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ㅇ
안경애 – 겨울 새
안국훈 – 겨울이 오면
안도현 - 겨울 아침
안도현 - 겨울 편지
안도현 -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 연탄 한 장
안성길 – 너무 긴 겨울
안영준 – 겨울 노숙
안영준 – 겨울왕국
안용호 –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안종원 – 겨울 이야기
안태운 - 겨울
양광모 - 겨울 나목
양선희 – 겨울 정원과 나
양애경 -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양채영 – 겨울 나그네
양채영 – 겨울 밭에서
양채영 – 동천(冬天)의 별 하나
양현근 – 겨울새
여관구 – 겨울의 앙상블
염인덕 – 겨울의 길목
염인덕 – 겨울의 소리
염인덕 – 겨울 이야기
오경옥 – 겨울 폭포
오광수 - 겨울 끝에서
오광수 - 겨울 여행이 남긴 스케치
오광수 - 겨울로 가는 바닷가에서
오광수 - 겨울에 읽는 하얀 편지
오광수 - 겨울의 회상(回想)
오광수 - 겨울이 그려준 하얀 보고픔
오광수 - 하얀 겨울의 노래
오광수 – 하얀 계절의 일기
오규원 – 겨울 나그네
오길원 – 겨울눈
오보영 – 겨울 가로등
오보영 – 겨울 고독
오보영 – 겨울 군것질
오보영 – 겨울 그리움
오보영 – 겨울 기다림
오보영 – 겨울 길
오보영 – 겨울 낚시
오보영 – 겨울 등산
오보영 – 겨울 사랑
오보영 – 겨울 사슴
오보영 – 겨울 시냇물
오보영 – 겨울 햇살
오세영 - 겨울 노래
오세영 - 겨울의 끝
오세영 – 겨울 한나절
오애숙 – 겨울 길섶에서
오애숙 – 겨울 연가
오애숙 – 겨울 이야기 – 세월의 잔상
오애숙 – 겨울 탈출
오애숙 - 그대 이 겨울, 오시려거든
오애숙 – 올겨울
오태인 – 그해 긴 겨울
옥윤정 - 겨울
용혜원 - 겨울 아침
용혜원 - 겨울 여행
용혜원 – 눈 덮인 겨울 들길을 가노라면
우영규 – 겨울 연가
유나영 – 겨울 밭에서 낚는 꿈
유승도 - 겨울
유안진 - 겨울 사랑
유안진 – 겨울 양식
유안진 – 겨울 엽서
유영서 – 겨울 단상
유영성 – 그 겨울 언저리엔
유일하 – 깊은 겨울로
유진 – 그 겨울, 풍경
유현숙 – 겨울 무창포
유현숙 – 겨울 여행
유혜빈 - 내일은 눈사람의 손을 만들어줘야지
윤갑수 – 햇살 좋은 겨울날이면
윤덕명 – 겨울 풍경
윤동주 - 겨울
윤동주 - 눈 오는 지도
윤삼하 – 겨울의 첨단(尖端)
윤순찬 – 그해 겨울은 추웠네
윤용기 – 겨울 맛
이경선 - 나의 겨울은 가끔 당신이었습니다
이경자 – 가는 겨울
이광석 – 겨울 나그네
이구학 – 겨울이 오는 이유
이규옥 – 겨울잠
이근배 - 겨울행
이길옥 – 겨울의 근성
이난수 – 겨울 식탁
이남일 – 겨울 나루터
이남일 – 겨울 산장
이도연 – 겨울 이야기
이돈권 – 난 겨울이 좋습니다
이명수 – 겨울 뜰
이명희 – 겨울 이야기
이문재 - 물의 백서(얼음)
이병률 – 겨울
이병률 – 겨울 그 길을 걸었다
이병주 – 겨울의 끝에서
이보숙 – 겨울 로망스
이상교 - 겨울 들판
이성선 – 겨울 별 밭 아래에서
이성선 – 겨울의 노래
이수익 – 겨울 초상(肖像)
이수익 - 결빙의 아버지
이승은 – 겨울꽃
이영지 – 겨울 보화
이영지 – 겨울 파도
이양우 – 이 겨울에
이영지 – 한겨울엔
이영춘 – 겨울 참새
이우걸 – 겨울 항구
이원근 – 겨울을 담그다
이원문 – 겨울 하늘
이윤훈 – 등부터 겨울이 온다
이은심 – 태백, 겨울
이인혁 - 겨울꽃
이일영 – 어느 겨울날의 기억
이재민 – 겨울 가뭄
이재환 – 겨울
이정은 – 겨울 연가
이종곤 – 겨울로 가는 비상구
이종은 – 겨울 풍경
이지엽 – 겨울 우화
이지영 – 겨울, 산정호수
이지현 – 오리 떼의 겨울
이진숙 – 겨울 가로수
이창호 – 겨울
이채 - 겨울엔 당신에게 이런 사랑이고 싶습니다
이채 –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이채 - 당신과 나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채 – 혼자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철건 – 겨울 소네트
이태강 – 겨울이 좋은 이유
이한명 – 겨울, 문틈
이한명 – 겨울, 병사의 노래
이한명 – 겨울 편지
이한명 – 빈들, 그 겨울의 기억
이해인 - 겨울 길을 간다
이해인 - 겨울 노래
이해인 – 겨울 산길에서
이해인 – 겨울 아가
이해인 - 겨울 연가
이해인 - 겨울 편지
이해인 - 겨울 아가
이해인 - 다시 겨울 아침에
이향숙 – 겨울 아이
이현서 – 겨울 별자리
이혜미 – 최소한의 겨울로만
이혜정 – 겨울 애상
이효녕 - 겨울을 위한 기도
이희숙 – 겨울 애상
임석 – 겨울 끝에서
임석래 - 겨울
임영준 – 21세기 겨울도
임영준 – 겨울 그대
임영준 – 겨울 무정
임영준 - 겨울 사랑
임영준 – 겨울 속에서
임영준 – 겨울 쏟아지네
임영준 – 겨울은 사랑을 품고
임영준 – 겨울 이야기
임영준 – 겨울 카페
임영준 – 겨울 행 열차
임영준 – 그대의 겨울
임영준 – 텅 빈 겨울
임우성 – 겨울 꽃눈(花目)
임우성 – 겨울 동화
임인규 – 겨울의 문턱
겨울 새
안경애
해가 뜨고, 지는 넓은 하늘 아래서
때론 약하게 강하게
찬바람 헤치며 날아와
나뭇가지 오르내리며
저 새는 무엇을 찾고 있을까
하늘 빛살아 있는 날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엄동설한 아득한 하늘로
외롭게 사라져 가는 너
무성했던 잎사귀와
이별이 아파서일까
벌판 가득
너의 노래가 참 쓸쓸하다
겨울이 오면
안국훈
바다같이 푸르른 인생
그리움은 물결 되어 일렁이고
햇볕이나 달빛에도
외로움은 그 크기만큼 깊어진다
그대 향한 그리움은
호수만큼 넓지만
보고 싶은 내 가슴은
붉게 타오른 노을이 된다
꽃길 따라 걷던 봄날
풀내음 가득하던 여름 향기
오색찬란하게 치장하던 가을 단풍
그들이 떠난 자리는 아름답다
홀연히 내린 함박눈
눈부신 눈꽃 피우더니
그리움 밤새 쌓으며
어찌 긴 밤 보내야 할까
겨울 아침
안도현
눈 위에 콕콕 찍어놓은 새 발자국
비틀거리지 않고 걸어간 새 발자국
한 글자도 자기 이름을
남겨 두지 않은 새 발자국
없어졌다 한순간에
새는 간명하게 자신을 정리했다
내가 질질 끌고 온 긴 발자국을 보았다
엉킨 검은 호스 같았다
날아오르지 못하고
나는 두리번거렸다
겨울 편지
안도현
댓잎 위에 눈 쌓이는 동안 나는 술만 마셨다
눈발이 대숲을 오랏줄로 묶는 줄도 모르고 술만 마셨다
거긴 지금도 눈 오니?
여긴 가까스로 그쳤다
저 구이(九耳) 들판이 뼛속까지 다 들여다보인다
청둥오리는 청둥오리 발자국을 찍으려고 왁자하게 내려앉고,
족제비는 족제비 발자국을 찍으려고 논둑 밑에서
까맣게 눈을 뜨고,
바람은 바람의 발자국을 찍으러 왔다가 저 저수지를 건너갔을 것이다
담배가 떨어져 가게에 갔다 오느라
나도 길에다 할 수 없이 발자국 몇 개 찍었다
이 세상에 와서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것을
땅바닥에 찍고 다니느라
신발은 곤해서 툇마루 아래 잠들었구나
상기도 눈가에 물기 질금거리면서,
눈 그친 아침은, 그래서
이 세상 아닌 곳에다 대고 자꾸 묻고 싶어진다
넌 괜찮니?
넌 괜찮니?
너에게 묻는다
안도현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탄 한 장
안도현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 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먹으면서도 몰랐네
온몸으로 사랑하고 나면
한 덩이 재로 쓸쓸하게 남는 게 두려워
여태껏 나는 그 누구에게 연탄 한 장도 되지 못하였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너무 긴 겨울
안성길
밤마다 습관처럼 불 켜지던
길 건너 망자의 집 추녀 바라보며
누군가를 위해 무릎 꿇고
기도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그렇게 마음 다지고 다졌건만
당신 시린 목덜미 따습게 덮어줄
내가 만든 털목도리는
병상 여기저기 걸레처럼 굴러다니고
더러는 겨울비에 젖은 창문 너머
우리의 내일 날마저 아득해 오면
병실을 뛰쳐나와
무작정 걸었네
등대 아래
솔숲 보이는 곳까지 와서
일없이 서성이다 출근하곤 했네
그럴 때면 으레 곱빼기에 잔업까지 해치워도
기다림의 나날 더욱 독할 뿐이었네
털어도 털어도 스물스물 배어나오던
비린 소독약 냄새보다 매운
아득함뿐이었네
겨울 노숙
안영준
폭설이 몰아치는
어느 날
가냘픈 새의 전신에
스며드는 싸늘한 바람
해 저문 지 오래
깊은 어둠 속
탄식하는 새소리는
적막을 깨며 밤을 새운다
외딴곳
고요는 여명을 재촉하고
탄식하다 열병에
신음하는 애처로움
겨울왕국
안영준
마른 풀잎도
바람에 고개 끄덕였다
부러지기 싫어
바람에 제 몸 맡기고
난 자리 발 뻗으려
풍파 견뎌내며
모질게도 배겨냈지만
봄이 와도
싹이 트지 않는
오천이백만 개
썩어가는 밀알
눈비 맞으며 서럽다
쓸개 빠진
위정자 거드름
두 눈 있어 못 보겠네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안용호
눈도 많이 내렸어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까지
달도 유난히 밝았었지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에도
아름답던 첫사랑이
멀어져 간 때도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이었어
피눈물 쏟으며
달빛 흩어지던 거리를
방황(彷徨)하던 때도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이었지
그해 겨울이 끝날 무렵
난 죽었어.
그리고 다시 태어났어
겨울 이야기
안종원
새벽녘 순돌이는
운동을 했네
앞서거니 뒤서거니
남긴 발자국 보니
다리 밑 빨강 부표
손에 손잡고
깨어진 얼음조각 조심하라네
갈대도 버들도
추워 추워 아우성인
호수의 언저리 부여잡고서
부사호
겨울 이야기 소리
소곤소곤 귓전에 울려 퍼지네
겨울
안태운
그 겨울의 끝에서 피고 지는 것. 지고 피는 것. 그해 겨울은 눈이 잘 내리지 않았으므로,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눈은 점점 더 내리지 않기로 했나, 정말 그런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였으므로, 사실 눈인가, 모든 게 눈인가, 하고 나는 걷다가 멈춰 섰다. 그 겨울에는 모든 게 눈이야. 모든 게 눈이다. 아 눈이 내린다, 하고 말하는 사람들. 입을 벌리면서 아 눈이 내린다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건너편에서 지나가는 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사람들. 모르는 사람에게 손을 흔들고 있구나. 눈이 내리면. 그 사람을 모른다는 사실도 이후에나 알아차리는구나. 눈이 내리면. 눈이 내리지. 하지만 올해에는 눈이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설산으로 가야 할 것. 설피를 신고 올라가야 할 것. 높은 곳에는 눈이 쌓여 있을 테니까. 그곳이 과거라도 혹은 미래라도 가봐야 하지. 고지대로 진입해야 하지. 그곳에는 마을이 있고 마을에는 눈이 계속 내리고 쌓이는 눈으로 고립된 사람들이 있고 그 사람들한테 들을 수 있는 전언들이 있다. 멀리멀리 갈 수 있어요. 눈이 내리면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다는 말은 어디에서든 들을 수 있었는데, 그러니까 눈이 내리면 그때마다 정말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니까, 멀리멀리 갈 수 있다고. 그 겨울의 끝에서 피고 지는 것. 지고 피는 것. 나는 설산에 있었지. 겨울의 방에 모여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얼굴과 문 밖에서 쏟아져 내리는 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방은 눈으로 뒤덮여 있는데, 목소리를 계속해서 듣고 있었지. 그 겨울에는 많이 잡혔어요, 많이 잡혔습니다. 저 옛날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많이 잡혔어요. 옆 사람이 말했고 나는 그 말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누가? 그게 나인지 너인지 모르니까. 잡힌 게 무엇인지. 단지 많이 잡혔다고만 말하는 사람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나는 이 밤만 지나면 설산에서 내려와야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다시 들리는 대화 소리. 많이 낳았어요, 그해에는 이상하게도 많이 낳았습니다. 하지만 무엇을요? 무엇이 무엇을 무엇에게요. 어떻게. 그게 이상했지. 되물어도 단지 그 말만, 잡혔어요, 낳았어요, 하는 술어만 되풀이할 뿐이었으므로 나는 이 밤을 못 참고 한시라도 빨리 설산을 떠나 겨울 바다로 가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겨울 바다. 겨울 바다에 내리는 눈. 그 눈을 바라보고 싶었나. 겨울 바다로 가면 어쨌든 눈 내리는 풍경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 겨울 바다의 눈. 아스라한, 내리며 사라지는 모습 자체로 굳어진 형태. 끊임없이 움직이는 눈의 겨울 바다가 언뜻 어느 순간에는 또렷한, 흩어지지 않는 어떤 형태처럼 느껴졌다. 내가 내 몸을 온전히 깨닫지도 돌보지도 못할 때의 기억을 찾는 더듬거림처럼 느껴졌고, 겨울 바다 속으로 뛰어드는 이상한 생물들도 떠올랐다. 이내 그 생물은 내가 아니지, 고개를 저으며 다른 겨울 장면들도 떠올렸지. 어느 겨울, 지하철을 타려 지하에 들어서고 개찰구로 향하며 상점을 지나칠 때 마네킹은 쿵, 떨어졌는데, 나는 그게 무엇인지는 뒤늦게 알아챘다. 단지 무언가 쿵. 부딪침. 울림. 아래로 쿵. 떨어진 무언가가 있었고 바닥으로 떨어져 엎드려 있는 그것은 사람의 형태였으므로, 정적. 모든 사람이 얼어 있었다. 순간 아무도 그것에 다가가려 엄두도 못 내고 단지 바라보기만 했다. 죽은 사람처럼 누워 있는 마네킹을 보며 다들 심장이 철렁했으니까. 쓰러진 건 사람이라고 순간 착각했으니까. 다들 그 분위기 속에서 멈춰 있었고, 나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곧 상점 직원이 나와 그것을 일으킨다. 그 모습을 보고 몇몇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기도 했지. 마네킹이었어. 그래, 마네킹. 그건 내가 아니지. 그건 너도 아니야. 나도 다시 갈 길을 간다. 하지만 집으로 가는 내내 그 분위기가 가시질 않았지. 밖에서는 그 시간에 눈이 내리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겨울이었으니까. 잠깐 눈이 내렸다가 그쳤을지도. 내가 멀리 가려고 지하에서 이동하고 있는 그사이에. 겨울의 끝에서 피고 지는 것. 지고 피는 것. 그해 겨울은 추웠나. 아 춥다, 아 춥다고 연신 소리 내며 발걸음을 재촉한 기억은 나는데, 정말 추웠나. 쌓이는 눈에 대해서는 어떤 상념도 품지 않았는데. 그해에는 눈이 내려도 쌓이지 않고 다 녹아버렸나. 녹아버려서, 나는 무언가에 닿지 않고도 녹아버리는구나, 닿지 않고도 공기 중으로 스미듯 흩어지듯 사라지는구나, 하는 기분도 들었는데. 나는 그 겨울 그 눈들에 닿고 싶었나. 하지만 이미 사라졌지. 닿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 사라졌지만 닿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작별 인사. 작별 인사가 어울린다. 이 겨울에 어울리는 작별 인사는 무엇일까. 나는 어디선가 들었던 그 말이 떠올랐다. 잘 가 다음에 또 만나,가 아니라, 줄 건 없으니 다 기억하고 있을게요,라는 그 말. 줄 건 없으니 다 기억하고 있을게요. 헤어지면서. 그 말은 어디서 들었을까. 어디서 지나쳤을까. 나는 다만 기억하고 있다. 기억을 잘 못하는데도
그리고 어디선가 들릴 것 같은 목소리
눈이 내리면 멀리서 다독여주는 목소리
그 마음 내 아오
그 마음 내 아오
그러니까 어디선가 눈이 내리면
겨울 나목
양광모
알몸으로도
겨울 이겨내는
네 삶 눈부셔라
한 백년쯤이야
하늘 높이 쭉쭉
가지 뻗으며 살아야 한다고
헐벗은 가슴으로도
둥지 한두 개쯤
따뜻이 품으며 살아야 한다고
눈 내리면 눈꽃 피우며
봄이 아니라 겨울을
열렬히 살아야 한다고
너는 아무런 말 없이도
알몸으로 눈시울 뜨겁게 만든다
겨울 정원과 나
양선희
가지에 휘늘어진 주황(朱黃)
새들이 다 파먹었다.
