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드름
강윤순 - 오래된 고드름은 나이테가 있다
강효삼 – 고드름
곽정숙 - 고드름
김길나 - 고드름
김귀녀 – 고드름
김덕성 – 고드름
김덕성 - 고드름의 추억
김덕성 – 고드름의 향연
김룡호 - 고드름
김선희 – 고드름 속 얼굴
김송배 – 고드름
김연식 - 고드름
김영승 - 고드름
김영제 – 고드름
김영환 - 고드름
김종순 – 고드름
김종제 – 강철 고드름
김혜순 - 고드름
나태주 – 고드름
남연우 – 고드름
남정림 - 고드름
노정혜 – 고드름
박경화 - 고드름
박경희 - 고드름
박병금 - 고드름
박얼서 – 고드름
박정원 – 고드름
복효근 – 고드름
성동혁 - 고드름
송근주 – 고드름
신미균 - 고드름
신형식 - 고드름에게
안도현 – 고드름
양광모 – 고드름
엄금미 – 고드름
오애숙 – 수정 고드름
오세영 – 고드름
오정방 - 고드름
유승희 - 고드름
유용주 – 고드름
유일하 – 고드름
유일하 – 고드름 같은 생(生)
유지영 - 고드름
윤갑수 – 고드름
윤용운 – 고드름
윤이산 – 순정 고드름
윤인환 - 고드름
이대준 – 고드름
이승남 – 고드름
이영광 – 고드름
이영옥 - 고드름
이영지 – 고드름 벨
이원문 – 고드름의 슬픔
이원문 – 고드름의 일기
이재무 – 고드름
이정록 - 고드름
이해완 - 고드름
이현우 – 고드름
이형복 - 고드름
전선용 – 고드름
정호승 - 고드름
조수옥 – 겨울 고드름
조은주 – 고드름 눈물
하태수 – 고드름 고을에 투박한 사랑
한상숙 – 고드름과 그리움
황구하 - 고드름
오래된 고드름은 나이테가 있다
강윤순
맹물처럼 보이나요
투명한 과거라고 말하진 않을게요
무작정 찾아든 곳이 낡은 지붕 끝이었고
신발을 던져버린 이후이니까요
머리를 흔들며 등뼈를 훑어내린 눈 물
그 물에 살을 저며 넣고
물구나무로 뿌리를 내려야 했어요
줄기를 키우기엔
빙점을 포장한 태양이 블랙홀이었어요
더러는 봄빛을 따라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곤 했지요
한 발만 빠진 문지방에서 발을 뺐지만
목살을 떼어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어요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삭풍이어요
칼날을 세우고 톱날을 번득이는
망토 두른 화신의 음모 음모들
그러나 바다는 산을 넘고 산은 바다를 넘었어요
그때마다 나는 나이테가 굵어졌지요
제 나이만큼 나이테를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봄날을 등에 업은 당신 아직도
그 코웃음의 힘을 믿나요
착각은 언제나 프리즘을 동반하니까요
고드름
강효삼
아무리 생각해도 놀라운 일
발디딜 곳 없는 저 허공에서
아무 손잡을 곳도 없는 저 벼랑에서
어떻게 그 한방울 한방울을 모아
크고 실한 고드름방망이를 만들었을가
하나 또 하나 기대와 의지들을 모아세워
마침내 하나의 굵직한 선언을 기발처럼 추켜들기까지
떨어져 분신쇄골될 각오를 하고
모지름쓴것들이여
떠나는 겨울보다
도래하는 봄을 알리기 위해 너는 떳떳이 서있기에
너에게서 겨울의 추위보다는 봄의 따뜻함을
가슴으로 느낀다
고드름
김귀녀
밤새 내린 하얀 눈
태양 빛에 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이다 밤이 되어
처마 끝에 대롱대롱 하늘을 보다
한낮엔 서러움에
제 살 녹인다
그 옛날 가슴앓이하던 내 눈물도
함께 뚜욱! 뚝뚝!
길게 한번 짧게 두 번
느낌표 쉼표
깊은 밤 명상에 잠기다가
태양 빛에 또다시
한 방울 두 방울 마침표이다
겨울 뿌리가 아침을
밀어내던 날
내 가슴 속 창가에 서성이는
어린 날의 추억들도
아름다운 동심의 세계에서
지상으로 떨어지는
앓는 소리를 낸다
고드름
곽정숙
매운 고추바람 하나에
처마 밑 고드름
하나씩 열리면
까치발 딛고 서서
뚝뚝
떼어 내는 재미거니
빠알갛게 부푼 고사리손
호호 불며 먹던 맛이 있었다
고드름엔
어린 날 향수도
어머니의 젊음도 있었다
고드름
김길나
여기는 물의 유적지
얼어버린 물의 탑신이 물구나무섰다
물에서 뼈가 돋아난 물의 탑신 속에는
처녀성의 언어를 얼려둔
번들거리는 얼음 책이 들어있다
아기의 옹알이에서 흘러나오는 원시의 모음과
떡잎에서 나는 연둣빛 종소리.
