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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穀雨)

Bollnow 2024. 7. 14. 12:44

고영민 곡우

권경업 - 곡우(穀雨)

권경업 - 곡우(穀雨) 무렵

권규미 곡우 무렵

권철 곡우(穀雨)

김선규 - 나들이

김영근 곡우(穀雨)

김영탁 - 곡우

김용원 - 곡우

김용화 - 곡우 단비

김유선 곡우(穀雨)

김윤자 보성 녹차밭 향기

김희 - 곡우

노향림 - 곡우사리

도종환 - 나뭇잎 꿈

류병구 - 곡우

맹문재 곡우 무렵

박신규 곡우

신화남 곡우 아침

안상학 - 곡우

양문규 - 곡우

오인태 - 곡우 무렵

윤석정 곡우(穀雨)

윤수아 곡우 계절의 길목에서

윤의섭 곡우 물(穀雨 水)

이로미 곡우(穀雨)

이문희 곡우(穀雨)

이민구 곡우 날에 비 내리고

이상국 - 성자(聖者)

이석구 곡우(穀雨)

이종숙 곡우

이희숙 - 풀섶에 누워 곡우(穀雨)에게

임희숙 - 마지막 곡우(穀雨)

장철문 - 곡우날 바람

정끝별 - 곡우(穀雨)

정우영 곡우

정종명 곡우 비

조민희 - 곡우(穀雨) 무렵의 시

조예린 - 곡우

최춘희 곡우(穀雨)

한인수 곡우 날에

홍수영 곡우 날 차잎

홍순천 - 곡우

홍윤표 - 봄 문 앞에서

 

 

 

곡우

고영민

 

날이 흐리다, 흐리고 비가 왔다

그사이 누가 다녀가셨나

흰 꽃은 피었다 졌네

마당엔 발자국

얼마나 주춤거리다가

대문을 들어섰는가, 그대는

널어놓은 검은 빨래를 누가 걷어 놓았을까

나 없이 볍씨를 담그고,

뜬 벼를 걷어내고

잠깐 시간이 남아

말없이 마루를 한 번 더 훔치고

돌아갔는가

지싯지싯 매운 내가 오르는

눅눅한 아궁이에

환한 등걸 하나를 지펴

깊숙이 질러놓고 곰곰,

구들을 밟아 떠났는가

이 저녁 나는

허공을 보고 이야기하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곡우(穀雨)

권경업

 

희끗희끗한 이 나이에, 다시

곡우(穀雨) 전의 쑥밭재와 마주앉았다

 

차마, 고백하지 못한

어린 날의 그때처럼

 

 

곡우(穀雨) 무렵

권경업

 

작지만 또렷한,

온 산자락 메아리로 떠도는

그리운 이름 부르는 소리

 

돌아오라 돌아오라는

장당골 자작나무

연둣빛 여린 손짓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곡우 무렵

권규미

 

전생의 시간들 아마도 분홍이었다

 

묵묵히 나를 업고 어르고 또 달래며 지난 생의 엄마처럼 아가야 아가야

황황한 햇빛 속을 서성이던 낙타,

그 부르튼 발 아래 가만히 떨구던 한 방울의 눈물도 분홍, 분홍이었다

 

심장에서 심장으로 쓸쓸히 자전하는 별의 은하와

아득히 먼 추운 나라의 음악처럼 말랑말랑한 네 맨발도 그랬다

 

처음 여덟 개의 음에서 시작되었다는 이 세계와 곡진한 연두의 세포들은

분화하고 연대하여 다시 꽃으로 오는 것인지

 

아득히 낡은 우주의 핏줄이 매미 울듯 팽팽해지는 신화 속의 시간이다

강가를 헤매는 오르페우스처럼 더듬더듬 그림자 따라 도는 저녁들

 

어둠 속의 마을도 잠시 분홍이 되는 적막과 적막 사이의 어슬 무렵,

벚나무 저 환한 광대들의 춤

 

 

 

곡우(穀雨)

권철

 

봄바람에 잉잉대는 창문넘어 신경성 이명이 들리고

아파트 화단에는 흰철쭉, 분홍철쭉, 붉은 철쭉이 활짝 피면서

벚꽃이 진 나무에 푸른 잎들이 산들거리는 사월의 중반에는

산에도 초록물결이 온누리에 펼쳐지고 햇볕마저 더웁다

 

 

 

나들이

김선규

 

소풍 가는 막내 위해 반찬 준비하고

쳐다본 앵두나무에 앵두꽃 피었다

살구나무 꽃꺼정 발그스레 흐드러져

마음 저절로 환해져 장독대 근처를

처녀처럼 애들처럼 괜히 기웃거린다.

