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of Stewart
스튜어트 왕가
영국 첫 통합 왕가
스튜어트 왕가 문장
외국어 표기 House of Stewart(영어)
시기 1371년 ~ 1603년
지역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스튜어트 왕가의 기원
로버트 2세 초상화
스튜어트 왕조는 스코틀랜드에서만 232년간 아홉 명의 군주를 배출하며 통치를 이어갔다. 이후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왕가 군주로 등극하면서 영국 최초로 통합 왕국의 왕조가 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유럽에서 손꼽히는 왕조로 자리매김했다.
스튜어트 왕조는 노르만족에서 혈통의 기원을 찾을 수 있다. 9세기 무렵 북해를 평정했던 노르만족은 12세기 무렵 현재 영국과 프랑스 북부 해안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했는데, 노르만 출신의 스튜어트 가문 또한 그때 스코틀랜드로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스튜어트 가문명은 대대로 선조들이 노르망디 공국의 대법판관을 역임해온 것에서 유래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식 표기(The Stewart)는 프랑스 궁정에서 교육받고 성장한 메리 여왕에 의해 프랑스식 표기(The Stuart)로 대체되었다. 스튜어트 가문은 스코틀랜드에서도 로버트 2세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여섯 명의 재상을 배출한 고위 귀족 가문이다.
하지만 로버트 2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오른 것은 부계 스튜어트 가문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계 쪽으로 타고난 브루스 가문의 혈통 때문이었다. 늦도록 아들을 두지 못한 로버트 브루스가 동생 에드워드를 왕위 계승자로 지목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에드워드가 죽고 딸 마조리(로버트 2세의 어머니)마저 사고로 죽게 되었을 때, 로버트 스튜어트는 스코틀랜드의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엘리자베스가 로버트 1세의 늦둥이 아들 데이비드를 출산하자 왕위 계승권은 다시 적손에게로 넘어갔다. 이후 데이비드 2세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로버트 스튜어트는 쉰다섯의 나이로 뒤늦게 스코틀랜드 왕좌의 주인이 되었다. 로버트 2세를 시작으로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여왕 메리까지, 스튜어트 가문의 스코틀랜드 통치는 통합 왕국 시대에 비해 정치, 문화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럽고 불안정했다.
스튜어트 왕가의 어린 왕들, 그리고 섭정기
스튜어트 왕조가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던 시절의 왕권은 상당히 불안했다. 쉰다섯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로버트 2세는 선왕 데이비드 2세 시절 사실상 통치 실권자로 군림하며 권력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스스로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권력의 쇠락을 맛보아야 했다.
통치 13년 만에 로버트 2세는 의회의 강압으로 아들 로버트 3세를 후견인으로 두게 되었고, 권력은 자연스레 로버트 3세에게 이양되었다. 늦은 나이에 왕위에 오른 로버트 2세의 비극은 아들에게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 쉰셋의 나이로 스코틀랜드의 정식 왕이 된 로버트 3세는 왕권을 차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동생 올버니 공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허수아비 왕이 되었다.
올버니 공은 로버트 3세의 장남을 암암리에 살해하고, 차남 제임스 1세 또한 잉글랜드로 도피하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스튜어트 왕조의 왕권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스튜어트 가문은 줄지어 어린 나이에 왕위를 물려받으면서 혼란한 섭정기가 이어졌다.
먼저 제임스 1세는 올버니 공의 살해 위협을 피해 잉글랜드로 도피해야 했다. 열두 살 무렵, 그는 타국에서 왕위 수여식도 치르지 못한 채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결혼 후 스코틀랜드로 귀국한 제임스 1세는 가장 먼저 올버니 가문을 척결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는 그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 세력에 의해 그는 잔인하게 암살당했다.
