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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dom of Desmond

Bollnow 2025. 1. 6. 15:57

데즈먼드 왕국

 

아일랜드의 신생국

데즈먼드 왕국의 문장

 

외국어 표기 Kingdom of Desmond(영어)

시기 1118~ 1596

지역 아일랜드

 

데즈먼드 왕국의 설립

 

데즈먼드(Desmond) 왕국은 아일랜드 남서부 먼스터 왕국의 분파이다. 먼스터 왕국은 438년부터 963년까지 어거나흐타 왕가의 왕들이 다스렸다. 먼스터 왕국에는 총 5개 지역이 있었고 5개 지역의 왕들 중 가장 강력한 한 명이 나머지 4개 지역의 왕들을 다스렸다. 어거나흐타 왕가는 먼스터 지역에서 약 5세기 동안 가장 높은 왕, 대왕’(High King)으로 군림했다.

먼스터 왕국이 남북으로 나뉘어 혈투를 벌인 것은 10세기의 일이다. 963년 도나하 2세가 사망하자 먼스터 북부의 왕 마스가만은 힘으로 먼스터의 대왕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그도 976년 어거나흐타 왕가 후손인 브리안에게 살해된다. 이후 계속된 남북 사이의 다툼은 11세기까지 이어진다. 먼스터의 내분은 1118년 글랜마이어 조약 체결과 함께 종료된다.

당시 먼스터 북부의 미르헬타흐 오 브리언은 전 아일랜드의 대왕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미르헬타흐는 대왕의 지위를 이용해 눈엣가시인 먼스터 남부를 굴복시키길 원했다. 하지만 미르헬타흐의 동맹군들은 하나 같이 그에게 먼스터를 남북으로 나누어 불필요한 국력 소모를 피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1118년 글랜마이어에서 조약이 체결되고 먼스터는 먼스터 남부를 뜻하는 데즈먼드와 먼스터 북부를 뜻하는 쏘몬드로 나뉘게 된다.

데즈먼드의 초대 왕위에 오른 인물은 어그나흐타 가문 출신의 타이그 미레다흐이다. 왕으로 즉위한 타이그는 자신의 성을 막 카르하 모르로 바꾼다. 이는 1045년 사망한 왕 카르하의 이름에 위대한이라는 뜻의 모르를 붙인 것이다. 이로써 타이그는 새로운 왕국의 초대 왕에 걸맞는 타이그 막 카르하 모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신생 왕가인 막 카르하 왕가는 이후 수세기 동안 데즈먼드를 다스리게 된다.

막 카르하 모르는 종종 영어식으로 변형된 맥카시 모르로 불리기도 한다. 신생 왕국 데즈먼드는 어거나흐타 가문의 거점 역할을 해온 전설적인 장소인 카쉘을 수도로 삼는다. 카쉘은 평야지대에 홀로 우뚝 솟은 석회암 지대로, 타이그의 선조인 코날 코크가 이곳에 카쉘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먼스터의 수도가 된다. 데즈먼드는 150년 만에 카쉘로 돌아감으로써 옛 왕가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했다. 카쉘은 이후 데즈먼드 왕국의 수도로 막 카르하 왕가의 정치적, 종교적 중추 기능을 했다. 카쉘 이외에도 발리카버리 성, 팔리스 성, 로흐 성 등은 데즈먼드의 주요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카쉘 요새의 1986년 모습

 

데즈먼드 왕국의 번영

 

신생 왕국 데즈먼드는 건국한 지 10여 년도 안 되어 쏘몬드를 흡수해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배경에는 초대 왕 타이그의 동생 코르막 막 카르하가 있었다. 데즈먼드의 2대 왕인 코르막은 1125년 쏘몬드의 수도 리머릭을 장악함으로써, 먼스터는 두 개의 왕국으로 분리된 지 7년 만에 데즈먼드로 재통일된다.