그 싱싱한 녹취록도 들어있다
몸에서 몸으로 파도쳐 오간 생고의 흐름이
신생의 시푸른 결의로 바뀌는 결빙의 순간을
누가 확 낚아챈다 얼음 예각이 번득인다
에로스가 불에 닿는 번쩍이는 절벽에서
너의 숨이 멎는 사이, 나중까지 남은 물이
극점에 이르듯이 육신의 집 처마 끝으로 내려와
층층이 다롱이는 순백의 얼빛
이 세상에서 잊혀진 저것,
한 처음과 마지막 순수가 만나 결체된 저 투명함이
오늘, 내 흐린 눈을 시리게 한다
고드름
김덕성
한이 쌓여서
푸욱 숙이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는 건가
간지러운 햇살에
마음을 비우는 안타까움
처마 밑에서 숨은 듯
파아란 하늘이
녹아내리는 크리스털
살을 여위듯 엄동
그 빛이 더욱 눈이 시리도록 빛나고
맛있던
유일한 과자
고드름
세월은 흘러
언 듯 추억으로 다가오는
달콤하고 멋진
어린 시절
그리운 영상으로 지나가느나
고드름의 추억
김덕성
파란 하늘빛이
처마 끝에서 결빙되어
예리하게 빛나는 수정 같은 보석
부드러운 햇살에 부서지는
곱고 찬란한 눈빛
겨울엔 그리움으로 떠오르는 고드름
올엔 온화한 날씨로 보기가 쉽지 않지만
혹한이 엄습하면 함께 살아가기 위해
뭉쳐 이룬 영롱한 그 빛
먹거리가 없던 시절이라서
바삭거리는 맛에 먹던 얼음사탕
입맛 내며 허기를 달래던 고드름
세월은 언 듯 추억으로 변해
멋진 어린 시절
달콤한 그리움
고드름의 향연
김덕성
영하 십도를 오르내리는 날
어느 마트 옥상서 햇살에 드러낸
하이얀 알몸의 향연
냉혹한 엄동일수록
유리같이 눈부신 눈물 결정체인 양
빛나는 결빙의 영롱한 광채
사죄하는 듯 푸욱 숙이고
부드러운 햇살에 마음을 열어
한 방울 한 방울 토해냄은
코로나 소멸을 위한
애절한 기도인 듯
바삭바삭 거리는
동무들과 과자처럼 먹던 고드름
세월은 언 듯 추억으로 변해
잊은 듯싶던 달콤한 그리움
동무들은 어디서 살까
고드름
김룡호
풍경 소리 얼어붙은 고풍한 처마끝에
성숙된 사색들이 주렁주렁 걸려있다
긴긴 겨울의 핍박에
오히려 굳게 다져진 리념
아침을 노크하다
이제
아침이
화사한 창문을 열면
와
르
르
쏟아질
천만 개의 구슬
침묵 속에
오래오래 침묵 속에 잊혀진
깊이 잠든 섬돌을 두드리다
고드름
김송배
참으로 투명하더군요
추녀 끝에서 누군가 절규하는 영혼
그 떨림은 사랑으로 남을 만하더군요
뜨겁게 혹은 차갑게
시간을 메우고
때로는 공간을 채웠던 밀어(密語)
그러나, 엄동(嚴冬)
밤새 눈 쌓인 만큼만 온 몸으로 익어갔던
너와 나의 무지개빛 교감이려니
하, 어쩐지 햇살 따수울수록
무너져 내릴 예감도 영롱하더군요
길게 더러는 짧게
언젠가 흔적 없이 사라져 갈
그대 눈빛 너즈러지고
그 자리엔, 비어 있는 그 자리엔
서 푼어치 배반의 언어가 스며 있더군요
숯된 누군가의 가슴, 그 응어리
지금 막 녹아내리는 물방울처럼
오오, 비릿한 절망이
한 방울 또 한 방울 눈물로 떨어지는 날
참으로 그런 이별은
아프도록 불투명하더군요
고드름 속 얼굴
김선희
한겨울 고드름이
떨어진 지붕 위에
얼굴 비추며 자란 시간
웃고 울고 웃고
세월이 가져다 준 시간
자연은 여전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구나
한겨울이 겨울답게 추우니
고드름도 피는구나
그곳에 아직 내 얼굴도 있겠지
봄이 오기 전에
들여다보아야지
고드름
김연식
1
찬란한 태양
하얀 낮달이 뜬 날
반짝이는 까만 별밤
뽀얀 안갯속 키 큰 미루나무에
방패연 꼬리를 흔드는 까치집
처마끝 수정고드름 키가 자라고
하얀 굴뚝연기 타고
사위어간 그리운 얼굴들
아늑한 고향 마을 개울가 물보라
버들가지는 여전히 하늘거리는데
아스라이 멀어져간 동심
스산한 고향 바람 타고
그리움의 풍경이 울리네
2
추녀 끝 매달린
겨울의 시린 눈물은
내 마음을
뚫을 듯 시리다
햇빛 받아 빛나는
결정체 쉬 녹아
없어지겠지만
눈 녹아 흐르던
물방울 시리다 못하여
날카로운 송곳 되어
비수처럼 번득인다
따듯한 사랑 빛
받아 눈 녹듯
얼어버린 마음은 녹아
나의 눈물 되어 흐른다
고드름
김영승
이렇게 추운 날엔
