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llnow 2024. 7. 9. 13:29

강봉환 여름 그 끝자락에서

권복례 여름의 끝에서

김귀녀 늦여름 오후

김미숙 늦여름

김선옥 가는 여름

김선옥 여름을 보내다

김옥자 늦여름

김인숙 늦여름

김인숙 늦여름 어느 날

김인숙 여름이 떠나가네

김일선 늦여름 소묘(素描)

김재덕 성숙해진 늦여름

나태주 늦여름의 땅거미

류수안 늦여름

박라연 여름은 가고

박진표 여름아 안녕

백설부 늦여름 뒷모습

심호택 늦여름

유봉길 늦여름

유승도 늦여름 풍경

임동윤 늦여름

장유정 늦여름

장화순 늦여름

정명화 여름의 끝자락

정상만 여름이 떠나가며

정종명 늦여름, 한낮의 서정

한인수 여름은 가고

한천희 늦여름 오신 그대

홍신선 늦여름 오후에

 

 

 

여름 그 끝자락에서

강봉환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갈바람에 밀려오는

노란 물결에 빛을 잃어 가는데

미루나무 가지에 우는 매미

억새풀에 앉은 여치

시도 때도 없이 여름이 아쉬워

목청 높이 울어 댄다

녹색의 푸른빛은

따가운 햇살에 움추러 들고

어느덧 푸르름이 지쳐갈 때

여름 끝자락에 드리워진

가을 그림자에

살며시 꼬리를 내린다.

지나온 여름날의 푸른 물결,

가을빛에 실어 멀리 보내면

대지에 남은 깊은 정 잊지 않고

가을 겨울 봄을 지나

푸른 날개 달고 다시 찾아오련다

 

 

 

여름의 끝에서

권복례

 

산을 내려오는 발목이 시리다

올려다본 하늘에는 초승달이 뜨고

숲은

결승점을 향해 달리는 마라톤 선수처럼 지쳐있다

고추잠자리 몇 마리

내 주위를 빙그르르 원을 그리고

어디서 우는지 매미가

목청을 돋우며 울고 있다

계곡 위로

몇몇이 앉아서 더위를 식히고

나도 발을 담그고 앉아

살아온 세월의 더께 같은 티눈

찬물에 담근다

머리 빨갛게 염색한 젊은이 둘이서

허리가 휘어지도록 안고

올라오고 있다

 

 

 

늦여름 오후

김귀녀

 

오후 세 시, 목백일홍 붉게 핀

마을회관에 들어서면 뽀얗게 분칠을 한

분꽃 같은 할머니

할머니들의 입씨름은

마을회관 차지다

먹을라치면 앞에서 똑 자르고

똑 자르고 왜 그래

"이것 밖에 먹을게 없는데 어떡해"

계산이 틀리잖아

칠십 원 남아야 계산이 맞지

늦여름 오후 마을회관 안

십 원짜리 화투놀이는

어둠이 땅을 삼키고 나서야 끝이난다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허리야

평생 밭에서 땅만 일구며 살아온

호미자루 같은 허리를

유모차가 끌고 간다

 

 

 

늦여름

김미숙

 

들불 피운다

산불 지른다

샐비어 핀다

살살이 꽃길로도

닿지 못할 그대

울 안에

가을 신랑 기다리며

오롯이 불 밝히는

. . . . 샐비어

사랑 불 올린다

 

 

 

가는 여름

김선옥

 

대지가 이글거리는

용광로처럼 달구어진

비지땀 생산하던 너

 

텅 비었다

속 빈 강정처럼

뻥 뚫린 거리 거리마다

회색빛 기웃기웃

위풍당당하던 너

속수무책

 

열 가마 속 탈피해

산으로

바다로

계곡으로 떠난 이 찾아

허 한 가슴 안고

 

어디로 가는 걸까?

