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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충돌 2

Bollnow 2024. 5. 7. 10:07

5. 경제와 인구, 도전하는 문명

 

토착화와 종교의 부활이 범세계적 현상이긴 하지만, 특히 아시아와 이슬람권에서 서구에 대한 문화적 자긍심과 도전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와 이슬람은 지난 2, 30년 동안 가장 역동적으로 발전한 문명이다. 이슬람의 도전은 이슬람교의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부상과 그와 맞물린 서구 가치와 제도에 대한 거부로 표현되고 있다. 아시아의 도전은 중화, 일본, 불교, 이슬람 등 모든 동아시아 문명에서 감지된다. 그들은 서구에 대한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때로는 흔히 유교로 통칭되는 자기들의 공통성을 내세운다. 아시아와 이슬람은 오두 서구 문화와 비교하여 자기 문화의 우월성을 앞세운다. 힌두권, 정교권,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의 나머지 비서구 문명도 자기 문화의 고유성을 강조하지만 1990년대 중반 시점에 서구문화에 대한 자신들의 우월성을 노골적으로 표명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시아와 이슬람은 개별적으로, 때로는 힘을 합쳐서 서구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러한 도전의 배후에 자리 잡은 원인들은 서로 관련성은 있지만 성격은 판이하다. 아시아의 자기주장은 경제 성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슬람의 자기주장은 상당 부분 사회적 동원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도전은 지금도 그렇지만 21세기에 가서도 세계 정치에 심각한 불안 요소로서 파장을 미칠 것이다. 그러나 파장의 성격은 상당히 다르다. 중국과 여타 아시아 국기익 경제 발전은 이들의 정부가 대외 관계에서 적극적으로 자기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와 자원을 제공한다. 이슬람 국가들의 인구 증가, 특히 15세에서 25세 사이 연령층의 폭발적 증가는 원리주의, 테러리즘, 폭동, 노동력 수출에 필요한 인력을 제공한다. 경제적 발전은 아시아 정부를 강화시키고 있지만 인구 증가는 이슬람 정부와 비이슬람 사회에 위협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아시아의 자기주장

20세기 후반부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이다. 이 과정은 1950년대에 일본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한동안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도입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한 유일한 비서구 등 가로 아주 예외시되었다. 그러나 경제 발전의 과정은 네 마리 용(홍콩, 대만, 한국, 싱가포르)으로, 다시 중국.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로 파급되었으며 필리핀 . 인도. 베트남에서도 서서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나라들은 지난 십여 년 동안 연평균 8~10퍼센트를 상회하는 경제 성장률을 보였다. 무역량 또한 처음에는 아시아와 세계 사이에서, 그다음에는 아시아 내부에서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아시아의 이러한 경제 성장은 유럽과 미국 경제의 완만한 성장,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세계 나머지 지역과 크게 대조된다.

따라서 예외적 현상은 일본에 국한되지 않고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고 있다. 서구를 부국으로, 비서구를 저개발국으로 단정 짓는 시각은 21세기에는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다. 이 변화의 속도는 가히 층격적이다. 마부바니(K1shore Mahbuban1)의 분석에 따르면 1인당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리는 데 영국과 미국이 각각 58년과 47년 걸린 데 비해, 일본은 35, 인도네시아는 17, 한국은 11, 중국은 10년 걸렸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현재 세계 2위와 5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나라가 아시아에 있다. 중국의 경제는 1980년대와 1990년 전반기까지 연평균 8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으며 네 마리 용이 그 뒤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1993년 세계은행의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 경제권은 미국, 일본 독일과 함께 세계의 4대 성장축이 되었다. 1990년 현재 세계 2위와 3위의 경제 대국을 가지고 있는 아시아는 2020년까지는 5대 경제 대국 가운데 4개국, 10대 경제 대국 가운데 7개국이 될 공산이 크다. 가장 경쟁력이 뛰어난 국가들도 대부분 아시아의 몫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아시아의 경제 성장이 예상보다 훨씬 빨리 진정기로 들어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미 이루어진 성장의 파급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은 아시아와 서구, 특히 미국과의 세력 균형에 변화를 낳고 있다. 경제 발전은 그것을 성취하고 거기서 이득을 보는 주체에게 자신감과 자긍심을 준다. 경제력 또한 무력처럼 도덕적, 문화적 우위의 표현, 미덕의 증거로 간주된다. 경제적 성공을 거두면서 동아시아인들은 자기 문화의 고유성을 역설하고 서구를 비롯한 다른 사회와 비교하여 자신의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갖는 우월성을 서슴없이 강조한다. 아시아 사회는 미국의 요구와 이해관계를 점점 덜 수용하는 추세에 있으며 미국과 여타 서방 국가의 압력을 거부할 수 있는 실력을 꾸준히 쌓아가고 있다.

문화적 르네상스가 아시아 전역을 휩쓸고 있다고 1993년 고(Tommy Koh)대사는 말했다. 자신감의 확대와 관련 있는 이 현상은 아시아인이 더이상 서구적인 것 미국적인 것을 무조건 최고로 간주하지 않음을 뜻한다.

아시아의 경제 발전을 원동력으로 삼는 이 르네상스는 개별 아시아 국가들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과 서구 문화와 구별되는 아시아 문화의 공통성을 두루 강조하는 시대적 분위기에서 감지된다. 이 문화적 부활의 의미는 동아시아의 두 강대국이 서구문화를 수용하는 방식에서 나타난 변화에서도 읽을 수 있다.

서구가 19세기 중반 중국과 일본에 압박을 가했을 때 이 두 나라의 소수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전통문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철저한 서구화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실현 가능하지도 정당하지도 않은 노선이었다. 그 결과 양국의 지배 엘리트들은 개량주의 전략을 택하였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일본에서 실권을 장악한 역동적 개혁 집단은 서양의 기술, 관습, 제도를 연구하고 차용하여 일본의 근대화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 전통문화의 본질적 요소들은 고수하였고. 이 요소들은 여러 면에서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이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자신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전통적 요소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부패한 청 왕조가 서구의 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중국은 일본과 유럽 열강에게 패배하여 유린당하는 모욕을 감수하였다. 1910년 왕조가 무너지자 분열과 내전이 뒤따랐다. 지식인과 정치지도자가 내건 각양각색의 서양 이념과 중국 정신이 치열한 경쟁과 갈등을 낳았다. '민족. 민권. 민생'을 구호로 한 쑨 원의 삼민주의, 량 치차오의 자유주의, 마오쩌둥의 마르크스 레닌주의가 저마다 자신의 정당성을 부르짖었다. 1940년대 말에 이르러 소련에서 유입된 사상이 서구에서 도입된 사상 -민족주의, 자유주의, 민주주의, 크리스트교-을 완전히 눌렀고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로 정의되었다.

2차 대전에서 참패한 일본은 완전한 문화적 공황 상태에 직면하였다. 1994년 일본을 깊이 아는 한 서구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 문화 등 일본이라는 나라에 존재하는 정신성의 모든 측면이 전쟁에 동원되었다. 그 동원의 정도는 지금의 우리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패전은 이 체제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다. 일본인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모든 것이 무가치해졌고 모든 것이 밖으로 떨려 나가는 체험이었다."

그런 공황 상태에서 서구와 관련된 모든 것, 특히 전승국 미국과 관련된 모든 것은 좋고 바람직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중국이 소련을 모방하려고 애썼듯이 일본은 기를 쓰고 미국을 모방하였다.

1970년대 후반 공산주의가 경제 발전을 이룩하는 데 실패하고 일본과 여타 아시아 국가들에서 자본주의가 성공을 거두면서 중국 지도부는 소련 모델로부터 등을 돌렸다. 10년 뒤에 일어난 소련의 붕괴는 그들이 수입한 사상의 문제성을 한층 부각시켰다. 중국은 서구에 접근할 것이냐 자기 안으로 돌아갈 것이냐 기로에 섰다. 많은 지식인들은 전면적 서구화를 옹호하고 나섰다. 그런 움직임은 TV 연속극과 천안문 광장에 세워진 모조 자유의 여신상에서 문화적으로 대중적으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러나 서구 지향주의는 베이징에서 중국을 통치하는 수백 명의 당 간부와 농촌에 거주하는 8억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완전한 서구화는 19세기 말이나 20세기 말에도 실현 가능성이 회박하였다. 중국 지도부는 그 대신 새로운 '중체서용'의 원칙을 내걸었다. 자본주의를 도입하여 세계 경제에 참여하되 정치적 권위주의와 중국의 전통문화는 고수한다는 원칙이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성 대신 중국 정부는 중국 문화의 고유한 특징에 기초한 민족주의와 경제 발전에서 합법성을 찾았다. 천안문 사태 이후 당국은 새로운 합법성의 원천으로 중국 민족주의를 적극적으로 포용하였으며 자신의 권력과 통치를 정당화하고자 의식적으로 반미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한 분석가는 지적하였다." 새롭게 부상하는 중국의 문화적 민족주의는 1994년 한 홍콩 지도자가 던진 말에 압축되어 있다. '우리 중국인은 전에 없이 민족주의 감점을 느끼고 있다. 우리는 중국인이며 그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1990년대 초반 중국에서는 실제로 '가부장적이고 자연적이며 권위적인 진정한 중국상으로 돌아가자는 대중의 욕구'가 강하게 일었다. 이런 복고주의의 분위기 속에서 민주주의는 과거 레닌주의가 수입된 외래 사조로 평가 절하되었던 것처럼 인정을 못 받고 있다.

20세기 초반의 중국 지식인들은 베버(Marx Weber)처럼 중국 후진성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았다. 20세기 말엽의 중국 정치 지도자들은 서양의 사회 과학자들처럼 중국 발전의 원인을 유교에서 찾는다. 1960년대로 접어 들어 중국 정부는 유교에 대한 관심을 고취시키기 시작하였다. 당 간부들은 유교를 중국 문화의 주류로 선언하였다. 리 콴유 또한 싱가포르 성공의 주된 원천을 유교에서 찾으면서 유교적 가치관을 전 세계에 알리는 전도사가 되었다. 1990년대에 들어와 대만 정부는 자신들이 '유교 사상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고 리 덩후이 총통은 대만의 민주화는 공자(기원전 5 세기) 맹자(기원전 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국의 '문화유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선언하였다. 권위주의를 정당화하건 민주주의를 정당화하건 중국 지도자들은 그 정당성의 근거를 수입된 서구 개념이 아니라 국민적 공감을 얻는 중국 문화에서 찾았다.

중국 정부가 부추기는 민족주의는 한족 민족주의다. 한족 민족주의는 중국 인구의 90퍼센트를 차지하는 한족 내부의 언어적, 지역적, 경제적 차이를 무마하는 효과가 있다. 동시에 그것은 인구의 10퍼센트도 못 되지만 영토는 6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는 비중국계 소수 민족들과의 차이를 부각 시키기도 한다. 그것은 또한 중국 인구의 5퍼센트를 끌어들이면서 모택동주의와 레닌주의의 붕괴로 생긴 진공을 채우며 교세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는 크리스트교의 선교 활동에 중국 정부가 족쇄를 채울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한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자국의 성공적인 경제 발전이 미국 경제와 사회 체제의 실패와 '몰락'과는 대비하면서 서구 모델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고 자신들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원인이 일본 고유의 문화에 있었다는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났다. 1945년에는 군사적 재난을 낳았고 그래서 부정되어야 했던 일본 문화가 1985년에는 경제적 성공을 낳아 다시 포용되었다. 서구 사회에 날로 익숙해지면서 일본은 '서구라는 것 그 자체로는 특별하지도 신비롭지도 않으며 서구는 서구인의 제도에서 나왔을 뿐이라는 인식'에 도달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경제 발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의 미덕은 미국의 결함과 대비되면서 찬사를 받았다. 메이지 유신기의 일본인이 아시아를 탈피하여 서구에 합류하는 정책을 추구한 반면 문화적으로 자신감을 얻은 20세기 말의 일본인은 미국으로부터 거리를 두고 아시아에 참여하는 정책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조류를 낳은 원인으로는 첫째, 일본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그런 전통적 가치관을 긍정하려는 추세를 들 수 있고 둘째, 일본을 '아시아화'하려는 노력, 다시 말해서 독자적 문명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체성을 보편적 아시아 문화에서 찾으려는 그리 수월치만은 않은 시도를 들 수 있다. 2차 대전이 끝난 뒤 일본은 중국과 달리 서구에 완전히 경도되었고 철저히 붕괴한 소련과는 달리 서구는 여전히 건재한 상태이므로, 일본이 서구를 전적으로 거부하려는 의지는 소련과 서구 모델로부터 철저히 거리를 두려던 중국의 의지만큼 단호하지는 않다. 일본 문명의 독자성, 일본 제국주의가 주변 여러 나라에게 남긴 기억, 아시아 대부분 지역에서 경제권을 거머쥔 화교의 존재를 감안할 때 일본은 서구로부터 거리를 두기보다는 아시아와 융합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느낄 것 이다. 문화 정체성을 내세움으로써 일본은 자신의 고유성과 서구 및 아시아 문화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킨다.

중국과 일본은 각자의 고유한 문화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한 것만큼이나 서구와 비교하여 아시아 문화 일반이 지니는 가치를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나섰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산업화와 그것이 수반한 성장을 등에 업은 동아시아인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접어들어 아시아의 자기주장 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감에 찬 발언을 내놓고 있다. 이 복잡한 태도는 네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아시아인은 동아시아가 경제적으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머지않아 서구의 생산력을 능가하고 그에 따라 국제무대에서도 서구와 비교 하여 상대적으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경제 성장은 서구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가졌다는 자신감을 아시아 사회에 불어넣고 있다. '미국이 재채기를 하면 아시아는 독감에 걸리던 시절은 지나갔다'라고 일본의 한 대표적 언론인은 1993년에 선언하였다. 말레이시아의 한 관리는 한술 더 떠서 '미국이 고열로 신음해도 아시아는 기침조차 안 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아시아는 미국과의 관계에서 '경외의 시대를 끝내고 말대답을 할 수 있는 시대로 접어들었다.'라고 아시아의 또 한 지도자는 말했다 말레이시아의 외무 차관은 또 '아시아가 경제적으로 번영했다는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틀에 대해서 아시아가 중요한 대안을 제시할 위치에 오늘날 와 있음을 의미한다.'라고 주장하였다. 그것은 또한 아시아 사회에 인권과 그 밖의 가치와 관련해 서구가 자신의 기준을 관철시킬 수 있는 능력을 빠르게 상실해 가고 있음을 뜻한다고 동아시아인들은 주장한다.

둘째, 아시아인은 그들의 경제적 성공이 문화적, 사회적으로 타락한 서구보다 우월한 아시아 문화에 크게 힘입었다고 믿는다. 일본이 수출, 무역 수지, 외환보유고 등에서 모두 기록적인 성적을 내던 1980년대에 일본인은 그 전에 사우디아라비아가 오일 달러를 등에 업고 큰소리쳤듯이 자신의 새로운 경제력을 자랑하고 서구의 침몰을 측은히 여기면서 일본이 성공하고 서구가 실패한 것은 자신의 문화가 우월하고 서구 문화가 타락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1990년대 초반 아시아의 승리는 '싱가포르의 문화적 공세'를 통해 새롭게 표명되었다. 리 한유를 필두로 싱가포르 지도자들은 아시아의 부상을 서구와 비교해 부각시키면서 아시아의 성공은 기본적으로 유교에서 비롯된 질서, 규율, 가족적 유대, 근면, 집단주의, 절제 같은 가치관 때문이고 서구가 기우는 것은 방종, 게으름. 개인주의, 범죄, 부실한 교육, 권위에 대한 경멸, '정신적 경직화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동아시아와 겨루려면 미국도 '사회와 정치 구조에 관한 자신의 근본 가정들에 의문을 던지고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 사회로부터 한두 가지라도 배우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동아시아인은 개인보다는 집단에 비증을 더 둔 동아시아 문화 덕분에 자기들이 발전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일본,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처럼 집단의 가치와 관행에 더 무게를 두는 방식이 성장의 중요한 자산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라고 리 콴유는 주장한다. 집단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앞세우는 것처럼 동아시아 문화가 고수하는 가치관은 고속 성장에 필요한 집단적 노력을 지원한다.', "규율, 헌신, 근면을 강조하는 일본과 한국의 노동 윤리는 이들 나라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을 낳은 원동력이 되었다. 이 노동 윤리는 집단과 국가가 개인보다 중요하다는 철학에서 나왔다.'라는 말레이시아 외무 장관의 견해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동아시아인은 아시아의 여러 사회와 문명에서 나타나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중요한 동질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중국의 한 반체제 인사가 강조하듯 이 지역의 대부분 국가가 공유하고 역사적으로 존중해 온 유교의 가치 체계 특히 근면 가족. 노동. 규율을 중시하는 가치관이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에 대한 공통된 거부감이고 '부드러운' 권위주의 또는 아주 제한된 형태의 민주주의가 폭넓게 퍼져 있다는 사실이다. 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에 맞서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를 지키고 경제적 이익을 증대해야 한다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ASEAN(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이나 EAEC(동아시아 경제 회의) 같은 기구의 확대를 통해 아시아 역내의 협조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국가가 당면한 경제적 과제는 서구 시장에 지속적으로 진출하는 것이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제 지역주의가 득세하고 따라서 동아시아는 역내 무역과 투자를 점차 강화시킬 것이다. 특히 아시아 발전의 선두 주자인 일본은 전통적인 '탈아 입구 정책'에서 탈피하여 '재아시아화' 또는 싱가포르의 관리들이 주장하듯 좀 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아시아의 아시아화'를 들고 나서야 한다는 중책을 떠맡고 있다.

넷째, 동아시아는 아시아의 발전과 아시아의 가치를 다른 비서구 사회가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모방해야 하며, 서구가 자기 쇄신하기 위해 채택해야 하는 모델이라고 주장한다. '개발 도상국의 경제를 근대화하고 존럽 가능한 정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최선의 수단으로서 지난 40년 동안 신주단지처럼 모셔 온 앵글로색슨 모델은 한물갔다.'라고 동아시아인은 단언한다. 그 자리에 아시아 모델이 들어서고 있다. 멕시코와 칠레, 이란과 터키, 옛 소련 공화국들마저도, 서구의 성공으로부터 배우려던 그네들의 앞 세대와는 달리 이제는 아시아의 성공에서 무언가를 배우려고 한다. 아시아는 아시아의 가치가 보편성을 지닌 가치라는 사실을 세계 전역에 전파해야 한다...... 이러한 이상의 전파는 아시아 사회 체제 특히 동아시아 사회 체제의 수출을 의미한다.' 일본과 여타 아시아 국가들은 태평양 세계주의를 고취하여 세계를 아시아화함으로써 세로운 세계 질서의 판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강력한 사회는 보편화하며 허약한 사회는 특수화한다. 동아시아의 점증 하는 자신감이 서구에 비견할 만한 아시아의 새로운 보편성을 낳았다 '아시아의 가치는 보편의 가치이며 유럽의 가치는 유럽의 가치다. 라고 1996년 마하티르 총리는 유럽 정상들에게 선언하였다. 이러한 추세에 발맞추어 한때 서구의 오리엔털리즘이 아시아를 묘사했던 방식처럼 획일적이며 부정적으로 서구를 묘사하는 아시아의 '옥시덴털리즘(Occidentalism)이 나타나고 있다 동아시아인에게 경제적 번영은 도덕적 우위를 의미한다. 만일 어느 시점에 가서 인도가 동아시아를 제치고 경제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으로 부상하면 힌두 문화의 우월성, 카스트 제도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음을 강조하는 논문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올 것이고, 인도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간 덕분에 영국 제국주의가 남긴 서구 유산의 잔재를 극복할 수 있었다는 논리가 득세할 것이다. 물질적 성공은 문화적 자기주장을 낳고, 단단한 힘은 부드러운 힘을 낳는다.

 

이슬람 부활

아시아가 경제 발전을 배경으로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높여 가는 반면 이슬람 국가 대부분은 정체성. 의미. 안정. 정당성. 발전. 권력. 희망의 근원으로서 이슬람을 향해 한꺼번에 돌아서고 있다. 그들의 희망이 '이슬람이 해답이다.'라는 구호에 집약되어 있다. 이슬람 부활은 서구에 이슬람 문명이 적응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 등장한 심도 깊은 대규모의 현상이다. 이것은 서구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이슬람에서 해답을 발견하려는 노력이다. 새로운 이슬람은 근대화는 받아들이되 서구문화는 거부하며, 이슬람에 다시 귀의하는 것을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차원에서 근대 세계의 올바른 생탈 방식으로 이해한다. 1994년 사우디아라비아의 한 고위 관리는 '수입품'은 아주 근사하고 최첨단을 달린다. 그러나 밖으로부터 유입된 무형의 정치 사회제도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 이란의 국왕에게 물어 보라. ... 이슬람은 우리에게 단순히 종교가 아니라 생활 그 자체다. 우리 사우디아라비아인은 근대화를 원하지만 그렇다고 서구화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설명하였다. 이슬람 부활은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려는 이슬람교도들의 노력이다. 이것은 이슬람 세계 전역을 뒤흔드는 광범위한 지적,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운동이다. 흔히 이슬람의 정치 세력을 대표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널리 번지고 있는 새로운 이슬람 열기와 이슬람 사상 관습. 구호 등 훨씬 광범위한 부활의 일부분만을 반영한다. 이슬람의 부활은 주된 추세이지 극단주의자의 전유물이 아니며 도처에 파고들고 있지 고립되어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이슬람 부활은 모든 나라의 이슬람교도에게, 대다수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 에스포지토(John L. Esposito)에 따르면 개인 생활에서 이슬람이 소생하였음을 알리는 지표는 부지기수다. 종교의식(모스크 참배, 기도, 금식)에 대한 관심이 늘었고, 종교 프로그램이나 간행물의 수가 급증하였으며, 이슬람 의상과 가치관이 더욱 강조되는 추세에 있고, 수피즘(신비주의)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이처럼 폭넓은 기반 위에서 이루어지는 소생은 공공 생활에서도 이슬람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이슬람 세계관을 지향하는 정부 단체법. 은행. 사회 복지 시설. 교육 기관이 늘고 있다. 정부는 물론 반정부 단체까지도 자신의 권위를 끌어올리고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슬람으로 돌아서는 추세에 있다. 터키와 튀니지 같은 세속적 성격이 더 강한 나라까지 포함한 대다수 통치자와 정부가 이슬람의 막강한 잠재력을 깨닫고 이슬람이 관련된 사안에 대해서는 점점 예민하고 조심스럽게 반응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저명한 이슬람학 연구가인 데수키(ALi E Hillal Dessouki)는 이슬람 부활은 서구의 법이 군림하던 자리에 이슬람의 법을 올려놓으려는 노력, 종교적 언어와 상징의 빈번한 등장, 이슬람 교육의 세력 확대(이슬람 학교 수가 늘어나고 정규 공립 학교의 교과목에 이슬람 색채가 짙게 깔리는 현상에서 목도된다), 이슬람 교리가 규정하는 사회적 행동 규범(가령 여성의 복장, 금주)을 받아들이는 추세, 종교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의 증가 이슬람 사회에서 세속 정부에 대한 이슬람 세력의 저항이 넓은 지지세를 넓혀 가는 현상. 이슬람 국가끼리의 국제적 연대를 강화시키려는 노력과 맥을 같이한다고 분석하였다. '신의 설욕'은 범세계적 현상이지만 신은, 아니 알라는, 움마 곧 이슬람 공동체에서 가장 완벽하게 구석구석까지 복수를 실현시켰다.

이슬람의 부활은 정치적 영역에서는 성전(성전)을 가졌고. 완전한 사회에 대한 이상이 있고 근본적 변화를 지향하고 기존의 권력과 국민 국가를 거부하고 근대적 개량주의자에서 폭력적 혁명주의자에 이르는 다양한 분파를 거느리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시즘과 일맥상통한 면이 있다. 그러나 더 좋은 비교의 대상은 종교 개혁이다. 이슬람 부상과 서구의 종교 개혁은 기존 제도의 침체와 부패에 대한 대응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그래서 모두 자기 종교의 더 순수하고 엄격한 형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하고 근면 질서 규율을 강조하면서 활력 있는 새로운 중산층에게 점차 호소력을 얻는다. 둘 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운동이어서 다양한 갈래로 뻗어 나갔지만 루터파와 칼뱅파, 시아파와 수니파로 세력이 크게 양분된다는 공통점도 있다. 칼뱅과 호메이니 사이에도 비슷한 점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수도자적 규율을 사회 전체에 부과하려고 노력하였다. 이슬람 부상과 종교 개혁의 핵심 정신은 모두 근본적 개혁이다. 한 프로테스탄트 목사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종교 개혁은 보편적이어야 한다...... 모든 장소, 모든 사람. 모든 직업을 개혁해야 한다. 판결이 내려지는 법정, 무능한 치안 판사를 개혁해야 한다....대학을 개혁하고 도시를 개혁하고 농촌을 개혁하고 열악한 배움의 터를 개혁하고 안식일을 개혁하고 성찬식을 개혁하고 신에게 올리는 예배를 개혁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알 투라비는 이렇게 역설한다. '이러한 각성은 총체적이다. 개인적 신앙심에 대한 각성만은 아니란 뜻이다. 이것은 지적, 문화적 각성에만 그치는 것도 아니요 정치적 각성에만 머무르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이들 전부에 대한 각성이다. 사회를 밑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총체적으로 재건하자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동반구 정치 지형도에 미친 이슬람 부상의 영향을 무시하는 것은 16세기 후반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유럽의 정치 지형도에 미친 영향을 무시하는 것과 같다.

