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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雪) 2

Bollnow 2024. 8. 7. 15:07

나명옥 눈이 내리는 날

나상국 교실에 내리는 눈

나상국 눈 오는 밤에

나상국 설야(雪夜)

나상국 오는 눈을 바라보며

나태주 눈사람

나태주 늦은 눈

나탸주 - 싸락눈

나태주 첫눈

나호열 늦 눈

나호열 한겨울의 눈은

남원자 하얀 이불

노정혜 그리운 인연

노정혜 눈 눈 하얀 눈이 온다

노정혜 눈 오는 날

노정혜 오늘 밤에 눈이 오려나

도종환 눈 내리는 길

도종환 - 눈 내리는 벌판에서

도지현 눈이 내리면

류시화 눈 위에 쓴 시

류인서 -

류인순 눈 내리는 날엔

목필균 함박눈

문순자 늦눈 마저 보내고

문인수 눈길

문재학 진눈깨비의 비애

문정희 겨울 사랑

문정희 눈을 보며

문정희 - 한계령을 위한 연가

민경대 -

민경대 눈 내리는 밤

민경대 눈이 오는데

박고은 눈이 내리면

박광호 - 눈이 내리는 뜻

박광호 눈이 내리면

박금숙 눈 쌓인 아침에

박남수 첫눈

박남준 눈길

박명숙 눈사람

박미리 눈이 내리면

박서영 눈사람의 봄날

박소향 눈 내리는 저편

박신영 눈 오는 날

박용래

박용래 설야(雪夜)

박용래 저녁 눈

박인걸 -

박인걸 눈이 내리네

박인걸 눈이여

박인걸 눈 덮인 세상

박인걸 춤추는 눈

박인걸 하얀 눈

박인걸 흰 눈

박일 눈 내린 아침

박재동 -

박재성 눈 내리는 날에는

박재성 눈이 내리면

박정순 -

박정원 눈사람이 사는 집

박종영 눈 오는 날의 여백

박종영 눈이 내리고

박종영 눈이 되고 싶은 생각

박태강 눈길 산행

박태강 눈꽃

박춘식 눈 오는 밤

박효찬 눈이 내리고

배월선 밤늦게 내리는 눈과도 같이

배창호 눈보라 취설(吹雪)

백석 탕약(湯藥)

백승은 밤사이 내린 눈

백원기 - 곱게 눈이 온다

백원기 꽃눈 내리는 길

백원기 눈길이 걷고 싶었네

백원기 눈이 왔네

백원기 또 눈이 왔다

백원기 싸라기눈

백창우 다시 눈이 내리면

변종윤 눈 내리는 날에

변학규 -

복효근 겨울의 노래

복효근 눈은 스무 살로 내린다

서대경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

서봉석 눈 기다림

서봉석 어느 눈 오시는 날의 소묘

서봉석 함부로 눈 내리는 날

서윤덕 우리의 겨울

서정윤 눈 오는 날

서정윤 눈의 풍경

서지월 눈을 밟으면

서지월 앞산도 흰 눈 쓰고

성백군 강설(降雪)

손숙자 설화(雪花)

손순미 눈보라 여인숙

손현숙 눈이 온다, 누언의 증인처럼

송근주 눈이 안 오네

송근주 눈이 온다네

송무석

송수권 - 눈길

송수권 첫눈

송태한 눈 내리는 밤

신경림 -

신경림 눈 온 아침

신경림 산동네에 오는 눈

신달자 겨울 초대장

신동엽 눈 날리는 날

신성호 -

신성호 눈 치우기

신정민 - 봄눈

신형식 - 겨울은 부동자세로 선다

심재휘 성긴 눈

 

 

 

눈이 내리는 날

나명옥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하얀 눈이 많이도 내렸다

입춘도 지났는데

 

아이들과 그의 출근길이

다시 걱정되어

눈 내리는 기쁨도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옛날이야 아무리 눈이 내려도 우

산을 준비하는 일은 하지 않았는데

소녀적으로 돌아가 눈길을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도 다른 날보다 일찍 일어나

주차해둔 차의 시동을 먼저 걸어두는지 밖으로 나간다

눈이 내리면 치울 생각도 않는 나는 어린 날만 그립다

 

 

 

교실에 내리는 눈

나상국

 

어느 늦은 오후 한나절

소란스러운 아이들

눈망울이 하나 둘 줄달음쳐

창가에 초롱초롱 매달린다

 

-! !

아이들 함성이

창문 너머

함박눈으로 내린다

 

하얗게 쌓여

운동장을 가득 메우며

 

아이들 마음도

펄펄 춤을 추며

바람 따라서 훨훨 날아오른다

 

교실 안에도

하얀 눈이 소복이 쌓이고

눈사람도 하나 둘

교실을 가득 채워 나간다

 

 

 

눈 오는 밤에

나상국

 

눈 오는 밤에

발가벗고 깨금발로 선

앙상한 뼈만 남은

나뭇가지를 희롱하듯

솜사탕처럼 달콤한

입맞춤하며

귀엣말로 소곤소곤거리며

함박눈이 소복소복

쌓이며 내린다

산이며 논,

들에도 강에도

온통 떡시루 엎어 놓은 듯

암흑천지는 오간 데 없고

모두가 다 하얀

설원의 무립고원

가로등 불빛 속으로

은반 위의 요정처럼

강강술래 춤 타령에

멋진 춤사위를

펼치며 내린다

밤이 지새도록

 

 

 

설야(雪夜)

나상국

 

눈 오는 밤

해안가 절벽을 기어오르지 못한

남해안 비릿한 바닷속 이야기

파도에 떠밀려와

백사장 위에

널브러져 눕는다

 

해안가 선술집

탁배기 잔에 부딪히는

작부(酌婦)의 타향살이 설움

애달프게 부르는

비릿한 신세타령

오고 가는 밀물과 썰물처럼

내밀한 이야기 끊

이지 않는

팽팽한 줄다리기

 

눈물 머금은 바람

방풍림을 뚫고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오르며

솔숲의 음울한 울음소리

무겁게 듣는다.

 

가벼운 눈

어둡고 무겁던 우울한 마음을

하얗게 덮으며 내린다

조개무덤 위로

7번 국도 위로

수북이 쌓인다

 

 

 

오는 눈을 바라보며

나상국

 

새벽 4시쯤이었을게다

밤새도록

나무며

가로등 불빛이

추운 겨울비에

오돌돌 떨면서 흠뻑 비를 맞더니

젖은 몸 감싸주려는 듯

솜털 같은 함박눈이

어둠을 하얗게 지우며

여기저기 내린다

비 내리고 나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유난히도

비를 좋아하고

눈을 좋아했던

그녀를 떠올려 본다

저 함박눈처럼

해맑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돌연

눈꽃으로 방긋방긋 피어나

나를 향해

쭉 쭉 날아든다

 

 

 

눈사람

나태주

 

밤을 새워 누군가 기다리셨군요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그만

새하얀 사람이 되고 말았군요

안쓰러운 마음으로 장갑을 벗고

손을 내밀었을 땐

당신에겐 손도 없고

팔도 없었습니다​​

 

 

 

늦은 눈

나태주

 

늦은 겨울 오는 눈은 오자마자 녹는 눈이다

녹아서 자취 없이 눈물이 되는 눈이다

나무의 눈물, 바위의 눈물, 땅과 바다의 눈물

그래서 봄이 오는 길목을 만드는 눈이다

 

 

 

싸락눈

나태주

 

가랑잎에

싸락눈

싸락

 

하늘나라 선녀님의 속곳의

피내음도 흐릿하게

번져있었다

 

머언 먼

하늘이 내려와

옷 벗는

 

하늘나라 선녀님의 저고리

앞섶의 향내음도 아릿하게

스며있었다

 

 

 

첫눈

나태주

 

요즘 며칠 너 보지 못해

목이 말랐다

어젯밤에도 깜깜한 밤

보고 싶은 마음에

더욱 깜깜한 마음이었다

몇 날 며칠 보고 싶어

목이 말랐던 마음

깜깜한 마음이

눈이 되어 내렸다

네 하얀 마음이 나를

감싸 안았다​​

 

 

 

늦 눈

나호열

 

저렇게 부드럽게 박히는

못질이 있을까

때늦은 전언(傳言)

더러는 녹고

더러는 쌓이는데

콧가를 스치는 상큼한 냄새

한 다발씩 묶어서 드리고 싶은

빈 화병에

그 미소

새로운 역사(役事)를 하기 전에

새롭게 배우는 말씀의

짜릿한 더듬거림

하나 가득 차면서

또 하나를 가득 비우는

불꽃 비

 

 

 

한겨울의 눈은

나호열

 

한겨울의 사물은

눈이 내려야 비로소

눈을 감는다

 

삭풍에 페온이 식어가면서

안도하지 못하는

커다란 눈망울,

떨어져 내리는 손길은

따스하다

 

약속하지 못하는 내일을 위해

한 겹 두 겹

정성스레 완성되는

풍경

 

하얀 수의를 입고

떠나가는 한겨울의 사물은

이제 막 날개를 펼칠 참의

학과도 같다

 

 

 

하얀 이불

남원자

 

맑고 푸른 하늘은

저무는 한 해를

목화솜 같은 하얀 솜으로

따뜻한 이불을 덮어 주었다

 

산에도 예쁜 수채화

화가들 멋지게 붓칠을 하고

송이송이 눈꽃 송이

예쁘게 수 놓은 따뜻한 이불

 

어머니의 장독대

먼지만 가득한 장독대 위에

하얀 모자 씌워 주었네

 

마음은 차가운 얼음 속

나무 위에 살포시

내려앉은 하얀 이불

옷 벗은 겨울나무에

따뜻한 이불 덮어주었다

 

 

 

그리운 인연

노정혜

 

하얀 눈이 내린다

솜털처럼

 

사뿐사뿐 내린다

내 얼굴에 눈꽃이

 

보고 싶은 인연이여

손 호호 불며

함께 눈밭을 뒹굴고 싶다

 

새하얀 눈이 날리는 날

그리움이

가슴에

 

어디서

무얼 하고 있나

 

보고 싶은 인연이여

평안하시길

 

손 모아 기도한다

그리운 인연이여

 

 

 

눈 눈 하얀 눈이 온다

노정혜

 

눈이 온다

하얀 눈이 온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새 하얀 눈

순간에 천지를 하얗게 물들였네

 

하얀 눈

하얀 눈은 천사

천지가 새 하얗다

 

아픔도 괴로움도 하얗게 하얗게

 

