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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of Powys

Bollnow 2025. 1. 6. 16:28

포위스 왕국

 

웨일스의 약소국

포위스 왕국의 문장

 

외국어 표기 Kingdom of Powys(영어)

시기 400년대 ~ 1283

외국어표기 Kingdom of Powys

지역 웨일스

 

포위스 왕국의 건국

 

10세기 말 무렵 웨일스의 세력 분포도

 

포위스는 로마 점령기 이후, 웨일스 중서부에 세워진 왕국이다. 포위스를 세운 인물은 구르세른이다. 구르세른은 5세기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로 이름을 날린 보티건의 웨일스식 이름이다. 구르세른은 픽트족과 스코트족에게 쫓겨 웨일스 북부로 도피했고 그 곳에서 새로운 왕국을 건국하는데, 그것이 바로 포위스이다. 웨일스에 국가를 세운 구르세른은 웨일스에서 사망해 그 곳에 묻힌다.

구르세른의 아내 세비라는 로마 황제였던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딸로 포위스 왕가는 정말 고귀한 혈통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5세기 무렵 구르세른이 세운 왕국은 포위스로 불렸고, 구르세른의 후손은 구르세르니온 왕가로 불리며 포위스를 다스렸다. 9세기 무렵 포위스의 왕 킨겐의 지시로 세워진 엘리세의 기둥에는 포위스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구르세른은 포위스의 건국자이자 포위스 왕가의 선조이고, 그의 아내는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딸 세비라이다.

포위스라는 이름은 라틴어로 마을을 뜻하는 파구스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포위스라는 이름이 생기기 전, 이 지역은 테르니흘루그로 불렸다. 포위스는 넓게 보면 웨일스 중서부를 영토로 삼았고 자세히 보면 코르노비 내륙 지역과 세번 계곡 중부의 비옥한 땅 그리고 와이강 위쪽 유역이 영토였다. 건국 당시 포위스는 내륙 지방인 코르노비에 있으며 로마인들이 세운 도시인 비로코니움 코르노비오룸을 수도로 삼았다. 비로코니움은 한때 15천 명의 인구를 수용했고 전체 영국 땅에서 네 번째로 큰 로마인 집단 거주지였을 정도로 발전한 곳이었다. 로마인이 세운 유서 깊은 도시에 영국을 호령한 구르세른과 로마 황제 마그누스 막시무스의 딸이 세운 왕국이 바로 포위스였다. 이후 포위스는 800년 넘도록 유지되며 웨일스의 맨 마지막 왕국이 된다.

포위스 건국 당시 수도였던 비로코니움의 모습

비로코니움은 영국에서 네 번째로 큰 로마인 집단 정착지였다.

 

귀네드의 식민 지배

 

포위스가 처음부터 제대로 된 왕국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포위스는 여러 지역들이 느슨히 결합된 형태의 왕국이었고 완전한 왕국의 외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은 6세기 말부터 7세기 초였다. 포위스 관련 초기 기록은 대부분 잉글랜드와의 충돌에 관한 것이다. 포위스는 웨일스의 동부로 잉글랜드와 국경을 맞댄 탓에 잉글랜드와 잦은 충돌을 겪었다. 616년 무렵 포위스의 왕 셀리브는 체스터 전투에서 잉글랜드 세력과 격돌한다.

8세기 중·후반에는 잉글랜드 왕국 중 하나인 머시아와 갈등을 빚는다. 잉글랜드를 호령한 머시아의 왕 오파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국경에 오파의 방벽을 건설하면서 갈등을 일으켰다. 또한 오파는 포위스에 몇 차례 공격도 가했다. 오파가 죽은 후에도 머시아는 포위스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822년 포위스는 잠시 머시아인에게 장악된다. 잉글랜드와의 충돌로 생긴 국력 소모는 포위스가 이웃 왕국인 귀네드와의 경쟁에서 열세에 놓이는 요인 중 하나로 사료된다.

9세기 초·중반 포위스는 귀네드의 속국으로 전락한다. 귀네드는 메르빈 브리흐의 즉위를 기점으로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진다. 메르빈은 포위스의 공주 네스타를 아내로 맞는데 이것을 이용해 포위스를 거의 장악하기에 이른다. 포위스와 귀네드의 예속 관계는 로드리 마우르의 즉위와 함께 더욱 심화된다. 메르빈과 네스타의 아들 로드리는 모계 혈통을 통해 포위스의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마침내 855년 무렵 귀네드의 왕관을 쓴 채 포위스의 왕위를 차지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약 4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구르세르니온 왕가의 포위스 통치는 막을 내린다. 로드리 마우르의 공식 즉위 이후, 포위스의 왕위는 당연히 귀네드의 왕이 차지하는 처지로 전락한다. 855년부터 1063년까지 약 200년 동안 귀네드의 왕들은 차례로 포위스의 통치자 자리를 겸했다. 포위스가 주권을 되찾는 것은 블레딘 아프 컨빈이라는 새로운 왕가 출신의 걸출한 영웅이 등장하면서 가능해졌다.