이슬람 부활은 서구의 종교 개혁과는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후자가 미친 영향은 주로 북유럽에 한정되었고 스페인. 이탈리아. 동유럽 합스부르크 제국에서는 교두보를 마련하지 못했다. 반면에 이슬람의 부활은 거의 모든 이슬람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1970년대부터 이슬람의 상징물. 신앙. 의식. 제도. 정책. 기구는 모로코에서 인도네시아까지 나이지리아에서 카자흐스탄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10억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점차 동조와 지지 세력을 넓혀 가고 있다. 이슬람화는 처음에는 문화계에서 시작되어 차츰 정치와 사회의 영역으로 확산되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 지도자들은 원하건 원하지 않건 이러한 대세를 묵살할 수 없을 뿐더러 이슬람에 동조하는 정책을 취하지 않을 방도가 없다. 과도한 일반화는 늘 위험스러우며 종종 오류를 낳는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이란을 제외하고는 이슬람 인구가 많은 모든 나라가 지금부터 15년 전에 비해 1995년 현재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이슬람화가 심화되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이슬람화를 주도한 요소는 이슬람 사회 기관의 발전과 이슬람 집단의 기존 기관 장악이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은 특히 이슬람 학교를 세우고 공럽 학교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력을 확대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실제로 이슬람 집단은 이슬람 '시민 사회' 안에 규모와 활동 면에서 세속 시민 사회의 허약한 제도와 비교해도 조금도 손색이 없고 때로는 그것을 능가하는 제도를 실현시켰다. 이집트에서는 1990년대 초반 이미 이슬람 기관들이 정부가 방치한 공백을 채우면서 이집트의 수많은 빈민들에게 의료, 복지 교육의 혜택을 제공하는 광범위한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1992년 카이로에서 지진이 발생하자 이 기관들은 몇 시간도 되지 않아 거리로 나와 정부의 구호 활동이 굼뜨게 진행되는 동안 음식과 담요를 보급하였다. 요르단에서는 모슬렘 형제단이 '이슬람 공화국의 인프라'를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발전시키는 정책을 의도적으로 추구한 결과 1990년대 초반 현재 인구 400만 명의 이 작은 나라에서 대형 병원 하나 진료소 20개소, 이슬람 학교 40개소, 코란 강습소 120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이슬람 기관들은 또 가자와 서안에서 '학생 연맹, 청년 조직, 종교사 회 교육 연합체'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이것은 유치원에서 이슬람 대학, 진료소, 고아원, 양로원, 이슬람 재판관과 중재관으로 이루어진 체제를 망라한다. 이슬람 기관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인도네시아에서 세력을 확대하였다. 1980년대 초반 인도네시아 최대의 이슬람 단체인 '무하마디자'600만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세속 국가 안의 종교 복지 국가'를 일구면서 정교한 학교. 병원. 진료소. 대학 수준의 시설을 통해 인도네시아 각지에 '요람에서 무덤까지' 활발한 사회 활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정치 활동을 금지당하고 있는 나라에서도 이슬람 단체들은 20세기 초반 미국의 종교 단체를 연상시키는 광범위한 사회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치적 영역에서 이슬람의 부활은 사회적, 문화적 영역에 비해 덜 두드러지게 나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의 마지막 사반세기 동안 이슬람 사회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정치적 흐름으로 나타났다. 이슬람 운동에 대한 정치적 지지의 정도와 양상은 나라마다 다르지만 중심적 기류는 존재한다. 대개 이런 운동은 농촌 엘리트, 농부, 노인층으로부터는 별로 지지를 얻지 못한다. 이 운동을 지원하는 층은 근대화 괴정에 참여하는 사람, 근대화 과정에서 자란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들은 크게 세 집단에서 나온 사회적 동원성이 뛰어난 근대화 지향의 청년층이다.

대부분의 혁명 운동이 그렇듯이 이슬람 부활의 핵심 성원은 학생과 지식인이다. 대개의 국가에서 원리주의자들이 학생 조직 같은 단체를 장악 하는 것이 정치적 이슬람화 과정의 첫 단계로 나타났다. 대학에서 이슬람이 '약진'하는 이런 현상은 1970년대 이집트,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에서 시작되어 다른 이슬람 국가로 번져 나갔다. 이슬람의 구호는 특히 기술 대학, 공과 대학, 자연 과학 대학 소속 학생들에게 강한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1990년대 사우디아라비아, 알제리 등지에서는 모국어로 교육을 받는 학생이 늘어나는 그 과정에서 자연히 이슬람의 영향력에 노출되는 학생의 수도 늘어나면서 '2대 토착화' 현상이 나타났다. 이슬람주의자들의 주장은 여성에게도 상당히 먹혀들어가, 터키에서는 세속 지향의 장노년층 여성과 이슬람 지향의 젊은 여성 사이의 갈등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이집트 이슬람 단체의 호전적 지도자들을 분석한 조사에 따르면 그들은 다섯 가지 주요한 특징을 갖는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나라의 이슬람주의자들에게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 같다. 그들은 젊었다. 20대와 50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80퍼센트가 대학생이거나 대학 졸업생이었다. 절반 이상이 일류 대학 출신이거나 의대나 공대처럼 우수한 성적을 요구 하는 전문 분야 출신이었다. 70퍼센트 이상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가난하지도 않은 중하류 가정에서 자랐고 자기 집안에서 고등 교육을 받은 첫 세대였다. 그들은 어린 시절을 소도시나 시골에서 보내다가 나중에 대도시로 이주하였다.

이슬람 운동의 중핵을 이루는 적극적 행동 대원은 학생과 지식인이지만 도시 중산층의 지지기반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지지기반은 상인. 중개상. 자영업자 같은 전통적 중산층에 폭넓게 확보되어 있다. 이들은 이란 혁명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알제리 터키.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도 원리주의 운동의 중요한 세력 기반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원리주의자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중산층 중에서도 좀 더 근대적 집단에서 배출되었다. 적극적 이슬람주의자 중에는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과학자. 교사. 공무원 등 해당 인구 집단에서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가장 똑똑하고 젊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다.

이슬람 운동을 지탱하는 세 번째 주요 집단은 최근에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이슬람 세계 전역의 도시 인구는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퇴락하고 열악한 슬럼 지역으로 몰려든 이주자들은 이슬람 단체가 제공하는 사회적 지원을 필요로 했고 또 실제로 그 수혜자가 되었다. 게다가 겔너(Ernest Gellner)가 지적하듯이 이슬람은 '뿌리 뽑힌 대중'에게 '숭고한 정체성'을 제공하였다. 이스탄불과 앙카라, 카이로와 아시우트, 알제와 페스, 가자 지구에서 이슬람 정당은 지반 다지기에 성공하여 짓밟히고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파고들었다. '혁명적 이슬람 대중은 거대한 이슬람 대도시 권역의 인구를 폭발적으로 급증시킨 이농 유입민들. 곧 근대 사회의 산물이다.'라고 로이(Oliver Roy) 는 말한다.

1990년대 중반 현재 명백한 이슬람 정부는 이란과 수단에서만 정권을 쥐고 있다. 터키와 파키스탄 같은 소수의 이슬람 국가는 민주적 합헌성을 부분적으로 주장하는 정권이 통치하고 있다. 나머지 이십여 개 이슬람 국가는 군주, 1당 체제, 군부 정권, 1인 독재 또는 이것들이 복합된 구조로 통치되고 있으며. 협소한 족벌. 씨족. 부족적 기반을 두거나 외국의 지원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사회의 요구와 열망으로부터 절연된 억압적이고 부패한 이들 정권은 무어(Clemenr Henry Moore)의 표현을 빌리자면 '벙커(bunker) 체제'. 이런 체제는 의외로 오래 존속할 가능성이 있다. 반드시 무너진다는 법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대 세계에서 이들이 변화하거나 붕괴할 확률은 높다. 따라서 1990년대 중반에 던져지는 핵심적 물음은 누가 또는 무엇이 이들을 계승할 것인가라는 대안의 문제로 집약된다. 1990년대 중반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가장 가능성 높은 후속 정권은 이슬람 체제로 평가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민주화의 물결이 세계 전역을 휩쓸었고 그 과정에서 몇십 개국이 민주화를 경험하였다. 이러한 물결은 이슬람 사회에도 충격을 미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적이었다. 민주화 운동이 남유럽, 라틴 아메리카, 동아시아 주변부, 증부 유럽에서 노도 같이 퍼지면서 실권을 잡는 동안 이슬람 운동도 이슬람 국가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슬람주의는 비이슬람 사회에서 일어난 권위주의에 대한 항거와 동일한 기능을 하였으며, 사회적 동원력의 확대, 권위주의 체제의 합법적 통치력 상실, 변화하는 국제 환경 같은 비이슬람 사회와 비슷한 원인에서 태동하였다. 변화한 국제 환경의 예로 꼽을 수 있는 유가 상승이 이슬람 세계에서는 민주화 열기보다는 이슬람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크리스트 국가에서 신부, 목사, 평신도 집단이 반체제 운동을 주도한 것처럼 이슬람 사회에서는 '울레마', 모스크에 기반을 둔 집단, 이슬람주의자들이 운동을 이끌었다.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교황이 핵심적 역할을 했듯이 아야톨라(이란 이슬람 시아파 지도자의 칭호' 옮긴 이)는 이란 왕조를 분쇄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이슬람 운동은 정권 장악을 통해서가 아니라 반정부 운동을 주도하고 때로는 독점하는 방식을 통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슬람 운동의 부상은 다른 반체제 운동의 약화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이다. 소련의 붕괴로 국제 공산주의가 막을 내리면서 좌익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은 불신을 받았고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에도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반체제 집단은 있었지만 대개는 소수의 지식인이나 서구적 뿌리를 가진 층에 국한되어 있었다. 몇몇 예외는 있었지만 자유 민주주의는 이슬람 사회에서 안정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는 데 실패하였고 심지어는 이슬람 자유주의도 기반을 다지는 데 실패하였다. 아자미(Fouad Ajami)의 지적에 따르면 이슬람 사회에서 자유주의를 논한다거나 민족적 부르주아 전통을 거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싸움에 뛰어들었다가 좌절한 사람의 부고를 쓰는 일과 다름없었다. 자유 민주주의가 이슬람 사회에서 대체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은 1800년대 말부터 한 세기 동안 줄곧 반복되어 온 현상이었다. 이러한 실패는 서구 자유주의 개념을 달가워하지 않는 이슬람 사회와 문화의 분위기에서 부분적으로는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슬람 세력이 저항 운동을 주도하며 집권 세력의 유일한 대안으로 확고한 입지를 마련하는 데는 집권 정부의 이슬람 우호 정책에 힘입은 바 컸다 냉전기의 알제리. 터키. 요르단. 이집트. 이스라엘처럼 대다수 국가 들은 공산주의 운동이나 적대적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방패막이로 이슬람주의자들을 고무하고 지원하였다. 적어도 걸프전 이전까지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중동 산유국들은 각국에 포진한 이슬람 형제단과 각종 이슬람 단체에게 막대한 재정 지원을 하였다. 정부의 세속 저항 세력에 대한 탄압 역시 이슬람 세력에게 반체제 운동의 주도권이 넘어가는 데 일조하였다. 원리주의자들의 힘은 세속 이념을 지향하는 민주주의 정당이나 민족주의 정당의 힘에 반비례하였고, 모든 반체제 운동을 억누른 나라보다는 모 코나 터키처럼 다당제에 입각해 어느 정도의 경쟁을 허용하는 나라에서 상대적으로 미약하였다. 그러나 세속적 저항 운동은 종교적 저항 운동에 비해 탄압에 약하다. 후자는 모스크, 복지 시설, 재단, 그리고 정부가 탄압할 수 없다고 여기는 이슬람 기관의 연결망 안에서 숨어서 활동할 수 있다. 자유 민주주의 세력은 그런 엄호물이 없으므로 정부에 의해 쉽게 제압당하거나 제거당한다.

이슬람의 확산 추세에서 주도권을 쥐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정부는 공럽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확대하였다. 이들 학교는 이슬람 사상과 이슬람 교사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정부는 또한 종교와 종교 교육 기관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정부가 이슬람을 밀었다는 부분적인 증거이다. 재정 지원을 통해 이슬람 단체와 교육에 대한 정부의 통제권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 이슬람 가치를 따르는 학생들이 대규모로 배출되었다. 그들은 이슬람의 구호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면서 많은 경우 이슬람의 대의를 위해 투쟁하는 전사로 나섰다.

이슬람이 부상하고 이슬람 운동의 발언권이 강해지면서 정부는 이슬람 단체와 관습을 옹호하고 이슬람의 상징과 관행을 체제 안에 도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크게 보면 이들 나라에서 이슬람 색채가 강화되었거나 이슬람의 자기주장이 커졌음을 의미하였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정치 지도자들은 앞다투어 자신과 자신의 체제를 이슬람에 연결시켰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세속 정부는 아랍 세계에서 앞으로 발 디딜 땅이 없을 것이라는 확신을 피력하면서 이슬람 민주주의''이슬람의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모로코의 하산 왕은 자신이 예언자의 후예라는 사실과 '이슬람교도의 사령관'으로서의 자기 역할을 강조하였다. 이슬람에 경도된 듯한 인상을 전혀 주지 않았던 브루나이의 국왕마저도 '점점 신앙이 깊어져서' 자신의 정권을 '말레이 이슬람 군주국`으로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튀니지의 벤 알리(Ben A11)는 연설에서 걸핏하면 알라를 거론하기 시작하였으며 이슬람 단체의 지지기반이 확산되는 현상을 저지하고자 자신을 이슬람의 망토로 감쌌다. 1990년 초반 들어 인도네시아 의 수하르토는 노골적인 이슬람 강화 정책을 추구하고 나섰다. 방글라데시에서는 1970년대 중반 이미 세속주의 원칙이 헌법에서 제거되었으며, 1990년대 초반 케말주의에서 비롯된 터키의 강력한 세속 전통은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였다. 외잘, 수하르토, 카리모프 같은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이슬람 성향을 과시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슬람 각국 정부들은 또한 법령을 이슬람화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이슬람법 개념과 관행이 세속법 체계 안에 도입되었다. 그런가 하면 말레이시아는 적지 않은 수의 비이슬람교도 인구를 감안하여 이슬람법과 세속법의 두 가지 법 체계를 분리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파키스탄에서는 하크(Zla ul-Haq) 체제 아래 법과 경제를 이슬람화하려는 광범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이슬람 형벌 체계가 도입되고 '샤리아' 재판 체제가 확립되었다. 샤리아는 파키스탄의 최고법으로 올라섰다.

이슬람 부활은 근대화의 산물이자 근대화를 달성하려는 노력이다. 이슬람 부활의 저변에는 도시화, 사회 활동 인구의 증가, 문맹률의 축소와 교육의 확대, 통신과 매체의 발전, 서구를 비롯한 다른 문명들과의 접촉 강화 갈은 비서구 사회의 토착화 조류를 낳은 원인들이 폭넓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전통 마을, 가족 관계를 파괴하고 소외감과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이슬람 상징물 헌신, 신앙은 이러한 심리적 요구에 부응하며 이슬람 복지 시설은 근대화의 홍역을 치르는 이슬람 대중들의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구를 만족시킨다. 이슬람 부활은 또한 서구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 서구식 해법에서 좌절을 경험한 이슬람 사회는 자신의 뿌리로 돌아가서 이슬람 사상. 관습 제도에서 지향점과 근대화의 동력을 얻어낼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이처럼 서구에서 등을 돌리는 현상은 서구와의 접촉 강화가 빚어 낸 현상이기도 했다. 두 문명이 부딪치면서 가치관과 제도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그만큼 컸던 탓이다. 이슬람의 부활은 서구화에 대한 반작용이지 근대화에 대한 반작용은 아니다.

"이슬람의 부활은 또한 서구의 세력과 권위가 약화된 결과이기도 하다. 서구의 전체적 상승세가 꺾이면서 서구의 이상과 제도도 매력을 상실하였다."라는 주장도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면 이슬람의 부활은 1970년대의 유가 상승에서 자극받았고 거기서 동인을 얻었다. 유가 파동으로 많은 이슬람 국가는 부와 힘을 엄청나게 축적하였고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서구에 지배되고 종속당하던 관계를 역전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이 당시 켈리(John B. Kelly)는 다음의 사실을 관찰하였다. '서구인에게 모욕적인 처벌을 가하는 데서 사우디아라비아인은 분명히 이중의 만족감을 얻는다. 그것은 사우디아라비아의 힘과 주체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크리스트교에 대한 경멸과 이슬람의 우월성을 공공연하게 나타내기 때문이다. 부유한 아랍 산유국들의 태도는 역사적, 종교적, 인종적, 문화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면 크리스트교 세계를 중동 이슬람 세계에 종속시키려는 대담한 시도다. 사우디아라비아. 리비아 등은 풍부한 석유 자원을 이용하여 이슬람의 소생을 지원하고 자극하였다. 경제력을 갖춘 이슬람교도들은 서구문화에 매료당했던 상태를 부정하고 비이슬람 사회에서 이슬람의 위치와 중요성을 부각시키는데 혼신의 힘을 쏟고 있다. 과거 서구의 경제력이 서구문화의 우월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던 것처럼 석유 자산은 이슬람의 우위를 알리는 증거로 내세워졌다.

유가 급등을 등에 업은 아랍 산유국의 기세는 1980년대에 들어와 한풀 꺾였지만 이슬람의 인구 증가는 지속적인 힘을 불어넣고 있다. 동아시아의 부상이 경이적인 경제 성장에서 추진력을 얻었다면 이슬람의 부활은 인구의 폭발적 증가에서 추진력을 얻고 있다. 이슬람의 인구 증가율, 특히 발칸.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지역의 인구 증가율은 인접 여러 나라 또는 세계 전체의 평균 인구 증가율을 크게 웃돈다. 1965년에서 1990년 사이 세계 인구는 33억에서 55억으로 불어나 연평균 1.85퍼센트의 성장률을 보였다. 같은 기간 중 이슬람 사회의 인구 증가율은 내내 2퍼센트를 상회하였다. 주로 2.5퍼센트를 넘었고 때로는 3퍼센트를 웃돌았다. 가령 1965년에서 1990년 사이에 마그레브(북아프리카 북서부 곧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때론 리비아를 포함하는 지방 : 옮긴 이) 지역의 인구는 매년 2.65퍼센트씩 성장하여 2980만 명에서 5900만 명으로 불어났다. 특히 알제리 인구는 연평균 3퍼센트씩 늘었다. 같은 기간 동안 이집트 인구는 2.3퍼센트씩 늘어나 2940만 명에서 5240만 명이 되었다. 1970년에서 1990년 사이 중앙아시아의 연 평균 인구 증가율은 타지키스탄이 2.9퍼센트, 우즈베키스탄이 2.5퍼센트, 투르크메니스탄이 2.5퍼센트, 키르기즈스탄이 1.9퍼센트 카자흐스탄이 1.1퍼센트씩 늘었다. 카자흐스탄의 경우 인구의 거의 절반이 러시아인이었다.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인구는 매년 2.5퍼센트씩 늘었고 인도네시아의 인구 증가율도 연평균 2퍼센트를 상회하였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전 세계에서 이슬람 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은 1980년의 18퍼센트에서 2000년에는 23퍼센트로, 2025년에는 31퍼센트로 늘어날 전망이다.

마그레브는 물론 그 밖의 지역에서도 인구 증가율은 절정에 이르렀다가 하락세로 돌아섰지만 절대 인구의 증가세는 여전히 엄청날 것이며 이러한 인구 증가의 여파는 21세기 전반기에 두루 감지될 것이다. 당분간 이슬람 인구에서 젊은 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기형적으로 클 것이며 특히 10대와 20대의 인구 증가가 두드러질 것이다. 게다가 이 연령 집단은 도시 거주자가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며 상당수가 최소한 중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질 것이다. 대규모의 인구 증가와 사회적 활동 인구의 폭증이 맞물리면 다음과 같은 중대한 정치적 결과가 나타난다.

우선 젊은이는 반항. 불안정. 개혁. 혁명을 지지하는 세력이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청년층에 해당하는 인구 집단이 컸을 경우 사회가 변혁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은 역사에 등장하는 두드러진 청년 운동의 한 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인구 증가는 17세기 중반과 18세기 후반에 유라시아에서 일어난 두 차례 혁명의 파고에서 핵심적 요소로 등장한다는 논리를 골드스톤(Jack Goldstone)은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서구 여러 나라에서 청년의 비중이 눈에 띄게 커진 18세기의 마지막 몇십 년은 바로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 였다. 19세기의 성공적 산업화와 대규모 이민은 유럽 사회에서 청년 인구가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을 감소시켰다. 그러나 1920년대에 청년 인구는 다시 급증하는 파시즘을 비롯한 극단주의 운동의 인적 자원을 제공하였다. 다시 40년 뒤 2차 대전 이후의 베이비 붐 세대는 1960년대의 시위와 항거에서 정치적 영항력을 분출시켰다.

이슬람의 청년 인구는 이슬람의 부활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1970년대에 이슬람 부활의 시동이 걸리고 1960년대에 그 추세가 가속이 붙는 동안 주요 이슬람 국가의 청년 인구(15세에서 24세까지의 연령 집단) 비율은 급상승하여 전체 인구의 20퍼센트를 웃돌기 시작하였다. 상당수의 이슬람 국가에서 청년 인구가 차지하는 비증은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절정에 이르렀으며 일부 국가에서는 다음 세기 초에 가서 절정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 나라에서 과거 또는 미래의 절정기 청년 인구 비율은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외하고는 모두 20퍼센트가 넘는다. 21세기 초반 10년 안에 절정기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청년 인구 비율은 20퍼센트에 조금 못 미친다. 청년 인구는 이슬람 조직과 정치 운동에 필요한 인적 자원을 제공한다. 1970년대에 들어와 이란 인구에서 청년층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치솟아 70년대 후반에는 20퍼센트를 육박한 사실과 1979년에 이란 혁명이 터진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1990년대 초반 알제리의 인구 구성이 이런 기준점에 도달했을 때 이슬람 정당이 대중적 지지를 얻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 또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슬람 청년 인구의 증가는 정치적으로 의미심장한 다양한 지역적 편차를 드러내기도 한다. 자료를 신중하게 다룰 필요가 있지만 보스니아와 알바니아의 청년 인구 비율은 금세기 말에 가서 급속하게 줄어들 것으로 전망된다.

그 경우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평화가 조속히 정착될 수도 있지만 이슬람교도에 대한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공세가 강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걸프만 지역의 청년 인구 비율은 당분간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다. 1988년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세자는 자기 조국이 당면한 가장 큰 위협은 청년층에서 부상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라고 언급하였다. 인구 변화의 추세로 보아 이러한 위협은 21세기까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랍 국가들(알제리 이집트, 모로코, 시리아, 튀니지)의 자연 인구 증가율은 1970년대와 1990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으므로 20대 초반의 구직 인구는 2010년까지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1990년과 비교하여 구직 시장에 새로 들어오는 수는 튀니지에서 30퍼센트, 알제리. 이집트. 모로코에서 50퍼센트 시리아에서 100퍼센트 증가할 것이다. 아랍 지역의 급격한 문맹률 감소는 글을 읽을 줄 아는 젊은 세대와 대부분 글을 모르는 노인 세대 사이의 간극을 낳고 있으며 이러한 '지식과 권력의 분열은 '정치 체제에 긴장을 야기할 가능성'이 높다.

인구 증가는 더 많은 자원을 요구한다. 따라서 인구 밀도가 높거나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는 나라의 국민들은 밖으로 진출하여 영토를 점유하면서 인구 압박이 덜한 나라에 압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의 인구 증가는 그러므로 이슬람 세계의 경계선에서 발생하는 이슬람교도와 다른 민족들 사이의 분쟁에 핵심적 요인으로 등장한다. 인구 압력과 맞물린 경제 침체는 이슬람 인구를 서구와 그 밖의 비이슬람 사회로 이동시킨다. 그래서 이들 사회에서 이민 증가는 주요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다. 한 문화의 빠르게 늘어나는 인구와 다른 문화의 서서히 늘어나거나 성장이 멈춘 인구의 병존 상태는 양 문화 모두에서 경제 정치 구조 변화의 압력 요인으로 작용한다. 가령 1970년대에 옛 소련 지역에서는 이슬람 인구가 24퍼센트 늘어난 반면 러시아 인구는 6.5퍼센트밖에 늘어나지 않아 인구 균형에 급격한 변화가 와서 중앙아시아의 공산당 지도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에 26퍼센트나 증가한 체첸 인구는 러시아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마찬가지로 알바니아의 빠른 인주 증가는 세르비아. 그리스. 이탈리아를 불안하게 만든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의 급격한 인구 증가를 예의 주시하고 있으며, 연평균 인구 증가율이 0.2퍼센트에도 못 미치는 스페인 또한 인구 증가율이 자국의 10배나 되는 반면 1인당 GNP10분의 1 에도 못 미치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동태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변화하는 환경

두 자릿수의 경제 성장을 무한정 지속시킬 수 있는 나라는 없으므로 아시아의 경제 성장도 21세기 초반 어느 시점에 가서는 진정세로 돌아설 것이다. 일본의 고속 성장은 1970년대 중반을 고비로 뚝 떨어져 그 뒤로는 미국이나 유럽 각국의 경제 성장률과 대동소이하였다. 아시아의 '경제 기적'을 낳은 나라들도 하나둘 성장률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복잡한 경제 구조를 가진 나라들의 '정상' 수준에 접근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 운동이나 문화 운동을 무한정 지속시킬 수 있는 나라도 없으므로 어느 시점에 가서는 이슬람 부활 현상도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것이 일어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은 그러한 운동의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인구 증가세가 한풀 꺾이는 21세기의 20년대와 30년대다. 그 시기가 오면 호전적 이슬람주의자와 이민의 수가 모두 감소하고 이슬람 내부의 갈등, 이슬람과 비이슬람의 갈등 수준도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 이슬람과 서구가 밀착할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분쟁의 소지는 그만큼 줄어들며 국지적 분쟁 대신 냉전이나 심지어는 냉화(cold peace)가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

그러나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아시아의 경제 성장과 이슬람의 인구 증가가 서구가 주도해 온 국제 질서에 커다란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특히 세계 문제에 대한 발언권과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은 빠른 경제 성장을 경험하고 있는 동아시아의 몫으로 더 많이 돌아갈 것이다. 다음 10년 동안에도 지금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중국의 발전은 문명 사이의 관계에서 엄청난 세력 변동을 낳을 것이다. 게다가 그때쯤 가면 인도가 눈부신 경제 성장을 하면서 세계 무대의 주역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그런가 하면 이슬람의 인구 증가도 문명의 세력 판도에 중요한 불안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중등 교육을 받은 청년 인구의 급증은 이슬람 부활의 추진력으로 나타날 것이며 이슬람의 호전성과 이민 수도 계속 늘어 날 것이다. 그 결과 앞으로 몇십 년 동안은 비서구 문명의 힘이 지속적으로 증대하면서 비서구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 비서구 문명과 비서구 문명의 충돌이 나타날 것이다.

 

 

6. 세계 정치의 문화적 재편

 

집단성의 모색 : 동질성의 정치학 세계

정치는 근대화의 자극을 받으면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비슷한 문화를 가진 민족과 국가끼리 뭉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념과 강대국을 중심으로 정의되던 제휴 관계가 문화와 문명으로 정의되는 제휴 관계로 바뀌고 있다. 정치적 경계선이 문화적 경계선 곧 민족적, 종교적, 문명적 경계선과 일치해 가는 추세에 있다. 냉전 시대의 블록을 대신하여 문화적 결속이 등장하였으며 문명과 문명의 단층선이 세계 정치에서 주요 분쟁선으로 변모하고 있다.

냉전 시대에는 한 국가가 다른 많은 나라들처럼 비동맹 노선을 고수할 수 있었으며 또 일부 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이쪽에서 저쪽으로 동맹 관계를 바꿀 수도 있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들은 자국의 안보 상황에 대한 독자적 판단, 세력 균형에 대한 자기 나름의 계산, 이념적 선호를 바탕으로 관계 변화를 선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서는 문화적 동질성이 한 나라의 우방과 적국을 규정하는 본질적 요인이다. 냉전 구조에 편입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국가가 문화 정체성없이 존재할 수는 없게 되었다. 너는 어느 편인가? 라는 물음은 너는 누구인가? 라는 훨씬 근원적인 물음으로 바뀌었다. 모든 나라는 이 물음에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답변, 곧 한 나라의 문화적 정체성이 세계 정치에서 그 나라가 차지하는 위치, 그 나라의 친구와 적수를 규정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정체성의 위기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폭발하였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 속하는가?", "우리가 아닌 쪽은 누구인가?" 하고 묻는 사람들이 도처에서 목격된다. 이런 물음들은 옛 유고슬라비아의 경우처럼 새로운 민족 국가를 세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1990년대 중반 현재 국가의 정체성이 활발히 논의되는 지역은 알제리. 캐나다. 중국. 독일. 영국. 인도. 이란. 일본. 멕시코. 모로코. 러시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시리아. 튀니지. 터키. 우크라이나 미국 등이다. 물론 정체성의 문제는 상이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상당 규모의 인구 집단들을 거느린 분열 국가에서 특히 강하게 표출된다.

