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ㅇ - 2
이상국 – 여름
이상노 - 여름 한낮
이상조 – 여름
이상현 – 여름
이상홍 – 여름
이성복 - 그 여름의 끝
이성복 –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이성복 – 여름 산
이세복 – 여름날의 추억
이수니 – 여름옷 뜨기
이승기 – 여름의 날개
이승훈 – 나의 늙은 여름
이승희 – 여름의 우울
이시영 - 여름
이시영 – 여름날
이시영 – 한여름
이시하 – 장마
이영권 – 장마철에는
이영균 – 여름날의 오후
이영균 – 여름을 담다
이영균 – 피서(여름휴가)
이영주 – 여름
이영주 – 여름의 애도
이영지 – 여름감기
이영지 – 여름 열매
이영지 – 여름 열매 속삭임
이영지 – 한여름 감자
이영철 – 등목을 하고
이옥순 – 아픈 여름
이옥순 – 여름 미소
이외수 - 여름 엽서
이외수 – 여름의 끝
이외수 – 장마전선
이용임 – 여름의 수반
이원문 – 교훈의 여름
이원문 – 그 여름
이원문 – 시드는 여름
이원문 – 아가의 여름
이원문 – 여름꽃
이원문 – 여름 들녘
이원문 – 여름 뜨락
이원문 – 여름 마당
이원문 – 여름 밥상
이원문 – 여름의 꼬리
이원문 – 여름의 흔적
이원문 – 여름 인생
이원문 – 여름 장터
이원문 – 여름 하늘
이원문 – 저무는 여름
이원문 – 주막의 여름
이원문 – 친구의 여름
이원문 – 친정의 여름
이원문 – 타향의 여름
이유리 – 여름
이유리 – 여름날의 단상
이육사 – 청포도
이윤학 – 여름의 한낮
이은경 – 그 여름의 끝
이은경 – 여름 풍경
이은성 – 여름날의 회상
이은희 – 그해 여름
이의자 – 여름
이장희 – 하일 소경(夏日 小景)
이재봉 – 여름날
이재연 – 세속 여름
이재환 – 어느 여름날에
이재환 – 여름
이재환 – 여름 피서
이재환 – 여름 하늘
이정선 – 여름
이정애 – 여름
이정원 – 여름이 좋다
이정은 – 여름
이정은 – 여름이면
이종형 – 여름 이후
이종화 – 지난여름, 2013
이준관 – 여름 별자리
이지언 – 장마
이진희 – 지난여름
이채 - 그대에게 띄우는 여름 편지
이채 – 그해 여름의 그녀
이채 - 당신과 나의 여름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채 - 당신의 여름을 사랑합니다
이채 - 여름 바다, 그대와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이채 – 여름에 떠나간 사랑
이채 – 여름에 오는 눈
이채 – 여름에 참 아름다운 당신
이해인 – 고마운 여름
이해인 - 바다 일기
이해인 - 바다에서 쓴 편지
이해인 - 수국을 보며
이해인 - 여름 노래
이해인 – 여름이 오면
이해인 – 친구야 무더운 여름이 오면
이향아 – 그해 여름 풀밭 길에는
이향아 – 여름 개나리 가지
이향아 – 여름을 보내며
이향아 – 여름 저녁
이혜미 - 넝쿨 꿈을 꾸던 여름
이혜민 – 여름의 차
이화은 – 그해 여름 울었다
이효녕 – 여름날의 추억
임남규 – 여름 따라
임동윤 – 늦여름
임두고 – 어떤 여름
임보 – 어느 여름 일기
임석순 – 여름 단상
임송자 – 봄 곁의 여름
임수현 – 성난 여름
임수현 – 여름 해변
임영석 - 여름 편지
임영준 – 여름
임영준 – 여름, 그리움
임영준 – 여름 단상
임영준 – 여름 바다에서
임영준 – 여름 바다의 사랑
임영준 – 여름 사냥
임영준 – 여름 사랑
임영준 – 여름 서약
임영준 – 여름 소묘
임영준 – 여름 안에서
임영준 – 여름 앞에서
임영준 – 여름 여정
임영준 – 여름 예찬
임영준 – 여름을 팝니다
임영준 – 여름의 법칙
임영준 – 여름의 불씨
임영준 – 여름의 씨앗
임영준 – 여름의 전설
임영준 – 여름의 초대
임영준 - 여름이 다할 때쯤이면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임영준 – 여름 이별
임영준 – 여름이 시작이다
임영준 – 여름 이야기
임영준 – 여름 타다
임영준 – 여름휴가
임영준 – 이 여름엔 비라도
임재화 – 여름꽃 전시회
임재화 – 성하(盛夏)
임재화 – 여름 계곡
임재화 – 여름 숲
임재화 – 여름 호수
임종호 - 여름 바다 풍경
임주영 – 여름
임주영 – 여름 끝자락
임판석 – 여름
임향자 – 여름을 흥정하다
여름
이상국
산을 내려온 바람이
멧돼지처럼 옥수수밭을 뒤지고 다니는 저녁이다
하루살이들 이악스럽게 달려드는 멍석 마당에서
하늘의 별들이 가끔 더 먼 곳으로 날아가는 걸 바라보며
어머니는 감자를 깎으시고
오뉴월 하루 볕이 다른데
어디 보자며
불쑥 사타구니에 손을 넣어
감자 톨 같은 내 불알을 만져보시던
아버지야 아버지야
여름 한낮
이상노
소나기 한바탕 놀다 간
물 빠진 갯벌은 온통 붉은 물결
아버지 비료 포대 하나 들고
황발이 잡으러 갯벌에 가시네,
쫄랑쫄랑 나도 따라간다
어떻게 알았을까,
저승사자 발자국 소리를,
갯벌에 붉은 파도가 친다
붉은 파도가 출렁인다
자기들 삶의 터전이라고
배짱 좋게 버티던
집게발이 두 개 달린
등이 붉은, 그래서 황발이
어느새 포대에 가득 하네
아버지 콧노래 부르며
집으로 향하는데,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거품을 토하며
조난 신호를 보내는 황발이!
그러나 내가 어찌 할 수 없는 일
저승사자에 끌려는 가지만,
혹시 모르지 염라대왕
우리 엄마, 오늘 기분이 어떠실지
기대해 봐야지
바람이 놀고 있는 산으로
나는 고개를 돌렸다
여름
이상조
계절의 비 소나기
만난 사람마다
시원함을 알지
누군가 그리워하며
정자나무 앉아 쉴 때
쏟아지는 소나기도 알지
자신을 속인다는 것
참기 힘든 걱정이라
사랑하는 이를 속인다는
힘든 사랑을 알지
소나기로 가슴 적신 사랑
자신을 속이고
사랑하는 이를 속이니
쓸쓸한 아름다움인지 알지
사랑은 여름 소나기
시원함을 주는 것을 알지
여름
이상현
산 위에 오르면
내 생각이 산처럼 커진다
바다에 나가면
내 가슴이 바다처럼 열린다
파아란 산 위에서
바다에서
내 키가 자란다.
내 생각이 자란다
여름
이상홍
아침부터
그늘은 일어나 무릎꿇고
기도를 했지만
낡은 교각 뒤에서
떨던 몇 마리까지
차례로 끌려나와
탈색당하는
정오
연도에는
치를 떠는 수만(數萬)의 푸른 이파리들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이성복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안개는 우리 동네 집들을 가라앉혔다 아득한 곳에서 술 취한 남자들이 누군가를 불러댔고 누구일까, 누구일까 나무들은 설익은 열매를 자꾸 떨어뜨렸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서리 맞은 친구들은 우수수 떨어지며 결혼했지만 당분간 아이 낳을 생각을 못 했다 거리에는 흰 뼈가 드러난 손가락, 아직 깨꽃이 웃고 있을까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불란서문화원(佛蘭西文化院) 여직원은 우리에겐 불친절했지만 불란서(佛蘭西) 사람만 보면 꼬리를 쳤고 꼬리 칠 때마다 내 꼬리도 따라 흔들렸다 왜 이래, 언제 마음 편할래? 그래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와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어머니는 고향(故鄕)에 내려가 땅 부치는 사람의 양식 절반을 합법적(合法的)으로 강탈했고 나는 미안했고 미안한 것만으로 나날을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해 가을이 깊어갈 때 젓가락만큼 자란 들국화는 내 코를 끌어당겨 죽음의 냄새를 뿜어댔지만 나는 그리 취하지도 않았다 지금 이게 삶이 아니므로, 아니므로 그해 가을이 남겨놓은 우리는 서로 쳐다봤지만 단단한 물건이었을 뿐이고 같은 하늘을 바라보아도 다른 하늘이 덮치고 겹쳤다 이 조개껍질은 어떻게 산(山) 위로 올라왔을까?
여름 산
이성복
여름 산은 솟아오른다
열기와 금속의 투명한 옷자락을 끌어 올리며 솟아오른다
발등에 못 안 박힌 것들은 다 솟아오른다
저기 비행기가 수술 톱처럼 하늘을 끊어낸다
은빛 날개가 곤두선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이번 여름엔 꼭 다녀와야겠다고
그 여자는 잠자는 벌레를 밟았다
모르고 밟았다
부서지면서 물 같은 피가 솟아올랐다
내가 거듭 밟았다
그 여자는 불란서에 가겠다고
나는 속으로 욕했다
따지고 보면 욕할 이유가 없었다
당신은 남의 가난이 얼마큼 당신과 관계있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내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백 사람 중에 하나가 병들어 아프면 당신도 아프다고 생각합니까
그 여자는 부질없는 말이라고 대답했다
여름 산은 솟아오른다
여름 산은 땀 흘리지 않는다
힘쓰지 않는다
여름 산 여름 산 여름 산 우리는 그늘에서 콜라를 마셨다
콜라를 마시며 불란서를 생각하고 울었다 우는 시늉을 했다
우리는, 시멘트 포를 등에 지고 사다리 오르는 여인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흉내를 냈다
우리는, 바빌론에 묶여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우는 척했다
여름 산은 솟아오른다
한숨 쉬지 않고 솟아오른다 반짝임과 몽롱함을 뿌리며 솟아오른다
우리는 손을 잡았다 잡힌 손에서 물 같은 피가 흘렀다 살려줘요!
여름 산은 무겁게 솟아오른다
솟아오르지 않는다 솟아오르는 모습만 보여준다
여름 산 여름 산 여름 산 먼지, 매연, 악취로 부서지는
여름 산 여름 산
여름 산
여름날의 추억
이세복
들녘은 미루나무에 매미 우는 소리
맴맴 정겨운 여름날
태양은 뜨거운 백열등처럼
등 뒤에서 그림자를 따르고
이마에 소금꽃이 곱게 필 때
작은 개여울에 꽃잎 떨구며
멱감는 소리와 정겹게 노닐다가
뜨거운 여름날 이야기는
밤까지 계속되는 달빛 소나타
반딧불 풀숲에서 노래하고
미완성의 꿈을 좇아가는 별빛은
가슴만큼 풍성했다
볏짚으로 얼기설기 엮을수록
햇빛을 가려주는데 충분했던 원두막에서
밤 별 수 만큼이나 많던 수박은
둥글게 둥글게 노래도 불렀지만
장맛비라도 서럽게 오는 날이면
농부의 근심은 밤이 무겁기만 했다
예쁘고 고운 수박은 도시로 팔려 가고
남은 수박은 손수레에 한가득 실어
집으로 돌아와 수박 파티를 했던 날이 아직도 선하다
지천명을 넘어서 타는 세월의 그네는
어린 시절 추억에 젖어 들어
여름밤이 깊을수록 잊을 수가 없다
여름옷 뜨기
이수니
나의 몸 둘레만큼 코를 뜬다.