새 하얀 눈이 내린다

보고 싶었다 그리웠다

 

겨울이 떠나는 길

제 값을 하는구나

 

참 좋구나 좋아

 

눈 눈 새 하얀 눈

마음이 동심으로 돌려놓는 요술쟁이

 

 

 

눈 오는 날

노정혜

 

친구와 같이

음악이 흐르는 찻집에서 커피를 나누고 싶다

 

수다를 뜰고 싶다

어디서 어떻게 늙어가나

 

보고 싶다

향이 짙은 커피와 수다의 행복

 

그 옛날 그 시절

그립다 그때가

 

다시 올 수 없는 그때

그리움으로 남아

 

눈 오는 날이면 더 그리워질 것 같다

그때가

 

펑펑 쏟아지는 눈길을 걷고도 싶다

 

 

 

오늘 밤에 눈이 오려나

노정혜

 

눈 내리는 겨울밤

오늘 밤에 눈이 왔으면

 

이대로 겨울이 가려나

 

산이 외롭다

산이 눈을 애타게 기다린다

 

빈 가지로 오돌오돌

 

하얀 옷 입고 싶다

겨울 산에 설화도 보고 싶다

 

하얀 옷 입고 싶어 모두를 지웠다

오늘 밤에 눈이 오려나

 

산이 외롭다

바람만 분다

 

설화가 보고 싶다

오늘 밤에 눈이 오려나

 

 

 

눈 내리는 길

도종환

 

당신이 없다면 별도 흐린 이 밤을

내 어이 홀로 갑니까

눈보라가 지나가다 멈추고 다시 달려드는 이 길을

당신이 없다면 내 어찌 홀로 갑니까

가야 할 아득히 먼 길 앞에 서서

발끝부터 번져오는 기진한 육신을 끌고

유리알처럼 미끄러운 이 길을 걷다가 지쳐 쓰러져도

당신과 함께라면 이 세상 끝까지 가기로 한

이 길을 함께 가지 않으면 어이 합니까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에

당신이 함께 있어서 내가 갑니다

치는 눈보라 속에서도 당신이 그 눈발을 벗겨주어

눈물이 소금이 되어 다시는 얼어붙지 않는 이 길

당신과 함께라면 바람과도 가는 길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혼미하여 뒹굴다가도

머리칼에 붙은 눈싸락만도 못한 것들 툭툭 털어버리고

당신이 항상 함께 있으므로 오늘 이렇게 나도 갑니다

눈보라가 치다가 그치고 다시 퍼붓는 이 길을

당신이 있어서 지금은 홀로도 갑니다

 

 

 

눈 내리는 벌판에서

도종환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걸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발자국 소리만이 외로운 길을 걸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고 싶다

몸보다 더 지치는 마음을 누이고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며 깊어지고 싶다

둘러보아도 오직 벌판

등을 기대어 더욱 등이 시린 나무 몇그루뿐

이 벌판 같은 도시의 한복판을 지나

창밖으로 따스한 불빛 새어 가슴에 묻어나는

먼 곳의 그리운 사람 향해 가고 싶다

마음보다 몸이 더 외로운 이런 날

참을 수 없는 기침처럼 터져 오르는 이름 부르며

사랑하는 사람 있어 달려가고 싶다

 

 

 

눈이 내리면

도지현

 

하얗게 눈이 내리면

당신과 손잡고 눈길을 걸어보고 싶어

눈이 얼마나 희고 순수한지

당신의 흐릿해진 망막에

잔상으로 남겨두었으면 좋겠어요

 

누구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을

당신과 둘이 걸으며

사그락사그락하는 눈 밟는 소리

가슴에 영원히 새겨 두어

눈 감는 날까지 두고두고 얘기하고 싶어요

 

사그락사그락하는 소리 들으며

우리들이 살아온 소소한 일들을

도란도란 얘기 나누기도 하고

얼마 남지 않은 살날이지만

생명이 있는 날까지 기러기처럼 살고 싶어요

 

 

 

눈 위에 쓴 시

류시화

 

누구는 종이 위에 시를 쓰고

누구는 사람 가슴에 시를 쓰고

누구는 자취 없는 허공에 대고

시를 쓴다지만

나는 십이월의 눈 위에 시를 쓴다

흔적도 없이 사라질 나의 시​​

 

 

 

류인서

 

눈이 온다

와서

먹어치운다

 

기둥 아래 남자를 먹어치운다

벤치뿐인 벤치를, 거기 붙은 빈자리를 먹어치운다

공터의 이글루 같은 자동차들을 먹어치운다

 

먹어치운다

엘니뇨와 라니냐의 소란한 탁자를 먹어치운다

던킨도너츠 가게 커피 한잔을 순식간에 먹어치운다

담벼락과 포장마차의 낡은 연애를

돌아와 쓰러져 눕는 반 토막 그림자를 먹어치운다

 

전화선 너머 국경 너머

둥지 밖 새들의 잔고를 먹어치운다

발 묶인 봄, 세상으로 가는 이정목을 먹어치운다

저의 근원, 북풍의 침대까지 남기지 않고 먹어치운다

 

다 먹어 텅 빈 눈의 식탁, 눈의 위장

소화불량

폭설이 온다

 

 

 

눈 내리는 날엔

류인순

 

뽀드득뽀드득

하얀 세상

걸음걸음마다

푸른 추억 꿈틀대는 소리

 

내 안의 길 따라

어느새

성큼 다가오는

그대 발걸음 소리

 

 

 

함박눈

목필균

 

아침에 눈을 뜨니

세상은 온통 은빛 속에 있습니다

깃털로 내려앉은 하얀 세상

먼 하늘 전설을 물고

하염없이 눈이 내립니다

오늘 같은 날에는

같은 기억을 간직한 사람과

따끈한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다면

예쁜 추억 다 꺼내 질 것 같습니다

하얀 눈 속에 돋아난 기억 위로

다시 수북이 눈 쌓이면

다시 길을 내며 나눌 이야기들

오늘 같은 날에는

가슴으로 녹아드는 눈 맞으며

보고 싶은 사람을 그리워합니다

 

 

 

늦 눈마저 보내고

문순자

 

목질이 단단할수록 옹이가 깊이 박힌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그것이 눈이라는 걸

몸으로,

몸으로 말하는

갱년기 잣밤나무

 

 

 

눈길

문인수

 

눈 덮인 들판을 가로지르며 길이 묻혀 있다

두더지 자국처럼 꾸불꾸불 한참 가고 있다

동구밖의 등 굽은 홰나무 밑을 지나면서

까치집 한번 올려다보이고

더 춥다

저무는 길 끝 쇠죽 여물 끓는 냄새가 난다

 

 

 

진눈깨비의 비애(悲哀)

문재학

 

젖어서 슬픈 미련의 진눈깨비

사랑 잃은 길 위에 질척거리네.

못 잊어 흔들리는 마음안고

바라보는 황야(荒野)의 길

 

사랑의 정이 그리워

저절로 흐르는 눈물

하염없이 바라보는

초점 흐린 시선위에 넘치네.

 

새하얀 자태의 기품은 어디로 가고

꽁꽁 얼어붙은 세상길에

삶의 의미가 서글픔으로 얼룩지는가.

 

서러움으로 엮인 숙명

서러움을 복 받듯 해도

눈길 주는 이 하나 없네.

 

모두 다 지나가는 꿈이런가.

회한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빤짝이며 사라지는 무정한 꿈

허망하게 접어야 하는 운명이여

 

 

 

겨울 사랑

문정희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눈을 보며

문정희

 

눈은 하늘에서 오는 게 아니라

하늘보다 더 먼 곳에서 온다.

여기 나기 전에 우리가 흔들리던 곳

빈 그네만이 걸려 있는 고향에서 온다.

첫살에 부서지는

그대 머리칼이 반가운 것은

그 때문이다.

한 생애에 돌아오는 목소리이다

우리들의 호기심

우리들의 침묵이 닿지 않는 곳

그렇게 먼 곳에서 눈은 달려 와

비로소 한 조각의 빛깔이 된다

 

 

 

한계령을 위한 연가

문정희

 

한겨울 못 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었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었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면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아름다운 한계령에 기꺼이 묶여

난생처음 짧은 축복에

몸 둘 바를 모르리

 

 

 

민경대

 

온통 백설로 뒤덮인 눈 세상

백색의 세상은 아름답고 깨끗한 세상

빛고을 광원에 더욱 아름다운 얼굴

너를 찾아온 장소가 하얀 종이로 다시 변하여

흔적을 지운다 하여도 추억의 모서리에는

가을 편지가 난무한 언어의 속삭임

새벽 기도드리러 간 모습에 사랑은 호주머니에 넣고

성경만 고이 간직한 이율배반적인 시간의 못자욱

 

 

 

눈 내리는 밤

민경대

 

이 고요한 정적 속에 태고적 숨결이 감돌고

우주는 하나의 기포를 남기고

잠들고 고요한 서정이 숨 쉬는 시간들을

아름다운 시간들을 등 뒤로 잠재우고

하나의 우주 속에 모순을 잠재우라

 

 

 

눈이 오는데

민경대

 

이제 잠시 눈이 끊지지만

밤사이 눈이 내리고

나는 어디로 갈지 몰라

동으로도 서러도 가지 못하고

차 속에서 세우잠을 자다가

새벽 455분에 길을 떠난다

무지한 자가 m시로 나의 짐을 싣고

잠시 그 잘난 계산서를 펙스로 부치는데

나는 B시로 가서 차를 찾고

아침 이 아침에 그 차가 시동이 걸리지 않고

k시 주차장에 장기 주차를 시켜놓고 장기 주차 시 문의 바람 전화번호만 적고

몸을 싣고 나는 새벽 455분 차를 타고 a시로 떠난다

이 새벽 451분에 시를 방랑자여

 

 

 

눈이 내리면

박고은

 

펑펑 눈이 내려

산천은 온통 적막의 ()

그 누구의 연서인가

 

쓸쓸한 겨울 풍경에

소복이 눈이 쌓이면

이 몸은 날뛰는 꽃사슴

치렁치렁 그리움 매달고

소식 뜸한 벗에게 달려가

보고픈 마음 전하리

 

'잘 가라' 작별의 잔 데운

님의 입술이라도

시린 영혼에 담고

재회의 기쁨을 나누리

 

한세상 고적하기만 했던

깡마른 씨앗 한 알

가슴에 떨구어

향기로운 꽃 피워 보리

 

 

 

눈이 내리는 뜻

박광호

 

수많은 사람 머물다 간

비워있는 공원 벤치에

 

