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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uarts

Bollnow 2025. 1. 7. 07:07

스튜어트 왕가

 

격동의 17세기를 지탱했던 첫 통합 왕가

 

1707년에서 1714년 앤 여왕 재위 시 사용했던 통합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문장

 

외국어 표기 The Stuarts(영어), The Stewarts in Scotland until the16th century

시기 1603~ 1714

시대 재코비언 시대 - 캐롤라인 시대 - 공위기(공화국기) - 왕정복고

지역 영국, 스코틀랜드 및 아일랜드, 서유럽

 

스튜어트 왕가의 기원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왕가다. 스튜어트 왕가는 343년에 걸쳐 스코틀랜드에서만 단독으로 9명의 군주가 통치를 이어갔고, 잉글랜드(웨일스 및 아일랜드 포함)와의 통합 왕가로서 6명의 군주를 배출했다. 1603년에 잉글랜드의 국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공동 통치한 첫 국왕이다. 1702년부터 1714년까지 재위한 앤 여왕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통합 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통합 대영국의 첫 군주로 기록되었다.

스튜어트 왕가의 기원은 노르만족에서 찾을 수 있다. 이들은 9세기 이후 북해를 중심으로 브리튼 섬과 프랑스 북부 해안을 통제했다. 따라서 스튜어트의 혈통은 현재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와 브르타뉴 쪽에 가깝다. ‘스튜어트는 가문의 선조들이 대대로 노르망디 공국의 대법판관을 역임하면서 붙여진 가명(家名)이다.

12세기경 스튜어트 가문은 노르망디에서 스코틀랜드로 진출했고, 이후 스코틀랜드에서도 대법판관을 계속 배출하면서 명문가의 맥을 이어갔다. 왕가로서의 직계 시조는 14세기 후반의 로버트 2세였다. 1371년 로버트 2세가 우여곡절 끝에 55살의 늦은 나이에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즉위했고, 이후부터 스튜어트 가문은 스코틀랜드의 통치 왕가 자리를 고수해 왔다. 16세기 중반 유년기부터 프랑스 궁정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메리 여왕의 주장으로 스코틀랜드식 표기 대신 프랑스식 표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첫 통합 왕가 : 첫 통합 군주로 즉위한 제임스 1세의 혈통

 

잉글랜드에서는 1485년에 즉위한 헨리 7세가 오랜 장미전쟁을 마무리 짓고 튜더 왕가를 열었다. 헨리 7세의 맏딸(헨리 8세의 큰누이) 마거릿 튜더는 총 세 명의 배우자를 두었는데, 그중 첫째 남편이 스코틀랜드의 왕권을 이어온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4세였다. 1503년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다분히 정략적으로 맏딸 마거릿과 제임스 4세의 혼사를 성사시켰다. 이 결혼으로 잉글랜드의 튜더가와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가 두 왕가가 연결되었다. 당연히 헨리 7세는 이들의 후손에서 두 왕국의 통합 군주가 나올 가능성을 점쳐봤을 터였다.

마거릿과 혼인한 제임스 4세는 1513년 사망했지만, 그 아들 제임스 5세에 이어 그의 외동딸 메리 여왕으로 왕통의 명맥을 이어갔다. 즉 파란만장한 삶으로 잘 알려진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는 제임스 4세와 마거릿 튜더의 친손녀이자 스튜어트 왕가의 시조 로버트 2세의 7대 손이다. 메리 여왕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의 짧은 결혼에서 제임스 1(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를 얻었다. 단리 경 역시 마거릿 튜더의 두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외손자였으므로 그도 튜더 왕가의 혈통 안에 있었다.

따라서 통합 왕가의 첫 군주가 된 제임스 1세는 근친 혼인으로 얽힌 당시 왕가의 혈통 속에서도 모계(메리 여왕 쪽)와 부계(단리 경 쪽) 모두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와 잉글랜드의 튜더 왕가 양측의 적통임이 분명했다. 튜더 왕가의 마지막 군주로서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엘리자베스 1세는 제임스 1세의 5촌 이모뻘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제임스 출생 이후 그의 세례식에 직접 참석하진 않았지만 메리 여왕이 부탁한 제임스의 대모 역할을 수락했는데, 이로써 그녀 역시 제임스 1세의 적통을 인정한 셈이었다. 따라서 후사가 없는 엘리자베스 1세가 사망한 시점에서 제임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를 통틀어 유일한 적통 왕위 후계자였다.

160357일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는 통합 왕가가 된 스튜어트 왕가의 첫 번째 군주 제임스 1세의 자격으로 런던에 입성했다. 1503년 맏딸 마거릿을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로 보내면서 헨리 7세가 따져봤을 정치적 계산은 꼭 100년이 지나 이렇게 실현된 것이다.

