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강연옥 – 얼음의 도가니
강해림 – 불과 얼음
고영민 – 얼음 옷
곽효환 – 얼음새꽃
김귀녀 – 얼음 고기
김귀녀 - 얼음판 같은 우리의 삶
김기택 – 얼음 속의 밀림
김남조 – 얼음 이야기
김내식 – 얼음 속 물소리
김내식 – 얼음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
김명인 – 얼음 호수
김병훈 - 얼음
김병훈 – 얼음 나라 연인(戀人)
김상미 – 석양의 얼음 공주
김세영 – 얼음골에서 견디다
김수우 – 얼음 눈동자
김윤자 – 얼음 옷
김종제 – 얼음 궁전
김종제 – 얼음 기둥
김종제 – 얼음 나무
김종제 – 얼음 물고기
김종제 – 얼음을 밟다
김종제 – 얼음 인간
김종제 – 얼음 폭포
김지향 - 얼음집
나희덕 – 눈과 얼음
마경덕 – 얼음의 죽음
박남준 – 따뜻한 얼음
박연준 – 얼음을 주세요
박윤규 - 얼음의 틈 사이로 절망을 흘려보낸다
배한봉 – 얼음꽃
복효근 – 얼음 연못
손세실리아 – 얼음 호수
손택수 – 얼음 물고기
손택수 – 얼음 이파리
송찬호 – 얼음의 문장
신대철 – 얼음 사막
신동욱 – 얼음 물고기
안도현 – 얼음 매미
유일하 – 살얼음
윤꽃님 – 얼음의 집
이기철 – 얼음
이영지 – 가을 호수에 얼음 구름
이재규 - 얼음꽃
이정록 – 얼음 도마
이정록 – 얼음 목탁
장진숙 – 버려진 방죽처럼 살얼음 얼어
정민기 – 얼음벽
정세일 – 강이 얼면 고무 얼음이 되어 출렁이고
정세일 – 겨울 얼음이 얼어버린 냇가
조연호 – 얼음 불꽃
주용일 – 얼음 대적광전
차영섭 – 개울 얼음
차영섭 – 얼음처럼 물처럼
차주일 – 얼음 렌즈
최영철 – 얼음 호수
하영순 – 얼음을 녹여 차를 끓이다
하영순 – 커피잔에 얼음을 녹이며
하재봉 – 얼음 기둥
황인숙 – 얼음 강
얼음의 도가니
강연옥
1
심장이 뜨겁게 끓어도 내 의식엔 언제나 눈이 내려
가장자리부터 식는 난 얼음의 도가니다
일탈을 꿈꾸는 영상들이 뜨겁게 달아올라 끓을 때면
괄호 속에 갇힌 먼저 풀어야 할 숫자처럼
수많은 부호 속에서 해답을 찾는 내 글쓰기는
펜 끝이 닿는 의식의 가장자리부터 식는다
한없이 의식을 얼리는 얼음의 도가니와
한없이 끓고 있는 심장의 치열한 이중성은
서로 닿는 순간마다 풀지 못하고
늘 덧없이 증발해버리는 오답이다
금속성으로만 깰 수 있는
빙산처럼 두꺼워진 내 얼음의 도가니에 가끔
“쩡-”하고 금가는 쇳소리 울린다
시리고 아프다
그리하여 가슴은 끓어야하는 난 얼음의 도가니다
이대로 얼마나 더 아파야 하나
* 시 제목은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에서 따옴
3
자신의 가시가 호랑이 발톱보다 강하다며
씨앗을 품지 않는 <어린 왕자>소행성의 장미
나는 늘 깨어있는 가시이다
억압을 욕망하는 욕망으로 호흡하며
손에 닿는 데로 색을 버무리는
분탕질에 피어나는 노을은
뾰족탑 십자가 성스러움에 내려앉은
화려한 분노이다
절정에 다다르지 못해
자신을 묶지도 풀지도 못하는 노을 바라보는
어린 왕자의 아픔이
어스름 저녁 노형성당 종소리로 울리면
혼돈의 사유를 지우는 어둠이 내려앉는다
사랑에 묶여 괴로워하는 한 세상도
결국 사랑으로만 풀어야 함을 깨달으면서도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는 난 얼음의 도가니다
* 노형성당 : 제주시 노형동에 위치한 성당
* 시 제목은 최수철의 「얼음의 도가니」에서 따옴
불과 얼음 - 두통을 위하여
강해림
두꺼운 지층을 뚫고
한 줄기 광명을 찾아가는 것들
허구한 날, 똑같은 꽃
상식만 피워대는 것들은 왠지 믿을 수 없어
저것들 거짓 수식어로
세상은 온통 화려할 뿐이야
천 길 어둠 속
머리 박은 나는 꿈꾸는 씨앗
벌 받은 입술로
발아를 포기한 채 영혼의 반란을 꿈꾸었지
왜 세상은 불에 물을 가(可)해도
물에 불은 불가(不可)하다는 걸까
빙하기, 만년설에서나 핀다는
그 꽃
얼음 심장으로
불꽃을 삼켜버렸나 봐
열망의, 거꾸로 흐르는 검은 피
마지막 남은 한 방울로
인종(忍從)의
고욤나무 죽은 뿌리 흔들어대는 밤이야
타타타,
누가 내 두개골에 대고
성냥을 그으대는데
더 이상 내려갈 수은주 눈금이 보이지 않아
얼음 옷
고영민
미처 거두지 못한 배추들이
추레한 행색으로 겨울 밭 한가운데 앉아 있다
옷을 몇 겹이나 껴입었는지
누렇게 해진 옷 속으로 또 몇 겹의
낡은 옷이 얼비친다
누더기를 벗겨본다
한 겹, 두 겹, 세 겹, 네 겹.....
몸은 얼어 있고
옷은 종잇장처럼 얇아져 있다
삼동(三冬)을 나기 위해 배추는 지난가을부터
푸른 잎사귀의 옷을 껴입었다
머리띠를 둘렀다
남의 옷을 벗겨가는 종자(種子)는
인간뿐이다
배추 속 한가운데 어린 배추가
목숨처럼
웅크리고 있다
얼음새꽃
곽효환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얼음 고기
김귀녀
모두가 잠든 깊은 밤
잠자리에 누우니
슬픈 울음소리 내 귀에 들려온다
골바람이 바다를 찾아
동쪽으로 내려오는 동막골 저수지
폭설에 살아남아
서걱 이는 갈대숲
새벽꿈을 꾸고 있는
맑고 투명한 빙어의 눈물까지
삼킨 밤, 다시 듣는 울음소리
때마다 구워내던
갈치, 꽁치, 고등어의 함성 소리
늦은 밤
뒤늦게 가슴이 젖는다
오! 주님
나를 용서 하소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권력으로
세상을 합리화하려던 나를 용서 하소서
얼음판 같은 우리의 삶
김귀녀
외로울 때 찾아가는
깊은 산골 호숫가
꽁꽁 언 수평의 세계에서
빙어를 낚는 사람들
즐거운 마음으로 어신을 기다린다
두 발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얼음판을 걸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균형을 잃고 쓰러지지나 않을까
얼음이 깨질까
염려가 앞서기 때문이다
얼음판 위의 발걸음과
다를 바가 없는 우리의 인생살이
눈속임이 많은 것을 알면서도
보험을 드는 것은
불시에 찾아 올 불행을 대비
일상생활에서
마음 편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을 믿고 따름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종말
그 분을 떠올리기만 해도
맑은 호수처럼
내 마음 살아있어
고요하고 평화롭기 때문이다
믿는다고 외치면서도
의심하고
괴로워할 수고로움 없이
마음 깊숙이 형성되는 영혼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평안이
스스로 찾아오기에
그 분을 사랑하고
신뢰하며 경배하는 가슴이 된다
얼음 속의 밀림
김기택
겨울 아침, 유리창 가득 반짝이는
성에를 본다. 유리창에 만발한 하얀 식물,
꽃과 잎과 줄기를 본다.
무엇일까, 막힘없는 물방울들을
섬세한 꽃과 잎의 무늬 안에 가두어놓은 힘은.
결빙의 힘 속에
식물의 본능이 숨어 있었던 것일까.
