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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Habsburg

Bollnow 2025. 1. 7. 11:49

합스부르크 왕가

 

650년 동안 지켜온 왕실의 품격

 

외국어 표기 House of Habsburg(영어), Habsburg

시기 1273~ 1918

지역 오스트리아

68년 동안 통치한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와 황실 가족

 

합스부르크 왕가의 기원

 

합스부르크 가문은 현재 프랑스 지역인 하부 알자스의 노르트가우 백작 가문 출신의 부자 군트람(904~ 946)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이스가우의 백작이 된 그는 하부 알자스 지역과 무리(Muri) 근처 지역을 소유한 큰 부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의 손자 클레트가우 백작 라트보트(985~ 1045)가 알자스와 슈바벤, 그리고 아르가우를 포함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을 축성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라고 불리는 지금의 스위스 북부 지역에 근거지를 삼게 되었다.

그의 손자인 오토는 정식으로 합스부르크 백작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1~12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은 주변에 여러 성을 건설하여 취리히가우, 슈비츠, 운터발덴, 아르가우, 프리크가우, 우리 등을 소유한 견실한 봉건영주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스위스 지역에 위치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본토

마테우스 메리안, 1642년 작

 

합스부르크 왕가의 발전과 쇠퇴

 

1273년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는 잊을 수 없는 해가 되었다. 왜냐하면 스위스 알프스 북부 지역의 작은 봉건영주에 불과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독일 선제후들에 의해 (신성)로마독일 왕으로 선출되었기 때문이다. 루돌프 1세가 하루아침에 독일의 제왕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엿한 유럽의 왕가로 급성장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늘날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소유하게 되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었고, 그 결과 중세 유럽의 세력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시조 루돌프 1

 

1452년에는 10년 전 (신성)로마독일 왕에 즉위한 프리드리히 3세가 로마의 황제로 등극했다. 그의 황제 대관식은 로마에서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직접 집전했다. 그것은 합스부르크 가문으로서는 대단히 상징적인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고, 이제 합스부르크 왕실은 이후 460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는 어엿한 황실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황제의 손자인 미남대공 필리프 1세의 아들 대에 이르러 합스부르크 황실은 스페인 계보의 국왕 카를 5세와 오스트리아 계보의 황제 페르디난트 1세로 가문이 분리되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넘겨받은 오스트리아 계보는 다시 티롤 계보인 페르디난트 2세 황제에 의해 유지되다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왕인 카를 6세까지 이어졌다. 1732111, 황제 카를 6세는 오랫동안의 협상 끝에 왕자가 아닌 공주가 상속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시한 국사조칙을 공인받는 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마리아 테레지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왕위에 오르는 인물이 되었다.

1713년 카를 6세가 공포한 국사조칙

 

1736212,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트링엔 공작인 프란츠 슈테판과 결혼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이 시작되었다. 1741년 여왕에 등극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유럽의 군주들과 맞싸워 오스트리아의 왕위를 지켜냈다. 1745, 그녀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등극한 이후,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은 1차 세계대전 직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배출하는 황실로 꾸준히 성장했다. 특히 18세기 중반 이후에 계몽군주로 평가받은 황제 요제프 2세는 갖가지 근대적인 개혁정치를 단행하여 제국의 근대화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런데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 유럽 제국에 불어닥친 혁명의 바람은 신성로마제국의 종식을 가져오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이 과정에서 혁명 프랑스에 반대적인 입장을 취하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도리어 유럽 보수반동 정치의 보루가 되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특히 19세기 초반 메테르니히 총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수성은 18483월 빈 시민혁명에 의해서 비로소 부분적으로나마 저지될 수 있었다. 그래서 1848122, 오스트리아 황제에 오른 프란츠 요제프 1세가 향후 68년 동안 보수와 진보, 반동과 개혁, 전통과 근대, 절대군주와 입헌군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 제국 사이에서 적당한 절충주의적인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1914628,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탄은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의 죽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그 총소리는 결국 650년 동안 군주의 품격을 유지해온 합스부르크 왕가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이 되고야 말았다. 1914728,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촉발된 4년 동안의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패전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19146월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기 5분 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 방식

 