정체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주로 의지하는 것은 혈연. 믿음. 신앙. 가족이다. 사람들은 비슷한 조상. 종교. 언어. 가치관. 제도를 가진 사람들과 뭉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는 거리를 둔다. 냉전 시대에 유럽의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은 문화적으로는 서구의 일원이면서도 서구와는 거리를 두고 중립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문화적 동질성을 가진 유럽 공동체에 참여하였다. 과거 바르샤바 조약 기구에 들어갔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같은 가톨릭.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은 EUNATO 가입을 목전에 두고 있으며 발트 제국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유럽 열강들은 EU 안에 이슬람 국가인 터키가 들어오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들은 또한 유럽 대륙 안에 또 하나의 이슬람 국가인 보스니아가 등장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북쪽에서는 소련의 몰락과 함께 발트 공화국들 사이에서 또 이들과 스웨덴, 핀란드 사이에서 새로운(그러나 오랜 역사를 가진) 동맹 형태가 출현하고 있다. 스웨덴 총리는 발트 공화국들이 스웨덴의 "가까운 이웃"이며 러시아가 이들 국가를 침공할 경우 스웨덴은 중립을 지키지 않으리라는 점을 러시아 측에게 분명히 못 박았다.

이와 비슷한 형세 변화가 발칸 지역에서도 나타난다. 냉전 시대만 하더라도 그리스와 터키는 함께 NATO,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는 같은 바르샤바조약 기구에 소속된 동맹국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비동맹 노선을 고수하였으며 알바니아는 한때 중국과 유대 관계를 맺었던 고립 국가였다. 이제 이러한 냉전 구도는 이슬람과 정교에 뿌리를 둔 문명 구도로 바뀌고 있다. 발칸 지도자들은 그리스-세르비아-불가리아의 정교 동맹 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리스 수상은 이떻게 단언한다 "발칸 전쟁은...... 정교의 끈이 갖는 호소력을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그것은 유대다. 그동안 잠복되었다가 발칸 지역의 사태 전개와 함께 구체적 실체로 드러나고 있다. 변화무쌍한 세계에서 사람들은 정체성과 안전을 찾는다. 사람들은 미지의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자 뿌리와 연줄을 찾아 나선다." 이러한 견해는 세르비아의 한 주요 야당 지도자의 발언과 일맥상통한다. 현재의 남동부 유럽 정세로 보아 이슬람의 잠식을 저지하기 위하여 세르비아, 불가리아, 그리스를 포함하는 새로운 발칸 정교국 동맹이 조만간 결성될 필요가 있다." 북쪽으로 올라가면 같은 정교국 세르비아와 루마니아는 가톨릭 국가인 헝가리와의 관계에서 안고 있는 공통의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긴밀한 공조를 펴고 있다. 소련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그리스와 터키의 '부자연스러운' 동맹은 사실상 의미를 잃었다. 이 두 나라는 에게해, 키프로스, 군사적 균형, NATOEU에서의 역할, 미국과의 관계를 놓고 사사건건 충돌하고 있다. 발칸 지역에서 이슬람교도의 보호자 역할을 자임하는 터키는 보스니아를 지원한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러시아는 정교 세르비아를, 독일은 가톨릭 크로아티아를, 이슬람 국가들은 보스니아 정부를 합심해서 지원한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이슬람교도, 알바니아 이슬람교도와 싸운다. 전체적으로 보아 발칸 지역은 종교적 경계선을 따라 다시금 발칸화 되었다. '두 개의 축이 등장한다.'라고 글레니(Misha Glenny)는 지적한다. 하나는 동방 정교의 의상을 입었고 다른 하나는 이슬람 복장을 하고 있다. 베오그라드-아테네 축과 알바니아-터키 축 사이의 주도권을 둘러싼 분쟁이 가열될 가능성이 상존한다."

정교를 믿는 옛 소련의 벨로루시. 몰도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 쪽으로 접근한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싸움을 벌이고, 러시아와 터키는 분쟁 당사국들을 지원하면서 서로를 견제한다. 러시아군은 타지키스탄의 이슬람 원리주의자들과 체첸의 이슬람 민족주의자들과 싸운다. 반면 터키. 이란. 사우디아라비아는 이 신생국들과의 관계를 다지고자 막대한 노력을 기울인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캐슈미르를 놓고 반목을 벌이며 인도 내에서도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힌두 원리주의 세력 사이에서 새로운 갈등이 싹 트고 있다.

여섯 개의 상이한 문명이 발생한 동아시아에서는 군비 확산 경쟁이 벌어지고 있으며 영토의 분쟁이 전면에 표출되기도 하였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점차 중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본토에 접근하고 있으며 본토 의존도도 커지는 추세이다. 한국과 북한은 더디기는 하지만 통일의 길로 전진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는 한편으로 이슬람과, 다른 한편으로는 중국과 크리스트교 사이에 긴장이 증대하고 있으며 때로는 이것이 폭력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경제적 결속체-메르코수르(남미 공동 시장), 안데스 조약. 삼각 조약(멕시코,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중미 공동 시장-가 새로 나타나, 경제 통합이 문화적 동질성에 바탕을 두었을 때 더욱 신속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진다는 EU의 교훈을 다시금 입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미국과 캐나다는 NAFTA(북미 자유무역 지대) 안에 멕시코를 끌어들이고자 노력 중이다. 장기적으로 이 과정이 성공할 수 있느냐는 멕시코가 스스로를 라틴 아메리카 문화에서 북미 문화로 새롭게 규정할 수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냉전 질서가 무너지면서, 세계 각국은 새로운 대립과 제휴를 진전시키거나 해묵은 대립과 제휴를 소생시키고 있다. 집단성을 추구하는 이들은 비슷한 문화, 동일한 문명을 가진 나라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집단성을 발견한다. 정치인들이 민족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더 큰' 문화적 공동체를 부추기면 대중들은 거기서 일체감을 맛본다. 그래서 나오는 구호가 '대세르비아', '대터키', '대헝가리', '대크로아티아', '대아제르바이잔, '대러시아', 패알바니아', '대이란', '대우즈베키스탄' 이다.

정치와 경제의 지형도는 문화와 문명의 지형도와 늘 일치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세력 균형을 고려하게 되면 때로는 프란츠 1세가 합스부르크 제국에 맞서 오스만과 손을 잡듯이 문명의 울타리를 넘어선 연합이 가능하기도 하다. 뿐만 아니라 한 시대에 어떤 국가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형성한 결합의 형태는 다음 시대까지 지속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점점 느슨해지고 의미를 잃어가게 마련이며 새로운 시대의 목표에 맞게 수정되곤 한다. 그리스와 터키는 앞으로도 NATO 회원국으로 분명히 남겠지만 NATO의 여타 회원국들과 이들의 관계는 약화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과 일본. 한국의 관계, 미국과 이스라엘의 사실상의 동맹 관계, 미국과 파키스탄의 안보 관계도 변화를 겪을 것이다. ASEAN 같은 다문명 국제기구는 자신의 정합성을 유지하는 데 점차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냉전 시대에 상이한 강대국들의 동반자였던 인도와 파키스탄은 이제 자신의 국가 이익을 새롭게 정의하면서 문화적 정치 지형도의 현실을 반영하는 새로운 결속을 추구한다. 소련의 영향력을 저지하기 위하여 서구가 제공한 지원에 의존하던 아프리카 국가들은 점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도력과 원조를 바라고 있다.

문화적 동질성이 사람들의 결속과 응집을 낳고 문화적 이질성이 반목과 갈등을 낳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모든 사람은 친척. 직업. 문화. 제도. 영토. 교육. 당파 이념 등의 다양한 차원에서 때로는 갈등하고 때로는 협력하는 복수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한 차원의 정체성은 상이한 차원의 정체성들과 충돌할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로, 1914년 독일 노동자들은 국제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계급 정체성과 독일 민족과 독일 제국에 대한 민족 정체성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다. 현재 세계에서 문화적 정체성은 다른 차원의 정체성들에 비해 그 중요성이 비약적으로 커지고 있다.

정체성은 대체로 얼굴과 얼굴을 직접 마주 대하는 수준에서 가장 강력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정체성이 넓은 의미의 정체성과 반드시 갈등을 빚는 것은 아니다. 군 장교는 자신의 증대, 연대, 사단에 대한 제도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개인은 자신의 씨족, 민족 집단, 국적, 종교, 문명에 대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낮은 수준에서 문화적 정체성이 부각되면 늦은 수준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된다. 버크는 이렇게 지적한다. '하위의 파당성이 전체에 대한 애정을 절멸시키지는 않는다....... 하부 단위에 애착을 느낀다는 것.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작은 소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국민 정서의 제1원칙(말하자면 근간)을 이룬다.' 문화가 중요성을 갖는 세계에서 소대는 종족, 중대는 민족, 군 전체는 문명에 해당한다. 전 세계적으로 문화의 경계선을 따라 사람들이 재편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은 문화 집단들 사이의 갈등이 점차 중요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명은 가장 광범위한 문화적 실체이다. 따라서 상이한 문명에서 유래한 집단 간의 갈등은 세계 정치에서 점점 중요한 뜻을 갖는다.

둘째, 3장과 4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점차로 문화 정체성이 부각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혼란과 소외의 한복판에서 더욱 의미있는 정체성에 대한 욕구가 생기고 사회적 차원에서는 비서구 사회의 실력과 힘이 증대함에 따라 토착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자각이 일어나는. 사회적, 경제적 근대화의 결과이다. 세계의 주요한 종교에서 천리주의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사태 전개의 뚜렷한 조짐이다. 그러나 '신의 설욕'은 원리주의 운동 집단에만 국한되어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셋째, 정체성은 어떤 차원에서건 개인적, 부족적, 인종적, 문명적- '타자', 곧 다른 개인, 부족, 인종, 문명과의 관련성 속에서 정의된다. 과거의 역사를 보아도 동일한 문명 안에 들어가 있는 국가들이나 그 밖의 정치적 실체들 사이의 관계는 상이한 문명에 속한 국가들이나 정치적 실체들 사이의 관계와는 달랐다.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규정하는 원칙과 우리와 같지 않은 '야만인'들에 대한 태도를 규정하는 원칙은 같지 않았다. 크리스트교 국가들끼리 서로 교섭하는 원칙과 터키라든가 그 밖의 '이교도들'을 다루는 원칙은 달랐다. 이슬람교도들은 '다르 알 이슬람''다르 알 하르브'에 대하여 각각 다르게 행동하였다. 중국인은 해외 화교와 비중국계 외국인을 다르게 대우하였다. 문명화된 '우리'와 문명 외곽의 '그들'은 인류 역사에서 늘 나타나는 변수이다. 이러한 차이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에서 유래한다

1. 판이하게 다른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에게서 느끼는 우월감(때로는 열등감)

2. 그런 사람들에 대한 신뢰감의 결여나 두려움

3. 언어라든가 예의 바른 행동에 대한 기준의 차이에서 나타나는 의사소통의 어려움

4. 다른 사람들의 전제, 동기, 사회적 관계, 사회적 관습에서 느끼는 생소함

교통과 통신이 발전하면서 상이한 문명에 속한 사람들 사이의 교섭 또한 더욱 심층적이고 포괄적이며 균형 잡힌 방식으로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그 결과 문명적 정체성이 점차로 부각된다. 프랑스인, 독일인, 벨기에인, 네덜란드인은 점점 스스로를 유럽인으로 생각한다. 중동의 이슬랍 교도는 보스니아인과 체첸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공동의 사명감을 느낀다. 동아시아 지역에 흩어진 중국인은 중국 본토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노력한다. 러시아인은 세르비아를 비롯한 정교권의 민족들을 지원하려고 애쓴다. 이러한 광범위한 수준의 문명적 정체성을 통해 문명 간의 차이와 '우리''그들'을 가르는 내용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얼마나 뿌리 깊은가를 잘 알 수 있다.

넷째, 상이한 문명 배경을 가진 국가나 집단 사이의 갈등 원인은 인간 집단 사이에서 갈등을 낳아 왔던 원인들과 대체로 유사하다. 인구, 영토, , 자원, 상대적 권력을 장악하여, 다른 집단이 자기 집단에 가하는 수준 보다 자신의 가치관, 문화 제도를 다른 집단에 조금이라도 더 이식하려고 애쓰는 데서 야기되는 싸움이다. 그러나 문화 집단 사이의 갈등은 문화적 사안을 담고 있다. 가령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자유주의라는 세속 이념에서 나타나는 차이는, 해소되지는 않더라도 논의는 할 수 있다. 물질적 이익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절충이 가능하며 원만히 타협에 이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문화적 사안은 그렇지 않다. 아요드햐에 신전을 지어야 하느냐, 모스크를 지어야 하느냐를 놓고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벌이는 갈등은 그곳에 두 건물을 다 짓는다고 해서, 혹은 아예 어떤 건물도 짓지 않는다고 해서, 또는 모스크와 신전을 절충한 형태의 건물을 짓는다고 해서 해소될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코소보 지역을 둘러싼 알바니아 이슬람교도와 세르비아계 정교도의 대립, 예루살렘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의 대립같은 영토 주권의 문제는 쉽사리 해결되기 어렵다. 이 지역들이 양 진영 모두에게 깊은 역사적, 문화적, 정서적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틀에 한 번 여학생들에게 이슬람 의상을 입고 등교할 수 있게 하는 절충안은 프랑스 당국도 이슬람교도 학부모들도 모두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 이러한 문화적 사안들은 전부 아니면 전무, 다시 말하여 제로섬 선택의 문제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분쟁의 보편성이다. 증오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감정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정의하고 행동 욕구를 느끼기 위해서는 적이 필요하다. 사업 분야의 경쟁자, 성취도를 놓고 다투는 라이벌, 정치적 앙숙이 필요하다. 자기와는 다르고 자기를 해칠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사람들은 대체로 불신하며 거기서 위협을 느낀다. 하나의 분쟁이 해소되고 하나의 적수가 사라지면 개인적, 사회적. 문화적 압력이 작용하여 새로운 적수를 만들어 낸다. 마즈루이(Ali Mazrui) '우리''그들'이라는 대립 구도는 정치 영역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양상이다.'라고 지적하였다. 현대 세계에서 그들'은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의미로 점점 사용되고 있다. 냉전의 종식은 분쟁을 종식시킨 것이 아니라. 문화에 뿌리를 둔 새로운 정체성, 가장 광범위한 수준에서는 문명을 형성하게 될 상이한 문화에서 유래한 집단들 사이의 새로운 갈등 양상을 낳았다. 아울러 공통의 문화는 그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나 집단 사이의 협조를 낳는다. 이것은 특히 경제 부문에서 국가들 사이의 지역 연합이 출현하는 현상에서 확인된다.

 

문화, 경제의 협력

1990년대 초반에 세계 정치의 지역주의와 지역화에 대한 언급이 늘고 있다. 지역 분쟁이 세계 안보의 중요한 사안으로 전면에 등장하는 사례 또한 늘고 있다. 러시아, 중국, 미국 같은 주요 강대국은 물론 스웨덴, 터키 같은 중진 국가들도 자신의 안보 이익을 지역적 용어로 노골화하고 있다. 지역 내부의 무역은 지역과 지역 사이의 무역보다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 이에 따라 유럽인, 북미인, 동아시아인의 지역 경제 블록의 대두를 점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지역주의'라는 용어는 현실을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다. 지역은 지리적 실체이지 정치적 또는 문화적 실체가 아니다. 발칸과 중동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의 지역은 문명 내적, 문명 외적 갈등으로 갈갈이 찢길 수 있다. 지역은 지리와 문화가 일치하는 경우에만 국가들 사이의 협조를 낳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문화적 이질성이 크면 지리적 근접성은 동질성을 낳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군사 동맹과 경제 협력은 회원국 사이의 협조를 요구하는데, 이 협조는 상호 신뢰에 기초하며, 신뢰는 다시 공통의 가치관과 문화로부터 가장 쉽게 얻어진다. 시대 분위기와 정책 목표도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지만 지역 기구의 전체적 효율성은 회원국의 문명적 다양성에 대체로 반비례한다. 일반적으로 단일 문명 기구가 복수 문명 기구보다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이 원리는 정치 기구와 안보 기구는 물론 경제 기구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NATO가 성공을 거둔 것은 그것이 공동의 가치관과 철학적 전제를 가진 서유럽 국가들의 중추적 안보 기구로 출범한 데에 크게 힘입었다. 서유럽 연합(WEU)은 공통된 유럽 문화의 소산이다. 반면 유럽 안보 협력 기구 (OSCE)는 판이한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지닌 최소한 3개 문명권의 국가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의미 있는 제도적 동질성을 발전시키고 활동 반경을 넓히는 데 일정한 한계가 있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으며 영어가 공용 어로 사용되는 13개국으로 구성된 단일 문명 성격의 카리브 공동체 (CARLCOM)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협력 관계를 발전시켰으며 일부 회원국들 사이에서는 더욱 긴밀한 공조 체계를 낳았다. 그러나 카리브 지역에서 영어권과 스페인어권의 단층선을 더욱 포괄적인 카리브 기구로 연결하려는 노력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마찬가지로 1985년에 결성된 지역 협력을 위한 남아시아 연합은 7개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국가로 구성되어 있어 거의 유명무실한 기구가 되었으며 회의 한번 제대로 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문화와 지역주의의 관계는 경제 통합의 영역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국가간의 경제 연합은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 자유무역 지대

2. 관세 연합

3. 공동시장

4. 경제 연합

EU는 공동 시장과 함께 경제 연합의 수많은 요소들을 받아들여 통합 단계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나아갔다. 비교적 동질성이 강한 메르코수르와 안데스 조약은 1994년 현재 관세 연합을 체결하는 단계에 도달하였다. 복수 문명으로 이루어진 ASEAN의 경우 자유무역 지대를 향한 첫걸음을 1992년 이제 막 내디뎠을 뿐이다. 다른 복수 문명 경제 기구는 이보다 훨씬 지지부진한 상태에 있다. 1995년 현재 NAFTA를 제외하고 복수 문명 경제 기구 중 경제 통합은 고사하고 자유무역 지대 발족에 성공한 사례조차 없다.

서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지역 기구가 효율적으로 가동하면서 의미 있는 협력 관계가 뿌리내리는 데 성공한 것은 문명적 동질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서유럽인과 라틴 아메리카인은 자신들이 공통의 문화를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다. 동아시아에는 5(러시아를 집어넣을 경우 6)의 문명이 존재한다. 따라서 동아시아는 공통의 문명에 뿌리 않고서도 의미 있는 지역 기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금석이 될 수 있다. 1990년대 초반 현재 동아시아에서는 NATO에 비견할 수 있는 안보 기구나 다자간 군사 동맹이 존재하지 않고 있다. 복수 문명 지역 기구인 ASEAN1967년 중화권 1개국, 이슬람권 2개국, 불교권 1개국, 크리스트교권 1개국에 의해 발족되었다. 당시 이들은 내부의 좌익 혁명 세력과 북베트남과 중국의 잠재적 위협이라는 공동의 안보 위기를 앞에 두고 뭉쳤다.

ASEAN은 혼히 효과적인 다문화 국제기구의 한 예로서 언급되곤 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러한 기구의 한계를 드러내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ASEAN은 군사 동맹이 아니다. 회원국들은 군사적 쌍무 협조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서유럽과 라틴 아메리카에서 군사비가 감축되는 현상과는 대조적으로 ASEAN 각국은 군사 예산을 경쟁적으로 늘리면서 무력 증강에 힘쓰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만 국한시켜 보더라도 ASEAN은 출범 당시부터 경제 통합보다는 경제 협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따라서 지역주의는 완만한 페이스로 발전하였으며 21세기를 목전에 둔 지금까지 아직 자유무역 지대 하나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하고 있다. 1978ASEAN은 각료급 회담을 출범시켜 회원국 외무 장관들과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국. 유럽 연합 등 '대화를 위한 동반 국가'의 외무 장관들이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 회담은 기본적으로 2자 대화를 위한 포럼의 성격이 강하였으며 중요한 안보 사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1993ASEAN은 더욱 광범위한 토론의 장으로서 아세안 지역 포럼을 발족시켰으며 여기에는 회원국과 동반 국가 외에도 러시아. 중국. 베트남. 라오스 파푸아뉴기니가 가담하였다.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이 기구는 집단 대화를 위한 장이었지 집단행동을 위한 장이 아니었다. 19947월 첫 회담을 가지면서 회원국들은 지역 안보 문제에 대한 각국 견해의 발표'를 표방하고 나섰지만 중요한 사안은 누락시켰다. 한 관리의 지적대로 그러한 사안이 거론될 경우 관련 참가국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나설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ASEAN과 그 후속 기구들의 활동은 복수 문명 지역 기구에 내재된 한계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의미 있는 동아시아 지역 기구는 그 기구를 지탱할 만한 동아시아의 문화적 동질성이 층분히 확보될 때만 무르익을 것이다. 동아시아 사회에도 이 지역을 서구와 구별시키는 공통성이 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이러한 공통성은 EAEC의 출범을 위한 밑바탕을 제공하였다고 주장한다. 이 기구에는 ASEAN 회원국과 미얀마. 대만. 홍콩. 한국.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과 일본이 참여한다. 마하티르는 EAEC가 공동의 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EAEC는 동아시아 지역에 있다는 이유로 단순한 지리적 그룹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어디까지나 문화적 집단이다. 동아시아인은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인도네시아인이건 문화적으로 어떤 유사점을 지니고 있다. 유럽이 자기네끼리 뭉치고 아메리카인이 자기네끼리 뭉치듯이 우리 아시아인은 아시아인끼리 뭉쳐야 한다.' 마하티르의 한 측근 인사가 밝히듯이 EAEC의 목적은 동질성을 지닌 아시아 국가들끼리 역내 무역을 증진하는 데 있다.

따라서 EAEC의 저변에 깔린 전제는 경제는 문화에 종속된다는 것이다. 호주, 뉴질랜드, 미국이 EAEC에서 배제된 이유는 이들 국가가 문화적으로 아시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EAEC의 성패는 일본과 중국의 참여 여부에 달려 있다. 마하티르는 일본에게 합류할 것을 역설한다. 일본인은 아시아인이다. 일본인은 동아시아인이다. 그는 일본인 청중들 앞에서 그렇게 못박았다. '여러분은 이 엄연한 지리 문화적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여러분은 이곳에 속해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미국의 심기를 건드릴지 모른다는 우려와 함께 일본이 아시아에 소속감을 느껴야 하는지를 놓고 내부적으로 의견 수렴이 되지 않은 상태이므로 EAEC에 선뜻 동참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다. 만일 일본이 EAEC에 참여할 경우 일본이 EAEC를 주도할 가능성이 높으며 회원국들이 불안과 우려를 느끼겠고 중국의 강한 반발이 예상된다. 유럽 연합과 NATFA에 맞서기 위하여 일본이 아시아를 '엔 블록화'할 것이라는 전망은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일본은 이웃 국가들과 문화적 공통성이 지극히 적은 외로운 국가이며 1995년 현재엔 블록이 구축된 듯한 조짐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ASEAN이 굼뜨게 움직이고 엔 블록이 한낱 공상으로만 머물며 일본이 휘청거리고 EAEC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적 상호의존도는 비약적으로 커졌다. 이러한 무역 규모의 확대는 동아시아 화교권의 문화적 결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러한 결속은 중국에 기반을 둔 국제 경제의 지속적인 비공식 통합을 낳으면서 사실상 중국 공동 시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과정은 여러 면에서 과거 유럽의 한자 동맹에 비견할 만하다. 다른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동아시아에서도 문화적 동질성은 의미 있는 경제적 통합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냉전의 종식은 새로운 지역 경제 기구를 출범시키거나 과거의 지역 경제 기구를 부활시키는 자극제의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성패는 관련국들의 문화적 동질성에 크게 의존한다. 페레스(Shimon Peres)1994년에 내놓은 중동 공동 시장 구상은 당분간 사막의 신기루로 남아 있을 공산이 크다. 한 아랍 관리는 아랍 세계는 이스라엘이 참석하는 제도나 개발은행의 설립 필요성을 못 느낀다.'라고 지적하였다. 1994CARLCOM을 아이티와 이 지역의 스페인어권 국가들과 연계시키고자 발족한 카리브 국가 연합은 회원국들의 다양한 성격과 과거 영국 식민지였던 국가들의 편협성, 그들의 압도적인 미국 지향성을 극복하는 듯한 조짐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문화적으로 좀더 동질적인 기구를 만들려는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하위 문명의 경계선을 따라서 나뉘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파키스탄, 이란, 터키는 1977년 자신들이 출범시켰다가 거의 유명무실해진 지역 개발 협력체를 다시 부활하면서 경제 협력 기구(ECO)로 명칭을 고쳤다. 그 후 관세 인하를 포함한 후속 조치가 뒤따랐으며 1992ECO 회원국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옛 소련의 6개 이슬람 공화국이 추가로 들어왔다. 그런가 하면 1991년 옛 소련의 5개 중앙아시아 공화국이 공동 시장을 창설하자는데 원칙적으로 동의하였으며 1994년에는 가장 큰 두 나라인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이 상품, 서비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하고 양국의 재정, 금융, 관세 정책을 조율하도록 규정한 조약에 서명하였다. 1991년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는 경제 통합의 정상적 이행 단계를 크게 앞당기기 위해 메르코수르에 동참하였으며 1995년까지는 부분적인 관세 연합이 출범하였다. 1990년에는 이제까지 지지부진하던 중미 공동 시장이 자유무역 지대를 창설하였으며 1994년에는 마찬가지로 활동이 미진하던 안데스 그룹이 관세 연합을 본격 가동하였다. 1992년에는 비제그라드 국가군(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이 중부 유럽 자유무역 지대를 출범시키기로 합의하였고 1994년에는 그 실현 일정을 앞당기기까지 했다.

경제 통합은 교역 확대를 낳는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역내 무역은 역외 무역에 비해 증요성이 더해 갔다. 1980년 유럽 연합의 역내 무역은 이 지역 무역량의 50.6퍼센트를 차지하였지만 1989년에는 그것이 58.9 퍼센트로 늘어났다. 역내 무역의 비중이 높아지는 추세는 북미와 동아시아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도 메르코수르의 출범과 안데스 조약의 부활과 함께 1990년대 초반 라틴 아메리카 역내 무역량이 급격히 치솟았다. 1990년에서 1993년까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무역량이 3배로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무역량이 4배로 뛰었다. NAFTA가 출범하면서 미국과 멕시코의 교역량 역시 크게 치솟았다. 동아시아 지역의 역내 무역량도 역외 무역량보다 빠르게 늘어났지만 자국 시장을 폐쇄하려는 일본의 경향으로 그 팽창 규모가 많이 줄어들었다. 반면 중국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ASEAN, 대만, 홍콩, 한국, 중국)끼리의 무역량은 1970년 이 지역 무역량의 20퍼센트에서 1992년에는 30퍼센트로 증가하였다. 반면 일본의 역내 무역량은 23퍼센트에서 13퍼센트로 줄어들었다. 1992년 중국권의 역내 수출량은 이 지역의 미국에 대한 수출량, 일본과 유럽에 대한 수출량을 더한 값보다도 많았다.

