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과 사회 3
3. 색의 시대-역사와 본질
탈레랑은 노년에 이르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낙원은 사라졌다. 1789년 이전의 시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산 보람이 없다."그리고 탈레랑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은 의견을 가졌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침몰해 버린 극락의 섬을 아쉬워하면서 그 생애를 마쳤던 거이다. 그들은 청춘시대에 그 섬의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으나 점점 슬픈 현실에 의해 그 섬은 이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아름다움과 행복의 꿈이었다.
앙시앙 레짐의 가장 뛰어난 기록, 곧 구제도에 의해 창출되었고, 또 그것이 반영되어 있는 문학과 미술을 보면 그러한 슬픔이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점의 얼룩도 없는 화려한 아름다움이 그 문학과 미술 속에 넘치고 있다. 모든 것이 참으로 아름답다. 여자가 그처럼 염려하게 보인 적도 없었고, 남자가 그처럼 활달하고 고상하게 보인 적도 없었다. 그 시대에서는 진리조차도 맨몸으로 걷지 않고 옷을 입었으며 언제나 재기발랄했다. 장미는 그 가시의 날카로움을 잃었고 악덕은 그 추악함을 잃었으며 미덕은 그 지루함을 잃었다. 모든 것이 향기롭고 우아하여 마법에 걸린 듯 우아할 뿐이었다. 곧 비극도, 고통도, 범죄도 인간의 얼굴을 찌푸리게 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빛나고 있었다. 눈물은 웃음으로 씻겨졌고, 불행도 결국 보다 큰 행복을 향한 사다리에 지나지 않았다. 시대는 노쇠나 조락에는 오불관언이었다. 사람들의 한평생은 영원한 청춘 그것이었고 임종에서조차도 익살을 떨고 농담을 했다. 관능과 호색천지였으며 모든 생활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은 이 세상 최상의 호색적인 황홀경이었다. 그러나 도취의 다음에 오는 것은 깨어난 뒤의 비애가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즐거움이었다. 모든 일에는 끝이 없었고 내일도 없었으며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오늘뿐이었다. 관능은 동침에 의해 상처를 입거나 왜곡되지 않았다. 관능은 마법에 걸린 거대한 불가사의의 나라였으며,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악따위는 그 나라에서는 추방되었다. 왜냐하면 금단의 열매가 열린 나무는 그 땅에서 자라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가지에 가득 열린 달콤한 과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맛볼 수 있고 크고 작은 길을 걸어갈 때면 온갖 정욕이 갖가지 형태로 손을 내밀었다. 호색은 한평생 인간과 함께 발걸음을 같이 했고 옥문을 향해 아낌없이 그 거대한 즐거움을 쏟았다. 어린이의 눈초리도 호색적인 약속을 갈망했고, 늙은 여인조차 나의 정혼에서도 당신의 정욕을 위해 수많은 과실을 드러낼 수 있다는 기분속에서 살았다. 자연은 지금까지의 법칙을 바꾸었다. 자연은 부자연스러운 것으로부터 구역질이 날 듯한 상스러움을 제공해 버렸다. 왜냐하면 상스러운 것은 모두 번쩍이는 아름다움 속으로 숨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눈에 띄는 것은 아름다움과 순수한 광휘뿐이었다... 사람은 아름다움 속에서 살다가 죽어갔다. 아름다움은 진통에 괴로워하는 산모들의 베갯머리에 재빨리 다가섰고 또 죽어가는 사람들의 손조차도 놓지 않았다. 아름다움은 태양, 지지않는 태양이었다.
그것은 바로 앙시앙 레짐의 살아남은 사람들이 임종의 순간에도 암울한 아쉬움을 느끼며 추억한 낙원이었다. 저 로코코풍의 불타는 시가, 훌륭한 동판화, 향기높은 그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눈앞에 그러한 행복을 속삭이고 있으며, 그것들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다. 그러한 낙원은 진정 지금의 세상에서는 영원히 지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렸다.
과거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거짓이 아니다. 그렇더라도 이것이 진실의 한 부분, 곧 역사에서 가장 귀중한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앙시앙 레짐의 낙원 속에서 산 사람들은 인류 가운데 겨우 한줌 고대 희랍을 포함해서 유럽의 역사가 아마도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저 수펄의 생활(게으른 생활)을 절대주의라는 권력 덕택으로 보낼 수 있었던 겨우 한 줌의 인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또한 그러한 과거의 증언은 당시의 생활이라는 것이 소수의 인간을 지상의 낙원에서 살도록 만들기 위해 그 시대를 산 그 밖의 대부분의 인간에게는 슬픔과 고통의 생지옥을 강요했다는 사실도 말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앙시앙 레짐을 인류가 잃어버린 낙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류 전체로 볼 때, 인간은 오늘날까지 아직 한 번도 지상의 파라다이스, 곧 낙원 따위를 산책한 적이 없으며 낙원에서 추방된 일도 없고 낙원을 잃어버린 적도 없다. 낙원의 문은 아직도 인류에게는 닫혀져 있다. 가장 좋았던 시절(독일 농민전쟁, 영국의 청교도혁명 때를 가리키는 듯하다)에만 행복의 뜰을 잠깐 들여다보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제까지 인류는 동경의 눈으로 미래의 나라로서의 낙원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바로 그 때문에 앙시앙 레짐이 한줌의 인간을 위해서 만들었던 낙원의 토대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부수어 버렸다. 그것은 인류의 진보를 위한 가장 높은 확신이었으며, 언젠가는 전 인류를 받아들여 커다란 즐거움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주는 진정한 낙원의 문을 열게 될 것이라는 정신에 토대를 둔 확신이었다. 그 낙원은 분명히 노동을 몰랐던 시바리스 사람(고대 희랍인들이 남부 이탈리아에 건설했던 식민 도시 시바리스의 시민은 노동하지 않고 환락만을 즐겼다)의 게으른 생활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며, 또 아주 다른 생활의 이상도 실현시킬 것이다. 왜냐하면 앙시앙 레짐의 지배계급의 낙원의 진실은 시바리스 사람의 게으른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낙원이란 오히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의 낙원이다. 인류를 낙원으로 안내하는 낙원의 문은 아직은 머나먼 저쪽에 놓여있다. 그러나 그것은 인류가 더욱 분발함으로써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도정이며, 인류가 역사에서 몇 천년이나 걸려서 -몽매했던 가장 낮은 단계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쉬지 않고 걸어왔던 저 기나긴 도정에 비하면 먼 거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인류는 인류의 진정한 역사의 출발점이 될 그 낙원의 문을 강력한 승리자로서 탄탄하게 들어서기 위해 인류가 또 한차례 걸어가야 하는 이 최후의 길도 언젠가는 돌파할 것이다. 인류진화의 논리는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하다는 유모의 우화보다 더욱 깊은 것이며, 자본가가 말하는 내 것과 네 것이 드디어 결정되는 주식시장의 지폐보다 더욱 높은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진화의 법칙이라는 톱니바퀴조차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기묘한 논리로나 만족하는 것이 좋으리라.
만약 우리가 문명의 비극에 관한 논리를 전개한다면, 신들의 황혼은 인류에게는 어떻게 해도 회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것은 인류의 시대가 끝나는 동시에 다시 시작될 것이라는 자랑스러운 확신을 모토로 내걸어야 한다. 그에 반해서 절대주의 시대는 인류가 이를 악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가장 비참한 비극의 시대였다.
1) 중앙집권의 발달
존재 현상은 항상 행동으로 시작된다. 역사에서 그 행동은 곧 혁명이다. 이것은 세계사의 모든 계급운동에도 적용된다. 계급운동이 역사에 등장할 때는 항상 혁명적이다. 그것은 역사의 낡은 조직을 무덤으로 보내고 모든 것이 변혁된 내용에 걸맞는 정치형태를 지배적 위치에 앉히는 혁명적 요소로 작용했다. 그것이 역사에서의 혁명적인 것의 본질과 작용이다. 계급 운동이 처음에는 혁명적으로 역사에 등장한다. 그것이 마지막에 화석화해서 유기적으로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는 대신에 그 지배가 시작되는 날로부터 유기적인 모든 발전에서 가로막는 최대의 제동장치로 바뀌더라도 이 논리는 언제나 진실이다. 그 고전적인 증거가 기독교의 역사이다. 기독교는 본디 거대한 혁명운동이었다. 그 혁명운동은 또 건초를 수레 위로 걷어 올리는 갈퀴라는 의미에서도 아주 오랫동안 혁명을 지도했다. 기독교가 건초를 수레 위로 걷어올리는 갈퀴라면, 오늘날의 기독교를 공식으로 대표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몹시 불쾌하게 만들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대의 과학은 여러 가지 사례로써 예수와 그의 사도들은 유럽적 세계사의 혁명을 훌륭하게 "성취했을" 뿐만 아니라 또 행동하는 대혁명가의 예를 가장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한 증거는 갈퀴 정도로는 끄떡도 하지 않으며, 더구나 그 때문에 그러한 증거는 말살되지도 않는다.
절대주의도 처음으로 역사에 등장했을 때는 역시 혁명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권력이었다. 절대주의는 16세기에 기원한다. 마침 그 세기에 절대주의는 그당시에 등장한 상업 자본주의의 대변자로서, 그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민족국가를 이룩하고, 군주를 내세워 중앙집권을 도모하고, 나아가 그것에 반대하는 지방의 봉건영주들을 제압함으로써 군주의 권력을 최고의 수준까지 절대화했다. 절대주의는 그 임무를 위한 혁명적이고 역사적인 권력으로서 큰 구실을 했다. 그 까닭은 절대주의가 그렇게 함으로써 여러 나라에 새로운 정치조직을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 정치조직은 그 시대의 역사적 필연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민족국가는 중앙국가의 토대 강화가 그 시대의 역사적 필연성이었다. 지배계급 내부의 세력분포가 중세와 비교할 때 일변했기 때문에 그것은 필연적이었던 것이다. 상업의 발전과 함께 역사가 만들어냈던 것 중에서 가장 혁명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화폐가 세계에 새로 선을 보이면서 모든 것을 뿌리째 갈아엎었다. 상인이 기사를 대신해서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그런데 상인이 해외무역의 발전과 함께, 특히 신대륙의 발견 뒤에 전세계를 상업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했을 때 세계의 주인으로서 상인은 영구히 그들의 이윤을 확보하고 또 그것을 더욱 높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확고한 토대를 만들어야 했고 또 만들려고 했다. 상인의 이 특수이익은 다른 어떤 이익보다도 우선되어야만 했다. 상인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해외무역의 이익을 지키려고 했다. 유사시에는 언제나 기능할 수 있는 육군과 해군을 보유한 강력하고 국제적인 정치세력을 지도하는 중앙집권만이 상인의 이 이익을 충분히 보장할 수 있었다. "상업은 자기이익을 국제적, 국내적으로 보호하기 위해서, 경쟁하는 다른 나라 국민을 물리치기 위해서, 시장을 빼앗기 위해서, 나라 안에 구차한 단체들이 자유무역을 반대해서 만든 제한적 장치를 타파하기 위해서, 나아가 상업이 선언한 소유권에 반대하고 이론으로써 뿐만 아니라 실력으로써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크고 작은 봉건영주를 무력화하고 권력의 개, 경찰을 조정하기 위해서 군대가 필요했다"
상업의 발전이 여러 나라에까지 확산되었기 때문에 그 나라들의 상인의 이익은 자치도시의 한계를 뛰어넘어 마침내 민족국가와 중앙집권의 토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서 도시의 이해관계-도시는 상인자본에 의해 지배된 최초의 지역적 개념이며, 그 이익의 정치적인 담당자였다-는 자연의 왕권, 곧 왕실의 이해관계와 일치했고 따라서 도처에서 자연이 그것과 손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실은 그 무렵에 일어났던 대부분의 전쟁이 우선 상업 전쟁이었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맞는 것이었다. 상인자본과 왕권의 이해관계는 일치했다. 왕권은 군대와 믿을 수 있는 장군이 필요했다. 그러나 왕권이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것은 유산계급의 돈지갑에 의존하게 되었다. 유산계급은 도시에서만 살고 있었다. 어떤 전쟁도 우선적으로 군주의 권력을 강화했고 그 때문에 유산계급의 부담은 자꾸 커졌으나 그 당시까지는 군주와 유산계급의 동맹은 깨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움직이는 자본에 대해서는 그에 상당하는 보상이 틀림없이 지불되었기 때문이다.
절대주의의 혁명기는 나라마다 자본주의화의 속도가 달랐으므로 어디서나 같은 시기에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혁명기는 어느 나라에서나 르네상스와는 일치했다 (<르네상스>, pp. 6-16).
정치적인 지배형태로서의, 따라서 하나의 문명의 대표자 및 담당자로서의 절대주의는 끊임없는 이러한 발전의 마지막 결과였다. 그것은 어떤 나라에서나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근대적인 생산양식, 그리고 그것과 함께 사회의 자본주의화 경향이 그 무렵에 모든 나라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앙집권이 아직 확립되지 않은 가운데 절대주의의 지배가 어느 나라에서나 출현했던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를 향한 발전에서 불가피한 단계였다. 곧 영국은 특출하게 좋은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그 단계를 수십 년 안에 거뜬히 끝내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기반 다지기에 좋은 조건이 주어진 다른 나라들, 예를 들면, 프랑스나 독일은 250 년 동안이나 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도 절대주의라는 정치적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 자본주의 단계로 바로 건너뛸 수는 없었기 때문에 모든 나라가 그 단계를 거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의 필연성은 가장 빨리 스페인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스페인에서 유럽의 어떤 지역보다도 앞서 뚜렷한 절대주의적인 문화가 생겼다. 스페인의 풍속과 에티켓이 맨 먼저 유럽의 궁정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주의가 스페인의 그것을 대신하게 되는 것은 그보다 100년이나 뒤의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에서의 절대주의의 지배와 중앙집권의 안정은 이미 1615년, 곧 루이 13세가 즉위한 해부터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세계 무대에서 세계 제패에 실패한 스페인의 쇠사슬을 끊은 뒤에야 비로소 유럽에 대한 정치적, 문화적 지배권을 공인받게 되었다.
독일은 스페인이나 프랑스와는 달리 중앙집권이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30 년 전쟁(1618-1648)의 비참한 결과의 하나였다. 30 년 전쟁에서는 스웨덴과 프랑스의 원조를 받은 독일의 제후와 자유도시(Reichsstadt)가 요구하는 자주독립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주장하는 구교를 기초로 했던 독일제국 사상을 이겼던 것이다. 그 결과 베스트팔렌 강화조약에 의해 모든 제후들, 모든 자유도시들-이른바 신성 로마제국 직속의 자유도시들-은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서 좋았고 또 멋대로 다른 제후나 왕국과 동맹해도 괜찮게 되었다. 그 동맹은 형식적으로는-그러나 그 형식은 무시되었다-황제나 제국을 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꼬리표가 붙어 있었다. 30 년 전쟁의 독일의 비극은 그 조약의 결과로 확실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구화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30년 전쟁 속에서 비참한 독일의 소국가분립주의를 대표하는 "초라한 굴뚝새의 둥지를 제거하고" 독일국민을 위한 신성로마제국을 재건하려는 합스부르크가의 교황적인 세계 제패의 최후의 시도를 보기 때문이다. 그것이야말로 독일을 부흥으로 이끌고 자연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꼭 필요한 조건이었다. 합스부르크가의 시도가 철저하게 실패한 것은 그렇게 뜻밖의 일도 아니었다. 그렇더라도 독일의 소국가 분립주의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는가는 역시 그 소국가들의 비참한 경제상태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30년 전쟁이 끝나자 동시에 합스부르크가, 곧 스페인 절대주의가 프랑스를 상대로 자웅을 겨눈 세계제패전에서도 완전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때부터 프랑스의 화폐는 독일에서 큰손을 흔들며 돌아다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뒤 100년도 더 넘게 독일의 수백의 크고 작은 궁정의 텅 빈 돈주머니는 프랑스의 뇌물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이른바 대선 제후의 궁정에서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교수 프루츠가 갖가지 문서들에 의해서 증명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들-곧 왕자, 왕세자, 모든 대신들로부터 가장 급이 낮은 시종에 이르기까지-이 프랑스의 이해관계를 지지하는 대신에 현금 대가를 간단히 받아들였다. 현금이 너무나 노골적인 느낌이 들 경우는 훌륭한 말, 값비싼 의상, 호화로운 은제식기 세트, 그것들에 필적하는 탐나는 물품들을 받았다. 공공연하게 선언된 영구적인 부패가 30년 전쟁의 유산이었다. 그 결과 독일은 100년 동안 외국의 이권을 보장하는 노리개가 되었고 "독일의적은 보호의 미명하에서 독일 제후들의 영구적인 매국 행위에 마수를 뻗쳤다."
독재적인 절대군주제를 향한 역사적 발전은 독일에서도 외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소한 장애물에 의해서는 막을 수 없는 것이 자명했다. 다만 독일은 한 사람의 군주 대신에 200명의 절대군주를 받들게 되었다. 독일국민은 200 이나 되는 궁정의 탐욕스런 일들을 부양해야만 했다. 그것의 의미는 나중에 대표적인 한 두 가지의 사례로 설명하겠다.
여러 나라가 같은 역사단계에 들어감으로써 절대주의도 여러 나라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것은 곧 끊임없이 전진하는 자본주의화의 길에 의해서 부르조아 계급이 사회를 그때까지 지켜온 계급-그것은 주로 봉건귀족이었다-에 대해서 영향력과 중요성에서 점차 균형을 유지하는 데까지 성장했다는 것을 뜻했다.
그 단계는 언제나 왕권의 절대적 권력의 탄생이었고, 세계사가 또다시 새로운 모습을 띠는 시기이기도 했다. 새로운 사회는 왕권이 두 지배계급을 기둥으로 해서 그네를 타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끊임없이 견제하도록 했기 때문에 왕권은 그 계급발전의 단계에서 손쉽게 승리했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러한 결과에 이르렀던 것은, 이미 말한 대로, 불가피한 역사의 필연성이었다. 르네상스이래 어느 나라에서나 막강한 위세를 떨쳤던 금력은 그것을 대표하는 계급, 곧 상인 부르조아지를 위해서 곳곳에서 정치적 권리를 요구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계급은 그들의 이윤을 보장하고 그것을 높이기 위해 필요한, 앞에서 말한 국내 및 국외에서의 보호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결국 계급투쟁을 불러일으키는 빌미가 되었다.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이 눈부시게 발달하고, 그 때문에 봉건적인 저항이 강력하게 일어나자 계급투쟁에서 각 계급의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중재자 노릇을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부르조아 계급은 정치적 권리를 완전히 독점하기에는 아직 힘이 모자랐고, 봉건세력 쪽도 이제는 정치권력을 배타적으로 행사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왕권의 중재자로서의 역할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첫째로 투쟁하는 두 계급에 대해 휴전을 명령하고 둘째로 정치투쟁을 그만두게 하고 셋째로 그들 쌍방을 지도하고 넷째로 -이것은 언제나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목표이다-모든 계급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왕권은 한편으로는 사랑 때문에 또 한편으로는 목구멍 때문에 공공연하게 두 사람의 정부를 거느린 요염한 귀부인처럼 두 계급의 공동 부양을 받는 행운을 누렸다.
이 변혁과 함께 지방 및 각 단체들의 이제까지의 자치기관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권력의 기관들, 곧 "날마다 새로운 분야를 정복하고 날마다 엄격한 훈련을 받고 그리고 중앙권력의 뜻에 따라 춤추는 관료정치"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와 동시에 공업의 발달로 봉건적인 직업을 점차로 잃고 국가 가운데서 이미 독자적으로 정치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귀족은 궁정귀족으로 몸을 팔아야 했고 그때의 지불조건에 따라서 절대왕권의 강력한 지팡이가 되어야 했다. 왕권은 귀족에게 장교의 지위만을 약속했으나 결국은 명예직도 주기로 했다. 왕권은 그 명예직을 다루어야 했고, 수요가 커지자 새로운 명예직을 차례차례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비용은 금력 족에 할당되었다. 금력은 그 대신 상업의 독점권이나 그와 엇비슷한 다른 이권을 손에 넣어 결국 그것을 벌충했을 뿐 아니라 더욱 돈벌이에 전념할 수 있었다. 돈은 절대 왕권에게는 군대를 양성하기 위해서도, 궁정 귀족의 더욱 커져가는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도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유산계급은 국가에서 더욱 그 역할이 확대되어 왕권은 더욱 절대주의로 가게 되었고, 그 착취는 더욱 뻔뻔스러워졌다.
그 균형상태가 국가를 매개로 하여 유지되는 범위에서는 국가의 주권자는 실제로 "국가는 짐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만 따라야 한다"는 망상에 빠질 수 있었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절대주의 사상은 그러한 현실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다. 사회의 새로운 권력이 강해지고, 그 권력이 왕권을 지탱하는 대 필요한 돈을 대주기를 거절하는 날에는 그러한 상태는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는 듯이 끝나고 말았다. 부르조아계급이 그 필요한 실력을 갖춘 날에 절대주의의 운명의 날은 찾아왔다. 그날에는 물론 봉건제도 또한 뿌리째 뽑혀졌고 대신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만이 단 하나의 배타적인 경제원칙으로서 역사의 프로그램 속에 남겨졌고, 그렇게 해서 근대 부르조아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부르조아 시대의 중요한 특징은 부르조아지가 이제는 왕권을 대체로 그들의 이해관계에 종속시킨 데 있었다.
