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立春)
강민경 - 입춘
강세화 – 입춘
강순구 – 입춘
강연호 – 입춘
강자앤 – 입춘
고영민 – 입춘
고지영 – 입춘
공석진 - 입춘
곽재구 – 입춘 부근
곽종철 – 입춘
곽종철 – 입춘첩(立春帖)
곽진구 - 희망, 그 입춘 사이
구분옥 – 입춘
권오범 – 입춘 추위
권옥희 – 입춘에 내리는 비
권철 – 입춘
권철 – 입춘을 기다리며
김귀녀 – 입춘
김귀녀 – 입춘 너머
김길남 – 입춘 여행
김덕성 – 입춘
김덕성 – 입춘이 오는 날
김명배 – 입춘 시(立春 詩)
김병훈 – 입춘(立春)
김병훈 – 입춘대길
김상현 – 입춘(立春)
김석환 – 입춘, 어떤 밀애
김선우 – 입춘
김세영 – 입춘, 구룡마을
김안 – 입춘
김영길 – 입춘
김영주 – 당신의 입춘
김영천 – 가시나무 입춘
김윤배 - 입춘 이후
김은숙 – 입춘(立春) 무렵, 봄
김인호 – 입춘에
김정섭 – 봄(입춘)
김정수 – 입춘
김진학 – 입춘(立春)
김해인 – 입춘에
김향아 – 입춘
김희경 – 입춘
김희경 – 입춘대길
나상국 – 입춘
노금영 – 입춘
류동열 – 입춘
류윤모 – 입춘
목필균 – 난 지금 입덧 중 – 입춘(立春)
문시종 – 입춘
문시종 – 입춘 가까이
박광호 - 입춘
박라연 – 입춘
박목철 – 봄이 드는 날(立春)
박목철 – 입춘대길
박성우 - 입춘 윷판
박얼서 – 입춘 이야기
박영호 – 입춘 지나며
박인걸 – 입춘
박종영 - 입춘날에
박종영 – 입춘 날에는
박찬덕 – 봄의 전쟁
박형진 – 입춘 단상
박후식 – 입춘
박희자 – 입춘
박희진 – 입춘
배귀선 – 입춘
배한봉 - 입춘
백원기 – 입춘
백원기 – 입춘 맞이
복효근 – 입춘 무렵
서대선 – 입춘
설태수 – 입춘
성백군 – 입춘(立春)
성진명 - 입춘대길
성진수 – 입춘대길
손병흥 – 입춘
손병흥 – 입춘대길(立春大吉)
손병흥 – 입춘첩(立春帖)
송기홍 – 입춘
송진 – 입춘 다음 날
신석정 – 입춘
신지혜 - 입춘(立春)
심지향 – 입춘(立春)
신홍섭 – 입춘
안국훈 – 입춘 기도
안도현 – 입춘
안성덕 – 입춘
안영준 – 입춘 날 아침
안종환 – 입춘 절에
안희선 – 입춘(立春)
양성우 – 입춘(立春)
여관구 – 입춘(立春)
염경희 – 입춘 맞이
오보영 – 입춘(立春)
오보영 - 입춘(立春) 추위
오애숙 – 입춘
오애숙 – 입춘대길
오애숙 – 입춘 속에 피어나는 연가
오정방 – 입춘
오정방 – 입춘 무렵
오정방 – 입춘 소식
오정방 – 입춘(立春)에게 묻다
원영애 – 입춘
유승희 – 입춘
유응교 – 입춘
유창섭 – 입춘
윤보영 – 입춘
윤보영 – 입춘대길
윤석주 – 입춘 무렵
윤인환 - 입춘
윤재철 – 입춘
이길선 – 나의 입춘
이남일 – 입춘
이도연 – 입춘대길
이명순 – 입춘날
이사금 – 하색리의 입춘
이상목 – 입춘
이상원 – 입춘
이성희 – 입춘 강변
이영균 – 입춘
이영균 – 입춘(立春)에는
이인혁 – 입춘(立春) 손님
이재봉 – 입춘
이종환 – 입춘대길(立春大吉)
이창기 – 심경(心境) - 바람이 아직 차다고
이학주 – 입춘(立春) 추위
이한명 – 입춘
이해인 – 봄 일기 – 입춘에
이해인 – 입춘(立春)
이해인 – 입춘 일기
임동확 – 입춘 무렵
임재화 – 입춘 단상(斷想)
장광규 – 입춘
장석남 – 입춘
장석남 – 입춘 부근
장유정 - 입춘대길
장인성 – 입춘
장인성 – 입춘 꿈
장인성 – 입춘날의 기도
장종섭 – 입춘
장지연 – 당신의 입춘입니다
장진숙 – 입춘
장진숙 – 입춘서
장태윤 – 입춘
전병일 – 입춘
전영금 – 입춘 날
정군수 – 입춘
정미영 – 입춘
정민기 – 입춘
정민호 – 입춘(立春) 날
정약용 – 입춘 단상
정양 – 입춘
정연복 – 벗에게 쓰는 입춘 편지
정연복 – 아내의 입춘
정연복 – 애인에게 쓰는 입춘 편지
정연복 – 입춘
정연복 – 입춘대길(立春大吉)
정연복 – 입춘(立春)에 아들딸에게 주는 시
정연복 – 입춘의 기도
정연복 – 입춘의 노래
정연복 – 입춘의 사랑 노래
정연복 – 입춘 지나서
정연복 - 한겨울의 입춘(立春)
정이산 – 입춘 세레나데
정종명 – 입춘을 맞이하며
정찬열 – 입춘의 휘슬
정찬열 – 입춘첩의 소망
정태중 – 입춘
정호완 – 입춘 절에
정홍순 – 입춘 부고
조병화 – 입춘
조병화 – 입춘을 지나며
조성국 – 입춘 무렵
조연호 – 입춘 부근
조영순 – 입춘 예감
주응규 – 입춘(立春)
채린 – 입춘(立春)
최경신 – 입춘(立春)
최남균 - 입춘
최재환 – 입춘(立春) 무렵
최진연 – 입춘(立春)
최홍윤 – 2월의 입춘(立春)
최홍윤 - 입춘(立春)을 기다리며
하두자 – 입춘
하영순 - 입춘대길
하영순 – 입춘에 이어
허기숙 – 입춘
허수경 – 입춘
허윤정 – 입춘의 밤
허윤정 – 입춘(立春)의 햇살
허정인 – 입춘
홍경임 – 을유년 입춘날
홍신선 – 입춘 근방
홍재향 – 입춘(立春)
홍해리 - 입춘
입춘
강민경
내 고집만 세울 수도
그렇다고 양보할 수도 없으니
이를 어쩌나! 잔설 아직 녹지 않았는데
제 시절이라고 눈 밑에 숨겨진 씨앗 하나
두려움 없이
틔운 싹 수런거리는 담 밑에 푸른 생명
새 봄맞이 잔치 한참입니다
경칩 맞아 입 열린
개구리 울음소리 천지 사방 술렁여
봄소식 전하는 성숙한 소란에
여무는 밝고 신선한 햇볕
꽃샘바람의 시샘 따위는
두렵지 않습니다
흔들릴 염려 없는 여유로움
그 많은 변화에도
밝고 포근하여 저 할 일 잊은 적 없는
이력 일깨우는 침묵 속에 사계절이
뜨끈뜨끈한 햇빛의 참사랑을 안고 있습니다
담 밑 푸른 싹들
잔설 쫓는 볕 좋은 봄날
개구리 울음소리에 귀 기울이는
나를 봅니다
입춘(立春)
강세화
겨울 가뭄이 너무 오래다
오늘이 하마 입춘절(立春節)인데
어린 가지에는 단물이나 오르는지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고
전하는 소문마다 살만한 건 그예 없고
속앓이 풀릴 기미는 감감하고
바람도 가뭄 타서 뒷길로 분다
오늘이 하마 입춘절(立春節)인데
겨울 가뭄이 너무 오래다
입춘
강순구
쨍쨍쨍
봄 햇살이 새봄을 틔워주니
톡톡톡
들려온다 새싹이 트는 소리
똑똑똑
보슬보슬 비 매화꽃을 피운다
기나긴 겨울잠에 깨어난 산천초목
가지에 저마다의 이름을 붙여가며
희망의 나래 펴면서 노래한다 새봄을
입춘
강연호
멀리서 부음이 온다
죽음은 어제나 우연을 가장하고
삶의 모퉁이에서 문득 부딪쳐 온다지만
대길(大吉)이라더니
하지만 봄이 온다고 해서
어디 새순이 움트기만 하겠는가
입춘은 말하자면 생사의 엇갈림 같은 것
살얼음 채 녹지 않은 세상이
갑자기 고분고분하다
살인적인 속도로 달려온 덤프트럭이
등뼈를 곧추세워 짐을 부리듯
고분고분하다 짐이든 죄든 목숨이든
부리는 일은 이토록 고분고분하다
저만치 핏발 선 등불의 정육점에 펄럭이는
오늘 소 잡는 날
그 짐승도 고분고분했으리
입춘
강자앤
봄을 알리는
입춘
조용한 마음에
사랑 한 줌 던져주고
홀연히 떠나가는
겨울 이야기
파아란 하늘
부드러운 햇살에
아름다운 인연만
쌓았구나
조금씩
내미는 풀잎 따라
내 마음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샘솟네
입춘
고영민
봄은 오네
강가에는 한 무리의 철새가 모여 있네
모여 있는 곳으로 봄은 오네
강물은 반짝이고
흐름은 졸리네
한 구의 시신(屍身)을 끌고 오네
나는 열두 살
오후 세 시
입춘
고지영
동해바다 깊은 곳
고요한 이른 아침
물고기들이 분주하다
산통이 시작되었던 게지요
물결이 요동치고 선혈을 쏟아내며
마침내 태양을 해산한다
안개 속에 묻혀
형체도 알 수 없는 산사
이제사 얼굴을 내민다
계곡물은 흐르고
홍매화 보고픈 산새들
찌든 날개 털어내며 몸단장한다
눈꽃 핀 가지 속에서도
계절은 다 읽고 있나 보다
선대가 그랬고 그 선대가 그랬듯이
연약한 촉으로
딱딱한 등피를 밀어 올리고 있다
찢어진 아픔 생피가 터진다
세상이 밝아지고 그렇게도 보고픈
빨간 움 하나 틔운다
입춘
공석진
입춘이란다
무심한 짧은 치마는
한파를 비웃고
쇼윈도 마네킹은
화려한 꽃무늬로
입춘을 반긴다만
폭설로 고개 넘기를 포기하고
먼길을 우회하는 심정은
어쩔 것이냐
서울역 행려병자의
객사하는 산송장을 옆에 두고
속없는 세상
사람들의 봄 타령은 어쩔 것이냐
입춘이란다
체감하기 어려운 봄은
다가오는데
내 마음의 한파는
도무지 풀릴 줄 모르는데
입춘이란다
입춘 부근
곽재구
백련사 입구 산다화꽃 눈밭 위에 피 뿌렸습니다
겨울 산바람 다산화사(茶山花史) 몇 구절 읊으며 만덕산 넘어갔습니다
세상은 시끄러워서 눈 속에 핀 꽃 한 송이 새겨 볼 틈 없습니다
3공 4공 5공 6공 끝없이 이어지는 곰팡이들의 행렬 속에서
그 옛날 소 뺏기고 절양(絶陽)한 농투사니 부처 하나 떠오릅니다
울먹이며 휘두른 피 묻은 조선낫 하나 말없이 그리워집니다
입춘(立春)
곽종철
앞산이 기지개 켜는 소리
만물이 잠 깨는 소리
들리는 사람은 다 들릴걸
계곡에 물 흐르는 소리
나뭇가지에 잎망울 피는 소리
봄 오는 소리 다 들리네.
봄 오는 소리에
겨우내 움츠렸던 그대 가슴에
봄 향기가 가득했으면 좋겠네
청춘을 알리는 첫 절기
내 삶의 향기도 또다시
솔솔 피어났으면 좋으련만
입춘첩(立春帖)
곽종철
이리도 추운데
아니, 눈 와 겨울이 한창인데
봄은 멀지 않은 듯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새봄을 맞이하는 정성으로
입춘첩을 챙겨보네
“입춘첩을 붙이면 굿 한번 하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대는 손수 붓글씨로 정성껏 써 주고
(立春大吉, 建陽多慶)
대문에 붙이기를 이십 년
올해는 아직도 오지를 않네
하늘나라에서 여기까지
꽤 여러 날이 걸리나 보다
입춘첩을 새로 쓰고
입춘방(立春榜) 부친다
남북한이 화목하여
나라가 태평하고
폭우 태풍 비켜가서
재해 없는 한 해 되어
온 세상을 넉넉하게 해주소서
오늘은 입춘 전날,
절분(節分)이 다가오니
콩 뿌리고 귀신 쫓는
해넘이라도 하면서
새해를 맞이해야겠네
그대는 늦었다고 소식 전 해주려나
희망, 그 입춘 사이
곽진구
겨울 내내 낡은 양철지붕은
펑펑 쏟아붓는 함박눈을
잔치 집
밥상처럼 느긋이 먹어 치우고선
입을 쓱쓱 닦고
그 자리에
하늘빛 고드름을 내어 달아
열두 가얏고 소리를
낙숫물과 함께 참 이쁘게 그려냈는데,
그 소리엔 막 글을 깨친
첫째의 책 읽는 소리도 함께 섞여 있어서
하루종일
듣기가 여간 좋은 게 아니었다
이런 날은 으레 일도 없이
빈둥빈둥 천장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나에게
그런 소리를
소중히 나누어 들으라고,
아내는
나를 무릎에 뉘여놓고
오래도록
귓밥을 파 주고 있었다
입춘
구분옥
한파를 몰고 온 동장군
대관령 고개 넘어
꼬리를 감췄다
긴 나목의 어깨
겨우살이가 둥지 틀고
보초를 선다
잔설 틈
복수초 고개 내밀고
봄을 부른다
봄바람 분다
열아홉 목련 가슴
부풀어 올랐다
길가는 나그네
멈추는 시선
봄,
봄,
봄.
입춘 추위
권오범
평년보다 유별나게 행세했던 동장군
제 기념일인 대한도 모른 채 한눈팔아
꼬리를 사리나 싶더니
그러면 그렇지
제 성깔 남 주랴
정상적으로 오르내리던 온도계 혈압이
봄의 문턱에서
지하로 급격히 추락해
온기 사라진 살벌한 세상
계절도 시기가 만만찮아
호락호락한 봄에게
그렇게 쉽사리
자리 비켜주기가 싫은 게야
다짜고짜 다가와 주물러 대는
뻔뻔스런 봄의 끄나풀 아양 못 이겨
제풀에 지쳐 스러지는 그 날까지
또, 얼마나 발악을 할는지
입춘에 내리는 비
권옥희
겨울 죽이고
나도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죽여도
말 못 할 비가 와서
새벽도 죽이고
단숨에 심장을 찍어
눈꺼풀 쓸어 덮으며
진눈깨비 널브러진 새길 위
몇 개의 관을 준비해야 할지
아직도 장의 절차는 끝나지 않았는데
도처에서 조문객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말 못 할 비는 온다
와서 날 죽이고 또 죽인다
입춘
권철
어디서 불붙는 눈물인가
입춘이 불어가는 못마땅함인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물어뜯고
사랑해주는 절실함인가
시가 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처럼
괴로운건 없다
오늘은 일어나자 마자 씻고
또 보일러를 켜고
또 잤다
입춘을 기다리며
권철
몸 따뜻하고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날
커피를 한잔 한다
간혹 들리는 이명
바깥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
군자란 꽃대가
대한 추위에 새까맣게 얼어 죽었는데
난초는 물만 머금네
입춘
김귀녀
오늘도 살얼음판을
아슬아슬하게 건너갔다
걱정거리가 없는 날은 언제일까
부족함을 느끼지 않은 날은 언제일까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한 걸음 내딛는 길이 모두 빙판이었다
결국 인생은
길을 찾아가는 일일 뿐인데
새해를 맞고 봄을 맞는다
불안에서 평안으로 바꾸어지고
주님과 함께하는
또 한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입춘 너머
김귀녀
남편은, 남향받이
창문 앞을 참 좋아한다
외출했다 돌아와
마당가로 나가 기둥 모서리에서
고개를 갸웃하면
남향으로 된 창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싸리나무로 윷을 다듬거나
책을 읽고 있다가
응- 왔어?
