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돈
파이돈
대화하는 사람 : 파이돈, 에케크라테스
대화 속에 나오는 인물 : 소크라테스, 아폴로도로스, 심미아스, 케베스, 크리톤
장면 : 소크라테스의 감방
장면 : 플리우스
에케크라테스 : (에케크라테스는 플리우스 사람으로 피타고라스 파에 속해 있었다) 파이돈,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던 날, 당신은 감옥에 그와 함께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그 때의 일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었습니까?
파이돈 : (파이돈은 엘리스 사람으로 포로가 되어 아테네에 왔으나 후에 해방되어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었다) 네, 함께 있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에케크라테스 : 그렇다면 그의 임종에 대해서 들려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순간에 무슨 말을 했습니까? 우리는 그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더 자세한 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지금은 플리우스(플리우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동북부의 있는 마을로 피타고라스학파의 요람지로 알려져 있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다음에 아테네를 떠나 고향으로 가는 도중, 플리우스에 들러 여기에 살던 에케크라테스와 이 대화를 나눈 것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 다소의 시간이 경과한 다음에 이 대화가 있었던 것 같다) 사람으로 아테네에 가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또 아테네로부터 이곳으로 오는 나그네도 오랫동안 끊어져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파이돈 : 재판 과정에 대해서도 듣지 못했습니까?
에케크라테스 : 들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재판에 관해서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판결을 받은 다음 곧 처형되지 않고 오래 있다가 처형되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 까닭은 무엇이었습니까?
파이돈 : 에케크라테스, 우연한 일이었지요. 아테네 사람들이 델로스 섬(델로스 섬은 아테네의 동남쪽 키크라테스 군도에 있는 작은 섬으로 아폴론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으로 보내는 배가 우연히 그가 판결을 받기 전날에 그 선미를 장식했던 것입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 배는 어떤 배입니까?
파이돈 : 아테네의 전설에 따르면 테세우스가 열 네 명의 소년 소녀를 데리고 크레테 섬으로 가서 그들을 구출하고 자기 자신도 구출했을 때 탔던 배라고 합니다.(크레테의 미노스 왕이 국력이 약한 아테네에 싸움을 걸어 왔을 때, 아테네는 매년 소년 소녀 7명씩을 크레테 섬으로 보내기로 약속하고 강화하였으며, 세 번째로 아이들을 보내게 되었을 때 용사 테세우스는 소년 소녀를 데리고 클테 섬으로 가서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무사히 소년 소녀와 함께 귀환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그 때 아테네 사람들은 만일 그들이 무사히 돌아오면 매년 델로스 섬에 사절단을 보낼 것을 아폴론 신에게 맹세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관습은 계속되고 있는데 델로슨 섬으로 떠났다가 돌아오기까지의 항해 기간은 - 아폴론 신의 사제가 선미를 장식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만 - 신성한 기간으로 여겨져 이 기간 동안에는 시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법에 의한 처형도 금지됩니다. 그런데 배가 역풍을 만나 지체하면 갔다 오는데 결리는 시간이 상당합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이 배는 재판 전날에 장식되었는데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판결을 받은 다음에도 오랫동안 감옥에 갇힌 채 처형 받지 않은 까닭입니다.
에케크라테스 : 파이돈, 그의 임종 때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이 참석하는 것을 금지해서 그가 임종할 때 그의 곁에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었습니까?
파이돈 : 아닙니다. 몇 명의 친구가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바쁜 일이 없다면, 가능한 한 자세하게 그 때 일어난 일을 말해 주십시오.
파이돈 : 당장 바쁜 일도 없으니 당신의 소망을 들어주기로 하지요. 소크라테스를 다시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니까요. 내가 말을 하든 남이 그의 말을 하는 것을 듣든 간에 …
에케크라테스 :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도 당신과 똑같은 심정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정확하게 말해 주십시오.
파이돈 : 나는 그의 곁에 있으면서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친구의 임종의 자리에 있다는 것이 거의 믿어지지 않았고, 따라서 에케크라테스, 나는 그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어요. 나는 그가 축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신의 부름 없이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아니며, 저 세상에 닿아서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시간에는 당연히 연민의 정을 느끼기 마련인데 나는 그를 가엾이 여기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철학적 토론을 할 때면 언제나 느끼던 즐거움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때도 우리의 대화의 주제는 철학이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즐거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즐거움에는 기묘하게도 고통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는 곧 죽을 것이라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이중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는 웃고 어는 때는 울었습니다. 특히 흥분 잘 하는 아폴로도로스(아폴로도로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의 한 사람. 소크라테스를 숭배하여 스승을 따라 맨발로 다녔다고 하며 향연에서는 대화의 주도자로 등장한다)가 심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당신도 아시지요?
에케크라테스 : 네.
파이돈 : 그 사람은 아주 미친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나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매우 마음이 어지러웠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파이돈 : 아테네에 사는 사람으로는 아폴로도로스 이외에 크리토뷸로스와 그의 아버지 크리톤, 헤르모네스, 에피게네스, 이이스키네스, 안티스테네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이아니아의 크테시포스, 메네크세노스와 그 밖의 몇 사람이 있었습니다. 내 기억에 잘못이 없다면 플라톤은 병중이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다른 곳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습니까?
파이돈 : 네, 테바이에서 온 심미아스와 케베스, 파이돈데스, 그리고 메가라에서 온 에우클레이데스와 테르프시온이 있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아리스티포스와 클레옴브로토스도 있었습니까?
파이돈 : 없었습니다. 그들은 아이기나 섬에 있었다고 하더군요.
에케크라테스 : 그 외의 다른 사람은?
파이돈 : 대체로 앞에 말한 사람들뿐인 것 같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러면 무슨 말을 했습니까?
파이돈 : 처음부터 말하기로 하지요. 대화 전부를 상세히 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우리는 늘 아침 일찍 재판이 열렸던 법정에 모였습니다. 법정은 감옥으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요. 거기서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며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곤 했습니다. (감옥 문은 일찍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문이 열리면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서 소크라테스와 함께 하루를 보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아침에는 우리는 보통 때보다 더 일찍 모였습니다. 그 전날 저녁에 감옥을 나올 때, 우리는 그 신성한 배가 델로스에서 돌아왔다는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모이는 장소에서 아주 일찍 만나기로 약속했지요. 감옥에 도착하니 늘 문을 열어 주던 간수가 밖으로 나와 우리를 가로막고 그가 부를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하더군요. 간수는 11집행 위원(아티카의 10구에서 추첨으로 뽑힌 10명의 위원과 1명의 서기가 감옥의 관리, 형의 집행 등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들을 11집행 위원이라 불렀다)이 지금 소크라테스와 같이 있습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의 사슬을 풀고, 그가 오늘 죽는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간수는 곧 돌아와서 들어가도 좋다고 일러주더군요. 들어가 보니 소크라테스는 방금 사슬에서 풀려나 있었고, 그 옆에는 당신도 잘 아는 크산티페(크산티페는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애들을 안고 앉아 있었습니다. 크산티페는 우리를 보자 울음을 터뜨리며, 여자들이 흔히 그렇듯이 “소크라테스, 당신이 친구 분들과 이야기하고 저 분들이 당신과 이야기하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에요.” 라고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크리톤, 누구를 시켜서 저 사람을 집으로 데려가도록 하게.” 그래서 크리톤의 하인 중에서 어떤 사람이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크산티페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크산티페가 나가자 소크라테스는 침상에 앉아서 몸을 꾸부려 발을 문질렀습니다. 그리고 발을 문지르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것은 얼마나 묘한 것인가, 그리고 쾌락의 반대라고 여겨지는 고통과의 관계도 또 얼마나 이상한 것인가! 쾌락과 고통은 동시에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일은 없으면서도 그 중 하나를 추구해서 얻은 사람은 대체로 다른 하나도 어쩔 수 없이 얻기 마련이기 때문이야. 그 몸뚱이는 돌이지만, 머리 하나에 붙어 있는 셈이야. 그리고 이솝이 이러한 점을 알았더라면, 그는 신이 쾌락과 고통간의 싸움을 화해시키려다가 도저히 불가능함을 알고 양자의 머리를 하나로 만들어 버렸고 그래서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가 뒤따르기 마련이라는 우화를 지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네. 지금의 내 경험으로도 알 수 있어. 발이 사슬에 묶였을 때에는 고통스럽더니, 쾌락이 뒤따라오는 것 같아.”
이 말을 듣고 케베스가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솝의 이름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 물었고, 바로 그저께도 시인 에우에노스가 물은 질문인 생각납니다. 에우에노스는 분명히 다시 물을 것이고, 따라서 내가 그에게 할 대답을 마련해 주셔도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내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를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한 줄의 시도 쓰지 않던 당신이 지금 감옥에 들어와서는 이솝의 우화를 시로 옮기고 또 아폴론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짓는 까닭을 알고 싶어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케베스,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게. 나는 그나 그의 시와 겨룰 생각은 전혀 없다는 것을. 그와 겨룬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나는 잘 알고 있네. 그러나 나는 어떤 꿈의 의미에 대해 품고 있는 의아심을 씻어 버릴 수 있을지도 알고 싶었네. 나는 살아오는 동안에 종종 내가 음악(원어는 무시케로 뮤우즈가 다스리는 기예 전반을 가르친다. 따라서 시, 음악, 학문, 예술 등을 총칭하는 말이다. 넓은 의미로 문예라고 옮길 수도 있다. 여기서는 영어의 뮤직에 따라 음악이라고 옮겼으나, 이 말이 갖는 넓은 뜻에 유의하기)을 저어야 한다는 암시를 꿈속에서 받았네. 똑같은 꿈이 때에 따라 형태를 달리 하면서도 항상 같은 말, 또는 거의 같은 말을 들려주었네. 곧 꿈은 음악을 연마하고 음악을 지어라 하고 말했네. 그리고 지금까지는 나는 이 말이 나에게 다만 철학을 연구하도록 권고하고 격려하는 것으로 생각해 왔네. 철학은 내가 일생 동안 탐구해 온 것이고 또 가장 고상하고 가장 훌륭한 음악이니까. 그 꿈은 마치 경주를 하고 있는 선수에게 선수가 달리고 있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구경꾼들이 달리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내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을 나에게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가 없었네. 이 꿈이 말하는 음악은 항간의 통속적인 음악을 말하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그래서 사형 선고를 받고 축제 때문에 나에게 잠시의 유예가 생기자, 나는 내 의아심을 풀기 위해 꿈의 명령에 따라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몇 편의 시를 짓는 것이 안전하지 않을까 생각했네. 그래서 우선 나는 축제의 신을 찬양하는 찬가를 짓고, 다음에는 시인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단지 낱말을 이어 맞추는 일만 할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고 생각했네. 그러나 나는 만들어 낼만한 이야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네. 시로 옮겨 놓은 것일세. 케베스, 에우에노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에게 용기를 내라고 전해 주게. 또한 그가 바보가 아니라 현명한 삶이라면 나를 따라 오기를 내가 바라고 있다고 말해 주게. 그리고 나는 아테네 사람들이 명령하는 대로 오늘 죽게 될 것 같다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무슨 말씀입니까? … 나는 그 사람을 자주 만나 보았기 때문에, 내가 알기로는 그는 불가피한 경우를 당하지 않는 한 당신의 충고를 따르지 않을 것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래? 에우에노스는 철학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는, 아니 그뿐 아니라 철학 정신을 가진 사람은 누구든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되지. 자살은 옳은 일이 아니니까.”
여기서 그는 자세를 바꾸어 발을 침상에서 땅에 내려놓았는데, 대화가 계속되는 동안 그는 줄곤 앉아 있었습니다.
케베스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사람은 자살을 해서는 안 되지만 철학자는 죽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케베스, 그리고 심미아스, 자네들은 필롤라오스의 제자들인데, 그에게서 이 문제에 대해 듣지 못했나?”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애매모호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내 말도 역시 들은 말을 옮기는 데 지나지 않지만, 내가 들은 말을 전하지 못할 이유도 없지. 그리고 사실상 나는 저 세상으로 가려고 하는 때이므로 내가 바야흐로 출발하려고 하는 순례의 길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이에 대해 생각하고 담론하는 것은 매우 어울리는 일 같군. 지금부터 해가 질 때까지(해가 지면 사형이 집행된다) 그 사이에 메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일이 있겠는가?”
“그러면 소크라테스, 왜 자살은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지 말해 주시오. 나는 방금 당신이 물어 본 필롤라오스가 우리와 함께 테바이에 있을 때 자살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도 같은 말을 했는데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어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가 이해할 날이 올 걸세. 다른 나쁜 일들은 때로는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되기도 하는데 어째서 죽음은 유일한 예외일까, 그리고 오히려 죽는 것이 나을 경우에도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되고 다른 사람의 손을 기다려야 하는가, 이 점을 의아하게 여길 줄로 생각하네. 사실 말한 데에는 외견상 모순이 있다는 점을 인정하네.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모순이 없을 걸세. 인간은 문을 열고 달아날 권리를 갖지 못한 죄수라고 몰래 속삭이는 주장이 있지.(오르페우스 교단의 극장을 말한다. 이 교단에 의하면 신체는 영혼의 감옥이다. 피타고라스학파도 이 주장을 계승했다) 이것은 내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신비야. 그러나 신들은 우리의 수호자이며 우리들 인간은 신들의 소유물이라는 사실만은 나도 믿네. 자네는 동의하지 않나?”
“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만일 자네의 소유물 중의 하나, 예컨대 소나 나귀가 죽는 것이 좋겠다고 자네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음대로 자살한다면 자네는 화를 내지 않겠나? 그리고 가능하다면 소나 나귀를 처벌하지 않겠나?”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화를 내고 처벌해야지요.”
“그렇다면 문제를 이와 같이 볼 때, 사람은 마땅히 기다려야 하고, 신이 지금 나를 부르는 것처럼 신이 부를 때까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데에는 까닭이 있다고 할 수 있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은 옳은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신은 우리의 수호자이며 우리는 신의 소유물이라는, 정당한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방금 당신이 말씀하신 바와 같이 철학자는 기꺼이 죽어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절충하시겠습니까? 인간들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자들이 그들을 다스리는 최선의 지배자인 신들의 보호로부터 즐거운 마음으로 벗어난다는 것은 불합리한 듯합니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가 자유로워졌을 때, 신보다도 더 훌륭히 자기 자신을 보살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혹 이와 같이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어리석은 자는 끝까지 남아 있어서 선으로부터 도피하지 않는 것이 그의 의무이고, 따라서 도피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인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낫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보다 훌륭한 자와 항상 함께 있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 이것은 방금 말씀하신 것과는 반대가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견해에 따르면 현명한 자는 죽는 비탄하고 어리석은 자는 기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케베스의 진지한 태도는 소크라테스를 흐뭇하게 만든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들을 돌아보면서 말했습니다. “여기에 한결같이 탐구하고 들은 것을 대뜸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군.”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내 생각으로는 그가 지금 말한 반대 의견에는 약간의 타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현명한 사람이 달아나기를 원하고 자기보다 훌륭한 자로부터 쉽게 떠나려고 한다면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나는 케베스는 바로 당신을 두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신이 너무 쉽게 우리 곁을 떠나려 하고 또 당신이 너무 쉽게 스스로 우리의 선량한 주인이라고 공언한 신들로부터 떠나려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옳아, 자네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렇다면 자네는 내가 마치 법정에 선 것처럼 자네의 비난에 대해 변명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해 준다면 우리는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네들 앞에서 재판관들 앞에서 했던 변명보다 더 성공적인 변명을 하도록 노력해 보겠네. 심미아스, 그리고 케베스, 우선 현명하고 선한 다른 신들에게로 가려고 한다는 (이에 대해서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나는 확신을 갖고 있네), 그리고 둘째로 내가 뒤에 남겨 두고 가는 사람들보다 더 좋은 사람들에게로 떠나간다는 (이에 대해서는 반드시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러한 신념이 나에게 없다면 나도 죽음을 슬퍼해야 마땅하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네. 그러나 나는 이와 같은 신념을 갖고, 예로부터 전해 오는 바와 같이 착한 사람에게는 악한 사람보다 훨씬 더 좋은 일이 있다는 훌륭한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이야.”
“그러나 소크라테스, 당신은 당신의 사상도 함께 갖고 가렵니까? 당신은 그 사상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렵니까? 그 사상들은 우리도 알아두어야 할 은전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신이 우리들을 설득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당신에 대한 비난을 논박하는 대답이 될 것입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네. 그러나 우선 크리톤의 말을 들어보기로 합시다. 그는 아까부터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했으니까.”
크리톤이 대답했습니다. “다른 일이 아닐세. 자네에게 독약을 줄 책임을 진 간수가 아까부터 내가 자네에게 전해 주기를 바라며 나에게 한 말인데 자네는 말을 너무 많이 해서는 안 된다네. 말을 하면 열이 오르고 열이 오르면 독약의 작용을 방해하기 쉽다고 간수가 말하네. 흥분한 사람들은 때로는 두 번, 세 번씩 마셔야 한다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할 일이나 생각하라고 하게. 그리고 필요하다면 두 번, 세 번이라도 독약을 줄 준비나 하라고 하게. 이게 전부일세.”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나는 자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네, 그러나 간수의 말을 안 들어 줄 수도 없었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간수에 대해서는 너무 염려하지 말게. 그러면 오, 나의 재판관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맞이하여 기쁜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가 있으며, 또한 죽은 다음에는 저 세상에서 최대의 선을 얻는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하네. 심미아스와 케베스, 어떻게 그러한지를 나는 설명하고자 하네. 진정으론 철학에 헌신하는 사람은 남에겐 오해받기 쉽기 때문일세. 세상 사람들은 참된 철학자는 항상 죽음과 죽어 가는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해. 그리고 만일 사실이 이렇다면, 그리고 그는 일생 동안 죽음을 갈망해 왔다면 그가 대망 하던 시간이 닥쳤을 때 어째서 그가 한결같이 추구하고 갈망하던 일을 한탄할 것인가?”
심미아스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웃을 일은 아닙니다만,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을 들으니 웃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듣고 당신이 철학자를 참으로 잘 설명했다고 말할 것이고, 우리 고향 사람들도 철학자들이 바라는 삶은 사실상 죽음이며 철학자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심미아스,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옳아. 단 철학자들이 알게 되었다는 말만 제외하고는…. 참된 철학자에게 합당한 죽음이 어떤 것인지, 또는 어떻게 죽는 것이 합당하고 어떠한 죽음을 원하는지를 철학자들이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참된 철학자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 두세. 우리들의 문제나 토론하기로 하세. 우리는 죽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분명히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아닌가? 그리고 죽는다는 것은 이러한 분리의 완성인 것이다. 영혼이 독립해 있어서 육체로부터 해방되고 육체가 영혼으로부터 해방될 때, 이것이 바로 죽음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가 있네. 만일 자네와 내가 이 문제에 대해 의견이 일치될 수 있다면 아마도 이 문제는 우리의 현재의 탐구를 밝혀 줄 걸세. 철학자는 먹고 마시는 쾌락-이것도 쾌락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에 유념해야 마땅한가?”
“물론 안 됩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의 쾌락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철학자는 사랑의 쾌락을 추구해야 할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예를 들면 값비싼 옷이나 신발, 기타의 육신의 장식품을 얻는 따위, 그 밖의 여러 가지 신체적 향락을 철학자는 보람 있다고 생각할 것인가?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거들떠보지 않고 철학자는 자연이 요구하는 것 이상의 것은 경멸해야 할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참된 철학자는 이러한 것들을 경멸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네는 참된 철학자는 전적으로 영혼에만 관심을 갖고, 육체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는 가능한 한 육체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영혼만을 생각한다는 말이겠지?”
“옳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 철학자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영혼을 육체와의 결합으로부터 분리하는 온갖 방법을 다 쓴다는 것이겠지?”
“옳습니다.”
“그러나 심미아스, 세상 사람들은 육체적 쾌락에서 쾌감을 얻지 못하고, 또 육체적 쾌락을 맛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살 만한 것이 못되어 육체적 쾌락에 무관심한 사람은 죽은 것과 같다는 의견인데 ….”
