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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use of Bruce

Bollnow 2025. 1. 7. 06:27

브루스 왕가

 

스코틀랜드의 독립 쟁취

브루스 왕가 문장

 

외국어 표기 House of Bruce(영어)

시기 1306~ 1371

지역 스코틀랜드

 

브루스 왕가의 기원

 

로버트 1

 

가문의 성 브루스는 프랑스 노르망디의 브루스, 오늘날 브릭스라고 불리는 지역명에서 기원하였다. 노르망디 출신의 브루스 가문은 1106년 데이비드 1세와 친분이 있었던 로버트 1(Robert Brus)가 잉글랜드 군대와 함께 바다를 건너오면서부터 브리튼 지역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로버트 1세는 당시 군사적 공로를 인정받아 애넌데일 땅을 받았고, 브루스 가문 최초의 애넌데일 영주가 되었다.

브루스 가문이 스코틀랜드의 왕가가 된 것은 잉글랜드의 통치 속에서 내란이 반복되는 가운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로버트 1세가 경쟁 세력가인 존 코민을 살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면서부터이다. 혈통상으로 로버트 1세가 스코틀랜드의 왕족임을 주장할 수 있었던 근거는 애넌데일의 3대 영주 로버트(Robert de Brus)가 데이비드 1세의 손자 헌팅던 백작의 둘째 딸 이사벨라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 로버트 1세는 데이비드 1세의 4대 외손자이며, 동시에 전임자 존 왕과 스코틀랜드 왕권을 두고 경쟁한 바 있는 애넌데일의 다섯 번째 영주 로버트 브루스의 손자이기도 하다.

1290년 마거릿 여왕 서거 당시 열여섯 살이었던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 왕위 쟁탈전에서 할아버지였던 로버트 브루스가 존 발리올에게 왕권을 빼앗기는 것을 지켜보았다. 잉글랜드 에드워드 1세의 허수아비가 된 존 왕을 보며 로버트 1세는 고국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다짐했고, 경쟁 세력가 존 코민을 만나 두 가문이 힘을 합해 잉글랜드에 맞서 싸울 것을 제안하려 했다.

그러나 말다툼 도중 코민을 살해한 로버트 1세는 황급히 자신의 지지 세력들을 모아 스콘의 대수도원에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스스로를 추대했다. 브루스의 대관식은 1306325, 코민이 죽은 지 채 두 달이 되기 전에 이뤄졌고,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브루스 왕조가 서막을 열었다.

 

스코틀랜드의 독립운동

 

극도로 비참한 형편 속에서 왕이 된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기치로 삼아 야심차게 정복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코민 살해 사건으로 인해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한 그는 모든 종교의 보호에서 제외되었고, 그를 죽여도 좋다는 교황의 포고까지 떨어진 상황이었다.

1306619일 악조건 속에서 치러진 잉글랜드와의 전투에서 펨브로크 백작에게 처참히 패배한 로버트 1세는 이후로도 계속되는 참패와 도피생활 끝에 13068월 자신의 성이었던 킬드러미에 이사벨라 백작 부인과 왕비를 막냇동생 닐 브루스의 보호 아래 맡겨 두고, 둘째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와 함께 아일랜드 해안의 라크란 섬으로 도피했다. 그러나 킬드러미는 잉글랜드 군대에 함락당하고, 이 과정에서 닐 브루스는 끔찍하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이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졌던 로버트 1세는 심기일전하여 제임스 더글라스 경과 함께 1307년 런던힐에서 잉글랜드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1314623~ 24일 이틀에 걸쳐 펼쳐진 바녹번 전투는 로버트 1세에게 큰 승리와 함께 스코틀랜드 왕으로서 당당한 명예를 안겨주었다. 에드워드 1세가 정복했던 스털링 요새가 스코틀랜드의 손에 넘어가게 되자, 잉글랜드 귀족들은 에드워드 2세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 마지막 남은 요새를 지킬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에드워드 2세는 대대적인 전투태세를 갖추고 스털링으로 진군했는데, 당시 스코틀랜드의 군사력은 잉글랜드에 비해 훨씬 뒤처져 있었다.

특히 훌륭한 무기를 갖추었을 뿐 아니라 훈련이 잘된 잉글랜드의 기병대와 궁수들은 스코틀랜드 군대와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을 뒤집기 위해 곳곳에 함정을 파고 잉글랜드 진군 예상 경로에 대못들을 박아놓았다. 또한 바녹번에서 스털링까지 남북 방향으로 군대를 정렬하고 후방에는 훈련되지 않은 하인들과 짐마차꾼을 배치시켰다. 로버트 1세의 빛나는 전술은 잉글랜드 군대의 병력과 무기에 한참 뒤진 스코틀랜드 군을 승리로 이끌었고, 전투에서 패배한 에드워드 2세는 간신히 잉글랜드로 피신했다.