눈이 내리네

눈이 쌓이네

 

산에도

들에도

 

인간이 스쳐 간

뒷자리

 

지나간 발길 위에

하얀 눈으로 덮어가네

 

옳든 그르든 모든 잔영들

일단은 다 지우고

 

새롭게 다시

알뜰살뜰히 사는 세상

 

그려보라 하네

보고 싶다 하네

 

제발 착하게 사는 모습을

 

 

 

눈이 내리면

박광호

 

눈이 내리면

나는 창가에서 먼 산을 본다

 

추억이 산자락에 아롱이고

옛날을 상기하며

생의 단면을 다시 그려보기 때문이다

 

유년의 추억에서

청장년의 추억까지

 

철부지 한 날의 눈사람 만들기

눈 쌓인 날의 산토끼 몰이

가시덤불 앞에 새 그물 쳐 놓고

 

새 떼 몰이 하여 만두 해 먹든 일

즐겁고 평화로운 때도 있었지만

 

혹한에 눈보라 치는 자갈길을

10살 나이로 동생들 손을 잡고

 

귓불이 얼은 체

어른 발걸음에 맞춰

 

헐떡거리며 걷든 피난길

군밤 상자를 메고 기차역 프렛 폼을

 

오가며 군밤 사세요하던 삶의 외침

이런 모든 애환이 눈발 속에서 피어오른다

 

명문대 사각모자를 쓰고

연인과 걷든 눈 오는 날의 남산 길

그때는 젊은 꿈으로 부풀었지

 

다 지나간 이야기

쓴웃음에 눈가 잔주름 지으며

세월 빠름에 고개 끄덕여 본다

 

 

 

눈 쌓인 아침에

박금숙

 

마당에 눈 쓸러 나갔다가

서서 말라버린 국화 한 그루

기왓장만 한 눈 무덤을

무겁게 덮어쓰고 있는 걸 보았다

 

살아 뻣뻣한 줄기

죽어서도 편히 눕지 못한다는 걸

 

커다란 눈 뭉치 두 개 만들어

대문 옆에 세우고

툭툭 부러지는 국화 줄기를 잘라

, , 입을 박았다

부디 둥글둥글한 세상과 융합되어

부드러운 새순으로 돋아나기를

 

 

 

첫눈

박남수

 

그것은 조용한 기도

주검 위에 덮는 순결의 보자기

밤새워 땅을 침묵으로 덮고

사람의 가슴에, 뛰는 피를

조금씩 바래주고 있다

개구쟁이 바람은 즐거워서 즐거워서

들판을 건너가고 건너오고

눈발은 바람 따라 기울기도 하지만

절대의 침묵은 조용히 조용히

지붕 위에 내리고, 혹은

나뭇가지 위에 내리고

혹은 인류의 가슴에도 내리는가

 

아침 동이 트면, 세상은

빛나는 흰빛으로, 오예(汚濊)를 씻으라

 

 

 

눈길

박남준

 

그 눈길을 걸어 아주 떠나간 사람이 있었다

눈 녹은 발자국마다 마른 풀잎들 머리 풀고 쓰러져

한쪽으로만 오직 한편으로만 젖어가던 날이 있었다

 

 

 

눈사람

박명숙

 

함박눈이 내리면 내 마음에

한 아이가 찾아와요

그 아이를 만나는 날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신이 납니다

 

송이송이 하얀 눈송이

소복소복 쌓이면

엄마가 된 나는 동글동글

부풀린 눈덩이에 아이처럼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듭니다

 

초승달을 닮은 눈과

빨간 루돌프 사슴 코를 만들고

입은 해맑게 웃는 삐에로처럼

하얗고 통통한 귀여운 아이가

웃고 있습니다

 

빨간 모자도 씌워주고

목도리도 둘러주고

장갑도 끼워주었더니

순수한 그 아이는 동심을 심어주고

해맑게 웃고 있습니다

나도 덩달아 웃었습니다

 

 

 

눈이 내리면

박미리

 

포옹하며 입 맞추며

축복처럼 눈이 내려요

황홀한 저 품속을

그대도 날고 있나요?

 

눈 쌓인 설원 속을

학처럼 날갯짓하며

시간을 동여맨 그날이

그립지도 아니한가요?

 

파고드는 눈송이에

그리움은 더 다져지건만

안 보이게 더 안 보이게

멀어지어 애가 탑니다

 

눈 덮인 설원 위로

뿌려진 하얀 꽃말 꽃말들

순백의 그 겨울을

그댄 어디서 녹이고 있나요?

 

 

 

눈사람의 봄날

박서영

 

이사 다닌 집들이 눈사람처럼 녹아 사라져버렸다

환한 벚꽃이 깨진 창문을 잠시 엿보다 가버리고

이후의 긴 그늘에 대해선 모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런 국도를 지나쳐, 지나쳐온 봄날이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처럼 도시 외곽에서 달을 분양받았지만

나의 열망은 달과 태양을 제본하는 것

한겨울에 만든 눈사람을 한여름에도 들여다보는 것

 

태양의 밀짚모자를 쓴 채

달의 털모자를 쓴 채

 

태양과 달은 서로의 표정을 사각사각 베어 먹고 있다

그러니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는

뜨겁고 차가운 두 얼굴은 그냥 놔두시길,

괜한 관심으로 눈썹과 코와 입술을

그려 넣지 마시길,

 

지금은 눈사람처럼 녹아내리고 있는 집에 들어가

그 해의 환했던 벚꽃과

어느 여름밤의 뜨거운 포옹과

술렁이는 꽃그늘 따위를 모두 들고나오고 싶은 날이다

어쩌면 이미 누군가 청소하면서 다 치워버렸을

쓸모없이 소중하고 궁핍한 기억들 말이다

 

 

 

눈 내리는 저편

박소향

 

해가 저물어요.

어머니 캄캄한 자아가 온몸으로 비껴가고

허전히 발목을 쥐는 빈 물결만

곤고하던 내 그리움을 끌어안아요

 

당신의 커다란 사랑이

흰 눈발처럼 품에 와 안기고

세상을 떠돌던 영원의 한때가

언제부터인지 거기 쉬고 있어요

 

바람이 부는 그 어딘 가로

슬픔은 향해가고

안달하던 영혼이 혼자 남아

죽도록 그리워만 하고 있어요

 

, 이별이 없는 곳 눈물이 없는 곳

맨 처음 당신을 안고 비상하던 첫 비행의 날에

가슴이 무너져 내릴 오늘을

운명처럼 예감했어요

 

멀리 떠나와도 그리움은 늘 그 자리이고

결국은 다시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고 있어요

 

하루

이틀

사흘

당신을 만나 행복하던 그때

 

 

 

눈 오는 날

박신영

 

아득한 날에

숨겨둔 설렘

 

꼬깃꼬깃 접어서

주머니에 넣은 채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

 

하얗게 닳아

가루 되어

 

그대 가슴 열어

소복소복 쌓인다

 

 

 

박용래

 

하늘과 언덕과 나무를 지우랴

눈이 뿌린다

푸른 젊음과 고요한 흥분이 서린

하루하루 낡아 가는 것 위에

눈이 뿌린다

스쳐 가는 한 점 바람도 없이

송이눈 찬란히 퍼붓는 날은

정말 하늘과 언덕과 나무의

한계는 없다

다만 가난한 마음도 없이 이루어지는

하얀 단층

 

 

 

설야(雪夜)

박용래

 

눈보라가 휘돌아간 밤

얼룩진 벽에 한참이나

맷돌 가는 소리

고산 식물처럼

늙으신 어머니가 돌리시던

오리오리

맷돌 가는 소리

 

 

 

저녁 눈

박용래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 터만 다니며 붐비다

 

 

 

박인걸

 

눈 내리는 들판을 바라보노라면

가슴 위로 그리움이 쌓이고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그대가

눈길로 달려 올 것만 같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하얀 눈길을 함께 걸으며

차가운 손 잡아주던 그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추억

 

고달픈 인생의 뒤안길에

잊고 살아 온 옛 생각들이

포근한 눈송이에 실려

새록새록 되살아나고 있다.

 

오지 못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은

행여나 하는 미련(未練)

가슴 언저리를 맴돌고 있어서다

 

 

 

눈 덮인 세상

박인걸

 

거룩한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졌다.

하룻밤 사이에

세상은 온통 성결하다

더러운 것들을 덮고

상처 난 곳은

흰 붕대로 싸매고

파이고 깨진 곳마다

아름답게 메웠다

슬픔은 잦아들고

고통은 잊어버린다

하나같이 어린 아이가 되어

하얀 땅을 밟으며

마냥 즐거워한다

어둡던 세상을

밝히는 거룩한 나라는

간밤에 하늘에서 내려왔다

거룩한 나라에는

지금 평화가 넘친다

 

 

 

눈이 내리네

박인걸

 

1

눈이 내리네

새해 벽두에 내리네

묵은 때를 씻어내라고

폭포처럼 내리네

 

눈이 쌓이네

가슴 가득 쌓이네

고운 추억 겹겹이 포개며

시루떡처럼 쌓이네

 

눈에 막혔네

육해공 길이 막혔네

쉬는 김에 푹 쉬라고

문 앞까지 가로막았네

 

눈이 녹아내리네

조금씩 녹아내리네

얼어붙은 세상도 녹이고

차갑던 인심도 녹이네

 

 

2

눈이 내리네

폭죽처럼 내리네

텔레비전에도 내리네

섬에도 내리네

전 국민 가슴 위로 내리네

 

눈이 퍼지네

전선줄 타고 퍼지네

휴대폰 타고 퍼지네

위성을 타고 지구 저편까지

반가운 사람에겐 반갑게

서러운 사람에게 서럽게 퍼지네

 

눈이 쌓이네

추억을 버무려 쌓이네

한숨이 섞여 쌓이네

그리움의 무게만큼 쌓이네

반가운 표정만큼 쌓이네

 

눈이 녹아내리네.

아쉬움을 길게 남기고

얼어붙은 가슴까지 녹이며

도랑물 되어 흐르네.

강물 되어 흘러내리네

 

 

3

잔인한 바람이 광야를 스치고

무정한 태양은 허공을 헛돌았습니다.

차가운 수은주는 사슬에 매여

파스칼호로 돌아갈 꿈을 접었습니다.

눈 내리지 않는 긴 겨울은

아라비아 사막 길 보다 더 지루했고

미세먼지 자욱한 도시는

캄신바람 가득한 이집트 광야였습니다.

지루한 땅에 하얀 눈이 내리길

죽은 사람이 살아나길 바라듯 했습니다.