절대주의의 존재와 현상을 지속시킨 역사의 법칙은 무엇인가? 그 법칙을 위와 같이 따져가면 그 가운데서 첫째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법칙으로서 나타나는 것이 절대주의가 어떤 단계에서도 저 동화와 같은 정치형태, 곧 국가권력이 지배계급과는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약자를 강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중재 적인 정의로서 당파나 계급 위에 초연하게 존재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한 동화와 같은 역할은 결코 절대주의의 그것이 아니었으며, 절대주의의 목적도 아니었다. 어떤 절대군주도 "사회적 왕권"에 관한 사명을 느낀 일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자기의 특수이익밖에는 몰랐다. 만약 군주가 민족국가의 제도적 발전을 꾀했다면, 그것은 언제나 자본가의 돈주머니를 능란하게 털기 위해서 그들의 등을 두드려주는 정도였을 뿐이다. 군주가 국가의 수입과 자신의 수입을 동일시하여 자신의 수입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한, 인민의 생활고를 걱정하는 동정심이나 인민을 빈곤으로부터 구제하겠다는 생각이 국부로서의 절대군주의 마음속에 일어날 까닭이 없었다. 그에 반해서 "약자에 대한 강자의 보호는 현실에서는 다음과 같이 드러난다. 즉 절대주의는 일반적으로 경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하층계급의 민중은 봉건주의의 비참한 착취뿐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착취의 대상이 되기에까지 이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절대주의는 착취의 화신으로까지 보인다" (카우츠키, <1789년 이전의 계급대립>). 그 때문에 가난은 절대주의하에서는 경찰의 요주의 대사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것은 또 참으로 논리적이기도 했다. 내 주머니로 어디 한번 인민의 생활고와 빈곤을 구제하겠다는 생각으로 짐짓 도둑질이라도 하는 인간은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이다.
관념적인 역사관에 의하면, 전제적인 절대주의의 등장은 언제나 관념적인 원인, 곧 천성이 전제적인 군주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박한 역사관은 관찰자가 청맹과니여서 사물의 본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절대군주제가 등장하기 전에 도대체 어떤 역사가 준비되었는가, 그러한 준비는 또 무리가 없이 필연적으로 진행되었는가를 간과함으로써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히 군주들 가운데에서도 천성적으로 전제적인 인물은 대개의 경우 자기의 절대권력을 무제한적으로 강화하려고 했다. 더구나 그 시대에 그와 같은 어느 군주는 절대군주권을 독점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렇지 않은 그들의 경쟁자는 그 방면에서는 완전히 실패했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진정한 그리고 지속적인 결과는 그것의 발전과 안정을 위한 역사적인 조건이 사회의 모든 경제적인 구조 속에 틀림없이 형성되었던 시대와 나라에서만 언제나 나타났다. 그렇지 않은 경우나 그렇게 되기 이전에는 절대주의적인 어떤 인물도 아직 단단한 발판을 갖고 있는 봉건적인 지방귀족의 장구머리나 튼튼한 토대를 갖고 있는 독립적인 자유도시들의 돌대가리에 부딪혀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그러한 인물이 전제를 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그 시대의 토대가 제공하는 기회를 잘 포착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어떠한 인물도 자신이 지배했던 당시의 경제적인 토대의 일정한 테두리를 한 걸음도 벗어날 수는 없었다. 무리를 한 경우는 언제나 위험한 상황에 몰렸다. 계몽절대주의만 하더라도 그것은 언제나 일반적인 역사의 상황이 만든 기회를 잡아서 잘 대처한 것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의 아주 알기 쉬운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역사적 상황은 때로는 군주의 전제를 낳거나 군주의 전제를 축소하는 일은 있어도 절대로 어떤 인물이 그 시대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있도록 만들지는 않는다.
절대주의의 역사에서 그러한 역사의 법칙을 시사하는 고전적인 사례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이다. 그들은 그 전형이 될 수 있다. 후세의 역사가에 의해 절대군주들 가운데서도 가장 절대적인 군주라는 낙인이 찍힌 루이 14세는 그 됨됨이로 볼 때 역사적 상황은 왕의 제목이 될 수 없는 바보의 머리에조차도 눈부신 후광을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생존시부터 100년 이상에 걸쳐 그 명성을 떨쳤던 태양왕은 사실은 허영심이 강한 바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시대나 그의 됨됨이에 관한 진지한 연구가 새롭고도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추앙을 받았던 그 절대주의의 영웅은 읽고 쓰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정말 무식한 자로서 고양이란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것은 연구가들의 짓궂은 조사가 아니라 그의 숭배자들이 직접 한 이야기였다. 오랫동안 태양왕의 측근에서 지냈고 그를 몹시 예찬한 오를레앙 공작부인(엘리자베트 샤를로테 : 루이 15세의 섭정 오를레앙 공작의 어머니. <색의 시대> p.66 각주 참조/역주)조차 "측근들이 국왕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 전하는 읽지도 쓰지도 못했다"라고 썼다. 부인은 또 다른 곳에서 "국왕뿐 아니라 내 아들을 빼고는 국왕 일족은 거의가 독서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한 환경이 국왕을 무식하게 만든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프리드리히 2세에 관해서도 근대과학의 방법으로 행해진 역사연구는, 물론 그 방향은 다르나,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견해가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 연구에 의하면, 첫째로 프리드리히 2세의 "계몽절대주의"의 성공은 사기 극에 지나지 않으며 둘째로 프로이센의 창립자는 프리드리히 2세가 아니라 그의 야만스런 아버지였다(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그는 군대, 관료제도의 강화, 산업의 부흥에 의해 프로이센의 근대적인 토대를 닦음. 허나 문학과 예술을 멸시함으로써 그렇지 않은 아들과 다투어 아들을 성에 유폐시키기도 했다/역주)는 것이 분명히 증명되고 있다. 더욱 과학적인 역사연구는 천분을 타고났으며 상당히 머리가 좋았던 듯한 프리드리히 2세가 정치적으로 실패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즉위한 날에 프로이센의 정치조직에 대해서 근본적인 것은 무엇 하나 바꾸지 않고 "프로이센은 손대지 않고 종전대로 둘 수밖에 없다. 자칫 잘못 손댔다가는 큰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프로이센은, 군국주의의 지배하에 그대로 두지 않으며, 소멸해버린다는 곧 30년 전쟁 이후의 브란덴부르크 공국의 융커들과 착취자들의 봉건적인 요구가 프로이센을 그러한 죄악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었으므로 섣불리 손을 대지 않는 편이 좋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프리드리히 2세도 또한 실제로는 프로이센의 반동적이고 참혹한 정치조직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않았다. 그는 즉위하고 나서 기존체제를 바꾸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실망한 무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 프리드리히가 즉위한 날은 절망의 날이었다"고 쓴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로부터 몹시 학대받기는 했으나 피리의 명인이며 시인이었던" 그는 자기의 유니폼을 수의라고 불렀으나 "정치의 모든 기반은 선왕이 만든 대로 놔두고 군대만은 기병중대를 약간 늘릴 생각이라는 아주 솔직한 시정방침밖에는 발표하지 않았다." (프란츠 메링, <레싱 전설>). 프리드리히 2세는 그 정도의 "시정방침"조차도 실행하지 않았다. 이 유명한 프로이센 왕에게는 다음과 같은 말이 걸맞았다. 그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고, 약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켰다는, 바꾸어 말하면 프리드리히 2세는 융커들이 바라는 일, 융커들에게 새로운 권리와 이권을 보장하는 일밖에 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봉건적인 토대 위에서 성장한 군국주의라는 철제 셔츠"를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러워지고 이젠 몸에도 맞지 않는 철제 셔츠를 벗어버릴 뜻도 기력도 없었다.
이 사실들을 점검하기 위해 일부러 궁정사를 끌어다 댈 필요는 없다. 그것은 루이 14세의 시대는 물론 그 이상으로 프로이센에서도 같다.
2) 절대주의의 비용
세계사적인 운동은 모두 혁명기가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운동이 모두 영웅시대를 가진다고는 볼 수 없다. 기독교에는 몇 세기에 걸치는 영웅시대가 있었다. 시민계급도 영웅시대가 있었다. 75년 전부터 역사에 등장한 의식을 가진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시 영웅시대를 가졌다. 그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부분적으로는 오늘날에도 아직 영웅시대에 있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역사만은 어느 나라에서도 그러한 이상주의적인 청년의 어리석음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 그 점에서 절대주의의 계급운동은 다른 세계사적인 운동과는 크게 달랐다.
이 차이점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보적인 계급이 승리하기 위해서 벌인 지난날의 영웅적 투쟁은 그 계급이 그 뒤 지배권을 쥔 뒤에 저지른 범죄를 결코 상쇄할 수는 없었으나 지배권력을 장악했던 방법은 그 자체가 영웅적 투쟁에 의해서 대표되는 그 시대의 독특한 성격의 일부분을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절대주의가 문명을 위해 지불한 희생을 계산할 경우는 그것이 어떠한 방법으로 자기의 목적을 달성했는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방법을 고찰하는 것만으로 절대주의라는 시대의 특유한 사회상황이 분명히 드러날 뿐 아니라 그러한 사회상황이 사실은 "부득이한 것"이었다는 사실도 분명해진다.
물론 절대주의의 그러한 잡다한 비용을 감안할 때 각국에서의 절대주의의 고유한 자기 방법이나 죄악의 역사를 계통적으로 서술하는 것은 어떻게 하더라도 괜찮으며, 아주 좁은 범위이더라도 상관없다. 차라리 두 서너 개의 대표적인 사례로 그 특징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살펴보자.
혁명적인 계급은 적어도 권력투쟁에서는 결코 감상적이 아니다. 절대주의가 사용한 방법은 언제나 몹시 야만적이고 또 참으로 조잡한 것이었다. 반대파가 무력하게 자신의 손에 넘어오면 그만큼 절대주의의 강압은 언제나 더욱 심각했고 그때의 야만성은 또 그만큼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누구나 알고 있는 역사적 사례 가운데서 가장 두드러진 것만을 들어보자. 독일의 예를 든다면 제후들이 농민전쟁 때 패배한 무기도 없는 농민들에게 가한 저 무서운 복수, 또 항복한 뮌스터의 재세례교파 교도들의 인육에 군침을 흘렸다는 저 맹수와 같은 잔학성만을 상기해도 된다. 독일 역사는 그와 비슷한 피비린내 나는 야수성으로 얼룩져 있다. 그것은 마치 발광한 맹수가 사냥감을 막다른 곳에 몰았던 순간, 저 베르제르커와 같은 분노였다.
프랑스에서의 이와 비슷한 사례는 위그노 교도(16세기 프랑스 신교도/역주)에 대한 박해이다. 그것은 성 바돌로매 축제일 밤(1572년 8월 23일/역주)에 일어났으며 세계사에서도 가장 가공할 학살 극의 하나였다. 그러한 싸움은 모두 현상을 역사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순수한 종교전쟁이다. 그러나 그것의 껍질을 벗겨보면 종교전쟁이라는 관념의 껍질 속에는 군주적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한 싸움이 내재하고 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이른바 종교전쟁 거의 모두에 해당된다. 1576 년에 체결된 동맹(Liga 또는 Saint Liga : 가톨릭이 신교에 대항하여 기즈 공을 맹주로 하여 맺은 동맹을 말한다/역주)에 대항해서 프랑스에서 일어났던 투쟁은 바로 절대적 중앙집권을 무너뜨리려는 귀족계급의 반대파들이 도전한 투쟁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톨릭교의 옹호라기보다는 오히려 절대적 중앙집권으로 위협을 받고 있던 귀족계급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서 가톨릭 귀족들이 벌인 것이었다. 따라서 부르조아 계급이 왕권에 반대해서 그와 유사한 투쟁을 벌여야 했을 때는 일찌감치 동맹에 합류한 것은 아주 당연했다. 그리고 그 뒤 동맹이 승리를 쟁취한 절대주의에 희생된 것도 역시 극히 당연했다. 그런 뜻에서 말하면, 이긴 자가 발휘하는 야수성은 결국 공연한 광신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먹이에 위협을 느낀 맹수가 이를 드러내며 달려드는 아주 저속한 분노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영국 청교도의 투쟁, 그 뒤의 칼빈교도의 투쟁에 관해서도 우리는 저항의 첫째가는 이유를 종교적인 열광 속에서만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부르조아 계급의 적인 절대주의에 대항하는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속에서 찾아야 한다. 청교도의 패배는 군주의 중앙집권의 승리였다. 영국에서도 다른 나라에 뒤지지 않는 피비린내 나는 야수적인 보복방법이 구사되었다. 그 당시 자기의 권리를 지키는 계급을 레블(rebel)이라고 불렀는데, 지주들이 레블 곧 모반자를 격파했을 때 "그들은 희생자의 몸뚱이에서 창자를 잘라내어 숨이 넘어가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불태웠다. 그들은 그런" 방법으로 그들의 원한을 풀면서 즐거워했다.
큰 저항과 함께 작은 저항도 또한 절대주의에 의해 모조리 짓밟혔다. 절대주의의 지배에 굴복하려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위압적으로 군림하는 군주의 전제에 대항하여 무기를 들고 오랫동안 누려왔던 자유를 지키려고 했던 많은 자유도시들의 자유도 그 방위자들과 함께 교수대나 차열형(車烈刑)에 의해 분쇄되고 말았다.
역사의 상황 때문에 부르조아나 봉건귀족의 반대파와 싸움터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우거나, 공공연하게 검거하고 교수형에 처할 수 없었을 대에는 그들은 몇천 번이고 자객의 손에 거리낌없이 비수를 건네주었고 기막히게 듣는 확실한 독약을 써서 상황을 불리함을 만회했다. 그러한 방법을 쓸 경우에는 부모, 형제, 자매도 가리지 않았다. 그 고전적인 사례는 15세기 말엽 로마 교황 자리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유명한 분쟁이다. 결국 절대주의의 이해관계만이 문제였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6 세(재위 1492-1503. 스페인의 보르지아 집안 출신. 매수정책에 의해 교황이 됨. 사보나롤라를 처형함. 그는 예술과 학문을 장려하여 브라만테,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을 보호함. 그가 그의 사생아 체자레를 조카[nepos]라고 속인 뒤 중용 함으로써 nepotism 이라는 말이 생김/역주)가 막판에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되어 마침내 경쟁상대인 추기경 로베레를 굴복시켰을 때 그것은 한 인물이 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페인의 세계 제패정책이 프랑스의 세계제패정책을 누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스페인과 프랑스의 왕실의 이해관계가 교황권에 대한 두 사람의 입후보자를 통해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콘클라베(Konklave : 교황 선거를 위한 추기경의 비밀회의/역주)에서의 결정적인 순간에 양파의 승패는 벌써 끝나 있었다. 이전에는 빈번하게 매수가 행해졌으나 이번에는 매수 말고도 독약과 비수로 경쟁이 계속되었다. 보르지아 집안의 독약의 속담에 등장할 정도인 것이다. 보르지아 집안 사람에게 매수된 자객들은 비수나 대검을 손에 들고 맹렬하게 암약했다. 그들의 승리는 말할 것도 없이 스페인의 절대주의의 승리를 뜻한다. 그 뒤에 추기경 로베레(율리우스 2세. 재위 1503-13. 교황권 강화에 노력하고 프랑스, 독일과 캉브레 동맹을 맺었으나 프랑스의 세력이 증대하자 신성동맹을 결성하여 반 프랑스적이 됨.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등을 보호함/역주)가 마침내 교황의 자리에 앉았을 때 세상이 그에게 "흡혈귀"라는 별명을 붙이게까지 한 그의 참혹한 수법은 기독교라는 구원의 종교가 아니라 절대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에 중앙집권의 토대를 강화하는 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그리고 율리우스 2세의 후계권이 메디치 집안(곧 레오 10세/역주)의 수중에 떨어졌을 때 만사는 각본 그대로 진행되었다. 곧 메디치 집안은 당시 피렌체 시민헌법의 마지막 보루를 그들이 대표하는 절대주의를 위해서 폐지하려고 어김없이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 든 얘기들은 역사의 긴 두루마기 속에서 찾아낸 약간의 예에 지나지 않으나, 각국의 고전적이며 동시에 대표적인 예에 다름 아니다.
절대주의가 한번 탈취한 권력을 사생결단을 하고 독점하려는 것은 마치 정치권력을 탈취하려고 하는 저 야수성과 같았다.
절대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나 진정한 승리를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절대주의의 역사에서는 어디에서나 우선 타협이 먼저였다. 루이 14 세 시대의 앙시앵 레짐조차도 끊임없는 타협의 과정이었으므로, 그 시대의 정신구조의 가장 큰 특징은 귀족계급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인민계급(Volksklassen, 곧 classes peoples), 곧 부르조아 계급도 포함된 평민(roture)을 허접쓰레기처럼 경멸한 것이었다. 상인, 노동자, 농민은 지배계급의 눈에는 인간이 아니라 짐승으로 보였다. 절대주의시대가 되자 사람은 남작 이상을 의미한다는 견해가 생겼다. 그런 이유에서 절대군주는 귀족계급에만 둘러싸였고 그들만을 접견했고 그들에게만 여러 가지 권리를 주었다. "군주의 절대권력은 인민, 곧 부르조아와 농민만을 그리고 고위 승려계급을 포함한 귀족계급의 경우는 각각의 개인만을 대상으로 했고 신분으로서의 귀족계급은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왕국은 왕의 영지였으나 거기서 나오는 수입은 귀족계급들에게 나누어 주어야했다. 농민과 상공인은 귀족계급을 위해 일하고 상비군은 귀족계급을 위해 싸우며 국가의 관료와 수입은 귀족계급을 위해 존재했다"(칼 후고). 평민에 대한 경멸에는 그것과 정반대되는 것이 어김없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 정반대의 것은 최고의 표현은 곧 군주는 신과 같다는 감정이었다. 절대군주는 유아독존하여 지상의 최고존재로 승격했다. 그는 "vin Gottes Gnaden! (신의 은총에 의하여!)"이 되었다. 그의 지배는 국민의 지지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에 대해서만 책임이 있었다. 절대주의의 모범소년인 뷔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은 "군주는 살아 있는 신이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마음대로 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내뱉고 다녔다. 그런데 신은 나쁜 일에는 직접 손을 대지는 않으나, 독자들도 눈치채고 있듯이, 악마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시키는 법이다. 그리고 절대주의에서는 악마란 것은 신의 수하였다. 그 토대 위에서 자연히 국가의 단 하나의 그리고 최고의 법률로서 국왕의 행복, 국왕의 의지, 국왕의 즐거움, 라틴어에서 말하는 "국왕의 의지는 최고의 법률이다"가 생겨난다. 그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통설이; 되어 모든 사람의 머리를 지배했고 수백 년에 걸쳐서 큰 소리로는 반대할 수 없는 명백한 신앙이 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과인의 즐거움이니까"가 모든 것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물리쳤다. 과학이나 예술도 국왕의 고마움을 선전해야만 했고, 곧 신의 명예를 노래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역사는 군주 및 그 선조의 행위와 그 영웅적인 위대함을 서술했을 뿐이다. 지고지존하신 혈통이 군주의 몸을 빌어 지상에 강림함으로써 그 혈통의 자손, 곧 살아있는 신의 자손만이 언제나 군주가 되었다. 그러므로 군주는 가장 높은 지혜와 덕이었다. 세계는 아직까지 그 이상 고상하고 위대한, 또 그 이상 숭고한 것이 하나의 인간에게 실현된 일이 없었다.
천재적인 콜베르는 그의 아들이 루이 14 세의 측근으로 채용되었을 때 그것은 아들의 다시없는 행복이라고 감격해했다. 왜냐하면 "자식의 결점을 가장 뛰어난 주인, 세계에서 가장 기품이 있는 분, 이제까지 왕좌에 앉은 분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강력한 국왕에 의해서 하나하나 고칠 수 있기"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회를 포착하자 재빨리 국왕을 찬양했다. "전하, 전하의 의지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전하의 전능함을 제한할 수 없는 전하와 같은 국왕의 시대에 우리가 태어난 것은 너무나 감격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소신들은 날마다 신께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루이 14세는 읽고 쓰기조차도 변변히 할 줄 모르는 바보였고 콜베르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였다. 그렇다고 마음속에 비아냥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절대군주의 궁정 용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미성년자가 입에 올리며 근본적으로 교만한 짓이 되었다. 궁정 용어는 최상층의 사람밖에는 알지 못했다. 그 당시에 그러한 미치광이 같은 짓이 얼마나 인간을 좌우했던가는 오늘날 아직도 수백만의 인간이 그와 같은 짓을 하고 그 시대와 같은 사회상황이 나타나기만 하면 미치광이 짓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미술 또한 같은 길을 걸었다. 바로크 미술을 절대주의를 미술의 거울로 비춘 것이었다. 거대함, 태부림(포즈), 위엄이 그 거울 속에 예술적으로 그대로 비쳤다. 절대주의는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궁전건축에 특수한 양식을 끌어들여 발전시켰다. 궁전은 이미 중세처럼 습격이나 위험으로부터 성의 주민을 보호하는 성곽이 아니라 오히려 지상의 올림포스였다. 그 올림포스에서는 모든 것이 신들의 삶에 어울렀다. 홀은 참으로 넓고 복도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유현했다. 벽은 어디나 온통 수정으로 되어있었고 벽을 꽉 채우고 있는 거울 같은 수정에 사람들은 눈이 부셨다. 위엄과 태부림에는 거울이 필요하다. 어느 것이나 속된 것은 없었다. 모든 것은 거룩하게 꾸며져 있었다. 군주의 잠조차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궁전 둘레를 널따랗게 둘러싼 정원과 공원은 올림포스의 빛나는 광야였다. 영원한 즐거움, 영원한 웃음. 봄은 나무열매로 가지가 휘어지는 가을로 바뀌어졌고 겨울은 향기를 내뿜는 여름으로 바뀌어졌다.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군주의 의지만이 자연에 명령을 내렸다.
회화에서는 장엄함과 화려함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고대 희랍에서 따온 장면, 곧 신들의 생활이 정해진 소재였다. 그것은 군주의 생활이며 군주의 지배의 신격화라고 할 수 있다. 쥬피터나 마르스는 군주의 얼굴 모습을 했고 비너스나 쥬노는 왕비를 쏙 빼놓았다. 희랍 신화는 미술에 의해서 왕실의 역사와 군주의 생활의 역사로 바뀌었다. 왕실의 승리는 군주의 승리였다. 군주는 손에 우리의 신의 화살(곧 제우스를 의미하며 제우스는 국가의 보호자였다/역주)을 들었고, 다나에([희랍신화] 황금으로 몸을 변장한 제우스와 관계하여 그녀는 페르세우스를 낳았다/역주)와 래다([희랍신화] 스파르타 왕비의 몸으로 어느 날 저녁 백조로 화한 제우스와 관계하여 알을 두 개 낳았는데 그 중 하나에서 절세미인 헬레네가 나왔다/역주)는 줄곧 신음하면서 그에게 정열에 불타는 다리를 뻗는다. 그의 허리에서는 새로운 신들의 종족이 태어나며, 그 종족에 의해서만이 영웅적인 것은 휘황한 재생을 경험한다.
