톨스토이 인생론
서론(序論)
본론(本論)
1. 인간 생활의 근본적 모순
2. 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
3. 현대인에게 나타난 의식의 분열
4. 인생에서의 참된 생활의 탄생
5.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의 가능성
6. 인간 생활의 법칙
7. 합리적 의식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8. 사랑의 감정
9. 육체의 죽음과 죽음의 공포
10. 끝없는 생명의 움직임
결론(結論)
톨스토이 생애에 대하여
서론(序論)
여기에 물방앗간을 생활의 유일한 수단으로 하고 있는 어떤 사나이를 상상해 본다. 이 사나이는 가루 방앗간의 아들이며 손자이므로 가루를 빻는 데 제분기의 각 부분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잘 알고 있다. 이 사나이는 기계학 따위는 조금도 모르나, 가루를 훌륭하게 잘 빻도록 제분기의 각 부분을 썩 잘 다루어서 그것으로 밥을 먹고 살아간다.
그런데 우연한 일로 이 사나이가 제분기의 구조에 관해서 생각하게 되고, 기계학에 관해서 막연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그는 빙빙 돌아가는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고 그런 것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밀을 넣은 깔대기에서 절구통으로, 절구통에서 축(軸)으로, 축에서 바퀴로, 바퀴에서 둑으로, 물로, 관찰을 진전시킨 결과 마침내 모든 것이 둑과 시내(川)에 있음을 그는 똑똑히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 사나이는 이 발전을 매우 기뻐하면서, 그로부터는 이전처럼 빻아 나오는 가루의 성질을 비교 연구해서 절구를 오르내리거나, 절구통을 닦거나, 피대(皮帶)를 조이거나 늦추거나 하는 대신 시내의 연구에 손을 댔다. 그런데 그의 물방아는 아주 고장이 나버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잘못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들과 언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시내의 연구만을 계속했다. 이와 같이해서 그는 시내만을 너무 오래 열심히 생각하여 그의 사고방식이 옳지 못함을 말해주는 사람들과 언쟁하기에 정신이 없어서 마침내는 시내가 결국 물방아 그 자체라고 굳게 믿어 버렸다.
그의 생각이 잘못임을 지적해 주는 모든 증명에 대해서 그 사나이 같은 제분업자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어떠한 물방아라도 물이 없이는 제분할 수 없다. 따라서 물방아를 알자면 물을 대는 방법을 알고, 그 흐름의 힘과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 즉, 물방아를 알자면 시내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고.
그 고찰에 있어서 논리적으로는 물방앗간 주인이 옳다. 그러나 미망(迷妄)으로부터 그 사나이를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체로 사색(思索)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색 그 자체보다도 사색이 차지하는 위치라는 것, 즉 효과적으로 사색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무엇을 사색하고 다음에 무엇에 관해서 사색할 것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 이것을 그에게 보여주는 데 있고, 또 합리적 활동이 불합리적인 활동에 비해서 나은 이유는, 그저 합리적 활동은 그 사색을 세상의 중요성의 정도에 비추어서 질서 있게 배분하는, 즉 여하한 사색이 첫째이고, 둘째며, 셋째이고 열째여야 하는가를 아는 점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런데 불합리한 활동은 이 질서를 갖지 않는 사색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더욱이 그에게는 이 순서의 결정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사색을 촉진시키는 바로 그 목적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라 함도 아울러 설명해 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모든 사색의 목적은 하나하나의 사색이 합리적이 되도록 배열되어야 하는 그 순서까지도 결정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일체의 사색에 공통된 목적과 관계없는 사색은 그것이 아무리 논리적이라 하더라도 어리석은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물방앗간 주인이 목적은 좋은 가루를 빻은 데 있다. 그리고 이 목적은 그가 그 목적을 놓치지 않는 한, 그를 위해서 절구나, 바퀴나, 둑이나, 시내에 관한 그의 사색의 명확한 순서나 배열을 결정할 것이다.
그런데 사색에 대한 이러한 관계가 없는 이상, 물방앗간 주인의 사색은 그것이 아무리 아름답고 논리적이라 할지라도 그 근본이 그릇된 것이고, 우선 무익한 것이다. 말하자면 키이파 모키예 치(고골리 작 '죽은 영혼'에 나오는 인물)의 사색, 만약 코끼리가 새처럼 알 속에서 생겨 나온다면, 코끼리 알의 껍질 두께는 얼마만큼 되어야 하느냐를 생각하는 따위와 비슷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서는, 인생에 관한 현대 과학의 사색은 마치 이와 같은 것이다.
인생은 이 사나이가 연구하고 있는 물방아 같은 것이다. 물방아는 가루를 잘 빻기 위해서 필요하고, 인생은 인생을 좋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탐구의 목적을 일각이라도 포기하게 되면 반드시 벌을 받고야 말 것이다. 만약 인간이 그것을 버린다면 그의 사상은 반드시 그 정당성을 잃고, 저 코끼리가 알을 까는데 어떠한 화약이 필요할까 따위를 생각하는 키이파 모키예 치의 사색과 비슷한 것이 될 것이다.
인간이 인생을 연구하는 것은 그저 그것을 보다 나은 것으로 하기 위해서만이 하는 것이다. 지식의 길에서 인류의 진보를 추진(推進)시킨 사람들은 이러한 태도로 인생을 연구했던 것이다. 이들 참된 인류의 스승이나 은인들과 나란히 하여 사색의 목적은 제쳐놓고, 그 대신 생명은 무엇에서 생기는가, 물레방아는 무엇이 원인이 되어 도는가, 하는 따위를 연구 분석하고 있는 인간들이 예나 지금이나 항상 그치지 않는다. 어떤 자들은 그것이 물 때문이라 단정하고, 어떤 자들은 그것이 기계의 구조에 의한다고 단정한다. 이같이 해서 이론은 점점 비등해지고, 가장 요긴한 제목으로부터 더욱더 멀리 떨어져 마침내는 전혀 다른 제목으로 바뀌고 마는 것이다.
유태인과 기독교도와의 논쟁에 관해서 이런 옛이야기가 있다. 유태인의 구차스러운 논법에 기독교도는 맨손으로 유태인의 대머리를 철석 소리 나게 갈기고는 재빨리 지금 소리는 어디서 나왔느냐? 손바닥에선가? 대머리에선가? 하는 문제는 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에 관한 논쟁은 해결할 수 없는 다른 문제가 되어버렸다.
어디에서든지 이와 비슷한 일은 아주 옛적부터 사람들의 참된 지식과 함께 인생 탐구의 문제에 관해서도 생기고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오랜 옛 시대부터 생명은 무엇에서 발생하는가? 비물질적인 본원(本源)에서인가? 여러 가지 많은 물질의 결합에선가? 이러한 문제에 관한 논의는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러한 논의가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언제 끝날 것인가 하는 예측도 전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왜냐하면 결국 일체의 논의의 목적은 제쳐놓고, 인생의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인생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것이 말로써 이해되는 것은 벌써 인생이 아니라 생명은 무엇에서 생기느냐라든가, 생명에 수반되는 것은 무엇이냐 하는 따위의 것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과학적 저작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회화에서까지 생명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는, 우리들 모두가 알고 있는 저 생명―내가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여러 가지 고통, 내가 원하거나 바라는 갖가지 기쁨이나 쾌락에 의해서 내게 인식되고 있는 생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지 어떤 물리적 법칙에 의한 우연한 장난에서 생긴 따위의 것이나, 혹은 그 내부에 신비로운 원인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생긴 생명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오늘날 "생명"이라는 낱말은 생명의 근본적 특질, 즉 고통과 쾌락의 느낌이나, 선에 대한 그리움이 부족한, 무엇인지 계쟁적인 것으로 되어있다.
"La vie est I'ensemble des founctions, qui resistant a la mort. La vie est I'ensemble des phenomenes, qui se succedent pen dant un temp slimite dams etre organise."
(생명이란 죽음에 반항하는 여러 기능의 결합이다. 생명이란 유기체 내에 있어서 어떤 한정된 시간,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현상의 결합이다.)
"생명이란 일반적이면서도 연속적인 분해와 결합의 이중작용이다." "생명이란 활동하는 유기체이다.""생명이란 유기물의 특수 활동이다." "생명이란 외부에 대한 내부관계의 순응이다."
이와 같은 모든 정의에는 반드시 따르기 마련인 부정확성이나 중복(重複)은 고사하고라도, 이러한 정의의 본질은 그 어느 것도 마찬가지다. 즉 거기에 정의되어 있는 것은 만인이 똑같이 "생명"이라는 말에 의해서 이의없이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및 기타 현상에 수반되는 일종의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정의의 대부분은 지금 구성중(構成中)인 결정(結晶)의 작용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또 어떤 정의에 적용하는 것은 발효(醱酵)와 부패의 활동이며, 그리하여 이와 같은 모든 정의에 적응하는 것은 선도 악도 모르는 육체의 개개 세포의 생명이다. 결정체나, 원형질이나, 원형질 핵이, 나의 육체 및 다른 육체의 세포 따위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과정을 가리켜 사람들은 나의 체내에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경향의 인식과 나눌 수 없도록 결합되어 있는 것과 동일한 용어로 "생명"이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어떤 조건을 들어 마치 인생 그 자체인 양 논의함은, 시내 그 자체를 마치 물방아처럼 논의함과 매일반이다. 이 종류의 논의도 혹은 어떤 일을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일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논의는 그들이 논구(論究)하려는, 바로 그 제목에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논의에서 끄집어낸 인생에 관한 결론은 모두 애매한 것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말은 극히 간단명료한 것이며, 누구든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만인이 그 뜻하는 바를 이해하고 있으므로 우리들은 항상 그것을 만인이 이해하고 있는 뜻으로 쓸 의무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생명이라는 말이 만인에게 이해되는 것은, 그것이 다른 용어나 관념에 의해서 매우 적절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이 말이 설사 다른 모든 것까지라고는 못하더라도, 많은 관념을 낳게 하는 근본적 관념을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관념에서 여러 가지 이론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들은 무엇보다 먼저 이 관념을 그 누구에게도 의의가 없는 중심적 의의에 있어서 채용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가장 중요한 일이 내게는 어쩐지 생명의 관념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논자 측으로부터 망각되어 있는 것 같이 여겨진다. 그래서 당초에 그 중심 의의를 떠나서 꾸며진 생명의 근본 관념이 그 것에 관한 논의에 의해서 더욱더 그 근본인 만인에게 인정되어 있는 중심 의의로부터 멀어지고, 마침내는 그 본 사상을 버리고 아주 다른, 그것에 합당치 않은 의의를 가지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원래 그것을 기점(基點)으로 그린 형태의 다름 아닌 바로 그 중심이 저버려지고, 새로운 점으로 이동되어 버리는 따위의 일이 일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생명의 세포에 어떤 원형질이 있는가, 혹은 더 하등(下等)의 무기물이 있느냐 하는 따위에 관해서 쉴 새 없이 논쟁하고 있다. 그러나 논쟁을 벌이기 전에 우리들은 우선 다음 한 가지 일을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우리들에게는 과연 생명의 관념을 세포에 얼버무려버릴 권리가 있느냐 없느냐이다.
예컨대 우리들은 말한다. 세포 속에는 생명이 있다. 세포를 생명이라 한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이라는 근본 관념과 세포 속에 있는 생명의 관념은 전혀 다른 것일 뿐더러, 서로 일치하지 않는 두 개의 관념이다. 한쪽의 관념은 다른 쪽의 관념을 배격한다. 나는 나의 전 육체가 남김없이 세포로 이루어져 있음을 시인한다. 이들 세포는 내가 들은 바로서는 나와 같은 생명의 본질을 가지며, 나와 같은 생물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를 생명 있는 것으로서 인식함은, 그저 내가 나를 이루고 있는 일체의 세포를 가진 나라는 것을 나누기 어려운 한 개의 생물로 의식하고 있으므로서다. 듣건대 나라는 것이 몸 전체는 골고루 산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그 무엇에 생명의 본질을 돌릴 것인가, 세포에게? 나자신에게? 만약 세포는 생명이 있는 것이라고 내가 인정한다면, 나는 생명의 관념으로부터 나의 생명의 중요한 기호(記號)―다른 한 개의 생물로서 의식하는 일―를 제거해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약 내가 나를 독립된 한 개의 존재로서의 생명이 있음을 인정한다면, 나의 전 육체가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으면서도 그 의식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세포에 대해서 생명의 본질을 돌릴 수 없음도 역시 분명한 일이다.
혹은 내가 살아 있고, 나의 내부에 세포라고 불리우는 생명 없는 세편(細片)이 있는 것일까? 혹은 또 산 세포의 집합이 있고, 나의 생명의 의식은 생명이 아니라 단순한 환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첫째로 우리들은, 세포 속에는 우리들이 부리즌이라고 부르는 물건이 있다고는 하지 않고 "생명"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들은 "생명"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생명"이라는 말로써 이해하는 것을 일종의 미지의 X가 아니라 충분히 한정된 양(量), 우리들 모두가 다 같이 인정하고 있는, 게다가 그저 자기 자신을 기본으로 해서 자기와는 나눌 수 없는 유일한 육체를 가지고 있는 자기라는 것을 의식으로서 알고 있는 양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관념은 나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세포에는 적합하지 못한 것이다.
어떠한 연구나 관찰에 종사하더라도 그 관찰을 표현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용어 하나하나는, 만인에게 다 같이 의의 없이 이해되는 것을 의미해야 할 것이로되, 자기에게는 통하나, 만인에게 이해되고 있는 근본 관념과는 도저히 일치하기 어려운 따위, 그러한 관념을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약"생명"이라는 용어가 마치 세포와 세포로 이루어져 있는 동물의 경우와도 같이 어떤 사물 전체의 본질마저도, 또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의 전혀 다른 본질마저도 차별 없이 의미하도록 무턱대고 써도 상관없는 것이라면, 다른 용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쓰여도 괜찮을 것이다. 예컨대 모든 사상은 언어에서 나오고, 언어는 개개의 문자에서, 문자는 선(線)에서 나온 것이므로, 선을 긋는 것이 즉 사상을 말하는 것이고, 따라서 선은 사상이다라고 해도 무방하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는 노릇이다.
예를 들어 과학계에 있어서, 가장 흔한 현상으로서는 물리적 힘, 기계적 힘의 작용에서 생기는 생명의 발생에 관한 논의를 듣거나 읽거나 하는 일이다.
그리고―글쎄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곤란하지만―의견이면서도 의견이 아니고, 역설(逆說)이면서도 역설이 아닌 오히려 한갓 농담이고 수수께끼인 일을 고수(固守)하고 있는 것이 과학자의 대다수가 아닐까?
생명은 물리적 및 기계적 힘, 우리들이 그저 생명이라는 관념에 대해서만 물리적 기계적이라고 불러온 물리적 힘의 작용에서 생기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생명"이라는 말은 분명히 그것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관념으로 오용(誤用)되어 그 본래의 뜻에서 더욱더 멀어졌으므로, 그 중심적 의미에서 전연 분리되어서 우리들의 해석에 의해서는 도저히 생명이 있을 리 없는 곳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즉 원의 둘레의 바깥에 중심이 있는 원이나 구(球)가 있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나로서는 악(惡)에서 선으로 향하는 노력으로서 밖에는 상상할 수 없는 생명이 내가 선도 악도 볼 수 없는 영역(領域)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생명에 대한 관념의 중심이 완전히 바꿔져 버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생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에 관한 연구를 음미(吟味)할 때에 거기에는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관념이 어느 것 하나라도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안다. 내가 보는 새로운 관념이나 용어는 과학적 용어로서는 제각기 극히 보편적(普遍的)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현존의 여러 관념과는 아무런 일치점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생명의 관념은 만인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해석되고, 그로부터 끄집어낸 여러 가지 관념도 역시 보통 해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한 것은 거기에 상응(相應)하는 새로운 말이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될 새로운 임의적이고 독단적인 결정의 관념으로 되어있다.
인간의 언어는 과학적 연구에 따라서 점차 밀려 나와서 현존하는 사물이나 관념을 표현하는 수단인 언어 대신에 과학적 세계어가 도사리고 있다. 더구나 이 세계어가 참된 세계어와 다른 점은, 참된 세계어는 일반적인 언어로 현존의 사물과 관념을 부르는 데 반하여, 과학적 세계어는 현존하지 않는 언어로 현존하지 않는 관념을 부르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과 사람의 정신적 교류(交流)를 도모하는 유일한 수단은 언어다. 그리고 이 교류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그 한마디 한마디가 만인 사이에서 그것에 적응한 정확한 관념을 틀림없이 깨우치도록 그 언어를 써야한다. 만약 언어를 닥치는 대로 쓰거나, 그것에 제멋대로의 뜻을 내포시키든가 하는 일이 허용된다면, 오히려 입을 봉하고 모든 기호로써 표시하느니보다 못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도 경험이나 관찰을 무시하고, 단순한 이성의 결론만으로써 세계의 법칙을 결정하는 일이 그릇되고 비과학적인 방법이라는 것, 즉 참된 지식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에는 의견이 같다. 그러나 만약 경험이나 관찰만으로써 세계의 현상을 연구하거나, 동시에 그러한 경험이나 관찰에 있어서 만인에게 공통되는 근본적 관념이 아니라, 조직적인 관념에 의해서 지도되거나, 이러한 경험의 결과를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따위의 언어로 기재한다든가 하면, 그것은 더 한층 나쁜 일이 아닐까? 아주 훌륭한 약국이라도 만약 약병의 레텔을 내용과는 관계없이 약제사의 제멋대로 붙여놓는다면 가장 큰 해독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게 말할 것이다. 과학은 인생의 총화(總和)의 연구를 문제로 삼지 않는다. (그 속에는 의지, 선에 대한 희구 및 정신계도 포함된다) 그것은 단순히 인생이라는 관념에서 그 실험적 연구에 속하는 여러 가지 현상을 배제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고.
물론 그것은 가장 옳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현재 과학적인 기술(記述)에 있어서는 그것이 전혀 그렇지 않음을 알고 있다. 만약 무엇보다 먼저 생명이라는 관념이 그 중심 의의, 즉 만인에 이해되고 있는 의의에 있어서 인정되고, 다음에 과학이 외적 관찰에 속하는 방면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측면을 이 관념에서 배제하고 나서 자기가 독특한 연구 방법을 가진 이 일면에서만이 현상을 자세히 점검하는 것임이 분명히 한정된다면, 그것은 훌륭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만 되면 사정이 전혀 바뀌어져 버린다. 그렇게 되면 과학이 차지할 지위도, 과학을 기초로 해서 우리들이 도달해야 할 결과도 전혀 별다른 것으로 될 것이다. 우리는 사실을 말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을 감춰서는 안된다. 대관절 우리들은 실증과학(實證科學) 연구자 대다수가, 단순히 생명의 일면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연구하고 있다고 깊이 생각하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천문학 기계학 물리학 화학 기타 일반의 과학은, 총체적으로도 개별적으로도 제각기 속하는 일면에 있어서 생명을 연구하고 있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일반적으로는 생명에 관한 어떠한 결과에도 도달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저 저 야만시대, 즉 불명(不明) 부정(不定)의 시대에 있어서의 이러한 과학의 어떤 것은 자기의 처지에서 생명의 모든 현상을 포착하려고 시도하고, 스스로 새로운 관념이나 언어를 발명해서 혼란에 빠졌다. 즉 천문학이 점성술(占星術)이었던 시대, 화학이 연금술(鍊金術)이었던 시대가 그것이었던 것이다. 헌데 오늘날에도 그와 같은 일이 실험적 진화론(進化論)의 경우에 생기고 있다. 이 과학은 생명의 한 면 내지 여러 면을 검토하면서 그것을 생명 전체의 연구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전공의 과학에 대해서 이같이 그릇된 견해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연구가 그저 생명의 어떤 측면만에 한정되어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생명 전체가 그 모든 현상과 더불어 외적 실험 방법에 의해서 연구되리라고 단언하고 있다. "만약"하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들에게는 심령(心靈)이 (그들은 자기의 세계어가 이토록 애매한 언어임을 기뻐한다) 아직 미지(未知)라 할지라도 끝내는 알려질 때가 올 것이다. 즉 바꾸어 말하자면, 만약 어떤 일을 아주 오랫동안 열심히 그 일면에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사물을 모든 면에서, 아니 그 중심에서조차도 볼 수 있게 될 것이다라고.
미신적 광신(狂信)으로서만이 설명할 수 있을 이런 기괴(奇怪)한 학설이 얼마나 놀라운 것이라는 것과, 그것은 훌륭히 존재하면서 일체의 야만이고 광신적인 교의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사상적 활동은 그릇되고 공허한 방향으로 돌리면서 그 파괴적 영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진지한 연구가도 거의 불필요한 연구에 그의 생애를 바쳐서 망하고, 사람들의 물질력도 그것이 필요 없는 방향으로 나가서 멸시되고, 또 젊은 시절도 인류에 대한 최고의 봉사로서 모셔진 키이파 모키예 치와 같은 가장 무용한 활동으로 지향되어 망해 가는 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말하고 있다. 과학은 모든 방면에서 생명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라고. 문제는 그 한 가지 일, 즉 모든 사물에는 원(圓)에 무수한 반경이 있는 것처럼 무수한 측면이 있다는 점과, 따라서 그 측면을 모조리 연구해 버린다는 것은 도저히 할 수 없는 이야기이므로, 사물의 탐구에 있어서는 무엇보다 우선 어느 면에서부터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고, 보다 필요한가, 어느 면으로부터 하는 것이 보다 중요하지 않고, 보다 필요하지 않는가, 이것을 아는 일이 급선무이다. 어떤 사물에 모든 방면으로부터 동시에 다가갈 수 없는 것처럼, 모든 방면으로부터 한꺼번에 인생의 여러 현상을 연구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순서가 결정된다. 그리고 그 순서에 바로 모든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순서는 그저 인생에 대한 이해에 관해서만이 얻어지는 것이다.
오직, 인생에 대한 올바른 이해만이 일반 과학에 대해서, 특히 개개의 과학에 대해서 올바른 의의와 방향을 주고, 그리고 인생에 대한 그의 경주에 따라서 그것을 분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관념이 우리들 만인의 내부에 심어져 있는 것 같은 것이 아니라면, 과학 그 자체도 거짓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인생관이 과학이라고 인정할만한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학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과학이 무엇이며, 무엇이 과학이 아닌가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리하여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인생에 관한 견해를 밝혀야 한다.
나는 여기에 나의 모든 사상을 기탄없이 진술하기로 한다. 우리들은 모두 거짓된 이 실험 과학의 신념이 근본적으로 독단론임을 알고 있다.
물질과 그 에너지가 존재한다. 에너지는 운동한다. 기계적 운동은 분자운동(分子運動)으로 옮아가고, 열전기 신경 뇌의 운동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모든 생명의 현상은 예외 없이 에너지의 관계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은 미(美)이며, 단순하며, 명료하며, 특히 편리하다. 그런데 만약 우리들에게 이토록 바람직하고, 우리들의 생명을 단순하게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그것을 생각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나의 대담한 생각이지만, 실험 과학에서 활동의 에너지와 정열의 대부분은 이토록 편리한 관념을 확증하기에 필요한 일체의 것을 생각해 내려는 염원에서 생겨나오는 것이다.
과학의 이러한 모든 활동에는 생명의 모든 현상을 연구하려는 염원보다 그 근본적 독단론의 정당성을 증명하려는 끊임없는 염려가 더 많이 보인다. 무기물(無機物)로부터 유기물(有機物)의 발생을 설명하고, 유기체의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정신 활동을 설명하려는 시도에는 얼마나 많은 힘이 낭비되고 있는 것일까?
무기물은 유기물로 변화하지 않는다. 바다 밑바닥을 찾아보라. 우리들은 거기에서도 핵이라고 부르는, 원생동물을 찾아볼 것이 아닌가!
거기에도 그러한 변화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들은 그것이 발견될 것을 믿어 마지않는다. 하물며 몇 세기의 무한한 세월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 우리들의 신념으로서는 있어야할 것인데도 현실에는 없는 모든 것으로서 거기에 떠맡길 수 있음에 있어서랴.
유기적 활동에서 정신적 활동에의 추이(推移)라는 것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모든 지력(知力)과 노력을 기울여 아쉬운 대로 그 가능성이나마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인생에 관계없는 것, 즉 생명의 기원(起源)에 대한 의문(그것이 정신 자재 설이든, 활력론이든, 혹은 다른 상상적인 세력이든 간에 관계없지만)에 대해서의 논의는 인간에게서 인생의 중요한 문제, 즉 이것이 없으면 인생에 대한 관념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않는 문제를 옹폐(壅蔽)해 버렸다. 그리고 조금씩이 과학자라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또 매우 황급히 걸어다니기까지 하지만, 자기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 것인가를 잊고 있는 것 같은 인간의 생태에 이르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과학이 현재 취하고 있는 방향에서 주어진 거대한 결과에 일부러 눈을 감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떠한 결과라 한들 그릇된 방향을 수정할 수는 없지 않는가? 가령 불가능한 일은―오늘날의 과학이 생명에 관해서 알려고 원하는 일이나, 단정을 내리고 있는 일 따위, (과학 자체도 그것을 믿고 있지는 않지만)―그러한 모든 일이 밝혀지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즉 모든 것이 분명히 된다. 해처럼 분명히 된다고 가정하자. 어떤 순응(順應)의 길을 거쳐서 유기물이 무기물질로부터 생기는 것이 분명하다면, 또 어떻게 해서 물질적 에너지가 감정 의지 사상으로 변화되는 가도 분명하고, 이러한 일은 모두 중학생만 아니라 마을의 국민학교 어린이들까지도 빤히 알고 있는 것이라고 가정하자.
