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입동(立冬)

Bollnow 2024. 7. 14. 13:00

강영환 - 입동 지나서

강한익 - 입동((立冬)

구분옥 입동

구재기 입동(立冬)

권경업 - 입동

권복례 - 입동

권오범 - 입동

권오범 - 입동의 공원 벤치

김귀녀 - 입동

김영근 입동

김영길 - 입동

김영남 - 입동 무렵

김영재 - 입동

김용화 - 입동 무렵

김은식 입동

김일선 입동유감(立冬有感)

김일선 입동의 오후 송호리

김일선 입동 전후

김춘수 - 입동

나상국 - 입동

나상국 - 입동

나석중 - 입동(立冬)

노명순 입동

도현영 - 입동

박광호 - 입동(立冬)

박금숙 - 입동(立冬)

박인걸 - 입동

박종영 입동(立冬)

박진표 오늘이 입동

박해성 입동(立冬) 전야

박환종 - 입동

백원기 - 입동 마중

설동필 - 입동월경(入冬月景)

성백군 - 입동

손병걸 - 입동 무렵

송영희 - 입동(立冬)

송종찬 - 입동 부근

신미나 입동

신창홍 - 입동(立冬) 풍경

심지향 - 입동(立冬)

안영준 - 입동 날 가을 들판

오정방 - 입동 아침

오정방 - 입동(立冬)

오정방 - 입동지절(立冬之節)

유안진 - 입동

유창섭 - 입동

유창섭 - 입동에 피는 꽃

윤보영 입동

윤효 - 입동(立冬)

이계진 - 입동(立冬)

이기철 - 입동 무렵

이덕규 - 입동

이덕수 - 입동

이도연 - 입동(立冬)

이명기 - 입동

이상국 - 입동

이성선 - 입동 이후

이성선 - 입동 저녁

이성선 - 입동(立冬)

이성진 - 입동

이영광 - 입동

이외수 입동

이창수 - 입동(立冬)

이현우 입동(立冬)과 소설(小雪) 사이

이화숙 - 긴긴밤

임강빈 - 입동(立冬)의 시

임석순 - 입동(立冬)

장광규 - 입동

장문석 입동

장종섭 입동

전병일 입동(立冬)인 오늘

정군수 입동(立冬) 앞에서

정끝별 - 입동

정상만 - 입동

정숙자 입동

정정우 - 입동

정태중 입동

최영숙 입동 무렵

최진연 입동(立冬) 무렵

최홍윤 입동 날에

하영순 입동 바람

한혜영 입동

허순성 - 입동은 지났습니다

허형만 - 입동(立冬)

홍수희 - 입동(立冬)에 부르는 노래

홍해리 - 입동

 

입동 지나서

강영환

 

바다에 다 이른 강물처럼

별은 망가지고 있었다

영롱하게 반짝이던 눈빛은 희미해지고

날카로운 모서리도 닳아 이제는

소리하지 않은 톱니가 되었다

벌판에는 돌아누운 밤이 많아

지상의 꽃들은 피지 않고 목마른

은하수 흐르지 않는다

바위틈을 거칠게 용솟음치던 강물

이 땅 가을처럼 잎을 떨구고

아침은 어느덧 벌판을 지나서

시린 무릎으로 저물어 가느니

바다에 다 이른 저녁노을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먼 산 그리매에 말없이 잦아든다

 

잎을 떨구어 버린 하늘로

넓어져 간다

그것은 용서를 터득한 바다

삼켜도 배부르지 않는 서늘한

그대 입술

 

 

 

입동((立冬)

강한익

 

가을을 떠나보내는

뒤바람

 

바다 향기 품어내며

한라산 단잠 깨우고

 

고목의 우듬지

간신히 매달린 잎새에

이별을 재촉하며

하얀 눈꽃을

애타게 기다린다.

 

둥지 속에 몸 감추고

임 찾는 까마귀

애절한 울음소리

길섶에 메아리치며

 

벼랑 끝에

노루 한 마리

애잔한 눈망울 굴리며

저만치 고개 넘는 가을에

이별의 손을 흔든다.

 

 

 

입동

구분옥

 

배추 무 만지다

정신이 번쩍

깜짝이야!

 

오늘

김장하면

김치 맛이 떨어진다는데

 

 

 

입동(立冬)

구재기

 

밖은 칠흑의 어둠

바람 불어 요란이고

 

절간의 빈 방 안

불어나는 고요이면

 

천정의 불빛

쌍으로 밝음인데

 

영하로 내리는

산사(山寺)는 추웁다

 

 

 

입동

권경업

 

때늦은 천둥소리에

소나기 퍼붓고

백운산은 밤새워 울어

이제 겨울 산

산허리 돌아

너를 안고 선잠 들면

새벽녘 곤한 잠을 깨우는

찬 서리

오늘이 입동이구나

 

 

 

입동

권복례

 

세월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내 몸 구석구석

몸살을 앓게 하고

그리고 또 한 살을 먹는 건가

경상도 사투리로 약을 조제하는

그 여자에게로 가는 길목의

가로수 잎이 한 개도 남아있지 않다

늦은 시간까지 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모두 떠나버린 시민공원의

적막함,

늘 바라보기만 할 때는

그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서럽고 서러웠다

늦은 밤

모두 떠나보내고

빈 가지로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는 나무의 추위가

다 내게로 몰려온다

 

 

 

입동

권오범

 

가을이 제멋에 취해

알록달록 뭉그적거리자

겨울이 밤을 도와 비를 앞세우고 와

왜바람 입김 토해 천방지방 헤살놓는 아침

강제로 이별한 은행잎들이

아스팔트 갓길 따라 서로 베고 누워있다

차들이 흘린 날파람에

약삭빠른 것들 우루루 일어나

무단횡단 일삼아 무질서하다

첫밗부터 심상찮은 걸 보면

올에 부임한 동장군은

왠지 괄괄한 것 같아

벌써부터 으스스한 어깻죽지

모기 한 마리 시절도 모르는지

단단히 여민 출근길 버스 속

군침 도는 뷔페 어쩌지 못해

귓가 맴돌며 입맛 다시는 소리

 

 

 

입동의 공원 벤치

권오범

 

성근 각목 등받이에 마음의 각도를

낭만적 분위기로 최대한 맞춘 채

높은 망망대해 구름 따라

자맥질 일삼는 내 마음

달력의 계절 음표는 겨울이건만

햇볕이 한여름같이 머리 어깨 짓밟아

그늘로 피했더니 오슬오슬

빛바랜 팽나무 추억들마저 나를 우수수 덮친다

매무새 털고 다시 양지로 옮겨 앉아

잔디밭에 모여 강종대는 비둘기 쫓다 보니

간기 빠진 내 청춘처럼

어느새 저만치 기울어버린 해

북새통인 낙엽에게

허천병 전염되었는지

아까부터 목울대가 공연히 오르내려

돼지국밥에 소주 한잔이 굴뚝같고

 

 

 

입동

김귀녀

 

한낮은 단풍잎처럼 빨갛게

물이 든다

부푼 가슴 다독이며

속으로 갈무리하는

하루는 그녀의 몸 위에 가만히 눕는다

겨울 속으로 가기 위해

재충전하는 아름다운 날

백담사를 오르는 길목엔

수런거리는 가을빛

따뜻하게 달궈진

단풍잎들은 반짝이는 손을 흔든다

어수선하던 마음도

쉴 틈 없이 바쁘던 시간도

아픈 영혼도

단풍잎처럼 빨갛게 물이 든

늦가을의 한낮으로

그녀는 빨려 들어간다

 

 

 

입동

김영근

 

플라타너스 가지 끝에 고양이 몇 가르릉거린다

바람이 불면

갈색이거나 검은 몸을 가지에 바싹 붙이며

더 앙칼지게 가르릉거린다

몰려오는 어둠이 죄다 쥐 떼로 보였는지

몸을 날리려 하지만

뛰어내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밤 내내 가르릉거린다

어미는 어딜 갔을까

밤 깊어 바람 차가울수록

울음은 송곳니처럼 자라나

내 꿈을 찢고 들어온다

나는 내 시체를 보고 울고 있었다

죽도록 해도 이룬 일 하나 없어

울음은 차츰차츰 통곡으로 변하고

그 소리에 놀라 문득 깨니

올라온 기억이 없는 이 높은 가지 끝에서

어떻게 내려갈지 몰라 죽은 어미를 찾으며

나도 한밤 내 가르릉거리고 있다

 

 

 

입동

김영길

 

겨울의 첫걸음이란다.