구멍 깊은 색
새들 부리자국에
한입 댄다
된서리 견딘 속살
혀끝으로 굴린다.
달콤하다.
살아나는 색들
보고, 만지고, 핥고 싶어
겨울 나뭇가지에 매달린다
새는 색을 쪼고
색은 나를 쫀다
새와 나
겨울 볕 드는 나무 아래
색에 홀린다
살, 맛 난다.
불이 있는 몇 개의 풍경
양애경
1
입동(立冬) 지난 후
해는 산 너머로 급히 진다
서리 조각의 비늘로 덮인 거리
어둠의 粒子가 추위로 빛나는 길목에서
나는 한 개비의 성냥을 긋고
오그린 손 속에 꽃잎을 급히 피워낸다
불의 의상을 입으며
사물은 하나하나 살아나기 시작하지만
불은 가장 완벽하게 피었다 지는 꽃
화사한 절망.
절벽으로 떨어지듯 꺼진다
2
기침을 한다
탄불을 갈며
달빛 밑에 웅크리면 아궁이 옆으로 희미하게 흩어지는 그림자
한밤중 여자들의 팔은
생활(生活)로 배추 속처럼 싱싱하게 차오르지만
좀처럼 불은 붙지 않는다
식구들은 구들에 언 잔등을 붙인다
어떻게 된 것일까 옛집의 불씨는.
영원히 꽃피우는 전설의 나무와 같이
순금(純金)으로 제련된 불씨.
화로에 잘 갈무리되어
주인을 지켜주던
3
이제 불은 때 묻고 지쳤다
누가 불을 거래하고
누가 불에게 명령하는가
불길한 모반(謀反)의 충동에 몸을 떨며
콘크리트 보일러실에 갇혀 웅크리고 있는 불의 꿈
밤 열 시 공원(公員)들은 흩어지고
불은 또 재 위에 몇 길이나 쓰러진다
4
짧은 인사의 잔손목을 흔들다 말기.
부딪치다 와아 터지기.
안개 속에 서 있는 불
문을 열고 길길이 솟구치는 불
산맥 속에 잠들어 있는 원시림의 불
5
목단(牧丹) 마른 가지에서 올라오는
불의 빛깔은
사과나무 장작에 옮겨 붙으며 만발한다
쓰레기 더미에서도 불은 꽃핀다.
들끓으면서 평등한 불의 속
열은 순수하여 평화롭다
6
열은 빛나지 않고
소리 내지 않는다
그러나 따갑게 퉁겨져 나와
손바닥을 쏘는 열기
우리의 입 다문 진실
바람 부는 도시의 밑둥을 떠받치는
건강한 당신
일곱 시 반에 집을 나와 아홉 시 반에 퇴근하며
휘파람 부는 당신,
당신의 불
7
이 속에 잠자는 불이 있다
작은 성냥골 안에.
성냥은 불을 꿈꾸고
불은 성냥을 태운다.
순간의 불꽃은 기다림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바꾼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꿈을 시작한다
겨울 나그네
양채영
눈 섞인 바람이 분다
오라는 이 없어도 가야 하리
얼까 말까 망설이는 개울을 옆구리에 끼고
붉은 망개 열매와 멧새 떼에 길을 물어
마른 풀잎 쓰러져 흩날리는 논밭뙈기를 지나
술렁술렁 걸어서 가야 하리
내 조선시대 사모하던 선비들의 기골을 닮은
잡목숲과 낙락장송과 거친 암벽이 솟아 있는
이 나라 눈 덮인 산악을 우러르며
산가마귀 우짖는 산협을 지나면, 어디선가
―이제 가면 언제 오나
명년 춘삼월에 돌아올까
어―허이 어―화
건 쓴 상제들과 상여꾼과 선소리꾼이
흰 겨울 산속으로 사라진다
우리들의 슬픔도 갖고 싶던 모든 것들이
눈발 속으로 날아가고 산은 더 높고 깊다
고사리국에 밥 한술 말아먹고 소주 한잔 걸치고
무너진 산성을 지나면 호도나무 과목들 사이로
푸르딩딩한 냉이잎이 얼어 있고
신라적 암각된 마애불이 길손을 맞는다
그는 이 산과 바위와 바람과 더불어
수척한 길손을 지키며 바랜다
흰 눈벌에 모여선 낙엽송 숲의
자잘한 가지들이 더 가까이 더 가까이
겨드랑이를 끼고 겨울바람을 막아
수묵화처럼 허공중에 부풀어 있다
그 속에 누군가 저녁 등불을 켜고
그 머리 위로 겨울새 떼가 돌아가고 있다
나는 것도 모여 있는 것도 걸어가는 것도
모두 춥다. 모두 간다. 모두 남는다
겨울 밭에서
양채영
저녁 불빛
해 질 녘 겨울 밭 한가운데 서서
남(南)쪽 산(山)을 바라본다.
차가운 바람 한 점이 내 가슴에 닿자
대답도 없이 그저 보라색 꽃이 된다.
빈 나뭇가지들이 우리들의
행복한 손가락인 양 향기롭다.
어느 쪽으로든 귀를 기울인
저쪽 산(山) 밑에 불이 켜지고
다시 우리들 목숨의 숨소리가
날개를 폈다 접었다 다시 편다.
이 겨울 밭 속의 깊고 깊은
꽃다지들아, 냉이꽃들아
동천(冬天)의 별 하나
양채영
미당의 동지섣달 매서운 새는
동천(冬天)의 밤하늘을 비끼어 갔다
그 막막한 빈자리에
아득한 별 하나
불덩이 같다가도
꽃덩이 같이 환한 별
별의 이름을 내가 지어줄까
뒤돌아보는 깊은 눈빛같이
겨울밤 하늘의 먼먼 길
언제쯤 내게 와 닿을까
흰 눈발에 묻어서
자작나무숲에 와 내릴까
자작나무숲에 와 내릴까
겨울새
양현근
눈발이 날리는 늦은 오후
멧새 한 마리가 가지에서 졸고 있다
새는 꿈속에서도 날아다니는지
나뭇가지가 수시로 출렁거린다
그 아래 몸을 말리던 낙엽 몇장도
바스락 거리며 잠꼬대를 한다
창문 너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내가 들킨 건지 새가 들킨 건지
부르르 떨며 설익은 꿈을 털고 있는 새
미안하다
꽃잠을 방해해서 미안하다 돌아서는데
드라마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의 슬픔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거실의 또 다른 새 한 마리
고개를 떨구고 꾸벅 꾸벅 졸고 있다
슬픈 빛깔의 꿈을 꾸는지 어깨가 깊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겨울의 앙상블
여관구
발 시린 나목의 발등을
낙엽이 살며시 다가와
이불인 양 덮어준다.
홀로선 바람은 겨울 등에 기대어
가지들의 마음을 마구 흔들어 깨워놓고
저만치 사라지는 행복의 빛깔
그대의 텅 빈 가슴에 홀로앉아
지저귀는 새처럼
구름 뒤에 숨어 바라보는
해님의 웃음 잃은 누이처럼
잎새하나 남지 않은 나의 뜨락엔
마음에 불이 붙지 않은
겨울이 지나간다
겨울의 길목
염인덕
고운 잎 달빛을 붙잡고
찬 바람에 덜덜 떨더니
가지마다 서리꽃 피웠다
한세월을 그리움만
남겨두고 이렇게
미련 없이 떠나가는가
못다 한 사랑에
아쉬움도 많은데
속절없이 보내야 하나
붙잡을 수 없는 이 시간
아름다운 사랑으로 엮어 놓으면
또 따뜻한 봄날 찾아오겠지
겨울의 소리
염인덕
하얀 솜털이 햇살 먹으면
은빛 찬란하게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놨습니다
축 늘어진 빨랫줄 쉬어가는데
전깃줄에는 지지배배 노래가
저 멀리 울려 퍼집니다
하얀 도화지 위에 나무는
수 국화꽃을 그려나
활짝 웃고 있어 아름답습니다
나도 하얀 꽃송이 되어
누군가에게 하얀 사랑을
하염없이 꺼내 주고 싶습니다
겨울 이야기
염인덕
툇마루에 앉아 있으면
잡힐 듯 말 듯 한 별들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토방 위에 검정 고무신
밤사이 하얀 옷 갈아입고
반짝반짝 빛나 있는 모습들
아침부터 작은 방 안에서
우리 형제 시끌시끌 뒤엉켜
무엇이 그렇게 좋았는지
.
철없던 그 시절이
지금도 가끔 생각이나
그 시절이 그리워질 때가 많다
겨울 폭포
오경옥
한 계절 내내
뒤척이던 원고지 속의 글자들이
길을 나섰다
더 이상 물러설 것 없는
길 없는 길 위에서
길을 물어야 했다
길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극한의 고독
고흐의 밤하늘로 소용돌이치다
밤이면 밤마다
쿨럭쿨럭
펌프질하는 가슴의 종양
햄릿의 쓸쓸한 독백처럼
결빙하는 시어
겨울 끝에서
오광수
겨울에 쓴 일기에는
날짜가 없습니다.
행여나 기다림이 지질까 봐
날짜를 좇아버렸습니다.
말라있는 시린 가슴이라도
한숨 한 줌이 꼭 필요할 때
눈물은 눈앞에서 소리를 잊고
손톱은 입안에다 감추고 살았습니다.
발에 밟혀 뒹구는 여린 언어들의 비명이
겨울 길에서 하얗게 얼어가는 날
햇볕이 조금 더 가까이 온 둑방길에 앉아
그래도 가슴은 뛰고 있나 만져 봅니다
겨울 여행이 남긴 스케치
오광수
모과나무 서 있는 마당 한쪽
이젠 더 갈 곳 없는
가을 사연 몇 장이
모질게 따라오는
찬바람을 피해
하얗게 몸을 숨기며
퇴색의 잠자리에 들고 있다
널어놓은 빨래들은
북어같이
흔들거리고
며느리가 많이 떨었던 모양.
소죽 삶는 불 앞에 쭈그리고 앉아 졸고 있다
이 집 어른 마실 갔다 오기 전에
저걸 걷어야 할 텐데
잠깐 따스함에 마당에 떨어진
뒹굴고 있는 고드름 몇 조각 위로
넘어가는 햇볕이
마지막 빛을 뿌리고
곧 불어올 차가운 눈바람만 믿고
아직 달려있는 추녀 끝의 몇 놈은
의기양양 뾰쪽한 날을
세운다
지붕 위로 흰 연기 뭉실
동네에는 밥 냄새로 가득한데
"손님. 방이 따시남유?"
호롱불 피워오는 주인의
목소리에
객 앞으로 달려오던
산골 땅거미가 마루 밑으로 들어간다
겨울로 가는 바닷가에서
오광수
꿈같은 사랑의 미련 때문에
하얗게 진이
다하도록
파도가 발버둥을 치며
소리소리 지르고 있다.
까맣게 흔적이 없는 늪에 앉아
푸념조차 퇴색해버린
몽돌을 붙잡고
묻고 또 물으며
지난 계절의 흔적을 뒤져봐도
당신이 내게 한 황홀한 고백이,
내가 당신에게 속삭이던
밀어가
까만 젖꼭지 같은 잔돌이 되어
이제는 좌르르 다른 소리를 내는데
아침에 보이던 환한 얼굴은 어디 가고
흰
머리칼로 물기 가득 뿌리면서
잔뜩 몰려온 바다 안개들이
날름날름 그 소리마저도 삼켜버린다.
겨울에 읽는 하얀 편지
오광수
당신을 향해 기도하고 잠이 든 시간
밤새도록 당신이 써 보낸
하얀 편지가 하늘에서
왔습니다.
잠든 나를 깨우지 않으려고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조용히 그렇게 왔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한 당신의 사랑은
얼마나 큰지 온 세상을 덮으며
"사랑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당신도 내가
그립답니다.
당신도 내가 보고 싶답니다.
당신도 내가 너무너무 기다려진답니다.
새날을 맞이하며 창을 여는
순간부터
한참을 일하는 분주한 낮시간에도
당신은 언제나 나를 생각한답니다.
너무나 반갑고 고마워 눈물 방울져 떨어지면
닿는 곳 점점이 쉼표가 되어
쉬어가면서 읽고 또 읽습니다.
넘어져 하얀 편지 속에 폭
안기면
당신은 나를 더욱 꼬옥 안고
"많이 사랑해!" 하는 느낌이 옵니다.
하얀 편지를 읽는 이 행복한 시간.
내
마음속에서 피어난 하얀 입김으로
"나도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
겨울의 회상(回想)
오광수
당신이
손 내밀 때
왜 내가 잡질 못했던가?
뿌옇게 색이 바랜 아쉬움들을
가슴 속에다 억지로
밀어 넣어도
회상(回想)의 실핏줄을 타고 튕겨 나와선
가끔씩 가끔씩 심장을 꼬집으며
덮어두었던 노래를 열고
가슴을 데우려고 하지만
굳어진 현실의 시간 앞에선
그저 아랫입술만 꼭꼭 씹습니다.
그때 하지
못했던 그 고백들은
이제는 탁한 숨소리가 되어
가슴이 아닌 세월에다 불을 붙이며
한 줄 나이테로
사라지는 오늘,
당신이 손 내밀 때 잡지 못했던 손은
지금 주머니에서 겨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그려 준 하얀 보고픔
오광수
밤새 소복소복 하얀 눈이 내려
보고 싶은 당신 모습을 그렸습니다.
당신을 보고 싶은 마음이 큰 줄
알고 온 세상이 다 보도록 크게
그렸습니다.
어제까지 길을 막던 저 언덕은
오뚝한 당신의 코가 되었습니다.
처량해 보이던 마른 풀들도
오늘은 기쁨은 기쁨끼리만
출렁이는 물결이 되어 이제야
닻 올리며 추운 어린 눈발들이,
다른 데도 아니고 강물 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이
그리하여 형체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강은, 안타까이 만년필로
써나가는 고전적인 노동, 노동하듯 나는 네게 힘들여 사랑한다는
한마디 하고 싶다.
사랑한다.
잘못 걸려 온 전화처럼 수화기 내려놓으며 나 이제 너를 향해
한 통의 전화조차 할 수 없지만,
여보세요, 여보세요. 들려오는 네
음성 듣고서도 아무 말 할 수 없지만, 바깥에는 비 내리고 나는 지금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처음 본 지붕과 낯선 길들 끈질기게
따라온 절망을 버리기 위해 나는 정류장에서도, 편의점에서도
쉴 새 없이 말을 했다.
쉴 새 없이 물건을 사고, 쉴 새 없이 키보드를 두드렸다.
말하는 것만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듯 혼자 있는
방에서도 지껄였다.