어린 들숨을 한껏 들이마신 꿈은
아직 날숨에 이르지 않았지만
마파람이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헐렁하게 품을 맞추어도 좋겠다
허리춤엔 결리는 칡넝쿨 같은 실을 쓰면 안 되겠지
풋내 나는 자두나무의 뭉쳐진
그늘을 풀어 목덜미를 짜도 좋겠다
목덜미 가장자리에 무늬를 새기는 실로는
나팔꽃 줄기만 한 것이 없겠지
목덜미에 새로 생긴
주름살 한 줄 곁들이면 조금 여유로워지겠다
새치가 박힌 머리카락, 열린 사립문으로 들어와서
뒤란 들창으로 빠져나가는
소나기 바람 줄기로 주름을 짜 넣으면
한여름에도 한기가 으스스 돋겠다
두 팔목은 토란 밭고랑 북을 돋우는 일을 시켜 놓고
그 사이 어깨까지 마무리 짓는다
무심한 등짝은 갑작스런 소나기 빗살로 뜨면 좋겠고
오후 한나절 등나무 그늘을 빌린 깜박 졸음에,
듬성듬성 코가 빠진 가슴팍에는
마파람을 꿰어 넣어도 좋겠다
입다 보면 늘어지는 곳이 생기겠지
늘어지지 않는 것은 지나간 시간뿐이니
살짝 그리움으로 느슨하게 짜도 좋겠다
촘촘히 코를 짠다. 허리쯤에
그리움을 닮은 보라색 도라지꽃으로 주머니를 달고
마무리로 한여름 밤 반딧불을 모아
보일 듯 말 듯 단추를 달아도 좋겠고
풋살구 몇 개 따다가 달아도 좋겠다
어차피 실로 뜬 옷이나 얼기설기 얽힌 일들이란 다
그 신맛에 찡그린 얼굴들이니까
여름의 날개
이승기
물의 세계에게
전쟁 선언한 불의 덩어리
분노한 물은 오아시스 전술이다
불타는 사막에는
낙타만 한숨을 지으며
아득한 목적지 쪽 모래 위
네발 등을 담금질하고 있다
질투하는 바람
흙도 불길도 나른다
눈썹 속 모래가 익는다
둘러쓴 두건이 짜증 낸다
축축 늘어지는 육신
땀의 무게는 한숨의 무게
낙타 위 쌓이는 물병의 잔재
오아시스만 유일한 해결책이다
햇빛이 내린다
해의 날개를 본다
수없이 많은 깃털의 햇살
날개 펄럭이며 세상 삶는다
햇살이 내린다
노랗다. 아니 하얗다
등에 늘어나는 염전의 꽃
조금만 더 데우면 날 수도 있다
산에 들에도
강물의 흐름 위에도
맥 놓은 구름 위에도
온종일 여름의 날갯짓이다
나의 늙은 여름
이승훈
저녁 밥상과 아편과, 우는 새끼와,
비가 새는 방들을 저는 기억합니다
억울하기 때문에 눈만 남은 여름
형편없는 시의 국물 길에 엎지르며 저는 걸어왔습니다
아버지, 서른 살에도 저는 너무 춥습니다
여름의 우울
이승희
누군가 내게 주고 간 사는 게 그런 거지라는 놈을 잡아와 사지를 찢어 골목에 버렸다. 세상은 조용했고, 물론 나는 침착했다. 너무도 침착해서 누구도 내가 그런 짓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도 못 할 것이다. 그 후로도 나는 사는 게 그런거지 라는 놈을 보는 족족 잡아다 죽였다. 사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이의 표정을 기억한다. 떠나는 기차 뒤로 우수수 남은 말들처럼, 바람 같은,
하지만 그런 알량한 위로의 말들에 속아주고 싶은 밤이 오면 나는 또 내 우울의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골목을 걷는다. 버려진 말들은 여름 속으로 숨었거나 누군가의 가슴에서 다시 뭉게구름으로 피어오르고 있을지 모른다. 고양이도 개도 물어가지 않았던 말의 죽음은 가로등이 켜졌다 꺼졌다 할 때마다 살았다 죽었다 한다. 사는 게 그런 게 아니라고 누구도 말해주지 않는 밤.
난 내 우울을 펼쳐 놓고 놀고 있다. 아주 나쁘지만 오직 나쁜 것만은 세상에 없다고 편지를 쓴다
여름
이시영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앞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어
노오란 꽃잎들을 와르르 포도 위에 쏟아놓는다
그 위를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년 둘이
허연 다리를 허벅지까지 드러낸 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간다
어디서 훅 풀 비린내가 스쳐온다
여름날
이시영
동쪽 하늘이
발그레한 걸 보니
거기서
누가
무지개 꿈을 꾸고 있나 봐
한여름
이시영
좋은 시인들은 소리를 갖고 있다
아니 소리의 그늘을 만들 줄 안다
그리하여 그 그늘에 초록 새끼개미들을 불러모아 쉬게 하고
저녁이면 그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연기 오르는 마을을 향해
허리 잘록이며 서로의 먹이들을 조금씩 나누어 지고가게 한다
장마
이시하
장마철이면 시골집 뒷간들이 들썩인다
쌓아 놓았던 곰삭은 속들을 퍼내 개울물에 쏟아버린다
하루걸러 똥 퍼 대는 냄새로 마을은 욱, 욱, 욕지기를 하고
아이들은 코를 싸잡은 채 구경삼아 몰려다닌다
더러워, 더러워, 똥지게 뒤를 졸망졸망 따르다보면
하늘은 기어이 어두워지곤 했다
속을 비워낸 뒷간은 휑하니 깊다
어린 녀석들은 얼마간 누이 손을 잡고서야 힘을 쓸 것이다
새로 오린 신문지가 걸리고 뜯는 달력이 걸리면 즐겁다
어디선가 낯익은 냄새가 퍼진다
뉘집서 오늘 똥 푸나 보다
부침개를 뒤집으며 어머니, 개울물 많이 불었으니 나가지 말라신다.
장마철에는
이영권
이 넓은 세상도
그 큰 덩치답지 않게
한 열흘 밤낮 만사 제쳐두고
엉엉 울고 싶은 때가 있다
뭐라 할 거 없이
그동안 맺혔던 한이
설움 되어 복받쳐 올라
세상의 오장육부를 화악
뒤집어놓을 때가 있다
울어라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한다
서슬 푸르게 독기도 품어보고
세상을 흔드는 소리로도 울어봐야 한다
울다가 힘들면
쉬었다 또 울어라
고인 슬픔 막힌 설움 가득한 그리움
쫙쫙 국수 면발 뽑듯
뽑아내며 울어야 한다
울고 싶을 때는 울고 또 울어야
온몸 다 적시며 흘러
도랑물이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이 강물이 되어
네 하늘 검은 구름도 마침내 걷히고
하늘 같은 바다를 맞이하리라
여름날의 오후
이영균
바람 소리 낯설지 않을 때가 있다.
언덕이 바람 잡고 선 오후
오래된 나무로 햇살 가려본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빗줄기 뿌려주길 헐떡거리며 지열 뱉어낸다
간절히 살아 음직일 때 대답한다
바람의 냄새 손끝에 만져져
온다고 여기서 소리치면 언덕은 나뭇잎을 흔들어
바람은 가로수를 타고 와
언제나 사거리 신호등 옆 이정표 좁은 그늘에 선다
신호등 빨간 덩어리 녹아떨어지고
파란 불빛 내 눈에 들어오면
기다리던 빗줄기 아스팔트 위 파란빛을 세기고
바람 소리 내 코끝 땀방울 닦는다.
지금껏 지나온 아스팔트 아직도 여름은 길다
피서(여름휴가)
이영균
7월 말 마른장마에 시퍼런 날들
맥없이 자빠진 지 벌써 여러 날이다
에어컨 바람으로 거실을 식히며
수박화채에 얼음 가득한 티브이 화면에 빠져
45도의 지열을 몸에서 뽑아내는 중
폭포가 시원한 계곡 물소리와 화면이
뉴스에 밀려 사라진다
사라진 그곳으로
3일간 더위를 피해 가기로 한다
떠날 채비를 하는 동안은
올여름 중 가장 더운 날이다
계곡을 향한 피서 채비가 한 살림
계곡의 시원함에 더위도 잊은 채 벌써
쪽방만 한 텐트를 치고
살림살이를 풀며
아직 이른 저녁을 준비한다
더위는 먼 나라 일인 계곡의 밤
한 시간 두 시간 밤이 깊을수록
거실은 강원도 심신 계곡이고
벽은 계곡의 기암괴석으로 얼어온다
사나흘 있으면 떠나기로 한 피서지
그 밤 미리 에어컨 바람으로 다 즐겼으니
가면 그 계곡 과연 시원할까
또 한 번 심신 계곡인 듯
상상은 더 골이 져 계곡 깊어진다
여름
이영주
악천후 속에 있다
엄마는 찬물로 쌀을 씻었다
우는 것은 쉽다
엄마는 양파를 썰며 말했다
악천후 속에서 우는 일같이
쉬운 일은 하지 마
엄마는 국을 끓였다
모든 폭풍이 이 작은 집 안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물을 쏟았다
창밖에서 목이 긴 나무가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몹시 흔들렸다
나는 물속에 엎드린 채 영원을 둘러싼 기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식탁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물이 흘렀다
악천후 같은 영원은 이번 삶에서 끝나지 않지만 그래도.....엄마는 희미하게 웃었다
길게 땋은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여름의 애도
이영주
비 오는 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어머니는 부서진 날개를 깁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누구의 옆구리일까요
그때 나는 어머니의 바구니에 담겨 있는 털 뭉치처럼 온몸이 가려웠었죠
죽은 사람이 두고 간 것인데. 어머니는 중얼거리다 말고 빗물이 쏟아지는 마당을 가만히 바라보았습니다. 모든 발자국이 지워졌습니다
어두운 자리 하나만 남아서 점점 깊어지고 있었죠. 모든 게 빗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인데
너의 할머니는 이것을 두고 갔구나. 우산을 들고 어머니는 마당으로 걸어갔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을 듣지 못하고 나는 털 빠진 개처럼 옆구리를 긁고 있었죠
개다 만 빨래가 다시 축축하게 젖어드는 시간
떠내려가지 못한 날개를 건져 올린 것은 어머니입니다
찢기고 바스러진 이것을 어떤 자리에서 다 완성할 수 있을까요
물에 젖은 어머니의 발자국이 천천히 지워지고 있습니다. 슬레이트 조각이 떨어지는 소리
이 다정한 악몽의 시간에 잠깐 쉬었다 갈게. 죽은 사람의 날개가 힘없이 부서집니다
어머니의 등에서 흰 빛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나는 그제야 컹컹 웃기 시작합니다
목이 아프도록. 깃털이 흩어져 쓸려갑니다. 그 위로 장대비 쏟아지는 소리
여름감기
이영지
태양이 내리 내리 누르자
온
온몸이
온몸이
땀투성이
온몸이
오 오싸악
온몸이
오싹거리는 밤 투정이
오 싸악
여름 열매
이영지
파랗다 잎 곁에서 파랗다 더 파랗다
여름이 더운 여름 묶느라 한데 얼려
약간은 싱거우면서 떫은 맛이 파랗다
파랗다 잎을 닮아 파랗다 더 파랗다
여름이 익는 여름 묶느라 한데 묶여
약간은 못난 듯하며 열매값이 파랗다
파랗다 여름 닮아 파랗다 꼭 파랗다
긴여름 더위라도 잊느라 더 파랗다
약간은 기다리느라 발걸음이 파랗다
여름 열매 속삭임
이영지
나뭇잎 세포에다
하늘의 바람만을
얹어서 놓으세요
바람을 놓으세요
빠알간 가슴 속으로
들어가서
살게요
사랑이 가슴만큼
오늘은 얼마만큼
사랑이 둥글둥글
온 날이 열어 놓아
알알이 여물어 가며
여름 열어
드려요
한여름 감자
이영지
사랑을 갈비 불에 묻는다 차츰차츰
정들어 지금쯤은 한 반쯤 익었겠다
별들이 음악을 풀어 소근소근 익어가
멍석에 두 다리를 뻗고도 고개 젖혀
감자야 다 익어라 별들을 세어간다
아마도 지금쯤에는 한 반쯤만 더 익어
손으로 부지깽이 잡고서 꺼내든다
입에서 침이 꼴깍 같이 들 노래들면
펑퍼짐 하얀 알갱이 오물오물
한여름
등목을 하고
이영철
나이가 들면
땀이 많이 난다
어디로 가나
땀 내음 때문에 홀애비 소리를 듣고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지만
요사이 같이 땀은 그냥 있어도 줄줄 흐른다
이때 등목을 하고
선풍기 밑에서 한잠 자고나면
그렇게 싱그러울 수 없다
바람이 와서
화문석 돗자리에 나를 발견하고
곧장 시원한 빙수 한 그릇
먹고 나면
마치 신선이 된 기분이다
옛 믿음의 상처
그것 다 지우고
혼자 살아가는 내 방식이 있다
아픈 여름
이옥순
흔들리는 걸음 마음 아파
파고드는 음악도 가슴 시리고
날마다 바라보던 그림자
희미하게 바래져 가는 서러움에
돌아설 수 없는 미련인가
놓을 수 없는 끈을 부여잡고
시간 따라 굽이굽이 계곡을 흐른다
뜨거운 여름은 고통으로 휘감고
살아있는 가슴 까맣게 멍이 든다
아련해진 꿈처럼 허전한 빈자리
홀로 가야 하는 사막의 초원
안식을 허락한 시간 속 복잡한 도시
한복판에 몸살을 안고 서 있다
흔적도 없이 떠나려는 텅 빈 여름 뒤
바람 타고 다가오는 가을 향기
새록새록 빈 가슴 채우는 기쁜 소식은
감사의 눈물 속에 축복과 행복의 열매다
여름 미소
이옥순
고즈넉한 곳 넓고 넓은 들 바라보니
곱게 자란 푸르른 들녘
바람에 푸른 파도 물결치며 출렁인다
계절 따라 변화하는 드넓은 생명의 땅
파랗게 뜨거운 여름을 즐기고 있다
땀방울 송송 농부의 손길
때때로 스치고 어루만져
그 사랑 속에 자라나 여물 어가는 모습
가슴 설레는 풍성한 기쁨을 부른다
여름날 백일홍 꽃봉오리 톡톡 터트려
활짝 피어낸 꽃가지 흔들며 정다운 미소
주홍빛 저고리 곱게 차려입는 능소화
화사한 얼굴 고귀한 자태 품어낸다
그윽한 커피 향 코끝에 맴도는데
푸른 하늘 하얀 구름 몽실몽실 꽃피우고
음악의 향기 가슴 가슴에 수놓으며
은빛 물결 반짝이는 바다 내음과
달콤한 시간 시원한 바람에 한껏 취한다
밤하늘 높게 달빛 반짝이고
소곤소곤 목소리 별빛처럼 달콤하다
계절의 순응과 인내를 배우며
가을날 황금빛 휘날리는 들녘 익어가듯
내일 향해 소망 담은 여름 아침 밝아온다
여름 엽서
이외수
마음으로만은
사랑을 할 수 없어
밤마다 편지를 썼었지
서랍을 열면
우울한 스무 살 가슴앓이
사어(死語)들만 수북이 쌓여 있었지
입대하기 전날 아무도 몰래
편지를 모두 잘게 찢어
그대 집 담벼락에 깊이 묻고
다시는 그리워하지 않으리
나는 바삐 걸었네
황산벌 황사 바람 속에서도
바래지 않던 추억
수시로 가시처럼 날카롭게
되살아나서
하루에도 몇 번씩
파고들던 아픔이여
그래도 세월은 가고 있었네
제대해서 돌아와
다시 편지를 쓰려는데
그대는 하늘나라 먼 길을 떠났다던가
보름달은 환하게 밝아 있고
편지를 잘게 찢어 묻은 그 자리
찔레꽃이 무더기로 핀 이유를
비로소 알아내고 혼자 울었지
여름의 끝
이외수
이제 여름은 가고
육림공원 빈 의자에
노오란 페인트가 마르고 있다.
