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강경우 - 일몰
강대환 – 낙양(落陽)
강영환 - 일몰 앞에서는 누구나
강정식 - 일몰
곽문환 – 일몰
권갑하 – 일몰 앞에서
권순자 – 일몰
김경실 – 일몰
김경희 – 일몰, 시간을 담다
김길남 – 해안가의 해넘이
김대식 – 삼천포의 일몰
김문택 - 일몰
김숙경 – 일몰에
김영천 – 목포 일몰
김완하 – 서해 낙조
김은식 – 일몰 앞에서
김정임 - 일몰
김종구 – 일몰
김주완 – 겨울 일몰
김주혜 – 일몰
김희철 – 산지 일몰
나희덕 - 낙조
남상진 – 일몰과 일출 사이
도종환 - 낙조
도종환 - 일몰
도혜숙 – 일몰, 그 후
명서영 – 일몰
박남준 – 서해 겨울 낙조
박라연 – 신태인 일몰
박영희 – 일몰
박이도 - 일몰
박인걸 – 일몰
박후식 - 일몰
성백군 – 일몰, 치매인가 봐
손정모 – 석도의 일몰
손정모 - 석양
신성호 – 해넘이
안성길 - 정자 바다의 일몰에 젖어
안재동 – 해거름 풍경
양인자 - 일몰
오세영 - 일몰
오애숙 – 해넘이 속 빛
오애숙 - 해넘이 홍빛 물결 속에
오정방 – 일몰
유봉희 - 그 일몰, 7월 13일 7시 40분
유홍준 – 일몰 앞에서
윤갑수 – 붉은빛이 떠오르면
윤갑수 – 일몰
윤갑수 – 해넘이
윤제림 – 하구의 일몰
이계윤 - 낙조
이명수 – 일몰
이명수 – 일몰 이후
이사라 - 낙조
이양우 – 일몰이 지는 언덕에서
이영균 - 일몰
이영균 – 일출과 일몰
이영균 – 저물 무렵
이재무 - 낙조
이재창 - 일몰(日沒) 이전 그때는
이재창 – 일몰 이후
이창숙 – 일몰 뒤
임영준 – 일몰
장인성 – 해넘이
장춘화 – 마지막 해넘이
전선용 - 일몰
정은정 – 다대포 노을
진명희 – 낙조
진창진 – 어느 겨울날의 일몰
최성원 – 애월 낙조
최영철 – 다대포 일몰
추명희 – 머리 위에 일몰이
한도훈 – 지리산 해넘이
한용훈 – 지는 해
한이나 – 부석사 일몰
홍신선 – 망월리 일몰
황동규 – 황해 낙조
황인숙 - 일몰
일몰(日沒)
강경우
임종을 앞둔 숨소리가 들린다
삭풍(朔風)을 머금어
천근 무게로 다가서는 구름
얼마 남지 않았음이다
"1812년"의 메시지
대포가 울리고
대 평원으로 몰아가는 말발굽 소리
음악이 있어야 할 곳에 전쟁이 있다
둥둥둥
아라비안 나이트
저 처절한 것은 내가 아니다
내가 돌아
오히려 저것을 탓하며 죽음을 거부하는 오만
사위어 가는 불빛은 반짝하기도 한다
종(終)
천(天)
눈물의 바다에 여명으로만 남은
노을빛
아라비안나이트
흩어지는 꽃잎은 내일을 잉태한다
언제나 아름다운 것엔 티가 있었다
낙양(落陽)
강대환
그리움의 노을빛 불기둥
불 단풍 한 그루 가슴에 타오르고
희한의 눈물 물결에 어린다
사랑이 싹트던 곳에
사랑이 추락하여 괴멸되어 가는곳에
보름달이 내려와 호수 품안에 안긴다
나는 왜 산봉우리 넘어가 버린
달빛 같은 너의 얼굴
떠올리는지 알 수 없어
없어진 이름을 부르고 있다
일몰 앞에서는 누구나
강영환
누구나 한 번쯤 바라보지 않았으랴
누구에게나 해는 지고 내게도 그렇듯
지는 해를 안고 언덕을 넘어간다
순식간에 결정되어버린 떠남 앞에
남겨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향을 피우고 묵념을 올려도
내게는 떠난 슬픔보다 남은 슬픔이
더 견고해 질 뿐 이 낡은 도시에서는
떨어지는 해가 어둠을 남긴다
산천초목이 먼저 고요히 잠들 때
깊이를 알 수 없는 잠 속으로
한 번 숨이 끊어지면 깨어나지 않을
그것은 실로 엄숙한 침묵
아쉬움이나 통곡으로도 닿지 못할
싸늘하게 식은 욕망을
안타깝게도 말해 주지 않는다 그것을
누구나 한 번쯤 바라보지 않았으랴
일몰(日沒)
강정식
산등성이 너머에서
어둠이 신작로 따라
쿨럭쿨럭 무릎까지 흘러넘쳐도
덧씌워진 하늘은 언제나 푸르게
살아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팔다리가 잘린 플라타너스
빨간 입술의 마네킹이 양편으로
알몸인 채 깊고 긴 터널을 만들어
피안(彼岸)과 차안(借岸)은 어디쯤에서
무엇으로 구별되어야 하나
연속 문양의 보도블록 그 틈새 사이로
발톱부터 녹아내려
질척하게 어둠에 섞여 번진다
해는 빌딩 꼭대기에서, 바다에서,
모래사막에서 떠서 여기에 진다
너의 가슴에 지고,
네 검은 눈동자에 지고
눈물 속 호수에 떨어지고
딸기처럼 허공에 매달린 수은등
설익은 빛은 부서지며 비늘처럼
그녀들의 눈썹 위에, 젖무덤에, 둔부에
그리고 내 어깨 위에 쌓여 간다
나 이대로 잠들고 싶어진다
기대어 선 어둠 잃어버린 그림자
잃어버린 그림자 너는 비어 버렸다
그녀들의 춤사위는
스란하게 깊어 가는 어둠을
보내려 하지 않는다
일몰(日沒)
곽문환
사람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더미
부서지고 삭아버린
모든 것 날려 보내고
띄워 보낸
설움의 흔적들
이제 돌아와 누워 있을
허위와 가증스러움이 살아
옷을 벗어 던지고
애잔한 소망
잊혀 지워진 앙금
치열 뒤살을 물고
뼘반 생애를 거닐며
피곤한 그림자로
바위 벼랑에 선
일몰은 다시 올 내일을
기다리고만 서 있다
일몰 앞에서
권갑하
언제나 보내고 나서
마른 풀잎처럼 흐느끼는
서늘한 눈물자국
뼛속 깊이 사무칠지라도
선홍빛 울부짖음으로
타오르고 싶었다
흐름 깊어갈수록
뜬눈으로 야위는 강
처연히 상처를 묻으며
별을 띄워 올리지만
내 안의 넘치는 슬픔
잦아들지 않는다
서둘러 옷을 벗는
허전한 부재 속에서
어둠, 그 둑을 허무는
핏빛 목마름으로
휑하니 지고 싶었다
외진 비명도 없이
일몰
권순자
내 연정이 낙엽 지는 날
동백꽃 뭉텅 뭉텅 떨어져
바람은 새파랗게 질려 쪽빛 바다로 숨고
동백 붉은 눈물 쏟아진
가슴 불타는 바다는
자꾸만 야윈 내 어깨를 삼키고
충혈 된 하늘은
화석 같은 시간을 몰고 오고 있었다
말없이 가버린 인연의 여운
수평선 너머로 잠겨든다
그대의 산 그림자를 뒤로하고
슬그머니 돌아앉아
이제,
추억의 문 하나 걸어 잠근다
일몰
김경실
해 내려와
이승 문 닫히어 갈 때
하루내 모은
내 피마저 보태어
목숨같이 타는 노을
어둠이 내리고
저녁새 날아 꼬리별 뜨면
다릅나무 꽃 피는데
억겹으로 핏물드는 그리움
오늘밤 꿈에라도 보이면
잊을 일이다
일몰, 시간을 담다
김경희
해 떨어지기 전
산책 가던 길
갈대가 춤추고 갯벌이
공존하는
해 길어 순식간
등선 배앓고
윤슬의 반경 붉은
언저리
그대의 구도와 각도
한 눈으로 보는 시야
이 순간
마음의 벤치에 앉아
소박한 삶의 이야기를
꺼내 본다
해안가의 해넘이
김길남
해 질 녘
충남 어딘가의 해변가
썰물로 인해 어느 논밭으로 변한 듯한
광활한 대지를 멀리도 걸었습니다
멀리 태양이 넘어가는 그 순간
갑자기 찾아온 어두움
먼바다 용궁 지키는
무사들이 달려 나올까 무서워
멀리 보이는 방파제 건너 상가 불빛만 보며
물 고인 갯벌을 허둥 지둥
달려 나오는 모습들이라니
만신창이 된 옷
옛날 엄마가 계셨으면 야단깨나 맞았을 터인데
갑자기 어머니 생각
삼천포의 일몰
김대식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걸
삼천포의 매력에 빠져 본 사람은 안다.