찬바람도 비켜 가는
흙집 토담 창가에, 하얀 웃음
입안이 빛으로 가득하다
환하다. 밝다
입춘 여행
김길남
눈 속에 몰래몰래 피어나는
동백을 보았습니다
눈이 녹으려니
여기저기 처참히도
시체가 된 동백입니다
동네방네 밭두렁엔
새봄이 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눈 속에서도 보릿잎과 시금치와
갓과 봄동이 새파랗게 떨면서도
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 산은 갈색 옷 벗고서
초록 빛 옷을 갈아입으려는지
쳐다보는 눈과 귀는
지나가는 바람에 얼었습니다
손을 내밀자니
손이 틀까 봐 겁이 납니다
입춘
김덕성
오늘
그대가 오신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는구려
미련 없이 떠난
그대이기에
예전처럼 곱게
미소를 띠며 오시겠지요
깨끗이 비워 놓은
산과 들이니
레드 카펫은 아니지만
햇볕을 받으며 어서 오시옵소서
그대 오시는 날
맨발로 뛰어나가
두 팔을 벌려 포옹하리이다.
봄이여
입춘이 오는 날
김덕성
한파는
그 꼴을 볼 수 없다는 듯이
앞질러 봄 길을 막았다
이리 일찍 자리를 내 줄 수 없다고
아니 내 자리를
왜 빼앗으려는가고
서슬이 퍼래 대항하듯이
찬 바람 몰아치며 꽁꽁 얼어붙었다
봄은 저만치에서 서성거리고
한파는 기승을 부리는데
시인들 가슴서는
봄 향기로 향기롭게 피어오르는
시의 향기
입춘 시(立春 詩)
김명배
바람이 분다.
구석구석 뚫는 작은
모음(母音)들
발자국 밑에도 푸른
단모음(單母音)의 아우성이 있다
술래야, 술래야.
산맥(山脈)이며 저녁노을
구겨진
원경(遠景)을 끌고 가는
기러기 떼,
그 뒷줄에
콘크리트 벽(壁)을 뚫는 작은
모음(母音)이 보인다
술래야, 술래야
입춘(立春)
김병훈
입춘(立春)은
봄의 시작이 아니라
깊이 잠든 봄을 깨우는
알람 시계의 멜로디일 뿐
입춘대길
김병훈
입춘은 봄의 발바닥
수술실의 피와 실밥을 먹고 자란
나는 입춘을 봄의 발바닥이라고 생각한다
입춘대길은 봄의 족저근막염
인공관절로 묶인 영혼으로 걷는 나는
입춘대길을 봄의 족저근막염이라고 생각한다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은
붓으로 섬세하게 터치하며
찌릿한 봄의 발바닥을 치료해준다
입춘(立春)
김상현
까치가 물고 온 아침
받아먹으려
입 벌리는 목련
오늘은 두 송이가 더 피었네
꽃송이 세어보다
방에 들어서니
어느 틈에 묻혀 온 봄기운에
가리개에서도
매화 꽃망울 터질려나
까치 소리 다시 듣고
꽃 다시 보고 싶어
정화수 길어내어
귀도 씻고 눈도 씻고
입춘, 어떤 밀애
김석환
아직 시린 달빛에 살얼음이
풀린다 처녀 귀신이 산다는
연못 둘레를 서성이며 겨우내
못다 부른 누구의 노래
대신 불러 주던 미루나무
거꾸로 잠긴 제 그림자를 옮긴다
정면으로 달을 맞이하리라
불덩이에 온몸을 던지리라
묵은 빨래처럼 얼음장 아래 감추어 둔
뉘우침과 기다림의 흔적을 지운다
그 미동에 놀라 멈칫거리던 달
휴, 참던 입김을 토해 놓는다
못물 깊이 불려 들어간
산짐승 아가들의 삭은 뼈들
울음소리가 이제 물관을 타고
오를 거라고 가지 끝마다
연둣빛 혀가 돋아날 거라고
숨죽이며 다가서는 달
발자국 소리에 이는 물무늬
수장된 시간의 굴곡들을
지켜보다 당황한 산
뿌리부터 이마까지 흔들린다
입춘
김선우
아이를 갖고 싶어
새로이 숨 쉬는 법을 배워가는
바다풀 같은 어린 생명을 위해
숨을 나누어 갖는
둥근 배를 갖고 싶어
내 몸속에 자라는 또 한 생명을 위해
밥과 국물을 나누어 먹고
넘치지 않을 만큼 쉬며
말을 나누고
말로 다 못 하면 몸으로 나누면서
속살 하얀 자갈들
두런두런 몸 부대끼며 자라는 마을 입구
우물 속 어룽지는 별빛을 모아
치마폭에 감싸 안는 태몽의 한낮이면
먼 들판 지천으로 퍼지는
애기똥풀 냄새
입춘, 구룡마을*
김세영
창자가 쏟아져 나온 초식동물이
얕은 숨 몰아쉬며, 산 밑에 웅크리고 있다
손바닥이 따스한 햇살이
구절양장, 막다른 골목까지 헤집고 다니다
쪽마루의 으스러진 무르팍을 만져주고 있다
마을의 파수꾼 길고양이가
구들장 댓돌 위에 꼬리를 감고 앉아서
닫힌 방문 쪽으로 귀를 쫑긋 세운다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찢어진 창호지와 벌어진 문짝 틈 사이로
찐득한 가래로 흘러나온다
마을 개가 보고도 짖지 않는
발바닥이 따뜻한 사람이
연탄재 깔린 골목길을 얼쩡거린다
얼른,
꽃신 신고 나으라고
산수유꽃 몇 잎, 댓돌 위
신발 속에 담아놓는다.
*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에 위치한 구룡산 아래의 판자촌 마을
입춘
김안
이념도 없고 분도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워서 봄이다
까마득한 크레인 위에서 겨우내 사람들이 얼어갔고, 젊은 청년들이 자꾸 죽었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들과 어깨 겯지르고 같이 취해 나뒹굴며 황망하게 흘러 다니다 보니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고 사무실에 앉아 버려져 가는 반쪽짜리 노동이 되었다
나는 버려지기가 무서운 것일까. 그래서 착한 척이나 하는 것일까, 하다가
그저 밤늦도록 취하게 좋으니 봄이다. 가끔 술에 취해 전화하는, 지금은 꽤 잘산다는 친구를 생각한다. 그 친구의 꿈은 아직 시인일까? 내가 생각한 것은 이따위 것이 아니었다. 나나 그 친구나 포즈만을 꿈꾸었구나.
어리석어도 발랄하니 봄이다. 더더 취하고 추하고 발랄해지자. 취해 더러워지니 봄이다. 부풀어 오르는 것은 꽃봉오리만이 아니다. 흘러내리는 것은 마음의 고름만이 아니다.
발랄하게 터져버리는, 뿌리는 겨울에 둔 채 피어난 섣달 홍매화처럼
봄이 오면
부끄러움 없는 생활이,
술에 취해 급작스레 네게 전화하리라
선뜻 더러워지리라
입춘
김영길
새해 새봄의 날이 시작 날 입춘이라 한다.
올해 겨울이 유난히도 추워 한강 물이 수년
만에 꽁꽁 얼어 한강의 유람선도 얼음과
스크류가 충돌하여 침몰하는 사고가 났다
말은 봄이 시작되는 봄의 첫걸음이라지만
아직은 한겨울의 영하의 매서운 날씨가
물러가기 싫은 듯 폭 넓게 면적을 자리 잡고
겨울의 미련에 발길을 멈추고 있다
그러나 자연의 법칙은 순리 따라 진행되어
천지지간 만물지중이 자연의 순수와 진실의
흐름에는 거역할 수 없는 순리의 법칙이
흐르고 도는 이치와 의미를 알고 있는지라
저 멀리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훈풍의
바람에 공중에 넓은 면적을 자리 잡고
버티고 서 있는 찬 공기도 춘풍의 봄바람에
못 견디고 살아질 것이다
당신의 입춘
김영주
입춘 봄의 길목은
추웠다
이 강산이 해산하는
소리 속에서 당신의 음성이
고향을 찾았음을 알았습니다
육 남매 텃밭에 숨어드는
향기 당신의 담소가
윷판을 들고 있는 모습
구들장이 달궈진 아랫목에
기대어 설음식을 뒤척이던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 좋아하는 조기 뒤집는 속도에
파릇한 입술이 떨리던 덕담이
그리워지는 밤
엄습하는 복고풍이 화병의
꽃을 피우는 눈물 창가의
성애로 화목을 설교하였으며
기쁨의 미소로 윷을 던지던
당신 깍쟁이는 덩그러니
글러 잡지의 엉덩이를 붙잡고
있으니
가고 없는 세월 설날의 풍경화는
텅 빈 자리에서 붓을 내려
놓는구려
당신의 설 구수한 지도력은
올봄에는 보지 못할 꽃이라
여기니
눈물이 시냇물을 이루고
강둑을 넘어 바다로 향하는
어귀마다 자식들의 꽃을 바라보며
만개함을 축원하겠죠
부족하고 베풂이 적은
저의 마음에 찾아 드는
당신의 입춘
이 한밤 자고 당신과
겸상을 청하고 싶지만
당신의 칼칼한 비음
내 귓전에 맴도는 자치기 소리로
남겠지만
당신 좋아하는 음식으로
가족의 담소 소리가
이 강산을 깨우리라 믿습니다
이 가슴에 묻힌
아버지 당신을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입춘
김영천
채 겨울도 떠나지 못한 들판에서
미리 푸른 것들이야 계절의 전령으로 치지
오메, 벌써 봄인갑다, 그리 오두방정으로
좌정치 못하고 들썩거리기 시작할라치면
이제 돌아오는 봄을 어찌 다 견디겠는가
낮고 볼품없는 밭두렁이나 언덕배기로부터
코딱지풀꽃이나 냉이꽃, 술꽃들이 서둘러 피어나면
듬성듬성 이름도 설운 오랑캐꽃이 또
피어나고
그러다 환장하도록
노오란 빛깔의 꽃들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터라
미리 조심스럽다
매양 사는 꼴이 똑같아
하나도 더 나아지는 법이 없어
늘 초라하고 곤란하면서도
어찌 봄을 또 그리 겨워하는지
야윈 두 팔로는 햇빛을 가득
안으며 마른 가지마다
톡톡 움을 틔어볼까,
하는갑다
하찮은 바람에도 호들갑을 떤다
입춘시(立春詩)
김영환
창살에 걸려 햇살은
창백한 얼굴을 얶는다
건너 옥사(獄舍) 흰 담 아래
설 녹은 눈 한 무덤
싸늘한 전선 위 참새 한 마리
꽃샘에 작별 고하고
내일은 천리(千里)길 달려
어머니 오시는 날
나는 다시 갈라진 하늘 아래 선다
입춘 이후
김윤배
언 강 풀립니다
겨울 산 완강한 어깨 강물에 기대어 순하고 철새 떼 흐린 하늘 잠깁니다
관목숲 겨우내 갇혀 있던 안개 풀려나 울울한 모습 드러내는 강안,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곳에 머물러 얼음 투명한 살 속으로 실핏줄 내렸습니다
새벽 기침 후 차가운 빙질 속 선홍의 섬뜩한 아름다움에 몸 떨었습니다
갇혀 비로소 얻은 자유로움 풀립니다
입춘 이후 언 강 풀려 투명한 빙질에 내린 실핏줄 뜨고
빙질에 갇혀 자유로웠던 날은 강물 따라 흐릅니다
언 강 풀려 흐르는 물길은 당신 거스를 수 없는 또 다른 갇힘입니다
입춘(立春) 무렵, 봄
김은숙
몇 방울의 물이 가슴에 고인다
나는 맨발로
너에게로 가겠다
입춘에
김인호
어절씨구 봄 타령이나 하자는 것 아니다.
찢긴 세월에 썩은 강산
어디 절로 만화방창(萬化方暢)에 녹수청산(綠水靑山)이더냐
그렇다고
게거품 물고 나자빠져 보자는 수작(酬酌)도 아니다
못 입고 못 먹어가면서도
자식놈 등록금 꼬박꼬박 부쳐오던 어머니처럼
온 힘으로 언 땅 가르고
새싹을 밀어 올리는 저 모든 뿌리에게
딱 한 번이라도 이쁘디 이쁘게
입맞춤이나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봄(입춘)
김정섭
그대 오시려고
그대 오시려고
매양, 기다림으로 부푼 이 가슴에
꽃빛으로 수즙은
그대 성큼 오시려고
유난히도 이 겨울은
숱한 눈송이를 꽃잎이라 흩뿌려
가지마다
순백으로 꽃피움이었나보다
그대 오시려고
그대 오시려고
매양, 그대에게로만 흐르던
그리움의 강들은
생살 파고드는 혹한 위에 맨몸 드리워
그리움의 저편 강나루에서
기다림으로 출렁거리는
이편 여울목까지
물빛 오작교를
까마귀처럼 까치처럼
그렇게 그렇게 놓았었나 보다
입춘
김정수
함박눈 내려
하나의 색으로 세상이 수런거리자
밤을 낮 삼아
색깔을 구하려 동분서주하는
봄, 남녘에서 북상하는
저 빚쟁이 같은 봄을
내 안에 들이면
우울의 살갗에 잠든 나비 떼
겹겹이 외출을 시도할까
아지랑이 같은 생(生)을 채집할 수 있을까
함박눈 소담한 물의 소리에
두 귀를 담가
볍씨 같은 울음 틔울 수 있을까
밖에서 나를 찾아
나, 여태
살아 있는 빛깔을 보지 못하였네
입춘(立春)
김진학
산하(山河)엔 모진 북풍만 있더니
침묵하는 소리로 찾아온 소식
채 녹지 않은 눈 쌓인 길가
자는 듯 앙상한 가지들 위로
혼자 움트는 개나리
대지는 또 살아나고
어딘지 알 수 없는 삶의 터전엔
춤을 추며 다가온 계절의 시간
얼어붙은 골짜기 저편
한 폭의 수채화로 남아 있는
아름다운 사람
오는 봄이듯
오면 좋으련만
입춘에
김해인
스쳐 지나는 바람 꼬리를 잡아
고드름 눈물지는 낙수를 찍어
"입춘대길(立春大吉)" 네 글자를 쓰고
눈 덮인 산하에 비추는 햇볕같이
밝고도 곱게 그늘지지 말라 비는
"병신다경(丙申多慶)"이라 외는 고삿소리
파랑새 노래하던 녹두밭두렁에 서서
나신(裸身)의 정(精)을 그러모은 젓대에 실어
한소리 보듬은 꿈을 대지(大地)에 채워본다
입춘(立春)
김향아
저 언덕 너머
꽃바람 불어오더니
자박자박
봄 아씨 걸어온다
한풀 꺾인 겨울바람
물오른 나무 뒤에 숨고
촉촉해진 대지를 뚫고
꿈틀꿈틀
잠자던 새싹들이 눈을 뜬다
성질 급한 목련 아씨
그리움 머금은 볼록한 볼
이른 비 내리는 날
기다리던 임이 오면
하얀 미소 번지겠다
입춘(立春)
김희경
모두 버리고 돌아오는 이의
이마가 푸르스름하다
고통 너머에서 불어오는 것은
소리를 먼저 물기로 보내온다
해의 빛살이
근육을 올리며 도착하고
언어들의 전율이 바람으로 술렁인다
재빨리 나무들이
창을 열고 몸을 펼쳐 펜을 들자
힘찬 빛 두 줄기가 몸을 일으키더니
봄을 새기고 있다
그 소리에 놀란 움츠린 담쟁이 잎 하나가
띄어 쓸 곳을 모색하듯
가느다랗게 고개를 든다
음지 하나가 환하다
입춘대길
김희경
서 푼짜리 동정이어도 좋습니다
어여쁨이 아니라면
조그만 연민이라도 주십시오
당신께 바라는 건
뜻 없이 던져지는 것
결단코 위선은 아니지요
두더지처럼 땅 밑에
저당 잡힌 목숨
발더듬이로 앞세워
땀 흘려 가꾸어야 하는,
어개 위의 무게를
훌훌 털고 일어서야 하는
푸르게 서는 날을 소망하는 건
터널 끝으로 보이던 당신의
은총 느꼈기 때문이지요
입춘
나상국
곱게 물든 단풍
낙엽 되어 떨어지던
겨울 초입에 서서
겨울 내내 살 속을 파고드는
맹추위 때마다
어쩌면
난 학교 담벼락 아래
한 뼘 햇빛에 등 기대어
꼼지락 꼼지락
돋아나던 파란 새싹
할아버지께서 대문에
한자로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고
써 붙여 놓았던
글자를 보며
봄맞이를 했는지도 모른다
입춘
노금영
송홧가루 날리는 봄인가
싶더니 은빛 가루 날리는
겨울인가 보다
어둠을 건드리는 바람이
겨울 내내 숲으로 와서 머물고
반짝 깨어난 햇살은 저 산을
등지고 넘어 간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봄은
얼음 두께만큼이나 밤새
고통을 안긴다
잔뜩 웅크리고 있던 초록은
방금 지나간 햇살에 기대를 걸고
투명한 얼음 속을 기여 나온다
겨울이 깨여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입춘(立春)
류동열
하늘 구름길 막힘 없듯
행복하게 여유를 내는 봄
사람 마음 따뜻하게 녹이는
포근한 봄이었면 좋겠다
한파의 가슴에 온기를 주고
빛의 나래가 온 누리 펼치는
꽃비가 촉촉하게 내렸으면 좋겠다
서릿발은 녹아 안개가 되어
맑은 빛 애타게 기다리는 이
설익은 사랑을 하는 사람에
삶에 애간장 태우는 사람에
하얀 꽃잎 되어 달려왔으면 좋겠다
엄동의 칼 춤을 맞이하며
예쁜 꽃잎 곱게 피워내고
세상에는 향기를 내놓아
벌 나비 놀러 왔으면 좋겠다
모두가 가슴 열어
내 마음은 녹아 사랑이 되고
네 마음은 녹아 환희(歡喜)가 되어
배려와 용서 화합의 단지에
희망(希望)이 가득가득 담겨졌으면 좋겠다
입춘
류윤모
맺힌 맘속 옷고름 풀어
섬섬옥수로 흐르는 골골 물소리에
마음 흥건이 젖어드는 이 봄날
나는 그토록 오래 단절되었던 그대 소식을
오늘 이 아침에야 비로소 듣습니다
그대에의 예감을 지저귀는 어린 새들의 비상이
눈부신 하늘엔 화해에의 기쁨으로 가득하고
눈물마저 얼어붙은 내 마음 공허의 벌판에도
오래 기다려온 그대의 답신으로 푸르게 채워집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풀로 무성히 자라 있는
내 고독이 첩첩 가로누운 산등성이 다북솔밭 어디에나
온 산천을 가득 채우시는 당신의 깊고 그윽한 그 미소에
민들레 풋가슴 수줍은 나는 몸둘 곳 없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살아 숨 쉬는 한 떨기 목숨마저 참으로 눈물겨운 날
쟁쟁쟁 쏟아져 내리는 순은의 햇살 거느리고
저리 고웁도록 서러운 발자취로 오시는 당신
난 지금 입덧 중 – 입춘(立春)
목필균
하얀 겨울,
치마끈 풀어내고 살그머니
가슴에 작은 꽃씨 하나 품었다.