고대 로마제국이 분할통치를 지배의 원리로 삼았다면, 변방의 봉건영주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일찍부터 가문의 영토와 재산을 분할하는 것을 금지하는 장자상속 제도를 도입했다. 1283, 합스부르크 가문의 태조가 된 루돌프 1세는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이른바 라인펠더 협약을 만들어 장자 단독통치 방식을 기본으로 하되, 다른 아들들에게는 여타의 행정관리 업무를 맡기는 식으로 공동지배 방식을 제한하고 가문의 영토가 분할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했다. 합스부르크의 태조가 된 (신성)로마독일 왕 루돌프 1세가 세운 이 통치원리는 향후 650년 동안 합스부르크 제국의 중요한 통치원리로 작동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예외적인 상황이 있었다. 그 하나는 16세기 초반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페인 계보와 오스트리아 계보로 양분되었을 때였다. 1516, 미남대공 필리프 1세의 장남 카를 5세가 스페인의 왕위를 상속받았고, 1520년에는 (신성)로마독일의 왕으로 등극했다. 이때 그는 보름스 협약에 의거하여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일부를 제외한 오스트리아 영토의 통치권을 넘겨주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와 재산이 처음으로 분할되었다. 16~17세기 스페인 왕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배출된 왕들이 군림하여 해외식민지 정복사업을 추진하였던 셈이다. 그러나 카를 5세의 서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계속 이어졌고, 18세기 초반에 와서 또 한 차례의 예외적인 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장자상속제라는 통치원리가 작동할 수 없었던 두 번째 사건은 1706년 스페인 왕, 1711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1712년 헝가리 왕, 1723년 보헤미아 왕에 등극한 카를 6세 때 일어났다. 카를 6세는 합스부르크 왕가 역사상 가장 거대한 영토를 갖게 된 인물이었다. 그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토와 재산이 다시 분할되는 것에 깊은 우려를 금치 못했다. 1713419, 오랜 고심 끝에 그는 이른바 국사조칙이라는 새로운 조서를 공포했다. 이 조서에 따르면, 장자상속 제도를 엄격히 따르되 만일 남자 상속자의 대가 끊어질 경우, 여자도 상속자의 권한을 갖는다는 점을 명시해두었다.

사실상 이 국사조칙은 카를 6세의 자녀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공포된 것이라는 점에서 카를 6세가 오로지 그의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위해 미리 만들어놓았다고 보기는 힘들다.1)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732년 국사조칙을 공인받은 8년 뒤 17401020, 상속 받을 아들이 없는 상황에서 카를 6세가 서거하자 그의 뒤를 이어 적법한 방식으로 상속녀의 권한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있어서는 최대의 행운이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혼 정책

 

전쟁 수행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너 오스트리아 복 있는 나라여, 결혼하라(Bélla geránt aliī, tú felix Áustria nūbe).” 이 라틴어 경구는 수백 년 동안 이루어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성공적인 결혼 정책을 한마디로 압축해주고 있다. 이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왕가로 성장한 중세 시대부터 오스트리아 제국의 위엄을 갖춘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정략결혼은 꾸준히 추진되었다. 특히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와서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결혼 정책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은 그녀의 왕위계승권을 처음부터 반대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의 강력한 유럽 왕실과의 정략결혼을 추진했다. 그녀는 열 번째 딸 마리아 카롤리네 대공비를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젖줄이 닿아 있는 시칠리아 공국의 페르디난트 3세와 결혼을 시켜 스페인과 나폴리, 시칠리아의 왕인 카를 3세와 사돈관계를 맺었고, 궁극적으로 이탈리아와 함께 반()프로이센적 연합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녀의 막내딸 마리아 안토니아(마리 앙트와네트) 대공비를 프랑스의 루이 16세와 정략결혼을 시켜 프랑스의 대외 정치에 입김을 불어넣고자 했으나 그의 딸이 단두대에서 공개 처형당하면서 그녀의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대외 문제를 오로지 전쟁을 통해 해결하는 데 혈안이 된 근대 유럽의 군주들 사이에서 정략결혼을 통해 외교적 실마리를 찾으려는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의 노력은 분명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중세의 봉건영주에 불과했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20세기까지 유럽의 튼실한 황실로 자리 잡기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결혼 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유럽 왕실과의 정략결혼에 능했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과 황실 가족

 

합스부르크 왕가의 종교와 문화 정책

 

중세 13세기 후반 루돌프 1세와 함께 성장하기 시작한 합스부르크 왕가는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빈에 수도를 잡게 된 직후, 루돌프 4세는 중세 고딕식 슈테판 대성당을 개축하여 가문의 신앙적 열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 결과, 1469년 교황 파울 2세는 칙서를 내려 빈에 주교 관구를 설치하고 황제에게 주교를 임면하는 권한을 부여해주었다. 따라서 종교개혁 시대 개종의 분위기 속에서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좋은 관계를 계속 유지했고, 1918년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가문으로 남았다.

빈의 슈테판 대성당(1609)

 

1486, 르네상스 시대에 합스부르크가 통치하는 티롤 지역에서 중세 마녀사냥의 교본이 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라는 책이 발간되었다. 이 책의 위력은 실로 엄청나서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앙적 광기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종교개혁 시대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카를 5세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이교도로 파문시켰고, 루터를 따르는 개신교도들을 탄압했다.

