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강건호 - 태풍
강민경 – 태풍의 눈
강수 – 태풍에게 묻다
강수 – 태풍이 온다
강정 – 태풍이 지나간 자리
강정식 – 태풍 올가
강효수 – 태풍의 눈
곽종철 - 태풍
권오범 – 정치와 태풍
권오범 - 태풍
권오범 – 태풍의 눈
권오범 – 태풍이 지나간 자리
김경렬 – 태풍 곤파스
김경철 – 태풍 링링
김관호 - 제13호 태풍 링링의 대의(大義)
김귀녀 – 태풍 루사를 떠올리며
김귀순 – 태풍이 지나고
김내식 – 태풍이 할퀸 새벽 바다
김명희 – 인사동에도 태풍이
김명희 – 태풍 올가
김미숙 – 태풍 그 뒤
김미정 – 태풍 예보
김상용 - 태풍
김성구 – 태풍
김승택 - 태풍
김옥자 – 올여름 태풍 1호
김옥자 – 올여름 태풍 2호
김용직 – 태풍
김윤자 – 태풍 매미, 9월의 슬픈 날개
김지향 – 이상 태풍 경보
나상국 - 태풍
나희덕 – 태풍
나희덕 – 태풍의 눈
노정혜 - 태풍
노정혜 – 태풍 링링
노향림 - 태풍
도지현 – 태풍 같은 사랑
목필균 - 태풍
문인수 – 꽉 다문 입, 태풍이 오고 있다
박근철 – 태풍 너구리
박인걸 – 태풍(콘파스)
박인걸 – 태풍(볼라벤)
박종인 – 태풍의 지문
박진표 – 태풍의 채찍
박태원 – 태풍에게
백원기 – 태풍이 온다
백원기 – 효자 태풍
복효근 – 태풍 속에서
성백군 – 태풍의 눈
손병흥 – 태풍
송시월 - 태풍 주류 비와 비주류 비
송연우 – 태풍
신경림 – 태풍이 지나간 저녁 들판에서
신광덕 – 태풍
신영희 – 싹쓸바람(태풍)
심의운 - 사라호
심지향 – 태풍 루사
오보영 – 태풍
오보영 – 태풍 비 희망
오보영 – 태풍 유감
오보영 – 태풍의 본색
오보영 – 태풍 전야
오승한 – 태풍이 머무는 계절
오애숙 – 너의 존재(태풍 다다스)
오하룡 – 태풍 루사
오하룡 – 태풍 매미 지나간 후
오현정 – 태풍과 허풍
유응교 – 태풍의 눈
유일하 – 태풍의 눈
유창섭 – 태풍
윤관영 - 거룩, 거룩, 거룩한 - 태풍(颱風)
윤영초 – 태풍이 지나간 후에
윤용기 – 사오마이 태풍
윤의섭 – 태풍 볼라벤에 채인 슬픔
윤창환 – 태풍을 멀리 보내고
이경림 – 태풍, 뒤
이경애 – 태풍 피해
이문희 - 태풍
이문희 – 태풍의 함성
이생진 – 태풍 사흘째
이시경 – 태풍이 몰려온다
이종인 -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이지엽 – 태풍의 눈
이지영 - 태풍
이지영 – 태풍의 길
이해인 – 태풍 속의 꽃잎
이해인 – 태풍 연가
이현호 – 혼자 무렵의 태풍
이희숙 – 태풍 주의보
임보 – 태풍
임석순 – 태풍 경보
임영준 – 태풍
임인규 – 사랑의 태풍
임주영 - 태풍
전병철 – 태풍 오던 날
정경조 – 태풍이 비를 안고 오는 이유는
정민기 – 태풍
정상화 – 태풍
정선호 – 내 마음의 태풍
정석봉 – 18호 태풍
정영숙 – 태풍과의 대화
정영숙 – 태풍 매미
정영숙 – 태풍 매미가 지나간 자리
정영숙 - 햇빛과 태풍의 품
정은희 - 태풍의 흔적
정이산 – 가을 태풍 링링
정이산 – 가을 태풍이 남기고 간 것은
정이산 -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
조연호 – 태풍이 오고
조찬용 – 태풍이 지나간 자리
주금정 – 태풍
주응규 - 태풍
차영섭 – 태풍 링링과 느티나무
최금진 – 태풍 속에서
최영철 – 태풍 전망대
최이천 - 태풍
최해춘 – 태풍 전야
최홍윤 – 태풍이 지난 자리
최홍윤 – 태풍 전야
하두자 – 태풍 주의보
하영순 – 태풍
함민복 - 태풍
허욱도 - 태풍
홍수희 – 태풍 부는 날
홍수희 – 태풍의 눈
홍윤표 – 태풍 그 짧은 시간에
홍일표 – 태풍
황규관 – 태풍을 기다리는
태풍
강건호
바람이 지나간다.
배부른 바람 소리
어디서부터 먹어치우며 왔나
대단한 배불뚝이구나
허기에 지쳐 잠자는 이 깨우지 말고
소리 없이 지나가렴
배부른 바람아
못 견디게 고프거든
청기와집 찾아가고
싸온 것 있거들랑
여기 놓고 가거라
배부른 바람아
배고픈 이 먹지 마라
태풍의 눈
강민경
하나뿐인 눈으로는 사선을 그리는
대각의 세상을 다 보지 못한 한풀이였는가!
뱅글뱅글 지축을 흔드는 태풍
만물에게, 아니 우리들에게 수난이다
이 세상 누군들
살가운 바람으로 살고 싶지 않겠냐 만
세상에서 환영받고, 사랑받고, 싶은데
지글지글 끓는 지열이 목 마르다
바다에 파도는 뭍이 그리워 끝없이 출렁이고,
칭얼대는 말들이 버겁다고
하소연할 곳 없는 급하고 사나운 본성,
숨기지 못하는 외눈박이 태풍이니
뱅글뱅글 천방지축의 살벌함으로 돌고,
할퀴고, 때려 부수는 행패만 앞세우니
평화의 어제는 간 곳을 물어 낯설다
거덜 난 세간 살이 걱정에 잠 못 이룸이
나만 당하는 일이 아닌데
고향 땅을 휩쓴 태풍 “차바”도,
미국 노스케롤라이를 강타한 “매슈”도
원근과 좌, 우, 구분 못하는
외눈박이의 짓거리라고 탓할 수만 없으니
아수라장이 된 세상 근심스런 그 틈으로,
깊어가는 가을 하늘 청명한 햇볕
한 걸음으로 달려와, 노여움으로 씩씩대는
폭풍의 눈,
부드러운 손 들어 쓰다듬는다
근심 걱정은 잊고 잘 여물 가을 알곡 생각만 하자며
세상 다독이는 귀한 햇볕 따시디 따시다
태풍에게 묻다 - 아버지
강수
세 번의 질문에 세 번 다 아버지를 부정했다
그가 아버지가 아니길 빌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라고, 그와 나의 인연이 잘못 연결된 것이라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바다 건너 태풍이 오고 있었다
웃통을 벗어 던진 그가 혼자 태풍 맞이를 하며 뛰어다닐 때
나는 그냥 서 있었다
조그만 태풍 하나에도 우왕좌왕했다.
조그만 언덕 위, 초가집은 튼튼해 보였다
그러나 해마다 엮어 올리는 초가집에 물이 새고 흙벽이 바스라져 내렸다
어떻게 집 한 채 없는 인생이 있단 말인가
태풍이 몰려오는 바다……
그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을 때
농삿일로 검게 타오른 등어리를 나에게 돌리고
검은 절망이 가득찬 눈빛으로 먼바다를 내다보고 있을 때
이제 더 이상 어떤 움직임도 소용없다는 것을 느꼈을 때
태풍의 눈 안에서 우리는 잠시 평안했다
멀리 물러났던 바닷물이 거대한 검은 벽이 되어 돌아올 때
우리가 서 있던 언덕이 휩쓸려 내려갈 때
그는 마지막 남은 힘으로 나를 품었다
그의 쿵쿵 뛰는 심장 소리가 내 몸속으로 들어왔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집
어떻게 집 한 채 없는 인생이 있단 말인가?
태풍이 온다
강수
길고양이 한 마리
가녀린 울음소리 흘리며
담장 위로 뛰어 오른다
울음소리 머금은
능소화 꽃줄기
담장을 따라
고양이 뒤를 쫓는데
자그만 파문으로 퍼져가는
여름
한낮의 고요
고양이 울음을 쓰다듬는
솜털 바람
태풍이 지나간 자리
강정
한 남자를 죽였네
비가 오고 있었네
넘치는 빗물의 길 한가운데
저 차고 딱딱한 물체가 접붙여질 것이네
아기 주먹 하나 저 벌어진 입을 열고 나오겠네
푸른 수액을 물고
달디단 시간의 껍질을 물고
핏물 솟구치는 가슴 움켜쥔 두 손 사이로
털복숭이 새 떼들이 둥그런 노래를 펼칠 것이네
죽이는 자는 죽는 자의 충실한 그림자라네
살아서 죽은 모든 것들의 고체 덩어리 언어가
붉은 흙을 씹고,
나는 다만 한 남자를 죽였을 뿐이네
비가 피가 되어 넘치는 날,
거슬러 오르는 빗물의 길 한가운데서
투명한 온천,
뜨거운 핏물의 온천 솟아오를 것이네
내 살이 흐물흐물 숲으로 변하고 있네
태풍 ‘올가’
강정식
철로도 떠내려가고
세상을 뒤집어놓은 채
짙은 먹구름을 망토처럼 덮어쓰고
야차같이 비정한 모습으로
‘올가’가 나를 찾아왔다
문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며
잠근 문이 다 부서지도록
두드리고, 흔들어 대며
분을 삭이지 못해 발톱으로 할퀴며
늑대의 소리로 울부짖다
나뭇잎들을 쥐어뜯고, 가지를 부러트리고
전깃줄을 끊고,
간판 따위는 닥치는 대로 부숴 가며
밤새도록 으르렁거리며 분풀이를 하다가
새벽녘에야 북으로 갔다
폭풍이 가고 나서
부러진 나뭇가지, 깨어진
유리 조각을 주워내며
정치판을 비관하고, IMF를 욕하며
떼돈 벌어 보려던
미욱함을 후회하며
오금이 저려 가슴을 쓸어 내며
남쪽 하늘을 힐끔거린다
태풍의 눈
강효수
오만과 교만으로 충만한 무지한 것들
열섬에 갇혀 거짓에 충실한 것들
고요를 슬프게 하는 것들을 위해
나는 큰 춤을 추노라
기쁨은 슬픔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흐름을 거역한 왜곡을 위해 나는
거꾸로 돌며 돌며 진한 푸닥거리 하노라
내 숨소리는 거칠어도
내 춤사위는 세상을 뒤집어도
나는 큰 눈물 흘리노라
나의 눈은 정온하나니
나의 심장은 평화롭나니
너의 영혼을 위탁하지 말지어다
원망은 없어라 슬픔은 없어라
귀 열고 거친 숨소리를 들어라
느껴라
크게 눈 뜨고 거대한 흐름을 보아라
느껴라
들리지 않거든 보이지 않거든
죽은 심장 주물러 벌써 죽어 있음을 느껴라
내가 내가 아님을 느껴라
나의 눈은 정온하나니
나의 심장은 평화롭나니
나는 흐름에 충실한 흐름일지니
나는 이제 크로노스를 죽이노라
나는 다시 카이로스를 살리노라
나는 흐름의 평화로 눈 감으며
나의 눈은 온전한 질서로 소멸하나니
태풍(颱風)
곽종철
지나간 자리마다
늘 큰 상처로 얼룩지니
네가 올까 두렵구나.
멀고 먼 남쪽 바다에
네가 나타나기만 해도
온 나라가 들썩이는구나.
오지 말라고 한들 안 올까
오더라도 안 오는 듯 오기를,
비껴갔으면 하는 요행도,
올 바엔 효자 노릇 하고 가야지.