어떤 인간도 관념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체의 세계에서도 절대군주의 머리 위에 설 수는 없었다. 건축에서 절대주의 미술양식의 최후의 발전단계인 로코코 양식의 궁전은 언제나 단층구조였다. 어떤 인간도 군주 위에 서서는 안 되었으며 그것은 용서받을 수 없었고 또 군주의 머리 위에서 걷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회와 신의 관념을 지상에옮긴 것이었다.
신은 절대군주가 되어서 지상을 거닌다. 그러므로 절대군주 또한 언제나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나타난다. 황금과 보석이 군주의 의상이다. 그의 신하와 종복의 제복은 금빛으로 빛난다. 군주가 앉는 의자, 군주가 식사하는 탁자, 군주의 음식을 담는 그릇, 군주가 먹을 것을 입에까지 옮기는 포크나 스푼은 모두 금으로 만들어져 있다. 군주의 침대의 커튼, 군주의 방위 융단도 금과 은이 섞인 것이었다. 황금은 도처에서 군주 위에 눈부신 빛을 떨어뜨렸다. 군주의 마구도 황금으로 만들어졌다. 군주는 황금으로 된 마차는 타고 거리를 누볐다. 군주의 생활, 군주의 궁전은 모든 것이 황금으로 둘러싸였고 황금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빛 가운데 있었다. 그것은 황금으로 바뀌었다. 향연을 벌일 때 궁전의 방들에 켜지는 수천 개의 촛불 또한 황금처럼 빛났고, 거울을 낀 주위의 벽은 그 빛을 몇 배로 확산시켜 반사했다. 군주 그 자체가 빛이었고 그 때문에 군주는 언제나 빛 속에 서 있었다.
그러므로 한갓 헛된 노고에 불과한 의식도 역시 빛 속에 있었다. 군주가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줄곧 행하는 모든 일상사도 이를테면 그러한 의식의 연속이었다. 군주의 시중을 드는 일이라면 아주 비천한 일도 역시 의식이 되어 국사에 관련되었고 어떤 향기롭지 못한 일에서도 군주의 품위를 떨어뜨릴 만한 것은 제거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궁정에서는 국왕의 침대용 변기를 매일 검사하는 일은 그 일을 담당한 사람에게는 더 없이 영예로운 관직이었고, 실제로 공작이 그 직무를 맡기도 했다. 다시없는 바보스러운 짓도 진지한 얼굴로 해야만 했다. 그러기에 신하들 가운데 일곱 사람의 고관만이 노상 국왕의 측근에서 어른거렀고 세력이 없는 자나 지위가 낮은 신하는 그 곁에 가지도 못했다. 세계는 신의 눈짓에 습복했다. 그들은 군주의 권력의 심부름꾼이었다.
신은 군주가 되어 지상을 걸어다녔다. 절대군주는 바로 살아 있는 신이었다. 따라서 두려움이 앞서 접근할 수 없는 것이 살아 있는 신의 걸음걸이였으며, 또 아무나 호흡할 수 없는 다른 분위기가 살아 있는 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평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장벽만이 아니라 엄중한 규칙이나 넘을 수 없는 돌담, 생울타리, 목책에 의해 군주로부터 격리되었다. 절대군주가 그의 궁전이나 별장으로 쓰기 위해 독점한 광대한 동산에는 평민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었다. 만약 그 금령을 범했을 대에는 혹독한 벌이 뒤따랐다. 군주가 거리를 산책하고 싶을 때 그 거리는 그가 거동하는 시간 동안 완전히 통행이 차단되었고 인민은 멀리서 군주의 거룩한 모습을 바라보는 다시없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괴테 시대의 바이마르도 역시 그랬다. 한번이라도 군주의 옥음(玉音)에 접하고 용안을 바라보고 우악(優渥)한 말씀을 들은 사람은 마치 죽음을 면치 못하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최대의 행운을 누린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영광을 누린 자는 자기의 생애가 다른 사람보다도 한층 특별하게 된 듯이 느꼈다. 왜냐하면 신의 눈초리가 자기에게 닿았고 또한 신의 은총인 진정한 영광이 자기에게 닿았기 때문이다. 군주에게 끊임없이 충성을 다하는 자에게는 군주의 거룩함의 일부가 옮아온다고 조차 말했다. 국왕의 공식 총회는 대다수의 인간에게는, 적어도 경쟁하는 여자들에게는 절대로 비천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그 여자의 아름다움이나 사랑의 기교가 자신의 현세의 가장 큰 욕망인 호색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자격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군주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 그녀 역시 신의 은총을 받은 셈이었다.
그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할레의 유명한 법률학자 토마시우스는 그의 <궁정철학>에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위대한 군주라면 과인은 첩 따위는 싫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군주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서는 신에게만 책임이 있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첩은 상대인 군주의 영광을 얼마쯤 받게 되는 것 같다.
국왕에 의해서 공식 총희로 봉해지는 영예는 그 총희에게 자신과 같은 신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것은 그 여자가 군주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허용되는 기간 뿐이었다. 군주가 다른 여자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기교를 더욱 즐겁게 생각하는 날부터 그 총희의 인기와 행복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인간은 태양의 빛을 육안으로는 직접 관찰할 수 없듯이 지상에 현신한 살아 있는 신에 대해서도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혀서야 다가설 수 있을 뿐이었다. 큰 소리를 내서도 안 된다. 큰 목소리는 군주의 거룩함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다. 황공하게도 허용된 배알은 곧 예배였다. 라 피야드 공작은 자기의 성안에 루이 14 세의 황금의 입상을 세우고 부하들과 함께 밤에 횃불을 들고 그 입상 앞에서 일종의 예배를 보았다. 궁정신하들도 군주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했으며 땅바닥에 엎드리는 것 역시 거리에서의 충성의 표시였다. 군주의 의장마차가 다가오면 신사도 숙녀도 그 행렬을 피하기 위해 길옆의 구렁 속에 뛰어들어 마차가 지나갈 때까지 꼼짝하지 않고 바닥에 꿇어 엎드려 있었다. 군주의 시선이 자신에게 와 닿았다는 감격은 그들의 흙투성이가 된 채 땅에 꿇어 엎드렸다는 불만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그러한 충성의 표시는 군주의 텅 빈 마차에까지도 행해졌다.
절대군주의 지상에서의 전지전능함은 자기의 권력을 시위하는 과정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그 하나가 군대의 스포츠였다. 군주가 일단 손에 넣은 권력은 당당한 군대를 통해서 손바닥 위에 있는 것처럼 드러낼 수 있었다. 지상에서의 전지전능함은 대개 그러한 방법이라야 시위할 수 있었으므로 가장 미약한 군주조차도 "군대"를 갖추고 있었다. 그 경우 군국주의는 대개 장식이나 장난감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러한 나라에서는 군국주의의 형태는 더욱더 그로테스크해졌다. 뷔르템베르크에서는 장신만이 "근위대"에 채용되었다. 이런 근위대에 대해서 어떤 사람이 이렇게 쓰고 있다.
근위대는 검은 색의 소매 휘장, 주름잡은 흰 천으로 만든 목 장식, 붉은 소매의 상의를 입고, 끝이 뾰족한 양철 모자를 쓰며 머리는 인두로 지져 곱슬머리를 만들어 분을 칠하고, 양쪽 끝을 위로 말아 올린 검은 콧수염을 하고 의기양양하게 걷는다. 각반과 짧은 바지는 몹시 통이 좁기 때문에 몸에 꼭 끼며 게다가 무릎 위까지 앞뒤에 두꺼운 마분지를 대어 다리가 막대처럼 되어 앉을 수도 구부릴 수도 없다. 거리에서 또는 분열 행진 중에 나뒹군 자들은 경을 치기 마련이다. 한번 나뒹굴면 혼자 힘으로는 절대로 일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른 두 사람이 홀태바지 속에 댄 마분지 때문에 뻗정다리가 된 그 군인을 양쪽에서 부축하여 일으켜 세워야만 한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거느린 키다리 군대도 역시 그로테스크했다. 그처럼 그로테스크한 포즈도 역시 그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절대군주는 국가를 지배하려 하는 여러 세력들의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허울뿐인 전지전능함에 의해서 자신이 당연히 살아 있는 신이라고 진정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곧 절대군주는 자기 몸 속에 들어온 신이 여러 가지 일을 명령한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국왕들은 환자의 몸에 손을 얹어 그의 병과 불구를 치료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때때로 환자를 진짜로 낫게 했다. 신앙심이 그러한 기적을 낳았던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모든 것을 설명하는 열쇠이며, 그 열쇠에 의해서 절대군주의 전제적인 수법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살아 있는 신은 모든 것을, 곧 신이 만든 인간의 생활과 자유, 특히 인간의 재산권조차도 자기 좋을 대로 처분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법률적으로도 군주의 것이다. 왕국은 군주의 개인 소유물이었다. 루이 14세 시대에도 "국왕은 프랑스의 모든 재산과 토지에 대해서 실질적인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가 여러 차례 진지하게 토론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아무런 후회도 없이 언제나 그 놀라운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루이 14 세가 세자를 위해 만들도록 한 훈령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과인의 국가에 있는 모든 것은 어떤 종류의 것이든 법률적으로는 과인의 소유물이다. 너희 국왕은 태어나면서부터 신민들의 훌륭한 관리인으로서 과인의 국가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언제라도 충당하기 위해서 승속의 소유를 불문하고 일체의 재산을 자유롭게 쓰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안 된다." 특권계급이 절대주의의 그런 원칙의 선전에 의해 그들의 구래의 "권리"가 침해되는 것을 보고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반대하기 시작했을 때 왕실의 법률학자들은 재빨리 앞장서서 "왕국의 모든 토지는 국왕에게 보편적인 소유권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절대군주는 국토의 모든 재산에 대해 태어날 때부터 소유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었으므로 그는 모든 조세수입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었고, 그뿐 아니라 자기 개인의 사치를 위해서 조세 수입의 대부분을 탕진하는 것도 절대주의의 논리로 보면 당연했다. 절대군주는 자기의 변덕스런 사치를 위해서 그가 써도 좋은 금액을 초과하는 일 따위는 물론 계산에 넣지 않았고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다. 적자가 생기면 그 뒤치다꺼리를 하는 것은 국민이었다. 엉망진창의 낭비는 거의 모든 절대주의의 궁정에서는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 몇 년 동안 프랑스는 국가재정이 감당할 수 없는 적자에 이르자 대신까지 완전히 두손을 들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왕비를 위해서 거금 1,500만 리브르로 성 크루 성을, 자기를 위해서는 1,400만 리브르로 랑비에 성을 사들였다. 하룻밤의 도박을 위해 10 만이나 20 만 리브르의 돈을 뿌리는 일은 마리 앙트와네트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 러시아의 에카테리아 2세는 그녀의 왕성한 색욕을 채우기 위해 무려 9천만 루블을 썼다. 그러나 그 엄청난 금액도 루이 15세가 정부들에게 마구 뿌린 돈에 비하면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세상에서 녹원(鹿苑)이라고 불린 베르사이유 궁전의 하렘에 있는 젊은 여인들을 위해서 사들인 물품의 값만 해도 수억 리브르나 되었다. 그 금액 가운데는 애첩인 퐁파두르 부인, 넬 자매, 듀바리 부인에게 들어간 방대한 액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네 잎 클로버 가운데 하나인 퐁파두르를 위해서만 국고로부터 수천만 리브르의 거금을 인출했다. 루이 14세의 비공식적인 첩 관계도 결코 값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훨씬 많은 돈이 든 것은 루이 14세의 건축에 대한 열정이었다. 그는 신으로 받들어진 자신을 위해서 훌륭한 궁전을 가지고 싶었고 그 때문에 1년 동안(1685년)에 9천만 프랑의 돈을 쏟아부었다.
유럽의 절대군주들은 너 나 없이 태양왕이 유례없는 사치와 건축 열과 낭비로 유럽에 보인 본보기를 젖먹은 힘까지 짜내어 흉내 내는 것을 그들의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자신의 건축 열 때문에 단기간에 무려 천 수백 만금을 썼다. 그것은 7년전쟁(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 1756-63/역주)의 가공할 궁핍의 시대로서는 –이 시기는 바로 이 고통의 시대의 뒤이기 때문이다-그리고 궁핍한 프로이센인들에게는 참으로 막대한 것이었다. 뷔르템베르크, 바덴, 헤센의 왕실에서 호화로운 궁전건축을 위해 사용하는 비용은 프로이센보다 방대한 것이었다. 가장 작은 궁정에서도 궁내 대신, 주제 상궁, 궁정 기사, 상궁, 귀족 출신의 궁정 시동 등이 있었다. 궁정시동은 화려한 시동복을 입고 식사 때는 옥좌 뒤에 서서 접시를 바꾸어 내놓았다. 게다가 그 어떤 궁정도 시동, 집사, 마두(馬頭), 어의 , 궁정신부, 승지, 궁정회계인, 궁정악장, 궁정악사, 주방장, 궁정정원사, 시종, 로이퍼(Laufer : 국왕의 마차를 예고하는 관리/역주), 하이둑크(Heiduck : 항아리 식 복장을 한 경호보병/역주), 궁정사냥꾼 그리고 지체가 낮은 종복, 시녀, 의사 담당 시녀, 마부, 전방기수(前方騎手), 마구간지기, 정원사 조수, 주방 심부름꾼 아이, 하비, 근위대(근위대는 어떤 경우에도 무장하고 있으며, 국왕을 모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에도 다른 자질구레한 하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절대주의의 궁정은 베르사이유의 모범에조차 지지 않으려고 안달, 초조했으며, 그 가장 큰 야심은 될 수 있는 한 한 가지 점에서라도 그 모범을 제압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이 궁정 저 궁정에서 이러한 야심이 성공한 것도 사실이었다. 성공의 명예는 특히 작센의 강력왕 아우구스트와 뷔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작에게 주어졌다. 여전히 유감을 표명하면서 그러나 두 사람 공히 이구동성으로 변명하여 가로대, 과인은 종마의 자격은 훌륭히 갖추었으되 그에 비하면 머리 쪽은 크게 뒤떨어지는군. 약소 국가 뷔르템베르크의 절대군주의 낭비벽은 이 나라 면적-당시 뷔르템베르크의 전 인구는 크게 잡아도 60만이었다-에 반비례하여 놀랄만한 것이었다. 궁정연회에서는 사례금 12,000굴덴에 해마다 파리의 인기무용가 베스트리스를 특별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더욱 값비싸게 치인 것은 호사를 극한 불꽃놀이였다. 뷔르템베르크 공작의 궁전에서는 축제 때마다 불꽃놀이가 열렸다. 공작은 그 준비를 위해 이번에는 당대의 불꽃 기술자로서는 가장 유명한 베로네제를 이탈리아에서 불러들였다. 일기가 나빠 불꽃이 공중에서 터뜨려지지 않을 때에도 그 놀이는 강행되었다. 1765 년 뷔르템베르크의 실태를 쓴 <뷔르템베르크 궁전의 진실, 회상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성내에서는 웃음소리를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 정도로 더 많이 먹어치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때만 만나면 퍼 마셔댔다. 그리고 술판 뒤에는 불꽃이 으레 쏘아 올려졌는데, 그것은 연회에 임석하는 최고의 기독교도인 전하처럼 훌륭하고 아름다웠다. 가령 그날 비가 온다고 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1763 년에는 비 때문에 불꽃이 모두 젖어버렸다. 그런데도 전하는 불꽃놀이 대회를 어떻게든 개최하라고 명령했다. 화포장(火砲匠)은 불꽃 가운데 절반은 발화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어떻든 52, 000 굴덴의 거금을 들인 불꽃은 빗속에 마구 쏘아 올려졌다. 전하는 그러한 행세를 자기의 성세와 영화를 과시하는 훌륭한 표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52,000굴덴은 막대한 돈이었다. 그 정도의 금액이면 당시의 뷔르템베르크의 모든 인구를 하루 부양할 수 있었다. 그런 거금을 어리석게도 일시적인 기분풀이를 위해 탕진한 것이었다. 오랜 세월동안 향락생활을 누린 빔펜 남작의 <회상록> 속에는 뷔르템베르크 궁전에서 축제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참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나는 스페인 궁정에서 한 해 동안 머무른 뒤 1763년에 슈투트가르트로 돌아왔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나는 궁정의 즐거운 생활에 한몫 끼게 되었다. 어떤 소동이 일어나더라도 향락은 중지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 뷔르템베르크와 같은 궁정은 아무 데도 없었다(1763년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에 벌어진 7년 전쟁이 끝난 해였다/역주). 공작은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가장 아름다운, 가장 훈련이 잘된 군대를 15,000명이나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200여 명의 귀족이 그를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는 그의 일족과 백작이 20명 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말을 800 마리나 가지고 있었다. 그의 여름 별궁인 루드비히스부르크는 그의 힘에 의해서 더욱 확장되고 더욱 훌륭하게 되었다. 뷔르템베르크 궁정에서는 유럽의 일류 오페라, 일류 오케스트라, 가장 아름다운 발레, 파리풍의 가장 훌륭한 프랑스 희극이 상연되었다. 그리고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 날마다 벌어진 행사에는 굉장한 연회가 으레 뒤따랐다. 연회가 얼마나 사치스러운 것이었는가는 그 뒤 다른 나라 궁정의 가장 사치스럽다고 소문이 났던 연회를 몇 차례 보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공작의 여름 별궁, 특히 그라페네크의 여름 행차만큼 유쾌한 것은 이 세상에 없었다. 그 별궁은 슈바르츠발트의 깊고 깊은 곳에 있는 성으로 그는 혹서의 계절을 그 별궁에서 지냈다. 그는 보통 10명이나 12명 정도의 궁정 기사를 데리고 갔는데 나도 그중에 넣어주었다. 나는 언제나 행운을 잡았다. 그밖에 수행원은 6,700명, 그들은 모두 공작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뽑힌 사람들이었다. 프랑스 희극, 코믹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의 단원들 가운데서 뽑힌 자도 있었고 오케스트라는 조멜리, 롤리, 나르디니, 루돌프, 슈바르츠, 프라 형제 등 일류 악사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노베레는 가장 아름다운 발레만을 추라는 분부를 받았다. 우리들은 "폴로라와 헤베" 극단의 뛰어난 무용만을 보게 된 것이다(플로라 [로마신화] : 봄과 꽃의 여신. 헤베 [그리스신화] : 청춘의 여신. 신들의 술 시중을 듬/역주).
천분과 재능의 혜택을 받은 자만이 기쁨과 즐거움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환락을 위해서만 베풀어졌다. 우리들은 기쁨 속에서 잠을 자고 눈을 떴다. 다른 두 악단이 기상 음악을 연주했다. 우리들은 모두 함께 날마다 그늘이 짙은 조용한 숲속에서 조반을 든다. 그때는 어느새 시골풍의 반주에 맞추어 론도나 카드릴(Quadrille : 4인조의 춤/역주)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은 밤의 무도회를 위해 준비되었던 것이다. 휴식시간에는 화장을 고치거나 놀이를 하거나 음식을 먹었다. 또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구경거리도 즐길 수 있었다. 우리들은 어떤 때는 낚시질을 하고 어떤 때는 사냥을 하고 어떤 때는 어두컴컴한 짙푸른 숲속을 산책했다. 숲속의 산책에는 "플로라와 헤베"의 단원들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뒤 그처럼 즐거운 나날을 보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며칠 동안에 너무나 많은 즐거움을 맛본 터여서, 그 추억은 오늘도 나를 황홀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슬프게 만든다.
거기 머무는 동안 즐거움을 그렇게 높인 것은 아름다운 여인들만이 아니었다. 모든 것, 곧 훌륭한 식사 그리고 아침의 댄스와 오후 사냥을 즐긴 뒤의 왕성한 식욕도 한몫을 단단히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것은 역시 공작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언제나 웃는 얼굴이었고 명랑하게 농담을 던지면서 신하들에게 노상 따뜻한 태도를 보였다. 빔펜이 말한 사냥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다음의 한 예에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군주 한 사람이 진정한 사냥의 즐거움을 위해 공작령의 농민들이 총출동해서 6,000마리나 되는 사슴을 졸리튀드라는 수렵지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사냥"이 어떻게 행해졌는가는 역시 그의 <회상록>으로 알 수 있다.
1763년의 축제의 세 번째 마당은 들판에서 벌어졌다. 들판에서 사냥감 짐승들에게 총공격이 가해졌는데, 크고 작은 짐승 수백 마리가 살육되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그 광경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다. 사냥을 위해서 수렵지 한 곳에 울타리를 치고 갖가지 짐승을 수천 마리나 몰아넣었는데, 사냥하는 날에는 울타리에서 짐승을 한 마리씩 내보내게 했다. 그러면 공작을 비롯한 고위층이나 사냥꾼들은 화승총을 들고 불쌍한 짐승을 기다렸다. 여러분은 나에게 그들은 모두 도살자이므로 그러한 짓은 물론 축제라고 말할 수 없다고 항의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끝까지 들어주기 바란다. 울타리 문밖으로 쫓겨 나온 짐승 앞에는 아주 좁은 외길밖에 없었고 외길의 끝은 단애 절벽이었다. 그리고 절벽 밑에는 연못이 있었다. 그러므로 짐승은 외길로 쫓기다가 절벽에서 깊은 연못 속으로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 맛에 재미를 붙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 연못은 자연의 것이 아니라, 혹한의 한겨울에 사람의 손으로 파게 한 것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면 그 즐거움도 금방 사그러드는 듯했다. 그 당시 추위는 참으로 혹독했는데 공작은 추위에도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고 먼 곳에서 못으로 물을 끌어들이고 그 물이 얼지 않도록 40 대 이상의 난로를 설치하고 계속 불을 피우게 했다.