아무도 들어주는 이 없는 말을 하고,아무도 읽어주는 이 없는 글을 썼다.
살아있다는 것은 그렇듯 확인하는 일, 한때 네가 확인하던 내 마음처럼 두드리고
만져보는 일, 눈 대신 바깥에는 비 내리고 아무 것도
더 확인할 것 없는 너를 향해 나는
쓰고는 보내지 않을 편지를 쓴다
강 건너로 가서 살고 싶어요 어머니
얘야, 내 귓속을 들여다 보아라
찬바람 드나드는 갈대숲 말이냐?
추운 저 새소리 말이냐 얘야.
하얀 겨울의 노래
오광수
겨울에는 하얀 눈이 있어 좋습니다
하얀 눈꽃이 조용히 내리면
매섭게 설치던 찬바람도
아침에 보이던 산새들도
덩달아 가만히 숲으로 와서
사락사락 노래를 들으며 쉬다 갑니다
겨울에는 하얀 노래가 더 좋습니다
두 손을 입에다 호호 모으고
가만히 혼자서 부르면
하얀 입김으로 피어올라
처마 끝 고드름 녹는 소리와
살랑살랑 박자를 맞추며 날아갑니다
하얀 계절의 일기
오광수
어제 이 강가에서 만났던 노래는
반짝이는 옷으로 갈아입고
돌틈속에 숨었답니다.
모질게 구는 바람이
무서워
조롱 조롱 그렇게 숨었답니다.
하얗게 하얗게 쌓인 눈밭엔
아이들의 발걸음 소리도
남은 낱알 찾던 철새의
소리도
숨구멍만 조금씩 내놓은 채
빠끔이 숨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한 움큼씩 고운 햇살을 주면
천사들의 따스한 손길
따라
뾰족 뾰족 생명들이 고개를 들고
숨었던 소리가 날아다니고
초롱 초롱 보고픔이 꽃이 필 테지요.
앙상한 나무를
마구 때리는 바람도
이젠 지쳐 힘이 없나 봅니다.
숨바꼭질했던 나무의 새 순들이
바람소리보다 더 크게
껍질을 벗는 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겨울 나그네
오규원
지난겨울도 나의 발은
발가락 사이 그 차가운 겨울을
딛고 있었다.
아무데서나
심장을 놓고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있었다
그 곁에서
계절은 귀로를 덮고 있었다
모음을 분분히 싸고도는
인식의 나무들이
그냥
서서 하루를 이고 있었다
지난겨울도 이번 겨울과
동일했다
겨울을 밟고 선 애 곁에서
동일했다
마음 할 수 없는 사랑이여, 사랑
내외들의 사랑을 울고 있는 비둘기
따스한 날을 쪼고 있는 곁에서
동일했다
모든 나는 왜 이유를 모를까
어디서나 기우뚱, 기우뚱하며
나는 획득을 딛고
발은 소멸을 딛고 있었다
끝없는 축복
떨어진 것은 근(根)대로 다 떨어지고
그 밑에서 무게를 받는 일월(日月)이여
모두 떨어져 덥숙히 쌓인 위에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발자국이 하나씩 남는다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 나가고
손은 필요를 저으며 떨어져 나가고
서서 작별을 지지하는 발
발가락 사이 이 차가운 겨울을
부수며
무엇인가 아낌없이 주어버리며
오늘도 딛고 있다
바람을 흔들며 선 고목 밑
죽은 언어들이 히죽히죽 하얗게 웃고 있는
겨울을
첨탑에서 안식일을 우는 종이
얼어서 얼어서 들려오는
겨울을
이번 겨울에도 나의 발은
기우뚱, 기우뚱 소멸을 딛고
일월(日月)이 부서지는 소리
그 밑 누군가가 무게를 받들고
겨울눈
오길원
빈 뜰에 홀로 남은 허수아비처럼
겨울눈은 눈을 부릅뜨고
봄을 기다린다
다 비우고 떠난 겨울 숲속
마른 나뭇가지에 생기를 불어넣어
살아있음을 외치지만
봄은 그냥 오지 않고
꽃은 혼자서 피지 않는다
매의 눈으로
간절히 원하는 바람을 등에 업고
봄이 오고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함께 딛고 일어서는 용기와 희망으로
꽃이 핀다
매서운 칼바람을
눈물로 끌어안아 마음의 문을 열고
참고 기다리며 기도하듯
봄의 길목을 지키는 겨울눈
봄의 새싹처럼
호기심에 들뜬 어린아이 마냥
초롱초롱 빛나는 눈빛이
앙증맞고 사랑스럽다
겨울 가로등
오보영
좋아 죽겠다며
미치도록 사랑한다며
그토록 막무가내 몰려들던 나방들
한순간에 가슴 식어
다들 떠나갔어도
묵묵히 홀로
자리 지키고 있는 건
행여 길 잃고 방황하는
외로운 나비
지친 날개 잠시 쉬고 가라는
빛이 품은 속 깊은
사랑이어라
겨울 고독
오보영
당신의 어깨가
쳐져 보입니다
등 보이고 가는 뒷모습이
웬지
쓸쓸해 보입니다
더 잘해보려고
더 나아지려고
애써 내딛는 당신 발걸음이
무거워 보입니다
많이
힘겨워 보입니다
우중충한 날씨 탓에
내 기분이 유난히 가라앉아있어서 그리 보이는지는 몰라도
겨울 군것질
오보영
보기만 해도 구미가 당긴다
맛깔스런 색감이
먹음직스런 모양이
덥석
얼른 손으로 집어
냉큼
입안에 털어 넣고
그 맛을 음미하고 싶다
그 향기에 취하고 싶다
겨울 그리움
오보영
그리운 이여
혹시나 당신
겨울이 오는 길목에 혼자 움츠리고 앉아
시린 맘 달래고 있는 건 아닌지
언뜻 스쳐 가는 당신 위에
내리쪼이는 이 햇살이 더 환하게 비추어
따사하게
얼어있는 당신 몸과 맘을 좀
녹여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오
보고픈 이여
부디 다가오는 긴 겨울
포근히 잘 지내다가
우리
내년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따뜻한 봄날
활짝 펴진 얼굴로
더 반갑게 만날 것을 기약하며
찬 기운에
아련히 밀려오는 이 그리움을
삭이기로 해요
겨울 기다림
오보영
다가올 님을 위해
마음 모은다
맞이할 님을 위해
옷깃 여미고
마주할 님을 위해
향기 더하고
녹여줄 님을 위해
몸을 데운다
겨울 길
오보영
좀
얼어붙긴 했어도
다소
냉냉하긴 하여도
마땅한 도리로서 맞아주누나
그래
내겐 네가
기꺼이 맞아주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난 언제나
내가 필요할 때만
나의 쉼만을 위해
널 찾아왔으니까
겨울 낚시
오보영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꾸나
내가 더 잘 참아낼지
네가 더 오래 견뎌낼지
그러나
내겐 잠깐의 즐거움이지만
네겐
생사가 달린 생존의 문제이니
난 네가 제발
흔들리는 미끼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고
끝까지 잘 견뎌내어
낚시 바늘에 걸려들지 말았으면 좋겠단다
사실은
비록 당장은 내게
널 낚는 즐거움이 덜할지언정
일순간의 내 욕심만으로 이 한겨울에
하나밖에 없는 네 생명을
낚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단다
겨울 등산
오보영
찬바람으로
얼어붙은 눈길로
내어딛는 발걸음 훼방을 해도
앞을 향한
내 발길
되돌리지 못 하리
위를 향한
내 시선
꺾지를 못하리
겨울 사랑
오보영
당신만 보입니다
오직 내겐
수없이 많은 이들 모여 있어도
당신 모습만
당신 얼굴만
눈에 들어옵니다
비록 작은 몸집
큰 키 뒤에 가려져 있을지라도
내 눈에
당신은
금방 띄입니다
당신은
나의
사랑이니까요
당신은
늘
내 맘속에 있으니까요
겨울 사슴
오보영
오늘따라 유난히
외로워 보이는 네 눈동자를
똑바로 쳐다보질 못하겠구나
여린 내 눈길로는
애타하는 네 그리움을
비어 있는 네 가슴을
감히 채워줄 수가 없을 것 같아
반가워하는 너에게
따스한 눈길 한번 제대로 건네지도 못하고
안타까운 맘만 뒤로한 채로
발길 돌린다
겨울 시냇물
오보영
내 몸 얼어붙게 해
잠시 멈추게는 할 수 있어도
결코
너는 날
막아설 수가 없단다
내겐
님을 향한
열정이 있으니까
비록 네가 날 막아선다 할지라도
내 친구 따사한 햇살 나와 비추기만 하면
금방
날 녹여줄 테고
난 여전히 가던 길
님에게로 힘차게
흘러내릴 수가 있단다
겨울 햇살
오보영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눈(雪) 널
녹일 수가 있지만
잠시 지켜보고 있는 거란다
흩날리는 모습 통해
자유의 귀함 일깨워 주고
세상 하얗게 덮어
깨끗하게 만드는
주어진 네 역할 잘하고 있는지
부여된 대로
네 소명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지
세심히 살피고 있는 중이란다
겨울 노래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데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蘭)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겨울의 끝
오세영
매운 고춧가루와 쓰린 소금과 달콤한
생강즙에 버물려
김장독에 갈무리된
순하디 순한 한국의 토종 배추
양념도 양념이지만
적당히 묵혀야 제맛이 든다.
맵지만도 않고 짜지만도 않고
쓰고 매운 맛을, 달고 신 맛을
한가지로 어우르는 그 진 맛
이제 한 60년 되었으니
제맛이 들었을까,
사계절이라 하지만 세상이란 본디
언제나 추운 겨울
인생은 땅에 묻힌 김칫독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인가
그분이 독을 여는 그때를 위해
잘 익어 있어야 할 그 김치
겨울 한나절
오세영
눈 올 듯 말듯
햇빛 날듯 말듯
포장마차 집에서 막소주 한잔, 꽃가게 가서 실없는
농담, 시계방 물끄러미 들여다보기, 돌아와서 눈물 찔끔
그리고 다시 또 소주 한잔
행여 동백꽃 실려 올까
불현듯 달려가 본 간이역 플랫폼
남녘에서 오는 열차는 멎지 않고
오늘도 벌써 해 저무는데,
우체부 올 시간은 지났고
아직도 누군가
올 듯 말 듯
겨울 길섶에서
오애숙
그대 떠난 그 자리에
외로움이 맘 저리게
밀려오는 겨울 초입
소슬바람 사이사이
휩쓸리어 우는 소리
요란하다 밤 깊은데
못 떠났던 낙엽들이
몰아치는 바람 속에
겨울 물밀듯 오려나
난데없는 창문밖에
후두두득 떨어지는
빗방울의 메아리 속
낙엽들을 잠재우고
왔던 길로 되돌리려
밤새도록 비 내릴 때
길 잃은
기러기처럼
외로움이 흐르누
겨울 연가
오애숙
1
너의 그 침묵 깨고 사윈들 햇살 가득
어두움 거둬 내어 한 아름 안은 추억
설한풍 휘몰아쳐도 눈꽃으로 피기에
포근한 눈꽃처럼 가슴에 피어나는
사랑의 그 열꽃이 동백꽃 향기 속에
그대를 못 잊고 있다 묘혈로 핀 그 사랑
그해의 그 겨울은 그대의 온기 속에
따뜻한 나날이라 고백해 보는 추억
한잔의 커피향기로 찻잔 속 어리우고
해 질 녘 허기진 맘 노을빛 담아내는
우리의 추억들이 활화산 분화구로
가슴에 솟구치기에 붉게 물결 칩니다
2
새하얀 눈
소복히 내릴 때면
그 어린 시절로 가고파
일렁이는 심연에 피어나는
그 설레임
철없었던
그 시절이 그리운 건
첫사랑의 향기 스민 까닭인가
오늘따라 그 옛날로
가고픈지
남산 타위
시계탑 밑에
한 송이 붉은 장미 들고
환희에 찬 그녀가
다가온다
해맑은 미소
활짝 웃음짓고 있는
풋풋하고 상큼 발랄한 소녀
가슴으로 걸어서
내게 온다
함초롬한 그녀
연분홍빛 립스틱 바르고
꽃향기 휘날리며 다가온다
첫사랑의 그 향기
가슴에 머금고
그대 이 겨울 오시려거든
오애숙
그대 이 겨울 오시려거든
설한풍 휘몰아치는
한겨울에 오시지 마옵시고
무희들의 춤사위 휘날리는
하이얀 눈꽃 송이 피어
삭막한 대지 위 눈 세상 만드사
첫사랑의 향그럼 가득 채워
눈꽃 송이 피어나는
함박눈 속에 오시옵소서
내 그대를 기다리는 심연이
열여섯 풋풋한 마음
학수고대하는 소녀 가슴이라오
그대 이 겨울 오시거든
찬 서리에 냉가슴 앓게 마시고
그 옛날 첫사랑의 향기로 오소서
올겨울
오애숙
올겨울
다른 해 보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춥다고 말하고 있다지만
내 안에 당신이 있는 한
찬 바람이 쌩쌩 불어도
그대로 인해
괜찮아요
올겨울
유난스럽게도
한파 휘몰아쳐 온다고
벌써 사시나무 떨 듯 하나
내 곁에 당신이 있기에
함박눈의 포근함으로
따사론 마음
느낍니다
그해 긴 겨울
오태인
그해 긴 겨울
고속도로 옆 좁은
다락방 작은 창을
열고 그리운 나라로
가는 차들을 세며
희망과 절망을 세며
아버지의 청자담배를
참 많이 훔쳐 피웠다
아버지의 생애를 몰래
훔쳐 피웠다
겨울 아침
용혜원
하얀 눈이 소복하게 내린
겨울 아침에
발자국 하나 없는
눈 위를 걸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
하얀 눈 위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내 발자국을 뒤돌아보면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딛고 서기라도
한 것만 같아 기분이 명랑해진다
하얀 눈을 두 손 가득히 모아
꽁꽁 뭉쳐 힘껏 멀리 던져도 보고
하얀 눈을 뭉쳐서 굴려 보면
내 마음도 아이만 같아진다
하얀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을 가득하게 덮은
하얀빛이 새삼스레 고마워진다
하얀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날은
단팥이 들어 있는 호빵을
호호 불어가며 먹고 싶다
겨울 여행
용혜원
새벽 공기가
코끝을 싸늘하게 만든다
달리는 열차의 창밖으로
바라보이는 들판은
밤새 내린 서리에 감기가 들었는지
내 몸까지 들썩거린다
스쳐 지나가는 어느 마을
어느 집 감나무 가지 끝에는
감 하나 남아 오돌오돌 떨고 있다
갑자기 함박눈이
펑펑 쏟아져 내린다
삶 속에 떠나는 여행
한잔의 커피를 마시며
홀로 느껴보는 즐거움이
온몸을 적셔온다
눈 덮인 겨울 들길을 가노라면
용혜원
눈 덮인 겨울 들길을
기차를 타고 가노라면
눈 안에 그리움이 가득하다
눈이 내리면
이렇듯 온 세상을 다 덮거늘
그대는 왜 그리움으로만
내 가슴에 가득한가
이 차가운 바람 불어대는 겨울에
눈이 온 땅에 내리듯
그대 내 품에 가득하도록
쏟아져 내려라
눈 덮인 겨울 들길이
찬사가 터지도록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 내 품에 사랑으로
쏟아져 내려라
그대 눈처럼 내게로 쏟아져 내리면
얼마나 행복할까
겨울 이야기 - 세월의 잔상
오애숙
세월은 등 뒤에서
계절의 바람 날개로
가고 싶지 않은 곳에
휘몰아 가고 있다
상큼함 매료되었던
청초함의 싱그러움도
희망찬 소망도 꿈속의
물결이라 얘기한다
삭막한 대지 위의
사윈 들과 가로수 나목
그 앙상한 나뭇가지 위의
포근한 눈꽃을 한 조각
얼음덩이 만들었다
낙엽처럼 가버렸던
사랑 앞에 시울 붉히며