 

스튜어트 왕가의 통치

 

스튜어트 왕가의 단일 군주로 왕통이 통합되긴 했지만, 여전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각각 브리튼 섬의 중남부와 북부 지방을 통치하는 두 개의 개별 왕국이었다. 국정을 견제하는 의회도 따로 두었고 종교 체제도 완전히 달랐다. 잉글랜드는 국교회가 국가의 공식 종교로 자리 잡고 있었고, 스코틀랜드는 커크라는 범 스코틀랜드 개신교 조직이 절대적인 세력이었다. 이렇게 문화적, 종교적으로 상이한 구조를 갖고 있던 두 왕국이 단일 왕가로 명목상 통합되다 보니, 스튜어트 왕가의 국정운영은 초반부터 종교,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원활하게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아 크고 작은 마찰을 빚게 되었다.

통합 1대 군주인 제임스 1세 때부터 누적되어 온 갈등은 스튜어트의 2대 군주인 찰스 1세에 이르러 극대화되었고, 급기야 1649년 찰스 1세를 단두대에서 참수하는 청교도 혁명으로 표출되었다. 이후 크롬웰이 주도한 11년 동안의 공화국 실험이 있었다. 일반적으로 공위기’1)라 불리는 1649년에서 1660년 사이, 스튜어트 왕실은 마리 앙리에트 왕비의 친정인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1660왕정복고에 의해 스튜어트 왕가는 왕실로 복귀했다. 제임스 1세의 장손자이자 찰스 1세의 장남인 찰스 2세가 통합 스튜어트 왕가의 3대 손이었다. 내전과 혁명에 지친 국민들도 왕실의 복귀를 지지했다. 그러나 왕실이 복위하고 10여 년간 나라 안팎에서 굵직한 사건, 재난, 전쟁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특히 1665~1666년은 삼재의 해로 기록될 만했다. 우선 역사상 악명 높은 런던 대역병1665년에 발발했다. 런던에서 발발한 이 역병은 인류사에 나타났던 흑사병 중 거의 마지막에 해당했던 만큼 규모도 압도적이었다. 당시 통계로 런던 인구 45만 가운데 75,000명이 사망했는데, 그 수가 10만 명에 육박했다는 일설도 있다. 희생자들은 주로 런던의 빈민가에서 속출했고 여름을 거치며 역병은 극에 달했다. 찰스 2세를 비롯한 왕실 일가도 한 달 동안 피난을 가야만 했다. 역병은 이듬해 1667년까지 기승을 부렸다.

게다가 16669런던 대화재가 일어났다. 이 대화재는 166692일 일요일 새벽 런던 동부 푸딩 레인에서 시작되었다. 불은 바람을 타고 삽시간에 주변을 집어삼켰다. 당시 런던의 주거환경은 흑사병은 물론 화재에도 취약했다. 옹색한 목조 가옥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인구가 조밀한 서민 거주지에서 화재는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번져나갔다. 계속되는 강한 바람과 건조한 날씨 속에서 불은 나흘 동안 쉬지 않고 타올랐다. 이 대화재로 런던의 대표적 상징물이었던 세인트 폴 대성당은 물론 예배당 87, 가옥 13,200채가 소실되었다.

1665년부터 1672년까지 해양에서의 무역 이권을 놓고 네덜란드와 두 차례의 해상 전쟁을 치렀다. 공위 기간, 즉 크롬웰의 공화국 시절인 1652~1654년에도 이미 네덜란드와의 해상 접전이 있었다. 사실 제임스 1세 시기부터 해상을 통한 해외 식민지 확보에 적극적이었다. 스튜어트 군주들은 신대륙 확장이나 식민 지배권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미래 산업이라고 여겼으며, 해군력을 키워 해상에서의 통제권을 강화하고 해상 교역에 선박 이권을 확보하고자 했다. 북미 신대륙의 동부 13개 식민지 대부분이 제임스 1세부터 찰스 1, 찰스 2, 제임스 2세 시기에 개발되었다.

 

스튜어트 왕가와 종교문제

 

영국 역사에 기록될 17세기의 중대사는 종교에서 시작했다. 왕실과 의회 사이에서 종교 논쟁의 불길은 끊임없이 타올랐다. 마치 영국 국교회가 쌓아놓은 나뭇더미에, 청교도가 불을 붙이고, 로마 가톨릭이 기름을 붓고 비국교파 프로테스탄트가 둘러서서 구경하는 형국이었다. 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고, 일반 백성들은 가까이서, 멀리서 불똥을 맞았다.

종교문제는 튜더 시대부터 줄곧 국가적 쟁점이었다. ‘피의 메리로 통한 가톨릭 군주 메리 1세 이후 가톨릭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은 심화되었다. 메리 여왕에 뒤이은 엘리자베스 1세는 부친 헨리 8세가 단행한 종교개혁의 연장선에서 국교회를 적극적으로 회복시킴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얻었다. 튜더 왕조의 마지막 군주 엘리자베스 1세의 통치를 거치면서 국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적대감은 증폭되었고, 이는 스튜어트 시대로 이어져 종교적 반목과 갈등의 골은 깊을 대로 깊어졌다.

