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ouse of Luxembourg
룩셈부르크 왕가
보헤미아와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들
룩셈부르크 왕조의 문장
외국어 표기 The House of Luxembourg(영어), Lucemburkové
시기 1310년 ~ 1437년
별칭 보헤미아 왕국
지역 체코의 보헤미아
룩셈부르크 왕조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들
프르제미슬 왕조의 마지막 왕 바츨라프 3세가 암살당하면서,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4년 동안 왕위계승 전쟁이 이어졌다. 결국 1310년 룩셈부르크 가문의 얀이 바츨라프 2세의 딸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보헤미아 왕이 됨으로써 왕위계승 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아울러 보헤미아 왕국의 두 번째 왕조인 룩셈부르크 왕조가 시작되었다.
얀 룩셈부르크가 즉위한 이후에도 보헤미아의 많은 귀족들은 얀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보헤미아 왕국은 1/3 이상 되는 지역이 귀족들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다. 왕위에 오른 얀은 차근차근 귀족들을 제압해 통치의 안정을 이루어나갔다. 이후 뛰어난 외교술을 바탕으로 아들인 카렐 4세가 보헤미아의 왕위를 계승하는 것은 물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얀의 아들인 카렐 4세는 유년 시절 프랑스 파리의 궁정에서 자라면서 국제적 감각을 익혔다. 카렐 4세는 여기에 아버지 얀이 이룩해 놓은 내적 안정과 외적 성공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다. 왕위를 계승한 카렐 4세는 고지대 팔츠, 고지대 루사티아와 저지대 루사티아, 브란덴부르크 후작령을 차지했으며, 내적으로는 프라하의 신시가(노베 므네스토)를 조성하고 구시가와 프라하 성을 개축해 프라하를 고딕 양식의 도시로 변모시켰다. 또한 몰다우 강 위에 석조교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 카렐교라고 명명했으며, 프라하 인근의 카를슈타인 성을 비롯해 왕국 각지에 많은 도시와 성을 세웠다.
1355년 카렐 4세는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이로써 프라하가 제국의 중심이 되었는데, 당시 프라하는 인구 4만 명에 육박하는 유럽 최대의 도시 중 하나였다. 또한 카렐 4세는 치세 중에 프라하 주교좌를 대주교좌로 격상시키는 데 성공하여, 보헤미아의 교회가 더 이상 마인츠 대주교좌나 제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카렐 4세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실레시아 귀족들을 제압해 각 지역의 행정권을 왕의 직속으로 통합시켰고, 브란덴부르크, 룩셈부르크, 루사티아, 실레시아를 보헤미아 왕국의 봉토로 재편해서 보헤미아 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만들었다.
또한 카렐 4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 방식을 체계화시켜,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7명의 선제후 중 보헤미아 왕이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도록 했다. 보헤미아 왕의 봉토인 브란덴부르크 후작령을 선제후국으로 지정함으로써 실질적으로 보헤미아 왕국이 황제 선거에서 2표를 갖도록 했다. 이로써 카렐 4세는 자신의 자손들이 보헤미아의 왕위계승은 물론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는 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놓았다.
1378년 카렐 4세를 계승한 바츨라프 4세는 카렐 4세가 구축해 놓은 체제 덕분에 손쉽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바츨라프 4세 시기에 교회의 부패상을 지적하면서 종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결국 보헤미아 왕국은 신-구교 사이의 전쟁터로 변해갔다.
후스와 종교 개혁
교회의 부패가 심해지면서 보헤미아 왕국에서는 15세기 초반 얀 후스에 의해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다. 후스 운동은 기본적으로는 종교 개혁을 목표로 한 것이지만, 동시에 민족주의적 성격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교회의 권위와 위계 구조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개별 왕국의 종교 문제는 지역 교회가 결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예배는 현지어로 진행되는 것이 옳으며, 보헤미아에서는 보헤미아어로 예배를 진행할 것을 요구했다. 신도들의 평등 문제도 포함되었다.