청명 지난 곡우라 절기 맞춰 어제 내린

봄비 끝에 한층 파래진 널따란 하늘

누구 말마따나 쓸어봤자 티 하나 안 걸릴

이런 날 놓치고서야 은제 나들이하랴.

물레방앗간 거쳐 들길을 주욱 지나서

산 고개 넘으면 바다가 긴 은 모래밭.

그곳 향해 막내애 섞인 소학생들 뒤를

이만큼 일부러 처져 영구네와 걸었겠지

꽃밭이래도 좋을 길옆의 꽃다지 무리는

부러 건드리거나 더러는 따고

얘기풀 앞에선 한참을 섰기도 했거니

참으로 그렇다 영구네야 옛날 처녓적

물오른 우리들 여기 태연히 살았네.

그 얼굴 잃고 허겁지겁 까맣게 살다

겨우 찾아 낯선 듯 구경을 시방했구나.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곡우(穀雨)

김영근

 

모든 것에는 때가 있다

 

절기에 맞춰서 내리는 비

풍년을 기약하나니

 

좋구나

곡우에 인연의 연못 속에서

연꽃 하나 피워 올릴 수 있으니

 

서로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이

가난하지만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든든하구나

 

외로움은 반으로 나누고

즐거움은 서로 배가(倍加)시켜 주며

인생의 벗이 되어

살아가면

인연의 연못에

삶의 향기 가득하리.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곡우(穀雨)

김영탁

 

아이들이 사라진 후 애기똥풀만 지천이다

태어나야 할 아기들이

밥도 안 먹고,

이제는 꽃으로 태어나는지

 

오래전 지상에서 쓰러졌던

무명의 전사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지상의 풀처럼

더는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고

언제나 아침 인사처럼

늘 안녕을 묻는다

 

눈에 밟히는 푸르고 시린 신록이

지상의 어린 영혼들을 순하게 키우고

뻐꾸기 우는 귀울음에 더는 의심하지 말고

귀갓길에 볍씨를 보지 않기로 한다

 

 

 

곡우

김용원

 

아주 캄캄한 곳에서

한 사내가 울고 있다

빈약한 어깨를 들먹이면서

아까부터 흐느끼고 있다

사내의 젖은 눈물 줄기 안으로

보석보다 부신

불빛 한 점 익사하고 있다

익사한 별빛을 따라

비틀거리고 돌아가는

사내의 잿빛 가슴 위로

곡우의 가는 빗줄기

여리게 스미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곡우 단비

김용화

 

하늘이 때를 알아 비를 내리십니다

달팽이는 긴 뿔대를 세우고

가재는 바위를 굴리며

청개구리는 연잎 위에 알몸으로 무릎을 꿇고

물새는 수면을 차고 날며

잉어는 못 위로 뛰어올라

농부는 땅에 엎드려

온몸으로, 오시는 비를 마중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곡우(穀雨)

김유선

 

막내 이모 과수댁 텃밭에

애시시 비가 오신다

소리 없이 오지만 아침이면

온 동네가 수런댄다

슬픔이나 기쁨이나 사랑같이

적시고 가는 것들 다 같이 썩어

늙은 텃밭에 혼자서 피어나는 꽃이라고

투박해진 손으로 풋봄 일으켜 앉히는

이순 넘은 막내 이모

내 눈에는 여전히 복사빛 은은한데

이별 여행 온 나는

오지(奧地)의 텃밭에서

만남의 오지를 읽는다

비가 오신다

마음까지 만나야 직성 풀리는

맹춘(孟春)의 손길에

몸푼 들판 흐벅지게 누워 있고

이모는 적멸(寂滅)의 밭에서 흥건히 비를 맞고 있다

나 혼자만 비 피해서

숨어 있던 봄.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보성 녹차밭 향기

김윤자

 

여름 향기를 만나러 왔는데

첫사랑 여인을 찾아

녹차밭과 상록수 길을 거닐던

드라마 속의 한 남자

사랑의 향기를 만나러 왔는데

사람의 사랑보다 더 진한

차밭의 땀방울과

푸른 향기를 만난다.

