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노년
강남주 – 서귀포에서 만난 노인
강보철 – 꼰대
강한익 – 노인의 가을 연정
강효수 – 몇 살부터 노인인가
고재종 – 홀로 된 노인
고정희 – 황혼 일기
고지영 – 노인과 그림자
고지영 – 파지 줍는 노인
권승주 – 노인은 외로워라
기형도 – 노인들
길상호 – 그 노인이 지은 집
김경렬 – 어느 노인의 인생
김근이 - 어르신
김길남 – 어르신의 말씀
김남조 – 노년의 날개
김대규 – 노년의 시
김덕성 – 노인의 소원
김덕성 – 어느 노인장의 소원
김덕성 – 어느 노인의 회고록
김병래 – 가을이 노인에게 이르는 말
김상현 – 누가 노년을 묻는가
김수우 – 상자를 고치는 노인
김승기 - 노인장대
김시종 – 종점(終點)의 노인
김영제 – 노인에게 경고한다
김영천 – 노인
김유석 – 소를 모는 노인
김점용 - 황혼
김정윤 – 백수(白手) 노인
김정윤 – 운명을 타는 노인
김종길 – 그것들
김준엽 -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김혜경 – 그물을 깁는 노인
김혜정 – 어느 노인의 단상
노정혜 – 고운 노인
노정혜 – 노년의 모습
노정혜 - 노인
도분순 – 노인의 하루
류정숙 – 노년
문인귀 – 노인과 석류
문장우 – 노년의 하룻길
문재학 – 산책길 노파(老婆)
박경표 – 노인의 각오
박광호 – 어느 노인의 일기장
박근철 – 어느 노인의 가을 이야기
박동수 - 손수레와 노인(종이 줍는 노인)
박소연 – 노인 요양소
박순호 – 독거노인
박인걸 – 노인의 기도
박인걸 – 노인의 설날
박인걸 – 어느 노인
박인걸 – 어느 늙은이
박인걸 – 어떤 노인
박재동 – 벤치 노인
박정재 – 낙엽을 태우는 노인
박정재 – 봄과 노인
박정재 – 여명과 노인
박종영 – 노년의 훈장
박종영 – 소년이 노인이 되는 세월
박형준 – 개밥바라기
박형준 – 전철의 유리문에 비친 짧은 겨울 황혼
박홍점 – 노인의 방
박희진 – 노인과 기타아
박희진 – 노인이 있는 곳엔
박희홍 – 눈물 많은 노년
서복길 – 노인과 손수레
서태수 – 노인
성백군 – 노년의 삶
성백군 – 맛 나는 노년
성백군 – 아름다운 노년
손병흥 – 노인 빈곤 시대
손상근 – 노인
송근주 – 노인 징조
신경림 -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신달자 – 늙음에 대하여
신진 – 노인의 아침
안갑선 – 명아주와 노인
안국훈 - 나이 들면 누구나 어르신이 될까
안국훈 – 어르신 나무
안시아 – 노인과 수레
안영준 - 노인
안원찬 – 독거노인
양재건 – 노인의 길
오보영 – 노년 예찬
오애숙 – 노년의 영광 위해
오애숙 – 새론 바람(노년의 바램)
오하룡 - 노인정에서
오하룡 – 산지기 노인
용혜원 –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원영애 - 독거노인
유영서 – 노신사의 고독사
유일하 – 먼지 쌓인 노인 밤
유종천 – 노년의 가을
윤동주 - 황혼
윤만주 – 굽은 노년
윤만주 - 한 노파
윤제림 – 노인은 박수를 친다
윤종택 – 노인성(老人星)
이길옥 – 노년
이길옥 – 노인의 셋방
이길옥 – 어느 노인의 끝자락
이대흠 - 황혼
이동순 – 백 살 노인
이동호 – 노인과 계단
이명윤 – 독거노인이 사는 집
이문기 – 도시와 노인
이문조 – 노년
이문조 – 홀로 사는 노인
이선옥 – 황혼의 회안
이승기 – 노년의 모르쇠에는
이승기 - 독거노인
이승하 – 가로수와 노인
이영지 – 어르신이 사는 나라
이육사 – 황혼
이운학 –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이윤학 – 단무지
이인호 - 황혼
이정원 – 노인의 실종
이종섭 – 도장 파는 노인
이해인 – 어느 노인의 편지
임성춘 – 쉰 살 즈음에
장수남 – 노인의 가방
장용순 – 노년의 사랑
전성호 - 독거노인
조남명 – 노인
조병화 – 단 하나의 소원
조수옥 – 노인
조순자 – 독거 노인
조위제 – 노인의 날에
차영섭 – 노년에 실천할 미덕
차영섭 – 노년의 미(美)
차영섭 – 노년의 삶
차영섭 – 노인 선서
최다원 – 노인
최동락 – 치매야 물러가라
최일화 – 노인과 땡감
최일화 – 한 노인
최풍성 – 다리 밑 노인들
하영순 – 독거노인을 찾아
하태수 – 노인정에 핀 검버섯
허수경 - 미술관 앞에 노인들은 물 흐르듯 앉아
허수경 -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허용회 – 어떤 중늙은이의 기도
황인숙 – 노인
Karle Wilson Baker –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서귀포에서 만난 노인
강남주
오늘이 12월 1일이다.
한 해가 한 장의 달력에 매달려
바닷가 가게 벽에서
안간힘을 하면서 펄럭이고 있다.
체감이 더욱 차겁다.
바람은
어쩌자고 서성이고만 있나.
출렁이는 바다 위를 힘살 좋게 날고,
갈매기만 춥지 않은가.
먼 경치와 대조를 이루면서
노인 한 분이
천천히 걸어가고 있다
꼰대
강보철
나 때는 말이야
요즘 것들은
푸념의 공간에서
입도 벙긋 못하는 가슴앓이
감자가 물에서
이리저리 서로 부딪히며
때를 벗듯이
시간을 끌어안은
겸손한 죄인이고 싶다
내가 왔다는 어떤 기록도
내가 갔다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말자
헌신과 가치는 어딘가 있다
고통은 이겨내고
삶의 품격을 되찾기 위해
당신이 찾는
부드러운 일꾼이고 싶다
지나고 나면 시간의 그림자
해가 뜨면 길게, 짧게
해가 지면 사라질 그림자가 될걸
나 때는 꽁꽁 싸매고
요즘 것은 가슴으로 받는다
노인의 가을 연정
강한익
휘영청 밝은
한가위 보름달
닫힌 가슴 활짝 열어
고이 모셔놓고
코스모스 꽃 지어
검은 가시 돋아나면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을 살포시 밟으며
오신다는 사랑 하는 임이여 !
칠순 노인 얼굴에
주름살 깊게 그리는데
어느 곳에 깊은 사랑
뿌리내렸는지
오실 줄 모르는구나,
칠흑의 어둠 속
행여 길 잃으실까
오시는 길
둥근달 꺼내 들고
훤히 비추어
발걸음 가볍게 하려는데
귀뚜라미 풀 벌레
서글피 우는 가을밤
그리운 임
오신다는 기별이 없어
고운 옷 치장한
아름드리 고목에
아픈 사연 하소연한다
몇 살부터 노인인가
강효수
나이는
영혼과 무관하다
영혼에는
숫자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이 젊으면
늙어도 젊음이요
영혼이 늙으면
젊어도 늙음이다
최악은 늙어서
늙은 영혼을 소유하는 것
가장 최악은 젊어서
늙은 영혼을 소유하는 것
참된 영혼의 나이는
시공간을 초월한 미래다
세상이 혼탁하다
늙은 것들은 다 죽어버려라
홀로 된 노인
고재종
저처럼 금숭어 튀어오르며 그리는
금빛 아치의 순간을 보는
저 노인, 저리는 발 담그지 않았을지라도
강물은 이미 노을에 감전돼 있다.
하루 내내 잘 익은 포도주빛 노을, 그 속에
봉우리를 헹구는 병풍친 산들은
또 검푸러지며 능선들을 미끈히 뽑을 때
저 노인, 거친 노동의 단내 나는 숨결도
이제 강심으로 잦아드는가.
적막강산, 이렇게 흘러도 좋다지만
아직도 허기를 못 면한 소쩍새는
물살을 더욱 흔들어놓는 지금, 저 노인의
가난도 절뚝거리며 강변을 돌아온다.
때마침 백양나무 잎새를 흔드는 바람,
이미 한 번 스쳐간 인연들도
우수수거리는 소리만 있어, 그 소리만으로도
저 노인, 온몸 사무치게 물살치곤 한다.
그러니 생은 얼마나 깊고 푸르른 것인가.
어깨에 맨 삽이 몇십 개 닳도록
평생을 파보아도 그러나 회한과 뉘우침뿐,
다만 강물은 유장하고 산은 우뚝해선
강으로 오늘을 씻고 산으로 내일을 세웠느니,
적막강산, 들어서는 산집 마당에
오늘처럼 또 금빛노루가 맑은 눈망울로
저 노인의 귀가를 기다린 적도 있긴 있다
황혼 일기
고정희
뉘엿뉘엿 저무는 시간에,
나는 차분하지 못하여
그 집의 너른 유리창가에 앉으면
바람부는 창밖은 딴 세상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잔조롭게 흔들리는 산목련 줄기 사이로
획 가로지르는 새도 새려니와
불그레 불그레 물드는
찔레꽃 이파리를 무심히 바라다보면
울컥하고 치미는 눈물 또한 어쩌지 못했다
후르르후르르 산목련 줄기에서 흔들리는 건
산목련잎이 아니라 외줄기 내 영혼이었기
기댈 곳 그리운 내 정신이었기
오래오래 나는 울었다
어둠이 완전히 창을 지워버렸을 땐
넋장이 무너지듯 내 이름도 깊어져
하염없는 슬픔으로 어깨기침을 했다
누군들 왜 모르랴
어두워지는 건 밤이 아니라
속수무책의 한 생애
무방비 상태의 우리 희망이거니
그 집의 주인은 조용히 다가와
너른 창에 커튼을 내리고
내 좁은 어깨를 따뜻이 감쌌다
(새도 날기 위해 날개를 접는 거란다
빛과 어둠이 하나이듯 말야!)
문득, 신경통에 좋다는 골담초 꽃멍울이
건들건들 흔들리는 고향집이 그리웠다
노인과 그림자
고지영
1960년 서울역 앞
펑생을 함께 지겟짐 날으며 살아온
백발의 그림자가 있소
그림자는 어둠을 먹고 빛에 살며
노인은 지게를 먹고 외로움에 살아요
아빠 한번 불러 보지 못한
칠삭둥이 딸애 업고 야반도주한 마누라
찾아도 소용없는 일
솟대처럼 넋 놓고 앉아 먼 산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딸애 우는소리 환청에 잠 못 든다
허구한 날 연탄가스
쉰 김치통에 빠져 허우적대는
추억들만 도배되어 얼룩져 있는 곳
눈보라 치는 지하방 한 칸
날갯죽지 꺾인 독수리처럼
눈빛은 녹슬어 가고
그림자는 서서히 사라진다
파지 줍는 노인
고지영
달그락달그락
낡은 리어카
새벽 공기를 할퀴고 간다
허리 굽은 노인
안개 깔린 이른 아침
어둠을 허리춤에 끌고 다니며
이 골목 저 골목
양지에서 쓰고 버린 물건
음지를 찾아다니며 줍는다
하루 종일
땅에 코 닿겠네
허리 굽은 노인
우박 맞은 기억은 있고
하늘 본 기억은 없다
반듯 누워 천장 쳐다본
기억 또 한 할멈도 모른다
하루하루
양지를 그리워하며 사는 인생
무엇을 더 그리워할까
내일은 어디로 가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
노인은 외로워라
권승주
사랑보다 좋은 것은 없으리
삶은 사랑으로
만들어졌지
사랑을 하면
사는 것이 즐겁고
몸도 가볍고
그날이 기다려지네
사랑은
자유로우며
구속받지 아니하며
누구나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리
짝이 없어서 못하고
돈이 있어도 못하고
좋은 것이 없어라
사랑을 하지 않으면
삶이 어두워지며
몸이 찌푸등하네
숱한 사랑 중에
남녀 간의 사랑이 최고인데
사랑이 없으면
어찌 사노
노인은
외로워라
노인들
기형도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덜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그 노인이 지은 집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어느 노인의 인생
김경렬
뜨겁던 여름 매미도 지쳐 울음을 멈추고
태풍 요동쳤던 대지에 하루의 석양으로 빛나고
어느새 파란 하늘은 지난여름 잊고
가을 단풍이 찬란하도다
오늘 가을비는 단풍마저 한해 매듭일세
젊은 날 열정의 결실은 어디 있는가?
거울 속 덧없는 흰머리만 서서 가을바람에 한들거리네
후세에 어느 누가 내 이름을 기억해 줄까
어르신
김근이
어르신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는 가요
살아오신 세월이 지루하고
지겹지는 않으섰 는 지요
때로는 살아있는 목숨이
원망스러울 때는 없었는 지요
허구만은 이별 중에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섭 슬한 미소로 돌아오는
그리움도 있겠지요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좋고
아니 하는 것 보다 하는 것이
마음을 달래주는 보람이다 보면
죽어 세상에 없는 것 보다
살아 있는 지금이 그래도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지구위에 걸어 다닐 수 있는 곳은
다 내 땅이요
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을
욕심 없이 바라보면서
즐길 수 있는 권리가 있으니
이 또한
살아 있는 보람이 아니겠습니까
어르신
길을 가다가 돌부리에 체여
넘어 지는 사람도 있고
길을 가다가 돈뭉치를 주워
횡제 하는 사람도 잊지요
천을 가지면 천 가지 극정으로
만을 가지면 만 가지의 극정으로
사는 우리 내 인생살이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낳다 지만
없는 만큼 마음은 비워져 있으니
다시 주서 담을 수 있는 여유가 있어
또 살아갈 맛이 잊지 않을 까요
돌아누우면 저승인 것을
아직도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온 사람 없으니
저승의 삶을 기대하지 마시고
이승에 남아있는 세월
잘 챙기시고 비워져있는 마음속에
갖고 싶었던 작은 것이라도
소중히 주서 담아 모아 두셨다가
저승길 돌아 갈 때
머리맡에 풀어놓으시고
그 가치를 저승 노자로 가져가시면........
