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淸明)
권경업 - 청명(淸明)
김경희 - 청명
김명인 - 청명에서 한식으로
김영랑 - 청명
김언희 – 청명
김용화 - 청명(淸明)
두목(杜牧) - 淸明(청명)
박경희 – 청명(淸明)
박덕중 - 청명
박만식 - 청명
석화(石華) - 청명 날에
손병흥 - 청명(淸明)
이상국 - 청명 한식(淸明 寒食)
이영광 - 청명
이재무 - 청명
장철문 - 낼모레 청명
전동균 - 청명
정희성 - 청명
최소영 - 청명 밥상
최소영 - 청명(淸明)
추영호 - 4월 청명의 봄은
홍해리 - 청명(淸明)
홍해리 – 청명시편(淸明詩篇)
청명(淸明)
권경업
숲이 되고 싶으세요?
써레봉 자락 새순 돋을 즈음
장당골 아직 아린 내(川)를
둥둥, 맨종이리로 건너보세요
누구라도 금방
무성한 숲 될 거예요
겨우내 얼어붙었던 탄성
절로 풀리며
청명
김경희
폭포져 폭포져 피어나는
싸리꽃 구릉 아래로 가면,
수만 송이 싸리꽃들이
한 송이 싸리꽃도
생각 말게 하는....
싸리꽃의 아름다움
오늘은 청명
금나비 흰나비 초록 벌레
은빛 나래 나래
강 너머로 붐비어 가고
이내 몸마져 비워지는
눈부심에 하늘이 깊다.
돌아오는 길엔
사탕 잠자리
끊어진 허리 하나 주워
풀잎 끝, 서역 천리
불어 보내주고.
꿈속인 듯.....
나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청명에서 한식으로
김명인
그대 어둠이 내게 짐 지운
슬픔의 빚이 남아
청명 날 아침 무덤 서늘히 솟아오른다
지나는 세월이여 새들이
그 곁에서 잠시 지저귀는 동안
우리는 너무 오래 살아왔구나
청명에서 한식으로 건너가며
아직도 내 부끄러움 그대 무덤 밖에 섰을 뿐
풀잎에는 이슬이 마르지 않는다
청명
김언희
입속에
새까만
염소똥이 굴러다닌다
막 이슬 마르는 햇무덤 속에선 버썩버썩 사과 깨무는 소리
죽음은 내 혀 밑에 있다
어린 고사리처럼
도르르르
말리어
있다
청명
김영랑
호르 호르르 호르르르 가을 아침
취여진 청명을 마시고 거닐면
수풀이 흐르르 벌레가 호르르르
청명은 내 머릿속 가슴속을 젖어 들어
발끝 손끝으로 새어 나가나니
온 살결 터럭끝은 모두 눈이요 입이라
나는 수풀의 정을 알 수 있고
벌레의 예지를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나도 이 아침 청명의
가장 고웁지 못한 노랫꾼이 된다
수풀과 벌레는 바고 깨인 어린애
밤새워 빨고도 이슬은 남았다
남았거든 나를 주라
나는 이 청명에도 주리나니
방에 문을 달고 벽을 향해 숨쉬지 않았느뇨
햇발이 처음 쏟아오아
청명은 갑자기 으리으리한 관을 쓴다
그때에 토록 하고 동백 한알은 빠지나니
오! 그 빛남 그 고요함
간밤에 하늘을 쫓긴 별상의 흐름이 저러했다
온 소리의 앞소리요
온 빛깔의 비롯이라
이 청명에 포근 축여진 내 마음
감각의 낯익은 고향을 찾았노라
평생 못 떠날 내 집을 들었노라
청명(淸明)
김용화
쟁깃날에 화들짝, 놀란
흙의 속살이
파헤쳐진다
잘 익은 쇠똥 냄새가 난다
잔등이 시린
실뱀
한 마리
파르르-
꼬리를 떨며
자꾸
흙더미 속을 파고든다
청명(淸明)
두목(杜牧)
淸明時節雨紛紛(청명시절우분분)
路上行人欲斷魂(노상행인욕단혼)
借問酒家何處有(차문주가하처유)
牧童遙指杏花村(목동요지행화촌)
청명이라 부슬부슬 비 내리자
나그네 외로워 마음까지 젖는다.
