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ian Dynasty
살리(잘리어) 왕가
교황과 서임권 투쟁을 벌인 11세기 ~ 12세기의 독일 왕가
외국어 표기 Salian Dynasty(영어), Salier
시기 1024년 ~ 1125년
지역 동프랑크, 독일
살리 왕가의 기원
1457년에 그려진 적공 콘라트의 레히펠트 전투 모습
살리 왕조는 독일어로 잘리어라 불리며 '살리족 출신'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가문이 다스리던 영토의 위치에 의해 12세기 초반부터 이러한 명칭이 붙었다. 게르만 민족에 속하는 프랑켄족은 오늘날의 라인 강 하류에서 벨기에와 네덜란드에 이르는 저지대를 차지하고 있었다. 프랑켄족의 여러 일파 중 살리족은 북쪽의 해안가 잘란트에 거주하다가 세력을 확장해서 5세기에 프랑크 왕국 최초의 왕가인 메로빙 왕조를 탄생시킨 부족이다.
843년 베르덩 조약에 의해 프랑크 왕국이 서·중·동프랑크의 셋으로 나뉠 때 살리족의 저지대 영토는 로타르 1세가 다스리는 중프랑크 왕국의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그 아들 로타르 2세가 서거하자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반으로 쪼개져 각각 동·서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었다. 그중에서 동프랑크 왕국에 속한 곳을 '로타르의 땅'이라는 의미로 ‘로타링기아’ 또는 독일어로 ‘로트링엔’이라 부르게 되었고 오늘날 프랑스의 지역명 ‘로렌’으로 남았다.
적공이라 불리며 살리 왕가의 시조가 된 로트링엔 공작 콘라트는 가문 대대로 로트링엔 지역을 다스려 왔다. 이후 그의 증손자 콘라트 2세가 가문 최초로 독일 국왕이 되었고, 1125년 하인리히 5세가 서거할 때까지 왕조가 지속되었다. 또한 시조가 지배하던 영토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살리 왕조'라는 명칭을 붙였다.
적공 콘라트가 실제로 살리족의 후예인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일반적으로 프랑크족의 군주를 살리라 부르기도 했으므로 이전의 작센족 출신 오토 왕조와 대비시키기 위해 이름을 선택한 듯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잘리어 왕조'로 불리지만 이전의 '오토 왕조'나 이후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와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영어나 독일어가 아닌 고유명사를 기반으로 '살리 왕조'라 표기하는 것이 옳다.
살리 왕가의 발전과 쇠퇴
살리 왕조는 카롤링 왕조 이후의 콘라딘 왕조와 오토 왕조가 섞여서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적공 콘라트의 아버지 베르너 5세 백작은 동프랑크 왕국의 카롤링 왕조가 끝나고 독일을 지배했던 콘라딘 왕조 유일의 국왕 콘라트 1세의 조카였다. 게다가 적공 콘라트는 대제 오토 1세의 딸 류트가르데와 결혼했으므로 오토 왕조의 사위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증손자 콘라트 2세는 카롤링 왕가의 태두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 기젤라와 혼인했다. 덕분에 1024년 살리 왕조가 시작될 때에도 충분한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콘라트 2세는 정치적인 내분을 평정하고 10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올랐으며, 부르군트 왕국을 이어받은 남프랑스 아를 왕국도 지배하고 동유럽 국가들을 휘하에 두는 팽창 정책으로 오토 대제 때보다 더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아들 하인리히 3세는 전국을 순방하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냄으로써 국내의 의견을 통일시켰고 대외적으로는 동쪽 경계선을 다뉴브 강 너머로까지 확장했다. 이 경계선은 20세기 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분열될 때까지 1천 년 동안 유지되었다. 그러나 교황 선출에 개입해 두 번이나 대립 교황을 추대하는 바람에 로마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황제가 정치와 종교를 모두 손에 쥐는 시대는 하인리히 4세에 들어와 끝이 났다. 밀라노 대주교 임명 문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대립을 하다가 수세에 몰려 결국 이탈리아까지 찾아가 엎드려 속죄하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로 복수를 시도하며 15년 동안 교황청을 괴롭히긴 했으나 살리 왕조의 마지막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서임권 투쟁에서 패배해 1122년 보름스 협약을 맺음으로써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교황보다 낮은 자리에 위치하는 것으로 굳어졌다. 잦은 전쟁과 분란에 시달리던 하인리히 5세는 39세의 나이로 후사 없이 급작스럽게 서거했고 살리 왕조는 집권 102년 만에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살리 왕가의 통치 방식
살리 왕조에서는 잦은 해외 원정으로 통치권에 공백이 생기는 것을 우려해 어린 아들을 공동국왕으로 앉혀 후계 구도를 안정화시키는 방법이 쓰였다. 콘라트 2세는 1828년 11세의 장남 하인리히 3세를 공동국왕으로 앉혔고, 1053년에는 그 아들 하인리히 4세가 3세의 나이로 공동국왕이 되었다. 이어진 콘라트(3세)는 13세 때, 그 동생 하인리히 5세도 13세 때 공동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아들들의 반란을 겪다가 결국 퇴임해야 했다. 콘라트(3세)는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느라 어머니의 임종도 못 지키게 한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었다. 1093년에는 적군인 이탈리아 롬바르디아 지역의 귀족 동맹에 참여해 아버지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고 이탈리아 국왕에 선출되었다. 하인리히 4세는 1099년 콘라트(3세)를 폐위시키고 막내아들 하인리히 5세를 독일 공동국왕으로 앉히며 반란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서약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마저도 1104년 반란을 일으켜 이듬해 아버지를 강제 퇴임시켰다.