어르신
이승 삶에 맺힌 한이 있다면
이다음 저승에서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이 열리면
그때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전생의 삶을 거울삼아
맺힌 일 풀어가며
좋은 일 만이 하면서
멋진 인생 살아 봅시다
어르신의 말씀
김길남
생각을 조심하라
생각이 말이 되나니
말을 조심하라
말은 행동이 되나니
행동을 조심하라
행동은 습관이 되나니
습관을 조심하라
습관은 인격이 되나니
인격을 조심하라
인격은 운명이 되나니
노년의 날개
김남조
삐걱거리는 내 뼈는
몸 안의 자잘한 사슬이며
허허로운 모래밭에
내 순정의 파편들이 쌓이고
그 위에
질펀한 노을
애련하구나
늙는 일 서툴러서
깃털 줄어도 더 줄어도
날아오르려 애쓰는
내 노년의 날개
노년의 시
김대규
나이가 들수록
어려운 어휘들 잊혀지고
쉬운 말만 남는다
시도 그렇듯 단순해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사람의 허물
용서하자
세상의 일
다 잊자
하늘의 뜻
감사할 뿐
죽음에게는
"잘 부탁합니다"
노인의 소원
김덕성
나와 그 노인과는
그리 가까운 편은 아니었다
별로 말이 없는 과묵한 편이었고
그날도 우연히 만났을 뿐이다
노인은 한숨을 푹 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내용인즉
손자 결혼식에 꼭 참석하고 싶은데
코로나19 50명 제한으로 참석 못해
마음이 아프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들으면서
아무런 대꾸도 도움 되는 말이 없어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다
노을이 수를 놓을 때에야
노인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마음으로 축하할 수밖에 없다면서
가시는 뒷모습
노인의 소원이 이루어 주시기를
나는 기도할 뿐이었다
어느 노인의 회고록
김덕성
어린 시절은 웃기는 세상이었지
하고 입을 연 노인은
일본이 항복하는 날까지
학교에선 일본 말을 하며 일본 글을 배웠고
우리말을 쓰면 매를 맞았고
한글은 배우지 못했어
그러다 1945년 8월 15일
만세를 부르는 군중에게서
애국가를 듣고 태극기를 처음 보았지
나라를 잃는다는 것은
삶을 잃은 거나 다름이 없다고 하시는
노인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지
일흔두 번 채 광복을 맞는다
해마다 광복절 날에는
대한 나라를 무궁화 꽃동산을 만들어
집집마다 태극기 휘날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날이었으면
어느 노인장의 소원
김덕성
그 날은
내게는 죽어도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지
정오가 지나자
시민들은 모두 거리로 뛰쳐나와
목이 떠져라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지
그 날이 바로 1945녕 8월 15일이야
일본식 이름으로 빼앗겼던
내 진짜 이름을 되찾았고
자유를 찾았고
한글을 처음 배워
대한 나라의 한 사람이 되었지
나라 빛이 다시 비쳐온 날
나를 찾은 날
천상에 늘 감사드리며
한 겨레인 남북이
하나 되는 날을 보고 싶을 뿐이야
가을이 노인에게 이르는 말
김병래
늙어도 늙어도
추하게 늙지 마라 한다
늙었다고 늙었다고
서러워 하지마라 한다
늙음을 늙음을
자랑스러워하라 한다
죽음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한다
고웁게 고웁게
살다가는 낙엽을 보라 한다
누가 노년을 묻는가
김상현
시간이 돌아와 동무가 되어주고
성긋한 흰 모발(毛髮)들도 찾아와 반기며
남은 생애 반려자를 자청하는데
누가 노년을 외롭다고 하는가
어제는 모기떼가
오늘은 번쩍이는 불빛들이
안구에 앉아 논다
그렇다
뼈들도 시큰시큰한 맛을 즐기는 시간은
혼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슬픈 일이 없어도
자꾸만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잘 익은 육체에게
고독하냐고 묻지 마라
노년은 벗들이 많아진다
상자를 고치는 노인
김수우
상자들이 바다에서 담아온 건 태고의 제사였다
어창에서 실려나와 새벽비늘을 쏟아낸
빈 생산짝마다 던져진 기도들이 함부로 엎어져있다
소금버케 두꺼운 허공 이쪽저쪽
비린 장갑을 끼고 비린 못을 박는 그는
해종일 기도를 고치며 기도를 올리는 중
꿰맨 나무짝들 층층 발끝을 세운다
단단한 높이로 단단한 깊이를 만들며 다시 바다를 기다린다
생이란 배우지 않아도 손끝에 익숙한 비밀
누구나 저마다의 바다는 깊고 깊은 제사이니
제 삶에 비린 못 하나 박지 못한
튼튼한 눈물을 가진 그는
물의 온도를 기억하는 한 마리 지극한, 쇠고래였다
그 눈빛,
비린 못,
몰래 날카로운
노인장대
김승기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누가 말했느냐
죽고 싶어 죽는 사람 어디 있으며
살고 싶어 사는 사람 어디 있겠느냐
살아도 사는 게 아닌 목숨
죽을 수도 없지 않느냐
그냥 사는 거지
굽이굽이 생의 고개
숨 턱턱 막힐 때마다
눈감으면 편한 길
땀 흘리며 오르다 보면
시원하게 바람 웃어재끼는
정상이 있을 것이고
숨 고르며 쉬었다 가는
내리막도 있을 것이고
파랑새의 꿈을 꾸면서
살아내다 보면
붉게 꽃도 피어날 것이고
타는 가슴 속에서 씨앗도 맺히는 것이지
이 세상의 어느 풀 나무인들
비바람 피하려고
몸부림치는 것 보았느냐
종점(終点)의 노인
김시종
우대증 안 가져도
공차 타는 파파 노인.
종점에 닿았는데,
내리실 줄 모르시네.
인생도 하차(下車)를 않고서
새 출발(出發)을 하고픈지
노인에게 경고한다
김영제
늙은 것은 자랑이 아니외다
경로석이라고 무조건 앉지 마소
늙은 것도 급수가 있나니
허리 구부러진 형 지팡이의존 형 올백발 형
그리고 60대 이상 형 등이 있거늘
자기네도 양보 안하면서
젊은 사람 앉았다고 나무라지 말라
경로석이라 특별 귀빈석 공짜로 타서
따스한 온돌같은데서 백프로 앉아가니
이거 완전 신선놀음 아닌가
그래놓고는 장애자가 타면
스르르 눈감아 외면하면서
옆사람 툭툭치는 그 싸가지는 무엇이요?
출근시간에 등산 간다며 올라 타고는
두리번 두리변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지 마소
당신같은 노인들 땜에 내가 젊었어도 자리양보 못하겠소
우린 눈비비며 간신히 일 나가는데 당신은 룰루랄라
놀러가지 않소 난 그게 기분 나쁘오
노인
김영천
그는 쉬이 부끄럽다
너무나도 오래 산 나이가,
금방 배가 고프고
금방 목이 마르고
점잖지 못하게 금방 식욕에 지고 마는 것이
부끄럽다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면서도
조금만 아파도 약을 사 먹는
생의 의욕이 부끄럽다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못하고
더욱 완고해지는 삶이,
바람처럼 살지 못하고
기억되고 인식되기를 기다리는 삶이
거울을 보며
끝내 책임지지 못한 얼굴을
다듬는 연민이
너무도 부끄럽다
오오,
이 많은 부끄러움을 어찌할까
소를 모는 노인
김유석
외딴집을 감고, 고구마순처럼 뻗친 길섶에
쇠똥 몇 점이 떨어져 있다.
굳은 몸을 푸는 연한 힘, 그것을 발에 뭍히고
걸어간 봄은 냄새가 좋다
삶은 고구마 같은 등성이,
외딴집에서 거기까지가 노인의 길이다
평생을 오갔어도 항상 초행인
노인의 마음 만큼 밑드는 고구마밭이 있다
무엇을 앞세운다는 건
그것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큼이나 정겨운 일이다.
따라가는 길도 문득 홀연해질 때
슬그머니 돌아다봐 주는 눈빛
무엇엔가 등을 맡긴다는 것처럼
아름다운 길들여짐은 없다
내외하듯, 여물을 먹는 소의 잔등에
담배를 물고 돌아앉는 노인의 허리가 겹친다
닮은 것들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지 않고서도
서로의 몸에 마음을 드리우기도 한다
황혼 / 김점용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은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 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하루는 멀쩡한 우리 집을 숨겼다가
경찰차를 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머리카락과 옷을 가위 속에
가스렌지 속에 숨겼다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백수(白手) 노인
김정윤
허무한 인생 고달픈 삶
준비 없이 채워진 나이에 쫓겨난
세상이 붙여준 이름 백수(白手) 노인
갈 길은 먼데 세월의 무게에
맥 빠진 삶을 등에 업고
오라는 곳 없어
갈 곳 찾아 헤매는 가엾은 방랑자
눈먼 장님
말 못 하는 벙어리가 아니라고
외쳐도 보았지만
세상에 낙인된 노인이란 숫자
눈뿌리 아프게 참아온 밤
장맛비가 토해낸 하얀 물안개가
비탈진 계곡을 기어오르는 새벽부터
발정 난 들개처럼 컹컹거리며
지폐 냄새를 찾아 헤매는
예순다섯
숫자가 만든 이름 백수(白手) 노인
어두운 세상 한 모퉁이에서
힘겨운 삶의 등짐을 지고 오늘도
오라는 곳 없는
갈 곳을 찾아 길을 떠난다
운명을 타는 노인
김정윤
비만의
거대한 몸을 흔들며
유월의 푸른
바람이 불어온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놀이터에
불법 체류한 붉은 조각들이
구석구석 몸을 숨기고
가로등 불빛 속으로 뛰어든
하루살이의
슬픈 운명을 수습한다
한바탕 어린 즐거움이
지나간 자리에
노인은 그네를 타고 있다
요양원 목에 걸린
울리지 않는 전화기처럼
흔들거리며
잊혀가는
유년의 그리움을 타고
겹겹이 밀려오는
외로움을 타고
돌아오지 않는 세월 속에서
노인은
운명을 타고 있다
그것들
김종길
친손 남매와
외손 남매가 다
미국과 캐나다와 영국에 가 있으니
그것들은 다
멀리 하늘가에
살고 있는 셈이다
우리 두 늙은이는 아침저녁으로
먼 하늘가를 바라보며
그것들을 그리워한다
또 한 해가 저물어가니
더욱 그것들이
그리워진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김준엽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자신 있게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 하여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가족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가족의 좋은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에게 순종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나에게 많은 날들을 지내오면서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나는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내 인생에 황혼이 들면
나는 내 마음 밭에서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어보겠지요
그러면 그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그물을 깁는 노인
김혜경
노인은 그물을 선창에 널었다
바람도 비린내가 났다
머리칼이 푸석한 그물 같았다
수캐는 낡은 창호지처럼 힘이 없다
거제도 하청면 장곶마을로
동백꽃 같은 여인이 시집을 왔다
여인은 지아비를 따라 거울같이
차가운 바다에 갔다
술에 미친 사내는 물을 푸다
바다에 빠진 아내를 두고 돌아왔다
복사꽃같이 화사한 여인들이 연일
야밤에 그 집을 나가버렸다
어린 아들은 앉은뱅이꽃처럼 더 이상 자라지 않았다
늙은 수캐는 이젠 눈조차 바다를 향하지 않는다
노인은 찢어진 추억을 기웠다
바닷가 작은 마을 그의 선창가에는 기워야 할
수많은 상처들이 술병처럼 널려 있다
어느 노인의 단상
김혜정
세월이 꼭 움켜쥐고
달아나는 삶 속에 어느 노인의
주름진 인생이 고스란히 걸려 있습니다
어떤 세상에도 잊혀지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눈가에, 이마에
접힌 삶의 혼탁함 들
이젠 조용히 뒷짐지고
구경해야 할 나이임에도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허상 같은 몸놀림에 묻어나는
질곡 같은 삶의 아픔들
작은 바람 한 조각에도
힘없이 쓰러지며 눈물 흘리는
주름 접힌 눈가에 두꺼운 삶의 형상이
슬픔처럼 반짝거립니다
얼마나 고단했으면 구부러진
허리 한번 얼싸안지 못한 체
아직도 지나온 삶의 역경을 드나들며
침묵 같은 고독으로 가슴 저림인지
원망도 애원도 부질없는 세상
이젠 푸른 하늘 배게 삼아
허리 한번 곧게 펴고
남은 세월 편안히 누여 보소서
고운 노인
노정혜
봄은 매양 봄인 양
환한 미소로
꽃비가 내린다
발자국에 짓밟힌 모습도
아름다워
올 때는 영원할 것 같은 당당함
꽃은 진다
꽃잎이 진자리에
아기 열매가 왔네
우리네 인생도 영원한 봄
얼마나 자만했나
늙지 않을 것처럼
자연의 법칙
얼굴에 밭골이
수를 더한다
머리에는 하얀 눈발이
할머니는 내가 아니야
나는 받아들인다
할머니
고운 노인이 되고 싶다
마음이 바다같이 넓은
받는 그릇이 작아지니
어쩌나
좁아지는 가슴
어쩌나
봄꽃 마음이 되고 싶다
노년의 모습
노정혜
노년의 내 모습
젊은 날의 계산서
아름다운 노년의 모습이고 싶다
청년이 중년을 만들고
중년이 장년을 만들고
중년이 노년을 만든다
나무는 자라는 모습 나이테로 기록하고
내가 걸어가는 발자국은 내일 내 모습
어떻게 살았나 묻지 마라
지금 네 살아가는 모습 노년의 나이테
노년에 고운 모습이고 싶다면
삶을 잘 살아야 한다
마음이 행동을 낳고
지금 내 행동이
노년의 내 모습이다
지금 예쁜 마음 열정의 삶
노년의 모습이 곱다
노인
노정혜
나이 많으면
지금까지 배워 쌓은 지식 높은 줄 알았네
지식은 낮아지고 고집만 높아졌네
나이가 많으면 부자가 될 줄 알았네
통장 비었네
나이 많으면 효도받을 줄 알았는데
직장 없어 부모 주머니 바라보네
나이 많으면 친구 많을 줄 알았네
사는 곳 어디인지
소식 멀어지네
생각은 고향에 머물고 고향 친구 정 깊네
나이 많아 일하고 싶은데
노인이라 부르네
청년 일자리 모자란 데
노인 일자리가 어디 있나
집에 가서 애나 봐라
자식들은 제 둥지로 가고
어쩌다 만난 손자 노인 냄새난다고 싫다네
노인 됨 서러운데 어디서 환영받나
아픈 곳만 늘어만 가네
노인의 하루
도분순
새벽 초침 소리가 요란하여
이른 아침을 맞이하는 깊은 인생
이제는 아가야 발걸음처럼
제아무리 빨라도 몇 걸음 못가서
바닥에 엉덩방아 찧듯 힘겹다
자동차 질주의 소리와
텃밭의 푸른 채소들 조잘대는
말벗으로 허전함을 달랜다
세 끼의 식탁은 마주한 사람 없고
모래알갱이와 나무껍질 씹는 입맛에
진미는 푸대접이라 아우성친다
길고 긴 하루가 서산 넘는 저녁노을
혈육의 피가 끌리는 모정은
아픔을 잊은 채 자식 걱정뿐이다
꿈속에서나 만날까
고단한 육신은 깊은 영혼 속으로
소풍을 가려는지 가슴이 에인다
노년
류정숙
님이시여
노년에는 더욱 사랑하소서
육신의 눈 어두워도
신령한 눈 밝게 하시고
겉사람 늙었느나
속사람 새롭게 하소서
새것을 배우고
힘써 행하여
믿음, 사랑, 인내를
이루게 하소서
세월의 경험과 지혜를
젊은이와 나누고
기도해 주며
인격의 완숙을 이루게 하소서
노인과 석류
문인귀
젊은 날의 바램과 꿈이 이제
껍질을 뻐개 낸 가슴 채
기지개를 켠다
햇살의 진액을 뽑아 채워놓은
젊음을 흔들어 보는 시각
진홍의 씨앗은
시(詩)처럼 맑은 음을 발하며
별빛까지도 찍어 바른
검버섯 번지는 세월을 펴 보인다
노인의 가슴은
반짝반짝 튕기는 루비
이제부터 시작되는 존재 의미를
한 권의 시집으로 엮으며
미소를 흘린다
-이것은
내가 좋아하는 석류야-
노인의 손 끝에
노년의 하룻길
문장우
배시시 눈 비비면서 눈을 뜨고
창문을 열면서
하루를 맞이한다
허름한 노년의 일상이
희멀건 눈으로 달려들고
오늘은 또 어디론가 떠돌며
하루를 보내는가
나 홀로 걸어왔던 길이 아니기에
서성거리는 마음
손을 잡고 이끌던 동무도 사라지고
고개 숙인 노신사
절뚝거리는 일상의 하루
어설픈 웃음으로 또 하루를
건너야 하리
누군가도 내 뒤를 따라
비틀비틀 이 길을 걸어오리라
새벽을 밟고 어둠까지 뛰시던
아버님도 이 길과 같았을까
말없이 걸어가는 하루라는 길
누가 이 길을 놓아
숙명인 양 모든 사람
걷게 하였을까
풍요로운 나의 가을 추수를 위해
가난한 웃음으로 또다시
하루를 걸어야겠다
산책길 노파(老婆)
문재학
터벅터벅
새벽공기를 깨뜨리는
유모차에 의지한 백발의 노파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애처롭게 굽어버린 등위로
무심하게 쏟아지는
보안등 불빛조차 싸늘하구나.
