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giellonian dynasty
야기에워 왕가
15~16세기 중동부 유럽의 강자
외국어 표기 Jagiellonian dynasty(영어), Dynastia Jagiellonów, Jagiellonowie, Jogailaičiai(리투아니아어)
시기 1386년 ~ 1572년
지역 폴란드, 리투아니아, 체코, 헝가리
야기에워 왕조의 문장
결혼으로 맺어진 야기에워 왕가의 성립
야드비가 여왕의 초상화
마르첼로 바치아렐리 작품
피아스트 왕조의 카지미에슈 3세 대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폴란드의 왕위는 그의 조카인 앙주 왕조의 헝가리 국왕 루드빅에게로 넘어갔다. 1382년 루드빅이 사망하자 폴란드의 왕위는 그의 딸에게 돌아가게 되었는데, 장녀 마리아는 이미 헝가리의 왕이 된 상태여서 차녀 야드비가가 폴란드의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1384년에 10대 초반의 어린 여왕 야드비가(1373/1374년 ~ 1399년)가 즉위하자 곧 그녀의 결혼 문제가 대두되었고, 당시 이교도 국이었던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에워가 적임자로 판단되었다. 1385년 리투아니아의 크레보에서 두 나라 간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리투아니아 대공 야기에워가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폴란드의 왕으로 즉위하며,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폴란드에 통합시키고, 잃어버린 폴란드의 옛 영지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1386년 야기에워는 세례를 받고 브와디스와프라는 세례명을 얻었다. 이후 며칠 뒤 폴란드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여 공동 군주의 자격으로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워(1352/1362년 ~ 1434년)로 즉위했다. 이로써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왕조 중 하나인 야기에워 왕조가 탄생하게 되었다.
야기에워 왕가의 성장과 사멸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의 결혼으로 통합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막강한 세력을 이루었다. 야드비가가 사망하자 적법한 계승자가 없었던 브와디스와프 2세의 왕권은 약화되었고, 그와 귀족들 간의 갈등이 가시화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피아스트 왕조 카지미에슈 3세의 손녀인 안나와 결혼했다. 이후 막강한 세력을 이룬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공동의 적인 튜턴 기사단을 상대로 그룬발트 전투(1410년 7월 15일)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434년 브와디스와프 2세가 사망하고 아버지의 뒤를 위어 10세의 어린 장남 브와디스와프 3세 바르네인췩(1424년 ~ 1444년)이 즉위했다. 그러나 어린 왕을 대신한 귀족들의 섭정으로 브와디스와프 3세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고, 이는 14살이 되어 친정을 시작했어도 변하지 않았다. 1440년 헝가리 왕위(울라슬로 1세)를 차지했던 브와디스와프 3세는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터키와 싸우다 전사했다. 이후 폴란드의 귀족들은 리투아니아의 대공인 동생 카지미에슈 4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했다.
3년의 공위 시대를 거쳐 1447년에 폴란드 국왕의 자리에 오른 카지미에슈 4세는 리투아니아의 자치 요구에 대체로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다. 또 왕권을 강화하려 했기 때문에 야기에워 왕조 초기의 지배 세력인 폴란드 대지주 세력과 충들을 일으켰다. 그는 귀족들에게 보다 많은 특권을 부여해서 자신의 정책에 대한 귀족들의 정치적·재정적 지원을 얻어냈다.
그 결과 카지미에슈 4세는 튜턴 기사단과의 13년 전쟁(1454년 ~ 1466년)에서 승리하고 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영토의 많은 부분을 획득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2세는 체코의 왕(블라디슬라프 2세, 1471년)과 헝가리의 왕(울라슬로 2세, 1490년)으로 추대되어 당시 중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가 되었다. 1492년 카지미에슈 4세가 서거하고 폴란드 왕위는 셋째 아들 얀 1세 올브라흐트에게, 리투아니아 대공위는 넷째 아들 알렉산데르 야기엘로인췩에게 돌아갔다.
얀 1세 올브라흐트(1459년 ~ 1501년)의 재위 기간은 9년 밖에 되지 않았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던 튀르크의 침공에 대비해 그는 수도 크라쿠프를 지킬 방어 요새 바르바칸을 지었다. 얀 1세 올브라흐트는 대대적인 원정을 단행하여 튀르크에 대항하고 더 나아가 흑해까지 진출하려고 했다. 몰도바의 종주권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몰도바 대공과 동맹을 맺고 원정을 떠났다. 그러나 1497년 몰도바 공국의 수도 수차바 전투에서 패배하며 원정은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 결혼도 하지 않고 후계자도 남기지 않은 채 1501년에 생을 마감하여 동생 알렉산데르가 그의 뒤를 이어 폴란드 왕위에 올랐다.
