Ⅻ. 그리스 시대
Ⅻ. 그리스 시대(Greece Period, BC 332 ~ 31)
마케도니아 왕국의 청년 왕 알렉산더가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에 도착한 것은 제2차 페르시아 지배가 시작된 지 11년 후인 BC 332년의 일이었다. 이집트인은 페르시아의 피나는 압제로 고통을 받았는데 압제로부터 해방해준 알렉산더를 환호하였다고 한다. 페르시아는 BC 331년 헬라의 알렉산더에 의해 멸망한다.
알렉산더는 지금의 그리스 북부에서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에 이르는 꽤 넓은 지역을 지배하고 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의 왕자로 BC 356년에 태어났다. 소년 시절의 가정교사가 아리스토텔레스 인데 16세에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해고했다고 한다. 알렉산더는 폐르시아를 정복하고 인도까지 진격하여 정복해 버렸다. 알렉산더는 인도 동쪽에 마가다 왕국이 존재한다는 얘기를 듣고 더 진격하려 했으나 오랜 원정길에 지친 부하들이 반대하여 귀국했다. 그러나 비벨론에 도착했을 때 심한 고열에 시달리다 아마도 말라리아에 의해 32살에 생을 마감하였다.
알렉산더 사후 후계자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프톨레마이오스 장군이 선수를 쳐 이집트를 장악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지역은 3명의 장군들에 의해 분할 통치되기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이집트에서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시작된 것이다. BC 3세기에 프톨레마이오스 2세(필라델푸스)는 특별히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헬라어(그리스어)로 번역을 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번역본인 70인 역이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는 BC 51년 딸 클레오파트라와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공동으로 나라를 통치하라는 유언장을 남기고 죽었다. 이들 남매는 형식적인 혼인 의식을 거쳐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가 여왕이 된 지 3년만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후견인들과 함께 모의하여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 추방하고 그녀는 시리아로 망명당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한편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가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해 있었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시리아에서 군대를 이끌고 이집트로 향하던 중 카이사르를 만나 동맹을 맺고자 하였다. 카이사르에게 선물로 포장되어 만난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의 마음을 사로잡고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전쟁을 하여 승리를 하게 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동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영어로 줄리어스 시저로 불리는데 성경에서는 가이사로 번역되었다. 로마로 돌아간 카이사르는 세습제 총사령관의 칭호를 받고 로마제국의 왕이 되기 위한 단계를 밟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가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일들이 발생하자 원로원은 부르투스 등을 시켜 그를 살해하였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 구해 준 부르투스마저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 틈에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절규했다고 한다.
“부르투스, 너마저~”
카이사르 사후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자인 옥타비아누스와 카이사를의 심복이고 클레오파트아와 카이사르 사이에 태어난 아들 카에사리온을 후계자로 미는 안토니우스 간의 갈등이 발생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간의 해전에서 안토니우스가 패배를 당하고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자살로 마감한다. 클레오파트라의 자살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멸망하고 이집트는 로마의 속국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옥타비아누스는 개선하여 29년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부여받고 초대 로마의 황제에 취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카이사르 시대인 BC 4년경에 태어났고 26년경에 이 지역 총독으로 부임한 빌라도에 의해 처형을 당했다.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의 12제자와 바울이라는 제자에 의해 현재 터키지역과 로마에 전파되었다.
그러나 얼마 자니지 않아 로마 황제 네로에 의해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일어나고 바울과 베드로는 처형을 당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AD 70년경에 멸망하여 유대민족은 전세계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박해를 통하여 기독교는 더욱 단결력이 강해지고 이집트에서도 복음이 마을 곳곳에 전해지게 되었다. 3세기 후반에는 로마의 박해를 피해서 사막으로 들어가 금욕적인 수행을 시작했는데 기독교 수도원의 시작이 되었다고 한다. 4세기가 되면서 기독교는 커다란 전기를 맞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밀라노 칙령을 선포하고 기독교를 공인한 것이다.