행복한 삶을 향한
지난날의 꿈들은
그 언제 피웠든가.
어둠 속으로 빨려들면서
건강을 다짐하는
초라한 뒷모습이 처량하여라..
삶에 대한 애착(愛着)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묻어나는
연민의 짙은 그림자가
가슴을 아리게 하네
노인의 각오
박경표
흰머리 검버섯
패인 주름살
칠순의 고개에
고비고비 넘어온 인생길
한 고비
두 고비
넘어온 고비마다
추억 많이 낙엽되어
두껍게 쌓이는데
인생의 연륜은 깊어만 간다
떠나고픈 마음이 얼마련가
고비마다 한숨 자욱
가득하구나
각박한 사회속에
홀로 걷는 외솔길
주변은 보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앞만 보고 걸으렸다
내일 걱정 다 버리고
어제일도 다 버리고
오늘만 만족하며
바로보고 살아가자
먹을 수 있음도 감사
걸을 수 있음도 감사
숨 쉬는 시간도 감사
삶의 감사의 노래를 부르자
어느 노인의 일기장
박광호
이마에 주름지고
귀밑머리 희어져도
세월을 한 하진 말자
삶이 힘들 땐 젊어 땀 흘릴 적 생각하고
기뻐 즐거울 땐 철없든 유년을 떠올리자
인생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고
익어가는 것이란 말 무슨 뜻일까
생로병사,
태어나 늙으면 병들어 죽는 건
당연한 이치
모든 약이 무효하고
병이 깊어 진통이 오면
기도의 눈물로 가라앉히고
기력이 약해 거동이 불편하면
갈 때가 가까워 오는 구나
머리 끄덕이며
해지는 황혼의 찬란한 구름꽃을
그려보자
오늘은 공원 벤치에 앉아
공을 갖고 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어느 노인의 가을 이야기
박근철
무정한 세월은 나 두고
꽃처럼 고운얼굴에
세월을 심어 주름지고
마디마디 굵어진 매듭은
자식 자랑밖에 없네
서산 해는 같이 넘자 하나
나 남겨있고
찬 서리에 머리만 희어
먼저 가신님 얼굴 멀어
동지달의 긴 밤이 춥구나
유수한 세월에 청춘은 가고
나도 조금씩 간다마는
둥글게 사는 것이 좋더라.
어울리며 사는 것이 좋더라.
떨어지는 낙엽에는
짊어지고 가는 것이 하나도 없어라
손수레와 노인(종이 줍는 노인)
박동수
바람이 굴러 온다.
폐 종이 상자에 갇혀버린
노인과 그의 인생이
수레에 실려
바람과 함께 굴러 온다
낡아 꾸부러진 고철허리
그에게도
봄이 주던 사랑이 있었고
불꽃같은 마음으로
그대 위해 풍선처럼
봄 하늘을 날았지
어느덧
살처럼 꽂혀버린
그 옛 사랑은
털어낼 수 없는 덫이 되었고
종이 상자에 묻혀
도시의 골목 바람에
굴러가야 하는 낡은 생
노인 요양소
박소연
긴 병에 효자 없다더니
현대판 고려장
버려진 두려움은 잠시
금쪽같은 새끼 마음 쓰여
깊이 숙인 고개 남몰래 눈물 삼키시네,
병들고 늙은 육신
추억은 막 내린 무대 되고
움켜쥔 막차 승차권
애 말라 기다리시며 저승사자는 어디쯤,
왜 이리 더디신가 한탄하신다.
삶의 끝자락 가물대는 여명(餘命)
간절한 자식 걱정 소망의 끈은
안고 가실 미련인지
자식의 재롱, 옛꿈을 꾸신 것인가,
이슬 맺힌 눈가 스치는 미소
독거노인
박순호
노을이 산 모가지까지 차오른 여름의 끝에서
태양을 들어올렸던 핏발선 하늘
한낮을 이끌던 태양이 공원에 버려진 공처럼
작아지더니 저녁의 바람에 떠밀려간다
공원을 가로질러 큰 길을 빠져나가는 사람들이 몇 있었으나
등나무에 기대 잠든 노인 쪽에서
빈 그네 줄만이 흔들리고 있다
이른 새벽,
파지와 빈병을 줍던 할머니의 놀란 손길이
노인의 죽음을 알려왔고
살아생전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일 없었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말
문손잡이가 떨어져나간 노인의 단칸방에는
찌그러진 냄비가 향로를 대신해주고 있다
고물상 같은 기억을 몰고 가는 거리
사람들은 낡은 기억들을 하나씩 버리면서 저녁놀을 품는다
등나무 가지에 내걸린 보라색 등 하나 켜지 못하고
노인을 기다리는 지팡이
흙바닥을 툭툭 짚어보며 노인의 단칸방으로 향한다
노인(老人)의 기도
박인걸
삶의 무게가 버거워 몹시 지치고
내 영혼 깊은 고통 중에 신음하나이다.
인생 길 돌고 돌아 광야 길 오다보니
붉게 타던 낙조(落照)같이 스러지나이다.
때론 괴로워 우울함에 맘이 아프니
나는 당신을 따오기처럼 부르짖나이다.
이젠 홀로 서서 이겨낼 힘없으니
견강한 두 팔로 나를 붙들어 주소서
든든한 당신이 나와 함께 걷는다면
높고 가파른 고갯길이 두렵지 않으며
내 배(船)에 당신의 그림자만 깃들어도
높은 풍랑이 두렵지 않으리다.
나 이제 너무 머나먼 길을 걸어와
골짜기 산비둘기 되어 심히 구슬프니
처량한 나를 내버려두지 마시고
우뚝 솟은 산처럼 위안이 되소서.
석양은 짙고 갈 길은 막막하여
낙목한천에 한 송이 꽃처럼 외로우니
당신의 그 억센 손으로 날 붙들어
갈잎처럼 흔들리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이 극히 아늑하고 고요하여
실바람 따라 고귀한 향기 풍기며
남은 인생길 흉한 일 없이 마치고 싶으니
일평생 뒤따라오며 돌봐 준 당신께
깊은 경외심으로 거듭 간곡히 비나이다
노인의 설날
박인걸
이제는 하나도 기다려지지 않는다
나에게 설은 많이 부담스러울 뿐이다
떡국 한 그릇에 한 살을 강매당할 때
몇 개 남은 곶감이 꽂이에서 사라지듯
바들바들 남은 나이를 붙잡는다
수명(壽命)이 귀한 것을 이전엔 잘 몰랐다
뭉텅이 돈을 빼내 쓰듯 허비했다
화장터로 죽마고우들이 불려가던 날
내 차례가 온다는 것을 의식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설날을 기다리며
눈썹이 샐까봐 날밤을 지새우고
세뱃돈 받을 꿈에 가슴 설레던
동심(童心) 시절이 천국이었다
새파랗던 시절 동행서주(東行西走)로
오직 꿈을 위하여 앞만 보며 달렸다
어느 날 존재를 의식하던 날
생(生)의 종착역이 저기 보인다
당장 불려가도 아쉬움은 없지만
추한 모습으로 끌려가는 건 아주 싫다
당당하게 내 발로 걸어가고 싶다
설날이 싫지만 멈추게 할 순 없으니
오늘부터는 남은 설날을 계수(計數)하련다
어느 노인
박인걸
노인은 바람소리를 들으며
외딴 찻집 창가에 앉아
때마침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지나간 날의 상념(想念)에 젖는다
발이 부릅뜨도록 걸으며
딴 겨를 없이 살았으나
얼굴에 주름살만 깊을 뿐
덧없이 흘러간 세월이었다
꿈도 설렘도 자취를 감추고
분출하던 욕망도 활동을 멈췄다.
자제(自制)와 포기(抛棄)가 일상화이고
탈 없는 하루가 감사할 뿐이다
옛날 기억을 시간은 삭제하고
곱던 추억도 화면에 비가 내린다
어둠은 맞은편 산으로 드리우고
찻잔을 드는 노인의 손은 떨린다
어느 늙은이
박인걸
시침(時針)에 매달려 태양을 돌았다.
세월의 동그라미 속에서 어지럼을 느끼며
안단테로 혹은 프레스토로
멈추지 않고 달려온 지점에 노인이 서있다.
살얼음판에서 두 귀를 곤두세우고
막대기 끝에서 발끝을 세웠다.
별을 손에 잡으려 아등바등하며
눈물골짜기를 건너와 보니 노옹이 웃는다.
거미줄처럼 얽힌 밤길에서
깨알 같은 공감각의 수수께끼를 풀며
촉각결여증에 걸리면서 도달했는데
난청 늙은이가 고목 곁에 서있다.
황영조를 내 안에 집어넣고
헉헉거리며 대관령을 넘어온 것이
아테네의 월계관이 아니었다.
뒹구는 쭈그러진 밤송이 하나였다.
허수아비 초라한 발목이
어느 공동묘지 앞을 서성인다.