삼천포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를
삼천포대교의 아름다운 풍경이야 말할 것도 없고
호수 같은 바다의 풍경이야 너무도 당연하고
술잔에 담은 바다의 해물 맛 또한 천하의 일품이지
여기저기 섬의 매력은 더할 나위도 없고
여러 섬을 오가는 항구의 배들이야
꿈과 행복을 나르느라 여념이 없지
바다에는 물빛이 검어지고
해녀들도 조용히 집으로 가는 시간
바다 건너 해지는 풍경은 그야말로 아름답다
삼천포대교에 오색등이 하나둘 켜질 때쯤
발갛게 익은 홍시 같은 태양이
저녁노을과 함께 까만 산으로 지는 풍경은
보지 않고는 그 아름다움을 모른다
일몰
김문택
우르르 몰려와서
해 잡아가는
저 어둠,
우르르 몰려와서
아버지 잡아가는
빚쟁이 같다
해가 쉬어간다
온종일 걸어온 하늘 길,
따뜻한 사랑
땅에게 주고
식물에게 먹이고
어미는,
아랫목 찾아
몸 달구려 간다
일몰에
김숙경
텅 빈 들판 저 너머로
상기한 설렘을
알 수는 없지만
잠깐만 돌아 세워 보듬고 싶은
느릿한 등줄기
그 흔한 약속의 말 내색 없다가
산허리께 미끌려 걸린 저,
인동의
어지럼증을 견딘
어김없는 부활이더니
억새 가랑이 사이로 고개 접고
깃털보다 가벼운 언어 풀풀 날리다가
테두리 안에는 살점이 녹고 없다
조갈증에
망원렌즈를 갈아 끼우고
이내 이는 들녘에 서서
떠나는 시간을 되작인다
노을만 뿜고 산 뒤로 몸을 가리는
별무리보다 많은 언어를
파종하고 간 이름
붙들지 못할 피안
가슴이 저린 찰나
목포 일몰
김영천
젊음의 뒤안길을
방황하던 내 발목처럼
저녁 햇살이
발갛게 부어올랐다
연골 어디쯤이
으깨지거나 닳아져서
시큰거리며 절뚝거리며
물이라도 조금 차올랐을까
부푼 햇살 아래로
마른 갈대풀들이 서걱이는지
바다가
제법 깊숙이 밀려와
무너지며 쉐쉐거린다
이제는 걸음을
좀 쉬어야겠구나
어둠이야
천 리를 가든 머뭇거리든
나는 또 우루루 쏟아지는
별처럼
꿈이나 꾸련다
찬물에 부은 발을 담그고
물목을 치면 좀 나으려는지
먼 수평으로는
불쑥 해가 빠진다
서해 낙조
김완하
그대 그리운 날은 서해로 간다
오가는 길과 길 사이로
초록빛 그리움 안고 달리면
내 안으로 나무 하나 깊이 들어선다
계절마다 하늘 바꿔 이는 저 느티나무도
한 생을 이렇듯 푸르게 드리우지 않는가
참매미 쓰르라미 숨찬 울음소리에
산과 강 뜨겁게 열리고
불볕 속에서도 길은 서해로 달린다
십리포, 만리포에 이르러
제 가슴 한쪽을 여는 바다
짙은 쪽빛 껴안고 섬 하나 키운다
파도는 몇 번의 물때를 바꾸며
생의 바튼 숨길 씻어 내린다
파도소리에 귀먹은 모감주나무
수천 번 푸르름 길어 올리고서야
제 가슴에 능소화 몇 송이 붉게,
붉게 꽃잎 틔운다
서해, 하루는 붉게 달아올라
큰 바다 비로소 받아 안는 해의 몸
길에서 바다로, 다시 파도 속으로
너에게로 오롯이 이어져
가슴속에 등불 하나 살아 오른다
일몰(日沒) 앞에서
김은식
일몰은 몰입이다
붉게 타는 혼신의 열정으로
몰입하는 것은
뜻하는 바가 있고
어디엔가
자신을 송두리째 던진다는 것은
생각하는바
그 이유가 분명 있기 때문인데
일출을 앞에 둔
벌거벗은 내 두려움의 엄습
내일 새로운 해가 솟고
새로운 하루가 열리기라도 하면
조용히 혁명이 있을 여명 앞에
새로운 나로 하여
육신이 점거될 일이라도 벌어지면
지금까지의 위선의 시인을 버리고
무장해제의 백기를 준비하고
그것이 순리라면
순백의 항복을 선언하리
일몰
김정임
허공으로 치닫던 날빛
바다의 발끝에 모여
잉걸불 지피는 저녁 때
의식을 치르듯
몸을 기울여
바다는 가만히 눕고 있다
연모의 노래 출렁이는 심연
불꽃 당겨지면
속살까지 달아 달아오르다
눈부시게 터지는 폭죽
다시 빠르게 사라지는 관능의
저 꽃들,그늘진 자리
아름다운 소멸의 흔적
일몰(日沒)
김종구
서산(西山)에
사내 하나
부끄러이 앉아있다
그래, 그래,
괜찮다고
사는 게 다 그렇다고
하늘이
다독거리며 눈을 감아 주신다
겨울 일몰
김주완
1
오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가 끝이다
도중에 내리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하는가
올 데까지 왔기에, 이제는
가라앉아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숨 몰아쉬며 붉어지는 얼굴
천지를 활활 태우는 저 불길도
허덕거리는 이 답답함도
눈 깜짝하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내 뜻대로 나선 길이 아니었기에
오고자 하여 예까지 온 것이 아니기에
내 맘대로 내리는 것, 또한 아닐 것이다
2
고맙게도, 내가 그대에게 끌려온 것은
여기까지이다
나를 여기 내려놓고, 그대는 다시
밤을 새우는 노역으로 내일 아침을 열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여기까지,
여기서 내려야 하고
준비할 내일이 내게는 없다
나만 버려두고 그대만 또 가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치르고 있는 이 숨가쁜 의식이
바로 작별이다
남은 자가 맞이하는 임종이다
3
연극이 끝나고 있다, 마지막 장면은 언제나 으스스하고 썰렁하다, 잠시 불타는 엠버톤 칼라가 무대를 덥히지는 못한다, 배역도 연기도 어정쩡했다, 짧게 때리던 탑조명은 하나같이 회색빛이었다, 무대 위에서 제대로 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연극은 실패했다, 그러나 끝나지 않을 수 없다
무대막이 내려지고 객석등이 켜질 것이다, 관객은 수런수런 그들의 느낌을 무심하게 말할 것이다, 닫힌 무대막 뒤로 관심을 보내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마침내 그들의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삶의 끝은 고독하다, 혼자서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죽음의 시작은 춥다, 손끝 발끝부터 식기 때문이다, 가물가물 체온이 떨어지면서 숨이 막혀 답답해져도, 그러나 다행히도 그것은 잠시이다, 아련한 황홀이 곧 다가온다, 새지 않는 밤, 깜깜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며 숨이 멎는다, 무책임한 해방이 너울져 오는 것이다
