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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ective monarchy

Bollnow 2025. 1. 8. 09:54

선거 왕제

 

세습 왕에서 선거 왕으로

 

외국어 표기 Elective monarchy(영어), Królowie Elekcyjni

시기 1573~ 1795

별칭 선거군주제

지역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선거왕제의 기원-국왕 선출을 위한 자유 선거

 

1573년 바르샤바에서 열린 첫 번째 자유선거

 

왕위 계승이 세습제였던 야기에워 왕조의 마지막 왕인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1572년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서거해 왕위가 공석인 상태였다. 귀족들은 공석인 왕의 자리를 두고 어떤 방식으로, 그리고 누구를 새로운 공화국의 통치자로 내세울지를 의논한 끝에 의회에서 자유선거로 왕을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국왕 선출을 위한 선거에는 귀족의 일부, 즉 대귀족들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귀족 모두가 참여할 수 있었다. 새로운 왕이 선출되기 전까지 공위 기간 동안은 그니에즈노의 대주교인 야쿱 우찬스키가 섭정했다.

선거왕제 동안 귀족들은 새로 선출된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통치 계약 조항을 제정하여 정치적 행동을 구속하기도 했다. 이 시기는 귀족들에게 많은 권한이 주어졌기 때문에 황금의 자유또는 귀족 민주주의 시대라고 부른다. 자유선거는 바르샤바 외곽 볼라에서 치러졌다. 이때부터 크라쿠프 중심의 정치가 바르샤바 중심으로 바뀌었으며 야기에워 왕조의 뒤를 잇는 새로운 선거왕제 또는 선거 군주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폴란드의 자유선거는 오늘날의 입헌군주제의 효시라고 볼 수도 있다.

선거왕제 첫 번째 선거왕, 헨릭 발레지

 

당시 유럽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과 공들은 폴란드의 왕위에 오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후보로는 프랑스 발루아 가문의 앙리, 러시아의 이반 4, 오스트리아 대공 에른스트 그리고 스웨덴 왕 요한 3세로 폴란드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했다. 1573년 프랑스의 앙리 왕자인 헨릭 발레지가 선거왕제의 첫 번째 선거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그는 당시 프랑스보다 발전했던 폴란드 문화와 관습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국정을 돌보기보다는 유흥으로 재정을 악화시켰다.

이후 프랑스의 왕인 카롤 9세의 서거 소식을 듣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프랑스로 도망침으로써 134일 간의 짧은 폴란드 첫 선거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뒤를 이어 헝가리의 스테판 바토리가 안나 야기엘론카와 결혼하면서 국정을 돌보는 실질적인 첫 선거왕이 되었다. 이후 왕이 서거하면 의회에서는 자유선거를 통해 새로운 왕을 선출하였으며, 이는 17915.3헌법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폐지되었다.

 

선거 왕제의 통치 방식

 

귀족들의 권력이 강화되면서 왕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던 왕 중심의 정치 체계에 변화가 왔다. 슐라흐타, 즉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를 통해 정책이 결정되는 귀족 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국왕 또한 세습에 의한 계승이 아닌 귀족들의 선거에 의해 선출되는 구조였다. 당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은 절대 군주제의 중앙 집권적 정치를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합쳐져 만들어진 연방 국가이면서 귀족 민주주의가 행해지고 종교적 관용까지 베푸는, 주변 국가들과는 다른 정치 체계를 가지게 되었다.

중앙의 의회는 국왕, 원로원(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되며, 각 지방은 세이미크(지방 의회)가 설치되어 중앙 의회에 참가할 의원을 선출했다. 당시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폴란드 왕국과는 별개로 군대, 국고, 관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자유선거를 통해 왕으로 선출된 국왕은 폴란드 정치 시스템의 근간이 된 헨릭 조항과 파크타 콘벤타에 서명해야 했다.

거의 유례없는 종교적 관용을 포함하고 있는 헨릭 조항과 파크타 콘벤타는 국가 통치를 위해서는 반드시 서명해야 하는, 왕의 행동과 권한을 제한하기 위해 귀족들이 만든 통치 계약이다. 왕은 2년에 한번 6주 동안 의회를 소집해야 했다. 의회에서는 주로 입법을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세금, 외교, 전쟁에 관한 일 등 중요한 국가적 사안에 대해 왕의 의견에 반대하는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만장일치제인 리베룸 베토에 의해 모든 것을 결정했다.

파크타 콘벤타(라틴어)

 

선거 왕제 후반기의 폴란드는 여러 주변 국가들과의 잦은 전쟁으로 인해 국가 물자와 재정 등 경제적인 면에서 매우 궁핍했다. 얀 소비에스키 3세 사후 폴란드는 작센 왕가의 아우구스트 2세 모츠니에 의해 통치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안위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와 작센의 위상을 높이는 데에만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귀족들은 스타니스와프 레슈췬스키를 새로운 왕으로 추대하여 아우구스트 2세를 퇴위시켰다.

