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House of Lancaster

Bollnow 2025. 1. 7. 06:56

랭커스터 왕가

 

왕가의 정통성 세우기에 전념

 

영국 왕실에서 사용했던 랭커스터 왕가의 문장

 

외국어 표기 House of Lancaster(영어)

시기 1399~ 1461

시대 14세기 후반(백년 전쟁 후기 ~ 장미 전쟁 전기)

지역 잉글랜드, 영국, 서유럽

 

랭커스터 왕가의 기원

 

랭커스터 왕가는 플랜태저넷의 리처드 2세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헨리 4세에 의해 개창되었다. 왕좌에 즉위하면서 헨리 4세로 왕명이 바뀐 헨리 볼링브로크는 플랜태저넷 왕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플랜태저넷 왕가의 헨리 3세는 왕의 권위에 맞섰던 시몽 드 몽포르의 반란을 진압하고 복위한 뒤, 차남인 곱사등이 에드문드에게 시몽 드 몽포르 소유의 재산과 지위를 넘겨주었다. 1231년부터 시몽 드 몽포르가 소유해왔던 레스터 백작령뿐만 아니라 1267년에는 랭커스터 백작령도 에드문드에게 넘겨주었는데, 이때부터 랭커스터 가문이 시작되었다. 헨리 3세의 왕위는 장남인 에드워드에게 계승되어 에드워드 1세로 왕좌에 올랐다. 에드워드 1세는 웨일스 정복에 대한 신념이 뚜렷한 왕이었지만, 그의 아들 에드워드 2세는 부왕과 달리 국정에 소홀했고, 왕자 시절부터 기사 피어스 개버스턴만을 총애했다. 이에 곱사등이 에드문드의 아들인 토머스와 헨리는 에드워드 2세의 왕권을 강력히 제한하는 칙령위원회 파의 일원이 되었다.

곱사등이 에드문드의 아들인 토머스와 헨리는 에드문드의 두 번째 부인 블랑쉬의 소생이었다. 이들 중 헨리는 어머니와 이름이 같은 블랑쉬를 손녀로 두었는데, 손녀 블랑쉬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아들 곤트의 존과 결혼하여 헨리 볼링브로크를 낳았다. 헨리 볼링브로크는 리처드 2(재위 1377~ 1399) 시절 소위 청원파의 일원으로서 왕의 권위에 맞서다가 랭커스터 가문의 토지를 몰수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리처드 2세가 아일랜드 방문을 감행한 사이 헨리 볼링브로크가 이끄는 반란군은 잉글랜드를 침략하여 왕위를 찬탈하였다.

뒤늦게 리처드가 귀국했지만, 이미 국민과 의회를 비롯하여 귀족과 교회 모두의 지지를 잃은 리처드 2세는 결국 항복했다. 폰터프랙트 성에 갇혔던 리처드 2세는 13999월 말 감옥 안에서 사망했다. 리처드 2세의 사망으로 플랜태저넷 왕가는 막을 내렸고, 헨리 볼링브로크가 헨리 4(재위 1399~ 1413)로 즉위하여 랭커스터 왕가를 열었다.

 

랭커스터 왕가의 통치 - 헨리 5세와 랭커스터 왕가의 부흥

 

헨리 5세 초상화

 

랭커스터 가문은 플랜태저넷 왕가를 종식시키고 랭커스터 왕가의 시대를 열었다. 랭커스터 가문의 헨리 볼링브로크는 의회와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헨리 4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헨리 4세는 플랜태저넷 왕가의 정통성 있는 왕인 리처드 2세를 의문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비판과 함께 랭커스터 가문의 왕위 계승 명분을 확보하지 못해 정당성 문제로 곤혹을 치러야만 했다. 재위 기간 내내 국내외 반란을 진압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헨리 4세와 달리 그의 아들 헨리 5세는 왕가의 권위와 정당성을 세울 명분으로 백년 전쟁을 재개하였다.