 

 

 

 

여름을 보내다

김선옥

 

누구인들 한 때

푸른 날에

마음 녹았던 적 없었던가

 

두고 가는 마음

보내야 하는 심정

별반 다를까만

가던 발길 멈추었던 그 날

돌아보지 마오

 

꽃 시절 지나

이젠, 스치는 바람에도

흔들리며 사위어가는 대공

 

까만 밤 지새우다

접었던 한 페이지

다시 펼지라도

속내 감추며

끝내, 보냈습니다

 

 

 

늦여름

김옥자

 

황토 방 툇마루에 햇살 쏟아지는 한낮

사르르 굴러 내리는 은빛 구슬 같은 땀

아직 미련이 남아 고개 숙이지 못하고

떠나는 계절 시원한 바람 목에다 걸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살랑살랑 그네 뛰는

푸른 잎 흔들어 깨워 가을 노래 부르네

아침저녁 부드러운 숨결이 고맙지만

돌아설 수 없는 떠날 기약이 안쓰러워

 

 

 

늦여름

김인숙

 

뜨거워 견디기 힘든

몸부림으로 옷을 벗고

 

첨벙 물에 뛰어들어

화병 난 듯 휘젓고

돌아다녔는데

 

왕방울 땀을 쏙쏙 빼고

다녔는데

 

어찌 저렇게도 얌전할까

얌전하다 못해 풀이 죽어있다

 

뜨겁게 타버린 가슴 위로

빗물이 눈물 되어 서늘히 쏟아진다

 

측은한 마음이 들어

창밖의 그녀를 자꾸만 바라본다

 

아마도 그녀는

철이 들어가나 보다

 

가을이라는 철이 들어가는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고서는 천방지축

혈기 넘치는 그녀가

저렇게 얌전할 수가 없다

 

빗소리 고요히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 밤

점점 침묵 속에 멀어져가는

한여름 날의 열병

 

지금 그녀는

정신을 하나둘 가다듬고

철들어 가는 진통

새로운 꿈을 출산 중이다

 

 

 

늦여름 어느 날

김인숙

 

순수의 빛이 그리워

문득 바라본

도시의 하늘에 별이 뜬다

 

풀 내음 모락모락 익어가는 들녘

찌르르 쌔르르 풀벌레 소리

새벽 창가에서 가을을 부르고

 

마음엔 두둥실두둥실

별이 뜬다

하늘 닮은 맑고 푸른 바람이

선들선들 불어온다

 

 

 

여름이 떠나가네

김인숙

 

여름이 떠나려 하니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밤새도록

귀뚜리의 노래는

울어도 다 못할 애끓는 노래

떠나는 사랑 잡을 수 없는

안타까운 그리움

 

차라리

미련도 후회도 떨치고 싶은

꿈꾸는 가을의 노래 귀뚜루루

 

귀뚜루루 귀뚜루루

어서 가까이 더 오시오

나 그대와 더불어 이 한 날을

슬퍼도 즐거이

노래 부르고 싶소

 

 

 

늦여름 소묘(素描)

김일선

 

늦여름의 태양이 뜨겁게 내려쬐고

마지막으로 무더운 여름밤이 이어지면

감은 진초록의 이파리들 속에서 푸르러지고

조생종은 노릇노릇해지며 맛이 든다

 

넝쿨장미 가지에 무겁게 매달린

색이 바래고 풀어 헤쳐진 꽃잎들이

소리 없이 떨어지면

살짝 위로 튕겨 오르는 가벼워진 장미 가지

 

일찍 어미 여윈 아기 장미 몇 송이

이파리도 없는 빈가지 속에

동무도 없이 가련히 얹혀

쓸쓸히 앙모하는 높푸른 하늘

 

저 앞에 서있는 산들이 흘연 섬뜩해진

늦여름 오후의 급습해오는 어둠

아직 별 하나 보이지 않은 연푸른 하늘엔

건너편 노루섬에 활활 불타는 노을이 흐릿하다

 

 

 

성숙해진 늦여름

김재덕

 

삶이 질퍽거린다고 울상이던 낯짝이 누렇게 떠서인지 고개를 못 드는 벼 이삭은 겨우 울보 매미를 배웅했건만 가을의 노래밖에 할 줄 모른다는 귀뚜라미 마중하려니 코로나에 지친 허수아비가 눈에 밟힌다

곧 참새가 떼 지을 것을 안 농부의 고래고래도 귀청 따가울 건데 가뜩이나 힘겨운 허수아비의 누더기까지 찢어지겠다만 어수선한 세상이라도 할 일들 해야겠지

어라, 마른하늘 날벼락 친다. 산모롱이에선 아들딸 낳는 밤송이 산통에 고슴도치 될 청개구리 어쩌라고 호랑이 장가가는 걸까 휘둥그레 비구름 뚫은 해님이 을씨년스러운 오늘따라 옛사랑 만나듯 반가워도 짓궂을 햇살 때문에 육수를 꽤 흘리겠다

