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小雪)
가혜자 – 소설(小雪)
강보철 – 소설(小雪)
강성은 - 소설(小雪)
강희창 - 소설 언저리
권기일 - 소설(小雪)
권혁재 - 소설
김난석 - 소설(小雪)을 맞아
김영근 - 눈이 내리지 않는 소설(小雪)에
김영길 – 소설(小雪)
김재덕 – 소설(小雪)
김정윤 – 소설(小雪)
김정희 – 소설(小雪)
김학주 - 소설(小雪)
나상국 – 소설(小雪)
박상봉 - 소설
신성수 – 소설(小雪)
안도현 - 소설과 첫눈
유홍준 - 소설(小雪)
윤여진 - 소설(小雪)
이우식 – 소설(小雪)에 가난한 집을 지나며
이현우 – 입동(立冬)과 소설(小雪) 사이
임영준 - 소설(小雪) 유감
장광규 – 소설
천창우 - 소설(小雪)
최재환 - 소설(小雪)
홍정순 - 소설(小雪)을 지나다
소설
가혜자
생명을 잉태하던
땅 위에
가을소풍 떠나
엄마 땅 품에 안겨
품에 잠들은 낙엽 위에
서서히 얼음으로 덮어
간간이 햇님 놀러 와도
썩어지고 거름 되어
새 땅 되어
새 생명 품고
새봄 그대 찾아오겠지요
소설(小雪)
강보철
다시 만날 것들을 위해 덮는다.
밤사이 허옇게 태어나
해가 뜨면 작은 입김도 못 이겨
스스로 제 몸 사위며
몽글몽글 씻기는 얼굴
어제의 고달픔이 흉터로 남을까
밤사이 허옇게 덮고 있더니
고개 드는 한 줄기 햇살에
쓱, 무거운 눈꺼풀 문지르며
말갛게 눈을 뜨는 몸
숨 가빴던 계절이 운다
차가운 바람결에 숨죽여
보내는 이 가슴 깊은 곳에서
엉엉
해가 솟는다.
한두 방울 날리던 눈
고달팠던 세월을 다독이는지
떠나는 아픔
떠나보내는 서러움
다시 만날 것들을 위해 덮는다.
소설(小雪)
강성은
꿈에서 배를 가르자
흰 솜뭉치가 끝없이 나왔다
겨울이면 옷 속에 새를 넣어 다닌다는 사람을 생각했다
별일 없습니다 이따금 눈이 내리고요
소설 언저리
강희창
웃닥밭골 바우형네는 즈가베 바램대로 대처론 못 나가고 눌러 백혀 올 갈바슴에 팔굉 버덤두 새로 나온 진흥으루다 품종을 바꿔 소주 밀식한 턱에 호락질에도 벼 여덟 섬을 수확했으니께 제법 흐뭇하였다. 동구로 오가는 질껄가시는 돌팍이 데따 많고 되게 깨끌막져서 숫제 달음박질 치다시피 해야 넌디 제금난 지 십수 년에 원체 읎이 살다봉께 집안 꼬락서니는 개갈 안 났지 뭐.
된서리 내리고 한 파수 지났으니 시방 깨구락지도 겨울잠 잘 테고 거머리 물린 데가 가려울 쯤이면 말여, 이 동리 으른덜은 탑세기 나는 짚누리 옆에 나앉아서래미 낡은 게타리에 흘러내린 겟말 추시르고 손에 침을 뱉어가매 산내끼를 꼬거나 이엉을 엮던지 안 그러면 문풍지를 바르거나 방구락쟁이 구래질에 헐은 배름빡에 맥질을 해야 할때다.
얼뚱애기 업어 포대기 띠빠 두른 애덜 빗나떨거나 진눈깨비 오면 큰집에 모여 숨바꼭질하던 골방엔 밀대 방석을 두른 감자 통발 옆댕이 메주 곰팡내가 부릿부릿 나서는 말이지, 아릿하니 머리채를 땋아 시절스런 조카뻘 가시내 볼따구를 처음 만져 본 것도 거그 골방에서닝께.
