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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House of Stuarts House of Orange

Bollnow 2025. 1. 7. 07:16

스튜어트+오라녜 왕가

 

명예혁명을 완수하고 18세기를 열다

 

외국어 표기 The House of Stuarts House of Orange(영어)

시기 1689213~ 170238

시대 명예혁명이후 윌리엄 3세의 사망 시까지

지역 영국,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1694년에서 1702년까지 단독 재위한 오라녜 왕가의 윌리엄 3세의 문장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공동 재위 시 사용한 문장

 

스튜어트 왕조의 4대 국왕인 제임스 2세는 강압적인 가톨릭 옹호 정책을 고수하다 명예혁명으로 1688년 폐위되었다. 제임스 2세의 장녀인 메리 2세와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세 부부가 공동 왕위에 오름으로써 스튜어트와 오라녜(오렌지), 공동 왕가는 5년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국을 공동 통치했다.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는 즉위 후 명예혁명과 제임스 2세 폐위의 여파로 과도기적 상황에 직면했지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반정부 봉기를 차례로 정리하면서 안정세를 찾았다.

한편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세는 반() 프랑스 입장을 고수했고, 이 때문에 유럽 여러 지역에서 크고 작은 대외 전쟁을 계속 치러야 했다. 1694년 메리 2세가 사망하자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세가 단독으로 왕권을 행사했다. 1702년 윌리엄 3세 사후에는 메리 2세의 친동생 앤 여왕에게 왕위가 승계됨으로써 다시 스튜어트 왕가의 단독 군주 체제가 이어졌다. 그러나 12년을 통치한 앤 여왕은 1714년 직계 후손 없이 사망했다. 이로써 내전과 두 번의 혁명, 종교적 갈등으로 점철된 격동의 17세기를 간신히 이끌었던 첫 통합 왕가 스튜어트의 왕통은 종말을 맞았다. 이어진 번영의 18세기는 하노버 왕가의 손에 맡겨졌다.

명예혁명이후 공동 즉위한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 부부

혼인으로 엮인 영국의 스튜어트 왕가와 네덜란드의 오라녜 가문

스튜어트 왕가의 5대 군주 메리 2

명예혁명으로 폐위된 제임스 2세의 장녀. 남편인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세와 공동으로 재위.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왕가는 1603년 제임스 1세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동시에 통치해 온 단일 왕조였다. 1660왕정복고이후 25년 동안 재위했던 스튜어트의 세 번째 국왕 찰스 2세가 1685년에 사망했고, 뒤이어 동생 제임스 2세가 55살의 나이로 스튜어트 왕가의 4대 군주가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 2세는 강압적인 가톨릭 옹호 정책을 고수하다 즉위 3년 만인 1688명예혁명으로 폐위되었다.

메리는 폐위된 제임스 2세의 장녀였다. 통합 스튜어트 왕가의 시조였던 제임스 1세의 증손녀다. 부친 제임스 2세의 가톨릭 신앙과 별개로 메리와 3살 터울의 여동생 앤은 어려서부터 국교도 신자로 교육받으며 성장했다. 제임스 2세 폐위 당시 메리는 왕위 후계 첫 번째 서열이었다.

한편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 오라녜 가문의 유일한 남손이었다. 윌리엄의 모친 메리와 찰스 2, 제임스(제임스 2)는 남매지간으로 통합 스튜어트 왕가의 2대 국왕인 찰스 1세의 자녀들이다. 메리 2세의 고모뻘인 메리는 1648년 네덜란드의 오라녜 가문의 빌렘 2(윌리엄 2)와 혼인했다.

오라녜 가문의 첫 군주 윌리엄 3

 

명예혁명으로 장인 제임스 2세가 폐위된 후 아내 메리 2세와 공동 왕위에 오름.

 

1650년 윌리엄이 출생할 당시 모친 메리 스튜어트는 개인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다. 그녀는 윌리엄을 출산하기 불과 8일 전에 남편을 천연두로 잃었고, 또 바로 전 해인 1649년에는 부친이자 스튜어트 왕가의 2대 군주 찰스 1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참변을 겪어야 했다.

