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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냐 삶이냐(To Have or To Be) 3

Bollnow 2024. 5. 7. 10:21

2편 두 가지 존재 양식의 기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4: 소유양식이란 무엇인가

 

1. 취득적 사회-소유양식의 토대

 

우리의 사유재산, 이윤, 그리고 힘을 그 존재의 지주로 삼아 의지하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판단이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취득하고, 소유하고, 이윤을 남기는 것은 산업사회에 사는 개인의 신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재산의 근원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또 소유가 재산 소유자에게 어떤 의무를 지우느냐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재산을 어디서 어떻게 취득했느냐, 또 그것을 가지고 무슨 일을 하느냐 하는 것은 나만의 문제이다. 범법을 하지 않는 한 내 권리는 무제한이며 절대적이다'라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종류의 재산을 '사유(private)'재산이라고 부를 수 있다(private는 라틴어의 privare '빼앗다'에서 온 말이다).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의 주인으로, 그것을 사용하거나 즐기거나 하는 권리를 다른 사람들로부터 빼앗는 완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사유재산제도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인류의 전 역사(선사시대를 포함해서)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특히 경제가 생활의 주된 관심사가 아니었던 유럽 이외의 문화를 생각해 보면, 사실 사유재산제는 통상적인 예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외인 것이다. 사유재산 외에 전적으로 자신의 일의 결과인 '자기 창조'재산, 동포를 원조할 의무에 의해 '한정'되는 '한정재산', 일하는 도구, 혹은 향락을 위한 물건 등을 가리키는 '기능적' 혹은 '개인적' 재산, 이스라엘의 키부츠처럼 한 집단이 공동유대의 정신에 따라 공유하는 '공유'재산 등이 있다.

사회의 기능을 규정하는 규범은 그 구성원들의 특성(사회적 특성)을 형성한다. 산업사회에 있어서의 그런 규범은 재산을 취득하려는 소망, 그것을 유지하려는 소망, 그것을 증가시키려는, 즉 이익을 얻으려는 소망 등이다. 재산을 가진 자들은 찬양받고 또 우월한 존재로 부러움을 받는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본, 자본재라는 참다운 의미에서 볼 때 재산을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다음과 같은 어려운 문제가 일어난다. , 그런 사람들이 재산을 획득하고 유지하려는 그들의 열정을 어떻게 충족시키거나 수습할 수 있을 것인가. 또 그들이 이렇다할 재산이 없는데 어떻게 재산의 소유자 같은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인가.

물론 누가 보아도 분명한 해답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무엇인가' 소유하고 있으며, 이 보잘것없는 소유물을 자본주들이 그 재산을 소중히 하듯이 소중하게 다룬다는 점이다. 또 가난한 사람들도 대재산의 소유주들처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존하고 조금씩이라도 늘리려는 소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즐거움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보다는 살아 있는 존재를 소유하는 데 있을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가장 미천한 계급의 가장 비참한 남자들일지라도 그의 아내, 자녀들, 가축들과의 관계에서 재산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 이들에 대해서 그는 절대적 지배자로서의 기분을 맛볼 수 있다. 적어도 가부장적 사회의 남자에게 있어서는 자녀를 많이 갖는 것이, 소유권을 확립하기 위해 일할 필요도 없이, 또 자본 투자도 없이 사람을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아이를 낳는 모든 고통이 여자의 것임을 생각할 때 가부장적 사회에서의 자녀의 생산은 여성에 대한 노골적인 착취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어머니는 어머니대로의 독자적 소유형태를 갖는다. 어린 시절의 자식들을 소유하는 것이다. 이 연쇄관계는 끝없는 악순환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를 착취하고, 아내는 어린 자녀들을 착취하며, 청년기에 접어든 남자는 이윽고 어른들에 끼어 여자를 착취한다.

가부장적 질서에 있어서의 남성 주도는 대략 6천 내지 7천 년간 계속되어왔으며, 아직도 가장 가난한 나라, 사회의 최하층 계급에서는 그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보다 풍요한 국가나 사회에서는 그것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사회의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시기와 정도에 따라 여성, 어린이, 청소년의 해방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오래전부터의 가부장적 소유형태가 서서히 소멸되면서, 완전히 진보된 산업사회의 중하층 시민들은 재산을 획득하고, 지키고, 또 늘리려는 그들의 열정을 이제 어디서 충족시킬 것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소유의 영역을 확장시켜 친구, 연인, 건강, 여행, 예술품, , 그리고 자아 등을 그 속에 포함시키는 데 있다.

재산에 대한 부르즈와적 탐닉을 그럴듯하게 표현한 사람은 막스 슈티르너(Max Stirner)이다. 그에 의하면, 사람은 물건으로 변환되며 서로간의 관계가 소유의 성격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개인주의'는 긍정적인 의미로는 사회적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지만 부정적인 의미로는 '자기 소유'를 뜻한다. , 자기의 에너지를 성공에 투자할 권리 그리고 의무-를 말한다.

자아는 우리의 소유감각의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그것은 많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 신체, 이름, 사회적 지위, 소유물(지식을 포함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타인이 자기에 대해 가져주기를 바라는 이미지 등이 포함된다. 자아는 지식이나 기술 같은 실제적인 자질과 우리가 현실의 핵 주위에 쌓아올리는 가상적 자질과의 혼합물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자아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자아가 우리들 각자가 소유하는 어떤 물건으로 느껴지며, 그리고 이 '물건'이 우리의 주체의식의 기초가 된다는 점이다.

이 재산 논의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19세기에 성행했던 중요한 형태의 재산집착이 1차대전이 끝난 후 수십 년 동안 쇠퇴하여 오늘날에는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됐다는 것이다. 옛날에는 소유한 물건은 무엇이나 소중히 여겨졌고, 손질하여 쓸 수 있을 때까지 사용되었다. 물건 구입은 '소중히 간직하기' 위한 구입이었고, 이 당시의 표어는 '오래된 것은 아름답다'라는 것이었다. 오늘날은 소중히 간직하기보다는 소비가 강조되고 있으며, 구입은 '쓰고 내버리기 위한' 것이 되었다. 산 물건이 자동차이건 옷이건 기계이건간에 얼마 동안 쓰고 나면 싫증이 나서 '낡은' 것을 처분하고 최신형을 사기를 열망한다. 취득, 일시적 소유와 사용, 폐기(혹은 가능하면 더 좋은 모델과의 유리한 교환), 새로운 취득, 이것이 소비자 구매의 악순환을 형성하고 있어 오늘날의 표어는 '새로운 것은 아름답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오늘날 소비자 구입 현상의 가장 충격적 예는 자가용 자동차일 것이다. 우리 시대는 '자동차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 이것은 전 경제가 자동차 생산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고, 우리의 전 생활이 자동차의 소비자 시장의 부침에 크게 좌우되기 때문이다. 자동차를 소유한 사람들에게는 자동차는 중요한 필수품처럼 보이며, 아직 소유하지 못한 사람, 특히 소위 사회주의 국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자동차는 기쁨의 상징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자동차에 대한 애정은 깊고 지속적인 것은 못 되고 잠깐 동안 계속되는 풋사랑처럼 보인다. 소유자들은 자동차를 자주 바꾼다. 2년쯤 지나면, 아니 어떤 경우엔 1년밖에 안 되어서 차주는 '헌 차'에 싫증을 느끼고 새차를 '잘 사기'위해서 물색하고 다닌다. 물색에서부터 구입에 이르는 일련의 거래는 일종의 게임처럼 보인다. 이 게임에서는 속임수까지도 때로는 주요한 요소로 등장하며, '잘 산다'는 것 자체가 최종 목적인 최신형 승용차의 소유 못지않게 즐거움의 대상이 된다.

차를 재산으로 소유하면서도 그 차에 대한 차주들의 관심이 그토록 짧게 지속되는 것은 얼핏 보기에 매우 모순된 것 같다.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선 몇 가지 요소가 고려되어야만 한다. 첫째로 차와 소유자간의 관계의 비인격화적 요소이다. 자동차는 그 소유주가 좋아하는 구체적 대상이 아니고 지위의 상징, 힘의 연장, 즉 자아를 구축해 주는 것이다. 자동차를 획득함으로써 소유자는 새로운 자아의 단편을 획득하게 된다. 두 번 째 요소는 새 차를 6년마다가 아니라 2년마다 삼으로써 구매자의 취득의 드릴이 증가된다는 것이다. 새 차를 자기 것으로 하는 행위는 처녀를 정복하는 행위와도 비슷하다. , 지배감을 높여주는 행위이다. 이런 행위가 더욱 자주 일어날수록 그 드릴도 더욱 커진다. 세 번째 요소는 차를 자주 산다는 것은 '거래할' 기회를 그만큼 자주 갖는다는 점이다. , 교환에 의해 이익을 남길 기회를 자주 갖는다는 것, 그것은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에게 깊이 뿌리박혀 있는 만족감이다. 네 번째 요소는 중요한 것으로서 '새로운' 자극을 경험해야 하는 필요성이다. 오래된 자극은 곧 맥이 빠져 그 힘이 고갈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과거 1세기 반 동안에 일어난 사회적 성격의 변화이다. , '축적적' 성격이 '시장적' 성격으로 변화한 것이다. 이 변화에 의해 소유지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상당히 수정하고 있다.

소유적 감정은 다른 관계, 예를 들면 의사, 치과의사, 변호사, 사장, 노동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나타난다. 사람들의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인간에 대한 소유적 태도 이외에도 사람들은 무수한 물건, 때로는 감정까지도 재산으로서 경험한다. 건강이나 병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들은 '' 병이니, '' 수술이니, '' 치료니, '' 식이요법이니, '' 약이니 하고 자기의 건강을 소유적 감각으로 얘기한다. 그들은 확실히 건강과 병을 자기 재산(소유물)으로 생각하고 있다. 나쁜 건강에 대한 그들의 소유 관계는 폭락하는 주식시장에서 원가 이하로 떨어지는 주식에 대한 주주의 관계와 비슷하다.

사상이나 신념은 물론이고, 습관까지도 재산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메뉴의 아침을 먹는 사람은 그것이 조금만 달라져도 당황하는 수가 있다. 습관이 재산이 됨으로써 그것을 잃게 되면 그의 안전감이 손실되기 때문이다.

생존의 소유양식을 보편적으로 묘사한 이런 설명은 많은 독자들에게 너무나 부정적이고 일방적인 것으로 느껴질지도 모른다. 사실 그건 그렇다. 나는 현상을 가능한 한 명확하게 제시하기 위해서 우선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태도를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위에 제시한 설명에 어느 정도의 평형을 줄 수 있는 또 다른 요소가 있다. 이 요소는 젊은 세대 사이에 자라나고 있는 태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것과는 아주 다른 태도이다. 이 젊은이들에게서 우리는 감춰진 형태의 취득과 소유가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어떤 것을 그 보상으로 기대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데서 진정한 기쁨을 나타내는 소비 패턴을 보게 된다. 이들 젊은이들은 그들이 즐기는 음악을 듣기 위해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서 흔히 고생을 하면서 먼 곳까지 여행한다. 그들의 목적이 그들이 생각하는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닌가는 여기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충분한 진지성, 준비, 혹은 집중력을 갖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젊은이들은 과감히 '존재할' 뿐 자기들이 보상으로 무엇을 얻느냐, 무엇을 보존할 수 있느냐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그들은 또 흔히 철학적, 정치적으로 단순하지만 구세대보다는 훨씬 더 성실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시장에서 팔릴 만한 '상품'이 되기 위해서 항상 자신의 자아를 갈고 닦지는 않는다. 그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며 자기들의 이미지를 보호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또 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듯이 진실을 억압하기 위해 정력을 소모하지 않는다. 그리고 흔히 그들은 그 솔직함으로 연장자들에게 감명을 준다. 사실 연장자들은 진실을 보거나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내심 찬양하기 때문이다. 그들 간에는 여러 가지 색채를 띤 정치적, 종교적 지향을 가진 단체들도 있고,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신조가 없이 다만 자신을 '찾고있다'고 스스로 말하는 단체들도 많다. 그들이 자신이나 혹은 실제 생활의 지침이 될 목표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해도 그들은 소유와 소비 대신 자기 자신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긍정적 요소는 수정을 가할 필요가 있다. 이들 같은 젊은이들의 다수는(60년대 말부터 이들의 숫자는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다) '...로부터의' 자유에서 '...로의' 자유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반항했을 뿐 제한과 의존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목표 외에는 지향해 나갈 목표를 찾아내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들 부모들의 부르즈와적 표어나 마찬가지로 그들의 표어는 '새로운 것은 아름답다'는 것이며, 가장 위대한 정신이 만들어낸 사상을 포함한 모든 전통에 대해 거의 공포증적이라고 할 수 있는 무관심을 나타내었다. 일종의 단순한 자기도취에 빠져 그들은 발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것을 그들 스스로 발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근본적으로 그들의 이상은 다시 어린애가 되는 것이었고, 마르쿠제(Marcuse) 같은 저자들은 어린애로 되돌아가는 것이-성년으로의 발전이 아니라-사회주의와 혁명의 궁극적 목적이라는 편리한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냈다. 아직 젊어서 이 도취감이 지속되는 한 그들은 행복했다. 그러나 그들 중 대부분은 근거 있는 확고한 신념도 얻지 못한 채, 자기 내부의 구심점도 갖지 못한 채 심한 환멸과 함께 이 시기를 지났다. 그들은 흔히 환멸에 빠진 무감동한 인간, 혹은 불행한 파괴의 광신자가 되었다.

그렇다고 큰 희망을 품고 출발한 사람들 모두가 환멸로 끝났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 가를 알 길이 없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타당한 통계적 데이터나 근거 있는 추정조차도 얻을 수가 없으며, 그런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 각 개인을 평가할 수 있었을까 믿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미국과 유럽의 수백만이라는 사람들이 그들에게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전통이나 스승을 찾으려 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신조나 스승은 속임수가 아니면 과장된 자기선전에 타락되었거나, 각각의 도사의 재정과 위신상의 이해관계로 오염되어 있다. 가짜에 불과한 그런 방법에 의해서도 진정으로 혜택을 입을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이들에게서 아무런 내적 변화도 얻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신봉자들에 대한 자세한 양적, 질적 분석 뒤에야 각 그룹에 얼마만한 숫자가 소속되어 있는가 알 수 있을 것이다.