올해는 몇 번이나 오고 갈는지
상처만 주지 말고 웃음을 다오
우리는 가물 때 도랑 칠게
정치와 태풍
권오범
바람기 다분한 바다라서
억겁의 세월 맴도는
달의 참사랑 나 몰라라
해를 향한 짝사랑에 눈멀어
따듯한 입김만으로 상상임신 해
출렁출렁 뒤척이다 낳는
돌연변이 외눈박이처럼
내가 소모품인 줄도 모른 채
힘 빼물고 한바탕 회오리치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입맛대로 써온 역사
엊그제 지나간 센 놈에게 버림받았는지
앞산 뒷산 너머 기웃기웃
간기 빠져 방황하는 뭉게구름들
태풍
권오범
바다가 열 받아 낳은 외눈박이
영양가 많은 어미 체온 먹고 거리낌 없이 자라
어미 뱃가죽 출렁이게 짓밟고 회오리치는
불효막심한 것
비구름 끌어안고 성숙해지면
힘 주체 못해 몸부림치다
뭍에 올라
파괴본능 드러내놓고 천방지축
종요로운 다리 잘라 팽개치고
산허리, 냇둑, 길 예저기 베어 먹은 지난 상처
아물지 못해 벌겋게 덧났건만
다시 넘보는 피도 눈물도 없는 몹쓸 것
온난화와 정분나
다산 소문 파다한 바다
심심하면 쑥대밭 만들러 올 고집불통 등쌀을
억겁의 붙박이 바위인들 어떻게 버티랴
태풍의 눈
권오범
조명발 잘 받던 별이
승천 앞에 두고 복에 겨웠는지
밥그릇 엎고 추락해
흠집 없는 임자 기다리는 수미산
군침 도는 노른자위일지언정
평소 시만 짝사랑하다 미쳐
개갈 안 나게 신들린 선무당 타고난 그릇을 알아
뒷짐 지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건만
고혈로 호의호식하다 나사 빠진
허수아비부터 오사리잡것들 까지
밥그릇 쟁탈전에 혈안인
2011년 9월 단대목
일찌감치 고질과 인연이 깊은
쌈박한 안 백신 발 벗고
치료하러 나올동말동하자
삼천리금수강산이 발칵 뒤집혔다
무성한 소문만으로도 그렇게 무서웠는지
경쟁적으로 꼬리 사리더니
유행처럼 번진 집안싸움에 식구끼리 뒤통수 쳐
혼비백산한 악성 바이러스들
천진스럽게 발 벗었다
콧방귀만 뀌다 발빼
돌풍은 가라앉았지만
언제 또 후폭풍이 일지는 조상도 기상청도 몰라
태풍이 지나간 자리
권오범
재수 없이 가로수로 팔려 와
남세스럽게 버텨온 몽당비 매무새 양버즘나무
아랫도리에 나이만 아름드리로 쟁이다
바람에게 떠밀려 희망마저 절단났다
평소 단골 노인들로 북적대던
담장너머 어린이놀이터엔 생맥주 간판이 누워있고
어쩌면 한 가족이었을 은행잎들과 은행 도사리들이
처참하게 매대기쳐 뒤엉킨 난리 통인 것을
때 묻지 않은 하얀 털옷 입고
담장에 기댄 헌옷수거함 지붕 끌어안은 채
눈물 콧물 주룩주룩 흘리며
서럽게 울고 있는 덩치 큰 곰 한 마리
외눈박이 시기가 인간의 사랑마저 이간질한 걸까
비를 언제부터 노박이로 맞았는지
엎드린 발가락으로 범람하는 물
만수가 되었을 뱃속 무게가 추락을 말렸나 보다
그렇게 오지랖 넓은 바람이 눈감아준 걸 보면
태풍 곤파스
김경렬
무엇이 원통할까 광란의 천둥소리
먹구름 덮어놓고 극한의 공포 주네
아뿔싸 덮은 내 허물 호통치네 사과 혀.
바람 소리 귀곡성 빗소리 눈물바다
60년 사라 태풍 이름은 곱다마는
그때나 지금이나 한 숨소리 높구나 천벌여.
바람님 자는가 장대 빗소리 자장가일세
내일 태양 눈을 뜨면 잠든 숲일랑 세울까?
흙탕물 잠긴 논배미 손발이라도 빌어 볼란다
태풍 링링
김경철
잠잠한 하늘에
무언가에 쫓기듯이
흰 구름과 먹구름
어디론가
향하는 아침
불어오는 바람에도
꼿꼿하게 서서
휘고
흔들려도
나무는 버틴다
기분이 상했나
가소로운 듯
눈 한 번 흘기고
강하게 몰아치지만
전율을 탄 건가
머리는
산발이 되고
잔가지는
이리저리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고
잘 버텼지만
순간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더는 못 버티고
목이 잘려 나간 듯
고개를 푹 숙인다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는
생을 살다가
나무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지만
시간이 흐른 뒤
부러지고
홀로 남은 나무에
새 생명이
다시 꿈틀거리기를
제13호 태풍 링링의 대의(大義)
김관호
구름마저 강물인 듯 흐르는 하늘
태풍에 마주서서 버티어보지만
지구의 자전과 함께하려는
저 강한 욕심을 보라
지구의 자전을 앞서려는
저 강한 욕망을 보라
우리가 잠시
멈춰서야한다
우리는 잠시
지켜봐야한다
이내 잠잠해질 것들과
끝내 참아내는 것들과
오늘 또 한 수 배우는 인생
오늘 또 한 뼘 커가는 인생
태풍 루사를 떠올리며
김귀녀
십칠 년 전 태풍 루사가 고향을 덮쳤다
루사가 내가 태어난 마을 집들을 덮쳤다
산 밑 계곡 근처에 집을 짓고 살던
집들이 떠내려가고
우리 집도 피해를 입었다
열한 명이 물에 휩쓸려 먼바다로 떠내려가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도 있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가 남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개울 건너 교회도 집도 사람도
모두 삼켜버렸다
내 길을 찾고야 말겠다고
돌아 돌아 내려온 작은 물길을 마구 휩쓸어
산 등어리 채 삼킨 것도 성에 차지 않아
마을을 휩쓴 것이다
이젠 내 집도 없는데 고향에 가면 루사가 생각난다
큰 비만 오면 염려되는 집들이 지금도 많다
계곡 밑 집들은 모두 염려된다
* 태풍 루사 2002년 8월 30일
태풍이 지나고
김귀순
집 앞 개울물 찰랑찰랑
넘칠듯 사납게 흐른다
검은 먹구름 동무되어
함께 흘러 가고싶은듯
개울물에 멱 감는다
여름내 웃자란 갈대숲에
모여든 불청객들
거친 물살에 시원스레
쓸려가니
한결 깨끗해진 개울엔
바람이 노닐고 구름이
출렁인다
개울 터줏대감인 백로 한 쌍
길게 목 빼고 뚝방에 서서
연신 흐르는 물속 주시하지만
거센 물살에 머리만 조아리며
서로 안타까운 듯 바라본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장맛비로 대청소하고
빗속에 날지 못한 다리 짧은
작은 새
처마 끝에 매달려 온종일
짹짹짹
바가지만 긁어댄다
태풍이 할퀸 새벽 바다
김내식
태풍과 드잡이 하느라고
밤을 찢던 파도의 거친 숨결이
칼날로 지구의 심장을 파고드는
새벽 바다에 날이 밝는다
생다지 투정도 언제나 말없이
포근히 받아주는 모래사장에
전장에서 튕겨 나온 해초의 파편
산산이 너부러져 밀려들고
갈매기는 혼비백산
어디론가 종적이 없다
하늘이 태풍의 눈으로 그리던 얼굴
슬며시 지우며 활짝 웃으나
한 번 솟구친 파도의 성깔
스스로 고요하게 수습 하자면
시앗을 본 아낙네 마음으로
한 2~3일은 족히 끙끙대며
신음을 하지 싶다
인사동에도 태풍이
김명희
살아남기 위해
태풍은 철조망을 빠져 나가고
삼류가수의 주름진 이마에서
꽃보라를 본다
골동품 그늘에 사는
인사동 사람들도
스트레스의 앙금을
용해하지는 못해
빌딩 그늘에서
저마다
노래를 부르지만
불면증에
그 나무는
흔들리지 않고
서 있다
태풍 올가
김명희
핵폭탄보다 더 무서운
'올가' 가 상륙한다는
그렇게 떠들썩하는 도시
수십 년생 '히말라야시다'가로수까지
뿌리째 뽑아 놓고도
가벼운 흔적만 남긴 채
북상한다고 소리친다
'올가' 가 올라오기 전에도
이미 쑥대밭 지옥처럼 되어 버린 대지에
사람들은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지조차 못하고
절망을 되씹기만 할 뿐인데
'올가' 7호보다 더 강한 태풍이
소리 없이 부서져 버리는 도시
하늘은 흙탕물처럼 흐려져 있을 뿐
태풍 그 뒤
김미숙
버드나무가 쓰러진다
쓰러진 채
가지 잘리고 둥치마저 뽑힌다
웃자란 잡풀들이
함성 지른다
여름 한 철
피부병처럼 뿌리내려
뽑히지 않는
그대, 슬픈 뒷모습
태풍 예보
김미정
남자의 방향이 바뀌었다
고기압과 저기압이 부딪혀 소문이 시작된다
처음 보는 날씨의 꼬리는 잊었던 장면을 떠밀고
높게 쌓은 기억의 담을 뛰어넘었다
수심 깊은 진실이 솟구친다
심리상태는 늘 바뀌는 거라고 진로 예측은 이미 늦었다고
여자의 등 뒤로 날아오르는 뿌리 없는 표정,
금이 간 근원지의 내부가 뒤집어진다
막다른 골목에서 머리와 꼬리가 훼손된 회오리가 돌고
연일 거리에 떠내려가는 젖은 알리바이들
천 개의 어둠이 바닥에서 잠든 손을 내민다
우린 다시 태어나기 위해
무서운 풍속으로 날아가는 중이다
뒤를 따라서
먼바다로부터
태풍이 온다는데
태풍
김상용
죽음의 밤을 어지르고
문을 두드려 너는 나를 깨웠다.
어지러운 명마(兵馬)의 구치(驅馳)
창검의 맞부딪힘,
폭발, 돌격!
아아 저 포효(泡哮)와 섬광!
교란(攪亂)과 혼돈의 주재(主宰)여
꺾이고 부서지고,
날리고 몰려와
안일을 항락하는 질서는 깨진다.
새싹 자라날 터를 앗어
보수와 저애(저碍)의 추명(醜名) 자취하던
어느 뫼의 썩은 등걸을
꺾고 온 길이냐.
풀 뿌리, 나뭇잎, 뭇 오예(汚穢)로 덮인
어느 항만을 비질하여
질식에 숨지려는 물결을
일깨우고 온 길이냐.
어느 진흙 쌓인 구렁에
소낙비 쏟아 부어
중압(重壓)에 울던 단 샘물
웃겨 주고 온 길이냐.
파괴의 폭군!
그러나 세척과 갱신의 역군(役軍)아,
세차게 팔을 둘러
허섭쓰레기의 퇴적(堆積)을 쓸어 가라.
상인(霜刃)으로 심장을 헤쳐
사특, 오만, 순준(巡逡) 에의 버리면
순직과 결백에 빛나는 넋이
구슬처럼 새 아침이 빛나기도 하려니
태풍
김성구
태풍 "더그"
모두들 불안해서
논과 밭으로
달음질한다
물길을 트고
새끼줄로 꽁꽁 묶어
고추나무 붙들고
폭풍전야에 농부가
가슴 죄이며 잠을 청하나
하늘을 가르는 섬광이 번뜩일 때
또다시 심장이 멎어
땅이 꺼진다
고요의 적막을 깨고
세차게 몰아치는
태풍 더그는
조용히 비를 뿌리고
사라지나
뒤 이어 찾아오는
태풍 엘리가
또 다른 근심을
세차게 몰고 오리라
인간의 첨단 과학이
손을 들고 하늘만 쳐다보니
오직 당신의 은총을
다시 한번 기다릴 뿐일러라.
* 태풍 "더그" "엘리"는 94.8.10-20 한반도를 지나갔다
태풍
김승택
1
나는 뜨거운 욕망의 자식이다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사하라 사막의 모래보다 더 뜨거운
태평양 바다의 한가운데
깊은 갈증에서 태어난 사생아다
바람으로 무장하고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몰아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주체하지 못하는 눈물
그대 사랑이 그리운 가슴 한가운데는
그래서 고요하다
2
바람도 숨죽인 사하라 사막
비단결 같은 평평한 모래 위
수많은 아지랑이가 손에 손을 잡으며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어차피 태양의 제국
태양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슬픔들이
바다 한가운데서도 몸을 사르며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분노는 마침내 거대한 폭풍우가 되어 태양에 맞섰다.
아지랑이의 혼들이 바람이 되고
슬픔의 혼들이 비가 되어
태양이 장악하고 있는 육지를 향해 진격했다.
속속 올라오는 승전보도 잠시
너무나 울어서 가벼워진 슬픔의 영혼들이
대오를 이탈했다는 소식이 본영(本營)에 들려오고
돌진하던 아지랑이 혼들마저 길을 잃었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
가슴 후련했던 역사도 잠시
또다시 이어지는 태양의 제국
올여름 태풍 1호
김옥자
어린 가지 바라보고 내일을 생각한다면
함부로 휘몰아칠 수 있으랴
서로 의지하고 버티는 힘을 키워야지
아무리 힘들고 바쁘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주위를 돌아볼 여유도 없이
여린 가지를 부러뜨리니
올여름 태풍은 피해가 대단하겠네
보고 듣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힘들수록 차분하게 불어주길 바라며
언제쯤 바람 잘 날 오려나
올 여름 태풍2호
김옥자
올 여름을 무사히 보내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네
요 며칠 바람소리가 예사롭지 않구나
밤잠을 스치고 괴롭더라도 견딜 수 있으련만
기세당당한 나무 한그루 거센 바람을 일으키니
어린 나무들 뿌리까지 흔들려 비틀거리네
자기 그늘이라고 힘자랑 하듯이
늘어진 가지로 후려치고 멍든 가슴 감쌀 줄을 모르네
떨어진 초록 잎 뿔뿔이 흩어져 변색하고
소문은 거센 바람을 타고 번져가는데
부디 살랑살랑 불어주길 바라는 마음
머지않아 겨울이 오면 누가 그늘을 찾아주기나 할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이 계절뿐인데
넓고 푸른 그늘에 넣어주면 어떠랴 감싸주면 어떠랴
참고 견디면 평화로운 날이 오려나
태풍
김용직
바람아 구름아
지난여름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니
그토록 많은 사연들을
가슴앓이를
서러움을
이제야 털어놓니
마음껏 목놓아
울고 가거라
마음껏
쏟아 놓고 가거라
나도 너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어 보련다
태풍 매미, 9월의 슬픈 날개
김윤자
그날 밤, 날개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날개에 희망을 매달면
밝은 세상을 만날 것 같아서
날개를 키우고 또 키우고
빈곤의 지하 동굴을 벗어나
세상에 나갈 때쯤
수십 폭 휘날리는 비단 날개로
높이 뜨겠지, 라고 꿈도 꾸면서
눈물 없는 하늘을 볼 거라 믿으며
다리는 가늘어도, 울음은 서러워도
날개, 날개 하나 만큼은
강하게 지키고자 하였더니
움켜진 바람, 철없이 새어나가
한반도의 남동쪽, 죄 없는 땅을 훑고 다니니
2003년 9월 11일 밤 9시에 눈 뜬 목숨
2003년 9월 12일 새벽 3시, 하룻밤 광풍의
짧은 생을 마감합니다.