백년 전쟁은 중세에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플랜태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가 조부인 에드워드 1세의 숙원 사업을 실천하고자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을 재개하면서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에드워드 3세의 군대가 우세했지만 1348년에 흑사병으로 사회적 위기가 찾아왔으며, 잉글랜드와 프랑스 두 나라가 싸움을 끝낼 결정적 계기를 찾지 못한 채 전쟁은 점차 만성적인 상태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랭커스터 왕가의 헨리 5세는 왕가의 정통성과 권위를 세울 명분을 프랑스 내 잉글랜드의 옛 영토회복 전쟁에서 찾았고 대() 프랑스전에 다시 매진하였다. 청소년기부터 아버지 헨리 4세를 따라다니며 웨일스 원정에서 전투 실력을 키웠던 헨리 5세는 용맹한 군인이었다. 헨리 5세는 부친 헨리 4세나 조부 곤트의 존에 대한 부정적 민심을 불식시키고 자신에 대한 확고한 충성심을 구축하고, 왕가의 권위 회복, 국력 결집 등을 목적으로 전쟁을 재개하였다.

당시 귀족들의 내분과 국왕 샤를 6세의 정신분열증, 취약한 군사력 등 프랑스의 불안정한 정세는 헨리 5세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게다가 잉글랜드의 귀족층 및 교회, 국민들은 헨리 5세의 대() 프랑스전 재개를 전폭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1415년 헨리 5세는 200여 명의 중무장 기병과 6,000명의 궁수, 그리고 포병대를 이끌고 사우샘턴을 출항했고, 5주 동안의 치열한 포위전 끝에 아르플뢰르 항을 점령하여 노르망디에 거점을 마련했다. 오랜 전투로 병사들의 기력은 쇠진했지만, 헨리 5세는 칼레를 향해 북진했다. 잉글랜드 궁병의 뛰어난 능력과 잘 훈련된 정예 보병대 덕분에 칼레 남쪽의 아쟁쿠르에서 헨리 5세의 군대는 승리를 거두었다. 아쟁쿠르 전투의 승리로 헨리 5세는 잉글랜드의 영웅으로 거듭났다.

헨리 5- 아쟁쿠르 전투에서의 승리

 

아쟁쿠르 전투의 승리 후 잉글랜드는 당시 내분과 왕권 취약으로 불안정한 프랑스에 큰 위협 세력이 되었다. 승리에 고무된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재침략하여 도시들을 약탈했다. 헨리 5세는 프랑스를 잉글랜드령으로 만들고, 프랑스의 왕위까지 이어받을 조약을 내걸며 프랑스를 압박했다. 사회적으로 불안감에 휩싸여 있던 프랑스는 1420년 잉글랜드와 트르와 조약을 맺는 데 동의했다. 이 조약으로 헨리 5세는 프랑스의 샤를 6세의 딸인 카트린 공주를 왕비로 맞게 되었으며, 두 사람 사이에서 난 아들은 장차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왕이 될 수 있게 하였다. 결혼 후 카트린은 장차 헨리 6세가 될 아들을 낳았고, 헨리 5세는 샤를 6세가 사망할 때까지 프랑스의 섭정을 맡았다.

1421년 헨리 5세의 동생인 클래런스 공 토머스가 프랑스 군에게 패배하고 사망하자, 헨리 5세는 다시 프랑스를 침략하여 르와르 강 이북의 프랑스 땅 전체를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1422년 모(Meaux) 시를 공격하던 중 무리를 하다가 뱅센 성에서 발진티푸스에 걸려 35세의 나이로 급사했다. 이로써 왕위는 겨우 9개월에 불과한 헨리 6세가 계승하게 되었고, 이로써 부흥과 성장을 거듭하던 랭커스터 왕가는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2) 헨리 6세와 랭커스터 왕가의 몰락