나무가
자신이 털어버린
쏟아부은 낙엽이
강풍에 소용돌이 치는 걸
- 이런 나쁜 노래들은 왜 만들어 놓아갖고, 애국가
연주들을 하리라, 애국가
소리를 얼린 것이
고드름이라고
고드름 저편엔
풀이
고드름이라고
고드름
김영제
흐르다 굳고
흐르다 얼어
처마끝에 길게 고드름 되었네
짓궂은 아이들
폴짝 뛰어
한 자루 꺾고는
젖 빨던 송아지
똥꼬에 넣고 후비네
흐르다 얼고
흐르다 굳어
지난여름 먹었던 아이차바 생각나네
지지라고 먹지 말랬는데
왜 자꾸 먹고 싶을까
아니 하얗게 얼었는데
녹아떨어지는 물은
왜 검정색일까? 신기하네
고드름
김영환
너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중력마저 거부하는 처절함으로
저리고 시리게 제 몸을 혹사하다
마침내 몸을 던져 장렬하게
추락하여 산산히 파멸한다
처절하게 밀어낸다는 건
내 모든 것을 던져 너에게로
온전하게 가기 위함이었던가
고드름
김종순
산사의 추녀 끝에
묵언의 신음에 투명한 고드름
경지에 이른 사리었나
동녘이 한껏 펼쳐지면
밤을 지켜온 고뇌는 뭍을 향해
오색의 창백한 몸 신으로 아롱졌다
구원의 끈은 냉랭한 속세에서
매서운 바람 되어 스쳐 지나면
풍경 소리 오래도록 머물 수 없음이
너울 같은 인내를 고함(高喊)이다
투명함이 수의마저 정갈한 고드름,
순리를 찾아 투신하는 숭고함이여
강철 고드름
김종제
그의 익숙한 손가락이
현(絃)에 닿아 움직이자
수 천, 수 만 개의 고드름이
수직의 영하로 급하게 떨어지는
선율처럼 튀어나왔다
날아오르는 저 송곳의
날카로운 끝이 강철이다
가슴에 탁, 와서 박히는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도
절정의 하늘까지 닿겠다
폭포와 같이 추락하는 소리에
꼼짝없이 온몸이 사로잡혀
물속에 빠졌으니 숨 막히겠다
현악기 하나 무릎에 앉혀 놓고
무협(武俠)의 한 장면처럼
한 음, 한 가락에서
현란하게 바늘이 튀어나와
온몸의 혈에 꽂혔으니
해탈로 치달리는 연주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기에
급소를 맞은 듯
그 자리에 모두 얼어붙은 채로
감전사 당한 듯
심장까지 파고든 강철이
극치의 마음속에서 녹는다
저 현을 입으로 뜯어서
다비까지 치루었으니 입적이다
고드름
김혜순
죽음이 너에게 준 것
네 얼굴이 샌다
네 얼굴이 흘러내린다
네 얼굴은 코 무덤
네 얼굴은 귀 무덤
네 얼굴은 네 얼굴 무덤
대책없이 얼굴이 또 흘러내린다
네 얼굴에선 영하(零下)가 자라다가 죽는다
(너는 태어난 순간부터 바닥이었다)
두 눈에 들러붙는 공기는 칼끝처럼 싸늘하고
가슴에 들러붙는 바람은 뜨거운 손바닥처럼 쨍하다
보고 싶다고 외치고 싶지만
바닥 밑에는 또 바닥이 있다
독창을 하고 싶어도 너는 합창단원이다
네 목소리를 구별해 들을 귀가 이 세상에는 없다
유령들의 지병인 이 상사
첫새벽처럼 날마다 밝아 오는 이 상사
너의 안팎에는 길이 없다, 내려가는 길밖에 없다
너는 이제 아무도 아니다, 이제 떨어질 수밖에 없다
너는 창문에 눈빛을 대고 애걸한다
들여보내 달라고
내 얼굴에 네 얼굴을 겹치겠다고
내 혀가 네 혀라고
네가 내 눈물을 흘린다고
물이 줄줄 샌다
환각을 본다
미친다
고드름
나태주
아빠, 고드름이 많이 열리는 집이
행복이 많이 찾아오는 집이라면서?
그럼, 그럼
우리 집이야말로 행복이
많이 찾아오는 집이고말고
봄이 와도 고드름이
쉽게 녹지 않는 우리집
그늘져 산 아래 마을
고드름 부자 우리 집
고드름
남연우
호수를 건너는 다리 난간에
위험한 시도가 매달렸다
뛰어내릴까
말까
밤새 고민한 흔적을 말해주듯
신발을 벗어놓은
발부리 끝이 뾰족하다
방울 방울지는
투명한 펜촉으로 써 내려간
유서를
자필 서명, 햇살이 받아적는다
쨍한 서릿발 눈빛
송곳으로 후빈 아픔
용서해달라
뛰어내린 그 자리에
마르지 않은 눈물이 떨어진다
혼탁한 생의 한복판
급소를 찌른
얼음칼
고름이 튀었다
고드름
남정림
지붕 끝에 줄지어 선 생각들
낯선 곳으로 뛰어 내리려니 무서워
망설이고 망설이다 꽁꽁 얼어버렸네.
