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로등
강민경 – 가로등 불빛은
강민경 – 깜박이는 가로등
강민경 – 외로운 가로등
강순 – 가로등의 목격
강지산 – 가로등
강효수 - 외 가로등 그 슬픈 눈웃음
강효수 – 외 가로등이 전하는 말
경규민 – 가로등
구상 – 어느 가로등
김덕성 – 가로등
김덕성 – 가로등 사랑
김덕성 – 가로등 앞에서
김미경 - 가로등
김민소 – 가로등을 보면서
김옥진 – 가로등
김윤자 – 빅토리아 통나무 가로등
김자미 – 우리 동네 가로등
김정윤 – 가로등
김준기 – 새벽 가로등
김태후 - 가로등
김해빈 - 가로등
김행숙 – 가로등 청년 진옥씨
나선미 – 초저녁 가로등
나태주 - 가로등
문재학 – 가로등
박갑순 - 가로등
박동민 – 세로수길 가로등
박동수 – 빗속의 가로등
박얼서 – 칠성사 가로등
박인걸 – 가로등
박인걸 – 어느 가로등
박인혜 – 나무와 가로등
박종영 – 가로등 연가
박태강 – 숲속의 가로등
반기룡 – 가로등
변성언 – 가로등 아래
서금순 - 가로등
성백군 – 눈 감아라, 가로등
성백군 – 두 팔 가로등
성백군 – 물속 가로등 불빛
성백군 – 바람둥이 가로등
성백군 – 한심한 가로등
송연우 – 가로등
송종규 – 가로등을 추모함
신성호 – 가로등
신형식 - 가로등
심의표 – 가로등 하나
심지향 – 가로등
안규례 - 가로등
양애경 – 가로등이 있는 숲길
양전형 – 탑동 가로등
오보영 – 가로등의 본분(本分)
오보영 – 겨울 가로등
오애숙 – 가로등
용혜원 – 가로등
유창섭 - 가로등
윤민순 – 슬픈 가로등
이남곤 – 가로등
이남일 – 가로등
이문재 - 가로등
이문조 – 국화와 가로등
이미순 - 가로등
이민정 – 가로등
이승해 - 가로등
이시영 – 가로등
이인순 - 가로등
이재환 – 가로등
이주언 – 점등의 시간
이주현 - 가로등
이진숙 – 가로등
이현승 – 가로등 끄는 사람
임영준 – 가로등불이
임영준 – 가로등의 여인
임은숙 – 가로등은 혼자다
장수남 – 이마에 걸린 새벽 가로등
장화순 - 가로등
전근표 – 가로등 꽃
전병조 – 도시의 가로등
전성규 - 가로등
정민기 – 밤마다 가로등이 피어나고 있다
정민기 - 가로등 불빛 아래 나는 그의 눈물처럼 서 있다
정용진 – 가로등
정재열 - 가로등
조말선 – 가로등 증후군
차성우 - 가로등
채영선 - 가로등, 저 부드러운 눈빛은
최범영 – 민들레 가로등
최수일 - 가로등에 매달린 화분
허충순 – 가로등이 하얀 밤
현상길 - 가로등
현영길 – 슬픈 가로등
가로등 불빛은
강민경
해가
수평선을 넘으면
가로등 불빛은 서둘러 나를 찾아와
나의 천사가 됩니다
밤하늘에는
달이 있고
별들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들은 하늘에 있어
이 땅 위에서 길을 찾는 나에게는
오히려 참 많이 유혹하는
홍등가의 미로가 되지요, 만
저기를 봐요
하나, 둘, 셋,
밤길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등 불빛들
그들은 캄캄한 나를 인도하는 길 안내자입니다
나를 찾아내 길을 따라
내 발걸음이 닫는 곳이면 어디든
환하게 비추지요
지금도
하루의 일과를 끝마치고
침상에 든 나를 지키려고 잠도 자지 않고
뜰 창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저 가로등 불빛
내
수호천사가
맞습니다
깜박이는 가로등
강민경
많은 사람이 산책하기 좋은
알라와이* 운하 길을 걷는데
가로등 하나 깜빡이며 다가와
사위를 쥐락펴락한다
정신이 이리저리 헛갈리는 대로
무심히 지나다가도 불이 깜박이면
자동으로 올려다보게 되는데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하다는 듯
내 발끝을 굽어보는 가로등
바짝 다가오면서 작은 키의 나와
커다란 키의 나를 그려 보이는 친절
절대 내 옆을 떨어지지 않는
앞뒤 저만큼에서
짧아졌다가 길어졌다가
말없이 따라 오는 짧고 긴
그림자가 낮 설고 새로워
한 번 더 둘러본다
아주 작아지고 싶던
전봇대처럼 커 보고 싶던
내 맘을 어찌 알고 잠시 잠깐이지만
특별히 나를 위해 행복하게 하는가
가끔은 늘 변함 없는 모습의
가로등보다
깜박거리는 가로등 네가 더
좋을 때도 있다
외로운 가로등
강민경
햇볕과
푸른 하늘과 초록 나무들의 싱싱함과
지지배배 노래하는 새들이 그리웠던 것일까?
가로등, 길가로 마중 나와
한낮인데도 불을 켜고 있다
밤낮 구분 못 하고
의욕에만 사로잡혀 정신 나간 것 같은 그에게
네가 있을 곳은 낮이 아닌
밤, 어둠을 밝히는 일이니 분별없이
나서지 말라고 강권하다가
문득, 알게 모르게 일탈을 꿈꾸며 방황하던
나의 지난날의 모습을 회상해 본다
사소한 일까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상의 사건 사고 속에서, 내가
나를 어쩌지 못함이 한스러웠지만
기죽지 않고
햇살 알갱이들로 그늘진 가슴을 채웠던 나
그래 이해한다
밤새도록 어둠을 밝히느라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
미안하다 하였더니
나뭇잎 사이로 그늘진 얼굴이 슬쩍슬쩍 웃는다
내 측은지심이
동병상련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로등의 목격
강순
한 나무가 왔다가 간다
한 나비가 갔다가 온다
어떤 것들은 나를 좋아하다가 등을 돌린다
목소리가 고운 것들은 바람을 좋아하며 까르르 거리다가
바람의 앞잡이가 되어 나를 떠나간다
사라진 목소리들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밤
줄기조차 바싹 마른 목숨들이 제 방향을 잃는다
서로의 침묵이 서로의 그림자를 늘리는 시간
그들의 침묵을 받아내느라 허공은 더욱 바빠진다
아무도 모르는 언어를 아무도 모르게 소화하느라
또 한 목숨이 깊은 밤에 남모르게 흔들린다
누군가에게 빛인 것이 누군가에겐 어둠
누군가에게 어둠인 것이 누군가에겐 빛
나는 여전히 가난한 차림으로 주름을 늘리며
같은 자리에서 깨어 있으려고 노력한다
갔다가 다시 오지 않을 바람의 말을 이제 배운다
슬픈 목숨과 내통한 바람의 비릿한 냄새
그 속에 출처 불명의 낯선 언어들을
내가 밤새 해독할 테니
나는 깨어 있어서 증명해야 한다
하나의 목숨이 흥건한 피를 내게 남겨 준 날조차도
이 밤, 누군가가 날 훔쳐보고 있다
가로등
강지산
반쪽의 얼굴은 하늘을 보고
반쪽의 얼굴은 길위의 나를 보고
저 스스로 쌓아가는 벽
긴 머리 풀어놓고
총총히 다가오는 걸음마다
양면의 경계선에 서 있다
외 가로등 그 슬픈 눈웃음
강효수
처음엔 빗물인 줄 알았지
누군가 던진 돌멩이에
마음은 깨져버리고
무심한 바람
낙엽은 자꾸 눈을 찌르네
닦을 수도 없는데
처음엔 빗물인 줄 알았어
한 사람이
또각또각 떠나고 있더군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멀리서도 느낄 수 있도록
밤새도록 깜빡거려야지
단 한 번만이라도 뒤돌아본다면
행복해야지
가물가물한 곳만 바라보다
처음엔 눈물인 줄 알았어
별 비 쏟아지는데
우산도 없이
한 사람이 떠나고
슬픈 눈웃음을 잃은
가로등도 떠나고 없더군
외 가로등이 전하는 말
강효수
가라 한다
가라 한다
다가오지 말라 한다
외로움은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한다
