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5. 1. 7. 10:39

스페인 부르봉 왕가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유일한 부르봉 왕가

 

스페인 부르봉 가문 문장

 

외국어 표기 Bourbon(영어), Borbón

시기 1700~ 1931, 1975~ 현재

지역 스페인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기원과 방계

 

펠리페 5

 

부르봉 왕가는 14세기 카페 왕가의 로베르 드 클레망에서 기원하고 있다. 부르봉 왕가는 카페 왕가의 분가로서 앙리 4세가 1598년 프랑스의 왕위를 계승하며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는 단절되었으나,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는 현재에까지 이르고 있다. 스페인에 부르봉 왕가가 들어온 것은 결혼으로 스페인과 부르봉 왕가가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펠리페 3세의 첫째 딸이자 펠리페 4세의 누나였던 안 도트리슈가 부르봉 가문의 루이 13세와 결혼해서 루이 14세를 낳았으며, 루이 14세의 부인인 마리아 테레사 역시 스페인의 펠리페 4세의 딸이었다. 마리아 테레사는 스페인의 마지막 왕인 카를로스 2세의 이복누이였으며, 향후 스페인 왕위를 잇는 부르봉 왕가의 펠리페 5세는 마리아 테레사의 손자였기 때문에 스페인의 왕위계승 주장이 가능했다. 결국 카를로스 2세가 두 번의 유언장 취소 후 마지막으로 선택한 계승자는 부르봉 가문의 필리프(펠리페 5)였다. 그러나 주변국들은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한 펠리페 5세는 이 주변국들과 왕위계승 전쟁(1702~ 1713)을 치러야 했다.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이 연합하여 스페인-프랑스 동맹과 전쟁을 벌인 전쟁에서 펠리페 5세는 위트레흐트 조약(1713)으로 왕위계승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펠리페 5세의 왕위를 인정받는 대신, 스페인은 요충지들을 양도해야 했으며, 이 조약으로 영국으로 넘겨야 했던 지브롤터는 아직도 양국간 영토 분쟁지가 되고 있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에도 중앙집권 성격이 강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중앙정부에 계속 저항한 스페인 내부의 카탈루냐-아라곤 공국은 1716년 신계획령을 통해 자치권이 폐지되었고, 법과 행정이 카스티야에 종속되었다.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장 알로 작품

 

스페인 부르봉 왕가로부터 다양한 방계 가문이 생겨났다. 펠리페 5세의 막내아들인 펠리페 왕자로부터 부르봉-파르마 공가가 파생했다. 카를로스 3세의 둘째 아들인 페르난도 왕자로부터는 부르봉 양시칠리아 가문이 나왔는데 그들의 자손인 페르난도 1세와 페르난도 2세가 나폴리와 양 시칠리아를 다스렸다. 카를로스 4세의 막내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로부터 부르봉-카디스-세비야 가문이 나왔다.

또한 카를로스 4세의 차남이자, 페르난도 7세의 동생인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도르로부터는 카를리스트의 가문이 시작되었다. 전통주의자들은 페르난도 7세가 사망하자 페르난도 7세의 딸 이사벨 여왕 대신 카를로스 마리아 이시도르를 카를로스 5세로 추대하며 1차 반란을 일으켰으며, 연이어 카를로스 6, 카를로스 7세를 추대하면서 19세기 내내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발전과 쇠퇴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문을 연 펠리페 5(재위 1700~ 1724, 1724~ 1746)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 루이 14세의 손자이다. 후손이 없이 사망한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마지막 왕, 카를로스 2세를 계승했다.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스페인 왕위계승 조건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왕을 겸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프랑스의 부르봉 왕가와 별도로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다. 펠리페 5세는 스페인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는 영국, 네덜란드, 포르투갈과 왕위계승 전쟁을 치른 후에야 스페인 왕위를 인정받았다.

페르난도 6(재위 1746~ 1759)는 왕세자 시절 충분한 제왕교육을 받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왕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무장 평화정책을 펼쳤으며, 중립과 중재 역할을 자처했다. 또한 174810월 체결한 아헨 조약을 계기로 모든 전쟁을 종식시켰다. 그의 집권하에 스페인은 경제적으로도 안정을 되찾았다.

카를로스 3(1759~ 1788)는 대표적인 계몽군주로 경제적으로 국내 상업을 활성화시키고 수출을 육성했으며, 도시정책을 통해 마드리드의 근대화에 힘썼다. 또한 예수회가 아메리카에서 교황의 편에 서자, 예수회를 추방하는 등 교권에 대해 왕권의 우위를 확립했다. 카를로스 3세는 선왕의 중립정책 대신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아메리카 독립군에게는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는 등 대외정책에서 균형정책을 채택했다.