강한 척 힘센 척하는 똘똘 뭉친
생각들 위에 부드러운 아침볕이
비치자 굳은 마음 녹아내리네.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맑은 물이 되었네
고드름
노정혜
고향 초가지붕
처마 밑 고드름 열렸다
아이들 겨울 과자
고드름 한입 물고
사로 보면 바삭바삭
고드름 고드름 얼음 고드름
아이들 너도 나도 겨울 과자
고드름
입에 물고 행복해
고드름
박경화
거꾸로 산다는 건 쉬운 일 아니잖아
본적(本籍)이 하늘이라 뿌릴 두고 받들 뿐
차라리 부러질지언정 휘어진 적 없었다
꼿꼿한 결기 세워 벼린 칼 빼어 들고
왜바람에 맞섰다는 형형한 눈빛이다
그 눈빛 스스로 버려 피워낸 꽃 한 송이
고드름
박경희
어미와 떨어진 강아지가
사나흘 내린 운다
바들바들 떨다가 울다가
고드름이 되어버린 강아지
퍽퍽, 눈물로 깨진다
고드름
박병금
어찌해도 떠날 사람
붙잡아 보려고
나도 한때
저렇게 입술 앙다물고
죽을 힘 다해
매달려 본 적 있었지
행여 뒤돌아볼까
빳빳해지는 손
녹이려
지금도 아침 햇살이
이토록 영롱한 게 아닐까
고드름
박얼서
나 이제 겨울 버리고
봄에 안기고 싶다
나 그만 나를 버리고
땅에 내리고 싶다
나 그만 고집 버리고
바보 물이고 싶다
고드름
박정원
예리하지 않고서는 견뎌낼 수 없는 오기였다
가장 약한 것이 가장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밤마다 처마 밑에서 울던 회초리였다
거꾸로 매달려 세상을 볼 수밖에 없었던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냉혹하게 자신을 다스릴수록 단단해지던 회한이었다
언제 떨어질까 위태롭다고들 했지만
그런 말들을 겨냥한 소리 없는 절규였다
복수하지 마세요 그 복수의 화살이 조만간 내게로 와
다시 꽂힙니다
절 마당엔
노스님이 가리키던 동백꽃 하나 투욱, 지고
이쯤에서 풀자 내 탓이다 목이 마르다
처마 끝에서 지상까지의 거리를 재는
낙숫물 소리
결국엔 물이었다
한 바가지 들이켜지 않겠는가
고드름
복효근
모두들 저 위를 향하여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을 때
저 빙점 이하의 낮은 곳으로
쓸쓸히 계단을 내려서는 이들 또한 있어
불빛마저 들지 않는 경계의 바깥
더는 발 내디딜 수 없는 처마 밑에서
누가 밤새 소리도 없이 울었을까
가파른 난간을 붙잡고
동굴 같은 지상을 향한 빛기둥 몇 개
눈물로 빚어낸 종유석
거꾸로 매달려
이내 목을 툭 떨구는 순교의 아침을 꿈꾸었을까
저 무모하게 투명한 피
고드름
성동혁
당신은 인터폰을 누르고
바닥을 보고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은 풀지 않기로 했고
주인이 사라진 물건은 비닐로 싸 두었다
뚜껑이 열리지 않는 레몬청과
플라스틱 포크
마른 냅킨
성이 기억나지 않을 때
이름도 기억나지 않을 때가 올까
홀연히 사라지는 사람과
뭘 그렇게까지 안았을까
현관을 열며
바닥을 보고
고드름
송근주
1
소동이 일어나고 있어
고드름이
아파트 베란다의
수도관 동파로
매달려있어
물이 얼어서
인공 폭포가 얼어서
빙벽을 이루고 있어
강도 얼어버렸어
바다도 얼고
양식장도 얼고
하우스도 냉해로
재배 작물이 피해를 보고 있어
사람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야
환경이 무참히 살해 당했어
나 살자고 이룬 산업화가
나 죽이는 산업화로
내가 사는 세대는
살아갈 수 있어
내 다음 세대는
어디에 어떻게 살아가야해
2
반짝반짝 반짝이는
태양을 따라가는
수정체가 있다네
눈부시게 빛나는
덩어리가 있다나
끝은 뾰족하니
호랑이 이빨 송곳니
아래로 추를 달아
머리를 아래로 아래로
물구나무서기하고
똑똑 떨어지네
햇살에 부끄러워하며
송곳니가 빠지네
고드름
신미균
꼼 짝 맛
엎 드 렷
쳐다보지 맛
숨도 쉬지 맛
움직이면 찌른닷
헤헤
놀라지마
사실은 나
물이야
맹물
고드름에게
신형식
요즘 뉴스에서는
그리 쉽게
투신들 하던데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그놈의 미련들은
꼬리에 또 꼬리를 물고
추운 날씨에
날 세우지 마시게
열렬함 한 번이면
눈물 떨구고 말 것을
고드름
안도현
1
하나같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겠다고
밤새
굳게
결심하고
결심한 것처럼
매달려 있네
2
고드름이여,
어느 먼 나라에서 밤새 걸어왔는가
줄지어 고된 행군이었는가, 그리하여 지금은
그대 마디마디 발목뼈가 시린가
그대는 지붕을 타고 넘어 왜 마당에 한 발짝도 내려서지 않고
처마 끝에 그렇게 정지, 상태로 고요한가
고드름이여, 영 마땅찮았는가
이 세상이 이렇듯 추해져서 발도 디딜 수 없다는 말인가
이 세상 같은 건 아예 상대할 가치조차 없어서
그렇게 얼음 손가락질만 하고 있다는 말인가
이 아침은 외로워할 틈도 없이 살아온
생이 그대에게 발각되는 순간이네
나는 후회하네
외로워하지도 않고 천 권의 시집을 읽었다는 걸
외로워하지도 않고 만 잔의 술잔을 들이켰다는 걸
고독을 모르는 나를 꾸짖고 싶어서
고드름이여
품속에서 직지심경(直指心經)을 꺼내 낭랑히 읽고 있구나
외로울수록 당당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결빙의 폭포여
그대는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아니로구나
내 이마를 후려치고,
꼬리지느러미로 허공을 치고 하늘로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로구나
고드름
양광모
거꾸로 매달려 키우는 저것이
꿈이건 사랑이건
한 번은 땅에
닿아보겠다는 뜨거운 몸짓인데
물도 뜻을 품으면
날이 선다는 것
때로는 추락이
비상이라는 것
누군가의 땅이
누군가에게는 하늘이라는 것
겨울에 태어나야
눈부신 생명도 있다는 것
거꾸로 피어나는 저것이
겨울꽃이라는 것
고드름
엄금미
처마 밑엔
할매 만든 엿가래