애증의 흑빛 그림자가
세월의 바람결 속에서
사랑의 상처 남기듯
동절기에 얼어붙은
앵두 열매가 가슴속에
옹이 되어 맺혀 있어
미련인가 사랑인가
세월의 흔적 속에
켜켜이 쌓여진 심연
빛바랜 추억이런만
새봄 기다리누나
겨울 탈출
오애숙
적막이 애워쌓아
골방으로 밀어 넣는 한겨울
그저 마음의 밀실에서는
어두움의 긴 그림자로
누워만 있었다
성긴 가지 끝에서
홍매화 어둠 밀어내려고
빙점에서 탈출하려 안간힘 쓰며
불 밝히는데도 그저 밀실 안
숨죽여 있었지
내가 눈을 뜬 건
새벽 미명 어둠 밀어내고
내 주님 일어나라 여명의 외침
푸른 희망이 나팔 불며
내 눈 열어주었지
성에로 갖힌 한겨울
어느새 따사론 나래 펼쳐
사윈 들판 어둠 뚫고 맞이한 새날
의식의 세계 속에 눈 떠
휘파람 불고 있다
겨울
옥윤정
아무것도 바라고
원하는 것도 없이
자신의 곱디고운 모습 고스란히
내려놓고 말없이 주고 갔는데
가을의 자리
슬그머니 차지하고
자기 세상이라고 히죽히죽 웃으며
즐거운 마음 따뜻한 가슴도 모른 체
차가움만 갔다 놓고는
쓸쓸히 웃고 있는 해님을 빨리 가라
등을 밀어 버리기까지
너의 욕심은 어디까지야
훈훈하게 불던 바람도
비켜 갈 수 없는 듯 휘몰아치고
너를 맞이하는 마음 아려오며
그리움 되어 오는 시린 가슴 어찌하랴
겨울 연가
우영규
4층 옥탑 위 굴뚝에서
몽실몽실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아래층 어디선가
갓난아기 울음소리 들려오면
사랑도 가난했던 젊은 날 생각나고
4층만큼 높이 치솟은 전봇대 위
가로등 불빛은 사랑 앓고 서 있다
불빛에 젖은 눈발이 소리 없이 흐느적거리면
역마살 낀 청춘 문 열고 색깔만 선명하다
전신주 변압기는 잉잉대며 깡마른 소리만 지르고
건조한 여로에 지친 나그네처럼
구들장 따뜻한 아랫목 생각나면
떠돌던 매운 세월만 한없이 쳐다본다
찬바람 살 속 깊이 파고들면
어느새 소리 없이 그대 이름 부르는 소리
겨울밭에서 낚는 꿈
유나영
마음이 심란하여
겨울 들판에 나가보았더니
아득한 날의 이야기가
눈발에 어리어
하얀 눈발을 밟고 있었습니다
보리밭골에 까마귀 눈발을 헤쳐
삶을 묻고 있는 것 같아
들여다보았더니
파란 보리잎사귀에 얽힌 이야기가
정이 젖어
눈발을 맞고 있었습니다
도외의 변방을 돌면
고향 같은 풍경이 아스라이 밀리어 오고
꿈도 그리운 탓에
하얀 평원을 걸어보면
숨은 듯 가슴 조이는 날이
전설처럼 덧나 있어서
하늘과 땅을 어르는 눈발에 젖어있습니다
겨울
유승도
10시가 넘어 일어나, 먹을 걸 달라고 우는 염소의 소리가 듣기 싫어 밭가에 매고 밥을 먹고 컴퓨터를 켜 뉴스를 보다가 연탄보일러의 불을 살피고 헛간의 연탄을 보일러실로 나르고 집 주위를 거닐며 산과 하늘이 맞닿은 곳에 시선을 두고 있기도 하다가 염소를 우리로 들여보내고 저녁을 먹고 책장을 들춰보다가 다시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종선이의 전화를 받았다 술에 취해 주절주절 털어놓는 이야기를 할 수 없이 들었다 하교에 함께 다니던 선배 시인이 뇌출혈로 수술을 7회나 받고 겨우 죽음을 벗어나 미음을 먹고 있다고 한다 남의 일이건만 남의 일 같지가 않다 시간은 빠르고 추위는 맵다 그래도 잠은 자야 되니 잠자리에 든다 매일 매일이 그러니 죽음이 그리 멀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이 세월이 나를 데려갈 때까지 묵묵히 사는 거다 오래 살려고 노력하진 말고
겨울 사랑
유안진
나 혼자서 정리하고
나 혼자서 용서하며
얼었다가 풀렸다가
한겨울도 깊어 갑니다
비바람이건 눈보라이건
나 혼자의 미친 짓입니다
겨울 양식
유안진
눈물이여
네 앞에서 하 그리 바보였던 내게도
어떤 슬기가 깃들이나 봐
쓰디쓴 한 사발의 독약을 마시고 보니
깜깜 천지(天地)
침묵의 시절도 무섭지 않고
거대한 빙산이 좌초를 노리듯
미워하자 미워하자
이 요상한 힘으로
욕스럽긴 하지만
철두철미 미움 하나로
모질게 추운 이 겨울도 살만해
적어도 석 달 열흘 거뜬히
나는 버티리라
보란 듯이 웃기 위해 살아남으리라
겨울 엽서
유안진
눈이 펄펄 흩어지는 밤
너도 이처럼
잠이 오지 않았었니
한잔 술이라도 기대고 싶어
거리 거리를 헤매었을 너
사나이의 끝없는 가능성의
확인을
일개 여자에게서 찾을라던 너는
주점 구석에 쭈그려 앉아
쓴 잔을 스스로 따루었니
명예도, 사랑도, 황금도 내던지고
두 주먹 불끈 쥐고 총을 메던 너는
어느 산마루에 우뚝 서서
성난 짐승처럼 소리쳐 울었니
뜨락에는 쌓이는 하늘나라의 엽서
나는 어느 편에
안부를 전해볼꼬.
겨울 단상
유영서
목적지 없이
바람 분다
간밤에 내린
무서리
길섶에 엎드려
동상 걸려 끙끙 앓는
가여운 것들
하나둘씩
일으켜 세우며 불러본다
저 허허로운 들판에
마음 하나 내려놓으면
꽃이 필까?
겨울의 끝
유영서
피어오르는 물 안갯속에서
겨울이 뒤척이고 있다
움트는 가지마다
훈훈한 바람 안긴다
추위 견디며 발 등 덮었던
가랑잎 사이로 꿈틀거리는 생명
자작자작 쪼는 햇살이
물살 위에 내린다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어깨 위로
초록빛 출렁이고 있다
그 겨울 언저리엔
유영서
새파랗게 떨고 있는
하늘
얼굴빛 시리다
낙엽 떨구고
대지는 잠이 들었다
창가에 놀러 온
햇살 끌어안고
예쁜 꽃 피었다
우리 집 베란다엔
외로워하지 마셔요
이 추운 겨울날
아마도 누군가 기다리는 사람
있는가 봅니다
깊은 겨울로
유일하
언 땅마저 갈라진 혹독하게 추운 날
솔가지 끄트머리 매달린 달력 한 장
쓸쓸한 솔바람 타고 갸우뚱한 내 마음
흰 눈 속 그대 형상 겹겹이 떠오르면
감감한 영혼 속이 찹찹하게 외로워져
칼바람 휘어 감싸는 그대 품이 그립다
차갑게 실신하던 저 하늘의 눈물 파편
솔가지 걸터앉아 꽁꽁 다문 그대 같아
이 겨울 뼈저릴 만큼 가슴 속이 쓰리다
그 겨울, 풍경
유진
동짓달 찬바람에 시간 헐거워진 마을
언제부터인가 까치울음 그치고
아득한 몽환 속에 홀로 겨울을 꿰매며
시름시름 야위어 가는 고향 집
대숲 술렁이는 뒤꼍 산등성이로
오늘이 또 지면
밤이슬에 젖은 달
차가운 기왓장을 뒤적이며
낡아버린 옛 가풍을 줍는다
겨울 무창포
유현숙
녹다 만 눈이 희끗한 해안 모랫길을 걷네 느리고 길게 걷네
물때가 다 됐는지 발이 쑥쑥 빠지는데 앞서간 이는 모랫바닥에다 그립다! 라고 쓰네
물이랑을 타고 노는 바닷새도 밀어 보낸 바다를 그립다! 말할까
저녁에는 바다가 보이는 3층 방에서 젖은 발을 말렸네
큰 창으로 바닷소리를 들이고 시집 한 권을 다 읽는 동안 늦은 밤 TV에서는 지라니합창단*이 소개되네
빛나는 큰 눈과 검은 살갗의 슬럼가 아이들 위로 전화번호가 흐르네
나는 자막의 번호를 눌러 후원통화를 하네
(노래만이 희망인 저 아이들!)
목에 박힌 가시를 뽑으면 내 슬럼가의 생활도 아름다운 화성(和聲))이 될지
독 묻은 가시가 들숨 날숨을 토막 내는 목구멍에다 손가락을 쑤셔 박네
눈발 날리는 무창포에 와서 가시를 파네
베개 밑에는 밤새 썰물 길이 흐르네
여러 해째 박혀있던 언 모래 같은 고집들이 목구멍에서 쏟아지네
섣달그믐이네
다음날은 눈 그친 허공을 파고 뽑은 가시를 묻네
* ‘지라니’는 스와힐리어로‘좋은 이웃’이라는 뜻. 세계 3대 쓰레기장이라 불리는 아프리카 케냐 고르고초 마을에서 쓰레기를 뒤져 연명하는 어린이들로 구성된 합창단
겨울 여행
유현숙
산바람이 차다는 한계령에서 온 메시지입니다
덕장에 널린 명태들의 떼 울음을 듣습니다, 강원(江原)의 겨울을 엿듣습니다
그가 안고 떠난 울음입니다
동쪽에서 들려온 이 울음을 길게 펼쳐 드는 동안
나뭇가지는 야위어갔고 내 목청은 다 닳았습니다
날 저물어 산(山) 집에 든 그는 이 울음을 갈아 글씨를 씁니다
깊은 그믐의 밤입니다
떨어져 앉은 사람들이 떨어져 앉은 채로 잠들지 못합니다
나무 향이 쌓이는 처처(悽悽)한 산골에다 그를 풀어놓는 그가 있고
불빛 작은 이 누옥에다 나를 풀어놓는 내가 있습니다
마을에는 그저 흰 눈이 내렸으며 아침은 더디게 오고 있습니다
각수刻手는 아직도 산벚나무 목판에다 칼질을 하고 있겠지요
찻물만 따르는 한겨울, 거기도 여기도
깊디깊은 강원(講院)의 밤입니다
내일은 눈사람의 손을 만들어줘야지
유혜빈
너는 1월의 의자에 앉아 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눈을 굴리고 있다. 저녁에 온다고 하는 눈을 골똘히 생각하면서. 눈을 굴리고, 또 굴리고 있으면, 눈은 이미 왔으니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음으로 눈이 되고 마는 것들. 오지 않음으로 이미 와버리는 것들은 싫다. 따가움이다. 눈은 오지 않는 내내 따가움으로 내린다. 이윽고 창밖에 눈이 온다. 굴리던 눈이 눈을 만나 녹아내린다. 눈은 지금부터 눈 아니다. 눈 같은 건 싫어 버리면 그만이다. 눈 그칠 줄 모르고, 엄마가 너를 데리러 갈까, 묻는다
햇살 좋은 겨울날이면
윤갑수
부서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하늘거린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듯
양지 녘 해바라기하는 고양이
상념에 잠긴 듯 지그시 감고
오수를 즐긴다
사람이 지나가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귀만 쫑긋 세우고는
요지부동이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때쯤
기지개를 펴고 어슬렁거리며
햇살 멈춘 자리를 벗어나
걸어간다
겨울날 햇살 좋은 날이면
우리 집 앞마당에 친구들과
제기차기 팽이치기하며 놀던
어릴 적 고향이 그리워진다
겨울 풍경
윤덕명
새치 한 올 뽑아 들고
겨울 하늘을 본다
오래도록 기다리며 눈을 띄워
거목으로 자라난
은행나무여
오늘은 곁가지 짤린 나목이구나
꽃과 새들도 떠나버린
구름의 벗으로
텅 빈 가로수의 손짓
내 응달 한 모서리
옹이 맺힌 나뭇가지에 걸린
바람은 세월을 자꾸 흔들고
까만 머리 숲에서
새치 한 올 뽑아내어
고스란히 불태우고 싶다
겨울
윤동주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래미
달랑달랑
얼어요
눈 오는 지도
윤동주
순이(順伊)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위에 덮힌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이나 천정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나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던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욱을 눈이 자꾸 나려 덮여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욱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욱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겨울의 첨단(尖端)
윤삼하
한겨울 얼어붙는 가슴
갈라놓는 날선 바람
잔가지 잔뿌리들을
더욱 움츠리게 하는 강바람이여
빙판 위를 굴르던지
거친 들판 질러서 가다오
잿빛 하늘도 쏟아지게
흰 눈이나 펑펑 내려다오
처마밑에 쌓이는
눈의 나랫소리
새벽이 와도
정갈한 눈의 마음
이 겨울의 첨단에서
아둥그러진 노래들은 거두어다오
아직 얼음에 덮힌 개울가
가시나무에 물이 오르는
봄은 까마득 보이지 않고
저만치 앞서가는
외로운 절기여
그해 겨울은 추웠네
윤순찬
세상 속으로
아침을 열고
출근한다
허리에 핸드폰
가슴에 서류뭉치
무장한다
자욱한 포화
꿈속을 뒤척이다
문을 나선다
정류장에는
칼날 같은 풀잎에
이슬이 하얗다
겨울 맛
윤용기
사계절의 순환은
어김없이 찾아와
싱그런 초록빛 생명
탁트인 태양의 바다
송글송글 맺혀있는 시랑표 단풍
군밤과 호떡이 제 맛나는 긴긴 밤
계절의 흐름 속에
생의 연륜은 깊어만 간다.
군불피는 사랑채에
고구마 서너개
새까맣게 구운 고구마
긴 겨울밤 둘러앉아
동치미 설익은 국물
겨울 맛이 그립다.
구수한 겨울 맛이
나의 겨울은 가끔 당신이었습니다
이경선
그해 겨울을 기억합니다
그해 겨울이 좋았습니다
이유가 무어라 물으신다면
이따금 당신이었다 하겠습니다
그해 겨울 나는 좋았습니다
꽁꽁 싸맨 당신의 옷가지와
옷가지 사이 빼곡 내민 당신의 수수함이 좋았습니다
그해 겨울 나는 따스했습니다
당신을 바라보고 사랑하는 일이
밤사이 온기로 자라나 곁을 덮어주었습니다
모닥불 일렁이던 밤이 있습니다
우리는 나란히 불빛을 바라보곤 했습니다
때로는 나란히 누워 별자리를 세기도 했습니다
그해 겨울
우리는 서로의 안녕이자 슬픔이고만 싶었습니다
무렵
당신의 온기는 밤하늘 뭉근히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그해 겨울을 기억합니다
그해 겨울이 좋았습니다
당신을 기억하는 중입니다
이따금 당신이 떠오릅니다
가는 겨울
이경자
물안개 흩날린다.
그사이 네가 서 있다.
눈(目)이 젖는다.
돌아섰다
서있는 자리 구멍이 파이고
안개가 뽀얗게 피어오른다.
님의 소리인가 어렴풋이 기다려있으면
그래 오겠지
겨울 나그네
이광석
해마다 이맘때면
우리는 겨울나그네가 된다
질펀하게 개펄처럼 내려앉은
12월의 어둠에 떠밀려
포장마차같이 3등칸 밤차를 탄다
목적지도, 예약된 기다림도 없다
허허한 산자락에
차가운 눈발도 내리는
차창밖에 숨은 고독과 만나
막소주 한잔 나눈다
지금쯤 지리산의 겨울바람도
장터목 산장으로 대피했을까
남해 먼 바다 푸른 파도소리도
홍도 등대 아래 닻을 내렸을까
어차피 세월은 가고
아쉬움만 남는 것
그리움도 사랑도 빈자리
꿈도 희망도 빈자리
아마도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추억여행일 테지요
겨울 나그네가 되어 3등칸 밤차에 몸을 싣고
떠나는 외로운 겨울 여행
아마도 그 잔조로운 여운을 주는 것이
추억여행이 아닐까 싶습니다
인생의 숨은 고독을 안주 삼아
막소주 한잔 나누는
겨울 나그네의 허허로운 내면 풍경
어쩌면 우리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제 또 한해의 끝자락입니다.