그나저나, 늦여름이 농익는데도 아직 시뻘겋게 달아오르지 않은 고추잠자리 보이지 않는다

 

 

 

늦여름의 땅거미

나태주

 

차마 빗장도 지르지 못한

대문간을 지켜 불그레

꽃을 피운 능소화

종꽃부리의 우물 속으로

빠져드는 매미 울음

마당 가 좁은 텃밭을 일궈

김장 채소 씨앗을 묻을

채비를 서두르는 아들은

나이보다 많이 늙었다

얘야, 시장할 텐데

연장이나 챙기고 밥이나 같이

먹자꾸나

저녁상을 차리는 어머니는

더 많이 늙었다

허리 숙인 담장

키 낮은 담장 너머

휘휘휘휘 키가 큰

어둠이 기웃대는 여름이라도

늦여름의 땅거미

꽈리나무 꽈리 주머니

주먹 쥔 꽈리알 속으로

스며들어 가서 또

하나의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황토빛 노을

 

 

 

늦여름

류수안

 

지나간 어느 시절엔

이화중선이라던가 혹은

박초향이라 불렸을 계집 하나

평상에 앉아 부른다 열녀 춘향 수절가를

이승 사내

저승 사내

평상 아래 불러들여

쪽 뻗은 가리마

파르한 눈매의 계집

때 절은 보퉁이 장단 맞춰

노을 깔고 앉아 부른다

열녀 춘향 수절가를

고가

안마당

돌이끼 붉어가는 저녁

 

 

 

여름은 가고

박라연

 

매미 운다

그리운 사람들 피서 가고 없는데

핫 백을 껴안고 누워

상처란 상처는 모두 꿰매진 듯 안심하고 누워

저 매미 소리 듣는다

가슴에 묻어두면 이 되는 것들

내 몸 베어낼 때 흐르던 피 따라

흘러가 주었는지

소쩍새 울음 사이사이

별 떨어지는 소리만 들린다

내 몸 베어낼 때 흐르던 피 따라

고운 피마저 흘러가 버렸는지

지순한 마음 아직 돌아오지 않고

삐요시 삐요시 삘릴리이

우면산에 매미 소리만 가득하다

죽을 때까지 함께 살자던 초록은 가고

휘어진 뼈 휘어진 영혼뿐인데

우면산의 내 매미

젊은 날처럼 울어댄다

 

 

 

여름아 안녕

박진표

 

하얀 별

파란 하늘

초록 잎새에 물들면

 

수고한 착한 여름

연지 곤지 가을에

그 자리 내어주고

 

오시는 가을

넉넉하게 한 상 차려

여름을 배불리 먹인다

 

가고 오고 오고 가는

정다운 벗들아

 

곱게 곱게 피고 지는

그리운 추억으로

너희를 가슴에 새긴다

 

 

 

늦여름의 뒷모습

백설부

 

겨트로이 내속의

깊이를 재어보고

 

서풋서풋 지나가 버린

반나절이 아쉽다

 

길섶의 자유로운

야생화도 바람을

그리워했던가

 

세상 속에서 곱게

숨 쉬는 것들은

 

모든 가벼이

여기지 않고 싶다

 

천천히 정겨워지는

가을빛이 좋고

 

조용히 갈길 준비하는

늦여름의 뒷모습에서

세월을 엿본다

 

 

 

늦여름

심호택

 

까막까치 대가리뿐 아니라

개 잔등이 소 엉덩이도 벗어지게 생긴 날

때 넘겨 돌아와

찬물에 밥 말아 먹고

마룻장 짊어지면 살 것 같지요

 

쉬파리 똥파리와 싸우며

소르르 낮잠 한소금 꿀맛이지만

가시를 머금은 듯 잠결에도

더운 들에 엎드린 식구들 생각

가여워라 가여워라 매미들 울지요

 

잘잤다 눈 비비고 일어나면

미루나무 그림자 늘어난 텃밭에

가을 온다 가을 온다

싸움터 하늘 비행기처럼

고추잠자리 어지러이 떠다니지요

 

 

 

늦여름

유봉길

 

집에서 아주 멀리

마음먹고 산행을 갔다가

우연히 만난 시골집

마치 방안에서 금방이라도 인기척을 들으면

방문이 열릴 것 같아

가만히 서 있었는데

마지막 여름 햇살이 방문으로 기어오른다.