추위가 다가올 날을

예고하는 듯, 한 자릿수

온도가 되니 으스스하고

몸의 활동이 움츠려든다.

 

김장 절임배추 주문하고

겨울 오리털 옷도 장롱 속에서

밖으로 나와 외출 준비를 하려 한다.

 

더위 한 철 장롱 속에서

숨을 쉬기가 고통스러웠는지

밖에 세상을 보니 몸도

부풀어 오르고 풍만한

자태를 자랑하려 하는구나.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철 따라 옷을 바꾸어

정리하지도 못한 채

 

또 새로운 절기를 맞이하는

세상의 돌고 도는 운세 따라

적응하는 훈련이 무척

바쁘기만 하다.

 

 

 

입동 무렵

김영남

 

감잎 하나

! 지자

하늘엔 어느새

파란 불이 들어온다.

 

그러면 동구 밖 쪽 처마 끝에선

또 시레기 다발이 흔들리고

그 밑 마당 어귀에서

동네 아주머니들 모여

김장을 한다.

시뻘건 배춧잎을 쭉쭉 찢어

서로의 얼굴에다 건네며,

 

이런 날

저 하늘가에 저녁 기러기 뜨면

고향에선 지금쯤

시레기국을 가마솥에다 끓였겠다.

 

 

 

입동

김영재

 

구만리 귀양길에 오른 가을빛

뒤돌아보며 쓴 홍엽(紅葉)의 편지,

서슬 퍼런 북풍(北風)이 손아귀에 떨구어 준 것은

 

엄동설한에도 가르침이 담겨 있나니...”

 

 

 

입동 무렵

김용화

 

성가수녀원 뒤뜰에 모과가 열렸다

수녀님 만나면 따 달라고 해야겠다

칠순을 바라보던 안젤라 수녀님은

멀리서도 잘 익은 모과 냄새가 났다

 

 

 

입동

김은식

 

싸릿대 엉성한 담 사이로

늦가을 바람이 불면

앞마당 구석진 곳에서 몸을 서걱이는 낙엽

굽은 등을 콜록거리며 묵은 기침을 한다

겨울 황소바람은 여름 모기떼처럼

헤진 문풍지를 곧잘 찾고

터진 문살에 풀칠 매겨 닫아 두면

초저녁 힘없는 햇발을 찾아

산 고양이가 내려와 볕을 쬐다 가는 툇마루

짧아진 늦가을 해가 중천에 떠도

빨간 고추에게 양기를 다 빼앗기고

햇발은 힘이 없다

집 없는 바람, 서글퍼지는 해거름 녘에

밥 짓는 도마소리 누굴 기다리나

산에서 내려온 산 고양이가

겨울 털옷을 입고 내려와

추위 걱정은커녕

섬돌 위에 나란히 벗어둔

고무신 한 짝 얼싸안고 뒹굴고 있다

 

 

 

입동유감(立冬有感)

김일선

 

해마다

감 수확하고 뒤풀이로

가족이 함께 찾았던

땅끝 선창가 횟집

공교롭게도

그때마다 입동

 

이제는

을씨년스럽게 고개 숙여

처량하게 도열 해있는

늙은 감나무들

노쇠와 병약은

생사와 소멸의 우주적인 윤회

애달프다 무엇하랴?

 

끊임없는 변전과 생멸 속에

많은 추억과 경험들을 엮은

지난 세월의 고락

망상이라 깨닫지 못하고

입동이라는 절기의 감각으로

자아를 더듬어보게 된다

 

삼매(三昧)에 들게 되면

몽상에서 깨어날 수 있다는데

 

 

 

입동의 오후 송호리

김일선

 

오른팔로 꽃섬을 왼팔로 염소 섬을

방파제로 끌어안은 송호리 해변

눈앞의 어룡도는 안개 속에 뽀얗고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수평선은 사라져

남은 섬들은 모두 바다안개 속에 가렸다

 

십일월의 오후는 가을이 못내 그리워

햇살이 엷어진 태양은 아직도

그 섬에서 이쪽 해변 까지

바다 위에 일직선으로 햇빛 띠를 그려

이쪽은 드믄 별들을 요란하게 반짝이고

섬 쪽으로는 은하수가 잔잔하게 흐른다

 

고요한 썰물이 방금 쓸고 간 해변 위엔

어린아이 둘이와 젊은 부부가

외롭게 발자국을 남기며 조용히 웃고 있다

땅끝 관광길에 들른 깜짝 나들인가?

입동의 오후 해수욕장은 몸서리치게 쓸쓸하다

 

 

 

입동 전후

김일선

 

주황색으로 맨 먼저 익어가는

오변이를 택배에 보내야 할 때

서울서 큰아들 내외가 내려오고

이어 차량마저 처분하면

시월 말은 금세 사라진다

 

부유와 마지막 한바탕할 때

노상 작은아들 식구들이

서울서 내려오고

감 따기 작업이 끝이 나면

으례 뒤풀이로 땅끝을 찾았다

 

그때마다 공교롭게도 입동이라

은행나무는 노랗게 시립하고

플라타너스 잎은 딩굴어도

단풍은 아직 덜 익었으니

가을은 한참이 남은 성싶은데

 

하늘은 높고 푸르고

바다는 고요해 호수 같아

천연스러운 여러 섬들은

뽀얗게 잠겨 있고 파도 위엔

별빛이 흐르며 다리를 놓는다

 

입동은 가을과 겨울의 경계일까?