땅속에서 물을 퍼올려
잎을 피우고 꽃을 터뜨리는 생명의 비밀이
얼음 속에도 있었던 것일까.
모든 흐트러짐과 자유로움을
정교하고 엄격한 계율로 만드는
서슬 푸른 법(法)과 도(道)의 세계가
결빙의 과정 속에 있었던 것일까.
이 화려한 무늬를 들여다보면
막 얼기 시작한 물이
결빙의 칼날과 환희를 견디다가
절정의 순간 얼음의 결정체마다 살라놓은
투명한 불의 흔적이 보인다.
겨울 아침, 하얀 식물 성에를 보며
문득 지상의 모든 얼음들을 떠올린다.
푸른 얼음 속에 울창하게 퍼져 있는
또 다른 원시림을 본다.
청정한 법(法)과 도(道)가
열대의 온갖 동식물처럼
뿌리 내리고 자라 넘실거리는,
뛰고 날고 헤엄치며 노는,
투명하고 차가운 밀림을 본다
얼음 이야기
김남조
서양의 사랑은
활활 불타서 재를 남기고
동양의 사랑은
서로 스치며 녹아 물이 되어
하나에 이른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남, 북극의 만년설은
깜짝 놀라는 선연한 청옥 빛인걸
조금씩 부수어 팔기도 하는데
이를 수입한 나라들에선
작게 썰어
칵테일 잔에 띄운다 한다
보통 얼음보다
네 배를 더디 녹으며
수정 주사위 같고 신기하여
사람들은 술도 잊은 채
지켜본다던가
광석이면서
본질은 물이라
차갑고 투명한 물의 곤충들이
빽빽이 붐비며 꿈틀대고
실오리만 한 균열에도
몸을 푸는 물방울들이
작은 운하처럼 운집하리라
소리 없이 움직이는
공장 같으리
두 얼음 세 얼음이
스치고 녹아 물이 되어
끝내 하나에 이르듯
우리도 그리된다면 좋을 것을
... 사람아
얼음 속 물소리
김내식
산이 산을 이고 북두칠성을 마중하는
강릉시 구정면 칠성산 중허리에
법왕사 주지 스님
신도를 태우는 소형 버스에
도자의 삽날 달고
눈을 업으로 밀어가며
사바와 선계를 오르내린다
배고픈 작은 새와 다리 긴 고라니도
눈 쌓인 비탈엔 먹을 게 없어
인근 마을 가까운 야산으로 이동하고
구름만 기웃대는
텅 빈 겨울 산
눈 뭉치를 벙거지 쓴 청솔들은
팔다리 휘어지는 천형을 풀어주는
빗금 친 황혼 햇살도
달가운 눈빛이다
머리에 내린 폭설
염색하여 젊은 줄 착각하는 나는
버리고 살 나이에 채우던 마음 밭이
하얗게 비는 게 좋아
모처럼 눈길 따라
오르는데
이미, 하늘을 한 바퀴 돌아
성불을 이룬 눈은 물이 되어
개울 바닥 얼음 속으로
또르르 통통
목탁 소리 내어가며
낮은 곳의 목마른 자를 찾아
바람을 타고 가는 솔향 함께
저만치 내려간다
얼음 속으로 흐르는 물소리
김내식
산이 산을 이고
북두칠성을 마중하는
강릉시 구정면 칠성산 중허리에
법왕사 주지 스님
신도를 태우는 소형 버스에
도자의 삽날 달고
눈을 업으로 밀어가며
사바와 선계를
오르내린다
배고픈 작은 새와 다리 긴 고라니도
눈 쌓인 비탈엔 먹을 게 없어
인근 마을 가까운
야산으로 이동하고
구름만 기웃대는
텅 빈 겨울 산
눈 뭉치를 벙거지 쓴 청솔들은
팔다리 휘어지는 천형을 풀어주는
빗금 친 황혼 햇살도
달가운 눈빛이다
머리에 내린 폭설
염색하여 젊은 줄 착각하는 나는
버리고 살 나이에 채우던 마음 밭이
하얗게 비는 게 좋아
모처럼 눈길 따라
오르는데
이미, 하늘을 한 바퀴 돌아
성불을 이룬 눈은 물이 되어
개울 바닥 얼음 속으로
또르르 통통
목탁소리 내어가며
낮은 곳
목마른 자를 찾아
바람을 타고 가는 솔 향 함께
저만치 내려간다
얼음 호수
김명인
가장자리부터 녹이고 있는
얼어붙은 호수의 중심에 그가 서 있다
어떤 사랑은 제 안의 번개로
저의 길 금이 가도록 쩍쩍 밟는 것
마침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빙판 위로 내디딘 발걸음 돌이킬 수 없다
깨진 거울 조각조각 주워들고
이리저리 꿰맞추어보아도
거기 새겼던 모습 떠오르지 않아 더듬거리지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한때의 파문
어느새 중심을 녹여버렸나
나는 한순간도 저 얼음 호수에서
시선 비끼지 않았는데
얼음
김병훈
얼음은 녹아보는 게
유일한 꿈이자 사랑이다
얼음은 온몸이 눈물이다
얼음은 온몸이 사랑이다
얼음은 온몸으로 시를 쓴다
얼음처럼 사랑하다, 죽으리라
얼음처럼 시 쓰다, 죽으리라
얼음 나라 연인(戀人)
김병훈
얼음과 얼음이 만나 물이 된다
물과 물이 만나 수증기가 된다
수증기와 수증기가 만나 비가 된다
너와 나의 만남은 언제쯤 물이 되어
너와 나의 사랑은 언제쯤 수증기가 되고
너와 나의 이별은 언제쯤 비가 될까
우린 언제까지 얼음으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해야하는 것일까
난 이미 너의 심장을 녹여줄 준비가 끝났는데
석양의 얼음공주
김상미
나는 그가 좋아 세상 물정에 어둡고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나를 한 마리 새하얀 양으로 그려주는 그가 나는 좋아 가시 많은 장미꽃보다 헐벗은 카우보이 같은 잭 런던의 강철 군화를 벽에 걸어주고 아양 떨고 매달리고 침 흘리는 개새끼들을 저 멀리로 차버리는 그가 나는 좋아 호시탐탐 그의 하나밖에 없는 애인이 되고 싶어 불타는 권총 한 자루와 날렵한 잭나이프를 가슴에 숨기고 보이는 대로 그의 여자들에게 뜨거운 피 맛을 보여주는 나를 향해 던지는 그의 야릇한 천만 불짜리 윙크가 나는 좋아 그는 세기의 소매치기 집단 페이건보다 더 빠르게 내 마음을 훔치고 카사노바보다 더 빨리 나를 군중 속으로 밀어내지만 나는 뒤집기 게임의 명수 그의 수법을 쭉쭉 빨아 당겨 멋진 복수를 꿈꾸는 얼음공주 그가 달콤새콤하고 쫀득쫀득한 손길로 나를 어루만질 때에도 그가 세기의 영웅처럼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우아하게 자동차 문을 열어 그 안에 탄 여자들을 보여줄 때도 나는 앙증맞은 토끼처럼 깡충거리며 겉으론 환하게 속으론 새파랗게 칼을 갈지 물론 그는 모르지 모르면서도 힘껏 가속페달을 밟으며 음산한 엑스터시 협곡을 향해 신나게 질주하는 그. 그는 꿈에도 모르지 얼음은 녹을 때 더 치명적이고, 더 아리고, 더 정직해지고, 더 뜨겁다는 걸 죽을 것 같은 쾌감이 크면 클수록 내가 더 자주 더 빨리 활활 타오르는 불꽃들을 비웃는 얼음공주로 변해간다는 걸 비웃음은 붉은색으로만 치장된 화려한 매장 어떤 것을 골라도 아주 지루하고 건조해지지 담배 피는 비루먹은 개처럼 역겹고 추해지지 온갖 감정이 넘쳐나는 문체 뒤에 숨어 있는 심장의 메마름* 나는 그 서늘한 메마름으로 서서히 내게서 그를 죽일 거야 새하얀 양, 가시 많은 장미, 헐벗은 카우보이, 달콤새콤하면서도 쫀득쫀득한 손길, 텅 빈 새파란 하늘, 그 모든 것을 발갛게 물들이며 죽어가는 저 잔인한 석양처럼