살리 왕가의 결혼 정책
외국에서 신붓감을 찾았던 오토 왕조와는 다르게 살리 왕조의 초기 국왕들은 대부분 국내 유력 귀족 집안과 혼인을 올렸다. 지역 귀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국내 정치 상황이 복잡했던 것도 하나의 원인이었고 왕조 교체에 따른 정통성 확보를 위함이기도 했다. 가문의 시조인 적공 콘라트도 오토 대제의 딸 류트가르데와 결혼했고, 살리 왕조 최초의 국왕이 된 증손자 콘라트 2세도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이자 먼 친척인 기젤라와 결혼했다. 콘라트 2세와 기젤라는 오토 왕조의 하인리히 1세를 공통 조상으로 두었기 때문에 가문 계승법에 따라 결혼이 무효화될 위기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에는 해외 결혼 정책으로 돌아섰다. 하인리히 3세는 덴마크 국왕의 딸 군힐트와 결혼한 후 아키텐 공작의 딸 아녜스와 재혼했다. 콘라트 3세는 프랑스 남동부 사부아 백작의 딸 베르타와 결혼했다가 사별 후 동쪽 키에프 공국의 프락세디스 공녀와 재혼했다. 콘라트(3세)는 시칠리아 백작의 딸 막시밀리아를 신부로 맞이했고, 동생 하인리히 5세는 잉글랜드 국왕의 딸 마틸다와 결혼식을 올렸다.
살리 왕가의 종교와 문화 정책
살리 왕조 시기는 오토 왕조의 문화와 예술을 그대로 이어받았지만 정치와 종교의 측면에서는 유럽 전체의 판도가 뒤바뀌는 대격변이 일어났다. 그중심에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자리한다. 로마가톨릭 성직자는 기본적으로 교황에 의해 임명되고 지시를 받지만 오토 왕조 때는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의 성직자들에게 토지와 건물을 하사했다. 여타의 귀족들처럼 봉건제에 소속되어 왕의 명령을 우선시했던 구조를 '제국교회 체제'라 부른다.
살리 왕조 초기에도 이러한 분위기가 유지되었다. 콘라트 2세는 1024년 부인 기젤라가 마인츠 대주교 아리보의 반대로 인해 정식 왕비로 인정받지 못하자 쾰른 대주교 필그림을 매수해 즉위식을 거행했다. 아들 하인리히 3세는 1046년 교황이 바뀌는 사이의 혼란 중에 독일 출신 주교를 교황으로 따로 지명했다. 이렇게 선출된 클레멘스 2세는 하인리히 3세를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을 거행해주었다.
그러나 그 아들 하인리히 4세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180도로 바뀌었다. 밀라노 대주교 지명 문제로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와 다투던 하인리히 4세가 "교황을 폐위하겠다"고 선언하자 교황은 독일의 주교들을 파문하고 국왕에 대한 귀족들의 충성서약까지 무효화했다. 독일 국왕을 다시 선출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인리히는 1077년 1월 이탈리아 카노사를 몰래 찾아갔고 추운 날씨에 3일 동안 성문 밖에서 기다린 끝에 교황에게 엎드려 사죄했다.
카노사의 굴욕 이후 성직자를 임명하는 서임권은 황제에게서 교황으로 넘겨졌다. 신성로마제국의 정치력은 로마의 종교적 지배력 아래에 놓이는 대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교황을 지지하던 이탈리아의 수트리 주교 보니초조차 "로마제국 전체를 뒤흔든 사건"이라고 표현했다.