그 결과, 제임스 2세 또한 여섯 살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왕위를 물려받아야 했다. 전임 왕이 암살당하고 어린 왕이 왕위에 오르자 스코틀랜드는 다시 한 번 혼돈의 섭정기로 접어들었다. 귀족들의 치열한 세력 싸움에 치여 국민들은 극심해진 생활고를 감내해야 했다. 당시 왕의 후견인이었던 알렉산더 리빙스턴 경과 스코틀랜드의 대법관 윌리엄 크라이턴 경은 제임스 2세를 대신하여 실질적인 통치를 담당한 섭정들이었지만, 이들은 국가 통치보다 자신들의 권력 쟁탈전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최고의 귀족 가문이었던 더글라스 가문과 섭정들의 살해는 제임스 2세가 직접 통치를 할 때까지 스스럼없이 자행되었다. 제임스 2세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더글라스 경을 살해하는 등 무서운 군주의 모습을 보였지만, 록스버러 성을 탈환하기 위해 전투에 나섰다가 대포 폭발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전장에서 제임스 2세가 맞은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제임스 3세는 스튜어트 출신 전임 왕들과 마찬가지로 여덟 살 나이로 왕좌에 앉았다. 어린 왕을 대신해 메리 왕비와 케네디 대주교, 보이드 경 등이 섭정 자리에 올라 국정을 돌보았으나, 누가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시국 속에 제임스 3세는 의심 많은 성격으로 자라게 되었다.
끝없는 피해의식에 시달리던 그는 당시 권세가였던 보이드 가를 몰살하고 천한 신분의 사람들을 등용하여 향락적 삶을 살아가며 현실을 도피했다. 그 또한 제임스 1세와 마찬가지로 불만을 품은 귀족 세력에 의해 전투에서 도망치던 중 암살당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이러한 비극의 굴레는 제임스 4세에서 그치는 듯했다. 열다섯 살에 왕위에 오른 그는 스튜어트 왕조 출신의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력, 외교, 문화 등 다방면에서 최고의 번성기를 이룩했다. 그는 백성을 사랑했던 현명한 왕이자 문화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훌륭했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호전적 성격으로 인해 자신이 일으킨 플로든 전투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이로써 스튜어트 왕조는 다시 한 번 어린 왕을 보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제임스 5세다.
제임스 5세는 17개월, 그러니까 채 두 살이 되기 전에 스코틀랜드의 왕이 되었다. 10여 년간의 섭정기가 이어졌는데, 섭정이었던 어머니 마거릿은 남성 편력으로 신임을 잃었다. 이어 제임스 3세의 아우였던 로버트의 아들 올버니 공작 존이 섭정에 올랐으나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 틈을 타 마거릿의 두 번째 남편 앵거스 백작은 왕의 권력을 휘두르는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이후 제임스 5세는 프랑스 귀족 기즈와 결혼함으로써 앵거스 백작을 제치고 스코틀랜드 내 권력을 쟁취했다. 그러나 잉글랜드의 종교 개혁 압박에 시달리다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패하고 우울증으로 서른셋의 젊은 나이에 숨을 거뒀다.
그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마지막 여왕 메리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왕위에 올랐다. 이는 스튜어트 왕조 초유의 사건이었다. 스코틀랜드는 애런 백작과 메리 기즈가 다스렸고, 메리 여왕은 프랑스 왕세자비가 되어 유년 시절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러나 첫 번째 남편 프랑수아 2세의 이른 죽음으로 스코틀랜드로 복귀한 메리는 두 번째 남편 단리 경을 살해한 혐의와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암살 의혹 혐의로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스코틀랜드 왕가로서 안정된 왕권을 이룩하지 못한 스튜어트 왕조는 대부분의 왕이 암살, 살해, 처형당하는 등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는 어린 왕의 왕권 계승으로 이어지면서 악순환의 굴레를 고착시켰다. 어린 왕의 정치적 공백은 여러 권력 가문의 치열한 권력 쟁탈전을 야기했다. 이후 권력 가문에서 왕으로 통치권이 이양되는 시점에서 또 한 번 자국 내 피바람을 몰고 왔다. 하지만 권력 싸움에서 왕손 보호를 목적으로 잉글랜드 및 프랑스로 보내졌던 왕위 계승자들은 훗날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발전된 선진 문명을 자국에 도입함으로써 스코틀랜드의 문화와 정책 발전에 기여했다.