나도 이러이러한 사상 감정은 이러이러한 운동에서 생기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어떻단 말인가? 대체 나는 이 사상이든 저 사상이든, 사상을 나 자신의 마음속에 환기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운동을 지도할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대체 나는 나 자신이나 남의 마음에 어떠한 사상 감정을 일으킬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해결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손도 대지 못한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에서는 과학자들이 난처해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 문제의 해결은 그들에게는 지극히 간단한 것같이 생각된다. 마치 아무리 어려운 문제의 해결이라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간단하게 여겨지는 것처럼, 인생을 어떻게 정리(整理)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 해결도 그것이 우리들의 수중에 있는 한 과학자들에게는 지극히 간단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인생은, 사람들 하나하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도록 정리해야 한다. 과학은 그 방법을 마련한다. 첫째로는 요구의 만족을 올바르게 배분하기 위해서, 둘째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쉽고 풍부하게 생각해내서 모든 요구가 쉽게 만족되게 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면 요구란 무엇이냐? 요구의 한도는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묻는다면, 이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역시 간단하게 대답한다. 과학, 과학이 있는 것이 그것 때문이다. 과학은 많은 요구를 육체적 지적 미적 내지 도덕적으로까지도 분류해서, 어떠한 요구가 어떠한 한도에 있어서 옳고, 어떠한 요구가 어떠한 한도 안에서 옳지 못한가를 분명히 결정하는 것이라고.
과학은 시간과 더불어 그것을 결정해 갈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요구의 옳고 그릇됨을 결정하는 표준에 관해서 묻는다면, 이것에 대해서도 그들은 용감하게 대답할 것이다. 요구를 연구함으로써 라고. 그러나 요구라는 말은 그저 두 가지 뜻밖에 없다. 그 하나는 존재의 조건인데, 각 사물의 이 존재 조건은 무한하므로 그 조건을 모조리 연구해 버릴 수는 없다. 또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행복의 요구로써, 그것은 그저 의식에 의해서만이 인정되고 결정되는 것이므로 실험 과학에 의해서 연구될 가능성은 더욱더 적은 것이다.
하기야 세상에는 틀림없이 과학이라고 불리우는 것 같은 제도라고나 할까, 사람들이나 학자들의 단체라고나 할까, 희합이라고나 할까, 그러한 것들은 있다. 과학도 그러한 것들만은 시간과 더불어 결정해 나갈 것이다.
과연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모두 메시아 역할을 과학이 맡아하고 있는, 바꾸어 말하면 메시아의 왕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이러한 설명으로써 무엇인가를 설명케 하기 위해서는 유태인이 메시아를 믿고 있듯이, 무조건 과학의 독단을 믿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과학의 사도(使徒)들은 그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양자가 다른 점은 그저 정통 유태교도는 메시아를 신의 사자(使者)라고 믿으므로 그가 그 힘으로써 삼라만상을 교묘하게 정리하리라는 것을 믿을 수 있으나, 과학의 사도들은 문제의 본질상, 요구의 외면적 연구에 의해서 인생에 관한 유일한 주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점이다.
본론(本論)
1. 인간 생활의 근본적 모순
모든 인간은 오직 자기의 생활을 잘하고자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다. 자기의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를 느끼지 못할 때, 그때 인간은 자기를 살아있는 것으로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자기의 행복을 바라지 않고서는 인생을 생각할 수 없다. 개개인에 있어서 산다는 것은, 행복을 바라는 것, 즉 행복을 얻는 일이다.
인간은 오직 자기 자신 속에만, 자기 개인 속에서만 생명을 느낀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무엇보다 자기가 바라는 행복은 오로지 자기 혼자만의 행복인 것 같이 생각된다. 그에게 실제 살아있는 것은 자기 혼자만인 것처럼 생각하게 된다. 다른 존재의 생활은 자기의 생활과는 전혀 다른 것 같이 느낀다. 즉 그저 생명 비슷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생활을 그저 관찰할 따름이다.
그리하여 이 관찰을 통해서 그것들이 살아있음을 알 따름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생활에 관해서는 자기가 그들의 일을 한번 생각해 보려고 생각할 때만 알게 되는 데 지나지 않으나, 자신의 경우에는 자기가 살아있음을 항상 알고 있으며, 단 일순간이라도 그 의식을 그칠 수는 없다. 따라서 만인에게 참된 생명으로서 생각되는 것은 오직 자신의 생활뿐이다.
그에게는 그의 주위에 있는 다른 존재의 생활은 그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조건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설사 그가 남에게 악을 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남의 고뇌를 보는 일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해치기 때문인 것이다. 또 가령 그가 남에게 행복을 바란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에게 행복을 원할 때와는 전혀 다르다. 즉 그가 선을 바라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 좋게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다른 존재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을 더해 주기 때문에 불과하다. 인간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일은 오직 그가 자기의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 생명의 행복, 즉 자기 한 몸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인간은, 오직 자신의 행복 달성을 위해서 노력하면서도 그 행복이 다른 존재에 의하는 것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다른 존재를 관찰하고 연구할 때 인간은 그러한 모든 것이―인간도, 짐승마저도―생명에 대해서는 자기와 똑같은 개념(槪念)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존재의 각각은 그와 똑같이 오직 자신의 생명, 자신의 행복만을 느끼고, 자신의 생활만이 소중하고, 진정한 것이라 생각하고는 다른 일체의 존재의 생활은 그의 행복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따름이다. 또한 인간은 살아있는 것은 모두 자기와 마찬가지로, 항상 자기의 자그마한 행복을 위해서는 그와 같이 생각하고 있는 인간마저도 포함하는 다른 모든 존재보다 큰 행복은 물론, 그 생명마저 서슴지 않고 빼앗을 각오가 있어야 함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러한 것을 알면 인간은 본심이 아니면서도 다음과 같은 상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다. 즉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그러나 그는 사실이 틀림없이 그러함을 알고 있다 ―한 개나 열 개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무수한 모든 존재가, 각자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주야로 자기 일신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를 없애 버리려 한다고 상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 일을 알게 되면 인간은 그가 인생을 이해하는데 유일한 열쇠로 되어있는 그의 개인적 행복이 그저 쉽사리 얻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게서 빼앗겨지리라 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이 오래 살면 살수록 이 판단은 경험에 의해서 더욱더 확인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서로 뜯어먹으려 하고 있는(개성의 결함으로 이루어진 자기도 참여하고 있는) 이 세상의 생활이 자기에게는 행복이 될 수 없을 뿐더러, 반드시 큰 불행임에 틀림없으리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개성과 행복을 위해서는 조금도 두려워할 것 없이 다른 개성을 상대로 해서 멋지게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놓인다 하더라도, 이성과 경험은 곧 그가 개인의 열락(悅樂)이라는 형태로서 인생에게서 빼앗아 가지는 그러한 행복의 유사품은 결코 행복이 아니며, 다만 열락에는 따라다니기 마련인 고뇌를 한층 강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 그에게 주어진 행복의 견본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 줄 것이다. 인간은 오래 살면 살수록 열락은 점점 그 정도가 감소되고 권태 포만 노고 고뇌가 점점 더 커져 감을 더욱 뚜렷이 알게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힘의 감퇴나 건강이 좋지 못함을 느끼기 시작하기도 하고, 남의 병, 노쇠나 죽음을 목격함에 이르러서는, 더구나 그것 하나에만 참되고 충실한 생명을 느끼고 있는 자기 자신의 생존조차도 시시각각, 이거일동이 쇠퇴 노쇠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또 그의 생명은 그와 싸우는 다른 존재라든가, 항상 더해 가는 고통에 의한 수 없는 파괴적 우연에 부딪히는 것 이외에도 그 자체의 특성에 의한 죽음으로의 끊임없는 접근, 즉 개성의 생명과 개성의 여하한 행복의 가능성마저도 여지없이 모조리 부셔버리고야 말 상태로의 접근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또 자기, 자기의 인격, 즉 그것 하나에만 그가 생명을 느끼고 있는 것이, 싸워서는 안 될 것을 상대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는데 지나지 않다는 것, 또 그는 그저 행복의 유사품을 줄 뿐이고, 의례히 고통으로 끝나기 마련인 열락을 찾아서 지탱할 수 없는 생명을 지탱하려고 하고 있을 따름임을 인정한다.
인간은 또 그 자신, 그 자신의 인격, 즉 그 하나만을 위해서 그가 행복과 생명을 원하고 있는 것이 행복도 생명도 가질 수 없는 것임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그가 갖고자 원하는 것―행복과 생명을 갖고 있는 것은 실로 그가 느끼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는, 그에게는 조금도 인연이 없는 존재―그 실재에 관해서 그는 알 수도 없으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 존재뿐이다.
그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것, 그에게 소용되는 오직 하나의 것, 그의 생각에는 그것만이 참되게 살아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 그이 인격, 마침내는 사멸되어 뼈가 되고 구더기가 될 것, 그것은 그가 아니라 그에게는 필요도 없고, 소중하지도 않고, 그가 살아있다고도 느끼지 않는 것, 끊임없이 싸우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존재물의 전 세계, 그것이야말로 참된 생명이며, 영원토록 남아서 살아나갈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게 유일한 것으로 느껴지는 이 생명, 그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인 생명은 어쩐지 일종의 불가능하고 애매한 것이 되고, 그의 밖에 있고, 그에게는 사랑스럽지 않으며 느껴지지도 않는 한 개의 알지 못할 생명이야말로 유일한 참된 생명이라는 것이 된다.
그가 감지(感知)할 수 없는 것, 그것만이 그가 혼자 가지기를 원하는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이 슬픈 기분으로 있는 나쁜 때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가지지 않고도 있을 수 있는 따위의 관념이 아니라, 오히려 틀림없고 뚜렷한 진리이며, 만약 이 사상이 한 번이라도 저절로 인간의 마음에 우러나든가, 한 번이라도 남에게서 설명을 받든가 하면 인간은 영원히 그것으로부터 떠날 수도 없으며 그 무엇으로서도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몰아낼 수 없을 정도의 것이 된다.
2. 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의 거짓
“인생의 모순은 옛적부터 인류에 의해서 인정되어왔다. 인류의 개척자들은 이 내적 모순을 해결할 인생의 정의를 사람들에게 계시(啓示)하였으나, 바리새의 무리나 학자들은 그것을 사람들의 눈에서 숨기고 있다.”
처음 인간에게 인생의 유일한 목적으로서 나타나는 것은 그 일신의 행복이다. 그러나 개인을 위해서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설사 인생에 행복 비슷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개인에게만 행복이 가능한 인생, 개인적 인생은 일거일동, 호흡마다 고뇌로, 악으로, 죽음으로, 파멸의 구렁으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일은 사리를 가릴 수 있을 정도의 인간이라면 그 누구라도 젊은이나, 늙은이나, 식자나, 무식자나, 다같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뚜렷하고 빤한 일이다. 이 고찰은 아주 간단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므로 사리를 알 수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며, 또 태초부터 인류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터이다.
"서로 멸망시키거나 스스로 멸망하는 똑같은 무수한 개성중에서, 자기 일개의 행복만을 마음먹는 개성으로서의 인간 생활은 삭막(索漠)하며 무의미한 것이다. 참된 생활은 그와 같은 것일 리 없다"라고 인간은 아주 옛적부터 자신에게 타일러 왔다.
인간 생활의 이 내적 모순은 비상한 힘과 명료성을 띠고, 인도 중국 이집트 희랍 유태의 현인(賢人)들에 의하여 표명(表明)되여 왔다. 그리고 저 아득한 옛적부터 인간의 이성(理性)은 인간 상호의 생존 투쟁이나, 고통이나, 죽음에 의해서는 멸망되는 일이 없는, 그와 같은 인류의 행복을 찾아내는데 지향되어왔다. 그리하여 투쟁 고통 죽음 등에 의해서 없어지지 않는 틀림없는 인간의 이 행복을 더욱더 밝히고자 하는 노력이야말로 우리들이 인생을 알기 시작했을 때부터 인류의 끊임없는 진보가 있는 것이다.
매우 아득한 옛적부터, 수많은 여러 국민들 사이에서 인류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내적 모순을 풀어 주는 인생의 정의를 계시하고는, 그들에게 인류에 합당한 참된 행복과 참된 생활을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사람들의 위치는 동일하며, 따라서 그 개인적 행복에 대한 희구와 그것을 불가능케 하는 의식 사이에 개재하는 모순은 그 누구에게도 동일한 것이므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식자들이 사람들에게 계시해 준 참된 행복에 대한 참된 인생의 모든 정의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것이어야 한다.
"인생이란―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하늘로부터 그들 속으로 광명이 남김없이 비치는 일이다"라고 공자(孔子)는 기원 600년 전에 말했다.
"인생이란―끊임없이 더욱 큰 행복에 이르고자 하는 영혼의 순례이며 완성이다"라고 공자와 같은 시대의 바라문교도들은 말했다.
"인생이란―행복한 열반(涅槃)에 이르기 위한 자기 부정이다"라고 역시 공자와 동시대인 석가모니는 말했다.
"인생이란―행복에 이르기 위한 온량 겸허(溫良謙虛)의 도(道)이다"라고 역시 공자와 같은 시대인인 노자(老子)는 말하였다.
"인생이란―인간이 신의 법칙을 지키면서 행복을 얻도록 신이 인간의 콧구멍 속에 불어넣으신 입김이다"라고 유대의 어느 현인은 말했다.
"인생이란―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이성에 따르는 일이다"라고 스토아학파의 사람들은 말했다.
"인생이란―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예수는 모든 선인들의 정의를 자기의 정의 속에 총괄해서 말하였다.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는 수천 년 동안, 우리들 인류에게 불가능하고 그릇된 개인적 행복 대신에, 깨뜨릴 수 없는 참된 행복을 지적하는데 있어서, 인간 생활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그것에 합리적인 의의를 주는 인생의 정의는 대체로 이상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그와 같은 인생의 정의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한 정의를 더욱더 정확하고 더욱 명료하게 표현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정의들은 그것을 승인함이 인생의 모순을 배제하고 도달하기 어려운 개인적 행복에 대한 경향을 고통이나 죽음에 의해서도 깨뜨려지지 않는 행복에 대한 경향으로 바꿔서 인생에 합리적인 의의를 주는 따위의 것이라 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인간의 그러한 정의는 이론적으로 옳을 뿐더러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확인된다는 것, 그와 같은 인생의 정의를 과거에도 승인하였고, 현재에도 승인하고 있는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개인적 행복에 대한 경향을 고통이나 죽음에 의해서 깨뜨려지지 않는 행복에 대한 다른 경향으로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사실상으로 증명하였으며, 또 현재도 증명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류의 위대한 계발자(啓發者)들에 의해서 계시된 인생의 정의를 이해하고, 그것에 의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밖에도 일생의 어느 기간, 때로는 전 생애를 통해서 그저 동물적인 생활에만 그치고, 비단 인간 생활의 모순을 해결하기에 소용되는 그와 같은 정의를 이해하지 못할 뿐더러, 선현들이 해결하고 있는 인생의 그러한 모순을 알아차리기조차도 못하고 사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으며, 또 지금도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는 또 자기의 외적 지위로 자신을 인류의 지도자인 양 생각하고, 스스로는 인간 생활의 뜻조차 모르는 주제에 자신도 모르는 인생을, 인생이란 개인적 존재에 불과한 것이라고 남에게 가르쳐 왔고, 또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과거에도 있었으며 또 현재에도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이비 교사들은 이미 지나간 시대에도 존재하였고,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들 중의 어떤 자들은 저들이 그 전통을 받아서 키워져 온 인류의 계발자들의 교의 (敎義)를 입으로는 떠들지만 워낙 그 합리적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어느덧 그러한 교의를 인류의 과거와 미래 생활에 관한 초자연적 계시로 만들고, 그저 형식적 의식의 실행만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극히 넓은 의미에서의 바리새인, 즉 인생은 원래 불합리한 것이지만 형식적 의례의 실행으로 얻어지는 내세(來世)의 신앙만 있으면 그것에 의하여 수정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는 자들의 교의이다.
또 어떤 자들은 눈에 보이는 인생 이외에는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기적을 부정하며, 모든 초자연 물을 주정하고, 인생은 그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동물적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서슴지 않고 단정하고 있다. 이것은 일부분의 학자들, 즉 동물로서의 인간 생활에는 좀처럼 불합리한 것이 없다고 가르치고 있는 자들이 교의이다.
이들 두 가지 종류의 가짜 교사들이 말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인간 생활의 근본적 모순에 대한 서투른 몰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늘 시비해 왔으며 또 지금도 서로 다투고 있다. 이들 두 가지 교의는 오늘날 우리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으며, 서로 적의를 품고 자기를 스스로의 논쟁으로써 세계를 가득 채우고, 그러한 논쟁 그 자체에 의해서 이미 수천년전에 인류에게 주어져 있는 인간의 참된 행복으로 이르는 길을 계시하는 인생의 정의를 사람들의 눈에서 감추고 있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저들이 그러한 사람들의 전통 속에서 키워지면서 그 스승들이 사람들에게 준 인생의 정의를 이해하지 않고, 그것을 미래 생활에 대한 저들의 그릇된 해석으로써 고치고, 동시에 인류의 다른 계시자들이 가르쳐 준 인생의 정의를 사람들의 눈에서 감추려고 제멋대로 서툴고 아주 엉터리로 고쳐 버린 꼴로 저들의 제자들 앞에 터놓으므로 인해서 해석의 기초로 했던 교의의 절대적인 권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인류의 다른 계발자들이 보여 준 인생의 정의에 있어서의 합리적 의의의 일치도 저들에게는 그 교의의 진실성을 증명해 주는 좋은 증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저들이 그 교의의 본질과 바꿔친 저들의 불합리한 거짓 해석에 대한 신뢰를 한꺼번에 뒤집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면에 다른 학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교의 발생의 기초로 되어있는 합리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조차도 해보지 않고, 그냥 미래 생활에 관한 일체의 교의를 부정하고, 대담하게도 그러한 교의는 아무런 근저(根抵)도 없는 무지 시대의 사나운 습관의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정하고, 더구나 또 인류의 진보는 이간의 동물적인 존재 영역을 넘고서는 여하한 인생 문제도 인간에게 부과하지 않는다는 한 가지 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학자의 미망(迷妄)
그보다 놀라운 일이 있다. 이들 위대한 인류의 지식자들이 가르침이 모두 그 위대성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매우 놀라게 했기 때문에 서툰 자들은 선현들에게 거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성질을 주어 그 교조(敎租)들을 반쯤 신으로 모셔버렸다는 사실이다. 교의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주된 징조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가지고 학자들은 이러한 교의를 불합리성과 시대에 뒤떨어졌음을 증명해 주는 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베이컨, 콩트 그 밖의 사람들의 대수롭지 못한 교의가 그들의 소수 독자 혹은 숭배자들의 재산으로 항상 남기도 했으며, 오늘날도 남아있을 따름이고, 그 근본이 그릇되었으므로 여태껏 한 번도 대중에게 작용할 수도 없었으며, 따라서 미신적인 변형이나 군살이 붙여지는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대수롭지 못하다는 이 징조가 도리어 진실성의 반증으로서 승인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바라문이나, 석가나, 조로아스터나, 노자나, 공자나, 이사야나, 예수의 교의는 그저 이들 교의가 대중의 삶에 하나의 큰 전환을 일으켰다는 이유만으로서 미신이며 미망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미신은 상당히 이그러진 상태에 있어서까지도 인생의 참된 행복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사람들에게 주고 있으므로, 수십억의 사람들은 그러한 미신에 의해서 오늘날까지 생활해 왔으며, 오늘날도 역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교의는 모든 시대에서 뛰어난 사람들의 사상과 어떤 연계(連繫)를 가지고 있을 뿐더러 그 근저(根抵)로서 쓰이고 있으나, 학자들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이론은 그저 그들 자신 사이에서 주고받아질 뿐이고, 항상 반박되고 때로는 10 년도 채 못가서 진실이 나타나면 어느덧 잊어버려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금도 그들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않는다.
현대 사회가 추종하고 있는 이 그릇된 지식의 방향은 자고로 그것에 의해서 인류가 살았으며, 또 교육되었고, 현재에도 역시 살고, 또 교육되고 있는 이들 위대한 인생의 스승들의 가르침이, 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에서 보는 것만큼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것이라곤 없다. 갖가지 연감(年鑑)의 통계란 속에는 현재 지구상의 주민들이 신봉하는 종교는 천 가지나 넘는다고 보고되어 있다. 이들 종교 중에는 물론 불교 바라문교 유교 노자교 기독교도 들이 있을 것이다. 천 가지 종교, 그리하여 현대인들은 아주 정직하게 그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모두 무의미한 것들 뿐이다. 그것을 연구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 더구나 현대인들은 스펜서나 헬름홀츠나 그 밖의 식자(識者)들이 말하는 최근의 금언(金言)을 알지 못하면 치욕이라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바라문 석가 공자 노자 에픽테토스 이사야에 대해서는 간혹 이름 정도나 알고 있는 일이 있고, 때로는 이름조차 모르는 일도 있을 정도다. 그리고 오늘날 행세하고 있는 종교는 결코 천 가지가 아니라 그저 세 가지, 즉 중국, 인도, 헤브류 예수교에 (마호멧트교를 포함한다) 지나지 않는다고 여긴다.
이들 종교의 서적은 5 루블쯤 내면 살 수 있고, 2 주일 정도면 통독할 수 있다는 것 및 그것에 의해서 인류가 오늘날까지 살아왔으며, 오늘날도 역시 살고 있는 이들 서적 속에서 보면, 우리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1 천분의 7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인류의 모든 지혜, 인류를 오늘날과 같이 만들게 한 일체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는 일 따위는 그들이 털끝만치도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대중은 이러한 교의를 알지 못할뿐더러 학자도 자기의 전문이 아닌 한 그것을 모르고 직업적 철학자들은 그러한 서적을 가까이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거늘 첫째로, 무엇 때문에 이성이 있는 인간에 의하여 의식된 인생의 모순을 해결해서 사람들이 참된 행복과 생활을 결정해준 그들을 연구하는 것인가? 학자들은 합리적 생활의 근원이 되는 이 모순을 깨닫지 못한 채 대담하게도 자기네들에게 그것을 보이지 않는 이상 어떠한 모순도 있을 리 없다고 하며, 인간의 생활이란 인간의 동물적 생존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들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눈이 보이는 자는 자기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이해하고 또 결정한다. 장님은 자기 앞을 지팡이로 더듬어서 지팡이의 촉감이 가리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단정한다.
“학자들의 교의(敎義)는 인간의 생명이라는 관념 밑에 인간의 동물적 생존이라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주어 맞추어서 그로부터 인생의 목적에 관한 결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삶이란 한 개의 생물이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태어나고, 개가 나고, 말이 생겨난다. 그들은 특유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특유한 육체가 얼마의 시간 동안 살다가 마침내는 죽는다. 그러면 육체는 분해되어 다른 물질로 바뀌고 그 생물은 없어진다. 생명이 있었다. 그리고 없어졌다. 심장은 고동치고, 허파는 숨쉬고, 육체는 분해되지 않는다. 이것이 즉 사람 개 말이 살아있는 일이다. 심장이 고동을 멈추고 호흡이 중단되고 육체가 분해되기 시작한다. 즉 죽음이며 이미 삶이 없는 것이다. 삶이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사이에 동물의 육체에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육체에 일어나는 작용이다."