선한 백성의 가슴에 마의 자국을 남긴
9월의 슬픈 날개는
뜨거운 사죄로 하얗게 접히고
이상 태풍 경보
김지향
몰아부쳤다 하늘에서 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먼지가루가 공중에 블랙홀을 만들며 휘돌았다
풀잎들이 나뭇가지들이 사람의 머리칼들이
일제히 치뻗어 블랙홀에 빠져들었다
블랙홀에서 푹, 푹, 푹, 연기를 뿜으며
나무. 풀잎. 머리칼 일당을 무(無)로 만들며 태워냈다
지남철이 된 연기 사이로
지상의 모든 존재들이 휘말려 올라가지만
이상하게도 비는 오지 않았다
존재들의 타는 빛,
빛들이 하늘과 땅을 가로지르며
우주의 치맛자락을 들었다 놓곤 했다
존재들의 파열음, 하늘을 부숴버리는 돌격,
돌격의 아우성이 빛을 뿌렸다
빛이 지나갈 때마다 땅의 구멍들이 보였다
보였다, 산속의 구멍, 나무 속의 구멍, 풀 속의 구멍,
건물 속의 구멍, 빌딩 속의 구멍, 길 속의 사람 속의 구멍,
구멍, 드러내지 않으려 감싸고 감춘 구멍들이 다아 보였다
땅이 하늘과 뒤바뀌리라고
태풍은 이런 날의 예고를 알려왔다
태풍
나상국
너! 정녕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아니 오지 말아야 했는데
집중 호우로 찢어지고 부러진 상처가
채 아물지도 않았는데
태평양에서 열대성 저기압으로 발현하여
예까지 질풍노도와 같이 빠르게 달려와
성난 얼굴로
날카로운 고양이 발톱을 세워
할퀴고 짖찢어 놓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변죽이 죽 끓듯 하는 네가
태연하게 예상진로를 따라서
가버리고 나면
치유하기 힘든
내상을 입은
그 깊이보다도
더 고통스럽게
얄밉기만 하다
태풍
나희덕
바람아, 나를 마셔라
단숨에 비워내거라
내 가슴속 모든 흐느낌을 가져다
저 나부끼는 것들에게 주리라
울 수 있는 것들은 울고
꺾일 수 있는 것들은 꺾이도록
그럴 수도 없는 내 마음은
가벼워지고 또 가벼워져서
신음도 없이 지푸라기처럼 날아오르리
바람아, 풀잎 하나에나 기대어 부르는
나의 노래조차 쓸어가 버려라
울컥울컥 내 설움 데려가거라
그러면 살아가리라
네 미친 울음 끝
가장 고요한 눈동자 속에 태어나
태풍의 눈
나희덕
칼라 힐스*의 태풍이 몰려오고 있다
그러나 고요하기만 한 곳,
미국의 수입개방 압력에도 아랑곳없이
반성의 바람 한점 불지 않는 곳,
아름다운 태풍의 눈이다
한치의 양보도 없이 달려오는 바람을 보라
정작 태풍이 할퀴고 가는 곳은
더 버릴 것도 찢겨질 것도 없는 땅,
빚으로 담을 쌓아가는 농가이거나
일년 내내 땀흘려도
백만 원도 채 못 거두는 들판이었다
그러나 저 바람 속의 완전한 무풍지대,
오히려 태풍에 의해 공고해지는 땅,
저렇게도 맑고 고요한 눈동자 속에
제국의 온갖 잡티와 벌레들이 번식하고 있다면
그 누가 믿겠는가
* 칼라 힐스 : 미국 무역 대표
태풍
노정혜
나뭇잎이 바람에 세차게 흔들린다
태풍이 온다고 난리다
많은 비도 태풍이 손잡고 온다네
지난 상처도 치료되지 않았는데
또 온다고 난리다
오려면 조용히 오시오
들녘에 고개 숙인 알곡은 어쩌려고 하시나
애타는 농심은 어찌하려오
곱게 지나가시오
더위는 무서워 멀리멀리 도망갔습니다
바람이 찹니다
오시는 태풍이여
곱게 지나가시오
가시는 길
전송하오리다
태풍 링링
노정혜
어둠을 뚫고 새벽이 열린다
계절은 소리 없이 흐른다
한치의 오차 없는 73일이 한 계절
차디찬 겨울을 뚫고
봄에 태어나 가을이면 수확을 해야 한다
쨍쨍 내리쬐는 떠거운 열정으로 시험
하늘은 높고 시원한 바람에 행복
잠시 잠깐의 안심도 그냥 두지 않네
또 시험에 들어간다
무서운 태풍 링링이 시험을 한다
이 관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아름다운 가을
풍요로운 가을을 맞을 수 없다
태풍 링링이 지나간 자리에는
깨끗한 지구 신선한 공기
잘 영근 곡식
맛갈나게 잘 익을 과일
곡식과 과일이 미소
아낌없이 주련다
올가을에 가정마다
풍성한 알곡 잘 익은 과일
아름답게 물던 단풍
웃음소리 듣고 싶다
태풍
노향림
바닷바람 속에는 수천수만의 갈매기들
날개 비비는 소리가 들린다
벼랑 위에서나 갯벌에 앉은
괭이갈매기들의 머리와 가슴은 하얗다
민박집 커단 등이 내걸리고
바다를 향해 앞가슴 풀어헤친
상수리나무 잎새에 몰린
파도 소리가 쏴아쏴아
쏟아질 때쯤
폐선들은 빈 채로 폐기된다
누구도 바다로 내려가지 못한다고
배가 뜨지 못한다고
바다는 빈 채로 경고판을 들고 대기 중이다
바람 소리 사나워지면
한 마리 공기조차 날지 않는다
오로지 위태롭게 벼랑에 매달려
알을 품는 괭이갈매기들
평생 바다에서만 살고 사람을 피하지 않는
그들도 벌써 며칠째 움직이지 않는다
만리 밖에서 태풍이 오는지
경전처럼 누군가 몰고 올 적막을 기다린다
멀리 상수리나무의 옷이 다 헤졌다
태풍 같은 사랑
도지현
태풍의 눈
가장 중심부는
고요와 정적만 감돈다
그런데 그녀는
태풍의 가장자리
제일 끝부분에 자리했나 봐
멀미가 난단다
그것을 사랑의 멀미라 하든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데
태풍이 지나간 자리
피폐해지고 폐허가 된다는데
부디 그런 사랑은 아니기를
태풍
목필균
강둑이 무너진다
뿌리째 뽑혀져 떠내려가는
묵은 상수리나무
둥지를 잃은 새의 울음소리가
거센 빗소리에 휘말린다
먼 바다도 허옇게 뒤집히고
범람하는 황톳물이
마음대로 길을 내며 달린다
하늘이 무너진다
살고 싶은 것과
살고 싶지 않은 것의 싸움
한 젊은이의 목숨이 절단된 채
위성을 타고 절규한다
아득한 사막의 나라에서
고주파 위성방송으로 퍼지는
참수된 내력이
고국 가슴에 대못을 박는다
꽉 다문 입, 태풍이 오고 있다
문인수
새벽에 들어오는 고깃배들을 본다
빈 그물엔 불가사리만 흉흉하게 붙어있다
밤새 건져 올린 죽은 별들
저것이 희망이었겠으나 힘껏 탁탁 털어낸다
마음이 또 꽉 다무는 입, 저 긴 수평선
방파제 굵은 팔뚝이
태풍의 샅을 깊숙이 틀어잡고 있다
태풍 너구리
박근철
너구리가 몰려온다.
바다가 성낸 너구리와 한편이다.
담장을 넘어 창문을 할퀴고
농작물을 할퀴어
못 가는데 없이 틈만 있으면
손톱과 하얀 이로 달겨든다.
너구리의 요동에
선착장은 키를 넘는
대군과 맞서 싸우고
창과 방패로 지키려는 자와
성난 자의 대결이 시작된 오후
연약한 인간들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방파제야 물리쳐다오
담벼락아 이겨 내다오.
아이처럼 잉잉거린다.
거대한 너구리
분노한 너구리
야생의 분노가 태산 같다.
칭얼대는 자기중심적
어린아이 같은 인간들
너구리의 기습에 숨만 죽이고 있다
태풍(곤파스)
박인걸
미쳐버린 바람이
이리 불고 저리 불어
아늑한 것들을 휘젓고 어디론가 달아났다.
기댈 곳 없는 가로수는
억울하게 수명을 다하고
둥지 잃은 새들은
앉을 곳이 없어 슬피 운다.
거칠게 쏟아지는 빗물은
아무 데나 도랑을 내고
놀란 바닷물은
하루 종일 거품을 토한다.
남의 영토를 밟고 간
성질 사나운 폭군(暴軍)의
당당한 그 모습이
아직까지 얄밉기만 한다.
부러지고 쓰러지는
참혹한 전장(戰場)에서
살아남은 생명들이
한없이 대견스럽기만 하다
태풍(볼라벤)
박인걸
광우(狂牛) 광견(狂犬) 광인(狂人)이 날뛰더니
이제는 광풍(狂風)이 일어섰다.
먼바다에서 일어나
물거품을 연실 뿜어대며
매우 사납게 날뛰다
요란스런 괴성을 질러대며
닥치는 대로 부서트릴 때
누구도 그와 맞설 수 없었다.
억압된 감정을 순화하고 싶지만
발산할 기회를 여러 차례 놓치고
누적된 응어리가 곪아터질 때
누구나 광기(狂氣)를 부린다.
망망한 수평선 끝에서
섬 사이를 배회하고 있을 때
아무도 그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누구도 그를 보듬지도 않았다.
눈은 벌겋게 충혈 되고
표정은 괴물처럼 일그러졌다.
이성(理性)은 산산이 부서졌고
의지(意志)도 제어기능을 잃었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원한과 증오가
잔인한 사자처럼 변하여
종횡무진 하던 날
숨을 죽이며 지켜봐야만 했다.
바다와 육지가 맞닿는
그 어느 꼭짓점에서
자신을 보듬어 줄 제 어미를 만나야
저 광란(狂亂)이 멈출 것이다.
