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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ast Dynasty

Bollnow 2025. 1. 8. 09:45

피아스트 왕가

 

10~14세기, 폴란드의 첫 번째 왕가

 

외국어 표기 Piast Dynasty(영어), Dynatia Piastów(폴란드어)

시기 960년경 ~ 1370

지역 폴란드

 

피아스트 왕가의 기원

 

피아스트는 대폴란드 지역(특히 쿠야비 지역의 크루슈비차)의 작은 도시에서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이었다. 마을을 통치하던 잔인한 포피엘 공이 죽자 새로운 통치자가 필요했다. 마을 사람들은 현명하고 지혜로웠던 피아스트를 적임자로 여겨 선출, 피아스트 가문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피아스트와 그의 후손들(시에모비트, 레슈텍, 시에모미수우)은 폴란드의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폴란드가 역사 시대로 접어든 시기는 미에슈코 1세가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966)한 시점이다. 폴란드의 첫 번째 왕으로 인정받고 있는 그는 농부에서 공작으로 신분이 상승한 피아스트 가문 출신이라는 전설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에슈코 1

얀 마테이코 그림

 

피아스트 왕가의 발전과 쇠퇴

 

폴란드의 국가 성립은 피아스트 왕조의 미에슈코 1세가 963년 독일 귀족과의 전투에서 동부 지역을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폴란드의 국가 기틀이 이미 그 이전에 확립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당시 미에슈코 1세는 스스로를 왕이라고 칭하지도 않았고 왕관을 얻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지만 이미 주변국들은 그를 왕으로 부르고 있었다. 미에슈코 1세는 국가 행정 조직을 확고히 다졌을 뿐만 아니라 영토 확장에도 힘을 쏟았다.

특히 눈여겨 볼 점은 966년 가톨릭 세례를 받으면서 가톨릭을 국교로 수용하고 로마 문화권으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결정은 주변 가톨릭 국가들의 종교적 이유를 내세운 폴란드 침략 가능성을 제거한 것으로, 국가 존립과 발전에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이처럼 폴란드 초기 피아스트 왕조는 로마 교황청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독일과 체코의 위협에 맞설 수 있었다.

영토 확장에 힘쓴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는 후계 문제를 미리 정해서 유언으로 남겨 국가의 내정 혼란을 막으려 했다. 장자에게는 대공의 지위를 주어 모든 영토를 관할하는 권한을 부여하고, 나머지 4명의 아들에게는 영토를 분할하여 각각 분배했다. 이 방식은 원래 의도와는 달리 지방 영주들의 역할이 커지고 중앙 집권력은 약화되는 현상을 불러와 볼레스와프 3세의 죽음(1138) 이후 폴란드는 분할 공국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분할 공국 시대를 맞으면서 정치적으로는 끊임없이 분규가 일어났지만 도시 건설과 경제, 문화 발전은 꾸준히 이루어졌다. 13세기의 폴란드는 몰락과 암흑의 시기로 여겨지고 있지만 당시 공국들 간의 동질적 의식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대폴란드와 실롱스크 지역을 다스리는 피아스트 가문의 후예들은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소폴란드와 마조프쉐 지역의 영주들은 동쪽과 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벌 정책을 펼쳤다.

또한 13세기 몽골 군대(타타르)의 침입과 튜턴 기사단의 폴란드 진출은 폴란드의 사회 조직과 주민들의 의식을 크게 변화시켰다. 분할 공국 시대의 폴란드는 봉건 체제가 강화되고 국가 권력은 왕, 교회, 귀족, 기사 등으로 분산되었으며 사회적 신분 구별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13세기 말 브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텍은 다시 폴란드를 통일하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분할 전의 영토를 모두 통일시키지는 못했지만 폴란드가 유럽의 강국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후기 피아스트 왕조를 대표하는 왕은 왕조의 마지막 왕인 카지미에슈 3세 대왕이다. 그는 진정한 통일 국가를 이룬 뒤 군사력을 증강하고 주변국과 평화를 유지하며 폴란드의 안정을 가져와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또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경제와 문화 발전에도 힘썼다. 특히 1364년에는 대학을 설립하여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했다. 당시 주변국들은 폴란드의 독립성과 피아스트 왕조의 전통성을 인정했다. 그러나 1370년 카지미에슈 3세 대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함으로써 피아스트 왕조의 폴란드 통치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피아스트 왕가의 영토 정책

 

피아스트 왕조 시대의 폴란드 영토는 각각의 군주와 왕에 의해 변화를 겪었다. 폴란드가 국가로 성립되던 초기의 미에슈코 1세 때 영토는 바르타 강과 비스와 강이 흐르는 대폴란드와 쿠야비 지역이었다. 집권 말기(10세기 말기)에는 북쪽으로는 발트 연안까지, 북서쪽으로 오드라 강 하구부터 북동쪽의 비스와 강 하구까지 팽창하였고, 서남쪽으로 실롱스크 지역과 동남쪽으로 비에프시 강 상류까지 차지하였다.