이 이상으로 더 명백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간신히 동물적인 상태를 벗어난 극히 조잡한 미개인들은 생명을 늘 그와 같이 보아왔으며, 또 지금도 그렇게 보고 있다. 현재 우리들의 시대에도 자칭 과학이라고 일컫고 있는 학자들의 교의도 생명에 대한 가장 거칠고 원시적인 이 해석을 유일한 진리로 인정하고있는 것이다. 인류가 획득해온 외적(外的)지식의 수백 가지 기능을 이용한 이 거짓된 교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과거 수천 년 동안 긴장과 노고로서 간신히 벗어나온 본래 무지몽매의 암흑으로 다시 한번 조직적으로 데려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자기의 의식으로써 생명의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이 교의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은 자기 내부에서 그것을 관찰할 때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의 의식에 있어서는 행복에 대한 그리움만이 우리들의 생활을 구성하고 있으나 그 행복이라는 관념은 속기 쉬운 환영(幻影)이며, 생명은 이 의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못 된다. 생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저 물질적 운동으로서의 그 현상을 관찰해야 한다. 오직 이러한 관찰과 그 관찰에서 이끌어 나온 법칙에서만이 우리들은 생명 그 자체의 법칙과 인간 생활의 법칙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릇된 학설은 그 인식에 의해서 자기가 알고 있는 인간의 모든 생명의 개념에다가 그 눈에 보이는 일부분―동물적 존재―을 주워 맞춰서 눈에 보이는 그 현상들을 처음에는 동물로서의 인간에서, 다음에는 일반 짐승에서, 나아가서는 식물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여 그 사이에 끊임없이 우리들은 두셋의 삶의 현상을 연구함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연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 관찰이 아주 서투르고 갖가지이며, 맞지 않는 데다가 그것에 소비된 시간과 노력이 대단했으므로 사람들은 점점 대상의 일부를 대상 그 자체로서 간주했던 근본적 오류를 잊고서 마침내는 물질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눈에 보이는 특질을 연구하는 것이 생명 그 자체―의식에 의하여서만이 사람에게 알려지는―의 연구라고 끝내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은 마치 그늘 속에서 무엇을 보여주고는, 보는 사람이 당하는 미오(迷誤)상태를 내내 유지해 나가려고 하는 것 같은 일이 실행되고 있는 것이다. "조금도 다른 쪽을 보아서는 안됩니다"하고 보여주는 자가 말한다. "반영(反映)이 나타나는 쪽 밖에는, 특히 물체 그 자체 쪽을 보아서는 안 되오. 왜냐하면 물체라는 것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있는 것이라곤 오직 그 반영뿐이니까."
이것은, 대중에게 영합하려는 현대 과학들의 거짓된 과학이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계시되는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를 무시하고 인생을 검토하려고 할 경우에 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에 대한 희구와는 관계없는 인생의 정의로부터 직접 출발해서 거짓된 과학은 모든 생존의 목적을 관찰하고, 거기에 인간과는 관계없는 목적을 발견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떠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외적 관찰에 의해서 생존물들의 목적으로 열거된 것은 자아의 개성 보존이며, 자기의 형태 보존이고, 같은 종류의 산출이며, 생존을 위한 투쟁이다. 그리고 이 가장 공상적인 삶의 목적이 인간에게 또 떠맡겨지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주요한 특성을 구성하는 인간 생활이 이 모순을 인정치 않고, 시대에 뒤진 인생관을 출발점으로 하는 거짓된 과학―이 가공적(架空的)인 과학은 그 최후의 결론에 있어서 인류 대중이 요구하는바, 즉 개인 생활의 행복이 행복의 가능을 인정하고 인간을 위해 동물적인 생존만을 행복이라고 인정하게 하기 마련이다.
허울 좋은 과학은 그것에 하나의 설명을 찾아내려는 대중의 요구 이상으로까지 나가려는 기세이다. 즉 인간의 합리적 의식이 그 출현의 첫 시작에서부터 부정해 오던 것을 시인하게 되었고, 더구나 인간 생활은 모든 동물 생활과 마찬가지로 개인 종족 및 형태의 생존 경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바리새인 및 학자들의 거짓된 교리는 참된 생활의 의미에 관한 설명조차 주지 않으며, 생활상 아무런 지침도 주지 않는다. 생활의 유일한 지침으로서 나타나 있는 것은 아무런 합리적 설명도 갖고 있지 못하는 생활의 타성이다.”
"인생을 정의한다는 건 쓸데없다. ―누구나 인생을 알고 있다. 그것이면 그만이다. 그저 살아나갑시다!" 거짓된 교의의 뒷받침을 받은 사람들은 그 미오(迷誤) 속에서 이렇게들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지,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모르는 체 그들은 그것으로서 그들이 살고 있는 것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마치 전혀 아무런 방향도 없이 물결에 흔들리는 사람이 자기로서는 자기가 가야 할, 또 가려고 생각하는 쪽으로 나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듯이.
어떤 아이가 가난 속이나 부유(富裕) 속에서 태어나 바리새나 혹은 학자식 교육을 받았다고 가정하자. 아이에게는, 또 청년에게는 아직 인생의 모순도 존재하지 않으며, 인생에 대한 문제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바리새파의 설명도 학자들의 설명도, 그에게는 불필요하며 그의 생활을 지도할 수 없다. 그는 오직 주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본보기에서 배울 따름이다. 그런데 이 본보기에는 바라새파의 본보기든 학자의 본보기든 다름이 없다. 전자도 후자도 오직 개인적 생활의 행복만을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으며, 그 아이에게도 또 그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 그의 양친이 가난하면 그는 양친에게서 배울 것이다. 인생의 목적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빵과 돈을 버는 것이며, 뒬 수 있는 대로 적게 일해서 동물적 자아(自我)를 될 수 있는 데까지 만족시켜 주는 일이라고, 반면에 그가 사치 속에 태어났다면 아마 그는 이렇게 배우리라. 인생의 목적은 될 수 있는 대로 유쾌하고 즐겁게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부귀와 명예를 얻는 일이라고.
가난한 자가 얻는 모든 지식은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더하는 데만 필요하다. 부유한 자가 얻는 모든 과학과 예술의 지식은 과학 및 예술의 의의에 관한 모든 고상한 말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그저 권태를 정복하고 유쾌히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만이 필요하다. 이 두 사람은 오래 살면 살수록 한간(巷間)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는 견해를 더욱더 강하게 흡수하게 된다. 그들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룬다. 그러면 동물적 생활의 행복을 얻으려는 갈망을 가정을 시인함으로써 더욱더 강해지고, 남과의 투쟁은 격화되며, 오직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만이 생활하려는 버릇이 확립된다.
만약 전자든 후자든 간에, 즉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에게 그러한 생활의 합리성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하더라도 또 만약 그 어느 자에게든지 그들의 자손들에게까지도 계속될 이 목적 없는 생존 경쟁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것과 혹은 자기와 자기의 자식들에게도 최후에는 고통으로 그치게 될 열락(悅樂)에 대한 속기 쉬운 이러한 추구(追求)는 무엇 때문인가, 하는 문제 따위가 생긴다 하여도, 아마 거기에는 그 보다 수천 년 전의 옛날에 그와 똑같은 상태에 있었던 위대한 인류의 스승들이 오랜 옛날에 인류에게 가져다 준 인생의 정의를, 그가 알게 될 개연성(蓋然性)은 거의 없을 것이다. 바라새파나 학자들의 교의가 모두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으므로 그것을 보기란 좀처럼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자들―바리새의 무리들은"이 불행한 인생은 무엇 때문이냐?"하는 물음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인생은 불행하다. 항상 그랬으며 또 그래야 할 것이다. 인생의 행복은 인생의 현재에는 없다. 생활에 이르기까지의 과거와 생활이 끝난 뒤의 미래에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바라문교도들도, 불교도들도, 유교도들도, 유태교도들도, 기독교적 바리새파도 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현재의 생활은 악이다. 이 악의 설명은 과거에 속한다. 세계와 인간의 출현에 있다. 현세 악의 속죄(贖罪)는 내세(來世)에 있다. 무덤 저편에 있다. 이 현세 아닌 내세의 생활에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우리들이 가르치는 가르침을 믿고, 우리들이 명하는 의식을 실행하는 일이라고.
그런데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보고, 그와 같은 행복을 위해서 사는 바리새인 자신의 생활을 보며 그 설명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자들은 그 해답의 뜻을 깊이 캐묻지도 않고, 애당초 그들은 믿지도 않고 학자들에게 달려간다. "우리들이 동물 생활에서 오는 이외의 생활에 관한 모든 가르침은 무학무지의 결과이다."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너의 생활의 합리성에 관한 너의 의문은, 말하자면 쓸데없는 공상이다. 구주(救主)의 생활, 지구의 생활, 인간의 생활, 동물의 생활, 식물의 생활은 모두 제각기의 법칙이 있으므로 우리들은 그것을 연구해서 우주의 기원, 인간의 기원, 동식물의 기원, 그 밖에 만물의 기원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들이 또 장차의 세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태양은 어떻게 식어질까 하는 따위의 일에서, 인간이나 모든 동식물의 과거는 무엇이었으며, 장차 어찌될 것인가 함도 연구하고 있다. 우리들은 만물이 우리들이 말하는 대로의 것이 있다는 것을 보여 줄 수도, 증명할 수도 있다. 우리들의 연구는 그뿐만이 아니고 인간의 행복 증진에도 크게 공헌하고 있다. 그러나 너의 생활과 너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대해서 우리들은 네가 우리들이 아니라도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즉 너는 살고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잘 사는 것이 좋다. 이외에는 새삼스럽게 한마디도 덧붙일 것이 없다."
이와 같이하여 그의 의문에 대해서 바리새파로부터도 학자로부터도 아무런 해답을 얻지 못한 회의자(懷疑者)는 자기 개성의 충동(衝動) 이외에는 생활상 아무런 지침도 없는, 지금까지 있는 대로의 처지에 남아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회의자 중의 어떤 자들은 파스칼의 의견에 따라서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대체 바리새파의 사람들이 그들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위협하고 있는 일은 정말일까?" 이렇게 생각하고서 그들은 틈을 타서 바리새파의 지시를 모조리 실천해 본다. (별로 손해는 없다. 자칫하면 큰 이익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학자의 의견을 좇아서 당장에 현세 이외의 모든 생활과 일체의 종교적 의식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혼자만이 아니다. 옛적부터 모두들 이렇게 살아왔으며 현재에 살아있기도 하다. 이러나 저러나 될 대로 밖에는 되지 않는 법이야."―그리하여 이 차이는 어느 편에든지 아무런 우월도 주지 않는다. 전자도 후자도 다같이 현재의 생활 의의에 관해서는 전혀 아무런 해석조차도 갖지 못한 채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살아야 한다.
인간의 생활은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 자리에 들기까지 행위의 연속이다. 인간은 매일 그에게 가능한 여러 가지 행위 속에서 그가 하는 일을 끊임없이 골라야 한다. 더구나 천국생활의 신비를 설명해 주는 바리새파의 가르침도, 세계와 인간의 기원을 연구해서 저들 미래의 운명에 관한 결론을 주는 학자들의 가르침도, 다같이 그러한 행위의 지침을 주지는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자기 행위의 선택에 일정한 지침을 갖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는 수 없이 이성(理性)의 판단을 떠나서 인류 개개의 사회에 항상 존재해 왔으며, 또 현재 존재하고 있는 생활의 외적 지침에 따르게 된다.
이 지침은 아무런 합리적 설명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항상 뭇 사람의 행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 지침이라 함은 인간 사회 생활의 습관이며, 이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힘이 강해지면 질수록 생활의 뜻에 대한 이해가 사람들에게 덜해지는 것이다. 이 지침은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못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때와 곳에 따라서 가장 복잡하게 되기 쉬운 사물이나 행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인에게 있어 양친의 위패(位牌)에 드리는 촛불인 것이다. 그것은 마호멧트 교도에게는 명소 고적(名所古蹟)에 대한 순례이지만, 그것이 인도인에게는 어느 정해진 기도(祈禱)가 될 것이다. 그것은 군인에게는 군기(軍旗)에 대한 충성과 군복(軍服)에 대한 명예이며, 사교인(社交人)에 대해서는 결투(決鬪)이며, 산(山) 사람에 대해서는 근친(近親) 원수 갚기인 것이다. 그것은 일정한 날에 대한 일정한 음식물이며, 자기의 자식에 대한 어떤 종류의 교육이다. 그것은 방문(訪問)이고 주택에 대한 일정한 장식이고, 장례 출산 결혼 등에 대한 일정한 축제이다. 그것은 모든 생활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건과 행위의 무한량이다. 그것은 예의 습관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 아니 가장 흔히는 의무, 신성한 의무라고까지도 이름 붙여지는 그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은 바리새파나 학자들의 인생에 대한 설명 이외에 이 지침에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어디에 가든지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주위에서 가슴에 벅찬 신념과 외견적 장엄성을 지니고 이러한 일들을 실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본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 아무런 합리적인 해석을 갖지 않은 채 자기도 같은 일을 시작할 뿐더러, 그러한 일에 합리적인 뜻을 주려고 애쓴다. 그는, 그러한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무슨 까닭으로 그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는 설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그는 이러한 일들은 합리적인 뜻을 가지고 있고, 가령 그러한 의미의 설명이 자기에게는 충분히 밝혀지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들은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스스로 타이른다. 그런데 그 이외의 사람들조차 대부분은 그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을 갖지 않고도 그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이다. 저들이 그러한 일을 행하고 있음은, 그저 다른 사람들은 그러한 일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있기만 하고, 그 실책은 저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하여 사람들은 본심에서가 아니라, 서로 남을 속이면서 아무런 합리적 설명이 없는 일을 실행하는데 더욱 젖어갈 뿐더러, 그러한 일종의 신비스러운, 저들 자신들도 알 수 없는 의미를 붙이는데 젖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하고 있는 일의 뜻을 저들이 이해하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이러한 일이 저들 자신에게 의심스러우면 의심스러울수록 저들이 더욱더 그것을 중대시하고 더욱 장엄하게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해서 돈 있는 자도 가난한 자도, 주위 사람들이 하는 일을 오로지 실행하면서 그토록 오랜 옛적부터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실행되고, 저들에 의해서 이토록 높이 평가되고 있는 일이 참된 과업이 아닐 리 없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마음을 위로하면서, 그러한 일들을 자기들의 의무, 신성한 의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설령 자신들이 살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모르더라도, 남들은―그것도 저들을 의지하고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일은 잘 모르는데―알고 있다고 억지로 믿으려고 애쓰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살아나가는 것이다.
새로운 사람들이 생을 받아 이승에 태어나서 생장한다. 그리고 주위의 존경을 한 몸에 모으고 있는 명예 있는 백발노인들까지도 끼어 있다. 인생이라고 불리우는 이 생존의 혼잡을 보고 이 무의미한 혼잡이야말로 인생이며, 따로 인생이라곤 없다고 확신하고는, 그 문 앞에서 서로 밀치다가는 가버린다. 이와 같이하여 아직 한번도 사람의 집회(集會)를 본 일이 없는 사람은 입구에서 밀치고 떠밀면서 법석대는 군중을 보고서도 그것을 집회라고 앞질러 생각하고는 출입문 앞에서 조금 밀치다가는 아픈 옆구리를 부둥켜안고, 자기는 집회에 갔다 왔다는 확신을 품고 자기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들은 산을 깎아내고, 세계를 날아다닌다. 전기 현미경 전화 전쟁의회 자선 사업 당파 싸움 대학 학회, 박물관...... 이것이야말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무역 전쟁 교통 과학 예술 등에 수반되는 시끄럽고, 착잡하고, 떠들썩 하는 인간의 활동 전부는 대부분이 그저 인생의 문간에 모여있는 어리석은 군중의 잡답(雜踏)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현대인에게 나타난 의식의 분열
"그러나 진실로, 진실로 내 너희들에게 말하리라―지금 그때가 왔노니 죽은 자는 신의 아들의 소리를 듣고 다시 살게 되리라." 그리하여 그 시간은 이미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생활은 무덤의 저편에서만이 행복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든가, 오직 개인적 생활만이 행복하고 합리적일 수 있다든가 함을 아무리 인간이 스스로 설득시켜 보더라도, 또 남에게서 설득되더라도 도저히 그것을 믿을 수 없다. 인간은 그 마음속 깊은 곳에 자기의 생활을 행복하게 하고 싶고, 이것이 합리적인 의의를 주고 싶은 없앨 수 없는 요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덤 저편의 생활이라든가 불가능한 개인적 행복이라든가 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는 생활은 악이며 무의미한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미래의 생활을 위하여 살 것인가? 인간은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러나 만약 내가 알고 있는 생활의 유일한 본보기인 이 생활―나의 현재 생활이―무의미한 것이어야만 된다면, 이일은 나에게 다른 합리적인 생활의 가능을 증언해 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그와 반대로 인생은 본질적으로 무의미한 것이어서 이 무의미한 것 이외에는 따로 어떠한 생활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 것인가? 그러나 보라, 나의 개인적 생활은 악이며 무의미하다. 자기의 가족을 위해서 살 것인가? 자기의 사회를 위해서 살까? 조국, 전 인류를 위해서 살까? 그러나 나의 개인적 생활이 만약 불행이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모든 다른 개인적 생활도 역시 무의미하다. 따라서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개인 생활을 아무리 많이 모아본다 한들 하나의 행복하고 합리적인 생활은 구성되지 못한다. 스스로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남이 하고 있는 일을 하며 살 것인가? 그러나 보라! 나는 남도 또 나와 마찬가지로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를 자신도 알지 못한다 함을 알고 있지 않은가?
그와 같이하여 이제야 합리적 의식이 그릇된 가르침을 뛰어넘어서 인간이 생활의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추고 설명을 요구할 때가 온 것이다.
오직 생활 양식이 다른 사람들과의 교섭이 없는 소수의 사람들, 또 자기의 육체적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연과의 고된 투쟁에 쫓기우는 사람들만이, 스스로 가기들의 의무라고 이름 붙인 그 무의미한 일의 실행을 저들 고유의 인생의 의무일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내세 생활의 준비를 위해서 현재 생활의 부정―말뿐인 부정―을 주장하는 거짓이나 한갓 개인적 동물적 생존을 인생이라 생각하고, 소위 말하는 의무를 인생의 과업이라고 인정하는 일―그와 같은 기만(欺瞞)이 대부분의 사람을 위해서 밝혀지고, 그저 결핍으로 좌절되고 음탕스러운 생활로 말미암아 둔하게 된 자들만이 겨우 그 생존의 무의미함과 불행함을 느끼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지 아직 생존을 계속해 나갈 수 있는―그러한 때가 오기 시작하고 있다. 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더욱더 합리적 의식에 깨우쳐서, 그 무덤 속에서 소생한다. 그리고 인간 생활의 근본적 모순은 그것을 보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힘과 명료성을 띠고 뭇 사람들 앞에 일어선다. "나의 생활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나의 행복을 바라는 일편단심이다"라고 깨우친 사람은 자기에게 말한다. 그러나 나의 이성은 나에게 말한다. 이 행복은 나를 위해서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무엇이 되든, 무엇을 얻든 모든 것을 똑 같을 결과―고통과 죽음과 절멸(絶滅)에 그치는 것이라고. 나는 행복을 원하고, 삶을 바라고, 합리적 의미를 원한다. 그런데 나 속에도, 나를 에워싼 일체의 것 속에도, 있는 것이라곤 오직 악 죽음 무의미뿐이다. 어찌하면 좋을까? 무엇을 하면 좋을까?―그러나 이에 대한 대답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주위를 돌아다보며 자기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고 있으나 해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주위에, 그가 생각도 안 하는 의문에 대해서 답해줄 갖가지 가르침은 찾아볼 수 있으되, 그가 일으킬 의문에 대한 해답은 그의 주위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남들이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하는 일을, 자기도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하고 있는 사람들의 들뜬 소란뿐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저들이 상태의 비참함과 활동의 무의미함을 의식하지 못하는 양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들이 제정신인가? 내가 내 정신인가?" 하고 깨우친 사람은 중얼댄다. "그러나 모든 세상의 뭇 사람들이 모두 제정신을 잃고 있을 리 없으므로 아마 내가 미쳤을 거야. 그러나 그럴 리 없다. 내게 이 일을 타일러주는 합리적 자아(自我), 이것이 미칠 리 없다. 그로 하여금 전 세계 앞에 오직 한 사람에게 하라. 그러나 나는 그를 믿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하여 인간은 그의 영혼을 찢어버리는 두려운 문제를 가슴 속에 품은 채 전 세계에 오직 한 사람의 자기를 의식한다. 그리고 또 살아가야 한다.
하나의 자아(自我), 그의 인격(人格)은 그에게 살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다른 자아, 그의 이성(異性)은 말한다. ―"살 수는 없다"라고.
인간은 자기가 두 조각으로 찢어졌음을 느낀다. 이 분열은 괴롭게도 그의 영혼을 못살게 군다.
그리고 이 분열과 고뇌의 원인이 그에게는 그의 이성인 것같이 여겨진다.
이성, 인간의 생활을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최고 능력인 이성, 그를 파괴하는 자연의 힘 속에서 벌거숭이며 의지할 곳 없는 인간인 그에게 생존의 방법과 향락의 방법을 주는 이성―그러나 이 이성이야말로 때로는 그의 생활을 해치고 있는 것이다.
그를 에워싼 전 세계의 갖가지 종류의 생물 사이에서는 이들 생물의 특유한 능력이 저들에게는 필요하고 저들 모두에 공통적이며, 저들의 행복을 촉진시키는 것이다. 식물 곤충 및 짐승은 제각기 법칙에 따라서 행복하고 기쁨에 찬 평온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보라. 인간에 있어서는 이 최고 능력이 (그의 본성의 일부분인 그것이) 그의 내부에 대단히 괴로운 상태를 일으키므로 인간은 가끔―근래에 이르러서는 더욱더 흔히―현대에 이르러서는 최고 이성의 의식에 의하여 야기된 번거로운 내적 모순의 긴장에서 벗어나고 싶은 나머지 지극히 어려운 도(道)에 다다른 것인, 생명의 이은 틈을 풀어서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의식의 분열은 동물생활과 인간 생활의 혼동에서 생긴다.”
인간에게는 그의 내부에 깨우쳐진 합리적 의식이 그의 생활을 갈기갈기 찢어 정지시키는 것같이 생각되나, 그것은 그저 그가, 생활이 아니었던 것, 생활이 아닌 것, 또 장차도 생활일 수 없는 것을 자기의 생활로 인정하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의 생활이란 그 출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개인적 생활에 지나지 않는다는 신념을 증명해 주는 현대 세계의 그릇된 속에서 키워져 자라온 인간은, 그가 갓난아기였고 어린이였던 시대에도 생활했던 것 같은 생각이 들고, 그 뒤 어른이 되고 천년이 되었을 때도 그동안 끊임없이 생활해 왔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의 생각에 자기는 매우 오랫동안 살아왔고 늘 끊임없이 살아왔다. 그러던 것이 갑자기 이제는 여태껏 살아온 것처럼 살아갈 수 없이 자기의 생활은 정지되고 갈기갈기 찢어졌다는 것이 틀림없이 명백하게 될 시기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릇된 가르침은 인간의 생활을 그 출생에서 죽음까지라는 관념을 머릿속에 굳게 집어넣었다. 그래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동물적 생활을 보고는, 눈에 보이는 생활의 관념과 자기의 의식을 혼동시켜 눈에 보이는 이 생활을 자기의 생활이라고 굳게 믿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부에 깨우쳐진 합리적 의식은 동물적 생활에 대해서는 만족스럽지 못한 요구를 환기시켜 그에게 그의 인생관의 잘못을 지적한다. 그렇지만 그의 몸속 깊숙이 뿌리박은 그릇된 가르침은 그에게 이 잘못을 깨닫지 못하도록 한다. 그래서 그는 동물적 존재로 보는 인생관을 저버릴 수 없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이 합리적 의식의 깨우침에 의해서 정지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생활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그에게는 정지되어 버린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은 일찍이 존재조차 해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가 자기의 생활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 즉 그가 태어났을 때부터의 생존은 결코 그의 생활이 아니었던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현재의 이 순간까지 끊임없이 살아왔다는 그의 관념은 꿈꾸고 있을 때의 의식의 착각인 것이다. 즉 잠이 깰 때까지는 아무런 꿈도 없는 것이며, 그것은 모두 잠이 깬 순간에 구성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합리적 의식이 깨우칠 때까지는 아무런 생활도 없었던 것이며, 과거의 생활에 관한 관념은 합리적 의식이 깨우쳐지는 순간에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어렸을 동안 동물 같은 생활을 보내고, 인생에 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다. 만약 그가 10 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는 자기의 생활에 관해서나 어떠한 생활에 관해서도, 아는 것이 없었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의 태 속에서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생에 관해서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은 어린이뿐만 아니라, 이성이 발달되지 못한 어른, 백치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살아있다는 일, 다른 존재가 살아있다는 일에 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인간다운 생활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적 생활은 합리적 의식의 출현―남들 앞에 현재와 과거의 자기 생활과 다른 사람 개개인의 생활을 동시에 계시하여 이들 개개인의 관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모든 일,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계시의 당(當)의 의식―즉 그의 내부에 개인 생활에 대한 행복의 부정과, 그에게는 그 생활을 정지시키는 것같이 여겨지는 모순을 야기시키는 의식, 이 의식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이외에 자기의 눈에 보이는 존재물에 정의를 내리는 것처럼 자신의 생활을 시간으로서 정의를 내리려 하고 있다. 그러던 찰라 난데없이 그의 내부에 그의 육체적인 출생시와는 일치하지 않는 생명이 깨우쳐져 오므로, 그의 시간으로서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것이 생활일 수 있다고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리 인간 속에 자기의 합리적 생활의 시작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한 점을 찾아보았댔자 결코 그것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그 희상 속에서는 결코 이 일점, 즉 합리적 의식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합리적 의식이 자기 내부에 있었던 것 같이 상상된다. 설령 그가 이 의식의 실마리 비슷한 것을 찾아낸다 하더라도 그것은 도저히 그의 육체적 출생 속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육체적 출생과는 하등의 공통점이 없는 영역 속에서 찾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합리적 출생을 그의 육체적 출생이 생각되는 것과는 아예 다른 것으로서 인식한다. 즉 자기의 합리적 의식에 관해서 스스로 물을 때 인간은 결코 합리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어느 해 어느 달에 출생하신 자기 부모의 자식이며, 조부모의 자손이라고는 생각지 않고, 늘 자신을 하나의 자식으로서가 아니라, 때로는 수천 년의 옛적에 이 세계의 다른 끝에 살고 있던 합리적 존재, 즉 시간과 장소의 관계로는 그에게 전혀 낯선 존재의 의식과 하나로 융합되는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그 합리적 의식에 있어서 인간은 자기의 여하한 발생도 인정치 않고, 그저 다른 합리적 의식과의 시간과 공간을 넘은 합류를 인정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자기 내부에 들어오고, 자기가 그들 내부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 속에 깨우쳐진 이 합리적 의식이야말로 헤매는 인간들이 인생이라 생각하고 있는 사이비 인생을 정지시키는 것처럼 생각되는 듯이, 헤매는 인간들에게는 이 깨우침이 온 그 순간부터 그 생활이 멈출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분열이나 모순은 없다. 그것은 오직 그릇된 교의에 있어서만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 속에서 키워지고 또 지탱되어 온 교의, 즉 인생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동물적 존재로서 보는 그릇된 교의에서만 사람들이 자기 내부에 합리적 의식의 깨우침을 느끼고 곧 들어오는 괴로움이 분열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미오(迷誤)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생활이 그 내부에서 두 갈래가 난 것 같이 느껴진다.
