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小暑)
도종환 - 여름 일기
박성훈 - 소서
이병초 - 소서(小暑)
정학유 - 농가월령가 6월령
최영화 - 소서(小暑)
여름 일기
도종환
제주 송악산은 휴식년에 들어가고
배들은 태풍을 피해 항구로 몰려와 몸을 묶고 있는데
내륙은 불볕이다
역병으로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자기도 격리되어 있다가
간신히 살아난 이의 편지를 읽다가
잠시 안경을 내리고 창 너머 구름을 보고 있는데
정문 앞에 누굴 죽이라고 소리치는 노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몰려와 있다
다 작고한 전직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끝마다 핏발을 세우고
종편이 붉은 글씨로 화면을 덮는 동안
나이 사십이 넘도록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연극인이 고시원에서 죽은 지 닷새 만에 발견되었다
한 달 평균 수입이 삼십만 원이라고 했다
고시원 주인 여자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소리쳤다
낡고 오래된 고시원 벽을 타고 오르던
덩굴식물은 말라죽은 지 오래되었고
채송화 몇 포기 시멘트 바닥 사이로
안간힘을 쓰며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날도 비는 오지 않았다
왜 거기 가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논은 갈라지고
감자 잎은 오그라드는 몸을 펴보려고 바둥대는데
무기력한 날들만이 반복되었다
난세에 믿을 만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민들은
아무 데나 대고 욕을 하고
울화를 풀 길 없는 젊은이들은 점점 사나워지는데
소서 지나 초복이 멀지 않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배롱나무가
진분홍 꽃을 피우고 있는 게 대견하다
경멸과 상극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도
꽃을 피워야겠다는 마음이 가상하다
소서
박성훈
더운 때는
길을 떠나야 하는 때
흐르는 냇물처럼
조리조리 졸졸
꽃 같은 열망을 찾아
떠나야 하는 때
마음의 그림자를 저당 잡히고
흐르는 열풍 따라
우리의 고향으로 떠나야 하는지
삶의 지팡이 잡고
아리랑 굽이굽이
인생 열두 고개
사색으로 넘어야 하는 때
마중하는 이 없는
자국자국에는
일매진 풀 향기
이름 모를 벌레가
우짖는 여울 소리
소서(小暑)
이병초
공동변소같이 문짝이 다닥다닥 붙은 집에 방을
얻어 여름을 났다 해가 지면 쪽창 거미줄에
맺히는 음표들을 쇠추 달린 대저울로 달아서
치부책에 적듯 시간이 지져댄 오돌토돌한
흉터들을 곰곰이 만져보기도 했다
못 통을 찬 아버지는 민사재판에 이겼어도
갠 날이 없고 밥티 묻은 가지를 깨소금 장에
무친 걸 좋아했다 은행원들에게 점심 장사라도
허닝게 밥 먹는 줄 알라고 어머닌 자주 오 남매
입을 막았다 밤인 줄도 모르고 참매미 소리는
멀건 감자국 같이 흘러넘치고 내일까지 수업료
안 내면 제적이래요, 제적 이러면서 동생들
목소리도 흘러넘치고 공사장에서 철근을 멨던
내 몸엔 땀띠가 올랐다 밤하늘에 총총한
별들처럼 몸 아무 데서나 톡톡 쏘는 땀띠를,
기왓장 조각으로 긁어댔던 밤들을 닭
모가지처럼 확 비틀어버리고 싶었다
때론 흉터가 끼닛거리였다고 공동변소 같았던
날들을 돌아누워도 마음속 꽃눈 틔우다 덜 탄
토막들이 서걱거리며 별처럼 반짝였다
농가월령가(農家月令歌) 6월령
정학유
유월이라 계하되니 소서 대서 절기로다
대우도 시행하고 더위도 극심하다
초목이 무성하니 파리 모기 모여들고
평지에 물이 괴니 악마구리 소리 난다
봄보리 밀 귀리를 차례로 베어내고
늦은 콩, 팥, 조, 기장은 베기 전에 대우들여
지력을 쉬지 말고 극진히 다스리소
젊은이 하는 일이 기음매기 뿐이로다
논밭을 갊아 들어 삼사차 돌려 맬 제
그중에 면화밭은 인공이 더 드나니
틈틈이 나물밭도 북돋아 매 가꾸소
집터 울밑 돌아가며 잡풀을 없게 하소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할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좌차를 정한 후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 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메인 후에
청풍에 취포하니 잠시간 낙이로다
농부야 근심마라 수고하는 값이 있네
오조 이삭 청태콩이 어느 사이 익었구나
일로 보아 짐작하면 양식 걱정 오랠소냐
해진 후 돌아올 제 노래 끝에 웃음이라
애애한 저녁 내는 산촌에 잠겨 있고
월색은 몽롱하여 발길에 비치구나
늙은이 하는 일도 바이야 없을 소냐
이슬아침 외 따기와 뙤약볕에 보리 널기
그늘 곁에 누역 치기 창문 앞에 노 꼬기라
하다가 고달프면 목침 베고 허리 쉬움
북창풍에 잠이 드니 희황씨 적 백성이라
잠 깨어 바라보니 급한 비 지나가고
먼 나무에 쓰르라미 석양을 재촉한다
노파의 하는 일은 여러 가지 못하여도
묵은 솜 들고 앉아 알뜰히 피어내니
장마의 소일이요 낮잠자기 잊었도다
삼복은 속절이요 유두는 가일이라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가묘에 천신하고 한때 음식 즐겨보세
부녀는 헤피 마라 밀기울 한데 모아
누룩을 드리어라 유두국을 켜느니라
호박나물 가지김치 풋고추 양념하고
옥수수 새 맛으로 일 없는 이 먹여보소
장독을 살펴보아 제 맛을 잃지 말고
맑은 장 따로 모아 익는 족족 떠내어라
비 오면 덮어두고 독전을 정히 하소
남북촌 합력하여 삼구덩이 하여 보세
삼대를 베어 묶어 익게 쪄 벗기리라
고운 삼 길삼하고 굵은 삼 바 드리소
농가에 요긴키로 곡식과 같이 치네
산전 메밀 먼저 갈고 포전은 나중 갈소
소서(小暑)
최영화
소서 아니랄까 비 내린다
새 각시 모심으라지만
여름 장마
떠내려갈 시름 미루고
민어 고추장 국
허물없는 친구 마주 앉아
낙수 소리
앞산 피어오르는 비구름 타고
주거니 받거니
옛 얘기 기울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