떠나간 발자국
고개 숙여 바라보던
뜨거운 눈물 떨구던
그 겨울부터
오지 말라
오지 말라 한다
기대지 말라 한다
그리움은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한다
뜬 눈 깜빡일 수 없는 하얀 밤
구멍 뚫려 흩어져버린
이 가을까지
가지 말라
가지 말라 한다
떠나지 말라 한다
다시는
혼자만으로 견딜 수 없다 한다
메마른 나뭇잎 모두 떨어져
대신 울어 줄 눈물마저 사라져
다가설 수 없는 가슴 안아 달라 한다
저만치
갈비뼈 드러낸 벤치 위
부여잡지 못한
낙엽 하나 덮은
한 남자
웅크려 잠든 아침
이슬 맞아 눈 감은
거리의 장승
가로등
경규민
1
분주하던 차 소리도 아스라해지고
사람들 발걸음도 뜸해지자
쓸쓸히
홀로 서 있는 골목 안 가로등
뒤늦게 지나던 중년 남자
다가와선 엉거주춤 기대선다
손발 합작으로 매질하더니
부둥켜안고서는 실컷 넋두리하다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골목길이 좁다며
설익은 말(言語)들 떨어뜨리며 사라져 간다
갖가지 많은 사연 품고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내색 하나 없이
골목길을 촘촘히 비추고 서 있는 가로등
언제나 그랬듯이
이 밤도 마음 추슬러 보듬으며
서서히 안개 넘어 새벽으로 가고 있다
2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지팡이가 되고 등댓불이 된다.
가끔 네게 등을 기대기도 하고
때론
뜨겁게 포옹도 하는 것은
제자리에서
묵묵히 소임을 다하는 네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차 소리도 아스라하고 인적도 드문 것을 보니
밤도 꽤 깊었나 본데,
눈 크게 뜨고 귀 쭝긋이 세우고는
사방을 꼼꼼히 챙기는 너는
노모(老母)의 마음까지도 섬세(纖細)하게 그려 놓았구나
너를 닮고 싶다
그 인내와 너그러움 그리고 희생을,
가로등,
진정 너이고 싶다
어느 가로등
구상
어둠이 짙게 깃들인
아파트 뜰 안 길목에
가로등 하나가 우뚝 서
켜져 있다
그 짙노란 불빛은
희부연 램프를 통해 비춰서
더없이 은은하고 정겹다
마치 그 등불은 밤길보다
나의 마음속 어둠을 비춰서
내 안의 풍랑도 자게 하고
표류하던 내 삶의 향방도
잡히게 할 것 같다
한밤내 자신을 뉘우치며
홀로 기도하는 수도자처럼
경건(敬虔)하게 서 있는 등불
그 불빛에는 눈물이 어려 있다
그 불빛에는 사랑이 어려 있다
가로등
김덕성
1
소리 없이
회색빛 땅거미가 지면서
어두움 속으로 찾아오는
귀한 손
소리 없이 다가오며
홀로 서서 외롭게 밤을 지키며
밤길에 밝혀주는
길잡이인 너
행인의 흔적이 없는
홀로 가는 빔 길
나를 밝혀주려고
고된 파수꾼이 되었는가
밤마다 밝혀주는 사랑
너는 내가 있어 좋고
나는 네가 있어 좋으니
우린 짝꿍
2
땅거미가 지면
소리 없이 어두움 속으로
외롭게 찾아오는 너
어둠 속에 너는
홀로 있는 밤
날 위해 파수꾼이 되어 주는
넌 희생양이구나
밤마다
사랑으로 바치는 애틋한 사랑
네가 내 곁에 있고
내가 네 곁에서 품어주는
우린 짝꿍 사랑
영원한 사랑
가로등 사랑
김덕성
찬란한 빛으로
멋진 하루를 마감을 위한 노을
황홀하게 연출 된다
회색빛 땅거미가 젖어들고
칠흑 같은 어두움 찾아드는 순간
마술처럼 신비스레 들어내며
거리를 깨우는 가로등
밤의 파수군
홀로 길을 걷는 나를 위함인가
생명이 되는 사랑의 빛으로
영혼까지 밝혀주는 사랑
나는 너를
너는 나를 품어주는 따뜻한 사랑
너와 나는 하나 된 세상
가슴이 찡하는
아름다운 세상인 것을
가로등 앞에서
김덕성
회색빛 땅거미가 지면서
모두 어두움 속으로 찾아드는데
소리 없이 환한 빛으로
존재를 들러낸다
보란 듯 밤길을
맑고 찬란한 얼굴로 미소지우며
발걸음 하나하나 세워보는
사랑의 파수꾼
잠드는 고요 속에
왈칵 외로움 밀려오는 어둔 밤길
홀로 지새며 안전하게 보호하는
빛의 사자이구나
밤이면 밤마다
빛으로 밤 지키는 가로등 보면서
빛이 되라 명하신 님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구나
가로등
김미경
핏빛 황홀경으로 노을이 지고 나면
그물처럼 어둠이 몰려오고
그들의 불장난이 시작된다
누굴 저리 기다리나
사방으로 퍼지는 사랑의 손길
밤새
어둠만 잠식시키며 찾아온
너는 사라지지 않는
망부석의 스토커
하루 낮이 가고 나면
또다시 깨어나는 사랑놀음
아-
태초의 내 생명은
시지프스의 형벌에서
시작됐음을
가로등을 보면서
김민소
모두가 비상을 꿈꿀 때도
네 꿈은 가장 낮은 곳에 있다
부와 명예를 위한 관심도 없다
오직 살고 싶은 생명을 위해
고압전류에 온 몸을 녹이면서
빛살을 아낌없이 뿜어댄다
어두울수록 눈부신 너는
그 찬란한 열꽃을 피우면서
꿈을 잉태하는 동화가 된다
너를 닮고 싶다
누더기같은 마음을 털고
몸으로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너처럼 살고 싶다
비릿한 허욕과 결별하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도 아름다운
가로등
김옥진
달님도 아닌 것이
햇님도 아닌 것이
밤이 무서워서
어둠이 싫어서
낮에는
눈 비비며
실눈 뜨고 살다가
밤에는
초롱초롱
골목대장 되었네
빅토리아 통나무 가로등
김윤자
밴쿠버 다운타운 그림 같은 집들이
겉과 속 모두 나무라 하여도
지붕에 올라앉은 떡조각 모양 기왓장이
나무판이라 하여도
바람처럼 지나가는 말로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섬으로 가는 밴쿠버 들녘에서
기둥에서 지붕까지 나무로 세워
집 짓는 장면을 보며
바람처럼 지나가는 말을 반쯤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빅토리아 섬 여행을 마치고
밴쿠버로 다시 돌아오는 빅토리아 들녘에서
줄지어 선 통나무 가로등을 본 후에야
눈과 가슴에 온전히
캐나다의 투명한 나무를 담았습니다
그 곁에 서 있는
캐나다 연방 국회의원 선거 팻말
이곳은 유세 없이 침묵의 언어로 홍보한다는데
통나무 가로등 닮은 진실이 흐릅니다
우리 동네 가로등
김자미
구불구불 골목에
가로등
이명자 할머니집 앞
접시꽃
박태분 할머니집 앞
가지꽃
공용화장실 옆
나리꽃
숙이 할머니집 앞
수국꽃
고무통에 세워진
꽃가로등
온 동네가 환하다
가로등
김정윤
도시의 골목길
키 크고 잘생긴 얼굴 하나
지키고 서 있는 탓으로
일상에 고단한 걸음들이
안전하게 길을 걷는다
늦은 밤 검은 양심의
불청객이 사라지고
날벌레들의 무지 막한
사랑 고백에 밤새 지친 몸
아침에서야 겨우 잠이 들면
늘씬한 종아리에
영역을 표시하려는
동네 누렁이의
뜨거운 배설물 세례에
잠을 설친다
고개 들어
하늘을 볼 수 없는
선천적 장애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
고개 숙인 채 살지만
언제나 밝고 환한 얼굴로
어둠 속
세상의 길눈으로 살아가는
너의 헌신적 삶에
뜨거운 성원을 보낸다
새벽 가로등
김준기
창 너머 우윳빛 가로등 열 지어 선
새벽 안갯길을
내 목숨이 유령처럼 걸었다
두 번 사는 세상을 향하여
창 너머
우윳빛 안개등 분수처럼 쏟아지는
가로등 길을
훠이훠이 연기를 헤치며 아내는
넋을 쏟아 부어 끓인 죽 보새기를 안고
다시 살아난 남편의 병실을 향해 걸었다.