하지만 아우구스트 2세는 러시아의 도움으로 복위했고, 이후 러시아의 내정 간섭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북방 전쟁으로 인해 폴란드는 거의 폐허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잦은 전쟁과 외부 세력의 개입 등으로 인해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는 아우구스트 3세 사스 왕의 통치기에 무정부 사태나 다름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마지막 왕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시대에 개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788년 소집된 4년 의회(위대한 의회)에서 국력 강화하고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179153, 유럽 최초의 성문법인 5.3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는 입법권, 행정권, 사법권의 3권 분립을 도입하였으며, 소작농의 권리 보장 및 참정권의 확대, 종교적 관용 등 다양한 법안을 제정했다. 또한 악법인 만장일치제(리베룸 베토)를 폐지하고, 선거에 의한 국왕의 선출을 세습제로 변경했다. 하지만 러시아를 추종하는 귀족 세력의 타르고비차 동맹으로 인해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5.3헌법은 폐지되었고 폴란드는 2, 3차 삼국분할을 맞으면서 123년간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7915.3헌법의 제정

 

선거 왕제 시기 영토 분쟁

 

왕궁보다는 전장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스테판 바토리가 죽고 난 후 스웨덴 바자 가문의 지그문트 3세 바자가 왕위에 선출되었다. 이후 바자 가문에서 브와디스와프 4세 바자, 2세 카지미에슈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폴란드는 러시아의 모스크바까지 정복할 정도로 유럽에서의 황금기를 누렸다. 폴란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바자 가문에 의해 통치되던 폴란드는 잦은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나 물질적으로 피폐해졌다. 바자 가문의 마지막 폴란드왕인 얀 2세 카지미에슈 시대의 폴란드에는 점차 패망의 신호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1618년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의 영토

지도에 표기된 나라 이름은 현재의 영토

 

폴란드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던 것은 코사크의 반란스웨덴의 대홍수로 불리는 스웨덴의 침략이었다. 코사크의 반란으로 인해 폴란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영향력을 러시아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1655년 스웨덴의 대홍수로 경제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할 만큼 피폐해졌다. 무엇보다도 16, 17세기의 유럽은 이슬람 세력인 튀르크의 잦은 공격으로 매우 힘들어하던 시기였다.

3세 소비에스키 통치 하의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은 이들 세력으로부터 유럽의 기독교를 지켜낸 수호자의 역할을 해내면서 유럽 강대국으로서의 자리를 지켜 나갔다. 1683년 빈 전투에서 소비에스키 왕이 이끄는 폴란드 군대는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승리를 거둬 250년간 지속되었던 기독교 세계에 대한 이슬람의 위협은 한풀 꺾이게 되었다.

얀 소비에스키 3세 사후 작센 왕가의 아우구스트 2세 모츠니와 아우구스트 3세 사스에 의해 통치되었던 폴란드는 거의 폐허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러시아의 내정 간섭과 북방 전쟁으로 인해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아우구스트 3세 사스 통치기 때의 정부는 국가 통치의 기능을 상실했다. 마지막 왕인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국가를 되살리기 위해 개혁을 시도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귀족들의 배신 등으로 인해 폴란드는 결국 1772, 1793년 두 번의 삼국 분할에 이어 1795년 마지막 삼국분할로 모든 영토를 잃으면서 123년간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17915.3헌법을 제정하는 4년 의회

 

삼국 분할

 

1) 17721차 분할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가 페테르부르크에 모여 폴란드를 분할하는 조약에 서명을 하면서 1차 분할이 이뤄졌다. 러시아는 드비나 강 동쪽 벨라루스 지방 등 가장 넓은 영토(92,000km2와 인구 130)를 차지했으며, 프로이센은 비스와 강 어귀와 대폴란드 북부지방 일부(36,000km2580,000명의 인구)를 얻었다. 오스트리아는 비스와와 즈브루츠 사이 폴란드 남부(83,000km2260만 인구)를 얻었다. 폴란드는 1차 분할로 인하여 국토와 인구를 1/3가량 상실했다.

 

2) 17932차 분할

폴란드는 17915.3헌법을 제정하는 등 개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러시아를 지지하는 국내의 매국노 보수파 귀족들은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분할을 강행했다. 1차 분할을 함께 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당시 프랑스 혁명 문제로 인해 불참했다.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의 벨라루스 지방과 서부 우크라이나 지방(250,000km2 이상)을 얻었으며, 프로이센은 그다인스크(단치히), 토룬, 대폴란드(비엘코폴스카), 쿠야비, 워비츠, 쳉스토호바, 마조비아의 일부 지방(58,000km2)을 차지했다.