주막집이 어디쯤이냐 물으니
목동이 손가락으로 살구꽃 핀 마을을 가리킨다
청명(淸明)
박경희
옻 잘 타던 아버지 산 넘어 가신지 팔 년인데, 옻 안 타는 어머니가 걸리는 것 없다고, 냅다 옻 든 염색약을 머리에 바르고, 하얀 머리 흙 묻은 파 뿌리로 흔들며 방바닥을 돌아다녔다 가볍게 새소리도 치면서, 흘러가는 구름을 가릉가릉 목소리로 가르마를 타면서, 콧노래가 밭머리에 쌓아둔 돼지 똥거름에 부딪히는데, 방구들 귀신이라고 안중에도 없는 나는 뒤쫓아 다니며 걸레질이 바쁘고, 날도 잘 넘어간다고 까만 머리카락 꼬불거리며 한 달은 바람을 잘 스치겠다고 거울을 빤히 들여다보는데, 하필 오밤 중에 내 온몸에 옻꽃이 피어 환장하는 밤을 보내는데, 뭐가 그리 즐거우신지 웃으면서 잠꼬대하는 엄니, 참말로 소리라도 질러서 깨우고 싶은, 아주 진저리나게 온몸을 긁고 싶은, 구름 한 점 약이라면 좋을 것을, 그 한 점마저 떠먹을 수 없는 맑은 밤이다
청명
박덕중
두루미 한 마리
솔숲에 흰 백자기로 앉아
외로움 깨물더니
갑자기 하늘 그리움에 둥둥 뜨러라
북, 장구, 가야금, 거문고, 날라리 없이도
너울너울 춤을 추며
죽지에 쌓인 고뇌
허공에다 툭툭 털며
잘못 먹은 오염 물질
끼룩끼룩 토해 내며
농약 뿌리는 들판 우회하여
하늘길 가더라.
행여나 흰 옷깃 더럽힐까
높이높이 떠 가더라.
청명
박만식
왜식 역사(驛舍) 처마 밑에
흰 고무신 한 짝
빗물에 삭아가고
맵싸한 고추장 냄새 아리아리한
역전 상회 장독대 옆,
아침 햇살 담뿍 머금고
참새들과 숨바꼭질하다가
화물기차 지나는 소리에
하늘이 노래지며
화들짝 놀라 터지는
임피역 개나리꽃
청명(淸明)
손병흥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 지니고서
풍우가 심해 불을 금하고 찬밥 먹으며
풋나물과 산채를 먹던 풍습이 있던 날
농촌에선 이 날을 전후하여 가래질을 하거나
나무 심기에도 좋은 한 해 농사 준비하는 시기
그 해 날씨 좋으면 풍년이 든다는 속신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흉년 든다는 믿음 있었던 세시풍속
봄이 한창인 살구꽃이 무더기로 피어나는 무렵에
지상에 있던 신들이 모두 하늘로 올라간 날인지라
그냥 택일하지 않고서도 조상의 산소를 돌본다거나
손이 없는 날이기에 묘의 이장을 해도 좋다고 믿었던
한 해의 24절기 중에서 다섯 번째로 맞이한다는 명절
청명 한식(淸明 寒食)
이상국
청명 한식 배꽃 피면
물 건너 월리(月里)
경주 이씨 화수회 가셨다가
학도가를 부르며 오시거나
떡장거리 옥희 누나 시집가던 날
상객(上客) 갔다 오실 때처럼
도포 자락 펄럭이며
산굽이 돌아오시는
아버지
청명 날에
석화(石華)
술을 붓고 절을 하고 흙을 떠올리고
상돌 앞에 펑덩하니 앉아
담배 한 대 꼬나물다가 무심히