설 넘긴 해가 슬금슬금 담을 넘자
울컥울컥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
토해도 토해도 앙금으로 내려앉는 금빛 햇살
매운바람 속에 꼼지락거리던
꽃눈 하나 눈 비비고 있다
입춘
문시종
1
얼음 속 송사리들 이불 덮고 잠잘 때
찬바람 버들개지 눈을 감고 떠는 모습
절후는
입춘인데도
봄기운은 산 너머에.
얘들아 뭐 하느냐 오늘이 입춘인데
일 년의 계획은 이른 봄에 매였는 것
울 할배
긴 수염에는
상고대가 피었다
2
칼바람 지난 자리 상처는 아픔인데
계절은 어김없이 끝가지에 찾아와서
보듬어 감싸주는 맘 대자연의 사랑이다
자욱히 피어나는 실안개 주름 사이
기진 턴 생명들도 명줄을 부여잡고
한 호흡 가는 숨결로 그리움을 그린다.
갈색빛 들녘에도 봄기운 아물아물
그 속에 새잎 피고 꽃들도 하롱하롱
환희는 깃을 펼친다 나래 치며 펼친다
가고 오고 또 가는 공전의 축을 따라
윤회도 거듭남도 한 가지의 열매라면
기쁨도 아, 서러움도 같은 것이 아닌가
입춘 가까이
문시종
저 알 바 아니라고 눈바람 떼 몰려와
내 솔숲 서럽다 사지육신 앓는데
그쯤은
어림도 없다
동박새
포
로
로
롱
입춘(立春)
박광호
입춘이라
절기로는 벌써
봄의 길목을 알리고
산들에 세찬 눈보라 휘몰아쳐도
지구 공전의 윤회는
봄을 이루고 있다.
부풀은 동토에 햇살은 스며들어
초목의 가지마다 생력을 불어 넣고
실개천에서 바다에 이르는
대지의 혈맥은 박동하며
전이되는 지열은 안개를 피운다
입춘대길,
마음 문 활짝 열어놓고
시선 머문 산자락에
봄꽃을 그려본다
입춘
박라연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영역까지가
정신이라면
입을 봉하고 싶어도
몽둥이로 두들겨 패주고 싶어도
불가한 것
정신 속에도 사람의 형상이 있다면
눈곱도 떼어내고
칫솔질도 시켜줘야 할 텐데
땀 흘리는 일밖에 떠오르는 게 없어
겨울 내내 미륵산을 오르다가
무슨 선물처럼 전투기를 두 대나 만났다
온몸이 정신인 허공을 가르는 전투기 소리,
미륵산이 쫙쫙 갈라질 때
내 오래된 욕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봄이 드는 날(立春)
박목철
봄이 든다는데
버들강아지 움이나 틔웠는지
아지랑이 일 듯
나비도 날고, 꽃도 피고
그리움도 나른한 하품 하네
겨울이 눈 흘기니
봄은 살며시 가슴에 숨었다
입춘대길
박목철
귀 기울이면
들린다
눈 덮인 동토(凍土)의 땅 밑
기지개 펴는, 생명의 소리
시냇가 얼음 아래
시린 겨울 녹이는 봄의 소리
동장군(冬將軍) 무서워
닫혔던 대문 활짝 열고
맞고 싶던 빈객(賓客) 봄뿐이랴
立春大吉,
겨울을 견딘 소박한 바램일진데
대문 없이 달랑 현관문
갈 곳 없는 미아(迷兒)라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란다.
벌집에 살아도
봄을 반기는 마음은 늘 그 자리
입춘인데, 대길(大吉)하지 않겠는가
입춘 윷판
박성우
처마 끝에 걸린
낡고 오래된 풍경, 소리
쟁그랑쟁그랑 입춘을 알린다
전주한옥마을
토담길 골목 가운뎃집 마당으로
겨울 털러 온 사람들은
멍석 깔고 장작불 피워
봄이 오는 첫날 아침
입춘대길 윷판을 벌린다
윷은 멍석 위로 던져지고
말은 갈팡질팡 말판을 건넌다
이겨도 별것 없는 판을 놓고
어수선한 실랑이가 벌어지니
밍밍한 구경꾼조차 간섭하여
윷판은 시끌벅적하게 흥성해진다
한 말 술에 묵은 김치전이 나와
윷판에서 떼를 쓰던 진안댁이
젤 먼저 술을 따라 부아 난 속 달랜다
술주전자를 꿰찬 화산 양반은
서너 순배 술을 어깨춤으로 돌린다
몰려온 구경꾼도
윷을 노는 사람도 입춘,
윷 한 판에 환장을 한다
입춘 이야기
박얼서
1
잔설 속에 숨어
밤새껏 몸을 뒤척이던
동백이
복수초가
여기저기서 새봄맞이 길을 닦느라
재잘거리는
입춘 이야기를 듣는다
이젠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는 태동
어차피 잘려 나갈 겨울 긴 꼬리
아직은 좀 이른 셈인데
꽃망울을 붙들고
서로 밀치고
잡아당기며
서리꽃 앞다투어
지는 소리를 듣는다
2
뒷마당의 느티나무 두 어르신께서
서로의 체감을 나누는 대화
“희망이 녀석, 목줄 흔드는 기지개가
오늘따라 무척 크군요"
"대한(大寒)이 보낸 지 이제 겨우 며칠인데
어느덧 새벽 기운이 달라졌나 보오“
누군가 문지방을 넘어서는 그림자
울안에 번지는 낮은 목(木)소리
입춘 지나며
박영호
바람 풀려 귀밑머리 스치는 당신 숨결 따스합니다
잔설 먼 산 눈에 시리고
밤새 보채며 뒤척이더니
청명한 당신 잘 보입니다
살얼음 밑을 흐르는 투명한 개울물되어
당신 가슴속으로 흘러가고 싶습니다
산 겹겹 그리움 겹겹 살에 박히는
바람 이미 예사롭지 않습니다
바람에 실려온 소나무 향기
당신 향기가 그리움 흔들어 깨우고
한기에 떨고 있는 초록빛 하나 깨어나게 합니다
풀씨들 당신 숨결만 스쳐도 잠 깨어나
온 산 푸르게 하고 당신 오시는 계곡 어디쯤
들꽃되어 당신 향해 지천으로 피어나겠지요
그리움으로 피어나는 꽃
온 산 붉게 하겠지요.
입춘
박인걸
1
분홍빛 꽃잎이 흩날리던
바람 잦은 산길을 돌아
내 곁을 훌쩍 떠난 그대 소식에
아직도 애달프더니
눈보라 사납게 흩날리는
얼어붙은 강둑을 걸어
꽃눈 틔우며 내게로 온다는
그대 소식에 설레는 마음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아쉽게 가버렸지만
아직도 못 잊어하는 마음
그대 어찌 알았을까
대문 활짝 열고 뛰어나가
플래카드 내걸어 환영하며
그대 오시는 앞길을
빗자루로 쓸어 드리리다
2
양력(陽曆) 이월 사일경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입춘에는
남촌(南村)에서부터 융풍(融風)이 분다
춘(春)은 현해(懸解)를 넘어오느라
막다른 절정(絶頂)에서
급박(急迫)한 혈전(血戰)을 치루고
드디어 춘화(春花)를 불붙이며
광활(廣闊)한 대지를 밟았다
전승자처럼 의기(意氣)가 양양하여
편전(片箭)을 쏘아대며
동서대지(大地)를 지져 밟고
물밀듯이 상경(上京)하고 있다
동사(凍死) 직전의 가지 끝에는
희망의 포부(抱負)가 싹트고
바짝 마른 줄기마다 물이 오른다
냉랭(冷冷)하던 인심은 어질어지고
사납던 눈초리들은 눅눅해진다.
감금(監禁)되었던 감정들은
촛농처럼 흐물흐물 녹아내린다
황경(黃經)삼 백 삼십 도의
우수(雨水)가 지척(咫尺)이니
막강한 우군(友軍)과 함께
동절(冬節)을 완전히 몰아내리라
아! 얼마나 기다렸던가
봄이 일어서는 함성(喊聲)을
아직은 다소(多少) 음산(陰散)해도
이미 가슴에는 꽃망울이 맺힌다
입춘날에
박종영
봄이 내려오고
비로소 시작되는 꽃의 이야기,
기쁜 우주의 빛으로
위안을 얻는,
지금 여기 모여 있는
수많은 꽃은
누구의 마중을 나와 웅성거리는가
입춘날에,
환한 길 열어 놓고 어서 오라
손짓하는 하늘 매화,
그림자처럼 달려온 향기가
새로운 탄생을 벼른다
기다림에 야위어가는
느슨한 바람이 속삭이고,
소중한 번식의 고행을 언 땅에
뿌리내리는데,
정녕 봄은 오는 것인가?
입춘 날에는
박종영
옛적 기억나는 데로 식은밥이
가난을 눈물 나게 하던 시절에도
슬기로운 얼굴 쳐다보며 봄이 오는 들판
허리춤 부여잡고 달려가지 않았더냐
이제는 들을 수 있는가,
언 손 녹이며 우리와 함께하려는
청아한 바람의 소리 그 뒤에 신비로운 무게로
솟아오른 연둣빛 촉순의 발그레한 웃음끼
우르르 피어나는 날이 예서 가까운지라
나무와 나무 사이 제각기 흩어져 살아온
추운 언어들이 하나둘 숲으로 들어서
아쉬운 고개를 조아리고
비로소 겨울잠을 깨고 어두운 날을 환하게 웃는
노란 복수초 너의 꿋꿋한 장래를 위하여
오늘은 한껏 더운 힘을 모아
추운 겨울 몰아내자 팔 걷어붙이는 입춘 날
이 강산 꽃물들인 저녁상 앞에 놓고
너와 나 목청 다듬어 다정한 들꽃 이름
막힘없이 불러보자
봄의 전쟁 - 신묘년
박찬덕
왼 겨우내 잠자고 있던
입춘이란 수류탄
회색빛 토끼들은
안전핀을 뽑아 던졌다
불꽃 튄
전쟁터에는
군데군데 불덩어리
입춘 단상
박형진
바람 잔 날
무료히 양지쪽에 앉아서
한 방울
두 방울
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
추녀 물을 세어 본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천 원짜리 한 장 없이
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
흘러가는 물방울에
봄이 잦아들었다
입춘(立春)
박후식
여보게, 석산
양지바른 햇살처럼 푸드득 털고
일어서야 하지 않겠나
오늘아침 ‘이천팔 년’의 노고가 새겨진
석산의 고희기념 만년필을 꺼내 쓰면서 생각했네
십 년이 엊그제 같다고
돌아보면 아카시아 숲 우거진 성당 길
비탈진 하숙방에서
백열등 하나에 불나방처럼 머리를 맞대고 동고동락하던
까마득한 시절의 그때가
왜 자꾸 그리워지는지 모르겠네
입춘치 때문일까
입춘
박희자
새벽을 달리는 길목
유난히 반짝반짝
샛별이 유영을 하고
어둠 속 가로등도
밝음에 더한
따뜻한 데움을 던진다
먼 길 돌아온
싱그런 향기가
몸속 깊숙이 스며들고
착한 그리움이
사락사락 찾아든다
차가운 날씨에 봄인 듯
따뜻함을 보내주는
그대의 선물
땅속에 새싹들은
음모를 일으켜
살찌우기가 시작되고
차가운 바람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기 시작한다
봄을 품은 그대의 꿈
입춘
박희진
시계탑에는 늘 제자리에 꼼짝도 않고
날고 있는 알몸의 어린 천사
겨울동안에 동상이라도 걸리지 않았을까
오늘은 그 자동빛 손가락을 만져주고 싶네
입춘
배귀선
사르락 사르락
님의 발걸음 마냥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는 게야
안개처럼 뿌연 모습으로
싸래기 눈 밤새 뿌리며
겨울과의 화해를 청하고 있는 게야
가는 발길 잠시 멈춰
숨죽인 고요 앞에
봄 길목을 손짓하고 있는 게야
입춘
배한봉
암 수술로 위를 떼어낸 어머니
집에 돌아오자 제일 먼저
세간을 하나둘씩 정리했다.
아팠다. 나는
어머니가 무엇인가를 하나씩 버리는 것이 아파서
자꾸 하늘만 쳐다보았다.
파랗게 새파랗게 깊기만 한 우물 같은 하늘이 한꺼번에
쏟아질 것 같았다.
나는 눈물도 못 흘리게 목구멍 틀어막는 짜증을 내뱉었다.
낡았으나 정갈한 세간이었다.
서러운 것들이 막막하게 하나씩 둘씩 집을 떠나는 봄날이었다.
막막이라는 말이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 그 막막한 깊이의 우물을 퍼 올리는 봄날이었다.
그 우물로 지은 밥 담던
방짜 놋그릇 한 벌을 내게 물려주던 봄날이었다.