내동 자란 머리 빡빡 밀다가 바리깡에 씹혀 줘뜯기면 낫살 먹은 분한 티 욕지거리 하질 않나 배까티 나갈 때마다 나를 꼬창막대라고 떫게 쑥맥으루다 놀리던 베기 싫은 눔덜은 말여 워쨋던지 후제 반다시 급살맞을 끼라 믿었었지
그쯤이면 오양간에 거적을 둘러치고 짚토매며 콩깍지동 들여놓으면 여물로나 땔감으로 제격인 거라 가외루다가 뒤난 염생이나 도야지 뒤붙여야허구 농기는 마치맞게 지름칠을 해둬얀다. 거시기 수건 두른 아주매들은 바텡이를 뒤란에 묻거나 상수리 갖다가 절구에 빵구거나 솔껄 빚어 불 때는 냄새가 무쟈게 좋았으닝께 그러구선 인저 장광에다 정한수를 올리는 집도 더러 있었다
여태껏 농사지며 사는게 여간 빡시고 대간허지만서도 집집이 가차워 이마를 맛댄 듯 지침만혀도 문을 열어보게될 헹편이었는데 한편짝으루는 툇마루에 벙거지 눌러쓴 할아배덜은 화롯불 돋워가매 댕강강 대꼬바리 털면서 우덜한티 우스갯소리하던 따신 나날에 멱살 잡힌 엄동이야 엥간헤서는 제 까징게 힘 못쓰고 수이 지나갈 밖에.
소설(小雪)
권기일
하얀 행복이
하얀 사랑이
하얀 꿈처럼
소설 같이 내려라
하얀 너에게
소설
권혁재
막교대 철야를 마치고 돌아와
아내가 남기고 간 찬밥을 먹는다
아내의 고단한 체취가
개수대에 걸린 밥알같이
퉁퉁 부어오르는 신새벽
작은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리는 만큼이나 기대했던 형편은
아이들이 자라는 속도보다 느려
좀체 피지를 못한 채
밀린 공과금, 밀린 잠으로 쏟아진다
내 작아진 가슴 위로
작은 눈이 내린다
앞으로 차츰 큰 눈이 내리고
추위도 살벌하게 닥쳐올 텐데,
저녁 막교대를 위해 나는 다시
한잠을 붙인다
아내가 남기고 간 찬밥 위로
작은 눈이 쨍하게 내린다.
소설(小雪)을 맞아
김난석
지난 세월 내내 다독이고도 휘적거릴 것 없이
그렇다고 사붓사붓 머뭇거릴 것도 없이
철벅 철벅 걸어오는 이 누구던가
톡 톡 톡
메마른 창문 두드려보지만
일그러진 눈길 차갑기만 한데
하얗게 피워내지 못한 눈물
서러워 말지니
내일이 오늘이 되듯 어제가 오늘이지 않는가
시간은 시간을 잡아먹으며 소멸할지라도
기억은 기억을 낳으며 소생하는 법
물 밑에 스며들어 내일로 피어나리라.
눈이 내리지 않는 소설(小雪)에
김영근
소설(小雪)인데도
눈은 내리지 않고
단지 어제보다는 더 쌀쌀해진
날씨가
커피 맛을 더욱 따스하고, 향기롭게
돋보이게 하는 날에
달콤한 커피 향처럼
담백한 여인이 세상에 존재할까라는
추상적 관념에 빠져본다
산다는 것은
한 잔의 커피나,
한 잔의 술잔을 기울이는 것만큼
담백하고, 맛깔스러운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있어
인간은 가슴 한쪽이 시리고,
외로움이 밀물처럼 밀려와
밤의 짙은 어둠만큼
영혼을 추위에 떨게 하니
삶은 본원적인 것이 추상적인 것에
하나의 위로로 되새겨 있을 뿐
허구의 늪을 지나 진실의 샘가로 가면
아직은 얼지 않은
투명하면서도 차가운 물이
생수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춥다는 것도 어쩌면 상대적인 것이기에
사랑 속에 깃들어 있는 누군가는
뜨거운 가슴으로 생의 예찬론자가 되어 있을 것이고,
사랑의 볕이 들지 않는 외진 곳에 있는 누군가는
차가운 가슴으로 생의 비관론자가 되어 있으리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이 인간을 단죄하는
세상에서
니이체의 신은 죽어있고
티벳 어느 고산(高山)의 사원에는
두껍게 쌓인 눈만큼의 신앙이
달라이라마의 살아온 이력만큼
신비롭게 빛나고 있다
매일 같이 인간은
순수한 윤동주의 시심(詩心)으로
하늘을 우러르며
맑은 구름으로 세상의 하늘을 흘러가지만
도달해야할 곳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죽음은 늘 쓸쓸하고, 슬프다
아침에 춥다고
온종일 추운 것은 아니기에
희망, 사랑, 열정, 그리움, ……
등등을 가슴에 품고
마지막 순간까지 꿈을 놓지 말고
살아보자
눈이 내리지 않는
소설(小雪)에도
맑고 청초한 눈(雪)을 볼 수 있는
안목으로
오늘도 담백한 마음을 지닌 그 누군가와
따뜻한 대화 한마디는 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안고
한세상 살아보자.