* 프란츠 카프카의 글 중에서 변용
얼음골에서 견디다
김세영
적도의 심장이 화차처럼 이글거려도
내 몸이 녹아내리지 않는 것은
북해의 냉류가 등줄기를 냉각 코일처럼 감고 내려와
골짜기에 얼음골을 이루고 있음이다
산짐승의 울음소리에 달뜨지 않는 것은
정수리 위 오로라의 서기(瑞氣)가
온몸을 감싸고 있음이다
열기의 박동소리가 능선의 나뭇잎을 흔들어도
뜨거운 핏물이 윗계곡의 바위를 달구어도
암반의 고드름은 흰 건반처럼 가지런하다
저물녘 암벽의 견고한 그림자로
골짜기 저수지의 얼음판 위로
별빛의 징소리를 내며 건너오고 있다
열대야의 밤에도 남극의 펭귄처럼
불면의 맨발로 빙판 위에 서서
몽당날개지만 파닥이며 그를 기다린다
얼음 눈동자
김수우
여덟 살 다팔머리 맏딸은
쭈그렁 냄비를 들고 봉래동 시장통에 서 있었다
아부지가 월급 대신 받아온 동태 가마니, 새 운동화를 약속했던 엄마는 그 북태평양 살점을 팔기로 했다 쏟아진 얼음 눈동자들, 훤히 아는 듯 두릿거리는데 “더하기 빼기 할 줄 알제!” 갈기 푸른 엄마가 쥐어준 냄비를 안고 더하기 빼기가 막막한 딸은 하늘만 바라보았다 얼음 눈동자들이 봄구 름을 넘고 있었다 물갈퀴가 된 엄마 손도, 오 원짜리 지폐로 퍼덕이는 바다도, 세 동생이 끌던 슬리퍼도, 귀퉁이 깨진 두레 밥상도, 낮은 천장을 달리던 쥐들도 얼음 눈동자로 둥둥 떠가고 있었다
아부지가 끌고 온 바다가 앞으로 억 년은 걸어야 할 하늘임을 몰랐던 그때, 운동화 한 켤레가 비싸다는 것을 알았고, 정말 미안했다 온 천지에 미안했다 낱돈이 아가미처럼 담기던 손냄비가 그 모양 그대로 제 가슴이 되어버린 지금,
두릿두릿, 얼음 눈동자로 본다
바다의 단칸방들
얼음 옷
김윤자
누가 널더러
왜 그리 차가우냐고 묻거든
삼월에 눈 뜬
매화 꽃 처럼 그냥 웃거라
왜 그리 두터우냐고 물을 때도
말없이 드러누운
고산의 산그리메처럼 그냥 웃거라
하얀 침묵으로
죽음처럼 고요해도
너는 겨울의 어머니인 것을
너를 덮고 누운 대지가
너로 인해 허문 등성이를 메운산하가
너의 따슨 품에서 새근거리며
우주를 꿈꾸고 있는 것을
그 자리에 다 놓고
빈 걸음으로 떠날지라도
가슴을 울리던 생명의 발동 소리
그 한줄기 행복에 그냥 웃거라
얼음 궁전
김종제
영하로 내려간 집이
봄으로 녹아버리기 전에
한두 달이라도 들어와 살라는
당신의 몸 속
얼음 궁전으로 간다
나도 한때 얼음이었던 적이 있어서
그저 알몸으로
벽을 열고 미끌어져 들어가면
그 오래 전에 들어가 살았던
지하의 아득한 방이다
무지개 등불이 반짝이는 정원에서
온갖 얼음의 열매가 열렸다
얼음새들이 날아다니며 지저귀고
색색의 얼음꽃이 활짝 피었다
당신이 던진 눈빛에
나도 순식간에 얼어서
몸 나누며 사랑한 내가 깨져 나간다
부서진 내 얼음 조각을 들고
당신은 탑을 세운다
수 천개의 저 탑 중에
내가 당신을 살릴 기도였다
내가 당신을 부활시킬 피였다
내가 얼음이 되어야
햇살 따스한 봄이 되는 것이라고
나를 얼음으로 만들었다
당신이 다 녹아 사라지기 전에
얼음 궁전으로 쳐들어간다
얼음 기둥
김종제
한창 젊은 나이 때
웃통을 자주 드러내며
절대로 부러뜨릴 수 없는
단단한 뼈라고 주장했던
사내의 몸이 병석으로 얼어붙었다
한겨울 우물가에 나가
밤새 물을 길어 올려 머리부터 쏟아부었다
잎 다 떨어진 겨울나무처럼
앙상한 당신을 보여주기 싫었을 게다
평생토록 한 집안의 지붕을 떠받칠
기둥이 되고 싶었던 사내
뿌리 뽑히기 전에
허물어지는 몸을 마지막으로 세워
마침내 얼음으로 우뚝 섰다
비록 온기를 다 잃었어도
당신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
기둥이 맞다
온몸이 돌덩어리처럼 굳어서
불조차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눈부신 저 뼈 하나
희디흰 핏덩어리 한 방울
몸으로 세운 저 얼음 기둥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을 알아서
살점 한 조각 뚝 떼어내 품에 지녔더니
쩡 소리내며 발부터 얼어붙는다
당신으로부터 얻은 내가
누구에게 기둥이었다고
얼음 나무
김종제
흑백 영화에 나올
오래된 쇠덩어리 전차 같은
삶을 질질 끌고
지축을 울리며
포천 이동으로 옮겨 가는데
더 이상 지나갈 수 없는
북방한계선이라고
얼음 나무 한 그루가
검문소 초병같이
부동의 자세로 경계를 하고 있다
태초의 아담과 이브처럼
이파리 하나로
가을까지 부끄러움 감췄으나
어느새 헤지고 구멍이 나
속살 드러났으니
흰 방한복 한 벌 입혀주려고
밤새 분수 높이 쏘아올린 것일까
아니면 누구에게
불에 한 철 온 몸을 달구었으니
한 철은 머리 식히라고
물 뒤집어 쓰게 한 것일까
아니면 오늘은
치유하지 못할 병에 걸렸으니
피 다 빼버리고
언젠가 올 희망 같은
봄에 다시 살려내기 위해
저렇게 몸 얼려 놓은 것일까
살점 다 뜯어 먹고
버려진 이동 갈비의 뼈 같다
식물인간 같은
생(生)이 진저리친다
얼음 물고기
김종제
내 것도 분명 아닌
무슨 주의라든가
우리 것도 전혀 아닌
무슨 무기라든가 하는 것이
철새처럼 국경을 넘어 날아오다가
사철 꽃 피는 마을
화천에 발을 내려놓고
세상을 뜨겁게 불태웠던 것들이
한 줌 재가 되어
물속으로 가라앉은 지 수십 년
강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길게 드러누워 채로
얼었다 녹았다 뒤척이며