진달래꽃 곱게 피어나는데
계절을 읽지 못하는 치매(癡呆)가 된다
어떤 노인
박인걸
거울 안에는 한 노인이 서 있다
정수리까지 흰서리 내리니
무정세월이 원망스럽다
첫돌 사진은 잃어버렸더라도
기억 속에 얼굴은 꾸밈없는 꽃이었다
비 온 뒤 태양이 구름을 찢을 때
소년은 무지개 위를 걸었다
하얀 눈이 푸른 강물에 쏟아지던 날
그녀와 나는 한배를 탔다
스러지는 갈대밭을 지나
금광(金鑛) 지대를 달려가며
우리 둘은 생손톱이 빠지도록 흙을 팠다
그 자리에 황금(黃金)은 없었고
발길에 돌멩이만 허무하게 차였다
내가 읽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은
나를 위한 책이 아니었다
그럴듯하게 그렸던 자화상을
갈기갈기 찢어 시궁창에 처박았다
고락이 뒤섞이고 희비가 갈마드는
굴곡(屈曲)진 인생의 바둑판을 알 듯하니
사람들이 나를 노인(老人)이라 부른다
하지만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
세월과 싸워온 계급장이 이마에서 빛난다
벤치 노인
박재동
지는 해를 안타깝게 노인이 바라보고 있다
외로움을 잊으려 앉은 의자에서 자동으로 켜지는 음악이 시끄럽기만 하다
어쩌면 그것을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시끄럽게 울려대는 소리에 주위 사람들은 찌푸린 얼굴로 쳐다본다
그러면 노인은 음악을 다른 것으로 바꾸기도 하였지만
사람들은 바다에서의 정적을 깨려는 노인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바다에서는 삶이 그저 한가롭게만 느껴지기만 했고
노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음악이란 그저 사람들의 경멸거리일 뿐이다
저녁이 어스름해지면 연인들과 가족들은 어디론가 찾아 떠나가 버리고
더 깊은 무료함과 침묵만이 다시 바닷가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언제든지 노인에게 어울리는 바닷가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삶은 그저 따분한 것이라는 법칙이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었다
낙엽을 태우는 노인
박정재
세월을 되돌릴 수도 없고
하소연할 상대도 없고
지나온 길이 너무 멀어서
추억으로 그리워할 뿐이다
황혼이란 명찰을 달고
살아온 길에 떨어진 추억
주름진 손으로 쓸어 모으면
짙은 그리움 향기 쌓인다
싸리로 역어 만든 비로
떨어진 낙엽을 쓸어 모아
불을 붙여 낙엽을 태우면
그리움 향기 연기로 퍼진다
낙엽을 쓸어 모아 불태우고
추억을 쓸어 모아 그리워하고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전부인
가을 노인은 세월의 친구가 된다
봄과 노인
박정재
봄바람 불어와
깊은 잠 새싹 흔들어 깨고
꽃눈 비비며 살며시
마른 낙엽 틈으로 목 내민다
복수초, 바람꽃
질 새라 다투어 손 흔들고
매화꽃, 벚꽃
참고 참았던 미모 자랑
앞 창문 열리기 못 기다린다
생강나무, 산수유
노오란 눈망울 치켜뜨고
소란스런 봄 동산을 살피는데
무기력한 노인 이제 겨우 하품이다
여명과 노인
박정재
메마른 가지 사이로
금빛 태양은 얼굴 내밀고
출렁이는 물결 위에
금빛 카팻을 깔았구나
아침이 오는 소리
요란한 향연이 펼쳐지는데
내 사랑 세월은
자꾸만 나에게서 멀어지고
두 손 들어 반기던
여명의 오케스트라 연주
이제 와서 어쩔 수 없이
허전한 여운만 남기는데
생의 마지막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 옮기는
인생 말년의 한 늙은이
푸념이 애처럽구나
노년의 훈장
박종영
어느 반촌의 노인정 추녀에 달린 풍경이
티없이 맑은 소리로 지나간 세월을 구가한다
반백의 노인들은 못들은척 가물거리는 눈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산과 들,
바람의 냄새까지 세세히 분간하며 흐르는 시간을 잡아당긴다
남보다 오래 살아 장수의 비결은 마음으로 흡족하다
간혹 젊음의 패기가 유혹의 눈짓을 해오는 날은,
흰머리와 잔주름의 연륜으로 피어난 노년의 기상이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우러름과 능멸의 삶을 푸르게 살아온 당신들을 부추긴다
수많은 시간 치열하게 살아 남아 달려온 지금,
아름다운 노년을 대비하는 묘책은 무엇인가?
날로 변화하는 언어와 문자를 익히고,
건강한 섭생을 통해 삶의 액년(厄年)을 경계하여
스스로 나이 듦의 행운을 축하해야 하는 것,
이 땅의 수많은 노인이여!
허송하게 살아온 날의 장탄식을 버리고
찾아오는 늙음을 경계하며 노령에 접어든다고 해도
심득(心得 )의 자세로 빛나는 노년의 훈장을 향하여
잘 늙어감의 나를 다스릴 일이
소년이 노인이 되는 세월
박종영
소년이 되어 지금도 철들지 않는
노인으로 살아온 기나긴 설움의 세월
그 세월 나를 키워준
그리운 고향, 옛집 마당에는
지금도 카랑카랑한 어머니의 말씀 쟁쟁하게
노란 씨받이 창연한
달개비꽃으로 피어 반기고,
이른 아침 환한 웃음소리 넘쳐나던
사랑채에선 언제나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 기운차서
대문 앞 지나던 동네 새댁이
놀라 종종걸음치던 진솔한 날이 있었거늘,
어언 내가 어버이 되어
돌아와 앉아 흉내 내보는 무참한 세월
자식들은 바쁘다고 얼굴 보기 드물고,
저만큼 짧은 초가을 해가 나를 붙잡는가?
마냥 듣고 싶은 정겨운 그 말씀들
개밥바라기
박형준
노인은 먹은 것이 없다고 혼잣말을 하다
고개만 돌린 채 창문을 바라본다
개밥바라기, 오래 전에 빠져버린 어금니처럼 반짝인다
노인은 시골 집에 혼자 버려두고 온 개를 생각한다
툇마루 밑의 흙을 파내다
배고픔 뉘일 구덩이에 몸을 웅크린 채
앞다리를 모으고 있을 개, 저녁밥 때가 되어도 집은 조용하다
매일 누워 운신을 못하는 노인의 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져 있다
초저녁 창문에 먼데 낑낑대는 소리
노인은 툇마루 속 구덩이에서 귀를 쫑긋대며
자신의 발자국 소리를 기다리는
배고픈 개의 밥바라기별을 올려다본다
까실한 개의 혓바닥이 금이 간 허리에 느껴진다
깨진 토기 같은 피부
초저녁 맑은 허기가 핥고 지나간다
노인의 방
박홍점
이곳에서
먼저 간 사람이 그리워 밤을 샜노라고
밤새도록 뒤척이다
한숨을 꺼내 천정에 무수한 편지를 썼노라고
지상의 방 한 칸
이곳은 나의 영토라고
깃발을 꽂아 놓고 갔다
뿌리가 깊다
문을 연다
바람을 불러들인다
이불이나 옷가지들은 훠이훠이 산등성이를 넘고
이제 일어나세요
이곳은 우리 집이...
당신의 방이 아니라구요
고집은 그만 피우시고 제발
벚꽃 살비듬처럼 나무의 육체를 떠나는 날
머리 수건을 쓴 아주머니 둘
마스크를 쓰고
벽마다 들러붙어 있는
벽창호 노인을 송두리째 떼어내고 있다
노인의 때 없이 물기 고이던 눈이
구멍 숭숭 뚫린 폐가
눅눅한 입김이 방바닥에 나뒹군다
둘둘 말린다
사내들, 무거운 운동화를 신은 채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고
그들의 손은 면장갑 속에 고스란히 감추어져 있다
노인과 기타아
박희진
죽음에 기대어 노인이 마지막
기타아 줄을 뜯자 아으 소슬한
가을 바람 일어서 백발을 적시네
오른쪽 어깨는 이미 저승으로
기울어 안 보이나 이제 그에게
남은 건 단 하나 낡은 기타아 …
노인과 마음을 더불어 해온
평생의 반려이기 지금은 오히려
주링 먼저 알아 손가락을 튕기나 봐
그가 숨지어 소리는 자더라도
죽음을 넘어선 심장의 고동처럼
줄은 울 것일세 다시 더 한 번
노인이 있는 곳엔
박희진
노인이 있는 곳엔
노송이 있고
유현한 산수가
펼쳐지게 마련이다
길을 묻지 말라
노인이 길이므로
그는 곧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
나귀의 발굽 소리
솔바람 소리 섞여
멀리 폭포의
소리가 들리는가
노인은 사라져도
그가 쉬던 자리
노송의 아래에선
향훈이 일 것이다
눈물 많은 노년
박희홍
젊은 날에는
무덤덤하더니만
늙어 힘 떨어지니
감성이 더 풍부해졌을까
헤퍼서
좋고 나쁜 일 가리지 않고
듣거나 보거나 할 때마다
얼굴을 흥건하게 적시는 것은
지난날 망나니 같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반성의
휴화산이 분화噴火한 것일까
세월이 늙어가니
지구 온난화 현상처럼
늙은이의 가슴속에서 잠자던
뜨거운 용암과 화산재의 분출일까
노인과 손수레
서복길
땅거미
그물 짜 내려가고
빈 수레
요란하게 소리 낸다
검게 그을린
얼굴 속의 고뇌
세월 따라
구부정한 등줄기
힘줄 사반게
움켜진 두 손
수레와 하나가 된
노곤함 속의 뒷모습
그림자 밟아가며
반겨줄 이 찾아서
잰걸음 재촉하네
노인
서태수
초겨울 햇살 아래 마른 낙엽 앉아 있다
한 점 물기 없이 다 증발한 무심한 빛
늪으로 오도카니 굽은
허연 강의 빈 껍질
흘려보낸 깊이만큼 하염없는 흐린 눈은
한 생애 굴곡 굽이
어드메쯤 멈췄을까
담장 위 까치밥보다 더 작게 웅크린 강
노년의 삶
성백군
언제 보아도
저 산 밑 숲 동산은 한결같다
햇빛 들면 초록이 반짝반짝 눈부시고
흐린 날일수록 잎들이 더욱 싱싱하다
바람 불면 부는 데로 흔들리고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맞는다
나무들이라고 천재지변이 왜 두렵지 않겠냐만
피할 마음이 없으니
태자리가 붙박인 자리가 되었나 보다
손, 발, 팔, 다리, 다 있다고
자랑할 게 하나도 없다
사람 한평생을 이리저리 뛰며
이 짓 저 짓 다 해 보았지만
남는 게 고집과 욕심과 회한과 늙음뿐이니
뒤돌아보면 삶이라는 게
다 농담 같다
이제는, 살 만큼 살았으니 피하지 않겠다
다시는 세월에 속지 않겠다
발 다리가 뿌리가 되고, 손 팔이 잎이 된데도
햇볕도 받아먹고, 바람에 순응하며, 후회 없이
순리대로 편안하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연습이나 하며
여생을 즐기고 싶다
맛 나는 노년
성백군
한 달포
집을 비운 사이 방안 여기저기
먼지가 수북이 쌓여 있다
그동안 공으로 살았으면
이제는 자리를 내어 줄만도 한데
고맙다는 인사는 고사하고
웬 불청객이냐고 폴폴 날며 억지 쓰는 먼지가
내 돈 떼먹은 미운사람 같다
쓸고 닦고 털어낸 후에야
겨우 본래대로 돌아온 모습
안 쓰면 안 닳겠지만, 녹이 슬고
시간은 멈추지 않으니 인생은 절로 갈 것이고
늙어 치매 걸리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머리를 굴릴 일이다
오랜만에
도마 위에서 아내의 과일 써는 소리
사각사각
내 여생도 저렇게 상쾌했으면 좋겠다
맛 나는 노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노년
성백군
늙은 나무뿌리가
흙과 막돌 사이를 헤집고 올라와
계단이 되었다
하루에도 수백 명씩
오르내리는 등산객들을 실어나르다 보니
껍질 벗겨지고 진(津) 다하여
하얗게 바래어져 반들거린다
왜 세상에 나왔는지 알 수 없지만
땅속 캄캄한 어둠이 싫어서 열심히 살다 보니
사랑도 하게 되고 자식도 생겨나고
생명 귀한 줄 알아 도중에서 포기도 안 되고
이제는 다 산 몸이라 여겼는데
오늘 산중에서
늙은 나무뿌리를 만나니
아직은 할 일이 남았다
나도 세상 계단 되어 뭇 사람들을 실어나르다가
목숨 다하는 날
너처럼 반들거렸으면 좋겠다
노인 빈곤 시대
손병흥
고령화 시대 빈곤의 노령화 현상이
빈곤위험도 노인 빈곤 율을 키워버린
대도시 중소도시 보다 농촌지역일수록
그 수준이 더욱 높아만 지는 심한 격차와
경제위기 사회보장책 재정지원정책방향 등
불평등문제에 따른 해결방안 마련이 절실해진
유형별 상태 변화 인간다운 삶의 질에 대해서도
사회적 공감대와 관계망의 점검이 필요해진 시점
노인
손상근
허물어진 토담 옆
늙은 향나무
반은 썩고
가지 몇 개 겨우 남아
수액 주사를 맞고 있네
속은 비어 바람 윙윙 울고
상한 한쪽 가지
시멘트로 떼워져 있네
숫이 적은 잎새
수척한 가지
가을 햇살 쬐고 있네
조금씩 낮아지는 체온
매일 밤 죽음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햇살에 샅샅이
들여다뵈는 알몸
푸르게 흔들리던 가지
하나 둘 버리고
옹이에 향내 품고
외진 곳에 서 있네
노인 징조
송근주
서리가 내리는
서릿발을
장식하는 머리카락
노인이 되는 징조
만족하지 못하고
검은 버섯 만들고
버섯으로 장식하는
노인의 징조가 되고
불만족이 성이 안차
만족하게 하려드는
피부의 거칠어짐
노인이 되어가는 징조
노인이 되는
기억력 감퇴
금방 했던 말도 잊혀지는
노인이 된 징조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신경림
자리를 짜보니 알겠더란다
세상에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걸
미끈한 상질 부들로 앞을 대고
좀 처지는 부들로는 뒤를 받친 다음
짧고 못난 놈들로는 속을 넣으면 되더란다
잘나고 미끈한 부들만 가지고는
모양 반듯하고 쓰기 편한 자리가 안 되더란다
자리 짜는 늙은이와 술 한잔을 나누고
돌아오면서 생각하니 서러워진다
세상에는 버릴 게 하나도 없다는
기껏 듣고 나서도 그 이치를 도무지 모르는
깨닫지 못하는 내 미련함이 답답해진다
세상에 더 많은 것들을 휴지처럼 구겨서
길바닥에 팽개치고 싶은
내 옹졸함이 미워진다
늙음에 대하여
신달자
그를 애타게 기다린 적이 있었다.
