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풍속과 사회 4

Bollnow 2024. 5. 7. 09:44

4. 부르조아의 시대-역사의 본질

 

부르조아 시대는 18세기에 등장한 순수한 상품 생산 경제 양식을 바탕으로 세워진 근대자본주의 시대이다. 근대 자본주의는 사유재산제도의 급격한 발전에 기초하여 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새로운 상황에 적합한 정치 및 사회 체제는 영국의 경우는 힘겹게 성취한 1648년의 청도교 혁명으로, 유럽대륙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그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역사적으로 추진되는 새로운 생산양식을 위협하는 국가 및 사회 체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이 두 국가의 변혁으로 무너졌으며 그 대신 새로운 생산양식을 위협하는 국가 및 사회 체제는 그야말로 획기적인 이 두 국가의 변혁으로 무너졌으며 그 대신 새로운 경제원칙을 발전의 전제로 또 그 범주로 받아들이는 정치와 사회 체제가 추진되었다. 이러한 결과에서 보면 1618년과 1789년의 두 혁명은 영국과 프랑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유럽의 혁명"이라 할 수 있다. 두 혁명의 결과, 유럽인의 역사는 다시금 전혀 새로운 형태를 취했다. "그것은 단지 사회 내에 존재하는 어떤 계급이 낡은 정치조직에 대해 승리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바로 새로운 유럽 사회를 위한 정치조직의 탄생을 선언한 것이었다. 시민계급은 혁명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당시 시민계급의 승리는 봉건제도에 대한 부르조아적 재산권, 지방분권제에 대한 중앙집권제, 동업조직에 대한 자유 경쟁, 토지 소유의 소수지배에 d대한 다수지배, 미신에 대한 문명개화, 가문에 대한 가족, 영웅적 타성에 대한 근면성, 중세적 특권에 대한 시민적 권리의 승리를 의미한다."(18421215일자 "새 라인 신문").

이러한 변혁과정에서 이제까지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계급 가운데 어떤 계급은 무너졌는가 하면 또 어떤 계급은 완전한 변신을 했다. 뿐만 아니라 그 후의 발전과정에서 전혀 새로운 요구를 가진 새 계급이 탄생했다. 이러한 요구는 그 계급이 구체적으로 선거권을 획득함으로써 모든 국가의 역사를 변혁시켰다. 이렇게 해서 인류의 사회 생활은 점차 새로운 형태로 변혁되었다. 한편 인류의 변혁된 사회 생활에 부응해서 성도덕에 변혁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 시대에도 역시 새로운 성도덕이 탄생했다. 공적, 개인적 도덕에 새로운 법칙이 나타나게 되어 그 세력을 넓혀 나갔다.

절대주의 시대에는 공공연히 관능에 대한 방종하고 극히 세련된 숭배가 최고의 법칙으로 선언되었다. 공공연히 발휘된 이 용기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날보다도 성을 자유롭게 또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라기보다는 누구나 거리낌 없는 절대주의 시대의 철면피였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당시의 지배계급이었던 궁정 귀족이나 금융 귀족에게 저항할 수 있는 계급이 아직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계급이 있어서 끊임없이 비판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시 지배계급의 지배를 위협하는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러한 계급이 없었기 때문에 지배계급은 원하는 대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이러한 욕망의 끝없는 낭비를 뻔뻔스럽게도 인생 최고의 목적이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절대주의를 대체한 부르조아 시대가 되자, 각 계급의 역학 관계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 시대에 들어서면 각국의 중산계급이나 하층계급은 공개적인 비판이 가능한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제한적인 선거권을 가진 유권자로 지위가 높아졌다.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이 시기에는 공공도덕의 법칙이 정반대의 방향으로 공식화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새로운 시대의 생활과 요구의 내용이 완전히 변했다는 것 역시 커다란 요인이었다.

부르조아 국가가 나타나게 됨에 따라서 그 국가의 이제까지의 신민과 농노는 국민으로 질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부르조아 국가는 국민에게는 인권과 자결권을 부여했으며 만인이 평등한 권리를 가졌다고 선언했다. 3계급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 아래 봉건 유럽과 싸워 불후의 승리를 쟁취했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르조아 국가는 거의 150년에 걸쳐서 최고의 신으로 공공연히 모시던 자리에서 여성을 끌어 내렸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의 권리 추락이 아니라 오히려 향상이었다. 여성은 중세 이후 비로소 인간이 되기 시작했다. 이제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던 권리가 없는 노예나 단순한 오락물의 위치에서 점점 남성과 동등한 인격체가 되어갔다. 개인적 성애는 결혼을 위해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유일한 토대로서 모든 계급에게 또 모든 계급에 의해서 요구되었다. 인간과 인간을 한데 묶는 연대책임은 모든 인간을 결합하는 끈으로 간주되었다. 인체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생존에서의 최고의 정신적, 육체적 목적을 그 표본과 척도로 하도록 규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생활의 모든 형태와 가치, 예술, 철학, 법률, 언어, 과학은 물론 그밖의 모든 것들도 부르조아 시대에 부응해서 정정되고 개편되었다. 근대적 부르조아 국가는 가족, 국가, 자치단체 등 모든 면에서 역사적 발전에 정상에 이른, 기껏해야 두세 가지의 결점만을 가진 체제라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부르조아 국가는 "진실로 도덕적인 세계질서"의 서막을 진실로 구현하려고 했다. 이러한 질서는 부르조아 국가의 모든 방면에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도덕에 대한 강력한 추진력이 유럽 역사 속에 밀고 들어왔으며, 이 추진력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금까지의 어느 사회 조직도 필적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수준으로까지 국민의 육체와 정신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옛날에는 대담한 유토피아주의자의 터무니없는 공상으로만 그려졌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이상은 수백만 명의 열광적인 투쟁의 기치 아래에서 언제나 선두에 내걸렸기 때문에 더 빨리 현실화 될 수 있었다. 과학도 예술도 나날이 점점 더 대담하고 새로운 결과를 낳았다. 혁명은 정신의 모든 영역에서 영속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그대로 성도덕과 그에 관련된 모근 방면에까지 개혁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새로운 상태를 모든 문명인에게는 보다 밝은 여명이 점점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도덕적인 세계질서라는 개념은 현실 속에서 형성된 것이 아니라 고작 부르조아 국가의 이데올로기, 즉 인위적인 외관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가 힘찬 기세로 지구 위에 군림하면서 모든 것을 변혁시키고 옛것을 모조리 부수면서 새로운 내용이 가득 찬 청년시대의 오월에 부르조아 국가의 머리 주위에서 나오는 후광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부르조아 국가가 진실된 신념을 가지고 모든 것의 이상을 실현시켰다고 진심으로 자부한다면 그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부르조아 국가의 이데올로기가 가지고 있는 본질은 관념과 그 시대의 현실적인 경제적 토대가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참히 무너져버렸다. 그것은 그 시대의 경제적 토대의 궁극적인 가장 중요한 목적은 어디서나 자본주의적 상품생산에 필연적인 법칙으로서 이윤율 증대였기 때문이다. 부르조아 시대의 이상은 결코 현실화 될 수 없었다. 그것은 부르조아 국가가 주도한 인류의 해방은 결코 자신이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아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 국가는 대중으로서의 인류를 해방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르조아 국가는 인류를 해방시키는 것만이 인민의 힘을 강화하고 새 경제 법칙이 세계 제패를 위해서 점점 더 대규모로 요구하는 기술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조아 국가가 선언한 공식적인 이상은 자신의 궁극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본주의의본질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도 내에서 끊임없이 수정되었다. 부르조아 사회의 이익과 지배를 목적으로 수행되는 이러한 수정은 점점 첨예하게 되고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관념과 모순에 빠져들게 되자 사물의 본질과 그 이데올로기적 외관이 서로 괴리 현상을 보이자, 부르조아 사회는 더더욱 끈질기게 이데올로기적 외관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 외관은 이 세계에서 실현된 것 가운데 아직 그 이상의 것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도덕적 세계 질서이기를 바랐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관념의 늪 속에 빠져 버린다. 이것은 스스로 내린 사형선고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라는 것은 그 발전의 모든 한계 조건이 이미 성숙되어 사회의 파산이 임박할 때 비로소 관념적이 될 수 있다.

지금까지 역사에 내재했던 실제와 외관 사이의 가장 큰 모순은 사회 발전의 최후의 결과였으며, 따라서 바로 그것은 근대적 부르조아 시대의 고유한 특징이 되었다. 사물과 관념의 거대한 모순을 은폐하기 위한 외피로서 위선은 이와 같은 역사적 정세로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조정자가 되었다. 이제까지는 사회의 일부층의 특징에 지나지 않았었던 것이 부르조아 시대에 들어서자 전체의 특징이 되었다. 단순한 외관이 공공연히 현실을 대표하게 되었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 처하더라도 겉으로는 도덕적인 체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대적인 법칙이 생겨났다. 특히 성도덕 분야에서는 위선이 하나의 성의 사상으로 나타났다. 이 위선은 매우 뻔뻔스러운 새침떼기로까지 발전했다. 모든 처세에서 이러한 외관을 지키려고 애쓰는 사람은 존경 받지만, 개인적이고 건들여서는 안 되는 일에서 그 외관을 벗기는 사람은 경멸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러한 것은 부르조아적 도덕을 수직적으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바라본 것이지만, 발전의 상승기에도 하강기에도 나타난다.

이처럼 부르조아 시대에 존재하는 각 계급의 성생활의 진정한 내용과 외관을 밝히는 것이 부르조아 시대의 범위와 내용이다.

이에 관한 자료는 너무 많다고 할 정도로 풍부하며 역사가가 과거의 성풍속에 대한 인식과 설명을 하기 위해 이용한 어떠한 자료보다 훨씬 다채롭다. 오늘날 모든 계급은 독립적 정치 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각 계급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들이 실천하고 또 선전하고 있는 성도덕에 대한 요구를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우선 정기적으로 갠행되는 신문을 들어야 할 것이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신문은 지금까지의 선전지의 대체물이 되었다. 더욱이 신문에는 훌륭한 그림이 연재물로 실리게 r되었다. 그림은 처음에는 독립된 부록으로 실리다가, 그 후 기사 해설과 보완물과 일러스트레이션이 됨으로써 마침내 기사가 오히려 부록이 될 때가 자주 있었다. 그러나 일러스트레이션이 실린 신문의 효과는 독자들에게 기사만 제공하는 신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이것은 정기 발행을 함으로써 판매망이 계획적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독자는 일반 서민을 대상으로 한 지금까지 나오던 선전물의 그림에서처럼 개인, 국민의 공공생활과 사생활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나 특수한 상황에 대해서 단편적인 지식을 얻게 되었으며 이미 조직적으로 모든 사건이 세밀하게 파헤쳐졌기 때문에 훨씬 전부터 기사와 함께 그림을 통하여 그것을 일상적으로 매우 상세하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에게 그림을 상용한 광범위한 보도의 영향은 19세기의 70년대부터 화가의 손을 대신하는 사진으로 보충되었다. 그 덕택에 마침내 눈으로 볼 수 있는 현상체를 그림이나 사진으로 묘사하는 범위가 넓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의 기록적인 가치도 더 확실해 졌다. 이제 화가도 사물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자신의 감정으로 보완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전 같으면 상당히 방자한 행동으로 보완한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진은 화가보다 매우 간단하게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제 화가는 이전처럼 사물을 묘사할 때 주관적으로 덧붙이거나 사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매수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의 사진이 점점 더 많이 등장함으로써 일반인의 눈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사진의 출현으로 상상에 의한 것은 적어지고 모두 사실화가 가능했기 때문에,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회화적인 상상은 교정되었고 그리고 시야가 더 넓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림 엽서가 발명되고 그림은 커다란 힘을 가지게 되었다. 어디를 가나 그림엽서가 있고 오늘날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게다가 삽화가 실린 신문도 감추려고 하고 그림엽서도 억지로 은폐하려고 하는 자본주의의 외견, 나아가 자본주의의 도덕을 강요하기 위해서 크고 작은 길가에서부터 호젓한 들판에 이르기까지 어디든지 세워져 있는 간판이나 생활 필수품에 붙어있는 광고가 아직 우리를 지배한다. 자본주의적 도덕을 강요한다는 것은 부수적인 일이 아니다. , 이 모든 것, 신문이나 그린, 입 간판, 그림엽서, 사진, 생활필수품의 대부분은 일정한 성도덕을 담당하고 있으며, 거간꾼이면서 때로는 직접적인 선전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이 모두가 현대의 풍속을 증언하는 역사의 귀중한 기록이다.

이처럼 풍부한 자료에 대해 올바른 평가를 내리는 것이 "부르조아의 시대"의 삽화의 주요 목적이다. 그러나 우리는 때때로 개괄적 입장만 독자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자본주의의 팽창 의해서 부르조아 시대는 사회를 총체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을 한정된 범위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인생이나 개인 문제의 복잡한 형태를 전체적으로가 아닌 단편적으로만 묘사하려는 것과 같다. 골라낸 단편적인 것을 자본주의의 특징이라는 수준으로까지 끌어올려 거기서 사유재산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 문화라는 거대한 실체를 그리는 일은 미래의 저술가가 할 일이다.

 

1) 부르조아 지배사회의 초기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유럽인들은 중세에서 벗어나 르네상스의 절정을 맞이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 지금가지의 매뉴팩쳐가 기계제조공업으로 발전하면서 절대주의가 붕괴되고 근대적 부르조아 제도가 터를 잡기 시작한다.

새로운 생산양식이라는 젊은 거인은 자신의 힘을 마음껏 발휘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자유롭게 움직여야 했다. 이 거인은 자신의 발전을 받아들이는 또 가능한 크게 팽창하려는 자신의 속성을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성을 모든 방법으로 도와주는 국가와 사회조직을 요구했다. 결국 이러한 요구는 절대주의 국가에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18세기 말이 되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절대주의는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생산방법의 담당자인 시민계급, 즉 부르조아 계급은 국가권력을 자신들이 으뜸으로 여기는 근대 자본주의의 이익을 위해서만 사용해야 했다. 이에 따라 시민 계급은 근대 입헌국가에 의해서 오직 자기 계급의 정치적 지배와 사회적 지배에 유리한 제도를 쟁취하여 그것을 발전시켰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상품생산이 기계제공업으로 바뀐 것은 물론 우연한 일이 아니라 전체적 발전에서 본다면,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필연적 발전과정이었다. 따라서 그 시대에 나타난 기술적 발전, 가령 생산도구로서의 기계의 발명이나 동력으로서 증기의 도입을 이 변혁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아야 한다. 18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기술발달은 이미 그 당시에 나타났던 여러 가지 요구의 결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훨씬 옛날, 발전의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 16세기에 이루어졌던 발견이나 통로상의 개척은 상인들에게 언제나 풍부한 부만을 가져다주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상인은 순식간에 가속도로 항해 국민의 공업에, 처음에는 스페인, 네덜란드 나중에는 바다의 지배자로서 등장하게 되었던 영국의 공업에만 시장을 넓혀주었다. 이러한 시장에서 앞을 다투어 쏟아져 나오는 산더미 같은 주문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수공업은 더 이상 적합하지 않았다. 대량판매는 대량생산을 요구했다. 이 시기가 바로 18세기 후반기였다. 그리고 대량생산에 대한 요구는 다시 기존의 상업을 위해서 대규모로 생산되었으며, 어느 나라에서나 가장 중요한 상품으로 취급되어왔던 생산품을 만드는 작물 생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당연하다. 직물 생산에 기계가 도입되었다는 것은 수공업적 생산이 시장 주문에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우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물레 따위는 전혀 쓸모가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았다. 물레의 생산성이 아무리 높아도 18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나라 안의 물레를 전부 동원해도 "더 이상 빔실의 수요를 채울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왔던 것이다. 그 것은 직공 한 사람이 6개 내지 8개의 물레밖에 돌릴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바로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원료 빔실이 도저히 손에 들어오지 않아 베틀은 종종 장기간 동안 일을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기에서 "손을 사용하지 않고" 방적 공장의 주문을 충족시킬 수 있는 실을 생산하여 그곳 직공들을 휴업시키지 않을 수 있는 그러한 장치를 만드는 것이 크게 요구되었으며, 마침내 이 요구는 당시의 중대한 기술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방적기계는 오직 방적 공장에서 발명되었고 개량되었다. 그것은 방적 공장이 가장 민감하게 이 요구를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이발사 아크라이트는 방적기계를 최초로 교활하게 사용한 착취자에 불과했다. 그런데 역사는 실수로 이자를 방적기계 발명가로 받들여 모셨던 것이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요구는 증기기관의 발명과 발달을 가져왔다. 방적기계의 능률을 더욱 더 높이기 위해 수공업 공장은 처음에는 동물의 동력을, 그다음에는 수차를 이용한 수력을 사용했다. 따라서 생산자는 기계와 함께 일정한 장소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장주들은 솔직히 자기 기계를 움직이기 위해 가장 값싼 "노동력"을 원하고 있기 때문에 값싼 노동력이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에서든 생산하고 싶어 했다. 공장주는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이러한 자유노동자들은 도시에 밖에 없었다.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 덕택에 처음에는 자동 방적기가, 나중에는 자동직기가 가동되었다. 결국 자신이 원하는 장소에 기계를 설치하는 것만이 그 당시의 중심과제였다.

이렇듯 놀라운 산업혁명의 막이 오르자 모든 생산과 인간생활의 요구는 점차 그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혁명적인 움직임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하루도 멈추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그 작용과 결과는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놀랍게 되어갔다. 증기기관은 마침내 기술적 측면에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없애버렸다. 증기기관의 지배자로서 부르조아 계급은 오직 증기력과 더불어 또 증기력에 의해서 사업을 했다. 이러한 대사업에 비하면 인류가 이때까지 쌓아왔던 가장 뛰어난 것도 어린애 속임수에 불과 했다. "그것은 이집트의 피라밋, 로마의 수도, 고딕식 건물과는 전혀 다른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은 민족 대이동이나 십자군과는 전혀 다른 행진을 했다." 그렇지만 대량생산 역시 막대한 이윤획득만을 의도했기 때문에 근데 부르조아 계급은 부의 축척을 위해서 기술을 이용하여 이러한 사업을 경영했다. 이 축적은 지금까지 전혀 상상도 못했던 범위의 것일 뿐더러 눈사람처럼 끝없이 커져갔다. 어디까지 발전할지 예상도 할 수 없는 근대자본주의는 기계 사용의 생산방법과 함께 탄생했다. 화폐 그 자체가 지금까지 세계에 나타났던 것 중 가장 혁명적인 요소였다. - 왜냐하면 화폐와 더불어 탄생한 하루도 쉬지 않는 교역의 법칙은 영구운동, 즉 영구 순환의 법칙이기도 했다. 근대 자본주의는 화폐의 가장 눈부신 전개였다. 다시 말해 근대 자본주의에 의해서 화폐의 작용이 무한히 실현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인생의 모든 요소와 현상을 포괄했다. 사물에 대한 우리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도 모두 자본주의의 요구에 따라서 염색되고, 그 영향을 뿌리에서부터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대적 형태를 취한 모든 육체와 정신은 화폐형태 속에 존재하고 있다.

근대 부르조아 국가라는 것은 당연히 상품생산의 분야에서 우위를 획득한 생산방법이 새로운 양식을 대표한 정치적 표현이며, 각 나라가 여기까지 발전한 시기는 동시에 그것이 이른바 입헌 국가로 이행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점에서 영국이 가장 앞섰다. 영국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적 상황이 무엇보다도 근대적 생산방법을 가능하게 했으며 그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다. 오직 이 이유로 영국이 세계에서 앞장서서 부르조아 혁명을 일으켰으며 절대주의의 이해관계에 대항해서 부르조아의 이익을 챙겼던 것이다. 런던은 지리적으로 혜택받은 위치 덕택에 최초로 자연적인 세계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일찍부터 런던으로 대상인들이 몰려왔고, 그것이 다른 곳보다 먼저 공업을 대규모로 발전시킨 자극제가 되었다. 더욱이 18세기가 되자, 인도의 문호가 개방되면서, 해양의 지배자로서 영국은 인도를 장악하게 되었다. 인도에 대한 무자비한 약탈-영국이 대표하는 이른바 "문호 개방"은 수 백년에 걸쳐서 약탈이 최우선 목적이었다.-은 이류국민으로서의 영국인에게 또 영국의 공업 발달에 일찍이 그 역사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다. 엄청난 부가 영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영국 상인들은 이 부를 유리하게 투자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것은 당시 대량 생산이라는 일반적인 요구에 부흥해서 활성화된 공업을 대규모로 확장시키는 자본이 되었다. 이롸같은 이유에서 영국을 선두로 부르조아 국가가 견고하게 구축되었으며 또 영국에서 처음으로 부르조아적 육체, 정신, 지성의 대표적인 구조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국에 뒤이어 프랑스가 등장한다. 프랑스는 18세기 말엽에 영국에서 시작되었던 윤무에 참가하게 되고 유럽대륙에 부르조아를 선언했다. 좀 더 정확한 표현을 빌면, 프랑스 혁명은 1789714일에 시작되었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이보다 50년 전에 시작되어 그 이후로도 계속되어왔다. 혁명은 언제나 폭력적이듯이 1789년 혁명도 자연의 새로운 질서에 대한 산파에 불과했다. 따라서 유럽에 부르조아 국가가 분명 1789년에 탄생했지만, 이것은 혁명에 의해서만 시작되어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힐 수밖에 없다. 런던과 더불어 파리는 처음부터 당시 세계무역의 제2의 자연적인 중심지였다. 그 덕으로 거대의 상인계급이 파리에서 나타났다. 특히 절대주의는 항상 적자재정으로 허덕였기 때문에 오히려 상인계급에게 시간이 갈수록 더 새롭고 큰 이익을 안겨주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공업은 지배계급에게 다양한 종류의 사치품을 대량으로 판매함으로서 절대주의로부터 지속된 엄청난 이윤을 우려냈다. 즉 앙시앵 레짐의 지배계급은 초호화판 향락생활을 누리기 위해서 그와 같은 사치품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궁정 사회의 귀부인들이 대부분 수 백 벌에 달하는 화려한 옷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만 보아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마리 앙트와네트가 이보다 더 많은 옷을 가졌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게다가 프랑스의 견직물 공업과 파리의 재봉사는 1세기에 걸쳐 전 유럽 궁정 사회의 어용공업과 어용 상인이었다는 것만 보아도 충분하다. 프랑스의 직물공장과 양장점은 러시아 궁정에만도 매년 수천 필에 달하는 값비싼 비단과 수천 벌의 예복을 수출했다. 러시아의 여제 엘리자베타가 사망했을 때 그녀의 옷장에는 15,000벌 이상의 값비싼 예복이 있었는데 모두 파리에서 맞춘 것이었다고 했다. 이처럼 당시의 파리의 공업은 대부분 사치품 제조공업이었다.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중앙집권제가 일찍이 시작된 탓으로 공업발전 역시 단기간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그 결과 자본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국 내에서 거대화될 수 있었으며, 그다음은 국제적 기업의 측면에서 보호받음으로써 끊임없이 기업심을 자극했다. 왜냐하면 그 덕택으로 자본은 흥하고 망하는 데 관계 없이 모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이러한 여건이 결여되어있었다. 그 결과 독일은 가장 뒤늦게 근대적인 발전을 했다. 독일은 프랑스보다도 60여 년간이나 더 공공연히 절대주의에 빠져 있었다. 궁정사에서 잘 나타나 있듯이 프랑스의 환경이 독일보다 더 부패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일찍이 18세기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의견만큼 잘못되고, 터무니없는 것이 없을 것이다. 독일의 경우는 이와 정 반대이다. "30년 전쟁 이후 대중으로서의 독일 국민은 극심한 공포정치의 절대주의 하에서 도저히 힘을 쓸 수 없었으며 골수까지 착취당할 정도였기 때문에 프랑스의 시민 계급이 절대주의적, 봉건주의적 지배를 무너뜨리는 것과 같은 혁명적인 비약의 힘을 가지지 못했다." 이처럼 정 반대의 형편이다. 물론 독일에서도 혁명의 힘이 있었으나 그것은 공상의 구름 위에 즉 시와 철학에만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꿈에서만 자유로와 지려고 했다. 에나의 철학 강의실에서 바이마르의 가난이 물씬 풍기는 방 안에서-대도시에서는 한번도 없었다-쉴러는 독일의 부르조아적 자유를 꿈꾸었다. 그것은 사실상 철학적, 문학적 몽상 이상의 그 아무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처럼의 꿈이 아무리 논리적으로 비상할지라도 전혀 미학적이 아닌 현실에 부딪히면 이것도 저것도 안되기 때문이다. 막스 마우렌 브레허는 당시 독일의 상황을 적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독일에서 부르조아 사상을 담당한 자들의 의견은 자신들의 이상이 투쟁이나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군주를 도덕적, 미학적으로 감화, 즉 정신적으로 감화시킴으로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와 같은 의견이 실천적인 정치적 성과를 거둘 수는 없었다. 독일에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 그러한 모순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행동도 결여되어 있었다. 이것은 역시 부르조아적 사상이라는 것이 독일의 환경에서 나오지 않고 프랑스로부터 자극을 받아 독일이란 토양에서 탄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프랑스의 시민사회가 윤리적 미학적 이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야만적인 투쟁에 의하여 그 목적을 달성했을 때 독일의 시인이나 철학자는 점검을 하면서 프랑스 혁명에 등을 돌리고 이후 더 심각한 압제주의에 빠져들어버렸다. 한편 독일에서 용감한 레싱과 같이 과감하게 항거한 사람들은 덜 되먹은 인간들의 졸개가 되거나 아니면 이민을 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영혼을 팔더라도 문자 그대로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 이다.

이같이 비참한 역사적 상황은 독일 사회의 비참한 후진성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이 후진성을 더 깊이 보면 독일의 이러한 침체는 결코 불가사의한 것이 아니었다. 18세기 말엽이 되어도 독일에서는 공업발전이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탄광업이나 제철업도 대규모가 아니었고 기계를 사용하는 직물 공장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오히려 순조롭게 발달했다고 할 수 있는 매뉴팩츄어 정도의 규모도 찾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공장은 보잘것없는 수공업 상태에 있었다. 당시에도 독립적인 수공업 공장 6개에 평균 5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을 정도였다. 다시 말해 공장 1개에 직원이 1명 이하라는 비율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유치한 방법, 즉 중세적인 생산방법이었다. 이와 같아서 독일에는 부르조아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선거권을 획득하기 위해서 전심전력하는 부르조아 계급도 없었다. 19세기의 40년대부터 독일에서 비로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눈부시게 발달했으며 그 결과 절대주의가 타도됨으로서 진정한 부르조아적인 사회가 실현되었다. 이것은 영국보다 200년 프랑스보다는 50년이나 뒤진 것이었다. 이 격차는 되돌이킬 수 없는 것이고 이 후진성이 결국 독일의 부르조아적 자유의 발전을 참으로 목불인견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2) 관념과 실천

절대주의를 완벽하게 제압함으로써 등장한 부르조아 사회제도의 지배는 어떤 입장에서 보아도 항상 인류발전에 가장 중요한 진보를 의미한다. 절대주의 타도와 더불어 중세는 막을 내리게 되었고 이런 의미에서 중세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 이기심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다. 그 개인주의는 자기의 신변의 이익에 한정되었고 그것만 인식되므로 매우 좁은 시야를 가지게 되었으며 인류가 품은 높은 이상에 대해서 어떤 감각도 없고, 설령 이러한 이상이 나타나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물질적 재산 범위를 조금이라도 손상시키는 것으로 보이면 일방적으로 말살해버렸다. 따라서 참으로 순수한 모든 문화의 근원인 연대라는 개념은 그때까지는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체생활에서도 국민 사이의 관계에서도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모든 인간은 곁눈질로 타인을 바라보았다. 타인이라는 존재는 결국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유권에 대해서 가장 비열한 의도를 품고 있는 적이었다. 그런데 부르조아 사회와 더불어 연대의 진정한 개념이 나타났다. 그것은 이제까지와 같은 "되찾은 영혼 사이의" 단순한 동정이라든가 아름다운 개개의 현상이 아니라 비로소 생활의 근본 원칙이 되었다. 그리고 이 미덕은 순식간에 또 암암리에 놀라운 기적을 발휘했다. 인간의 얼굴을 가진 존재가 연대함으로써 절대주의 하의 전 유럽을 해방시키기 위해 프랑스 혁명군을 만들었다. 연대는 19세기 중반부터 인류가 현재보다도 더 성장할 뿐만 아니라 이 성장은 앞으로 점점 더 고상한 형태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장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한 훌륭한 증명은 자아의식에 눈뜬 전세계 노동계급의 놀라운 해방전쟁이었다. 해방전쟁은 인류의 연대라는 미덕을 대규모로 또 세계사에 나타난 지금까지의 운동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이상으로까지 펼쳤다. 거대한 인간의 연대는 부르조아 사회제도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미화했다. 어떤 사물이든 처음에는 항상 이데올로기적으로 미화된 형태로서 인류의 의식에 나타났으며 결코 물질적 토대 위에 형성된 형태로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새 시대의 여명은 환호 속에서 인류의 모든 것을 실현하는 시대로 선언되었다. 처음에는 인류는 바야흐로 황금시대, 즉 진정으로 도덕적인 세계질서가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공상했다. 이제부터 존재하는 것은 인간뿐이었다. 신분 차별이 인간을 갈라놓을지라도 그것이 사회를 상하로 구분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은 주인도 노예도 없다. 이 세상에는 압제하는 자도 압제 당하는 자도 없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인인 시민뿐이다. 무한한 행복을 약속하는 삶의 방향이 도시와 농촌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전쟁은 옛날이야기가 될 것이고, 자유 평등 박애는 마침내 각 국가에서 실현되어 나아가 전 인류를 하나로 묶는 끈이 생길 것이다. 이런 주문이 프랑스의 모든 관공서, 모든 문서에 어김없이 쓰이는 슬로건이 되었다.