그날의 상처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산하의 강들은 모두
전쟁을 치른 아버지들이었으니
불시에 찾아오는 아픈 기억처럼
때때로 꽁꽁 얼어붙었던 것이다
육신 같은 얼음판을 깨뜨려
붉은 피 보이는 구멍을 내고
눈먼 물고기 같은
찢겨나간 살점을 건져내고 싶었으리
산천어 한 마리 낚싯줄에 걸렸다
날카로운 쇠붙이에 소망을 빼앗겼을 때도
당신의 몸은 파닥거렸을 것이다
순식간에 얼음이 된 저 물고기
얼음을 밟다
김종제
삶이 강과 같아서
병석에 드러누운 저 노친네도
가장자리부터 얼기 시작하는 것이다
무슨 미련 같은 것 아닐까
그냥 떠내려가지 못하고
돌이나 흙 같은 살붙이를 부여잡고
마지막 안간힘 쓰는 목숨 같은 것이겠다
갑자기 뚝 떨어진 영하의 한밤
중심에서 물 흐르는 소리 같은
고동마저 들리지 않으면
한 생이 마침내 저무는 것인데
아직 살얼음일지도 몰라서
안쪽으로 한 발씩 더듬어가는 것이다
당신이 이루어놓은 가계 같은
강을 건너가야 하므로
얼어붙은 당신을 밟고 가는 것이다
저 아래가 꽁꽁 얼어서
다리부터 밟고 가는 것이다
깊게 얼은 등짝 밟고 가다가
얼었다가 녹았다가 하는
강의 한가운데를 밟고 건너가야
네 이름으로 집 하나 세우는 것이다
얼음을 밟는다는 것
얼음의 강을 건넌다는 것
얼어붙은 당신을 건너간다는 것
생에서 생으로의 맞바꿈 같은 것이다
얼음 건너에
분명 꽃 피는 피안 같은 것 있겠다
얼음 인간
김종제
얼음이 녹으면서
사체 한 구가 드러났다
그곳은 빙하가 깔려있었고
만년설이 높이 솟아 있었는데
옛날에는 고기 잡던 강물이 있었고
나무들 푸르른 산이 있었다고 했다
그곳에 잠깐 소풍을 나왔다가
발을 헛디딘 사람이었거나
아니면 스스로 목숨을 던졌을 것이라고
사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추측을 했다
나중에 몇몇 증거로 밝혀진 사실이지만
사내가 죽은 후
갑자기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고
폭설이 몇 달 쏟아졌다고 했다
피 빠져나가기 전에
살 썩어 흩어져버리기 전에
순식간에 얼음이 된 저 사내
얼음의 혀와 눈을 가진 차가운 저 사내
현세의 인간이 아니었다고 한다
철기시대의 늪지대나
이집트 사막의 지하동굴보다 오래된
선사시대의 유뮬을 가지고 있었다
죽기 전에 저 사내가
말라비틀어진 꽃을 손에 지니고 있었다
얼음으로 뒤덮이기 전에
불같은 사랑을 품었는지
뜨거운 마음이 밖으로 드러나자
찬물 흐르는 자리에서
붉은 꽃대가 쑥 밀치고 올라왔다
얼음 폭포
김종제
오늘부터 간단없이
한 달 하고 열흘간만
정수리에 얼음만 쏟아져라
뇌성벽력의 얼음으로
마른 몸을 불이 나게 내려쳐라
시퍼런 얼음의 감옥에
오장육부와 사지를 가두어라
얼음의 살갗으로
꽃 피어나라
얼음의 혓바늘로 가시 돋아나라
얼음의 머리카락으로
얼굴 뒤덮혀라
부러뜨릴 수 없는
저 금강의 얼음으로
문을 세워라
끊어낼 수 없는 저 금기의
얼음으로 기둥을 세워라
그리하여 내 몸이
빈틈없이 빙하가 되어라
그리하여 내 몸이
여백 없이 빙산이 되어라
한 점의 물러섬이 없이
얼음의 절벽이 되어라
한 치의 뉘우침이 없이
얼음의 동굴이 되어라
세상의 허튼 입을
부르튼 혀를 가두어라
세상의
썩은 눈을, 멍한 귀를 가두어라
대명천지 같은 얼음 폭포로
얼음집
김지향
1 – 문이 없다
출입구가 없는(물로 지은)
투명 유리 상자 속에
그녀는 있다
속살로 짠 스타킹 속에 다리를 꼬고 앉아
스프를 먹고 있는, 커피스푼으로
휘젓고 있는
그녀 스프엔
잘게 바스러진 햇살의 하늘이
찰랑 찰랑 멱을 감고 있다
하늘 바닥엔 한 마리
모딜리아니의 여인의 긴 목의
오리가 뭉툭한 손으로 하늘을 헤집고
깊이깊이 들어간다
손이 조금씩 작아진다 손톱만 남기고
손은 아주 없어진다
스프잔을 비운 그녀가
어깨 너머로 긴 손가락을 뻗쳐
딘·쿤츠의 SF 한마당을 집어들었다
한 권의 딘·쿤츠엔 한 궤짝의
탁한 삶이 몽땅 잠입해 있다
삶 한 개비만 꺼내 잘근잘근 씹는다
-유리상자 손잡이를 만지면 출입문이 지워져 버림
-처음부터 출입문은 어둠 속에 감춰져 있음
-출입문을 열고 나오려면 삼층천 세계로 증발될 것
그녀는 딘·쿤츠의 삼엄한 경계령 목록을
눈으로 짚어가며 한 귀 한 귀 먹어치우고
출입문을 찾아 일어선다
그녀 몸놀림에 따라 유리상자 전체가
출입문이다가 아니다가 한다
몇 만 볼트의 전기 이빨로 깨물어도
뚫리지 않는 얼음 유리벽
밖에선 구세기의 추억을 담은 가랑잎이
바삐 가는 사람들의 가슴으로 미끄러져 내린다
사람들은 가랑잎 한 갈피씩 품 속에 접어넣고
멈추지 않는 시간의 낚싯대에 코가 꿰어
낯설게 낯설게 저물어가는 중이다
(아무 데도 출입문이 없는 유리 상자
창밖에도 똑같은 유리 상자뿐인 세상),
높이 걸려 하늘의 주름 속으로
몸을 감추고 있는 낮달의 반쪽을 보며
그녀는 갇힌 삶을(반쪽뿐인 삶을)
사랑하려고, 사랑하려고 주저앉는다
2 – 복사 인간
여기서 비스듬히 누운 길 안내판을 따라
새참 먹을 시간만큼만 비스듬히 가면
그 집은 있었다
그 집에선
뼈들이 부딪치는 독한 음악이
머리칼을 일으키며 으스러진다
우우르르 쾅, 음악이 일어날 때마다
집 전체를 채운 눈 뿐인 컴퓨터엔
꼬리 긴 자막이 입을 실룩거리며 튀어나오고
무인 카메라가 문 두들기는 자를 안아 넣는다
잠자는 나무 처럼 모로 누워
컴퓨터 키만 누르고 있는 그 아이는
마음이 없다 나이도 없다
몸에선 풀내가 흙내가 불똥내가 나기도 한다
아이의 뇌세포 기억장치를 돌려본다
앞으로도 뒤로도 왔다갔다 마음대로다
아, 그런데 언젠가 우리집에 살았던
그 사람의 신상명세서가, 그때 그 사람이
손으로 적었던 삶의 궤적이, 가족사가
그 아이의 기억장치를 통해
스크린 처럼 컴퓨터 화면에 찍혔다
사라진다
그때 소주잔을 들이키고 허름한 옷가지 둘러멘 채
길에서 밤을 밝히던 주벽까지
모두 불러와 컴퓨터에 모아놓고
이제 보니 사람은 안 보이네
날렵한 손가락만 소리가 탁, 탁, 부러지는
컴퓨터 키 앞에 남겨두고
사람은 투명 유리가 되었나
하늘로 땅으로 바람 처럼 날아다니는
그 사람의 완전자유가
투명인간으로 복사되었나?