4
짚불 꺼지 듯 겨울해가 떨어지면 곁불도 내어 놓아야 한다 하얗게 입김 내뿜으며 움추린 아이들 집으로 돌아가고 바람벽의 마른 흙은 남은 온기를 껴안은 채 밤을 맞을 것이다
뼈마디에 든 한기가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새벽쯤 숙제가 남은 노인 한 사람 자는 듯이 이승을 떠날 것이다 서산으로 가라앉은 해는 밤을 새워 동녘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다, 짧은 겨울해가 떨어지고 사붓사붓 찾아오는 길고 먼 어둠 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는 처연한 사건이다
해, 아이, 노인 - 서로 다른 수명 사이의 간극
5
화르르 타오르며 꺼져가는 저 불길
아름답다
차갑고 깜깜한 어둠
밀물처럼 몰아오기 때문이다
까맣게
지상의 모든 것 하나같이 감싸 안기에
부끄럽고 더럽고 사악한 것들
남루한 기억들 모두 다 묻어 버리기에
꽁꽁 얼려 꼼짝 못하게 가두어 버리기에
저 어둠, 저리 아름답고 몽롱하다
6
치자빛 치맛자락 깔아놓고 붉은 가슴 덥히고 있다
드러누운 강이 한달음으로 천연염색 되고 있다
해거름 겨울산 어깨가 자르르 풀리려 한다
검고 추운 긴긴 밤 건너려면 저래야지
이 밤 밀어내고 첫새벽 산마루 위
둥근 햇덩이 쑥 빼 올리려면
그래, 저만큼은 불타듯이
온몸 바짝 덥혀야지
그럼그럼 그렇지
그렇고 말고
앙다문
모진
맘
7
어른거지 아이거지 남자거지 여자거지 떼거리 지어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전쟁 끝나고 황량한 사방, 겨울 해가 떨어지면 마른 가시나무 울타리 곁 빈 밭에 자리를 잡았다 거적때기 깔고 덮으며 밤을 지낼 준비를 하였다 나뭇가지 세우고 큰 깡통 걸어 삭정이 불 피우며 둘러앉았다 얻어온 밥이며 반찬이며 국이며 한꺼번에 넣고 펄펄 끓였다
가운데는 건장한 왕초가 앉고 그 옆에 젊은 여자거지가 품에 안은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젊고 얼굴 하얀 남자거지가 다가앉으며 왕초의 여자를 흘끔거렸다 왕초의 눈에서 번쩍 하는 불길 일더니 굵은 지팡이로 사내의 정수리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뚝 지팡이가 부러져 나갔고 사내는 나무토막처럼 나동그라졌다 죽은 것 같았다 남은 거지들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꿀꿀이죽을 후후 불어가며 먹었다
아침이 되자 나는 문손잡이 쩍쩍 들어붙는 방문을 열고 나와 낮은 울타리 너머 거지들의 거처를 건너다보았다 하얗게 서리를 뒤집어 쓴 그들은 동냥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왕초의 여자거지와 어제 밤의 젊은 남자거지가 보이지 않았다 두더기에 싸인 왕초의 아기만 사그라지는 화톳불 곁에 놓여져 있었다 벌겋게 눈에 핏발 선 왕초가 씩씩거리고 있었다 다른 거지들은 슬슬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가시나무 울타리 어디서도 가시나무새의 아름다운 노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장 날카로운 가시에 찔려 흐르는 붉은 피도 없었다 왕초의 여자와 젊은 남자거지는 야반도주를 하였다 매섭게 추웠던 겨울밤의 어둠이 그들의 도주를 도운 것이다 그 아침 어느 먼 수평선에서 그들은 불타는 태양으로 떠오르고 있었을까
8
짧은 겨울 해가 바다 끝자락을 뚫고 들어갑니다
억지로 비집고 들어갑니다
많이 급했거나 간절하게 기다렸나 봅니다
찢어지는 물결 사이에서 붉은 피가 번져 나옵니다
물도 뭍도 핏빛으로 물이 듭니다
키 작은 나무 그림자 가장 길어졌다가 흔적 없이 사라집니다
물들지 않은 채 사라지는 건 그림자뿐입니다
바다의 몸속에서 얼마나 미끄럽게 헤엄쳐야
해가 다시 살아나는지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황홀한 절정에서 얼마나 부드럽게
바다는 몸을 떨며 비트는지 아는 사람도 없습니다
바다 속이 얼마나 따뜻할지는
더더구나 아무도 모릅니다
반영되는 한 장의 도화지 바깥에만 사람들이 있습니다 추위에 떨면서 쓸쓸하다 합니다 어둠이 무섭다 합니다 마음 들어앉힐 곳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9
내 속으로 들어오렴, 평생을 태우고도 아직 남은 불덩이 내가 식혀줄게, 식혀서 안아줄게 재워줄게, 나도 지금 속이 무척 허하거던, 긴긴밤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거던, 서슴없이 들어오렴, 온몸 열어 놓았으니 망설임 없이 들어오렴
일몰
김주혜
강이 먼저 주홍빛 자리를 편다
서서히 주저앉는 그를 지켜보는 일은 잔인하다
폭발적인 힘을 가진 그가 저렇듯 약해지다니
지저귀던 새들도 둥지를 튼 지 오래
하나둘씩 켜지는 등불 아래 그는
눈부시도록 위대한 준비를 한다
황금빛 강 사이로 붉은 길을 열고
흰 무명 바지저고리 살포시 여미며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듯
힘겨운 이별 숨을 몰아쉰다
시체처럼 꼼짝 않는 내 어깨를 도닥이며
처음부터 나는 혼자였노라고
주는 것밖에 할 줄 모르던 그가
가져가는 게 많아 미안하단다
내가 그의 곁에 오래 머물 수가 없을 정도로.