주렁주렁
나뭇가지엔
누나의 은구슬
반짝반짝
해님의 눈웃음에
엿가래도 은구슬도
감동의 눈물
똑똑
수정 고드름
오애숙
여린 햇살 윙크하며
청아한 하늘가 동산 위에
해맑게 웃고 있을 때
못 내 아쉬움 속에
겨울이여 안녕 작별 고해
떠나는 수정고드름
3월의 해맑음 속에
땅 속으로 스미어 들어가
꽃 동산 피어 나련지
토도독 문 두드리며
잠꾸러기 아가씨 일어나세요
고운 꿈에 잠든 씨앗에게
햇살 가아득 봄 동산
3월 속에 만들어 휘날리라
흔들어 깨우고 있네요
고드름
오세영
처마 끝 고드름
방울방울 낙숫물 진다
증오가 풀리면 연민이 되는 걸까
굳어버린 속눈썹
싸늘하게 얼어붇은 시선에서 문득 녹아
뚝뚝
떨어지는 눈물
봄은 화해로부터 오는 것
강물도 너와 나 더불어야 흐른다
고드름
오정방
시골이라 눈깔사탕도 흔치 않았던
반세기도 훨씬 전 내 어릴 적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과자였었지
밤사이 내린 눈이 서서히 녹으면서
초가지붕 추녀 끝에다 빚어놓은
수정 같은 겨울의 얼음과자
아침에 일어나 눈 비비며 내다보면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먹고픈 호기심마저 생겨서
툇마루 끝에서 닿을 듯 말 듯
발뒤꿈치를 높이 치켜 올리고
팔을 길게 내뻗어 겨우
먹음직한 것 하나 손으로 뚝 따서
아직 영글지 않은 나약한 이로
야금야금 씹어 보았던 그 시절
고드름이 무슨 맛이나 있었을까
그저 이가 시리고 입안에 찬 맛밖에는
고드름
유승희
천지간 어두껌껌
죽은 듯 적막한 겨울밤
기인 밤 내내
하늘에서 뽀얀 목화송이
퍼르퍼르 날려
지붕 위
소록소록 쌓이더니만
따끈따끈 얄미야운 햇살에
주룩주룩
고만 동태 됐네
고드름
유용주
물로 만든 못을 보았느냐
물로 만든 창을 보았느냐
물로 만든 칼을 보았느냐
저것은 무엇이든 뚫을 수 있다
저것한테 찔리면 무엇이든 박살난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매지리 회촌 마을회관
조립식 건물에 매달린 고드름,
저것한테 얻어터지면 쩡쩡 얼었던 겨울도
힘 못 쓰고 물러난다
강철 주렴 활짝 열어 제치고
봄 한바탕 맞이해 보겠느냐
거꾸로 매달린 자의 고독을 맛 보겠느냐
(끝까지 매달려 있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가)
물로 만든 작대기에 피멍 한번 들어 보았느냐
고드름
유일하
1
눈물이 한 서린 낙수 되어
그대 이름 석 자를 지우고 있다
잊지 못할 정하나 남긴 것이
너무나 아리고 비릿하여
아픈 상처가 허하다
신음하다 자리 누운 초라한 내 마음
아름답던 미소 뜨겁던 사랑
타오르는 장작더미 속으로 사라진다
너와 나
지난 흔적이
희미한 안개에 잠식되어 가고
먼지와 함께 부유한 너의 모습도 퇴색되어 간다
서러운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참혹하게 썩어가야 할 한 맺힌 내 마음
낙수 하는 눈물에 섞여 쉼 없이 흐른다
내 몸 솎아낸 맑은 물로 다시 태어나
보다 나은 세상에 네 울타리로 엮어갈
깊은 사랑으로 하모니를 이루리라
2
별자리마다
거꾸로 매달려
자라고 있는 처마
추억이 뒤척이며
근심과 맞선 일을
관람하고 있을 때
허공에 표류하는
유랑자 긁어모아
살찌우고 있는 너
어둠 사라지고
태양 솟아오르면
밤새 속삭이며
모았던 빛들
눈물 되어
지구 축을 관통하겠지
3
성난 폭설로
가슴을 난도질했던 불청객
봄 햇살에 기대어 울고있나요!
애처롭게 울려거든 봄비로 오지
이곳저곳 후드득
산 노루도 화들짝 후다닥
부러진 나무 위에 사뿐히 내려앉을 때
넌 이미 불행이었어
만돌린 튕기다 줄도 이내 끊어져 버렸지
솔가지 흰 모자는 할배 흰 턱수염 되어
하염없이 흐르는 수많은 고드름
고드름 끝에 영롱하게 맺힌 눈망울
그대와 등맞대고 헤어질 때 보았었지
초유를 짠 후 송송이 맺는 유두의 흰빛처럼
줄 줄줄 흐르던 추억의 구슬 눈물
오늘은 슬퍼하지 마라
그대로 지축을 향해 스며들어 지구 반대편
옹달샘에 솟구쳐 기쁨으로 환생하거라
그렇게 스러져간 인생이 얼마나 많으랴
내 인생도 그러하겠지
아아 빛이
고드름 같은 생(生)
유일하
세상 모든 관습이
쓸데없이 변한다 해도
운율에 서투른
전리품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것을
밤새워 별빛 모아
지상의 환호에
화답하는 것도 잠시뿐
참으로 아름답고
가상한 내 몸뚱이
녹고 녹아
순수한 불멸의 영혼으로
쓸데없는 슬픔 되어
사라지는 것
한번 떠나면 다시올수 없지만
또 다른 내가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를 놓고
별빛을 머금어
또 다른 음률에 도전하는 것
거꾸로 사는 세상에 대한
한탄이랄까
고드름
유지영
고드름 고드름 수정 고드름
고드름 따다가 발을 엮어서
각시방 영창에 달아 놓아요
각시님 각시님 안녕하셔요
낮에는 햇님이 문안 오시고
밤에는 달님이 놀러 오시네
고드름 고드름 녹지 말아요
각시방 방안에 바람이 불면
손 시려 발 시려 감기 드실라
고드름
윤갑수
온몸이 쪼그려 든다
된바람이 가슴속으로 파고들면
이내 몸은 차디찬 얼음 된다
쪽빛 하늘 햇살이 너울대지만
꽁꽁 얼어버린 동토의 나라에
메마른 텅 빈 허무만 가득하다
저물녘이면 초가집 처마 끝에
매달린 신검들을 붉게 달군다
칠흑의 세계 한밤엔 동장군은
단검과 장검을 벼루고
새벽엔 예리한 신검들은 아침
햇살이 검증을 한다
하지만 검들은 영롱한 햇살 아래
하염없이 눈물만 뚝뚝 흘린다
고드름
윤용운
맑은 눈물이 흘러
바람에 굳어버렸다
슬픔도 기쁨도
가슴에 묻어두고
발은 하늘을 향하고
머리는 땅으로 향해도
곧은 마음은 변함없고
청렴하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림도 없고
곧기가 대쪽보다 맑다
칼처럼 날이
뾰쪽해도 무디고
창이 되어도
방패가 된다
봄날에 눈 녹듯
마음만은
은빛 물결이다
순정 고드름
윤이산
아이가 순정 고드름이 먹고 싶다고 했다
순정 고드름을 어디서 파나?