독특한 사회 구조와 문명을 가진 일본은 동아시아와의 경제적 결속, 미국 및 유럽과의 경제적 이견 조정에 애를 먹고 있다. 동아시아 다른 나라들과 아무리 무역량을 늘리고 투자를 강화한다 하여도 일본은 이들 나라와의 문화적 차이, 특히 이 지역의 경제를 주도하는 화교 경제 엘리트들의 견제로 NAFTA나 유럽 연합에 견줄 만한 경제 블록을 일본의 주도로 구축하는 데 한계가 있다. 뿐만 아니라 서구와의 문화적 차이는 일본과 미국, 유럽과의 경제적 관계에서 오해와 적대감을 악화시킨다. 경제 통합이 문화적 동질성에 달려 있다면 문화적으로 고립된 나라 일본의 미래는 경제적으로도 암울하다.

과거의 경우 국가 간의 교역 양태는 동맹에 뒤이어 나타나거나 그와 맥락을 같이하였다. 앞으로의 세계에서 무역의 양태는 문화가 결정한다. 기업가들은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대와 거래를 한다. 국가들은 서로 이해하고 신뢰할 수 있는 비슷한 성향의 국가들로 이루어진 국제적 결사체에 주권을 양도한다. 경제 협력의 뿌리는 문화적 동질성에 놓여 있다.

 

문명의 구조

냉전 시대의 국가들은 양대 초강대국과 동맹국, 위성국, 종속국, 중립국, 비동맹국으로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탈냉전 시대의 국가들은 문명들과 소속국(member state), 핵심국, 고립국(lone state), 단절국(cleft state), 분열국(torn state) 으로서 관계를 맺는다. 부족이나 민족처럼 문명 또한 정치적 구조를 갖는다. 소속국은 한 문명에 문화적으로 완전히 동질감을 느끼는 나라다. 아랍-이슬람 문명에 동조하는 이집트와 유럽_서구 문명에 동조하는 이탈리아가 좋은 예다. 하나의 문명은 그 문명을 공유하고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물론 다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밑에 거느린다. 대부분의 문명은 그 문명의 소속국들이 자기 문화의 근원 또는 뿌리로 간주하는 한 군데 이상의 성지를 가지고 있다. 이 장소는 일반적으로 핵심국, 다시 말해서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진 문화적 중심 국가 안에 자리 잡고 있다.

핵심국의 수와 역할은 문명마다 다르고 시대별로도 다르다. 일본 문명은 하나로 존재하는 일본 핵심국과 사실상 일치한다. 중화, 정교, 힌두 문명은 압도적 지배력을 가진 하나의 핵심국, 다수의 소속국, 상이한 문명권의 사람들이 지배하는 지역에서 살아가지만 자기 문명의 뿌리를 잃지 않고 있는 사람들(해외 화교, 독립국가연합 곳곳에 포진한 러시아인, 스리랑카의 타밀인)을 거느린다. 역사적으로 서구에는 다수의 핵심국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둘이다. 하나는 미국이고 또 하나는 독일-프랑스다. 영국은 그 중간에서 준중심국으로 떠 있다. 이슬람,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에는 핵심국이 없다. 이것은 아프리카와 중동을 분할하였고 정도는 덜하지만 과거 몇 세기 동안 라틴 아메리카를 분할한 바 있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에서 부분적으로 그 역사적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슬람 세계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5장에서 논의하였듯이 이슬람 사회와 비이슬람 사회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점이 되고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는 스페인이 스페인어권, 나아가서는 이베리아 문명의 핵심국 역할을 할 수도 있겠지만, 스페인의 지도자들은 과거의 식민지들과 문화적 유대는 계속 유지하면서도 유럽 문명의 일원으로 남는 길을 의식적으로 선택하였다. 영토, 자원, 인구, 군사력, 경제력 면에서 브라질은 라틴 아메리카를 주도하는 나라가 될 자격이 있고 가능성도 많다. 그러나 브라질과 라틴 아메리카의 관계는 이란과 이슬람의 관계와 비슷하다. 핵심국으로서의 자격은 층분히 갖추었지만 하위 문명 수준의 차이점(이란은 종교, 브라질은 언어) 때문에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브라질, 멕시코,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이 주도권을 놓고 공조와 경쟁을 동시에 벌이는 복잡한 양상이 벌어진다. 멕시코가 라틴 아메리카에서 떨어져 나와 북미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하고 칠레 등이 그 뒤를 따르면서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은 한결 복잡해졌다. 장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문명은 하나로 녹아들어 세 갈래를 가진 서구 문명의 한 변형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하나의 중심국이 그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제약이 많다. 이 지역이 프랑스어권과 영어권으로 양분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때는 코트디부아르가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핵심국이었다. 그러나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의 진정한 핵심국은 예나 지금이나 프랑스라는 데 이견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프랑스는 과거의 식민지들이 독립한 다음에도 그 들과 긴밀한 군사적, 경제적, 정치적 관계를 맺어 왔다. 아프리카의 핵심국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춘 나라는 나이지리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이들은 모두 영어권 국가다. 나이지리아는 영토, 자원, 위치 면에서 핵심국이 될 만한 잠재력을 갖추었지만, 내부 분열, 부패의 만연, 정치 불안정 정부의 억압적 정책, 경제 난국 때문에 몇몇 예외적 사안을 제외하고는 핵심국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타협을 통하여 흑백 인종 차별 구조에서 민주 체제로 평화롭게 이행하였고 막강한 산업 생산력과 풍부한 자연 자원, 군사력을 가졌으며 아프리카의 다른 나라에 비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앞섰고 흑백 정치인들이 무난히 국정을 이끌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남부 아프리카, 나아가서는 영어권 아프리카,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전역을 주도해 갈 가능성이 가장 높다.

고립국은 다른 나라들과의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되어 있다. 가령 에티오피아는 이 나라의 국어이며 에티오피아의 고유 문자로 표기되는 암하라어, 룹트 정교(크리스트 교파의 하나로 5세기 증엽 알렉산드리아 주교의 주도 아래 로마, 콘스탄티노플 교회로부터 분리함 : 옮긴 이), 제국주의 역사, 인접한 이슬람 국가들과의 종교적 차이 때문에 문화적으로 고립되어 있다. 아이티의 지도층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의 문화적 유대를 소중히 여겼지만 이 나라의 국어인 크리올어, 부두교, 봉기한 노예들이 세운 나라라는 특수성, 피로 얼룩진 역사 때문에 고립국으로 남아 있다. 민츠(Sidney Mintz)도 모든 국가는 특수하다는 점을 인정하지만 아이티는 비길 데 없이 특이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1994년의 아이티 위기 때만 하더라도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이 사태를 라틴 아메리카의 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며, 쿠바 난민은 받아들였어도 아이티 난민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파나마의 대통령 당선자는 "라틴 아메리카에서 아이티는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 인정되지 않는다. 아이티인은 다른 언어를 쓴다. 그들은 상이한 인종적 뿌리, 상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판이하게 다르다."fk고 말했다. 아이티는 영어를 공용어로 쓰는 카리브해의 여러 나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 한 평론가의 지적에 따르면 아이티는 아이오와나 몬태나 출신뿐 아니라 그레나다나 자메이카 출신에게도 낯설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이웃' 아이티는 그야말로 천애 고아다.

가장 중요한 고립국 일본은 일본 문명의 유일한 국가이자 핵심국이다. 일본의 특이한 문화를 공유하는 국가는 전혀 없으며 일본에서 외국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그 나라에서 극히 소수에 머물러 있거나 아니면 그 나라의 문화에 동화되었다(가령 일본계 미국인). 일본의 문화가 매우 특수하며 보편화가 가능한 종교(크리스트교, 이슬람교)나 이념(자유주의, 공산주의)을 외국에 수출하여 그 나라들과 문화적 연계를 맺을 가능성 또한 없다는 점에서 일본의 고립감은 한층 깊어진다.

거의 모든 나라는 성격이 판이한 둘 이상의 민족적, 인종적, 종교적 집단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질적이다. 많은 나라들은 이 집단들의 차이점이나 갈등이 그 나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분열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분열의 깊이는 대체로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한다. 한 국가 안의 깊은 분열은 대규모 폭력으로 치닫거나 그 나라의 존립 자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자치나 분리를 지향하는 운동은 문화의 차이가 지리의 차이와 일치할 때 분출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문화와 지리가 일치하지 않을 경우 민족 청소나 강제 축출을 통하여 일치를 낳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날 수도 있다.

동일한 문명에 속하지만 뚜렷한 문화의 차이를 지닌 국가들은 분리를 경험하였거나(체코슬로바키아) 분리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캐나다). 그러나 깊은 분열은 대규모 인구 집단들이 상이한 문명권에 속한 단절국에서 출현할 가능성이 늦다. 그러한 분열과 여기에 수반하는 갈등은 한 문명권에 속한 다수 집단이 자신의 정치 체제로 온 나라를 규정하려고 시도하고 자기의 언어, 종교, 상징을 국가 전체에 강요하려고 시도할 때 악화된다. 인도, 스리랑카, 말레이시아에서 힌두교도, 신할리즈인, 이슬람교도가 바로 그런 시도를 하였다.

문명과 문명 사이의 단층선에 걸터앉은 단절국은 국가적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특히 어려움을 겪는다. 수단에서는 북부의 이슬람교도와 남부의 크리스트교도 사이에서 수십 년째 내전이 벌어지고 있다. 똑같은 문명적 분열이 나이지리아의 정치를 비슷한 기간 동안 광기로 몰아넣었으며 쿠데타, 폭동, 폭력과 한 차례의 대규모 분리주의 전쟁을 촉발하였다. 탄자니아에서는 크리스트교 정령 신앙을 떠받드는 본토와 아랍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점하는 잔지바르 섬이 분열되어 여러 가지 면에서 사실상 별개의 국가로 나뉘었으며, 1992년에는 잔지바르가 비밀리에 이슬람 협의 기구에 가입하였다가 탄자니아의 설득으로 이듬해 탈퇴하였다. 이와 동일한 크리스트교-이슬람교의 분열은 케냐에서도 긴장과 분쟁을 낳았다. 아프리카 동부에서는 크리스트교도가 다수를 점하는 에티오피아와 이슬람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에리트레아가 1993년 결국 갈라섰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는 아직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적잖은 수의 오로모족이 남아 있다. 이 밖에도 문명의 단층선으로 갈라진 국가들은 인도(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 스리랑카(신할리즈 불교도와 타밀 힌두교도),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중국인과 말레이계 이슬람교도), 중국(한족, 티베트 불교도, 터키계 이슬람교도), 필리핀(크리스트교도와 이슬람교도), 인도네시아(이슬람교도와 티모르의 크리스트교도) 등이 있다.

문명 단층선의 분열 효과가 두드러지는 지역은 냉전 시대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내건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정권에 의하여 강제로 통합된 단절국이다.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결속과 배척을 낳는 원동력은 이념이 아니라 문화가 되었다.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은 문명의 경계선을 따라 뭉친 새로운 단위들로 분리되었다. 옛 소련은 발트 공화국(프로테스탄트 및 가톨릭), 정교 공화국, 이슬람 공화국으로 갈라졌고, 유고슬라비아는 가톨릭을 믿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이슬람교도가 부분적 세력을 잡고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정교 인구가 다수를 점하는 세르비아-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로 갈라졌다. 이들 분리 지역에 여전히 다양한 문명 집단이 존재한 경우 거기서 다시 2차 분열이 이루어졌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전쟁을 통하여 세르비아 지역, 이슬람교도 지역, 크로아티아 지역으로 쪼개졌으며,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로 갈라졌다. 알바니아 이슬람교도가 다수를 점하는 코소보 지역은 정교를 신봉하는 슬라브계 세르비아 내부에 있는데 아직은 평화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 지역은 늘 일촉즉발의 긴장이 감돈다. 마케도니아에서도 소수파인 알바니아 이슬람교도와 다수파인 슬라브계 정교 인구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 되고 있다. 옛 소련의 많은 공화국들이 문명의 단층선에 걸쳐 있다. 이것은 소련 정부가 국경선을 인위적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러시 아인이 거주하는 크리미아가 우크라이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아르메니아인이 거주하는 나고르노-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에 속하게 되었다. 러시아 영토에 거주하는 이슬람교도의 수는 비교적 적으며 이들은 주로 북부 코카서스와 볼가 지역에 산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카자흐스탄에는 적잖은 수의 러시아인이 거주하는데 이들을 이 지역에 거주시킨 것도 상당 부분 소련 당국의 정책적 고려였다. 우크라이나는 연합동방가톨릭 신자가 다수를 점하며 민족주의 의식이 높아 우크라이나어를 공용어로 쓰는 서부 지역과 동방 정교를 믿으며 러시아어 사용 인구가 많은 동부 지역으로 분열되어 있다.

단절국의 경우 둘 이상의 문명권에서 유래한 주요 집단들은 사실상 서로가 다른 민족이며 다른 세계에 속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배척하는 힘 때문에 분리되지만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자기와 동일한 문명이 지닌 흡인력에 끌려간다. 분열국은 한 문명 안에서 어엿한 지배력을 가진 단일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그 나라의 지도부가 다른 문명으로 옮겨 가기를 바라는 국가다. 그들은 '우리는 같은 민족이며 모두 같은 세계에 속해 있지만 우리가 사는 땅을 바꾸고 싶다'라고 말한다. 단절국의 국민들과는 달리 분열국의 국민들은 자신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을 보지만 어떤 문명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서는 국론이 갈라져 있다. 일반적으로 지도층의 상당수는 케말주의 전략을 수용하면서 자기들 사회가 비서구 문화와 제도를 배격하고 서구에 합류해야 한다고 보면서 근대 화와 서구화를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후로 자신이 서구 문명의 일부인가 아니면 뚜렷한 독자성을 지닌 유라시아 정교 문명의 주축인가를 놓고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한 분열국으로 남아 있다. 케말 아타튀르크의 조국은 물론 분열국이다. 터키는 1920년대부터 줄곧 근대화와 서구화의 길을, 서구의 일원이 되는 길을 추구하여 왔다. 멕시코가 미국에 대항하여 자신을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 정의한 지 거의 두 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 이 나라의 지도부는 북미 세계의 일원으로 새롭게 정의하였고 그 결과 멕시코는 분열국이 되었다. 반면에 호주 지도자들은 1990년대에 들어와 서구로부터 탈피하여 호주를 아시아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 애쓰고 있다. 역방향으로 움직이는 분열국인 셈이다. 분열국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분열국의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가 두 문화를 잇는 '가교'라고 선전하는 반면 외부인들은 그 나라가 야누스의 얼굴을 가졌다고 묘사한다. 서쪽을 보다가 동쪽을 보는 러시아', '터키': 동인가 서인가, 무엇이 최선인가?', '호주 민족주의: 분열된 충성'은 분열국의 자기 정체성 문제를 다루는 신문 기사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제목이다.

 

분열국 : 문명 이동의 실패

분열국이 자신의 문명적 정체성을 새롭게 정의하는 데 성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요건이 갖춰져야 한다. 첫째, 그 나라의 정치 경제 엘리트가 이러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나서야 한다. 둘째, 일반 대중은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최소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셋째, 그 나라가 지향하는 문명(대개는 서구 문명)의 주요 구성원들이 개종자를 수용할 의사를 갖고 있어야 한다.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과정 앞에는 숱한 장애물이 가로놓여 있으며 그것은 정치, 사회, 제도, 문화적으로 크나큰 고통을 동반한다. 그리고 지난 역사의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있다.

 

러시아

1990년대 현재 멕시코가 분열국으로 들어선 기간은 불과 몇 년에 지나지 않고 터키도 기껏해야 수십 년이다. 반면 러시아는 수 세기 전부터 분열의 길에 들어섰다. 또 터키나 멕시코와는 달리 러시아는 주요 문명의 핵심국이다. 터키나 멕시코가 자신을 서구 문명의 일원으로 새롭게 정의하는 데 성공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슬람 문명이나 라틴 아메리카 문명에 미치는 여파는 미미하거나 제한적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서구에 편입될 경우 동방 정교 문명은 존럽 기반을 잃는다. 소련의 몰락은 두 가지 증요한 문제를 야기하였다. 러시아는 서구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가? 러시아는 동방 정교와 또 소련 제국의 일원이었던 신생 공화국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러시아와 서구 문명의 관계는 크게 네 단계로 발전하여 왔다. 1단계는 표트르 대제(재위 1689~1725)까지 이어졌다. 그때까지 키예프 루시와 모스크바 공국은 서구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서유럽 국가와 거의 접촉이 없었다. 러시아 문명은 비잔틴 문명의 지류로서 발전하였으며 러시아는 13세기 중반부터 15세기 중반까지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러시아는 로마 가톨릭, 봉건제, 르네상스, 종교 개혁, 해외 영토 개척과 식민화, 계몽주의, 국민 국가의 형성 등 서구 문명을 역사적으로 규정하는 현상들에 거의 노출된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 서구 문명의 뚜렷한 특징으로 파악되던 8가지 특성 중에서 7가지-종교, 언어, 정교분리, 법치, 사회적 다원주의, 대의제, 개인주의-를 러시아는 서구와 거의 공유하지 못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일한 예외는 그리스-로마의 유산이었는데 이것마저도 비잔틴을 통해 한 다리 건너서 온 것이었지 서구처럼 로마로부터 직접 주입받은 것은 아니었으므로 성격이 크게 달랐다. 러시아 문명은 키예프 루시와 모스크바 공국의 토착 뿌리 위에 비잔틴 문화가 가세하고 여기에 몽골의 장기 지배가 복합적인 영향을 미쳐서 출현하였다. 이러한 영향력들은 성격적으로 다른 힘들의 영향 아래 서유럽에서 발전한 사회나 문화와는 극히 유사성이 적은 사회와 문화를 만들어 냈다.

17세기 후반의 러시아는 유럽과 판이하게 달랐을 뿐 아니라 유럽에 비하여 크게 낙후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표트르 대제는 1697~98년의 유럽 시찰에서 절감하였다. 그는 조국 근대화와 서구화의 단호한 의지를 품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자기 국민이 유럽인과 흡사해지도록 터키 모자의 착용을 금지시켰다. 비슷한 의도에서 표트르는 모스크바에 돌아오자 우선 귀족들의 턱수염을 강제로 밀고 긴 가운과 원뿔형의 모자를 착용하지 못하게 했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아랍 문자 대신 로마 문자를 채택하였다. 표트르는 키릴 문자를 폐지하지는 않았지만 문자 체계를 개선하고 서구식 단어와 표현을 받아들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주안점을 둔 것은 러시아 군사력의 확충과 현대화였다. 그는 해군을 창설하고 징병제를 도입하였으며 방위 산업을 육성하고 각종 기술 학교를 세우는 한편 서구에 유학생을 파견하여 무기, 선박, 조선, 항해. 행정 조직 같은 군대의 효율성 제고에 필요한 선진 지식을 도입하였다. 이러한 개혁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그는 조세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확층하였고, 재위 말년에는 정부 조직을 개편하였다. 러시아를 단순히 유럽 안에 있는 한 나라가 아니라 유럽 안에 있는 열강으로 만들기 위하여 그는 모스크바를 버리고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였으며,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유럽 무대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고자 스웨덴과 북방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러시아를 근대화와 서구화의 길로 밀어 넣는 과정에서 표트르는 전제주의를 완성하고 사회적 다원주의나 정치적 다원주의의 잠재적 발전 동인을 제거하여 러시아의 아시아적 특성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러시아의 귀족은 한번도 권력을 잡아 본 적이 없다. 표트르는 귀족을 더욱 몰아붙여 귀족의 군대 복무를 의무화하고 혈통이나 사회적 신분이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바탕을 둔 관등표를 만들었다. 귀족도 농민처럼 국가에 대한 병역 의무를 져야하는 '굽신거리는 귀족 사회'는 외국의 귀족들을 격분시키기도 했다. 농노는 토지와 지주에게 더욱 항구적으로 예속되어 자율성이 한층 약화되었다. 예전부터 광범위한 국가의 통제 아래 있었던 동방 정교회는 새로운 조직 개편을 거쳐 차르가 직접 임명하는 종교 회의의 지배 아래 들어갔다. 차르는 또 당시의 상속 관행을 따르지 않고 후계자를 자신이 자유롭게 선정할 수 있는 권한을 확보하였다. 이 일련의 변화를 통하여 표트르는 러시아에서 근대화와 서구화가 전제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증하였다. 표트르의 전범에 따라 레닌, 스탈린, 그리고 정도는 덜하지만 예카테리나 2, 알렉산드르 2세도 다양한 방식으로 러시아를 서구화하고 근대화하면서 중앙 독재를 강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적어도 1980년대까지는 러시아의 민주주의자는 대체로 서구주의자였다. 그러나 서구주의자가 모두 민주주의자는 아니었다. 우리는 러시아에서 권력의 중앙 집권화가 사회 경제 개혁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측근들은 글라스노스트가 경제의 자유화 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양산한 각종 장애물을 거론하면서 자신들이 이러한 사실을 진작에 깨닫지 못한 점을 한탄하였다.

오스만 제국과 달리 러시아 제국은 유럽 국제 체제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국내에서 표트르의 개혁은 일련의 변화를 가져왔지만 러시아는 이질적 사회로 남아 있었다. 상층부에 포진한 소수 엘리트를 제외하면 아시아적. 비잔틴적 생활방식, 제도, 믿음은 러시아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였으며 러시아인도 유럽인도 러시아를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였다. "러시아를 할퀴면 타타르가 상처를 입는다." 고 메스트르(de Maistre)는 말하였다. 표트르는 분열국을 만들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와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는 이런 불행한 현실을 함께 개탄하면서도 철저한 유럽화를 통하여 이런 상태를 종식시킬 것이냐 아니면 유럽의 영향력을 일소하여 진정한 러시아의 영혼으로 복귀할 것이냐를 놓고서는 의견이 엇갈렸다. 차다예프(P. Ya. Chaadayev) 같은 서구주의자는 "태양은 서구의 태양"이라고 주장하면서 러시아는 이 햇볕을 기존의 제도에 투사하여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다닐레프스키(N. Ya. Danilevskiy) 같은 슬라브주의자는 유럽화를 추구하는 노력이 민중의 생활 방식을 외래의 형식으로 대체하여 민증의 삶을 왜곡시키고 외국에서 빌려온 제도를 러시아 토양에 이식하고 러시아인의 삶의 문제와 대내외 관계를 유럽이라는 외래의 관점을 통하여, 즉 유럽인의 굴절 각도에 맞춘 렌즈를 통하여 파악한다고 비판하였다. 그 뒤의 러시아 역사에서 표트르는 서구주의자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에 맞선 세력에게는 사탄의 수괴로 받아들여졌다. 러시아의 특수성 을 강조하는 세력은 1920년대에 표트르를 반역자로 낙인찍었고, 유럽에 맞서 서구화를 거부하면서 수도를 다시 모스크바로 옮긴 볼셰비키들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은 러시아와 서구의 관계를 다음 단계로 이행시켰다. 이 관계는 애매모호하게 유지되어 오던 지난 두 세기 동안의 관계와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볼셰비키 혁명은 서구에서 탄생한 이념이지만 서구에서는 존립할 수 없는 새로운 정치 경제 체제를 만들었다. 그때까지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는 서구에 뒤처지지 않고도 러시아가 서구와는 다른 길을 걸을 수 있는가를 두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공산주의는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였다. 러시아가 서구와 다르고 서구에 근본적으로 대항하는 이유는 러시아가 서구보다 앞섰기 때문이라고 공산주의는 설명하였다. 러시아는 궁극적으로 세계 전체를 휩쓸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었다. 러시아는 낙후된 아시아적 과거가 아니라 선진적 소련의 미래를 구현하고 있었다. 혁명을 통하여 러시아는 서구를 껑층 뛰어넘었고 이제 러시아와 서구의 차이점은 슬라브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너희는 다르고 우리는 너희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가 아니라 '우리는 다르고 결국 너희는 우리처럼 될 것'이라는 논리로 설명되었다. 그것이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메시지였다.

공산주의는 소련의 지도자들이 서구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와의 강력한 연결 고리도 제공하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인이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들의 사상에 동조한 주요 인사는 서유럽인이었다. 1910년에 이르면 서구 사회에서 수많은 노동조합과 사회 민주주의 세력이 이들의 이념에 동조하면서 유럽의 정치 무대에서 무시 못 할 주역으로 점차 부상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이후 좌익 정당은 공산당과 사민당으로 갈라졌지만 이들은 유럽 각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서구의 대부분 지역에서 마르크스의 세계관이 득세하였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미래의 대세로 받아들여졌으며 많은 정치인과 지식인이 이런저런 형식으로 그것을 자신의 세계관으로 수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의 미래를 놓고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가 벌인 논쟁은 유럽에서 서구의 미래는 무엇인가. 소련이 그 미래를 선도하는가를 놓고 벌인 좌우의 논쟁으로 바뀌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실증된 소련의 힘은 서구와 특히 서구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 비서구 문명에서 공산주의의 호소력을 높였다. 서구가 지배하던 비서구 사회에서 서구를 설득하려 애쓰던 엘리트들은 자결과 민주주의를 외쳤고 서구에 맞서기 원하던 엘리트들은 혁명과 민족 해방을 부르짖었다.

서구의 이념을 채택하고 그 이념을 서구에 맞서는 데 활용함으로써 러시아는 어떤 의미에서는 과거 역사의 어느 시기보다도 서구에 가까워졌고 서구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는 판이하게 다르지만, 양쪽 다 어떤 의미에서는 동일한 언어로 말하였다. 공산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서구와 러시아의 이 정치적-이념적 상호 교섭도 끝났다. 옛 소련 제국 곳곳에서 자유 민주주의가 승리를 거두리라고 서구는 희망하기도 했고. 그렇게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는 서구의 바람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1995년 현재 러시아를 비롯한 동방 정교 국가군에서 자유 민주주의의 미래는 불확실하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인이 마르크스주의자로 처신하기를 포기하고 차츰 러시아인답게 행동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와 서구의 골은 한층 깊어졌다. 자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갈등은 이념 분쟁이었으며, 판이한 성격 차이에도 불구하고 둘 다 근대적이고 세속적이며 자유, 평등, 물질적 복리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하척 분명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다. 서구의 민주주의자는 소련의 공산주의자와 지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의 민주주의자가 러시아 정교를 신봉하는 민족주의자와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소련이 건재하던 시기에는 솔제니친의 추종파와 사하로프의 추종파가 모두 공산주의라는 결집체에 맞섰으므로 슬라브주의자와 서구주의자의 대립이 표면으로 부각되지 않았다. 그 결집체가 허물어지자 러시아의 진정한 정체성을 놓고 치열한 논쟁이 봇물처럼 터졌다. 러시아는 서구의 가치관, 제도, 관습을 받아들여 서구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아니면 러시아는 뚜렷한 정교와 유라시아 문명을 구현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특이한 운명을 가졌다는 점에서 서구와는 분명히 구별되는가? 지식인과 정치인, 일반 대중은 이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의견이 엇갈려 있다. 한쪽에는 코스모폴리틴, 대서양주의자로 지칭되기도 하는 서구주의자가 있고 또 한쪽에는 '민족주의자', '유라시아주의자' 혹은 '데르자브니키(강한 정부 옹호론자)'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는 슬라브주의자의 후예가 존재한다.