바로 그것은 새로운 부르조아 사회제도가 자리 잡는 시대의 위대하고 진지한 신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만인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은 봉건제도였으므로 봉건제도를 타도하고 폐지하기만 하면 만인이 행복한 시대, 만인을 위해서 포도가 무르익는 시대가 시작될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그 이후 인간의 권리를 침해하려는 행위가 가장 큰 범죄가 되었고 권리 침해 시도는 혁명의 발생을 정당화시켰다. 결국 이것이 미국의 독립 선언으로 자신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모국 영국으로부터 1776년에 독립했다. 독립 선언문에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만들어졌다. 모든 인간은 조물주로부터 남에게 양도할 수 없는 권리, 그중에서도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부여받았다. 이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인민들에게 정부가 수립된다. 정부의 권력은 인민의 동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만약 어떤 정치체제가 이런 목적을 파괴한다면 인민은 그러한 체제를 개조하던가 폐지하여 위와 같은 원칙을 조직함으로써 새로운 정부를 수립할 권리가 있다"이처럼 감격적인 이유를 내세워 미국의 독립선언은 시작되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이 문서는 무지와 미신으로 승려의 머링 감겨 있었던 쇠사슬을 끊기 위해서 세계의 봉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는 마침내 오직 한 사람의 정통한 기수가 자기 위에 올라타서 그의 마음대로 박차와 채찍을 사용하도록 등에 안장이 얻힌 채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류는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은 자치에 참가하기 위해서 자기 머리와 능력을 교육해야 한다." 이처럼 훌륭한 모범은 17년 후 프랑스에서 그 나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프랑스인은 이윽고 미아보의 권고에 따라서 "자유에 대해서 미국인에게 배우자!"라는 기치 아래 행동했다. 유명한 1793년의 프랑스 헌법은 다음과 같은 "시민 및 인간권리의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프랑스 인민은 세계의 불행이 천부적인 인권을 망각하고 그것을 경멸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확신하며, 엄숙한 선언으로써 신성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천명하고자 결의했다. 그 결과 모든 시민은 정부의 행동과 제반 사회제도의 목적을 항상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폭정에 의해서 결코 억압당하거나 굴욕을 당할 수 없다. 인민은 어제나 자신의 자유 자신의 권리의 기초를 알고, 정부는 자신의 의무규약, 입법자는 자신의 위임 과제를 알게 된다.

1973년 헌법의 서두에 있는 가장 중요한 조항은 다음과 같다.

1조 사회의 목적은 만인의 행복이다. 모든 인간에게 천부적인 영구한 권리의 향유를 보증하기 위해서 정부가 세워진다.

2조 이러한 권리는 평등, 자유, 안전, 재산에 관한 권리이다.

3조 법률은 만인의 의지를 자유롭고 엄숙하게 표현한 것이다. 법률은 만인에 대해 보호에서도, 처벌에서도 평등하다. 법률은 정당한 것, 사회에 유익한 것만 명령하고 사회에 유해한 것만 금지한다.

5조 자유는 타인을 해치지 않는 행위를 하는 인간의 권리이다. 자유는 원칙으로는 천성, 규칙으로는 정의, 보호로서는 "법률 및 자신이 납득할 수 없는 행위, 자신이 바라지 않는 행위를 타인에게 하지 않는다"는 격언에서 그 도덕적 한계를 지닌다.

그것은 세계가 절대주의로부터 해방된 시대의 인간의 말이다. 이 말은 행동으로써 정당하게 인정받게 되었다. 인간은 특히 타인의 영혼과 정신을 사랑했다. 고결한 사람만이 연애할 가치가 있었다. 인간은 그 이후 오직 훌륭한 내용을 위해서 아름다운 외관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것은 부르조아적인 연애, 즉 새로운 연애원칙이었다. 이 원칙은 그 이후 남녀를 결합하고 그와 동시에 만인의 생명에 가장 순수한 내용을 부여하게 되었다.

루소가 전혀 새로운 계시인 양 세계에 내놓은 부르조아적인 연애관의 복음서 "새 엘로이즈"에는 이러한 요구가 지극히 웅변적으로 나타나 있다, 새로운 남성으로서 생 프뢰는 한 편지에서 자기가 숭배하는 줄리에게 이렇게 항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순수한 연애는 그 때문에 프라토닉해서도 안되었으며 단순한 정신적인 열중에 그쳐서도 안 되었다. 순수한 연애는 정신과 영혼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와서 그 샘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강한 충동을 퍼 울리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그것은 바로 자연적인 육욕을 맑게하고 그 육욕을 이러한 방법으로 모든 정열 가운데서 가장 숭고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멋진 상투어 대신에 진실이 토로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열은 연애를 함으로써 인식한 연애 자체의 본질을 뿌리까지 파고 내려가서 그것을 감격적으로 하늘에까지 끌어올려 거기에 가장 훌륭한 신의 계시를 부여해야만 했다. 줄리는 생 프뢰의 세 번째 연서에 대한 답장에서 도취된 고백을 하고 있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원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어요. 하늘은 약한 자의 기도에는 귀 기울이지 않아요. 모든 것은 나를 다 삼켜버릴 것 같은 열정을 낳습니다. 모든 것은 나를 나 스스로에게 맡겼습니다. 아니, 나를 당신에게 맡겼습니다. 자연은 모두 당신의 편인 듯이 생각되어요. 내 노력은 전혀 헛된 것이랍니다. 내 의지와는 달리 나는 당신을 열열히 사랑하고 있어요. 아무리 애써도 저항할 수 없던 내 마음을 지금에 와서 어떻게 반이나 양보할 수 있을까요? 아무것도 감출 줄 모르는 이 마음이 당신에게서 어떻게 이 연약한 심정을 숨길 수 있을까요?

그리고 생 프뢰는 애인의 이 감격스러운 고백으로 하늘을 나를 듯이 기뻐한다. 환희와 황홀감이 그의 영혼 속에서 끓어올랐다. 황홀한 행복감 또한 극에 달했다.

하늘의 힘이여! 나는 고통스러운 영혼을 가지고 있소. 나에게 행복스러운 영혼을 주시오. 사랑하는 이여, 영혼의 생명이여, 내게 와서 꺼져버릴 것 같은 나의 영혼을 지탱해주오. 미덕의 언어로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이길 수 없는 힘, 행복, 쾌락, 감격, 그대의 화살은 너무도 예리하게 나의 가슴을 찔렀소. 누가 그 고통을 참을 수 있겠소? 아아! 나의 마음을 파고 든 환희의 물결을 어떻게 하면 억제할 수 있겠소?

그러한 고상한 감정에는 시작만 있고, 마지막이라는 것은 없었다. 연애는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 있다. 연애는 공간과 시간의 모든 개념을 완전히 지양한다. 설령 육지와 바다가 두 사람을 갈라놓아도 두 사람은 영원히 결합된다. 둘은 이미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심장은 같이 박동하며, 머리에서는 같은 생각이 활동을 저지한다. 이 연애 법칙에 반대하는 어떤 힘도 세상에 나타날 수 없다. 줄리는 생 프뢰에게 이렇게 답장을 썼다.

운명은 우리들을 억지로 갈라놓을 수 있겠지만 우리들을 배반할 수는 결코 없어요. 우리들은 앞으로 기쁨도, 슬픔도 함께 나눌 거예요. 당신이 언젠가 나에게 말씀하셨듯이 서로 떨어져 있어도 행동은 같이 한다는 그 연인들처럼 우리들은 세상의 이쪽 끝과 저쪽 끝에 있어도 같은 것을 느낄 거예요.

연애는 이처럼 인간의 본성에 깊게 그 뿌리를 내렸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마침내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운명적으로 어쩔 수 없이 타인이 될 수밖에 없는 파괴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줄 리가 생 프뢰에게 비통스럽게 아버지가 자기를 다른 사람에게 짝지어 주려 한다고 편지 썼을 때 생 프뢰는 절망한 나머지 이렇게 썼다.

당신은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오? 당신은 정말 나에게 무엇을 듣고자 그렇게 말씀하셨오? 당신이 다른 사람의 팔에 안기다니! 다른 사람이 당신을 차지하게 된다니! 이제 내 사람이 아니라니! 더 놀랍게도 나 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오? 내가 이 무서운 고통을 참지 않으면 안 된다니! 당신이 다른 사람의 아이를 낳는 것을 내가 바라보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니! 아니오, 나는 당신을 가른 사람과 함께 나누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을 잃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오. 하늘은 어찌하여 나에게 오래버틸 수 있는 맹목적인 용기를 주지 않으오? 당신의 손이 연애를 혐오하고 명예와는 거리가 먼 이 불행한 혼담으로 더럽혀지기 전에 나는 내 손으로 당신의 가슴에 단검을 찌르고 싶은 심정이오. 당신이 부정으로 더럽혀지기 전에 나는 당신의 정숙한 심장을 찌르고 싶은 심정이오. 나는 당신의 더럽혀지지 않은 핏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 되어 내 혈관 속에서 타고 있는 것을 섞고 싶소. 나는 당신의 팔에 몸을 던져, 내 입술로 당신의 입술을 누르고 마지막 숨을 거둘 것이오. 나는 당신의 마지막 숨을 들이마실 것이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정열의 토로였다. 그러한 정열은 전세계에 도전하는 힘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패배하거나 승리하거나 언제나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연애는 부르조아 사상에 의해 인간화되고, 동시에 신격화되었으며, 가장 위대한 경험과 함께 생존의 가장 고상한 형태로 실현되었다.

부르조아 시대는 모든 인간에게 자율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자율의 권리는 대신 책임을 요구한다. 권리에는 항상 의무가 따른다. 이것은 그 이후 모든 사람에게 일생 "당신에게도 의무가 있다"고 명령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한 이 법칙은 연애에 대해서도 그 특유한 명령을 했다. 참된 정열로써 때묻지 않은 개인적인 성애는 결혼에 의해서 최고의 단계로 올라가야만 했다. 그것은 최초로 결혼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선언했다. 그리하여 연애관계는 그다음에 오는 결혼의 이전 단계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전생에의 육체와 정신의 조화. 결혼의 최고의 목적은 이 때에도 역시 자식이었다. 성욕을 충족시키는 것은 쾌락 행위를 의미했고 아이를 만든다는 염원에 의해서, 목적의 사상으로까지 고양되어, 순결하고 고결해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자식은 결혼의 목적이 되었다. 그러나 자식은 재산과 가문의 상속자이면서 더불어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하는 인간성의 상속자였다. 결혼은 국가에 대해서 이같이 중요한 것이 된 결과 하나의 도덕 제도로서 남녀 관계를 법제화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여기서 곧바로 도출되는 결론은 결혼 전의 순결과 부부 상호 간의 절대적인 정절의 요구였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면서 자기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구나 이 때문에 합법적이 아닌 성관계는 모든 당사자에게 치욕과 불명예였다. 외간 남자들과 희롱하거나 그들에게 교태를 부리는 것은 결혼생활을 모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간통은 인간에 대한 범죄일 뿐만 아니라 국가에 대한 범죄였다. 이 논리에서 보면, 돈으로 사는 연애 행락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치욕이다. 매춘부는 더 이상 연애의 자극적인 주인이 아니라 오히려 퇴폐의 덫이다. 이같이 결혼은 남녀가 연애를 공유하는 유일한 도덕적인 제도였기 때문에 도덕 국가의 수호신으로 승격되었다. 이 때문에 결혼은 곧 독신자보다도 기혼자를 존경하게 하는 자격도 되었다.

부르조아적인 사고방식이 결혼을 이토록 순결하게 했기 때문에 따라서 당연히 상호 간 구애의 모든 분야에서 그에 따르는 결과가 나타났으며, 언어, 태도, 행위, 복장, 사교 등에 대해서 이른바 공적, 사적 예의범절에 관한 다양한 요구도 나왔다. 그러나 이런 지엽말단적인 것은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겠다. 부르조아적인 성 사상의 원칙이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원칙은 결환과 순결만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정치이상과 같이 자본주의의 성 사상도 그 시대의 특유한 요구에서부터 성장했다. 이와 같은 유고가 성장의 원인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완전한 질서는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가족경제 테두리 안에서만 보장된다. 이 경우 부르조아 시대를 위한 권력투쟁을 일으켰던 계급은 첫째로 시민계급이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혁명적 소시민이 영국과 프랑스에서 대혁명을 일으켰던 것이다. 영국에서는 크롬웰이 왜소한 소시민계급으로 그의 철기병(Ironsides)을 편성했고, 프랑스에서도 자코뱅 클럽이 그 같은 소시민들로 편성되었다. 하나의 독립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산업혁명이 전개되어가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한편 그 당시 이미 존재했던 자본가가 쾌락주의의 인생철학을 선언했던 것은 당연하다. 그것은 곧 사치스러운 궁정 귀족이 그 행동거지로 볼 때 결국 당시의 자본이라는 자석의 식객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부르조아 시대를 연 것은 주로 소시민적 이데올로기였다.

덧붙여 두 번째 사정도 놓쳐서는 안 된다. 즉 부르조아 사상은 절대주의에 대한 투쟁 속에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지배권력층은 자신의 높은 도덕성을 과시함으로써 특히 상대방의 부도덕에 낙인을 찍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투쟁의 태도는 새로운 이상적인 모델, 즉 새로운 이상만이 가질 수 있는 공식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투쟁을 위해서 내걸어졌던 도덕은 언제나 시위적이었다. 앙시앵 레짐에서는 연애란 단순한 향락이며 질탕하게 노는, 사정에 따라서는 십수 명을 상대하며 항상 상대를 갈아치우는 유희였다. 그와 같은 유희에 대해서 시민계급은 오직 한 사람의 상대를 향해 깊은 불멸의 정열을 불태웠다. 앙시앵 레짐의 지배계급의 결혼은 가장 심각한 부도덕성을 보여주었다. 시민계급은 이렇게 무질서한 사실에 저항함으로써 결혼생활의 청결성을 주장했다. 앙시앵 레짐에서는 자식은 결혼생활에서 가장 귀찮은 존재로 취급되어 지배계급은 육아를 타인에게 맡김으로써 가능한 한 빨리 그 귀찮은 존재를 쫒아버렸다. 이에 반하여 부르조아 사상에서는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것이 가장 높은 도덕적 의무였다. 그 때문에 자식을 자기 손으로 키우지 않는 어머니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앙시앵 레짐에서는 각양각색의 매춘부는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무릎을 꿇는 최고의 신이었다. 그러나 부르조아 사상은 매춘부를 이 세상에서 가장 열등한 것의 표본으로 격하시켜버렸다.

이와 같은 의식적, 과식적 투쟁의 태도에서 나타나는 것은, 부르조아 계급의 정신적 선구자들이 자신의 이상의 강령이 지배계급에 대해 대체로 일치된 증오심을 도발시켰을 때, 자신의 행동에 점점 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지배계급에 대한 증오심은 부르조아 계급에게는 이른바 바로메타와 같은 것이었다. 루소는 그 시대의 인간교육에 커다란 역할을 한 소설에서 다음과 같은 특징을 찾았다.

소설은 상류계급의 원칙과 싸워서 그 원칙을 파괴해야 한다. 소설은 상류계급의 허위와 비열함, 다시 말하면 상류계급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묘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제반 이유에서 소설이 내가 제안한 요구를 완전히 충족시키지 못하든가, 그러한 방면에 조금도 쓸모가 없다면, 그 같은 소설은 독자들로부터 흥미 없고 과장된, 시시한 책으로 냉소와 증오, 비난을 면치 못한다. 여러분들은 소설을 토앟여 지상이 무엇이며 어리석음이란 것이 세상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당시 인간은 오직 관념적 토대 위에서 사물을 그 사물 자체로써가 아니라 관념으로써만 설명했기 때문에 관념이 역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부르조아 계급의 선구자와 입법자는 무엇보다 우선 교육자가 되고 싶어했다. 그들은 훌륭한 본보기로서 매우 훌륭한 교육자가 될 수 있었다. 때문에 많은 사람은 여러 행태로 훌륭한 모범을 나타냈다. 설교자는 그것을 설교로 표현했으며 문인은 그것을 소설과 시로 묘사하고 화가는 그림으로 묘사했다. 영국에서 절대주의적 왕정복고에 대항하여 부르조아 계급이 들고 일어났을 때 "가디언"은 이렇게 썼다. 우리들의 사명은 "종교와 도덕을 될 수 있는 대로 깊게 인간의 정조관에 심어주고 부모와 자식의 의무라는 숭고한 모범을 모든 이의 눈앞에 보여주어 죄악을 증오하고 미덕을 사랑하도록 하는 데 있다." 그 후 프랑스에서도 부르조아 계급은 2, 30년간 그와 같은 처방전에 따랐다. 루소는 교육자로서의 소설의 역할에 대해 이렇게 썼다.

나는 이 선집을 함께 읽을 부부가 그들이 둘 다 노동함으로써 지치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용기를 어떻게 얻게 되고 또 노동의 수확을 유익하게 이용하기 위해서 새로운 시야가 그들에게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생각하면 실로 기쁨을 느끼게 된다. 사랑하는 모범을 본받고 싶다는 희망에 들떠 있지 않다면 두 사람의 눈길이 그토록 즐거움에 충만해서 행복한 가정을 묘사한 그림 위에 쏟아질 수 있겠는가? 설령 연애결혼이라 해도 두 사람이 단단하게 결합되지 않는다면, 행복한 결혼생활의 매력이 어떻게 두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부르조아 계급은 독일에서도 같은 양상이었다. 레싱은 부르조아적 자각의 대표자로서 그 계급의 자각을 열렬히 설명했다. 쉴러에게는 극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도덕적인 제도였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부르조아적 회화도 이와 같은 사상을 바탕으로 묘사되었다. 호가드, 샤르댕, 그루즈같이 회화 분야에서 부르조아 사상을 대표한 가장 위대한 화가들은 한결같이 훌륭한 모범을 표현했다. 그들은 부패한 앙시앵 레짐의 지배계급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나쁜 모범에 대해서 자신들의 훌륭한 모범을 보여주었다...

성장하는 부르조아 계급은 이러한 사상으로부터 자신들의 인권을 이끌어내었다. 따라서 이 인권 역시 이러한 사상 위에, 구체적으로는 더 높은 도덕성 위에 세워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처럼 높은 도덕성을 기록하는 것이 그들의 사명인데 이 사명은 아래와 같은 서술방식으로 관념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현실은 모든 분야에서 관념보다도 강했다. 관념의 형식뿐 아니라 내용도 상당히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현실의 잔혹한 논리에 직면해서 금방 부서져버렸다. 만인의 행복을 내세운 시대는 부르조아 계급의 승리와 더불어 시작될 수는 없었다. 봉건사회가 멸망함으로써 탄생한 근대 부르조아 사회는 계급대립을 없애기는커녕 "이전의 계급 대신에 새로운 계급, 억압의 새로운 조건, 투쟁의 새로운 형태만을 이식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수수께끼의 간단한 해결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일찍이 이 새로운 계급대립을 아주 분명하게 드러냈다. 혁명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함에 따라서, 다시 말하면, 혁명이 이론적으로 실현됨에 따라서 계급대립은 점점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또한 그 과정은 지금까지의 혁명적 변혁이 경험했던 것 가운데 가장 일관된 것이었다. 혁명의 위대함이나 그 후로 조금도 뒷걸음치지 않았던 결과도 이로부터 기인했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가장 유명한 저서 "1789년부터 1794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혁명적 신문문학"의 저자이기도 한 뛰어난 민족학자 쿠노는 프랑스 혁명에서의 새로운 계급대립의 성립과정을 다음과 같은 문자으로 명확히 정리하고 있다.

이미 1789년 말, 실질적으로 구제도가 붕괴한 지 8개월도 되지 않은 때에 국민의회 내의 제3계급의 대표들이 정력적으로 투쟁하는 여러 당파로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파리 시민들 속에서도 당파적 투쟁이 일어났다. 각각의 이해의 방향을 대표하는 각 당파는 이미 자신들을 위해서 집필하고, 투쟁할 신문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의 최하층조차 자기 기관지가 있었다. 급진적인 인텔리 소시민이나 대부분의 반 프롤레타리아적 인텔리는 루스탈로의 "파리혁명"을 읽고 있었다. 대학생이나 문학가, 부의 축복을 받지 못한 무명 미술가, 군소 변호사 등은 까미으데물랭의 "프랑스와 브라방의 혁명"을 읽었다. 하편 인텔리 계층 노동자, 군소 수공업자, 일부 프롤레타리아는 마라의 "인민의 벗"을 읽었다. 또한 이해의 대립이라는 현실은 모든 부르조아 사상, 모든 통일사상을 파괴해버렸다. 1789년이란 해가 아직 도래하기도 전에 일찍이 마라의 기관지는 자신들을 노동자와 수공업자의 이익을 대표하는 계층이라고 이름 붙이고 금융가나 대상인, 공업생산자, 랑띠에(rantier) 및 거만한 아카데미 회원에 대한 투쟁을 선언했지만 브리소의 "프랑스 애국자"는 성실하고 유복한 시민계급의 대표로서 계속하여 무산의 "다수"에 대항했다.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계급대립은 더욱더 격렬해져서 이제 반동세력에 대한 단순한 방위나 여러 가지 아름다운 자유 원칙의 단순한 논리가 문제가 아니라 그 원칙을 실제 행정문제에 어떻게 적용하고 어떻게 법률적 동의를 얻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즉 선언한 정치적인 원칙을 마침내 실천에 옮기는 단계가 되면 이 같은 원칙의 해석이 백화제방하며 그 결론은 백이면 백 모두 계급이익이 다양하게 반영된 점에서, 움직일 수 없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 확실해졌다. 자유주의적 입헌주의는 무너졌고, 사이에스의 자유주의에 반대해서 자코뱅주의가 등장하게 되고 자코뱅당에서 1791년말 무렵에는 지롱드당이 분리되고, 그후 당통주의당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당파의 집합체인 자코뱅당도 여러 가지 경제적 이익을 대변하는 당파에 부응한 여러 경향으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적 경향과 더불어, 예를 들면, 급진적 "마라주의", 즉 마라당파가 있었다. 더욱이 이 급진적, 민주적 경향과 함께 또다시 아나르카시스 클로와 에베르의 개인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경향이 나타났다. 온건한 자코뱅당의 경향이 국가의 키를 잡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공안위원회에서 지배권을 잡았지만, 한편 마라와 쇼메트의 "급진혁명주의적" 경향이 파리 코뮌을 형성함으로써 승리를 차지했다.

이와 같은 투쟁의 궁극적인 원인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라는 의문에 대해서 사물의 외관밖에 보지 않는 관념적 역사학자는, 상투적으로, 그 원인은 지도자간의 질투에 불과하다고 말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쿠노의 반박은 정당하다.

이러한 의견은 가장 어처구니없는 것 중의 하나이다. 브리소와 로베스피에르의 항쟁을 개인적 대립 속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것은 혁명 시대의 경제적 추진력을 못 본 체하고 이들 두 혁명가의 사상적 경향이나 두 사람의 전혀 다른 사상 내용을 이해하지 못한 관념론자들에게만 전해져 내려오는 독특한 기술이다. 한편 이러한 인물들의 사상이나 이 인물들이 시대적 문제에 대해서 취한 입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두 사람이 그토록 첨예하게 대립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감탄한다. 당의 이 같은 분열과 다양한 경향 사이에서 나온 투쟁의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계급대립, 즉 경제적인 생활조건의 차이와 전반적인 경제의 흐름에 대한 각 정당의 입장에서부터 유래한 이해의 일치와 그 충돌이었다.

모든 근대국가의 역사가 19세기 중반 무렵에 더욱 두드러지게 부여주었듯이 거듭되는 발전은 프랑스 혁명 속에서 드러난 이 새로운 계급대립을 더욱 더 심각하게 만들었다. 18세기 전환기에 있어서의 거대한 혁명극에서 첨예하게 노출되던 대립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 때문에 현대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투쟁도 1789년부터 1794년까지의 프랑스 혁명에서의 대립의 연속에 지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현실이 관념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다는 것은 즉각적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더욱 확실하고 더욱 분명하게, 거대한 변혁이 각 국가에 강요한 정치형태에서 나타났다.

시대적 문제는 그후부터 오직 정치적 권력을 쟁취한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을 위해서 유용하게 쓰였다는 것이었다. 그 목적 역시 달성되었다. 그 후로 자본주의의 이해관계가 국가 전체를 지도하는 유일한 이해관계가 되었다. 그런데 미국을 제외한 각국의 정치조직에는 언제나 은밀한 형태로 옛 권력과 큰 타협이 이루어졌다. 완전히 변혁된 경제적 단계로서의 새로운 현실상황에 어울리는 국가체제는, 진실로 말한다면, 당연히 부르조아적 공화국, 즉 언제나 일반의지를 분명하게 대표한다는, 따라서 각각의 계급뿐 아니라 항상 일반이익을 보호한다는 의회정치였다. 그것은 또한 최초의 이상이자 목적이었다. 인민은 오로지 이상과 목적을 위해서 결코 식지 않는 감격 속에서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여러 혁명들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 목적은 역시 승리의 날-1793"프랑스 혁명의 공포정치", 1830"프랑스 7월 혁명", 1848"프랑스의 2월혁명"-이면 언제나 선언되었다. 그렇지만 실천에 옮겨졌던 여러 변혁이 그 성격적으로는 설령 급진적이었다고 해도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내용을 다시 옛자루에 담는 것으로 만족했다. 부르조아 계급은 대개의 경우 간판을 다르게 색칠한 왕권, 즉 왕권을 대표한 계급으로서, 언제나 반 봉건적인 대지주계급과 타협했다. 확실히 부르조아 계급은 헌법을 통해 귀족계급도 자기 편으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귀족과 군주에게 권력의 상징까지도 허용했다. 한 나라의 부르조아 계급이 스스로 약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이 같은 상징이 더욱더 필요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영국의 경우 왕권은 너무도 분명하게, 또 재빨리 오직 부르조아 계급의 이익에 유용했었다. 부르조아 역사가는 1688년 혁명에 "명예스러운(Glorious)"이라는 자랑스런 형용사를 부여했다. 그것은 혁명이 왕관과 부르조아 계급-즉 재산-의 타협, 곧 왕관이 의회의 의지, 곧 부르조아 계급의 의지를 집행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토대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군주제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종종 고개를 쳐들었듯이 명예혁명으로 군주에게 부여된 역할은 오늘날에도 송두리째 변한 것은 아니다. 글래드스톤은 이 때문에 귀족들에게 우리가 하원에서 신뢰받는 한 우리의 지위는 안전하다는 자신에 찬 말을 내뱉을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 군주제는 1870년에 완전히 폐지되고 동시에 부르조아 계급이 권력의 공식적인 담당자가 되었지만 그날까지는 타협에 타협을 거듭해왔다. 장기간에 걸쳐서 이와 같은 타협을 통해 가장 맛있는 즙을 먹을 쪽은 언제나 군주쪽이었으므로 군주제는 그 동안 거리낌없이 절대주의적으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경우 오직 과거의 역사적 권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 독일에서는 지금까지 그대로 잔존하고 있다. 독일의 시민계급은 자신들의 계산에 따른 것이었지만 절대군주제와 참으로 비열하고 불명예스러운 타협을 했다. 절대군주제는 당연히 대지주를 근위병으로 격하시켰는데, 그 역할은 무산계급의 침입으로부터 절대주의의 이윤율을 지키는 것에 국한되었다. 그러나 현실의 다양한 조직은 이미 자본주의의 시대적 본질에 내포되어 있었다. 자본주의시대에는 모든 존재, 따라서 왕권이나 지주계급의 존재이유도 자본주의의 이윤율이라는 이 같은 기능은 독일 시민계급 특유의 긍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와같은 기능이 시민계급에게 가장 궁욕적인 조건하에서 지주계급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시민계급 특유의 치욕이었다. 독일의 시민계급은 지주계급에게 권력의 상징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를 실제로 허용해야만 했다. 독일의 시민계급에게는 정치기구에서 높은 지위를 당당히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때문에 귀족계급에게는 아무리 바보 같은 사람이더라도 가문만으로 불문곡직 최고의 지위를 요구할 권리가 있었다. 관리 중에서도 높은지위, 정부의 중요한 자리, 군대의 높은 지위는 모두 귀족계급이 차지해버렸다. 부르조아적 독일에서는 대지주만이 배낭에 항상 원수봉을 지니게 되었다. 재능은 원수봉을 쥘 자격을 결코 주지 않았다. 그러나 가문, 나아가 연고, , 수염 등은 매우 중요한 자격요건이 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적 재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순수 부르조아 가문이면 이제까지의 부르조아적 직업수준 이상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우수하다고 해도 상업자문, 궁정 자문, 행정자문, 기껏해야 추밀원 자문 정도가 최고였다. 다급해진 경우에만 정부고위직에 초빙되는 정도였다. 그런 때는 그들은 머리를 굴려서 봉건적인 사고가 자리를 틀고 있는 구렁텅이로부터 현실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독일의 지주계급만큼 문화적 진보를 방해한 예는 없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은 독일의 시민계급으로서는 그만큼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독일의 지주계급만큼 진정한 권력을 행사할 능력이 없는 빈약한 계급도 없었다. 이것은 지주계급은 태어날 때부터 통치능력이 있다고 간주된 군국주의와 행정방면 등의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클라이스트는 예외로 하고, 지주계급 출신의 사상가, 철학가, 작곡가, 시인은 어떠했는가? 독일 어디를 둘러보아도 과학, 문학, 미술 방면에서 귀족계급의 그 알량한 수준은 어느 정도였는가? 귀족계급 출신의 예술후원자가 독일에 있었는가? 독일의 귀족계급이 설립한 공공도서관이나 미술관이 어디에 있었는가? 대가의 손으로 꾸며진 귀족의 전통적인 화랑이 어디에 있었는가? 독일의 지주계급이 세운 건축물로서 문명에 쓸모있는 것이 있었는가? 그와 같은 것을 찾아본들 소용없다. 이에 반해 ", , 여자"라는 조롱이 섞인 단어가 독일만큼 행세할 수 있는 곳은 없다. 창조력의 결핍이라는 면에서는 지주계급이나 독일의 군주들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이후 독일의 왕좌에 앉은 군주들 가운데 대인물로 평가될 수 있는 면모를 갖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분명 이 같은 모든 것은 독일의 대지주나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서술했듯이 독일적 역사의 비극적인 운명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개인 및 전체의 침해할 수 없는 최고의 재산으로서 유럽 어느 나라에서나 선언된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도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관념의 전화를 경험했다. 확실히 유럽에서는 신민이나 농노는 이미 사라져 버렸고 국민만이 존재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자유라는 개념에 관해서도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해석을 해왔다. 그 해석은 "자유, 평등, 박애"라는 슬로건을 현실적으로 보다 중요한 "보병, 기병, 포병"으로 대치했다. 우리들은 언론자 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그와 더불어 대역죄, 불경죄, 신성모독죄라는 조항도 가지고 있다. 우리들은 집회 및 결사에 대한 권리-오늘날 독일에서조차도-를 가지고 있지만 어느 나라에서든 경찰은 고무로 만든 곤봉이나 브라우닝식 권총에 대한 은밀한 권력을 쥐고 있다. 이제 만인은 법 앞에서 평등해졌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자신의 권리가 자신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것을 요구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이 요구권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정말 믿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충실하게 직무를 수행하는 계급재판에 의해서 재해석된다. 그러나 이러한 넋두리를 아무리 늘어놓아도 소용없다. 이제까지 열거한 모슨은 관념이 전화된 역사적인 비논리 가운데서 가장 눈에 띄는, 또 누구나 알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자가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캐물을 수밖에 없다면-대답은 역시 그 원인은 어느 나라에서나 역사의 상속인에 대한 공포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시대는 탄생 그 순간부터 이 상속인을 두려워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바로 프랑스 혁명 당시에 독립적 계급으로서, 3계급으로부터 분리된 제 4계급,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이 같은 공포는 상당한 근거가 있었다. 사회제도가 부르조아적으로 바뀜과 더불어 세계에 등장한, 앞에서 언급한 계급대립 가운데서 가장 무서운 것은 최초부터 노동자계급이 더욱더 분명하게 자리를 잡고 하나의 계급으로서는 숫적으로 가장 많아졌을 뿐만이 아니라 이에 따라 점차 사회의 한쪽 깃발이 더 하얗게 됨으로써 생긴 대립이었다. 부르조아 계급이 이 본질을 오랫동안 명확히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처음부터 가장 치명적인 상처로 느껴졌다. 이와 같은 입장의 공유에 의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제외한 모든 계급은 단결하게 되었다. 이 계급들은 이 공통된 입장에서 자신들을 단결하게 했던 이유, 바로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갑자기 인식하게 되었다.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요구에 의해 같이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도움을 받음으로써 승리를 차지하게 되었던-이것이 중요하다-부르조아 계급과 타도될 수밖에 없었던 군주제 간에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타협은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한결같이 나타났다. 부르조아 계급은 얼마간은 헌법상의 의무와 제한을 조건으로 하여 군주와 귀족계급에게 새삼스럽게 정치권력을 나누어줌으로써 이른바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동맹을 맺었다.

