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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romanic dynasty

Bollnow 2025. 1. 7. 11:19

코트로마니치 왕가

 

중세 보스니아의 마지막 왕가

 

외국어 표기 Kotromanic dynasty(영어), Котроманићи

시기 1250년경 ~ 1463

지역 보스니아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혈통

 

코트로마니치 왕가는 약 1250년부터 1463년까지 보스니아를 통치하던 통치 가문이었다. 그들 코트로마니치 왕가는 처음에는 반, 이후에는 왕의 칭호로 보스니아를 통치했으며, 1459년 이후에는 세르비아에서와 마찬가지로 데스포트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혈통과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초기 보스니아의 반(통치자)이었던 쿨린, 스테판, 니노슬라브 등이 이 가문 출신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시조로 간주되는 프리예즈다는 니노슬라브와 인척 관계였던 것은 확실한데, 가까운 친척이었는지 아니면 먼 친척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인척 관계에 대한 모든 사실은 16세기 두브로브니크의 역사학자였던 마브로 오르빈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데, 자의적인 내용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시작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통치자 중 이름이 명확히 알려진 맨 처음 통치자는 프리예즈다이다. 그는 1233년 니노슬라브의 고위 관리로 언급되었는데, 그때부터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직계 후손들이 비교적 명확히 기록되었다.

13세기 중엽의 보스니아는 헝가리의 지배가 비교적 확고했으며, 프리예즈다는 헝가리의 봉신으로서 보스니아를 통치했다. 보스니아 분할 통치 때 얻은 보스니아의 중부 지역은 프리예즈다 가문의 통치 지역으로 남았다. 프리예즈다에게는 스트예판, 프리예즈다(2), 부크 등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스트예판과 프리예즈다(2)1290년경 보스니아의 반(Ban)으로 언급되는 것을 보아 아버지의 통치 지역을 분할하여 다스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부크에 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1290년 이후 프리예즈다(2)에 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이 되지 않고 스트예판에 대해서만 기록이 되어 있으며, 두브로브니크 작가들은 그를 코트로만이라 칭하였다. 스트예판의 또 다른 이름 코트로만에서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명칭이 생겨났다. 후세의 몇몇 사학자들은 그의 이름에 붙는 접미사 mann’에 착안해 그를 독일계 사람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문장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문장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문장은 파란색의 방패를 은색이 가로지르는 형태를 띠고 있으며, 좌우에 3송이의 황금색 백합이 있다. 위에는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왕관을 쓴 기사의 머리가 있다. 문장에 그려진 백합은 보스니아 토종의 백합을 상징한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왕위 계승

 

15세기 초 보스니아 영토

 

스트예판은 1284년 세르비아의 왕 스테판 드라구틴의 딸 옐리사베타와 결혼하였다. 그 결혼으로 네마니치 왕가와 코트로마니치 왕가는 인척 관계를 맺었으며, 이를 근거로 트브르트코 1세는 1377년 밀레쉐바에서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스트예판과 옐리사베타 네마니치 사이에서 태어난 후손들로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마지막 왕 스트예판 토마쉐비치까지 왕실이 이어졌다.

중세 보스니아에서 왕위계승 순위는 분명하게 정해지지는 않았으나, 반의 즉위와 왕위에 오른 모든 통치자들, 그리고 군주의 자리를 노리던 모든 사람들은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사람들이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는 단 한 명의 사람은 자신의 남편 스트예판 다비샤 왕의 뒤를 이어받은 옐레나(재위 1395~ 1398) 여왕이었다.

마브로 오르빈의 기록에 의하면, 스트예판 오스토야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결혼 관계에서 태어났지만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후손으로 1398년 보스니아의 왕으로 등극할 때 주요 영주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스트예판 오스토야의 두 명의 아들인 스트예판 오스토이치(재위 1418~ 1420), 스트에판 토마쉬(재위 1443~ 1461)와 한 명의 손자 스트예판 토마쉐비치(재위 1461~ 1463)가 보스니아의 왕위에 올랐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방계 혈통

 

파바오 라디쉬치는 코트로마치니 가의 방계로서 보스니아를 떠나 스트예판 오스토야(재위1398~ 1404)의 통치 시절 두브로브니크에서 반오스토야 활동을 하면서 살았다. 따라서 스트예판 오스토야는 그를 보스니아로 송환하거나 두브로브니크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였다. 두브로브니크인들은 그를 '()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혈통'으로 여겨 흐르보예 북치치에게 새로운 왕을 선출할 때 그를 고려할 것을 추천하였다.