이 두 집단은 경제 정책과 국가 구조를 두고 견해 차이를 보이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외교 정책에서 나타난다. 한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으로 이어진 연속체 위에 다양한 의견이 분포되어 있다. 한쪽 극단에는 고르바초프가 제창한 '신사고 와 '유럽 공동의 집 구상이 있으며, 러시아가 '보통 국가'로 나아가 서방 선진 공업국 모임인 G-7에 여덟 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바람을 가진 옐친과 그의 고위 측근 다수의 견해도 그 연장 선상에 있다. 스탄케비치(Serge1 Stankev1ch) 같은 온건 민족주의자는 러시아가 '대서양주의자'의 노선을 거부하고 재외 러시아인을 보호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야 하며 터키를 비롯한 이슬람 세계와의 관계를 중시하고 러시아의 자원, 정책 우선권, 결속, 이익을 아시아 쪽으로, 혹은 동쪽 방면으로 상당량 재투입할 것을 촉구한다.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옐친이 러시아의 국익을 서구의 이익에 종속시켰고 러시아의 군사력을 약화시켰으며 세르비아 같은 전통 우방에 대한 지원을 소홀히 하고 러시아 국민에게 해악을 끼치는 방식으로 경제와 정치의 개혁을 밀어붙였다고 비난한다. 이러한 여론의 추세를 대변하듯 러시아는 독특한 유라시아 문명이라고 주장한 1920년대에 주장한 사비츠키(Peter Savisky)의 사상이 요즘 러시아에서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좀 더 극단적으로 흐르는 민족주의자들도 있다. 솔제니친은 러시아의 울타리에 러시아인, 또 러시아와 밀착되어 있으며 슬라브 정교를 신봉하는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포함시키되 그 나머지 세계는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지리노프스키(Vladimir Zhirinovsky) 같은 제국주의 성향의 민족주의자는 소련 제국을 부활하고 러시아의 군사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자의 견해에 동조하는 세력은 반서구주의 성향을 보일 뿐만 아니라 때때로 반유대주의 자세를 취하면서, 러시아의 외교 정책을 동쪽과 남쪽으로 궤도 수정하고 남부의 이슬람 세력을 제압하든가(지리노프스키의 주장) 아니면 이슬람 국가군, 중국과 공조하여 서구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 한다. 민족주의자들은 또한 이슬람교도와 싸우는 세르비아를 광범위하게 지원하라고 요구한다. 코즈모폴리턴과 민족주의자의 차이점은 제도적으로는 러시아 외무부의 견해와 군부의 견해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차이점은 또한 옐친의 외교 안보 정책이 자주 바뀐다는 사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러시아의 엘리트처럼 러시아 국민도 분열되어 있다.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2069명의 러시아인을 대상으로 하여 시행된 1982년의 한 여론 조사에서 응답자의 40퍼센트가 러시아는 '서구에 대해 열려 있다.', 36퍼센트가 '서구에 대해 닫혀 있다.', 24퍼센트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199312월에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 개혁 정당은 34.2퍼센트의 지지를 얻었고 반개혁 정당과 민족주의 정당은 43.3퍼센트의 지지를 얻었으며 중도 정당은 13.7퍼센트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마찬가지로 19966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러시아 국민은 서구를 대변하는 옐친에게 43퍼센트의 지지를 보내고 민족주의 후보와 공산주의 후보에게 52퍼센트의 지지를 보내 다시금 분열된 양상을 보였다. 정체성이라는 중요한 문제에서 러시아는 1990년대에 들어와서도 분열국으로 남아 있으며 서구주의자와 슬라브주의자의 대립은 '이 나라를 규정하는 특성의...필수 불가결한 요소'.

 

터키

1920년대와 1930년대, 주도면밀한 계산이 깔린 일련의 개혁을 통하여 케말은 터키 민족을 오스만과 이슬람의 과거로부터 단절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케말주의가 내건 기본적 원칙, '6개의 화살'은 인민주의, 공화주의, 민족주의, 세속주의, 국가 사회주의, 개혁주의였다. 케말은 다민족 제국의 이상을 거부하고 동질적 민족 국가를 건설하려 하였고 그 과정에서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을 축출하고 학살하였다. 그는 술탄을 폐위하고 서구식 공화정을 정치 체제로서 도입하였다. 케말은 칼리프의 영토, 종교적 권위의 특권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전통 교육과 전통 신앙의 대변자들을 제거하였으며 종교 단체에서 세운 각종 학교를 폐쇄하고 공공 교육 분야에서 통합된 세속 체계를 수립하였다. 또 이슬람 율법이 적용되던 종교재판소를 없애고 그 대신 스위스의 민법에 바탕을 둔 새로운 법률 체계를 수립하였다.

 

그는 전통 종교를 상징하는 터키모자의 착용을 금지하고 일반 모자의 착용을 장려하였으며 전통 달력 대신 서양 달력을 도입하였고 이슬람교가 터키의 국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천명하였으며 터키어를 아랍 문자가 아닌 로마 문자로 표기하도록 규정한 포고령을 선포하였다. 이 마지막 개혁이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문자 개혁이 시행되어 로마 문자로 교육받은 새로운 세대는 막대한 분량의 전통 문헌에 접근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고 유럽 언어를 배우려는 열기가 고조되었다. 또 점증하던 문맹률도 낮아졌다. 터키 국민의 민족적,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을 재정의한 케말은 19S0년대에 터키를 경제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서구화는 근대화의 동반자이자 근대화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었다.

1939년에서 1945년까지 벌어진 세계 대전 기간 동안 터키는 중립을 지켰다. 그러나 종전 뒤 터키는 서구와의 밀착 속도에 박차를 가하였다. 서구의 정치 체제를 모방하려는 뚜렷한 의도를 나타내면서 터키는 일당 통치에서 다당 경쟁 체제로 나아갔다. 터키는 꾸준한 로비를 벌여 1952NATO의 정식 회원국이 됨으로써 자유 세계의 일원임을 세계만방에 알렸다. 터키는 서방으로부터 수십억 달러 규모의 경제 군사 지원을 받게 되었다. 터키 군대는 서방의 무기를 도입하고 군사 지도를 받았으며 NATO의 지휘 체계에 편입되었다. 미국의 군사 기지도 받아들였다. 서방은 터키를 지중해, 중동, 걸프만에 대한 소결의 팽창을 억제하는 동부의 중요한 보루로 간주하였다. 터키의 이러한 서방과의 밀월 관계는 1955년 반둥 회의에 모인 비서구 비동맹 여러 나라의 지탄을 받았으며 특히 이슬람권 국가들의 격분을 샀다.

냉전이 끝난 뒤 터키의 엘리트들은 터키가 서구와 유럽의 일원으로 남아 있는 것을 여전히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터키가 NATO의 회원국 지위를 고수하는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발판으로 서구와 긴밀한 구조적 연대를 맺을 수 있고 그리스와의 긴장 완화에도 이것이 긴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NATO 가입으로 구체화된 터키와 서구의 긴밀한 관계는 냉전의 산물이었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그러한 결속의 중대한 이유가 사라졌으므로 터키와 서구의 관계는 약화되었고 그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려는 움직임이 자연스럽게 나타났다. 터키는 북방으로부터의 중대한 위협을 저지하는 보루로서 더 이상 서구에게 유용하지 않게 되었다. 이제 터키는 걸프전에서 입증되었듯이 남부로부터의 덜 심각한 위협을 함께 처리하는 하나의 동반자 역할을 할 뿐이다. 걸프전에서 터키는 자국 영토를 거쳐 지중해로 연결된 이라크의 파이프라인을 봉래하고 미군기가 터키 기지를 이용하여 대 이라크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함으로써 반 후세인 연합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러나 외잘 터키 대통령의 이러한 결정은 터키 국내에서 적잖은 비판을 받았으며 미국과 긴밀한 공조를 편 외잘의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그 여파로 외무 장관, 국방장관, 대통령 비서실장이 사임하였다. 그 후 새로 정권을 잡은 데미렐 대통령과 실레르 총리는 터키에게도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는 이라크에 대한 UN의 제재를 조기에 종결하라고 요구하였다. 남부에서 오는 이슬람의 위협을 서구와 함께 막아 내려는 예전의 터키의 의지는 소련의 위협을 서구와 함께 막아 내려던 의지처럼 확고하지 않다. 걸프전 위기에서 전통적으로 터키의 우방국이었던 독일이 이라크의 터키에 대한 미사일 공격을 NATO에 대한 도발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은 터키가 서구에 의존하여 남부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할 수는 없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 준 사건이었다. 소련과의 냉전적 대치 상황은 터키의 문명적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지만 탈냉전 시대의 아랍과의 관계는 그러한 근본적인 물음 앞으로 터키를 내몰았다.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서구 지향적인 터키의 엘리트들이 외교 정책의 우선적 목표로 설정한 것은 유럽 연합의 회원국 자격 획득이었다. 터키가 공식적으로 회원국 가입 신청서를 낸 것은 1987년 가을이었다. 터키는 198912월 유럽 연합으로부터 가입 신청에 대한 검토는 1993년에 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1994년 유럽 연합은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의 가입 신청을 승인하였으며, 몇 년 안에 폴란드, 헝가리, 체코, 다음 단계로는 슬로베니아, 슬로바키아, 발트 공화국들이 유럽 연합에 받아들여질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다. 유럽 연합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독일이 터키의 가입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고 그 대신 중부 유럽 국가들의 가입을 지원하는 현실을 보면서 터키는 다시금 실망하게 되었다. 미국의 압력을 받고서야 유럽 연합은 터키와 관세 동맹을 체결하였지만 터키의 정식 회원국 가입은 아직도 요원하며 그 가능성도 분명치 않다.

터키는 왜 냉대를 받으며 왜 번번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는가? 공식적으로는 유럽 연합 관리들이 터키의 낙후된 경제 발전 수준과 북구 여러 나라에 한참 못 미치는 인권 보장 수준을 거론한다. 그러나 사석에서 유럽인과 터키인은 그리스가 격렬하게 반대하고 더 중요하게는 터키가 이슬람 국가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굳이 부인하지 않는다. 유럽 각국은 인구가 6천만 명을 넘고 실업률이 높은 이슬람 국가에게 자신의 국경선을 개방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더욱 중요한 원인은 유럽인들이 문화적으로 터키인이 유럽에 속하지 않는다고 본다는 점이다. 1992년 외잘 대통령은 '터키의 인권 기록은 터키의 EU 가입을 막기 위해 날조된 것이다. 진정한 이유는 우리가 이슬람교도이고 그들이 크리스트교도이기 때문이다.'라고 발언하였다. 외잘 대통령은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하지만 그들은 그 점을 말하지 않는다.' 유럽의 관리들 또한 유럽 연합이 '크리스트교 국가들의 모임'이라는 점을 시인하면서 터키는 너무 가난하고 너무 인구가 많고 너무 이슬람적이고 너무 거칠고 문화적으로 너무 다르다.'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한 관계자의 지적처럼 유럽인들이 내심 지니는 악몽은 사라센이 서유럽을 침공하여 터키인이 빈의 문턱까지 왔었던 지난 역사의 기억이다. 이러한 태도는 다시 '서구는 이슬람 터키를 유럽 안에 넣어 줄 의사가 없다.'라는 공감대를 터키 국민들 사이에 불러일으키고 있다.

메카를 거부한 뒤 브뤼셀로부터도 거부당한 터키인들은 소련의 몰락으로 생긴 기회를 포착하여 타슈켄트로 접근하였다. 외잘 대통령을 비롯한 터키 지도자들은 터키계 민족의 공동체라는 야심 만만한 구상을 내놓고 아드리아해에서 중국 국경선까지 터키의 '가까운 외국'에 있는 재외 터키 민족을 결속하고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터키는 그중에서도 특히 아제르바이잔과 터키어를 쓰는 중앙아시아의 4개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 1991년과 1992년에 터키는 이 신생 공화국들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이 지역에 대한 터키의 영향력을 높이고자 광범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는 15억 달러 규모의 장기 저리 융자, 7900만 달러 규모의 직접 원조, 위성 방송(러시아어 방송을 대체하는), 전신망, 항공 서비스, 터키 정부가 수천 명의 유학생에게 지급하는 장학금, 중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 출신 은행가, 기업인, 외교관, 군사 요원을 대상으로 실시하는 터키 연수 등이 포함된다. 이들 신생 공화국에서 터키어를 가르칠 교사들도 대규모로 파견되었으며 2천 개의 합작 회사가 문을 열었다. 문화적 동질성은 경제 관계를 순탄하게 만든다. 한 터키 기업인은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성공을 거두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파트너를 만나는 일이다. 터키인에게는 이것이 별로 어렵지 않다. 우리는 같은 문화, 그럭저럭 뜻이 통하는 언어를 가졌으며, 같은 요리를 먹는다.'라고 지적하였다.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를 향한 터키의 방향 선회에는 튀르크 민족 공동체의 수장이 되겠다는 야심도 깔려 있지만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여 이슬람 원리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려는 이란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의도를 저지하겠다는 계산도 숨어 있다. 터키는 '터키 모델' 혹은 '터키 이상' -시장 경제를 가진 세속적 민주주의 이슬람국가를 제시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터키는 러시아의 영향력이 되살아나는 것을 누르려고 한다. 나아가 터키는 러시아 카드와 이슬람 카드를 내세워 유럽 연합의 지원을 이끌어 내고 궁극적으로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다는 야심도 품고 있다.

중앙아시아 공화국들과 터키의 교류는 1995년에 들어와 터키의 제한된 자원, 외잘 대통령의 서거에 뒤이은 데미렐 대통령의 취임과 그에 뒤따른 어수선한 상황, 자신이 '가까운 외국'으로 간주하는 곳에서 다시금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러시아의 노력 등으로 한동안 소강상태에 빠졌다. 옛 소련의 터키계 공화국 지도자들은 독립하자마자 앙카라로 달려와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 후 러시아의 압력과 회유가 시작되면서 이들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문화적 사촌국과 과거의 제국주의 상전국 사이에서 '균형 잡힌' 관계를 추구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화적 동질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경제적, 정치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기울인 터키는 관련 당사국과 기업들을 설득하여 중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석유를 터키를 거쳐 지중해로 수송하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로 합의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옛 소련의 터키계 공화국들과 결속을 강화하고자 진력하던 터키의 케말주의에 입각한 세속적 정체성은 국내에서 도전을 받았다. 첫째, 냉전의 종식과 함께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일대 흔란을 겪었다는 점에서 터키도 다른 여러 나라들과 비슷한 운명을 겪었고 그 와중에서 '국가적 정체성과 민족적 자기 확인'이라는 중요한 물음이 제기되었다. 종교가 그 해답을 제공하였다. 70여 년에 걸쳐 지속되어 온 케말과 터키 엘리트들의 세속적 전통은 점차 공격을 받았다. 터키인의 해외 체험은 국내의 이슬람 정서를 자극하였다. 독일에서 귀국한 터키인들은 "그곳에서 겪은 적대감에 대한 반발심에서 낯익은 것에 기울어졌다. 그것이 이슬람이었다."라고 고백한다. 국민 여론과 지배적 풍습은 점차 이슬람화하였다. 터키에서 이슬람 복장을 하고 거리를 다니는 여성이 늘어났고 이슬람 사원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졌으며 서점은 이슬람의 역사, 가르침, 생탈 방식을 찬양하고 예언자 마호메트의 세계관을 보존하는 데 기여한 오스만 제국의 역할을 칭송하는 서적, 잡지, 카세트, 콤팩트디스크, 비디오테이프로 메워지고 있다는 보도가 1993년에 나왔다. 최소한 290여 개의 출판사와 인쇄소, 4개 일간지를 포함한 300여 개 간행물, 수백 개의 허가받지 않은 라디오 방송국과 역시 허가받지 않은 30개의 TV 채널이 이슬람 이념을 전파하고 있었다.

고조되는 이슬람 정서에 부응하여 터키 정부는 원리주의 관습을 채택하고 원리주의 세력을 흡수하려고 애썼다. 1980년대와 1990년대 터키 정부는 종교 문제국의 예산을 일부 부처의 전체 예산보다 많게 책정하였다. 이러한 재정적 뒷받침 아래 모스크가 세워지고 공립 학교에서 종교 교육이 시행되었다. 이슬람 학교에 대한 지원도 대폭 늘어났다. 1980년대에 이런 학교의 수는 5배로 늘어나 중등학교 숫자의 15퍼센트나 차지하였다. 이슬람 교리를 가르치는 이런 학교에서 배출된 졸업생들의 상당수는 뒤에 공무원이 되었다. 터키 정부는 케말이 터키모자를 금지시킨 지 70년 만에 여학생이 이슬람 머리 두건을 하고 등교하는 것을 허용하여 프랑스 정부와 극적인 대조를 보였다. 터키 정부의 이러한 시책은 상당 부분 이슬람주의자들의 기선을 제압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지만 아무튼 정부의 노력은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이슬람의 열풍이 얼마나 거세게 불었는지를 반증한다.

둘째, 이슬람 부활은 터키의 정계 판도를 흔들어 놓았다. 대표적인 예가 외잘 대통령인데, 터키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와는 달리 이슬람의 상징과 정책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나섰다. 다른 나라에서도 그렇지만 터키에서도 민주주의는 토착 정서와 종교로의 복귀를 강화한다. 일반의 지지와 유권자의 표를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는 의도에서 정치인들-심지어는 세속주의의 보루이며 수호차라 할 수 있는 군부마저도- 은 국민의 종교적 열망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물러선 몇 가지 시책에서 인기 영합주의의 냄새가 풍겼다. 대중 운동은 종교? 밀착되었다. 엘리트 집단과 관료 집단, 특히 군부는 세속주의에 기울어 있지만 군 내부에도 이슬람 정서는 확산되어 1987년에는 사관 학교에서 수백 명의 생도가 이슬람 정서에 물들어 있다는 혐의를 받고 퇴교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주요 정당들은 케말이 인정하지 않았던 이슬람교도로 이루어진 '타리카', 곧 선택된 사회의 지지표를 점점 무시하지 못하게 되었다. 19943월에 시행된 지방 선거에서 터키의 주요 5개 정당 증에서 유일하게 원리주의 노선을 걸었던 복지당은 19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크게 약진하였다. 실레르 총리의 정도당은 21퍼센트익 지지를 얻었고 외잘 대통령의 조국당은 20퍼센트의 표를 얻었다. 복지당은 터키의 양대 도시인 이스탄불과 앙카라를 장악하였으며 특히 터키 남동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였다. 199512윌 선거에서 복지당은 가장 많은 의석을 획득하였으며 터키와 세속주의를 대표하는 두 정당은 이슬람 세력인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연정에 합의하였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터키에서도 원리주의를 지지하는 층은 주로 청년, 외국에서 돌아온 노동자, 짓밟히고 못 가진 사람, 도시 유입민과 대도시의 과격파이다.

셋째, 이슬람의 부활은 터키의 외교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터키는 외잘 대통령의 주도 아래 유럽 연합 가입을 염두에 두고 걸프전에서 서방을 결정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낱 몽상으로 끝났고 터키 국내에서 정부의 친서방 정책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어났다. 소련의 붕괴로 터키와 서방을 연결하던 주된 연결 고리가 끊어지면서, 걸프전에서 터키가 이라크의 공격을 받았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놓고 NATO가 보인 미적지근한 반응을 지켜본 터키는 장차 비러시아 세력의 침공을 받을 경우 NATO의 지원을 얻을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에 터키는 아랍과 여타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를 점차 확대하였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는 아제르바이잔과 보스니아의 이슬람교도를 대대적으로 지원하면서 이슬람의 권익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발칸 지역, 증앙아시아, 중동에서 모두 터키의 외교 정책은 눈에 띄게 친이슬람 노선으로 기울고 있다.

오랫동안 터키는 분열국이 자신의 문명적 정체성을 바꾸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세 가지 요건 가운데 두 가지를 충족시켜 왔다. 터키의 엘리트 집단은 그 운동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으며 대중도 거기에 반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맞은편에 있던 서구 문명의 엘리트 집단은 거기에 호응하지 않았다. 이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하고 있는 동안 터키 내부에서 세력을 키운 이슬람 세력은 국민들 사이에 반서구 정서를 확산시키면서 터키 엘리트의 세속주의적, 친서방적 성향을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터키가 완전한 유럽 국가로 진입하는 데 가로놓인 장벽, 옛 소련의 터키계 공화국들 사이에서 완전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터키의 일정한 한계성, 케말의 유산을 잠식하는 이슬람주의의 발흥을 감안할 때 터키는 앞으로도 분열국으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내부적 갈등을 반영하듯이 터키의 지도자들은 터키가 두 문화를 잇는 가교라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한다. 1993년 실레르 터키 총리는 '서구 민주주의 국가' 이면서 동시에 '중동의 일원`인 터키가 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두 문명을 연결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애매모호성을 반영하듯 실레르 총리는 국내에서는 공식 석상에서 자신이 이슬람교도임을 강조하는 반면 NATO에 대해서는 지리적, 정치적 현실로 보아 터키는 엄연한 유럽 국가라고 역설한다. 같은 맥락에서 데미렐 대통령은 터키가 서에서 동까지, 유럽에서 중국까지 뻗어 있는 대단히 중요한 지역적 가교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교는 두 단단한 실체를 연결하는 인공물일 뿐 그 실체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터키의 지도자들이 자신의 나라를 가교라고 부를 때 그들은 터키가 분열국임을 완곡하게 인정하는 셈이나 다를 바 없다.

 

멕시코

터키는 1920년대에 분열국이 되었지만 멕시코는 1980년대에 와서야 분열국이 되었다. 그러나 터키와 멕시코가 역사적으로 서구와 맺은 관계를 보면 일정한 유사점이 발견된다. 터키처럼 멕시코도 뚜렷한 비서구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파스(Octavio Paz)가 언급한 것처럼,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멕시코의 정수는 인디언 문화이며 그것은 비유럽적이다. 19세기에 멕시코는 오스만 제국처럼 서구 열강에 의하여 분할되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에 멕시코는 터키처럼 혁명을 거치면서 국가 정체성의 새로운 토대와 일당 통치 체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터키에서 일어난 혁명은 전통 이슬람 문화와 오스만 유산을 배격하고 서구문화를 수입함으로써 서구에 편입하려는 시도였다. 멕시코의 혁명은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서구문화의 여러 가지 요소를 통합하고 수정하였지만 이것이 서구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민족주의를 낳았다. 터키가 60년 동안 자신을 유럽 국가로 규정하려고 노력하였다면 멕시코는 비숫한 기간 동안 미국에 대항하는 존재라는 데서 자신의 정체감을 찾았다. 193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멕시코의 지도자들은 미국의 이익에 도전하는 경제 정책과 대외 정책을 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사태가 일변하였다. 마드리드(Miguel de ls Madrid) 대통령과 그 후임자인 살리나스(Car1os Salinas Gortari) 대통령은 멕시코의 국가 목표, 관습, 정체성을 전면적으로 재규정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것은 1910년의 혁명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개혁이었다. 살리나스는 사실상 멕시코의 케말이 되었다. 케말이 당대 서구의 중심 조류였던 민족주의와 세속주의를 지향한 것처럼 살리나스도 서구를 특징짓는 양대 축의 하나인 경제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밀고 나갔다(또 하나의 축인 정치 민주주의는 수용하지 않았다). 케말처럼 살리나스의 개혁 정책도 멕시코를 지배하는 정치 경제 엘러트 집단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살리나스와 마드리드처럼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살리나스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잡았고 수많은 국영 기업체를 민영화하였으며 외국 투자를 적극 유치하고 조세와 보조금을 삭감하였으며 외채를 건실하게 운영하고 노동조합의 힘을 꺾었으며 생산성을 높이고 미국, 캐나다와 함께 북미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케말의 개혁이 터키를 중동의 이슬람 국가에서 세속 유럽 국가로 탈바꿈시키는 데 있었듯이 살리나스의 개혁 목표는 멕시코를 라틴 아메리카에서 탈피시켜 북미 국가로 진입시키는 데 있었다.

그것은 멕시코의 불가피한 선택은 아니었다. 멕시코의 엘리트 집단은 그들의 선배들이 20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고수해 온 민족주의, 보호주의적 제5세계 지향의 반미 노선을 견지할 수도 있었다. 아니면 일부 멕시코인들이 주장하듯이 스페인, 포르투갈, 남미 국가들과 함께 이베리아 국가 연합을 결성하는 방법도 있었다.

북미 국가를 지향하는 멕시코의 시도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인가? 멕시코의 정치, 경제 엘리트와 지식인 대다수는 이 노선을 압도적으로 지지하였다. 또한 터키가 직면하였던 상황과는 달리 멕시코를 수용하는 입장에서 있는 북미 두 나라의 정치 경제 엘리트와 지식인 대다수는 멕시코와의 문화적 제휴를 압도적으로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이민이라는 중요한 문제에서 터키와 멕시코의 차이점은 극적으로 대비된다. 대규모 터키 이민에 대한 공포는 유럽의 지도층과 대중으로 하여금 터키를 유럽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을 갖도록 만들었다. 반면에 대규모의 합법, 비 합법, 멕시코 이민이 엄존하는 현실은 살리나스가 NAFTA 회담에서 이용한 카드의 하나였다. 그는 '우리 상품을 받아들이든가 우리 국민을 받아들이라!'라고 몰아세웠다. 뿐만 아니라 멕시코와 미국의 문화적 거리는 터키와 유럽의 문화적 거리보다 좁다. 멕시코의 종교는 가톨릭이고 언어는 스페인어이며 멕시코의 엘리트들은 역사적으로 유럽에 기울다가(그들은 자녀를 유럽으로 유학 보냈다). 최근에는 미국으로 기울었다(요즘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앵글로-아메리카 문화를 가진 북미와 스페인-인디언 문화를 가진 멕시코의 조화는 크리스트교 문화를 가진 유럽과 이슬람 문화를 가진 터키보다는 쉬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NAFTA가 비준된 이후 늘어나는 미국 공장의 남부 이전 추세, 멕시코가 북미의 자유와 법치개념을 준수할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우려의 표명과 함께, 이민 제한을 요구하면서 멕시코와의 지나친 밀착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분열국이 정체성 이행에 성공하는 데 불가결한 셋째 조건은 일반 국민이 반드시 지지를 보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묵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요인의 중요성은 국민 여론이 그 나라의 정책 결정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친서방 정책은 1995년 현재까지는 아직 민주주의의 시험을 거치지 않았다. 수천 명의 잘 조직되고 폭넓은 지지를 받는 무장 세력이 일으킨 치아파스 봉기는 그 자체로는 멕시코의 북미화를 가로막는 심각한 걸림돌은 아니었다. 그러나 멕시코의 지식인, 언론인, 그 밖의 여론 주도 세력이 치아파스 반군에게 보인 동정적 반응은 크게는 북미화, 작게는 NAFTA 가입이 멕시코의 엘리트 집단과 일반 국민으로부터 점차 도전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살리나스 대통령은 의식적으로 정치 개혁과 민주화는 뒷전에 미룬 채 경제 개혁과 서구화에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경제가 발전하고 미국과의 관계가 깊어지면 멕시코 정치 제도의 진정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이 입지를 강화할 것이다. 멕시코의 미래를 가늠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근대화와 민주화가 탈서구화를 일정 수준까지 자극하여 멕시코가 NAFT에서 한 발을 빼고 그에 따라 NAFFA가 급격히 약화되어 1980년대와 1990년대 서구 지향 엘리트들이 멕시코에 심어 놓은 체제에 변화가 나타날 것인가? 멕시코의 북미화는 멕시코의 민주화와 양립할 수 있는가?