열여덟 살 새색시가 품고 온 놋그릇이
쟁쟁 울던 봄날이었다
입춘
백원기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
드디어 봄이 왔구나 봄이 왔어
겨우내 쌓아 두었던 봄
눈 털고 얼음 깨 봄을 꺼내야지
봄바람 살랑 쓰러지지 않는 봄
파랗게 움돋아 꽃 피는 계절
봄이 왔구나 봄이 왔어
우수 경칩 춘분 손잡고 나올 입춘
너는 인정 많은 효자야
모두가 머뭇거릴 때
겨울 안에 살던 사람
움막 털고 나오게 해
따뜻한 봄 선사하려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구나
입춘 맞이
백원기
겨울 침대에서
곤히 잠자던 봄
부스스 기지개 켜던 날
반가워 마중 나갈 때
파란 하늘 바라보면
따뜻한 햇볕 좋더니
바람은 쌀쌀해지고
해 질 녘 눈 날리다가
소복하게 쌓였구나
마음의 봄은 왔어도
몸의 봄은 아직도 먼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움트는 봄 올 때까지
기다리는 마음
간직하고 있겠네
입춘 무렵
복효근
혼자 살다가, 버티다가
딸내미, 사위들 몰려와서
가재도구 차에 나누어 싣고
앞집 할머니 콜택시 불러 요양병원으로 떠난다
아프면 아프다 진작 말하지
요 모양 요 꼴 되어서
이웃에서 전화하게 만들었느냐고
노모를 타박하는 딸년도
눈시울 뭉개져 아무 말 없는 노인네도
무던하다 생이 그렇다
겨울 지나 입춘 바람이 맵다
살던 집 둘러보는 노구의 굽어진 그림자를
휘청 담벼락이 받아 준다
거기가 요양하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으랴만
당신도, 나도 우리도 다 안다
대합실 같은 곳, 대기소 같은 곳
그러나 다행이다
더 요양할 삶이 남아있지 않다
아무튼 나는
손수 가꾸어 가지런히 다듬어서 주시는 부추와
생도라지와 달래나물을 다시는 못 얻어먹겠구나 싶어서
눈앞이 자꾸 흐려지기도 하였다
입춘
서대선
찌르르
가슴에 젖이 돈다
잠결에도
입을 오물거리는
어린 생명 하나
가슴에 안겨 오는
밝은 양지
입춘(立春)
설태수
계집 녀(女)에 갓머리를 씌우면
편안할 안(安) 자라
갓머리를 벗기면
발길 닿는 곳마다
바람을 일으키는지
계집은
돌아다닐수록 야릇해지는 눈빛에
붉은 스커트는 짧아지고
가슴은 출렁거려,
마침내 불붙은 듯한 몸으로
눈보라 휘날리던 들판에 들어섰다
이럴 땐
꽉꽉 깨문 어금니로
겨울을 버티던 산하(山河)도
어쩔 수 없이 녹아내린다.
도처에서 녹아내린다
입춘(立春)
성백군
가랑잎이
언 땅 위를
굴러다닙니다
겨우 내
두들기며 노크하더니
드디어 땅이 문을 열었습니다
문 틈새로
뒤란, 돌담 밑 난초가
노란 주둥이를 내밀고는
“아, 봄이다!”는 탄성(歎聲)에
지푸라기 속 잔설이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제풀에 녹아 도망갑니다
입춘대길
성진명
육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이천십년 경인년 백호의 해,
대한이가
소한이네 집에 놀러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의기양양한 소한이
입춘에게 수청 들라고
뒷짐을 지고, 곰방대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찾아왔다가
붕R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래도,
얼음장 밑에서 물고기가 노닐고
찬바람 속에서 매향이 짙어지듯
저 바람결 어느 자락에
깜박이는 꽃눈이의 윙크
꼼지락거리는 새싹의 기지개가 숨었다
입춘이 대길이다
입춘대길
성진수
육십 년 만에 찾아왔다는
이천십년 경인년 백호의 해,
대한이가
소한이네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의기양양한 소한이
입춘에게 수청 들라고
뒷짐을 지고, 곰방대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찾아왔다가
붕R이 꽁꽁 얼어붙었다
그래도
얼음장 밑에서 물고기가 노닐고
찬바람 속에서 매향이 짙어지듯
저 바람결 어느 자락에
깜박이는 꽃눈이의 윙크,
꼼지락거리는 새싹의 기지개가 숨었다
입춘이 대길이다
입춘
손병흥
봄의 문턱에 들어선다는 말 무색하게시리
해마다 기승부리는 추운 날씨에 한기 느껴
봄 시샘하는 옷 속 스미는 삭풍마저 몰아쳐
예년 기온보다 더 추워져버린 준동하는 동장군
대한 지나 성큼 다가온 봄의 시작 알리려는 듯
때 이른 봄나물 캐는 아낙네들 몹시 놀래주려고
매서운 찬 기운 잔뜩 몰고 와 옷깃 잘 여미게끔
강바람 산바람 들바람 고드름으로 써보는 입춘첩
마음 가득히 늘 우리 곁 맴도는 설렘 불러 모아다
분명 오는 봄 미처 느끼지 못하는 아둔함 물리고서
어김없이 꽁꽁 마음 웅크린 채 봄 마중으로 분주한
쌀쌀한 바람 한파 몰아쳐도 참 좋은 크게 길 하는 날
입춘대길(立春大吉)
손병흥
기나긴 겨울날 기승부리던 추위마저
몰아치던 북풍한설조차 점차 누그러져
조금씩 찾아드는 봄 향긋한 유혹 전령사
달래 냉이 쑥 두릅 봄 미나리 미각 떠올려
봄이 시작됨을 자축하는 마음 가득하도록
한 해 무사태평 농사 풍년 다시금 기원하는
그래도 아직은 조금 쌀쌀하기만 하는 입춘 날
먹 갈아 정성스레 입춘첩 써서 대문에 붙여놓은 채
이제 새로이 입춘을 맞아 올 한해 크게 길할 것임과
온 집안 가득 따스한 기운 돌아 경사가 많을 것임을
24절기 중 첫 번째 새 기분으로 반가이 맞이하는 날
이내 터질 듯한 꽃망울 가득히 따스한 봄 향기 담아
한결 부드럽고 따스한 기운 온기 향기 가득해지도록
자연의 이치 순응해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우리네 삶
버선발로 봄 마중 서두르기엔 좀 이른 봄이 오는 길목
입춘첩(立春帖)
손병흥
봄에 들어서고 시작이 되니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많이 생기기를 기원하며
부모는 천년을 장수하시고 자식은 번영하여
산처럼 오래 살고 바다처럼 재물이 쌓이기를
소망하는 글귀 쓴 종이 붙이는 민속 세시풍속
농가에선 예로부터 입춘 절기 맞아 농사 준비를
아낙들은 집안 곳곳에 쌓였던 먼지 털어내고서
좋은 뜻 문구를 집안 곳곳에 써 붙였던 입춘방
땅을 쓸면 황금이 생기고 문을 열면 만복 오며
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복은 오라고 바람하면서
재난은 봄눈처럼 사라지고 행복은 여름 구름처럼
일어나라고 어둡고 긴 겨울지나 봄의 시작 자축해
길한 곳 상서로운 햇빛 운수대통을 상징하는 절기
입춘
송기흥
고흥읍 오일 시장 입구
노점의 고무 함지에서
손바닥만큼씩 한 가자미들이
흰 배를 까뒤집으며 허공으로
팔딱팔딱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스스로를 들어올려
땅바닥으로 패대기를 쳐대는
무지막지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집에 와서 손질을 하려고 보니
아이구머니나!
제 몸의 절반은 됨직한 알주머니에 가득 찬
수천만 개의 노란 알들이
흐물흐물 흘러내리고 있었다
결단을 내린 어미의 심정이
거기, 있었던 것이다
입춘 다음 날
송진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모여
막걸리를 한 잔씩 나누고
하늘의 별에 대해 이야기 나누다
늘 같은 날은 아니지만
늘 같은 얼굴은 아니지만
꽃등심이 구워지고
아귀찜 젓가락이 바빠질 때
진하 수평선 속에서 코끼리가 걸어 나오고
노루섬 속에서 야자나무가 걸어 나오고
우리는
그 순간의
빈 손바닥을 사랑하는 것이다
미역을 띄운 술잔을 돌리지만
사실은 슬픔에 겨워
신이 만든 미끈미끈한 공포영화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입춘
신석정
가벼운
기침에도
허리가 울리더니
엊그제
마파람엔
능금도 바람이 들겠다.
저
노곤한 햇볕에
등이 근지러운 곤충처럼
나도
맨발로 토방 아랠
살그머니 내려가고 싶다.
"남풍이 몇m의 속도로 불고
곳에 따라서는 한때 눈 또는 비가 내리겠습니다."
입춘(立春)
신지혜
먼저, 단전에 숨 한번 멈추고
여백이 꽉 찬 흰 화선지 위에
듬뿍 묻힌 먹물을 꾸욱 누르는 듯싶더니
흰 우주 적막을 가늘게
찢으며 꽁꽁 숨었던 난초 잎 하나 툭, 트인다
드디어 난초 잎 하나 고개를 든다
얇은 화선지 음지에서
서로 엉키고 설켰던 구부러진 사족들,
날렵하게 이리저리 삐쳐 오른다
천 길 절벽에 이르러서는
일직선의 팽팽한 몸이 망설임도 없이
난창, 휜다 품 넓은
대기가 단숨에 넙죽 받아 안는다
천지사방,
수군수군 봄바람 일어선다
속울음 터지고 말이 터진다
참았던 자폐가 꽃망울을 단다
제 생의 암시와 여백 한 장을
철철 들었다 놓았다 한다
집 한 채가 숙연히 선다
입춘
신홍섭
입춘 날
들 가운데
작은 저수지
하얗게 질려 버린
얼음판은
추위가 할퀴고 간 자국이
헝클어져 있고
가끔
우지직 우지직
소리를 지르지만
누워있는
갈대숲
얼음 밑에서
싹 틔우고
꽃 피울 이야기
온 세상을 잠에서 깨울
얘기로 꽃을 피운다
파란 물풀이 움직이고
참붕어 몇 마리가
느릿느릿 떠다니는 소리
버드나무 잎눈은
홍조를 띠고
개나리 넝쿨에는
잔잔한 미소가 흐른다
입춘(立春)
심지향
뿌지직
키 작은 나무들
겨울 산 다 덮은
무거운 솜이불
걷어차고
졸졸졸
산수유 진달래
산목련 잠 깨우러
얼음장 밑 시냇물
기지개 켜는 날
재 넘어
어느 골짜기
자박자박
봄 처녀 오시는
발자국 소리
입춘 기도
안국훈
무슨 일을 하든 무슨 계획을 세우든
그것이 세상을 바꾸거나 새로운 집을 짓듯
먼저 벽돌 한 장부터 반듯이 쌓아
영원토록 살 아름다운 집 짓게 하소서
그대 어깨 위로 무지개 뜨고
푸른 기운 넘치어 집 위에 머물고
생명 가득한 숨결 묻어나서
언제나 웃음꽃 피어나게 하소서
작은 희망조차 소용없을 땐 없나니
숨차면 숨 고르고 힘들면 잠시 쉬더라도
언제 어디서라도 당당히 맞서게 하여
지금 겪는 추위 끝내고 내일은 새봄이게 하소서
혹독한 겨울 견딘 만큼 봄꽃 화사하듯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망설이지 않고
처음부터 신중하고 마지막까지 열정 쏟아
의미 있는 삶으로 기꺼이 마무리하게 하소서
입춘
안도현
바깥에 나갔더니 어라, 물소리가 들린다
얼음장 속 버들치들이 꼭 붙잡고 놓지 않았을
물소리의 길이가 점점 길어진다
허리춤이 헐렁해진 계곡도 되도록 길게 다리를 뻗고
참았던 오줌을 누고 싶을 것이다
물소리를 놓아버린 뒤에도 버들치들은 귀가 따갑다
몸이 통통해지는 소리가 몸속에서 자꾸 들려왔기 때문이다
입춘
안성덕
골판지는 골판지대로 깡통은 깡통대로
끼리끼리 모여야 밥이 된다고
삼천변 요요(要要) 자원* 파지 같은 생들이
마대자루에 빈 페트병 고봉으로 눌러 담는다
오락가락하던 진눈깨비가 물러간다
유모차에 생활정보지 걷어오는 할머니
치마꼬리 따라온 손주 볼이 발그레하다
어슬렁거리던 누렁이가 꼬리친다
쥐불 놓는 아이들의 함성 오종종 모여 있는 갈밭
풀린 연기 사이로 북녘을 가늠하는
오리 떼 몸통이 통통하다
버들개지 은대궁도 제법 토실하다
모두 요요(夭夭)하니
풀려나간 요요(yoyo)가 제 목줄 감아올리듯
스르르 계절조차 되돌아온다
쥐불 놓은 갈밭에도 펜촉 같은 새순이 돋아
돌아올 개개비 떼 노래 낱낱이 기록하겠다
코흘리개 맡겨놓고 감감소식 없는 며느리도
한 소식 보내오겠다
* 전주 삼천변에 자원재활용센터 요요자원이 있다
입춘 날 아침
안영준
가는 줄만 알았더니
다시 오는 게 세월이더라
바퀴도 없는 것이
잘도 굴러 굴러가는구나
동장군이 저만치서
늠름하게 버티고 있는데
성질 급한 개나리는
한 줌 꽃 흔들며 비웃는구나
동면에 개구리는
꽃향기에 반해 나왔다가
대지에 깔린 허연 눈 보더니
기겁하고 뒷걸음 하는구나
겨울아 무슨 미련이 남아
질투하며 주춤대고 있나
봄아 무엇이 두려워
오지 못하고 게서 떨고 있나
입춘 절에
안종환
봄 아가씨가 오신대요
모두가
설렘으로 들떠 있어요
저에겐
진작부터 봄이 왔는걸요
임께서 내 마음에 오신 날부터지요
이제
파릇한 이파리들
선잠 깬 아가처럼 걸어 나오고
작은 풀꽃들은
햇살보다 더 밝은 웃음을 웃겠지요
제 마음 밭엔 벌써부터
향긋한 꽃들이 만발 했답니다
가만히 들어보셔요
얼음장 밑
돌돌돌 실개천 소리 말고요
부풀은 제 가슴에 피어난
화사한 봄꽃들이 속살거리는 소리를요
보이는 곳
다 봄이에요
입춘(立春)
안희선
대지는 수줍은 박동으로
옷섬을 조심스레 풀어 헤치고
피어오른 아침 안개는
가녀린 호흡의
힘겨운 입김
촉수는 어미의 품을 더듬고
순결한 젖가슴은
사랑의 긴 포옹 끝에
모유(母乳)를 뿜는다
긴장한 나뭇가지마다
기대와 설레임으로
깜박이는 눈망울들
아침햇살에 들켜버린
그 파릇한 침묵들 숨차다
입춘(立春)
양성우
어서 오게, 이 친구
모진 바람 한세월
백수건달로 떠도는 이
어디 가서 한 마디 소식 없더니
이제 오는가 그대,
반갑고 서러운 이
끝도 없는 침묵의 땅
소리소리 지르며
이제 오는가 그대,
무정한 사람아
입춘(立春)
여관구
봄을 세우는 날입니다.
땅속의 생명체들이 우글거리기 시작합니다.
암흑 속에서 마음의 불을 켜놓고 희망을 꿈꾸며
얼마나 마음을 부풀렸을까?
긴 밤은 가고 이제 새날이 밝아옵니다.
지구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고 빛이 새어들어 옵니다.
겨울과 봄 샛길로 접어들었나 봅니다.