북 바니치 코트로마니치 역시 1422~ 1428년 사이에 언급되는데 그는 두브로브니크에서 두브로브니크 정부가 보조하는 약간의 도움으로 살았다. 보스니아의 트브르트코 2세는 그를 아주 위험한 인물로 간주하여 두브로브니크 정부에 인계해줄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결혼 관계

 

코트로마니치 왕가는 네마니치 가는 물론 인근의 다른 통치 가문 및 영주 가문과도 결혼으로 인척 관계를 맺었다. 프리예즈다의 성명 미상의 딸은 스트예판 바보니치에게 시집을 갔으며, 그 결혼을 통하여 코트로마니치 왕가는 슬라보니아의 크네즈 블라가이스키와 슈타에르스카 지역의 오르텐부르고바쯔 가문과 연결되었다.

이미 13세기 말에 코트로마니치 왕가와 비르비르 지역의 슈비치 가 간에는 결혼을 통해 인척 관계가 맺어졌다. 1329년 스트예판 2세 코트로마니치는 폴란드 쿠야비 통치자였던 카지미르의 딸 옐리사베타와 결혼했는데, 이 결혼으로 헝가리 왕 카를로 안주빈스키와 먼 인척 관계가 되었다. 이들의 딸인 옐리사베타는 1353년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왕 루도비크 1세에게 시집을 갔다.

이후 옐리사베타는 헝가리의 섭정자로서 1382~ 1386년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결국은 봉기를 일으킨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에게 잡혀 노비그리드의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옐리사베타의 딸인 야드비가는 폴란드 왕 블라디슬라브 야겔과, 또 다른 딸 마리야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이었던 지그문드 룩셈부르그와 결혼하였다.

스트예판 2세 코트로마니치의 또 다른 딸 카타리나는 1362년 헤르만 1세 쩰스키 백작과 결혼하였다. 이 결혼으로 1427년 트브르트코 2세와 헤르만 2세 쩰스키 간에 협약이 맺어지게 되었다. 만약 트브르트코 2세가 후손 없이 사망할 시 보스니아의 왕위를 헤르만 2세 쩰스키가 이어받는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협약의 내용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스트예판 2세 코트로마니치의 형제인 블라디슬라브는 유라이 슈비치의 딸 옐레나와 결혼하여 21녀를 두었는데, 딸 마리야는 1351년 헬펜스타인 가의 울리히와 결혼하였다.

트브르트코 1세는 1374년 불가리아 황제 스트라찌미르의 딸 도로테야와 결혼하였으며, 그의 아들 트브르트코 2세는 고랸스키 가의 도로테야와 결혼하였다.

스트예판 오스토야는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일원인 것은 확실하지만 어느 결혼 관계에서 출생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스토야의 첫 부인은 비타차, 두번째 부인은 쿠야바, 세번째 부인은 옐레나였는데, 옐레나는 두 번째 부인 쿠야바의 아들 스트예판 오스토이치가 왕위에 오른 후(1418) 궁에서 쫓겨났다. 오스토야의 또 다른 아들이 스트예판 토마쉬인데 어느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코트로마니치 왕가의 쇠퇴와 멸망

 

코트로마니치 왕가는 보스니아의 멸망과 함께 곧 사라졌다. 스트예판 토마쉐비치와 그의 삼촌 라디보이는 1463년 튀르크인들에 의해 처형되었으며, 스트예판 토마쉬의 어린 자식들인 지기스문드와 카타리나는 튀르크로 끌려가 이슬람으로 개종하였다. 지기스문드는 이후 이스하크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소아시아의 산자크-베그로 언급되었다. 스트예판 토마쉐비치의 미망인 마라는 남편의 처형 후 달마티아로 도망하여 한동안 두브로브니크에 살았으나 1466년 이후 튀르크로 떠났다.

스트예판 토마쉐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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