 

호주

러시아, 터키, 멕시코와 달리 호주는 원래부터 서구 사회이다. 20세기 내내 호주는 처음에는 영국과 그 다음에는 미국과 밀착 관계를 맺어 왔다. 냉전 시대의 호주는 서구의 일원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영국-캐나다-호주를 잇는 군사 첩보 연결축의 핵심 성원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초에 들어와 호주의 정치 지도자들은 호주가 서구에서 탈피하여 아시아 국가로서 새롭게 탈바꿈하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웃 나라들과 결속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키팅(Paul Keating) 총리는 호주가 '제국의 지부 노릇을 그만두고 공화국이 되어야 하며 아시아에 섞여 들어가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이것은 호주가 독럽 국가로의 정체성을 찾는 데 필요한 과정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호주는 아무리 헌법상의 용어에 그칠지언정 지금처럼 파생적 사회로 남아 있는 한 전 세계에 자신을 다문화 사회로 알리고 아시아에 참여하고 관계를 맺어 그 관계를 어떤 식으로든 내실 있게 유지해 나갈 수 없다.' 그동안 말은 못 하였어도 호주는 오랜 세월 영국 숭배와 무기력증에 시달려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영국과의 특수한 관계가 계속 지속되면 호주의 국민 문화, 호주의 경제적 미래, 아시아와 태평양 안 호주의 운명이 쇠락할 것이라고 키팅 총리는 단언하였다. 에반스 (Gareth Evans) 외무 장관도 비슷한 견해를 토로하였다.

호주를 아시아 국가로 새롭게 정의하자는 주장은 국가의 운명을 규정하는 요인으로서 문화보다는 경제가 중요하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발상을 더욱 부채질한 핵심적 요인은 동아시아 지역의 역동적 발전이었다. 동아시아가 발전하자 호주와 아시아 지역의 무역량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1971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호주 수출의 39퍼센트를 받아들였으며 호주 수입의 21퍼센트를 제공하였다. 그러던 것이 1992년에는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가 호주 수출의 62퍼센트를 차지하고 호주 수입의 41퍼센트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반면에 1991년 호주의 대 유럽 연합 수출은 11.8퍼센트였고 대 미국 수출은 10.1퍼센트였다. 이처럼 아시아와 경제적 결속이 강화되면서 호주인들의 의식에는 세계가 5대 경제 블록의 구축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으며 호주는 동아시아 블록에 속한다는 믿음이 점차 뿌리를 내렸다.

경제적 유대가 이렇게 강화됨에도 불구하고 호주의 아시아 전략은 분열국이 문명 이동에 성공하는 데 철요한 요건을 하나도 층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첫째, 1990년대 중반 현재 호주의 엘리트들은 이러한 노선에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 문제는 어느 정도는 이런 노선에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반대 입장을 펴는 자유당 지도자들과 노동당 지도자들의 정책 갈등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키팅이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각계각층의 지식인과 언론인으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을 받았다. 호주의 엘리트 집단 내부에서는 아시아 지향성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국민 여론이 애매모호하다. 1987년에서 1993년 사이에 군주제의 종식을 지지하는 호주 국민의 비율은 21퍼센트에서 46퍼센트로 늘었다. 그러나 군주제 종식의 지지율은 그 단계에서 머물더니 다시 서서히 떨어지고 있다. 호주 국가에서 영국 국기를 삭제하는 것을 지지하는 비율은 19925월의 42퍼센트에서 19938월의 35퍼센트로 떨어졌다. 1992년 한 호주 관리는 "국민은 이것을 감내하기가 어렵다. 호주가 아시아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틈나는 대로 밝힐 때마다 나는 얼마나 많은 항의 편지를 받는지 모른다."라고 지적하였다.

셋째,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아시아 각국의 엘리트들이 호주의 친아시아 정책에 보이는 호응도는 유럽 엘리트들이 터키의 유럽 접근에 보인 호응도의 수준을 밑돈다. 그들은 호주가 아시아의 일원이 되려면 진정한 아시아 국가가 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불가능하지는 않더라도 실현 가능성은 아주 희박하다는 자신들의 견해를 분명히 밝혔다. 인도네시아 한 관리는 '호주가 성공적으로 아시아에 편입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하나, 아시아 국가들이 호주의 의도를 얼마나 환영하느냐에 달려 있다. 호주가 아시아에 수용되느냐는 호주 정부와 호주 국민이 아시아 문화와 사회를 어느 정도까지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다. 고 말했다. 아시아인들은 호주의 아시아 지향적 수사와 그와는 동떨어진 서구적 현실 사이의 괴리를 의식한다. 한 호주 외교관의 지적에 따르면 태국인은 자신이 아시아 국가라는 호주의 주장을 어리둥절하게 받아들인다.

199410월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문화적으로 호주는 여전히 유럽이며 우리 또한 호주를 유럽국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못 박았다. 따라서 호주는 EAEC의 회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다. "아시아인은 다른 나라들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거나 다른 나라를 심판하는 것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유럽에 속하는 호주는 다른 나라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권리,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졌다고 믿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우리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 (호주의 EAEC 가입을) 내가 반대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것은 피부색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의 문제다. 요컨대 아시아인은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하는, 유럽인이 터키를 거부한 것과 같은 이유에서 호주를 자기네 모임으로부터 배제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키팅 총리는 호주를 '아시아 외부의 이방인에서 내부의 이방인으로 탈바꿈시키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된 발언이다. 이방인은 낯선 집단에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다.

마하티르 총리의 지적처럼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는 호주가 아시아에 합류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아시아와 호주는 민주주의, 인권, 언론 자유에 대한 호주의 발언과 인접한 나라의 인권 유린 사태에 대한 호주의 항의를 놓고 거듭 충돌하고 있다. 이 지역에서 호주가 당면한 진짜 문제는 국기가 아니라 근본에 놓여 있는 사회적 가치관이다. 이 지역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자신들의 가치관을 단 하나라도 포기할 호주인은 아마 없으리라고 생각한다.'라고 호주의 원로 외교관은 언급하였다. 성격, 기질, 행동 양식의 차이도 거론된다. 마하티르 총리가 지적하였듯이 아시아인은 대체로 미묘하고 간접적이고 완곡하고 무비판적이고 비규범적이고 비대결적이고 에두르는 방식으로 남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목표를 추구한다. 이와는 달리 호주인은 영어권에서도 가장 직접적이고 무뚝뚝하고 노골적이고 혹자는 둔감하다고 표현할만한 방식으로 처신하는 국민이다. 이러한 문화적 충돌은 키팅 총리 자신이 아시아인들과 접촉하는 자리에서 두드러지게 표출되었다. 키팅은 호주인의 국민적 특성을 극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타고난 천성이 도발적이고 호전적이며 말뚝박개 같은 정치인으로 묘사되었다. 키팅은 자신의 정적들을 서슴없이 쓰레기 같은 놈, 향수나 뿌리고 다니는 샌님, 대가리가 돈 미치광이로 몰아세웠다. 호주는 아시아 국가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키팅은 자신의 무지막지하리만큼 거침없는 성격 때문에 아시아 지도자들의 반감을 사고 그들을 충격과 격분으로 몰아넣었다. 문화의 격차가 얼마나 컸던지, 문화의 수렴을 주창하던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이 문화적 형제라고 우기던 사람들의 반발을 사고있다는 사실마저 인식 못 할 지경에 이르렀다.

키팅 총러와 에반스 외무 장관의 선택은 경제적 요인을 과대평가하고 호주의 문화를 쇄신하기보다는 무시하는 근시안적 판단으로, 또한 호주의 경제 문제를 호도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으로 평가될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동아시아의 점증하는 경제력, 정치력,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의 중심부에 호주를 포진시키기 위한 구상에서 나온 원대한 장기적 계획으로 평가받을 수도 있다. 그 점에서는 호주는 수많은 서구 국가 가운데 서구로부터 벗어나 새롭게 부상하는 비서구 문명에 합류하려고 시도한 최초의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 22세기 초두의 역사가들은 키팅-에반스의 선택을 서구의 몰락을 예고한 중대한 전환점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그러나 호주가 그런 노선을 견지한다고 해도 호주의 서구적 유산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키팅이 한탄한 것처럼 '제국의 지부'로서, 또 리 콴유가 경멸적으로 빗댄 '아시아의 새로운 백색 쓰레기'로서 영원히 분열된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리고 지금도, 이것이 호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영국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호주인의 심정은 층분히 이해하지만 호주의 지도자들은 호주를 아시아 국가로 정의할 것이 아니라 키팅의 전임자 호크 총리가 시도하였던 것처럼 태평양 국가로 정의하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만일 영국의 군주제로부터 떨어져 나와 공화국으로서 새 출발을 하고 싶다면 호주는 마찬가지로 영국에 뿌리를 두었고 이민자들이 세운 국가였으며 광대한 영토를 가졌고 영어가 공용어이며 세 번의 전쟁에서 호주와 함께 싸웠고 유럽인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호주처럼 아시아 인구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 미국의 선례를 따를 수도 있다. 문화적으로 보아 호주인의 정서에는 아시아 국가의 가치관보다 미국이 177674일에 단행한 독립선언의 정신이 더 맞는다. 경제적으로 보아도, 문화적으로 낮설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호주를 거부하는 나라들의 모임에 들어가려고 기를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호주의 지도자들은 NAFTA를 확대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를 포함하는 북미-남태평양(NASP) 협정을 체결하자는 안을 내놓을 수도 있다. 그런 집단화는 문화와 경제를 조화시키고, 호주를 아시아화하겠다는 헛된 노력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견고하고 지속 가능한 정체성을 호주에 제공할 것이다.

 

서구의 바이러스와 문화적 정신분열증

호주의 지도자들은 아시아를 지향한 반면 다른 분열국-터키, 멕시코, 러시아의 지도자들은 자기 사회를 서구에 통합시키려고 시도하였다. 하지만 그들의 경험은 고유문화가 얼마나 완강하고 회복력이 강하고 끈끈하며 스스로를 쇄신하고 서구로부터의 유입물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억누르고 수정하는 능력이 뛰어난가를 똑똑히 보여 주었다. 서구를 무조건 배격하는 입장도 불가능하지만 서구를 무조건 긍정하는 케말주의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비서구 사회가 근대화에 성공하려면 서구의 방식이 아닌 자기 고유의 방식을 추구해야 하며 일본처럼 자신의 전통, 제도, 가치관의 바탕 위에서 차곡차곡 쌓아 나가야 한다.

자기 나라의 문화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에 젖어 있는 정치 지도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서구문화의 요소들을 도입할 수는 있겠지만 자기 고유문화의 알맹이를 영원히 억제하거나 제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한편 일단 어떤 사회에 이식된 서구 바이러스는 좀처럼 말살하기가 어렵다. 그 바이러스는 고질적으로 남아 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 환자는 살아남지만 다시는 정상을 되찾지 못한다. 정치 지도자들은 역사를 만들 수 있지만 역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그들은 분열국을 만들 수는 있어도 서구 사회를 만들지는 못한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문화적 정신분열증에 감염시켜 그 수렁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7. 핵심국, 동심원, 문명의 질서

 

문명과 질서

새롭게 형성되는 세계 정치의 판도에서 주요 문명의 핵심국들이 냉전 시대의 두 초강대국을 밀어내고 다른 나라들의 접근과 배척을 낳는 중심축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서구, 정교, 중화 문명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경우 문명 집단은 핵심국. 소속국, 인접국에 거주하는 문화적 동질성을 지닌 소수 집단, 이웃 나라에 거주하면서 갈등 관계에 놓여 있는 문화적으로 다른 민족들로 이루어진다. 문명 블록을 구성하는 국가들은 대체로 하나 또는 여럿이 핵심국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들 위에 분포하며, 중심으로부터의 거리는 해당 국가가 그 블록에 편입된 정도나 일체감의 정도를 반영한다. 폭넓게 인정되는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 이슬람 문명은 공동 의식이 강화되고는 있지만 이슬람 세계의 공동적 정치 구조는 아직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

무릇 국가는 비슷한 문화를 가진 나라들과 뭉치려는 경향이 있으며 문화적 동질성이 결여된 나라들을 견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은 핵심국들의 태도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핵심국들의 중력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집단을 끌어당기고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을 밀어낸다. 안보상의 이유로 핵심국들은 다른 문명에 속한 일부 민족들을 자신에게 편입시키거나 지배하려고 시도하지만 이들 민족은 다시 그러한 지배에 항거하거나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중국과 티베트 위구르의 관계, 러시아와 타타르, 체첸, 중앙아시아, 이슬람교도의 관계). 역사적 관계와 세력 균형을 고려 일부 국가들은 핵심국의 영향력 행사에 저항하기도 한다. 그루지야와 러시아는 같은 정교 국가이지만 그루지야인은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지배에 저항하였으며 러시아와 긴밀한 결속을 맺는데 저항감을 보여 왔다. 베트남과 중국은 모두 유교 국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두 나라도 러시아와 그루지야에 못지않은 역사적 앙숙 관계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문화적 동질성과 광범위하고 강력한 문명 의식의 발전이 서유럽 국가들이 뭉친 것처럼 이 두 나라를 결집시킬 가능성이 있다.

냉전 시대의 세계 질서는 두 블록에 대한 양대 초강대국의 지배와 제3세계에 대한 초강대국의 영향력 행사의 산물이었다. 새로운 세계에서 초강대국은 유명무실해졌으며 지구 공동체도 요원한 꿈이 되어 버렸다. 미국을 포함한 그 어느 국가도 세계적 차원의 안보 이해에 예전처럼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는다. 오늘날의 좀 더 복잡하고 이질적인 세계 질서를 이루는 성분들이 문명 내부와 문명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세계는 문명의 기초 위에서 질서를 잡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질서가 확립되기 어려운 상태가 될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문명의 핵심국들은 문명 내부에 존재하는 질서의 원천이면서, 동시에 다른 핵심국들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지는, 문명과 문명 사이에 성립하는 질서의 원천이다.

핵심국이 선도하며 지배력을 행사하는 세계는 영향권들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그러나 핵심국의 영향력 행사는 그 핵심국이 동일 문명에 포함된 소속국들과 공유하는 공동의 문화로 인하여 완화되고 절제된다. 문화적 동질성은 핵심국이 소속국들뿐 아니라 외부 권력과 제도에 대하여 주도권을 행사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역할을 정당화한다. 따라서 갈리(Boutros Boutros-Ghali) 유엔사무총장이 1994년에 공표한 바 있는, 지역 강국이 유엔 평화 유지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분의 1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영향권 억제'의 원칙은 헛된 구호일 뿐이다. 그러한 요구는 지배적 국가가 존재하는 지역의 평화는 오직 그 지배국의 주도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는 지정학적 현실과 상치된다. 유엔은 지역 패권의 대안이 될 수 없으며, 지역 패권은 같은 문명 안의 다른 소속국들과의 관계에서 핵심국이 행사할 때에만 일정한 무게와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

핵심국이 질서 부여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소속국들이 핵심국과의 문화적 유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문명은 가족의 확대판이며, 핵심국은 가족 안의 웃어른처럼 친척들을 돕고, 지켜야 할 원칙을 제시한다. 이러한 유대감이 없을 때는 강한 힘을 가진 국가라도 자신의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을 해결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심지어는 스리랑카도 남아시아에서 인도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일본이 지역 패권 국가로 등장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문명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에 문명 내부에 질서를 세우거나 다른 문명들과 질서를 구축하고자 절충을 벌이는 작업도 한결 어려워진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독일이 크로아티아를 도왔던 것처럼 보스니아를 합법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이슬람 세계의 핵심국이 없는 상황에서, 미국은 부득이 그 역할을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역할이 유명무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 설정된 국경선에 미국의 전략적 이해가 걸려 있지 않았기 때문이며, 미국과 보스니아 사이에 문화적 연결 고리도 없었고 유럽 각국이 유럽 안에 이슬람 국가가 들어서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수단 내전이 좀처럼 해결의 실마리를 보이지 않는 것도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에 핵심국이 존재하지 않는 데서 그 주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반면 핵심국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핵심 국이 문명에 바탕을 둔 새로운 국제 질서의 중추적 요소로 부각되고 있다.

 

서구의 결속

냉전 시대의 미국은 소련의 팽창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진 거대하고 다양한 성분을 가진 다문명 국가군의 중심국이었다. '자유 세계', '서구', '연합국' 등 다양한 호칭을 가졌던 이들 국가군에는 서유럽 국가는 물론 터키, 그리스, 일본, 한국, 필리핀, 이스라엘, 그리고 좀 더 느슨하기는 하지만 대만, 태국, 파키스탄 같은 나라가 들어갔다. 여기에 맞선 것은 이보다는 이질적 성격이 조금 약하지만 그리스를 제외한 모든 정교 국가들, 역사적으로 서구에 들어갔던 몇 나라, 베트남, 쿠바, 그리고 좀 더 느슨하기는 하지만 인도, 여기에 때때로 아프리카의 몇 나라가 동참한 국가군이었다. 냉전이 끝나면서 이러한 다문명 국가군은 와해되었다. 소련 체제의 붕괴 특히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붕괴는 그 극적인 표현이었다. 역시 다문명으로 구성된 냉전 시대의 '자유 세계' 역시 좀 더 느린 속도이긴 하지만 서구 문명과 어느 정도 외연이 비슷한 새로운 국가군으로 재편되는 과정에 있다. 서구의 국제기구에 가입할 수 있는 자격을 어떻게 정의하느냐를 두고 현재 이합집산의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유럽 연합의 핵심국인 독일과 프랑스는 먼저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같은 내부 그룹에 둘러싸여 있다 이 나라들은 모두 서유럽 지역에서 인적 물적 자원의 소통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을 제거하는 데 동의한다. 그다음이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덴마크, 영국, 아일랜드, 그리스 같은 회원국이고 다음이 1995년에 회원국이 된 나라들(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 그리고 1995년 현재 준회원국으로 남아 있는 나라들(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여 1994년 가을 독일의 집권당과 프랑스의 고위관리들은 유럽 연합의 차등화 안을 내놓았다. 독일이 제시한 안은 이탈리아를 제외한 원래 회원국들이 '중핵'을 이루고 독일과 프랑스가 그 증핵의 핵을 이룬다는 것이었다. 중핵 국가들은 빠른 시일 안에 단일 통화를 제정하고 외교와 국방 정책을 통합하는 데 노력한다고 되어 있다.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의 발라뒤르(Edouard Balladur) 총리는 세 고리로 구성된 유럽 연합 안을 내놓았다. 이 안에 따르면 통합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5개 국가가 중심에 오고 나머지 현 회원국 들이 다음 원을 형성하며 장차 회원국이 될 나라들이 가장 바깥 원에 들어 간다. 프랑스의 쥐페(Alain Giuppe) 외무 장관은 이 안을 더욱 가다듬어 동유럽과 중부 유럽을 포함하는 가장 바깥 원의 동반 국가들, 몇몇 분야(단일 시장, 관세 연합 등)에서 공동의 원칙을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는 회원국들로 이루어진 중간 원, 국방. 화폐 통합. 외교 정책 등에서 다른 나라들보다도 더욱 빠른 결속을 추진하겠다는 적극적 의지와 역량을 가진 국가들로 이루어진 '강화된 결속체'의 안쪽 원들을 제안하였다. 이 밖에도 유럽 각국의 지도자들은 다양한 구성안을 내놓았지만 긴밀하게 결속된 내부 그룹과, 회원국과 비회원국을 가르는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핵심국과의 완전한 통합을 미루는 나라들로 이루어진 외곽 그룹을 빠짐없이 설정한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유럽에서 그러한 경계선을 긋는 것은 탈냉전 세계에 들어와 서구가 직면한 가장 까다로운 숙제이다. 냉전 시대만 하더라도 전체로서의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붕괴하면서 이 지역 사람들은 유럽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회피할 수 없게 되었다. 유럽의 북방, 남방, 서방 경계선은 모두 바다에 의해 확정되어 있는데 남방 경계선은 뚜렷한 차이점을 가진 문화의 경계선과도 일치한다. 그렇다면 유럽의 동쪽 경계선은 어디인가? 누구를 유럽인으로 간주할 것이며, 누구를 유럽 연합 NATO, 또는 그에 상응하는 기구들의 잠재적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설득력 높고 포괄성 있는 해답은 수 세기 전부터 서구 크리스트교 권을 이슬람권과 정교권에서 구분한 거대한 역사적 경계선을 통해 알 수 있다. 이 선은 서기 4세기의 로마 제국 분열과 10세기의 신성 로마 제국 성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의 선은 최소한 지난 5백 년 동안 기본적 골격을 유지하여 왔다. 북쪽에서 시작하여 지금의 핀란드와 러시아, 발트 3(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과 러시아의 국경선을 따라 내려와서 서부 벨로루시를 지나고, 다시 우크라이나 서부의 연합동방 가톨릭 지역과 동부의 정교 지역을 가르는 선과 포개지면서, 다시 루마니아에서 가톨릭을 신봉하는 헝가리 인구가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 지역과 나머지 지역을 나누는 선을 이루고, 옛 유고슬라비아에서 슬로베니아 및 크로아티아를 여타 공화국들로부터 구분하는 선으로 연결된다. 물론 발칸 지역에서 이 선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역사적 구분선과도 일치한다. 이것은 유럽의 문화적 경계선이며, 탈냉전 시대에 들어와서는 유럽과 서구의 정치 경제 경계선이기도 하다.

따라서 문명 패러다임은 유럽이 어디에서 끝나는가라는 서유럽인 앞에 놓인 질문에 분명하고 설득력 있게 대답한다. 유럽은 서구 크리스트교가 끝나고 이슬람교와 정교가 시작되는 곳에서 끝난다. 이것이 서유럽인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이다. 서유럽 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낮은 목소리로 여기에 동조하며, 많은 지식인과 정치 지도자들은 공공연하게 그러한 견해를 피력한다. 하워드(Miche1 Haword)의 지적처럼 소련의 지배를 거치면서 그 위상이 애매모호해진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구분을 다시금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중부 유럽에 들어가는 지역은 한때 서구 크리스트교 세계의 일부를 형성한 지역과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을 이루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그리고 폴란드와 독일의 동부 변경 지대다. '동유럽'이라는 말은 정교의 방패 아래 성장한 지역, 다시 말해서 19세기에 와서야 겨우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같은 흑해 연안의 국가들과 소련의 '유럽'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으로 써야 한다... 그는 서유럽의 중차대한 과제가 '중부 유럽의 인구를 그들이 당연히 소속되어야 하는 경제적, 문화적 공동체로 재흡수하여 런던, 파리, 뮌헨, 라이프치히, 바르샤바, 프라하, 부다페스트 사이의 결속을 재구축하는 일이다.' 고 주장한다. 그로부터 다시 2년 뒤 베아르(Pierre Behar)는 새로운 단층선이 출현하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이것은 한편으로는 서구 크리스트교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막론하고)로 특징짓는 유럽과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 정교와 이슬람교로 특징 지워지는 유럽을 근본적으로 구분하는 문화의 경계선'이라고 말하였다. 핀란드의 한 고위 인사도 철의 장막을 대신하여 유럽에서 중요한 분할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 유구한 역사를 가진 동과 서의 문화적 단충선은 폴란드와 발트 국가뿐 아니라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를 서유럽 안에 포진시키고 나머지 동유럽 국가들을 그 바깥에 내놓는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한 저명한 영국인도 동의하듯이 이것은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 좀더 넓게는 크리스트교를 로마에서 직접 받아들였거나 켈트인이나 게르만인을 거쳐 받아들인 사람들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을 통해 크리스트교를 받아들인 동부와 남동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는 거대한 종교적 구분선이다.

중부 유럽 사람들도 이러한 구분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공산주의의 유산으로부터 탈피하여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하면서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는 나라들과 그렇지 못한 나라들은 '한편으로는 가톨릭, 신교와 다른 한편으로는 동방 정교를 가르는 신에 의하여 구별된다. 몇 세기 전부터 '두 문명'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였던 리투아니아인은 라틴 세계를 택하여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으며 법치에 바탕을 둔 국가 형태를 받아들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폴란드인도 비잔티움에 맞서 서방 크리스트교를 선택한 지난 10세기 이후로 자신들이 서구에 속해 있다고 말한다. 반면에 동유럽의 정교 국가들은 이 문화적 단층선에 대한 새로운 강조 앞에서 양면적 태도를 보인다. 불가리아인과 루마니아인은 서구의 일원이 되어 그 제도에 편입될 때 누릴 수 있는 엄청난 이득을 잘 알고 있지만 동방 정교의 전통에 충실하려고 한다. 특히 불가리아인은 러시아와 비잔틴 문명의 역사적 친연성을 강조한다.

유럽을 서구 크리스트교 세계로 정의하면 서방 기구가 새로운 회원을 받아들일 때 명확한 기준이 마련된다. 유럽에 존재하는 서구의 중추적 실체인 유럽 연합의 회원국을 확대하려는 노력은 1994년 문화적으로 서구에 속한 오스트리아, 핀란드, 스웨덴의 가입이 승인되면서 다시금 재개되었다. 1994년 봄 유럽 연합은 발트 국가들을 제외하고 옛 소련의 모든 공화국들에게는 회원 자격을 주지 않는다는 잠정적 결정을 내렸다. EU는 또 4개 중부 유럽 국가(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2개 동유럽 국가(루마니아, 불가리아)'공동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이 증에서 21세기를 맞이하기 전에 정식 회원국 자격을 획득할 나라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설령 가입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불가리아와 루마니아보다는 중부 유럽 국가들이 더 먼저 EU 진입에 성공할 것이다. 발트 국가들과 슬로베니아의 EU가입 전망은 아주 밝은 반면, 이슬람교도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터 키, 너무 왜소한 말타, 정교권에 속하는 키프로스의 가입 신청이 받아들여질 전망은 1995년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EU의 범위를 확대하는 작업에서도 문화적으로 서구에 속하며 경제적으로 더 발달한 나라들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이런 기준이 적용될 경우 비제그라드 국가군(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과 발트 3,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말타가 결국 EU에 진입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럽 연합은 역사적으로 유럽에 존재하여 온 서구 문명과 동일한 외연을 갖게 된다.

문명의 논리는 NATO의 확대와 관련해서도 비슷한 결과를 예상한다. 냉전은 중부유럽에 대한 소련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 확대와 함께 시작되었다. 미국과 서유럽 국가들은 그것을 저지하고 필요하다면 소련의 공격에 대처하기 위하여 NATO를 결성하였다. 탈냉전 시대의 NATO는 서구 문명의 안보 기구이다. 냉전의 종식과 함께 NATO는 증부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정치적, 군사적 지배 재개를 막는다는 중요한 당면 목표를 설정하였다. 서구의 안보 기구로서 NATO는 여기에 동참할 의사가 있고 군사적 역량, 정치적 민주주의, 군부에 대한 민간의 통제 같은 기본적 요건을 충족 시키는 서구 국가들에게 차츰 문호를 개방하고 있다.