매화나무 줄기는 호스가 되고 매화 얼굴에는
청춘의 심벌이 볼록이는 걸 보면 겨울이 허락을 했나 봅니다
바람도 겨울옷이 무거운지 봄옷으로 갈아입고
내 얼굴을 예쁜 맘으로 어루만지며 온기를 전해줍니다
그래도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겨울은
언제 그 심통이 터질지 아직은 마음 놓고 봄을 안을 때가 아닙니다
허울 좋은 봄만 세워놓았을 뿐
입춘 맞이
염경희
새벽잠 설치면서
대문을 활짝 열어 놓고
저만큼 동구 밖에서
서성대는 봄을 기다리며
하늘이시여, 하늘이시여
두 손 모으고 마음을 담아
노란 종이 두 장 곱게 부친다
入 春 大 吉
행여나! 노심초사하며
창가를 서성이던
둥근달이 살포시 들어와
선뜻 봄을 맞이한다
올해는 서둘러서
대문을 활짝 열었으니
건강과 행운을 주시옵고
마음을 시원하게 열었으니
사랑과 행복을 주시옵소서
입춘(立春)
오보영
찬 기운 여전히 감싸 돌지만..
버들강아지
보송보송
솜털 얼굴 피워냈네요
곧 오실 님
반갑게
마중하려고
활짝 웃는
환한 모습
보여주려고
님 맞이할 준비
차분히
하고 있네요
입춘(立春) 추위
오보영
1
어쩐지 네가 잠잠하다 했다
웬일로 네가
앞길 가로막지 않고 순순히 비껴나는가 했더니
아니니 다를까
오늘
내 이름이 드리우는 시간에 맞추어
여지없이
감추었던 본색을 드러내누나
그런다고
멈칫할 내가 아니라는 걸
만사 순리에 따라 정당하게 행하는 내가
네 그릇된 흉계 앞에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는다는걸
넌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뻔히 역부족인 줄 알면서도
괜한 몽니로 못된 심술부리는 네가
딱하기조차 하구나
2
뒷덜미
붙잡아도
소용이 없단다
가는 길
막아서도
상관이 없단다
언제나
내 편인
하늘이 있으니까
어떤 힘도
막지 못할
섭리가 있으니까
입춘
오애숙
1
만물이
꿈틀꿈틀 용트림하는
2월의 산야가
침묵 깬다
절망이
겨우내 산그늘에 앉아서
똬리 틀고 수미진 곳에
숨죽여 동면했다
2월 속에
기상 나팔 소리가 울리더니
졸졸 흐르던 시냇물 다시 찾아온
입춘 추위에 장독 깨지누나
겨울이
거꾸로 붙어 다시 오련가
꿔다 해도 한다던
그 입춘 추위가
2
동지섣달 기나긴 밤을 지나서 대한과 우수 사이
태양의 황경 315˚에 드는 때로 아직 추운 겨울이나
밝은 햇살로 처마 밑 수정 고드름 녹이는 봄의 시작
한 해의 사계절 중 첫 번째로 겨울과 여름 사이
눈처럼 재앙 녹아 없어져라 복은 구름처럼 일어나라
인생사에서 한창때처럼 앞날 위한 희망 날개 치는 날
속담에 범이 불알 동지에 얼리고 입춘에 녹인다고
동장군도 물러가 누그러지는 날씨를 비유로 한 말이며
이때 즈음 해가 넘어가는 기준점으로 구정 전이라
송구영신 때의 결심 작심삼일 되었어도 다행인 건
새 마음 곧춰 휘파람으로 감사의 날개 화-알짝 펼치어
널따란 대양 향해 올곧게 맘에 함박꽃 피울 수 있네
야호 봄이다 내 맘속에 피어나는 새 희망의 룰루랄라
옛 생각 부정적인 것은 가고 새로운 각오 도전 정신만 와라
내 마음에 새로운 계획 사랑 속에 피어나는 봄입니다
3 – 야호 봄이다 봄
야호- 트랄라라
북풍이 쫓겨가고 동풍이 곧 풀린다
멀리서 살짝쿵 손짓하던 태양이
미소하며 한 발짝 다가오네
와우-솨랄라라
대한과 우수사이 태양의 황경 315도
2019년 기미해엔 양력 2월 4일
설날 하루 앞이라 신바람 나네
허나, 세상사
장담은 금물 매년 불규칙적인 기상에
1년 중 가장 추운 해도 있었기에
서로에게 입춘대길로 축복하길
우리 모두 입춘대길
농가에선 보리 뿌리 뽑아 보고 그해
농사 점치는 이름하여 봄바람
살랑이는 봄이로구나
졸-조올 졸졸졸
벌써 봄바람 살랑이어 시냇가의
졸졸거림에 첫사랑의 설렘으로
가슴에 가득 차오르고 있다
4
아직 겨울인데
봄의 문 활짝 열렸다
모두들 환호한다
아직 겨울이나
나도 문 활짝 열고서
꽃을 피우고 싶다
마음의 거적
벗어던지고 싱그런
봄의 향 마시런다
꽃샘바람 다시
휘모라 쳐 온다 해도
봄은 내게 오기에
입춘대길
오애숙
봄의 시작 알리는 종소리
24절기 중 첫 절기 그대로 인한
그 기쁨 살폿한 설렘 살랑이어
희망의 꽃이 피어납니다
그대 생각 내안 가득 차올라
한늬 바람 봄햇살 속에 휘날리는
그 향기 내 안에서 가아득 차오른
그 향그러움 휘날리고파요
내 안 가득 그대가 있기에
행복한 이 맘에 겨우내 움켜잡은
잡동사니들 훠이얼 허공 속에다
털고서 새롭게 피어나렵니다
이제 새봄 맞이하러 옷매무새
가다듬고 새 단장하는 이 마음이
새롭게 가슴에서부터 좋은 일만
휘날리도록 휘파람 붑나다
하는 일마다 새봄 속에 길하고
봄의 향그럼 속에 경사스러운 일만
꼬리를 치길 원하는 바 삶 속에서
생명 참의 환희 노래 부릅니다
입춘 속에 피어나는 연가
오애숙
새봄을 알리려는 입춘 속에
산허리 휘감고 부는 설한풍
그 옛날 장작불 덥힌 따끈한
아랫묵이 이역만리 타향에서
향수가 되어 피어나고 있다
오빠와 막내 동생 그리고 나
우리 셋 옹기종기 둘러앉아
"개가 고기를 물고 가다가
강에다 빳쳐서 먹은 둥 만둥"
하하 호호~ 겨울을 달궜다
늘 놀아 주고 살피던 기억에
다신 볼 수 없고 만날 수 없어
흘러간 세월의 강가 뒤에서
그 옛 추억 하나가 가슴에서
활화산 되어 뜨겁게 피어난다
입춘
오정방
아직도
겨울은 그대로 머물러 있다
산마루에도
계곡에도
들판에도
그 잔해가 늑장을 부리고 있다
겨울 속의 봄인가
봄 속의 겨울인가
간단없는 시간은
누구도
거꾸로 돌릴 수 없다
이미
봄은 문턱을 넘어왔다
지필묵을 준비 못해
'입춘대길'은
마음에만 새긴다
입춘 무렵
오정방
산등성이엔
아직도
하얀 겨울이 서성이는데
저 계곡엔
벌써 졸졸졸 봄이 흐르고
텅 빈 호수엔
상기도
멍든 얼음이 다 풀리지 않았는데
뉘 집 뜨락엔
하마 도란도란 매화 벙그는 소리
입춘 소식
오정방
일찌기 겨울이 깊어지던 가운데서도
계절의 봄은 서서히 다가서고 있었다
차가운 겨울의 껍질을 인내하던 나무들도
뿌리로부터 푸른 지하수를 쉼없이 퍼올리고 있었다
눈이 되지 못한 겨울비 속에 봄비 더불어 내리고
매서운 삭풍 불어올 때 봄바람도 섞여 불었느니
차츰 차츰 겨울은 남몰래 시들어 가고
봄기운이 하나 둘 손끝에 감지되어 온다
시야에 보이지 않던 사물들이 보여지고
귓가에 들리지 않던 소리조차 들려온다
님은 돌아누워 꿈쩍도 않는데
하마 봄은 성큼 대문앞에 당도했다
누가 절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을 수 있으랴
누가 절로 찾아오는 계절을 내칠 수 있으랴
입춘(立春)에게 묻다
오정방
춘래불사춘이라 하더니
봄이 왔다 해도 봄 같지 않구나
겨울 속의 봄인가
봄 속의 겨울인가
가면 오고 오면 또 가나니
오면 가고 가면 또 오나니
겨울을 비집고 찾아온 봄,
자연의 시간표를 누가 돌리랴
임자여, 먹물을 좀 준비해줘
'입춘대길'이라 써붙여야겠거든?
입춘
원영애
봄 길로 가요
찬란한 햇살
마주치는 것마다
웃어요
흐르는 냇가에
꽃 같은 마음 흘리면
인연 한 자락
구름같이 일어나
시방 세상 흘러가는 길
햇살이
물빛에 그림을 그려요
봄이어요
나무들은 꽃잎 물고
씨앗들은 꿈을 꾸어요
오세요
당신도 오세요
인연 한 자락에
꽃물 드려요
입춘
유승희
봄 앞에서 선 날
좋은 날만 있어라
행복한 날만 있어라
건강한 날만 있어라
딱히,
꼭은 아니더라도
많이는 아니더라도
크게 욕심부리지 않을지니
새 봄에
우리 모두에게
그런 날들로 시작되는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매서운 추위 걷히고
밝은 햇살 가득 드리운
따스함으로
뾰족이 얼굴 내미는 새순처럼
삶의 희망이 꿈틀거리는
그런 날들이었으면 싶어라.
입춘
유응교
대한이 지나가고
입춘이 다가오니
눈 밑의 얼음들도
부스스 몸을 풀고
불긋한
매화꽃망울
잔설 털고 내다보네
입춘
유창섭
입춘도 지났는데 저럴 수가 있다니!
이건 눈보라다
아니, 폭설이다
아니, 폭풍이다
아니, 폭언이다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배설이다
눈도 코도 뜰 수 없게
휘몰아치는, 쏟아 붓는, 덮어버리는
오, 하늘은 얼마나 좋겠는가
퍼붓고 싶을 때
마음 놓고, 눈치 보지 않고, 아무렇게나
퍼부을 수 있다니
눈발이 사정없이 쏟아지는
창밖을 보며
밖에서 걷는 이 보다도 안에서 먼저
더 젖고 있다
입춘에 아득한
봄이 젖고 있다
입춘
윤보영
입춘입니다
나는 오늘 꽃을 심겠습니다
나무며 씨앗은 아직 땅속에서
겨울잠을 자고 있겠지만
나는 꽃을 심겠습니다
꽁꽁 언 추억에 애틋함이 스며들어
기억이 기지개를 켤 수 있게
그대 좋아하는
결 고운 향기를 보내겠습니다
그대가 걸어올
마음 밖으로 달려나가
파랑새를 날리며 기다리겠습니다
입춘입니다
오늘 내 안에
그대라는 꽃을 심겠습니다
입춘대길
윤보영
가슴 활짝 펴고
봄을 맞는 입춘입니다
산과 들에 머무는 봄은
우리 가슴에 들어와
웃음꽃을 활짝 피우고
우리 가슴에 담긴 봄은
산과 들로 나가
싱싱한 꽃을 곱게 피우는 봄!
꽃이 피듯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아
레몬 같이 상큼한 입춘입니다
나보다도
그대에게 더 어울리는 선물
입춘대길입니다
입춘 무렵
윤석주
소설 쓰며 배(梨) 농사짓는
싱건지 맛 그 맛인 목사동(木寺洞) 이백형(李白兄)네
정월 초닷새 배곯은
달빛만 가득한 마당가
기방에서 쫒겨난 사립문
기웃거리던 매화(梅花)란 년
싹수 노오란 열일곱 고 가시네
지난겨울
상사병 지독히도 앓더니
물오른 얼굴에 뾰루지 툭툭 불거졌네
오매, 저걸 어쩔거나
입춘(立春)
윤인환
흔들리던 나뭇가지
바람의 속살을 쓰다듬다
고개 숙여 합장하니
화르르,
허공의 뼛살을 밀치며
붉은 매화 한 송이
피워 오른다
잔설 난분분하듯
세상이 요지경 되어 흔들려도
오늘부턴 찬란한 봄
입춘
윤재철
입춘은 머나먼 강남땅
작은 철새 날갯짓에
귀로(归路)의 여망이 실려있고
아무도 찾지 않은
개여울 가장자리에서도
기지개 펴는 버들강아지
혈구산에 생강나무도
내가 일 순위라고
뽀르통 표정 속 향내음 띄워준다
오매불망 처절한 춘망(春望)에
갈망들이 찬바람 속에서도
따스함이 스며있고
얼어붙은 달그림자에도
포근함이 걸려있다
입춘지절에는
아쉬움은 채움으로 화는 복으로
미움은 사랑으로
다같이 오래된 정인(情人)을
재회하듯 입춘가절을
나의 입춘
이길선
아주 멀리서 오기에
미미하게 느껴지는 자연의 숨소리
오로지 느낌으로 잡히는
바람과 햇볕의
부피와 두께로
삶의 뉴스를 녹이기 시작했고
손짓하지 않아도
이미 다가와 속삭이는 입춘
꽃피고 새가 화답할 봄날의 시작이다
얼어붙은 넓은 세상에서
추위를 꽁꽁 감싸던 여심에
봄의 기운은 겨울의 균열을 시작했다
겨울 속의 봄은 보이지 않지만
이미 마음의 혹한을 벗겨버린 입춘
털옷을 벗고 봄을 마중한 나의 입춘
입춘
이남일
문득 남풍이 불더니
얼음장 밑에도 봄은 오더군
그리움에 지새우던 밤을
애썼다 말 한마디 없이
눈물에 젖던 그 긴 밤을
보고 싶었다 말 한마디 없이
무심코
분 향내 풍기며 봄은 오더군
입춘대길
이도연
한겨울에도
꽃잎이 날린다
여의도
인중로에 벚꽃이 날리듯
입춘을 알리는 밤에
꽃잎을 뿌리는 겨울은
하얀 나비 춤추는
가로등 아래 소복소복 쌓여
눈부신 겨울을 시샘하는
봄날을 기다려
아 겨울에 꽃눈이 내린다
그날이 입춘이라고
입춘날
이명순
쫓지 마라 밀지 마라
긴긴 기다림에 북풍한설 맞으며
붉게 피웠더니
어이해 너는 봉우리 다 피우기도 전에 나를 밀어내느냐
산 따라 물 따라 갯버들 깨우고
복수초 입맞춤하고
홍매화 산수유 산천에 물들 때면
나도 쉼 하러 갈까만은
재촉 마라 바람아 봄바람아
못다 핀 꽃송이 임 그리워 애태우거늘 눈감아주려무나 입춘아
하색리의 입춘
이사금
굴뚝새 돌아간 울타리에
어둠이 날아와 앉으면
마실꾼들
하나둘
윤호네 사랑으로
먼 발자욱을 모아 온다.
황토방 가운데 질화로 속엔
주먹만 한 정(精)들이 고구마로 구워지고
마실꾼들
동치미 한 사발로 겨울을 돌며 마시며
훈훈한 입김을 뽑아내 새끼를 꼰다
겨울밤보다 길다란 삶의 얘기를 꼰다
밤새
지붕 위에 서리가 또 덮여도
처마 끝 도드름 키를 한 뼘 줄이고
울타리 밑 개나리 마른 가지
호호
시린 손가락을 불며
마실꾼들의 삶의 얘기를 거둬
봄을 반쯤 만든다
입춘(立春)
이상목
겨울은 아직 먼데 절기는 입춘이다
절기를 따질 만큼 편치 않은 마음 밭에
포근히 나를 감싸줄 그 무엇이 그립다
지열로 움터오는 한 톨의 밀알처럼
풍요를 꿈꾸었던 새봄의 전령처럼
그렇게 푸른 생각으로 물들고픈 2월에
매서운 북풍한설 침잠에서 깨어나라
끈질긴 설(雪)의 유혹 음모에서 벗어나라
오늘이 입춘이라는데 아직은 먼 나의 봄
입춘
이상원
산은, 하늘로 내민 젖무덤
꼭지께를 별들 밤새 간질대더니
나무들 귀를 열고
발그레 웃는 새벽녁
물소리, 골짝 어디선가
뒷물 훔치는 소리 들렸다
입춘 강변
이성희
추위에 인상 쓰며 굳어진 강
주름 펴는 소리는
겨울잠 깨우는 자명종
버들개는 보드러운 털을 쓰고
마지막 늦잠을 자고 있다
고양이 졸음을 재촉하는
햇살이 내리쬐는 한나절에
쌓인 눈 녹듯이
나른한 피곤이 나를 찾아왔다
입춘
이영균
김 서린 안경 저 먼데 흰 산
말라비틀어진 삭막한 계절
냉랭한 돌부처들의 외면
헐벗은 나목의 할 일은 단지 해동 기다림뿐이지
있지도 않은 서정 가상(假想)해 본들
누가 그걸 詩라 여기겠나
그래도 발버둥 침이 가상(嘉尙)치 않나
돌아앉아 외면만 하는 것들은 뭐 그리 대단해서
돌 섶 밑 훈장 고드름만 무성히 달고 앉았네
오늘이 입춘이라던가?