낮은 음악이 등 뒤로 다가와
등넝쿨을 가만히 흔들고 있다.
구관조 새장 앞에서
조그만 아이 하나가 말을 가르치고 있는 소리
사
르
비
아
햇빛 속에 한 줄로 피어 있다
장마전선
이외수
흐린 날
누군가의 영혼이
내 관절 속에 들어와 울고 있다
내게서 버림받은 모든 것들은
내게서 아픔으로 못 박히나니
이 세상 그늘진 어디쯤에서
누가 나를 이토록 사랑하는가
저린 뼈로 저린 뼈로 울고 있는가
대숲 가득 쏟아지는 소나기 소리
여름의 수반
이용임
서성이는 육체
나리우는 육체
맴도는 육체
묽어지는 육체
붉어지는 육체
환하게 사라지는 육체
입김으로 흩어지는 육체
한 점으로 떠 있는 육체
가장자리가 흔들리는 육체
바람을 가둔 육체
거울이 되는 육체
눈 위에 손을 올리고 기다리는 육체
그림자에 빠져 익사하는 육체
꽃잎을 얹은 육체
푸른 얼굴의 육체
가둔 향기에 빙빙 돌면서
말라가는 육체
교훈의 여름
이원문
아직은 여름
얼마 있어 그 찬바람이
이 마음을 빼앗을까
논으로 밭으로
날아드는 참새 떼
앞 뒷산 나뭇잎
색깔부터 다르고
냇물에 담근 발
그 느낌은 안 그럴까
흠뻑 내린 아침 이슬
긴소매 옷 꺼내라 한다
기억의 여름
여름 끝자락의 쓸쓸함
가을의 여름날일까
서운한 그 여름
무엇인지 서운함
가슴에 새겨지고
그 뭉클했던 주눅감
다시 떠 오르니
계절의 가르침이었나
마르지 않는 그 이슬
이 가슴에 흘러내린다
그 여름
이원문
1
전기 없는 그 시절
전기 있는 이 시절
어머니의 아들 딸
어떻게 기르셨나요
많이 더우셨지요
어머니 고맙습니다
2
부푼 꿈 즐거움
뒷산 길로 멀어지던 날
매미 울음에 묻은 꿈
다시 내년이 되어야 했고
아침저녁이 다른 바람
그 아쉬움 잊어라 한다
누가 이 여름을
그 바다에서 즐겼을까
해마다 가겠다는 곳
그렇게 벼르고 벼르던 곳인데
또 꿈 깨어진 한 해가 되어야 하나
차라리 그 말을 듣지나 않았더라면
가보고 싶었던 그곳
처음의 여름이었으니
얼마나 가고 싶었나
자랑에 들었으니 더 그랬었고
내려놓아야 하는 실망과 절망
뒷산 길 그 노을에 올려놓았다
시드는 여름
이원문
음지여도 뜨겁다
후덥지근해 못 살겠다
흐르는 땀을 어찌 할까
그렇게 미운 여름이었는데
아니면 핑게 삼아
멋 내니 그런대로
놀러 가니 찾은 곳
그곳에서도 투정이었을까
먹을 것 입는 것
여름만이 주는 웃음
그런 계절의 즐거움
일터의 짜증은 왜 없었겠나
그래도 이 여름
떠나니 아쉽고
가을 앞에 주눅 드는 마음
그 가을이 몇일이 될까
아가의 여름
이원문
아가야 울지마라
이 더운 날씨를 어떻게 하겠니
몸이 불편해 그러긴 하는데
어디가 불편한지 알 수가 없구나
어제 밤새 칭얼댔던 우리 아가
오늘 또 그러면 어떻게 하지
열도 조금 있는 것 같고
이제 눈도 안 마주치네
아가야 울지마라
부채로 부쳐대면 그리 잘 자더니
그것도 아니고 어떻게해
아픈 것은 아니겠지 아가야 우리 아가야
여름꽃
이원문
1
잃어버린 우리의 꽃
그 꽃을 어디에서
어떻게 찾을까
하늘의 구름은
옛 구름 그대로인데
찾을 수 없는 우리의 꽃
추억 속에 아련하다
아는 꽃으로 봉숭아
그 뜨락 채송화
울타리 감아 오른
삭쟁이의 나팔꽃
냇둑 논둑 들꽃들
이름 모를 고향의 꽃
그 시절로 데려간다
2
그 흔하게 피는 여름 꽃
냇둑으로 들길로 산자락 밑 밭둑으로
어쩌다 가재 잡이의 골짜기에 오르면
그 곳도 띄엄 띄엄 예쁜 꽃이 피었었지
모르는 이름의 그 예쁜 꽃들
소녀의 머리 빗은 듯 날리는 억새풀
그 많은 꽃 이름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모두 다 모아 고향꽃이라 부르고 싶다
여름 들녘
이원문
1
원두막 위 흰 구름
뒷산 넘어 멀어지고
매미 울음 멎을새라
길고 가늘다
볏논에 뜸북새
논병아리 숨는 논
초저녁을 약속하는
앞 냇가의 맑은 물
노란히 참외 수박
누구의 것이 먼저 될까
뜨거운 참외밭
저녁노을 기다린다
2
걷는 길 뜨거워
그늘에 비켜서니
나무 한 그루의 고마움
불어오는 바람일까
나부끼는 벼 포기
잔물결 이루고
하늘의 흰 구름
들어오고 나간다
뜸북새의 파란 들녘
산자락 밑 원두막
그곳도 여기처럼
바람 불어 시원할까
저녁이면 더 시원히
저녁 바람 불 것인데
해 떨어져 노을 지면
노을 길 되겠지
여름 뜨락
이원문
잠든 초가의 그리움인가
무너진 뜨락 시간의 돌 뒹굴고
기우는 담 나팔꽃 넝쿨 얹는다
몇 가닥의 담쟁이 누가 먼저 오를까
틈새로 돋아난 풀 봉숭아 외롭고
손길 없는 봉숭아 어떻게 자라났나
석삼년 전 심고 떠난 누나의 영혼인 듯
뜨거운 기다림에 빨간 꽃잎 떨어진다
여름 마당
이원문
멍석 펴 눕기에 아직 이르고
바라보는 서쪽 하늘 노을 저 간다
머리 위 고추잠자리 어디에 숨었나
쓸어안은 댑싸리 포근히 안기고
은하수 북두칠성 먼 훗날 그려준다
여름 밥상
이원문
시원한 먼동이었는데
이슬 마르니 뜨겁구나
어제 그렇듯 더 뜨거울 것인데
그래도 먹을 것은 해먹어야지
새벽녘 이리저리 둘러본 텃밭
뜯어 무치면 다 반찬이 될 것인데
무엇부터 만들어 식구 먹이나
저녁 밥상에 모두 둘러 앉겠지
우선 열무 뽑아 열무김치 담고
애오이 몇 개로 오이냉국 만들까
바가지의 노각은 상채로 무치고
비름나물 고춧잎은 조금만 무쳐야 하나
풋고추는 썰어 된장에 넣으면 되고
그리고 또 뭐 있나
호박잎 좀 뜯을까
애호박 두개로 볶음이 될런지
오이지가 빠졌구나 고추장에 된장도 그렇고
오늘 이만하면 저녁 반찬이 될 것 같은데
어디 보자 그러는 내일은
밀가루 반죽 한 덩어리더 다져 막둥이 빵 쪄주고
칼국수나 넉넉히 썰어 놓을까
애호박도 그렇지 몇 개 더 따면 되고
반찬은 있는 반찬 그대로 놓으면 되겠지
여름의 꼬리
이원문
하루 이틀 사나흘
이렇게 다를 수가
저울 위 여름 가을
가을 추 내려가고
물도 따라 차갑게
그 여름 다 식었다
가을에게 밀린 여름
이제 그만 가야 하나
매미 울음도 멎은 듯
귀뚜라미 밤새우고
씨앗 맺는 들녘의 풀
한시 하루가 바쁘다
기다리지 않았것만
슬그머니 찾은 가을
이제 얼마만큼이나
이 마음을 빼앗을까
떠난 여름 가을 문턱
하늘 한번 올려본다
여름의 흔적
이원문
여름도 아니고
가을도 아니고
어중간한 이 계절
가을이라 말 할까
한낮 뜨거움으로
여름이라 말 할까
달력의 날짜로
분명 가을인데
여름 같은 이 가을
언제 더 깊어 갈까
뜨거웠던 그 자리
찬 바람이 메운다
여름 인생
이원문
1
더워 벗은 옷
몸만 덥겠나
문간 바람 잦아들어
부채 쥐고 부치려니
눈 안의 뜰 기다려라
그 세월 덮어 준다
나절에 점심나절
저녁나절 돌아오면
쥔 부채 빼앗는
저녁 바람 불어올까
천릿길의 툇마루 끝
아이들이 기다려진다
2
풀이파리에 흔들리는 마음
나도 모를 이 마음 무엇을 바라보나
그늘 시원히 바라보는 이파리
소스라쳐 눕다 다시 일어나고
일어나 다시 몸부림치는 저 이파리
바람 불면 부는 대로
가뭄에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처음도 비바람에 저리 시달렸을까
씨앗 하나 잃을세라 매달린 세월
이제 그 세월도 절기 따라 넘는구나
여름 장터
이원문
내일은 장날
사람 구경이나 할까
혼잣말에 할머니
텃밭에 가시더니
비름나물 뜯고
밭두덩의 호박잎
풋고추에 대파
들깻잎 몇묶음
그 다음에 오이 노각
이 노각을 누가 집을까
씻어놓는 할머니
담배쌈지 찾더니
아침 일찍 나서며
보따리 가득 들고 이고
늙은 친정 생각에
장터 길 멀어진다
여름 하늘
이원문
매미 울음 드높아라
바람 불면 가늘고
졸음 오면 그리 멀어지는지
음지녘에 누운 하늘
저 흰 구름 두둥실
어디로 흘러가나
이리 보면 이런 모형
저리 보면 바위 언덕
뭉게구름의 뜰
꽃 피어 있는 것 같고
마음이 그린 그림
그대로 그려준다
옛날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
다음의 그림은
무엇이 그려질까
바람 한 차례에
스며드는 그 옛날
떠오르는 기억마다
구름 따라 흐른다
저무는 여름
이원문
저문다 해서
여름만 저물겠나
보내야 하는 한계절
방초잎부터 다르고
어느 것은 씨앗 맺어
이 더위에 영글린다
절기를 따르는가
아니면 세월인가
녹두 씨 알차게 들어서니
벼 패기에 참깨꽃
며칠 있어 씨 맺을까
하루가 다르게 느끼는 마음
말복에 보름이면
아침저녁이 다르고
그다음 옷 갈아입으니
손은 그만두더라도
발 담근 물 차갑지 않겠나
얕은 구름 높아라
높아진 하늘 높이
구름 흩어질 것이고
매미 울음에 숨은 가을
그 매미 울음 멎게 할까
커가는 감나무의 감
절기의 밤송이도 하루가 다르다
주막의 여름
이원문
새벽 일의 논과 밭
한낮의 뜨거움
이 뜨거운 들녘
누가 나갈 것인가
뜨거워도 나가야 하는
어머니의 마음
콩밭으로 텃밭으로
얼마나 뜨거운가
주막의 아버지
그 마음을 아는지
새벽녘 물꼬 보고
일 다 했다는 아버지
싹 차려입고 나서는 길
어디 가시나
썩는 속의 어머니
화가 난 어머니
옛 노래와 함께
주고 받는 혼잣 말
팔자 걸음의 아버지
누구와 말 하나
행길이 좁을새라
비틀대는 아버지
어머니 바라보며
잔뜩 벼른다
친구의 여름
이원문
친구야
이제 그 여름 잊자
생각하면 뭐하겠니
너와 나의 여름은
여름이 아니고
가슴 깊이 새겨진
교훈의 계절이었지
매미채 만들어
서울 친구에게 선물하고
냇가의 고기잡이
들로 산으로 안 다닌 곳 있니
배고파도 아닌 척하고
같이 놀아 주었고
감정이 있어도 참아 주었잖니
그러다 그 서울 친구 집에 가면
우리 둘이는 뭐했었지
개구리 꾸러미 생각나
그 잡은 개구리 꾸러미 팔아
공책 연필 샀잖니
어디 그것뿐일까
이웃 밭일 도와주면서
몇 푼 얻은 돈 그 돈은 안 그럴까
밀린 방학 숙제에 집안일
무엇이 먼저였었니
다가오는 개학 날에 그 근심 걱정
먹는 거나 제대로 먹었었니
학교 문밖 그 며칠에 다 보낸 여름
가슴 두근두근 허무하기만 했었지
들로 산으로 저녁이면 그 노을
이제야 눈 안으로 그 꽃까지 스쳐 가는구나
친정의 여름
이원문
여기가 더운데
친정은 안 더울까
지금쯤 우리 엄마
들녘에 있겠지
두른 수건에 젖는 옷
그 옷만 젖었을까
나 기를 때 그 마음
옛날도 젖었겠지
이 무렵의 저녁
우리 엄마도 저녁
욕심 많은 우리 엄마
무엇 하고 있을까
남은 일 거두고
집에는 왔는지
여기 이 곳 노을지니
엄마의 집은 안 졌겠나
안 보아도 보이는 듯
바쁜 걸음의 우리 엄마
외갓집 잃은 우리 엄마
나 몇번을 그려 보았는지
타향의 여름
이원문
이리 부딪치고 저리 차여 앉은 몸
갈 곳 없는 골목길 누가 나를 부를까
더워도 물 한 모금 얻어먹을 곳 없고
벗자 하니 흉 되어 아랫도리만 올린다
인정 없는 차가운 세상 이것이 타향이고
그 인심이란 말인가 오가는 이 바라보면
다 웃는 표정이요 손잡은 남여 청춘
나는 저리 왜 못했나 보내진 집 작은 머슴
논 밭 일로 한평생 주인 집 막내 아가씨
혹시 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그림으로 보는 하늘 그것 아닌 꿈이었고
손에 쥔 모래 한 줌 모두 새어 흐른다
잘 살겠다 나온 타향 글 모르고 쥔것 있나
종이 부채 부쳐대니 시원한 듯 더 뜨겁고
글 모르는 까막눈 이 종이에 무어라 써 있나
알면은 나의 갈 길 그 길도 있으렴만
양놈의 글씨까지 어질뜨려 졸음 온다
이제 일어서면 어디로 가야 하고
아는 이 없는 타향 누구의 집 찾아야 하나
물 끼얹을 곳 없는 곳 허기에 서롭구나
졸음 그만 자리를 떠야 하나
흐르던 구름 낮아지니 주인집 마당 노을 같고
더 붉어라 바람까지 나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여름
이유리
온통 초록이다
태양은
젊은날의 열정, 당당함을 닮았다
차라리 오만함이다
여름 숲을 흔드는 매미는
목멘 간절함으로