스무 살 때는 열손가락 활활 타는 불꽃 때문에
임종에 가까운 그를 기다렸고
내 나이 농익은 삼십대에는
생살을 좍 찢는 고통 때문에
나는 마술처럼 하얗게 늙고 싶었다
욕망의 잔고는 모두 반납하라
하늘의 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지면
네 네 엎드리며
있는 피는 모조리 짜 주고 싶었다
피의 속성은 뜨거운 것인지
그 캄캄한 세월 속에도
실수로 흘린 내 피는 놀랍도록 붉었었다
나의 정열을 소각하라 전소하라
말끔히 잿가루도 씻어내려라
미루지 마라
나의 항의 나의 절규는
전달이 늦었다
20년 내내 전갈을 보냈으나
이제 겨우 떠났다는 소식이 당도했다
이젠 마음을 바꾸려는
그즈음에
노인의 아침
신진
마른기침 일어나
어둠의 자투리들을 갠다
쿨럭쿨럭 삽자루 일어나고
눈곱재기 닦으며 털복숭이 한 마리 뛰쳐나온다
몽당 털복숭이 논두렁길 앞장을 서면
밤새 물을 지고 기다렸던 풀들이
노인의 발등에 한 바가지씩 물을 부리고 간다
샛바람 불어 노인의 이마에서 새로 체온을 짚고
복숭아뼈를 타고 쇄골까지 물 기운 오르는 동안
노인은 물꼬 다지고 피 싹 몇 건진다
논바닥 흙의 숨소리 여기저기 모이고 흩어지고
찌르레기 소리 내며 재잘거린다
아침은 부신 개밥그릇 만지듯 살갑고 낯이 익다
들판 여기저기 바투 돛을 올리는
농투성이들의 목선들, 여어- 여어-
또 하루 함께 지냈구나
받는 이 없어도 저마다의 무사함을 알리고 있다
일평생 칭송 받은 일 없고
알레스카며 앙코르와트며 멀리 가 본 적 없으나
넘길 것 죄 넘기고 남았나니
다시 밝는 날이 짐 되지 않다
툇마루 너머 산이며 들이며 한없이 몸을 푼다
강아지 새삼 다가와 노인의 발등에 몸을 비비고
볕살 알뜰히 날아다니며 젖은 삽날 말린다
털복숭이와 둘이 맞는 툇마루의 아침 밥상
홰나무 가지 사이 샛별조차 기웃거리니
오늘은 갈 때 아니라고 하루 더 쉬다 가자고
몽당 털복숭이 폴짝폴짝 뛰어오르며
주둥이 입에 문지르며 조르고 있다
명아주와 노인
안갑선
가시철망 울타리에 피어난
풀 한 포기
그냥 잡풀인지라
사람들은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한 사람은 정성껏 보살폈네
어떻게 은혜를 갚을 수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 생각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음을 알고
아픈 눈물 흘렸네
그럴수록 명아줏대는
더 많은 사랑을 받기만 했네
여름 되고
가을 되어
명아주 풀은 훌쩍 커 버렸고
한 사람은 힘없는 노인이 되어 버렸네
굽어진 노인의 허릴 보고
제 몸 잘라 지팡이 되었고
체중이 실릴 적마다
명아줏대는 감사의 눈물 흘렸네
나이 들면 누구나 어르신이 될까
안국훈
헌집에는 없는 게 없다
세월 가면 눈 침침하니 보이는 게 적어지고
귀 어두우니 화낼 일 없어지고
이 빠지니 먹을 게 줄어들어 다행이다
다리 풀리기 전에 여행 다니고
아프기 전에 더 베풀어라
나이 든 게 벼슬 아니라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운 일도 아니다
달력 나이는 누구나 해마다 한 살씩 먹고
사회적 나이는 결혼하고 자식 낳으며 성숙하지만
심리적 나이는 저마다 달라
나잇값 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인생길
나이 들면 들수록 장광설보다 경청하고
경쟁관계가 아닌 상생의 길 걷고
비난보다 칭찬하노라면 어르신 된다
어르신 나무
안국훈
어르신은 나이 든 나무 같아
언제나 든든하다
수많은 고생과 아픔 겪고서야
슬픔과 고통은 고운 추억의 약이 되었다
누구나 나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꽃을 더 아름답게 피우고
결실을 더 튼실하게 맺노라면
사부자기 나무 그늘은 천국이어라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하거늘
속절없이 흘러가는 바람을 어찌 탓하랴
어떤 난관과 시련 굴하지 않고
운명에 당당히 맞서는 별을 보며 노래 부른다
세월에 순화된 마음은
봄눈처럼 울분과 불만 녹이고
봄바람처럼 용서와 화해의 손짓으로
나이 듦에 감사하며 안부 전한다
노인과 수레
안시아
노인은 내리막길처럼 몸을 접는다
밤새 쌓인 어둠을 수거하고
수레 위 차곡차곡 재활용 상자를 쌓고 있다
상자마다 뚜렷이 접힌 흔적들
그 각(角)이 포개져 품을 만든다
바퀴가 회전할 때마다
노인의 야윈 마디가 함께 맞물려 삐꺽거린다
어떤 세월이 구부러진 각(角)을 만든 것일까
곧게 내리던 하얀 눈들도 굽은 등위에서
한 번 더 미끄러지고 있다
구부러진 길이 골목을 품듯,
노인은 점점 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수레 위 차곡차곡 접힌 生이 묵직하다
헉, 헉 뜨거운 입김이 골목을 큰길로 끌어내고 있다
품 가득 곧, 햇살이 안겨올 것이다
골목을 다 빠져나올 무렵
축이 닳은 바퀴가 성급히 회전을 한다
끌어온 길을 축으로 힘껏 잡아당길 차례다
노인은 마지막 각(角)을 그려내고 있다
노인
안영준
낙인찍힌 숫자 뒤에
세상이 지어준 슬픈 이름
머지않은 길
세월의 무게를 짊어지고
고샅길을 두리번거린다
어둔한 걸음걸이
자신몰래 굽어지는 허리로
길잃은 강아지 처럼
어슬렁 거리는 방랑자
까만 밤 삼경에도
무거운 침대만 들썩 이고
실없는 그림을 도배 한다
고달픈 삶으로
평생을 위해 준비 했건만
나중 남은 건 노쇠한 육신
독거노인
안원찬
독거는 독거다
창틀에는 먼지가 덕지덕지 쌓여 있고
천정에는 알록달록 지도가 그려져 있고
벽 구석구석 갈라진 틈새마다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 있다
독거는 독거다
댓돌에는 시퍼런 꽃이 피어 있고
마당에는 잡초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지붕에는 버섯들이 솟아 있고
철 대문에는 붉은 꽃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독거는 독거다
이 모두는 늙음의 꽃이다
어떤 모양으로 피든 어떤 색깔로 피든
말없이 피었다가 말없이 가야 하는 꽃이다
저승꽃이다
노인의 길
양재건
계절의 바람이
조금씩 짙어가는 산등성이 수림 위로
휘파람같이 지나간다.
묏등에 웃자란 풀들을 낫질하며
구순을 바라보며 힘에 부쳐
성묫길을 향해 손 흔들고 계신
노인 생각을 한다
살아생전 마지막일지도 모를 성묫길,
고속철을 타고 나들이 삼아 오셨건만
반겨주는 건 산바람과 까마귀 친구들뿐
노인은 애꿎게 들풀만 만지며
세상 저편을 바라보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우린 모두
노인의 길을 걷고 있는
또 다른 풍경이란 그런 생각 속에,
함께 온 아낙과 아이의 싱그러운 미소가
산들바람과 곱게 어우러지고
가을 산은 어느새 까마귀들을 모으러
또다시 바람을 불러들이고 있다
노년(老年) 예찬
오보영
보지 못한 세계가
아직
저리도 넓게 펼쳐져있는데
듣지 못한 소리가
아직
온 사방에 가득 퍼져있는데
깨닫지 못한 진리가
아직
저만큼이나 깊이 쌓여있는데..
더 많이 느끼고
더 두루 살피고
더 깊이 알아가면서
주어진 내 삶
소중하게 살아가야지
한 순간 한 순간을
진솔하게
감사한 마음으로
하늘의 뜻에 순종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가치 있게
귀한 나의 삶
복되게 살아가야지
노년의 영광 위해
오애숙
머무는 시간에
열리는 열매의 희열
감회가 남다르네
백 세 시대 향하는
경첩 같은 거라 안도하나
그 거린 아직 머네
허나 굳센 마음에
천 리 길도 한 걸음으로
한 보 행진해 보네
철마 쓴 군인처럼
앞만 보고 전진하나
비빌 언덕 맘에 두고서
새론 바람(노년의 바램)
오애숙
사는 동안
내 인생 여정의 길
꽃길만 걷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 가끔
심연속에 아련하게
옛날이 떠올라 휘도는
그 희로애락
황혼의 해 질 녘
마지막 열차 안의 바람
살며서 속삭이는 파문에
기도 손 모으나니
내 주여 이 생의
그 종착역 언제가 될런지
아직 모르나 그날이 올 때까지
주님의 평강 속에
하늘빛
그 향그러움만
휘날리게 하소서
온 누리에
노인정에서
오하룡
1
그냥 물끄러미 앉아 있다
그냥 있어도 숨이 가쁘다
말은 안 하지만 눈빛이
사정쪼다
‘데려가 다오’
비틀비틀 굼뜬 걸음
가느라 가지만 몇 걸음 떼지 못 한다
말은 안 하지만 손짓이
사정쪼다
‘데려가 다오’
이쪽을 보는지 저쪽인지
보이기는 하는지
초점 풀린 눈동자 굴리며
사정쪼다
‘데려가 다오’
어디로 가자는 건가
종착역에서 애원하는
내 모습
2
황홀한 꽃송이였고 만개였다
기고만장 아름드리나무였고
울울창창 숲이었다
그 숲길의 어울리는 천사였다
하느님의 백성이고
신의 자식이고
제후의 신하였다
이 세상 더할 바 없는 성인의 제자였다
꽃길이고 꽃바람이고
꽃노래였다
모두 자신 넘쳤다
늠름하고 아름다웠다
그들의 환호
절로 악기고 명기였다
나도 뒤따르면
나도 쫄랑쫄랑 흉내 내면
절로 꽃길 되고
악기 되고 명기 되리라
그러나 아니었다
따라가도 따라가도
높이 모르는 산이었다
넓이 모르는 숲이었다
나는 그들과 종속이 달랐다
제각기 뿔뿔이 아름답게 사라져
부러웠다
다시는 못 만나고 못 찾는
아득한 딴 길 이었다
누구의 명령으로 어디를 돌아
결국 다시 여기 다 모였는가
기고만장 그 아름다운 모습 다 어디 두고
불쏘시개 나뭇단 나부랭이로
여기 모두 모였는가
3
참 종류도 많았다
참 방법도 많았다
참 까마득히 높고 멀고
그러나 선택의 폭은 있었다
왜 나는 외길만 보았는지
꽉 막히게도 아무 것도 안보이고
하늘의 소린지 땅인지 못 듣는
청맹과니 되어
분간 없는 맹목의 질주였다
무릎 까지고 굳은 살 박히고
험한 잡목 헤집고 고개 넘어
다리 알배고 정맥 징그러이 드러나는
나는 막 머슴 이었다
뛰고 뒹구는 외길은 내 길 이었다
한계지대였고 절망뿐이었다
아둔한 눈에 길은 외길만 보였다
그 길 놓치면 끝이었다
아부에 비굴에 굴종으로 직업삼아
그냥 맹목의 질주였다
아무것도 아닌 최면에 걸려
저승 문 이르러 비로소
슬프게 줄 서 있는 내 모습 만나다
산지기 노인
오하룡
지금 내 귀엔 산지기 음성이 쟁쟁하다
"저 건너 산에 나무하는 사람아"
산지기 노인의 핏발선 눈과 굵은 힘살 팽팽히 불거지던 이마
노인 음성은 메아리 살이 붙어 산을 맴돌았다
탕건이 젖혀지면 어울리었다
작은 체구 소리만 클뿐
좀체 산으로는 내닫지 않았다
나뭇군이 숨고 나면
감나무밑 돗자리에 목침을 베고
나뭇군이 어서 한짐을 채워 달아나
주기를 바라던 노인
나뭇군은 대개가 같은 동리 아이였고
대부분 대결은 같은 동리 나뭇군과 벌어졌다
승자도 패자도 없이 동리에서 만나면
노인은 인사받는 어른
나뭇군은 공손한 아이
나뭇군 사라진뒤 그 흔적에다
"저 산에 나무하는 사람아"하였다
이 소리에 타동리 나뭇군은 정말 놀라서 몸을 감추었다
노인은 이런 효과를 노리었다
산 그림자가 짙으면 산에 누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럴땐 목청을 가다듬어
진짜 나뭇군이 있을때 보다 더 직설적인
"저 산에 솔베는 사람아" 아니면
"저 산에 나무 끔는 사람아"하며 무릎까지 굴렸다
그러나 한번도 놈소리를 안하던 노인
몹시 단아 청아하던 음성
몹시 늙으셨던 산지기
수염이 가슴아래 치렁 하였다
할아버진 청지기였고
아버지때부터 산지기였다고
가끔 콧물 엉킨 수염으로 얘기하였다
지금 그 노인은
영원히 그 산속으로 이사하였다
동리 사람들이
노인이 마주하던 산 초입에
"입산금지"간판을 세워 놓았다
지금 내 귀엔 산지기 음성이 쟁쟁하다
내 후손 귀엔
"입산금지" 간판이 쟁쟁할 것인가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
용혜원
젊은 날의 사랑도 아름답지만
황혼까지 아름다운 사랑이라면
얼마나 멋이 있습니까
아침에 동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떠오르는 태양의 빛깔도
소리치고 싶도록 멋이 있지만
저녁에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노을지는 태양의 빛깔도
가슴에 품고만 싶습니다.