소유양식에서 존재 양식으로 그들의 태도를 바꾸려는 데 진지한 관심을 가진 젊은이들(그리고 약간의 연장자들)의 숫자는, 내 개인적 추정에 의하면 여기저기 개별적으로 흩어진 극소수의 사람들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아주 많은 수의 단체 및 개인이 존재의 방향으로 움직여 가고 있으며, 이들은 다수의 소유지향을 초월하려는 새로운 경향을 대표하고, 또 이들은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와 같이 소수자가 역사적 발전의 방향을 지시한 것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새로운 태도의 출현을 가능하게 한 일부 요소가 거의 역전될 가망이 없는 역사적 변화, 즉 여자들에 대한 가부장의 우위와 젊은이에 대한 부모의 지배의 붕괴라는 역사적 변화이익 대문에 이 희망은 더욱 현실감을 갖는다. 20세기의 정치적 혁명인 러시아 혁명은 실패한 반면, 금세기의 성공적인 혁명으로는(비록 초기단계에 있기는 하지만) 여성 혁명, 어린이의 혁명, 성의 혁명을 들 수 있다. 이들 혁명의 원칙들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통해 받아들여져, 옛 이데올로기는 날로 더욱 가소로운 것이 되어 가고 있다.

 

2. 소유의 본질

 

생존의 소유양식의 본질은 사유재산의 본질에서 유래하고 있다. 이 생존 양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재산을 취득하는 것, 그리고 내가 취득한 것을 무제한의 권리를 가지는 것뿐이다. 소유양식은 모든 것을 배제한다. 내 재산을 유지하거나 그것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치 않다. 석가는 이런 행동 양식을 열망이라 표현했고,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는 탐욕이라 표현했다. 그것은 모든 사람, 모든 사물을 죽은 것, 타인의 힘에 종속되는 것으로 변형시킨다.

'나는 무엇을 가지고 있다'는 문장은 주체인 '' (혹은 그, 우리, , 그들)와 객체인 대상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고 있다. 이 문장은 주체도 영속적이고 객체도 영속적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주체가 영속적인가? 또 객체 역시 영속적인 것인가? 나는 죽을 몸이다. 또 내가 무엇을 소유하도록 보장해 주는 사회적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 객체도 역시 영속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괴될 수도 있고, 잃어버릴 수도 있으며, 도 그 가치가 없어질 수도 있다. 뭔가를 영원히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체가 영속적이고 파괴될 수 없다는 환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내가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다. 내가 어떤 물체를 보유, 소유, 지배한다는 것은 사는 과정에서의 한 순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주체) 대상(객체)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의 정의를 객체에 대한 나의 소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주체 정의를 객체에 대한 나의 소유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고 '나는 내가 가진 것'이다. 내 재산이나 자신과 나의 주체를 형성한다. '나는 나다'라는 말의 밑바닥에 있는 사상은 '나는 X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다'라는 것이며, 이때, X는 내가 그것을 지배하고 영원히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권한을 통해 내가 나 자신과 관련을 짓는 모든 자연물과 사람들을 가리킨다.

소유양식에 있어서는 나와 내가 가지고 있는 것 사이에 살아 있는 관계는 없다. 그것과 나는 물건이 되어 버리며, 나는 그것을 내 것으로 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그 반대의 관계도 성립한다. , '그것이 나를 소유하는 것이다.' 나의 주체의식, 즉 정신이 내가 '그것을'(그밖에 가능한 한 많은 것들을) 소유한다는 사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존의 소유양식은 주체와 객체 사이의 살아 있는 생산적 관계에 의해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객체와 주체를 모두 '물체'로 만들어버린다. 그 관계는 살아 있는 관계가 아니며, 죽어 있는 관계이다.

 

소유, , 반항

스스로의 본성에 따라 성장하려는 경향은 모든 생물에 공통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구조에 의해 결정된 방식으로 우리의 성장을 방해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저항한다. 그 저항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이를 분쇄하기 위해서는 물리적 혹은 정신적 힘이 필요하다. 생명이 없는 사물은 그 원자구조 및 분자구조에 내재한 에너지를 통해 어느 정도 그 물리적 구조의 제어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사용되는 것에 대항해서 싸우지는 않는다. 생물체에 대한 타율적 힘의 사용(, 우리의 주어진 구조와 반대방향으로 우리를 구속하는, 다시 말해 우리의 성장을 저해하는 힘)은 저항을 일으킨다. 이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할 수 있다. 개방적, 효율적, 직접적, 능동적 저항에서부터 간접적, 무력적, 무의식적 저항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가 있다.

유아의, 어린이의, 청소년의,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성인의 의지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제한될 뿐 아니라, 지식과 진실에 대한 그들의 갈증, 사랑에 대한 그들의 소망도 제약을 받는다. 사람은 자라면서 자율적이고 진정한 욕망과 관심, 그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자발적이 아닌, 감정과 사고의 사회적 유형에 의해 첨삭된 의지, 욕망, 감정을 택하도록 강요된다. 사회와 그 심리사회적 대행자로서의 가정은 '한 사람의 의지를 어떻게 하면 그가 모르게 꺾느냐'하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그러나 교화, 보상, 처벌, 적당한 이데올로기 등의 복잡한 과정을 통해 가장과 사회는 이 과업을 대체로 훌륭히 수행하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간다고 믿고 있으며, 자기들의 의지 자체가 조정되고 조작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이 의지의 억제 중에서 가장 곤란한 것은 아마 성에 관한 경우일 것이다. 우리는 이 성문제에서 어떤 다른 욕망보다도 조종하기 어려운 자연질서의 강한 경향을 다루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다른 어떤 욕망에 대해서 보다도 성욕을 상대로 해서 더욱 맹렬하게 싸우려고 한다. 성에 대한 비방은 도덕적인 근거(섹스는 악이다)에서 건강상의 이유(자위행위는 건강을 해친다)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것을 여기서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교회는 산아제한을 금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실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배려에서가 아니라, 생식에 도움이 안 되는 성행위를 악으로 규정하고 꾸짖기 위해서이다.

성을 억제하기 위한 이제까지의 노력은 그것이 성 자체만을 위한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을 비방하는 이유는 성에 있지 않고 인간의 의지를 꺾는데 있다. 이른바 수많은 원시사회에서는 성의 금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 사회는 착취와 지배 없이 기능을 발휘하므로, 개인의 의지를 꺾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사회는 성을 멸시하지 않고 죄의식 없이 성관계의 쾌락을 맛볼 여유를 갖는다. 이들 사회에서 특기할 점은 이 성적 자유가 성적 탐욕을 초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비교적 일시적인 성관계의 시기가 지나가면 자기의 상대를 발견하게 되고, 그후에는 그들은 상대를 바꾸려 하지 않으며, 사랑이 없어지면 또 미련없이 헤어진다는 것이다. 이들 소유지향이 아닌 집단들에 있어서는 성적 향락은 '존재'의 표현이며, 성적 소유관계의 결과가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우리가 이들 원시사회와 같은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가령 우리가 원한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문명이 가져온 개인화, 개인적 차이, 개인적 거리로 인해 개인적 사랑이 원시사회의 그것과 다른 특질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퇴보할 수는 없다. 다만 전진할 수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형태의 무산성으로 모든 소유사회의 특징이 되고 있는 성적 탐욕을 제거하는 일이다.

성적 욕망은 인생의 매우 이른 시기에 나타나는 독립의지(자위행위)의 한 표현이다. 그것에 대한 나무람은 자녀의 의지를 꺾는 작용을 하며, 그로 하여금 죄의식을 느끼게 함으로써 한층 더 종속적으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성적 금기를 깨려는 충동은 대체로 그 본질에 있어서 자유를 회복하려는 데 목적을 둔 반항의 시도이다. 그러나 성적 금기 그 자체의 타파는 더 큰 자유로 발전하지 못한다. 그 반항은 말하자면 성적 만족 속에, 그리고 그에 뒤따르는 죄의식 속에 빠지고 만다. 내적 독립의 성취만이 자유를 가져오며 결과 없는 반항에의 욕구에 종지부를 찍는다. 이것은 자유를 회복하려는 시도로서 금지된 일을 하려 하는 모든 다른 행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금기는 성적 탐닉과 성적 도착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성적 탐닉과 성적 도착은 자유를 만들어내지는 못한다.' 자녀의 반항은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된다. 청결훈련의 규칙에 승복하지 않는 행위, 먹지 않거나 너무 먹는 행위, 공격성과 가학성, 그밖의 여러 가지 자기파괴적 행동 등이 그 예이다. 반항은 흔히 일종의 일반적인 '태업'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세상에 대해 관심을 갖지 못하고, 게을러지고, 수동적이 되며, 심한 경우에는 완만한 자기파괴라는 가장 병적인 형태에까지 이른다. 자녀와 부모간의 이 힘의 투쟁의 결과는 데이비드 E. 섹터의 '유아발달' 이라는 논문의 주제가 되고 있다. 모든 데이터는 '어린이와 그 후의 성장과정에 대한 타율적인 간섭은 모든 정신적 병리, 특히 파괴성향의 가장 깊은 원인' 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자유는 방임이나 방종이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이해해야만 한다. 인간도 다른 종이나 마찬가지로 특별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이 구조의 조건하에서만 성장할 수 있다. 자유는 모든 지도원리'로부터의' 자유를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인간존재의 구조의 법칙(자율적 제한)에 따라 '성장하는' 자유이다. 그것은 최선의 인간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에의 순응을 뜻한다. 이 목적을 촉진시키는 어떤 권위든간에 그 촉진이 어린이의 활동, 비판적 사고, 생에 대한 신뢰를 활성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성취되면 그것은 '합리적 권위'이다. 반대로 권위가 어린이에게, 어린이의 특수한 구조에 맞는 목적이 아니라 권위의 목적에 봉사하는 타율적 규범을 과할 때 그것은 '불합리한 권위'이다.

재산과 이윤에 중점을 두는 태도인 생존의 소유양식은 필연적으로 힘에 대한 욕망-진실한 요구-을 낳는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한 힘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사유재산의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그것을 지킬 만한 힘을 사용해야한다. 충분히 갖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기 때문에 항상 빼앗으려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사유재산을 소유하려는 욕망은 공공연한, 혹은 은밀한 방식으로 타인의 것을 빼앗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려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소유양식 안에서는 사람의 행복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성, , 그리고 좀더 분석해 보면 정복하고 빼앗고 죽이는 자기의 능력에 달려있다. 존재 양식 안에서는 행복은 사랑, 공유, 주는 행위에서 찾을 수 있다.

 

3. 소유양식을 지탱하는 그밖의 요소

 

소유지향을 강화하는 데는 '언어'도 한몫을 한다. 어떤 인물의 이름-우리는 모두 이름을 갖고 있다(만일 현재의 비인간화 경향이 계속된다면 아마 이름 대신 번호를 갖게 될 것이다)-은 그 혹은 그녀가 최종이며 불후의 존재하는 환상을 낳는다. 사람과 이름은 서로 대응된다. 이름은 그 사람이 하나의 과정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파괴될 수 없는 실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일반적인 명사도 똑같은 기능을 갖는다. , 사랑, 자랑, 증오, 기쁨 같은 명사는 실체인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이런 명사는 실재성이 없으며, 인간의 내부에서 진행되는 과정에 우리가 관계하고 있다는 통찰을 흐리게 할 뿐이다. '책상'이나 '램프'와 같은 '물건'의 이름으로서의 명사까지도 우리를 현혹시킨다. 이런 말들은 우리가 불변의 실체를 이야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러나 실상 물건은 우리의 신체조직 속에 어떤 감각을 일으키는 에너지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감각은 책상이나 램프 같은 물건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고 믿는다. 우리는 사회가 우리에게 감각을 인식으로 변형시키게끔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실상은 이런 인식에 의해 주위의 세계를 조작함으로써 우리는 주어진 문화 속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일단 그런 인식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 이름이 그 인식의 궁극적이고 불변의 실재를 보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유의 욕구에는 또 다른 근거가 있다. ,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살려는 욕망'이다. 우리가 행복하건 불행하건간에 우리의 육체는 우리로 하여금 '불멸'을 향해 노력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경험에 의해 알기 때문에, 그 경험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불멸이라는 것을 자신에게 믿게끔 하는 해결책을 찾는다. 이 소망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띠었다. 피라밋 속에 안치된 육체는 불멸이라는 파라오(Pharaohs)의 신앙, 초기 수렵사회의 행복한 수렵에서 볼 수 있는 사후생활에 대한 갖가지 종교적 환상, 기독교나 이슬람교의 천국 등이 그 예이다. 18세기 이후 현대사회에서는 '역사''미래'가 기독교적 천국의 대용물이 되었다. 명성, 명예, 심지어 악명까지도-역사의 기록에 한 줄을 보탤 듯싶은 것은 무엇이든 간에-불멸의 일부를 형성한다. 명예에 대한 갈망은 세속적 허영에만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이제 전통적인 내세를 믿지 않게 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종교적 성격까지도 지니게 되었다(이것은 특히 정치 지도자들에게 뚜렷하게 나타난다). 광고 선전이 불멸을 가능하게 하고, 선전담당자는 새로운 성직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불멸에의 갈망을 만족시키는 데는 아마 재산의 소유가 다른 어느 것보다도 큰 구실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소유지향이 그와 같은 힘을 갖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나의 '자아'가 내가 '가지고 있는'것에 의해 형성된다면 내가 가진 물건들이 파괴되지 않는 한 나는 불멸인 것이다. 고대 이집트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육체의 미이라에 의한 육체적 불멸로부터 유언에 의한 정신적 불멸에 이르기까지-사람들은 그들의 육체적, 정신적 생애의 한계를 넘어 생을 이어 왔다. 유언의 법적 효력에 따라 미래의 세대들을 위한 우리 재산의 처분이 결정된다. 유산상속법에 의해서 나는-내가 재산의 소유자인 한-불멸이 된다.

