡긴 집안 아녀자들은 모두 죽었을 것이다. 아아, 우리 하상(下相) 항가(項家)도 이리 끝나고 마는가…”
“형님, 그 무슨 약한 말씀이십니까? 항가가 끝나다니요. 여기만 해도 형님과 제가 이렇게 살아있고 또 적아(籍兒)도 있지 않습니까?”
“대를 이어 살던 터전을 잃고 수십 백 명(백여 명) 일족에서 겨우 몇몇이 목숨이나 붙어 떠도는 걸 진정 산다고 할 수 있겠느냐? 아무래도 우리가 계책을 잘못 고른 것 같다. 흩어져 달아나 구차하게 뒷날을 꾀하기보다는 우리 모두 장렬하게 죽어 아버님[項燕]의 크고 높으신 이름이나 지켜드리는 게 옳았다.”
셋째형의 그 같은 말에 항량도 새삼스런 비감에 젖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이른 감정의 사치였다. 갑자기 부근이 수런거리더니 멀지 않은 곳에서 하나둘 횃불이 켜졌다. 횃불은 잠간 동안에 그들 예닐곱이 앉아 있는 언덕을 빙 둘러 에워쌌다. 항량은 놀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횃불을 든 사내들의 입성을 뚜렷이 알아볼 수는 없었으나 적어도 진나라 병사들은 아니었다.
“누구냐? 어떤 놈들이냐?”
긴 창을 잘 쓰는 집안 조카뻘 하나가 창을 짚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아, 너도 살아있었구나…그 때 맞은 편 횃불 앞에 선 몸집 큰 사내가 이죽거리듯 받았다.
“너희들이 그 동안 마소 잡듯 죽여 온 이들의 은혜를 받아온 사람들이다. 앞문과 관도(官道)쪽은 진나라 군사들이 깔렸으니 항가네 장원에서 용케 빠져 나오는 것들이 있다면 이리로 올 수밖에 더 있겠느냐? 풀을 베고 뿌리를 뽑지 않아 뒤탈을 보는 일이 없게 하고자 우리가 여기서 너희를 기다린 지 오래다.”
“진나라의 개들이구나!”
셋째형이 칼을 뽑아들며 차갑게 소리쳤다. 불빛에 보니 온 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난전 속을 힘들여 헤쳐오기는 곁에 있는 가동들과 족당(族黨), 문객(門客)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쳐 주저앉았다가 분분히 일어서는 그들도 자신과 남의 피로 온몸이 시뻘겠다.
“일어나거라!”
어린 조카를 재촉해 일으키며 항량도 땅에 뉘어 놓았던 칼을 집어 들었다. 그때 셋째형이 항량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우리 다섯은 힘을 다해 횃불이 가장 두텁게 모인 곳을 칠 것이다. 우리가 그들을 베어 넘겨 그곳이 갑자기 어두워지거든 너는 적아를 데리고 그리로 빠져나가라. 뒤는 우리에게 맡기고 되도록 멀리 달아나야 한다. 결코 뒤돌아보아서는 아니 된다”
항량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하지만 그 뜻에 따라야 할지, 마다하고 함께 죽어야 할지를 얼른 정하지 못해 우물거리고 있는데 셋째형이 나머지 다섯을 내몰 듯 결연하게 말했다.
“조금 늦었지만 우리는 초나라에서 으뜸가는 무장가(武將家)의 사람답게 죽을 자리를 얻었다. 나와 뜻을 달리하는 자가 있느냐?”
“없습니다. 기꺼이 이 한목숨을 던지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다섯은 마치 자신들의 말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 각자의 병장기를 꼬나들고 가장 횃불이 가장 밝은 쪽으로 바로 치고 들었다. 역시 칼을 빼든 셋째형이 그들을 뒤따라 달려 나가며 항량을 재촉했다.
“어서 나를 따라 오너라. 길이 열리면 바로 적아를 데리고 빠져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렵거든 적아를 버려도 좋다. 너라도 살아 반드시 우리 항씨가(項氏家)를 일으키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이어 초나라를 되살려야 한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항량은 비로소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외쳤다.
(안됩니다. 형님. 죽어도 함께 죽고 살아도 함께 살아야지요. 저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말문이 막혔는지 그 말은 머릿속에서만 맴돌았다. 몸도 굳어버린 듯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어린 조카까지도 잡은 손을 뿌리치고 뛰쳐나가고 있지 않은가. 이래서는 안 된다. 나도 함께 가야 한다. 함께 죽으리라…
“어르신, 어르신…”
누가 그렇게 자신을 부르며 가볍게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항량은 어지럽고 사나운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떠보니 손씨녀(孫氏女)가 웃음기 머금은 눈길로 내려 보고 있었다. 간밤 함께 잠자리에 들었는데, 어느새 일어나 겉옷까지 갖춰 입고 옅은 단장까지 마친 뒤였다.
“나쁜 꿈이라도 꾸셨는지요?”
손씨녀가 비단 수건으로 항량의 이마에 솟은 땀을 닦으며 나직이 물었다. 간밤의 정사(情事) 때문일까, 평소의 그녀답지 않은 다가듦이었다. 평소 같지 않기는 그런 그녀의 스스럼없는 다가듦을 받아들이는 항량의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왼손으로 가만히 비단수건을 밀쳐내기는 해도 그녀를 바라보는 눈길은 그리 엄하지 않았다.
진나라 군사들과 그 앞잡이들에게 집안이 결딴나기 전에는 항량에게도 아내와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맏형에게 맡긴 그들이 끝내 모두 진나라 군사들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뒤로는 다시 아내를 맞지도 않았고 달리 자식을 보지도 못했다. 어떤 이는 항량이 추적을 벗어나기 위한 난전 중에 다쳐 사내구실을 못하게 된 까닭이라 했고, 또 다른 이는 떠돌아다니면서 이따금 어울린 유녀(遊女)들에게서 창병(瘡病)이 옮은 탓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항량 자신은 아내와 자식을 두지 않는 까닭을 달리 말했다.
“이제 와서 자식을 얻어 적아(籍兒)에게 소홀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적아는 셋째형이 목숨을 던져 나를 구해주며 맡긴 조카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하상 항씨 가문의 하나 남은 핏줄이다. 저 아이를 훌륭히 길러 가문을 되일으키는 게 홀로 살아남은 나의 크나큰 소임이다”
홀아비로 늙어 가는 그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면 항량은 늘상 그렇게 대답했다. 근년 들어 죽은 줄 알았던 맏형 항백(項伯)이 겨우 살아남은 몇몇 일족의 소식을 가지고 온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에게는 여전히 이제는 성년이 된 조카 항우만이 항씨가를 이어갈 유일한 혈육이자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의 상속인이었다.
자식을 둘 수 없게 된 것인지, 스스로 두지 않는 것인지는 잘라 말할 수 없지만, 쉰을 넘긴 그때까지도 항량에게는 남성으로서의 욕망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나이도 나이인데다, 그 동안 오중(吳中) 거리에서 나름으로 쌓은 명망이 있어, 이제는 체신 없이 유곽(遊廓)을 드나들 수도 없었다. 그래서 집안에 들인 게 손씨녀였다.
손씨녀는 어지러운 시절을 만나 일찍 남편을 여윈 농가의 아낙이었는데, 몸가짐이 조용하고 자색(姿色)이 있었다. 처음 안채에 들인 구실은 홀로 지내는 항량의 의식(衣食) 수발이었으나 오래잖아 잠자리도 함께 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조금이라도 안방마님 티를 내려들면 항량은 매정하게 발길을 끊고 몇 달이고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날도 항량이 손길을 뿌리치자 손씨녀는 화들짝 놀라듯 물러나 앉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공손한 아랫사람의 몸짓과 말투로 돌아갔다.
“아침상을…차릴까요?”
그 목소리가 이상하게 쓸쓸하고 애처롭게 들렸다. 항량이 다시 평소 같지 않게 따듯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되어 받았다.
“그래라. 네 것도 함께 차려라. 같이 아침을 들고 싶구나.”
하지만 그 별난 느낌이 바로 곧 이어 몰아닥칠 거센 풍운의 예감이라고는 항량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회계(會稽) 군수 은통(殷通)이 보낸 젊은 교위(校尉) 하나가 요란한 말 발굽소리와 함께 항량의 저택으로 달려온 것은 손씨녀와 함께 아침상을 받은 항량이 막 식사를 끝내고 일어서려던 참이었다. 무엇이 그리 급한지 안마당까지 말을 달려 들어온 교위는 가동(家싔)에게 말고삐를 맡기기 바쁘게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허옇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숨을 헐떡이는 게 벌써 예사롭지 않았다.
“이렇게 일찍 왠 일이시오?”
“군수께서 대협(大俠)을 찾으십니다.”
“나를 부르는 일이라면 다리 실한 군졸 하나로도 넉넉할 것이오. 그런데 무슨 큰 일이 있기에 교위께서 몸소 달려오셨소?”
“저는 모릅니다. 가서 군수님을 뵙고 직접 듣도록 하십시오.”
항량이 거듭 물어도 젊은 교위는 굳어있는 얼굴로 짧고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주무(朱武)라고 하는 그 교위는 하남 영양(潁陽)에서 나고 자랐으나 어른이 되어서는 회계군에 와서 벼슬을 살고 있었다. 그는 항량의 사람이라고까지는 할 수는 없어도, 항량이 군아(郡衙)를 드나들면서 공들여 사귀어 둔 군리(群吏)들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도 알던 정 보던 정 없이 나오자 항량은 더욱 심상치 않게 느껴졌다. 슬며시 그에게 평소의 친분을 상기시키며 다시 물었다.
“아니, 주(朱)교위. 우리 사이에 못할 말이 무에 있소? 무슨 일인지 말해 보시오. 그래도 대강은 알아야 나도 알맞은 채비를 할 수 있을 것 아니오?”
그제야 젊은 교위도 항량이 누구인지를 알았다는 듯 조금 풀린 얼굴이 되어 하소연하듯 말했다.
“말도 마십쇼. 요즘 저희 군수님은 표정 없기로 이름난 예전의 그분이 아닙니다. 아침저녁 변덕이 죽 끓듯 하시지요. 어제 그제는 본부 병마를 모두 풀어 군계(郡界)를 철통같이 지키라 하더니, 오늘은 또 모조리 오중(吳中 · 吳縣. 회계군의 治所로 지금의 蘇州市)으로 불러들이란 분부십니다. 뿐입니까, 속현(屬縣)마다 사람을 보내 병마를 긁어모으는 한편 큰 농성전(籠城戰)이라도 치를 듯 곡식을 거둬들이고 있습니다. 대택(大澤)의 반도(叛徒)들이 밀고 든다는 기별이 있는 것도 아니요, 그것들을 쳐 없애라고 조정의 칙사가 온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대협을 부르는 일도 그렇습니다. 마치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어서 모셔 오라고 성화이십니다만 무엇 때문인지는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항량도 조금은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이 의뭉스런 물건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구나. 저도 가만히 앉아서 한없이 기다릴 수는 없었을 테지. 그런데 - 무얼까? 이토록 급하게 나를 불러 무엇을 하려는 걸까?)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런 내색 없이 받았다.
“알겠소. 내 곧 뒤따라 갈 테니 먼저 부중(府中)으로 돌아가 그렇게 일러주시오.”
“아니 됩니다. 기다리더라도 대협을 모시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주교위가 다시 굳은 얼굴이 되어 그렇게 말했다. 무엇 때문인가 은통에게 적지 아니 시달리다 온 것 같았다.
“그럼 잠깐 옷을 갈아입고 올 테니 그때가지만 뜰에서 기다려 주시오.”
항량은 그렇게 말하고 안채로 들어가며 가까이 있던 노복에게 지나가는 말투로 시켰다.
“말에 안장을 얹고 나갈 채비를 하라. 그리고 작은 주인에게 얼른 내방으로 들라 이르라.”
항량이 내실로 들어가자 손씨녀가 뒤따라 와서 옷걸이며 벽장에 갈무리해 두었던 나들이옷을 꺼내 왔다. 간밤 잠자리를 함께 한데다 조금 전의 아침상까지 함께 받은 터라 다시 마음이 풀어진 탓일까, 곁에서 옷 입는 것을 거들며 그녀가 가만히 물었다.
“무슨 일일까요? 무슨 일로 사람을 이리 급히 찾는지요.....”
하지만 그때 이미 항량은 골똘한 헤아림에 젖어 그녀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항량이 만일 알아들었다면 이번에는 틀림없이 엄한 눈길로 꾸짖음을 대신했을 물음이었다.
진승과 오광이 대택향(大澤鄕)에서 군사를 일으킨 것은 벌써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처음 그 소식이 오중(吳中)에 전해졌을 때만 해도 항량은 좀 어리둥절했다.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 태자 부소(扶蘇)와 초나라의 명장 항연(項燕)을 가장했기 때문이었다. 진나라 태자가 진나라를 향해 칼을 뽑았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가 진나라에 몰려 자결한 아버지 항연과 손을 잡고 일어났다는 데는 더욱 어이가 없었다.
항연이 실은 죽은 게 아니라 숨어살면서 초나라를 되살리려하고 있다는 풍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막을 잘 모르는 백성들 사이의 일이었고, 바로 그 항연의 아들 되는 항량에게는 그저 가슴 아픈 헛소문일 뿐이었다. 그런데 한을 품고 자결한 아버지가 원수인 진나라의 태자와 어울려 군사를 일으켰다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진상이 밝혀져 진승과 오광이 누군지가 드러난 뒤에도 항량이 느낀 황당함은 줄어들지 않았다. 진의 세상을 뒤엎고 초나라[장초]를 되일으킨 것이 초나라의 왕족이나 명문거족에서 난 지사(志士)가 아니라, 양성(陽城)과 양하(陽夏)의 두 무지렁뱅이 농군이라는 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훈련도 받지 못하고 무기도 없는 변방의 수졸(戍卒) 몇백을 이끌고 패배를 모르던 진나라의 관군들을 잇따라 격파하고 있다는 소문은 다만 오래 억압받고 살아온 백성들이 진나라에 앙갚음하듯 꾸며댄 이야기로만 들렸다.
그런데도 진승과 오광은 승승장구하고, 옛 육국 왕실의 혈통과 그 명문가의 후손들은 다투어 진승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찾아 들었다. 특히 제나라의 공자 전담(田y)이나 위나라의 공자 구(咎)까지도 그 밑에 들어가 왕위에 올랐다는 소문은 항량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래 쫓기면서 세상을 떠돌아 그 변화의 기미에 밝은 맏형 항백(項伯)을 다시 하비(下뾄)로 보내어 그곳에서 머지않은 진(陳)땅의 형세를 알아보게 한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마음에 짚이는 일도 없지 않았다.
(어쩌면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바로 그 ‘때’일지도 모른다. 왕후장상이 씨가 따로 없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영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때를 잘 탄 사람이 영웅이고, 진승과 오광은 그런 뜻에서 참된 영웅일수도 있다.....)
그러자 항량은 갑자기 조급해졌다. 그 동안 오중 땅에 숨어 사람들을 사귀고, 그들을 엮어 은밀히 세력으로 키워온 것은 바로 그러한 때를 기다림이 아니었던가. 그때가 오면 떨쳐 일어나 망해버린 나라와 집안을 되살리리라는 비원(悲願)이 바로 그의 삶에 긴장과 활력을 지탱시켜주는 힘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항량이 그 동안 기른 세력을 끌어 모아 몸을 일으켜보려 하면 천근의 무게로 항량을 짓누르는 게 있었다. 바로 회계수(會稽守) 은통의 존재였다.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에 맞서 군사를 일으킨 뒤로 천하 서른여섯 군(郡)의 태반은 봉기(蜂起)의 회오리에 휩싸였다. 관동(關東)에서도 하남(河南)과 강동(江東) 일대의 옛 진(晋)초(楚) 땅의 군현(郡縣)이 특히 심했다. 왕족이나 명문가의 후예와 백성들이 저마다 들고일어나 군수와 현령을 죽이고 진승과 오광의 거병(擧兵)에 호응하였다.
초나라를 없애고 만든 세 군 가운데 하나인 회계군(會稽郡)도 위치로 보아서는 평온할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군수 은통은 산악 같은 침착과 의연함으로 벌써 두 달이 넘도록 회계군을 봉기의 회오리에서 지켜오고 있었다. 그 비결은 군기(軍紀)와 민심의 장악이었다.
평소 은통은 엄격하면서도 세심하게 군사(軍事)를 보살폈다. 그 덕분에 진나라 조정이 보낸 수비대뿐만 아니라 지역 현군(縣軍)까지도 흔들림 없이 은통의 명에 따랐다. 거기다가 군정(郡政)에서 항량 같은 그 지방의 명망가를 활용해온 것도 민심을 잡는데 큰 힘이 되었다. 그런 중재자를 내세워 진나라의 폭정을 동의에 바탕한 다스림처럼 얼버무림으로써 그만큼 백성들의 원한을 적게 산 까닭이었다.
그런 은통이 진승과 오광에게서 비롯된 회오리에 대응하는 방식은 부동(不動)의 원리였다. 일이란 어떻게든 풀려가기 마련이다, 나는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마지막 결말의 순간을 기다리겠다, 그때 대세를 올라타 가장 작은 힘을 들여 가장 큰 것을 얻겠다 - 마치 그렇게 말하는 듯 꼼짝 않고 군아(郡衙)에 틀어박혀 세상 돌아가는 것을 관망하고만 있었다.
그렇게 되자 항량은 아무리 다급해도 움직여 볼 수가 없었다. 섣불리 일을 벌였다가 은통이 그때까지 전혀 손상 받지 않고 유지해온 관병(官兵)으로 거세게 반격이라도 해오는 날이면, 그 뒤가 어떻게 될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런데 이제 네가 움직인단 말이지. 드디어 어느 쪽이 쓰러지고 어느 쪽이 남을지를 알게 되었단 말이지….)
항량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날따라 유달리 정성 들여 갖춰 입은 겉옷에 마지막 띠를 둘렀다. 거창하게 겉옷까지 갖춘 까닭은 속옷 안에 걸친 엄심갑(掩心甲·가슴을 보호하는 철갑)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그때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우렁우렁한 항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아버님, 저를 찾으셨습니까?”
“그렇다. 나와 함께 군아에 가봐야겠다. 은통이 찾고 있다는 구나.”
그러면서 뒤를 돌아보니 조카의 눈이 화경(火鏡)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언가 격앙되거나 고양(高揚)되었을 때 내뿜는 눈빛이었다. 항량은 문득 그 전해 봄 절강(浙江)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렸다.
그해 순수(巡狩)에서 회계산을 돌아본 시황제가 절강을 건널 때였다. 항량과 항우도 그런 시황제의 화려한 순수 행렬을 보기 위해 강가로 나갔다. 엄청나게 큰 용선(龍船)이 온량거(쟆>車)를 싣기 위해 물가에 닿자 시황제가 잠시 온량거의 창문을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이미 병색이 완연했으나, 아직도 그 얼굴에는 바라보는 사람을 위압하는 데가 있었다.
그런데 곁에 있던 항우에게는 느낌이 달랐던 듯했다. 꼭 지금과 같은 눈빛으로 시황제를 쏘아보다가 옆 사람이 다 알아들을 만큼 큰 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것(또는 저 사람의 자리)이라면 빼앗아 대신 차지할 만하구나(彼可取而代也)!“
그때 항량은 놀라 그의 입을 막으며 나무랐다.
“함부로 지껄이지 말라. 자칫하면 삼족(三族)이 모조리 죽게된다!”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는 사람이 없어 별일이 없었지만, 그날은 어지간한 항량도 식은땀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은 무슨 일인가. 무슨 일로 저 아이의 눈빛이 저렇게 타오르는가......)
그때 다시 항우가 두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그런데 작은 아버님. 도대체 작은 아버님께서는 언제까지나 그 하찮은 작자를 상전처럼 모실 작정이십니까?”
“때가 무르익을 때까지. 하지만 - 어쩌면 그게 바로 오늘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와 함께 같이 가자.”
항량이 그래놓고 다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덧붙여 말했다.
“너도 옷 안에 엄심갑(掩心甲)을 걸치고 보검을 차도록 하여라. 그리고 이제부터는 언제든 내가 부르면 올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그러자 항우의 두 눈에서 쏟아지던 불길이 조금 잦아들었다. 대신 갑자기 신명이 솟는 듯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보검이라면 주가(朱哥)놈이 말을 달려올 때부터 차고 나왔습니다. 엄심갑은 옷 안에 걸치기 구차할 뿐더러 힘을 쓰는데 되레 걸리적거립니다. 이대로 가도록 하지요. 그럼 먼저 나가 말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방을 나가는 항우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몸놀림이 어둡고 불만에 찬 표정으로 말이 없던 근래의 그와는 사뭇 달랐다. 그걸로 보아 그 동안 항우는 계부(季父) 항량이 세상과 은통을 살피며 하염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걸 답답하고 불만스럽게 여겨왔음에 틀림없었다.
항량이 군아(郡衙)에 이르니 은통은 호젓한 객청(客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때아니게 갑주를 갖춰 입어 작달막한 키에도 제법 위의(威儀)가 넘쳐흘렀다.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언제나 표정이 없던 그 얼굴에도 어딘가 상기된 기색이 느껴졌다.
“어서 오시오. 항대협.”
그렇게 항량을 맞는 말투도 전과는 달랐다. 언제나 항씨 아우님이라고 부르며 친한 척 너스레부터 떨던 그였다. 그 변화에 항량이 자신도 모르게 긴장해 물었다.
“이렇게 일찍 무슨 일로 저를 부르셨습니까?”
그러자 은통은 지긋이 눈을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뜸을 들이기보다는 평소의 희로(喜怒)를 짐작하기 어려운 표정을 되살려 보려는 듯했다. 하지만 말하려는 것이 워낙 엄청나 그런지 끝내 상기된 기색을 지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아우처럼 믿고 의지해온 항대협이니 둘러말할 것 없이 바로 털어놓겠소. 이제 강서(江西·양자강 이북) 땅은 모두가 반란을 꾀하고 있으니, 이는 하늘이 진나라를 멸망케 하려는 때가 온 것이라 보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오. 듣기로, 먼저 손을 쓰면 남을 제압할 수 있고[선발제인], 늦으면 남에게 제압을 당한다 하였소[後發制於人]. 이에 나도 더 늦기 전에 이 회계(會稽)를 근거로 군사를 일으켜 저들과 함께 천하를 다투어 볼까 하오. 그때 대협과 환초(桓楚)를 장수로 앞세우고자 하는데, 대협의 뜻은 어떠시오?”
은통이 그렇게 바로 속을 털어놓자 항량은 잠시 당황했다.
(이 의뭉스런 작자가 꼼짝 않고 부중(府中)에 들어앉아 있을 때부터 뭔가 심상찮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느낌은 들었다. 그러나 법을 으뜸으로 여기는 진나라 관리로서 그토록 엄청난 꿈을 꾸고 있다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엄밀하고 위압적이던 진 제국의 법망(法網)도 별 것 아니었구나.....)
하지만 오래 빠져 있을 감회는 못되었다. 항량에게 당장 급한 것은 그와 같이 돌변한 형세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일이었다. 다행히도 은통의 속셈을 뚜렷이 알게 되자 항량도 이내 그 대응을 결정할 수 있었다.
“감히 청할 수는 없는 일이오나 참으로 바라던 일입니다. 공께서 불러 써 주신다면 기꺼이 앞장서 싸우겠습니다.”
항량은 먼저 그렇게 말해 은통의 믿음을 산 다음 슬며시 덧붙였다.
“하오나 환초의 일이......“
“환초가 어찌되었다는 것인가?”
“환초가 오중(吳中)에서 가장 뛰어난 장수감이기는 하나 얼마 전 죄를 짓고 택중(澤中·대택지방)으로 달아나 그가 있는 곳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제 조카 적(籍)만이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항적은 어떻게 환초가 있는 곳을 아는가?”
“환초의 수하 중에 용저(龍且)라는 호걸이 있는데 조카가 그와 매우 가깝습니다. 아마도 그 용저를 통해 환초가 있는 곳을 알게된 듯합니다. 바라건대 그 아이를 불러 환초를 데려 오라고 명하십시오.”
그러자 은통이 의심쩍어 하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그렇다면 항적을 불러 오라”
“그 아이도 저와 함께 여기 왔으나 대인(大人)의 부르심이 없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가서 데려 오겠습니다.”
항량이 그렇게 대답하고 객청을 나와 항우를 찾았다. 그 새 항량이 있는 곳을 알아낸 항우는 객청 밖 머지않은 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항량이 그런 조카를 불러 은통에게로 데려 가면서 짧게 말했다.
“드디어 때가 된 것 같다. 문밖에서 기다리다가 부르거든 들어오너라. 내가 신호하면 바로 은통의 목을 베어 버려야 한다.”
항우가 오래된 당부를 다시 한 번 다짐받은 사람처럼 까닭 한번 물어보는 법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객청으로 돌아간 항량은 항우를 문 밖에 세워두고 먼저 안으로 들어가 은통에게 말했다.
“제 조카 항적을 찾아왔습니다. 불러 보시겠습니까?”
“들라 이르시오”
은통이 느긋한 목소리로 그렇게 일렀다. 이에 항량이 소리쳐 항우를 부르자 기다리고 있던 항우가 성큼성큼 객청 안으로 들어왔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은통은 항우의 잘 생긴 얼굴과 우람한 체구에 반해 입이 헤벌어졌다. 제 딴에는 좋은 장수감을 하나 더 얻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은통의 헤벌어진 입이 다물어지기도 전에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항량이 갑자기 항우를 돌아보며 나직하게 외쳤다.
“때가 되었다. 손을 써라 [可行矣]! ”
그 말에 칼을 뽑은 항우가 한 마리 사납고 날랜 범처럼 은통을 덮쳤다. 번쩍 칼빛이 스치는가 싶더니 비명조차 제대로 질러보지 못한 은통의 작달막한 몸이 목을 잃고 객청 바닥에 쓰러졌다. 은통은 ‘선수(先手)를 치면 남을 제압하고, 선수를 놓치면 남에게 제압 당한다’ 는 말의 실례를 자신의 죽음으로 잘 보여준 셈이었다.
“인뚱이와 끈[印綬]은 어디 있느냐? 그 목을 간직하려거든 어서 가서 찾아오너라!”
항우가 은통을 죽이는 걸 보고 항량도 칼을 빼어 마침 그곳에 있던 늙은 주리(主吏·工曹吏)의 목을 겨누며 소리쳤다. 반나마 얼이 빠진 늙은 주리가 벌벌 떨며 옆방으로 가서 긴 베 끈에 묶인 군수의 관인(官印)을 찾아와 바쳤다. 그걸 받아 허리에 찬 항량은 객청 바닥을 뒹구는 은통의 머리를 찾아들고 소리 높이 외쳤다.
“놀라지 말라. 은통이 반역을 꾀하므로 우리가 죽였다.”
은통이 자리를 은밀하게 한답시고 사람을 물리쳐 객청 안에는 늙은 주리를 비롯한 문관(文官) 두엇과 시중드는 노복(奴僕) 몇이 고작이었다. 아무도 항우와 항량에게 맞서볼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마룻바닥에 엎드려 목숨만 빌었다. 하지만 부근에 있던 무관(武官)이나 파수를 서던 군사들은 달랐다. 사마(司馬) 하나가 변괴를 알고 관아를 지키던 군졸들을 끌어 모아 객청으로 달려왔다.
“이놈들. 은통은 이미 죽었고, 회계군의 인수(印綬)는 여기 내 손에 있다. 썩 물러나 명을 받들지 못하겠느냐?”
항량이 은통의 머리와 인수를 번갈아 흔들어 보이며 겁을 주었으나 그들은 객청 안의 문관들처럼 쉽게 무릎을 꿇으려 하지 않았다. 항우가 그들을 노려보다가 훌쩍 몸을 날려 그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네놈들은 아무래도 관을 보아야 사람이 죽은 줄을 알겠구나!”
그런 외침과 함께 허연 검기(劍氣)가 그들 가운데를 휩쓸고 지나가는가 싶더니 피와 살이 튀고 처절한 비명소리가 뒤를 이었다. 숨 한번 길게 내쉬는 사이에 그 겁 없는 사마와 함께 객청 안으로 뛰어든 수십 명 군졸의 태반이 쓰러졌다.
그제야 놀란 군졸들이 저마다 잡고 있던 창칼을 내팽개치고 열린 문으로 달아났다. 항우가 그들을 뒤쫓으며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놈들 어디로 달아나느냐? 어서 항복하지 못할까!”
그 소리에 놀란 군졸들 몇이 그대로 창칼을 내던지고 마당에 넙죽 엎드렸다. 그러나 나머지는 다시 패를 지어 몰려드는 저희 편을 보고 얼른 달려가 그들 사이에 숨었다.
이래저래 관아 마당에 모인 현군(縣軍)이 어느새 백 명이 훨씬 넘게 되자 항량은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항우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이 없었다. 양떼 속에 뛰어드는 호랑이처럼 그들 속으로 뛰어들어 무인지경 가듯하며 베고 찔렀다.
다시 수십 명의 죽고 그보다 더 많은 군졸들이 다쳐 관아마당을 즐비하게 덮었다. 기록에는 그날 항우가 쳐 죽인 사람만도 백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하지만 싸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갑자기 새로운 함성과 함께 또 한패의 군사들이 나타났다. 이번에 군사들을 이끌고 온 것은 바로 그 아침에 항량을 부르러 왔던 주(朱)교위였다.
“주무(朱武). 네 감히 나를 대적하겠느냐?”
고막을 찢어놓을 듯한 그 한마디로 주교위와 군졸들의 얼을 한꺼번에 빼놓은 항우가 문득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무언가 단번에 그들 모두를 위압해버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 같았다. 마침 객청 축대 아래에는 세 발 달린 커다란 청동 솥[(鼎]이 하나 놓여 있었다. 거의가 나무로 된 관아 건물을 화마(火魔)로부터 지키려고 물을 담아두는 것인데, 솥 무게만도 3백 근이 훨씬 넘었다.
무슨 생각에선지 항우가 한 발을 들어 그 솥을 걷어찼다. 그 큰솥이 빈 대접 쓰러지듯 핑그르르 돌며 쓰러지고 담겨있던 물이 쏟아졌다. 항우가 들고 있던 장검을 땅에 꽂고 두 손으로 쓰러진 솥의 두 다리를 잡았다. 그러더니 장정 대여섯은 붙어야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그 큰솥을 어깨위로 번쩍 들어 올리며 사나운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이놈들! 이래도 항복하지 못하겠느냐?”
실로 무시무시한 힘이요 기세였다. 거기다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고함에 이어 불을 내뿜듯 한 눈빛이 쏘아 오니 마음 약한 군졸들은 제김에 놀라 창칼을 떨어뜨리며 마당에 폭삭폭삭 주저앉았다. 그때까지는 한 고을을 지키는 교위(校尉)답게 군졸들을 모아 달려온 주무(朱武)도 그 같은 항우를 보고는 얼어붙은 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때 항우를 뒤따라 객청에서 달려 나온 항량이 다시 은통의 목과 인수를 번갈아 쳐들어 보이며 달래는 투로 말했다.
“주교위, 대세는 이미 정해졌소. 더는 천명을 거슬러 애꿎은 사람들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그러자 주무도 퍼뜩 정신이 들었는지 빼들었던 황급히 칼을 칼집에 꽂으며 소리쳤다.
“모두 창칼을 거두어라! 먼저 항대협의 말씀부터 들어보자.”
그 말에 그때까지 창칼을 움켜잡고 버티던 군졸들까지도 모두 창칼을 눕히고 땅바닥에 엎드렸다. 항우가 그제야 쳐들고 있던 솥을 내려놓고 발 앞에 꽂아두었던 장검을 뽑아들었다. 숨결 한번 흐트러짐이 없이 항량 옆에 가 서는 것이, 그야말로 힘은 산이라도 뽑을 듯[力拔山]하고, 기세는 세상을 뒤덮는 듯[氣蓋世]했다.
“여러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동헌[政廳]으로 갑시다. 그리로 가서 우리 회계군의 앞일을 함께 의논합시다.”
항량이 다시 목소리를 높여 외쳤다. 그 사이 제법 시간이 흘러 객청 안팎에서의 소동이 관아(官衙) 안에 널리 알려졌다. 소문을 듣고 달려온 군리(郡吏)들이 저마다 기둥 뒤에 숨어 일이 되어 가는 꼴을 지켜보다가, 항량의 그 같은 외침에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어 동헌으로 몰려들었다. 그들 중에서도 세력 있는 몇몇은 그대로 항량의 사람이라 해도 좋을 만큼 진작부터 항량과 깊이 사귀어온 이들이었다.
항우와 주무를 좌우에 거느리고 동헌으로 들어간 항량은 제 편을 들어줄 군리들이 대강 다 모였다 싶자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따라 뛴다고, 은통은 제 욕심 하나만으로 망령되이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소. 나와 환초를 장수로 세우고 우리 회계군을 밑천 삼아 천하를 다투려 했으나 그게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이겠소? 천하는 공기(公器)이니 사사로운 욕심으로 다툴 수 있는 게 아니오. 하물며 저 무도한 진나라가 한줌의 군사들과 함께 우리를 쥐어짜려 보낸 군수 나부랭이에게 가당키나 하겠소? 자칫하면 우리 회계군은 여기저기서 몰려든 난군(亂軍)들의 싸움터가 되거나, 기운을 차린 진나라가 보낸 대군에게 쑥밭이 되고 말 것이오. 이에 나는 여기 있는 조카 우(羽)와 더불어 은통을 죽이고 회계군의 인수(印綬)를 거두었소. 하지만 진왕(陳王·진승)이 일으킨 바람은 거세고, 영웅들은 곳곳에서 그 바람을 타고 구름처럼 일고 있소. 나무가 가만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멈추지 않으니 어찌 하겠소? 머지않아 우리 회계군도 그 바람에 휩쓸릴 터, 무언가 이 땅을 지킬 방도를 찾지 않으면 안 되겠소. 모두 가슴을 터놓고 의논해 봅시다. 자, 이제 우리는 어찌하면 좋겠소?”
“대협께서 회계군을 맡으시어 이 땅과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군리(郡吏)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내심 기다리던 말이었으나 항량은 손을 저으며 사양했다.
“그리되면 내가 은통을 죽인 게 또한 사사로운 욕심이 되고 말지 않겠소? 그리할 수는 없소이다. 달리 덕 있는 이를 뽑아 군수로 세우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인수까지 벗어 놓았다. 하지만 눈치 빠르기로 이름난 게 고을 구실아치[吏屬]와 아전바치[胥吏]들이라, 이미 대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훤히들 꿰고 있었다. 거기다가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항우가 불길이 뚝뚝 듣는 눈길로 노려보고 서 있으니 어떻게 감히 딴 사람을 내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 오중(吳中)에 항대협 말고 누가 그같이 큰일을 치러낼 수 있겠습니까? 이 땅과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부디 회계군을 맡아주십시오.”
군리들이 입을 모아 그렇게 간청하고, 항량이 풀어놓은 인수를 다시 갖다 바쳤다. 뜰에 있던 군졸들도 창자루로 땅바닥을 두드려 그런 군리들에게 찬동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래도 항량은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못한 듯 받아들이며 말했다.
“좋소. 제공(諸公)들이 이렇게 간곡히 바라시니 잠시 이 군수의 인수를 맡겠소. 하지만 무릇 일이란 반드시 대의와 명분이 앞서야 하오. 회계 같은 큰 고을을 주고받는 일은 더욱 그러하오. 나는 조상 대대로 섬겨온 초나라를 되세우고, 원통하게 돌아가신 선친의 한을 씻는 것을 나의 가장 큰 소임이자 회계수(會稽守)를 맡는 구실로 삼겠소. 이는 공들에게도 내세워 부끄럽지 않을 대의명분이 되니 부디 힘을 아끼지 말고 거들어 주시오.”
그리고는 풀어놓았던 인수를 도로 거두어들였다.
항우를 앞세운 한줄기 질풍 같은 선공(先攻)으로 군아(郡衙)와 군리(郡吏)들을 장악하기는 했지만 그걸로 회계군 군정(郡政)까지 모두 장악된 것은 아니었다. 군리들 중에는 겁이 나서 달아난 이도 있지만 항량 밑에 있기가 싫어 숨어버린 경우도 있었다. 유협(遊俠)과 토호(土豪)들도 모두가 항량을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항량은 급하게 사람을 풀어 평소에 자신을 따르던 오중의 호걸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에게 각기 알맞은 벼슬을 주어 먼저 군아의 빈자리부터 채우고, 다시 그렇게 자리 잡아가는 권력을 바탕으로 자기 밑에 들기를 마다하는 건달패거리나 지방 터줏대감들을 어르고 달래었다. 그리하여 군정을 장악하기 바쁘게 회계의 하현(下縣·속현)들에도 자기 사람들을 내려 보내 관부(官府)를 거두어들이고 흔들리는 군민(軍民)들의 마음을 다독이게 했다.
회계군은 진나라가 초나라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설치한 세 군(郡)중에 하나로서, 치소가 있는 오현(吳縣·오중)이외에 곡아(曲阿) 무석(無錫) 단도(丹徒) 오정(烏程) 부춘(富春) 산음(山陰)등 26개 현(縣)에 22만호(戶), 100여만 명의 인구가 있었다. 항량이 보낸 사람들이 그 모두를 장악하자 잠깐 동안에 강동에도 만만찮은 세력권이 하나 형성되었다.
항량은 초나라 부흥을 내세워 먼저 군사부터 모았다. 은통이 죽은 뒤 항복한 진나라 군사도 있고, 아우른 현군(縣軍)들도 있었으나 그들만으로는 부족했다. 좀 더 정예하고 믿을만한 자신의 군대가 필요했다.
항량이 군사를 모은다는 소문이 나자 그를 믿고 그가 내세운 초나라 부흥의 대의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회계군 곳곳에서 모여들었다. 26개현에 100만 인구를 가진 군(郡)이라 그 수가 금세 몇 만이 되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다만 갈 곳이 없어 밥이라도 얻어먹고자 따라나선 유민(流民)들도 적지 않았다.
항량은 모여든 이들 중에서 강동, 곧 옛 초나라 땅의 젊은이들만 8000명을 골랐다. 그리고 항우를 부장(副將)으로 세운 뒤 그들을 거느리게 했다. 그 뒤 항우가 몰락할 때까지 그의 주력으로 충성을 다하는 이른바 ‘8천 강동 자제(江東 子弟)’가 바로 그들이었다.
장수로 쓸 인재들도 모여들었다. 여번군(餘樊君)이나 종리매(鍾離眛 · 鍾離가 姓임)같이 오중에 숨어살던 호걸도 있고, 주무와 여마동(呂馬童)처럼 이전부터 회계군에서 교위 노릇하던 이도 있었다. 큰형 항백이 살아남은 또 다른 조카 항장(項莊 · 항우의 사촌아우)을 데려와 각기 한 갈래 군사를 맡아주었고, 숨어있던 환초(桓楚)와 용저(龍且)도 오래잖아 항량의 부름을 받아들였다.
‘황금 백근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허락 한마디[季布一諾]를 받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생겼을 만큼 신의로 이름을 얻은 계포(季布)와 그의 외삼촌 정공(丁公)이 항씨의 깃발 아래 든 것도 그때였다. 둘 모두 끝내 항우를 저버린 꼴이 되지만, 어느 시기까지 손꼽을 만한 초나라의 맹장(猛將)들이었다.
항량은 그들에게 교위(校尉), 후(侯) 사마(司馬) 같은 벼슬을 주고 능력에 맞게 군사를 맡겼다. 또 문서나 경리를 관장하는 관리나 곁에서 돕는 모사(謀士)도 그동안 사귀었던 오중의 호걸들 중에서 뽑아다 썼는데, 사람과 자리가 한결같이 잘 맞았다.
그런데 오랫동안 항량을 따라 다녔으나 그때 한자리를 얻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항량을 찾아와 불평했다.
“저는 사람을 끌어 모으는 재주는 없지만, 모인 사람을 나누어 부리는 데는 요령을 얻었다 할 만 합니다. 게다가 누구 못지않게 오래 공을 모셔왔는데 어찌 써주지 않으십니까?”
그러자 항량이 차갑게 받았다.
“그대는 작년 오씨가(吳氏家)의 장례식을 잊었는가? 그때 나는 그대의 자부(自負)와 사람들의 평판만 믿고 그대에게 접객(接客)과 출상(出喪)의 일을 맡겼다. 그러나 그대는 내가 딸려준 적지 않은 사람들을 고단하게 부렸으되, 오는 손님도 제대로 접대하지 못했고 떠나는 망자(亡者)도 편안하게 모시지 못했다. 결코 사람을 잘 부릴 줄 아는 자의 처사가 아니다. 내가 그대를 쓰지 않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또 어떤 서생(書生)이 찾아와 따졌다.
“저는 셈에 밝고 이재에 능해 공께서 늘 칭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찌하여 저를 외면하십니까?”
이번에는 항량이 꾸짖듯 받았다.
“나는 아직도 몇 해 전 굴씨가(屈氏家) 노마님이 돌아가셨을 때를 잊지 못하겠다. 그때 나는 그대를 믿고 물자의 출납(出納)을 맡겼는데 어떻게 되었는가? 그대의 기록에는 들어온 부의(賻儀)도 가지런하게 올라 있지 않았고 나간 비용도 밝게 드러나 있지 못했다. 게다가 출납이 형평까지 잃어 곤궁한 유족을 더욱 곤궁하게 만들었으니, 한 상사(喪事)의 출납도 제대로 가당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무슨 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그대가 셈에 밝고 이재에 능한 것은 내 알겠으나, 천하를 경영하는 일에도 그러할지는 내 모르겠다.”
그러자 그 서생은 얼굴이 벌겋게 되어 돌아가고 곁에 있던 사람들은 탄복해 마지않았다. 항량이 사람을 쓰는 법이 그러하고, 대의가 우뚝해 모여드는 사람이 많으니 그 세력은 날로 커졌다. 그러나 죽은 은통에게서 배운 것인지 산악같이 버티고 앉아 세상을 관망만 할 뿐 가볍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사수군(泗水郡) 서북쪽 끄트머리에 탕현(碭縣)이 있고, 탕현 동남에는 두 개의 큰 산이 남북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북쪽에 있는 것이 망산(芒山)이요 남쪽에 있는 산이 탕산(碭山)인데, 두 산 모두 골짜기가 깊고 숲이 짙었다. 거기다가 서로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아 어떤 때는 두 산을 아울러 망탕산(芒碭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망산과 탕산 사이의 한 골짜기에 여러 달 전부터 한 떼의 사람들이 자리 잡고 숨어서 지냈다. 그 전해 시황제의 능묘공사를 위해 인부[역도]들을 이끌고 여산(驪山)으로 가다가 도중에 인부들을 풀어주고 달아난 사상(泗上) 정장(亭長) 유계(劉季)가 이끄는 패거리였다.
원래 유계는 끝내 떠나지 않는 인부 수십 명과 함께 풍읍(豊邑)에서 멀지 않은 늪지대로 숨어들었다. 그러나 ‘동남쪽에 천자의 기(氣)가 있다’는 말로 그 지역의 불온한 기운을 경계하며 회계(會稽)까지 순행(巡幸)나온 시황제에 겁을 먹었다. 거기다가 소하가 사람을 보내 더 깊숙이 숨기를 권해와 보다 멀고 골짜기가 깊은 망산과 탕산 사이로 옮겼다.
그 뒤 날이 갈수록 유계를 따르는 무리가 늘어, 그 무렵에는 어느 새 백 명을 넘어서고 있었다. 먼저 그들 패거리의 머릿수를 늘인 것은 그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던 좀도둑 떼나 인근을 떠돌던 유민(流民)들이었다. 그들이 유계와 그가 거느린 무리의 결속을 무슨 큰 세력으로 여겨 저마다 의지해 오니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계네 패거리에서 가장 머릿수가 많은 것은 아무래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 패현(沛縣) 사람들이었다. 이미 늪지대에 있을 때 달려와 한패가 된 노관(盧쇿) 외에도 평소 유계를 우러르고 있던 그곳의 많은 호걸과 건달들이 망탕산으로 찾아들었다. 풍읍 인근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기신(紀信)과 주가(周苛)가 유계 아래로 들어간 것도 그때였다.
교룡(蛟龍)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적제(赤帝)의 아들이 마침내 백제(白帝)의 아들을 베고 몸을 일으켰다 - 그들을 유계에게 끌린 까닭을 그 시대의 신화적인 수사(修辭)로 꾸미면 그쯤 될 것이고, 요즘말로 하면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우리 속에서 자라오던 이 비상한 인물이 드디어 낡은 세계의 사슬을 끊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해 일어섰다.”
패현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믿음을 주기 위해서는 누군가 패현에 남아 끊임없이 상징을 조작하고 유계의 신화를 퍼뜨려야한다. 실제가 그랬다. 패현 성안에서는 소하와 조참이 유계의 장인 여공(呂公)과 함께 그 일을 하고 있었고, 풍읍 중양리에서는 태공(太公)이 맡아했다.
그런데 그 무렵 들어서는 유계의 아내 여씨(呂氏)도 그 일에 한몫을 단단히 했다. 그 한 예가 유계가 있는 곳에 떠돌았다는 ‘구름기운[雲氣]’ 이야기다.
유계가 망산과 탕산 사이에 숨어있을 때 찾아온 패현 사람들 중에는 아내 여씨도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직 어린 아들 영(盈·뒷날의 효혜제)과 딸 노원(魯元·뒷날의 노원공주)이 있어 유계 곁에 머물지 못하고 며칠 묵은 뒤에는 중양리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패현 쪽에서는 유계가 숨은 곳을 아는 유일한 사람이 되어 다음에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그녀의 안내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유계가 망산과 탕산 사이의 골짜기에 숨었다 해도 한곳에 붙박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계와 그를 따르는 무리가 모두 진나라의 법을 어긴 죄인인데다, 나중에 몰려든 사람들도 대개는 이런저런 죄로 쫓기는 사람들이었다. 언제 있을지 모르는 관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옮겨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여씨가 사람들을 안내해 다시 돌아왔을 때 유계네 패거리는 멀리 떨어진 딴 골짜기에 숨어있을 때가 많았다. 게다가 망산과 탕산 사이에 골짜기는 한둘이 아니었고, 대개는 나라의 법을 어긴 사람들이 숨어들 만큼 골이 깊고 숲이 짙었다. 그런데도 여씨는 용케 유계가 숨은 곳을 알아보고 사람들을 그리로 이끌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소?”
아내의 그같은 재간을 기이하게 여긴 유계가 어느 날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여씨가 곁에 있는 사람들이 다 들을 만큼 큰소리로 말했다.
“그거야 쉽지요. 당신이 계시는 골짜기 위에는 언제나 밝고 환한 구름 같은 기운[雲氣]이 어려있어 그것만 따라가면 언제나 당신을 찾을 수가 있어요.”
마치 물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 같았다.
아마도 실제 그녀를 이끈 것은 그녀 특유의 직관이나 남편의 습성을 근거로 한 추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뒷날 그녀가 보여준 놀라운 정치적 감각은 아마도 그때 이미 작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희미하게나마 시대가 남편에게 떠맡긴 역할을 알아 본 그녀는 자신의 직관이나 추리를 그런 남편에게 유리하게 윤색한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말을 들은 그곳 사람들이 놀라 머리 위를 쳐다보았으나 그들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유계에게 삶을 의지하기로 마음먹은 그들은 그 말이 참이기를 간절히 빌었고, 그러다 보니 어떤 때는 자신들도 그걸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소문이란 종종 확신이 없을 때 더욱 과장되는 법, 그리하여 그 소문을 전해들은 패현의 젊은이들은 한층 더 유계를 우러르고 따르고자 하였다.
유계는 나중 천자가 된 뒤에 방(邦)이란 이름을 지어 썼다고 하나, 실은 그 이름이 쓰이게 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옛날 진납국(眞臘國)에서는 형과 누이를 모두 방(邦)이라 했고, 그 무렵에도 방은 형(兄)을 뜻하는 그 지역의 사투리였다. 따라서 새로 유계 밑에 들게 된 그곳 사람들이 그를 친근하게 여기면서도 높이는 뜻으로 ‘유방(劉邦)’이라 불렀는데, 뜻은 ‘유씨형님[劉兄哥]’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나머지 사람들도 그 호칭을 따라 불러 끝내는 그게 유계의 이름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그 유방에게 사람이 많이 모여든다는 것은 세력이 불어난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좋아할 일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람이 늘수록 걱정거리도 늘어갔다.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큰 걱정거리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릴 식량이었다.
머릿수가 수십 명일 때만 해도 소하가 패현에서 몰래 거두어 보내는 것과 유방을 찾아오는 젊은이들이 얼마간씩 지고 온 것들로 그럭저럭 견딜만했다. 하지만 백 명이 넘어서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산열매와 나무껍질, 풀뿌리로 곡식을 대신하고 사냥과 고기잡이로 먹을 것을 보태도 그들 사이에 주린 기색이 점차 번져갔다.
그럴 때 손쉬운 해결이 지나는 길손을 털거나 가까운 마을을 노략질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는 피해를 입은 군현(郡縣)의 모진 토벌을 불러들일 위험이 있었다. 거기다가 유방에게는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세상을 막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어 몇 달째 굶주리면서도 아직 도적질로 나서지는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패현에서 찾아온 젊은이 하나가 놀라운 소문을 전해주었다. 그해 칠월에 진승과 오광이란 농군이 수졸(戍卒) 9백과 더불어 들고일어나 곳곳에서 진나라 군사를 무찌르고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그때까지도 느긋하게 지내던 유방이었으나 그 소문을 듣자 문득 낯빛이 변했다. 이어 그 답지 않게 놀라움과 근심이 묘하게 얽힌 표정으로 노관을 찾았다. 노관이 불려오자 유방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관(쇿)아, 너도 들었느냐? 진나라의 천하가 뒤집어지고 있다는 소문 말이다. 진승과 오광이란 자의 얘기….”
“실은 나도 그 소문을 듣고 놀라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대답하는 노관의 얼굴에는 그저 신기해하고 재미있어 하는 표정뿐이었다. 유방이 한층 어두운 얼굴로 물었다.
“혹시….우리가 여기서 일 년이 넘도록 세월을 헛되이 축내고 있었던 것은 아니냐?”
“세월만 헛되이 축내다니?”
그제야 유방의 표정이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노관이 어렸을 적부터의 버릇대로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긴장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어렸을 적부터의 친구라 하지만 그때 이미 노관은 유방을 주인처럼 섬기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그 ‘때’를 놓쳐버린 게 아닐까. 먼저 시작하는 유리함을…. 잃어버린 게 아닐까?”
전에 없이 신중하고 진지해진 유방이 그렇게 더듬거리자 노관은 이내 그의 속마음을 모두 읽어냈다.
“아니, 그렇지 않아. 그때는 아직 ‘때’가 아니었어. 아직 시황제가 살아있었고, 진나라의 군사들도 그때까지는 흔들림이 없었지. 더구나 너를 따르는 무리도 겨우 스무남은 명이었어. 그때 일어났다면 반드시 끔찍한 꼴을 당했을 거야.”
“때라는 것이 머릿수나 군사가 날래고 씩씩함에만 의지하지는 않을 것이다. 민심이….”
“그래도 그래. 진승과 오광은 그때부터 일 년이나 지난 뒤에 일어났지만 아직도 제대로 때를 타고 있는지는 몰라. 저들이야 말로 너무 일찍 일어난 것이 아닐지. 거창하게 들리는 ‘장초(張楚)’라는 것도 실은 초장 끝발, 아니 초기의 반짝하는 기세일수도….”
“그럴까…?”
평소의 태평스런 성격대로 그렇게 물러서기는 했지만 그날 유방의 어두운 얼굴은 종내 밝아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다음날 다시 노관을 불러 불쑥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패현을 한번 다녀와야겠다.”
“거긴 왜?”
노관이 영문을 몰라 머뭇거리며 되물었다.
“소하(蕭何)에게 물어 봐야겠다. 그라면 우리가 이제 무얼 해야되는지 알겠지. 네가 가서 한번 물어 보아라.”
하지만 그때 소하는 패현에 없었다. 진나라의 어사(御使 · 郡守를 감독하는 관리. 뒤에 刺史가 됨) 한 사람이 사수군(泗水郡)을 감독하러 왔다가 패현에 들렀는데, 소하의 빈틈없는 일솜씨에 반해버렸다. 이에 그 어사는 소하를 사수군으로 불러들여 졸사(卒史 · 郡의 중급관직)자리에 앉혔다. 노관이 그 일을 상기시켰다.
“소하는 패현에 없을 텐데. 듣기로 소하를 군(郡)으로 데려간 그 어사는 진나라 조정에까지 글을 올려 소하를 추천했다고 하더군. 어쩌면 지금쯤 소하는 멀리 함양에서 진나라의 높은 벼슬아치가 되어 거드럭대고 있을지도 몰라.”
"그럴 리가 없어. 소하는 지금쯤 틀림없이 패현에 돌아와 있을 거다.”
유방이 무엇을 믿는지 그렇게 잘라 말하고는 노관에게 길 떠나기만을 재촉했다.
개백정 번쾌(樊噲)가 처형(妻兄)이 되는 여씨(呂氏)와 함께 부른 듯 유방 앞에 나타난 것은 노관이 마지못해 길 떠날 채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왔느냐?”
노관을 몰아댈 때와는 달리 유방이 다시 평소의 느긋한 표정을 되찾아 번쾌에게 물었다. 번쾌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형님, 드디어 기다리던 때가 왔습니다. 어서 패현으로 돌아가십시다!”
“그게 무슨 소리냐?”
“현령이 찾고 있습니다. 어서 가셔서 패현을 취하십시오!”
“현령이 날 부르는데, 가서 패현을 차지하라니? 통 알 수가 없구나. 차근차근 말해 보아라.”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에 맞서 들고일어난 뒤로 지금 천하는 엉머구리 들끓듯 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 군수나 현령을 죽이고 진승과 오광 밑으로 달려가는가 하면, 어제까지 진나라 관리였던 자들이 오늘은 옛적 제후들처럼 제 땅[군현]과 백성들을 업고 진나라에 맞서기도 합니다. 우리 패현 현령이 형님을 부르는 것도 제 딴에는 따로 무슨 꿍꿍이속이 있어서일 겁니다. 하지만 형님께서는 오히려 이틈을 타 그 자를 없애고 패공(沛公 · 沛의 현령이란 뜻. 진나라 때는 현령을 公이라 했다)이 되시어 품고 계신 큰 뜻을 펼쳐보도록 하십시오.”
평소에는 말이 없지만 한번 말문이 열리면 제법 열변을 토할 줄도 아는 번쾌였다. 무엇에 내몰리는 사람처럼 그렇게 거침없이 엄청난 소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유방은 별로 놀란 기색 없이 다시 물었다.
“소하(蕭何)가 그러더냐?”
“예. 바로 보셨습니다. 소 주리(主吏)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때는 노관도 번쾌가 왔다는 소리를 듣고 그 자리에 와 함께 있었다. 영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번쾌에게 물었다.