알렉산데르 야기엘로인췩(1461년 ~ 1506년)은 1492년에 아버지 카지미에슈 4세를 이어 이미 리투아니아 대공의 자리에 있다가 형 얀 1세 올브라흐트의 죽음으로 1501년에 폴란드의 왕이 되었다. 재정 부족으로 인해서 그는 폴란드 의회와 귀족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폴란드 의회는 왕으로부터 조폐권을 빼앗았고, 왕의 특권도 많이 줄였다. 의회의 동의 없이 왕은 새로운 법을 제정할 수도 없었다. 얀 1세 올브라흐트와 알렉산데르가 통치하던 시기에 야기에워 왕가가 누리던 권력 일부를 귀족에게 빼앗겼으며, 체코와 헝가리에서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벌어졌다.
1506년에 형 알렉산데르 역시 후사를 남기지 않고 사망하자 폴란드 왕위는 카지미에슈 4세의 다섯째 아들인 지그문트 1세 스타리(1467년 ~ 1548년)가 계승했다. 그가 왕위에 올랐을 때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내정의 부패와 튜턴 기사단과 모스크바 공국 등 외세의 침략으로 매우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었다. 지그문트 1세는 귀족들의 권력을 축소시키지 않으면서도 점차 그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외교적 수단을 발휘해 나갔다.
1514년에 폴란드는 오르샤에서 모스크바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마침내는 튜턴 기사단도 진압하였다. 1525년, 튜턴 기사단장 알브레흐트 호엔촐레른은 루터교로 개종하고 지그문트 1세의 봉신이 되기를 맹세했다. 그 대가로 지그문트 1세는 그에게 기사단의 지배권을 주고 프러시아 공작으로 봉했다. 튜턴 기사단의 영토는 프러시아의 세속 공작령이 되는 동시에 폴란드의 봉토로 편입되었다. 지그문트 1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정치를 보다 안정시켰고 마조프쉐(마조비아)를 폴란드 영토에 병합하며(1526년) 폴란드 르네상스 문화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
마르첼로 바치아렐리 작품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1520년 ~ 1572년)는 부왕 지그문트 1세가 살아있을 때인 1930년에 이미 대관식을 치루고 공동 군주가 되었다. 그의 통치 시기는 내부적으로는 혼란하고 외부적으로는 확장하는 시대였다. 하지만 약해져 가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외부와의 마찰은 피하고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정책을 펼쳐야 했다.
인플란티(리보니아)가 러시아로부터 벗어나 지그문트 2세의 보호와 폴란드의 봉토가 되기를 원하자(1561년) 그는 귀족들과 동맹을 맺어 전쟁 자금을 조달하고 러시아와 싸워 인플란티와 발트 해 연안의 지배권을 확보하였다. 또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데 힘을 쏟았다.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마침내 두 나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공화국을 결성했다. 하지만 3년 후인 1572년, 자녀를 남기지 못한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하였고 그로 인해 야기에워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이후 폴란드의 국왕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전체 귀족들이 직접 선출하는 선거왕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573년, 프랑스 발루아 가문의 앙리가 폴란드의 왕 헨릭 발레지로 선출되었으나 몇 달 후 프랑스 왕이 되기 위해 폴란드를 떠났다. 얼마 후 지그문트 2세의 여동생 안나 야기엘론카(1523년 ~ 2596년)와 결혼한 헝가리의 스테판 바토리가 폴란드 왕으로 선출되어 이들이 폴란드를 다스리게 되었다. 1596년에 안나가 세상을 떠남으로써 야기에워 왕가도 폴란드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야기에워 왕조 통치 하의 국가들(1492년)
15세기 말 중부 유럽의 판도
폴란드의 황금기 – 학문과 문화, 예술의 발달
야기에워 왕조의 마지막 두 왕 지그문트 1세와 지그문트 2세가 다스리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의 폴란드는 전례 없이 문화와 예술, 학문이 번창했다. 이러한 변화는 지그문트 1세의 왕비 보나 스포르차(1494년 ~ 1557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보나 스포르차는 1518년 폴란드로 오면서 이탈리아의 예술가, 궁정인들을 데려왔고 지금껏 폴란드에서 볼 수 없었던 토마토, 브로콜리, 상추 등 여러 종류의 채소도 가지고 왔다. 이 영향으로 폴란드 왕궁과 귀족들 사이에 이탈리아 문화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건축가와 조각가들은 르네상스 양식의 수많은 건축물을 세웠고, 조각과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카지미에슈와 자모시치 등의 도시는 도시 자체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설되었다.