그는 위대했다. 다만,
외로운 생의 전부를 토해놓느라
잠시 숨가쁠 뿐인 그를
바라보는 강물이 더 아파하는
거추장스런 허물을 벗는
찬란한 의식
산지 일몰
김희철
하늘에서 피다 만
꽃잎들이 바다에 떨어지면
낙조는 다시 피어나고
노을도 페인트 통을
바다에 붓는다
서부두 방파제
가로등 싹이 돋기 시작하면
거리에 하나, 둘
꽃으로 나선 네 얼굴은
주름살이 이미 거미줄이구나
고향은 어딘지
네 부모는 어디서 무얼 하는지 들을 이유는 없지만
“놀다 가세요” 한 마디에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꽃잎은 바다에 빠지면
다시 피는데
네들은 오히려 시드는구나
이런 날은 밤마저도
발걸음 휘청거리며
취하고 싶어라
낙조
나희덕
한때 입을 벌려서 먹이를 찾고
숨을 쉬던, 그 모든 삶이
조각난 슬픔으로 바닷가에 뒹굴 때
내 필생의 조개껍데기 다 주울 수 없어
그 부스러기들에게 온몸을 긁히며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무릎을 끌며 기어도
다 주울 수 없어
낙조에 잠긴 바닷물이
더운 혀를 내밀듯 내 발등을 쓸어가고
잠시 허리를 펴고 바라보면
많기도 해라
부서져 삶의 가장자리에 쌓이는 것들
이렇게 부서져서나 한자리에서 만나는 것들
깊은 뒤척임 끝에 토해낸 신음소리 같은 것들
그래도 몇 줍지 못해 날은 저물고
일몰과 일출사이
남상진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해 질 녘 무늬는 모세혈관이다
긴 통로를 따라 구분된 이쪽과 저쪽
각각의 경계가 선명하게 흐르는 시각
절름거리며 들어서는 어둠이
토막 난 불빛의 깃발을 걷는다
색깔 있는 것들은 모두 떠나고
흑백만 가득한 들판
밤새 책임 지지 못할 것들을 잉태하는 달빛
늘 명쾌한 결론은 유보되는 세상
그 달빛 뒤로 다시 동이 트면
나는 어깨 위에 내려앉은
달의 비늘 툴툴 털어버리고
투명한 경계 그 안에
절름거리는 내 발목 하나 밀어 넣을 수 있을까
낙조
도종환
하구언 탁류를 덮는 낙조 보러 왔다
바다 끝에는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오늘 하루의 마지막을 덮는
찬란한 소멸이라도 있다
질문하지 않는 상식의 날들이여
감동도 비린내도 악마주의도 없는
나의 하루여
고뇌하지 않는 이 시대의 시여
하루 한 번만이라도
산산조각나는 걸 보러 왔다
산산조각나 수평선 위에 던져져
바다의 살갗을 찌르며
내 살 네 살 찌르며 피 흘려
처절한 모습을
일몰
도종환
지평선을 향해 해가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구릉 위에 있는 무너진 절터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사암으로 쌓은 성벽의 붉은 돌 위에도
노을은 장밋빛으로 깔리고
폐허는 황홀하였다
그가 폐사지 근처 어디를 혼자 떠돌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것도 거기서였다
젊은 날 그와 나는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다
비슷한 시기에 둘 다 뇌옥에 갇혔다
그가 맨 앞에서 곤봉에 머리를 맞아 피 흘리면
내 옷을 찢어 피투성이 된 그의 얼굴을 감쌌고
내가 쓰러지면 그가 옆에서 울었다
왕국이 가장 강성할 때 지은
거대한 사원도 무너져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병사들을 사열하던
왕의 테라스는 적막하였고
햇빛을 하얗게 달구어 공중으로 튕겨내던 창들도
영원히 하늘을 찌르지는 못했다
일몰 속에서 나는 우리가 꾸었던 꿈도
이루어지지 않은 꿈의 파편들도
다 그것대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꿈은 언제나 꿈의 크기보다 아름답게
손에 쥐어졌다 사라지는 것
그리고 안타까움이 남아 있는 날들을
부축해 끌고 가는 것이다
내일은 다시 내일의 신전이 지어지리라
시대의 객체로 밀려나 폐허의 변두리를
걷고 있을 덥수룩한 수염의 그를 생각했다
익명의 쓸쓸한 편린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지평선을 넘어가는 해가 그를 보고 있을 것이다
찬란한 폐허 위에 그와 내가 함께 있는 것이었다
일몰, 그 후
도혜숙
네가 그어놓은
수평선 깊이
떨어지던 해
고개 돌린
자동차 안으로
숨어 들어와
너였니?
귀밑에 찰랑거린다
금귀고리 사이로
어느새 밀물...
차는 스스로
바다에 눕는다
가라 앉는다
일몰
명서영
동구 밖 감나무 가지에
몇 개 달린 홍시와
서쪽으로 기운 해가 함께 걸려 있다
감인지 해인지
해인지 감인지 할머니의 대창은
서리서리 뜬 해만 푹푹 찌르고
감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강아지가 이쪽저쪽 뛰다가
툭 발아래 떨어진 감을
할머니 허리 구부러지기 전에
날름 핥아먹는다
강아지 잘 익은 해를 먹어 치웠는지
하늘이 어두워졌다
일몰
백원기
볼일 보러 나갈 때는
아직 해 꼬리가 남아있어
나온 김에 바람이나 쐬자 하고
길 따라 한 바퀴 돌아본다
십일월 보내놓고 십이월 맞으니
이해 마지막 달이라
인정사정없는 광음 행색이
밉살스러운데
밝았던 해가
집에 들어오니 안팎이 캄캄해
제멋대로 넘어가
어두운 일몰 뿌렸기에
이리되었나 보다
고집 센 세월이라
타이를 수 없어
중얼대며 따라가지만
나오는 한숨 막을 수가 없네
서해 겨울 낙조
박남준
노을로 물드는 지는 해를 보러 갔던 것은 아닙니다. 겨울 바다에 나갔습니다. 지난여름 이 백사장에 밀려 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발자욱들, 밤바다를 거닐던 젊은 연인들의 밀어들.
파도는 기억하고 있는지. 저 일렁이는 물결의 바위에 말없이 올라 지는 해를 바라보는 사람들 무슨 소망이라도 실어 보내는지. 어디까지 밀려갈 것인가
보이지 않는다. 일몰로 수장되는 붉은 해. 이홉들이 소주 한 병으로도 겨울 바다는 눈물난다. 파도로 부서져 우는 밀물의 겨울 저녁이여, 낙조로 지는 쓸쓸한 서해여
신태인 일몰
박라연
누구였을까
저처럼 아름다운 공중을 수태시킨 자
무엇을 잃으면
저처럼 아름다운 죽음을 출산한
태양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 있을까
일몰
박영희
종아리를 걷으라 한다
혹시 너에게
또는 누군가에게 누를 범한 일은 없었나,
그 잘못들 죄가 돼버린 건 아닌가 하여
불혹의 종아리 걷어 올렸더니
차알싹!