“그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면 지식의 획득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육체는 만일 탐구에 참여한다면 방해가 될까, 도움이 될까? 다시 말하면 보고 듣는 데에도 어떤 진리가 있는가 하는 말일세. 보거나 듣는 것은 시인들이 늘 우리에게 일러주듯이 부정확한 증인이 아닌가? 그렇지만 보고 듣는 것조차 부정확하고 명석하지 못하다면 다른 감각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까? 자네는 보고 듣는 것은 감각 가운데서는 가장 나은 것이라고 인정할 테지? 그렇다면 영혼은 언제 진리를 획득하는가? 육체와 함께 무엇을 고찰하려고 하면 영혼은 속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존재가 드러난다고 하면, 그것은 사유를 통해서 영혼에 드러나야 하겠지?”
“네”
“그리고 정신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서 소리나 시각이나 고통이나 쾌락 따위가 정신을 괴롭히지 못할 때, 곧 정신이 육신으로부터 떠나서 가능한 육신과 관계하지 않을 때 다시 말하면 정신이 육체적 감각이나 욕망을 갖지 않고 오직 참된 존재만을 갈망할 때, 사유는 최상의 것이 되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함으로써 철학자는 육체를 경멸하고, 그의 영혼이 육체로부터 벗어나 홀로 독립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좋아. 그러나 심미아스, 또 다른 문제도 있네. 정의 자체가 있을까, 없을까?”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면 미 자체, 선 자체도?”
“물론입니다.”
“그러나 자네는 자네의 눈으로 그러한 것들을 본 일이 있나?”
“결코 보지 못했습니다.”
“혹은 다른 육체적 감각으로써 이러한 것들에 도달한 일이 있었나? 그런데 나는 이러한 것들뿐 아니라 크기 자체, 건강 자체, 또는 만물의 본질, 또는 참된 본성도 말하고 있는 것일세. 자네는 육체의 기관을 통해서 이러한 것들의 실재를 지각해 본 적이 있었나? 혹은 오히려 지적 통찰력으로써 그가 고찰하는 각각의 사물의 본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몇 가지 자연에 대한 지식에 가장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고 사유 작용에 있어서 정신만으로써 위에서 말한 것에 접근하고 이성과 함께 시각이나 기타의 감각을 끌어들이거나 침입시키지 않고, 바로 명석한 정신과 빛으로써 각각의 진리 그 자체를 탐구하는 사람이 정의 자체, 미 자체 등에 관한 가장 순수한 진리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말하자면 눈이나 귀난 기타의 모든 신체는 영혼을 더럽힐 때에는 진리와 지식의 획득을 방해하고 혼란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의견으로 가능한 한 눈이나 귀나 기타의 신체와 관계를 끊은 사람, 이 사람이야말로 참된 존재에 대한 지식을 획득할 것이 아닌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당신의 말에는 놀라운 진리가 깃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일을 고려할 때, 진정한 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반성을 하지 않을 수 없겠지? 진정한 철학자들은 우리가 육체와 더불어 있는 동안은, 그리고 영혼인 육체의 악에 감염되는 동안은 우리의 욕구는 충족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우리와 우리의 논의를 이끌어 가는 사유의 길을 우리는 찾아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우리의 욕구는 진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육체는 양식을 요구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우리에게는 끝없는 번거로움이 생기고 게다가 병이라도 걸리면 우리의 참된 존재에 대한 추구를 압도하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또한 육체는 우리의 마음속을 애욕과 욕망과 공포와 모든 종류의 환상과 끝없는 어리석음으로 가득 차게 만들고, 사실상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사유의 힘을 전적으로 빼앗아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불화나 분쟁은 왜 일어나는가? 육체와 육체의 욕망이 바로 그 원인이 아닌가? 전쟁은 돈을 좋아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돈은 육체 때문에 육체를 돌보기 위해서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장애로 말미암아 우리는 철학 하는 데 쓸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가장 나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한가한 시간이 생겨서 사색에 잠기려고 하더라도 언제나 육체가 끼어들어 우리의 탐구에 동요와 혼란을 일으켜서 놀라웁게도 우리들로 하여금 진리를 보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가지려면, 육체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경험에 의해서도 입증되고 있는 일이다. 영혼 자체만이 사물 자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만 우리는 우리가 갈구하며, 우리의 애인이라고 부르는 지혜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야 도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육체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영혼은 순수한 지식을 가질 수 없다면 다음 두 경우 중의 하나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곧 지식은 전혀 획득되지 않거나 또는 획득된다 하더라도 죽은 다음의 일인 것이다.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영혼은 육체를 떠나 홀로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현세에 있어서는 가능한 한 육체와 관계를 갖거나 사귀지 않고 또 육체의 본성에 전염되지 않고 신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시간까지 우리 자신을 깨끗이 지킬 때 우리는 지식에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육체의 어리석음으로부터 풀려날 때, 우리는 순수하게 될 것이며 순수한 것과 사귈 것이며 스스로 도처에서 밝은 빛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빛은 바로 진리의 빛이다. 라고 말할 거야. 순수하지 못한 것은 순수한 것에 접근할 수 없기 때문이야. 심미아스, 이것이 참된 애지자들이 서로 주고받지 않을 수 없고,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일세. 자네도 동의하겠지, 그렇지 않은가?”
“소크라테스, 물론입니다.”
“그러나 오, 친구여, 이것이 진리라면, 내가 나의 여행을 마치고 지금 가려고 하는 곳에 다다르면, 평생 동안 추구하던 것을 얻게 되리라는 희망을 품는 가장 큰 이유도 여기에 있네. 그러므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나의 길을 가려고 하며 나만이 아니라 마음에 결심이 서 있고 순수한 태도를 가졌다고 믿는 모든 사람이 그럴 거야.”
“옳은 말입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지만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 바로 카타르시스가 아닌가? 곧 영혼이 모든 방면에서 육체로부터 벗어나 자기 자신으로 응접하고 결합하며, 저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세상에서도 가능한 영혼이 자기 자신의 자리에 홀로 머물러 있는 습관, 이것이야말로 영혼이 육체의 쇠사슬로부터 풀려나는 것이 아닌가?”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철학자만이 항상 영혼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영혼과 육체의 분리 및 해방은 그들의 각별한 관심사가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죽음에 가장 가까운 상태에서 살려고 하던 사람들이 죽음이 닥쳤을 때, 불평을 말한다는 것은 처음에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가소로운 자가당착일 거야.”
“물론입니다.”
“따라서 심미아스, 참된 철학자들은 항상 죽음을 연습하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을 가장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야. 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게. 곧 참된 철학자들은 모든 면에서 육체의 적이었으며 영혼과 함께 있는 것만을 원하고 있다면 그들의 이러한 소망이 성취될 때, 그들이 거기에 도착하면 평생 동안 소망하던 것- 이것은 지혜야 -을 얻을 희망이 있고 동시에 적과 함께 있지 않아도 될 곳으로 출발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무서움에 떨고 한탄한다면 이것은 얼마나 모순된 태도일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명부에 가면 거기서 지상에서 사랑하던 사람들이나 아내나 자식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어서 죽기를 원해 왔어. 그런데 참된 애지자이며 명부에서만 지혜를 보람 있게 터득할 수 있다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진정한 철학자라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떠날 것이 분명해. 그는 거기에서 오직 거기에서만 순수한 형태로 지혜를 찾아낼 수 있다는 부동의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이야. 따라서 이것만이 진리라면, 내가 말한 바와 같이 그가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매우 어리석어.”
“정말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슬퍼하고 주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육체를 사랑하는 자이며, 동시에 돈이나 권력 또는 두 가지를 다 사랑하는 자일지도 모른다는 충분한 증거야.”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따라서 심미아스, 용기는 철학자에게만 특유한 성품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또한 절대로 마찬가지야. 일반 대중들도 절제는 정욕을 다스리고 누르는 것이며 정욕보다 탁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절제도 오직 육체를 경멸하고 철학 하는 생활을 하는 자에게만 속하는 덕이 아닌가? 자네가 다른 사람들의 용기와 절제를 고려해 보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모순된 것임을 알게 될 거야.”
“어째서 그렇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네도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죽음을 커다란 악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알고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용감한 사람도 보다 큰 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오직 공포 때문에 다시 말하면 두려워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용감한 거야. 그런데 사람들이 공포 때문에, 또 비겁하기 때문에 용감할 수 있다는 것은 확실히 이상한 일이야.”
“그렇군요.”
“그리고 절제도 마찬가지 경우가 아닌가? 사람들은 방종하기 때문에 절제를 요구하는 것이야. 이 말이 모순된 것 같이 모르지만, 사실은 이것이 저들의 어리석은 절제의 진상이야. 그들에게는 잃어버리기 싫은 쾌락이 있고 이 쾌락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몇 가지 쾌락을 삼가는데, 이는 다른 쾌락에 압도당했기 때문이야. 그리고 쾌락에 정복당하는 것을 사람들은 방종이라고 부르지만, 그들에게는 쾌락의 정복은 쾌락에 의해 정복당함으로써만 가능한 거야. 이러한 의미에서 나는 그들은 방종하기 때문에 절제하게 된다는 말을 한 거야.”
“사리에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어떤 공포나 쾌락이나 고통을 마치 화폐처럼 다른 공포나 쾌락이나 고통과 바꾸고, 또 보다 큰 것을 보다 작은 것과 바꾸는 것은 덕의 교환은 아니냐. 오, 축복 받은 심미아스, 모든 사물을 교환할 수 있는 참된 화폐가 하나 있지 않은가? 그것은 바로 지혜야. 이러한 지혜와 바꿀 때에만, 그리고 이러한 지혜를 가져야만 용기든, 절제든, 정의든, 무엇이든지 참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거야. 그리고 모든 참된 덕은 공포나 쾌락이나 이밖에 이와 비슷한 좋은 일, 또는 나쁜 일이 따르든 따르지 않든 간에, 지혜와 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여러 가지 좋은 것으로 되어 있는 덕도 지혜와 분리되어 서로 맞바꾸게 되는 경우에는 덕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고, 또한 여기에는 어떠한 자유도 건강도 진리도 없어. 그러나 참된 교환에서는 이러한 모든 것은 정화되지. 그리고 절제, 정의, 용기, 지혜 자체가 이러한 것들을 정화하는 거야. 신비 의식의 창시자들은 참으로 의미 있는 말을 한 것 같아. 그들이 오래 전에 비유를 통해 정화되지도 않고 비의도 받지 않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은 진흙 구덩이에 빠지지만, 비의를 받고 정화된 다음에 저 세상에 닿은 사람은 신들과 함께 살 것이라고 말한 것은 결코 난센스가 아니냐. 비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르테에크스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자는 많으나 박쿠스는 적기(나르테에크스는 남구에 있는 나무의 일종. 속이 비어 있다. 프로메테우스가 이 나무속에 불을 넣어서 갖고 왔다고 한다. 박쿠스 제 때 이 나무를 휘두르며 도취 속에서 박쿠스 산과 합일하는 체험을 얻으려고 했다. 따라서 나르테에크스의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박쿠스는 적다고 한 것은 산과의 합일을 원하는 사람은 많으나 그 경지에 도달하는 사람은 적다는 뜻이며, 여기서는 정화되어서 저 세상으로 가는 사람은 적다는 뜻이다) 때문이야. 나는 이 말이 <참된 철학자>가 적다는 뜻으로 해석하네. 나는 평생을 통해 능력껏 이러한 참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 왔네. 내가 올바르게 노력해 왔는지, 또는 내가 성공했는지 그 여부를 나는 잠시 후에 사실 그대로 알게 될 걸세. 나 자신이 저 세상에 도달했을 때 신이 알려 주려고 한다면…. 이것이 나의 신념이네. 그러므로 심미아스와 케베스여, 나는 여러분과 이 세상에서의 나의 주인으로부터 떠나가면서 서러워하지도, 불평하지도 않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네. 나는 저 세상에서도 이 세상에서와 마찬가지로 좋은 주인과 벗을 만나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말을 믿지 않아. 따라서 내가 아테네의 재판관들에 대해 서도보다도 여러분들에 대해서 더 잘 설득을 했다면 아주 좋은 일일 텐데.”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의 말의 대부분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영혼에 관한 말은 사람들이 믿으려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영혼이 육신을 떠나자 있을 곳이 없어지고, 따라서 죽은 그날로 사멸하고 종말을 고하며,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자마자 연기나 공기처럼 뿔뿔이 흩어져 날아가다가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해서 두려워합니다. 소크라테스, 만일 당신이 말한 여러 가지 악으로부터 해방된 다음에 영혼이 다시 온전하게 모일 수만 있다면 당신이 말한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영혼은 여전히 존재하며 어떤 침과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려면 상당한 논증과 증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옳은 말이야, 케베스. 그러면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데 대해 좀 더 이야기하기로 할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당신의 의견을 몹시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은 그가 설사 오래 된 적인 저 희극 작가들(희곡 ‘구름’ 에서 소크라테스를 조롱한 아리스토파네스 등을 말한다) 중의 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내가 관심도 없는 문제에 대해 쓸데없는 말을 한다고 비난하지는 못할 거야. 따라서 자네가 원한다면 탐구를 계속하기로 할까.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 명부에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문제부터 고찰하기로 하세. 영혼은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갔다가 이 세상으로 되돌아와서 죽은 자로부터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하는 옛날의 이론이 생각나는군. 만일 산 사람이 죽은 사람으로부터 태어난다고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영혼은 저 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영혼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산 사람은 오직 죽은 사람으로부터만 태어난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다면, 저 세상에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해질 거야.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논증이 필요하겠지.”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다만 인간에 관련시켜서 고찰하지 말고 동물 전체, 식물 전체, 따라서 생성하는 모든 것에 모두 이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닌가? 나는 선과 악, 정의와 부정 등을 말하는 것일세.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은 이밖에도 무수하게 있지. 그리고 나는 모든 반대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동일한 교체 관계가 있을 뿐임을 보여 주고 싶네. 다시 말하면 예컨대 어느 것이 더 큰 것이 되었다면 그것은 더 작은 것이 된 다음에야 더 큰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일세.”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다 약한 것은 보다 강한 것으로부터 생기고 보다 빠른 것은 보다 느린 것으로부터 생길 테고.”
“맞습니다.”
“또 보다 나쁜 것은 보다 좋은 것으로부터, 보다 옳은 것은 보다 옳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기고.”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반대 관계에 해당되겠지? 반대 관계에 있는 것은 모두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겼다고 믿어도 좋을까?”
“네.”
“모든 사물의 이와 같이 보편적인 반대 관계에는 또한 항상 진행되고 있는 두 가지 생성 과정, 곧 갑으로부터 을로, 그리고 을로부터 갑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있어서 생장하는 것을 증가라 하고 쇠퇴하는 것을 감소라고 하는 것이겠지?”
“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분할과 결합, 냉각과 가열 등 기타의 많은 과정이 있는데, 이것도 마찬가지로 갑이 을로 되고 을이 갑으로 되는 변천을 내포하고 있네. 그리고 일일이 말로 표현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러한 과정이 필연적으로 모든 반대물을 지배하고 있네. 반대물은 사실상 반대물로부터 나오고, 갑으로부터 을이 되는 변천, 또는 과정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자, 그러면 잠자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의 반대인 것처럼 삶의 반대물도 있지 않을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있습니다.”
“그러면 그게 무엇인가?”
“죽음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죽음과 삶이 반대 관계에 있다면, 죽음과 삶은 각기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생기고, 또한 두 가지 생성 과정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 나는 자네에게 말한 두 쌍의 반대물 중의 하나와 그 생성 과정을 분석할 테니, 자네는 다른 하나를 나에게 설명해 주게. 두 쌍의 반대물 중의 하나란 잠자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을 말하네. 잠자는 상태는 깨어 있는 상태의 반대이고 잠자는 상태로부터 깨어 있는 상태가 생기고 깨어 있는 상태로부터 잠자는 상태가 생기네. 생성 과정은 하나는 잠드는 것이며, 또 하나는 깨어나는 것이지. 옳다고 생각하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면 같은 방식으로 자네가 삶과 죽음을 나에게 설명해 주게.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닌가?”
“네.”
“그리고 삶과 죽음 각기 반대물로부터 생기겠지?”
“네.”
“산 것으로부터는 무엇이 생길까?”
“죽음입니다.”
“그리고 죽은 것으로부터는?”
“오직 한 가지 대답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산 것이라고.”
“그러면 케베스, 그것이 사물이든 인간이든 간에,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긴다는 말이지?”
“분명히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이 추리로부터 우리의 영혼이 명부에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겠지?”
“그렇습니다.”
“두 가지 과정 또는 생성 중의 하나는 볼 수 있네. 죽는 것만은 확실히 볼 수 있지 않은가?”
“분명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일까? 반대되는 과정은 제외해도 될까? 자연은 다리 하나로만 걸어 다닌다고 할 것인가? 오히려 우리는 죽음에 대응하는 생성 과정을 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합니다.” 라고 케베스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그 과정은 무엇인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는 일이 있다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죽은 살아 있는 것의 세계에 태어나는 게 아닌가?”
“정말 그렇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죽은 것이 살아 있는 것으로부터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긴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새로운 길이 있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죽은 자의 영혼은 어떤 곳에 있다가 거기서 되살아난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되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우리가 앞에서 인정한 것으로부터 필연적으로 그러한 결론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케베스, 앞에서 인정한 것이 잘못이 아니라면 다음과 같은 일이 입증되리라고 생각하네. 곧 생성은 직선으로만 진행되고 자연에는 보상이나 순환이 없으며 어떤 요소들이 그 반대물로 되었다가 다시 되돌아오는 일이 없다면, 모든 사물은 결국은 같은 형태를 갖고 같은 상태에 놓이고 따라서 사물의 생성은 있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무슨 뜻이죠?” 라고 케베스는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매우 단순한 일이야. 잠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네. 자네도 알다시피 잠자는 상태와 깨어 있는 상태의 교체가 없다면, 결국 잠자는 엔뒤미온(코린토스의 목동 엔뒤미온은 후세의 미남이어서 달의 여신 아르테마스가 그에게 반했다. 여신은 자신의 애무를 의식하지 못하도록 엔뒤미온을 영원한 잠에 빠지게 했다)의 이야기는 무의미해질 거야. 모든 다른 사물도 역시 잠자는 상태에 있을 것이므로 그를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야. 또는 결합만이 있고 실체의 분할이 없다면, 아낙사고라스의 혼돈(아낙사고라는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그는 태초에는 혼돈이 있을 뿐이었으나 누우스(이성)에 의해 분리 정돈됨으로써 세계에 질서가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이 다시 나타날 거야. 친애하는 케베스, 만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이 죽고 죽은 다음에는 죽은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결국 모든 것은 죽게 되고 산 것은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거야. 이밖에 다른 결과는 있을 수 없지 않은가? 살아 있는 것은 다른 것으로부터 나오고, 또한 이 다른 것들도 죽는다면 궁극적으로는 죽음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게 될 것이 아닌가?”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다른 도리는 없군요, 소크라테스. 나는 당신의 논증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래 케베스, 내 의견으로도 반드시 그럴 것 같군.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인정함으로써 기만당하는 것은 아니냐. 오히려 나는 다시 살아나는 일이 정말로 있고, 살아 있는 것은 죽은 것으로부터 생기고 죽은 자의 영혼은 생존하며 착한 영혼은 악한 영혼보다 더 좋은 운명을 맞이한다는 것을 확신하네.