누군가 햇빛 따라 나올 것 같아

살며시

발길을 옮겼다

 

 

 

늦여름 풍경

유승도

 

원추리는 여름이 다 가도록 꽃을 피우고,

포도는 초록의 빛이 깊어 보랏빛으로 물들어 간다

꿀을 모으기에 바쁜 벌들을 부르며 집 옆 두릅나무밭엔 두릅꽃도 만개했다

돌담 너머엔 담보다 높게 자라난 해바라기가

금방이라도 해만한 꽃을 달 것도 같은데 그 모습을 지그시 누르며,

거목으로 자라난 느릅나무가 집 앞에 검푸른 빛의 덩어리로 서 있다

그 나무의 꼭대기에 눈길을 주고 있자니,

뭉게구름이 새록새록 피어나며 꿈자를 그리고 꿈자를 지우며 느릿느릿,

쉼 없이 움직인다

 

 

 

늦여름

임동윤

 

하룻밤, 구두끈 풀고 쉬어가라고

목쉰 대청마루가 흔들흔들 붙잡아댔다

등고선마저 지워진 무늬의 바닥

겹겹의 세월을 껴안고 비바람이 들이쳤다

우우 바람이 거친 팔을 뻗어오고

볏짚으로 엮은 흙벽이 가슴뼈를 드러냈다

떠난 사람들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그들이 퍼 올리던 우물물은 잦아들고

뚫린 지붕 위로 낮달이 머물다 떠난 자리

죽창처럼 빗줄기가 내리 꽂히고 있었다

다시 우지끈 쏟아지는 천둥과 번개

직립의 나무들이 허리를 꺾고 있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지고

모든 것이 빗줄기 속으로 몸을 섞고 있었다

거미줄과 빈 풍경이 간단없이 찢기고

쑥부쟁이도 익모초도 흙탕물에 몸 묻은 마당

그리움은 발치에 묻어두는 법이라고

장지문 꼭꼭 닫아걸어도 바람은 피리가 되어

빗물 잠긴 화덕을 끼고 밤새 돌았다

사방에서 다가드는 풀, 나무, , 바위

간당간당 모가지를 빼들고 일제히 울어댔다

빈집이, 화들짝 갈비뼈를 쏟아내고 있었다

 

 

 

늦여름

장유정

 

비가 오는 둥 마는 둥 하다 햇살 화창하고

뒤뜰에 매미는 울고

 

오늘도 더워와 한바탕 씨름을 해야 한다

처서가 지 나면 좀 나아지겠지

 

뜨거운 아스팔트 열기 비가 오니 좀 식었다

햇살 위로 석류 발갛게 익어가는 늦여름

 

이렇게 가을을 향해 가네

잠자리 창공을 날다

 

 

 

늦여름

장화순

 

아직은 여름이다. 늦장 부리다

떠날 채비 갖추지 못한 늦여름

전쟁 같은 햇살과의 뜨거운 사랑

식지 않은 가슴 아직 따듯한데

가을을 준비하는 바람은

서늘한 기운 뽐내며 지나간다

 

이제는 자리를 비워달라고

갈바람 서늘한 재촉 소리에

가슴을 웅크리고 쓸어안으며

주섬주섬 남은 여름을 주워 담으며

가을은 왜 그렇게 빨리 오느냐고

늦여름이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다

 

 

 

여름의 끝자락

정명화

 

코스모스 꽃잎에

고추잠자리 기웃거리고

조석으로 시원한 바람에

그대의 계절이 오고 있어요

 

앞마당에 곱게 핀

백일홍이 호랑나비 초대하고

맨드라미꽃은 그대 마음 훔쳐

붉게 물들어 가고 있어요

 

귀뚜라미 노랫소리 듣고 싶어

도자기 항아리 준비해 놓고

지붕 위에 실하게 영글어 가는 박

가을을 기다리고 있나 봐

 

찬란한 여름도 가을 앞에서

힘없이 떠나갈 채비하고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나는

가을을 채우려 부지런히 비우고 있어요

 

 

 

여름이 떠나가며

정상만

 