 

3) 17953차 분할

1795년 타데우슈 코시치우슈코 봉기 등의 저항 운동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는 쿠를란트와 리만 강 동부의 리투아니아 영토, 프로이센은 바르샤바를 포함한 마조비아 전역과 리만 강 서부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차지했다. 또 오스트리아는 크라쿠프와 소폴란드 지방의 전역을 합병했다. 이로써, 폴란드는 오스트리아·프로이센·러시아 3국에 의해 영토가 완전히 분할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은 1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유럽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797년 세 국가가 페테르부르크에 모여 더 이상 폴란드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는 폴란드 독립 공화국 파괴, 소멸에 대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폴란드 영토의 1, 2, 3차 분할

 

선거왕제의 종교 정책

 

16세기 중반 폴란드 교회는 내부적으로 큰 개혁을 시작했다. 이 개혁의 하나는 교회의 내부적 구조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신도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법의 변화였다. 1564년 설립된 폴란드 예수회는 이내 활발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17세기 초반까지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와 정교회 신자인 농부들의 교육에 힘썼다.

당시 폴란드는 이웃 국가와 달리 매우 독특한 종교적 관용을 실현하고 있는 나라였다. 국교인 가톨릭과 더불어 유대교, 동방정교, 개신교, 이슬람교가 평화적으로 공존했으며, 영국과 미국의 유니테리언주의의 선구자인 폴란드 형제단을 탄생시켰다. 18세기에 등장한 유니테리언주의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단일신론을 주장하며, 삼위 일체 신앙의 주류 기독교 교리와 차이가 있는 반삼위일체 기독교이다.

폴란드 형제단이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폴란드에서 활동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의 대표자들, 즉 루터교, 체코 형제단, 칼빈교 간에 1570414일 맺은 산도미에슈 협약은 폴란드 영토 내에서의 종교적 관용을 위한 첫 단계였다. 1573년 열린 첫 번째 공위 기간 중 의회에서 제정된 바르샤바 협약의 조항은 공화국에서의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는 최초의 법률 문서였다.

선출된 왕이 서명하는 헨릭 조항에는 이러한 이례적인 종교 관용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모든 종교 간의 조건 없는 항구적인 평화를 보장하고 귀족과 왕국의 시민, 그리고 다른 종교를 믿는 자들에게 종교와 상관없이 평등을 보장했다. 이것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뿐만 아니라 전체 유럽에서 합법적인 종교적 관용 보장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655~ 1660년까지의 스웨덴의 대홍수를 겪으면서 그동안의 종교적 관용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바로크 예술과 문화가 꽃핀 17세기

 

17세기 폴란드에서는 바로크 건축 양식이 시작되었다. 교회, 수도원 등 현저히 많은 건축물이 지어졌다. 왕들은 예술 애호가로 그림을 수집하거나 직접 금속 공예를 하기도 하고 브와디스와프 4세는 오페라 극장을 만들어 세익스피어의 비극이나 다양한 이탈리아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바르샤바 천도 이후 왕궁을 비롯한 다양한 건축물이 지어지고 왕들과 대귀족들에 의해 값비싼 예술품이 수집되기도 했다. 16세기에 역사화와 초상화가 유행했다면 17, 18세기에는 전형적인 회화 양식의 초상화가 유행했다. 문학적으로는 애국적, 역사적 서사시가 많이 쓰여 졌다. 또한 17세기의 폴란드는 동양과 서양의 다양한 문화가 혼재해 있던 시기였다.

17세기 전반에 걸쳐 폴란드 귀족들의 삶의 양식이나 의상, 공예품 등에서 사르마티즘적 요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기원전 7세기 ~ 8세기 사르마티아인들이 폴란드 지역까지 진출하여 거의 5세기 이상 이 지역을 지배하였다고 전해지기 때문에 자신들을 용맹한 사르마티아인들의 후예라고 믿는 것에서 유래된 것으로 본다. 이러한 사르마티즘은 초기에는 신앙심, 성실함, 애국심, 용맹함, 평등과 자유를 고취시키는 긍정적 요소였으나 후기에는 국가를 소멸에 이르게 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16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폴란드 귀족 사이에 지배적이었던 전통주의적인 정치의식, 사회의식, 생활태도 및 문화적 기호 등을 모두 일컬어 사르마티즘이라고 한다.

 

계몽주의로 문화부흥기 이룬 18세기

 

18세기 후반은 거의 폴란드 문화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폴란드에 계몽주의 사상이 널리 퍼졌다. 스타니스와프 코나르스키는 1740년 바르샤바에 콜레기움 노빌리움을 설립했으며, 귀족 자녀들을 교육하여 헌정 개혁에 참여시켰다. 계몽운동이 널리 퍼지면서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국가 부흥과 근대화에 노력을 기울였다.

1765년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 왕은 폴란드 역사상 첫 번째 사관학교인 기사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폴란드가 17721차 삼국분할을 겪자 의회는 교육의 중요성을 더욱 깨달아 1773년 오늘날의 교육부에 해당하는 세계 최초의 민족교육위원회를 창설했다. 1791년에는 5.3헌법을 제정하여 쓰러져 가는 국가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국가의 어려운 상황, 자신들의 애국심과 노력, 개혁의 필요성 등을 작품 속에 담아냈다. 유명한 건축가들이 바르샤바 왕궁을 재건하거나 와지엔키에 궁전을 짓는 등 수도인 바르샤바에 새롭고 화려한 건축물들을 지었다. 이 당시의 건축물들은 후에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대부분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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