만추의 전령사이기도 하고

초겨울의 문지기라서

서늘하고 산산함이 어울린

상쾌한 미풍이 목덜미를 스친다

 

 

 

입동

김춘수

 

낙엽들이 길섶에 슬린다

햇살이 햇살의 웅덩이를 만든다

여기저기

잎 떨군 나무들

키가 더 커지고

조금은 어쩔 줄을 몰라 한다

너무 먼 하늘이

귀에 쟁쟁하다 그

목 잘린 무쇠두멍

 

 

 

입동

나상국

 

1

저번 날 서리 내리더니

가는 가을이 아쉬운지

아니면

서둘러 다가오는

겨울이 싫은지

가을비인지

겨울비인지 모를

경계가 모호한

비가 내린다

쉬 잠들지 못하고

온 밤을 서성대는 밤길

중량천 변을 따라

갈대밭을

저벅저벅 적시며 내린다

이 밤이 새면

입동인데

겨울 눈은 오지 않고

겨울비인지

마지막 가을비인지 모를

비가

입동을 향해 걸어가며 내린다

 

 

2

바람에 흔들리며 고뇌하는 가을

이별 무대의 뒤안길

십일월

스물넷 마디 중

상강과 소설 사이

열아홉 마디

생리통처럼 왔다가 잠시

스쳐 지나가는 바람같이

허공에 매달려

눈 감고 귀 기울여

마지막 이자 첫 바이올린 독주회에

심취해 본다

등 떠밀려간 가을의 끝자락에 기대어 서서

점령군의 군화 발걸음 소리 같은

저 시베리아의 바람 소리

총소리보다 먼저와

귓전에 서성거린다

 

 

 

입동(立冬)

나석중

 

외로움도 덧나서 쳐다본 하늘이란

강아지도 사립문을 나와 한참을 컹컹 짖어대던 하늘인데

잔뜩 우중충한 우울이 끼어

금세 눈이라도 펑펑 쏟을 하늘인데

벌써 날아간 새의 날갯짓 소리까지

죄다 들리고 귀먹을 날

, 올 것이다.

 

 

 

입동

노명순

 

새들의 집이었던 아름드리 후박나무 가지에

빽빽했던 잎사귀들이 죄 떨어져 휑하니 비어 있다

 

새들은 바람을 가르고 하늘길로 떠나고

 

수북이 쌓인 낙엽에 발부리 채인

가을이 비틀거린다

 

 

 

입동

도현영

 

가을은 떠나려나

사연이 남았는데

 

계절을 속절없이

흘러만 보냈구나

 

내년에 이 느낌으로

() 지을 수 있을까

 

 

 

입동(立冬)

박광호

 

나무가 잎들에게 말한다

 

이젠 헤어지자!

사랑하기에 함께 할 수 없는 너,

너를 추운 내 곁에 언제까지나

머물게 할 순 없지 않은가

마치 우리들의 이별과 같다고 할까?

한잎 두잎 미련의 손을 놓고

떠나보내는 입동의 나무들

하늘 뜻에 순응하고

부활의 신앙으로 열심히 일하며

순리로 살아왔기에

잎들은 겸허히 운명을 맞는다.

겨울의 긴 - 강을 건너

새봄이 찾아들면

어김없이 바라볼 수 있는

낙엽의 부활을 보면서

인간도 그들과 함께

사계(四季)를 여는 것이다.

 

 

 

입동(立冬)

박금숙

 

살얼음을 타고

잘도 왔구나, 겨울은

상강(霜降)을 맨발로 지나온

아직은 얇은 외투 차림인데

 

어젯밤 된서리에

꽃잎처럼 찍어놓은 까치 발자국

아침을 물어 나르는

발끝이 시렸나 보다

 

바지랑대 타고 오르다

수척해진 나팔꽃 줄기

가는 허리를 단단히 졸라매고

못다 한 말처럼

여문 씨앗을 뱉어내는데

 

먼 길 떠나온

벌판 같은 마당 한 편에

싸늘한 아침 빛이

계절의 경계선을 긋고 있다.

 

 

 

입동

박인걸

 

늦가을과 이른 겨울이 뒤섞인

상수리나무 빽빽한 숲에는

모순되지 않은 조화가 흐르고

아직 가지 끝에 매달린 잎과

바닥에 뒹구는 낙엽들이

묘한 철학을 연출하고 있다.

죽음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거부나 발버둥이 없이

바람이 호명을 할 때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피안의 세계로 춤추며 떠나는

낙엽의 자유가 경이롭다.

만삭의 구름이 신음하며

차가운 눈물을 뿌릴 때면

연약한 쑥부쟁이가 비틀거리고

늦깎이 야생화가 당황하지만

야무지게 서 있는 굴참나무는

당당하게 겨울로 걸어갈 자세다.

떠나는 존재와 남아있는 존재

버려야 할 것들과

간직해야 할 것들을

자신들의 결심에 따라 움직이는

대자연의 섭리가 경이롭다.

 

 

 

입동(立冬)

박종영

 

기나긴 밤 못다 한

뒷이야기가 반짝거리는

따스한 아랫목,

 

뒤란 대숲 이는 바람에도

달빛 스치는 소리

장지문에 귀 솔깃하고,

 

장독대 오동잎 한 개

,

부서지는 비명으로

겨울 시작이다.

 

 

 

오늘이 입동

박진표

 

붉게 물든

풍성한 가을이

아쉬운 작별을 고하는

겨울로 들어서는

오늘이 입동

 

귀뚜라미 노래와

해바라기 코스모스 환한 미소

짱아짱아 이쁜 짱아 고추잠자리

이름 모를 풀벌레 합창이

가난한 마음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가을아

가을아

떠나는 마음 아쉽겠지만

 

우리 다시 만날 것 알기에

기쁘게 떠나렴

 

찬 서리 내리기 전 조심해서 가거라

 

하얀 눈 내리고 눈의 여왕 오시면

너의 고운 마음 이쁜 미소 전해줄 거야

 

오늘이 입동

다시 시작하는 거야

온 세상 하얗게 덮이면

그 품에 안기어 꿈을 꿀 거야

 

빨간 코 루돌프 산타 할아버지

고드름 수정 고드름

토실토실 군밤 호호 불며

, 여름, 가을, 노래해야지

 

겨울은

겨울은

어떤 얼굴 보여줄까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

 

 

 

입동(立冬) 전야

박해성

 

이름만 신세계인 버스 종점 구식 다방

지구별 한 귀퉁이 메모인 양 꽂혀있다

막다른

골목 끝에서 찬비는 오락가락

만날 사람 없어도 반쯤 닫힌 문을 밀면

골다공증 나무 계단 목울대가 젖는 시간

타다 만 시린 하루가 꽁초처럼 나뒹굴고

손마디 굵은 바람 헛기침하는 창가엔

성긴 날개 추스른다, 길 잃은 황조롱이

안단테,

올드 팝송에 발이 걸려 주춤거리는

 

 

 

입동

박환종

 

긴 밤 못다 한 뒷이야기

우정과 사랑이 반짝이고

 

뒤란 마음속에서 일렁이던 바람 소리

동장군 몰고 오고

 

긴 밤 저만치 여명 오더니

서산(西山) 저녁노을 포얀 이불을 덮었네.

 

 

 

입동 마중

백원기

 

언제나 처음은 설렌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봄 여름 가을

정답던 계절은 가고

낯선 겨울이 온다

첫걸음은 어떻게 뗄까

돌쟁이 걸음마 첫걸음

내일모레 입동이 오면

반갑게 맞이할 궁리 끝에

내복에 두꺼운 옷 입고

두 손 따뜻하게 너를 마중 가련다

 

 

 

입동월경(入冬月景)

설동필

 

해 질 녁 산에 올라 시내를 굽어 보니

희뿌연 세상사가 이토록 무상無常한가

한 낮의 거친 일 일랑 입동월경 맞고서.

시름은 저 먼산에 오롯이 날리고서

동산(東山)에 달 오르면 반백(半白)된 누이 생각

찬 입김 이슬이 되어 동심(童心)으로 달린다

내 고향(故鄕) 신월리(新月里)의 의연한 팽나무는

찬 바람 소슬히도 까치만 울겠거니

깊어진 적막강산에 월경관산(月景觀山)뿐이라.