겨울이 가기전에 단 한 번만이라도

내 가슴까지 덮어주길 원했습니다.

사모하던 눈이 기대하던 대로

살구 꽃 잎처럼 기분 좋게 내립니다.

옛 추억들을 하나 둘 되살리며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도록 내립니다.

산과 들과 나뭇가지에

소복소복 많이 쌓이길 기대합니다.

고운 풍경을 여러 장 찍어

마음 벽에 가득 걸어두고 보렵니다

 

 

 

눈이여

박인걸

 

겨울 가뭄에 애가 타

목마른 짐승이 물을 찾듯이

마른하늘을 향하여

폭설을 사모하였더니

때마침 퍼붓는 눈 줄기에

평생지기 친구를 만난듯하다.

두 팔을 번쩍 들어

어서 오라 눈이여

메마른 가슴 위로 내려라.

지친 영혼에도 내려라.

눈을 기다리는 마음마다

흡족하게 내려다오.

삭막한 이 내 마음

잃어버린 수많은 추억들

굳어버린 감수성과

석고가 된 순진성

어둠에 갇힌 옛 기억들까지

완전하게 회복하게 해다오

눈이여 녹을 때면

근심 걱정도 녹여주고

영혼의 불순물들 용해하며

찌든 삶의 찌꺼기들을

윤기 나는 그릇처럼

하얀 눈처럼 설거지해다오

 

 

 

춤추는 눈

박인걸

 

하늘 위를 날아

무한한 자유를 누리는

어느 영혼의 춤사위

 

뮤직이 없어도

노랫말이 없어도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꽃잎처럼 가볍게

어딘가를 향해 날아가는

무한한 이상(理想)

 

거추장스런 것들을 끊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는

드넓은 세계로

질주하는 꿈의 향연(饗宴)

 

회색빛 구름이 드리운

얼어붙은 세상을

포근하게 감싸 안는

댄서의 치맛자락이

방안만큼 포근하게 다가온다

 

 

 

하얀 눈

박인걸

 

하얀 눈이 하늘에서 내릴 때

더러는 즐거운 미명을 지르며 반기거나

연인과의 추억을 떠올리거나

깊은 행복감에 젓기도 하며

그 하얀 결정체로 꽃잎처럼 내려앉는

아름다움에만 취할 뿐

바다를 떠난 무수한 콜로이드가

아득한 허공을 바람에 떠밀려

두려움에 떤 아픔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소복하게 쌓인 눈길을 걸으며

사람들은 연애 소설의 주인공이 되거나

연인과 팔짱을 끼고 눈 위를 걸으며

끝없는 밀어를 속삭이다가

벌러덩 드러누워 몸 도장을 찍고

그 고운 순간을 셀카에 가득 담지만

출처와 경로를 기억 못한 채

포근한 분위기에 젖어

함부로 짓밟을 때 마음이 아프다

단순하게 살지 말고 생각하며 살자

나는 남에게 행복을 주었는가.

아름다움은 절정에서 일어나는 순간이다

고움과 화려함에 들뜨지만 말고

너도 누군가에게 설렘을 주어보라

뭇 가슴을 달아오르게 해보라

 

 

 

흰 눈

박인걸

 

하얀 성막(聖幕)

온 세상을 뒤덮는다.

세상을 정화하는

예배(禮拜)가 있을 예정이다.

 

부정(不淨)한 세속(世俗)

()하게 하려고

천사들의 목욕물을

이 땅에 퍼붓고 있다.

 

다툼과 증오(憎惡)

거짓과 악으로 물든

새까맣던 마음까지

하얗게 염색하고 있다.

 

흰 눈은 신비한 힘이 있어

사납고 무서운 이들과

팔순 노파까지도

동심(童心)을 갖게 한다

 

 

 

눈 내린 아침

박일

 

조그마한 냉기도 싫어

베란다 창문을 꼭 닫고 커텐을 내렸지요

흐느적거리던 담배 연기 잠들고

식탁 앞 의자도 잠들고

욕실에 떨어지던 윗집의 안부도 잠들고

별 수 없이 저도 잠이 들었지요

밤새 무섭고 황량한 꿈에 뒤척이다가

도망치듯 아침을 맞았지요

그 어떤 궁상도 싫어

커텐을 거두고 창문을 열었어요

어머나,

밤 사이 세상 모두가

하나의 꽃으로 피어있었지요

주차장에 그려진 각각의 네모난 선

저 멀리 빌딩과 허름한 판잣집

골프 연습장과 그 옆 공사장에 쌓인 목재들도

아무런 경계 없이

하나로 피어있는 아침 위를

노랑색 유치원 버스가

조심조심 발을 옮겨갔지요

 

그런 살맛나는 세상을 한 시간쯤 지켜보다가

전 지각을 했지요

참 아름다운 지각이었지요

 

 

 

()

박재동

 

그대여 보고 있나요

이 눈을

당신은 이제 떠나고 없는데

 

그대여 울고 있나요

이 새벽

난 이미 눈물이 말랐답니다

 

그대여 떨고 있나요

이 어둠

난 이미 익숙해져 버렸답니다

 

 

 

눈 내리는 날에는

박재성

 

하얀 눈을 맞아 보렴

 

먹빛 호수 위로

바람의 결을 따라

요동치며 휘날리는

하얀 춤사위를 보렴

 

때로는 멈춘 듯

먼 산 그림자 품고

송이송이 펼쳐지는

포근함에 빠져 보렴

 

푸드덕

까투리라도 날 양이면

네 가슴에서 솟구치는

환희를 힘껏 외쳐 보렴

 

하얀 수채화 위에

한 점

네가 되어 보렴

 

 

 

눈이 내리면

박재성

 

빗장 풀린 하늘에서

뚝뚝 떨굴 수 없는 가벼움이

나풀거린다

 

머리 위에도

구두 코 위에도

맞잡은 손위에도

 

사박사박

젊은 눈의 절규에 귀 기울이다

우리가 남긴 발자국을 덮으며

따라오는 어린 눈에 잡히면

 

그 고요의 설원에서

하얗게 덧칠되는 시간

미소마저 수줍어 숨죽이는

입맞춤은 길기만 하다

 

 

 

박정순

 

1

아무 연락 없이 찾아온

네가 반가워

와락,

방문 열고 나가 얼싸안았다.

 

닫혀진 내 마음의 창가에

이야기보따리 풀어놓으며

부드러운 미소로

풍성한 축복의 멋을 부려놓는

마술사의 손길

 

너의 긴 속눈썹 새로

보이는

나프탈렌 새하얀 이야기들이

아득하게 먼 곳의 전설처럼

바람 되어 들려오고

 

하얀 이부자락으로

내 마음 덮어 주는

널 닮아

너의 마음에 스며

강으로,

바다로,

낮은 곳으로만 흐르는

물이 되어 사는 것처럼

 

 

2

달빛 별빛 없어도 너는

화안한 백색의 등불로 서서

바람 깃 다독이며

온 세상을 덮은

부처님의 마음을 닮았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기인 햇살의 그림자

목에 걸어놓고

그리움의 실을 뽑아내는

누에고치

 

일년 365일 베틀에 앉아

씨줄 날줄로 엮어

눈부신 육모 꽃송이로 피어났다

 

모든 인연 끊어버린

너의 차디 찬 의지는

온갖 허물

따스하게 덮어주는 더 큰 사랑이었다

 

겨울 꽃이 피는 날이면

떼를 쓰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요구하지 않으려면서도

좀 멋진 시가 되어 달라고

자꾸만 나의 시를 귀찮게 군다

 

 

 

눈사람이 사는 집

박정원

 

쌓인 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밥을 먹고 잠을 잔다 책을 나누어 읽으면서 끄덕이는 모습이 보이는 듯도 하다

눈송이 하나하나에 갇힌 나에 대한 기록이 풍등의 행방처럼 묘연하므로 햇볕의 무동을 타고 저쪽으로 건너려는 그들을 나는 망연히 올려다만 본다

거들먹거리는 짐승 들이 미끄러져 고꾸라진다 멀리 있다는 수미산도 설산처럼 비치다가 사라진다

당신의 목소리가 흰뺨박새처럼 쉬던 자리

나를 유혹하던 시간들이 안나푸르나처럼 지나가는 동안

한강 어귀 저쪽에서 모자를 깊게 눌러쓴 그림자가 다가온다

눈사람이다

내 이야기는 몇 페이지에 나오느냐고 따지다가 나뭇가지만 부러뜨리고 주저앉아 눈꽃이 된다

명료한 것들은 맨 밑바닥이거나 꼭대기를 선호한다

보이지 않는 활자 속에서 물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내로라하는 주인공마다 세찬 바람소리만 앞세운다

얽히고설킨 눈보라일수록 촘촘히 쌓인다

덮어버리면 물이 된다는 분명한 오류는 다시 눈발에 짓밟히고

다 쓰지 못하고 먼저 간 눈들의 책갈피를 넘기다가 눈송이 같은 당신이 흐느낀다

나는 당신이 펴낸 책 당신이 만든 집

발기된 클리토리스처럼 히말라야가 내 혀끝에서 녹을 때

나는 세상을 다 뒤덮어버린 듯 기뻤다 하지만 어디를 뒤져봐도 내 기록은 없다 어떻게 해야만 내가 단숨에 무너지는 줄을 오직 당신만이 알 뿐

 

 

 

눈 오는 날의 여백

박종영

 

눈 오는 날 부질없이

지나간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발자국,

 

바로 눈이 내리는 날의 여백이

아주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응집되게

흩날리는 눈발의 분망함을 함께 허락한다

 

함박눈이 되어 뛰어내리는 사람들의 행렬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시원한 여름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는 우리,

 

지나간 자리마다 다시 채워지는 눈송이

뽀드득 미세한 입자를 밟고 가는 아픔의 소리를 즐긴다

 

발자국 그곳에 누구와의 그리움을

숨겨두고 가는 사람들의 속내가 궁금한 것은,

 

아직 남은 풋풋한 사랑의 밀어를 기억하고 싶어서다

 

 

 

눈이 내리고

박종영

 

1

눈이 내리고,

세월의 더께만큼 가벼운 티끌을 날려보내고

언 땅은 투명한 눈물로 닦아내고,

따스한 입김은 바람이 되어

겸손하게 속삭이고,

하찮은 이별에도 가슴을 열어

흘러간 시간을 안아주고,

슬픈 회색의 하늘을 나눠 가지며

하현달처럼 얇게,

아주 가볍게 흔들리는

저토록 견고한 백색 미립의 숨결,

푸른 바람으로 달려와

무서운 국경의 밤을 지우고,

수많은 경계를 덮으며

사락사락 눈이 내리고 또, 눈이 내리고

 

 

2

회색 하늘

빛보다 밝은 웃음으로

국경의 밤을 찾아가는 눈의 여행,

시린 바람을

잠재우며 메마른 대지위에

조화롭게 하얀 꽃을 피워내는,

금지된 허물을 감추면서

지상에 곤두박질치는

무모한 눈꽃의 곡예,

인적이 드문 길 모퉁이

하얀 융단을 깔아 마중하는,

깃털처럼 가벼운 환대의

웃음소리 들리고,

수많은 경계를 덮으며

사락사락 눈이 내리고

서러운 눈물처럼 또, 내리고

 

 

 

눈이 되고 싶은 생각

박종영

 

이별은 언제나 먼 곳으로 부터

그대의 웃음을 데리고 오는가?