이들 두세 가지의 기록만 보아도 뷔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작은 프랑스의 태양왕의 모범을 보인 낭비 기록을 깨끗이 깨드렸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 기록은 오래지 않아 수십 배의 더 큰 낭비로 인해 깨졌다. 강력왕 아우구스트의 낭비 기록을 보면 그와 엇비슷한 밑바닥이 빠진 큰항아리들이 너무 많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 당시 유럽의 모든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뮈흘베르크의 유명한 환락 야영의 이름만을 들겠다. 왜냐하면 다른 기회에 그 군주의 가공할 만한 낭비에 대해서는 몇 차례나 언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각국의 군주들은 사치를 즐긴 지배자로서의 태양왕 뿐만이 아니라 절대군주로서의 태양왕도 끊임없이 추월하려고 했다. 따라서 약소 군주는 자기의 경쟁상대에 대해서는 대개 복수심에 불타는 절대군주가 되었고 자신이 살아있는 신이라는 특권에 대해서도 무서울 만큼 과대망상 적이었다. 뷔르템베르크에서는 모든 사람이 공작의 보초근무자에게 공작을 대하듯이 모자를 벗어야 했다. 그리고 모자를 벗지 않았을 때에는 태형에 처했다. 그 형벌은 늙은이나 신분이 높은 자도 용서하지 않았다. 군주의 대리인이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는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았다. 1783년에 어떤 궁정 재정보좌관이 다른 생각을 하느라고 슈투르가르트의 보초근무자에게 모자를 벗는 것을 깜빡 잊었다. 그것을 보고 위관급 장교 폰 뵈넨이 그 위반자를 사무실에 가두었다가 25대 대의 태형에 처했다. 그러나 처사는 칼 오이겐공이 1759년에 상습의 칼 훈장을 제정했을 때 군공의 하나로까지 쳐준 바 있었던 것이었다. 자기에 대한 신의 은총이 자꾸 줄어든다고 느낀 수다장이 엘리자베트 샤를로테가 무심코 우스꽝스럽게 감정을 터뜨린 것은 약소 군주들이 자기는 살아 있는 신이라는 특권에 대해서 품은 그로테스크한 망상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는 꽤 좋은 실례이다. 영지를 가진 이 궁중 백작의 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거웃 같은 것" - 그 여자는 맹트농(루이 14세의 정부/역주)에 대해 얘기할 때는 으레 그렇게 부름으로써 울분을 토하곤 했다.-이 슈트라스부르크에서 두 사람의 처녀를 불러들이곤 그것들이 궁중 백작의 딸들이라고 떠들어대면서 자기 조카의 시녀로 삼았지요, 나는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어요. 세자비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그 일을 호소했지요. 나는 이렇게 말했지요. 내버려 두십시오. 저는 그 따위 일은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제겐 힘이 있으니까 늙은 마녀에 대해서 조금도 따지거나 하진 않겠습니다. 나는 창 너머로 그 조카와 독일 처녀 1명이 산보하는 것을 보았죠. 나도 산보하러 나가 일부러 그녀들 옆을 지나가면서 그 처녀에게 말을 걸어 당신은 대체 누구지요라고 물었죠. 그 처녀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리첼슈타인의 궁중 백작의 딸이라고 말했어요. 내가 정말이죠라고 말하니까 처녀는 정말이에요. 전 아버지 없는 자식은 아니어요. 젊은 궁중 백작의 딸은 아니군요. 우리들 궁중 백작 가문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결혼은 하지 않으니까. 한 마디 더 해주지. 궁중 백작이 당신 어머니와 결혼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당신은 거짓말쟁이야. 당신 어머니는 유명한 매춘부였어. 백작 이외의 많은 남자가 당신의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했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당신 어머니의 진짜 남편이 누구인가를 잘 알고 있지. 그자는 허풍쟁이 예술가였어. 정말이야. 그런데도 당신이 궁중 백작의 영양이라고 계속 속이려 들면 나는 당신 치마의 뒤쪽자락을 잘라내서 그따위 말이 다시는 들리지 않게 하겠어. 하지만 당신이 나의 충고에 따라 진짜 이름으로 행세한다면 나도 결코 당신의 태생을 경멸하진 않겠어. 아무튼 당신이 앞으로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보고싶군. 처녀는 내 말이 마음에 걸려 마침내 며칠 뒤 죽어버렸지요. 또 한 사람의 처녀는 파리의 여자학교로 추방했죠. 나는 세자비한데 가서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말씀드렸죠. 세자비는 정말 기쁘게 생각합니다. 나는 평생 그런 용기를 낼 수는 없었을 거예요라고 고백했어요. 세자비는 내가 국왕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을 것이라고 걱정했지만, 국왕은 내게 그 문제 자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국왕은 약간 웃음 띤 얼굴로 내게 이렇게 말했죠. 당신의 가문문제에 대해서 당신을 공격하기란 두렵군, 목숨을 걸어야 할 판이니까,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죠. 저는 거짓말쟁이는 아주 싫어합니다. 궁중 백작의 말을 사칭했던 또 한 사람의 처녀는 파리에서 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유명한 갈보가 되었어요. 하지만 그 처녀는 이름을 바꿨더군요. 결국 내가 그 여자를 쫓아낸 셈이죠. 1720년 10월 25일.
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편지는 이처럼 비애에 가득 차 있다. 아무튼 엘리자베트 부인은 그러한 가문의 일원으로서는 아주 분별력이 있는 여자였다.
소국의 절대군주들은 그들의 적에 대해 복수심이 불탔다. 칼 오이겐 공이 슈바르트(1739~91. 정치적인 풍자시를 쓴 결과 체포됨/역주)를 10년 동안 호엔아스베르크에 유폐한 일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오점으로 남아 있다.
신은 인간에게 수많은 은혜를 내린다. 신이 상냥한 손을 인간에게 뻗칠 때는 진정 축복을 내린다. 그와 마찬가지로 절대군주들도 열심히 은혜를 하사했는데, 그 자선사업은 참으로 낭비적이었다. 그 방면에서는 적어도 갈리아니(이탈리아의 재정학자. 1728~87/역주)의 "군주의 덕은 이를테면 처녀성의 즐거움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상상하는 것이 향락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답다"라는 말은 적절하지 않다. 군주의 축복은 오직 귀족 계급에게만 내려졌는데, 어떠한 빚도 민중에게 내려오지는 않았다. 그것이 바로 절대주의의 사상이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것으로 보더라도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다. 루이 16세는 그러한 방법으로 1774년부터 1789년까지 15년 동안 귀족계급에 대한 은총의 표시로서 무려 2억 2천8백만 리브르의 거금을 뿌렸다. 그 가운데 8천만 리브르는 그의 일족에게 뿌린 것이었다.
왕족의 가까운 친구가 된다는 행운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가는 금방 상상할 수 있다. 폴리냑 집안이 입은 혜택은 이에 대한 훌륭한 증명이 될 것이다. 폴리냑 공작의 부인은 마리앙트와네트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루이 16세는 그 둘도 없는 친구에게 보답하기 위해 왕비의 은사라는 명목으로 폴리냑 집안에 매년 70만 리브르의 은급을 내렸다. 폴리냑 공작은 매년 12만 리브르의 종신연금을 받았고 그 위의 영지 매입대금으로 120만 리브르라는 거금을 일시에 하사 받았다. 가엽게도 폴리냑 공작은 도시의 공기에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의 선왕들도 역시 손이 컸다. 궁중 백작의 딸인 리즈로트(엘리자베트 샤를로테의 프랑스 이름/역주)는 어머니를 따르는 상냥한 아들(오를레앙 공 필립 2세. 루이 15세의 섭정/역주) 덕택으로 그녀의 주머니에 도도하게 흘러들어온 1백만 리브르에 대해서 웃음을 지으며 1719년 9월 1일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내 아들 덕에 이번에도 나는 더욱 부자가 되었는데, 내 연금은 150배로 불어났습니다." 그로부터 석달 뒤인 1719년 11월 28일에 그 부인은 다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었다. "내 아들은 내 저택을 짓는 데에 2백만 리브르의 주권을 주저하지 않고 내게 주었습니다." 그런 거금이 어떻게 돈지갑에 들어올 수 있었던가? 그러나 돈지갑은 밑빠진 독이었다. 그 여자는 "신의 은총"에 의해서 작은 쿠데타 형식으로 프랑스의 섭정이 된 사람의 생모라는 것밖에는 별로 이렇다 할 공로도 없었다. 그 부인은 지독한 수전노였으나 그런데도 생활비로 30만 리브르의 거금을 썼다. 그리고 군주는 그 밖의 일에도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퇴물이 된 총희들은 대개 많은 연금과 은사품을 받는 대신 사랑의 하사는 보통 단념했다. 루이 14세의 첩이었던 감상적인 라발리에르 양의 뒷자리를 물려받은 몽테스팡은 10년 동안에 걸친 충실한 사랑의 봉사에 대한 위자료로서 매월 1000 루이도르(20프랑짜리 금화/역주)의 은급을 받았다. "그 총희 하나에게 프랑스는 유럽과 프랑스 왕국에 있는 학자 전체 급료의 3배나 되는 돈을 주었다"고 그 무렵의 한 저술가가 개탄을 했을 정도였다. 그것은 절대주의 시대에 학문이 얼마나 비참한 대우를 받았는가를 분명히 보여준다. 퇴물이된 총신들도 대개 그와 비슷한 행운을 잡았다. 에카테리나 2세가 부리고 버린 총신들이 받았던 지난날의 총애에 대한 막대한 선물이 이에 대한 충분한 증거가 될 것이다.
지위가 높은 자와 함께 지위가 낮은 자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였다. 절대주의 궁정의 손발 노릇을 한 자들은 크고 작은 어느 나라에서나 몇 백만이라는 거금을 챙겼다. 뷔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작은 연회에 초대한 귀부인들 모두에게 이른바 여인에 대한 선물로서 값비싼 보석을 주는 것을 특별한 여흥으로 즐겼다. 그는 그 여흥을 위해서 한 번에 10만 굴덴이나 되는 막대한 돈을 썼다. 겨우 15분 동안에 그러한 막대한 선물을 뿌렸던 것이다. 작센의 강력왕 아우구스트는 가장 마음에 드는 여인들에게 첫 초대 때에 대개 다이아몬드나 루비를 박은 조화 꽃다발을 안겨주었다.
구두쇠 왕국 프로이센에서도 때로는 몹시 광적인 관례가 있었다. 에기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시대 때인 1796년의 폴란드의 "게르만화"는 아주 지독한 공공연한 사기였다. 그때 혹독한 피해를 본 쪽은 무자비하게 기만당한 폴란드의 귀족계급과 승려계급이었는데, 그것이야 아무래도 좋다. 그 수법이 어떤 것이었는가는 다음의 보고를 보면 알 수 있다.
호임 연합(Konsortium Hoym), 곧 비숍베르더(Bischoffwerder)-트리벤펠트(Triebenfeld)-리츠(Rietz)-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정권"이 다음과 같이 공작했다. 연합은 몰수한 폴란드 토지의 공정가격을 1리 1모까지 사정해서 그 토지들을 이른바 "은사의 토지"라고 하여 무상으로 또는 그들 연합에 막대한 커미션을 지불한다는 약속 아래 "독일의 부농들"에게 싼 공정가격으로 분양했다. 토지를 분양받은 부농들은 그 토지들의 암시세가 폭등하기를 기다렸다가 폴란드 인, 유대인, 러시아 인, 터키 인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토지를 팔았다. 약간의 예를 들어 이 유명한 토지 암거래를 설명해보자. 비숍베르더는 어떤 토지를 양도받았는데, 그 공정 가격은 18,000탈러였다. 그러나 암시세는 191,000탈러였다. 그는 그것은 114,000탈러에 팔아 넘겼다. 추밀 원고문 폰 골드베크는 공정가격 28,000탈러의 토지를 분양받았는데 되팔아 당장 8만 탈러를 벌었다. 뤼티카우는 공정가격 84,000탈러의 토지를 받아 그것을 80만 탈러로 팔았다. 더구나 그는 공정가격 28,000탈러로 8개소의 왕실 직영지를 "구입했다" 그 중 한 곳의 토지만 하더라도 등기소에서는 당장 9만 탈러로 감정하였다. 육군 소장 폰 쿠헬은 무상으로 받은 은사의 토지만으로는 부족하여 3만 탈러로 또 한군데의 왕실직영지를 구입한 뒤 그것을 재빨리 13만 달러로 팔아넘겼다. 블뤼허도 역시 방대한 토지를 받은 뒤 그것을 14만 탈러의 암시세로 엘빙의 한 상인에게 팔아넘겼다. 또한 호임 연합과 그 일당들은 부농들과 암거래를 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많은 커미션을 내기만 하면 변호사, 상인, 여관 주인, 향료 장수와 같은 시민계급의 천민 등 누구에게나 마구 토지를 분양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트리벤펠트와 리츠의 부하인 방물상인 트레스코프는 그들의 시세로 35만 탈러는 족히 되는 토지를 겨우 8만 탈러로 매입했고 더구나 그 내국적인 의협심이 인정되어 귀족으로 봉해졌다.
절대주의 시대의 지상의 신들은 하늘에 있는 우리의 신이 보여주는 모범을 그대로 흉내 냈으나, 어떻게 해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지상의 신들은 하늘에 있는 신이 행하는 기적을 보이려고 몹시 애썼으나 그러나 기적은 하나도 이룰 수가 없었다. 결국 무에서 황금을 만들려는 실험은 지상의 신들에게는 전혀 가능하지 않았다. 이미 루이 14세와 관련해서 인용했듯이, 속세 사람들의 재산은 모두 과인의 사유재산이라는 간교한 방법도 사실의 엄격한 논리와 충돌한 결과 산산조각이 났으므로 그들은 다른 수법으로 그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고 머리를 써야만 했다. 그리도 마침내 부르조아나 농민의 토지를 매수한 뒤 임대함으로써 흘러들어오는 금액보다 더욱 많은 돈을 다른 수법으로 실제로 손에 넣었다. 그 증거로서는 루이 16세가 1783년에 재무대신에 임명한 재상 칼론의 공채정책의 결과만을 인용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칼론은 재직 3년 동안에 프랑스에서 6억 5천만 리브르라는 막대한 금액을 사취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당시 참으로 거대한 금액이었다. 그리고 그 돈 전부가 국왕의 금고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적어도 그 대부분이 정말로 국왕의 금고를 통과했던 것이다.
절대주의가 그 부귀영화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돈을 긁어들이기 위해 어느 나라에서나 취한 첫째 수법은 참으로 전제적인 세법이었다. 아무것에나 세금을 부과했고 계속해서 새로운 조세를 만들어냈다. 세수입을 확보하고 그 위에 세금의 징수업무를 모면하기 위한 꽤 천재적인 방법이 프랑스에서는 페르미에 제네랄 이라고 불린 진세 청부인 제도에 의해 성공했다. 그 제도는 궁정이 신임하는 사람들 중에서 선발된 자들에게 그들이 국왕의 금고에 납입해야 할 일정한 금액이 청부되었다. 1789년에는 프랑스에 44명의 징세청부인이 있었는데, 합계 1억 3천 8백만 리브르의 세금이 해마다 국왕의 금고로 들어갔다. 그러한 책임과 징세조직의 대가로서 징세 청부인들에게는 납세자에게 세금을 마음대로 매겨도 좋다는 권리가 부여되었다. 그 결과 국왕의 금고에 납입되는 금액의 거의 2배나 되는 세금이 서민으로부터 거두어 들여졌다. 그렇다고 해서 국가 자신이 세금의 할당과 징수를 담당했던 나라들에서는 그것이 너그러웠다는 뜻은 아니다. 프로이센에서는 농민이 납부해야 할 "군세(Kontribution)"가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지방에 다라서는 전체 세입의 33.3%나 되었다. 그것은 1 후페(Hufe : 말 한 마리로 갈 수 있는 밭의 면적, 약 10~15헥타르/역주)에 대하여 8탈러의 군세를 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대지주는 같은 면적의 땅에서 겨우 2탈러의 군세만 내면 되었다. 한편 농민은 그들에게 남겨진 얼마 안되는 수입에서 다시 그 밖의 세금이나 토지세로 거의 그 절반을 납부해야했다. 그런데도 입만 나불거리는 어용 역사가들에게 의하면, 프리드리히 2세는 "농민의 왕(Bauernkonig)"으로서도 크게 활약한 것이다.
그런데 세원의 고갈에 의해 세수가 줄어드는 데도 씀씀이는 자꾸 늘어났기 때문에 세수는 국왕의 금고를 언제나 절반 정도밖에는 채워주지 못했다. 그 때문에 절대주의는 어느 나라에서나 서민의 돈주머니를 노리고 공공연한 약탈을 조직적으로 행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절대주의는 자본가들이 기근이나 그와 유사한 생활난을 빌미로 대중의 주머니를 털려고 하는, 바꾸어 말하면 대중의 생활난에 편승하여 돈을 벌려고 하는 음모를 은밀히, 또는 공공연히 응원해야만 했다.