카를로스 4(재위 1788~ 1808)는 왕비 마리아 루이사와 그녀의 정부인 고도이에게 정치를 맡기고 시계수리 등의 취미활동에 몰두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사촌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뒤늦게 대불 강공책을 폈으나 대불 전쟁에서 패하면서 결국 나폴레옹의 뜻대로 움직이게 되었다. 또한 1805년 트라팔카 해전에서 영국에게 대패하여 페르난도 6세 때 복구했던 해군력을 모두 상실하기도 했다. 나폴레옹의 부름으로 프랑스로 간 카를로스 4세는 결국 스페인 왕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사망하였다.

카를로스 4세 가족

고야의 작품

 

페르난도 7(재위 1808, 1814~1833) 시기는 자유주의와 절대주의의 반목이 계속된 시기이다. 빈체제의 지지를 받은 페르난도 7세는 반()자유주의 법령을 채택하고 폭정과 압정을 시작하였으며, 예수회의 귀환을 승인하였다. 특히 그는 살리카 법을 폐지하여 딸 이사벨 2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는데, 이 때문에 동생인 돈 카를로스 추종 세력들은 19세기 내내 3차례에 걸쳐 카를로스 전쟁을 일으켰다.

이사벨 2(재위 1833~1868)는 대체로 자유주의 시기였으나 온건-급진-연합 등 다양한 자유주의 정부를 거쳤다. 내각도 60차례나 바뀌는 등 정권은 혼란스러웠으나 결국 1868년 프림 장군의 9월 혁명으로 망명길을 떠나게 되었다.

알폰소 12(재위 1874~1885)1874년 마르티네스 캄포스 장군의 군사 쿠데타로 스페인의 제1공화국이 무너지자 스페인으로 귀국하였다. 왕정복고의 주도자였던 카노바스는 영국식 양당 체제로 알폰소 12세 치세기를 이끌어나갔다. 그는 입헌군주제의 군주로서 중립적인 입장에서 통치하였으며 중재자로서 주로 활동했다. 따라서 짧았던 그의 통치기는 20세기 스페인 역사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와 번영의 시기로 평가받는다. 특히 스페인은 1870년부터 1900년까지 활발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알폰소 13(재위 1886~1931) 통치기인 1898년 스페인은 마지막 식민지인 쿠바를 잃었다. 알폰소 13세도 선왕처럼 양당제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러나 1909년 모로코 파병 문제로 바르셀로나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돌입하자 군대를 보내 무차별 진압하는 비극의 일주일사건으로 비화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보수당의 수장 마우라가 해임되었다.

사회의 혼란이 이어지는 가운데 1923년 프리모 데 리베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알폰소 13세는 그를 총리로 임명했다. 하지만 세계경제공황과 리베라 장군의 실정으로 스페인의 위기가 고조되자 알폰소 13세는 1930년 리베라를 해임하였다. 이듬해인 1931년 지방선거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하자 알폰소 13세는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페인은 즉시 제2공화국을 선포했다.

스페인 내전을 거쳐 내전의 승자인 프랑코 장군이 장기 독재집권을 시작하였다. 프랑코 장군 사후 법에 따라 알폰소 13세의 손자인 후안 카를로스 1(재위 1975~ 2014)가 후계자로 왕정을 다시 시작하였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수아레스 수상에게 지시하여 스페인을 왕정국가가 아닌 서구 민주주의 국가로 이행하는 데 성공하였다. 국민의 압도적인 다수가 이를 지지했으며 현재의 의회군주제의 정치 체제가 헌법에 명시되었다.