케베스가 덧붙여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지식은 상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당신이 좋아하는 이론이군요. 이 이론이 옳다면 우리가 지금 상기하는 것은 예전에 배운 일이 있었다는 것이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이 사람의 형태로 존재하기 전에 어디엔가 있지 않았다면 이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영혼 불명에 대한 또 하나의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케베스, 말을 잠시 돌려서 상기설을 밑받침하는 논거가 무엇이었는지 말해 주게. 지금 나는 이에 대해 확실한 기억을 갖고 있지 못하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질문에 의해서 훌륭한 증거를 파악할 수 있네. 자네가 어떤 사람 그에게 올바른 방식으로 질문을 한다면 그는 스스로 옳은 대답을 찾아 낼 걸세. 그러나 만일 이미 지식과 올바른 이성이 없다면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하겠나? 그리고 이것은 도형이나 이와 비슷한 것을 문제로 삼을 때 가장 명백하게 입증되네.(플라톤의 다른 대화편 메논 에서 소크라테스는 무지한 소년에게 질문을 통해 스스로 피타고라스의 공리를 풀게 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심미아스, 자네가 아직도 믿을 수 없다면,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세. 자네는 아직도 지식이 상기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는 것 같아 하는 말일세.”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상기설을 스스로 상기하고 싶었던 것이며 케베스의 말을 듣고 다시 상기하게 되고 옳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직도 당신이 어떻게 말할 것인지 알고 싶군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다음과 같네. 곧 내가 잘못이 아니라면, 어떤 사람이 상기하는 것은 전에 언젠가는 배웠던 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점에 우리는 동의해야 할 걸세.”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지식 또는 상기의 본질은 무엇일까? 나는 다음과 같이 묻고, 싶네. 어떤 것을 보거나 듣거나 또는 다른 방식으로 지각한 사람은 그것을 알 뿐 아니라,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이외의 개념도 갖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 라고. 그런데 이 개념은 그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라 별개의 개념이네. 따라서 그는 개념을 갖고 있던 것을 상기한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하지 않을까?”
“무슨 뜻이지요?”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예를 들어 말하면 다음과 같네. 수금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은 다르겠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사람이 늘 쓰고 있는 수금이나 옷이나 그 밖의 다른 것을 보았을 때 애인들의 감정은 어떨까? 그들은 수금을 알아보고 마음의 눈으로 그 수금의 주인인 청년의 모습을 그려보지 않을까? 이것이 바로 상기일세. 마찬가지로 심미아스를 본 사람은 케베스를 상기할 걸세. 이러한 예는 무수히 있네.”
“정말로 무수히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상기는 대체로 시간이 흐르고 부주의로 말미암아 이미 잊었던 것을 회복하는 과정일세.”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자, 그렇다면 자네도 집이나 수금의 그림을 보고 사람을 상기하는 경우가 있겠지? 그리고 심미아스의 그림을 보면 케베스를 상기하게 될 거야.”
“그렇습니다.”
“또한 자네는 심미아스 자신을 상기하는 경우도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상기는 비슷한 것으로부터 생기기도 하고, 비슷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생기기도 하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상기가 비슷한 것으로부터 생겼을 때, 확실히 또 하나의 문제가 제기되네. 곧 그 유사성이 상기된 것에 어느 정도 미치지 못하는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그렇군요.”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등>하다는 것이 있다고 주장한다고 하세. 그러나 나뭇조각이나 돌이 다른 나뭇조각이나 돌과 같다든지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것을 넘어서서 대등 자체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네, 그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맹세코 생명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대등 자체의 본질을 알고 있나?”
“알고 있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우리의 지식을 얻는가? 우리는 나뭇조각이나 돌 같은 물질적인 것들을 보고 대등함을 알고, 이러한 것들로부터 이러한 것들과는 다른 대등이라는 관념을 추출해 냈는가? 자네는 여기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인정할 거야. 혹은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살펴보기로 하세. 동일한 나뭇조각이나 돌이 어느 때는 같고 어느 때는 같지 않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같은 것은 항상 같지 않은가? 다시 말하면 대등하다는 관념이 대등하지 않다는 관념과 동일한 경우가 있나? 그렇다면 이러한 이른바 대등한 것들이 대등하다는 관념과 동일한 것은 아니겠지?”
“분명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대등한 것들은 대등하다는 관념과는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등한 것들로부터 자네는 대등하다는 관념을 인식하고 획득하나?”
“그렇습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대등하다는 관념은 대등한 것들과 비슷한 경우도 있고 비슷하지 않은 경우도 있겠지?”
“네.”
“그러나 그것은 상관없는 일이야. 자네가 어떤 것을 보면 비슷한 것이든 비슷하지 않은 것이든 간에 언제나 다른 것을 생각한다면, 반드시 그것은 상기 작용이 아닐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나무나 돌이나 기타의 물질적인 것들의 대등한 면에 대해서는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러한 것들로부터 어떠한 인상을 받는가? 대등 자체가 같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에서 이러한 것들도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또는 이러한 것들은 대등 자체에 어느 정도 미치지 못하는 것인가?”
“네, 훨씬 못합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지? 나나 또는 다른 사람이 어떤 대상을 바라보고 그가 보고 있는 것이 다른 것과 같게 되려고 하지만 이에 미치지 못하고 다른 것이 될 수도 없으며 오히려 열등하다는 것을 관찰할 때 이러한 관찰을 한 사람은 어떤 것이 그것과 비슷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다른 어떤 것을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거야.”
“확실히 그렇습니다.”
“이것은 대등한 것들과 대등 자체라는 우리들의 문제에도 해당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처음으로 물질적인 대응물들을 보고 이러한 외견상 대등한 것들은 대등 자체에 도달하려고 노력하지만, 이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앞서서 대등 자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또한 대등 자체는 시각이나 촉각, 기타의 감각을 매개로 해서만 알려지고 또한 그렇게 해서만 알려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이 점에서는 모든 감각이 같지 않을까?”
“네, 소크라테스. 지금의 논의에서 본다면 모든 감각에 대해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감각적인 사물은 대등 자체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이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지식을 감각으로부터 이끌어 낼 수 있을 게 아닌가?”
“네.”
“그렇다면 우리는 보거나 듣거나 기타의 방식으로 지각을 시작하기 전에 절대적인 대응을 알고 있어야 할 거야. 그렇지 않으면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대응물들에 이 기준을 적용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감각을 통해서 알게 된 대응물들은 절대적인 대응에 도달하려고 하지만 이에 미치지는 못하기 때문이야.”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아서 그밖에 추리는 불가능하군요.”
“그리고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보고 듣고 또 다른 감각을 사용하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전에 대응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 것이 틀림없겠지?”
“네.”
“말하자면 태어나기 전이란 뜻이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러한 지식을 획득했고, 또 나면서부터 이러한 지식을 활용한다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에 <같다>든지, <보다 크다>든지 <보다 작다>든지 하는 것만이 대등 자체만이 아니고 아름다움, 선, 정의, 거룩함, 그밖에 우리가 묻고 대답하는 대화 과정에서 본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야. 이러한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태어나기 전에 지식을 얻었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지식을 얻은 다음에 우리가 각각의 경우에 획득한 것을 망각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지식을 갖고 태어나서 생명이 있는 한 언제나 계속해서 알고 있지 않으면 안 될 거야. 안다는 것은 지식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망각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야. 심미아스, 망각은 바로 지식의 상실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나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얻은 지식을 태어날 때에 상실하고, 그 후에는 감각을 사용하여 이전에 알고 있던 것을 회복한다면, 우리가 학습이라고 부르는 과정은 우리가 본래 갖고 있던 지식을 회복하는 것이고 따라서 이 과정을 상기라고 불러도 잘못은 아니겠지?”
“옳습니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점이 명백해지네. 우리가 시각이나 청각이나 기타의 감각의 도움을 받아서 어떤 것을 지각할 때, 이러한 지각으로부터 그것과 비슷하든 비슷하지 않든 간에 그것과 관련이 있으나 망각했던 어떤 다른 것의 개념을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을. 따라서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 중의 하나가 가능할 걸세. 곧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이러한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일생 동안 계속해서 알고 있거나, 또는 태어난 다음에는 학습을 하는 사람들만이 기억하며 따라서 학습은 상기에 지나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일세.”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심미아스, 자네는 어느 쪽을 택하려나?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지식을 갖고 있었는가, 또는 태어나기 전에 알고 있던 것을 상기하는 것인가?”
“당장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어쨌든 자네는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지식을 설명할 수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에 대해서는 결정을 내릴 수 있을 텐데…. 어떻게 생각하나?”
“분명히 그는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지금 우리가 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해 모든 사람들이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소크라테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까! 나는 오히려 내일 이때쯤이면 이 문제에 대해서 정당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미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 두렵습니다.”
“그렇다면 심미아스, 모든 사람이 이 문제에 대해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말인가?”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전에 배웠던 것을 상기하고 있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의 영혼은 이러한 지식을 얻었을까? 인간으로 태어난 후가 아니라면?”
“분명히 태어난 후에 얻은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태어나기 전인가?”
“네.”
“그렇다면 심미아스, 우리의 영혼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기 이전부터 육체 없이 존재했고 지능도 갖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네.”
“소크라테스, 이러한 개념들이 바로 태어나는 순간에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라고 당신이 생각하지 않는다면…. 태어나는 때가 남아 있는 유일한 시간이니까요?”
“그렇지, 나의 친구여.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그 개념들을 잃을까? 우리가 태어났을 때에는 이 개념들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야. 이점은 이미 인정한 바 있네. 우리는 이러한 개념들을 받는 즉시로 잃어 버렸는가 아니면 다른 어떤 때에 잃어 버렸는가?
“소크라테스,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나는 부지중에 난센스를 말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심미아스, 우리가 늘 말해 온 바이지만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 모든 사물의 절대적 본질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방금 알게 된 이러한 본질에 우리의 모든 감각을 관련시키고 또 이러한 관념을 태어나기 전부터 갖고 있었고 선천적인 소유물임을 발견하고서 이 본질과 우리들의 모든 감각을 비교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영혼의 태어나기 이전부터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논의는 무력한 것이 아니겠나? 우리의 영혼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관념들도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일세. 만일 관념이 없다면, 우리의 영혼도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영혼이나 관념의 존재에 대해 똑같은 필연성이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논의는 탄생 이전의 영혼의 존재는 당신이 말하는 본질의 존재와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다는 입장에 성공적으로 도달했습니다. 아름다움, 선, 그리고 당신이 방금 말한 기타의 개념들이 가장 진정하고 절대적인 존재라는 것 ― 이것보다 더 명백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상의 증명으로 만족합니다.”
“좋아. 그러나 케베스도 역시 만족했는지? 나는 케베스도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거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케베스도 만족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인간 중에서는 가장 의심이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도 역시 탄생 이전의 영혼의 존재를 충분히 믿게 되었으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죽은 다음에도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점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고 이 점에 대해서는 나도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는 케베스가 언급한 많은 사람들의 감정, 곧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흩어져 버릴 것이며, 이것이 영혼의 종말이라고 하는 감정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혼이 다른 곳에서 오는 것이며 특별한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고 인간의 육체에 들어오기 전에도 존재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어째서 일단 육체에 들어왔다가 다시 나간 다음에 소멸해서 없어지지 않을까요?”
케베스가 말했습니다. “심미아스, 자네 말이 옳아. 필요한 증명의 절반은 된 셈이야. 곧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은 증명되었네. 죽은 다음에도 태어나기 이전과 마찬가지로 영혼이 존재하리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 나머지 절반이며, 이것은 보충되지 않으면 안 되네. 이 증명이 이루어지면 논증은 완성될 거야.”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증명했네. 자네가 두 가지 논증,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한다는 논증과 우리가 앞서 인정한 바 있는 또 하나의 논증, 곧 살아 있는 것은 모두 죽은 것으로부터 태어난다는 논증을 합쳐 본다면 알 수 있을 걸세. 만일 영혼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며, 생명을 갖고 태어나는 경우에는 오직 죽음과 죽은 자로부터만 태어날 수 있다면, 영혼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영혼은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존재해야 하지 않은가? 자네가 바라는 증명은 이미 완료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네. 나는 아직도 자네와 심미아스는 이 논의를 더 증명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네. 자네들은 어린애처럼 영혼이 육체를 떠나면 바람이 영혼을 정말로 날려 버리고 흐트러뜨려 버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고 있네. 특히 사람이 심한 폭풍우 속에서 죽거나 하늘이 맑지 못할 때에 죽는다면 그럴 것이라고….”
케베스는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 우리가 그러한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게다가 엄밀하게 말하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는 어린애가 있어서 이 어린애에게는 죽음은 유령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 어린애가 어둠 속에 홀로 있을 때에도 두려워하지 않도록 설득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네들이 마법으로 그 두려움을 쫓아 버릴 때까지 매일 마법사가 주문을 외우도록 하세.”
“그런데 당신이 떠나 버리고 나면 어디서 우리는 두려움을 쫓아 줄 훌륭한 마법사를 구할 수 있을까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케베스, 그리스는 넓은 곳이네. 훌륭한 사람도 많고 외국에서 온 종족도 적지 않아. 이러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훌륭한 마법사를 찾게. 먼 곳까지 가서 널리. 수고나 돈을 아끼지 말고. 돈을 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에서도 찾아보아야 하네. 자네들보다 이 일은 더 잘하는 사람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야.”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반드시 찾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당신이 괜찮다면, 아까 중단했던 논점으로 되돌아가기로 합시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하세.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흩어져 버리는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우리가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는 것은 무엇인지, 이것부터 따져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 다음에 더 나아가 우리는 흩어져 버리는 것이 영혼의 본질인지 아닌지를 탐구해야 할 거야. 우리 자신의 영혼에 대해 희망을 품을 것인가, 또는 두려워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문제에 대한 대답에서 밝혀질 거야.”
“그렇군요.”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복합물이나 합성물은 합성된 것이기 때문에 또한 당연히 분해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합성되지 않은 것은, 만일 이러한 것이 있다고 하면, 이것만은 분해될 수 없을 거야.”
“네,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군요.”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따라서 합성되지 않은 것은 항상 동일하고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며, 반면 합성된 것은 항상 변하고 결코 동일할 수 없을 거야.”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까 논하던 데로 되돌아가기로 하세. 우리가 대화 과정에서 실재 또는 참된 존재 ― 대응의 본질이든, 아름다움의 본질이든, 또는 기타 어떤 것의 본질이든 ― 라고 정의한 관념, 또는 본질은 어떠한 본질인가? 다시 말하면 그것은 때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하는 본질인가? 또는 그것은 각기 항상 그대로 있으며 항상 동일하고 단순한 독립적이며 불변의 형태를 갖고 있고,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또 어느 때에 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본질인가?”
“소크라테스, 그것은 항상 동일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는데 ―사람, 말, 옷, 기타 동일한 이름으로 불리면서 똑같다든지, 아름답다고 일컬어지는 것―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항상 변하지 않고 동일한가, 또는 정반대인가? 오히려 이러한 것들은 그 자체에 있어서나 상호간에 있어서나 거의 언제나 변하고, 거의 언제나 동일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후자입니다. 이것들은 언제나 변화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이러한 것들을 만지고 보고 감각을 통해 지각할 수 있지만, 불변의 것들은 오직 정신을 통해서만 파악하지 않나? 불변의 것들은 형태가 없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두 종류의 존재, 곧 하나는 보이는 것이고 하나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보세.”
“그렇게 합시다.”
“보이는 것은 변화하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변화하지 않을 테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나아가 인간의 한 부분의 육체이고 또 하나의 부분은 영혼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육체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중에서 어떤 것에 가깝고, 어떤 것을 더 닮았는가?”
“물론 보이는 것에 가깝지요. 이 점은 아무도 의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소크라테스, 인간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인다> 또는 <보이지 않는다> 고 한 것은 사람의 눈에 <그 형태가 보인다> 또는 <그 형태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네. 사람의 눈을 기준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영혼은 보이는가, 보이지 않는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것이지?”
“네.”
“그러면 영혼은 보이지 않는 것에 더 가깝고, 육체는 보이는 것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그것은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런데 예전부터 다음과 같은 말을 해 오지 않았는가? 영혼이 육체를 지각의 도구로 사용할 때, 다시 말하면 시각이나 청각이나 기타의 어떤 감각을 사용할 때 ―육체를 통해 지각한다는 것은 감각을 통해 지각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야― 영혼도 육체에 의해 가면적인 영역으로 이끌려 들어가 방황하고 혼미에 빠진다고 말해 오지 않았는가? 세계가 영혼을 속박해서 영혼을 변화에 접하게 되면 술 취한 사람처럼 허둥지둥 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반성할 때, 영혼은 다른 세계, 곧 순수하고 영원하며, 불멸하고 불변하는 영역으로 들어가게 되네. 이러한 것들은 영혼과 동질적인 것으로서 영혼이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서 허용을 받고 방해를 받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이러한 것들과 함께 살게 되네. 이와 같이 되면 영혼은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고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과 사귐으로써 영혼은 불변의 것이 되네. 그리고 이러한 영혼의 상태를 지혜라고 부르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훌륭한 말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앞서 논한 것과 지금 논한 것으로부터 추리한다면 영혼은 어느 것에 더 가깝고 어느 것을 더 닮았는가?”
“소크라테스, 지금까지의 논의를 경청한 사람은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에 무한히 가깝다는 의견을 갖게 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주 둔한 사람들까지도 이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는 변하는 것에 더 가까운가?”
“네.”
“이 문제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하세. 곧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어 있을 때, 영혼은 지배하고 다스리고, 육체는 복종하고 섬길 것을 자연히 명한다고―. 그런데 이 두 기능 중에서 어느 것이 신적인 것을 닮았는가? 신적인 것은 본성상 명령하고 지배하는 것이며 죽어야 할 것은 지배받고 예속되는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어느 것을 닮았는가?”
“영혼은 신적인 것을, 육체는 죽어야 할 것을 닮았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케베스, 지금까지 말해 온 모든 것 중에서 이것이 결론이 아닌지 생각해 보게. 곧 영혼은 신적인 것에 매우 흡사하고 불멸하며 예지적인 것이고, 단일한 형태를 갖고 분해되지 않으며 변화하지 않는 것이고, 한편 육체는 가장 인간적인 것이며 사멸해야 하고 예지적인 것이 아니고 많은 형태를 가졌고, 분해되며 변화하는 것이네. 친애하는 케베스, 위에서 말한 것을 명확하게 부정할 수 있는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면 육체는 재빨리 분해되지 않을까? 그리고 영혼은 거의 또는 전적으로 분해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네는 다음과 같은 사실도 알고 있을 테지? 인간이 죽은 다음에 육체, 다시 말하면 인간의 눈에 보이는 부분, 곧 눈에 보이는 세계에 놓여 있고 시체라고 불리며 본성적으로 분해되고 부패하고 소멸되는 것은 임종 당시의 육체적 조건이 좋고 그해의 계절이 유리하면 즉시 분해되거나 부패하고 않고, 얼마 동산 아니 심지어 오랫동안 보존된다는 것을―. 이집트에서 하는 것처럼 육체를 수축시키고 향유를 바르면 육체는 거의 영구히 보존될 수도 있네. 그리고 썩는다 하더라도 뼈나 인대처럼 사실상 파괴되지 않는 부분도 있네. 그렇지 않은가?”
“네, 그렇습니다.”
“그리고 영혼과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고 순수하고 고상한 참된 명부로 가며 선하고 현명한 신에게로 ―신이 허락하신다면, 나의 영혼도 곧 가게 되거니와― 가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 이러한 것이 영혼의 본성이요 기원이라고 한다면, 나는 거듭 말하거니와 이러한 영혼이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육체를 떠나자마자 바람에 날려 버리고 파괴될 것인가? 친애하는 심미아스, 그리고 케베스, 절대로 그럴 수는 없네. 오히려 육체를 떠날 때 순수하며, 일생 동안 자발적으로 육체와 관계한 적이 없고 오히려 항상 이러한 관계를 피하고 자기 자신을 가다듬었기 때문에 육체의 흔적을 남기지 않은 영혼, 그리고 이런 한 육체로부터 분리를 영구히 연습해 온 영혼 ―다시 말하면 이 영혼은 참된 철학도 이거니와―은 따라서 사실상 항상 죽음을 연습해 오지 않았는가? 철학은 바로 죽음의 연습이 아니던가?”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무형의 영혼은 무형의 세계, 곧 신적이며 불멸이고 이성적인 세계로 떠나가고 이 세계에 닿으면 영혼은 더 없는 행복을 얻게 되어 인간의 과오와 어리석음, 두려움과 거친 정열, 그리고 기타의 모든 인간의 악으로부터 풀려나고 비의를 받은 사람들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원히 신과 함께 사는 거야. 그렇지 않은가, 케베스?”