돈을 벌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군주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현금을 매개로 거래하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지난날 로마 교황청이 고위의 사제직을 입찰에 부쳐 팔아넘겼던 것과 마찬가지로 특히 벌이가 좋은 관직이 매매 대상이 되었다. 악명 높은 매관매직이 어느 나라에서나 유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은 관직이 착취의 원천이 된다는 것을 전제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 이래로 "관리"는 어떤 것이든 거저 해주는 것이 없었고, 사소한 일에도 수수료를 받으려고 했다.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위에서 임명한 관리가 하는 어떤 일에도 응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가난한 농민은 자기 집에서 만드는 포도주의 술통마저 관리의 검사를 받아야 했고 그에게 수수료를 지불해야만 했다. 수수료를 낼 수 없으면 포도주 통이 썩어가도 지하실에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 또 가난 때문에 자신의 포도주 한잔 마실 수 없는 신분의 사람이라도 수수료를 내고 검사를 받아야 했다. 어떠한 공직도 모두 국가의 관직으로 바뀌었다. "군주는 도시로부터 자치권을 거두어가 버렸다. 도시가 빼앗긴 자치권을 많은 돈을 지불하고 되사지 않는 경우에는 도시의 공직이나 명예직은 일방적으로 국가의 관직이나 명예직으로 바뀌었다. 그 경우에도 그것들은 도시주민의 비용에 의해 유지되었고, 더구나 국가는 주민들로부터 일일이 수수료를 받아냈던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의 국왕도 함스부르크 가도 호엔촐레른 가도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약소 군주들까지도 수백 년에 걸쳐서 그와 비슷한 수법을 썼다. 그 이래로 관직은 모두 돈을 내고 살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독점화되었고, 더구나 다수 지원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높은 값을 매긴 자가 언제나 차지하게 되었다. 따라서 직무에 대한 특수한 재능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얼간이라도 돈을 뿌리기만 하면 어떤 천재에게도 이길 수 있었다. 유곽 주인이 추기경 회의의 평의원이 될 수도 있었다. 매관매직은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세상에서 소문난 얼간이가 추밀원 고문에 임명되었고 사기꾼이나 도둑조차도 시장이나 법관의 자리에 올랐고 궁정의 하인이 무대감독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부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작이 관직 경매를 맡은 신하 비틀레더에게 내린 훈령 가운데는 "설령 재능이 없더라도 그 사람은 역시 훌륭한 인물이다. -4,000굴덴이라면 큰돈이기 때문이다"라는 엽관운동 패거리를 겨냥한 참으로 정직한 말이 있다. 유스티누스 케르너(독일 시인, 슈파벤 파의 한 사람. 1786~1862/역주)의 아버지는 루트비히스부르크의 지사 거리를 6,500굴덴의 거금으로 사들였다. 그는 빚을 내었고 그 빚 때문에 평생을 시달렸다. 뷔르템베르크의 경우, 새로 채용된 관리는 한 사람도 남김없이 사령장을 받기 전에 서약서에 서명을 해야 했는데, 그 서약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있었다. "성스러운 전하께서 신 아무개에게 관직을 수여하시기로 결정했으므로, 신은 이를 영광으로 알고 즉시 ......굴덴의 금액을 바치겠습니다. 그 증거로 여기에 자필 서명을 ......"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도 관직을 줄 때는 "누가 가장 맣이 낼 수 있는가?"를 가리기 위해 몇 차례나 회의를 열었다. 어떤 관직에 대해서 살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그 관직은 곧바로 돈 있는 자에게 수여되었다. 만약 그 사람이 군주로부터 받은 그 "명예"를 고사하면 그는 "군주의 우악한 은총을 몸으로 느끼고 깨달을 때까지" 독일에서는 변경 요새로 추방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는 위험을 무릎써야 했다. 그 장사는 꽤 수지맞는 것이었으나 그럼에도 돈 부족은 별로 풀리지 않았다. 그 때문에 군주는 정원을 마음 내키는 대로 마구 늘였고, 한술이나 더 떠서 어이없는 관직까지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제까지 4명이나 8명의 평의원으로 구성되었던 참회의는 12명, 24명으로 늘어나다가 마침내 그 이상의 인원으로 늘어났다. 특히 루이 14세 시대에는 돼지와 새끼돼지 검사관, 가발 감독관, 버터의 신선도 검사관, 버터 시식관, 건축용 석재 검사관, 건초 계산관, 목재 쌓기 감독관, 눈 판매관, 포도주 검사관 등 야릇야릇한 관직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관직은 얼마든지 한꺼번에 여러 개를 살수도 있었다. 아무튼 파리에만 900명 가까운 포도주 검사관이 재직하고 있었다. 매관매직의 방법으로 루이 14세는 1701-15년의 15년 동안에 국왕의 금고에 5억 4천 2백만 리브르라는 엄청난 돈을 긁어 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일확천금을 꿈꾸는 콜럼버스의 달걀을 절대주의는 화폐 모야을 바꾸어 재주조하는 수법으로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었다. 탈러, 굴덴, 그로센의 크기를 줄이기만 하면 되었다. 옛 화폐 한 개로 같은 액면의 새 화폐를 몇 개나 주조해낼 수 있었다. 무일푼이 하룻밤 동안에 재산가인 크뢰수스(옛날 소아시아에 있었던 리디아의 마지막 왕, 그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임금이었다. / 역주)가 되는 데는 그보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화폐 경제가 등장한 무렵부터 일찌감치 생각해 낸 그 방법이 되풀이해서 악용되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5세 때까지 은화의 액면 표시가 원래 표시의 250배로, 금화의 액면표시는 원래 표시의 150배가 되었다. 그럴 때 어떤 방법이 잘 사용되었는가는 국고에 5천만 리브르 이상을 불로 소득한 1709년의 프랑스의 대대적인 "개주"와 새로운 "정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거의 모든 군주가 그들의 지독한 재정 적자를 메우기 위해 그런 간악한 타개책을 생각해 낸 것은 별로 놀랄 일이 못 된다. 그 방면에서 가장 악독하고 또 잘 이용된 수법은 세금, 보증금, 예금과 같은 국고에 납입되는 돈은 양화로 요구하고 국가의 지출이나 봉급은 악화로 내주는 방법이었다. 프리드리히 2세 등은 아주 능란한 재정의 명수로서 그런 방법을 능숙하게 구사했다. 그런데 이 방법에 의해서도 낭비로 인한 적자를 보충할 수 없을 때는 대개의 군주는 공공연하게 강도로 돌변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1689년에 프랑스 정부는 17세기 후반기에 유행했던 은제 집기를 모두 왕실조폐국에 공출하도록 명령했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는 극형에 처했다. 민중의 궁핍을 이용하여 한목 벌려는 것도 번번이 사용된 수법이었다. 프랑스에서는 기근이 들 때마다 의례 곡물투기군이 큰돈을 벌었다. 왜냐하면 매점 조합을 조직하여 모든 곡물을 시장으로부터 거두어들이게 됨으로서 기근이 더욱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기회에 루이 15세는 이른바 "기근에 불을 지르는 도당"과 한패가 되어 폭리를 취하는 곡물 상인으로부터 개평을 떼어 자신의 금고에 막대한 돈을 끌어들였다. 루이 15세가 곡물 매점 조합인 말리세(Malisset)의 두목이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의 신하의 인명부에는 버젓이 "전하의 곡물매점"을 전담하기 위한 회계과장이었다. 오를레앙 공작 부인(엘리자베트 샤를로테/역주)이 루이 15세의 첩 맹트농에 관해서 "전하는 물론 늙은 첩까지 그 해의 농사가 흉년으로 보이면 재빨리 시장에서 닥치는 대로 곡물을 매점했습니다. 그 때문에 그 여자는 참으로 많은 돈을 벌어들였지만 국민은 굶주림으로 마구 죽어갔습니다"라고 말한 그대로의 사실이 벌어졌다. 루이 15세는 그 경우에 곡물의 자유무역이나 자유판매를 편드는 쪽-모든 판매상과 마찬가지로 곡물상도 독점되어 있었다-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 반대로 자기 나라의 국민이 영원히 식량 위기에 직면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좋은 상황으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절대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민중의 가장 큰 행복은 신이 내린 국왕의 행복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결국 큰 나라에서만 할 수 있는 벌이었다. 세금, 매관매직, 독점 등에 의해 국민을 착취하는 수법은 큰 나라에서도 한계가 있기 마련인데 작은 나라에서는 그 한계가 더욱 뚜렷했었다. 프랑스 태양왕의 궁정을 흉내 내려는 약소국의 절대군주들은 그들의 전제적인 손아귀 속에 있는 국민의 힘을 짜내기 위해 특수한 방법을 써야만 했다. 그럴 경우 가장 수지 맞는 방법은 인신매매, 곧 전쟁 중인 다른 나라의 군대에, 특히 네덜란드나 영국군대에 자기 나라 사람을 팔아넘기는 것이었다. 당시 네덜란드나 영국은 잔혹한 식민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많은 인적 자원이 필요했는데, 자국의 국민만으로는 그 수요를 다 메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프랑스나 영국으로부터 보상금을 받고 자기 나라 군대를 그 나라의 전선에 보내는 것인데 자기 나라에 묶어 두는 일 보다도 더욱 야비한 짓이었다. 독일의 인신매매업자들 가운데 으뜸가는 자들은 헷센의 빌헬름 방백, 레싱의 박해한 브라운 슈바이크의 세자, 슈바르트를 박해한 뷔르템베르크의 칼 오이겐 공작이었다. 으뜸가는 자들이라는 점에 주의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자기 나라의 인민을 팔아넘기는 수법은 오랜 세월에 걸쳐 소국의 군주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던 "재정개혁"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파는 일은 독일의 약소국 절대주의에서는 매우 중요한 경제적 기반의 하나였다. 브라운슈바이크의 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1776년부터 1782년까지 영국에 5,723명의 인간을 팔아넘겼다.(영국은 미국의 독립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용병이 필요했다/역주). 그때의 조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총 4,300명의 보병과 경기병을 언제라도 영국정부에 제공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영국 정부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가 영국의 급료를 받고 있는 동안은 보상비를 계약에 서명한 날로부터 계산해서 1년마다 64,500 독일 탈러씩 증액하기로 약속했다. 또 군대가 영국 정부로부터 급료를 받지 않으면 그날로부터 보상비를 두 배로, 곧 129,000탈러로 증액하며 두 배로 증가된 보상비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군대가 독일로 귀환한 뒤에도 향후 2년 동안 계속해서 지급하기로 약정했다. 또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은 영국으로부터 병사 1인당 1년에 30탈러의 징발 자금을 받았으며, 전사자 1인당 40 탈러의 보상금과 부상자 3인당 같은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다.
이와 같은 경로로 팔린 사람들 가운데 1783년에 무사 귀국한 사람은 2,708명이었다. 그 숫자를 5,723명에서 빼면 3,015명이 없어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그 3,015명이 모두 전사한 것은 아니고 "그 일부분은 가엽게도 미국에서 거지가 되었다. 왜냐하면 레싱의 고귀한 패트론(페르디난트는 만년에 학자와 예술가를 보호했다/역주)은 병사들 가운데 전상을 입거나 불구가 된 자들은 미국에 버려두고 귀국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팔아먹은 인간이라는 상품에 대해 영국이 지불하는 피의 급료를 챙기는 것만이 목적이었던 것이다. 교활한 재정가는 자신의 쾌락을 위해 그 불행한 인간들에게서 3중의 이윤을 긁어냈다. 첫째로 병사들의 건강한 육체를 팔아넘김으로써, 둘째로 병사들의 부상한 육체에 대해서 손해배상을 받아냄으로써, 셋째로 불구폐질자가 된 병사들을 외국에서 거지 노릇이나 하게 해서 그들에게 지불해야 할 수당을 절약함으로써였다. 그가 그러한 놀라운 "재정개혁"에 의해 500만 탈러 이상의 현금을 자기 호주머니에 쑤셔 넣은 것은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메링, 레싱의 전설).
뷔르템베르크 공작도 매우 악독한 인물이다. 그는 자기의 혈육까지 아프리카의 살인은행에 팔아 넘겼다. 그는 장기간에 걸쳐 네덜란드의 화폐와 이해관계를 위해 일한 살인은행의 가장 큰 어용 상인이었다. 뷔르템베르크 공작은 많은 첩의 자식들에게 모조리 프랑크몽(Franquemont)이란 성을 붙였는데, 네덜란드와의 계약에 의해 그가 아프리카의 케이프타운에 파견한 각종 군대 가운데는 그의 아들들이 많이 끼어 있었다. 물론 뷔르템베르크 공작이라는 인신매매자는 자기의 아들들을 농민의 자식들과 같이 값싼 계약조건으로 팔지는 않았다. 그런 상품이나 희생자는 그 값이 훨씬 높았다. 그 아들들은 장교감이었던 것이다. 곧 장교의 경우에는 그 계급에 상응해서 보통 군인에게 지불되는 금액의 3배 이상으로 계약되었다.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에 간 프랑크몽들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전해진다. 첫째 프랑크몽은 사막에서 쇠약해진 나머지 객사했다. 둘째 프랑크몽인 프리드리히는 온갖 고초를 겪다가 13년만에 겨우 고국으로 송환되었다. 그런데 그는 아버지가 팔아넘긴 가엾은 자식들 가운데 다시 조국의 땅을 밟은 몇 명 안되는 자식 중 하나였다. 살아남았지만, 귀국 도중에 탈주할 만큼 영리하지 못했던 아들들은 거의 바타비아로 보내졌는데 그들은 거기서 흑사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파렴치한 인신매매를 비판할 경우, 특히 외국에 팔아 넘긴 군대 중에서 자발적으로 아프리카행 군인모집에 응한 자원병은 거의 없었다는 주위의 사정에도 주목해야 한다. 대다수는 강제로 군대에 징발되었던 것이다. 병역의무가 있는 장정이라고 해서 간단히 끌려온 사람들도 있었고 서인도의 노예상인이 검둥이 상품을 조달하던 식으로 사냥된 사람들도 있었다. 해마다 많은 젊은이들과 성인들이 한창 밭일을 하던 중에, 밤중에 잠자리에서, 또 술에 취해 있을 때에 강제로 끌려갔다. 일단 군주의 재산으로 편입된 인간은 아무리 발버둥쳐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다 큰자식이나 한창 일할 나이의 아버지가 있는 수많은 가정에서는 가족들이 공포와 불안 때문에 밤에도 잠을 잘 자지 못했다. 절대군주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약소 군주들이 행한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이러한 "재정개혁"의 모든 수법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미 말했듯이 이러한 일들은 모두 서로 맥이 닿는다. 절대주의의 교의는 스스로 갈 데까지 가버렸다. 절대주의를 추진시켰던 역사적 상황의 덕택에 절대주의는 전지전능의 신격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것은 신으로부터 권력을 받은 군주 그리고 그 군주의 신하들에게 그들 좋을 대로 이 한세상을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는 것만이 국가 특히 국민의 이 세상에서의 단 하나의 목적이라는 사고방식을 불어넣었다.
국왕이 있고 나서 비로소 국민이 있었다. 그러므로 군주의 변덕이나 찰나의 행복 때문에 수많은 비천한 서민의 생활이 불행해진들 그것은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다. 절대주의는 그렇게 생각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프랑스에서도 독일에서도, 예를 들면, 알을 품고 있는 자고새나 꿩의 신경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이유만으로 농민은 1년 중 어떤 기간에는 어떤 종류의 농사일도 해서는 안 되었다. 그 때문에 농작물이 해마다 전부 또는 일부분이 못 쓰게 되는 일이 되풀이되었지만 그런 일 따위는 알 바가 아니었다. 더구나 손해를 본 농민들에게는 단돈 한푼의 배상도 해주지 않았다. 명색이 기독교도인 군주가 자기 나라에서 몇천 명의 국민이 해마다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는 것을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 14세가 호화건축에 9천만 리브르를 투입한 그해에 세자비의 영지에 사는 인민들은 목장의 잡초나 나무껍질을 먹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의 절망에 대해서는 "초근목피도 훌륭한 음식이지"라는 조소나 흘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와 똑같은 성찬이 독일농민의 식탁에 수없이 울려졌던 것이다. 도시도 농촌과 마찬가지였다. 도시에서는 빈곤이 더했다. 1777년에 프랑스 전국에서 집계한 거지의 숫자는 25만 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12만 명이 파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숫자는 파리의 전체 인구의 6분의 1에 해당했다. 그 시대만큼 사회의 상하층의 격차가 크고 깊었던 때도 없었다. 한쪽의 끝에는 기아에 직면한 사람들, 곧 평생을 굶주리며 서서히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고, 다른 쪽 끝에는 남아도는 돈더미에 짓눌려 술이 막히는 사람들, 곧 서서히 부패해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비극은 다음의 사실에 의해서 더욱 비참한 상황이 되었다. 밑빠진 독과 같은 낭비는 18세기의 특권계급사회의 특징이었지만, 부르조아 계급, 귀족계급, 승려계급 가운데서도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자들만이 그러한 낭비를 즐길 수 있었고 또 즐겼다. 앙시앵 레짐의 주요 계급인 이 세 계급은 그 각 계급의 내부에서도 역시 격차가 심각했다. 세 계급 가운데 한 줌밖에 안 되는 자들만이 언제나 절대주의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8 세기 후반의 프랑스에서는 귀족계급의 가구수는 많아야 3만이었고 그 총인구는 14만 명 정도였다. 그 귀족계급 가운데서도 자신의 봉건적인 기존직업을 버리고 자진해서 궁정 귀족으로 변신한 자들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경우 그들은 겉으로는 왕의 측근에서 봉사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사실은 고급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다고 치고 고급 심부름꾼이라는 제2의 직책도 허구에 불과했다. 그 허구는 각국의 절대군주가 개인적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곧 수입이나 형식으로 볼 때 아주 기괴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저 명예직을 궁정 귀족들에게 남발하는 것만으로도 충족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궁정 귀족이라는 이름은 그 다음의 명예직을 위한 전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궁정에서 실질적인 보직을 맡을 때는 명예직은 사퇴해야 했다. 곧 진정한 궁정 귀족은 명목만의 관직이었으므로 실제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결국 귀족의 가장 높은 덕이 되었다. 귀족은 군주와 마찬가지로 대대로 상속되는 권리이며 하 대에 "획득된" 권리는 아니었다. 그때그때의 수입은 작위에 연결되었으며 실제의 일과는 연결되지 않았다. 따라서 그것은 수백 명의 사람이 각국에서 작위를 받음으로써 급료를 강탈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정이 그럴진대 궁정에서 실제로 직무를 맡는 일은 미천한 사람의 짓으로 멸시를 받게 되었다. 승려계급에서도 고위직에 있는 자만이 단물을 빨아먹었다. 그런데 고위직에 있는 자는 모두 봉건귀족 출신이었다. 궁정 귀족과 그들의 차이점은 그들에게 주어진 명예직이 성직이고 성직자로서 봉급을 받는다는 것뿐이었다. 이 성직자로서의 명예직이 때로는 얼마나 수지맞는 것이었는 가는 스트라스부르의 추기경 로앙의 유명한 사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 사나이는 환심을 사기 위해 마리 앙트와네트에게 싯가 150만 프랑이 넘는 찬란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바쳤고 그것을 미끼로 한바탕 연극을 부릴 수 있었다. 그 연극은 이 노회한 사기꾼의 손에 의해 완벽하게 공연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로앙까지도 사리를 당했다는 또 다른 의견도 있다. 슈테판 츠바이크, 「마리앙뜨와네뜨」, 도서출판 까치, pp.176-91 참조). 아무튼 군주의 혜택에 의해 "입고 먹는" 그 두 계급의 상대적, 절대적 인구는 절대주의 시대에 이르러 계속해서 불어났다. 바꾸어 말하면, 근대적인 생산양식이 날로 발전함에 따라 귀족계급은 이제까지의 봉건적인 직업을 작파하고 군주의 부양 인원 속에 끼어들려는 취직 운동으로서 아유구용을 일삼았다. 그래도 기껏해야 두 계급 가운데 겨우 수만 명만이, 곧 전체 인구 가운데 소수만이 군주의 부양 인원 속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부르조아 계급의 압력에 의해서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다. 부르조아 계급의 경우에도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류는 가장 위에 위치한 그야말로 한 줌에 지나지 않는 계층, 곧 금융세력의 대표들뿐이었다. 산업자본은 아직 어느 나라에서나 턱걸이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산양식은 아직 소규모생산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대 부르조아 계급 숭 소수 곧 금융 귀족 계층이라고 말해도 좋을 부류가 앙시앵 레짐의 생활양식에 점점 커다란 발언권을 자지게 되었다. 그들의 영화와 호사는 결국 귀족계급이 동경하는 사치의 표본이 되었다. 귀족계급은 소비생활과 사치에 돈을 물 쓰는 듯하는 부르조아 계급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그 부류들과 적어도 대등하게 행동해야만 했던 점은 절대주의의 사고방식과 모순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금융조작에 의해서 방대한 부가 부르조아 계급의 금융세력의 손아귀에 들어갔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밖에도 원시축적의 시대에는 개같이 쓰는 것이 언제나 부의 가장 확실한 증거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참으로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 때문에 부르조아 계급은 언제나 여봐란듯이 사치에 파묻힌 생활을 했으며, 특히 귀족계급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려고 기를 썼다. 그런데 앙시앵 레짐 시대에 분에 넘치는 사치를 더욱 부추긴 것은 또 하나의 집단, 곧 이러한 세 종류의 특권적 집단 주위에서 언제나 들끊고 있었던 수 백가지 부류의 사기꾼이나 수많은 기생충들이 그들의 가문을 코에 걸고 출신이 비천한 인간의 두뇌와 육체를 거침없이 짓밟는 지체 높은 자들을 흉내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자세하게 조사하면 이 마지막의 어중이떠중이 계층도 포함한 기생계급은 기껏해야 각국에서 전체 인구의 5%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한 줌의 온갖 광태, 어이없는 변덕, 일시적인 기분에 탐닉하기 위해서는 전체 인구의 95%가 굶어 죽든가 그렇지 않으면 빈곤과 생활고에 허덕이는 그날그날을 지내야 했다. 거기에 절대주의의 가장 심각한 그리고 진정한 비극이 있었다.
기생계급은 인간의 존엄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전혀 몰랐다. 절대주의는 모순이나 반항에 부딪히지도 않고 얼마나 쉽게 그 야수성을 발휘했던가?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편지지 속에 있는 다음의 예가 바로 산 증거이다.
콩티 왕자의 광기는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해져 갔습니다. 최근에도 어떤 무도회의 홀에서 왕자는 시골에서 온 가난한 쳐녀를 완력으로 그녀의 어머니한테서 가로챘습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무릎 사이에 꼭 끼운 뒤에 한 팔로 그녀를 안고 그 처녀의 코와 입을 백번쯤이나 쥐어뜯었습니다. 입과 코에서는 피가 철철 흘러내렸습니다. 불쌍하게도 처녀는 소리를 내서 울었습니다만 왕자는 웃으면서 나는 사람을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지 모른다고 내뱉었습니다. 그러한 광경을 참고 보아야 한다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라도 슬픈 일이었습니다. 아무도 이제까지 왕자에게 아픔이란 것을 느끼게 해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왕자는 아픔을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들은 그 가엾은 처녀를 도와줄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미치광이 같은 그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720년 2월 2일
그러한 것은 "군주"까지도 즐겁게 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이 과인의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절대주의는 모든 것에 대해서 단 하나의 이유, 어느 나라에서나 공통하는 이유, 곧 절대주의는 신이 소망한 사물의 질서라는 이유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질서는 영구히 변하지 않는 자연법이었다. 상황에 따라 재빨리 대응하는 실용적인 절대주의의 인생 철학에 파묻혀 대개의 절대군주들은 결코 신중하게 역사의 필연성을 멀리까지 예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와 같은 것을 전제로 할 때 절대주의 시대에는 대중에 대한 가공할 만한 정치적 탄압이 나타났고 그 압제는 인민 계급에게서 마침내 완전히 정치 권력을 빼앗아 버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가 신의 은총을 받은 지존한 군주의 자비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절대주의 권력의 기본토대였다. 불평하지 말고 알아서 기는 단 하나의 권리가 인민 계급에게 주어졌다. 그 결과 가장 손쉬운 결론은 곧 그 상태가 과연 옳은 것인가를 의심하거나 그 상태에 반항하거나 또는 그것을 개혁하려고 꾀하는 일만큼 커다란 범죄는 없으며, 절대주의의 주잔은 역사는 발전하지 않으며 역사의 발전은 정지했다는 것이다. 또한 절대권력의 소유자의 행위를 비판하는 일도 역시 큰 범죄가 되었다. 비판은 곧 신을 모독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러한 죄를 저지를 자는 종신금고형이라는 비교적 그 당시로서는 관대한 형벌에 처해졌다. 그러나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아직 정치범은 되지 않았다. 주체적으로 사고할 것을 대중에게 호소해야 비로소 정치범이 되었다. 군주는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것 따위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엉뚱한 유령이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그것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아주 합리적인 대항수단을 취했다. 그것은 참으로 적절하고 재빠른 예방법이었다. 왜냐하면 사람이란 죽으면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국의 군주들이 유령퇴치를 위해 동원한 무서운 수단은 검열이라는 것이었다. 절대주의의 손에 의해 검열이 모범적으로 시행된 결과, 민중이 접근할 수 있는 책이란 가톨릭 국가에서는 성도전 뿐이었다. 작은 도시에서는 책방을 불수도 없었다. 바이에른에는 교회가 25,000개 이상, 모두 5,000명 이상의 동거인을 거느린 수도원이 200개나 있었으나 세속의 책을 발행하는 출판사는 한 군데도 없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무모하게도 이 사업을 벌였으나 당장 법원으로부터 영업정지 저분을 받았다. 이들 사례들은 아주 완고한 정통파의 지배 결과였다. 정통파의 최고의 교의는 일체의 것은 신의 섭리와 의지에 의해 이루어지다는 것이며, 참새조차도 신의 의지 없이는 지붕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정통파라는 것은 가톨릭교의 삭발머리에 걸치든 프로테스탄트의 법복에 걸치든 참으로 단단한 것이었다. 제주이트회의 수도사는 "천국에 가려고 생각한다면 인간은 포로가 된 이성을 가져야 한다" 고 가르쳤다. 여기서 말하는 "포로가 된 이성"이란 현상에 대해서 비파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정신계에 남긴 모든 결과는 모두 위에 든 상태와 일치하고 있었다. 학문은 화석화하거나 까다로운 형식주의 속에서 질식해버렸다. 따라서 가장 밑바닥의 인민계급에게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소름끼치는 무지와 끝없는 미신이 만연해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정통파에 의해서 억압되고 봉쇄된 대중은 될대로 되라는 체념에 짓눌려 있었다. 그 체념은 특히 독일에서는 기발한 발상이라고나 할 경건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경건주의란 30년 전쟁의 부산물로 그 피비릿내 나는 살육전으로 독일 국민이 피할 수 없었던 몸서리나는 빈곤이 종교의 형태로 반영된 것이다. 부르조아 계급은 그 경건주의에 의해서 확실하게 파산을 천명했다. 부르조아 계급은 이미 지상을 상대하려 하지 않았고 오로지 천국만을 상대하려고 했다."(메링, 「레싱의 전설」). 30년 전쟁 뒤에도 절대주의가 취한 수법들은 물론 어디서나 국민의 마음에서 그 무서운 악목을 씻어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씻어주기는커녕 그 수법은 오히려 그 무서운 악몽을 미리 속에 목 박아 버렸다. 그 결과 100년 이사 독일의 인민은 언젠가 한 번은 이 세상에 아름다운 여명이 올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포기하고 말았다. 이 세상은 탄식의 골짜기였다. 17세기에 들어와서 곳곳에 진을 친 종교단체, 곧 형제교단이나 자매교단의 대두는 사회에 팽배한 절망감의 반영이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상황 속에서 국가기관-가장 미천한 야경꾼조직조차도 국가기관이었다.-중 부패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한 이상한 일은 아무 데서도 일어나지 않았다. 관리들은 모두 관직을 돈으로 샀고, 더 높은 값으로 더 높은 관직을 차례로 사서 더 높이 올라갔기 때문에 관리의 직무는 돈이 전제될 때에야만 집행되었다. 이제 재판에 대해서 말한다면, 부자들의 "권리"만이 언제나 보장되는 결과가 나왔다. 가난뱅이에게 즐겼고 세상의 대우를 받았다. 그 품성은 더욱 비열해질 뿐이었고 그들이 하는 짓에는 범죄나 다름없는 것이 부지기수였다. 군사고문인 코엘른이나 게르보니와 같이 소수의 프로이센 관리가 앞에서 말한 폴란드의 "게르만화"를 반대했을 때, 코엘른은 곧바로 좌천되었고 게르보니는 계속해서 그따위 사기를 반대했기 때문에 "안녕과 질서를 저해할 목적으로 위험한 비밀결사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마그데부르크의 요새에 감금되었다.