젊었을 때는 시간이 흐르는 것 같고
30대 때는 세월이 흐르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인생이 흐른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그 흐름 속에서도 늘 변치 않는 풍경은
우리들의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그래서 옛날 친구들과의
추억여행은 늘 아름답습니다
그리움도 사랑도,
꿈도 희망도 모두 빈자리로 남지만
우리들의 자리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가득합니다
우리 모두 겨울 나그네가 되어 삼등열차를 타고
막소주 한잔 기울이며 아름다운 추억여행을 떠납시다
겨울이 오는 이유
이구학
금빛 가을이 오는
까닭을 아시나요
더위에 지친 대지가 옷을 벗어 던지자
하늘은 몸이 달아서 알몸으로 달려듭니다.
나무들 얼굴 붉히며 깃털 뽑아 감싸주자
구름은 솜이불로 온 세상을 덮어줍니다
이렇듯 하얀 겨울이
우리 곁으로 온답니다
겨울잠
이규옥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저마다 분주히
오가는데 오가는데
잠을 잔다 잠을 잔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제각기 어디론가 총총히 떠나는데
떠나는데 눈 뜨고 잠을 잔다 잠을 잔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이제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데 뜬 눈 속으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발자국조차 보이지
않는데 보이지 않는데 잠 속 깊숙이 눈이 내린다
눈이 뿌리 내린다 뿌리 내린다 눈뜬 잠 속으로 하얀
눈이 푸른 뿌리 내린다 붉은 뿌리 내린다 새하얀 눈이
푸른 꽃 내린다 붉은 꽃 내린다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겨울행
이근배
1
대낮의 풍설은 나를 취하게 한다
나는 정처 없다
산이거나 들이거나 나는 비틀걸음으로 떠다닌다
쏟아지는 눈발이 앞을 가린다
눈발 속에서 초가집 한 채가 떠오른다
아궁이 앞에서 생솔을
때시는 어머니
2
어머니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고향엘 가고 싶습니다
그곳에 가서 다시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름날 단신의 적삼에 배이던 땀과
등잔불을 끈 어둠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타고 내리던
그 눈물을 보고 싶습니다
나는 술 취한 듯 눈길을 갑니다
설해목 쓰러진 자리 생솔 가지를 꺾던 눈밭의
당신의 언발이 짚어가던 발자국이 남은
그 땅을 찾아서 갑니다
헌 누더기 옷으로도 추위를 못 가리시던 어머니
연기 속에 눈 못 뜨고 때시던 생솔의, 타는 불꽃의,
저녁나절의 모습이 자꾸 떠올려지는
눈이 많이 내린 이 겨울
나는 자꾸 취해서 비틀거립니다
겨울의 근성
이길옥
이놈은 몽니가 워낙 사나워서
함부로 건들거나 다스리기가 까다롭다
성질 또한 원체 괴팍하여
휘기보다 부러지기를 좋아한다
이놈의 습성은
신경의 끝 부분부터 마비시킨 뒤
야금야금 심장으로 이동하면서 칼을 댄다
칼이 지난 자국이 얼고
자국 안의 피가 얼고
이놈의 성깔은 되게 못나서
위아래를 가리지 않는다
혹한을 옆에 끼고 살면서
빈곤의 구들장을 냉동시켜야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놈이다
이놈의 못 된 성미에 특효약은 불인데
불을 구하는 것이 돈이 드는 일이라
늘 기세등등하다
겨울 식탁
이난수
열두 명이 않을 수 있는
교자상 두 개를 새로 들여놓고
한밤중에 일어나
빈 그릇을 올려 보았다
크고 작은 접시며
열두 개의 술잔
두 벌의 커피잔
아름다운 물 주전자
전골냄비
은수저
교자상 한가운데는
일곱 송이의 장미를 꽂고
오렌지빛 램프도 밝혔다
전등을 끈
거실에
잔잔히 음악이 흐른다
창밖에는
어느 사이
축복처럼 하얀 눈이 내리고
나는
교자상에 둘러앉을
사랑하는 이름들을
하나씩 불러본다
겨울 나루터
이남일
바람에 실려 왔다가
강물 따라 흘러가는 발자국 소리
보고 싶었소
꽃잎이 날리던 자리에 눈발이 날리면
그리움은 천 길 물속 별빛처럼 박히는데
강물이 얼고
갈대 숲에 함박눈이 쌓이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바라보다가
얼음 강 눈길 위를 끝도 없이 걸었소
강둑을 만나 돌아오는 길에
찍고 온 내 발자국은 왜 이리 낯선지
걷다가 멈추다가 서성이던 모습들이
한줌 햇볕이면 안개처럼 스러지고 말
육신이 남긴 중력의 흔적들이
강물에 띄울 말 한마디 담지 못한 채
문득 흰눈 속에 사라지더이다
계절 따라 만날 것 같던 영혼의 노래여
눈발 날리면 서둘러 떠나는 겨울바람처럼
배 띄우면 물결 따라 닿는 곳에서
그냥 보고 싶었소
겨울 산장
이남일
부스러질듯
낙엽 같은 어깨 위에
흰 눈이 내리더니
봄볕보다 야윈 얼굴에
눈물이 흐릅니다
몰랐습니다.
봄날 벚꽃 잎에 털어버린
지나간 인연들이
토방에 달아오른 군불 연기로
사무치게 피어오른다는 것을
그립습니다
산새처럼 허공에 떠도는 이름
아득히 흘러버린 옛 노래가
소리없이 하얀 밤
그대가 보고 싶습니다
겨울 이야기
이도연
창밖은 넓고
겨울 이야기는 소담소담 쌓여
세상은 고요와 적막에 놓이며
수런거리는 숲의 대화는
나비의 날갯짓으로 밤사이 날아오른다
세상은 온통 순백의 태고를 입고
시원 始原의 세상은 맑고 정갈하며
신들의 제단 앞에
순결함으로 엄숙하고
들판에는 은백색 겨울꽃이 걸려 있다
꿈결 같은 그리움은
시베리아 바이칼호에서 날아온
겨울 철새의 완강한 어깨에서 느껴지는
안쓰러움으로 한 쌍의 겨울새는
설원에 아득한 발자국을 남기다
그해 겨울에는 따스한 겨울 풍경이
흰 눈처럼 쌓여 부풀어갔고
차가운 이성에 목마른 사랑도
솜사탕처럼 포근하게
겨울 숲이 보이는 창가에 내려앉았다
난 겨울이 좋습니다
이돈권
난 겨울이 좋습니다
추위는 무척 싫어하지만
겨울이 좋습니다
나이 들어 같은 방을 쓰되
따로 이부자리를 펴고 자는 우리 부부
새벽녘 영하 8도를 넘어서자
서늘한 공기가 아내를 내 이불속으로
슬그머니 들어오게 합니다
가만히 안아 줍니다
겨울은 추워도
나는 겨울이 좋습니다
그대, 내 품으로 살며시 돌아오는
겨울이 좋습니다
그대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하는
겨울은 참 따뜻하기만 합니다
겨울 뜰
이명수
겨울에도 비가 오는 성북동(城北洞) 기슭
낮게 깔려 근심하는 집들
불을 켜도 어두운 뜨락엔
뒷굽이 닳은 신발 몇 켤레,
볼을 맞대고 있다.
사나워짐에 길들일 수 없는,
딸애의 무섭고 심심한
겨울
뜰.
마른 가지 끝에서 잠드는
아픈 이파리들의
끝없는 수화(手話)
겨울 이야기
이명희
바람은 한사코
깊은 내면을 흔들었지만
숨고를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능선을 넘어 왔습니다
공허한 웃음 지으며
내 삶의 그루터기 물끄러미 바라 봅니다
의식에 걸쳐있던 흔적들이
저물어가는 풍경 속을 휘적휘적 걷습니다
돌아보지 못한 것들이
문전을 두드리며
정적을 가로질러 무의로 번져갑니다
어둠이란 빛의 결핍
사는데 거창한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북수북 쌓이는 외로움
생의 갈피갈피마다
채곡채곡 묻어두렵니다
물의 백서 – 얼음
이문재
초겨울
얼음이 얼기 직전
뒤돌아보는 물처럼
초봄
녹기 직전
자기 앞을 내다보는
얼음처럼
한겨울
얼음 속으로
얼음의 한가운데로
꽝꽝 더 얼어가는
얼음처럼
더 차가워져서
더 딴딴해져서
스스로 터져나가기를
원하는 얼음처럼
제 몸 밖으로
터져나가
으스러지고 싶어 하는
녹아 흐르고 싶어 하는
얼음 속 언 물처럼
이윽고
가벼워져
구름의 손을 잡는
새벽 물안개처럼
보란 듯이 땅을 버리는
이른 봄 아지랑이처럼
겨울
이병률
추운 이사를 했습니다
짐들을 부려놓자 성당의 종소리 바람을 만들었습니다
책을 둘 데 없어 책장을 짜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번쯤 가봤던 목공소로 향하는 길,
버스 정류장의 나무 한 그루 기대기 좋았습니다
오랜만에 아는 체하는 목공소 사내,
새끼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것을 압니다
손가락의 안부는 탄성을 숨깁니다
칠팔 년 전 조수 시절에 내 책상을 짜면서
잃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자를 가득 걸어놓은 벽을 등진 그가 웃으며 자꾸 웃으며
책장 선반의 간격을 물어오는데
봉해진 손가락 마디가 막 꽃 진 자리 같습니다
선반의 높이야
나의 뼘보다 그의 뼘에 맞으면 좋을 것이고
선반의 깊이야
붕대들을 모아놓을 정도면 그만일 것입니다
그이의 손이
내 찬 손하고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숨길 수 없었던
겨울이었습니다
겨울 그 길을 걸었다
이병률
회색 뚝 길에 살얼음 부서지며 종알대는 발자국
하얀 벌판에 불어오는 일상의 단순함이 통치하는 무한의 시간
시간의 시체들이 기억을 움직이는 정자나무 마을
참새 떼들의 군무가 이상과 환상의 세계로 날아가고
열망을 실현하는 가슴을 갉아 먹으며 자라는 나를 보았다
갈색 낙엽이 초록색이었다는 걸
얼룩진 눈길에서 서로가 다른 기운의 바람을 껴안고, 수줍어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분홍빛 노란빛 고원길 이정표
길이 있어 내려놓을 수 있는 일상의 고단함과 무료함은
연분홍 설렘으로 피어나는 초록의 처녀처럼 웃고 있다
섬진강 빙하수 맑은 물 하늘빛 품어 흐르는 넉넉함에
두려워하지 않은 옛사랑의 나날들의 바람 길을 걸어가고
강변 콘크리트 괴물들이 설친 아픔위에 흰 눈은 임자가 되어
죽어간 초록이 그리워 햇빛에 눈부신 눈물 흘리는 걸 보고
누군가가, 내 살을 파먹은 적폐 흔적이 있다고 소리친다
길이 있어 길에서 만나는 풍경
산속 길가에 한그루의 나무는 음영 따라 고독에 머물게 하고
고독의 또 다른 문에서 손잡아주는 두렁거리는 미소
걸으며 다가오는 따스한 체온, 늦은 사랑의 기억을 흔들고
현실의 중력이 사라진 환상의 영토에서 초록의 문으로 들어간다
맨 얼굴을 드러낸 산의 썰렁함이 한낮의 햇살과 놀고
차가워진 별판을 걸어가는 발소리를 바라보며 구시렁거리는 삶에
푸른빛이 달라지는 숲의 섬세했던 나뭇가지를 보여 준다
겨울 그 변화하는 땅, 스스로 검은색 차가움이 되어있다
겨울의 끝에서
이병주
그렇게 하얗고 하얗던
눈송이는
나의 시린 발등을 아량하지 않고
하얗다 못한 꺼어먼
눈사람
나의 차디찬 마음을 쳐다보지도 않고
눈싸움하면서 뛰놀던
아이들
황혼의 종종걸음 걷거나 말거나
시린 발등 차디찬 마음
종종걸음은
녹다 지쳐버린 울퉁불퉁한 눈 모듬 위에서
그래도 꺼지지 않는 모닥불의
불씨는
지펴주는 불 지킴이를 찾아가련다
겨울 로망스
이보숙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다는 아침에 슬피
나보다도 더 슬피 함박눈이 내려
어느 쪽 어느 버스로 갔는지
조그만 발자국도 찾을 수 없어
그 사람을 잡지 못했습니다
다시 오실 것을 알기에
기다린다는 걸 그 사람은 알기에
함박눈 속에 그리움을 묻으며
추억을 묻으며 얼어붙은 발도 묻으며
사방이 온통 하얀 동화 속 눈 나라에
얼어붙은 채 서 있습니다
눈아, 함박눈아
쉬지 말고 내려다오
발목을 덮고 무릎까지 오르렴
나의 반쪽 그 사람 다시 오면
내 곁 못 떠나게 발목을 잡을 거다
다른 사람에게 갈 수 없도록
운명의 끈을 꽁꽁 묶을 거다
쉬지 말고 내려다오
겨울 들판
이상교
겨울 들판이
텅 비었다
들판이 쉬는 중이다
풀들도 쉰다
나무들도 쉬는 중이다
햇볕도 느릿느릿 내려와 쉬는 중이다
겨울 별 밭 아래에서
이성선
겨울나무에 별빛 가득 피고
밤하늘은 그 아래 고전을 편다.
신은 책갈피 속에 촛불을 들고
기침을 하고
달은 둥그레 하늘을 채운다.
내 안에
나신의 여인은 누워
한 손으로는 붉은 내 심장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제 사타구니
달 뜨는 곳을 만진다.
어둠이 되었다 발마이 되었다 하며
나는 하늘을 쳐다본다.
눈이 내릴까.
수천 별들은 반짝이다가
갑자기 망가져 눈이 내릴까.
나도 그녀에게 가서 망가져
달로 뜰까.
서리 묻은 밤하늘이 사지 펴
우주의 빛을 다 건져 비치는 밤
겨울의 노래
이성선
벌거숭이 몸으로 겨울을 가리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영혼
벗은 사랑의 맨발로
그대에게 이르리라
다 떨어져 나간 빈 뜰의 등불
잠들지 못하는
얼굴은 고독하고 아름답다
이제 나도
절망과 아픔을 벗어버리고
아직 별이 떠있는
이 겨울밤 끝으로 떠나리라
거기 붉게 동터오는 하늘 아래 가서
순수한 두 팔의 날개로만
서 있으리
아아
그런 알몸의 악기로 걸어가리
나무는 벗어서
벗은 몸끼리 더욱 가까이 빛난다
서로의 등뼈를
서리빛 하늘에 비추고 서 있다
그 곁에서 기도하며
저녁 눈시울처럼 겸허하게 떨며
그대에게 바치는 노래를 준비하리
겨울은 순수한 맨발로 가리
겨울 초상(肖像)
이수익
못에 빠져 죽은 여자의 얼음
사이로 나온
손,
그 희디 흰 손은 가지를 내고
햇빛을 받아
성장하고 있었다
장미꽃처럼
타오르는 윤활유의 난로(煖爐)에서
사막(沙漠)에서
나와
그 여자는, 함께 있었던 것일까
겨울에 표현되는
강
流域을
빗기어가는 새들---
저 이름모를 영혼의 악사들은
나의 지대에서
주둔(駐屯)했던 모든 것을
거두어 갔다
망고와
잎사귀 진 나무와
조용한 이 계절의 석모(夕暮)를 노래하는
우리 아이들의 식탁에 와서
하나씩 잠이 드는 고향
못에 빠진 여자는 죽어서
손은
가지가 되고
가지마다 꽃은 난만히 피었는데,
누가 겨울철의 이 눈물을
그릴 수 있을 것인가
결빙의 아버지
이수익
어머님,
제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가옥 이 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 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랑이 사이로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 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 층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 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오늘은 영하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 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화신(化身)에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 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을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 꽝 얼러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겨울꽃
이승은
잘린 대궁이의 흐느낌이 잦아지자
버텨온 꽃송이가 고개를 수그린다
그렇게 겨울은 왔다 언 목숨을 거두면서
한때 이 지상에 빛나던 약속처럼
병 속의 꽃일망정 꽃으로 환했던 것
가변성 내일의 말은 빈칸으로 남긴다
이 겨울에
이양우
언젠가 자기를 불태워
남을 데워준 사람
그 사람이 기억납니다.