“네,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렵혀진 영혼, 떠날 때에 순수하지 못한 영혼, 항상 육체의 벗이고 노예이며, 육체와 육체의 욕망 및 쾌락을 사랑하고 매혹 당한 영혼, 그래서 결국은 진리는 만지고 보고 맛보는 등 이러한 육욕에 이용할 수 있는 육체적 형태로서만 존재한다고 믿게 된 영혼, 다시 말하면 육체의 눈에는 어두워서 보이지 않고, 오직 철학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성적 원리를 미워하고 두려워하고 피해 온 영혼 ― 자네는 이러한 영혼이 순수하고 깨끗하게 떠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러한 영혼은 늘 육체와 관계하고 육체를 돌봄으로써 마침내 육체적인 것이 그 본성에 섞이게 되어 육체적인 것에 속박 당하고 말 거야.”
“물론 그렇겠지요.”
“그리고 나의 친구여, 이 육체적인 요소는 무겁고 둔하며 세속적인 것이고 영혼을 내려 눌러서 다시 가시적인 세계로 끌어내리는 시각적 요소야. 이러한 영혼은 보이지 않는 세계, 곧 명부를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이 영혼은 무덤가를 배회하게 되고, 따라서 사람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무덤 근처에서는 영혼의 유령 같은 형상을 볼 수 있는데 이 영혼은 떠날 때 순수하지 못했고, 오히려 시각에 매달려 있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거야.”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물론 그렇지, 케베스. 이러한 영혼은 좋은 영혼이 아니라 나쁜 영혼임에 틀림이 없어 이러한 영혼은 기와의 악한 생활에 대한 벌을 받기 위해 그런 곳을 배회하지 않을 수 없는 거야. 그래서 이 영혼으로부터 절대로 떠나지 않는 육체적인 것을 갈망한 나머지 결국은 다른 육체에 갇히게 될 때까지 이 영혼은 방황을 멈추지 않게 되네. 그리고 전생에서 가졌던 것과 똑같은 성질을 가진 감옥을 다시 찾아낸다고 생각할 수 있네.”
“어떤 성질이지요, 소크라테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음식을 탐내고 방탕하고 술을 좋아해서 이러한 것을 피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은 나귀나 그러한 종류의 짐승이 된다는 것이야.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러한 의견은 매우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부정이나 독재나 폭력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리나 독수리나 솔개가 될 거야. 그 밖의 다른 것이 된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네, 그러한 성질이라면 의심의 여지가 없지요.”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모든 것들도 그 몇 가지 성질이나 경향에 따라서 각기 알맞은 것을 할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행복할 거야.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가장 행복하고 가장 좋은 곳으로 가는 사람들은 절제와 정의라고 불리며, 철학이나 이성 없이도 습관에 의해 획득되는 국민의 사회적 덕을 실천해 온 사람들이야.”
“왜 그들이 가장 행복합니까?”
“그들은 꿀벌이든가 장수말벌이나 개미처럼 그들 자신과 비슷한 온화하고 사회적인 것이 될 수도 있고 다시 사람의 형태를 갖고 태어날 수도 있으며, 올바르고 절제 있는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철학을 연구하지 않고 출발 시에 전적으로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신과 함께 있지 못하며 오직 애지자만이 신과 함께 있을 것을 허락 받네. 그리고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것이 철학에 헌신한 사람들이 모든 육체적 정욕을 삼가고 육체적 정욕을 극복하고, 육체적 정욕에 빠지지 않는 이유일세. 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세상 사람들처럼 가난해지거나 가족을 파멸시키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 또한 권력과 명예를 좋아하는 사람들처럼 나쁜 행위 때문에 불명예나 악평을 얻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도 아니냐.”
“소크라테스, 그것은 참된 철학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군요.”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일일세. 그러므로 육체를 돌보고 키우는 데만 골몰하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조금이라도 돌보아 온 사람들은 이러한 모든 것과 작별을 하는 거야. 그들은 장님의 뒤를 따라가지는 않을 거야. 그리고 철학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돌아서서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하네.”
“무슨 뜻입니까,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세히 설명하기로 하지.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영혼은 육체에 속박되고 갇혀 있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철학이 그의 영혼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의 영혼은 자기 자신 가운데서 자기 자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옥의 창살을 통해서만 진정한 존재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네. 영혼은 온갖 무지의 수렁 속에서 허덕이고 육욕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속박하는 공범자가 되고 있었던 거야. 이것이 영혼의 본래의 상태였네. 그렇지만 내가 이미 말한 바 있고 또 지식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철학은 영혼이 영혼 스스로를 가두어 두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를 보고 영혼을 받아들여 점잖게 달래고, 눈과 귀와 기타의 감각은 기만으로 가득 차 있음을 지적해 줌으로써, 또한 이러한 감각들로부터 물러나고 꼭 필요한 경우 이외에는 이러한 감각의 사용을 삼가며 영혼을 집중시키고 가다듬도록 설득함으로써, 영혼 자신과 순수한 존재에 대한 영혼 자신의 순수한 파악을 신뢰하고 다른 동료를 통해서 영혼에 이르고 변화하기 마련인 것은 무엇이든 믿지 말도록 권함으로써 철학은 영혼을 해방시키려고 노력하게 되네. 이러한 것들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것이지만 영혼이 스스로의 본성을 통해 보는 것은 예지적인 것이며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참된 철학자의 영혼은 이러한 해방에 거슬려서는 안 되며 따라서 가능한 한, 쾌락과 욕망과 고통과 두려움을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인간이 큰 기쁨이나 슬픔이나 두려움이나 욕망을 가질 때, 이러한 것들로부터 해를 입는데, 그것은 예상할 수 있는 해악-예컨대 육욕 때문에 희생된 건강이나 재산의 상실 따위-일뿐 아니라, 훨씬 더 큰 해악, 가장 크고 가장 나쁜 해악이며 전혀 생각지도 못하던 해악이야.”
“소크라테스, 그것은 무엇입니까?”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쾌락이나 고통의 감정이 가장 강렬할 때, 어느 누구의 영혼이나 이 강렬한 감정의 대상을 가장 명백하고 가장 참된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바로 그 해악이야.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이러한 대상들은 가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아.”
“그렇군요.”
“그리고 영혼이 육체에 의해 가장 심하게 구속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닌가?”
“어째서 그렇지요?”
“왜냐하면 모든 쾌락과 고통은 영혼이 육체와 비슷해질 때까지, 그리고 영혼이 육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옳다고 믿을 때까지, 영혼을 육체에 못 박고 속박해 두는 일종의 못이기 때문이야. 그리고 육체와 뜻을 같이 하고 동일한 기쁨을 즐김으로써 영혼은 육체와 똑같은 습관과 기호를 갖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영혼이 명부로 떠날 때 순수할 수는 없는 일이니 언제나 육체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므로 이 영혼은 다른 육체 속에 가라앉아 거기서 싹이 트고 성장하며, 따라서 신적이며 순수하고 단수한 것과는 사귀지를 못하는 거야.”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옳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그리고 케베스, 이것이 참된 애지자가 절제 있고 용감한 까닭이야.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냐.”
“확실히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이유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그렇지 않아! 철학자의 영혼은 다른 방식으로 추리할 거야. 영혼은 해방되어서 영혼의 페네로페의 천(페네로페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호머의 오디세이아에 의하면 원정 후에 돌아오지 않은 남편을 이타카에서 기다리고 있던 페네로페는 구혼자들의 성급한 구혼을 피하기 위해 한 폭의 천을 다 짤 때까지 남편이 들어오지 않으면 구혼에 응하겠다고 핑계를 대고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낮에는 짜고 밤에는 푸는 일을 되풀이했다고 한다)을 푸는 것이 아니라 다시 풀기 위해 철학에 영혼의 해방을 요청하지는 않을 거야. 오히려 철학자의 영혼은 격정을 가라앉히고 이성에 따르며 참되고 신적인 것-이것은 억견의 대상이 아니네-을 바라보고 여기서 영양을 취하면서 영혼의 관조 안에서만 살 거야. 따라서 이 영혼은 주어진 시간을 다 살려고 노력하고 죽은 다음에는 자기와 동질적인 것, 곧 자기와 비슷한 것이 있는 곳으로 가서 인간의 악으로부터 해방되기를 바라게 되네.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와 같이 양육되고 이러한 추구를 해 온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 바람에 날려 흩어져 버려서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테니 두려워하지 말게.”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치고 나서 상당한 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소크라테스 자신도 우리들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말해 온 것에 대해 숙고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케베스와 심미아스만이 서로 몇 마디의 말을 주고받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그들이 지금까지의 논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부족한 점이나 없는가를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철저히 따지는 사람이 이 문제를 따져 보면, 아직도 의심스러운 점, 공격할 점이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일세. 자네들이 다른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면 나는 더 할 말이 없지만 만일 아직도 이 문제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정확하게 자네들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말하게. 자네들에게 더 좋은 이론이 있다면 이를 듣기로 하세. 만일 내가 소용이 된다면 나는 즐겨 도움이 되겠네.”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아까부터 우리들의 마음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일어나서 대답을 듣고 싶은 점을 질문하라고 서로 권하고 또 재촉하고 있던 중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때에 조르는 것은 귀찮은 일이 아닐까 해서 묻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습니다. “오, 심미아스, 무슨 말을 하나? 만일 내가 지금 내 생애 중의 어느 때보다도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자네들에게까지도 설득할 수 없다면 내가 현재의 상태를 불운하다고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사람이 믿게 만들 수는 없을 거야. 자네들은 내가 백조보다도 못한 예언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백조들은 일생 동안 노래하며 지내지만 죽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알면 그들이 주인인 신에게로 바야흐로 돌아가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즐거워서 어느 때보다도 더 즐겁게 노래하기 때문이야.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어떤 새는, 나이팅게일이나 제비나 후투티까지도 춥거나 배고프거나 고통스러울 때에는 노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백조는 최후가 온 것을 슬퍼해서 운다고 헐뜯는 주장을 하는 거야. 새들은 슬픈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새들이 슬퍼서 운다고 생각하지 않아. 백조도 마찬가지야. 오히려 백조는 아폴론 신에게 바쳐졌기 때문에 예언의 재능을 받았고 저 세상에 있을 좋은 일들을 기대하고 있는 거야. 그러므로 백조들은 죽음의 날이 오면 다른 때보다도 더 즐겁게 노래하고 기뻐하는 거야. 그리고 나도 역시 아폴론 신에게 바쳐진 종이며 백조의 동료임을 믿고, 또한 나의 주인으로부터 백조에 뒤지지 않는 예언의 재능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백조와 마찬가지로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려고 하네. 따라서 이것만이 자네들이 반대하는 점이라면 염려하지 말게. 그러나 말하고 싶은 것,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11위원들이 허락하는 동안에 말하게.”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알았습니다, 소크라테스. 그러면 나는 나대로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을 말하고, 케베스는 케베스대로 자기의 의문점을 많기로 하죠.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어떤 확실성에 도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감히 말하면 당신도 같은 생각을 갖고 있겠지만). 그렇지만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최선을 기울이지 않아 거나 온갖 측면으로부터 이 문제들을 검토하기 전에 지쳐 버리는 사람은 비겁하다고 생각합니다. 곧 그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진리를 발견하거나 배우던가, 또는 이것이 불가능하면 인간이 생각해 낸 이론 가운데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확실한 이론을 받아들여 이 이론을 인생을 항해하는 뗏목으로 삼는 것이 좋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를 보다 확실하고 보다 안전하게 인도해 줄 신의 조언을 얻지 못하면 위험이 없지도 않으리라는 점을 나도 인정합니다만-. 이제 당신이 요구한 대로 거리낌 없이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 후에 왜 내가 그때 생각하는 바를 말하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는 하지 않게 될 테니까요. 이 문제를 나 혼자 생각해 보아도 그렇고 케베스와 의견을 나누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소크라테스, 지금까지의 논의는 아무래도 불충분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나의 친구여, 자네가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네. 그러나 어떤 점에서 지금까지의 논의가 불충분한지 알고 싶군.”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렇습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하모니와 수금에 동일한 이론을 적용한다면, 그는 하모니가 잘 이루어진 수금의 경우엔 하모니는 눈에 보이지 않고 비물체적인 것이며 완전하고 신적인 것인 반면, 수금과 그 줄은 물질이며 물체적인 것이고 합성된 것이며 세속적인 것이고 소멸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 수금을 부수거나 줄을 끊어서 잘라 버렸을 때, 위에서 말한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은 당신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추리에 따라 하모니는 살아 있으며 소멸하지 않았다고 논할지도 모릅니다. 소멸되어 버리는, 줄 없는 수금이나 끊어진 줄을 남아 있고, 하늘에 속해서 불명 하는 것과 동일한 성질을 갖고 이러한 것에 속해 있는 하아모니는 소멸되어 버리는 것보다 앞서서 사라져 버린다고 상상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그는 말할 겁니다. 하아모니는 아직도 어디엔가 있어야 하고 나뭇조각이나 줄은 하모니에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썩어버리겠지요. 소크라테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에 대한 개념이구나, 하는 생각이 당신에게도 떨 올랐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곧 육체는 열기와 냉기, 습기와 건조 등의 요소들이 수금의 줄과 같은 역할을 하고, 이러한 것들이 합쳐진 것이라고 할 때 영혼은 하아모니, 다시 말하면 이러한 요소들이 알맞은 균형을 갖고 혼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만일 그렇다면, 육체의 줄이 질병이나 기타의 상해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느슨해지거나 너무 팽팽해질 때, 비록 가장 신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음악이나 다른 예술 작품의 하아모니처럼, 물론 즉시 소멸할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의 물질적 잔재는 썩어 없어지거나 태워 버릴 때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남아 있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영혼은 육체의 여러 요소들의 하아모니이므로 이른바 죽음이 닥치면 제일 먼저 소멸한다고 주장하면 우리는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요?”
소크라테스는 늘 그러하듯이 뚫어지게 우리를 바라보며 미소를 띠우고 말했습니다. “심미아스의 말에도 일리가 있네. 그런데 왜 자네들 가운데서 나보다 더 잘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그에게 대답하지 않는가? 나에 대한 그의 공격은 강력하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그러나 아마도 그에게 대답하기 전에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얻기 위해서 케베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군. 그리고 두 사람의 말을 다 듣고 나서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리 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동의해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입장을 주장해야 할 거야.”
다시 말을 이어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케베스, 자네를 괴롭히는 문제점이 무엇인가 말해주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말하기로 하지요. 지금까지의 논의는 제자리에서 맴돌고, 아직도 앞서 말한 반대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게 나의 느낌입니다. 육체의 형태 속에 들어오기 이전에 영혼이 존재했다는 점은 매우 확실하며, 감이 말한다면 매우 충분히 증명되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나의 판단으로는 죽은 후의 영혼의 존재는 아직도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반대 의견은 심미아스의 반대 의견과는 다릅니다. 나는 영혼이 육체보다 더 지속적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모든 점에서 영혼은 육체를 훨씬 능가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는 나에게 말하겠지요, 왜 당신은 믿지 못하느냐, 사람이 죽은 다음에도 보다 약한 것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을 보면서도, 당신은 보다 지속적인 것이 동일한 기간 역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느냐고-. 그러면 심미아스와 마찬가지로 나도 반대 의견을 비유로써 말하겠는데, 나의 반대 의견에 중요한 점이 있는지 고려해 주십시오. 내가 인용하려고 하는 비유는 늙은 직조공에 관한 것입니다. 이 직조공은 죽었는데, 그가 죽은 다음에 어떤 사람이 말합니다. 그는 죽지 않았어, 그는 틀림없이 살이 있어. 보라, 저기에 그가 손수 짜서 입었던 상의가 완전하게 조금도 썩지 않고 남아 있지 않은가. 그리고 나서 그는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인간이 더 오래 존속하는가, 또는 존속한다는 대답을 얻으면 그는 보다 덜 지속적인 것이 남아 있기 때문에, 보다 지속적인 인간이 존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심미아스, 자네의 논평을 구하면서 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잘못이야.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난센스를 말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야. 왜냐하면 사실은 다음과 같기 때문이야. 앞에 말한 직조공은 많은 상의를 지어서 입었으므로 그가 지은 몇 개의 상의보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고 하겠지만 마지막에 지은 옷만은 그 사람보다 더 오래 남아 있게 되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상의보다 더 하찮고 더 약하다는 것이 증명된 것은 아닐세. 그런데 육체와 영혼의 관계도 동일한 비유로써 말할 수 있을 거야. 따라서 어떤 사람이 같은 방식으로 영혼은 존속하며, 육체는 영혼에 비해 약하고 단명하다고 말해도 잘못은 아닐 걸세. 그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모든 영혼은, 특히 인간이 오랫동안 산다면 많은 육체를 닳아서 못 입게 될 때까지 입는다고 논할 수 있을 거야.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 육체는 소모되고 소멸되지만 영혼은 항상 다른 옷을 짜서 낡은 것을 보충해야 한다는 걸세. 그러나 물론 영혼이 죽으면 영혼은 마지막으로 짠 옷을 입고 있기 마련이고, 이 옷은 영혼보다 더 오래 남게 되지. 그리고 영혼이 죽으면 결국 육체는 본래의 취약성을 드러내서 재빨리 썩어서 없어지게 되네. 그러므로 나는 힘이 월등하다고 해서 영혼이 죽은 다음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고 보는 이론을 믿지 않네. 자네 이상으로 이 이론이 옳다는 것을 인정하고,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존재했을 뿐 아니라, 어떤 영혼은 여러 번 다시 태어나는 것을 견디어 낼만한 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단 하더라도,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아직도 영혼이 거듭해서 태어나는 일에 지쳐서 결국은 거듭되는 죽음 중의 하나에 굴복하여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네. 그리고 이러한 죽음, 다시 말하면 영혼에 파멸을 초래하는 육체의 붕괴는 아무도 알지 못하네. 우리는 누구든 이러한 붕괴를 경험한 적이 없기 때문이야. 따라서 만일 이와 같다면 영혼이 전적으로 불명이며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는 한, 죽음을 맞이하여 태연한 사람은 오직 어리석은 자부심을 가진데 지나지 않네. 그러나 영혼의 불멸을 증명할 수 없다면 바야흐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은 육체가 분해되었을 때, 영혼도 역시 완전히 소멸할 것을 두려워할 이유를 항상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네. 후에 서로 한 말입니다만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 우리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는 우리는 확고하게 믿고 있었습니다만, 이제는 우리의 믿음이 흔들려서 지금까지의 이론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전개될 이론에 대해서도 혼란과 불신이야 야기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판단할 자격이 없거나 또는 믿음의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파이돈, 저도 동감입니다. 맹세코 그렇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말하고 있는 동안에 나도 동일한 의문에 사로잡히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이론도 다시는 신뢰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하는-. 이제는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지만 소크라테스의 이론보다 더 옳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영혼은 하모니라고 하는 것은 내가 항상 놀라운 매력을 느끼고 있던 이론이며, 이 이론이 언급되었을 때 나는 즉시 나의 원래의 신념으로 되돌아갔어요. 따라서 이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 인간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남는다는 것을 확신시키는 다른 이론을 찾아내야겠어요. 제발 소크라테스가 그 후 이 토론을 어떻게 끌고 나갔는지 말해 주시오. 그도 당신이 말한 불쾌감에 사로잡힌 것 같았습니까? 또는 냉정하게 공격에 대처했습니까? 그리고 그는 강력한 답변을 했는지 또는 불충분한 답변을 했는지? 가능한 한 상세하게 그 후의 일을 말해 주시오.