순한 양이 될 것이다
태풍의 지문
박종인
바람의 악력(握力)에 나무가 뿌리째 뽑혔다
허공에 찍어대던 지문을 나무에게 찍다니,
그때 인주 묻은 바람의 엄지손가락을 보았다
바람의 지장(指章)이 집과 사람에게도 찍혔다고
아침부터 뉴스가 소란했다
매미라는 바람이 지나갔다
그녀의 이동 경로를 눈치챘지만 아무도 차단하지 못했다
툭, 건드린 베란다 유리창이 박살이 났다
그 지문을 지우는 데 며칠이 걸렸다
이웃집 부부는 늘 미풍이었다
그 웃음 속에 태풍이 숨어 있었다
남자에게 뛰어든 바람이 빠지기도 전
이혼이라는 지문을 달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태풍의 채찍
박진표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걱정말자
마음의 근심
가슴에 키우지 말고
내일 뜨는 태양 아래
또 다른 도전과 희망
가슴에 허락하자
기우는 인생 말고
채워지는 삶을 살자
불평과 낙심 비우고
푸른 꿈과 희망을 채우자
태풍의 채찍도
알고 보면
견디고 이겨내
다시 일어서라는
희망의 회초리
떠오르는 태양 앞에
당당한 내가 되자
행복한 우리 되자
태풍에게
박태원
나비야
네가 밉기는 처음이다
민들레 아지랑이 속
맴돌던 날개 짓
이상한 바람을 타고 왔구나
광풍 속 숨어 오지 말고
땅 파는 아우네
농부 집 들리지 말고
훠이 훠이 가거라
너의 앙칼 한 손톱
살점 뚝뚝 떨어지니
몸서리 농익는다
작아져라, 작아져라
태풍아 작아져라
이 밤 쓰라린 흔적
문신 새기지 말고 가거라
잘 익은 열매 낙하 않도록
열매 가지 새로
있듯 없듯 새어 가거라
태풍이 온다
백원기
가을 태풍 볼라벤이 온다
괴괴한 세상
곧 닥칠 것만 같은
정적이 감돌고 있다
사면은 어둡고
자연의 숨소리조차 멈춘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해가 생기고 달이 생기며
별이 만들어지던 때
가득히 밀려온다
창문이 흔들리고
나뭇잎이 경련하듯
떨고 있는 불안한 시점
무시무시하게
호통칠 듯 하늘이
땅을 노려보고 있다
나무가 뽑히고
유리창이 깨지는
칼처럼 휘두르는 위력
B-29 비행 음이 가까워지고
기상 캐스터 목소리가 다급하다
효자 태풍
백원기
근심 걱정 불안에 가둬놓더니
지나간 자리 파편이 우수수하다
때가 되면 어디서 날아와
풍비박산 만들어 놓고 가면서
많은 사람 눈물도 빼어 놓고
한 숨도 길게 늘여 놓았다
녀석의 심술도 한계가 있나
지나가고 나면 시원한 것이
볼이 붓고 입이 나오던 사람
보조개 꽃이 피고 입술이 열린다
지긋지긋한 무더위 몰아냈으니
누구도 당할 수 없는 질긴 무더위
고 녀석이 싹 쓸어다 버렸다고
비를 뿌려주고 부채질해대니
시원하다고 웃음소리가 난다
집집마다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
태풍은 무더위를 쫓아내고
가을을 데리고 왔단다
태풍 속에서
복효근
벌써 바람이 몰려오고
일기예보에서는 밤새
한 차례 태풍이 올 거라고 했다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새소리 그치고
몇 마리 새들만이
바람이 몰려오는 쪽을 향하여
나뭇가지를 지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서둘러 지붕에
비닐을 덮고 돌을 얹었지만
새들은
가끔 가지를 골라 옮겨 앉을 뿐
집을 짓거나 고치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새들이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울음이거나 노래가 아니었다
새들은 눈을 감거나
몰려오는 구름을 외면하지 않았다
결코 어둠에
균형을 잃지 않았으므로
이윽고 아침이 왔다
아직 세찬 비바람 속을
몇 마리 새가 가지에 앉아 있다
폭우를 나뭇잎 몇 개로 가리는 새는 없다
바람 부는 쪽을 향하여
새는
어느새 태풍이 되어 있었다
태풍의 눈
성백군
재주, 부산, 울산을
마구잡이로 짓밟고 간 ‘차바’나
미국의 노스캐롤라이나, 플로리다, 조지아를
쑥대밭으로 만든 ‘매슈’는 이름만 다르지
다 태풍의 종자다
이놈들의 특징은
원근과 좌우가 구별이 안 되는 외눈박이라
천방지축이다
사람 무서운 줄 모르고
자연의 아름다움도 모른다
아무 때나 어느 곳에나 끼어든다
여러 사람이 죽고, 수백 채의 가옥이 물에 잠기고
군데군데 산이 무너지고 강이 범람했다
사람도 외눈박이가 있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나
하나밖에 모르는 극단적 외골수
돈이면 다 된다고 행동하는 부자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정치가, 종교인
조심해라
외눈 눈알이 뱅글뱅글 돈다
도는 물이 소용돌이치며 주변을 다 빨아들이듯
잠시만 보고 있어도 혼이 빨려드는 것 같아
두 눈을 가진 정상인은
앞뒤 구별 못 하는 외눈박이를 절대로
이길 수가
없다
태풍
손병흥
전남 목포를 지나 광주와 전주를 거쳐 휩쓸고 간
속도를 높여 빠르게 이동했던 태풍 솔릭(SOULIK)
예상 진로 방향 튼 채 수도권 비켜 충청과 강원으로
가속되기 시작해 국토를 강타해버린 태풍의 중심 이동
폭우 퍼붓고 동쪽 해상으로 빠져나간 강한 태풍의 위력
한반도 내륙에 상륙해 위치 바꿔가면서 관통한 진행 방향
시시각각 막대한 피해를 남겨가며 속도마저도 높여가던
전국이 고기압의 가장자리에 든 계속 바뀐 경로 태풍 비상
강한 비바람에 밤잠을 설치게 했던 태풍의 영향 든 기상 상황
재난 대비와 온 국민의 촉각 곤두세웠던 초미 관심 끈 태풍 진로?
태풍 주류 비와 비주류 비
송시월
북태평양에서 남하하는 목소리 큰 태풍 주류 비와
남해안을 돌아 북상하는 몸집이 왜소한 태풍 비주류 비가
인왕산에서 술잔 부딫히며 시시비비 말씨름을 하다가
함께 굴러 떨어진다
태풍 주류 비
엎어지고 회오리치며 빌딩 나무 전선줄까지 비틀어 짜며
비비비(非非非)를 지붕에다 창문에다 집집마다 퍼붓고 다닌다
정면으로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한 드럼 퍼붓는다
귀 막고 눈 감고 몸짓도 소리도 없이 서 있는 가로등을
넘어뜨린다
태풍 비주류 비
쌩쌩쌩 웅웅웅 덜커덩덜커덩 녹슨 철책을 흔들어보다가
거리로 뛰쳐나간다
8차선 도로 중앙선이 비비비비 주르르륵
꼬였다 풀렸다 흩어진다
구름 사이로 눈 부릅뜬 해, 실핏줄이 툭툭 터진다
나는
태풍 주류 비와 비주류 비를
포르말린 병에 넣어 거리에다 전시한다
태풍
송연우
내일도 비가 온다고 한다
삼복더위는 벼락에 부러지고
천둥의 방사는 풋곡식, 과일 마구잡이 찔러 놓고
장대비 사정없이 쏟아진다
찢겨진 삶이 부초처럼 뜬다
분뇨와 기름이 엉켜
속을 뒤집어놓는다
황토물이 아무 데나 그은 낙서
지운다 또 지운다 사이사이
발밑에 자꾸 절망이 고여든다
화솥 고무래 넉가래 동구미
마루 위에 쌓아 놓는다
이대로 수장시킬 수 없는 내 젊음
소매를 걷어붙이고 일어난다
태풍이 지나간 저녁 들판에서
신경림
사마귀와 메뚜기가 물고 뜯고 싸우고 있다
방아깨비와 찌르레기가 여름내 가으내
내 잘났다 네 잘났다 다투고 있다
뉘 알았으랴 그때
하늘과 땅을 휩쓰는 비와 바람이 몰아쳐
사흘 밤 사흘 낮을 불다 가리라고
이제 들판에는 그것들
부러진 날갯죽지만이 흩어져 있다
토막 난 다리와 몸통만이 남아있다
태풍이 지나간 저녁 들판에 서 보아라
누가 감히 장담하랴
사람의 일 또한 이와 같지 않으리라고
태풍
신광덕
하늘을 볼 수 없는 절박함의 항해
바람은 쇄에액 휙 퍽 미쳐 날뛴다.
풍속 불규칙하여 풍향은 가늠할 수 없음에
하늘을 가린 파도는 브릿지 지붕을 덮쳐 씌운다
굵고 짧은 바람 높고 낮은 파도
불규칙한 파장 짝작꿍 니(파도)에 부는 바람 미쳐서 덮치니
작은 배는 위태하다
남 실파도 일렁이면
하늘은 사라져 보이질 않음에 작은 배는 잠수함 되어
연속으로 덮쳐오는 짝짜꿍 파도 염려하며 절박함은 극에 달한다
바다 밑으로 철퍼득하며 선체를 들었다 놓으면
한참 동안 조타기를 붙들고 멍하니 있을 수밖에
가랑이 사이로 간지러운 전율을 전해온다
연속으로 부딪쳐오는 짝짜꿍 파도
머리끝 쭈뼛하며 두렵다
절박의 항해는 하늘을 볼 수 없음에
생사를 하늘에 청할 수도 없어라
깃발은 찢어져 너덜거려진 지 오래고
항해등은 불을 밝힐 수 없음에 지옥의 천지로다
제발 엔진만이라도 제대로 작동되길 빌어본다
24시간의 사투에 실점해진 파도
그때서야 한 개비의 담배 맛을 알아본다
싹쓸바람(태풍)
신영희
놀던 새
잠적해 버린
하늘에는 먹구름이 진을 친다
바람 가지는 더 센 끝을
비창처럼 들고
뿌리를 더 깊이 박고 있다
세상 짐 내려놓고
운명의 강을 건너버린
영혼 없는 백발의 이팝나무
영원히 달빛 아래 누웠다
놀란 가슴처럼
꽁꽁 얼어버린 유리창
바람의 한계를 가늠하지 못하고
멍청하다, 멀겋게 보고만 서서
차라리
쨍그랑 깨지기라도 해
송송 뚫리는 바람
기운이라도 쭉 빠지게
태풍이 출입 금지된
대문이 흔들려 자빠진다
몸부림치는 뜰
사라호
심의운
비 맞은 기와지붕이 축 처지고
초가지붕 조롱박들은 마당 구석에 처박히고
마루 밑에 뱀이 갈 곳이 없어
밥상머리에 어슬렁어슬렁했다
천둥 번개가 집이 내려앉은 것처럼
굉음을 내며 번쩍번쩍 이고
뒷산에 황토물이 밤새도록 철썩철썩
소리 내며 내려오고
감나무가 뿌지직뿌지직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도둑 고양처럼 눈만 반짝 반짝이며
번개 치는 문살만 쳐다보고 있었다
먼동이 밝아 오자 보릿짚 우의를
덮어쓰고 감나무 밑에 우수수 떨어진
상처 난 생감 한 주먹 쥐고 들어와
맛을 보고 있는 사이
뒷산 개골창에 하얀 폭포가 무섭게
떨어지고
이 골목 저 골목 황토물이 누런 들판을
덮고 말았다
프라다 리스 가로수가 넘어지고
신작로는 어디로 사라지고
논과 밭 귀퉁이를 먹어 치우고
대수를 이루며 바다가 나타난 것 같았다
덜 익은 풋감을 단지에 삭혀
한 개씩 나누어 먹던 그해 여름 끝
고추장에 보리밥이 먹고 싶었던 시절
일천구백오십구 년 구월 십이 일
추석날 아침 사라호 태풍이 불었다
태풍 루사
심지향
분에 넘치는 풍요 속에
자연의 소중함을 잊고
교만과 허구에 물든
인간에게 내리는
저 대자연의 응징
가을이 오기 전에
떠나는 여름의 횡포가
너무 광폭하고 무서워
소식을 궁금해하고
안녕을 묻기가 두렵다
자연에게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은
있는 그대로의 양상으로
남겨 두는 일임을 인식하기까지
너무 큰 대가를 치렀다
무섭고 가슴 떨려 초조한
8월의 마지막 날
결코 잊을 수 없네
자연은 우리의 것이 아닌
후손에게서 빌려온 것
태풍
오보영
1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데
불어오는 바람결에 잎새들
춤만 추고 있네
떨어질 운명에는 전혀 안중에 없고
언뜻 보아 시원함에 그저 몸 내어 맡기고
신바람이 빈 몸만 흔들거리고 있네
뿌리가 뽑히려고 하는데
가지들은 뒤엉키어
힘겨루기만 하고 있네
말라버릴 운명에는 전혀 무관심한 채
몸통 굵기 자랑하며 서로
밀쳐만 내고 있네
이를 어쩌나!!!
뿌리채 흔들리고 있는데
뿌리가 뽑히려고 하는데
2
언뜻 스치고만 지났는데도
잠시 머물렀다 떠났는데도
깊은 뿌리 나무도
뽑아버리고
굳게 박힌 바위도
굴려버리니
제발
바람아
네 가진 힘을 좀
바로 쓰거라
너 부는 방향을 좀
바로 향해 가거라
3
바람이어라
정녕
한순간
발길 멈추게 하고
가슴 얼얼하게 만드는
이 강한 부딪힘은
분명
휘몰아친 소용돌이 태풍이지만
틀림없이
등 돌리고 잠시 제
자리에 머물러있기만 하면
금방
스치고 지나가는
곧 흔적 없이 사라져갈
덧없는 바람이어라
4
순전히 당신 덕입니다
내가 이렇게
님에게로 내달려와
심하게 목말라 하는 님
갈증을 품어줄 수 있게 된 건
오직
등 떠밀어 준 당신의 힘
바로
아낌없는 당신의 사랑 덕분입니다
길 한가운데 딱 버티고 서서 막아서는
더운 열기 때문에
뻔히
내 님 애타 하며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도
선뜻
님 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안타까움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르며
멀찌기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오늘 당신이 센 바람으로 밀어주셔서
별 힘 안 들이고 거뜬히
님에게로 다가와
얼싸안고 상봉할 수 있게 되니
얼마나 큰 기쁨이고
당신에게 감사한지요
5
덩치가 좀
크다고
가진 힘이 좀
세다고
맘 여린 들풀들 무시하면서
오만하게 군림하던 나무
얕은 뿌리 뻗어 겨우 몸 지탱하 면서도
큰소리 떵떵 쳐대던 허우대만 멀쩡한 나무
혼 좀 내주려고
지나는 길 급히 들러 스치고 지나가니
들꽃 너희는 당황하지 말고
소박한 모습 그대로
피어있거라
태풍 비 희망
오보영
웅덩이 물 분탕질하던
미꾸라지
행여
장맛비에 쓸려내려 가려나 했더니
여전히 남아
맑은 물 흐리고 있네
몰려오는 태풍 비를 기대해볼까
미꾸라지는 물론
제발
잡동사니 오물까지도
몽땅
한꺼번에 다 쓸어가 버리면 좋으련만..
