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5. 1. 7. 11:39

류리크 왕가

 

동유럽 평원에 일어선 러시아의 왕조

 

노브고로드 크렘린 소재 러시아 국가 탄생 1000주년 기념비 속 류리크

 

외국어 표기 Rurik(영어), Рюрик

시기 862~ 1598

지역 러시아

 

류리크 왕가의 기원

 

류리크 왕조는 러시아 최초의 국가를 세운 통치자이자, 왕조의 개창자인 류리크의 이름에서 기원했다. 바이킹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류리크는 862년 유럽 러시아의 북서부 지역에 위치한 노브고로드에 정착해 국가를 세웠다. 노브고로드는 오늘날의 연방 행정 주체로는 북서연방 관구에 속하며, 지리적으로 볼 때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연결하는 중간 지점에 있다.

러시아 최초의 통치자 류리크

 

우크라이나의 수도에 소재한 키예프 동굴수도원의 수도승 네스토르가 쓴 러시아 원초연대기(지나간 시절의 이야기)에는 류리크가 러시아에 오게 되는 이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 연대기의 862년 항목에는 슬라브인들이 자신들의 지도자로 류리크를 초대하는 내용이 등장한다. 러시아인들은 류리크에게 러시아의 땅은 광활하고 먹을 것이 많지만 질서가 없다면서 자신들을 통치하며 질서를 잡아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의 요청에 따라 류리크와 그의 두 동생이 러시아 땅을 밟았는데, 큰형인 류리크는 노브고로드에 정착하고, 둘째 시네우스는 벨로오제로, 셋째 트루보르는 이즈보르스크에 정착했다. 안타깝게도 두 동생이 먼저 사망했기 때문에 류리크는 홀로 노브고로드 지역을 지키며 왕조를 이어 나갔다.

노브고로드에 도착한 류리크 삼형제

 

류리크 왕가의 흥망성쇠

 

류리크 왕조는 862년 최초의 국가가 세워진 노브고로드에서 시작해 882년 키예프로 중심지가 이동하면서 키예프 루시의 군주 가문으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1169년 이후에는 상대적으로 북동쪽에 위치한 블라디미르가 왕조의 중심지가 됐고, 14세기 초반인 1326년 이후에는 모스크바가 왕조의 중심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류리크 왕조가 관할하는 지역은 주로 키예프 루시 시기에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가 중세 이후 지역 패권을 장악한 모스크바 공국의 영토로 편입됐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류리크 왕조의 역사는 고대 키예프 루시의 역사와 중세 이후 모스크바 공국의 역사와 맥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민간신앙을 믿고 있던 러시아인들에게 988년 블라디미르 1(980~ 1015)는 기독교를 수용해 세례를 주고 국교로 정함으로써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더욱이 11세기 초반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 야로슬라프 무드르이(1019~ 1054)루스카야 프라브다라는 법전을 편찬하면서 왕조와 국가가 동시에 전성기를 맞이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일된 중앙집권 국가가 아닌 도시국가, 지역 국가의 성격을 띠고 있던 키예프 루시는 11세기 중반 이후 내부 분열의 과정을 겪는다. 즉 블라디미르 1세와 함께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를 이끌던 야로슬라프 1(야로슬라프 무드르이)가 사망한 1054년 이후, 키예프 루시는 점진적으로 작은 지역 공국으로 분열됐다. 국가의 분열은 곧 왕조의 분열과 동일했다. 류리크 왕조가 분열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인 이유는 키예프 루시가 단일한 중앙집권 국가가 아니었던 까닭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류리크 왕조의 권력 계승 원칙이 장자상속제가 아닌 이른바 형제 분할상속제’(rota system)였기 때문이다.

이 원칙은 키예프 공국의 권위가 위협을 받지 않고 굳건할 때는 그나마 유지됐으나, 키예프 공국 통치자의 권위가 약화될 경우에는 분열의 빌미를 제공했다. 따라서 야로슬라프 무드르이 공후가 사망한 이후에는 블라디미르 2(블라디미르 모노마흐, 1113~ 1125)처럼 일시적으로 키예프의 권위를 바로잡은 군주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군주가 전체 키예프 루시를 대표하는 상징적 군주로 인정받지 못했다.

다시 말해서 야로슬라프 무드르이 이후, 즉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와 그의 아들 므스티슬라프 블라디미로비치(1125~ 1132)가 사망한 이후에는 역사가 기억할 만한 키예프 루시의 통치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므스티슬라프 공후의 사망 이후 류리크 왕조의 군주들은 키예프 루시의 와해와 동일하게 각지로 분열된 공국들을 통치하게 됐다.

11세기 중반 이후 분열된 키예프 루시의 공국들은 키예프, 노브고로드, 갈리치아-볼리나, 투로프, 체르니고프, 페레야슬라블, 폴로츠크, 스몰렌스크, 블라디미르-수즈달, 랴잔 공국 등이다. 대부분의 경우 류리크 왕조의 후예들이 이 지역들을 관할했으며, 때로는 서로 경쟁하다가 공국이 하나로 통합되거나 류리크 왕조의 영토가 주변 강대국으로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다.