 

 

 

입동

성백군

 

텅 비었습니다

곡식으로 가득한 황금 들녘은

사라지고 추수 끝난 자리에

하얗게 무서리가 내렸습니다

나무들은

한 잎 두 잎 잎을 떨구며

나목이 되어갑니다

대지는

, 여름, 가을을 지나오느라

피곤하여 쉬이 곤한 잠이 들었는지

바람이 거칠게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고 코 고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모여

김장을 담그고

남정네들은 독 묻을 땅을 파며

월동 준비를 하고

아이들은 오손도손 화롯가에 둘러앉아

감자며 고구마를 구워 먹었지요

그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잘산다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겨울이 왜 와야 하는가를

 

 

 

입동 무렵

손병걸

 

모두 다 춥다춥다 껴입을 때

나무는 이파리를 다 벗는다

 

생활의 옳고 그름을

옷매무시 한 가지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내 삶 오롯이 알몸인 적 없었다

 

삶을 온전히 살아낸다는 말

언 바람을 베어대는

저 나무의 당당한 목소리다

 

깡마른 가지를 후두르며

때로는 뚝뚝 부러져나가도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나무는 결코 눕지 않는다

 

종내엔 뿌리의 내력을 송두리째 드러내고

딱 한 번 유연을 오롯이 남기겠다는 듯

 

어둠을 움켜쥔 체 꼿꼿한

전라의 나무 한 그루

 

또 한 겹의 나이테를 여미고 있다

 

 

 

입동(立冬)

송영희

 

까치밥 하나 덩그마니 남기고

마을이 조용해졌다

멀리 뾰족 성당이 보이고

양로원이 보이고

창호지 같은 속 하늘도 비쳤다

누구나 마음 안에 설핏설핏

길 하나 보일 때쯤엔

살도 빠지고 말수도 적어지는 법

홀쭉해진 산

휘어진 나무들의 두 팔.

 

 

 

입동 부근

송종찬

 

입동이 눈앞인데 이제야 먼 길을 나서다니

밤나무 잎이 떠가는 냇가에 앉아

협곡을 막 빠져나온 물살을 바라본다

겨울이 오기 전에 바다에 닿을 수 있을까

잘게 드러난 주름살 창백해진 손과 발

주술사처럼 강기슭마다 물안개를 피워

사람들이 어찌어찌 살고 있는지 저지대의 안부를 물으며

낮은 목소리로 갈대를 흔들고 지나간다

언제 영어의 몸이 될지 내년 봄까지

어디서 얼음의 제단이 될지

이제야 먼 길을 나서다니

절로 막막해지는 늦가을 그림자 속에서

 

 

 

입동

신미나

 

신새벽 논산 오일장에 우시장이 열렸다

고삐를 당기자

송아지는 자꾸 어미 소 곁에서 뒷발로 버텼다

머리에 홍화씨만 한 뿔이 돋아 있다

열일곱에 여공이 된 큰언니가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를 타던 날도 그랬다

 

 

 

입동(立冬) 풍경

신창홍

 

산등성이 윤곽이 실낱처럼 열리면

작은 틈새로 쏟아지는 여명에 실려 온

새벽 창밖에 요란한 바람 소리

서둘러 도시의 거리로 스며들면

 

새벽을 여는 바쁜 발걸음들의

움츠러든 어깨에서 묻어나는 한기는

서리 맞은 풀잎으로 세안을 하듯

얼음 같은 냉기가 얼굴을 스치고

 

일상으로 지나치던 거리의 풍경들은

하루가 다르게 낯설게 변해가고

여기저기서 마른 낙엽 쓸리는 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거리에서 서글프다

 

,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끝에서

기억 속에 간직한 소중한 시간들은

아무도 원치 않은 겨울의 길목에서

긴 동면의 망각 속으로 스며들고

 

메마른 거리에서 느끼는 황량함은

한번 손대면 참기 어려운

완치되지 않는 마른 피부병처럼

스치는 얼굴마다 서늘하게 퍼져간다

 

 

 

 

입동(立冬)

심지향

 

간밤 찬 서리 하얗게 내리고

실개울 살얼음 깊었다고

아침 일찍부터 T.V 화면 가득

예쁜 여자가 큰 소리로 알리며

날씨가 추워지면 빠짐없이

보여주는 단골 그림

모닥불 앞에 모여 있는

새벽시장 상인들의

푸른 입김을 보여주고 있다

 

아침 햇살을 담뿍 짊어지고 앉아서

집 앞 공터에 쌓아놓은

폐자재더미 앞에

등이 검고 배가 하얀 도둑고양이

실눈을 가늘게 뜨고 열심히

세수를 하고 있다가

물끄러미 지켜보는 내 시선에

녀석도 나를 빤히 쳐다보며

내 마음을 읽는 눈치다

 

한참을 바라보던 녀석이

제 깐에도 적의가 없음을 알아차렸는지

검은 등을 한껏 구부렸다가

흰 배를 내 보이며 길게 기지개를 켠다

고양이 흰 배 밑에 눌려있던

겨울이 무릎 세우고 일어나는 날(立冬)

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가을의 뒷모습이 고양이 걸음으로

자재더미 모퉁이를 돌아 들어간다

 

 

 

입동 날 가을 들판

안영준

 

다랭이 밭 촘촘히 박아놓은

낱알 하나하나는 간신히 비집고 나와

봄부터 모진 풍파 견디고

땅 냄새 맡으며 새끼도 치고

열심히 잘 살아왔는데

주인장은 그 열매를 아기 때부터

좋아하더니 늙어질 때까지

몽땅 털어가고

몇 가닥 남은 이파리마저도 데친 듯

무서리 맞은 호박 넝쿨은

맥 빠져 축 처져 있다

굴곡진 논이랑에

허리춤이 꽁꽁 묶인 배추는

초라해져 서 있고

뽀얀 하반신을 감추고

서릿발 맞아 떨고 있는

무는 주인장 따스한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입동 날 되자마자

선 듯 오기가 민망했는지

무서리로 경고만 하고

겨울은 재 너머에 머뭇거린다

 

 

 

입동 아침

오정방

 

늦가을 끝자락에 입동이 찾아드니

가을은 떠날 채비 분주히 서두르고

자욱한 안개 속 아침 꿈속처럼 거닌다

 

 

 

입동(立冬)

오정방

 

긴 여름 짧은 가을

다 지나서 입동일세

 

인심은 변할지라도

절기만은 예대롤세

 

 

 

입동지절(立冬之節)

오정방

 

먼 산의 눈 소식이

바람결에 전해지고

수목들 옷을 벗고

겨울 차비 서두는데

아직도

가을을 잡고

놓지 않는 심사여!

 

 

 

입동

유안진

 

유랑하는 내 마음

기슭기슭에

무성히 우거진

탐욕의 잡초더미

 

젊은 날

비린내마저도

무찔러

 

절대의 왕국은

오고야 말았구나

 

그리스도

옛 애인이여

 

막달라 마리아의 상채기마다

눈바람이 일겠지요

얼음꽃도 피겠지요

 

그 얼마 뒤에

절대의 사랑은

불이 붙을까요.