차알싹!
수평선이 핏빛이다
일몰(日沒)
박이도
어느 시점에서 하직할까
어느 지점에서 굴러떨어질까
지금 해는 내 기대를 뿌리치고
고독의 손수건을 흔들면 사라진다
외로움, 두려움, 침묵
죽음의 블랙홀
일몰(日沒)
박인걸
저기서 저기까지 걸어가느라
태양은 온종일 얼마나 힘들었을까
혼자 걷는 길은 출구 없는 고독이다.
진종일 대지에 쏟아부은 햇살은
코로나 긴급 구제비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바다에 빠진 잉여 햇살은 곯아떨어진다 해도
흘리고 간 햇살은 어떤 가슴을 어루만졌으리라.
일몰 이후의 거리는 그림자들이 도망치고
각을 세우고 일어섰던 세상은 어둠 속으로 침몰한다.
그 시끄럽던 굉음도 일제히 무너져 버리고
그토록 견고하던 도시는 담덩어리에 불과하다.
다만 전광(電光) 아래 몰려든 불나비들만
희미한 불빛에 희망을 건다.
나에겐 일몰(日沒)이 설레임이다.
온종일 따라다니던 바람을 쫓아버렸고
귓전을 울리던 발자국 소리를 신발장 안에 가뒀다.
계단을 오르느라 갉힌 연골에 기름을 치고
전두엽에서 빠져나간 감정을 채워 넣는다.
쌈닭 눈으로 노려보던 팽팽한 긴장도
장진호 전투가 끝난 병사만큼 마음이 가볍다.
하루가 밤에 잠기는 동안 나는 다시 살아난다.
봄비 내리는 오후보다 더 반갑다
일몰
박후식
산길을 가다 보면
돌 끝에도
햇빛 앙금이 묻어 있다
누가
보냈을까
산골 할머니가 밭고랑 끄트머리에서
자꾸 흘러내리는 햇빛을 고랑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할머니가
돌멩이처럼 작아지고 있다
일몰, 치매인가 봐
성백군
수평선이 단풍들었네
시도 때도 없이
마구 먹는데도 늘 배고파,
기운 세네
종일
하늘을 건너왔는데
기억에 남은 것은 몇 무더기 구름뿐
온몸이 벌겋게 타오르다
일순간 환하네
그만 불 꺼
나 잘래
석도의 일몰
손정모
지평선 너머로
지던 해도
수면에서 기운 힘으로
산고(産苦)를 푸는 석도.
수면에서 파드득거리는 반사광
수만의 물고기 되어
하늘로 치솟는데
물안개만 솜이불로 나부낀다.
석양만 되면 황해에서
몰려드는 숱한 영혼들
승천인지 하강인지 모를
수면파의 운율로 춤추며
숨 거두는 일몰
마지막 장면 지켜보다가
진정한 생멸(生滅)의 조화(造化)
의미가 무어냐며 수런댄다
석양
손정모
가슴이 먹먹할 때면
긴 그림자 끌며
해변에 선다.
광풍에 휩쓸리는 목련꽃처럼
갈매기들 떼지어
허공을 날고
황금빛 물결
불길처럼 타올라
숨죽이면
뱃고동처럼
가슴속으로 밀려드는
그리움
해넘이
신성호
하루의 고달픔이 무거워질 때
서산의 해는 가던 길을 멈추고
행여 눈물이라도 와락 쏟을 것 같은
나를 보며 내일 다시 오겠노라 하고 있네
내 사는 것이 힘들다고 소리쳐 본들
지는 해에 그 소리가 들려진들 무엇이 되랴
씨 뿌린 땀 흘림 뒤에 잘 덮어주고
고운 햇살에 물과 바람으로 어루만져주면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크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어 기쁨을 주는 것이라
지는 해가 내일을 약속하고
저녁노을 속에 해무리를 그리며
서산에 걸터앉아 열심히 살으라며
내 마음을 달래는 듯 붉게 타고 있네
정자 바다의 일몰에 젖어
안성길
언제부턴가 곤곤한 해조음에 젖은 자갈돌들이
쓸리고 쓸린 마음의 인동덩굴 풀어내더니
저무는 바다와 뒤엉켜 철썩이더니
하나 둘 익명의 어둠이 되고 있었습니다
서로를 물덥히던 그 청푸른 마음들이
매운 내 속눈썹까지 찰랑거리도록
숨소리 한 올 떨구지 않고 바라보았습니다
지난날 당신과 함께 해돋이 하던
그 모래 언덕엔 무수한 갈매기똥들이
함부로 굴러다니는 싱싱한 웃음소리 끌어 덥고는
숨을 고르며 한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와글거리던 물무늬들도 어느새
깨꽃 같은 별밭을 이루고...
그러고 보면, 이 땅에서 하늘까지
내 앞의 사물들은 모두 어깨와 어깨 겯고
서로를 등 토닥이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불현듯 짐승의 비명 소리를 내며
설움이 먹먹한 내 목젖 다 찢어 버렸습니다
두 무릎 사이에 얼굴 묻고
어금니 앙다물었지만 속수무책이었지만
내 가슴속 이팝나무꽃처럼 빛나던 정자바다는
영영 그렇게 지워지고 말았습니다
해거름 풍경
안재동
천계리 뒷산 산등성이
나즈막 갈대숲은
아이들이 꿈나무를 키우는 공간
여느 때처럼 신나던 아이들
땅거미에 쫓기다
흘리고 간 동화
노을에 불그스레 탄다
온 들녘으로
구수하게 퍼지는
동화 타는 냄새
온종일
장터 하늘을 박박 긁어대던
목 쉰 호객 소리
이제 피곤함에 절어
상인들의 보따리와 궤짝 속으로
삐칠 대며 기어들고
포목가게 아저씨의 달력에서
지워지는 하루
어둠이 자랄수록
풀벌레들이 별들과 다정하게
도란거리고
맑은 개여울에 몸 담근
시리도록 하얀
쟁반달 아름다움에 취해
비틀거리는 바람
일몰
양인자
우지 마라 사랑이여
지상에 남겨진 쓸쓸한 시간을
우지 마라 사랑이여 바람 따라 너 왔으니
차 한 잔에 마음 묻고 살아도 되련만
스치우는 인연에도 목이 메이는데
어차피 우리 다 한 번은 바람이 되어 떠나는데
왜 이렇게도 그리운 것이 많은지 몰라
차 한 잔에 마음 묻고 살아도 되련만
스치우는 인연에도 목이 메이는데
어차피 우리 다 한 번은 바람이 되어 떠나는데
왜 이렇게도 그리운 것이 많은지 몰라
우지 마라 사랑이여
지상에 남겨진 쓸쓸한 시간을
우지 마라 사랑이여 바람 따라 너 왔으니
일몰(日沒)
오세영
온종일 지구를 끌다가
저물녘
지평선에 누워 비로소
안식에 든 산맥.