인간은 그의 생활이 하나임을 알고 있으나, 그것이 둘인 것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인간은 손가락 두 개를 묶고 그사이에 작은 공을 굴릴 때 공이 하나인 줄 알면서도 두 개인 것 같이 느끼는 것이다. 그것과도 같이 그릇된 인생관을 지닌 사람에게도 일어난다.
인간의 이성은 그릇된 방향으로 지향되어 있다. 그는 도저히 인생일 수 없는 자기 하나의 육체적 개인적 존재를 인생으로 인식하도록 가르쳐 온 것이다.
그는 이같이 상상된 생활에 관한 그릇된 관념으로서 인생을 바라보면서는 거기에서 두 개의 인생을 찾으려했다. 자신이 상상한 인생과 실제 존재하는 인생을.
그러한 사람에게는, 합리적 의식에 의한 개인적 존재의 행복이나 다른 행복의 요구 따위는 어떤 병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합리적 존재인 인간에게는 개인적 행복 및 생활의 가능을 부정함은 개인적 생활의 약속에 의한 필연적인 귀결이며, 그것과 결부된 합리적 의식의 본성에서 오는 당연한 결과다. 개인적 행복 및 생활의 부정은, 합리적 생존에 대해서는 마치 새가 날개로 나는 것이 발로 걷기보다 자연스러운 것처럼 그 생명의 자연적인 본질이다. 만약 깃털이 나기 시작한 아기새가 발로 뛴다 하더라도 그렇다고 해서 나는 것이 그 새의 본질이 아니라는 증명이 될 수는 없다. 만약 우리들이 자기 이외에서 인생이란 개인적 행복에 있다고 생각하는 깨우치지 못한 사람을 본다 하더라도, 그것은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 아니라는 증명으로 되지는 못한다. 인간이 그에게 본질적인 참된 생명을 깨우치게 함은,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 이토록 긴장을 요구하게 된 것이 오로지 지금 이 세상의 거짓된 가르침으로 삶의 환영을 삶 그것이라고 하며, 참된 생활의 출현 파괴하는 것이라 하여 사람들을 설득시키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세계에 있어서 참된 생활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여자로서의 본성에 관해서 무지했던 처녀에게 일어나는 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성(性)의 성숙의 조짐을 느끼는 그러한 처녀는 자기를 어머니로서의 의무와 기쁨을 가진 장래의 가정생활 쪽으로 이끌어 가는 그 상태를 절망으로 이끄는 병적인 부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와 비슷한 절망을 오늘날의 세계 사람들은 참된 인간 생활에 대한 깨우침의 처음 징조에 부딪힘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의식이 깨우쳐져 있는데도 아직 자기의 생활을 개인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있는 사람들은 마치 물질의 운동을 그의 생활로 인정하고는 개성으로서의 그의 법칙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아무런 노력도 없이 일어나는 물질적 법칙에 그를 종속시키는 것에만 그의 생활을 발견하는 짐승이 놓여 있는 것과 같은 괴롭고 번거로운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짐승은 괴로운 내적 모순과 분열을 경험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그저 단순한 물질적 법칙에 자기를 종속시키는 나머지 자기의 생활을 드러누워서 숨쉬는 일에서 찾아볼 것이다. 그러나 개성은 그와는 한층 다른 일―자신의 보육과 종속의 보존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 짐승에게는 자기가 분열과 모순을 느끼고 있듯이 느낄
것이다. "생활이란"하고 그는 생각할 것이다. "중력의 법칙에 따르는 일, 즉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체내에 일어나는 화학작용에 따르는 일에 있다. 나는 현재 그렇게 하고 있다. 한편으로 나는 일해야 하고 먹어야 하며 또 수컷이든 암컷이든 찾아야 한다."
동물은 그러한 상태에서 괴로워하고 거기에서 번거로운 모순과 분열을 볼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이 자기 생활의 낮은 법칙, 동물적 개성을 자기 생활의 법칙으로 인정하도록 가르쳐 온 인간에게도 생기는 것이다. 인생의 최고 법칙, 그의 합리적 의식의 법칙은 그에게 다른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그를 에워싼 모든 생활과 그릇된 가르침이 그의 그릇된 의식 속에 그를 억류하고 있으므로 그는 모순과 분열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이 그 괴로움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그의 법칙으로서 물질의 낮은 법칙이 아니라 그의 개성의 법칙을 인정하여 그 법칙을 실행하면서, 그의 개성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물질의 법칙을 이용하여야 함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역시 자기의 생활을 개성의 낮은 법칙 속에서가 아니라 최초의 법칙을 포함하는 최고 법칙 속에―그의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그에게 제시된 법칙 속에―인정하도록 해야한다. 그렇게 되면 모순은 사라지고 개성은 자유로이 합리적 의식을 쫓아 그것에 봉사하게 될 것이다.
4. 인생에서의 참된 생활의 탄생
생명의 구현(具現)을 인간적 존재 속에서 관찰하고 시간 속에서 음미(吟味)할 때, 우리들은 참된 생명이 마치 낱알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처럼 인간 속에 보존되어 있다가 일정한 시기에 표면으로 나타나는 것을 본다. 참된 생명의 구현은 동물적 개성이 사람을 행복 쪽으로 이끌어 들이려고 할 때, 합리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이 불가능함을 가르쳐 다른 행복을 지시하는 일 속에 구성된다. 인간은 이 멀리 지시된 행복을 응시하기는 하나 그것을 인식할 만한 힘이 없어서 처음에는 이 행복을 믿지 않고 본래의 개인적 행복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그처럼 희미하게 자기의 행복을 지시하는 합리적 의식도 개인적 행복의 불가능을 지시함에 있어서는 아주 뚜렷하고 단정적이므로 인간은 또다시 개인적 행복을 부정하고, 새삼스러이 그에게 지시된 이 새로운 행복을 응시한다. 합리적 행복은 아직 보이지 않으나, 개인적 행복이 이토록 여지없이 폐기(廢棄)되고 보면, 그 이상 개인적 행복을 지속해 나가기란 불가능하다. 그와 같이하여 인간의 내부에는 합리적 의식에 대한 동물아(動物我)의 새로운 관계가 성립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참된 인간적 생활로 다시 태어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물질계에서 모든 것이 생길 때 일어내는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태아(胎兒)가 태어나옴은 그가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완전히 발육해서 그때까지 해오던 생존을 그 이상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야 하지만 새로운 생활이 그를 부르지 아니한다. 오히려 지금까지의 생존 가능성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식은 그의 개성 속에서 어느덧 발달되어 마침내는 개성 속의 생활이 불가능하게 될 정도까지 성장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만물의 출생에 즈음하여 일어남과 똑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생활 이전의 형태인 낱알의 해체와 새로운 움의 싹트기가 해체되는 낱알이라는 앞선 형태의 의견상의 투쟁과, 튼 움의 성장 및 해체되는 낱알을 토대로 하는 움의 배양(培養) 등 모두 같은 현상이다. 합리적 의식의 출생과 눈에 보이는 육체의 출생과의 차이는 우리들에게 다른 점이 있는 것이다. 즉 육체 출생에 있어서 우리들은 시간(時間)과 공간(空間) 사이에 언제, 어떻게 해서, 무엇에서, 즉 배자(胚子)에 무엇이 생겨나는가 함을 목격해서 씨앗, 즉 열매이며, 일정한 조건하의 씨앗에서 식물이 발생하고, 그것이 꽃이 피고, 마침내는 씨앗과 같은 과일이 열매를 맺음을 (이와 같이하여 생명의 모든 순환이 우리들의 눈앞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알 수 있으나 합리적 의식의 성장은 시간적으로 볼 수 없으며, 그 순환 과정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합리적 의식의 성장과 그 순환을 볼 수 없음은 우리들 자신이 그것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들의 생명은 이 우리들 자신 속에서 생겨 나와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의 출생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들은 도저히 그것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이 이 새로운 생존의 출생, 동물적 의식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새로운 관계를 볼 수 없음은 마치 씨앗이 그 줄기의 생장을 볼 수 없음과 마찬가지다. 합리적 의식이 숨은 생태로부터 나와서 우리들 자신의 앞에 나타날 때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자신이 모순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나 거기에 아무런 모순이 없음은 움트는 씨앗에 모순이 없음과 같은 것이다. 움트는 씨앗에 있어서 우리들은 지금까지 씨앗의 껍질에 있었던 생명이 이제야 그 움속에 있음을 볼 따름이다. 합리적 의식을 깨우친 사람에게도 이와 마찬가지로 거기에는 아무런 모순도 있을 리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새로운 존재의 출생, 동물적 의식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새로운 관계의 발생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다른 개성이 살고 있음을 알지 못하고, 향락(享樂)이 만족을 주는 것이 아님을 알지 못한다면, 자신이 죽을 것도 알지 못하며 생존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살아있는 것조차도 알지 못하므로 자연히 아무런 모순도 없는 것이다.
또한 인간이, 다른 개성도 자신과 마찬가지이며, 고통이 그를 위협하고 있다는 것과 생존이란 완전한 죽음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면, 그리고 그의 합리적 의식이 그의 개성의 존재를 해체시키기 시작한다면, 그는 이미 해체하기 시작한 그 개성 속에 자기의 생명을 맡길 수 없게 되어 필연적으로 그것을 자신 앞에 전개된 새로운 생명 속에 두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모순이 없음은 마치 이미 싹이 텄으므로 그 자체는 해체되는 씨앗에 모순이 없음과 매일반인 것이다.
“이성(理性)이란 인간에 의하여 인정된 법칙이며, 인생은 그것에 의하여 완성되어야 할 것이다.”
동물적 개인에 대한 합리적 의식 속에 나타나는 인간의 참된 생활은 동물적 개인의 행복이 부정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물적 개인의 행복에 대한 부정은 합리적 의식이 깨우쳐질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합리적 의식이란 무엇인가? 요한 복음서에는 그 첫 페이지에서 로고스(로고스라 함은 이성 예지를 뜻한다)는 태초(太初)라고 했다. 이어 말하기를 일체는 그 속에 있으면, 일체는 그것에서 나타난다. 따라서 이성은―다른 모든 것을 정의하는 것―다른 것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라는 글로부터 시작되어 있다.
이성은 정의될 수 없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들은 그것을 정의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 모두는 그것을 알고 있을 뿐더러, 그저 그것 하나밖에는 알 수 없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서로 접촉할 때 우선 우리들이 믿게 될 것은―그 무엇에 있어서보다도 더 많이―일반 적인 이 이성이 우리들 모두에 대한 똑같은 필연성이다. 우리들은 이성이야말로 우리들 살아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결합시켜 주는 유일한 토대임을 확신하고 있다. 이성이야말로 우리들은 그 무엇보다도 확실히 또 먼저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오직 그것이 우리들에게 똑똑히 알려져 있는 이 이성의 법칙과 합치된다는 것을 우리들이 알고 있으므로 해서 알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은 이성을 알고 있다. 또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다.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다는 것은 이성이란, 즉 합리적 존재인 인간이 생활에 있어서 반드시 좇아야 할 법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성에 의하여 그 생활을 완성시키는 법칙이다. 동물에게는 그들이 그것에 의하여 생육하고 번식하는 법칙과 같은 법칙이며, 식물에게는 초목이 그것에 의하여 성장하고 꽃이 피는 법칙과 같은 법칙이며, 천체(天體)에게는 지구나 발광체(發光體)가 그것에 의해서 운행되는 법칙과 같은 법칙이다. 그리고 우리들이 자신 속에서 우리들의 생활 법칙으로서 아는 법칙은 세계의 온갖 외적 현상이 그것에 의하여 행하여지는 법칙이고, 그저 다른 점은 우리들 자신 내부에서는 이 법칙을 우리들 자신이 성취해야 할 것으로서 인정하고 있으나, 일반 외적 현상에 있어서는 우리들의 관여 없이 이 법칙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으로서 인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이 세계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일은 그저 우리들에게 보이는, 우리들 이외의 천체에 있어서 동물계 식물계 기타 전 세계에서 행해지는 이성에 대한 복종뿐이다. 외부의 세계에 있어서 우리들은 이성의 법칙에 대한 복종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내부에서 우리들은 이 법칙을 자신이 행해야 할 것으로서 시인하는 것이다.
흔히 있는 인생에 관한 미오(迷誤)는 자신의 법칙에 대한 우리들의 동물적인 육체의 복종, 우리들 스스로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우리들에 의해서 하여지는데 불과한 복종, 그것을 보고 인생인 것처럼 사고하는 점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이 결부되어있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의 법칙은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 내에 있어서 그것이 나무나 결정체(結晶體) 전체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무의식중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우리들의 동물적인 육체를 이성에 복종시키는 일―은 우리들이 어디에서도 못 보는 또 볼 수도 없는 법칙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성취되어 있지도 않고, 결국 우리들에 의해서 우리들 생활 속에 성취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법칙을 실행하는 일, 즉 행복 달성을 위해서 자신의 동물아를 이성의 법칙에 복종시키는 일 속에 우리들의 생활은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복과 생명이 자기의 동물적 자아(自我)의 존재와 행복을 인생 전부로 보고 우리들에게 예정된 인생의 과업을 거절할 때 우리들은 참된 행복과 참된 생명을 스스로 저버리고 그 대신 우리들과는 관계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들의 생활로 될 수 없는 눈에 보이는 동물적 활동의 존재를 설치하는 것이다
지식의 그릇된 방향
우리들의 눈에 보이는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 위에 작용하는 법칙을 우리들의 삶의 법칙이라고 하는 미오는 사람들이 항상 빠져 왔으며, 현재도 역시 빠지고 있는 옛적부터 있는 미오다. 이 미오는 사람들에게 그들 지식의 주요한 목적, 인생의 행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동물적 자아를 이성에 복종시키는 것을 감추고 그 대신 인생의 행복과는 관계없이 인간 존재의 연구를 내놓는 것이다.
자신의 행복 달성을 위해서 인간의 동물아를 복종시켜야 할 법칙을 연구하고 이 법칙을 알고 그것을 토대로 해서 세상의 다른 삼라만상을 연구하는 대신에, 그릇된 지식을 그 노력을 그저 지식의 주요 목적―참된 생활의 행복 달성을 위해서 인간의 동물적 자아를 이성의 법칙에 복종시키는 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이 동물아의 존재나 행복의 연구에만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릇된 지식은 이 지식의 주요 목적을 제쳐놓고 그 힘을 과거 및 현재 사람들의 동물적 존재의 연구와 일반적으로 동물로서의 인간 생존의 상황(狀況) 연구에 돌리고 있다. 그런 인간에게는 이러한 인간 생활의 행복에 대한 지침도 찾아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릇된 지식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존재해 온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존재해 왔으며,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그 존재에 어떠한 변화가 생겼는가, 그리고 그 변화는 어떠한 방향으로 지향되고 있는가. 그들 존재의 이러한 역사적 변화로부터 우리들은 그들 생활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지식의 주된 목적―인간의 개성이 그 행복을 위해서 마땅히 쫓아야 할 합리적 법칙의 연구를 도외시하면서 이와 같은 부류의 소위 학자들은 그 연구의 목표로서 자신이 설치한 목적 그 자체에 의해서 그 연구가 무익하다 함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인간의 존재가 그저 그들의 동물적 존재의 일반적 법칙에 의해서만이 변하는 것이라면 그 존재가 가만히 있더라도 이토록 종속하고 있는 법칙을 연구함은 전혀 무익하며 무의미한 일이다. 그들 존재 변화의 법칙에 관해서 사람들이 알건 말건 간에 이 법칙은 두더지나 수달피의 생활에 있어서 그러한 동물들이 지배받고 있는 조건에 따라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그 생활을 존속시켜야 할 합법적 법칙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이 이성법칙의 지식은 그 법칙이 그에게 열리는 곳, 즉 그 합리적 의식 이외에는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음은 뚜렷한 사실이다. 따라서 인간은 동물로서의 인간이 어떻게 생존해 왔느냐를 아무리 연구한다 한들, 인간의 생존에 관해서 이 지식이 없더라도 인간 내부에서 자연히 일어날 그러한 것 이외에는 결코 그 어느 하나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아무리 인간의 동물적 존재를 연구한다 한들 인간이 그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 이 동물적 존재를 종속시켜야 할 법칙을 알 리도 또 결코 알 수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즉 사학(史學)이니 정치이나 하고 불리우는 인생에 관한 무의미한 인간적 고찰의 일종이다.
더우기 오늘날 지식이 극도로 유포되어 지식의 유일한 목적을 완전히 잃고 있는 고찰의 다른 범주(範疇)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간을 관찰의 대상으로 연구하면서 우리들이 보는 바는 (학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도 역시 모든 생물과 마찬가지로 영양을 취하고, 생장하고, 번식하고, 늙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현상, 즉 정신적인 (그들은 그것을 이렇게 이름 붙이고 있다) 현상이 있고, 그것이 관찰의 정확(正確)을 방해하며 너무도 큰 복잡성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인간을 보다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생활을 보다 더 많은 간단한 현상, 즉 우리들이 늘 이 정신적 활동이 없는 동식물에서 보는 것 같은 현상을 연구하여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서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동물 및 식물의 생활을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동식물을 연구해서 우리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전체 속에 전반에 공통되어있는 한층 더 간단한 물질의 법칙이 나타나 있는 일 그 하나뿐이다.
그리하여 동물의 법칙은 인간 생활의 그것보다 간단하고 식물의 법칙은 더욱더 간단하며 물질의 법칙은 한층 더 간단하므로 우리들의 연구는 그 기초를 가장 단단한 법칙인 물질의 법칙에 두어야 한다. 우리들은 식물 및 동물 속에 일어나는 현상이 틀림없이 인간의 내부에도 생기는 것임을 인정한다. 이렇게 그들은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인간 속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이 우리들에게 보이고 우리들의 실험에 맡겨져 있는 가장 간단한 무생물에 생기는 현상에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물며 인간 활동의 모든 특성이 물질 속에 작용하고 있는 힘과 항상 끊임없는 관련을 가지고 있음에 있어서랴!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의 변화는 모두 그의 활동을 변화시키고 또 파괴도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물질의 법칙은 인간 활동의 근저라고. 그러나 인간 속에는 우리들이 동물에서도, 식물에서도, 무생물에서도, 볼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고찰, 그것이야말로 지식의 유일한 목적이며 그것 없이는 다른 모든 것은 무익하다는 고찰이 그들의 마음을 어지럽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들의 머리에는, 만약 인체에서의 물질의 변화가 그의 활동을 파괴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단순히 물질의 변화가 인간의 활동을 파괴하는 원인 중의 하나라 함을 증명하는데 그치고, 물질의 운동이 좀처럼 인간 활동의 원인이라는 증명이 되지 못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식물의 뿌리에서 흙을 없애버리는 해독이 흙은 반드시 아무 데라도 있다고 할 수 없는 증명으로는 될 수 있으나, 식물은 흙만의 산물이라는 증명으로는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들은 인간 생활의 법칙에 수반되는 현상의 법칙을 밝히기만 하면 인간 생활 그 자체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무생물 속과 식물 속, 동물 속에서도 일어나는 일을 인간에게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 즉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 그 동물적 자아를 복종시켜야 하는 법칙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인간 생활을 보지 않고 역사적 존재를 연구하기도 하며, 그저 눈에 보일 뿐, 인간에게 의식되지 않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물질의 여러 가지 법칙에 대한 복종을 연구하곤 한다. 즉 그들은 그들이 추구해야할 뚜렷하지 못한 목적을 찾으려고 저들이 잘 모르는 사물의 상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해온 것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상에서의 인간 생존의 현상을 아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교훈적이라는 것, 또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동물적 자아 및 다른 동물의 법칙을 연구하는 일도 우리들에게 교훈적이 될 수 있다면, 물질 그 자체가 종속하고 있는 법칙의 연구도 역시 교훈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이다. 이들 모든 연구가 인간에게는, 그의 생활에서 필연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일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보여줌으로써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성취되어서 우리들 눈에 보이고 있는 일에 관한 지식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완전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지식과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들의 동물아를 종속시켜야 할 법칙에 관한 지식을 우리들에게 줄 수 없음은 명백하다. 현재 행해지고 있는 법칙의 지식은 우리들에게 교훈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의 동물적 자아를 종속시켜야 할 이성의 법칙을 인식할 경우에만 그런 것이고, 이 법칙이 전혀 인정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
나무가 제아무리 그 속에서 일어나는 화학적 내지 물리학적 현상의 일체를 연구한들(가령 나무가 그렇게 할 수 있다 치고) 나무는 자기를 위해서 이러한 관찰로부터 나무즙을 모아서 그것을 줄기나 잎 열매의 성장을 위해서 분배해야 할 필연성을 끄집어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도 이것과 마찬가지다. 그가 아무리 그 동물적 자아를 지배하는 법칙이나 물질을 지배하는 법칙을 잘 안다 한들 그러한 법칙은 그의 수중에 있는 한 조각의 빵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 가이다. 아내에게 줄 것인가? 다른 사람에게 줄 것인가? 개에게 줄 것인가 혹은 자기 자신이 먹을 것인가? 또 혹은 간직해 둘 것인가? 구걸하는 자에게 줄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리 지시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생활은 그저 이와 유사한 문제의 해결에만 이루어지는 것이다.
동물 식물 및 물질의 존재를 지배하는 법칙의 연구는 인생의 법칙을 해명하는데 유익할 뿐 아니라 오히려 없어서는 안 될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 연구가 그 목적으로서 인간의 지식의 주요한 목표이다. 이것은 이성 법칙의 해명(解明)을 가질 경우에만 한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인간의 생활이, 단순히 그 동물적 생존에 불과한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표시되는 행복이란 있을 리 없다. 이성의 법칙이란 결국 환영(幻影)에 지나지 않는다는 가정에 입각한다면, 이러한 연구는 단순히 무의미할 뿐더러, 인간의 눈에서 그 지식의 유일한 목표를 감추고, 그로 하여금 사물의 반영만을 연구한다면 그 본체도 알 수 있다는 미오에 빠뜨리게 함으로써 해로운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마치 생물의 운동 원인이 그 그림자의 변화와 운동 속에 포함되어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생물의 그림자의 변화나 운동만을 꼬박꼬박 연구하는 사람의 행동에 매우 흡사하다.
5.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의 가능성
“그릇된 지식의 원인은 사물을 투사(投射)하는 그릇된 원근법(遠近法)이다.”
"참된 지식은 앎을 앎이라 하고, 알지 못함을 알지 못함이라고 함에 있다"라고 공자는 말하였다. 이에 반해서 그릇된 지식은 알지 못함을 앎이라고 하고, 앎을 알지 못함이라고 함에 있다. 그리하여 우리들 사이에 도사리고 있는 그릇된 지식에 대해서 이 이상 더 정확한 정의를 줄 수는 없다. 현대의 그릇된 지식은 우리들이 알 수 없는 것을 안다 하고, 우리들이 알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알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릇된 지식을 가지고 보는 사람에게는 공간과 시간 속에 나타나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은 알고 있으되, 그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그에게 명백한 일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일반의 선(善)과 그의 선은 가장 알 수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 이와 거의 같은 정도로 알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의 이성과 그 합리적 의식이다. 그에게 다소 알기 쉽게 여겨지는 것은 동물로서의 그 자신, 좀 더 알기 쉽게 여겨지는 것은 동식물, 가장 알기 쉽게 여겨지는 것은 생명 없이 무한히 퍼져 있는 물질이다.