소설(小雪)
김영길
계절은 소설을 지나 매서운 바람이
가슴속을 파고들어 온다.
오늘 새벽 아침도 인자한 햇님은
천지일월 광명이 밝고 따뜻한 웃는
얼굴로 나타나시었다.
이 영광된 공간
이 즐거운 공간
이 기쁜 공간
이 찬란한 공간
이 무한한 공간
이 공간에 피조만물이든지
삼라만상에 나타난 형성이든지
성분의 찬란한 요소의 조화든지
학문의 제도로 이루어진 과학이든지
햇님의 광명이 없으면 볼 수가 없다.
소설(小雪)
김재덕
밤사이 찬 이슬이
낙엽에
사뿐하다
애끓는 눈물일까
서릿발
통곡인가
햇살은 빈둥대다가
얄밉게
사라진다.
소설(小雪)
김정윤
작은 겨울로 들어선다는 절기
소설 추위는
빚을 내서라도 맞는다는
속설이 있다
어머니는 솜 바지를 깁고
무와 배추를 거두어
김장김치를 담그고
호박을 썰어 줄에 널고
시래기를 엮어 헛간에 건다
겨우내 온돌방 땔감준비며
소여물 볏집을 챙기며
겨울 채비를 서두르신다
소설 때는 추워야 이듬해
농사가 잘된다는 말은 지금은
어디에서도 들어 볼 수가 없어
가슴만 먹먹해진다.
소설(小雪)
김정희
한밤중 바람이 창을 두드릴 때 어쩐지 네가 올 것 같아서
떠나지 않는 바람 등 떠밀어 보내고 달빛으로 내 방을 밝혀두었지
그리움에 지친 날 몰래 엿보았더냐?
달빛이 지 몸을 아랫목에 뉘이고서야 이리도 애달픈 네가 온 줄 알았더니
내가 보낸 그 바람 뒤에 너는 숨어 다녀갔구나.
겨울 시작한 밤
살며시 오는 너를 보지 못하고
네가 떠난 새벽,
홀로 달빛 헹구며 서성거린다.
소설(小雪)
김학주
"소설(小雪) 추위는 빚을 내서도 한다"는
속담처럼 겨울이 겨울다워야 할 텐데
추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손돌 바람이라도 불어 주면
조금 춥다 시퍼
눈치만 살살 보던 눈도 펑펑 내려줄 텐데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
마음은 아는 거야? 모르는 거야?
작년에 떠났던 칼바람은 오지 않고
늦가을 훈풍에 철모르는 꽃들만 피고 있으니
눈이 오길 기다리는 사람들은
꽃도 싫어라
첫눈 약속은 어디 갔나?
소설(小雪)에는 눈 꽃이 좋아라
소설(小雪)
나상국
24절기 중 20번째 절기
소설이란다
얼음이 얼고
땅이 언다는데
창밖에는 비가 내린다
오랜 시간 주고받던 편지
뜨문뜨문 오던 답장
그리고 긴 파열음
시베리아 벌판처럼
꽝꽝꽝 얼어 버렸는데
어느 날부턴가
수신인 없는 곳으로
부치지도 못할
편지를 쓰며
지새웠던 수많은 밤
그해 그 겨울 어느 날
쓰다만 편지지 위에
추적추적 하염없이
비가 내렸었지
아마 그날도
소설이었을 거야
오늘처럼
저렇게 창밖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렸었지
소설
박상봉
첫얼음 얼고 첫 눈 내리기 시작하는 때
쌀독에 밑바닥이 휜히 들여다보이는 때
독을 채우고 있던 쌀이 다 비어지는 때
고쟁이 확 까뒤집어 보듯이
불장다본 쌀독 속
궁핍이 날카로운 이빨 드러낼
목구멍을 간질이던
밥알이 치욕이라는 것,
가슴에서 설설 밥이 끓기 시작한다
소설이라는 설익은 밥이 설설 끓는다
옛날옛적?