파이돈 : 에케크라테스, 나는 자주 소크라테스에게 경탄했습니다만 이때처럼 경탄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가 답변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만, 우선 젊은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온화하고 유쾌하고 긍정적인 태도가 나를 놀라게 했고, 다음에는 지금까지의 논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재빨리 알아차리고 이 상처를 쉽게 고쳐 준 점이에요. 그는 마치 패해서 달아난 군대를 정돈시켜 그와 함께 논쟁의 전선으로 되돌아가도록 명령하는 장군과 같았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어떻게 되었는데 그렇게 말합니까?
파이돈 : 내 말을 들어보세요. 나는 마침 그의 오른쪽 가까운 곳에 있는 걸상에 앉아 있었고, 그는 침상에 앉아 있었는데 침상은 상당히 높았어요. 그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의 머리털을 목에 눌러 붙였어요. 그는 나의 머리털을 갖고 장난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말했습니다. “파이돈, 내일이면 자네의 이 고운 머리털을 자르겠지(당시는 슬픔의 표시로 머리를 잘랐는데, 내일이면 소크라테스가 죽은 후이므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슬퍼하여 머리를 자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자네가 내 충고를 듣는다면 자르지 않아도 될 걸세.”
“어떻게 하면 됩니까?”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는 대답했습니다. “만일 지금까지 말해 온 이론이 죽어 버리고 우리가 다시 살려 내지 못한다면 내일 아니라 오늘, 자네와 나는 둘 다 머리를 깎아야 할 걸세. 그리고 만일 내가 자네라면, 또 이 이론이 나를 버리고 달아나 버린다면, 그리고 내가 심미아스와 케베스에 대해 나의 논거를 지키지 못한다면, 나는 아르골리스 사람들(아르골리스는 펠로폰네소스 동쪽에 있으며 이 곳 사람들은 머리를 길게 기르는 습관이었으나 기원전 550년경 스파르타와 싸워 영토를 빼앗긴 다음에는 영토를 회복할 때까지 남자는 모두 머리를 기르지 않고 여자는 황금의 장식품을 쓰지 않기로 맹세했다. 페로도토스 역사 참조)처럼 다시 싸움을 벌려 내가 심미아스와 케베스를 패배시킬 때까지는 머리를 기르지 않겠다고 맹세하겠네.”
나는 말했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러나 헤라클레스조차도 두 사람과 맞서서는 안 된다고 말했는데요.”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나를 부르게. 해가 질 때까지는 내가 자네의 이올라오스(헤라클레스가 히드라<머리가 아홉 개인 뱀으로 머리를 자르면 곧 다시 생긴다>와 큰 개와 고전하고 있을 때 그의 조카인 이올라오스가 도와주어 이겼다고 한다. 앞의 해가 질 때까지 라는 말을 희망이 있는 동안 이라는 뜻이다)가 되지.”
나는 대답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이올라오스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롤라오스가 헤라클레스를 부르는 것처럼 나는 당신을 부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러나 우선 위험을 피하도록 조심하세.”
“어떠한 성질의 위험입니까?”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이론을 싫어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하세, 인간에게 이보다 더 나쁜 일은 일어날 수 없을 거야. 곧 세상에 대한 무지야.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무경험에 오는 지나친 자신으로부터 생기지. 자네가 어떤 사람을 믿고 그를 전적으로 진실하고 건전하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후에 그가 거짓투성이고 악한이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하세.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이렇게 여러 번 같은 일을 겪으면 특히 가장 믿고 가까운 친구라고 생각하던 사람들한테서 당하고, 이 친구들과 자주 다툴 때, 그는 결국 모든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인간 중에는 착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믿게 되네. 자네도 이러한 성격상의 특색을 알고 있을 테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부끄러운 것이 아닌가? 이러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은 다루는 데 있어서 인간성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만일 경험이 있다면 이 경우의 진실한 상태, 곧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중간에 속한다는 사실을 배웠을 것이기 때문이야.”
“무슨 뜻입니까?” 라고 나는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아주 큰 것과 아주 작은 것에 대해서 하는 말과 마찬가지야. 키가 아주 큰 사람이나 아주 작은 사람은 쉽게 찾아볼 수 없네. 그리고 이것은 크고 작은 것, 빠르고 느린 것, 아름다운 것과 더러운 것, 검은 것과 흰 것 등, 모든 극단적인 것에 일반적으로 해당되는 말이야. 자네가 인간이나 개나 그 밖의 다른 것을 예로 듣더라도 극단적인 것은 드물고 그 중간이 많아. 자네도 이 점을 모르지는 않을 거야.”
“네, 알고 있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만일 악이 경쟁을 벌인다면 가장 나쁜 것은 극소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을까?”
“네, 그럴 것 같습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확실히 그럴 거야. 이 점에서는 이론은 사람의 경우와는 다르지만-. 자네 말에 끌려서 내가 하고 싶은 말과는 다른 말을 한 셈이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비교할 수 있네. 대화술에 대한 기술이 없는 단순한 사람이 어떤 이론이 옳다고 믿었다가 후에 거짓이라고-사실상 거짓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상관이 없네.- 생각하고 다음에도 여러 번 이러한 경우를 겪을 때, 그는 더 이상 믿을 것이 없게 되고, 자네도 알다시피 논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이야말로 인류 가운데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게 되네. 그들만이 모든 이론이나 또는 사실상 모든 것이 극단적으로 건전하지 못하고 확실하지 않으며, 모든 것은 에우리포스(에우리포스는 에우보이아 섬과 보이오티아 사이에 해협. 이 해협에서는 하루에 일곱 번이나 조류의 방향이 바뀐다고 한다. 여기서는 소피스트의 논법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의 조류처럼 끊임없는 성쇠에 따라 위 아래로 흔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야.
“옳은 말입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고말고, 파이돈. 그런데 진리나 확실성이나 지식의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사람이 처음에는 옳다고 여겨졌으나 후에는 거짓임이 밝혀진 어떤 이론에 부딪쳤다고 해서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의 지능의 결핍을 탓하지 않고, 괴로운 나머지 결국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이론 전반에 책임을 돌리고 아주 좋아하며, 그 후에는 영원히 이론을 미워하고 욕하고, 실재에 관한 진리의 지식을 상실한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
“네, 그렇습니다.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선 우리의 영혼이 모든 이론에는 건강도 건전성도 없다는 사상을 허용하거나 받아들이는 일에 대해 각별히 조심해야 하네. 오히려 우리는 아직 우리들 자신의 건전성에 도달하지 못했으며, 정신의 건강을 획득하기 위해 남자답게 싸우고 최선을 다 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걸세. 자네와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은 미래의 생활 전체를 위해서, 나 자신은 죽음에 대비하여-. 이 순간 나는 철학자의 침착성을 갖지 못한 것 같아 하는 말일세. 오히려 일반 대중처럼 나는 승리를 좋아하는 사람에 지나지 않아. 그런데 승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논쟁을 할 때 문제가 정당한 것인가 하는 점은 개의하지 않고 오직 듣는 사람에게 자기 자신의 주장을 확신시키고자 애를 쓰네. 그리고 현재로서는 그와 나 사이의 차이점은 단지 다음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네. 곧 근 청중이 그의 말을 옳게 여기도록 애를 쓰는 데 반해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확신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네. 나에게 있어서는 청중을 설득한다는 것은 이차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아. 그러면 내가 이론을 통해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를 보기로 하세. 만일 내 말이 옳다면, 나는 진리를 설득하여 좋은 일을 하는 셈이네. 그러나 죽은 다음에는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으니 나는 애통함으로써 친구들을 괴롭힐 생각은 없고, 또 나의 무지는 지속되지 않고 나와 함께 죽을 것이므로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할 거야.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것이 이 문제를 다루는 나의 심경이네. 그리고 나는 자네들에게 진리만을 생각하고 소크라테스의 일은 생각하지 말라고 요구하겠네. 내가 자네들에게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되면 나에게 동의하고 만일 그렇지 않으면 열정 때문에 자네들과 나 자신을 기만하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내가 죽기 전에 벌처럼 나의 가시를 자네들에게 남기는 일이 없도록 전력을 다 기울여 반대해 주게.”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논의를 계속하기로 하세. 우선 내가 자네들이 말한 것을 잘 기억하고 있나 보기로 하세. 내 기억이 옳다면, 심미아스는 비록 영혼이 육체보다 더 아름답고 더 신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조화의 형태로 있는 것이므로 제일 먼저 소멸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불안을 갖고 있네. 한편 케베스는 영혼이 육체보다 더 지속적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영혼이 여러 육체들을 입어서 낡게 만든 다음에는 영혼 자신이 소멸하고 뒤에 마지막 육체만 남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은 아무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했네. 따라서 이것이 바로 죽음이며 육체 속에서는 항상 파괴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므로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파괴되는 것이 죽음이라고 했네. 심미아스와 케베스, 이것이 우리들이 고찰해야 할 문제점들이 아닌가?”
소크라테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그러면 자네들은 앞서의 이론 전체를 부인하는가, 또는 일부만을 부인하는가?”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일부 만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지식은 상기이며,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영혼은 육체에 갇히기 전에 어디엔가 존재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했나?”
케베스는 지금까지의 논의의 이 부분에서는 놀라운 감명을 받았으며, 이에 대한 확신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심미아스도 동의했고,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거의 없다고 믿는다고 덧붙였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테바이에서 온 친구여, 자네가 아직도 조화는 합성된 것이며, 영혼은 육체에 매어진 여러 줄로 이루어진 조화라고 주장한다면, 자네는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거야. 왜냐하면 자네는 조화는 조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앞서서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야.”
“결코 용인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
“자네가 한편으로는 영혼은 인간의 형태나 육체를 취하기 전에 존재했다고 말하면서 또 한편으로는 영혼은 아직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때, 바로 이러한 생각을 내포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자네는 깨닫지 못하고 있나? 조화는 자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영혼과 같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야. 오히려 수금과 줄과 소리가 부조화의 상태로 먼저 존재하고 그 후 마지막으로 조화가 생기는 거야. 그리고 조화가 제일 먼저 소멸되네. 그런데 영혼을 조화로 보는 사상과 앞서 말하는 사상이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일치할 수 없군요.” 라고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조화를 주제로 하는 논의에도 분명히 조화가 있어야겠네?”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물론이죠.”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지식은 상기라고 하는 주장, 그리고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주장, 이 두 주장에는 조화가 없네. 자네는 어느 쪽을 택하려는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두 주장 중 전자를 나는 훨씬 더 굳게 믿습니다. 내 입장에서 본다면 전자는 후자보다는 충분히 논증되었고, 후자는 전혀 논증되지 않았으며 다만 개연적이고 그럴 듯한 근거만을 갖고 때문입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믿어지는 듯합니다만-. 개연성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논의는 사기꾼이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러한 논의를 사용하는 경우, 기하학에 있어서 난 다른 일에 있어서나 기만당하기 쉽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상기에 대한 이론에 내 입장에서 본다면 믿을 만한 근거 위에서 증명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증명은 영혼에는 존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본질이 속해 있기 때문에, 영혼은 육체에 들어오기 전에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결론을 충분한 근거 위에서 올바르게 받아들였으므로-나는 이렇게 확신합니다- 나는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다른 결론을 논하거나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심미아스, 이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제기해 보겠네. 조화나 그 밖의 다른 합성물이 그것을 구성한 요소들의 상태와 다른 상태로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럴 수 없습니다.”
“또는 구성 요소들이 하는 일이나 당하는 일 이외의 일을 하거나 당할 수는 없겠지?”
심미아스는 동의했습니다.
“그렇다면, 공정하게 말해서 조화는 조화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이끌지는 못하고 오직 추종할 뿐이야.”
심미아스는 찬성했습니다.
“왜냐하면 조화는 그것을 구성한 부분들에 반대되는 움직임이나 소리나, 기타의 성질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야.”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런 일은 불가능하겠지요.”
“따라서 모든 조화의 본성으로 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방식에 따르는 것이 아닐까?”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요.”
“내 말은 조화에는 정도의 차가 있다는 뜻이야. 곧 가능한 한도에 따라 더 참되고 더 충분하게 조화될 때에는 더 좋은 조화, 더 완전에 가까운 조화가 있게 되고, 덜 참되고 불충분하게 조화될 때에는 보다 못한 조화, 보다 완전에 가깝지 못한 조화가 있게 되는 거야. 그러나 영혼에도 정도의 차가 있는가? 어떤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최소한 더 영혼답다든지, 덜 영혼답다든지, 또는 보다 완전에 가깝다든지, 보다 완전에 가깝지 않다든지 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두 가지 영혼이 있다. 곧 하나는 이성과 덕을 갖고 있어서 선하고 또 하나는 우매하고 부도덕해서 악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옳은 말일까?”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혼은 조화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영혼 속에 덕과 악이 있는 데 대해 어떻게 말할까? 그들은 여기에는 또 하나의 다른 조화와 또 하나의 다른 부조화가 있으며 유덕한 영혼은 조화되어 있고, 그 자체가 조화이면서도 그 안에 또 하나의 조화를 갖고 있고, 사악한 영혼은 부조화이며 그 안에는 조화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대답할 수 없군요. 그러나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이 주장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영혼에 대해서는 어떤 영혼을 다른 영혼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한 바 있네. 이와 마찬가지로 조화에 대해서도 더 좋은 조화라든가, 덜 좋은 조화라든가, 또는 보다 완전에 가깝지 못한 조화라는가, 하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조화나 덜 좋은 조화가 없다는 것은 더 잘 조화 되었다던가 더 나쁘게 조화 되었다던가 하는 일은 없다는 뜻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더 좋은 조화도, 덜 좋은 조화도 없다는 것은 더 많은 조화나 더 적은 조화를 갖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오직 동등한 조화만이 있다는 것이 아닌가?”
“네, 동등한 조화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어떤 영혼이 다른 영혼보다 절대적으로 더 영혼답다든지, 덜 영혼답다든지 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면 더 잘, 또는 더 나쁘게 조화되었다는 일도 있을 수 없겠지?”
“분명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부조화도 조화와 마찬가지로 더하고 덜한 점이 없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습니다.”
“조화나 부조화에 더하고 덜함이 없기 때문에, 만일 악은 부조화이고 덕은 조화라면, 어떤 영혼이 더 많은 악을 갖는다던가, 더 많은 덕을 갖는 일도 없겠지?”
“더 많이 갖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또는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심미아스, 영혼이 조화라면 영혼은 결코 악할 수는 없을 걸세. 왜냐하면 조화는 그 자체가 절대적으로 조화이므로 부조화와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야.”
“그렇습니다.”
“따라서 절대적으로 영혼다운 영혼도 악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논해 온 것이 옳다면, 어떻게 영혼이 악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영혼이 그 본성으로 보아 동등한 영혼이라면, 모든생물의 영혼은 한결같이 선하겠지?”
“옳은 말입니다, 소크라테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자네는 이러한 모든 것이 옳다고 생각하나? 영혼은 조화라고 하는 전제로부터 나온 귀결이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옳다고 할 수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다시 한 번 묻겠는데 인간의 본성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 중에서 영혼, 특히 현명한 영혼 이외에 다른 지배자가 있는가? 자네는 영혼 이외의 것을 알고 있나?”
“천만에요, 나는 모릅니다.”
“그리고 영혼은 육체의 정념에 따르는가? 또는 영혼은 육체의 정념과는 다른 것인가? 예를 들면 육체가 덥고 목마를 경우, 영혼은 우리가 물을 마시는 것을 막지 않는가? 또 육체가 배고플 때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경우도 있지 않은가? 그리고 이것을 영혼이 육체에 반대하는 수많은 예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네.”
“사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영혼은 조화이기 때문에 영혼을 구성하고 있는 줄들의 긴장, 이완, 진동 및 기타의 상태와 어긋나는 선율을 낼 수는 없다는 데 동의한 바 있네. 영혼은 오직 추종할 뿐 이 줄들을 주도할 수는 없지 않은가?”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영혼이 정반대의 일, 곧 영혼을 구성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요소들을 이끌어 간다는 것을 발견하지 않았는가? 일생을 통해 거의 언제나 이러한 요소들에 반대하고 강계하며, 때로는 의술이나 훈련에 의해 난폭하게 고통을 주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다루기도 하네. 마치 아주 다른 것을 대하듯이 때로는 욕망, 정욕, 공포를 위협하고 때로는 훈계하기도 하네. 호머가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처럼-.
그는 가슴을 치며 자기 마음을 꾸짖었다.
참고 견디라, 나의 마음아, 훨씬 더 심한 일도 참고 견디어 오지 않았는가!
호머가 영혼은 육체의 정념에 의해 이끌릴 수 있는 조화라는 생각으로 이러한 시를 썼다고 자네는 생각하는가? 오히려 영혼 자신은 육체의 정념을 이끌고 지배하며, 어떠한 조화보다는 훨씬 더 신적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네, 소크라테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친구여, 우리가 영혼은 조화라고 말하는 것은 전혀 옳지 않네. 우리는 신성한 시인 호머의 말과 어긋나는 말을 해서는 안 되며 우리들 자신이 해 온 말과 어긋나는 말을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테바이의 여신인 하르모니아(심미아스를 말한다)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말하기로 하세. 여신은 자비롭게도 우리들에게 졌으니까. 그러나 케베스, 여신의 남편인 카드모스(테바이의 여신 하르모니아는 테바이의 건설자인 카드모스의 아내이다. 심미아스는 테바이 출신이므로, 조화라는 말과 동음인 하르모니아를 들어 심미아스의 패배를 말하고 있다. 카드모스를 달랜다는 것은 케베스를 달래겠다는 뜻이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내가 그를 달랠 수 있을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카드모스를 달래는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생각합니다. 하르모니아에 대해서 내가 전혀 예기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논파하는 것을 분명히 보았으니까요. 심미아스가 그의 문제점을 말했을 때, 나는 그에게 어떠한 대답도 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당신이 첫 번째 공격을 가하자, 그의 이론이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는 것이 보고 놀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카드모스라고 부른 다른 이론도 동일한 운명을 맞이하겠지요.”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 나의 착한 친구여. 뽐내지 말기로 하세. 어떤 마안이 우리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말들을 전복시킬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이 일은 신에게 맡겨 놓는 게 좋을 거야. 하여튼 나는 호머의 영웅들처럼 바짝 다가가서 자네가 말한 것이 어떠한 성질의 것인가를 알아보기로 하겠네. 자네는 영혼이 소멸되지 않으며 불멸임을 증명해 주기를 바라고 있고, 죽음을 맞이하여 태연한 철학자가 자기는 다른 생활을 해 온 사람보다는 명부에서 더 잘 지내게 되리라고 믿는다 하더라도, 영혼의 불명이 증명되지 않는 한 단지 헛되고 어리석은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영혼의 힘과 신성이 논증되고, 영혼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 존재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에는 필연적인 귀결로서 영혼의 불명성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 때문에 영혼이 불명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말이지. 그리고 영혼이 인간의 형태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일종의 질병으로써 해체가 시작된 것이며 삶의 고난이 끝나면 결국 이른바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는 말이지. 그리고 자네의 말에 따르면, 영혼이 육체 속에 오직 한 번 들어왔느냐 또는 여러 번 들어왔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두려움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이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지식이 없거나, 영혼의 불명을 설명할 수 없다면 인간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케베스, 이것이, 또는 이와 비슷한 것이 자네의 의견이라고 생각하네. 한 가지 문제라도 빠뜨리지 않기 위해서 나는 일부러 자네가 한 말을 되풀이한 걸세. 보탠 것이나 뺄 것이 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하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현재로서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습니다. 곧 내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얼마 동안 말없이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습니다. 잠시 후에 그는 말했습니다. “케베스, 자네는 생성과 소멸의 본성 전체와 관련되는 엄청난 문제를 제기하고 있네. 자네가 원한다면 이 문제에 대한 나 자신의 경험을 말해 주겠네. 만일 내가 말하는 것 중에 자네의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이용하게.”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당신의 생각을 몹시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말하기로 하지. 케베스, 내가 젊었을 때, 자연의 탐구라고 불려지는 철학 분야를 알고자 하는 막대한 욕망을 가졌었네. 사물의 원인과 사물이 존재하고 창조되고 파괴되는 까닭을 아는 것은 고상한 일로 생각되었네.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생각하면서 항상 동요를 느꼈네. 곧 어떤 사람들(그리스 초기의 자연 철학자 아낙시만드로스, 아낙사고라스 등의 주장이다)이 말하는 것처럼 동물의 발생은 온기와 냉기의 원칙에 따라 야기되는 부패의 결과인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요소는 피인가, 공기인가, 또는 불인가? 혹은 이러한 것들이 아니라, 듣고 보고 냄새를 맡는 지각의 힘을 만들어 내는 것은 두뇌인가, 그리고 기억과 사료는 이러한 지각들로부터 생기고, 학문은 기억과 사료가 고정될 때, 기억과 사료에 기초를 두는 것일까? 그 후에 나는 이러한 것들의 소멸에 대해 검토하고 다음에는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검토하고 결국은 나는 이러한 문제들을 다룰 능력이 전혀, 그리고 절대적으로 없다는 결론-이 점은 앞으로 자네가 만족할 만큼 증명하겠네.-에 도달했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던 일들에 대해서도 눈이 어두워져서 갈피를 잡지 못할 정도로 나는 이러한 분들에 심취했기 때문이었네. 나는 전에는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하던 것조차도, 예컨대 인간의 성장은 먹고 마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조차도 잊어 버렸네. 음식의 소화에 의해 살이 불어나고 뼈가 굵어지고 신체의 다른 부분에도 같은 성질의 요소가 증가되면 체중이 적은 사람은 체중이 불어나고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커지기 때문일세. 이것은 합리적인 생각이 아니었을까?”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자, 그러면 다른 문제를 말하기로 하세. 한때 나는 <보다 큰 것>과 <보다 작은 것>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네. 그래서 나는 키가 큰 사람이 키가 작은 사람 옆에 서 있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머리 하나만큼 크다고 생각했네. 또는 어떤 말은 다른 말보다 크다고 생각했네. 그리고 더 나아가서 10은 8보다 둘이 많고, 11큐우빗(고대의 길이의 단위, 팔꿈치에서 가운뎃손가락 끝까지의 길이. 약 18-21 인치)은 둘은 하나의 배이기 때문에, 1큐우빗보다 많다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네.”