“그럼 소하가 패현에 돌아와 있다는 말이냐?”
“예. 벌써 지난달에 돌아오셨습니다. 다시 현에서 공조(工曹)일을 맡고 계십니다.”
“그것 참 알 수 없는 일이로구나. 어사(御使)가 추천해 높은 벼슬아치로 함양의 진나라 조정에 든다더니 그건 어찌되었느냐?”
노관이 그렇게 묻자 유방이 빙긋이 웃으며 번쾌를 대신해 대답했다.
“한낱 어사가 추천했다 한들 썩어빠진 진나라 조정이 소하를 얼마나 높이 써주겠느냐? 또 높이 써준다 한들 누가 다 망해 가는 나라의 녹을 먹다가 목 없는 귀신이 되려 하겠느냐?”
“소하가 돌아온 걸 벌써 알고 있었구나. 누가 전해 주었나? 누구에게 들었나?”
노관이 이상하다는 듯 그렇게 유방에게 물었다. 유방이 다시 빙긋 웃었다.
“누구에게 들어서가 아니다. 소하의 안목을 알기에 하는 소리다.”
그리고는 이내 웃음기를 거두며 번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현령의 꿍꿍이속이란 어떤 것이냐? 네가 아는 대로 소상히 말해보아라”
“다른 큰 고을의 관장(官長)들처럼 제 힘만으로 자립(自立)할 처지가 못되는 패현 현령은 머리를 쓴답시고 스스로 백성들을 이끌고 진승을 찾아가 그 세력에 빌붙어보려 했습니다. 하지만 고을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을까 봐 걱정이 되어 속으로만 꿍꿍 앓고 있었지요. 그걸 눈치챈 소 공조(工曹)와 조(曹) 옥연(獄¤·옥리)이 현령에게 가만히 일러 주었지요….”
“소하와 조참이 뭐라고 하였느냐?”
“먼저 현령에게 겁부터 주었다고 합니다. 곧 진나라의 관리로서 고을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진나라에 반역을 꾀하면 틀림없이 고을 젊은이들은 현령의 뜻을 따라주지 않아 위태로울 것이라구요. 그런 다음에, 죄를 짓고 도망쳐 숨어사는 우리 고을 사람들을 불러들이면 수백 명이 될 것인데, 그들로 하여금 고을 젊은이들을 이끌게 하면 될 것이라고 달랬습니다.”
“패현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 숨은 것이 나만이 아닐 터, 그런데 현령은 어찌하여 유독 나를 불렀느냐?”
“말할 것도 없이, 소 공조와 조 옥연이 은근히 부추긴 까닭이지요. 현령은 형님이 우리 고을을 떠나있는 이들 중에서 가장 미덥고 어질며, 따르는 젊은이도 많다고 믿어 저를 보낸 겁니다.”
거기까지 듣자 유방도 일의 앞뒤를 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게 어쩌면 자신에게 다가온 때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에 지체 없이 무리를 모으게 했다.
“잘 들어라. 우리는 이제 패현으로 간다. 그곳이 고향인 사람들도 있고 타향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나,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목적은 같다. 가깝게는 부모형제를 진나라의 폭정에서 구해주는 것이요, 멀게는 방금 일고 있는 천하 대(大)풍운의 기세를 타려함이다.
와 함께 가기를 원치 않는 자는 여기 남아도 좋다. 혹은 함께 산을 내려가다가도 도중에 다른 길을 잡아 떠나도 좋다. 하지만 나와 함께 하려는 이는 모두 병장기부터 먼저 갖추도록 하라. 쇠붙이가 없으면 나무를 깎아 몽둥이를 만들고, 푸른 대를 쪄서 활과 화살을 갖추도록 하라!”
유방의 그같은 말에 고요하던 골짜기가 한동안 수런거렸다. 하지만 누구도 유방을 떠나 제 갈 길을 가는 이는 없었다. 오래잖아 저마다 무기로 쓸 만한 것들을 마련해 다시 모여들었다. 제대로 된 창칼은 얼마 되지 않아도, 백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하나같이 무언가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도구를 매거나 든 체 줄지어 서니 그런 대로 기세가 일었다.
골짜기를 떠날 때쯤 하여 유방이 다시 한 번 그들을 모아놓고 당부했다.
“너희들은 도탄에 빠진 만민을 구하고자 진나라에 맞서 일어난 의군(義軍)이다. 다시 한 번 서로를 살펴 용모를 바루고 언행을 가다듬으라. 그리고 형편이 닿는 대로 기치(旗幟)와 의장(儀仗)도 갖추도록 하라.”
유방의 사람 부리는 솜씨는 그 무렵의 어떤 봉기군(蜂起軍) 우두머리보다 뛰어난 데가 있었다. 있는 듯 만 듯 멀찌감치 서서 각자가 가진 바 재주를 마음껏 펼치도록 지켜보다가, 아래위를 뒤집으려 들거나 단결과 화목을 깨는 따위, 꼭 필요할 때가 되어서야 나서는 방식이 그랬다. 손발의 움직임 하나하나까지 법령으로 간섭해온 진나라의 통치에 시달려온 그들은 조금도 억눌리거나 부림을 당한다는 느낌 없이 유방의 명을 따랐다.
사람들은 유방의 그같은 용인술(用人術)을 흔히 도가적(道家的)이라고 풀이한다. 실제로도 그의 막료들 중 장량과 소하 조참 진평 등 중요한 몇몇은 분명히 도가의 원리를 처세(處世)와 치란(治亂)에 적용하였다. 그러나 유방이 의식적으로 도가적 원리를 채택한 것 같지는 않다. 훨씬 뒷날의 얘기지만, 그의 무자비한 공신억멸책(功臣抑滅策)으로 미루어 보면 그의 용인술은 어떤 사상적 원리보다는 본능적인 정치 감각을 소박하게 공식화(公式化)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유방이 이끌고 있는 패거리도 특별히 조직되거나 훈련받은 이들이 아니었다. 그 동안 함께 지내오면서 골짜기가 난장판이 되는 것이나 겨우 면할 만큼 아래위를 정하고 규율을 세운 도망자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대개가 유방과 한 고향에서 나고 자란 이들이라 냉정한 제도적 조직의 엄격한 위계질서와는 많이 달랐다. 아무리 차림을 가다듬고 기치를 높이 쳐들어도 골라 뽑아 단련한 정예군의 위의(威儀)는 나오지 않았다.
라서 유방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패현에 이르는 동안 어디서도 제대로 된 의군(義軍)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진승과 오광의 군대처럼 섞여들어 뒤따르면 무슨 수가 날 성싶을 만큼 기세가 엄청나지도 않았고, 우두머리가 옛 왕족이나 명문의 후예이며 대의가 그 땅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어서 따라나서고 싶은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기껏 백성들이 표현한 호의랬자 진나라 군사들의 행군과 마주쳤을 때처럼 숨거나 피하지 않았다는 게 고작이었다.
하지만 하루 낮을 걸어 풍읍(豊邑) 가까운 곳에서 묵고 점점 패현으로 다가가면서 유방이 이끄는 무리는 차츰 달라졌다. 그 사이 소문을 듣고 달려온 옛날 패현 저자거리 패거리들이 그 무리에 들어 유방을 떠받듦으로써 오직 유방만을 우두머리로 삼는 군사집단의 성격을 뚜렷이 했다.
하기야 그 전에도 그들 무리에 노관과 주가(周苛), 기신(紀信) 같은 유방의 심복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가 골짜기를 떠날 때는 번쾌까지 더해졌으나, 모두가 나중에 끼어든 데다가 머릿수도 많지 않아 나머지 사람들을 손아귀에 넣고 부릴 정도는 못되었다. 그런데 풍읍 부근에서 패현으로 떠날 무렵 하여 염(殮)장이 주발(周勃)이 힘깨나 쓰는 패현 건달들을 모아 달려오고, 다시 조무상(曹無傷)이 또 다른 저자거리 주먹패를 이끌고 와서 무리에 끼어들면서 그들 무리는 이제 유방의 사사로운 군사[私兵]처럼 되었다.
그들이 패현에 이른 것은 다음날 정오 무렵이었다. 패현 경내로 접어들 때까지만 해도 유방은 현령이 목을 빼고 기다린다는 번쾌의 말만 믿고 속으로 우쭐해 하면서도 약간 들떠 있었다. 그런데 패현 성곽이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홀연 성 쪽에서 한 줄기 흙먼지 바람을 뒤에 달고 두 사람이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달려오고 있었다. 두 기(騎) 뿐이라도 칼을 차고 있어 긴장하여 살피는데, 달려와 말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바로 소하와 조참이었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는 게 몹시 급하게 달려온 듯했다.
“아니, 우리 공조 나리와 옥연 나리께서 갑자기 무슨 일이시오?”
유방은 그런 그들의 모습이 심상찮게 느껴졌지만 짐짓 느물거리듯 물었다. 먼저 숨결을 고른 소하가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유형. 잠시 행군을 멈추셔야 되겠소. 성안 사정이 달라졌소.”
“왜, 무슨 일이오? 성이라도 무너졌소?”
유방은 그래도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그렇게 되물었다. 함께 온 조참이 참지 못하고 거칠게 받았다.
“우리는 겨우 목숨을 건져 성을 빠져 나왔는데 유형께서는 웃고 계시군요. 너무 태평이십니다, 그려.”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누가 감히 그대들을 해치려 했단 말인가?”
유방이 그제야 정색을 하며 물었다. 이번에는 소하가 나서서 유방의 말을 받았다.
"유형께서 수백의 무리와 함께 오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현령의 마음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유형과 힘을 합쳐 모반을 일으킬까봐 걱정된 것이겠지요. 현령은 갑자기 성문을 걸어 잠그고 현군(縣軍)을 풀어 성을 굳게 지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찾는데, 먼저 우리를 죽여 안에서 호응하는 것을 막으려 함이었습니다. 우리를 데리러 온 군리(軍吏=軍校)의 기세가 심상치 않아 뇌물을 듬뿍 집어주고 물었더니 그렇게 털어놓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도망쳐 오는 길입니다.”
“하후영(夏侯嬰)은 어찌 되었소?”
유방이 문득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래전 유방이 잘못하여 칼로 그를 다치게 하였을 때, 모진 매를 맞고 옥에 갇히면서도 그 사실을 밝히지 않아 유방을 구해준 적이 있는 하후영이었다. 그 뒤 다시 현에서 사어(司御)로 일하고 있었지만, 그가 유방에게 가슴이나 배[심복]같은 사람이라는 것은 패현 사람이라면 모두 알았다.
“지금은 현령리(縣令吏 · 현령의 부관 격)가 되어 현령과 가까이 지내고 있습니다만 자못 걱정됩니다. 기별은 보냈는데 탈 없이 빠져나올 수 있을는지….”
조참이 어두운 얼굴로 그렇게 받았다. 소하도 자기들만 빠져나온 게 적잖이 마음에 걸리는 듯 표정이 밝지 못했다. 그런데 그때 함께 있던 노관이 문득 한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건 또 뭐지? 수레 같은데….”
그 말에 모두가 함께 바라보니 방금 소하와 조참이 달려온 그 길로 다시 부옇게 먼지가 일며 수레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네 마리의 말이 끌고 덮개가 있는 게 꽤 높은 벼슬아치의 수레 같았다.
“저건 현령이 공무로 고을을 돌아볼 때 쓰는 수레가 아닌가….”
소하가 그 수레를 알아보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조참도 고개를 끄덕여 같은 뜻을 나타냈다.
“현령의 수레라고? 그럼 사람들에게 싸울 태세를 갖추게 해야지.”
노관이 그러면서 멀지 않는 곳에 서 있던 장정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 유방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수레 앞뒤에 따른 인마가 없지 않은가? 저 수레 가득 군사가 타고 있다고 해도 그리 걱정할 일이 아니네. 현령이 보낸 사자거나 아니면….”
“아니면, 뭐야?”
노관이 눈을 깜박이며 유방을 쳐다보았다. 유방이 수레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말했다.
“하후영이 오고 있는지도….”
“뭐 하후영이?”
“우리 패현에서 하후영 말고 누가 저렇게 빨리 저 수레를 몰 수 있는가? 다 알다시피 하후영은 현리(縣吏) 노릇을 마구간에서 시작하였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어(司御)로서 바로 저 수레를 몰지 않았나?”
그러자 유방 못지않게 하후영을 걱정하던 노관이 고개를 기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제발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나….”
그 사이에도 수레는 한줄기 먼지바람처럼 다가들더니 갑자기 그들 앞에 멈춰서고 부옇게 먼지를 덮어쓴 사람이 어자(御者)자리에서 뛰어내렸다. 중키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다름 아닌 하후영이었다.
“영(嬰)아, 정말 네가 왔구나. 걱정하였다.”
유방이 하후영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반기고, 소하와 조참도 한마디씩 보탰다.
“벌써 기별이 갔던가?”
“성문 빠져나오기는 어렵지 않았어?”
“한가롭게 기별이나 기다리고 있을 틈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 분께서 성을 빠져나갔다는 소리를 듣기 바쁘게 이 수레를 끌고 뒤따랐지만 벌써 성문이 굳게 닫혀 있더군요. 나는 현령의 명을 받고 두 분을 뒤쫓는 중이라고 둘러대었지요. 거기다가 내가 이 수레를 몰고 나서서 그런지 성문을 지키던 교위(校尉)가 어렵잖게 속아주더군요.”
하후영이 그러면서 씩 웃었다. 아무리 다급한 지경에 빠져도 흔들림이 없는 그의 일면을 잘 드러내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갑자기 떠올린 게 있다는 듯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풍읍 중양리에도 빨리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현령은 우리가 모두 달아난 걸 알면 반드시 군사를 그리로 보내 태공(太公)과 그곳에 남아있는 가솔들을 인질로 잡으려 할 것입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말게. 우리가 떠나기 전에 여공(呂公)께 일러 양가 모두 멀리 피신하시게 해두었다네.”
소하가 차분하게 받았다. 그때 유방이 다시 그들을 일깨우듯 말했다.
“자, 이제 하후영까지 왔으니 성안에서 빠져나와야 할 사람은 대강 빠져나온 듯하오. 이제 사람들을 모아 패현을 차지할 궁리나 해보는 게 어떻소? 번쾌와 주발을 불러오고 주가와 기신도 이리 오라고 하시오. 여럿이 머리를 맞대고 꾀를 모으면 힘들이지 않고 성을 뺏을 수도 있을 것이오.”
이에 유방의 무리는 그곳에 잠시 군사를 머무르게 하고 군막 한곳에 몰려 앉아 꾀를 짜내기 시작했다. 힘이 남다르고 무예가 뛰어난 번쾌와 강한 활을 잘 쏘는 주발뿐만 아니라 주가와 기신, 조참이 모두 무장(武將)에 가까워 도필리(刀筆吏)인 소하를 빼고는 한결같이 힘으로 성을 우려 뺄 궁리만 했다. 하지만 유방은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싸움이 꼭 피를 흘리고 적을 죽여야만 이기는 건 아니지. 참으로 이기는 것은 나와 남이 아울러 상하지 않고 뜻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야. 게다가 우리 군사는 훈련도 안 되고 병장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어. 어떻게 싸우지 않고 패현을 손에 넣어 그곳을 근거 삼아 우리 힘을 키우는 수는 없을까?”
유방이 그렇게 묻자 싸움에 별로 자신이 없어 겉돌던 소하가 얼른 받았다.
“한번 꾀해볼 만한 일이 있소. 비록 몇 백의 현군을 거느리고 있다고 하나 현령에게는 이곳이 타향이외다. 수천의 백성들이 성안에 있고, 또 그들은 우리의 부모형제가 되니 어찌 두렵지 않겠소? 현령에게 사람을 보내 한번 달래보도록 합시다. 싸움은 그 뒤라도 늦지 않소.”
“그리 쉽게 항복할 현령이 왜 성문을 닫아걸고 두 분을 죽이려고까지 했겠습니까?”
주가와 기신이 먼저 그렇게 못마땅한 기분을 나타냈고, 다시 번쾌와 주발이 거들었다.
“이미 시작된 싸움인데 이제 와서 무얼 망설인단 말이오? 오늘 밤 불시에 들이쳐 현령 놈에게 정신 차릴 겨를을 주지 말고 패현을 둘러엎어 버립시다.”
유방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말했다.
“아니, 소형(蕭兄)의 말이 옳아. 먼저 달래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때 싸우지 뭐.”
그러고는 하후영을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네가 한 번 더 성안을 다녀와야겠다. 너는 근래 현령리로서 현령과 가깝게 지냈으니 그래도 네 말이라면 현령이 들어보려고 하지 않겠느냐?”
하후영의 얼굴이 잠깐 흐려지는 듯하더니 이내 평상을 회복했다.
“한번 가보지요. 그런데 현령을 만나 무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가서 말하거라. 이 유(劉) 아무개에게는 고향 땅과 부모형제를 지키려는 것뿐 딴 뜻은 없노라고. 만약 우리를 받아들여 함께 힘을 합친다면 이 패현 군민(軍民)의 다행일 뿐만 아니라, 현령께서도 벼슬과 몸을 아울러 보존하는 길이 되리라고. 현령은 이 유 아무개가 반드시 지켜 주리라고.”
그러고는 사자의 표식으로 삼을 흰 깃발 하나를 내주며 수레와 함께 성안으로 돌려보냈다.
“위태롭습니다. 겨우 죽을 곳을 빠져나온 사람을 다시 돌려보내다니요.”
“근래 현령과 가깝게 지냈다지만, 그래서 자신을 버리고 달아난 하후영이 더욱 미울 수도 있지 않나?”
조참이나 노관이 그렇게 걱정했지만 유방은 무엇을 믿는지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아무리 싸움터라도 사자는 함부로 죽이는 법이 아니다. 게다가 현령 제 놈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뭔가 내게 할 말이 있을 거다. 제 말을 내게 전하기 위해서도 하후영을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성안으로 들어간 하후영은 한 시진도 안 돼 되돌아왔다. 수레는 뺏기고 비루먹은 군마 한 마리를 빌려 탄 채 돌아왔지만 몸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성안으로 돌아가니 현령이 대뜸 나를 묶게 하고 목을 베겠다며 엄포를 놓더군요. 그러면서 은근히 우리 군세를 묻기에 한껏 부풀려 말해주었더니 비로소 묶은 것을 풀게 하며 온 까닭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형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전해드렸습니다. 현령은 겉으로는 벌컥 성을 내는 척했지만, 속으로는 무언가 깊이 헤아리고 있는 듯했습니다.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형님께 전하라고 하더군요. 모두 병장기를 놓고 하나씩 성안으로 들어와 현군(縣軍)에 든다면 받아들이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역도로 처벌하겠다고. 그러고는 느닷없이 창칼을 든 군사 5백을 늘여 세워 겁을 주었습니다.”
그게 하후영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었다. 유방이 별다른 표정 없이 물었다.
“내가 싸우지 않고 저를 거두려 했더니, 거꾸로 제가 내 항복을 받으려 드는구나. 그래, 성안 군사는 얼마나 되더냐?”
“성벽 위에 세워둔 군사까지 더하면 천명은 돼 보였습니다.”
“무기는?”
“창칼에 활과 화살을 넉넉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성안 대장간마다 창칼 벼리는 소리가 요란한 게 늙고 젊고를 가리지 않고 성안 백성은 모조리 군사로 끌어다 쓸 작정인 듯했습니다.”
“듣기로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두 배의 세력이 필요하고 에워싸려면 다섯 배가 필요하다 하였다. 그런데 거꾸로 우리의 세력이 적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니, 그렇다면 더욱 싸워서는 안 되겠구나….”
유방은 그 말과 함께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번쾌나 주발 같은 무골(武骨)들도 하후영이 전하는 성안의 군세를 듣고는 무턱대고 싸우자고 우기지 않았다.
"이렇게 하자!”
이윽고 유방이 퍼뜩 생각에서 깨어나며 말했다. 저마다 생각에 잠겼던 소하와 번쾌 등이 기대에 찬 눈으로 유방을 쳐다보았다.
“성안에 있는 우리 편을 쓰자. 그들을 보태면 우리가 현령보다 머릿수가 많다”
“성안에 있는 우리 편?”
노관이 알 수 없다는 듯 눈을 깜박거리며 되물었다. 유방이 그런 노관을 무시하고 소하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형(蕭兄)의 글 솜씨를 좀 빌려야겠소. 비단 몇 폭을 구해 글을 쓴 뒤 화살에 묶어 성안으로 쏘아 보냅시다.”
“무슨 글을… 쏘아 보내시려 하시오?”
소하가 얼른 짐작이 가지 않은 듯 물었다. 유방이 한층 기운찬 목소리로 대꾸했다.
“성안의 나이 드신 어른들[부로]들에게 호응을 당부해봅시다. 그들은 몸이 성안에 갇혀 어쩔 수 없이 현령을 따르고 있을 뿐 마음은 우리 편이오. 그들이 들고일어나면 우리는 현령보다 훨씬 많은 군사를 가진 셈이 되니 성을 떨어뜨릴 수도 있소!”
“알겠습니다. 지금으로서는 그것도 한 좋은 방도가 되겠습니다.”
그제야 유방의 말을 알아들은 소하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받았다. 그때 다시 노관이 꾀를 보탰다.
“그 글이 효과를 보려면 먼저 패현 성부터 에워 싸야할 거다. 장정들에게 시켜 깃발을 많이 만들어 세우고, 가까운 마을 사람들을 모아 함성을 보태게 하여 되도록 우리 군사가 많은 듯이 꾸미자. 또 마소를 많이 빌어 그들이 일으키는 먼지와 울음소리로 기마(騎馬)까지 갖춘 것처럼 하자. 그래야만 성안 사람들이 우리를 믿고 일을 벌일 수 있을 것이다.”
유방은 그 말을 따랐다. 번쾌와 주발 등을 시켜 장정들을 몰아 성을 에워싸게 하고 자신은 소하와 함께 성안으로 쏘아 보낼 격문을 지었다.
<패현 성안에 계신 어르신들께 유계가 삼가 아룁니다.
천하의 뭇 백성들이 진나라의 학정으로 괴로움을 겪어온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어르신들께서는 현령을 위해 외로운 성을 지키고 계시나, 전국의 제후들이 모두 들고일어났으니 머지않아 이곳 패현에도 밀려들 것입니다. 성안의 여러분께서는 모두 힘을 합쳐 현령을 죽인 뒤에 재주 있고 덕 많은 젊은이를 우두머리로 세워 제후들에게 호응하도록 하십시오. 그리한다면 가솔과 재산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을 것이나 그리하지 못하면 아비와 자식이 한 가지로 헛되이 죽음을 당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게 내용을 정한 뒤에 소하가 깎은 듯한 글씨로 비단에 써 내려갔다. 그리고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그 비단 폭을 화살에 묶고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그런데 화살을 쏘아보내기를 다섯 대나 하였지만 갚은 우물에 바늘 떨어진 듯 패현 성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삼경이 다되도록 성벽 위의 횃불과 화톳불만 휘황할 뿐이었다.
“바보 같은 것들 뭣하고 있는 거야? 평소 그렇게 으스대던 뚝심 다 어디 두고 비리비리한 현령 한 놈 해치우지 못해?”
먼저 번쾌가 그렇게 투덜거리며 성안에 남은 저자거리 건달들을 나무랐다. 세밀한 만큼 소심한 소하도 삼경을 넘기자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요?”
“현령을 죽이는 일이 그리 쉬울 리가 있겠소? 좀 더 기다려 봅시다.”
무얼 믿고 그러는지 유방이 태평스럽게 소하의 말을 받았다. 바로 그때 요란스럽게 함성이 일며 성문 근처에서 잠시 창칼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문루(門樓)가 횃불로 훤히 밝아지며 누가 큰 소리로 외쳤다.
“유씨 형님[劉兄哥]은 어디 있소? 무씨(武氏) 어른께서 찾고 계시오.”
유방이 보니 저자거리에서 가장 형세가 좋은 무가(武哥)네 피륙전에서 점원 노릇을 하는 건달이 기세 좋게 외치고 있었다. 그 곁에는 성안 무씨 집안의 어른 되는 무태공(武太公)이 집안 젊은이에게 뭔가를 들린 체 서 있었다. 유방이 말을 탄 체 불빛 아래 나가 섰다.
“유계는 여기 있소. 무슨 일로 나를 찾으시오?”
그러자 문루 위의 사람들이 이리저리 횃불을 비춰가며 유방을 살폈다. 그러다가 무태공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말했다.
“유(劉)대협. 여기 현령의 목과 인수(印綬)가 있소. 먼저 현령의 목을 내려 보낼 터이니 그게 맞거든 성안으로 드시어 우리 패현을 지켜주시오!”
그리고 문루 위에서 현령의 목과 인수가 떨어졌다. 소하와 조참이 현령의 목을 확인하기도 전에 유방이 성문 앞으로 말을 몰았다. 노관이 유방의 말고삐를 잡았다.
“속임수가 있을지 모르니 현령이 목이 맞는지 아닌지 먼저 알아보고 가자”
그러나 유방은 박차로 말 배를 차며 호탕하게 소리쳤다.
“패현의 부로(父老)는 다 나의 부모요 군민(軍民)은 모두 나의 형제다. 부모 형제가 하는 일에 무슨 속임수가 있겠느냐?”
그리고는 앞장서서 성안으로 들어갔다. 소하와 번쾌 등이 장정들을 이끌고 뒤따라 성안으로 들자 패현의 부로들이 유방에게 인수를 바치며 말했다.
“여기 패현의 인수가 있습니다. 대협(大俠)께서는 이제 패공(沛公 · 패현 현령)이 되시어 우리를 지켜 주시오”
언제나 태평스런 얼굴에 부드럽기만 하던 유방의 표정이 무엇 때문인지 일시에 굳어졌다.
“바야흐로 천하가 어지러워지니 제후들이 다투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때 무능한 사람을 장수를 세우면 싸움에 무참하게 져서 땅은 짓밟히고 사람은 죽거나 다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여러 어르신의 명을 받들지 못하는 것은 감히 이 한목숨을 무겁게 여겨서가 아니라 아닙니다. 내가 어리석고 힘이 없어 이 땅과 사람들을 지켜내지 못할까 두려워서입니다. 누구를 패공으로 삼는가는 실로 중대한 일이니, 부디 신중하게 고르시어 재능 있는 이를 세우도록 하십시오.”
유방을 오래 알고 지내던 사람들에게는 처음 보는 신중함이요, 겸손이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은 유방에게 패공이 되어달라고 거듭 졸랐다. 유방이 다시 사양했다.
“여기 이 소형은 오랜 세월 현의 주리(主吏)로서 일해 왔습니다. 빈틈없고 차분할 뿐만 아니라 우리 패현의 일이라며 누구보다 많이 아는 사람이니 현령의 일을 맡겨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러자 소하가 펄쩍 뛰며 두 손을 저었다.
“대나무를 깎고 붓을 묶어 문서를 꾸미거나, 산(算)가지를 놓아 숫자를 셈하는 일이라면 저도 남만큼은 합니다. 그러나 무리를 이끌고 적과 싸우는 일이라면 현군(縣軍)의 졸개보다 못합니다. 이같이 어지러운 세상에 남의 우두머리로는 결코 맞지 않습니다.”
이에 유방은 다시 조참을 내세웠으나 놀라며 물러서기는 조참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한낱 옥리(獄吏)로서 도필(刀筆)로 일하는 것조차 소(蕭)주리에게 크게 미치지 못합니다. 하물며 한 무리의 장수되는 일이겠습니까? 더욱이 저는 미관말직이나마 진의 관리 노릇을 했던 자로써, 이 같은 일에 앞장섰다가 뒷날 잘못되기라도 하면 멸족의 화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실로 두려운 일이니 유형께서 맡아주시오.”
그렇게 사양했다. 조참이 나중에 덧붙인 핑계는 패공의 자리를 유방에게 양보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기(史記)>는 소하와 조참이 사양한 까닭을 오직 그것으로만 밝히고 있다.
어쨌든 물망에 오른 사람들이 한결같이 사양하자 패현 부로들은 다시 유방에게 매달렸다.
“일찍부터 우리는 귀공(貴公)께 여러 가지 기이하고 불가사의한 일이 많았음을 들어왔습니다. 틀림없이 높고 귀한 분이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또 시초(蓍草·점치는 풀)와 귀갑(龜甲·거북껍질)을 써서 점을 쳐보아도 귀공만큼 길한 점괘가 나온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유방은 몇 번이나 더 사양하다가, 아무도 우두머리가 되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결국은 패공(沛公), 곧 패현(沛縣) 현령을 맡았다. 이후 한동안 유방의 이름처럼 쓰이게 되는 벼슬자리였다.
그때의 패현 현령이 해야 할 일은 무엇보다도 군사적 지도자로서 군민(軍民)을 이끌어 그 땅과 사람을 지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패공이 된 유방은 먼저 패현 관아에서 한 장수로서 치러야할 의식부터 시작했다. 곧 소와 말을 잡아 전술에 뛰어난 황제(黃帝)와 여러 가지 병기를 새로 만들어낸 치우(蚩尤)를 제사지내고, 그 피를 북에 발라 무운(武運)을 빌었다. 그런 다음 자신이 전날 백제(白帝)의 아들을 죽인 적제(赤帝)의 아들임을 내세워, 붉은 색을 자신의 색깔로 삼고 이끄는 모든 군사들의 깃발을 붉은 색으로만 쓰게 했다.
장수로서의 의식을 끝내자 널리 방을 붙여 군사들을 모았다. 패현 곳곳에서 유방을 우러르던 젊은이들이 모여 며칠 안 돼 3천이 넘는 군세(軍勢)를 이루었다. 이웃 수양현(Q陽縣)에서 비단 장수를 하던 관영(灌영)이 젊은이 수십 명을 이끌고 오고, 오래 유방에게 맞서오던 풍읍(豊邑)의 건달패 두목인 옹치(雍齒)가 패거리와 함께 유방 아래 든 것도 그때였다.
유방은 그를 따르던 무리에게 각기 알맞은 벼슬을 주어 군민(軍民)의 허리를 삼았다. 먼저 소하를 현승(縣丞)으로 올려 현 안팎의 공무를 맡게 했다. 또 조참은 주발과 관영과 함께 중연(中涓)이 되어 각기 한 갈래 군사를 이끌게 하였다. 조무상은 좌사마(左司馬)로 바깥에서 군무(軍務)를 돌보게 하고, 노관은 빈객(賓客)을 삼아 안에서 모든 논의를 함께 했다. 번쾌는 사인(舍人)으로 언제나 큰칼을 들고 뒤따르게 하였으며, 하후영(夏候嬰)은 칠대부(七大夫)의 작위를 가진 태복(太僕)으로 유방의 수레를 몰게 했다.
안팎의 진용이 모두 짜여지자 소하가 나서서 여럿에게 말했다.
“무릇 일에는 순서가 있고 사람의 모임에는 상하가 있는 법이외다. 유공은 지금까지는 우리의 벗으로 허물없이 지냈고, 형제처럼 뒹굴었으나 이제는 우리의 수령이 되었소. 앞으로는 반드시 패공으로 불러 사사로운 정으로 대하는 일이 없어야할 것이오. 또 지금까지는 계(季)란 자(字)를 이름은 대신 써왔으나 이제부터는 방(邦)을 휘자(諱字)로 삼는 게 어떻겠소? 이미 여러 사람이 그렇게 불러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이 또한 작지 않으니 한 무리를 이끄는 수령의 이름으로 모자람이 없을 것이오.”
시황제 시절 함양 부근 이 백 리 안에는 이 백 일곱 개의 궁궐이 있고, 그 궁궐들은 모두 구름다리와 용도(甬道·흙담을 두른 길)로 이어져 있었다. 황제는 그 궁궐들을 가만히 옮겨 다니며 자신이 어디에 묵고 있는지 알 수 없게 하였으며, 그걸 함부로 밝히는 자에게는 죽음을 내렸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곁에서 모시는 신하들이나 내시들[시어자]밖에 드나들 수가 없어 금중(禁中)이라 불리었는데, 이세(二世)황제 호해(胡亥)도 그런 아비를 본떴다.
진(秦) 이세 황제 2년 시월 중순 어느 날이었다. 호해는 위수 남쪽의 장신궁(長信宮)을 금중으로 삼아 머물고 있었다. 뒷날과는 달리, 그래도 중대한 국사는 아직 황제와 대신들과 얼굴을 마주보며 논의하던 때의 일이었다.
그날 장신궁에서 낭중령부(郎中令府)로 쓰고 있는 전각 한 깊숙한 방안에는 낭중령 조고(趙高)와 그 아우 조성(趙成)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있었다.
“그래, 자세히 알아보았느냐?”
조고가 환관 특유의 높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낮춰 아우에게 물었다. 조성은 어디를 바삐 돌아치다 왔는지 아직 숨결도 고르지 않았다. 길게 숨을 내뿜어 한번 더 숨결을 고른 뒤에 물음을 받았다.
“예. 제가 직접 희수(戱水)근처로 가서 보고 들었을 뿐만 아니라, 날래고 눈치 빠른 사람을 적도들 틈에 몇 풀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래, 적도들의 병세(兵勢)는 어떠했고 장수는 누구더냐?”
“적도들은 스스로 몇십 만이라 떠드나, 그저 먹을 것이나 얻고자 따르는 무리가 적잖이 섞여 있어, 군사라 이름할 수 있는 자들은 십만을 넘기기 어려울 것입니다. 거기다가 병장기가 허술하고 훈련도 제대로 되지 않은 농투성이가 태반이었지만, 그 기세만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그들을 이끄는 장수는 이름을 주문(周文)이라고도 하고 주장(周章)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력만 들어도 만만찮은 자임을 알만 했습니다. 그자는 원래 진(陳) 땅 사람으로 일찍이 항연(項燕) 막하에서 시일(視日·군대를 따라 다니며 천문을 살피고 길흉을 점치던 사람. 日者라고도 한다)을 지냈으며, 한 때는 춘신군(春信君 · 楚나라의 令尹을 지낸 사람으로 食客 3천을 거느리고 戰國말기 한때를 주무른 풍운아)을 모신 적도 있다고 합니다. 주문이 역도의 우두머리 진승의 눈에 들어 장군인(將軍印)을 받고 감히 진나라를 치겠다고 나설 때 그가 이끈 군사는 채 만 명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서쪽으로 오는 도중에 끌어 모은 군사가 십만이 넘고, 장수 수십 명에 전거(戰車)가 천승(千乘)에 이른다 하니,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습니까?”
조성 또한 환관이라 마음이 격해지자 절로 목소리가 높아져 안달부리는 아낙네처럼 쨍쨍거렸다. 그러나 조고는 여전히 차고 가라앉은 눈길로 그런 아우를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다른 세상 소식도 새로 들은 것이 있으면 말해보아라”
“지금 시끄러운 것은 대택(大澤)이나 강남만이 아닙니다. 이미 함곡관 동쪽은 우리 진나라의 천하가 아닌 듯합니다.”
“그건 나도 들어 알고 있다.”
“그런데도 형님은 계속 구경만 하실 겁니까? 진나라가 없으면 황제도 없고, 황제가 없으면 위세 좋은 낭중령도 없습니다.”
그런 조성의 말투에는 어딘가 형인 조고를 두려워하면서도 나무라는 듯한 데가 있었다. 조고가 잠시 조용한 물처럼 앉았다가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말했다.
“알았다. 나가 보아라.”
그리고는 말없이 방을 나가는 아우에게 다시 생각난 듯 덧붙였다.
“소부(少府 · 九卿의 하나로 황실 재정담당관) 장함(章邯)을 찾아오라 일러라”
“소부 장함을…?”
그렇게 되묻는 조성의 눈이 궁금함으로 번쩍했다. 그러나 함부로 되묻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형의 성품을 잘 아는지 굳이 그 까닭을 알아보려 하지 않고 내쳐 방을 나갔다
“알겠습니다. 그리 전하지요.”
조고는 그런 아우의 말을 귓가로 흘러들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더는 밖의 일을 미룰 수가 없다. 아직 궁궐 안의 일이 모두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이쯤에서 손쓰지 않으면 애써 쌓아올린 조정의 권세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아우의 말대로 진나라와 황제가 없으면 이 조고도 없다.)
그러면서 얇은 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그의 머릿속에는 지난 일 년 남짓의 숨 가쁜 세월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승상 이사(李斯)를 꼬드겨 호해를 이세 황제로 세우고 시황제의 장자인 부소를 죽게 한 조고가 한동안 가장 힘을 쏟은 일은 몽염(蒙恬)과 몽의(蒙毅) 형제를 죽이는 일이었다. 몽씨는 원래 제(齊)나라에 살았으나 몽염의 조부 몽오(蒙鰲)가 진나라에 와서 장군이 된 뒤로 대를 이어 진나라가 알아주는 장군가가 되었다. 몽염은 장군 왕전(王剪)과 함께 초나라를 쳐 없애고, 그 장수 항연(項燕)을 죽인 일로 특히 이름을 떨쳤다. 또 흉노를 멀리 내쫓고 만리장성을 쌓아 시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몽염의 아우 몽의도 시황제의 총애를 받아 벼슬이 상경(上卿)에 이르렀다. 시황제가 궁궐 밖으로 나갈 때는 수레를 함께 탔으며 돌아와서는 언제나 곁에서 모셨다. 몽염은 장군으로 밖을 지키고 몽의는 대신으로 안에서 충성을 다하니 누구도 그들 몽씨 일가와 감히 다투려 하지 않았다.
한번은 조고가 큰 죄를 지었는데 시황제는 몽의에게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몽의는 법에 따라 처결하였으나 그래도 베풀 수 있는 인정은 다 베풀었다. 죽음을 면하게 하고 환적(宦籍)에서 내치는 것으로 그쳤는데, 속 좁은 조고는 법을 따른 몽의에게 오히려 원한을 품었다.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황제로 세운 조고는 먼저 장군으로서 대군을 이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자 부소까지 등에 업고 있는 몽염부터 죽이려 했다. 이사의 가신(家臣)을 사자로 삼아 상군(上郡)의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는 시황제의 거짓 조서를 전하게 했다. 부소는 시황제가 명한 대로 자살하였으나, 몽염은 조서를 의심하여 죽기를 마다했다. 이에 사자는 몽염을 양주(陽周)의 옥에 가두고 돌아가 호해와 조고에게 그대로 알렸다.
황제가 된 호해는 부소가 죽었다는 말을 듣자 몽염을 살려주려 하였다. 그러나 조고는 몽염이 살아 그 아우와 더불어 다시 권세를 얻게 되는 게 두려웠다. 가만히 호해를 찾아가 말했다.
“선제(先帝·시황제)께서는 진작부터 현명한 이를 태자로 세우시려고 하였으나 몽의가 가운데 들어서서 안 된다고 말렸습니다. 폐하께서 현명하신 것을 알고도 오래도록 태자로 세우는 것을 막았으니, 이는 불충(不忠)이며 군주를 미혹시킨 일입니다. 몽의의 그같은 짓은 어리석은 신이 헤아리기에는 죽어 마땅한 죄입니다.”
그렇게 모함하여 몽의도 대현(代縣) 옥에 가두게 했다. 그리고 밤낮으로 이세 황제에게 몽씨 형제를 헐뜯고 죄과를 들춰내 탄핵하였다. 호해의 조카 되는 자영(子嬰)이 몽씨 형제를 구하러 나섰다.
“옛적 조나라 임금 천(遷)은 어진 신하 이목(李牧)을 죽이고 안추(顔聚)를 등용하였으며. 연나라 임금 희(喜)는 오래된 신하들 모르게 형가(荊軻)의 계책을 서서 우리 진나라와의 약조를 저버렸으며, 제나라 임금 건(建)은 윗대의 충신들을 죽이고 후승(后勝)의 말을 따랐습니다. 이 세 임금은 옛것을 바꾸었다가 각기 나라를 잃었으며, 재앙이 그 몸에까지 미쳤습니다. 지금 갇혀있는 몽씨는 우리 진나라의 큰 신하이며 모사(謀士)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하루아침에 이들을 버리려 하시니 결코 아니 될 일입니다.
신이 듣건대, 경솔한 생각으로는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고, 혼자의 지혜로는 군주의 자리를 보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충신을 죽이고 믿지 못할 사람을 세운다면 이는 안으로는 뭇 신하들을 서로 믿지 못하게 하고, 밖으로는 전쟁을 치르는 군사들의 마음을 흐트러지게 하는 일이니 나라를 위해 적이 걱정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말렸으나 호해는 듣지 않았다. 먼저 사자를 대(代)땅으로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선제께서 나를 태자로 세우려 하실 적에 경은 나를 헐뜯으며 그 일을 막았소. 승상은 그와 같은 경의 불충(不忠)을 꾸짖으며 그 죄가 일족에게 미친다 하였으나, 짐은 차마 그리할 수가 없어 경에게만 죽음을 내리오. 아무쪼록 이 처분을 다행으로 여기고 경은 스스로 알아서 행하시오.>
몽의가 그 명에 대답해 말했다.
“신이 선제의 뜻을 몰랐다고 볼 수도 있으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은 젊어서부터 벼슬하여 선제께서 승하하실 때까지 그 뜻에 순종하고 총애를 잃지 않았으니 어찌 선제의 뜻을 몰랐다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신이 폐하의 재능을 알아보지 못하였을 수도 있으나, 오직 폐하만이 선제를 수행하여 천하를 두루 순행하였으니, 폐하께서 다른 여러 공자 분들보다 훨씬 뛰어남을 제가 어찌 몰랐겠습니까? 선제께서 폐하를 태자로 세우려 생각하신 지 여러 해 되었다면 신이 감히 무슨 말로 말릴 것이며, 어찌 감히 다른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습니까? 말을 꾸며서 죽음을 피하려는 것이 아니라, 선제의 크고 빛나는 이름에 흠집이 될까 두려우니 폐하께서는 부디 깊이 헤아리시어 신이 올바른 죄명으로 죽게 해주십시오.
대체로 공을 이루고 제 몸도 온전히 보전해야 도리가 귀한 것이지, 형벌을 받고 죽게되면 도리도 끝입니다. 옛날에 진목공(秦穆公)께서는 세 사람의 어진 신하를 죽이시고 백리해(百里奚)에게도 죽음을 내리셨지만 모두 올바른 죄목은 아니었습니다. 또 소양왕(昭襄王)은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를 죽였으며, 초평왕(楚平王)은 오사(伍奢)를 죽였고, 오왕(吳王) 부차는 오자서를 죽였습니다. 이 네 임금은 모두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래서 천하가 그들을 꾸짖었으며 어질지 못한 임금으로 나쁘게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도리로 다스리는 이는 죄 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무고한 사람에게는 벌을 내리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부디 굽어 살피시옵소서.”
하지만 사자는 이세황제의 뜻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같은 몽의의 말을 전해주려 하지 않았다. 스스로 죽어주기를 바라다 듣지 않자 사람을 시켜 몽의를 죽이고 말았다.
몽의가 죽자 다음은 몽염 차례였다. 조고의 꼬드김에 이세황제 호해는 다시 몽염에게 죽음을 명하는 글을 내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경의 잘못 또한 적지 않으나, 더한 것은 경의 아우가 저지른 큰 죄이다. 법대로 하면 형제로서 그 죄에 연루된 것만으로도 이미 죽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양주의 감옥에서 행여나 하고 기다리던 몽염은 마른날에 날벼락 같은 그 말에 사신을 잡고 말했다.
“신(臣)의 집안은 선조로부터 지금까지 진나라를 위해 싸워 공을 세운 지 삼대가 됩니다. 이제 신은 비록 죄수의 몸으로 갇혀있으나, 한때는 삼십만 대군을 거느린 장수로서 진나라에 반역하기에도 넉넉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신이 의리를 지켜 이렇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조상의 가르침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며, 선제(先帝)께서 끼치신 은덕을 잊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옛적에 주공 단(周公 旦)은 조카인 어린 성왕(成王)을 도와 주나라를 일으켜 세웠으나, 반역을 꾀한다는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멀리 초나라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뒷날 기부(記府· 기록을 보관하는 창고)를 살피다가 거기 간직되어 있는 주공 단의 글을 읽어보고 자신이 속은 것을 안 성왕은 그 간신배를 죽이고 주공 단을 다시 불러들였습니다. 그리고 ‘주서(周書)’에 ‘반드시 여러 곳에 묻고, 거듭 살펴 행한다’는 구절을 남겼습니다.
지금까지 신의 집안은 대대로 두 마음을 가진 적이 없었으나 일이 이렇게 되고만 것은 반드시 반역을 꾀하는 간신이 있어 저희를 모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폐하를 잘못 이끌어 안으로 군주를 욕보이려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무릇 성왕은 한번 일을 그르쳤으되, 잘못을 고쳐 끝내는 창성(昌盛)하였습니다. 이에 비해 걸(桀)과 주(紂)는 관용봉(關龍逢)과 비간(比干) 같은 충신을 죽이고도 뉘우치지 않았기에 몸은 죽음에 이르고 나라는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잘못은 바로잡아야 하며, 간언(諫言)을 들으면 깨달아야 하고, 두루 여러 곳에 묻고 거듭 살펴 행하는 것이 어진 임금의 도리이다’라는 말씀을 올립니다. 신이 이같이 아뢰는 것은 결코 허물을 면해보고자 함이 아니라, 바른 간언을 올린 뒤에 죽고자 할 따름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가련한 뭇 백성들을 위해 떳떳한 도리로 천하를 다스리도록 하옵소서.”
그리고 자신의 말을 이세황제에게 전해주기를 빌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조고에게서 거듭 다짐을 받고 온 사자가 차갑게 잘라 말했다.
“나는 명령을 받고 형을 집행할 따름이니, 장군의 말씀을 폐하께 전해 올릴 길이 없소.”
이에 몽염은 길게 한숨짓고 말하였다.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죄도 없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한참이나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문득 탄식처럼 말하였다.
“나의 죄는 참으로 죽어 마땅하다. 임조(臨조)에서 공사를 일으켜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리가 넘도록 장성(長城)을 쌓았으니 그 동안에 끊어 놓은 지혈(地穴) 지맥(地脈)이 얼마이겠는가!”
몽염이 그 말을 끝으로 약을 마시고 죽자, 함양에서 그 일을 전해들은 조고는 한시름 놓았다. 하지만 이세황제 호해에게는 그게 시작이었다. 아비를 흉내 내어 동쪽을 순수하며 바위와 돌에 돼먹지도 않은 글을 어지럽게 새기고 돌아온 호해가 가만히 조고를 불러 말했다.
“대저 사람이 태어나 이 세상을 사는 것은, 비유하자면 여섯 마리의 준마가 끄는 수레가 벌어진 틈 사이를 달려 지나가는 것과 같소. 짐은 이미 황제로 천하에 군림하게 되었으되, 귀와 눈으로 좋은 것을 느끼고 싶고, 마음이 즐거운 바를 다하며, 종묘를 안정시키고 만백성을 기쁘게 하며, 천하를 오래도록 지키면서 천수(天壽)를 마치고 싶소. 그런데 대신들은 기꺼이 복종하려 하지 않고, 관리들은 아직도 세력이 강대하며, 공자들은 기어이 나와 제위를 다투려 하니 어찌하면 좋겠소?”
뒷사람들은 흔히 진(秦) 이세황제 시절의 어지러운 정치를 조고 탓으로 돌린다. 그러나 차분히 살피면 그같은 어지러움을 이끌어낸 데는 이세황제 호해의 특이한 개성도 한몫을 했다. 가만히 앉아 절대 권력을 승계한 자들이 그 절대 권력의 무게에 짓눌려 드러내는 인격의 왜곡과 파탄으로, 호해는 이미 그것을 시황제를 장사지내는 과정에서 허영과 잔인함으로 잘 드러낸 바 있었다. 어쩌면 그날의 물음도 아직 넉넉히 채워지지 못한. 그 허영과 잔인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조고가 때를 놓치지 않고 속살거렸다.
“신(臣)이 도끼 아래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히 아룁니다. 대저 사구(砂丘·진시황이 죽은 곳)에서의 모의는 여러 공자들과 대신들이 모두 의심하고 있는데, 그 공자들은 모두 폐하의 형들이며 대신들은 선제께서 뽑아 썼던 인재들입니다. 지난날 그 공자들은 스스로 폐하보다 제위에 가까이 있다고 여기며 살아왔고, 대신들은 세상에 명망을 떨친 귀인들로 여러 대 이 나라에 공을 쌓아왔다 자랑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폐하께서 제위에 오르시어 비천한 신을 치켜세우시고 높은 자리에 오르게 하시어 조정안의 큰일을 맡기시니, 공자와 대신들의 속이 어떠하겠습니까? 겉으로는 따르는 체하면서도 속으로는 못마땅히 여겨 따르지 아니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문치(文治)로 다스릴 때가 아니라 무력으로 천하대세를 결단할 때입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망설이지 마시고 유리한 시세(時勢)를 살려 맞게 쓰시면, 공자와 대신들도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입니다.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가혹하게 하시어, 죄가 크면 저잣거리에 끌어내어 여럿 앞에서 사지를 찢게 하시고 일족도 연좌(連坐)하여 처단하시며, 죄가 적어도 손발이 잘리고 일족이 모두 갇히게 되는 벌을 내리도록 하소서. 선제 때부터의 옛 대신들을 모두 죽여 없애시고, 골육을 멀리하시며 공자라도 폐하께 거역하는 이들은 서슴없이 목 베소서. 가난한 자를 부유하게 하시고 천한 자를 존귀하게 하시며 멀리 있는 자를 가까이 부르소서.
이렇게 하시면 감춰져 있던 덕이 드러나고 숨어있던 민심이 몰려, 해로운 것이 사라지게 되고 간사한 꾀가 쓰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천하가 모두 폐하의 두터운 은덕을 입어, 폐하께서는 더 애쓰지 않으셔도 베개를 높이 하고 주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세황제는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따라 법을 바꾸고 걸려든 공자와 대신들을 조고의 손에 맡겨 처벌하게 하였다.
공자 열두 명이 함양의 저잣거리에서 끔찍한 형을 받아 죽었으며, 공주 열 명도 두현(杜縣)에서 사지가 찢겨 죽었다. 공자 장려(將閭)의 형제 세 사람은 내궁에 감금되어 있다가 죽었는데, 가장 나중에 처형되었다. 이세 황제가 사자를 보내 자신의 말을 전하게 하였다.
“그대는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않았으므로 그 죄가 사형에 해당되기에 형리를 보내 집행하노라.”
그 말에 장려가 빌었다.
“궁중의 의식에서 나는 이제까지 빈찬(賓贊 · 의례를 담당하는 관리)의 지시를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조정에 들어서는 한 번도 예를 어긴 적이 없었으며, 황제의 명을 받들어 사신을 응대할 때도 실언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신하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죽더라도 죄명이나 제대로 알고 싶습니다.”
“나는 죄명을 논하는데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다만 조서를 받들어 삼가 형을 집행할 따름입니다.”
사자가 죄지은 사람 마냥 기어드는 목소리로 받았다.
“하늘이시여, 나는 죄가 없습니다!”
장려는 하늘을 올려보며 처절한 목소리로 그렇게 세 번 외친 뒤에 칼을 꺼내 스스로 목을 찔렀다. 그 형제들도 뒤따라 목을 찔러 자결했다.
골육인 공자와 공주들이 그 지경이니 대신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구경(九卿·조정의 상급직)에서 삼랑(三郞 · 中郞 外郞 散郞으로 조정의 하급직을 이름)에 이르기까지 조고가 쳐놓은 법망을 벗어난 이는 많지 못했고, 군현의 수위(守尉)들 중에도 목숨을 잃은 자가 많았다. 그들의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고 일족도 죄에 따라 벌을 나누어 받았다.
겉보기에 그 모든 일은 조고를 내세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뒤에서 주도하는 것은 오히려 이세황제 호해 쪽이었다. 그걸 잘 보여주는 일이 공자 고(高)의 죽음이었다.
조고가 쳐놓은 법망에 걸려든 공자 고는 도망쳐 목숨이라도 건지려다가, 죄가 가족에게 미치는 것이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상서를 올렸다.
<선제께서 살아 계실 때 신이 궁궐에 들면 음식을 하사하셨고 궁궐을 나서면 수레를 타게 하셨습니다. 어부(御府·황제의 의복을 관장하는 부서)의 옷을 제게 내리셨으며, 마구간의 좋은 말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선제께서 붕어하셨을 때 신 또한 선제를 따라 죽어야 했으나 그러하지 못했으니 이는 아들 된 자로서 불효이고 신하된 자로서 불충입니다. 충효를 아울러 갖추지 못한 자는 세상에 나설 면목이 없으니 이제나마 신은 선제를 따라 죽고자 합니다. 신이 죽거든 부디 선제께서 잠들어 계시는 여산(驪山)기슭에 묻힐 수 있게 해주옵소서. 오직 폐하께서 가엾게 여겨주심만도 크나큰 은덕으로 알겠습니다.>
그 글을 읽어본 이세황제는 대단히 기뻐하며 조고를 불러 보여주었다.
“어떻소? 이만하면 저들이 앞뒤를 헤아릴 겨를이 없을 만큼 몰아댄 게 되겠소? 짐이 베개를 높이 하고 자도 되겠는가, 이 말이오.”
호해가 자랑스레 묻자 조고가 음침하게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신하된 자들이 죽음이 두려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무슨 수로 변란을 꾸밀 수가 있겠습니까?”
그 말에 호해는 더욱 흡족해하며 공자 고가 여산 기슭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고 십만 전(錢)을 내려 그를 장사지내주게 하였다.
나라 안팎을 피로 적시다시피 하며 자신의 정통성과 정당성에 도전하는 세력을 잔혹하게 쓸어버린 이세황제 호해는 다시 거창하게 짓고 세우는 일로 허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두 가지 일이 백성들에게 특히 재앙이 되었는데, 그 하나가 시황제가 짓다만 아방궁(阿房宮)을 마저 짓게 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뒷날 ‘병마용(兵馬甬)’으로 알려진 지하군단(地下軍團)의 제작과 배치였다.
방궁이란 시황제가 함양 부근 아방(阿房) 땅에 짓게 한 궁궐이다. 시황제 35년 구원(九原)에서 운양(雲陽)까지 산을 깎고 골짜기를 메워 곧게 도로를 낸 진시황은 함양을 돌아보며 말하였다.
“함양은 사람이 많으나 선왕(先王)이 지은 궁궐들이 너무 작고 좁다. 짐이 듣건대 주나라 문왕은 풍(豊)에 도읍하고 무왕은 호(鎬)에 도읍하였다고 하니 풍과 호 사이가 바로 제왕이 도읍할 땅이다. 그곳에 천하를 아우른 우리 진(秦)의 위엄을 드러낼 궁궐을 지으리라”
그리고 위수(渭水) 남쪽 상림원(上林苑)에 궁전을 짓게 하였는데, 먼저 아방에 그 전전(前殿)부터 세우도록 했다. 대전은 동서의 길이가 5백 걸음[步]이요 남북의 길이가 5십 길[丈]이었다고 한다. 대전 마루는 그 위에 1만 명이 함께 앉을 수 있을 만큼 넓고, 그 아래에는 다섯 길 높이의 깃발을 세울 수 있을 만큼 덩실했다.