朴자 堧자 함자 가진 집안어른이
명절날 앞 떡 빚을 쌀이 없어
가야금으로 떡을 쳤다는 고사처럼
소설이라는 악기가 살얼음 깨는 소리
쟁그랑 쟁그랑 밥상 차리는 소리
소설(小雪)
신성수
소설을 누군가는 소춘(小春)이라고 했다.
아직은 가을 시샘이 남아서
겨울을 더디게 만드는데
내일 첫 눈이 온다는 설레는 뉴스 담는다.
오늘 십일 년 전 세상을 떠난 김광균 선생은
'먼 데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고 했다.
새벽 출근길에 철길 위에 누운 서리를 보았다.
정말 첫눈도 가까이 벅찬 걸음으로 와 있다고
나는 확신하였다.
세상 혼란을 모두 지우고 새 옷을 입힐
그 거룩한 첫눈을 기다리는 아침
안개도 마저 걷히고
맑게 세수를 마치고
싱그러운 낯빛으로 선
하늘,
나는 창을 활짝 열었다.
창가에 남은 이슬이 떨어지는데
귀 기울이면 못 들을까 더 다가가
거기 아직 머물러 있는 가을을 센다.
소설과 첫눈
안도현
소설에는
첫눈이 내린다는 말을 믿고
내 안에 눈을 내렸습니다.
약속대로
그대 손 잡고
눈길 따라 따뜻하게 걸었습니다.
이 여운 이대로
날까지 춥다는 오늘
포근하게 보내겠습니다.
소설(小雪)
유홍준
하늘에서도
빗자루로 쓸 수 있는 것이 내려서 좋다
동글동글 손으로 뭉칠 수 있는 것이 내려서 기쁘다
잠시겠으나
그늘 쪽 어깨에만 눈을 얹고 구층 석탑처럼
묵묵히 서 있고 싶다
이 겨울은
창호지같이 얇은 서러움으로 죽(竹)을 칠까 붉고 푸른
깃발처럼 펄럭여볼까 아니야 아니야 울타리 쪽으로 밀어붙여 놓은 눈이
조금씩 조금씩
녹아 없어지는 것이나 바라보아야겠다
소설(小雪)
윤여진
소란스러운 건 싫어요
이 방엔 남겨진 소음이 너무 많거든요
잠이 들기 전, 방의 밝기보다 바깥이 더 환해지면
내가 누운 베개 안쪽에도
곧 눈이 도착할 거라, 숨을 몰아쉬는 잎들이
납작 엎드린 채 말해주었어요
그가 벗어두고 간 양말 한 짝을
허리를 굽혀 주웠을 때
벗은 발과 분주할 그의 아침을 생각해요
모서리부터 깨지는 방 한가운데서
달력을 세어보며
이상하다, 잠긴 목소리를 다듬으면
그림 속, 제일 큰 나무에 목맨 의자가 흔들려요
아랫배엔 흰 피가 도는 것 같아요
손을 넣으면 축축한 음지가
내가 만든 그늘로 들어와 볼래요?
고개를 돌리면 눈 내리는 소리가 뺨에 닿아요
눈은 힘껏 쥐기도 전에
가장 여린 피부 안쪽으로 녹아들어요
슬픔은 어느 쪽으로 돌고 있는가요
골똘해질 때 나는 생생해져요
뒤척이는 소리 하나 없이
나 혼자 그의 이름을 불러요
이번이 처음이라는 듯
놀란 입을 한 손으로 가릴 때
미처 가리지 못한 눈동자를
베개를 더듬거리다 마주칠 때
거짓말은 언제까지 미끄러질까요
계절이 미처 알려주지 않는 게 있어요
매일 한 뼘씩 덮이는 바깥의 일을 모른 체해요
처음 보는 밝기를 찾아 맞추고 몸을 눕혀요
두 귀를 꼭 잠근 묵묵한 잠이 있고
그늘을 배에 올린
내가 누운 자국이 있어요
희미해지기 전에
남은 소음을 다 가져가 줘요
곧 더 많은 눈이 내린다, 했거든요
소설(小雪)에 가난한 집을 지나며
이우식
바람 찬 쓸쓸한 골목 가난한 집이 한 채
굴뚝에선 연기 안 나고 토담은 기울었네
말라 썩은 처마 끝에 고드름 눈물짓는데
노인의 기침 소리만 창 너머로 더해진다.