 

4. 소유양식과 변태적 성격

 

프로이트의 가장 뜻있는 발견 가운데 하나를 상기하는 것도 소유의 양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접근방식일 것이다. , 모든 어린이는 단순한 수동적 수용의 단계인 유아기 및 공격적, 착취적 수용기를 거친 후 성숙기에 도달하기 전에 프로이트가 '항문성애(anal-erotic)'라고 불렀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 현상이 가끔 인격의 발달기간 내내 그대로 지속되는 수가 있으며, 이럴 경우 '변태적 성격'이 발생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변태적 성격이란 생애의 중심 에너지를 감정, 제스처, 언어, 정력을 물론 돈과 물질적인 것을 소유하고 절약하고 저축하고 보관하는 데로 돌리는 사람의 성격을 말한다. 그것은 인색한 사람의 성격이며, 흔히 다른 특성, 즉 지나치게 깔금하다든가, 지나치게 규율적이라든가, 지나치게 고집이 세다든가 하는 특성과 연결되어 있다.

프로이트의 개념의 중요한 일면은 금전과 배설물-황금과 오물-사이의 상징적 연결이다. 그는 그에 관해 수많은 실례를 들었다. 변태적 성격을 미처 성숙에 이르지 못한 성격으로 보는 그의 개념은, 실상 변태적 성격의 특징에서 보여지는 여러 가지 인간적 특징이 도덕적 행동의 기준을 이루고 '인간성'의 표현으로 존중되어 19세기 부르즈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다. 금전=배설물이라고 하는 프로이트의 방정식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지만 부르즈와 사회와 기능과 소유욕을 비판하는 것이며, '경제적, 철학적 원고'에서 논술한 마르크스의 금전론과 비교될 만하다.

프로이트가 리비도(libido) 발달의 특수한 양상이 일차적이고, 성격 형성은 이차적이라고(내 생각에는, 성격은 생애 초기 인간 상호간의 관계의 산물이며 무엇보다 그 형성을 촉진하는 사회적 조건의 산물인 듯하다) 믿었다는 사실은 여기서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소유에 있어서의 주된 지향은 완전한 성숙이 이루어지기 전 시기에 일어나며, 만일 그것이 영속적으로 되면 병적인 것'이라는 프로이트의 견해이다. 다시 말해서, 소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프로이트에 있어서는 신경증적이고 정신적으로 병든 인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구성원이 변태적 성격을 갖고 있는 사회는 병든 사회라는 결론이 나온다.

 

5. 금욕주의와 평등

 

도덕적, 정치적 논쟁의 대부분은 소유냐 비소유냐 하는 문제에 집중되어 왔다. 도덕적,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이것은 금욕적 생활과 비금욕적 생활의 선택을 뜻한다. 비금욕적 생활에는 생산적 향락과 무제한의 쾌락이 모두 포함된다. 그러나 어떤 단일 행동만을 보지 않고 그 밑바탕이 되는 태도를 볼 때는 이 선택은 그 의미의 대부분을 잃는다. 비향락을 고집하는 금욕적 행동은 소유와 소비로 향하는 강한 욕망의 부정에 불과하다고 할는지 모른다. 금욕적인 사람들은 이런 욕망을 억제할 수는 있다. 그러나 소유와 소비를 억제하려는 바로 그 시도 자체에서 그 사람도 소유와 소비에 똑같이 사로잡혀 있을 수도 있다. 과잉 보상에 의한 이 자기부정은 정신분석학적 데이터가 보여주듯이 매우 흔히 일어난다. 이것은 파괴적 충동을 억제하는 광적인 채식주의자, 살인 충동을 억제하는 광적인 인공유산 반대자, '죄 받을' 충동을 억제하고 있는 광적인 '도덕주의자' 같은 경우에 일어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념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는 광신이다. 모든 광신이 그러하듯 그것이 다른, 흔히 정반대의 충동을 은폐하는 구실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불러일으킨다.

경제, 정치 분야에서는 소득에 관한 무제한의 불평등과 절대적 평등 사이에서 비슷한 오류의 양자택일을 볼 수 있다. 모든 사람의 소유물이 기능적이고 인격적이라면 누가 다른 사람보다 좀더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사회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유가 본질적인 것은 아니므로 부러움은 자라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각자의 몫이 다른 사람의 몫과 아주 똑같아야 한다는 의미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 역시 강한 소유지향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다만 엄격한 평등이라는 편견에 의해 부인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관계의 배후에 그들의 진정한 동기가 보인다. 그것은 부러움이다. 아무도 자기보다 더 많이 소유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더 소유할 경우 그가 갖게 될 부러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사치와 가난이 뿌리뽑혀야 한다는 것이다. 평등은 물질적 자산의 양적 균등을 의미해서는 안 되며, 소득이 각각의 다른 그룹에게 서로 다른 삶의 경험을 창조할 정도로 분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의 평등이 되어야 한다. 마르크스는 '경제적, 철학적 원고'에서 이것을 소위 '미숙한 공산주의'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모든 영역에서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존재를 부정한다.' 이 유형의 공산주의는 이런 부러움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이며, 최소한의 소유라는 전제를 기초로 한 평준화의 극치이다.

 

6. 생존적 소유

 

우리가 여기서 다루고 있는 소유의 양식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요건, '생존전 소유의 기능'이라는 요건이 필요할 것 같다. 인간존재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물건을 소유하고, 보전하고, 손질하여 사용하는 것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육체, 음식, 주거, , 일용품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도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런 형태의 소유는 인간존재에 뿌리박고 있기 때문에 생존적 소유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살아 있기 위해 합리적으로 방향지워진 충동이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루어 온 성격학적인 소유와는 대조를 이룬다. 생존적 소유는 강력한 충동으로서, 그것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종으로서의 인류에게 사회적 조건이 영향을 준 결과로서 발전된 것이다.

생존적 소유는 '존재'와 충돌하지 않는다. 성격학적 소유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킨다. '공명정대'하고 '성스러운' 인간일지라도 그가 인간인 한 생존적 의미의 소유는 불가피하다. 반면 보통 사람은 생존적 의미의 소유와 성격학적 의미의 소유 두 가지를 다 바란다.

 

 

5: 존재 양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대부분 존재 양식에 비해 소유양식을 더 많이 알고 있다. 그것은 우리 문화 속에서 소유 쪽이 훨씬 더 흔히 경험되는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무언가가 있어 소유양식에 대한 정의보다 존재 양식에 대한 정의를 훨씬 곤란하게 한다. 그 무언가란 인간생존의 두 양식 간의 차이의 본질, 바로 그것이다.

소유가 관계하는 것은 '물건'이며, 물건은 고정되어 있고 또한 '표현 가능하다.' 존재는 '경험'과 관계되는데, 이 인간의 경험은 원칙적으로 표현 불가능한 것이다. 충분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페르소나(persona)'-우리들 각자가 쓰고 있는 가면, 우리가 나타내는 자아(ego)-이다. 그것은 이 페르소나 자체도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 반면, 살아 있는 인간은 죽은 이미지가 아니므로 물건처럼 표현할 수가 없다. 사실 살아 있는 인간은 전혀 묘사될 수가 없다. 확실히 나에 대해서, 내 성격에 대해서, 삶에 대한 나의 모든 지향에 대해서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다. 이 통찰적 지식은 나 자신의, 혹은 다른 사람의 심적 구조를 표현하고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완전한 나, 나의 전개성, 지문처럼 나만이 갖고 있는 나의 본질은 감정이입에 의해서도 결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어떤 인간도 둘이 완전히 같은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상호 간의 살아가는 관계의 과정에서만 타인과 나는 양자를 갈라놓은 장벽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무도회에 함게 참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한 동일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어떤 단순한 행동일지라도 완전히 묘사될 수 없다. 모나리자의 미소를 표현하기 위해 몇 페이지를 쓸 수도 있겠지만 그 그림에 나타난 미소는 언어로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 미소가 '신비스럽기' 때문은 아니다. 누구의 미소라도 미소는 신비스럽다(시장거리에서나 통용되는 가식적인 미소가 아니라면). 아무도 다른 사람의 눈에 나타나는 흥미, 정열, 삶에 대한 애착, 혹은 미움, 자기 도취 등의 표정을 완전히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도 사람들을 특징짓는 다양한 얼굴표정, 걸음걸이, 포즈, 억양 등도 마찬가지다.

 

1. 능동적이라는 것

 

존재 양식은 그 전제조건으로 독립,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갖는다. 그 기본적 특성은 능동적이라는 것인데, 그것은 외적 활동이나 분주하다는 의미가 아닌 내적 활동, 인간의 힘의 생산적 사용이라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이다. 능동적이라는 것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모든 인간이 타고난 능력, 재능, 그리고 풍부한 인간적 소질을 발현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자신을 새롭게 하고, 성장하는 것, 흘러넘치는 것, 사랑하는 것, 에고(ego)의 감옥을 빠져나가는 것, 관심을 갖는 것, '참가하는' , 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어느 것이나 언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다. 언어는 흘러넘치는 경험으로 가득 채워진 그릇이다. 언어는 어떤 하나의 경험을 가리키지만, 언어가 경험 그 자체는 아니다. 경험한 것을 나의 사상과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그 경험은 없어진다. 그것은 말라서 죽고 단순한 사상만이 남는다. 따라서 존재는 언어로 표현될 수 없고, 다만 나와 경험을 나누어 가짐으로써만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다. 소유의 구조 속에서는 죽은 언어가 지배한다. 존재의 구조 속에서는 살아 있는 표현될 수 없는 경험이 지배한다(물론 존재 양식에는 살아있는, 생산적인 사고도 있다).

존재 양식의 묘사는 아마도 막스 훈치거(Max Hunziger)가 나에게 암시한 상징에 의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파란 유리에 빛을 통했을 때 그것이 파랗게 보이는 것은 유리가 다른 색깔은 모두 흡스해서 통과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 우리가 유리를 '파랗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파란색의 파장을 보유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유리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가 아니라 자기가 주어버리는 것에 따라 명명된 것이다.

우리가 비존재(nonbeing)인 소유양식을 감소시키는 정도만큼-, 안전감과 동일성의 추구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매달리거나, 그것을 '끌어안고' 있거나, 우리의 에고와 소유물에 집착하거나 하지 않는 정도에 비례해서-존재 양식은 나타난다. '존재하는 것'은 이기주의를 버릴 것을 요구한다. 흔히 신비주의자들이 쓰는 말을 빌면 그것은 자신을 '텅 비게' 하고 '가난하게' 함으로써 달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지향을 포기한다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런 시도는 심각한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모든 안전이 파괴되고, 헤엄을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넓은 바다에 던져진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그들은 재산이라는 목발을 포기해 버려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그들이 혼자 힘으로는 걸을 수 없으리라는 환상,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에 의해 지탱되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라는 환상이다. 그들은 한번 쓰러지면 결코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없을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러나 자연과 인간적 도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름발이가 되도록 내버려두지는 않는다. 소유라는 목발을 쓰지 않으면 쓰러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바로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2. 능동성과 수동성

 

우리가 기술한 의미의 존재는 능동적인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 수동성은 존재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러나 '능동적(active)'이니 '수동적(passive)'이니 하는 말은 가장 많은 오해를 받고 있는 말 중의 하나이다. 이 말들의 의미가 오늘날에 와서는 고대와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가 시작되던 시기에 이르기까지 가졌던 의미와는 완전히 다르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존재의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능동과 수동의 개념을 명확히해야만 한다.

현대적 용법에서는 능동성은 보통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두드러진 효과를 가져오는 어떤 행동의 특질로서 정의된다. 그러므로 예컨대, 자기 농토를 경작하는 농부들은 능동적이라고 말해진다. 일관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고객에게 물건을 사도록 권유하는 판매원, 자기 자신의 돈이나 혹은 다른 사람의 돈을 투자하는 투자자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 우표를 파는 우체국 직원, 서류를 정리하는 관리들도 또한 능동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이들 능동 가운데는 다른 것보다 더 많은 관심과 집중을 필요로 하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능동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능동은 한마디로 '사회적으로 유용한 변화를 낳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의도적 행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현대적 의미의 능동은 '행동'을 가리킬 뿐 그 배후에 있는 인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들이 노예와 같이 외부적 힘에 의해 이끌리든 불안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의 경우처럼 내부적 강제에 의해 이끌리든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목수나 독창적 작가, 과학자 또는 정원사처럼 그들의 일에 흥미를 갖든, 혹은 일관 작업장의 노동자나 우체국 직원처럼 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내적 관련이나 만족을 갖지 않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

현대적 의미의 능동은 '능동'과 단순한 '분주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소외된' 행동이냐 '소외되지 않은' 행동이냐의 두 가지 능동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소외된 능동의 경우에는 나는 자신을 능동의 행동 주체로서 경험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는 내 능동의 '결과'를 경험한다. 그것도 '저쪽에 있는' 어떤 것으로, 나와는 격리되어 내 위에, 또 나와는 대립해 있는 어떤 것으로 경험한다. 소외된 능동의 경우 ''는 진정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나는 외부적 혹은 내부적 힘에 의해 '움직여질' 뿐으로, 내 행동의 결과로부터 이미 분리된 것이다. 정신병리학 분야에서 흔히 관찰할 수 있는 소외된 능동의 경우는 강제강박증 환자들의 경우이다. 그들 자신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어떤 행동-예를 들어, 자기 발자국을 세거나, 어떤 글귀를 되풀이해서 외거나, 어떤 개인적인 의식을 행하는 일-을 하도록 내적 충동에 의해 강요받는 이들 환자들은 이 목표를 추구하는 데 있어서 지극히 능동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적 연구가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스스로도 잘 모르는 내적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소외된 능동의 또 다른 현저한 예는 최면에 걸린 후의 행동이다. 최면의 환각으로부터 깨어나는 순간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하라는 최면적 암시를 받은 사람은 그 행동이 자기가 스스로 '원하는'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대로 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최면술사의 명령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소외되지 않은 능동에 있어서는 나는 '나 자신'을 내 능동의 '주체'로서 경험한다. 소외되지 않은 능동은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과정이며, 내가 생산한 것과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이것은 또한 나의 능동성이 내 힘의 표현이며, 나와 나의 능동성과 그 결과가 하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을 '생산적 능동'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쓰는 '생산적'이란 말은 예술가나 과학자의 경우와 같이 새롭고 독창적인 무엇을 창조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내 능동의 산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요, 그 특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림이나 과학적 논문은 지극히 비생산적인, 다시 말해 불모의 것일 수도 있다. 한편, 깊이 있게 자신을 인식하는 사람들, 나무를 그저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보는' 사람들, 또는 시를 읽으며 시인이 언어로 표현한 감정의 움직임을 자신 속에서 경험하는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과정은 비록 거기서 아무것도 '생산된 것'은 없지만 매우 생산적인 과정이다. 생산적 능동성은 내적 활동의 상태를 나타낸다. 그것은 꼭 예술작품이나 과학 같은 '유용한' 어떤 것의 창조와 연관을 갖지는 않는다. 생산성은 정서적으로 불구가 아닌 한 모든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성격지향이다. 생산적인 사람들은 그들이 접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것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탄생시키며, 다른 사람들이나 물건에도 생명을 불어넣는다.