탈냉전 시대의 유럽 안보 체제를 바라보는 미국의 정책이 처음에는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라는 구상으로 구체화되었던 것처럼 유럽 국가는 물론 유라시아 국가들에게도 문호를 개방하겠다는 보편주의적 발상을 담고 있었다. 또한 이러한 접근법은 유럽 안보 협력 기구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런 태도는 19941월 유럽을 방문한 클린턴 대통령의 연설에도 반영되어 있다. 자유의 경계선은 지난 역사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에 의해 정의되어야 한다. 유럽에 새로운 경계선을 그리려는 모든 당사자에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유럽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의 미래상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도처에서 꽃을 피우고 시장경제가 도처에서 뿌리 내리고 국가들이 공동의 안보를 위헤 협력하는 미래상이다. 우리는 미지근한 성과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난 뒤 미 행정부는 '지난 역사가 정의한 경계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으며 문명적 차이점이라는 현실을 반영하는 '미지근한 성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는 폴란드,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이어서 슬로베니아, 나중에는 아마도 발트 국가들까지 포함시키는 NATO 확대 방안의 기준과 일정을 적극적으로 마련하였다.

러시아는 NATO의 확대를 극력 반대한다. 자유주의와 친서방적 태도를 보이는 러시아 인사들도 NATO의 확대가 러시아 내의 민족주의 세력과 반서구 정치 세력의 입지를 크게 강화시킨다는 이유를 들어 여기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서구 크리스트교 세력권에 들어갔던 나라들로만 NATO의 확대 범위를 제한할 경우,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 몰도바, 벨로루시가, 또 분열되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도 NATO의 울타리 바깥에 남아 있으리라는 확신을 러시아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NATO의 가입 자격을 서구 국가에 한정시키는 안은 또한 서구 문명과 뚜렷이 구분 되는 정교 문명의 핵심국으로서 러시아가 가지는 역할을 존중한다. 러시아는 정교 문명 안에서, 또 정교 문명의 경계선에서 질서 유지의 책임을 지닌 국가로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국가들을 문명에 따라 차등화하는 전략의 효용성은 발트 공화국들의 예에서 확연히 입증되었다. 발트 3국은 옛 소련 공화국들 중에서 역사, 문화, 종교에서 뚜렷이 서구적 성격을 가진 나라들이었으므로 서구는 이들의 운명을 예의 주시하였다. 미국은 소련의 발트 지역 병합을 공식적으로는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고 소련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이 지역의 독립 운동올 지원하면서 이들 공화국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한 합의를 예정대로 실행에 옮기도록 러시아측에 촉구하였다. 발트 3국은 러시아가 옛 소련 공화국들을 대상으로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영향권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 정부가 러시아에게 보낸 일관된 메시지였다. 스웨덴 총리가 지적한 것처럼 이러한 클린턴 행정부의 노력은 유럽의 안보와 안정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발트 공화국들에 대한 서구의 명백한 지지 앞에서 극우 러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보복 계획은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보임으로써 러시아의 민주주의 세력을 도왔다.

EUNATO의 확대에만 지나치게 초점을 맞춘 느낌이 들지만 이들 기구의 문화적 구조 개편은 이 기구들이 축소될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유일한 비서구 국가인 그리스는 두 기구에 모두 소속되어 있고 또 하나의 비서구 국가인 터키는 NATO 회원국으로서 EU 가입 신청을 한 상태이다. 이 관계는 냉전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얼개가 탈냉전 문명 세계에 서도 존속할 수 있을까?

터키의 유럽 연합 정식 회원국 가입을 두고 적잖은 갈등이 빚어지고 있으며 복지당은 NATO 가입을 비판하고 나섰다. 그러나 복지당이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거나 터키가 의식적으로 케말의 유산을 부정하고 이슬람의 지도국으로 자신을 재정의하지 않는 한 터키는 NATO에 잔류할 것이다. 터키의 이슬람 지향 노선은 개연성이 층분히 있고 또 바람직한 측면도 있지만 가까운 미래에 채택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NATO에서 어떤 역할 을 떠맡게 되건 터키는 발칸 지역, 아랍 세계, 중앙아시아에 걸려 있는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점차 강하게 추구할 것이다. 그리스는 서구 문명의 일원은 아니지만 서구 문명의 모태가 된 고전 문명의 발원지이다.

그리스는 터키에 맞서면서 역사적으로 크리스트교의 기수임을 자임해 왔다. 세르비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와는 달리 그리스의 역사는 서구의 역사와 긴밀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그리스는 예외적 존재이며 서구 문명 안에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정교 국가이다. 그리스는 EU NATO에서 모범적인 회원국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양 기구의 원칙과 관행에 적응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그리스는 군사 정권의 지배를 받았으며 민주 정부로 이행한 다음에야 비로소 유럽 연합에 가입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지도자들은 서구적 기준으로부터 자주 이탈하면서 서방 각국 정부에 도전하는 듯한 행동을 보이곤 하였다. 그리스는 EUNATO의 다른 회원국들보다 가난하였으며 브뤼셀에서 요구하는 기준을 비웃는 듯한 경제 정책을 추구하기 일쑤였다. 1994EU의 의장국으로서 그리스가 보인 행동은 다른 회원국들을 격분시켰으며 서유럽 관리들은 그리스를 회원국으로 받아들인 것이 실수였다고 사석에서 토로하는 실정이다.

탈냉전 시대의 그리스 정책은 점점 서구의 정책에서 이탈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봉쇄는 유럽 여러 나라의 반발을 사 그리스가 유럽 재판소에 제소되는 불상사를 낳았다.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분쟁에서 그리스는 서방 주요국이 추구하는 정책에서 이탈하여 세르비아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세르비아에 대한 유엔의 제재 조치를 노골적으로 위반하였다. 소련과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진 오늘날 그리스는 공동의 적 터키에 맞서고자 러시아에 접근하고 있다. 덕분에 러시아는 그리스령 키프로스에서 중요한 교두보를 마련하였으며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동방 정교를 공유하는 러시아인과 세르비아인을 환영하였다. 1995년 현재 키프로스에 진출한 러시아인 소유의 기업은 2천여 개에 달하며 러시아어 신문과 세르보-크로아티아어 신문도 이곳에서 간행되고 있다. 키프로스의 그리스계 정부는 러시아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제공받고 있다. 그리스는 또한 러시아와 함께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의 원유를 터키와 여타 이슬람 국가들을 경유하지 않고 불가리아-그리스 파이프라인을 통해 지중해로 수송하는 방안을 강구하였다. 전체적으로 그리스의 대외 정책은 정교 지향적 색채를 강하게 띤다. 그리스는 의심할 바 없이 NATOEU의 공식 회원국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화적 구조 재편이 강화되면서 유럽 기구 회원국으로서 그리스의 지위는 점점 의미를 잃고 약해질 것이며 관련국들에게 고통을 안길 것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의 적대국이었던 나라가 탈냉전 시대에는 러시아의 동맹국으로 돌아서고 있다.

 

러시아의 가까운 외국

차르와 공산주의 제국의 계승자는 유럽에 존재하는 서구 문명과 많은 점에서 평행선을 달리는 문명 블록이다. 프랑스와 독일처럼 그 핵심부에 존재하는 러시아는 슬라브 정교를 신봉하는 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은 두 나라 벨로루시와 몰도바, 전체 인구의 40퍼센트가 러시아인인 카자흐스탄, 역사적으로 러시아의 맹방인 아르메니아로 이루어진 내부 원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중반 현재 이 나라들에서는 모두 선거를 통하여 친러시아 정권이 들어서 있다. 러시아와 그루지야(정교 인구가 압도적 다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정교 인구가 우위)의 관계는 가깝지만 깊지는 않다. 그루지야와 우크라이나는 민족의식이 강하고 독립국으로서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정교가 지배하는 발칸 지역에서 러시아는 불가리아, 그리스. 세르비아 키프로스와 밀월 관계를 누리고 있으며 루마니아와는 덜 가깝게 지낸다. 옛 소련의 이슬람 공화국들은 경제적으로도 안보 부문에서도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가 늦다. 반면에 발트 공화국들은 유럽의 견인력에 이끌리면서 러시아의 영향권으로부터 효과적으로 빠져나왔다.

전체적으로 보아 러시아는 자신의 주도 아래 정교의 심장부로서 하나의 블록을 형성하고, 상대적으로 약한 이슬람 국가들로 둘러싸인 완충 지대를 만들어 이슬람 국가들을 다양한 수준으로 지배하면서 다른 열강들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하석 노력할 것이다. 러시아는 또한 세계가 이러한 체제를 수용하고 승인하기를 바란다. 19932월 옐친이 말한 것처럼 외국 정부들과 국제기구들은 예전의 소련 지역에서 평화와 안전의 보장자로서 러시아가 갖는 특수한 힘을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 소련이 지구적 관심을 가진 초강대국이었다면, 러시아는 지역적, 문명적 관심사를 지닌 강대국이다.

옛 소련의 정교 국가들은 유라시아와 세계 무대에서 응집력 있는 러시아 블록이 발전하는 데 증추적 역할을 한다. 소련이 붕괴되었을 때 이 지역의 5개 나라는 처음에는 대단히 민족주의적인 노선을 걸으면서 자신들의 새로운 독립성과 모스크바로부터의 거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 뒤로 4개 공화국의 유권자들은 경제적, 지정학적, 문화적 현실에 부딪히면서 친러시아 정부를 선택함으로써 과거의 친러시아 정책으로 회귀하였다. 이 지역 국민들은 러시아의 지원과 보호를 기대한다. 유일한 예외였던 그루지야도 러시아의 군사 개입 이후 정부의 태도에서 비슷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아르메니아는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동일한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였으며 러시아는 인접 이슬람 국가들로부터 아르메니아를 수호한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소련이 붕괴한 뒤로 이러한 관계가 부활되었다. 아르메니아인은 러시아의 경제적, 군사적 지원에 의존하며 옛 소련 공화국들과 관계된 문제에서도 러시아 편을 든다. 두 나라의 전략적 이해는 하나로 수렴한다.

벨로루시는 아르메니아와 달리 민족의식이 희박하다. 게다가 러시아의 지원에 대한 의존도가 한결 심하다. 벨로루시 국민의 상당수는 자신이 조국뿐 아니라 러시아에도 속해 있다고 느끼는 듯하다. 19941월의 선거에서 중도파와 온건 민족주의 세력이 후퇴하고 친러시아 성향의 보수 세력이 약진하였다. 19947월의 대선에서는 극단적인 친러시아파로서 지리노프스키와도 절친한 인물이 80퍼센트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벨로루시는 독립국가연합에 일찌감치 합류하였고 1993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체결한 경제 연합의 창립 회원이었다. 또 러시아와 화폐 연합을 맺기로 합의하였고 자신의 핵무기를 러시아에게 양도하였으며 금세기 말까지 러시아 군대의 주둔을 허용하기로 합의하였다. 1995년 벨로 루시는 이름만 다를 뿐이지 사실상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소견의 붕괴로 몰도바가 독립하자 종국적으로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재통합을 점치는 견해가 많았다. 이러한 사태 전개에 대한 우려는 러시아 인구가 다수를 차지하는 동부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자극하였다. 모스크바의 은밀한 지원과 러시아 육군 제14군단의 적극적 지원을 등에 업은 자치 운동으로 트랜스-드네스트르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바라는 몰도바 국민의 열기는 두 나라의 경제적 문제와 러시아의 경제적 압력으로 인해 한풀 꺾였다. 몰도바는 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였고 러시아와의 교역량이 늘어났다. 19942월 친러시아 성향의 정당들이 의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 세 나라에서는 전략적,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 국민 여론이 러시아와의 긴밀한 결속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섰다. 비슷한 경향이 심지어는 우크라이나에서도 결국 나타났다. 그루지야에서는 사태의 전개 양상이 약간 다르다. 그루지야는 1801년 왕이 터키의 위협에 맞서 러시아에게 보호를 부탁하기 전까지는 줄곧 독립국이었다. 러시아 혁명이 터진 뒤 3년 동안, 그러니까 1918부터 1921년까지 그루지야는 다시 독립국이 되었지만 볼셰비키들이 그루지야를 소련에 강제로 편입시켰다. 소련이 붕괴하자 그루지야는 다시금 독립을 선언하였다. 민족주의 연합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대통령이 국민을 억압하며 제 무덤을 팠고 결국 폭력으로 전복되었다. 소련의 외무 장관을 지낸 셰바르드나제(Eduard A. Shevardnadze)가 조국을 이끌기 위해 돌아와 1992년과 1995년의 선거에서 연달아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는 러시아의 실질적 지원을 받는 압하스의 분리주의 운동과 쫓겨난 감사후르디아(Gamsakhurdia)가 이끄는 반군의 도전에 직면하였다. 그 역시 예전의 왕처럼 우리에겐 뾰족한 수가 없다. 는 결론을 내리고 모스크바에 도움을 청하였다. 그루지야가 독립국가연합에 합류한다는 조건으로 러시아 군대가 개입하여 셰바르드나제를 지원하였다. 1994년 그루지야인들은 러시아가 그루지야 영토에서 3개 군사 기지를 일정한 시효 없이 유지하도록 허용한다는 데 합의하였다. 처음에는 그루지야 정부를 약화시켰다가 나중에는 그것을 지탱시켜 준 러시아의 군사 개입은 이처럼 독립 의식이 강한 그루지야를 러시아 진영에 묶어 두는 성과를 낳았다.

러시아를 제외하고 옛 소련 공화국들 중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비중이 큰 나라는 우크라이나이다. 우크라이나는 역사적으로 여러 차례 독립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렸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모스크바가 통치하는 정치적 실체의 일부로 머물렀다. 그 결정적 전기가 되는 해는 1654년이었다. 당시 폴란드의 지배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코사크 지도자 흐멜니츠키 (Bohdan Khmelnytsky)는 폴란드와의 항쟁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얻는 대가로 차르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이후 1991년까지, 1917년에서 1920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정치적으로 모스크바의 지배를 내내 받았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2개의 상이한 문화를 가진 단절국이다. 서구 문명과 정교 문명의 단층선이 몇 세기째 우크라이나의 심장부를 가로지르고 있다. 과거 서부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리투아니아 오스트리-헝가리 제국의 일부로 여러 차례 편입되었다. 서부 우크라이나 주민의 대다수는 정교에서 요구하는 종교의식을 준수하지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연합 동방가톨릭 신자다. 역사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우크라이나어를 썼고 민족의식이 유난히 강하다. 반면 동부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정교 신자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대부분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쓴다. 1990년대 초반 전체 우크라이나 인구 증에서 러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22퍼센트이며 러시아어 사용 인구는 31퍼센트에 이른다. 러시아어로 수업을 진행하는 초등학교와 중등학교의 숫자도 많다. 크리미아 지역은 러시아인이 압도적으로 많이 거주하며 1954년 흐루시초프가 표면상으로는 500년 전에 있었던 흐멜니츠키의 결정을 인정하여 우크라이나에 할양하기 전까지는 러시아 연방의 일부였다.

동부 우크라이나와 서부 우크라이나의 차이는 양 지역 주민의 태도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가령 1992년 말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다고 응답한 비율이 서부 지역에서는 전체의 3분의 1에 달하였으나 동부 지역에서는 10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 동서의 분열은 19947월의 대통령 선거에서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러시아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민족주의를 표방한 현직 대통령 크라프추크(Leonid Kravchuk) 는 일부 지역에서 90퍼센트가 넘는 지지율을 과시하면서 서부 우크라이나의 15개 주를 장악하였다. 그의 정적으로 유세 기간에 비로소 우크라이나어를 배운 쿠츠마(Leonid Kuchma)는 역시 압도적인 지지로 동부 우크라이나의 13개 주를 장악하였다. 쿠츠마는 모두 52퍼센트의 지지를 획득하였다. 1994년의 선거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은 근소한 차이로 1654년에 있었던 흐멜니츠키의 결정을 추인한 셈이었다. 한 미국 외교관은 선거는 우크라이나의 정체성을 놓고 서부 우크라이나의 유럽화한 슬라브인과 러시아-슬라브 주민 사이에 가로놓인 갈등을 반영하였으며 심지어는 이것을 공고히 다지는 측면도 있었다. 이것은 민족적 대립이라기보다는 상이한 문화들의 대립이다.'라고 지적하였다.

이러한 분열의 여파로서 앞으로 예상되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관계는 크게 세 가지 시나리오가 있다. 1990년대 초반 두 나라 사이에는 핵무기, 크리미아반도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러시아인의 권리, 흑해 함대, 경제 관계 등 중요한 현안이 많았다. 많은 사람들이 무력 충돌 가능성을 점쳤고 일부 서구 분석가들은 러시아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하여 서방이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보유를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문명의 역할이 크다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무력 충돌 가능성은 낮다. 이들은 둘 다 슬라브 민족이고 인구 중에서 정교 신자가 다수를 점하며 수 세기 동안 가까운 관계를 맺어 왔고 무수히 많은 혼인 관계로 얽혀 있다. 이것은 아주 민감한 사안들이며 양국의 극우 민족주의 세력이 가하는 압력 또한 거세지만, 양국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이견이 상당히 좁혀 들었다. 1994년 중반에 치러진 선거에서 명백한 친러시아적 노선을 추구하는 인물이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두 나라의 분쟁이 악화될 소지는 크게 줄어들었다. 옛 소련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이슬람 세력과 크리스트교 세력 사이에서 심각한 충돌이 발생하고 러시아와 발트국가들 사이에서 심각한 대립과 분쟁이 표출되기도 하였지만 1995년까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실력대결을 벌인 적은 없었다.

두 번째의 좀 더 개연성 높은 시나리오는 우크라이나가 단층선을 따라 두 개의 실체로 분리되고 동부 지역이 러시아에 병합되는 길이다. 분리 운동은 크리미아 지역에서 먼저 불거졌다. 러시아인이 70퍼센트를 차지하는 크리미아 공화국은 199112월에 실시된 국민 투표에서 소련으로부터의 우크라이나 독립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였다. 1992년 크리미아 공화국 의회는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독립을 의결하였다가 우크라이나 측의 압력으로 그 결정을 철회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의회는 1954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크리미아 할양 결정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하였다. 19941월 크리미아 지역 주민들은 선거 공약으로 '러시아와의 통합'을 내건 후보를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여기에 자극받아 일부에서는 '크리미아는 제2의 나고르노-카라바흐나 압하지아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답은 아니다로 판명났다. 독립을 묻는 국민 투표를 결행하겠다고 공표하던 신임 크리미아 대통령이 한 걸음 물러서 우크라이나 정부와 절층을 벌인 것이다. 1994년 크리미아 의회가 사실상 우크라이나로부터 벗어난 독립국임을 선포한 1992년의 헌법을 부활하기로 결의하면서 다시금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지도자들이 자제력을 발휘하여 이 문제가 폭력으로 치닫지 않았고 두 달 뒤 치러진 선거에서 친러시아 노선의 쿠츠마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크리미아 지역의 분리주의 열기도 한풀 꺾였다.

그러나 그 선거는 러시아와 점점 가까와지는 우크라이나에서 서부 지역이 떨어져 나올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일부 러시아인은 오히려 그것을 환영할지 모른다. 한 러시아 장성은 우크라이나, 아니 동부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5년이나 10, 아니면 15년 안에 돌아올 것이다. 서부 우크라이나는 지옥에나 가라지!라고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서구 지향의 우크라이나 연합동방가톨릭 세력은 강력한 의지와 서구의 효과적인 지원이 있어야만 독립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지원은 서구와 러시아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악화되어 냉전과 유사한 상황에 놓일 때만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욱 가능성 있는 세 번째 시나리오는 우크라이나가 분리되지 않은 채 단절국으로 남아 있으면서 독립국으로서 러시아와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길이다. 핵무기와 군사력과 관련한 민감한 문제가 일단 매듭지어지면 장기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 문제인데, 이것은 문화적 유대감과 활발한 민간 차원의 교류에 힘입어 원만히 해결될 가능성이 늦다. 러시아-우크라이나 관계가 동유럽에서 가지는 성격은 모리슨(John Morrison)의 지적대로 독일-프랑스 관계가 서유럽에서 차지하는 성격과 유사하다. 후자가 유럽 연합의 핵심을 이루듯 전자는 정교 세계를 응집시키는 중심 세력이다

 

대중국과 공영권

중국은 역사적으로 자신을 한반도, 베트남, 때로는 일본을 포함하는 '중화 지대', 비중국계가 거주하지만 안보상의 이유로 중국이 지배하는 만주, 몽골, 위구르, 튀르크, 티베트로 이루어진 '아시아 내곽 지대' 야만족이기는 하지만 중국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조공을 바칠 것으로 기대되었던 '외곽 지대' 모두를 포함하는 세계로 이해하였다. 현재의 중화 문명 역시 비슷한 양식으로 구조화되고 있다. 중심부에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중국이 있으며, 중국의 일부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그 바깥의 지역들, 법적으로 중국의 영토이지만 다른 문명에 속한 비중국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들(티베트, 신장), 일정한 조건 아래 베이징이 주도하는 중국의 일원이 될 의사가 있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중국계 사회(홍콩, 대만), 점점 베이징에 접근해 가는 중국계가 주도하는 국가(싱가포르), 화교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태국, 베트남,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그리고 중국계는 아니지만 중국의 유교 문화를 상당 부분 공유하는 나라들(북한, 한국, 베트남)이 있다.

1950년대 중국은 소련의 우방국으로 있었다. 그러다가 중소 분쟁 이후 중국은 두 초강대국에 맞서는 제3세계의 지도자 역할을 자임하였지만 득보다는 실이 많았다.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의 대외 정책이 바뀌자 중국은 두 초강대국이 벌이는 세력 다틈에서 제3의 균형추 역할을 맡으려고 애쓰면서, 미국이 약해 보였던 1970년대에는 미국의 편을 들었고 미국의 군사력이 강화되고 소련이 경제적으로 쇠퇴하고 아프가니스탄의 수렁에 빠졌던 1980년대에는 등거리 노선으로 궤도 수정을 하였다. 그러나 초강대국 간의 경쟁 시대가 끝나자 '중국 카드' 는 효력을 잃었고 중국은 세계 무대에서 자신의 역할을 새롭게 정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중국은 두 가지 목표를 정하였다. 하나는 다른 모든 중국 공동체를 결집시킬 수 있는 중국 문화의 기수, 문명의 핵심국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19세기에 상실한 자신의 역사적 지위, 곧 동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되찾는 것이었다.

새로운 중국의 역할이 점차 가시화되고 있다. 첫째, 그것은 중국이 국제 문제에서 자신의 역할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둘째, 해외 화교와 중국의 경제적 결속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 셋째, 중국과 홍콩, 대만, 싱가포르 등 중국적 색채가 강한 세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외교적 관계가 강화되고 있으며, 화교가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동남아시아 각국이 중국에 점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중국 본토를 중국 문명의 핵심국으로 이해하고 다른 모든 중국인 공동체가 이 핵심국을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 정부는 해외의 각국 공산당을 통하여 자신의 이익을 관철한다는 전략을 이미 오래전에 포기하고 중국적인 것의 세계적 대변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정의하려고 노력해 왔다. 중국 정부는 비록 다른 국가의 시민이라 할지라도 중국인의 후예는 중국 사회의 일원이며 따라서 중국 정부의 권위를 어느 정도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체성은 인종적 용어로 정의된다. 한 중국 학자의 말대로 중국인은 같은 '인종, , 문화'에 속한 사람들이다. 1990년대 중반을 고비로 이러한 주제가 중국 관리와 민간인들 사이에 자주 거론되고 있다. 중국인과 해외의 비중국계 사회에 거주하는 중국인 후예들에게 그들의 정체성은 '거울 실험'을 통해 확인된다. '가서 거울을 들여다보라'라는 것이 외국 사회에 동화하려고 애쓰는 중국인 후예들에게 베이징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이 던지는 충고다. 재외 중국인, 즉 중국 본토에 거주하는 중국인과 구별되는 중국계의 화인은 자신들의 공동 의식의 상징물로서 중국 문화의 개념을 점차 부각시키고 있다. 20세기 서구의 수많은 공격에 시달렸던 중국인의 정체성은 중국 문화의 지속적 요소들에 의하여 다시금 복구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이러한 정체성은 중국의 중앙 정부와 제외 중국인 집단들이 맺었던 다양한 관계 속에서 유지되었다. 이 문화적 정체성은 여러 중국들 사이의 경제적 관계 확대를 도우며 역으로 이 관계 확대가 문화적 정체성을 강화하기도 한다. 중국 본토와 여타 지역에서 급격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는 원동력으로 작용한 것이 바로 이러한 동질감이었다. 중국의 경제 발전은 문화적 정체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물질적, 심리적 발판을 제공한다.

'대중국'은 그러므로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급속히 성장하는 문화적, 경제적 현실이며 이제는 정치적 현실의 성격까지 띠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극적으로 전개된 동아시아 경제 발전을 주도한 것은 본토, 호랑이들(네 마리 증에서 한국을 제외한 세 마리가 중국계), 동남아시아의 중국인이었다. 동아시아의 경제는 점차 중국 중심, 중국 주도로 운영되고 있다. 홍콩, 대만, 싱가포르의 중국인은 1990년대 본토에서 이루어진 눈부신 경제 발전의 토대가 되었던 자본을 실질적으로 제공하였던 층이다. 그 밖에도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이 지역 경제를 틀어쥐고 있다. 1990년대 초반 필리핀 인구 중에서 1퍼센트에 불과한 중국인이 필리핀 국내 기업 총매출액의 35퍼센트를 차지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1980년데 중반 전체 인구의 2~3퍼센트를 차지하는 중국인이 국내 민간 자본의 70퍼센트를 보유하고 있었다. 25대 기업 가운데 17개가 화교 소유였으며, 한 화교 재벌은 인도네시아 GNP5퍼센트를 생산하였다고 한다. 1990년대 초반 태국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화교가 10개 대기업 가운데 9개를 소유하였으며 태국 GNP50퍼센트가 화교의 몫이었다. 화교는 말레이시아 인구의 3분의 1이지만 말레이시아 경제를 거의 장악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을 제외하면 동아시아 경제는 기본적으로 중국 경제이다.

대중국 공영권의 출현을 크게 도운 것은 가족 관계와 개인적 친분 관계의 촘촘히 얽힌 연결망과 문화적 동질감이었다. 해외 화교는 서구인이나 일본인보다 중국에서 사업을 벌이기가 훨씬 쉽다. 중국에서는 신뢰와 헌신이 계약, 법규 공적 문서보다 개인적 약속에 좌우된다. 서방 기업인들은 인도에서 사업을 벌이기가, 합의의 존중이 당사자 간의 개인 관계에 달려 있는 중국보다는 훨씬 낫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다. 일본의 한 유력 인사가 1995년에 부러워한 것처럼 중국은 홍콩, 대만, 동남아시아 화교 상인들과 형성된 국경 없는 네트워크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미국의 한 기업인도 비슷한 맥락에서 화교는 기업가식 수완에다 언어 면에서 유리하며 가족 관계에 바탕을 둔 연줄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그것은 애이크론이나 필라델피아의 이사회에 꼬박꼬박 보고를 해야 하는 사람에 비하면 엄청난 이점이라고 실토한다.