그 사람이 이 겨울에 오신다면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겉으로 타오르는 불길보다도
안으로 타오르는 불길이
더 뜨거워지는 길을 알고 싶어서입니다.
그분은 안으로 태워서
밖을 따듯하게 해준 분이거든요
그분의 가슴에서는
사랑의 마그마가 끓고 있었을 겁니다.
용서의 용솟음
그 용솟음이
죄를 사하여 주었으니까요
겨울 보화
이영지
겨울이 옷 입듯이 하얀 눈 봄 보화로 새싹을 달아두고
아직은 두 손에 감싸않은
골짜기
흐르는 빛이
하얗도록 달리는
겨울 파도
이영지
겨울 파도
몸살을 앓는다 열병이다
전할 이야기
파도 소리 풀어 놓아 견디느라
긴 겨울 한복판에서 봄의 혼이
바위섬에게 물 먹여
울며울며 봄을 토하라
흰 눈과 흰 파도로 흰 가슴 보이며
봄 내라
낚싯대에 걸려들
봄 바다를 낚는다
한겨울엔
이영지
겨울엔 눈 감지요
바람이 불어오니 두 눈을 꼬옥 감고
정말로 안 볼려는
차가운 그대 내음에 눈을 감고 옷깃이
날리니 눈을 감고
사랑이 춤출까 봐 눈을 감고
오온통 눈을 감고 옷깃을 여미고
일찍 잠자리에 들어
하늘나라 꿈을 꾸지요
꿈에 기차를 타고
두두웅 바람을 타고
바람이 불어와 또 바람 불어
섬기며 가느라고 말조차 삼가 듣고
긴긴밤에 일어나 꿈을 닦지요
겨울 참새
이영춘
겨울 빈 나뭇가지에 포동포동한 참새들이
꽃송이처럼 앉아서 논다
한 놈이 휙- 햇살 줄기를 가르며 자리를 옮기자
옆에 있던 다른 놈들도 포르릉 따라가 앉는다
빈 가지에서 무엇을 쪼아 먹으려는 몸짓인지,
그냥 놀러 나온 것인지,
살폿살폿 내려앉는 발가락들,
환(幻)이다
햇살들은 쪼악쪼악 고것들의 똥구멍을 쪼여주고
포롱포롱 날개 죽지 밑에 숨긴 입술들은
햇살 그림자를 따라 출렁인다
나는 어느 새 겨울 동화의 나라로 돌아가
동화 속 빨간 아이의 얼굴이 되어 중얼거린다
초가지붕 처마 밑에서 쌔근쌔근 잠들었던 조것들의 붉은 심장에
깊숙이 손 내밀어 홱- 잡아챘던 그 어린 날의 가가소(可呵笑)
너희들 고렇게 앙증맞고 고요로운 평화의 몸
내가 왜 그리 탐했었는지 모르겠다 참새야, 미안하다
너희 알몸 가려주는 햇살 앞에서 내가
겨울 항구
이우걸
둠의 사슬에 묶여 포구에 갇힌 선박들
오리무중의 내일을 기다리며
여인숙 하수구들은
병든 낭만을 방류한다.
강철처럼 단단한 수평의 껍질을 깨고
아침마다 비상한 불꽃의 새는 없을까
시간은 현관 앞에서 구두끈만 만지고 있다
겨울을 담그다
이원근
누구나 가슴에 담아 둔 그리움
새벽녘 안개에 감추고
다가오는 초겨울 문턱에
서로서로 도토리 키를 재기하듯
서 있는 나무들
가을을 그렇게 보내고
겨울은 눈인사도 없이
조용히 찾아와
시냇가의 둥그런 거울에 자기를 비추면
그 거울에
겨울을 담그다.
이름 모를 나무들까지
그리 화려했던 지난날
다 버리고 나면
추운 겨울의 시간
몸을 드리운다
겨울이 오면
누구는 떠나가고
누구는 만나 이렇게 서서
지난가을을 아쉬워하면
누구나 참아가는
긴 시간의 겨울
지나가는 일상을 묻으며
동면의 시간 속
시상(詩想)을 담아 본다
겨울 하늘
이원문
바라보는 저 먼 하늘
그리움 가득하고
지난날 하나둘
구름 따라 흐른다
나뭇가지에 걸치는
그 어렵던 아픔들
아련한 날의 서러움인가
못 잊을 그 많은 상처
멀리서 다가오고
이제 아무려야 할때
아물리는 이 양지녘
그 찬바람 스쳐 간다
등부터 겨울이 온다
이윤훈
등부터 겨울이 온다
반쯤 열린 뒷문의 귀가
마른 풀 살랑이는 산그늘 쪽으로 기울고
웅덩이에 살얼음이 끼기 시작한다
그대의 등이 설핏 보였을 때 그곳이
그대의 속울음이 고였던 자리라는 걸
나의 벽지라는 걸
시린 등으로 알았다
그대 없어 등이 더 어둡고 시리다
뒷문 곁 강아지 등에 손을 얹는다
앞산 뒤켠으로 아직 남은 빛이 환하다
한때 비겁하게 비수를 감춘 적이 있다
내 등에 통증이 왔다
내 등이 얼마나 가파른지
지나는 바람이 일러주었다
가끔 내 등에서 벌레 먹은 가랑잎이 서걱인다
이제 쓸쓸한 등으로 나를 다 보이고 싶다
서글픈 일로 서글프고 싶다
어둠이 오고 저마다 제 깊은 곳으로 들어선다
군불을 지펴 지붕 위로 순한 연기를 피워 올려야겠다
겨우내 그대의 등에 곤히 등을 대야겠다
태백, 겨울
이은심
너와집 정지간에서 장작불을 지피는 아낙은
아이 셋 낳고도 동아줄 타고 하늘에 오르지 못했다
자신밖에는 구해줄 이가 없다고
국세게 우거지는 뒷산나무들
그 밑둥에 덧대어 차린 밥집
마당에 널어놓은 옷가지들이 얼어붙어 칼이 되었다
투명한 날개옷 한 벌도
아낙의 가슴에서 평생 버석거릴 터
신탁을 깨트린 눈이 내리고
사모하면 더 깊어지는 적막강산
사실보다 더 아름다운 환상은 없다
눈 쌓인 아침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밥을 푸는가
아낙의 반쪽 옆얼굴이 어룽져 갈라터진 바람벽에
하마 해를 넘겼을까
다리 다친 까치들이 글자를 찍어놓았다
- 어서 빨리 오십시요
- 꼭 또 오십시오
겨울꽃
이인혁
온 몸이 달아오른 채
내일도 놓여 있을 그 자리에서
평생을 바라보자 하더니
겨울이 들쑤시고 지나간 자리마다
슬픔으로 가득하다.
옛 추억의 꿈은 피어나는가
수 만개의 세포로 분열(分列)되어
뭉텅뭉텅 잘리고 난 그리움으로
계절도 바람도 지나간 그곳에
힘없이 추락하는 순간까지
깨닫지 못하는 것이
느낄 수 없는 것이
사랑이듯, 이별이듯
내일도 놓여 있을 그 자리에서
바라 볼 수 없는 꽃을 피운다
어느 겨울날의 기억
이일영
희끗희끗 거리는 눈이 날리면
겨울 하늘에 눈빛 묶어놓고
별똥별 애타게 기다리던 기억
먹먹한 하늘을 번져간다.
눈발 날리는 겨울 하늘에
별똥별 찾아 소원을 빌면
모든 꿈이 이루어진다는
여물 솥 불 머리에서 들었던
작은 누님 말을 끌어안고
사랑채 헛간에 쪼그리고 앉아
양손에 흥건한 땀 가득 쥐고
별똥별을 기다렸다.
고뿔에 들린 지독한 열병
몇 날을 불기둥 안고 살아난 기억
지혈되지 않는 그리움으로
하늘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다시 볼 수 없는 누님
하늘 저편에 웃고 있었다
겨울 가뭄
이재민
담배 연기가 맑은 하늘을 뒤덮는다
두 달 가까이 가물은 탓에
바닥은 먼지로 가득 차 있다
고양이란 녀석 눈앞에서 알짱거리며
가슴을 예리한 칼로 난도질한다
온갖 소음이 머리를 쥐어박고
쥐어 박힌 머리 두 손으로 부축해서
겨울 김매기를 해 본다
무성했던 곱슬머리 엉겅퀴가
난쟁이가 되어버린 지금
뿌연 창문은
수시로 닦아 보아도
시야는 흐리기만 하다
비가 올 것 같은 오후
시간은 더디게 서행을 하고
저쪽 언덕에 엎드려 있는
소나무가 노래를 한다
합창이다
바람은 비란 녀석에게
결국 바람맞았나 보다
밤하늘을 서행하는 별 무리 품에 안기어
房事(방사) 중인지
통 낯을 볼 수가 없구나
눈이라도 만날 수 있다면
탱고를 출 수 있을 텐데
담배연기 가득한 하늘이
재채기에 콧물, 눈물범벅이 되기를
된통 고뿔이 들기를
비가 와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없기를
오늘은 진짜 바래본다
땅은 땀으로 질퍽대고
그래서 가끔은 입맞춤 할 수 있는 당신
당신의 그 입술이 떨기 시작하기를
그 사랑은 춤을 추듯 흥겨울 수 있기를
그래서 오늘은 기도하는 소녀가 된다
겨울
이재환
동장군은 어디 있나
함박눈은 어디 갔나
겨울인 듯 봄인 듯
이상한 겨울이다
사계절이 뚜렷했던
한반도가 이상하네
온난화가 된 것인가
추운 겨울 사라졌네
코로나바이러스
세균들 득실거리고
살아가는 인생길이
추위보다 더 힘드네
겨울날의 연가
이정은
호호 뜨거운 호빵의 맛에
모락모락
호호 손이 꽁꽁 얼게 하는
겨울날에
호호 따끈한 찻잔의 뜨거움에
불어가며
한 모금씩
마음마저 닫게 만든 겨울날이어서
더욱더 추워지고
휭휭 칼바람만이
인적 드문 골목길 쓸어가는
겨울날에
따뜻한 아랫목 찾게
만들어지고
겨울날은 더욱더 머물고만 있어라
길게만 머문다
겨울로 가는 비상구
이종곤
다가서면 그만큼
멀어져 가서
이별을 예감하는
쪽빛 커다란 눈동자에도
밤이면 밤마다
목 놓아 울어야 하는
귀뚜라미 슬픈 사연이 있어
가을은
울긋불긋 내 속을 태운다
차라리
그립고 외로운 사연은
눈바람 몰아치는 동토
그 망각의 언덕 위에 묻어 놓고
적당히 삭거든
야금야금 꺼내먹을
내 몸 속 어딘가에
먼지 낀 채 기다리고 있을
비상구는 없는가
겨울 풍경
이종은
안개 진 날이면 눈(眼)이 흐리다
달이 훔쳐간 내 반쪽 눈썹 위에
하얀 눈 내리고
그대 기다리다 얼은 가슴
미열의 햇살에 녹아떨어지곤 했다
손바닥에 새겨두었던 낙엽은
엽서로 부쳐진 지 오래였으나
그 긴말들이 닿기도 전에 계절이 가버릴까
나의 입은 하얀 성에들로 꽉 채워져
서툰 믿음들이 나를 세우지 못하는 날이면
시린 입을 불며 강가로 나가야 했다
흔들리는 수면과 길고 지루한 억새의 몸짓을
지나치는 풍경에 가로로 짜 맞추며
목적 없이 키운 그 가로의 풍경 속에서
내가 찾으려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대의 소식은 연착되어 겨울은 길었고
내가 도려낸 풍경의 조각은
어느 서랍 안의 낯선 편지가 되어
해묵은 날들을 정리하는 날이면
남방을 떠나가는 기러기의
하얀 울음을 들려주곤 했다
겨울 우화
이지엽
고추씨 오쟁이에 바람 한 줄 살금 딛고 가는 겨울한낮
입 꽝 벌린 장독대 항아리들 금줄에 걸린 햇살들이
때 절은 문지방 애써 기어오르다
고드름 끝에 쨍그랑 부서진다
그러자 직립으로 낙하하는 물방울 그 투명한 속살
그 살결 파고들어 마악 길 떠나려는 찰나
그 밑에 한가하게 한세월 좋게 넘어가던 고양이가
그만 그 살가운 파고듦에
밥그릇을 뒤엎고 등을 세우며 부르르 떨고 선다
내게 왔다가 가버린 사랑 늘 그러하였다
겨울 산정호수
이지영
어둠 한 자락
산 등 넘지 못해
웅크려 누운
산 능선
은반을 지치는 아이들 초롱 눈이
차갑고 명징한
푸른 별로 떠
빈 호수 위로 쏟아지고
새털 같은 흰나비 떼
날갯죽지 파닥이며
빙글빙글 원무를 춘다
밤은 온 천지에
하얗게 살아 숨 쉬고
생(生)도 빙빙 타임머신 타고
되돌아와
쇠꼬챙이 썰매를 찍는
나의 유년(幼年)
오리 떼의 겨울
이지현
강 위에 오리가 머리를 숙였다 올린다
노란 부리로 쪼아낸 물방울은 베틀을 돌리지 않았는데도
모퉁이에서 가운데로 물결을 만들어간다
물결이 엉키지 않도록
휘휘 발 저어 옮기는 오리들,
혼자서는 저 넓은 강을 물고 날아오를 수 없다고
함께 강을 담아갈 보자기를 짜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도
서로의 날갯소리를 엮을 수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코와 코를 매듭지을 수 있다는 것을
결국 삶의 보자기는 혼자 짜낼 수 없다는 것을
오리 떼가 함께 날아오를 때 알았다
살얼음이 발목을 조여와도
강의 끝자락을 팽팽히 잡아당기는 오리 떼,
놓고 가는 건 없는지 막바지 점검을 끝낸 후
세상 바깥으로 일제히 날아오른다
세상 안쪽으로 폭설이 쏟아진다
겨울 가로수
이진숙
책상머리 어디쯤에서
묵은 치통이나 보듬고 있듯
세월이나 앓다가
봄 햇살처럼 나른해진다
햇볕 바래기가 되어
졸고 있는
내 세포들이나 꾸짖는 이 비겁함
차라리 선명한 아픔을 꿈꾸기로 하자
혹한의 벌판 위로
참혹하게 흩어져 나뒹구는 내 뼈와 살과
머리카락들,
빈 거리에 홀로 서서
오랫동안 슬프게 지켜보기로 하자
겨울
이창호
지금 세상은 새하얀 독을 푼 냉동창고
내 가슴 냉돌 위,
눈은 하염없이 퍼붓고 집 대문 밖,
-[시인의 길을 가겠다]-
등불처럼 내 걸린 무명시인의 문패,
사소한 삶이 시의 삶으로 소생하기까지
이 가슴,
얼마나 더 더워져야 할 것인가
그러나
알몸의 시(詩)로 부활할 것들을 위해
또 다시 내 가슴 붉게 달구겠다.