엄청난 것은 궁궐의 규모만이 아니었다. 사방으로 구름다리를 놓아 남산(南山)까지 이르게 하고, 남산 봉우리에 궐루(闕樓)를 세워 표지로 삼으니, 궁궐이 그대로 하늘에 이어진 듯했다. 또 구름다리를 높이 세워 아방에서 위수(渭水)를 건너 함양까지 이르게 함으로서 북극성, 각도성(閣道星)이 영실성(營室星)에 이르는 모양을 흉내 냈다.
시황제는 그 궁전을 짓기 위해 궁형(宮刑)이나 도형(徒刑)을 받은 죄수 7십만을 끌고 와 나누어 부렸다. 한 무리는 바로 아방에서 궁궐을 짓게 하고, 또 한 무리는 여산(驪山)에 나무를 심어 수십 년째 짓고 있는 자신의 능묘(陵墓)를 꾸미게 했다. 그들 중에는 북산(北山)으로 끌려가 석재(石材)를 캐내는 일을 하는 이도 있었고, 재수 없으면 멀리 촉(蜀)땅이며 형(荊)땅까지 가서 목재를 끌고 오는 일을 맡기도 있었다.
원래 시황제는 그 전전(前殿)이 다 지어지면 따로 좋은 이름을 지어 붙이려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이년 만에 시황제가 죽고, 궁궐은 아직 다 지어지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땅이름을 따서 그 궁궐을 아방궁이라 불렀다.
진나라 이세(二世) 원년(元年) 4월 초순 이세황제 호해는 다시 동쪽으로 순수(巡狩)를 떠났다. 골육인 공자와 공주들이며 여러 대 나라에 공을 세운 대신들을 참혹하게 죽여 감히 자신에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게 얼을 빼놓은 뒤였다. 하지만 며칠 되지 않아 함양으로 되돌아온 호해는 갑자기 백관을 불러 모아놓고 말했다.
“선제께서는 함양의 궁궐이 좁다고 여기셨기 때문에 아방궁을 새로이 짓게 하셨소. 그런데 실당(室堂)이 미처 다 지어지기도 전에 선제께서 붕어(崩御)하시니, 일꾼들은 모두 여산으로 보내어져 관을 내리고 능을 꾸미는 일로 돌려졌소. 그러나 이제 여산의 일은 모두 끝이 났소. 그런데도 아방궁을 짓다 만 체로 두는 것은 선제께서 벌이신 일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는 것에 지나지 않소. 결코 자식된 자의 도리가 아니오.”
그러면서 다시 아방궁을 짓게 하였다. 어쩌면 그것은 이세황제의 허영이 아니라, 아비로부터 물려받아 절대 권력을 움켜쥐게 된 자들이 항용 쓰는 수법 - 아비를 추켜세워 그 승계자인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키려함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세황제가 효도를 구실로 벌인 대역사(大役事)는 아방궁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당시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가 2천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한 농부에게 발견되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진용(秦甬) 또는 병마용(兵馬甬) 조성이 그것이다.
진나라에는 원래 순장(殉葬)의 풍습이 있었다. 순장을 했다는 것은 진나라 사람들이 상상한 사후(事後) 세계에서의 삶이 이승에서와 비슷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순장은 뒷날 폐지되어도 그 상상만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 같다.
이세황제 호해는 전에 없던 효심(孝心)으로 저승의 아비를 지켜줄 엄청난 군단을 땅속으로 보내려 했다. 그러나 이미 순장이 없어진 뒤라 흙으로 빚어 구운 인형[土俑]군단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아방궁 공사로 돌리고도 남은 죄수들을 여산 동쪽 십리 되는 곳에 보내 아비의 능묘를 지킬 지하군단을 흙으로 빚어 묻게 했다.
일을 동쪽에서부터 시작하게 한 것은, 시황제가 살아있을 때도 진나라의 적[六國]은 모두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이승에서는 그 모두를 멸망시키고 혼일사해(混一四海)를 이루었지만 저승에서는 다른 변괴가 벌어질 수도 있었다. 그래서 먼저 동쪽부터 든든히 해두고 손이 돌아가는 대로 나머지 세 방향에도 차례로 병마를 묻기로 했다.
역사(役事)는 먼저 진흙으로 실물 크기의 토용을 빚는 일부터 시작되었다. 막일밖에 할 수 없는 일꾼들이 잘 이겨 놓은 진흙으로 손재간 좋은 일꾼들이 병사나 말을 빚었다. 그러나 실물 크기여서 한꺼번에 다 빚으면 너무 크고 무거웠다. 말리고 굽기 위해 옮기거나 갈무리하는데 여간 거추장스럽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머리와 몸통과 팔다리 따위로 나누어 빚은 다음 그것을 말리고 불에 구워 굳힌 뒤에야 끼워 맞추었다.
전(實戰)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치하려 하다 보니, 사람은 보병과 기병, 마부, 궁수(弓手)에 높고 낮은 사관(士官)과 장군들이 모두 빚어져야 했다. 말도 기병들이 타는 말과 병거(兵車)를 끄는 말이 따로 만들어졌다. 거기다가 그늘에 잘 말린 뒤 불에 굽고 색칠까지 해야 일이 끝났다. 눈썹과 눈동자를 그려 넣고 갑옷이며 안장에 멋진 채색까지 한 실물 크기의 말과 사람은 그대로 살아있는 듯했다.
토용을 만드는 일꾼들이 열심히 진흙을 주물러 빚고 말리고 굽고 끼워 맞추고 색칠하는 사이에 다른 일꾼들은 그들 군단이 들어설 굴을 팠다. 위는 열려 있었지만 넉 줄로 늘어선 사람과 말이 수천씩이나 들어설 구덩이라 그걸 파는 일 또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 구덩이 위를 덮을 목재를 다듬는 일도 만만치는 않았다.
그렇게 되니 시황제 때 아방궁을 짓기 위해 끌려 온 7십만 죄수는 고스란히 함양 부근에 남게 되었다. 거기다가 이세황제는 또 건장한 군사 5만을 함양으로 뽑아 올려 활쏘기를 익히고 군견(軍犬) 군마(軍馬)를 조련하도록 하였다. 그만큼 먹여야할 입이 는 셈이었다.
그들을 모두 먹이는데 함양의 곡식만으로는 모자랐다. 이에 각 군현(郡縣)에서 곡식과 사료를 거두어 함양으로 실어 보내도록 했다. 하지만 그 일에 끌려나온 일꾼들은 모두 자기가 먹을 것을 따로 지니게 하고, 함양에서 3백 리 안의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니, 백성들이 겪는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 백성들을 억누르기 위해 법은 더욱 가혹해졌다.
그해 7월에 마침내 반란이 터졌다. 대택향에서 수졸(戍卒)들을 이끌고 들고일어난 진승과 오광이 진(陳)땅에 이르러 ‘장초(張楚)’를 세웠다. 때마침 동쪽으로 사신 갔던 알자(謁者·辭令을 맡은 관직 이름)가 돌아와 반란이 일어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벌써 절대 권력의 독기(毒氣)에 머리가 돌기 시작한 이세황제는 그 발칙한 모반을 믿을 수가 없었다. 벌컥 성을 내며 좌우를 돌아보고 소리쳤다.
“누가 감히 짐에 맞서 들고일어난단 말이냐? 저 놈을 옥에 가두어라. 터무니없는 헛소리로 상하를 아울러 혼란케 한 그 죄를 엄히 물으리라!”.
하지만 이세황제도 속으로는 걱정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얼마 뒤에 동쪽으로 갔던 다른 사자가 돌아오자 가만히 불러들여 물었다.
“형(荊)땅에서 모반이 일었다는데 어찌 되었느냐?”
그 사자는 이미 먼저 돌아온 알자가 당한 일을 듣고 있었다. 황제가 듣기 좋은 말만 했다.
“그것들은 하찮은 도적떼로, 각 군현(郡縣)의 수위(守尉)들이 모조리 붙들어 들여 없애버렸습니다. 지금은 다시 잠잠해졌으니 지엄하신 폐하께서 심려하실 일이 결코 아닙니다.”
황제가 매우 기뻐하며 그 사자에게 상을 내리니 그 뒤로는 아무도 함곡관 이동(以東)의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고는 그때 이세황제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면서 그 총애로 엄청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가혹하게 법을 집행할 뿐더러 사사로운 앙갚음까지 곁들이니 사람들은 멀리서 그의 그림자만 보아도 벌벌 떨었다. 못된 관리들이 또한 그를 본받아 백성들을 모질게 다스렸다. 이에 길에 다니는 사람의 절반은 형벌을 받았던 적이 있는 사람들이고, 저자거리에는 사형당한 사람들의 시체가 나날이 쌓여갔으며, 백성들을 많이 죽인 관리가 충신으로 여겨졌다
조고도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모르지는 않았다. 풀어놓은 눈과 귀를 통해 오히려 금중(禁中)의 누구보다도 사태의 변화를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무시하고 싶어 하는 호해에게 그 진상을 알려 쓸데없이 자극하고 싶지는 않았다.
조고는 어려서부터 환관이 되어 긴 세월 궁중에 살면서 거의 본능의 수준으로 그 특유의 정치적 감각을 익혀왔다. 거기에 따르면, 반란으로 긴장된 황제가 자기도취에서 깨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못되었다. 자기 같은 총신형(寵臣型)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자기도취 같은 권력의 치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고 자신은 아우 조성(趙成)을 우두머리로 삼고 더 많은 사람을 풀어 세밀히 천하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따라서 그 뒤 진승의 장수였던 무신(武臣)이 자립하여 조왕(趙王)이 되고, 위구(魏咎)는 위왕(魏王)이 되었으며, 전담은(田b) 제왕(齊王)이 된 것도 조고는 알고 있었다. 심지어 옛 초나라 땅에서는 항연(項燕)의 아들과 손자를 자처하는 패거리가 회계군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것까지 알았다. 하지만 그 모두가 강 건너 불만 같았는데 이제 그 아우 조성이 돌아와 사태가 더는 방치할 수 없을 만큼 위급함을 알려온 것이었다.
“소부(少府) 장함(章邯)이 낭중령(郎中令)께 뵙기를 청합니다.”
생각에 잠겨있는 조고에게 곁에 두고 부리는 젊은 환관이 알려 왔다. 조고는 얼른 몸을 일으켜 맞으러 나가려다가 짐짓 꼿꼿이 앉아 장함을 불러들였다.
비록 황제의 총애를 받는 낭중령이라고는 하지만, 환관인 조고가 그래도 구경(九卿)의 하나인 소부를 앉아서 맞는다는 것이 큰 무례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조고에게는 굳이 그럼으로써 떠보고 싶은 게 있었다. 바로 장함의 사람됨이었다.
진승과 오광의 반란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진작부터 알았으면서도 조고가 나서서 황제를 깨우쳐주지 않은 까닭에는 황제가 정신차려 정사에 전념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지 않다는 것 말고도 하나 더 있었다. 곧 황제가 유능한 장수를 뽑아 반적(叛賊)들을 쳐부수고 공을 세우게 함으로써 새로운 몽염(蒙恬)이 생겨나는 게 싫어서였다. 이제 하는 수가 없어 평소 장수의 자질이 있다고 알려진 장함을 추천하게 되었지만, 먼저 그 됨됨이를 알아두고 싶었다.
(일껏 저를 장수로 세워줘도 공을 세운 뒤에 등을 돌리면 호랑이 새끼를 기른 꼴이 되고 만다. 내 평생에 두 번 다시 몽염 형제와 같은 적은 만들고 싶지 않다….)
그게 차가운 얼굴로 감추고 있는 조고의 속마음이었다.
"낭중령께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방안에 들어와 가볍게 두 손을 모으며 그렇게 묻는 장함의 태도에는 조고를 환관이라 깔보는 듯한데도 없었지만 권신(權臣)이라고 굽신대는 것은 더욱 아니었다. 조고가 여전히 윗자리에 앉은 채 아랫자리를 내주게 하며 깐깐하게 말했다.
“그렇소. 내 소부께 물어볼 일이 있어 보자 하였소.”
“무슨 일이신지….”
장함이 별로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조고가 권한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조고가 꼿꼿한 자세를 조금 허물며 물었다.
“소부께서는 지금 함곡관 밖의 도적들에 대해 어떻게 알고 계시오?”
“기세가 심상치 않다고 들었습니다. 그 한 갈래가 희수(戱水)까지 이르렀는데 무리가 십만에 이른다고 하더군요.”
말은 짧아도 조고로서는 장함이 한 말에 은근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아우에게 수만 전(錢)을 주고 사람을 풀어 알아낸 것을 궁궐 안에서 지내다시피 하는 장함도 훤히 알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비록 소부께서는 폐하를 위해 돈과 곡식을 셈하고 계시지만 실은 이 나라의 기둥이나 대들보감이라 들었소. 그런데 이제 보니 헛소문이 아닌 듯하구려. 황실의 살림꾼에 지나지 않으면서 어찌 그렇게 함양 밖의 소식까지 훤하시오?”
“산하(山海)와 지택(池澤)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것들에게서 귀동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라의 기둥이나 대들보감이라니요? 지나친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소. 선제께서 일찍 천하를 하나로 아울러 태평케 하시지 않았다면, 소부께서는 진작부터 장수가 되어 천군만마를 이끌고 전장을 내달아야 할 사람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소.”
“그 또한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글을 읽는 중에 몇 권의 병서(兵書)를 읽고, 몸을 기르고 닦는 사이에 창검을 다루는 일과 활쏘기를 약간 익혔을 뿐입니다.”
겸손하면서도 자부(自負)가 전혀 없지는 않구나-조고는 속으로 그렇게 헤아리면서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한 것을 물었다.
“내 이제 폐하께 소부(少府)를 장군으로 추천하려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무리 궁궐의 문호(門戶)와 백관의 출입을 도맡아 다스리는 낭중령이요, 이세황제의 유별난 믿음과 총애를 받고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조고는 환관이었다. 구경(九卿)의 하나를 제 방으로 불러 하는 말치고는 지나친 데가 있었다. 하지만 장함은 조금도 고까워하는 표정이 없었다.
“이 몸이 비록 재주 없으나 폐하께서 써주신다면 몸과 마음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정중하게 말해놓고 다시 은근한 말투로 조고에게 사사로운 고마움까지 나타냈다.
“아울러 못난 이 몸을 위해 힘써주신 낭중령의 은혜도 마음에 새겨 길이 잊지 않겠습니다.”
마음먹기에 따라 커질 수도 있고 작아질 수도 있으며[能小能大], 굽힐 줄도 젖힐 줄도 아는 위인이로구나-조고는 그런 장함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재빨리 셈을 했다. 위험하지만, 턱없이 곧기만 하거나 앞 뒤 없이 부딪치고 보는 것들보다는 낫다. 감시만 게을리 하지 않으면 오래도록 밑에 잡아둘 수가 있고, 맞서려 들 때도 이익으로 달래볼 수가 있다….
“좋소. 그럼 폐하께 말씀 올릴 터이니 소부께서도 도적을 깨뜨릴 방략(方略)을 준비해 두시오. 그리고 나중에 폐하께서 백관을 불러 놓고 물으시거든 소부께서 일어나 그 방략을 아뢰도록 하시오.”
이윽고 조고는 장함에게 그렇게 이른 뒤에 황제를 찾아갔다. 그때 이세황제 호해는 궁궐 뒤뜰에서 미녀들 속에 파묻혀 질탕하게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옛 스승이자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조고만은 어려워할 줄 알았다.
“낭중령께서는 무슨 일로 짐을 찾아 오셨소?”
호해가 좌우를 물리치고 조고에게 물었다. 조고가 가장 충성스러운 체 말했다.
“폐하. 재주 없이 나라의 봉록만 축내는 무리들이 아무래도 동쪽의 일을 크게 그르친 것 같사옵니다. 진나라를 거역한 수졸(戍卒)의 무리가 함곡관을 넘어 희수(戱水)가에 이르렀다고 하옵니다. 속히 문무백관을 모으시어 그 도적들을 깨칠 논의를 하게 하옵소서.”
굳이 백성들의 봉기를 아는 체 하고 싶지 않아 하던 호해도 조고가 정색을 하고 그렇게 말하자 정신이 확 들었다. 미룰 것도 없이 조고에게 그 날로 백관(百官)을 모두 불러 모으게 했다. 백관들이 대전에 늘어서자 호해가 그들에게 물었다.
“도적떼가 마침내 도성 가까이 밀려들었다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소?”
그러나 백관들은 조고의 눈치만 볼 뿐 아무도 나서서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황제의 신임을 받아 법을 집행하는 조고가 그 동안 수많은 대신들에게 죄를 씌워 가혹하게 죽여 온 터라 모두가 그의 눈에 띌까 두려워했다. 그때 장함이 일어나 말했다.
적들이 이미 이곳까지 이르렀을 뿐더러 그 머릿수가 많고 세력이 강대하다 하니, 이웃 군현에서 군사를 끌어오기는 때가 늦었습니다. 지금 여산과 아방에는 죄수들이 많이 끌려와 있는데 이들을 군사로 써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청컨대 그들의 죄를 사면해주고 무기를 내리시어 도적들을 쫓아내도록 하시옵소서.”
함양에는 그동안 화초처럼 길러온 5만 군사뿐이라 달리 길이 없었다. 이에 이세황제는 다음날로 천하에 대사면령(大赦免令)을 내리고 아방궁을 짓던 죄수와 노비의 자식들 중에서 젊고 날랜 장정 20만을 뽑아 장함에게 주었다.
“경에게 대장군의 부월(斧鉞)을 내리니, 아무쪼록 도적을 무찔러 사직의 근심을 없이하고 놀란 백성들을 진정케 하라!”
장함은 그 날로 그들에게 병기와 복색을 내주게 해 군졸로 삼고, 함양에 남아있는 조련된 군사 약간을 긁어모아 그 군대의 허리로 삼았다. 그리고 밤이 되기 바쁘게 그들을 이끌고 서둘러 희수를 향했다.
“조련되지 않은 군사를 급하게 싸움터로 내모는 것은 백성을 함부로 죽이는 짓이라 했소. 장군께서는 너무 싸움을 서두르고 계신 게 아니오?”
걱정이 된 대신(大臣) 하나가 떠나는 장함을 잡고 그렇게 말했다. 장함이 자신에 찬 얼굴로 받았다.
“비록 내 군사들이 잘 조련되지는 않았으나, 죄수로 끌려와 오래 함께 먹고 자며 일해온 자들이라 나름의 규율과 상하는 있습니다. 오다가다 따라붙은 농투성이만이야 못하겠습니까?
또 이들은 지금 죄를 사면 받고 진나라 군사가 되어 한창 기세가 올라 있습니다. 그동안 싸움다운 싸움 한번 못해보고 여기까지 와 기강이 해이해진 갈가마귀떼와는 다를 것입니다. 게다가 머릿수도 우리가 훨씬 많으니 무얼 더 걱정하겠습니까?“
그런 장함의 헤아림은 옳았다. 그때 주문(周文)의 무리는 기강이 풀어질 대로 풀어져 있었다. 희수 가에 이른지 여러 날이 되도록 맞서오는 진나라 군사가 없자, 경계심은 무디어지고 허풍만 늘어갔다.
“저것들이 겁을 먹었다. 우리가 함양으로 치고 드는 수밖에 없겠구나.”
주문은 그런 말로 군사들의 기세를 올렸으나, 속으로는 난감하였다. 말이 그렇지 아무리 망해간다 해도 황제가 있는 진나라의 도성을 들이치는 게 쉬울 리 없었다. 함부로 밀고 들지도 못하고 물러설 수도 없어 엉거주춤 머물다 보니, 군사들의 기강이 말이 아니었다. 느느니 노름과 술이요, 취했다하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인근의 민가를 돌며 약탈과 행패를 일삼았다.
렇다고 장수인 주문까지 마음을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성문을 드나드는 백성들 사이에 간세(奸細)를 끼워 넣어 오히려 전보다 더 세밀하게 함양 성안의 움직임을 살피게 했다. 그들이 맡은 일에 게으르지 않아 그 날 성안에 대사면령이 내리고 좌수들 중에서 군사를 뽑는다는 소식은 진작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 급작스레 얽은 군대가 바로 그 날 밤에 자기들을 급습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삼경 무렵 하무(枚·군사들이 소리를 내지 못하게 무는 나무)를 물린 장함의 20만 대군이 갑자기 주문의 군사를 들이치자 조용하던 희수 가는 한순간에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장함의 군사들이 지른 불로 대낮같이 훤한 강변에서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도살이 벌어졌다. 기강이 풀어져 보초도 제대로 세워놓지 않고 술이 취해 자고 있던 ‘장초(張楚)’의 장졸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희수는 불길과 진병(秦兵)의 창칼을 피해 뛰어든 그들의 시체로 메워지고, 강변 모래밭은 그들의 피로 흥건히 젖었다.
홀로 깨어있던 주문이 발을 구르며 장졸들을 몰아댔으나 이미 기운 대세를 돌이킬 수는 없었다. 어둠을 틈타 겨우 몸을 빼내 함곡관으로 달아났다. 날이 밝은 뒤 함곡관을 빠져 나와 남은 군사를 수습해보니 한때 십만을 웃돌던 머릿수가 3만을 채우지 못했다.
“조양(曹陽)으로 가자. 거기서 다시 한 번 세력을 키워보자.”
주문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들이 함곡관으로 들기 전 마지막으로 기세를 올렸던 땅으로 군사를 물렸다. 주문의 군사들이 쫓겨 가자 다급한 불은 끈 셈이었다. 함곡관 안은 겉으로는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조고에게 보내는 이세황제 호해의 믿음과 총애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조고는 주문과 그 군사들이 자극한 위기의식 때문에 호해가 권력의 도취에서 깨어나는 게 두려웠다. 거기다가 대신들이 쉽게 황제를 볼 수 있음으로써 자기가 저지른 못된 짓을 일러바치는 것도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머리를 굴린 끝에 꾀를 내어 호해에게 권했다.
“선제께서는 일찍 등극하시어 천하를 다스리신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신하들이 감히 그릇된 짓을 하거나 모질고 사된 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지금 폐하는 젊으신 데다 이제 막 즉위하셨으면서 어찌하여 나랏일을 모두 대신들과 의논해 결정하려 하십니까? 일이 잘못되면 여러 대신들에게 폐하의 어둡고 모자란 곳만 보여주게 됩니다. 천자가 스스로 짐(朕)이라 하는 것은, 본래 천자란 그저 한 크고 거룩한 조짐(兆朕)같은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천자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쉽게 볼 수 있고, 그 소리를 아무나 들을 수 있게 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조고가 가장 충성스러운 체 그렇게 말하니, 모처럼 깨어나려던 호해의 정치적 감각은 다시 조고가 교묘하게 비틀어놓은 권력의 단맛으로 무디어졌다. 그때부터는 깊은 금중(禁中)에 거쳐하면서 오직 조고하고만 나랏일을 의논했다.
장함은 희수(戱水) 가의 한 싸움으로 진승(陳勝)이 보낸 십만 대군을 여지없이 쳐부수고도 급하게 적을 내몰지는 않았다. 그 장수 주문(周文)이 남은 졸개들을 이끌고 함곡관을 빠져나가도 뒤쫓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뒤 달포가 넘도록 병력을 움직이지 않았다. 위수 남쪽 넓은 벌판을 골라 군사들을 풀어놓고 오직 그들을 조련하는 데만 힘을 쏟았다.
그 사이 주문은 조양(曹陽)까지 물러나, 희수에서 살아 도망쳐온 군사들을 수습하고 새로 인근의 백성들을 받아들여 세력을 불려가고 있었다. 사람을 시켜 살피고 있던 조고가 아우 조성을 보내 물었다.
“장군은 어찌하여 도적을 쫓아 그 뿌리를 뽑아버리지 않으시오?”
“쥐도 막다른 곳에 몰리면 되돌아서 고양이를 무는 법이외다. 저들은 바로 그 막다른 곳에 몰린 쥐 같은 무리라, 공연히 뒤쫓다가 소중한 군사를 잃을까 걱정되어서 그랬소이다.”
“그래도 한 달이 넘도록 군사를 움직이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이오? 지난번에 군사를 낼 때는 따로 조련이 필요 없다며 오히려 서둘지 않았소?”
“그때는 많은 머릿수로 제 땅에 앉아서 먼길을 온 도적떼를 갑자기 들이치는 일이었소. 기세와 신속함을 위주로 하는 야습(夜襲)이라 역도(役徒)로서의 조련만으로도 되었지만, 이제는 다르오. 함곡관을 나가면 우리는 적지에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싸워야 하니, 조련이 없으면 그야말로 아무런 가르침 없이 백성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꼴이 되오.”
장함은 그렇게 말해놓고 다시 덧붙였다.
“하지만 돌아가서 낭중령께 심려 말라 이르시오. 선제(先帝) 때 싸워본 적이 있는 장졸들을 찾아 모아 머리와 허리로 삼았더니, 다행히도 조련이 빨라져 이제 곧 쓸만한 군사가 될 듯하오. 군량과 병기만 지금처럼 대어주신다면 이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가 크고 작은 도적떼를 모조리 쓸어버리겠소!”
그리고 꼭 두 달을 채운 뒤에야 군사를 휘몰아 함곡관을 나갔다. 이때 장함을 거들어 그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그 동안 찾아낸 옛 진군(秦軍)의 장수 왕리(王離)와 소각(蘇角=蘇公 角이라고도 한다), 섭간(涉閒) 등이었다.
한편 그 무렵 조양에 머물며 힘을 기르던 주문은 두 달 전 함곡관으로 밀고들 때의 세력을 거의 회복해 있었다. 장함이 뒤쫓아온다는 소리를 듣자 새로운 각오로 전열(戰列)을 펼치고 매서운 반격을 노렸다. 일찍이 대재상 춘신군(春信君)과 명장 항연(項燕) 밑에서 자신을 단련하였고, 진(陳)땅의 현인(賢人)으로 널리 우러름을 받았던 주문에게는 무엇보다도 희수 싸움으로 짓밟힌 자신의 위신을 되살리는 일이 급했다.
양군이 맞닥뜨린 것은 조양정(曹陽亭)에서 멀지 않은 들판이었다. 이전의 세력을 회복했다고는 하나 주문의 군사는 장함이 거느린 2십여만에 비해 우선 머릿수부터가 훨씬 적었다.
“겁내지 말라. 적군은 죄수들을 끌어 모아 온 오합지중(烏合之衆)이다. 한 싸움으로 무찔러 우리 장초(張楚)의 기상을 보여주자!”
주문이 그렇게 봉기군의 의기(義氣)에 호소했으나, 넓은 들판에서 정면으로 장함을 맞은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머릿수뿐만 아니라 규율과 조련에서도 진군(秦軍)은 이미 두 달 전의 그 죄수와 노비를 뒤섞은 잡동사니가 아니었다. 거기다가 날카로운 병기와 든든한 갑옷에 병참(兵站)까지도 주문의 군대와는 달랐다. 주문의 군사들은 무엇이든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데 비해 장함의 군대는 아직 본국 진나라와 이어진 병참선(兵站線)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문의 군대가 장함의 진군(秦軍)에게 뒤지는 것은 무엇보다도 장수들이었다. 항연 군대의 시일(視日)이나 춘신군의 모사(謀士)였다는 전력이 말해주듯이 주문 자신도 제대로 된 무장(武將)은 못되었지만, 그 밑의 장수들은 더했다. 잘해야 녹림(綠林)이나 초적(草賊)의 우두머리요, 그도 아니면 뚝심 하나로 장수노릇을 하는 건달이 고작이었다.
거기 비해 장함은 비록 문관(文官)인 소부(少府)일을 맡아보고는 있었으나 오랫동안 자신을 갈고 닦아온 장재(將材)였다. 장수들 중에도 그가 힘들여 찾아 데리고 나온 왕리와 소각, 섭간 등은 수많은 싸움터를 헤쳐온 무골(武骨)들로, 시황제 시절에 진나라 장수들이 누리던 명성을 이을 만했다. 특히 왕리는 진의 또 다른 명장 왕전(王剪)의 조카로서 일찍부터 몽염을 따라 흉노와 싸우면서 장수로서의 이력을 쌓아온 맹장이었다.
나중에 싸움터에 이르러 주문의 진세를 둘러본 장함이 장수들을 불러 명을 내렸다.
“왕리와 소각 섭간은 각기 한 갈래 갑병(甲兵)을 이끌고 적진을 관통하여 도적 떼를 몇 토막으로 흩어놓으라! 그 뒤를 우리 삼군(三軍)이 일시에 들이쳐 토끼 몰듯하리라!”
그러자 세 장수는 각기 한 갈래의 갑병을 휘몰아 나름으로는 진세(陣勢)라고 벌려놓은 주문의 대군 속으로 뛰어들었다. 갑옷으로 단단히 몸을 감싼 체, 당시의 어떤 병기보다 강하고 날카로운 진과(秦戈)를 앞세운 군사들이 대쪽을 쪼개듯 하는 기세로 뚫고 나가면서 주문의 대군을 서너 토막으로 갈라놓았다. 놀란 주문이 끊긴 지휘선(指揮線)을 다시 이으려고 하는데 틈을 주지 않고 장함이 남은 군사를 휘몰아 파도처럼 덮쳐왔다.
그래도 머릿수가 적고 조련과 병기에서 아울러 뒤진 주문의 군사들이었다. 거기다가 전술까지 서툴러 벌판에서 정규전을 벌이다 강습(强襲)을 당하고 나니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순식간에 뭉개져서 대오고 뭐고 없어졌다. 장졸을 가리지 않고 거미새끼처럼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기 바빴다.
기실 이런 형태의 싸움은 나중에 항우의 강병(强兵)을 만나 무너질 때까지 장함이 관동(關東)의 반란을 진압할 때 쓴 전략 전술의 한 전형이 되었다. 곧 집중되어 강화된 전력으로 분산되어 약화된 봉기군의 갈래를 강습으로 일격에 격파해버리는 방식이었다.
봉기군의 우두머리들은 그 동안 압제에 시달린 백성들의 지지아래 소규모의 병력밖에 없는 군현(郡縣)을 상대로 잇따라 승리해왔다. 거기다가 실속 없이 요란하기 만한 자기들의 기세에 스스로 취하여 마땅히 의지해야할 유격전(遊擊戰)의 이점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진나라 조정이 마지막 힘을 짜내 내보낸 정규군의 대군을 겁 없이 정면으로 맞서다가 무참하게 무너져 갔다.
주문이 패군을 수습한 것은 조양에서 한나절이나 도망을 친 뒤였다. 뒤쫓는 군사들의 함성이 잦아져 한숨을 돌리며 주위를 돌아보니 거기까지 따라온 것은 부장(部將) 두엇과 몇 십기(騎)의 호위군사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냐?”
주문이 그렇게 묻자 길을 잘 아는 군사가 대답했다.
“민지(澠池)로 가는 길목입니다.”
그때 부장 가운데 하나가 일깨워주듯 말했다.
“민지라면 지난번 우리가 지나갈 때 백성들이 매우 따뜻이 맞아주던 곳입니다. 장군께서는 먼저 그리로 가셔서 진왕(陳王 · 진승)께 구원을 청하시는 한편 그곳 백성들을 다독이고 계십시오. 저는 여기서 기다리다가 흩어진 인마를 모아 그리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주문도 달리 길이 없어 그 부장의 말을 따랐다. 그 사이 모여든 몇 백 명을 데리고 먼저 민지로 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진승에게 위급을 알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 사이에서 새로 장정들을 뽑았다. 이튿날이 되자 조양에서 흩어진 인마도 셋에 하나 정도는 찾아들어 다시 몇 천의 군세(軍勢)를 이루었다. 그대로 가면 다시 오래잖아 몇만 군사는 모을 수 있을 듯도 싶었다.
하지만 장함이 그럴 여유를 주지 않았다. 희수에서와는 달리, 이번에는 아예 끝을 볼 생각인지, 장함은 싸움에 이긴 군사를 며칠 쉬게 하지도 않고 바로 주문을 뒤쫓기 시작했다. 사방에 사람을 풀어 주문이 달아난 곳을 알아내고, 열흘도 안 돼 민지로 밀고 들었다.
만이 넘는 군사로도 두 번이나 깨강정 으깨지듯 했는데, 만 명도 안 되는 패잔병으로 승세를 타고 뒤쫓아 오는 대군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대는 사이에 군사들은 흩어지고 주문을 비롯한 몇 백 장졸만이 겹겹이 에워싼 장함의 진군(秦軍) 속에 갇히고 말았다. 사방을 둘러보던 주문이 문득 칼을 빼들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외쳤다.
“내 끝내 망국(亡國)의 한을 풀지 못하고 무도한 진나라의 칼날 아래 죽게 되었구나. 유유한 푸른 하늘아, 네가 이 몸을 빌어 뜻한 바가 무엇이더냐!”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그런 주문과 함께 진나라를 쳐 없애려고 서쪽으로 밀고 들었던 진승의 정예군 한 갈래가 자취 없이 사라졌다.
주문을 죽인 장함이 다음으로 칼끝을 들이댄 것은 ‘장초(張楚)’의 또 한 갈래 강력한 별동대(別動隊)인 오광의 대군이었다. 하지만 기실 그때 이미 오광은 살아있지 않았다. 거느리던 장수에게 죽음을 당해 그 군사는 전장(田藏)이란 장수가 거느리고 있었다.
진승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가왕(假王 · 대리왕)까지 된 오광은 원래 적잖은 장졸을 이끌고 곡창지대인 형양(滎陽)을 차지하러 갔다. 그러나 이사(李斯)의 아들인 이유(李由)가 삼천군수(三川郡守)가 되어 형양을 잘 지키는 바람에 성을 떨어뜨릴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서쪽으로 간 주문의 군대가 장함에게 궤멸되었다는 풍문이 들리자 군심(軍心)이 흉흉해지고, 장수들 사이에는 불화가 생겼다.
“주문의 군사들은 이미 싸움에 크게 져서 뿔뿔이 흩어졌고, 장함이 이끄는 진나라의 대군은 머지않아 이곳으로 밀려들 것이라 하오. 그런데 우리는 형양성을 에워싼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으니, 만약 이때 진나라 병사들이 쳐들어오면 반드시 차마 못 볼 꼴을 보게 될 것이외다. 형양성에는 적을 성안에 가둬두기에 넉넉한 군사들만 남겨놓고 나머지 날랜 군사들은 모두 서쪽으로 가서 장함의 대군과 맞서 싸우는 게 차라리 옳소. 그런데 지금 가왕 오광은 거만하고 횡포하기만 할뿐, 군사를 부리는 일은 전혀 알지를 못하니, 그와는 아무 일도 함께 꾀해볼 수가 없소. 이대로 가다가는 이 형양성에 묶여 앞뒤로 적을 받고 죽게될 뿐이외다. 이제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큰일을 그르치고 말 것이오!”
전장이란 자가 공공연히 들고일어나 다른 장수들을 쑤석거렸다. 그 또한 권력이 부패시킨 것일까. 예전에는 의리 있고 남을 보살필 줄 안다 소리를 듣던 오광이었다. 그러나 왕이 된 진승 다음가는 권력을 움켜쥐자 그렇게 사람이 달라진 것이었다.
“좋소. 진왕의 명을 위조하여 오광을 죽여 버립시다. 나중에 자세한 사정을 아뢰면 진왕께서도 우리 충정을 알아주실 것이오.”
그러잖아도 오광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장수들이 전장을 편들어 일을 꾸몄다. 먼저 진왕의 명을 사칭하여 오광을 죽인 뒤에 다시 진왕에게 오광의 목을 보내며 그 간의 사정을 저희에게 유리하게만 꾸며 알렸다.
전장(田藏)의 무리가 보낸 사자와 함께 오광(吳廣)의 목이 이르자 진왕(陳王) 진승은 놀랍고도 슬펐다. 돌이켜 보면 오광은 오랜 벗이었을 뿐만 아니라 목숨을 걸고 큰일을 함께 이룬 동지이기도 했다. 특히 수졸(戍卒)들과 더불어 들고일어나 세운 <장초(장초)>로 보면 그는 누구보다 우뚝한 건국공신이었다.
그 때문에 진승은 자기가 없는 곳에서는 자기를 대신해 왕 노릇을 할 수 있게 오광을 가왕(假王)으로 삼았다. 그리고 힘깨나 쓰는 장수와 날랜 군사를 있는 대로 긁어모아 딸려주며, 몰려드는 유민들을 먹이는데 없어서는 안 될 곡창지대인 형양(滎陽)을 치러 보냈다. 빼앗아야할 땅이 요긴한 만큼 빼앗은 공도 크리라 여겨 그리한 것인데, 이제 그 오광이 죽어 목만 돌아온 것이었다.
진승은 떨리는 손으로 사자가 바친 글을 읽어보았다. 먼저 오광을 죽인 다음 그 죄상을 알려온 것도 그렇지만, 알려온 오광의 죄상 또한 석연치 않은 데가 많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진승은 비정한 권력의 속성에 속속들이 길들여져 있었다. 아무리 전장과 그를 따르는 패거리의 죄가 뚜렷하다 해도, 하루가 멀다하고 불길한 파발이 달려오는 때에 대군을 이끌고 나가있는 장수들에게 죄를 물을 수는 없었다.
(오광. 뒷날 내 반드시 그대의 한을 풀어 주리라......)
진왕은 속으로 그렇게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 전장(田藏)이 원하는 대로 해주었다. 사자를 형양성으로 보내 전장에게 초나라 영윤(令尹·재상)의 인수를 내리고, 더하여 그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올렸다.
오광을 대신해 모든 장졸을 맡게된 전장은 곧 자신이 우겨온 대로 군사를 움직였다. 먼저 이귀(李歸)에게 장수 몇과 군사 약간을 남겨주며 멀찌감치 형양성을 에워싸고만 있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나머지 날래고 굳센 군사들을 모두 이끌고 기세 좋게 장함을 찾아 나섰다. 유리한 곳을 골라 지키며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공명심에 휘몰려 목숨을 재촉하러 나선 셈이었다.
전장이 군사들을 휘몰아 한나절이나 달린 끝에 장함이 이끄는 진나라 대군을 찾아낸 것은 오창(敖倉) 부근이었다. 오창에는 진나라가 건조한 황토지대의 구릉을 이용해 큰 구덩이를 파고 곡식을 갈무리하던 일종의 지하 창고가 있었다. 창고는 이미 굶주린 유민들에게 털리고 없었지만, 그래도 그곳은 부근의 다른 어떤 고을보다 곡식이 넉넉했다,
주문을 죽인 장함은 오광을 들이치기 전에 먼저 오창을 차지하고 함양에서 멀어질수록 불안해지기 시작한 군량부터 확보했다. 그리고 주문과의 싸움으로 지쳐있는 장졸들을 잠시 쉬게 하는 한편, 탐마(探馬)를 풀어 형양성의 형세를 알아보고 있는데, 전장이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찾아 온 것이었다.
탐마(探馬)가 달려와 적병이 가까웠음을 알리자, 장함은 전처럼 훤히 트인 벌판에 진세(陣勢)를 벌이게 했다. 병졸들의 머릿수를 부풀리는 방식도 아니고, 장수의 재주를 자랑하는 것도 아닌 배치로서 겉보기에는 평범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실은 그들이 함곡관을 나오기 전 가장 공들여 익힌 진세였다.
처음 봉기했을 무렵에 누렸던 승세에 취해 적을 모르기는 전장도 죽은 주문에 못지않았다. 거기다가 전장은 타고난 무골(武骨)의 단순함으로 공을 서둘기까지 했다. 장함이 따로 유인 계책을 쓸 필요도 없이, 그물처럼 펼쳐 놓은 진세(陣勢) 속으로 장졸들을 휘몰아 뛰어 들었다.
장함은 장수들을 풀어 전장의 퇴로를 끊게 한 뒤, 남은 전군을 들어 무서운 기세로 받아쳤다. 빽빽한 창칼의 숲 속에 갇힌 뒤에야 전장은 비로소 왜 주문 같이 헤아림 깊은 장수가 그렇게 어이없이 무너졌는지 알 듯했다.
“물러나라. 뒤로 몰리 물렀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한 뒤에 싸우자!”
전장은 소리높이 외치며 군사를 물리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사방을 철통같이 둘러싼 진군(秦軍)들을 뚫고 나올 수는 없었다. 전장은 적에게 에워싸여 어지럽게 뒤엉킨 군사들 속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다가 끝내는 누군지도 모를 병졸의 칼에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말았다.
그 뒤 장함이 보여준 용병(用兵)의 신속함은 실로 눈부신 바 있었다. 들짐승 몰듯하여 전장의 군사들을 모조리 잡아죽인 장함은 쉴 틈도 없이 군사를 휘몰아 형양성으로 달려갔다. 길이 멀지 않아 자정 무렵에는 전장의 부장(副將) 이귀가 진채를 얽은 곳에 이를 수 있었다.
그때 저희 상장군 전장의 기세만 하늘같이 믿고 있던 이귀는 가까운 장수들과 함께 태평스레 술을 마시고 있었다. 갑자기 군사 하나가 달려와 알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많은 사람과 말이 다가오는 기척이 있습니다. 횃불까지 켜들었는지 하늘 한 모퉁이가 훤합니다.”
“그게 어느 쪽이더냐?”
“동북쪽입니다.”
그러자 이귀는 혼자 다 아는 척 말했다.
“밤중에 행군하면서 군졸들에게 하무[枚]도 물리지 않고 횃불까지 켜들었다면 야습을 하려는 군사가 아니다. 거기다가 동북쪽에서 온다니 진군(秦軍)도 아니다.”
함께 술을 마시던 부하 장수 하나가 아무래도 걱정되는지 조심스레 권했다.
“그래도 장졸들에게 영을 내려 만일에 대비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무엇에 홀렸는지 이귀는 얼굴까지 실쭉해지며 핀잔주듯 말했다.
“소란 떨 거 없소. 상장군께서 이기고 돌아오시는 길이 아니면 진왕(陳王)께서 원병(援兵)을 보내신 것일 게요.”
그 사이 말발굽 소리는 군막 안에서도 들을 만큼 가까워지더니 갑자기 망보기를 나갔던 군졸이 숨이 턱에 찬 체 뛰어들며 말했다.
“어느 편인지 모를 기마대가 진채로 뛰어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적 같습니다.”
이어 더욱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적이다. 적의 야습이다!”
그제야 이귀도 술자리를 털고 일어났으나 혼란은 이미 걷잡을 수가 없는 상태로 빠져들고 있었다. 적병 기마대가 진채 안을 무인지경 휩쓸 듯 베고 찌르며 내닫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불길이 솟아올랐다. 오래잖아 적군 보졸(步卒)들도 함성과 함께 밀려들었다.
거기다가 어떻게 연통이 되었는지 그 동안 굳게 지키기만 하던 형양성 안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갑자기 성벽 여기 저기 횃불이 오르더니, 뒤이어 적지 않은 인마가 함성과 함께 성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잖아도 얼마 되지 않던 이귀의 군사는 그와 같이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얼이 빠졌다. 한번 싸워볼 엄두도 내보지 못하고 달아나 제 한 목숨 건지기에도 급했다. 하지만 적이 워낙 대군인데다 앞뒤로 가로막고 들이치니 살아서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그날 밤 이귀를 비롯해서 형양성 밖에 남겨졌던 <장초(張楚)>의 장졸들은 아무도 에움을 벗어나지 못하고 몽땅 놀란 넋이 되고 말았다.
주문이 이끌고 함양으로 쳐들어간 군대와 오광이 이끌고 형양성을 공격하던 군대는 진왕(陳王) 진승의 군대 중에서 가장 굳세고 날랜 군사들로 이루어져있었다. 몇 번의 싸움으로 그 두 갈래의 군대를 여지없이 쳐부순 장함은 다시 진현(陳縣)부근에서 봉기한 다른 농민군을 치기 시작했다. 관동(關東) 민란의 괴수로 지목된 진승의 근거지인 진현으로 밀고 들기 전에 등 뒤에서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을 미리 쓸어버리기 위함이었다.
그들 중에서 장함이 먼저 군사를 보내 치게 한 것은 등열(鄧說)이 이끄는 세력이었다. 등열은 진승과 같은 양성(陽城) 사람으로 담(담) 땅에서 군사를 일으켜 그 수가 몇만에 이르렀다. 그러나 진승 밑으로 들어가지 않고 따로 세력을 이루어 진나라에 맞서고 있었다.
장함은 왕리(王離)에게 군사 3만을 내주며 등열을 치게 했다. 등열은 겁내지 않고 맞서 싸웠으나 병기가 날카롭고 조련이 잘 된 데다 승세까지 탄 진군을 당해낼 수 없었다. 한 싸움에 무참하게 져, 거느리고 있던 군사를 모두 잃고 제 한 몸만 겨우 빼내 진승이 도읍 삼고 있는 진현(陳縣)으로 달아났다.
그때 허(許)땅에는 질현(9縣) 사람 오봉(伍逢·史記에서는 伍徐)의 군사들이 머물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이 진나라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자 그도 농민군을 모았는데, 그 세력이 또한 만만치 않았다. 보기(步騎) 십만이라 큰소리치며, 그 또한 진승 밑에 들지 않고 따로 한 갈래 세력을 이루었다.
장함은 왕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대군을 몰아 오봉을 쳤다. 오봉이 힘을 다해 버텨 보았으나 될 일이 아니었다. 하루도 안돼 군사들은 장함의 진군에게 조각조각이 나 흩어져 버리고 오봉만 겨우 목숨을 건져 진승에게로 달아났다.
등열과 오봉을 쳐 없애자 진현 부근에는 진승이 직접 거느린 군사들 말고 달리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이 없어졌다. 이에 장함은 드디어 <장초(張楚)>의 도읍인 진현으로 밀고 들었다. 이세황제 2년 섣달 초순으로, 장함이 함곡관을 나온 지 한 달만이요, 진승과 오광이 군사를 일으킨 지 다섯 달만의 일이었다.
그해 7월 진승이 대택향(大澤鄕)에서 수졸(戍卒) 9백과 더불어 일어나 왕위에 오를 때까지 승승장구하던 시절의 엄청난 기세를 돌이켜 보면, 그같이 급속한 반전(反轉)은 얼른 이해하기 어려운 데가 있다. 어떤 이는 그걸 그저 하늘의 뜻[天命]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하늘의 뜻 같은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장함의 뛰어난 용병술과 그가 이끈 군사들의 우수함을 그 원인으로 내세운다.
틀림없이 장함은 여러 가지로 뛰어난 장수였다. 그러나 뒷날의 비루한 왕 노릇과 자살로 끝을 맺은 그의 삶을 총체적으로 헤아려보면 그가 뛰어났다 해도 천하대세를 바꾸어놓을 만큼은 아니었다. 장함이 거느린 군사들도 그랬다. 사면된 죄수와 노비의 자식으로 꾸며진 군대치고는 잘 싸웠지만, 오래잖아 그들 이십만이 산 채로 한 구덩이에 묻히는 것으로 보아 반드시 시대 흐름을 되돌릴 만큼 대단한 군사들은 아니었다.
따라서 장함이 그렇게 아무도 도와줄 이 없어 외롭게 된[孤立無援]이 된 진현으로 밀고 들게 것은 천하대세의 반전이라기보다는 진승의 영락이라고 보는 편이 낫다. 그리고 그 급속한 영락의 원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진승 자신과 그를 둘러싼 세력 내부에서 찾아보는 게 옳을 듯하다.
진승이 변했다는 소문은 그가 왕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돌기 시작했다. 대개는 미천했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 높고 귀해진 그에게 기대려 왔다가 푸대접을 받은 데서 생겨난 말이었다. 아마도 그 첫 번째가 그의 장인[처지부]이 될 듯싶다.
진승이 장가를 든 것은 남의 머슴살이를 하고 있을 때여서 처가도 변변치 못했다. 장인 되는 사람은 가난한 농부로서 진승에게 딸을 준 뒤에도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사위가 임금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반가운 마음에 가을걷이조차 미루고 한달음에 진현(陳縣)으로 달려갔다.
그때 진승은 한창 임금노릇에 맛을 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궁궐을 으리으리하게 꾸미고 백관을 두어 임금으로서 지녀야 할 위엄을 키우고 있는데 장인이 찾아왔다. 새로 얻은 미인들에 마음을 뺏겨있는 그에게 어려운 시절에 만났던 아내가 대단할 리 없었고 아내가 그러하니 찾아온 장인 또한 반가울 리 없었다. 마지못해 만나주기는 했으나 길게 읍(揖)할 뿐 절은 하지 않았다.
진승의 장인은 비록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도 사람까지 못나지는 않았던 듯싶다. 사위가 하는 짓을 보고 벌컥 성을 내며 소리쳤다.
“세상이 어지러운 틈을 타 함부로 왕을 일컫고[호亂僭號], 어른에게는 오만 방자하니 네가 그리 오래가지 못하겠구나!”
그리고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제야 놀란 진승이 무릎을 꿇고 빌었으나 장인은 끝내 뒤 한번 돌아보지 않았다.
진승이 자신을 찾아온 옛 친구를 죽인 일도 좋지 않은 소문이 되어 떠돌았다. 처음 진승이 반겨 맞아 궁궐에 머물게 된 그 옛 친구는 지난날의 정분만 믿고 왕을 대하는 예를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렵게 지내던 시절의 얘기를 함부로 하고 다녔다. 보다 못한 신하가 그 일을 일러바치자 진승은 마침내 옛 친구의 목을 베게 하여 그 입을 막았다.
진승은 왕이 된 자신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랬다고 핑계 댔을 것이다. 하지만 실은 그때 이미 권력의 단맛에 취해 제정신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옳다. 그 뒤 그를 왕위로 끌어올린 옛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새 사람들도 밝고 어질다 하면 아무도 그 곁에서 일하려 들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진왕의 주변에는 권력을 탐내고 이익을 노리는 소인배만 모여들었다. 진왕은 그들 중에서 주방(朱房)이란 자를 총애하여 중정관(中正官)을 삼고 호무(胡武)를 믿어 사과관(司過官)로 삼았다. 그리고 벼슬아치를 뽑아 쓰는 일과 그 잘못을 캐고 벌주는 일을 그들 두 사람에게 모두 맡겼다.
그렇게 되자 장초(張楚)의 조정은 주방과 호무가 주무르게 되었다. 진왕 밑에서 벼슬을 하려는 사람은 먼저 그 두 사람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고 그래서 벼슬을 얻어도 그들 눈에 벗어나면 성하게 살아남지 못했다. 장수들이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와서도 그들에게 뇌물을 바치지 않으면 오히려 죄를 물었으며 진왕에 앞서 그들의 명을 받들지 않으면 바로 반역으로 몰렸다.
주방과 호무는 또 죄를 다스림에 가혹한 것을 진왕에 대한 충성으로 여겼다. 하찮은 일도 끔찍한 벌을 주어 보는 이를 떨게 했고 또 진왕에게는 큰 공을 세운 양 자기들이 다스린 죄를 턱없이 부풀려 말하였다. 그러자 대신과 장수들은 그들과 마주치기 싫어 진왕 가까이 가기조차 꺼렸다.
각처로 파견한 장수들이 너무 빨리 자립하여 왕이 된 것과 그런 그들을 통제할 아무런 수단이 없었다는 것도 진왕이 그토록 일찍 장함에게 되몰리게 된 원인이었다. 장수들이 떠날 때마다 많건 적건 군사를 나누어 주다보니 종주국(宗主國)격인 장초(張楚)는 군사적으로 차츰 공동화(空洞化) 되어갔다. 그래서 진왕에게는 자립하여 왕이 된 그들의 충성을 강제할 힘이 남아있지 않을뿐더러 든든한 동맹을 담보할 수단조차 없었다.
장초(張楚) 조정의 그 같은 취약점은 조나라가 자립할 때 이미 그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 장군 무신(武臣)이 자립하여 조왕(趙王)이 되었다는 말을 듣자 진왕은 몹시 성을 냈다. 진현에 있는 무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그 밑에서 좌우(左右) 승상이 된 장이(張耳)와 소소(邵騷), 그리고 대장군이 된 진여(陳餘)의 가족까지 모조리 잡아들이게 했다. 가까운 날 저잣거리로 끌어내어 목을 벰으로써 다른 장수들에게 본보기로 삼을 작정이었다.
그때 상주국(上柱國·초나라 武官 최고직)이던 방군(房君) 채사(蔡賜)가 나서서 말렸다.
“천하의 공적(公敵)인 진나라를 아직 쳐 없애지 못하였는데 조왕과 그 장상(將相)의 가족을 죽인다면 이는 또 다른 진나라를 적으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조나라는 땅이 넓고 백성들이 많은 데다 방금 새로 일어나 그 기세가 만만치 않습니다. 이를 적으로 삼느니보다는 차라리 그들을 경하해 주고 그들로 하여금 빨리 서쪽으로 군사를 보내 진나라를 치게 하도록 만드시는 게 낫겠습니다.”
그때 진왕은 사람이 좀 변하기는 해도 아직 온전히 돌지는 않은 채였다. 곰곰이 헤아려 보니 채사의 말이 옳았다. 곧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을 궁중으로 옮겨 살게 하고 장이의 아들 오(敖)를 성도군(成都君)에 봉했다. 그런 다음 사신을 조나라에 보내 무신의 등극을 경하함과 아울러 하루빨리 군사를 서쪽으로 내어 함곡관으로 쳐들어갈 것을 당부하였다.
얼른 보아서는 꽤나 그럴듯한 계책이었으나 그 뒤가 진왕이 바란 대로 되지 않았다. 사신을 통해 진왕의 경하와 당부를 들은 장이와 진여가 가만히 조왕을 만나보고 말했다.
“대왕께서 조왕이 되시는 걸 경하해준 것은 초(楚 · 여기서는 張楚)나라의 뜻이 아니라 저들의 계책에 따라 대왕을 달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초나라가 진나라를 쳐 없앤 뒤에는 반드시 조나라에 칼끝을 들이댈 것이니 바라건대 대왕께서는 군대를 서쪽으로 움직이지 마시옵소서. 북쪽으로 연(燕)과 대(代)를 쳐서 얻으시고 남쪽으로 하내(河內)를 거두시어 먼저 영토부터 넓혀 두셔야 합니다. 조나라가 남쪽으로는 대하(大河)에 의지하고 북쪽으로는 연과 대를 차지하고 있으면 초나라가 비록 진나라를 이긴다 하더라도 조나라를 함부로 억누르려 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조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겼다. 군사를 서쪽으로 내는 대신 장수들을 보내 연과 대 땅을 거두어들이게 하였다. 곧 한광(韓廣)은 옛 연나라 땅을 거두게 하고 이량(李良)은 상산(常山)을 치도록 했으며 장염(張琰)은 상당(上黨)을 우려 뽑게 하였다.
그런데 한광이 다시 연왕(燕王)으로 자립하여 진왕과 조왕 사이에 있었던 일을 조왕과 다시 되풀이하게 된다. 진왕과 직접 관련은 없으나 당시 새로 일어난 제후국들의 성격을 보여주는 데가 있어 대충 훑어보면 이렇다.