분열된 국가에서 왕조를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왕조의 결집력이 약해진 13세기 초반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류리크 왕조는 약 240년 동안 그들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가 왕조의 최대 수난기라고 볼 수 있다. 수난을 극복하고 왕조를 일으킨 후손들은 다름 아닌 몽골 칸의 신임을 얻어 새롭게 지역의 강자로 부상한 모스크바의 공후들이었다. 몽골 제국은 러시아의 공후들이 서로서로를 견제하고 자신에게 충성 경쟁을 하도록 유도하는 분할지배 전략을 채택했는데, 이를 역이용한 모스크바의 공후들은 몽골 칸의 신임을 얻어 힘을 축적해 결국 몽골의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1480년 류리크 왕조의 이반 3세는 몽골 칸에 대한 충성을 거부함으로써 몽골의 압제로부터 러시아와 류리크 왕조를 구해냈다. 이반 3세의 아들과 손자인 바실리 3세와 이반 4세는 동유럽 평원의 대부분의 땅을 러시아로 편입하며 국가와 왕조의 최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통치 말기에 폭군의 성향을 보인 이반 4세로 인해 류리크 왕조는 급격하게 몰락하고 만다. 비록 그의 아들인 표도로 1(표도르 이바노비치)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류리크 왕조는 종말을 맞게 됐다.

표도르 1

 

류리크 왕가의 혼인 정책

 

류리크 왕조의 군주들은 유럽 군주 가문과 혼인을 통해 교분을 쌓으려고 노력했다. 러시아 역사가인 베르나드스키는 키예프 루시 시기에 러시아 왕족과 헝가리, 보헤미아, 폴란드, 독일 가문 등 유럽 가문 사이에 이뤄진 혼인의 횟수는 약 40회에 이른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단지 키예프 루시의 시기에 한정돼 있을 뿐이고, 실제로 700년이 넘는 류리크 왕조 전체 통치기를 고려하면 성사된 외국 군주 가문과의 혼인 횟수는 셀 수 없을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류리크 왕조의 군주들은 러시아 공후 가문뿐만 아니라, 서유럽 및 북유럽 군주 가문과 혼인을 통해 자신의 대내외적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 특히 몽골의 지배 시기에 몽골의 칸 가문과의 혼인은 든든한 후원자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러시아 공후들이 가진 일종의 로망이었다.

류리크 왕조를 통틀어 유럽의 군주 가문과 가장 많이 혼인을 체결한 군주는 11세기 초반 키예프의 군주였던 야로슬라프 1세이다. 러시아 최초의 법전인 루스카야 프라브다를 편찬한 야로슬라프 무드르이 공후는 블라디미르 1세와 더불어 러시아의 고대국가, 즉 키예프 루시의 전성기를 이끌던 인물로 평가된다. 그런 까닭에 야로슬라프의 명성이 곳곳으로 퍼지자 유럽의 왕가들은 러시아 왕족과 혼인을 맺고자 했다.

키예프 루시 시기에 유럽의 왕조와 혼인하는 전통은 류리크 왕조가 행하는 흔한 일 중에 하나였지만, 야로슬라프 1세의 통치 시기에는 특히 유럽 군주 가문과 혼인이 상대적으로 많았다. 야로슬라프의 아들 브세볼로드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 모노마흐의 딸과 결혼했고, 아들 이쟈슬라프는 폴란드 국왕 카시미르의 딸과 결혼했다. 야로슬라프의 딸 안나는 프랑스의 국왕 헨리 1세와, 딸 아나스타샤는 헝가리 안드라쉬 1세와 결혼했고, 딸 엘리자베타는 노르웨이 왕 하랄리드 3세와 결혼했다.

 

류리크 왕가의 영토 팽창 정책

 

류리크 왕조의 영토는 초기 노브고로드와 키예프를 중심으로 시작해 동유럽 평원을 중심으로 확장해 갔다. 키예프 루시는 도시와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공국들이 모인 연합체이기 때문에 류리크 왕조의 영토는 곧 키예프 루시의 영토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류리크 왕조의 영토는 11세기 중반 야로슬라프 1세 사망 이후 여러 공국으로 분할됐다가, 몽골의 지배 시기를 거치면서 14세기 초반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통합됐다.

 

15세기 중반 무렵 이반 3(1462~ 1505)와 그의 아들 바실리 3(1505~ 1533)가 통치하던 시기에 류리크 왕조의 영토는 크게 확장됐으며, 16세기 중반 이반 4세 시기에 왕조의 영토는 최대 전성기를 맞았다. 그리고 16세기 말엽인 1581년부터 러시아는 시베리아 정복을 시작했는데,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통해 동쪽으로 진출한 주된 이유는 모피를 구하고자 했던 상업적 목적 때문이었다. 모피는 러시아 국내 시장뿐만 아니라 유럽 시장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특히 검은담비의 모피는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이렇듯 러시아가 시베리아를 정복하면 할수록 류리크 왕조의 영토는 확장됐다고 할 수 있다.

11세기 무렵 키예프 루시의 영토

11~12세기 키예프 루시의 영토(101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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