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 1
가혜자 – 장맛비
강보철 – 장마가 시작되면
강보철 – 장맛비
강세화 – 오뉴월 장맛비
강순옥 - 장맛비
강정식 - 장마
강정식 – 장마의 추억
강중훈 - 마른장마
강해림 – 장마
강현덕 - 장마
강희창 – 장마
고운기 - 장마
고은영 – 가을장마
고정애 – 장마 앞에서
고진하 – 장마
공광규 - 장마에
공석진 – 장마
공재룡 – 장맛비는 내리는데
공현혜 – 장마
곽종철 - 장마전선
곽종철 – 장마철에 보는 해
구중회 – 장마기(記)
권경우 - 장맛비
권순자 – 장마
권오범 - 건들장마
권오범 – 마른장마
권오범 – 억수장마
권오범 – 장마 통
권오범 – 장맛비
권윤오 – 화려한 장마
권태응 – 장맛비 개인 날
기혁 – 오란비
길상호 – 장마 속의 잠
김강태 - 장맛비
김경렬 – 장맛비
김경선 - 장맛비
김근 – 장마
김근배 – 장마
김금자 – 장마의 추억
김기갑 – 장맛비
김기원 - 장맛비
김길남 – 장마 끝 산행
김길자 – 장마
김나영 - 장마
김낙필 - 장마
김내식 - 장마철 고추잠자리
김대식 – 장마
김대식 - 장맛비
김덕성 – 마른장마
김덕성 – 유월 장맛비 소고
김덕성 - 장맛비
김덕성 – 장맛비 내리는 날
김덕성 – 장맛비 서정
김명관 – 장마
김명배 – 장마 유감
김명우 – 장마
김명인 - 장마
김명희 – 마른장마
김문억 – 장마
김미선 – 겨울 장마
김민서 - 장마
김병훈 – 장마
김사인 - 장마
김선균 - 장맛비
김수우 – 장마 예보
김순진 – 장마와 소나무
김순진 – 팔월 늦장마
김승동 - 장마
김신오 - 장마
김안로 – 장마
김영자 - 장마 후, 퇴근길에
김영제 - 늦장마
김영제 – 장마
김영천 - 장마
김영환 – 축복의 장맛비
김옥진 – 장마
김유택 – 장맛비 유감(遺憾)
김인숙 – 장맛비
김인자 - 장마
김재근 – 장마의 방
김재진 – 장마
김정윤 - 장맛비
김정택 - 장맛비
김종제 - 장마
김주대 – 장마
김주수 - 장마
김지명 - 장마
김지헌 – 상륙, 장마전선
김지희 - 건들장마
김진학 – 장마
김찬석 - 장마
김행숙 – 장마가 끝나고
김향숙 – 장마
김현덕 - 장마
김형술 - 장마
김흥님 – 장마
김희경 – 긴 장마가 시작되면
김희경 – 장마 무렵
김희영 – 마른장마
장맛비
가혜자
뽀얀 그리움에
동글동글 동그라미
수도 없이 그리다가
옆도 뒤도 안 보고
수직으로 곧바로
낮고 낮은 땅 위에
생명수로 떨어져서
더위에 지친 대지에
쉼을 주고 알곡들
살찌우고픈
당신의 눈물입니까
장마가 시작되면
강보철
바지런한 개미들
제 몸보다 큰 등짐 지고
장맛장 긴 줄 만들면
코끝 간질이는 축축한 기운
능소화, 임 소식 그리워
돌담 너머로 붉은 목 내밉니다.
하늘 머문 푸른빛
깨알 같은 산수국꽃
긴 봄 가뭄 마른 목축이고
소가지 부리는 비바람에도
묵묵히 몸 적시며
흔들리는 땅나리
텃밭, 고추 호박 숭덩 썰어
밀가루 반죽에 슬쩍 소금으로 간해
궁금한 입 달래던 시절
잿빛 하늘 품은 창
사선 긋는 장맛비로
그 시절이 피어납니다
장맛비
강보철
끈적이는 사연
칭얼대는 시간
누덕누덕 더께 되어
힘들고
더럽고
서럽고
주름, 깊은 골마다
엉키고 설킨 응어리
쏟고 또 쏟아
벗겨내고
닦아내고
씻어내고
청춘
뜨거운 여름을 만나
짙어가는 푸르름
바다가 맛을 내고
산이 맛을 주고
들이 맛 들어간다
오뉴월 장맛비
강세화
오뉴월 장맛비가 몸을 풀어 내린다
옹졸아 마른 땅에 작정하고 내린다
부옇게 흐린 하늘도 씻어주며 내린다.
타는 풀잎 꽃대궁에 초록으로 내린다
답답한 가슴에도 다정하게 내린다
어디나 촉촉 적시며 느긋하게 내린다.
걸음걸음 돌아보며 차근차근 내린다
주룩주룩 느릿느릿 눈감은 듯 내린다
똘똘한 낙숫물 소리 절절하게 내린다.
마음을 비우고 나면 따스하게 내린다
서로가 조금씩 져주면서 내린다
세월아 환해져라고 열두 번 소망이 내린다
장맛비
강순옥
연이어
퍼붓둣이
내리는 장맛비야
인제 그만
내렸으면 좋겠다
하늘의
소유도 아닐 텐데
바닷속
물고기 산란 때처럼
쉼 없이 내리는 장맛비야
인제 그만
내렸으면 좋겠다
폭우로 와르르
한해 농사 무너진
농부의 마음 어쩌라고
기록도 세웠으니
인제 그만
내렸으면 좋겠다
억새풀 꽃꽂이
햇살을 빨아들이는
비밀의 정원이 보고 싶다
장마
강정식
방송국마다 피해 속보가 홍수처럼 쏟아진다
300mm 이상 내린 살인적인 호우로
서울의 서쪽이 침수되고
물에 잠겼다 고속버스 터미널이
벌써 3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단다
늦은 아침을 꾸역꾸역 먹으며
점심에는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면서
느긋하게 소파에 가로 누워
TV 화면을 강 건너 물 구경하듯 바라보며
깜박깜박 낮잠 속으로 다시 빠져 든다
비는 계속 전국 온 사방에 쏟아지고
겹겹으로 자동차들이 처박힌
시장 통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사망자 수는 이미 40여 명을 넘었다
맥없는 잠도 장대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7호선 운행이 중단되고
도심의 신문사가 물에 잠기고
사망자 수가 50여 명을 넘은 것 외에는
아무 일이 없나 보다
100mm 이상의 비가 더 예상된다지만
내게 별일이 있을 리 없지 여기며
게으른 낮잠 속으로
더 깊이 빠져 들어간다
빗줄기는 줄기차게 거세지고
TV 화면에서는 아우성이…
40명, 50명, 60명…
장마의 추억
강정식
어릴 적 장마는 긴 기다림이다
물 새는 지붕과 벽면 곰팡이가
전장의 기념비 같은 커다란 지도를
상처처럼 남겨
고단하게 살아가던 궤적으로 쌓였다
우묵배미 안마당
정강이 넘게 흙탕물이
문지방에 찰랑거릴 때쯤
붉은 기와 용마루에도 틈이 자라서
하늘이 보이고
천장을 적시며 영토를 넓혀가
물받이 그릇이
방 안 가득하던 시절에도
우리는 강가로 물 구경 갔다
마른장마
강중훈
마른장마가 비옷 같은 미끄러움으로
내 이마를 타고 내릴 때,
4차선 도로 가장 끝자리에서
나는 또 다른 추억의 사랑을 낚시질한다.
가슴속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내리지 않는 비와 비 사이로
속 빈 버스 한 대,
내 앞을 막아선 바람을 가르며 지나가지만
비는 내리지 않고,
신호등을 꿈꾸는 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는데,
질퍽한 그리움이 녹아 흐르는
인도와 차도의 중간 쯤,
오로지 장맛비처럼 비틀거리는 그림자 몇 조각,
오늘도 나를 부정하며
4차선 도로 가장자리에 서 있다
장마
강해림
복지교회 옥상 위에서 예수가 비를 맞고 서 있다 첨탑 십자가를 향해 빗줄기가 심문하듯 창끝, 꽂힌다 시멘트 바닥 널브러진 검은 비닐봉지와 널빤지 조각들 퉁퉁 불은 기억의 한쪽 끝을 움켜쥔 채 빗물 토해내고 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멀어, 꿈과 현실을 사선으로 이어주던 양철 계단이 삐걱거리며 무거워진다 빗소리에 지붕과 지붕, 번지와 번지 사이 구원이라 믿었던 길들 경계가 실려가고 삶의 찌꺼기가 홈통을 타고 흘러내린다
세상을 온통 붉은 녹물로 뒤섞어놓으며 범람하는 시간의 하수도는 만원이다 밤새 중얼거리던 주기도문이 떠내려가고 누추와 생활의 무게로 달그락거리던 세간살이가 떠내려간다
며칠째, 옥상 안테나는 복음 대신 빗소리를 송전하고 있다
장마
강현덕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장마
강희창
바깥은 온통 빗금투성이다.
뜨거운 욕망을 숨긴 울매미처럼
사람들은 입을 꾹 다문 채
은신처로 빨려들어 갔다
전선은 종잡을 수 없이 이동 중
막하 섣부른 선택은 금물임
비는 앙갚음이라도 하듯
본디 욕심 이상 쏟아 부었다
반발하는 우울 두 분자, 분노 한 방울
낮은 곳을 찾아 어디든 강림하사
쓸어가야 할 것은 모두 쓸어가야지
터전을 잃고 쓰린 가슴속까지도
비는 이미 분별력을 상실한 지 오래다
시계추는 물을 먹은 듯 무거웁다
나름의 기대치는 승산이 없지
갈증은 습습한 틈바구니에 웅크린
독버섯처럼 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모든 인내는 전선 뒷전에서 종종걸음 중
은신처에 탕 난 욕망들은
쨍하는 햇살이 장막을 가르자
원래 모습으로 단숨에 복귀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과장은 심해지고
아무리 잃어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고
아무도 못 넘볼 배짱 한 움큼이라도,
하지만 벌써 모두 잊기 시작한다
장마
고운기
개구리가 운다
검은 구름 떼에 밀려 여름 해도
일찍 졌다
나는 어느 산골에 묻혀
담배에 불도 붙여 보고
해 지면 다니기 힘들어
발길을 빨리 거두던 어머니
패랭산 넘어
어두워 캄캄해지기 전
길 모퉁이엔 언제 나타나시나
마음 졸이던 생각도 나는 해 보고
긴 여름해가 지치도록 끝나도
엄마의 모습만 보이며 좋았는데
끝내 보이지 않는 것이
세상에는 있더라
끝내 기다려야 할 것이
내게는 있더라
여름 해 떨어져 어둡고
구름 떼 하늘에 깔렸는데
개구리는 운다
장대비가 쏟아지리라고?