부르조아 사회제도의 무서운 상속인에 대한 이러한 공포는 독일이 부르조아 계급에서 매우 심각하게 나타났으며, 또 독일에서만큼 이 공포가 합리화되었던 곳도 없었다. 이미 얘기했듯이 독일에서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발전이 매우 늦었다. 1840년대에 비로소 "그 상속인이 절대적인 성격이 프랑스나 영국에서 역사적인 논쟁에 의해서 나타나 대혼란을 일으킨 후에" 드러났다. 독일의 부르조아 계급이 역사에 등장했을 때부터 그들은 일찍이 무대에 그 상속인이 있는 것을 알았을 뿐만 아니라 그 상속인이 생명을 걸고 자신들의 요구를 주장하는 것도 알았다. 이러한 상황은 독일에서 부르조아 계급의 비열함을 영구화시켰다. 이로부터 곧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첫째로, 독일의 통일은 1848년에 성공하지 못했다. 둘째로, 경제적인 각 세력에 눌려 마침내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을 때, 이 통일은 부르조아 계급과 절대주의의 매우 비열한 타협을 통해 이루어졌다. 1848년의 위대한 역사적 순간에 직면해서, 봉건주의와 절대주의를 갑자기 두드려 부수고, 나아가 이 두 권력을 영구히 정복할 수 있는 부르조아가 독일에는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이와는 달리 이 역사적인 순간에 부르조아 계급-가장 완전한 의미로서-은 그들 자신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동틀 무렵,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혀, 두 손을 비비면서 그들이 패배시킨 상대방에게 아무쪼록 앞으로 우리의 해방자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적으로 돌리고 우리 편이 되어주십사 하고 애원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의부르조아 계급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부르조아 계급에 비해서 정치권력에 전혀 참가할 수 없었으며 정치적 영향력도 거의 가질 수 없음이 확실해졌다. 그렇지만 이 경우에도 그것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이미 얘기했듯이 30년 전쟁에 그 궁극적인 원인이 있는 독일의 비참한 경제적 후진성의 결과였다. 30년 전쟁이야말로 독일을 완전히 파괴하고, 수백 년 동안 대소 전제군주들의 노리개로 전락시켰던 원인이었다.

수십년 전부터 자본주의적 발전은 모든 국가를 습격했으며, 진보적인 국가에서는 기존의 모든 개념을 타파시키는 팽창까지도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조아 계급의 권력은 이상하게도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그 이상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 권력은 도처에서 매우 협애화되었다. 이처럼 한계점에 달한 징후가 각국에서 바로 나타났는데 그것은 뿌리깊게 자리잡은 제국주의였다. 제국주의는 미국까지도 습격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얼핏 보면 상당히 모순된 것 같지만 최근의 발전은 상당히 일관된 근거를 가진 것으로, 결국에는 이윤율 확보라는 동일한 원인에 근거하고 있다. 자본주의적 이윤율은 공공생활의 관점에서 보면 점점 더 놀라울 정도로 높아지는 데 반해 부르조아 계급의 모든 정치적 이상은 자신들의 이윤율상승에 반비례해서, 마치 햇볕에 내놓은 버터처럼 녹아버렸다. 부르조아계급은 자신들이 성취한 높은 이윤율이 영구히 보장된다는 조건하에서만 모든 분야에서 가장 광포한 반동을 매수했다-자본가 측에서 작성하는 잡비 장부는 이미 반동을 제어하는 데 소모되는 막대한 비용을 안심하고 조달할 수 있을 만큼 흑자를 기록했다. 따라서 그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최후의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정치적 논리, 즉 관념의 그 반대물로의 완전한 진화였다.

그렇다면 이와 같이 과거의 권력과 정치적으로 타협하는 현상은 근대 자본주의와 더불어 전혀 새롭게 세계에 드러난 경제적, 정치적 그리고 도덕적 결과에 대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제 와서는 이러한 타협이 완전히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현상을 특징 짓는 여러 가지 사실은-개요뿐만이 아니라 사실에 주의해서 말하고자 한다-각 방면에서 가장 철저한 비판이 요구되었다. 왜냐하면 부르조아 시대에 특수한 성의 상태는 이러한 결과에만 관계되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소유자로서,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대표자로서 부르조아 계급은 대량생산의 덕택으로 투자한 자본이 창출하는 이윤율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가는 곳마다 눈깜짝할 사이에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가 각 자본가로 하여금 도대체 무엇을 만들게 했는가를 질문하고 싶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자본가들을 정신덕으로 또 정조 면에서 도덕적으로 이전의 수준보다 향상시켰는가? 이 부는 그들로 하여금 인간적인 미덕을 갖추게 하고 또 그것을 선양시켰는가? 그리고 영웅종족을 형성시켰는가? 참으로 터무니없는 수작이다-그와는 정반대의 현상이 일어났다. 감정 없는, 하찮은, 감각적 흔적도 없는 겨우 돈만을 버는 기계-그것은 자본이 그 자신의 소유자 및 지배자에게 부여한 최초의 결과였다. 이것은 매우 빨리, 또 매우 전형적으로 영국 부르조아 계급에게서 드러나게 되었다. 영국은 유럽에서 제일 먼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 들어갔으며 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는 장기간 동안 전혀 제한이 가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부르조아 계급의 특유한 형태가 영국에서 가장 특징적으로 발달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전혀 무제한적인 발전의 최초의 성숙기는 1830부터 1840년 사이였다. 우리들은 그 당신의 부르조아 계급에 관해 심리적, 도덕적 초상화를 어떻게 그렸는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카알라일은 이를 위해서 "과거와 현재"라는 대저서를 1843년 런던에서 출판했다. 카알라일은 이 책에서 특히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제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신의 법칙은 최대 행복의 원리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과거의 종교하는 자리를 공석으로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그 자리에 시대적 공허와 무내용에 어울리는 새 복음서-배금사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스도교의 천국과 지옥 가운데서 전자는 의심스러운 것으로, 후자는 허황된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새로운 지옥을 받아들였다. 근대영국의 지옥은 "성공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포, 즉 돈을 벌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공포이다! 확실히 우리들은 배금주의의 복음서와 함께 기묘한 결론에 도달한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우리들은 그것을 사회라고 부르면서 공공연하게 가장 완전한 분리와 고립 속에서 헤매고 있다. 우리들의 생활은 상호부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명정대한 경쟁" 등으로 이름 붙여진 정당한 전쟁규약을 구실로 한 상호적대적인 것이다. 우리들은 어디에서나 현금지불 같은 것이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우리들은 현금지불만이 인간이 맺는 모든 계약을 해제하고 결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는다. 자본가 공장주는 "내가 부리는 노동자들이 굶고 있단 말인가? 더구나 나는 그들을 정당하게 시장에서 데려다 고용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들에게 끝자리 6펜스도 떼지 않고 약속한 금액을 정확하게 지불하지 않았는가? 그 이상 나와 그들은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말한다. 확실히 배금사상의 숭배는 비참한 신앙이다.

카알라일에 의하면 자본가와 그 아내의 관계 역시 99퍼센트는 "현금지불"에 지나지 않는다. 이같이 화폐에 의해 칭칭 동여 매어져 있는 부르조아 계급의 비참한 노예 상태는 부르조아의 지배에 의해 언어에까지 파급되었다. 화폐는 남편의 가치를 결정한다. 어떤 남편은 1천만 파운드의 값어치가 있다. 다시 말하면 남편은 1천만 파운드의 돈을 가지고 있다. 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며 "인간 중에서 보다 훌륭한 부류"에 속하며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가 하는 행동은 모두 그가 속한 사회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폭리정신이 모든 언어에 나타나 있으며, 모든 관계가 상업언어로 나타나고 경제적인 범주 속에서 해석된다. 카알라일의 글에 따르면 판매자와 구매자, 수요와 공급은 영국인이 인간 생활을 판단하는 논리이다. 특히 흥미 있는 것은 카알라일의 이 한 구절이다.

영국인이 "존경해야 할 사람"이라든가 "인간중에서 보다 훌륭한 부류"등으로 부르는 상류계급이 오히려 정신적으로 저열하고 탄력성이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모든 힘, 모든 활동, 모든 내용이 그렇다. 시골귀족은 사냥을 하고 화폐귀족은 책을 쓴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정도가 심해지면, 그들은 마찬가지로 공허하고 나약한 문학에 빠진다. 정치나 종교에 대한 편견은 대를 이어 전해진다. 오늘날 그들은 완성된 모든 것을 쉽게 손에 넣으며 옛날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원리에 고심할 필요가 없다. 그러한 원리는 오늘날 빈틈없이 완성된 상태로 일찍이 요람 속으로 날아들어 온다.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럴 필요가 있는가? 그들은 훌륭한 교육을 향유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학교에서 로마 인이나 희랍인 때문에 쓸데없이 고통받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다. 즉 그들은 수천 파운드의 재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령 아내가 없는 경우라면 아내 이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그들은 사람들이 "정신"이라고 이름 붙인 "허수아비"이다. 이들과 같ㅇ든 생활에서는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가? 가령 정신이 온다면 그것은 그들의 어디에  그 거처를 찾을 것인가? 이 경우 모든 것은 중국식으로 결정된다. 협애한 한계를 넘어서는 사람은 화있을 지어다. 오랫동안 굳어져왔던 것이라면 그 사람은 아홉 배로 슬프다. 그 이유는 모든 질문에는 두 가지 대답, 즉 휘그랑의 대답과 토리당의 대답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대답은 그 옛날에 두 정당의 현명한 의전관에 의해서 결정된다. 우리들에게는 그에 대한 심사숙고라든지 형식이 필요없다. 그 모두가 빈틈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딕키콥든, 또는 존 러셀 경이 그렇게 말했으며, 보비 필이나 특히 "대공", 예를 들면 웰링톤 대공이 그렇게 말했다고 단언해도 좋다.

그런데 "지식계급"이 가진 공공연한 편견은 토리당이거나 휘그당이기나 간에 고작해야 급진 흉내레 지나지 않는다-이미 그것도 완전히 그렇지는 않지만. 교양있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서 우리는 차아티스트다, 또는 우리는 민주주의자라고 말씀해보시라-사람들은 당신의 상식을 의심하고서 당신을 모임에서 쫒아내버릴 것이다. 아니면 나는 신, 그리스도 따위를 믿지 않는다, 나는 배반당해 팔린 것이라고 말해보시라. 더욱이 나는 무신론자라고 고백해보시라. 그렇게 하면 사람들은 그 후부터는 당신을 마치 적색의 이방인처럼 취급할 것이다. 설령 자유와 함께 마시는 편견의 속박을 벗어난다고 해도 그는 역시 자신의 확신을 자유롭게 말할 용기를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때에도 그는 세상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관용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듯이, 자기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과, 때때로는 두 사람끼리 대화할 때 내놓는 의견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 중 카알라일 같이 총명하면서도 무자비한 비평가는 그리 많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런 비평가가 카알라일 한 사람만은 아니었다. 당시 맨체스터의 상인이었던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다음과 같이 명쾌한 묘사도 역시 동시대의 것이다.

영국 부르조아 계급처럼 극도로 풍기가 문란하고 사리사욕으로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타락한, 마음속까지 썩어버린 어떤 진보도 담당할 수 없는 무능력한 계급을 나는 보지 못했다 -여기에서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본래의 부르조아 계급, 특히 자유주의적이며, 곡물법을 폐지하려고 하는 부르조아 계급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 세상에 사람이 존재하는 까닭은 모두 오직 돈을 위한 것이므로 자기자신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은 이들이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쉽게 돈을 벌 때 이외에는 아무런 기쁨도 느끼지 못하고 손해를 볼 때 이외에는 아무런 슬픔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소유욕과 금전욕만이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사물에 대한 인간다운 사고방식이 조금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교방면에서의 영국 부르조아 계급의 위선에 관해 엥겔스는 1844"독불연보"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일생"과 그의 명성이 바다를 건너왔을 때, 어떤 "진지한" 사람도 그 책을 번역할 용기가 없었으며, 어떤 유력한 출판업자도 그것을 인쇄할 용기가 없었다. 마침내 어떤 사회주의자 독서가-즉 세상에서 유행을 가장 늦게 따르는 신분계층에 있는 인간-가 그것을 번역하고 이름도 없는 사회주의자 출판업자가 권당 1페니짜리의 가제본으로 출판했다. 그리고 맨체스터, 버밍검, 런던의 노동자가 영국의 슈트라우스의 최대의 독자층이 되었다.

1840년대에 묘사된 영국 부르조아 계급의 이런 모습은 60년대에도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오늘날에도 본질적으로는 변화되지 않고 개선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어느 정도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부르조아 계급의 특징에 대해 서술한 것들이 모드 근대자본주의의 생산양식을 가진 그밖의 다른 국가에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카알라일은 단지 국제적 부르조아 계급밖에 묘사하지 않았지만, 거기에는 참으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란 하나도 없다. 실제로 그러한 것이 발생할 여지는 없다. 이와 같은 특징은 그러한 성격을 지닌 영국정신에 근거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적인 치부가 자본가에게 미치는 불가항력적인 영향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국이 공업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갖춘 순서대로, 또 이 발전이 각국의 특수한 조건에 따라 이루어지는 강도에 따라서 유산계급에게 특수한 부르조아적 특징이 형성된다. 이러한 특징은-예를 들면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과 같이-장기간 수공업적 생산이 지배적이었던 나라에서는 처음에는 결코 전형적이 될 수 없었으나, 대공업의 발달이 애초부터 낡은 생산방식을 구축할 필요도 없고 마음먹은 대로 대공업의 특유한 경향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그만큼 전형적이며, 따라서 그만큼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미국 부르조아 계급에게는 이와 같은 고유한 부르조아적 모든 특징이 옳지 못하게도 극단적이 되었다. 이러한 측면에서는 미국은 오늘날도 첨단을 걷고 있다. 이곳에서는 이간이란 정교하게 조립된 계산기이며 이러한 기계는 장식용 곡선마저 모저리 제거되었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모든 생활의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사회조직 전반에서의 자본주의의 필요성과 자본가에게서의 이러한 특수한 필요성은 결국 같은 것이었다. 이 일반적인 필연성은 모든 것이 상품이 되고,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관계 역시 모두 자본주의화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감정이라든지, 사고방식, 연애, 예술 이 모든 것이 어디에서나 화패가치로 계산되었다. 인간의 품위까지도 그 교환가치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것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상품성이다. 사물에 대한 그밖의 사고방식은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며 아무리 좋은 경우라도 경멸이 섞인 동정을 사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확실히 화폐가 역사에 등장한 이래, 어느 시대에서나 물질적인 이익이 사물을 규정하는 수단이 되었다. 이런 점이 화폐의 혁명적 작용이었다. 금전결혼은 그후 언제나 존재했으며, 예술이나 과학에서조차 시간, 장소를 막론하고 "돈벌이"를 원했다. 그러나 옛날과 현대의 차이는 근대자본주의 시대가 화폐를 제외한 모든 척도를 물리침으로써, 순수한 상품성, 즉 얼마인가, 이문은 어느 정도인가, 이자는 얼마인가만을 오직 하나의 척도로서 높인 데에 있다.

사물의 이와 같은 일반적 본질을 은폐하려는 시도는 오늘날에 와서는 마음대로 되진 않는다. 그것은 폭력을 사용함으로써만이 묵인될 수가 있고 참으로 무지할 때만이 그것에 무관심해질 뿐이다. 거기에서 인간은 훨씬 전부터 그와 같은 것이 사물의 "자연적인 것(das Naturliche)"이었다고 선언하는 적절한 생각을 마련해냈다. 실제로 그대로 되었지만, 그것은 사유재산을 기초로 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토대 위에 세워진 사회 속에서만 자연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범주에서 그것은 역시 합리적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활 법칙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자본축적이라는 대단히 무서운 방법이 자본주의의 인생철학과 일치하는 것은 당연하다. 인정이 사라진 곳에서는 겸양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서운 방법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근대자본주의의 이른바 원시축적기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유는 원시축적의 토대가 자본주의의 본질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산업자본가의 토대는, 가장 빨리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던 네덜란드와 영국의 경우, 노예무역이었다. 참으로 무자비한 인간약탈에서, 즉 극히 비열한 행위 위에서 자본주의가 탄생했다. 노예무역에서 창출된 이윤은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네덜란드인이나 영국인들은 모든 그리스도교적 망설임을 팽개치고 앞장서서 인간약탈과 노예무역을 합리화하는 구실을 공공연히 논의하게 되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이렇게 쓰고 있다.

매뉴팩추어 시대에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함에 따라 유럽의 여론은 먼저 수치심과 양심의 마지막 조각까지 잃어버렸다. 어느 나라 국민이나 자본축적의 수단이 된 어떤 불명예도 염치없이 자랑하게 되었다. 가령 아담 앤더슨이라는 정직한 사람이 펴낸 소박한 "상업연감"을 읽어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책에서 앤더슨은 지금까지 아프리카와 영국령인 서인도제도 사이에서만 가능했던 흑인매매를 앞으로는 아프리카와 스페인령 아메리카 사이에서도 가능하게 한 특권을 유트레히트 평화회의에서 영국-스페인 조약에 의해서 영국이 스페인으로부터 억지로 빼앗았던 사실을 영국의 국가정책의 승리라고 선전하고 있다. 영국은 1743년까지 스페인령 아메리카에 매년 4,800명의 흑인을 공급할 권리를 획득했다. 이것은 동시에 영국의 밀무역을 얼버무리기 위한 정부의 가면이 되기도 했다. 리버풀은 노예무역을 배경으로 크게 번창했다. 노예무역이 이 도시의 원시축적의 방법이었다. 그리고 리버풀의 "명예"는 오늘날까지 줄곧 "상업적 기업정신을 정열적으로 높이고 훌륭한 선원을 만들어내며 막대한 금을 가져다주었던" 노예무역의 핀다르가 되었다. 리버풀에서 노예무역선으로 사용되었던 선박은 173015, 175153, 176074, 177096, 1792132척이었다.

예를 들면 아메리카에서와 같이 원주민이 자본주의의 이해관계에 장애물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예로 적합하지 않은 경우에는 재빨리 계획적으로 절멸의 대상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현상금이 걸린 대량 살인에 대해 쓰고 있다.

서인도제도처럼 수출무역만을 하는 식민지나 멕시코, 동인도와 같이 강도살인이 횡행했던,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한 나라에서는 원주민에 대한 대우가 매우 난폭했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식민지에서도 원시축적의 기독교적 성질은 버려지지 않았다. 이 신교의 근엄한 열성분자 청교도들은 1703년 그들의 집회결의에 따라 구릿빛 인디안 머리 1, 또는 포로 1명에 대해 40파운드의 상금을 걸었으며, 1720년에는 머리 1개에 100파운드, 그리고 1744년에는 매사추세츠 해안에서 어떤 종족을 반도라고 선언한 후에는 다음과 같은 상금을 걸었다. 12세 이상의 남자 머리 1개에 새 화폐로 100파운드, 남자 포로 하나에 105파운드, 여자와 어린아이 포로 하나에 50파운드, 여자와 어린아이 머리 1개에 50파운드라는 상금을 내걸었다.

실제로 그 이익이 엄청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장사에서 손을 뗄 수가 없었다. 따라서 모든 경우를 합리화하기 위한 자기 선전으로 하느님까지도 받들어 모셨다. 영국의회는 노예무역의 전성시대에 토인 사냥과 머리껍질 벗기기는 "하느님과 자연이 우리들에게 내려주신 수단"이라고 재빨리 선언했다.

그 같은 물질적 토대 위에서 탄생하여 가장 강력하게 그 힘을 빨아들였던 계급이 자기 나라라고 해서 모든 것을 초용하는 박애주의자 흉내를 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 같은 것은 이 계급에게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세계에서 어떤 장애도 없이 실행할 수 있었던 방법을, 설령 공공연하지는 않더라도, 자기 나라에서도 휘두르고 싶은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대공업이 발전하기 시작한 처음 10년 동안에 유럽 임금노동자의 운명도 허울을 쓴 노예제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인의 발걸음처럼 전진한 공업이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은 그지없이 순종적인 노예였다. 자본주의가 대중들 가운데서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공장으로 억지로 끌어들였던 ""은 바로 "조막손"이었다. 아직 부모의 다정한 손길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이들의 애처러운 조막손은 부모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손에서 끌려 나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노동으로, 예를 들면 방적기계 바퀴 돌리기나 잡동사니를 골라내는 탁자에 쇠사슬에 묶인 흑인 노예보다도 더 무자비하게 묶였다. 물론 이러한 것은 개개 공장주의 개인적인 악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기계 때문에 근력이 쓸모없게 되자 나타난 단순한 하나의 결과였다. "기계때문에 근력이 쓸모없게 되자 힘이 없는 노동자 혹은 육체적 발육이 미숙하고 사지가 아주 연약한 노동자를 고용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여자와 미성년자의 노동은 자본주의가 기계를 이용한 당신의 최초의 언어였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준 곳은 역시 영국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공업의 변혁이나 발전이 다른 국가에서 인도적으로 행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영국에서는 앞에서 설명한 이유로 공업발전이 처음부터 대규모의 형태를 취하고, 그 결과 매우 풍부한 자료가 연구가의 손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영국에서의 공장제 기계공업의 초기 단계에 관해 쓴 특징적인 기사를 이미 가지고 있다. 18세기 말엽에 존 필든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더비셔, 노팅검셔, 특히 랭커셔에서는 수차를 이용할 수 있는 하류를 따라 큰 공장이 세워졌으며, 오직 그곳에서 발명된 기계가 사용되었다. 도시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런 지방은 수천 명의 직공이 급히 요구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당시 인구가 비교적 적었던 불모지 행카셔에서는 무엇보다도 노동력이 가장 필요했다. 특히 미성년자들의 작고 민첩한 손가락이 가장 필요했다. 그로 인해 런던이나 버밍검, 기타 지역의 각 교구의 빈민수용소에서 도제를 확보하는 것이 재빨리 관례화되었다. 7세부터 13세 내지 14세까지의 의지할 곳 없는 어린이들 수천 명이 북쪽으로 수송되었다. 도제에게 옷과 음식물을 제공하고 공장 부근의 도제 오두막집에 기거시키는 것이 주인의 의무였다. 도제의 노동을 감시하는 감독제도도 만들어놓았다. 아이들이 체념하고 노동하는 것이야말로 이러한 노예감독의 이익과 직결되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받는 급료는 아이들이 착취당하는 생산량이 비례했기 때문이다. 그 당연한 결과는 요컨대 잔혹 그것이었다...대부분의 공장지대, 그중에서도 행카셔에서는 공장주에게 맡겨졌던 이토록 티없고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에게 참으로 무자비한 학대가 가해졌다. 그들은 심한 노동으로 죽지만 않을 정도로 혹사당했으며, 이 세상에서 가장 교묘한 잔혹함으로 결박당했고 쇠사슬에 묶여 고문당했다. 채찍으로 노동을 강요할 경우, 그들은 대개 뼛속까지 허옇게 드러날 정도로 맞았다. 그런가 하면 드물게는 자살로까지 내몰리는 경우도 있었다. 더비셔, 노팅검셔, 랭카셔의 인가에서 떨어진, 경치가 아름답고 로맨틱한 계곡은 고문은 물론 종종 끔찍한 살인이 일어나는 적막한 지대로 변했다. 공장주의 이윤은 막대했다. 이윤은 이리와 같은 그들의 욕망을 자극시킬 뿐이었다. 공장주는 밤일까지 시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A"조 노동자들에게 녹초가 되도록 주간노동을 시킨 후 그다음에는 'B'조를 밤늦게까지 묶어두는 것이었다. 결국 주간조는 야간조가 빠져나올 때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갔으며 야간조는 또 주간조가 빠져나올 때만 침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침대가 차가와지지 않는다는 것이 행커셔의 민화가 되었다.

이 기록 속에서 순수한 노예노동으로서의 미성년자 노동의 특징에 대해 내가 앞에서 서술한 모든 것이 이미 증명되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노예와 조금도 다름없는 대우를 받았다. 공장주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직접적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브로커를 통해서 재빨리 손을 써서 런던이나 버밍검의 빈민수용소에, 그곳에 수용되어있는 빈민의 아이들을 넘겨주도록 의뢰했다. 빈민수용소는 언제나 기꺼이 그러한 의뢰에 응했다. 그 덕택에 빈민수용소는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아이들을 부양하는 부담에서 벗어났다. 그 이후 의지할 데 없는 아이들은 전혀 의지를 가지지 않은 상품과 같이 이러한 박애주의자의 손에서 다른 사람의 손으로 건네졌다. 1815년 로버트 필 경이 아동보호법안을 제출했을 때 의회의 프란시스호너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파산자의 값나가는 물건과 함께, 이러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공장의 아이들이 재산의 일부로서 공공연히 경매에 붙여져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2년전, 1813, 비참한 사건 하나가 고등법원에 회부되었다. 그것은 한 무리의 아이들에 관한 사건이었다. 런던의 어떤 교구에서 아이들을 어떤 공장주에게 보냈는데, 그 공장주는 그들을 다른 공장주에게 전매해버렸다. 이 아이들이 마침내 기아에 허덕이다 빈사 상태에 이른 것을 두세 사람의 박애주의자들이 발견했다. 게다가 이보다 더 비참한 사건이 의회 조사위원의 일원으로 있는 필에게 보고되었다. 몇 년 전에 런던의 어떤 교구와 랭커셔의 아무개 공장주가 계약을 체결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건강한 아이들 20명당 백치 아이 1명을 덤으로 끼워서 공장주가 사 간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특히 방적공장에 어느 정도로 많이 고용되었는가는 1788년 랭카셔에서 남자노동자가 26,000, 여자노동자가 31,000명인 데 비해 아이들은 약 35,000명으로 그 대부분이 10세 이하였다는 사실이 증명하고 있다. 예를 들면 특히 자수공장과 모든 잡화공장에 대량으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경노동을 필요로 했던 공장뿐만 아니라 어떤 공장에서든 미성년노동력이 직접 성년노동력을 쫓아낼 정도로 미성년노동력의 고용은 만연해 있었다. 1865년에도 아직 버밍검이나 그 교외에 있는 금속제품 제조공장에서는 "대부분의 중노동을 부녀노동자 1만 명 말고도 미성년노동자가 3만 명"이나 맡아 하고 있었다.