우는 아이에게
순정 고드름 대신 월드콘을 사주겠다고 타일렀다
그건 고드름이 아니라며
순정 고드름을 먹고 싶다고 더 세차게 울었다
유치원 알림장에 오늘
수정 고드름에 대해 공부했다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지금은 새 길이 나서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는
덕국이란 계곡이 있었다 그곳엔 뼝대로 울타리를 두른
빨래터가 있었는데
한겨울에도
몇몇 가구가 모여
백철솥과 빨랫감과 장작을 이고 지고 덕국에 갔다
어머니들이 아시빨래를 해서 백철솥에 삶아 헹군 빨래를 이고 집으로 향할 때까지 우리는
고드름을 따먹거나 고드름으로 칼싸움을 하거나
고드름을 끓여 얼음 구멍을 뚫기도 하면서 한나절을 보냈다
뜨거운 음식을 먹듯 호호 불어가며 먹던
투명하고 기다란 막대 과자,
고드름은
간식이었고 새참이었다
장난감이었고 과학 실험 재료였다
뼈가 타는 듯한 추위였는데
달고 시원하고 뜨겁기까지 해서
웃음이 절로 터지게 하는 요술봉이었다
지금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는
그때, 아이들에게
순정 고드름 대신 미세먼지를 먹이고 살게 될 줄
누구라도 상상이나 했을까
울다 지친 아이가
무언가를 토해낼 것 같이 쪼그린 자세로 잠들어 있다
순정 고드름은 어디서 살 수 있나?
눈을 감으니
잠 속마저 미세먼지가 뿌옇게 덮쳐서
꿈이 잘 보이지 않았다
고드름
윤인환
그래,
바로 서지 못한 것이 너뿐이더냐
요지경 돼버린 세상에서
잘난 것이 무엇이고
못난 것이 무엇이냐
그렇게
허리 펴고 살면 되는 거지
그래,
땅 내음 맡고 사는 거야
애드벌룬처럼 하늘만 바라보는
부풀려진 꿈보다는
아래로 아래로 쳐다보며 사는 게야
간혹 서러움에 눈물 훔칠 때도 있겠지만
겉과 속이 똑같은
그런 몸으로 사는 게야
고드름
이대준
아침 햇살이 없는 뒤안길
처마 끝을 붙잡고
오롯이 한밤을 견딘다
바람 불고 어둠 깊어도
눈물 한 방울 떨구는 법 없어
안으로 안으로
단단한 투명을 빚어
스스로 빛이 되고야 만다
우리가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자동차 바퀴에 끈끈이 액을 뿌리고
쇠사슬까지 감아두고도
행여, 미끄러질까
빙판길에 고분고분 길들어갈 때에도
풀리는 날 즈음이면 거침없이
부서져 버리는 고드름
흙투성이 몸뚱이로 뒹굴다
물이 된 친구라도 만나면
한 몸이 한 몸을 보듬고
땅속 깊숙이 스미다
잠든 뿌리를 어른다
잠든 어린 뿌리를 깨운다
고드름
이승남
몇 번쯤 자리 맞춰 누웠다 일어나 보니
맑게 흐르는 말씀 한마디씩이 똑똑 지면(地面)에 새겨진다
귀한 몸체가 아래로 자라 위로 오르는 말씀이다
노모의 주름 같은 말씀이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아래로와 위로 자란다
이십사절기 마지막 밤의 자정 끝 말씀은 더욱 달구어질까
그나마 한 방울 눈물처럼 녹아떨어지는
떨어져서는 짧아져가는 노모의 회향(回向)같은
잔소리
그 잔소리와 주름 사이로 물 종지 하나씩 늘어가고,
어느 먼 산맥의 백년 설(雪)은 오래도 그 뿌리를 지켜왔다는데
노모의 백년 설(設)은 언제까지 지켜질까
드문드문 피어나는 검은 꽃들 하얘질 쯤 그 어느 시간에
그 꽃이 너무 무거워 똑딱이며 떨어지는 검은 물방울
처마 아래 구멍 파인 종지 안으로 해와 달이 자랐고
불안한 틈새로 갈수록 자라는 무념(無念)의 물방울들
슬레이트 지붕 같은 주름 사이로 총총 소멸할 듯 박힌
노모의 꽁꽁 언 뿌리는 어디쯤일까
고드름
이영광
햇살에 베인 처마 끝이 미닫이를
두 쪽으로 갈라놓고 있다
소한(小寒) 바람이 입가의 술 냄새를 닦아주고 간다
물인 줄 알고 마신 술
알고 보니 불이었다
불타버린 나의 내부(內部)
식은 재 날리는 벌판의
모래 언덕의 모래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본다
문득, 거대한 짐승의 뱃속에서
하루 쉬었다는 생각이 든다
주렁주렁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들
티라노의, 단검 같은 이빨 같은
고드름들은, 누군가 나에게 겨눈
창끝 같기도 하고
간밤 내가 그에게 드러낸 적의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고드름들은
뾰족한 끝에서부터 한 방울씩 녹아내리고 있다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누군가를 용서하고 있다
이제야 누군가에게 용서받고 있다
고드름
이영옥
울음을 삼켰나
파문을 끌어안고 잠든 물
밤이 칼을 지키고 낮이 칼을 뺏을 때
요동치던 마음을 허공에 묻었다
지나치게 차갑고 불에 덴 듯이 뜨겁지만
투명한 내부에는 어떤 미래도 융기하지 못했다
투쟁이라도 하듯이
산산조각나기 좋은 자세로 매달려
결심한 듯
똑똑
혀를 버린다