헨리 5세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헨리 6세는 출생한 지 9개월 만에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다. 어린아이에 불과한 그가 왕이 되면서 유력한 귀족들이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등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자 왕권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헨리 6세는 오랫동안 미성년의 왕으로 재위했기 때문에 타인에게 의존하는 성향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성년이 된 뒤에도 측근 자문관들과 삼촌들, 그리고 왕비에게 휘둘리면서 왕위를 유지해 갔다. 치명적으로 집권 말기에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기까지 했다. 정신이상을 앓았던 외조부 프랑스 샤를 6세의 정신병력이 그에게 대물림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왕실의 또 다른 혈통들이 왕권을 향한 권력다툼에 나섰다. 엄격한 장자상속의 원칙에 따르면 랭커스터 집안의 헨리 6세보다 왕위계승 서열에서 앞서 있던 인물은 왕의 사촌인 요크 공작 리처드였다. 헨리 6세가 정상적으로 왕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자 불만세력들이 그를 중심으로 집결했다. 잉글랜드 및 웨일스의 변경과 아일랜드에 광대한 영지를 갖고 있던 리처드는 대 프랑스 전쟁에서도 훌륭한 경력을 쌓았다. 그는 국왕자문회의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욕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00년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의 샤를 7세는 아쟁쿠르 전투에서 대부분의 종친 및 대귀족들이 사망해서 도전세력 없이 쉽게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으나, 잉글랜드의 경우는 그렇지 못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백년 전쟁 후에도 거의 살아 있었던 종친 및 대귀족들이 남은 잉글랜드의 영토를 놓고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상황이 왕권에 대한 다툼과 결부되어 사회적으로 혼란이 커져가는 양상이었다. 거기에 백년 전쟁 후에 돌아온 병사들 중 농토로 복귀하지 못한 다수는 무리를 지어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을 중심으로 몰려들어 사병으로 전락했다. 이제 상황은 잉글랜드가 왕권을 놓고 두 세력 사이에 최후의 일전을 벌여야 할 지경에 이르게 됐다.

킹스 칼리지 성당, 케임브리지

 

이러한 분위기 속에 헨리 6세는 1440년에 이튼 칼리지의 설립과 케임브리지 대학 내 킹스 칼리지의 웅장한 예배당을 건립하다가 파산했고, 1453년경에는 정신이상의 증세마저 보이게 되었다. 이때 요크공 리처드의 아들인 에드워드가 워윅 백작의 지원 하에 반란을 일으켰다. 요크 가문의 자손인 에드워드는 헨리 6세를 감금하고 에드워드 4(재위 1461~1483)로 등극하여, 랭커스터 왕가를 끝내고 새로운 요크 왕가를 열었다.

 

랭커스터 왕가의 업적과 평가

랭커스터 왕가가 배출한 3명의 군주는 각기 왕위 찬탈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나 왕가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헨리 4세는 젊은 청원파 시절부터 국왕으로 재위하던 기간까지 온갖 난관을 겪었지만 결국 랭커스터 가문을 하나의 왕조로 정착시켰고, 아들인 헨리 5세에게 안정적으로 왕권을 양위했다. 치세 기간 동안 그는 격렬한 전쟁을 치르지 않았으며 눈에 띄는 업적도 세우지 못했다. 그러나 지지 세력과의 협력 관계를 이용하여 국내외 도전 세력을 무력화시켰고, 결국 랭커스터 왕조를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한편 정통성 시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헨리 4세는 자신을 지지해줄 수 있는 의회 권력과 교회 세력과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왕실은 잦은 전쟁비용 지불을 위해 의회의 동의가 필요했는데, 당시 과세에 대한 동의권은 하원에 있었다. 하원은 과세에 동의해주는 대신 하원 단독 재정법률 제출권을 확보하는 등 의회의 권력을 키워나갔다. 상대적으로 의회에 지나치게 의존적이었던 왕실은 재정이 취약해졌고, 결국 랭커스터 왕조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정통성 시비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랭커스터의 군주들은 주로 종교의 권위와 문화적 유산 구축을 통해 문제를 극복해나가기 시작했다. 헨리 4세는 교회 세력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면서 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는 대신, 당시 이단의 처단에 주력하던 교회에 협조하여 이단의 화형 처벌법을 통과시켜 주었다. 이로써, 교회는 당시 교회 권력의 부패를 비판하던 롤라드 일파를 처형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대 프랑스전을 치렀던 헨리 5세의 모토는 하느님의 영광을 도모하며, 교회를 확장하고, 농촌을 구제하고, 왕국의 평화와 안정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그의 신실한 신앙심은 아쟁쿠르 전투에서도 신성의 중재에 의지하게 만들었으며, 아버지 헨리 4세가 랭커스터 왕가를 세우며 처형했던 과거 청원파 동지들에 대한 속죄를 위해 사이온 사원(1415)을 세우기도 했다.