스튜어트 왕가와 잉글랜드의 관계
스튜어트 왕조가 스코틀랜드를 통치하던 시절, 잉글랜드는 랭커스터 왕가, 요크 왕가, 튜더 왕가가 걸쳐져 있던 시기이다. 근본적으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적대적 관계는 역사적으로 쉽게 화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임스 1세가 유년시절 잉글랜드에서 왕실 교육을 받으면서 조금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아버지 로버트 2세가 권력을 잃고 실권자 올버니에게 장남을 빼앗겼을 무렵, 유일한 적자였던 제임스 1세는 프랑스로 피신하던 중 잉글랜드의 공격을 받고 헨리 4세의 손에 넘겨져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18년 동안 잉글랜드에서 포로 신분으로 성장기를 보냈지만, 그는 잉글랜드 왕실의 선진 교육을 받으며 왕실과 돈독한 유대관계를 쌓는 등 이후 스코틀랜드의 현명한 군주가 되기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1420년에는 잉글랜드 왕을 대신하여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 전투에서 스코틀랜드 군대에 맞서 싸워야 하는 비극적 상황에 마주하기도 했다.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군주가 된 그는 스코틀랜드로서는 보기 드물게 잉글랜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잉글랜드 왕실 교육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하지만 제임스 2세 시절로 넘어오면서 평화로운 양국의 관계는 곧 무너졌다. 이는 엄격하고 강한 방식으로 귀족들을 통제하고 통치했던 그가 외교적으로도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기간 잉글랜드 소유로 넘어가 있던 보더스 지방의 록스버러 성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그의 뒤를 따라 하일랜드 지방 사람들부터 수많은 귀족이 스코틀랜드의 영토 확장 계획에 참여하고자 기꺼이 전투에 나섰다.
그러나 압도적으로 우세했던 록스버러 전투에서 그는 잘못 장전된 대포 폭발 사고로 즉사했다. 당시 스물아홉 살이었던 그는 자신이 일으킨 전투에서 전사했지만, 그의 뒤를 이어 조지 더글라스가 전투를 지휘함으로써 결국 잉글랜드로부터 값진 승리를 얻어냈다.
소심하고 사욕이 많았던 제임스 3세는 잉글랜드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국 내 귀족 세력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1474년 아들 제임스 4세와 잉글랜드의 세실리 공주를 약혼시켰다. 그러나 그의 잉글랜드 화친정책은 오히려 훗날 자멸의 씨앗이 되었다. 사치스러울 뿐 군주로서 자격이 부족했던 제임스 3세를 몰아내기 위해 귀족들은 성명서를 내걸었다.
요지는, 잉글랜드와 지나치게 공조를 이룬 그는 나라를 팔아먹은 부덕한 왕이라는 것이었다. 평소 신임 받는 왕이 아니었던 그는 실제로 존 발리올 왕처럼 나라를 잉글랜드 손에 넘겨준 일이 없음에도 국민과 아들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이 일으킨 소키번 전투에서 아들 제임스 4세를 선두에 세운 귀족 세력으로부터 도망치던 중 방앗간에서 암살당했다.
잉글랜드와 우호관계를 맺은 아버지에 대항했던 제임스 4세이지만, 정작 자신은 잉글랜드 헨리 7세의 적극적인 화친정책에 결국 응함으로써 양국에 10여 년간의 평화를 선사했다. 당시 잉글랜드는 요크가와 랭커스터가의 끔찍한 내전으로 황폐했는데, 이를 종식시키고 왕위에 올랐던 사람이 바로 헨리 7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와의 우호관계 속에 나라의 안정을 꾀했다. 그러나 상당히 호전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제임스 4세는 헨리 7세의 딸 마거릿과 결혼하기 전까지 잉글랜드 왕의 든든한 동맹국이 되길 꺼려했다.
심지어 헨리 7세 통치 초기에는 에드워드 4세의 차남 요크 공을 자칭한 퍼킨 웨벡이 왕위가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때 제임스 4세는 웨벡의 편에 서서 헨리 7세 반역 음모에 가담했다. 하지만 결국 웨벡의 반란이 잉글랜드 귀족과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가운데 수포로 돌아갔다. 이 틈을 타 헨리 7세는 다시 한 번 제임스 4세에게 화친을 제의했다.