내과의사가 내린 장막 뒤로 사라져가는 삶
외과의사가 주말에 걷어 올려
유랑극단 무대 위에 다시 올려진 살풀이
운명으로 두 번 사는 세상이라며
앞이 보이지 않는 하얀 안갯길을
가로등 따라 뿌연 연기를 피우며
아내가 걸어 왔다
아내가 걷는 안갯길을
새벽마다
내 목숨이 유령처럼 헤맨다
* 보새기 : 밥이나 죽을 담는 작은 사기 밥그릇의 지방말
가로등
김태후
빛이 온다 도시의 집, 도시의 커피숍, 도시의 사람,
그안에 내가 있다 먹어도 배부른 줄,
기다려도 오지를 않는
쫓기는 시간
가로등
김해빈
이름 밝히지 않아도
거리가 훤하다
뜨겁게 달구던 햇볕
빌딩 그늘로 감싸 안은 채
포근한 달빛 풀어놓고
마천루의 초석을 키운다
밤하늘 밝힌 별 무리
불빛에 매달아
흔들리는 도시의 꿈을
어둠에서 건져 올린다
가로등 청년 진옥씨
김행숙
해남 땅끝마을 진옥씨의 동네는
오늘도 간간한 소금내로 시작된다
어둠 걷히는 이른 시각
어김없이 새벽을 여는 진옥씨의 바쁜 발자욱 소리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결같이
가로등 켜고 끄는 일이
그가 세상에 온 본분이라는 듯이
마을사람들은 그를 가로등 청년 진옥씨라 부른다
누가 그를 모자라다 했는가
저녁이면 마음까지 닫아거는 동네에서
부디 환한 빛 잊지 말라고
포근함 버리지 말라고
동네방네 뛰어 다니며 불 밝히는
행복한 단거리 선수 진옥씨
그가 있어서 마을 사람 가슴마다
초하루건 삭망이건
보름달 하나씩 뜬다
초저녁 가로등
나선미
초저녁 퇴근길
이른 감이 없지 않은 켜진 가로등
그 아래 거닐다, 설움이 북받치더라.
오늘 많은 일이 있었는데
다정했던 건 가로등뿐이라
가로등
나태주
밤안개는 몸에 해롭대요
치마 벗고 밤거리에 나선
누군가의 아낙
가로등
문재학
희미한 가로등
긴 그림자 드리우고
쓸쓸히
골목길을 더듬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춘하추동 그 자리서
때로는
연인들의 속삭임에
얼굴 붉히고
취객을 손잡아 주던
소중한 추억도 있었지만
밤마다 찾아주는
별과 달
동(東)으론 희망이 드니
서(西)쪽으론 허무만 남기니
달랠 길 없는 고독
커져만 가네
잊을 수 없는 수많은 추억도
상처 난 꿈도
모두
아침이슬에 묻는다
가로등
박갑순
깜깜한 밤
가로등은 무서워서 불을 켜지
그래도 무서우면
불빛을 흔들며
출렁출렁
내 뒤를 따라오지
세로수길 가로등
박동민
내가 어둡대요
밤새 손들고 벌 받는 중에도 쉴 새 없이 까부는 난데
바닥에 붙은 은색 껌종이처럼
나의 꿈도 통통 튀는 용수철이었죠
커서 뭐가 되려는지
뭐라도 되겠지, 하시던 분들
보세요
나는 매일 런웨이를 걸어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워킹 워킹,
배운 적은 없죠
무대 위 조명을 받으며
옷걸이들이 홋홋 모자를 쓰고 걷네요
나는 통유리 앞에서 마네킹이 웃을 때까지 춤을 춰요
이렇게 흥이 많은데 내가 어둡다니 원
어젯밤에는 발톱에 페디큐어를 칠하다가 미친년처럼 웃었어요
런웨이에선 절대 웃으면 안 되거든요
요새 시즌이라 먹어도 자꾸 말라요 체질인가 봐요
모가지보다 다리가 길어서 슬픈 족속
자기 전에 비밀 하나 말해줄까요
사실 워킹보다 중요한 건 턴 턴,
뒤도 안 돌아보고 꿈속으로 워킹 워킹
배우지 않은 걸음으로
빗속의 가로등
박동수
비 내리는 골목 입구에
껌벅이며 희미해지는 가로등
밤은 깊어가고
쇠하여 가는 거리
떠난 사랑 떠난 사람
부슬비에 젖은 그리운 사연들
말을 잊은 체
돌아올 자리 있을까
축축한 불빛
까무러지듯 껌벅이며
떠나가고 발자취만 남겨진
허전한 골목길
가슴 텅 빈 가로등의 비애여
칠성사 가로등
박얼서
사천왕처럼 지켜 서서
은밀히 숨어든 어둠
호령 쳐서 내쫓아버리고
자비심 떠받든 불심
침묵 정진하는 수도자로 곧게 서서
달빛 같은 마음씨
그림자 하나 딸려 보내는
청사초롱 같은
친정 엄니 같은
가로등
박인걸
밤새도록 골목길을 지킨
고개 숙인 가로등이
벌건 눈알을 비비며
밝아오는 아침을 맞는다
철야기도 하는 어머니처럼
전선을 지키는 초병처럼
긴 밤을 새우는 불빛은
거룩한 성직자 같다
칠흑 같은 어두움에
고독이 파도처럼 밀려들고
거친 비바람 부딪칠 때면
달랠 길 없이 외로워도
수년을 하루같이
밤마다 등불을 든 사명자여
골목길 만 비추지 말고
어둔 마음까지 비춰주려무나
어느 가로등
박인걸
언제부터인가
집 앞 가로등은
항상 그 자리에서
어둠을 환히 밝힌다
어두울수록 빛나는
황금빛 등불은
오가는 길손들까지
정겹게 지켜준다
내 마음 입구에도
가로등 하나 걸어놓고
어둠을 몰아내고
언제나 밝게 살고프다
눈비 바람에도
한 점 흔들림 없이
제 자리를 지키는
충신열사가 되고프다
한 겨울 떨려도
비 오는 날 울더라도
어느 가로등처럼
세상을 비추고 싶다
나무와 가로등
박인혜
나무 깊숙이 가로등이 서있다
추운 계절
잎가지지 못한 가지들이라
가로등이 보기 흉하게 나무에 꽂혀있음이
너무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조화를 이루지 못함은 내 생각이고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것들은 묵묵히 서있다
언제부터인지
언제까지일지
그들은 계속 서 있을 것이다
가로등 연가
박종영
밤의 열기로 일어서는 어둠의 빛
늦은 귀가를 염려하는 빛의 은혜로움,
외진 곳 허름한 집을 찾아가는 무거운 발걸음과
휘황한 궁전으로 향하는 가벼운 으스댐과
모두가 그 값을 지불하지 않으면서
툭툭 빛의 몸뚱이를 발로 차며
돌아가는 사람들,
그때마다 못명한 빛은 눈물처럼 흩어지고
미명의 시간,
노동의 새벽을 지고 가는 사람이거나
술 취한 타락의 건달이거나
날렵한 도적의 무게 없는 발걸음까지도
낱낱이 기억하며 눈감아주는
저, 메마른 가슴으로 피워내는 빛의 길,
오직 한곳에 머물러
연인처럼,
어두운 세상의 눈이 되어주는 푸른 등대 같은 것