윌리엄 3세는 친할머니의 고집대로 부친의 이름 윌리엄(빌렘)을 물려받았다. 스튜어트 왕가의 메리는 윌리엄 3세를 영국식으로 양육하려 했고, 이 때문에 오라녜 가문의 시어머니(윌리엄의 할머니)와 마찰이 많았다. 1660년 윌리엄이 10살 때 모친 메리 스튜어트 역시 천연두로 사망했다.

오라녜 가문은 네덜란드 공화국의 북부 주요 5개 주의 총독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1672년 프랑스 루이 14세는 당시 영국의 찰스 2세와 연합해서 네덜란드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잉글랜드 측에서 보면 이른바 제3차 영란 전쟁인 상황이었다. 당시 윌리엄은 22살의 나이에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프랑스에 맞서 네덜란드군을 이끌었다. 이를 계기로 윌리엄은 오라녜 가문에 적대적인 세력을 따돌리고 네덜란드 공화국의 총독에 임명되었다. 이후 윌리엄은 프랑스의 루이 14세를 평생의 숙적으로 여겼고, 영국 국왕으로 재위한 후에는 적극적으로 대 프랑스, 반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수호라는 대의를 내걸고 당시 유럽 각국 사이의 세력 경쟁을 주도했다.

1677년 찰스 2(메리 2세의 큰아버지)는 동생 요크 공(후일 제임스 2)의 장녀 메리와 오라녜 가문 윌리엄의 혼인을 성사시켰다. 12살 차이의 사촌지간인 메리와 윌리엄의 혼인으로 스튜어트 왕가와 네덜란드의 오라녜 가문은 2대에 걸쳐 혼인 동맹을 이어갔다. 당시 유럽 왕가들 사이의 정략결혼이 그렇듯이 결혼 당사자들의 감정은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왕정복고로 복위된 스튜어트 왕가의 3대 군주 찰스 2세는 초반 이 혼사에 미온적이었다. 이후 정치적인 고려에 따라 가톨릭 신자인 동생 제임스를 적극 설득하여 혼사를 추진했다. 찰스 2세 입장에서 가톨릭 주창자인 동생 제임스뿐만 아니라 스튜어트 가문 전체가 의회와 국민들로부터 늘 가톨릭 연루 의혹을 받아왔던 터라 메리와 윌리엄, 두 개신교도 간의 혼인은 스튜어트 왕가의 종교를 둘러싼 시비 거리를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또한 불과 얼마 전까지 프랑스와 연합해서 벌인 2차례의 대 네덜란드 전쟁 때문에 영란 관계가 악화되었는데, 이 혼사를 통해 양국 관계를 재정비하려는 의중도 있었다. 윌리엄 3세 쪽에서도 숙적 프랑스에 대적하는 데 영국과의 동맹이 도움이 되리라는 계산이 작용했다. 사촌동생 스튜어트 왕가의 메리와 혼인하면서 윌리엄은 영국 왕위 후계 서열 네 번째 지위를 차지했지만, 결혼 당시만 해도 윌리엄은 자신이 정말로 영국의 왕권을 쥐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메리와 윌리엄, 이 프로테스탄트 부부는 결혼 후 12년 만에 영국 땅을 다시 밟았다. 스튜어트와 오라녜 공동 왕가 시대를 열며 영국 왕위에 오르기 위해서였다.

 

영국 국왕에 즉위한 네덜란드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

 

명예혁명으로 제임스 2세는 폐위당했지만, 그의 개신교 자녀들에 의해 스튜어트의 왕통은 이어졌다. 부친과 달리 개신교도로 성장한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 2세와 그녀의 프로테스탄트 남편인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세 부부가 공동 국왕으로서 통치를 했던 것이다. 메리는 스튜어트 왕가의 후계 서열 1위였기에 그녀 단독으로도 국왕이 될 자격이 충분했지만, 메리 쪽에서 남편 윌리엄과의 공동 왕위를 고집했다. 168811월 메리는 아내로서 남편 윌리엄에게 복종하는 것 말고 달리 생각해 본 적이 없다.”며 부친 제임스 2세 대신 남편 쪽에 섰다. 메리의 동의를 얻은 윌리엄의 군대는 장인에 맞서 당당히 영국으로 출정할 수 있었고, 딸이 자신을 저버렸다는 배신감까지 더해져 제임스 2세는 무기력하게 윌리엄에게 무너졌다.