1502년 12월 11일, 글라스고 성당에서 평화 조약을 맺은 양국은 헨리 7세의 딸 마거릿 공주와 제임스 4세의 정식 결혼을 계기로 긴밀한 동맹관계를 굳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양국의 동맹 체제는 채 10년이 못 되어 제임스 4세가 일으킨 플로든 전투로 인해 양국에 사상 최고의 사상자를 내며 깨져버렸다. 잉글랜드 왕좌에 호전적 성향의 헨리 8세가 오르면서 양국은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마거릿 공주의 유산 미지급, 스코틀랜드의 배 라이온 호 탈취 문제, 헨리 7세의 서자 헤론의 문제 등 심심찮게 갈등이 야기된 것이다. 결국 제임스 4세는 잉글랜드와의 화친 조약을 깨고 프랑스와 동맹을 맺었다. 그 결과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자 이에 불복해 일으킨 플로든 전투에서 제임스 4세는 결국 전사했다. 이 전투로 잉글랜드 진영은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스코틀랜드 진영은 이보다 두 배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제임스 5세 시절, 잉글랜드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추진으로 대대적인 종교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의 부친을 죽게 만든 헨리 8세에 대해 제임스 5세는 혐오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종교 개혁 압박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와의 긴밀한 동맹관계를 유지했다. 제임스 4세가 프랑스의 메리 기즈와 결혼함으로써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동맹은 더욱 굳건해졌다. 제임스 4세는 이러한 권력 기반을 바탕으로 개신교를 지지하던 잉글랜드를 침공했지만, 솔웨이모스에서 패배한 후 우울증에 시달리다 서른 살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스와의 동맹관계는 메리 여왕 시절에도 확고했는데, 프랑스 왕비 메리 여왕은 종교적으로도, 성격상으로도, 잉글랜드의 왕권을 두고도 엘리자베스 여왕과 대치했다. 당시 메리 여왕은 엘리자베스의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을 문제 삼았는데,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의 모친 앤 볼린을 교수형에 처했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살아생전 서자라고 공포한 엘리자베스보다 헨리 7세의 증손녀였던 메리 여왕은 자신에게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권이 있다며 엘리자베스 여왕을 자극했고, 훗날 단두대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적 말로를 걷게 된다. 메리 여왕과 엘리자베스 여왕의 싸움은 영국의 왕권을 둔 쟁탈전이기도 했지만, 당시 유럽 전역으로 퍼진 종교 개혁의 급물살 속에서 구교와 신교의 전쟁이기도 했다.
메리 여왕의 아들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라가면서, 오랜 세월 앙숙 같았던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드디어 하나의 통합 왕국을 이룩한다. 스튜어트 왕조가 스코틀랜드만 통치하던 시기, 잉글랜드와의 관계는 언제나 프랑스와 삼각관계를 이루며 이익에 따라 우방국이 되기도, 적국이 되기도 하는 정치적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화해할 수 없는 양국의 역사 속에서 언제나 발톱을 숨긴 채 서로를 공격할 때를 노리는 관계였다고 볼 수 있다.
스튜어트 왕가의 문화적 유산
스튜어트 왕조의 왕손들은 자국 내 살해 위협을 피해 잉글랜드와 프랑스에서 선진 교육을 받으며 유년시절을 보냈다. 이후 이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왕위에 오르면서, 유년시절 체득한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문화적 유산을 스코틀랜드에서도 꽃피우게 했다.
대표적으로 잉글랜드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제임스 1세가 있다. 로버트 3세와 달리 강인하고 남성다운 면모를 지녔던 제임스 1세는 잉글랜드 왕실 교육을 받고 자라 교양도 풍부했을 뿐더러 다방면의 재능도 타고났던 터라 음악과 시 감상 및 창작에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그가 쓴 작품 중 두 편은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는데, <왕의 책(The Kingis Quair)>과 <풀밭 위의 교회(Christ's Kirk on the Green)>가 그것이다.
총 1,379행으로 이루어진 <왕의 책>은 꿈을 서사적 장치로 이용한 일종의 설화시로서, 아내 조안과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에게 바쳤던 애정시다. 이 시에서는 잉글랜드 문화가 제임스 1세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찾아볼 수 있다. 문체와 표현 방식 등 많은 부분에서 영시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의 스타일과 상당 부분 닮아 있다. 제임스 2세의 경우,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성품과는 정반대였지만, 글라스고 대학을 설립하는 등 교육을 장려했고, 백성들과 격 없이 지내며 그들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 줄 아는 왕이었다.