하루의 노역을 마치고
평화롭게
짚 바닥에 쓰러져 홀로 되새김질하는
소 잔등의
처연하게 부드러운 능선이여
해넘이 속 빛
오애숙
나 해넘이 속에 있습니다
내 아직 황홀한 들녘이 좋아
그 빛에 내가 매료 되어
서성이며 맴돌고 있습니다
나 미련하여 곧 어둠 덮쳐와
맹수가 날 집어 삼키는
들녘 한 가운데 서 있습니다
갈 바 알지 못해 길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양 된 내게
그님 목자로 오시었습니다
그님만이 참 빛이라 깨닫고
눈물로 지난날 토해내어
꺼지지 않는 빛 속에 있습니다
나 이제 해넘이 속 빛입니다
해넘이 홍빛 물결 속에
오애숙
이 가을 맘속에
우수 깃들지 않고서도
쉽게 갈 수 있는 곳 있어
참 행복합니다
만추 홍엽의 물결
가슴에 일렁이고 있어
담금질로 호숫가 앉아
나래 펴 봅니다
살며시 눈 감으니
가슴 살포시 열고서
그 옛날이 미소하며
사랑 속삭입니다
해넘이 홍빛 물결에
첫사랑의 숨결 일렁여
옛 시인의 노래 속에서
그리움 피어납니다
노을 진 하늘속엔
하늬 바람 결로 저만치
구름 흘러 유유히 가는데
첫사랑의 물결 일렁이네
일몰(日沒)
오정방
한 여름 해거름에
태평양 연안에서
침몰하는 태양을 바라본다
종일토록 춤을 춰도 지칠 줄 모르는
노도에 항복하여
광대한 해면에
금빛보다 더 눈부신
최후를 쏟아 놓고
스스로 몸을 던져 사라지고 마는가
반달이 이미 중천에 떠서
미소 지으며
지는 태양을 환송하고 있다
그 일몰, 7월 13일 7시 40분
유봉희
세 뼘쯤 남은 해,
바닷가로 나가는 길에 갈대밭 갈대들은
어서 오라는 것인지 고만 돌아가라는 것인지
서걱거리는 손을 자꾸 흔들고 있다
길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언제나처럼 조금 망설이다 한 길로 들어섰지만
모든 입구가 출구를 물고 서 있다고 생각하면
갈대의 손짓이 무슨 의미이든 상관 있겠는가
바다는 저기서 마지막 햇살로 나뭇잎처럼 찰랑인다
두 뼘쯤 남은 해,
일렁이는 물결에 금빛 망을 던져 놓고
다시 생각하듯 머뭇거리는 일몰
수평선에 걸려 반짝이는 잔물결들은
심해의 나뭇잎, 떨어지는 오늘 해 한 덩이도
온 몸을 던져 심해의 뿌리에 닿고 싶은가
한 뼘쯤 남은 해,
해 종일 무겁던 머리, 당기듯 끌리듯 바다로 내렸다
기어코 뿌리에 닿았는가
붉은 해를 우려낸 바닷물이 수평선을 조금 넘었다
일몰 앞에서
유홍준
저 일몰 앞에서
발목을 내려놓은 그가 앉아 있다
눈멀고 귀 멀어 아무리 소리쳐도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와 나는 시소 타는 사람 같고
해와 달 같아서
누가 먼저 궁둥이를 털고 일어나면 툭 떨어진다, 하늘 아래로 곤두박질친다
저 뜨겁고 차가운
해와 달을
‘시소 타는 남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붉은빛이 떠오르면
윤갑수
뉘엿뉘엿 멧부리에 노을 지면
꽁꽁 언 강물위로 비껴간 햇살이
어지러운 영혼에 불을 지핀다
가슴 언저리에 매달린 서글픈
추억들이 검게 그을려 다홍빛
그림자 되고
오늘도 지나간 흔적을 지우는
해거름 속 반짝이는 소망의 눈동자
어슬렁거리는 달님이 반기운다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잎을 떨군
나목처럼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동틀 무렵 떠오르는 붉은 빛에도
가슴을 태우고 있기 때문이다
일몰
윤갑수
해거름
서녘 끝에 노을 진
하늘 바다
우리 님
수줍음에 고개를
저미우고
어스름
땅거미 지니 초승달만
반기네
해넘이
윤갑수
붙잡을 수 없는 그대여
햇살이 내려앉은 저물녘
멀어져 가는 그대여
고이 접어 묻어둔 그대여
마음에 머물다 미련 없이
가버린 당신이여
눈빛에 맴돌다
떠나버린 님아
멧부리에 올라 구름 타고
당신이 떠난 길을 따라
갈까나
그대
붙잡지 못함 못내 아쉬워
오늘도 바람에 말라버린
영혼을 달래본다
하구의 일몰
윤제림
집으로 가는데,
큰물에 떠내려왔다가
판문점 넘어가는 북쪽의 사람들처럼
이쪽의 옷은 훌렁훌렁 벗어던지고
만세를 외치며
냅다 뛰어 달아나지 못하고
집으로 가는데
돌 지난 아이 남겨두고 추방되는
베트남 여자처럼
아픈 몸으로
처음 올 때 입었던
그 옷을 입고
낙조
이계윤
한 없이 멀어져 간다
손잡으려 해도
눈길조차 주지 않고
뿌리치고 가는 무정
발길 돌리는 몸짓
별똥별 떨어지듯
뚝하고 멀리 떨어져 간다
행여 산에라도 올라
손을 뻗쳐 보지만
바다 저 쪽으로 기우는
황홀한 그리움만
물위에 그려놓고
어둠으로 지는 아쉬움에
허기진 내 가슴
차라리 달래려
속 깊숙이 이글거리는
불을 태운다
일몰(日沒)
이명수
바람은
멀리까지 가서 사라진다
나의 발길도
이제 보이지 않는다.
사라지는 빛과 살아나는 어둠
가지들이
죽어서 흔들린다.
가지 끝에 어리는
까만 이름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몰 이후(日沒 以後)
이명수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불을 청했다
건네 오는 마른 개피의 설레임
그 끝에서 빛이 떠난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어둠속에서
우린 헤어나지 못한다.
흐르다 끊긴 전류
가슴은 필라민트처럼 어두운데
우리는
죽은 바다 한가운데
몇 개의 돌이 되어
묻혀 간다
낙조(落照)
이사라
당신을 떠나올 때
불그스레 웃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스럽다
떠나올 때처럼 다시 당신에게 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갈 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사람은 사람에게 매달리고
구름은 하늘에 매달리고 싶어한다
사과밭에서 사과나무는 사과를 꽃피우고
그리고
사과상자 속의 사과가 되어
붉은 얼굴로 나는 다시 당신에게 간다
마치 오천 년 전의 은팔찌 하나가
박물관 속 낙조 같은 조명 속에서
오늘을 껴안는 것처럼
일몰이 지는 언덕에서
이양우
나는 고향이 그리웠지만
고향은 나를 모른다.
길 손들은 모두가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지
고향으로 가는 것은 아닐지라.
태어난 곳이 고향이라면
무한대한 지평선에
간이역두로
세상에 태어날 때 거쳐 온 것 뿐 일지라.