가을장마
고은영
계절 앓이에 묻어 놓은 아픔들이
호우 속에 통곡처럼 요란하다
얼마나 세찬 몸부림이냐
흙과 하나가 되어 흘러가는
사소한 물방울들이 제 형상을 허무는 일은
만남과 이별의 책장을 넘기며
정지된 추억의 앨범에 번개 같은
날렵한 청춘의 미소나 행위를 그려 넣은 일은
무심한 세월이 저 빗줄기에 지난 기억을 싣고
저물어가는 세상에 아쉬운 여름과 벗하여
강물로 강물로 흘러가는 물줄기마다
그리움을 그려 넣는 일은
장마 앞에서
고정애
저기압을 끌어모으고 있다
비구름이 한 덩이로 뭉치고 있다
사지문지 덩치 크고 힘센 무리들이
재빠르게 사방에서 모여들고 있다
넓고 두터운 스크럼으로 전선을 구축하고 있다
밀리면 끝장이야
먹구름으로 바리케이드를 친다
연중 가장 큰 저기압 종친회가
번개와 벼락과 물벼락을 마련하고 있다
장대 같은 빗줄기를 갖추고 있다
장마
고진하
1
평생을 쇠갈퀴 같은 손으로 흙만 파며
살아가신 할머니의 열 손가락엔 지문이 없다
반질반질하게 닳은 호밋자루 낫자루처럼
그렇게 닳아서 없어진 것일까.
사람의 손가락에 새겨진
나선형의 지문을 영혼이 들어오고
나간 흔적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하지만 난 지문 없는 손을 잡고는
할머니의 영혼의 숨결을 뜨겁게 느끼곤 한다.
그 쇠갈퀴 같은 할머니의 손에 가끔씩 붙들리고 싶지만
벌써 쭈글쭈글한 우주 배꼽으로 돌아가신 지 오래다
오늘도 난 볼록 튀어나온 내 배꼽을 만지며 그리움을 달랜다
2
폐허의 담벽 아래, 성스런 신의 병사들이
지구의 왼쪽 관자놀이를 찢는 총성이 울리고
그 피와 살을 받아 핥는
시퍼런 잡초와 갈가마귀의 혀가 비릿하다.
골고다, (우주 배꼽?), 거기, 여전히 신생아들의 울음소리도
들린다지?
안 보았어도 좋을, 흥건히 피에 뜬 조간을 보며
질긴 탯줄을 씹듯 간신히 조반을 삼켰다.
장마가 쉬 그칠 것 같지 않다
장마에
공광규
건물과 숲을 배경으로 나를
사진 찍으려고 검은 구름 커튼을 친 채
후렛쉬를 마구 터트리신다
내가 지상에서 저지른 죄를
조목조목 다 아는지
후렛쉬를 터트린 후 호통까지 치신다
배경이 맘에 들지 않는지
아니면 내가 너무 더러운지 비를 뿌려
샤워도 시켜주신다
구름 위 저 하늘로 가는 날
오늘 찍은 사진을 편집해 두었다가
판단하시려는가 보다
장마
공석진
서러움이
살점 뜯어내는
눈물 쏟는구나
뼛속까지 스며
골수로 아파하여
애흔(愛痕)마저 흐르나
그리움 출렁이어
가슴 속 흘린 눈물
천길만길
찬란했던 사랑은
추락하는 몰골로
끝없이 울어댈 뿐
장맛비는 내리는데
공재룡
숨 막히는 열대성 저기압
소나기 탓만은 아닐 것이다
매일 무엇에 쫓기듯
짓눌림과 답답함은 왜일까
빗줄기 속을 오가는 사람
모두 행복해 보이는 데
중년의 어깨 너머
젖어드는 외로움에 탓일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녹슨 세월 염색된 추억
꺼져 가는 기억 속에
또 무료한 하루가 지나간다.
두고도 가져갈 것도 없는
우리네 삶인 것을
내 마음 다 적셔놓은
장맛비만 주르룩 내리는데
장마
공현혜
영월댁 할머니 마디 굵은 손엔 지문이 없다
호밋자루가 다 지웠다 했다
같이 사는 할아버지 손에도 지문이 없다
삽자루가 다 지웠다 했다
동네 사람들은 두 사람이 한집에 사는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이 되려고 만난 것이기에 가족 있는 사람들은
모른척 하는 것이 예의라 생각한 탓이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할아버지는
높은음 목소리로 전국 사투리를 쓴다
담너머 들려오는 할아버지 화난 목소리에
지나가던 사람들 모두 웃을 수 있는 것도
할머니가 막걸리 통 들고 빨리 걷는 것도
사람들에게는 재미있는 하루 일과였었다
은행이라고는 한 뼘 소금 항아리가 다 였고
귀한 반찬은 낚시에 걸려던 생선뿐이던 생활
목소리 엮이고 목소리 엮으며 마음 엮어 살던 날은
할아버지 아들 찾아오던 날이 마지막 장면이었다
소금 항아리 깨진 그날은
억수 장맛비 쏟아지고
경찰차도 병원차도 안 왔다
밥상에 마주 누워 할아버지는 왼쪽으로
할머니는 오른쪽으로 지문 없는 손가락을 걸었을 뿐
흙 발자국 넘치는 방안에는 빗소리만 가득 들어앉았다
동네 사람들은 무덤 하나에 두 사람을 뉘었다
눈물 마르는 사람 없었고 제 자식 보고 웃는 사람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 사나흘 동안 비는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장마전선
곽종철
올라온다는 기별에 잔뜩 기다리는데
어디에 눌러앉아 이리 더디냐.
너무나 보고 싶은 임처럼,
가뭄에 단비도 동행할까 하여 보니
바람만 일렁이고 먹구름만 바쁘네.
애간장 태우는 임처럼,
온종일 내내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밤잠까지 설치다 잠든 새벽
단비 소리에 그대를 맞이하네.
바람 잡는 바람으로 그대는 변하네.
빗방울 커지고 천둥 번개 동반하여
성난 임처럼 물 폭탄을 토해내네
장마철에 보는 해
곽종철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비구름을 몰고 다니면서
천지를 물바다로 만드는 장마전선,
너를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롭지 않네.
네가 머물고 있는
중북부지방에는 물 폭탄 세례인데
북태평양고기압의 가장자리에 있는
남부지방은 햇볕이 쏟아진다나.
병 주고 약 주는 고약한 짓들이
어찌 네 탓이라고만 할 수 있으랴.
먹구름 뒤에 보이는 해야!
그대 본 지도 오래되었네만
뒤에만 있지 말고 앞에 나와
천둥 번개는 멀리 보내고
뭉게구름 데려와다오.
보이다가 사라질 그대 모습에
내 마음을 전해본다
장마기(記)
구중회
수증기와 편승하는
물방울들은
구름만 되면
이미 소나기로 쏟아진다
자갈밭에 자라는 들풀
황토물로 뿌리채 뽑아
싣고 떠나간다
물방울들은 바다에 가도
왜 바다가 못 되는가.
또 수증기로 피어오른다
장맛비
권경우
숯등걸의 목마름
하늘에 젖은 구름 모으니
간절한 마음 담아
내일 날씨를 만든다
밤새 뇌우 거느리고
큰 울음에 호수 이루니
농부는 망상의 늪에서
차라리 눈을 감는다
사나흘로 성긴 누런 모들
아침살에 뭉긋거리고*
그제야 정침하는 빗줄기
아무 일 없다는 듯 멀뚱거린다
그러함에도 피로한 기색은 역력하구나!
하늘이 사(赦)하는 너라지만
다소곳이 다가오면
누가 뭐라니?