귀도 눈도
그래 이젠 마음 좀 열어 보게
입춘(立春)에는
이영균
쩡 얼음장 터져오던 침묵의 강
허한 맘에 서릿발 날 세운 쪽문 밖
음지 어슴푸레 그의 엷은 속살
모퉁이 은빛 바람 힁하니 지나던 긴 겨울밤
살아있다고 말하는 이 어디 있었나
언 계절엔 영혼조차 두려워
오금 저려 숨죽여 가던
달의 발그림자
이월엔 원망 사라지고
해동의 숨결 차츰 살아나
검은 밤 한켠씩 희게 벗어지기를
찬 설 날카롭던 비명
이젠 아물도록 미소 녹아들어
강물의 노래 다시 들려오고
온 천지 살 냄새가 땅에서부터 돌아와
한 발짝씩 차근차근
처마 끝 낙수 가슴 적셔온다
입춘(立春) 손님
이인혁
어디서 오는 걸까
바람의 흔적조차
더 쓸쓸해 있을 때
고운 햇살 닿는 곳에
길 없는 길이 열리고
말없는 말이 들리는데
유년의 그런 모습으로
청년의 그런 모습으로
그렇게 오시겠나
철모르고 사는 이
남풍(南風)불어
어지러히 어우러지게
하늘의 창문을 열어
입춘대길(立春大吉)하여도
봄은 쉬이 오지 않겠네.
입춘
이재봉
담벼락 갈라진 틈을 비집고 올라온 새순들이
머리를 비비대며 봄을 기다린다.
시샘 많은 바람이 담벼락을 흔들고 지나가자
덜덜거리며 수음*을 한다.
기다려야 한다.
진짜 봄이 올 때까지.
* 수음 : 殊 뛰어날 수, 音 소리 음, 가락이 특이한 음
입춘대길(立春大吉)
이종환
대문에 큰 글씨로 입춘축 건양다경
立春祝 建陽多慶
건곤은 겨울인데 세월은 봄이로니
乾坤 歲月
춘첩자 대들보에 춘만건곤 복만가라
春帖子 春滿乾坤 福滿家
오동나무 새싹은 맏손녀 출가목이라
出嫁木
봄 시샘 찬바람도 아랑곳 아니하고
콧노래 흥겹구나 윙 윙윙 잘도 한다
갑신년 입춘이여 과거사 훌훌 벗고
새 마음 새싹으로 무럭무럭 자라나서
국태민안 안가태평 누리게 하소서
國泰民安 安家太平
심경(心境) - 바람이 아직 차다고
이창기
입춘 바람에 질척거리는
산그늘 잔설을 밟으며
심심해 죽겠다는 아이를 달고
백족산을 오르다
빙판 진 산 중턱 약수터 언저리
겨우내 매달려 있던 마른 잎 떨구듯
털썩 주저앉아 미끄럼 타는 아이 손 놓고
넉살 좋은 후배의 안부 전화 받다
우연히 매만진
겨울나무의 부드럽고 도톰한 어린 꽃눈
바람이 아직 차다고
가볍고 부드러운
솜털 옷 해 입혀 내보낸 그 마음
너, 알지?
입춘(立春) 추위
이학주
겨울 내내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입춘(立春)날
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대문 활짝 열고
봄 마중 나갔더니
봄은 아직도
저 산 넘어 있다면서
꽁꽁 얼어붙은
새벽 찬바람이
오돌오돌 떨면서
내 품 안을 파고들더라
입춘
이한명
산고의 고통이다, 2월은
가지 끝마다 움트는 움막집 하나씩 매달아두고
봄을 탄생시키는
잠꾸러기다, 2월은
겨울잠에서 깬 늦잠꾸러기들이
이불을 뒤척이며 귀를 쫑긋 세운다
개여울 징검다리 폴짝폴짝 건너오는
홍매화 소식부터
건넛마을 아랫집 외양간에
송아지 태어난 소식까지
바람이 전해 온 따끈한 소식일 게다
차가운 기운 걷어내고 따뜻한 빛을 심어야지
싹을 틔워야지
저기 새 희망이 오고 있네
대문 활짝 열어젖히고 복을 들인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하리라
봄 일기 - 입춘에
이해인
봄이 일어서니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나는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그렇구나
그렇구나
마음에 흐르는
시냇물 소리
입춘(立春)
이해인
꽃술이 떨리는
매화 향기 속에
어서 일어나세요, 봄
들새들이
아직은 조심스레 지저귀는
나의 정원에도
바람 속에 살짝
웃음을 키우는 나의 마음에도
어서 들어오세요, 봄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다시 사랑하라 외치며
즐겁게 달려오세요, 봄
입춘 일기
이해인
겨울이 조용히 떠나면서
나에게 인사합니다
안녕! 다음에 또 만날 수 있기를
봄이 살그머니 다가와
나에게 인사합니다
안녕? 또 만나서 반가워요
딱딱한 생각을 녹일 때
고운 말씨가 필요할 때
나를 이용해주세요
어서 오세요. 봄
나는 와락
봄을 껴안고
나비가 되는 꿈을 꿉니다
입춘 무렵
임동확
그악스럽게 도토리, 상수리를 주워가던 지난겨울에도 살아남은 청설모 새끼 두 마리가 스트로브 잣나무 가지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해발 73M 궁산 공원
삭정이로 얼기설기 아카시아나무 우듬지에 엮어놓은 까치집이 마치 시대를 훌쩍 앞서간 예언자처럼 뜻하지 않은 초속 21M 강풍에도 끄떡없이 잘 버텨내고,
저마다 혹독한 생존의 비밀을 풀려는 듯 도끼이자 숟갈인 부리를 가진 딱따구리는 선 채로 썩어간 지 오래인 밤나무 둥지를 연신 쪼아대고 있다
굽은 허리에 지팡이를 짚은 채 정상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가는 할머니가 오르막에서 잠시 눈길을 돌리며 쉬는 동안
제주 삼다수 2L병에 담아 연민하듯 뿌려주는 흰 쌀을 거부하듯 멧비둘기 한 마리 노오란 개나리 울타리 그늘 아래 부엽토를 연신 두 발로 파헤치고 있다
혼자인 게 두려워 이리저리 떼 몰려다니는 겁 많은 참새들이 사철나무 조팝나무 덤불로 옮겨간 사이
앞서 드러나야 할 미래 같은 모습을 한 새매 한 마리 늘 소란한 연둣빛 현재의 지상을 굽어보며 제 먹잇감을 찾고 있다
입춘 단상(斷想)
임재화
한겨울 추위를 잘 견디어내고
봄기운 산과 들에 새봄을 예고하니
눈 덮인 먼 산의 마른 나뭇가지에도
또다시 생명의 싹을 틔우려 한다
양지 녘의 매화 나뭇가지마다
작은 꽃망울 하나둘 입술을 벌리고
늘 푸른 솔숲과 대숲에 이는 바람
온 누리에 새봄의 기운 분출한다
이제 겨울은 저만치 떠나려 할 때
지친 몸 세월의 흔적 켜켜이 쌓여도
늘 마음만큼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새봄의 맑은 기운 흠뻑 담고 싶다
입춘
장광규
눈발이 날리고
수은주는 영하로 내려가
겨울 깃발이 나부끼는데
방 안에 앉아
보이지 않는 봄을 기다린다
입춘대길
건양다경
入 建
春 陽
大 多
吉 慶
정성 어린 춘축을 만들어
기둥이며 대문에 크게 붙이고
봄이여 어서 오라 손짓한다
고드름이 떨어져 땅을 깨우고
얼음장이 갈라지며 강물을 흔들면
봄은
남풍과 함께 온다
입춘
장석남
아버지의 사진틀을 갈았다
수염을 깎은 듯 미소도 조금 바뀌었다
이발소를 데리고 가던 아버지의 손가락 마디가 두엇 덦던 손을 생각한다
언 몸을 금세 목여주던 이발소의 연탄난로도 생각한다
연통에 쓱쓱 비누거품을 태우던 이발사의 거품붓도 생각한다
전쟁통에 열 번을 살아나와 열한 번을
총알 속으로 되몰려갔다던 무심한 대화를 생각한다
아무도 몰래 어금니를 꽉 물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미 이십년이 가까워 얼굴 하관이 마구 빠져나오는 낡은 사진틀을 새로 갈아
식탁 의자에 기대놓고 아버지의 관상을 본다
박복한 이마를, 우뚝한 콧날을,
어투를 기침 소리를 형제들은 골고루 나누어 받았다
길지 않은 인중만은 아무도 물려받지 않으려 했으리-
허나 그도 알 수는 없다
날은 언제 풀리려나?
강추위다
돌절구에 물이 열어 쩍하니 금이 갔다
할 수 없이 이번 봄엔 절구에 흙을 담아 꽃을 심으리
아버지가 가꾸던 꽃이 있었던가?
어느 핸가 샘가에 심었던 사철나무만 생각난다
늙도록 꽃도 없이 지루한 나무다
날은 언제 풀리려나
기왓장도 반달도 새파랗게 얼어붙는다
입춘 부근
장석남
끓인 밥을
창가 식탁에 퍼다 놓고
커튼을 내리고
달그락거리니
침침해진 벽
문득 다가서며
밥 먹는가
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
오는 봄
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
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
입춘대길(立春大吉)
장유정
오라 봄이여
여울 강 건너
거샌 찬바람 불어 살이 애이도
나는야 나아가리
그댈 맞으리
꽃봉오리 도톰하게 살이 오르고
오라 봄이여
그댈 안으리
도란도란 얘기하며
봄소식 전한다
얼었던 강 고삐 풀리고
봄아 오너라
네 아무리 추워도
봄은 가까이
입춘(立春)
장인성
봄빛 한 움큼
잠자던 나목에 비춰 주니
생끗 웃는 입술이 곱다
두근거리는 목련
불룩한 젖가슴 커가는
관능의 몸짓
나무마다
옷을 벗는 긴 하품 소리
겨울이 서두르는 봄의 길목에
立春 강산은 벌써 기쁘다
입춘 꿈
장인성
산에도 들에도
입춘이 오면
하얀 목련꽃도 진달래꽃도
왕벚나무꽃도
아름답게 꽃피울
새봄이 오는데
나에게도
진정 봄은 오는가
나는 오늘도
심플 하우스에다
아름답게 꽃피울
새로운
봄 꿈을 심는다
입춘날의 기도
장인성
용호(龍虎)는 복을 부르고
재앙을 몰아내며 복이 들어오는
입춘날에 만사 대길하게 하시고
좋은 경사가 많게 하소서
절기를 순조롭게 하시고
요임금 때처럼 모든 것이 평화롭고
나라는 태평하며 백성은 평안하여
화평하고 풍성한 세월이 되게 하소서
온 세상이 태평한 봄으로
하늘은 사방에 가까웁게 하시고
봉(鳳)은 남산의 달 아래 기쁘게 울며
기린은 북악의 바람에서 노닐게 하소서
부모님 천년수(千年壽) 건강하게 오래 사시고
자손은 길이길이 영화로우며
땅을 쓸면 황금이 되게 하시고
문을 열면 만복이 들어오게 하소서
봄이 천지에 가득하니
나라 사랑하고 풍년을 원하며
문으로는 사시사철 복을 받아들이고
집으로는 사방의 재물이 들어와서
온화한 군자의 집이 되게 하소서
입춘
장종섭
부끄러운 맘속을
감추어 씻도록
밤의 배려로
어둠이 내리듯
날뛰는 봄의
아름다움을
다소곳이 단장하여
입춘이라는 날을 잡아
산과 들로 시집보내는
겨울은 봄에게 엄격한
친정집이었습니다
당신의 입춘입니다
장지연
입춘 입하 입추 입동이 정해진 사계
인생 또한 그렇게 나누어져
차가운 동토의 가슴을 얹고 사는 이에게
자 이날부터 당신의 입춘이라 말할 수 있다면
가슴 시린 겨울도 참을 만하겠다
마음 비 얼어 눈 되어 쌓여도 견딜 만하겠다
사랑하는 이 잃은 앙상한 외로움도
또 다른 인연의 싹을 올릴 준비를 하겠다
겨울의 기나긴 터널을 헤매는 이여
며칠만 지나면
당신의 입춘입니다
마음에 크게 입춘대길 건양다경이라 써 붙여요
새 마음이 돋고 새 인연이 찾아오고
막힌 일이 풀려 졸졸 흐르고
사랑 꽃 행복 꽃이 만발할 봄이 곧 올 거에요
축원의 인사를 드리고 싶은 당신의 봄
입춘
장진숙
누가
아직도
늦잠을 자니?
밑 빠진 잠 털어내고
이리 나와 봐
잔설이 구겨진 휴지처럼
희끗희끗 남아 있는 산비탈에서
남은 추위 겁도 없이
미릅나무 눈뜨는데
고개 너머 보리밭
신명 나 푸르른데
누가 아직도
늦잠을 자니?
어서 나와 봐
입춘서
장진숙
이제
다시 태어나
제금 날 시간이니
5월 보리 까스라기로
쑤욱 쑥 웃자랄
시퍼런 맨발의 족쇄
풀어다오
문고리 쩍쩍 달라붙던
지난겨울 증오의 손가락들
얼음장 깨고 일어나는
뜨거운 신열의 입춘서 한 장
무너진 논둑 밭둑 일으켜 세워
지심을 매리니
우리들 깜깜한 동면의 빙벽마다
고드름으로 늘어선
노염의 비수
이제는 낱낱이 거두어 다오
입춘
장태윤
온 누리에 햇볕이 가득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건강하여
편안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
입춘서를 붙인다
봄기운이 섰으니
영혼이 깨어나
활발한 기운 피어나겠지
움츠렸던 가슴 활짝 펴고
마음 밭에 심을
사랑보다 진한
꽃씨를 챙겨두어야겠다
봄은 어디로 오는지 잘 모르지만
제주도 서귀포에는 벌써
동백 홍도화 유채꽃이 피었단다
아직도 매서운 바람
손끝이 시려오는데
겨울인들 어쩌겠는가
설레는 마음으로
입춘서를 붙여놓고
봄 맞을 준비를 서두른다
입춘
전병일
들어오는 봄
겨울답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
봄이 온다고 하니 시샘이라도 하듯
진정 겨울을 보내기 싫은가 보다
나목의 꽃망울도
지층의 생명체들도 기지개를 켜다
찬바람과 냉혈에 당혹한다
꽃샘바람을 맞아야
비로소 아름다운 꽃과 잎을
피울 수 있나 보다
봄이 오는 길목에서
입춘 날
전영금
입춘이
나뭇가지 위에 앉으며
겨울날 너의 모습 딱도 하더라
나무를 보고 흉을 본다
나무 하는 말
겨울에는 눈에도 안 띄더니
비겁하게 남의 흉을 봐
입춘은
하루종일 기분이 나빴습니다
다음날 입춘이
나뭇가지 위에 앉으며
너의 봄에 피는 꽃이야말로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어
나무는 웃으며
아니야 네가 따듯해서
우리가 꽃 필 수 있잖아
정말 고마워
나무와 입춘은
서로 웃으며 오늘은 기분 좋은 날
왜 기분이 좋은지
이제야 알았습니다
입춘
정군수
입춘 아침
할아버지는 사립 문설주에도
햇발 안 드는 뒤안 장지문에도
입춘방을 붙이셨다.
