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ukanovic dynasty
부카노비치 왕가
반비잔틴적 성격을 띤 왕가
부카노비치 왕가의 시조 부칸
외국어 표기 Vukanovic dynasty(영어), Вукановићи
시기 1084년 ~ 1166년
지역 라쉬카, 세르비아
부카노비치 왕가 성립 과정
부카노비치 왕가에 대한 명칭은 동시대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며 후세의 역사가들이 왕조의 시조인 부칸(Вукан)의 이름에서 따와 붙인 명칭이다. 부카노비치 왕가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단지 『두클랴 승려의 연대기』와 『안나 콤네노스의 기록』 등에서 단편적으로 볼 수 있을 뿐이다. 이들 기록물들은 비잔틴과 헝가리의 발칸반도에서의 주도권 다툼을 주로 서술하고 있으나 부차적으로 세르비아 지역과 그 통치자들을 기록해 놓았다.
아드리아 해안에 자리 잡고 있던 두클랴는 당시 비잔틴의 입장에서는 순종적이지 않고 대항하는 아주 골치 아픈 지역이었다. 비잔틴은 이러한 문제의 원천이 된 두클랴를 정벌하기 위해 몇 차례 전쟁에 나섰지만 성공하지 못한 채 팽팽한 긴장 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두클랴의 통치자 미하일로는 비잔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 1078년 왕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뒤를 이은 그의 아들 보딘 왕은 넓은 영토를 차지한 강성한 국가로 성장시켰다. 보딘 왕은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를 1083년 ~ 1084년경에 점령하고 그곳에 두 명의 통치자를 세웠는데, 그들이 바로 부칸과 마르코였다. 그들은 형제로서 주판의 칭호를 가졌다.
부카노비치 왕가와 비잔틴제국
두클랴 왕 보딘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부칸이 다스리던 세르비아가 비잔틴 반대 세력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부카노비치 왕가의 통치가 시작되었다(1084년). 부카노비치 왕가의 군주들은 헝가리와 동맹을 맺고 끊임없이 반비잔틴 정책을 펴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비잔틴으로부터 종속적인 위치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들은 비잔틴과 헝가리의 관계가 위기에 빠지거나 전쟁에 돌입하면 항상 반비잔틴적 입장을 고수했다. 이러한 세르비아의 태도로 인해 비잔틴의 황제들은 분노를 표출하고 세르비아를 정벌하기 위한 원정을 단행했다.
비잔틴제국은 부카노비치 왕가의 군주들을 통제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무력으로 위협하거나 충성 서약 강요, 투옥과 감금, 약탈, 왕위 교체 및 주민들의 강제 이주 등을 통해 부카노비치 왕가 군주들을 통제했다.
부카노비치 왕가의 통치
1090년 발칸반도
끊임없이 영토를 공격하며 비잔틴제국을 괴롭히자 알렉시예 1세 콤네누스 황제는 직접 출정하여 부칸을 궁지로 몰아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부칸은 알렉시예 1세가 돌아가자 다시 비잔틴을 공격, 약탈했다. 비잔틴의 알렉시예 1세는 이러한 세르비아의 공격에 또 다시 출정했고 부칸은 휴전을 제의했다. 부칸과 알렉시예 1세는 1094년 리플랸에서 협상을 벌였으며, 조약 체결의 대가로 부칸은 자신의 조카 우로쉬와 스테판 부칸을 포함한 스무 명의 인질을 비잔틴에 보내야만 했다.
부칸의 사망 후 그의 조카인 우로쉬 1세가 대주판 지위를 이어받았다. 우로쉬 1세는 통치 초기 인척들의 비협조로 인해 불안정한 권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으며 한때 권좌에서 축출되기도 했다(1123년). 하지만 두클랴의 조르제의 도움으로 복귀할 수 있었으며, 이때부터 권좌를 더욱 공고히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1145년경 우로쉬 1세의 큰 아들 우로쉬 2세가 권좌를 이어받았다. 1147년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이 이오니아 해의 비잔틴 지역을 공격하자 우로쉬 2세는 헝가리 게자 2세하의 반비잔틴 동맹에 참가했다. 1149년 우로쉬 2세가 비잔틴 지역을 공격하자 1150년 비잔틴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는 군사를 이끌고 세르비아 공격에 나섰다. 이 싸움에서 패한 우로쉬 2세는 마누엘 1세에게 항복했다.
마누엘 1세는 향후 비잔틴제국이 전쟁에 나갈 때 세르비아가 지원 부대를 더 많이 파견한다는 조건으로 우로쉬 2세를 권좌에 그대로 두었다. 우로쉬 2세가 마누엘 1세 콤네누스의 봉신이 된 것이다. 우로쉬 2세는 1155년 헝가리의 지원을 받은 데사에 의해 권좌에서 쫓겨났으나, 비잔틴황제의 지지에 힘입어 권좌에 복귀할 수 있었다.
부카노비치 왕가의 권좌는 1160년대 비잔틴 황제에 의해 여러 번 교체되었다. 1162년 비잔틴은 세르비아의 주판 자리에 벨로쉬를 앉혔다. 권좌에 오르기 몇 년 전에 헝가리에서 돌아온 벨로쉬는 권좌에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양위를 결정하고는 헝가리로 되돌아갔다.
마침내 우로쉬 2세의 막냇동생인 데사가 비잔틴제국에 의해 세르비아의 주판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데사는 권좌에 오르자 마자 반비잔틴적 입장을 나타냈다. 그는 비잔틴이 요청한 지원 부대의 파병을 거절하고, 비잔틴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군은 비잔틴 황제가 아닌 헝가리 왕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했다. 또 당시 비잔틴과 적대적 관계였던 독일에서 자신의 신붓감을 찾았다. 비잔틴 황제는 몇 번에 걸쳐 데사에게 해명과 설명을 요구했지만 제대로 응하지 않자 그를 짜리그라드에 구금해 버렸다.
1165년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비잔틴 황제는 부카노비치 왕가의 방계 친척인 자비다의 큰아들 티호미르에게 대주판의 자리를 위임했다. 대주판의 형제들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영토 일부를 위임 받아 통치했는데, 티호미르의 막냇동생인 스테판 네마냐도 영토의 일부를 받음으로써 네마니치 가의 시작을 알릴 수 있었다.
부카노비치 왕가의 결혼
부카노비치 왕가의 결혼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많지 않다. 1129년 우로쉬 1세의 딸 옐레나가 헝가리 왕 벨라 2세가 되는 왕세자와 결혼했으며, 그 사이에 게자 2세가 생겨났다는 정도로 알려져 있다.
부카노비치 왕가의 통치 의의
부카노비치 왕가는 블라스티미로비치 왕가가 멸망한 후 100여 년 뒤에 다시 등장한 세르비아 왕가이다. 왕가의 시조인 부칸부터 시작해 마지막 군주였던 데사까지 모든 군주들은 당시 비잔틴의 영토였던 코소보 방향으로 영토를 확장을 시도했다. 군주들은 비잔틴의 종속에서 벗어나 보다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헝가리와 동맹을 맺는 등 끊임없이 노력했다.
부카노비치 왕가는 고대 세르비아의 블라스티미로비치 왕가와 중세 네마니치 왕가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했다. 네마니치 왕가의 시조 스테판 네마냐의 형인 티호미르가 부카노비치 왕가에서 대주판의 지위에 오름으로써 네마니치 왕가는 햇빛을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