한광이 대군을 이끌고 연나라에 이르자 그곳의 호족들이 모여 한광에게 권했다.
“초나라도 왕을 세웠고 조나라도 왕을 세웠습니다. 우리 연나라가 비록 작다하나 병거(兵車) 만승(萬乘)의 나라였으니 자립하기에 넉넉합니다. 부디 장군께서 연왕에 오르시어 이 땅과 백성들을 지켜주십시오.”
“여러분의 뜻은 고마우나 늙으신 어머니와 처자가 조나라에 있어 따를 수가 없소이다.”
한광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연나라 호족 가운데 하나가 자신 있게 말하였다.
“조나라는 이제 서쪽으로는 진나라를 걱정해야 하고 남쪽으로는 초나라를 걱정해야 합니다. 그런 그들이 무슨 힘이 남아 우리를 칠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다가 초나라는 그렇게 강대한데도 오히려 조왕(趙王)과 그 장상(將相)의 가족들을 해치지 못하였는데 방금 생긴 조나라가 어찌 함부로 장군의 가족을 해칠 수 있단 말입니까?”
한광이 가만히 들어보니 그 말이 옳았다. 마침내 자립하여 연왕이 되었다. 그 뒤는 연나라 사람들이 헤아린 대로였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나라는 연나라 왕의 어머니와 가족을 연나라로 보내주었다.
하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고 조왕은 어쩔 수 없이 한광의 자립을 허용하고 나서도 마음속의 괘씸함을 다 털어 내지 못했다. 거기서 또다시 당시 새로 일어난 제후들과 그 장상(將相)들 사이의 이반(離反)과 결속의 양태를 잘 보여주는 일이 터졌다.
조왕은 나라의 틀이 잡히는 대로 장이 진여와 더불어 북쪽으로 군사를 내어 연나라를 쳤다. 그런데 어느 날 홀로 진채 밖을 거닐다가 마침 정탐하러 나온 연나라 군사들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연나라 장군은 조왕을 가두어 두고 조나라의 땅을 절반 떼어주면 조왕을 놓아주겠다고 통보해왔다. 뜻밖의 낭패를 당한 장이와 진여가 다른 조건을 내걸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사자를 보내기만 하면 목을 베어 돌려보내며 땅을 내놓지 않으면 왕도 죽여 버리겠다고 을러댔다.
그때 조나라 진채에 나무하고 말 기르는 군졸(厮養卒)이 하나 있었는데 함께 일하는 군졸들을 보고 결연히 말했다.
“내가 연나라 장수를 달래 조왕을 수레에 싣고 돌아오겠다!”
그러자 군졸들이 비웃으며 말했다.
“벌써 사신으로 간 사람만 여남은 명이 되지만 가는 족족 모조리 죽음을 당하였다. 그런데 네깟 것이 어떻게 왕을 구해올 수가 있단 말이냐?”
하지만 그 군졸은 아무 대꾸 없이 연나라 성벽 아래로 달려가 성을 지키는 연나라 장수에게 만나기를 청했다. 연나라 장수가 마지못해 성벽 위로 나오자 그 군졸이 올려보며 크게 소리쳐 물었다.
“장군께서는 제가 무엇 때문에 뵙기를 청했는지 아십니까?”
“아마도 너희 왕을 구하고 싶어 하는 것일 테지”
연나라 장수가 시답잖다는 듯 그렇게 대꾸했다. 그 군졸이 다시 물었다.
“장군께서는 우리 우승상 장이와 대장군 진여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계십니까?”
“슬기롭고 밝은 사람들이지.”
“그럼 그들이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아십니까?”
“자기들의 왕을 구하려 하겠지”
연나라 장수가 듣지 않아도 뻔하다는 투로 그렇게 받았다. 그러자 그 군졸이 껄껄 웃으며 깨우쳐 주듯이 말했다.
“장군께서는 저 두 사람이 원하는 바를 알지 못하시는군요. 무신(武臣)과 장이(張耳), 진여(陳餘)는 말채찍을 흔드는 것만으로도 조나라의 수십개 성을 떨어뜨렸으며 제각기 남면(南面)하여 왕이 되고자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누구는 왕이 되고 누구는 경상(卿相)으로 머물겠습니까? 무릇 임금과 신하의 지위는 결코 같은 것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처음 조나라를 얻었을 무렵에는 대세가 안정치 못해 나라를 세 토막내어 각기 왕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나이를 따져 무신을 앞세워 왕위에 올림으로써 조나라의 인심부터 거두어들였지요. 하지만 이제 조나라는 땅도 사람도 모두 그들의 것이 되었으니 장이와 진여도 나라를 나누어 왕이 되고 싶을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할 구실과 틈탈 겨를이 없어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장군께서 조왕을 가두고 계시니 저 두 사람은 겉으로는 구하려고 애쓰는 척하고 있으나 실은 연나라가 그를 죽여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두 사람은 조나라를 둘로 나누어 각기 왕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조나라로도 연나라를 가볍게 여기는데, 하물며 두 사람의 현명한 왕이 서로 돕고 의지하며 연나라에 자기들의 전왕(前王)을 죽인 죄를 묻는다면 어찌 하시겠습니까? 모르긴 하되 그들이 힘을 합친다면 연나라를 멸망시키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연나라 장수는 조왕을 돌려보내 주었고, 그 막일하는 군졸[시양졸]은 제 말대로 조왕을 수레에 태워 모셔왔다. 진왕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당시 새로 선 왕들과 그 장상(將相)들 사이를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예이다.
진승이 군사를 일으킨 뒤 많은 호걸들이 곳곳에서 봉기했으나 자립할만한 세력이 못되는 이들은 대개 진승 밑에 들기를 원했다. 따라서 겉보기에는 진승에게 복종하는 듯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진승의 기세가 좋을 때뿐이었다. 부장(部將)들이 하나 둘 자립해가면서 그들도 복종을 거부했는데 그걸 잘 드러내는 일이 무평군(武平君) 반(畔)의 죽음이다.
진승이 처음 왕위에 올랐을 때 능(陵) 사람 진가(秦嘉), 질현(9縣) 사람 동설(董설), 부리(符離) 사람 주계석(朱鷄石), 취려(取廬)사람 정포(鄭布), 서(徐) 사람 정질(丁疾)등도 따로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서로 연합하여 담현(담縣)에서 진나라 동해(東海)군수 경(慶)을 에워싸고 있었으나 쉽게 이기지 못했다.
그 소식을 들은 진왕은 무평군 반을 장군으로 삼아 담현성을 에워싸고 있는 의군(義軍)들이게 보냈다. 그들을 자신의 세력에 편입시켜 감독하고 통솔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진가는 무평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립하여 스스로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무평군은 나이가 어려 군사를 부리는 일에 밝지 못하니 그의 말을 따르지 말라!”
거느리고 있던 군리(軍吏)들에게 그렇게 명을 내려 무평군을 따돌리더니 마침내 진왕의 명을 위조해 그를 죽여버렸다. 한때 명목상으로나마 진왕을 저희 주인으로 받들었던 다른 봉기군 우두머리들에게 복종이란 게 대개 그 정도였다.
장함이 진현(陳縣)으로 밀고든 것은 진왕이 그렇게 외로워진 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한때 강대했던 초나라를 자처했던 세력이라 그런지 가만히 앉아서 당하지는 않았다. 장함의 군대가 진현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상주국(上柱國)인 방군(房君) 채사(蔡賜)가 대군을 이끌고 마주쳐 나왔다.
채사는 상채(上蔡) 사람으로 일찍부터 초나라에서 무관(武官)으로서는 가장 높은 상주국 자리에 올랐을 만큼 장수의 자질이 있었다. 일이 급해지자 성안의 장졸들을 있는 대로 긁어모아 스스로 이끌고 나가면서 진승에게 말하였다.
“대왕, 진나라의 대군이 이르고 있다 하니 신(臣)이 먼저 나갑니다. 장함이 우리 땅으로 들어오기 전에 그를 맞아 죽기로 싸워 그 기세를 꺾어 놓겠습니다. 그사이 대왕께서는 다시 널리 장졸들을 모아 신의 뒤를 받쳐 주십시오. 듣기로 지금 조정에서는 장하(張賀)가 가장 뛰어난 장수감이라 하니 그를 앞세우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는 장졸들을 휘몰아 진현 성 밖 오십 리 되는 곳에 진을 쳤다. 무인지경 밀고들 듯 장졸들을 휘몰아 진현으로 달려가던 장함은 그런 채사의 군사들을 보자 은근히 놀랐다. 이제 인근에서는 도와줄 세력도 없고 진왕의 군사도 다 흩어져 가서 숨통만 죄면 진현은 쉽게 떨어질 줄 알았는데 뜻밖의 대군으로 맞서왔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싸우기에 좋은 지형을 골라 제법 정연한 진세를 벌이고 있었다.
“대군을 휘몰아 단숨에 짓밟아 버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까지 잇따라 이겨온 뒤라 호기가 솟은 진나라 장수들이 장함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조용히 적진을 살피던 장함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전력(戰力)을 다 긁어모은 것이라 그런지 저들의 기세가 여간 날카롭지 않다. 게다가 뒤가 막힌 땅을 골라 진세를 벌인 것이 죽기를 각오한 군사들이다. 함부로 들이치지 말고 우리도 지키기 좋은 곳을 골라 진채를 세워라.”
그리고 탐마(探馬)를 풀어 앞뒤 사정을 살펴보게 했다. 오래잖아 풀어놓은 탐마들이 돌아와 알렸다.
“군사를 이끌고 나온 장수는 상주국 채사이고 그가 이끈 군사는 진현에 남아있는 장졸 모두라고 합니다. 또 성안에서는 장하라는 장수가 인근 고을에 흩어져 있던 군사들을 불러들이고 새로 장정들을 뽑아 군세를 키우고 있다고 합니다. 장하는 싸울 채비가 갖춰지는 대로 성을 나와 채사와 더불어 기각지세(기角之勢)를 이루어 성을 지키면서 구원이 오기를 기다릴 심산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장함의 얼굴이 흐려졌다.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장수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진승에게도 영 장수가 없지는 않구나. 일이 그렇게 되면 힘든 싸움이 된다. 희생이 늘더라도 기작지세를 이루기 전에 하나씩 떼어 쳐부수는 수밖에 없다. 오늘 밤 채사를 친다!”
거기서 장함이 함곡관을 나온 이래 가장 힘든 싸움이 한바탕 벌어졌다. 채사는 야습에 대비하고 있었으나 덮친 장함의 군사들이 워낙 대군이었다. 이십만이 넘는 대군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수레바퀴 굴리듯 번갈아 밀고 드니 3만 남짓한 채사의 군사들이 견뎌낼 수 없었다. 날이 새기도 전에 채사의 진채는 잿더미가 되고 상주국 채사도 군사들과 함께 죽음을 당했다.
그 싸움에서 장함의 군대가 입은 손실도 적지 않았다. 거기다가 밤새 싸우느라 살아남은 군사들도 몹시 지쳐 무리하게 몰아댈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 날 하루를 푹 쉬게 한 뒤에야 다시 진현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사이 진왕과 장하는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낸 힘으로 적지 않은 군사를 모았다. 하지만 상주국 채사가 이끌고 간 군대가 이미 싸움에 지고 채사도 죽었다는 소식이 오자 성을 나가는 대신 곡식을 거둬들이고 성벽을 고쳐 농성(籠城)을 준비했다. 그때 질현 사람 오봉(伍逢)이 진왕에게 말했다.
“적은 이십만 대군이요, 진현의 성은 좁고 성벽은 얇습니다. 에워싸여 싸우다가 성이 깨어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낭패를 당할까 두렵습니다. 차라리 들판에서 크게 싸워보고 뜻 같지 못하면 몸을 빼내 뒷날을 기약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도 그럴듯한 말이었다. 이에 진왕은 장하로 하여금 진현 서쪽의 들판에 진세를 벌이게 하고 자신도 싸움을 독려한다는 명목으로 함께 나와 장함의 군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래잖아 장함의 대군이 이르러 양쪽 모두가 죽을힘을 다한 싸움이 다시 한 번 진현 서쪽 벌판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병세가 약한 데다 구원병조차 없는 진왕 쪽이 밀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진채는 뭉그러지고 장수인 장하마저 어지럽게 몰리는 군졸들 사이에서 죽고 말았다.
좌우의 보살핌으로 간신히 몸을 빼낸 진왕은 멀리 여음(汝陰)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장함은 그런 진왕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한 갈래 날랜 군사를 보내 급히 뒤쫓게 했다.
이에 진왕은 흩어진 장졸들을 수습해 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수레를 하성보(下城父)로 몰게 했다. 예전에 부장(部將)으로 있던 장수 하나가 그곳에서 약간의 세력을 모아 놓고 기다린다는 풍문이 있어서였다. 하지만 하성보에 이르러보니 헛소문이라 맥없이 수레를 돌리는데 진군의 추격은 다급하기만 했다.
그때 진왕의 수레를 몰던 것은 장고(張賈)란 자였다. 시골 현청(縣廳)에서 어자(御者·마부) 노릇을 하다가 진왕을 따라 나서 장초(張楚)의 태복(太僕)에까지 오르게 되었으나 심지가 불량하였다. 진왕이 점점 궁해지고 지키는 군사도 줄어들자 슬며시 마음이 달라졌다. 졸개 하나와 짜고 진왕을 죽여 팔자를 고칠 궁리를 했다.
그 날 밤 장고는 온종일 쫓기느라 지친 진왕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렸다가 가만히 다가가 찔러 죽였다. 그리고 그 목을 잘라 수레에 싣고 진나라 진채로 달려가 항복하고 말았다.
장고의 투항을 받은 진나라 장수는 장고와 진왕의 목을 장함이 있는 진현으로 보냈다. 진왕의 목을 본 장함은 몹시 기뻐하며 장고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아울러 장고에게 약간의 군사를 딸려주며 진현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동쪽으로 또 다른 반란세력을 찾아 떠났다.
함양에서 불어온 역풍(逆風)은 일견 대택(大澤)에서 인 회오리를 가볍게 잠재워버린 듯했다. 장함도 진승을 죽임으로써 관동의 큰 불길은 잡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대택의 회오리가 불어 일으킨 관동의 불씨를 모조리 끈 것은 아니었다.
한때 진왕 곁에서 시중 들다 장군이 된 여신(呂臣)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자 창두군(蒼頭軍)을 조직해 신양(新陽)에서 일어났다. 창두(蒼頭)란 원래 사가(私家)의 노비를 이르는 말이었으나 여신의 창두군은 문자 그대로 푸른 수건으로 머리를 싸맨 군대를 말한다.
여신은 진왕의 원수를 갚는다며 창두군을 이끌고 진현으로 쳐들어갔다. 장고가 장함에게서 얻은 약간의 진나라 군사들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었으나 당해낼 수가 없었다. 끝내 성은 떨어지고 장고는 창두군들에게 난도질당해 죽었다.
여신은 진왕의 머리를 찾고 또 하성보에 있는 몸통도 가져다 이은 뒤에 성대하게 장례를 치렀다. 왕후(王侯)를 장사지내는 예로 탕현(탕縣)에 묻고 더하여 애상(哀傷)의 뜻이 있는 은왕(隱王)이란 시호(諡號)까지 바쳤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함양에서 불어온 장함이란 역풍은 거세게 중원을 휩쓸고 있었다.
이 세 황제 2년 일월 패공(沛公) 유방은 방여(方與)란 곳에 군사를 머물게 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천하의 풍운에 몸을 던진 뒤 석 달 남짓, 참으로 숨 가쁘게 내달아온 나날이었다.
지난해 9월 현령의 자리를 맡아 먼저 패현(沛縣)을 수습한 유방은 다시 건달 시절 왕래가 잦았던 풍읍(豊邑)까지 아울러서 근거로 삼았다. 패공은 그를 우러러 모여든 젊은이 3천을 받아들여 군사로 조련하고, 소하 노관 조참 번쾌 주발 관영 하후영 같이 전부터 그를 따르던 이들에게는 각기 알맞은 벼슬을 내려 그들을 이끌게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부릴 만한 장졸로 짜여지자, 아직도 천하의 큰 흐름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왕좌왕 하는 이웃 고을들을 휩쓸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풍읍에서 멀지 않은 호릉(胡陵)이었다. 새로 일으킨 군사의 날카로운 기세에다 갑자기 장수가 된 시골 아전[향리]과 장사꾼에 저잣거리 건달의 분발이 더해지니 그러잖아도 별로 싸울 마음이 없던 호릉 현령과 잔뜩 움츠러든 진군(秦軍)이 당해낼 리 없었다. 싸움다운 싸움도 없이 성은 떨어지고 호릉은 패공의 깃발 아래 들어왔다.
패공은 다시 길을 서북으로 잡아 방여(方與)로 군사를 몰고 갔다. 방여 또한 호릉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천하대세를 탈 배짱도 없고, 진나라를 위해 성을 지키다 죽을 충성심도 갖지 못한 현령은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성문을 열었다.
열흘도 안 돼 호릉과 방여 두 현(縣)을 더 차지한 패공은 방여에서 며칠을 쉰 뒤 다시 풍읍으로 돌아갔다. 아직 넉넉하지 못한 세력으로 전선을 너무 멀리까지 확대했다가 근거를 잃게 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풍읍과 패현을 중심으로 보다 힘을 기른 뒤에 다시 나아가기로 하고, 우선은 군사를 물려 쉬게 했다.
그런데 먼 길에서 돌아온 장졸이 제대로 쉬기도 전에 놀라운 전갈이 들어왔다. 사천군(泗川郡·사수군)에 어사감(御使監)으로 내려와 있던 평(平)이란 자가 진군(秦軍)을 이끌고 호릉을 빼앗은 뒤 풍읍으로 쳐들어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패공은 급히 장졸들을 불러 모아 싸울 채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미처 채비가 갖춰지기도 전에 어사감 평의 군사들은 풍읍을 에워싸고 말았다.
그때 평이 이끈 진나라 군사들은 진승이 보낸 주문(周文)의 군대가 희수(戱水) 가에서 저희 편 장수 장함에게 크게 지고 쫓겨났다는 것을 이미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움츠러들었던 기세가 되살아난 데다 그 머릿수 또한 적지 않았다. 하지만 패공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졸들을 하루 더 성안에서 쉬게 한 뒤 한꺼번에 휘몰아 성을 나갔다.
겁을 먹은 패공이 성을 의지해 버틸 줄 알았던 진군은 그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해내지 못했다. 어사감 평이 이끈 진군은 한 싸움에 뭉그러져 호릉으로 달아났다. 이에 패공은 풍읍을 옹치(雍齒)에게 지키게 한 뒤 남은 장졸을 이끌고 평을 뒤쫓았다.
패공이 옹치에게 풍읍을 맡긴 데는 까닭이 있었다. 옹치는 그곳에서 나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얼마 전까지도 그 뒷골목을 휘어잡고 있던 건달들의 우두머리였다. 비록 패공 밑으로 들어온 것은 아직 두 달이 못되지만, 적어도 풍읍을 맡아 지키는 일이라면 그보다 나은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거기다가 끝까지 맞서다가 대세가 기울자 마지못해 머리를 숙이고 들어온 터라, 패공에게는 은연중에 그런 옹치의 진정을 한번 시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옹치도 패공을 따라 어사감 평을 뒤쫓기보다는 풍읍에 남아서 지키는 쪽을 좋아하는 것 같았다. 군사 약간과 전부터 그를 따르던 졸개 몇만 남겨주었는데도 별로 걱정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저 옹치란 자를 믿어도 되겠습니까? 번쾌와 노관이라도 곁에 붙여두는 게 어떨는지요?”
매사를 꼼꼼히 살펴 처리하는 소하가 걱정스런 눈길로 패공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오래 옥리(獄吏)로 일해 패현 뿐만 아니라 풍읍의 건달패까지도 잘 아는 조참 또한 옹치를 좋게 보지 않았다.
“듣기로 옹치는 고집이 세고 자존망대(自尊妄大)하여 남의 밑에 들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라 했습니다. 거기다가 수하(手下)들을 사납게 다루어 한번 그 밑에 들면 벗어날 길이 없다 하니 그 비뚤어진 심사를 알만 합니다. 믿고 풍읍을 맡길 자가 못됩니다.”
그러나 패공 유방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의심하기로 한다면 누군들 믿을 수 있겠소? 또 이미 의심하면서 우리 편을 남겨둔다는 것은 성을 나서는 우리 힘을 줄이는 일이 될 뿐만 아니라, 일이 그릇되었을 때는 그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일이니 더욱 그리해서는 아니 되오.”
그러면서 풍읍을 오직 옹치에게만 맡긴 체 자신을 따르는 장졸들은 모조리 이끌고 성을 나섰다.
패공에게 한번 혼이 난 어사감 평은 호릉 성안에 굳게 틀어박혀 지키기만 했다. 그때 다시 패공을 따라나선 시골 아전이나 건달 출신 부장(部將)들의 눈부신 분발이 있었다.
번쾌는 패공 유방의 사인(舍人 · 왕공이나 귀족을 곁에서 수행하는 관원)이었는데 지난번 호릉과 방여를 칠 때 이미 그 용맹을 한껏 펼쳐 보인 바 있었다. 이번에도 큰칼을 잡고 패공을 호위하다가 군사들을 휘몰아 앞장 서 호릉성을 들이쳤다. 현청의 마부[御者]였던 하후영은 이때 이미 칠대부(七大夫)로 태복(太僕)이 되어 패공의 마차를 몰았다. 그러나 호릉 성에 이르자 마차를 버려두고 번쾌와 마찬가지로 앞장서 성벽을 기어올랐다.
조참은 중연(中涓 · 원래는 황제의 시종관. 副官격)으로 군사를 휘몰아 싸웠는데, 그 옛날의 시골 옥리 같지 않았다. 그 기세가 얼마나 사나운지 진나라 군사들이 감히 그 앞을 막지 못했다. 주발(周勃) 역시 중연으로 싸웠는데 강한 활을 당겨 화살을 날리는 족족 적군을 꿰어놓았다. 누구도 그가 누에치기로 살면서 상가(喪家)에서 피리를 불어주던 그 주발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병졸로 따라나선 패현 젊은이들까지 무엇에 홀린 듯 분기해 싸우니 어사감 평이 아무리 높고 두터운 성벽에 의지하고 있다 해도 호릉을 지켜 낼 수 없었다. 겨우 한나절을 버티다가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해버렸다.
호릉을 되찾고 한숨을 돌리려는데 다시 급한 전갈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사천(사수) 군수 장(壯)이란 자가 대군을 이끌고 설현(薛縣) 쪽에서 밀고 든다는 내용이었다. 패공은 장졸들을 제대로 쉬게 하지도 못하고 군사를 설현으로 휘몰았다.
싸움에 이긴 뒤라 그런지 장수도 군사도 피로한 줄 몰랐다. 하룻길을 달려 설현에 이르자 다시 한바탕 격전이 벌어졌다. 호릉 싸움에서 공을 세워 칠대부에서 오대부(五大夫)로 오른 하후영과 중연에서 칠대부가 된 주발이 앞장서 내닫고, 번쾌가 나머지 군사들을 휘몰아 그 뒤를 받쳐주었다.
몸은 고단하지만 정신은 한 것 고양돼있는 장졸들이 한 덩이가 되어 짓두들겨 대니 이미 무너져 내리는 제국의 기 꺾인 군사들이 무슨 수로 맞서낼 수 있겠는가. 거기서 진(秦)의 사수군(泗水郡)을 지키던 마지막 병력이 무너지고, 그 군수 장은 척현(戚縣)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패공의 좌사마(左司馬)로 있던 조무상(曹無傷)이 나섰다.
“대군이 번거롭게 움직일 것 없습니다. 제가 한 갈래 군사를 이끌고 뒤쫓아가 사천(사수) 군수의 목을 얻어 오겠습니다.”
그 동안 별로 눈에 띄게 세운 공이 없어 너무 서두는 듯한 느낌이 있었지만 그 기상만은 한번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패공이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고 나머지 장졸은 설현에서 쉬게 했다. 오래잖아 조무상이 돌아와 정말로 사천 군수 장의 목을 바쳤다.
거듭 이겨 힘이 난 패공은 군사들이 기력을 회복하기 바쁘게 북쪽 멀리 항보(亢父)로 밀고 들었다. 현위(縣尉)가 성안의 진병(秦兵)을 모조리 긁어 사천 군수를 도우러 간 바람에 텅 비다시피 한 항보에는 따로 지켜주는 세력이 없었다. 마치 안겨오듯 패공에게 귀순해왔다.
하지만 항보에서도 오래 쉴 수는 없었다. 그때 이미 서쪽의 정세는 크게 글러져 진왕(陳王) 진승은 죽은 뒤였다. 그러나 정확한 소식 대신 종잡을 수 없는 소문만 어지럽게 나돌아 사람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었다. 그 중에도 진승이 이미 죽었을 뿐만 아니라, 진나라가 끝내는 반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 믿는 세력 일부가 방여(方與)를 되찾아갔다는 파발이 들어왔다.
이에 패공은 급히 항보를 떠나 급히 방여로 군사를 몰아갔다. 항보를 떠날 때만 해도 또 한 바탕 힘든 싸움을 예측하였으나 다행히도 방여를 차지했던 세력은 파발이 알려온 것처럼 그리 대단치가 못했다. 패공이 주발에게 딸려 보낸 한 갈래 군사조차 당해내지 못해 성을 내주고 달아나 버렸다.
이번에도 힘든 싸움 없이 방여를 되찾은 패공은 그곳에서 며칠 쉬며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추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편히 쉬기도 전에 풍읍에서 기막힌 소식이 왔다. 옹치 밑에 남아있어도 속으로는 유방을 따르던 젊은이 하나가 진눈깨비 속을 달려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옹치가 주불(周불)에게 항복하고 풍읍을 위나라에 바쳤습니다!”
주불은 원래 진왕(陳王)의 장수였다. 진왕의 세력이 한창일 때 그 명을 받들어 옛 제(齊)나라 땅을 거두어들이고자 군사를 이끌고 그리로 갔다. 하지만 그때는 옛 제나라 왕족인 전담(田담)이 적현(狄縣)에서 군사를 일으켜 현령을 죽이고 제나라를 다시 세운 뒤였다. 주불이 들어가자 대군을 보내 맞섰다.
주불은 진왕의 위세를 앞세우고 싸웠으나 끝내 전담의 군사를 당해내지 못했다. 한 싸움에 크게 져 군사를 태반이나 꺾인 체 옛 위(魏)나라 땅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주불은 마지막 위왕(魏王)의 적통이 되는 영릉군(寧陵君) 구(咎=魏咎)를 왕으로 세워 위나라 사람들의 힘을 빌고자 했다. 그런데 영릉군 구는 그 무렵 진왕의 부장(部將)으로 진(陳) 땅에 남아 있어 위왕으로 세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럭저럭 하는 사이에 주불이 위나라 옛 땅을 거의 다 평정하자 위나라 사람들을 그를 왕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주불은 끝내 사양하고 사자를 진왕에게 보내 영릉군을 보내 주기를 청하였다. 사자가 위(魏)와 진(陳)을 오가기 다섯 차례, 마침내 진왕은 영릉군 구를 위왕으로 세우는 것을 허락하고 그를 위나라로 돌려보냈다.
위왕이 된 영릉군 구는 주불의 공을 잊지 않고 그를 재상으로 삼았다 - 거기까지는 패공 유방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그 주불이 풍읍으로 쳐들어온 것이었다.
"주불(周巿)이라고? 아니 주불이 어째서 풍읍(豊邑)까지 쳐들어왔다는 것이냐?”
패공 유방이 놀라움을 감추고 조용히 물었다.
“위왕(魏王)을 위해서일 겁니다. 진왕(陳王)이 장함에게 쫓겨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게 되자 딴마음을 먹은 위왕을 위해 위나라의 세력을 넓히려 함이겠지요. 그래서 동쪽으로 오다 보니 풍읍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오랜 친구에서 막하의 빈객(賓客)이 되어 패공의 참모 노릇을 하고 있는 노관이 곁에 있다가 그렇게 추측했다.
“옹치(雍齒)는 왜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주불(周巿)에게 항복했는가?”
패공 유방은 짐작 가는 데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었으나 다시 그렇게 물어보았다. 소식을 가지고 달려온 젊은이가 분한 듯 일러바쳤다.
“그자는 평소에도 패공 아래로 든 일을 늘 달갑지 않게 여겨왔습니다. 아뢰기 죄송스러운 말이나 한번은 패공의 뒷모습을 가리키며, 머리는 텅 빈 허풍선이가 운 하나는 억세게 좋아서 남 위에 올라타게 된 꼴이라고 큰소리로 지껄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자에게 풍읍을 맡기셨으니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것이나 다름없지요. 주불이 사자를 시켜 글 한 통을 보내자 바로 성문을 열고 그 앞에 꿇어 엎드려 버렸습니다.”
“주불이 무어라고 썼다던가?”
“풍읍은 예전에 위왕(魏王)께서 도읍지로 삼으셨던 곳이오. 이제 위나라가 싸워 되찾은 성만 해도 수십 개에 이르니 만약 그대가 항복하면 제후로 삼아 풍읍을 지키게 할 것이나 거역하면 풍읍을 들이쳐 옥과 돌을 가리지 않고 모두 태워버릴[옥석구분] 것이오-대강 그렇게 쓰여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거기까지 듣고 나니 나머지는 뻔했다. 패공이 두려워했던 대로 옹치는 최소한의 구실과 갈 곳이 생기기 바쁘게 패공에게서 등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지난날의 불쾌한 기억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모든 사람이 패공의 신화(神話)를 믿고 다투어 그 밑으로 들어올 때에도 옹치는 언제나 차가운 웃음과 빈정거림의 눈길로 겉돌기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때로는 나름으로 한 무리 졸개들을 만들어 패공에게 맞서려 들기까지 했다. 지난번 패현을 뒤엎을 때도 옹치는 요리조리 살피다가 막판에야 마지못한 듯 끼어들어 패공의 속을 긁어댔다.
하지만 그날 패공의 마음을 더욱 괴롭힌 것은 그런 옹치를 따라간 풍읍 젊은이들이었다. 같은 땅에 나고 자란 젊은이들이 끝내 자신을 저버리고 옹치같이 하찮은 작자를 따라 가버렸다는 게 패공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모두 모아들여라! 지금 당장 풍읍으로 간다.”
언제나 느긋하던 패공이 불같이 노해 그렇게 소리쳤다. 그리고는 오랜만에 창칼을 뉘여 놓고 쉬고 있던 장졸들을 질풍같이 휘몰아 풍읍으로 달려갔다.
방여에서 풍읍까지가 그리 가까운 길이 아니었고, 더구나 날이 이미 저문 데다 진눈깨비까지 날리고 있었다. 그러나 패공이 워낙 급히 군사를 몰아대니 다음날 날샐 무렵에는 풍읍 성밖에 이를 수가 있었다. 그때까지 말없이 패공의 눈치만 보며 따르던 조참이 가만히 달래듯 말했다.
“먼 길을 달려와 지친 군사로 급하게 싸워서는 안 됩니다. 아침밥을 배불리 지어 먹이고 한나절 쉬게 한 뒤에 성을 들이치는 게 어떻겠습니까?”
“우리 군사는 이미 방여에서 며칠이나 잘 쉬었소. 하루 밤쯤 잠을 설쳤다고 싸우지 못할 것은 없소.”
패공이 그렇게 대답하며 싸움을 서둘렀으나 곁에 있던 소하와 노관까지 나서서 조참을 편들자 겨우 마음을 돌렸다. 잡일하는 군사들이 서둘러 솥과 시루를 걸고 아침밥을 짓는 동안장졸들을 쉬게 하다가, 아침밥을 먹기 바쁘게 성을 에워싸게 했다.
“옹치는 어디 있느냐? 어서 나와 얼굴을 보여라!”
말 위에 높이 앉은 패공 유방은 성을 들이치기 전에 먼저 옹치부터 불러냈다. 옹치가 표정 없는 얼굴을 성벽 위로 드러내고 차갑게 물었다.
“유계는 무슨 일로 나를 찾는가?”
새로 생긴 호칭은 두고 굳이 건달시절에 이름 대신 쓰던 자(字)를 부르는 것부터가 사람의 심기를 건드는 데가 있었다. 유방이 참지 못하고 호통을 쳤다.
“옹치 이놈. 나는 너를 믿고 풍읍을 맡겼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나를 저버리고 주불에게 무릎을 꿇었느냐?”
“나는 네가 그저 머리가 빈 장돌뱅이로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머리가 아주 돈 미치광이로구나. 너를 저버리다니, 그럼 네가 내 주인이라도 된단 말이냐? 그리고 이 땅은 원래 위나라의 땅이었다. 이제 위왕(魏王)께서 다시 일어나시어 옛 땅을 찾고자 하시는데 어찌 감히 거역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패공 유방을 내려 보는 품이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 보듯 했다. 유방이 더욱 성나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패현 부로(父老)들의 명을 받들어 패공이 되고, 너를 수하에 거두어들인 뒤에 풍읍의 수장(守將)으로 삼았다. 그런데 너는 힘을 다해 풍읍을 지키기는커녕 싸움 한번 없이 적에게 갖다 바쳤으니 이 또한 반역이다. 그러고도 네 목이 성하기를 바라느냐?”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인다만 진정으로 반역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너다. 너는 포악한 진나라를 쳐 없애기 위해 <장초(張楚)>를 받든다고 하면서도 정작 진왕(陳王)이 장함에게 져 쫓겨 다닌다는 소문을 듣고도 군졸 한 명 진왕에게 보낸 적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위왕이 되신 영릉군 구(咎)는 진왕께서 허락하여 세운 왕인데, 그를 받드는 걸 반역이라고 떠드니 도대체 너는 누구냐? 네가 진나라의 이세 황제라도 된다는 말이냐?”
옹치는 주불에게 풍읍을 갖다 바칠 때부터 마음먹고 준비한 것처럼 숨결 한 번 흐트러짐 없이 그렇게 패공의 부아를 돋우었다. 패공 유방이 원래 그리 차분하고 조리 있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못되었다. 거기다가 화까지 터질 듯 치솟으니 더욱 말문이 막혔다. 한참이나 옹치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모두들 무얼 하느냐?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어서 성을 들이쳐라! 먼저 성벽을 오르는 자에게는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줄 것이오, 저 옹치 놈을 사로잡아오면 천금을 상으로 내릴 것이다!”
그리고는 자신도 칼을 빼들고 성벽을 기어오를 기세였다. 소하가 간신히 패공을 말려 잡아두고 있는 사이에 장졸들이 함성과 함께 성을 들이치기 시작했다.
몇 달째 줄곧 이겨온 군사들이라 처음 내달을 때의 기세는 좋았다. 하지만 밤새도록 진눈깨비 속을 행군해온 것이 아무래도 무리가 되었는지 몸이 기세를 따라주지 않았다. 성벽에 이르자 어딘가 이전 같지 않게 굼뜨고 둔해진 듯한 데가 있었다.
이전과 다르기는 앞장선 장수들도 마찬가지였다. 번쾌 하후영 주발 관영 등이 저마다 손에 익은 병장기를 휘두르며 성벽을 기어올랐으나 왠지 머뭇거리고 움찔거리는 기색이 있었다. 지키고 있는 군사들이 모두 같은 땅에 오래 함께 산 사람들이라 모질게 손을 쓰지 못하는 것 같았다.
거기다가 옹치가 마음먹고 준비한 것은 말만이 아니었다. 농성전(籠城戰)에 요긴하게 쓰일 것은 무엇이든 더미더미 성벽 위에 쌓아놓고 기다리다가 성을 기어오르는 패공의 군사들의 머리 위에 퍼부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화살로 메뚜기 떼처럼 꺼멓게 하늘을 덮더니 성벽으로 다가가자 이번에는 돌과 통나무가 우박처럼 쏟아졌다. 긴 장대가 성벽에 걸친 구름사다리[雲梯]를 밀어내고, 어렵사리 구름사다리를 기어오른 군사들의 머리 위에는 다시 끓는 물과 기름이 퍼부어졌다.
군사들로서는 패현을 떠난 뒤로 처음 겪는 모질고도 힘든 싸움이요, 성이 나서 제 정신이 아닌 유방이 보기에도 무리하기 짝이 없는 공성(攻城)이었다. 곳곳에서 비명소리와 함께 군사들이 상하는 걸 보자 퍼뜩 정신이 든 유방은 징을 치게 해 군사를 거두었다. 하지만 치솟는 화를 풀 길이 없어 성벽 위를 바라보며 저잣거리 잡놈들이나 날건달이 쓰는 육두문자를 거침없이 뱉어냈다.
그날 오후 패공 유방은 보다 많은 구름사다리를 얽고 나무 방패를 짠 뒤에 다시 한 번 풍읍 성을 들이쳤다. 하지만 아침나절보다 군사들이 좀 덜 상했을 뿐, 성벽에는 여전히 아무도 올라가 보지 못했다. 그날 밤 어둠을 틈탄 기습도 마찬가지였다. 구름사다리를 성벽에 걸치기도 전에 성벽 위가 대낮같이 밝아지며 화살과 돌이 우박처럼 쏟아졌다.
그 뒤로도 유방은 사흘이나 더 풍읍을 에워싸고 성을 떨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만큼 미움과 분노가 컸음을 보여주는 셈인데 일은 감정대로 되지 않았다. 옹치의 준비는 치밀했고, 한 성을 맡아 지키는 우두머리로서의 자질도 모자람이 없었다. 거기다가 성 밖에서 치고 드는 기세가 맹렬할수록 성안에서 지키는 사람들의 위기감도 높아져, 옹치와 풍읍 젊은이들을 전보다 더 굳게 뭉치게 했다. 그런 그들이 지키는 성이다 보니 힘을 들여 칠수록 패공 쪽의 군사들만 더 많이 죽거나 다쳤다.
하지만 패공 유방은 어찌된 셈인지 옹치와 풍읍을 쉽게 단념하지 못했다. 나흘째 되는 날 아침 유방은 셋에 하나꼴은 죽거나 다친 장졸들을 이끌고 다시 성 앞으로 밀고 들었다. 문루(門樓)에서 내려 보고 있던 옹치가 유방을 보고 큰 소리로 이죽거렸다.
“유계, 너는 원래 노름방 뒷전에서 공술이나 얻어 마시거나, 패거리를 지어 좀도둑질이나 하던 저자 밑바닥 망나니가 아니었더냐? 꼴에 녹봉으로 살 꿈을 꿨던 듯하다만, 기껏해야 말단 벼슬아치들 수발이나 드는 정장(亭長) 노릇이 제격이었다. 그런데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허풍 하나로 패공 자리를 차지하고, 수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더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오고 눈이 뒤집혀버린 모양이구나. 잇따라 나흘이나 그렇게 모진 낭패를 당하고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느냐? 든 것 없이 번지르르하기만 한 머리통이라도 네 어깨 위에 그대로 얹어 두려거든 이만 물러가거라.”
“저놈이…저 아비 셋 가진…천한 종놈이….”
유방이 불길이 이는 눈길로 문루를 올려보며 외마디 비명이라도 내지르는 것처럼 욕설을 퍼부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은 건들기만 해도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옹치는 얼굴색 한 번 변하는 법 없이 이죽거림을 계속했다.
"유계를 따라 다니는 패현 동무들도 딱하오. 지금이라도 내가 풍읍 젊은 형제들을 몰고 달려나가면 한 싸움으로 그대들 모두를 개 잡듯 할 수 있소. 그러나 같은 땅에 나고 자란 정 때문에 참고 기다리는 것이니 이제 더는 저 같잖은 허풍선이에게 휘둘리어 귀한 몸을 상하게 하지 마시오.”
그 말에 어지간한 패공도 더는 견뎌내지 못했다. 너무 화가나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아찔해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하지만 그래도 패공은 장차 한 시대를 새로 열 사람이었다. 두 허벅지로 말 등을 죄어 겨우 버티면서도 입은 기세를 잃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너야말로 찢어진 입이라고 함부로 떠든다만, 성이 떨어지고 내 앞에 끌려와서도 그렇게 떠들 수 있는가 보자!”
그러나 가진 힘을 다 쥐어짜 지른 소리였다. 패공은 말을 끝내기 바쁘게 곁에 있는 번쾌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나를 부축해라. 특히 성 위에서 내가 쓰러지는 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고 어서 이곳에서 물러나자.”
번쾌가 그 말에 놀라 바라보니 패공의 얼굴이 이미 흙빛이었다. 대강의 사정을 알아차린 번쾌는 짐짓 성벽 위까지 들릴 만한 큰소리로 패공을 말렸다.
“패공께서는 저 쥐 같은 무리와 다투실 것 없습니다. 저희들이 성을 깨뜨리고 저놈을 사로잡아 무릎을 꿇릴 것이니 편안히 구경이나 하시며 기다리십시오.”
그리고는 패공을 잡아 끌 듯 부축하여 성벽아래서 빼냈다. 패공도 못이긴 척 끌려 나왔으나 옹치의 눈길을 벗어낫다 싶자 이내 정신을 잃고 말등에서 스르르 흘러내리듯 떨어졌다. 번쾌가 그런 패공을 재빨리 받아 들쳐 업고 가까운 군막 안에 뉘였다.
“패현으로 돌아간다. 에움을 풀고 군사를 물리되, 적이 뒤쫓아 나올 때를 대비하라!”
한참 뒤에 정신을 차린 패공이 그렇게 명을 내렸다. 그래도 믿고 받아들였던 사람의 배신이 준 상처에다 처음으로 겪은 군사적 패배가 준 충격까지 겹쳐서인지 얼굴은 이미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었다. 이에 번쾌와 조참은 옹치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군사를 물려 패현으로 돌아갔다.
그 뒤 옹치는 패공 유방이 언뜻 지나쳐 듣기만 해도 이맛살을 찌푸리는 이름이 되었다. 그 만큼 유방이 받은 상처는 깊었고 옹치에게 품은 원한은 컸다. 뿐만 아니라 유방이 뒷날 한나라 고조(高祖)가 되어서인지, 원래 고유명사인 옹치(雍齒)는 ‘마음속으로 깊이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이란 뜻의 보통명사로 동양 삼국에 두루 쓰이는 말이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음이 변해 <옹추>라고 하기도 한다.
패현으로 돌아간 유방은 그곳에서 여러 날 병을 다스렸다. 그러나 병 줄에서 놓여난 뒤에도 옹치와 풍읍 젊은이들의 배신이 준 상처에서 놓여나지 못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바쁘게 풍읍을 되찾을 궁리부터 했다.
하지만 급한 것은 마음뿐이고 형편이 따라주지 않았다. 지난번에 오기 하나로 앞 뒤 없이 성을 들이치다가 적지 않은 장졸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몇 번이나 내쫓기는 바람에 사기까지 꺾여 있었다. 그런 유방의 군사들에 비해 옹치와 그가 거느린 풍읍 젊은이들은 한번 싸움에 이겨 사기가 올라있었다. 거기다가 풍읍의 성벽은 높고 채비는 단단하니 무슨 수로 유방의 군사들이 이겨낼 수 있겠는가.
그때 소하가 가만히 유방을 찾아보고 일러주었다.
“진왕(陳王·진승)이 장함에게 쫓겨 간 곳을 모르게 되자 진왕을 따르던 동양현(東陽縣) 사람 영군(寧君)과 능현(凌縣) 사람 진가(秦嘉)는 초나라 왕족인 경구(景駒)를 가왕(假王 · 임시 왕)으로 세웠다고 합니다. 이제 적지 않은 군사를 모아 유현(留縣)에 머무르고 있다고 하니 그리로 찾아가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유현은 패현 동남으로 백리도 못되는 곳이었다. 유방도 진가와 경구의 소문을 못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소하의 말을 듣고 보니 처음 듣는 듯 새로웠다.
“그들이 내게 힘을 빌려줄까?”
당장은 풍읍을 되찾고 옹치를 사로잡는 일밖에 눈에 뵈는 게 없는 유방이 그렇게 묻자 소하가 조금은 차갑게 말했다.
“패공께서 이미 진왕을 섬기기로 하셨으니, 그를 이은 경구를 따르는 것이 무에 욕될 게 있겠습니까? 또 패공께서 가왕 경구를 섬기겠다면, 풍읍을 치는 것도 결국은 그를 위한 일이 되는데 무슨 까닭으로 그가 마다하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가왕은 반드시 패공에게 힘을 빌려줄 것입니다.”
유방이 지나치게 감정에 휘몰리고 있는 게 딱하기는 하지만 일은 틀림없다는 투였다. 그같은 소하의 말에 유방은 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막빈(幕賓)과 장수들을 모두 불러들이게 했다.
“지금부터 모두 유현(留縣)으로 간다. 가왕(假王)께 군사를 빌어 풍읍부터 되찾고 보자!”
유방은 의논이랄 것도 없이 그렇게 말하고 그날로 군사를 움직였다. 길이 멀지 않은데다 마음이 급해 재촉해서인지 그날 날이 저물기도 전에 패공의 군사들은 유현에 이를 수 있었다. 멀리 유현 성이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앞서 살피러 갔던 군사가 돌아와 패공에게 알렸다.
“언덕 아래 숲 속에 장정 백여 명이 모여 있습니다. 모두 병장기를 갖춘 데다 마필(馬匹)도 대여섯은 됩니다.”
“가왕의 군사들이냐?”
곁에 있던 노관이 긴장하며 묻자 그 군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어디 멀리서 온 무리로 보이는데, 짐작에는 그들 역시도 우리처럼 가왕을 찾아뵈러 가는 길인 듯했습니다.”
군사의 말을 듣고 있던 패공이 그 어떤 예감에 내몰렸는지 벌떡 몸을 일으키며 서둘러댔다.
“그렇다면 성안으로 들기 전에 먼저 그들을 만나보는 게 좋겠다. 별로 큰 세력이 아니라도, 여러 갈래를 모아서 가면 가왕이 더 기뻐하실 것이다.”
그리고는 앞장서 말을 몰아 그 군사가 일러준 숲 쪽으로 갔다. 비록 옹치에게 다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직 수천의 군마였다. 그들이 몰려가자 모르는 이에게는 자못 위세가 있어 보였다. 갑자기 몇 십 배의 군사들에게 에워싸인 꼴이 된 숲 속의 백여 명 장정들도 적지 아니 놀랐다. 겁먹은 눈길로 이쪽저쪽을 살피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대들은 어디서 온 장사들이며 누가 이끌고 있는가? 그대들의 우두머리를 만나고 싶다.”
패공이 그들 앞으로 말을 몰아 나가며 목소리를 가다듬어 소리쳤다. 갑자기 웅성거리던 장정들이 갈라서며 그 사이로 한 사람이 천천히 말을 몰아 나왔다. 말은 보기에도 힘찬 구렁말이었으나 그 위에 앉은 사람은 좋은 천으로 정성 들여 지은 화복(華服)차림부터가 벌써 한 갈래 군사를 이끄는 무장(武將)은 아니었다. 다가올수록 뚜렷해지는 그의 생김도 장수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흰 살결에 붉은 입술이며 짙은 눈썹이 화장이라도 한 듯 고왔고, 비단옷에 쌓인 몸매는 여자가 남자 옷을 입고 나선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리호리하고 낭창거렸다. 나이는 서른 네댓쯤 될까, 그것도 가까운 데서 한참 들여다본 뒤에야 그 나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젊었다.
그를 보는 순간 패공은 묘한 충격과 감동을 경험했다. 원래 그는 책상물림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들 중에서도 나약한 주제에 턱없이 까다롭고 말만 반드르르한 유자(儒者)들은 특히 싫어해, 어쩌다 그들을 만나면 그냥 보내주지 않았다. 비웃거나 빈정거려 약을 올리기도 하고, 힘으로 눌러 골려주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저건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아마도 별나게 쓸 일이 있어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다….)
유방은 그런 눈길로 그 사람을 쳐다보다가 다시 불쑥 떠오른 엉뚱한 망상에 가슴 설레며 중얼거렸다.
(어쩌면 그 쓰임은 나를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늘은 나를 위해 저 사람을 내고 키워온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를 도우러 보냈다….)
그때 그 젊은 서생(書生)이 공손히 두 손을 모으며 부드럽고도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는 하비(下비)에서 온 장량(張良)이란 사람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그 말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이 든 유방이 마주 손을 모으며 다시 물었다.
“장공(張公)께서 이끄시는 장사들은 누구며 지금 어디로 가는지요?”
“진왕께서 장초(張楚)를 일으키시어 포악한 진나라에 맞서고 있다는 말을 듣고 가진 것을 다 풀어 모은 장사들입니다. 진작부터 그 깃발아래 들어가 작으나마 힘을 보태고 싶었으나, 재주가 없고 덕이 엷은 탓인지 지난달에야 겨우 장사 백여 명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진왕께서 장함에게 쫓겨 어디에 계신 지 알 수 없게 된 뒤라 어디로 가야할 지 몰랐습니다. 달포나 사방으로 수소문하며 떠돌다가 얼마 전에야 영군(寧君)과 진가(秦嘉) 장군이 가왕(假王)을 모셨다기로 가왕께라도 의탁하고자 이렇게 찾아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장군께서는 누구시며 어찌하여 이렇게 저희를 찾아오셨는지요?”
평소 패공 유방은 성격이 느긋하고 자신을 남에게 잘 드러내지 못해 자칫 오만하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만큼 말이 거칠고 함부로 속을 드러내 보이는 편이었으나 어찌된 셈인지 그날은 겸손하면서도 조심스럽기가 전에 없이 유별났다.
“나는 패현 풍읍 중양리에서 나고 자란 유방이란 사람이오. 패현 부로(父老)들의 추대를 받아 패공이 되었으나 세상이 어지럽고 간사한 도적들이 많아 제 땅을 지키기도 어렵구려. 힘없고 어리석어 속읍(屬邑)인 풍읍조차 빼앗기고 이제 가왕께 군사를 빌러 가는 참이오.”
그렇게 대답하고 다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비록 그 깃발아래 드는 길이라도 남을 찾아갈 때는 남을 찾아가는 예절이 있는 법이오. 이제 날이 저무니 가왕을 찾아 뵙는 일은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이 숲에서 함께 쉬는 게 어떻겠소? 나를 보잘것없는 시골 무지렁뱅이라 버리지 않으신다면 하룻밤 술이라도 나누며 선생의 고견(高見)을 듣고 싶소.”
유방이 어울리지 않게 겸양을 떨다가 마침내는 새파랗게 젊은 장량을 선생이라고까지 높여 부르자 번쾌가 어이없다는 듯 노관을 돌아보았다. 노관이 눈을 찡긋하여 번쾌가 함부로 끼어드는 걸 막았다.
뒷날을 두고 보면 유방과 장량은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자석의 극처럼 서로 다른 것이 오히려 끌어당기는 힘을 가졌는지 그날 까닭 모르게 끌림을 느끼기는 장량도 유방과 마찬가지였던 듯싶다.
처음 장량에게 유방은 무엇이든 그저 크고 높고 넓기 만한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다. 멀쑥한 키와 살집이 좋은 몸, 넓고 훤한 이마와 높고 콧방울이 넉넉한 코, 그리고 풍성한 수염과 머리칼. 목소리까지도 넓은 동굴에서 우렁우렁 울려 나오는 듯 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다부진 맺힘이나 단단하게 들어찬 속을 느끼게 해주지는 않았다.
유방의 첫 인상이 준 그같은 느낌은 먼저 장량에게 무름이나 모자람, 허약 같은 것으로 읽혀졌다. 이 사람은 뭔가가 실제보다 턱없이 부풀어 올라있다. 용케 버티고 있지만 곧 파탄이 드러나고 허물어져 내릴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말하자면 쉽게 남을 방심하게 만드는 인물, 그래서 장량은 잠시 유방을 만만하게 느끼기까지 했다.
그런데 유방과 마주보고 선 그 별로 길지 못한 시간에 이상한 변화가 왔다. 무르고 모자라고 허약해 보이던 것들은 차츰 묘한 기대를 주는 비어있음으로 다가오고, 다시 희미하지만 자신이 그 빈 데를 제대로 채워 넣고 싶은 욕망으로 자랐다. 지금은 텅 비어있지만 참으로 큰 그릇이다. 공을 들이면 천하도 담을 만하다….
그날 장량이 하루 밤 함께 머물자는 유방의 청을 별로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아마도 그런 난데없는 욕망과 또 그걸 이뤄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장량이 함께 머물기를 허락하자 유방도 그 숲 속에 군사들을 머무르게 했다. 그리고 군막을 세우기 바쁘게 술자리를 벌이고 장량을 윗자리에 앉혔다.
장량의 사람 보는 눈이 크게 틀리지 않았음은 그날 밤의 술자리에서 곧 드러났다. 무슨 생각에서인지 유방은 언제나 곁에 두고 부리는 노관과 번쾌 뿐만 아니라 소하 조참 주발 하후영같은 부장들까지 모두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패현에서 건달노릇 하던 시절 저잣거리 술집에서 퍼마시듯 아래위도 없이 함부로 마셔댔는데, 장량에게는 그게 또 묘한 감동을 주었다.
유방과 마찬가지로 그를 둘러싸고 있는 패거리들도 하나하나 떼어놓고 보면 비상하거나 특출할 것 없는 시골 건달들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한번 유방의 사람이 되어 손발로 일할 때는 아무도 그들이 시골 아전이나 저잣거리 주먹, 개백정, 상가(喪家)의 피리장이, 현청의 마부 따위였다고는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저마다 눈부신 솜씨를 보였다. 나중에 그들은 한결같이 왕후장상(王侯將相)이 되어 한 시대를 다스리는데, 그 모두가 패현을 중심으로 백리 안쪽에서 태어난 사람들이었다. 천하의 드넓음에 비하여 말하자면, 하늘은 그때 종지 안보다 좁은 패현 한 곳에 당대의 인재를 그대로 쏟아 부은 셈이 된다.
하지만 하늘의 사사롭게 치우치지 않음을 들어 유방을 둘러싼 인재들을 달리 설명하기도 한다. 그 무렵 사람들의 입에 널리 오르내리던 말로 ‘파리가 준마의 꼬리에 붙어 천리 길을 간다’ 는 것이 있는데, 이는 대단찮은 인물이 영웅의 비상한 재주와 운세에 곁붙어 출세하게 되는 경우를 이른다. 아마도 유방을 따라 한(漢)나라를 연 패현 건달들을 가리켜 한 말일 테지만, 그들을 준마의 꼬리 붙은 파리로 빗댄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보다는 그 지역과 관련된 무언가가 그들을 격려하고 분발시켜 그들의 잠재력을 한껏 끌어낸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어쩌면 그날 밤 장량이 그 술자리에서 본 것은 바로 그들 패현 건달들에게 격려가 되고 마침내는 비상한 분발을 이끌어낸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말없이 빙글거리며 술잔만 비우고 있는 유방이 그것이었다. 그 무르고 모자라고 허약해 뵈는 인품이, 그저 크고 넓고 높기만 한 텅 비어 있음이, 단순하고 순박한 시골 건달들을 분발시켜 마침내는 천하를 통째로 담게 만든 것이었는데 - 장량은 어렴풋하게나마 그걸 알아보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거기서 받은 감동은 천하의 대세를 읽는 장량의 안목까지도 바꾸어 놓았다.