가톨릭에 대한 관용 및 친 프랑스 정책은 스튜어트 왕가의 기조였다. 스튜어트 왕가는 가문의 기반이 프랑스 계통으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와 우호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었다. 스튜어트 군주들의 이 같은 친 가톨릭, 친 프랑스 성향은 잉글랜드에서 공공연한 불만과 비난의 요소였다. 사실 이 때문에 왕가의 몰락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일단 통합 스튜어트 왕가의 군주들은 대체로 신앙심이 두터웠다. 그러나 이들은 국교회 중에서도 보수파를 지지했고, 또 자기 종교에 관계없이 청교도의 개혁적인 성향은 불편해했다. 가톨릭이 대다수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의 스튜어트 군주들은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가톨릭에 대한 관용적 태도를 이어갔다. 이는 의회와 국민 여론을 무시하는 군주의 일방적인 태도로 비쳐졌으며, 심지어 일종의 반 잉글랜드적인 것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특히 제임스 2세의 경우 타협하지 않는 가톨릭 옹호 정책 때문에 급기야 명예혁명의 당사자가 되었다.

1688년 가톨릭을 고집하다 제임스 2세가 폐위된 뒤, 그의 개신교 자녀들이 합법적인 왕통을 잇게 되었다. 부친과 달리 개신교도로 성장한 제임스 2세의 장녀 메리 2세와 그녀의 남편 윌리엄 3세 부부가 공동으로 왕위에 올랐고, 메리 2세의 사망 이후에는 윌리엄 3세 단독으로 프로테스탄트 왕권을 이끌었다. 1702년 후손이 없는 윌리엄 3세에 뒤이어 역시 개신교도인 제임스 2세의 둘째 딸 앤이 왕권을 승계하면서 프로테스탄트 왕통을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1701년 앤 여왕의 즉위 직전, 당시 유일한 스튜어트 왕손인 앤의 장남 윌리엄 왕자가 11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사망했다.

명예혁명이후 자리 잡아가던 후계 문제가 다시 대두되었다. 당시 프랑스 땅에는 여전히 폐위군주 제임스 2세와 그의 아들이 버티고 있었다. 이에 잉글랜드 의회는 단호히 왕위계승법(1701)과 연이은 왕위보장법(1704)을 통과시켜 향후 영국의 왕위는 오로지 프로테스탄트에게만 승계되도록 법으로 규정했다. 제임스 2세와 그의 가톨릭 자녀로 이어질 가톨릭 왕권은 법적으로 완전히 배제된 것이다. 이에 따라 앤 여왕이 자식 없이 사망할 경우 영국의 왕권은 스튜어트 왕가에서 프로테스탄트인 독일계 하노버 왕가로 넘어가도록 정해졌다. 만약 앤 여왕의 장남 윌리엄 왕세자가 계속 성장해서 앤 여왕의 후임 군주가 되었다면 스튜어트 왕가의 통치권은 얼마나 더 지속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스튜어트 왕가의 정치적 유산

 

스튜어트 왕가는 두 번의 극단적인 경험을 치렀지만, 이를 통해 의회의 권한은 확대되었고, 더불어 입헌군주제라는 정치적 유산을 후대에 물려주었다. 왕정 체제의 핵심이자 최고 권력은 국왕이었고 이 점은 당시 어떤 의심도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럼에도 스튜어트의 두 군주, 찰스 1세와 그의 아들 제임스 2세는 각각 국왕으로서, 심지어 인간으로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을 맞이했다. 찰스 1세는 국민을 대표하는 의회에 의해 단두대 처형을 당했고, 제임스 2세는 말하자면 의회와 공조한 자녀 세대에 의해 강제 폐위당한 셈이다.

스튜어트 중심으로 이전의 튜더 시대와 이후의 하노버 시대는 같은 군주제라 하더라도 실질적으로는 매우 다른 정치 체제였다. 이는 군대의 조직과 관리, 조세와 관련된 권한, 또 후계 결정권 등에서 알 수 있다. 이 세 가지 사항은 모든 권력 운영의 핵심인데, 명예혁명 이후의 군주는 이와 관련해서 의회가 정한 원칙에 따르도록 법적인 제약을 받았다. 즉 두 번의 혁명을 거치고 난 왕권은 이전의 전제적이었던 세습 왕권과 달리 매우 제한적이었다. 국왕은 명목상 국가의 수장이자 최고 권력자이긴 하지만 대폭 확대된 의회의 권한에 따라 통치권의 결정적 사항을 의회와 조율해야 했다. 이렇게 정치적 격동의 스튜어트 시대를 거치면서 세습군주제는 입헌군주제로 이행되었고, 이로써 순차적으로 국민의 대의기관인 의회를 통해 시민권이 확대될 계기가 마련되었다.