다시 돌아와 수직으로 서겠다는 듯이
바람에 흩어지는 물의 절벽
고드름 벨
이영지
한 겨울
창밖에서
흰 눈을 꼭꼭 눌러
하얗게 벨 누른다
동동동 고드름 벨
딩동댕
북극에서 와
눈 녹는 봄
여세요
고드름의 슬픔
이원문
키재기의 고드름
누가 더 많이 자랐나
길쭉하니 더 크게
또 하나는 짧고
크고 작은 고드름
눈물 보인다
댓돌에 흘린 눈물
저 눈물도 해기울면
마를 것인데
양지의 볕 짧아라 저리 흘리는지
작년 봄 그 봄 오기는
아직 멀리 있는데
고드름의 일기
이원문
먼 산보다 더 높은 까치집
쓸쓸하고 지붕에 쌓인 눈
눈물 흘린다
장독대에 소복이
두레박에 가득히
빗나간 햇살에
언제 녹을까
추녀 끝 저녁나절
그 하루를 거두고
자라는 고드름
석양이 짧다
고드름
이재무
적막 끝에 매달린 꽝꽝 언 고드름
술 마실 때마다 큰소리치는 아버지 허풍
둘 다 사나흘을 이기지 못하네
고드름
이정록
겨울 숲의 명물은 고드름이다
겨울잠에 든 뿌리들이 궁금해 눈길 길게 내밀었다가 얼어붙은 것이다 눈이 짓무른다는 것, 겨울 햇살에 저 고드름 녹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눈물만으로 기척을 보내다가 몸을 던져 언 땅을 찍는 녀석도 있다 잠시 숨 놓은 마비의 시간을 온몸으로 읽어내려는 것, 그 마음 졸임이 명물을 낳는다 짓무른 눈자위를 어루만지려 햇살도 겨울 숲으로 뛰어든다 저 뜨거운 눈길에 마음 녹여본 적이 있는가
내 몸에 들어와 내 안에서 마비된 사랑에 짓물러본 적 있는가
고드름처럼 발등 찍어본 적 있는가
고드름
이해완
하느님께서 제게도 옷 한 벌 주셨지요.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이기에 맨발에 알몸으로 이 세상 힘차게 달려가서 목숨있는 것들 발바닥에서 머리끝까지 피 골고루 잘 돌 수 있도록 말없이 손 내밀어 도와주고 싶다고 그렇게 살고 싶다고 말씀드렸더니 그 마음이 너무 이쁘다고 당신 손수 옷 한 벌 지어 이렇게 입혀 주셨지요.
누구나 들여다보라고 참으로 투명한 옷으로 지어 주셨지요
고드름
이현우
한낮의 화장막(火葬幕)
연기 오르면
처마 끝에 매달린 삶의 응어리가
속절없이
속절없이 녹아내린다
고드름
이형복
어찌 어찌
하늘에서 내려서는가 했더니
다시 갇히고 말았네
바람뿐인 허공에 갇히고 말았네
저 물까치 조롱하며 지나지만
염려하지 않기로 하네
이내 다시 물이 되어
땅 위를 지나
작은 내로 지내다
이윽고 강이 되고 바다가 되리니
잠시 허공에 매달린 어지럼쯤이야
무어 대수이던가
그렇다고 좁은 골에 갇혀 지내는
저 물까치를 가여워하지도 않기로 하네
드디어 햇살에 눈이 부셔 오네
고드름
전선용
중력의 힘이다
온통 솟구치려고 안간힘 쓰는 세상에
내려놓는 엄동의 아름다운 힘이
경이롭다
처마 끝에 매달린 종유석
동장군의 창은 날카롭고 영롱하다
북풍을 들이켜고 내뱉지 않는 숨통이 부레처럼 부풀다가
봄이 되면 박하 향 같은 시원한 바람을 줄 것 같은
얼음 목어의 청량함
살면서 저리 깨끗한 속을 지닌 사람 있던가
꽁꽁 얼어붙은 빙결이 선비 수염처럼 곧다
바람이 가리킨 구불구불한 이정표
순리대로 살아온 존재의 내력엔
우주의 하얀 세포가 살고있다
무엇을 위해 사냐고 말하지 마라
그저 아래만 바라보고 산다
육신을 녹여 속을 보여준다는 것은
너와 가까이하고 싶다는 암시
때묻지 않은 영혼이 녹아 시나브로 고이는 순결
저 투명한 피를 내가 마시고 싶다
고드름
정호승
영랑 생가 초가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은 물의 모란이다
모란이 피기를 기다리는 찬란한 기다림의 물이다
낙산사 파도 소리 끝에 매달린 고드름은 바다의 적멸보궁이다
새벽마다 길에서 길을 묻던
동해의 햇살이 달려와 깃드는 진리의 뒷뜰이다
종로 오피스텔 고층 난간에서 떨어진 고드름은 물의 시체다
전생에 무슨 죄가 저리 많아 산산조각이 났을까
나는 어릴 때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을 따다 먹었다
어머니가 손수 반죽해서 만든 칼국수처럼
고드름으로 국수를 해 먹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겨울 고드름
조수옥
소한, 저물녘
도시 변두리 공사장
강판에 매달린 사내들
입김이 맵차다
산소용접 불꽃보다
더 뜨겁게 타오르는 겨울 불꽃들
해빙이 되어도 녹지 않을
저 사내들의 거푸집 같은 삶
금속성이다
고드름 눈물
조은주
고요 속에 흐르는 적막
끝날에 춤추는 고드름
떨구다 멈춰버린 고드름 눈물
햇살 머금다
끝내 사그라드는
처마 밑 고귀한 사랑
떨어진 눈물
한 서린 겨울바람에
차곡히 쌓인 연정의 한(恨)처럼
그대 눈물은
내 그리움의 동반이며
내 마음속 쪽빛 사랑되리
아직 남은 겨울
그 차디찬 바람은
그대와 내 앞에 잔설로 남았더이다
고드름 고을에 투박한 사랑(경상도 버전(version)으로)
하태수
엊그저께, 살림방에서 울 엄니 울 아부지 싸움이 났다.