이와 비슷한 일이 인간의 시각(視覺)에도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무의식적으로 가장 멀리 있고, 따라서 빛깔도 윤곽도 극히 간단하게 여겨지는 물체, 하늘이든 지평선이든 들이든 혹은 숲 따위에 유달리 시선을 돌리기 쉬운 것이다. 이들 물체는 멀면 멀수록 더욱 뚜렷하고 단순히 생각되나 반대로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윤곽이나 빛깔도 복잡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이 물체의 거리를 결정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원근법(遠近法)에 의해서 물체를 배열해 보지도 않고 물체의 윤곽과 빛깔이 더 단순하고 명확하기만 하면 그것을 눈에 보이는 최고도라고 인정한다면, 이와 같은 인간에게 가장 단순하고 명확하게 생각되는 것은 끝없는 하늘이며, 그보다는 약간 명확도가 덜하다고 여겨지는 것은 빛깔과 윤곽이 복잡한 집이나 나무 따위이고, 더욱더 명확도가 덜하게 여겨지는 것은 자기 눈앞에서 흔드는 자기의 손이며, 더욱 막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광선인 것이다.
인간의 그릇된 지식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가장 명백한 것이다. 그 합리적 의식이 그에게는 단순치 않기 때문에 알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나 그에게는 확실히 포착하기 어려운 것이며, 영원한 물질은 그와의 거리 때문에 단순하게 여겨지므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이와 정반대다. 무엇보다 확실히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찾고 있는 행복을 알 수 있고, 또 사실 알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자기에게 이 행복을 지시해 주고 있는 이성, 그 자체를 알고 다음에는 이미 이 이성에 종속하고 있는 자기의 동물아를 알고, 그리하여 끝으로 공간과 시간 사이에 그에게서 나타난 다른 모든 현상을 보고는 있으되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릇된 인생관을 품고 있는 사람일수록, 물체가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한정됨이 명확하면 할수록 자기가 그것을 더욱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우리들은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도 한정되지 않는 것, 즉 행복과 이성의 법칙만을 충분히 알고 있을 따름이다. 외적 사물은 그 지식에 우리들의 의식이 참여함이 적으면 적을수록 우리들이 그것을 아는 정도도 적은 것이다. 따라서 사물은 그저 공간과 시간에서의 그 지위에 의해서만이 한정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체가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한정되는 일이 현저하면 현저할수록 인간에게 알려지는 일도 적은 것이다.
인간의 참된 지식은 자기의 개성, 동물아의 인식에 그친다. 행복을 추구하고, 이성의 법칙에 종속되는 자기의 동물아를 사람은 자기의 개성 이외의 삼라만상에 관한 지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실제 이 동물아에서의 자기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자기를 알고 있음은 그가 시간적 또는 공간적인 그 무엇이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그는 시간적 또는 공간적 현상으로서의 자기를 결코 알 수는 없다.) 자기의 행복 때문에 이성의 법칙에 쫓아야 하는 그 무엇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무엇으로서의 자기가 이 동물아 속에 있음을 알고 있다. 그가 시간과 공간에서의 자기 위치에 관한 스스로 물을 때 무엇보다 먼저 생각되는 것은, 그는 앞뒤에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의 한복판에서 있다는 것과 자기야말로 표면이 어디에도 없는 구체(球體)의 중심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시공을 넘는 자기 자신을 실제 알고, 자기의 자아에서 그의 실제적 지식이 끝마치는 것이다. 이 자아 이외에 있는 삼라만상을 인간은 알지 못하고 그저 외적 조건적 방법으로 관찰하고 결정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가령 일시적으로 행복을 희구하고 있는 합리적 중심이 시공을 초월한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을 아는 일로부터 떠난다고 하면, 인간은 그때에만 조건부로 자기가 공간과 시간 속에 나타나고, 세계의 일부임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인간은 시간과 공간 사이에 있는 자기를 다른 존재와 관련시켜 고찰하면서 자기 자신에 관한 참된 지식을 자기에 관한 외적 관찰에 결부시키고는 곧 일반적으로 다른 모든 사람들과 비슷한 인간으로서의 관념을 자신에 관해서 얻는 것이다. 인간은 이와 같이해서 자기에 관한 이 조건적인 지식에 의해서 남들에 대해서도 어떤 외적 관념을 얻기는 하나 그들을 알지는 못하는 것이다.
인간이 진실로 남을 수 없게 되는 불가능은, 그가 그러한 사람을 한 사람만이 아니라 수백 수천 명을 볼뿐더러, 또 여태껏 한 번도 본 일이 없고, 또 장래에도 결코 볼 수 없을 인간들이 현재에도 있고, 과거에도 있었고, 또 미래에도 있으리라 함을 알고 있으므로 해서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의 저편에서 자기로부터 더욱 멀리 떨어져서, 인간은 공간과 그 시간 사이에서 남들과 다르고 또 서로도 다른 동물을 본다. 이들 존재는 만약 그가 인간에 관한 지식을 갖지 못한다면 그에게는 전혀 이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을 가지고 인간이라는 관념에서 그 합리적 의식을 빼낼 때 그는 동물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의 관념을 얻는 것이다. 그러나 이 관념은 대체로 사람들에 관한 그의 관념으로 보아 그의 지식에서 한층 먼 것이다. 수 없이 다른 동물을 그는 상당한 양으로 보기 때문에 그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분명히 그것에 관한 그의 지식의 가능성도 적어지는 것이다.
그로부터 더욱 먼 곳에서 그는 식물을 본다. 그리고 세계에 있어서의 이같은 현상의 광범성이 넓으면 넓을수록 그것에 대한 그 지식이 그에게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더욱더 먼 곳이나 동식물의 저편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은 생명이 없는 물체나 이제는 거의 혹은 전혀 구별하기 어려운 물질의 형태를 보는 것이다. 그는 물질을 무엇보다 조금 이해한다. 물질의 형태에 관한 지식은 그에게는 이미 전혀 불명료(不明瞭)하고, 그는 그것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저 그것을 상상하고 있을 따름이다. 하물며 물질은
그에게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무한한 것으로도 생각되고 있음에 있어서랴!
“사물을 이해한다는 것의 가능성은 공간 및 시간에서의 그 출현 결과가 아니라 우리들 및 우리들이 연구하고 있는 사물에 종속하는 법칙의 통일 결과이다.”
개(犬)가 괴로워하고 있다. 송아지는 유순하다. 그이는 나를 사랑하고 있다. 새는 기뻐한다. 말은 겁먹고 있다. 착한 사람, 못된 짐승, 이와 같은 말만큼 알기 쉬운 무엇이 있을까? 더구나 이들이 가장 중요하고 이해하기 쉬운 모든 말은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상이 종속되는 법칙이 우리들에게 이해 불가능하면 할수록 그 현상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더욱더 정확하게 결정되는 것이다. 지구나 달이나 태양의 운행을 일으키는 인력의 법칙을 누구나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더구나 일식(日食)은 공간으로서 가장 명확하게 결정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들이 완전히 알고 있는 것은 그저 우리들이 생활과 행복에 대한 우리들의 희구(希求)와 이 행복을 우리에게 지시해 주는 이성(理性)뿐이다. 그다음 우리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우리들의 동물아(動物我), 즉 행복을 희구하고 이성의 벌칙에 따르는 지식이다. 우리들의 동물아에 관한 지식은 이미 보이든가, 만져지든가, 관찰되든가 하지만 우리들의 이해에서 들어오기 어려운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이 부수(附隨)되고 있다. 확실성의 정도로 보아 이에 버금할 지식은 우리들과 같은 수많은 동물적 자아, 그 속에 우리에게 고통 되는 합리적 의식을 인정하는 동물적 자아에 관한 지식이 있다. 이들 자아의 생활이 행복에 대한 희구 및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의 법칙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만큼 우리들은 그것을 아는 것이 되며, 그것이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 속에 나타나면 나타날수록 그만큼 우리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는 셈이 된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들은 인간을 가장 잘 알게 되는 셈이 된다. 확실성의 정도에 의해서 이에 버금할 지식은 동물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이다. 그 동물 속에 우리들은 행복을 추구하는 우리들 자신의 개성(個性)과 비슷한 개성을 인식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과 비슷한 것을 인정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우리들은 동물과는 이미 이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서로 통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동물 다음에 우리들은 식물을 본다. 식물에 이르러서는 우리들은 벌써 거기에 행복을 희구하는 우리들과 비슷한 개성을 알 수가 거의 없는 것이다. 이들 존재는 주로 우리들에게 시간 및 공간의 현상으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우리들의 지식에는 더욱더 들어가기 어려운 것이 된다.
우리들이 그들을 앎은 그저 그들 속에 우리들이 동물아와 비슷한 개성을 보기 때문이고, 그것을 우리들의 경우와 같이 행복을 희구하고, 공간과 시간의 조건에서 그 속에 나타나는 이성의 법칙에 물질을 따르게 하는 것이다.
또한 한층 우리들의 지식에 들기 어려운 것은 무인격(無人格)인 물질적 사물이다. 그 속에서 우리들은 이미 아무런 우리들의 개성과 비슷한 것도 찾아볼 수 없고, 행복의 희구조차 전혀 보지 못하며 보이는 것이라곤 그저 그들이 종속하는 이성 법칙의 시간적 공간적 현상에 불과하다.
우리들 지식의 진실성은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의 사물에 관한 관찰 여하에 관계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사물의 표현이 관찰하기 쉬우면 쉬울수록 그것은 우리 들에게는 오히려 이해하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세계에 관한 우리들의 지식은 행복을 희구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인식과 그 행복 달성을 위해서 우리들의 동물아를 이성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의식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동물의 생활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그저 동물 속에서도 행복에 대한 희구와 그들에게는 유기체(有機體)의 법칙으로서 나타나 있는 이성의 법칙에 좇을 필요를 인정하기 때문에 불과하다.
또 만약 우리들이 물질을 안다고 하면, 그것은 그저 물질의 행복은 우리들에게 이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역시 그 물질 속에 우리들 자신이 있음과 같은 현상, 즉 그들을 지배하는 이성의 법칙에 따를 필요를 인정하기 때문에 불과하다.
지식은 무엇보다도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며, 이성의 법칙을 따름으로써 얻어지는 행복에 대한 희구라고 하는 우리들의 지식은 다른 사물로의 이전(移轉)이다.
동물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우리들은 자기를 알 수는 없다. 그저 자기 속에 인정하고 있는 법칙에서만 우리들은 동물을 아는 것이다. 하물며 물질 현상에 이전된 자기의 생활 법칙으로부터 우리들은 자기를 알 수는 없는 것이다.
외계(外界)에 관해서 인간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은 그가 그저 자기 자신을 알고 자신 속에 세계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관계를 발견하고 있으므로 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첫째는 합리적 의식의 관계, 둘째는 동물적 자아의 관계이며, 그 세계는 동물적 육체에 들어오는 물질의 관계이다. 그는 자기 자신 속에 이들 세 가지가 서로 다른 관계에 있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가 세계에서 보는 삼라만상은 그의 앞에 항상 서로 다른 세 가지 평면(平面) ① 합리적 존재 ② 동식물적 존재 ③ 무생물이라는 배경법(配景法) 속에 배치되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이 세계에서 이 세 가지 범주(範疇)를 보고 있으나, 그것은 그 자신 속에 이들 세 가지 지식의 대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① 동물을 지배하는 합리적 의식으로서 ② 합리적 의식에 따르는 동물로서, ③ 동물에 따르는 물질로서 알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되고 있다시피 우리들이 유기체의 법칙을 알 수 있음은 물질 법칙의 지식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무엇보다 우선 우리들은 자기 자신, 즉 우리들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들의 개성을 종속시켜야 할 이성의 법칙을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그때에 비로소 우리들에게는 자기의 동물적 자아 및 그와 비슷한 다른 자아의 법칙과 또 자기로부터 훨씬 멀리 있는 물질의 법칙을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자신만을 알아야 할 것이며 또 그것만을 알고 있는 것이다. 우들에게는 동물의 세계가 이미 우리들이 자신 속에 알고 있는 거의 반영(反映)이다. 물질의 세계에 이르러서는 이미 일종의 발명의 반영이라고나 말해야 할 것이다.
물질의 법칙이 우리들에게 특히 명료한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은 그것이 그저 우리들에게 똑같이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에게 똑같은 것은 우리들에게 의식되고 있는 우리들 생활의 법칙으로부터 특히 먼 것이기 때문이다.
유기체의 법칙도 역시 우리들에게는 그와 마찬가지로 먼 곳에서 우리들 생활의 법칙보다는 간단한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역시 우리들은 그저 법칙을 관찰할 따름이고 우리들이 이행해야 할 우리들의 의식적 법칙을 알다시피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들은 그 어느 쪽 존재도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서 보고, 관찰하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오직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의 법칙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의 행복에 필요하고, 우리들은 이 의식에 의해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우리들이 그것을 보지 않는 것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을 만큼 높은 곳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임에 불과하다.
만약 세상에서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이 우리들의 동물아를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처럼, 또 동물아(유기체)가 물질을 자기에게 종속시키는 것처럼, 우리들이 합리적 의식을 종속시키는 더욱 높은 존재가 있기만 한다면, 이들 고등(高等) 존재야말로 우리들의 합리적 생활을 우리들이 자기의 동물적 존재나 혹은 물질적 존재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있었음에 틀림 없다.
인생은 그것이 자기의 내부에 포함하고 있는 두 가지 존재 양식, 동물 및 식물(유기체)의 존재와 물질의 존재로 나누기 어렵게 결합되어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인간은 그 자신의 참된 생활을 만들고 스스로 그 생활로 산다. 그러나 그 생활에 결합되어 있는 두 가지 존재 양식에 인간은 참가할 수 없다. 그를 구성하고 있는 육체와 물질은 그 자체가 단독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존재 양식은 마치 그의 생활에 삽입(揷入)된 앞선 과거의 생활 같은 것으로 또 과거 생활에 대한 추억 같은 것으로 인간에게 여겨진다.
인간의 참된 생활에 있어서 이들 두 가지 존재 양식은 그를 위해서 사업의 재료와 도구는 제공해 주나 사업 그 자체는 제공하지 않는다.
자기 과업의 도구와 재료를 연구함은 인간에게 유익하다. 그런 것들을 잘 알면 알수록 그의 과업은 쉽게 될 것이다. 그의 생활에 삽입된 이들 생존 양식, 즉 자기의 동물적 존재와 그 동물적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의 연구는 인간에게 마치 거울에 비친 반영처럼 일체의 존재물의 일반적 법칙, 이성이 법칙에 종속해야 하는 일을 가르치고, 그것에 의해서 그 동물아의 일체를 자기의 법칙에 따르게 해야 할 필요성을 그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인간은 과업의 재료와 도구를 일 그 자체와 혼동시켜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자기와 남에게서 관찰되고,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생활, 그의 노력없이 이루어지는 생활을 연구해본들 그 생활은 항상 그에게는 신비스러운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찰에서 그는 결코 자기에게 의식되어 있지 않는 이 생활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고 이 신비스럽고도 항상 공간과 시간과의 무한 속에 그로부터 감춰져 있는 생활을 관찰함으로써는 그의 의식 속에 열려 있는 참된 자기의 생활을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게 하고, 그에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써 성립되는 참된 생활을 비추어 낼 수는 도저히 없을 것이다.
“참된 인간 생활은 공간 및 시간 속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기의 동물아를 이성의 법칙에 복종시킴으로써 이루어지는 행복의 희구로서 그 자신 내부의 생활을 인정하고 있다.
그는 그 이외의 인생을 모른다. 또 알 수도 없다. 사실 인간은 그를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 그 자신의 법칙뿐만 아니라, 유기체의 최고 법칙에도 따르고 있을 때 비로소 동물을 살아있는 것으로서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물질의 어떤 결합 속에 유기체의 최고 법칙에 대한 종속이 있을 때 우리들은 물질의 이 결합 속에서 생명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 종속이 시작되어 있지 않든가 또는 끝마쳐 버렸을 때에는 이 물질을 다른 모든 물질, 즉 그 속에 기계적 화학적 물리적 법칙만이 작용되는 물질과 구별할 것은 없어지고 우리들은 거기에서 동물적 생명을 인정할 수도 없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과 자기 자신마저도 우리들의 동물아가 그 자체의 유기체 법칙뿐만 아니라 더욱 높은 합리적 의식의 법칙에 따를 경우에만 비로소 살아있는 것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이성의 법칙에 대한 자아의 이와 같은 종속이 없어지자 곧 인간 속에 그를 구성하는 물질을 종속시키고 있는 자아의 법칙만이 작용하게 되고, 우리들은 다른 사람 속에도, 자기 자신 속에도, 인간 생활을 인정하지 않게 되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그저 자체의 법칙에만 따르는 물질 속에 동물 생활을 인정하지 않게 됨과 매한가지다.
무아몽중이라든가, 광증이라든가, 사고라든가, 만취라든가, 격정의 발작이라든가 하는 경우에 제 아무리 인간의 운동이 세고 신속한 것이라 한들 우리들은 그 사람을 산 인간으로 알지 않고, 또 생명 있는 인간으로서 대접하지 않고, 그의 내부에 그저 생명의 가능성만을 인정한다.
이에 반해서 그 사람이 아무리 약하고 활발치 못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동물적 자아가 이성에 따르고 있음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우리들은 그를 생명 있는 인간으로 알고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인생을 이성의 법칙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으로서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생명은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 있기는 하나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의해서 결정되지는 않고, 그저 이성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 정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생명을 시간적 및 공간적 조건에 의해서 결정함은 사물의 높이를 결정함에 있어서 그 길이나 넓이로서 함과 마찬가지다.
같은 평면이라도 움직이고 있는 물체가 위로 오르는 운동은 참된 인간적 생활과 동믈아의 생활과의 관계, 혹은 참된 생활과 시간적 내지 공간적 생활과의 관계와 흡사한 것을 말해 줄 것이다. 위로 향하는 물체의 운동은 평면에서의 그 운동에는 관계가 없으므로 그로부터는 아무런 증감을 받을 수가 없다. 인생의 결정도 이와 같은 것이다. 참된 생활은 항상 개성 속에 나타난다. 그러나 개성과는 관계가 없다. 이것저것 개성의 존재에 의해서 증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동물적 자아가 발견되는 시간적 내지 공간적 조건은 합리적 의식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 속에 성립되는 참된 생활에 대하여 아무런 영향도 가질 수 없다.
자기 생존의 시간적 내지 공간적 운동을 폐기하고 정지시키는 것은 살기를 원하는 인간의 힘밖에 있다. 그러나 그의 참된 생활은 이들 눈에 보이는 공간적 내지 시간적 운동과는 관계없이 이성에 종속됨으로써 행복을 획득하는 일이다. 이와 같이 이성에 종속함으로써 점점 많은 행복을 획득하는 일이어야만 인간 생활을 구성하는 그것도 존재한다. 이러한 종속에서의 향상이 없을 경우에 인간 생활은 공간 및 시간이라는 두 가지 눈에 보이는 방향에 따라서 나가는 단순한 일개의 생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향상 운동, 점점 도가 더해지는 이성으로의 이 종속 운동이 있을 경우에는, 두 개의 힘과 한 개의 힘 사이에 있는 관계가 결정되어, 인간의 생존을 생명의 영역에까지 높여 합치는 힘에 의해서 크든 적든 운동이 이루어진다.
공간적 내지 시간적인 힘은 인생의 관념에는 용납되지 않는 한정적 유한적(有限的)인 힘이다. 그러나 이성에 따름으로써 행복을 희구하는 힘은 향상력이며, 인생의 힘 그것이며, 이 힘에는 시간적 한도도 공간적 한도도 다 같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그 생활이 정지되거나 분열되는 것 같이 여겨지나, 이같은 정체나 동요는 있지도 않고 또 있을 수도 없으며, 그것들은 그저 우리들이 인생을 보는 눈이 그릇되었을 때 그렇게 생각되는 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야 인간은 참된 생활도 살기 시작했다. 즉 동물적 생활보다는 한층 높은 곳에 올라가 있다. 그 높은 곳으로부터 필연적으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의 동물적 존재의 환영(幻影)을 보고 그 평면에서의 생존이 사방으로 심연(深淵)에 의하여 단절(斷絶)되어 있음을 본다. 더구나 이 향상을 인생 그 자체라고는 인정하지 않고, 다만 그 높이에서 보이는 것 앞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를 그 높이까지 끌어올린 힘을 자기의 생명으로 알고 자기 앞에 열린 방향에 따라 나가는 대신에 향상되었으므로 자기 앞에 열린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유달리도 아래로 내려와서 자기 앞에 놓인 절벽을 보지 않으려고 될 수 있는 대로 낮게 내려오려고 한다. 그러나 합리적 의식의 힘은 그를 다시 들어 올리므로 그는 그것을 보고 겁을 먹어 끝내는 그것을 보이지 않으려고 땅 위에 엎드려버린다. 그리하여 이 한 가지 일은 그가 마침내 그를 끌어당기고야 마는 멸망적 생활의 운동에 대한 공포로부터 살아나기 위해서는, 평면에서의 그의 운동, 즉 그의 시간적 공간적 존재가 그의 생활이 아니라는 것과 그의 생활은 오직 위로 향하는 운동 속에만 있으며, 행복과 생명의 가능도 역시 그의 개인성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일에는 포함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함을 깨달을 때까지 계속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그는 자기에게는 그 심연 위로 자기를 들어 올리는 날개가 있다고 한다. 만약 이 날개가 없다면 자기는 결코 그토록 높이 올라갈 리도 없었을 것이며, 또 심연을 보는 일도 없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는 이 날개에 의지해서 날개가 그를 데리고 가는 곳으로 날아가야 하는 것이다. 그저 이 신뢰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처음에는 이상스럽게 여겨지는 참된 생활의 동요나, 그 정지나 의식의 분열이라는 현상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저 시간과 공간에 의해서 제한되는 동물적 존재에 있어서 자기의 생활을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만 합리적 의식은 동물적 생존 속에 나타난다는 식으로 생각된다. 자기 속에 인정되는 합리적 의식의 표시도 이런 식으로 보는 결과, 인간은 자기에게 이제 어떠한 조건하에서 자기의 합리적 의식이 자기 속에 나타났는가를 자문한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자기의 과거를 연구한다 한들 그는 결코 합리적 의식이 출현한 시간을 찾아낼 수 없다. 그는 늘 그것은 결코 존재한 일이 없는 것이라든가, 혹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그에게 합리적 의식에도 시간적인 간격이 있었던 것처럼 여겨진다면, 그것은 그저 그가 합리적 의식 생활을 생활로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임에 불과하다. 자기의 생활을 오로지 공간과 시간에 의해서 제한하는 동물적 존재로서만 이해할 때, 인간은 합리적 의식의 각성이나 활동마저도 같은 척도로 재고 싶어 한다. 그는 자문한다. 언제, 몇 시간쯤, 어떤 조건하에서 자기는 합리적 의식의 지배를 받았던가 라고, 그러나 합리적 생활의 각성과 각성 사이에 간격이 존재함은 오직 자기의 생활을 동물과의 생활로서 이해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만이다. 자기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합리적 의식의 활동에 있어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그러한 간격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합리적 생활은 존재한다. 오직 그 하나만이 존재한다. 그로서는 1분간의 간격도 혹은 5 천년의 간격도 무차별이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시간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참된 생활 그것을 근본으로 인간이 일체의 다른 생활에 관한 이해를 스스로 꾸미는 것은 자기의 개성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킴으로서 달성해야 할 행복에 대한 희구(希求)이다. 이성도 그것에 대한 종속의 정도도 다같이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참된 인간의 생활은 공간이나 시간을 초월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6. 인간 생활의 방식
“동물적 자아를 위한 행복의 부정(否定)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법칙이다.”
생활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행복에 대한 희구, 즉 생활이다. 모든 사람들은 생활을 이렇게 이해하여 왔으며, 현재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고, 장래도 항상 그렇게 이해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인간적 행복에 대한 희구이며 인생이다. 그리하여 사색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이 그 동물적 자아의 행복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릇된 과학은 인생의 정의에서 행복의 관념을 빼어버리고 인생을 하나의 동물적 생존 속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인생의 행복을 동물적 행복 속에만 있는 것으로 알고 대중의 미오와 일치하고 있다.
그 어느 경우도 이같은 과오는 과학의 소위 자아적 생존, 즉 개성을 합리적 의식과 혼동시키는 데서 생긴다. 합리적 의식은 그 속에 자아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자아는 동물 및 동물로서 인간의 본성이다. 합리적 의식은 일개 인간으로서의 인간의 본성이다.