코페르니쿠스
이탈리아로부터 문화와 학문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폴란드 스스로도 큰 발전을 이루었다. 학문 분야에서 크라쿠프의 야기에워 대학교는 폴란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많은 유학생들이 찾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또한 당시 폴란드의 천문학과 수학은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학자가 지동설을 증명한 코페르니쿠스(1473년 ~ 1543년)이다.
16세기는 폴란드 문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시기로 라틴어가 아닌 폴란드어로 된 문학 작품들이 나오게 되었다. ‘폴란드 문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미코와이 레이(1505년 ~ 1569년)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언어가 있다”고 주장하며 폴란드어로 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일상적인 소재와 대화체의 형식을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그의 작품을 접할 수 있었다. 그보다 한 세대 가량 늦게 태어난 얀 코하노프스키(1530년 ~ 1584년)는 19세기까지 폴란드의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평가 받는다. 훗날 많은 시인들이 아름답고 예술성이 뛰어난 그의 작품을 흉내 내면서 ‘폴란드 시인들의 왕자’라고 불린다.
미코와이 레이
얀 코하노프스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혁신 기술 중의 하나는 인쇄술이었다. 새로운 사상과 연구 업적, 문학 작품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선 인쇄술의 발전은 필수적이었다. 폴란드의 인쇄술은 1473년부터 발달하기 시작하였고 대량 출판이 가능해졌다. 크라쿠프에 처음 세워진 인쇄소는 16세기에는 폴란드 전역 87개에 이르렀고, 16세기 후반에는 5천 종이 책이 발행될 정도로 발전했다. 인쇄술의 발달로 저렴해진 책에 사람들은 더욱 쉽게 접근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과학과 학문의 번성은 물론 폴란드어 보급에도 기여하게 되었다.
인쇄술의 발달은 종교 개혁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독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폴란드의 성직자들 역시 비난받고 있었다. 많은 폴란드 귀족들은 물론 도시민, 심지어 농민들도 프로테스탄트의 가치에 귀를 기울였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 전쟁이 벌어지고 신교도들이 처형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폴란드에서는 모든 신앙은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고, 이는 폴란드 프로테스탄트들이 교육에 의한 교화에 큰 비중을 두었기에 가능했다. 결과적으로 인쇄술의 발달이 교회 개혁에 영향을 미친 셈이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관계
1385년 크레보 조약에 따라 리투아니아 대공 브와디스와프 2세가 폴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약 200여 년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야기에워 왕조에 의해 결합되었다. 폴란드 국왕은 동시에 리투아니아 대공이기도 했다. 그러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하나의 완전한 국가로 통합된 것은 아니었다. 두 나라는 공통의 군주가 통치하지만 각자 독자적인 행정, 사법, 군사 체계 등을 가지고 있는 개인적 왕위에 의한 연합 형태였다.
1389년 리투아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내전이 발발했다. 폴란드와의 연합에 반대하는 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던 브와디스와프 2세의 사촌인 비톨드가 스스로를 대공으로 칭하며 튜턴 기사단과 동맹을 하는 등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1392년에 휴전 조약(오스트루프 조약)을 맺고 브와디스와프 2세는 비톨드에게 리투아니아 통치권을 넘겨주었다. 이로써 비톨드는 죽을 때까지 대공으로 리투아니아를 다스릴 권한을 가지게 되었으나, 종주권은 그대로 폴란드 국왕이 가지고 있었다.
1399년에 여왕 야드비가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의 입지는 약해졌다. 그가 폴란드 국왕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비톨드 역시 위험해지고, 타타르족의 침입과 튜턴 기사단과의 마찰로 인해 리투아니아도 힘든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둘은 협상에 들어가 1401년 빌르노-라돔 조약을 통해 비톨드는 그대로 리투아니아 대공의 자리를 가지며 브와디스와프 2세는 폴란드 국왕으로서 리투아니아의 종주권을 가지기로 합의했다. 또한 리투아니아는 행정적으로도 독립을 유지하기로 했다. 비톨드가 사망할 경우 브와디스와프 2세나 그의 계승자가 리투아니아 대공이 될 것이며, 서로의 동의 없이 홀로 왕을 뽑지 않는다는 내용에 두 나라는 합의했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413년, 호로드워 연합을 발표함으로써 다시 한 번 두 나라의 우호적인 관계를 확인했다. 호로드워 연합에는 리투아니아 대공의 지위를 ‘영구적이고 항구적인 지위로 폴란드 왕국과 묶는다’라는 내용과 함께 리투아니아 귀족들에게 폴란드 귀족들에 버금가는 특권을 부여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또한 리투아니아 귀족의 동의 없이 폴란드 귀족들 단독으로 군주를 선출할 수 없으며, 이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선언했다.
