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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Mojmir or the Mojmir dynasty

Bollnow 2025. 1. 8. 09:40

모이미르 가문

 

기독교 세계로의 편입과 슬라브 문명의 시작

 

외국어 표기 House of Mojmir or the Mojmir dynasty(영어), Mojmírovci

시기 820년 추정 ~ 907

별칭 대모라비아 제국(Great Moravia Empire)

지역 체코의 모라비아, 슬로바키아, 헝가리 북부

 

모이미르 가문

 

10세기 초반 현재의 체코와 슬로바키아 지역에는 모라바 공국과 니트라 공국이 있었다. 모라바 공국을 차지하고 있던 모이미르 1세는 당초 카롤링거 가문의 봉신이었는데, 833년 니트라 공국의 프리비나를 몰아내고 니트라와 모라비아의 남서부, 북동부에 살고 있던 슬라브인들을 통합해 모라비아를 세웠다. 840년대 들어서서는 프랑크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프랑크와 수차례 전쟁을 치르기도 했다.

모라비아는 프랑크 왕국의 속국으로 매년 조공을 바치고 있었는데, 모라비아 내부에서는 조공에 대한 의견이 분분했다. 모이미르 1세는 프랑크로부터 완전 독립을 추진하고 있었던 반면 조카인 라스티슬라프는 프랑크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측이었다. 결국 루트비히의 도움을 받아 라스티슬라프가 모이미르를 폐위시키고 군주로 올라섰다.

라스티슬라프가 프랑크의 종주권을 인정하면서 프랑크 왕국이 있는 서쪽 지역에서의 갈등이 사라지자 모라비아는 영토 팽창과 더불어 국내의 안정화를 진행할 수 있었다. 우선 동쪽의 코시체 부근 슬란스케 지역을 획득했고, 불가리아 왕국과 국경을 맞댔다. 라스티슬라프의 팽창 정책이 성공을 거두자 프랑크는 불가리아 왕국과 동맹을 맺고 라스티슬라프를 견제했다.

모라비아는 853~ 854년 프랑크 왕국에 권력 투쟁이 발생하자 루트비히에 대항해 라트보트를 지지했다. 이 때문에 855년 다시 프랑크가 모라비아를 침공하면서 859년 평화 조약이 조인될 때까지 양국의 적대 관계가 이어졌다. 당시 프랑크 왕국이 모라비아와의 대결에서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사실을 감안할 때 모라비아는 프랑크 왕국에 견줄 만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미 프랑크로부터 일정 부분 독립을 이룬 상태였다고 판단할 수 있다.

 

기독교 수용과 슬라브 세계의 문명화

 

당시 동프랑크는 모라비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직접적인 침공을 하는 것 이외에도 종교를 통한 간접적인 개입을 시도했다. 모라비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이전 이미 모라비아에는 동프랑크 선교사들이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라스티슬라프는 동프랑크의 간접적인 개입을 간파해 동프랑크 선교사들의 활동을 억제시키려고 했다. 이를 위해 우선 교황에게 서신을 보내 선교사 파견을 요청했고 이를 통해 모라비아에 독자적인 교구를 설립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황은 아무런 답신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비잔틴의 황제 미카엘 3세에게 선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868년 미카엘 3세는 슬라브어에 능통한 키릴과 메토디우스 형제를 모라비아 선교사로 파견했다. 이로써 슬라브 세계도 기독교를 받아들여 문명 세계로 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키릴과 메토디우스의 선교 활동에 위협을 느낀 동프랑크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교황청과 황제에게 모라비아가 가톨릭을 탄압한다고 주장했다. 가톨릭을 전파함으로써 모라비아를 자신의 영향권에 두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동프랑크의 루트비히는 모라비아를 침공했다. 이 전쟁에서 패한 모라비아는 프랑크 왕국과의 화평을 체결하고 프랑크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그러나 독자적인 교구를 설립하려던 당초의 계획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동프랑크는 870년 오스트마르크의 후작 칼로만(859~ 876)을 대장으로 다시 모라비아를 침공해 라스티슬라프를 몰아냈다. 이 과정에서 라스티슬라프의 조카였던 니트라 대공 스바토플룩(870~ 894)은 칼로만에 투항했다.

 

프랑크와의 갈등

 

적대적이고 비협조적이던 라스티슬라프를 몰아낸 동프랑크는 라스티슬라프의 조카인 스바토플룩을 모라비아의 대공으로 옹립하는 동시에 엔겔샬크(Engelschalk)와 빌헬름(Wilhelm)을 파견해 모라비아 내정을 간섭했다. 스바토플룩이 이에 반발하자 동프랑크는 그를 반역죄로 몰아 바바리아로 압송했다.