小雪過貧家(소설과빈가)
寒風窮巷一貧家(한풍궁항일빈가)
煙突無煙牆壁斜(연돌무연장벽사)
枯朽檐端氷株淚(고후첨단빙주루)
老翁咳喘隔窓加(노옹해천격창가)
입동(立冬)과 소설(小雪) 사이
이현우
입동(入冬)과 소설(小雪) 사이
이 산 저 산 단풍 들 때 비켜있던 갈참나무
서리꽃이 만발한 늦가을 숲속에서
다투어 홍장하고 적멸에 든다.
소설(小雪) 유감
임영준
걸맞지 않아서
사람 사는 세상인가
소설에 제대로 한번
눈가루 비친 적 있던가
들숨 크게 권한 적 있었나
그래도 사람들은 오가는데
기대하는 소식은 깜깜이고
음영만 짙게 깔린다
돌부리라도 차고 싶었는데
핑계가 생겼다
소설
장광규
입동은 지났지만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본격적인 겨울은 이제부터다
기후변화 기상이변으로
소설 추위는 빚내서라도 한다는
옛말은 옛말이 되어간다
아직 못한 김장도 서두르고
월동준비를 하는 시기다
겨울 양식인 김장을 하고 나면
무 잎사귀와 배춧잎을 엮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시래기를 만든다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낙엽
알몸을 드러내는 나무들이
허전함과 외로움을 느끼게 하고
어둠은 일찍 찾아와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소설(小雪)
천창우
살얼음 깔린 하늘길 밟고
갈대꽃 고개를 휘젓는 강가에 섰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미지로 떠나는
풀꽃들의 비상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붙박이 나무가 되어 떠나지 못하는
나는, 벌거벗은 계절이 두렵습니다
이리로 오셔요
마른풀들 베어다 언 땅 위에 깔고
풀꽃 씨 날개로 자리를 펼치겠습니다
거기, 오색 낙엽 이불 마련해두겠습니다
제 곁에 바짝 붙여 누우셔요
창밖에 바람 이리처럼 울어도 우리
그윽한 풀냄새 살품에 품으며 그리
어두운 계절 여위며 가요
아득한 오랑캐꽃 발자국 소리 기다려요
하얗게 온기 서린 우리들 꿈길에, 밤새
소설(小雪)의 풋눈 살포시 덮이어가게요
소설(小雪)
최재환
방문 굳게 걸어 잠그면
추위도 밖에서 주춤거릴까.
결 고운 조약돌 하나
햇볕 따스한 석상(石床)에 올려
찻물 끓기를 기다리다.
돌려받은 세월이
삶을 앞지르기 전에
빈손으로 돌 앉아도
하늘을 거역지 않고
밀린 빚이나 지워얄 텐데.
온갖 시름이 물속을 어지럽힐 때쯤
찻잔을 덥히는 입김처럼
눈발이 가슴을 파고든다.
소설(小雪)을 지나다
홍정순
은행잎 지고 겨울비 오는 날
일 피해 사람 피해 찾은 시골집
첫서리 오고, 김장하고 마늘 심은 후
서리태 타작한, 이맘때
바깥 풍경은 나만큼 촌스럽다
누워서도 보기엔 감나무가 최고다
들창에 세 든 지 오래된 모습이라 그렇고,
가지가지 종잘종잘,
새 소리를 달고 있어서 더 그렇다
마늘 심은 밭을 지나는 바람 같은 소리
매점매석 했다 해도
눈감아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감나무 그늘에서 자라 감 먹고 살아 온 그 소리는
전대 풀고 나온 나를 창문 앞에 서게 했다
이파리 다 떨군 느티나무 가지 사이로
철물점 연탄난로를 쬐던 거칠고 곱은 손들이 보인다
먹고사는 일에, 온전히 한 해를 다 보낸 발자국소리 들린다
보일러 소리, 냉장고 소리,
창문을 치고 두드리는 계곡 바람 거친데
풍경은 거짓말처럼 소설(小雪) 무렵을 지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