“그러면 이러한 것에 대해 지금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고 케베스는 물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맹세코 하는 말이지만 이러한 것들의 원인에 대해서 내가 안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형편이네. 왜냐하면 하나에 하나를 더할 때, 원래의 하나가 둘이 된다고 볼 수도 없고 덧붙여진 두 단위가 더하기 때문에 둘이 된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네. 어떻게 해서 1이 다른 1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에는 2가 아니라 1이었던 것이, 이제 합쳐졌을 때에는 단지 병치하던가, 두 개의 1을 합치시키는 것으로 말미암아 2가 되는지를 나는 이해할 수 없네. 또한 나는 어떻게 해서 하나를 쪼개면 둘이 되는 지도 이해할 수 없네. 이때에는 다른 원인에 의해 동일한 결과가 생기기 때문이네. 다시 말하면 앞의 경우에는 1을 1에 더하거나 병치시키는 것이 2가 되는 원인이었는데 이번 경우에는 하나를 다른 하나로부터 분리시키고 빼는 것이 그 원인이란 말일세. 또한 이제는 나는 1이나 다른 어떤 것이 왜 생기고 소멸되고 존재하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없게 되었고, 약간 혼란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고 있어서 다른 방법을 채택할 수는 없네. 그런데 나는 어떤 사람이-그의 말을 따르면- 아낙사고라스의 책에서 읽었다고 하면서 정신이 모든 것에 질서를 부여하며 만물의 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네. 나는 이 사상에 기쁨을 느꼈네. 이 사상은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네. 그리고 정신이 질서를 부여한다면, 정신은 만물에 최선의 방법으로 질서를 부여할 것이며 개개의 특수한 것을 가장 좋은 자리에서 배치하리라고 나는 생각했네. 그리고 어떤 것이 생성하고 소멸되고 존재하는 원인을 찾아내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사물이 존재하거나 행동하거나 외부의 영향을 받는 데 있어서 최선의 상태가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하고, 따라서 인간은 자기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최선의 것만을 고려하면 되며 다음에는 최악의 것도 역시 알아야 하리라고 생각했네. 왜냐하면 동일한 학문이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을 파악하기 때문이네. 따라서 나는 아낙사고라스에게서 내가 바라고 있던, 존재의 원인을 가르치는 스승을 찾았다고 생각하고 기뻐했네. 그리고 나는 그가 먼저 지구가 평면인지 원인지를 가르쳐 주고 이것이 바로 최선의 것임을 보여 주리라고 생각했네. 그리고 만일 그가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면, 더 나아가 그는 이러한 위치가 최선의 것임을 설명해 줄 것이며, 나는 이러한 설명에 만족하고 다른 종류의 원인을 찾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리고 나는 다음에는 그에게 해와 달과 별에 대해 물으면, 그는 해와 달과 별의 비교적인 속도라든가, 회전이라든가, 여러 가지 능동적 또는 수동적 상태라든가, 그리고 어떻게 이러한 모든 것이 최선의 것을 위해서는 존재하는가 하는 것을 설명해 주리라고 생각했네. 왜냐하면 그가 정신이 이러한 것들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 이외에는 이러한 것들이 지금과 같이 있는 것에 대해 다른 설명을 할 수는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네. 그리고 나는 그가 나에게 각각의 것의 원인과 모든 것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해 줄 때, 그는 각각의 것에 대해 최선의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해 최선의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도 설명해 주리라고 생각했네. 나는 아무리 많은 돈을 주더라도 이러한 희망을 팔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나는 그 책들을 보다 좋은 것과 보다 나쁜 것을 알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열성을 기울여서 읽었네. 나는 얼마나 큰 기대를 갖고 있었던가. 그런데 나는 얼마나 비참한 실망을 맛보았던가! 그 책들을 읽어 나가면서 나는 이 철학자가 정신이나 기타의 다른 질서의 원리들을 전적으로 포기하고 오히려 공기, 에테르, 물, 기타의 기묘한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그는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말해서 소크라테스의 행위의 원인은 정신이라고 주장하지만, 나의 몇 가지 행위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하려고 할 때에는,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은 내 육체가 뼈와 근육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비교할 수 있을 걸세.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할 거야. 뼈는 단단하고 뼈와 뼈를 갈라놓는 관절이 있으며, 근육은 탄력성이 있는데, 이 근육이 뼈를 감싸고 있으며, 살과 피부도 근육과 함께 뼈를 감싸고 있다. 그리고 근육이 수축 또는 이완으로 뼈가 관절이 있는 곳에서 쳐들어지면, 나는 나의 수족을 구부릴 수 있으며, 그래서 나는 비스듬한 자세로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할 거야. 그리고 그는 내가 자네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할 거야. 곧 음성이나 공기나 청각을 그 원이라고 말하고 같은 종류의 무수한 원인을 들 거야. 참된 원인을 말하는 것은 잊어버리고-. 참된 원인은 아테네 사람들이 나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또한 나도 여기에 남아 있어서 판결에 복종하는 것이 더 좋고 더 올바르다고 생각한 데 있단 말이야. 나의 근육이나 뼈는 벌써 오래 전에 메가라나 보이오티아로 달아나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하는 말일세. 맹세코(변명 주 참조) 말하거니와 만일 뼈나 근육이 제 나름대로 생각한 최선의 것에 따라 움직였다면, 그리고 만일 내가 몰래 도망가지 않고 국가가 내린 처벌을 받는 것이 보다 훌륭하고 보다 고상하다고 결단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뼈와 근육은 메가라나 보이오티아로 달아났을 거야.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원인과 조건이 이상한 혼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 사실 뼈나 근육이나 그 밖의 신체의 부분들이 없다면 나는 나의 목적을 실행할 수는 없었을 걸세. 그러나 내가 뼈나 근육이나 신체의 기타의 부분을 가졌기 때문에 나의 행동이 가능하고 이것이 정신이 작용하는 방식이며, 최선의 것을 선택해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매우 경솔하고 게으른 말솜씨이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원인과 조건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나 아닐까 하는 의아심을 갖게 되네. 많은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더듬고 다닐 때처럼 항상 원인과 조건을 혼동해서 잘못된 이름을 붙이기 때문이네. 따라서 어떤 사람(엠페클레스는 천재의 회전이 빨라서 지구가 밑으로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물을 가득 채운 그릇을 돌리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은 지구 둘레에는 소용돌이가 치고 있어서 지구가 공중에 머물러 있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아낙시메네스, 아낙사고라스 등이 공기가 밑받침이 되고 있다고 생각한다)은 일종의 넓은 반죽 그릇 같은 지구를 떠받치곤 있는 것은 공기라고 설명하네. 하늘과 땅이 지금처럼 최선의 상태로 있도록 하늘과 땅을 조정하는 어떤 힘이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는 전혀 떠오르지 않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신적인 힘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선보다 더 강하고 더 영속적이며 더 포괄적인 다른 아틀라스(아틀라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땅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거인으로써 반란에 가담한 벌로 땅과 하늘이 갈라진 틈에서 서서 천체를 떠받들고 있다고 한다)를 발견할 것을 기대하고 있네. 선의 필연적이며 포괄적인 힘에 대해서는 그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네. 그러나 이것은 가르쳐 주는 사람만 있다면 내가 배우고 싶어 하는 원리이네. 그러나 최선의 것의 본성을 스스로 찾아내는 데에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는 데에도 실패했으므로, 자네가 좋아한다면 원인을 탐구하는 두 번째의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내가 알아낸 대로 자네에게 말해 주겠네.”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이었습니다. “나는 참된 존재의 관조에 실패했으므로 영혼의 눈을 상실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네. 일식 중에 태양을 관찰하거나 주시하는 사람들이 물 또는 이와 비슷한 매개체에 비친 그림자를 보도록 미리 조심하지 않으면 육체의 눈을 상하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나 자신의 경우에도 사물을 내 눈으로 바라보거나 또는 감각의 도움을 받아서 파악하려고 한다면, 나의 영혼이 아주 장님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두려워했던 거야. 그래서 나는 정신의 세계에 의지하여 거기에서 존재의 진리를 찾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네. 나는 이 비유가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네. 왜냐하면 나는 사유를 매개로 해서 존재를 고찰하는 사람이 행동과 일을 통해 존재를 고찰하는 사람 이상으로 <그림자를 통해서 희미하게> 본다고 인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야. 오히려 이것이 내가 채택한 방법이었네. 나는 우선 가장 강력하다고 판단되는 원칙을 설정하고 다음에는 원인에 관련된 것이든, 그 밖의 것에 관련된 것이든, 이 원칙과 일치하는 것은 참이라고 확신했네. 그러나 자네가 아직도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아서 내가 한 말을 좀 더 분명히 설명하겠네.”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정말로 그렇습니다. 확실하게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내가 앞으로 자네에게 말하려고 하는 것에는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네. 오히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나 기타의 다른 토론에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항상 되풀이해 오던 말일세. 나는 원인의 본성에 대해 나의 사상을 사로잡고 있던 것을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네. 나는 뭇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잘 알려져 있는 말들로 되돌아가서 우선 아름다움 자체, 선 자체, 크기 자체가 있다고 가정해야겠네. 나에게 이와 같은 가정을 세우도록 허용한다면, 나는 자네에게 원인의 본성을 보여 주고 영혼의 불명성을 증명해 줄 수 있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당신이 그와 같이 하는 것을 인정합니다. 당장 그 증명을 해 주십시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자, 그러면 자네가 다음 단계에서 나에게 동의하려는지 그것을 알아보고 싶군. 아름다움 자체 이외에도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를 분유하고 있는 한에서만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야. 자네는 원인에 대한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나?”
“네, 동의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주장되어 온 여러 가지 현명한 원인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지도 못하네. 나에게 화사한 빛깔, 또는 형태, 또는 이 밖의 어떤 것을 아름다움의 원천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이러한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이러한 모든 것은 오직 나를 혼란에 빠뜨릴 뿐이니까-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아름다움 자체에 참여하고 분유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아름다워질 수 없다는 것을 단순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아마도 어리석게도 주장하고 마음속에 새기어 주겠네. 그 방법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분명히 알지 못하지만 아름다움 자체에 의해서 모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진다는 것만은 강력히 주장하기 때문이네. 나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내가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안전한 대답인 것 같네. 나는 설득에 있어서 이 원리는 결코 전복되지 않으며 나 자신이나 이 문제를 묻는 다른 사람에게나 아름다움 자체에 의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워지는 것이라고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을 고수하고 있네. 자네는 내 말에 동의하지 않는가?”
“동의합니다.”
“또한 크기 자체에 의해서는 큰 것은 크게 되고 또 점점 커지며 작은 것 자체에 의해서 보다 작은 것이 더 작아지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1은 2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크며 2는 1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작다고 말하더라도, 자네는 이 사람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큰 것은 크기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크기 자체로 말미암아 보다 크며, 보다 작은 것은 작은 것 자체에 의해서, 그리고 작은 것 자체로 말미암아 보다 작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확고하게 주장할 걸세. 따라서 자네는 보다 큰 것은 머리를 척도로 하여 보다 커지고, 보다 작은 것은 머리를 척도로 하여 보다 작아진다고 말하는 위험을 피하게 될 걸세. 자네는 이러한 추리에 도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안 그런가?”
케베스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네는 10은 2에 의해서, 그리고 2로 말미암아 8을 초과한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오히려 수에 의해서, 그리고 수로 말미암아 그러하다고 말할 테지? 또한 2큐우빗이 1큐우빗보다 큰 것은 절반만큼 크기 때문이 아니라 길이 자체 때문이라고 말할 테지? 이러한 모든 경우에는 잘못에 빠질 동일한 우려가 있어서 하는 말일세.”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정말 그렇군요.”
“또한 하나에 하나를 더하거나 하나를 쪼개는 것이 둘이 되는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조심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네는 적절한 본질을 분유 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것도 존재하게 될 방법이 없으며 따라서 자네가 아는 한, 둘의 원인은 오직 2자체뿐이며, 1자체를 분류하는 것이 하나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소리 높이 단언할 걸세. 자네는 다음과 같이 말할 거야. 나누기나 더하기 따위 수수께끼에는 상관하지 않을 테야. 나보다 머리가 좋아 사람이 이러한 문제에 대답하는 게 좋아. 속담에 있는 말과 같이 내가 경험이 부족하고.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도 놀라기를 잘하지만 나는 원리의 확실한 근거를 포기할 수는 없으라고. 그리고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원리 때문에 자네를 공격하면 자네는 전혀 개념 하지 않거나 또는 그러한 공격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결론이 서로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를 알아본 다음에 공격하는 사람에게 대답하면 되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원리를 설명해 달라는 요구를 받으면 자네는 보다 높은 원리를 차례로 설정하다가 결국은 보다 높은 원리 중 최선의 것에서 휴식처를 찾아내면 되네. 그러나 자네는 논객들(소피스트를 말한다)처럼 자네의 추리의 원리와 귀결을 혼동하지는 말게. 적어도 자네가 진정한 존재를 발견하기를 바란다면-. 이런 문제는 전혀 돌보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 논객들에게는 이러한 혼동은 중요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사상이 아무리 큰 혼란에 빠지더라도, 그들 자신을 즐겁게 만드는 재치만은 갖고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자네가 철학자라면, 자네는 반드시 내 말을 따라야 할 걸세.”
“당신의 말은 아주 옳은 말입니다.” 라고 심미아스와 케베스가 동시에 말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렇군요, 파이돈. 나는 심미아스와 케베스가 동의한 것을 이상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소크라테스의 이론이 얼마나 명석한가에 놀라게 될 거예요.
파이돈 : 물론입니다, 에케크라테스. 그리고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 그렇습니다. 그 자리에는 없었지만, 지금 당신이 전하는 말을 듣고 있는 우리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는 어떠한 말을 했습니까?
파이돈 : 이러한 모든 이론에 찬동하고, 따라서 이데아가 존재하며 다른 사물은 이데아를 분유하고 그 이름을 이데아로부터 얻는다는 데 동의한 다음에는 내 기억이 옳다면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네가 위에서 말한 이론에 찬성한다면 자네가, 심미아스는 소크라테스보다는 크고 파이돈보다는 작다고 말할 때, 자네는 심미아스에게는 크기와 작음이 다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자네는 아직도 크다는 말이 가진 뜻 그대로 심미아스가 심미아스이기 때문에 사실상 소크라테스보다 큰 것이 아니라 그가 갖고 있는 크기로 말미암아 크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네. 심미아스는 심미아스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보다 큰 것은 아닌 것처럼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는 심미아스의 크기와 비교할 때 작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리고 파이돈이 그 크기에 있어서 심미아스를 능가한다면, 이것은 파이돈이 파이돈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적으로는 파이돈은 심미아스에 대해 크기를 갖고 있고 심미아스는 비교상 보다 작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따라서 심미아스는 크다고 할 수도 있고 작다고 할 수도 있네. 그는 양자의 중간이어서 그의 크기는 한 사람의 작음을 능가하지만, 한편 또한 사람의 크기는 그의 작음을 능가하기 때문이네.”
소크라테스는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습니다. “나는 마치 책을 쓰듯이 말하고 있군. 그러나 나는 내가 하는 말이 옳다고 믿네.”
심미아스가 동의했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자네가 나와 같은 생각을 갖기를 바라기 때문이네. 크기 자체는 크면서 동시에 작은 것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우리들 속에 있는 크기(우리의 영혼은 태어나기 전부터 이데아를 알고 있다고 플라톤은 말한다. 우리의 지식은 단지 상기에 지나지 않음은 여기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다)나 구체적인 크기도 작아진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며 또한 능가되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거야. 이와 같이 되는 대신, 두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가 일어날 거야. 곧 <보다 큰 것>은 그 반대물인 <보다 작은 것> 앞에서 달아나거나 비켜나거나 할 것이며, 또는 <보다 작은 것>이 접근함에 따라 이미 사라져 버릴 거야. 그러나 작은 것을 받아들이거나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 때문에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을 거야. 마치 내가 심미아스와 비교할 때 작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어제의 나와 변함이 없는 채 여전히 키가 작은 사람인 것과 같다. 그리고 크기의 이데아가 결코 작은 것일 수 없고 또 작은 것이 될 수도 없는 것처럼, 우리들 속에 있는 작음도 큰 것이거나 큰 거시 될 수는 없네. 또한 다른 반대물들도 동일한 것으로 남아 있으면서 그 반대물이거나 그 반대물이 될 수는 없고 오히려 이렇게 되는 경우에는 변화 가운데서 사라져 버리거나 소멸하네.”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내 생각과 꼭 같습니다.”
이때 누구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자리에 있던 사람 가운데서 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하는 말이지만, 이것은 앞에서 우리가 인정했던 것과는 정반대가 아닌가. 보다 큰 것으로부터 보다 작은 생기고 보다 작은 것으로부터 보다 큰 것이 생기며 반대물은 오직 반대물로부터만 생긴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제는 이 원칙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는 사람 쪽으로 머리를 돌리고 듣고 있다가 말했습니다. “그 점을 상기시켜 주는 것을 보니 자네는 용기가 있는 사람이군. 그러나 자네는 두 경우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 같아. 그때는 구체적인 것에 있어서의 반대 물에 대해 말했고 지금 본질적인 반대물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야.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본질적인 반대물은 우리 속에 있어서나 본성에 있어서나 그 자체는 변화할 수 없네. 나의 벗이여 그때는 반대물인 내재되어 있어서 반대물에 따라 이름이 붙여진 것들에 대해 말했으나 지금은 그러한 것들에 내재되어 있고 그러한 것들에 명칭을 부여하는 반대물 자체에 대해 말하고 있네. 그리고 우리가 주장한 바와 같이, 이러한 본질적인 반대물이 상호간 생성된다는 것은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거야.”
말을 마치자 케베스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케베스, 자네도 이 친구의 반대물 듣고 마음에 동요가 일어났나?”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반대 때문에 마음에 동요가 일어난 적도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결국 우리는 반대물은 어떤 경우에든 결코 그 자체와 반대되는 것이 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한 것이 아닌가?”