'능동성''수동성'은 각각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순한 분주함이라는 의미의 소외된 능동성은 생산성이라는 의미에서 보면 '수동성'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분주하지 않다는 의미로서의 수동성은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인 경우도 있다. 오늘날 이와 같은 구분을 이해하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대개의 능동성은 소외된 '수동성'이고, 생산적인 수동성은 좀체 경험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능동성과 수동성에 관한 대사상가들의 견해

'능동성''수동성'은 산업혁명 이전 사회의 철학적 전통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노동의 소외가 오늘날과 비교될 만한 정도에까지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은 '능동성'과 단순한 '분주함'을 명확히 구별조차 하지 않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소외된 노동은 모두 노예들이 담당하였다. 육체노동을 수반하는 작업은 '프락시스(praxis)'의 개념에서 제외되고 있었던 것 같다. 프락시스란 말은 '자유민'이 행할 가능성이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활동을 포괄적으로 나타내는 말로서, 원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사람의 자유로운 활동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이다.

주관적으로 무의미한, 소외된, 순전히 일상화된 작업이라는 문제는 이런 배경을 생각해 볼 자유 아테네 인들에겐 제기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자유가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그들이 노예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능동성은 생산적이고 그들에게 의미가 있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능동성과 수동성의 개념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있어 가장 고귀한 형태의-정치적 활동을 초월한-활동은 진실의 탐구에 바쳐진 '명상적 생활' 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아주 뚜렷해진다. 그로서는 명상이 비능동성의 한 형태라는 관념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명상적 활력을 우리에게 있어서의 최선의 부분, '노우스(nous)''능동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노예도 자유민이나 똑같이 쾌락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 '복리'는 쾌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에 합치하는 능동성' 에 있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현대의 능동성의 개념과는 대조적이다. 아퀴나스에 있어서도 내적 평온과 영적 지식에 바쳐진 생활, 즉 비타 콘템플라티바(vita contemplativa : 명상적 생활)는 인간의 능동성의 가장 고귀한 형태였다. 그는 보통사람의 일상생활, '비타 악티바(vita activa)'도 유익하며, 그것도 인간의 모든 활동이 지향하는 목표가 복리이고, 인간이 자기 정열과 육체를 제어할 수 있다면-이 조건이야말로 결정적이다-역시 복리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비타 콘템플라티바''비타 악티바'의 문제는 이 점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아퀴나스의 태도는 일종의 타협이기는 하지만, '미지의 구름'의 저자이며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동시대인이었던 그는, 에크하르트가 능동적 생활을 크게 찬양하고 있는 데 반해 이에 대한 날카로운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은 겉보기만큼 그렇게 날카로운 것은 아니다. 능동성은 궁극적으로 윤리적이고 영적인 요구에 뿌리박고, 또 그 요구를 표현할 때에만 '건전한' 것이라는 데 두사람이 모두 동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들 두 대가에게 있어서 분주함, 즉 인간의 정신적인 기초로부터 벗어난 능동성은 배척되어야 할 무엇이었다.

스피노자는 약 4세기 전 에크하르트의 시대에 유행했던 정신과 가치관을 한 인간으로서, 또 한 사상가로서 구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 그 시대의 사회와 평민에게 나타난 변화도 관찰하였다. 그는 과학적 현대심리학의 창시자였다. 다시 말해, 그는 무의식의 차원을 발견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 풍부한 통찰력으로 능동성과 수동성의 차이를 그의 어떤 선배들보다 더 조직적이고 정확하게 분석하였다.

'윤리학(에티카)'에서 스피노자는 능동성과 수동성(행하는 것과 겪게 되는 것)을 정신작용의 두 가지 기본적 양태로서 구분하고 있다. '행하는 것'의 첫째 기준은 행위가 인간본성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부 혹은 외부에서 우리 본성의 결과로 어떤 일이 행해지고, 그것이 그 본성만으로 명백하고 분명하게 이해될 때, 우리는 행동한다고 말한다. 반대로 우리 내부에서 우리 본성의 결과로 어떤 일이 행해지는데, 우리가 부분적으로만 그 원인이 될 때, 우리는 겪는다(스피노자의 견해로는 수동적인 것)고 나는 말한다.' 이 문장이 현대의 독자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것은, '인간성'이란 말이 나타내는 것과 논증할 수 있는 어떤 경험적 데이터와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피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또 현대의 일부 신경생리학자, 생물학자, 심리학자들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스피노자는 말의 본성이 말에게 특징적이듯 인간본성은 인간에게 특징적인 요소라고 믿고 있다. 또 선이냐 악이냐, 성공이냐 실패냐, 안녕이냐 고통이냐, 능동성이냐 수동성이냐 하는 것은 사람이 그 본성의 완전한 발전을 이룩하는 정도에 관련되어 있다고 그는 믿었다. 자기 종의 본성(인간에게 있어서는 인간성)의 완전한 실현이 생활의 목적이다. 우리가 인간성의 전형에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의 자유와 복리는 더욱 증대되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한 인간의 전형에 있어서 능동이라는 속성은 도 하나의 속성, 즉 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우리 생존의 조건에 맞춰 행동하고, 또 이들 조건을 실제적이고 필연적인 것이라고 인식하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된다. '우리의 정신은 때로는 행동하고 때로는 겪는다. 정신이 타당한 관념을 갖는 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행동하고, 타당하지 않은 관념을 갖는 한 정신은 필연적으로 겪는다.' 욕망은 능동적인 욕망(actiones ; 행동)과 수동적인 욕망(passiones ; 열정)으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우리 존재의 조건(병적인 왜곡이 아닌 자연스런 조건)에 뿌리박고 있으며, 후자는 그렇게 뿌리박지 못하고 왜곡된 내적 혹은 외적 조건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다. 능동적 욕망은 우리가 자유로운 만큼 존재하며 수동적 욕망은 내적 혹은 외적 힘에 의해 생겨난다. 모든 '능동적 정서'는 필연적으로 선하며 '열정'은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능동성, 이성, 자유, 복리, 기쁨 및 자기완성은 인간성의 요구에 불가분으로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수동성, 비합리, 속박, 슬픔, 무력, 분투 등이 인간본성의 요구에 상반되어 연관되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열정과 수동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관념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사고의 마지막 단계(그리고 가장 현대적 단계)까지 추적해 보아야 한다. 비이성적 열정에 의해 움직이는 것은 정신적으로 병들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우리가 만족스런 성장을 이룩하게 되면 우리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강하고, 이성적이고, 기쁨에 넘칠 뿐 아니라, 또한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이다. 이 목표에 이르지 못할 때, 우리는 부자유스럽고, 약해지고, 이성이 결핍되고, 억압당한다는 것이다. 내가 알기로 스피노자는 정신적 건강과 질환이 각각 올바른 삶과 그릇된 삶의 결과라고 주장한 최초의 현대사상가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정신적 건강은 결국 올바른 삶의 나타남이며 정신적 질환은 인간성의 요구에 따라 사는 데 실패했다는 징후이다. "그러나 만약 '욕심 많은' 사람이 돈과 소유물만을 생각하고 야망에 찬 사람이 명예만을 생각한다 해도, 사람들은 그들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다만 좀 불쾌하게 생각할 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을 경멸한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탐욕, 야망 등을 병으로 생각하지 않지만 '실상은' 일종의 정신이상의 형태이다." 우리 시대의 사고와는 판이한 이러한 말에서 스피노자는 인간성의 요구에 상응하지 않는 열정을 병적이라고 보고 있다. 그리고 실상 그는 이것을 정신이상의 한 형태라고까지 보고 있다.

능동성과 수동성에 관한 스피노자의 개념은 산업사회에 대한 가장 극렬한 비판 중의 하나이다. 돈이나 재산, 혹은 명예에 대한 욕심에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들을 정상적이고 잘 적응된 사람들이라고 보는 오늘날의 생각과는 대조적으로 스피노자는 이런 사람들을 지극히 수동적이고 근본적으로 병든 사람들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생각하는 능동적 인간은-그는 스스로의 생애를 통하여 이를 가장 잘 구현하였다-오늘날에는 별로 없게 되었고, 소위 말하는 정상적 활동에 잘 적응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이로제에 걸린 것이 아닌가 의심받고 있는 형편이다.

'마르크스'('경제적, 철학적 원고'에서)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능동성(, 인간의 능동성)''인간의 특성'이라고 썼다. 그에게 있어서는 노동은 인간적 능동성을 대표하며, 인간적 능동성은 바로 삶이다. 그 반면, 자본은 축적된 것, 과거, 그리고 결국은 죽은 것을 대표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본과 노동 간의 투쟁은 활발함과 무감각의 투쟁, 현재와 과거의 투쟁, 인간과 사물의 투쟁이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투쟁에 대해 그가 가졌던 감정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문제는 누가 누구를 지배해야 할 것인가, 즉 생이 무감각을 지배해야 한냐, 무감각이 활발함을 지배해야 하느냐였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사회주의는 활발함이 무감각을 이긴 사회를 나타내고 있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마르크스의 전반적인 비판과 사회주의의 이상이 기초로 삼고 있는 개념은 인간의 능동성 자체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마비되므로 생의 모든 분야에서의 능동성을 회복함으로써 완전한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전학파 경제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공식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가 인간을 역사의 수동적 대상으로 만듬으로써 인간에게서 그 능동성을 빼앗은 결정론자였다는 상투어는 그의 사고와는 전혀 상반되는 말이다. 이것은 문맥을 생각하지 않고 추려낸 몇몇 단편적 구절을 읽은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면 누구나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생각은 그의 다음과 같은 말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역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단한 부를 소유하고 있지도 않으며 (어떤 투쟁을 하지도 않는다). 행동하고, 소유하고, 모든 투쟁을 수행하는 것은 인간, 진실된 살아 있는 인간이다. (역사)가 마치 인간과는 동떨어진 별개의 것인 듯,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인간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역사는 자기의 목적을 추구하는 인간의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최근에 살았던 사람들 중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만큼 현대인의 행위의 수동적 특성을 예리하게 통찰한 사람은 없다. 그는 문명의 쇠퇴와 회복에 대한 그의 연구에서 현대인을 부자유스럽고 불완전하며, 집중력이 부족하고 병적으로 의존하며, '절대적으로 수동적'이라고 보았다.

 

3. 실재로서의 존재

 

나는 앞에서 존재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그것을 소유와 대비시켜 보았다. 그러나 존재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외관(appearing)'과 대비시킴으로써 명확하게 드러난다. 만약 내가 친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친절이 내 이기주의를 감추는 가면에 불과하다면, 내가 용감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허영심이 많고 어쩌면 자멸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면, 또 내가 나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 개인적 이득을 더욱 중시한다면, 외관, 즉 나의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나를 움직이고 있는 진정한 힘과는 심한 모순을 이룬다. 이때 내 행동은 낸 성격과 다르다. 내 성격구조, 즉 내 행동의 진정한 동기가 나의 현실의 존재를 이루고 있다. 내 행동은 내 존재를 부분적으로 반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행동은 보통은 나 자신의 목적을 위해 쓰는 가면이다. 행동주의는 이 가면을 마치 믿을 만한 과학적인 데이터처럼 취급한다. 그러나 진정한 통찰은 흔히 의식할 수도, 또 직접 관찰할 수도 없는 내적 실재에 초점이 모아지고 있다. 에크하르트가 '가면을 벗긴다'고 표현한 이 존재의 개념이 스피노자와 마르크스의 사상의 중심이며, 또한 프로이트의 주요한 발견이기도 하다.

행동과 성격, 가면과 그것이 가리는 실체 사이의 엇갈림을 이해한 것이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가장 중요한 성과이다. 프로이트는 유년기의 억압된 본능적(본질적으로는 성적) 욕망을 드러내기 위한 방법(자유연상, 꿈의 분석, 감정전이, 저항)을 고안하였다. 후기 정신분석의 발달된 이론과 치료법에서는 본능적 생활보다는 유년기의 인간관계 분야에서의 외상적 사건에 중점을 두게 되었는데, 그 원리는 마찬가지다. , 억압되어 있는 것은 초기의(내 견해로는 또 후기의) 외상적 욕망과 공포이며, 병적 증세, 그리고 더욱 일반적인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이 억압된 요소를 드러내는 데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억압되어 있는 것은 불합리하고 유아적이며 개인적인 요소들이다.

한편 보통은 정상적인, 다시 말해서 사회적으로 적응된 시민은 합리적이고 따라서 심층분석의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의 의식적 동기, 관념, 신념 등은 거짓된 정보, 선입관, 불합리한 열정, 합리화, 선입관 등의 혼합물이다. 이 속에서 진실의 조각들이 헤엄치면서 모든 혼합물이 올바르고 진실된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을 심어주고 있을 뿐이다. 사고과정은 이 환상의 탁한 웅덩이를 논리와 그럴싸한 법칙으로 체계화하려고 한다. 이런 정도의 의식이 실재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그 의식은 우리가 삶을 조직하는 데 사용하는 지도이다. 이 거짓된 의식의 지도는 억제되지 않는다. '억제되는 것은 실재에 대한 지식, 즉 진실한 것에 관한 지식이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무의식이란 무엇인가?'하고 묻는다면, 그 해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불합리한 열정을 제외한 실재에 대한 거의 온전한 지식이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근본적으로 사회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는 불합리한 열정을 만들어내고 그 구성원들에게 갖가지 허구를 공급해 줌으로써 진실을 사이비 합리성의 포로로 만들어버린다.

진리가 억압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물론 우리가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그 지식을 억압한다는 전제, 다시 말해 '무의식적 지식'이 존재한다는 전제를 기초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과 또 나 자신에 대한 나의 정신분석 경험은 이것이 사실임을 믿게 해준다. 우리는 실재를 인식한다. 아니, 인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의 감각이 우리가 실재에 직면했을 때 보고 듣고 냄새맡고 촉각으로 느끼도록 조직되어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이성은 실재를 인식하게끔 조직되어 있다. ,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게끔, 진리를 인식하게끔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물론 내가 가리키는 실재는 과학적 기구나 방법을 써야만 인식될 수 있는 유의 것은 아니다. 나는 집중력을 기울여 ''으로써 인식할 수 있는 것, 특히 우리 자신과 타인의 내부에 있는 실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위험한 사람을 만날 때, 또 완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날 때, 거짓말을 들을 때,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착취를 당할 때, 스스로 자신을 속였을 때, 각각 그 사실을 안다.