차가운 밤 눈발로 찾아오는 임의 소리,

고즈넉이 솜털 같은

그리움 머리에 이고

가슴에 안겨 사각대는 소리,

삼동의 겨울로 돌아와

눈처럼 내리고 싶은 간절함이 땅에 놓이고,

뽀드득 아픔의 소리 들뜨지 않게

대나무숲 산비둘기 사랑노래 짙은걸 보면

이제부터 봄이 멀지 않았는가

애써 언 땅 녹이는 복수초,

너 노란 웃음 끼 외람히 뿌리치고

어찌 빈 강을 혼자 건너랴?

 

 

 

눈 오는 밤

박춘식

 

내일이면, 너는

남의 식구가 되는구나

 

딸에게

웨딩드레스를 입혀본다

속옷 매만지는 손길은

행복을 비는 합장이 되고

젖가슴

허리

엉덩이

옷이 뽀얗게 맞는지 살핀다

세상에서 가장 고운 꽃으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어미 마음을 파고든다

 

깊어가는 하얀 밤

사부작 사부작

눈이 내리고 있다

 

 

 

눈길 산행

박태강

 

나무에

은백의 꽃

계곡에는 소복소복 장독대

 

쌓인 눈길을 걸어면

싸박 싸박

발끝의 감촉이 예민하게 살아나고

 

가는 곳마다

보는 곳마다

너무나 즐겁고 즐거워

 

마음은 즐거운데

눈이 아려 검정 안경을 쓰면

흰 눈이 희검색하여 더욱 멋있다,

 

산정에서 보는

첩첩 겹겹히 늘어선 능선과 산

눈인가 구름인가 아득도 하다

 

가져간 들짐승 먹이

강냉이 알을

먹어라 곳곳이 쏟아놓고

 

님아

저 눈꽃을 보소

볼 때마다 다른 은백색의 꽃을

 

한기가 열기로 바뀌는

추운 겨울 눈길 산행

이 아름다움 님아 나누어 보자

 

 

 

눈꽃

박태강

 

천지가 눈꽃

가는 이 오는 이 탄성이 절로

 

삭막한 도회에 하얀 꽃 피어

가는 이 오는 이 넋을 잃어

 

가는 걸음 멈추고 보고 또 보고

오는 걸음 멈추고 보고 또 보네

 

흰 나무 눈꽃에 눈 못 떼고

아이도 강아지도 깡충 깡충

 

보이는 것 모두가 하얀 눈꽃

저 아름다운 꽃이 오래오래

 

세상 모든 것 너가 다 덮어

은천지 만들어

 

산에 눈꽃

들에 눈꽃

 

고요한 내 가슴에

하이얀 눈꽃이 피네

 

 

 

눈이 내리고

박효찬

 

난 집안에 갇혔다.

내 안방까지 찾아온 눈 때문에

이부자리를 깔고

 

창문 너머 순백색의 세상은

뽀얗게 가지마다 꽃을 피우고

허물을 벗어 버린 것처럼 유혹한다.

 

정갈하게 차림새를 하고

마중가리라 한 것은 생각일 뿐

블랙커피잔으로 스며든 세상은 쓰다.

 

흔들의자에 폼나게 앉은

육신은 편안하지도

사족은 빳빳하게 굳어가고 있다

 

 

 

밤늦게 내리는 눈과도 같이

배월선

 

눈 내리는 날이면

음악이 들린다.

어디서나 알아듣는 익숙한 음악이

 

송이송이 날린다.

 

명치끝에서부터 차오르는 거리의 입김이

사그라졌다, 이내 허공 위로 머플러처럼 풀어진다.

 

어디로 날아가 버린 음악인지

아직 나의 시간은 유효하고 너는 여전히

음악 뒤에 숨어있다.

 

밤늦게 내리는 눈과도 같이

밤늦게 내리는 비와도 같이

, 그러나,

한 낮의 쓸쓸한 햇발과도 같이

 

음악을 끄고

눈 내리는 날엔 커튼을 내린다 치자.

기습적으로 스며드는 한기와 온기

허공 중에 날아올라 녹아내리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성긴 눈발들

모두 내 잘못 아니다.

 

눈 내리는 날이면

음악이 들린다.

어디서나 나만, 알아듣는 익숙한 음악이

 

 

 

눈보라 취설(吹雪)

배창호

 

시시비비로 늘어놓은 잿빛이

밤새 엇갈린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천지 사방에 내려앉은 설원을 바라보니

청빈한 소탈의

눈부심이 지천을 삼키는 네,

왠지 모를 울컥하는 멍울 하나가

목젖에 가시처럼 걸렸다

 

동화 같은 때 묻지 않은 하얀 세상

왜 이다지도 낯설어

둥글어질 수 없는 일생을 보냈으니

헤아릴 수 없는 곡절이 까닭 없이 깊어

참회의 속울음 삼키게 하는지,

 

취하도록 날리는

편견도 없고 기만도 없이 눈보라가 피운 꽃!

회한에 사무친 애증도

얽매이지 않는 구름 같이

한탄의 강을 건너는 자유로운 바람이 되고 싶다

 

 

 

탕약(湯藥)

백석

 

눈이 오는데

토방에서는 질화로 우에 곱돌탕관에 약이 끓는다

삼에 숙변에 목단에 백복령에 산약에 택사의 몸을 보한다는 六味湯이다

약탕관에서는 김이 오르며 달큼한 구수한 향기로운 내음새가 나고

약이 끓는 소리는 삐삐 즐거웁기도 하다

 

그리고 다 달인 약을 하이얀 약사발에 밭아놓은 것은

아득하니 깜하여 萬年 옛적이 들은 듯한데

나는 두 손으로 고이 약그릇을 들고 이 약을 내인 옛사람들을 생각하노라면

내 마음은 끝없이 고요하고 또 맑아진다

 

 

 

밤사이 내린 눈

백승은

 

밤사이 소리없이 펑펑

눈이 내려 온산은 하이얀 세상

저곳에 무엇을 그릴까?

파랑새를 그릴까? 구름을 그릴까?

아니아니 맛있는 사과를 그려야지

 

나무는 어디로 숨었지?

저 언덕에 숨었나?

저 바다에 숨었나?

 

햇살은 요술쟁이

지팡이로 훠이훠이

어느새 하하호호 웃는 나무

 

 

 

곱게 눈이 온다

백원기

 

성탄절이 또 왔나싶게

곱게 눈이 내린다

초행길이라

들머리를 못 찾아

뻔한 알바를 하다가

워낙 낮은 산이라

야트막한 능선에서

뱀 길을 찾아냈다

 

첫눈처럼 마지막 눈을

가파른 산길에 뿌리면

일부러 맞으려는 사람들

참다가 참지를 못해

서두른 새해 눈 맞이

희망에 부푼 얼굴

김이 서린다

 

 

 

꽃눈 내리는 길

백원기

 

휘돌아 나가는 강변에 눈이 내린다

엄동설한 다 지난 봄, 백화가 만발한데

철 늦은 눈 쏟아지는 길

나는 젖지 않는 우산 쓰고 천천히 걸어간다

 

이루지 못한 사랑이라 한이 됐나

가슴 아픈 눈물 묻어난 핑크빛 눈송이

불어오는 강바람에 힘겨운 춤추다

괴로워 흐느끼는 춤사위로 안타까이 내린다

 

임 찾아 서둘러왔다가 서둘러 가는 벚꽃 아가씨

고운 손 하얀 손 등으로 눈물 훔치며

길가에 한적한 곳 처량히 서있을 때

심술궂은 자동차 질주 바람에

이리 휩쓸리다 저리 휩쓸리고 있다

 

 

 

눈길이 걷고 싶었네

백원기

 

눈길이 걷고 싶어 찾아 나섰네

아이젠 밟고 스틱 찍으며

바삭바삭 콕콕 소리 정답게

남한산성 지맥 금암산에 오르네

 

웬 눈이 이리도 많이 왔을까

녹을 꿈도 꾸지 않는 적설

춘삼월이어야 녹으려나 보다

더워서 땀이 나다 눈바람에 식으면

시원한 가을바람 쏘이는가 싶다

 

부모슬하 어릴 적 고향길이 그립고

소복하게 쌓인 눈길 아침 향수에 젖어

추운 줄 더운 줄 까맣게 잊고

타박타박 산줄기 타고 넘어

환상의 산그리메 손잡아 보련다

 

 

 

눈이 왔네

백원기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하얗게 눈이 왔네

크리스마스 예고하듯

기별 없이 살그머니 내린 눈

마음씨 착하게

하얀 이불 덮어줬네

 

근심 걱정 많은 세상

평화로운 세상 되라고

소복하게 내렸구나

 

겨울이면 찾아오는 손님

오지 않을 듯하더니

약속 지켜 서둘러왔네

 

지구에 사는 사람

불쌍히 여겨

저 높은 하늘에서

하얗게 천사가 내려왔네

 

 

 

또 눈이 왔다

백원기

 

아닌 밤중 홍두깨 격으로

마구 쏟아지던 겨울 장맛비

계절 잊은 날씨에 부어대더니

뭇사람 입방아 소리에

주눅 들어 뚝 그치던 겨울비

비도 귀가 달렸나보다

 

그만 한가 했더니 다시 쏟아지는 눈

눈에 비에 다 녹아졌나 하면

밤새워 풀풀 내리는 눈

방앗간 고운 떡가루처럼

곱게 빻아 뿌렸구나

 

퍼내고 쓸어도 수북하게

많이도 내린 눈

삼월이면 춘삼월

그 안에 실컷 내리려무나

비야 눈아 아무 때나 오려무나

오고 싶어도 못 올 날 있을 테니

 