이십 오년을 자식 기르듯

정성을 쏟은 재일교포의 손끝에서

해발 삼백 오십 미터 산기슭

아무도 돌보지 않던 볼모지 땅이

중국 용정차밭 못지 않은 고고함으로

풍요가 넘실대고 있다.

산중 대한 다업 주식회사

전남 보성 녹차밭

희망은 빈터에서도 피어오른다고

하늘 향기를 읊조리고 있다.

곡우에 따는 우전차와 세작 종작 대작

천상의 옥향을 물들이고 있다.

 

 

 

곡우

김희

 

봄비는

속적삼에 어리는 살빛 되어 온다.

조근조근 이야기하듯 온다

이 비 내려 자고 나면

성큼 초록에 가까워져 있을 나무들

시샘하듯 목련은 꽃눈을 틔우고

천지에 젖줄을 대는

슬하를 가진 비

 

 

 

곡우사리

노향림

 

곡우사리 때 저물녘

앞바다는 무료하다

벗은 옷 다시 입고 또 벗는다

 

불길한 꿈 슬금슬금 몰리는 압해도

 

서둘러 능선들이 어깨를 비비며

다가앉는

뱃길쯤에서

만나야 하리

 

지는 해를 몰고 와

쭈그려 앉은 수평선이

터져서

급류를 이룬다

 

시간은 곁눈질로 피해가고

허공에 깊숙이 찍어놓은

발자국을 캐는

괭이갈매기들

 

, 그 줄지어 선 그림자에 세상은

깊어만 가고

앞바다는 무료하다

입는 옷 벗고 또 벗은 옷

입는다

 

 

나뭇잎 꿈

도종환

 

나뭇잎은 사월에도

청명과 곡우 사이에

돋는 잎이 가장 맑다

연둣빛 잎 하나하나가

푸른 기쁨으로 흔들리고

경이로움으로 반짝인다

그런 나뭇잎들이

몽글몽글 돋아나며

새로워진 숲

그런 나무들이 모여

이루는 산은

어디를 옮겨놓아도

한 폭의 그림이다

혁명의 꿈을 접은 지는 오래지만

세상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버린 건 아니어서

새로운 세상이 온다면

꼭 사월 나뭇잎처럼

한순간에 세상을 바꾸고

사람을 바꾸었으면 싶다

이 세상 모든 나무들이

가지마다 빛나는 창을 들어

대지를 덮었던

죽음의 장막을 걷어내고 환호하듯

우리도

실의와 낙망을 걷어내고

사월 나뭇잎처럼

손사래 쳤으면 좋겠다

풋풋한 가슴으로

늘 새로 시작하는

나뭇잎의 마음으로

 

 

 

곡우(穀雨)

류병구

 

요 며칠 새

온통 벚꽃에 눈들을 파는 사이

고약한 황사에 데어 봄이 좀 눌었다

좁다란 가마니 속에서

긴 잠을 잔 씨나락이 졸음을 문 채,

솔가지 틈새로 늦봄 간을 본다

진달래가 참꽃을 흉내 내는 개꽃한테

온 산을 비워 주고

느릿느릿 퇴거짐을 꾸린다

해남 한듬산의

달착지근한 다래물 향에 취한

주말 봄밤

 

TV에서는

곡우 전날에, 꽤 많은 비가 내리겠다는

예보를 연신 내보내고 있다

글피가 삼짇날이다

 

 

 

곡우 무렵

맹문재

 

봄비가 나무처럼 걸어오네 볍씨가 사람처럼 반기네

 

비탈도 전봇대도 벽보도 봄비의 그림자를 가졌네

마을버스도 보도블록도 담벼락도 봄비의 신발을 신었네

골목도 과일가게도 플래카드도 봄비의 발걸음이네

 