숲속의 가로등
박태강
밤의 정적에
외로움 느끼지만
다정한 연인들 사랑에
웃음 지우고
가끔 술 취한 행인
오줌 사태에 얼굴 찡거리며
비 오는 날
자신의 서글픔에
눈물 흘린다오
가로등
반기룡
봄이 오면
봄비의 촉촉함으로 봄 처녀처럼 감정이 무르익고
여름이 오면
모기와 날파리 떼에 못 이겨 징징 울다가
가을이 오면
연인들의 사랑의 순간을 환장하게 지켜보다가
겨울이 오면
하얀 눈의 축복 속에
마침표 물음표 느낌표 말줄임표 따옴표로
진종일 참선을 한다
가로등 아래
변성언
등이 켜졌다
진종일 마주 보던
두 가닥 구리 전선
초저녁 진눈깨비 후리자
서로의 체온을 맞댄다
사랑이 간절하면
두려움쯤 잊는지,
수심 깊은
어둠 한가운데로
불빛 맹아리
돋움 돋움 발뿌리를 내라고 있다
가로등
서금순
깜깜한 밤중
화장실 유리에 반사된
집 앞의 가로등 불빛
도시의 가로등보다
더욱 반갑다
별빛도 달빛도 멀기만 한
까만 밤
모두가 고요히 잠든 산촌
가로등의 밤 번 보초가
든든하다
나는 누군가의
가로등이 되어준 적
있었을까?
두 팔 가로등
성백군
저 먼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등불이 반짝거립니다
멀리서 볼 때는
불만 보이는데 가까이 가 보니
가로등 기둥이 가지를 벌려 양쪽에
등 하나씩 잡고 있습니다
등불은 반짝이며
어둠을 밝힌답시고
자기를 나타내느라 광을 내고
기둥과 가지는 밤새도록 버텨내느라 힘들지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낮은 알 지요
어둠이 겉이고 밝음이 오면
불은 보이지 않고 몸뚱이와 팔만 보입니다
문제는,
알면서도 시침을 떼고 있는
세상, 편 가르는 사람들입니다
눈 감아라, 가로등
성백군
아내와 함께
저녁 산책길을 나왔습니다
가로등이 환합니다
평생을
묵묵히 내 뒤만 따라온
아내가 고마워 손을 내미는데
마치 한 몸임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아내도 내 손을 꼭 잡네요
작고, 연약하고 그러나
동안이라서 생전 안 늙을 것 같았었는데
어느새 주름살이 겹치네요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다 내 탓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미안하고 안쓰러워
주름진 아내의 이마에 살짝 입술을 되었더니
자연스레 내 허리를 감고 다가서는 아내의 몸과 마음
“눈 감아라. 가로등”
“무얼 보겠다고 더욱 밝게 비추니!”
그래, 까짓것
소문나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부부인 것을
평생을 같이 살아온 사람의 모습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속 가로등 불빛
성백군
낮에는
할 일 없어 스위치를 내리고
알라와이 운하 둑길 따라 무료하던 가로등들이
밤을 맞아 신명이 짚였나 보다
일렬횡대로
운하에 뛰어들어 불기둥을 세우고
흐르는 물에 제 몸을 풀어
길을 낸다
일렁거리는 물속
아른거리는 저 불빛의 아픔이
개화처럼 보이는 것은
삶이 죽음보다 강하기 때문일까?
근처 빌딩 숲 방 방
불빛 하나하나가 다 뛰어내려
낙화가 되지만, 낙화는
열매를 맺으려고 산화하는 것이다
모든 산자의
처연하도록 아름다운 길이다
바람둥이 가로등
성백군
가로등 중에는
바람둥이가 더러 있다
달이 하늘을 건너가는데
비추란 길은 비추지 않고
밤 풍경에 취해 한눈팔 다가
길을 잃었나 보다
대낮인데도
눈에 불을 켜고
달을 찾는다
달은 떠나고
길조차 사라져 버리고
할 일 없는 가로등 제 신세만 비춘다
한심한 가로등
성백군
한낮인데
갓길 가로등 몇
여태, 불을 켜고 있다
때 되면
앉을 자리 떠날 자리 찾아
바른 처신을 해야 하는데
과욕인가, 노욕인가, 분간 못 하다가
오도 가도 못하고 낭패를 당한다
요즘 세상에
경로 사상이 어디 있어 누가
스위치를 내려 줄 것인가
보다 못한 옆 야자나무가 마지 못해
측은지심을 발해
그림자로 겨우 가려 주려는데
그것도 잠시
바람 불면 바람 따라 흔들리면서
슬쩍슬쩍, 가로등 창백한 얼굴에
점점 더 그늘이 진다
가로등
송연우
철 기둥 꼭대기에
슬픈 애꾸눈이
거리의 어둠 지우느라 핏발선다
아물아물 멀어져가는 골목까지
늦은 발자국 소리
데려다주고 오는 외눈부처
철부지의 방황 바라보며
오래오래 기다려주던
어머니,
밤 지새도록 외발로 서서
새벽녘 마지막 어둠을 개키고
장승처럼 섰다
가로등을 추모함
송종규
새벽의 남은 빛들을 쓸어 모아 공중으로 띄워 올리는 손이 있다 그 손에는 빛으로 버무린 붕대가 감겨있고 그 손에서는 우주의 비늘들이 나비처럼 떨어져 내린다 처음부터 그의 몸이 모서리로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각을 세운다는 건 그에게는 마치 보호색 같은 것
누군가 밤새워 그곳에 가서 울었고 누군가 뜨거운 말을 그곳에 새겨 넣은 후 모서리들이 그의 몸을 이루기 시작했다
호수의 오리 떼가 깊은 잠 속으로 들어가고 그 많던 발자국들도 검은 융단 아래 잠기고 나면 3시, 4시의 유리창 그리고 고요한 벤치 두근거리는 호숫가에는 각으로 몸을 이룬 그가 산다
오래전부터 그는 슬픔의 힘을 믿어왔다 각은, 그의 몸을 떠받혀 주는 천만 개 빛들의 각도인 것 그가 날을 세워 온통 땀에 절은 몸을 공중으로 밀어올리면 어느 순간 환한 아침이 온다
세상의 모서리들이 둥글어지는 시간
너라는 이름의 엽서가 아침의 호수에 막 당도하는 시간
두근거리는 호숫가에는 각으로 몸을 이룬 그가 살고 있다
가로등
신성호
긴 목을 빼고
살아가는 가로등
때가 되면 스스로
불을 밝히는 동네 파수꾼
자존심도 거만함도 없이
책임을 다하는 야경꾼
어둠 없는 세상 지킴이
너는 정녕 청백리로다
가로등
신형식
마지막이 가까와질수록
가슴에는 불을 켜고 있어야 해.