 

 

싸라기눈

백원기

 

은은한 꽃향기 따라

내려오던 봄비 물

러설 줄 모르는

꽃샘추위에

하얀 싸라기 눈 되어도

굽힐 줄 모르는 단단함

 

컬러의 계절 옛 모습이 그리워

아스팔트 위에 굴러 넘어져도

지난 추억에 젖은 마음

털고 일어나

봄의 향연 그날을 기다린다

 

 

 

다시 눈이 내리면

백창우

 

눈이 내리면

다시 첫눈이 내리면, 나는 길을 떠날거야

이 세상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채

나비의 잠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그리운 나라 찾아갈거야

여기는 내가 머물 곳이 아니야

여기는 나같이 꿈뜬 사람이 살만한 데가 아니야

사는 게 익숙해질 때 쯤이면 어느 사이

생의 끝에 서 있을 걸

망가지기 전에

몸도 마음도 다 망가져 아주 엉망진창이 되기 전에

떠날 채비를 해야 해

눈이 내리면

다시 첫눈이 내리면, 나는 길을 떠날거야

먼길 나서기에는 눈 오는 날처럼 좋은 날이 없지

눈이 그치기 전에 이 세상을 벗어나야지

아무도 모르게

 

 

 

눈 내리는 날에

변종윤

 

지난밤 소복이 쌓인 눈

어머님의 향기 고운 얼굴

햇살에 눈이 부시네

어눌한 날씨에 그림자 대신

뒤따라오는 뽀드득 뽀드득 발자욱 소리

뒷개울 아이들 눈싸움 끝이 없는 개구쟁이들

순박한 웃음소리 거실에서 놀고 있다

추억 속에 그리움이

주머니 속 먼지 털듯

어린 시절 친구들

한 넘 두 넘 머릿속에 필름처럼 스처 간다

어느새 입가에 피시식 웃음이 흘러난다

 

 

 

변학규

 

소리도 숨도 없이 거품 물고 내린다

하늘빛 제 모습이 가슴 재고 쌓인다

내 마음 하마 한 골에 눈 비비는 부신 햇살

 

산하에 넘쳐나는 가슴 벅찬 숨소리가

가지마다 꽃을 달고 때아닌 봄이 핀다

하마히 무너져 내리는 돌에 새긴 꽃가지

 

허전한 흰빛 갈고 안으로 깁을 짠다

순색으로 가려내어 곱기만 한 씨올날이

어리는 바람을 불러 되새기는 메아리

 

피보다 진한 힘이 흰빛 속에 눈을 뜬다

아픔보다 짙은 사랑 흰 눈 속에 일어선다

내 가슴 푸른 창 넘어 빛을 더한 먼 산맥

 

 

 

겨울의 노래

복효근

 

멀리서 보면

꽃이지만

포근한

꽃송이지만

손이 닿으면

차가운 눈물이다

더러는 멀리서 지켜만 볼

꽃도 있어

금단의 향기로 피어나는 그대

삼인칭의

눈꽃

그대

 

 

 

눈은 스무 살로 내린다

복효근

 

이렇게 춥고 눈이 쌓이는 날엔

신부야 가난한 우리가 더 깊은 산골로 가서

산골로 가서 눈에 묻혀

한 스무 살 쯤으로 살면 좋겠다

 

지하수 펌프가 얼어서

내가 장작을 패고 있는 사이

계곡물을 길러 가는 신부야

네 귀가 추위에 빨갛게 얼었구나

 

나는 패던 장작을 내려놓고

털 부숭한 산토끼나 한 마리 잡아서 그 놈의 가죽으로

신부 귀를 감쌀 귀덮개를 만들어주어야겠다고

가만가만 토끼 발자국을 찾아 나서겠지

 

토끼 발자국 따라가면

눈 속에 먹을 것을 찾아

, 거기 눈처럼 하얀 토끼가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애처로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인데

그 놈의 귀가 내 사랑하는 신부의 귀처럼 빨갛구나

 

나는 토끼와 토끼의 신부와 그 어린 자식들이 안쓰러이 떠올라서

마른 풀이라도 뜯어 먹으렴 하면서

언덕에 쌓인 눈을 파헤쳐 주곤 모른 척

돌아서 내려오겠지

 

자꾸만 내 신부의 빨간 두 귓불이 생각나서

나는 내 겨드랑이 아래 두 손을 묻고

아직은 더운 체온으로 내 손을 데워서

가만 물 긷고 있는 신부의 두 귀를 감싸주겠지

 

그러면 내 손을 타고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먼 우레 소리처럼 건너갈까

네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피의 온도가

내 손을 타고 건너오겠지

 

소주병이 비어갈수록

눈은 스무 살 적 그 빛깔로 내리고

내려 쌓이고 오늘은

군불을 조금만 넣어도 밤이 더울 것만 같고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

서대경

 

1

변두리 도시의 지저분한 거리 위로 눈이 내린다. 좁은 도로 양옆으로 낡고 더러운 간판들이 다닥다닥 붙은 상가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건물 사이 좁은 골목으로는 붉은 깃발을 내건 무당집과 세탁소, 전당포들이 어둡게 웅크려 있다. 허공엔 추위, 그리고 어지러이 얽혀 뻗어가는 전깃줄의 소리

 

 

2

상가건물 5층 창문이 드르륵 열리더니 한 아이가 창문을 빠져나와 창턱으로 올라선다. 아이는 보습학원 간판에 기대어 서서 하얀 침묵으로 뒤덮인 인적 없는 거리를 내려다본다. 아이의 이마로 전깃줄 그림자가 지난다. 창문 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아이는 눈을 가늘게 뜨고 허공의 눈발을 올려다본다. 전깃줄 사이로 보이는 허공이 기차가 지나다니는 잿빛 벌판처럼 보인다. 아이가 가방을 앞으로 고쳐 맨다. 창문에서 욕설과 함께 한 사내의 손이 튀어나온다. 아이가 안테나를 잡고 몸을 비틀며 사내의 손을 피한다. 아이가 웃는다. 전깃줄이 윙윙거린다. 아이의 몸이 허공 속으로 펄쩍 날아오른다

 

 

3

상가건물 2층 만화방 카운터 뒤에 앉은 사내가 화면이 흔들리는 소형 TV를 주먹으로 내리친다. 얼굴에 만화책을 덮고 잠들어 있던 내가 깨어 일어나 사내를 노려본다. 만화방 안엔 사내와 나 두 사람뿐이다. 벌써 3시다. 나는 창문을 바라본다. 눈이 아직도 오는군. 차가 막힐 것이다. 목욕탕에 갔다가 이발소에도 들르려면 시간이 빠듯하다. 나는 그녀와 만날 시간과 장소를 떠올리며 서둘러 외투를 걸친다. 내게서 돈을 건네받은 카운터 뒤의 사내가 등을 돌린 채 소형 TV 위로 몸을 웅크린다

 

 

4

무당집 좁은 마당에 소녀가 앉아 있다. 상가건물 벽이 마당의 절반을 가려 마당 한쪽이 저녁 무렵처럼 어둑어둑하다. 잠시 구름이 열리면서 마당으로 희미하게 햇살이 비쳐 든다. 그녀는 무릎 위로 깍지를 끼고 웅크린 채 눈동자에 어리는 귀신의 속삭임을 듣는다. 그녀는 눈을 감는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찬송가 소리. 박수 소리. 귀신들이 낡은 상가 교회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

 

 

5

한 여인이 요란하게 울리는 핸드폰을 들고 예배실 문을 열고 서둘러 나온다. 우리 애가 또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선생님. 여인이 창문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문다. 여인의 시선이 무당집 마당에 웅크린 채 앉아 있는 여자아이에게 머문다. 가느다란 담배 연기가 풀어지며 창밖으로 빨려 들어간다. 그녀는 바라본다. 그녀는 바라보고, 그녀는 욕을 내뱉고, 다시 바라본다. 창턱에 담배를 비벼 끄고 그녀가 돌아선다. 문을 열자 열기와 신음 소리와 박수 소리가 그녀의 미소 띤 얼굴 위로 일제히 밀려든다

 

 

6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가 걸어오는 나를 내려다본다. 평소처럼 벌거벗은 채다. 미친놈은 추위도 못 느끼나 봐. 나는 생각한다. 그가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전에 썼던 <백치는 대기를 느낀다><소박한 삶>이라는 시는 저 사내에게서 착상을 얻어 쓴 것들이다. 다음번엔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 써봐야지. 목욕탕 문을 열면서 내가 중얼거린다.

 

 

7

목욕탕 굴뚝 아래 사는 사내는 입을 헤 벌리고 굴뚝 아래 앉아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전깃줄을 바라본다. 사내에게 그것은 서로의 다리를 물고 늘어선 이상야릇한 거미 떼를 연상시켰다. 그것들은 전신주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검게 나아가면서 눈발로 가득한 허공을 비밀스럽게 지배했다. 사내는 허공에 번뜩이는 전깃줄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전깃줄의 여정을 눈으로 쫓아가다 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아파트 단지와 공장지대의 그림자와 바람의 속삭임과 불 켜진 창의 신비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다. 사내의 벌거벗은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눈 녹은 검은 물이 굴뚝을 타고 주룩주룩 떨어져 내린다.

 

 

8

안녕하세요.전깃줄에 매달린 아이가 사내에게 인사한다. 아저씨는 이런 거 못하죠?사내는 엉덩이를 벅벅 긁으며 아이를 바라본다. 너 내려와. 내 전깃줄이야.사내는 목욕탕 옥상 옆으로 뻗어가는 전깃줄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린 채 자신에게 혀를 낼름거리는 아이가 못마땅하다. 사내가 벌떡 일어서서 옥상 가장자리로 다가간다. 이 동네 전깃줄은 내 거에요.아이가 원숭이처럼 재빠르게 손을 놀려 옥상에서 멀어진다.