* 뭉긋거리다 : 나아가는 시늉만 하면서 앉은 자리에서 머뭇거리다
장마
권순자
장맛비에 꽃길이 묻히네요
오래도록 서러운 꽃물이 번지네요
뭉쳐 가슴 속 깊이 박혔던 그리움들
빗줄기로 갈라져 마구 쏟아지네요 쓸쓸한 빗소리
꽃잎은 빗물에 둥둥 떠내려가며 눈물 삼키고 있네요
세상의 모든 상처들은 다 비명들처럼 끓어오르고
캄캄한 울음들은 빗금들을 쳐가며 일렁이는
무늬들만 자꾸만 더 새겨놓네요
투명한 내장처럼 당신의 얼굴이 또 포개지네요
어쩌죠 당신을 향한 뿌리가 아직도 저토록 자라나고 있으니
길거리에서도 저토록이나 당당하게 출렁대오고 있으니
장맛비에도 아랑 곳 않고 저토록 뜨겁게 자라나고 있으니
당신의 선홍색 목소리도 둥둥 떠내려오고 있으니
붉은 촉수로 젖어 온통 산지사방으로 다 흘러내리고 있으니
구름이 수면 아래에도 둥둥 떠내려오고 있네요
얼굴이 온통 퉁퉁 부어올라 그리움마저도 퉁퉁 다 부어올라요
물컹물컹한 이 그리움들만 점점 더 불어나네요
그리움이 다 터져버리면 이토록 비만 내내 내리게 되는 걸까요
초라하고 측은한 낮달은 저 하늘의 또 그 어디엔가 숨어 있다는 걸까요
창백한 회색의 저 허공 위에서 저 혼자만이 오로지 안 젖어 들고 있다는 걸까요
건들장마
권오범
열대야로 흐리멍덩하게 지지고 볶더니
가을 향한 어중간한 처서 보폭에
잦은 작달비에 버무려진 세상
모처럼 아스팔트에 꽂힌 햇귀가 투명하다
유리창이 제집인 양 달라붙어
성하의 푸른 물결 침침하게 막던 먼지들을
어둠 속 더듬거려 말갛게 닦아 내리느라
방울꽃들이 밤새 그렇게 칭얼거렸던 것을
옥상부터 방범등 대머리까지 싸잡아 감기고
뒤란 호박잎 하나 다치지 않게
말끔히 야간작업 끝내고 시침 뚝
그러잖아도 곤댓짓 일삼는 코스모스 세월 만났다
하늘이 평소 볼만장만하는 것 같아도
삼라만상이 꾀죄죄해지는 꼴을 못 봐
때맞춰 대청소해주니 죄짓지 말아야지
산책길 비거스렁이가 이다지도 상큼할 줄이야
마른장마
권오범
1
먹장구름들이 몰려들어 앞산 정수리 짓밟고 놀다
심심하면 천둥 번개 낳느라 요란 떨더니
그깟 뒤란 고춧대 여남은
간에 기별도 안 가게 찔끔대다 말게 뭐냐
피뢰침마저 자주 헛다리 짚어
긴장이 풀렸는지
오락가락하던 철없는 제비 새끼나 붙잡아 두고
몸매가 제비 같다는 둥 성희롱 일삼게
두리번거리는 게 일인 잠자리는 그렇다 치자
하늘이 며칠 헛기침으로 엄포만 놓을 거라는 걸
하루살이들은 어떻게 알고 태어나
가로등 불빛 교에 미쳐 생난리인지
티브이 속, 예쁜 아가씨가 뉴스 덜어 짬을 내
오늘 밤 본성을 드러낼 것 같다고
고자질 일삼는 걸 보면
이번엔 진짜 같기도 하다만서도
2
장마면 장마답게 물퉁이구름 몰이해와
속 시원히 쥐어짜지
유통기한 다된 구름 끌어안고 지짐거려
공연히 헤살 부리는 7월 초입
이러다 하필 배동바지 쯤
세세연년 그랬던 것처럼
물 폭탄으로 지구 껍데기를
무작스럽게 벗기려고 벼르는 건 아닐까,
그러잖아도 난기류에 휩싸인 세상이라서
생화의 마지노선이 뿌리 째 흔들려
바늘방석 지키려고 꼭두각시가 된 몸
벌써부터 열대야가 집적거려 환장하겠다
하기야 인간 때문에 오존층이 구멍 나
습관적인 자반뒤집기로 버티는 지구
머잖아 바다마저 자리보전해야 할 판에
장마라고 제정신일 리 있겠나
3
면면이 이어와 손에 익었을 연중행사건만
시작부터 션찮아 갈증 해갈이 안 된 우리 동네
그러면서 만날 가마솥처럼 볶는 걸 보면
밑천이 딸리나 보다
우중충한 구름 시켜
만날 더위만 낳아놓고
한 사날 혹은 대엿새에 한 번씩
감질나게 생색만 내는 하늘
어제는 솜 같은 뭉게구름으로 가을까지 표절해
어쩐지 속보여 남세스러운지
오후에 더러 가무잡잡한 것들 집합시켜
드디어 날 잡았구나, 했건만
멀리서 번쩍번쩍 싸우기만 할 뿐
만삭이 된 먹장구름들
밤새 산고로 으르렁거리다 또 흐지부지
떠들기 좋아하는 걸 보면 정치 닮아가나
억수장마
권오범
1
태곳적부터 이어진 조직 간의 암투로
변방 에돌던 기압골이
먹장구름 앞세워
본색을 드러낸 7월 한복판
해마저 감금해놓고
서슬이 시퍼렇게 으르렁대더니
서로가 못마땅해
근본을 없애려나 보다
패싸움에 휘말린 아스팔트
차선이 익사하자
차들도 꼬리를 사리고
걸신들린 듯 포식하는 하수구
혈투로 추락하는 패거리 발길질에
대성통곡하는 양철지붕
밴댕이 소갈머리일지언정
막중한 책임에 여념 없어 다행이다
2
만삭으로 더부룩해진 소소곡절
언제까지 끌어안고 여행할 수 없어
어차피 금수강산에 비우려고 작정했거들랑
골고루 적당히 나눠줄 것이지
적선이 아까운 듯
마지못해 찔끔거리다
편파적으로 휘뚜루마뚜루 쏟아 부어
놀부같이 티를 내는 몹쓸 심보
무슨 억하심정으로
예 저기
하루아침에 결딴내
애먼 농부들 피눈물 흘리게 하는지
넘치면 부족한만 못한 것을
엎친 데 덮칠 요량으로
또 기웃거리는
징글징글한 먹장구름들아
장마 통
권오범
북쪽에서 태어나 차갑게 팽창하는 무리와
남쪽에서 태어난 화끈한 천성
조물주가 지구 거름발 위해 수작부린 상극이라
만나지 말아야 평화로운 사이
그러나 어쩌랴
삶의 원천 공급 목적이 우선이라
세력이 비대해지면 모름지기
싫든 좋든 치러야 하는 전쟁이 숙명인 것을
만나기만 하면 철천지원수 같이 으르렁거리다
결국엔 끝장을 봐
세력이 와해돼야 직성이 풀리는
피차 득 없는 연중행사
인간들 방패인 우산과 동행하도록 밀고 밀리다
며칠 조용한 걸 보면, 아마
세력 보충할 때까지 휴전하기로 했나
상투적인 수작이 궁금해 그냥 속가량해보는 7월
장맛비
권오범
몇 해 전 물벼락에 덴 가슴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아
제발 마침맞게 지나가주기만을 빌었건만
티브이 속에 처참하게 담긴 내 고향
어차피 다 같이 필요한 삶의 에너지
골고루 나눠줄 수는 없는 걸까
한평생 살림살이 물꼬 트일 새 없어
애면글면해온 마음 골라 발목 잡을 게 뭐냐
불공정 양심 전매특허라도 냈는지
지신에게 미운털 박혔는지
어디는 넘치다 못해 쑥대밭 만들고
어디는 갈증으로 타들어가거나 말거나
멀찌감치 이사 가고 싶어도
이래저래 없는 운 쫓아다니며
더 피눈물 나게 복수할 것 같아 못 뜨겠다며
오히려 도회지 안부 걱정하는 전화기 속 친구
화려한 장마
권윤오
빗물에 젖고 싶다 빗속을 달리고 싶다
빗물을 한없이 마시고 싶다
갈증 난 농민들은
애타게 하늘만 쳐다 본다
해마다
찾아오는 6월의 장마 기다린지 오래다
산천초목과 농심이 타고 있다
아 아 장마철인데
올해는 왜 비는 오지 않노
하늘이 우리를 죽일라 카나
논바닥이 갈라지고
농심이 비틀거리며 논 바다에 뒹굴고 있다
곧 비는 오기는 오겠지 장마철인데
푸념 섞인 기다림 속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뇌성벽락이 치고 기다리던
폭우가 쏟아 지던 날
흠뻑 젖은 바람이 대지를 더욱 눈부시게 한다
장마는 시작되고
소갈은 풀리고 넘실대는 화금들판이
눈앞을 스쳐간다
희망을 몰고 온 장마
화려한 장마라 부르고 싶다
장맛비 개인 날
권태응
활짝 장맛비 개었습니다
새빨간 봉숭아 눈부십니다
맴 맴 매미들 울어 댑니다
이젠 장맛비 개었습니다
잠자리도 좋아서 날라 댑니다
우리들은 고기잡이 개울 갑니다
오란비*
기혁
비가 오자 살이 젖는다
누군가의 손이 빠져나가고
다녀간 흔적들이 사라지는 중이다
되돌아갈 길을 잃으면
편협한 기억은 고립되거나
같은 곳을 맴돌곤 했다 어쩌다
만진 사랑의 반절이
생선 비늘처럼 미끌거릴 때
웅덩이와 진흙탕을 오가는
말굽 자국이 보였다
씨앗도 벌떼도 없는 핏줄 위로
푸른 멍이 무지개로 떠오르고
나는 뒷모습뿐인 풍경을 쓸어 본다
가장 아픈 피부는 흔적이 남지 않는 곳
이별이란 지름길은
얼마나 멀쩡한 몸부림인가
말굽마다 쿵쿵거리는 심장을 매단 채
말의 울음이 커튼처럼 펄럭인다
당신이 되돌아오는 계절
환하게 젖은 살결이 허물어지고 있다
* 오란비 : 장마의 옛말
장마 속의 잠
길상호
한 바가지 남은 쌀을 쏟아놓고
쌀벌레 골라내는 어머니, 제발
저의 꿈틀대는 몸은 집어내지 마세요
시간을 까먹고 또 파먹어도
푹 꺼져버린 배를 채울 수 없어
쌀로 만든 집 필요했던 거예요
아직 날개 돋지도 않았는데
이제 겨우 단꿈 씹고 있는데
어머니 시커먼 손가락이 닿으면
서툴게 지은 집 깨지고 말아요
눅눅한 장마 지나고 나면
퇴화된 등판 날갯죽지가
삐걱삐걱 다시 움직일 것 같아요
넌 환상의 방에 누워 있는 거란다,
어머니의 말은 듣기 싫어요
깨어나 날개 없이 처박히더라도
그냥 여기서 젖은 몸을 말리게
비 내리는 세상 불러내지 마세요
장맛비
김강태
너는 용광로 속 쇳물인가
어둠에 바라보는 장대빗날의 끓기
섭씨 60도 혹은 70도쯤
어떻게든 수직에 가까웁게
누운 몸이 패일 때까지
불질한다 화냥질을
쏘시개면 어떠랴
한밤에 쇳물을 떠나 뜻 모를 불나비로
마냥 미쳐 날아다니기만 할 뿐
15도 혹은 10도의 틈을 비집고
불칼 몇 점
나의 한잠 칠흑 중심에 꽂으니
기웃대던 새벽이 찬찬히 깨진다
과녁이다 나는,
무수히 쓰러지기만 하는
장맛비
김경렬
빗소리 들리니
종이배 띄우며
놀던 꿈은 어제인데
지시락에 떨어지는 고인 물에
어제 같은 꿈을 꾸어 보네
가슴 한구석 허전함은
물처럼 흘러간 세월뿐이런가?