후끈 달아올라 더는 견딜 수 없을 때,
스스로 분향하여 이루어내게 될
새까만 재,
그 속을 파헤치면 사리(舍利)처럼
빛날 한줌의 시(詩)
죽음처럼 하얗게 창(窓)을 두드리는
눈보라 속에서도 몸,
따뜻하게 뎁혀 갈 한 줄의 삶, 그 위를
걷겠다
겨울엔 당신에게 이런 사랑이고 싶습니다
이채
당신의
마음을 입혀주는 옷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두 손을 녹여주는 장갑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가슴을 지펴주는 난로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아침을 열어주는 햇살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하루를 채워주는 기쁨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저녁을 맞이하는 휴식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밤을 덮어주는 이불이고 싶습니다
당신의
소망을 지켜주는 촛불이고 싶습니다
욕심으로 채운 무게라면
털어내는 지혜를 배우고
미움으로 언 마음이라면
용서의 강물로 흐르고 흘러
하얀 겨울
하얀 천사
당신의
사랑으로 피는 눈꽃이고 싶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이채
한참을 추웠습니다
바람은 차고 길은 내내 얼어 있었지요
살아가는 일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돌아오고
꽃과 새 그리고 벌과 나비도 함께 오겠지요
그래서 세상은 살 만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한참을 떨었습니다
문밖에서 당신을 기다리느라
손발이 다 얼었지만 기다림엔 이렇듯
인내하는 시간이 있어야 함을 알고 있습니다
벌써부터 꽃 이야기를 하면서
당신과 내가 꽃망울을 틔울 때
또 잠깐은 꽃샘추위에 떨며 당신을 기다려야 합니다
봄에게 쉽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겨울
그러나 기어이, 기어이
떠날 것은 떠나고 올 것은 오고 말지요
이제 춥고도 긴 겨울이
오래도록 침묵한 의미를 알겠습니다
겨울을 거처 봄이 아침을 맞이할 때까지
그 가슴은 또 얼마나 울었겠습니까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당신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여전히
따뜻한 곳보다 추운 곳이 더 많고
채워진 곳보다 비어 있는 곳이 더 많고
밝은 곳보다 어두운 곳이 더 많은
긴긴 겨울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겠습니다
누구나, 언제나, 어디서나
초록의 잎이 늘 푸를 수 없다는 것을
꽃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당신과 나의 시절도
언제까지나 지금같지 만은 않다는 것을
세월은 늘 그렇게 흐르고 흘러간다는 것을
당신과 나의 겨울이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채
사방의 바람이 병풍처럼 서 있어
햇살도 추운지 집으로 일찍
들어가는 겨울입니다
어디를 둘러봐도
추위와 맞서야 하는 이 겨울엔
당신과 나
가장 낮은 곳으로 걸어갑시다
당신과 나는 지금까지
높은 곳을 향하여 걸어왔고
때로는 숨 가쁘게 뛰어왔습니다
당신과 나의 남은 눈물이 있다면
그 눈물도 가장 낮은 곳으로 흘려보냅시다
이 겨울엔 당신과 나의 가슴도
잠시 접어 두기로 합시다
머지않아 바로 봄
가슴에서 먼저 꽃 한 송이 피우려면
씨앗 하나 온전히
새가 알을 품듯 품어야 함이니
당신과 나의 가슴도 곱게 접고 접어
신이 당신에게 준 사람의 온기가
식지 않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당신과 나의 겨울이
하얗게 눈꽃으로 피어
서로의 영혼을 따뜻이 덮어 줄 때
두꺼운 외투 속으로 추위를 보태는 무게는
더 이상 없을 것입니다
눈처럼 순결하고 그 맑음처럼 티 없는 마음
낮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
당신과 나의 겨울이 사랑하는 사람의
그 가슴처럼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다
이채
그해 겨울이 떠나면서
표피에 묻었던 외로움을
적당히 쓸고 갔지만
정작 지독한 것은 남겨 두었다
떨어질 듯한 추위를 동여매어
가난한 가방에 싣고
쓸쓸함이 지나는 나뭇가지 사이로
하얀 눈발이 날리는
어디쯤 내 여정을 만나
그동안의 안부를 묻고
그리운 사람이 스친 바람과
악수라도 하고 싶은 날
다시 겨울은 오고
혼자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다
차창가에 기댄 사람의 외투에서
그리움의 잔재가 스치고
잊었던 사람의 체취가 묻어나는 순간
아무도 모르는 외로움을 꺼내 보며
어디쯤 묻어 놓은 무엇을 찾아
문을 열고 나서는 겨울 저쪽에서
찬 바람 포개진 외로움이
열차에 실은 몸을 에워싸면
발길 돌렸던 그 길
그날이 문득 아스라지듯
차창 밖으로 쏜살같이 지나가고
눈앞에서 추억이 함께 날리우겠지
늘 그리운 사람에게
가냘픈 몸을 맡기고
마른 바람과 외로움을 섞으며
어딘가에서 떨고 있을
사랑이 숨 쉬던 그 날을 찾아
혼자, 문득 그 해
겨울 여행을 떠나고 싶다
겨울 소네트
이철건
작약꽃의 저녁 강이
산그늘 속으로 저물어 갈 때
넌 기도원 별관으로 날 데리고 갔다
넌 내 마음을 읽어 나갔고
내 시린 결핍의 고통을 마음 아파했다
생을 리셋하고 싶다는 내 말에
말간 우물 같은 네 눈이 젖었다
네 안의 어머니
내의처럼 따뜻했다
아침에 커피잔을 들고 우리는
창가에 투명하게 마주 앉았다
창 너머로 산등성이가 말갈기 같았다
하얀 자작나무 숲이
더 이상 슬퍼 보이지 않았다
겨울이 좋은 이유
이태강
길을 가다
우연히 멈추게 된
가게 앞에서
안 먹는다고
바락바락 우기는
나를 달래
억지로 손에 쥐게 된
호빵 하나와
캔 커피 하나
호빵은 두 손에 쥐고
캔 커피는 주머니 속에
어느새
두 손엔
캔 커피가 쥐어져 있고
집에 도착할 때까지
식을 줄 모르는 캔 커피 땜에
추운 줄도 모르고
왼손 오른손
번갈아 옮겨 쥐며
손을 녹였답니다
몇 년 만에
먹어보는지도 모르는
호빵 하나와
식을까 무서워
밥통에 얼른 집어넣은
캔 커피 하나가
너무 추울지도 모르는
올겨울을
하얀 입김
한숨까지
놓치지 않게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겨울, 문틈
이한명
저 벌어진
문틈을 닫지 않고는 밤새
잠을 못이뤄
기어이 일어나 비닐장막을 두른다
아무도 찾지 않는
겨울 뜰에
소리 없이 다가드는 눈발
그 작은 소리마저 차단당하다
입마개를 하고
코에 산소 호흡기를 매달고
이 겨울을
버텨 보려고 애쓰지만
사실은 벌써
봄이 내려 앉아 있는
그 무거운 세월을
버텨내고 있었는지도
바람이 불면
그들은 바람잡이가 되어
더 거센 바람을
문틈으로 비집고 들여
보낸다
비닐 장막을 두르지 않고선
너와 나
서로를 지킬 수 없어
대화조차도 거부당하고
인공관 안에서 숨을 쉰
그해 겨울의
마네킹 연습실처럼
겨울, 병사의 노래
이한명
하나. 매복지에서
다시 서리라
강바람 치는 깊은 사색(思索 )의 철책 너머
흰 깃발 펄럭이며 도열한
선잠 깬 억새풀
실(失)한 가슴 저녁으로 저무는
매복지에 서면
소슬히 잡목림을 빠져나간
빛살들이
아침을 기다리는 동안
내내 불어오는 눅눅한
그리움들에
철모 깊숙이 눌러쓴
겨울 병사의
참호 속으로 몸을 누이던
손때 묻은
네 크낙한 안부
강자락을 더듬어 본다
싸륵싸륵 별이지는
마지막 능선에
이제 홀로 남은 네 무덤
장벽(障壁)은 더 이상 침묵의 거친
바람일 순 없다
새벽이 다가왔다
네 숨통 조이는 모래바람보다
더 갈(渴)한 목마름으로
타는 이 땅의 푸른 아침을 위해
이제 나팔을 불어라
일어나라
그대 전선의 혼이여
오랜 고통의 심연(深淵 )에서 깨어 일어나
때 묻은 겨울 들녘 틈새로
너는 다시금 푸른 옷을
갈아입어라
회색빛 길목마다 염원의
촛불 밝혀
새벽길 매복에서 돌아온
아 저토록 초연한
전선의 파수꾼이여
둘, 아침을 기다리는 빛살, 사수(射手 )의 노래
이제 만나 보리라
가시덤불 속에 움크린
잔설(殘雪)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
겨우내 윙윙 울어대던
빈 들판
그 추운 가슴
비집고 들어서는
그리움의 눈빛들을
검붉은 힘살 굳게 돋은
전선의 강
푸른 참호(塹壕) 밖으로
지난 반세기 앙금처럼 갈앉던
쓰라린 가슴속 여울을 지나
묵묵히 일어서는
저 거대한
분노의 물결을
내 혼신의 신념으로 키운
가파른 고지
그 높이만큼 우리 달려야 할
아득한 곳.
대공초소 계곡을 타고 오르는 젊은
사수(射手)의 노래는
무딘 감각을 깨우는 사수혼의 묵시(黙視)
빛살, 빛살들
오라, 너 피눈물 나는 젖은 손으로
내 투구 끈을 깁던 그 하얀
꿈의 주렴 젖히고
댓닢 같은 산맥을 넘어 새벽
발걸음으로
억새풀 갈기 세우며 달려오는
저 광야(廣野)
빛나는 아침 손을 이끌고
나에게 오라
질경이풀 어우러 핀
내 강토(疆土)
깊은
역사의 줄기 속에
강철같은 봄을 휘날리며 달려오는
새
아침을 맞으라
병사여, 삼단 같은 머리 드리운
회억(回憶 )의 세월이여.
이제 만나 보리라
봄이 오는 그대
첫 뜨락에 서서
환희의 숨소리 씩씩히
땅울림을
몰고 오던 옛 선구자를
만나 보리라
셋. 바람의 끝 혹은 침묵
핏발선 풀잎 창검처럼 일어서는
야간 공제선
네 춤사위 덩달아 너울지는 젊은
무대 위로
하늘은 또 시퍼런
동맥줄기를 드러내며
저렇게
뇌성을 울리는데
아직도 겨울바람이 매서운
눈초리를 번뜩이며
우리 가슴을 얼어붙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언 땅 팽팽히 잡아끌던
봄
소식도 없이
인계철선 말목에 붙박힌
민들레의 영토
외진 숲속으로 울어대는 목쉰
바람 소리와
흔적 없이 다가서는 진눈깨비들이
설국의 전사처럼
소리 없이 산 그늘을
업어 내리던 늦은 저녁
먼 나라에서 온 타인과 가슴 맞대고
모반(謀反)을 꿈꾸던
네 아픈 기억으로도
언젠간 일궈야 할
침묵의 땅이기에
지금은 그냥 유휴지라 불러두자
얼마큼의 가능성으로 가꾸어온
낯선 희망들이
봄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녹슬어 있을 뿐
넷. 해빙을 위한 전선의 진통
봄은
요원(遙遠)한 새벽인가
쑥대머리 흩으러진
갈대밭, 돌아온
철새의 기별은 아직은
낯설고
강바닥을 긁는 기억들이
아픈
생채기를 토한다
풀잎
마른 줄기를 흩고 지나던
바람들은
철책에 걸려 우우 속살을
찢어내며
목마른 꿈을 일깨우고
긴 기다림으로 이어온
초병의 밤은
젊은 체온을 다독이듯
이따금씩
강마을 저쪽으로
눈발을 날린다
가늠쇠 선단에 매몰되는
겨울 저녁
해거름으로 몰려가는
은둔지를 찾아
깊이 내지르는 탐침봉 끝
진홍빛 진달래
설움 깊구나
다섯. 아침 혹은 또 다른 불면
아침을 기다리는 긴긴
밤의 초소 근무
능선이 숨은 그림자를 끄집어낼 때쯤
한켜한켜 벗겨내던 젊은
초병의 시선과
벌때처럼 일어나는 어울림의 소리
빛살 소리여
혼돈의 새벽을 벗어난 거친
황토 위에
열두폭 사계의 첫 빛살 어울리는
소리는
얼기둥기 어깨축들고
신명난 춤사위로
풀밭을 달리는 봄비들의
행렬
못물 풀리는 긴 수로 하층에
까마득한 날의 생채기
뿌리를 돋우는
저기
소슬한 내 아침의 나라에선
역류를 꿈꾸며 어울리지
못하는
물살들의 상실된 봄뜨락에
사수여
젊은 그대 잠들지 못한 조국의 하늘
드높이
고도를 기다리는 비둘기 한 무리떼
날아 오를날은,
여섯. 봄을 기다리며
아아 무엇일까
아둔한 저녁 그리메로 넘어오는 저
산자락에
두 발 깊이 묻은 채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던 너는
누구의 못다 한 비명(碑銘)이었던가
진달래 진달래야
추운 가슴에 불을 피우자
이 강 저 산 언 땅 녹여
우리 서로 잊었던 꿈을 캐자
아 병사여
내가 부르던 너의 이름은
군사분계선 그 높다란 철책에 걸려
쩌엉쩡 울고만 있구나
추운 들판에 비목(碑木)으로 누웠구나
그리워 마라 그리워 마라
네 고향 집 언덕에도 푸른 잔디는
솟았어라
이 고운 햇살 아래 어딘들
움크린 가슴 열지 않으리
아 병사여
망배단 울음 위에 홀로 누운
철마의 내력을 아는가
바다보다 깊은 한을 안고 흐르는
임진강의 울음을 듣는가
바람이
살아나고 있다
불면의 밤을 뒤척이던
녹슨 세월의 조각들이
치유되지 못한 이 땅의 바람들이
비무장지대 앙상한 가슴들을 헤집고
있다
초소 구석구석 스며있는 때 묻은
지난 이야기들
오래전 전역해간 병사들의
그리움의 낙서들도
저 검은 북녘 하늘 바라보며 울분을
삭히던
가슴속 언어들도
겨울 편지
이한명
낡은 편지를 부치고
돌아서는 날
네 차가운 변덕스런 마음들이
까닭 없이 미워졌다
꽃잎 피기 전에
‘사랑한다’ 먼저 써놓고도
차마 부치지 못했던
망설임들은
너의 진실을 알지 못했던
까닭에
하나둘 겨울나무들이
그리움을 떨구며
지친 마음을
담벽에 기대일 때쯤
이제사 ‘그립다’ 한마디
던져주고
바람처럼 사라지던
너의 모습에
희미하게 바래인 글씨들을
봉투에
쓸어 담기도 전에
검은 먹물을 튀기며 버선발로
달려가는
나의 마음들
낡은 편지를 부치고 돌아서던
그날은
밉도록 네가 그리웠다
빈들, 그 겨울의 기억
이한명
모질다, 너는
우리가 겨울이라고 이름 붙인
저 빈들,
삭제된 메모리 같은
촉촉이 젖은 논바닥 희끗희끗 서리꽃이
박힌다
세월, 가고 오지 못할 것들의 맹세는
기어이 강물처럼 엎어져
공허히 갈아 앉은
약속의 부재
젊은 심장 덥혀줄 피나는 진실이라도 찾아
떠나야 하나
다리 건너 안식을 찾는 교회당 첨탑 위로
달이 걸리고 바람이 지나가면
얕은 기억의 조각으로 오랜 경전을
더듬는
내 추운 들판
겨울 길을 간다
이해인
겨울 길을 간다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혼자서 가니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겨울 노래
이해인
끝없는 생각은
산기슭에 설목(雪木)으로 서고
슬픔은 바다로 치달려
섬으로 엎드린다
고해소에 앉아
나의 참회를 기다리는
은총의 겨울
더운 눈물은 소리 없이
눈밭에 떨어지고
미완성의 노래를 개켜 들고
훌훌히 떠난 자들의 마을을 향해
나도 멀리 갈 길을 예비한다
밤마다 깃발 드는
예언자의 목쉰 소리
오늘도
나를 기다리며
다듬이질하는 겨울
겨울 연가
이해인
함박눈 펑펑 내리는 날
네가 있는 곳에도 눈이 오는지 궁금해
창문을 열어 본다
너를 향한 나의 그리움도
쏟아지는 함박눈이다
얼어붙은 솜사탕이다
와아! 하루종일
눈꽃 속에 묻혀 가는
나의 감탄사!