지그문트 2세에게 후계자가 없자 폴란드는 그의 사망 이후 유대 관계가 깨질 것을 우려하여 두 나라 사이의 보다 완전한 연합을 주장했다. 리투아니아 역시 주변 나라들과의 전쟁과 위협 속에서 폴란드와 좀 더 긴밀한 연합을 원해 두 나라의 합병을 제안했다. 1569년 1월 소집된 루블린 의회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지그문트 2세는 리투아니아 영토 1/3에 해당하는 포들라시에, 키예프, 보윈(볼히니아)을 합병했다.
7월 1일, 마침내 루블린 조약이 체결되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공동으로 선출한 한 명의 통치자와 공동 의회가 다스리는 연합 국가가 되었다. 공식적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별개의 동등한 국가로서 각자 독자적인 행정부와 법률, 재정, 군대를 가지며 외교 문제는 공동으로 수행하기로 합의했다. 이렇게 탄생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공화국은 폴란드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으로(폴란드 제1공화국), 18세기에 폴란드가 삼국분할로 패망할 때까지 유지되며 정치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공화국(1569년)
튜턴 기사단과의 관계
야드비가와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워의 결혼으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연합을 이루면서 리투아니아는 가톨릭으로 개종했고, 이것은 튜턴 기사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튜턴 기사단은 더 이상 이교도 정벌이라는 이유로 리투아니아를 공격할 수 없었고, 기사단이 점령한 지역에서 기사단의 무리한 부역과 공물 요구에 대항하여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튜턴 기사단 사이에 대전쟁(1409년 ~ 1411년)이 일어났다. 기사단은 마치 이교도와 싸우는 것처럼 선전하여 서유럽 기사단으로부터 원조를 받았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체코와 모라비아, 타타르 군대의 도움을 받아 기사단과 맞서게 되었다.
1410년 6월, 브와디스와프 2세는 군대를 이끌고 튜턴 기사단의 심장부로 향했다. 7월 15일, 중세에 일어난 전쟁 중 가장 크고 잔혹한 전투가 벌어졌다(그룬발트 전투).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사실상 튜턴 기사단을 전멸시켰고, 1411년 토룬에서 폴란드와 기사단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제1차 토룬 조약). 비록 폴란드가 전쟁에서의 승리를 잘 이용하지는 못했지만, 불패의 신화를 자랑하던 튜턴 기사단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1454년 튜턴 기사단 지역의 프러시아인들이 기사단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프러시아 동맹이 폴란드의 봉신으로 들어오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카지미에슈 4세는 튜턴 기사단을 무력화시키고 그다인스크와 동부 포모줴(포메라니아) 탈환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13년 전쟁(1454년 ~ 1566년)을 치렀다. 카지미에슈 4세와 프러시아 동맹은 튜턴 기사단을 물리치고, 기사단의 수도인 말보르크마저 정복했다.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이 체결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그다인스크를 포함한 동부 포모줴를 폴란드에게 양도하고, 프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폴란드 왕국의 권리를 인정했다. 이 지역은 폴란드령 프러시아(Royal Prussia)의 기초가 되었고 이후 폴란드 왕과 왕국의 독점 재산이 되었다. 프러시아 동쪽 지역(후의 프러시아 공작령)은 그대로 기사단의 영토로 남았지만 튜턴 기사단은 폴란드의 봉신이 되었다. 체코와 헝가리는 카지미에슈 4세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2세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이 전쟁의 승리로 폴란드의 위상이 높아져 유럽의 강국으로 자리 잡았다.
제2차 토룬 조약으로 폴란드와 튜턴 기사단은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6세기 초반에 다시 문제가 생겼다. 1511년에 기사단장이 된 호헨촐레른은 폴란드에 대한 조공과 충성 맹세를 거부하고 폴란드에 대한 공격을 시도했다. 마침내 1519년 폴란드와 튜턴 기사단과의 마지막 전쟁이 발발했고, 이는 폴란드의 승리로 끝이 났다. 1525년, 기사단장 호헨촐레른은 루터교로 개종하고 지그문트 1세의 봉신으로 충성을 맹세했다. 그 대가로 기사단의 지배권을 받고 프러시아 공작에 봉해졌다. 준 군사적 종교 국가였던 튜턴 기사단은 호헨촐레른에 의해 해체되어 세속 공국으로 바뀌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