그러나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독일 개신교도들을 비롯한 다른 종파나 종교에 대해서 상당히 관용적인 자세를 취했다. 무엇보다도 합스부르크 왕가가 배출한 대표적인 계몽군주인 황제 요제프 2세는 심지어 로마 가톨릭교회의 대대적인 개혁을 감행할 정도로 종교의 자유를 실천했다. 이른바 요제프주의라고 알려진 그의 자유로운 종교 정책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 의해 19~20세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근거지인 빈이 19세기 말의 반유대주의의 대표적인 온상지로 변질된 것은 근대 국가와 시민사회와의 모순관계를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중세 시대 마녀사냥의 교본이 된 마녀의 망치(Malleus Maleficarum)(1486)의 표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문화 정책은 우선 13653, 루돌프 4세가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중세 대학을 세운 문화적 사건이 주목할 만하다. 독일어권 내에서는 최초의 대학으로 탄생한 빈 대학은 중세 시대뿐만 아니라 근대 시대에도 새로운 학문과 지식의 산실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특히 프랑스식 혁명적 계몽주의가 아닌 독일식 개혁적 계몽주의의 탄생 과정에서 빈 대학이 기여한 바는 매우 크다.

또한 합스부르크 가문은 18~19세기 빈 고전파 음악이 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18세기 중반부터 오스트리아를 통치한 합스부르크-로트링엔 가문은 클래식 음악을 비롯한 시민문화를 증진시키는 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예컨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경우, 오스트리아 황실로부터 후원을 지속적으로 받지는 못했지만 계몽군주 황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는 모차르트의 계몽 오페라 3부작, <피가로의 결혼>, <돈조반니>, <마술피리>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때 빈 고전파 음악가들이 이룩한 클래식 음악 문화의 수준은 후세대 음악가들이 결코 오를 수 없을 정도로 매우 높은 수준에 다다랐다.

19세기 중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빈의 도심지 개발사업을 추진하여 빈의 도시 문화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른바 링슈트라세 프로젝트라고 불리는 이 사업을 통해 부르크 궁전을 둘러싼 넓은 빈 공터를 현대식 환상 대로로 개발하고, 그 주변에 중요한 현대식 건물을 건축함으로써 수도 빈을 현대적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빈 도심지 개발사업의 추진 과정에서도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독특한 절충주의 통치전략이 그대로 반영되어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국가와 시민사회가 어우러진 독특한 빈의 도시 문화가 탄생하였다.

링슈트라세 도심지 개발 사업 프로젝트의 계획도 초안(1860)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중문화

 

1918년 제국의 몰락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산은 오늘날 대중문화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오스트리아의 수많은 신문들은 매일 같이 650년 전통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들을 되새김질했고, TV와 영화 매체 또한 역사 다큐멘터리나 다양한 역사물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함 속 어두웠던 순간들을 흥미롭게 재현하는 데 관여해왔다.

그러나 최근 들어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업적을 낱낱이 기록한 인터넷 홈페이지가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2007년부터 오스트리아 연방정부가 <합스부르크의 세계(Die Welt der Habsburger)>라는 제목으로 합스부르크 왕가 홈페이지 구축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불과 2년 만에 훌륭한 성과를 남겼다. 시간, 공간, 인간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세계를 총망라하는 이 홈페이지는 특히 합스부르크 왕가의 주요한 인물들과 문화적 업적, 그리고 주요한 역사적 사건 등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식의 보고로 활용될 만하다.

얼마 전부터는 교실에서 활용할 수 있는 수업 모형까지 개발해서 무료로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이 사용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게다가 상시로 열리는 온라인 전시회는 합스부르크 왕가와 관련된 특정한 주제에 관한 알찬 정보와 볼거리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적극 추천할 만하다. 특히 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추념하기 위해 진행되는 <1차 세계대전과 합스부르크 군주제의 종말>이라는 전시회는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은 바 있다.

합스부르크 왕가를 총망라한 홈페이지 합스부르크의 세계의 일부

 

우리나라의 대중문화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정사보다는 오히려 비사(祕史)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 우선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의 암살에 관한 이야기는 일찍이 1920년도의 주요 일간지에서도 자주 다루어질 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의 초미의 관심사 중 하나였다. 2009년에는 미국의 역사소설가 프레더릭 모턴(Frederic Morton)석양녘의 왈츠가 번역 소개되면서 황태자의 암살, 합스부르크 제국의 붕괴와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주지시켜 주었다.

그리고 2009년에 프레더릭 모턴의 황태자의 마지막 키스가 동시에 번역 출간되면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장남 루돌프 황태자의 비극적인 운명이 우리나라 문화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러한 관심은 결국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가 한국에서 자체 제작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 뮤지컬은 2012년 국내 초연 당시 관객 수 15만 명을 동원하여 흥행 신화를 일궈냈고, 201410월에 다시 공연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또한 201211월 말, 1897522일부터 1901년까지 5년간 오스트리아 빈의 궁정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코레아의 신부(Die Braut von Korea)>라는 발레 작품의 총보가 발견되면서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우리나라의 관심이 더욱더 높아지고 있다.

1897년 빈의 궁정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된 코레아의 신부의 표지

 

그러나 19세기 말 합스부르크 제국에서 공연된 한 발레 작품이 단지 제국의 심상이 반영된 문화제국주의 작품인지, 아니면 실제로 두 나라 사이에 진행된 트랜스내셔널한 문화적, 정신적 교류의 역사적 산물인지는 철저한 분석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이후에야 제국의 문화적 유산의 다양한 예술적 전유에 관한 논의가 다채롭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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