1689213일 영국 의회가 메리-윌리엄 부부의 공동 왕권을 승인했고, 이후 5년 동안 두 왕가의 공동 통치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스튜어트 왕가의 여손(女孫) 메리 2세는 명목상 공동 왕위에 있으면서 왕가의 맥을 이었지만, 부군 윌리엄 3세를 보좌하는 정도에 머물렀다. 메리는 윌리엄이 자리를 비울 시에, 그것도 윌리엄의 의사를 대리해서 국사를 처리하는 정도였다.

 

명예혁명으로 프로테스탄트 왕권을 지켜나가다

 

가톨릭 관용 및 친 프랑스 정책은 스튜어트 왕가의 기조였다. 가톨릭이 대다수인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군주들은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가톨릭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특히 제임스 2세의 경우 타협하지 않는 가톨릭 옹호 정책을 고집하다가 급기야 명예혁명의 당사자가 되어 1688년 폐위를 맞게 되었다.

메리 2세가 사망한 1694년부터 1702년까지 8년은 오라녜 출신의 윌리엄 3세 단독으로 영국을 통치했던 기간이다. 1702년 윌리엄 3세가 후손 없이 사망한 뒤 제임스 2세의 둘째 딸 앤이 왕권을 승계했다. 이로써 명예혁명이후 프로테스탄트 왕권이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무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앤 여왕 역시 왕권을 물려줄 후계를 얻지 못한 채 1714년 사망하였다. 1701년 앤 여왕이 즉위하기 한 해 전, 당시 유일한 스튜어트 왕손인 앤의 장남 윌리엄 왕자가 11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만약 윌리엄 왕자가 계속 성장해서 앤 여왕의 뒤를 이었다면 스튜어트 왕가의 왕권이 얼마나 더 이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사실 11살에 사망한 윌리엄 왕세자에서 스튜어트의 왕통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폐위 군주이긴 해도 제임스 2세가 1701년까지 망명지 프랑스에서 건재했고, 그가 사망한 이후에도 그의 아들과 손자로 스튜어트의 남손의 맥은 이어졌다. 가톨릭이라는 종교문제만 빼면 이들이야말로 영국의 정당한 왕권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세력도 많았다. 이 같은 위협에 맞서 잉글랜드 의회는 단호하게 왕위계승법’(1701)과 이후 왕위보장법’(1704)을 통과시켰다. 향후 영국의 왕위는 오로지 프로테스탄트에게만 승계되도록 못 박은 것이다. 제임스 2세와 그의 남손으로 이어질 스튜어트의 가톨릭 왕권은 법적으로 완전히 배제되었다. 따라서 앤 여왕이 자식 없이 사망할 경우 영국의 왕권은 스튜어트 왕가에서 프로테스탄트인 독일계 하노버 왕가로 넘어가도록 법으로 확정되었다. 즉 스튜어트 왕가의 1세기에 걸친 통치가 끝을 맞게 된 것이다.

 

입헌군주제로

 

명예혁명의 결과로 제임스 2세가 폐위되고 프로테스탄트 여손 후계, 즉 장녀 메리와 사위 윌리엄, 그리고 차녀 앤이 왕위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권리청원과 권리장전으로 완성된 명예혁명의 가장 큰 성과는 입헌군주제였다. 스튜어트와 오라녜 가문의 공동 왕위는 잉글랜드 의회의 강력한 지지와 발 빠른 전략적 행보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명예혁명 이후 스튜어트와 오라녜 공동 왕가의 공동 군주에게 주어진 왕권은 이전까지의 세습 전제왕권과 달랐다. 16892월 의회는 권리선언과 이를 강화한 권리장전을 연달아 내놓았다. 이를 통해 군대조직 및 조세와 관련된 세부 사항에 있어 의회의 원칙을 따르도록 법적으로 명시했다. 더불어 왕위 후계 역시 세습이 아니라 의회가 정한 원칙에 따라 결정된다는 내용을 법으로 규정했다. 즉 국왕은 이전처럼 국가의 수장이자 최고 권력자이긴 하지만 대폭 확대된 의회의 권한에 따라 전제적이었던 왕권은 제한되었다. 통치와 후계의 결정적 사항도 의회와 조율해야 했다. 스튜어트와 오라녜 두 왕가의 공동 통치는 일시적인 것이었으나 이를 시작으로 잉글랜드는 세습군주제에서 입헌군주제로 이행할 수 있었다. 또 이렇게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의 역할 비중이 커짐에 따라 이를 기반으로 근대적인 시민권도 지속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첫 번째 재커바이트 봉기와 글렌코 학살