카노사는 정치와 종교 간의 투쟁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800년이 지난 1872년 5월 14일 프로이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반가톨릭 투쟁을 촉구하며 "우리는 카노사로 가지 않는다!" 하고 외칠 정도였다. 1122년에는 하인리히 5세가 교황과 대항하다 정치적 입지를 잃고 결국 성직자에 대한 황제의 서임권을 교황에게 넘겨주는 ‘보름스 협약’에 서명함으로써 이 구도가 영원히 굳혀진다.
1077년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 성주 마틸데 여후작에게 무릎을 꿇은 장면
살리 왕가와 대중문화
살리 왕조의 사건 중 가장 많이 회자되는 것은 '카노사의 굴욕'이다. 많은 화가들이 망토만 두른 채 맨발로 기다리는 하인리히 4세의 모습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종교화에서는 당당한 교황 앞에 비참한 모습의 황제가 무릎을 꿇는 장면이 그려졌다. 영국의 화가 조지 셰리든 놀즈는 1909년작 '카노사의 굴욕'에서 계단 아래에서 두 손을 모으고 엎드려 흐느끼는 젊은 황제의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하인리히가 꿋꿋하게 인내심을 발휘하며 복수를 준비하는 의지의 인물로 묘사되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1869년 에두아르트 슈보이저가 그린 8개의 '바이에른의 역사 연작' 중 '카노사 앞에 선 하인리히 4세'다. 파수병들이 비웃는 태도로 바라보고 있는 와중에 황제는 망토만을 걸친 채 맨발로 서 있지만 전혀 비굴한 표정을 짓지 않고 있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도 19세기 초에 발표한 '하인리히 4세'라는 제목의 시에서 독일인의 기상과 투지를 강조했다.
카노사 성채 안뜰에 / 독일 황제 하인리히가 서 있다 / 맨발에 참회의 복장을 걸친 / 그날 밤은 춥고 비가 내렸다 // 저 위의 창문 안으로 / 달빛 아래 두 개의 그림자가 보였으니 / 하나는 그레고리우스의 빛나는 대머리이고 / 다른 하나는 마틸데의 가슴살이다 // 하인리히는 창백한 입술로 / 경건하게 주기도문을 외웠지만 / 제국의 정신이 담긴 마음속에서는 / 이러한 외침이 비밀스럽게 피어올랐다 //
"내 머나먼 조국 독일에서는 / 현기증 나는 산맥이 솟아 있고 / 그 아래 구덩이에서 조용히 / 전쟁의 도끼를 만들 철광이 자라난다 // 내 머나먼 조국 독일에서는 / 늘씬한 참나무 숲이 솟아 있고 / 가장 높은 참나무 줄기 안에서 / 전쟁의 도끼에 손잡이로 쓸 나무들이 자라난다 // 나의 사랑하는 조국 독일이여 / 언젠가 영웅을 낳아 / 내 슬픔을 만든 저 뱀을 / 전쟁의 도끼로 짓이기게 하라"
역사소설 '로마인 이야기'를 지은 시오노 나나미도 전체 3권으로 이루어진 '십자군 이야기' 시리즈를 카노사의 굴욕 장면으로 시작했다. 스물일곱 살의 젊은 황제가 쉰일곱 살의 교황 앞에서 맨발로 속죄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교황의 완승 이후의 일은 세계사 교과서에 실려 있지 않다"며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혈기가 드센 나이의 황제에게 치욕을 준 교황은 강단은 있었을지 몰라도 정치적인 인간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복수심에 불타오른 하인리히는 이후 8년 동안 교황을 궁지로 몰아넣었고 결국 그레고리우스는 로마가 아닌 도피처 살레르노에서 생을 마쳤기 때문이다.
이후 교황에 오른 우르바누스 2세도 황제 하인리히 때문에 7년 동안 로마에 들어가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과 대립하던 카노사의 강경책이 원인이라 생각한 우르바누스는 방향을 예루살렘으로 바꿔 "하느님이 원하신다"는 명언으로 십자군 원정을 제안했다. 그리고 기독교도들 간에는 휴전을 명령해 로마에 쏠리던 황제의 힘을 해외로 돌려서 역이용하는 전략을 편 것이다. 살리 왕조 시기가 대전환기라고 불리는 이유다.
조지 셰리든 놀즈의 1909년 작 '카노사의 굴욕'
에두아르트 슈보이저의 1869년 작 '카노사 앞에 선 하인리히 4세'
황제 하인리히 5세와 마인츠 대주교 루타르트의 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