나를 위한 그리움의 노래를 부른다
기쁘고 슬펐던 노래들
숱한 바람이 드나들며
아릿한 구멍을 내던 내 마음도
온통 초록이다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다
상심하던 가슴 있거든
숨죽인 바람에 살며시 묻고
너무도 푸르러 황홀한 이 여름 안에
그대,
나와 함께 머물다 가지 않으렵니까
여름날의 단상
이유리
풍경마다
애틋함이고 그리움이다
바람과 햇빛과의 동행이
이처럼 무르익는
아릿한 그리움을 만들었으리
열렬히 부서지는 푸르름은
살아 꿈틀대는
싱그러운 떨림, 설렘들,
눈부신 찬란함
그 속에 숨어 있는 비애는
내가 떠나보낸
나를 버린 시간들이다
시린 것은 더욱 시리게
푸른 것은 더욱 푸르게
계절 속에 묻히는 애잔한 기억들
청포도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 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며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을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여름의 한낮 - 오동나무 아래
이윤학
오동나무 밑에는 평상이 놓여 있다
평상 옆에는 지팡이가
여럿 기대져 있다, 노인들이
입을 벌리고 자고 있다
털 난 벌레가
꿈틀꿈틀 기어가고 있다
평상 위에는 부채가 놓여 있다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쩍
갈라진 수박 반 쪼가리
저 수백 장의 오동나무 이파리
부채는 시들지 않는다
푸른 부채, 너무 큰 부채들 위에
꽃이 피어 있다
노인들, 가끔 입맛을 다신다
얼마나 많은 순간들이 겹쳐
지나간 것인가, 그리고
꽃이 시든다는 것을 얼마나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가
더 높은 곳으로
저 꽃들은 바쳐진다
오오, 입을 다물어
씨를 만들어내는
지독한 순간들, 만난다
햇빛이 잠깐 입 속을 스쳐 간다
입 속의 금이 번쩍 빛난다, 저
평상 위의 그늘은 끝없이 물결친다
그 여름의 끝
이은경
화난 표정으로 그 여름과 싸웠다
몸이 박살 나서야 난 다시 살았다
붉은 여름이 가는 소리, 야듀
여름 풍경
이은경
하늘 네모 조각
하얀나비 하늘하늘
그림자 앞 건물에 투영되다
찬란한 새소리
여름 아침의 대부분은 햇빛의 절정시간
햇빛이 절정으로 치닫는 시간에 저 뜨거움
환호하는 저 뜨거움
여름날의 회상
이은성
빗소리와 함께
여름이 가고 있다
내 청춘도 가고
뜨겁게 타오르던
열정도 차츰 식어
가을의 낙엽처럼
퇴색되어 가겠지
그러나 가슴엔
식지 않은 정열로 남아
언젠간 다시 타오르리라
봄이 오면
새싹이 움터
꽃잎이 피어나듯이
태양의 열기
비와 함께 식어가고
가을의 찬 바람은 불어오는데
오늘은 나의 마음
어느 곳에 추억으로 남아
그런 날이 있었노라
회상하게 될까
그해 여름
이은희
지리산
하늘 아래 첫 동네
우리는
두 개의 반짝이는
별이였지요
한 번도 오염되지 않은
산내음이
계곡에서 불어오고
청명한 하늘 가득
별꽃이 피었지요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만을 보고
당신 이름 앞에
내 이름 바치던 그 날이
잊히지 않아요
그 날,
풋복숭아 향기는
아직도 그대로입니다
여름
이의자
삼복더위 무더운 여름
산으로 바다로 달려가고파
차속에 이것저것 짐으로
가득 채우고
바람과 함께 마구 달려 떠난다
시원한 계곡을 들어서니
지저귀는 새소리와
평안함을 얘기하듯
청녹 세계의 반김
길가엔 이름 모를 꽃들이
방긋방긋 나를 반겨 주는구나
졸졸 흐르는 물은 이웃을 만난 듯
첨벙되는 물장구에
웃음을 띄우네
더운 여름이 지나면
이곳도 조용히
평온한 수면에 취하겠지
그래 내년 이때를 위해
하일 소경(夏日小景)
이장희
운모같이 빛나는 서늘한 테이블
부드러운 얼음 설탕 우유
피보다 무르녹은 딸길를 담은 유리잔
얇은 옷을 입은 저윽히 고달픈 새악씨는
기름한 속눈썹을 깔아 맞히며
갸날픈 손에 들은 은사시로
유리잔의 살찐 딸기를 부수노라면
탐홍색 청량제가 꽃물같이 흔들린다.
은사시에 옮기인 꽃물은
새악씨의 고요한 입술을 앵도보다 곱게도 물들인다.
새악씨는 달콤한 꿀을 마시는 듯
그 얼굴은 푸른 잎사귀같이 빛나고
콧마루의 수은 같은 땀은 벌써 사라졌다
그것은 밝은 하늘을 비친 작은 못 가운데서
거울같이 피어난 연꽃의 이슬을
헤엄치는 백조가 삼키는 듯하다
여름날
이재봉
잠자리 한 쌍이 얼러붙어 물속에 잠긴 풀잎을 흔든다
멱을 감던 아이들이 돌멩이를 던지자
바사삭거리며 암컷 날개 한쪽이 부서진다
그러자 수컷이 다친 암컷을 업고 강둑으로 날아간다
아이들이 물속에서 뛰어나와 달리다가 한 아이가 넘어진다
그러자 옆에 있던 아이가 넘어진 아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고,
그 강둑길을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업고
아버지께서 추억 속으로 걸어가신다
세속 여름
이재연
늘 그랬듯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려고
다시 전화를 받고 전화를 끊는다
아는 사람과 알고 싶은 사람의 차이
알고 싶은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모두 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것이 편해 따뜻한 물을 마시고
반쯤 죽은 아이비 화분에 물을 준다
지구는 펄럭이고 현수막처럼 아침이 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람을 보내버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냉장고 속을 바라본다
샐러드 속의 단백질의 관점에서 나는
지나가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을
끝없이 지나가게 하는 사람
갑자기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어 이르기를
누구나 다 마찬가지, 마찬가지로 같아
무궁화꽃이 피고 곰팡이꽃이 피고
옥수수, 옥수수 텅 빈 하늘로 솟고
술 먹고 술 안 먹었다고 하는
너의 목소리 빛나고 아프다
어느 여름날에
이재환
연못가에 모여
개굴개굴 노래하는 개구리
더운 날 나무 그늘에서
합창하는 매미
소나기 그치고 나니
메밀잠자리 평화롭고 놀고
시원한 계곡엔
개구쟁이들의 행복한 웃음소리
뜨거운 태양에도
폼을 잡는 망초꽃
만추의 계절을 향해
탐스럽게 익어가는 과일
파란 하늘 뭉게구름과
먹구름은 서로 잘난체한다
여름
이재환
여름아
너 왜 이러니
태풍으로 괴롭히고
폭염으로 힘들게 하고
너는
아침부터 더위를 주고
낮에는 불볕더위로 숨이 막히고
저녁에 열대야로 잠 못 들게 하네
여름아
왜 이렇게 괴롭히니
너 정말 어쩌려고 그러니
이러다가 큰코다친다
여름 피서
이재환
계곡의 흐르는 깨끗한 물
바람 소리 연주에 노래하고
어디서 왔는지 물잠자리
리듬 속에 춤을 추네
어느새 삼복더위는 어디로 가고
시원한 물소리만 들리네
여름 하늘
이재환
북쪽 하늘
무서운 검은 구름
바람 따라 흘러가고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발걸음은 빨라진다
번쩍번쩍 불 켜더니
우르르 쾅쾅
괴성을 지르더니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도로는 물로 가득하네
한참을 퍼붓던 비 그치고
하늘이 환하게 웃더니
일곱 빛깔 무지개가 반기네
여름
이정선
흥에 겨워 여름이 오면 가슴을 활짝 열어요
덩쿨장미 그늘 속에도 젊음이 넘쳐흐르네
산도 좋고 물도 좋아라
떠나는 여행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사랑이 오고 가네요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갈숲 사이 바람이 불어
한낮의 더위를 씻고
밤이오면 모닥불가에
우리의 꿈이 익어요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
이정애
톡 톡
내 잠을 깨우는 소리에
너인 줄 알았다
문을 열면 너는 없고
네 그림자 닮은 비만 내렸지
날이 저물어도
떠나지 못하는 연인들처럼
밤새 두리번거리다
선잠이 들었다가
아쉬운 듯 초초한 듯
그렇게 긴 밤을 보냈다
오지 않을 것 같던 네가
밤새 비를 타고 왔다는 걸
낭창한 바람과 햇살을 만나고서 알았다
나는 새색시처럼 웃다가
괜히 쑥스러웠다
내 맘을 들킨 거 같아서
여름이 좋다
이정원
땡볕이 비추는 여름날이 돌아왔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선풍기 바람이 그리워지는 날
시원한 물냉면이 생각나는 날이
기어이 돌아왔다
야들야들한 면을 삶아 찬물에 헹구고
냉면 그릇에 한 아름 담아
싱싱한 생채소를 곁들어 후루룩 먹으면
감칠맛이 맴돌 지경인데
버무린 양념장이
진하고 매콤 알싸한 맛을 더해
입맛을 돋운다
시원한 열무김치와
심심한 겉절이를 담가
장독대에 묵혀놓고
하나씩 꺼내먹는 별미
여름이 참 좋다
한적하고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
따사로운 햇볕과 연인이 되련다
여름
이정은
계곡을 찾고 산을 헤매고
들로 강으로 바다를 찾게 하더니만
그렇게 불볕 더월을
작열하게
땀방울 송송 맺히게 하고
여름날의 갖가지 추억 만들어 주고
흔적 없이 어쩌면
그렇게 사라져 가버리누
어느 땐 너를 찾고
어느 땐 너를 버리고픈 마음에
싫어서 밀치던 날들이
어느 순간
너의 자취가 벌써 저만치 사라져
가 있음을 느낀다
난 느껴지누나
그렇게 그 열정을 불태우던 너를 뒤도 보지 않고
미련 없이 떠나가는 너를 잡지 못하고
떠나감을 느낀다
여름이면
이정은
난 니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혼자 다닐 때도 넌 내 곁에 있어야 해
언제나 난 네가 필요해
하늘하늘 춤추고 내게 기쁨을 주고 있기에
너의 그 친절함은 나와 하기 때문에 너는 춤을 추고
나는 내 얼굴을 너에게 맡기지
내 손을 빌어서
너의 모습은 다양하게 여름을 나려고
팔색조같이 여러 모습으로 여름을 함께하지
너와 나는 여름이면 없어서는 안 될 것이야
여름 이후
이종형
남아 있는 생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뱉어내는 말보다 주워 삼키는 말들이 많아졌다
삶이 낡았다는 생각이 들자 내 몸에 새겨진 흉터가
몇 개인지 세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반성할 기억의 목록이었다
뼈에 든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두려웠고
계절이 몇 차례 지나도록 아직 이겨내지 못했다
사소한 서러움 같은 것이 자꾸 눈에 밟히지만
아무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바싹 여윈
등뼈가 아름다웠던 사랑이 떠난
여름 이후
지난여름, 2013
이종화
불안하게 부풀던 이름이여,
새벽부터 찾아온 채권자,
둔감해진 나의 가을은 어느날
피의자가 될지 모르리, 퇴출된
어느 별이 그랬듯이..