피아스트 왕조에서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시대는 미에슈코 1세의 아들인 볼레스와프 1세 흐로브리가 집권한 시기(992~ 1035)였다. 그러나 그의 사후 아들들의 후계자 다툼을 틈타 독일과 체코, 그리고 키예프와 러시아에 의해 많은 부분을 잃고 말았다. 다시 볼레스와프 3세 크쉬보우스티에 의해 1인 통치 시대(1107~ 1138)가 확립되면서 영토 팽창 정책을 펼쳐 북쪽의 포모줴 지역과 오드라 강 유역을 영토로 편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유언에 따라 아들들에게 영토를 분배하면서 폴란드는 거의 200년간 분할 공국 시대를 맞이했다. 통일된 국가의 모습이 아니라, 각 지역별 소공국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후기 피아스트 왕조 시대의 브와디스와프 1세 워키에텍은 통일에 많은 힘을 쏟았다. 비록 피아스트 왕조 시대의 모든 영토를 통일하지는 못했지만, 대폴란드와 소폴란드 지역을 통일하고 왕으로 즉위하면서 분할 공국 시대를 마감할 수 있었다. 뒤를 이은 카지미에슈 3세 대왕은 큰 전쟁을 치르지 않기 위해 능수능란한 외교 정책을 펼쳐 마조프쉐 지역을 통합했다, 또 튜턴 기사단으로부터 쿠야비와 도브쥔 지역을 반환받고 동부의 루스 지역을 폴란드로 편입시켰다.

미에슈코 1세의 세례(966)

얀 마테이코 그림

 

피아스트 왕가의 종교와 문화 정책

 

피아스트 왕조 시대의 첫 왕으로 인정받는 미에슈코 1세는 966년 세례를 받으면서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수용했다. 이것은 이교도 국이라는 이유로 폴란드를 공격하던 독일의 침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선택이었다. 또 로마 교황청 직속의 폴란드 대주교구를 가짐으로써 독립된 가톨릭 국가로 인정받아 대외 관계에서 다른 국가들과 동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피아스트 왕조의 왕들은 대부분 로마 교황과의 우호 관계를 돈독히 맺으면서 외교 정책을 펼쳤다. 그리고 폴란드의 여러 도시에 주교좌 성당을 설립하여 기독교 포교에 힘썼다. 토지 귀족들은 교회 조직의 발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신부 등 고위 성직자는 지주 계급 출신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고위 성직자들과 귀족들이 왕과 맞서는 권력을 형성하는 가운데 1079년 볼레스와프 2세 시미아위 왕이 크라쿠프 주교 스타니스와프를 사형에 처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일로 볼레스와프 2세는 퇴위당하고 말았다. 후에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으며 폴란드의 민족 공동체 의식 형성에도 크게 기여했다.

13세기 분할 공국 시대에는 특히 교회가 발전했는데 독립적인 사법권과 왕의 영향력을 받지 않은 인사권을 가지는 등 많은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성직자 계급은 법적으로도 독립적이고 높은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여러 수도회들이 유입된 폴란드는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하면서도 가톨릭을 인정하는 독특한 모습을 띠게 되었다.

대부분 문서가 라틴어로 쓰인 피아스트 왕조 시대에 폴란드어 문서는 그리 많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나마 전해지는 것은 12세기에 쓰인 그니에즈노 칙령’, 13세기 말 또는 14세기 초의 것으로 알려진 보구로지차 기도문' 정도인데 모두 종교와 관련된 것들이다. 피아스트 왕조의 왕들 중 문화에 힘을 쏟았던 카지미에슈 3세 대왕은 1364년 크라쿠프 대학을 설립했다. 설립 당시에는 공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법학에 많은 비중을 두었으나 다음 왕조 시대(야기에워 왕조)에는 서유럽의 문학과 문화 사조들이 유입되는 중심지가 되었다.

카지미에슈 3세 대왕

얀 마테이코 그림

 

분할 공국 시대와 후기 피아스트 왕조의 경제와 사회

 

피아스트 왕조 시대 중에서 가장 암흑기인 분할 공국 시대는 국가 권력은 약화되었으나 경제 성장과 사회 변화는 활발하게 일어난 시기이다. 출생률도 높아지고 독일로부터의 이주민 수도 증가했다. 또한 경작 방법의 개선과 농기구의 개발로 농업이 발달하고 개간 사업을 통해 농지가 늘어났다. 지역 간의 교통이 원활해지면서 이동이 자유로워져 인구도 분산되었고 소도시 농민들은 기술자로 전업하기도 했다. 그들은 공산품을 생산해 식량과 교환하면서 새로운 물물교환의 시장을 만들어 나갔고 폴란드에는 새로운 도시가 만들어졌다. 농업의 발달과 함께 상업과 공업도 골고루 발전하게 된 것이다.

분할 공국 시대에는 중앙 집권 체제가 약화되고 봉건 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교회 내의 재산 관리 조직이 정비되고 소교구 조직이 정비되는 등 교회의 발전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14세기의 후기 피아스트 왕조 시대에 사회 계층이 뚜렷하게 형성되었다. 신분의 계급이 정치, 경제, 사법상의 권리와 의무가 서로 다른 성직자, 귀족, 중인, 농민 등 네 개로 나눠졌다. 13세기 초부터 독립적인 사법부와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성직자 계급은 서로 간에도 경제적, 사회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귀족이나 중인 이상 출신의 성직자 중에서도 대학을 마친 자들만 고위 성직자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귀족 계급은 크게 대귀족과 기사 계급으로 나뉘었는데,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주종 관계가 뚜렷하지 않았다. 폴란드의 귀족 수는 인구의 1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많은 편이었다. 중인이었던 도시 상공 계급은 부유층, 중산층, 빈민층으로 나누어졌다. 부유층은 부유한 상공인들로 도시의 상권을 독점하며 행정 관리직을 차지했다.

중산층은 독립 수공업자와 소규모 자영업자로 재력이나 권력이 약했고, 빈민층은 대부분의 근로자와 고용인들로 신분상의 완전한 자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군주, 귀족, 교회의 농토를 빌려 경작하며 살았다. 이들 또한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제한된 조건 안에서 토지를 매매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자유와 권리는 15세기에 들어 점차 제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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