하루종일 빗물인지 눈물인지
앞을 가릴 수 없네
장맛비
김경선
해마다 적자공연을 다시 기획하는 7월
구름이 떼로 몰려와 허공 곳곳에 공연 포스터를 붙이고 다닌다
관람료 없음 완전 공짜!
무대 뒤에서는 중국 남부 내륙지방과 일본 남해상에 걸쳐 온
출연진의 공연 준비가 한창이다
밑창이 닳은 햇빛 구두를 벗어 던지고
새로 갈아 신은 구름구두 밑창에 탭을 박는다
협찬받은 무대의상은 유행이 한참 지난 물방울무늬
그중 새로 맞춘 번개무늬와 사선 무늬 몇 벌 끼어있다
무대연출자가 없는 공연,
첫 출연인 애송이 빗발 하나가 리허설을 하고 있다
공연 직전, 관중석에는 우산을 쓴 연인 한 쌍
손님이 들지 않는다고 울먹이는 먹구름
금세 주르르 눈물을 쏟을 것 같다
큐!
드디어 햇빛 커튼이 올라간다
무대막 사이 눅눅한 바람의 종아리가 보인다
일제히 무대로 뛰어오르는 굵은 빗발
타닥타닥 탁탁 타닥
저 요란한 탭 댄서들
리듬에 맞춰 동그란 발자국이 사방으로 튄다
텅 빈 객석을 향해 온몸으로 춤을 추는 댄서들
차츰 기운이 빠진다
늘 똑같은 지루한 레퍼토리,
제주도 부근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이동하던 출연진이
합류한다는 기별이 왔다
잠시 소강상태였던 무대가 화끈 달아오른다
장마
김근
너희들은 죽었다 우산도 없이 이상하게도
비를 맞고 철벅철벅 걸어가는 너희들은
날 어둡고 비 쏟아지고 빗소리 포악하고
몸에 들러붙어 잘 벗겨지지 않는 옷 속에서
너희들은 그만 죽고 죽어 새파랗게 웃고
맑은 날 숲으로 떠난 아이들이
산딸기에나 저희 손과 입을 붉게 더럽힐 때
그 붉음이 아이들을 길 잃게 할 줄은 영영 모를 때
걸어오지 말아라
팔 흐느적거리며 저는 다리로 뒤뚱거리며
나에게로 번개처럼은 천둥처럼은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삶
한 번도 죽어보지 못한 죽음
뜨거운 살을 뚫고 김 오르고
인간도 짐승도 아닌 소리들
모락모락 피어나 흩어지는데
걸어오지 말아라
산 적도 죽은 적도 없는 나에게로는
미안하지만 너희들은 죽었다 살았다고 우기며
꾸역꾸역 내가 여기서 온종일 비를 맞아도
장마
김근배
오듯 오지 않습니다
오지 않는 듯 옵니다
가는 듯 가지 않습니다
가지 않는 듯 갑니다
가는 날과 가지 않는 날,
시간의 그 새로
비가 가고 옵니다
비탈길 위태롭게 선
나무 발치, 넘어져
넘어져 부러지고 흔들리는 가지
휩쓸려 갑니다
시간의 그 새로
청개구리 어린 울음 매달고
오고 갑니다
장마의 추억
김금자
반기지 않아도 여름 문지방을 넘어와
밤 같은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면
굵은 빗줄기는 메마른 가슴을 적시고
대지의 품에 안겨 둘만의 밀애를 나눈다
고인 빗물처럼 가슴이 흥건히 젖으면
소용돌이치는 태풍의 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천둥, 번개의 불꽃처럼 뜨거운 밤을 살랐지
잉태된 소중한 것을 지키려
삶과 죽음의 깊은 물살을 거슬러
내려놓고 퍼내 버린 시기와 질투
긴 장마로 그립고 보고픈 날에 이끼가 끼고
여우비에 거미줄 같은 이야기가 무성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구름 속에서 얼굴을 내미는 허무
휘몰아치는 태풍에
심연의 바다를 뒤엎는 애별의 눈물
무지갯빛 행복은 어느 구름 속으로 숨어든 걸까
인생이 비바람에 떨어진 과일 같고
고무신처럼 떠내려간 여름 추억이
장마에 휩쓸린 풀뿌리 같아도 끝은 미려하다
장맛비
김기갑
탁한 모습 안쓰러워
올해도 잊지 않고 찾아왔구나
곳곳에 묻어있는
투쟁의 흔적들을 깨끗이 씻어다오
목이 타는 꽃과 나무
실컷 마시게 하라
힘들고 지친 영혼
맘껏 울고 쉬게 하라
모두가 새 생명을 얻어
순결한 마음으로
뜨거운 태양 아래
열렬히 사랑하며 살아가리라
장맛비
김기원
장마라서
같은 하늘 아래서도
저쪽 하늘은 비가 온다지만
이쪽 나 사는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낀 그런 비가 장마 비인가
곳곳에 간간이 뿌려지는 비
이런 날에
막걸리와 파전 향기에
가야금 소릭 비 소리인가
그토록 먼 옛날부터
농민 가슴을 애태웠나
나 오늘 여기까지 왔네
너를 만나려고 산을 돌고
여러 마을 지나
그토록 먼 길을 목마른 대지에
너를 만나 쉬어 가리라
장마 끝 산행
김길남
장마 뒤 끝이라
표범 폭포 밑 계곡이 범람하다
징검다리가 보이지 않아
신발을 초혜로 갈아 신고
기우뚱거리며 계곡을 건넌다
발 위로 듬직한
바윗돌이 굴러감을 느낀다
태양은 생명의 햇빛을
내리쬐어 주었다
구름은 푸른 하늘을 화폭 삼아
추상화를 그리고
이름 모를 산새는
발랄하게 지저귀며
푸른 나무 사이로 날아간다
한가로운 새 소리가
테레빈유 소나무 향기와
같이 춤을 춘다
야생화가 파르르 흔들렸다
꽃 위에 앉아있던 점박이 나비가
근처를 한 바퀴 사뿐거리다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용의 비늘은 갑옷을 입은
울긋불긋 적송의 뿌리는
땅을 박차고 나와
승천을 하려는지 폼을 잡고 있다
시야가 너무 맑아
동북쪽으로
금강산 내금강 산줄기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여
두 발을 높이 들고
그냥 손을 내밀었더니
설잡으로 끝나고 말았다
장마
김길자
구름 하나가 중천에서
헛구역질 몇 번 하더니
이내 울컥울컥
쏟아붓는다
나뭇잎들이 목 놓아 울어
개울마다 눈물이 넘치고
호우에 상처 난 대지의 신음소리
초록의 몸부림이다
장마 그 끝에서
막중한 책임을 놓칠 수 없어
땀과 눈물의 시간을 딛고
개망초 떼 지어 꽃을 핀다
장마
김나영
냉면발보다 질긴 빗줄기가 하수구로
찰지게 빨려 넘어간다
길 건너 옥상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하늘을 빨래집게가 꼭 물고 있다
그걸 바라보는 동생의 얼굴에
저기압 전선이 잡혀있고 이마에는
며칠째 깊은 기압골이 형성되어 가고 있다
몇 그릇을 말아냈을지 정신이 없어야 할
삼복에 손님 대신 불량한 빗줄기가
문 안으로 들이닥친다 오늘도 공치는 날,
늘 빗나가던 일기예보가 올여름은
척척 잘 들어맞는다 어쩌다 들어오는 손님들
냉면 그릇에 동생은 한숨을 둘둘 말아 내놓고,
나는 그걸 눈치 못 채게 걷어내는데,
점점 거세어지는 빗줄기가 빈 식탁 위에
빈 의자 위에 사리처럼 똬리를 튼다
남해상에서 발달한 저기압 전선이 또
북상 중이라고 TV는 투덜대고 있다
냉면집 내부가 팅팅 불어터진 물냉면 같다
장마
김낙필
집 나간 청양댁이 항구 횟집에서
시름없이 파리채를 휘두르고 있을 때
먼 바다길을 가로 지르는 빗발은
몇 날을 후줄근히도 내렸다.
웬수같은 서방놈이나
가슴에 묻은 애들 생각에
애꿎은 파리채 모가지만 부러뜨리고
끝내 방죽 허물어지듯 울음보가 터진다.
방파제위로 비에젖은 갈매기 하나
제집 잃고 헤메는데
그 신세도 처량타 목숨 부지하는 일이
이리 죽기보다 어렵던가.
열무김치 보새기에 소주병 걸쳐놓고
창문 밖 비 바다만 넋 놓고 바라본다.
새색시 연지곤지 찍고 시집오던 날
그날부터 긴 장마의 시작이였던가
팔자는 그때 그 지루한 장마처럼
칙칙하게 비 오는 날 말고는 없었다.
꼬인 인생살이 술로 달래고 담배로 날리고
고래고래 육자배기 피를 토해가며
곁불거지 삶이 지리멸렬 축축하기만 했다.
눈가에 세월이 진물처럼 묻어나고
탱탱하던 육질은
바람 빠진 풍선 마냥 질컹거리고
담배 연기처럼 새치머리 날리는
포구식당 구석탱이
운명같은 빗소리에 심신이 폭삭 삭아내렸다.
이놈저놈 옆구리 찌르던 뭇사내들도
하나둘 제 갈길 찾아 떠나버리고
비 맞은 강아지마냥 갈 곳 없는
청양댁...
몇날 몇일 하릴없이 빗줄기만
세다가
애꿎은 소주병만 하나 둘 셋 넷..
발끝으로 뒹구는데
우라질놈의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항구..