매미의 애절한 마지막 절규가

세상을 향한 목놓음으로 울려질 때면

떠나는 이의 마지막 발걸음 되어

석양의 빛 속으로 조용히 사라진다

 

처음 왔던 그리운 그 길 따라

말없이 돌아가는 서글픈 발걸음에

예쁜 꽃잎 한 아름을 흩뿌려놓고

고운 발걸음 떠나간 그 길 따라

 

다시 찾아와 주기를 기다려 본다

 

여름이 가는 소리에 가을을 맞이하듯이

서녘 하늘의 석양이 붉게 물들어 간다

 

귀뚜라미의 청량한 노랫소리가

가을의 문 앞에서 수더분한 미소를 지어 본다

 

 

 

늦여름, 한낮의 서정

정종명

 

가끔 바람이 춤을 추는

텃밭 고추밭 위로

고추잠자리 군무 예사롭지 않다

 

이마에 땀방울 눈물처럼 흐르는

중년의 사내 적삼은 온통

물에 젖은 채 잡초를 매고 있다

 

점심으로 먹은 열무국수가

속을 더부룩하게 하는지 연신

껄껄거리며 트림을 한다

 

한낮 열기에 더위를 먹었는지

머리가 띵하고 어질어질

눈앞이 흐려진다

 

매미 떼창 허공을 메워 분잡스럽고

잠자리 등줄기 햇살이 붉다

 

절기는 입추를 건너 가을 속에 들고

콩 섬 불룩 배를 불리는 풍년의 기대에

힘을 내 보지만 힘에 부친다

 

들쭉날쭉한 일기에 서툰 농군의

가슴 콩닥콩닥 디딜방아를 찢는다

 

 

 

여름은 가고

한인수

 

여름 내내 그렇게도 들볶던

삼복더위는 고개를 숙이고

살랑대는 가을 문턱의

손님이 찾아오는 구나

 

못 살게도 달달 볶으드니

어지럼을 유발 해 놓고

서서히 고개 수기니

내년에 찾아올 때에는

성숙 해져서 볶지 말거라

 

장마도 꼬리를 몰고 오고

해님도 너무나 빛을 내니

생활에 권태 까지 느끼게 하고

여름이 한스러웠던 것이다

 

이제는 선들 바람 부는

가을 냄새가 풍겨 나니

잘도 가는 구나 여름아

그래도 그늘 밑이 아쉽단다

 

 

 

늦여름 오신 그대

한천희

 

그대의 향기조차 말려버린

뜨거운 여름날의 향연

지쳐버린 내 사랑

말라버린 그리움

 

갈라져 더 이상 갈라질

아픔조차 잊은 가슴

그대의 모습조차

지워져가는 찌여지는 이 괴로움

 

여기에 오기까지

그리 먼 길 돌았나요

그리 쌓여진 보고품 참아

흘리는 눈물 끝없이 끝없이 흘러

마른 가슴 채우고

호수가 차고 넘치는가요

 

 

 

늦여름 오후에

홍신선

 

오랜만에 장마전선 물러나고 작달비들 멎고

늦여름 말매미 몇이 막 제재소 전기 톱날로

둥근 오후 몇 토막을 켜나간다.

마침 몸피 큰 회화나무들 선들바람 편에나 실려 보낼 것인지

제 생각의 속잎들 피워서는

고만고만한 고리짝처럼 묶는

집 밖 남새밭에 나와

나는 보았다, 방동사니풀과 전에 보지 못한 유출된 토사 사이로

새롭게 터져 흐르는 건수(乾水) 투명한 도랑 줄기를.

지난 한 세기의 담론들과 이데올로기 잔재들을 폭파하듯 쓸어 묻고는

천지팔황 망망하게

그러나 자유롭게 집중된 힘으로 넘쳐흐르는

마음 위 깊이 팬 생각 한줄기 같은

물길이여

그렇게 반생애 살고도 앎의 높낮은 뭇 담장들 뜯어치우고는

범람해 흐르는 개굴청 하나를 새로 마련치 못했으니

다만 느리게 팔월을 흐르는 나여

꼴깍꼴깍 먹은 물 토악질한

닭의장풀꽃이

냄새 기막힌 비누칠로 옥빛 알몸 내놓고 목물 끼얹는

이 풍경의 먼 뒤곁에는

두께 얇은 통판들로 초저녁 그늘 툭툭 쌓이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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