1981년 테헤로 중령이 의회를 장악하며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직접 TV에 출연하여 군 최고통수권자로서 군대의 복귀를 명령하였으며, 이로 인해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다시 한 번 스페인 민주주의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현재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왕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인 펠리페 6(재위 2014~ 현재)이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와 계몽주의

 

18세기 유럽의 중심 이념 중 하나는 계몽주의였다. 16~17세기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이, 뉴튼에 이르기까지 과학 혁명을 거치면서 기계론적인 세계관이 자연을 해석했다. 그리고 이 세계관은 사회를 해석하는 도구로도 쓰이기 시작했다. 계몽주의를 이끈 학자들은 이성으로 우주의 법칙을 파악하듯 인간과 인간사회의 구조를 파악하여 변화를 이해하고 개혁했으며, 사회를 향상시키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살롱과 커피숍은 계몽사상의 전파 장소였다. 그곳에서 자연법, 사회계약 등의 개념이 대중화되었다. 따라서 이들 계몽사상가들은 성격상 철학자라기보다 평론가에 가까웠다. 계몽주의자들의 비판 대상은 절대왕정과 종교였다. 계몽주의 사상은 프랑스 혁명에까지 영향을 주고 결국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스페인의 계몽주의는 성격이 달랐다. 한 세기 이상 유럽에서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스페인의 계몽주의자들은 연약한 화초라고 불렸으며, 항상 반동세력들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다. 스페인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에 대한 일정 부분의 비판은 있었으나, 절대왕정을 비판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비록 밀수한 볼테르, 루소 등의 저서를 읽고 국민주권, 인민의지 등의 수사를 사용했으나 그 정신만큼은 보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프랑스 계몽주의와 스페인의 계몽주의 사이의 근본적인 간극은 넓었다. 스페인 계몽주의자들은 구체제(앙시앙레짐) 타파 같은 근본적인 사회혁명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주된 관심사는 현재의 개혁에 불과했다. 그들의 지상 목표는 국가를 근대화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스페인 계몽주의자들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나 러시아의 표트로 대제 같은 계몽전제군주상을 꿈꾸었다.

따라서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왕들은 큰 어려움 없이 계몽주의 수사로 국가를 개혁할 수 있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를 시작한 펠리페 5세는 처음 스페인 마드리드에 들어왔을 때 도시의 후진성에 적잖이 놀랐다. 그의 치세기는 조부였던 루이 14세의 프랑스식 모델을 따라서 각종 학술원이 건립되는 등 문화적인 부흥을 준비한 시기이기도 했다. 1712년에 설립된 스페인 왕립도서관이나 1714년 왕립학술원이 그 실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1714년 설립된 왕립학술원은 스페인 지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곳에서 출판된 책은 종교재판소의 검열에서 제외되었다. 또한 펠리페 5세는 1721년 마드리드 테피스트리 공장을, 1726년에는 세비야에 담배공장을 세우기도 했다.

페르난도 6세의 통치 방향 역시 선대에서 비롯된 전쟁의 요소들을 일소하는 대신 왕국의 개혁에 힘썼다. 그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 이후 요구되던 재건정책을 실시하여 재정, 통신의 근대화를 가시화했다. 이로 인해 스페인 국내의 경제 회복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페르난도 6세는 재정 건전화를 위해 174910월 토지대장 조사위원회를 창설했으며, 토지분배를 목적으로 새로운 토지대장의 작성도 지시했다. 또한 1746년 설립된 전국경제우애협회를 통하여 농업, 산업, 무역에서 중요한 발전을 이루었다. 한편 산 페르난도 왕립 예술학술원을 비롯하여 식물원과 천문관측소와 같은 학문 기반시설을 설립하면서 18세기 중반의 번영을 위한 기틀도 마련할 수 있었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계몽군주는 카를로스 3세였다. 나폴리 왕이었던 카를로스 3세는 형제인 페르난도 6세가 후사없이 사망하자 1759, 43세의 나이로 스페인의 왕위를 계승하였다. 카를로스 3세는 나폴리에서 재상을 맡았던 에스킬라체를 데려와 스페인의 사회개혁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자 했다. 펠리페 5세가 그랬듯이 에스킬라체 역시 마드리드의 후진성에 기겁했다. 그는 마드리드를 당대의 유럽도시처럼 개혁하고자 도시정책을 폈다. 스페인은 여전히 농업경제였으나 농업생산물이 화폐로 바뀌는 곳은 도시였고, 인구의 20%가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인구 5,000명 이상의 도시가 100개 이상인 도시 사회였다.

그러나 마드리드의 도시민들은 도시의 근대화에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길의 뾰족한 돌을 제거하려고 해도 반발했고, 하수도와 가로등 설치도 반대했다. 에스킬라체가 외국인이라는 것이 반대의 가장 큰 이유였다. 실제로 1766년 에스킬라체에 반대하는 민중폭동으로 250명의 사상자를 냈음에도 불구하고, 카를로스 3세가 에스킬라체를 나폴리 대사로 임명해 돌려보내자 즉시 폭동이 사그라들었다.