어둠이 다가올수록
더 또렷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노숙의 운명.
분주한 세상을 가로질러
사람들이 가고,
다시 그들이 돌아오고
그러다가 낙엽처럼 나뒹구는
바람의 이야기
이만큼 비켜서서 듣고 있으면
언제부터였던가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는
이 고지식한 그리움.
한뎃잠을 자더라도
기억의 심지에 불 하나 밝히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고
졸다가도 웃음짓는 너,
그 아래로 동그랗게 내려앉는
텅 빈 스포트라이트
가로등 하나
심의표
뱁새 한 마리마저도 잠든
깊은 밤
인적 끊인 오솔길
바람만이 나풀거리는데
눈비 막아줄 의지함 없이
삼경의 적막 깨고
어둠 밝히는 가로등 하나
맨몸으로 쓸쓸히 서서
외로움만 먹고 사는가
수호천사인 양 아무 말 없이
가로등
심지향
찬비에 젖어 떨고 있는
가시 없는 장미 한 송이
처연(悽然)한 빛으로
닫힌 유리창 밖 흐릿하게
비추이는 그림자
어지러이 흔들리는
단절된 가지 끝
응어리 진 세월 추스르며
이제는 돌아 갈 때를 아는
길 잃은 천사
마른 꽃다발 한 아름
갈바람에 흩날리는
텅 비어버린
얼룩진 내 영혼에 남아있는
춤추는 홀로그램(hologram)
가로등
안규례
허허로운 바람이
가슴을 스치며 지나갈 때
너를 생각 한다
일탈을 꿈꾸며
어디론가 떠나고 싶을 때
너를 생각한 적이 있었다
행선지 없는 방황 둘러메고
밤의 골목길 걷다가
까닭 모를 분노에 휩싸일 때
문득, 누군가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그런 날이 있었다
가로등이 있는 숲길
양애경
초여름 저녁 어스름
산책로로 접어드는데
파득, 하고
가로등이 날개 펴는 소리가 들렸어요
올려다 보니
빛의 씨앗이 점점 더 붉게
더 환하게 켜지더니
밤의 우주를 향해 열린 커다란 등대가 되더군요
내 마음도 가로등처럼 켜져서
우주를 향해
그대, 나 외로워
라고
나와 밤하늘만 들을 수 있는
큰 소리로 외쳤어요
빛의 빠르기로 대답이 와도
몇 천 년 후에야 이 자리에 도착할지 몰라요
산새가 가쁜 내 숨소리를 따라와서
자기도 답.답.해. 답.답.하다고
나무 위에서 큰 소리로 울어줬어요
하늘엔 초승달과 별이 마주보며
저렇게 수줍게 열려 있는데
밤이 다가온 숲과
사람이 사는 마을 사이
저렇게 아름다운 불빛들이 걸렸는데
탑동 가로등
양전형
누군가
이 한 가닥 선을 내려 주시게
별빛에 쏘여 켜인 꽃불을
얼른 다가와 꺼 주시게
안간힘으로 밤을 다 태우는
해거름 노을빛 결은 이 기다림
누가 사정없이 끊어 주시게
아, 그리움에 겨워 불 토하는 내 가슴
새벽이 오기 전에 바다로 들고 싶어라
어둠을 비질하는 밤물결이여,
수 만리 먼 길 달려와
단숨에 부서지고
상심만 돌아가는 저 물결이여
나를, 나를 데려가시게
가로등의 본분(本分)
오보영
가로등
네가 할 역할은 거기까지란다
주제 모르고
더 이상 나서지 말고
이젠 훨씬 밝은 빛을 내는
아침 해가 돋았으니
모든 걸 다 넘겨주는 게
지극히 정상이고 상식 이란다
어두움이 지나간
낮 동안 내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쳐줄
햇볕에 비하면
기껏해야 넌
그나마도 스스로가 못하고
전선을 통해 전해진
전기를 통해 가까스로
잠시 역할을 했던
미미한 전등불일 뿐이니까-
추호의 미련 갖지 말고
모든 걸
햇볕에게 넘겨주는 게
사그라지는 전등으로서
지켜야할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도리임을 명심하거라
겨울 가로등
오보영
좋아 죽겠다며
미치도록 사랑한다며
그토록 막무가내 몰려들던 나방들
한 순간에 가슴 식어
다들 떠나갔어도
묵묵히 홀로
자리 지키고 있는 건
행여 길 잃고 방황하는
외로운 나비
지친 날개 잠시 쉬고 가라는
빛이 품은 속 깊은
사랑이어라
가로등
오애숙
외롭고 쓸쓸한 밤
나 그댈 기다리며
이 밤도 두 눈 뜨고
밤깊어 살에이는
소슬바람 속에서
그리움에 젖는 밤
그리워
밤새 불 밝혀
기다리누 그대를
가로등
용혜원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으면
눈동자만 남았을까
가로등
유창섭
눈오는 날은 밖에
가로등 하나 켜 놓고
전화를 매달아 놓는다
올 일도
받을 일도 없는
끝내는
설화(雪花) 같은
해가 뜨면 사라질
설화(雪花)로 피는
기다림
슬픈 가로등
윤민순
밤 깊어
잠 오지 않아
홀로 서 있는 고독
떠나는 임 찾아
불빛 되어 오기를 하염없이
고개 숙여 기다렸다
어디선가 들리는 빗방울
눈 뜨니
주르륵 비가 흐르며
빗물이 눈물 되어 내리네
가로등
이남곤
성난 그리움 켜고
우뚝 선 하얀 가로등
마야 앙겔루의 연금술 만큼
향기로운 시간 흔들어 놓네
부드럽네, 빛 소리
나그네 발이 되고 그림자 되어
가슴으로 내리는 눈물 지우고
처진 어깨 얼싸안은 따뜻한 손길
부드럽게 차올라
빈자리 채워주는 그리움
허공을 휘젓는 빛에
그늘진 얼굴이 명경처럼 맑다
겨울 속에 봄을 심는 이여
고혹한 너의 눈빛에 부끄러운
가슴 녹이고 땅을 녹이니
봄을 잉태한 밤의 화신이로다
가로등
이남일
길을 밝히는 것인지
사람을 밝히는 것인지
가로등은 밤마다 불을 밝힌다.
달빛보다 환한 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묻는다.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냐고
길은 언제쯤 닿느냐고
가로등은 눈부시게 말한다.