그 그믐밤이 깊어 간다
장마철 고추잠자리
김내식
언제 멈출지 모르는 장마
오던 비가 잠시 그칠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난 고추잠자리 떼
가만가만 뒤를 따라가 보니
그들의 집은 비 맞는 풀잎이다
비가 퍼 부울 땐 잎새 밑에 매달리고
약하게 내릴 때는 위에 앉아
얼굴이 거울 되어 하늘을 보며
부르르 물기를 털어낸다
이따금 빗방울이 뜸해지면
연한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며
수재민들이 펼친 가재도구 위로 날아
밝은 희망을 보여준다
장마
김대식
흐리고 해 나고 비가 오기를 반복한 장마가
어느 날엔 무서운 폭우를 쏟아댄다
하늘엔 웬 물이 저렇게도 많은지
미처 대비하지 못한 물난리에 그 피해 심하다
어떤 땐 일에 채여 감당을 못하다가
어떤 땐 또 일이 전혀 없어 실업자 신세
이래저래 삶의 고단함은 그칠 줄 모르고
생계의 막막함에 그저 한숨만 나온다
이래도 걱정 저래도 걱정 삶이란 걱정뿐
순탄할 땐 또 앞일이 잘 안될까 걱정이고
걱정으로 체념할 무렵엔
덤터기 같은 버거운 일이 터지고
어쩌면 내 인생 같은 장마
맑음과 흐림과 폭우의 인생
노후를 대비하지 못한 막막함
왠지 한숨은 그리 많이 나오는지
장맛비
김대식
장마라서
같은 하늘 아래서도
저쪽 하늘은 비가 온다지만
이쪽 나 사는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낀 그런 비가 장마 비인가
곳곳에 간간히 뿌려 지는 비
이런 날에
막걸리와 파전 향기에
가야금 소릭 비 소리인가
그토록 먼 옛날부터
농민 가슴을 애태웠나
나 오늘 여기까지 왔네
너를 만나려고 산을 돌고
여러 마을 지나
그토록 먼 길을 목마른 대지에
너를 만나 쉬어 가리라
마른장마
김덕성
올 것 같은 테
왜 오지 않니?
애타게 기다리는데
장마철인데
남쪽에서만 오르락내리락
올라 올 기세가 없는
장맛비
예년에는 시원하게 뿌리며
북쪽 하늘을
넘나들었는데
왜 무서워서 오지 못하는가
오늘도 오는 길목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서성대고 있는데
쌓인 분노가
폭발하기 전에
해갈해 주려므나
어서
유월 장맛비 소고
김덕성
유월이 떠난다
오랜 가뭄이 계속되고
초여름인데 한더위 못지않던 유월
유월은 떠나면서 미안해선가
장맛비가 내리면서
가뭄을 일소하려고 떠나려는 듯
폭우로 변하기도 하고
마구 토해 내는 장맛비
빗방울 한 방울의 생명
폭우라 해도 목말라 헤매던 나날들
촉촉하게 적시는 그 빗방울
투명한 사랑의 눈물인가
사랑의 생수 받아먹는 꽃들
새 생명으로 사랑을 피어 내고
내 가슴에도 사랑이 피며
오는 장맛비 속에
칠월이 오는데
장맛비
김덕성
하염없이 쏟어진다
언제는 그렇게 인색하더니
이젠 나를 닮았는가
지나치게 성심을 쓰는고
누구의 눈물이 그리 많은 건가
세상은 다 그런 건데
참으며 살아가야지
안 그런가
이제 나도 자유롭게 해 주렴
갇혀있는 몸을
외로움이 스며드는 밤
깊어 가는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야속하게
장맛비는 마냥 내린다
장맛비 내리는 날
김덕성
장맛비가 내린다
나무마다 두 팔을 벌리고 미소로
환영하면서
하늘을 우러른다
추욱 늘어진 잎사귀
바닥을 드러낸 갈라진 저수지
오랜 가뭄을 보면서
하늘의 고마움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장맛비
생기를 얻은 초록 잎새
청풍에 마음을 씻은 심오한 마음
내 마음까지
기쁨과 행복이 차오르는
은혜의 날
머리를 숙인다
장맛비 서정
김덕성
1
가뭄으로 대지는 타들고
초록빛도 누렇게 빛이 변색되던 날
사랑의 장맛비가 촉촉이 적신다
얼마나 고마운지
생명을 잃기 직전
투명한 맑은 눈물을 생명인양 부어
수목이 새 생명으로 피워나며
내 가슴에도 피워낸다
생명을 지닌 자연에게
목마름을 촉촉하게 적시는 빗줄기
투명한 사랑의 눈물인가보다
이제야 살았구나
안도의 한숨과 함께 새 생명의 부활
새로운 변화로 사랑의 꽃이 피워
장맛비로 되살아나는 고마움에
사랑의 눈물이 흐르고
2
비는 생명수다
수목들에게 스미며 생기를 얻는다
고요 속에 내리는 빗줄기
가슴 속에 사랑 비가 되어 내린다
장맛비는 퍼붓는 악성을 있어
잿빛하늘에서 급행으로 쏟아 붇는다
삽시간에 도로에 달려들어 삼켜
하천이 되는 흐른다
비는 정서가 묻혀 있어
특히 시인에게는 따뜻한 마음에
희로애락과 같은 감정을 일으켜 주어
시제로 시를 쓰게 한다
퍼붓는 장맛비는
이제 비의 속성인 생명의 비로
사나운 세파에 물들지 말고
사랑스럽게 내렸으면
장마
김명관
7월은
슬픈 하늘을 품고 산다
너를 사랑하고부터
누구에게도 줄 수 없는 마음
사랑할수록 커져가는 목마름은
그렁그렁 눈물로 맺히고
눈물방울 떨어진 자리마다
낯선 인연 풀처럼 돋아도
너는 아직도 그 자리
장마 유감
김명배
비 오는 날, 그대
보내 놓고
어느새 돌아보는 그대
그냥 보내 놓고,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그대
찾아 나섰더니,
오라는 비는 오지 않고
날벼락만 치더라.
각시 하자 어미 하자 하는 말
부정해서
돌아와 문 꼭 걸어 잠그고
외짝 귀신 되었더니
해마다 그맘때쯤 되어서는
비는 왜 자꾸 올까.
억울한 건 하나 없지만 그대
불 꺼진 이 가슴에
비 되어 내리면 무엇하리
장마비 되어 내리면
무엇하리
장마
김명우
목숨 바쳐도 후회하지 않을 사랑한번 못하여
시퍼런 칼날 들이대고
목숨줄 끊어 버릴 원수조차도 없다
정오의 태양이 살갗을 파고들어
가슴속 시커멓게 타들어가도
잘룩한 허리
하얀 속살 드러내는 밤을 기다리며
축 늘어진 불알
침 한번 꿀꺽
밤마다 흔들리는 네온사인 가랭이 사이로
어눌한 몰골로 헤집고 나온 야간 노동자
하도 불쌍해
예수는 아직도 피 흘리고 있는데
저 끝에 햇살 한 조각 조그맣게 생기면
떼 지어 몰려가는 피서객
지평선 맞닿은 곳에서부터 시커멓게 뒤 덮는다
담벼락에 말라비틀어진 장미
얼룩진 음부의 부끄럼조차 잊고서
구부정한 등짝에 벗겨진 허물
칼날에 꽂히고 뼈마디를 부수며
아침에 반짝일 은빛 노래되어
내 아이 뛰어 놀 수 있게
밤새도록 퍼붓는 하늘의 비수.
일 할 수 있는 행복이라고
땀 흘리는 세상 아름다운 사회라고
틈만 나면 까발려도
굽신거리는 노동자의 관절
씨-펄
비가 올려나
폭풍전야
신촌로가 밤을 켜면
노동의 지친 호흡
삼동교 다리위에 걸어놓고
우울한 하루치 계산을 마친 작업복을 걸친 채
잃어버린 사랑을 쫓아가다
길을 잃는다.
유영하는 노동
쉴 곳마저 추억 속으로 던져버리고
네온에 취해 밤을 벗긴다.
별빛들은 안개에 젖어 빛을 잃고
축축한 호흡마저
이제 곧 폭우에 짤 릴 지도 모를 일
“비정규직 차별철폐”
“대량해고 원직복직”
절뚝절뚝 빌딩사이로
전단 뿌리듯 내뱉어보지만
이내 빗물에 찢겨져버린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목숨을 내어준 예수의 사랑에
지친 하루를 걸어두고
비릿한 노동
당당한 오만으로
십자가를 바라본다
장마
김명인
며칠째 공사가 중단된 다가구 단지
일용 잡부들끼리는
양은 냄비로 잡담 끓이거나
소간* 없는 심술로 서로 들볶지만
외상말코지 고스톱도 이제는 바닥이 나
페트병 막소주에 삼겹살
노린내나 비로 굽는다
곰팡내 물씬 나는 입맛 안쪽까지
들이치는 빗줄기여, 생각 몇 병으론
이 너절* 기울 수 없어
한 사내가 주머닐 뒤집는데
둘러앉은 반편들도
며칠 전부터 빈털터리
굽질리는* 빗소리에
불알 속이 다 질척거린다
* 소간(所幹) : 할 일, 용건.
* 너절 : 허름하고 지저분함.
* 굽질리는 : 일이 꼬여서 잘 안되는
마른장마
김명희
애절하게 여름을 부르던
뻐꾸기 울음도 하나 둘 짙은 열기로
묻혀 갔다
어느새
소서를 지나며
장마라는데
터무니없는 퇴약볕 아래
비내려라
간절한 기도는 스폰지처럼
사방으로 흡수되고
장마 삼킨 끝없는 가뭄에
마른 논바닥처럼
쩍 쩍 쩍
갈라지는 가슴
그리고 마음들
씨 뿌렸던 그 봄날이
그렇게 가버린 뒤
매일 갑갑한 마음에
비라도 내리기를 바라는
수없는 날이 가고 또 가고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붉은 해를
토악질처럼 쏟아내 놓는
7월
쨍쨍한
마른하늘에
장마 언제 오려나
빈 하늘에 해무리 옷을 걸쳐 입고
간밤
꿈속에도 비는 오지 않는
마른장마였다
장마
김문억
1
네가 그리운 날은
날 밝은 대낮에도 벼락같이 비가 오고
비 오는 밤이면 달을 내다 걸었다
끊임없이 연일
큐우핏 화살이 가시울을 뚫고 꽂혀오면
뚫어진 가슴에서 선홍빛 꽃이 펑펑 피고
청록빛 산정에서 불이 활활 탄다
아프게 바싹 타버린 잿더미에서
연소된 그리움이 물안개로 자욱한 날
산은 하루에도 몇 번 씩 떠나고 돌아 오며
우리의 거리를 확인해보며
고백하는 소낙비가
참았던 말 초서로 단숨에 막 휘갈긴다
알 듯 모를 듯 판독하기 어지럽다
먼 산에 구름 가면
물 흐르는 소리
비 개이면 푸른 숲이 더 가깝게 다가 오겠구나
2
평택평야 우리 땅에 철조망을 둘렀다
지루하다
가뭄으로 갈라져 금간 틈, 틈 사이에서
美軍은 집을 짓고 農軍은 모를 심고
예
아니오
예
아니오
단답형 쇠막대로
단답형 물대포로
한냉전선 난기류 집중호우 퍼부으며
범람하는 홍수경보
다듬잇돌, 반닫이, 징검다리 다 떠내려가네.