 

스튜어트와 오라녜 가문의 공동 통치 형식으로 프로테스탄트의 왕권 승계가 이루어지자 그 여파로 잉글랜드 안팎은 일종의 과도기적 혼란 상태가 되었다. 큰 무력 충돌 없이 왕권 교체가 이뤄졌던 잉글랜드와 달리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2세의 폐위를 인정하지 않는 반정부 움직임이 거셌다. 메리 2세와 앤 여왕은 제임스 2세의 첫 번째 부인에게 얻은 자녀로 스튜어트 왕가의 정식 후계임에 분명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스튜어트 왕가의 정당한 왕권은 프랑스로 도피해서 일종의 망명정부를 마련한 제임스 2세와 그로부터 이어진 남손에게 승계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명예혁명의 정당성을 의문시하는 이런 주장은 재커바이티즘으로 대표될 수 있다. 재커바이트란 명칭은 제임스의 로마식 명칭인 제이콥에서 왔다. '재커바이티즘'은 영국의 첫 통합 군주였던 제임스 1세에서 비롯된 스튜어트 왕가 후손들의 정당한 왕권을 지지한 정치적인 움직임을 총칭한다.

하이랜드의 반란 집단을 무차별 처단하라고 명령한 서한

 

재커바이트들은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의 왕권을 위협한 유일하고 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 성향인 재커바이트들은 1688년 스튜어트의 4대 국왕 제임스 2세가 폐위되자 스코틀랜드에서, 그중에서도 하이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반정부, 반 잉글랜드 분위기를 형성했다. 재커바이트들을 규합하는 구심축은 제임스 2세와 그의 아들, 손자로 이어진 스튜어트 가문의 가톨릭 남손이었다. 이들은 명예혁명의 결과로 왕위에 앉게 된 오라녜 가문의 윌리엄 3세에 맞섰다. 때문에 명예혁명 이후 윌리엄 3세 재위 때부터 1745년 조지 2세 시기까지 총 네 차례의 재커바이트 반란이 스코틀랜드 지역에서 일어났다.

스튜어트 왕가의 본적지라 할 만한 스코틀랜드는 16894월 윌리엄 3세와 메리 2세의 즉위 소식이 알려지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4월부터 6월까지 제임스 2세 지지파들이 에든버러 성을 닫아걸고 사수전에 돌입했다. 무엇보다 오라녜 가문 출신의 윌리엄 3세에 대한 이 저항은 두 달 만에 무력으로 진압되었지만, 이번에는 하이랜드1) 지역에서 무장봉기가 거세졌다. 던디 자작을 주축으로 재커바이트들은 16897월에 킬리크랭키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쥐며 윌리엄을 압박했다. 그러나 몇 달 뒤 윌리엄의 정부군은 던켈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재커바이트의 기세도 한풀 꺾여 이후 산발적인 항전에 그쳤다.

1691년에 이르면서 산발적으로 벌어지던 소규모 재커바이트 봉기가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윌리엄 3세는 아일랜드와 근접한 하이랜드의 지정학적 중요성과 향후의 산업적 측면을 고려해서 북서부 하이랜드의 해안에 포트윌리엄(윌리엄의 항구)을 세워 전략 요충지로 활용함과 더불어 변방 지역을 개발하려고 마음먹었다. 이에 윌리엄 3세는 하이랜드 가문 대표들이 포트윌리엄소재 관청에 출두해서 국왕에 대한 충성서약을 시한 내에 완료하면 제임스 2세를 지지했던 이들의 과거 행적, 말하자면 일종의 반역죄를 전면 사면하기로 약속했다.