제임스 3세 초상화
제임스 3세 시절에는 사적인 여흥을 즐겼던 군주 탓에 건축가, 음악가, 대장장이, 재단사, 검술사와 같은 사람들이 궁정으로 유입되어 큰 권력을 잡았다. 정치 경험이 없는 이들이 국사에 관여하면서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지만, 문화적으로는 한층 발전된 면모를 보였다.
제임스 4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던 왕으로 통치 시절 무예, 예술, 과학 등 스코틀랜드의 문화 정책에 큰 관심을 쏟았다. 특히 자신 스스로를 ‘포악한 기사’라고 칭했을 만큼 그는 갖가지 군사 기술과 무기 사용에 능했는데, 창 시합과 마상 시합을 장려함으로써 국가의 부강함을 과시하는 한편 이러한 시합을 하나의 문화로 정착시켜 유럽 각지에서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잔인한 장면이 수없이 연출됐지만 당시 일종의 운동경기로 간주되었던 마상 시합은 당대 영예를 얻기 위해 귀족과 젠틀맨들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었다. 부친이 남긴 재산을 바탕으로 유래 없이 화려한 궁정을 지어 풍요롭고 교양 있는 왕실을 이룬 그는 스코틀랜드를 야만국으로 치부해온 타국인들을 행사와 시합에 초대하여 후한 대접을 함으로써 과거 스코틀랜드의 오명을 불식시켰다.
제임스 4 세의 초상화 (다니엘 미에텐스 작)
그뿐만 아니라, 과학 분야에 큰 관심을 보였던 제임스 4세는 1506년 왕실 헌장에 에딘버러 외과 의학대학을 등재했고, 1507년 스코틀랜드 최초의 인쇄소를 건립했다. 약사로서도 꽤 유명했던 그는 자신이 직접 수술 기법을 연구했을 만큼 적극적이었다. 그는 당대 과학으로 여겨지던 범주의 많은 것에 직접 참여함으로써 과학 산업을 장려했다. 또한 그는 스코틀랜드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는데, 이를테면 던바, 케네디, 더글라스 등이 그의 후원을 받았던 인물들이다.
그가 예술에 대한 지원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은 자신 스스로 예술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쉽게 북방의 야만족으로 취급받았던 스코틀랜드의 문화를 발전시킴으로써 국가의 외교적 이미지 또한 개선되길 희망하는 마음에서였다고 전해진다. 그가 든든히 지원한 결과, 그의 통치 시기에 북유럽 국가 최초로 이탈리아 시인 버질의 아이네이드가 번역되었고, 스코틀랜드 문학의 시초라 불리는 로버트 헨리슨이 배출되었다.
제임스 5세 초상화
제임스 5세는 용모가 훤칠했고, 제임스 4세만큼이나 무예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선친이 펼쳤던 백성을 중시하는 정책들과 같은 선상에 놓인 여러 정책을 제안했다. 그는 제임스 4세가 그랬던 것처럼 민심을 읽고 정책에 적극 반영하기 위해 변복을 하고 나라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는 흔히 시인이었던 제임스 1세와 많이 비교되는데, 스털링 성의 구조를 보강시킨 형태의 장중한 린리스고 궁전을 재건축했고, 왕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문학 작품들도 기꺼이 받아줄 만큼 예술가들에게 자유로운 창작 활동을 장려했다.
메리 여왕 초상화
메리 여왕이 왕비로서 프랑스에서 보낸 시절은 이후 스코틀랜드의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홀리루드 성 안에 작은 프랑스를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녀는 홀리루드 성을 프랑스풍의 장식으로 꾸미고 고전적인 가면극과 연극을 공연했다. 이는 엘리자베스 시대 최고의 정점을 찍었던 벤 존슨의 가면극과 셰익스피어의 드라마 등에 큰 영향을 끼치며 르네상스 잉글랜드의 연극 발전에 기여했다. 메리 여왕 시절의 스코틀랜드 문화는 잉글랜드에까지 영향을 미쳐 엘리자베스 여왕 시절 잉글랜드 문화의 전성기를 이룩하는 데 한몫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