우리 선조들이 별의 운행에 대해 탁월한 지식을 가졌던 것과 같이 우리는 인간의 행동에 관해 알아야 할 것은 대부분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이 별에 관한 그들의 지식을 '의식하고' 그것을 이용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는 우리의 지식을 억압한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을 의식한다면 사는 것이 너무 힘들 것이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그럴 경우 사는 것이 너무 '위험'해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말에 대한 증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우선 꿈을 생각해보자. 꿈속에서 우리는 흔히 다른 사람, 혹은 자신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발휘한다. 생시에는 이러한 깊은 통찰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또 우리는 흔히 어떤 사람을 문득 전과는 아주 다르게 보며, 우리가 마치 지금까지 그런 지식을 쭉 가지고 있었다고 느끼는 수가 있다. 고통스런 진실이 의식의 표면에 떠오르려 할 때의 저항현상도 그 증거의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말을 더듬는다든지, 어색한 표정을 짓는다든지, 환각상태에 빠진다든지, 혹은 자기가 항상 믿고 있다고 주장하던 것과 정반대되는 어떤 말을 독백처럼 하고는 이내 그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예 등은 모두 이 저항현상의 보기들이다. 실제로 우리 에너지의 상당 부분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 자신으로부터 감추기 위해 소비되고 있으며, 그런 억압된 지식의 정도는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괜찮을 정도로 엄청나다.

이 진실의 억압이란 개념을 시의 형태로 표현한 탈무드의 전설이 있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천사가 머리를 만지면 그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 가지고 있던 진실에 대한 지식을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만약 그 아이가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그 아이의 일생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의 주제로 되돌아가자. '존재'는 거짓된 환상의 그림이 아닌 실재와 관련된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의 영역을 증가시키려는 어떤 시도는 자신과 타인, 그리고 우리 주위의 세계의 실재에 대한 통찰의 증대를 뜻한다. 유대교와 기독교의 윤리적 중심목표, 즉 탐욕과 증오의 극복은 불교의 중심요소이며 유대교와 기독교에서도 어떤 구실을 하고 있는 또 다른 요소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그것은, 존재에의 길은 표면을 꿰뚫고 실재를 통찰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4. 주고, 공유하고, 희생하려는 의지

 

현대사회에서는 생존의 소유양식이 인간 본성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므로 사실상 변화시킬 수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게으르며 선천적으로 수동적이므로, 물질적 소득이나... 또는 배고픔이나... 또는 징벌의 공포에 의해 충동되지 않는 한 일이나 그밖의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는다는 정설 속에도 이러한 생각이 나타나 있다. 이 정설을 의심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이것이 우리의 교육방법과 작업방식을 결정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말들은 이 사회적 구조가 인간 본성의 요구를 따르고 있다고 인정함으로써 우리의 사회적 구조의 가치를 입증하려는 소망의 표현일 뿐이다. 과거와 현대의 여러 다른 사회의 구성원들에게는 인간의 선천적 이기심과 태만이라는 개념은 그 반대개념이 우리에게 생소하게 들리는 것처럼 이상하게 생각될 것이다.

실제로는 삶의 소유양식과 존재 양식은 둘 다 인간 본성의 잠재성이라는 것이다. 생존을 향한 우리의 생물적 충동은 소유양식을 더욱 진전시키려는 경향을 갖지만, 이기심과 태만이 인간에 내재한 유일한 성향은 아닌 것이다.

우리 인간은 존재하고, 우리의 능력을 표현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하고, 또 타인과 관계를 맺고, 이기주의의 감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뿌리 깊은 고유의 욕망을 갖고 있다. 이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한 권의 책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많다. (D. O. Hebb)은 이 문제의 핵심을 가장 보편적인 형태로 표현하였다. '행동에 관한 유일한 과제는 비능동성을 규명하는 것이지 능동성을 규명하는 것이 아니다.' 다음의 데이터는 이 일반적 명제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

1. 동물의 행동에 관한 데이터. 실험과 직접적인 관찰에 의하면, 많은 동물들이 물질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경우에도 어려운 과업을 기꺼이 수행한다.

2. 신경생리학 실험은 능동성이 신경세포 고유의 것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3. 유아 행동. 최근의 연구는 유아들에게는 복잡한 자극에 능동적으로 반응하려는 욕구와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이것은 유아가 외부 자극을 위협으로서 경험하며, 그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서 공격성을 동원한다는 프로이트의 가정과는 대조되는 발견이다.

4. 학습 행동. 많은 연구 결과에 의하면, 어린아이와 청소년이 게을러지는 것은 학습재료가 그들의 진정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없이 무미건조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강제와 권태가 제거되고 학습재료가 생생한 방식으로 제공된다면 현저한 능동성과 자발성이 생겨나리라는 것이다.

5. 작업 행동. 메이요(E.Mayo)의 고전적 실험에 의하면, 그 자체로선 몹시 권태로운 작업일지라도 작업자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것은 흥미로운 일이 된다. 그것은, 즉 그들이 호기심과 참여의욕을 불러일으킬 능력이 있는 생명력과 천부의 자질을 갖춘 인물에 의해 수행되는 실험에 자기가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유럽과 미국의 수많은 공장에서도 마찬가지 결과가 나타났다. 경영자들은 노동자에 관해 항상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 '노동자들은 사실 능동적 참여에는 흥미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직 더 놓은 임금이다. 따라서 이윤 분배는 더 높은 노동생산성의 유인이 될는지는 모르지만 노동자들의 참여는 그렇지 않다.' 그들이 사용하고 있는 작업방식에 관한 경영자들의 견해는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에 의하면-그리고 적지 않은 경영자들이 다음과 같은 확신을 갖게 되었다-노동자들이 그들의 작업상 역할에 있어 진정으로 능동적일 수 있고, 책임을 질 수 있고, 또 그 역할을 알 수 있을 경우, 이때까지 흥미 없던 작업에 눈에 띄게 흥미를 느끼며, 따라서 그들은 놀랄 만한 창의성, 능동성, 상상력, 만족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6. 사회적 및 정치적 생활에서 찾을 수 있는 풍부한 자료. 사람들이 희생하기를 원치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처칠은 제 2 차 세계대전 초에 그가 영국 국민에게 원하는 것은 피와 땀과 눈물이라고 선언했는데, 그는 그것에 의해 국민들의 사기를 꺾은 것이 아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들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희생하려는 욕망, 스스로를 바치려 하는 욕망에 호소한 것이었다. 적군에 의한 인구 밀집 지역의 무차별 폭격에 대한 영국인의 반응은-독일인이나 소련인도 마찬가지였다-공동의 고통이 사람들의 정신을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그것은 오히려 그들의 저항을 강화시켰으며, 폭격의 공포가 사기를 꺾어 전쟁 종결에 도움이 되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희생정신을 자극시킬 수 있는 것은 평화 시의 생활이 아니라 전쟁과 고통이고, 평화는 오히려 인간의 이기심을 더욱 조장시키는 듯이 보이는 것은 우리 문명에 대한 슬픈 비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평화 시에도 상황에 따라서는 헌신하려는 인간의 노력, 단결을 향한 인간의 노력이 개별적인 행동에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노동자들의 파업, 특히 제1차 세계대전 전의 파업은 본질적으로 비폭력적인 그런 행동의 본보기이다. 노동자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했지만, 동시에 그들은 그들 자신의 존엄성과 인간의 단결을 경험하는 만족을 위해 싸우느라고 혹심한 고난을 무릅썼고, 또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파업은 경제적 현상임과 동시에 또한 '종교적' 현상이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그런 파업이 아직 일어나기는 하지만, 요즘의 파업은-최근 들어 더 좋은 작업조건을 위한 파업이 증가했지만-대개의 경우 경제적 이유에서 일어난다.

주려는 욕구, 나누어 가지려는 욕구,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려는 의지는 아직도 간호사, 의사, 신부, 수녀 등과 같은 몇몇 직업의 구성원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직업의 사람들 가운데서도 도움과 희생을 입으로만 떠들어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이들 대다수의 성격은 그들이 헌신하고자 하는 그들의 가치관과 상응하고 있다. 우리는 똑같은 욕구가 여러 세기에 걸쳐 명멸했던 종교적, 사회주의적, 휴머니즘적 공동체에서 주창되고 발현되었음을 발견한다. 우리는 또 헌혈(보수 없이)을 자원하는 사람들에게서, 또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는 많은 상황에서 주려는 의지를 발견한다. 우리는 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주려는 의지의 발현을 본다. '거짓된 사랑', 즉 상호 간의 이기심의 공유는 사람들을 더욱 이기적으로 만든다(더구나 이것은 종종 나타나는 경우이기도 하다).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능력, 다른 사람에게 주는 능력을 증가시킨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 안에서 전세계를 사랑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는 적지 않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이 풍족한 가정 안에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치와 이기심을 못견뎌하는 것을 발견한다. 자기 자녀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그들은 그들의 생활의 죽음과 고립에 저항한다. 실상 그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두드러진 예를 과거 역사에서 찾아본다면 로마 제국의 부유층의 자녀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궁핍과 사랑의 종교를 받아들였다. 또 하나의 예는 석가이다. 그는 왕자로서 그가 원하는 모든 사치와 쾌락을 누릴 수 있었지만, 소유와 소비는 불행과 고통을 초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좀 더 최근의 예로는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상류계급, 나로드니키(Narodniki)의 자녀들이 있다. 나태와 불의의 생활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그들은 부유한 가정을 떠나 가난한 소작인들에게 가담하여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러시아 혁명 투쟁의 기초를 닦는 데 이바지했다.

미국과 독일의 부유층 자녀들에게서도 유사한 현상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부유한 가정환경 안에서의 생활을 권태롭고 무의미하게 생각하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세상의 냉담함과 개인적인 이기주의 때문에 핵전쟁을 향해 표류해 가는 세계정세를 참을 수 없다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가정환경을 저버리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찾는다.

그러나 어떤 건설적 노력도 성공할 것 같지 않으므로, 그들은 여전히 불만에 싸여 있다. 그들 대부분은 원래는 가장 이상주의적이고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세대였으나, 현시점에서는 전통, 성숙, 경험, 정치적 지혜 등이 결여된 탓으로 자포자기에 빠지게 되거나, 자신들의 능력과 가능성을 과대평가하는 자기도취에 빠져서 불가능한 일까지도 폭력에 의해 성취하려하고 있다. 그들은 이른바 혁명단체를 구성하여 테러 행위와 파괴행위로써 세계를 구원해 보려는 기대를 갖고 있지만, 그들의 이런 행동이 폭력과 비인간성으로 향하는 일시적 경향을 가속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사랑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그 대신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려는 소망에 불타고 있다(자기희생은 사랑하려는 욕망이 강렬하면서도 그 능력을 상실한 사람들이 흔히 찾는 해결책이다.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희생하는 데서 고도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자기희생에 뛰어드는 젊은이들은 '사랑의 순교자들', 즉 삶을 사랑하기 때문에 살기를 바라고, 자신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 죽어야 할 때에만 죽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과는 다르다. 자기희생적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고발당한 자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고발자이기도 하다. 우리의 사회체제 내에서는 가장 뛰어난 젊은이 중 약간은 지나치게 고립되고 절망에 빠져 버리므로 그들이 절망에서 벗어나는 길은 파괴와 광신주의밖에 없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화를 경험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종의 특성이 되는, 또한 인간 행동의 가장 강력한 동인의 하나인 존재의 특수한 조건에 뿌리박고 있다. 본능적인 결정 요소를 극소화하고 이성적 능력의 발전을 극대화함으로써 우리 인간은 우리가 원초적으로 갖고 있던 자연과의 일체성을 잃어버렸다.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느낌-이런 느낌은 우리를 정신이상으로 몰아간다-을 갖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다른 인간 및 자연과의 새로운 결함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바라는 이 인간의 욕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즉 어머니, 우상, 종족, 민족, 계급, 종교, 협동단체, 직업적 조직 등과의 공생적 유대에서 경험된다.

물론 이들 유대관계는 가끔 중복되며, 어떤 종파나 폭력단체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혹은 전쟁 시 국민적 히스테리의 폭발처럼 망아의 형태를 띠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1 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이 망아적 형태의 '일체화'의 극단적인 경우를 보여주었다. 갑자기, 불과 하루이틀 사이에 사람들은 평생 동아 품어오던 평화주의, 반 군국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포기해 버렸고, 과학자들도 평생 동안의 훈련으로 쌓아 올린 객관성, 비판적 사고, 공정성을 내던지고 커다란 '우리'에 가담하였다.

다른 사람들과의 일체화에 대한 욕망은 이상이나 확신에 기초를 둔 단결이라는 가장 고귀한 행동으로도 나타나지만, 사디슴이나 파괴 같은 가장 저열한 행동으로도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적응하려는 욕구의 주된 원인이기도 하다. 인간은 죽음보다도 버림받는 것을 더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욕망이 그 사회의 주어진 사회경제적 구조라는 조건 아래서 어떤 종류의 일체화와 단결을 조성하느냐, 그리고 또 어떤 종류의 일체화와 단결을 조성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인간에게 두 가지 경향, '소유'하려는 경향-이것은 궁극적으로 분석해 보면 생존에 대한 욕망이라는 생물학적 요소에 기인한다-'존재'하려는-나누어 갖고, 주고, 희생하려는-경향이 있음을 시사하는 듯하다. 이 후자의 경향은 인간생존의 특유한 조건과, 다른 사람과 하나가 됨으로써 자기의 고립을 극복하려는 고유의 요구에 기인하고 있다. 모든 인간내부에서 일어나는 이 모순된 투쟁 중에서 한편이 우세하도록 결정하는 것은 사회구조와 가치관, 관습 등이다. 소유에 대한 탐욕을 조장하고, 그 결과 생존의 소유양식을 강조하는 문화는 인간의 한쪽 잠재성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며, 존재와 공유를 조장하는 문화는 인간의 또 다른 쪽의 잠재성에 뿌리박고 있다. 우리는 이 두 잠재성 중 어느 쪽을 키울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이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어느 한쪽의 해결책으로 기울게 하는 우리의 주어진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따라 우리의 결정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집단행동 분야에 관해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아주 깊이 뿌리박혀 거의 변화시킬 수 없는 타입의 소유 혹은 존재를 각각 나타내는 극단적인 그룹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고, 대다수 집단의 경우에는 양쪽의 가능성이 공존하며, 두 가지 가능성 중 어느 편이 우위를 차지하고 어느 편이 억눌리느냐 하는 것은 환경적 요소에 달려 있는 것 같다.