장맛비 그치고 나면
복구비나 주느냐?
겨울 장마
김미선
누가 여자를 분열된 풍경 속에 걸어 두었을까
물구나무선 여자의 맨발은
버스 바퀴를 굴리고 있다
당돌한 무임승차에
승객들이 히죽이 웃고 있다
풀어 헤친 머리카락 창밖으로 내밀어
어느 별에서의 암호를 수신 중이다
단절이 지어내는 빌딩의 시계바늘
고장 난 위성 안테나에서
수신받지 못하는 별똥별이
아득한 기억 속에서 혼자 흔들린다
지구촌에 기거하고 싶었던 눈빛
처절히 태양에 매달려
억겁의 시공을 넘나든다
생의 궤도 이탈
낯선 우주에 걸터앉은 여자
또 다른 행성을 굴리고 있다
활화산 같은 눈망울이 부질없이
온전한 지상을 불평으로 휘젓는다
불안한 유리창에 흰 거품이 흘러내리고
오후를 실은 도시 버스가 황급히 달리고 있다
장마
김민서
비 온다
끊어진 듯 이어지고
잦아들다 격해지며
비 온다
오로지 한 길로
오롯이 한 마음으로
말갛게 질겨지는 이 빗줄기
낱낱이 바늘귀에 꿰어
터진 마음의 솔기를 기우면
수몰은 면할 수 있을까
비 온다
어느새 정강이를 적시고
허리 명치 지나
기어이 쇄골까지 차올라 흥건한
그리움의 벅찬 물살
그리움은
철없이 장마지고
한없이 범람하는
내 안에 있는 외부
이번 生은
도무지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내 안으로
그대의 속으로
깊이깊이 수장되리라
장마
김병훈
어머니의 양산은
며칠째 휴가 중입니다
아버지의 우산은
며칠째 야근 중입니다
장마
김사인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묵으로
젖은 발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보러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로 갈까
긴 긴 장마
장맛비
김선균
요란한 비명을 지르며
숨 가쁘게 달려와서는
지붕을 두들기고 땅을 패고 야단인데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고
젖은 툇마루 아래 멍멍이조차
빗물 머금은 눈빛이 좋지 않다.
성난 하늘 문 닫힐 줄 모르고
천지창조의 울림을 담은 폭수는
산산이 부서지며 가슴을 내리치고
지상의 아우성 소리에 귀 기울이다가
한풀 꺾인 시늉으로 슬며시
감춰 놓은 해를 내밀 적에
노아의 떨리는 가슴엔
소망의 무지개가 뜬다.
우산을 접고 올려 다 본 하늘
하얀 구름을 빨랫줄에 털어 널며
철없는 미소를 띠우고는
한껏 기지개를 켠다.
참회한 아담의 눈물이
용서의 강물에 이를 즈음
원초적 죗값을 치루고
생명나무에 매달려 빛날 때
하늘은 파랗고 마음은 투명한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장마 예보
김수우
표시 나지 않게 웃는다 복숭뼈에 튀는 빗방울. 우산을 접었다 꽃이 두근거린다 아니 두근대는 건 꽃을 안은 가슴, 우산을 폈다 문방구에 들러 두꺼운 노트를 산다. 일기를 새로 쓸 거야. 우산을 접었다 잎차 향기가 들새의 눈물처럼 흔들린다. 우산을 폈다 수화기를 들고 물안개 목소리로 안부를 전한다. 깨어진 유리컵. 우산을 접었다 맹꽁이 울음이 심심한데 빈 의자 같은 얼굴 하나. 우산을 폈다 철조망 감아오른 호박 줄기 그 손짓에 속살대는 개망초. 우산을 접었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미워한다. 뱀딸기 같은 몽상의 파편. 우산을 폈다 코끝이 시리다 오늘부터 장마래지 뭉게구름처럼 사치스러울 수 있을 거야. 타박거리며 현관문에 키를 꽂다가 어머나 택시 안에 우산을 두고 내렸어
장마와 소나무
김순진
이 사람아, 비 내리는 밤이 좋다고 하더니만
칠월 장마의 밤을 좋아하는지 몰랐군.
한가윗날 광명의 밤보다도
섣달그믐 소록 눈 내리는 밤보다도
그렇게 좋더란 말인가.
좋으면 나랑 같이 새워 볼 일이지
홀로 망상의 허리를 쥐고 앉아
반딧불이 소곤대는 하늘나라 얘기를 듣다가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면
하늘나라로 가는 지름길인 줄 알았나.
목에 건 전투화 줄이
겨우 소나무 가지에 걸렸는데
그곳이 하늘나라인 줄 알았겠지.
보게나
자네의 발끝이 땅 위에 닿았네.
비 내리는 밤이 좋다고 그랬지만
결국 외로운 생각이 들 걸세.
명년 칠월 장마엔
땅 위의 발끝을 들어 올리고
후년 칠월 장마엔 하늘나라에
터 좀 닦아서
잘 살게나.
그렇지만
자네네 나라엔
비는 억수같이 내려도
소나무는 없을 걸세.
그래서
여기 자네가 올라간 소나무를 베어 왔네.
여기
이 소나무에 기름을 붓고
한 가치의 성냥을 그어대네.
이 불길의 자네에게로 닿거들랑
불꽃이랑 연기랑 모아
소나무를 만들게
그 소나무는
칠월 장마 지는 어느 날 밤
또 필요할 거야
자네가 날 부르면
칠월 초복의
태양이 사정없이 쬐는 날
자네가 올라갔던
그 소나무 그루터기 옆의 소나무에
살진 개 한 마리를 목매어 올려 보내겠네.
그 개를 보내면 제발 좀 묶어 기르지 말게나.
그 개는 자네와 친구가 될 걸세.
여기 자네의 제사상 앞에 향을 피우고
재배를 하네
그리고 밥풀강정 한 개를 먹으며
대신 쐬주 한잔 부어 놓겠네
팔월 늦장마
김순진
팔월이 되자 끈적한 공기가
근심을 파리처럼 빨아대더니
상념의 소용돌이 열흘 밤낮
쏟아지는 원수 같은 빗줄기들
산사의 염불 소리를
집어삼킨 수마가
사람들이 토해 내는
온갖 속어들 마저 뼈 째 삼키고
우중(雨中)의 설법 보다
더욱 씨알 멕히는 간계와 저주가
명아주 지팡이 든
노인들의 귓전에 경을 읽는다
전장(戰場)의 비극보다
더욱 처절한 문둥이 비
비에 드러난 죽은 자들의 묘비명이
수련 꽃 보다 더 섧게 운다
생의 고비에서 들리는
복구 현장의 기곗소리
칭가칭가 엥가엥가
해골 눈 보다 움푹하다
목숨을 넘실대는 야광충은
유영하는 아린 언어들을
회심곡 보다 애잔한 노랫말로
폐허 위에서 살풀이 춤을 춘다
억지로 목숨 건진 이
찝찌리한 까마중 따 입에 넣으며 독백
이 눔의 비 그만 좀 오지
자벌레 한 마리 근심을 잰다
장마
김승동
아침부터 창밖은
늘어진 흑백영화다
우산 속의 아이도 종종걸음이고
빗길 자동차도 구성진 음색이다
가끔씩 뻥뻥 뚫어진 화면으로는
무료한 시간만 튀었다 사그라진다
갈 데도 없이
칙칙한 손잡이만 잡았다 놓았다 하면서
검열에 용케 빠진
난해한 장면이라도 기대해 보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열리지 않을 풍경 같지만
햇빛 한 줌 훔쳐두지 못한 아쉬움이
은막에 숨은 그림자처럼
빗물 위에 일렁인다
물방울에 터진 마음
치렁치렁 흘러내리는 날
유리창에 매달려
백열등에 차임벨 기다려 보지만
무엇이 서러운지
오늘은 하루종일 연속상영이다
장마
김신오
하늘에 감춰 둔
그리움의 둑이
터졌습니다
전화도
편지도
젖어 버린 날
손바닥 가득
이름을 쥐고
철없이 웃었습니다
장마
김안로
비는 잠시
그치고
내 생각은 영영
잠기고
장마 후, 퇴근길에
김영자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고 있었다
여우비가 내린 북녘에서의 하늘
햇살 비추이고 푸른 등줄기 들녘너머
지난 추억으로만 기억했던 일곱 빛깔
이 성채를 이루어 그녀를 매혹했다
찬란한 성문에 이르러 산이 있었네
깊은 골짜기 품어 푸르름과 무수한
꽃을 피워내고 있는 숲에서
순리의 길을 걷는 한 사람이 꽃을 가꾸고 있었다
그녀는 어느 새 여름 오후의 산에
보라
남색
파랑
초록
노랑
주황
빨강 꽃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
늦장마
김영제
창밖으로 원치않는
신기록을 하나 세우며
지긋지긋했던
올해의 장마가 끝났다
농촌은 비상이다
안 오면 안 와서 고민
오면 너무 와
사고 쳐 후수습 불안
높낮이의 차이에
산 등진 우리 아파트
산 깎여내려
흙탕물 길 만들었다
장마
김영제
무수한 점들이
선을 만들어
창문을 적시고
하루를 적신다
하루를 적셔 논
꽉 찬 선들이
강줄기 만들어
여름을 적신다
한 달의 긴 우기
촉촉 적신 논과 밭
풍년을 부르고
가을을 부른다
장마
김영천
내 어린 뼈가
꽝꽝하게 여물어가던 시절,
이유 모를 분노나 슬픔 같은 것들이
회오리바람처럼 불어갔었나니
절망도 희망도
번지수를 찾아가지 못하고
내 안 좁은 골목길을
서성거리던,
문득
온몸 시리게 장맛비가
내리곤 했었나니
터벅터벅 간난의 길을
가로질러 가다가
풀썩, 주저앉는 골다공증의
내 한평생이
시퍼렇게 질린 풋가시나의
입술처럼
파르르 떨며
젖은 숲으로 자지러지고 있구나
지운 듯 다시 짙어지는
그리움이여
축복의 장맛비
김영환
아침은 아직도 먼데 내리는 장맛비
소리가 선잠을 깨우는 새벽입니다
들이치는 비에 화들짝 놀라 열린
창문을 닫습니다
벌써 창틈을 빠져나간 불빛은
아파트 광장 젖은 바닥에서
비를 맞으며 춤을 추고 있습니다
빈방에 불을 켜면 밤비처럼
찾아오는 반가운 사람이 있습니다
마른 잎을 적시는 이슬처럼
반가운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날마다 상처받고 살면서
날마다 세상을 치유해 주는 사람
갈대보다 약해도 바람보다 강한 사람
가냘프고 슬퍼도 이슬보다 투명하고
꽃보다 아름다운 영혼입니다
그대 고운 마음이 향기가 되어
내리는 비를 타고 음악처럼
들려오는 밤입니다
아!