응달에는 눈이 쌓여
할아버지의 흰머리만큼이나 근심스러운데
마른 가지는 겨울바람이 남아
할아버지의 손등만큼이나 앙상한데
입춘방을 붙이셨다.
둘러보아도 봄소식은 알 길 없고
풀 그릇을 들고 종종거리다가
나는 보았다
하얀 수염 사이
어린아이 같은 할아버지의 웃음
봄이 오고 있음을 보았다
입춘
정미영
찬비가 내린다
붉은 장미를 사 들고 그에게 간다
꽃처럼 향기롭게 잘 웃던 그가
1층 병실 끝 볕이 잘 들지 않는 방에 누워 있다
한때는 새벽 초침 소리처럼 밝았던 그가
지금은 겨울 저녁 같이 흐리다
의사는 이따금 와
차가운 손을 이마에 대곤
어제 했던 같은 말만 되풀이하고 돌아간다
알코올 솜 냄새가 장미의 향기를 덮은 병실
그래도 어디서 봄이 오고 있는지
장미 향기가 조금씩 풀썩거린다
입춘
정민기
문 열고 나오니
순백의 세상 꽃눈이 바라본다
착하게 살아가라고 때묻지 않은 듯,
돌아가는 길 끊길까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바람
막다른 골목 끝에서 주저앉고 만다
초봄처럼 날은 포근하고
난데없는 까치 울음소리 귀를 뚫는다
해는 햇살 늘어뜨리고 낚시 삼매경
구름처럼 나비도 날아들겠지
앞다투어 저요, 저요 꽃봉오리 주먹
들어 올리고
입춘(立春) 날
정민호
얼음장 속에서
하얀 뿌리를 내리는 미나리를 보았다.
헤엄치는 미꾸라지의
흔들리는 꼬리,
어디선가 하얀 입김이
모락모락 오르고 있다.
저녁 식탁에 오른
물미역 두어 오리,
바다의 파도 소리가
밥상 위에 출렁거리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立春大吉>일세.
입춘 단상
정약용
사람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는 것이 그 본분
어리석은 자는 본래의 선함을 잃고
평생을 입고 먹는 데 바친다네
효성과 우애가 仁의 근본이요
학문은 그 남은 힘으로 하는 것이니
힘겹게 노력하지 않는다면
세월 따라 그 덕을 잃어 가리라
입춘(立春)
정양
얼다 녹은 냇물에
살얼음 낀다 살얼음 밟듯
목숨 걸고 봄이 오는지
궁금한 수심(水深)을 길어 올리는
피라미 한 마리
하얀 뱃바닥으로 살얼음을 만져보고
갸웃거리며 다시 가라앉는다
사람의 손이 닿을 수 없는 영역까지
가정신이라면
입을 봉하고 싶어도
몽둥이로 두들겨 패주고 싶어도
불가한 것
정신 속에도 사람의 형상이 있다면
눈곱도 떼어 내고
칫솔질도 시켜줘야 할 텐데
땀 흘리는 일밖에 떠오르른 게 없어
겨울 내내 미륵산을 오르다가
무슨 선물처럼 전투기를 두 대나 만났다
온몸이 정신인 허공을 가르는 전투기 소리,
미륵산이 쫙쫙 갈라질 때
내 오래된 욕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벗에게 쓰는 입춘 편지
정연복
가슴속에는 늘 있지만
몸은 멀리 있는
사십 년 지기
나의 오래 묵은 벗아.
강원도 양양 너의 집
앞뜰 배롱나무 빈 가지에도
지금쯤 입춘의 봄바람
살랑이고 있겠지
문득문득 그리운 마음
알뜰히 쌓아가다가
연분홍 꽃 피는 날에 우리도
기쁜 우정의 꽃 한 송이 피우자
아내의 입춘
정연복
직장에서 허기져서 돌아와
늦은 저녁밥을 먹고
잠시 TV를 시청하다가
깊은 잠이 든
아내의 다리를 주물러주다가
눈에 번쩍 띄었네.
평소 화장을 거의 하지 않는
아내의 손톱과 발톱마다
곱게 칠해진
연분홍 빛깔 매니큐어.
참 앙증맞게
예쁘기도 하여라
봄의 도래를 알리는
진달래꽃이나 벚꽃 같네.
오늘이 입춘인 줄
아내는 알고 있었나 보다
그래서 제 몸에도
봄의
시작을 알리는 표시
살며시
해두고 싶었나 보다
애인에게 쓰는 입춘 편지
정연복
삶이 까닭 없이 외롭고
또 많이 지루하던
내 앞에 돌연 한 줄기
빛같이 나타난 너
네가 내 눈에 들어온
그날 그 아찔했던 찰나부터
나의 가슴 나의 생에는
기쁨의 날개가 돋아났다
아직은 추운 겨울 속에서도
봄의 시작을 알리는
오늘 입춘을 맞아 고맙고
행복한 마음으로 편지를 띄우나니
내 눈에는 꼭 한 송이
겨울 동백같이 예쁜 애인아
너는
내 생의 봄날이다
입춘(立春)
정연복
24절기의 하나인 입춘은
해마다 양력 2월 4일경이다
사실 이때는
아직 겨울이 한창인데도
이날 봄이 시작된다고 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바로 올해 입춘인
오늘 한낮의 겨울 햇살 아래
그 숨은 뜻을 몸으로
느껴 알 수 있겠다.
차가운 겨울 공기를
가르며 내려와
얼어붙은 대지를
따스한 기운으로 애무하는
한줄기 겨울 햇살 속
은은한 봄빛!
입춘대길(立春大吉)
정연복
아직도 한창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 추위에 떨며
가만히 몸을 옹크린
그대여.
오늘은 입춘
봄의 문턱에 들어서는 날
힘껏 기지개 펴고
오늘의 햇살을 바라보라.
느껴지지 않는가
겨울 햇살 속 봄기운
보이지 않는가
겨울 햇살 속 봄빛.
긴긴 겨울의 끝
저만치 아른거리도록
지금껏 잘 참아낸
그대의 생에 찾아온 입춘
이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쁘고 희망적인가
입춘에 아들딸에게 주는 시
정연복
오늘은 양력 2월 4일
입춘(立春)
겨울의 한복판에서
봄이 시작되는 날이다.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라던
어느 시인의 말이 생각난다
봄은 겨울에서 가까이 있다는 말이
단순한 시적 표현만은 아니구나
꽃 피는 인생의 봄날을 위해
지금 힘겨운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랑하는 아들딸아 용기를 내어
조금만 더 파이팅을 하렴.
온몸에 찬바람 맞으면서도
안으로 묵묵히 새봄을 만들어가는
저 겨울나무의 굳센 의지를
너희의 가슴속에도 한가득 담아보렴
입춘(立春)의 기도
정연복
겨울의 꼬리가
아직 많이 남아 있는 데도
입춘의 햇살에서
봄기운이 물씬 느껴집니다
겨울 너머 봄이 아니라
겨울 속에 이미 봄이 있음을
슬픔 건너 기쁨이 아니라
슬픔 속에 기쁨이 함께 있음을
세상 살아가는 날들 동안
늘 잊지 않게 하소서
입춘의 노래
정연복
겨울의 끝이
저만치 보이네
가슴 시린 오랜
추운 날들을
지금껏 잘
견디어 온 그대
헤쳐가야 할
아픔과 시련의 시간
아직 그대의 발 앞에
놓여 있어도
이제는 눈물 거두고
웃으며 걸어가도 좋으리
꽃 피는
봄이 눈앞에 있으니
가슴 가득 희망을 품고
기쁘게 살아가리라
힘차게
노래해도 좋으리
입춘의 사랑 노래
정연복
아직 봄이
저만치 있어도
내 마음 속엔 앞질러
봄은 시작되었네
머잖아 찾아올
꽃 피는 봄을 예감하며
매서운 칼바람도
오늘은 별 것 아닌 듯
당신의 마음 또한
아직은 내게서 멀어도
가슴 속으론 벌써
당신은 내 사람
입춘 지나서
정연복
입춘이 지난 지
벌써 일주일이나 되었는데
오늘 또다시
매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꽃 피는 봄날이 오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자연의 봄 마냥 인생살이의
봄 또한 그러하겠지
그래도 창문 너머
한낮의 밝은 햇살에서는
차가운 듯 따스운
봄기운이 아른아른
한겨울의 입춘(立春)
정연복
겨울의 본색을 드러내는
칼바람 휘몰아쳐
체감온도 영하 20도라는
양력 2월 4일
바로 오늘이 입춘이라니
참 이상하지 않은가
온 세상 추위에 얼어붙고
나무마다 빈 가지뿐
초록빛은 어디에도 없는데
뜬금없이 봄이 왔다니.
아니다!
입춘이 맞다
겨울 지나 봄 오는 게 아니라
겨울 속에 봄이 있다
겨울 품속에서
봄이 살금살금 자라는 거다
겨울은 봄의 길목일뿐더러
새봄의 자궁이다.
한 줄기 햇살 내려앉은
겨울나무의 보이지 않는 속
파릇한 봄 기지개 켜는
소리 들린다.
입춘 세레나데
정이산
입춘을 하루 앞두고
봄을 알리는 비가 내린다.
동지섣달 얼어붙은 산과 들에도
비다운 봄비가 스며들어 가고
겨우내 가뭄으로 굳었던 대지도
허둥지둥 빗물을 빨아드린다.
겨울 끝에 봄비가 내리니
대문 옆 라일락 나뭇가지에도
조그만 회색빛 봉우리가 솟으니
또 다른 찬란한 봄을 보내고
며칠 동안 봄을 보낸 슬픔으로
마음 아파서 지냈던 추억에
난데없이 내 마음이 떨린다.
설레고 떨리는 마음으로
또다시 새봄을 맞이하는 것을
사치스러움이라 여길지도 모른다.
이 넓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아름다운 비밀 하나는 간직하며 살자
그것을 무덤까지 가지고 가서
영원한 비밀이 되지 못하고
그 언젠가는 밝혀지더라도
새해 새봄 새 생명에는
설렘과 비밀이 숨어있지 않는가
우리는 그 비밀을 찾으려고
부질없이 바쁘게 사는 게 아닐까
봄을 사랑하는 그대는 아는가
오월 라일락 꽃향기에 취하고
상사병으로 마음 아파하면서
또 한 해를 보낸다는 아쉬움으로
몸서리치는 슬픈 비밀을
입춘을 맞이하며
정종명
절기(節氣)는 농경사회서 중요하게 여기며
고려 충렬왕 때 중국에서 도입 널리 사용되었다
입춘(立春)은 24절기 중 첫 번째로 봄의 시작으로
입춘대길(立春大吉) 건양다경(建陽多慶) 등의 좋은 글귀의 방을 써서
대문에 걸어 크게 길하고 경사스러운 일이
집안으로 들게 하는 세시 풍속이다
저도 현관문에 방을 걸고 한 해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며 힘찬 새봄의 문을 열었으면 한다
입춘 추위에 장독대 깨어진다는 속설이 실감 나게
한파가 지친 몸과 마음에 피로를 가중시킨다
하지만 슬기와 지혜로 이겨내면 멀잖아
남녘 봄기운이 훈풍을 몰고 와 온 누리에 향연을 펼칠 것이다
긴 침묵의 시간에서 벗어나 정갈한 마음으로
입춘방 써서 걸고 한해 내 가정에 만사형통하기를
소망하며 새봄을 송축해 본다
입춘의 휘슬
정찬열
동장군이
멈추지 않은 언덕에
화사한 햇빛을 받아
붉은 매화 소식을
셔터에 쓸어 담는다
눈보라도
무서울 것 없다며
입춘이라는 힘을 믿고
당당하게 피워낸
무등(無等)의 홍매화
앙상한
가지 끝의 반 춤
매섭게 부는 칼바람의
휘파람 소리에도
양보 없는 동장군의 끝자락
봄의 전령사
부지런한 계절의 신호에
마음 놓기는 이르다 해도
벙글 어진 붉은 사랑
환한 미소로 뱉어 보낸다
입춘첩의 소망
정찬열
메마른 가지 위에
하얀 눈꽃이 피고
차가운 한파에 몸부림
1월에 지나간 절기
소한(小寒)과 대한(大寒)을
감싸고 지나갔다.
2월에 접어들어
입춘(立春) 날에 붙이라며
서예 작가의 입춘첩(立春帖)
사무실 단문에 붙여둔다.