이런 가정은 환경이 유아기 및 소년기 성격의 발달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만, 이 시기가 지나면 성격은 고정되어 외부적 사건에 의해 거의 변화되지 않는다는 정신분석학적 정설과 모순된다. 이 정신분석학적 정설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것은, 보통은 똑같은 사회적 조건이 계속 유지되므로 어린 시절의 기본적 조건이 대개의 경우 후기에까지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있을 대, 즉 부정적 세력이 억제되고 긍정적 세력이 조성, 고무될 때 행동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는 예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요약하면, 나누어 갖고, 주고, 희생하려는 욕구의 빈도와 강도는 인류라는 종의 생존조건을 생각해 볼 때 놀라운 것이 아니다. 놀라운 것은 산업사회(또 그 밖의 여러 사회)에서 이기적 행동이 상례가 되고 단결된 행동이 예외가 될 정도로 이 욕구가 억제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면, 실로 이 현상은 일체화에 대한 욕구에서 나온 것이다. 그 원리가 취득이요, 이윤이요, 또 재산인 사회는 소유지향의 사회적 성격을 만들어내며, 일단 이 주된 양식이 확립되고 나면 아무도 아웃사이더, 다시 말해서 이 소비지향의 사회로부터 추방된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 위험을 피하기 위해 모든 사람은 서로 적의만을 공유하고 있는 다수에 순응하게 된다. 이렇게 이기적인 태도가 우위를 차지한 결과로 우리 사회의 지도자들은 사람들이 물질적 이득에의 기대에 의해서만, 즉 보상에 의해서만 행동의 동기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들은 사람들이 단결과 희생에의 호소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전시가 아니고는 이런 호소를 하는 경우는 드물며, 그 결과 그런 호소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관찰할 기회를 놓치고 있다.

매수만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유일한 방법(혹은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완전히 다른 사회 경제적 구조, 전혀 다른 인간성의 구도가 설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6: 소유와 존재, 그 새로운 측면

 

1. 안정감과 불안감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는 것, 퇴보하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의존하는 것은 우리를 강하게 유혹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그것을 굳게 지킴으로써 그 안에서 우리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 미지의 것, 불확실한 것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것은 두렵고,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회피하려 한다. 실제로 그 '발걸음'은 일단 내디딘 '후에는' 그렇게 위험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발걸음을 내딛기 '전에는' 그 너머에 펼쳐질 새로운 국면은 위험해 보이고, 따라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낯익은 것, 시험된 것만이 안전하다. 혹은 그렇게 보인다. 새로운 발걸음은 늘 실패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사람들이 자유를 그토록 두려워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말할 것도 없이 생애의 각각의 상태에서 오래 되고 습관화된 것은 서로 다르다. 어릴 때는 우리는 우리의 육체와 어머니의 품(본래적으로 아직 구별되지 않은)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다음 단계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세계로 향해 서게 하고 세계 속의 자기 자리를 만드는 과정에 착수한다. 우리는 물건을 '소유'하려고 원하기 시작한다. 어머니, 아버지, 형제자매, 장난감을 '갖게 되고', 좀더 지나면 지식, 직업, 사회적 지위, 배우자, 자녀들을 '얻게 되며', 일종의 내세라고 할 수 있는 것, 즉 매장지, 생명보험, 유언 같은 것을 소유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소유에 의한 안정감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비전을 가진 사람들, 새 길을 개척하는 사람들, 전진하는 용기를 갖는 사람들을 찬양한다. 신화에서는 이런 생존의 양식이 '영웅'에 의해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영웅들이란 그들이 가진 것-그 토지, 가족, 재산 등-을 버리고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두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모험을 감행한 사람들이다. 불교의 전통에서 보면, 석가모니는 자기의 모든 소유물, 힌두교 신학에 포함된 모든 확실성-지위, 가족 등-을 내던지고 집착하지 않는 삶을 향해 나아간 영웅이다. 유대교의 전통에서 보면 아브라함과 모세가 영웅이다. 기독교의 영웅은 예수이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면서 모든 인류에 대한 충만된 사랑에서 행동한 영웅인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세속적인 영웅들을 가지고 있다. 목표는 승리요, 그들의 자만심의 충족이며 정복이다. 그러나 헤르쿨레스와 오디세우스는 숭고한 영웅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모험과 위험을 겁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동화에 나오는 영웅들도 같은 기준, 즉 버리고, 전진하고, 불확실성을 무릅쓴다는 것에 부합된다.

우리가 이들 영웅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 것은 우리도 가능하다면 그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고 싶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우리에게는 그런 생활이 불가능하고 오로지 영웅들만이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영웅은 우상이 되고 우리는 움직일 수 있는 스스로의 능력을 이들 우상에게 넘겨주고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무른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우리 자신은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머무른다. 어떻게 보면 이 논리는, 영웅이 되는 것이 바람직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한편 어리석고 자기의 이익에 반대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조심성 많고 무엇인가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안정감을 느끼지만 그들은 필연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 명성, 자아-자기 외부의 어떤 것-에 의존하고 있다. 만약 그들이 자기가 가진 것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실제로 무엇이든 소유한 것은 잃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산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위, 친구 등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사람은 언제 어떤 순간에 생명을 잃을지 모르고, 머지않아 반드시 잃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나를 나의 소유라 가정하고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어버리면 나는 누구일 것인가?' 그릇된 삶의 방식의 증인으로서, 패배한, 김빠진, 슬픈 존재 외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은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까 봐 항상 걱정하게 된다. 도둑을 두려워하고, 경제적 변화를 두려워하고, 혁명을 두려워하고, ,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사랑을, 자유를, 성장을, 변화를, 그리고 미지의 것을 두려워한다. 따라서 나는 끊임없이 걱정을 한다. 건강을 잃을까 두렵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다른 것들도 잃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까지 겹쳐 만성적 우울증에 걸리게 된다. 더 잘 보호받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 때문에 나는 방어태세를 취하게 되고, 고집스러워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외로와진다. 입센은 '페르 귄트(Peer Gynt)'에서 이 자기중심적 인간형을 훌륭하게 묘사하였다. 주인공의 머리는 자기 자신으로만 가득 차 있다. 그는 극단적인 이기주의 속에서 자기는 '자기 자신'이라고 믿는다. 그는 '욕망의 덩어리'였던 것이다. 임종에 이르러서 그는 자기의 소유 중심의 생활로 인해 자기 자신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자기는 알맹이가 없는 양파와 같았다는 것을, 즉 한 번도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 미완성의 인간이었음을 깨닫는다.

가지고 있는 것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으로부터 생기는 걱정과 불안 존재 양식에는 없다. '나는 존재하는 나'이고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내가 아니라면 아무도 나의 안정감과 동일성을 빼앗거나 위협할 수 없다. 나의 중심은 나 자신 안에 있으며 나의 존재 능력, 나의 기본적 힘의 발현능력은 내 성격구조의 일부이며, 그것을 좌우하는 것은 나다. 이것은 정상적 삶의 과정의 경우에도 들어맞는 것이다. 물론 사람을 무력하게 하는 병, 고문, 또는 기타 강력한 외부적 제약 등과 같은 상황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소유는 사용에 의해 감소되는 어떤 것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그 반면 존재는 실행에 의해 성장한다(없어지지 않는 '불타는 나무'는 바로 이 역설에 대한 성서적 상징이다). 이성의 힘, 사랑의 힘, 예술적, 지적 창조의 힘 등 모든 기본적 힘은 발현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사용되는 것은 잃어버리지 않고 반대로 보관하는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존재에 있어서의 안정감에 대한 유일한 위협은 재 자신 속에 있다. 삶에 대한 신뢰의 결핍, 내 생산적 능력에 대한 믿음의 부족, 퇴보적 경향, 내적 나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내 생활을 떠맡게 하려는 의지 등에 그 위협은 도사리고 있다. 그러나 이들 위험은 존재에 있어 '내재'하는 것은 아니다. 상실의 위험이 소유에 있어 내재적인 것과는 사정이 다르다.

 

2. 연대와 적의

 

어떤 것을 사랑하고 좋아하고 즐기면서 그것을 '소유'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경험을 앞에서 스즈끼가 일본 시와 영국 시를 비교하면서 언급한 바 있다. 소유와 상관이 없는 즐거움을 경험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서구인에게 있어서는 진실로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스즈끼가 든 꽃의 예는, 꽃을 보는 대신 산책자가 산이나 목장 또는 기타 물리적으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을 바라보았다면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확실히 산을 진정으로 보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그것을 상투적으로 대할 뿐이다. 그들은 산을 보는 대신 그 이름과 높이를 알려고 한다. 혹은 그 위에 오르고 싶어한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로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일부의 사람들은 진정으로 산을 보고 그것을 즐긴다. 마찬가지 이야기가 음악작품을 감상하는 데에도 해당된다. ,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의 레코드를 사는 것은 그 작품을 소유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예술을 즐긴다고 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실은 그것을 '소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진정한 기쁨을 가지고 '소유'에 대한 충동 없이 음악과 같은 예술에 반응하리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따금 사람들의 반응을 그들의 얼굴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최근에 나는 중국 서커스단의 멋진 곡예사와 마술사들이 출연하는 텔레비전 프로를 본 일이 있다. 프로 도중 카메라는 군중 속에 있는 개개인의 반응을 잡기 위해서 관중들을 자주 비춰주었다. 대개의 얼굴은 우아하고 생생한 공연에 대한 반응으로 밝게 빛나고 생기에 차고 아름다워 보였다. 극소수의 사람들의 얼굴만이 차갑고 무감동하게 보였다.

소유에 대한 소망 없이 즐기는 예는 어린아이들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서 쉽사리 볼 수 있다. 여기에도 또한 상당한 정도의 자기자만적 행동이 개재된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어린아이를 사랑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린아이에 대한 진정하고 생생한 반응은 결코 드문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그 이유의 일부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 청소년이나 성인에 대한 감정과는 대조적으로 대개의 사람들은 어린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따라서 그들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반응할 만큼 자유로운 감정을 갖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방해하면 이런 자유로운 감정은 느낄 수 없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소유에 대한 갈망 없이 즐기는 가장 적절한 예는 대인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한 남자와 한 여자는 여러 이유에서 서로를 즐길 수 있다. 각자는 상대방의 태도, 취미, 생각, 성질, 또는 전인격을 좋아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소유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이 상호적인 즐거움이 항상 성적인 소유 욕망으로 귀결된다. 존재 양식이 우위를 차지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상대방이 즐길 만하고 성적 매력도 있지만 즐기기 위해서 상대방을 (테니슨의 시구를 인용한다면) '꺾어야' 할 필요는 없다.

소유지향의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거나 찬양하는 사람을 '갖기'를 원한다.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 선생과 학생 간의 관계, 친구들 간의 관계에서 이것을 볼 수 있다. 어느 쪽도 상대방을 단순히 즐기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각자는 상대방을 독점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이들은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다른 사람들을 질투한다. 각각의 파트너는 마치 난파된 선원들이 살기 위해서 나뭇조각을 찾듯이 상대방을 찾는다. 대체로 '소유' 관계는 답답하고 부담스러우며 갈등과 질투로 가득 차게 된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생존의 소유양식에 있어서의 개인 간의 관계는 그 기본적 요소가 경쟁, 대립, 공포이다. 소유 관계의 대립적 요소는 소유 관계의 본질에서 파생된다. '나는 내가 가진 것'이기 때문에 소유가 내 주체성의 근본일 경우 소유하려는 소망은 필연적으로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 가장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을 낳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탐욕'이 소유지향의 당연한 결과가 된다. 그것은 수전노의 탐욕일 수도 있고,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의 탐욕일 수도 있고, 난봉꾼이나 바람둥이 여자의 탐욕일 수도 있다. 그 탐욕이 어떤 것이든 탐욕스러운 사람은 결코 충분히 가질 수는 없으며, '만족할' 수도 없다. 배고픔 같은 육체의 생리에 따르는 일정한 충족점이 있는 생리적 욕구와는 달리 '정신적' 욕구는-모든 탐욕은 그것이 육체를 통해 만족 될지라도 정신적인 것이다-충족점이 없다. 그 포화점은 그것이 극복해야 할 내적 공허감, 권태, 외로움, 침울 등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소유하고 있는 것은 이런저런 형태로 빼앗길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위험에 대비하여 자기 존재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이 소유해야만 한다. 모두가 더 많이 소유하기를 바란다면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빼앗아 가려는 이웃의 공격적 의도를 두려워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공격을 막으려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하며, 예방적으로 자기가 공격적이 되어야 한다. 또 아무리 대량으로 생산하더라도 결코 '무한한' 욕망을 따라갈 수는 없으므로, 각 개인들은 서로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서 경쟁과 대립을 일으키는 수밖에 없다. 이 싸움은 절대적 풍요의 상태에 도달될 수 있다고 해도 계속될 것이다. 육체적 건강이나 매력, 소질, 재능을 보다 적게 가진 사람들은 '더 많이' 가진 사람들을 몹시 부러워할 것이다.

소유양식과 그 결과로서의 탐욕이 필연적으로 사람들 간의 대립과 투쟁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개인과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들 간에도 적용된다. 국가가 소유와 탐욕을 주된 행동 요인으로 하는 국민들로 구성되어 있는 한 그 국가들 간에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 국가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국가가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낼 것이며, 전쟁이나 경제적 압력이나 위협 등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그들은 우선 이런 수단을 더 힘이 약한 국가들을 상대로 사용할 것이며, 또 공격받게 될 국가보다 더 강력한 동맹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그 국가가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 정복하려는 욕망이 사회적 성격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평화로운 시대도 있다. 그러나 항구적인 평화와 일시적 현상인 평화, 즉 힘을 규합하고 산업과 군대를 정비하는 시기와는 구별되어야만 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구적 조화의 상태인 평화와 근본적으로 휴전에 불과한 평화는 서로 다른 것이다. 19세기와 20세기에도 휴전의 시기는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역사 무대의 주역들 간의 만성적인 전쟁상태로 특징지워진다. 국가들간의 조화로운 관계가 지속되는 상태로서의 평화는 소유구조가 존재구조로 대치되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소유와 이윤을 위한 투쟁을 고무하면서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이며, 또한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람들이 자기네들은 명백한 선택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 즉 그들의 성격의 근본적 변화냐 아니면 전쟁의 영구화냐 둘 중 하나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 선택은 이미 오래전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지도자는 전쟁을 선택하였고 국민들은 그들을 추종하였다. 새로운 무기의 파괴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증가된 오늘날에 와서는 이 선택은 이미 전쟁이 아니라 서로간의 자멸로 변모하고 있다.