가내공업이 중심이었던 매뉴팩추어에서는 불행한 아이들에게 놀랄 정도로 긴 노동시간 - 대개 아침 5시부터 밤 10시까지-이외에도 참으로 무서운 다른 부수조건을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가내공업이 중신을 이루었던 레이스 공업에서 이에 관한 예를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1864년의 아동노동법안에 관해 영국의회가 결정한 위원회의 보고에는 특히 이렇게 쓰여있다.

대략 20평방피이트 정도의 작은 작업실에 14명에서 20명의 미성년자들을 콩나물시루에서처럼 꽉 집어넣는 일은 노팅검의 경우 다반사이다. 미성년자들은 권태로움과 단조로움만으로도 지칠 정도로 피로했지만, 게다가 건강에 매우 해로운 온갖 조건하에서 혹사당하면서 24시간 중 15시간 이상 콩나물시루 같은 작업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그 가운데 가장 어린아이들조차 놀랄 정도로 긴장된 주의력과 민첩한 행동으로 일하게 하며, 손을 한시라도 쉬거나 느슨하게 하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무엇인가 질문을 해도 그들은 일각을 놓친다는 공포 때문에 일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노동시간이 연장될 때는 "마나님"이 그들을 자극시키는 방법으로서 "긴 막대기"를 시간에 따라 몇 번씩이나 휘둘렀다. 아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피로가 더해 가지만 단조롭고 눈을 해치며 더구나 자시를 흐트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피로한 장시간 노동에 속박된 채 마치 작은 섬처럼 끝까지 쉬지 못한다. 그것은 정녕 노예노동이다.

매뉴팩추어의 대부분의 주인들은 나이 어린 가내노동자를 3,000여 명이나 노동시키고 있었다. 아이들의 평균연령은 6세였다. 그런데도 주인들은 이 평균연령보다 더 어린아이들은 돈 버는 도구로 혹사하 ㄹ정도로 냉혹했다. 앞 보고서의 다른 부분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어떤 레이스 공장에는 18명의 처녀와 부인들이 있었는데 1인당 면적이 35입방피트이고, 다른 레이스 공장에는 18, 1인당 24.5 입방피트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한 악취가 풍겼다. 이 공장에는 두 살, 기껏해야 두 살 반밖에 안 된 어린애가 일하고 있었다.

황린성냥공장에는 어디나 할 것 없이 완전히 미성년자들만 고용되어 있었으며, 더구나 이곳 미성년자들은 무척 어렸다.

이토록 지독한 노동조건으로 미성년자를 대량으로 혹사하는 것은 아동 살인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비참한 사실이었다. 아동노동은 19세기 후반기까지 매우 조직적인 아동살인이었다. 증기는 수십만명의 어린 시체 위에서 세계에대한 자기 지배를 구축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것을 알고 있었다. 버밍검 출신인 시인 에드워드 폴 미드가 1844년에 발표한 "국왕 증기"라는 시에서 노래한 것은 노동자의 비참한 운명이었다.

국왕이 있다. 화를 잘 내는 군주가 있다.

그것은 시인이 그린 국왕의 모습이 아니라,

백인 노예가 알고 있는 폭군이었다.

이 야만적인 국와이 증기이다.

증기의 팔은 하나, 철제였다.

하나이지만

그 팔에는 마력이 깃들어

수백만의 인간을 쓰러뜨린다.

그 옛날 힘몬(Himmon) 계곡에 살고 있던

그의 선조, 무서운 몰로흐(Moloch)처럼

증기의 내장은 시뻘건 불꽃이며, 그의 먹이는 아이들이다.

증기의 사제들은 인간이 아니다.

오만하며, 광표하고, 피로 살찐 그들.

사제들은 거인의 커다란 팔을 놀리는 것이-치욕스럽다!

마법으로 피를 황금으로 만든다.

그들 신의 천한 황금을 위해서

그들은 태연자약하게 인간의 권리를 유린한다.

여자의 고통 따위는 놈들에게는 농담거리이며,

남자의 눈물 따위는, 놈들에게는 웃음거리이다.

배고픈 자의 단말마의 절규도

놈들의 귀에는 음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젊은 여자나 아이들의 해골이

국왕 증기의 지옥을 가득 메운다.

이 세상이 지옥이다. 온 나라 전체에

놈들은 죽음을 흩뿌린다.

증기가 지배한 뒤에는 인간의 육체도, 정신도

함께 살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야만적인 몰로흐, 증기를 쓰러뜨려야 한다.

노동하는 수천의 인간들이여, 모두

구둘 손을 꽁꽁 묶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들이야말로 우리나라를 밤새 부숴버릴 것이다.

그 무서운 손끝이

오만하게 황금으로 부풀어 오르고

선혈로 물든 공장주들을,

놈들의 도깨비 신과 함께

인민의 분노로 쓰러뜨려 버리자.

이것이 시적인 과정이 아니라는 점은 미성년노동을 조사하기 위해 영구의회가 1840년에 임명한 위원회의 보고가 증명하고 있다. 1842년에 간행된 보고서는 N. W. 시니어의 말을 인용해서 "자본가와 부모의 물욕, 이기심, 잔혹성, 그로 인한 아이들이나 연소자의 타락과 파괴에 관해, 지금까지 세상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참으로 무서운 광경"을 묘사했다.

미성년노동력과 더불어 앞에서 잠깐 연급했듯이 여성노동력도 매우 욕심나는 것이었다. 여성은 여러 가지 산업에 특히 적합할 뿐 아니라 여성의 특성을 보더라도 언제나 남자보다 매우 유순한 노동자였다. 여성은 항상 가장 예속적인 인간이었다. 남자의 공통된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여성은 거기에 더하여 가장 고귀한 감정, 즉 헌신적인 모성애적 감정을 가지고서 기계와 공장에 매여 있었다. 수천만의 여성들이 아버지 없는 자기 아이들에게, 혹은 아버지의 벌이만으로는 배부르게 먹기에는 참으로 충분치 않은 자기 아이들에게 오로지 필요한 빵을 사주기 위한 이유만으로 매일매일 때로는 몇 시간이나 걸어서 공장에 일하러 갔다. 어머니들은 이러한 헌신적인 모성애 때문에 여성에게 무척 위험한 중노동까지도 무리하게 떠맡게 되었다. 이 모성애 때문에 어머니들은 무거운 돌을 짊어지고 공사장 발판의 흔들거리는 사다리를 올라가야 했으며, 웅웅거리는 미싱이나 미싱바늘을 한눈 하나 팔지 않고 응시해야 했다. 더욱이 모성애 때문에 어머니들은 특히 노동시간이 점점 더 늘어나도, 공장주들이 어떠한 모욕을 주더라도 더욱 더 온순하게 참고 견뎌야만 했다-이것도 결국 실업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영국에서 유행복을 만드는 소녀들의 노동상태에 관한 1842년의 보고서는 이렇게 쓰고 있다.

1년에 대략 4개월 계속되는 유행 시즌 동안은 일류상점에서도 노동시간은 매일 15시간이며, 급한 일감이 있을때는 18시간 이상이 된다. 그런데 대부분의 상점에서는 이 시즌 동안은 전혀 규정된 시간이 없이 일을 시키므로 소녀들에게 주어지는 휴식과 수면을 위한 시간은 24시간 가운데 6시간 이상 되는 경우란 좀처럼 힘들며 대대는 3시간에서 4시간, 때로는 2시간밖에 주어지지 않기 때문에 결국 소녀들은 19시간 내지 22시간이나 일을 하게 된다. 이 경우는 밤새도록 일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이고 밤새도록 일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소녀들은 과로로 인하여 몸이 말을 듣지 않아 더 이상 1분도 바늘을 움직일 수 없게 되어야 일을 마친다. 의지할 데 없는 소녀들은 9일간 계속해서 옷도 벗지 않고 때로는 홑이불 밑에서 그저 잠깐밖에 쉴 수 없는 것은 물론 소녀들이 되도록 짧은 시간에 음식물을 삼키도록 빵을 잘게 잘라서 주는 경우도 있다. 요컨대 이처럼 불행한 소녀들은 노예의 정신적인 채찍-즉 해고의 위협-때문에 14살에서 20살 가량 되는 이 애처로운 소녀들은 물론이고 힘센 남자 어른들도 참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긴 시간 동안 휴식도 없이 노동에 묶여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작업장이나 침실의 축축한 공기, 구부정한 자세, 종종 거칠고 소화가 잘 안 되는 음식 등.

다음에 나오는 예는 영국의 봉재공의 일반적인 상태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봉재공들은 보통 조그만 다락방에서 참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다. 이 경우 한 치의 여유도 없이 많은 여공들을 꽉꽊 집어넣어 겨울에는 동거인들의 육체적인 온기가 대부분 유일한 난방 수단이 되었을 뿐이다. 이런 방에서 일을 할 때 소녀들은 등을 구부리고 앉아서 아침 4시 또는 5시부터 한밤중까지 바느질을 계속하는데 게다가 대소변도 제대로 하지 못해 2, 3년 내에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일찍 죽어버릴 것이다.

이토록 혹사당하는 소녀들의 1주일 수입은 2.5 실링에서 3실링 정도였다.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

머리가 어찔어찔해질 때까지!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

눈알이 빠질 때까지!

테두리, , 밴드,

밴드, , 테두리-

단추 위에서 나는 존다.

여자는 꿈속에서도 바느질을 계속한다.

그 당시 작곡되었던 "셔츠의 노래"의 슬픈 리듬은 이렇게 울린다. 봉재공들은 제대로 울 수조차 없다. 눈물로 실과 옷감이 얼룩지기 때문이다. 눈물이 흐를 때는 더욱이 바느질을 할 수 없다. 여자들의 다른 어떤 직업도 그녀들의 운명을 반대방향으로 돌려놓지는 않았다. 어디를 가도 가장 고통스럽고, 건강에 치명적인 노동조건, 즉 장시간의 노동, 극히 낮은 보수, 굴욕적인 대우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공장에 붙들려 매여 있는 여자들에게도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운명이 가로놓여 있었다. 국왕 증기가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그 국왕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육체뿐 아니라 여자들의 육체까지 희생물로 바쳐졌다. 그리고 결핵, 티푸스, 특히 고통스러운 부인병이 수백만 젊은 여성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부인들의 태내에 있는 새로운 생명도 이미 그 안에서 빈곤의 낙인이 찍혔다. 프롤레타리아의 갓난아이들 대부분은 모체 안에서 이미 기아에 허덕였기 때문이다. 부인들은 거의가 조산을 했다. 대부분의 부인들은 태아를 출산 예정일까지 품고 있을 수 없었으며, 모두 언제나 그랬듯이, 태아는 사산되었다.

그런데 1840년 맨체스터의 통계에 따르면 살아서 태어난 갓난아이들 가운데 57퍼센트가 세상까지도 살지 못했다. 57퍼센트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갓난아이가 다시 젖먹이 때에 죽어야 했었다. 이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죽지 않으면, 갓난아이들은 뺴빼 말라 있었던 것이다. 가난 때문에 도저히 공장에 나가지 않으면 안 되는 어머니들의 젖은 쓸모 없이 버려졌다. 애스틀리 경은 한 조사에서 특히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스무 살이 된 M. G. 에게는 아이가 둘 있다. 둘째 애는 젖먹이이기 때문에 나이가 조금 많은 큰 애가 돌보고 있었다. 애들 엄마는 매일 아침 5시에 공장에 나가 밤 8시에 돌아왔다. 하루내내 젖이 흘러 옷이 흠뻑 젖었다-H. W. 에게는 아이가 셋이나 있지만 매주 월요일 아침 5시에 집을 나와서 토요일 밤 7시에야 돌아갔다. 아이들 때문에 집안 일이 많이 밀려 있어서 엄마는 다음날 새벽 3시가 되어도 잠자리에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엄마는 자주 젖이 흘러 탁자까지 흠뻑 젖어도 그 자세대로 일을 계속하도록 강요되었다. 이 여공은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젖이 흘러내리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요. 젖에 옷이 흠뻑 젖어버리지요."

수면제도 젖먹이 아이들에게 무서운 해독이 되었다. 미싱을 붙들고 있어야 하는 가난한 어머니들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갓난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여서 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면 미싱을 놀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갓난아기들에게는 유전이나 영양부족으로 구루병 또는 선병질이 항상 붙어 다녔다.

노예제, 원주민 사냥, 머리 껍질 벗기기, 유아나 여자의 학살-이러한 것들이 근대자본주의의 기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노동대중이 부르조아 국가에서 확득한 자유는 결국 부르조아 계급에게 수탈당할 수밖에 없는 자유에 불과했으며 평등은 기아와 궁핍의 평등이었다. 남성 노동자의 운명도 여자들 못지않게 비참했다. 그들이 바치지 않으면 안 되는 피의 희생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가동하기 위해 그들의 힘을 요구하는 기계는 매년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눌러 쓰러뜨렸다. 전쟁에서도 그토록 많은 희생자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만인에 대한 평등한 운명은 바로 결핍, 빈곤, 절망이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아동노동에 관한 의회보고서는 또한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에게 가하는 잔혹한 행위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부모가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 때문만으로, 즉 부모의 벌이가 시원치 않아 비록 몇푼 안 되는 돈이지만 아이들이 매일 벌어오는 돈이 생활비의 적자를 메우는 데에 필요하다는 사실만이 그 행위를 정당화한다. 대중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가 산처럼 높이 쌓아 올린 부의 바로 옆에서 굶주리고 있었다. 앞에서 인용한 "과거의 현재"에서 카알라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국의 상황은 이 세상에서 일찍이 볼 수 없었던 것으로 가장 불길하고 가장 기괴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영국은 부와 여러 가지 생산물, 인간의 요구에 부응한 다양한 종류의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허나 한편에서는 영양부족으로 죽어가고 있다. 영국의 토지는 이전에 받아본 적이 없는 은총을 받아 살찌고 넓어져 가고 황금을 낳는 작물로 물결치고 있으며 공장이나 산업기계에 파묻혀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 다시없는 가장 강력한 최고의 도구로서 가장 순종적이라고 인정되는 1,500만 노동자들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가 하면 그들이 세운 사업, 그들이 실현한 결과도 여기에 있다. 바로 그것은 우리들 주변에 풍부하게, 넘칠 정도로 널려 있다. "여기에 손대지 말라. 너희들 노동자, 너희들 노동자 우두머리, 너희들 게으른 자들아, 너희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것에 손을 댈 수 없다. 너희들 중 한 사람이라도 이것을 넘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법에 걸린 열매이니라."

나아가 카알라일은 현실적으로 일어난 일을 예로 들면서 이것을 보충했다.

스톡포트의 순회재판에서 어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 세 명을 독살한 사건이 고발되어 유죄판결을 받았다. 즉 아이 하나가 죽으면 "매장협회"에서 약 3파운드 8실링의 돈이 나오므로 그 돈을 사취하려 했기 때문이다. 고발당한 그들은 유죄판결을 받았다.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당국은 이러한 사건은 이 한 건에 그치지 않고 너무 많아 세밀히 조사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이라고 넌지시 말하고 있다고 한다-이러한 실례는 눈에 드러나는 높은 산의 꼭대기와 같은 것이므로 그 아래에 있는 산지와 평지 전체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숨겨져 있다. 그들도 인간인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기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은 이 어두운 움막에 깊이 빠져 있는 데도 구원의 손길은 너무 멀리 있군요." 그렇다. 우골리노의 기아탑에서는 참으로 무서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 가장 사랑하던 어린 고다가 아버지 무릎에 쓰러져 죽었다. 이 스톡포트의 부모는 생각 끝에 넌지시 말을 건넨다. 애절하게 굶주리고 있는 우리 어린 톰은 하루종일 먹을 것을 달라고 보채면서 울고 있다. 톰은 이 세상에서 괴로움만 당할 뿐 즐거운 일은 한번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톰을 단숨에 불행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톰의 죽음은 운명이므로 우리들도 결국 톰의 명을 보존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 같은 생각을 넌지시 부모들은 서로 내비쳤다. 톰을 죽이고 받았던 것은 모두 먹을 것을 사는 데 써버렸다. 이번에는 애절하게 굶주리고 있는 어린 잭이 살해될 차례인가, 아니면 애절하게 굶주리는 어린아이의 차례인가?-어쩌면 이렇게 지독한 세입위원회인가?-적에게 포위되어 기아에 쫓긴 도시, 예를 들면 신의 노여움을 사 몰락한 고대 예루살렘의, 최악의 비운을 겪게 되었던 폐허에서는 "동정심 많은 여자들마저 자기 손으로 자기가 낳은 아이들을 구워서 먹을 것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예언이 있었다. 엄숙한 헤브라이 인의 상상으로도 이 이상 더 암울한 불행의 심연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은 타락하여 신에게 벌을 받았던 인간의 말로였다. 그리고 모든 종류의 물질이 길거리에 넘쳐흐르고 눈으로 볼 수 없는 마법을 제외한 그 무엇에 의해서도 포위되어 있지 않는 근대 영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점점 말세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일이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이러한 일은 어떤 맥락에서 일어나고 있는가? 또 어떤 맥락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다?

이 사건은 1841년에 일어났다. 5개월 전에 리버풀에서 이와 똑같은 이유로 친자식 셋과 의붓자식 둘을 독살한 볼튼 출신의 베티 율리스가 체포되었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을 덧붙여둔다.

주택상태를 재검토하는 것은 언제나 노동계급의 상태를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데 가장 확실한 판정 기준이다. 다시 말하여 노동자의 수입이 좋아지고 노동시간이 짧아져서 반드시 필요한 수면시간 이외에 좀 더 여유가 주어지게 되면 그때 비로소 주택상태가 좋아지기 때문이다. 한편 노동자의 상태가 전체적으로 나빠지면 주택상태도 항상 나빠진다. 프롤레타리아는 상태가 나빠지면 당장 생활비를 줄이게 된다. 그들은 주택이라는 것을 가장 손쉽게 절약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짧은 밤만이 자기 시간이 될 수 있다면, 더욱이 그들 자신에게 가정생활이란 것이 밤에밖에 없다면 그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밤 동안의 휴식을 동굴 속에서 취해도 만족해 한다. 그리고 수박만의 노동자는 수십 년 동안 주택이라고 해야 고작 초라한 동구이었으며 그리고 그것에 만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근에 이르러 비로소 주택상태가 개선되었던 것이다. 영국인 의사 헌터는 1866년 광범위한 주택조사를 실시했다. 그 가운데에서 런던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썼다.

다음의 두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첫째로, 런던은 약 20군데의 커다란 식민지가 있으며 각 식민지에서 약 1만 명의 사람이 죽어간다. 이런 비참한 상태는 영국 이외의 다른 나라에서 일찍이 보아왔던 어떤 비참함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 사람들이 살던 지독한 주택상태 때문이다. 둘째로, 이러한 식민지의 주택에 사람이 꽉 차 더욱 지독하게 황폐해진 상태는 20년 전보다 더 심각하다.

또 다른 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세상 사람들이 런던이나 뉴카슬의 대부분 지역에서의 생활은 지옥이라고 해도 그것은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리고 헌터 박사는 노섬버랜드와 그외 지역에 거주하는 광산노동자들의 주택상태에 대해 언급했는데, 런던 이외의 지역에서도 노동자들의 생활은 참고 견딜 수 없을 정도라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브래드포드에 있는 노동자보험회사 대리점의 리스트는 현대의 주택상황을 부조처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보험회사에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이 거리에서 여섯 개의 방이 있는 집에서 한 방에 평균 열 명에서 열한 명, 어떤 방에서는 열두 명이, 방 세 개가 있는 집에서는 한 방에 평균 열세 명, 많은 경우에는 열여섯 명이, 그런가 하면 방이 두 개가 있는 집에서는 한 방에 평균 열일급 명에서 열여덟 명이 기거하고 있었다-이 경우 "살고 있다"라는 표현은 사용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래도 좀 나은 편이었다. 이 도시 저 도시에 엄청나게 늘어나 무리 지어 떠도는 훔펜프롤레타리아의 대부분은 지금도 아직 거처가 없어서 창고, 빈나무통, 빈 상자, 다리 밑에서 누워자야만 한다. 이반 블로흐가 1910년에 발행한 베르날도 데 퀴로스의 "마드리드의 범죄와 매춘"에는 이른바 골포(golfo), 즉 부랑민의 생활이 묘사되어 있다.

마치 원시인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듯 그들은 이 도시에서 자연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을 먹고 살며, 지상에 있는 것을 닥치는 대로 훔치고 있다. 양배추 꼭지를 모을 때는 도둑질이 손쉽지만, 사격장에서 탄환의 뇌관이나 탄환 파편을 훔치는 일은 위험하여, 이 경우는 대개 목숨이 걸려 있다. 그들은 이따금 물고기를 잡는다든지, 시골에 가서 도마뱀을 잡는다든지, 거리에서 쥐를 잡는다든지 해서 벌판 한가운데나 끝머리에 자리 잡은 그들의 집에서 잡은 것들로 먹을 것을 만들었다. 더 운이 좋은 경우는 싸구려 여인숙이나 일일 숙박소, 그들이 말하는 "룸펜호텔"에 살며시 들어가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는 구호원이나 숙박소를 찾아다녀야 하며 거기도 너무 늦게 갔을 때는 벽돌아궁이 위에 자리를 잡거나 따뜻한 분뇨통 위에서 참고 견뎌야 하며, 아니면 마치 동굴인처럼 동굴 속에서 자거나, 도시에서도 한적한 지역의 외진 곳이나, 차도 위,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거나 한다. 이때도 동정심이라곤 전혀 없는 야경 경찰관이 끊임없이 방해하기 때문에 자는 것이 아니라 깜빡깜빡 졸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빈민들 가운데서도 더욱 가난한 사람은 겨울이 되면 숙박소로 피난했는데, 데 퀴로스는 그 숙박소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전에는 이 지역, 지금 암파레 거리로 불리는 옛날의 코마드레 거리에는 유명한 숙박소가 있었다. 단골손님들은 이 숙박소를 "뚱뚱보 아저씨네 창녀집"이나 "밧줄 여인숙"이라고 불렀다. 그곳에서 묵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었다. 방 한가운데에 밧줄 한 가닥이 쳐 있으며 손님들이 쉴 때는 허리를 구부린 채 밧줄에 기대서 잠만 잘 뿐이다. 이 밧줄은 또한 하인역할도 했다. 그것은 뚱뚱보 주인 아저씨가 손님들을 깨울 때 그들이 일어나려고 하지 않으면, 한쪽 벽에 묶어둔 밧줄을 풀어버림으로써 자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마루 위로 엎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때 아저씨는 "이 자식아, 일어나, 일어나" 하면서 큰소리로 야단친다.

이러한 숙박소는 스페인뿐만이 아니라 19세가 중엽까지는 대부분 영국이나 프랑스의 대공업도시에도 있었다. 1840년에 그렸던 도미에의 스케치는 파리에 있는 이러한 숙박소 시설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이란 보통 때에도 대개 아사 직전의 상태에 있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숙명인 공황 때가 되면 아사가 정면으로 내습하는데, 이것은 수천 명의 프롤레타리아들이 도저히 모면할 길이 없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운명이었다. 아사는 실제로 이 수십 년 동안 영국 공업 도시에 으레 붙어 다니는 현상이 되었다. 노동자가 이와 같은 공황 시기에, 예를 들면, 1866년 면공업을 습격했던 대공황 때처럼, 자신들의 비참함을 호소하면서 가두시위를 일으킬 용기를 가진 경우에는 이러한 대중비극은 그 원인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시위 사실 때문에 일반시민의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186644일 실업 노동자와 기아 노동자가 일으켰던 시위운동에 대해 그다음날 "스탠다드 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어제 무서운 연극이 메트로폴 일각에서 펼쳐졌다. 오스탠드의 수천 명의 실업 노동자들이 손에 손에 검은 깃발을 들고, 집단적인 행진이라곤 할 수 없지만, 상당한 인파를 이루었는데 그 자체가 사람들을 압도했다. 우리들은 이들 노동자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가를 생각해본다. 그들은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그것은 간단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서운 사실이다. 이러한 사람이 4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현대의, 이 훌륭한 메트로폴의 한쪽에서는 세상에서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부가 축적되고 있음에도 한쪽에서는 4만의 인간이 구원의 손길도 없이 굶주리고 있다! 이들 4만의 인간은 현재 그밖의 다른 지역으로도 파고 들어온다. 그들은 24시간동안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우리들의 귀에 자신들의 비참함을 호소한다. 그들은 하늘을 향하여 절규한다. 그들은 초라한 공동주택에서, 일을 찾을 수 없으며, 비생산적인 일이지만 걸식 마저도 할 수 없다고, 우리들에게 말한다. 지역 구빈세의 부담자들도 교구의 청구 때문에 빈곤의 경계선에까지 내몰려졌다.

공황 때는 수십만 인간에게 "구호원(wokrhouse)"이 대개 아사를 모면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기독교의 자선사업단체가 굶주린 대중에게 베푸는 "구호"는 한 조각의 빵과 매일 6페니가량의 위로금이 보통이었지만, 그 대가로 엉킨 마사 부스러기를 풀거나 돌깨는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은 "구호원"으로 수많은 실업자들이 몰려들었다든가, 1866년부터 67년에 걸쳐 면공업을 습격했던 대공황 때에 이 "구호원"이 실업자들로 만원을 이루었다는 것에 관해서는 18671"모닝스타"지 기자가 상세하게 쓴 기사 가운데에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나는 포플러에 있는 "구호원" 입구에 들어가는 데 매우 고생을 했다. 거기에는 굶주린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빵 배급표를 얻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배급시간은 아직 멀었던 것이다.

"구호원"에 사람들이 크게 몰려들어 만원을 이룬 광경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여져 있다.

안마당 한쪽 모통이에 구루병 환자처럼 구부러진 조그만 목조건물이 있었다. 문을 열자, 빽빽이 들어 찬 사람들이 서로 몸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 모두 어깨와 어깨를 꼭 붙이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선박용 밧줄을 푸는 데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경쟁하고 있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최소한의 먹거리였으므로, 아무리 긴 시간 동안이라도 일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인내가 바로 명예였기 때문이다. 이 한채의 "구호원"에만 해도 7,000명의 실업자가 수용되어 있었다. 그중에서 수백 명은 6개월 전 혹은 8개월 전까지는 이 나라에서 숙련노동자로서 최고의 임금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자기 수중에는 단돈 한 푼이 없더라도 전당포에 잡힐 물건이 아직 남아 있는 한, 교구의 구호원 따위에는 들어가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면, 여기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지금의 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이 기자는 실업자가 된 노동자의 주택이 어떤 상태인가를 보도하고 있다. 그에 관한 여러가지 기사들 중에서 여기서 인용하는 두 가지는 가장 짧은 기사이다.

다음으로 방문한 집은 조선소에서 일하던, 아일랜드 태상의 어떤 아주머니 집이었다. 이 아주머니는 제대로 먹지 못해 병이 나서, 입은 옷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요 위에 길게 누워 있었다. 침구를 모두 전당포에 저당잡혔기 때문에 깔개를 요로 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대신 어머니를 간호하고 있었지만, 그런 아이들에게는 아직 어머니의 보살핌이 필요할 것 같았다. 19주 동안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집은 무일푼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아주머니는 비참한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앞날이 정말 암담하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집을 떠나 밖으로 나오자 한 청년이 우리들 쪽으로 달려와서 우리 집에 오셔서 우리 가족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가를 한번 봐주십사하고 부탁했다. 청년을 따라가서 보게된 광경은 그의 젊은 마누라, 사랑스러운 두 아이, 쌓여 있는 전당표, 그 때문에 가재도구라곤 하나도 없는 텅 빈 방 같은 오두막이었다.

그렇지만 광황 때, 노동자계급을 완벽하게 습격한 대중빈곤의 이토록 참혹한 모습은 어떤 산업부문에서는, 그중에서도 특히 가내공업노동자에게는 10년 이상 계속되었는가 하면, 이런 가내공업노동자들의 비참함은 인도주의자들이 한결같이 떠드는 소리에도 불구하고 현대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을-영국 정부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영국의 상원은 19세기의 전환기에 실시한 이른바 스웨팅 시스템(sweating system:노동착취제도)의 조사결과를 다음처럼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들이 이 폐해를 과장할 수는 없다. 최하류 노동자계급의 수입은 가까스로 살아나갈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노동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에 노동자의 생활은 일생 동안 고통의 연속이며 작업은 혹독하고 거의가 건강을 해치고 있다. 위생상태는 노동자에게 유해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고 일반대중에게도 위험하다. 왜냐하면 전염병 감염의 위험이 있는 작업장에서 만들어진 의류에 병균이 묻어 있기 때문에 그 전염병이 크게 번질 수 있다. 우리들은 이와 같은 의견이 틀림없음을 믿고 있다. 우리들은 수난받는 자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묵묵히 감내해가는 용기를 보고 경탄하는 우리들의 심장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들은 과장함으로써 세상의 동정을 사는 따위는 전혀 생각지 않는다.