글렌코 학살을 다룬 삽화

 

그런데 당시 불가피했던 상황과 정치적 이해타산이 맞물려 결국 16922월 하이랜드의 글렌코에서 부녀자들, 노인들, 아이들을 포함한 맥도널드 가문의 민간인 수십 명이 정부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말았다. 글렌코 학살(16922)로 알려진 이 사건의 여파로 스코틀랜드, 특히 하이랜드 지역에서 반 잉글랜드 정서는 깊게 뿌리내렸고 지금까지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편 1714년 스튜어트의 마지막 국왕 앤 여왕이 사망하고 왕권은 프로테스탄트의 하노버 왕가로 넘어갔다. 하노버 혈통의 조지 1세와 조지 2세가 즉위하자 재커바이트들은 어느 때보다 거세게 반발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크고 위협적이었던 ‘1745년의 저항이 극도로 무자비하게 진압당한 후 재커바이트의 표면적인 항거는 더 이상 없었다.

 

보인 강 전투와 오렌지(오라녜) 축일’, 그리고 북아일랜드 문제

스튜어트와 오라녜 공동 왕가의 프로테스탄트 부부 군주가 공동으로 통치권을 계승하자 가톨릭이 대다수인 아일랜드에서도 상황은 심각해졌다. 특히 아일랜드에서 토착 가톨릭 민중과 잉글랜드에서 이주한 개신도 사이에 축적된 반목과 집단 폭력의 문제는 뿌리가 깊었다. 역사적으로 또 정책적으로 여러 겹으로 꼬여 있는 이 민족적, 종교적, 계급적 적대감의 난맥은 간단히 해결될 수도 없고, 이를 위한 손쉬운 미봉책이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다. 요약하자면, 잉글랜드는 12세기 후반 이웃 아일랜드 섬을 정복했지만 줄곧 방만하게 관리하였다.

그러다 강한 튜더 왕권이 들어선 후, 특히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시절 잉글랜드는 무자비한 군사 정벌을 수차례 단행했고, 이로써 아일랜드에 대한 일종의 식민 지배권을 강화했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국교회를 아일랜드에 강압적으로 이식시켰고, 토착민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아 잉글랜드에서 이주시킨 국교회 신자들에게 몰아주었다.

아일랜드는 인종과 언어가 잉글랜드와 다를 뿐 아니라 무엇보다 5세기 이후 가톨릭 신앙이 확고하게 뿌리내린 곳이었다. 따라서 잉글랜드의 무력 정벌과 이어지는 종교적 박해, 또 일련의 억압적인 식민 정책은 대대로 아일랜드인의 뼛속까지 반 잉글랜드, 반 프로테스탄트라는 민족적 저항의식을 키우게 되었다. 간간이 아일랜드 토착 지주와 귀족이 이끄는 크고 작은 민중봉기가 있었지만 번번이 잉글랜드의 군사력에 진압되었다.

이 때문에 가톨릭에 대체로 너그러웠던 스튜어트 왕가의 통치 시기 동안 아일랜드는 줄곧 왕당파이자 반 의회파였다. 어느 면에서 가톨릭에 우호적인 스튜어트 군주들 때문에 도리어 아일랜드에서는 토착 가톨릭과 이주 개신교의 반목은 깊어지기만 했다. 1640~1641년경 잉글랜드에서 내전이 불붙기 직전 아일랜드에서 대규모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국왕 찰스 1세와 의회가 심각하게 갈등 중인 데다 한편에선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군사력이 집중된 상황이었다. 아일랜드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봉기를 일으켰고, 그 양상은 잉글랜드 개신교 이주자들에 대한 집단 폭력으로 번졌다. 이 대규모 봉기는 결국 잉글랜드군에 의해 진압되긴 했지만, 그 전까지 이 봉기로 얼스터 지방(아일랜드 북동 지역)에 이주해 살던 잉글랜드의 국교도 수천 명이 가톨릭교도에 의해 살해당했다.