이튿날 날이 밝자 장량은 이끌고 온 장사 백여 명과 더불어 스스로 유방 앞에 나가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어디로 가시고 누구에게 의탁하시든 저희들은 패공께서 거두어 주십시오. 어차피 따로 군세를 이룰 수 없을 바에야 패공 밑에서 싸우고 싶습니다.”
하지만 장량에게는 망해버린 조국 한(韓)나라 부흥에 걸어온 일생의 비원(悲願)이 아직 살아 있었다. 그게 나머지 장사들과는 다른 단서를 붙이게 했다.
“다만 저는 삼대에 걸쳐 옛 한나라에 은의(恩義)를 빚진 가문의 자손입니다. 한나라를 다시 일으키리라 조상들의 영전에 맹세한 바 있어, 그 한나라가 부르면 저는 언제든 가야합니다. 그때 저를 너무 나무라지 말아주십시오. 일이 끝나면 반드시 패공께로 돌아오겠습니다.”
그 말에 묻어나는 진심을 느꼈는지 패공도 기꺼이 그 단서를 허락했다.
“나를 어리석다 버리지 않으시니 그것만으로 감격할 뿐이오. 지금 우리 군에는 구장(구將)자리가 비어있으니 선생께서는 우선 그 자리를 채워 나를 도와주시오.”
그렇게 말하며 장량을 군마(軍馬)나 다스리는 하급 무장으로 삼았으나, 실제 대접은 노관보다 더 우러름을 받는 막빈(幕賓)이었다.
패공이 수천 병마를 이끌고 진현으로 들어가자 영군(寧君)과 진가(秦嘉)가 먼저 나와 반갑게 맞아들였다. 장함 때문에 진군(秦軍)의 기세가 되살아나 군사 한 명 말 한 필이 아쉬울 지경이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영군과 진가가 임시로 세운 왕[가왕] 경구(景駒)도 몰색없이 패공을 반겼다. 패공에게서 풍읍과 옹치의 이야기를 듣더니 함께 분해하며 소리쳤다.
“그렇게 겉과 속이 다르고, 손바닥 뒤집듯 의를 저버리는 자는 죽어 마땅하오. 내 대군을 내줄 터이니 가서 풍읍을 되찾고 그자를 목베도록 하시오!”
하지만 넉넉한 것은 말뿐이었다. 영군과 진가가 나서 진왕의 패잔병들을 긁어모으고는 있어도 그들의 세력은 아직 스스로 지키기가 다급할 지경이었다. 진군(秦軍)이 언제 휩쓸어올지 몰라 불안해하는 판에 패공에게 빌려줄 군사 같은 것은 애초에 없었다.
“지금 장함의 부장(副將) 사마니(司馬尼·혹은 司馬인 尼 또는 夷)가 초나라 옛 땅을 다시 평정하고, 상현(相縣)을 되찾은 뒤 탕현(탕縣)에 머무르고 있다 하오. 언제 이 진류(陳留)로 몰려올지 모르니, 앉아서 기다리느니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먼저 그를 찾아 쳐 없애는 게 나을 듯하오. 패공께서는 나와 함께 사마이를 치러 가시지 않겠소?”
동양현 사람 영군이 자신들의 궁한 처지를 에둘러 말한 뒤 패공에게 그렇게 권했다. 따지고 보면, 오히려 가왕 경구 족에서 패공의 군사를 빌려 쓰자는 꼴이었다. 하지만 패공에게는 달리 길이 없었다. 옹치와 풍읍을 향한 원한을 잠시 접어두고 영군의 군사들과 함께 사마이를 치러 떠났다.
그때 사마이는 탕현을 떠나 소현(蕭縣)에 진채를 내리고 있었다. 영군과 패공이 자신을 찾아오고 있다는 말을 듣자 그도 군사를 이끌고 성을 나와 소현 서쪽에서 기다렸다.
오래잖아 패공과 영군이 군사를 휘몰아 오다가 사마이가 미리 와서 펼쳐둔 진세를 보고 흠칫했다. 그들도 멈춰 진채를 얽으려 하는데 사마이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대로 군사들을 휘몰아 덮쳐오니 이래저래 갈팡질팡하던 패공과 영군의 군사들은 그 매서운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싸움다운 싸움도 해보지 못하고 몇 십리나 쫓긴 뒤에야 겨우 추격을 벗어났다.
그때 장량은 이미 패공의 사람이 되어 있었으나, 그 싸움에서는 별 힘이 되지 못했다. 워낙 창졸간에 당한 낭패인데다, 직위가 한낱 구장(구將)이라 모사(謀事)에 깊이 관여할 처지가 아니었다. 패공도 그때는 미처 장량을 쓰지 못하고 늘 해오던 대로 군사를 부렸다.
하지만 싸움에 한번 여지없이 지고나자 패공은 비로소 장량이 있음을 떠올렸다. 군사가 수습되기 바쁘게 장량을 군막으로 불러들이고 땅이 꺼질 듯한 한숨과 함께 말했다.
“무능한 주제에 남의 장수가 되어 선생에게 부끄러운 꼴만 보였소. 하지만 더 큰 걱정은 앞일이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실로 막막하구려! ”
장량이 태평스럽기 그지없는 얼굴로 말했다.
“이기고 지는 것[勝敗]은 싸우는 이[兵家]에게는 늘 있는 일[常事]입니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우선 군사를 유현으로 물리시지요. 그곳에서 며칠 쉬며 군사를 늘인 뒤에 다음 행보(行步)를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에 패공은 영군과 의논하여 군사를 유현으로 물렸다. 유현에서 며칠 군사를 쉬게 하며 새로 장정들을 뽑으니 곧 군세는 사마이에게 크게 지기 전보다 나아졌다.
“우리 군사는 넉넉히 쉬었고 머릿수도 전보다 많아졌소. 때도 봄 2월이라 군사를 부려볼만 하니 어디로 가보는 게 좋겠소?”
어느 날 패공이 다시 장량을 불러놓고 그렇게 물었다. 패공은 속으로 풍읍을 떠올리고 있었으나 장량은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탕현을 쳐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탕현은 얼마 전까지도 사마이가 머물던 곳 아니오? 성벽이 높고 두터운데다 군민(軍民)도 소현보다 많은데 무슨 수로 이겨낸단 말이오?”
패공은 의아한 표정으로 그렇게 물었다. 장량이 방금 탕현을 돌아보고 온 사람처럼 말했다.
“허나 그곳에는 장함에게서 장수로 단련을 받은 사마이도 없고 장초(張楚)를 쳐부수어 사기가 오른 진나라 군사도 없습니다. 있다면 사마이가 새로 뽑아 얽어둔 현군(縣軍)과 현리 (縣吏)뿐일 터이니 탕현을 손에 넣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패공은 이번에도 그런 장량의 말을 따랐다. 그날로 장졸들을 휘몰아 탕현으로 달려갔다.
겉보기에 탕현은 성벽도 높고 지키는 군사도 많았다. 패공이 장량의 말만 믿고 힘껏 들이쳐보았으나 첫날 싸움에는 내몰리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 장량의 말이 맞았다. 성을 들이치기 사흘 째, 겉보기에는 한없이 버틸 것 같던 탕현의 성문이 갑자기 열리고 지키던 군사들이 제 장수의 목을 베어들고 항복했다. 사마이가 현민 중에서 새로 뽑아 얽은 군사들이었다.
패공 유방은 그들 중에서 군사로 머물러 싸우기를 바라는 자들은 모두 거두어 들였다. 그 수가 뜻밖으로 많아 패공의 군세는 잠깐 동안에 6천으로 부풀어올랐다. 그러자 다시 마음이 급해진 패공은 이내 풍읍으로 밀고 들려 했다. 그때 장량이 다시 말렸다.
“아직은 이릅니다. 제가 패공께 들은 바로 헤아려 보면, 옹치란 자는 장수로서도 범상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처지가 힘을 다하여 지키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설 건드렸다가는 이쪽이 상해 저쪽의 기세만 오려주는 꼴이 나고 맙니다. 우선 가까운 하읍(下邑)부터 손에 넣은 뒤 군세를 보다 가다듬어 풍읍을 치도록 하십시오.”
그 말에 패공은 이를 악물어 급한 마음을 달래고 애꿎은 하읍으로 군사를 몰아갔다.
강남의 3월은 봄이라도 늦은 봄이었다. 복사꽃 오얏꽃은 이미 지고 모란이 봉우리를 맺었다. 회계군(會稽郡) 오중(吳中·吳縣) 성밖 동북으로 이십 리쯤 떨어진 벌판에서는 윗도리를 벗어붙인 군사들이 땀을 흘려가며 조련을 받고 있었다. 새로이 회계군수가 된 항량의 조카이자 그 부장(副將)을 맡게된 항우가 초나라 사람들로만 이루어진 군사, 이른바 강동자제(江東子弟) 8천을 조련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미 조련을 받은 지 오래인 듯 군사들의 몸놀림은 제법 볼만했다. 모이고 흩어지며 나아가고 물러남이 얼마나 익숙한지 한 몸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장대(將臺) 위에서 그들을 내려 보고 있는 항우의 눈길에는 아직도 못마땅해 하는 데가 있었다. 오래잖아 징을 울리고 기를 휘저어 군사들을 모은 항우가 소리쳤다.
“이미 여러 번 일러주었듯, 앞뒤로 늘어선 줄을 항(行·대개 스물다섯 명)이라 하고 옆으로 벌여선 줄을 오(伍 · 대개 다섯 명)라 한다. 이 항오(行伍)가 어우러져 대(隊 · 周禮에서는 卒. 다섯 伍가 한 兩이 되고 네 兩이 한 卒이 된다)를 이루고 대가 모여 여(旅 · 5백 명)가 되며, 또 여가 자라 사(師 · 2천5백 명)가 되고 사는 커져 군(軍 · 1만 2천 5백 명)이 된다. 그러므로 항오를 움직이는 법[行伍法]은 단순하지만 군사를 부리는 바탕이 되며, 행군에서도 전투에서도 한가지로 벗어나서는 안 되는 큰 틀이다. 옛적에 손무자(孫武子)가 처음 병법(兵法)을 보여줄 때, 오왕(吳王)이 가장 사랑하는 미녀를 굳이 둘씩이나 죽여가며 먼저 세우려했던 것도 바로 이 항오법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으로는 아무리 굳세고 날래어도 항오를 잃으면 이미 그 군대는 군대라 이를 수가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무언가? 한나절 조련으로 벌써 항오가 흐트러지고 있지 않은가? 이러고도 그대들이 망초(亡楚)의 한을 씻을 의군(義軍)을 자처할 수 있겠는가? 각 둔장(屯長)은 이제부터 대(隊)를 갈라 항오법부터 바로잡은 뒤에 다시 진퇴(進退)와 공수(攻守)를 익히게 하도록.”
그런 항우의 얼굴은 굳어 있었지만 그리 사나워 보이지는 않았다. 말을 끝내기 바쁘게 장대를 내려서서 군사들 속으로 들어서는 품이 왠지 그들을 나무란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렇게 하여 그들 사이로 끼어들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았다. 말을 듣고 있는 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긴장하여 듣고 있기는 해도 겁을 먹은 얼굴들은 아니었다. 항우가 바로 곁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게 어떤 힘이 되었는지, 새삼 정신을 가다듬어 똑같은 움직임을 되풀이하는 데서 오는 지루함을 이겨냈다.
어떻게 보면 항우는 그때 군사들에게 항오법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과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체감(一體感)을 기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뒤 그 8천 명은 거의 모두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항우에게 한결같은 믿음과 사랑을 바치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때 길러진 일체감에서 비롯되었음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그들에게는 뒷날 천하를 쥘락 펼락 하던 항우도 멀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장수가 아니라, 자기들과 항오를 함께 하고 있는 동무들 가운데 으뜸일 뿐이었다.
항오법에 이어 찍고 베고 찌르고 막는 조련이 시작된 것은 춘삼월 해도 서편으로 제법 뉘엿할 무렵이었다. 항우는 그제야 조련을 부장(部將)들에게 맡기고 거처로 쓰고 있는 군막으로 돌아갔다. 사마(司馬)로서 군막을 지키고 있던 용저(龍且)가 무엇 때문인가 상기한 얼굴로 나와 맞더니 항우가 군막 안으로 들어서기 바쁘게 장검 한 자루를 내밀었다. 칼집이나 장식이 얼른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았다.
“이게 왠 칼인가?”
대를 이은 무장(武將) 가문의 혈통 때문인지 보검(寶劍)임을 한눈에 알아본 항우가 급히 용저에게 물었다. 용저도 이미 그 칼을 알아본 듯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낮에 장군께서 나가신 뒤 어떤 늙은이가 찾아와 바치고 갔습니다. 초(楚)왕실 전래의 보검이니 반드시 이 칼로 진나라를 쳐 없애 회왕(懷王)의 한을 씻어달라는 청이었습니다.”
“그 늙은이는 누구이며, 어째서 우리 왕실의 보검이 그에게 있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만한 보검이라면 이름이 있을 터, 이 칼의 이름은 무어라고 하던가?”
“물었지만 뚜렷하게 일러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보검을 지켜 복국(復國)의 지사(志士)에게 전해주는 것을 보람으로 삼던 망초(亡楚)의 유신(遺臣)이라고만 하더군요. 또 칼 이름은 밝히지 않아도 절로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알 수 없는 늙은이로군. 한 나라의 흥망을 맡길만한 보검이 있단 말인가.”
그러면서 항우는 가만히 칼을 뽑아보았다. 짐작대로 삭거나 녹이 슬지 않도록 손을 본(크롬염 산화처리로 서양에서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쓰인 방식) 청동검(靑銅劍)이 아니라 무쇠를 공들여 벼린 철검(鐵劍)이었는데, 맑은 쇳소리와 함께 갓 갈아놓은 듯한 칼날이 눈부신 빛을 뿜었다. 군막 안이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누군가 군막 안으로 들어오다가 놀란 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빛이오? 아, 칼이구려. 대단한 명검 같은데,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서 났소?”
항우가 얼른 칼을 칼집에 꽂으며 돌아보니 계포(季布)였다. 계포는 초나라 땅에서 널리 알려진 명사로서 그때는 이미 항량의 막빈(幕賓)이 되어 곁에서 거들고 있었다. 사람이 의기로운 데다 식견이 넓어 항량이 그를 몹시 존중하니 항우도 그런 숙부를 따라 언제나 공손하게 대했다.
“낮에 어떤 늙은이가 가져왔다는 칼인데, 이름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항우가 칼을 든 체 두 손을 모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계포가 마주 예를 하며 다가오더니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항우가 쥐고 있는 칼을 보며 다시 물었다.
“제가 그 칼을 한번 살펴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잖아도 선생의 안목을 빌려야할 참이었습니다. 살펴보시고 아실만한 물건이면 제게도 일러주십시오.”
항우가 그러면서 들고 있던 칼을 계포에게 넘겨주었다. 계포는 칼집부터 찬찬히 살피더니 이윽고 날을 뽑아 어린 듯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칼등에 새겨진 무늬를 살피고 쓰다듬듯 하던 계포가 가만히 항우를 쳐다보며 감격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진실로 경하 드립니다. 장군께서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보검을 얻으셨습니다.”
“그럼 선생께서는 이 칼을 알아보시겠습니까?”
계포가 내민 칼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묻는 항우의 목소리가 새삼 떨렸다. 계포는 나지막하면서도 자신 있게 말했다.
“제가 헛소문을 듣고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이 칼은 바로 간장(干將)입니다.”
간장이라면 항우도 들은 적이 있는 명검(名劍)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비한 전설로만 들어온 이름이라 실제 손에 들어왔다는 게 얼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럼 막야(莫邪)와 짝을 이룬다는 그 간장입니까? 거궐(鉅闕) 벽려(僻閭)와 함께 옛날 오왕(吳王) 합려(闔閭)가 가지고 있었다는 명검.....”
“틀림없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간장의 칼등에는 거북 등 무늬[龜文]가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바로 그 거북 등 무늬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면서 계포는 손으로 머리를 슬어 머리터럭 몇 올을 뽑더니 칼날 위에 놓고 입으로 불었다. 별로 세게 불지 않았는데도 머리터럭은 모두 두 토막이 나 칼날 양쪽으로 흘러 내렸다. 그걸 보고 더욱 자신을 얻었는지, 계포가 망설임 없이 넓은 식견을 펼쳐 보였다.
“간장은 달리 구야자(句冶子)라고 불리기도 하는 옛적 대장장이의 이름이며, 막야는 그 아낙의 이름이라고 합니다. 간장은 자신이 만든 칼 중에서 숫칼[雄劍]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이고 암칼[雌劍]에는 아내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명검 간장과 막야가 만들어진 경위나 그 뒷일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갈래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간장이 오나라 사람으로 장군께서도 알고 계시듯 오왕 합려의 명에 따라 그 두 칼을 만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쇳물이 제대로 녹지 않더니 부부가 머리칼을 자르고 손톱을 깎아 넣자 비로소 쇳물이 제대로 어우러졌다고 합니다. 안타깝게 여기던 아내 막야가 쇳물에 뛰어들고 나서야 칼이 어우러졌다는 말도 있습니다. 어쨋든 그렇게 어렵게 만든 까닭인지 간장은 칼 두 자루를 만든 뒤 수칼 간장은 감추어버리고 암칼 막야만 오왕에게 바쳤습니다. 그 때문에 대장장이 간장은 오왕에게 해코지 당했을 거란 말도 있으나, 명검 간장은 끝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다른 전설은 간장이 오나라 사람이 아니라 초나라 사람이며, 칼을 만들어달라고 한 것도 초왕(楚王)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장이 너무 공을 들여서인지 삼년이 지나서야 겨우 칼 두 자루를 만들자 성난 초왕이 그를 죽이려 했습니다. 그걸 안 간장은 그때 만삭이던 아내 막야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왕명을 받들어 칼을 만들게 되었는데 삼년이 걸려서야 겨우 칼 두 자루를 만들 수 있었소. 그 때문에 왕이 몹시 성나 있다 하니, 이번에 가면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오. 이에 칼 한 자루를 감추고 가는 바, 만약 당신이 아들을 낳거든 그 아이가 자란 뒤에 집을 나가 남산(南山)을 바라보라 이르시오. 그러면 바위 위에 난 소나무 뒤에 그 칼이 있을 것이오. 그 칼을 찾아 아비의 한을 씻어 달라 하시오.” 그런 다음 암칼 막야만 지고 초왕에게로 갔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간장의 일손이 더딘데 성이 나 있던 왕은 사람을 시켜 칼의 상(相)을 보게 한 뒤 더욱 성이 났습니다. 원래 암수 두 자루의 칼이 만들어졌는데 암칼만 들고 왔다는 걸 알게된 까닭이었습니다. 초왕은 간장을 다그쳤으나 숫칼이 없다고 끝내 잡아떼자 그를 죽여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뒤 정말로 아들을 낳게 된 막야는 아들이 자라자 남편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해 주었습니다. 막야의 아들은 집을 나가 남산을 바라보았으나 남산은 보이지 않고 집 앞 주춧돌 위에 선 소나무 기둥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그것도 돌 위에 선 소나무라 여긴 아들이 도끼로 기둥을 쪼개보니 정말 그 뒤에서 칼 한 자루가 나왔습니다. 바로 숫검 간장이었습니다. 칼을 찾은 아들은 그날로 아비를 죽인 초왕에게 원수를 갚기로 맹세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이마가 한자나 되는 사람이 원수를 갚으려고 덤비는 꿈을 꾸게 된 초왕은 천금을 걸고 그 자객을 잡게 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삼왕묘(三王墓)의 전설이 생겨났는데, 거기 따르면 간장검(干將劍)은 그 뒤 초나라 왕실에 있게 됩니다.”
"삼왕묘의 전설은 또 무엇입니까?”
이야기에 취해 듣고 있던 항우가 불쑥 물었다. 타고난 무골(武骨)인 항우도 남방 초나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기질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불같은 격정만큼이나 풍부한 감성이 바로 그랬다. 계포가 하던 이야기를 그대로 이어갔다.
“막야의 아들은 초왕(楚王)이 천금(千金)을 걸고 자기를 찾는다는 말을 듣고 산 속으로 달아나 숨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슬픈 노래를 지어 부르며 자신의 무력함을 통곡했는데, 마침 지나가던 협객(俠客) 하나가 듣고, ‘그대는 그리 나이도 많지 않아 보이는데 어찌하여 노래와 울음소리가 그토록 슬픈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 물음에 막야의 아들은 솔직하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고, 또 아비를 죽인 초왕에게 원수갚을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자 그 협객은 한동안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더니 가만히 말하기를 ‘내 들으니 왕이 천금을 걸어 그대의 머리를 얻고자 한다 하였소. 이는 왕이 이미 그대를 안다는 뜻이니, 그대의 손으로 원수를 갚기는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만약 그대가 그대의 목과 그 보검 간장(干將)을 내게 준다면 내가 그대를 위해 원수를 갚아주겠소.’ 라고 했습니다.
막야의 아들은 협객의 그같은 말을 굳게 믿었습니다. 한번 다짐조차 받는 법이 없이 간장검을 빼어 자신의 목을 자른 뒤 두 손으로 그 머리와 칼을 협객에게 바쳤습니다. 그 협객도 그런 믿음을 짐스러워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망설임 없이 그것들을 받아들이자 비로소 목이 없는 막야의 아들은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협객은 그 길로 막야의 아들 머리와 보검을 들고 초왕을 찾아갔습니다. 초왕이 그 머리를 받아 보니 과연 이마가 한 자나 되는 게 꿈에 본 그 얼굴이라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때 그 협객이 초왕에게 말하기를, ‘이는 용사의 머리라 마땅히 가마솥에 삶아 그 넋과 얼을 흩어야 합니다.’ 라고 하니 초왕은 그 말대로 막야의 아들 머리를 가마솥에 넣고 삶게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사흘 낮 사흘 밤을 삶아도 그 머리는 물크러질 줄 몰랐습니다. 오히려 이따금씩 끓는 물위로 머리가 솟아올라 눈을 부릅뜨고 왕을 노려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협객이 다시 초왕에게 ‘저 아이놈의 한이 깊어서인지 사흘을 끓여도 머리가 익어 문드러지지 않습니다. 대왕께서 몸소 가마솥 가에 가시어 굽어보신다면 틀림없이 대왕의 위엄에 눌려 저 머리가 물크러질 것입니다.’ 라고 부추겼습니다.
초왕은 이번에도 그 협객의 말을 믿고 가마솥 곁으로 가서 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때 그 협객이 왕이 차고 있던 간장(干將)을 빼어 왕의 목을 치니 그 머리가 끓는 가마솥 안으로 떨어졌습니다. 협객은 다시 그 보검으로 제 목을 쳤습니다. 그러자 협객의 머리도 가마솥 안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세 머리가 나란히 가마솥 안으로 떨어지자 비로소 머리들이 익어 문드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놀란 신하들이 불을 끄고 장대로 가마솥을 휘저어 머리들을 건져냈을 때는 세 머리가 모두 물크러져 어느 것이 누구의 머리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하는 수 없이 세 머리를 모두 왕의 예로 장사지냈는데, 그게 바로 삼왕묘(三王墓)라고 하며, 듣기로는 지금 여남(汝南) 북쪽 의춘현(宜春縣) 어디에 있다고 합니다. 또 보검 간장은 그때 초나라 왕실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부고(府庫) 깊이 처박아 두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이제 보니 그게 맞는 말인 듯합니다.”
“이게 바로 그 간장검이란 말이오?”
항우가 새삼스럽게 그 보검을 뽑아보며 감탄했다. 그러다가 검을 거두어 용저(龍且)에게 맡기며 계포를 보고 물었다.
“그런데 - 선생께서 무슨 일로 누추한 이곳까지 몸소 오셨습니까?
“회계수(會稽守·항량)께서 급히 장군을 찾으십니다. 아무래도 이제 우리가 움직일 때가 온 것 같습니다.”
계포가 비로소 항량의 부름을 전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어딘가 들뜬 기색이 있었다. 처음에는 보검 때문인가 싶었으나 반드시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우리가 움직일 때라니요? 성안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진왕(陳王)께서 사람을 보내 왔습니다. 드디어 진왕께서도 강동에 우리가 있는걸 아신 것 같습니다.”
“진왕이라면 진(秦)나라 장수 장함에게 크게 지고 쫓겨가지 않았습니까? 지금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고 하던데, 사람을 보내다니요?”
항우가 의아한 눈길로 물었다. 회계군을 손에 넣고도 네댓 달이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진왕과의 연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근래에 들리는 소문에는 진왕이 이미 죽었다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도 계포의 목소리는 밝기만 했다.
“떠도는 말과는 달리 아직 굳건하게 버티고 계신 모양입니다. 진군(秦軍)을 다시 내몰고 광릉(廣陵)을 치려하신다고 합니다.”
“진왕이 광릉을 치려한다고?”
“예. 오늘 온 사람이 바로 진왕에게서 광릉을 치란 명을 받고 군사를 얻어 나온 소평(召平)이란 장수라고 합니다. 전해야할 진왕의 어명이 있다며 회계수 어른께 관원들을 모두 불러모아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항우도 성안으로 들 채비를 했다. 따지고 보면 그도 기뻐해야 마땅할 일이었다. 은통을 죽이고 회계군을 손에 넣기는 했으나 그들 숙질(叔姪)이 이끄는 무리는 아직 강동에 고립된 지역 세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반진(反秦) 봉기의 맹주(盟主)로 널리 우러름을 받는 진왕이 사람을 보내온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계포와 함께 군막을 나온 항우는 곧 오중 성안으로 달려갔다. 현청(縣廳)에는 이미 높고 낮은 관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항량도 드물게 군수의 관복까지 갖춰 입고 현청 마루에 나와 있다가 항우가 들어서자 반갑게 맞아들이며 말했다.
“진왕께서 사자를 보내셨다. 너도 부장(副將)으로서 나와 함께 왕명을 받들자.”
그때 다시 현청 한쪽이 수런거리더니 한 중년 사내가 서너 명 졸개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그리 위엄 있어 보이지 않는 행색이나 뭔가 불안해하는 졸개들의 표정에 비해 그 태도에는 짐짓 거들먹거리는 듯한 데가 있었다. 현청 마루에 들어설 때부터 관원들의 늑장이 못마땅한 표정이던 그는 곧 이제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스스로 현청 마루 가운데 높은 곳으로 올라가 큰소리로 외쳤다.
“나는 장초(張楚) 진섭(陳涉·진승)대왕의 명을 받들어 광릉을 치고 있던 소평이오. 시절이 비상하여 칙서도 인수도 가져오지 못했으나,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곧 대왕의 엄명이니 어김이 있어서는 아니 되오. 내 말을 알아들으시겠소?”
“삼가 천명을 받들겠습니다.”
항량을 비롯한 회계군의 높고 낮은 관원들이 목소리를 합쳐 그렇게 대답하자 소평이 한층 엄숙하게 이었다.
“대왕께서는 당초 진장(秦將) 장함에게 다소간 어려움을 겪었으나, 마침내 흉측한 도적을 물리치시어 강동(江東)은 이미 평정되었소. 이제 회계 군수 항량을 장초의 상주국(上柱國· 楚나라의 上卿으로 相國과 같음)에 봉하니, 상주국은 군사를 이끌고 강서(江西)로 가서 진나라의 남은 세력을 쓸어버리도록 하시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이 소평이란 인물의 엉뚱한 행각이다. 소평은 광릉 사람으로 그가 진왕의 명을 받들어 광릉을 치려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그가 광릉을 떨어뜨리기도 전에 진왕은 장함에게 져서 근거지를 잃고 쫓기다가 죽고 없었다. 게다가 광릉이 진(陳)땅에서 머지않으니 진왕의 죽음은 오래잖아 그에게도 알려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석 달이나 지난 뒤에 군사도 없이 홀연 회계군에 나타나 살아있지도 않은 진왕의 거짓 명을 항량에게 전하고 있다.
“......소평은 진왕 진섭을 위해 광릉을 치러갔다가, 성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진왕이 이미 싸움에 져서 쫓겨가고 또 진나라 군사들이 장차 자기를 치러올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에 진왕의 명을 거짓으로 내세우고[교진왕령] 항량을 찾아가.....”
<사기(史記)>는 소평이 항량을 찾아오게 된 경위를 그렇게 적고 있으나, 그것만으로는 진왕의 죽음으로부터 그때까지 그가 어정거린 난세(亂世)의 불같은 석 달을 제대로 설명하지는 못한다.
아마도 소평은 어쩌다 진승을 따라나서 장수가 된 농군 출신의 허풍선이나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진왕이 져서 쫓겨갔다는 소문에 겁이 나서 우왕좌왕하다가 졸개들을 모두 잃고 헤매던 끝에 항량의 세력이 만만찮다는 말을 듣고 오중으로 찾아와 허풍을 떤 듯하다. 하지만 그 허풍은 오래 웅크린 채 자신을 길러오던 호랑이를 숲 밖으로 내몰아 천하가 뒤집히는 바람과 비구름을 몰고 오게 된다.
뭔가 석연찮은 데가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소평이 전한 진왕의 명은 오중 성안의 기세를 드높였다. 특히 항량은 억지로 빼앗아 차지한 회계군수에서 초나라의 상경(上卿)인 상주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당하게 강서로 세력을 뻗쳐나갈 구실을 얻게되니 겨드랑이에 날개라도 돋은 느낌이었다. 곧 항우와 8천 강동병을 앞세워 크게 군사를 일으켰다. 현군(縣軍)으로 남아 회계 땅을 지킬 이들을 빼고도 2만이 넘는 군세(軍勢)였다.
참고 기다린 지난 다섯 달도 헛되지 않았다. 그 동안 항우가 기른 강동병들은 조련이 잘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장졸(將卒) 사이의 일체감이 강하고 사기도 드높았다. 회계군 백만 인구와 스물여섯 개 현(縣)에서 거두어 들여놓은 곡식과 군비도 제몫을 했다. 강을 건너 중원(中原)의 사슴을 쫓으려 가는 항량의 군사를 그 무렵 각지에서 일어난 어떤 군사들보다 더 넉넉하고 채비가 갖춰진 군사로 만들어주었다.
“삼월 열 이튿날에 장강(長江)을 건너 서쪽으로 간다. 우이(우이) 동남쪽의 동양(東陽)현이 첫 싸움터가 될 것이다!”
일자(日者)에게 물어 날을 받고 방향을 정한 항량은 그렇게 명을 내려 떠날 채비를 하게 했다. 그러자 오중 성안은 큰 잔치판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흥청거리고, 군사들도 목숨을 건 싸움터로 가는 것이 아니라 큰 잔치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처럼 떠날 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떠나는 이들과 남는 이들이 나누는 작별의 의식까지 마냥 즐거움과 기쁨만일 수는 없었다.
항우와 함께 앞장을 서는 8천 강동병(江東兵)에게는 열에 하나도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게 될 뒷날이 어떤 불길한 예감으로 닿아 왔을는지 모른다. 항량이 알지 못할 비장감에 빠져 손씨녀(孫氏女)와 작별의 의식을 치른 것도 마찬가지였다. 짧은 영광에 이은 허망한 종말의 예감이 그를 어둡게 몰아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출진(出陣) 날을 잡은 뒤로 항량은 내리 사흘 밤을 손씨녀와 잠자리를 함께 했다. 쉰을 넘긴 나이뿐만 아니라 평소의 절제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특히 오중을 떠나기 전날 밤은 거의 뜬눈으로 지새면서 그녀의 몸에 탐닉했는데, 그 새벽에 한 일은 더 별났다. 창틀이 희뿌연하게 밝아올 무렵 항량이 그녀의 벗은 몸을 가만히 밀며 불쑥 말했다.
“저기 문 곁으로 가 서거라.”
말수가 적고 초나라 사람 같지 않게 감정 표현에 인색한 항량에게 익숙해있는 손씨녀는 말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깁을 바른 문살 사이로 새어든 새벽 어스름에 그녀의 벗은 몸이 하얗게 빛나 보였다. 이부자리에서 몸을 반쯤 일으켜 베개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항량은 어둠 속에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강남은 늦은 봄이고, 방안이라고는 하지만 첫새벽의 문가는 아직 싸늘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문가에 서있게 되자 손씨녀는 곧 추위로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항량은 무슨 생각에 잠겨서인지 그녀가 알아보게 몸을 떨 때까지 그녀의 벗은 몸을 바라보고 있다가 가볍게 이빨 부딪는 소리를 듣고서야 무엇에서 퍼뜩 깨난 사람처럼 말했다.
“됐다. 이만 이리 오너라.”
그리고 밝아오는 동녘 때문에 방안이 환해질 때까지 또 한바탕 불같은 정사를 벌였다. 이윽고 집안이 모두 깨어나 수런거리고 항량도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을 무렵, 어느새 옷을 갖춰 입은 손씨녀가 말끄러미 항량을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떠나시는…겁니까?”
삼가고 두려워하면서도 걱정을 이기지 못해 애처로운 빛까지 떠도는 눈빛이었다.
“그렇다”
항량이 그렇게 대답하고는 그제야 생각난 게 있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가 방안의 궤짝을 뒤적여 꺼낸 것은 작지만 묵직해 뵈는 비단 주머니였다,
“이걸 거두어 두어라.”
“이게 무엇입니까?”
“지금(地金) 몇 덩이다. 너를 위해 마련했다.”
“재물은 나리께서 지금까지 제게 베푸신 것으로 넉넉합니다. 이제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건너시면 그들을 먹이고 입힐 곡식과 돈이 한층 더 필요할 터, 적지만 거기 보태 쓰십시오.”
“너는 또 내가 허락하지 않은 것까지 헤아리는구나. 입을 다물고 거두어 두어라”
항량이 평소와 다름없는 엄한 눈길로 손씨녀를 쏘아보며 꾸짖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무엇 때문인지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래듯 덧붙였다.
“오늘 내가 군사들과 오중을 떠나거든 너도 이 집을 떠나거라. 되도록 멀리 떠나 네가 나의 사람이었음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가서 숨어 살아라. 그러다가 뒷날 내가 진나라를 쳐 없애고 함양(咸陽) 성안 대궐에 높이 되어 앉았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때는 나를 찾아와도 좋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너와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만약 그때가 끝내 오지 않는다면 너와 나도 이 세상에서 만난 적조차 없는 사람이 된다. 알아들었느냐?”
“나리. 그 무슨 말씀이지요. 사람의 정을 어찌….”
항량에게 어지간히 단련된 손씨녀였지만 거기까지 가자 더는 참지 못했다. 솟는 눈물을 훔치며 울먹이듯 말했다. 항량이 다시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내 이런 구차함이 싫어 계집에게 곁을 주지 않았던 터, 네 끝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만약 내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 이는 곧 포악한 진나라가 다시 천하를 다스린다는 뜻이다. 또한 그때 나는 진나라에 거역하여 군사를 일으켰다 죽은 대역죄인이니 그 가솔(家率)이 어찌 성하기를 바라겠느냐? 답답한 것.”
항량은 그렇게 내뱉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매몰차게 정을 끊듯, 뒤 한번 돌아보는 법 없이 바깥채로 나와 버렸다.
까닭 모를 비장감에 빠져있는 항량에 비해 바깥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항우는 그 어느 때보다 밝고 생기에 차 있었다. 항우가 높이 타고 있는 검은 털 섞인 부루말[백마]이 유별나게 눈에 띄어 항량이 물어보았다.
“안보이던 말이구나. 어디서 난 것이냐?”
“여기서 멀지 않은 용연촌(龍淵村)에서 얻었습니다. 검은 용이 변한 놈을 어제 오늘 제가 길들인 것입니다.”
항우가 기쁨을 감추지 못해 싱글거리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그의 허리에는 며칠 전에 얻었다는 보검이 메어져 있었다. 매사를 차분히 따져 허황된 걸 잘 믿지 않는 항량이 가볍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되뇌었다.
“검은 용이 변한 놈을 길들였다?”
그러자 항우가 자랑스레 말했다.
어제 낮 군마(軍馬)를 거두러 나갔던 주무가 용연촌에 이상한 말 한 마리가 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 마을에는 옛부터 용이 산다 하여 용연(龍淵)이라 불리는 큰 못이 있는데, 며칠 전 그 못에서 한 마리 검은 용이 솟아오르더니 말로 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너무 빠르고 힘이 세 붙잡을 수가 없고, 용케 붙잡아도 너무 사나워 사람이 타게 길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급히 용연 가로 가보았더니 정말로 이 놈이 울부짖으며 뛰어다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떠보듯 내닫는 놈을 한달음에 뒤쫓아 안장 없이 올라탄 뒤, 갈기를 고삐처럼 휘감아 쥐고 무릎으로 놈의 등판을 조인 체 못을 한 바퀴를 돌았더니 이내 순해졌습니다. 그래서 고삐와 박차를 달고 안장을 얹어 다시 길들여 보았는데 하루 만에 벌써 오래된 군마처럼 말을 잘 듣습니다.”
그 같은 항우의 말에 항량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싸움터에서 달아나 산 속을 떠돌다 야생화(野生化)한 군마겠지. 어느 날 갑자기 못 가의 풀밭에 나타나 풀을 뜯자 그 마을 사람들이 잡아다 부리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날래고 사나워 잡을 수 없자 마을의 오래된 전설과 결합돼 용마(龍馬)로 소문나게 되었으리라. 그러다가 결국 너의 날램과 힘에 굴복한 것이겠지. 하지만 네가 며칠 전에 얻었다는 그 보검처럼 용마의 전설도 나쁠 건 없다. 그게 정말로 간장검이든 아니든, 거기에 실린 초나라 회복의 염원만으로 그 칼은 존중되어 마땅한 보검이 되었다. 이 용마의 전설도 마찬가지- 이 말이 용마라면 이 말을 타고 있는 너도 은연중에 하늘이 불러낸 사람으로 보여지게 될 것이다. 장수 나자 용마 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겉으로는 기꺼운 듯 감탄했다.
“참으로 용마답구나. 검은 용이 변한 것이라 검은 부루말이 된 것이냐?”
“아닙니다. 섞인 털은 얼른 보면 검지만 실은 푸릅니다. 푸른 부루말[추=청색 잡털이 섞인 백마]이지요.”
항우가 그렇게 받다가 문득 고쳐 말했다.
“하지만 작은 아버님께서 검게 보셨다니, 이름은 오추(烏騅)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흐음. 오추라, 오추마(烏騅馬)라. 오(烏)가 검은 용을 떠올리게 하니 그것도 괜찮은 이름이다. 이름뿐만 아니라 힘과 날래기도 하루 천리를 달리는 명마이기를 빈다.”
그때 곁에 와 있던 계포가 새삼 항우를 향해 두 손까지 모으며 집안이 떠들썩할 만큼 크게 소리쳤다.
“아무래도 하늘이 장군을 크게 쓰실 뜻인 듯합니다. 일전에는 몇 백 년 전설만으로 떠돌던 보검 간장(干將)을 찾아 내려주시더니 어제는 또 용마 오추까지 보내셨군요. 진심으로 경하 드립니다!”
항우에게라기보다는 집 안팎 모든 사람이 들으라고 외고 있는 듯했다. 실제에 있어서도 그 외침의 효과는 컸다. 그때 집안에 있다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항우가 얻은 보검과 명마를 신기하게 여겼다. 저희끼리 수군거리다가 바깥으로 전해진 그들의 말은 곧 오중 성안에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그 보검을 차고 그 말을 탄 항우를 전보다 더 우뚝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장졸들의 사기까지 높여주었다.
‘장초(張楚) 상주국(上柱國)’ 깃발을 앞세운 항량과 그 부장(副將) 항우가 2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오중을 떠난 것은 그날 오시(午時)였다. 항량은 먼저 군기(軍旗)에 희생을 바쳐 제사를 올린 뒤에 미리 정해둔 차례대로 군사들을 출발시켰다. 먼저 성을 나선 것은 항우가 이끄는 강동병 8천이었다.
여느 강남사람들처럼 체격이 왜소한데다 용모도 그저 단아할 뿐인 항량에 비해 강동병 8천을 이끌고 앞장 서 성을 나가는 항우의 모습은 실로 볼만했다. 여덟 자가 넘는 큰 키에 우람한 몸피는 번쩍이는 갑옷과 투구로 더 눈부셨다. 거기다가 허리에는 전설로만 전해오던 보검을 차고 용마(龍馬)란 소문으로 더 덩실해 뵈는 오추마(烏추馬) 위에 올라앉아 있으니 마치 푸른 기운 도는 구름을 탄 신장(神將)같았다. 그 안장에 꽂힌 60근 짜리 철극(鐵戟)과 시위를 당기는데 석 섬 무게의 힘이 드는 강궁(强弓)도 항우의 위용을 더했다.
그를 따르는 8천 강동병도 그 시절의 다른 봉기군(蜂起軍)과 아주 달랐다. 옛 초나라의 양가(良家) 자제들만 가려 뽑아 하나같이 젊고 날랜데다 다섯 달이 넘는 엄한 조련으로 한창 때의 진(秦)나라 군사 못지않게 기세가 날카로웠다. 거기다가 병기와 갑옷에 의장(儀仗)까지 갖춰 위엄과 화려함을 아울러 뽐내니, 항량이 이끄는 군대의 주력이자 그 꽃이라 할만 했다. 그들이 형제자매의 환송을 받으며 성문을 나갈 때는 회계군의 속살과 알맹이가 다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들 뒤를 겨우 농기구나 면한 병장기를 든 유민(流民)들이 흉갑(胸甲)조차 걸치지 못한 체 대오를 지어 따라갔다. 받드는 대의(大義)도 절실한 성취욕도 없이, 그저 굶어죽지 않기 위해 따라나선 군렬(軍列)이었다. 하지만 그들도 8천 강동병이 앞서고 용저(龍且)나 종리매(鍾離매)같이 용맹한 장수들이 곁에서 휘몰아 또한 그 시절의 흔해빠진 유민군(流民軍)과는 달랐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센 탁류처럼 오중 성문을 흘러나가 세상으로 덮쳐갔다.
그날 대군을 몰고 오중을 떠난 항량은 강수(江水=長江)가에 이르러 행군을 멈추게 했다. 거기서 강동에서의 마지막 하룻밤을 쉬면서 강 건너 동양(東陽)현의 움직임을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미리 살피러 보냈던 군사가 돌아와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동양현에 변고가 있어 이미 진나라의 다스림이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고을 젊은이들이 그 현령을 죽이고, 진영(陳영)이란 사람을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합니다.”
“진영은 어떤 사람이며 그 세력은 얼마나 된다더냐?”
“진영은 원래 동양현의 영사(令史=현의 관리·獄吏로 보기도 한다)로서 그곳 토박이였는데, 평소에 신의가 있고 몸가짐이 신중하여 장자(長者=어질고 덕이 높은 어른)로 불렸다고 합니다. 진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신 이래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동양현에서도 젊은이 수천 명이 들고일어나 현령을 죽이고 자기들을 이끌어줄 사람을 찾다가 진영에게로 몰려갔습니다. 진영은 처음 사양하였으나 젊은이들이 물러나지 않고 떼를 쓰니 마지못해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평소 진영을 따르던 사람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어 잠깐 동안에 큰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창두군(蒼頭軍)이라 하여 푸른 수건을 써서 다른 군사들과 자신들을 구별하는데, 지금은 그 머릿수가 2만을 넘는다고 합니다.”
그 말에 항량은 난감한 기분이었다. 진영의 군사는 머릿수만으로는 자신이 이끄는 세력과 비슷했지만 그쪽은 편안히 앉아서 지킨다는 이점이 있었다. 만약 그들과 싸워야 한다면 자기들처럼 먼 길을 가서 공격을 해야 하는 군사들로는 4만으로도 이겨내기 어려웠다. 거기다가 앞에는 장강까지 가로막혀 있지 않은가.
(힘만으로 억누르기는 어려운 상대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스스로 들고일어나 진나라 관리를 죽이고 세운 현령이라 하니 먼저 말로 한번 달래 볼 만하다. 사자를 진영에게 보내 함께 서쪽으로 쳐들어가자고 해보자.)
그렇게 마음을 정한 항량은 먼저 말 잘하는 군사를 뽑아 사자로 삼고 그에게 간곡한 글을 주어 동양현으로 보냈다. 하지만 이번에도 전란의 시대가 만들어낸 특이한 개성이 항량과 항우가 이끄는 세력의 서진(西進)을 도왔다. 진영의 사람됨이 바로 그랬다.
진나라가 보낸 현령을 죽이고 진영을 그 자리에 앉힌 동양현의 젊은이들은 모여든 군사가 2만에 이르자 생각이 달라졌다. 저희끼리 의논을 맞춘 뒤에 진영을 찾아가 말했다.
“우리 동양이 비록 큰 성은 아니나 모인 창두군이 2만이나 됩니다, 게다가 저들은 또 저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겠다고 다짐하고 있으니 한번 큰일을 도모해 볼 만합니다. 현령께서 왕위에 올라 저희들을 이끌고 천하를 다투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들이오? 나는 고을의 하찮은 벼슬아치로서 여러분의 분부를 어기지 못해 현령 노릇을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분수에 넘치는 일이외다. 그런데 왕이 되어 천하를 다투라니 말만 들어도 진땀이 솟는구려.”
진영이 놀라 그렇게 사양했다. 그러나 젊은이들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진왕(陳王=진승)도 양성(陽城)의 한 농군에서 몸을 일으켜 장초(張楚)의 대왕이 되었습니다. 또 지금 옛 육국(六國) 땅에는 그 왕손(王孫)이 아니면서도 왕 노릇을 하는 자들이 많이 있는데, 게 중에는 공(公=현령)보다 더 하찮은 출신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늘의 부름을 받고 몸을 일으킨 이들이거나 재주와 덕으로 사람들의 우러름을 산 영걸(英傑)들이오. 어찌 나 같은 것과 견줄 수 있겠소?”
진영이 다시 그렇게 사양했으나 젊은이들은 물러날 줄 몰랐다.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거듭 졸라대자 구차한 핑계를 대고 그 자리에서 빠져 나왔다.
“여러분의 간곡한 뜻은 알겠으나 이는 지난번에 현령 자리를 맡은 것과는 다르오. 또 내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니 이같이 큰일을 함부로 정할 수도 없소. 돌아가 어머님께 아뢴 뒤에 그 분부대로 따르겠소.”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 정말로 그 어머니에게 물었다.
“전에 나를 현령으로 올려 세운 고을 젊은이들이 다시 몰려와 이제는 저에게 왕이 되라고 조릅니다. 그래서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진나라와 크게 싸워 천하를 다투어 보자는 것입니다. 어머님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아직 유가(儒家)의 가르침이 세상을 뒤덮기 전이었던 만큼 타고난 효성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일흔을 넘긴 진영의 어머니는 흰 머리칼을 쓸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내가 너희 집안에 시집온 이래 너희 조상 중에 귀하게 된 사람이 있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네가 공경(公卿)이나 대부(大夫)도 아니고 바로 왕이라 일컬음을 받는 것은 결코 상서로운 일이 못된다. 차라리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그 밑에 있는 것이 낫다. 그리하면 일이 잘 되면 후(侯)에 봉해질 수 있고, 일을 그르쳐도 쉽게 화를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일이 잘 되었을 때는 네가 세운 왕이 너를 기억해줄 것이고, 일을 잘못 되었을 때는 그 왕의 이름이 네 이름을 가려 세상 사람들이 너를 지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영에게는 눈앞이 훤히 밝아오는 듯한 대답이었다. 그래서 왕 노릇을 떠넘길 사람만 찾고 있는데, 동양현의 군관(軍官) 하나가 진영의 집으로 급하게 말을 몰아왔다.
“어서 관아로 가보셔야겠습니다. 회계(會稽) 군수 은통을 죽이고 스스로 군수 자리에 오른 항량이란 자가 오중(吳中)에서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오다가 장강 저편에 머물면서 사자를 보내 글을 전해 왔습니다.”
그 말에 놀란 진영이 관아로 돌아가 항량이 보낸 사자를 만나보니, 사자는 잘 닦은 글 한 통을 내밀었다. 진영이 뜯어보니 대강 이랬다.
<대초 상주국(상주국) 항량은 동양공(동양공) 궤하(궤하)에 이르노라.
우리 항가(항가)는 대를 이은 초나라의 장군가로서, 마지막까지 여정(여정=진시황)의 간담을 서늘케 한 명장 항연(항연)은 바로 이 몸의 선친이 되오. 나는 조카 적(적=항우)과 더불어 오중에 숨어살며 때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군수 은통을 죽이고 회계를 평정하였소. 그 뒤 아득히 서쪽을 바라보며 병마(병마)를 길러 선친의 한을 풀 날만 기다리던 차에 진왕의 부름을 받게 되었소이다. 진왕은 나를 상주국에 봉하고 서쪽으로 진격해 진나라를 멸하라 명하셨소. 이에 십만 대군을 일으켜 강수(강수)를 건너려 하다가, 강서(강서)에 공(공)과 의기로운 동양 군민(군민)이 있음을 듣게 되었소. 포악한 진나라는 천하가 아울러 쳐 없애야 할 적이요, 공은 이미 의기로 군민을 이끌고 일어났으니, 공과 나는 곧 뜻이 같고 길을 함께 하는 동지라 할 수 있소이다. 내일 우리 대군이 강을 건너면 공도 우리와 힘을 합쳐 함께 서쪽으로 쳐들어가지 않겠소? 그리되면 천하를 위해 큰 다행이거니와, 자잘한 욕심이나 그릇된 셈으로 우리의 길을 막는다면 공과 동양현의 군민(군민)에게 아울러 재앙이 이를 것이오. 십만 대군으로 성을 떨어뜨려 옥과 돌을 함께 불태운 뒤[옥석구분] 그 잿더미와 시체를 밟고 지나갈 뿐이외다.>
어찌 보면 오만한 위협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소심한 진영에게는 그렇지가 않았다. 간절히 자신과 군민을 맡길만한 우두머리감을 찾던 차에 그 글을 보니 오히려 반갑기까지 했다. 곧 군관과 현리(縣吏)들을 불러 모아 항량의 글을 읽어보게 한 뒤에 말했다.
“여기 쓰인 대로 항씨(項氏)는 대대로 장수의 집안이었으며 초나라에서 널리 알려진 가문이오. 그러니 지금 큰일을 하고자 한다면 이러한 사람을 우두머리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소. 우리 또한 그러하니, 항씨 같은 명문대족(名門大族)에 의지하면 틀림없이 포악한 진나라를 쳐 없앨 수 있을 것이오. 차라리 동양현의 군사를 이끌고 그 밑으로 들어가 우리 의기(義氣)를 펼쳐보도록 합시다!”
왕으로 섬기려 해도 마다하던 사람이 그렇게 말하니 모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진영은 그들이 따라주자 투덜거리는 젊은이들을 달래는 한편 항량에게 글을 보내 그를 맞아들였다.
아무 어려움 없이 강수를 건넌 항량이 동양현에 이르자 진영이 군사 2만을 이끌고 나와 그 밑에 들기를 청했다. 거기서 다시 세력을 배로 부풀린 항량은 그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밀고 나갔다. 그런데 항량의 군사들이 북쪽으로 길을 잡아 막 회수(淮水)를 건넜을 때였다. 앞서 살피러 보냈던 군사 하나가 돌아와 알렸다.
“해하(垓下)로 가는 길목에 대군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한 용맹한 장수가 거느리는데, 군사들의 파수가 얼마나 촘촘한지 더는 가까이 가서 자세한 걸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처음 오중을 나설 때의 항량 같으면 긴장하여 군사를 멈추고 기다리면서 어떻게든 자세하게 알아낸 뒤에 다시 군사를 움직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동양현을 흡수함으로써 세력이 두 배로 자라 기세가 한창 올라 있을 때였다. 장졸들에게 한번쯤 어려운 싸움 맛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기분으로 대군을 밀고 나갔다.
얼마 가지 않아 살피러 나온 적병들이 하나둘 어른거리더니 곧 한 무리의 군사가 길을 막았다. 숲과 계곡을 등지고 있는 데다 군사들도 여기 저기 흩어져 뭉쳐 있는 게 멀리서 보기에도 규모 있고 체계를 갖춘 대군은 아니었다. 다가가 보니 깃발과 의장도 진나라의 것이 아니었다. 짐작으로는 기세를 타면 한줄기 거센 물결처럼 짓쳐들었다가 몰리게 되면 흩어져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유민군(流民軍)에 틀림없었다.
(진나라 군사가 아니라면 굳이 싸울 것은 없다. 먼저 저들의 우두머리를 불러내 달래보고 정히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 가서도 짓밟아버려도 늦지 않다.)
속으로 그렇게 헤아린 항량은 군사를 멈추게 한 뒤 장수들을 좌우로 거느리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나갔다. 맞은편에서도 한 장수가 말 타고 갑옷 걸친 졸개 몇을 거느리고 천천히 말을 몰아 나왔다. 백마 위에 높이 낮았는데 투구에 덮인 얼굴이 이상하게 얼룩져 있었다.
“장군의 뉘시오? 그리고 어인 일로 우리 군사의 길을 막으시오?”
상대편 장수가 말을 멈추는 것을 보고 항량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물었다. 그러자 무쇠 솥바닥을 놋쇠 주걱으로 긁어대는 듯한 소리가 대답했다.
“나는 육(六)땅에서 난 영포(英布)라 하오. 지금 장함이 여신(呂臣=진승이 싸움에 지고 죽자 창두군을 조직해 진나라 군사를 진현에서 내쫓고 진승을 장례지내 준 사람)을 쳐부순 뒤 진현(陳縣)에 남겨두고 간 좌우 교위(校尉)를 청파(靑波)에서 무찌르고 다시 장함을 뒤쫓아 동쪽으로 가는 중이외다. 장군께서 이끌고 계신 군사가 진군(秦軍)은 아닌 것 같아 살피고 있을 뿐, 길을 막은 적은 없소이다.”
그때 군사들 중에서 그를 알아본 자들이 있어서 소리쳤다.
“경포(黥布)다! 대강(大江=장강)에서 수적(水賊)질을 하다가 파군(番君=番縣의 현령 · 여기서는 나중에 長沙王이 된 吳芮)의 사위가 된 그 경포다!”
경포라면 항량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이름이었다.
경포(黥布)는 육현(六縣)사람으로 원래 성은 영(英)씨였다. 검수(黔首=평민)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어려서부터 힘이 좋고 품은 뜻이 남달랐다. 한번은 용한 점쟁이가 지나가다가 그이 상을 보고 말했다.
“너는 나중에 모진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뒤에는 왕이 된다”
여느 아이들 같으면 먼저 두려워해 마땅한 말이었으나 영포는 오히려 흐뭇한 표정이었다. 뿐만 아니라 은근히 형벌 받기를 서두르는 것처럼이나 그때부터 패거리를 지어 몰려다니며 못된 짓만 골라 했다. 남의 재물을 훔치거나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다가 마침내 관부(官府)에 붙잡혀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새기는 형벌[경형]을 받게 되었다.