공터도 작업복도 라디오의 목소리도 볍씨 냄새를 풍기네

고양이의 울음도 식탁도 새들도 볍씨 소리를 내네

우체국도 포장마차도 전철역도 볍씨 표정을 짓네

 

볍씨를 키우려고 도랑물이 흐르네

숲이 흔들리네

화단이 피고 지네

이끼와 민달팽이와 거미와 개미가 자라네

 

약국이 문을 여네

아이들이 뛰어가네

 

 

 

곡우

박신규

 

쏟은 꽃잎을 담을 수가 없었다

라면 두 박스를 쌓아놓고

자취방에 숨어 잠만 잤다

가랑비 그치는가, 서툴게

때를 놓친 꽃들이 서둘러 갔다

먼 데까지 실비가 내린다

 

 

 

곡우 아침

신화남

 

아직도 바람은 찬데

춘란의 꽃대

아무런 제재도 없이

활짝 피어

암향(暗香)을 풀어내었다

 

누가 그렇게 했는지

보기 좋게 24절기를 만들어

세상 사람에게 보여주고

산뻐꾸기 울 때를 기다려도

작설차의 구수한 내음

내 곁에 서성거렸다

 

곡우 아침

우전의 향그러움

빈방을 메우고도 남을 여운

난향과 함께 봄의 끝자락에서 반긴다

 

, 무정한 세월이여

이 봄이 가면 여름이 올지니

 

 

 

곡우

안상학

 

한 잔 술도 없이

곡우 전에 차를 따리라는 박 시인과 헤어지고

요 며칠 나는 마포나루 들락거리며 좀이 쑤셨네

곡우 비는 내리고 밤새 내리고

새벽잠 깨어 비워두고 온 안동 집 생각하네

텃밭 첫물 부추는 아직 첫물 그대로 비 맞고 있겠지

돌아오는 주말엔 안동 내려가서

친구들 불러 놓고 첫물 부추 잘라다가 전이라도 부쳐

막걸리나 한잔할까 생각하네

심장이 아프면 아픈 대로 사는 박 시인은 지금쯤

비 맞기 전에 딴 차를 덖으며

나 같은 것들에게나 나누어 줄 차를 손짐작으로 헤아리고 있겠지

올해 곡우에는 상추 한 포기도 심지 않고 보면

그다지 돌아올 소출도 없겠다는 생각에 적적해지네

적적해져 남몰래 마음에나 무언가 심는 시늉해 보네

 

 

 

곡우

양문규

 

청명과 입하 사이

곡비는 제 배설물을 빈 쌀독에 가득 채웠다

찰찰 찰거머리였다

눈과 코와 입이 까만,

몸 없는 바닥과 한 몸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다랑이논을 갈고 있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몸

삭은 작대기 같지만

마음은 빗물 따라 회전 중이다

저 뭉클한 땅의 맛

 

그때 나는 계곡을 휘돌아 나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였다

누가 저 물의 중심에 구멍을 내었을까

어떤 하루가 온몸으로 낸

뜨거운 사랑 또 하나의 길을 본다

 

누군가 구름 한 차 부려놓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또 다른 봄날이었다

 

 

 

곡우 무렵

오인태

 

몹시도

등이 허전한 날

 

누가 또 내 등 뒤에서

서성이다 떠나갔을까

 

앞에 마주한 사람은

얼굴 표정으로도

마음을 가늠하지만

 

늘 그랬다.

뒤에 있는 사람은

떠난 뒤에야

이렇게 등이 없는 듯 허전했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뒤를 돌아보면

내 생애의 뒤안이

누군가의 눈물에 젖어 있다.

 

, 꽃잎은 모두 지고

비가 오려나.