동물은 그저 그 자신의 육체를 위해서만이 생활할 수도 있다. 그 무엇도 그가 그러한 생활을 함을 방해하지는 않는다. 동물은 자기의 자아를 만족시키고 무의식적으로 그 종족에 봉사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의 개성임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성 있는 인간은 그저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만이 살 수는 없다. 그가 그런 식으로 살 수 없음은 자기 개성을 알고 있고, 다른 존재도 역시 자기와 같이 개성이라는 것, 또 이러한 개성과 개성과의 관계에서 생겨야 할 모든 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그저 자기 일신의 행복에만 몰두하고 오직 자기 자신과 자기의 자아만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는 다른 존재도 역시 그 각각 자기 자신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동물이 알지 못함과 마찬가지로 틀림 없이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자기는 자기의 주위에 있는 모든 개성이 희구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희구하고 있는 개성임을 안다면, 인간은 이미 그의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악으로 비친 행복을 희구할 수 없게 되고, 또 그의 생활은 이미 개인적 행복을 바라는 것에는 존재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저 인간은 때로 행복에 대한 자기의 희구가 동물과의 요구 만족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이 생각되는 일이 있다.
이 잘못은 흔히, 사람이 자기의 동물아(動物我) 내부에 일어난 일을 그 합리적 의식의 활동의 목적으로 간주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마치 인간이 꿈에서 깨고 난 뒤에도 꿈에서 본 바에 의해 지도되면서 일을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만약 이 잘못이 거짓된 가르침에 의해서 지탱된다면, 즉시 사람 내부에 자아와 합리적 의식의 혼동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의식이, 이 인간에게 항상 그의 동물아의 요구를 만족시킴은, 곧 그의 행복은 따라서 생활이 될 수 없음을 지시하고, 그의 참된 행복은 따라서 그에게 알맞는 생활, 즉 그의 동물아 속에는 지리(地理)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는 생활 쪽으로 계속 끌리는 것이다.
흔히 사회에서는 개인의 행복을 부정함은 당연한 일이며, 인간의 미덕이라 생각되고, 또 그렇게 말하여지고 있다. 그러나 개인적 행복을 부정함은 미덕도 아니고 위엄도 아니며, 오히려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조건이다. 인간은 자기를 전 세계에서 동떨어진 개인으로서 의식함과 동시에 다른 개인들도 세계로부터 동떨어진 한 개인으로서 인식하고, 그를 상호 간의 연계(連繫)도 인정하고 자기의 개인적 행복의 덧없음을 인정하며, 그저 그의 합리적 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 같은 행복에만 유일한 실존성을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동물에게는 자체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따위, 자체의 행복에 직접 어긋나는 이와 같은 활동은 다름이 아니라 삶의 부정에 해당되나, 인간에게는 이것이 아주 정반대이다. 오로지 자기 한몸의 행복 달성에만 지향되는 인간의 활동은 인간 생활의 완전한 부정이다.
그 생존의 비참함과 유한함을 지시하는 합리적 의식을 갖지 못하는 동물에게는, 개체적 행복과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개성의 종속이 계속 생활의 최고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자아가 그저 그의 개인적 행복과는 일치되지는 않는 바, 그의 생활의 참된 행복이 그에게 보여주는 생존의 한 단계에 불과하다.
개성의 의식은 인간에게 생활이 아니지만 그의 생활은 동물아의 행복과는 관계없고, 그에게 특유한 행복을 차차 획득해 나가는 활동 속에 이루어지는 그의 생활이 시작되는 한계점(限界點)이다.
오늘날 행세하는 인생관에 의하면, 인생이란 그 동물아의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시간의 한 조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생이 아니다. 그저 단순한 동물아로서 안간의 생존에 불과하다. 무릇 인생이란 동물적 생존 손에 조금 나타날 따름인 그 무엇이다. 그것은 마치 유기적 생물이 물질적 존재 속에 조금 나타날 뿐인 그 무엇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우선 눈에 보이는 그의 개성의 목적이 그의 생활의 목적으로 생각된다. 이들 목적은 눈에 보이므로 이해하기 쉬운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런데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그에게 표시되는 목적은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불가해(不可解)한 것 같이 여겨진다. 그리고 인간은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것을 물리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따르는 일이 두려운 것 같은 느낌이 일어난다.
세속의 그릇된 가르침으로 해독을 받은 사람에게는 현재 저절로 이행되고 있으며, 자기 위에도 타인 위에도 이 눈으로 볼 수 있는 동물아의 요구는 간단명료(簡單明瞭)한 것 같이 생각되나, 눈에 보이지 않는 합리적 의식의 새로운 요구는 그것과는 서로 반대되는 것 같이 생각된다. 자연히 이루어짐이 아니라 애써서 해야 하는 그 실천은 무엇인지 복잡하고 불명료한 것으로 여겨진다. 뚜렷이 눈에 보이는 인생관을 저버리고 어렴풋이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에 따르는 것은 두렵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기에게는 태어 나는 일이, 만약 그가 출생을 감득(感得)할 수 있다고 하면 두렵기도 하고 어지럽기도 했으리라고 생각됨과 매일반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인생관은 죽음으로 이끄나,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만이 생명을 주는 것이 명료할 경우 그 밖에 어찌한 도리가 있겠는가?
“동물적 자아는 생활의 도구이다.”
이러한 이론을 가지고 논증(論證)하더라도 인간의 개인적 생존은 끊임없이 죽음으로 나가는 멸망의 길을 걷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그의 동물아에는 생명이 있을 수 없다는 뚜렷하고 한점의 의심도 없는 진리를 사람의 눈으로부터 가리울 수는 없다.
인간은 태어나서 어린이가 되고, 나이 먹어 죽을 때까지 그의 개인적 존재가 최후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으로 그치는 동물아의 끊임없는 소모(消耗)와 감소(減少)에 지나지 않음을 알지 않을 수는 없다. 따라서 자아의 확대(擴大)와 불멸에 대한 염원(念願)을 포함하고 있는 개성 속의 생활 의식은 끊임없는 모순(矛盾)과 고통이 아닐 수 없고, 또 악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그의 생활의 유일(唯一)한 의의는 행복에 대한 희구인 것이다.
인간의 참된 행복이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던 동물적 자아의 행복을 부정해야 함을 그로서는 도저히 피할 수 없다. 동물아의 행복을 부정함은 인간 생활의 법칙이다. 만약 이 법칙이 합리적 의식에 복종하는데 표현되면서도 자유로히 실행되지 않는다면, 그 의식은 각자 내부에서 그 동물아의 육체적 죽음에 즈음하여, 인간이 임종의 고통에 견디지 못해 오직 한 가지 일, 즉 멸망되어 가는 개성의 괴로운 의식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 양식으로 옮김을 원할 때 강제적으로 실행될 것이다.
생활에의 첫걸음과 인간의 생활은 마치 주인에 의해서 외양간으로부터 끌려 나와 마구(馬具)를 얹히는 말이 당하는 일과 같다. 외양간에서 끌려 나와 바깥 광경을 보고 자유로운 기분을 맛본 말로서는 이 자유야말로 생활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나, 이윽고 수례를 매고 끌려나간다. 말은 자기 등에 무게를 느낀다. 그래서 만약 그 말이 자기의 생활은 자유로이 뛰어다니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말은 몸부림치기도 하고, 들어 눕기도 하고, 때로는 죽어 버리기조차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이 만약 죽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로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따름이다. 그대로 걷고 짐을 끌고 간 결과 짐도 과히 무겁지 않고, 그것을 끌고 가는 것이 고통이기는커녕 도리어 기쁨임을 알던가 혹은 끝까지 배짱을 부리는 것이다. 그러면 주인은 그 말을 끌고 수레 위로 데리고 가서 밧줄로 벽에 동여맨다. 그러나 수레가 아래에서 빙빙 돌기 시작하므로 말은 암흑 속에서 제자리를 고통스럽게 하염없이 걸어야 한다. 그러나 말의 힘은 소용없게 되는 것이 아니다. 즉 말은 마음에 거슬리지만 자기의 일을 하고, 법칙은 그 속에서 실행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라고 하면 오직 전자의 경우는 기꺼이 일하는데, 후자는 싫은 것을 억지로 일할 따름이다. "그러나 이 개성이란 것은 대체 무엇일까? 인간인 내가 생명을 받기 위해서 그 행복을 거절해야 하다니!"하고 자기의 동물적 존재를 인생으로 알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실제 무엇 때문에 이 참된 생활의 표현을 방해하는 개성 의식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의 생명 및 종족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향해서 정진하고 있는 동물이 질문할 수 있을 것 같은 비슷한 질문으로써 대답할 수 있다. "대체 무엇 때문에?"하고 그는 물을 것이다. "이 물질과 그 법칙, 기계적이니 물리적이니 화학적이니 뭐니라고 하며 내가 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뭇은 이유가 있을까? 만약 내 사명이?"하고 동물은 말할 것이다. "동물생활의 존재라면 내가 정복해야 할 이러한 방해물은 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일까?"
우리들에게는 분명하지만 동물이 싸워서 그것을 동물로서의 개성 존속을 위해서 자기에게 종속시키고 있는 모든 물질과 그 법칙은, 실은 장해(障害)가 아니고, 그들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저 물질의 개조(改造)와 그 법칙의 매개(媒介)에 의해서만이 동물은 살아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에 있어서도 바로 이와 같다. 인간이 그 속에 자기를 발견하고, 그것을 자기의 합리적 의식에 종속시켜야 할 사명을 띠고 있는 동물적 자아는 결코 방해물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서 인간이 그 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동물적 자아는 인간에 있어서 그가 일하는데 쓰는 일개의 도구이다. 동물적 자아는, 인간에게는 흙을 파기 위해서이고, 파서는 무디게 하고, 갈고, 소모하기 위해서 합리적 존재에 주어진 보상이며, 깨끗이 간직해두기 위한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생장을 위해서 그에게 주어진 재능이지 보존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무릇 그 목숨을 아끼는 자는 이것을 잃고, 나를 위해서 그 목숨을 잃은 자는 그것을 얻으리라." 이 말씀 속에 있는 뜻은 우리들이 멸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또 쉴 새 없이 멸망하고 있는 것은 보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저 멸망하게 될 것, 또 멸망해야 할 것, 즉 우리들의 동물아를 부정함으로써만이 우리들은 우리의 참된 생명, 영구히 멸망하지 않고 또 멸망할 리 없는 생명을 받는 것이라 함이다. 더우기 우리들의 참된 생활은 그저 우리들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생명이 아니었던 것, 또 생명일 수 없던 것, 즉 우리들의 동물적 생존은 생명이라 생각함을 그칠 때 비로소 시작된다는 것도 나타나 있다. 더구나 거기에는 생명을 유지하는 음식물을 준비하기 위해 주어진 보상을 간직해두는 따위 인간은 보상을 아꼈기 때문에 음식물도 목숨도 잃게 되리라 함도 말씀되어 있는 것이다.
영(靈)의 탄생
"너희들은 새로 태어나지 않으면 아니된다"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 누구가 인간으로 태어날 것임을 명령했음을 의미함이 아니라, 이것은 필연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생명을 가지기 위해서 인간은 합리적 의식에 의해 이 생존 속에 새로이 태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합리적 의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 의식에 의해서 표시되는 행복 속에 생활을 찾게 하고자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 행복 속에서 생활을 찾는 자는 생명을 가지게 되나, 이 속에서 생활을 찾지 못하고, 그것을 동물아의 행복 속에서 찾는 자는 이 사실 그 자체에 의해서 스스로 생명을 잃는 것이다. 예수에 의해 주어진 인생의 정의는 이 한 가지 일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개인적 행복이 희구를 인생으로 아는 자들은 이런 말씀을 듣더라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 말씀이 전혀 뜻이 없거나 혹은 극히 빈약한 의미인 어떤 감상적이고 신비적인 - 그들은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 기분이 있기나 한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데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그들로서는 들어가기 어려운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이것의 의미를 깨달수 없음은, 마치 메말라서 이제는 움이 트지 못하는 씨앗이, 습기를 띠고 이미 움트고 있는 씨앗의 상태를 이해하지 못함과 같은 것이다. 메마른 씨앗으로서는 그 움터 나오려는 씨앗을 비쳐주는 태양도 그저 무의미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약간의 열과 빛을 더해 줌에 지나지 않은 그것이 움트기 시작한 씨앗에게 있어서는 생으로 태어나오는 원인이 된다. 이것은 마치 아직 동물아와 합리적 의식의 내적 모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로, 이성인 태양의 빛이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우연, 감상적이고 신비적인 말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태양은 다만 이미 생명이 움트기 시작한 것만을 삶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인간에게만 그치지 않고 동물에서도 식물에서도 생명이 어떻게 해서, 언제, 어디서, 생겨 나오느냐는 것을 오늘날까지 그 누구도 알아낸 사람이 없다. 인간 생명의 발생에 대해서 예수는"이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알 수 없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실제 어떻게 하여 인간의 내부에 생명이 발생하느냐 함을 알 수 있을까? 생명은 인간의 빛이다. 생명은 만물의 생명이다. 삼라만상의 원천이다. 어찌 인간이 그 발생 상태를 알 수 있으리오? 인간에게는 발생하거나 멸망하는 것은 살아 보지 않은 것, 즉 공간과 시간 사이에 나타나 있는 것뿐이다. 생명은 참된 존재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발생하거나 멸망될 수도 없는 것이다.
7. 합리적 의식은 무엇을 요구하는가
그렇다. 합리적 의식은 인간에게 반박할 수 없는 단호한 결정을 내린다. 그가 자기의 개인적 입장에서 보는 오늘날 세계 조직에 있어서는, 즉 그 개인을 위한 행복이란 있을 수 없고, 그의 생명은 특별히 자기에게 행복을 얻으려는 소원인 것이다. 더구나 그는 이 행복이 불가능한 까닭을 아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스럽지 않은가? 그는 이 행복이 그에게 불가능한 까닭을 의심할 여지없이 인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있을 수 없는 이 행복, 자기 일신을 위한 행복을 생각하는 것으로만이 살아가고 있으니!
눈이 뜨이는 (방금 뜨이었을 뿐이다) 했으나 아직도 동물아를 자기에게 종속시키지 않는 합리적 의식을 가진 인간은, 만약 그가 자살이라도 하지 않는 한, 오직 이 불가능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만이 살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가 살고 또 일하는 것은 자기 일신의 행복을 얻기 위한 것이고, 모든 사람들, 모든 생물조차도 그저 그의 행복을 위해 그가 하나의 기쁨을 위해 살고 일하기 위한 것이고, 그만이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 아닌가? 그 자신이 경험과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생활에 관한 관찰과 이성은 각자에게 이 목적이 달성되기 어렵다는 것을 확실히 가르치고, 다른 생물로 하여금 그 자신을 사랑함에 그치게 하고, 다만 자기 하나만이 사랑받게 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각자의 생활은 그저 부력(富力) 권력 명예 영광 감언 사기 등의 수단으로써 다른 생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하나를 위해서만이 생활하게 하고, 일체의 생물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하나만을 사랑 받게 하려하는 데 있으니!
사람들이 이 목적 달성을 위해서 될 수 있는 데까지는 무엇이든 해왔으며 또 현재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저들이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다. "나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희구다"라고 인간은 자기에게 말한다. "나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만인이 오직 나만을 자기네들 자신보다도 사랑해 줄 때 비로소 가능한데, 모든 생물은 그저 자기만을 사랑하고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들로 하여금 나를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내가 하고 있는 모든 일은 헛수고다. 헛수고이기는 하나 나로서는 그밖에 어찌할 도리가 없다."
몇 세기의 세월을 거쳐서 인간은 발광체로부터의 거리를 알고, 그들의 무게를 정하고 태양이나 별의 성분을 밝히기는 했으나, 개인적 행복의 가능을 부정하는 이 세상의 생활을 어떻게 조화하면 좋으냐 하는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5천년 전의 사람들에게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합리적 의식은 각자에게 말한다. "그렇다. 그대는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만인이 그대를 그들 자신 이상으로 사랑해 줄 때에 한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합리적 의식은 사람에 대해서 너무 무리한 청구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따라서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인간에게 계시되는 유일한 행복은 너무 같은 의식의 손에 의해서 또다시 감추어져 버리는 것이다.
몇 세기의 세월이 경과해도 인간 생활의 행복에 관한 수수께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전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이 수수께끼는 이미 아득한 옛적에 해결되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해결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그들 자신이 무엇 때문에 그것을 풀지 못했는가 함은 이상스럽게 여기며, 그들은 벌써 옛적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을 잠깐 잊어버리고 있었음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낀다. 그만큼 현대 세계의 그릇된 가르침 속에서는 곤란한 것 같이 여겨지는 이 수수께끼의 해결도 극히 간단하고 또 자연히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대는 만인이 그대를 위해서만 생활해 줄 것을 바라고, 그들 자신 이상으로 그대를 사랑해 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인지? 그런데 그대의 이 희망이 달성될는지도 모를 상태는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그것은 모든 생물이 타자(他者)의 행복을 위해서 살고,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는 상태다. 그때에 비로소 그대로 또 다른 모든 생물과 만물로부터 사랑받게 되고, 그들 중의 하나인 그대도 그대가 바라는 행복을 얻게 될 것이다. 이토록 행복이란 모든 생물이 자기 자신보다 남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대에게 가능한 것이라 한다면, 하나의 생물인 그대도 마땅히 그대 자신보다 다른 생물을 더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오직 이 조건에 있어서만이 인간의 행복과 생활은 가능하다. 오직 이 조건에서만이 인간의 생활에 해독을 끼치는 것이 절멸되고, 생물의 투쟁, 참혹한 고통 및 죽음의 공포도 근절되는 것이다.
실제 개인적 존재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이냐? 첫째는, 서로가 개인적인 행복만을 찾고 있는 생물의 투쟁이며, 둘째로는 생명의 낭비(浪費)와 포만(飽滿)과 고통으로 이끄는 열락(悅樂)의 속임이고, 셋째로는 죽음이다. 그럼 이 행복의 불가능을 없애고, 인간이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의 개인적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로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임을 가정해야 한다. 인생이란 개인적 행복에 대한 희구라는 인생관으로써 세계를 볼 때, 인간은 거기에 서로 멸망케 하는 불합리한 생물의 투쟁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 세상에 그것과는 전혀 틀리는 것, 즉 생물의 투쟁의 우발적 현상과 더불어 같은 존재의 끝없는 상호봉사, 그것 없이는 세계의 존재가 무의미하게 되므로 봉사를 하기 위해 인간은 자기의 생활을 남의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것만을 인정한다면, 여태껏 도달할 가망이 없던 개인적 행복으로 지향된 모든 무의미한 활동도 세계의 법칙과 일치해서 자기와 전 세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행복 달성으로 지향될 다른 활동과 바꾸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생활을 비참하게 하고, 인간에게 그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둘째 번 원인은, 생명을 낭비하고 포만과 고통으로 이끄는 개인적 열락의 속임수였다. 인간은 그저 남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서 자신의 생활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되면 열락이 지니는 속이기 쉬운 갈망(渴望)은 사라지고, 동물이라는 밑바닥 없는 통을 가득 채우기 위해서 지향되어 온 무익하고 괴로운 활동도 이성의 법칙과 일치하는 다른 존재의 생활을 지탱하려는 그의 행복에 없어서는 안될 활동으로 바뀔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을 절멸시키는 개인적 고통의 괴로움은 확실히 유익하고 가장 기꺼운 활동을 일으키는 남에 대한 동정의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개인적 생활을 비참하게 하는 셋째 번 원인은 죽음의 공포였다. 그러나 인간은 그저 자기의 생활을 그 동물아의 행복에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에 있는 것이라고 인정하기만 한다면, 죽음이라는 괴물은 그 눈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질 것이다.
대체로 죽음의 공포는 그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삶의 행복이 상실된다는 공포로부터 생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인간이 만약 자기의 행복을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상정(相定)할 수 있다면, 즉 그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많이 사랑할 수 있다면, 죽음도 역시 자기 하나만을 위해서 생활하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 같은 행복과 생명의 중단은 생각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남을 위해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것이 행복과 생명의 소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존재의 행복과 생명은 다만 그들에게 봉사하는 인간의 생명에 의해서 절멸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때로는 그 생명이 희생에 의해서 높여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식의 요구의 확인
"그러나 그것은 삶이 아니다." 교란(攪亂)되어 갈피를 못 잡는 사람의 의식은 이렇게 대답한다. "그것은 삶의 거부(拒否)이며, 자살이다."―"나는 그 따위 일은 조금도 모른다"라고 합리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인생이란 그러한 것이고, 그 이외의 인생은 없고, 또 있을 수 없다는 것뿐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러한 생활이 인간에게도, 전 세계에 대해서도, 인생이며 행복인 줄 알고 있다. 더욱이 나의 지난날의 세계관에 따르면, 나의 생활도, 모든 생물의 생활도, 악이며 무의미한 것이었으나, 이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심어진 이성의 법칙이 실현됨을 알고 있다. 또 나는 무한으로까지 증대되어 나갈 수 있는 각 존재의 생활의 최대에 의해서 그저 만인에 대한 각자의 봉사하는 법칙, 따라서 각자에 대한 만인의 봉사라는 법칙에 행복은 달성되는 것이다."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적인 법칙은 될 수 있어도 실제의 법칙이 될 수는 없다"라고 교란되어 갈팡질팡하는 사람의 의식은 대답한다. "현재 남들은 그들 자신 이상으로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나도 나 자신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열락을 저버리고 고통을 감수(甘受)할 수는 없다. 나는 이성의 법칙에는 별로 볼 일이 없다. 나는 나를 위해서 향락을 바라고 나를 위해서 고통을 일부러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오늘날 생물 상호간의 투쟁이 이루어졌으니, 만약 나 한 사람이 투쟁하지 않았다면 남들이 나를 억눌러 없애 버렸을 것이다. 만인의 최대 행복이 가령 어떠한 방법으로 달성되더라도 그것이 나에게는 마이동풍(馬耳東風)격이다. 현재 내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의 실제적 최대 행복이다." 이렇게 그릇된 의식은 말할 것이다.
"나는 그따위 일은 아무것도 모른다"라고 합리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대가 그저 그대의 향락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대 자신이 그것을 취하지도 않고, 남이 그대에게 줄 때에만 비로소 그대를 위해서 행복이 되리라는 것과 그대 자신이 자신을 위해서 그것을 잡을 때에는 그대의 향락은 현재 그러하듯이 포만이 되고, 고통이 되리라는 것뿐이다.
그대는 또 남이 그대를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때만이 실제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므로, 지금처럼 상상적인 고통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손을 대어 자기의 생명을 빼앗아 버리는 것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또 개인적 생활, 만인이 나 혼자만을 사랑해 주고, 나는 나 자신만을 사랑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열락을 내가 얻고,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나만이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같은 생활은 가장 크고 또 끊임없는 고통임을 알고 있다.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남과 싸우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남도 역시 더욱 나를 미워하고, 더욱더 심하게 나와 싸우게 될 것이다. 내가 고통에 대해서 몸을 방어하면 할수록 죽음은 더욱더 두려운 것이 될 것이다.
또 나는 인간이 무엇을 해보든, 그가 자기 생명의 법칙에 적응해서 생활하지 않는 한 행복을 받을 수 없으리라 함은 알고 있다. 그리고 그의 생명의 법칙이란 싸움이 아니고 도리어 만물 상호 간에 이루어지는 상호봉사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생명은 그저 나 자신의 개성 속에만 존재함을 알고 있다. 나는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나의 생명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 따위를 나는 모른다"하고 합리적 의식은 말한다. "알고 있는 것은 오직 나의 세계의 생활이 전에는 사악(邪惡)하고 무의미한 것으로만이 생각되던 생활이 지금은 내가 나 자신 속에 인정하고 있는 것 같은 이성의 법칙에 따름으로써 동일한 행복을 향해서 살아 나가는 한 개의 합리적이고 완전한 생활인 것같이 여겨질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내게서는 불가능하다"라고 헤매는 의식은 말한다. 동시에 이 불가능한 일 그 자체를 하려하지 않는 자가 없고, 이 불가능한 일 그 자체에 있어서 자기 생활의 가장 좋은 행복을 상상하지 않으려는 자가 없는 것이다.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 자기의 행복을 생각함은 불가능하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자기 의외의 다른 존재의 행복이 자기의 행복으로 된 상태를 모르는 자는 없는 것이다. 남을 위해서 일도 하고 고통도 받고 하는 일 속에 행복을 생각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인간은 한번 자비(慈悲)의 감정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개인적 열락 같은 것은 그에게서는 졸지간(猝地間)에 의의를 잃고, 그의 생활력은 남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노력과 고통으로 옳아가버린다. 그리하여 고통도 노력도 그에게 행복이 되는 것이다."남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더구나 인간은 일단 이 감정을 알게 되면 죽음이 보이지 않게 되고, 두렵지 않게 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허용된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되게 되는 것이다.