 

 

 

입동

유창섭

 

1

살얼음 낀 내를 건너

하얀 산() 이끌고 오는 소리

밭은 기침하며 따라오던 바람도

옷을 갈아입는다

떡갈나무는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나선형으로 지는 낙엽과 작별을 고하고

추워, 추워, 오그라진 발 등위로

쏟아지는 석양 햇살 쌓아두고

그 빛 한 올씩 감아쥔 채

겨울잠을 위하여 뿌리로 내려간다

아직도 들판에서는

가는 바람과 오는 바람의 다툼이 계속되고

지켜보던 새들도

낯선 둥지 속으로 숨어 버렸다

온갖 사랑도 미움도 슬픔도 즐거움도

모두 꼬깃꼬깃 접어 넣고

아직도 겨울은 저 밖에 있는데

많은 생각 안고 있는 산()

떨고 있는 소리 들린다

짊어지고 오던

무거운 짐 다 내려놓고

단단한 마음으로 몸을 털며

겨울을 기다리는 나무들이 당당하다

 

 

2

입동 끝에 앉아 졸던 햇볕이

낙엽 위로 수북수북 쌓이고

그 위에 가을이

투명하게 서서 머무는 사이

떠나도 마음 가까운 사람

흰 서리 되어 다가온다

 

이제 하나둘

저승꽃 피는 세월

떠나며 남겨 놓은 길도

산허리에서 끊겨

잡목 숲에 눕고

너의 풋풋한 체취 남은 감나무엔

주렁주렁 매달린 감들이 고개 숙여

붉어 있다

 

하늘은 슬픔처럼 파랗기만 한데

개울가 너럭바위에

햇볕을 널어 말리고 있던

바람이 몸을 떨며 일어서고 있다

 

 

 

입동에 피는 꽃

유창섭

 

아득히 먼 발자국 소리

소란스럽던 낙엽 위로

하늘 가득한 은하수 쏟아져 내려 옵니다

밀폐된 고요와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모습

별 하나씩 머리에 꽂고

빨갛게 익은 가슴으로 서성이는 시간들이

서로 부딪치고 있습니다

저 어둠이야 시간이 지나면 걷히겠지만

마음 가득 고여있는 기다림이거나

풀릴 길 없는 그리움이거나

끝내 감출 수밖에 없는

텅 빈 마음에는

겨울만이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많은 세월 지나고

뒤늦게 돌아온 사람의 다 식은 가슴에 안겨

토라진 어느 누구의 마음이

밤 내내 떠돌다가

차가운 기억 감싸 안고 내려와

하얗게 서리꽃 피우는 것일까요

 

 

 

입동

윤보영

 

겨울이 시작되는

입동이다.

 

무를 뽑고

배추도 뽑아

김장을 담그는.

 

내 사랑도 시작이다

가을에 담아둔

따뜻한 생각으로

지금부터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그리움으로 시작이다.

 

 

 

입동(立冬)

윤효

 

바늘구멍에 황소바람

안방 문풍지 새로 바르고

 

들마루 놋요강

방안에 들이고

 

반짝반짝 윤내서

방안에 들이고

 

 

 

 

입동(立冬)

이계진

 

밤새 서리꽃이

굽은 골목에 펴고

고엽(枯葉)은 산 숲에

고단한 여정을 뉜다

 

장롱 속 겨울 내복이

가을의 체온을 덮고

신사동 우리 동네

낮은 언덕 담 너머

감나무 홍시 기다림

까치는 새별을 난다.

 

산다화(山茶花) 선 붉은 열정

마름달 11월 밭두둑을 넘고

매듭달 12월의 밭고랑을 지나

올해를 가득 채우는

 

입동(立冬)

입동(立動)이다.

 

 

 

입동 무렵

이기철

 

입동 가까운 계절에는 보이는 것 모두가 쓸쓸하고 애잔하다

저 북지장사 뒤란에 떨어지는 굴참나무 잎새에 뺨이라도 얻어맞으면

문득 너럭바위 딛고 넘어간 구름 그림자도 애처롭다

해는 노루 꼬리만큼 짧아지고 물소리는 새로 갈아놓은 부엌칼처럼 손에 시린데

어서 올라오라고 이승의 끝인 양 높고 아득한 팔공의 치맛자락에

오늘 듣지 않으면 영영 못 들을 깃이 따뜻한 산비둘기 울음소리

 

 

 

입동

이덕규

 

곡식 한 톨이라도

축내면 그만큼

사람이 굶는다

가을걷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빈손으로 떠난

오직 사람 아닌 것들의

안부가 궁금하다

 

 

 

입동

이덕수

 

창밖의 참새들이

찬 이슬 쪼고 있다.

깨지는 소리가

정갈하게 들리는

이슬마당에

오늘을 살아야 할

명리도 잊어버리고

쪼는 것만 바라보며

대신 살아 준

참새들에게 경배드렸다.

목 밑을 차오르는

슬픈 한기가 꿈틀거린다.

참새의 연민이었나

숨찬 박동이 터지려는 듯

격한 가시에 찔린 숨통이

울컥 터지려 한다.

참새가 감나무로

한숨에 뛰어오르자

설익은 온기를 달고

나르는 이른 나비들

여린 빛을 타고

문턱 사이로 슬며

비벼 들어 오는

겨울 꽃뱀 한 마리

들어오려면

한참은 걸리겠다

 

 

 

입동(立冬)

이도연

 

찬바람이 어스름 불어오는

계절이 오면

어머님의

벙어리 장갑이 생각난다

털실로 한 땀 한 땀

사랑의 코를 꿰어 만든

혹여 한 짝 잃어버릴까

장갑 두 개를 길게 연결하는 것도

잊지 않으신

어머님의 벙어리 장갑

벙어리 장갑 속에

꼬물거리고 모여 있는

손가락들

어머님의 사랑으로

서로의 살갗 부비며

겨울을 나던 추억의 그 시절

열 손가락 장갑이 멋있고 편해 보여

세월 지나 끼여 보니

모두가 제각각이더라

좁은 공간 꼬물거리며

모여 살던 그때가

훨씬 따듯 한 것을

세월 지나 알았으니

입동 즈음에

베갯머리

그리움에 눈물만 흐른다

 

 

 

입동

이명기

 

바람이 몹시 불어 코끝이 어는데,

빈손 쫙 펴들고 먼 곳을 배경으로 섰습니다.

다 쓰러진 세상엔 더 이상 흔들릴 것이 없습니다.

거울처럼 잘 닦여진 풍경 속으로 자꾸 얼굴 감추는 길을 갑니다.

이 길 끝에는 드문드문 까치밥이 어는

몇 채의 집과 샛강 건너 돌담을 쌓고,

저물 무렵엔 낮은 지붕 위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마을입니다.

몇 남은 잎에 내려온 햇살같이,

기다림이 끓고 있는 곳으로,

이제 한동안 당신을 만날 수 없음을 압니다.

 

 

 

입동

이상국

 

근대국을 끓여 먹고

마당의 어둠을 내다본다

근대국은 텁텁하고 또 쓸쓸하다

그 속에는 한여름 소나기와 자벌레의 고투와

밤하늘의 별빛이 들어 있다

비가 마당을 깨끗하게 쓸고 간 저녁

누군가 어둠을 바라보며 근대국을 먹는다는 것은

어딘가 깊은 곳을 건너간다는 것이다

 

 

 

입동 이후

이성선

 

가을 들판이 다 비었다.

바람만 찬란히 올 것이다.

 

내 마음도 다 비었다.

누가 또 올 것이냐.

 

저녁 하늘 산머리

기러기 몇 마리 날아간다.

 

그리운 사람아

내 빈 마음 들 끝으로

 

그대 새가 되어

언제 날아올 것이냐.

 

 

 

입동 저녁

이성선

 

벌레 소리 고이던 나무 허리가 움푹 패였다.