코르막은 용맹함과 인자함으로 명성이 자자했는데, 아일랜드 중세사를 기록한 이니스폴른 연대기(The Annals of Innisfallen)는 그를 가난한 자를 돕는 넉넉한 성품, 독실한 신앙심과 용맹함을 모두 갖춘 훌륭한 왕으로 높이 평가한다. 훌륭한 왕 코르막의 통치 아래 데즈먼드는 아일랜드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는 기반을 마련한다. 코르막 덕분에 데즈먼드는 먼스터 분파 중 하나에서 아일랜드 대표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12세기 중반 데즈먼드는 잉글랜드의 침략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한다. 당시 데즈먼드의 왕 디아마트 막 카르하는 1171년 아일랜드에 상륙한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평화를 요구한다. 명예보다 실리를 우선한 외교 정책으로 디아마트는 전쟁의 소용돌이로부터 데즈먼드를 지켜낸다.

디아마트의 다소 굴욕적인 태도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역사학자 헨리 엘렌 제프리스는 디아마트의 공로 덕분에 데즈먼드 왕국이 잉글랜드의 침략이 본격화되기 이전, 아일랜드에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고, 아일랜드 남서부의 강자로 오래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며 디아마트를 높이 평가한다. 12세기 데즈먼드는 어질고 현명한 두 명의 왕 덕분에 아일랜드의 대표 왕국 중 하나로 당당히 인정받는다.

 

잉글랜드와 데즈먼드 왕국의 격돌

 

즈먼드의 왕 디아마트가 일개 기사에게 살해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데즈먼드가 노르만인에게 유린당할 것을 예고한다. 13세기 들어 잉글랜드 귀족들은 부쩍 데즈먼드로 이주, 정착해 데즈먼드의 패권을 노린다. 1259년 헨리 3세는 데즈먼드를 존 피츠토마스라는 영주에게 봉토로 수여함으로써, 데즈먼드의 주권은 심각한 위협에 직면한다. 심지어 1252년 존 피츠토마스는 데즈먼드의 왕 도날 고트를 살해하고, 데즈먼드의 운명은 바람 앞의 촛불 신세가 된다.

위기의 데즈먼드를 구한 것은 두 차례의 승리였다. 1261년 핀진 막 카르하가 이끄는 데즈먼드 군대와 존 피츠토마스의 잉글랜드 군대는 칼란에서 격돌한다. ‘칼란 전투는 데즈먼드의 역사상 가장 빛나는 승리로, 잉글랜드가 아일랜드에서 당한 패배 중 가장 뼈아픈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손실은 무려 8명의 남작, 25명의 기사, 수천 명의 중기병이었고, 존 피츠토마스와 그의 아들 모리스마저 전사했다. 이로써 데즈먼드의 최대 위협은 사라졌고 핀진은 대승을 거두며 왕국을 사수한다.

1262년 데즈먼드는 칼란 전투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잉글랜드와의 새로운 전투에 돌입한다. 리차드라는 새로운 인물이 데즈먼드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데즈먼드의 새로운 왕 코르막 5세는 데즈먼드로 진군하는 리차드를 케리 주의 망거튼 산에서 맞았다. 이곳에서 데즈먼드는 또 한 번 값진 승리를 거둔다. 1661년과 1662년 두 차례의 연승으로 잉글랜드 침략자들은 데즈먼드가 만만찮은 상대임을 깨닫는다. 덕분에 데즈먼드는 13세기 후반과 14세기에 걸쳐 잉글랜드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더 자유로워진다.

14세기 후반 잉글랜드의 노르만 남작들이 데즈먼드로 돌아온다. 새로운 잉글랜드인들은 데즈먼드 왕과의 교류와 협력을 원하면서, 데즈먼드를 지배 대상으로만 보던 존 피츠제럴드 같은 이전 잉글랜드인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14세기 후반 데즈먼드는 아일랜드인과 잉글랜드인이 공존하며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독특한 시기를 보낸다. 뜻밖의 안정과 평화는 당시 데즈먼드의 왕이던 도날 오그 막 카르하의 공로이기도 하다. 1359년부터 약 30년 동안 데즈먼드를 다스린 도날은 강력한 군주이자 관대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로 명성이 자자했다.