시집처럼, 아무데나 펼쳐지던
한 장짜리 나날들,
올해도 사랑은 전문가의 평가와
지도가 필요했다, 약자를 괴롭히면
안 되는 이유에도 다시 긴 설명이...
세상은 역시 뜨거워지며 침침해진다
예상대로 길어진 평균수명과
그만큼 길어진 늙은이들의 한숨 소리,
축배의 노래는 저 멀리 지나가고
오래된 시름소리와 다시 술잔을 나눈다
친구여, 새로운 그 계획이 이 계절에
어울리겠는가..
여치의 울음은 더 우울해지고
잠자리의 하늘은 작아져 가고
점점 길어진 나비들의 휴식 시간,
올해도 꿀을 털린 벌들의 아우성과
매미는 소음으로 다시 분류됐다
이제 각자 또 다른 계절로
떠나야 할 시간, 주고 받은 시간은
생각대로 정산해 가며
시인들도 자기 시를 해명해야 하는
이미 추상화된 세상으로
여름 별자리
이준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산음리에 가서
별을 보았다.
감자밭에서 돌아온 어머니 호미 같은
초승달이 서쪽 산자락으로 지고
감자꽃 같은 별들이 돋아났다
어미곰과 아기곰이 뒹굴며 노는 큰곰 작은곰 별자리
은하수 물방울을 퉁기며 솟구치는 돌고래 별자리
직녀가 거문고를 뜯고 있는 거문고 별자리
나는 어렸을 때 배웠던 별자리 이름들을 다시 불러보았다
그 이름에 대답하듯 별들이 온 하늘 가득
뽕나무 오디 열매처럼 다닥다닥 열렸다.
별똥별 하나 저 멀리 밤나무 숲으로 떨어졌다
저 별똥별은 가을에 밤 아람으로 여물어
밤송이 같은 아이들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리라
아내는 세상에나! 별이 다 없어진 줄 알았는데
여기 다 모여 있었네 하면서 별처럼 눈을 빤짝거렸다
그리고 옥수수를 따서 담은 바구니를 머리에 이듯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서 있었다
세상에나!
우리는 낮이나 밤이나 아름다운 별 바구니를
머리에 이고 살고 있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밤 우리는 외양간이 딸린 민박집 방에서
별들과 하룻밤을 보냈다.
송아지를 낳은 지 얼마 안 되는 어미 소는
가끔 깨어 송아지를 혀로 핥아주고
그때마다 별들은 잠을 깨어
딸랑딸랑 워낭 소리를 내곤 했다
장마
이지언
검은 먹구름은 떼를 지어
우르르 몰려와 도시를 점령했다
벌써 며칠 째 밤이고 낮이고
되풀이되는 집중호우.
죄 많은 도시의 죄를 씻기 위해
슬픔 많은 도시의 슬픔을 거두기 위해
한여름의 빗줄기로 세상에 내려와
진흙빛으로 갈아입고
처참하게 생명을 잃을 줄 알면서
이 땅에 내려와 자신을 내동댕이친다
슬픔의 잔치는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는다
낮은 음을 자랑하는 첼로의 독주곡처럼
너는 한낮에 한밤의 우울함을 연주하는
불행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기쁨보다 눈물을 사랑하는 음율의 시인이다
지난여름
이진희
함께 햇볕에 그을리고 그늘에서 함께
다정하게 포옹하고 깊은 입맞춤을 나눴다 한들
네가 겪은 지난여름과
내가 간직한 지난여름은 달라
알 수 없는 모양으로 피어오른 구름을
동시에 보고도
너는 한없이 노곤한 낮잠을 희망했고
나는 모두 떠나버린 쓸쓸한 광장을 떠올렸다는 거
서로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깍지 끼고 걷는 동안에도
서로에게 말하기 미묘한 그 무언가가 있다는 거
공들여 준비한 선물을 쓰레기통에 처넣었거나
깊은 밤 예리한 칼날을 손목에 대보았던
서로에게 바쳐져서는 안 되는 그런
이제는 식은 재처럼 부드러워진 사소한 의례들
전부 얘기해줬으면 좋겠어
빠짐없이 얘기하고 나서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해줬으면
그대에게 띄우는 여름 편지
이채
사르르 눈 감으면
파도 소리 들리는 계절
푸른 가슴을 열면
꿈 많던 시절의 바다가 있고
철없던 시절의 그대와 내가 있지요
여름이 오면 왠지 들뜨는 기분
바다와 그 바다의 추억이 그리워서일까요
곱게 접어둔 마음 한 자락으로 스치는
만나고 싶은 얼굴, 보고 싶은 얼굴들
물안개 자욱한 옛길을 걸어옵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노래
하얀 물보라의 여운이 가슴을 적셔요
돌아가고 싶은 동화의 나라
그 나라엔 아직도 파랑새가 살고 있지요
진주 같은 눈망울에 구름 같은 미소로
수평선처럼 아득한 세월에도
갈매기 날으는 또 하나의 꿈을 그리며
마주 앉은 동심으로 모래성을 쌓고 싶어요
쌓다가 부수고 또 쌓으며
서산 노을빛이 해변에 물들면
우리 서로 모래를 털어주기로 해요
그해 여름의 그녀
이채
그해 여름의 그녀는
쪽빛 하늘을 닮았네
하얀 구름같은 미소에
구슬 목걸이가 썩 잘 어울리던
첫눈에 반한 건 아니지만
초여름 산들바람에
흩날리던 그녀의 긴머리가
내 가슴까지 불었네
그해 여름의 그녀에게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네
그녀와의 사랑은
나 혼자만의 사유지만
그녀도 모르는 사랑을
여름 내내 뜨겁도록 했었네
그 후로
7월의 하늘엔 늘 그녀가 서 있네
당신과 나의 여름이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이채
오늘의 땀방울이 희망의 강물로 흘러
꿈꾸는 강어귀에 닿을 수 있었으면
하얀 돛단배에 그 꿈을 싣고
노 젖은 기쁨으로 매일을 살 수 있었으면
당신과 나에겐 기다림이 있지요
기다림이 상처가 되고 눈물이 되어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늘 기다리며 살아가지요
사랑하는 사람의 전화를 기다리듯
약속처럼 그 기다림을 만날 수 있었으면
친구를 기다리는 정거장에서 친구를 만나고
연인을 기다리는 찻집에서 연인을 만나듯
꿈을 기다리는 삶에서 꿈을 만날 수 있었으면
그러나 비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구름과 새, 바람처럼
가벼움의 자유를 깨달을 수 있었으면
이 여름엔 당신과 나
욕심의 무게가 더위를 보태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여름을 사랑합니다
이채
겨울은 덥지 않아서 좋고
여름은 춥지 않아서 좋다는
넉넉한 당신의 마음은
뿌리 깊은 느티나무를 닮았습니다
더위를 이기는 열매처럼
추위를 이기는 꽃씨처럼
꿋꿋한 당신의 모습은
곧고 정직한 소나무를 닮았습니다
그런 당신의 그늘이 편해서
나는 지친 날개 펴고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
가슴이 작은 한 마리 여름새랍니다
종일 당신의 나뭇가지에 앉아
기쁨의 목소리로
행복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당신은 어느 하늘의 천사인가요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열매가
여름 햇살에 익어가고 있을 때
이 계절의 무더위도 신의 축복이라며
감사히 견디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여름 바다, 그대와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이채
못 견디게 뜨거운 태양이
지칠대로 지쳐버리면
푸르도록 하얗게 별들이 쏟아지는
여름 바다, 그대와 함께 떠나고 싶습니다
바다는 벌써 그대 가슴으로 열리고
한겹 또 한겹 벗겨지는 인어들의 몸짓인가
은비늘의 살결이 넘실대는 파도
하얀 선글라스 너머
그대 까만 눈동자도 파도처럼 출렁이겠죠
한여름 밤, 타박타박 모닥불 타들어 가는 소리
깊어가는 낭만은 차라리 황홀일까
아, 아
나의 가장 차가운 날과
그대의 가장 무거운 날들이
환상의 해변에서 그렇게 잠이 들겠죠
몇번의 여름이 지나고, 그 후
어느 여름날 아침 햇살이
고혹한 그대 숨결로 떠오를 때
그대 가슴이 열린 그 바다를 기억하겠습니다
여름에 떠나간 사랑
이채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들은 여름보다
먼저 바다를 떠나가네
사람들이 떠나간 바다에
남겨진 모래알 같은 사랑의 부스러기
밀물과 썰물에 쓸리고 쓸려
하얀 파도에 거품처럼 사라지네
언제나 그렇듯이
사랑이 떠날 때는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보다 빨리 떠나가네
사랑이 떠나간
한때의 여름이 그러했네
흔적도 없이 휩쓸린
한때의 사랑이 그러했네
여름에 오는 눈
이채
어느 겨울날
나폴나폴 하얀 눈이
초장 무대 삼아 내리던 날
나비처럼 훨훨 날고 싶었지요
단초롭게 화장하고
양 어깨에 날개 달고
이 풍진 세상에 천사처럼 날고 싶었지요
검은 장막 다 걷어 내고
하얀 눈이 밭이 되던 온 세상에
희망의 날갯짓을 하며
밤이 새도록 향연을 하고 싶었지요
어느 여름날
겨울 문 열리는 그날까지
여름에 오는 눈이 되어
그대 삼복더위 거두는
여름 천사가 되렵니다
여름에 참 아름다운 당신
이채
마음은 바다를 향해도
몸은 고된 하루에 지쳐 있을
나의 이웃, 나의 벗
내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하얀 파도의 노래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나보다 더 소중한 그 누구를 위해
뜨거운 햇살을 온몸으로 담아내며
긴 긴 하루 저물도록 걸어가는
여름에 참 아름다운 당신에게
시원한 바람의 노래를 불러주고 싶습니다
누구나 마음의 고향이 있지요
정겨운 그 고향 언덕에
늘 그리움의 집 한 채 짓고 사는 우리
그 언덕 푸른 숲 나뭇잎은 흔들리고
새소리 바람 소리 가슴을 적실 때
어디에 가면
세상에 없는 꿈이 거기 있을까요
비 개인 아침 숲
박하 내음 같은 당신이여
홀로 조용히 시간을 더듬어 보면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독한 일입니다
하늘은 결코 기적을 주지 않고
인내에 응답하는 믿음을 약속할 뿐
숭고한 노동의 의미와
그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여름에 참 아름다운 당신
당신은 오늘의 빛이고 내일의 희망입니다
고마운 여름
이해인
푸른 잎으로
그늘을 만들어 주는 나무들이
새삼 고마워서
나무야 나무야
친구를 부르듯이
정답게 불러 봅니다
나의 땀을 식혀주는
한 줄기 바람이
새삼 고마워서
바람아 바람아
노래를 부르듯이 정답게
불러 봅니다
장마 뒤에
쨍쨍 내리쬐는 햇볕이
새삼 고마워서
해님해님 하느님을 부르듯이
반갑게 불러 봅니다
해 아래에
해에 익은 둥근 수박 여럿이 나누어
먹으며 크게 넓게 둥글게
열리는 마음
지구 모양이 수박을
먹을 때마다
지구 가족
우리 가족
하나 되는 꿈을 꾸는
고마운 여름
바다 일기
이해인
늘 푸르게 살라 한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위를 바라보며
내 약한 마음을 든든하게
그리고
파도처럼 출렁이는 마음
갈매기처럼 춤추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바다에서 쓴 편지
이해인
짜디짠 소금물로
내 안에 출렁이는
나의 하느님
오늘은 바다에 누워
푸르디 푸른 교향곡을
들려주시는 하느님
당신을 보면
내가 살고 싶습니다
당신을 보면
내가 죽고 싶습니다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당신을 맛보게 하는 일이
하도 어려워
살아갈수록 나의 기도는
소금 맛을 잃어갑니다
필요할 때만 찾아 쓰고
이내 잊어버리는
찬장 속의 소금쯤으로나
당신을 생각하는
많은 이들 사이에서
나의 노래는 종종 희망을 잃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제발
안 보이는 깊은 곳으로만
가라앉아 계시지 말고
더욱 짜디짠
사랑의 바다로 일어서십시오
이 세상을
희망의 소금물로 출렁이십시오
수국을 보며
이해인
기도가 잘 안 되는
여름 오후
수국이 가득한 꽃밭에서
더위를 식히네
꽃잎마다
하늘이 보이고
구름이 흐르고
잎새마다
물 흐르는 소리
각박한 세상에도
서로 가까이 손 내밀며
원을 이루어 하나 되는 꽃
혼자서 여름을 앓던
내 안에도 오늘은
푸르디푸른
한 다발의 희망이 피네
수국처럼 둥근 웃음
내 이웃들의 웃음이
꽃 무더기로 쏟아지네
여름 노래
이해인
엄마의 무릎을 베고
스르르 잠이 드는
여름 한낮
온 세상이
내 것인 양
행복합니다
꿈에서도
엄마와 둘이서
바닷가를 거닐고
조가비를 줍다가
문득 잠이 깨니
엄마의 무릎은 아직도
넓고 푸른 바다입니다
여름이 오면
이해인
움직이지 않아도 태양이
우리를 못 견디게 만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이가 되자고 했지?
