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Bonaparte
보나파르트 황가
19세기 격동기를 살다간 프랑스의 네 번째 왕조
외국어 표기 House of Bonaparte(영어), Maison impériale de Bonaparte
시기 1804년 ~ 1815년, 1852년 ~ 1870년
지역 프랑스
제1 제정과 나폴레옹 1세
나폴레옹 1세
자크-루이 다비드 작, 1812년
보나파르트 가문은 이탈리아에 기원을 두고 있는 코르시카 소귀족 가문으로 1768년 루이 15세 치세 당시에 코르시카 섬이 제노바에서 프랑스로 넘어가게 되면서 프랑스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보나파르트 가문은 15세기 이래로 코르시카 섬을 무대로 아라곤 왕국과 제노바 사이의 권력투쟁에서 늘 핵심적인 역할을 해 왔다. 루이 15세 당시에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친인 샤를-마리 보나파르트(카를로 마리아 디 부오나파르테) 또한 코르시카 내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나폴레옹과 조제핀의 축성식
자크-루이 다비드, 1808년 작
보나파르트 가문이 프랑스의 네 번째 군주 가문이 된 것은 전적으로 샤를-마리 보나파르트의 둘째 아들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즉 나폴레옹 1세(1769년 ~ 1821년, 재위 1804년 ~ 1815년) 때문이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이탈리아와 이집트 등지에서 전례 없는 승리들을 거둔 포병장교 나폴레옹은 총재정부 당시의 무기력하고 혼란한 상황을 틈타 정치적 입지를 다져나갔다.
1799년 지지 세력을 규합한 그는 쿠데타를 통해 통령정부 체제를 세우고 자신이 가장 중요한 권력을 장악하며 제1통령, 나아가 종신통령에 취임하였다. 결국 1804년에는 형식적이나마 남아 있던 공화정 체제를 폐지하고 스스로 황제의 직위에 오르면서 프랑스 제국을 선포하였다. 통령정부부터 제정까지 나폴레옹의 통치는 대내적인 개혁과 대외적인 정복으로 이어져 에스파냐에서 폴란드까지 아우르는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가 정복한 영토는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와 카를 5세 제국에 비견할 만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1제국의 영토 범위
진한 초록: 프랑스 제국/ 연한 초록: 종속국
하지만 나폴레옹은 섬나라 영국을 정복하지 못했다. 육지에서 무적이었던 그의 군대는 바다에서는 넬슨이 이끄는 영국해군에게 연패를 면치 못했다. 결국 나폴레옹은 영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대륙봉쇄령을 선포하였으나 영국보다는 대륙의 다른 나라들에게 더 큰 불이익을 주게 되었다. 1812년 이를 어긴 러시아를 정벌하기 위해 러시아 원정을 조직했으나 러시아의 청야작전과 살인적인 추위로 원정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한 나폴레옹은 동맹군에 의해 1814년 퇴위 당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하지만 복고왕정이 제대로 정착되지 않은 혼란한 상황을 틈타 엘바 섬을 탈출하여 1815년 3월에서 6월까지 다시 한 번 정권을 잡았다(백일천하). 하지만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한 후 남대서양 한가운데 있는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서 1821년에 사망하였다.
나폴레옹 1세의 유일한 계승자는 오스트리아 공주인 둘째 부인 마리-루이즈와의 관계에서 태어난 나폴레옹 2세(1811년 ~ 1832년, 재위 1815년 6월 22일 ~ 7월 7일)가 유일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친 나폴레옹 1세에 의해 ‘로마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하지만 1815년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할 당시 네 살에 불과했던 그는 모친을 따라 오스트리아에 가서 성장하게 되었다. 형식적이나마 그의 재위 기간은 나폴레옹 1세가 그에게 양위를 선언한 6월 22일부터 루이 18세가 파리에 입성하기 전날인 7월 7일까지인데, 그나마 그 기간에도 그는 오스트리아에 머물던 아이에 불과하였다.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총명하고 문무를 겸비한 왕재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2세는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수많은 견제 속에서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잡지 못했다. 결국 1832년 스물한 살의 나이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제2 제정과 나폴레옹 2세
나폴레옹 1세는 유럽 전역을 정복해 나가면서 각 지역에 자신의 형제들에게 왕위를 부여했다. 형 조제프를 나폴리와 에스파냐 왕위에, 동생 루이를 홀란드 왕위에, 또 막냇동생 제롬을 베스트팔리아 왕위에 앉혔다. 나폴레옹 1세의 형제들이 다스린 나라들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제국에 종속된 왕국들로 조제프와 제롬은 모두 나폴레옹 1세의 몰락과 함께 각 지역에서 왕위를 상실했다. 나폴레옹 1세의 형제들 중 예외적인 인물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래 동생인 뤼시앙과 홀란드 왕이었던 루이였다. 뤼시앙은 나폴레옹이 황제가 될 때부터 사이가 틀어져 자신만의 영지에 칩거하였다.
다른 한편 나폴레옹 1세로부터 홀란드 왕위를 부여 받은 루이는 이미 나폴레옹 1세가 권력의 절정기에 있을 때 홀란드 왕위를 상실했다. 형보다 유약하면서도 보다 동정심이 많았던 루이는 형으로부터 프랑스보다 홀란드를 더 위한다는 질책을 받았고, 여러 모로 나폴레옹 1세와 충돌하였다. 결국 나폴레옹 1세는 1810년 루이를 퇴위시키고 홀란드를 프랑스 제국에 병합하였다. 이후 그는 나폴레옹의 최대 적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의 도움으로 오스트리아에 정착하여 남은 여생을 보냈다.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할 당시 오스트리아에 있던 루이 보나파르트에게는 1807년에 죽은 나폴레옹-샤를을 제외하고 두 명의 아들들이 있었다. 이들의 이름은 나폴레옹-루이와 샤를-루이 나폴레옹으로, 이들은 모친 오르탕스와 함께 프랑스에 있다가 나폴레옹 1세의 몰락 후 독일 지역과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에서 성장하였다. 형 나폴레옹-루이는 1830년대 이탈리아 카르보나리 운동에 가담했다가 당국의 표적이 되어 도주하던 중 홍역에 걸려 사망하였고, 동생 샤를-루이 나폴레옹은 어머니 오르탕스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갔다. 이후 샤를-루이 나폴레옹, 즉 루이 나폴레옹은 이후 스위스와 영국에 정착한 상태에서 1840년대 루이-필리프 1세에 대항하여 무모한 쿠데타를 일으키려다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정이 들어선 이후 영국에서 혼란한 상황을 피해 있던 루이 나폴레옹은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예상을 뒤엎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자신의 야망을 펼치기 위해서는 대통령 임기가 짧다고 판단한 그는 숙부 나폴레옹 1세와 같이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 체제를 붕괴시켰다. 이듬해 루이 나폴레옹은 제2제정을 선포하고 나폴레옹 3세(재위 1852년 ~ 1870년)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제위에 올랐다.
그는 산업혁명과 근대적 자본주의 경제 체제 확립, 파리 도시정비, 해외 식민지 팽창에 열을 올리면서 제국의 번영을 추구했으나 정치적으로는 언론을 통제하고 각종 정치적 활동들을 탄압하였다. 나폴레옹 3세는 1870년 9월 새롭게 급부상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폐위당했고, 프랑스에는 제3공화정이 들어서게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영국으로 망명하여 1873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퇴위와 함께 프랑스에서는 군주정이 완전히 종식되었다.
1867년 당시 프랑스 제2 제정의 범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