헨리 6세는 미성년으로 오랫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특권 세력에 휘둘렸지만, 학문에 관심이 많았고 신앙심이 두터운 인물이었다. 그는 1440년에 이튼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 내 킹스 칼리지의 웅장한 예배당을 건립했으며, 교육 및 건축학적으로 영구한 유산을 남기고자 했다.

 

작품 속 랭커스터 왕가

 

헨리 4세는 일부 시인들을 후원하여 왕위 찬탈의 정당한 이유를 설명하며 왕가의 목표를 널리 알리는 시를 쓰게 했다. 당대의 시인 제프리 초서는 헨리 4세의 어머니 블랑쉬에게 백작 부인 서(The Book of the Duchess)(1368)를 써서 바쳤는데, 이 작품에는 헨리 4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세웠던 업적을 칭송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왕위 계승의 정당성 문제가 부채였던 랭커스터 왕가의 왕들은 예술마저도 왕가의 정통성 확보에 일부 활용했던 것이다. 또한 초서의 친구이기도 한 고우워는 평화를 칭송하며(In Praise of Peace)등을 포함해서 헨리 4세의 업적을 칭송하는 헌정시 다수를 집필했다.

한편 근대에 들어와서 셰익스피어는 이 시기의 군주를 그린 헨리 41, 2, 헨리 5, 헨리 61, 2, 3부를 집필했다. 튜더 왕가 시기의 작가인 셰익스피어는 튜더 왕가의 정치적, 종교적 필요성에 따라 집필하였으며 민감한 논쟁 사안은 피했다. 그러므로 랭커스터 왕가 시기는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 주로 튜더 왕조가 상대적으로 중세적 갈등을 극복하고 조화와 번영을 이루었음을 부각시킬 의도로 동원되었다. 그러므로 역사적 사실보다는 신화에 가깝게 읽힐 수 있다.

헨리 4속의 헨리 4세는 거듭되는 반란과 동료들의 배신 속에서 초조해하고, 한편 자신에 대한 새로운 반대 세력이자 방탕한 생활에 빠져있는 아들 왕세자 할(Hal)에 불만을 품는, 허약한 노년의 왕으로 묘사된다. 한편 헨리 5세는 헨리 41, 2부와 헨리 5에 걸쳐 폭넓게 등장한다. 왕세자 할은 왕세자 시절에는 방탕했으나 왕이 되자 주변의 걱정을 불식시키고 왕다운 면모를 보이는 개과천선의 인물이자 유능한 왕으로 그려진다.

그는 세상을 유랑하며 얻은 지혜로 비천한 무리들과도 어울리고 백성의 희망을 들여다볼 줄 아는 왕으로 묘사된다. 또한 아쟁쿠르 전투에서는 잉글랜드가 극적으로 승리하는 내용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왕으로, 왕세자 시절 어울렸던 한량 폴스타프를 처단할 때는 냉정한 면모도 갖춘 왕으로 비춰진다. 헨리 5세는 현대에 와서 1944년과 1989년에 각기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와 케네스 브래나 주연으로 영화화되기도 하였다.

헨리 6는 장미 전쟁이 벌어지던 30여 년 위기의 영국과 권력투쟁 과정 및 프랑스와의 전쟁 등을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헨리 6세는 미성년부터 섭정을 받고 프랑스 출신 왕비에까지 휘둘리는 무력한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특이한 점은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에 대한 묘사이다. 프랑스에서는 성녀이자 순결한 처녀 영웅의 화신인 그녀가 잉글랜드에서는 마녀, 창녀 혹은 악의 화신으로 저평가되는데, 작품은 두 가지 관점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잉글랜드 진영에 생포된 잔 다르크는 자신이 섬기는 샤를 황태자를 칭송하며 프랑스를 구할 영웅으로, 성 마리아의 성스러운 중재를 받는 신성한 처녀로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이 처녀이며 천상의 힘과 소통하므로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역설한다. 그러나 결국 화형의 위기에 처하자 자신은 임신한 몸이라고 번복하고, 그래도 요크공 등이 아랑곳 하지 않자 잉글랜드를 저주하며 사망하는 불우하고 가련한 여인의 모습으로 퇴장한다. 결국 작품은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의 영웅적 면모를 평가 절하하는 것으로 사료된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