이즈음 안렉산드리아 고회에서는 교리를 둘러싸고 두 가지 주장이 대립하고 있었다. 하나는 알렉사드로스 주교가 제창한 것으로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설과 예수의 신성을 주장하였다. 또 한명의 사제였던 아리우스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적 존재가 아니다. 예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양쪽의 대립은 기독교 전체로 비화하여 격렬한 양상을 보이자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는 주교들을 니케아로 불러 제1차 종교회의를 열게 했다. 회의 결과 약 300명이 삼위일체설이 정통으로 인정되고 아리우스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 후 5세기 중반까지 교리 논쟁이 이어지는데 콘스탄티노플 교회는 예수위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인정하는 양성설을 견지하였고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예수의 인성만을 인정하는 단성설을 견지하였다.
451년 제4차 종교회의에서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이단으로 선고하자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콘스탄티노플 교회에서 분리해 버렸다. 이에 따라 이집트의 기독교는 콥트교로서 독자적인 길을 밟게 되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조직화되어 이단을 사냥하는 구실로 많은 사람을 박해하고 살해한다. 대규모 성당을 건축하느라 권력화되고 진리의 본질을 잃어버리는 길로 들어선다.
콥트교회
콥트교는 그리스어로 이집트를 뜻하는 단어로 4세기 중반부터 이슬람이 들어오는 7세기까지 이집트 전역으로 퍼졌고 독특한 콥트교 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다. 7세기 이후 오랜 세월 이슬람교가 지배하는 상황에서도 현재에도 콥트교는 이집트의 약 10% 신앙을 지속하고 있다.
네헤메스라타우이(Nehemesrattaouy)의 사자(死者)들 명부
파피루스, 사자(死者)들 명부 : 심장의 저울질(루브르)
호네제테프(Hornedjetef)와 푸이(Poui)의 사자(死者)들 명부
유독스의 천문학 파피루스(루브르)
집 모형(석회암 조각, 루브르)
날개를 펼친 새 형태의 부적(터키옥, 청금석, 금, 루브르)
새끼와 함께 누워 있는 바스텟 암코양이(청동 조각, 루브르)
신격화된 제 3왕조 제세르 왕의 대법관 임호텝(청동 조각, 프랑스 콩데 미술관)
에드푸에서 출토된, 여왕 또는 여신 형상(석회암 부조, 루브르)
아몬 타잇의 여자 음악가의 석비(채색된 나무, 렌 미술관)
덴데라, 헥토르 신전 위 오시리스를 기리는 예배당. 천정(황도대, 부조, 루브르)
호루스의 네 아들이 장식된 채색 면포 띠(장정 제조, 릴 미술관)
미트라히네 스타일의 불룩한 병. 하프를 연주하는 여자, 춤추는 남자, 가는 끈, 비늘, 꽃, 그리폰 문양(이집트 자기, 루브르)
연꽃 위에 서 있는 몽구스 형상의 우아젯 여신을 찬양하는 파디호 사제(청동조각, 루브르)
마케도니아 왕조(Machedonia, BC 332 ~ 323)
사자(死者)의 발 아래 묶인 아시아인과 흑인 죄수(석관 하부, 루브르)
모델(인공석 조각, 렌 미술관)
조각 원형(석회암 부조, 렌 미술관)
걷고 있는 하포크라테스(청동 조각, 릴 미술관)
파디메네키벳과 네프레트렌펫의 아들, 제도르의 뚜껑과 장례함(루브르)
슈(숫양)와 테프눗(암사자) 신성들에게 대지를 봉헌하는 왕(증여 석비, 석회암 부조, 루브르)
앉아 있는 파포크라테스(릴 미술관)
여자 모습(석회암 조각, 렌 미술관)
마케도니아 왕조 계보
Alexander I (III)(The Great)
Philip (III) Arrhidaeus
Alexander II (IV) Aegos
프톨레마이오스(프톨레미) 왕조(Ptolemaios, BC 305 ~ 31)
알렉산드로스의 마케도니아-그리스 군이 이집트로 진군하자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환영했다. 그는 아문 신전을 방문하여 그가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아냈다. 이를 계기로 이집트인들은 그를 새로운 파라오로 인정했다. 알렉산더는 나일 삼각주 서편에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였고, 지중해에 면한 이 항구 도시는 이집트 최대의 도시로 발전한다. 이집트 통치를 마케도니아, 그리스, 이집트인 행정관들에게 나누어 맡기고 떠난 알렉산드로스가 기원전 323년 바빌론에서 사망하자 이집트는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이집트 왕실의 전통에 따라 친누이와 결혼했으며 이러한 관행은 프톨레마이오스 왕가의 전통이 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후손들은 BC 30년 안토니우스와 연대하여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려 했던 클레오파트라 7세가 악티움에서 패전하고 알렉산드리아가 함락 당하여 자살할 때까지 300년 이상 이집트를 다스렸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세계의 중심이었고, 학문과 예술의 수준이 세계 최고인 도시였다.