(내 기억에도 복사된 그 아이는
옛날 우리집에 분명히 어른으로 살았었다)
오늘도 그 집에선
녹아 없어질 얼음 사람을
'비밀이야, 비밀이야' 말하는
컴퓨터 화면이 연거푸 새로 만들어
다락 속에 감추고 있다
눈과 얼음
나희덕
사흘 내내 폭설이 내리고
나뭇가지처럼 허공 속으로 뻗어가던 슬픔이
모든 걸 내려놓는 순간
고드름이 떨어져나갔다
내 몸에서
시위를 떠난 투명한 화살은
아파트 20층에서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을 알게 되리라
깨진 얼음 조각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밟으며
지나가리라
얼음 조각과 얼음 조각이 부딪칠 때마다
얼음 조각이 태어나고
부드러운 눈은 먼지와 뒤엉켜 눈멀어가리라
얼음의 죽음
마경덕
노점상 여자가 와르르 얼음 포대를 쏟는다
갈치 고등어 상자에 수북한 얼음의 각이 날카롭다
아가미가 싱싱한 얼음들, 하지만 파장까지 버틸 수 있을까
사라지는 얼음의 몸, 한낮의 열기에 조금씩 각이 뭉툭해진다
질척해진 물의 눈동자들
길바닥으로 쏟아지는 땡볕에 고등어 눈동자도 함께 풀린다
얼음은 얼음끼리 뭉쳐야 사는 법
얼음공장에서 냉기로 꽁꽁 다진 물의 결심이 풀리는 시간,
한 몸으로 들러붙자는 약속마저 몽롱하다
서서히 조직이 와해되고 체념이 늘어난다
핏물처럼 고이는 물의 사체들
달려드는 파리 떼에 모기향이 향불처럼 타오르고
노점상은 파리채를 휘두른다
떨이로 남은 고등어, 갈치 곁에 누워버린
비리고 탁한 물
이곳에서 살아나간 얼음은 아직 없었다
노점상은 죽은 생선에 자꾸 죽은 물을 끼얹는다
따뜻한 얼음
박남준
옷을 껴입듯 한겹 또 한겹
추위가 더할수록 얼음의 두께가 깊어지는 것은
버들치며 송사리 품 안에 숨 쉬는 것들을
따뜻하게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철모르는 돌팔매로부터
겁 많은 물고기들을 두 눈 동그란 것들을
놀라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얼음이 맑고 반짝이는 것은
그 아래 작고 여린 것들이 푸른빛을 잃지 않고
봄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겨울 모진 것 그래도 견딜 만한 것은
제 몸의 온기란 온기 세상에 다 전하고
스스로 차디찬 알몸의 몸이 되어버린 얼음이 있기 때문이다
쫓기고 내몰린 것들을 껴안고 눈물 지어본 이들은 알 것이다
햇살 아래 녹아내린 얼음의 투명한 눈물자위를
아 몸을 다 바쳐서 피워내는 사랑이라니
그 빛나는 것이라니
얼음을 주세요
박연준
이제 나는 남자와 자고 나서 홀로 걷는 새벽길
어린 풀잎들, 기울어지는 고개를 마주하고도 울지 않아요
공원 바닥에 커피우유, 그 모래빛 눈물을 흩 뿌리며
이게 나였으면, 이게 나였으면!
하고 장난질도 안 쳐요
더 이상 날아가는 초승달 잡으려고 손을 내 뻗지도
걸어가는 꿈을 쫓아 신발 끈을 묶지도
오랜지 주스가 시큼하다고 비명을 지르지도
않아요, 나는 무럭 무럭 늙느라
케이크에 내 건조한 몸을 찔러 넣고 싶어요
조명을 끄고
누군가 내 머리칼에 불을 붙이면 경건하게 타 들어갈지도
늙은 몸을 위해 박수를 치는 관객들이 보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추억은 칼과 같아 반짝 하며 나를 찌르겠죠
그러면 나는 흐르는 내 생리혈을 손에 묻혀
속살 구석구석에 붉은 도장을 찍으며 혼자 놀래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새벽길들이 내 몸에 흘러와 머물지
모르죠, 해바라기들이 모가지를 꺾는 가을도
궁금해하며 몇 번은 내 안부를 묻겠죠
그러나 이제 나는 멍든 새벽길, 휘어진 계단에서
늙은 신문배달원과 마주쳐도
울지 않아요
얼음의 틈 사이로 절망을 흘려보낸다
박윤규
우리는 절망에 빠진 무기력보다는 희망에 가득찬 열정을 서로에게서 볼 수 있었다. …… 그러나 내게는 운명을 꿈꿀 만큼 충분한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 북극을 탐험한 에드가 포의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 중에서
부빙(浮氷)이다 나는 간헐적으로 얼음의 신에게
물의 신과 바람의 신에게
저녁 식사를 하듯 간단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저녁 식사와는 다른 것이
기도를 끝낸 뒤에도 나는 전혀 포만(飽滿)을 느끼지 않았으며
그렇게 동료들은 경건하면서도
자신의 안녕을 위해 기도를 올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의 확고한
운명조차 지워 버리려는 얼굴 위로 섬뜩한
의지의 핏줄이 굵게 나타났던 것이다
한 동료가 양팔을 넓게 벌린 채 무표정하게
먼 우주의 별과 교신이라도 하듯
흔들리는 뱃전에서 엎드렸다 일어서더니
수직의 하늘로 알지 못할 언어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것은 기나긴 삶의 마지막 속죄일 수도 있었다
생존의 희망이 전혀 사라진 곳에서
극한 추위와 피로, 어둠만이 지배하는 곳에서
푸른 나무에 앉아 휴식하는
아름다운 새의 울음소리를 기억해 낸 것일까
浮氷이 하늘 가장자리를 휘몰아 온다
이렇게 엄청난 물의 혼돈을 이제껏
나는 느낀 적이 없다 누구도 그랬을 것이다
부빙이 크게 부딪혀가며 사나운
짐승의 비명소리를 내는 것을 우리는 들었다
나는 이 상황에서 우리가 못다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을 생각한다거나
흘러간 시간들에 대해 추억한다는 것
또는 앞으로의 (아마도 지독히 짧을 것이지만)
우리에게 배당된 시간에 무슨 일을 할 것인가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금 나와 동료들은
살기 위한 수단을 적어도 부리지는 않는다
굶주림과 거친 파도에 극도로 지쳐 있었지만
나는 그들이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
지극한 평온의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는 물론 앞으로의 계획을 모두 취소하고
어느 물길에 휩싸이다가
어느 얼음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묻힐지 몰라도
살아온 날들은 참 황홀하였으며
따뜻한 한 잔의 우유가 그리워질 뿐이다
얼음덩이는 우리들 여정의 마침표를 찍어주리라
내 이름을 영원히 파헤쳐지지 않을
깊은 얼음 골짜기에 묻으며
우리가 함께 살았고 함께 죽음을
즐거이 기억하리라
얼음꽃
배한봉
별들이 세수하러 오는 밤
나뭇가지에 얼음꽃 피어 있다
아픈 세속 다 받아주느라 뼈만 남은 나무들이
몸 던져 편찬한 얼음 경전(經典)
별이 밤하늘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면 얼음꽃은
지상의 밤을 꿰뚫는 금강신(金剛神)의 눈동자
한 바퀴 늪길을 휘둘러 나온 나야
따뜻한 방바닥 이불 속이나 파고들 약골이지만
세상의 모든 사악함
꽝꽝 결빙으로 정제시키는 맑고 투명한 저 힘이
생과 멸의 파란만장을 수만 개 얼음꽃으로 수놓았으리
삶도 이처럼 세상을 온몸 으스러지도록 껴안을 때 아름다운 것
그렇지 못하니까 나는 아프고 외로운 것이다
별들이 세수하러 오는 밤
얼음꽃 핀 가지를 당겼다 놓으면
허공에 새벽길 트는 새의 날갯짓만큼이나 힘찬
고요의 서늘한 기운이 천지간을
팽팽한 긴장으로 떨리게 한다
맵고 시린 육체의 고통쯤 소용없이 무화시키는
거대한 주술의 사원
내 몸에서도 얼음꽃 피는 소리 들리는 그런 밤이었다
얼음 연못
복효근
얼음 위에 누가 저렇게 돌을 던졌을까
구멍 난 가슴을 덮으려
연못은 더 많은 바람과 그늘을 불러 모았겠다
나이테처럼 얼음을 덧입고
얼음의 근육들이 자란다
더러 뚫고 지나가지 못한 돌들이