명예혁명의 결과 제임스 2세가 폐위되고 프로테스탄트인 여손(女孫) 후계, 즉 장녀 메리와 사위 윌리엄, 그리고 차녀 앤으로 왕위 후계가 결정되었다. 메리와 앤은 제임스 2세의 첫 번째 부인에게 얻은 자녀들로 스튜어트 왕가의 정식 후계였지만 일각에서는 스튜어트 왕가의 정당한 왕권은 프랑스로 도피해서 일종의 망명 정부를 마련한 제임스 2세와 그의 남손(男孫)에게 승계되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명예혁명의 정당성을 의문시하는 이런 주장은 재커바이티즘으로 대표될 수 있다. 재커바이트들은 명예혁명 이후 잉글랜드의 왕권을 위협한 유일하고 또 가장 위협적인 세력이었다.

 

스튜어트 왕가의 문화적 성과들

 

스튜어트의 군주들이 대체로 경건한 신앙심을 지닌 덕에 스튜어트의 궁정이 마냥 호사스럽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시조인 제임스 1세 때부터 궁정에는 예술가들도 즐겨 초대되었고 정기적으로 가면극도 공연되었다. 제임스 1세는 재위 초반 흠정성서(일명 킹제임스 성서’, 1611)의 완역 작업을 이뤄냈고, 한편으로 그의 재위기 동안에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걸작들이 쏟아져 나왔으니, 통합 스튜어트 시대의 초반은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시기였다.

또한 미술품에 대한 애호가 남달랐던 두 번째 군주 찰스 1세의 궁정에는 네덜란드 출신의 뛰어난 초상화가 반 다이크가 궁정 화가와 기사 작위를 동시에 부여받으며 초청되어 당시 스튜어트 왕실의 귀중한 인물화를 다수 남겼다. 공위기(크롬웰의 공화국 시기)를 제외하면 스튜어트 시대는 대체로 예술을 장려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공위 기간에도 순도 높은 종교적 경건함과 도덕을 강조하는 청교도 문헌들이 왕성하게 저술되었고, 이들은 영어로 쓰인 위대한 문학적 성취로 손꼽힌다. 존 밀턴의 경우가 그중 대표 사례다.

프랑스에서 오래 망명했다 복귀하게 된 찰스 2세의 궁정은 앞선 군주들보다 좀 더 화려하고 성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데 거리낌 없는 다소 분방한 분위기였다. 찰스 2세는 종교보다는 현실문제에, 또 신앙보다는 개인적 쾌락 추구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왕립학회를 설립해서 자신의 세속적 관심을 과학과 지식을 장려하는 데에도 쏟았다. 아이작 뉴턴(1642~1726)도 이 시기 왕립학회에서 활동하면서 과학의 진보에 일조할 수 있었다.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후손들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군주 앤 여왕의 공식 칭호는 '대영국과 아일랜드의 여왕'( 1705~1714)이다. 1702년에 형부 윌리엄 3세에 이어 즉위한 앤 여왕과 잉글랜드 의회는 1705년 통합법을 성사시켰다. 이 통합법에 따라 170551일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대영국이라는 완전한 단일국가 체제로 이행되었다. 1603년 스튜어트 왕가의 제임스 1세를 시작으로 통치 군주의 단일화 시대가 열린 후 100여 년 만이다. 이제까지 독립된 국가 조직이었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런던의 의회를 통해 하나의 정치 체제 안에서 운영되는 단일국가로 재탄생했다. 바야흐로 그레이트브리튼 섬 전체가 단 하나의 통일국가가 된 것이다.

스튜어트 왕가의 마지막 자손은 공식적으로는 헨리 베네딕트 추기경이다. 베네딕트 추기경은 통합 왕가의 시조인 제임스 1세의 4대 손이었다. 그는 폐위된 제임스 2세의 둘째 손자인데, 흔히 () 왕위 요구자또는 곱상한 찰리 왕자로 알려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동생이었다. 형 찰스는 스튜어트 왕가의 재기를 꿈꾸며 스코틀랜드에서 ‘1745년의 재커바이트 반란을 이끌었지만, 동생 베네딕트는 평생 성직에 복무했고 당연히 스튜어트 가문의 대를 이을 수도 없었다. 형 찰스는 가문의 부활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베네딕트 추기경에 대해 늘 서운해 했다고 한다. 1807년 베네딕트 추기경이 사망하면서 스튜어트의 직계 혈통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찰스 2세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즐긴 덕에 많은 혼외 자녀를 두었다. 여기에서 뻗어나간 후손이 스페인과 프랑스 등에 여러 세대에 걸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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