신성한 고양이 관
황소를 동반한 아폴론과 아르테미스(그리스어로 된 헌정, 종려나무 장식, 대리석 부조, 루브르)
제타 황제에게 헌정하는 그리스 문장 조각(리옹 미술관)
오시리스 앞의 아누비스가 그려진 석관 조각(프랑스 릴 미술관)
이시스의 매듭이 달린 튜닉을 입고, 팔을 늘어뜨린, 머리가 없는 여자(섬록암 조각, 루브르)
프톨레미 왕조 계보
Ptolemy I Soter I ( Savior )
Ptolemy II Philadelphos
Arsinoe II : Ptolemy I세와 Berenice I세의 딸
Ptolemy III Euergetes I(Benefactor) : Ptolemy II세와 Arsinoe I세의 아들
Berenice II : Cyrene의 왕인 Megas와 Arsinoe의 딸
Ptolemy IV Philopater(Loving Father) : 프톨레미 3세와 Berenice II세의 장남
프톨레미 4세의 이름이 새겨진 원판 조각 (사암 부조, 리옹 미술관)
Horwennefer (Harmakhis)
Ankhwennefer (Ankhmakhis)
Ptolemy V Epiphanes(Manifestation of God) : Ptolemy Philopator와 Arsinoe III세의 아들이자 Antiochus III의 딸인 Cleopatra I세의 남편
Cleopatra I (Syra)
Ptolemy VI Philometor(Loving Mother) : Cleopatra I세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11살 때, 그의 누이인 Cleopatra II세와 결혼.
우아젯에게 포도주 봉헌물을 바치는 프로레메 6세 파라오(사암, 루브르)
Cleopatra II
Ptolemy Eupator : Ptolemy VI Philopator(아버지를 사랑하는 여신)와 Cleopatra II세의 아들
Ptolemy (VII) Neo Philopater (New Philopater)
Ptolemy VIII Euergetes II (Benefactor) : Cleopatra I세와 Ptolemy Epiphanes의 아들
아몬에게 마아트 봉헌물을 바치는 프로레메 8세 파라오
Cleopatra III : Ptolemy VI세와 Cleopatra II세의 딸
Horsiese
Ptolemy IX Soter II Lathyros(Pea) : Cleopatra III세와 Ptolemy VIII세의 장남
Ptolemy X Alexander I : 프톨레미 8세와 클레오파트라 3세의 아들
Berenice III : Ptolemy IX세와 Cleopatra Selene의 딸
Ptolemy XI Alexander II : Ptolemy IX세 죽음 이후에 로마에 의해 정해진 왕
Ptolemy XII Neo Dionysos (New Dionysos)
Berenice IV : Ptolemy XII세와 Cleopatra V세의 딸
Ptolemy XIII :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겨우 10살이어서, 17살 누나 클레오파트라와 같이 다스렸다.
Ptolemy XIV Philopator (The Child)
Cleopatra VII Philopater(Loving Father) : Ptolemy XII의 딸이자, Cleopatra VI세와 자매, 악티움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 자살
Ptolemy Caesarion : Cleopatra and Julius Caesar의 아들
로마시대
가슴받이와 골격이 있는 여자 미라 가면(화장벽토 칠 채색된 나무, 루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