토닥토닥, 말씀 소리 이상타 하다가도 언제나 가끔씩 황혼의 여정에
울 아부지 성질 급해 늘- 울 엄니에게 패배자로 낙인찍히신 울 아부지!
오늘따라 자식 몰래 싸우시니라 힘겨워 보였다.
제일 먼저 대청마루에 나오셔서 심심초 한 모금 쯧-우욱-쯧-우욱 들이마시고 난 뒤
야-아-야 -
큰 아-있나’
외마디 부르심에 황급히 뛰쳐나갔다.
(71)아들: 아부지 불렀심니껴-!
(95)아버지: 내사 니 엄니하고 못살겠다.
(90)어머니:나도 인자 한평생 살아 주었으니 너 거 애비 하고 못살겠다.
(아주 억양이 높음)
(95)아버지: 그라면 우짤낀대-! 응,내꼬라지가 비기 실타꼬"
:갈라 카그들랑 "암말 안코 보내 주꾸마"
(90)어머니:머라꼬-!
:실큰 단물.신물.다빨아먹고 보내뿐다꼬
:이 영감쟁이가-응
(90)어머니:내가 손해을 볼수가 없지-
:그라먼-도로(처녀 때)새것으로 물러주던지
:아니면 논.밭.반반씩 준다꼬.아들앞에 글쓰고.도장 찍자,!
(95)아버지:애라- 이 할망구야-시방 머라캔노!
:말이라 카면 다 말 인줄 아나!
:아- 아들 앞에 서리 쯧쯧
(71)아들:아부지 예 와 그라 십니껴!
:엄니 와 그라노! 엄마가-좀 참아라. 으-잉 알제!
:온 동네가 창피 시럽구만은!(중얼-중얼)
얼마 후 시간이 지나고 나서
(71)아들: 뒷간(시골변소)에서 시멘트 포대종이 찢어서 1장 들고
연필1자루 쥐고 침물 묻혀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이혼장)
<제목> : 맨날 맨날 저녁따배 싸움하는 울아부지 울엄니
[이혼 사유]
:울엄니 먼저 잠자는 대 코 드르렁 드르렁 곤다꼬 !
:울아부지가 엄니의 배개 뭉치를 발로 약간 밀었다고
:말싸움 한 뒤 이혼을 요구함에 합의함.
0000년. 0월. 0일.
신랑:하 갈비 (인)
신부:천 뚱보 (인)
큰아들/증인:하 태수 (인)
(71)아들:그라면 아부지요!
:아부지가 먼저 손 도장을 찍을랑교,
:아니면 엄니가 먼저 찍을랑교,
(96)아버지: "애라-이놈아", "이놈이" 이기 "돌았나"! 똘아이가!
: 돌대가리 같은놈".이-기" 쪼다" 같은놈 보았나
:"키만 뻘쫌해갔고! 생긴 꼬라지가- 에이-
(96)아버지:"지애미" 닮아가지고. "딱"보면 몰라서
: 도장을 찍어라꼬! "멍청한놈"쪼다같은놈"
<울아부지 솥뚜껑 만큼 크고 억센 손으로 대청마루에서 큰자식
머리를 (꿀밤)탁탁-딱딱-- 밀쳐 밀어버리시고는 사랑방으로..
중얼중얼...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캄캄하고 쥐 죽은 듯이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대청마루에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고드름과 그리움
한상숙
추운 처마끝에 매달린
곧은 고드름의 절개 속에
맴도는 투명한 그리움
한 방울 한 방울
혈흔이 깊어질수록
시간이 질투하듯 우리를 갈라놓으려 하겠지
그리움은
햇살 한 줌에도 제 살을 녹여 내리는
고드름처럼
아픔을 감내해야 하는 것
이처럼 짧고도 처절한 기다림 속에
오늘도 그대 위한 마음 한 조각을
살포시 내려놓는다
고드름
황구하
벌써 며칠째, 이 죽도 저 밥도
통 뭘 먹지 못하겠다는 아버님
뜨끈뜨끈 드시고 싶다는 추어탕
겨우 두어 술 애써 넘기더니
아이구, 쓰다 왜 이리 쓰나
우두커니 한숨 쉬며 퀭한 숟가락 내려놓고
물 한잔을 드신다
거 참, 달다 참 달다
오래된 밥상머리 기억 더듬으며
한 모금, 한 모금
벌써 며칠째, 축 늘어진 중환자실 링거액만
한 모금, 또 한 모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