이미 얘기했듯이 필자는 산업의 변력과 그 발전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이 쌓아 올린 업적에 관해서 영국역사에서 빌어온 사실과 기록을 지금까지 인용했지만, 그것은 영국이 세계에서 선두로 근대자본주의의 대표적인 나라가 되었기 때문일 뿐, 자본주의발달이 늦은 다른 나라에서는 영국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선진자본주의국가는 후진국에 오직 자신의 장래만을 가리켜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위선적인 쇼비니즘은 대개 스스로를 은폐하기 위해서 가는 곳마다 자선을 베풀었다. 더욱이 독일 노동자의 상황을 설명하는 몇몇 실례는 이 점을 뒷받침해준다. 이에 관해서 나는 아주 최근의 기록을 인용하고자 한다. 1890년대의 통계에 의하면, 빈에서는 봉재공 100명 가운데 62명이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이 시대의 베를린 세탁부들에 관한 보고서 중에는 이와 같은 종류의 많은 보고말고도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다.

동료의 보고에 따르면, 이 여공은 이전에는 미싱사로 여성복 자켓을 만들었는데, 그러다가 병이 들어서 지금은 셔츠 단추 구멍을 손으로 만들고 있다. 여공은 단추 구멍 한 타스에 15페니히를 받고 있다. 1주일 수입은 도매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주문량에 따라 3마르크에서 4마르크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전직이 목사였다는 파울 괴레라는 사람이 1906년에 자신이 조사한 광산의 가내 노동자들의 생활상태에 대한 팜플렛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가내 노동자의 가족 수입에 관해서 다음과 같은 상세한 통계치가 있다. 장난감 제조공의 연간수입은-가족으로는 부인과 평균 두세 명의 자녀-350마르크에서 기껏해야 450마르크였고, 못 제조공의 연간수입은 450마르크에서 기껏해야 500마르크였다. 여기서 프로이센 인구의 56퍼센트의 수입이 1년에 900마르크 이하였다는 점을 첨가해둔다. 괴레는 광산의 가내노동자들의 바깥의 강요에 의한 "생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광산에 사는 가난하고 불행한 사람들이 겪고 있는 빈곤, 일년 내내 겪는 빈곤은 그들의 보잘것없는 생계나 수입상태에 따른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1년 수입이 350마르크 내지 400마르크라면, 하루 수입은 1마르크 7페니히로 다섯 명 이상의 가족이 먹고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으로는 가족 1인당 20페니히 내지 30페니히도 안 될 정도이다. 더욱이 이 수입으로 주택, 의류, 연료, 등화비용, 특히 가족 전체에게 필요한 식료비를 지불해야 한다. 이런 광경을 자기 눈으로 보지 못한 사람은 이와 같은 사실을 액면 그대로 믿지도 않을뿐더러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와 같은 곡예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 누구도 어떻게 그런 곡예를 할 수 있느냐고 묻지 않는다. 곡예는 먹을 것을 절약함으로써만이 가능하다. 음식물의 주종을 이루는 것은 빵과 아마인 기름, 커피, 그리고 감자 등이다. 여기에서도 감자가 주식이다. 꼭두새벽부터 감자이다. 물론 낮에도, 밤에도 감자이다. 광산촌의 장난감 제조공 아내들의 요리법이란 지칠 줄 모르는 창의력으로 감자를 재료로 이따금 새로운 요리를 만든다든가 감자가 그들의 허기진 배를 채워주는 것은 물론 언제나 맛있고 기분좋게 입에 맞도록 만드는 것이다. 육류 따위는 정말 아주 조그만 부스러기조차도 상상할 수 없으며 말고기라 해도 엄청난 진수성찬이다. 그들이 가장 잘 먹는 유일한 고기는 청어이다. 그래서 청어는 광산촌 잉어라고도 불리고 있다.

가난한 가내노동자가 어느 모임에서 괴레 목사가 쓴 기사를 비통한 어조로 증명했다. 그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식구가 가지고 있는 것은, 솔직히 말해, 우리들이 몸에 걸치고 있는 옷뿐입니다. 얼마 전에 행상 아주머니가 속옷, 침구, 기타 그 부류의 여러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우리 집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 아주머니는 이런저런 물건을 내보이면서 점점 물건가격을 내렸습니다. 저와 아내는 일을 해야만 했기 때문에 사양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왈칵 기분이 상해서 "당신네들은 가지고 싶은 게 하나도 없어요?"러면서 소리를 쳤습니다. 제 아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필요하죠, 필요하죠, 수백 가지가 필요하죠, 아주머니. 셔츠, 바지, 스커트, 양말, 손수건, 이부자리, 이것저것 다 필요하죠-그렇지만 그것을 살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돈이 한푼도 없답니다"라고 절규했습니다.

이제까지 인용했던 모든 예는 민중이 분노하여 "고용주의 20페니히는 형리이다."라는 노래를 만들었던 60년전의 광산촌의 가내노동자의 모습만이 아니다. 지금도 그와 같은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지 않다. 지금도 말고기, 소세지 한 토막은 수천 세대의 가내 노동자의 가족에게는 훌륭한 식사이다!

베를린에서 조사한 다음과 같은 수치는 대도시의 노동자계급의 주택 상황을 잘 보여주고 있다. 1910년 통계국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757천호의 주택 가운데 218천호는 방 2개와 부엌, 253천호는 방 1개와 부엌, 4만호는 방 1개만, 5천호는 부엌만 있었다. 다시 말하면 베를린에 사는 세대 중 45천 세대는 지금도 아직 방 하나로 만족해야 하며 그곳에서 하나에서 열까지를 다해야 한다. 그런데 1세대는 평균 5명이므로 방 2개와 부엌만 있는 주택 역시 결코 넓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베를린 인구 중 3분의 2 이상은 지금도 인간다운 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구스타프 사바트가 18961024일 자 봉제업계 신문에 썼던 "함부르크 봉제공장 두세 군데의 실태"라는 기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주택이 어떤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바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데른슈트라세 지역에 일류소매점에서 하청을 받아 일하는 노동자 한 사람이 살고 있다. 이 노동자의 집을 가려면 우선 그 앞집에서 거의 10m 정도 되는 좁고 침침한 길을 지나야만 한다. 이 길의 폭은 거리에 면한 입구가 1m, 중간이 86cm이다. 길을 지나가면 조그만 동네가 있는데, 바로 거기에 유명한 함부르크의 빈민굴이 있다. 좁고 급경사진 계단을 올라갈 때도 무릎이 계단에 부딪히지 않도록 무척 신경을 써야만 한다. 그러나 이 계간은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다. 이 노동자의 말에 의하면, 그들은 익숙해져 있지만, 아이들은 계단에서 곧잘 굴러떨어지곤 한다. 아파트에 들어서면 그곳이야말로 생지옥이다. 아파트 시설은 이 세상의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다. 그 내부는 칸막이로 셋으로 나뉘어있는데, 그들은 가 하나하나를 방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방은 그다지 크지 않은 작업대와 미싱, 찬장 등으로 꽉 차 있어, 공간이라고는 두 사람이 동시에 가까스로 드나들 수 있을 정도이다. 소위 거실이란 곳에는 침대 대용으로 쓰이는 소파, 서랍장, 식탁 그리고 의자 두 개가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방이 꽉 찬다. 세 번째 ""은 창문이 없어서 방 속은 칠흙같이 어두우며 너무 좁기 때문에 침대 두 개만으로도 꽉 찬다. 더욱이 천정이 너무 낮아서 보통 키 정도의 사람도 머리가 바로 천정에 닿는다. 이 아파트 한 가구에 살고 있는 가족은 모두 6명으로 부부와 아이들 넷이다. 통계만으로는 2층에다가 방 3개짜리 집이라면 어딘지 모르게 근사해 보이겠지만 황금빛이라고는 아무 데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노동자의 경제적 상황은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힘이 커감으로써 초기 대공업발달 시대에 비해 어느 나라에서나 근본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한편으로는 오늘날에야 비로소 겨우 근대적인 상품생산단계에 발을 들여놓은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국가는 아직 대중 빈곤 초기의 적나라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을 덧붙여 인식해야 한다. 가령 스페인에는 아직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이 지금도 일년 내내 동굴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동굴은 가난한 사람들 중에서도 최하층의 사람들이 도시 근처의 구릉이나 산의 부드러운 모래땅을 쇠붙이로 파서 만든 집이다. 마드리드에는 이와 같은 동굴집이 큰 동네를 이루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이곳뿐 아니라 그 외의 도시에도 많다. 베르날도 데 퀴로스는 앞에서 인용한 책에서, 주택구조, "낭비" 그리고 동굴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위험을 이렇게 쓰고 있다.

마드리드의 동굴 거주민의 중심지는, 요즈음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파세오 델 레이가 아레네로스 구릉까지 이어져 있는 산중턱에 자리 잡은 마차레 델 프린시페 포이이다. 가족이 없는 유랑민들인 젊은 골포 즉 부랑자, 걸인, 매춘부들이 자기가 살 동굴집을 만들기 위해 산에서 갱도를 파고 있다. 그 성격으로 볼 때 잠자리용과 진짜 동굴 두 가지고 있다. 둘 중 어떤 곳에는 열두 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 수 있을 정도로 큰 것도 있다. 골포들이 숟가락이나 양철조각 따위로 튼튼하게 이러한 동굴을 팠던 것이다. 그들은 입구의 4분의 1가량은 벽돌로 쌓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도록 동굴을 만들었는데 그 하나하나는 토목기술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손이나 자연의 힘으로 다시 파괴된 동굴도 많이 있다.

마치 양치기가 자기 양떼를 정성껏 돌보듯이 골포들은 이런 동굴을 지키는 것을 큰일로 여기고 있다. 조금 전까지는 난폭한 남자, 즉 직업적으로 폭력을 휘두르던 사람으로 일종의 폭력정치를 행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죄의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이다.

동굴 속에는 생활하는 데 특히 필요한 것들이 갖추어져 있다. 예를 들면 겨울을 대비한 거적이라든지 일상 부엌 용구에서부터 토층이나 갈라진 벽틈에는 인쇄물이라든지 종잇조각들이 있으며, 특히 범죄인의 생활에 관한 통속소설의 동판화도 눈에 띈다. 우리들은 그 속에서 콩데와 살라자르가 쓴 "여왕 도적"이나 페르난데스와 곤잘레스가 쓴 "호세마리아와 템프라닐레"를 보았다. 서민들은 이와 같은 책을 실제로 즐겨 읽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실들을 그렇게 중시하지는 않는다. 동굴 입구에는 화덕이 있다. 그들은 거기에서 요리를 하거나 식기를 씻으며 또 화장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산사태와 범람과 같은 큰 위험이 동굴인들의 생활을 위협하고 있다. 우리들은 모델로 감옥 부근의 비탈이 무너져 "골포의 여왕"이 깔려 죽은 사건을 상기하고 오싹했다. 호우 때는 가장 용감한 사람마저도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급류가 산꼭대기에서 흘러내려와 여기저기 있는 동굴을 전부 휩쓸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때 급류에 휩쓸린 사람은 급류와 함께 아래로 흘러내려 가야만 목숨을 건질 수 있다. 그렇지만 이와같은 일은 동굴인들의 생활에서 드물지 않게 일어나는 에피소드이다. 동굴 안에서는 남녀노소가 뒤섞여 잡혼 생활을 하고 있는데 내일 밤도, 또 내일 밤도 이토록 슬픈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동굴집은 안전하게 보호받지 못한다. 이곳 사람들이 한 사람이 숨을 쉬기 위해서는 얼만큼의 공기가 필요한지 고려하고서, 그 지식을 바탕으로 만든 통풍망도 막히는 경우가 자주 있다.

스페인을 여행하는 보통사람은 대개 그라나다에 있는 집시들의 동굴집만을 볼 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때 여행자는 소위 집시의 왕이 살던 동굴집으로만 안내된다. 이것은 돈을 잘 쓰는 외래인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때문에 이 동굴집은 집시들이 살던 집의 진짜 모습도 아닐뿐더러, 보통 동굴집의 모습도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 이러한 동굴집에 사는 사람들 쪽이 도시 구석의 더럽고 온갖 병균과 절망의 끊임없는 습격을 당하는 빈민굴로 내몰린 대부분의 프롤레타리아트에 비해서 부러운 사람들로 간주되고 있다. 바르셀로나나 마드리드 거리를 걸어가면서 이런 빈민굴 주택을 한번 본 사람은 진짜 비참함이 어떤 것인가를 목격한 것이다. 스페인의 공업은 대규모적이지는 않으나 그럼에도 부녀자와 어린이들의 지옥같은 상황은 이 나라에도 어김없이 갖춰져 있다. 그와 같은 지옥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한 상황은 스페인에서 태양열이 가장 강하다고 일컬어지는 남부지방의 안달루시아에서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라나다의 유명한 국영 담배공장이다. 그 희생자는 5,000명의 담배공장의 여공들이다. 여공들은 손가락을 재빨리 놀려 날마다 3,000개피의 담배를 말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국영 담배공장을 찾는 사람의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은 소름이 끼칠 정도이다. 길이 500여 피트에 걸터앉아서 담배통을 향해 몸을 앞으로 숙이고 있다. 5,000여 명의 여공들이 오직 이 한 군데 터널 속에서 일하고 있고 수천 파운드의 담배가 작업대와 작업통 속에 꽉 쌓여 있지만, 신선한 공기가 들어오는 통풍창은 하나도 갖춰져 있지 않다. 스웨덴 소설가 안데르센 넥쇠가 최근 "안달루시아 여행기"에서 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그라나다의 이 지옥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어린이들이란, 많은 여공들 옆에 놓여있는 요람 속에서 자고 있거나 놀고 있는 그녀들의 어린아이들을 말한다. 스페인의 가난한 담배공장의 여공들은, 슬프게도, 돌봐줄 사람이 없는 자식들을 공장에 데리고 와서 햇볕 대신에 지독한 담배먼지를 뒤집어씌우고 있다. 이런 상황을 넥쇠는 묘사하고 있다.

거기에는-우리들 바로 앞에 있는 담배상자와 작업대에 반쯤 가려진 아래쪽에는-편편하게 깎은 막대기로 얽어 짠 목제요람이 있다. 그 곁에 앉아 있는 여인은 얼굴이 핼쑥하고 두통을 가라앉히려고 양쪽 관자놀이에 흰 고약을 붙이고 있다. 담배에서 나오는 갈색 먼지가 여인의 머리카락과 요람 안에 있는 흰 이부자리 위에 수박히 쌓여 있는가 하면, 어린아이의 도톰한 볼에는 홍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 어머니의 표정을 보면, 비뚤어진 것 같은 얼굴에 아이가 울 때마다 미소가 나타나곤 한다-그것은 마치 석회를 하얗게 칠한 담벼락이 붉은 태양빛을 머금은 것 같다.

터널을 따라 또 다른 요람들이 늘어져 있다-그것은 모두 40여 개 정도이다. 어떤 요람 속에는 갓난아이가 가만히 앉아서, 마치 담배말이 일을 연습이나 하고 있는 듯 담배를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고 있다. 내가 갓난아이 하나에게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아이는 겁에 질려서 자기 어머니에게 "엄마 저 아저씨 아는 사람이야?"라고 물었다. 옆에 있는 여자들은 큰 소리로 웃었고, 그 아이 어머니는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그곳에는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살고 있는 천사, 곧 저 깊은 하수구 속에서만 번식하는 박테리아가 있다. 그러나 이런 박테리아인들 인간도 그렇듯이 이곳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여기에는 모든 위생학을 조소하면서 3대에 걸친 여인들이 의자에 걸터앉아 4대째 어린아이를 콧노래를 부르면서 교대로 얼르고 있다. 그들은 우리들에게 40세가량 된 어머니를 소개해주었다. 그 어머니는 울고 있는 갖난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이 공장에는 80여 년간 일하고 있는 106세 된 노파도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봉건제도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나타나게 된 부르조아적 자유와 만인의 행복이라는 사상이, 자본주의가 노동자 계급에게 현실적으로 어떻게 살아가도록 했는가를 증명하는 극소수의 기록이다. 나는 이에 관한 예를 산더미만큼 제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와같은 현상, 즉 자본주의가 성립되는 곳이면 어디에서나-오늘날에는 자본주의는 어떠한 벽촌이라도 지배하고 있다-자본주의가 창출한 거대한 부에는 언제나 대중 빈곤이 따르는 것이 그 특징이기 때문이다. 빈곤이 이토록 광범위하게, 또 이토록 놀라운 양상으로 지금까지의 유럽 세계사에 기록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빈곤은 이제 산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자본주의 성립과 더불어 빈곤은 인류의 대부분 인간에게는 모면할 수 없는 대표적인 숙명이 되었다. 부르조아의발전에 대한 보수적인 반대파는 혁명이라는 것이 불러일으킨 광경에 공포감을 부여하기 위해서 프랑스 대혁명의 공포를 수천에 달하는 그림과 문장으로 묘사했다. 확실히 부르조아 국가는 온 몸에 피의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부르조아 국가가 피의 세례를 받아 피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대공업의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뻘이 되는 우리의 상업 자문관이나 은행장은 결코 고상한 부류의 인간들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무지한 자나 위선자만이 혁명의 공포에 대해서 이른바 "마음속의 깊은 분노"를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프랑스 혁명이 낳은 무서운 행동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프롤레타리아트의 육체를 야금야금 갉아 먹고 수십 년에 걸쳐 대공업의 변혁과 발전이 제멋대로 난폭하게 굴었던 행동에 비하면 마치 어린이의 유희와 같은 것이었다. 기요틴"단두대"도 전부 5,000명에도 못 미치는 사람의 목을 잘랐지만, 근대자본주의, 즉 오늘날 거대 자본은 긴 세월에 걸쳐서 인류의 5분의 4의 뜨거운 피를 빨아 먹으면서 이룩된 것이었다.

그런데 행여 독자들이 봉건제도의 신봉자를 끌어내어 그에게 농촌의 목가적인 상태를 바리새인처럼 지껄이게 한다면, 지금까지 얘기한 것은 불충분할 뿐 아니라 새빨간 거짓말이 될 것이다. 만약 독자가 농업 노동자의 운명은 절망적이지만 그렇게까지 지독한 상태는 아니라고 말씀하신다면 그것은 말하자면 극단적인 특징이 아닐 것이다. 이 경우에도 주택상태만 들어 얘기해도 충분하다. 농업노동자의 주택상태는 어떤 묘사라고 모조리 일축해버릴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앞에서 인용했던 헌터 박사가 1865년에 실시한 주택조사보고서에 나오는, 짧지만 모든 상황을 말하고 있는 다음에 열거한 세 가지 증거만으로도 충분하다.

버크셔의 예는 이렇다.

8가에서는 집 한 채가 임대된다. 이 집은 폭이 7피트, 높이가 14피트 6인치, 부엌 높이가 6피트이다. 침실에는 창이나 난로, 출입구도 없을뿐더러 통풍창도 없다. 마당 한 뼘도 찾을 수 없다. 얼마 전까지 남자 한 사람이 다 큰 딸 둘과 아들 하나와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 이들과 아버지가 한 침대에서 잤으며, 딸 둘은 복도에서 잤다. 이 가족이 여기서 살 때는 딸 둘에게 아이가 하나씩 있었는데 딸 하나는 해산하기 위해 "구호원"에 가서 아이를 낳고서 다시 돌아왔다.

베드포드셔의 예는 이렇다.

조사한 17채 가운데 4채에는 침실말고도 방이 많았지만, 역시 사람들이 초만원이었다. 오직 잠만 자는 비좁고 누추한 집안에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있는 어른 3명과 6명의 아이들이 있는 부부 1쌍이 살고 있었다.

성홍열이 휩쓸던 당시를 묘사한 버킹검셔의 예를 보자.

열병에 걸린 젊은 여자가 밤에는 한 방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 여자의 사생아인 남자아이 둘, 남동생 둘, 그리고 여동생 둘, 그 여동생들의 사생아 둘, 해서 모두 10명과 함께 자고 있었다. 몇 주 전만 해도 이 방에서는 13명의 아이들이 누워잤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는 예외적인 것이 아니다. 헌터 박사의 보고는 아느 페이지나 모두 같은 어조이다. 그리고 독일의 경우는 지금도 같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농장고용주가 농업노동자들에게 허용한 공기와 음식물은 그들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최저량뿐이었다. 그리고 교육의 경우도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교육밖에 허용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것은 실제로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다. 이에 대한 증거로는 동엘베 의회에서 농장 출신의 국회의원이 최근 농촌지방에 보습학교를 설립하는 데 반대하면서 행한 연설이 있다. 그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들은 보습학교를 통하여 특별히 견실하고 근면하고 열성적인 인간을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훌륭한 생각이십니다. 그러나 나는 국민경제력이라는 것이 가능한 한 높은 교육수준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의견에는 찬성할 수 없습니다. 어느 정도의 교육은 필요하겠지만 너무 많은 교육은 오히려 해가 됩니다. 청년들은 고전학에 대한 교육을 받으면 곧 육체노동을 하려 하지 않습니다. 특히 나 같은 지주들은 3명 또는 5명 이상의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들이 더 이상 일을 하지 않으려 하게 되어 신경이 쓰입니다. 원래 소학교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지식을 가르쳐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육체노동을 해서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는 데도 종교 외에도 산수나 읽고 쓰기까지 배우려는 인간은 마치 지식계급인 것처럼 행세합니다. 농촌에 필요한 것은 육체노동입니다. 육체노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머리에 많은 지식을 집어넣어야 합니까? 나로서는 그 이유가 전혀 이해되지 않습니다. 청년들은 여러 가지 도구에 대해 너무 많이 알지 않는편이 더 행복합니다. 현대와 같이 인본주의적인 이상이 만연해 있는 한 이 세상은 자 ㄹ되어 나가지 못할 것입니다. 청년들의 방종을 주먹으로 억눌러서 단념시키지 않으면 무엇 하나 만들 수 없습니다. 만약 교사들이 청년을 단념시킬 수 없다면 그 교사는 피소되어야 합니다. 그 때문에 교육계에서는 이러한 주먹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만약 집행권을 가진 국가권력에 그들을 세게 억눌러도 된다는 권리가 주어진다면, 보습학교 따위는 필요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의 신께서는 이 세계를 지배하시고, 곤봉은 인간을 지배합니다.

이 연설은 결코 독창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최고의 법률로서 어떤 것은 박차를 가지고 태어나며, 어떤 것은 채찍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선언한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애용했던 변함없는 처방전이다. 그렇지만 이 처방전도 사실상 그 외의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역시 그 처방전은 의회의사록으로서의 문화사적인 가치가 있다. 그것은 너무나 노골적이었다는 장점만을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 연설은 아주 최근에 있었던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측면에서와 마찬가지로 성적 측면에서도 관념이 그 반대로 완전히 전화하는 것이 근대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논리가 되었다. 나는 이 반대물, 즉 앞에서 얘기한 바 있는 부르조아적인 성사상으로서의 일부일처제를 이상으로 하고 그 이상에 열광하는 정열적인 연애가 현실적으로 마침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대표적인 실례를 들면서 이야기하려 한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하게 설명할 생각이므로 여기서는 대략적인 윤곽만을 말하고자 한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선각자가 가진 최고의 성사상과 부르조아 시대에 나타난 실질적인 연애행위 사이의 모순으로부터 자보주의적 도덕의 본질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결론을 내릴 떄 다시 서술할 것이다.

사물의 발전이 어떻게 해서 각 방명에서 즉각적으로 반대물에 이르렀는가를 파악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부르조아 시대에는 어떤 형태의 방탕이든 예비되어 있으며 성에 관한 모든 악덕 역시 예비되어 있다. 사람들은 특이한 방탕의 양상을 더욱더 음란하게 묘사할 수 있기만,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의 두 극, 즉 상류층에도, 하류층에도 해당된다. 다른 한편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발달함으로써 성적 측면에서 나타나는 무서운 악덕이나 범죄를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에 의해 설명하지 못했다-부르조아 시대에는 아무리 세련 되었다 할지라도 결국 그 결실을 맺을 수 없었던 앙시앵 레짐 때와 같은 방탕 따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을 곧 인식하게 된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적 발달로 인해 결과적으로 전혀 다른 현상이 나타났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으로써-최초의 현상에서부터-대규모로 부를 축적해나가게 된 자본가라는 계급은 온갖 사치스러운 향락에 빠질 기회를 가지고 되었다. 자본주의 이전 시대에는 권력을 장악한 전제군주와 대금융자본가나 부유한 궁중 귀족들만이 향락을 누렸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향락을 누렸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절대주의 시대에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기껏해야 200명 정도의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었던 것을 오늘날에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즐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수십만의 사람들이 이처럼 극도로 사치스럽고 에로틱한 대접을 받게 되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함께 각국의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서, 마치 서로 상의나 한 듯이 힘이 미치는 한 세련된 에로틱한 방탕에 빠지고 싶다는 욕망이 나타났는데 그것은 갈수록 나날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 확실히 이 욕망은 최후의 욕망이다. 수백만에 달하는 대중을 마치 미치광이처럼 혹사시키기 위해서는 비상하게 머리를 굴려야 했으므로, 그들은 그 배출구로서 매우 강력한 마약을 탐하게 되었다. 순진한 양치기가 지은 전원시 따위는 혼란해진 신경을 진정시키지 못했으며, 순화시키지도 못했다. 더구나 새로운 자극을 주지도 못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지극히 일시적인 향락만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세련된 사랑의 진수성찬을 먹고 싶어하는 대중적인 요구에 의해서 이 방면에도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된 영업이 대두되어 아주 광범위한 요구까지 충족시켜주게 되었던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특별히 에로틱한 향락을 맛보고자 하는 행위는 손님들로서는 이제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이것 또한 커다란 요구였다. 그들은 언제나 어떠한 향락이든지 맛볼 수 있었으며, 또 맛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즉 그들은 이전부터 연애도 일종의 상거래라고 생각하고서 포목을 사고팔 때와 같이 거리낌 없이 돈을 지불했다. 최고의 자연력이라면 몰라도 인간의 힘 따위로는 도저히 이 영업의 외적인 정당성을 파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문제의 바탕에도 자본주의발달의 결과,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관계에서 이상적인 광채가 조직적으로 잘려나감으로써 그 관계가 금전 수수관계로 변질되어버렸다는 전제가 분명히 있었다. 여자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 모두 가격이 매겨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아무리 변덕스럽더라도, 가령 그것이 아무리 터무니없는 것일지라도, 정확한 가격을 여자에게 매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물에는 마찬가지로 빈틈없이 "가격"이 붙어 있었다. 때로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 있었지만 반드시 "가격"은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어떤 욕망을 채우고 싶다는 것은 자기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한가라는 문제가 된다. 그것이 최후의 결론이다. 오늘날에도 자신의 변덕을 충족시키기 위해 돈을 지출하는 사람은 어떠한 변덕이라도 충족시킬 수 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예는 실제로 많이 있다.

어떤 대부호가 파리의 거리나 볼로뉴 숲이나 다른 곳에서 품위있는 숙녀를 만났다고 하자. 이 대부호는 그 숙녀를 보는 순간 욕정이 도발되어 손에 넣고 싶은 욕심이 끓어오를 것이다. 그것은 그 여자와 결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음란하게 즐기고 싶다는 마음 하나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부호는 대개의 경우 그 숙녀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설령 상대방 숙녀가 결혼한 사람이거나 상류계급 여자라고 하더라도 어김없이 "가격"이 항상 붙어 있기 마련이니까. 상대방 여자에게 관심을 둔 신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밀회의 집을 정하고 거기에 속달우편을 보내는 일이다. 오늘날의 파리에서 이런 장소가 90 내지 100개 정도 있는데 여자에게 정신을 빼앗긴 신사는 그 여주인에게 자기의 주문과 자기는 상대방 여자에게 얼마나 돈을 내어야 하고 그녀는 어느 정도 요구할 것인가를 문의한다. 이 신사의 요청을 받은 여주인은 모든 것을 최대한 짧은 시간에 처리해준다. 이것이 유감스럽게도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한 기록이 증명한다. 프랑스 저술가 모리스 탈메르가 수년 전에 폐지된 파리 조사국의 국장 포바로의 요청과 후원하에 이러한 밀회의 집에 관해 조사해서 최근 발표한 대규모의 조사서는 이와 같은 뚜쟁이의 행동과 상황을 극히 상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모시스 탈메르는 면회인에게 아무쪼록 필요한 내부사정을 확실하게 파악하고자 미리 여주인들에게 부탁해놓은 경찰국 고급간부의 안내를 받으며 이러한 밀회의 집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두 개의 실례를 들었는데 그것은 일정한 금액을 치르면 "어떤 주문이든 틀림없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가장 고급스러운 밀회의 집 중의 하나를 경영하는 여주인은 다음과 같이 그 자초지종을 밝히고 있다.

최근에 어떤 신사분이 어디어디에 사는 숙녀와 알고 지내고 싶다면서 저희 집으로 찾아와서, 만약 필요하다면, 자기는 4만 프랑까지는 낼 수 있다고 저에게 부탁했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숙녀를 찾아가서 제 명함을 건네주었지요. 그 숙녀는 저를 만나주었지만, 무척 기분 나빠했습니다. "어디 사시는 누구인지요?" "당신은 제 명함을 보시지 않으셨는지요?" "보았어요. 그렇지만 댁의 명함 따위는 저에겐 관심도 없답니다." "부인, 실은 저에게 친구들이 있는데요, 그쪽에서 당신과 어떻게든 가까이 지내고 싶다고 말씁하셨어요. 그분은 돈을 아주 잘 쓰시는 분이랍니다." "당신은 도대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는 것인지? 나로서는 모르겠군요. 또 당신이 무슨 일로 우리 집을 찾아오게 되었는지도 저는 전혀 모르겠네요." "실례합니다만, 당신은 제 명함을 가지고 계신가요?" ",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당신은 가지고 계신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입니다...만약 사정이 허락하신다면, 저에게 편지를 해주세요. 실례했습니다, 부인." "안녕히 가세요, 부인." 그로부터 8일째 되는 날 편지가 왔습니다.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백화점의 독서실로 나오시기를 바란다고 썼더군요. 제가 그곳으로 나가자 그 부인은 내 얼굴을 보면서 뻔뻔스럽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부인, 일전에 저희 집에 오셨을 때, 부인께서 매우 관대한 말씀을 하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께서 그때 저에게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저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어요. 괜찮다면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주실 수는 없으신지요." "부인, 사실 저에게는 친구가 있어요. 그쪽에서 14,000프랑을 낼 수 있다고 하십니다." ", 제가 한번 생각해보겠어요. 부인, 그럼 실례하겠어요." "안녕히 가세요, 부인." 다시 8일이 지나 그 부인에게서 편지가 왔는데, 저는 그 부인을 만나서 물었습니다. "부인, 생각해보셨어요?" 그러자 부인은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생각해봤어요, 부인. 그 정도로는 너무 싼 것 같군요." ", 그러면 그 신사분에게 말씀드려보겠습니다." 그래서 그 거래는 2만 프랑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또 다른 밀회의 집의 여주인의 다음과 같은 말도 앞의 것과 전혀 다름이 없다. 이 경우 면회자 모리스 탈메르는, 남자 손님들이 상대방 숙녀가 어떤 여자인가를 항상 알고 있는가에 대해 우선 물어보았다. 이에 대한 답은 다음과 같다.