잎 없는 능선이 낮아져 그 아래 눕는다.

가지 하나가 팔을 벌여 내 집을 두드린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바라만 본다.

저문 시간이 고개 숙이고 마을을 서성거리고

그의 머리 위로 별이 벼꽃처럼 드물다.

낡은 문 창에 달빛이 조금씩 줄어든다.

달 내리는 소리가 마당을 지나 헛간에 머문다.

누군가 떠나고 난 자리가 세상보다 크고 깊다.

나무가 하늘에 기대어 우는 듯하다.

 

 

 

입동(立冬)

이성선

 

잎이 떨어지면 그 사람이 올까

첫눈이 내리면 그 사람이 올까

십일월 아침 하늘이 너무 맑아서

눈물 핑 돌아 하늘을 쳐다본다.

수척한 얼굴로 떠돌며

이 겨울에도 또 오지 않을 사람

 

 

 

입동

이성진

 

이별 이야기는 짧게 하자

가슴 언저리 치미는 못다 한 이야기

바람 따라 흐르는 낙엽에 실어 보내고

한 시절 잘 살다 간다는 붉은 눈물은

남은 자 그리움으로 닦아내면 그만

천금 같은 사랑도

껍데기 같은 외로움도

시절 인연으로 뚝 분질러버리고

오들오들 이빨 부딪치며

저 찬란한 나목으로 가는 의식

빠짐없이 속속들이 보자면

더는 무슨 이유나

덧붙임 말 필요하겠는가

부질없는 헛것 모두 털고

장자불와 참선의 길 들어서는데

 

 

 

입동

이영광

 

늘 추운 마을은 추위가 식구 같다

밥상머리 무릎 위에 파릇파릇 얼어 있다

국그릇 건드는 손끝에 토라져 있다

곰살궂게 수저에 엉긴 잔 얼음

된장국에 가만히 녹여본다

 

맞바람을 받으며 학교 가는 아이들

열없게 키만 쑥 자라 종아리가 펄럭인다

다 못 막을 바람이라 흙담벽은 머쓱하다

바람 드나들 적에 간간이 사람 그림자 얼씬거려

이웃집 늙은 아지매 동치미를 놓고 갔다

 

동치미 그 찬 것이 얼얼히 속을 뎁힌다

아버지처럼 일손을 놓고 툇마루에 기대자니

흙은 선산의 흙을 캐어 햇짚과 이겨 쓰고

그래 고친 아궁이는 참숯을 지피라신다

추녀 끝 옛날의 어느 말씀이

불을 보면 절하고 싶은 마음

 

화끈, 얼굴이 상하는데

기우뚱 세상을 지고 아, 등이 시리다

내게 못 견딜 추위가 있었던가

애송이 바람도 한나절 맨발로 건너는 입동

 

 

 

입동

이외수

 

달밤에는 모두가 집을 비운다

잠 못 들고

강물이 뜨락까지 밀려와

해바라기 마른 대궁을 흔들고 있다

밤 닭이 길게 울고

턱수염이 자라고

기침을 한다. 끊임없이

이 세상 꽃들이 모두 지거든

엽서라도 한 장 보내라던 그대

반은 잠들고 반은 깨어서

지금 쓸려가는 가랑잎 소리나 듣고 살자

나는 수첩에서 그대

주소 한 줄을 지운다

 

 

 

입동(立冬)

이창수

 

소나기 지나가고 물웅덩이가 남아 있네

물웅덩이 속으로 구름이 지나가네

구름 속으로 고추잠자리가 사라지네

말라붙은 흙 속으로 하늘이 사라지네

흙 속으로 사라진 하늘에서 개망초가 올라오네

개망초 위로 소나기와 구름과 고추잠자리가 지나가네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 첫눈이 내리네

 

 

 

입동(立冬)과 소설(小雪) 사이

이현우

 

입동(入冬)과 소설(小雪) 사이

이 산 저 산 단풍 들 때 비켜있던 갈참나무

서리꽃이 만발한 늦가을 숲속에서

다투어 홍장하고 적멸에 든다.

 

 

 

긴긴밤

이화숙

 

입동이 지나 겨울이 되니

밤이 꼬리를 치며 길어졌네

낮에 나뭇가지에 꺅꺅 지저대던 새들도

밤이 되니 어디로 날아갔는지

밤이 되니 고층빌딩도 날이 추워

입김이 끄륵끄륵 온몸이 비틀비틀 떤다

달도 추워 구름 뒤로 숨었는데

까마득한 어둠이 허공을 진동하네

해가 늦게 떠 밤이 길어지니

꾸역꾸역 잠만 쉬이 오네

늦잠꾸러기 되어 해가 동천에 떠 일어나니

긴긴밤 해묵은 꿈까지 꿔

해장국 먹는 아침에 새록새록 일룩이네.

 

 

 

입동(立冬)의 시

임강빈

 

땀 흘린 만큼 거두게 하소서

손에 쥐게 하소서

들판에

노적가리가 아직 남아있습니다

주먹을 피게 하소서

찬바람이 지나갑니다.

뒤돌아보는 지혜를 주소서

살아있다는 여유를 가르쳐 주소서

떨리는 마음에 불을 지펴 주소서

남은 해는 짧습니다

후회 없는 삶 이제부터라는 것을

마음 편안히 갖게 하소서

 

 

 

입동(立冬)

임석순

 

어제와 같은 시각

하루하루 시시각각 다르네

입동이 자리하니

가을이 힘없이 물러나 주고

가고 오는 이치 알기는 한다만

애닳는 서러움 어찌하랴!

 

꽃이 피는 봄날을 그렇게 좋아하고 좋았건만

여름의 시원한 그늘 찾아 계곡 찾아 즐겁고

가을이라 만산홍엽 눈이 호강하고 호사스러운데

 

이제,

두툼한 외투 챙겨볼까, 하와이로 떠나 볼까

 

같은 시각 보여주기 싫어서 어둠이 깔려 있고

같은 시각에 쌀쌀한 기운이 엄습하니 춥고 배고프고

같은 시각 어둠이 자리하고 떠나가려 하질 않으니

 

동장군이 겨울 문을 똑똑 두드리고 있으니

이제 혹독한 겨울 동장군 맞이할 준비해야겠네.

 

 

 

입동

장광규

 

24절기 중 19번째 절기

겨울의 문턱으로 접어든다는 입동

음력으로는 10월에

양력으론 11월 칠일이나 팔일 무렵

상강과 소설 사이에

태양의 황경이 225도일 때이다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나뭇잎

뒹구는 낙엽 위로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도 불어 쌀쌀함을 느낀다

비로소 물이 얼고

땅도 얼기 시작하는 기온이 되며

일부 지방에는 갈까마귀가 날아든다

입동 날 날씨를 보며

포근한 겨울일까 추운 겨울일까

다가올 날씨를 미리 점쳐보기도 한다

입동을 전후해 김장을 하며

서서히 월동준비를 하는 가운데

햇곡식으로 시루떡을 만들어

집안의 무사함에 감사드리고

하는 일이 잘되기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며

이웃과 나눠 먹는 풍습도 내려온다

 

 

 

입동

장문석

 

지금은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

한철 무성했던 자음일랑 저만치 떨궈내고

형형한 모음의 뼈대 몇 개만을 추슬러

한 그루 감태나무로 서야 할 때

문득 높바람은 눈시울을 씻어 가고

하늘 한복판 일필휘지로 날리는

기러기 떼의 서늘한 서한체

그 삐침과 파임에 골몰하여

밤늦도록 촛불을 밝혀야 할 때

, ,

조용히 나이테를 두드리며

한줄 한줄 일기를 써야 할 때

그렇게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

묵언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지금은

 