9세기 무렵 포위스의 왕 킨겐의 지시로 세워진 엘리세의 기둥의 모습

9세기 무렵 포위스의 왕 킨겐의 지시로 세워진 엘리세의 기둥의 그림

 

포위스 왕국의 번영

 

106385일 웨일스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웨일스를 완전 통일한 귀네드의 왕 그리피드가 사망한다. 이때까지 포위스는 귀네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포위스의 귀족 컨빈의 아들인 블레딘은 그리피드라는 절대강자가 사라진 틈을 타 포위스를 재빨리 장악한다. 블레딘의 포위스 장악으로 포위스는 200여 년 만에 포위스 출신 인물을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 1063년 블레딘은 키난을 물리치고 귀네드의 왕위까지 차지한다.

이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귀네드와 포위스의 지배 관계가 역전되는 일대 사건이었다. 블레딘은 웨일스 북부를 완전 장악한 후, 잉글랜드 국경지역과 데헤이바쓰로도 영토를 일부 확장시켰고, 웨일스 법을 정비해 백성들의 일상생활까지 윤택하게 함으로써, 포위스는 전례 없던 황금기를 구가한다. 블레딘은 영국 땅을 장악하려는 노르만의 침공에도 맞서 싸워 웨일스의 주권을 앞장서 지킨다. 또한 마스라발 왕가라는 새로운 포위스의 왕가를 세움으로써 강성해진 포위스를 후손에게 무사히 물려주었다.

블레딘의 아들 카두간은 아버지의 유산을 물려받아 웨일스 최강자로 군림했고, 1094년부터 1098년까지 웨일스를 침략하던 노르만인에 반항하는 대항군의 지도자로도 왕성히 활동했다. 카두간은 무려 30년 동안 포위스를 통치하며 왕국을 안정과 번영으로 이끌었다. 카두간은 케레디기온을 장악해 웨일스 중부로 세력을 넓혔고 잉글랜드로부터 웨일스의 주권을 사수하는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강대한 귀네드 옆에서 기를 못 펴던 포위스는 블레딘과 카두간 부자(父子)의 활약 덕분에, 웨일스라는 무대 위에 주인공으로 우뚝 선다.

포위스는 카두간의 아들 오와인과 함께 마지막 전성기를 누린다. 포위스의 하락세는 오와인의 경솔함과 무관하지 않다. 오와인은 윈저 백작 제럴드를 공격하던 도중 그의 아내를 납치하는데, 이것 때문에 1116년 결국 제럴드에게 죽임을 당한다. 오와인은 1114년 헨리1세와 맺은 평화협정을 통해 그의 영토 지배권과 자치권을 인정받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경솔하고 무모한 성격은 그를 이른 죽음으로 이끌었고, 오와인의 요절은 포위스의 전성기를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와인이 사망한 1116년까지 포위스의 강력함은 여전히 굳건했다. 포위스는 커베일리오그, 케레디기온, 메이리오니드 같은 웨일스 중부 지역의 지배권을 여전히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와인이 사망하자 각 지역들은 독립을 도모하며 포위스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1118년 포위스의 왕 마레디드는 커베일리오그의 저항을 신속히 진압했지만, 포위스의 굳건하던 입지에 점점 금이 가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1121년 헨리1세가 웨일스로 원정을 추진했고 국경 가까운 포위스는 큰 손실을 입는다. 1132년 오와인의 숙부이자 후임자인 마레디드마저 사망하자, 더 이상 포위스의 하락세를 막을 인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블레딘의 후손들은 합심해 포위스의 황금기를 유지하려는 생각보다 권력욕이 강했다. 카두간의 아들 마레디드가 또 다른 아들 모르간에 의해 살해된 것은 포위스의 내분이 얼마나 심했는지 잘 보여준다. 왕자들의 다툼 속에 포위스의 눈부신 번영은 과거의 일장춘몽이 되고 만다.

 

포위스 왕국의 분할과 몰락

 

1160년 포위스는 두 개로 나뉜다. 통일된 포위스를 마지막으로 다스린 인물은 마레디드의 아들이자 블레딘의 손자인 마도그였다. 1132년부터 1160년까지 포위스를 다스린 마도그는 맏아들 흐웰린을 후계자로 지목했으나 흐웰린은 마도그의 사망 직후 숨을 거둔다. 남은 형제들은 왕국을 나누기로 결정하면서 포위스는 두 개의 왕국으로 분할된다. 포위스 남부는 포위스 웬윈윈, 북부는 포위스 바도그로 불렸고 각각 다른 왕가의 통치를 받게 된다. 한 번 분할된 포위스는 두 번 다시 통일되지 못했다. 두 개로 나뉜 포위스는 세력도 반토막이 났다.