삐칠 별(丿)처럼 붙여준
입춘대길(立春大吉)
파임 불(乀) 자로 붙인
건양다경(建陽多慶)
붙여놓고
바라보며 하는 소망
인생팔(八) 자로 보여진다
경자(庚子) 벽두
재난은 사라지고
가정의 안녕과 많은 경사에
기원을 대신하는 입춘첩으로
입춘
정태중
상춘객들
오색으로 물들이며
산으로 들로 간다
저
많은 발걸음 바삐
봄 속으로 걸어가는데
발끝
병아리 부리 같은 저것
땅을 공중부양하는데
난
한 발짝도 더디
움직이지 못하였다
묵언수행 밟을 것만 같아서
입춘 절에
정호완
눈 날리는 산허리에 동백꽃이 유정하오
나그네 긴긴 사연 한 잎 두 잎 피어나면
눈 녹은
골물소리로
봄이 먼저 오는 것을
호랑이 탄 산신령님 오름 넘어 어딜 가요
뭣 같은 세상살이 어느 누굴 삼키려고
바람 찬
산신각에는
봄소식이 향기로워
숯 덩어리 숭례문에 하얀 눈이 회한이듯
치욕을 불사르고 그 넋 살아 진달래로
봉황의
무지개 말씀
소양강이 풀릴 것을
입춘 부고
정홍순
홍매는 문밖에 섰다
쉰둘에 쓰러진 너로 어안 빠져
붉게 피는 가지 흔들리고 있다
슬픔 물어가는 새
죄다 물고가라
꽃은 한사코 아파도
너의 깊은 병 참으로 몰랐다
묵상하던 말씀 거두고
자리끼처럼 흘리던 목마른 밤
가지마다 꽃 치고 간 너
아무렇게나 슬퍼하고
많이 울 수 있는 날을 두었다
오십이 년
이만하면 한 무더기 될 것이라
대문에 꽂아 놓은 편지
입춘
조병화
아직은 얼어 있으리,
한 나뭇가지, 가지에서
살결을 찢으며 하늘로 솟아오르는 싹들
아, 이걸 생명이라도 하던가
입춘은 그렇게 내게로 다가오며
까닭 모르는 그리움이
온몸에 쑤신다
이걸 어찌하리
어머님, 저에겐 이제 봄이 와도
봄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봄 냄새나는 눈이 내려도
입춘을 지나며
조병화
아직도 하얗게
잔설이 남은 숲길을 걸어서
절로 올라가면
그곳, 어디메에서 들려오는
어머님의 기침 소리
생시에 듣던 그 기침 소리지만
어머님과 나 사이는 저승과 이승이다
멀리 숲 위에 봄 냄새나는
붉은 해는 솟아오르고
나의 이 이승의 길은 아직 안개다
입춘 무렵
조성국
대밭 어귀 새잡이 그물망에
아연 환해지는 치자빛 햇살이 애잔하다
끄느름한 수은 등촉의 농공단지
용접 불빛에 아다리 걸린, 나보다
몇 살 어린, 그러나 여러 살 더 먹은 것 같은
백석의 시를 곧잘 암송하고
마르크스 저작을 한 권도 빼놓지 않고
독파해버린, 늘 나이보다 훨씬 깊은 여자
때론 내 양쪽 볼을 까닭도 없이
화끈 달아오르게 했던
그 형형한 눈매 되살려낼 약 달임 새,
밤새 울던 부엉새는 없다
애면글면 그물망 찢고 날아오른
붉은머리오목눈이 한 마리만 조롱하듯
마른 나뭇가지에 사뿐히 앉아
피멍 든 부릴 닦던 자리,
아기 홍도화가 살폿 맺혔다
입춘 부근
조연호
그 입춘(立春) 부근은 너무나도 따사로워 나는 제방에 걸터앉아 못생긴 꽃의 꽃말을 외웠다. 아무도 떠나지 않은 자리에 마음이 머물던 자국만 남아 있다. 어떤 책을 펼쳐 읽어도 마음 좋은 청춘은 만날 수 없던 날, 들풀이 머리칼처럼 야윈다. 늙은 개암나무 곁에서 허리를 굽혀 봄볕의 마음을 줍는다. 내가 꽃말을 외울 때마다 거짓으로 잎순이 부풀어 올랐다. 가난한 애인과 함께 부자의 마을에서 헤픈 상대방이 되고 싶던, 내 그리움이 가시에 찔려도 터지지 않았다. 따사로운 나무둥치들이 어린 양처럼 매매 울며 어미 숲을 부른다. 쑥냄새가 나는 길을 걸었고 그 길가에 호들갑스레 꽃 피고 여동생의 책가방에서 화장품이 쏟아졌다. 찌처럼 조용히 그늘 위로 머리만 내민 봄볕은 자기를 물고 어둠 밑으로 순식간에 내려갈 바람의 입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입춘예감(入春豫感)
조영순
털 부시시한 새들과
짧디 짧은 뿌리로 온몸을 겨우 지탱한 마른나무들과
코끝에 송글송글 땀방울 맺힌 바람이 신나게 노는 아침
부드럽게 생명을 실어 나르는 히아신스 알뿌리 하나
쓸쓸한 겨드랑이 사이를 마구
비집고 들어서면
자꾸만 허전한 나목의 벼랑마다
제 몸 속에
도사린 어둠의 질긴 발목들
툭툭 자르며
꽃봉오리들 둥글게 일으키고 있다
입춘(立春)
주응규
산짐승 같이 길들어지지 않은
엄동설한의 울부짖음이
어느 틈에 멎어 들면
산빛도 물빛도
혹한의 겨울을
말끔히 씻어내고 있다
양지에 발그스레 터진
매화(梅花) 꽃잎과 향기가
햇살과 바람을
물들인다
입춘(立春)
채린
겨울이 오는가 했더니
어느새 봄기운이 뻗친다
햇살들이 쪼르르 담장으로 오르고
거칠어진 손등을 살살 문질러준다
귀한 햇볕에 머리카락을 쬐려 모자를 벗어본다
닫아두었던 붓두껍을 열고
청자 개구리 연적에 물을 담고
두루마리 한지를 펼친다
떨리고 굳어진 손으로 꾸불꾸불
立春大吉
방을 써서 조심스레 붙인다
사람들의 가슴에
푸른 희망을
소낙비 그친 뒤 살그머니 나타난 무지개처럼
찬란하리
입춘(立春)
최경신
아직 밖은
매운바람 불고
희끗희끗 눈발도
뿌리는데
곤한 새벽잠 깨우며
들려온 소식
뒷산 까치마을은
헌 집 리모델링으로
부산하다고
입춘
최남균
봄이 왔어야
오곡밥도 먹었으라
그란디
석촌호수는 과부 쌈짓돈처럼 꽁꽁 얼어붙었어야
어쩌면 좋것는가
거시기해서 나가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져 불었어
스키를 타부러야
나가 뭘 잘 못했는가
봄 처녀 개나리 봇짐처럼
나가 자유롭게 살고픈디
아직도 겨울이랑가
입춘(立春) 무렵
최재환
칼날보다 차가운 구둘에 누워
아직도 뼛속에 느끼는 냉기(冷氣)를
봄이라 고집한다
나이가 들수록 어깨는 처지고
빛바랜 머리칼 하나
만장(輓章)처럼 바람에 나부껴
지나친 세월을 돌아다 보면
가지 끝이 매달린 저 손짓은
누구의 귀띔일까
아침마다 벌이는 아내와의 입씨름
새끼들 눈치 보는 일쯤
이골이 나서
젖은 채 누워 있어도 부끄러운 줄 몰라
그럭저럭 日曆 한 장 떼어내는걸
친구들 성화로 헤진 옷 몇 겹으로 껴입고
문을 나서지만 마음은 아직도 엄동설한(嚴冬雪寒)
암노루 속살 오르는
양지 볕에도
흔들리는 삶의 무겔 낸들 어쩌랴
어머니의 기억 속에서나 빛나던
식구들의 생일을
이제사 간지(干支) 짚어 헤아리며
봉창을 열면
언젠간 넘어야 할 저 언덕이
오늘따라 유난히 가까와 보인다
입춘(立春)
최진연
미립자의 먼지를 일으키며
파란 미끄럼틀을 타고
햇살의 아이들 떼 지어 내려오고
난쟁이 바람들이 쏘는 화살에
쓰러지는 청동빛 병사들의 신음소리
희고 견고한 성채는 다시
폭설보다 더 한 햇살 속에 묻히고
창문 가득 밀려드는 하늘로
갑자기 더 어둑하고 좁아지는 집
갑옷들의 함성 포위도 사라지고
그 군화소리들 들리지 않는다
왁자지껄한 바깥 소리에
잠을 깨고 나오는 새싹들의 한낮
근질거리는 땅 거죽을 뚫고
밖으로 기어 나오는 벌레들
온 생명들이 벌이는 축제의 마을
할아버지의 대문엔 벌써
입춘대길(立春大吉) 방이 붙어 있었다
미립자의 먼지를 일으키며
파란 미끄럼틀을 타고
햇살의 아이들 떼 지어 내려오고
난쟁이 바람들이 쏘는 화살에
쓰러지는 청동빛 병사들의 신음소리
희고 견고한 성채는 다시
폭설보다 더 한 햇살 속에 묻히고
창문 가득 밀려드는 하늘로
갑자기 더 어둑하고 좁아지는 집
갑옷들의 함성 포위도 사라지고
그 군화 소리들 들리지 않는다
왁자지껄한 바깥 소리에
잠을 깨고 나오는 새싹들의 한낮
근질거리는 땅 거죽을 뚫고
밖으로 기어 나오는 벌레들
온 생명들이 벌이는 축제의 마을
할아버지의 대문엔 벌써
입춘대길(立春大吉) 방이 붙어 있었다
2월의 입춘
최홍윤
봄은 오는데
살가워야 할 2월이 매섭기만 하다
배우고 익히다
이별 아닌 이별로 서러워진 마음
그 마음들 때문에
이틀이나 짧아진 2월인가 보다
꿈 찾아
꿈을 키우려
이리저리 떠나는 나그네 인생길도
이 2월에 시작되고
얼어붙은
천지간에서
복록이라도 불러들이려는 내 심사
나도 이미 입춘대길을 부르짖었다
버들강아지
방그레 웃는 산골짝 어디선가
졸졸 흐르며 뒷물 훔치는 소리
반세기 전에
마지막 학교 문턱을 나서던
이 땅의 누이들의
눈물 훔치는 소리가
더는 오갈 데가 없던
누이들의 서러움이,
아직도 내 가슴을 적신다
입춘(立春)을 기다리며
최홍윤
오래된 이야기다.
봄은 오는데 살가워야할 2월이 매섭기만 하고
배우고 익히다
이별 아닌 이별로
서러움을 달래던 마음들 때문에
이틀이나 짧아진 2월에
입춘 날이 들었나 보다
꿈을 키우려다 꿈을 접고
이리저리 떠나는 나그네 인생길이
이 입춘 절기 지나면은 시작 되는 것이었다.
반세기 전에 나는 보았다
마지막 배움터 떠나는
누이들의 눈물 훕치는 소리를 들었다.
더는 오갈 데가 없던 누이들의 서러움을 안다
아직도 내 가슴 저미는 서러움이,
빛나는 졸업장을 적시는 눈물이,
그저
울어 대던 누이들의 울먹임이
내 눈에 어렁거린다
입춘이.. 봄날이 오면....
정든 교실 선생님도
이제는
영영 볼 수가 없다.
입춘
하두자
편지가 왔다
눈물 섞인 바람 속을 떠난 뒤
소식 끊겼던 그대
손 끝 시린 어둠의 시간들을 지나
꽃눈 하나 피우며 오고 있다는
그대 더딘 발소리
귀 기울여 듣고 있다
사랑은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것
물기 오른 나무 속살 베어내어
그대 이름을 쓴다
먹빛 그리움으로
입춘대길
하영순
잔설이 있어 바람은 차도
봄기운이 감돈다.
빨간 코끝이 땅 냄새 맡고 봄아 하고 부르니
새들이 짹짹
새들도 봄을 기다리고 있다
제아무리 혹독한 북극곰이라 해도
계절을 이기지 못하고
꼬리 빼기를 시작 한다
젖니 내민 목련 가지마다 봄을 매달고
임 기다리다 지쳐 하품하며 기지개를
오라는 이 없어도 봄은 오고
가라는 이 없어도
가고 마는 겨울 그 틈에 동행하는 나
가는 겨울도 오는 봄도
부질없는 일인데 그리움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
입춘에 이어
하영순
예전에 이런 말이 있었지
삼사월에 물 사발 얼어 터지고
보리누름에
중늙은이 얼어 죽는다고
입춘에 봄 시샘 하는 일이야
허다한 만행
동장군이 立春大吉 建陽多慶
글귀 보고
대문 안으로 뛰어 들어 왔나
집안이 왜 이렇게 써늘한지
산유국 기침 소리에
놀란 주머니 꽁꽁 얼어붙었다
그 덕에 한자리 노리는 놈 있으니
이름하여 감기
입춘
허기숙
창문에 살며시 똑똑
봄이 노크하네요
입춘 한파
찬바람이 너무 시려요
꽁꽁 얼어버린 대지
배시시 솟아오른 땅
털 봉우리 내밀며
작은 손 내밀어요
사랑스러운 소리
함께 눈 맞춤하네요
봄의 멜로디
사랑의 아름다운 울림
봄은 아침 햇살처럼
이렇게 안겨 오네요
입춘
허수경
밤새워 불 이운 디딜집 위로
따순 말 노잣거리 보태며
눈이 내린다
싸리울 삽짝마다 걸어둔 발뒤꿈치
바람 문풍지에 귀 대고 서면
밥도 잠도 애닯지 않고
추위의 무섬증도 저만치
도드리찬 새벽
생년 1911년
아직도 애옥처자 할머니
씨나락 베고 누분 할머니
먼 새벽잠 속으로 꾸벅이며
피투성이 사내가 걸어온다
이대도록 흩어지는 그리운 눈이파리
사람이 사는 마을
개 짖는 소리 들린다
입춘의 밤
허윤정
황홀한 노을은 고독한 실루엣
순수의 강물은 무작정 흘러가네
이어 어둠은 내리고 밤이 오면 은하의 별무리
꿈꾸는 고향 강물 겨울밤을 출렁이네
오늘이 입춘이라 봄 소식도 곧 오겠지
뜨락의 매화나무 추위에 몸 움츠리고
겨울 강 한해가 지나니 세월은
더욱 속력을 내고
지금은 밤의 시간 현의 슬픔이여
저 강물 흘러가는 곳이 그 어디인지
삼경은 깊어라
이 밤도 가고 나면 복제되지 않는다
입춘(立春)의 햇살
허윤정
눈이 내린 하얀 2월의 햇살이 눈부시다
봄을 깨우려는 입춘의 절기가 곧바로 따라왔다
입춘은 대체로 음력 정월의 첫 번째로 드는 절기로서
새해를 상징하기도 하지만 입춘일은 농사의
기준이 되는 24절기의 첫 번째 절기이기에 이날은
여러 가지 민속적인 많은 행사가 행해졌다
그중 하나가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는 일이다.
이것을 춘축(春祝) · 입춘축(立春祝)이라고도 하며
그중 하나가 입춘첩(立春帖)을 써 붙이는 일이다
각 가정에서 대문 기둥이나 대들보 · 천장 등에 좋은
뜻의 글귀를 써서 붙이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옛날 대궐에서는 설날에 내전 기둥과 난간에다
문신들이 지은 연상시(延祥詩) 중에서 좋은 것을 뽑아
써 붙였는데, 이것을 춘첩자(春帖子)라고 불렀다.
사대부집에서는 흔히 입춘첩을 새로 지어 붙이거나
옛날 사람들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썼다
그래서 한해의 축복을 불러들이는 옛사람들의
미풍양속이 전해오는 것인가
절간의 기둥에도 좋은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좋은 글귀를 찾아서 삐뚤삐뚤 나의 현관에도
써 붙이고 싶다
내일이 입춘(立春) 다음 날이 기해년(己亥年) 설이다
겨울 동화 같은 설경 색동저고리 유년의
설날이 그리운 것이다
입춘
허정인
시릴 만큼 시렸다
참을 만큼 참았다
강물아
계곡물아
기다리던
입춘이다
너희를 붙잡았던
한파가 힘을 잃었다
이젠
녹아 내려 흐르거라
졸졸졸,
찰찰찰,
만물이
네 소리로 깨어나리니
을유년 입춘날
홍경임
오늘도 여늬날과 다름없이 전날 준비한
비둘기 가족과 이름모를 새들의 아침 식사를 내 마음의 창
베란다 창을 활짝 열곤 기쁜 마음되어 대접한다
식사를 끝낸 비둘기 가족은 어디론가 훌쩍 날아가 버리지만
이름모를 새들은 식사비보다 후한 값으로
아름다운 목소리를 재재거려 좋은 아침임을 노래노래하다
그들의 쉼터로 돌아간다
추억이 없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라 했는가
비밀도 때론 큰 재산이 된다 했던가
내가 먹을 아침식사를 사람이 아닌 구구거리는 재재거리는 그들에게 대접하여
매일 추억을 만들곤
을유년 입춘날 큰 비밀 하나 은밀히 만들어
작은 가슴에 잠재워서
I.M.F 시대보다 힘든 이때 큰 부자 될려고
몸단장 꽃단장하여 귀하신 어른 한 분 모시러
조선시대 정조대왕 지나신 인덕원 길을 간다
입춘 근방
홍신선
곧추선 품새로 보면 갈대는 영락없는 삼천 척의 폭포다.
햇볕 속 바싹 여윈 정수리에서 발뒤꿈치께로
적막들이 굴러떨어지는 반짝이는 폭포다.
이 갈밭에는 그런 폭포들이
길길이 굉음의 침묵들을 쏟아낸다.
그 폭포의 물길들은 어디서 시작되는지
바싹 마를수록 내부의 수십 길 마음에 얹힌 집착을
선뜻선뜻 내려놓는 소리
그만하면 됐다 그만하면 됐다
살그락살그락 광휘롭게 쏟아져 내리는 침묵의 굉음들
그 소리들마저 이즘엔 잦아들고
그리곤 하나 둘 미련 없이 꺾인다.
꺾여 제 뿌리 근방 어디론가에도 갈대는 편안히 가 닿지 못하는데
도무지 아프지 않게 본색 그대로 꺾이고 떨어지는
내 마음의 폭포
말문에 걸쇠 걸어둔 하늘은 영영 침묵이다.
그만하면 됐다고 말문 터질
늙은 설매화의 꽃싹들 아직은 덩달아 입 봉했는데
누군가 철수하면 누군가 또 새로 진주해오는 입춘 근방.
* 삼천 척 ; 이백의 시구 비류직하삼천척(飛流直下三千尺)에서 가져옴.
입춘(立春)
홍재향
최소한 눈을 뜨고
최소한 귀 기울여 보면
올 것은 기어이 오고
갈 것은 기어이 간다
오는 것과 가는 것에는
참새처럼 요란법석 떨거나
입춘 되기 전날, 죽은 까치처럼 고요하거나
누가 산 자요, 누가 죽은 자인지
누가 어떤 말을 했고, 누가 어떤 말문을 닫는지
비스듬히 대문짝에 써 붙는다
최소한 눈을 뜨고
최소한 귀 기울여 보면
보일 것은 보이고 들릴 것은 들리고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보인 것에 차마 울고
들린 것에 하마 웃는다
입춘(立春)
홍해리
겨우내 조용하던 햇살이
화살을 쏘아대기 시작한다
깜짝 놀란 강물이
칼날을 번쩍이며 흘러가고
죽은 듯 움츠려 있던 나무들이
무거운 잠을 눈썹 끝에 달고
연초록 깃발을 꽂으며
시동을 걸고 있다
새들도 솜털깃을 털어내며
아름다운 전쟁 준비에 한창,
문득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타인도 정다운,
죄 될 것이 없는
그리운 남쪽 나라
멀리서 오는 이의 기침 소리가 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