이 전투에서 에드워드 2세는 수많은 병력과 잉글랜드의 귀족들을 잃었을 뿐더러 더 이상 스코틀랜드 정복을 꾀할 수 없게 되었다. 바녹번 전투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손에 꼽히는 최고의 승리를 안겨주었다. 반면 잉글랜드에게는 지울 수 없는 끔찍한 패배의 역사가 되었다. 이로써 스코틀랜드의 브루스 왕가는 자국 내 잉글랜드 세력을 척결할 수 있었고, 스코틀랜드 최고의 번영기를 누리게 되었다.

바녹번 전투

 

브루스 왕가의 세력 확장

 

1316년 로버트 1세의 통치 말, 그의 동생 에드워드 브루스는 잉글랜드의 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본국의 왕이 되어달라는 아일랜드 관리들의 청을 받았다. 로버트 1세는 기꺼이 동생 에드워드에게 병력을 지원해주었고, 몸소 아일랜드로 군사를 이끌고 가 잉글랜드군의 격퇴에 적극 동참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자신의 게일족의 혈통을 내세워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두 왕국의 적법한 통치를 꾀했다.

그가 1302년 아일랜드 버그 가의 얼스터 백작 딸과 결혼한 사실과 브루스 어머니가 게일족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었다. 실제로 얼스터 지역에 한해서 그의 이러한 노력은 성과를 보이는 듯했지만, 얼스터를 제외한 다른 아일랜드 지방 사람들에게는 그의 통치권 주장이 잉글랜드의 침략과 별반 다르지 않게 인식되었다. 잉글랜드 장군 피어스 버밍엄 경과의 전투에서 에드워드 브루스가 사망하자, 로버트 1세는 아일랜드 정복의 뜻을 접었다.

통치 말기, 병으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1세는 든든한 측근 랜돌프와 더글라스를 앞세워 잉글랜드로부터 큰 승리를 거두는 등 맹활약을 펼쳤다. 그 결과, 13285월 노샘프턴 조약을 통해 그는 공식적으로 독립국가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인정받았다. 물론 스코틀랜드 또한 잉글랜드로부터 해방되었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화친 조약이 맺어졌음을 공고히 하기 위해 두 왕국은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의 여동생 조안 공주와 로버트 1세의 아들 데이비드 브루스 왕자의 결혼 서약을 체결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버트 1세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이라는 평생의 과업을 풀고 쉰넷의 나이로 병사했다.

 

데이비드 브루스 이후의 브루스 왕가

 

로버트 1세의 후계자 데이비드 브루스, 즉 데이비드 2세는 다섯 살 때 즉위했다. 로버트 1세의 살아 있는 유일한 적손이었기 때문에 어린 나이에 왕권을 물려받은 데이비드 2세는 존 왕의 아들 에드워드 발리올의 반란으로 왕위 찬탈의 위기를 한 차례 겪고, 1333년 프랑스로 망명했다.

데이비드 2세를 대신해 랜돌프, 도널드, 머리, 더글라스 등 네 명이 차례로 스코틀랜드 왕국을 대리 통치했는데, 이들은 모두 에드워드 발리올과 대적한 전투에서 사망했다. 데이비드 2세는 프랑스 망명생활을 마치고 1341년 본국으로 돌아왔지만, 프랑스의 집요한 권고로 일으킨 네빌스 크로스 전투에서 잉글랜드에게 무참히 패하고 다시금 잉글랜드에서 11년간 포로생활을 경험했다.

네빌스크로스 전투

 

1357년 본국으로 귀환한 데이비드 2세는 왕으로 등극한 뒤 22년 동안 왕위를 비워야 했던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는 첫 번째 아내 조안나가 세상을 떠난 뒤, 1364220일 존 로지 경의 과부였던 마거릿과 재혼하며 왕국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하지만 그는 두 아내 모두에게서 자식을 보지 못했고 5년 뒤 이혼했다. 결국 데이비드 2세는 후손을 남기지 못한 채 마흔일곱의 나이로 1371222일 에든버러 성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후사를 남기지 못한 데이비드 2세를 마지막으로 브루스 왕조는 짧은 역사를 마감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로버트 1세라는 아버지 이름의 그늘에 가려 큰일을 해내지 못했던 데이비드 2세가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잉글랜드와 공조한 에드워드 발리올의 왕위 찬탈 위협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만약, 에드워드 발리올이 데이비드 2세를 누르고 발리올 왕조를 부활시켰다면, 로버트 1세가 어렵게 되찾은 스코틀랜드의 독립권은 다시금 잉글랜드의 손에 넘어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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