다시 한번
희망을 가져보누나
태풍 유감
오보영
제발
아무 흔적 남기지 말고
어서 빨리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숨죽이고 있는 몇 시간이
마치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네 못된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터이라
혹여 네가 이전처럼 마구 할퀴고 지나가
여린 가슴에 큰 상처 남길까
염려함이라
태풍의 본색(本色)
오보영
잎이 떨어지든 말든
가지가 부러지든 말든
상관이 없다
상처 입히는 게
생채기 내는 게
목적이니까
뿌리가 흔들리든
뿌리가 뽑히든
상관이 없다
숲 망가트리는 게
숲 색깔 바꾸는 게
속셈이니까
태풍 전야
오보영
쥐 죽은 듯 고요한
적막이
숨 막혀오는 답답한
침묵이
온 천지사방을 짓누르고 있다
곧 거대한 회오리가
불어 닥칠 것만 같아서
꼭 무슨 엄청난 변고가
터질 것만 같아서
태풍이 머무는 계절
오승한
계절이 바뀌는 길목에
태양이 사라지고 없다
먹구름이 밀려와
태양을 가두고
캄캄한 하늘엔 비가 내린다
을씨년스러운
참혹한 바람이
세상을 어지럽힌다
흔들리고 꺾이고
흩어져 갈팡질팡
모두가 앓아누웠다
또다시 태양이 뜨고
푸른 하늘이 열려도
치유되지 않을 깊은 상처가 남아 아프다
너의 존재(태풍 다다스)
오애숙
네 존재 알면서도 어쩌지 못하는 맘
그 누가 이맘 알까 간담이 서늘해도
기어코 찾아오려는 잔인함에 손 드나
물 폭탄 대책 없어 당하던 너의 존재
북상에 따른 대책 눈물이 앞 가리나
태풍의 이름 다다스 경험이란 뜻이니
다행히 예보 있어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쳐 가지 않고 강풍의 위험 위해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줄이려고 힘쓰누
태풍 루사
오하룡
한반도가 가장 만만하였다
일본과 대만은 엉겁결에
그냥 지나쳤다
중국은 너무 넓고
소련은 너무 멀었다
태풍 루사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그걸 어찌 알겠는가 마는
그렇다고 치부해버리자
최근 들어 한반도가
조금 콧대 높아진 것도 눈에 띄었다
북은 북대로 쌀밥은커녕
보리죽도 못 먹으면서
껍죽거리고
고얀 것들
남은 남대로
겨우 쌀밥 좀 먹게 되었다고
천지 모르고 찧고 까불고
고얀 것들
그렇지 않고서야
차마 이 지경일리야
태풍 매미 지나간 후
오하룡
그날 매미는 매미가 아니었다
흡사 “웃겼구나 태풍 작명한 과학자들이여”
하며 비웃기나 하듯 사납게 설쳐댔다
나 역시 매미란 이름을 보잘것없고 가냘픈
곤충으로만 의식하고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과학자들이 작명에서 기대했듯이
곤충답게 유순하게 우리나라를 스쳐 지나가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추석 다음 날
우리는 추석을 무사히 보낸 안도감에
약간 피곤한 몸뚱이만 의식하고 있었다.
제사 지내고 성묘 다녀오고
오랜만에 가족 친지 더불어 회포 푸느라 마음도 몸도
약간은 노곤하여 쉬고 싶던 참이었다
매미 따위 설쳐보았자 어디 흔적이나 남기랴
내일은 씻은 듯 물러가고 쾌청의 일상이 기다릴 것이다
그런데 턱없게도 매미는 딴 궁리를 하고 있었다
아니 하늘의 뜻은 딴 데 있었던 것이다
이참에 우리에게 행동으로 보여줄 게 있었던 것을
우둔한 우리는 짐작도 못 한 것이다
지난해에 루사를 통해 엄청난 재난을 안겼지만
그것 가지고는 미흡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순진한 우리는 어이없게도 이런 하늘의 뜻은
까맣게 모른 채 일신의 안식에만 매달려 있은 것이다
우리는 더러 느긋이 자리를 펴고 눕기도 하고
더러는 정답게 나들이에 나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이런 행동 또한
하늘의 대단한 뜻이 함축돼 있음을 어찌 알았으랴
이래서 하늘의 뜻은 무한함을 우리는 꼭
사후에 깨닫는 미물임을 증명하게 된 것이다
평소 하늘이 은근히 경고할 때
방심 말아야 하는 것을 또 뼈저리게 맛본 것이다
태풍과 허풍
오현정
호랑가시나무를 키우는 폭염
땡글땡글 걸어 잠근 생각 벗어놓고
너에게 금빛 루돌프가 올 거라는 페르마의 정리를 기록 중이다
흠, 흠, 흠 고개를 갸웃거리다
오로라 헤치며 찾던 황소자리 고리에 건다
금빛 이어진 무늬, 숫자 대신 삶의 법칙을 간명하게 전하는 대수학代數學이다
뿔은 말아 가슴에 넣고 말랑말랑해진다
흑마술에게 가장 작은 것을 주고 어마어마해지는 건
변수를 사용해서 다향방정식을 푸는 것이다
목젖을 가다듬고 흠, 흠, 흠 할수록
가학적 위트는 로바니에미 눈 마을의 썰매 우표
추상성을 벗기면 산술적 수 대신 의미가 돋을새김이다
별빛 목걸이가 내 어깨를 흠, 흠, 흠鑫 감싸는 동안
빨간 옷을 입은 엘프가 빈 쟁반을 들고 서쪽으로 달아난다
태풍의 눈
유응교
기존의 모든 질서를
확 뒤집어 버리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피 묻은 칼을 빼어 든
혁명가의 눈을 보라!
원래의
모습으로
세상을 뒤 집어 엎기 위하여
시계의 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내 무서운 악마의 눈을 보라!
나무와 숲을 없애고
석유를 퍼 올려
대기를 검게 만들며
극도의 이기심으로
푸른 별 지구위에 선을 긋고
전쟁을 일삼는 땅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리라.
한없이
고요한 평정의 눈으로
세상의 모든 허물을 보노니
바다를 건너 비로소
이 땅 위에서
커다란 눈으로 보리라
내 눈을
악마의 눈이라 불러다오.
천사는
천사를 가까이하고
악마는
악마를 가까이 하나니
악행을 저질러 온 너를
오늘 비로소 응징하리라
태풍의 눈
유일하
열려진 하늘로
이름 석 자 날아간다.
가을하늘에
그렁그렁 맺힌 내 마음
뒤돌아보지 말고
어서어서 가거라.
구름에 실려
태풍의 눈 속으로 사려앉아
태양빛 내리쏟는
그곳에 머물어라
그곳이 바로 너의 천국
이곳은 돌아가는 지옥
태풍(颱風)
유창섭
산등성이와 계곡
흥건히 젖어
산이 움직인다
나무들이 눕고 뿌리 뽑혀
들판도 겁 먹은 채 눕는다
어느 참았던 생각들
폭발하여 내뿜는 연기
地心을 달구던 노여움의 뿌리
흠뻑 젖어
오늘에야 홀가분해 졌을까
휘도는 바람
애처롭게 매달리던 과일만
수북이 떨어져
가슴 아픈 하루
아무도 원망할 수 없는 하루
거룩, 거룩, 거룩한-태풍(颱風)
윤관영
그때 나는 그를 코앞에서 맞은 격이었다
제 속에 비를 심었을 때의 그는
위압적일망정 빠르거나 사납지는 않았다
맨몸 저 혼자일 때 그는
소리로 제 길을 내었다
움직이지 않는 것들, 눕지 않은 것들은
모조리 그를 화나게 하는 것들이었다
집 모서리 돌면서 멍이 들고
추녀에 갈라질 땐 소리내면서 울었다
지붕에 부딪칠 때 그는
슬레이트 용마루를 뜯어 올리면서
몸을 꼬아 휘몰아쳤다 사실,
내가 그에게 용서받은 것도 그가 밀 때
몇 발자국이라도 뒤로 밀리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비를 속에 심지 않는 그는
소리를 심은 채, 낙엽과 검불과 비닐과
비닐하우스와 고춧대와 빨래를
그의 내부로 빨아들이는,
-심술, 그런 심술이 없었다.
나는 그의 심술 앞에
그나마 비가 안 와서 다행이라고
몇 걸음 또 물러서면서 바위 곁으로 피했다
바위가 둥글다는 사실이 예사롭지 않게 만져졌다 멀리
포기한 눈에 나무들이 미친 듯이
바람 쪽으로 휘어지는 것을 보았다
저렇게 온전히 심술에, 상처에
비위를 맞추는 움직임이 있었다
저렇게 길게 상처의 소리까지 받아내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산 전체가 능선을 자꾸 낮추면서
바람에 자신을 맞추고 있었다
나무는 넘어져서도 잎과 가지를 흔들고 있었다
저 거룩, 거룩, 거룩한, 손길들 속에
나, 살고,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에
윤영초
폭우가 한바탕 난동을 부리자
나무들이 몸부림치고
꽃들이 아파하며 눈물 흘린다.
사람의 집도 그렇게 흔들렸다
그대가 다녀간 다음 날
옥빛 하늘과 도시의 맑음이
우리를 변덕스럽게 한다.
늘 안전지대를 찾으면서
다른 꿈을 꾸는
그대, 귓전에 쏟아붓던 폭언이
머리카락은 사시나무로 떨고
기침 소리에도 놀란 가슴 된다.
바람이 잠들면 적막감에 불안해진다
사오마이 태풍
윤용기
프라피룬 태풍이 호남지역을 강타한지가
엊그제 같은데
또 다시 사오마이 태풍이
영남지역을 관통하고 있다.
수확기 계절의 태풍은
너무나 위력이 크다.
피해도 그 만큼 크다.
내 고향 우곡에도 낙동강 뚝이 무너져
태풍의 피해가 크다고 한다.
한강 물이 불어나 잠수교가 통제되고
연 나흘 비바람은 계속되고 있다.
황토색 흙탕물이
한강의 찌거기를 훌고 지나간다.
5미터 넘는 성난 파도가
뭍을 향해 돌진한다.
그 동안 못다한 사연들을 가슴에 품고
뭍을 뭍을 향하여
태풍 볼라벤에 채인 슬픔
윤의섭
바다가 뒤집힐 듯이
폭풍의 언덕을 이룬 파도
가두리양식 뗏목을 육지에 패대기 첬으니
어부의 울부짖음이 하늘을 찌르고
때리듯이 아픈 바람이
풋고추를 떨어트리고
비닐하우스를 날려 보내니
농부의 타는 가슴 숯검정 같네
산등성이 과수원에
익어가는 봉지 배 떨어지고
과목도 꺽어 놓았으니
5년 공들인 과수원집 초상난 듯 슬퍼하고
골자기에 가려 지은 축사에
닭도 채이고 오리도 죽어
잠 못 이룬 목축인의 눈두덩이 부어오르네
볼라벤의 날쌘 강풍이
할퀴고 간 흔적
올해 농사 망친 슬픔
추석 상 차릴 일이 두렵기만 하구나
태풍을 멀리 보내고
윤창환
태풍을 멀리 보내고 나서
손님 맞을 준비를 합니다
강풍에 꺾어진 나무들
뿌리째 뽑아 저버린 나무들이
나를 슬프게만 합니다
어렵사리 기계톱을 구하여
길을 가로막은 나무들을 치우고
힘들어하는 어머니에겐
위로의 말 한마디 하질 못하고
땀 범벅이 된 나의 자신에게만 질책합니다
오늘 오후엔 손님을 받으려고
어머니와 둘이서 힘겹게 치워진 낚시터를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어 봅니다
오후 늦게 당도한 조사 두 분이
낚아 올린 월척 붕어와 잉어가
어머니와 나를 감싸주며
대신하여 위로해주는 것 같아
눈물로 대신하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태풍, 뒤
이경림
바람은 사과나무를 흔드느라 말이 없고
사과나무는 사과를 꼭 쥐고 말이 없다
바람 잔 뒤
가지에 사과 하나 겨우 매단 사과나무
어리둥절 서 있다
우둠지 걸려 있던 진회색의 슬픔
없다!