포위스는 블레딘 이후 단 3세대 만에 웨일스 최강국에서 두 개로 나뉜 약소국으로 전락한다. 북부의 포위스 바도그는 오와인 귀네드의 통치를 기점으로 제2의 전성기를 누리던 귀네드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반면, 포위스 웬윈윈은 귀네드와 앙숙이 되고 독자노선을 걷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독자노선은 포위스 웬윈윈이 웨일스 왕국 중 가장 마지막까지 생존하는 비결이 된다. 포위스 웬윈윈의 노선은 웨일스의 주권 사수를 위해 분투하는 귀네드의 편에 서는 대신, 잉글랜드의 편에 서서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13세기 들어 잉글랜드의 웨일스 정복 시도는 한층 거세진다. 1240년 웨일스를 호령한 귀네드의 왕 흐웰린 바우르가 사망하면서 전 웨일스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다. 멸망 직전의 귀네드를 구한 것은 흐웰린으로 그는 진정한 웨일스 최후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 흐웰린은 귀네드를 거점으로 웨일스 내에서 빠르게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잉글랜드에 내전이 발생하자 흐웰린은 시몽 드 몽포르의 편에서 헨리3세에 대적한다. 시몽의 승리를 도운 공으로 흐웰린은 1267몽고메리 조약에서 웨일스 최강자로 인정받고, 웨일스의 다른 왕들에게 충성과 복종을 약속받을 권리가 있음을 승인받는다. 이때 흐웰린을 더 높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유일한 왕은 포위스 웬윈윈의 그리피드였다. 그리피드는 평생 흐웰린과 대립했고 잉글랜드의 편에 섰다.

1281년 웨일스 최후의 반란이 일어난다. 귀네드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저항에서 포위스 바도그는 웨일스를 사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운다. 포위스 바도그의 왕 흐웰린 아프 그리피드는 1281322일 오수에스트리를 공격해 잉글랜드인들을 몰아낸다. 하지만 에드워드 1세의 강력한 공세에 웨일스 최후의 저항은 실패로 돌아간다. 1282년 흐웰린의 사망과 1283년 흐웰린의 동생인 다비드의 사망으로 귀네드는 멸망하고, 웨일스 최강국의 몰락과 함께 다른 웨일스 왕국들도 일제히 잉글랜드의 통치 아래에 놓인다. 1282년과 1283년에 걸쳐 에드워드 1세는 포위스 바도그를 장악하고 흐웰린의 후손들이 왕국을 계승할 권리마저 빼앗았다.

1283년을 넘기면서 살아남은 웨일스 왕국은 단 하나, 잉글랜드의 편에 선 포위스 웬윈윈 뿐이었다. 그리피드는 1277년부터 1283년까지 에드워드 1세를 도와 웨일스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고 그 대가로 왕국을 지킨 것이다. 하지만 포위스 구엔윈윈은 이미 이름만 웨일스의 왕국이었을 뿐, 잉글랜드의 완전한 식민 지배에 놓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포위스 구엔윈윈의 왕은 더 이상 왕 칭호를 쓰지 못했고 그들은 봉건 영주와 같은 대우를 받았다.

따라서 그리피드와 후손들은 왕으로서 포위스 구엔윈윈을 통치한 것이 아니라, 영주로서 그 지역의 지배권을 유지한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포위스 웬윈윈을 웨일스 최후의 왕국으로, 그리고 포위스 웬윈윈의 왕 그리피드 아프 구엔윈윈을 웨일스 최후의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포위스 웬윈윈의 생존이 웨일스를 버리고 잉글랜드를 택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리피드의 후손은 포위스 웬윈윈에서의 영주 지위를 1587년까지 유지한다.

포위스 바도그의 국기

 

포위스 왕국의 유산

 

포위스는 웨일스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거의 남기지 못했다. 블레딘부터 시작된 약 반세기 동안의 황금기를 제외하면 포위스는 거의 항상 웨일스의 약소국이었기 때문이다. 포위스의 문화적 자산은 블레딘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그가 웨일스 법을 정비한 것은 웨일스인들의 삶의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포위스 왕국이 남긴 최대 유산은 포위스라는 이름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포위스라는 이름은 1972년 지방정부법의 탄생과 함께 197441일자로 웨일스 남동부를 일컫는 행정구역이자 그 곳 지방정부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편, 포위스는 1994년의 법 개정으로 199641일자로 새로 탄생한 개념인 보호 주가 되기도 했다. 웨일스에는 총 8개의 보호 주가 있는데 그중 상당수는 포위스처럼 해당 지역에 있던 중세 왕국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대표적으로 귀네드나 구엔트 같은 보호 주의 이름은 포위스와 동시대에 존재했던 왕국의 이름이다.

포위스 왕국의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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