먼저 칼로 얼굴에 죄명(罪名)을 쓰고 거기에 먹물을 부어 검푸른 자국으로 남게 하는 그 형벌은 고통스럽기도 하거니와 일생 흉악한 죄명을 얼굴에 문신으로 덮어쓰고 다녀야하는 욕됨이 뒤따랐다. 그런데도 형을 받고 난 영포는 오히려 기쁘게 웃으며 여럿에게 자랑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내 상을 보고 모진 형벌을 받은 뒤에 왕이 될 것이라 했는데, 아마 이것이겠지?”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으며 놀렸으나 영포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그때부터 이름조차 경포(黥布)로 바꿔 자신이 형벌 받은 일을 남 앞에 내세웠다.
경포는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뜬 뒤에 여산(麗山)으로 보내져 시황제의 능묘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때 여산에는 전국에서 끌려온 수십 만 명의 죄수와 역도(役徒)들이 있었는데, 경포는 곧 그들 무리에서 두각(頭角)을 드러냈다. 남다른 힘과 배짱에다 얼굴에 검푸르게 뒤덮인 먹 글자가 사람을 위압하여 그를 둘러싼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그 우두머리 노릇이 다시 다른 무리의 우두머리나 호걸들과 사귀게 하여 경포란 이름을 점점 키웠다. 그 뒤 경포는 따르는 무리 수백을 이끌고 여산에서 달아나 고향 근처의 장강 가에 자리잡고 떼도둑이 되었다. 주로 수적(水賊)질이었지만 힘이 자란 뒤에는 인근의 고을까지 노략질했는데, 그 바람에 그의 이름은 대택(大澤) 인근에 널리 알려졌다.
진승이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 군대를 물리치고 진현(陳縣)에 이르러 마침내 <장초(張楚)>를 세우자 경포도 마음이 달라졌다. 평소 만만찮은 야망을 감춘 체 때를 엿보고 있던 파현(番縣) 현령 오예(吳芮)를 찾아가 말했다.
“나는 장강 남북을 오르내리며 노략질하던 경포란 놈입니다. 진나라의 폭정을 만나 뜻을 잃고 도둑의 이름을 얻었으나, 이제 진현(陳縣)의 반가운 소문을 들으니 그냥 있을 수 없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파군(番君=파현의 현령)께서는 언제까지 진나라의 현령으로 저들이 던져주는 쥐꼬리만한 녹봉에 목을 매고 계실 작정이십니까? 저와 함께 크게 군사를 일으키시어 천하를 뒤흔드는 이 풍운을 타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오예도 경포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 또한 진승의 소문을 듣고 은근히 몸달아하고 있던 판이었다. 기꺼이 경포의 말을 받아들여 함께 군사를 일으킴과 아울러 사랑하는 딸을 주어 그를 사위로 삼았다. 항우로부터 형산왕(衡山王)에 봉해졌다가 나중에는 다시 한나라의 장사왕(長沙王)으로 살아남을 만큼 능란한 처세에 어울리게 밝은 오예의 사람 보는 눈이었다.
진나라가 보낸 현령으로서 진나라에 등을 돌린 오예와 도둑의 우두머리에서 의군(義軍) 장수로 옷을 갈아입은 경포가 군사 수천 명을 모아 기세를 올리고 있을 때, 진나라 장수 장함이 진왕(陳王) 진승을 이겨 그 근거지인 진현에서 멀리 쫓아 버렸다는 놀라운 소문이 들려왔다. 이어 진승의 부장이던 여신(呂信)이란 장수가 진승의 원수를 갚고 진현을 되찾았다는 말이 돌더니, 다시 장함이 보낸 진나라의 좌우 교위(校尉)가 여신을 내쫓고 진현을 도로 차지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잖아도 싸울 곳을 찾지 못해 몸을 꼬고 있던 경포는 곧 군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쳐 올라갔다. 진현을 지키고 있던 진나라의 좌우 교위는 그런 경포의 기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거기다가 달아났던 여신이 다시 나타나 뒷덜미를 치니 더욱 견뎌내기 어려웠다. 한번 싸움에 크게 지고 쫓겨 달아나다가, 청파(淸波)에서 경포의 군사들을 만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장함의 부장인 두 교위를 죽이고 그 군사를 두드려 흩어버렸지만 경포는 그걸로 속이 차지 않았다. 그 우두머리 장수 장함을 찾아 다시 동쪽으로 군사를 휘몰아갔다. 그러다가 장함을 만나기 전에 항량의 소문부터 먼저 듣게 되었다. 소문이란 원래 부풀려지기 마련이지만, 특히 동양(東陽)현령 진영이 2만 대군을 이끌고 귀순한 것은 항량을 실제보다 몇 배나 크게 만들어 경포에게 전해주었다.
하지만 경포는 진영과는 달랐다. 소문만 듣고 달려가 넙죽 엎드리기보다는 한군데 자리를 잡고 항량이 오기를 기다려 사람됨과 따르는 세력의 크기를 가늠한 뒤에 거취를 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제 항량이 만난 것은 바로 그런 경포와 그가 거느린 군사들이었다.
원래 영(英)장군 이셨구려. 이 항량도 진작부터 장군의 높은 이름을 듣고 있었소. 하지만 장군께서는 평소 파양호(番陽湖)와 강수(江水) 사이에서 신룡(神龍)처럼 노니신다는 말을 들었는데, 오늘은 무슨 일로 멀리 여기까지 오셨소?”
항량이 말 위에서 두 손을 모아 경포에게 예를 표하면서 그렇게 아는 체를 했다. 그러나 근간의 일은 잘 모르는 듯하자 경포는 짐짓 뻣뻣하게 받았다.
“나는 진왕을 이긴 장함이 다시 여신(呂信)까지 쳐부순 뒤에 진현에 남겨둔 좌우 교위를 청파에서 잡아죽이고 오는 길이오. 이제 장함의 머리를 얻고자 뒤쫓고 있거니와, 항(項)장군께서는 어디로 가시는 일이오?”
“장함을 쫓고 계시는 길이라면 마침 잘 되었소. 내가 멀리 회계에서 여기까지 온 것은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쳐 없애기 위함이나, 당장 급한 일은 주문(周文)을 죽이고 진왕을 핍박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만든 진장(秦將) 장함을 목베는 것이오. 우리 힘을 합쳐 함께 장함을 쳐부숩시다. 장함은 함양에 남은 진나라 군사를 모조리 끌고 와 그 세력이 만만치 않다고 들었소. 희수(戱水) 가에서 주문의 10만 대군을 질그릇 부수듯 하였고, 또 진왕이 근거하고 있던 진현을 한 싸움으로 우려 뺐으니 결코 가볍게 보아서는 아니 되오. 하지만 다행히도 내가 이끌고 온 병마가 5만은 되니 장군과 합치면 장함과도 해볼 만한 싸움을 펼쳐볼 수 있을 것이외다.”
며칠 전 진영에게 글로 써보내 재미본 말을 항량이 다시 해보았다. 목소리는 부드럽고 겸손해도 은근히 세력을 내세우는 데가 있었다. 그러나 경포는 조금도 움츠러드는 기색 없이 능청스레 말했다.
“그것 참 고마운 일이오. 항장군처럼 고명하신 분이 하찮은 이 몸을 따라주시겠다니 그저 감격할 따름이오.”
거꾸로 자신이 항량의 세력을 거두어들이겠다는 투이니 항량 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장수들까지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모두 경포를 노려보고만 있는데 항우가 가만히 보검 자루를 움켜쥐며 항량을 돌아보았다.
“작은 아버님. 아무래도 말로는 안될 위인 같습니다. 제가 가서 저 얼룩덜룩한 모가지를 베어 오겠습니다!”
그러면서 말고삐를 감아쥐는 것이 그대로 두면 바로 말을 박차 달려나갈 듯했다. 그때 항우보다 먼저 말을 몰고 나선 장수가 있었다. 이제는 항량과 항우의 사람이 되어 거기까지 따라온 환초(桓楚)였다. 환초가 말을 몰아 여럿으로부터 몇 발자국 앞으로 나가더니 경포를바라보며 소리쳤다.
“경포 형은 나를 알아보시겠소? 궁금한 게 있으면 내게 물어보도록 하시고, 더는 항장군께 무례하지 마시오!”
그리고는 투구를 젖혀 얼굴이 더 드러나도록 해 보였다. 경포가 그런 환초를 알아보고 반갑게 외쳤다.
“자네는 환초 아우 아닌가? 아직 택중(澤中)에 있는 줄 알았는데 언제 회계로 돌아갔는가?”
죄를 짓고 졸개 약간을 모아 대택(大澤)에서 숨어 지내던 시절 환초는 역시 무리를 이끌고 강수(江水)를 타고 오르내리며 도적질을 일삼던 경포를 만난 적이 있었다. 둘이 만날 때는 그런 패거리들 사이에 있기 마련인 하찮은 시비 때문이었으나, 서로를 잘 알게 된 뒤에는 형제까지 맺어 서로 돕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지난 섣달에 항장군의 부름을 받고 오중으로 돌아갔다가 지금은 별장(別將)으로 이렇게 따라 나서게 되었소. 이제 여기 계신 항장군은 이 아우의 주인 되시는 분이니, 함부로 떠보려 하지 말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무엇이든 이 아우에게 물으시오.”
그 말에 항량은 비로소 경포가 그렇게 뻣뻣하게 나온 까닭을 짐작했다. 홀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아직도 분을 못 삭여 씨근거리는 항우에게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때 한동안 말이 없던 경포가 갑자기 모든 것을 털어놓는 듯한 말투가 되어 물었다.
“좋아. 그럼 먼저 아우에게 묻겠네. 항장군은 정말 항연(項燕)장군의 혈육이신가?”
“그건 틀림없소. 이 아우가 목을 걸겠소!”
“저마다 왕공(王公)과 거족(巨族)의 후예라 우기는 세상이라 물어본 것일세. 그럼 진왕의 사자가 와서 장군을 상주국(上柱國)에 봉했다는 말도 사실인가? 진왕이 아직 살아 계신단 말인가?”
“진왕께서 살아 계신 걸 보지는 못했지만, 소평(召平)이란 사자가 와서 우리 항장군을 상주국에 봉하며 서쪽으로 밀고 나가 하루 빨리 진나라를 멸하라고 명한 일만은 틀림이 없소. 그 일에는 바로 곁에서 보고들은 이 눈과 귀를 걸겠소!”
그러자 경포는 더 뻗대지 않았다. 말없이 말 등에서 내려 홀로 걸어 나오더니 항량 앞에 이르러 전포(戰袍)의 오른 쪽 팔을 걷고 무릎을 꿇으며 시원스레 말했다.
“육(六)땅 영포가 삼가 상주국을 뵙습니다. 저와 제가 이끄는 군사들을 받아들여 주신다면 개나 말의 수고로움[犬馬之勞]도 마다하지 않고 섬기겠습니다.”
항량이 급히 말에서 뛰어내려 그 손을 잡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양쪽 장졸들이 모두 기쁨과 감격에 찬 함성을 질렀다.
하지만 기뻐하고 감격할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해가 지기 전에 항량과 항우는 다시 제 발로 찾아온 장수와 대군을 그 밑에 받아들였다. 포장군(蒲將軍)이라 하여 끝내 고향도 이름도 밝혀지지 않은 장수와 그가 거느린 만여 명의 군사였다.
동양(東陽) 현령 진영(陳영)이 2만 군사를 이끌고 온데다 경포(경布)의 만여 명과 포장군(蒲將軍)의 만여 명이 더해지자 항량이 거느린 군세(軍勢)는 어느새 7만에 가깝게 부풀어 올랐다. 항량은 그들을 다시 북으로 휘몰아 수수(휴水)를 건넌 뒤 하비(下비)에 이르렀다. 한 갈래 군사가 팽성(彭城=지금의 徐州) 동쪽에 머무르고 있다가 항량의 길을 막았다.
항량이 먼저 사람을 풀어 길을 막는 게 누구의 군사인지 알아보았다. 군사들과 정탐을 나갔던 군관이 돌아와 말했다.
“능현(陵縣) 사람 진가(秦嘉)가 이끄는 군사라고 합니다. 진가는 진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자 뒤따라 일어난 여러 의군(義軍)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같이 진나라에 맞서 싸우면서도 굳이 진왕 밑에 들기를 마다하던 자로서 스스로 대사마(大司馬)를 칭하면서 진왕께서 보낸 무평군(武平君) 반(畔)을 죽이고 자립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도 진나라에 맞서기는 저나 우리나 마찬가지 아니냐? 그런데도 우리 길을 막는 까닭은 무엇이라 하더냐?”
“진왕이 장함에게 쫓겨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진가는 진왕이 죽었다고 우기며 초나라 왕족 경구(景驅)를 왕으로 세웠습니다. 따라서 우리 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이제 경구가 진왕을 이어 초왕(楚王)이 되었으니 그 밑으로 들어와 그 명을 받들라는 뜻입니다.”
그같은 군관의 말에 항량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진왕은 가장 먼저 진나라에 맞서 군사를 일으키셨고 또 처음으로 초나라를 되세우셨으니, 우리 모든 의군의 맹주(盟主)요 왕을 일컬으셔도 지나치지 않으실 분이다. 장함과의 싸움에 서 지시고 형세는 불리해져 이제는 그 가신 곳조차 알 길이 없으나 의연히 장초(張楚)의 대왕이시다. 그런데 지금 진가는 진왕을 저버리고 경구를 왕으로 세웠으니 이는 실로 대역무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진가야말로 진나라에 앞서 쳐 없애야할 역적이다!”
그리고는 항우와 종리매를 앞세워 바로 진가의 진채를 들이치게 했다. 어쩌면 항량은 거기까지 싸움다운 싸움 한번 없이 온 군사들을 시험해볼 핑계를 얻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한편 진가는 처음부터 항량과 그가 이끄는 군사들을 얕잡아 보고 있었다. 왕족이나 명문거족의 후예는 군사를 일으키는 자들이 저마다 내세우는 혈통이요, 그들을 따르는 군사도 먹을 것이나 얻을 수 있을까하여 따라나선 유민들이 태반인 시절이었다. 요란한 소문만 털어 버리면, 항량의 군사 또한 멀리 남쪽에서 올라온 어중이떠중이 유민군(流民軍)이 오는 도중에 턱없이 머릿수만 부풀어 허세를 떨고 있는 것으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비록 자기가 세우기는 했으나 왕을 끼고 있어 얻게 된 이로움도 진가의 간을 키웠다. 한번 경구를 왕으로 세우자 세력 약한 유민의 무리가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들의 세력을 불려주었다. 달포 전에도 패공 유방이라는 자가 군사 수천을 이끌고 제 발로 찾아와 받아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진가는 경구를 앞세우고 유방을 받아들여 동양사람 영군(寧君)과 함께 장함의 부장(副將) 사마니(司馬尼)를 치게 했다. 둘은 사마니를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북쪽의 든든한 울타리 노릇은 잘해냈다. 진가가 그때 항량의 길을 막은 것도 반드시 싸우겠다는 뜻보다는 그렇게 겁을 주어 유방처럼 제 발로 귀순해 오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진가의 마음가짐이 그렇다 보니 그 군사 또한 싸울 채비가 되어 있을 리 없었다. 진채조차 제대로 단속하지 않고 턱도 없이 항량이 귀순하겠다는 소식만 기다리는데, 갑자기 항우와 종리매가 이끄는 두 갈래 군사가 진가의 진채를 네 토막으로 갈라놓듯 짓밟아 왔다. 그제야 놀란 진가가 장졸들을 독려해 맞서보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뒤따라 덮쳐온 항량의 중군(中軍)을 당해내지 못하고 전군이 그대로 무너져 버렸다.
하지만 묵은 생강이 맵다고, 일찍부터 녹림(綠林)을 떠돌았고 진승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군사를 일으켰던 진가라 그대로 끝장이 나지는 않았다. 경구를 구해 어지러운 싸움터를 벗어나기 바쁘게 거기까지 뒤따라온 졸개들을 풀어 패군(敗軍)을 수습했다.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던 장수와 군사들이 소문을 듣고 진가와 경구를 찾아들어 호릉(胡陵)에 이르렀을 때는 다시 상당한 세력이 되었다.
“방심하다가 어린것들에게 당했구나. 그것들에게 몇 배로 갚아주지 않으면 내 초나라의 대사마(大司馬)가 아니다!”
진가가 그렇게 이를 갈고 있는데 때맞추어 항량의 대군이 거기까지 뒤쫓아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듣고 난 진가가 투구 끈을 여미며 장수들에게 소리쳤다.
“모두 군사들을 단속해 싸울 채비를 단단히 갖추라! 길목에 숨어 기다리다가 쥐가 독 안에 들기를 기다려 가차 없이 때려잡으리라!”
그리고는 적은 군사로 많은 군사를 되받아 치기 좋은 길목을 고른 뒤에 거느리고 있는 군사를 모두 숨기고 기다렸다. 그 사이 장졸들을 잘 다독여 사기도 어느 정도 회복된 데다, 병장기도 그만하면 쓸만하다 싶게 갖춘 체였다.
진가 쪽에서 보면 미리 지리(地利)를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기습에 가까운 반격이었다. 또한 먼저 와 기다리던 군사로 급하게 뒤쫓아오는 군사를 치는 것이요, 한번 져서 삼가고 살피는 군사로 이겨 교만해진 군사를 치는 일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기기로 되어 있는 싸움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진가가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는 게 있었다. 항우의 빼어난 무예와 그를 따르는 8천 강동병의 용맹이었다. 그날 구릉 사이로 난 좁은 계곡에 숨어 기다리던 진가는 항량의 대군이 물러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이 들어왔다 싶자 좌우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쳐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그리고 자신도 칼을 빼들고 말에 올라 앞장서 덮쳐갔다.
그 갑작스럽고도 거센 공격에 항량의 군사들은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흉갑(胸甲)을 걸치고 방패를 든 선두의 병사들이 덩이지어 맞받아 쳐왔고, 다시 그들을 이끌던 젊은 장수가 물살을 가르듯 진가의 병사들을 가르며 말을 몰아 달려 나왔다.
“나는 초인(楚人) 항우다. 이놈, 너도 명색 장수라면 달아나지 말고 이 창을 받아보아라!”
그렇게 소리치며 철극(鐵戟)을 꼬나 잡고 다가오는 그 젊은 장수의 두 눈에서는 불길이 뚝뚝 듣는 듯했다. 진가는 자신도 모르게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진심으로 자신의 등 뒤에 항우가 노리는 다른 장수가 있기를 바랐으나 헛일이었다. 근처에 말을 탄 장수라고는 오직 그 자신뿐이었다.
항우가 자신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다는 걸 깨달은 진가는 얼른 칼을 끌어당겨 맞받아 칠 자세를 갖추려 했다. 그러나 항우가 탄 말은 너무 날랬고, 휘두른 철극 또한 너무 세차고 빨랐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아홉 자 철극이 한줄기 굵고 긴 화살처럼 그 가슴에 내리 꽂히니, 진가는 비명조차 제대로 질러보지 못하고 말에서 떨어졌다.
대장인 진가가 그 모양으로 죽자 그가 이끌던 장졸들에게는 병략도 기세도 소용없었다. 거기다가 8천 강동병이 저마다 작은 항우가 되어 무섭게 치고 드니 더욱 배겨내기 어려웠다. 오래잖아 무기를 버리고 털썩 털썩 꿇어앉아 목숨만을 빌었다.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마라!”
항량이 급히 명을 내려 진가의 군사들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진가가 왕으로 세운 경구는 다시 용케 몸을 빼내 양(梁)땅으로 달아나고 없었다.
항량은 군사를 풀어 경구를 뒤쫓게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경구 홀몸으로 달아나 찾기도 어려울 뿐더러 굳이 찾아야할 까닭도 없었다. 장졸들을 호릉에 머물러 쉬게 하면서 진왕의 생사를 수소문하는 한편 부근에 흩어져 숨어있는 그 세력을 거두어들였다.
거기서 항량의 군세는 다시 부풀어 어느새 10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기세가 오른 항량은 바로 대군을 서쪽으로 몰아 진나라의 심장부를 찔러가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파발이 달려와 급한 소식을 알렸다.
“장함이 군사들이 율현(栗縣)에 이르렀는데 그 기세가 자못 사납다고 합니다.”
율현은 호릉 남쪽에 있어, 그곳에 장함의 군사가 이른 것은 항량에게는 적잖이 성가신 일이었다. 아무리 서쪽으로 가는 길이 급하다 해도 적을 등 뒤에 남긴 체 그냥 밀고들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항량이 은근히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별장(別將)인 주계석(朱鷄石)과 여번군(餘樊君)이 나섰다.
“저희들이 가서 장함의 군사들을 두들겨 흩어놓겠습니다.”
여번군은 회계에서부터 데리고 온 사람이었지만, 주계석은 호릉에서 새로 얻은 장수였다. 부리(符離)에서 나고 자란 그는 원래 진승을 본받아 군사를 일으켰으나, 그 밑에 들어가지 않고 따로 떠돌았다. 그러다가 그 무렵 들어서야 항량을 따르게 되었는데, 회계에서 출발한 장수들보다 끼어든 게 늦은 만큼 공을 서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항량에게는 그들이 나서준 것이 반갑기만 했다. 주계석이 마음에 걸렸지만 여번군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 믿을만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에게 거듭 당부한 뒤 군사 만 명을 떼어주었다.
주계석과 여번군이 떠난 다음 날 이번에는 항우가 항량을 찾아와 말했다.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쳐 없애는 일도 급하지만, 먼저 동쪽을 평정하여 뒤탈을 없이 하는 것도 그 못지않게 급합니다. 특히 양성(襄城)은 진나라가 보낸 관리와 군사들이 굳게 지켜 지난 아홉 달 동안 한 번도 우리 의군(義軍)들 손에 떨어져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대로 남겨두고 서쪽으로 갔다가는 등 뒤를 겨누는 비수 꼴이 되니 반드시 먼저 쳐부수어야 할 성입니다. 제게 군사 만 명만 주십시오. 주계석과 여번군이 돌아오기 전에 양성을 떨어뜨려 뒤탈을 없이 하겠습니다.”
마음은 한없이 급했지만 항량이 들어보니 그것도 그럴듯한 소리였다. 거기다가 자식보다 더 아끼고 믿는 조카가 하는 말이 아닌가. 이에 항량은 다시 1만 군사를 떼어 항우에게 주며 양성을 치게 하고 자신은 그대로 호릉에 머물러 서쪽으로 갈 병마와 군량을 모아들였다.
그런데 주계석과 여번군이 떠난 지 사흘도 안 돼 기막힌 소식이 들어왔다. 그들을 따라갔던 군관 하나가 어디서 흠씬 얻어맞고 쫓겨온 수캐 꼴로 돌아와 울먹이며 말했다.
“저희 편이 크게 지고 말았습니다. 군사는 열에 일고여덟이 죽거나 상하고, 여(餘)장군께서는 돌아가셨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좀 더 자세히 경과를 말하거라. 그리고 주계석은 어찌 되었느냐?”
그러자 그 군관이 소매로 눈물을 씻으며 사설처럼 늘어놓았다.
"저희들이 율현(栗縣)에 이르렀을 때 진군(秦軍)은 이미 성을 차지하고 북쪽으로 2십리나 올라와 숨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이 먼저 작은 군사로 우리를 골짜기로 꾀어 들였는데, 주(朱)장군께서는 아무 의심 없이 우리 군사들을 그리로 몰아댔습니다. 여(餘)장군께서 말렸으나 소용없더군요. 주장군은 군사를 둘로 쪼개 가며 적을 쫓다가 마침내 좁은 골짜기에서 에워싸이고 말았습니다. 그걸 보자 여장군도 하는 수없이 남은 군사를 몰아 주장군을 구하러 갔는데, 저도 그 군사들 중에 있었습니다. 여장군과 저희들이 힘을 다해 치고 들자 적도 주춤하여 길이 열리더군요.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주장군은 그렇게 여장군과 저희들이 목숨을 걸고 연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를 구하러 갔던 여장군과 저희들은 적병 가운데 에워싸여 죽어 갈 수밖에 없었지요. 저도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으나 요행 임자 잃은 군마 한 필에 매달려 겨우 죽을 구덩이를 벗어났습니다.”
그래놓고 그 군관은 새삼 분한 듯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항량이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주계석은 어찌 되었느냐? 지금 어디 있느냐?”
억지로 화를 삭이고는 있어도 항량 또한 제 속이 아니었다. 오중을 떠난 뒤로 처음 겪는 패배인데다, 회계군수가 되어 처음 얻은 장수 중에 하나인 여번군(餘樊君)이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었다. 군관이 이를 갈 듯 말했다.
“듣기로 주장군은 남은 군사들을 이끌고 호릉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합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들을 자취를 전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장군께 죄를 받게 될까 다른 곳으로 달아난 것 같습니다.”
그 말에 항량도 억눌렀던 화를 마음놓고 터뜨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입만 살아 떠들던 비렁뱅이 도적놈이 큰일을 망쳐 놓았구나. 내 이 도적놈을 잡아 대의의 무서움을 밝히지 않고는 서쪽으로 가지 않겠다!”
그리고는 계포를 불러 명을 내렸다.
“군사들을 풀어 주계석이 어디로 갔는지 알아주시오!”
계포가 발 빠르고 눈 귀 밝은 군사들을 풀어 알아보니 주계석의 행방은 곧 밝혀졌다. 그 군관의 말대로 주계석은 처음 호릉으로 돌아와 항량에게 구원을 청하려 했으나 제가 한 짓이 캥겼던지 백여 리 동쪽 설현(薛縣)으로 달아나 숨어있었다. 진군의 추격을 겨우 벗어난 패군(敗軍) 3천과 함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쪽 함양(咸陽)으로 가는 길을 서둘러 오던 항량이었다. 설현으로 가는 길은 거꾸로 동쪽이었으나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설현으로 군사를 휘몰아 갔다. 대군이 밤낮을 쉬지 않고 내달으니 다음날에는 설현에 이를 수 있었다. 항량은 군사를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고을 전체를 에워싸듯 한 뒤 몸소 앞장 서 주계석이 머물고 있는 곳을 들이쳤다.
겨우 3천의 군사로 숨어있던 주계석은 감히 맞설 엄두도 못내고 달아나기부터 먼저 했다. 그러나 사방이 항량의 군사들로 에워싸여 그것도 뜻 같지 못했다. 주계석은 독 안에 든 쥐처럼 에움 속을 내몰리다가 이름 없는 군사의 칼에 죽어 그 목만 항량에게 바쳐졌다.
“싸움에 진 것은 주계석의 죄가 아니다. 어려움에 빠진 아군을 저버린 게 그 큰 죄요, 함부로 본진을 벗어나 달아나려 한 게 더욱 큰 죄다!”
항량은 주계석의 목을 진중에 높이 걸게 하고 모든 장졸들에게 그렇게 알렸다.
주계석을 죽여 흔들리던 군심(軍心)이 가라앉히고 사기를 되살린 항량은 다시 대군을 서쪽으로 돌리려 했다. 그런데 양성(襄城)을 치러 간 항우가 떠날 때의 큰소리와는 달리 열흘이 가까워도 소식이 없었다. 항량이 사람을 양성으로 보내 사정을 알아보게 했더니 며칠 안돼 그 사람이 돌아와 알렸다.
“양성은 성벽이 높은데다 군민(軍民)이 힘을 합쳐 굳건히 지키는 바람에 부장(副將=항우)님의 용맹으로도 아직 떨어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앞으로도 가까운 날, 쉽게 성이 떨어질 것 같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부장은 무어라고 하던가?”
“며칠만 더 기다려 주시면 반드시 성을 떨어뜨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달리 어쩔 수가 없었다. 항량은 장수 몇에 군사 3천을 딸려보내 항우를 돕게 하고, 자신은 설현에서 그들이 이기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 바람에 항량은 뜻밖으로 오래 설현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항량이 양성에서 좋은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한 장수가 백여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항량을 만나러 왔다. 사인(舍人)에게 넣어보낸 이름을 보니 유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유방이라.....누가 이 사람을 아시오?”
항량이 좌우를 돌아보며 그렇게 묻자 마침 가까운 곳에 있던 패현 사람 하나가 아는 대로 대답했다.
"유방은 원래 유계란 이름으로 풍.패(豊 沛)의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젊은 날을 보낸 건달이었습니다. 나이 서른이 훨씬 넘어 벼슬살이를 한다는 게 겨우 정장(亭長) 노릇이었는데, 그나마 역도(役徒)들을 놓아준 죄로 쫓겨 망산과 탕산에 숨어산 적도 있지요. 그러다가 진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자 같이 들고일어나 현령을 죽인 패현 부로(父老)와 젊은이들의 추대해서 패현 현령이 되었습니다. 흔히 패공(沛公)으로 불리는데, 얼마 전까지도 진가(秦嘉)와 함께 경구(景驅)를 초왕(楚王)으로 섬겼던 자입니다.”
“세력은 어느 정도인가?”
“한때는 풍읍과 패현을 차지하고 인근 고을을 휩쓸어 제법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러나 풍읍이 위나라로 넘어 가버린 뒤에는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러다가 경구를 섬겨 적지 아니 회복했지요. 장함의 부장 사마니를 내쫓고 탕현(탕縣)과 하읍(下邑)을 차지해 지금은 만 명 가깝게 거느리고 있을 것입니다.”
“경구를 섬기던 자라…. 그런 자가 왜 나를 찾아 왔을까?”
항량이 그러면서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패공을 불러들이게 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항량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오래잖아 한 멀쑥한 장수가 항량의 군막으로 들어왔다. 콧날이 높고 이마가 튀어나온 데다 길게 수염을 기르고 있어 어딘가 용을 떠올리게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람을 겁주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그런 생김은 아니었다. 오히려 왠지 편안하고 만만한 기분이 드는 그런 사내였다.
“그대는 역적 진가와 더불어 경구를 초왕(楚王)으로 섬겼다고 들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왔는가?”
목소리는 차가웠으나 그때 이미 항량의 마음은 반 넘어 풀려있었다. 패공 유방이 조금도 움츠러든 기색 없이 태연하게 받았다.
“그때는 진가와 경구가 있음을 알았을 뿐, 상주국(上柱國)께서 계신 줄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 나는 경구를 왕으로 섬기러 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군사를 빌려 맺힌 한을 풀고, 잃은 것을 되찾으려 했을 뿐입니다.”
“그러면 그대는 누구든 힘만 있으면 따르겠단 말인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세라면 어쩔 수 없겠지요. 거기다가 맺힌 한을 풀고 잃은 것을 되찾을 힘을 빌려준다면 누구에게라도 머리를 숙일 수 있습니다.”
패공이 그렇게 숨김없이 속을 털어놓자 항량도 조금씩 경계를 풀었다. 빙그레 웃으며 패공에게 물었다.
“공의 맺힌 한은 어떤 것이며, 그토록 간절히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요?”
“믿고 맡긴 사람에게 나고 자란 땅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을 한꺼번에 잃은 일입니다. 풍읍(豊邑)을 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습니다.”
패공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옹치에게 품고 있는 원한이 그대로 얼굴에 타오르고 있는 듯했다. 항량이 이제는 진정으로 궁금해서 물었다.
“믿고 맡긴 사람이 누구며, 풍읍은 어찌하여 잃게 되었소?”
그러자 패공은 더욱 달아오른 얼굴로 욕설 반 저주 반 섞어 옹치가 위나라에 투항한 일을 일러바치듯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다 큰 아이처럼 항량에게 졸라댔다.
“제게 군사 만 명만 빌려주십시오. 반드시 옹치의 목과 풍읍 성을 상주국께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상주국의 깃발아래 들어 진나라를 쳐 없애는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패공을 보는 항량의 눈길이었다. 조금 걱정스러워하면서도 다정하게 바라보는 게 철이 덜든 아우 보살피듯 했다. 평소 무엇이든 차분하게 따져보고 살피는 습성과는 달리, 벌써 패공을 다 알아보았다는 자신감까지 그 눈빛에 깃들어 있었다.
(약간 모자라 보이기는 하지만 씩씩하고 시원스런 호걸이다. 거두어 두면 쓸모가 있겠다.)
항량은 속으로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무언가를 깊이 헤아리는 듯하다가 크게 인심 쓰듯 말했다.
“좋소! 공에게 오대부(五大夫)의 작위를 가진 장수 열 명과 군사 5천을 빌려주겠소. 당장 풍읍으로 가서 그토록 가슴속에 응어리진 욕됨과 분함을 씻으시오. 다만 뜻을 이룬 뒤에는 바로 돌아와 공의 말대로 내 깃발 아래서 싸워주어야 하오.”
뒷날 사랑하는 조카 항우가 그 패공을 상대로 분통 터지는 싸움을 벌이다가 마침내는 패망해 죽게 되는 것을 미리 떠올려 보면 참으로 알 수 없는 항량의 호감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보잘것없는 지역 세력의 우두머리에 지나지 않던 유방은 그렇게 항량의 그늘에 들면서부터 천하를 다툴만한 세력의 주공(主公)으로 자라가게 된다. 하지만 뉘 알랴. 그같은 그들의 만남에 이미 하늘의 뜻이 담겨 있었는지를.
그런데 사람의 헤아림으로서는 알아보기 힘든 하늘의 뜻은 그날 항량에게 또 다른 만남을 마련해놓고 있었다. 방향을 달리하기는 하지만, 패공 유방에 못지않게 항량에게는 뜻 깊은 사람이 되는 범증(范增)과의 만남이었다.
그날 해질 무렵 뜻밖으로 쉽게 군사를 얻어 크게 세력을 부풀린 패공이 서둘러 풍읍으로 달려간 뒤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계포가 뛰듯이 항량의 군막으로 달려와 알렸다.
“범증 선생이 찾아오셨습니다!”
"범증(范增) 선생이 누구요?”
평소 몸가짐이 가볍지 않은 계포가 전에 없이 허둥대는 게 이상해 항량이 물었다. 계포가 약간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범증 선생은 거소(居巢) 사람으로 젊어서부터 뛰어난 재주와 학식으로 사람들의 우러름을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 나라에서 불렀으나 끝내 벼슬살이를 마다하고 여항(閭巷)에 섞여 살며 학문을 익히고 식견을 넓혔는데, 특히 천문과 지리에 밝고 그것을 세상일에 견주어 풀어 기묘한 계책을 짜내기 좋아했습니다. 그러다가 진시황이 천하를 아우른 뒤에는 기고산(旗鼓山)에 초막을 얽고 숨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어느덧 나이 일흔이 되었지만 젊은이 못지않게 기력이 좋고 품은 뜻이 커서 옛적 태공망(太公望) 강상(姜尙)의 풍도가 있다고 합니다. 진작에 폐백을 갖추어 찾아 뵈어야할 분이셨는데, 선생께서 되레 이렇게 우리를 찾아오셨으니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돕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장군께서는 먼저 의관을 정제하시고 공손히 선생을 맞아들이십시오. 선생께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이든 들어주시고, 되도록 장군의 장하(帳下)에 남으시도록 붙들어 보십시오. 천 명의 좋은 장수보다 범증선생을 군사(軍師)로 모시는 것이 훨씬 더 든든한 일이 될 것입니다.”
“거소에 그토록 대단한 분이 계신 줄 몰랐습니다. 공의 가르침을 따르겠소.”
항량은 그러면서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범증을 들이게 했다. 그리고 어른을 뵙는 예로 범증을 맞은 뒤 윗자리를 권하면서 공손하게 물었다.
“선생께서는 어떤 가르침이 내리시려고 저를 찾으셨습니까?”
별로 사양 없이 윗자리에 앉은 범증이 한동안 항량을 살펴보다가 불쑥 물었다.
“장군께서는 왜 진승이 패망한지 아시오?”
“불은 꺼지기 전에 반드시 한번 크게 타오릅니다. 진왕께서 가장 먼저 일어나셨고…. 진나라는 아직 여력(餘力)이 다하지 않아…. 진왕께서는 바로 그 진나라의 마지막 불꽃에 그을린 것이나 아닐는지요?”
항량이 조심으로 그렇게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범증이 무겁게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아니오. 그 패망은 진승이 스스로 불러들인 것입니다. 진승은 망해 마땅한 사람이었소.”
“그 무슨 연유이신지….”
“육국(六國)이 모두 진나라에게 망했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억울하고 한 많은 나라는 초나라일 것이오. 회왕(懷王)께서 무도한 진나라의 속임수에 빠져 잡혀가신 뒤 끝내 초나라로 돌아오지 못하시고 함양에서 돌아가신 지 70년이 지났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초나라 사람들은 그 일을 애통하고 분하게 여기고 있소이다. 그 까닭에 일찍이 남공(南公=초나라의 이름난 陰陽家)은 ‘초나라에 설령 석 집밖에 남아있지 않다 해도, 진나라를 멸망시킬 나라는 반드시 초나라일 것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소. 비록 진승이 가장 먼저 군사를 일으켜 진나라에 맞선 공이 있다하나, 초나라 땅에서 일어났으면서 초나라 사람들의 한을 저버린 것은 큰 잘못이오. 초나라 왕실의 후예를 세우지 아니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어찌 그 세력이 오래 가기를 바랄 수 있겠소?”
“듣고 보니 선생의 말씀이 옳은 듯합니다. 진왕께도 허물이 없다 하지 못할 것입니다.”
“장군도 다르지 않소이다. 장군이 강동(江東)에서 군사를 일으키자 초나라 땅에 벌떼 같이 일어났던 장수들이 모두 다투어 장군에게로 몰려드는 것은 장군이 망국(亡國)의 한을 풀어 주리라 믿어서 외다. 곧 장군의 가문은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가 되어 초나라를 위해 싸웠으니, 장군도 조선(祖先)의 뜻을 이어 그리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오. 반드시 옛 왕실의 후예를 찾아 초나라를 되살려 주리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요 바램이니, 그걸 저버리면 장군 또한 진승의 전철을 밟게 될 뿐이오!”
“미욱하나 선생께서 무엇을 제게 일깨워주려 하시는지는 알겠습니다. 반드시 말씀하신 대로 받들겠습니다. 그밖에 제가 마음에 새겨 두어야할 일은 무엇인지요?”
그때만 해도 항량에게는 오중(吳中) 시절의 차분함과 빈틈없는 헤아림이 살아있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겸손하게 대꾸하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범증을 살폈다. 강동에서 온 새로운 강자(强者)가 그렇게 흔연히 자신의 말을 받아들여 주자 신이 났는지 범증은 이번에는 거침없이 병법의 요체를 쏟아놓았다.
(이 사람은 흔해빠진 유세가(遊說家)들처럼 자신의 재주를 팔려고 나를 찾아온 것 같지는 않다. 내가 진승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몇 마디 깨우쳐주러 왔을 뿐 써주기를 바라는 눈치는 전혀 없다. 아마도 나에게 빌 것이 없기 때문에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내 군막(軍幕)에 붙들어두려면 지금 매달려야 한다. 상대가 뜻하지 않은 곳을 치고 나가면[출기불의]쉽게 뜻을 이룰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이윽고 그렇게 헤아린 항량은 갑자기 범증의 발아래 무릎을 꿇으며 간곡하게 말했다.
“선생의 크신 가르침은 한마디 한마디가 죽백(竹帛)에 써서 남겨 둬야할 만큼 값집니다. 이제 제가 이렇게 엎드려 염치없이 비는 바는 오늘부터 저희들의 군사(軍師)가 되어달라는 것입니다. 부디 저희 군막에 머무시어 삼군(三軍)의 스승으로 저희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십시오. 선생의 크신 이름을 흠모하여 폐백을 갖추고 예를 다해 모셔오려 하던 차에 선생께서 몸소 이렇게 와주셨으니, 이 또한 하늘의 뜻인가 합니다.”
그러자 계포도 얼른 항량의 속셈을 알아차리고 그 곁에 나란히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게 제 불찰입니다. 상주국(上柱國)께서는 진작에 예물과 마련하고 수레를 내어 선생님을 모셔 오라 하셨으나 제가 게을러 하루 이틀 미루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제 게으름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상주국의 간절한 뜻을 받아주십시오. 저희를 가르치고 이끄시어 진나라 멸망의 날을 앞당겨주십시오.”
그러면서 군막 바닥에 머리를 짓찧었다.
두 사람이 갑작스레 그렇게 졸라대자 범증은 놀라고 당황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 사양하다가 마침내 그들의 청을 받아들였다.
“좋소이다. 초나라 왕실을 되 일으켜 세워 주신다면 초나라의 유신(遺臣) 치고 누가 감히 장군을 거역할 수 있겠소? 내 비록 늙고 어리석으나 힘을 다해 장군의 큰 뜻이 세상에 펼쳐질 수 있도록 하겠소. 다만 오늘은 이만 돌아갔다가 가솔과 작별한 뒤에 장군을 따르겠소이다.”
범증의 그같은 말에 항량은 크게 기뻐하며 계포를 기고산까지 딸려 보냈다. 계포는 수레 가득 금과 비단을 싣고 가 그 가솔을 위로하는 한편 돌아오는 범증을 편히 모셨다.
범증은 기고산 초막으로 돌아간 뒤에야 퍼뜩 천명(天命)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날 밤 계포가 잠들기를 기다려 가만히 귀갑(龜甲)을 태우고 시초(蓍草)를 뽑아 보았다. 항량과 항우가 운세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그들 중 하나에게 굵고 짧은 왕운(王運)이 있었으나 패역(悖逆)의 상과 함께였다. 거기다가 더욱 고약한 일은 자신은 그런 왕운마저 끝내 그들과 함께 하지 못한다고 나온 것이었다.
(아뿔싸! 내가 경솔하였구나. 자잘한 감동으로 큰 일을 헤아리지 못했다….)
범증은 그렇게 뉘우쳤으나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녘에야 옛말로 자신을 달래며 겨우 눈을 붙였다.
(거북껍질과 잡풀이 저 아득한 하늘의 뜻을 드러낸다한들 얼마이겠는가. 정성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법. 그럴수록 내가 이들을 잘 이끌어 세상을 바로잡도록 해야 한다.)
항량도 그런 범증의 심사를 헤아리기라도 한 듯 초나라 왕실을 되세우는데 정성을 다했다. 다음 날로 널리 사람을 풀어 민간 어딘가에 숨어있을 회왕(懷王)의 후예를 찾는 한편 옛 초나라 조정의 벼슬아치들까지 불러모았다. 그런 항량의 처사 또한 범증의 불만스런 심기를 적잖이 누그러뜨려 주었다.
그런데 항량의 군막에 든 지 열흘도 안 돼 범증은 다시 항량의 운세와는 다른 방향으로 묘하게 불길한 예감을 건드리는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그날 점심나절 항량과 함께 양성(襄城) 싸움을 의논하고 있는데 군관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패공 유방이 돌아와 뵙기를 청합니다.”
그리고 항량의 입에서 데려오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한 장수가 들어오는데 그를 본 범증은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졌다.
(기이한 상이다. 모든 것이 넘치는 듯하면서도 텅 비었구나. 텅 비어서 오히려 천지 만물을 다 담아내는 우주처럼…. 눈 여겨 봐두어야 할 인물이다.)
하지만 그를 보는 항량의 눈길은 부드럽고 정이 가득했다.
“패공이구려. 풍읍을 되찾았다는 반가운 소문은 들었소만 어찌되었소? 공에게 들은 바로 미루어 보면 쉽지 않은 싸움이었을 텐데….”
항량이 그렇게 묻자 유방이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옹치(雍齒) 그 악물(惡物)이 사생결단으로 나왔으나 상주국께서 빌려주신 장수와 군사들의 용맹에 힘입어 풍읍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성이 사흘만에 떨어졌는데도 이렇게 늦은 것은 오래 나를 떠나있던 풍읍의 민심을 되 거두어들이느라 분주한 까닭이었습니다”
“그럼, 맺힌 한은 좀 푸셨소?”
항량이 약간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그러자 유방이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맺힌 한이라니요?”
“지난번에 나를 찾았을 때는 이를 갈더니. 성이 떨어지면 풍읍의 군민(軍民)은 말할 것도 없고 짐승 한 마리, 풀 한포기 남겨두지 않을 기세였소.”
그러자 유방이 슬쩍 얼굴을 붉히며 히죽 웃었다.
“실은…. 그때는 울화가 치밀어 잠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옹치는 위(魏)나라로 달아나고 풍읍은 되찾았으며, 군민은 이미 내게 항복했는데 또 무슨 풀어야할 한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풍읍 사람들의 겁먹고 놀란 가슴을 달래기에 바빴습니다.”
너그러운 건지 속이 없는 건지 모를 대답이었는데, 그것도 범증에게는 유방이 가진 어떤 괴력(怪力)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항량과는 방향을 달리하는 힘, 항량에게 보탬이 되는 힘이 아니라 맞서게 될 것 같은 힘이었다.
(지금은 한 별장(別將)으로 항량을 따르고 있는 모양이다만 끝내 작은 못에 가두어놓을 수 있는 용 같지가 않구나….)
그 바람에 다시 의기소침했던 범증이 마음을 추슬러 자신을 왕자(王者)를 돕는 모사(謀士)요, 일군의 군사(軍師)로서 굳건히 자리매김 하게 되는 것은 항우를 만난 뒤가 된다.
항량이 이끄는 세력의 군사(軍師)가 된 범증이 패공 유방을 보고 난 뒤 보름쯤 지났을 때였다. 싸움을 나갔던 한 갈래의 군사가 항량의 본진(本陣)으로 돌아왔다. 양성(襄城)을 떨어뜨리고 돌아온 군사들로서, 우두머리 장수는 바로 그 동안 여럿으로부터 귀가 따갑도록 그 이름을 들은 항우였다. 항량은 범증을 자신의 군막에 불러놓고 항우를 맞아들였다.
“어려운 싸움이라고 들었다. 애썼다. 어디 상한 데는 없느냐?”
항우가 군례(軍禮)를 올리자 항량이 숙부라기보다는 자애로운 아비처럼 항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저는 아무 탈 없습니다만 군사들이 좀 상했습니다. 특히 강동 자제들을 수 백 명 잃었고, 장수로는 용저(龍且)와 여마동(呂馬童)이 다쳤습니다.”
“여러 날 끄는 걸로 미루어 어려운 싸움인 줄은 알았지만 그토록 심할 줄은 몰랐구나. 양성(襄城)은 어떻게 처리하였느냐?”
항량이 그렇게 묻자 항우는 잠시 주저함도 없이 받았다.
“성이 떨어지는 날로 군민(軍民)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맞선 것들은 모두 산 채 땅에 묻어버리고 왔습니다.”
“산 채로 땅에 묻었다고? 그게 얼마나 되느냐?”
항량이 약간 어두워진 얼굴로 물었다. 그러나 항우는 태연하기만 했다.
“현령과 현리, 군관들에다 그들의 부추김에 놀아난 현군과 성안 젊은것들을 합쳐 3천 명 남짓이었습니다”
“진나라 관리들은 그렇다 쳐도 군사들과 백성들은 살려서 쓸 수도 있지 않았느냐? 거기다가 어차피 우리 손안에 들어온 성이면 우리 땅으로 지켜야할 터, 그때에는 더 많은 군사들이 있어야할 터인데......”
“양성 같은 곳을 지키려고 군사를 남긴다는 것은 우리 힘을 흩는 일일뿐입니다. 우리가 진나라를 쳐 없애고 함양을 차지하면 양성은 절로 우리 손에 들어올 것이오, 진나라에 져서 쫓기게 된다면 설령 양성을 보존하고 있다 해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거기다가 양성의 군민은 이미 진나라의 다스림에 길들어 있어 쉽게 우리에게 항복하고 따라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언제 창칼을 거꾸로 들이댈지 모른 것들이라 차라리 땅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그때까지도 항량의 얼굴은 어두웠고 범증의 마음 또한 적지 아니 무거웠다.
“사람을 산 채로 땅에 묻는 짓은 여정(呂政)같이 자들이나 하는 폭거(暴擧)이다. 민심이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느냐?”
그렇게 나무라듯 조카의 말을 받는 항량 곁에서 범증은 가만히 항우가 하는 양을 살폈다. 항우가 한바탕 크게 웃은 뒤에 말했다.
“하지만 그래서 여정이 시황제(始皇帝)가 될 수 있었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남의 임금 된 자에게는 부끄러워할 일이 없으며[군왕무치], 군사를 부림에는 속임수를 마다하지 않고,[兵不厭詐] 영웅은 간사함과 흉악함과 계략과 독기[奸凶計毒]을 다 품어야 한다 했습니다. 모두 비상한 일을 하려는 이에게는 비상한 방도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찌 세상 모든 일에 먹물들의 탁상공론만을 법으로 삼을 수가 있겠습니까? 진나라를 쳐 없애고 천하를 구할 수 있다면 저는 3천 명이 아니라 30만 명이라도 땅에 묻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 내 일찍이 사람의 목숨을 가볍게 여기고도 민심을 얻어 큰 뜻을 이룬 이는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받는 항량의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곁에 있는 범증은 달랐다. 그 나이에 이르도록 범증이 배우고 익힌 것이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들여 익힌 것은 병가(兵家)요, 높이 받들어온 것은 형명학(刑名學)이었다. 그같은 항우의 말을 듣자 항량의 장막에 들고 처음으로 후련함과 함께 오히려 한줄기 휘황한 가능성의 불꽃을 본 느낌이 들었다.
(엄청난 힘과 기상이다. 인의(仁義)니 왕도(王道)니 하는 것들이나 무위(無爲)니 자연(自然)이니 하는 것들과는 다르지만, 저 또한 천하를 다스릴 방도가 되지 못한다는 법은 없다. 시황제처럼 항구적인 통치 원리로 키우지만 않는다면, 이같은 난세를 헤쳐 가는 데는 오히려 간명하고도 효능이 더 클 수도 있다. 저만하면 내 여생을 한번 걸어 볼만한 사람이다.)
범증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스스로 나서 항우를 발명해 주었다.
“목숨도 목숨 나름 - 적은 목숨을 들여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가볍게 여겨 흠될 것 없습니다. 옛적 은나라를 세운 탕왕(湯王)은 걸(桀)을 칠 때 맞서는 자들을 모두 죽였을 뿐만 아니라 그 가솔들까지 잡아다 죽이거나 노비로 삼았고, 주나라를 일으킨 무왕(武王)은 목야(牧野)의 싸움에서 방패와 쇠몽둥이가 피에 떠다닐 만큼 많은 주(紂)의 군사를 죽이고 나서야 천하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무왕은 또 뒷날에 경계를 내리기 위해 죽은 주(紂)의 시신에 화살 세 발을 쏘고 그 목을 경여(輕呂=보검 이름)로 잘랐으며, 목을 매어 죽은 그 애회(愛姬)들까지도 검은 도끼로 목을 베어 작은 백기에 매달게 했습니다. 탕무(湯武)의 밝고 어지심으로도 그리하셨으니, 이번 일도 반드시 젊은 장군만을 나무라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범증의 그같은 말에 비로소 항량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먼저 두 손을 모아 범증에게 고마움부터 드러내고 말하였다.
“못난 조카를 좋게 보아주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저 아이는 가형(家兄)의 한 점 혈육일 뿐만 아니라 우리 하상(下相) 항가(項家)를 짊어지고 갈 종손이기도 합니다. 자식 못지않게 공들여 길렀으나 모자란 곳이 많으니 부디 선생께서 채우고 다듬어 주십시오”
그리고는 다시 항우을 보며 엄숙하게 말하였다.
“우(羽)야. 여기 범증 선생께 인사 올려라. 우리 삼군(三軍)의 스승으로 모신 분이시다. 너는 범증 선생을 스승으로 모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아버님처럼 받들도록 해야 한다.”
무엇에 끌렸는지 항우도 한번 망설이는 법조차 없이 범증에게 넙죽 절을 올리면서 시원스레 말하였다.
“항우가 군사(軍師)를 절하며 뵙습니다. 이제부터 아부(亞父)라 부르겠습니다.”
아부란 아버지에 버금가는 이를 말하니 곧 아버지 다음으로 우러러 모시겠다는 뜻이 된다. 평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항우의 기개에 견주어 보면 엄청난 겸양이요, 공손이었다. 그같은 항우의 태도가 인간적인 매력이 되어 다시 범증을 사로잡았다. 거기다가 며칠 안 돼 회왕(懷王)의 손자 웅심(熊心)을 찾았다는 전갈이 들어오면서 그때까지 범증의 마음 한구석을 어둡게 하고 있던 후회를 한층 줄였다.
“그래 왕손(王孫 =당시 왕손이란 호칭은 귀공자를 뜻하였으나 여기서는 뜻 그대로 왕의 자손)은 어디서 찾았다고 하던가?”
항량은 웅심을 찾았다는 말에 진심으로 기뻐하며 그 일을 전하러온 종리매(鍾離매)에게 물었다. 종리매가 들은 대로 답했다.
“음릉(陰陵) 남쪽의 한 산간 마을에서였다고 합니다. 황공스럽게도 왕손께서는 양치기로 민간(民間)에 숨어 살고 계셨습니다.”
“어떻게 찾았는가”
“널리 사람을 풀어 초나라의 옛 땅 구석구석을 수소문하게 하였던 바, 음릉 땅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늙은 부부와 젊은 아들이 산다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일흔도 넘어 뵈는 할미와 예순도 안돼 보이는 영감이 스무 살도 안 되는 아들과 함께 양을 기르며 사는데 셋의 나이가 엇바뀌어 부부로도 이상하고 모자(母子)로도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내 몰래 살펴보게 하였더니 더욱 이상한 게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그 젊은이는 양치기를 하며 늙은 부모를 봉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남의 눈이 없는 곳에서는 오히려 그 늙은 남녀가 젊은이를 모시는 형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들을 잡고 다그쳤더니 놀랍게도 그 젊은이는 애왕(哀王)의 원자(元子) 되시는 심(心)이라 했습니다. 곧 우리 초나라 사람들이라면 한결같이 그 죽음을 분하고 애통히 여기는 회왕의 적통(嫡統)이 되는 셈입니다. 또 할미는 그 젖어미이던 궁녀였으며 영감은 궁궐의 젊은 시위(侍衛)였는데. 애왕의 배다른 형인 부추(負芻)가 애왕을 죽이고 초나라 왕위를 찬탈할 때, 젖먹이인 애왕의 한점 혈육을 빼내 달아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뒷날을 기약하며 숨었으나,......”
그 뒤 초나라의 참담한 망국사(亡國史)는 항량도 잘 알고 있었다.
애왕이라면 진나라의 속임수에 걸려 함양으로 끌려간 뒤 끝내 돌아오지 못하고 원통하게 죽어간 회왕의 손자인 효열왕(孝烈王)의 둘째 아들이 된다. 효열왕이 죽자 그 맏이인 유왕(幽王) 한(悍)이 왕위를 이었으나 유왕이 즉위한지 10년 만에 후사 없이 죽자 동생인 유(猶)가 왕위를 이었는데 그가 바로 애왕이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지 두 달도 안돼 배다른 형 부추의 무리가 애왕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 초나라는 그 뒤 다섯 해를 버티지 못하고 진나라 장수 왕전(王剪)과 몽무(蒙武)의 대군에게 망해 진나라의 삼군(三郡=南郡 九江 會稽)이 되고 부추는 사로잡혀 함양으로 끌려가고 만다.