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한 그루 나무가 되자고 했지?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마음을 흔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탁 트인 희망과 용서로
매일을 출렁이는 작은 바다가 되자고 했지?
여름을 좋아해서
여름을 닮아가는 나의 초록빛 친구야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너는 알고 있구나
너의 싱싱한 기쁨으로 나를 더욱 살고 싶게 만드는
그윽한 눈빛의 고마운 친구야
친구야 무더운 여름이 오면
이해인
움직이지 않아도
태양이 우리를 못견디게 만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는 서로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기쁨으로 타오르는
작은 햇덩이가 되자고 했지
산에 오르지 않아도
신록의 숲이 마음에 들어차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묵묵히 기도하며
이웃에게 그늘을 드리워주는
한 그루 나무가 되자고 했지
바다에 나가지 않아도
파도 소리가 마음을 흔드는
여름이 오면 친구야
우리도 탁 트인 희망과 용서로
매일을 출렁이는 작은 바다가
되자고 했지
여름을 좋아해서 여름을 닮아가는
나의 초록빛 친구야
멀리 떠나지 않고서도 삶을 즐기는 법을
너는 알고 있구나
너의 싱싱한 기쁨으로
나를 더욱 살고 싶게 만드는
그윽한 눈빛의 고마운 친구야
그해 여름 풀밭 길에는
이향아
그해 여름 울울하던 풀밭 길에는
짚신벌레, 반딧불, 소금쟁이 살았다
한더위에 새끼 치던
나의 곤충들
심란스런 잔걱정도 무성했지만
괭이밥, 시계꽃, 참비름 찾아
취한 다리 휘청대던
꿈길 몇십 리
먹으면 몽롱히 눈이 감기고
죽어도 한 사흘뿐
아주 죽지는 않는
풀밭에는 숨어 피는
아편꽃이 있었다
여름 개나리 가지
이향아
저녁밥 먹고 거무레한 동네 가로수 아래를 어정거리다가
하릴없이 뻗어서 너울거리는 개나리 가지를 보았다
꿈에도 꽃나무 가지인 줄 몰랐다
그 연한 속잎을 무심히, 맹세코 무심히 따서 으깼다
이른 봄 시린 줄 모르는 젊은 이빨로 얼음을 깨고
현기증 나는 샛노란 속을 하늘하늘 외쳤었지
이제 더는 피울 꽃이 없어서
한여름 초록 기운으로 후생이나 기약하는데
길가까지 뻗어서 너울거려도
누구 하나 눈여겨보지 않는 개나리 가지
그의 무료를 겨우 속잎이나 으깨면서 돌아다본다
새끼들 모두 키워 짝맞추어 보내고
나 또한 모처럼 무심을 으깨는 초저녁
목숨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이제는 허무를 말하려는가
한여름 개나리 가지
다른 무엇을 도모할 것인가
철 지난 개나리 가지
여름을 보내며
이향아
절정은 지나갔다
8월은 이제 만만한 풋내기가 아니다
말복을 향해 불을 뿜던 칸나도
제풀에 지쳐 목이 잠기고
감출 것도 머뭇거릴 것도 없는
그렇다고 으스대지도 않는
이미 판가름이 난 굿판
발표가 남았어도 조바심하지 않는다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을 것
두근거림도 가라앉히고
평온하게,
아주 평온하게 익어가는 대낮
햇발은 느긋하게 그림자를 늘인다
그래도 매미는 죽을힘을 다해
최후의 공연을 부르짖는다
여름 저녁
이향아
칠월 저녁나절
길거리로 나도는 바람
타이르듯 타일러 달래듯
가로수 잔등 쓰다듬고 내려오는
그 바람 마주치듯
만나라도 봤으면
장대같이 여윈 그림자
훠이훠이 끌고서
모처럼 큰 맘 먹고 돌아온 고향
우리 동네
묵은 장터께로
흥정이라도 붙이려는 듯
건달패처럼 일없이
기웃거리는 저녁
소식이나 들을까
팔짱 끼고 어슬어슬
바람 쐬러 나온 저녁
넝쿨 꿈을 꾸던 여름
이혜미
떨어진 능소화를 주워 눈에 부비니
원하던 빛 속이다
여름 꿈을 꾸고 물속을 더듬으면
너르게 펼쳐지는 빛의 내부
잠은 꿈의 넝쿨로 뒤덮여 형체를 잊은
오래된 성곽 같지
여름을 뒤집어 꿰맨 꽃
주홍을 내어주고 안팎을 바꾸면
땅속에 허리를 담근 채 다른 자세를 꿈꾸는
물의 잠시(暫時)
꽃은 물이 색을 빌려 꾸는 꿈
기묘한 돌기를 내뿜으며
옛 꽃들에 둘러싸인 검은 돌벽 위로
무수히 가지를 뻗는 여름의 넝쿨
눈 없는 잎사귀들처럼
뜨거운 꿈의 벽을 기어오르면
눈동자 위로 쏟아져 내리는
물의 손가락들
입술을 뒤집고 숨을 참으니
원하던 꿈속, 물 꿈속
여름의 차
이혜민
그대를 기다리는 밤 내내
사연은 조금 늦게 다가와
빈방마다 조용한 기다림이 내렸다
섬돌 밑 귀뚜라미는 계절을 잊은 채
잠들지 못했다
이 때 내 떨리는 온몸을 일으켜
차를 우린다
몇 몇 차이파리는 길게 풀어져
차관을 채운다
그저 부질없는 세월만 탓하기도 하고
내 지나가는 생각도 내려놓고
여름의 차
그 앞에서 흐느끼는 심사
출렁이는 파도는 이내 잦아들고
에둘러 떠나는 울음보
그대 가슴 속에 내려놓고 싶은 밤
그해 여름 울었다
이화은
의사는 눈물샘이 말랐다는데
예약도 없이 한밤중에 자명종이 운다
불길한 징조다
채 여물지 않은 벼들이
병든 여자처럼 논바닥에 드러누웠다
낙과가 지구를 덮었다
국가가 재난을 선포했다
물고기들이 떼로 죽었다
모기가 사람을 물지 못한다
가로수 그늘이 바싹 말라 바스라진다
먼 나라 바다가 불타고 있었다
폭염이 내 눈물 탓을 한다
아니야 아니야
국가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지구에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는다
무서워서 울었다 외로워서 펑펑 울었다
착해지지 않으려고 조금 더 울었다
죽은 꽃을 버렸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잊은 사람을 다시 잊었다
여름날의 추억
이효녕
팽팽히 조여진 비명을 노래하는
매미 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장마로 떠내려간 나무 한 그루
그것이 슬픔인지 알았습니다
나뭇잎에 걸린 수많은 말들
만장(輓章)처럼 돋아난 나뭇잎 보고
산 위에 앉아 한 백년 살아갈
여름날 추억이 아름다울 거라고 여기다가
장맛비 잠깐 개인 사이 울던 매미
높은 허공에서 울어줄 추억만 남겼지요
푸른 나무 아래 무성히 돋아난 풀잎
바람결에 멀리 흘러간 시간까지
무엇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기에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그늘이 그리워
추억을 허공의 바람결로 남긴 다는 것
올 여름 추억이 기나 긴 장맛비로 젖었다는 것
그 뒤에 찾아온 비애로 하여
매미 울음소리가 부러진 가지를 슬퍼한다는 것
비를 많이 맞은 추억은 갈 길을 잃어
무아(無我)의 시간에서 떠돌까요
여름 따라
임남규
여름이 발목을 잡아끌고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
아!
그리워했던 시퍼런 바닷가로,
뼛속까지 시원하게 해 주는
계곡과 숲으로
가자
그려, 따라가는 거야
그쯤에서 발목을 놓아주면
심신의 무더위를 씻어내고
초가을 저쯤에서나 나와야지
늦여름
임동윤
하룻밤, 구두끈 풀고 쉬어가라고
목쉰 대청마루가 흔들한들 붙잡아댔다
등고선마저 지워진 무늬의 바닥
겹겹의 세월을 껴안고 비바람이 들이쳤다
우우 바람이 거친 팔을 뻗어오고
볏짚으로 엮은 흙벽이 가슴뼈를 드러냈다
떠난 사람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들이 퍼 올리던 우물물은 잦아들고
뚫린 지붕 위로 낮달이 머물다 떠난 자리
죽창처럼 빗줄기가 내리 꽂히고 있었다
다시 우지끈 쏟아지는 천둥과 번개
직립의 나무들이 허리를 꺾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빗줄기 속으로 몸을 섞고 있었다
거미줄과 빈 풍경이 간단없이 찢기고
쑥부쟁이도 익모초도 흙탕물에 몸 묻은 마당
그리움은 발치에 묻어두는 법이라고
장지문 꼭꼭 닫아걸어도 바람은 피리가 되어
빗물 잠긴 화덕을 끼고 밤새 돌았다
사방에서 다가드는 풀, 나무, 꽃, 바위...