국제전쟁에 해당되는 이 사실은 계급투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계급 간의 투쟁은 본질적으로 착취자와 피착취자 간의 투쟁으로, 탐욕의 원리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항상 존재하여 왔다. 착취의 욕구나 가능성이 없던 사회, 탐욕스런 사회적 성격이 없던 사회에서는 계급투쟁은 없었다. 그러나 소유양식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회에는, 가장 부유한 사회일지라도 계급이 있게 마련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무한한 욕망이 있는 이상은 아무리 많은 생산이라 하더라도 이웃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만인의 환상을 따라갈 수는 없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더 강하고, 더 현명하고, 환경조건이 더욱 좋은 사람들은 자신을 위한 더욱 좋은 위치를 확립하여, 힘이나 폭력 혹은 암시를 써서 힘이 약한 사람들은 이용하려고 한다. 억압된 계급이 그들의 지배자를 뒤집어엎는 등의 경우도 있다. 어쩌면 계급투쟁에서 폭력성이 줄어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투쟁은 탐욕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사라질 수가 없다. 이른바 사회주의 사회의 계급 없는 사회라는 생각도 그것이 탐욕의 정신으로 충만되어 있는 한 탐욕스러운 국가 간의 영구적인 평화라는 생각이나 마찬가지로 환상적이고, 또 위험하다.

존재 양식에서는 사적 소유(사유재산)는 거의 정서적인 중요성이 없다. 무엇을 즐기기 위해서, 또는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서까지도 그것을 소유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 양식에선 한 사람 이상의 사람들-아니, 수백만의 사람들-이 한 대상을 함께 즐길 수가 있다. 아무도 그것을 즐기는 조건으로서 그것을 가질 필요가 없고, 또 가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싸움을 피하도록 해 줄 뿐 아니라 가장 심원한 형태의 인간 행복 중의 하나, 즉 즐거움을 창조한다. 어떤 사람에 대한 찬양과 사랑을 공유하는 것, 어떤 생각, 음악, 그림, 상징을 공유하는 것, 어떤 의식에 함께 참석하는 것, 슬픔을 나누어 갖는 것은 (그 개성을 제한하지 않고)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공유의 경험은 두 개인 간의 관계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것은 모든 위대한 종교적, 정치적, 철학적 운동의 기초이다. 물론 이것은 각 개인이 진정으로 사랑하거나 찬양할 때만 (그 정도에 따라) 적용된다. 종교적, 정치적 운동이 경화될 때, 암시와 위협으로 사람들을 조종할 때 공유는 사라진다.

자연은 공유의 원형-또는 상징-을 성행위에다 설정했지만, 경험적으로 볼 때 성행위가 반드시 공유되는 즐거움을 아니다. 흔히 행위자들은 너무 자기도취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욕이 강한 나머지 동시적 쾌락이라고는 할 수 있지만 쾌락을 공유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자연은 소유와 존재의 차이점을 덜 모호하게 상징으로 제시하고 있다. 남근의 발기는 완전히 기능적이다. 남성은 발기를 재산이나 영구적 자질처럼 '소유'하지는 않는다(이런 식으로 소유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남근은 남자가 흥분상태에 있는 동안만, 그가 그의 흥분을 일으킨 사람을 욕구하는 동안만 발기상태에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이유로 무엇인가가 이 흥분을 방해하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게 된다. 거의 모든 종류의 행동과는 대조적으로 발기만은 거짓으로 꾸밀 수가 없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가장 뛰어난 정신분석학자의 한 사람인 조지 그로테크(George Groddek)는 남자는 결국 단 몇 분 동안만 남자일 뿐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어린아이라고 말하곤 했다. 물론 그로데크의 이 말은 남자의 전체적 존재가 어린아이가 된다는 뜻은 아니고, 많은 남자들이 자기가 남자인 증거로 내세우는 바로 그 측면만을 말한 것이다.

 

3. 기쁨과 쾌락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삶이란 '기쁨'을 가져온다고 가르쳤다. 오늘날의 독자는 '기쁨'이라는 말에 별로 주목하지 않고 에크하르트가 말한 것이 쾌락일 것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기쁨과 쾌락을 구별한다는 것은 중요하다. 존재 양식과 소유양식 간의 구별과 관련해서 이것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기쁨 없는 쾌락'의 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그 차이를 인식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쾌락이란 무엇인가? 이 말은 여러 가지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지만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그 용례를 고려해 볼 때,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의 충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욕망의 충족이라고 정의하면 가장 적절할 것이다. 그런 쾌락은 강도가 높은 것일 수도 있다. 사회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느끼는 쾌락, 많은 돈을 버는 데서 느끼는 쾌락, 복권당첨 때 느끼는 쾌락,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적 쾌락, 마음껏 먹음으로써 얻어지는 쾌락,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맛보는 쾌락, 음주, 환각, 약품 등에 의한 정신적인 흥분상태, 사디슴, 혹은 살아 있는 것을 죽이거나 난도질하려는 격정을 충족시키는 데서 느끼는 쾌락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부자나 유명인사가 되기 위해서는 바쁘다는 뜻에서 매우 활동적이어야 하지만, '내적 탄생'이라는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그들은 '드릴'을 느끼고 '극도의 만족을 느끼며', '절정'에 이르렀다고 느낄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절정인가? 아마 흥분의 절정, 만족의 절정, 환각적, 광란적 상태의 절정일 것이다. 이런 상태에 이르도록 하는 것은 그들의 열정이다. 그러나 이 열정은 인간적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인간 조건의 적절한 해결을 가져오지 않는 한 병적인 것이다. 그러한 열정은 더욱 위대한 인간의 성장이나 힘을 낳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간을 불구로 만든다. 극단적 쾌락주의자의 쾌락, 항상 새로운 욕망 충족, 현대사회의 쾌락 등은 서로 정도가 다른 '흥분'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것들은 '기쁨'을 갖다 주지는 못한다. 사실은 기쁨이 없기 때문에 항상 새롭고, 한층 더 자극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현대사회는 3천 년 전의 유대인들과 똑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장 사악한 죄악 중의 하나에 대해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든 사물의 충만함 가운데서 마음속의 '기쁨''즐거움'으로 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신명기 28 : 47). 기쁨은 생산적 능동성에 따른 부수물이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갑자기 끝나버리는 '절정경험(peak experience)'이 아니고 오히려 평원이고, 사람의 본질적인 능력의 생산적 표현을 동반하는 감정상태이다. 기쁨은 순간적인 몰아의 불꽃이 아니다. 기쁨은 존재와 함께 오는 빛이다.

쾌락과 드릴은, 이른바 절정에 이른 뒤에는 슬픔을 낳는다. 왜냐하면, 드릴은 경험했지만 그릇은 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의 내적 힘은 증가되지 않은 것이다. 그는 비생산적 활동의 권태를 돌파하려 하였고, 잠시 동안 이성과 사랑을 제외한 그의 모든 에너지를 결합하였다. 그는 인간의 힘을 벗어나 초인이 되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그는 승리의 순간에 이른 것같이 느낀다. 그러나 그 승리에 이어 깊은 슬픔이 따른다. 그의 내부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접 후의 동물은 슬프다'는 격언은 똑같은 현상을 사랑이 없는 섹스와 관련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성행위 역시 강도 짙은 흥분의 '절정경험'이다. 따라서 드릴이 있고 쾌락적이다. 그러나 끝나고 나면 필연적으로 실망이 뒤따른다. 섹스의 기쁨은 육체적 교접이 동시에 사랑의 교접일 경우에만 경험할 수 있다.

예상한 대로 '존재'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종교적, 철학적 체계에서는 기쁨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불교에서는 쾌락을 배격하지만, 니르바나(nirvana) 상태를 기쁨의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나 그림에 나타나 있다.

구약성경과 그 이후의 유대 전통은 탐욕의 충족에서 얻는 쾌락에 대해서는 경고하면서도 기쁨 속에서 존재를 동반하는 분위기를 갖고 있다. '시편'은 하나의 거대한 기쁨의 찬가인 15편의 성가로 끝나고 있다. 이 박진감 있는 성가는 두려움과 슬픔으로 시작되어 기쁨과 즐거움 속에 끝난다. 안식일은 기쁨의 날이며 메시아의 시대에는 기쁨이 넘치는 분위기가 될 것이다. 예언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쁨의 표현이 많이 나타난다.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이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기 때문이니라'(예레미아 31 : 1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이사야 12 : 3). 또 하느님은 예루살렘을 '나의 기쁨의 성읍'(예레미야 49 : 25)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은 탈무드에서도 마찬가지로 강조되어있는 바다. '미츠바(mitzvah ; 종교적 의무를 수행하는 것)의 기쁨만이 성령을 얻는 유일한 길이다'(베라코드 31, a). 기쁨은 매우 근본적인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탈무드의 율법에 의하면 근친자에 대한 상도 안식일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중단되어야만 한다. 시편의 한 구절 '기쁨으로 하나님을 섬기라'를 모토로 삼고 있는 하시딤 운동은 기쁨을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로 하는 생활형태를 창조하였다. 슬픔과 우울은 뚜렷한 죄는 아니더라도 정신적인 과오의 징후로 간주되었다.

기독교의 발전에서는 복음-'즐거운' 소식-이라는 이름이 즐거움과 기쁨이 차지하는 중심적인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기쁨은 소유를 포기한 결과요 슬픔은 소유에 집착하는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 13 : 4419 : 22를 보라). 예수의 많은 말 중에서 기쁨은 존재 양식에 있어서 삶의 부수물로 이해된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복음 15 : 11).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사상에 있어서도 기쁨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의 말 중에는 웃음과 기쁨의 창조적 힘이라는 개념을 가장 아름답고 시적으로 표현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나님이 그 영혼을 향해 웃고 그 영혼이 하나님께 웃음을 되돌릴 때 삼위일체의 신격이 탄생한다. 과장해서 말하면, (하늘의)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웃고 그 아들이 다시 아버지에게 웃음을 되돌릴 때 그 웃음은 즐거움을 주며, 그 즐거움은 기쁨을 주고, 그 기쁨은 사랑을 주고, 사랑은 그 성령이 하나인 '삼위일체'의 신격을 준다." 스피노자 또한 그의 인류학적 윤리체계에서 기쁨에다 최고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쁨은 보다 작은 완성에서 보다 큰 완성으로 나가는 인간의 통로이다. 그리고 '슬픔'은 보다 큰 완성에서 보다 작은 완성으로 나가는 인간의 통로이다." 스피노자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그 말을 그의 전 사상체계의 문맥 안에 포함시켜 생각해야 할 것이다. 타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인간 본성의 전형'에 접근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고 이성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될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 본성 속에 잠재적으로 내재해 있는 선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이해하는 '''우리가 설정한 인간본성의 전형에 더욱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라고 우리가 확신하는 모든 것'이다. 또 그가 이해하고 있는 '''반대로... 우리가 그 원형에 도달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확신하는 모든 것'이다. 기쁨은 선이며, 슬픔 (비애 또는 우울)은 악이다. 기쁨은 덕이며, 슬픔은 죄이다.

따라서 기쁨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 된다는 목표에 점점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경험하는 것이다.

 

4. 죄와 용서

 

죄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학적 사상의 고전적 개념으로 볼 때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의지에 대한 '불복종'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두 종교가 공통으로 믿고 있는 최초의 죄의 원천, 즉 아담의 불복종에서 현저하게 드러난다. 유대교의 전통에서는 이 행위를 기독교에서처럼 아담의 모든 자손들이 물려받은 ''죄로서 이해하지 않고 (아담의 자손들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는 않는) 단순한 '최초의' 죄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공통적 요소는, 어떤 명령이든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은 죄'이다'라고 보는 견해이다. 성경의 그 부분에서의 하나님의 이미지가 동양의 왕 중의 왕의 지위를 본 딴 완전한 권위의 그것이고 보면, 이것은 놀라운 것이 못 된다. 교회는 거의 그 최초부터 사회적 질서에 순응하였고, 그 당시의 사회적 질서는 봉건주의로서 오늘날의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그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각 개인이 그것이 자기의 진정한 이익에 도움이 되든 안 되든 법률에 철저하게 복종할 것을 요구하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그것은 더욱 놀라운 것이 못 된다. 그 법률이 얼마나 억압적이었느냐 혹은 관대한 것이었느냐, 또 그 실시방법이 어떠했나 하는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무기를 휘두르는 '법률집행' 관리들뿐만 아니라 권위를 두려워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려움만으로는 국가의 정상적인 기능이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다. 시민은 이 두려움을 내면화하여 복종을 도덕적, 종교적 범주로, 즉 죄로 변모시켜야 한다.

사람들이 법률을 존중하는 것은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라 불복종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 죄의식은 권위 자체만이 부여할 수 있는 용서에 의해서 극복될 수 있다. 그러한 용서의 조건은 죄인이 회개할 것, 벌을 받을 것, 벌을 받음으로써 다시 복종할 것 등이다. (불복종), 죄의식, 새로운 복종(징벌), 용서의 악순환이 되풀이됨으로써 각각의 불복종 행위는 더욱 증가된 복종을 낳을 뿐이다. 극히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일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프로메테우스가 그들의 영웅이다. 제우스가 가장 잔혹한 형벌로 괴롭혔음에도 불구하고 프로메테우스는 복종하지 않으며, 또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는다. 그는 신에게서 불을 빼앗아다가 인류에게 주는 것은 훌륭한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복종하지 않았지만 죄를 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인류의 다른 여러 영웅(순교자)처럼 그는 불복종의 죄의 등식을 극복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영웅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소수에게만 특권이 허용되고 다수가 소수의 목적에 이용되며 다수는 남은 찌꺼기로 만족해야 하는 한, 불복종은 죄라는 의식이 자라나야만 했다. 국가와 교회가 협력하여 그 의식을 키웠다. 양자 모두 자신의 계층조직을 보호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불복종과 죄를 융합시키는 사상을 얻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다. 교회는 국가가 복종의 미덕을 갖도록 훈련시킨 신자들이 필요했다. 양자는 모두 가족제도를 이용했다. 그 기능은 아이가 최초로 그 독자적 의지를 보이는 순간부터 복종하도록 훈련시킨다(그것은 흔히 대소변 가리기 훈련으로 시작된다). 아이의 자기 의지는 그가 후에 시민으로서 정상적인 기능을 하도록 하는 준비로서 꺾어놓아야만 했다.