 

 

 

곡우(穀雨)

윤석정

 

그때 처음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다

오래 저장된 눈물이 있다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수도꼭지처럼 잠글 수 없는

 

잠든 아버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숨 막히는 병실을 빠져나와

복도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며

어머니 없이 입원한 아버지

더 늦기 전에 수술을 해야 했다

저물녘 나는 병실 앞 복도에 기대어

아버지 없이 못자리를 해야 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잠시 머뭇머뭇했더니

니 아부지 죽는다냐?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줄만 알았다

 

다 때가 있는 것인데

섣불리 목숨을 짐작했던 나는

가물던 마음을 들킨 듯

갑자기 울컥거렸고 몹시 요란했다

 

 

 

곡우(穀雨) - 계절의 길목에서

윤수아

 

비가 내린다

 

대지의 숨소리 가늘게 떨며

또 다른 계절의 시작을 알리는

빗소리와 조우(遭遇)한다

 

, 짧은 만남의 인연을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눈물로 뿌리며

백곡을 기름지게 하기 위한 몸부림

 

태양이 춘분점을 가로지르다

블랙홀에 속으로 추락하는 순간

난 미래를 위한 파종(播種)을 한다

 

내 마음엔 벌써

풍년이 든다

 

 

 

곡우 물(穀雨 水)

윤의섭

 

숲이 좋아

산에 들면

고요를 볼 수 있고

 

물이 좋아

계류 따라

여울 소리 듣네

 

심산유곡에

이름 모를 봄꽃이

미인 웃음 짓고

 

산다래 박달 수액(樹液)

곡우 물 한 잔 마시니

천하제일일세

 

 

 

곡우(穀雨)

이로미

 

종일 비가 내렸다 어젯밤부터

우수관을 타고 콸콸 흘러내리는 빗물 소리가

폭포수 같은 굉음을 내며

잠귀를 파고들어 꿈자리를 걷어냈다

남쪽 바다 흑산도 어디쯤 겨울을 보낸 조기가

격열비열도까지 올라오는 소리가 이와 같을까

북녘땅 용흥강 어디쯤 살진 숭어 떼가 산란을 위해

돌아오는 소리가 이와 같을까

오면 오나보다 할 일을

곡우에 내리는 비라니!

내 귀가 들으라고 굳이 소리 내어 말한다

빗줄기보다 먼저 알아차렸다

초저녁부터 뺨에 축축한 바람이 끼치고

코끝에 저 멀리 땅끝에서 올라온 흙내가 감돌았다

메마른 지표 밑에 잠들었던 미물들이

깊은숨을 몰아쉬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았다

마른 봄을 해갈시키며 이틀을 꼬박 쏟아진 비는

한 번밖에 오지 못할 이 봄을 만끽하는

꽃들을 돌아가게 하고 그 덕에

신록으로 갈아입은 나뭇가지는 가벼이 능청거린다

꾀죄죄했던 길가의 노란 팬지는

수분을 가득 머금은 채 살랑거리고

곡우에 모든 곡물들이 잠을 깬다고 믿는 곳도 있고

곡우에 비가 오면 농사를 망친다고 믿는 곳도 있으니

넓지도 않은 이 땅에서 어느 말이 맞을까 궁리하다가

비는 어느 장단이든 춤을 춰야겠구나 결론을 내리고

어쨌든 이날 부부가 잠자리를 하면 토신(土神)이 질투하여

쭉정이 농사를 짓게 만든다는 것만은 믿기로 한다

생명을 먹여 살리려면 하늘도 끝없이 조화를 부려야 할 테니까

가면 가나 보다 할 일을

비가 그쳤네!

내 귀가 들으라고 굳이 소리 내어 말한다

띄엄띄엄 서 있는 전봇대 사이로

늘어진 전깃줄을 타 넘으며

비늘구름이 묵은 시간을 거두어가고

서쪽 하늘에 쪽빛 노을이 번져오자

참새들은 일제히 높은 가지를 향해 날아오른다

비가 오고 가고

하루가 오고 가고

올 사람도 없는데 베란다 난간에서 맥없이

고개를 빼고 밖을 내다본다

 

청명(淸明)과 입하(立夏) 사이

지금 직립해 있는 곳이 딱 그 어디쯤

삼월과 오월 사이

그 어디쯤에서 나는 비를 맞고 서 있다

활짝 피어난 라일락꽃 향기 속에

젊은 날의 추억, 첫사랑, 우애, 우정, 아름다운 맹세 같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부하고 맥 빠진 단어들을 떠올리며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어본다

 

 

 

곡우{穀雨}

이문희

 

어김없이

잿빛 하늘에선

백곡을 기름지게 하는

꿈을 심는 봄비가 내린다.

 

온갖 씨앗이 잠에서 깨고

일년 농사에 가장 중요한

볍씨를 담그어 금줄을 치고

대 풍작을 기원한다.