 

 

입동

장종섭

 

값이 비싼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겨울맞이는

몸도 마음도 따뜻하지만

 

숲속에서는

 

가을과 겨울이 동거하는

오 계절 속

새들의 눈동자에서

 

분가하여 떠나간

딸아이의 겨울이

걱정으로 다가옵니다

 

 

 

입동(立冬)인 오늘

전병일

 

겨울의 문턱

서산에 걸쳐있는 만추에

먼 산의 나무들은 옷을 벗어

산 아래로 달려온다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은

찬바람에 검붉게 농익어가고

집 모퉁이 소국은 활짝 웃어

물 만난 고기다

 

행랑채 가마솥에

메주콩 김이 서리고

감나무에 감들은

산까치 불러드린다

 

만추의 길목

고장도 없이

쉬지 않고 가는 세월

겨울 방 문턱을 넘었다

 

나목들은 음영의 나이테를 그리고

나도 주름살 하나 더하여

가는 세월 붙잡지 못하고

그냥 그 길 따라서 간다

 

 

 

입동(立冬) 앞에서

정군수

 

옷깃을 여미고

저무는 대지에 무릎을 꿇는다

거룩함이라 치장하던

이름도 벗어버리고

시들어 가는 것들의 사랑을 본다

찬란함도 날카로움도

침묵으로 드러눕는 산하 곁에서

따라 눕는다

가슴을 몰아쳐 오던

푸른 언어는 잠기어 가고

갈색의 위대함으로

세상을 보듬는다

백마처럼 눈을 몰고 올

계절 앞에서

들풀들이 뿌려놓은

씨앗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묵은 것을 베어버리고

신선하게 일어서는

낯익은 얼굴들을 기억한다

 

 

 

입동

정끝별

 

저리 홧홧한 감잎들

저리 소심히 분분한 은행잎들

저리 낮게 탄식하는 늙은 후박잎들

 

불꽃처럼 바스라지는

저 잎들 모아

갈든 마음에 담아두어야겠습니다

몸속부터 꼬숩습니다

 

 

 

입동

정상만

 

겨울로의 여행을 떠나 보렵니다

 

차가운 바람의 세상

초가집 지붕을 하얗게 덮은 서리

주렁주렁 매달린 고드름에 비친 햇살

그런 겨울로의 여행을 떠납니다

새하얀 면사포가 씌워지는 날이면

수줍은 새색시의 조용한 미소처럼

다소곳이 피어난 꽃 눈을 한 움큼 따다가

하늘 높이 휙 흩뿌리며 꽃 보라를 맞으렵니다

어린 시절 타고 놀던 썰매 하나 만들어

꽁꽁 얼어붙은 강가로 나가 보렵니다

 

모닥불에 감자도 굽고 고구마도 굽고

따끈한 국물에 어묵도 끓여가며

어린 시절의 세상으로 돌아가렵니다

어머니가 부르실 때까지 그렇게 놀아 보렵니다

놀다 지치면 따끈한 아랫목에서 곤한 잠을 청하렵니다

그렇게 추억 속의 겨울로

오늘 난 여행을 떠나렵니다

 

 

 

입동

정숙자

 

귀뚜리 그치고 북풍이 높다

이 밤에

국화꽃 아주 얼겠네

 

 

 

입동

정정우

 

님의 배추밭 위에 밤새 하얗게

내린 무서리는 아침 햇살에 반짝이고

 

밤새 찬바람과 사투를 벌이던

참나뭇잎 한닢 사뿐이 내려앉아

마지막 인사를 고한다.

 

바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시치미 뚝떼고 잎 떨어진

참나무 가지에 매달려 있고

 

햇살은 여전히 참나뭇닢 떨어지는

배추밭 위에 오롯이 내리쬐고 있다.

 

 

 

입동

정태중

 

빈 들녘이 초췌하다

여름을 지나오면서

뭇 것들의 짝짓기에 소란스러웠지만

벼들이 고개를 숙이며

볕 좋은 날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도

겸허히 생을 마감하는 것에 행복해했다

간혹 참새가 지나간 자리에

비둘기 한 마리 날아들지만

이내 다랑논에는 암탉이 헛기침하며

벼 이삭이라도 쫄 듯

발톱을 곧추세우며 뒷발질을 한다

골에는 이미 서리가 내렸고 살얼음이 판을 깔았다

입동이라는 말에 입이 얼고

바싹 마른 나뭇잎 뒤로 사시나무 눈치를 보고

북악산 기와집으로 날아간 비둘기에게

소식이나 물을 참인데

찬바람만 굳게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입동 무렵

최영숙

 

밤비 오려나...... 바람이

별들을 쓸고 가 버린 입동 무렵

연탄은 좀처럼 피지 않는다

한 장 또 한 장의 숯탄을

넣을 때마다 폐광처럼 아뜩한 누짐 속에서

단 한번의 불길이 확, 일었다 지고

잠시 밝은 매캐함이 눈을 아프게 한다

 

그렇다 두려운 것은 한밤의 냉기가

등골을 타고 내려오는 절망 때문이 아니다

나 이제 가보지 못한 겨울의 문을 열려 할 때

왜 지나간 추위는 따뜻하게 느껴지는지

가난했지만 두 손으로 받쳐 올리던 국물 사발과

서리김 사이로 보이던 그대 얼굴 있다

마음밭 서성임으로 주저했으나

 

저렇듯 불씨를 옮겨 붙이려고

먹탄 아래 여생의 캄캄함을 태우면서 혹은

스러지면서 혼자 가는 길 위에서

부르는 사랑노래 무섬증을 밀고 가다 보면

떨어져 쌓인 낙엽 무덤 속

두 발을 묻고 싶도록 환해 보일 때도

있는 것이다 밤비 오려는지

별 없는 하늘 고개를 들면

어딜까, 바람이 길을 트는

먼 나라 그 집.

 

 

 

입동(立冬) 무렵

최진연

 

그대 목소리는 산색(山色)처럼

또 한 번 변질할 것이다.

나날의 오랜 경작 끝에

뿔이 빠진 암소의 시간,

죽음이 비질해버린 가지 위에서

-, -, 울다 간 새의 둥지를

몇 오리 맴도는 햇살을 볼 때

그대 폐부를 울리는 딱한 기침은

먼 산의 늑골을 휘젓는 풍설(風雪)처럼

재발할 것이다.

은전(銀錢)을 흔드는 잎새들의 해안에서

율동(律動)하던 능선들이 발을 뻗고

그 위를 기어 넘는

검은 그림자

생애의 논밭을 건너오는 저녁

그대 건강한 목울대도

부어오를 것이다.

야망의 새 떼들이 날아간 가지 끝에

위태롭게 밀려와 걸리는

만삭의 구름,

저들이 우리 정원에 뿌리는 비는

니나노집 장단과는 다른 노래를 부르면서

현재의 꽃잎에도 젖어들 것이고,

간밤에 진 꽃잎에 묻혀

비에 젖는 곤충의

죽은 촉각이

또 한번 그대를

찔러 죽일 것이다.

욕망의 꿈틀대는 이랑을 갈다가

뿔 빠진 암소처럼

늙어버린 시간에.