이듬해인 1767년 카를로스 3세는 왕권 지상주의자들이자 계몽주의로 무장한 행정 엘리트들을 내세워 에스킬라체 반란의 배후로 예수회를 지목하고 그들을 추방했다. 추방의 실제 이유는 예수회의 아메리카 식민지 활동이 자신에게 충성하기보다는 교황의 이익에 충실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는 왕권이 교권을 제압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예를 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페인 부르봉 왕가는 계몽주의 시기를 제외하면 교회와 대체로 공생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 이후 다시 왕권과 교권은 유착되었다.

카를로스 3

고야의 작품

 

한편 카를로스 3세가 친척에게 썼던 편지를 보면 그가 실제로 계몽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는지는 의심스럽다. ‘호화로운 훈장을 차고 있더라도 군중 앞에 설 때면 허름한 외투로 감춰야 한다.’라는 등의 표현은 그의 속내가 계몽군주라기보다 계몽군주 이미지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야의 그림에서도 카를로스 3세는 투박한 사냥복을 걸치고 있다. 그러나 그림 속에서 나타나는 카를로스 3세의 소박하고 따뜻한 모습은 계몽군주인 카를로스 3세를 보는 고야의 시선을 잘 드러내고 있다.

최고의 마드리드 시장이라는 별명답게 프라도 미술관이나 식물원, 시벨레스 분수, 넵튠 분수, 알칼라 문, 스페인 왕궁 등 오늘날까지도 마드리드를 장식하고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수많은 건축물들과 도로 등이 카를로스 3세 시기에 개중축 또는 완공된 것들이다. 국내 상업과 운송에 필요한 돌로 포장된 도로와 다리들도 건설되었다. 도시의 조명, 상하수도 시설, 쓰레기 수거 시스템 등 대부분의 도시정책은 카를로스 3세 시기에 개혁된 것이다. 그래서 후안 카를로스 1세 전 국왕은 마드리드 중심의 솔 광장에 카를로스 3세의 동상을 세워서 현재까지도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두 개의 왕가, 두 개의 전쟁, 두 개의 스페인

 

스페인은 근대 이후 두 개의 왕가가 이어졌다. 첫 번째는 합스부르크 왕가이며 두 번째 왕조는 현재의 부르봉 왕가이다. 두 외국 왕가가 스페인에 남긴 족적은 매우 다르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대체로 비타협적인 가톨릭 종교관을 갖고 유럽에서 헤게모니를 좌우했다면, 부르봉 왕가는 계몽 전제군주, 전제군주, 자유주의 군주, 의회군주제 군주 등 유럽사의 흐름에 따라 그 성격이 좌우되곤 하였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부터 내려온 가톨릭 전통주의는 스페인 부르봉 왕가 시기에 압도적이지는 않았으나 강력한 흐름으로 존재했다. 스페인이 독특한 계몽주의를 받아들여 문화변용이 일어난 것은 한 세기 이상 고립된 스페인의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서 가능했다.

19세기 중반 이전, 농촌사회였던 스페인이 겪은 도시화는 산업사회의 도시화와 다른 것이었다. 근대적 의미의 대중, 즉 공장 노동자가 아니었던 이들 대중들은 사회의 하층 계급을 형성했다. 소위 악자의 후예로서 외국으로부터는 빈둥거리는 수다쟁이의 사회라는 비아냥을 들었던 이들을 마호그리고 마하라고 칭했다. 유럽의 계몽주의에서 근대성은 민족 전통을 훼손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근대성이 스페인의 전통적 정체성을 강조했고, 민중의 전통은 근대성을 훼손했다.

평민인 마호와 마하의 옷차림을 스페인 궁중의 토착 귀족들이 따라 입기 시작하고, 스페인 부르봉 왕가의 왕족들의 복식 역시 이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도 일례이다. 스페인 민중들은 근대성에 저항했고 도시화 정책에 격렬히 저항하기도 했다. 심지어 스페인에서는 계몽주의자들조차 왕정과 구체제를 지키려는 사람들이었다. 스페인 계몽주의자들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이렇게 외쳤다. “계몽주의로부터 우리 왕을 보호하자!”