그 자리가
가만히 비어 있다
태풍 피해
이경애
손바닥만 한 비바람 홀연히 나타나더니
억수장마에 불붙여
거대한 폭풍 만들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거리 곳곳에 나뭇가지들은
부러지기도 하고 밑동이 갈라지기도 하며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기도 하였다
전기정전으로 서로의 안부를 단절시키고
온통 흑암으로 덫을 놓아
사람들의 발길을 묶었다
농부들은 상반기에 씨뿌린 결실을
거두어 보지도 못하고
삐라빠룬 악당들 앞에 고스란히 다 바쳐
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사람들이 되었다
그 속에 나는
내 안에 몰아친 태풍으로 인해
신뢰의 벽에 불신이라는 실금이 생겨
믿음이라는 견고한 성을 상실시켜 버렸다
영원히 복구시키지 못할
한차례의 태풍 피해
역사적 흔적이라는 상처만 남기고
구겨진 졸업장만 고스란히 남을 것 같다
태풍
이문희
가을 들녘에 황금 물결이
초석이 되어 눞고
홀로 선 허수아비
양 팔을 크게 벌린 채
하늘을 향해 울부짓는다
태산이 무너져 내리고
강남동 서릿발 앞길이
성난 홍수로 뒤집혀
물결 져 흐르고
광화문. 마로니에 공원
서울역 일대에 이르도록
구슬픈 삼족오(三足烏) 울음소리
온 장안을 뒤덮는다
태풍이 핥고 간
텅 빈 자리에 바위와
나무는 뿌리채 뽑힌 채
집은 부서져 내리고
허리가 두 동강난
벼락맞은 도로가
길이 끊기어
구슬픈 호곡 소리 높다
태풍의 함성
이문희
먼바다 우레 소리
태풍 오는 소리
지축을 흔든다
하늘의 우렁찬 함성
대지를 짓찢는
가슴 울리는 소리
우산도 없이 쌀몸
때론 뜨거운 소낙비
앙가슴에 껴안아 본다
막힌 가슴이 확 트인다
더러는 태풍도 비도
흠뻑 젖으며 살아보자
헐거워진 잠든 의식
녹슬은 양심 깨우쳐 보자
태풍 사흘째
이생진
도초 흑산 홍도로 가는 사람들은
모두 목포에서 쇠사슬을 찼다
태풍 사흘째
아침 여덟 시 홍도행
혹시나 하고 일곱 시 반에 터미널에 나와보면
썰렁한 대합실에 나와 같은 사람들이 대여섯
사망자 명단을 보듯 선박 시간표를 본다
창 박으로 보이는 수백 척의 선박이 서로 비벼댄다
체온이 없는 것들
저희들끼리도 그것을 알고 불행히 여긴다
산만한 제주행 여객선은 더 굵은 사슬에 묶여 있다
신문팔이는 오늘 조간처럼 묶여 있고
자판기는 기둥에 묶여서 걷지 못하고
태풍 사흘 때
식당도 다방도 문이 있는 건물은 모두 문을 닫았다
전마선이 개 묶이듯 묶여 있다
대합실의 대화는 일기에 관한 탐색일 뿐
아무짝에도 쓰지 못한다
“오늘 오후나 내일 풀리겠지”
“어딜 가시는데?”
“홍도요”
“홍도엔 왜 가오, 이 바람 속에?”
“구경 가죠”
“구경이라니 큰일 나요, 큰일”
홍도엔 왜 가느냐 이 말엔 언제고 말문이 막힌다
고향도 아니고 급한 일도 없으면서
겨울 섬 겨울 바다 그리고 미친놈
이 바람에 홍도는 왜 가느냐, 말은 않지만
그는 분명 미친놈이라고 속으로 말하고 담배를 물었을 거다
“미친놈”
그 사람 대신에 내가 말해 버린다
태풍이 몰려온다
이시경
날개가 부실한 그가 들어서자
책장과 책상위에서 서적들이 가늘게 떤다
따끈따끈한 저널 한 페이지를 들추자
표절 시비를 피해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은
글자들이 빛에 들뜬 원자인 양 우뚝 일어선다
그리고 달린다 그 뒤로 알파벳들이 숫자들이 함수들이
삼바축제에 뒤섞여서 뒤따르고 있다
길가의 어느 샘은 바닥이 드러났다
그들의 행렬을 독수리 눈으로 더듬어보면
새가슴 속에 이는 회오리. 숨이 막힌다
적은 무리들이 큰 무리 앞에서 바동댄다
그들을 짓밟고 한 공룡 무리가 지나간다
그 뒤에 더 큰 무리가 막 태동하고 있다
자잘한 날개들이 돌풍에 부러진다
주눅 든 아우성들이 책상에 수북이 쌓인다
허기의 물결이 상어 이빨을 드러내며
과제 규모와 논문 숫자에 파래진 나를 삼키려고 입을 벌린다
실험실 연구원들의 숨결은 해 지난 논문 속에서나 가끔 출몰할 뿐
낡은 과제제안서만이 서류 더미 속에서 숨을 할딱이는데
점점 더 가까이 몰려오는 태풍의 이름들
바이오 그래핀 그린 에너지
확률이 꿈틀거리다 태풍이 된다
반딧불이 태양이 된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이종인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평화로운 아침을 맞이한다
모두 별일 없었는가요?
엎드려 있던 풀들이 몸을 세우며 안부를 묻는다
썩은 가지들만 정리된 키 작은 나무들이
안도의 숨을 몰아쉬며
뿌리채 뽑혀 나간 큰 나무들을 내려다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끝까지 휘어지기만 했던
키 작은 우리는 살아남고
크고 무거운 나무들이 쓰러지다니
태풍의 꼬리를 멀리 바라보며
강인함을 자랑하던 세상을 내려다보며
이번엔 사람에게 안부를 묻는다
괜찮은가요?
정말 아무 일 없는 거죠?
태풍의 눈
이지엽
얼마나 외로우면 저렇게 몸부림치며 휘몰아치는 것일까요
북태평양 그 먼바다에서 아주 은밀히 태어나
고온다습한 공기를 끌어모으고
적운을 만들고 더 빠른 속도로 나선형 돌개로 변해
가로막는 모두를 날려 보내고 오로지 뭍을 향해 돌진하는
저 고독한 사내의 그리움 덩어리
그 슬픈 눈, 유혹하지 마세요
지름이 10킬로미터나 되는 커다란 눈
불타는 적도의, 붉은 저 사랑의 눈!
아니 푸르고푸르고루르고 깊은 눈!
한 번 잡아당기면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야성이 그에게는 있답니다
태풍
이지영
너를 잊는 건 태풍 탓만은 아니다.
빗줄기가 땅을 후들겨 치고
비수로 내려 꽂아도
꿈쩍 않던 너에 대한 믿음
끝내 태풍으로 와
질긴 내 인고의 타래를 푼다
열 번에 열 번의 실망이 체념 되어
제한 수위를 넘다가 만수위로 차올라
바다도 삼킬 것 같은 저 싯뻘건 동맥 핏줄
번쩍번쩍 나래 치며 폭우로 퍼붓는다
피할 수 없는 물줄기 따라
떠내려간다 떠내려간다
고통과 형벌, 더러운 것들
가라, 멀리가라
가까운 사람 먼 사람 다 쓸어가라
강물로 떠내려와 깊은 늪 속에 빠져
천줄기 만줄기 구슬 눈물 쏟다가
불현듯 너 그리워 옷자락 붙들고 다시 기어오르고 싶은
불치의 병
누군가의 마음 창가에 무지개 띄우며
순수의 둥글음으로 살기를 원했었다
그렇게 애쓰다 애쓰다 떠내려가는
내 작은 목소리의 끝은 무인도
내, 너를 잊는 건 태풍 탓만은 아니다
태풍의 길
이지영
자연이 알아서
해주는구나
빗줄기 쏟아지고
장마가 휩쓸고
질풍노도 뒤집히는 광란
자연이 알아서
길을 찾아주는구나
산을 자르고
강 맥줄 함부로 꺽어
러브호텔에다 골프채 휘두르더니
길이 막히고 벼락을 맞는다
적조의 바다가 휩쓸려 간다
지구 생태 복제를 어찌 할 수 있나
아름다운 우리들의 강
깨끗한 물소리 찾아가자
새들아 꽃들아 살아 있는 것들아
길이 보이지 않을떄 길을 물으러 간다
너희들은 내가 몸 부빌 언덕이다
태풍 속의 꽃잎
이해인
태풍이 다녀간 꽃밭에 와서
사람들은 말합니다
기적이 따로 없네
어떻게 이 부드러운 꽃잎들이
한 장도 떨어지지 않고 제 자리에 붙어있지
모진 바람 속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 분께 대한 고마움이
새록 새록 돋아나는 아침이에요
이 고운 힘을 잘 다스려
오늘에 이를 수 있게 한
저의 조그만 노력에도 고마운 마음 가득해요
그리고....아무리 연약해 보여도
꽃 잎 한 장, 저 없이는
꽃 한 송이 이룰 수 없음을
다시 알게 해 주셔서
더 없이 행복한 아침이에요
태풍 연가
이해인
태풍이 지나간
바다의 빛깔은
어찌 이리
푸르고 투명한지
태풍이 지나간
숲의 모양은
어찌 이리
환하고 깨끗한지
한바탕 싸움 끝에
울고 나서
활짝 개인 마음의 하늘
그대와 나의 사랑은
어찌 이리 순결한지요
혼자 무렵의 태풍
이현호
잠잠하다고 태풍이 물러났겠는가
더욱 적요하다
태풍의 한가운데는, 그 혼자 무렵은
때맞춰 이름을 달리해 찾아드는 태풍 같은 너
나는 뒤집어 벗어놓은 양말같이 무력하다
날아간 지붕과 함께 겉과 속의 경계도 허물어졌다
빗방울의 기총소사에 내상 입은 시간들
누명 입은 복역수가 흔들어대는 철창처럼 덜컹거리는 유리창
신발 안을 굴러다니는 성가신 돌 조각 같은, 별들
풍속 너와 나 사이의 큰센바람에 쓸려 다닌다; 그것이 태풍의 일
갈 곳 잃은 꿈들이 갈수록 세를 더해 사나워지는 것
속엣것들을 죄다 휘젓는 태풍만을 사랑하는 사람; 그것은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하는 일
체념의 깊이만큼의 강우량 속에서 추깃물을 흘리는 이 밤의 비정(非情)
태풍과 태풍의 눈 다시 고요와 극렬의 징검다리를 오가는 마음
불게 하기는 쉬워도 머물게 하기는 어려운 바람
폭우를 거두기엔 너무 성긴 자기모멸의 씨실과 온기의 날실
폐허를 짓고 스러지는 네 뒷모습
다른 사람의 영혼을 적실 습기를 품은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가
네 쪽으로 고꾸라지고 싶은
다만 폭풍에 우지끈 부러지는 아름드리나무처럼
태풍 주의보
이희숙
애틋한 눈길로 바라보지 마세요
당신은 아니온 듯 지나가면 그만이지만
스치는 바람에도 가슴 무너지는 겁쟁이랍니다
바싹 다가오지 마세요
당신의 손길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질까 봐 겁이 납니다
태풍
임보
태풍에 나무가 뽑히고 지붕이 날라간다
바람이 참 무섭다고들 한다
강풍 폭풍 태풍 허리케인…
그런데, 그 바람들은 왜 일어나는가?
바람은 공기의 이동이다
기압이 높은 곳에서 기압이 낮은 곳으로의 이동
그런데 공기의 기압을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햇볕이 아닌가
낮에는 뭍의 온도가 높아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해풍이 일고
밤에는 바다의 온도가 높아
뭍에서 바다로 부는 육풍이 일어난다
그러니 바람을 일으키는 주체는 태양
그 태양이 이 지상을 휘어잡고 있다
태풍 경보
임석순
하늘이 노(怒) 했나
땅이 열(熱) 받았나
더불어 바다가 성내고
공기 덩어리
존재를 나타내려
뭉쳐서 표출하려나 보다.
인간에게 경고를 주려는 듯
한껏 느껴지는 계절...
거대한 폭풍의 비바람이 몰려온다
태풍
임영준
방종의 여름이 꺼지고
소인배들의 욕심이
극을 달리고
반도가 쓰레기로 넘칠 때
근간을 이루던 동량들이
조국을 미련없이 떠나고
노인들의 한숨소리가
골목마다 메아리될 때
위정자들의
밥그릇 싸움이
일간지마다 넘치고
향학의 열망으로
분초를 아껴 쓰던 젊은이들이
갈 곳이 없어 헤멜 때쯤
태평양에서
철퇴가 날아온다
변화를 요구하고
모두 쓸어버리려 하고
단합해 버티라 하고
해마다 나라를 다시
생각케 한다
사랑의 태풍
임인규
언제나 시작은
미묘한 따뜻한 기류
그대를 향한 내 마음
사랑의 태풍입니다
무단히 일어난
정열의 거센 바람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중심선에는 당신이 있습니다
사랑합니다
이 몸이 죽어지는 그날까지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제발 저를 말리지 마십시오
사랑은 때때로
고통의 눈물도 뿌리고
분노의 번개도
사정없이 때립니다
그대여
이 나의 사랑이
당신에게 눈물이
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당신만이
나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그대의 따뜻한 품으로
사랑의 태풍을 소멸시켜 주소서
태풍
임주영
파도에 휩쓸려
연안부두로 피항
어선과 여객선이 모두
바닷길이 막혀 버렸다
한반도 대륙을
삼켜 버릴듯한 모습
웅장하다 못해
장엄한 회오리가 몰아친다
강렬한 모습으로
여객실에 올라서
흔들리는 뱃머리에서
운항을 전면 통제시킨다
바닷길을 막아 버리고
온몸을 던지며
다음 목표 지점을 향해
태풍 솔릭이 왔다 조심해라
태풍(올리와) 오던 날
전병철
1 - 시간의 연속
모래가 허공을 간지럽히고
버림받은 신문지 몇 장이
아스팔트 위를 쓸면서
달리기를 하며 한을 풀고
목을 길게 내뽑은 해바라기는
자랑스런 목 부러지지 않으려고
억지로 허리 굽혀 펴기를 연거푸 해대는
시간의 연속이
끊일 줄 모르게 계속되고 있다
2 – 바로 내 탓이니
치마가 위로 치켜 올라가는 게
꼭 낙하산 같고
걸어가는 걸음걸음이
서로 뒤엉킴을 당할 때
안으로 감추어 둔 은밀한 부분이
노출되는 수치심을 겪어도
어쩔 수가 없는 것은
바로 내 탓이니
3 – 탈옥수
가게 앞에 놓여 있던 빈 맥주 박스가
갑자기 지진을 만난 듯
요동을 치고
벽돌로 눌러 놓은 쓰레기통이
벽돌만 남겨 놓고 제 혼자
먼 여행을 떠나려는 야비함을 연출하더니
결국엔 내게 잡혀 오는
탈옥수 신세가 되었다
태풍이 비를 안고 오는 이유는
정경조
태풍이 비를 안고 오는 이유는
나고 자란 곳을 떠나야하는 설움 때문입니다.