 

가장 맛 좋은 영광굴비는

흑산도 연근해서 겨울을

보내고 북상한 조기 떼

곡우사리가 으뜸이란다.

 

아무리 온 세상이

코로나19에 어두어져 와도

겨우내 언 가지에서

연초록 희망이 싹터 오르듯

 

새 희망 꿈이 부푼

풍년 농사 기원하는 농. 어촌

물오른 농.어민 가슴에선

힘이 불끈 솟는다

 

 

 

곡우 날에 비 내리고

이민구

 

창문을 밀치니 봄바람 좋지만

처마를 돌아보니 봄비에 헐고

 

차를 달이니 병든 가슴 낫는 듯하고

술을 거르니 마음 속 근심 씻어지며

 

녹색 길가엔 여린 싹들 돋아나고

숲속 붉음에 잠시 향기 쏟아내네.

 

지금은 봄철 일이 너무 일러서

둥지 속 제비는 아직 바쁘지 않네.

 

 

 

성자(聖者)

이상국

 

곡우 무렵 산에 갔다가

고로쇠나무에 상처를 내고

피를 받아내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도

무엇이 모자라서 사람들은

나무의 몸에까지 손을 집어넣는 것인지,

능욕 같은 그 무엇이

몸을 뚫고 들어와

자신을 받아내는 동안

알몸에 크고 작은 물통을 차고

하늘을 우러르고 있는 그가

내게는 우주의 성자처럼 보였다

 

 

 

곡우(穀雨)

이석구

 

한눈에 들어오는 창문 밖 살구나무

저 살구나무 아래로 놀러가 연애하자

꽃들이 자꾸 피어서

다닥다닥 붙어서

 

새끼손가락만 한 가지를 덮어주어

만개한 꽃송이들 구름처럼 번진 의자

가볍게 신발을 벗고

백 년 동안 앉아보자

 

굵은 빗방울이 멈춘

푸른 그늘 저만치로

봄날이 가기 전에 애인을 기다리자

허공의 꽃 진 자리마다

풋살구가 열린다

 

 

 

곡우

이종숙

 

숲속에 봄비가 내려 청초함이 더하고

눈에 덮였던 고사리도 후럭후럭 자라서

여인네의 손길을 기다리며

 

곡우 날에 참새 혀끝만큼 자란

차의 눈앞을 따서 앞치마에 담아

살랑살랑 허리춤을 추는 여인네의 자태는

산비탈 언덕에 눈이 부신다.

 

자작나무줄기에 받은 부유스름하고

달보레한 수액은 여인네의 가슴에

막혀 있던 부유물을 청소해 주고

 

잠자는 씨앗을 깨워 침종하여

허한 들판에 꽃잎 날리듯 뿌리고

만물이 생장하여 파란 물감이 가득 차

드러나는 빛깔을 기다리면

 

촘촘히 내려는 곡우 날의 빗방울은

산에는 붓꽃이 들에는 봄맞이꽃이 피어나고

새들 활기차게 날아다니는

하얀 꿈 한 소쿠리

여인네의 가슴에 목화 꽃 피듯이 핀다

 

 

 

풀섶에 누워 곡우(穀雨)에게

이희숙

 

봄풀로 흔들린다, 곡우 풀섶에 누워

뿌리가 뻗어간다, 지하수 깊숙이

온몸으로 받아내는 햇살의 희열

들풀의 옛이야기에 귀를 모은다

 

풀이 자란다, 꿈이 자란다

내 머리 길이만큼 자란다

언젠가는 이 풀섶을 돋우어

숲을 이루리라

 

꿈의 숲이 흔들린다, 앙리 루소의

원근(遠近), 그늘도 없이

 

일순의 폭발음

 

숲이 잘리어 나간다

내 꿈의 파편, 파편들

온 사방으로 솟구친다

 

 

 

마지막 곡우(穀雨)

임희숙

 

청명을 지나 가랑가랑 봄비가 내리면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가 바구니에 따 넣는 찻잎이 있다 처녀의 흰 숨결에 놀라 화끈 달아오른 차나무 잎사귀, 무쇠솥에 쏟아 참선하며 덖었다는 여아차(女兒茶)를 마신 적이 있다