간당간당 모가지를 빼들고 일제히 울어댔다
빈집이 화들짝 갈비뼈를 쏟아내고 있었다
어떤 여름
임두고
화려한 개혁의 문민시대
열대야의 여름조차
사정의 서슬에 주눅이 들었는가
믿기지 않는 이상저온 속
비만 무성한데
막연한 기대와 대리충족감에 젖은 채
정작 무엇하나 변할 게 없는 나는
부끄러운 존재인가
슬픈 존재인가
실명의 시대
익명의 검은 돈들이
갈팡질팡 양심의 무게를 저울질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요지경
"잘난 사람은 잘난 대로 살고
못난 사람은 못난 대로 산다"는
소시민의 오도송(悟道頌) 같은 노래의
유행은 그치질 않는다
정면이 위험하던 시대는 설화로 남고
오히려 정면이 안전하다는 소문이 태연스럽지만
아직도 나는 정면이 두렵기는 마찬가지
176의 내 키는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점점 작아지고
작아질수록 안전감을 확인하는
내 자신이 눈물겹다
공개되는 재산은 모두
억, 억, 억
받아쥔 내 월급명세서의
고통 분담의 몫이 터무니없이 무거워지고
단지 가을이 오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공개할 재산도, 실명으로 전환할 통장도 없이
이 여름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있는 나는
부끄러운 존재인가
슬픈 존재인가
어느 여름 일기
임보
절름발이 검둥이가 수캉아지 다섯 마리를 낳고
백목련이 푸른 잎들 사이에 시절도 모르고
둬 송이 꽃을 뽑아 올리다 말았다
누가 낮술을 하자고 불러내지나 않을가
기다리다
왕유(王維)의 시를 둬 편 더듬거리며 읽었다
구름은 떼로들 몰려 북한산 골짜기를
부지런히 넘어가고
아이들은 종일 시시덕거리며 수영장을
오르내리고 있다
금방 터질 것 같은 예감의 세상은
아직 그대로 있다
여름(夏) 단상(斷想)
임석순
한여름
찌다가 덥다가
부채로 더위를 식히려
부채질하는 게 아니라
겉 폼 잡으려 한다.
여름이 무섭다
기후변화, 인간의 욕심이 불러오는
장마, 태풍, 폭염 두려워 무서워
겉 폼 잡으려 한다
여름이 무섭다
한여름
여름냉면이 좋다
하늘이 흐려 시원한 비가 와서 좋다
맑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더욱 좋다
겉멋을 잡으려 한다
여름이 무섭다
봄 곁의 여름
임송자
곁이란
가만히 이어져서 뜨겁게 그렇게 하나가 되는 것인가 봐
아버지 곁의 어머니도 그랬던가 봐
봄 곁의 여름처럼
슬며시 기대어 조용히 우거졌나 봐
이른 봄 곁을 보내고
여름내 그 무덤가 잡풀이며 칡뿌리를 캐내는 삼복의 어머니가
고요히 타 들어 갈 것만 같아
오래 된 내 곁 하나 멀리멀리 흘러갈 것만 같아
웅덩이처럼 그 곁에 고여있는데
뙤약볕에 시들어진 잎사귀마냥 고단하게 저물어가는
지극한 삶 한 포기
"느그 아부지가 옛날에 느그 아부지가" 할 때는
아직도 숲처럼 우거지나 봐
눈부신 일인지 못 볼 일인지
나는 서툰 용접공처럼 눈이 부셔서
눈이 아파서
성난 여름
임수현
아침을 지저귀는
새들의 어깨 위에
뽀얀 안개 내려앉고
어젯밤 읽다 잠든
책장은 펼쳐진 채 밤을 지새웠다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날 때
산도의 온도가 이 정도였을까
등 뒤로 내리는 따사로움이
어머니 등에 볼을 댄 느낌으로
몸은 노글노글 익어만 간다
동으로 난 창문 틈 사이로
햇살이 밀고 들어오는 이른 아침
열기를 잔뜩 머금은 여름은
날개 달고 대지를 나르고
바람은 숨죽인 채 멍하니 서 있다
애쓰고 난 하루해가
갈참나무 사이로 등을 돌릴 때
감빛 가로등 불빛 발등 아래 떨어지고
그 빛에 밤마저 뜨거울까
조심스럽게 창문 커튼을 내려두고
성난 여름 내 앞을 지날 때
행여 눈이라도 마주칠까
겁먹은 눈동자 허공에 둔 채
나무 기둥에 납작 달라붙은 매미처럼
마디마디 끊어가며 울음 울어본다
여름 해변
임수현
개미가 발등에서 떨어진다
착지는 불안했지만 금세 길을 찾아 어딘가로 향한다
개미의 따끔한 충고가 모기의 말투여서 알아듣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충고를 무시했다기보다
못 알아듣는 편이 나았다
비둘기를 닭이라고 부르며 아이가 쫓아간다
저건 비둘기야 닭은 저렇게 안 생겼어 말해도
닭닭닭 손짓하며 따라가자 비둘기는 날기 시작한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없을 때가 많아서
무슨 말이든 괜찮았을까?
죽은 게 분명해 보이려면 숨을 참으면 된다
내가 악몽 속에서 배운 것
검은 벌레들이 기어와 눈알을 파먹어도
눈 하나 깜짝 않는다
물고기는 눈이 없다는 것을 잊고 헤엄친다
죽었다는 걸 잊고 살아있다
여긴 발등이야 말해도 개미는 벼랑 끝이라고 여긴다
그게 좋았니? 그래서 털어내려고 발버둥 쳤니? 벤치는 충고했지만
무시했다기보다 무심한 쪽이니까
나의 발등과 무관하게 누군가는 뛰어내린다
신발을 벗어두면 상징이 된다
개미의 문제에 대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검정 심장 검정 우산 검정 눈물
검정을 위한 기도는 많이 해 봤다 다신 울지 마!
같은 말은 안 한다
아이는 닭이 날아갔다며 울다가도 금방 웃는다
해변에는 비둘기들이 많다
그 느낌 알아가고 있으니까
비둘기는 하늘을 포기하고 땅에 내려와 산다
우리는 평화롭게 해변을 거닐다
문득 바비큐 통에 돌아가는 닭들을 본다 꼬챙이에 꽂혀
여름 편지
임영석
아침부터 소나기가 오더라
그래 난 누가 또 벼락 맞아 죽은 줄만 알았다
벼락 맞아 죽은 초상집 아니고서야
저런 소낙비 같은 눈물을 흘릴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사는 일이 힘들수록 눈물 흘릴 일이 많겠지만
채송화를 보아라 그 작은 씨앗 하나
다음 해(年) 그 자리에 또 꽃피우기 위하여
얼마나 치열하게 꽃피워 씨를 맺고 있는지
텅 빈 것은 가슴을 비워 울림을 주고
가득한 것은 가슴을 채워 아득함을 주고 있다
아침부터 소나기가 오더라
빈 산 넘어 누가 또 이승을 하직한 줄만 알았다
살 만큼 살다가 떠나가는 세상살이
아직 하직 인사를 더 건네야 하는 사람이 있나 보다
땅에 솟구쳐 오르는 빗줄기가 끈처럼 묶여
강물을 이루어 흐른다 그 강물이
세상의 인연을 묶어 떠나가는 듯하다
검붉은 황토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물결만큼
울컥울컥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만 같다
세상의 끈을 묶어 흐르는 강물 위에
여름
임영준
1
작열하는 태양이
축복으로 느껴진다면
만끽할 수 있다
세찬 장대비 속
환희를 안다면
누릴 자격이 있다
노출이 자랑스럽고
자연에 당당하다면
깊게 빠진 것이다
풀밭에 누워
별들과
어우러질 수 있다면
즐길 줄 아는 청춘이다
2
홀로 꾸리기엔
세상이 너무 뜨겁네
신록은 왕성한데
걸음은 더욱 무겁네
모양을 갖추고 싶지만
청춘이 눈앞을 가리네
훌훌 털고 떠나라고
자꾸 꼬드기고 부추기네
여름, 그리움
임영준
뒷동산에 숨어 있는 하늬바람이
개여울을 엿보고 있었어
말벌에 쫓기는 꾸러기들이
깔깔거리며 텀벙거렸지
새참 이고 나르는 아낙들도
청매미 노래하는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입을 모았어
땀방울 스며드는 논두렁에선
잠자리도 함께 익어갔지
여름 단상
임영준
덩실거리는 어깨를
눌러 앉히는 것만 해도
할 일을 얼추 다 하는 것 아닌가
또 한 고개를 넘어가서도
황홀한 축제의 순간에 함께
뒹굴어 보았노라 할 수 있을까
진심으로 땡볕에 감사하고
순일하게 호우에 고개 숙여야
가열 찬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 터인데
여름 바다에서
임영준
솔직한 알몸이 아니라면
함부로 모래를 더듬지 마라
도발을 꿈꾸지 않는다면
섣불리 파도에 엉키지 마라
수평선에 걸린 노을이
별들을 깨울 때까지
누구든 가뿐히 떠날 수 없다
모자란 열정이 아쉽구나
유한한 삶이 우습구나
생생한 추억을 부르는
섬의 노래도
한평생 맴돌고 있을 것을
여름 바다의 사랑
임영준
술렁이는 파도 소리가
가슴을 헤집는가요
해변을 잠재운 별들은
눈물 속에 스며드나요
가까운 듯 먼 섬에
숨어있는 사랑 노래가
우리의 속삭임이 아닌가요
언제 어디서나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백사장인데
함께 찍었던 발자국인데
그 바다에 잔뜩 남겨놓은
우리의 약속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여름 사냥
임영준
그대 이 뜨거운 태양 아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일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함께 사냥을 떠나보는 것이 어떤가
먼저 파릇한 얼굴과 단정한 매무새 따위는
가까운 이들에게 대충 미루어두고
심산이나 욕망 따위는 낯 두꺼운 자들에게 떠넘기고
청량한 기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으니
팍팍한 가슴에 여유 일발 장전하고
흐밋한 머리에 본능의 띠를 두르고
불만 가득한 뱃속엔 수긍의 배짱을 채우고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사냥을 떠나보자
눈에 띄는 원두막이 보인다면
함께 누워 별을 헤던 친구들을 잡아보자
가차없는 땡볕을 원망하지 말고
으늑한 계곡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열망에 몸부림치던 시절을 끝까지 뒤쫓아 잡아채보자
한껏 졸아붙었던 가슴을 망망대해 해변으로 실어가
감질나던 설레임과 아슬한 추억만 남기고
겨냥할 것도 없이 연발로 후련하게 쏘아버리자
더 이상 늘어져 일그러지지 않게
여름창공에 산산이 날려 버리자
여름 사랑
임영준
가뿐히 돌아서면
지워지리라 생각했습니다
밤새 술렁이던 파도와
비릿한 바람처럼
또 만날 수 있겠지 하고
가벼이 넘겨버렸습니다
하지만 파고드는 모래알처럼
밤바다를 적시는 수많은 별처럼
두고두고 헤집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룻밤의 열정이 일생을 다그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여름 서약
임영준
녹아들어 가야지
땡볕도
소나기도
기대에 넘쳐 있으니
되살려 놓아야지
별들의 합창
해맑던
추억의 순간까지
열망의 길도
되새기라
재촉하고 있으니
비집고 들어가야지
여름 소묘
임영준
하늘엔 눈부신 미소
바다 가득
일렁이는 맥박
철없는 갈매기들은
마냥 너울거리고
모래알마다 새겨진
수많은 사연은
투명한 회상에
깊숙이 빠져
다시 한번 싱그러운
폭발을 꿈꾼다
여름 안에서
임영준
원두막에 걸린 실바람도
함께 노닐고 싶어 했지
매미들의 합창에
새털구름도
한참을 머물다 갔어
뙤약볕에
채송화 봉숭아 분꽃
삼동네 아이들도
활활 타올랐어
깔깔거리던 개울이
평생을 꿰뚫고 흐르다
넘실거리는 바다가 되어버렸어
여름 앞에서
임영준
명주바람