얼음에 박혀 있다
거미줄 같은 균열들이 돌을 붙들고 있다
뿌리처럼 퍼져 나가 스크럼을 짜고
상처가 상처끼리 연대한다
한 번 부러졌던 뼈처럼
돌은 얼음의 뼈가 되어 연못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돌 몇 개로 무너진다면 얼음은 얼음도 아니다
돌 몇 개로 메워질 연못이라면 연못도 아니다
큰 돌이 넉넉하게 박힌 얼음이라면
맘 놓고 들어가도 좋겠다
돌 몇 개는 제 가슴에 안고 있는 사람도 그럴 것이다
얼음 호수
손세실리아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도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본 적 있던가
한 사나흘 죽어본 적 있던가
없다, 아무래도 엄살이 심했다
얼음의 문장
송찬호
그는 나뭇가지 속에 매장되었다 나뭇가지들이 그의 몸 안에서 길을 찾기 위해 서로 격투를 벌였다 그들의 오랜 무기였던 횃불을 밝혀 둔 채,
탁, 탁 불꽃은 격렬한 소리를 내며 탄다 불꽃이 그를 높이 치켜올린다 다른 해안, 다른 새벽으로 그를 밀어보내기 위하여
마침내 그들은 노 젓기를 멈춘다 새들이 얼어 떨어지는 높은 곳에서 그의 늙은 손, 그 노를 가슴에 얹어놓은 채
이제 오랫동안 뱃사람들은 그를 기억할 것이다 그의 혼을 외쳐 부르던, 그의 몸에 달라붙은 조개 구멍들이 그 치명적인 항구를 보여줄 것이다
얼음 물고기
손택수
한밤에 누가 아파트 외벽을 친다 동태가 우는 모양이다 아내가 겨우내 해장국을 끓이기 위해 베란다 창틀에 매어놓은 푸른 노끈, 잡아채며 말을 듣지 않는 몸 뒤채고 있는 모양이다
흐린 동태 눈을 부비며 어둠 속 창문을 여니 눈이 흩날리고 있다 달라붙는 눈비늘을 털며 어디론가 하염없이 가고 있는 물고기 뿌옇게 날리는 이 눈보라 속에 저희도 무슨 잠 못 드는 시름이 있는지 눈앞의 미끼를 잘못 문 채 머리를 짓찧고 싶은 벽들이 있는지
고드름 맺힌 지느러미 부딪는 소리, 몸에 들러붙은 얼음 조각 서걱이는 소리, 어느 산중에라도 든 듯 따랑따랑 풍경소리를 낸다 몇 해만 더 머물고 뜨자던 서울 이 빚더미 아파트와 벗어날 수 없는 나날들이 한 채 소슬한 절집이라도 된다는 듯
가른 배 속을 파고드는 눈보라 눈보라 아니 가른 배 속에서 산란하는 눈보라 눈보라
얼음 이파리
손택수
얼어붙은 연못 위에 낙엽이 누워 있다
얼음에 전신을 음각하는 이파리,
파고들어간 자리가
움푹하다
끌도 정도 없이
살갗을 파고드는 비문이 있다면
비문도 나의 살점이 아니겠는가
말을 안으로 감추어버린 백비(白碑)
속에서 말을 꺼내듯
빙판을 어루만지는 손,
덜 아문 딱지라도 뜯듯
이파리를 걷어내자
얼음 속으로 실핏줄이 이어진다
따끔따끔 떨어져나온 자리마다
잎맥이 돋아난다
얼음 사막
신대철
1
무슨 일로 예까지 시집을 끌고 왔는가. 아직도 시가 생을 지탱하고 있는가. 아무리 읽어도 시 한 줄 들어오지 않는다. 휘이잉 어둠을 몰아치는 눈보라 소리만 울려온다.
눈 폭풍 그치자 마른 눈송이들 빙평선으로 돌아가고 돌연 실상보다 무거운 기억 몇 개 발길에 차인다. 얼음빛이 눈을 찌른다.
영하 44도, 45도
공포가 허공으로 바뀌어간다.
체온이 돌지 않는 생각은
금시 얼음꽃이 맺힌다.
2
소설가가 되겠다고
지구의 최북단까지 온 젊은이는
난민 친구들과 포커를 하고 돌아와
인생은 포커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포커도 인생도 모르는 나는
찢어지는 폭풍 끝자락에 매달려
날이 새기를 기다린다.
뼛속 깊이 박힌 얼음 어둠
눈도 얼어붙는다.
그냥 살아 있을 뿐
내가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는다
얼음 물고기
신동옥
물고기 또는 물고기라는 투명한 이름들
물고기 또는 물고기의 몫으로 마저 불러주어야 할 믿음들
파들대는 등지느러미를 새처럼 날갯짓하면서도 앞을 내다보아야만 한다는 건
한 줌 허락된 기포 속에서 남은 숨을 들이켜는 일
얼고 춥고 머나먼 강가에서
지쳐 오들오들 떨던 아가미를 감싸던 작은 비늘들은 어디까지 떠내려갔나?
더 얼마나 난폭한 꿈에 시달리다 쌔근쌔근 숨이 잦아들까?
비늘 하나 떨치지 않고 물길을 거슬러 헤엄쳐 마침내 물길이 되어 얼어붙는 순간
저 강바닥 물속에도 햇빛은 들고 얼음은 얼겠지
얼음 매미
안도현
매미가 벗어놓고 간 허물 속으로, 눈이 내린다
이 누더기의 주인은 저 광활한 우주 속으로 날아갔는데
눈은 비좁은 구멍 속으로
자꾸 자꾸 내린다, 그리하여 쌓인다
하늘은 몇 번이나 녹았다가 얼고,
(이 겨울이 지날 때쯤 나는 매미 허물을 가만히 벗겨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날아갈 줄도 모르고, 발을 가슴께로 그러모은
얼음 매미 한 마리가 거기 웅크리고 있겠지
살얼음
유일하
차갑게 실신한 너와 나
얽히고 얽혀서
짜맞춘 우리 사이
쩍쩍 갈라져도
또다시 얽히어
밤이면 티 맑게 또 만나
두텁게 넓혀가는 것
붓칠하듯 그려가는 사랑
내일이 사그라져도
또 그려가는 우리 사이
살. 살. 살.
이어 가는 것
또 영그는 이슬 꽃
우린 영원한 예술가
그리다
그리다
못 그리는 그날
우린 깨어지는 것
깨어져도
깨어져도
또다시 이어가는 것
얼음의 집
윤꽃님
레테의 강을 건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간다
그 망각의 강물을 마시며 우리는
누군가에서 또 누군가로 헤엄쳐간다
만약 그 강물이 얼어붙는다면
어느 날 얼어붙어 마실 수가 없다면
우리는 수많은 기억을 온전히 가지고 가게 될까?
우리의 두뇌에 금이 가듯
얼어붙은 강에 금이 간다면
그 금간 상처도 생생하게 살아있게 될까?
봄날처럼 그 얼음이 풀려
다시 강물이 흐르고,
그 강물의 후손의 후손이 계속 흐르면
우리는 다시 그 강물을 마시고
망각의 강을 건널 수 있을까?
사랑은 스스로 얼어붙어 스스로 금이 간다
사랑은 스스로 금이 갔던 상처를 쓰다듬지 않는다
다시 레테의 강물이 흘러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서서히 망각의 하구에 이른다 해도
사랑의 DNA는 기억하고 있다
두뇌와 마음과 심중이 얼어붙어
마침내 쩍 갈라졌던 순간을
얼음
이기철
얼마나 기다렸으면 가랑잎마저 껴안았겠느냐
얼마나 그리웠으면 돌멩이마저 껴안았겠느냐
껴안아 뼈를, 껴안아 유리를 만들었겠느냐
더는 헤어지지 말자고 고드름의 새 못을 쳤겠느냐
내 사랑도 저와 같아서
너 하나를 껴안아 내 안에 얼음을 만들고야 말겠다
그리하여 삼월이 올 때까지는
한 번 낀 깍지 절대로 절대로 풀지 않겠다
아무도 못 말리는 지독한 사랑 한 번
얼어서 얼어서 해보고야 말겠다
가을 호수에 얼음 구름
이영지
햇볕이
한가로이
내리는 가을 호수
그림자 만들기의 내기를 하는가 봐
구름이 거울 속에서 얼음궁전 짓는다
그
안에
학 한 마리
얼음이 미끄러워
날다가 내려앉다 오르며 미끄럼을
타는 듯 떴다 앉았다 얼음이듯 춤으로
고기가 물속에서
장단을 맞춰가는 때마다
동그라미 물들이
춤을 춘다
지금 막
학 한 마리가
얼음 딛고 물 차며
얼음꽃
이재규
조용히 또 하루가 저물어
그렇게 살고 있나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추억만이 남아
시간이 흘러 다시
사랑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눈물아 내 기억이 너를 잊지 못해
가슴아 내 추억이 너를 놓지 못해
하루 또 하루만 볼 수 있다면 내 사랑아
이제 다시 돌릴 수는 없지만
기억만이 남아
시간이 흘러 다시 다가갈 수 있다면 좋을텐데
눈물아 내 기억이 너를 잊지 못해
가슴아 내 추억이 너를 놓지 못해
하루 또 하루만 볼 수 있다면 내 사랑아
사랑인 걸 알잖아
지난 날들도 난 눈물이 흘러
눈물아 내 기억이 너를 잊지 못해
가슴아 내 추억이 너를 놓지 못해
하루 또 하루만 볼 수 있다면 내 사랑아
얼음 도마
이정록
겨울이 되면, 어른들은
얼어버린 냇물 위에서 돼지를 잡았다.