인생의 황혼도 더 붉게
붉게 타올라야 합니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기까지
오랜 세월 하나가 되어
황혼까지 동행하는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랑입니까
독거노인
원영애
바람부는 거리에서
홀로 줍는 외로움
무엇을 엮으려 하나
리어카에 나부끼는 비닐 끈
폐 박스 주워
허리 휘도록 끄는
손잡이엔 차가운 눈물이 고이고
세상 다 들러 보아도
허허로움
기다릴 사람이라도 있어야
그리움을 엮지
거리에 버려진 휴지
그리움 대신
외로움 가득 쌓이면
고단한 삶
아스팔트 위
버거운 바퀴 자국 내려 않는다
노신사의 고독사
유영서
오랫동안 주차장에 세워둔 차량이
주인 잃은채 어디론가 끌려가고
사물함의 우편물이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손길 기다리며 굴러다니고 있다
방안에 숨어살던 온기가 도망치듯 빠져나와
쓰레기 더미속에 섞여 분리수거 된채
청소차에 실려 간다
누구도 관심 주지 않는다
얼마나 외롭고 힘든 싸움 싸웠을까
용을 쓰다 감지 못한 눈동자
노신사가 읽던 책꽂이에 꽂혀있는
서적 나부랭이 찌그러진 금테 뿔 안경
먹다 남은 약들이 할말 잃은 채 애도하며 서있다
가시는길 호송차라도 불러 드려야겠다
꽹과리치고 피리 불며 천국의 문 열어 달라
소원 하나쯤 빌어본다
문득 노신사의 책상 위 사랑한다는 문구가
가슴을 후벼파고 떠나갔다
먼지 쌓인 노인 밤
유일하
헛기침 쿨룩쿨룩
심오했던 노인 방에
세월의 찌든 때가
외롭게 쌓여간다
일 년 반
빈 공간에는
하염없는 시름뿐
자식 놈 반찬 빈 통
찌든 방에 놓고 가면
바짝 마른 늙은 영혼
밤새껏 지새우다가
말끔히
비워진 빈 통에
깨알 같은 글 “공부뿐
번득이는 유공훈장
양어깨 짊어 매고
웃음 잃은 초상화에
얼룩진 습한 먼지들
초연히
바라다보는
먼지 쌓인 노인 방
노년의 가을
유종천
늦가을 찬바람에
해가 빛을 잃었다
새벽부터 세상을 장악한 냉기가
강열한 태양의 숨결을
끊어 놓았다
나그네 개나리봇짐 주먹밥도
싸늘하게 죽어가고 있다
언제 코스모스가 피었었던가
언제 푸른하늘과 단풍이
산을 적셨던가
갈바람 찬바람에 장작더미가
산을 덮었다
매일 걷던 이길이 왜이리도 먼지
나그네 숨결이 턱에 걸렸다
황혼
윤동주
햇살은 미다지 틈으로
길죽한 一字를 쓰고, 지우고
까마귀 떼 집웅 우으로
둘둘 셋넷
작고 날아 지난다
쑥쑥, 꿈틀꿈틀 북쪽 하늘로
내사
북쪽 하늘에 나래를 펴고 싶다
굽은 노년
윤만주
등 굽어
길을 걷는 저 늙은이
땅 물고 해그림자 줍는다
거친 숨결
고단함을 토해내고
응어리진 삶의 굴곡
폐부 속의 앙금이요
홍안은 간데없고
사고(思考)는 청춘이나
주름살 눈을 뜨니
검은 머리 백발일세
노을 지는 잎새 위로
각시 볼 새 단장에 굽은 노년
회춘(回春)으로 활기차다
한 노파
윤만주
골목골목
어둠으로 내려앉은 밤그림자
자동차의 경적으로 새벽을 깨우면
도심은 눈을 뜨고 활기찬
생명의 맥박으로 일어선다
밤새
바람이 머물다간 자리
가로수의 낙엽으로 충만할 때
부지런한 길거리의 미화원
비질 소리 요란하고
뒷골목
허름한 담장 너머
문빗장이 열리면
허리 굽어 무거운 여명을 등에 업고
한 노파가 길을 나선다
뒤우뚱 뒤우뚱
힘에 겨운 발걸음
고단함을 접어두고
골목골목 휘저으면
빈 박스가 한 수레라
귓불로 내려앉은
하얀 세월 따라
등 굽어 서러우니
수레를 이끌고
거친 숨결 몰아쉬며
땀에 젖은 육신으로
한숨 소리 더 높구나
노인은 박수를 친다
윤제림
약수터 옆 소나무 아래서
노인이 박수를 친다
산을 보며 박수를 친다
몸에 좋다니까 손뼉을 친다고?
아니다 추풍낙엽
파하고 돌아가는
가랑잎 단풍잎한테 잘 가라
하직인사를 하는 것이다
봄이 오면 노인은
다시 저기 와서 박수를 칠 것이다
산을 보며 박수를 칠 것이다
꽃들에게 어서 오라고?
아니다 화란춘성
꽃시절을 다시 맞는 스스로에게
격려의 갈채를 보낼 것이다
노인성(老人星)
윤종택
아득한, 그날
그날에도 그랬을까
별인 듯
별인 듯
아홉 하늘길을 열어 오시더니
오늘은
섬 물마루마다 주어등 밝히며
남극의 따스한 바램을 안고
서귀포에 나리셨다
토정 이지함이 찾았던
서귀포 장수의 별 노인성, 카노푸스
세 번 보면 무병장수하고
아홉 번 바라보면
구천(九天)에 태어난다는 남극노인성
구월이 오면 사월 청명 닿을 때까지
서귀포에 가면
생명의 별 노인성을 만난다
310광년을 건너
사람에겐 삶의 길을
국가에는 국운 융성을 인도하는 남극의 별
정남진(正南鎭) 서귀포에 가면
너와 나의 별 남극노성(南極老星)
카노푸스가 기다린다
노년
이길옥
집안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가장의 위엄이 기를 쓰던 시대가 문을 닫고
목소리 하나로 식솔을 휘어잡던 횡포가
꼬리를 자른 뒤 고전에 스며 몸을 사린다
기세등등하던 어른의 자리에서 주춧돌이 빠져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밟고 일어서는 환호 움켜쥐고
억압에 당했던 분노가 불끈 허리를 펴자
당당하고 서슬 퍼렇던 체면의 뼈마디가
삐거덕 뒤틀리면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린다.
풀이 빠진 옷깃처럼
위력 잃은 몰골이 측은하다
수시로 열 오르던 목청이 힘을 잃고
빳빳하게 세웠던 권위와 위신이 뒷전에 몰려
눈치로 길들어지며 기가 죽는다
가시가 박혔던 호령이 삭아 내리고
날이 섰던 위세가 무뎌지며 눈빛에 성에가 낀다
관심의 말뚝을 뽑고 등 돌려 쥐 죽은 듯이 누워
간섭의 끈을 자른 편안함에 석양이 찾아든다
어둠에 늙음이 젖어 든다
노인의 셋방
이길옥
자식농사 잘 지었다고 부러움을 데리고 다니던 졸부가 세든 방
소리 죽인 울음이 뚫린 창문을 빠져나가다 걸려 훌쩍거린다.
잘 빠져나간 놈은 형체 허물고 무너지는데
아직 방구석에 박힌 놈은 매캐한 곰팡이 냄새에 붙들려
스스로 목을 조르고 있다.
남 보기에 좋게만 느껴지는 허울에 감춰진 노인의 아린 마음속에
불씨처럼 살아나는 연민이
기대의 뿌리를 파내고 싹을 자르는 자식들의 외면에 도륙당하고
거나하게 취하기라도 하면 가슴에 응어리로 굳은 실망의 피멍울이
흐물흐물 무너지는 몸의 무게에 깔려 터진다.
등 돌리는 배신의 찬바람이 알맹이 빠져나간 빈껍데기에
터진 피멍울의 원통함을 쓸어 넣고 달아난다.
옹골차고 강단지지 못한 천성으로 스스로를 버리지 못하는
나약함이 질펀한 셋방에서
오늘도 노인은 기약 없는 삶의 시곗바늘에 찔려
콜록콜록 마른기침에다 서러움을 섞고 있다.
서러움 섞인 기침이 방바닥을 뒹굴며 한기에 오들오들 떨고 있다
어느 노인의 끝자락 - 미리 본 자화상
이길옥
자정도 훨씬 넘은 시각
어둠 묻힌 적막 속에서
한을 꺼내어 어금니로 으깨는 노인의 눈에
뜨겁게 솟는 눈물로 빠진 별빛이
탈색되고 있었다.
맥 풀린 빛이 뜨겁게 데워지며
몸서리치고 있었다.
노인의 쭈글쭈글한 삶의 껍데기도
함께 녹아들고 있었다.
그렇게 노인은 어둠을 타는데 익숙해져
굼벵이 움질거림으로
살아 있음을 확인이라도 하듯
꿈틀거리다가
몸에 묻은 오싹한 한기를 털어내느라
몸서리 한 번 치고서
누군가 빨다가 버리고 간 꽁초에 불을 붙이는
잠깐 동안의 불기에 잡힌 노인이 윤곽이 사라지고
떨리는 손에 잡힌 꽁초의 마지막이
노인의 명줄을 잡아끌고 있었다.
곱게 키운 자식들의 구박과 외면만
가득 담은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통한을 어둠으로 감추고
노인은 꿈틀
살이 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한이 풀릴 날이 언제인 줄도 모르면서
서서히, 서서히 식어가고 있었다
황혼
이대흠
노인은 쑤세미 손으로 이마의 땀을 닦는다
쇠스랑 짚으며 마을 쪽으로 향한다
그림자가 세상 끝에 닿는다
바지게엔 어린 모가 가득하다
먼 데서 황소 울음이
노인의 허리처럼 구부러져 들려온다
백 살 노인
이동순
이제 석 달만 지나면
백 살이라는 덕곡댁 할머니
경북 청도 화양 신봉리
마을회관에서 다른 할머니들과
화투 한판 신나게 놀더니
바쁘다며
유모차를 밀고
제법 가파른 언덕길인데도
쉬지 않고 올라간다
집 마당에 성큼 들어서자
고추밭으로 가서 잡초를 뽑아 던지고
빨갛게 잘 익은 고추를 따서
마루에 널어놓으신다
그리곤 방에 들어가 앉아
마당을 내다본다
삼시세끼 밥도 잘 챙겨 드시고
아픈 데도 별로 없다는
백 살 노인의 볼이 발그레하다
올해 여든이라는
몸져누운 큰딸이 걱정이라며
얼굴에 구름이 낀다
노인과 계단
이동호
지하철 계단을 오른다
계단 중턱 뽀오얗게 구름 아득한데
노인들은 지팡이를 한 손에 움켜쥐고
남은 근력으로 계단을 힘껏 밀어 내린다
이승에서는 좀체 추진력이 생기지 않는다
가도가도 끝없는 노령산맥이고 오를수록
호흡이 가쁘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발바닥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헉헉
위를 올려다보면 하늘이 두어 평
출입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노인들은 지팡이를 난간에 세워놓고
이마의 능선들을 손질한다
이마 위에서 날짐승들이 힘차게 날아오를 듯한데
노인들은 지팡이를 의지해서야 겨우 칠십 계단이다
이 계단의 개수가 마를 날 있었던가
지팡이를 움직이면 이마 위의 능선은
또 다른 능선을 만들며 주름주름
온몸으로 이어졌을 것인데, 그 능선을 따라
자식들은 산짐승이 되어 수월하게
산맥 너머까지 닿았을 것인데
아직도 산 너머 산이라니
이마 위에 한 줄 능선을 더 새기며
다시 계단을 오른다
지팡이를 손에 쥐고 두어 칸 위 계단을 짚으면
산맥의 척추를 지탱하던 힘으로 지팡이는
계단을 이승으로 주욱 밀어내린다
땅속에서는 전동차가 계단을
어디론가 실어 나른다
독거노인이 사는 집
이명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도시와 노인
이문기
스물스물 어둠이 내리면
층지나 칸 건너
형광등(螢光燈) 하나둘 켜지고
시름과 곤함을 실은
내 차는
지하 주차장에 정지한다
검은 길 위로 에이는 추위는
도시를 더욱 움츠리게 하고
검은 밤은 노인을
시멘트 숲에 묶어둔 채
깊어만 가고…
휘황(輝煌)한 방안 TV는
DIGITAL 웃음을 쏟아내고
온통 WELL-BEING으로
넘친다
햄버거 피자는
너희들의 향유물(享有物)
한평 남짓 궁전에
지친 몸 뉘어 상념(常念)은
얼음 방울이 된다
노년
이문조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잠자리
푸드덕푸드덕
안타까운 날갯짓
몸은 점점 조여오고
팔다리 힘은 빠지고
얼마나 버틸 수 있을는지
눈물만 흐르네
홀로 사는 노인
이문조
사립문 너머
차가운 겨울 달이
방문 앞 살펴본다
댓돌 위
외로운
검정 고무신 한 켤레
방안에서
가끔 들리는
밭은기침 소리
오늘 밤도
무사한 가 보다
할머니의
기침 소리가 반갑다
황혼의 회안
이선옥
감사하게 받은 생이기에
내가 스스로 가야할 길이라 생각하며
이왕이면 예쁘게 단장한
황홀한 꿈을 안고서
가시밭길 포도(鋪道)로 알고
숙명처럼 걸었더니
어린 시절 화려한 꿈은
무정한 세월의 몫에
다 빼앗겨 버리고
황혼을 눈앞에 두고서야
솔바람이 가슴으로 전해 주는
가을 소식에
문득 챙겨보니
쓴맛 단맛
어디 가고
희로애락의 자국만
업장의 여운으로 남았을 뿐
무심한 공허만이
내 삶의 동반자 되었네
노년의 모르쇠에는
이승기
어둠 옷을 벗는 시간
싱크대에 넘어져 있던
후춧가루의 통
벌떡 일어나
몸에 묻은 음식물 털더니
왼쪽 빰에 담배를 물고
다가서며 뭐라 뭐라 한다
밤새 울었나 화장기 지워진 여자
삼십 년 이상 산 부부
퇴임 이후 세끼밥 달라는 남자
어제는 동태탕 먹고 싶다는 남자
점심때 낮술 먹는 남자
성질 난 여자
점심 술판
매일 얼굴 마주하는 부부
세 끼 식사 장만 짜증 나는 여자
외출할 때마다 빨리 오라는 남자
간 큰 남자 때문에 힘겨운 여자
낮술 중에 후추 찾는 남자
갖다 넣어요 큰소리 친 여자
새벽 귀가한 여자
후추통 던져 화풀이하는 여자
후추통이 남자를 보자마자
왼쪽 빰에 담배 붙이고
잘 만났다 뭐라 뭐라 하네
독거노인
이승기
외딴 산기슭
함박눈 얼굴한
까치집 같은 집 한채
디딤돌 위
흰 고무신 한 짝
툇마루에 걸쳐 서 있고
안방
미닫이문 보던
흰 고양이 한 마리
함박눈송이 따라
고개 젓다가
꽈리 몸틀어 잠 청한다
밤하늘
둥근 달 달무리.