물오르는 나뭇가지에 앉아 바라보는
한 마리 참새와 두 눈을 마주치다
저렇게 바라보는 참새가 있는 것은
언제부터였을까고 생각하다가
친구가 건네주는 구운 참새를 안주하던
지난겨울의 늦은 저녁이 떠올라서
오늘이 청명 날임을 다시 느끼다
청명
이영광
1
한번 죽어 본 것들을
만난 적이 있으신지
돋아나는 새잎 같은 푸름도
시들어 떨어진다는 걸
알고도 피어나는
아아, 알고도 살아나는
어여쁘고 천진한 죽음을
맞은 적 있으신지
2
집중치료병동 앞에는 매점이 있고 주차장에는 검은 바퀴들이 구르고 육교는 공중을 걸어오고 식당은 밥을 하고 앓으면서 깨어나는 아픈 자들의 집, 색연필처럼 부르튼 꽃들, 생명이 아직 여기 붙어 있다 오늘이 청명이니께 내일이 한식이제 밭은 어야노 어떤 사활死活은 드디어 재활再活에 이르러 횔체어를 밀고 가는 노인이 휠체어에 앉은 노인에게 중얼거린다 그럼, 오늘 청명하고 말고..... 옹알이 같은 동문서답이 전력을 다해 지나가는 공중의 푸른 길, 링거병 아슬히 흔들리는 그곳은 식은 밥 한 그릇 따뜻이 올리고 싶다 그럼요 재활再活은 부활復活이고 말고요 내일이 한식이니까 오늘은 청명하고 말고요
청명
이재무
세 평도 안 되는 울안 한구석
똥들 쌓여 지독한 냄새,
등짝 빤질빤질한 쇠파리들 부르며
맹렬하게 독 한솥 끓이고 있는데
꺼먹돼지 한 마리
걸쭉한 국물에 밥찌꺼기가 담긴
여물통 하나 독차지하고 앉아
게걸스레 비우신 후 네 활개 펴고
한잠 길게 때리고 있는 게 아니신가
저걸 천하태평이라고 해야 하나,
무위도식, 맹목이라 해야 하나
미풍 잔가지 흔들며
하늘 청명하여 구름 한 점 없는데
가까운 미래 불운 따위
안중에도 없이 세상 모르게 잠든 돼지 앞에서
나도 어째 슬슬 눈가에 졸음기가 몰려와
졸졸 고이는 것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낼모레 청명
장철문
바람이 풀리고, 땅이 풀리고, 살이 풀려
해일 해일, 흘러넘치는
돌나물 돌나물 위에
시금치 위에
작년의 고추 밑동에
삼라(森羅)에 흘러넘치는
넘쳐
발이 푹푹 빠지는
푸륵푸륵 파도의 징검다리를
치고 가는 까치떼
청명
전동균
오동꽃이 피었다 마당에
가슴뼈 같은 줄을 내걸고 이불을 펼쳐 널었다
먹고살 생각, 여자 생각에 뒤척이던 밤들이 놀라 두리번대다가 이내 공손해진다
모든 빛을 삼키고 내뿜는 자줏빛 불이 타오른다는 건
흙들이 술렁인다는 것,
종달새가 울듯 이름 부를 신조차 없는 사람들 많아지고
살아서는 차마 못 잊힐 일들이
자꾸만 생겨난다는 건데
몸이랄 것도, 마음이랄 것도 없이
헐렁한 슬리퍼를 끌고 나와 먼지를 터는
나 같은 놈도 손님이라고
타닥타닥 반갑게 튀어 오르는 햇볕들
무슨 부끄러운 질문을 받은 양 좁은 마당은 일어섰다 누웠다 서성거린다
세상은 괜히 하늘 저켠에 닿을 듯 높아지고 높아져서
이사를 할까? 새장가를 들까?