어디 한번 잡아 봐요, 바보 아저씨.상가건물 벽 사이 공중에 매달린 채 아이가 깔깔거린다. 하얀 눈송이가 아이의 몸 위로 내려앉는다. 나 바보 아냐.사내가 고함을 지른다. 그럼 다음에 봐요.아이가 손을 흔든다. 아이의 몸이 허공에 매달린 채 천천히 멀어져간다. 나 바보 아냐!사내가 소리친다. 한차례 돌풍이 일자 전깃줄이 일제히 윙윙거리며 사내의 벌거벗은 몸 위로 눈가루를 날린다. 사내가 씩씩거리며 머리를 턴다. 안녕! 잘있어요, 바보 아저씨!아이의 해맑은 웃음소리가 멀리 공장지대의 어두운 그림자가 가물거리는 잿빛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9

깊은 밤의 거리 위로 여전히 눈이 내린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목욕탕 굴뚝 위로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의 시를 쓰고 있다. 담배를 물고 창가에 선다. 불 꺼진 상가건물과 목욕탕 건물이 내다보이고, 무당집 마당의 어둠 속에 소녀와 가방을 앞으로 둘러맨 아이가 나란히 앉아 있는 게 보인다. 나는 오랫동안 그들을 지켜본다. 파르스름한 눈송이가 아이들의 몸 위로 반짝이고 있다

 

 

 

눈 기다림

서봉석

 

눈 내리는 것 보자고

추워도 겨울을 기다린다

눈이 내리면

한 뼘씩 그늘 덜어내며 쌓이는 눈 속

뼛속까지 하얀 눈사람으로

우리도 둥글게 모여서

비록, 천당은 못 갈 목숨이래도

이 세상 살고 있는 지금은 즐거워라

촛불 한 자루에도

은근해지는 사람들의 저녁

해 안뜬 날도 걱정 없이

하늘의 초청장처럼 무량하게도 내리는 눈

가로등 불빛에 멋들어지면

정든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크리스마스카드가 보고 싶어서

추워도 겨울을 기다리고 있을 뿐

푸른 날로 오는 봄 때문만은 아니다

눈 내리는 것 보자고

추워도 겨울을 기다린다

 

 

 

어느 눈 오시는 날의 소묘

서봉석

 

녹으려고 내리는 구나

눈은

그것도 주룩 주룩 그리움을 향해

쏟아져 내리고 싶은데

차마

하늘하늘 즈려 내리는 눈

십이월 이 추운 날

얼어버리려고 내리는 구나

벌써 봄이 그리운 가슴에게는

쌓이려고 내리는 구나

하얗게 비어가는 마음마다

서리 순하게 꽃 지려고 내리는 구나

눈은,

마른바람 오들거리는 빈 가지

탐스러움으로

풀꽃 보다 더 곱게 피었던-!

그대를 향한 내 마음 또한 그러하리니

사랑하기에 더워도 추어도

눈 길 따라 변하는

형광빛 그 배경색,

다만

녹으려고도 얼려고도 그리고

쌓이려고도 하지마라

모두가 다 지난 뒤에야 보이는 회한이려니

눈은 내리는 구나

그냥

하얗게 깨어나기만 하라고

눈은

 

 

 

함부로 눈 내리는 날

서봉석

 

하늘 좋아라,

물방울

수증기로 날라

서둘러 구름으로 가더니

다시 땅 그리운가

북풍한설로 얼어 눈 내리는데

귀향길은 즐거운지

눈 오는 모습도 싱숭생숭하다

바람에 치미 뒤집힌 아주머니

엉뎅이 춤으로, 씰룩

씰룩, 내리고

토끼 닮은 어린 아이

깡총 춤으로 까불리더니

아무 바람이라도 불기만 하면

신명부터 나는 풋 가슴들

얼쑤, 절쑤 디스코 풍

어깨 춤으로 펄럭인다

술 취한 아저씨 비틀 걸음,

급한 소피 부여잡은

영감님 고이춤이듯

엉거주춤 내리고

스란치마 새 아씨

뒤똥 거리는 씨암닭

아장 걸음으로도 눈은 내려

이 마을 저 동네 빈 가지마다

어진 모습 꽃 피우려는지

밑그림으로 설경을 차려 놓고

한 땀 두 땀 수 놓는다

세상은 그렇게 멋들어지고

겨울은 또 그렇게 정들어 간다

 

 

 

우리의 겨울

서윤덕

 

팔장을 끼듯

그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따뜻함을 충전받습니다.

가까이 더 가까이

한 주머니 속에 두 손

겨울이라서 더 좋습니다

 

 

 

눈 오는 날

서정윤

 

눈 오는 날에

아이들이 지나간 운동장에 서면

나뭇가지에 얹히지도 못한 눈들이

더러는 다시 하늘로 가고

더러는 내 발에 밝히고 있다.

날리는 눈에 기대를 걸어보아도, 결국

어디에선가 한 방울 눈물로서

누군가의 가슴에

인생의 허전함을 심어주겠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외로움을

불편해할 쯤이면

멀리서 반가운 친구라도 왔으면 좋겠다

 

 

 

눈의 풍경

서정윤

 

마을에서 가장 높은 까치집에 눈이 쌓인다

바람은 때때로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

우리 앞에 펼쳐 놓고는

설레는 나를 유혹한다

사람의 마음속에도 눈이 오게 할 수 있을까

온갖 거짓과 위선, 사랑과 행복까지도

다 덮어놓고는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마음과 욕심은 조금만 나오게 하고

남을 위하는 마음과 작은 것에 만족하는 기쁨을

많이 나오게 하여

삶이 따사롭게 할 수 있을 것을

나뭇가지의 눈이 녹아

물방울로 떨어지는 놀이터

어느 정도의 고통은 나를 긴장시켜

겨울 찬바람에 맞설 용기를 준다

 

 

 

눈을 밟으면

서지월

 

눈을 밟으면

세상 한끝이 내려앉고

서녘으로 기우는 내 사랑을 본다

 

오늘도 무수한 사람들이

바다로 통한 골목을 빠져나가고

잠든 청보리의 이랑 굽어보며

바람과 함께 서 있는 나무들

저들은 언제나 노래처럼 남아서 운다

 

눈이 내려서

세상은 비어지지만

말없는 지붕과 굴뚝, 언덕과 강물이

주춤 서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셈하는 것은

그렇다, 너와 내가 아직도

흰 거적을 깔고 앉아 있기 때문이다

 

 

 

앞산도 흰 눈 쓰고

서지월

 

오늘은 흰눈 쓴 앞산의 나무들이 걸어나와

흰 배때아리 드러낸 까치 몇 마리 날리고 있다

꺼칠한 흰 수염의 아버지는 땅속 깊이

잠드신지 오래,

마당을 밟고 뜨락을 오르시던 어머니마저

욋골의 흰눈 덮힌 잔디 아래 누우셔서 말없으신데

왠지 오늘은 흰눈 쓴 앞산의 나무들이 줄지어 걸어나와

청명한 하늘 드리우고 있다

저어기 누가 소달구지에 쌀가마 싣고

방앗간으로 향하는 느린 길이 보인다

아아 어린것들 방안에는 젖 달라고 칭얼대는

어린것들 분홍손톱달이 이쁘고

부엌에는 밥 짓는 아내의 옆모습이 아름답다

방문을 열고 나와 대청마루 끝 이제는

흰 수염의 아버지 대신

뒷짐지고 바라보는 저기 저 골짜기

앞산도 흰눈 쓰고 나를 오라 오라 하는 듯

눈뭉치 툭툭 떨어뜨리며 푸른 소나무 등걸엔

흰 구름 한 송이 걸렸네

 

 

 

강설(降雪)

성백군

 

1

눈이

한꺼번에 하늘 가득 오시면

어쩌란 말인가

 

내 손은 둘

뿐인데

머리에도 앉고 어깨에도 앉고

땅바닥에 떨어지고, 아깝지 않은가

아프지 않겠는가

 

소처럼 눈망울 껌벅거리며 눈 속에 넣어보고

개처럼 혓바닥을 내밀어 핥아보고

두 손 손바닥으로 받아 꼭 쥐었더니

없네, 눈물인지 눈 녹은 물인지, 겉만 적셔놓고

 

어느새 빠져나가

나뭇가지에 있네, 지붕 위에 있네

펄펄 나르네, 나르며 쌓이네

거기 그대로 두고

오래오래 사랑해 달라고

겨울 임이 오시네

 

 

2

하늘 꽉

채워

온 세상 가득 눈이 내립니다

 

죽은것들에나 산것들에나

있는것들 위에는 다

눈꽃이 핍니다

 

좋은것이나 나쁜것이나

손백으로 덮어버린 세상은

하늘의 은총입니다

 

세상 사람들

이 은혜 잊으면 안 된다고

한 줄기 강물이 표시를 냅니다

 

 

 

설화(雪花)

손숙자

 

설화(雪花)

허허로운 겨울 산

나목의 침묵 속에

살포시 내려앉은

처연한 네 모습

애처롭기만 하다

 

햇살 한줄기에

사라질 여린 꽃

따듯한 가슴에

안아주고 싶지만

바라만 보아야 하는

애달픈 이 마음

 

 

 

눈보라 여인숙

손순미

 

마당 입구 측백나무 남편처럼 버티고 섰어도

객지에 지쳐 기어드는 사내들에게

따뜻한 잠의 젖을 물리던 여자

늙어 더 이상 나올 젖이 없는데도 그 여자

아직도 브래지어 같은 문 열어놓고

석유난로에 겨우 몸을 녹인다

아무도 오지 않는다고 실망할 때쯤

눈보라가 도착했다

어디서부터 얼마나 울고 왔는지

눈물범벅이 된 눈보라가

사내처럼 여인숙의 허리를 꼬옥 껴안는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런 것이 아니었다

서로의 추억이 삽입된 눈보라 여인숙 불이 훅! 꺼진다

백발이 다 된 여자의 처마 끝에서

밤새도록 고드름 젖이 뚝뚝 흘러내린다

빨수록 배고픈 고드름 젖이 하염없이 녹아내린다

 

 

 

눈이 온다, 무언의 증인처럼

손현숙

 

벌판에 나무 역광으로 서 있다 허공 속으로 뿌리 내렸다 팔 벌린 가지에는 이파리 한낱도 없다

눈썹 쓸 듯, 쓸어가는 구름 묵음으로 내리는 하늘 그림자

한 발짝 건너 또 한 발짝 근처가 없는 사람의 집, 그 어디쯤에서 발자국 풀어 살아도 되겠다

사람이 살기도 하고 살지 못하기도 하는, 아무나 함부로 들어서지 못하는 땅 나도 저 땅에 발들여 놓은 적 있다 구릉에는 푹푹 눈이 쌓이고 비밀의 보유자들이 무언의 증인처럼 왔다가는 돌아서야 하리라

지도에도 없는 나라 가는 길은 달라도 번개와 우레가 들끓어서 고요하게 피어나는 꽃, 구름이 땅에서 돋아 하늘로 간다 발바닥은 쉴 곳을 모른다는데

 

 

 

눈이 안 오네

송근주

 