도시 공화국이 그와 유사한 공무를 행할 경우에도 절대주의 지배와 엇비슷한 형태, 곧 절대주의와 똑같은 정신과 도덕을 택했다는 것을 덧붙여 두어야겠다. 그 훌륭한 사례로서는 베네치아를 들 수 잇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절대주의지배는 17세기와 18세기의 그 절대주의적인 수법이나 냉혹성에서 결코 프랑스나 독일에 뒤떨어지지 않았다.
요약하면 이제 다음과 같이 결론지을 수 있다. 곧 절대주의의 역사는 유럽 문명의 거대한 비극이었다. 하지만 그 고난의 길이 대부분의 인민에게는 어떻게 할 수도 없었던 역사의 필연성이었다는 것은 그런대로 위안을 준다. 그리고 첫째, 절대주의 시대의 지배적인 현상은 현대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 둘째, 뿌리째 변혁된 역사단계에 의해서 절대주의적 재배를 일시적으로라도 부흥시키려는 시도 따위는 장래의 어떤 시대에도 다시는 부활되지 않을 과거의 꿈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것만으로도 다행한 일이다. 오늘날에도 이런저런 나라들에서 아직도 살아남은 절대주의가 멸망해가고 있는데, 그 멸망은 순전히 절대주의가 행사하는 권력에 대항하는 동일한 정신들에 의해서 추진되고 있다. 그 권력은 어느 나라에서나 절대주의의 수중에 아직 남아 있는 권력수단을 멋대로 남용하는 것이며, 사라져가고 있는 쾌락을 죽어가는 육신으로라도 붙잡아보려고 몸부림치는 백발이 된 탕녀의 역겨운 추태이다.
마지막으로 절대주의의 힘이 그토록 가공할 야수성을 발휘하게 된 토대, 또 그 역사적 현상이 어느 나라에서나 야수성을 띠게 된 원인을 찾는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어느 쪽이든-곧 권력을 손에 넣었을 때의 야만성 그리고 한번 손에 넣은 권력을 파멸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똑같은 박자로 남용하려고 했던 수법은 여;r시 앞에서도 말했듯이 절대주의라는 역사적 존재의 특수한 전제에 바탕하고 있다. 절대주의의 대두는 순전히 역사의 필연성이었으며, 특히 중앙집권의 성립은 역사의 획을 긋는 진보였다. 그러나 그 때문에 절대주의는 유기적인 조직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사회적 생산단계와 연결되는 정치형태가 되지 못했다. 생산단계와 연결된 정치형태만이 유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절대주의는 일시적인 정치적 기회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결국 사회라는 육체에 파고든 기생충이었다. 그것은 절대주의의 혁명기에조차 지배적 현상이었다. 절대주의는 앞에서도 이미 말했듯이 발흥하는 부르조아 계급과 몰락하는 봉건주의의 불가피했던 계급투쟁에서 생긴 어떤 정치적인 기회, 곧 지배권을 장악하려고 서로 다투는 두 계급 사이의 상대적인 지공상태를 교묘하게 자기의 개인적인 이해관계에 이용할 수 있었던 운 좋은 제3자였다. 그런데 그 운 좋은 제3자는 아무래도 폭력에 의지하지 않고는 죽은 자의 몫을 차지할 수 없었다. 군주가 하나의 계급이 되어 다른 계급을 견제하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즉각적인 야만스런 폭력을 선동했고 그와 같은 원인에 의해서 차례차례 끊임없이 새로운 폭력이 만들어져 나갔다. 그 상태는 신흥계급-부르조아 계급-이 절대적으로 강력하게 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 결국 신흥계급은 그 기생충의 폐해를 막고 그것을 자기 몸에서 제거할 수 있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그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현상 고착의 외피는 변화해 가는 내용을 이미 담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생충을 제거하는 작업은 영국에서는 1649년의 혁명으로, 프랑스에서는 1789년의 대혁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이루어졌다."는 말을 부연하면 그 투쟁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지않다고 해서 최후의 결과가 바뀔 것은 아니다. 이면의 논리만이 역사에서 결정적인 것이며, 또 의미를 가진다. 곧 사실의 논리는 언제나 인간의 두뇌의 비논리보다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발전의 법칙을 아는 것은 역사발전의 길을 수월하게 하며 촉진시킨다. 그러므로 인류가 자기의식에 의해 역사를 만드는 것은 오늘날에도 진보를 향햐여 투쟁하는 인류가 의연히 추구하고 있는 거대한 이상이다.
이제까지 말한 것은 절대주의시대의 정치 수법이나 형태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것, 곧 그 기본골격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마다 절대주의가 지배하던 시대의 경제적 기반의 차이에 따라 그 기본골격을 에워싸는 테두리에는 나름대로 큰 파이가 있었다. 그 차이는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차이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밝히고, 특히 그 차이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각국의 문화수준의 큰 차이, 곧 프랑스 절대주의문화가 왜 모든 다른 나라의 문화를 압도하고 전 유럽의 동경의 표적이 되었는가, 지역적 개념에 불과했던 독일이지만, 북부독일과 중부독일이 왜 그처럼 크게 달랐는가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주의는 스페인에서 첫 승리를 거둠으로써 마침내 정치적인 재배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따라서 스페인은 다른 나라에 비해 거의 100년이나 앞서 특수한 절대주의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은 이미 말한 대로이다. 그런데 이 최초의 절대주의는 절대 접근 불가능을 첫째의 특징으로 하는 권위적인 형태였다. 그러한 형태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스페인에서 절대군주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가장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 때문에 스페인에서는 권위에 대한 관념은 항상 가장 높은 곳을 전제로 하여 형성되었고 그것이 그 뒤의 모든 시대에 모범이 되었다.
17세기 말경이 되면 어느 나라에서나 프랑스의 절대주의형태가 스페인의 절대주의 형태를 대신하게 되었고 그 후부터는 프랑스풍의 에티켓과 풍속이 모범이 되었다. 스페인은 파산해서 세계를 제패했던 지위도 잃게되어 프랑스 아래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가 모든 방면에서 스페인의 상속자가 된 것이다. 프랑스는 스페인이 시작한 것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시켰으며 그 이래로 프랑스 궁정의 방식들이 유럽에서 줄고 큰 영향력을 미쳤다. 절대주의의 권력쟁탈전은 어느 나라에서나 프랑스파의 승리로 돌아갔으므로 프랑스 절대주의의 영향은 이전의 스페인에 비해 훨씬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따라서 도처에서 절대주의 문화가 융성하는 데에 필요한 준비조건들이 마련되었다. 이제 프랑스는 그 언어까지도 국제적이 되었다. 곧 프랑스어는 각국의 궁정에 의해 채택되었고 그 이래로 궁정에서는 공식적으로는 프랑스어만을 사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교양을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의 첫째 조건이 되어 각국의 상류계급에서 유행했다. 그 때문에 각국의 시민 생활의 언어에도 프랑스풍의 말투나 프랑스어가 스며들었다. 어느 나라에서나 프랑스어 한두 마디를 섞지 않으면 제대로 의사표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상류의 부르조아 계{급에서는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프랑스 여자를 가정교사로 채용했고,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프랑스의 습관과 프랑스어를 배웠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면 걸음걸이, 자세, 동작도 프랑스풍으로 해야 했다. 모든 것에 프랑스식이 배어들었다. 아브라함아 산타 클라라는 "외국풍의 오페라, 외국풍의 댄스, 외국풍의 모드, 외국풍의 예의 외국풍의 언어, 외국풍의 의복"을 말하고 있다. 그런 것만이 훌륭하고 또 모방할 가치가 있었으므로, 자기 나라에서 만들어진 것은 그만큼 더욱 경멸해야만 하는 것이 되었다.
그러한 흉내 내기의 외국숭배 열기는 일반 민중이 프랑스라는 강력한 승이자-프랑스는 분명히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다-의 교의에 완전히 굴복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현상을 비판할 때 무차별적이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예를 들면, 독일의 학자들도 역시 프랑스화라는 외국숭배의 노예가 되었으나, 그것은 결국 다른 어떤 것, 곧 "끝없이 빠져들어 가는 진창에서 그들 자신의 계급을 구해내려는 자각한 부르조아직 분자들의 최초의 시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시도이다.
프랑스의 절대주의는 모든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강력했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는 첫째, 경제적 토대가 절대주의를 위해 형성되었기 때문이고, 둘째, 정치권력의 집중화가 거의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또 파리로 말하더라도 그곳-파리에는 중앙권력이 집중되어 있었다.-은 어떤 측면에서도 인공적으로 무리하게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우선 그 지리적 조건 때문에 파리는 일찍부터 국제무역의 교차점이 됨으로써 자연히 절대주의 세계의 수도가 되었다. 프랑스 절대주의는 물질적으로 풍족했기 때문에 정신적으로도 풍족했다. 파리 이외의 그 어디도 절대주의가 그처럼 활수한 고객이었던 곳은 없었고 따라서 그만큼 모든 생활-곧 파리의 방대한 인구의 생활-이 절대주의의 이해관계와 일치하고 절대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었던 곳도 없었다. 그러므로 절대주의의 이론적 체계화도 파리에서 첫 고고지성을 울렸고 절대주의의 최고의 예술적 승화도 이곳에서 처음으로 로코코라는 예술 양식에 의해 이룩되었다. 딸서 파리의 절대주의는 곧 대부분의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노골적으로 사기 수법을 발휘했으나 겉으로는 그런 대로 아름다운 일면도 갖추고 있었다. 이렇게 파리에서는 모든 것이 그 최고의 수준에 도달해 있었으므로 새로운 역사의 관념과 인식도 또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그 새로운 관념과 인식이 마침내 절대주의의 모든 분야를 뿌리까지 뽑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파리 사람들, 곧 해방을 향해 앞으로 밀고 나가는 계급이 가장 절실하게 절대주의의 변혁을 느꼈던 것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프랑스 문화는 다른 여러 나라들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독일에 대해서도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수준을 제시했다. 그 수준에까지 올라가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큰 진보를 의미했고 또 국가의 빈곤으로부터의 해방도 의미했다. 따라서 외국의 진보적인 분자들이 프랑스를 모방한 것은 그 점으로 보아도 분명히 설명된다.
절대주의의 재원은 프랑스에는 풍부했으나 독일, 특히 프로이센에는 별로 없었다.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절대주의에 의해 대표되는 중앙집권이 역사의 필연적 논리로서 발전하려고 할 때 그것은 어떻든 도시에 의존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중앙집권을 보장할 수 있는 힘을 지탱하는 돈은 도시를 향해 흘러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유산계급, 곧 가장 납세능력이 큰 계급이 도시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단순한 논리를 깨닫지 못하고 절대주의가 융커, 곧 귀족대지주의 손을 빌고 또 그들을 위해서 그 토대를 만들었던 나라는 그러한 내용의 경제적 발전의 결과 이도 저도 모두 참으로 슬픈 걸인 경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독일의 역사는 그 결인 경제에 관한 생생한 고전적이며 동시에 비참한 사례이다. 독일이라는 지리적 개념을 형성하고 있었던 크고 작은 국가들은 그들의 중앙집권을 도시의 손을 빌지 않고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도시에 대항하고 융커를 살찌우기 위해서 강화했다. 그 때문에 19세기에 들어와서도 변함없이 결인 경제가 계속되었다. " 독일의 군주들은 자본주의시대의 절대군주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봉건시대의 대지주였다. 그들은 도시를 자기의 권력의 원천으로 보자않고 도시를 융커제도에 대항하는 야심만만하며 더없이 위험한 경쟁자로 보았다. 그들은 국도에서 행인을 터는 기사 강도들에 대해서보다도 더 철저하게 그러나 그들과 비슷한 마음으로, 황금의 알을 낳는 암탉을 잡아 죽이려고 했다."(메링, 「레싱의 전설」). 물론 그것이 후세에 독일이 빈곤하게 된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독일을 역사에서 후퇴시킨 가장 큰 원인은 이미 16세기초에 나타났다. 곧 동인도 항로의 발견으로 15세기 말부터 무역로가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독일의 번영은 생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 대부분이 중개무역, 곧 거간으로서의 활동-독일은 거대한 국제무역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에 의한 것이었다. 따라서 무역로가 바뀌자 독일의 경제적 발전은 곧 장애에 부딪혔고 이제까지 내 세상을 구가하던 독일의 부자들도 하룻함 사이에 가난뱅이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에로틱 미술의 역사」,pp.52-54).
그러한 대변동은 30년 전쟁에 의해서-곧 그 전쟁이 독일에 지운 부담이나 독일의 숙명적인 정치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소국분립주의의 영구화에 의해서 더욱 복잡한 것이 되었다. 더구나 그 전쟁은 독일 전체를 통일하는 하나의 중앙권력이 들어서는 것을 저지했고 그 때문에 독일은 스스로의 손으로 어떻게든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부르조아아적 국가혁명에 실패하고 역사의 낙오자가 되었다. 영국이 일찌기 1649년에, 프랑스가 1789년에 돌입한 혁명의 도정에 독일이 발을 내디딘 것은 겨우 1848년이었고 그나마도 어중간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전혀 독일이 유기적인 발전을 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 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자연히 절대주의 시대의 독일은 불행한 특수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 특수성은 첫째, 독일은 1600년부터 1760년까지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었다는 것, 둘째, 그 시대의 하층계급은 독일의 어느 나라에서도 자발적인 역사의 담당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 셋째, 독일에서의 혁명적 부르조아의 에너지는 아주 뒤늦게 폭발했다는 것, 넷째, 독일인의 노예근성은, 독일인의 전형성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속담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 등이다. 그러나 독일의 걸인 경제는 그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을 돌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적극적인 측면이 있었다. 곧 독일 군주들의 가문의 야만성은 아주 특수한 것으로서 어느 나라에서도 그 유례를 불 수 없다는 것이다. 절대주의 시대에 군주가 되었던 독일인들이 깜짝 놀랄 만큼 야만적이었음은 그 당시에 이미 뜻 있는 사람들을 전율케 한 사실이었다. 18세기 초기의 용감한 융커이며 또 독일 궁정의 정통한 소식통으로 알려져 있었던 만토이펠 백작의 일기를 보자.
독일에는 군주들이 우글거리고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4분의 3에게는 거의 상식이 결여되어 있다. 그들이야말로 인간의 수치이며 인간의 양화이다. 나라란 것이 손바닥만한 터에 그들은 이 세상의 인간을, 그들을 위해 만들어지고 그들의 어리석은 짓에 봉사하는 도구쯤으로 아는 자기도취에 빠져 있다. 그들의 가문은 사실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자신의 가문을 아주 사랑스러운 것인 양 코에 걸고 자기의 영혼이나 심성을 정화하려는 노력은 하찮은 짓이나 체면 손상으로 여긴다. 그들이 하는 짓을 보면 단지 백성을 우민화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자들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들은 혹독한 짓만을 하며,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원칙을 거침없이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위의 기록은 당대의 현실을 그대로 나타낸 것인데, 그것은 특히 독일의 절망적인 경제상태와 크게 관련되어 있었다. "독일의 군주들은 인민의 노동의 결정을 갉아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그 피를 빨아먹고 살았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역사의 책임이 문제가 된다. 그 누가 독일의 작은 나라들의 군주가 되었더라도 그 역시 폭군이 되었을 것이다. 자기 나라의 백성을 외국에 팔아넘기는 일이 자기의 가장 큰 재원이 되며, 백성을 날마다 배반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기반을 간신히 지탱할 수 있었던 절대주의 시대의 한 줌 군주계급은 어디로 보나 도덕주의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군주계급 그 자체가 바로 악의 학교였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 전체가 꼭 같은 모습이라곤 할 수 없다. 독일 여러 나라, 또 왕실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같은 원인으로 프랑스는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하게 되었고 모든 나라를 정신적으로 완전히 거느리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나라들을 예로 들면 작센은 프로이센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작센은 독일의 다른 나라들, 특히 프로이센에 대해서는 마치 프랑스가 독일 전체에 대해서 가진 것과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작센은 은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중세 말기부터 독일의 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풍요하고 번영했으며 따라서 정치적으로도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었다. 은광수입에 의해서 작센의 베틴 가는 독일에서 황제제조의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 곧 오랜 세월에 걸쳐서 황제선거 때 선제후들의 표가 작센의 돈으로 매수되었고 그 때문에 독일은 오직 작센의 이해관계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 은광 덕에 베틴 가는 미술이나 과학에 대해서 상당히 환경이 좋은 온상을 마련해 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일찌감치 16세기에 작센에는 절대주의 문화가 크게 발달했고, 예를 들면 독일 미술의 최초의 세속적 화가 루카스 크라나하 2세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크라나하처럼 근대적으로, 곧 "세속적으로" 여자의 육체를 그린 화가는 독일 르네상스의 미술계에서는 그가 유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의 독일에는 제2의 크라나하를 탄생시키는 데 필요한 역사적 조건이 갖추어진 토양이 작센 이외엔 없었기 때문이다. 작센은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독일의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16세기에 들어와서 스페인의 아메리카 대륙 정복자들이 멕시코의 은광을 대대적으로 채굴하게 되고 그 때문에 작센의 광산업이 궁지에 몰렸을 때도 작센의 문화는 그 은광 덕택에 여전히 이제까지의 우월한 지위를 잃지 않았다. 작센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는 도시조직으로서는 파리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경제적 발전의 유기적인 산물이었다. 두 도시는 17세기와 18세기에 파리와 마찬가지로 그 무렵의 독일문화의 최고 수준에 있었다. 드레이덴은 독일이 그 시대에 낳은 최고의 예술문화를 대표했고 라이프치히는 "당대의 독일세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시민세계"를 보여주었다. 드레이덴과 라이프치히는 누구나 알아주는 예술과 과학의 중심지였다. 아이프치히에서는 위대한 요한 세바시티안 바하가 거의 30년 동안이나 합창 지휘자로서 활약했고, 레싱이나 괴테도 일찍이 라이프치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들은 거기서 가장 왕성하게 창작했고 그들의 천재를 가장 높이 발휘할 수 있었다. 더욱이 작센의 각 대학들에서 독일의 새로운 시대정신이 고고지성을 울렸다.
그러나 라이프치히를 제외한 대부분의 독일 영방들의 수도들, 특히 베를린은 "군주의 전지전능함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하여" 절대주의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조작된 기생적인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기생적인 도시였기 때문에 알맹이는 없고 겉만 번지르르했다. 예를 들면, 극단의 주역 배우들도 객원 출연에 불과하여 일정한 계약이라는 것도 없었다. 18세기 초에 독일을 여행한 영국의 몬테규 부인의 베를린과 같은 독일 연방의 수도에 대한 비평은 몹시 통렬했는데, 통렬했던 그만큼 정곡을 찌를 것이었다. "그 도시들은, 비유한다면, 머리에는 갖가지 리본을 꽂고 구두에는 은 레이스를 달고 있었으나 헤진 스커트를 입고 얼굴에는 덕지덕지 분을 바르고 머리를 마구 지진 갈보와 같았습니다." 그것은 프로이센의 각 대학들에도 해당된다. 그 당시의 독일 대학 가운데 프로이센의 할레 대학만큼 건물이 엉성하고 비참한 상태에 있었던 대학도 없었다. 할레시에 살면서 할레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는 라우크하르트가 쓴 책을 읽은 독자는 틀림없이 구역질이 날 것이다. 그리고 독일의 학교 교육 가운데서 프로이센의 교육만큼 연민의 정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없었다.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특히 비참했다. 프로이센을 변호하는 것으로, "건조한 마르크(Mark : 프로이센의 한 이름, 즉Mark Brandenburg/역주)의 모래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았다."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은 가장 아픈 불행의 상처는 건드리지 않으려는 자들의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왕실인 호엔촐레른 가의 이익에만 봉사한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현재의 대독일 가운데서 프로이센은 가장 하찮고 작은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비용을 조달해야 했던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그 군국주의는 독일의 다른 나라 군주들이 사치를 위해 뿌린 돈의 곱이나 된는 돈을 스스로를 위해 낭비하도록 그 국가에 대해 강요했다. 그리고 군국주의, 그것이 국가의 진정한 오직 하나의 목적이었다. 바로 그 때문에 프로이센의 문화는 19세기에 들어올 때까지 줄곧 거지꼴로 걸어왔고, 모든 행동은 난폭하고 거칠었으며 그 취미 중 가장 훌륭하다는 것이 기껏해야 창녀의 치장 같은 분단장이었다.