"그게 바로 문제이지요...일반적인 거래에서는 결코 이름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되어있답니다. 그렇지만 소위 값비싼 거래에서는 상대방 여자의 이름을 언제나 말씀드리게 되어있지요. 말씀드린다는 것은 이 경우 이름이 가격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사정에 따라서는 거래는 이름만으로 좌우되기도 합니다. 가령 어떤 손님이 저희들을 통해서 어디어디 사는 숙녀와 가깝게 지내고 싶다고 주문을 하는 경우가 여기에 해당하지요. 손님들은 종종 우리들에게 사교계 숙녀와 함께 값이 매겨진 숙녀들 집으로 가게 됩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이중의 방법으로 일을 처리해 나갑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이 되는 숙녀들에게 여주인 집에 고용되어 있는 정보를 담당하는 여자를 붙여놓든가 아니면 직접 우리들이 맡는답니다. 우리들은 대개의 경우, 사냥개에게 일을 명령하게 되는데 매일 아침마다 그 숙녀의 집을 찾아가게 하지요. 명령을 받은 사냥개 여자는 눈에 띄지 않게, 기껏해야 주문품울 보낸다거나 주문을 받아오든지 하며, 오직 마담하고만 얘기하고 용무를 듣는 정도로 관계합니다. 그런 여자는 어차피 만나주지 않거나 우리집 개가 그 여자와 부딪친 곳에서 쫓겨나는 정도가 고작이에요. 일반적으로 그런 여자는 만나주질 않지만, 만나주지 않는다거나, 우리집 개가 그 여자 집에서 쫓겨났다 해서 실망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죠. 이런 일은 결국 가격문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은 여염집 부인들을 상대할 때는 다른 방법을 쓰지요. 그래도 주머니에 돈이 가득 들어있는 양반들은 그런 여자에게도 예사로 다가갑니다. 이런 숙녀들도 값을 너무 낮게 얘기하면 얼굴을 붉히지만, 값이 높을 때는 부끄러움 따위는 그다지 문젤 삼지 않더군요...그 다음에는 제가 직접 나서서 세련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저는 예를 들어 그 숙녀가 어느 양장점을 잘 가는지를 조사합니다. 그리고 나서 그 양장점 주인과 얼굴을 터놓게 되죠. 그런 뒤에 점 찍어놓은 숙녀가 양장점에 있을 때에 일부러 들어가서 그쪽과 이런저런 잡담을 주고 받습니다. 저는 그 숙녀의 화장맵시를 입이 닳도록 칭찬하고 한술 더 떠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얘기 틈틈이 예의 그 이야기를 끄집어낸답니다. 그리고 이쪽 계획에 양장점 마담을 끌어넣는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담이 저의 뜻대로 행동하지 않을 때는 양장점의 가게 아가씨를 언제나 이용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제가 직접 맞대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가게 아가씨가 상대편 숙녀에게가 얘기를 건네줍니다." "그러면 가게 아가씨는 그때 어떤 얘기를 하게 되지요?" "언제나 돈 얘기이죠. 가게 아가씨는 그 숙녀에게 눈에 확 띌 정도로 화장하게 한 뒤에 저와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줍니다. 그쪽에서 가격을 딱 부러지게 얘기하지 않을 때는 아가씨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가격을 정하려고 애쓰지요. 여자에게 이쪽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 때는 적어도 당분간만은 가게 아가씨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말도록 합니다. 말이 통했을 때는 그곳에서 즉시 거래가 이루어집니다. 그외에 그 여자가 자동차를 가지고 싶다고 희망할 때는 우리들은 그쪽과 연락을 취하기 위한, 실제로 목적한 대로 구실이 생기게 됩니다. 이럴 때 저는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서 그 숙녀의 집을 방문합니다. "부인, 실례하겠습니다. 어떤 분께서 나에게 부인의 자동차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나 역시 자동차 하나를 가졌으면 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답니다. 나는 부인께서 가지시려는 자동차에 최신식 장식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이쪽에서 바라고 있는 일이니깐요, 부인." "그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더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주시면 고맙겠군요"-그래서 서로 알게 되면, 이번에는 한발 한발 구체적으로 들어가 대강 이야기가 마무리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오늘날에는 돈만 내면 어떤 여자든지 항상 당신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돈만 많이 내겠다고 마음먹고 계신다면 그런 여자와 서로 알고 지내기 위해서 사용하게 될 어떤 방법이든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돈을 조금밖에 내지 않는다면, 아무리 훌륭한 방법도 소용이 없을 거예요. 한번 시도해볼 작정이시라면 2만 프랑을 큰마음 먹고 내보세요. 그러면 어떤 여자든지 당신의 말을 받아들일 테니 주먹다짐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산보할 때, 처음으로 말을 걸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목적한 일을 순서대로 진행시키는 것이지요. 예를 들면 나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제 남자 손님들 중에 2만 프랑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요. 그쪽은 1개월 내에 그 돈을 건네줄 수 있답니다." 저는 상대방 숙녀에게 이 사실을 미리 알려주기 위해서 그 돈을 준비해두어야 하지요. 그래도 부인이 거절하게 되면 제 고객은 더욱더 진지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름진 한아름의 선물은 여자에게 무척 매력적인 것이죠.

세 번째 실례는 이러한 사소한 신소리와는 달리 더 많은 돈이 자본이라는 자석으로부터 즉시 내던져지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어떤 밀회의 집의 여주인은 모리스 탈메르에게, 자기가 고객에게 다리를 놓았던 상류층의 아름다운 미국부인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어떤 방법으로 주선했는가 하는 질문에 여주인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이 미국부인은 미국의 어떤 공장주의 부인이었답니다. 남편은 부인과 별거 상태에 있었지만 매년 10만 프랑씩 보내주고 있었죠. 저는 어떤 돈 많은 미국인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값에 그 부인이 허락할 것인지를 물어보고 와서 시원스럽게 얘기해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부인이 10만 프랑을 요구하자 남자측은 주저않고 10만 프랑을 냈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남자는 기혼의 부인과 즐기는 것이 매춘부와 관계하는 것보다 더 즐겁기 때문에 이러한 향락을 위해 큰 돈을 낸다. 그 때문에 수백만 기혼여성은 조직적으로 그러한 "거래"를 하려고 작심한다. 어떤 부인은 매주, 또 어떤 부인은 일년에 몇 주일만 거래를 하는가 하면 또 어떤 부인은 될 수 있으면 자주 거래하려 한다. 조직적으로 이러한 "거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부인에게는 앞에서 얘기한 내용에, 정확히 말하면, 앞에서 인용한 실례에 더 덧붙일 내용이 있다. 이 점에 관해 질문했을 때, 탈메르는 다음과 같은 실정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인이 밀회의 집에 넘어간다는 것을 믿어도 큰 무리가 아닐 거예요. 만약 당신이 정말 그 속사정을 알게 되면, 깜짝 놀라겠지요. 이런 부인들은 대부분 돈 때문에 우리집에 오게 됩니다. 저는 소위 이런 부인들에겐 은행가와 같은 입장이라 할 수 있죠. 저는 5만 프랑 이상의 이자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1,000프랑의 돈에도 곤란을 받고 있는 부인을 알고 있지요. 어떤 부인은 500프랑의 돈에 곤란을 받기도 한답니다. 이런 부인들은 항상 돈 얼마 때문에 우리집에 계속해서 오게 되죠. 제 경우 밤에 집에 있는 날은 1주일에 2번밖에 안 됩니다. 그런 날 밤에는 부인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오지요. 부인들은 저에게 자기가 바라는 것이나 자기에게 부족한 것, 또 어떤 어떤 종류의 거래가 자기에게 가장 적당한가를 귀띔해 준답니다. 만약 당신이 그 이야기를 듣게 되면, 깜짝 놀라실 거예요. 이런 부인들은 어떤 상대방이든 언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상대방이 처음에 우리 집으로 찾아오시면, 무엇보다 먼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한 달간만 거래하고 싶소. 어쨌든 돈은 있소. 그렇지만 그다지 많진 않아요. ...그 정도면 괜찮겠소?" 상대할 부인은 얼마가 지난 후 차 마실 시간이 되면 얼굴을 내밀고 탁 털어놓고 말한답니다. "제가 어느 정도를 원하는지 당신에게 말씀드리겠어요. 1개월에 2번 정도는 집에서도 무방해요." 그리고 나서 얼마 안 있어 다시 만나게 되지요. "이번은 가격이 너무 쌌어요. 그래서 거래가 이뤄지지 않았어요. 어쨌든 더 바란 것이죠. 나는 당신과 매주 거래를 하고 싶어요." 마침내 부인들이 궁지에 물려서 하루에도 두 번씩 매춘을 합니다. 그렇더라도 이런 부인이 바라는 것은 약속한 대로 많은 돈을 받는 것입니다. 현찰을 보게 되는 순간에 부인들은 곧 허락하게 되지요.

이런 부류의 부인이라고 해서 계급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아래로는 비참한 소시민의 아내나 하급공무원의 아내로부터, 위로는 최상류 사회의 부인까지 있다. 부인들은 이런 방법으로 적자를 메우거나 애인을 뒷바라지할 돈을 조달한다. 탈메르의 조사는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표현대로 "상거래"를 하는 기혼여성이 많다는 사실에 관해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그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서 그 결과를 "사회 밑바닥"이라는 책에서 증명했다. 나는 이점에 관한 확실한 증거로서 저자 탈메르와 앞에서 인용한 파리 조사국의 국장 포바로 사이에 이루어졌던 대담을 인용하고자 한다. 이 대담에서 포바로 국장은 탈메르에게 나름대로의 연구는 어떤가를 경찰의 기록에서 두 가지 이전의 예를 들어 설명했다.

포바로 국장은 나에게 "당신은 사교계에 자주 나갑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닙니다." "그럼, 당신은 사교계에서 자주 눈에 띄는 사람들도 모르고 계시군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습니까? 잠깐만..." 그는 벨을 눌럿, 들어온 직원에게 어떤 서류를 가지고 오도록 지시했습니다. 가지고 온 것은 커다란 서류철이었습니다. 그는 그 서류철을 펴서 커다란 사진 한 장을 끄집어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내게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알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모르겠군요." "잘 알겠습니다." 그것은 무도회 옷을 입은 젊은 부인의 사진이었지요. 그 부인은 귀티나느 용모의 뒤어난 미인으로 갈색 머리에 푸르스름한 깃털을 꽂고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걸고 있었습니다. 고운 손에는 부채를 펼쳐 들고 있었으며, 공원을 배경으로 벤치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포바로 국장은 그 사진을 다시 한번 자기 쪽으로 끌로 당기면서 말을 이었지요. "보시다시피 이 여자는 사교계 부인입니다. 이 부인은 한 번도 사회적 지위를 잃은 적이 없었으며 한번도 스켄달에 휘말린 적이 없답니다. 그녀의 주위는 상류 출신뿐입니다. 매우 총명하고 이지적이며 예술적인 재능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열 따위는 물론이고 죄악시하는 마음도 없는 데다 더구나 도덕심은 조금도 없습니다. 원래 자기 행실이 탄로 나면 볼 면목이 없다고 느끼게 마련이지만. 이 부인은 정말 도덕적 관념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이 부인은 어느 유명한 뚜장이와 함께 요사이 부쩍 얘기되는 상거래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부인과 한 번 거래하려면 1만 프랑 이상이 든다는군요. 참으로 비싼 가격입니다. 대개 1년에 3,4회 상거래를 한답니다...회수도 그리 적지 않은 셈이지요. 그렇게 해서 뚜장이는 2,000프랑, 그 부인은 8,000프랑 이상을 받는 것입니다. 1년에 평균 25,000프랑 내지 3만 프랑의 수입이 되지요. 이 돈은 이 부인의 1년 예산에서 적자 나는 돈과 꼭 일치하는 금액입니다. 그 수입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므로 부인은 자기 재산에 땡전 한 푼도 손을 대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파리 조사국 국장의 보고에 따르면, 중산층의 월급쟁이마저 "적자 메우기"를 위해 이러한 방법을 쓰고 있다고 한다. 더우기 포바로는 탈메르에게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상거래를 한다."라는 말이 어떤 계급의 바람둥이에게 무엇을 제공하고, 그 결과 어떠한 타락을 초래하는가를 여자들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신이 이따금 아무 호텔이나 그 수부에서 한 시간가량 머물기만 하면 참으로 아름답고 애교 넘치는, 정말 호감이 가는 부인이 그곳에 얼굴을 내미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더구나 수위가 그 부인에게 가장 신성한 서약을 하는 것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여자는 어느 회사원의 부인으로 자녀도 있으며 부부 사이도 좋고 교육도 받은 인텔리 여성으로서 가문도 상당히 좋은 집안의 출신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도 흠잡을 데도 없고 모든 것이 예의 바릅니다. 이 부인은 수부에서 아주 교묘한 인사를 받게 됩니다. 당신은 이 아름다운 부인이 무엇을 할지 물론 모르시겠지요? 부인은 밀회의 집에서 온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밑바닥의 밀회의 집에서도 주문이 오면 하루에 서너 번 이상 상거래를 합니다-이 부인은 월급쟁이의 전형이랄 수 있는 남편의 양해를 얻어서 매춘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아마 한 번 정도는 그 부인과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그 부인과 잡담이라도 하게 된다면, "참으로 성실한 여자로구나."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녀의 남편이 회사에서 고객을 상대로 해서 사무를 처리해나가고, 사무에 열중하는 모습을 본다면, 당신은 "참으로 건실한 사람이로구나.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한 사원이군." 하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당신이 그 부인의 집을 방문해본다면, "부부 사이가 참으로 좋구나." 하고 느낄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 사이에는 잡음도 없고 스캔들 도 없으며 나쁜 습관이나 비열한 근성을 연상시킬 만한 것도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 바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좀 더 깊이 관찰해본다면, 제가 말씀드린 것이 사실이라는 점에 동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부인은 그토록 여러 남자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우리 조사국의 내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여유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사교계 부인이나 정숙한 부르조아 부인은 상거래 대가로 도대체 어떤 일을 요구받게 되는가? 우리들에게는 이 의문이 아직 남아 있다. 대답은 이렇다. 남성의 부패한 욕망이 직업적인 매춘부에게 요구하는 행위를 그대로 전부 행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교계 부인이나 부르조아 부인은 절제를 모르는 변태자의 변태나 욕망까지 빈틈없이 채워주게 된다. 사실의 핵심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추어 부인과 직업적인 매춘부가 취하는 태도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어느 뚜장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당신은 아마추어와 프로 사이에 전혀 다른 것이 없다는 점을 인정하게 될 거예요. 우리 집에 드나들게 되면 그 순간부터 상류계급 부인과 비천한 매춘부 사이에는 전혀 구별할 것이 없어집니다. 아니, 오히려 중대한 차이가 생긴다고 해야겠군요. 아마추어와 프로를 비교해보고, 아마추어 부인 쪼깅 더 좋다고 하는 것이 이상하더군요. 저는 사교계 부인은 정숙하다는 말에 어울리는 그런 부인을 본 적이 없답니다. 정숙 하다는 것은, 그런 부인들에게는 참으로 좋은 말입니다. 그렇지만 사교계 부인은 정숙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도 싼 부인들은 이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알고 있지요. 직업적인 매춘부 중에는 양심의 가책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을 우리들은 자주 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아마추어 부인들에게서는 그러한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이 전혀 없는 것 같더군요. 저는 단골 직업여성이나 여배우들에게 호출 편지를 보내지만, 상대는 대개 거절합니다. 그러한 여자들은 저에게 "역시 싫습니다. 그런 일은 저에게는 너무 어처구니없는 일이군요.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라든가 "지금 한창 연습 중입니다. 어제 출연이 있었고. 물론 오늘도 출연해야 합니다. 내일은 낮공연에 나갑니다. 호의는 감사합니다만, 거절하겠습니다."라는 답을 보내옵니다. 그러나 아마추어 부인, 특히 사교계 부인은 어떤가요? 이들은 필요하다면, 특별열차를 타고 와서 당신과 즉시 오후의 반나절 동안 두세 번이나 상대하고 가겠지요.

포바로 스스로도 "사교계 부인들만큼 상거래에 열심인 여자들은 정마 없습니다. 남자들은 이런 부인들에게, 일반적으로는 가장 타락한 매춘부에게만 요구할 수 있는 것조차 거리낌 없이 요구하죠. 오히려 사교계 부인들 쪽에서 가장 음탕한 성교를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여자 쪽이 더 적극적이라는 점과 더불어 호자 쪽이 이치에 맞다고 말했다. 이른바 정숙한 부인을 상대한다는 묘미의 극치는 바람둥이에게는 그녀와 이 세상에서 가장 외설적인 유희를 한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근대적인 에로틱한 방탕으로, 이와는 다른 특수한 면이 영국에서 드러나고 있다. 소위 처녀성 파괴광이란 것이다. 영국에서는 처녀성 향락이 가장 인기 있는 미식이다. 그러나 이런 목적으로 어린 처녀, 특히 솜털도 벗지 않은 소녀를 유혹하는 행위는-"영계"는 모두 탐내는 것이기 때문에-돈을 잘 쓰는 많은 남자들에게도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상대방이 아이여서 길들이기 쉽다는 점은 별도로 하고, 그들에게는 유혹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특히 문제가 되는 서민층과의 직접적인 연락이 필요 없다. 더구나 이외에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런 유의 향락을 1번만이 아니라, 1년에 1번만이 아니라, 설령 1주일에 1번씩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2주일에 1번씩은 맛보기를 원하고 있다. 따라서 영국에서는, 유혹의 수고를 책임지고 떠맡아서 모든 고객에게 언제라도 일정한 가격으로 온갖 처녀들을 제공하는 합법적인 산업까지도 나타났다. 이러한 처녀들은 상대방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며, 또한 이름도 알지 못하는 자기 손님에게 언제 어느 때라도 처녀성을 바칠 수 있도록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와 같은 산업은 손님으로부터 특별한 주문이 있으면 처녀를 강간용으로도 제공했다. 이 경우, 대산이 되는 처녀는 저항은커녕 손님의 놀이개가 되어버린다. 이러한 주문이 쇄도하자 영국에서는 처녀공급이 구매자의 안전과 이익을 위해서 명실공히 도매업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그 덕택에 처녀를 사는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번호", 연령, 맵시, 금발머리, 갈색머리, 또는 자기 기호에 맞는 여러 종류의 처녀를 손에 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여자들은 육체적으로 아직 한 번도 남자와 접촉해본 적이 없는 정말 이름 그대로 "아다라시"라는 의사의 증명서까지 구매자의 손에 쥐어준다.

나는 이러한 처녀라는 상품을 취급하는 대산업적 조직에 대해서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폴 말 가제트"의 편집장이며, 유명한 평화주의자인 스테드 씨가 1884년에 켄터베리 대주교와 두 명의 그 교회 수뇌부의 후워하에 실시했던 치밀한 조사이다. 스테드씨가 자신이 수집한 엄청난 조사의 놀라운 결론을 "근대 바빌론에서의 처녀공물"이라는 제목하에 "폴 말 가제트"에 발표함으로써 전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것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스테드 씨는 이 조사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처녀능욕, 우리가 문제로 삼는 이 부분을 마치 냉정한 철학적인 연구처럼 담담하게 서술하는 것은 아주 냉철하고 매우 과학적인 관찰자로서도 힘든 일이다. 면밀하고 일관성 있는 조사에 의해서 가까스로 밝혀낸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독자에게 심각한 불쾌감을 줄 것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문제에는 가장 명백한 증거뿐 아니라 어떤 증거라도 의심하는 회의주의로써 접근하는 것이 한층 더 필요하다. 놀라운 사실이란, 우리나라에서 하나의 매춘조직이 광범위한 조직망을 펴고 있다는 점이다. 처녀능욕은 그 조직에서 가장 흔히 일어나는 사건이다. 상대 처녀는 대부분 미성년자로서 범죄가 무엇인지도 모를 정도로 나이가 어리며 자신의 의지라는 것을 가지지 못한 희생자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능욕을 저지른 자라도도 완전 범죄가 되어버린다. 모든 일이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진행되어 아직 그러한 범죄가 실제로 용이하게 일어날 수 있다는 증거를 잡지 못한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이다.

어떤 처녀는 간단히 올가미에 걸려들어서, 어떤 때는 술에 만취되어, 또 어떤 때는 자물쇠가 잠긴 방 안에서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하다 마침내 처녀성을 강탈당해버렸다. 이런 경우 힘이 약한 쪽이 지는 것은 당연하다. 어떤 처녀는 합법적으로 알선되기도 한다. 여자들은 두당 얼마씩이란 식으로 팔리든가 아니면 이런저런 미끼를 거록 재앙의 방에 감금되어 처녀들이 생명보다도 더 고귀하게 생각하는 것을 강탈할 때까지 상대방 남자는 그 방에서 처녀를 내보내지 않는다.

더욱이 이런 사업을 하는 기업가는 탄로 날 위험이 전혀 없다는 점도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이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런던의 범죄자들의 생활 전모에 관해서 매우 정확한 정보를 손에 쥘 수 있는 지위에 몇 년간 근무했던, 아주 능력이 뛰어난 공무원 한 사람과 이에 관해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를 정중하게 안내해주던 어느 상류층 저택의 수위가 다너러 아직 유혹당한 적이 없는 처녀가 필요하다면 알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돈이 든다고 했습니다만 사실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실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나는 "얼마 정도입니까?" 하고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은 "그건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 스코틀랜드 야드에게 제가 직무상 우연히 알게 된 사건이 있습니다. 이때는 그런 사람들이 협정가격이 20스털링으로 정해져 있었습니다. 람베스에 사는 사람들은 그 정도의 돈으로 딸 같은 처녀들을 빈민가에서 사들이는 상거래를 합니다. 이 같은 거래가 런던에서도 번창일로에 있다는 사실은 틀림없습니다." 나는 그러나 "그런 처녀들이 이런 상거래를 스스로 원합니까. 아니면 하는 수 없이 끌려갑니까?" 라고 질문했다. 그 사람은 나의 질문에 깜짝 놀란 얼굴을 하고서 큰 소리로 "스스로 원하는 처녀는 극히 드물죠. 대부분의 처녀들은 자기가 어떻게 되는지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당황해서 "당신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즉 법률적인 의미의 강간이 처녀들에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고 물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무의식중에 말하고 있었다. "그럴 것을 생각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마 악마까지 분개하게 만들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생각은 악마도, 가까이 있는 사람들도 분개시키지 않아요. 가난한 집 딸 따위가 아무리 아우성쳐도 소용없습니다. 누가 누굴 죽일 작정을 하면 살해당하는 남자나 여자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기껏 2분 가량입니다. 아무리 걸어도 5분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파출소에는 항상 경철이 있지 않습니까?" "경찰에게는 설령 그런 소리를 들억도 간섭할 권리가 없습니다. 만약 경찰에게 여자의 비명이 들리는 집으로 들어가도 좋다는 권리가 있다면, 경찰은 의사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해산을 할 때라도 언제나 입회해도 좋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 집으로 끌려 들어간 처녀를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당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능욕은 범죄로서 법률이 의당 처벌해야 합니다. 처녀 쪽에서 소송을 할 수는 없습니까?" "처녀 쪽에서 어떻게 상대방을 법률적으로 고소할 수 있습니까? 여자는 상대방의 이름을 전혀 모릅니다. 가령 여자가 길을 가다가 상대방과 우연히 마주쳤다 해도, 여자는 그자의 얼굴을 기억할 수도 없죠. 여자 쪽에서 바로 그 사람이라고 말해도 누가 그것을 믿어줄까요? 처녀를 강탈당한 여자는 그것만으로는 언제나 확실한 증거를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즉 여자가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다는 사실은 결국 그 여자가 합의해서 그런 일이 저질러졌다는 증거가 되어버립니다. 대저택의 수위나 고용인은 그 여자가 합의했다고 증언해버릴 것입니다. 그들은 비명소리 따위는 전혀 듣지 못했다고 증언할 것입니다. 결국 너는 모험을 한 여자다라는 판결이 내려지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런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까?" "여전한 실정입니다. 남자가 돈을 가지고 있는 한, 또 뚜장이들이 교묘하게 계획하고 여성이 약해서 세상을 모르는 한, 당신은 이런 일을 뿌리 뽑을 수 없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도 증명하듯이 런던의 대부분의 경찰이 색주가와 한패가 되어 있다는 사실도 여기에 덧붙일 수 있다.

처녀의 육체가 어느 범위까지 요구되며 또 어느 범위까지 소비되고 있는가라는 대체적인 가늠은 다음의 예가 시사하고 있다. 스테드 씨가 밝혀낸 예는 단지 이 한 가지만은 아니라는 점을 주지하기 바란다!-이 점에 관해서 스테드 씨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다음으로 나는 그 방식에서 전혀 유례가 없는 예를 하나 들어보겠다. 나는 런던에서 가장 크고 가장 번창한 소개소의 여주인에게 이야기의 실마리를 만들기 위해서 "처녀 주문이 상당히 줄었다고 최근 얘기 들었습니다만" 하고 물어보았다. 그 질문에 대해, 늙은 여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 여자는 이상한 영업을 하고 있지만, 성격이 강인하고 매우 진지하다는 점에서 비천한 여자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우리들의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답니다. 저부터 말씀드리자면 그 방면의 영업은 상당히 북적거리고 주문은 매일 쇄도하고 있습니다. 가격은 떨어졌을지 모르지만, 그 이유는 손님들이 큰 주문을 하시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저희 고객 중 한 분이신 박사님은, 지금까진, 200마르크 내지 140마르크 정도의 값으로 2주일에 3명꼴로 처녀를 사십니다." 이때 나는 무의식중에 ", 당신은 신사 한 분에 매년 70명의 처녀를 대주시는군요."라고 소리 질렀다. 그 여자는 "그렇습니다만, 만약 우리들이 공급할 수 있다면, 그쪽은 1년에 100명의 여자를 사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그쪽의 주문은 항상 16세 이하의 처녀랍니다."

여기에서는 이사의 세 가지 인용만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그밖의 자세한 것은 다른 곳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여기서 꼭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이와 같은 현대의 폭로가 전세계에 던진 센세이션도 크게 효과가 없었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이전과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이 조사의 결과, 공적으로는 영국 전체가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는 정도일 뿐이다-처녀의 몸값이 계속해서 오른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공급자들은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있었으나 실제로 손해를 입지 않았을 뿐더라 이 영업은 방해받지도 않았다.

절대주의가 유럽에서, 가령 러시아에서처럼, 강력한 저항도 없이 존속한 경우에는, 그것이 자본주의의 새로운 업적과 더불어 독특한 에로틱한 성향으로서 뻔뻔스럽게 전사회에 화풀이하는 식으로 절대주의의 고유한 관습 속에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하 실례로서는 수년전에 러시아의 어떤 대공이 보여주었던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다. 베를린의 신문은 이 에피소드를 생생하게 보도했다.

오늘 낮 12, 페테르스부르그의 일류 레스토랑에서 러시아 사교계의 저명인사들이 모였다. 살롱은 밀치락달치락 하는 소란 속에서 빈자리가 하나도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 그때 대기실 문이 열리면서, 전라의 앳띤 미인 둘이 나왔다. 이 두 여자는 쾌활하게 재잘거리면서 넓은 공간을 걸어다녔다. 그 순간, 넓은 살랑 안에는 말소리가 뚝 그쳤지만, 곧이어 귀족부인들이 졸도하는 등 큰 소동이 일어났다. 신사 두세 명이 경찰을 부르러 달려나갔다. 레스토랑 주인은 두 나체미녀들에게 큰 타울을 주고서 정중한 태도로 "아무쪼록 여기서 나가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나체미녀들은 주인을 보고서 코웃음을 치면서 레스토랑 안을 유유히 걸닐었다. 이 장면을 목격한 저명인사들은, 어떤 사람들은 질겁을 하고 분개해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정신없이 기뻐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이 여자들을 데리고 나가려고 경찰이 달려왔을 때, "미인"이 나왔던 그 대기실에서 한 러시아 대공이 나타나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여자들에게 손대지 마. 내가 그 여자들에게 옷을 벗도록 부탁했어.“

지금까지는 사회 상류층의 도덕을 여러 측면에서 얘기했지만 이제부터 얘기할, 노동자 대중으로 이루어진 그 반대 계급도, 오늘날에는 크게 향상되었으나, 1860년까지는 지배계급의 본보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들은 외관적으로만이 아니라 그 내용 면에서도 뒤지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방탕은 언제나 거칠었다. 그것은 그들에게는 언제나 빈곤이 뒤따랐으며, 당연한 귀결로서 불결함이 곁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서 향락생활에 많은 돈을 뿌릴 수 있는 소위 사교계의 방탕은 언제나 훌륭하고 고상한 것이었음은 당연하다.