우리 동네에는
바다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얼음 도마는 피를 마시지 않았다.
얼어붙은 피거품이 썰매에 으깨어졌다.
버들강아지는 자꾸 뭐라고 쓰고 싶어서
흔들흔들 핏물을 찍어 올렸다.
얼음 도마 밑에는 물고기들이 겨울을 나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노을을 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핏물은 녹아내려 서녘 하늘이 되었는데
비명은 다들 어디로 갔나?)
얼음 도마 위에 누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돼지가 있었다.
일생 비명만을 단련시켜 온 목숨이 있었다.
세상에,
산꼭대기에서 바닥까지 이어지는 도마가 있었다
얼음 목탁
이정록
산사 뒤 작은 폭포가 겨우내 얼어 있다.
그동안 내려치려고만 했다고
멀리 나가려고만 했다고, 제 몸을 둥글게 말아 안고 있다.
커다란 얼음 목탁 속으로 쏟아져 내리는 염주알들. 서로가 서로를 세수시켜 주는 저 염주알을 닮아야겠다고, 버들강아지 작은 솜털들이 부풀어오르고 있다.
네 마음도 겨울이냐?
꽝꽝 얼어붙었느냐?
안에서 두드리는 목탁이 있다. 얼음 문을 닫고 물방울에게 경을 읽히는 법당이 있다. 엿들을 것 없다. 얼음 목탁이 공양미 씻는 소리. 염주알이 목탁 함지를 깎는 소리.
언 방에서 살아가며 기도를 모르겠느냐?
나를 세수시켜 주는 쌀 씻는 소리가 있다
버려진 방죽처럼 살얼음 얼어
장진숙
살을 태우고 뼈를 갉아대던
탈진 끝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달이 떠오른 것을 알았다
칠흑의 어둠을 뚫고 둥근 달이
휘청이는 그림자를 휘감았다
유난히 빛나는 별이 보인다
내 항상 밤길 급히 달려갈 때
어두운 골목길 지쳐 돌아올 때
위로하며 동행하던 별
갈대숲을 지나온 서늘한 바람이
희디흰 비명을 쓸어안는다
황량한 들판의 버려진 방죽처럼
살얼음 얼어 오래도록
휘영청 밝은 달과 빛나는 별 하나 품고
지독한 한파 묵묵히 견뎌야한다
꽁꽁 얼어붙은 마음의 방죽
풀리는 날 까지
어지러운 시절을 뗏목처럼 띄워 두고
말없이 기다리자
시린 마음 펄럭이며 바람이 분다
얼음벽
정민기
까만 철새들처럼 몰려온 어둠
자정이 지났다
달빛 내려와 벽을 쌓고 있다
벽 쌓고 살 일이 있다면
얼음벽만큼 단단한 얼음으로 쌓으리
물 흘리던 폭포가 한파에 얼어버려
그야말로 꽁꽁 얼어버려
벽을 쌓았다
완전히 무장하고 투명한
벽 뒤의 세상 하도 궁금한 나머지
얼음벽 오른다 견딜 수 있다면
이를 악물고서라도 오를 일이지만
더 이상 오를 일 없다 체념 따윈
생각하지 않는다 양초 한 자루라면
저 속에 얼음벽을 꽂은 기다란
촛대라도 있을까, 촛불 활활 타오르면
뜨거운 촛농 눈물 다 흘릴 때까지
잠잠히 기다려주는 여유!
사랑한다면 말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그 순간이라도
강이 얼면 고무 얼음이 되어 출렁이고
정세일
겨울이 오면 강바닥이 얼음이 얼어서
우리는 언제든 오후가 되면
고무 얼음을 타러 강가로 갑니다
겨울 오후가 되면 강을 자신의 갈라지는 얼음을
거미줄처럼 얽어 매여서 고무 얼음이 되어서
강 이쪽에서 저쪽으로 겁 없이 걸어가면
출렁 출렁거리는 강의 가슴을 밟고 가는 것이
그리도 재미있을 수가 없습니다
흔들거리는 두려움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강을 건너가는 날은
누나와 나는 함께 손을 잡고
고무 얼음을 살며시 밟으면서 한 걸음씩
강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잡은 채
서로 발걸음을 조심거리며 강을 건너가고 있습니다
겨울 강가 그것도 꽁꽁 얼은 가슴이 풀리면
우리는 늘 강가에서 고무 얼음을 타면서
서로의 두근거리는 가슴을 멈추지 못해
누나와 나는 서로 손을 굳세게 잡곤 했습니다
물도 깊고 강언덕을 먼 곳에 있는 데도
어린 나는 누나의 손을 잡으면서
무서움을 이기며 강을 건너가곤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슴이 강처럼 꽁꽁 얼어서
가슴도 새하얗고
물소리가 늘 가슴에 들리던 그때는
누나는 나의 늘 두근거리는 나의 두려움을
언제나 두 손을 잡으면서
고무 얼음을 타면 나에게 늘 용기를 주곤 했습니다
고무 얼음은 흔들거리기만 할 뿐
깨지거나 갈라지지 않는다고 늘 나에게 용기를 주었지요
겨울 얼음이 얼어버린 냇가
정세일
겨울 얼음이 얼어버린 냇가에
누나는 우리집 빨래를 가지고 갑니다
한쪽 얼음을 깨어놓고 넓적한 돌을 놓은 곳에서
겨울 빨래를 하는 누나의 빨랫방망이 소리는
강바닥을 두드리는 소리로
겨울 깊은 잠이 들려고 하는 냇가 건너 오두막집
지붕 위에 있는 모자 같은 눈송이들을 흘려
내리게 하고 있습니다
겨울 얼음이 누나의 하얀 마음처럼
아침 햇살처럼 빛나는 곳에서
누나는 강들에게 속삭이는 이야기로
강들의 언 가슴을 녹이고 있습니다
입으로 손을 녹이는 호호 부는 소리에
강 속에 잠겨 있는 돌들도 자신들도 추울세라
가슴에 흐르는 물을 이불처럼 끌어당겨 살며시
덮어보고 있었습니다
겨울 얼음이 얼어버린 냇가에서
누나의 마음은 언제나 얼음처럼 맑았습니다
겨울 물 흐르는 소리가 그리도 마음이
따뜻한 것을 알고 있는 누나는
빨래를 할 때면 언제나
강물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있었으니까요
어린 내가 누나를 부르려 강가에 가면
누나는 겨울 물소리를 들려주려고 언제나
빨래 방망이로 겨울 강을 두들기고 있었습니다
나는 누나가 겨울 강의 마음을 어루만질 때마다
손도 빨개지고 볼도 귀도 빨개지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있었습니다
얼음 불꽃
조연호
부지깽이 끝에 매캐한 연기가 걸려 올라온다. 겨우 입 벌린 메꽃 한 송이가 되어 엄마 곁엔 순산한 셋째 계집애가 누워 있었다. 손가락 다섯, 발가락 다섯, 생식기를 꼼꼼히 살피고 나서 엄마가 편히 눈을 붙였고, 누룩곰팡이가 아랫목을 따라 끊임없이 기어다녔다. 달그락거리는 배고픔들이 따뜻한 아궁이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밤새 꿈 앞을 서성대고 있었다. 강이 빈한한 날을 지난다. 부지깽이를 쥔 엄마의 손바닥에서 뜨거운 불꽃나무가 자란다. 뿌리며 가지며 아궁이 속을 확확 드나들고도 나무는 아직 차갑다. 누이가 몰래 자작시를 보여준다. 그 시구에 내가 유치한 눈물 훔치다가, 세 번째도 딸, 아빠가 뒤집어 엎은 상을 훔치다가, 이 저녁은 느닷없는 평화 속에 끝난다. 강이 투명하고 가벼운 수의를 입고 강 건너 찬안댁 할머니를 부르러 간다. 미역줄거리가 끓고, 부지깽이를 저으면 화르륵, 엄마들이 일어서다간 도로 누웠다