진정한 고향은 무한대한 지평선 밖으로
원형의 전설속에 묻혀 있을지어니
갓 태어난 황토마루
일몰이 가로눕던 시절의
고향은 다시 거쳐 갈 곳도 아닐려나
일몰
이영균
저무는 하루의 무게에
인천대교 난간을 부여잡은 채
그가 서서히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데
채 발목 잠기기도 전
술렁술렁 몸이 녹아 붉게 번진다
반기는 어둠, 보내는 하늘과 바다
그 품 안에서 한동안 붉게 흐느끼는데
그의 붉던 머리카락 검어져
어둠 깊어질 그때까지
썰물 그의 흔적 말끔히 쓸어 간다
달빛이 하루를 달래며 찔펄한 갯벌에
은빛 펄 비늘 깔아놓아
바라보는 눈 다 환해 오는데
석별의 상처에서 나던 불 냄새
갯내음으로 지워져 은빛 가득하다
저묾이 아쉬워 바동거리던 하루
붉던 대교
일출과 일몰
이영균
일출
정동진을 붉혀 희망차게 솟다 보면
언젠가는 널 품은 정서진도
보람으로 붉으리다.
일몰
하루의 긴 그림자 밟고선 저 끝
바다로 사라지기 전
검붉게 물들이는 넌 그리움이다
저물 무렵
이영균
해
긴 듯 짧은 듯
한 뼘 정도 남았을 땐
열기 식혀 가는 차가운 눈이 된다.
크게 뜨고 깜박거리지 않으려 해도
어느새 붉게 눈시울이 젖어와
큰 산 발등에
눈물 뚝뚝 떨구며 간다
일몰(日沒) 이전 그때는
이재창
낯이 선 햇살 덮고 하루해를 건너가나
내 생애 매듭 푸는 일상만 남겨 놓고
분신은 적(笛)을 울리나, 아 빈 날이 차던 너는.
감기고 감겨 도는 이 시대 한 복판에
칼날의 삿대질로 잔바람을 풀어 빗나
심전(心田)은 빛을 거두는 내 과녁의 노래여
술렁이는 생명이 난파당한 중심(中心) 저자
술꾼이 재던 술래도 깊은 잠의 비 내리는
거리 위 깨진 눈물이 가슴팍에 훤하네
낙조
이재무
하루 해전 잘 놀다 뻘 빠져나가는
저녁 해의 장딴지에 푸른 정맥 돋는다
어둠은 보글보글 땅속으로부터 솟아오른다
바람이 갈대의 무릎 꺾어 무료했던 한낮
참회케 한다 낙서처럼 어지러운 게들의 발자국
저벅저벅 걸어오는 썰물에 놀라 진저리 치며
흔적 지운다 언덕 넘어오는 자전거 페달의 숨 가쁜 소리
먼지의 몸 바다에 던진다
저 들끓는 고요의 나라
마음의 영원한 거처
일몰이후(日沒以後)
이재창
1
세상 사는 일이 차 마시듯 쉽다면
빈자리의 너와 나는 다리 꼬고 살겠지만
세상의 환한 달빛만이
아아, 서럽도록 빛남이여
만나는 사람마다 차 한 잔의 슬픈 상면
더욱 상승하는 무더움의 기류 앞에
우리는 마지막 단죄하는
이 지상의 한 마리 새
2 - 1
생명들의 피로(疲勞) 앞에
손을 흔들어라
우선,
값진 시간의 시선 밖에 솟아나는
불모(不毛)의 덧난 가슴에
침묵의 손을 흔들어라
2 - 2
식구들의 식탁 위에 객혈이 맺혀 있다
다문 겨울
그 깊숙한 별떨기 아래서
순수의 무게로 매몰되는
일상들이 떨고 있다
2 - 3
사람이여
어지러운 눈물을 닦아라
위엄도 체면도 없는
골재 채취장 부근에서
발병한 위장병을 씻어라
취한 날의 사람이여
일몰 뒤
이창숙
죽음이 경이로워지는 것은
오래 산 사람의 집에선 인(忍)의 꽃도 시들어 가고
오래 산 사람의 입속에선 말의 그림자도 빠져나가고
누덕누덕 삶을 깁는 숨소리도 벽 밖으로 새어 나가는
이젠 돌아올 줄 모르는
일생의 단 한 번 황홀함, 그리고 무너짐, 검게 잊혀져 가는 가벼움
가는 겨울비 끝에
죽음이 경이로워지는 순간들
일몰
임영준
그리
서운할 것 없다
반드시 돌아오리라는
예지의 동공 아닌가
방파제에서
산등성이에서
첨탑에서 목놓아
부르고 있지 않은가
서천을 열고
손짓하고 있지 않은가
해넘이
장인성
하루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생명의 숨소리 싸늘한 애수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
빛과 향이 어우러진 향연
저토록 황홀한 하늘의 찬사
하얀 버선 신발
정갈하게 벗어놓고
오롯이 알몸으로 홀연히 가심이여
하루의 마지막 손님
마지막 해넘이
장춘화
붉어진 눈시울
서러워서 그런거야
못다 이룬 내 사랑 두고 가자니
은빛 물든 윤슬 물결
감사해서 빛나는 거야
서투른 한 생을 안고 가시니
미움도 아쉬움도 안고 가소서
사랑도 감사함도 품고 가소서
남은 미련만이 산 뒤에 숨어 운다
일몰
전선용
기울지 않은 것은 없었다
지구 축이 기울었으므로 우리는 기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
힘이란 것이 그랬다
자꾸 몰아 부치는 것
내가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무게는 계량되지 않는다
다만, 무게 중심이 쏠리면서
금이 생겼고 틈으로 붉은 노을이 새어 나왔다
나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당신은 나의 여왕
삐뚜름하게 걸어가는 자세
해거름에 당신의 그림자도 빛의 기울기에 따라 밖으로 휘어나간다
사선으로 비추는 어스름한 빛에 불신이 길어졌고 오해는 짙어졌다
힘은 뭉쳤을 때 단단해진다
느슨해진 관계를 주먹밥처럼 말고 있던 그녀
해를 끌어내리는 것이 시간이라면
세상을 끌어내리는 것은 미움이다
눈꺼풀에 기생하는 숙주 때문에
눈시울이 뜨겁다
다대포 노을
정은정
하루가 재를 넘는
서녘 하늘 분주해라
바다에 몸을 씻고
일어나는 붉은 깃발
마침내
하나 되는 몸
아려 오는 명치 끝
낙조
진명희
고분고분
뒤따르던 시간들이
일제히 화살촉이 되어
낙일의 등에 꽂혔다
온몸이 핏덩이가 되어
떨어지는
한 마리 낙조
어느 겨울날의 일몰
진창진
노을이 붉게 지던 어느 겨울날 오후, 물결도 숨을 죽인 바다 위로 꽃상여 하나 서녘으로 떠가고 있었습니다. 벌건 해그림자가 물결 위에 잔잔히 부서지고, 저녁 해가 수평선에 닿는 순간 하늘도 바다도 숨을 죽이고. 어머니는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흰 명주 치마저고리에 하얀 코고무신 단정하게 차려입고 이 세상 마지막 작별을 하고 있었습니다. 눈 감은 채 마지막 만찬을 떨걱떨걱 넘기시던 어머니, 막내딸이 왔는데도 겨우 고개만 끄덕이시던, 저녁해는 천천히 물속으로 가라앉고, 천근 같던, 붉은 노을만 그 자리에 우두커니 남겨놓은 채, 그 천근 같던 숨소리