이 밤의 굵은 빗줄기가
그대 가는 길에 축복처럼 내리는
아름다운 장맛비 되소서
장마
김옥진
오뉴월 손님
달갑잖은 손님
잘 치르고 나면
먹구름 속
햇살,
맛볼 수 있다
장맛비 유감(遺憾)
김유택
깊은 밤
장마 오는 세찬 소리
후덥지근 뜨거운 앞가슴엔
땀방울 맺히는 불쾌함
가려움의 인내
일터가 걱정돼
잠자리를 박찼다
긴 밤 일터엔
무슨 일 없을까
날 밝아오는 아침이 두려워
비상 연락망 속 직원들
밤잠을 깨운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
직원들은 디지털 시대
양적인 것과
숫자와 계산적 표현과의 불협화음
장맛비가 우릴 싸움의
유혹 빛깔로 젖게 한다
속내를 가리고
얼굴만 드러낸 우리는
새벽 축시(丑時) 때 만난 Salary-Man
장맛비 유감(遺憾)
졸리운 눈 소지(小指)로 비비며
떨어지는 눈꼽만큼
우린 정(精)이었다
주) 여름 장마가 시작된다고 하더니 늦은 오후부터 굵은 빗줄기 한바탕 쏟고 저녁 내내 비바람, 천둥 번개까지 몰고 온다 내일 아침 보도자료엔 사건 사고가 없기를 희망하며
장맛비
김인숙
1
지금 쏟아지는
당신의 사랑이
하루를 갈지
얼마를 갈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높은 하늘을 떠나
낮고 낮은 땅을 향해
부어주시는 뜨거운
정열로 오시는 임이여
당신을 한없이
원 없이 맞이하여
행복으로 드러눕고 싶은
오늘입니다
내리소서
오소서
지금처럼
쏟아부어 주소서
날마다 심한 갈증
애끓은
목마른 심령을 구하소서
2
내가 그대의 허전한 마음을
넉넉히 채워 주지도 못 하면서
풍성한 행복을 주지도 못 하면서
온통 기쁨이고 전부이지도 못 하면서
그대의 오랜 친구 예쁜 꽃들과
하늘거리는 보드라운 바람과
구름과 나무들에 왠지 신경이 쓰여
꿉꿉한 장마철 같았던 날이
하루 이틀 일이 아닌데
막상 오랜 친구들을
장대비로 쓸어내리고 보니
마음이 상쾌하지만은 않은 것이
씁쓸한 느낌인 것은 무엇일까
이것도 사랑이더냐
이것도 사랑이더냐
작대기 같은 빗소리가 밤새 좍좍 내리고 있다
장마
김인자
장맛비 속입니다 새삼스레 비엔 푸른곰팡이, 아니 슬픔의 냄새 같은 게 배어있다고 수선 떨고 싶지는 않습니다 비는 우울로 빚은 술, 마시면 취하는 알코올이지만 때론 마시지 않고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취하는 도수 높은 술입니다 늦은 밤의 빗소리는 먼길을 걸어와 종신서원을 마친 수도자의 기도하는 뒷모습을 떠올리지만 폭풍 속의 비는 미친개의 번뜩이는 눈알입니다 칠흑의 들판을 내달려 무엇이든 물어뜯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은 근질거리는 이빨을 가진 미친개의 속성, 비는 우글거리는 생명입니다 두꺼운 옷을 벗겨 적나라하게 원시의 시간을 걷게 하는 길 안내자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들에게 '당신'이라는 따뜻한 호칭을 허락한 이름도 '비'입니다 비는 세상의 모든 남자를 정부情夫가 되게 하고 세상의 모든 여자 또한 정부情婦로 만듭니다 고백할까요? 어느 날 그와 내가 눈맞은 후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은 콩밭에만 가있는 말하자면 그는 나의 기둥서방이고 나는 그 사내의 내연의 처인 셈이지요 그러나 싫지 않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복병 같은 장마
장마의 방
김재근
여긴 고요해 널 볼 수 없다
메아리가 도착하려면 아직 멀기에
당신의 방은 침묵을 기다린다
시간의 먼 끝에 두고 온 목소리
하나의 빗소리가 무거워지기 위해
빗소리는 얼마나 오랜 침묵을 배웅하는지
몸 안에서 몸 바깥을 들여다보는
고요를 거슬러 오르는 눈동자
아직 마주친 적 없어
침묵은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몸을 찾는 일
말없이 서로의 목을 매는 일
빙하에 스미는 물소리처럼
여린 식물의 초록 잠 속처럼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기에
당신의 몸은 빗소리를 모은다
장마
김재진
햇볕에 말리고 싶어도 내 마음
불러내어 말릴 수 없다.
더러우면서도 더러운 줄 모르는 내 마음의 쓰레기통
씻어내고 싶어도 나는 나를
씻어낼 줄 모른다.
삶이란 하나의 거대한 착각
제대로 볼 수 없어 온몸이 아프다
장맛비
김정윤
경자년 7월
삶이 허무하다며
찾아와
한낮을 울다가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그 많은
눈물을
쏟으며 울고 있다
허허로운 마음
문을 열기 무섭게
뛰어든 슬픔이
돈도 명예도
모두 부질없다며
애꿎은 신록만
할퀴고 지나간다
어느 날 갑자기
진실을 묻은 체
잘라버린 토막 난 삶도
운명이냐며
슬픔을 참지 못해
낮과 밤을
흐느끼고 있다
장맛비
김정택
1
목마른 대지 위를 적시는
계절의 벗
처마 끝 낙수소리 추억을
들려주면
후덥한 내 마음속을 시원하게
씻어주네.
엄마의 손장단에 부엌 안
분주하면
풍로불 더운 입김 부추전
바싹한 맛
창호문 툇마루 위에
행복한 정 가득하다
2
하늘이
울적하여
내리는 눈물인가
온종일
내리는 비
마음을 젹셔오니
잠자는
아린 사연을
하나 둘씩 씻어주네
처마 끝
낙수소리
세월을 두들기면
추억을
더듬으며
사색에 젖어 보니
운무 낀
앞산 마루에
한 시절이 머문다
장마
김종제
한 사나흘
바람 불고 비만 내려라
꿈결에서도 찾아와
창문 흔들면서
내안에 물 흘러가는 소리 들려라
햇빛 맑은 날 많았으니
아침부터 흐려지고 비 내린다고
세상이 전부 어두워지겠느냐
저렇게 밖에 나와 서 있는 것들
축축하게 젖는다고
어디 갖다 버리기야 하겠느냐
머리부터 발끝까지
누구에게 다 젖고 싶은
그 한 사람이 내게는 없구나
문 열고 나가
몸 맡길 용기도 없는 게지
아니 내가 장마였을 게다
나로 인해
아침부터 날 어두워진 것들
적지 않았을 테고
나 때문에 눈물로 젖은 것들
셀 수 없었으리라
깊은 물속을 걸어가려니
발걸음 떼기가 그리 쉽지 않았겠지
바싹 달라붙은 마음으로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졌을 거고
그러하니 평생 줄 사랑을
한 사나흘
장마처럼 그대에게 내릴테니
속까지 다 젖어 보자는 거다
장마
김주대
아버지만 당신의 생애를 모를 뿐
우리는 아버지의 삼개월 길면 일 년을
모두 알고 있었다
누이는 설거지통에다가도 국그릇에다가도
눈물을 찔끔거렸고
눈물이 날려고 하면 어머니는
아이구 더바라 아이구 더바라 하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열어놓고 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눈치 채지 못했으니
모두들 목구멍에다가 잔뜩 울음을 올려놓고도
내뱉지는 않았다
병원 출입이 잦아지면서 어느 때보다
무표정해진 아버지 얼굴에는
숨차게 걸어온 오십구 년 세월이
가족들을 물끄러미 쳐다보곤 했다
전에 없이 친절한 가족들의 태도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모를 일이다 아버지는 이미
당신의 남은 시간을 다 알고 있으면서
가족들을 위해
살아온 생애가 그렇듯 애써 태연한 건지도
여름내 아버지 머리맡에 쌓이는
수많은 불교 서적들에서
내가 그걸 눈치챌 무렵
어머니가 열어놓은 창밖에는
긴 장마가 끝나가고 있었다
장마
김주수
사과나무의 사과도 처마의 고드름도 아래로 자라고
산골짜기 폭포수도 우렁찬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진다
심지어 중력의 끝은 지상을 넘어 구름까지 닿아있다
그래서 구름그늘도 늘 지상에 사뿐히 내려와 있는 것이다
머나 먼 구름까지 높이 닿아 있는 중력의 손끝에서
무수한 빗줄기가 물빛 화살처럼 쉼 없이 쏟아진다
만유인력 속으로 빗소리가 활기차게 부화하며 퍼져간다
모든 생명의 그림자와 인간의 발자국을 붙잡아주는
자전하는 지구가 빗물에 마음을 한껏 적시는 시기가 있다
장마
김지명
실처럼
내리는 비
며칠째 이어지네
빗속의
추억으로
즐거움 가득하네
궂은 비
홍수가 되어
흔적마저 없애네
상륙! 장마전선
김지헌
세상은 온통 젖어 있다
후미진 구석마다
곰팡이 피어나고
저녁이면 비에 젖어 하나씩
등불을 켜 들리라
저희들끼리 무어라 밤에 속삭이며
슬픔에 젖은 별들까지도
담장 밖 온 세상 풀들이
모가지를 꺾는다
건들장마
김지희
장대비가 쏟아진다
한낮 햇살 한 줌에도
웃음 가득 머금던 골목도
발목까지 흠뻑 젖었다
입술은 온종일 비 오고
캄캄한 입속은 말라 간다
슬픈 애인 같은 비바람
시퍼런 칼날을 세워 젖은 길들을 오려낸다
하, 춥고 축축해 버리고 싶은 세상
캄캄하게 흐르는 계단을 이고
낯선 언어는
이 젖은 창가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삶에는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벼랑이 있는 법
세상이 장미 송이 다발처럼 환한 불빛 가득해도
발목을 젖지 않고는 건널 수 없는 것들이 있지
기댈 기둥 하나 없는
그 길 위에서 적막함을 쓰고
안개 신발을 신고 가뭇없는 길을 나선다
수은등 불빛마저 젖어있는
몽당연필처럼 추운 거리를
떨리며 진저리치며 지나 온 생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밤은 벌써 강으로 내려가 홀로 깊어지는데
하, 아직 얕은 길을 가고 있는 신발 하나
장마
김진학
비 내리는 날은 몹시도 서러워
몇 날이 지나도 그치지 않고
한나절이면 지겨울 그 햇볕 그리네
비 그쳐도 그날이 그날인 것을
그래도 비 내리면 몹시도 서러워
빗물에 고개 숙인 꽃들을 보네
가버리면 그만인 초라한 삶에
무슨 연유로 한(恨)은 또 생겨
나도 가면 볼 수 있을 비 오는 하늘 위
그곳이 그리운 건 너 때문인가
망할 놈의 장마는 땅에만 지지
무슨 죄가 많아 가슴엔 지나
장마
김찬석
한여름 뜨거운 열기를 잠재울
반가운 손님!