눈이 많이 올 모양
부엌문 틈 사이
귀뚜라미
귀뜨르르 귀뚜르르 우니
늙은 어머니
찢어진 기침 소리
잠자던 고양이 일어나
안방 문
걱정스럽게 보다가
몸 낮춰 보름달 원망한다
가로수와 노인
이승하
탁발승 가다 지쳐 멈추어 선 그 모습 그 자세로
가로수들 묵묵히 고개 숙이고 있다
가지치기로 봄단장을 마쳤으니
머리가 파르라니, 시원하기도 하겠지만
연초록 잎사귀마다 황사먼지 쌓여
황엽을 보는 것 같다
버스정류장 옆 가로수를 붙들고서
노인네 한 분 기침이 심하다
차량들 뿡뿡 내뿜는 배기가스쯤이야
하도 맡아서 냄새나지 않는다
해를 가리는 빌딩들과
가로수의 몸을 휘감는 플래카드의 끈들
뿌리는 발 뻗을 수 없다
가지는 기지개켤 수 없다
하늘이 노랗다 정신이 가물가물하는지
노인네 가로수 옆에서 그만 주저앉는다
어르신이 사는 나라
이영지
어르신 오늘도 잘 주무셨습니까
날씨가 춥네요
너무 추운 날에는 바깥에 나가지 마시고
방안을 두루두루 다니시고
왔다 갔다 하시고
따뜻한 방안에서
화안한 창문쪽으로
얼굴을 들어 화안한 빛을 받으셔요
우리나라는 참 좋은 나라에요
어른이라는 말이 바로 가장 높은 분이라네요
어른을 모시는 나라에서
든든히 잡수시고
아침저녁으로
아들딸들 문안을 받으시고
- 어른이라는 말이 히브리어에 있는 것을 발견하고
- 신명기 32장 8절
황혼
이육사
내 골방의 커튼을 걷고
정성된 마음으로 황혼을 맞아들이노니
바다의 흰 갈매기들 같이도
인간은 얼마나 외로운 것이냐
황혼아 , 네 부드러운 손을 힘껏 내밀라
내 뜨거운 입술을 맘대로 마추어 보련다
그리고 네 품 안에 안긴 모든것에
나의 입술을 보내게 해 다오
저 십이성좌의 반짝이는 별들에게도
종소리 저문 삼림 속 그윽한 수녀들에게도
시멘트 장판 위 그 많은 수인들에게도
의지할 가지 없는 그들의 심장이
얼마나 떨고 있는가
고비사막을 걸어가는 낙타 탄 행상대에게나
아프리카 녹음 속 활 쏘는 토인들에게라도
황혼아 , 네 부드러운 품 안에 안기는 동안이라도
지구의 반쪽만을 나의 타는 입술에 맡겨다오
내 오월에 골방이 아늑도 하니
황혼아 , 네일도 또 저 푸른 커튼을 걷게 하겠지
암암히 사라져간 시냇물 소리 같아서
한 번 식어지면 다시는 돌아올 줄 모르나 보다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이운학
굴러가는 낙엽만 보아도 웃음보다는
씁쓸한 미소만 입가에 머물고
눈꼬리 밑에는 살아온 날의 흔적만이
주름꽃을 피우고 있다
나이를 더 먹기 전에 한번쯤
해보고 싶은 것이 소박한 꿈으로
가슴에서 풀꽃처럼 자라고 있다
아주 추하지 않도록 단아하게 한번쯤은
머리도 길게 길러보고 싶고
짧은 미니스커트에 몸에 붙는
옷도 입어보고 싶다
젊음이 있을 때 해야 할 일이 있고
나이를 먹은 뒤에 해야 하는 일이
분명 따로 있을 텐데
아직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남을 위한 희생의 땀도
뚝뚝 흘려 보고 싶다
가끔은 내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
건망증에 또 한번 칼바람으로 다스리며
나이를 더 먹기 전에 꼭 해야 하는 것들을
겨울이 내 나이만큼 깊어가는 지금
부서지는 삶의 아픔들과 함께
다시금 곱씹어 본다
단무지
이윤학
옹벽 위에서 쏟아져 내린 개나리 줄기들
옹벽에 페인트칠을 한다
보도블록 바닥으로
페인트 자국 흘러내린다
옹벽 밑에는
일렬횡대로
종이박스가 깔렸다
할머니들은 머릿수건을 쓰고 앉아
나물과 밑반찬을 판다
개나리 줄기들이 내려와
허옇게 센 머리카락 쓰다듬는다
염색 물을 들이기 위해
길고 가는 붓질을 한다
노랗게 물든 단무지들
플라스틱 대야에 담겼다
쳐다보는 사람 머릿 속에
아득히 색소 물을 들인다
옹벽에 기대 잠든 할머니
둥글게 입을 오므렸다
단무지 한 조각 집어삼켰다
쩝쩝 입맛을 다신다
황혼
이인호
늙어가는 길
처음 가는 길입니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입니다
무엇 하나
처음 아닌 길은 없지만,
늙어가는 이 길은
몸이 마음과 같지 않고 방향 감각도
매우 서툴기만 합니다
가면서도
이 길이 맞는지?
어리둥절
할 때가 많습니다
때론 두렵고
불안한 마음에
멍하니 창 밖만
바라보곤 합니다
시리도록
외로울 때도 있고,
아리도록
그리울 때도 있습니다
어릴 적 처음 길은
호기심과 희망이 있었고,
젊어서의 처음 길은
설렘으로 무서울 게 없었는데,
처음
늙어가는 이 길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언제부터 인가
지팡이가 절실하고,
애틋한 친구가
그리울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그래도
가다 보면 혹시나
가슴 뛰는 일이
없을까 하여
노욕인 줄 알면서도,
두리번 두리번
찾아 봅니다
앞 길이 뒷 길보다
짧다는 걸 알기에
한발 한발 더디게
걸으면서 생각합니다
아쉬워도
발자국 뒤에 새겨지는
뒷 모습만은,
노을처럼
아름답기를 소망하면서
황혼 길을
천천히 걸어갑니다
꽃보다 곱다는 단풍처럼
해돋이 보다
아름답다는 해넘이처럼,
그렇게
걸어가고 싶습니다
노인의 실종
이정원
해초가 뒤엉킨 집안에서 사내의 지문은 검출되지 않았다
물 흐린 어항에 붕어 몇 마리 떠있고
불어터진 라면 옆에 찌든 딸랑이가 놓여있었다
도시로부터 수배된 사내의 검은 승용차
동승한 여자가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은행잔고는 확인해 보셨나요
깨진 조개껍데기가 예리하게 바다를 찔렀다
구부러진 팔이 고목 뿌리 같은 노인
검게 그을린 팔뚝에 소금꽃이 허옇게 피어있었다
저물녘 방파제에 앉아
무거운 소라껍데기를 등에 지고
부우 부우 뱃고동처럼 울던 노인
한밤중 바람이 한 남자의 몸뚱이를 껴안아
바닷물 속 깊이 가라앉혔다
칠흑 같은 밤, 별 하나 바다로 떨어지고
손에 잡히지 않는 바람이
밤바다를 떠다닌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고동소리 멎은 갯벌
물이 빠지자 승용차의 바퀴자국 사라지고 없었다
도장 파는 노인
이종섭
종일 바닥에 앉아 목도장을 파는
정선 5일장 백발의 노인
손발도 없는 몸통에
화인 같은 얼굴을 달아주면서
평생 외길을 걸어왔다
이리저리 칼을 대는 순간
동그란 평원에 계곡이 파이고 산이 솟았다
물이 흘러가고 바람이 불어오고
벼락에 맞아 부러지거나 폭설에 막히면서도
낯선 이름 새기며
모질게 견뎌왔던 세월
호명되기만을 기다리며
뭉툭한 나무속에서 단단한 껍질을 깨고 나온
상형문자들의 기지개
구불구불한 길을 파려고
각을 세월 흐르며 깎는 강물을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보았던 것일까
몸 속의 물기를 말려
정갈한 도장목 한 그루가 되어가는
노인의 굽은 등 뒤로
노을이 진다
붉은 인주를 묻혀 찍어보는
마지막 낙관
심장이 뜨겁다
어느 노인의 편지
이해인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들
그리고 나를 돌보아주는
친절한 친구들이시여
나를 마다 않고 살펴주는 정성
나는 늘 고맙게 생각해요
허지만 그대들이 나를
자꾸만 치매노인 취급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세세하게
교육시키려 할 적마다
마음 한구석에선
꼭 그런 것은 아닌데 ......
그냥 조금 기억력이 떨어지고
정신이 없어진 것뿐인데 .....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본다오
제발 사람들 많은 자리에서
나를 갓난아기 취급하는
언행은 좀 안 했으면 합니다
아직은 귀가 밝아 다 듣고 있는데
공적으로 망신을 줄 적엔
정말 울고 싶답니다
그리고 물론
악의 없는 질문임을 나도 알지만
생에 대한 집착이 있는지 없는지
은근슬쩍 떠보는 듯한 그런 질문은
삼가주면 좋겠구려
어려운 시험을 당하는 것 같아
내 맘이 편칠 않으니 ......
어차피 때가 되면
생을 마감하고 떠나갈 나에게
떠날 준비는 되어 있느냐
아직도 살고 싶으냐
빙빙 돌려 물어본다면
내가 무어라고 답을 하면 좋을지?
더 살고 싶다고 하면
욕심 많은 늙은이라 할 테고
어서 죽고 싶다면
우울하고 궁상맞은 푸념쟁이라 할 테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나의 숨은 비애를
살짝 감추고 사는 지혜가
아직은 턱없이 부족하여
내가 가끔은 그대들이 원치 않는
이기적인 추한 모습
생에 집착하는 모습 보일지라도
아주 조금만 용서를 받고 싶은 마음이지요
하늘이 준
복과 수를 다 누리라 축원하고
오래 살라 덕담하면
좋다고 고맙다고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나도 이미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
가능하면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평온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
간절히 기도하고 있음을 알아달라고
오늘은 내 입으로
꼭 한 번 말하고 싶었다오
그러니 부디 지상에서의
나의 떠남을 너무 재촉하지는 말고
좀 더 기다려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나를 짐이 아닌 축복으로
여겨달란 말은 않을 테니
시간 속의 섭리에 맡겨두고
조금 더 인내해달라 부탁하고 싶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빚진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뜻으로라도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말입니다
오늘은 이렇게 어설픈 편지라도 쓸 수 있으니
쓸쓸한 중에도 행복하네요
어쨌든 여러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나의 처지에
오늘도 미안한 마음 감출 수가 없지만
아직은 이렇게 살아 있음이
그래도 행복해서
가만히 혼자 웃어봅니다
이 웃음을 또 치매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그래도 웃어봅니다
쉰 살 즈음에
임성춘
늙어 가는 것이 서러운 게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게 더 서럽다
내 나이 쉰 살
그 절반은 잠을 잤고
그 절반은 노동을 했으며
그 절반은 술을 마셨고
그 절반은 사랑을 했다
어느 밤
뒤척이다 일어나
내 쉰 살을 반추하며
거꾸로 세어 본다
쉰, 마흔아홉, 마흔여덟, 마흔일곱...
아직 절반도 못 세었는데
눈물이 난다
내 나이 쉰 살
변하지 않은 건
생겨날 때 가져온
울어도 울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샘뿐이다
노인의 가방
장수남
지평선 끝머리
금빛노을 한 폭 이마엔
강줄기 깊어.
무거운 몸
지팡이 하나에 몸 얹어
하얀 길 걷는다
목이 지치도록
못다 부른. 세 살배기 엄마의
한 맺힌 자장가
가방 가득히 어깨 울러 메고
가을바람 등 떠밀면
한발자국씩 점점 가까워지는
어머니의 한 많은 세상.
먼산 산울림 되어
꼬리 내린 반려견
한 마리가 목줄 풀린 채
가는 길 잃을까.
짖음도 잊어버렸는지. 노인의
뒤만 바짝 따라가고 있다
노년의 사랑
장용순
사랑은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을까
푸른 사과는
빨갛게 익고
푸르던 은행잎이
노랗게 변하는 것을
바람이
유혹해서도
빗물에
녹이 슨 것도
아니리
단지 사랑이
익었을 뿐
어찌 청춘이
노년의 사랑을 알리오
독거노인
전성호
구름 타고 산을 넘는, 피붙이들 모이는 추석
혼자 지키는 옛집이 감나무 그림자보다 무료하다
북쪽 하늘 바라보던 밤의 눈동자
차가운 길바닥 뒹구는 신문지 속
'버려진 부모' 앞에서
자신의 하얀 체온, 잉크 냄새 사라진 문자를 읽고 있다
뜰을 지키고 선 대추나무 잔가지 사이
날카로운 풀벌레 울음소리
별빛은 옷깃을 파고들고
돌아올 이 없는, 돌아갈 일만 남은 가슴에
핏빛 감입만 나풀거린다
이젠 지상에 수분이 다하는 갈수기
가을 냇물도 감나무 뿌리까지 가닿지 않고
먼 하늘 쏘아올린 불꽃처럼
늙은 고양이 한 마리 하늘 향해 울음 울고
노인
조남명
땅거미 자욱한 저녁 무렵
유등천 냇물 따라
산책로를 걷는다
앞서가는 노인이 점점 가까워진다
몸이 버거운 듯
힘든 걸음을 한다
뒤따르는 나는
그 노인을 쉽사리 뒤로할 수 없어
한동안 뒤를 따라간다
머잖아 나도
이런 모습일 거라는
상념에 잠긴다
* 유등천(柳燈川): 대전 시가지를 흐르는 하천
단 하나의 소원
조병화
사람이 육십대에 들어서면
사형선고를 받을 사람들 대열에 끼고
칠십 줄에 들어서면
사형 집행을 받을 사람들 대열에
낀다고들 하는데
지금 나는 날로 그 날짜가 궁금해진다
아, 칠십 평생을 달음박질로
살아온 것 같은 인생,
무엇 때문에 나는 그렇게
칠십 평생을 공연히 그리 바쁘게
살아왔을까
떠남을 거듭하며 살아온 생애,
실로 나의 인생은
오해, 와 포기, 와 도피, 와 이별, 과 고독.