반기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무작정 떠나야하기 때문입니다.
머지않은 날 반드시
아무도 모르게 사라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울음을 울어야하는 것은
그 태어남과 죽음의 모든 과정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분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곳을 알게되어 행복합니다
태풍
정민기
1
부르지도 않은 큰바람이
불어온다, 예약해놓은
부둣가에서 잠을 청하는 배들
내 목덜미를 감싸더니
다이얼을 그녀에게 맞춰놓는다
대체 뭘 요구하려는 걸까,
나무도 잎새 동전을 모조리
다 털리고 빈털터리가 되었다
단두대에 오른 듯 꽃들의
모가지가 단번에 끊어진다
하늘은 붓글씨를 쓰다가
먹물을 잔뜩 엎어 놓고 태평이다
창밖 들려오는 빗소리가 다 욕이다
씨벌, 씨벌, 씨벌, 씨벌, 씨벌
2
비를 품고
바람을 안은
태풍이 온다
오는데 처마 밑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 장소에 나가지 않자
숫자를 머금은
다이얼을 돌린다
반짝반짝
잠들지 않고
눈 뜬 밤 같은 세상
테이프로
창문의 입을 막고
커튼으로 봉해버린다
누군가의 뒤를 밟는
차가운 빗소리
고양이를 피해
멀리 달아나는 햄스터의
천둥소리
고양이의 눈에서 번쩍이는
번갯불과
벼락 치는
목소리, 목소리
태풍
정상화
질 분비액처럼 끈적한 8월
잡초 뽑는 농부의 몸이 녹을 때쯤
꾹꾹 눌러 온 그리움이 원망으로
솟구쳐 세상을 뒤집는다
물의 힘을 감당하지 못한 뚝은 흔적
없이 강이 되어 논밭을 집어삼키고
사람이야 죽든 말든
나무야 부러지든 말든
성깔을 있는 대로 쏟아 놓고도
분을 삭이지 못해 미친 듯 춤을 춘다
철부지 사랑아
그런다고 맘을 주겠니
그런다고 옷을 벗겠니
달콤한 속삭임을 왜 모르니
18호 태풍
정석봉
18호 태풍이 올라온다 카는데 아마도 그쯤에 피해 가야 피해가 없을끼라 캅니더 헌디요 태풍도 우짜지 못하는 나무이파리들이 마카 떨어져 나가는 강력한 태풍이 다시 또 밀려 온다카는 소식이 있다 안 카능교 피해 가도 피해가 있을끼 라는 생각에 지는 오늘 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심더 허지만 지까지끼 태풍을 피할 재주는 눈곱만치도 없는지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기라예
아 ---올가을에--- 누가 날 잡아줄 손은 없능교 태풍이 지나가삐고 나면 수해 복구하는데 1년은 족히 걸린다 안 카능교 무너진 그놈의 다리, 다시 빳빳하게 세워 놓았더만 우짜면 좋겠능교
내 마음의 태풍
정선호
그야말로 태풍 전야다
남태평양 바다는 여름이면 많은 태풍을 만들어
중국과 일본으로, 한국에도 보내곤 하는데
태풍이 오기 전날은 활시위를 당긴 궁사처럼
모든 것이 팽팽한 긴장을 하고 무언가를
무너뜨릴 준비를 하고 있다
태풍 오기 전날엔 내 마음도 서서히
그동안 모아두었던 긴장감을 한 곳으로 모아
강한 바람과 비를 만들고 회오리를 만든 후
고국의 어머니와 가족, 채소와 가축에게 보냈다
내 마음의 태풍은 고국을 돌아 소멸되지 않고
우주를 향하게 되었는데 먼저 달에 도착했다
달에 도착한 태풍은 계수나무가 있는 마을을
한 바퀴 돌아 달에 처음으로 비를 내리게 하자
토끼들은 신이 나온 대지를 뛰어다녔다
대지엔 식물과 곡식이 자라나 굶주리며 살았던
토끼들에게 양식이 되었다
태풍은 소멸되지 않고 살아 화성에도 도착했으며
화성을 지나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에 갔다
내 마음의 태풍은 영원히 우주 속에서 살아
평화와 안녕의 메신저가 되어 모든 별을 향했다
태풍과의 대화
정영숙
예쁜 이름의 가면을 쓰고 퉁퉁 부은 얼굴로
사방을 째려보며 이유 없이 때릴 준비를 하는 너!
알코올 중독자 같이 벌겋게 타오른 비틀어진 코로
비틀비틀 아무 데나 헤집고 다니는 너!
제 할 짓 한 번도 해준 일 없으면서
모두가 제 것인 양 떠벌리며 빼앗아 가는 너!
햇빛 한 숟가락 먹여준 일 없으면서
굵은 눈물만 숨넘어가도록 억지로 먹여주는 너!
네가 가는 곳은 얻어터지고, 팔이 부러지고,
넘어지고, 죽음이 손을 잡고 오라는구나.
너는 폭력범. 너는 살인범, 너는 깡패. 너는 도적
나는 네가 싫다. 밉다. 무섭다, 우리 빨리 헤어지자
태풍 매미
정영숙
나뭇잎도 가지도 아닌 어두운 곳에서
심장이 멈출 것 같은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 울음소리가 두려워 귀를 막고 머리를
땅바닥에 박고 엎드린다.
신과 자연의 불화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가까이 가까이 들린다
마치 한국전쟁 때 울리던 그 사이렌 소리 같다.
왔다! 왔다!
분노한 자연이 제 살, 제 뼈 깍은 인간에게
분별없이 복수하려 왔다. 아 무서운 복수다
싸운다. 할퀸다. 바람은 전선 줄에 입을 대고
마구잡이로 욕설을 퍼부어댄다
과식한 바다는 소화불량이 되어 토한다
고향을 빼앗긴
성난 파도는 제 땅을 찾으려 칼날을 세운다
시베리아서 잡혀 왔다는 나무둥치
한풀이로 여기 푹! 저기 팍팍! 때린다
신의 명령도 받지 않고 제 맘대로
죄 없는, 고귀한, 아까운 젊은이들의
생명줄을 끊어버린다.
오!? 오!? 이 놀라움. 이 통탄
오! 핏줄의 슬픔, 사랑, 그리움의 세월을
어이할 꼬! 어이할꼬!
오!----어이할꼬! <2003년 9월12일>
태풍 매미가 지나간 자리
정영숙
매미의 탈을 쓰고 들어와
광기를 부리다 제풀에 죽은
너 태풍아!
나는 너처럼 살다 가지 않으리라
맹세코, 결코 너처럼 살다 가지
않으리라.
네가 지나간 자리는 파멸뿐이다
네가 지나간 자리는 상처뿐이다
네가 지나간 자리는 눈물뿐이다
네가 지나간 자리는 더러움이다
네가 지나간 자리는 실망뿐이다
네가 지나간 자리는 상실뿐이다
네가 지나간 자리는 죽음뿐이다
그래서 너를 순식간에 죽여주기를
기도했다
그래서 죽고 난 후 잘 죽었다 잘 죽었다
박수쳤다
매미의 탈을 쓰고 들어와
광기를 부리다 제풀에 죽은
너 태풍아!
나는 너처럼 살다 가지 않으리라
맹세코, 결코 너처럼 살다 가지
않으리라
햇빛과 태풍의 품
정영숙
햇빛이 팔을 펴면 떠났던 새들이
그 품 안에 다시 모여 집을 짓고,
지지배배 노래를 부르고 있으나,
태풍이 팔을 펴면 남아있던
새 한 마리도 그 품을 비틀며 나와
뒤돌아보지 않고 도망간다
태풍의 흔적
정은희
소식을 전해 듣고 긴장감을 맴돌고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천둥 번개로 알려주고
조금씩 조금씩 떨어지는 빗방울들이
앞이 안 보일 듯 정도로 퍼붓고
솔솔 부는 바람의 정도가 더 심해지고
아주 강한 강풍으로 몰아치니
높고 높은 파도의 활기차게 움직이니
오래된 나무들도 바람의 강풍으로 무너지네
단단한 전봇대도 엿가락처럼 휘어지니
흔들거리는 창문들도 쉽게 간파하고
서서히 더둑 강하게 오고 있다
점점 더 무서움이 느껴지면서 사고와 사건들로
소식을 전해 듣고
안타까운 일들이 생긴다
피해 가는 태풍의 눈이 조금씩 조금씩
수그러지면서 이슬비들이 오고 있다
태풍이 휩쓸고 간 흔적들
가을 태풍 '링링'
정이산
사람도 늦바람 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연애를 막기 어렵고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르듯이
뒤늦게 더 열중하고
가을철 태풍이 오면
강력한 바람이 불어
피해를 막기 어렵다
가을 태풍 '링링'이 오는데
진인사대천명이라 하지만
한반도에 큰 피해 없도록
하늘이시여! 도와주소서
가을 태풍이 남기고 간 것은
정이산
기해년 대풍년이 든 가을 들판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회자 되듯이
제17호 태풍 '타파'가 쓸고 가더니
제18호 태풍 '미탁'이 또 몰려와서
황금빛 들녘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대풍(大豊)이 아닌 떼 풍(風)만 남기고 갔네
떼를 지어 다니는 사람들이 많으니
태풍도 떼를 쓰며 초토화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심판이 아닌가
태풍이 할퀴고 간 자리
정이산
봄꽃 향기 가득한 곳
배꽃이 눈꽃처럼 피어
벌들이 꿀을 얻기 위해
봄의 향연을 벌이더니
오뉴월 따뜻한 햇살에
작은 열매를 잘 키우더니
칠월 장마로 훌쩍 자라서
폭염에 햇배로 여물어
구월 추석이 오기 전에
특품으로 따려고 했건만
너를 만져주지도 못했는데
태풍으로 땅에 떨어지니
아! 슬프고 애통하도다.
한 해 동안 애지중지 키운
자식과 같은 과일들이여
바람과 함께 사라졌구나
태풍이 오고
조연호
태풍이 오고 창궐하는 남하(南下)들을 보았다 파도와의 사이에 낳은 자식이라고 네가 말할 때 목적들이 외로워졌다 태풍이 오고 씨 없는 외물(外物)에 근육이 생기는 걸, 눈물인 걸, 유모는 달래본다 숙면에 필요한 빛을 땅 밑에서 찾는 법에 대해 당신은 이미 온 것이 이미 오고 있다고 말했다 태풍이 오고 나는 돌과 악수하고 지푸라기가 내 결심을 바꿔치기 하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태풍이 오고 각 문마다의 적령기를 가르치던 일 하루 두 번 송곳니로 방문하던 일 표적 한가운데 다른 사람을 그린 일 이 여행이 헛걸음이도록 점점 명령하게 되는 구름들 아래 태풍이 오고 어른들은 편지를 쓰고 죽으려고 했고 우리는 재미나 죽으려고 했다 태풍이 오고 변하지 않는 것들은 이미 탐구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한번도 땅거미가 우리를 그냥 지나친 적은 없었다 슬플 수가 없어서 너를 강간하던 일 줄지어 가던 개미들의 질서조차 비정(非情)하던 일 태풍이 오고 소실점을 향해 발정해 있던 너의 의학사전에게로 태풍이 오고 크고 아름다운 인조(人鳥)와 함께 태풍이 오고 너는 나를 버려라 하지만 내게 달린 여성은 아주 작아서 버려야 할 신체조차 되지 못한다
태풍이 지나간 자리
조찬용
그리 많지 않은 땅덩어리에
이틀인가 사흘인가 비바람이 돌고 갔다
잠깐 해 비치는 사이
들소 같은 바람을 밀치면
앞마당부터 어질러진 것들로 한동안 산란하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떨어진 것들로 하여
마음 둘 곳 없는 휑한 사방천지
나도 그만 머리통이 깨지고 싶다
살아남은 것들과
살아남지 못한 쓸쓸한 것들이
햇빛에 속을 드러낸다
속절없이 마음 아파해 보지만
쓰러지고 넘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말이 없다
키워지는 것들이 왜 슬픔이어야 하는지
턱 막힌 들판을
입안이 깔깔한 담배로 풀어내며
농부는 왜
다음 세상을 노래하고 기다려야 하는지 알 것도 같다
내 죄과에 덤덤해지는 데도
몇 번의 죄가 더 쌓이는 큰 바람이 필요하듯이
우린 비바람에 쉽게 허리를 꺾고
쉽게 잊는 다행스런 습성이 있다
가지가 찢기고 머리가 깨진 단감들이
앞마당 어디쯤에서 뜨건 속앓이처럼 속이 붉다
아, 그대가 떠난 날처럼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어지럽게 들판에 널려 있다
태풍
주금정
사랑이 되지 못한 그리움은
때로 분노가 되기도 한다.
열대의 해수면 아래에서
수많은 밤을 그리움으로
몸트림하다가
드디어는
참을 수 없는 소용돌이로
솟구치고 싶은 때가 있다.