내가 밝힌 길
네가 가지 않느냐고
그 길 네가 가고 있지 않느냐고
가로등
이문재
말이 나온 김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가로등은 낮에 잘 보입니다
밤에 보이는 것은
가로등이 아니라
가로등이 내뿜는 불빛입니다
캄캄할수록 가로등이 아니라
가로등 불빛이 더 잘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로등 디자인이
좋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이 꺼진 낮에 그러니까
가로등이 가로등이 아닐 때
가로등을 많이들 보니까요
재차 말씀드리지만
가로등의 모습은 낮에 잘 보입니다
국화와 가로등
이문조
꽃 한 송이 피우고 싶어
약수터 가는 길 가
가로등 아래
떨고 있는 한 떨기 국화
입동 지나
칼바람 부는 겨울로 가고 있건만
꽃 한 송이 피우지 못하고
애처로이 서 있구나
낮이면 햇님과 놀고
밤이면 달님 품에 안겨 잠 자야 하는
순리
빼앗겨 버린 안타까움
거주이전의 자유마저 구속당하고
가로등의 밤샘 고문에
계절마저 잊어버렸네
언제
자유의 몸 되어
한 송이
아름다운 꽃 피어 보나
가로등
이미순
그대 손짓하는 곳에
쏟아져 내리는 불빛
절망 그 표정
이젠 거두어 두기를
한 웅큼씩 움켜쥘 때마다
어둠의 피라고
그 노래도 거두어 두시기를
휘어진 빛도
때로는 어둠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지
그대가 손짓하는 저 불빛
수직으로 내리다 꺾여도
단단한 어둠의 살 뚫고
하얀 별 되어
반짝이고 있잖아
가로등
이민정
저 계집애
꼬락서니 좀 보라지
벌써 오랜 동안을
지루함도 잊은 채
뻔뻔스런 얼굴로
술 취한 행인의
심술궂은 추파도 견디며
꼿꼿이 서서는
꼼짝을 안 하네?
아무래도 오늘 밤
바람맞은 게야
가로등
이승해
어둠이 내리면
회색 도시에는 키큰 아버지들이
등을 밝히며 길에 선다
포장마차 앞
술 취한 이들의 설움을
지긋이 바라보며
자식 걱정에 어둠을 지우고 있다
어떤 이는 하소연에 발로 차거나
술에 취해 껴안고 울기도 하지만
담담히 아픔을 받아준다
묵묵히 밤을 밝혀주는 길잡이
자식 기다리는 마음 하나로
어둠의 끝에 늘 서 있다
가로등
이시영
밤늦은 시간 누가 홀로 공원을 가로지른다
어렵게 한 세계를 놓고 떠나는 자의 그림자가
뒤에서 한없이 자유롭다
가로등
이인순
집 앞 가로등
어두워지면 어김없이
불을 밝인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의 걸음을
마음 졸이며 지켜보는 어미처럼
그는 항상 등 뒤에 서 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내가 까맣게 잊었을 때에도
그는 그의 일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다
오랫동안 낡고 헐었지만
지근거리에서의
말 없는 보살핌은
여전히 빛이 나고 안온 하다
꽃잎이 헤살 짓는 봄밤
불빛으로 흐르는
속울음 소리
흔들리는 눈빛을 가슴에 담는다
주기만 하는
뒤척이는 마음을 읽는다
가로등
이재환
1
어둠이 깔리면
등불 들고 서 있어요
그대 오시는 길
무섭지 않게 오라고
골목길 들어설 때
날 보면 기분 좋아지라고
오늘도 난 기다려요
등불 하나 들고서
2
까만 밤을 불 밝히고
묵묵히 서 있는 너
누굴 그렇게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니
밤이 새도록
잠도 안 자고 안쓰럽네
기다리는 임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
밝은 해가 떠오르듯이
희망이 품고 기다려 봐
3
누가 뭐라고 해도
난 매일 밤 당신을 기다려요
당신이 좋아서
밤마다 불 밝히고 서 있어요
늦게 와도
행여 오지 않아도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점등의 시간
이주언
팔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곳에서
너를 찾아가는 길을 멀기만 하다
나침반 없어도 눈을 감아도
환하기만 했던 너의 얼굴
별을 바라보며 길을 찾던 날들 사라지자
서로를 향한 마음속 가로등도 꺼지기 시작했다
이제 컴컴해진 우리는
작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가로등을 다시 밝히려 애쓰지만
같은 언어로 말하고
다른 기호로 해석하고
실내 가로등 아래서
마음 번역서를 펼쳐야 할 시간이다
가로등
이주현
가로등 길은 항상 바쁘구나
걸어가는 이들의 눈은 빛이 나고
그 밤 아래 난 거만하게 웃어주니
오늘이였다
바로 오늘이 명당인 것을
필요하다면 길을 뿌리고
기다린다면 널 안아주고
앉아보라고 여기 풀밭 아래
난 폭신한 구름을 상상한다
저 높은 곳에 무엇이 있을까
올라가 보니 푸르구나
아주 녹색의 그 신비로 널 태어나니
사슴 목 길이 보다 더 아름다운 날들
가로등 길 그 아름다웠던 밤의 진실
가로등
이진숙
비눗방울처럼 떠돌다
사그라지는 목숨들 분분한 거리에
폭죽처럼 떠올랐다가
요절한 시인처럼 잠시
하루살이와 몸 비틀며 키득거리다가
하얗게 새벽 속으로 길 떠나는
슬픈 사랑의 눈망울이 있다
맨드라미 꽃대궁같이 낯설어진
추억의 알갱이들
차창 밖 풍경처럼 스쳐 가는 거리에
잊으리라 다 잊으리라 머리 흔드는 멍든 세상의
옆구리를 찔러 보다가
몇 개 남은 별들이 움찔하며 스러져 가는
새벽을 머금어
숨 멈추고 너를 밝히는
슬픈 사랑의 눈망울이 있다
바람이 차다
아직도 나는 나를 잊지 못하고 있나 보다
가로등 끄는 사람
이현승
새벽 다섯시는 외로움과 피곤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시간
외로워서 냉장고를 열거나
관 속 같은 잠으로 다이빙을 해야 한다.
만약 외로운데 피곤하거나
피곤하지도 외롭지도 않다면 우리는
산책로의 가로등들이 동시에 꺼지는 것을 보거나
갑작스레 시끄럽게 울어대는 새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잠시 뒤엔 불 꺼져 깜깜한 길을 힘차게 걸어가는 암 환자가 보일 것이다.
구석으로 숨어든 어둠의 끄트머리를 할퀴는 고양이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외로움과 피곤과 배고픔과 살고 싶음이 집약된,
더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는 열정으로 고양된 새벽,
죽고 싶지만 죽을 수 없는 열정으로 살아 있는 다섯시
저기 어디 가로등을 끄는 사람이 있다.