“하지만 회왕은 이미 70년 전에 돌아가신 분, 애왕의 참사도 벌서 스무 해가 다 되어 가는 옛날 일이다. 무엇으로 그 젊은이가 회왕의 적손(嫡孫)이라 믿을 수 있었다던가?”
“애초 상주국께서 회왕의 후사를 찾으라 명하셨을 때 저희는 먼저 옛 초나라 조정에서 일한 내시 몇을 찾아 두었습니다. 먼저 늙은 그들을 데려가 그 궁녀와 시위를 보였던 바, 모두 알아보았으며, 젊은이에게는 따로 초나라 왕실의 보물임에 분명한 몇 가지 신표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옛 초나라 신하들 중에도 그들을 알고 몰래 연결을 꾀하는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게 중에는 애왕 때 영윤(令尹=초나라의 상경. 재상급)을 지낸 송의(宋義)란 이가 있는데, 머지않아 숨어사는 유신(遺臣)들을 모아 이리로 오겠다고 전갈을 보내 왔습니다.”
그렇다면 더 의심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항량이 기쁜 듯 두 손을 비비며 범증을 돌아보고 말했다.
“참으로 잘되었습니다. 선생께서 가르치신 대로 초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듯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종리매에게 말했다.
“급히 파발을 놓아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별장(別將)들을 모두 설현(薛縣)으로 불러 모으게 하라. 그들과 의논해 하루 빨리 임금을 세워 초나라 왕실을 되살린 뒤에 서쪽으로 대군을 휘몰아 진나라를 쳐 없애야겠다.”
그런 항량의 시원스런 결정에는 터럭만한 사심도 없어 보였다. 거기서 범증은 귀갑(龜甲)과 시초(蓍草)에서 읽은 불길한 점괘를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렸다.
항량이 회왕(懷王)의 적손(嫡孫)인 웅심(熊心)을 초나라 왕으로 세우기 위해 직접 거느리고 있는 장수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세력 아래 든 모든 별장(別將)들까지 설현(薛縣)으로 불러모으자, 패공 유방도 장량과 노관 번쾌 하후영 등을 데리고 설현으로 갔다. 옹치를 내쫓고 풍읍을 되찾느라 항량에게서 오대부(五大夫) 작위를 가진 장수 열 명과 군사 5천 명을 얻어 쓴 뒤로 패공은 항량의 별장처럼 되어 있었다.
패공 유방이 항량의 군막에 이르자 이미 많은 장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항량이 언제나 그랬듯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유방을 맞았다.
“패공, 참으로 잘 오셨소. 내 오늘 긴히 논의할 일이 있어 공을 불렀으나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하실 일이 있소.”
그래놓고는 다시 여러 장수들을 돌아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그 동안 한 깃발 아래 싸우면서도 서로 모르는 장군들이 많으니 될 법이나 한 일이겠소?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인사를 나누는 게 옳을 것이오. 여기 이 패공은 진나라가 보낸 현령을 죽인 패현(沛縣)과 풍읍(豊邑) 사람들이 새 현령으로 떠받든 호걸로서, 성은 유(劉)요 이름은 방(邦)이며 자(字)는 계(季)라 하오. 지금은 패현과 풍읍 뿐만 아니라 탕현(탕縣) 하읍(下邑)까지 휩쓸어 사수군(泗水郡)을 진나라의 폭정으로부터 구해낸 분이외다.”
그러자 거기 모였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일어나 두 손을 모으며 패공에게 인사를 청했다. 항량은 패공을 이끌고 그들 사이를 돌며 경포(黥布)와 진영(陳영) 여신(呂臣) 포장군(蒲將軍) 같은 별장에서부터 계포 종리매 환초 용저 정공(丁公)등 휘하 장수들에 이르기까지 차례로 소개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게 했다.
그런데 그들 사이를 다 돈 패공이 저만치 상석에 앉아 있는 법증을 알아보고 예를 올리려 할 때였다. 범증 곁에 서 있는 낯선 젊은 장수를 본 패공은 갑자기 숨이 턱 막히고 천 근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열 자 키에 우람한 몸피나 그걸 둘러싼 전포(戰袍)와 갑주(甲胄)의 삼엄함뿐만이 아니었다. 불꽃이 이글거리는 듯한 두 눈과 불쑥 솟은 관자놀이, 그리고 잘 빗어 속발건(束髮巾)으로 묶어놓아도 사자의 갈기처럼 굽이치는 머리칼 같은 것들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힘과 기세는 멀리서도 사람을 압도하기에 넉넉했다. 마치 그 안에 태풍이나 벽력을 가둬놓은 사람을 보는 듯했다.
(저 사람이 누구인가. 어떻게 우리 중에 저런 사람이 났단 말인가. 천제(天帝)의 아들이나 교룡(蛟龍)의 씨란 바로 저런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그대 힘과 기개의 덩어리 같구나.....)
패공이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질린 눈길로 항우를 보고 있는데, 항량이 그걸 알아보았는지 너털웃음과 함께 말했다.
“못난 조카 적(籍)인데, 자를 우(羽)로 쓰고 있소이다. 방금 양성(襄城)을 떨어뜨리고 돌아왔으나 아직은 부장(副將)의 반열이라 따로 공을 찾아보고 예를 올리게 하려던 참이었소. 하지만 이왕 자리를 함께 하게 되었으니 저 아이의 인사도 받아두시오.”
그리고는 무엇 때문인가 번들거리는 눈으로 유방을 마주 바라보고 서 있는 항우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우야, 무얼 하느냐? 어서 패공께 예를 올려라. 장차 우리와 함께 서쪽으로 가서 진나라를 쳐 없앨 분이시니 받들어 모심에 소홀함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때 유방이 먼저 항우를 향해 두 손을 모으며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작은 장군을 하관(下官)의 군례(軍禮)로 뵙습니다. 저는 패현 부형(父兄)들의 뜻을 받든답시고 주제넘게 현령 자리를 맡았다가 속읍(屬邑)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해 크게 세상의 웃음거리가 될 뻔했던 유(劉)아무개입니다. 다행히 상주국(上柱國)께서 장졸을 빌려주시어 잃은 땅은 되찾았으나 그 부끄러움은 아직 다 씻지 못했습니다. 이제 한 말장(末將)으로 상주국을 따르게 되었으니, 작은 장군께서도 마땅히 저의 상장(上將)이십니다. 어리석고 힘없다 물리치지 마시고 저를 수하로 거두어 부려 주십시오. 개나 말의 수고로움[犬馬之勞]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유방이 그렇게 나온 것은 본능적인 감각에 따른 것이었다. 무엇 때문에 선뜻 나를 받아들여 주지 않는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내가 먼저 굽히고 숙어들어야 한다. 저 엄청나고 터질 듯한 힘과 기세에 함부로 맞서서는 아니 된다 - 그런 판단이 그를 기꺼이 항우에게 굽히게 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항우였다. 거의 거만하게 느껴질 만큼 뻣뻣하게 서서 유방을 건너보던 항우가 갑자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유방의 예를 받으며 말했다.
“항적이 패공께 문후(問候) 올립니다. 진작부터 장군의 우레 같은 이름을 들어왔으나 양성(襄城)을 우려 빼고 오느라 이제야 뵙습니다.”
뒷날 그와 목숨을 걸고 천하를 다투게될 일이 어떤 예감으로 닿아온 것일까. 그날 유방을 처음 보았을 때 항우 또한 유방에게서 묘한 힘을 느꼈다. 후리후리한 키에 우뚝 솟은 코와 튀어나온 이마, 길고 멋진 수염 같은 것이 어우러져 뿜어내는 특이한 기품이나 유들유들하면서도 꼬이거나 맺힌데 없는 언행에서 느끼게 되는 알 수 없는 친화력이 그러했다.
항우가 잠시 경계로 굳어졌던 것은 자신이 가진 것과는 다르지만 결코 얕볼 수 없는 유방의 그 묘한 힘에 갑작스런 호승심(好勝心)이 인 탓이었다. 하지만 유방이 한껏 머리를 숙이고 다가들자 그 호승심은 항우 일생의 강점이자 약점이었던 특이한 자부심에 가리워 눈 녹듯 스러졌다. 자신에게 맞서는 자에게는 무자비하기 짝이 없지만 엎드리고 따르는 자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운 그의 특성이 발동한 것이었다.
(너도 내게는 맞서지 못하는구나. 나를 알아보고 스스로 무릎을 꿇어오는구나. 그렇다면 나도 얼마든지 너그럽고 겸손할 수 있다.)
그런 마음으로 마주 머리를 숙일 수 있었다. 그러나 항우의 마음 한구석에는 미심쩍은 느낌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저 무르고 맺힌데 없어 보이는 것이 어쩌면 저 사내의 힘이 아닐까. 물처럼 부드러워 오히려 단단한 바위를 깎고, 활대처럼 많이 휘어질수록 더 멀리 화살을 날리는 그런 경우는 아닐까.
하지만 겉으로 내비친 항우의 겸양은 조카의 강한 성격을 늘 걱정해오던 항량을 매우 기쁘게 만든 듯했다. 흡족해하는 눈길로 조카를 바라보다가 너털웃음과 함께 유방에게 말했다.
“지나치게 스스로를 낮추는 것도 예가 아니라[過恭非禮] 들었소. 패공은 자중하시오. 적아(籍兒) 나이 이제 스물다섯, 비록 어리지는 않다 하나 패공의 상장이라니 가당키나 하겠소? 오히려 패공께서 우리 적아를 많이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오.”
말뿐만이 아니었다. 항량에게도 사랑하는 조카와 유방이 앞날에 벌일 처절한 쟁패가 끊임없이 어떤 예감으로 닿아온 것일까, 그는 왠지 항우와 유방을 특별한 사슬로 묶어두려 했다. 그날 여러 장수들과 웅심(熊心)을 왕으로 세워 초나라를 다시 일으키기로 논의를 마친 뒤의 일이었다. 한바탕 잔치로 모여든 장수들을 위로한 뒤 따로 항우와 유방을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인 항량이 먼저 항우를 보고 말했다.
“시절이 우리를 오중(吳中)에서 불러내 멀리 여기까지 왔지만, 앞으로 갈 길은 더욱 멀고 험하다. 네 비록 재주가 빼어나고 용력(勇力)이 남다르나 독불장군(獨不將軍)이라 혼자서는 큰일을 이룰 수가 없다. 또 내가 곁에 있어 돕는다 해도 이미 몸이 늙어가거니와 사람의 앞일은 누가 알겠느냐. 어디까지 너를 따라다니며 돌볼 수 있을 지는 하늘만이 아실 것이다. 범증 선생이나 계포 종리매 환초 등 이미 우리 막하(幕下)에 든 이들과는 따로 너를 이끌고 보살펴줄 이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여기 이 패공이 어떠냐? 두 사람이 형제가 되어 서로 손발처럼 도우며 어지러운 천하를 바로 잡을 수 있다면 그 아니 아름다운 일이겠느냐?”
그런 다음 항우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유방에게 다시 말했다.
“공을 만난 지는 달포밖에 되지 않고 깊이 마음을 주고받을 겨를도 없었으나, 나는 공이 어떤 사람인지 알 듯하오. 공에게는 봉황의 기품이 있고 용의 기상이 있소. 하지만 가시덤불에 깃들이고 얕은 개울에 누운 형국이니 비웃고 얕보는 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오. 어떻소? 저 아이와 형제가 되어 가시덤불과 개울을 벗어나 보지 않겠소? 저 아이의 재기와 용력에 공의 지혜와 덕을 합쳐 무도한 진나라를 쳐 없애고 가여운 창생(蒼生)들을 구해보시지 않겠소?”
그러자 유방이 길게 헤아려볼 것도 없다는 듯 받았다.
“감히 청하지는 못했지만 실로 바라던 바입니다. 이제부터 이 유(劉)아무개, 작은 장군을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그냥 두면 바로 엎드려 항우에게 큰절이라도 올릴 것처럼 두 손을 모으고 머리를 수그렸다. 항량이 놀라 크게 손을 내저으며 유방을 말렸다.
“패공 잠깐 멈추시오. 내 듣기로 나이 어린 아재비는 있어도 나이 어린 형은 없다 하였소. 그런데 여남은 살이나 어린 저 아이를 형님 삼겠다니 이 무슨 해괴한 일이오?”
“주종(主從)과 군신(君臣) 사이의 높고 낮음을 어찌 나이로 따질 수가 있겠습니까? 내 이미 항씨가(項氏家)를 주군(主君)으로 삼았으니, 작은 장군과 형제의 의를 맺는다면 마땅히 작은 장군이 형이 되어야지요.”
그러자 그때까지 머뭇거리고 있던 항우가 다시 나섰다.
“패공께서 이 적(籍)을 아우로 받기 싫다면 어쩔 수 없거니와, 형제가 된다면 마땅히 패공께서 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 숙질(叔姪)이 당장의 세력으로 형제의 차서(次序)를 바꾸었다고 세상이 크게 비웃을 것이오.”
그 일도 유방이 자신의 힘 앞에 엎드린 것으로 풀이한 항우가 크게 인정을 베풀 듯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유방은 기어이 형 되기를 마다했다. 보다 못한 항량이 두 사람의 뜻을 절충했다.
“좋소이다. 좋아. 누가 형이고 누가 아우인가는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일은 두 사람이 형제가 되어 서로 돕는다는 것이오. 오늘 일은 두 사람이 형제 됨을 맹세하는 것만으로도 뜻이 깊소이다. 나도 듬직한 조카 하나 더 얻은 것으로 기쁨을 삼겠소.”
그렇게 하여 유방과 항우는 형과 아우를 정하지 않은 기이한 형제로 맺어졌다. 항우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유방에게는 고비마다 요긴하기 짝이 없게 활용된 형제의 의(義)였다. 나중 항우는 그 때문에 몇 번이고 유방의 숨통을 끊어놓을 놓을 기회를 놓치게 되는데, 지하에서 그걸 보고 있어야 했던 항량의 심경은 어떠하였을까.
그해, 그러니까 진(秦) 이세(二世) 황제 2년 유월, 항량과 범증은 회왕(懷王)의 핏줄로 양치기 노릇을 하던 웅심(熊心)을 설현으로 맞아들여 왕위에 올리고 다시 회왕이라 일컬었다. 자손 되어 윗대의 왕호를 함부로 쓰는 것은 기휘(忌諱)에 걸리는 일이나, 회왕의 일이 초나라 사람들에게는 워낙 가슴에 맺힌 한(恨)같은 것이라 다시 그 왕호를 빌어 쓰기로 했다. 그들은 설현 현청(縣廳)을 임시 왕궁으로 삼아 새 회왕을 들인 다음 옛 왕실의 적통(嫡統)이 왕위를 이었음과 초나라가 되살아났음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그리고 공공연하게 진나라에 대한 설한(雪恨)과 보수(報수)를 내걸며 흩어져 숨어있던 옛 초나라의 세력들을 끌어 모았다.
그때 가장 먼저 찾아든 게 송의(宋義)가 이끄는 무리였다. 송의는 대대로 상경(上卿)의 으뜸인 영윤(令尹)을 낸 초나라 문벌(門閥)의 자손으로 그 자신도 유왕(幽王) 말년에 영윤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송의가 한 떼의 옛 초나라 벼슬아치들과 그 가솔을 이끌고 설현으로 찾아왔다. 송의 자신의 가솔을 합쳐 5백 명에 가까운 무리였다.
웅심이 회왕의 현손(玄孫)임을 증명하고, 그의 양치기 노릇은 진나라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함이었음을 밝혀준 일로 송의는 처음 한동안 항량에게 매우 요긴한 사람이었다. 다같이 쫓겨 숨어사는 처지면서도 송의는 일찍부터 웅심을 찾아내 몰래 오가며 지내왔다. 거기다가 송의는 또 애왕(哀王)이 참변을 당할 때도 초나라 조정에 있었던 터라, 누구보다 진상을 잘 알고 있는 그의 증언은 아무도 웅심의 혈통을 의심할 수 없게 하였다.
하지만 그 일을 빼면 송의는 항량에게 전혀 반가운 사람이 못되었다. 우선 항량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송의가 찾아온 대상이었다. 송의는 지금까지 모여든 사람이 그랬던 것처럼 항량을 따르려 온 것이 아니라, 새로운 초왕(楚王) 웅심을 찾아왔을 뿐이었다. 그를 따라온 옛 초나라 조정의 벼슬아치들도 그랬다. 그들도 항량의 실권을 굳이 무시하려 들지는 않았지만, 충성의 대상은 어디까지나 새로 초왕(楚王)이 된 웅심이었다. 따라서 그들이 온 것은 달리 보면 항량의 진중에 작지만 전혀 성격을 달리하는 세력이 섞여들었음을 뜻한다.
창칼을 잡고 싸우는 데도 쓸 수가 없고 계략을 짜는데도 크게 도움이 안되면서도 먹이는데는 여느 병졸들보다 더 많은 곡식과 돈을 써야하는 그 가솔들도 그랬다. 그들은 피붙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의 방계(傍系)까지 싸안은 데다 노비까지 거느린 기이한 유민집단으로 말많고 탈 많아 다루기가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게다가 아무 소용없게된 옛 벼슬이나 가문은 서로간 또 어찌 그리 깐깐하고 자잘하게 따져대는지.
(용케도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구나. 골치 아픈 무리들이다….)
항량은 그렇게 한탄했으나 초나라 왕실의 권위에 의탁하기로 한 이상 그들은 지고 갈 수밖에 없는 짐이었다.
한신이 칼을 차고 항량을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처음 항량은 그 훤출한 용모에 반해 한신을 무겁게 쓰고자 했다. 그러나 주변에 한신을 잘 아는 자가 있어 헐뜯어 말하였다.
“저 자는 회음(淮陰) 땅을 떠돌던 하찮은 건달입니다. 멀쩡한 생김에 큰칼을 차고 다니며 왕손(王孫)을 자처하지만, 그 뜻이 비루한데다 몸을 함부로 굽혀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온 자입니다. 하향(下鄕)마을의 남창정장(南昌亭長)에게 밥을 얻어먹고 지내다가 그 아내가 구박하자 성밖 물가에서 남의 빨래를 해서 살아가는 여인[표모]에게서 밥을 빌어먹기도 하였습니다. 또 한번은 저잣거리 불량배가 시비를 걸어오자 그 바짓가랑이 사이를 기어지나가 시비를 피한 겁쟁이기도 합니다.”
항량이 원래 귀가 얇은 사람이 아니었으나, 그 말을 듣자 한신을 무겁게 쓸 마음이 없어졌다. 병졸로 내치려 하는데 범증이 말렸다.
“저 사람의 생김이 웅장하니 가까이 두고 써 보시지요. 집극랑(執戟郞)을 삼으면 장군의 위의(威儀)에도 크게 보탬이 될 것입니다.”
집극랑이라면 창을 들고 장수를 호위하는 하급 무관이었다. 곧 한신의 키가 크고 몸집이 좋으니 곁에 두어 의장(儀仗)과 경호에 함께 서란 뜻이었다. 이에 항량은 한신을 집극랑으로 주변에 머물게 하였으나 그 재주를 유별나게 여기지는 않았다.
그 밖에 크고 작게 무리 지어 찾아오는 옛 초나라의 무장이나 귀족들도 많았다. 더러는 장수로 보태고 더러는 병졸에 들였지만, 대부분은 송의의 무리처럼 거느리기에 거추장스러우면서도 군량만 축내는 유민에 지나지 않았다.
유방을 비롯한 여러 별장(別將)들도 설현으로 자신의 세력을 불러들였다. 항량과 범증이 도맡고는 있지만 그래도 한 나라를 세우는 셈이라, 여러 가지 논의로 그들도 설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진 까닭이었다. 자기들이 거느린 장졸을 단속하기 위해서는 가까이 불러두는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항량의 장수들과 유방의 장수들이 얽히게 되면서 뒷날의 쟁패(爭覇)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여러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 만남 중에서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장량과 항백의 만남일 것이다. 무슨 일인가로 잠시 항량의 본진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항백은 어느 날 유방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진중을 가로지르는 장량을 보고 반가움을 이기지 못했다. 그대로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장량에게로 달려갔다. 장량도 항백을 알아보고 그의 두 손을 맞잡으며 반가워 어찌할 줄 몰랐다.
“장량 선생!”
“항 대협(大俠)!”
가만히 헤아려 보니 헤어진 지 3년 남짓, 그러나 참으로 긴 3년이었다. 헤어질 때만 해도 시황제의 시절이라 서로에게 모든 일이 그저 아득할 뿐이었으나, 그 사이 세상은 뒤집히고 둘 모두 천하 풍운의 한가운데 끼여들게 되었으니 감회가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오중(吳中)에 있다던 제씨(弟氏)와 조카가 바로 항량 항우 두 분 장군이었구려.”
이윽고 먼저 마음을 가라앉힌 장량이 그렇게 자신의 짐작을 털어놓았다. 항백도 저만치 앞서 가는 패공 유방 때문에 짐작 가는 바는 있었으나, 짐짓 물음으로 장량의 말을 받았다.
“선생은 어떻게 이 설현으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장량이 지난 3년 동안 있었던 일과 유방을 만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들려주자 항백도 하비(下邳)를 떠난 뒤의 일을 추려 말한 뒤 장량을 자신의 거처로 청했다.
“그때 저는 몇 년째 진나라 관병(官兵)들에게 쫓기느라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외롭기 짝이 없었습니다. 선생의 따뜻한 돌보심이 없었다면 이 오늘이 있기나 하겠습니까?”
장량이 그 거처로 따라가자 항백은 크게 술상을 차려내며 새삼 지난날 하비에서 돌보아준 은덕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열흘 뒤 다시 헤어질 때까지 두 사람은 시간만 있으면 한 장막에 머물면서 정을 더욱 두텁게 했다. 뒷날 홍문(鴻門)에서 유방의 목숨을 구해 천하의 판세를 바꾸어 놓게 될 두 사람의 정이었다.
항량이 장량을 별장(別將)인 패공 유방의 수하가 아니라 자신의 막빈(幕賓)처럼 대하게 된 것도 항백 덕분이었다. 항백이 따로 데려와 장량을 만나보게 된 항량은 곧 그 비범함을 알아보았다. 비록 유방 밑에서 군마(軍馬)나 다스리는 구장(廐將)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뒤로는 장량을 계포나 종리매 못지않게 정중히 대했다.
하후영과 한신의 만남도 그때 있었다. 나중에 등공(등公)이 된 하후영은 대단찮은 죄로 목이 베이게 된 한신을 구해주어 한(漢)나라에 크게 보탬이 되게 하는데, 사기(史記)에는 그게 한신의 멀쑥한 허우대 때문이었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실은 그때 태복(太僕)으로 유방의 수레를 몰고 다니던 하후영이 항량의 집극랑으로 있는 한신을 자주 보아 눈에 익은 인상 때문이었다고 한다.
유방이 정공(丁公)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계포의 외삼촌 되는 정공은 그때 항량의 장수로 있었는데, 솔직하고 쾌활한 유방의 인품에 반해 은근히 호감을 품었다. 뒷날 싸움터에서 유방에게 인정을 베풀었다가, 항우를 낭패시켰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자신도 유방의 독특한 통치술에 걸려 목숨을 잃게 된다.
나중에 초한(楚漢) 쟁패에서 많은 초나라 장수들이 패공 유방에게 투항하는데, 그것 또한 두 세력이 그렇게 전열(戰列)을 함께 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때 익힌 얼굴 때문에 그렇게 오고 감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한편 항량은 범증의 유세(遊說)에 따라 웅심을 초나라 왕으로 세우기는 했으나 날이 갈수록 무슨 뻑뻑하고 깊은 수렁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자신을 따르는 세력은 틀림없이 그전보다 크게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그만큼 번거롭고 성가신 일도 늘어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그를 괴롭힌 것은 옛 초나라의 왕족 부스러기와 귀족들, 그리고 벼슬아치들이었다. 송의가 이끌고 온 이들만 해도 넌더리가 날 지경인데 회왕이 서고 초나라가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자 그 몇 배가 모여들었다. 그리고 회왕이 임시로 머물고 있는 현청으로 몰려가 항량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소란을 떨었다.
회왕 앞에 머리 조아린 그들은 기억에도 없는 옛 왕실의 영화와 권위를 끊임없이 되뇌어 그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양치기소년 속에 불안스레 웅크리고 있던 회왕의 권력욕을 들쑤시고 부추겼다. 쓸모없으면서도 번잡하기만 한 왕실의 격식과 의례를 되살려 항량의 장졸들을 헷갈리게 하였으며, 항량에게조차 자신들의 몸에 밴 복종과 충성을 강요하여 그를 까닭 모르게 맥 빠지고 어이없게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항량을 짜증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몰려듦으로서 전에 없이 거센 관제(官制)정비 요구에 내몰리게 된 일이었다. 하기야 나라를 세운 이상 그것을 유지할 제도를 갖춰야 하고, 제도가 갖춰지면 그걸 맡아 일할 백관(百官)을 두어야 마땅했다. 그러나 항량에게는 그 모든 게 겉치레요 인력과 조직의 낭비로만 보였다.
(결국은 이 범증이라는 자도 싸움이 무엇인지 모르는 책상물림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겨우 천하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처지에 주제넘은 일을 한 것은 아닐까. 늙은 책상물림의 공론에 넘어가 너무 일찍 초나라 복국(複國)의 짐을 떠맡아 버린 것은 아닌가….)
항량은 한때 그렇게 은근히 후회하는 마음까지 일었다. 그러나 범증은 태연하기만 했다.
“이름뿐인 나라의 부서를 정하고 백관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거니와, 오히려 장군을 위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천하를 부리려면 실세를 움켜잡고 있는 것만큼이나 명목의 존귀(尊貴)도 중요합니다. 이 참에 비록 명목뿐이나마 초나라 왕실의 위엄을 빌려 장군의 존귀를 더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리고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사람의 이름과 관작이 가지런히 적힌 죽간(竹簡)을 한 두름[卷]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항량이 죽간(竹簡)을 읽어보지도 않고 묻자 범증이 느긋하게 대답했다.
“우리 새로운 초나라의 내정(內廷)과 외조(外朝)를 제 나름으로 대강 얽어본 것입니다. 한번 훑어보아 주십시오.”
그 말에 항량은 울컥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며 죽간을 펼쳐 보았다. 어차피 회왕(懷王)을 세우고 초나라를 되살린 이상 언젠가는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절차였다.
그런데 죽간을 펼쳐든 항량은 그 첫머리를 읽고 그대로 죽간 두름을 내팽개칠 뻔하였다. 맨 앞에 <영윤(영윤) 송의(송의)>라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송의 이자가 초나라를 되살리는 데 무슨 공을 세웠길래 상경(上卿) 중에서도 으뜸인 영윤으로 삼는다는 것이오?”
항량이 못마땅한 심사를 억지로 감추면서 그렇게 묻자 범증이 태평스레 받았다.
“지금은 왕도 융장(戎裝=전투복)을 예복으로 삼는 전시(戰時)입니다. 전시에, 그리고 전장에서의 영윤은 졸오(卒伍)보다 뒷줄입니다. 게다가 송의는 선왕(先王) 때도 이미 영윤이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항량의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것은 그 같은 법증의 대답 때문이 아니라 <상주국(上柱國) 진영(陳영)> 이라 쓰여진 다음 죽간을 읽은 까닭이었다. 진영은 2만의 동양(東陽) 군민(軍民)을 이끌고 투항해온 공이 있지만, 하찮은 시골 아전바치였고 검수(黔首=평민) 출신이었다. 그런 진영을 상경의 하나인 상주국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다섯 현(縣)까지 내려[封五縣] 높이고 있는 조정의 영윤 자리라면 송의를 앉혀 안될 게 없었다.
“소평(召平)도 상대부(上大夫)에 앉혔습니다.”
항량의 마음속을 읽었는지 범증이 다음 죽간에 쓰인 것을 이죽거리듯 말로 들려주었다. 소평이라면 이미 죽고 없는 진왕(陳王=진승)의 명을 내세워 항량을 상주국으로 삼은 뒤, 대군을 이끌고 장강을 건너게 만든 자였다. 그 사이 그가 한 거짓말이 모두 드러나 허풍쟁이가 되어 있는 그를 상대부로 앉힌 걸 보고서야 항량도 비로소 어렴풋하게나마 범증의 뜻을 알 것 같았다. 요컨대 구색은 갖추되 실제로는 별 힘도 권위도 없는 조정과 백관(百官)이었다.
그 뒤로도 한동안 옛적에는 아득히 올려본 문반(文班) 벼슬과 지금까지는 듯도 보도 못한 사람의 이름이 함께 적힌 죽간이 이어지더니, 무반(武班)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앞서 문반 때와 전혀 달랐다. 범증 자신은 그때까지도 사람들이 별로 무겁게 여기지 않던 군사(軍師)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고, 계포 종리매 환초 용저 같은 모사와 맹장들도 빈객(賓客)이나 사마(司馬) 사인(舍人) 같은 낮은 직위에 그쳤다. 항우가 상장군(上將軍)으로 된 게 별날 정도였다.
하지만 별장(別將)들은 또 달랐다. 낮아야 공(公)이나 군장(郡長=군수)이요, 웬만하면 후(侯)나 군(君)이었다. 이를 테면 경포(黥布=英布)는 당양군(當陽君)이 되었고, 오예와 유방은 파군(番君)과 패공(沛公)을 지켰다. 거느린 세력에 비하면 대개는 지나친 봉작이었다.
“그런데 - 나는 무엇입니까?”
죽간 두름을 다 들쳐도 자신의 이름이 없자 항량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군(君)이 어떠하겠습니까? 무신군(武信君) 쯤으로 해두면 문신의 반열에도 들지 않고 무장의 품계에서도 약간 비껴서 있으면서 존귀와 위엄을 겸할 수 있습니다. 제(齊)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나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과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을 떠올려 보시면 됩니다. 가깝게는 우리 초나라의 춘신군(春信君)도 있습니다.”
처음 범증이 군(君)을 들고 나올 때 항량은 울컥 화까지 치밀었다. 떠도는 무리 몇을 이끌고 작은 마을 하나를 차지해도 공(公)이요, 골짜기나 들판을 끼면 후(侯)나 군(君)을 자칭하던 때라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뒤이어 범증이 이른바 <전국말(戰國末) 사군(四君)>을 차례로 들먹이자 항량은 그 속 깊은 배려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넓은 봉토와 큰 세력을 가지고 천하를 주무르던 그들. 백성들의 사랑을 받아 왕조차도 함부로 다루지 못하던 그들의 독특한 역할과 위치를 항량에게 제시하고 있는 셈이었다.
“좋습니다.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항량이 환하게 펴진 얼굴로 그렇게 말하자 범증은 새 죽간 하나를 가져오게 해 <무신군 항량> 이라고 써넣었다. 그리고 마음 써서 덤이라도 얹어주듯 말했다.
“이곳 설현은 싸움터에 가까워 임금께서 머무실 땅이 못됩니다. 남쪽 초나라 옛 땅 깊숙한 곳에 있는 우이(우이)를 도읍으로 삼아 우리 대왕(大王)을 그리로 옮기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때 입만 살아 시끄러운 구닥다리 먹물들과 용케 살아남은 옛 조정의 벼슬아치들까지 함께 쓸어 보내고 이곳에는 목숨 바쳐 무신군을 따를 장졸들만 남기면 모든 어지러움은 절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 말은 병권(兵權)만 굳건히 장악하고 있으면 문신(文臣) 관료의 병폐는 크게 걱정할 게 없다는 암시이기도 했다.
범증의 말을 옳게 여긴 항량은 그대로 따랐다. 범증이 적은 대로 벼슬아치들을 세우고, 의논을 갖추어 새 초나라의 도읍을 남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우이로 정했다. 그리고 새 회왕과 그 조정에 약간의 군사를 딸리어 우이로 내려 보낸 다음 자신은 진나라와의 결전을 위해 대군을 정비했다.
아직 항량이 군사를 내기 전에 항백을 앞세운 장량이 찾아와 말했다.
“무신군께서는 초나라 후예를 찾아 왕으로 받드시어 망해버린 초나라를 되세우셨습니다. 이는 초나라 유민들뿐만 아니라 천하가 감탄해 우러를 일입니다. 제 부조(父祖)의 나라 한(韓)도 망한 지 여러 해 되었으나 그 유민들이 나라를 되살리려는 마음은 초나라 사람들에 못지않게 간절합니다. 지금 살아남은 왕족 중에는 횡양군(橫陽君) 성(成)이 가장 밝고 어진데, 그를 왕으로 세우고 한나라를 되살려 우리 편을 늘리는 것[益樹黨]이 어떻겠습니까?”
항량이 그 말을 들어 장량으로 하여금 횡양군 한성(韓成)을 찾아오게 했다. 진작부터 한성이 있는 곳을 알아두었던 장량이 다음날로 한성을 항량 앞에 데려왔다. 항량은 한성을 한왕(韓王)으로 세우고 장량을 사도(司徒)로 삼은 뒤 군사 천여 명을 주어 서쪽으로 한나라의 옛 땅을 되찾게 했다.
항량이 그렇게 장량의 말을 따라 준 데는 육국(六國)의 후예를 되세워 자신의 세력을 늘린다는 원래의 목적 이외에, 그렇게 함으로써 장량과 유방을 갈라놓는다는 뜻도 있었다. 유방과 장량 모두 따로 떼어놓고 보면 미덥고 정이 가는 사람들이었지만, 함께 있는걸 보면 까닭 모르게 마음이 어두워지는 항량이었다.
그런 항량과는 달리, 장량이 떠난다는 말을 듣자 유방은 쓸쓸하면서도 허전하기 그지없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백수건달로 저잣거리를 떠돌던 시절부터 유방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넘쳐 났다. 하지만 대개는 장돌뱅이나 농투성이 같은 밑바닥 출신들이라, 손발로 부리거나 가슴과 배[心腹]로 삼을 수는 있어도 머리로 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가 장량을 만나 그 슬기와 꾀를 빌려 쓸 수 있게 되었다 싶었는데, 몇 달 안 돼 떠나게 되었으니 상심이 아니 될 수 없었다.
“처음 만날 때 말씀드렸듯이 제게는 아직도 위로 삼대(三代)가 한(韓)나라에 입은 은의를 갚는 일이 먼저입니다. 한나라가 다시 서고 한(韓)왕실이 안정되면 반드시 돌아와 패공을 모시겠습니다.”
떠날 때 장량은 유방을 찾아보고 그렇게 말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망해버린 부조(父祖)의 나라를 잊지 않고 되살리려 애쓰는 선생의 충심에 감동했소. 장부는 은원(恩怨)이 분명해야 되는 법이외다. 하루 빨리 복국(復國)의 뜻을 이루고 나와 다시 만나 정을 나누게 될 날이 오기를 빌겠소.”
유방도 그런 말로 장량을 선선히 놓아주었으나 그의 마음은 줄곧 장량을 뒤쫓으며 살피고 있었다. 기세를 탄 한성과 장량이 옛 한나라의 성을 대여섯 개나 잇따라 떨어뜨렸을 때는 제 일처럼 기뻐하였고, 다시 진군(秦軍)이 그들을 되받아 쳐서 애써 얻은 성을 빼앗아갔다는 소문을 들으면 자신이 성을 잃은 것처럼 안타깝고 분하게 여기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성과 장량이 모든 근거를 잃고 많지 않은 군사들과 더불어 영천(潁川) 어름을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열일을 제쳐놓고 장량에게로 달려가 한(韓)나라부터 먼저 세워놓고 보고 싶었다.
한편 그 사이 크게 군사를 낼 채비를 갖춘 항량은 한바탕 크게 싸울 곳을 찾고 있었다. 사람을 풀어 진나라의 주력 장함의 대군이 어디 있는가를 수소문하고 있을 때, 위왕(魏王) 구(咎)가 주불(周巿)을 보내 급한 전갈을 청해왔다.
“진장(秦將) 장함이 진왕(陳王=진승)을 쳐부순 뒤 북으로 군사를 몰고 올라와 우리 위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위왕께서는 전군을 들어 장함의 대군과 임제(臨濟)에서 맞섰으나 승세를 탄 적의 날카로운 기세를 당해내지 못하고 성안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힘을 다해 버티고는 있어도 하루하루가 힘겹기 그지없습니다. 이에 저를 내보내 제나라와 초나라에 도움을 청하게 하신 바, 다행히도 제나라는 제왕(齊王)께서 친히 대군을 이끌고 구원을 오시기로 약조하셨습니다. 지난 육국(六國) 시절에 그러했던 것처럼 위나라가 없어지면 제나라도 초나라도 성하지 못할 것입니다. 무신군께서는 어서 빨리 대왕께 고하시어 제나라와 함께 초나라도 저희 위나라의 위급을 구하도록 해주십시오.”
어떻게 보면 찾고 있던 장함이 제발로 찾아온 격이었으나 항량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주불을 군막에서 내보내 객관에서 쉬게 한 뒤 가만히 범증과 의논했다.
“군사께서는 어떻게 했으며 좋겠소?”
주불이 처음 구원을 청할 때부터 줄곧 무언가 골똘한 생각에 잠겨있던 범증이 말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脣亡齒寒], 위왕은 마땅히 구해주어야 합니다. 다만 이왕 제왕이 몸소 대군을 이끌고 간다니, 우리는 믿을 만한 장수 하나와 약간의 군사를 보내 저들의 기세만 올려주면 되겠습니다. 장함 하나를 상대로 세 나라가 전력을 다한다면 그 또한 세상의 비웃음을 사지 않겠습니까? 무신군께서는 되도록 힘을 아껴 함곡관(函谷關)을 깨뜨리고 함양(咸陽)으로 밀고들 때에 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듣고 보니 항량도 그 말이 옳은 듯했다. 곧 종제 항타(項타)를 장수로 삼고 군사 5천을 떼어주며 위나라를 구하게 했다.
주불과 함께 설현을 떠난 항타(項타)는 곧 제왕 전담(田담)의 대군과 만나 밤낮 없이 임제(臨濟)로 달려갔다. 오래잖아 제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들은 임제 성밖에 이르렀다. 하지만 장함이 워낙 철통같이 성을 에워싸고 있어 성안으로 들지 못하고 성밖 들판에 진을 쳤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장함은 진나라의 마지막 명장(名將)답게 다시 한번 반진(反秦) 의군들에게 매서운 병법을 맛보였다. 성 안팎의 병력이 합쳐지게 전에 하나씩 쳐부수기로 하고 먼저 성 밖의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을 한밤중에 전군을 들어 맹렬하게 들이쳤다. 장함이 자주 그래왔듯. 집중된 병력으로 분산된 적을 친다는 원리를 적용한 야습(夜襲)이었다.
장함은 먼저 성을 에워싸고 있는 군사들에게 화톳불을 요란하게 피우도록 하여 임제 성안의 위군(魏軍)들이 뛰쳐나올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밤이 깊기를 기다린 다음 말발굽은 헝겊으로 싸고 군사들에게는 하무[매]를 물려 소리 없이 제나라와 초나라 군사들의 진채로 다가들었다. 화톳불 가에는 많은 허수아비를 세워 대군이 그대로 성을 에워싸고 있는 양 위장한 체였다.
위(魏) 제(齊) 초(楚) 세 나라가 힘을 합쳤을 뿐만 아니라, 성 안팎에서 서로 의지하는 형세[기角之勢]를 이루고 있다는 믿음 때문에 성밖 제초(齊楚) 연합군은 마음이 느슨해져 있었다. 등과 배로 적을 맞은 격이 된 장함이 되레 치고들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무런 대비 없이 잠들어 있다가 갑작스런 야습을 받자 큰 혼란에 빠졌다.
제왕 전담의 사람됨이 용렬하지 않고 항타 또한 한 무리의 장수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겁먹고 놀라 달아나기 바쁜 군사들을 되돌려 놓기는 어려웠다.
“서라. 달아나는 자는 모두 벤다! 적은 많지 않다”
둘 모두 칼을 뽑아들고 그렇게 외치며 놀라고 겁먹어 달아나기 바쁜 군사들을 다잡아 보려했으나 헛된 일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몰려드는 진병(秦兵)에게 한번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하고 어지럽게 뒤엉킨 군사들 가운데서 죽고 말았다. 그들을 청해 데려온 주불도 목숨을 보전하지는 못했다. 달아나는 군사들 틈에 끼어 진채를 빠져나가다가 이름 모를 뒤쫓는 진병들의 창칼에 어육(魚肉)이 났다.
한편 화톳불과 허수아비에 속아 밤새 임제성 안에 꼼짝없이 갇혀있던 위왕(魏王) 구(咎)는 날이 밝아서야 구원을 왔던 제나라와 초나라의 군사들이 장함에게 여지없이 부수어져 흩어진걸 알았다. 주불과 전담, 항타의 목을 장대에 매달고 성벽 아래로 몰려든 진나라 군사들을 보자 더 버텨볼 마음이 사라졌다. 적장 장함을 문루 아래로 불러 소리쳤다.
“장군. 진나라에 맞선 것은 이 구(咎)일뿐, 백성들은 죄가 없소.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 전에 먼저 백성들을 내보내려 하니 죄 없는 그들은 모두 살려주시오. 그들이 일없이 흩어진 뒤라야 우리도 창칼을 놓고 항복할 수 있을 것이오. 백성들이 우리와 함께 성안에 있다가 옥과 돌이 함께 타는[玉石俱焚] 끔찍한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감히 청하는 바이외다.”
장함이 그리 꽉 막힌 장수가 아니어서 그런 위구(魏咎)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장졸들에게 영을 내려 잠시 에움을 풀게 함으로써 성안 백성들이 성을 버리고 달아날 수 있게 했다. 성벽 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위구는 백성들이 모두 몸을 피했다 싶자 백기를 내걸고 성문을 활짝 열어 열었다. 그러나 자신은 궁궐 삼아 살던 집에 불을 질러 함께 타 죽고 말았다.
돌이켜 보면 아름답고도 씩씩한 출발에 비해 너무도 어이없고 끔찍한 끝을 본 위왕 구와 주불이었다. 진왕(陳王=진승)의 명을 받은 주불이 위나라 옛 땅을 진나라로부터 되찾았을 때 위나라 사람들은 주불을 받들어 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또 제나라와 초나라도 각기 수레 50대를 갖추고 사신을 보내 주불을 위왕으로 맞으려 하였으나 주불은 끝내 사양했다.
“천하가 어지러우면 충신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지금 천하가 진나라에 맞서 싸우고 있으니, 도리로 보아서도 반드시 위(魏)왕실의 후예를 찾아 왕으로 받드는 게 옳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옛 위나라의 영릉군(寧陵君)이었던 구를 맞이한 뒤, 사자를 다섯 번이나 진왕에게 보내어 기어이 그를 위왕으로 세우게 하였다. 같이 진왕의 부장(部將)이면서도 스스로 조(趙)나라 왕이 된 무신(武臣)이나 연(燕)나라 왕이 된 한광(韓廣)과 견주어 보면 개결(介潔)하다는 칭송만으로는 모자랄 주불이었다.
위왕 구도 그런 주불의 추대에 부끄럽지 않게 임금 노릇을 했다. 짧은 기간이었으나 그 어떤 선왕(先王)보다 백성을 아끼고 위했으며, 죽음을 맞아서는 스스로를 불태워 군왕(群王)의 장렬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그때 위구의 아우인 위표(魏豹)는 흩어지는 백성들 틈에 끼어 임제성을 빠져 나온 뒤 초나라로 도망갔다. 뒷날의 얘기지만 초 회왕은 위표에게 수천의 군사를 주어 다시 위나라 땅을 되찾게 하고 나중에는 위왕이 된다. 하지만 그의 삶도 죽음도 형 구의 품격에는 아득히 미치지 못한다.
제왕 전담은 위나라를 구하러 갈 때 사촌 아우인 전영(田榮)을 장수로 데려갔다. 전담은 임제 성밖에서 장함의 야습을 받아 죽었으나 전영은 용케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추격을 벗어난 전영이 흩어져 달아나던 전담의 군사들을 수습한 뒤 동아(東阿)로 달아나자 장함이 전영을 뒤따라가서 성을 에워쌌다.
그 사이 전담이 죽었다는 소식은 제나라에도 전해졌다. 사람들은 슬픔보다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차 옛 제나라의 마지막 왕인 전건(田建)의 아우 전가(田假)를 급히 새 왕으로 세웠다. 또 왕족인 전각(田角)을 재상으로 삼고, 그 아우인 전간(田間)을 장군으로 높여 흔들리는 제나라를 안정시켰다.
그해 7월은 유난히 비가 많았다. 잇따라 사흘씩 큰비가 내려 군사를 움직이기에 좋지 않았으나 항타에게 한 갈래 군사를 주어 위나라를 구하게 한 무신군(武信君) 항량은 그 결말을 기다리지 않고 항보(亢父)로 군사를 냈다. 그런데 미처 성을 들이치기도 전에 급한 전갈이 왔다.
“위나라를 구하러 갔던 군사들이 임제(臨齊) 성밖에서 장함의 야습을 받아 크게 낭패를 보았다고 합니다. 제왕 전담과 우리 항타 장군님은 주불과 더불어 싸움터에서 죽고 군사들도 태반이 죽거나 사로잡혔습니다. 오직 제왕의 아우 전영이 한 갈래 패군(敗軍)을 수습하여 동아로 달아났는데, 장함이 그를 뒤쫓아 성을 에워싸고 들이치는 중이라고 합니다. 그 기세가 하도 사나워 아침저녁을 기약하기 어려울 지경이라, 전영이 우리에게 급히 구원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에 항량은 항보를 버려두고 동아로 군사를 몰아갔다. 태어나기는 제나라 사람이지만 오래 전부터 그의 사람이 되어 사마(司馬)로 있는 용저(龍且)에게 1만 군사를 주어 먼저 달려가게 한 다음 자신도 전군을 들어 그 뒤를 받쳤다. 용저가 대쪽을 쪼개는 기세로 장함의 에움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가 꺼져 가는 제나라 군사들의 전의를 되살려냈다. 그리고 뒤따라온 항량의 대군이 동아 성 밖에 진채를 내려 안팎에서 호응하는 태세를 이루었다.
장함은 이번에도 집중해서 분산된 적을 친다는 계략을 펼쳐보려 했으나, 이미 사정이 전 같지가 않았다. 성안은 성벽이 든든하고 높은데다 용저의 구원병이 뚫고 들어가 기세가 올라 있었다. 성 밖에 있는 항량의 본진은 더했다. 머릿수로도 장함의 군사보다 많은데다 아직까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강동(江東) 자제들이 그 골격을 이루고 있었다. 더군다나 야습은 며칠 전에 같은 적을 상대로 써먹은 수법이었다.
그래서 머뭇거리며 하룻밤을 보내고 나니 장함은 등과 배로 적의 대군을 맞는 격이 되고 말았다. 농민군보다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장비와 병참에서도 뛰어난 장함의 군사들이었지만 한창 부풀어 오른 항량의 군세에는 머릿수부터 모자랐다. 거기다가 제나라 사람으로서 복수심에 차있는 전영과 용저가 대군을 이끌고 성안에서 뛰쳐나올 틈을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형세가 불리하다 해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날 수도 없었다. 희수(戱水)를 건넌 이래로 한번도 진 적이 없는 장함의 군사들이었다. 희수 가에서 함양을 넘보던 주문(周文)의 대군을 쳐부수고, 민지(승池)에서는 마침내 주문을 죽였다. 그 뒤로도 진승의 장수들을 차례로 쳐부수고 진현(陳縣)에 이르러 그 마지막 근거를 우려 뺐으며, 쫓기던 진승의 목을 하성보(下城父)에서 얻었다. 그리고 임제에서는 위나라 제나라의 두 왕과 초나라 장수를 한꺼번에 죽인 장함의 군사들이었다.
장함이 마지못해 싸울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는데 무신군 항량이 먼저 전열(戰列)을 펼쳤다.
항우와 8천 강동 자제들을 선봉으로 삼고 종리매, 환초 항장(項壯)같은 맹장들에게도 한 갈래 군사를 주어 벌판 가득 벌여놓았다. 당양군 경포(黥布), 패공 유방, 파군 오예와 포장군 같은 별장(別將)들도 각기 거느린 장졸들과 함께 좌우 날개를 이루었다.
“잔꾀를 부려 이기느니 정면으로 당당히 맞서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저들의 기세를 꺾어놓는 게 나을 것이오. 듣기로 장함은 집중된 힘으로 분산된 적을 치는 계략에 능하다 했소. 이번에는 우리가 먼저 적을 토막내어 흩어진 그들을 하나씩 때려잡을 것이오. 여러 장수들은 북소리와 함께 일제히 내달아 각자의 정면을 돌파하시오! 그런 다음 되돌아서 토막난 적을 포위하고, 다시 성안 군사들이 뛰쳐나와 적이 달아날 길을 끊어버린 다면 장함은 날개가 있다해도 빠져나갈 수가 없을 것이오.”
항량이 그렇게 명을 내린 뒤 진군을 재촉하는 북을 울리게 했다. 그러자 초군(楚軍)은 대쪽을 쪼개는 기세로 장함이 거느린 진군(秦軍)의 진세를 쪼개고 들어갔다.
“모두 가운데로 모여라! 원진(圓陣)을 이루고 흩어지지 말라!”
그제야 항량의 의도를 알아차린 장함이 그렇게 급한 명을 내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있었다. 한 줄로 나란히 밀고든 초군의 각 부대는 빠르고도 날카로운 화살처럼 여기저기서 진군을 관통해 버렸다. 몇 토막으로 나눠진 진군이 황급히 집중을 시도하고 있는데, 관통해 지나갔던 초군이 다시 돌아와 흩어진 그들을 점점이 에워싸고 두들겼다. 거기다가 성벽 위에서 싸움터를 내려다보고 있던 전영과 용저의 군사들이 성문을 열고 뛰쳐나오니 어지간한 장함도 벼텨낼 수가 없었다.
“할 수 없다. 징을 울려 군사를 물리게 하라. 장졸들에게 각기 서쪽으로 몸을 빼내 성양(城陽)이나 복양(濮陽)으로 모이라고 이르라!”
그런 명을 내리고 자신도 말머리를 돌려 싸움터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워낙 초군이 촘촘하게 에워싸 진군의 태반은 끝내 그 싸움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함양을 떠난 뒤로 장함이 처음 맛본 참담한 패배였다.
동아(東阿)의 싸움에서 크게 이긴 무신군 항량이 그대로 전군(全軍)을 들어 급하게 장함을 뒤쫓을 수 있었다면 장함이 아무 일없이 그곳을 벗어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싸움에 이긴 제나라와 초나라 연합군 사이에 뜻하지 않은 변고가 있었다. 전영(田榮)이 제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 가버린 일이었다.
“제나라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제나라를 되 일으킨 형님[田儋]의 아들들을 두고 옛 제나라 왕실의 핏줄인 전가(田假)를 찾아내 왕으로 세운 일은 실로 배은망덕하기 짝이 없는 일이외다. 그 일부터 바로잡지 않고서는 천하의 대의를 말할 수 없을 것이오!”
그같은 전영의 말에 항량과 여러 장수들이 저마다 말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바람에 초군(楚軍)만 장함을 뒤쫓게 되었는데, 그것도 군사를 두 갈래로 나누어야 했다. 곧 항량은 대군과 함께 북쪽 복양(濮陽)으로 달아나는 장함의 주력을 뒤쫓고, 상장군 항우와 패공 유방이 이끄는 군사는 성양(城陽)으로 달아난 또 한 갈래의 진군(秦軍)을 뒤쫓았다.
설현에서 초나라를 다시 일으킨 이래로 항우와 유방은 한 깃발 아래서 싸워오고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항량이라는 큰 그늘 아래서 다른 여럿과 함께 움직여 서로를 깊이 의식할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성양을 치기 위해 두 사람만 따로 떨어져 나온 게 다시 한 번 서로를 유심히 관찰할 기회가 되었다.
성을 에워싸고 들이치기 시작한 때부터 성이 떨어질 때까지의 사흘 동안 유방은 항우의 엄청난 힘과 기개를 다시 한 번 속속들이 구경할 수 있었다. 먼저 으스스한 느낌이 들 정도로 눈부신 것은 항우의 무예였다. 구름사다리 위를 평지 내닫듯 하여 성벽 위로 뛰어오르면 그곳이 곧 무인지경이었다. 철극(鐵戟)이나 보검을 휘두르며 나아가는데 장수고 졸개고 막아낼 수 있는 자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항우의 무예보다 더욱 유방을 질리게 하는 것은 상대를 만근 무게로 억누르는 듯한 야릇한 기세였다. 항우가 머리칼과 수염을 곤두세우고 벽력같은 호통과 함께 달려나가면 마음 여린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창칼을 놓고 폭삭폭삭 주저앉았으며, 장수들 중에는 싸워보지도 않고 말머리를 돌려 달아나는 자까지 있었다.
거기다가 가까운 곳에서 항우를 보니 장수로서의 자질도 뛰어난 데가 있었다. 언제나 병사들과 함께 자고 같이 먹으면서도 싸움터에서는 앞장을 섰다. 또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 한해서이기는 하지만, 병졸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했으며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함께 하기 마다하지 않았다.
항우도 유방에게서 새로운 것을 많이 보았다. 유방은 무예가 빼어나지도 않고 용맹 때문에 우러름을 받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글은 쓰고 읽을 줄 알았으나 그리 학식이 많은 것 같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꾀나 슬기가 남다른 것은 더욱 아니었다. 용모가 훤칠하기는 해도 위엄으로 사람을 누르지는 못했고, 장수로서도 인품은 너그럽고 부드러웠지만 자상하게 병사들을 보살피는 쪽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싸움에 나서면 모든 것은 사뭇 달라졌다. 모자라는 데가 많지만 유방이 싸움터에 나와 서 있으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것을 채워주었다. 한 떼의 촌뜨기들이 유방 주위에 몰려 있다가 용기가 필요한 곳이 있으면 그를 대신해 목숨을 걸고 뛰쳐나왔고, 기세가 필요하면 어디서 났는지 모를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그를 위해 좌충우돌 내달았다.
그 때문에 항우와 유방은 서로를 다시 보기 시작했으나 다행히 그때까지도 쓸데없는 경계심으로 자라지는 않았다. 성양을 쳐부순 뒤의 처분을 놓고 주고받은 두 사람의 논의가 다시 서로를 마음 놓게 한 까닭이었다. 성이 떨어지고 마지막까지 버티던 진군이 마침내 항복하자 항우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신의 장졸들에게 명했다.
“진나라의 관리와 병사들은 모두 끌어내어 죽여 버려라!”
그때 유방이 놀라 말했다.
“저들은 힘이 다해 항복한 자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을 모두 죽여 버린다면 앞으로 누가 장군께 항복하겠습니까? 모두가 죽기로 다해 싸울 것이니 더 많은 우리 장졸이 상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요. 그건 패공께서 잘못 보셨소. 끝까지 맞서다가 힘이 다해서야 항복한 자들을 용서하면 다른 성, 다른 싸움터에서도 똑같은 일이 벌어질 것이오. 무서운 본보기를 보여 우리에게 감히 맞설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우리 장졸들을 아끼는 일이 될 것이외다.”