이성 있는 사람은, 만약 자기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와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가능성을 마음 속에서 인정한다면 그의 생활은 지금까지의 불합리와 불행 대신에 합리적이고 행복스러운 것으로 되리라 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그는 또 남과 다른 존재 속에 이와 같은 생활 관념을 인정함과 동시에, 일찍이 부조리(不條理)하고 참혹하게 생각되던 전 세계의 생활이 뜻밖에 인간만이 희구할 수 있는 고상한 합리적 행복으로 된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 즉 무의미 무목적(無目的) 대신에 합리적 의의를 지나게 되는 것이다. 세계의 생활을 목적으로 이와 같은 사람에게 생각되는 것은 전 세계 존재의 한없는 광명(光明)됨과의 결합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이 결합을 목표로 해서 나가고, 이 결합에 있어서 처음에는 사람들이, 다음에는 모든 존재가 점점 많은 이성의 법칙에 따름으로써, 마침내 인생의 행복은 각 존재의 자기 일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의 법칙에 토대(土臺)를 두고, 남들의 행복에 대한 각 존재의 희구에 의해서 달성되는 것임을(오늘날은 인간에게만 이해되어 있는 일을) 이해하게 되리라.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자기 일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와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만이라도 인정한다면, 인간은 이처럼 자기의 개성을 부정해 나가는 것과 활동의 목적을 자기로부터 점점 다른 존재로 옮겨가는 일이 인류 및 인류에 가장 가까운 생물의 진보 운동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인간은 역사에 있어서도 일반의 생활 운동이 생물 상호의 생존 투쟁의 격화(激化)이니, 증대에 있음이 아니라 오히려 불화(不和)의 감소, 쟁투의 완화(緩和)에 있다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인생의 운동은 그저 이성에 따름으로써 세계가 적의(敵意)와 불화로부터 점점 조화와 결합으로 다가가는 일에만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이번에 인간은 여태껏 서로 물어뜯고 하던 사람들이 그러기를 그만 두고, 포로(捕虜)가 자기의 자식들마저도 죽이던 사람들이 그러함을 그만두고, 살육(殺戮)을 자랑으로 알던 군인들이 그것을 뽐내기를 그만두고, 노예제도의 창시자(創始者)가 그것을 폐기(廢棄)하고, 동물을 잡고 있던 사람들이 동물을 기르기 시작하고, 죽이는 일을 덜하고, 동물의 고기 대신에 달걀이나 젖을 식용으로 하게 되고, 식물의 세계에서까지도 그 절멸을 적게 하려 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인정치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또 인류 중에서 뛰어난 사람들이 남들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생존을 희생시키고 있는 모범적 사실을 인정한다. 인간은 또 그가 오직 이성의 요구에 의해서 인정한데 지나지 않던 그 일이 실지로 세계에서 이루어지고 인류의 과거생활에 의해서 확증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더구나 또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성보다도, 역사보다도, 더욱 힘세고, 확실히 같은 사실을 전혀 다른 원천에서 오는 것처럼 인간에게 보여주는 것이 그를 직접적인 행복으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하고, 이성이 그에게 지시하고, 사랑이 그의 마음에 표현하는 것 같은 활동으로 끌어당기는 그의 마음의 동향이다.
개성의 요구와 합리적 의식의 요구는 양립(兩立)되기 어려운 것 같이 생각된다.
이성도, 고찰도, 역사도, 내적 감정도, 모든 것이 이와 같은 인생관의 진실성을 인간에게 확신시키고야 마는 것 같이 생각된다. 더구나 현세의 가르침에 의해서 자라는 사람들에게는 그의 합리적 의식과 그의 감정의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이 그의 생활의 법칙이 될 수 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남과 싸워서는 안 된다. 향락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 고통을 피해서는 안 된다.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무리한 청이다. 이것은 전 생명의 부정이나 다름없다. 내가 나의 개성의 요구를 느끼고, 이성에 의해서 그 요구가 옳음을 알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그 개성을 부정해야 할까?" 현대의 교양 있는 사람들은 확신에 찬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더구나 여기에 주의해야 할 현상이 있다. 마음이 단순하고, 비판력을 활동시키는 일이 적은 노동계급의 사람들은, 거의 전부 개성의 요구를 굳게 지키는 일이 없이 항상 자기 내부에 개성의 요구와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요구를 느끼고 있다. 그런데 합리적 의식의 완전한 부정과 특히 그러한 요구들의 합리성 파괴와 개성의 권리 보호는 그저 비판력이 발달된 돈 많은 상류 사람들 사이에 많다는 사실이다.
교육을 받는 나약한 유한인은 항상 개성에 절대 불가침(不可侵)의 권리가 있음을 증명할 것이다. 그런데 굶주린 자는 인간에게 음식이 필요하다는 따위의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는 그러한 일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어서 증명도 논박도 할 수 없는 일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먹기만 할뿐이다.
이 사실은 단순한 사람, 소위 무교육자, 인생을 노동에 바치고 있는 자는 그 이성을 해치지 않은 채 완전한 순결과 힘 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일방으로는 그 전 생애를 단순히 무의미한 헛된 일에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는 생각해서 안될 일을 생각하는 데만 소비하고 있는 자들은 그 이성을 여지없이 헤쳐버리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에게는 이성이 아예 자유를 잃어버리고만 것이다. 그의 이성은 이성에 적합지 못한 문제, 즉 개인적 요구의 고찰이나, 그 발달의 증대나,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의 연구에 의해서 차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개성의 요구를 느끼고 있다. 따라서 이 요구는 옳다"고 세속의 가르침에 의해서 양육된 소위 교양인들은 말한다.
그들은 자기의 개성의 요구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자들의 생활은 모두 개인적 행복의 상상적 증대에 지향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개성의 행복은 그들에게 그 요구를 만족시켜 주는 일에 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이성이 지향되고 있는 개인적 존재의 모든 조건을 개성의 요구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의식된 이와 같은 요구는 이성으로 지향된 요구―항상 이 의식의 결과로서 무제한으로 확대되어 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확대되어 마지않는 요구를 충족시켜 가는 일은 그들로부터 그들의 참된 생활의 요구를 가로막는 것이다.
소위 사회학은 인간의 요구에 관한 학설을 그 연구의 기초로서 두고 있다. 그러나 그때 그는 그 학설에 편리하지 못한 사정, 즉 인간에게는 자살하는 자, 혹은 굶어 죽으려는 자들의 경우에서와 같이 아무런 욕망을 가지지 않을 경우도 있고, 글자 그대로 욕망이 무한할 경우도 있다는 사정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동물적 인간 존재의 요구는 그 존재의 면(面)의 수만큼 있는 것이지만, 그 면이야말로 원의 반경과 같이 무수하다. 먹을 것, 마실 것, 호흡 작용, 모든 근육 및 신경 운동의 요구, 노동 휴식 만족 가정생활이 요구, 과학 예술 종교 및 그들의 다종 다양스러운 요구, 이들 모든 관계에서의 어린이 젊은이 남자 노인 처녀 여자 노파의 요구, 중국인 파리인 노서아인 라프란트인의 요구, 민족의 관습이나 질병 등에 적용하는 요구.......
해가 질 때까지 헤아려도 인간의 개인적 생활 요구의 모든 것을 모조리 셀 수는 없을 것이다. 생존의 모든 조건은 요구일 수 있다. 더구나 생존의 조건은 무수하다.
그러나 요구라고 불리우는 것은 그저 의식된 조건뿐이다. 그러나 일단 의식되자마자 그 본래의 의의를 잃고, 항상 그들 쪽으로 지향된 이성이 그들에게 주는 과장적 의의를 갖게 되고, 그것에 의해서 참된 생활을 가리워버리는 것이다.
요구라고 불리우는 것, 즉 인간의 동물적 존재의 조건은 어떠한 형태라도 만들 수 있는 팽창 능력이 있는 작은 공에 비유할 수 있다. 모든 작은 공은 서로 같으며, 그 각각이 자기의 위치를 지키고, 그들이 팽창되지 않는 한 서로 방해하는 일이 없다. 모든 요구도 마찬가지로 같으며 제각기의 위치를 지키고 그것들이 의식되지 않는 한 병적으로 감각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적은 공이 팽창하기 시작하자 곧 다른 것이 차지하고 있는 보다 넓은 장소를 차지하리만큼 팽창해서 다른 것을 압박하고 자기도 비좁아서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요구도 또한 이것과 마찬가지다. 합리적 의식이 그 하나에 지향되자, 곧 의식된 그 요구는 모든 생활을 차지해 버리고, 인간의 존재를 괴롭히게 될 것이다.
개성의 부정이 요구됨이 아니라 합리적 의식에 대한 개성의 종속으로 요구된다.
그렇다. 인간이 그 합리적 의식의 요구를 느끼지 않고 그저 자아의 요구만을 느끼고 있다는 단언(斷言)은 우리들이 그것을 세게 하기 위해서 있는 이성을 모조리 이용해 온 우리들의 동물적 욕망이 우리들을 지배하고, 우리들로부터 우리들의 참된 인생을 가리워 버렸다는 단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성한 악덕의 잡초가 참된 생활의 움돋이를 억눌러 무찔러 버린 형극이다.
개인의 최고 완성은 그 개성의 세련된 요구의 다면적(多面的) 발달이다. 대중의 행복은 저들에게 많은 요구가 있고 저들이 그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데에 있다. 인간의 행복은 그 요구를 만족시키는 데 이루어진다. 이러한 일이 다른 사람들의 스승으로서 여겨지는 사람들에 의하여 서슴지 않고 인정되어왔으며, 또 현재도 인정되고 있는 이때에, 이 세상에 어찌 그 이외의 것이 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가르침 속에서 자라난 사람들을, 어찌 합리적 의식의 요구는 느끼지 않고, 그저 개인적 요구만을 느낀다고 단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또 그들에게 그들의 이성이 남은 것 없이 그들의 육욕 증대(肉慾增大)를 위해서 지양되어 있거늘 어찌 이성의 요구를 느낄 수 있을까? 또 그러한 육욕이 그들의 전체 생활을 삼켜버리고 있거늘 어찌 그 요구를 부정할 수 있을까?
"개성을 부정함은 불가능하다"라고 이들은 흔히 고의적으로 문제를 변경시키려고 애써서, 개성은 이성에 따르는 것이라는 관념 대신에 개성의 부정이라는 관념을 바꾸어 놓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부자연스럽다"고 그들은 말한다. "그러므로 불가능하다"그러나 아무도 개성의 부정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인간에게 개성은 동물아에 대한 호흡, 혈액순환과 같은 것이다. 동물만이 어찌 혈액의 순환이 부정될 수 있었으리! 그러한 것은 입밖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인간에게도 개성의 부정이라든가 하는 것은 입밖에도 낼 수 없는 일이다. 개성은 합리적 인간에게는 혈액이 그의 동물아의 생존에 필수조건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명에 불가결한 조건이다.
개성은 동물아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요구라도 제출할 수 없으며, 또 제출하고 있지도 않다. 이들 요구를 제출하는 것은 그릇된 방향으로 지향된 이성, 즉 생활의 지도도 아니고 그 계발도 아니며, 개성의 육욕 조발(肉慾 早發)을 위해서 지향된 이성이다.
동물아의 요구는 항상 충족되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을 먹겠다든가, 무엇을 입겠다든가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들 요구는 인간이 만약 합리적 생활을 보내고 있다면 새나 꽃에 보장되어 있듯이 인간에게도 보장되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 분별 있는 인간이라면 누가 개성의 안전에 의해서 생존의 불행을 덜 수 있다고들 믿는 자가 있을까?
인간의 생존 불행은 개성이라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개성의 생존이 인생이며 행복이라고 인식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간의 모순이나, 분열이나, 고통이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의 고통은, 그가 그저 자기의 눈으로부터 이성의 요구를 가리우기 위해서 끝없는 개성의 요구를 무한히 세게 하며 더하려고 이성의 힘을 이용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다.
개성은 인간이 그것에 의해서 생존하고 있는 모든 생활 조건과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도 없고, 또 그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조건을 인정 그 자체라고 하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인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주어진 생활조건을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을 인생의 목적으로서 보는 일은 할 수도 없고 또 해서는 안 된다. 개성을 부정함이 아니라 자아의 행복을 부정해서 자아를 인생으로 알지 않게 하는 일, 즉 이것이 본디의 단일(單一)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또 그것에 대한 희구가 인간 생활의 요소로 되어있는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인간이 해야할 일이다.
아득한 옛적부터 개성 속에 자기의 생활을 인식하는 일은 생활의 절멸이며, 개성의 행복 부정이야말로 생명을 얻는 유일한 길이라 하는 가르침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에 의해서 되풀이 설교 되어온 터이다.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불교(佛敎)다"라고 이것에 대해서 현대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열반(涅槃)이다. 그것은 기둥 꼭대기에 올라서는 일이다."
그들이 이렇게 말했을 때 현대 사람들은 그들의 아주 교묘(巧妙)한 방법으로 만인이 다 알고 있는 일이고 누구에게도 감출 수 없는 일, 즉 개인적인 생활은 볼행이고 아무런 의의조차도 갖지 못하는 일이라 함을 갈파(喝破')해 버린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은 불교다. 열반이다"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그들이 이 말로써 수십 억의 인간에게 인정받아 왔으며, 또 현재도 인정되고 있는 모든 일, 우리들의 그 누구도 마음속에서는 샅샅이 알고 있는 일체의 일, 즉 개성의 목적을 위한 생활을 해롭고 무의미한 것이다.
만약 이 해로움과 무의미에서 벗어나올 어떤 출구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개성의 행복을 부정하는 일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갈파해 온 것 같이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태반이 인생을 이처럼 해석해 왔으며, 또 현재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위대한 지식자들이 인생을 그와 같이 해석하고 있다는 사실, 그 밖에는 인생의 해석이 없다는 사실, 이러한 사실은 조금도 그들을 어리둥절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생의 문제를 모조리 비록 충분히 만족스러운 방법으로는 해결되어 있지 않다 하더라도, 전화 가극 세균학 전등 폭약 등에 의해서 처리되고 있다는 것과 개인 생활의 행복 부정이라는 사상은, 그들에게는 고대 무지의 되돌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는 것을 끝까지 믿어 마지않는 것이다.
더구나 이들 불행한 사람들은, 열반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오로지 개인적 행복을 부정하려고 몇 년이나 외발로 서 있던 가장 야만스러운 인도 사람 편이 되어 모든 비교를 넘어서 훨씬 산 인간이라는 것, 즉 세계를 철도로 돌아다니고 전등 불 밑에서 그 야수적 상태를 세계에 폭로하거나 하는 현대 유럽 사회의 야수화된 인간들보다는 훨씬 더 산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해보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 사람들은 개인적 생활과 합리적 생활 사이에 모순이 있음을 이해하고,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있는데 까지 그것을 해결하고 있으나, 현대 문명 세계의 인간들은 이 모순을 이해 못했을 뿐더러, 그러한 모순이 있다 함을 믿기조차 안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란 인간의 자아의 생존이 아니라는 정의는, 모든 인류의 수천 년에 걸친 노작(勞作)의 결정이다. 이 정의는 인간(동물적이 아닌)의 그 정신계에 있어서 단순히 지구의 희전이나 중력의 법칙 따위와 동일할 뿐더러, 그것보다는 훨씬 더 의심할 바 없는 견실(堅實)한 진리로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분별 있는 사람 학자 무식자 노인 소아도 이 사실을 이해하고 또 알고 있다. 이 사실이 감춰져 있는 것은 오직 아프리카나 호주에 있는 가장 야만스러운 사람들이나 유럽의 여러 도시나 그 밖의 여러 곳에 살고 있는 바 야만으로 되돌아간 아무 걱정 없는 사람들뿐이다.
이 진리는 인류의 재산으로 되었으니까 만약 그 종적(從的) 지식 기계학 대수학 천문학 등에서 뒷걸음질치고 있지 않는다면, 하물며 인생을 정의하는 근본적인 주요한 지식에 있어서 뒷걸음질 칠 턱이 없는 것이다. 인류가 수천 년간 생활에서 끄집어 내 온 것, 즉 개인 생활의 공허(空虛) 무의미함 불행함에 대한 천명을 잊어버리거나, 그 의식의 표현으로부터 말살해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생을 개인적 생존으로 보는 고색창연한 야만의 견해를 부활시키려고 하는 시도(試圖), 현대 유럽 세계의 소위 과학적이라는 것이 힘을 경주하고 있는 시도는 그저 인류의 합리적 의식의 발달을 한층 더 분명히 보여주는 데 그치고, 인류가 이미 어떻게 그 소년 시절의 의복으로부터 생장했는가를 명시해 줄 따름이다. 그리고 자기 포기(自己 抛棄)라는 철학상의 학설과 가공할 비율로 불어가는 자살(自殺)은, 이미 지나온 의식의 정도까지 인류를 후퇴시키는 일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데 지나지 않는다.
개인적 생존으로서의 인생은 인류가 이미 졸업한 것이며, 새삼스럽게 지금 그것으로 되돌아 갈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또 인간의 개인적 생존이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우리들이 무엇을 쓰든, 무엇을 말하든, 무엇을 발견하든, 또 우리들의 개인 생활을 아무리 완전한 것으로 만들든 간에 개인적 행복의 가능에 대한 부정은 현대의 모든 합리적 인간에게 확고부동한 진리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회전한다."이 문제는 갈릴레오나 코페르니 쿠스의 단정을 전복시키거나 새로운 푸토레미의 원(圓)을 생각해 내든가 하는 데에서 그것을 생각해 낼 수는 없다. 있는 것이 아니고, 더욱 앞으로 나아가서 이미 인류 전반의 의식으로 되어 있는 그러한 단정으로부터 그 이상의 결론을 끄집어내는 데 있는 것이다. 바라문 교도나 불타나 노자나 솔로몬이나 스토아 학파나 기타 모든 참된 사상가들에 의해서 말해진 개인적 행복의 불가능성에 대한 단정에 대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기의 눈에서 이 단정을 가리우든가, 수단을 꾸며서 그것을 희피하든가 해서는 아니 된다. 용감하게 명백히 그것을 시인하고, 그것을 토대로 그 위에 결론을 끌어내지 않으면 아니 된다.
8. 사랑의 감정
사랑의 감정은 합리적 의식에 따르는 개성의 활동 표현이다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서 사는 일은 합리적 존재로서는 할 수 없다. 그것은 할 수 없음은 모든 길이 그에게 막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동물아가 이끌리는 일체의 목적은 분명히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합리적 의식은 다른 목적을 보여준다. 이 목적은 도달할 수 있을 뿐더러 인간의 합리적 의식에 충분한 만족을 주는 것이다. 그러나 처음에는 세속의 그릇된 가르침의 영향에 의해서 인간에게는 이들 목적들이 그의 개성과 어긋나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오늘의 세계에 키워져서, 발달되어 과장된 개성의 육욕을 가진 인간은 그 합리적 자아(自我) 속에 아무리 자기를 인정하려고 애써도, 그 자아 속에는 그가 자기의 동물아 속에 느끼고 있는 것 같은 삶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합리적 자아는 생활을 관조(觀照)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나, 스스로 생활하지도 않고 삶에 대한 그리움도 없다. 합리적 자아는 삶에 대한 희구를 느끼지 않으나, 동물적 자아는 고통을 받아야 한다. 따라서 그에게는 오직 한가지 일, 삶으로부터의 회피(回避)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현대의 부정적 철학 (쇼펜하우어나 할트만)은 극히 성실성 없고, 양심이 없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그들은 삶을 부정하면서도 그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이용하려 하지 않고 여전히 그 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또 인생을 악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보고, 그로부터 벗어난 자살자들은 이 문제를 지극히 성실하게 해결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자살이야말로 현대 인간 생활의 불합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염세철학가(厭世哲學家)나 가장 평범한 자살자의 사고방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동물적 자아가 있다. 그것에는 삶에 대한 끌리움이 있다. 이 자아는 이 끌리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만족을 얻을 수는 없다. 또 다른 자아인 합리적 자아가 있다. 그것에는 삶에 대한 아무런 끌리움도 없다. 그것은 그저 모든 그릇된 삶의 기쁨이나 동물적 자아의 정열을 비판적으로 관조(觀照)할 따름이고, 그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린다.
첫째 번 것에 몸을 맡긴다고 하자. 우리들은 자기가 불합리한 생활을 하고 불행 쪽으로 나가고 점점 깊숙이 그들 속으로 떨어져 들어감을 볼 것이다. 둘째 번 것은 합리적 자아에 몸을 맡긴다고 하자. 우리들 속에는 삶에 대한 끌리움이 남지 않게 될 것이다. 나는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려고 생각하는 오직 한 가지 일 때문에,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어리석고 불가능함을 볼 것이다. 물론 합리적 의식을 위해서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할 필요도 없고, 그러한 엄두도 나지 않는다. 내가 태어난 원체(原體)―신(神)―를 섬길 것인가, 그러나 무엇때문에 신에게는? 만약 신이 계신다고 하면, 내가 아니라도 다른 봉사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해야할 이유가 어디 있담! 싫증을 느끼지 않을 동안은 이러한 인생의 유희도 보고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싫증이 나기만 하면 도피하는 일, 스스로 목숨을 빼앗을 수 있다. 나도 그렇게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야말로 솔로몬 이전, 불타 이전에 인류가 도달한 모순투성이의 인생관이다. 더구나 현대의 사이비 지도자들은 인류를 거기로까지 후퇴시키려 하고 있다.
개성의 요구는 불합리의 정점에까지 다다르고 있다. 각성된 이성은 그것을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개성의 요구는 매우 증대되어 인간의 의식을 가리워버렸으므로, 그에게는 이성이 모든 생활을 부정하고 있는 것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는 그 삶의 의식에서 그의 이성이 부정하는 것을 모조리 빼앗아내 버린다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같이 느낄 것이다.
그러나 빛은 어둠 속에서 빛난다. 그리고 어두움은 그것을 가리울 수 없는 것이다.
진리의 가르침은 이 딜레마를 ―무의미한 존재냐, 그 부정이냐를 ―알고 그것을 해결하고 있다.
항상 행복에 관한 가르침이라고 불리워지던 진리의 가르침은, 사람들에게 인간들이 그 동물아 때문에 찾고 있는 거짓된 행복 대신에 그들이 언젠가는 어디서든지 얻게 될 것이라고 하는 따위의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고, 항상 그들에게 허용되어 있는 실제적 행복을 가질 것을 보여주었다.
이 행복은 비단 단순히 추리에서 끄집어낸 그 무엇이 아니라, 어디에서 찾아내야 할 것도 아니고, 또 언젠가 어디서 얻어진다고 약속된 것 같은 행복도 아니다. 그것은 타락되지 않은 인간의 마음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직접 그쪽으로 이끌리는 인간에게는 가장 인연이 깊은 행복인 것이다.
대체로 인간은 극히 천진난만한 아기 아절부터, 인생에는 동물아의 행복 이외에 또 하나 그것보다 한층 더 높은, 동물아의 육욕 만족에 무관할 뿐더러, 동물아의 행복을 부정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커지는 것 같은 행복이 있음을 알고 있다.
인생의 모순을 해결하고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이 감정을 모든 사람들은 알고 있다. 이 감정이 "사랑"이다.
인생이란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동물아의 활동이다. 이성이란 인간의 동물아가 그 행복을 위해서 따라가야 할 법칙이다. 사랑이란 인간의 유일한 합리적 활동이다.
어쨌든 동물아는 행복 쪽으로 끌리기 쉽다. 이성은 인간에게 개인적 행복이 잘못임을 가르쳐서 하나의 길을 남겨준다. 이 길에서의 활동이 사랑이다.
인간의 동물아는 행복을 요구한다. 합리적 의식은 인간에게 서로 싸우는 모든 존재의 불행을 보여주고, 그에게 동물아에 대한 행복이 있을 수 없음을 가르치고 인간에게 허용된 유일한 행복에는 다른 존재와의 투쟁도 없으며, 행복의 중단이나 포만이나 죽음의 환상이나 공포 따위의 것은 더욱더 없어야 할 것임을 가르쳐준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 자물쇠에만 맞게끔 만들어진 열쇠처럼, 자기의 영혼 속에 이성의 가능성이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그에게 보여주는 그 행복을 그에게 가져다주는 감정으로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비단 그때까지의 인생의 모순을 해결할 뿐더러, 마치 그 모순 속에 인생 현현(顯現)의 가능을 찾아내고 있기조차 한 것 같이 여겨진다.
동물아는 자기의 목적 때문에 인간의 개성을 이용하려고 한다. 그러나 사랑의 감정은 그를 이끌어서 다른 존재의 이익을 위해 자기의 존재를 내주게 하도록 하려한다.
동물아는 괴로워한다. 그리고 이 고통의 경감이야말로 사랑 활동의 주요 목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동물아는 행복을 향해서 노력하면서도 숨 한번 쉴 때마다 최대의 악, 그 환상이 개성의 모든 행복을 파괴해 버리는 죽음 쪽으로 향해간다. 그런데 사랑은 감정은 이 공포를 제거할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육체적 존재라고 하는 대단한 희생 쪽으로 인도한다.