고요히 다섯시의 눈을 감기는 사람이 있다
가로등불이
임영준
거리의 가로등불이
우리를 가로막기 시작했어
눈을 부릅뜨고 막다른 길로 몰면서
함정을 파고 있었어
허청거리는 발걸음 뒤에선
그림자가 배신을 획책하고 있어
이제 밤거리에선
아무것도 바로 볼 수가 없어
억눌린 공포가 가로등불 아래서
몰래 스멀거리고 있었던 거야
가로등의 여인
임영준
내게 기대어 소리죽여 흐느끼던 그녀
가끔은 옆에 퍼질러 앉아 빨간 립스틱 입술로
담배 한대 아주 맛있게 빨고 가던 그녀
사흘 건너 한 번씩 낯선 남자와 팔짱을 끼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나던 그녀
어지간한 비는 우산도 쓰지 않고 젖어버리던 그녀
어느 날 맨발에 거의 반라의 몸으로
미친 듯이 어둠 속으로 달려 가버린 그녀
가로등은 혼자다
임은숙
가고 오는 계절
그 수많은 밤을
허리 한 번 굽혀보지 못하고
기지개 한 번 펴보지 못하고
빗물에 함께 젖어주고
달빛에 기죽은 척도 하며
누구의 따스한 눈길은 바란 적 없이
오직 타인을 위한 삶
어둠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가로등만큼
외로운 이는 없다
이마에 걸린 새벽 가로등
장수남
초겨울 세찬 바람이 칼을 갈고
잠에서 깨어난 새벽
거리는 휴지 쓰레기덤들이 골목마다
몸살을 앓고
두 번의 죽음이
미화원 리어카에 누워
발 빠른 세월 앞지르고 있다
밤 나그네 이마에 걸친 가로등 하나
하얀 입김 쏟아버리고
앙칼진 빗질 소리가
세월의 앙금을 쓸어내리면
끝이 보이지 않는 무언의 땅
차량들 틈바구니에
시간은 우주의 광속으로 질주하고
동녘 하늘엔 햇살 지긋이 자리 비우고
하얗게 지친 달이
또 하나의 세계로
미화원 리어카에 실려 가고 있다
가로등
장화순
밤새 눈 부릅뜨고 비탈길 지키는 가로등
미명의 어둠 안고 안개 비속을 걷는 이
임을 대신해 길을 밝혀 주고
안개비 때문인가 수은등 불빛 때문인가
애써 기다리지 말라며 떠나는 뒷모습 멋짐을
수은 불빛에 대롱대롱 매달아 주고
석양빛 조용히 살라 먹는 밤이 되면
또 하나의 아름다운 사랑을 만들고
또 다른 사랑의 외로움을 안고
밝아오는 여명이 그 빛 살라 먹기 전
다소곳한 새벽바람 품속의 꿈
오늘 밤 또 어느 임을 사랑할까?
가로등 꽃
전근표
하나 둘 어둠을 쫒고
향기는 없어도
깊은 밤 에 활짝 피는 꽃
새벽하늘 오르는 어둠의 천사
도시의 가로등
전병조
도시의 가로등은
도시의 쓰레기들을 보면서 불을 밝힌다
도시의 가로등은
도심의 쓰레기 더미에 묻혀서 긴 밤을 앓는다
밤이 되면 은밀히 쏟아지는 쓰레기 더미에 목숨을 거는
아찔한 정사의 찌꺼기들
도시의 가로등은 눈이 없어도 볼 것 다 보고
귀가 없어도 들을 건 다 듣는다
고양이들이 쓰레기 더미를 뒤진다
패트롤카가 야경을 돈다
저만치 다가오는 패트롤카의 불빛에 놀라
당당하던 동공을 조그맣게 축소 시키며 슬그머니
골목길을 돌아가는 고양이의 두 눈,
거리는 온통 도둑고양이들의 천지다
비린내 나는 삶의 현장에서 한 점 거머리의 모습으로
노동의 고혈들을 빨아먹다 들켜버린 고양이들의 천지
도시의 고양이들은 이제
더 이상 패트롤카의 불빛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시의 고양이들은 밤마다 패싸움을 벌인다
질 좋은 쓰레기 야적장을 둘러싸고
밤마다 피가 터지는 고양이들의 패싸움
물고 할퀴고 치고 때리고 깡통이 찌그러지고
서류뭉치가 날아다니고
심지어는 상대방의 명패조차
수류탄이 되어 적군의 이미를 터뜨리는
쓰레기 더미에 목숨을 걸어버린 저
비린내 나는 고양이들의 세상
아침이 되면
사람들이 격분을 하고
청소부들이 비질을 하고
환경미화원들이 고생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른다
고양이들이 짓밟고 지나간 쓰레기 더미의 어마어마한 정체를
그들은 모른다
밤마다 쓰레기 더미에서 파헤쳐지는 엄청난 양의 냄새들을
그러나 도시의 가로등들은 알고 있고 있다
도시의 가로등은
눈이 없어도 볼 것 다 보고
귀가 없어도 들을 것 다 듣는다
가로등
전성규
밤은 깊은데
아직 눈을 붙이지 않은 가로등.
시곗바늘 소리 같은 사월(四月)의 비가
내릴 때나,
밤나무 가지 끝에
시월(十月)의 찬바람이 걸릴 때나,
언제나 밤의 비위를 잘 맞추는
가로등.
이따금씩 찾아와
한 바가지 슬픔을 쏟아내고 사라지는
열차의 기적이 울릴 때에도
약 한 봉지 분량만큼의
향수를 달래가며,
오늘도
어둠의 속살과 밀애를 나누는
가로등
가로등 불빛 아래 나는 그의 눈물처럼 서 있다
정민기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오르며 나는
황홀한 빛 속에서 차마 사랑한다
낮에 깎던 손톱 하나 햇빛을 한 움큼 받아
어둠 속에서 어쩔 수 없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림으로 소리치던 화가가 그림을 덮고
반달처럼 허리를 굽힌 채 꿈속으로 들어가는 밤
가로등 불빛 아래 나는 그의 눈물처럼 서 있다
삼복더위는 먹다 남긴 밥상처럼 물러가고
덕담을 나누던 빛도 새벽녘에야 잠에 빠져든다
모여 있던 참새가 한곳으로 날아간 한낮에는
장미가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깔깔거리며
웃는 바람에 마시던 얼음물이 금세 다 녹았다
늦여름의 여백은 아직도 머리 꼭대기에서
흰옷 자락 늘어뜨리고 밤바람처럼 출렁거린다
처음 피어난 달빛은 어느새 저물어가고
양보하느라 나중에 피어난 달빛은
저 홀로 지는 날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다
오늘 밤 내리던 이 어둠 그치면 그의 눈물도
서서히 물거품처럼 애처로이 말라가겠지
빛을 깎으며 몽당연필로 별을 쓰는 달의 마음
서녘의 꽃으로 사그라들 듯 기울어진다
밤마다 가로등이 피어나고 있다
정민기
가로등을 꽃이라고 하자 밤마다 가로등이
피어나고 있다 그런 봄날 밤이 뚱딴지처럼
바람의 허리 꺾이는 소리 내지르고
웃는 달 너머로 꼬리 긴 별이 떨어진다
슬픈 내색 하나 없이 걸어가는 꿈속 앳된 여자
밤의 정류장에는 버스 한 대 오지 않는다
눈물을 가진 새벽에 부는 바람의 옷깃이 차다
소름이 돋을 것처럼 어둠이 출렁거리고
목련 눈 뜨고 걸음마 시작할 때 나도 걸어간다
아픈 하늘에 침 같은 별빛을 뱉은 이가 누구인가
나의 아버지는 내가 태어난 해에 꽃이 되어서
지금은 향기마저도 남아 있지 않아 그리워지지
달은 잠 못 이루고 밤바람 와락! 눈물 껴안고
애써 옆으로 돌아누워 잠을 한 곡 청한다
꽃씨처럼 흩뿌려지는 밤비를 맞으며 걷는다
내가 피어나면 꽃이 지고 꽃이 피어나면 내가 져
고픈 그리움을 움켜잡고 비틀거리는 사랑
밤새 침묵을 오물거리다 파도처럼 뒤척인다
성난 발길질에 밤마다 가로등이 개화하고 있다
가로등
정용진
어두움이
싸락눈처럼
거리에 덮여오면
연인의 눈빛 같은
가로등들 들이
하나 둘
눈을 뜨기 시작한다
팔짱을 끼고 걷는
조용한 발소리
그 속삭임이
달빛 같이 고요하다
만나면 만날수록
샘솟는 그리움
늘어선 가로등을 따라
연인들이
정겹게 걸어가고 있다
그들의
가슴이 따스한
이 저녁
가로등
정재열
흔들흔들
내 마음
영혼의
불빛 되어
발길 아래
한 올 한 올
그리움이
쌓여 온다
가로등 증후군
조말선
이런 경우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시술이라고 하는군요
비대증이나 왜소증이 일종의 증후군인데도요
정상이 아니지만 병이 아닐 리가 없어요
내가 볼 때 당신들은 못 보고 당신들이 볼 때 내가 못 보는 증상 덕분에
나는 가로등을 앓게 되었어요
만약이라는 가로등조차 켜지지 않기를 바랬거든요
이 나이에도 성장기의 정신연령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늙지 않는 이유라느니 하는 야유는 말아주세요
추운 겨울 가로등 아래 혼자 서 있는 기분이죠
폭우가 쏟아지는 밤 가로등 밑에서 혼자 비 맞는 꼴이랄까요
다들 비를 맞거나 안맞거나 다들 관심을 받거나 무관심이거나 간에
나는 내게 너무 관심이 많아서 문제에요
두 시간만 자고 일어나면 가로등 같은 거 상관없다는 군요
단 두 시간 만에 몇 십 년의 콤플렉스가 사라진다는 말인데요
정신과에 안가길 잘했어요
정신과의사는 가로등 점등사로 보이니까요
가로등에 관한 상상은 질렸거든요
입을 벌리라고 해서 입을 벌렸을 뿐인데
세상의 가로등이 다 꺼진 기분이었어요
바랭이풀보다 더 쓴 마취제가 나를 깨웠어요
두 시간 동안 무슨 짓을 한 거죠?