“그 점에 대해서는 우리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다시 한 번 고찰해 보기로 하세. 그래서 자네가 내 말에 동의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로 하세. 자네가 따뜻하다든지, 차다고 부르는 것이 있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불이나 눈과 같은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열은 불과 다른 것이며 냉기는 눈과 같지 않은 것이란 말이지?”
“네.”
“그러면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눈이 열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에는, 눈이나 열은 눈 또는 열로 그대로 남아 있을 수는 없고, 열이 접근할수록 눈은 물러나거나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자네는 분명히 인정할 테지?”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그리고 열도 냉기가 접근함에 따라 물러나거나 사라져 버릴 거야. 따라서 열이 냉기의 영향을 받고 있을 때에는 열과 눈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열과 눈으로 그대로 남아 있지 못할 거야.”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이데아의 이름은 영원한 관련 밑에서 이데아에만 해당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데아는 아니지만 형태 안에서만 존재하는 다른 어떤 것에도 해당된다고 볼 수 있네. 나는 예를 들어서 이 점을 더 명백하게 설명하겠네. 홀수에는 항상 <홀>이라는 말이 붙지?”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홀>이라는 말이 붙는 유일한 것인가? 자기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으면서도 홀수 자체와 같은 것은 아니지만, 홀수 자체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홀>이라는 말이 붙는 다른 것도 있지 않은가? 바로 이것이 내가 묻고자 하는 것일세. 3이라는 수는 홀수에 속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많은 다른 예가 있네. 예를 들면 자네는 3은 그 고유한 명칭으로 부를 수도 있지만 또한 3과는 동일하지 않은 홀수라는 이름으로도 부를 수 있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말은 비단 3만이 아니라 그밖에 5와 기타의 수의 절반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것일세. 이 절반의 수는 각기 홀수 자체는 아니면서도 홀수일세. 또한 같은 방식으로 2 와 4, 그 밖의 절반의 수는 짝수 자체는 아니면서도 모두 짝수일세. 동의하는가?”
“물론입니다.”
“그러면 이제 내간 밝히고자 하는 점에 주목해 주게. 곧 본질적인 반대물만이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도, 비록 그 자체가 반대되는 것은 아니더라도 반대물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서로 배척하네. 이러한 것들은 자기 자신 안에 들어 있는 이데아와 반대되는 이데아가 접근할 때에는 이러한 것들은 사라지거나 물러난다고 나는 말하고 싶네. 예를 들기로 하세. 3이라는 수는 3이면서도 동시에 짝수가 된다면, 그렇게 되자마자 소멸해 버리거나 또는 다른 변화를 겪게 될 것이 아닌가?”
“정말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런데 2는 분명히 3과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 그렇다면 반대되는 이데아들만이 서로의 접근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본성을 가진 것 중에도 반대 물의 접근을 배척하는 것이 있네.”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가능하다면 이러한 것들이 어떠한 성질을 가진 것인지 규정을 내리도록 하세.”
“좋습니다.”
“케베스, 이러한 것들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 자기 자신의 형태만이 아니라 어떤 반대되는 것의 형태도 갖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닌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방금 말한 바 있고 자네도 분명히 알고 있을 테지만, 3에 포섭되는 것들은 수에 있어서 3일뿐 아니라 또한 홀수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네.”
“물론 그렇습니다.”
“3이 관여하는 이러한 홀수 자체에는 반대되는 이데아는 결코 침범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침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여는 홀수의 원리로 말미암아 가능하겠지?”
“네.”
“그리고 홀수와 짝수는 반대되는 것이지?”
“그렇습니다.”
“그러면 짝수의 이데아는 3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러면 3은 짝수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면 세 개나 3이라는 수는 짝수가 아니지?”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면 내가 아까 반대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반대 물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한 구별로 되돌아가세. 앞에서 든 예에서 본 바와 같이 3은 짝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면서도 짝수를 절대로 용인하지 않고 항상 짝수는 반대쪽 이서 활동하도록 하네. 또는 2는 홀수를 받아들이지 않고, 불은 냉기를 받아들이지 않네. 이러한 예들로부터 (이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네.) 자네는 아마도 반대물만이 반대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반대물 초래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것이 초래하는 깃의 반대, 그것이 도달하는 바의 반대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여기서 나는 요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5의 배수인 10은 홀수의 성질을 받아들이지 않을 걸세. 배수는 또 다른 반대물을 갖고 있고 엄격하게 홀수에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적으로 홀수를 배척하네. 또한 2분의 3, 또는 2분의 1이나 3분의 1 등 분수는 전체와 반대되는 것이 아님에도 전체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동의하겠나?”
“네, 전적으로 찬성하며, 이 점에서는 당신을 따르고 있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세. 그리고 자네는 질문에 대답할 때 내가 질문에 쓴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게. 나는 처음에 내가 말한 오래되고 안전한 대답을 다시 듣고 싶지는 않네. 오히려 또 다른 안전한 대답, 곧 방금 말한 것으로부터 자네가 진리를 찾아 낸 대답을 듣고 싶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자네에게 어떠한 성질이 신체 내에 있기에 신체는 따뜻해지는가? 라고 묻는다면 자네는 열이라고 대답하지 말고 (이것이 내가 안전하고 우둔한 답이라고 부른 걸세), 불이라고 대답하게. 불이라는 대답은 우리가 내리고자 하는 훨씬 탁월한 대답일세. 또는 어떤 사람이 자네에게 왜 신체는 병드는가? 라고 묻는다면, 병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하지 말고 열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하게. 그리고 홀수 자체가 홀수의 원인 라고 말하는 대신에, 단일이 그 원인이라고 말하게.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일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더 이상 예를 들지 않더라도 자네는 충분히 이해했을 줄 믿네.”
“네, 당신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말해 보게. 육체 속에 무엇이 있으면 육체는 살아 있는가?”
“영혼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항상 그런가?”
“네, 물론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영혼을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영혼은 그것에 생명을 주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러면 생명에 반대되는 것이 있는가?”
“있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죽음입니다.”
“그렇다면 이미 동의한 바와 같이 영혼은 그 자신이 초래하는 것과 반대되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거야.”
“불가능하지요.”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러면 조금 전에 우리는 짝수를 배척하는 원리를 무엇이라고 불렀던가?”
“홀수.”
“그러면 음악적인 것, 및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원리는 무엇인가?”
“비음악적인 것 및 부정입니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원리를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는가?”
“불사라고 합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는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영혼은 불멸인가?”
“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증명되었다고 말해도 좋을까?”
“네, 충분히 증명되었습니다. 소크라테스.” 라고 케베스는 대답했습니다.
“홀수 자체는 불명하는 것이라면, 30도 불명이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입니다.”
“그리고 냉기가 불명이라면 열기의 원리가 눈을 공격해 올 때, 눈은 고스란히 녹지 않은 채 물러나야 하지 않을까? 눈은 결코 소멸할 수는 없고 또한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열을 받아들일 수도 없으니까.”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또한 차지 않은 것, 곧 열기의 원리가 불멸이라면 불은 냉기의 공격을 받을 때 소멸하거나 멎을 수는 없는 일이며 온전하게 물러나겠지?”
“분명히 그렇습니다.” 라고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불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불사는 또한 불멸이기도 하다면 영혼은 죽음의 공격을 받았을 때 소멸할 수는 없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논의로 보아 3이나 홀수가 짝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이나 불 속의 열기가 냉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것처럼 영혼도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죽을 수는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의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지 않는가? 라고 말할 거야. 그런데 이와 같이 반대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홀수의 원리는 불명이라고 대답할 수는 없네. 이 점에 대해서는 합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야. 그러나 이 점에 합의를 본다면 짝수가 접근하면 홀수의 원리와 3은 물러난다고 주장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걸세. 그리고 동일한 이론이 불, 열, 기타 모든 것에 타당하게 될 거야.”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리고 불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불사는 또한 불멸이기도 하다면 영혼은 불사일 뿐 아니라 불명일 거야.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영혼의 불명성에 대해서는 다른 증명이 필요할 걸세.”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다른 증명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영원하기 때문에 죽지 않는 것이 소멸된다면 불멸하는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그래서 신과 생명의 본질적 형태와 일반적으로 죽지 않는 것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는 데 모든 사람이 동의할 거야.”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입니다. 이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나아가 내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과 마찬가지로 신들도 동의할 것입니다.”
“따라서 불사는 불멸이라고 한다면 영혼이 죽지 않는 것인 한, 영혼은 불멸하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따라서 죽음이 인간을 공격할 때, 인간의 가시적인 부분은 죽는다고 하겠지만 불사적인 부분은 죽음이 다가오면 물러나서 안전하고 건전하게 보존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케베스, 영혼이 불사요 불멸이며, 우리의 영혼은 사실상 다른 세계에 존재하게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은가!”
케베스는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나는 그렇게 확신합니다. 더 이상 반대할 여지가 없습니다. 침묵을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할 말이 있거나 듣고 싶은 말이 있다면 토론을 다른 기회로 미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심미아스가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또한 지금까지의 논의에 대해 의심을 품을 이유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가 거대한 데 비해 인간은 무력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나는 아직도 마음속으로는 불안을 느끼고 있으며 그렇게 느끼지 않을 수가 없군요.”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옳은 말이야, 심미아스. 좋은 말을 했네. 그리고 최초의 원리들이 확실한 것처럼 생각되더라도 조심스럽게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것을 덧붙여서 말하고 싶네. 그리고 최초의 원리들이 만족스러울 만큼 확실할 때에는 인간의 이성이라면 어쩔 수 없는 망설임이 섞인 확신을 갖고 논의의 과정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 생각하네. 그래서 그것이 분명하고 명확하다면, 더 이상의 추구는 필요하지 않을 거야.”
“사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오, 나의 벗들이여, 영혼이 정말로 죽지 않는다면 생애라고 부르는 시기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서 영혼을 알뜰하게 돌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영혼을 소홀히 다룸으로써 생기는 위험은 참으로 엄청날 거야. 죽음이 모든 것의 종말이기만 하다면, 악인은 죽으면서 유리한 흥정을 할 거야. 악인은 행복한 마음으로 육체와 작별할 뿐 아니라, 그의 영혼과 함께 그 자신의 죄악과도 영영 작별하게 될 테니까. 그러나 영혼이 분명히 죽지 않는다면, 최고의 덕과 지혜에 도달하지 않고서는 악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된다는 것은 불가능해. 왜냐하면 영혼은 병부로 갈 때, 교양과 교육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가지 못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떠나는 자가 저 세상으로 가는 여행을 시작하면서부터 교양과 교육은 그에게 큰 도움이 되거나 심한 해를 끼친다고 말하더군. 세상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죽은 다음에는 그가 살아 있을 때 속해 있던 각자의 수호신이 그를 죽은 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어떤 곳으로 인도하고, 거기서 심판을 받은 후에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인도하는 일을 맡은 안내자를 따라 명부로 간다는 거야. 그리고 거기서 마땅히 당해야 할 일을 당하며 지정된 시간만큼 머물러 있노라면, 시간의 많은 주기(공화국에서는 이 주기를 1천년으로 잡고 있으며 파이도로스에는 이 주기를 열 번 되풀이한다고 되어 있다)가 지난 다음에 다른 안내자가 그를 다시 이 세상으로 데리고 온다는 거야. 그런데 아이스퀼로스가 텔레포스(텔레포스는 소아시아의 고대 국가인 미시아의 왕. 희랍 신화에 의하면 그는 아킬레우스의 창에 부상했으나 이 창에서 나온 녹물로 만든 고약을 바르고 나았다고 한다. 이이스퀄로스가 켈레포스를 다룬 비극은 실전 되었다)에서 말한 것처럼 저 세상으로 가는 길은 외길도 곧은길도 아니냐. 만일 그렇다면 안내자는 필요하지 않은 걸세. 길을 잃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지상의 삼거리가 있는 곳에서 명부의 신들에게 드리는 제사나 공양을 보고 내가 추측한 바에 따르면, 이 길은 갈림길로 많고 꼬불꼬불한 길일세. 현명하고 단정한 영혼은 곧은길을 따라가며, 주의 환경도 알게 되네. 그러나 육체를 갈망하고 내가 앞에서도 이야기한 바와 같이 생명 없는 육체와 가시적인 세계의 주위를 오랫동안 떠돌던 영혼은 여러 번 반항을 하고 또 여러 번 고난을 겪은 후에야 간신히, 그것도 수호신이 강제로 끌고 가게 되네. 그리고 다른 영혼들이 함께 모여 있는 곳에 이 영혼이 도착했을 때, 이 영혼이 불순하며 불의한 살인이나 이와 비슷한 죄, 또는 이러한 영혼들이 함직한 범죄 행위 따위, 불순한 행동을 했다면, 모든 영혼은 이 영혼을 피해서 달아나 버리네. 아무도 이 영혼과 동반하지 않고 아무도 안내해 주지 않으며, 일정한 시간이 다 찰 때까지 홀로 이 영혼은 극단적인 불운 가운데서 허덕여야 하며 기한이 다 차면 억지로 이 영혼에 합당한 곳에 태어나게 되네. 한편 일생 동안 신들과 함께 있으면서 신의 지도를 받은 순수하고 올바른 영혼도 적당한 집을 차지하게 되네. 그런데 어떤 이름 없는 사람이 나에게 들려 준 말을 믿는다면, 지구에는 이상한 곳이 많으며, 사실상 그 성질이나 그 크기에 있어서 지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일세.”
“무슨 뜻이지요, 소크라테스?” 라고 심미아스가 말했습니다. “나도 지구에 대한 설명은 여러 번 들었으나 당신이 믿고 있는 이론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으며, 따라서 몹시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심미아스, 내가 글라우코스(글라우코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발명가였던 것 같다)의 재주를 가졌더라면 자네에게 이야기해 줄 수 있으련만-. 하기는 글라우코스의 재주라 하더라도 내 이야기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을는지 의심스럽긴 하지만-. 나 자신은 그 진실성을 결코 입증할 수 없네. 그리고 내가 입증할 수 있다 하더라도, 심미아스, 설명이 끝나기 전에 내 생애가 끝날 것이 두렵네. 그러나 내간 생각하는 대로 지구의 형태와 여러 형태를 설명해 보겠네.”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좋아. 나의 확신은 다음과 같네. 지구는 하늘의 중심에 있는 둥근 천체이며 따라서 공기나 기타의 유사한 힘이 지탱해 줄 필요는 없네. 오히려 주변의 하늘이 균등하고 지구 자체가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지구는 그 자리를 지키고 떨어지거나 어느 쪽으로 기우는 일이 없는 것일세. 균형을 이루고 있으면서 동등하게 퍼져 있는 것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조금이라도 한 쪽으로 기울어지는 일이 없고, 항상 같은 상태에 있으며 빗나가는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네. 이것이 내가 믿는 첫째 것일세.”
“확실히 옳은 생각입니다.” 라고 심미아스는 말했습니다.
“또한 지구는 매우 광대하고, 파시스 강(파시스 강은 혹해 동쪽의 리온 강을 말한다)으로부터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은 지브랄탈 해협 양쪽에 있는 칼레 산과 아빌라 산. 라시스 강으로부터 헤라클레스의 두 기둥에 이르는 지역은 지중해 전역으로 당시의 그리스 세계의 한계를 보여 준다)에 이르는 지역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마치 개미나 개구리가 습지 주변에 살고 있는 것처럼, 오직 바다 주변의 작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데 지나지 않으며 이와 비슷한 많은 장소에는 다른 주민들이 살고 있다고 나는 믿네. 지구의 표면에는 도처에 물과 안개와 무거운 공기가 몰려드는 여러 가지 형태, 여러 가지 크기의 골짜기가 있기 때문이네. 그러나 지구 자체는 순수한 하늘에 자리 잡고 있네. 여기에는 별들도 있네. 이 하늘은 우리가 혼이 에테르라고 부르는 것이며, 이 하늘 가운데서 우리 지구는 침전물이 모여드는 밑에 있는 골짜기일세. 그러나 이 골짜기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지구의 표면 위의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네. 이것은 마치 해저에 사는 생물이 자기는 물의 표면에 살고 있고 바다는 그것을 통해 해와 기타의 별들을 보는 하늘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으며 허약하고 우둔한 탓으로 표면으로 떠올라 간 적이 한 번도 없고, 대지가 그가 사는 세계보다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가를 물위로 고개를 들어서 보았거나 심지어 보고 온 자에게 들은 적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처지네. 우리는 지구의 골짜기에 살면서 표면에 살고 있는 생각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우리는 공기를 하늘이라고 부르고 이 하늘 속에서 별들이 움직인다고 상상하고 있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허약하고 우둔하기 때문에 공기 표면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는 거야. 만일 어떤 사람이 외부의 한계에 도달하거나 새의 날개를 달고 정상에까지 이른다면,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이 세상을 바라보는 물고기처럼 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본성에 저 세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저 세상을 참된 하늘과 참된 빛과 참된 땅이 있는 것임을 알게 될 거야. 대지와 돌, 그리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지역은 마치 바다 속에서는 모든 것이 소금 때문에 썩는 것처럼, 더럽혀지고 썩었기 때문이네. 그리고 바다 속에는 고상하고 완전한 성장도 없고 오직 동굴과 모래와 무한한 진흙 밭이 있을 뿐이며 해안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대지의 위와 하늘 밑 사이에 있는 것에 대해서는 심미아스, 나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자네에게 들려 줄 수 있고 이것은 들을 만한 값어치가 있는 이야길세.”
심미아스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나의 친구여,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네. 첫째로 지구는 위에서 바라보면 여러 가지 빛깔을 칠한 열 두 조각의 가죽으로 된 줄무늬가 있는 공처럼 보이네. 그리고 지구상에서 화가들이 쓰고 있는 빛깔은 바로 그 견본이라고 할 수 있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땅은 이러한 빛깔로 가득 채워져 있는데, 그 빛깔은 이 세상의 빛깔보다 훨씬 밝고 환하네. 거기에는 놀라운 자주색의 광택이 있고 찬란한 황금빛이 있으며, 흰빛은 지구의 백악이나 눈보다도 더 희네. 그 땅은 이런 빛깔과 다른 빛깔로 되어 있으며 그 빛깔들은 인간의 눈이 일찍이 본 어느 빛깔보다도 그 수에 있어서 더 많고, 또 훨씬 아름답네. 공기와 물로 가득 차 있는 이 골짜기(나는 이 골짜기에 대해 지금까지 말해 왔네)는 독특한 빛깔을 갖고 있어서 여러 가지 빛깔들 속에서 번쩍거리는 광선처럼 보이고 따라서 그 전체는 변화 가운데 통일 석이 깃들이어 있는 단일하고 연속적인 모습을 나타내고 있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지역에서 자라나는 모든 것-나무, 꽃, 과실 등-도 역시 세상에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답네. 거기에는 언덕도 있고 이 언덕에는 돌들이 있는데 이 돌들은 이 세상에서 진귀한 것으로 여겨지는 에머랄드나 홍옥이나 백옥이나, 기타의 보석보다 더 부드럽고 더 투명하며, 그 빛깔이 더 아름답네. 이 세상에 있는 보석들은 저 세상에 있는 돌들의 조각에 지나지 않아. 거기에 있는 돌들은 이 세상의 보석이나 다름이 없고 또 더 아름답기 때문이야. 그 이유는 거기에 있는 돌들은 순수하고 이 세상의 보석처럼 이 세상에 엉겨 붙는 썩은 염분에 의해 더럽혀지거나 썩지 않은데 있네. 이 염분은 동물이나 식물과 마찬가지로 땅과 돌도 추하고 병들게 만드는 것이데. 이 돌들은 저 세상의 보석이고 저 세상의 대지도 금과 은 등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번쩍번쩍 빛나며, 이 보석들은 햇빛 속에 드러나 있고 큼직하고 풍부하며 어디에나 있기 때문에, 전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드네. 그리고 거기에는 동물과 인간도 있는데 일부는 내륙에 살고 있고 일부는 우리가 바닷가에 살고 있듯이 공기의 주변에서 살고 있네. 또 일부는 대륙 가까이 있어서 공기가 그 둘레로 흐르고 있는 섬에 살고 있네. 요컨대, 마치 우리가 물과 바다를 이용하는 것처럼 그들은 공기를 이용하며, 에테르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이 세상의 공기와 같네. 게다가 그 곳의 계절은 병을 일으키지 않으며 따라서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고, 공기가 물보다 더 순수하고 에테르가 공기보다 더 순수한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시각, 청각, 후각, 기타의 감각은 훨씬 더 완전하네. 또한 거기에는 신들이 실제로 살고 있는 신전과 성지가 있어서 그들은 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신들의 대답을 얻으며, 그들은 신을 알고 신들과 사귀고 있네. 그리고 그들은 해와 달과 별의 참모습을 보며, 이 밖의 온갖 행복을 누리고 있네. 이것이 대지 전체의 본성이며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본성일세. 그리고 지구 표면에는 도처에 있는 골짜기에 따라 여러 지역이 갈라지는데, 이 골짜기 중에는 우리가 사는 골짜기보다 더 깊고 더 넓은 것도 있고, 더 깊기는 하지만 그 면적이 좁은 것도 있으며, 더 얕기는 하지만 더 광활한 것도 있네. 모든 골짜기에는 그 밑으로 허다한 구멍이 뚫려져 있고, 거기에는 지구의 내부로 이어지는 넓고 좁은 통로들이 있으며 이 통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네. 이 통로로 마치 큰 대야에 물이 넘나들 듯이 큰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흘러 들어가며 끊임없이 흐르는 강들의 거대한 지하의 흐름이 있고, 뜨거운 물과 찬물이 솟아나오며, 큰 불과 불의 대하와 묽기도 하고 진하기도 한 흙탕물의 흐름(마치 시실리의 흙탕물의 강과 그 뒤를 따르는 용암의 흐름과 같은)이 있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흘러가는 지역은 이러한 것들로 가득 차 있네. 그리고 지구의 내부에는 진동 또는 동요가 있어서 이러한 모든 것을 항상 위 아래로 움직이게 하는데, 그 원인은 다음과 같네. 지구의 모든 틈 중에서 가장 넓게 갈라진 틈이 바로 지구 전체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세. 이것은 호머가 다음과 같은 말로 묘사한 틈일세.