최악의 사태는 유럽 근대사를 통틀어서 가장 참혹한 종교탄압 중 하나로 평가되는 크롬웰의 아일랜드 초토화 작전이었다. 내전과 청교도 혁명이후 집권한 크롬웰은 1649년에서 1651년 사이에 가톨릭 왕당파 세력을 대대적으로 소탕할 계획으로 스코틀랜드 일부 지역과 아일랜드에 군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특히 드로게다의 학살’(1649911)로 대표되는 아일랜드에서의 가톨릭 소탕작전은 민간인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당시 크롬웰의 초토화 작전으로 아일랜드 인구의 1/5 이상이 몰살당했다. 토지 황폐화 작업도 더불어 진행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경작 가능한 동북부 토지의 대부분이 잉글랜드 이주민에게 넘어갔다. 토착 가톨릭 신자들은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살아남은 가족끼리 불모의 땅 아일랜드 서부로 피신했다. 이 때문에 현재까지도 아일랜드의 서부는 억압받고 착취당한 아일랜드인의 민족적 상징이 되었다. 또한 지금도 아일랜드에서는 가톨릭의 씨를 말리고 아일랜드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고자 한 크롬웰을 민족 최고의 원흉으로 여긴다.

보인전투에 출정한 오라녜 왕가의 윌리엄 3

 

한편 16893명예혁명으로 폐위되었던 가톨릭 군주 제임스 2세가 프랑스의 전면 지원을 받으며 아일랜드에 도착했다. 아일랜드 군중은 프로테스탄트 군주 오라녜의 윌리엄 3세에 맞서 가톨릭 군주였던 폐위된 제임스 2세를 그들의 국왕으로 계속 지지하였다. 아일랜드 쪽에서는 이번 항전을 잉글랜드 세력과 국교회를 몰아내고 빼앗긴 토지와 주권을 되찾을 절대적인 기회로 여겼기 때문에 반 윌리엄, 반 잉글랜드저항은 전국적으로 장기간 이어졌다.

먼저 제임스 2세와 아일랜드의 합동 병력은 아일랜드 최대 도시 런던데리를 공격했다. 런던데리는 이미 튜더 시대부터 정책적으로 본토에서 건너간 잉글랜드 국교도와 군인들이 정착한 곳으로,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이주 역사의 본거지였다. 잉글랜드 이주민들은 런던데리를 중심으로 얼스터 일대의 토지와 모든 사회적 권력을 독점하면서 세대를 이어 절대 계급이 되었고, 대다수 토착 아일랜드 가톨릭은 천민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이후 아일랜드 내 개신교도와 잉글랜드 지지파의 아성이었던 런던데리에서의 방어전은 장장 17주 동안이나 끈질기게 이어졌다.

제임스 2세와 아일랜드 연합군대는 런던데리를 포기하고 더블린에서 재기를 노렸지만 1690년 윌리엄 3세는 아일랜드 사태를 정리하기 위해 직접 출정했고, 그해 7월 보인 강 전투에서 제임스 2세의 군대를 대파했다. 이후에도 아일랜드 병력은 1691년까지 저항을 이어가다가 결국 진압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리머릭 강화조약을 통해 아일랜드 가톨릭교도에게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기로 합의했으나, 나중에 이 조약을 무시하고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에 대한 지독한 탄압정책이 전과 다름없이 이어졌다.

오렌지 군주 윌리엄 3세와 보인 전투 승리를 기념하는 오렌지데이행진

 

한편 북아일랜드(얼스터 지방)에서는 현재도 보인 강 전투가 벌어졌던 712일을 국경일로 지정해서 윌리엄 3세의 보인전투 승리를 기념하고 있다. ‘오렌지데이’, ‘윌리엄의 오렌지데이’, 또는 명예로운 12번째 날’2)로 불리는 이 기념일에는 전통적으로 개신교도들의 흥겨운 거리 행진이 벌어진다. 이 행진은 일개 기념행사가 아니라 북아일랜드에서 프로테스탄티즘과 영국의 우위권이 확고하다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때문에 오렌지데이기념 행진이 진행되는 도중에 참가자와 해당 지역의 가톨릭 신도들과의 마찰이 종종 벌어진다.

아일랜드의 토착 가톨릭과 잉글랜드 이주 개신교도 사이의 갈등은 짧게 잡아도 600여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후 18세기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아일랜드로의 강제이주 정책도 시행되었다. 이 굴곡의 역사를 통해 아일랜드 섬의 얼스터 지방, 즉 북아일랜드가 오늘날 대영국과 북아일랜드 통합 왕국에 속하게 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또 이런 역사적 상황이 있었기에 북아일랜드가 대영국으로 통합된 이후에도 현재까지 지속적인 논란과 분쟁거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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