얼음 대적광전
주용일
계곡으로 물고기 잡으러 따라나섰다가
깨진 얼음장 속에 꽁꽁 얼어 있는
물고기를 보았다
물이 서서히 얼어오자 막다른 길목에서
물고기는 제 피와 살 버리고
투명한 얼음 속에 화석처럼 박혔다
귀 기울여도 심장 뛰는 기척이 없다
조식(調息)하는지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사랑하면
사랑에 목숨 묻기도 하듯이
물 속에 살기 위해선
얼음이 되는 것을 두려워 말아야 한다
이글루 짓고 들어앉은 에스키모처럼
은빛 지느러미 접고 아가미 닫고
사방 얼음벽 둘러친 무문(無門)의 집에서
물고기는 다시 올 봄을 아예 잊었다
얼음장이 그대로
고요한 대적광전이 되었다
개울 얼음
차영섭
얕은 물에 얼음이 앉고
깊은 물엔 차마 무서워
접근을 못 한다
흐르는 물엔 얼음이 흘러가 버리고
잔잔한 물엔 살포시
얼음이 엉덩이를 붙인다
얼음이 처음 정착할 땐 애로를 느끼고
일단 정착하면 겹 붙이기를 한다
추위가 흐르는 물에 헤엄치다가
돌멩이라도 있으면 얼른 붙잡고
집을 짓는다
얼음은 물 위에 떠서 수상 집이 되고,
그 집 속에서 물고기들이 산다
물 위에 지푸라기라도 있으면
얼음이 쉽게 건축을 한다
얼음처럼 물처럼
차영섭
날씨가 추우면 위기다
물의 입자들이 비상시에 대비하여
꽁꽁 단결한다
날씨가 풀리면 호기다
비상을 해제하여 화합하고 활동하며
생명을 돕는다
얼음처럼 물처럼
단결하고 화합하며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얼음 렌즈
차주일
나는 꿈을 꾸고 해몽까지 하는 사람이지만
꿈은 내 능동이 아니지
여러 등장인물로 한 편 이루어진 꿈은 피동
원하든 그렇지 않든 구성되는
내 삶은 타자가 주인공이 되어 지나간 막간일 뿐
능동과 피동이 동거하면
통념을 넘어서는 통설이 태어나지
나 역시 미완성 각본 어디쯤에서
누군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으리
인류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눈송이를 모으고
빙산을 갈아 볼록렌즈를 만드는 사람이 있어
햇빛을 모아 불씨 하나 길들이는 사람이 있어
나는 잠깐 꿈밖으로 태어나
사랑을 세공하는 천직을 가졌으리
내 수정체에 든 온갖 피사체로
너라는 한 점을 어렵사리 착상시키고
체온으로 그린 입체를 탁본하여
내 해몽대로 네 얼굴이 생겨났으리
네가 오늘 사용할 내 표정을 고르기 때문에
내 배역은 사후에도 전생이리
얼음 호수
최영철
한뎃잠을 자는 것들에게는
두꺼운 얼음이 때로 방한복이다
못 가득 바람 한 점 못 들어오게 두툼한 방한복을 껴입기까지
물고기는 물벌레를 먹고
물벌레는 물고기의 배설물을 받아먹었다
저토록 두꺼운 옷을 짜 입기까지
못 안의 것들은 수면을 간지럽히는 햇살을 마다하고
바닥에서 뽑아낸 서늘한 실로
쉴 새 없이 수면을 수놓고 있었다
한겨울 난전에 좌판 벌이는 노점상에게는
일찍부터 휘몰아친 칼바람이 추임새였다
줄줄이 딸린 식솔들의 배고픈 손이 후끈한 보약이었다
처음에는 손발이 차고 턱이 얼어붙어
무엇을 사라고 외치는 소리
몇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았으나
소한 넘기고 대한 가까워 오자
팔뚝을 걷어붙이고 다시 일어서는 몸에서
확확 더운 김이 터져나왔다
그 더운 입김 옆에서도 못을 덮은 얼음은 녹지 않고
겨울 내내 멈추지 않았던
물고기와 물벌레의 얼음 노동 옆에서도
장사치의 손과 발은 얼어붙지 않았다
얼음을 녹여 차를 끓이다
하영순
뜨겁던 대지가 식어 찬 기운이
전신을 휘감는 날이면
그리움이 파노라마처럼 흰 구름으로 날아간다
냉혹한 현실 속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마음에서 울어나는 훈훈한 정
그대 따뜻한 눈길이 정신을 살찌우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
봄날에 눈 녹듯 쌓인 설음을 녹인다
얼음 같은 눈길을 내게 준다 해도
입었던 윗저고리를 벗어 감싸안으리
모나고 비틀어진 바위를 깎아
공이 될 때까지
나 서러워도 입다물고
입안 가득 채워놓은 침으로
가슴에 응어리를 녹이며 창문을 연다
수행이란
얼음을 녹여 차를 끓이는 것이라면
한 잔의 찻잔 속에 내 얼을 우려 보리라
커피잔에 얼음을 녹이며
하영순
바람 솔솔 찾아드는 창가에 앉아
커피 잔에 얼음 동동 띄워
내려 쬐는 강렬한 태양을 식혀 본다
억겁의 세월
너와 난 무슨 연으로
푸른 숲 다 두고 내 창가에서 그리도 구슬픈가
맴맴 매미!
넌 어찌 휴일도 없는지
하루는 놀고 하루는 쉬는
별 의미 없는 휴일이 새삼 감회가 깊다
언제이던가 휴일이 되면
시집갈 날 받아 놓은 것처럼 가슴 설레던 때가
내게도 있었지
지금은 연휴가 되면 대문을 바라보며
내려 감는 내 눈
꼴 상스럽고 부질없는 일이다
잔 속에 얼음이 녹아들듯
굳었던 마음을 녹이는
일요일 오후 한나절. 시간은 흐른다 강물처럼
얼음 기둥
하재봉
내 추운 정신이 옷을 벗고 산등성이를 올라
마주 보는 곳, 그곳에서부터
눈이 내린다
매서운 채찍이 나를 후려치고
그러나 혀를 깨물며 견디는 정신의 극점
앞으로 석달 동안은 눈이 내리리라
약한 자는 땅속으로 숨고
또 몇몇은 어깨동무하고 단단하게 힘을 합쳐
북풍과 맞서 일어서리라
지상은 숨소리도 그친 채
다시 태양이 뜰 때까지 엎드려 있을 것이다
누가 새벽의 들판 위로 걸어가는가
누가 저녁의 강물 위로 돌아오는가
높은 곳에서 보면
산과 들이 껴안고 있는 가랭이 사이로
흐르지 못하는 강이 누워 있다
큰 물고기들은 하류로 도망치고
물이 결빙하는 속도를 미처 따라가지 못한 피라미들은
차가운 얼음 사이 숨을 거둔다
얼어붙은 강물 위로 돌을 던지면
돌은 물속으로 가라앉지 못하고
딱딱한 얼음의 표면 위를 스쳐
변방으로 미끄러져 간다
다시 따뜻한 세계가 올 때까지
한 치의 틈도 허락하지 않는
강의 힘
석달을 그치지 않고 눈을 내려서
세계는 소복을 입고
무수히 많은 죽음과 결별한다
곧 강이 풀리리라
그리하여 눈뜬 죽음들을 데리고
지상의 낮은 곳까지 내려가서
거대한 무덤을 만들리라
이제 어떤 이름의 새와 꽃과 물고기가
이 지상을 다스리겠는가
한 그루 얼음 기둥으로 산 위에 서서
나는 기다린다
내 두 눈의 물이 해와 달로 바뀌어 갈 때까지
얼음 강
황인숙
한겨울에는 강물이 언다
한낮에는 햇빛 떠오르면 눈부시다
강 위에서는 아이들이 스케이트 타며 즐겁고
강 밑에는 송사리가 붕어가 잉어가 헤엄치며
낚시꾼들은 얼음을 깨고 낚시를 하면
팔뚝만 한 고기들이 딸려 나와 팔딱거린다
낚시꾼들은 입을 떡 벌리고
딸려 나온 고기가
낚시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갈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