멀리 멀리, 지하의 가장 깊은 심연이 있는 곳에.(호머 일리아드 )
그리고 호머는 이것을 다른 곳에서 타르타로스(밑이 없는 나라. 최고의 주권자에게 반항하거나 또는 그를 모욕한 자는 이 나락으로 떨어진다)라고 불렀고, 많은 다른 시인들도 이와 같이 불렀네. 그리고 이러한 동요는 이 틈으로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오는 강물 때문에 일어나며, 이 강물들은 각기 그것이 흐르는 토지의 성질을 갖게 되네. 그리고 강물이 늘 흘러 들어가고 흘러나오는 이유는 이 액체를 머물게 할 하상이나 기반이 없어서 흔들리면서 위 아래로 물결치고 그 주변의 바람과 공기도 마찬가지로 동요하기 때문일세. 바람과 공기도 물을 따라 위 아래로, 여기저기로 땅 위를 떠돌아다니네. 마치 호흡을 할 때 공기가 항상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것과 꼭 같네. 그리고 물을 따라 안팎으로 동요하는 바람은 저항하기 어려울 만큼 무서운 돌풍을 일으키네. 그리고 물이 한꺼번에 이른바 지구의 낮은 부분으로 물러날 때, 물은 지구를 거쳐 이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펌프로 물을 길어 올릴 때처럼 이 지역을 가득 채우며, 또한 물이 이 지역을 떠나 이쪽으로 다시 쏟아져 들어올 때에는 이 곳의 골짜기는 다시 채워지며 이 골짜기들이 채워지면, 지하의 통로를 통해 각기 제길 을 따라 여러 곳으로 흘러가 바다와 호수와 강과 샘을 이루게 되네. 그 후 물은 땅 밑으로 흘러 들어가는데 어떤 것은 많은 지역을 오랜 시간에 걸쳐 감돌고, 어떤 것은 보다 적은 지역을 멀지 않은 코스로 감도네. 그리고 다시 물은 타르타로스로 떨어지는데 어떤 것은 지상에 솟아 나오기 이전에 위치보다 훨씬 낮은 곳에서, 또 어떤 것은 그다지 낮지 않은 곳에서 떨어지지만 결국 모두 지상으로 솟아 나온 위치보다는 어느 정도 낮은 위치일세. 그리고 그 중 일부는 다시 반대쪽으로 터져 나오고 일부는 같은 쪽으로 터져 나오며 일부는 뱀이 타래를 틀듯이 지구를 한 바퀴, 또는 여러 바퀴 돌다가 가능한 한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것도 있네. 그러나 결국은 언제나 갈라진 틈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와서 그 틈 속으로 흘러가지 못하네.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 강물이든 중앙까지만 흘러내릴 수 있고 더 앞으로는 흘러가지 못하네. 강물 반대쪽에는 절벽이 있기 때문이네. 그런데 이러한 강은 수다하고 강력하며 여러 가지이지만 그 중 중요한 것은 네 개가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크고 가장 긴 것을 오케아노스(신화에 나오는 티탄의 하나. 세계의 큰 강, 대향을 신격화한 것이다)라고 부르네, 오케아노스는 지구를 한 바퀴 도네. 그리고 그 반대쪽에 아케론(명부에 있는 강 중의 하나. 명부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모든 망령이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된다)이 흐르는데, 아케론은 땅 밑으로 쓸쓸한 곳을 뚫고 아케루시아 호스에 다다르네. 사람인 죽으면 대다수의 영혼은 이 호수 가로 가서 지정된 시간만큼-어떤 영혼은 오랫동안, 또 어떤 영혼은 잠시 동안-기다리고 있다가 동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 이 세상으로 보내지네. 셋째 강은 위에 말한 강 사이에서 솟아 나오는데, 분출구 근처에 있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 지중해보다도 더 큰 호수를 형성하네. 이 호수는 물과 진흙으로 들끓고 있네. 여기서부터 탁류를 이루며 지구의 주위를 돌다가, 다른 곳들을 거쳐서 아케루시아 호수의 맨 끝에 이르게 되지만 호수의 물과는 섞이지 않고 지구의 둘레를 여러 차례 돌다가 타르타로스의 가장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네. 이것이 필리플레게톤(아케론 강의 지류로 불타는 강 이라는 뜻이다)이라고 부르는 강으로서 지구의 다른 부분에서 불을 분출시키는 것이네. 이 반대쪽으로부터 넷째 강이 흘러나와 처음에는 유리처럼 검푸른 빛깔로 덮인 무섭고 황량한 지역으로 흘러 들어가서 스튀크스(증오의 강이라는 뜻) 호수가 형성되네. 호수로 흘러 들어간 강물은 물 가운데서 이상한 힘을 얻고 필리플레게톤 강과 반대 방향으로 땅 속을 돌다가 필리플레게톤 강과는 반대쪽으로 아케루시아 호수 근처에 이르게 되네. 그리고 이 강물도 다른 강물과 섞이지 않고 원을 그리며 흐르다가 필리플레게톤 강 맞은쪽으로 타르타로스로 떨어지네. 시인들은 이 강을 코키토스(죽은 자를 위해서 통곡하는 통곡의 강이다)라고 부르네. 이것이 저 세상의 형편이네. 그리고 죽은 자가 각자의 수호신이 따로따로 인도하는 곳에 다다르면, 우선 훌륭하고 경건하게 살았는가, 또는 그렇지 않은가에 따란 판결을 받게 되네. 그런데 착하게 산 것도, 악하게 산 것도 아닌 사람들은 아케론 강으로 가서 준비되어 있는 배를 타고 아케루시아 호수로 운반되어 거기에 살면서 악행을 씻어 내고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행한 죄악에 대한 처벌을 받고, 선행을 한 일이 있으면 합당한 상을 받게 되네. 그러나 그들의 죄가 너무 커서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성물에 대해 빈번하고 무서운 모독을 가한 자, 더럽고 무도한 살인자 등-은 타르타로스로 던져지고 다시는 나오지 못하는데, 이것은 그들에게 합당한 운명이라고 할 수 있네. 또한 큰 죄를 짓기는 했으나 구원받을 여지는 있는 사람들-예컨대 순간적인 분노로 말미암아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폭행을 했으나 여생을 줄곤 후회하며 지낸 사람들이나 이와 비슷한 처지에서 살인을 한 사람들-은 타르타로스로 던져져서 1년 동안 고통을 받지만 1년 뒤에는 물결이 그들을 밀어내 주네. 단순한 살인자는 코키토스 쪽으로, 아버지나 어머니를 살해한 자는 필리플레게톤 쪽으로 가네. 그리고 그들은 아케루시아 호수 가로 보내져, 여기서 목청을 높여 그들이 죽였거나 악행을 가한 희생자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가엾이 여기고 친절을 베풀어서 호수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애걸하게 되네. 그리고 만일 그들의 애원이 받아들여지면 그들은 그 곳에서 나와 고통을 면하게 되네. 그러나 그렇지 못하면 다시 타르타로스로 보내져서 그들이 악행을 가한 사람의 자비를 얻을 때까지, 다시 여러 강을 끊임없이 흘러 다니네. 이것이 그들의 재판관이 내린 판결이기 때문이야. 뛰어나게 거룩한 생활을 한 사람들은 이 지상의 감옥으로부터 풀려나 저 세상에 있는 순수한 집으로 가서 보다 순수한 땅에서 살게 되네. 이 사람들 가운데서 철학을 통해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정화한 사람들은 그 후로부터는 전혀 육체 없이 아주 아름다운 집에서 살게 되네. 이 집을 설명한다는 것은 쉽지 않고 게다가 지금은 설명할 시간도 없는 것 같네. 그런데 심미아스, 앞에서 말한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인생에서 덕과 지혜를 얻기 위해 못 할 일이 없지 않은가? 보상은 아름답고 희망은 크지 않은가!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내가 앞에서 한 영혼과 그 집에 대한 설명이 꼭 사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되며 또한 나 자신도 확신하는 것은 아니네. 그러나 영혼이 불사임이 증명된 이상, 그는 앞에서 말한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험을 하더라도 타당하지 못하거나 가치 없는 일은 아니라고 나는 말하겠네. 모험은 유쾌한 것인 만큼 그는 이러한 말로써 스스로를 위안해야 할 거야. 내가 길게 이야기한 까닭도 여기에 있네. 그러므로 육체의 쾌락과 장식은 그에게는 이질적인 것이고 유익하기보다는 오히려 해가 된다고 하여 이를 물리치고 지식의 쾌락을 추구해 온 사람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 갈채를 보내도 좋다고 나는 말하고 싶네. 그리고 이러한 사람은 자기 영혼을 이질적인 장식들이 아니라 영혼 자신의 보석, 곧 절제와 정의와 용기와 숭고함과 진리로 단장해 온 것이네. 이러한 것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영혼은 때가 오면 서슴지 않고 명부로 가는 여행에 나서게 되네. 심미아스와 케베스여, 자네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떠나야 하네. 비극 시인이 말하는 것처럼 운명의 소리가 이미 나를 부르고 있게. 곧 나는 독약을 마셔야 하네. 그래서 우선 나는 여자들이 내가 죽은 다음에 내 시체를 씻느라고 고생하지 않도록 목욕을 하는 것이 좋겠어.” 소크라테스가 말을 마치자,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 우리들에게 부탁할 말은 없나? 자녀에 대해서나 우리들이 해 줄 수 있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든지-.”
소크라테스는 대답했습니다. “크리톤, 특별히 부탁할 것은 없네. 오직 한 가지, 내가 자네들에게 늘 말한 것처럼 자기 자신을 돌보게. 이와 같이 하겠다고 약속하든 않든 간에, 이것이 나와 나의 가족과 우리들 모두에게 이바지하는 길일세. 그러나 자네들이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내가 자네들에게 권고한 길을 따라서 걸어가지 않으려고 한다면, 지금 처음으로 하는 말은 아니지만, 순간적으로 아무리 많은 공언을 하고 약속을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을 걸세.”
“우리는 최선을 다 하겠네.” 라고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를 어떤 방식으로 묻어 줄까?”
“자네가 좋아하는 방식대로-. 그러나 자네는 나를 꽉 잡고 내가 달아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걸세.” 이렇게 말하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우리들을 돌아보며 웃음을 띠우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크리톤으로 하여금 여기 있는 내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했고 토론을 주도해 온 동일한 소크라테스임을 믿게 할 수가 없군. 그는 나를 어떻게 묻으면 되겠느냐고 묻는 거야. 나는 독약을 마시고 자네를 곁을 떠나 축복 받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기 위해 간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숱한 말을 했건만, 이러한 말들이 크리톤에게는 소용이 없었던 것 같아. 이러한 말로 자네들과 나 자신을 달래기는 했지만-. 따라서 법정에서는 재판관들에게 그가 나를 위해 보증인이 되어 주었거니와, 지금은 자네들이 나를 위해 그에 대한 보증인이 되어 주길 바라네. 그러나 이번의 보증은 전번과는 다른 거야. 저번에는 그는 내가 틀림없이 있으리라는 것을 재판관에게 보증했지만 이번에는 자네들이 나는 머물러 있지 않고 떠나 버린다는 것을 그에게 보증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야. 그래야만 나의 죽음을 보아도 그는 덜 괴로워할 것이며, 내 시체가 화장되거나 매장되는 것을 보더라도 슬퍼하지 않을 걸세. 나는 내가 무서운 일을 당하는 것을 보고 그가 슬퍼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며 또한 매장할 때에 소크라테스를 입관시키자든지, 무덤까지 소크라테스를 따라가자든지, 소크라테스를 묻자고 말하는 것을 바라지 않네. 바른 말을 하지 않는 그 자체가 나쁠 뿐 아니라 영혼에도 나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네. 친애하는 크리톤, 기운을 내게. 그리고 자네는 오직 내 육체를 묻는데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게. 그리고 관계에 따라 자네가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묻어 주게.”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마치고 일어나 목욕을 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크리톤은 그를 따라 들어가며 우리들에게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대로 있으면서 지금까지 토론해 온 것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슬픔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마치 우리들의 아버지와 같았는데 이제 우리는 그를 여의고 여생을 고아처럼 지내게 된 것입니다. 그가 목욕을 마치자, 그의 자식들이 그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에게는 어린 아들 두 명과 장성한 아들이 한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집안의 부인들도 왔습니다. 그는 크리톤이 있는 자리에서 그들과 몇 마디 말을 나누고 몇 가지 지시를 했습니다. 그들을 보낸 다음에 그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가 방안에 있는 동안에 상당한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이제 해가 질시간이 가까워졌습니다. 목욕을 마치고 나와서 그는 다시 우리들과 함께 앉아 있었지만 말은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곧 11집행 위원의 하인인 간수가 들어와서 그의 옆에 서서 말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저는 당신이 이 곳에 온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고상하고 가장 점잖으며 가장 훌륭한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에게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처럼 화를 내지는 않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제가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여 독약을 마시라고 명령하면, 당신도 아시다시피 비난을 받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러면 안녕히 가십시오. 운명의 짐을 가볍게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무슨 심부름을 왔는지 아실 테니까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을 마치고 간수는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서 나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간수를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자네도 잘 있게. 나도 편안한 마음으로 가겠네.”
그리고 나서 우리들을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참 좋은 사람이야. 내가 감옥에 들어온 이후로 그는 늘 나를 찾아와서 때때로 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네. 그는 참으로 나에게 친절했어. 그리고 보게, 지금도 나를 위해서 진심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가. 크리톤, 우리는 그간 하라는 대론하지 않으면 안 되네. 자, 그럼 독약이 준비되었거든 잔을 가져오라고 하게.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면 담당자에게 준비 하라도 하게.”
크리톤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태양은 아직도 산마루에 있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간이 훨씬 지난 다음에야 약을 마신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네. 약을 마시라는 통고를 받은 후에도 먹고 마시며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즐기네. 서두르지 말게. 아직도 시간은 충분하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알았네, 크리톤. 자네가 지금 말한 사람들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당연하겠지. 그들은 지연시킴으로써 얻은 것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나 나는 그들이 예를 따르지 않는 것이 올바른 일일세. 나는 독약을 조금 늦게 마셨다고 해서 무슨 이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네. 이미 죽은 목숨을 조금 더 살려두고 아까워하면 내 눈에도 웃음거리로밖에는 보이지 않을 걸세. 제발 내 말대로 하게. 내 말을 거부하지 말게.”
크리톤은 옆에 서 있는 하인에게 신호를 했습니다. 하인은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에 독배를 든 간수와 함께 돌아왔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나의 좋은 친구여, 자네는 이 일에 경험이 많을 테니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주게.”
간수는 대답했습니다. “다리가 무거워질 때까지 걷기만 하면 됩니다. 다리가 무거워지면 누우십시오. 독약이 효과를 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말을 마치자 그는 잔을 소크라테스에게 주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태연하고 온화한 태도였고 조금도 두려운 빛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안색이나 표정이 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눈을 크게 뜨고 간수를 바라보며 잔을 들고 말했습니다.
“이 잔에서 어떤 신에게 헌 주를 하면 안 될까요? 됩니까, 안 됩니까?”
간수는 대답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우리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양만을 준비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알았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가는 역행이 편안하도록 신에게 기도는 드릴 수 있을 테고 또 기도를 드려야만 해. 이것을 기도드리자. 내 기도대로 이루어지이다.”
그리고 나서 잔을 입술에 대고 그는 아주 태연하고 유쾌하게 독약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우리들은 대부분 슬픔을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독약을 마시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또 독약을 다 마셔 버린 것을 보고 나서는 우리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습니다. 그래서 나는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벗과 헤어지는 나 자신의 불운을 생각하고 울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제일 먼저 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크리톤은 눈물을 억제할 수 없게 되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고, 나는 그 후에 울음을 터뜨렸으니까요. 그런데 그 순간에 줄곧 울고 있던 아폴로도로스가 큰 소리로 처절한 통곡을 하기 시작해서 우리들은 모두 마음에 약해졌습니다. 소크라테스만이 침착하더군요.
“이 이상한 울음소리는 무언가? 내가 여자들을 내보낸 것은 주로 이와 같이 부끄러운 행동을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네. 나는 사람은 조용히 죽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야. 그러니 조용히 참게.” 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부끄러워서 눈물을 삼켰습니다. 그는 이리저리 걸어 다니다가 다리의 힘이 없어지기 시작한다고 말하고는 드러누웠습니다. 간수가 가르쳐 준대로 한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에게 독약을 준 간수는 가끔 그의 다리와 발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에 간수는 그의 발을 세게 누르면서 감각이 있느냐고 소크라테스에게 물었습니다. 그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다리를 눌러보고 차츰 위로 올라가면서 눌러보더니 간수는 몸이 차가워지고 굳어진다고 시늉으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 자신도 이것을 느끼고 말했습니다. “독이 심장에까지 미치면 마지막이네.” 하반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얼굴을 가린 것-그는 얼굴을 가리고 있었습니다-울 들치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오스(아스클레피오스는 의학의 신. 소크라테스가 닭 한 마리를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빚졌다고 한 말에 대해서는 세 가지 해석이 있다. 첫째는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에게 닭 한 마리를 헌납하라고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스클레피오스라는 실재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고, 셋째는 순전한 농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기억해 두었다가 빚을 갚아 주겠나?” 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꼭 갚아 주겠네. 더 할 말이 없나?” 라고 크리톤이 말했습니다.
이 물음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그러나 1, 2분 후에 몸이 약간 움직였습니다. 간수가 얼굴을 가린 것을 벗겨 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눈은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크리톤은 그의 눈을 감기고 입을 다물게 했습니다.
에케크라테스, 이것이 우리의 벗의 최후였습니다. 이 벗에 대해서는 나는 진심으로 당대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소크라테스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올바르고 가장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