1415년 7월 6일 얀 후스가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하자 교회의 개혁을 요구하는 후스파와 가톨릭 측 사이의 갈등이 무력 충돌로 이어졌다. 이때 후스파는 프라하 시청사 건물에서 시의원들을 창밖으로 던진 프라하 제1차 창외 투척 사건을 벌였고 이에 반발한 가톨릭 측이 후스파를 처단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
1420년 후스파는 ‘프라하 4개 조항’을 통해 설교의 자유, 양형체(교회 미사에서 예수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빵과 포도주. 당시 평신도들은 미사에서 포도주를 먹을 수 없었음.) 허용, 성직자의 청빈과 교회 재산 몰수, 신분에 상관없는 평등한 형벌 적용을 요구했다. 그러나 가톨릭 측에서는 1420년에서 1431년까지 다섯 번에 걸쳐 후스파를 공격했다. 이 다섯 번의 전쟁에서 후스파는 승리했지만 곧 내분으로 온건파인 우트라키스트(양형체파)와 강경파인 타보르파로 분리되었다.
1434년 온건파인 양형체파가 가톨릭과 연합해 강경 후스파와 후스 전쟁 최후의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온건파인 양형체파는 1436년 가톨릭 측과 바젤 협약을 체결했다. 양측은 협약을 통해 보헤미아에서의 평화와 종교의 자유를 공인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462년 교황 피우스 2세가 바젤 협약의 무효를 선언하면서 다시 보헤미아에 전운이 감돌았다.
후스 운동은 종교의 자유와 개신교의 발전, 그리고 종교 개혁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사건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후스 전쟁을 거치면서 보헤미아는 쇠퇴해 갔다. 오랜 기간 전쟁으로 국토는 황폐해졌고, 수공업은 쇠퇴했으며, 무엇보다도 ‘이단의 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후스 전쟁을 통해 보헤미아의 국제적 위상은 추락했고, 이후 보헤미아 왕국의 왕위는 외국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
오른쪽 첫 번째가 보헤미아의 왕
보헤미아의 쇠퇴와 합스부르크 왕조의 등장
후스 전쟁 이후 1439년 지기스문트의 사위인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알브레히트가 잠시 동안 왕위를 차지했지만, 보헤미아 귀족들의 반발로 1440년에서 1453년까지 보헤미아에는 왕이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13년 만인 1453년, 알브레히트의 유복자인 라디슬라프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었지만, 그마저도 단명하는 바람에 다시 왕위는 공석이 되었다.
이때 보헤미아 귀족들은 귀족 출신의 이르지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했다. 이르지는 후스 전쟁의 부정적 유산을 극복하기 위해 개혁을 단행하고 국제적으로도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가 왕조 출신이 아닌 귀족 출신이라는 신분상의 문제로 많은 이들이 그의 통치를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르지는 내정을 안정시킨 이후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유럽의 통합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이르지가 유럽 통합을 주장한 표면적 이유는 오스만 튀르크에 대한 기독교 세계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속엔 숨겨진 뜻도 있었다. 이르지는 가톨릭에서 보자면 이단인 온건 후스파 수장 출신이었다. 때문에 교황과의 갈등 소지가 상존했다. 그는 교황의 압력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세속의 군주들 간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했고, 유럽 통합을 그 명분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르지 사후인 1479년 올로모우츠의 평화 협상을 통해 폴란드 야겔로니아 가문의 블라디슬라프 2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선출되었다. 1490년에는 블라디슬라프 2세가 헝가리의 왕위도 차지하면서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가 하나의 왕조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상 개별 왕국에서 공동 왕의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으며, 특히 보헤미아에서는 귀족들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블라디슬라프 2세 사후 그의 아들 루이가 보헤미아 왕위를 계승했지만,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한 이후에는 루이의 처남인 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 1세가 보헤미아 왕위를 차지했다. 페르디난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된 이후 400여 년 동안 보헤미아의 왕위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