본토와 거래하는 해외 화교가 누리는 이점은 리탄유도 곧잘 지적한다. '우리는 인종적으로 중국인이다. 우리는 같은 조상과 문화를 통하여 어떤 특질을 공유한다..... 사람들은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진다. 이러한 친밀감은 그들이 문화와 언어의 토대를 공유할 때 더욱 강화된다. 이것은 모든 사업 관계의 기초를 이루는 화합과 신뢰의 분위기를 낳는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화교는 같은 언어와 문화를 바탕으로 한 '관계'가 법치의 결여, 법규 및 관계에서 투명성의 결여를 상쇄할 수 있다는 것을 세계만방의 회의론자들에게 보여 주었다. 공동 문화에 뿌리를 둔 경제 발전의 저력은 199311월 홍콩에서 열린 제2차 세계 중국인 기업가 모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이 모임은 세계 전역의 중국인 기업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중국 승리의 자축연으로 되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중화 세계에서도 문화의 동질성이 세계의 결속을 강화한다.

중국 경제가 10여 년 동안 급속히 발전하다가 천안문 사건 이후 서방 각국이 중국의 경제적 진출이 급속히 감소하였을 때 해외 화교들은 이것을 호기로 보고 문화적 유대감과 개인적 연줄을 이용하여 중국에 대대적인 투자를 감행하였다. 그 결과 중국계 공동체들 사이의 경제적 결속이 급격히 강화되었다. 1992년대 중국 외국인 직접 투자의 80퍼센트(113억 달러)가 홍콩(68.3퍼센트), 대만(9.3퍼센트), 싱가포르, 마카오 등 화교들 손에 이루어졌다. 반면 일본의 투자는 전체의 6.6퍼센트, 미국의 투자는 4.6퍼센트에 그쳤다 500억 달러 규모에 이르는 외국인 투자 누적액의 67퍼센트를 화교가 담당하였다. 교역 확대도 인상적이다. 1986년 거의 전무하던 대만의 중국 수출이 1992년에는 대만 총수출액의 8퍼센트를 차지하였으며 이 해의 수출 신장률은 무려 35퍼센트에 달했다. 1992년 싱가포르의 전체 수출 증가율은 2퍼센트에 못 미쳤지만 대 중국 수출은 22퍼센트나 늘어났다.

1993년 웨이든바움(Murray Weidenbaum)이 지적한 것처럼 이 지역은 현재 일본이 지배하지만 중국 주도의 아시아 경제가 산업, 통상, 금융의 새로운 중심점으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이 전략 지역은 기술력과 제조력 (대만), 경영, 마케팅, 서비스 분야의 탁월한 노하우(홍콩), 첨단 통신망(싱가포르), 막대한 자금력(세 나라 모두), 풍부한 토지, 자원, 노동력(중국 본토)을 두루 갖추고 있다. 특히 중국 본토는 신흥 시장 중에서도 가장 큰 발전 잠재력을 가지고 있으며, 1990년대 중반 현재 중국에 대한 투자는 수출보다는 점차 내수 시장을 겨냥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동남아시아 각지의 화교가 현지에 동화된 수준은 다양하다. 현지인들은 중국인에 반감을 표출할 때가 자주 있는데 이 반감은 19944월에 발생한 인도네시아의 메단 소요처럼 폭력으로 분출되기도 한다. 일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중국 본토에 대한 화교의 투자를 .'자본 도피'라고 비난하였다. 수하르토 대통령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도자들은 이것이 자국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으리라는 점을 국민들에게 설득시켜야 했다. 그에 대응하여 동남아시아의 화교들은 자신들이 선조의 나라가 아니라 자신이 태어난 나라에 충성을 바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1990년대 초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중국으로의 자본 유출은 필리핀, 말레이시아, 베트남에 대한 대만의 대규모 투자로 어느 정도 균형을 회복하였다.

경제력이 증대하고 동질적 중국 문화라는 바탕 위에서 홍콩, 대만, 싱가포르와 중국 본토의 결속도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홍콩의 중국 복귀 시기가 임박하면서 홍콩의 중국인들은 런던이 아니라 베이징에서 내려오는 지시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홍콩의 기업인들과 각계 지도자들은 중국을 함부로 비판하지 못하며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행위를 가급적 피하려고 애쓴다. 중국을 공격하는 세력에게 중국 정부는 지체 없이 보복을 가하였다. 1994년 현재 수백 명의 홍콩 기업인이 베이징의 협조 아래 '홍콩 자문단'을 결성하였는데 이것은 사실상 예비 내각과 다를 바 없다. 1990년대 초반에 들어와 홍콩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은 대폭 강화되었다. 보도에 따르면 1995년 중국의 대 홍콩 투자는 일본과 미국의 투자를 합산한 규모를 능가하였다. 1990년대 중반까지 홍콩과 중국 본토의 경제적 통합은 거의 완료되었다. 정치적 통합 또한 1997년에 가서 완성될 것이다.

대만과 중국 본토의 결속은 홍콩보다는 미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에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1949년 이후 30년 동안 두 중국은 서로의 존재나 합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상호 대화를 하지 않았으며 간헐적으로 해안 도서에서 교전을 하는 준전시 상태에 있었다. 덩 샤오핑이 권력을 장악하고 경제 개혁을 착수하면서 중국 정부는 일련의 유화책을 제시하였다. 1981년 대만 정부는 이에 화답하여 그때까지의 본토와의 부담판, 부접촉, 불타협이라는 3불 정책에서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19865월 양국 대표단이 피랍된 대만 항공기의 귀환 문제를 놓고 최초로 협상을 벌였으며, 이듬해 대만은 중국 본토에 대한 여행 규제를 풀었다.

그 이후로 가속화한 대만과 중국의 경제 관계 확대는 '중국적 동질감'과 거기서 비롯된 상호 신뢰에 크게 힘입었다. 대만 측 협상 대표가 지적한 것처럼 대만인과 중국인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정서를 공유하며 쌍방의 업적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1993년 말까지 본토를 방문한 대만인은 420만 명에 이르며 대만을 방문한 본토인은 4만 명에 달한다. 매일 4만 통의 편지, 13천 통의 전화가 오갔다. 대만과 중국의 교역량은 1993144억 달러에 달하였고 대만의 2만 개 기업이 본토에 투자한 자본은 15억 달러에서 30억 달러 규모에 이르렀다. 대만의 관심은 점점 본토에 기울고 있으며 대만의 경제적 성공 역시 본토에 좌우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대만의 가장 중요한 시장은 미국이었다."라고 대만의 한 관리는 1993년 보고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우리는 대만 경제의 성패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본토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국내의 노동력 부족 현상에 직면한 대만 투자가들이 가장 큰 매력을 느끼는 요소는 중국의 값싼 노동력이다. 1994년 두 중국의 자본-노동 불균형을 시정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대만의 어업 회사들이 1만 명의 중국인 선원을 고용하였다.

경제 결속의 강화는 두 나라 정부를 대화로 이끌었다. 양국 간 대화를 위해 1991년 대만은 해협 교류 협회(Straits Exchange Foundation)를 설립하였고 중국은 대만 해협 관계 협회(Association for Relations across the Taiwan Strait)를 발족시켰다. 그들의 첫 회담은 19934월 싱가포르에서 열렸고 후속 회담은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 열렸다. 19948월 다수의 증요 사안 들을 포괄하는 '획기적' 협정이 타결되면서 양국 정부 최고 지도자들 사이의 정상 회담 가능성이 점쳐지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중반 현재 중국과 대만 사이에는 대만의 국제기구 참여, 대만이 독립국으로서 스스로를 새롭게 규정할 가능성 같은 민감한 사안이 엄존하고 있다. 그러나 대만의 독립 선포 가능성은 희박하다.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던 대만의 민진당이 본토와의 기존 관계가 손상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이 문제를 강하게 밀어붙일 경우 선거에서 승리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민진당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집권하더라도 곧바로 독립을 선포하지는 않으리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두 나라 정부는 또한 남중국해의 스프래틀리 제도를 비롯한 도서 지역에서 중국의 주권을 확립하고 중국 본토가 미국으로부터 무역 최혜국 대우를 받는 문제 등에서 보조를 맞추고 있다. 1990년대 초반 두 중국은 느리지만 가시적으로 쌍방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과정에 들어섰으며 경제 관계의 확대와 문화의 동질성을 바탕으로 공동의 이익을 발전시키고 있다.

화합의 추세는 1995년 대만 정부가 국제기구 가입과 외교적 승인을 강하게 추진하면서 갑자기 냉각되었다. 리 덩후이 총통은 '개인'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였으며 대만은 199512월에 총선을, 19963월에는 대선을 치렀다. 그에 대응하여 중국은 대만의 주요 항구에 인접한 해역에서 미사일 실험을 강행하였고 대만이 관할하는 도서 지역이 가까운 인근 해상에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두 가지 증요한 문제를 제기한다. 현 상태에서 대만은 형식적으로 독립을 선포하지 않고도 민주 국가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앞으로 대만은 실질적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않고도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실상 대만과 본토의 관계는 두 단계를 거쳐 바야흐로 세 번째 단계로 진입할 가능성이 있다. 과거 수십 년 동안 대만의 국민당 정부는 자신이 중국 전체의 정부라는 입장을 고수하여 왔으며 이러한 입장은 대만을 제외하고 전체 중국을 통치하고 있는 정부와 마찰을 빚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자 대만 정부는 이러한 허세를 포기하고 자신을 대만의 정부로 정의하였다. 그에 따라 '1 국가 2 체제'라는 본토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대만의 고유한 문화적 정체성, 중국이 대만을 지배한 기간이 비교적 짧다는 사실, 대만어와 북경어가 소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만 국민과 단체가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대만 사회를 비중국계 사회로 정의하면서 대만의 독립성을 쟁취하려고 시도한다. 대만 정부 역시 국제 사회에서의 활동을 강화하면서 대만이 중국의 일부가 아니라 별개의 국가임을 강조하는 듯한 조짐을 보인다. 요약하자면, 대만 정부의 자기 이해는 전체 중국의 정부에서 중국 일부의 정부로, 다시 중국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정부로 단계적으로 발전해 왔다. 독립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마지막 견해는 중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중국 정부는 대만의 독립을 저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행사할 뜻이 있음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였다. 중국 정부 지도자들도 1997년의 홍콩 반환과 1999년의 마카오 반환이 이루어진 다음 대만과의 재통합을 추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앞으로의 사태 발전은 대만에서 공식적인 독립을 요구하는 여론의 열기. 정치 지도자와 군부의 민족주의 성향을 부추길 중국의 후계자를 둘러싼 권력 투쟁의 강도 대만의 봉쇄나 침공을 성사시킬 만한 중국의 군사력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 21세기 초반에 들어가면 강압이나 화합, 또는 이 모두에 의하여 대만이 중국 본토에 더욱 긴밀히 통합될 가능성이 높다.

1970년대 말까지만 해도 철저한 반공 노선을 걸은 싱가포르와 중국의 관계는 얼어붙어 있었다. 리 콴유를 비롯한 싱가포르의 지도자들은 중국의 후진성을 비웃었다. 그러나 중국의 경제 발전이 시작된 1980년대부터 싱가포르는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중국 쪽으로 궤도 수정을 하였다. 싱가포르는 1992년에 19억 달러를 투자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수십억 달러를 투자하여 상해 해상에 해상 산업 도시인 제2의 싱가포르를 건설한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리 콴유는 중국 경제의 성공 가능성과 중국의 실력을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중국 예찬론자가 되었다. "사건은 중국에서 벌어진다."라고 그는 1995년에 말하였다.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에 몰려 있던 싱가포르의 해외 투자는 1993년을 고비로 중국으로 집중되었다. 1970년대에 처음 중국을 방문하였을 때 리 콴유는 중국 지도자들에게 중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말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고 한다. 20년 뒤에도 과연 그가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이슬람 : 중심 없는 의식

아랍국, 이슬람 국가들의 정치 참여 구조는 대체로 근대 서구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서구의 경우 국민 국가는 정치적 참여의 정점이었다. 협소한 참여는 여기에 종속되었으며 국민 국가에 대한 참여로 통합되었다. 국민 국가를 초월하는 집단-언어나 종교 공동체, 또는 문명-은 덜 강력한 참여를 낳았다. 협소한 실체에서 광범위한 실체까지 이어진 연속선에서 서구인의 참여는 중간점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것은 U자를 뒤집은 참여도의 궤적을 그렸다. 이슬람 세계에서 참여의 구조는 이와는 거의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인다. 이슬람은 참여의 위계 질서에서 가운데가 텅 비어 있다. 라피두스(Ira Lapidus)가 지적한 것처럼 독보적이고 지속적인 두 개의 구조는 한편으로는 가문, 씨족, 부족이었으며 또 한편으로는 좀더 거대한 규모로 나타나는 문화, 종교, 제국의 통합체였다. 부족주의와 종교(이슬람)는 아랍 사회와 정치 체제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발전에서 예나 지금이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실상 이 둘은 너무나 긴밀하게 얽혀 있어서 아랍의 정치 문화와 아랍의 정치의식을 규정하고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과 변수로서 간주될 정도이다.'라고 리비아의 한 학자도 비슷한 견해를 표명한다. 부족들은 아랍 국가들의 정치 판도에서 핵심적 역할을 지금까지 떠맡아 왔으며, 바시르(Tahsin Bashir)의 지적처럼 그 부족들의 상당수는 단순히 '깃발을 단 부족' 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건국이 성공을 거둔 주된 이유는 혼인 등의 수단을 통하여 부족 간의 결속을 다졌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 판도가 수다이르족과 샴마르족을 위시한 여러 부족들의 경쟁 구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리비아의 성공에 중대한 기여를 한 부족의 수는 줄잡아 최소한 18개에 이른다. 수단에 거주하는 부족의 수는 500개에 이르며 그 중 최대 부족이 수단 인구의 12퍼센트를 차지한다. 역사적으로 중앙아시아에는 국민적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층성의 대상은 부족, 씨족, 확대된 가문이지 국가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이 지역 사람들은 공동의 언어, 종교, 문화, 생활 양식을 가졌으며, 이슬람은 수장의 권력을 능가하는 강력한 통합력으로 사람들을 결집시켰다. 체첸과 인근의 북부 코카서스 지역에는 100여 개의 '거대' 씨족과 70개의 '소수' 씨족이 정치와 경제를 지배하며 체첸인은 소련의 계획 경제와는 달리 씨족' 경제를 고수하였다.

이슬람 전역에서 추종과 헌신의 초점은 소수 집단과 거대 신앙 부족과 '움마(이슬람 사회)' 였으며, 국민 국가는 두드러진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아랍 세계에서 기존의 국가들은 아주 무원칙하지는 않더라도 대단히 자의적인 유럽 제국주의의 산물이기에 정통성의 문제를 안고 있으며 이들의 국경선은 심지어 베르베르족, 쿠르드족 같은 민족 집단의 경계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이런 나라들이 아랍 민족을 나누고 있지만 범아랍 국가는 아직껏 실현되지 않고 있다. 주권을 가진 민족 국가들이라는 발상은 알라의 통치권과 '움마'의 우위에 대한 믿음과 공존하기 어렵다. 혁명 운동을 지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는 마르크시즘이 국제 프롤레타리아의 대동단결을 주장한 것처럼 민족 국가를 거부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통일을 요구 한다. 이슬람 세계에서 민족 국가가 취약한 것은 2차 대전 이후 이슬람교도 집단들 사이에서 수많은 분쟁이 발생하였지만 인접국을 침공한 이라크 같은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충돌은 극히 드물었다는 사실에도 반영되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각국에서 이슬람의 부활을 낳았던 요인들은 전체로서의 '움마', 곧 이슬람 문명에 대한 자각을 높였다. 1980년대 중반 한 학자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탈식민화, 인구 증가, 산업화, 도시화, 무엇보다도 이슬람 국가 사이의 유자원을 둘러싼 국제 경제 질서의 변화는 이슬람의 정체성과 통일에 대한 심각한 우려를 가증시키고 있다...... 현대의 통신 기술로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여러 민족들 사이의 결속은 강화되고 심화되었다. 메카를 순례하는 참배자들의 수는 급증하여 멀리 중국, 세네갈, 예멘, 방글라데시를 비롯하여 전 세계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동질감을 고조시켰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남부 필리핀, 아프리카에서 점점 많은 학생이 중동 여러 대학에서 공부를 하면서, 국가의 경계선을 넘은 사상의 교류가 번지고 개인적 접촉이 빈번해졌다. 테헤란, 메카, 쿠알라룸푸르 같은 중심지에서 열리는 각종 회의와 학술 대회의 빈도수가 점점 잦아지고 정례화되자 자연히 이슬람 지식인과 울라마(종교학자)'의 접촉도 빈번해졌다 .... 카세트테이프는 국제적으로 모스크의 예배를 전파하여 이제 영향력 있는 설교자의 말은 지역 공동체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먼 나라의 청중에까지 전달된다.

이슬람 공동 의식은 국가들과 국제기구들의 정책에도 반영되며, 그 정책에 힘입어 더욱 증폭되기도 한다. 1969년 사우디아라비아 지도자들은 파키스탄, 모로코, 이란, 튀니지, 터키 지도자들과 함께 라바트에서 최초의 이슬람 정상 회담을 가졌다. 여기서 태동한 이슬람 회담 기구가 1972년 지다에 본부를 두고 공식 출범하엿다. 적잖은 이슬람 인구를 가진 거의 모든 국가가 현재 이 기구에 가입해 있다. 이런 종류의 국가간 기구로서는 이것이 유일하다. 크리스트교, 정교, 불교, 힌두교 국가들은 종교에 바탕을 둔 국가 간 기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이슬람교도는 가지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 파키스탄, 이란, 리비아 정부는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점을 공유하고 이슬람교도 사이의 정보와 자원교류에 기여한다고 판단한 세계 모슬렘 의회(파키스탄 발의), 모슬렘 세계 연맹(사우디아라비아 발의) 등의 비정부 기구를 지리적 거리에 관계 없이 후원하고 지원한다.

이슬람의 결집을 지향하는 이슬람 의식 운동은 그러나 두 가지 역설에 직면한다. 첫째, 이슬람은 이슬람 세계를 자신의 주도로 결집시키려는 의도에서 '움마'에 대한 이슬람교도의 헌신을 이용하고자 각축을 벌이는 중추적 실력 국가들로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각축은 한편으로는 기존 체제와 국제기구, 다른 한편으로는 거기에 도전하는 이슬람 체제와 이 체제가 만든 국제기구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당시 이집트의 나세르가 지배하던 아랍 연맹에 맞서기 위하여 이슬람 협의 기구(O1C)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다. 1991년 걸프전이 끝난 뒤 수단의 지도자 알 투 라비(Hassan a1 Turabi)는 사우디아라비아가 지배하던 이슬람 협의 기구에 맞서기 위하여 범아랍 이슬람 회담(PAIC) 을 출범시켰다. 1995년 초 카르틈에서 열린 제3차 범아랍 이슬람 회담에는 세계 80여 개국의 이슬람 조직과 운동 단체에서 모두 수백 명의 대표단이 참가하였다. 아프가니스탄 내전은 이 공식 기구들 외에도 비공식 지하 전투원들로 구성된 광범위한 조직망을 낳았고 이들은 그 후 알제리, 체첸, 이집트, 튀니지, 보스니아, 팔레스타인, 필리핀 등지에서 이슬람의 대의를 위하여 싸웠다.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은 다와 대학에서 훈련을 받은 전투원들, 아프가니스탄 내의 다양한 파벌과 각각의 파벌을 미는 외국 후원 세력이 운영하는 캠프에서 훈련받은 이슬람 전사들로 교체되었다. 물론 이슬람 과격 체제와 운동이 공유하는 이해관계는 때때로 전통적 반목을 극복하는 데 일조하였다. 가령 이란의 후원으로 수니 원리주의 세력과 시아 원리주의 세력을 잇는 가교가 마련되었다. 수단과 이갈은 긴밀한 군사 협력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란 공군과 해군은 수단의 군사 시설을 이용하였다. 양국 정부는 알제리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원리주의 세력을 후원하는 데 공조를 펼치고 있다. 수단의 알 두라비와 이라크의 후세인은 1994년 관계 강화를 디짐하였으며, 이갈과 이라크는 화해의 길목에 들어서고 있다.

둘째 '움마'의 개념은 민족 국가의 부당성을 전제로 하지만 '움마'는 현재 이슬람 세계에 결여되어 있는 한 두 개의 강력한 핵심국이 주도적 역할을 할 때만 통합체로서 나타날 수 있다. 통일된 종교-정치 공동체로서의 이슬람 개념은 과거의 경우 종교적 지도력과 정치적 지도력-칼리프와 술탄-이 단일 지배 제도로 결합되었을 때만 핵심국이 등장할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7세기에 이루어진 아랍의 급속한 북아프리카, 중동 정복은 다마스쿠스에 수도를 둔 우마이야 왕조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이어 8세기에는 바그다드에 기반을 두었으며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은 아바스 왕조가 출현하였으며 이것은 10세기에 이르러 각각 카이로와 코르도바에 중심을 둔 두 개의 왕조로 쪼개졌다. 400년 뒤 오스만 튀르크는 중동을 휩쓸어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1517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 비슷한 시기에 다른 튀르크족은 인도를 침공하여 무굴 제국을 세웠다. 서구의 부상은 오스만 제국과 무굴 제국을 약화시켰고,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자 이슬람의 핵심국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영토는 서구 열강 들에게 상당 부분 분점되었고 이들 국가가 물러나자 이슬람의 전통에는 낯선 서구를 전범으로 한 허약한 나라들만 남았다. 따라서 20세기의 대부분 기간 동안 다른 이슬람 국가들이나 비이슬람 국가들에 의해 이슬람의 지도국으로 수용되고 그러한 역할을 맡기에 충분한 실력과 문화적, 종교적 정통성을 가진 핵심국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슬람을 특징짓는 내부적, 외부적 분쟁 다발의 주요 원인은 바로 이슬람 핵심국의 부재였다. 중심 없는 의식이 이슬람에게는 약점이 되었고 다른 문명들에게는 커다란 위협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지속될 것인가?

이슬람 핵심국은 경제적 자원, 군사력, 조직적 능력과 움마를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 만한 적극성과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슬람 지도국 후보의 반열에 올랐던 나라는 모두 여섯 나라지만, 현재로서는 실력 있는 핵심국이 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모두 구비한 나라는 없다. 인도네시아는 가장 큰 이슬람 국가이며 경제적으로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아랍의 중심부에서 한참 떨어진 변방에 있다. 게다가 인도네시아의 이슬람교는 느슨하게 변형된 동남아시아형 이슬람교이며, 이곳의 문화는 토착 문화, 이슬람교, 힌두교, 크리스트교, 중국 문화가 뒤섞여 있다. 이집트는 아랍국으로서 거대한 인구를 거느렸으며 중동에서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이슬람학의 본산인 알 아즈하르 대학도 이곳에 있다. 그러나 이집트는 가난하며 경제적으로 미국과 서유럽이 주도하는 국제기구, 아랍의 부유한 산유국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이란, 파키스탄, 사우디아라비아는 모두 자신이 이슬람 국가라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으며 움마에 대한 영항력을 행사하고 움마에서 지도력을 발휘하고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 과정 에서 이들은 각종 기구를 후원하고 이슬람 단체를 재정적으로 지원하며 아프가니스탄의 전사들을 돕고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도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이란은 영토, 지정학적 위치 인구, 역사적 전통, 석유 자원, 중진국 수준에 이른 경제 발전 등 여러 면에서 이슬람 핵심국이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이슬람 인구의 90퍼센트가 수니파인 반면 이란은 시아파가 절대다수를 점한다. 이란인이 쓰는 페르시아어를 아랍어 인구가 절대다수인 나머지 이슬람교도는 알아듣지 못한다. 페르시아와 아랍의 관계는 역사적으로도 분쟁으로 얼룩져 있다.

파키스탄은 남부럽지 않은 영토, 인구,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며 파키스탄의 지도자들은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 세계 무대에서 이슬람을 대변하는 역할을 자신들이 맡고 있음을 줄기차게 강조하여 왔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가난한 편이며 내부의 인종적, 지역적 갈등에 시달리는 형편이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하며 인접한 인도와의 안보 문제에 크게 신경을 써야 할 처지이다. 특히 맨 마지막 문제로 파키스탄은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 발전뿐 아니라 중국, 미국 같은 비이슬람권의 열강들과도 우의를 돈독히 해야 할 형편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의 본거지였다. 이슬람의 성지가 이곳에 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어는 이슬람의 보편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 최대의 석유 자원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경제적 영향력도 막강하다. 뿐만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따라 나라를 통치하여 왔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이슬람 세계에서 단일 국가로서는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모스크, 교과서에서 정당, 이슬람 조직, 테러 단체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의 이슬람 운동을 후원하는 데 수십억 달러를 뿌렸으며 지원도 비교적 공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 인구가 적고 지정학적으로도 불안하여 안보상의 이유로 어차피 서구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터키는 역사, 인구, 중간 단계에 이른 경제 발전 수준, 국민적 응집력 군사적 능력과 군사적 전통 면에서 이슬람의 핵심국이 되기에 층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터키를 세속 국가로 노골적으로 정의하는 과정에서 케말은 터키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의 역할을 계승하는 길을 원천 봉쇄하였다. 터키는 헌법상으로 세속 국가임을 분명히 명시하였기 때문에 심지어 이슬람 협의 기구의 발기국조차 될 수 없었다. 터키가 자신을 세속 국가로 계속 정의하는 한 이슬람의 지도국 역할은 터키의 몫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만일 터키가 자신을 새롭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시점에 가서 터키가 서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달라고 시정하는 비굴하고 모욕적인 노릇을 중지하고 서구에 맞서 이슬람을 대변하는 훨씬 인상적이고 자긍 있는 역사적 역할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 터키에서는 원리주의가 세력을 확대하고 있다. 외잘 대통령이 집권하는 동안 터키는 아랍 세계에서 발언권을 확대하고자 광범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터키는 중앙아시아에서 비중 있는 역할을 떠맡고자 인종적, 언어적 유대를 십분 활용하였다. 터키는 보스니아 이슬람교도에게 지원과 격려를 보냈다. 이슬람 국가 증에서도 터키는 발칸, 중동,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도와 폭넓은 역사적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독보적인 입장에 서 있다. 터키는 어쩌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할'을 할 가능성이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함으로써 자기 문명의 주변국에서 지도국으로 스스로 탈바꿈한 것처럼 터키도 자신에게 생경한 세속주의를 포기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서구 크리스트교와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단점을 두루 경험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아프리카를 이끌 만한 남다른 자격을 갖추었 듯이 서구 세속주의와 민주주의의 장단점을 두루 겪은 터키는 이슬람을 주도할 독특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러시아가 레닌주의를 청산한 것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케말주의의 유산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뿐만 아니라 케말에 버금가는 카리스마와 터키를 분열국에서 핵심국으로 변모시키기 위하여 종교적 정당성과 정치적 정당성을 접맥시킬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지도자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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