 

 

 

입동 날에

최홍윤

 

1

첫새벽에

차를 기다리며

길섶 서릿발에다 오줌을 갈기는 사람도,

따끈한 자판기 커피 호호불던 사람도,

 

한 패는 봉고차에 오르고

다른 한 패는 시외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바삐 사라진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어린 시절 따개비처럼 붙어 살던

소꿉 친구의 전화를 받고

 

메주콩 쑤는 날 추억 간절하고

간장 달이는 냄새 풋풋한 묵정 밭에

까치밥만 남기고 감 따자고 했다

 

이제 가을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묵은 그리움만 싹 트는 입동날에

 

이제 우리는

다닥다닥 붙어 살기에 너무 늦은 나이

가지 많은 나무가 되어서도

 

, 그토록 그립다면

얼음장 밑에 흐르는 물소리로

모닥불 피워놓고

 

동해안에 지천인 양미리라도 구워놓고

떠나는 가을을 잔에 담아

서러운 술잔으로

() 한 수라도 건져 볼까?

 

 

2

친구야!

입동 날인데

이른 새벽, 차를 기다리며

서릿발 길섶에 오줌을 갈기던 사람도,

따끈한 자판기 커피 호호불던 사람도,

한 패는 봉고차를 타고

다른 한 패는 시외 버스에 올라

바삐 어디론가 휑하니 사라진다.

도둑이 제발 저리다고 했듯

어린 시절 따개비처럼 붙어 살던

소꼽친구의 전화를 받으니

매주콩 쑤던 날 간절 하고

간장 달이는 냄새 그립고

까치밥만 남기는 감따로 가자고 했다.

 

친구와 통화 하는 사이 가을은

어느새 내 기억의 저편으로 획 달아나고

묵은 그리움들 가슴 마다에 싹트는 입동날

그러나 우린 이미 다닥다닥 붙어

살기에는 늦은 나이

그러기엔 너무 가지많은 나무,

정 그토록 그립다면 친구야

얼음짝 밑에 흐르는 물소리 벗을 삼아

모닥불 피워 동해안에 지천인

양미리라도 구워 놓고

깊어가는 가을 밤에 아쉬움을 달래며

술잔이라도 기우려 보세

홍얼 홍얼 취해

수평선에 깜박이는 영롱한 별들과 함께

라도 하나 건져 보자구나.

가을은 어제밤 벌써 떠나버렸네!

친구야.

겨울 바다로 오시게!

 

 

 

입동 바람

하영순

 

바람이 분다

오는 곳도 가는 곳도 모르는 바람

그러나

여름바람 과 겨울바람은 맛이 다르다

초겨울 바람은 옷 속으로 찾아 든다

그래서

초겨울 감기에 걸리면 한 겨울 난다고

조심하란다.

어제 부는 바람

예쁜 단풍잎이 샘 났는지

나뭇가지에 앉아

더 잘 익고 예쁜 잎만 하나하나 따서

던지고 있다

바람아 그러지 않아도

서리 맞아 피멍든 나뭇잎

그냥 그대로 두면 어떠니

 

 

 

입동

한혜영

 

몸집에 비해 유난히 가느다란 다리로

삐뚤빼똘 궁둥이를 놀려대며 걸어가는

저런 닭들

어디서나 흔히 봤다

재래식 시장 혹은 유원지 화장실

늘어진 네 박자로 삐뚤빼똘 걸어가다

한 목청 쑥 뽑아 올리던 늙은 닭들

비로소 자유롭게 궁둥이 흔들어대며

떠나가는 닭들을 본 적이 아주 많다

깃 세울 일도

볏 세울 일도 더는 없는

털 반쯤이나 듬성듬성 빠져버린

저 닭!

저 붉은 털을 가진 단풍나무 뒤를

삐뚤빼똘 따라와서

나 오늘 아침 입동에 당도한다

무수한 닭들

지나가다 한 번쯤은 서성였을

 

 

 

입동은 지났습니다

허순성

 

늦가을, 이사 간 빈집

2층 창문의 창호지가 펄럭이던 걸 보는

어린 기억 속의 동무가 살아나, 혼자 울었습니다

열흘 여정의 끝, 인제 자작나무 숲에 뒹구는 늦가을처럼

 

허름하여

벌거벗은 노을에 고운 눈빛이 찾아온 날이었습니다

청춘을 낭비한 흔적 말고는

나누어줄 아무 없는, 허지만 야속히도

설레이는 마음도

보이지 못하고 돌려보낸 어제가 있어

무소식에 가슴 졸이는 오늘

보니까 입동도, 아흐레 전에 벌써 지났군요

 

마음 오가지 못하는 연유를, 이 깊은 시간에

매듭인지, 장벽인지도 모른 채 두드리느라

한 겹씩 더해지는 까만 밤을, 앉은뱅이로 당신을 향한 것이

이제는 새벽이 되어 갑니다

 

그 눈빛에게서

한 톨 마음 조각 바라느라, 아니

눈 속에 머문 잠깐의 현기증이었다 하여오는, 어느 답인들

하늘 추워지고

공원 벤치 사랑이 다 돌아가는 그때쯤, 나의 가을은

하얀 분 바르고 아무 곳, 아무 흔적 없이 녹아질 텐데 말입니다

이 너른 우주

늦가을 하나쯤 뭉개진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입동(立冬)

허형만

 

아파트 뒷산 오르는 길

찬 바람기가 코끝을 때린다

새들의 푸드덕거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운동복 차림의 낯익은 얼굴들도 줄어들었다

굴참나무 마른 잎 하나 참 먼 길을 왔는지

내 발아래에 와서 소리 없이 눕는다

그 이파리 일으켜 세워 손을 꼬옥 쥐고

생각한다 시간이란 참으로 신이 거느리시는 거라고

나보다 앞서 걷는 사람들

등짝으로 눈부신 한 생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나는 바짝 다가붙지 못하고

이만큼 떨어져 걸으며 한기로 몸을 떤다

나처럼 떨리는 시간도 있는 모양이다.

 

 

 

입동(立冬)에 부르는 노래

홍수희

 

겨울이 오려나 보다

그래, 이제

찬 바람도 불려나 보다

선뜻 화답(和答) 한 번 하지 못하는

벙어리 차디찬 냉가슴 위로

조금 있으면

희디흰 눈싸라기도

아프게 불어 제끼려나 보다

코트 깃을 여미고

멀어지는 너의 등 바라보며

쓸쓸히 찻잔이나 기울이고 있을 나

사랑은 소유가 아닌 까닭을

모를 리 없는 죄 많은 가슴

, 연약한 미련

장밋빛 뺨이 고운 그대여

너무 쉽게 왔다가 너무 쉽게

떠나갈 그대여!

다시 또 겨울이 오려나 보다

오거든 다시 가려나 보다

 

 

 

입동(立冬)

홍해리

 

1

온 세상이

빨갛게,

익은 것 보았습니다.

 

낙엽 깔린 스산한 길,

급하게 달려오는

칼 찬 장군의 말발굽 소리 들리고,

 

영혼의 밑바닥에

은빛 그리움을 채우고 있는,

 

흰 이빨 드러낸 나무들

가지마다 꿈을 안고

바위에 몸을 기대고 있습니다.

 

하늘도

!

소리를 내며

나지막이 걸려 있습니다.

 

 

2

어느새 잦아든 풀벌레 소리

가지 끝 말간 까치밥

 

바람 소리 서두는 귀갓길

나뭇잎들 모두 입적하시고

홀로 차는 빗소리.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