이제 영국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 당시의 유럽 국가 가운데서 세 번째 대국이었던 영국은 아주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에 아주 짧게 그것도 특수한 절대주의시대를 겪었다. 그 절대주의 시대는 영국대혁명 이후 겨우 30년 동안밖에 존속하지 않았다. 그 시대는 "왕정복고기(Restoration)"로 불렸는데, 찰스 2세가 그 대표였다. 다시 말하면 영국의 절대주의에서의 바로 그 시기는 특히 그 기간이 매우 짧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중요하다. 영국을 지배한 정도에서는 절대주의는 강력한 전제를 행사했으며 프랑스에 지지 않을만한 수법을 구사했다. 찰스 2세도 역시 프랑스의 태양왕을 그의 빛나는 모범으로 삼았고 그 모범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승리를 뜻했다. 그러나 절대주의의 특수한 영국적 양상은 그 짧은 기간에 뻗어 나아갈 수가 없었고, 따라서 프랑스 문화도 대륙에서 모든 나라를 프랑스화한 것처럼 영국문화를 프랑스화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1649년의 혁명이 너무나도 철저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절대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었던 타협이라는 것이 프랑스 이상으로 필요했다. 따라서 왕정복고 기간 중에도 신흥 부르조아 계급은 절대주의를 강력하게 견제했고 마지막으로 제임즈 2세의 짧은 지배가 끝난 뒤 그들에게 한푼의 이익도 가져다주지 않는 군주제와의 거래를 재빨리 끊어버렸다. 이어서 18세기에 들어서자 인도라는 보고에서 무진장한 부가 런던으로 흘러들어왔고 그 덕택으로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이 세계에서 가장 돈 많은 부자가 되자 그들은 재빨리 프랑스의 가장 큰 고객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 영국 부르조아 계급의 정치적, 경제적 독립성은 일찍부터 그들을 자주 독립적인 방향으로 교육시켰고 그 때문에 그들은 프랑스 절대주의 문화의 식탁에 초대된 적은 있었으나 결코 프랑스에 굴복한 일은 없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 현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영국의 부르조아 계급은 프랑스 문화를 그들 마음대로 그로테스크하게 발전시켰고, 그 결과 프랑스 문화는 영국에서 도리어 억압되고 말았다. 근대적 부르조아 국가는 문화에서도 재빠르게 완강한 힘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부르조아 국가와 더불어 순수한 부르조아 문화도 탄생되었다. 확실히 부르조아 문화는 불사조처럼 절대주의의 잿더미 속에서 하늘 높이 날아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약무인한 어릿광대처럼 세계의 무대로 뛰쳐나왔다. 그 어릿광대는 옛 세계를 향해 으스대며 "나는 만장하신 여러분의 상속인입니다"라고 외치기 위해 온 세계의 문화를 끌어모아 자기의 의상을 스스로 지어 입는 장난을 해왔던 것이다.
3) 신민근성
삶의 관념은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니라-곧 독자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그 시대의 인간의 삶의 형식을 지배하는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결정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화도 역시 언제나 그 시대의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반영한다.
이제까지 절대주의의 중요한 문화의 특징을 개략적으로 얘기했으나 이제부터는 가장 중요한 그 사회적 반영을 보다 자세히 다루겠다. 인민을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억압한 경과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던 신민 근성(Untertan)의 심화는 절대주의의 살아있는 상징이므로 사회의 전체구도를 이해하는데 극히 중요하다. 개인주의를 다시 세계에 끌어냈던 르네상스는 인간의 최고 덕성으로서 개인의 자각을 발전시켰다. 개인의 자각은 르네상스의 시민적 자존심과 시민적 반항심의 기초가 되었고 삶의 형태를 결정적으로 특징지었다. 르네상스 문화는 시민적 자유를 바탕으로 해서 형성되었으므로 자기의 문화를 지키는 일은 개인의 가장 고상하고도 명예로운 의무로 간주되었다. 절대주의가 시민적 자유의 등뼈를 잡아 꺾어 시민을 거세한 양의 무리 속에 몰아넣는데 성공하자 기존의 도덕률은 손바닥 뒤집히듯이 뒤집혀져 버렸다. 왜냐하면 절대주의가 지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와는 아주 다른 "미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제는 지배 권력의 의지에 "순종하는" 것이 개인의 도덕적 의무가 되었고, 그 원칙에 충실한 것이 최고의 그리고 가장 강조되는 시민적 미덕이 되었다. 개인이 자기의 의지를 버리고 지도자의 명령을 천만지당하다고 따를 때에만 거세된 양의 무리에 한데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배권력이 정치분야에서 확대되어감에 따라 인민에 대한 정신적인 압박은 더욱 커갔다. 그리고 사정이 이럴진대 절대주의는 도처에서 그들의 가장 중요한 목적을 완전히 달성할 수 있었다. 역사적 권력들 가운데 절대주의만큼 오만하게 인민을 백안시한 것은 없었다.
신민 근성의 가장 큰 특징은 만사지당하다는 것, 곧 무슨 일에나 굽실거리며 순종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이상이 아니라 위에서 강요하거나 내려준 이상밖에는 가질 수 없었으므로 어느새 자기자신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인가의 행위에서, 따라서 문화의 정체 구도에서 참으로 위대한 것은 모조리 소멸되어버렸다. 그들은 인간의 높은 목표와 이상을 새오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절대군주가 제멋대로 자기의 권리의 마당을 넓히고 울타리를 높이며, 청춘기의 인민이 그들의 힘을 의식하고 의기양양하게 춤추며 에워싸던 자유의 나무를 마구 잘라냈을 때에도 그들은 절대군주에게 이용하며 그러한 일을 거들기까지 했던 것이다. "신민근성"은 주의라기에는 너무나도 비겁하고 부실하고, 순종이라기에는 너무나도 어리석고, 역사의 보복이라기에는 너무나도 보잘것없었다. 그것은 또 신민을 긍정하는 단 하나의 생활 표현의 요소, 곧 그 시대에 대중 현상이 되었던 노예근성의 요소였다. 왜냐하면 신민과 노예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민" 이 있는 곳에서는 노예근성도 뿌리를 단단히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가 인정한 주군에 대해 신민 근성을 발휘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이 공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들은 주군을 향해서 아뢴다. 소신을 걷어차 주십시오. 소신을 능멸해주십시오. 소신을 더럽혀주십시오-소신에겐 그 모든 것이 격려이며 기쁨입니다. 소신은 소신을 걷어찬 전하의 발에 입맞춤하겠사오며 어떻게 하면 소신을 더욱 욕보여 전하를 기쁘게 할 수 있는가를 교시하여 주십시오. 모든 계급이 노예의식에 짓눌려 있었다. 다만 그 계급의 정치의식이 그 이전에 이미 발달해 있었던가, 그렇지 않았던가에 따라 그 나타나는 형태가 달랐을 뿐이다. 더구나 신민 근성은 일반 인민에게서는 절대권력의 담당자에 대한 갈수록 새로워지는 끝없는 경탄에 의해서, 또 절대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의존에 의해서 나타났다. 절대주의에 대한 하층민의 믿음은 종교에 대한 믿음과 비슷했다. 하층계급은 그들이 지배받게 된 것은 신의 율법이며, 그렇기 때문에 그 율법의 중심은 진실로 선이며 모든 사람의 행복을 겨냥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절대주의가 그들에게 짐지운 고통이나 비극은 사회조직에서 온 것이 아니라 권력의 그때그때의 담당자의 특별한 악의에 의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가장 큰 소원은 하늘이 그들에게 자비로운 군주를 내려주는 것뿐이었다. 그 우연한 행운이 내려온다면 모든 것이 그들에게도 선으로 바뀔 것이라고 믿었다. 하층계급은 어느 나라에서나 그 행운을 대망했으며, 집단으로서의 민중도 그것이 헛된 희망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
상류 부르조아 계급, 그 가운데서도 신흥 자본을 대표하는 계급은 궁정이 공인된 사회의 본보기이며 따라서 모든 행위를 규율하는 오직 하나의 그리고 가장 훌륭한 표본이라는 사실때문에 절대주의에 대해 정신적인 압박을 느꼈다. 그들은 궁정의 방식을 언제나 가장 고상한 취미, 가장 훌륭한 예의범절이라고 쉽게 믿었다. 그리고 독일의 약소 군주들이 프랑스 절대주의 권력의 보다 뛰어난 담당자를 흉내 낸 것과 마찬가지로 각국의 부르조아 계급도 자기 나라의 궁정에서 펼쳐지는 풍속, 관습, 유행을 흉내 냈다. 궁정 바람잡이 노릇을 하고 그러면 그것은 곧장 유행되었다. 의상의 유행에는 당대의 궁정에서 좋아했던 색채만이 언제나 채택되었다. 상인들은 그 색태에, 그것에 어울리는 이름, 예를 들면 블루 로열(전하의 청색), 아 라렌(a la reine(왕비의 색), 아라 도핀(a la dauphine(세자비의 색) 등을 붙였다. 국왕이 한번 호빵을 먹고 싶다고 변덕을 부리면 너도나도 당장 1주일 동안 계속해서 호빵을 먹어댔다. 국왕이 어떤 상전에서 두 번쯤 같은 물건을 사면 모두 그런 훌륭한 물건은 그 상점 이외에는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 1주일 동안이나 계속해서 행운을 잡은 상인의 상점에 몰려들었고, 그 때문에 그 상점은 오랫동안 번창했다. 카사노바는 1755년에 파리에서 본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우리들은 정문을 빠져나와 궁전을 떠났다. 문득 나는 많은 사람들이 사향고양이가 그려진 간판이 걸린 소매점에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나는 동반했던 부인에게 물었다.
당신은 내 말을 들으면 웃을 테죠. 그 사람들은 모두 담배를 사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담배 가게가 여기 말고는 없습니까?
담배는 어디서나 팔고 있죠. 하지만 2주일 전부터 모두들 사향고양이의 상표가 붙은 담배만을 사려고 법석이죠.
이 가게의 담배가 다른 가게 것보다 좋기 때문인가요?
그렇게 좋다고는 말할 수 없죠. 하지만 샤르트르 공작부인이 그 담배를 피자 너도나도 그것만을 피우려고 든답니다.
그랬군요. 그런데 샤르트르 공작부인은 어떻게 그 담배를 유행시켰지요?
공작부인이 담배쌈지에 담배를 채우기 위해 두세 번 그 가게 앞에 마차를 세운 적이 있었는데, 담배 가게의 젊은 여자에게, 공작부인은 모두에게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당시 가게의 담배는 파리에서 가장 맛이 좋아라고 말했답니다. 공작 댁 마차 곁에 모여있던 호기심 많은 패거리들이, 공작부인의 얼굴을 골백번이나 본 적이 있고, 공작부인의 얼굴이 원숭이처럼 밉게 생겼더라도, 공작부인이 직접 한 말을 퍼뜨리자 그것만으로도 이 도시의 애연가들은 저처럼 전부 그 가게에 몰려들게 되었지요. 저 가게 주인은 아마 한 재산 만들걸요. 날마다 1백 에큐(ecu : 5프랑짜리 은화 / 역주)어치 이상의 담배를 판답니다.
궁정에 대한 원숭이 흉내는 이와 같은 하찮은 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천체에 미쳤다. 그리고 횽내 내기는 부르조아 계급에게는 자본주의의 전개에 의해서 그들의 수중에 돈이 더욱 불어났기 때문에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부르조아 계급이 의식적으로 궁정 관습에 반대한 나라에서는 그러한 반대가 대개의 경우 그 나라의 부르조아 계급의 성격이 특별히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흉내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만큼 그들이 빈곤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계급의식의 부정-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부르조아 계급이 궁정 관습을 흉내 낸 데서 나타났기 때문에-은 서울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강하게 그리고 가장 추악하게 나타났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자빠져도 그냥 일어나지는 않겠다는 속셈도 서울에서 궁정의 변덕을 흉내 내게 된 하나의 이유였다. 사람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도 그런 운 좋은 돈벌이에 한몫 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카사노바가 말한 것과 같은 흉내에 의해서 오늘은 딴 사람에게 행운이 갔지만 내일은 자기일지도 모른다고 의미심장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기 때문이다.
신민 근성은 본질적으로 일확천금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궁정의 성도덕은 그 시대의 국민도덕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도덕도 역시 서울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심각하게 부패했다. 말메리버리 경은 1772년에 베를린에 갔는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는 품행이 돈독한 남자나 정숙한 여자는 찾을 수도 없다. 모든 계급 남녀들의 풍기가 타락해 있는 데다가 빈곤까지도 이 도시를 억누르고 있다. 빈곤은 그 일부분은 현 국왕의 압제에서, 또 그 일부분은 그들의 할아버지 때부터 보고 익힌 사치 때문에 자연 발생한 것이다. 남자들은 돈도 없는 주제에 그저 향락적인 생활에만 끊임없이 몰두한다. 여자들은 하르피이아이(harpyiai : [희랍 신화] 몸은 새이고 얼굴은 사람인 여자 괴물/역주)이기 때문에 부드러운 감정이나 진정한 사랑을 알지 못한다. 그녀들은 돈을 뿌리는 남자라면 누구에게나 몸을 맡긴다.
절대주의에 의해 따라다니던 축첩제도는 궁정 귀족이나 도시 부르조아에게는 보편적인 제도가 되었다. 집을 둘 재력이 없는 사내는 부르조아로서 큰 열등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만으로도 그 자신이 스스로 왜소하게 보일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베를린 육군 유년학교의 교관을 지낸 프로이센의 시인 라믈러(레싱과 크라이스틔 친구. 1725~98/역주)는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 사나이는 지지리 가난해서 첩을 둘 수 없어 병을 앓고 있소."라고 쓰고 있었던 것이다. 세상 풍조가 이럴진대 첩은 꼭 매춘부가 아니라도 좋았다. 첩은 친구의 어머니, 누이, 아내는 물론이고 친구의 약혼녀라도 좋았다. 여자가 "색을 쓰면" 쓸수록 그녀의 생활은 그만큼 더 윤택해졌다. 남의 첩이 된 여자의 경우 상대방 사내가 자신에게 약소한 선물밖에 줄 수 없다든가 아무리 노력해도 애정밖에 지불할 것이 없는 때에만 돈에 쪼달렸기 때문이다. 이 얘기는 뒤에 다시 자세히 하기로 하겠다.
물론 이와 같은 것에 의해서 인간을 차별하는 계급도덕이 깨끗이 제거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어불성설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계급차별이 훨씬 더 조장되었고 훨씬 더 부추겨졌다. 상하의 격차를 명백히 한다는 절대주의의 가장 큰 원칙이 계급차별을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도 군주가 명령하기 전에는 군주 앞에서 앉을 수 없었다. 군주의 명령에 의해서 신분에 따라 특별한 "제복"이 정해졌다. 제복은 군주와 각 신분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를 명확하게 했다. 모든 계층에 대해서 참으로 엄격한 위계제도가 적용되었다. 곧 군주와 대신이나 상궁들과의 관계에서 허용되지 않은 것은 여주인과 하녀와의 관계에서도 허용되지 않았고 신분이나 지체가 높은 여인과 소시민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물론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진정한 인간은 남작 이상이라는 절대주의 저긴 사고방식의 보편화에 의해 뚜렷이 표현된다. 벼락출세를 한 자들이 그 어업격한 계급차별에 대해서 언제나 가장 절대적으로, 다시말하면 인민이 자기를 살아 있는 신으로 우러러보기를 원하는 약소 군주들과 마찬가지로 행동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민보다도 고등한 종류의 인간들 틈에 낄 수 있다는 권리의 주장은 대개의 경우 구주의 은총 또는 군주의 유력한 법률 고문의 은총에 의해서만 보증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군주에 대한 충성이란 것은 대개의 경우 자칫하면 꿀이 가득 차 있는 국가라는 구유에서 내몰릴지도 모른다는 공포의 노골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신 소리꾼은 그런 말을 공공연히 입에 올렸다. 공사의 수행원으로 파리에 가 있었던 나폴리 사람 갈리아니가 어떤 여자친구에게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국왕을 존경하고 있오. 왜냐하면 나는 국왕을 보습보다도 더 가깝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오. 나는 국왕으로부터 1,500 파운드의 급료를 받고 있지만 만약 농민들이 부자가 된다면 그 급료를 잃게 되겠지요. 인간들이 모두 나처럼 행동하고 자기의 손익을 생각해서 말을 한다면 이 세상에서 말다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오. 횡설수설이나 찬사는 그 때문에 있다고 생각하오. 그러한 말을 하는 것은 이 세상사람은 자기 일이 아닌 남의 일에 쓸데없는 참견을 하기 때문이오. 신부 모렐레(계몽사상가이자 경제학자. 1727~1819/역주)는 목사들을 공격하기 위해 책을 쓰지요. 재정가인 엘베시우스(프랑스의 계몽사상가. 1715~71/역주)는 은행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책을 씁니다. 보도(프랑스의 계몽사 상가, 1730~92/역주)는 게으른 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책을 씁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모두 이웃사람들을 최대한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들 하지요. 그따위가 뭐 말라비틀어진 것인지. 이웃이야 아무러면 어떻소! 당신에게 이득이 되는 일만을 말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득이 없을 때는 입을 다무는 편이 좋소.
4) 사회적 허위
절대주의의 외형적 특징이 만든 것, 곧 연기와 포즈는 절대주의의 토대에서 말하면 당대 문화의 가장 큰 특징이었다. 절대주의는 사상 유래 없는 거대한 레뷔(revue)였다. 따라서 그것은 무대에 등장한 인간 각자에게 연기와 포즈를 강요했다. 그것이 불가능한 자는 그 시대가 주었던 역에서 바로 쫓겨났으나 그 역을 잘하는 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또는 자진해서 떠맡은 역의 포즈를 줄곧 취했고 그 역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그런데 포즈를 잡을 수 있는 자는 또 자기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자라야 했다. 그 때문에 귀족이나 부르조아 계급의 저택의 실내벽은 모두 거울로 장식되었다. 거울은 어떤 장소에서나 가장 긴요한 것이 되었다. 그들은 연극을 하는 자기 모습을 자기 눈으로 보고 싶어 했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는 기회를 갈구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거시다. 침대의 덮개 천장에서조차 거울을 붙였다. 그것은 여자가 호기심이 강한 남자의 불의의 공격을 도발하는 포즈를 취한 채 잠을 자기 위한 것이었으며, 또 황홀경에 빠져 있는 순간까지도 자기의 포즈를 가다듬어 분위기에 어울리는 자태를 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신적인 어떤 행위도 거울 속의 그것과 같은 구조일 수밖에 없었다. 자기의 친구에게 쓰는 편지 -그때는 누구나 편지를 썼다-는 거울이었다. "마치 남이 보아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모두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그 당시의 편지는 오늘날의 편지와 같이 전달이 목적이 아니다. 편지라는 것은 정신을 화장하는 기예였다." 많은 사람들이 쓴 회상록도 역시 거울이었으며, 거울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영원히 살아 있는, 곧 후세가 보아주기를 바라는 역사적인 포즈를 글로 남긴 것이다. 신분이 높거나 유명한 사람들은 너나없이 하나의 포즈를 만들어내려고 했고, 회상록에 의해 그 포즈를 불후의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따라서 절대주의 시대는 또한 회상록 문학의 고전적 시대이며, 그것은 너무나도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다 읽지 못할 만큼 무더기로 남아 있다.
레뷔도 포즈도 친근함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가장 크게 노린 것은 모두에게 "보여준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친근성은 모든 생활에서 제거되고, 모든 행위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뿐 아니라 아주 신성한 순간조차도 보여주기 위한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정서 생활에서까지도 포즈와 연기만이 그것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 또한 절대군주의 생활을 축소한 듯한 생활을 했다. 귀부인은 친구나 방문객의 면전에서 태연히 자기의 비밀스런 화장을 했다. 그것은 우연히 시간이 촉박해서 부끄럽다는 따위의 변명이나 하고 있을 겨를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곁에 아주 열성적인 구경꾼을 일부러 모아놓고 가장 우아한 자기의 포즈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선정적인 매춘부들은 거리에서 치마를 높게 걷어 올리고 스타킹 끈을 고쳐 맨다. 그것은 스타킹이 흘러내릴 염려가 있어서가 아니라 적어도 그렇게 하는 그 순간만이라도 남자의 호기심을 끌 수 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는 그와 같은 포즈를 만들 수 있는 수 많은 기회와 다채로운 상황을 열어 놓았다. 그것에 대해서는 뒤에 보다 자세히 다루기로 하겠다. 시대의 유행도 역시 어떤 포즈로서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기발한 방법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럴 경우 어떤 대담한 방법을 쓰더라도 꽁무니를 빼지 않았다. 여기에 대해서도 뒤에 자세히 다루겠다. 그와 같은 것은 정신적인 모든 행위에도 적용된다. 남자는 남이 보고 있을 때만 주역이었다. 사람들은 남이 듣고 있을 때에만 말을 하고, 또 남이 듣도록 말을 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남을 의식하면서 말을 하게 되었다. 그 같은 이유에서 사람들은 그 시대에도 익살을 좋아했다, 익살은 남의 이목을 끌기 때문이었다. 익살을 이해하거나 그 효과를 크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특별한 준비를 해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학조차도 대개 익살, 재치있는 생각, 교묘한 말 따위에 지나지 않았다.
친근성이 제거되었다는 것은 비밀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생활의 비밀을 속속들이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슬픔이나 기쁨을 과장해서 말하고, 들었다. 따라서 은밀한 행복이나 고민 따위는 이 세상에 없었다, 모든 사람은 서로 알고 있는 사이이며, 어느 정도는 서로 관계되어있는 사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의 죄를 못 견디게 참회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에게 자기의 가장 큰 비밀을 털어놓았다. 한 여자가 죽은 뒤, 비로소 그 여자에게 비밀의 연인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여자 생전에도 비밀이 아닌 비밀이었던 것이다. 괴테는 이렇게 쓰고 있다. "사람들이 어떤 한 사람에게 이야기하거나 편지를 쓰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 내용이 알려질 것을 예상하고 있는 일이다. 그들은 자기의 마음을 염탐해 냈고 남의 마음도 염탐해 냈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서 가장 통쾌했던 일은 "바로 지금" 불시에 덮치는 것이었다. 자극적인 포즈로 자고 있는 미녀, 첫 입맞춤을 하려고 하는 두 연인, 자기의 정욕을 남몰래 하녀를 통해 채우려고 하는 약혼한 남자, 한 밤중에 살며시 정부의 품에서 빠져나오려고 하는 부정한 아내를 불시에 덮치는 것이었다. 특별히 그런 사례를 선택한 것은 내가 모은 특수한 자료는 모두 그러한 종류의 것뿐이었으며 또 그러한 소재를 적당한 회화를 통해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바로 지금" 덮치는 데 협력했다. 모두가 그런 불시의 공격에 환희작약한 것이었다.