믿을 수 없겠지만 나도 그런 찻잎을 딴 적이 있었다 차나무의 뾰쪽한 입술을 톡톡 분질러 등과 가슴에 넣고 내려오면 푸른 잎사귀가 후후 내쉬는 숨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면 등허리와 젖무덤이 확확 데워져 온몸이 저리던 봄날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따 온 잎사귀를 방바닥에 펼쳐놓고 들숨만 쉬던 날이 있었다 간간이 찻잎의 세포 몇 개가 떨어져 방구석에 가 박혔다 세포의 색깔은 대물림되어 이불깃이 푸르게 물들었지만 차나무의 잎사귀는 열리지 않았다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마지막 곡우였다

 

 

 

곡우날 바람

장철문

 

곡웃날 바람 속에서는 취나물 냄새가 난다

물오른 낙엽송 칡덩굴 걷어 올린

산허리

보리 똥 이파리 빛을 뿜는데

산비알 너덜겅에서는 두릅 냄새가 난다

상고대 칼바람 스쳐 간 가지

새잎 돋는데

철쭉꽃 빛을 "뿜는데

골바람 속에서는 덤불흙 냄새가 난다.

고사리철 푸르른 산맥 뻗어간 산마루

단식 사흗날 같은 찰랑임으로

술렁이는

보리 똥 이파리 빛을 뿜는데

곡웃날 바람 속에서는 산 더덕 냄새가 난다

 

 

 

곡우(穀雨)

정끝별

 

산안개가 높아지니 벌레가 날아들었다

어치가 자주 울었고 나도 잠시 울었다

빛 짙고 소리 높고 기척 멀어졌다

질 것들 가고 날 것들 오면 잊히기도 하겠다

발 달린 것들 귀가 쫑긋해지고

발놀림도 분주해져 바깥 기웃대겠다

밥그릇에 밥풀도 잘 달라붙고

꽃가루에 묻어온 천식도 거풍되겠다

계절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간다

오는 서쪽 비에 가슴이 먼저 젖었으니

가는 동쪽 비에는 등이 먼저 마르겠다

저물녘이 자주 붉고 달무리도 넓어졌다

이제 젖은 발로 마른 길 갈 수 있겠다

 

 

 

곡우

정우영

 

봄비 그치자 아침 이내

포근포근 산자락을 감아돈다

느른하고 불안하다

이런 날이면 천산 누옥의 우리 어머니

육탈의 가벼운 몸 또 근질근질하실 게다

천명(天命)도 아랑곳없이 떨쳐 일어나

요정처럼 날래게 묵정밭 일구실 게다

어허, 저기

천산에서 뜯어 흩뿌리는 모정이

무지개 되어 훨훨 땅바닥에 날아내린다

눈이 부셔 차마 바라볼 수가 없다

너무 환해서 비릿한 눈물 번진다

 

 

 

곡우 비

정종명

 

다리에 힘이 덜 오른 새순이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을

두 손을 받치고 끙끙거리는데

새벽바람이 이상하다 했더니

사부작사부작 여린 잎새를

담금질하는 정렬의 비가 내린다

 

하늘 가득 흩날리던 뽀얀 가루에

숨쉬기조차 힘든 날들

세상 구경 나온 어린 새싹은

비염에 숨쉬기 힘겨운 아우성

달래려 조곤조곤 비가 내린다

 

마른 땅을 뚫고 올라온 어여쁜

몸매에 아련한 향기 풀어

벌 나비 불러 한바탕 춤사위

이마에 송골송골한 땀방울 씻겨주는

엄마 손 같은 사랑 비가 내린다

 

늪을 채워 지하 물길을 돌리고

웅덩이마다 가득가득 용수를 담아

오곡백과 씨 뿌림에 풍년 농사

밑거름의 생명수가 내린다

 

부지깽이도 꽂아 두면 새싹이

돋는다는 계절 풍요로운

결실의 날을 다듬어 간다

 

 

 

곡우(穀雨) 무렵의 시

조민희

 

튀는 팝콘 털어낸 듯

벚나무 시르죽고

생금 쏟던 개나리

회갈색 고요를 문다

자부름

무채색 감긴 날

주렴 엮는 잽싼 손놀림

보릿고개 넘기 겨울 때

면발 널린 국수공장

그 집 앞 지나면서

마른침 꿀꺽 삼켰지

어머니

말간 눈물이

접시꽃잎에 구른다

곧은 길 젖으며 걷던

트라이앵글 연주 멎자

뽀얀 안개 틈 비집고

방아깨비 파닥인다

한 발짝

앞질러 온 산

여린 부리 구름을 쪼고.......