예부터 내려오는 신학적 및 세속적 의미에서의 죄는 권위주의적 구조 안에서 나온 개념이며, 이 구조는 생존의 소유양식에 속한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우리의 인간적 중심이 우리 자신에 있지 않고 우리가 복종하는 권위에 있다.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산적 능동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수동적 복종과 그 결과로서의 권위에 따른 시인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지도자(, 여왕, 또는 하느님 등의 세속적 혹은 영적 지도자)'가지며', 그에 대한 신뢰를 또한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도 아닌 한 (자신을 못 찾는 한) 안정감을 '갖는다'. 굴종이 반드시 굴종으로 의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부드러울 수도 있고 엄격할 수도 있으며, 정신적, 사회적 구조가 전적으로 권위주의적일 필요는 없으며 다만 부분적으로 그렇다는 등의 사실을 내세움으로써 '우리는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구조를 내면화할 정도로 소유양식 속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지고 있던 권위, 불복종, 죄에 대한 개념은 알폰스 아워(Alfons Auer)가 지극히 간결하게 강조한 바와 같이 매우 인도주의적인 것이었다. , 그는 불합리한 권위에의 불복종의 죄가 아니며 인간의 '복리'를 침해하는 것이 죄라고 하였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복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는 한 신은 우리에 의해서 모독될 수 없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인간 선(bonum humanum)은 완전히 주관적인 욕망에 의해 독단적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본능적으로 주어진 (스토아 학파적 의미로는 '자연적인') 욕망에 의한 것도 아니며, 또 신의 독단적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는 그것은 인간 본성과 그 본성에 기초해서 우리의 만족스런 성장과 복리에 기여하는 규범에 대한 우리의 이성적인 이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토마스 아퀴나스는 충실한 교회의 아들이요, 혁명적 분파에 대항하여 당시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던 인물이었으므로, 비권위주의적 윤리의 순수한 대변자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두 가지 종류의 불복종에 대해 모두 '불복종'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 내재하는 모순을 모호하게 하였다.)

불복종으로서의 죄는 권위주의적 구조, '소유'구조의 일부분이 되고 있지만 존재 양식을 근거로 한 비권위주의적 구조에서는 이것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다른 의미 또한 성서 중 인간 타락의 이야기 속에 암시되어 있으며, 그 이야기를 달리 해석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동산에 살게 한 다음, 생명의 나무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따 먹지 말라고 경고했다.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고 하느님은 여자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되도록 하였다. 둘은 다 발가벗고 있었지만 '그들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 말은 보통 옛날부터의 성적 관습, 남자와 여자는 성기가 노출되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여기는 관습의 입장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원문이 뜻하는 것이 이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더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서로 대했지만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고 부끄러워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를 각 개인으로 분리된 낯선 사람으로 경험하지 않고 '하나'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전인간적 상황은 타락 이후에 극단적으로 변한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 이성을 갖게 되고 선악을 의식하게 되고, 서로를 분리된 존재로 의식하게 되며, 그들의 본래의 일체성이 깨어지고 서로 타인이 되어 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서로 밀접하지만 나뉘어져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낀다. 그들은 아주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동료를 '발가벗은' 채 대하면서 동시에 서로간의 거리, 그들을 갈라놓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심연을 경험하는 수치를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만남, , 벌거숭이로 서로를 바라보는 이 만남을 가리기 위해 '각각 나뭇잎을 허리에 감았다' 그러나 죄나 수치는 가림으로써 없앨 수가 없다. 그들은 서로 사랑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육체적으로 서로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결합이 인간의 소원함을 풀어주지는 못한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암시되어 있다. , 이브는 아담을 보호하려 하지 않으며, 아담은 이브를 변호하지 않고 벌을 면하기 위해 그를 죄인으로 탄핵한다.

그들은 무슨 죄를 범했는가? 사랑의 결합행위 속에서 격리를 극복할 수 없는 분리되고 고립된 이기적 인간으로서 서로를 대한 것이다. 이 죄는 바로 우리 인간생존 속에 뿌리박혀 있다. 내재된 본능에 의해 생활이 결정되는 동물의 특징인 자연과의 원초적 조화를 박탈당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이성과 자의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다른 인간과의 완전한 격리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존재의 이런 상태, 사랑에 의해서 다리가 놓여지지 않은, 서로 간의 완전한 격리와 불화의 상태가 '지옥'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 절대적 격리라는 고문을 극복해야만 한다. 굴종에 의해서건 지배에 의해서건 혹은 이성과 의식을 침묵함으로써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이 가져다주는 성공은 순간적일 뿐이며, 진정한 해결에의 길을 가로막는다. 이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우리가 갇혀 있는 자기중심적인 뇌옥에서 벗어나 손을 뻗어 세계와 우리 자신을 '하나'로 하는 것뿐이다. 자기중심적인 분리가 엄청난 죄라면 그 죄는 사랑의 행위 속에서 보상(atonement)될 수 있다. 분리의 죄는 불복종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면'이 아닌 '치유'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 치유의 요소이다.

라이너 풍크(Rainer Funk)는 내게 비합일(disunion)로서의 죄의 개념은 예수의 비권위주의적 죄의 개념을 따르는 일부 신부들에 의해서도 제시된 적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앙리 드 뤼박의 저서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했다. , 오리게네스(Origenes)는 이렇게 말했다. '죄가 있는 곳에는 다양성이 있다. 반면에 덕이 지배하는 곳에는 단일성이 있고 합일(oneness)이 있다.' 또 증성자 막시무스(Maximus)는 아담의 죄로 인해 인류가 (내 것과 네 것 사이의 투쟁이 없이 조화로운 전체여야 하는데 개인이라는 모래 먼지로 변모했다' 고 말하고 있다. 아담으로 인해 파괴된 본래의 합일에 관한 비슷한 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아워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 속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다음은 드 뤼박이 요약한 것이다. '회복작업으로서의 구원은 필연적으로 잃어버린 합일의 부활, 즉 신과의 초자연적인 합일, 또 동시에 인간들 상호 간의 합일을 다시 얻는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권위주의적 체계인 소유양식에서는 죄는 불복종이며 참회, 징벌, 새로운 굴종에 의해 극복된다. 존재 양식, 즉 비권위적인 체계에서는 죄는 해소되지 않는 소원함이며, 이것은 이성과 사랑의 충분한 개화로 하나가 됨으로써 극복된다.

'타락'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그것은 이야기 자체가 권위주의적 요소와 자유주의적 요소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 속에서 각각 불복종과 소외로서의 죄의 개념은 완전히 상반되어 있다.

구약에 나오는 바벨 탑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인류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사실로 상징되는 합일의 상태에 도달하였다. 권력을 추구하는 그들 자신의 야망 때문에, 거대한 탑을 '소유하려는' 갈망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합일을 깨뜨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어떤 의미로는 이 탑의 이야기는 제2'타락'이며 인간성의 역사적 죄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신이 인간의 합일과 그에 따른 힘을 두려워한다고 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여 그들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세기 11 : 6 ~ 7).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타락의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신은 남자와 여자가 두 나무의 과일을 먹을 경우 그들이 발휘하게 될 힘을 두려워한다.

 

5. 죽음의 공포와 삶의 확인

 

사람이 자기 재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소유물에 바탕을 둔 안전의식이다. 나는 이 생각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보고자 한다.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은 다만 늙은이와 환자만의 두려움일까? 아니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우리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전생애를 침식하고 있는가? 죽음의 공포는 우리가 나아가 병으로 삶의 한계에 다가갈수록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의식하게 되는 것인가? 유년기에서 노년기까지의 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현상을 조사하고 그것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루려면 정신분석학자들의 체계적인 대규모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를 개인적인 사례에 국한할 필요는 없고, 사회정신분석학의 기존 연구방법을 사용해서 대집단을 대상으로 조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연구 결과가 현재는 없으므로, 우리는 얼마 안 되는 데이터로부터 잠정적 결론을 끌어내야만 한다.

인간 내면에 깊이 숨어 있는 불멸에 대한 욕망이 아마 가장 중요한 데이터이리라. 이 욕망은 인체를 보존하려는 여러 의식과 신앙에서 나타난다. 한편 오늘날의, 특히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사체의 '미용'에 의한 죽음의 부정도 단순히 죽음을 위장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억누르려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다-그것은 석가, 예수, 스토아학파 철학자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르친 방법이다. 그 방법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얼핏 삶의 정지에 대한 두려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에피쿠로스가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우리 곁에 없으며, 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분명히 죽음에 앞서 일어날지도 모르는 고통과 아픔에 대한 두려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죽음의 공포와는 다른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와 같이 불합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삶이 소유로서 경험될 때에는 그렇지 않다. 그 경우의 공포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고 '소유한 것을 잃는데' 대한 것이다. 내 육체를 잃는 두려움, 내 자아, 내 재산, 내 주체를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며, 비주체의 심연을 대해야 하는 두려움, '잃어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다.

소유양식 속에 사는 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어떤 이상적인 설명도 이 두려움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죽음의 시간에라도, 삶에 우리가 결합되어 있다는 재확인, 우리 자신의 사랑을 불태우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 두려움을 경감시킬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것은 죽음을 위한 준비로서가 아니라 '소유양식을 감소하고 존재 양식을 증대하는' 끊임없는 노력으로서 시작되어야 한다.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현명한 사람은 오직 삶에 대해 생각할 뿐,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과 마찬가지다. 모든 형태의 소유에의 갈망, 특히 자아의 속박을 벗어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약해질 것이다.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6. 지금, 여기 과거, 미래

 

존재 양식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존재하고, 소유양식은 다만 시간 속에만, 즉 과거, 현재, 미래에 존재한다.

소유양식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모은 것, 즉 돈, 토지, 명상, 사회적 지위, 지식, 자녀, 기억 등에 구속된다.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며 과거의 감정(혹은 명상처럼 생각되는 것)'기억함'으로써 느낀다(이것이 감상의 본질이다). 우리는 과거'이며' '나는 과거의 나(Iam what I was)'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는 이윽고 과거가 될 것에 대한 예측이다. 미래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소유양식으로 경험된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의 뜻은, 이 사람은 지금은 기지고 있지 않지만 이윽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드 회사의 광고 문구는 '당신의 미래에는 포드가 있다'인데, 이 말은 미래의 '소유'를 강조한 것이다. 어떤 사업 거래에서 '선물상품'을 팔고 사는 것도 비슷한 예이다. 소유의 기본적 경험은 과거를 다루는 미래를 다루든 똑같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마주치는 점이다. , 시간의 경계역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결하는 두 영역과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

존재는 반드시 시간 밖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영역은 아니다. 화가는 물감, 캔버스, 붓과 씨름해야 하며, 조각가는 돌, 끌과 씨름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창조적 행위, 그들이 창조하려는 것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은 한순간의 번득임, 또는 여러 번의 번득임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 비전 속에서 시간은 경험되지 않는다. 사상가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사상을 적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사상을 생각해 내는 것은 시간 밖에서 일어난 창조적 사건이다. 이것은 존재의 모든 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경험, 기쁨의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지금 그리고 여기는 영원이다.' , 시간을 초월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무한정으로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와의 관계에 대해서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가 언급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되새기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과거를 '소유'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과거는 죽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과거를 되살아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마치 그것이 지금 여기서 일어난 것과 같은 신선함으로 경험할 수가 있다. , 과거를 재창조할 수 있으며, 그것을 되살릴 수 있다(상징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는 과거이기를 중지하고 지금 그리고 여기에 '존재한다'.

미래도 또한 그것이 마치 지금 그리고 여기 있는 것처럼 경험할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자신의 경험 속에 미래의 상태가 아주 충분히 예측되어, '객관적으로', 즉 외적인 사실로서만 미래일 뿐 주관적 경험으로서는 미래가 아닐 때 생긴다. 이것이 (유토피아적 백일몽과는 대조적인) 진정한 유토피아적 사고의 본질이며, 진정한 믿음, 즉 미래를 현실로서 생생하게 경험하기 위해 '미래의' 외부적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믿음의 기초이다.

과거, 현재, 미래, 즉 시간의 모든 개념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로 인해서 우리의 삶 속으로 파고든다. , 제한된 우리의 삶,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하는 우리 육체의 요구, 우리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물질세계의 본질, 이런 것들이 시간을 우리 삶 속으로 파고들게 한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밤과 낮, 잠과 깨어 있음, 성장과 노쇠의 리듬, 노동으로 우리 자신을 지탱하고 방어해야 할 필요성, 이런 모든 요소들은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한, 또 우리 육체가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는 한 시간을 '존중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존중하는' 것과 우리가 그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존재 양식에서는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그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존중은 소유양식이 지배하는 때는 '굴복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물건만이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존재 양식에서는 시간은 왕위를 잃고,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지 못한다.

산업사회에서는 시간이 최고의 지배자가 된다. 오늘날의 생산양식은 모든 행동이 정확한 '시간제한' 속에 행해질 것을 요구한다. 끝없는 일관작업의 콘베어 벨트뿐만 아니라, 그렇게까지 지독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우리 활동이 시간에 의해 지배된다. 또한 시간은 단순히 시간일 뿐만 아니라, '시간은 돈이다'. 기계는 최대한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계는 스스로의 리듬을 노동자에게 강요한다.

시간은 기계에 의해서 우리의 지배자가 되었다. 우리는 자유시간에 한해서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업을 조직화하듯이 우리의 여가까지도 조직화한다. 또한 우리는 완전히 게을러짐으로써 시간이라는 전제군주에 반항한다. 시간의 요구에 불복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지만, 실상 우리는 이때 시간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잠시 가석방되어 있는 데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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