애월 낙조
최성원
언제부터 넌 말했지
노을을 보러 가고 싶다고
나도 거길 기억해
그때 보았던 그 노을
진주홍빛 구름들로 덮여 버린 하늘과 바다
믿을 수 없이 컸던 붉은 태양이 잠기던
누군가가 말했다지
슬픔은 노을을 좋아해
하지만 우리들은 아직 기억해 그 평화
이 순간 감사해 내 옆에 너를
노을이 물든 너를
이 순간 감사해 내 옆에 너를
노을이 물든 너를
조용히 다가온 푸른 밤하늘
어느새 초저녁 별이
바람 부는 애월포구
작은 산책로 벤치에 앉아
할 말 모두 잊고 애월낙조에 물들어
이 순간 감사해 내 옆에 너를
노을이 물든 너를
이 순간 감사해 내 옆에 너를
노을이 물든 너를
조용히 다가온 푸른 밤하늘
어느새 초저녁 별이
바람 부는 애월포구
작은 산책로 벤치에 앉아
할 말 모두 잊고 애월낙조에 물들어
다대포 일몰
최영철
해 지는 거 보러 왔다가
해는 못 보고
해 지면서 울렁울렁 밟아놓고 간
바다의 속곳, 갯벌만 보네
해가 흘려놓고 간 명백한 지문
어서 바닷물을 보내
현장 검증 중인 지문을 지우지만
갯벌은 해가 남긴 길고 긴 증거를
온몸으로 사수하네
시부렁 지부렁 등을 밀어붙이며
그 지문에 다 씌어 있다고
한 여인이 재빨리 와
이 과격한 문서를
저 혼자 읽고 숨기네
뒤꿈치로 쿡쿡 밟으며
쑥쑥 지우며
머리 위에 일몰(日沒)이
추명희
달리는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어둑한 얼굴
당신도 보고 있는가
맑고 깨끗한 눈빛은
별이 되고
지상에 남아있는
두 개의 흐린 눈동자
뉘우침으로 바라보는
나날은 그치지 않는 비가 내리고
가슴 웅덩이마다 빗물 고여
식욕도 멀리 달아난
늦은 귀가
당신도 보고 있는가
우리들의 나이
일몰을 머리 위에
이고 오는 쓸쓸한 풍경을
억만 송이
탐스러운 꽃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남루를
지리산 해넘이
한도훈
정월 초하루
한 세월이 박피(薄皮) 되던 날
찰랑찰랑 향기나는 한 살매*
그 목숨줄을 잇기 위해
내 운명을 뛰어넘는 명도적이 되어
삼지창 들고 뱃사공을 위협하며
겨우 삼도내를 건넜더니
온 산에 해꽃* 피듯
굽이굽이 타들어가는 해넘이 햇살
즈믄 날 즈믄 밤을
지리산이 쿨렁쿨렁 울어대고
먼 남해바다가
훌렁 뒤집어졌다는 얘기
노루막*이 떡갈나무 가지를 붙들고
서러운 황토빛이나
뭉텅 토해내고파
천왕봉으로 달려가는데
저렇게 산봉우리가 황소를 닮았는지
두억시니* 장난으로 생긴
산그림자 따라 두루미 쌍으로 날고
다붓이* 손각시*가 핏빛 손짓을 하면
몽달귀*가 부리나케 달려 나와
발 아래 무릎을 꿇고
황금빛 꽃다발을 내미는 것은
반야 해넘이가
천왕 해돋이를 사랑하느라
시방, 가쁜 숨이 넘어가는 거지
* 한살매 : 평생
* 해꽃 : ‘햇무리’의 방언
* 노루막이 : 산의 막다른 꼭대기
* 두억시니 : 모질고 사나운 귀신
* 다붓이 : 떨어진 사이가 멀지 않은
* 손각시 : 처녀 귀신
* 몽달귀 : 총각 귀신
지는 해
한용운
지는 해는
성공한 영웅의 말로(末路) 같이
아름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창창한 남은 빛이
높은 산과 먼 강을 비치어서
현란한 최후를 장식하더니
홀연히 엷은 구름의 붉은 소매로
뚜렷한 얼굴을 슬쩍 가리며
결별의 미소를 띄운다
큰 강의 급한 물결은 만가(輓歌)를 부르고
뭇 산의 비낀 그림자는 임종의 역사를 쓴다
부석사 일몰
한이나
배흘림기둥이 되어 나는 서 있네
전신에 보라빛 인동풀꽃 문신으로 새겨 넣으며
나는 견디고 있으리
살갗을 바늘로 찔러 물감이 줄기가 되고
잎사귀가 될 때까지
나는 버티고 있으리
상흔이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
풀풀 향기가 되어
몸이 만들어질 때까지
깊어가는 어둠 속 혈맥을 따라 통과해 가는 아픔
마침내는 이르러 캄캄한 딱지로 멈추어 선 너의
소백의 능선마다 내려앉는 어둠
둥─ 둥─ 둥둥─ 둥─ 둥둥둥─
비구승 서넛 번갈아
상한 영혼을 불러 모으는
법고 운판 목어 범종 소리를 담아
고통의 뜬 돌 위에 올려 놓는다
망월리 일몰
홍신선
두 야윈 손목의 동맥 긋고
앞바다 한가운데 혼절해 네 활개 뻗고 나자빠진
그 잘난 입양녀 노릇도 쫓겨난
오갈 데 없는 안잠자기 신세도 끝장낸
내 누이 같은 해,
이제 둥글디 둥근 내면 밖은 도처에 어둠이다
그 몸의 열린 죽음의 하수구에서 쏟아져 나오는
실꾸리만 한 피올들이
아프지 않은 가난과 신음들을
잔물결들 위에
막 화톳불 모양 올려놓는
이 전율의
폐업 직전 정신 영업 한 순간.
방파제 끝 밤 출어 나가는
멍텅구리 배 한 척이 흐린 식칼로
소리 없이 두 쪽으로 찢어 너는
강화도 망월리 앞바다
황해 낙조(落照)
황동규
'서방(西方)으로 간다'는 동서양 말 모두 죽는다는 뜻이고
오늘 태안 앞바다 낙조는
서쪽으로 갈매기 한 떼를 날리며
바다 위에
한없이 출렁이는 긴 붉은 카펫을 깔았다
죽을 땐 그 위를 걸어
곧장 가라는 뜻이겠지.
저고리와 고름 채 안 보이지만
하늘이 붉은 치마 반쯤 풀고
카펫 하도 황홀히 출렁여 정신없으리
제대로 가지 못하고
도중에 멍하니 발길 멈추리
두 세상 사이에 서서 오도 가도 못하고
일몰(日沒)
황인숙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두건을 쓰고
네 얼굴을 알아볼까 봐 역광 속에서
그림자처럼 스쳐 인파 너머로
넘어가는 너를 돌아보면서
네개도 내게도 낯선
거리를 돌아보면서
내 모든 고인(故人)들을 돌아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