올 해도 약속 어기지 않고
찾아준 그대는, 장마
소나기, 천둥, 번개 하모니에
샛 도랑 한가득 넘쳐흐르고
고개 숙인 들풀들도 합창을 한다
먹구름 사이로 일곱 색
무지개가 곱게 옷단장하고
살며시 얼굴 내민다
늘 그리웠든 너
어느새 내 마음 축축이 적시고
햇볕의 고마움으로 변해 버렸다
그리움 떠안은 너는 장마였구나
장마가 끝나고
김행숙
장마가 걷혔다 아직은 잔뜩 찌푸린 하늘이 내려와 있지만
몇날 며칠 쏟아붓던 빗줄기가 겨우 멈췄다
성났던 분당천은 노기를 가라앉히고 모든 것은 이제 제 자리로 돌아오고 있다
비에 젖었던 오리들은 냇물 가장자리에 몸 담근 채 놀란 가슴 진정하고
아직도 빠르게 흐르는 물살을 바라본다
쏟아붓는 장대비 속에서도 불어난 흙탕물에 쓸려가던 어린 나무들은 아직도 그 자세로 엎드려 외친다
쓸어가라 쓸어가라 나는 그저 어린 나무일 뿐 내 힘으론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게 아니냐
범람했던 물이 빠지고 나자 수십 마리의 작은 물고기들이 맨땅에서 파닥거리고 있다
물고기들을 하나씩 흐르는 냇물에 던져 넣어준다
따스하고 커다란 자연의 손이라야 상처 난 곳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람 하나 방죽에 우뚝 서 있다 냇물에 휩쓸린 나를 건져낼 손처럼
장마
김향숙
국숫집 마당에 젖은 국수 가락이
하얀 기저귀처럼 흔들린다
햇볕이 나면 보송보송 말려
시장 골목 구멍가게로 배달한다
국수 값 몇 푼으로 유지하는 가족의 생계
갑자기 쏟아지는 소나기에 국수 가락이 젖는 날에는
아버지의 가슴에도 장대비가 내렸다
한숨으로 허기를 달래고
마르지 않는 궁핍으로 앞치마를 동여맸다
장마가 지면 근심도 길어져
밀가루를 온몸에 묻히고 국수를 뽑던 가장의 빈자리에
고단했던 시간들이 방울방울 맺혀 있다
국수가 길어지던 날 빗물에 풀려 버린 끈
주인 없는 앞치마가
빈 벽에 걸려 비바람에 날리고 있다
하늘에서 가늘고 긴 소면이 내리는 날
물의 가락을 뒷산이 후루룩 말아먹는다
장마 때마다 국수를 드시는 아버지
산소 앞에 식구들을 불러놓고
잔치국수를 대접한다
국수 위로 쏟아지던 눈부신 햇살이
널린 국수 가락 사이를 비집고
숨바꼭질하던 아이들 웃음소리가
국물 위로 떠오르는 밤
눅눅한 국수 가락이 기억 속에 출렁이고
퉁퉁 불은 빗소리가 뒤척이는 밤을 적신다
장마
김현덕
바람에 누운
풀잎 위로
바쁜 물들이 지나간다
물속에서
더 짙어진
달개비의 푸른 눈썹
세상은
화해의 손을
저리 오래 흔들고 있다
장마
김형술
곧 하늘이 무너지리라는
소문은 하수구를 넘쳐 거리를 떠돌고
꽃들이 떠내려 왔어
마지막 그리움마저 앗겨 버리고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이 도시의 가장 낮은 곳 쓸쓸한
이름들
화급한 발자국 소리를 지우며 자꾸만
내려오는 검은 커텐
죽음처럼 무거운 잠 속에서도
지붕은 새고
별들은 젖고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는 꽃들
어두운 눈빛에 시달리다
쫓기듯 집을 나섰지 나의 맨발은
부끄러움처럼 창백하더군
불길한 싸이렌 소리
완강히 닫혀 있는 문들
"잠들지 마
눈을 감으면 안돼"
두터운 폭우의 벽을 헤치고
호외처럼 번개는 지상으로 날아와 꽂혔지만
누구도 아는 척 않아
비바람에 휩쓸려 가는 세상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길을 이끌고
혼신으로 걸어오는 이를 만났어
눈물 글썽이는
해맑은 눈빛의 가로등
행렬
장마
김흥님
간헐적으로 흐느끼다
몇 날을 축축이 젖은 몸을 뒤척이다
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눅진한 푸른곰팡이 툭툭 털어내고
백악기 공룡들이 살았다는 바다로 간다
뇌우의 노략질에 짓물러 문드러진
꽃잎들이 바다로 떠내려와
차마 잠들지 못하고 잦은 통곡을 한다
바다는 끝내 울음을 삼키지 못한 채
수만 년 서고에 켜켜이 쌓아 올린다
울다가 지친 모든 것들은
생의 지루한 샛강을 건너고 있는 중이다
정류장에 웅크리고 앉아 건너편 정미소를 응시한다
허름한 성을 에워싼 옥수수 잎들이
장대비의 광기에 히죽거리다
자오록이 안개 속으로 무심히 돌아선다
콩 볶는 양철지붕 두드리는 소리
거대한 톱니바퀴에 맞물려 돌아가고
그 순간 마법처럼 성문이 열린다
도시의 참새떼 방앗간에 에둘러 앉아
삶이 달큼하게 녹아내린 방앗간 주인의
죽을 때까지 물리지 않는다는 밥의 진리를 경청한다
황토물이 문턱을 남실거리고
그 옛날, 방앗간 뒷집 아이가 거기 서 있다
긴 장마가 시작되면
김희경
긴 장마 진 어느 여름날 그녀는
세상의 콘크리트들이
차곡차곡 창공으로 올라가 포개고 포개더니
금방 폭음을 일으키며 뛰어내릴 것 같다고 했다
저 벽 같은 어둠이 그 푸른 하늘에
철근을 박고 시멘트로 도배를 하여
두 번 다시는 빛을 보게 하지 못하게 하는
정공법을 들고 아웃을 얘기하고 있다며
그녀는 몸에 모공이 많아 숨을 쉬고 산다고 했다
하루에 세 번, 잠시만 암막 커튼을 걷는다고
어둠에 막이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커튼이
참으로 친절하고 진실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세상 밖의 암울보다 편안한 동굴에서
귀도 막고 입도 막았던 시간
그리고 그녀는 오랜 시간 연락을 두절했다
그때부터일 것이다
긴 장마가 시작되면
만삭이 된 고통들이
누르고 있던 상처들을 낳을 시간이라는 신호와 함께
수중분만을 준비하게 된 것이
산통이 시작되면
나는 나를 벗기 시작했다
퍼붓는 장대비가 암막 커튼처럼 세상을 가린다
아주 편안히 분만은 시작된다
슬픔만큼 슬픔을 받아주는 산파는 없기에
그리고 며칠 후
늘 정해진 룰처럼
장마가 끝난다는 소식이 일어나
하늘의 철근을 뽑고 전선을 걷어내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내 안에서 밝게 웃었다
장마 무렵
김희경
하찮은 말에도 생채기는 생겼다
예전의 넉넉함은 어디로 가고
불평만 습성처럼 쌓이는지
재채기와 콧물과
발열 두통을 호소하던 하늘
끝내 오한으로 드러눕는다
가시 박힌 손톱 밑이 얼얼하더니
터질 듯이 부어오른다
마른장마
김희영
칠년 가뭄
비 오지 않는 날 하루도 없다 더니
맥반석 위에 올려놓은 오징어처럼 꼬인 대지.
길 숲의 풀잎과 꽃들도 하늘을 볼 수 없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야속한 먹구름
한줄기 시원하게 쏟아질 것만 같아도
실바람 따라 휘돌아 먼 산 너머로 사라져 버린다
하늘만 쳐다보고 기약 없는
비 내리기만 기다리고 있을 때
우두둑 요란한 빗방울, 풀잎도 젖기 전에
거두어 버린다
타들어 가는 가슴이 배배꼬인 넝쿨처럼
먹구름 한 점, 타는 목마름
우두둑 뿌려주고 달아나 버린, 마른장마
말라버린 내 가슴에도 비가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