근대자본주의는 유산계급에게 수천에 달하는 즐거움을 주었지만, 한편 자본주의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프롤레타리아로 전락한 인민대중에게는 인생에서 두 가지 즐거움, 즉 술과 타락한 성적 유희만을 너그러이 허락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이 두 가지 유희로써 자기 목을 조르는 과중한 노동이나 고통을 잊을 수 있는 기분전환을 해도 좋았다. 이처럼 프롤레타리아가 향락을 누릴 기회가 적어진 당연한 결과로서 "노동자는 인생에서 그 무엇인가를 가지기 위해서 모든 정열을 이 두 가지 즐거움에만 바치고 이 즐거움들에 정신을 잃고,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잃어버릴 것이다. 인간이란 존재가 동물에게서만 볼 수 있는 상태도 전락해버린다면, 그러한 인간은 반항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동물의 상태로 몸을 망쳐버리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노동자, 특히 영국 노동자에게 이와 같은 특징이 나타났던 시기부터 영국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대부분 동물적인 생활로 몸을 망쳐버리는 후자의 길을 걸어갔다. 반항하게 되는 쪽은 그들이 계급의식에 눈뜬 후기까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근대자본주의에 들어선 그 밖의 다른 국가들 역시 이와 동일한 발전을 경혐했다. 단지 이런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근대자본주의발달의 제1기가 영국에 비해서 매우 짧았다. 그 이유는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대공업의 착취에 이어서 대중의 정치적 해방이 곧바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연령층의 남녀가 찌는 듯한 작업장에서 함께 노동하는 현실이야말로 공장에서 일하는 대중의 성적 욕망을 최초로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자극했다. 이런 상황은 대공업발달의 초기에는 어느 국가에서는 흔히 볼 수 있었다. 일부는 더위 때문에, 일부는 일하기 쉽도록 어느 공장 여공들이든 모두 옷을 얇게 입었다. 대부분의 공장, 예를 들면 광산에서는 남자 광부 여자 광부 할 것 없이 모두 반나체였다. 남자 광부의 경우는 신발 말고 옷이라고는 바지만 입고 있었으며, 여자광부들은 일하는 데 편리하도록 셔츠와 짧은 치마만 입었다. 사정이 이럴진대, 사고가 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열이면 열, 지적 교육도, 도덕적 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남녀집단이란 점을 생각하면, 유혹은 더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남녀 간의 잡담이나 교제 방식은 누구나 다 그 같은 분위기 속에서는 도대체 조잡하고 천박하게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신적 순결이 끊임없이 새로운 위험에 부딪히고 폭력에 의해 파괴되는 경우, 육체적 순결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남자 여자 모두 나이가 들면, 하나도 남김없이 육체적 순결을 잃어버렸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 성교는 정신을 토대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대부분 욕구충족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졌다. 남자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처녀나 부인들 중 젊은 여자들은 직장동료들과 한쪽 구석에서 관계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시에 몇 사람과 관계하기도 했다. 연애의 즐거움 따위는 찾아볼래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남녀가 함께 일하는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야간작업은 아주 퇴폐적인 풍기문란을 결과했다. 그것은 야간작업을 할 때, 공장 내에서 손쉽게 여공들을 유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야간작업의 빈도에 비례해서 사생아 수가 늘어나는데, 대개의 경우 그 배로 되었다고 한다. 1830년대까지 영국의 경우 공장 독신 여성의 거의 반수가 보통 항상 임신상태에 있었다고 한다. 여공 쪽에서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때는 거침없이 방자하고 거친 폭력이 사용되었다. 런던에서는 1850년에만 해도 강간으로 인한 고소가 2,000여 건이나 되었다. 그러나 대개의 여자들은 억울하지만 별 도리없이 체념했다. 이 경우 공장의 고용관계 때문에 모든 여공들이 좋든 싫든 간에 이와 같은 파렴치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는 간접적 강제의 예는 이 가운데 들어있지 않다. 여공들은 임노동을 할당받기 위해 자신의 육체를 공장 작업반장에게 바쳤지만 이와 동시에 직장을 잃지 않으려고 공장주에게 바치기도 했었다. 이에 관해서 프리드리히 앵겔스는 "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공장에 고용되면, 기타 고용 관계와 마찬가지로, 또는 그 이상으로 고용주에게 "처음 잡술 권리"를 주는 것은 당연하다. 공장주는 이 방면에서도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의 육체와 미모를 자기 소유로 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정조를 잃기 쉬운 젊은 여공들의 저항을 꺾는 데는 100명 중 99명까지는 아니더라도 10명 중 9명은 요구를 듣지 않으면 목을 자르겠다고 윽박지르기만 해도 충분하다." 실제로 대부분의 공장은 동시에 공장주의 하렘이었다. "거의 모든 공장주가 사회적인 체면 같은 것은 문제 삼지 않는, 전혀 교육도 받지 않은 벼락부자들이었다." 초기 대공업시대에는 그런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으며 그 후 40년대, 50년대, 심지어 여러 공판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대에도 여전히 드물지 않았다. 윌리엄 스테드는 1884년에, 영국의 상황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런던 사교계의 일부 인사들은 터어키의 술탄이 하렘의 여자를 바라보는 것처럼 귀부인들을 바라보고 있다. 더욱이 상점주인들은 자기 상점에 가장 예쁜 여자를 고용하려고 하는 것이 역시 틀림없다.

그뿐만 아니라 스테드는 이렇게 쓰고 있다.

수백 명의 처녀들을 고용하고 있는 많은 회사들이, 설령 아무리 나무랄 데 없이 관리되고 있더라도, 유곽으로 문이 통하는 무서운 대기실에 불과하다는 의견을 증명하기 위해 나는 실제로 여러 가지를 배웠다.

나는 앞에서 비참한 주택상태를 특히 자세하게 설명했다. 지금도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그렇지만 이전에는 모두가 그런 곳에 빽빽하게 몰려 살고 있었다. 주택상태는 일반적인 풍기상태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방이 많은 경우에는 동거인의 풍기에 대한 요구가 자연히 높아져서 성생활은 전체적으로 순화되었다. 이와 반대로 방이 적은 경우는 일반적으로 퇴폐풍조가 즉각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1870년대까지는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대중 주택이라고 해야 아직 캠프 같은 것에 불과했는데 그들의 성행위 역시 몹시 추잡한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또한 특징적인 현상이었다. 연애는 거의 모든 경우 음탕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동거인들 역시 형 먼저 아우 먼저 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처럼 비참한 주택에서는 수치심이란 것은 자랄 수도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수치심이 결코 키워지지 못했고 이전에 수치심을 가지고 있었던 어른도 그런 주택에서 살다 보면, 그런 감정은 혼란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그토록 좁은 집에서는 모세의 계명 "간음하지 말라."까지도 저절로 짓밟혀버리는 것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아이들과 어른이 좁은 방에서 시루 속의 콩나물처럼 꽉 끼어서 자고 침대와 침대가 달라붙어 있는 경우, 아이들은 아직 사춘기에 접어들기 훨씬 이전부터 성생활에 대한 다양한 실습을 하게 될 것이다. 성욕이 자기 잠자고 있어야 할 나이의, 이마에 채 피도 마르지 않은 나이의 어린이들이 모방 충동만으로 아버지와 어머니 또는 잠자리마저 딱 붙어서 자기와 함께 자고 있는 손위 누이와 그 남편이 하는 짓을 본 그대로 주저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실습하려 한다. 열두 살, 아니 그보다도 나이가 어린 임신부가 그 시대에는 드물지 않았다. 초기에는 대부분 형제자매끼리 그런 일이 저질러졌기 때문에 그 시대만큼 근친상간의 범죄가 많은 시대도 없었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의 아이를, 딸이 자기 아버지의 아이를 가지기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방에서 하숙인을 두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 그 집의 풍기란 더없이 문란했다. 주간노동에 시달려서 파김치가 되어 자고 있는 여공은 비몽사몽 간에 하숙인에게 몸을 허락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기 몸을 탐하고 있는 상대가 남편인지, 오빠인지, 동생인지, 아니면 하숙인인지를 전혀 몰랐다. 의회의 방문자가 이 문제에 관해서 질문을 했을 때 극도로 초췌해진 영국 노동자의 아내는 "상대가 누가라도 결국 마찬가지입니다."라고 아무 표정 없이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성욕을 채웠다. 남녀가 같은 공장에서 함께 일한다는 현실이 가장 큰 온상이 되었다. 노동자의 실정에 대한 조사나 보고는 모두 이와 동일한 결과를 뒷받침하고 있었다. 1864년의 영국의 미성년자 노동에 관한 의회조사단의 보고는 이렇다.

무지와 악덕이 이러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의 도덕관은 최저수준에 있다...대부분의 여성들은 사생아를 낳고 있으며, 또한 대부분의 여성들은 범죄통계전문가도 몸서리칠 어린 나이에 사생아를 낳고 있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몇 차례 언급한 헌터 박사도 자기가 실시한 주택조사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우리들은 빈민들이 놀아울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현대의 그 이전시대에 아이들이 어떻게 교육받았는지 모른다. 이 나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상태, 즉 한밤중에 한 정도는 술에 만취한, 음탕하고 싸우기 좋아하는 여러 연령층의 어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상태에서 미래의 행동에 대해 교육을 받고 있는 위험한 계급으로서의 오늘의 아이들에게 훌륭한 품행을 기대하는 사람은 너무나도 뻔뻔스러운 예언자이다.

그리고 헌터 박사는 다른 장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젊은 부부는 같은 방에서 함께 자고 있는 다 큰 형제나 자매에게 훌륭한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설령 우리들에게 그러한 본보기를 기록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더라도, 심한 번민이나 이따금 일어나는 자살이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 여성의 운명이라는 것을 직시하고 깨닫게 하는 자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스페인의 가장 가난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는 근친상간이 오늘날에도 상당히 만연되어있는 실정이다. 베르날도 데 퀴로스는 앞에서 언급한 책에서 이 점에 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들은 똑같은 밥그릇의 밥을 먹듯이 같은 잠자리에서 자고 있기 때문에 남자는 밤에 본능적인 충동과 반무의식상태에서 자기 딸이나 누이 혹은 곁에 자는 여자의 팔에 안기게 된다.

연구자는 종종 서너명이 동거생활을 하는 광경을 우연찮게 맞닥뜨리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과 정부와 함께 살고, 남편이 아내와 정부, 혹은 그와 유사한 여자와 난잡한 동거생활이나 뒤범벅이 된 생활을 하거나 심지어는 동성애생활을 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정부를 두는 일이 보통이다.

온갖 공장에서 일하는 아이들을 음습해오는 특수한 풍기상의 위험에 관한 보고도 많이 있다. 영국에서는 벽돌공장이 항상 가장 위험한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1866년의 의회조사단의 상세한 보고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덕적인 큰 타락 없이 아이들이 벽돌가마의 지옥을 거치는 것은 불가능한 실정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박한 이야기를 줄곧 귀로 듣고, 지저분하고 음탕하며, 수치심을 찾을 수 없는 습관이 몸에 배어 무지하고 야만적으로 자라난 어린이들은 범죄인, 불량배, 방탕아가 될 것이다. 타락의 놀라운 원인은 주택상태에 있다. 벽돌주조공은 7명의 직공으로 짜인 팀과 함께 자기의 좁은 집에서 함께 잔다. 이 좁은 집에는 방이 보통 2, 드물게는 3개 정도가 있다. 방은 지하실에 있어 환기도 안 된다. 몸은 낮 동안 흘린 땀으로 끈적끈적해져 있기 때문에 보건이나 청결, 예의라는 것은 아무 데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같이 대부분의 작은 집들은 난잡, 불결, 먼지구덩이의 진정한 모델이다. 나이 어린 여자들을 이런 일에 부려먹는 제도의 가장 큰 폐해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어린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극히 불량한 깡패들에게 전생애를 결박시키는 데 있다. 여자들은 자연이 그대는 여자다라고 가르치기 전에 야비하게 입정 사나운 탕녀가 되어버린다. 낡은 옷이지만 상당히 깔끔하게 입고, 다리는 무릎 위까지 완전히 드러내고, 먼지나 때투성이의 머리와 얼굴에 기름과 분을 바르고서 여자들은 조심성이나 수치심 같은 감정은 모두 경멸하도록 배운다. 식사 때는 땅바닥에 누워 자거나 근처 운하에서 몸을 씻고 있는 젊은이를 구경하거나 한다. 주간의 중노동이 끝나면, 여자들은 고급 옷을 입고서 남자들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술집에 간다. 가장 나쁜 것은 벽돌공들이 스스로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 좋아 보이는 한 직공은 사우스올필드의 부목사에게 "목사님은 악마 녀석을 여러모로 고무시켜 그 녀석이 벽돌공보다도 훨씬 좋은 녀석이 될 수 있도록 만드실 수 있는 힘이 분명히 있으십니다."라고 말했다.

독자가 위의 보고를 일게 되면-이 보고는 수백 가지의 이와 유사한 보고의 견본에 불과하다-성도덕이란 것보다 더 깊은 골짜기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도 농촌에 관한 기록에는 도저히 겨룰 수 없다. 1870년대까지 영국농업노동자들 사이에서 "대부분의 아가씨들은 자기가 처녀였던 시절을 기억할 수도 없다."라는 말이 유행했다.

수년간 런던 교외에서 형사로 뛰던 한 경찰관은 자기 마을의 여자들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담당한 바 있었던 지역들 중에서 런던 교외 마을의 여자들만큼 부도덕하고 뻔뻔스럽고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그들은 마치 돼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다 큰 아들 딸, 어머니, 아버지가 뒤섞여 함께 자고 있다.

이른바 영국의 "노동자 부대(gangsystem)"에서는 남녀가 닥치는 대로 관계를 맺는 것이 농업노동자 집단의 전형적인 노동조직이 되어버렸다.

13세부터 08세까지의 남녀 젊은이와 6세부터 13세까지의 남녀 아이들이 10명에서 4, 50명까지 한데 모여서 집단을 형성한다. 집단에는 두목이 있다. 이 두목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농업노동자이지만, 대개는 청부능력이 있거나 임기응변술에 능통한 소위 불량배나 주거가 부정한 부정뱅이 탕아들이다. 이런 불량배는 차지인 아래서가 아니라 자기 밑에서 일할 집단을 모집한다. 두목은 대부분 차지인과 청부협정을 하게 된다. 두목의 수입은 보통 농업노동자의 수입보다 많지는 않지만, 짧은 기간에 단원들에게 가능한 한 많은 노동을 끊임없이 강제할 힘이 있으며 수입이 그만큼 많아지게 된다. 타지인들은 여자라는 존재는 남성 독재자 아래에서만 열심히 일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일단 이 단체에 들어오면 정말 앞뒤 생각 없이 자신의 힘을 다 써버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조직의 어두운 면은 첫째로 남녀미성년자와 젊은 남녀들의 장시간 노동, 둘째로 매일 5, 6마일, 때로는 7마일 이상 떨어진 농장을 왕복해야 되는 장거리 이동, 셋째로 "부대"의 퇴폐한 풍기문란이다. 어느 지방에서는 감독이라 불리는 두목이 긴 막대기를 들고 있지만, 그 막대기를 사용하는 일이 드물고 냉혹한 학대에 대해 호소하는 예도 거의 없다. 그는 민주적인 황제 혹은 여자 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두목은 자기 부하들의 인기가 필요하고 자기의 보호하에서 이루어지는 유랑생활을 미끼로 그들을 자기에게 묶어둔다. 방종과 방약무인, 이제 그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되었다. 두목은 술집에서 대개 술값을 내주며, 돌아올 때는 팔팔한 여자들을 양옆에 끼고 갈지자 걸음으로 행렬 선두에 서게 되며 그 뒤를 아이들과 젊은 남녀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거나 풍자조의 노래나 외설적인 노래를 크게 부르면서 따라간다. 돌아오는 길에는 푸리에가 "현화 식물"이라고 불렀던 것, 즉 성기를 완전히 노출하는 것이 보통이다. 열서너살난 소녀가 같은 나이의 소년의 아이를 임신하는 일은 흔한 일이다. 이런 집단에 아이들을 공급하는 마을들은 성서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되어서, 전 영국의 사생아의 3분의 2가 이런 곳에서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학교에서 길들어진 여자들이 결혼해서 지어미가 되었을 때, 도덕적으로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알았다. 그녀들이 자기가 낳은 사생아를 아편 등으로 제거하지 않는 한, 그런 아이들은 나면서부터 그 집단의 보충병이 된다.

그와 같은 일이 농촌지방에서는 "과거"의 일이 아니며 그 밖의 다른 지방에서도 드물게 일어나는 상황이 아니라는 점을 알기 위해서 이런 상황을 더 자세히 조사할 필요는 없다. 매년 추수 때면 독일의 작센 지방에서 일하는 폴란드인이나 갈라치아인들로 이루어진 뜨내기 농업노동자집단 속에서는 영국의 농업노동자집단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꼭같은 현상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뜨내기들의 집단에 들어간 독신 여성은 대부분 임신한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태어난 아이의 진짜 아버지가 누군지는 보통 전혀 알지 못한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집단 내에서 모두는 아니더라도, 어쨌든 몇 남자의 요구는 들어주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떠돌이가 아니라 큰 농장에서 일하는 여자들의 경우도 대개 비슷비슷했다. 그 여자들 역시 닥치는 대로 농노들이나 임시노동자의 먹이가 되었다. 이에 관해서는 제1: 서론에 서술한 기록의 증언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지금까지 서술한 상황보다도 "더 심각한" 상태는 확실히 이제까지의 역사에서 나타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두 부르조아 시대에 나타난 드물지 않은 대중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애"에 대한 사고방식은 더욱 심각하게 타락했던 것이다.

 

3) 위선

공공생활과 사생활의 여러 분야에서 관념과 현실 사이에 나타나는 터무니없는 모순에 대해서 자연히 어떤 식으로든 해결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은 이상을 포기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현실을 높은 이상으로까지 높이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부르조아 계급은 이상을 포기하는 따위의 생각은 전혀 않았으며, 현실을 높은 이상으로까지 높이는 것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르조아 계급은 이상이 없으면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지만, 그들 자신이 현실에 참여하는 한, 그 현실을 쉽사리 포기할 의지도 없었다. 부르조아 계급은 이전에 자신들이 정치적 토대로 삼은 숭고한 이상보다도 부가 그들에게 유리하도록 분배되는 현실, 즉 이 유리한 분배 덕택에 마음먹은 대로 즐길 수 있는 현실 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그 때문에 그들은 눈앞에 있는 큰 도랑을 살짝 덮어두고서 현실과 이상을 병행시켜야 했다. 그들은 정치적인 면에서는 겉만 번지르르한 입헌제도를 허용함으로써 현실과 이상을 만족시켰지만 성적인 면에서는 공공연한 위선으로써 두 가지를 만족시켰다. "죄악"은 길거리에서 자물쇠를 걸어 잠근 대문 안으로 추방되었다-대문 안에서는 죄악이 마음대로 난폭하게 굴고 있었지만, 대문에는 빈틈없이 도덕이라는 페인트가 칠해져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 남김없이 공공연하게 더덕군자연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한술 더 떠 자기들이 몰래 즐기고 있는 모든 행위를 있는 힘을 다해서 스스로 비난함으로써 한층 더 공공연하게 도덕군자연했다. 사실 그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눈이 그 사실을 볼 수 없도록 하는 무화과 잎과 같은 도덕이 부르조아 사회제도가 천명하는 도덕률이 되었다. 부르조아계급은 그에 따라서 관념과 현실간에 피할 수 없는 모순을 양립시키는 교묘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은 그들이 이러한 모순을 제가할 생각도 안 했을 뿐더러 제거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조아 시대의 지배계급은 자발적으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려고 적극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라 주변 사정으로 인해 싫든 좋든 간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미 "서론"에서 얘기했듯이 부르조아 사회제도는 최초의 사상적 처방전으로써 도덕적인 세계질서를 우선 실현시키려고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신들의 생활을 그토록 위협하지 않는 한에서는 역사발전의 어느 시점에서 도덕적 세계질서를 표방할 수밖에 없었다.

각각의 특수한 시대는 언제나 발전과정에서 가능한 한 높은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임에 틀림없다. 오늘날까지 존재하고 있는 사물이 모두 어느 정도까지는 소위 신이 원한 자연의 질서이기를 원했다. 어느 시대나, 특히 그렇게 함으로써 어느 상황에서라도 자기 존재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행동까지도 정당화했다. 그러나 개개의 제도에 대해서, 대중이 조작된 이야기를 무조건 믿을 필요 역시 없었다. 그것은 각 시대의 권력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절대주의 시대에는 전혀 터무니없는 생활도 가능했으며 오히려 민중의 정부를 악마가 원한 자연의 질서라고 보아도 전혀 안중에 둘 필요가 없었다. 그 이유는 민중의 도덕적 분개 따위는 그들의 지배체제를 현실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체제는 신흥 부르조아 계급과 몰락 봉건 대지주계급 간의 계급투쟁에 의해서만 좌우되었다. 그 결과 왕관을 쥐고 있는 쪽은 두 계급의 역학 관계가 불균등하게 발전함으로써만이 위태로워지며, 마침내 그로 인해 무력해졌다는 것은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대공업시대로 접어들면서 역사적 정세는 돌변했다. 이 시대에 대중은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적으로 최대 다수의 선거권을 가진 계층이 되었다. 그들은 농노나 하인 같은 신분에서 국민으로 지위가 향상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만이 상품생산이라는 새로운 양식에 반드시 필요한 대중의 모든 힘을 동원하고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대중은 경제적으로 독립된 생활을 획득함에 따라서 정신적, 정치적 해방도 맞이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에 불과했다. 이와 같은 대중의 정신적, 정치적 해방을 방해하고 탄압했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대중의 정신적 해방은 끊임없이 진보하는 기술적 발전, 그에 따른 자본주의의 철저한 관철과 팽창에서 점점 더 중요한 조건으로 되어감에 따라 그것을 저지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부르조아는 문맹인이나 노예와 마찬가지로 밭을 경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들처럼 매우 까다로운 정밀기계를 만든다거나 이용할 수는 없다. 이 때문에 고도로 발달한 공업으로부터 획득되는 엄청난 이윤은 성년이 된 계급의 간단없는 비판에 의한 불유쾌함 때문에 상쇄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비판의 파괴작용은 부르조아 계급 스스로가 모범을 보이고 참으로 도덕적인 세계질서라는 동화를 적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대중이 신뢰하도록 만들어냄으로써만이 약화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필연성에서 위선의 법칙이 탄생했다. 그것은 내용, 다시 말하면, 무한한 부와 그 덕택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생활의 만족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파괴시키지 않기 위한 형식적인 타협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부르조아 시대와 더불어 각국에서 나타났다. 이것은 새로운 자본주의적 발전이 사회에 내재된 여러 가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하고 반대로 온갖 사회문제를 야기시키는 데다 맨 처음부터 동화적인 꿈을 모두 깨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갈등은 명백한 이유로 인해 처음에는 별로 절박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우선 독립된 정치의식을 가진 계급으로서의 질적 향상이 전제되어야 했었다. 그리고 이 역사적 진보는 쉬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씩 진행되었다. 1840년대에 비로소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어느 나라에서나 지배 계급이 무시할 수 없는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그 시대까지는 위선이라는 것은 바로 소시민계급, 즉 어느 시대에나 생활상의 좋지 못한 경제조건에 속박되어있는 계급에게만 나타나는 계급적 도덕에 불과했다. 이에 반해서 부르조아 계급은 벼락부자같이 생활하고 벼락부자처럼 행동했다. 그들은 실제로 벼락부자였다. 그들은 자만했다. 그 누구도 그들을 구속하지 않았다. 누구에게 거리낄 것이 있겠는가? 우리들을 누가 도와줄 수 있단 말인가! 세계는 우리들의 것! 우리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 우리들의 재산은 예언자 모세의 재산이야! 이런 것이 한층 분명한 어조와 다양한 방식으로 수없이 공포된 인생관이었다. 특히 영국 시민계급의 역사는 18세기초부터 거의 100년간에 걸쳐서 이러한 인생관에 대해 끊임없이 그로테스크한 본보기를 보였다. 그들은 야단법석을 떨거나 무절제한 생활을 했다. 부르조아적 자유는 무절제한 타락한 생활을 하거나 모든 인습을 고의로 무시하는 것을 의미했었다. 도시라는 도시는 이른바 선창가의 주막과 같은 것이었다. 벼락부자라는 존재는 비밀이나 은밀한 행동 따위에는 감각이 없었기 때문에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들은 큰소리치면서 벼락부자 티를 스스로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만약 자신들이 그렇게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즐거움이 되지 못했으며, 가장 놀라운 기쁨도 되지 못했다. 그들의 풍채 역시 그들의 행동거지와 같았다. 손은 때가 덕지덕지 끼고 단정한 차림새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품위 있는 어떤 곳에서라도 그들의 차림새는 앙시앵 레짐 복장 특유의 거드름을 피우는 곡선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은 보란 듯이 행동하는 벼락부자의 취미로서, 여기에는 돈이 들었단 말야라고 현란하게 과시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로테스크한 그릇에는 결국 그로테스크한 내용이 담겨진다. 특히 그들이 몸에 달거나 늘어뜨리는 장식물이 바로 이런 점을 가장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손에 때가 덕지덕지 끼고 차림새가 늘상 조잡하며 언행이 야비하고 예의범절을 전혀 몰라도 그들은 그런 것 말고는 확실히 빼어났다. 머리는 대개가 장대하였으며 늠름하고 더욱이 원숙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으로는 새로운 세계가 낳은 "모든 문제를 요리조리 고심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호가드나 호울랜드슨의 그림은 이런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영국 부르조아 계급은 대부분 벼락부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개발한 향락은 모두가 예외 없이 조잡하고 야비하고 외설적이었다. 그들은 귀족적인 고결함이나 세련됨 따위는 똥이나 쳐먹어라는 식이어서, 배가 터지게 마시고 실컷 "연애"했다. 모든 것은 이른바 "커다란 그릇"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돈을 주고 양의 커다란 넓적다리를 살 수 있었다. 즉 그들은 배가 터지게 먹음으로써 나에게는 돈이 있단 말야 하고 과시했다. 그들은 마치 대하처럼 끊임없이 왔다 갔다 떠돌아다녔다. 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며 마음에 드는 것은 모조리 손에 넣었다. 저쪽에서는 딸, 이쪽에서는 그 어머니, 때로는 모녀를 동시에 손에 넣었다. 유혹과 유괴, 특히 남의 아내를 유혹, 유괴하는 일이 유행했다. 영국인들의 방종과 분방함은 일상적이어서 어디에서나 속담으로 나타날 정도였다. 영국인은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이 방면에서 곧 구별이 되었다.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처럼 깨춤을 추는 졸부취미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유분방한 발전을 위해 영국에서처럼 유리한 조건은 어느 나라에서도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의 인간이며 동시에 그 시대의 지배자였던 이 같은 인간은 본질적으로는 어느 나라에서든 방치되어 있었다.

프랑스 혁명시대의 그리모 드 라 레이니에르는 혁명에 의해서 갑자기 출세한 부르조아 졸부에 관해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인간의 재산관계의 변혁이나 혁명의 결과로서 부가 이제까지의 소유자와는 다른 인간의 손에 집중되자 그것은 순전히 동물적인 향락에 대한 즐거움으로 이어졌다. 갑작스럽게 돈을 모으게 된 이런 부류의 파리인들의 심장은 비둘기의 모래주머니같이 변화되었다. 그들의 바램은 식욕뿐이고 감각에 대해 말하면 낯간지러울 뿐이다.

그 시대의 유명한 프랑스 풍속작가 메르시에는 총재정부와 제1 제정시대의 부르조아 계급의 졸부취미를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의 연회에서 벌어지는 잡담만큼 듣기 고역스러운 것도 없다. 진수성찬을 산더미처럼 차려놓은 식탁에서 이야기라고 해야 고작 식단표, 조리사의 솜씨, 새로운 스튜 요리의 발명자, 지하실에 들어 있는 포도주의 가격, 연회와 그 호화스러움에 대한 것뿐이었다. 실컷 먹고 실컷 마시는 일이 모든 사람에게 정말 강요되었다. 이와 같은 강요는 그들에게 휴식이란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독일에 관해서도 이와 같은 내용이 보고되었다. 함부르크의 요한 페터 갈라스는 어떤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런 사람들의 화제라면 복장, 미용, 이혼, 파산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배부르게 먹고, 그 뒤에는 트럼프의 일종인 부이요뜨 놀이를 시작하거나 카릭을 타고 산보를 하고, 산보에서 돌아와선 커피를 마시고 확실치 않은 것을 수다스럽게 얘기하며 턱이 빠질 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고 마침내 침대로 들어가는데, 다음날도 오늘 했던 일을 또 반복한다.