따라서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구체제로부터 스페인 민중을 해방시키겠다고 침입했을 때 스페인 민중들이 벌인 독립전쟁은 스페인의 부르봉 왕가를 지키겠다는 복고적인 신념에서 기인했다. 그들이 게릴라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해방군으로 온 프랑스군에 맞선 일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스페인 민중들은 자국의 왕과 자신들의 전통과 관습을 해치려는 외부세력에 강력히 저항하는 오래된 민족적 특질을 잃지 않았다. 이슬람 세력과 맞섰던 수백 년 전의 재정복 운동은 스페인에서 우파의 강력한 상징이었고, 독립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 독립전쟁 이후 유럽에서는 유럽답지 않은 스페인을 예술의 테마로 자주 사용하기 시작했다. 낭만주의자들은 부르주아 유럽의 물질주의를 피해 선진 산업국가가 상실한 전통사회의 인간적 가치들을 보전하는 국가를 발견했다.”고 스페인을 칭송했다. 마네는 15년간 스페인이라는 주제에 열광했고, 비제는 펠리페 5세가 세웠던 세비야 담배공장에서 일하는 아가씨를 주인공으로 <카르멘>을 작곡했다. 베르디는 스페인의 사도세자 격인 돈 카를로스와 그의 약혼녀를 왕비로 삼은 아버지 펠리페 2세와의 갈등을 다룬 <돈 카를로>라는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1808년부터 1814년까지의 독립전쟁 이후 약 120년이 지난 후에 스페인은 또 하나의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발발한 스페인 내전이다. 인구 2,100만 명인 스페인에서 100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그중 전쟁터에서 죽은 병사들의 수보다 후방에서 인민재판, 숙청 등으로 죽은 자의 수가 몇 배 더 많았다. 즉 스페인 내전은 일상속의 전쟁이었으며, 이데올로기가 사람으로 육화되어 끔찍한 증오로 얼룩진 전쟁이었다.

스페인의 전통적인 우파에 맞서 스페인의 반을 차지했던 좌파 진영은 독립전쟁과 스페인 내전 사이의 120년의 단기간에 새롭게 등장한 이들이었다. 이들 좌파는 전통적 의미의 대중’, 즉 공장 노동자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자본주의의 비약적인 발전과 시민사회의 급성장이 배출한 이들은 왕과 교회를 존중할 이유를 더 이상 찾지 못했다.

19세기는 이전의 스페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가 구성된 시기이다. 19세기 절대왕정과 갈등하며 단명한 제1공화국을 성립시켰던 자유주의는 스페인에서 생착에 실패했다. 하지만 프랑스, 러시아 등을 휩쓴 제2차 산업혁명의 물결은 스페인에도 도달했다. 카탈루냐와 바스크에 산업 지역이 폭넓게 성장하였고, 외국 자본도 집중되었다. 빌바오의 경우 1860년에서 1920년 사이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였다. 바르셀로나 인구는 1920년대에 100만 명에 이르렀다.

1909년 바르셀로나에서 일어났던 비극의 일주일사건은 이미 스페인 내전을 예고하고 있었다. 열약한 노동환경에 처한 노동자들은 타협하지 않는 자본가들과 이들을 보호해 주는 왕과 교회에 대해 다른 유럽에서 나타났던 것보다 훨씬 강한 증오심과 호전성을 품게 되었다. 반면에 새로운 대중에 대한 전통주의자들의 두려움과 멸시는 이미 호세 오르테가이 가젯의 대중의 반역이라는 저서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특히 영광의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시작된 제국 스페인이 1898년 미서 전쟁의 결과로 마지막 식민지였던 쿠바를 잃게 되면서 전통우파 역시 적개심의 이데올로기를 깃발 삼아 전통의 이데올로기를 발화시켰다. 양 진영의 에너지는 이제 곧 다가올 스페인 내전으로 수렴되고 있었다.

기억의 영속

달리의 작품

 

스페인을 흔히 두 개의 스페인이라고 규정한다. 대표적인 98세대 시인 중 한 사람인 안토니오 마차도가 20세기 초의 스페인을 언급하기 위해 사용했던 이 개념은 현재에도 가톨릭적이고 폐쇄적이며 보수적이고 민족적인 스페인개방적이고 급진적이며 코스모폴리탄적인 스페인을 일컫기 위해 쓰이고 있다. ‘두 개의 스페인은 합스부르크 왕가와 부르봉 왕가를 거치며 스페인 국민의 면면에 흘러내리고 있는 역사의 육화이며, 그 이미지이자 실체이다. 달리의 <기억의 영속>에서 보듯 시간은 단단히 굳지 않고 흘러내려 두 왕가의 욕망을, 전통과 혁명, 폐쇄와 개방,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라는 21세기 스페인 국민 개개인의 욕망으로, 그 집단 기억을 영속시키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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