이때 모라비아에서는 동프랑크의 간섭에 반발해 슬라보미르가 모라비아의 대공을 자처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바바리아 법정에서 무죄가 입증된 스바토플룩은 카를로만을 설득해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모라비아의 반란을 진압하기로 했다. 그러나 카를로만의 군대를 이끌고 모라비아에 돌아온 스바토플룩는 반란군에 합류해 자신이 이끌고 왔던 프랑크 군대를 몰아냈다.

스바토플룩이 프랑크를 배신한 이후 프랑크의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872년부터 계속된 동프랑크의 침공에 맞선 스바토플룩은 결국 882년에 동프랑크와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동프랑크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자 스바토플룩은 프랑크 왕국이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던 현재의 폴란드 북서부를 차지하는 등 모라비아의 영토를 폴란드 북부에서 불가리아 국경까지 확장해 중부 유럽 최강자로 올라서게 했다.

 

가톨릭으로의 개종과 권력 투쟁

 

스바토플룩는 라스티슬라프와는 달리 동프랑크로부터 독립적인 교구를 설립하려고 고집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로마와의 선린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고 특히 로마 교회의 보호를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알고 있었다. 이에 스바토플룩는 879년 교황의 보호를 요청했고 마침내 880년 교황 존 8세의 칙서 인두스트리애 투애(Industriae tuae)’를 통해 로마 교회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이를 통해 모라비아와 스바토플룩은 동시대 유럽의 다른 기독교 국가, 군주들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받았고 국제적 위상도 높아졌다. 종교적으로도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 이 칙서로 메토디우스가 대주교로 서품되면서 대주교로서의 특권도 보장받을 수 있었다.

키릴과 메토디우스

 

당시 모라비아는 기존의 핵심 영토와 정복 전쟁을 통해 획득한 영토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사실상 느슨한 형태의 연합 체제였다. 따라서 894년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정복을 통해 포함시켰던 지역들이 하나둘씩 모라비아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8956월 보헤미아가 프랑크에 합병되면서 스바토플룩이 건설한 대제국은 해체되기 시작했고, 내부에서도 계속해서 반란이 이어졌다.

스바토플룩 사후 장자인 모이미르 2(904~ 907)가 스바토플룩을 계승했고, 스바토플룩 2세는 니트라, 프레드슬라프 등을 상속했다. 그러나 형제간 권력 투쟁이 일어나면서 두 명 모두 모라비아의 대공을 자처했고, 이 틈을 노린 동프랑크가 모라비아를 침공했다. 당시 동프랑크는 헝가리와도 전쟁을 치르고 있었는데, 모이미르 2세는 이 전쟁에서 동프랑크를 지지했다. 불행히도 동프랑크가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헝가리의 세력이 커졌고, 결국 907년 헝가리는 모라비아를 침공했다. 이 전쟁 중에 모이미르 2세가 전사하면서 모라비아는 더 이상 존립할 수 없었고, 결국 모라비아 대부분의 영토와 사람들은 헝가리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모이미르 가문의 몰락과 역사적 의의

 

모이미르 2

 

모라비아가 헝가리에 의해 멸망되면서 모이미르 가문은 사라졌다. 이후 모이미르 가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907년 이후 모이미르 가문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헝가리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가문의 일부가 슬로바키아 산간 지대로 숨어들어 헝가리에 저항했고 또 다른 일부는 서쪽의 보헤미아로 이주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모이미르 가문이 현재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 남겨놓은 유산은 이후 이 지역을 차지한 다른 왕조가 남겨놓은 유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모이미르 가문은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아우르는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향후 체코슬로바키아 단일민족 사상이 출현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1차 세계대전 중에 체코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T.G. 마사리크를 포함한 일단의 독립 운동가들은 전후 평화 협상에서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독립과 단일국가 건국을 주장했고 그 근거를 모라비아에서 찾았던 것이다.

모라비아가 헝가리에 의해 멸망된 이후 현재의 슬로바키아는 약 1,000년 동안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다. 헝가리의 지배를 받았던 슬로바키아인들은 강압적인 마쟈르 화 정책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고 슬로바키아인으로 살아남았다. 오랜 기간 외세의 점령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를 지켜내고 슬로바키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근저에는 모라비아라는 위대한 국가를 경험했었다는 일종의 자신감과 자부심 때문이었다.

모이미르 가문의 종교 정책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기에는 동프랑크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비잔틴제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면서, 비잔틴의 종교, 즉 비잔틴 정교를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키릴과 메토디우스가 모라비아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펼쳤는데, 슬라브 문자를 창제하는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이들이 남긴 슬라브 문자는 현재 남슬라브인과 동슬라브인들이 사용하는 문자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모라미르 가문의 치세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동프랑크와의 관계 개선과 로마의 보호를 받기 위해 가톨릭이 도입되었다. 모라비아에 유입된 가톨릭은 이후 폴란드와 헝가리에도 전파되어 중부 유럽 국가들의 가톨릭화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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