그런데 개인의 행위는 모두 공개된 행위였고 또 공개를 위한 행위가 되기 마련이었으므로 보여주는 것이 모든 행위의 표상이 되었다. 인간은 보여주기 위해서 움직이고 행동할 때에만 만족했다. 빨리 움켜쥘 수 있는 효과야말로 가장 큰 겨냥이었다. 진지하고 깊이 있는 것은 빠른 효과를 보려는 목표 앞에서는 이차적인 것이 되어야 했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나 모든 것을 재빨리 포착하고 모든 기회를 될 수 있는 대로 잘 이용하기 위해서 시간을 들여 신중히 생각하거나 근본을 탐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모든 것은 결국 속임수와 거짓이 되었다. 순수라든가 진실이라는 것은 언제나 불쾌한 것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것은 까다롭고 접근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실은 하나의 우연에 불과하며, 그 속에 곧 그다음에 임박한 또 하나의 결과로서 또 다른 우연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은 연기에서 노리는 효과를 매우 감소시키는 것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따라서 진실은 시대의 가장 큰 적이 되었으며, 진실을 대신한 엄청난 속임수가 그 어디에서나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진퇴양난의 역사적 논리였다. 레뷔는 숲 그 자체를 필요로 하지 않고 영웅주의의 포즈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모든 것은 세트에 지나지 않았고 모든 것은 무대의 연기에 지나지 않았다.
5) 갈랑트리
각 시대의 일반 문화는 언제나 남녀관계에 관해 만들어진 견해나 사고방식 그리고 법칙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 고유한 반영이 바로 나의 연구의 중심 과제이다.
절대주의가 성에 남긴 발자취는 갈랑트리, 곧 유력한 여자가 모든 분야를 지배한다는 여자의 선언이고 그러한 여자에 대한 맹목적 숭배였다. 절대주의 시대는 여자의 고전시대였다. 여자가 수렴청정하면서 시대를 지배했을 뿐 아니라 실질적인 지배권마저도 꽤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쿠르 형제는 그들의 유명한 저서인 "18세기의 여자" 가운데서 그러한 여자의 시대적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었다.
여자는 1700년부터 1789년까지는 모든 것을 움직이도록 만들어진 거대한 태엽적 존재만은 아니었다. 여자는 매우 높은 권력, 프랑스 사상계의 여왕과 같은 존재였다. 사회의 가장 높은 곳에 도사린 관념, 곧 모든 사람의 눈이 우러러보고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리워하는 관념이었다. 여자란 남자가 무릎을 꿇는 초상, 남자가 기리는 모습이었다. 종교는 환각, 기도, 동경, 정진, 복종, 신앙 등에 의하여 대체되었다. 여자는 신앙이 만드는 것을 만들었다. 여자는 영혼과 마음을 찾아냈다. 루이 15세와 볼테르가 지배하는 동안은 여자는 신이 없는 시대의 하늘을 대표하는 모든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여자를 숭배하려고 현안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여자를 떠받드는 일에 열성적이었다. 우상숭배는 모든 사람의 손에 의해 여자를 지상에서 천국으로 받들어 올렸다. 여자를 구하지 않는 작가는 한 사람도 없었고, 여자에게 날개를 빌려주지 않는 날개 깃의 펜은 하나도 없었다. 여자는 지방 도시에서조차도 자기를 숭배하는 시인, 자기에게 열중하는 시인이 있었다. 그리고 도라(프랑스의 시인 1734~80/역주)나 장티-베르나르(프랑스의 시인. 1708~75/역주)가 여자의 발밑에 퍼뜨려 놓은 향기로운 연기에서 여자를 신으로 숭앙하는 구름이 만들어졌다. 그 구름은 비둘기가 날개치며 날아감으로써 꿰뚫리고 그리고 꽃비에 맞아 여자의 옥좌와 제단이 되었다. 산문, 시, 화필, 조각용 끌, 하프는 마치 신을 대하듯이 여자에게 열중했다. 그리고 여자는 마침내 18세기에 행복, 기쁨, 사랑의 여신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적인 것, 특히 신에게 바쳐지는 것, 모든 정신적 진보의 목표, 여자를 빌어 나타낸 인간의 이상이 되었다.
그런데 공쿠르 형제가 프랑스에 대하여 말한 것은 내용만으로는 유럽의 모든 나라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경제적, 정치적 상황이 어느 나라에서나 같았으므로 그 역사 시대의 문화적인 모습도 역시 내용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나 같았다. 여자가 지배하는 곳 어디서나 갈랑트리의 법칙이 위세를 떨쳤다, 그리고 각국의 차이는 그 형태의 세련도 차이일 뿐이었다. 그 형태는 다른 나라에서는 저마다 프랑스를 본으로 하여 베낀 것이었으므로 프랑스보다 훨씬 거칠고 조잡했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말했듯이 절대주의 문화를 활짝 꽃피울 수 있는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으므로 갈랑트리의 가장 우아한 형태가 발달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그 점에서 다른 나라와 차이가 있었다.
갈랑트리의 내용은 여자가 향락의 도구로서, 곧 육욕적 쾌락의 살아 있는 살덩어리로서 옥좌에 올랐다는 것이다. 여자는 육욕의 덩어리로서 숭배되고, 육욕의 덩어리로서 분향되었다. 여자의 영혼, 환상, 정신은 그것이 여자의 관능적 자극의 수요를 높이고 여러 가지 변화를 불러일으키는 범위 안에서만 찬양되었다. 그러한 형태의 여자숭배와 육욕 숭배는 절대주의를 향한 발전과 마찬가지로 필연적이었으며, 따라서 불가피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소수의 계급이 인민계급의 모든 것을 희생시켜가며 호화롭게 살 수 있었고 더구나 그들의 욕망을 마음대로 충족시킬 수 있었던 나라에서는 그 계급이 기생충이 되기 마련이다. 그 기생충의 삶의 첫 번째 목적은 물질적 향락이었다. 그 시대에서 가장 재기발랄한 한량이었던 신부 갈리아니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사는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며, 그렇다고해서 기만의 대상이 되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아무래도 좋다. 인간은 살면서 즐거워하고 그리고 슬퍼한다. 우리는 즐기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슬퍼하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 인간의 향락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바람직한 것은 육욕이었다. 따라서 그 시대에서는 육욕이 진정한 자기 목적, 곧 목적을 위한 목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모두가 "갈랑트리"에 몰두하는 일반 보편적 법칙만이 존재하게 되었다.
기생충은 미리 또 그때그때에 머리를 썩히지 않고 염치불구하고 향락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정열이라든가 경쟁 등은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육욕의 욕망이라든가 요구를 서로 채우는 것이 일반 법칙이었다. 그리고 진지하게 거절하는 것은 유일하게 도덕과 관습에 어긋나는 것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여자도 처음부터 상대방의 뜻을 따르려는 듯한 몸가짐이 이루어지기 마련이었다. 여자의 망설임은 상대방의 쾌락이나 향락을 높이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18세기의 프랑스인으로, 그 당시의 난숙한 갈랑트리의 달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티이 백작은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랑스에서 손에 넣을 가치가 있는 여자를 손에 넣으려면 전심전력, 노련미, 성실한 듯한 표정, 놀이 , 그리고 기교등 온갖 것이 참으로 필요했다. 또 여러 가지 형식이 있는데 그것도 충실히 지켜야 했다. 어떤 형식은 다른 형식에 비해서 더욱 중요했고, 앞의 것은 뒤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래도 생략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그렇더라도 공격하는 남자가 얼간이가 아니라면, 또 공격받는 여자가 지조있는 요조숙녀만 아니라면, 대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여자의 망설임은 그녀가 최후의 사랑을 구하는 남자의 정욕이나 쾌락을 높이는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거절 속에 그 얼마나 놀라움이 있었던가?"라고 티이 백작은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여자의 저항, 곧 거절의 포즈도 또한 필요했다. 여자는 입으로 싫다고 하면서 몸으로는 공격하는 남자에게 성공을 약속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에서의 끔찍한 위험도 될 수 있는 대로 제거해야 했다. 그 때문에 무분별한 질투는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여겨졌고 연적의 원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한 감정을 나타내는 자는 믿지 못할 사람, 용서받지 못할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시집 "비너스의 장미밭"에는 로코코 풍의 시로 이렇게 노래되어 있다.
"뱀보다도 질투가 더욱 가증한 것
내가 영국식으로 차려입은 처녀를 손에 넣게 되어
언제나 오빠 취급을 받더라도
나는 처녀에게 하소연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천사여 화만 내지 말아다오!
누구나 배반하는 이 세상에선 화를 내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오.
내게 어린애 같은 포즈이랑 보이지 말아다오.
또 내게 굳은 약속도 하지 말아다오.
사랑에서 한은 있을 수 없는 것.
나는 즐길 때까지라고만 맹세할 뿐,
끝나면 잘 있으라고 할걸,
그리고 다른 여인에게로 갈 테지만, 그녀도 언젠가는 잘 있어 일뿐."
남녀는 서로 칼로 치고 받았지만 그 칼이 심장을 찌르는 일은 드물었고 대개는 살갗을 스치는 상처를 입히는 정도로 끝났다. 사랑은 장미의 가시처럼 찔린 순간에는 아픔을 느끼게 할지도 모르지만 미쳐 날뛰는 자가 휘두르는 칼처럼 상대방의 목숨에 관계될 만한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고 목숨을 빼앗는 일도 없었다. 피는 상징일 뿐이었고 원한을 씻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상징이었으므로 일부러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었고 한 방울의 피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므로 정욕은 언제나 품위 있고 또 우아한 것이었다. 그것은 활화산 같은 파괴적인 것도 아니었다. 사이클롭스가 썼던 것과 같은 포획 방법 따위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장갑은 두 손에서 한 번도 벗겨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의자 뒤에서 기쁨만이 심부름을 하는 한가로운 미식가로서 쾌락의 식탁 앞에 앉는 것만을 생각했다.
사랑에 대한 "야수성이 완전히 제거된" 생각에서 더 나아가, 그 논리적인 반대의 저쪽 끝으로, 곧 여자들은 육욕의 성찬을 위하여 조직적으로 훈련되었다. 어떤 교제에서도 여자는 상대의 남자에게 쾌락을 주던가 아니면 남자를 쾌락을 향해 쉬지 않고 끌어가기 위해 자극해야 했다. 여자는 끊임없이 색을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살롱이나 극장이나 극장에서뿐만 아니라 거리에서까지도 마치 은밀한 침실에서 친구나 구애자와 은밀한 말을 주고받듯이 육욕의 재단에 언제나 몸을 바쳐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 방법밖에는 남자의 욕망을 진정시킬 수 없었고 자기주위에 나타난 모든 남자의 소원을 잠재울 수 없었던 것이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의 것이 되어야 했다. 여자는 쾌락을 끝없이 크게 하고 자신의 역할을 말하자면 몇 배로 확대하는 수완이 있어야만 했다. 여자는 삶의 그 오직 하나의 목적을 끊임없이 특히 뛰어난 기교로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언어, 행동, 의사, 기지, 놀이에 의해서 곧 자기의 정신과 육체를 모두 동원해서라도 보여주어야 했다. 여자는 스스로의 행동으로써 자기의 공상은 모두 육욕으로 물들여져 있고 자기의 생각은 모두 육욕에만 쏠려 있으며 스스로 육욕의 기회를 언제나 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랑 또한 연기이며 공개적인 연극이므로 수많은 관객이 지켜보는 무대 위에서 실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에는 육감적인 여자, 끊임없이 쾌락을 좇고 사랑의 향응만을 꿈꾸는 여자가 인구에 회자되었고 따라서 가장 인기있는 여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고혹적인 자극과 호색"을 추구했다. 화가는 그 부류의 여자를 여러 가지 모습으로 그렸고, 갈랑트리한 시인도 그 부류의 여자들을 열광적으로 찬미했다. 볼에는 "쾌락의 장미"가 피고" 융기한 유방이 출렁이는" 몸도 마음도 불태우는 "은밀한 정열이 내비치는" 여자의 아름다움처럼 이 세상에서 놀라운 것은 없었던 것이다.
물론 남자도 역신 같은 방향으로 그녀들에게 열중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여자의 행동은 남자의 행동의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곧 그 쾌락의 가장 귀중한 도구를 받들었다. 남자는 그 도구를 받음으로써 여자로부터 하나의 우상을 조형했고, 그것을 삶의 유일신으로까지 받들었다. 그것은 말과 행동에 의해 간단없이 계속된 제 분수를 잃는 숭배였다. 그러므로 여자와 주고받는 어떠한 대화에서도 남자는 먼저 "만약---해주신다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요"라는 문구를 앞세우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언제나 "당신은 언제 내 청을 들어주시려는지요"라는 바람으로 그 끝을 맺었다. 그것은 귀엣말로 속삭여졌다. 남자는 그것을 악수할 때 은밀하게 손을 꼭 쥠으로써, 손등에 하는 은근한 입맞춤으로써, 극장이나 사교장에서는 오가는 추파에 의해서 분명하게 전달했다. 남자는 언제나 그것을 여자에게 전달했고, 오직 그것만을 여자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여자는 언제나 남자가 그녀와 대화하고 있는 동안에도, 상대방의 소망을 들어주었다. 여자는 놀라운 것만을, 장점과 온갖 아름다움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여자는 참으로 아름다웠던 것이다. 모든 여자는 모든 남자의 것이므로 남자도 역시 모든 여자들을 골고루 숭배해야 했다. 남자는 모든 여자에게 당신이야말로 내 피를 끓게 하고 내 정욕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존재라는 말을 속삭여야 했고 또 그것을 몸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모든 여자는 자기를 여왕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가 보여주는 모든 행동이 노리는 것을 언제나 그 목적에, 그 결과였다. 그것은 남자의 목소리까지도 상냥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무뚝뚝한 것은 헌신이나 복종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교제에서는 진실이나 성실성이 아니라 은근한 예의와 감언이설이 판을 쳤다. 남자들은 상대에 따라 어떤 감언이설을 쓸 것인가를 여러 가지로 연구했다. 여자의 거절의 포즈도 복종을 의미할 때에는 무방했었다. 남자는 여자로부터 모든 장애물을 제거했다. 아무리 작은 요구도 남자들에게는 명령을 의미했다. 여자는 언제나 남자의 앞장을 섰고 어디서나 남자를 앞질렀다. 남자는 여자가 편히 걸을 수 있도록 크고 작은 길을 평평하게 닦았다. 그리고 남자는 여자에게 대한 자기의 권리나 이해관계를 포기하는 것을 언제나 영광으로 여겼다. 여자의 희망이나 의견은 남자에게는 권위가 되었고 남자의 의견은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히기 일쑤였다. 여자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남자는 자기 삶의 절반은 아니 대부분의 남자는 자기의 삶을 전부 바쳤다. 여자가 천재까지도 마치 자기의 의견을 가지지 않은 충실한 노예처럼 주무를 수 있었던 경우는 하루 24시간이 여자의 손안에서 놀아났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남자의 그런 행동은 모두 색에 짓눌려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갈랑트리의 시대를 다른 시대와 구별하는 특징이었다. 갈랑트리의 탄생, 곧 강한 육체를 가진 자가 약한 육체를 가진 자를 고려하는 것은 어느 세상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며, 남녀의 육체적인 힘의 차이에서와 마찬가지로 남녀관계에서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갈랑트리의 시대에는 그와 같은 고려가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더구나 성적인 방향으로만 이루어졌다. 약한 육체가 고려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고려에 의해서 여자의 정수, 곧 남자가 가장 요구하는 쾌락의 귀중한 도구가 과장 숭배되었다.
갈랑트리의 지배에 의해서 육욕의 질도 자연적으로 그 토대에서부터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변화는 그 전제로서, 또 그 결과로서 나타났다. 당대의 사람들은 자기의 힘을 마음껏 써보고 싶었으나 태어나면서부터 언제나 자기의 힘이 너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있음을 느꼈다. 그러므로 육욕은 힘의 선언으로부터 단순한 놀이, 곧 남녀의 놀이로 바뀌어버렸고, 사랑은 갈랑트리로 바뀌어버렸다. 왜냐하면 놀이는 무한히 연장시킬 수 있었고 날마다 새로운 것으로 바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녀가 서로 복종하는 형태는 모두 놀이같이 되었고 그만큼 더욱더 세련되었다. 세련이란 생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을, 곧 보통방법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을 다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흔해 빠진 시도일 뿐이었다. 이 경우, 세련은 개인의 생래적인 한정된 힘을 몇 배로 증가시켰고, 신분에 따라서는 몇 명이라도 둘 수 있는 첩이나 애인의 수효와 정력을 서로 조절하는 비결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영적인 것, 정신적인 것, 예술적인 것은 모두 갈랑트리의 새로운 변화를 발전시키고 그 새로운 변화의 하나하나에 끊임없이 새로운 형태를 부여하려고 하는 자극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결국 시대의 도덕관을 그대로 놓아두지 않았다. "도덕은 사랑 속에 온갖 악을 끌어들였다"고 레티프 드 라 브레톤은 말했다. 신부 갈리아니는 "방정한 품행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할 바에야 그 따위 것은 악마에게나 주어라"고 조소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방정한 품행, 곧 정숙과 그것에 따르기 마련인 권태를 악마에게 주어버렸다. 죄악은 사교에서도 관대하게 취급되었다. 그것은 공공연하게 미덕이 되지는 못했으나, "향락한다"는 인생의 가장 큰 목적에 알맞는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되었다. 곧 그러한 목적이나 목표에 편리하도록 합리화되었던 것이다. 매춘부는, 세상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이미 공중변소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숙달된 사랑의 예술가였다. 부정한 아내나 부정한 애인은 그녀들이 저지르는 새로운 부정에 의해서 남편이나 정부를 더욱 자극했다. 여자가 남자가 자기를 애무할 때 맛보는 쾌락은 많은 여자가 나보다 먼저 이 사내의 팔에 안겼을 것이라는 공상에 의해 더욱 커졌다.
이와 같은 것들은 대체적으로 절대주의의 법칙이 성적인 것에 어떻게 투영되었는가를 보여주는 특수한 것들이다. 그 법칙을 자세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 법칙은 각 계급에 어떻게 침투했고 각 계급에서 어떻게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는가? 둘째 그 법칙은 인생, 철학, 언어, 공적 사적 풍기, 법률관을 어떻게 만들었는가? 셋째, 그 법칙은 문학인 미술을 어떻게 규정했는가? - 그것들이 "색의 새대"에서 대답해야 할 문제이다.
우선 여기서 나는 그 당연한 결론 하나만을 강조하고 싶다. 그 결론이란 여자의 시대가 여자의 진정한 진보를 약속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자의 가장 혹심한 굴욕을 전제로 했다는 사실이다. 18세기에 일세를 풍미했던 여자 숭배는 굴욕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행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실상도 또한 꼭 내가 말한 그대로였다.
절대주의시대에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지 않았다. 참으로 여자의 지위가 향상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가 평등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시대의 여자는 진정한 권리를 결코 보장받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남자의 정치지배와 여자에 대한 남자의 전제는 그야말로 절대적인 것이었다. 여자의 부정이 성을 향락하는 데에 가장 좋은 자극제라고 공언하던 시대에도 남자는 자기의 힘을 휘둘러 간통혐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아내에게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형벌을 가했고 죽을 때까지 수녀원에 감금하는 일조차도 마음대로 했다. 남자는 전능했으므로 자기의 욕망을 기분 내키는 대로 발산 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그들은 자연히 자기의 기분이나 욕망의 노예가 되었다. 그래서 자연에 어긋나는 엉뚱한 변덕이 마침내 일반적인 관습이 되어 남자는 자기의 노예, 곧 여자에게 주인의 권리를 주고 자기는 노예가 되어 노예로서 여자를 섬겼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매조키즘이 사랑의 일반 법칙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곧 절대주의의 성 모랄의 정체였다.
그 시대의 그러한 특징을 분명히 파악하고 그것에 관한 이런저런 변명을 물리치기 위해서 특별히 날카로운 논리가 필요하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역시 그 토대를 강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토대 위에서만 당시의 여자 숭배를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고 갈랑트리의 법칙에 지배되는 수많은 사항을 하나하나 비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항을 사교생활에서 실천하는 것은 절대주의의 정치법칙을 실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의 절대적인 요구였다.
나는 이장의 첫머리에서 절대주의에로의 발전이 각국에서 서로 다른 속도로 진행되었고 그 지배의 기간이 길지 않았던 것은 절대주의를 역사에 등장시킨 뒤 어떤 시기에 다시 그것을 걷어 찬 각국의 자본주의가 서로 다른 속도로 발전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했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절대주의의 종말이 1848년에 이루어졌고 그 지배는 25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나, 프랑스에서는 1789년이 그것의 영원한 파멸의 해였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절대주의 시대는 프랑스에서 200년 밖에 계속되지 않았다. 영국은 이미 18세기에 부르조아 국가로 변모했다.
위와 같은 차이, 그리고 절대주의가 각국에서 지배적이었던 기간은 마치 르네상스 때처럼 그 시대의 나라들 사이에서도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커다란 차이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각국에서도 절대주의 문화의 등장기, 절정기, 몰락기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시대를 지배하는 법칙만을 찾아서 역사를 수직적이 아니라 수평적으로 바라보고자 하기 때문에 그것들이 나의 총괄적인 연구를 방해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18세기가 역시 "색의 시대"의 중요한 범위임은 분명하다. 절대주의는 영국을 제외하고는 18세기에 어느 나라에서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그 절정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18세기는 유럽의 문화에서 여자의 시대였다. 그 밖의 것은 모두 준비와 막간 휴식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