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ankovic dynasty
브란코비치 왕가
중세 세르비아의 마지막 왕조
유일하게 남아있는 부크 브란코비치의 초상화
외국어 표기 Brankovic dynasty(영어), Бранковићи
시기 1427년 ~ 1459년
지역 세르비아
브란코비치 왕가의 기원
브란코비치 가는 중세 세르비아의 영주 가문으로서 세르비아를 통치한 가문이기도 하다. 브란코비치 가의 시조는 밀루틴 및 스테판 데찬스키 통치 시절 귀족이었던 믈라덴이다. 믈라덴은 아들 브란코 믈라데노비치와 딸 비토슬라바를 자녀로 두었는데, 브란코비치 가라는 명칭은 두브로브니크의 역사학자 마브로 오르빈(1601년)이 브란코 믈라데노비치의 이름에서 따와 사용한 것에서부터 유래한다.
브란코 믈라데노비치에게는 큰아들 니콜라 라도냐와 막내 아들 부크 브란코비치가 있었다. 니콜라 라도냐는 아내와 두 딸이 죽은 후 아토스 산에 들어가 살았다. 부크 브란코비치는 라자르 공과 밀리짜의 딸 마라와 결혼했는데, 밀리짜는 부칸 네마니치의 고손녀였다. 네마니치 가와의 혈연 관계는 이후 브란코비치 가가 세르비아를 통치하는 데 정당성을 인정 받을 수 있었던 한 요소였다.
라자르 공을 예수로, 부크 브란코비치를 유다로 묘사한 그림
아담 스테파노비치 작, 1870년
부크 브란코비치는 1389년 코소보 전투에 세르비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했지만 민중들의 뇌리에서 그는 배신자로 남게 되었다. 실제로 부크가 라자르 공을 배신하지는 않았지만, 라자르 공이 전장에서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부크가 살아옴으로써 세르비아 민중들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 찍어 노래 불렀던 것이다. 부크는 세 아들(그르구르, 주라즈, 라자르)이 있었는데 그중 주라즈 브란코비치가 왕위를 물려받아 세르비아의 통치자가 됨으로써(1427년), 브란코비치 가가 혈통이 끊어진 라자레비치 가를 대신하여 세르비아의 통치 가문이 되었다.
브란코비치 왕가 통치 당시의 상황
브란코비치 왕가가 세르비아를 통치하던 시기는(1427년 ~ 1459년)는 이미 중세 세르비아의 국운이 쇠해 멸망하는 시기였다. 이와는 반대로 오스만 튀르크제국은 발칸반도로 세력을 왕성하게 확장해 나갔다. 주라즈를 포함한 브란코비치 가의 모든 통치자들은 오스만제국의 끊임없는 위협 때문에 오스만제국과 헝가리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려 노력했다. 오스만제국과 군신 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 동시에 헝가리와도 군신 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하지만 심정적으로 오스만제국보다는 헝가리와 더 편안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헝가리 지역에 많은 재산을 소유하기도 했다.
주라즈는 1453년 메흐메트 2세가 짜리그라드 정복 전쟁에 나설 때 그의 봉신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짜리그라드 다음에는 자신이 다스리고 있는 세르비아가 공격을 당할 것을 알고 헝가리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실패, 결국 오스만과 다시 한 번 군신 관계를 확인하고 평화 협상을 맺어야만 했다. 주라즈의 사망 후(1456년) 가족 간에 생긴 불화와 다툼은 세르비아의 멸망을 앞당기는 촉진제 역할을 했다.
브란코비치 왕가의 의의
브란코비치 왕가는 중세 세르비아의 마지막 통치 가문이었다. 1459년 수도 스메데레보가 오스만 튀르크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로써 1389년 코소보 전투 후 근근이 명맥을 잇던 세르비아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완전히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로 편입됨으로써 긴 긴 암흑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브란코비치 왕가의 스메데레보가 함락됨으로써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살해되고 잡혀가거나 인근 외국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스메데레보가 함락되던 1459년에만 오스만에 의해 6만여 명의 세르비아인들이 잡혀갔다.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 중 일부는 두브로브니크 근처의 아드리아 해안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더 많은 사람들은 헝가리 지역으로 피난을 떠났다. 브란코비치 가 사람들은 오늘날 노비 사드 근처의 프루쉬카 산에 많은 수도원을 짓고 재산을 하사함으로써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적·종교적 삶의 중심지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