그 순수고독을 살아오며, 그 순수허무를
같이 살아온 거다
지금 이 자리 아무런 후회는 없으나
칠십을 넘는 사람들의 대열에 끼어
날로 궁금해지는 것은
사형집행을 받을 그 날짜만이다
어머님, 저는 지금 기진맥진
단 하나 소원으로, 어머님 곁에 와 있습니다
확, 단숨에 집행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노인
조수옥
냉이꽃 핀 담벼락 곁에
봄볕을 뜯는 한 마리 순한 짐승이 있다
아 온몸이 흙빛이다
독거노인
조순자
누구랑 사느냐고
연세가 몇이냐고
당최 묻지를 마오
누군들 혼자이고 싶고
누군들 늙고 싶겠소마는
산전수전 다 겪고 나니
쓸쓸한 빈 둥지 노년기라오
어버이날 놀이터에
남의 집 손자녀들
재미있게 노는 걸 보고
눈과 맘이 마중을 갔오
바쁘면 오지 마라
말은 했어도
혹시나 하는 맘
골목길을 서성였다오
놀이터 아이들 집으로 가고
가로등 하나, 둘 붉게 켜지면
외로운 독수공방에도 내일이란
희망의 꽃 붉디 붉게 피어나리오
노인의 날에
조위제
어머니 부르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그 이름
힘들었던 보릿고개
초근목피로 끼니를 때우고
자식은 굶기지 않으려고
샘물 한 바가지 몰래 마시고
어머니는 입을 훔치시며
나는 조금 전에 먹었다
너희들 어서 많이 먹어라
아버님은 새마을 운동으로
나라의 기틀을 세워 주시고
뭉뚝하신 거친 그 손길
주름진 그 얼굴
치아 없으신, 환한 합죽이 웃음
건강하신 모습으로
저희 곁에 오래오래 머물러 주십시오
G20 의장국, 대한민국
어르신 만세, 대한 노인 만만세
노년에 실천할 미덕
차영섭
밖으로 바라보던 자세에서
안으로 바라보는 자세로 변환하며
노년에 맞이한 모든 상황을
자연스럽게 마땅히 받아들인다
자녀의 도움에 의지하지 말고
부부 절충에 양보의 노력을 하며
가족 간에 감사와 예절로
협조자로서의 역할을 담당한다
젊은이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나만의 목적과 목표로 끝까지 학문하고
어린아이처럼 혼자 노는 습관을 들인다
불만을 자제하고 기대하지 않는다
신이 있다고 믿으며
저 세상도 있다고 믿는다
삶과 죽음은 하나임을 믿는다
노년은 축복임을 또한 믿는다
노년의 미(美)
차영섭
잘 익은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가을 과일 나무다
효소를 듬뿍 안고 있는 메주다
무서리가 하얗게 내린 풀잎이다
하루해가 뉘엿뉘엿 지는 저녁노을이다
낙엽과 가랑잎과 단풍 든 나무들이다
가을 벼 수확을 끝내고
갈라진 논바닥이다
흰 눈이 소복이 내린 겨울 감나무에 까치밥이다
개울가에 서 있는 하얀 두루미다
물결이 새긴 바위에 흔적이다
노년의 삶
차영섭
노년을 알아야 한다
- 잘 익은 과일처럼 성숙하는 일
내면을 바라보아야 한다
- 욕심을 버리고 양심에게 묻는 일
너그러워야 한다
- 그대로 받아들이고 매사를 용서하는 일
새로운 삶을 배워야 한다
- 나서거나 끼어들지 말 일
- 노을처럼 사색할 일
- 잔소리 말고 침묵할 일
- 마음이 맑아(明) 건강할 일
잘 살아야 잘 죽는다
노인 선서
차영섭
노년은 논문으로 치면 결론 부분이다
연극으로 말하자면 마지막 장이고
택배로 치면 주인에게 물품을 건네주는 순간이다
여기까지 온 것을 축복으로 받아들인다
억울하다 안 할 거야
유년기를 봄 같이, 청년기를 여름처럼,
중년기를 가을로 보내고 이젠 겨울의 초입,
한 바퀴 완주 했으니까
불안하다 안 할 거야
나무 열매가 익어서 떨어지는 건 당연,
의심하고 화내며 고집부리지 않고
우울 초조 없앨 거야
외롭다고 안 할 거야
혼자 와서 둘이 살다 혼자 산다 해도
이건 자연의 순리인걸
당연한 마음으로 당당하게 살을 거야
젊음에 비하면 여기까지도 축복인걸,
앞으로 노년을 스스로 방어하고,
나의 권리를 찾으며 떳떳하게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고 나의 영역을 지킬 거야
노인
최다원
까치산역 벤치에 앉아
조금 늦게 도착하는 친구를 기다리는데
옆자리에서 벼룩신문을 세세히 뒤적이던 노인은
눈동자를 모아 겨누며 핸드폰을 누른다.
나이가 좀 들었는데
시켜만 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비교적 건강하고 정신은 맑으며
얼마 전 까지 아파트경비를 했습니다.
한국의 가정경제현실일까
아니면 평균 연령이 높아져서 남겨진 여력일까
구부정한 몸짓으로 총총히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인을
찬바람은 따라가 옷자락을 어루만진다
치매야 물러가라
최동락
황혼 인생이
늙기도 서러운데
치매란 도둑이
생각까지 훔쳐간다
그 옛날
허기진 시절보다
부지기수로 늘어났네
배 부르면 잠이 오듯이
배 고프면
신경이 눈을 뜬다
요양원이 싫거들랑
먹는 양은 반으로
운동은 배로
커큐민도 먹고
맑은 정신 황혼으로
노인과 땡감
최일화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절룩절룩 가고
나는 저만치 떨어져 터덜터덜
노인의 뒤를 걷고 있다
갑자기 노인이
반듯하게 몸을 세우더니
지팡이를 높이 들어 힘껏 내리친다
무엇인가 박살이 나면서 날아간다
가까이 가서 보니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땡감
나도 왕년에 골프깨나 쳤다고
마음은 지금도 청춘이라고
노인은 다시
절룩절룩 앞서서 가고
나는 터덜터덜 노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초가을 바람이
나를 앞지르고 노인을 앞질러
저만치 내달리고 있었다
한 노인
최일화
내게도 애비가 있어 종아리를 치고 못된 버르장머리를 몽둥이로 잡았을지라도 그런 애비가 곁에 있었더라면 나의 정원에도 꽃이 피고 벌나비도 날아들었을 텐데
장짓문 구멍으로 세상을 보며 살구꽃이 피는지 보리 이삭이 패는지 분간 못 하고 우유부단한 세월을 살아온 노인 무엇이 저 노인의 시야에서 나를 지웠을까 멀쩡한 노인의 두 눈에 내가 왜 풀 한 포기 나지 않는 사막으로 보였을까
지난밤 기이한 꿈에 잠을 깼네 비옥한 문전옥답을 바라보듯 멀리서 나를 바라보던 한 노인 천국의 환한 동산을 보듯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던 백발의 노인 꽃밭같이 환한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낯익은 노인
다리 밑 노인들
최풍성
병든 몸 이끌고
여름을 피해서
전주대교 아래로
말벗들이 모인다
시간이 늦으면
그늘에서 밀려나
햇볕에서 잡담이 즐겁다
핀잔이 목소릴 높여도
장기 훈수는
어깨 너머로 소곤대고
아침나절
동전 몇 닢 쌓아 놓고
화투짝 만지다가
허기가 점심을 찾으면
땡볕 줄을 서서
무료급식 주방 앞에서
인심을 나눈다
며느리 손맛보다 나은
봉사의 고마움이
시장 끼를 면하고
푸념이 넋두리로 주고받아
완산칠봉 산그늘이
무릅 위로 기어들면
기운 햇살 등에 지고
자리를 턴다
독거(獨居)노인을 찾아
하영순
문을 열면
문고리가 시려
마음이 시려
너무 아프다 가슴이
저것뿐이던가
열심히 걸어온 끄트머리가
차마 보기 민망스러워
계절도 겨울
인생도 겨울
무엇이 다르랴
새장에 갇힌 한 마리 새와
백발의 갈대
보상받을 길 없는 인생의 말로
차가운 바람이
가슴을 파고드는 삶 앞에
연년이 도지는 인사치레가 부끄러워
떨어지지 않는 발길
노인정에 핀 검버섯
하태수
이맘때 꼭 방문 틀 사이로
가을이 들면
틀니 살아 숨 쉬듯
역사의 꽃 피고 지고
오망(迂妄)하게 자리 잡은 검버섯
이곳에 저곳에 홀로 걸어와
내 마음 한 자락 훔친 눈물
지팡이 귀밑에
흰 머리카락 한두 올
무심한 바람에 너울대다
땅 짚다 보면
불같이 타다 사그라드는
묻어둔 통한의 자국
채 피지 못한 꿈 하나
죽부인(竹夫人) 끌어안고
자지러지는 코골이
애끊는 소리에 그 님은 없고
자신의 껍질에
수(繡)를 놓는다.
* 수(繡) : 수를 놓다.
* 오망(迂妄) : 하는 짓이나 태도가 괴상하고 요사스러움.
* 죽부인(竹夫人) : 대오리를 사람의 키만큼 긴 원통형으로 엮어 만든 물건. 여름밤에 서늘한 기운이 돌도록 끼고 잔다
미술관 앞에 노인들은 물 흐르듯 앉아
허수경
식은 점심을 먹고 황동빛 손가락으로 담배를 만다
미술관 저 너머에는 지하 땅굴이 있고 그 속에 차가운 짐승 하나가 사람들을 지상으로 길어 올린다
담뱃진 속에 끈적거리는 죽음은 갓 태어난 아가처럼 신선하고 외롭다
식은 점심을 하고 나오는 사람들을 물 흐르듯 바라본다
마치 지난 세기와 지금을 연결하는 흐름을 타고 있는 것처럼
노인들은 한적하고 지상으로 사람을 길어 올리는 짐승은
노인들의 엉덩이 20미터 밑을 지나가고 있다
빈 얼굴만 지닌 노인들만
허수경
빈 얼굴을 지민 노인들만 지나다니는 길옆에 그 극장이 있었다
흰 수건을 쓴 처녀들이 소리 없이 극장 옆으로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처녀들은 가슴에 달을 달았다
처녀들은 달을 안고 극장으로 들어갔다
달이 품안에서 깨기도 전에 극장 안에 있는 환풍기는 붉은 햇빛을 끌고 들어왔다
처녀들은 누런 달을 품고 잠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나무에는 달 같은 얼굴이 열렸다
그 얼굴은 너무나 낡아 나무는 그만 얼굴을 놓아버리고 싶다
그해 나무들이 그렇게 불편해하는 것도 모르고 도시락과 물병을 들고 우리는 숲으로 들어갔다
숲은 꼭 그 극장 같았다
몇백 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을 매일 매일 무대에 올리던 그 극장
살해된 자가 매일 매일 그렇게 다시 살해되던 그 극장
그 숲에서 아이들이 자지러지게 노는 것을 보았다
물병에 붉은 햇빛이 고이는 것을 보았다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자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빈 얼굴을 지닌 노인들이 배우였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처녀들은 슬금슬금 잠에서 깨어나서는 머리수건을 벗었다
처녀들은 매일 매일 무대에서 살해되는 배우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중늙은이의 기도
허용회
동녘, 산등성마루에
발기된 터럭처럼 서 있는 나무를 비집고
떠오르는 녹빈홍안(綠鬢紅顔)의 태양과
청바지 같은 운해를 걸친 겹 산 실루엣의 기를 받아
출근길 위에서 터지는 어떤 중늙은이의 방언
(오늘도 하나님의 능력과 솔로몬의 지혜를 주시옵고
대기만성에 밑거름되는 요소요소가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울러
제 가족과 식구들에게 건강과 행복을 주시옵고
저희의 사고와 과정과 결과가
승리하는 자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하나님!
오늘도 저희의 삶 속에
성령이 충만하게 하시옵고
저희와 늘- 함께하여 주시옵소서...)이
내달리는 차창 밖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가
풍등(風燈)처럼 하늘로 솟아오른다
노인
황인숙
나는 감정의 서민
웬만한 감정은 내게 사치다
연애는 가장 호사스런 사치
처량함과 외로움, 두려움과 적개심은 싸구려이니
실컷 취할 수 있다
나는 행위의 서민
뛰는 것, 춤추는 것, 쌈박질도 않는다
섹스도 않는다
욕설과 입맞춤도 입안에서 우물거릴 뿐
나는 잠의 서민
나는 모든 소리가 그치기를 기다린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
화장수 병 뚜껑 닫는 소리
슬리퍼 끄는 소리
잠에 겨운 소근거림
소리가 그친 뒤 보청기를 빼면
까치가 깍깍 우짖는다
나는 기억의 서민
나는 욕망의 서민
나는 생의 서민
나는 이미 흔적일 뿐
내가 나의 흔적인데
나는 흔적의 서민
흔적 없이 살아가다가
흔적 없이 사라지리라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Karle Wilson Baker
아름답게 나이 들게 하소서
수많은 멋진 것이 그러하듯이
레이스와 상아(象牙)와 황금
그리고 비단도 꼭 새것만이 좋은 건 아닙니다.
오래된 나무에 치유력이 있고
오래된 거리에 영화가 깃들어 있듯이
이들처럼 저도 나이 들어감에 따라
더욱 아름다워질 수는 없나요
Let me grow lovely
Karle Wilson Baker
Let me grow lovely, growing old-
So many fine things do:
Laces, and ivory , and gold,
And silks need not be new:
And there is healing in old trees,
Old streets a glamour hold ;
Why may not I, as well as these,
Grow lovly, growing 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