한편 세계의 새로운 주인공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처음에는 졸부취미를 가진 벼락부자들이었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그들은 오히려 소시민의 프록코트를 입고 활약했다. 얼핏 보면 점차 졸부취미에서 탈피해서 성장한 듯이 생각되겠지만, 그들은 졸부취미에 너무나도 빠져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시대와 더불어 그것을 일시에 제거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사태는 급변하여, 좀 더 적절한 표현을 빌면, 부르조아 시대의 주제넘은 호황의 최후는 먼저 영국에서 1820-30년에 시작되었다. 영국은 이러한 사태가 매우 심각했기 때문에 얼핏 보기에는 이 시기부터 새로운 시대가 마치 붕괴해버린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해서 인간과 자연의 외관은 이전의 시대와 비교해서 갑자기 변했다. 실제로 내용 면에서도 새로운 복장이 강요한 것에 한해서만이 크게 변화했다. 부르조아 계급은 새 프록코트만 입으려고 했다. 만약 사회의 진정한 일원으로 보이기를 원한다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후 존경스러운 부르조아의 견고한 프록코트를 공개적으로 입지 않으면 안 되었다. 프랑스와 독일에서는 이 변화가 초기에는, 설령 철저했다 할지라도,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이미 서술했듯이 프랑스와 독일의 경우, 새로운 시대의 인간은 그때까지의 도시 상인의 프록코트를 결코 벗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새로운 생활조건에 금방 위엄 있게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는 진지하고 "점잔빼는" 표정을 짓는 것만으로도 족했던 것이다.

공공생활의 외관에서 일어난 급격한 변화는 한층 더 특수한 사정, 즉 대공업발전이 그 시대에 경험한 특수한 경제상태에 의해서 훨씬 더 빨라졌다. 소개업은 점점 더 수익성이 높은 사업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업이 대규모로 발달하고 그에 따라서 공장이 확장되어갔으므로 더욱 더 온 힘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욱이 이제는 뻔뻔스러운 경쟁이 도처의 뒷골목에서 은밀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즉 부르조아는 자숙해야 했다. 그렇지만 아무리 자숙했다고 해도 유산계급에서는 그후 이상으로서의 도덕적 모범을 모든 사람에게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도피의 길밖에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지금까지의 식도락을 제사지내는 날에만 즐기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이 시대에 프롤레타리아 계급들이 창출한 잉여가치를 적어도 점잖게 해고당한 동료들에게 분배해주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다양한 요구를 자본가에게 가능한 한 납득시키기 위해서는 부르조아 계급이 처음에 주창한 도덕적 세계질서와 그들의 실천내용을 하나하나 비교하는 것이 통찰력이 부족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으로서는 가장 용이한 일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유산계급이 대중을 정치적으로 감독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오늘날에도 대중은 도덕적으로 열등하다는 이유에 의해서 가능할 뿐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대중이 점점 스스로 높은 도덕을 지키려는 자각이 생겼을 때 그 같은 이유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런 상황하에서 지배 계급이 자신들이 장악하고 있는 지배와 재산에 대한 총공격을 "과연 당연한 말이요."라고 비판의 무기로서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면, 그들이 기껏해야 자기들 생활의 표면만을 고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포자기하는 길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패배를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한편 "서론"에서 이미 서술했듯이, 사회조직 자체는 그 발전의 모든 전망이 이미 실현되어 필연적인 파산이 한 발 한 발 눈앞에 다가올 때 비로소 자포자기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때 비로서 "과인이 죽은 뒤에야 대홍수가 나는 말든!" 이란 말이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 그런 자포자기는 어느 나라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각국의 그후의 경제적, 정치적 발달이 확실히 보여주듯이, 부르조아 시대는 아직 상승초기단계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이제까지의 철면피한 졸부취미는 철면피한 위선으로 변했다. 이런 식의 탈피는 부르조아 계급뿐 아니라 부르조아 사회조직 내에 존재하는 모든 계급에서 나타났으며 모든 인간이 이 법칙에 지배되었다. 이것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지금까지 줄곧 계속되는 현상이다. 그리고 이 부르조아의 지배적인 도덕에 대해서는 개인만이 아니라 모든 계급이 오늘날까지도 의식적으로 명백한 반대를 표명할 수가 없었다. 즉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서자 연애는 생활문제로서 점점 복잡하게 된 제 3의 사정 때문에 특히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본주의발달은 우리들의 생활을 놀랍도록 복잡하게 만들었지만, 연애도 복잡한 생활에 얽혀서 수많은 어려운 문제를 야기시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어려운 문제를 사유재산을 토대로 한 자본주의라는 사회제도의 틀 속에서 개인적인 타협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로 인해 위선이 어느 정도까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냉엄한 법칙으로 되었다. 사람들은 지배적인 사회제도에 반대는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회제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지배적인 사회제도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도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머릿속에서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그려진 새로운 사회는 두루 알려진 대로 설령 이론적으로는 가능했더라도 아직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이후 모든 사람들이 따라야만 하는 부르조아적 사회제도의 규칙의 핵심은 "외형적인 예의범절은 지킨다."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사회로부터 특별히 존경받고자 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이른바 "훌륭한 사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그랬던 것이다. 가령 몸에 걸친 검은 프록코트, 품위 있는 머리 위의 다 한층 품위 있는 실크모자, 손에 낀 번쩍거리는 검은 가죽장갑은 남성들에게는 새로운 도덕, 즉 본디 부르조아 도덕을 위한 외형적인 심볼이었다. 그것은 외형적인 예의범절의 제복이 되었다. 그리고 부르조아 계급은 이런 종류의 제복을 대단히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프록코트와 실크모자는 엄숙한 동작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며 번쩍거리는 검은 가죽장갑은 촉각이 없었으므로 촉각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여성의 복장은 공적으로는 항상 목까지 완전히 감추는 차림이 되었다. 그 때문에 외형적인 예의범절의 규칙을 어길 때는, 그것도 여성들이 어길 때는, 그들의 대부분 사회로부터 무자비하게 배척당하게 되었다.

외형적인 예의범절을 까다롭게 하는 가장 큰 의도는 공적인 행위에서 성이라는 것을 닥치는 대로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부르조아 계급은 연애 역시 표면적으로는 제거해버렸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귀찮아하는 듯한 얼굴을 했으며 연애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체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연애에 관해 지껄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연애를 해도 보고도 못 본 체했다. 연애는 부정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태도를 정당화시켰다. 뿐만 아니라 대화를 할 때 성적인 의미가 깔려 있는 듯한 얘기는 가능한 한 피하는 것도 올바른 예의범절의 하나였다. 그런가 하면 성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것마저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 했고 그런 내용을 여성과 이야기하는 것은 당치도 않은 일이었다. 정숙한 부인은 세상사에 대해서는, 그런 내용은 아무것도 모르는 체했다. 남녀교제에서는 성적 자극을 하는 여성의 몸 부위나 복장의 이름을 입밖에 내는 것도 있을 수 없었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비유적으로 품위 있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부르조아 계급은 넓적다리나 장딴지 같은 말뿐 아니라 발이라는 단어도 입으로 내뱉어서는 안 되었다. 여성의 넓적다리 같은 단어를 입 밖에 내는 일 따위는 무엄한 짓이었다. 가슴이나 유방 같은 단어는 목이라고 했고, 필요하다면 흉부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배라는 단어는 엄금되어 위하고 말해야만 했다. 엉덩이라는 단어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코르셋은 흉의라고 불렸다. 스커트는 품위 있게 쥐퐁이라고 불렀다. 임신했다는 단어도 사용치 못하게 되어 "희망에 차 있다."라든가 "상황이 변했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형적인 예의범절은 유혹되기 쉬운 모든 기회를 엄격히 피하도록 요구했다. 젊은 아가씨와 신사를 단둘이만 방에 있게 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자기 명예를 지키고자 하는 여성은 자기 집으로 남자를 결코 초대해서는 안 되었다. 젊은 아가씨나 일반적으로 정숙한 지어미가 밤중에 혼자서 외출하는 것도 좋지 않았다. 또한 정숙한 지어미와 외간남자 사이의 교제는 제3자 앞에서밖에 허용되지 않았다. 약혼한 남녀에게도 결혼식 날까지는 어른들의 사교계에서만 만나서 이야기하도록 했고 그들 멋대로 만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숙녀가 외출할 때 고개를 옆으로 돌리거나 등을 돌리는 것은 좋지 않고 가능한 한 눈을 내리깔고 걸어야 하는데 그때도 너무 빨리 걸어서는 안 되며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걸어서도 안 되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남자들의 접근을 원하는 표시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숙한 부인은 거리에서 스커트를 걷어올리는 일을 될 수 있는 대로 주의해야 한다. 중인환시리에 스커트를 걷어 올리는 행위는 갈보만이 하는 짓이었다. 그런가 하면 다리를 내놓는 것조차 1880년대까지 줄곧 금지되어왔었다. 다리가 보이는 스커트가 등장했을 때 이런 복장은 소위 상류계급에서는 예의에 아주 벗어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무도회에서 숙녀가 가슴을 훤히 드러낸 데콜테 같은 유행복은 허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숙녀가 자기 집에서 실내복만을 입은 채로 사람을 대하는 것은 좋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옛날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매우 예의 바른 일이었지만 이와 유사한 예의범절의 요구를 일일이 들자면 한이 없다. 미술, 연극, 문학도 이와 같은 규중처녀의 도덕 틀에 끼워 맞춰졌다. 나체는 파렴치하다는 이유에서 완전금지되었다. 나체상 또는 나체, 반나체를 묘사한 그림 앞에 서는 것조차도 불결한 소망이나 욕망의 표출로 간주됨으로써 진지한 인간이라면 옷을 입은 인간밖에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진지한 인간이 읽는 소설에서는 언제나 깨끗한 것만이 사랑받았다. 간통, 사생아, 매춘 등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연애는 모두 "해피 앤드, 해피 앤드"라든가 실연했거나 "목적한 대로되지 않았다."라는 식으로 끝났다. 이 경우 작가는 "...", "..." 으로 일단락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의범절의 규칙을 어긴 인간은 누구나 매우 철저하게 배척받았다. 이 경우 그들은 공적으로 진지하게 행동하던가 아니면 표면상의 형식을 짓밟아버리고 무모한 정열에 빠지든가 둘 중 하나였다. 귀한 집 딸 아니 부인이 자기의 정혼한 약혼자가 아닌 또는 지아비가 아닌 남자와 입을 맞추었을 때는 당장 명예를 잃게 되었다. 가령 상대방이 그 당시 자기와 아가씨는 이미 그 사람 말고는 착실한 남성과는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여성의 혼전 성교는 전부 음탕한 짓으로 치부되었다. 만약 아가씨가 임신했다면 그녀는 곧장 진지한 사람들에게 백안시당했다. 그녀에게는 세상의 모든 문이 닫혀졌다. 또한 항시 배척당했으며 진지한 사람들로부터 뒤에서 손가락질을 받았다. 한편 세상은 사생아를 낳은 여자를 타락한 여자로서 철저하게 경멸했을 뿐 아니라 그 사생아에게까지도 일생동안 낙인을 찍었다. 그리고 어떤 여성이 한 걸음 앞서서 공공연하게 "자유연애"에 열중했다면, 세상은 그 여성을 갈보로 취급해서 호되게 다루었다.

이러한 사실은 외형적인 예의범절에 관한 국제법 가운데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유명한 조항들이다. 그것은 이와 같은 형태로서 일반적으로 승인되었으며 이른바 진지한 사람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언급됨으로써 공식화된 부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한편 비공식화된 부문, 즉 모순으로부터의 불가피한 도피에는 거의 행동에 제한이 없었다. 그것은 무조건적인 요구로서, 순결하지 않은 것은 가능한 한 몰래 하라는 유명한 성직자의 좌우명 속에 집약된다. 이 요구가 무조건 관철되면, 사회는 상황에 따라서 기꺼이 눈을 감았다. 곧 이런 조건하에서 사회는 남자에게는 모든 여자를, 여자에게는 가능한 한 더 많은 남자를 허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법칙에 따라서 자유롭게 행동했다. 돈이 많은 계급의 남자는 대개 첩을 두었지만, 그렇다고 함께 외출하는 법은 없었으며 두 사람이 공적인 장소에 함께 나타나지도 않았다. 이 계급의 남자는 종종 매춘부를 사러 갔으나 뒷구멍으로 몰래 사러 갔을 뿐이다. 그들의 말을 빌면, 유곽은 사회라는 몸에 꼭 달라붙어 있는 지긋지긋한 페스트 종양 같은 것이다. 정숙한 부인 역시 대개의 경우 한 사람 또는 몇몇 다른 남자와 맺는 애정을 남편이 자기에게 주는 향락보다도 훨씬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부인은 고용인에게 절대로 옆길로 새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시켜두기 때문에 자신과 남편이 위험에 바질 염려도 없었다. "침실의 순결"을 어떻게든지 지키려는 정말 현명한 아내는 자기 애인에게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도록, 약속을 정해서 밀회하자고 먼저 청한다. 숙녀들이 무도회복을 맞출 때는 당대의 유행복의 예의범절이 요구하는 것을 주문하지만, 또 자기 마음에 맞는 상대방의 에로틱한 호기심이 자기에게 집중되도록 옷을 맞추려는 의도도 반드시 작용하고 있었다. 숙녀들은 무도회복을 입긴 입었으나 실제로는 교묘하게 나체로 보이게 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했다. 위젠 펠레탕은 제2 제정시대의 사회에 관한 기사 속에서 이 비밀장치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예를 들면 이때에는 자기의 막내 아기의 요람 곁에서 공상에 빠진 젊은 어머니를 관찰하면 좋다. 난로에서는 불꽃이 불가사의한 멜로디를 내며 춤추고 있다. 푸르스름한 창을 통해서 달빛이 방으로 쏟아지고 있지만 아주 어둡게 해놓은 희미한 등불 때문에 실내는 어두침침하다. 이 황홀한 석양 속에서는 째깍거리는 시계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부인은 잊을 수 없는 방문시각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서 시계태엽을 부숴버렸던 것이다.

카쉬미르의 넘실거리는 바다에 둘러싸여, 부인은 푹신한 소파 쿠션에 파묻혀서 팔지 낀 팔로 머리를 괴고 눈을 반쯤 감고서 이 순간에 도덕이라는 기하학적 문제를 생각했다. 즉 다음 무도회복을 머리에 그리면서 옷을 입은 채로 가능한 한 나체로 보일 수 있는 선을 찾아내려고 했다. 왜 그런지 당신은 아는가? 순진한 기병대장교가 이 부인을 밀로의 비너스에 비교했었는데, 부인은 자신이 올림푸스 여신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미혼여성과 구혼자 사이에 진지한 관계가 시작되면, 그런 경우, 상류계급의 어머니는 자신의 좋은 평판을 잊지 않는 아내로서 이중적 의무를 거의 소홀히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서로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을 둘만이 있게 하고, 그로 인해 나쁜 평판이 생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도회나 사교계에서 돌아오는 차 속에서는 딸의 구혼자가 보호자로서 동행하는 한 어머니는 대개 마음 놓고 잠들어버릴 것이다. 이 사회에서는 연애를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결혼만이 허용되었다. 쌍방은 가장 고귀한 목적에 의해 인도되었다. 남자 쪽의 좌우명은 언제나 단호하다. "나는 연애결혼만을 하겠습니다. 상대의 돈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여자 쪽의 좌우명도 역시 단호하기 마련이다. "저는 제가 진심으로 존경하는 남자하고만 결혼하겠습니다. 상대방의 지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을 찾지 못하면 차라리 저는 독신으로 살겠어요." 그리고 남자도, 여자도 이 같은 고귀한 원칙에 따라 행동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이 서로 미친 듯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양쪽 부모들도 그런 소문을 들은 사람들에게 기뻐하면서 " 두 사람은 정식으로 약혼했다."고 발표한다. 양쪽 부모들은 그것을 보증하기 위해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그 청년은 원하기만 했다면 더 돈이 많은 사람과 맺어질 수 있었지요. 그렇지만 그 청년은 자기가 사랑하는 상대를 오매불망, 다른 사람은 싫다고 말했다오." 만약 누군가가 "두 가문끼리의 혼약이다. 두 가문의 재산의 결합이다."라고 무심코 말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천한 중상모략이 될 것인가? 다만 외형적인 예의범절의 태도가 헛고생이라고 느끼게 되면 그들은 부끄러움도, 소문도 잊어버리고 베일을 거침없이 벗어 던지고 두 사람 관계의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펠레탕은 그런 광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조금 전에 나는 포부르 생 제르맹의 저명인사들이 잘 가는 도서관을 다녀왔다. 열람실에 한 청년이 있었는데, 무릎에 턱을 괴고 앉아서 대출중인 집시 소설이 반납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그는 지팡이 끝으로 박자를 맞추면서 벨리느의 가극 카바티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에게 그의 건달친구 중 한 청년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을 보자 그 청년은 그에게 느닷없이 무뚝뚝하게 "이번 결혼으로 얼마 벌었어?"하고 물었다. 그러자 상대방은 "10만 프랑이야."라고 대답했다.

도서관의 여관장이 그 소리를 듣고서 "그렇다면 당신들은 아가씨가 아니라 지참금하고 결혼하는 셈이군요."라고 물었다. "그런 셈이요."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젊고 귀티를 풍기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부자였다. 파리에서는 환상을 좇는 나이가 폴카 추종자들 모두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얼마에 결혼했는가는 일부 청년들의 한결같은 관심사이다. 그런 청년들에게는 결혼이란 한 푼도 없는 텅 빈 금고를 위한 응급조치이며, 구둣가게나 양복점에 외상을 갚기 위한 최후의 도피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기다리고 기다리던 지참금이 손에 들어오면, 남편은 한밑천 잡은 도박꾼 같은 광포한 기분에 휩싸여 또 계산속으로 연기한 것이지만 향락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제 남편은 클럽, 다방, 밤에는 극장에 간다. 그의 가정은 아침부터 내팽겨쳐져 황량하다. 그는 무료함을 해소하기 위해서 또 아내의 의심에 양심이 찔리기 때문에 가능한 한 아내를 피해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온다.

이런 얘기는 부르조아 사회의 성모랄의 특수한 위선 중에서 일부만을 그린 것이다. 그러나 무화과 잎 같은 도덕은 부르조아 시대의 생활 속에서 모조리 흐트러지기 마련이었다. 인간은 사물과 상황의 진실을 도대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개인의 성도덕과 마찬가지로 사회상태도 매우 만족스럽다고 설명했다. "가난이나 비참한 상태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런 것도 있는가? 그것은 개인의 죄에 불과하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일자리가 생긴다." "저축을 하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출세할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은 인간답게 보살핌을 받고 있지 않은가?" "병자에게는 고아원, 맹인에게는 맹인의 집, 불구자에게는 구제시설, 노인에게는 양로원이 있지 않은가?" "우리들은 끊임없이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 애쓰고 있지 않은가?" "우리 아내들은 구제기금을 모으기 위해서 자선 바자회나 마가레트 데이를 열지 않는가? 그런가 하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키스하고 춤까지도 쳐준다." 틀림없이 사실이 이럴진대, 그 이상 무엇을 바란다는 말인가?

이미 서술했듯이, 이와 같은 현상은 모두 국제적이지만 미국을 제외한 어느 나라를 둘러보아도 영국만큼 위선이 기세를 떨치는 나라도 없다는 것이 우선 특징이다. 독일에서는 상류계급부인이 넓적다리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뱉어서는 안 되던 시대에 영국에서는 교양 있는 부인이 발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예의가 없다고 간주되었다. 셔츠나 코르셋이라는 단어는 영국인의 사전에서 사라졌다. 만약 저술자가 그런 단어를 무심코 썼다면, 그는 영국 내 도서관에서 자기의 택이 즉각 폐기될 위험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이것은 항상 그의 집필활동에 대한 사형을 의미했다. 더욱이 그러한 단어가 사용되는 연극은 옛날에 상영된 것이라도 지금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영국에서는 과학에서까지도 성문제에 관한 진지한 연구를 금지했다. 몇 년전에 런던에서 하벨록 엘리스의 유명한 "성심리학연구"가 외설적이라고 해서 금지됨으로써 어느 서점에서든 이 책을 공개적으로 파는 것은 망설였다. 영국의 상류사회에서는 모든 것이 규방처녀의 모랄을 기준으로 해서 결정된다. 존경받는 사회에서 읽히는 삽화신문은 나체화나 좀더 이상적으로 묘사한 러트루세 모습이나 데콜타쥬 등을 피할 뿐만 아니라 묘사된 인간에게서 성적 특징까지도 제거해서 모두 무성적으로 그리고 있다. 가장 유명한 증거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속물같은 신문이라 일컬어지는 "런던 펀치"의 제70권이다. 영국 부르조아 사회는 단어나 그림을 이처럼 금지했으면서도, 다른 한편 행동에 대해서는 실제로 관대했다는 점 역시 유명하다. 이에 관한 가장 적절한 예는 1870년대 경에 큰 문제를 일으켰던 베이커 대형의 사건이다. 헥토어 프랑스는 "순결한 앨비언"에서 이에 관해 이렇게 쓰고 있다.

발렌틴 베이커 대령이 어느 날 아름답고 요염한 아가씨 디킨슨 양과 단둘이서 열차의 특별실에 앉아 있었다. 이 아가씨는 잠시 동안 상당히 용감한 장교와 용감하게 시시덕거린 뒤에 잠들은 척했다. 장교는 느닷없이 허락되었던 이 좋은 기회를 놓칠세라 상대방을 마음껏 애무했다. 그렇게 해도 젊은 아가씨 역시 자는 척했을 뿐 실제로 저항하지 않았다. 그런데 장교가 사랑에 도취되어 흥분해서 무심결에 큰 목소리로 "내 사랑, 내 사랑!"이라고 소리치자, 사랑의 증거는 기꺼이 아무 말 없이 받아들였지만, 그러나 사랑의 말에는 매우 민감한 아가씨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소리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듣고 열차 안의 사람들이 달려와서 가엾게도 그 장교를 붙들었다. 그는 감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불명예 면직되었다. 그 후 그 장교는 터키 군대에 들어가서 러시아와의 전쟁과 이집트에서 공로를 세워 대장으로 승진, 베이커 파샤가 되어 10년 후에 영국군대에 대한 복권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영국의 귀부인들이 서명한 반대 청원서가 밀어닥쳤다. 그러한 청원서는 모두 심각하게 분개한 어조로 복원에 항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베이컨의 친구인 황태자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여왕은 청원서에 결재를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기회를 틈타 영국 신문은 귀부인들의 여러 가지 우스꽝스런 분개한 목소리를 지면에 대폭 소개했다. 어떤 귀부인은 영국부인 모두가 다킨슨 양을 통해서 모욕을 당했다고 선언했다. 또 다른 부인도 심히 분개해하며 베이커가 런던에 도착했을 때 그를 박수로써 환영하고 그런 자격이 없는 인간과 함께 식탁에 앉을 장교가 영국에 있을까 하고 썼다. 어떤 귀부인은 이런 인간이 영국에 온다는 것은 모든 영국부인들에게 모욕이라고 썼다. 그토록 추잡스러운 남자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매우 불결하다고 쓴 귀부인도 있었다. 그 때문에 베이커에 관해서 얘기하는 것은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음탕한 행위는 상당한 범위에까지 번져 있었으므로 그런 은밀한 행위가 입으로 내뱉어지지 않을 뿐이지 그 위험이 백일하에 드러나는 것은 시간문제였기 때문이다. 뚱하게 점잔빼는 사람은 예외 없이 은밀하게 즐기는 방탕아이고 어느 경우에라도 공상에 빠지는 방탕아이다. 따라서 언어 역시 심각하게 박해받았다. 그로 인해 언어로 표현되지 않는 것은 실재하지 않는다는 위선의 제 2 법칙이 나타났다.

이미 언급했듯이 미국의 상황 역시 이와 마찬가지였다. 미국인들만큼 유럽에 와서 외설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도 없다. 그 때문에 미국인들은 본국에서는 마음껏 점잔빼고 있다는 말을 듣는다. 뉴욕에 살던 독일인 저술가 바움펠트는 이 점에 관해서 몇 년 전에 "베를린 일보"에 기고한 "미국인의 여행"이라는 수필에서 매우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휴양을 목적으로 여행을 한다. 그런데 미국인은 용감하게 대담한 짓을 즐기기 위해서 여행을 한다. 좋은 시간을 가지는 것은 미국에서는 정말 불가능할뿐더러 자존심 때문에 해서는 안 되는 것을 한다는 의미이다. 대서양을 몇 번 횡단한 사람은 그때마다 미국 생활을 무척 고통스럽게 만드는 청교도주의와 위선적인 도덕이 바닷바람에 금방 날려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배 안에서 절대적인 경찰권을 쥐고 있는 선장들은 자신들의 경험상 세계에서 가장 청교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사회의 도덕에 의해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지 않다고 믿으면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야만스럽게 되는가에 관해서 매우 중요한 증거를 제시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공포 때문에 뒷꽁무니를 빼던 양키들도 사건이 벌어지면 어느 사이에 죄를 범하는 사람들 속에 빠져들어 가버리는 것을 보면 매우 재미있다.

유럽의 환락가에서는 이제 어느 누구라도 미국 여성들이 미국 남성들보다 더 강한 담배를 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류층 사람들에게 빈틈없는 장사를 벌이는 환락가의 상인들은 그런 강한 담배를 미국부인들에게 항상 제공한다. 나는 카이로의 상황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카이로 신사와 함께, 순수한 혈통의 아라비아인들이 참으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으로 타락한 점에 관해서 수차례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카이로 신사는 그와 같은 타락을 달러 인종의 돈, 유혹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달리 인종에게는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전혀 불유쾌하지 않으며 그것은 그들 인종이 부자연스러운 악덕공업을 아무리 촉진시켜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같은 특징적인 사실은 곧 외형만이 대접을 받고 부자연스러운 미덕이 지배하는 생활에 대한 반동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사람들에게서 곧잘 극히 칭찬받는 새침데기는 변태성욕자이다. 내심 꺼릴 것이 없는 사람은 자기의 알리바이를 끊임없이 입에 담을 필요가 없다. 이런 사람은 유럽 여행에서 미국인을 가장 자극시킬 수 있는 것들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가지고 있다. 작년 겨울 할베의 "청년"이 영국에서 상연되었을 때, 사람들은 투튼 족의 부도덕성의 무절제한 폭발이라고 입을 모아 비난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파리에 가서 더 수치스러운 짓을 한다는 점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미국인은 외국에서 의심 많은 세관원을 속이지 않으면 가지고 올 수 없는 토산품만 사 가지고 온다. 우리들은 미국인이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운 풍경이라든지 불후의 미술품에 대한 회고 등을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오히려 예외이다. 그들은 연예장, 레스토랑, 사치품 가게의 주소를 잔뜩 써놓은 것을 큰 소리로 읽고 있다. 게다가 미국으로 돌아오면, 큰소리로는 말할 수 없는 행동만을 은밀히 찾아다닌다.

미국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비판을 싫어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합중국의 대부분의 주에서는 남녀가 사람들 앞에서 키스하는 것을 범죄시한다. 이 경우 "예의 바른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아내에게도 키스하지 않는다."는 기준으로 남녀 쌍방이 모두 처벌받는다. "외설적인 문학"을 취급하는 것은 법률상 금지되어 있진 않지만, 그런 책을 우송하는 행위는 각 주에서 범죄로 간주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유럽의 근대문학 중 반가량이 외설적인 문학으로 취급된다. 1909년에 전직 판사였던 리차드 쉐가드가 "금지되어 있는 책을 우송했다."는 이유로 금고 2년형이라는 혹독한 판결을 받았다. 그 까닭은 "데카메론"을 한 권 우송했던 것이 검열에서 걸렸기 때문이다. 집필가와 상원의원, 그 외의 명사들이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감형운동을 벌였지만 대통령은 "감형은 안 됩니다. 본인으로서는 그런 인간의 전 생애를 금고에 처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비극입니다."라는 답변을 보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방적인 판단을 경계해야만 한다. 그것은 단지 미국만의 "도덕"이 아니라 독일에서도 모둔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이다. 그런데 그것은 오늘날에 와서는 옛날보다 한층 더 악화되어 있다. 최근에 품위 있는 교육자들이 독일청년들을 위해서 독일민요를 계속해서 개작한 것은 이에 대한 단적인 예가 된다. 예를 들면 "저기 방앗간에"라는 아름다운 민요에서는 학교에서 부를 수 있도록 오늘날에는 연인뿐만 아니라 거기에 살고있는 숙부님까지도 없애버렸다. "난폭한 사냥꾼"이라는 민요에서는 수풀에서 흑갈색의 아가씨가 뛰어나오지 않고 건강한 수노루가 뛰어나온다. "산들바람아, 그대의 뺨과 손에 키스를 보낸다. 그것은 그대에게 보내는 한숨이다."라는 멋있는 민요에서는 뒷부분이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이다."로 바뀌었다. "그 꿈은 무슨 뜻일까, 그대 죽었는가, 연인이여." "그 나뭇잎은 무슨 뜻일까, 시든 여름의 나뭇잎이여"로 바뀌었다.

사실 부르조아 시대만큼 관념과 현실의 간격이 심하게 벌어진 시대도 없다. 그 간격은 위선에 의해서 사실상 빈틈없이 감추어지며 더 나아가 차례차례로 은폐되어간다. 확실히 그것은 성공했다.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속임수를 쓴 무대배경이 아직도 속임수였다고는 생각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 순수한 도덕이라는 원시 암석에 붙인 도덕이라는 종이이다.

마지막으로 제3권의 범위에 관해 대략적인 전망을 서술하겠다. 부르조아 국가의 토대는 자본주의적인 상품생산이기 때문에 19세기가 그 전성시대였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절대주의는 18세기 유럽에서 그 전성시대를 맞이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서서도 두 시대를 구별하는 확실한 경계는 없다. 이 경계는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 적용되지 않는다. 이미 서술했듯이 영국이나 프랑스의 경우 부르조아 시대는 훨씬 이전부터 뚜렷하게 그 실체를 드러내었다. 역시 발전은 어느 시대에서든 수리적으로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현대에 대해서도 이처럼 분명한 경계를 그을 필요는 없다.





목차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