나의 노력이 잠잘 동안
나의 비정상이 잠잘 동안
나의 열등감이 잠잘 동안
수술실 아니 시술실 안에서 나의 콤플렉스는 끔찍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을까요
이런, 여태 가로등 같은 상상력에 기대있군요
나의 의지는 수술실 아니 시술실에 들어가는 순간에 손을 들었는데
자고 일어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나요
이런 경우는 병이 아니기 때문에 나아질 것도 없는 거죠
한밤의 비는 가로등 밑에만 내리는 걸요
가로등
차성우
어둠 속에는 슬픔이 살아
힘을 다하여 어둠을 밀어내면
치마폭 크기만큼 둘레를 친 불빛
무당벌레 알록달록 뽐내고
어둠을 헤치고 온 풍뎅이
길 잃은 쓰르라미
집 나온 여치, 방향 잃은 잠자리
잠 못 자는 귀또리
날개 떨며 노래한다
어둠에서 헤매던 찬란한 생명들
가로등 불빛의 경계에
어둠의 벽을 툭툭 쳐대는
거룩한 노래들
가로등, 저 부드러운 눈빛은
채영선
잠이 올까 눈을 가늘게 뜨면
부엌 창으로 스며들어와 살그머니
베개맡을 찾아오는 한 줄기 불빛
아직은 낯이 설은 고향 하늘
문 걸어 잠근 채 하루가 저물고
발치에 잠든 꼬맹이 강아지 해피
찬물에 머리감고 무엇을 기다리는가, 이 밤
흐려진 눈동자에 눈을 맞추는 저 광선
소스라쳐 일어나 형광등 밝히면
어느새 사라져버린 따뜻하던 눈길
설핏한 이불 속에 누워 만나는
고개 들고 엎드리면 보이지 않는
창 밑에 요를 펴는걸
오른쪽으로 누워야 잠이 드는걸
어떻게 알았을까
얼마나 오래 서서 기다리고 있었을까
수만리 떠돌며 날아온 내 영혼
방이 컴컴하다고 투덜대는 걸
아니라고 아니라고 괜찮다고 해도
가끔은 눈물이 찔끔 나오려는 걸 알고 있을까
민들레 가로등
최범영
제 여자 친구가 매일
출근길에 보면서
행복해하는 꽃입니다
뽑아가지 마세요(퇴근길 길섶 어느 분의 글)
내가 걷는 출퇴근 길
아침저녁 늘어서
나를 반겨주던 민들레꽃
하얀 수염을 잔뜩 드리우고
가로등이 되었습니다
조금 바람만 불어도 깨질 듯
누군가 한 곳에 써놓은 글귀
그분 여자 친구에 대한 사랑
찡그린 얼굴이 훔쳤습니다
등짐 털어 낸 듯 퍼지는 미소
퇴근길 점점이 켜지는 기쁨
두려움만 풍기는 세상에
맑은 웃음을 흩뿌렸습니다
가로등에 매달린 화분
최수일
왕십리역 사거리에 가로등이 꽃을 피웠다
꽃나무로 변신한 가로등을 지켜보다
오래전 어느 가을 운동회를 생각한다
한쪽 발은 발받이 딛고
남은 발은 허공 딛고 기둥에 매달린 아이들
한쪽 손은 기둥을 잡고
다른 손은 앞뒷면 색이 다른 카드를 들었다
긴 호루라기 소리에
기둥에 울긋불긋 카드꽃이 피어난다
짧은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꽃의 색깔이 홱홱 바뀌던 카드섹션
색색의 꽃을 피워내다
손에 힘 풀려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던,
가로등꽃을 지켜보다 새삼
그날의 박수 소리와 함성을 듣는다
순간, 무례한 한 무더기 바람이
가로등에 매달린 화분 하나를
땅바닥에 툭 던져버리고 달아난다
화분에 갇혔던 꽃의 맨발이 찬 바람에 노출되고
그 연약한 발이 땅바닥을 더듬기 시작한다
가로등이 하얀 밤
허충순
가로등이 하얀 밤
가로등 밑에 얼굴을 쥐고 있는 사내가있다
담배는 꺼진 채 손에 들려 있다
그 손에 선인장이 자라고 있는 것 같다
거친 삶의 한켠
잠잠해진 그는 눈을 아래로 깔고 있다
모든 걸 잃진 않았다고
얼굴을 쥔 손바닥을 가만히 떼어주고 싶다
가로등
현상길
언제 왔는지
아무도 모르는 사이
낮은 자 높은 자 가림 없이
긴 허리 변함같이 숙이며
하루의 굽은 어깨를 감싸주는
그의 따스한 눈빛
좁은 길목마다
가는 몸 담벼락에 기대어
새벽이 다하여도 깜박이는 숨결로
비에 젖거나 바람에 흔들려도
세상 구석구석 밝혀주는
그의 한결같은 겸허
땅거미보다 먼저
어둑새벽보다 늦게
높아질수록 더 넓은 아래로
물결에 실리면 지상의 은하 되어
여울 타고 어둔 숲까지 마다않는
그의 넓고 깊은 배려
슬픈 가로등
현영길
오늘 외로이
홀로 서 있는 가로등
사람에게 밝은 빛으로
길 밝혀주는 가로등 그대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으로 수많은 사람 길인도 받기 때문이지요
외로운 그 길
때로는 누군가에게 힘 되어주기 때문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