눈이 비늘을 벗고

내려 오다가

비늘이 다 없어지니

이제 그쳤다 하고

눈이 하강을 멈칫하며 멈추지

 

눈의 비늘은

여러 겹으로 비늘 조각을

입고 있는 아린이라해

잊혀지지 않는

겨울이 되고자 하지

 

겨울이 지나면

이 여러 겹의 비늘이

다 없어져

눈이 안 오게 되지

겨울이 되지 못하지

 

겨울에만

여러 겹의 비늘을

가진 눈을 볼 수 있지

겨울에 눈이 그치는 것은

여러 겹의 비늘이 잠시 벗겨진 거지

 

 

 

눈이 온 다네

송근주

 

눈이 온다네

눈이 오면

강아지들이

좋아한다네

 

강아지들은

눈이 좋아서

눈을 밟고

눈을 만지고 노네

 

놀이터에 노는

아이들이 강아지라네

그저 좋다 하네

눈이 오는 게 좋아라 하네

 

눈이 오면

좋아하는 아이들

아이 마음에

눈이 온다네

 

 

 

송무석

 

그대에 스치기가 무섭게

서늘한 한 방울의 느낌만 남기고

사라진다 하여도

나는 이 무모한 도전을

멈출 수 없다

 

온 하늘을 한마음으로 달려와

저기 바닥에 나려

이 세상의 모든 아픔과 차별과 슬픔을

그저 지긋이 흰 빛 하나로 감싸 안으며

나는 잠시 머문다

 

끝내는 흙빛으로 검은빛으로

최후를 맞이할지라도

이 지상에 나는

한 줄기 웃음이 되고 싶다,

철없는 순수한 희망의 노래가 되고 싶다

 

 

 

눈길

송수권

 

삼동(三冬)은 누군가 자주 솥뚜껑을 열고 갔다

그래도 노파는 부엌 빗장을 치지 않았다

또 고라니 가족이 다녀간 모양이다

 

 

 

첫눈

송수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미욱한 세상 깨달을 것이 너무 많아

그 깨달음 하나로 눈물 젖은 손수건을 펼쳐들어

슬픈 영혼을 닦아내 보라고

온 세상 하얗게 눈이 내린다 어제도 내리고 오늘도 내린다

살아 있는 모든 것 영혼이 있고

내 생명 무거운 육신을 벗어 공중을 나는 새가 되라고

살아 있는 티벳인이 되라고

한밤중에도 하얗게 내린다

히말라야삼나무 숲을 흔들며

말 울음 소릴 내며

이렇게 고요하게 지금 첫눈이 내린다

 

 

 

눈 내리는 밤

송태한

 

절정의 빛으로

에워싼 채

숨죽인 허공꽃잎같이 하늘거리는

깃털의 비상

군무로 날아와

내려앉는 질서

갈증에 지친

대지의 넋을 기리듯

저린 가슴 언저리

덮어주기 위해

두려움조차 내던진

하얀 혁명

 

 

 

신경림

 

내 몸이 이 세상에 머물기를 끝내는 날

나는 전속력으로 달려 나갈 테다

나를 가두고 있던 내 몸으로부터

어둡고 갑갑한 감옥으로부터

 

나무에 붙어 잎이 되고

가지에 매달려 꽃이 되었다가

땅속으로 스며 물이 되고 공중에 솟아 바람이 될 테다

새가 되어 큰곰자리 전갈자리까지 날아올랐다가

허공에서 하얗게 은가루로 흩날릴 테다

 

나는 서러워하지 않을 테다 이 세상에서 내가 꾼 꿈이

지상에 한낫 눈물 자국으로 남는다 해도

이윽고 그 꿈이 무엇이었는지

그때 가서 다 잊었다 해도

 

 

 

눈 온 아침

신경림

 

잘 잤느냐고

오늘따라 눈발이 차다고

이 겨울을 어찌 나려느냐고

내년에는 또

꽃을 피울 거냐고

 

늙은 나무들은 늙은 나무들끼리

버려진 사람들은 버려진 사람들끼리

기침을 하면서 눈을 털면서

 

 

 

산동네에 오는 눈

신경림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서

눈도 제일 먼저 온다

깁고 꿰매고 때워 누더기가 된

골목과 누게막과 구멍가게 위에

눈은 쌓이고 또 쌓인다

때로는 슬레이트 지붕 밑을 기웃대고

비닐로 가린 창틀을 서성대며

남 볼세라 사랑놀음에 얼굴도 붉히지만

때와 땀에 찌든 얘기

피멍 든 노래가 제 가슴 밑에서

먹구렁이처럼 꿈틀대는 것도 눈은 안다

이 나라의 온갖 잘난 것들 모여들어

서로 찢고 발기고

마침내 저네들 발붙이고 사는

땅덩이마저 넝마로 만든

장안의 휘황한 불빛을 비웃으면서

눈은 내리고 또 내린다

하늘에서 제일 가까운 동네라서

눈도 제일 오래 온다

 

 

 

겨울 초대장

신달자

 

당신을 초대한다

오늘은 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이런 겨울 아침에 나는 물을 끓인다

당신을 위해서

어둠은 이미 보이지 않는다

내 힘이 비록 약하여 거듭 절망했지만

언젠가 어둠은 거두어지게 된다

밝고 빛나는 음악이 있는 곳에

당신을 초대한다

가장 안락(安樂)한 의자와 따뜻한 차와

그리고 음악과 내가 있다

바로 당신은 다시 나이기를 바라며

어둠을 이기고 나온 나를 맨살로 품으리라

지금은 아침

눈이 내릴 것 같은 이 겨울 아침에

나는 초인종 소리를 듣는다

눈이 내린다

눈송이는 큰 벚꽃 잎처럼 춤추며 내린다

내 뜰 안에 가득히

당신과 나 사이에 가득히

온 누리에 가득히

나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새롭게 창을 연다

함박눈이 내리는 식탁 위에

뜨거운 차를 분배하고

당신이 누른 초인종 소리에 나는 답한다

어서 오세요

이 겨울의 잔칫상에​​

 

 

 

눈 날리는 날

신동엽

 

지금은 어디 갔을까.

 

눈은 날리고

아흔아홉 굽이 넘어

바람은 부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콧물 흘리며

국수 팔던 할멈

 

그 논길을 타고

한 달을 가면, 지금도

일곱의 우는 딸들

걸레에 싸안고

대한(大寒)의 문 앞에 서서 있을

바람 소리여

 

하늘은 광란

까치도 쉬어 넘던

동해 마루턱

보이는 건 눈에 묻은 나,

나와 빠알간 까치밥

 

아랫도리 걷어 올린

바람아,

머릿다발 이겨 붙여 산막(山幕) 뒤꼍

다숩던

얼음꽃

입술의 맛이여.

 

눈은 날리고

아흔아홉 굽이 넘어

(),

한은 쫓기는데

상여집 양달 아래

트렁크 끌르며

쉐탈 갈아입던 여인

 

 

 

()

신성호

 

하늘의 기쁨을 전하려고

서둘러 내려 온 진객인 양

 

회색빛 구름길을 한걸음에

거침도 소리도 없이 내려왔네

 

오는 길이 멀기도 한데

하얀 천사처럼 곱게도 내리었네

 

없는 집 식량이 되어질까

어린아이 솜사탕이 되어질까

 

있는 듯 쌓이던 적설봉[積雪峰]

숨었다 나타나는 해맑은 햇살에

 

왔던 길 잃어 버리고

눈물[雪水] 지으며 가버리네

 

 

 

눈 치우기

신성호

 

밤새 내린 눈이 발목을 잡는다

넓은 널판지로 집 앞을 쓸려 하니

금방 내린 눈이라서 별로 힘이 안 든다

 

하늘이 밝아오고 햇살이 눈부신데

오던 눈은 속절없이 뻥뻥 내리고

쌓이는 눈을 다 치우려 애를 써 본다

 

쌓이고 쌓이던 눈은 햇살에 녹아

널판지로 밀려고 애를 써봐도

무척이나 무게가 느껴져 힘이 부친다

 

몇시간을 눈 치우기에 땀을 흘리고

잠시잠깐 쉬었다가 다시 나가보니

눈은 그치고 쌓였던 눈이 어느새 다 녹아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헷갈려

헛되고 헛된 눈 치움이 깨우침이 됨이라

 

 

 

봄눈

신정민

 

봄산 나무들

봉오리 터트릴 때쯤

어디선가

봄눈이 흰꽃으로피어나

몸부림 치면

떠나기 싫어 발버둥친다

 

바람이 된 선머슴아

사정없이 몰고

어디론가 달아나더니

지금은 찾을 수 없다

 

봄눈이 떠난 지금

햇님이 따스한 이불 펴주며

속삭여 준다

봄눈이 떠난 자리

서러워 마라고

노란 복수초꽃 한 송이

고개 내밀었다

 

 

 

겨울은 부동자세로 선다

신형식

 

겨울은 부동(不動)자세입니다.

밤새워 여위어가는 가지 위로

안기고 또 안겨 봐도

굴복하지 않는 고독함입니다.

그리워도 결코 핑계 대지 않는

고집스런 기다림입니다.

사랑할 줄 아는 것들은

모두 떠나가고

가장 낮은 곳으로

그들의 고백만이

하얗게 모여 앉는 겨울엔,

끝내 주지 못한 사랑도

얼어붙은 겨울 기도도

길가의 이정표처럼

부동자세로 섭니다.

가슴 깊숙이 숨겼던 것들

모두 녹아 흐를 때까지

참아야 할 것들은 참아야 한다고

입 다물고 선 겨울은,

거친 휘파람 물고

뜨겁게 뜨겁게

부동(不凍)자세로 서 있습니다

결코 얼어붙지 않겠노라고

 

 

 

성긴 눈

심재휘

 

옛사람을 만나러 나간 거리에

갑자기 눈이 내린다

새들이 앉았다 날아간 단풍나무 가지처럼

모든 소리가 멀어진다

 

자잘한 눈들은 한동안 떼로 퍼붓다가

잠시 주춤거리다가 드문드문 나폴대다가

낱낱의 마음들이 모두 제 중심으로 골똘한 듯

눈송이는 안으로 함박 부푼다

그러면 성긴 눈 사이로 거리는

낡은 사진처럼 말이 없다

 

아직 저녁이 오기 전인데

만나려는 사람을 만나기 전인데

앞으로 너무 오래 그래야 하는 것인 듯

눈과 눈 사이가 멀고 어둡다

그것을 알아버린 마음을 돌이킬 수 없어

성긴 눈 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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