칠흑같은 밤을 골라
울먹이는 바람 노래처럼 앞세우고
넌출대는 물살 숙명처럼 데불고
네 가슴팎에 마냥 엎드러지며
무모하게,
무모하게
부서지고 싶은 때가 있다
태풍(颱風)
주응규
무수한 생명이
저마다 나름의 삶을 꾸려가는
평화로운 터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만물의 사생아
청하지도 반기는 이도 없건만
어디에서 태어나
정처 없이 떠돌다
떠돌이 나부랭이까지
거느리고 와 망나니짓이런가
나의 힘을 아느냐
호통에 으름장까지 치면서
갈가리 찢어 삼킬 듯
갖은 행패를 부린다.
발악의 몸짓
제풀에 지쳐 스러질 때까지
망연히 넋 놓고 바라다보는 딱한 처지
어쩌면 좋을까
속수무책 발만 동동 굴린다
태풍 링링과 느티나무
차영섭
어린아이가 울분에 휩싸여
땅바닥에 앉아서 벌벌 떨고 있다
두 발을 구르며
두 팔을 휘젓고
얼굴은 눈물로 뒤범벅이다
허리마저 이겨내지 못하고
팽이처럼 돌고 도는 느티나무,
분노가 바다에 파도처럼 치솟는다
한바탕 링링과 격투기를 하고 나니
시름시름 힘겹다
먹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웃고
가지에 이파리들은 고요하다
태풍 속에서
최금진
폭우가 쏟아진다
하늘에선 거대한 소용돌이가 다이얼을 돌린다
사내는 구인광고지처럼
저녁의 끄트머리에 서서 펄럭인다
우산대가 꺾인 사람들은 황망히 고개를 숙인다
손바닥 위엔 모종처럼 돋은 푸른 메모지 한장
사내는 있는 힘껏 비를 가리며 전화를 건다
동사무소 꼭대기엔 뭉툭 잘려진 입 하나, 커다란
스피커가 두리번거리며 그를 찾아낸 듯
안내방송한다. 모두들 일찍 귀가하시압!
아, 그렇습니까......네, 네, 사내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버려진 수화기처럼 웅크리고 돌아선다
손에서 구겨진 메모지가 무섭게 바닥에 달라붙는다
먹구름이 하늘을 두껍게 풀칠해놓고
사내의 이력서 위에 새로운 어둠을 발라놓는다
상가에 켜진 TV들은 눈을 깜빡이며
간단명료하게 이 저녁의 풍경을 정의한다
태풍북상, 그러니 모든 외출을 삼가시압!
사내는 젖은 비닐봉지처럼 굴러간다
바람을 품고 아주 높이 떠오르고 싶다,
사내는 잔뜩 부풀어오른 외투를 부러 채우지 않는다
뚜뚜뚜뚜, 잘린 말의 토막들이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그의 등을 어둠속에 타전한다 하늘에선
거대한 회전문 속으로 머리채를 잡힌 구름들이
뺑뺑이 돌고 있다, 진땀을 뺀다
저녁이 온통 다 젖는다
태풍 전망대
최영철
내 몸이 이파리처럼 쓸모없어지면 좋겠네
가벼워지면, 새털처럼 작아져서 미천하면 좋겠네
저 건너 산과 들 환히 보이는 전망대 앉아
하릴없이 날리는 담배 연기라면 좋겠네
선남선녀 마주 보고 부르는 태평성대
야호, 한 마디라면
뒤뚱거리며 날아가 어느 모서리에 박힌 미친 바람이면
단번에 능선을 넘는 한 줌 돌멩이라면 좋겠네
사람만 아니라면, 온전한 팔다리 머리가 아니라면
그것도 아니라면 좋겠네 아무 흔적 없이
바람 한 번에 까불거리는 지푸라기라면
눈시울 뜨겁게 하는 흙먼지라면
차라리 아무것도 아니라면 좋겠네
태풍
최이천
미탁 타파 링링 매미 차바
루사 세스 덴무 사라 이름은 예쁘다
쓸고 간 치맛자락에 울고 있구나!
얻어맞은 우리 눈물마저 마른다
너의 폭력은 사정없이 휩쓸고
남을 것이 없다 무얼 먹고살까?
바람은 때리고 비는 할퀴고
너를 고소하고 싶은데 길 모른다
흐르는 눈물에 호소하고 마른 마음
달래며 그래도 해가 떠오르니
멈추어버린 노래 불러야 할까?
바람에 자빠지고 물에 잠겨 아프다
나 좀 살려달라고 들이 산이 부른다
겨우 살아난 힘 빠진 내가 온 힘 다하여
뛰어본다. 물속 잠겨있는 벼들의 통곡
뿌리 뽑혀 절망하는 나무 눈망울 본다
어쩌란 말이야 손을 뻗어 봐도 손이
모자라고 발을 내밀어봐도 발이
모자란다. 한계는 아픔의 극치이다
한계가 지나고 더 아프지 않으며 죽었다
지금 아프다 지금 살았다 삶은 기회가 온다
삶이란 기다림이지 좋아질 거야
억장이 무너져도 기다림은 설렌다
바람도 구름도 가고 태양이 떠오른다
아픔을 햇볕에 마르자
그날이 오면 웃어질 거야
짧은 순간이라도 웃어질 거야
아픔을 견디고 살아있으니까
살아있음이 참 좋다
태풍 전야
최해춘
실성한 바람이 불어오는 밤
꼭 한번은
완전한 미침을 갈망하던
망설임이 풀어져
온밤을 태질하는 엇박자의 밤
소란한 빗줄기의 질펀한 유혹과
바람이 안고 오는
못 견딜 쓰라림에
하얗게 멍들어 찢어지는 밤
피난치 못할 공간에 갇혀
다소곳이 옷깃을 풀고
그 미친 바람에, 빗줄기에, 슬픈 광기 속에
이 한 몸
고스란히 내어다 놓아야 하는 밤
태풍이 지난 자리
최홍윤
심술 궂은 비바람은
앙상한 가지에다,
보기 흉한 여인네의 고쟁이를 걸어놓고
황토 물은
보에 걸려 허우적거리는 헌 고무신짝을
사정없이 세차게 밀어 낸다
동해 바다 너울 파도,
수족관에 노닐던 물고기를
영원한 고향으로 돌려보내던 날에
철모르고
철부지 하게 웃다 녹초가 된 가을꽃을
획 삼키고 달아난 가혹한 비바람이여
그러다가
능청스럽게 잔잔한 저 바다가 야속하고,
햇빛 머금고
헤프게 나뭇잎 헹구는 저 강물도 얄밉다
태풍 전야
최홍윤
날이 새고
해가 뜨고 간간이 비가 내려도
지금 내 사는 곳엔
무슨 큰일이라도 날 것 같은 기세로
하늘 땅 모두가 고요하고 음산하다
이미 길이 나버린 곳에서
숨죽인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고
어제 낮에 자지러지던 매미 울음도
적막강산이다.
세상 사는 일이 늘
요만큼 조용하다면 살맛 날듯한데
이것도 오래지 않아
저 멀리 들개 우짖는 소리 같은
음산한 죽음의 메아리가
산 겹겹 돌아 세상에 드리울 게다
사생아처럼 태어나
몸부림치다 뉘 손에서라도
주검을 당하는 처참한 꼴이
못 내 아쉬운지
긴긴밤, 내 베갯잇 기억으로 도지는
침묵의 터널 지나며 별을 헤고 있다
멀리는
사라의 눈물로, 루사 매미까지
내 귀밑에 기억으로 잔잔히 부서지다
해가 뜨면 능청스럽게 매미는
또 울음의 물결을 지울 것이다
태풍주의보
하두자
해일이 온다
붉은 물덩이로 출렁이며
북으로 향하던 빗줄기는
잠시 통제불능
어둠보다 더 무거운 한낮의 고요
해바라기 가만 씨앗들 사이
바람이 발톱 세울 때
잎들은 숨이 차다
태풍
하영순
금년 들어 벌써 열 번째
태풍 크로사가 올라온다
태풍 분명 공포의 대상이다
그 많은 태풍
우리나라에 직접적인 피해는 불과 몇 개
피해가 가장 큰
사라호 1959년 추석날
그러나 태풍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위기는 기회
태풍 한번 지나고 나면
세상이 달라진다.
더러운 곳이 말끔히 청소되기도
우리나라는 지금 태풍 상륙 중이다
사회 경제 정치를 포함한
이 태풍이 지나고 나면
세상은 어떻게 변할 것인지
변해야 된다
구석구석 정신세계도
태풍
함민복
태풍은 온다 먼바다 큰 바다에서
수직한 것들이 수평을 절감해보는 날
지하의 뿌리들에게
지상의 몸들을 치열하게 읽어보라고
지상의 몸들에게
지하의 뿌리들이 땅 움켜쥐는 소리 들어보라고
태양 조명 끄고 구름 스크린 휘날리며
아, 저 많은 바람은 다 어디서 와
어디로 가는가
태풍이여
수직한 것들의 근심을 뿜어 올려주는
건물의 명함인 간판을 뒤흔들며 호명하는
수평도 차오르면 위험하다고 댐의 수위도 조절시키는
티브이 채널을 물과 바람의 나라 생중계로 통폐합하는
움직이는 기체의 닻으로 고체들의 욕망을 정박시키는
태풍이여
수직한 것들의 호구조사 날
사람인 나는 유리창에 테이프로 ×자 붙이고
수평으로 누워
너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또다시 불안을 쌓아 올린다
태풍
허욱도
들려오는 북상 소식
기다릴 수 없는 기다림
가슴만 미어진다
그 모습 궁금한데 소식 깜깜
힘들어서 어디 가서 쉬고 있는가
기다리지 않는 기다림에 밤잠도 설친다.
비를 몰고 온다기에 챙긴 우산
그 모습 망설이고 감추고 있어
아직은 우산 쓸 일 없네
기다릴 수 없는 그리움
소문만 무성히 기다리게 하고
소리 없이 지나가도 그 자리 흔적은 남는다
태풍 부는 날
홍수희
왠지 낯이 익다,
저 비바람 불어 제끼는 소리,
나뭇가지 우지끈 부러지는 소리,
전신주 쿵쿵 넘어지는 소리,
세움 간판 와장창 내동댕이치는 소리,
유리문 덜커덩 흔들리는 소리,
빈 깡통 데굴데굴 굴러가는 소리,
빗속을 달리던 자동차,
끼이이익 급정거하는 소리,
히스클리프 신음하는 소리,
분쇄기능 믹서기 돌아가는 소리,
싸이클론 진공청소기 돌아가는 소리,
전화선 너머로 회오리치던,
사랑이 무너지던 소리,
버려지던 소리,
너의 목소리,
그 소리
태풍의 눈
홍수희
마음 한가운데가 아프다
네가 아프다
소식도 끊긴 채
네가 아프다
소리도 없이
네가 아프다
태풍 그 짧은 시간에
홍윤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짧은 화답으로
가장 짧은 언어를 전하는 날에
산기슭엔 번갯불이 붙고
호두나무에선 청설모가 판을 쳤다
가장 짧은 시간에 소리라는 소리는
다 잡아다가 가두었더니
오거리에선 우리네 전깃불이 꺼졌다
변압기가 타버렸다
상황처럼 쏟아지는 변명의 위치에선
화산같은 산사태가 나고
별들도 가장 짧은 그 시간이
무서워 숨어버렸다
유서 깊은 포구 선착장이
반쯤 무너지자
초고속 뉴스가 터지고
성북역 가로수가 부러졌다
그 후 칵테일 마시듯
이틀이 가버렸다
태풍
홍일표
독수리, 독수리떼다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하는 고만고만한 삶의 덩어리들 머리채 휘어잡아 날려버린다 뒤집어버린다
지상에 게딱지처럼 달라붙어 전후좌우 가지런히 정돈된 질서가 마뜩찮은지 어지러이 흐트려놓는다
난동이다 야생의 거친 짐승이다
한 번도 젖어본 적 없는 유리창의 차가운 가슴을 부수고,
자리 한 번 옮길 줄 모르는 소나무의 외고집을 뿌리째 뽑아 던진다
항아리의 숨통을 막고 있는, 무거운 모자 뚜껑이 날아가고,
허명으로 번쩍이던 거리의 간판도 한순간 떨어져 부서진다
수천 리 질주하던 바람이 자진하여 쓰러진 지상의 한켠,
하늘에 새로 돋은 별들이 파란 눈을 반짝이며 폐허의 한 귀퉁이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다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황규관
천길 벼랑 같은 사랑을 꿈꿀 나이도 지난 것 같은데
이 한여름에 목마름의 깊이가 아득타
영등포역 맞은편 사창가 골목에서 눈이
마주친 여인의 웃음으로는 어림도 없다
종말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새로운 시간은
갈라터진 목마름을 넘어
텅 빈 몸뚱이가 될 때라 읽었는데
아직 태풍이 오지 않는다
거센 바람과 빗줄기가
허공을 힘차게 가른 다음에야
얹힌 슬픔은 북받치는 울음이 되겠지만
어지러운 인간의 길은
범람한 강물이 투명하게 지우겠지만
태풍은 지금 적도 부근에서 끓고 있는가
짓밟힌 골짜기에서 이제 몸 일으키고 있는가
차마 절망하지 못해서
아주 아프게 그러나 빗물에 씻긴 무화과나무 잎처럼
나를 멀리서 바라보고만 있는가
목마름을 태울 새로운 목마름은
오늘을 절멸시킬 새로운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