어찌 감당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겨울 편지
이해인
친구야
네가 사는 곳에도 눈이 내리니
산 위에 바다 위에 장독대 위에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 만큼이나
너를 향한 그리움이 눈사람 되는 눈 오는 날
눈처럼 부드러운 네 목소리가
조용히 내리는 것만 같아
눈처럼 깨끗한 네 마음이
하얀 눈송이로 날리는 것만 같아
나는 자꾸만 내 이름을 불러본다
겨울 산길에서
이해인
추억의 껍질 흩어진 겨울 산길에
촘촘히 들어앉은 은빛 바람이
피리 불고 있었네
새 소리 묻은 솔잎 향기 사이로
수없이 듣고 싶은 그대의 음성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았네
시린 두 손으로 햇볕을 끌어내려
새 봄의 속옷을 짜는
겨울의 지혜
찢어진 나목의 가슴 한켠을
살짝 엿보다
무심코 잃어버린
오래전의 나를 찾았네
겨울 아가
이해인
하얀 배추속같이 깨끗한 내음의 12월에
우리는 월동준비를 해요
단 한 마디의 진실을 말하기 위해
헛말을 많이 했던
우리의 지난날을 잊어버려요
때로는 마늘이 되고 때로는 파가 되고
때로는 생강이 되는 사랑의 양념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해요
함께 있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우리들의 시간
땅속에 묻힌 김장독처럼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하늘을 보아야 해요
얼마쯤의 고독한 거리는 항상 지켜야 해요
한겨울 추위 속에 제맛이 드는 김치처럼
우리의 사랑도 제맛이 들게
참고 기다리는 법을 배워야 해요
다시 겨울 아침에
이해인
몸 마음 많이 아픈 사람들이
나에게 쏟아놓고 간 눈물이
내 안에 들어와 보석이 되느라고
밤새 뒤척이는 괴로운 신음소리
내가 듣고 내가 놀라 잠들지 못하네
힘들게 일어나 창문을 열면
나의 기침 소리 알아듣는 작은 새 한 마리
나를 반기고
어떻게 살까 묻지 않아도
오늘은 희망이라고 깃을 치는 아침 인사에
나는 웃으며
하늘을 보네
겨울 아이
이향숙
찬바람이
바람이 귀를 스치니,
귀마개를 하고 다닌 겨울 아이가
생각난다
벙어리장갑을 끼고도
손이 시러워
호호 불던 겨울 아이
난로가에서 군밤인지,
군고구마를 먹었는지,
손에는 시커먼
숯이 묻어있던
겨울 아이
어느날
슬픈 눈동자를 하고
날 찾아와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던
겨울 아이
할머니가 하늘나라로
갔다면서
손가락으로 구름 덮인
회색빛 하늘 끝을
가리키던 겨울 아이
몇해가 흐른 지금은
겨울을 무지무지 사랑하는
소녀가 되었다네
겨울 별자리
이현서
수억 광년 연대기를 건너온
부드러운 요람의 평화가 중심을 잡아요
눈송이 사각거리는 겨울밤
구유에 누인 아기예수처럼
신생아실 아기바구니에서 잠을 자는 아기들
부드러운 물의 자장을 따라 흘러왔을 시간들을
태엽을 풀 듯 풀고 있어요
어느 날 신이 한 줄기 빛을 뽑아 순한 영혼을 불어 넣었어요
천천히 페활량이 부풀어 오르고
먼 우주 발원지에서 채집된
빛의 알갱이들이 첫 보폭을 디뎌요
천사의 지문이 묻은 인중 아래 분홍빛 입술이 오물거려요
찰랑 고요를 깨는 파문이 기원을 더듬어요
구불구불한 원시의 숲을 지나
빛의 따뜻한 손이 자음과 모음을 새겨넣어요
한꺼번에 쏟아지는 물비린내
순한 영혼들이 아가미를 뻐금거리며 겨울 별자리로 박혀요
최소한의 겨울로만
이혜미
열매를 믿고 싶어지는 순간도 있었지
나무의 슬픔을 저장하려 술을 담그고
낙과들이 머문 자리마다 멍울지던 얼룩을 바라본다
유리병에 담긴 겨울 포도들이
귓속의 동굴 속으로 잠겨 들면
꿈이 잠을 벗어나듯
과실은 계절로부터 풀려나오지
지하 창고에는
작은 은 스푼으로 조금씩 모아두었던
겨울잠의 냄새가 고여 있고
잠의 녹는점을 알기 위해
한 시 전에는 불을 끄고 손을 모으고
최소한의 생각만을 해
멀리로
오래전의 깊이 속으로
나무가 뿌리를 하염없이 휘저으며
꿈속에 두고 온 깃털을 찾듯이
이제는 너의 두 귀가 밀봉된 날개라고 믿어
귀퉁이가 깨진 세계를 털며
나무에게서 떠나가는 새처럼
열매가 자신의 그림자를 만나러 갈 때
늦은 배웅에는 긴 연습이 필요했다고
겨울 애상
이혜정
물밑
바람도 찾아들 수 없는
고뇌의 숲
모방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겨울이 웅크리고 있다
거센 바람의 손으로
눈도 가리고
적막은 가냘픈 호흡마저 숨긴 채
깊음은 말 없는
시간을 건너간다
불야성 같은
요지경 상념은
하늘빛마저 상실한 채
메마른 가슴판에
가시덤불만 무럭무럭 자란다
바람이 물어온
무형의 외로움은
앙상한 손 내민 겨울 가지에
폐비닐 같은 가슴앓이만 걸어둔 채
버석거리는 통증은 겨울에 자리를 편다
겨울을 위한 기도
이효녕
차가운 바람결에도 흔들리지 않는
우리의 가난한 작은 마음을 위해
하얀 눈으로 물들여 곱게 빈 여백 채워주소서
마지막 남아 흔들리는 갈대밭
새들의 빈 둥지마다 가득 채워진 마음
얼지 않는 따스한 집 한 채
흩어진 내 가슴에 지어 모두 넉넉한 마음 안아
가난한 모두가 그 안에 편안하게 들게 하소서
날은 추워도 어둠 속에서
별들이 깜박이며 빛을 냅니다.
별들이 있어 춥지 않은 하늘 먼 뭇별 하나 따서
모두의 가슴에 담아두고 등불이게 하소서
빈자리는 그리움 채워주어
사랑할 수 있는 따스한 겨울이게 하소서
가난한 내 삶의 한고비
지금은 모두 쫓겨나
오늘은 비록 텅 빈 가슴이지만
마음마다 하얀 눈을 내려주어
눈빛보다 맑은 마음 지녀
겨울의 꿈으로 오래 지니고 살도록
모든 고통을 덮어주소서
혼자 길들일 수 없는 가슴앓이 하던 지난 밤
밖에 차가운 바람이 아픔의 병이 되더라도
눈 속에 작은 들꽃으로 피어내
외로운 시간을 넘으며 바라보게 하소서
그리고 사랑은 오직 하나이게 하소서
이 겨울은 모든 이에게
눈길 위에 따듯한 발자국 남겨
그리움으로 남게 하소서
조금도 시들지 않는
사랑의 자국 남게 하소서
겨울 애상
이희숙
아주 오래전
차디찬 물을 쏟아내고
더 단단해진 가슴으로
불을 지피던
한 사람이 있었지요
첫눈 오면 만나자던 사람
폭설이 온다고 전화를 했지요
"눈 오는 소리 들려?"
"실시간으로 전송되는 내 마음의 소리는?”
대답할 사이도 없이
"내리는 눈을 바로 보낼 테니 널 생각하는 마음인 줄 알고 잘 받아."
해마다 첫눈이 오고 폭설이 내리면
어쩐지 무작정 자꾸만
한그루 가문비나무처럼
전설이 된 사람이 그리워져요
겨울 끝에서
임석
죽은 듯 외진 들녘
초록 솜솜 물이 든다
허기진
겨울의 끝
봄 풀
뜯는
염소 떼
아내는
풋냉이 끓여
봄의 향기 돋워 낸다
겨울
임석래
바람 앞에 바람
바람이 맞붙었음
바람과 바람이 서로
엉키고 뒤엉켜 넘어지고
쌓인 눈가루가 휘말려
하늘로 솟구쳐 바람기둥이 되고
나는 바람기둥에 기대어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휘날리며
이 겨울 기침 한번 못하는
재주도 재주씩이나 쳐주고 있는
어금니 썩은 이빨로
치과에나 가
아- 하고
입 벌리고 있음
21세기 겨울도
임영준
늘 해묵은 겨울엔
모반이 스며있다
결박당한 육신에
주렁주렁 한가득
탐욕의 사슬을 달고
기득을 과시한다
마침 거리엔 온통
민낯의 광대들
굳이 아우성치고
부추기지 않아도
싱거운 파국을 들고
광화문에서 종로
종로에서 명동
명동에서 시청까지
한결같이 백 년을
변함없는 보폭으로
나돌아다니고 있다
겨울 그대
임영준
힘겨운 그대 몸짓이
나를 다독입니다
애잔한 그대 눈망울이
은총을 구합니다
유린당한 들판엔
넝쿨만 가득하고
창백한 강물은
서서히 오그라드는데
잊지 않고 찾아와
죽비가 되는 그대
부디 선별해서
호되게 나무라고 가시길
겨울 무정
임영준
그리운 그대여
얼어붙은 달빛 아래
앙상한 가지들만이
진솔하게 손을 벌리고 있습니다
언제나 실컷
토설(吐說)하지 못하는 겨울에
무슨 갈망(渴望)을 비치겠습니까마는
가슴을 가르고 나오는 서러운 눈물은
뿌리를 내리는 성에가 되어
곳곳에 상처를 남기고 있습니다
해소할 수 없는 희구(希求)가
거친 눈보라에 더 깊이 응어리지고
대답 없는 그대가
가혹하게 휘몰아치는 삭풍으로
냉소(冷笑) 짓고 있지만
무참한 이방인은
묵묵 앙망(仰望)하고 있습니다
그리운 그대여
작금(昨今)
불퉁스러운 겨울 밤하늘만이
심사를 어루만져 주고 있지만
영원히 사랑합니다
겨울 사랑
임영준
다시 그대를 만날 수 있다면
하얀 눈이 되고 싶습니다
뽀드득 밟히기도 하고
소담스레 뭉쳐지는
정겹기만 한
기쁨이고 싶습니다
영영 그대를 만날 수 없다면
그리움을 꽁꽁 품을 수 있는
만년얼음이고 싶습니다
햇살 아래 일렁이면서도
머뭇거리지 않는
뿌리 깊은 아픔이고 싶습니다
겨울 속에서
임영준
숨 쉴 구멍은
터놓았나요
가끔 하소연할 별자리는
잡아두었나요
몇 걸음만 더 가면
따사롭고
가뿐해질 텐데
지레 꺾어질 수 있나요
예서 멈출 수 있나요
겨울 쏟아지네
임영준
아랫목 파고들어
얼굴만 내밀었는데
삐걱대는 세상 소리
겨울 듬뿍 쏟아지네
오순도순 속삭이고
보둠어 어루는데
느닷없는 천재지변
겨울 흠뻑 쏟아지네
겨울은 사랑을 품고
임영준
기약 없는 님과의 교신인가
처연한 폭설의 그림자
결백에 멍든 겨울을 디뎌야
화사한 꽃이 피는가
얼어붙은 벌판에
달빛 교교하고
움츠리고 파묻어도
꿈은 자란다
겨울 이야기
임영준
전철역 앞 상가
전자 대리점 대형 티브이에선
화려한 연말 시상식이 중계되고
근처 후미진 귀퉁이에
종이상자를 깔고 신문지를 덮어쓴
노숙자 김씨가 꽁꽁 얼어붙은 채
까무룩 꺼져가는 정신 줄을
스피커 소리에 간신히 매달고 있었는데
재벌 집 씨받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미스코리아 출신 잘나가는 여배우의
오만하고 자신만만한 소감을 듣고
쌍욕을 퍼붓지 않을 수 없었다
저런 십장생 개나리 같은 것이
배가 불러 터질 것 같으니
잔치판에서 토악질을 하는가
망둥이가 뛰니까 꼴뚜기도 뛴다더니
누구는 세상 전부인 가족과 생이별하고
아귀 같은 빚쟁이들을 피해 시작한
노숙이 삼 년째인데
밑바닥 인생이 천만에 육박한다는데
저런 망발을 마구 질러대다니
이제 양극으로 벌어져 갈 데까지 간
이 세상에 과연 희망이 있는 건지
벌레 같은 인생들은
이대로 조용히 꺼져가야 하는지
창자를 파고드는 분노를 마시며
쪼그랑 동태가 되어버린다
겨울 카페
임영준
창밖으로
대답 없는 거리
희미한 잔상(殘像)
시린 가슴 파고들어
빈 겨울을 저민다
잊지 못할 사람
지울 수 없는 기억
그리움으로 부푸는
담배 연기에 취해
모진 구석에 접힌다
음악도 적막에 지고
압박하는 헤이즐럿
지친 독백의 사슬
떠나갈 이방인들이
사뭇 허물어져 있다
겨울 행 열차
임영준
과연
우리 중에 누가
홀가분한 왕복표를
끊을 수 있을까
돌아오지 못할 가을을
예감하고 있지는 않은 지
다급한 기적소리에
코트를 여미고
종종걸음들 친다
시간에 쫓겨
아예 눌러앉거나
한숨에 꺾어져
배회하는 이들로
역사는 더욱 붐빈다
차라리
오롯이 가버리려는 편도가
훨씬 더 많은 것이 아닐까
그대의 겨울
임영준
눈 덮인 오솔길이
나를 부르고 있습니다
괴괴한 밤을
가로지르는 삭풍이
예전처럼 가슴을 열어
무조건 품으라 합니다
고즈넉한 달빛이
동티의 뒤안길마다
소리 없이 다독이며
추억등을 밝힙니다
까닭 없는 통증이
무엇인가 했더니
알 속을 송두리째 앗아간
그대의 겨울이었습니다
텅 빈 겨울
임영준
그래도
코 빠진 늙다리를 알아주는 건
추적거리는 겨울비뿐이다 싶어
오며 가며 우산도 없이 받아들이다 보니
더욱 후즐근해져 버린 이방인의 일상
언젠간 소리 소문도 없이 끝나버리겠지만
그래도 번번이 위로가 되고 약이 되는
혼자 뱉는 넋두리 심지어 욕설 등등이
어쩌면 빈 하늘을 오르는 콩나무인지도
누구의 가락이던 곧 끝이 나는데
돌 던지면 퍼져가는 동심원조차도
아릿한 바늘이 되곤 하는데 아직도
문을 닫지 못하는 헐벗은 욕망덩어리
그 주제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왜 그리 고통은 끝이 없는지
갈수록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추한 몰골을 함부로 비웃지 않는 건
텅 빈 겨울
겨울 꽃눈(花目)
임우성
아가미와는 다를 것이다
혹한의 겨울을
얼어 죽지 않고 살아 낸다는 것은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아가미를 가지는 것과는
다른 무엇일 것이다
간직한다거나
꼬옥꼭 품는 어떤 것일 것 같은데
어떻게 버틴다거나
어떻게 견디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간직하거나
무엇을 품는 일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 추운 겨울에 얼어 죽지 않고
어쩌면 요렇게 작은 꽃눈으로
살아남아서
남풍에 부풀리고 부풀리어
더구나 분홍빛 고운 진달래로
피워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정 같은 무엇일까
그리움 같은 무엇일까
이렇게 혹독한 겨울을
꽃망울은 무얼 품고 살고 있을까
무얼 간직하고 살고 있을까
겨울 동화
임우성
매일 아침 다섯 시부터 보여주는
오래전 방영했었던 은서와 준서 이야기 가을동화
아침마다 이게 먼 짓이다냐, 보지 말자
여우가 눈물을 닦으며 번번이 한 말이었다
그래도 다음날 같은 시간이 되면
우리는 첨부터 끝까지 보며 같이 울었다
그렇게 가을동화 최종회를 다 보고
마주 보고 웃으며 눈물을 닦아주고
아직 첫눈도 내리지 않았지만
겨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2월은 중순을 넘기고 있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 돌로 치라
어린이 예배시간 그 성경 구절을 처음 들었을 때
가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잊고 있었던
만득이 구슬 세 개
소리 나지 않게 주머니에 따로따로 넣어 와
고향집 뒤뜰에 묻어 두고
탐이 나 훔쳐 오긴 했지만
언제 만득이가 나타날지 몰라 갖고 놀지도 못했던
묻어 둔 채로 시간이 흘러 잊어버렸었던
그 절도죄 뒤로
얼마나 많은 허물을 쌓으며 지금에 이르렀는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사함을 받기엔 내 죄가 너무 크고 많지 않나
죄에 비하면
내게 부여된 삶이 훨씬 과분하고 고맙지 않나
그런 생각 자주 하며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겨울이었다
겨울의 문턱
임인규
서성이다가
망설이다가
끝내 들어서 버린 초로(初老)
허한 벌판에
우뚝 선 허새비*처럼
허하고 허하구나!
지나온 인생사가
바람구멍 막을 길 없는 가슴
처음부터 마음이 없었으니
담을 둘 것도 없어라!
그저 그렇게 스쳐 간 인생
침묵의 땅 밑에
물이 흐르는가?
동토(凍土)의 땅에
숨 돋는 기운이 흐르는가?
이제 지켜봐야 할 시간
그렇게 겨울은 오고 있다.
계절도 인생도
어느새 입동(立冬)이
장승처럼 버티고 서있다.
* 허새비 : 허수아비의 방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