 

데즈먼드 왕국의 최후

 

15세기와 16세기에 걸쳐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던 데즈먼드는 1596년 왕국의 생명을 다한다. 16세기 후반 데즈먼드인들은 여전히 막 카르하 가문 출신인 도날 9세를 왕으로 모셨으나, 왕국의 영토는 많이 줄어 있었다. 데즈먼드 왕 소유의 영토는 코크와 케리 지역뿐이었다. 그것은 잉글랜드 왕에 의해 데즈먼드 백작으로 임명된 피츠제럴드 가문과 오먼드 백작으로 임명된 버틀러 가문이 데즈먼드 왕국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영토를 소유하고 통치했다.

데즈먼드의 주요 영토 중 하나였던 케리의 오늘날 모습

 

데즈먼드의 멸망은 잉글랜드 엘리자베스 1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영국과 아일랜드를 통틀어 유일한 왕으로 군림하기 위해 데즈먼드를 왕국에서 일개 지역으로 격하시키려고 했다. 이에 강한 반대 의사를 비친 도날 9세는 1565년 납치되어 잉글랜드로 이송된다. 잉글랜드에서 도날 9세는 데즈먼드의 왕에게 부여된 막 카르하 모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백작과 남작의 지위를 받아들일 것을 강요받는다.

데즈먼드로 돌아온 도날 9세는 교황에게 사자를 보내 자신이 여전히 데즈먼드의 왕임을 주장한다. 엘리자베스 1세는 데즈먼드를 굴복시키기 위해 더 강도 높은 조치를 취한다. 1569년 무렵 엘리자베스 1세는 데즈먼드로 군대를 보내고, 1578년 도날 9세의 퇴위를 종용하기 위해 데즈먼드의 왕자 타이그를 더블린 성에 감금한다.

1583523일 도날 9세는 엘리자베스 1세에게 타이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낸다. 1588년 타이그는 탈출에 성공해 프랑스로 도망치지만 그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는 엘리자베스 1세의 수하에 의해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도날 9세는 뒤를 이을 적자를 잃게 된다.

16세기 말 엘리자베스 1세는 데즈먼드를 포함해 전 먼스터를 쑥대밭으로 만든다. 그동안 도날 9세는 킬라니의 성에 피신한다. 1596년 도날 9세는 사망하고 그의 시신은 머크로스 성당에 안치된다. 후계자의 부재로 데즈먼드 왕국은 그대로 소멸 위기에 처한다. 도날 9세의 서자가 몇 명 있었는데, 그중 같은 이름의 아들 도날은 데즈먼드 귀족들의 지지를 받으며 유력한 왕위 후보가 된다.

그러나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도날은 평생 잉글랜드인들과 싸워야 했고, 지친 도날은 결국 왕국을 포기하고 은둔하기에 이른다. 도날의 포기로 도날 9세는 데즈먼드 최후의 왕으로 기록되고, 데즈먼드는 478년의 세월을 뒤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데즈먼드 왕국의 유산

 

데즈먼드의 유산은 종교적 측면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데즈먼드가 남긴 종교적 유산은 대부분 코르막의 치세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기독교 보호자였던 코르막은 총 12개의 교회를 건설했다. 그의 가장 빛나는 종교적 업적은 바로 카쉘 요새의 코르막의 예배당이다.

코르막은 1127년 예배당 건축을 지시했고 1134년 완성된 예배당은 축성을 받는다. 코르막의 예배당은 건축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건물이다. 예배당은 당시 아일랜드에서 보기 힘든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로 당시의 건축술과 조각술이 집약된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레겐스베르크의 수도원장 피르미시우스는 예배당 건축을 돕기 위해 당시 최고기술자 4명을 파견했다고 한다. 코르막의 예배당은 지금까지 아일랜드 종교사와 건축사의 보석으로 남아 있다.

르막의 지시로 건축된 코르막의 예배당의 정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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