 

 

 

곡우

조예린

 

동남풍 좋은 바람 서리 담가 둔

님 그린 눈물다이 맑은 청명주(淸明酒)

더운 피 품에 안아 술병 다숩고

뒷산 연한 죽순 뜯어 놓았네

산마다 산메나리

들엔 들메나리

 

흙 고무신 채마 밭엔 씨앗이 트고

곡우날 고마운 비 돌아오는데

하물며 그린 님도 정녕 오겠네

바라맞는 산마루엔 실아지랑이

아지랑이 뒷짐엔 짙오는 신록

 

님 그리는 믿음은 벌써 재 너머

꿈꾸는 사월 숲 넘쳐오는데,

 

동남풍 맑은 바람 좋은 청명주

대숲 연한 죽순 뜯어 놓았네

 

 

 

곡우(穀雨)

최춘희

 

봄 산부인과의 문이 열리고 닫힌다

만삭의 임부 커다랗게 부푼 배 앞으로 쑥 내밀고

햇빛에 눈부신 듯 차양을 하며

보도블록에 내려선다

모서리가 둥근 유모차에 이제 막 옹알이 시작한

아기 벙긋벙긋 무엇이 그리 좋은지

벌어진 목단이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나무들

수액 뿜어 올려 잎잎이 푸르고

산란기 맞아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누치떼

물차는 소리 귓속까지 환한

마음의 봄날

 

 

 

곡우 날에

한인수

 

산골짝에 따스한 곡우 날

. 빛이 내리쪼이니

 

개울물 흐르는 웅덩이에는

햇살을 받으며 노니는

피라미 물고기들 반짝거리고

 

산허리에 핀 철쭉꽃은

진달래 뒤를 이어 만발하니

 

바람은 솔솔 불고

뾰족이 나오는 새잎 새들은

너울대고 춤을 추네

 

바위에 걸터앉은 나그네는

너털웃음으로 답을 하고 있다

 

 

 

곡우 날 찻잎

홍수영

 

곡우 앞날까지 딴 찻잎에

우전 녹차 향이 배였다.

곡우 뒷날 딴 찻잎에는

작설 녹차 향이 배이겠다.

비오는 곡우 날 마시는 찻잎

풍년가 노랫소리 향기로 핀다.

 

 

 

곡우(穀雨)

홍순천

 

갓 올린 잎새를 달고 별 바라보던 가지 끝에

곡우(穀雨) 나리시면.....

겨우내 할퀴던 바람이 첫사랑의 숨결처럼 달콤하고

별빛 부서지던 잎새, 촉촉한 입술을 반긴다.

 

곡우 발길 아래서

부정한 사람은 악귀를 몰아내고

볍씨를 담그는 농부의 손은 조심스럽다.

 

곡우 나리시면

누이는 시집갈 날을 기다리며 볼을 붉히고

한숨에 주름 깊은 아버지 얼굴이 밝아졌다.

 

2004년에 나리시는 곡우는

모든 부정한 것을 몰아내고

누이의 볼처럼 발그레한 기쁨을

세상 가득 채우는 젖줄이었으면

,.......

좋겠다.

 

 

 

봄 문 앞에서

홍윤표

 

봄은 상냥한

얼굴로 다가오는 이름이여

땅속에 비밀을 퍼 올리는 펌프이며

목화솜보다 고운 여인의 숨결이여

안개꽃 한 아름 안고

표표히 걸어오는

봄은 나그네

나의 여인이여

살빛 살구빛 복사꽃밭을 찾아

사립문 여는 소리

휘어 넘는 저녁놀 은봉산에 누워

곡우(穀雨)의 창공을 나는

봄은 나그네

무수히 왔다 가는 나그네, 봄은

나의 여인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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