싱그러운 향기로
응답하는가
간절한 계곡에
신록 파고드네
열망이 넘쳐흘러
곰곰 다져주는지
보다 눈부시게
더 무구하게
무르익기를
여름 여정
임영준
아이야
땡볕 아래 번듯이
익을 만큼 익었느냐
사랑아
후련한 빗발에
나긋하게 젖었느냐
이승아
아픔을 잠시 닫고
맑은 꿈을 풀어놓았느냐
여름 예찬
임영준
불볕이 아니라면
어이 바람을 품으랴
달큼한 밤이라
별이 더욱 가깝구나
싱그러운 녹음방초에
그늘도 맛깔지다
아이야
더욱 눈부시구나
계곡에 들면 물이 되고
바다에선 노래가 되는구나
알몸으로 어디든
당당히 스며들어도 되겠다
여름을 팝니다
임영준
그대
넉넉한 이 여름을
얼마나 쓰고 있나요
넘실거리는 파도를
원 없이 품고 왔나요
다소곳한 계곡의 젖내를
한 아름 짊어지고 왔나요
돌아오지 않을 청춘인데
하나라도 더 건져
평생 함께 가야지요
여름의 법칙
임영준
축제가 한창
절정인데
초록이 넘쳐
극락이 되었는데
사위어 가는
한갓 욕망 쯤이야
여름의 불씨
임영준
다시 한번 되살려보자
이글거리는 불볕 속에서
풀죽은 허깨비들도
그나마 숨 돌릴 수 있고
지레 꺾어지더라도
마음껏 활개쳐 볼 수 있는
얼룩도 별 대수롭지 않던
그 불씨를
다시 한번 되살려보자
여름의 씨앗
임영준
서늘한 바람이
헤아리고 있지 않은가
벌거벗고 되새기던 가슴이
가지를 뻗고 있지 않은가
백사장에서
꿈꾸는 섬에서
아련한 계곡에서
함께 새겼던 날들이
그리움의 씨앗이 되지 않는가
넘치는 사랑 노래가
청춘의 열매를 맺고 있지 않은가
여름의 전설
임영준
1
가진 것 하나 없어도
푸른 강물을 끼고
초록 능선을 따라
다정한 사람들과
콧노래 흥얼거리면서
생가슴을 주고받았지
이글거리는 태양을
아주 기꺼이 품고
그윽한 계곡으로
타오르는 해변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깨끗한 꿈을 새겼지
별꽃이 만발한 밤하늘은
궁금한 것이 너무나 많아
속삭이는 벌레들
사부작거리는 나무들
잠 못 드는 청춘들 때문에
깊고도 또 깊어졌지
2
어스름
땅거미 고인
오솔길을 넘어
물질로 지샌 아이들이
더위를 품고 달을 꿰어
종일 땡볕에
달아오른 초가에
심지를 돋우고
밤은 절로 휴식이 되고
나른한 날숨이
능선을 따라 흐르면
별들은 말없이
온 누리에 좌르르
쏟아지고
3
빈손의 더벅머리
몇몇이 모여 앉아
울뚝불뚝 실랑이했다
산으로 가자
바다로 가자
차라리
도시의 밤을 지키자
우골탑 따위는
멀리 제쳐두고
물 좋고 때깔 고운
날라리판만 찾았다
한여름 내내
글자 한번 안 보고
손가락 한번
헤아리지 않아도
든든한 밥줄이 생기니
책상머리를
지킬 이유가 없고
신나게 젊음을 퍼붓고
갈 데까지 가보아야
후회도 없고
땡볕에 부푼 정염과
무풍에 빠진 근성일랑
계곡에 묻고
파도에 실어 보내면
절로 풀어지고
엄벙뗑 넘어가도
대충 살아지니
일단 싸지르고 보았다
여름의 초대
임영준
변덕조차 반짝이는
싱싱한 처녀의 계절인데
그대 지금
찡그리고 있는가
땀방울에 흔들리거나
갈증에 몸서리치고 있는가
숨결 듬뿍 열정을 뿜고
바람 끝에 향기를 매달아
초대받은 이들 모두
실컷 품고도 남을 것 같은데
시름아
눈물아
잠시 행장을 풀고
이 매혹에 함께 취해보지 않으련
여름이 다할 때쯤이면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임영준
여름이 다할 때쯤이면
반드시 되짚게 된다
사유의 뜨락에
가장 소중했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숨결을 나누며
앞날을 다듬고
머리카락 올올까지도
참견하고 트집 잡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사랑이었는지
허상이었는지
열정을 다 했는지
상처만 남았는지
흐릿한 기억과 함께
가슴 한켠이 허물어졌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여름 이별
임영준
눈을 감아도
눈을 꼬옥 감아도
푸른 파도의 속삭임을
뿌리칠 수 없습니다
분주히 돌아다니고
은밀하게 숨어들어도
초록 향기의 추억을 도저히
떨칠 수가 없습니다
잠시 나눈 그대의 숨결이
뼛속 깊이 새겨져
오롯한 심혼의 손짓에만
가슴이 두근거리게 됩니다
여름이 시작이다
임영준
약동하는 젊음이
마지막 폭발을 기다리는데
달구어진 포도에
숨 가쁜 소나기가 맞춤 아닌가
괄괄한 땡볕 아래
가분하게 발가벗은 여름 아닌가
삼라가 빛바랜 세월을
밀어내려 애쓰고 있는데
너무들 서두르고 있는 게 아닌가
늘어 붙은 게 아닌가
다가올 공허와 여백에
미리 얼큰한 열침을 맞아보자
산산이 부서졌다가
다시 새로운 틀을 짜보자
여름 이야기
임영준
차디찬 과실 몇 조각으로
더위가 순순히 녹아들었다
햇살 속 새파란 맥박들은
곧 황금물결로 일렁이리라
소나기 몇 번이면 되새기는데
심약한 군상들은 그늘만 찾는가
매미들이 암만 극성스러워도
여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여름 타다
임영준
홀로 꾸리기엔
너무 달아올라 힘겨워
신록은 바람나고
사람들은 예전 같지 않고
아무리 모양을 갖추려 해도
청춘은 묘연한데
훌훌 털고 날아보라고
자꾸 꼬드기고 부추기니
여름휴가
임영준
새콤달콤하지 않으면
찾아가지 마라
뜨뜻미지근하면
되새기지 마라
타오르는 불볕에
아예 녹아버리거나
푸르디푸른 물결에
배어들어 가거나
점령군이 되든
식민지가 되든
꼭 녹초가 되어라
오롯한 가루가 되어라
이 여름엔 비라도
임영준
거기 누구 없소
모서리마다 안개 자욱하고
끈적한 우울뿐이라오
비라도 내리지 않는다면
널부러진 이 여름을 어찌하리오
마음대로 역정을 부리는 것도
만만치 않은 세상인데
반나절 속 시원히 퍼붓곤 하니까
일제히 추스러지곤 합디다
이 무더위에
웬 개나리들까지 만발하여
뒤숭숭한 판에
장대비라도 내리지 않는다면
어찌할 뻔했소
여름꽃 전시회
임재화
광장의 분수대는
시원스레 물줄기를 내뿜고
한여름 다하는 이 날에
광장엔 여름꽃 전시회 아름답고
낭만의 생음악에 호프 한 잔
가는 여름을 축하하누나
맨 가운데 있는
요염한 "칸나"를 둘러싸며
주변엔 형형색색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하다
깨꽃, 샐비어 , 백일홍과
맨드라미 등의 꽃 이름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한쪽에는
남녀 장승들이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주인공 되고
시골의 옛 정취를 담은
소먹이 구유 통에는
여물 대신 예쁜 꽃을 담았습니다
성하(盛夏)
임재화
몹시도 무더운 어느 여름날 오후
한적한 강가 바위 절벽 위
소나무 숲 그늘에 홀로 앉아서
조용히 흐르고 있는
푸른 강물을 바라보면서
지나온 세월을 되새겨 볼 때
저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며
이제는 지나간 세월
미련을 두지 말라고 합니다
여름 계곡
임재화
어젯밤 장맛비가 내렸는데
깊은 계곡 건너편 푸른 솔숲에
오롯이 신령스러운 기운이 가득합니다
먼 산 능선 위 하얀 뭉게구름이 일 때
깎아지른 바위 절벽 틈새의 소나무에서
맑은 기운이 물안개 피어오르듯 합니다
벼랑 바위 아래 철철 흐르는 계곡물
버들치와 온갖 물고기 떼들도
맑게 흐르는 계곡물에서 헤엄을 칩니다
여름 숲
임재화
유월의 끝자락 날에
한낮의 찌는듯한 찜통더위를 피해
초록빛 숲 속에 들어서니
그늘은 너무나 시원합니다
푸른 잎 새 무성한 여름 숲에
작은 새들마저도
더위를 피해서 날아드는데
매미와 쓰르라미는 숲속에서
작은 음악회를 열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니
숲속의 나뭇잎들도
함께 따라서 합창을 하고
작은 새들도 덩달아 신이 나서
포로 날갯짓한답니다
여름 호수
임재화
1
불볕더위 이글거리는 오후 길손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쉴 틈 없이 솟아올라서
또르르 구르는 소리가 귀에 들리고
오백 리 대청호의 둘레길을 차로 달릴 때
찜통더위에 지친 풍경이 눈에 비치고
눈앞의 여름 호수는 너무나 고요하다
샛강에서 어슬렁거리며 먹이를 찾던
하얀 백로 한 마리도 더위에 지쳐서
흐느적거리듯 날갯짓하며 숲으로 간다
호반 위에는 잔물결 하나 없어 잔잔하고
깨끗이 닦은 거울에 비친 고운 모습처럼
다채로운 풍경을 물 위에 조용히 비친다
강가에서는 물안개 아른거리듯 피어나고
너른 호수 위에 붓질하여 그려낸 수채화처럼
산과 숲 그리고 나무의 그림자 가득하고
이따금 더위에 지친 잉어가 뿜어내는
조그만 물방울이 뽀글뽀글 솟아올라
동그랗게 작은 파문을 만들어낸다
말없이 호반을 바라보는 길손의 얼굴에
쉼 없이 구슬 같은 땀방울이 흘러내려도
강가의 풀밭에 노란 야생화의 향기는
호숫가에서 들 향기 가득 풍기고 있다
2
저 멀리 호수 너머서
먼 산의 모습 가물거리고
깊은 상념에 잠겨있는 듯
둥그런 섬 모래톱에서
외로운 백로 한 마리
시린 가슴이 너무 서럽다
맑은 물 쉼 없이 흐르는
고즈넉한 여름 호숫가에서
수려한 풍경 가슴에 담는다
여름 바다 풍경
임종호
돛배 한 척이 딸꾹질을 하면서
수평선을 넘어간다
갈매기가 기웃거리는
해변에는
폭염이 이글댄다
와르르 달려오다가
무너지는 파도
마냥 기쁜 것은 아이들이다
까르르 까르르 파도를 탄다
수평선으로
돛배 한 척이 딸꾹질을 하면서
사라진다
여름
임주영
멋스러운 재킷 하나
사주고 싶었는데
도루묵 매운탕에
소주 한잔도
빗속을 거닐며
오가는 이야기 귀 기울이고
따끈한 어묵탕에
미소 짓는 모습 보고 싶었는데
찬바람 머리에 스치고
진달래 피는 봄이 언제 왔었는지
보고 싶은 내 언니는
보지도 못한 채
다시 여름은 찾아오고
휑한 바람에 그리움이
향기가 되어 돌아와
언니에 소식을 전해 줍니다
여름 끝자락
임주영
혀끝이 타올라
얼음물 삼켜 목젖을
간신히 타고
명치끝에 머물다 갈 곳을 잃는다
말이 나오질 않고
헐떡이며 내뱉는 호흡조차
식은땀이 흘러
머릿속 뿌리를 젖신다
널 떠나보내면
이 세상에 무슨 의미로
살아갈 희망조차 없어
참나무에 붙은 매미는 안간힘을 쓴다
여름
임판석
오뉴월
뜨거운 햇살
눈부시게 쏟아지네
대지는 익고
바다는 끊는다
타는 저녁놀
하룻길 멀다
논바닥 개구리
더위에 숨죽이네
푸르름에 매미 소리
여름 한철 아니든가
어디메쯤
벼 익는 소리에
계절이 가네
여름을 흥정하다
임향자
여름에는 해변도 젊어진다
통통 튀는 비치볼과 비키니의 웃음을 모래밭에 전시하고
즐비한 비치파라솔은 그늘을 판다
한철을 위해 몇 개의 계절을 소비한 바다
이때쯤 잘 여문 파도가 흰 꽃을 피운다
제철인 여름바다
싱싱한 소라 멍게 해삼은 소품이다
축제를 위해 달아오른 태양을 조명처럼 달아두고
좌판의 상인들은 가지런히 수평선을 썰어 접시에 담는다
축제 분위기는 날씨가 맡았다
쾌청한 기분에 금이 가지 않도록 바람은 구름을 애드벌룬처럼 띄운다
빛에 감전된 사람들은
임대한 여름의 뒷주머니에 웃돈을 찔러주고
출렁거리는 파도는 추임새를 넣는다
장전된 총알이 과녁을 찾는 여름밤의 흥정
들끓는 거래 명세서가 여기저기 낭비된다
밤늦도록 청춘들의 연애 밀도가 높아지고
해변은 그들의 젊음을 발자국으로 기록한다
빛에 감전된 사랑이 떠나면 비치파라솔이 접히고
여름은 폐장이다
다시 거래를 하기 위해
바다는 몇 개의 계절을 공란으로 남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