그리고는 장졸들을 몰아대듯 항복한 진나라 병사와 관리들을 남김없이 죽여 버렸다. 그걸 보며 유방은 속으로 탄식해마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까닭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우리가 말하는 천하는 결국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리 보잘것없는 사람도 그를 죽이면 슬퍼하고 성낼 사람이 백 명은 넘는다. 그런데 사람의 목숨을 저리 하찮게 여겨 앞으로 사게 될 그 많은 원한은 어찌할 것인가. 항우, 과연 그대는 모든 점에서 나를 뛰어넘는 엄청난 기력의 사람이다. 그러나 한바탕의 전투에서는 언제나 이기겠지만, 천하를 다투는 큰 싸움에서는 아마도 끝내 이기기가 어려울 것이다.)
그 일로 유방을 마음 놓고 보게 되기는 항우도 마찬가지였다.
(부수어야 새로 세울 수 있고, 죽여서 더 많이 살리는 수도 있다. 바로 지금이 그러한 때다. 나에게 맞서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여기서 똑똑히 보여 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함양에 이를 때까지 내가 아끼는 초나라의 병사와 장수들이 얼마나 많이 죽어야 할지 모른다. 저 사람은 세상이 잘 다스려질 때면 인정 많은 재상쯤은 될 수도 있겠지만, 하늘과 땅이 뒤집히는 듯한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제 고을도 지켜내기 어려울 만큼 용렬한 장수가 될 것이다.)
편 서쪽으로 장함을 쫓아갔던 항량은 복양 동쪽에서 다시 한 번 진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전영이 제나라로 돌아가 버린 데다 항우와 유방에게 다시 적잖은 군사를 떼어준 터라 적을 뿌리 뽑을 만큼은 못되었다. 또다시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한 갈래 세력을 이룬 장함은 복양성 안으로 쫓겨 들어가 항량과 맞섰다.
장함이 높고 두터운 성벽에 의지해 버티니 그걸 에워싸고 들이쳐야 하는 항량에게는 싸움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항우와 유방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겨를이 없어 다시 전영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자를 보냈다.
그때 전영은 이미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제나라를 뒤엎은 뒤였다. 새로 제나라 왕이 됐던 전가(田假)는 전영에게 쫓겨 초나라로 달아났고, 상국(相國) 전각(田角)은 조나라로 몸을 피했으며, 조나라를 도우러 갔던 장군 전간(田間)은 감히 제나라로 다시 돌아올 엄두를 못냈다. 전영은 그들을 대신해 전담의 아들 전불(田巿)을 왕으로 세우고, 스스로 상국이 되어 전불을 보살피는 한편 전횡(田橫)을 장군으로 삼아 제나라 땅을 평정케 했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하는 항량의 사자가 이르자 전영이 그 사자를 돌려보내며 말했다.
“가서 무신군께 전하시오. 초나라가 전가를 죽이고, 조나라가 전각과 전간을 죽여 그 목을 내게 보내준다면 우리 제나라도 서쪽으로 진나라를 정벌하는 군사를 낼 것이오.”
하지만 초나라도 조나라도 전영의 뜻을 들어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전가는 한때 우리와 힘을 합쳐 진나라에 맞서던 나라의 왕이었다. 이제 신세가 곤궁하게 되어 우리 초나라에 의탁하였는데 어찌 차마 죽일 수 있겠는가”
항량은 그런 답서를 띄웠고 조나라도 전각과 전간을 죽여 제나라와 흥정하려들지는 않았다. 그러자 성이 난 전영은 끝내 군사를 보내 항량을 도우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항량은 복양을 버려두고 군사를 남으로 돌려 정도(定陶)로 향했다.
때마침 성양을 떨어뜨리고 성안의 진나라 관리와 군사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 항우와 유방의 군사들은 정도를 에워싸고 들이치고 있었다. 그러나 쉽게 떨어지지 않아 다급해 하고 있는데 항량의 대군이 이르렀다. 그들 두 갈래 군사가 합쳐 이 새로운 기세로 몰고 들자 정도도 더는 견뎌내지 못했다. 성을 지키던 진군(秦軍)은 수많은 시체를 남기고 저희편이 있는 곳으로 달아나 버렸다.
도를 차지한 무신군 항량은 다시 항우와 유방에게 따로 군사를 떼어주며 먼저 서쪽으로 밀고 나가게 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이끄는 군사가 옹구(雍丘)에 이르렀을 때였다. 삼천(三川) 군수 이유(李由)가 이끈 진나라의 대군이 그들을 가로막았다.
“이유라면 일찍이 못된 꾀로 여정(呂政=시황제)을 도와 육국(六國)을 차례로 망하게 한 이사(李斯)의 아들이오. 그 목을 얻어 무신군께 보내드리면 몹시 기뻐하실 거외다.”
항우가 그러면서 적군과 부딪히기도 전에 전의를 불태웠다. 유방도 구석진 군현(郡縣)을 지키는 이름 없는 수장(守將)의 군사들과 싸울 때와는 달리 긴장이 되어 싸울 채비를 갖추었다. 이유도 싸움을 서둘러 양군은 옹구현 성 밖 벌판에서 맞닥뜨렸다. 병법도 계략도 내세우지 않은 힘과 힘의 격돌이었다. 하지만 그런 싸움이라면 누구보다도 항우가 유리했다.
“패공께서는 본부 인마를 이끌고 중군(中軍)이 되어 뒤를 받쳐주시오. 나는 강동(江東) 형제들과 더불어 바로 이유의 본진(本陣)을 짓밟아 버리겠소. 내가 적진을 돌파하여 진군이 혼란에 빠지거든 패공께서도 때를 놓치지 말고 전군을 휘몰아 덮쳐 와야 하오. 그러면 이 싸움은 이긴 것이나 다름없소.”
그리고는 갑옷을 여미더니 60근이 넘는 철극을 끼고 훌쩍 오추마(烏騅馬)에 뛰어올랐다. 유방이 보니 한줄기 검푸른 기운이 먼지를 끌며 벌판을 내닫는데, 그 뒤를 강동의 정병(精兵) 3천이 한 덩이가 되어 내달았다. 말과 사람이 내닫는 빠르기가 같지 않아 마치 항우를 그 날카로운 끝으로 삼는 커다란 쐐기가 무서운 기세로 이유의 중군을 쪼개 놓는 것 같았다.
진군도 마주쳐 나왔으나 격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쐐기의 끝이 진군 가운데로 파고 드는가 싶더니, 갑자기 거센 바람에 쏠리듯 진군이 이쪽저쪽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아직 되돌아서서 달아나는 자는 없었으나 겁먹고 놀란 것만은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북을 울려라. 모두 앞으로 나아가자!”
유방이 칼을 뽑아들며 남은 군사를 휘몰아 항우를 뒤따랐다. 병졸들도 승세는 알아보아 함성과 함께 내닫는 초군(楚軍)의 기세가 또 여간 사납지 않았다. 그러자 힘겹게 버티던 진군이 드디어 무너져 내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창칼을 내던지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것은 그 대장 이유였다. 대단한 장재(將材)도 못되면서 긴 창을 꼬나 잡고 항우에게 맞서다가 몇 번 말이 엇갈리기도 전에 항우의 철극에 꿰어 목을 잃고 말았다. 꼭 죽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목을 항우에게 바쳤는데, 어떤 사람은 그게 이미 끔찍한 함양의 소식을 들어 혼이 뜬 탓이라고 한다. 그 무렵 그의 아버지 이사는 함양의 감옥에서 갖은 고통과 치욕을 겪은 끝에 일족(一族)과 함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승과 오광의 기의(起義)는 만세(萬世)를 이어가기 바라던 진(秦) 제국의 천하를 그 바탕으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문명이 그러했듯, 강력한 제국도 외부의 충격만으로는 붕괴시킬 수가 없다. 진 제국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기 위해서는 내부의 부패와 공동화(空洞化)가 더 진행되어야 했다.
진나라를 제국으로 키운 것은 형명학(形名學)을 바탕으로 한 부국강병 정책이었다. 하지만 진 제국을 내부적으로 무력하고 위태롭게 만든 것 또한 썩고 굳어버린 형명학이었다. 여러 공자 중 하나였던 호해(胡亥)가 이세황제에 오를 수 있었던 것도 제위(帝位) 계승권의 실질보다 형식이 우선된 진나라의 제도 때문이었으며, 진승과 오광의 봉기를 부른 것도 썩으면 백성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고 굳으면 폭정의 구실이 되는 법치(法治)였다.
하지만 썩고 굳은 형명의 원리는 그 뒤로도 아무런 반성 없이 진 제국의 최후를 재촉하고 있었다. 호해라는 특이한 개성에 왜곡되고, 조고(趙高)란 환관의 정신적 불구에 모욕당하고 이사(李斯)란 타락한 선비에게 부패되면서. 따라서 진 제국 내부의 말기적 증상은 곧 형명의 종말로 나타낼 수도 있는데, 그 중에서 끔찍하면서고 상징적인 것이 이사의 죽음이다.
조고의 꾐에 넘어가 호해를 이세황제로 세울 때부터 이사의 형명학은 부패를 넘어 치욕으로 빠져들고 있다. 그러나 이사의 이름에 돌이킬 수 없는 치욕을 입힌 것은 조고와 아첨하기를 겨루면서 이세 황제의 잔혹과 포악을 부추긴 그의 상소였다.
<........신자(신자= 신불해. 법가)는 일찍이 ‘천하를 소유하고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면, 천하를 차꼬와 포승으로 여김과 마찬가지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다른 뜻이 아니라, 신하를 제대로 꾸짖지 못하면서 요(요)임금과 우(우)임금처럼 도리어 자신의 몸을 천하의 백성들을 위해 힘쓰고자 한다면, 천하는 군주에게 죄수를 얽고 묶는 차꼬나 포승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무릇 신불해나 한비자(한비자)의 훌륭한 법술을 배우지도 못하고, 신하를 꾸짖을 줄도 모르고, 천하를 마음대로 부리지도 못하면서, 부질없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괴롭히며 힘써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은 보잘것없는 필부의 일이지 천하를 다스리는 이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게 군주라면 어찌 군주를 존귀하다 할 수 있겠습니까.
대저 남이 자기를 따르게 하면 자기는 존귀해지고 남은 천해지며, 자기를 남에게 따르게 하면 자기는 천해지고 남은 존귀해지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따르는 자는 천해지고 남이 따르는 이는 존귀하니, 예전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 왔습니다.
...........한비자가 이르기를 ‘자비로운 어머니에게는 집안을 망치는 아들이 있어도 엄격한 집안에는 방자한 하인이 없다’ 고 하였습니다. 그 까닭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벌을 주기 때문입니다. 옛날 상군(상군=상앙)의 법에는 길에 재를 버리면 벌을 주었는데, 재를 버리는 것은 가벼운 죄이나 그 벌은 몇 곱이나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직 현명한 군주만이 가벼운 죄를 무겁게 꾸짖을 수 있는 것입니다. 가벼운 죄도 그토록 엄하게 다스리니 무거운 죄는 오죽하겠습니까. 그러므로 백성들이 감히 죄를 짓 못하니 한비자가 그 일을 두고 말하기를 ‘하찮은 베나 비단 조각은 여느 사람도 그냥 두지 않지만, 좋은 황금이 백 일(일= 약 스무 냥)이나 된다면 도척(도척)도 훔쳐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여느 사람이 하찮은 이익을 무겁게 여겨서도 아니고, 도척이 욕심이 적어서도 아닙니다. 도척이 백 일이나 되는 황금을 훔치지 못하는 까닭은 그것을 가볍게 여겨서가 아니라 그걸 훔치면 손을 못쓰게 지져버리는 벌을 받기 때문입니다. 또 법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는 다면 여느 사람도 하찮은 것을 내버려두지 않고 훔치게 될 것입니다.
성벽 높이가 다섯 길[장] 밖에 되지 않아도 누계(누계=전국시대의 날래고 힘센 장사)가 가볍게 여겨 함부로 넘지 못하고, 태산은 백 인(인=여덟 자 정도)이나 되어도 절름발이 양치기가 그 위에 올라가 양을 칩니다. 누계가 다섯 길의 높이를 어렵게 여겼는데, 절름발이 양치기가 어찌 백 인을 쉽게 보았겠습니까. 그것은 다만 곧게 깎아지른 듯 높은 것과 비스듬하게 천천히 높아진 것의 형세가 다른 까닭입니다. 현명한 군주들이 오래도록 존귀한 자리에 있으면서 막중한 권세를 유지함과 아울러 천하의 이익을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특이한 수단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홀로 결단하고 꾸짖을 바를 찾아내 반드시 엄한 벌로 다스렸기에 백성들이 감히 죄를 짓지 못하였을 뿐입니다. 지금 죄를 짓지 못하도록 힘쓰지 않고 인자한 어머니가 아들을 망치는 것을 본받으려 한다면 이는 또한 성인의 길을 바로 살피지 못한 바가 됩니다.
.........무릇 현명한 군주는 반드시 세속을 초탈하고 고쳐서 자기가 싫어하는 바를 없애고 바라는 바를 세워, 살아서는 존중받고 권세를 누리며 죽어서는 현명하였다는 칭송을 듣게 됩니다. 뛰어난 군주는 홀로 결단하며 권세가 신하에게 있지 않게 합니다. 그런 뒤에야 인의(인의)의 주장을 없애고 설득하는 입을 막으며 열사(열사)를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자기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고도 마음속으로 홀로 보고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밖으로는 인의를 내세우는 사람과 열사의 언행에 홀리지 않을 수가 있고, 안으로는 다투고 말리는 말솜씨에 마음을 뺏기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군주가 초연히 제 뜻대로만 움직이더라도 감히 거역하지 못하게 되니, 이래야만 신불해와 한비자의 학술에 상군의 법을 닦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하를 꾸짖는 법을 잘 베풀면 군주가 하고자 하는 바를 다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백성들과 신하들은 허물을 짓지 않고 죄를 면하기에 겨를이 없을 터이니, 어찌 감히 모반을 꾸밀 수 있겠습니까. 이는 바로 황제의 도가 갖춰지는 것이요, 신하를 부리는 도가 밝고 바르다 할 수 있은 즉, 비록 신불해와 한비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더 보탤 것이 없을 것입니다.>
대강 그런 내용으로 채워진 수천 자(字) 상소문이 이르자 이세 황제는 매우 기뻐했다. 그리하여 공자와 대신들을 벌주는데 더욱 엄격해졌고, 관리들은 백성들을 심하게 쥐어짤수록 현명하게 여겼다. 그러다 보니 오래잖아 길을 다니는 사람들 중에 절반은 형벌을 받은 적이 있는 자들이었고, 사형당한 사람들의 주검은 날로 저자바닥에 높이 쌓여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관동의 변란은 갈수록 널리 퍼져 이사에게도 위기감을 키웠다. 거기다가 조고가 황제의 명을 핑계로 모든 일을 제멋대로 처리하는 것도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다.
“천자가 존귀한 것은 여러 신하들이 다만 폐하의 소리를 들을 뿐이고, 그 얼굴을 뵈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자가 스스로를 이를 때도 짐(朕=조짐이란 뜻)이라 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폐하께서는 젊으셔서 반드시 모든 일에 두루 능통하실 수는 없습니다. 조정에 마주 앉아서 정사를 보시다가 신하들을 꾸짖거나 뽑아 쓰심에 옳지 못한 것이 있으면 대신들에게 폐하의 서투르고 모자란 곳만 들키게 됩니다.
무릇 신명(神明)한 것은 천하에 함부로 드러내는 법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궁궐 깊숙이 계시면서 법을 잘 아는 신하와 시중 몇 만 거느리고 기다리시다가, 정사가 문서로 들어오면 그때서야 그들과 의논하여 처결하면 됩니다. 그리하면 대신들은 의심스러운 일을 함부로 폐하께 아뢰지 못할 것이며, 천하의 백성들은 폐하를 훌륭한 군주라고 칭송할 것입니다.“
조고는 이세 황제를 꿰어 궁궐 깊숙한 곳에 머무르면서 대신들과 얼굴을 맞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아무도 황제 근처에 얼씬 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만 그 곁에 붙어 앉아 모든 일을 제 뜻대로 했다.
하지만 조고 같은 총신형(寵臣型)의 인간일수록 남의 눈치를 잘 살피고 일의 기미를 빨리 냄새 맡는다. 아무리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어도 자신의 권력이 정통적이 아님을 잘 알아, 승상인 이사를 언제나 날카롭게 살피고 있었다. 그러다가 갈수록 이사의 얼굴에 심상찮은 결의가 굳어가는 걸 보고 제 쪽에서 먼저 이사를 찾아와 충성스럽고도 공손한 체 말하였다.
“지금 함곡관 동쪽에 도적떼가 들고 일어나 천하가 시끄러운 것은 승상께서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부역을 급하게 끌어들여 아방궁이나 짓고, 개나 말 따위 쓸모 없는 것들만 모으고 계십니다. 제가 깨우쳐 드려 말리고 싶으나 미천한 환관이라 함부로 아뢰지 못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런 일은 승상 같은 조정의 대신이 나서셔야 할 일인데, 어찌 아무 말씀도 아뢰지 않으십니까?”
그때는 이미 썩을 대로 썩어빠진 뒤라 하지만 그래도 조고처럼 간교하지는 못한 이사였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덥석 조고의 손까지 잡으며 말했다.
“정말 그렇소. 나도 그 일을 폐하께 아뢰려 한지 이미 오래되었소. 하지만 지금 폐하께서는 조정에 나오시지 않고 금중(禁中) 깊숙한 곳에 머무르고 계시니, 뵈오려 해도 뵈올 수가 없었고 아뢸 말씀이 있어도 아뢸 길이 없었소.”
그러자 조고가 간이라도 빼어줄 듯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면 조금도 걱정 마십시오. 승상께서 진실로 간언(諫言)을 올리시려 한다면 제가 길을 마련해보겠습니다. 폐하께서 한가로운 때를 골라 승상께 기별하여 드릴 터이니 그 때 아뢰십시오.”
이에 이사는 아무 의심 없이 조고와 헤어져 이세 황제를 마주하게 될 날만 기다렸다. 며칠 안돼 조고가 보낸 사람이 이사를 찾아와 말했다.
“낭중령께서 이르시기를 폐하께서 지금 한가로우시니 찾아뵙고 아뢸 수 있을 것이라 했습니다.”
하지만 기실 그때 조고는 이미 작은 함정을 파놓고 이사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황제가 가장 사랑하는 후궁들을 끼고 질탕하게 잔치를 열고 있는 곳에 이사를 불러들인 것이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곳에 이른 이사가 조고를 찾아보고 황제를 뵙기를 청하자 조고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먼저 가서 여쭙고 오겠소.”
그리고는 향기로운 술과 아리따운 여인들에 취해 한창 흥이 올라 있는 이세 황제에게 황송스럽다는 얼굴로 말했다.
“승상 이사가 폐하께 알현을 청합니다.”
그 말에 이세황제는 짜증부터 냈다.
“승상은 어찌하여 하필이면 이런 때에 나를 찾아온 것인가? 정사에 관한 것이라면 글로 써서 올릴 수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는 이사를 그냥 돌려보내게 했다. 조고가 여전히 천연덕스런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승상, 오늘은 아니 되겠습니다. 폐하께서 뒷날 조용히 승상의 말씀을 들을 터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라 하십니다.”
그 말에 이사는 별 의심 없이 금중을 나왔다.
며칠 뒤 조고는 다시 이사(李斯)에게 사람을 보내어 알렸다.
“낭중령께서 말씀하시기를 폐하께서는 지금 조용히 쉬고 계시다고 합니다. 승상께서 찾아뵙고 정사를 아뢰기 좋은 때이니 바로 입궐하시지요.”
이에 이사는 급히 의관을 갖추고 궁궐로 달려갔다. 그러나 이세 황제 호해는 그날도 궁녀들과 환관들을 모아놓고 천박하고도 음란한 놀이에 빠져 있었다. 조고가 천연덕스런 얼굴로 들어와 승상 이사가 정사를 아뢴다며 찾아왔다고 말하자 벌컥 화를 냈다.
“승상은 하필 이런 때만 골라 나를 찾아오는가? 짐은 아끼는 이들과 놀이를 즐기며 잠시 머리를 식히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러면서 다음날 들라는 말과 함께 이사를 돌려보내게 했다. 그러나 조고는 이사에게 돌아가 또 거짓말을 했다.
“폐하께서 한가로워 보이시기에 승상을 모셔오게 했는데 오늘도 틀린 것 같습니다. 내쳐 쉬시고 싶다 하니 찾아뵙고 정사를 아뢰는 일은 뒷날로 미루어야겠습니다.”
다음날 들라는 말을 쏙 뺀 체였다. 그제야 이사도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지만 워낙 엄중하게 둘러싸여 있는 금중(禁中)의 일이라 조고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었다.
조고가 세 번째로 이사를 부른 날은 이세황제가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벌여놓고 벌거벗은 후궁들 사이를 나비처럼 넘나들며 술과 미색에 함께 취해 가는 중이었다. 조고가 들어와 이사가 또 찾아왔다고 하자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소리쳤다.
“또 이사냐? 좋다. 들라고 하여라!”
그리고 아무 것도 모르는 이사가 오로지 제 할 말만 머리 속으로 가다듬으며 들어서자 대뜸 꾸짖기부터 했다.
“짐에게는 한가한 날이 많았지만 그때는 승상께서 오지 않았소. 그러다가 짐이 좀 쉬며 즐기려하거나 아끼는 이들과 다정히 술잔이라도 나누려고 들면 어김없이 찾아와 정사를 아뢰겠다고 하니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이오? 짐이 어리다고 승상께서 감히 얕잡아보시는 것이오? 아니면 승상의 자리가 높고 귀해 이 황제를 업신여겨도 된다고 믿으시오? 짐을 어떻게 보고 이리 함부로 구시오?”
그 말에 비로소 이사도 정신이 홱 돌아왔다. 조고가 가운데서 농간을 부린 걸 눈치 챘으나 워낙 이세 황제가 화를 내고 있어 그 자리에서는 자신을 변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릴없이 머리를 조아려 잘못만을 빌다가 쫓겨나듯 황제 앞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조고의 간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사의 뒷모습이 금중에서 사라지기 바쁘게 이세 황제 곁으로 가서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폐하. 어쩌시려고 승상을 그리 대하십니까? 실로 위태롭기 짝이 없는 일이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이세 황제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저 사구(沙丘=시황제가 죽은 땅)의 모의에는 승상도 관여하였으나, 폐하께서는 지금 황제의 자리에 오르셨는데도 승상의 벼슬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으니 사람의 마음으로 어찌 서운함이 없겠습니까? 모르긴 하되 그분이 속으로 바라는 바는 폐하와 땅을 나누어 왕 노릇이라도 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데 승상을 달래기는커녕 꾸짖어 쫓다시피 하셨으니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실로 걱정입니다.”
조고는 거기까지 말해놓고 잠시 무언가를 망설이는 듯하더니 갑자기 부르르 떨기까지 하며 덧붙였다.
“게다가 폐하께서 묻지 않으시어 감히 여쭈지 못한 일도 있습니다. 승상의 맏아들 이유(李由)는 삼천(三川)군수로 나가있고, 초(楚)땅의 도적인 진승 오광 등은 모두 승상의 이웃 고을에 살던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초 땅의 도적들이 그곳을 휩쓸고 다니며 삼천군을 지나가도 그곳 군수는 도적들을 치지 않았습니다. 저도 진작부터 삼천군수와 도적들 사이에 사람과 글이 몰래 오간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그게 참인지 아닌지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히 폐하께 아뢰지 못했습니다. 뿐만이겠습니까? 승상도 궁궐 밖에서는 권세가 폐하에 못지않습니다. 그런 승상 부자(父子)가 도적과 손을 잡고 폐하께 맞서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 위태로움은 실로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 조고의 말을 듣자 이세 황제도 으스스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사를 잡아들이게 하고 싶었으나 그 죄상이 확실하지 않아 그리하지 못했다. 가만히 사람을 풀어 삼천군수 이유와 초나라 땅의 반도(叛徒)들이 내통하는 증거부터 잡아오게 했다.
조고와 이세 황제가 주고받은 말이며 이세황제가 삼천군에 사람을 푼 일은 곧 이사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사는 더욱 이를 갈며 조고의 간교함을 밝히기 위해 이세황제를 만날 틈을 노렸다. 그러나 이세 황제는 감천궁(甘泉宮)에 머물면서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다. 곡저((角,穀)抵=角抵 라고도 하는데 씨름과 춤을 결합한 것 같은 놀이)와 광대들의 연희(演戱)에 빠져 세상을 잊고 지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궁궐 깊숙이 들어앉은 황제를 만날 길이 없자, 이사는 마침내 글로 조고의 죄를 아뢰게 되었다.
<신이 듣기에, 신하가 그 군주와 다투어 틀어지면 위태로워지지 않는 나라가 없고, 지어미가 지아비와 다투어 틀어지면 위태롭지 않은 집안이 없다 하였습니다. 지금 폐하를 곁에서 모시는 대신 중에는 폐하만큼이나 남에게 세력과 이득을 내려줄 수도 있고, 또 그 만큼 남을 억누르고 빼앗을 수도 있는 자가 있습니다. 그 권세가 폐하와 크게 차가 없으니 이는 실로 크게 부당한 일입니다.
옛적 사성(사성)이었던 자한 (자한)이 송나라의 재상이 되자 몸소 형벌을 집행하며 위세 있게 행동하더니 일년도 안돼 제 임금을 겁주고 억눌렀습니다. 전상(전상)도 제(제)나라 간공(간공)의 신하가 되어, 높고 귀하기가 그를 따를 자가 없고 재물도 공실(공실)과 비슷해지자 마찬가지였습니다. 은혜를 베풀고 덕을 펼쳐, 아래로는 민심을 얻고 위로는 벼슬아치들의 마음을 사들이더니, 슬그머니 제나라를 차지하려 들었습니다. 뒷날 궁중 뜰에서 재여(재여)를 죽이고 이어 궁 안에서는 간공을 시해하여 끝내는 제나라를 빼앗고 말았습니다.
지금 조고는 그 품은 뜻이 사악하고 그 행동이 위태롭기가 마치 송나라의 재상 자한과 같으며, 그 권세나 사사로이 모은 재산도 제나라의 전상에 못지 않습니다. 전상과 자한이 그 임금에게 반역하던 수법을 아울러 본받아 조고가 폐하의 위엄과 권세를 허물려함은 한이(한비)가 한나라 왕 안(안)의 재상으로 있을 때와 다름없습니다. 폐하께서 이제라도 조고를 다룰 방책을 찾지 않으시면 머지않아 그가 변란을 일으키지 않을까 참으로 두렵습니다.....>.
그같은 이사의 상소가 올라가자 이세 황제도 더는 모르는 척 할 수 없었다. 황제는 마지못해 이사를 금중으로 불러들였으나 그 마음은 온통 조고 편이었다. 자신이 나서 조고를 변호하기에 바빴다
“좌(左)승상의 글은 잘 읽었오만 그게 무슨 말씀이오? 조고는 본디 환관으로 나라가 평안하다고 해서 제멋대로 하지 않았고, 위태롭다고 해서 그 마음을 바꾼 적도 없소. 행실을 맑게 하고 끊임없이 선행을 닦아 오늘에 이르렀으며, 충성으로 그 벼슬이 높아지고 신의로 그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라, 짐이 그를 참으로 어질다 여기는데 승상이 의심하니 무슨 까닭이오?
게다가 짐은 많지 않은 나이에 선제(先帝)를 잃어 배운 것만으로는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고, 승상은 늙어 언제 이 세상일을 버려두고 떠나갈지 모르니, 짐이 조고에게 국사를 맡기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이오? 더군다나 조고는 사람됨이 깨끗하고 부지런하며, 아래로는 민심을 알고 위로는 짐의 뜻에 맞으니 그만한 인재도 없을 것이오. 승상은 그 사람을 너무 의심하지 마시오.”
그 말을 들자 이사는 어이가 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숨이 가빠지고 목소리가 높아져서 맞받아치듯 말했다.
“폐하.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속고 계십니다. 조고는 본디 미천한 출신이라 도리에 밝지 못한데다 그 탐욕은 끝간 데를 모릅니다. 그런데도 권세는 폐하에 버금가니 반드시 몹쓸 일을 저지를 자라 폐하께 그 위험함을 아뢰었을 뿐입니다. 부디 밝게 살피시어 돌과 옥(玉)을 분별하시옵소서.”
하지만 이세 황제는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다. 거듭 조고를 감싸며 오히려 이사를 꾸짖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이사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물러간 뒤에는 조고를 불러 이사가 한 말을 귀띔해 주고 걱정까지 곁들였다.
“낭중령은 부디 조심하시오. 승상이 낭중령을 해칠까 두렵소.”
그러자 조고는 간사한 눈물을 쏟으며 애처롭게 소리쳤다.
“승상이 걱정거리는 오직 이 조고뿐이며, 이 몸이 죽으면 승상이야말로 전상(田常)과 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 것입니다. 아아, 그때는 누가 있어 폐하를 지켜드리리까!”
한편 조고의 간악함을 알리려 했다가 도리어 이세황제에게 꾸중만 듣고 쫓겨난 꼴이 된 이사는 울적하면서도 불안했다. 어떻게든 황제의 마음을 돌려놓으려고 다시 한 번 가까이 할 틈만 엿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우(右)승상 풍거질(馮去疾)과 대장군 풍겁(馮劫)이 부른 듯이 이사의 집을 찾아왔다
“좌승상, 아무래도 이대로는 아니 되겠습니다. 소부(少府) 장함(章邯)이 죄수들을 이끌고 가서 우선 급한 불은 껐으나, 관동(關東)은 아직도 도적 떼로 들끓고 천하는 위태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으시고 아방궁을 짓는 데나 인력과 물자를 퍼붓고 있으니, 나라의 대신이 되어 어찌 그냥 보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함께 가서 폐하를 찾아뵙고 간곡히 아뢰는 게 도리일 듯합니다.”
두 사람의 그같은 말에 이사는 갑자기 눈앞이 훤해지는 듯했다. 기다리던 때가 절로 찾아온 느낌이었다. 그들과 힘을 합쳐 황제를 온전한 정신으로 되돌려 수만 있다면 조고를 잡는 일은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이에 이사는 그 자리에서 의관을 갖추고 풍거질, 풍겁과 함께 궁궐로 들어갔다.
좌(左)우(右) 승상과 대장군이 함께 알현을 청하자 황제도 마지못해 그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황제 앞에 나아간 그들 세 사람은 목청을 가다듬어 간곡히 아뢰었다.
"함곡관 동쪽에 도적의 무리가 크게 일자 조정은 군사를 내어 그들을 쳐부수게 하였습니다. 이에 많은 도적 떼가 죽고 흩어졌으나 아직도 그 어지러움이 다 가라앉지는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도적들이 많이 이는 까닭은 모두 수자리 살이[戌]와 물과 뭍으로 물자를 나르는 일[漕,轉]과 여기저기 불려나가 해야하는 일[作]에 백성들이 고달프고, 그들로부터 거두는 공물과 세금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아방궁 짓는 일을 잠시 멈추시고, 사방의 수자리를 줄이시며, 백성들이 물자를 나르는 수고로움을 덜어주옵소서. 그리하면 도적의 무리가 줄고 천하의 어지러움도 머지않아 가라앉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세 황제는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그런 세 사람의 말을 받아넘겼다.
“일찍이 한비(韓非)는 말하기를 ‘요순(堯舜)은 나무를 베어다가 깎지도 않고 서까래를 만들었고, 짚으로 지붕을 이면서 처마 끝도 가지런히 잘라내지 않았으며, 질그릇에 밥을 담아 먹고 동이에 물을 담아 마셨으니, 하찮은 문지기가 사는 꼴도 그보다 궁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우(禹)는 용문(龍門)을 뚫어 대하(大夏)를 소통시키고, 황하의 막힌 물길을 터서 바다에 이르게 하였는데, 몸소 괭이와 가래를 들고 일해 정강이의 털이 다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으니 종살이의 수고로움도 이보다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다 들었소.
대저 천하의 주인됨을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하고자 하는 바를 마음대로 할 수가 있고, 엄한 법으로 아랫사람을 부려 천하를 쉽게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오. 그런데도 우(虞=舜) 하(夏=禹)는 천자의 귀한 몸이면서도 궁핍하고 고단하게 살며 천한 백성들을 위해 도리어 자신을 저버렸으니 본받을 만한 것이 무엇이겠소? 짐은 존귀하기가 만승(萬乘)의 천자이지만 거기에 어울릴 만한 누림이 없으니, 아방궁을 마저 짓고 크게 군대를 길러 짐의 칭호에 어울리게 하려는 것뿐이오.
선제(先帝)께서는 제후에서 몸을 일으키시어 마침내 천하를 아우르시었소. 또 천하가 이미 아울러진 뒤에는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를 물리쳐 변방을 안정시키고, 안으로는 크게 궁실(宮室)을 지어 득의(得意)함을 드러내셨으니, 그대들도 선제께서 남기신 공업(功業)을 익히 보았을 것이오.”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엄하게 하여 꾸짖었다.
“그런데 이제 그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오? 짐이 제위에 오른 지 2년, 도적의 무리가 잇따라 일어도 그것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짐이 선제께서 하신 바를 이어서 하는 것조차 막으려 드는 것이오? 이는 위로는 선제의 은의에 보답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짐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도 못되니, 이러고도 이 나라의 좌우 승상이고 대장군이라 할 수 있소?”
그러는 이세 황제의 얼굴에는 찬바람이라도 도는 듯하였다. 그래도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나선 세 사람은 크게 낙담했다. 특히 혹 떼러 갔다가 혹을 하나 더 붙인 격이 된 이사는 다급한 마음까지 들었다. 온갖 말재주를 부려 황제를 달래보려 했으나 끝내는 나머지 둘과 함께 내쫓기고 말았다.
그런데 이세 황제의 노여움은 꾸짖음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들 세 사람이 어전을 물러나자마자 옥리(獄吏)를 불러 명하였다.
“우승상 풍거질과 좌승상 이사, 그리고 대장군 풍겁을 잡아들여 그들의 죄를 엄히 물으라!”
이에 그들 세 사람은 미처 궁궐 문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옥리에게 잡혀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게 되자 풍거질과 풍겁은 모든 일이 글러졌다고 보았다.
“장상(將相)은 죽을지언정 모욕당하지 않는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그러나 이사는 달랐다. 시황제의 천하통일을 도운 공만으로도 죽음은 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거기다가 시황제의 유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이세 황제로 세운 공까지 있으니 버티기만 하면 곧 죄를 벗고 전처럼 부귀와 영화를 누릴 수 있으리라 보았다.
앞일을 자신에게 이롭게만 헤아려 살아남은 이사는 호되게 그 값을 치러야 했다. 홀로 살아남은 것을 밉살스럽게 보아서일까, 이세 황제는 하루아침에 승상에서 죄수가 되어 옥에 갇히게 된 이사를 다른 사람도 아닌 조고에게 넘겨 심문하게 하였다. 그제야 일이 돌이키기 어려울 만큼 꼬였음을 안 이사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였다.
“아아, 슬프구나. 도리를 알지 못하는 임금에게 무슨 계책을 올릴 수 있다는 말인가. 옛적 하(夏)나라의 걸왕(桀王)은 관용봉(關龍逢)을 죽였고, 은나라 주왕(紂王)은 비간(比干)을 죽였으며, 오나라 왕 부차(夫差)는 오자서(伍子胥)를 죽였다. 그 세 사람이 어찌 충성을 바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 까닭은 그 왕들이 그들의 충성을 받을 만하지 못하여서이다.
지금 나는 지혜가 그들 세 사람보다 못하고, 이세 황제의 무도함은 걸왕 주왕이나 부차보다 더하니 내가 충성하였기 때문에 죽는 것은 오히려 마땅한 일이다. 어지러운 이세 황제의 다스림이여. 지난날 그는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제위를 차지하였으며, 충신을 죽이고 미천한 자를 귀하게 썼으며, 아방궁을 짓느라 천하 백성들을 쥐어짜고 부려먹었다. 그때마다 내가 바른 말로 말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듣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무릇 옛날 훌륭한 임금들은 식사할 때도 예절을 잃지 않았고, 수레를 부리고 물건을 쓰는 데도 정해둔 개수를 따졌으며, 궁궐을 짓는 데도 한도가 있었다. 조칙을 내려 어떤 일을 할 때도 비용만 들고 백성들에게 이득이 없는 일은 하지 않아 오랫동안 평온하게 천하를 다스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황제는 형제에게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하고서도 그 허물을 돌아보지 않고, 충신을 죽이면서도 그 재앙을 헤아릴 줄 모르며, 크게 궁궐을 지어 백성들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면서도 그 비용을 아껴쓸 줄을 모른다. 그 세 가지 일이 함부로 저질러지고 있는 한 백성들은 결코 그의 다스림에 따르지 않으리라.
이제 반역의 무리가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였건만 황제는 아직도 그 위태로움을 깨닫지 못하고, 조고 같이 간사한 무리를 충신으로 여기며 그 보필을 받고 있으니,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다. 도적들이 함양까지 쳐들어와 진나라를 멸망시켜 고라니와 사슴이 이 궁궐터에서 노는 꼴을 내 반드시 보게 되겠구나!”
이사가 걱정 한대로 조고의 참혹한 심문이 곧 시작되었다. 조고는 이사에게 천 번을 넘게 모진 매질을 가하며 아들 유(由)와 함께 모반한 죄를 덮어 씌웠다. 이사는 처음 펄쩍 뛰며 부인하였으나 매 앞에 장사가 없었다. 거듭되는 매질을 견뎌내지 못하고 조고가 원하는 대로 자백하고 말았다.
이사가 자살하지 않고 그 모진 고문을 견뎌낸 것은 실낱같으나마 그래도 아직 믿는 바가 있어서였다. 아무리 조고에게 홀려있는 황제이지만 그동안 세운 공을 보아서도 자신을 쉽게 죽이지는 못하리라는 것과 실제로 모반할 뜻이 없었음을 끝내는 밝혀낼 수 있을 것을 그는 믿었다.
이사는 그 두 가지를 황제에게 일깨워주기 위해 부서지고 찢긴 몸을 억지로 추스르고 옥중에서 붓을 잡았다.
<신이 승상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리기 시작한 때만 해도 진나라의 세력은 지금에 크게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 뒤 30년, 이제 진나라는 천하를 하나로 아울러 만세(萬世)를 기약하는 천자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은 이제 승상의 자리에서 죄수의 뇌옥(牢獄)으로 옮겨 앉아 모진 심문을 받고 있습니다.
신이 못난 아들 유(由)와 함께 도적들과 내통하며 반역을 꾀했다는 말이 거짓됨은 하늘과 땅, 해와 달이 밝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이는 모두 간사한 자들이 신과 폐하를 이간시키려고 꾸며 덮어씌운 모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오나 이 며칠 어두운 옥중에서 곰곰이 돌이켜보니 신에게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스스로 그 죄를 자복(自服)하며 폐하의 밝고 어진 처분을 빌 따름입니다.
선왕의 시절 진나라의 땅은 천리를 넘지 못했고 군사도 몇 십만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은 변변치 못한 재주를 다하여 삼가 법령을 만들고, 지모(智謀)있는 자들에게 몰래 보석을 나눠주며 제후들을 달래게 하였습니다. 또 은밀히 군비를 갖춤과 아울러 다스림과 가르침을 가지런히 하였으며, 용감한 자에게는 벼슬을 내리고 공 있는 자에게도 벼슬과 녹봉을 넉넉히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韓)나라를 위협하고 위(魏)나라를 약하게 만들었으며,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를 깨뜨리고 제(齊)나라와 초(楚)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끝내 여섯 나라를 모두 아우르고 그 왕들을 사로잡은 뒤, 우리 진나라의 임금을 천자로 세웠으니 그게 신의 첫 번째 죄입니다.
그 때 이미 우리 진나라의 영토가 드넓지 않은 것이 아니었건만, 더욱 북쪽으로 밀고 나아가 호(胡)와 맥((맥,학))을 멀리 쫓아내었고, 남쪽으로도 백월(百越)을 평정하여 제국의 강성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신은 그 일을 말릴 수 있는 자리에 있었으나 말리지 않았으니 이는 신의 두 번째 죄라 할 만합니다.
대신들을 존중하여 그들로 하여금 맡은 일과 받고 있는 녹봉에 만족케 하니 임금과 신하가 가깝고도 믿음이 굳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또한 죄가 된다면 저의 세 번째 죄목을 이룰 것입니다. 사직(社稷)을 세우고 종묘(宗廟)를 엄숙히 받들어 황제께서 밝고 어지심을 밝힌 것은 신의 네 번째 죄가 될 것이요, 눈금을 고치며 나라 안의 되[升]와 자[尺]를 모두 같게 하여 우리 진나라의 엄정함을 보인 것은 신의 다섯 번째 죄가 될 것입니다.
수레 두 대가 엇갈려 갈 수 있도록 길을 넓히고 사방으로 이어지게 하여 순수(巡狩)를 편안케 하고 황제의 위엄을 떨치게 한 것도 죄가 된다면 여섯 번째 죄를 이룰 것입니다. 또 형벌을 낮추고 세금을 덜어주어 황제께서 민심을 얻게 함으로써 모든 백성들이 죽어도 황제의 은혜를 잊지 못하도록 한 것도 일곱 번째 죄가 될 수 있겠습니다.
이 이사는 신하된 몸으로서 이토록 많은 죄를 지었으니, 이미 오래 전에 죽어 마땅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신을 벌하지 않으시고 지금에 이르도록 있는 힘을 다 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니 이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다만 폐하께서 아직도 이 늙은 신하를 가련히 여기신다면 다시 한 번 굽어 살펴 주시기를 빌 따름입니다. >
대략 그와 같이 쓰기를 마친 이사는 그 글을 옥리에게 주며 황제에게 올려주기를 빌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이사의 주변은 조고가 풀어놓은 눈과 귀가 쫙 깔려 있었다. 그 옥리도 그들 중의 하나라 이사의 글을 받기 바쁘게 조고에게 갖다 바쳤다.
글을 다 읽고 난 조고가 새파랗게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죄인이 어찌 폐하께 감히 이런 글을 올릴 수 있는가? 찢어 없애버려라!”
이사(李斯)의 상소문이 이세 황제에게 전해지는 것은 막았으나 조고의 마음은 편치 못했다. 문장뿐만 아니라 말재주로도 결코 남에게 지지 않는 이사였다. 이세 황제가 언젠가 한번쯤은 이사를 면대하고 진상을 물을 때가 있을 터인데, 그때 가서 이사가 말을 뒤집으면 큰일이다 싶었다. 이에 조고는 간교하면서도 잔인한 꾀를 냈다.
이사가 옥리(獄吏)에게 글을 준 뒤 며칠 아니 되어서였다. 이세 황제가 보낸 어사(御使)가 감옥으로 찾아와 이사를 보고 말했다.
“폐하께서 승상의 글을 읽으시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잊고 계셨던 승상의 지난 공훈을 되새기시고 늦었지만 이제라도 실상을 알아 오라고 하십니다. 승상께서는 그간에 있었던 그릇된 일들을 모두 기탄없이 말씀해주십시오. 폐하께 아뢰어 그 억울함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자신이 상소를 올린 지 며칠 아니 되는 데다 찾아온 어사의 차림과 생김새가 워낙 그럴싸했다. 이에 이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마음속에 한탄과 푸념을 곁들여 자신의 억울함을 모두 털어놓았다. 그리고 조고에게 품고 있던 분노와 원한까지 서슴없이 내비쳤다.
“알겠습니다. 저희들도 승상 부자(父子)분께서 모반을 꾀할 까닭이 없다고 짐작은 했습니다만 일이 그렇게 된 것이군요. 반드시 들은 대로 폐하께 전해 올리겠습니다.”
다 듣고 난 어사는 그렇게 이사를 안심시키고 돌아갔다. 이사는 이제 살았다 싶었다. 한시바삐 황제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기만을 바랐다.
그런데 그날 밤이었다. 그동안의 고문으로 멍들고 찢긴 몸을 추스르며 이사가 막 잠들려 하는데 갑자기 감옥 안이 횃불로 대낮같이 밝아지더니 옥리들이 몰려와 이사를 끌어냈다.
이사가 끌려간 곳은 감옥 뒤뜰 후미진 곳이었다. 저만치 횃불로 빙 둘러싸인 곳에 호사스러운 교의(交椅)가 놓여 있고 그곳에 한사람이 앉아 있었다. 이사는 이세 황제가 몸소 진상을 알아보려 나선 것으로 알고 감격부터 했다. 하지만 다가가 보니 그게 아니었다. 조고가 잔뜩 거드름을 빼며 교의에 앉아 끌려오는 이사를 차갑게 쏘아보고 있었다.
“죄인 이사는 듣거라. 너는 한때 좌승상을 지냈으니 우리 진나라의 법이 얼마나 엄정한지를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감옥에 갇힌 몸으로서, 죄를 비는 구실로 황제께 상소를 올려 있지도 않은 지난 공을 스스로 추어올렸다. 이는 폐하의 이목을 현혹시키는 일일 뿐만 아니라 법을 집행하는 대신을 능멸하는 죄를 더한 셈이다.”
이사가 그 앞에 무릎이 꿇리자 조고가 이사의 상소를 흔들어 보이며 엄하게 꾸짖었다. 자신이 써 올린 글이 조고의 손안에 있는 걸 보자 비로소 이사는 일이 크게 잘못된 걸 알았다. 놀랍고도 두려워 어찌할 줄 모르는데 조고가 문득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옥리들은 무얼 하는가? 어서 저 죄인의 양쪽 엄지와 검지를 모두 부러뜨려 다시는 망령되이 붓을 잡지 못하도록 하라!”
그러자 옥리들이 달려와 이사의 손가락을 모두 꺾어 다시는 붓을 잡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처절한 비명과 함께 이사가 혼절하자 물을 퍼부어 다시 깨어나게 한 조고가 다시 두 번째 판결을 내렸다.
“너는 오늘 또 황제께서 보내신 어사에게 네 죄를 부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 옥사(獄事)를 맡게 된 나를 무고하였다. 네가 모반을 꾀한 죄는 뒷날 오형(五刑)으로 다스리려니와, 곁들여 저지른 작은 죄는 바로바로 셈하게 될 것이다. 여봐라. 이 자를 일백번 매질하되 털끝만큼도 손끝에 인정을 남겨서는 아니 된다!”
그러면서 두 번째 죄의 증인으로 낮에 다녀간 바로 그 어사를 불러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어사는 조고에게 빌붙어 사는 식객(食客) 가운데 하나였다. 조고가 옥리들과 짜고 그를 어사로 꾸며 이사의 속을 떠보게 한 것인데, 이사가 보기 좋게 걸려들고 말았다.
그 거짓 어사를 알아본 이사는 두려움으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후회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이사의 몸이 준비된 형틀에 얹히자 모진 매질이 쏟아졌다. 조고는 이사가 몇 번이나 혼절했다 깨어나기를 거듭하며 일백 대의 매를 다 맞는 걸 보고서야 자리를 떴다.
조고의 독한 꾀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 뒤로도 황제가 보낸 어사들이 몇 번 더 감옥으로 이사를 찾아왔다. 그러나 한번 쓴맛을 본 이사는 쉽게 속을 털어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조고가 덮어씌운 대로 승복하며 어서 죽여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하지만 날이 지나면서 상처가 아물고 아팠던 기억이 무디어지자 이사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다시 살고자 하는 욕망이 되살아났다. 언젠가 한번은 황제가 진상을 물어올 것이란 믿음도 차츰 이사의 경계심을 무디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옥 안이 떠들썩할 만큼 요란한 격식과 수많은 손아래 벼슬아치들을 거느린 알자(謁者)가 다시 이사를 찾아왔다. 어사나 알자나 황제의 명을 받들기는 마찬가지지만, 어사가 벼슬아치들을 감찰하는 일을 한다면 알자는 황제가 예우를 갖춰 제 뜻을 전할 때 부리는 내관(內官)이다. 그 알자란 직함이 풍기는 우호적인 느낌에다 그를 맞는 옥리들의 정중하면서도 공손한 태도가 한층 더 이사의 경계심을 풀어놓았다.
거기다가 알자의 말투며 몸가짐까지 참으로 황제가 보낸 사람 같은 데가 있어, 이사는 마침내 거듭 감추어 오던 내심을 털어놓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함과 아울러 조고의 간교함을 일러바쳤다. 뿐만 아니라, 듣고 있는 알자의 얼굴에 함께 한탄하고 분노하는 기색이 떠도는 걸 보고 부러진 손가락까지 내보이며 흐느꼈다.
하지만 이번에도 알자는 황제가 보낸 것이 아니었다. 이사가 잘 속지 않자 조고가 식객들 중에서 생김이 더 그럴듯하고 언변이 더 나은 자를 골라 보냈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날 밤 이사는 다시 감옥 뒤뜰로 끌려가 또 한 번 견뎌내기 어려운 고통과 수모를 당해야 했다.
거기서 몇 군데 성한 뼈가 더 부러지고 온전하던 살가죽이 찢기는 고통을 겪자 이사는 마침내 모든 희망을 잃었다. 굳게 마음의 문을 닫고 그 뒤로는 누가 어떤 이름으로 찾아와도 그 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모두 조고가 보낸 사람이라 여겨 조고가 바랄만한 대답만 했다. 그렇게 이사가 죽기만을 기다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 비교적 이사에게 인정을 베풀던 옥리 하나가 이사에게 가만히 일러주었다.
“누가 승상을 찾아왔는데 만나보시겠습니까? 만나면 알아보실 분이라고 말합니다만….”
그때 이사는 이미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있었으나 아는 사람이 찾아왔다는 말을 듣자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조고가 거짓으로 꾸며 보낸 사람이라면 그때 가서 거기에 맞게 응대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를 만나보기로 했다.
오래잖아 옥리가 데려온 사람은 이사가 잘 아는 시중(侍中)이었다. 자신이 아직 이세 황제의 신임을 잃기 전 궁궐을 드나들 때 자주 보았는데, 들은 바로는 충직하고 근후한 위인이었다. 그 시중이 소매에서 황제의 옥새가 찍힌 친필 조서를 내보이면서 말했다.
“좌승상 어른. 고초가 많으셨을 줄 압니다. 이제야 황제께서도 조고의 간악함을 아시고 특별히 저를 보내셨습니다. 승상의 무고함과 아울러 조고의 죄상을 명백히 하시어 자칫 뒤집힐 뻔했던 사직과 법치(法治)를 바로잡자는 게 폐하의 뜻입니다.”
그러는 시중의 눈에서는 금세 눈물이라도 떨어질 듯했다. 거기다가 감옥에서 몇 달간 말 못할 고초를 겪기는 해도 옥새나 친필이라면 누구보다 잘 분별할 수 있는 이사였다. 황제가 친필에다 옥새까지 찍어 그 시중을 보증하는 데는 이사도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중이란 벼슬도 조고가 틀어쥐고 있는 낭중령(郎中令)에 속한다는 게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이사는 또 한 번 속아 그 시중에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말았다.
하지만 결과는 앞서 어떤 때보다 끔찍했다. 그 시중 또한 그 사이 조고의 사람으로 변해, 앞서 어사나 알자로 왔던 식객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 때문에 그날 밤 더해진 모진 고문으로 이미 걸레쪽같이 되어있던 이사의 몸은 또 한 번 으스러지고 찢어지고 터지고 짓뭉개졌다. 그리고 그런 몸에 못지않게 이사의 정신도 온전히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늦어도 한참이나 늦어, 이세 황제 호해가 보낸 어사가 감옥으로 이사를 찾아간 것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거짓 어사가 이사를 혼란시킨 뒤였다. 진짜 어사는 이사를 감옥에서 끌어내 정중히 심문했지만 이사는 그도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고가 보낸 가짜라 여겼다. 거듭거듭 죄를 자복(自服)하며 그저 죽여주기만을 빌었다.
감옥에서 돌아간 어사가 보고들은 대로 아뢰자 그래도 마음 한구석 어딘가 석연치 않은 데가 있던 이세 황제는 오히려 기뻐하며 말했다.
“조고가 아니었다면 이사에게 크게 속을 뻔하였구나!”
그리고는 다시 어사를 삼천군(三川郡)으로 보내 그 아들 이유(李由)의 죄를 드러내놓고 알아보게 하였다. 오래잖아 어사가 돌아와 알렸다.
“이유는 이미 항량(項梁)의 무리에게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세 황제는 이제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이사를 조고의 손에 맡겨 처결하게 했다. 조고는 이사에게 갖은 죄목을 덮씌워 오형에 이은 요참(腰斬)을 그 벌로 삼았다. 이사는 이세 황제 2년 7월(史記 <진시황本紀>에서는 3년 겨울이라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한두 달 차이) 함양의 저자 바닥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을 받기 위해 감옥을 나설 때에야 비로소 정신이 돌아온 듯 이사는 함께 끌려가던 둘째 아들을 돌아보며 처연히 말했다.
“만약 내가 풀려난다면 너와 함께 다시 한 번 누런 개를 이끌고 고향 상채(上蔡)의 동쪽 변두리로 나가 토끼 사냥을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어쩔 수가 없게 되었구나!”
그리고 마침내 부자가 얼싸안고 크게 울었다.
이사의 최후는 그가 일생 동안 펼친 계책이 남에게 끼친 고통과 스스로 걱정했을 만큼 누렸던 영화를 아울러 연상케 하는 데가 있었다. 이사는 죽기 전에 오형을 받았는데, 먼저 얼굴에 먹물로 글자를 새겨 넣고[墨], 다음에 코를 베어내고[劓], 이어 다리를 잘라내고[剕], 다시 생식기를 도려낸[宮] 뒤, 마지막으로 머리를 쪼개는[大辟] 순서였다. 그런 다음 허리를 베고 목을 잘라 저잣거리에 내거니 보는 사람이 모두 끔찍해했다.
그날 이사와 함께 죽은 것은 그의 둘째아들뿐만이 아니었다. 그 친가와 외가, 처가를 합쳐 삼족이 모두 죽음을 당하니 이른바 진(秦)의 <이삼족(夷三族)>이었다. 사마천은 이사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평하였다.
<…이사는 작위와 봉록이 막중하면서도 군주에게 아첨하고 구차하게 그 뜻에 영합하려 하였다. 조칙을 엄히 하고 형벌을 혹독하게 하였으며 조고의 간사한 말에 넘어가 적자를 폐하고 서자를 (천자로) 세웠다. 그러다가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킨 뒤에야 바른 말을 하려고 하였으니, 어찌 늦지 않을 것이랴. 사람들은 모두 이사가 충성을 다하였으나 오형을 당하고, 죽은 줄 알지만 그 본말을 살펴보면 세속의 공론과 다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진실로 충성을 다하였다면) 이사의 공적도 주공(周公)이나 소공(召公)에 못지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