망설이는 바람의 이파리들 사이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별 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조용한 웃음이 몇
얼룩처럼 번져오고
청명
정희성
황하도 맑아진다는 청명날
강머리에 나가 술을 마신다
봄도 오면 무엇하리
온 나라 저무느니
버드나무에 몸을 기대
머리칼 날려 강변에 서면
저물어 깊어가는 강물 위엔
아련하여라 술취한 눈에도
물 머금어 일렁이는 불빛
청명 밥상
최소영
목련꽃 봉오리에 꽃잎 차 우려내고
화전은 진달래꽃 쑥 뜯어 쑥버무리
두릅순 화살나무순 달래장에 비빔밥
청명(淸明)
최소영
춘분과 곡우 사이
일 년 중 가장 날이 맑다는 때,
오늘 하늘을 우러러보았는가
오늘 초록 내음 먹어 보았는가
부지깽이를 물에 담구어도
새순이 돋는다는 말이 들리고
태양의 황경이 15°에 있을 때
농부의 논밭둑 가래질은 시작된다.
온갖 봄꽃들 툭툭 피어오르고
초록 물드는 낮에 먹은 초록 계란찜
버드나무에도 물 오른 연두빛 수채화
청명한 하늘은 마음까지 맑아진다.
4월 청명의 봄은
추영호
4월 청명(淸明)의 봄은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있는가 봐요
산고(産苦)의 진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환하게 웃기만 하네요
새악시 버선코 같은 봄
겨우내 묵혀둔 그리움 들킬세라
밤사이 활짝 터트리고는
짓궂은 꽃샘추위에 화들짝하더니
가지 끝마다 빠끔히 고갤 내밀었네요.
날카로운 칼끝이 스치는 아픔쯤 될까
아님, 둔중한 송곳이 후비는 아픔쯤 될까
저 단단한 껍질을 뚫고 톡, 터지는 순간
흩뿌린 벚꽃 비 아래로
미선나무, 살구나무, 개나리꽃 나무
납작 엎드려 귀만 쫑긋 세운 노루귀까지
꽃 진 자리 두 번째 산통을 겪느라 아우성인데
천변 버들가지 끝에 수줍게 앉은 봄
엄마 품에 안긴 아이처럼 마냥 웃기만하네요.
청명(淸明)
홍해리
손가락만 한 매화 가지
뜰에 꽂은 지
몇 해가 지났던가
어느 날
밤늦게 돌아오니
마당 가득
눈이 내렸다
발자국 떼지 못하고
청맹과니
멍하니 서 있는데
길을 밝히는 소리
천지가 환하네.
청명시편(淸明詩篇)
홍해리
시의 첫 행을 찾아내듯
봄은 그렇게 온다
첫 행은 신의 선물이다
봄도 첫 행도 첫 입맞춤처럼 어렵게 온다
힘들게 와서 오히려 다디달다
신이 내려주는 은총일까
밤 새워 끙끙대며 애 낳는 일일까
헛구역질을 하다 하다 몸푼 아낙처럼
꼬물꼬물 기어다니는 첫 행을 본다
봉긋하다 탱탱 불어 터지는 꽃망울
자글자글 봄빛에 우우우 입을 벌리고 있다
달싹달싹 흙을 들어올리는 새싹처럼
생각 하나가 나를 밀어올리던 기억이 파랗다
반어법에 젖어 있고 역설에 능한 일상에서
동틀 무렵 젖몸살 앓는 바람은 묻고 있다
우리가 꿈꾸는 시는 어떤 것인가?
꿈 깨는 시?, 절절한 절정?, 만만한 바닥?
퇴고하듯 집수리를 하고 있는
까치 부부의 목청이 청아한 봄날
청명시편에 매달려 목이 멘다,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