사랑의 감정은 자기 생명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불가능하다
모든 사람은, 사랑의 감정 속에는 무엇인가 특수한 것이 있어 인생의 일체 모순을 해결하고 인간에게 참된 행복과 그것에 대한 희구 속에 그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그러한 행복을 주는 것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 감정은 극히 드물게만 나타나지 않고, 나타난다 하더라도 길게 계속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 결과 한층 더 나쁜 고통이 오는 일이 있지 않느냐?"라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말한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는 사랑이 합리적 의식에서 생각되다시피 인생의 유일하고 정당한 표현으로 여겨지지 않고, 그저 인생에 있는 숱한 여러 가지 우연한 일들 중의 그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 같이 여겨진다. 즉 인간이 살아 있을 동안에 부딪힐 무수한 기분 중의 그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된다. 인간은 때로 사치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이나 예술에 마음이 쏠리기도 하고, 또 때로는 직무 명예 이득에 마음이 끌리고, 때로는 그 누구를 사랑해 보기도 한다. 사랑의 느낌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 우발적인 기분으로 인간이 일생 중에 부딪히는 다른 모든 기분과 마찬가지로 그의 의지와는 아무런 관계없는 것처럼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때때로 사랑은 생명의 올바른 흐름을 파괴하는 불규칙하고 외로운 기분이라는 단정을 책에서 읽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마치 태양이 뜰 때 올빼미가 느끼는 것과도 흡사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상태는 일종의 특별한 것이고, 다른 모든 기분에서보다는 더욱 중대한 그 무엇이 있음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람들은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상태도 그들에게는 다른 모든 상태와 마찬가지로 불행하고, 속기 쉬운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한다. .........그러나 누구를?
일시적인 것이라면 보람없다.
그렇다고 영원히 사랑하기란 더욱 불가능하다. ...."
이러한 말은 틀림없이, 사랑에는 인생의 불행에 대한 구제와 참된 행복과 비슷한 오직 하나의 그 무엇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의 막연한 의식을 표현하고 있음과 동시에,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사랑이 구제의 규법일 수 없다는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있어 보라. 사랑은 소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그저 그 누구를 사랑할 때에만 영원히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때만이 행복으로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없으므로 자연히 사랑에서의 구제도 없을 터이고, 사랑도 역시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기만이며, 고통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동물적 생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도 배우고 남에게도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을 그렇게 해석한다. 아니 그 밖에는 따로이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사랑이, 우리들 모두가 어느덧 사랑이라는 말에 얽매어 있다는 개념(槪念)에조차 합당하지 못한 것으로 되어 있다. 사랑은 사랑하는 자, 사랑을 받는 자에게 행복을 주는 선량한 활동이 아니다. 인생을 동물아의 생활로서 알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사랑은 흔히 어머니가 자기의 어린 아기의 행복을 위해서, 굶주리고 있는 남의 아기를 젖혀두고 그 아기의 모친의 젖을 빼앗아서 까지라도 자기 자식의 양육에 애쓰는 감정과 같은 것이며, 또 아버지가 자기 자식의 생활을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 굶주린 사람들로부터 마지막 한 조각의 빵마저도 빼앗으려고 애쓰는 감정과 같은 것이고, 또 그것은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가 그녀를 유혹하면서 그 사랑 때문에 자기도 괴로워하고, 그녀도 괴롭히고, 질투 때문에 자기도 그녀도 멸망케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며, 또 더우기 그것은, 어떤 남자가 사랑 때문에 여자에게 매질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어떤 당파들이 자기 당파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당파에 해를 주는 것과 같은 감정이며,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 때문에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그 일로 말미암아 주위의 사람들에게 슬픔이나 괴로움을 주는 것과 같은 감정이며,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하는 조국에 대한 모욕을 참을 수 없게 하여 피차의 전사자(戰死者) 부상자(負傷者)로써 싸움터를 덮어버리게 하는 감정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뿐만이 아니다. 동물아의 행복에서 인생을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랑의 활동은 그 표현이 고통일 뿐더러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할 정도의 곤란을 야기(惹起)시키는 것이다. "사랑은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라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흔히 이렇게들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람들에 대해서 항상 경험하는 선호(選好)나 편애(偏愛)라는 직접의 감정에 따라야 한다. 그리하여 이것이 참된 사랑인 것이다.
사랑은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랑에 관한 모든 논의는 사랑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그들의 의견은 옳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한 가지 일에 있다. 즉 사랑에 관해서 논의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것은 그저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이성을 이용할 개인적 생활의 행복을 부정해 버린 사람들에게 한해서 만이 그런 것이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고 동물아의 행복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는 사람들은 논의하지 않고는 도저히 있을 수 없다. 그들은 그네들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감정에 몸을 맡기기 때문에 도저히 그것을 논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모든 표현은 논의없이, 즉 풀기 어려운 문제의 해결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내 자식 내 벗 내 아내 내 조국을 다른 모든 자식 벗 아내 조국보다 좋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감정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사랑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착한 일을 하려고 원하는 마음을 의미한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또 그밖에는 이해할 길 없는 것이다. 현재 나는 내 자식을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있다. 즉 내 자식 아내 조국에 대해서 남의 자식 아내 조국에 대한 이상의 행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저 내 자식이나 아내나 조국만을 사랑한다는 일은 결코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동시에 자식 아내 조국 및 일반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그 사랑에 의해서 각각 다른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서 원하는 행복의 여러 조건은 모두 극히 밀접하게 서로 매여저 있으므로 사랑하는 자 한 사람을 위해서 하는 그의 사랑의 모든 활동은 다만 남을 위해서 하는 그의 활동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들에게 해를 끼치게까지도 되는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야말로 문제가 생긴다. 어떠한 사랑의 이름 아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이냐? 어떤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사랑을 희생시킬 것인가? 누구를 더욱 사랑하고 누구에게 보다 많은 선(善)을 행할 것인가? 아내에게 자식에게 아내와 자식에게 벗에게? 아내나 자식들이나 친구에게 대한 사랑을 다치지 않고 사랑하는 조국에 봉사하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끝으로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필요하게 되는 자기의 개성을 어느 정도까지 희생시킬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남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봉사하기 위해서 나는 어느 정도까지 내 일신에 관해서 마음을 괴롭힐 수 있을까? 이러한 문제는 모두 소위 그들의 사랑이라는 감정을 해부해 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극히 간단한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해결은 극히 어려운 문제 인 것이다.
그리하여 옛적에 교법자(敎法者)의 한 사람이 예수에게 이것과 같은 문제, 즉 가까운 자란 누구냐? 라는 물음을 던졌던 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하기가 매우 쉬운 것 같이 생각됨은 그저 인생의 참된 조건을 잊어버리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한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상상하고 있는 것 같은 신이 되었을 때야 비로소 선택된 사람들만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다른 자에 대해서 어떤 자를 선택하는 일이 참된 사랑으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신이 아니다. 그들은 보통 생존하는 모든 것이 항상 직접적 의미에서나 비유적 의미에 있어서 서로 뜯어먹으면서 서로 남에게 의지해서 생활하고 있다는 생존조건 속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이성 있는 존재로서 이 사실을 알고 또 보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들 일체의 육체적 행복은 그저 남을 다침으로써만이 다른 한편의 존재가 얻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종교상의 미신이나 과학적 미신이, 아무리 모든 만인에게 흡족하게 될 미래의 황금시대에 관해서 사람들에게 설교한다 한들, 이성 있는 사람은 그의 시간적 및 공간적 존재의 법칙이 일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일인 내지 만인에 대한 각자의 투쟁이라 함을 보고 또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세계의 생활을 형성하고 있는 생물의 이해관계에 얽힌 혼잡과 투쟁 속에서는,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듯이 선택된 사람을 사랑해 나감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비록 선택된 사람을 사랑한다하더라도 결코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라도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식을 사랑하고, 벗을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이어서 사랑이란 단순히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일치하고 있듯이 남의 행복으로 지향된 활동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맨 처음에 가장 강한 사랑의 요구가 나타나고, 다음에는 약한 요구가 나타나는 것처럼 이 활동은 어떤 일정한 순서를 밟아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의 요구는 모든 것이 한꺼번에 아무런 순서도 없이 쉴새 없이 나타나는 것이다. 가령 여기에 내가 조금 사랑하는 굶주린 노인이 찾아와서,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자식들이 저녁으로 둔밥을 졸라댄다고 하자. 어찌 내가 현재의 적은 사랑의 요구와 미래의 큰 사랑의 요구를 저울질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은 질문이 교법사(敎法師)에 의해서 예수에게 던져진 것이다. "가까운 자라 함은 누구냐?" 사실 누구에게 어떠한 정도로 봉사할 것인가를 어떻게 결정하는 것이 좋은가? 사람들에게? 조국에? 조국인가 나의 벗에게인가? 나의 벗에게 인가 나의 아내에게 인가? 나의 아내에게 인가? 나의 아버지에게 인가? 나의 아버지에게 인가 나의 자식에게 인가? 나의 자식에 인가? 나 자신에게 인가? (요구될 경우에는 언제나 남에게 봉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첫째로 이것은 모두 사랑의 요구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완전히 서로 얽혀 있으므로 어떤 요구를 만족시키는 일은 다른 요구를 만족시킬 가능을 남에게서 빼앗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장래에 나의 자식을 위해서 그 구걸되는 옷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얼어 죽어 가는 아이에게 입혀주지 않아도 괜찮다면, 또 나의 장래 자식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다른 사랑의 요구에 응하지 않고 있을 수 있는 이치다.
조국에 대한 사랑, 선택된 직업에 대한 사랑, 만인에 대한 사랑 등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사람이 장래의 가장 큰 사랑의 요구를 명분으로 해서 현재의 작은 사랑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러한 사람도 아무리 전력을 다해서 그것으로 원한다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 미래를 내세워 현재의 요구를 거절해야 좋을지 계산할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할 힘이 없으므로 자연히 언제나 자기에게 유쾌한 사랑의 표시를 선택하는 것, 즉 사랑이라는 명분에서가 아니라 자기 개성의 이름에게 행동하는 것이 된다. 만약 인간이 장래의 보다 큰 다른 사랑의 출현을 구실로 현재의 가장 적은 사랑의 요구를 억누르는 것을 옳다고 결정한다면, 그는 자신이나 남을 속여서 자기 일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셈이 된다.
장래의 사랑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은 그저 현재에서의 활동이다. 현재에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는 자는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이다.
이와 마찬가지 일이 생활을 가지고 있지 않는 자들의 인생관에서도 생기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동물이고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동물로서 생존하고 인생에 관해서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동물적 생존이 올바르고 행복스러운 것이 되었을 것이다. 사랑에 있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만약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지 않는 동물이라면, 그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것, 즉 자기의 새끼 늑대를 사랑하고, 자기의 양 떼만을 사랑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또 자기들이 자기의 새끼늑대를 사랑하고, 자기의 양 떼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다른 늑대도 역시 자기들의 새끼 늑대를 사랑하고 다른 양 떼들도 자기들의 무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현재 있는 그들의 의식 정도에서 가능한 사랑이며 생활일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이성이 있는 존재이므로 다른 존재도 역시 그 자식이나 동족에 대해서 같은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 따라서 이들 사랑의 감정은 자연히 서로 충돌하게 되고, 행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랑의 관념과는 아예 상반되는 무슨 일을 야기시킬 것임에 틀림없음을 알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동믈적인 어찌할 도리가 없는 감정을 시인(是認)하거나 강조하는 데만 아니라, 자기의 이성을 이용해서 이 감정에 유달리 중요성을 준다면, 이 감정은 선량하지 않을뿐더러 인간에게서 가장 몹쓸, 가장 두려운 동물적인 것을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옛적부터 알려져온 진리다.) 그리고 복음서(福音書)에 씌어져 있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너희들 내부의 불이 꺼지면 그 어둠은 얼마나 크랴!" 만약 인간 속에 자기와 자기 자식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면, 오늘날 인간 사이에 있는 약 99%는 그들이 찬양해서 사랑이라고 부르는 거짓된 감정―동물의 생활이 인간의 생활과 비슷한 정도의 사랑―에서 생기는 것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랑이라 부르고 있는 것은, 자기의 개인적 행복의 어떤 조건을 다른 조건보다 낫다고 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자기의 아내나, 자식이나, 벗을 사랑한다고 할 경우에는, 그는 그저 그의 생활상 처의 존재, 자식의 존재, 벗의 존재가 그의 개인 생활의 행복을 더해 줌을 말함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이러한 선호(選好)의 관계는 마치 생존의 인생에 대한 관계와 매일 반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에 의해서 생존이 인생이라고 불리우듯이, 이러한 자들에 의해서 개인적 생존의 어떤 조건을 다른 조건보다 낫다고 하는 일이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일정한 존재, 예컨대 자기 자신에 대한 선호든가 혹은 일정한 직업, 다시 말하면 과학이라든가 예술에 대한 선호를 우리들은 그와 마찬가지로 사랑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이러한 선호의 감정은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인간의 동물적 생활의 모든 복잡성을 구성하는 것이어서 사랑이라고 부르기 어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감정은 사랑의 주요한 특징, 즉 행복을 목적으로 하고 결과로 하는 활동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선호의 출현이 맹렬함은 그저 동물아의 정력(精力)을 보여주는 데 불과하다.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좋아한다는 정열이 그릇된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것이고, 사실은 우리들이 참된 사랑을 접목(接木)해서 그 과일을 얻을 수 있는 야생(野生)의 어린 나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대목(臺木)은 사과나무가 아니므로 열매를 맺지 않고, 설령 맺는다 하더라도 맛있는 사과 대신에 쓴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이 그러한 정열은 사랑이 아니므로 사람들을 착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층 더 많은 악을 주는 것이다. 이 까닭으로 해서 과학에 대한, 예술에 대한, 조국에 대한 사랑에까지 언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그토록 찬양되고 있는 부인에 대한, 자식에 대한, 벗에 대한 사랑도 동물적 생활의 어떤 조건을 일시적으로 다른 조건보다 좋아하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고, 세계 최대의 악을 가져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사랑은 개인적 행복 부정의 결과다.
참된 사랑은 오직 동물아의 행복을 부정함으로써만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이 자기로서는 동물아의 행복 따위는 없다고 깨달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의 생명의 액즙(液汁)은 모조리 이미 동물 아닌 야생의 어린 나무 줄기의 모든 힘을 받아서 번성한 참된 사랑의 높고 아담한 접지(接枝)에 옮아가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이 사랑의 접목이다. 그가 스스로 그렇게 말하다시피 그는 말했다. "이 접목, 즉 그의 사랑은 과일을 맺게 할 수 있는 하나의 나무 가지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모조리 잘려버려지라고."
"자기의 목숨을 보전(保全)하려는 자는 이것을 잃고, 나를 의해서 그 목숨을 잃는 자는 그것을 보전하리라"고 함을 이해했을뿐더러, 생명으로써 그것을 이해한 자만이―즉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망치고, 이 세상에서의 자기목숨을 미워하는 자는 영원한 삶에서 그것을 보전한다는 것을 이해한 자만이―오직 그자만이 참된 사랑을 인식하는 것이다.
"나보다 너의 아버지 혹은 어머니를 사랑하는 자는 나에게 합당치 못한 자니라. 나보다 너의 아들이나 딸을 더 사랑하는 자도 나에게는 합당치 못하니라. 너희가 만약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는 것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희는 너희의 적을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라."
사람들이 개인성(個人性)을 부정함은 흔히 생각되고 있듯이 아버지나, 자식이나, 아내나, 벗이나, 선량하고 사랑할만한 자들에 대한 사랑의 결과가 아니고, 오직, 개인적 생존의 무의미함에 대한 의식, 개인적 행복이 불가능하다는 의식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개인적 생활을 부정한 결과 참된 사랑을 인식하고, 처 자식 벗을 참되게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이란 다른 존재를 자기의 동물아 보다 낫다고 하는 선정(選定)이다.
같은 개성의 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개성에 가까운 이익을 잊는 것, 그것은 소위 말하는 사랑, 자기 희생으로까지 성장되지 않은 경우에 흔히 일어나는 일로서, 자기의 개인적 행복을 위해서 어떤 존재를 다른 것 이상으로 낫다고 하는 선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참된 사랑은 활동적인 사랑이 되기 전에는 일정한 상태로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사랑의 시초, 그 근원은 흔히 생각되고 있듯이 이성을 흐리게 하는 따위 감정의 격발(激發)이 아니라, 가장 합리적이고 밝은, 따라서 침착한 기쁨에 찬 아이들이나 이성적인 사람들에 있어 독특한 상태다.
이 상태는 모든 사람에 대한 호감(好感)의 상태다. 그것은 어린이에게는 척생적(天生的)으로 갖춰져 있는 것이지만, 어른에게는 그저 개인적 행복을 부정할 경우에만 비로소 생기고, 그 부부의 정도에 따라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들을 것이다. "나는 어느 쪽이라도 괜찮다. 나는 아무 것도 소용없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말과 함께 우리들은 몇 번이고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상태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단 한 번이라도 사람들에 대한 불쾌한 감정을 품고 있는 순간에, 마음으로부터 진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게 해 봄이 좋다. "나는 어떻든 괜찮다. 나는 아무 곳도 소용없다"고. 그리고 비록 잠깐만이라도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도록 해 봄이 좋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얼마나 강렬하게, 여태껏 갇혀 있던 미망인에 대한 호감이 용솟음쳐 나오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은 사실 다른 존재를 자기 이상으로 낫다고 보는 선정이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 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의 양(量)은 분수(分數)의 양과도 같다. 그 분자(分子)는 남에게 대한 우리들의 편애(偏愛)라든가 동정이라든가 하는 우리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분모(分母) 쪽은 자신에 대한 사랑이어서, 이것은 내가 나의 동물아에 주는 의미 여하에 따라서 내 손으로 무한히 더할 수도 있고, 또 감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에 관해서 또 그 단계에 관한 오늘날의 세속의 판단은 분모를 엄두밖에 두고 분자에만 의한 분수량에 관한 판단이다. 참된 사랑은 항상 그 근처에 개인적 행복의 부정과 거기서 생기는 만인에 대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 오직 이 일반적 호감 위에야말로 어떤 사람들―친척이든, 남에 대한 것이든 간에 참된 사랑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만이 인간에게 참된 행복을 주고, 동물아와 합리적 의식과의 외견상으로만 모순을 해결해 주는 것이다.
그 근처에 개성의 부정이 없는 그 결과로서―만인에 대한 호감이 없는 그 사랑은 그저 동물적 생활에 불과하고, 이 가공적(架空的)이며 사랑이 없는 생활과 동등하든가 혹은 그 이상의 불행, 그 이상의 불합리에 부딪힐 것이다. 사랑이라고 불리우고 있는 정열적인 감정은 생존 투쟁을 제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개성을 쾌락의 추구(追求)로부터 해방시키지도 못하며, 죽음에서 구해 주지도 못하고, 오로지 인생을 어둡게 하고, 투쟁을 격심케 하고, 자기를 위한 또 남을 위한 쾌락에 갈망을 더하고, 자기와 남을 위해서 더욱더 죽음의 공포를 크게 할 따름이다.
자기의 생활을 동물아의 생존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의 생활과는 전혀 상반되는 활동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오로지 동물적 생존의 행복 속에서만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무엇보다도 첫째로 행복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설사 진실하게 사랑의 활동에 헌신하고자 생각하더라도 그가 인생을 알고 인생에 대한 그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지 않는 한 사랑을 할 상태가 되지못할 것이다. 그 생활을 동물적 자아의 행복으로 생각하고 있는 자는 그 생애를 재산을 통해 얻고, 그것을 모으므로써 자기의 동물적 행복의 수단을 더하기에 급급(汲汲)하고, 남들을 자기의 동물적 행복에 봉사케 하고, 이러한 행복을 자기의 개인적 행복에 더욱 많이 필요했던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다. 그가 자기의 생활을 자기 손으로 하지 않고 남들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거늘 어찌 자기의 생명을 줄 수 있을까? 더욱 그에게 그 이상으로 어려운 것은 자기가 선택한 사람들 중의 누구에게 그 저축된 행복을 분배하고, 누구에게 봉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자기의 생명을 줄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 남에게서 빼앗고 있는 쓸데없는 것을 버리고 다음에는 또 한 가지 불가능한 일, 즉 사람들 중에서 누구에게 자기의 생명을 바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그는 사랑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 전에 우선 자기를 희생시키고, 선(善)을 하기 전에 우선 미워하기, 즉 악(惡)을 그만두고 자기 일신의 행복을 위해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함을 그만두어야 한다.
개인적 생활 속에서 행복을 찾지 않고, 따라서 이 거짓된 행복에 대해서 마음을 괴롭히지 말고, 그럼으로써 자기 내부에서 인간의 특유한 개인에 대한 호감을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사람들에게만이 항상 자신과 남을 만족시키는 사랑의 활동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생활의 행복은 마치 식물의 행복이 빗 속에 있듯이 사랑 속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무엇에도 가리워지지 않은 식물이 자기는 어느 방향으로 성장함이 좋을까, 빛은 좋은 것인지 어떤지, 더욱 다른 좋은 빛을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따위는 물을 소도 없으며, 또 묻지도 않고,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유일한 빛을 받아 그쪽으로 자라나가는 것과도 같이, 개인적 행복을 부정한 사람은 남들로부터 얻은 것들 중에서 무엇을? 사랑하는 존재 중에서 누구에게 주어야 하느냐는 것, 현재 요구하고 있는 사랑이 사랑으로서 더 나은 사랑이 따로 있지나 않을까 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오직 그의 손이 닿는 사랑, 그의 앞에 있는 사랑에 자기를 바치고, 자기의 생존을 바치고 있다. 오직 이러한 사랑만이 인간의 합리적 천성에 충분한 만족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참된 생활의 유일(唯一)하고 완전한 활동이다.
벗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사랑, 이것 이외에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그것이 자기 희생일 때 비로소 사랑이다. 인간이 남을 위해서 자기의 시간이나 힘을 바칠 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그 육체를 희생시키고, 그에게 그 생명을 바칠 때 우리들은 오직 이것만을 사랑으로 인정하고, 오직 이러한 사랑에 있어서만이 행복을 찾아보고 사랑의 보답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이 사람들 사이에 있다는 것, 이 한가지 일로서만이 세계는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어린 아기를 키우는 어머니는 아기의 먹이로서 직접 자기의 그 육체를 바치고 있다. 그것 없이는 아기는 살아나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것이 곧 사랑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 즉 자기의 육체를 남을 양식으로 바치고 있는 것은 남의 행복을 위해 노동에 의해서 그 육체를 소모시키며, 시시각각으로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모든 노동자들이다. 이러한 사랑은 그저 자기 희생의 가능성과 그를 사랑하고 있는 존재와의 사이에 그 희생을 방해하는 아무런 장애도 없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내 자식을 유모에게 맡겨 두는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할 수 없다. 돈을 벌어서 그것을 저축해 두는 자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
"나는 빛 속에 있다 하면서도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아직 어둠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속에 있는 자이며, 그의 내부에는 유혹이 없다. 그러나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 속에 있고, 어둠 속을 걷고 갈 바를 모른다. 어둠이 그의 눈을 가리웠기 때문이다. ...." 우리들은 사랑을 말과 혀로 하지 말고 행동과 실천으로써 할 것이다. 이것에 의해서 우리들은 자기가 진리에서 나왔음을 알고, 그 마음을 편안하게 할 것이다. ...... 이같이 하여 사랑은 우리들 속에서 완전할 수 있고, 우리들은 최후의 심판 날에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컨대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주(主)처럼 행하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공포가 없다. 완전한 사랑은 공포를 쫓아 버린다. 생각컨대 공포 속에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이 충분하지 못한 자인 것이다."
오직 이러한 사랑만이 사람들에게 참된 생명을 주는 것이다. "너희 마음의 모든 것으로써, 너희 영혼의 모든 것으로써 너희 이해의 모든 것으로써 주이신 너희 신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이며, 가장 큰 가르침이다."
둘째 것도 이와 비슷한 것이다. "너희 자신을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의 가까운 자를 사랑하라." 이렇게 교법자는 말했다. 이에 대해서 예수는 말씀하셨다. "그대의 말은 옳다. 그처럼 실행하라." 즉 "신을 사랑하고 가까운 자를 사랑하라. 그러면 그대는 살게 되리라."
참된 사랑은 생명이 그 자체이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이미 죽음에서 삶으로 옮아갔음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들 형제를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예수는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속에 있는 자이다."
오직 사랑하는 자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랑은 생명 그 자체다. 그러나 불합리한 고통이 따름으로써 멸망되는 생명이 아니고 축복받은 끝없는 생명이다. 우리들은 모두 이 일을 알고 있다. 사랑은 이성의 결론이 아니다. 또 일정한 활동의 결과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을 사방에서 에워싸고 있는 생명의 환희에 찬 활동 그 자체이다. 우리들 일동은 이 활동을 철이 들기 시작한 어린 시절부터 그릇된 세속의 가르침으로 우리를 영혼 속에서 그것을 어둡게 하고, 그것을 경험할 가능을 우리들로부터 빼앗기까지에 이르는 사이에 알뜰히 자기 자신 속에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 이것은 선택된 사람들 내지 사물에 대한 사랑처럼 개인의 일시적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대한 편애가 아니고 동물아의 행복 부정 뒤에 사람 속에 남은 자기 이외의 것이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구든지 비록 단 한 번의 경험이라 하더라도 이 축복된 감정을 알지 못할 자가 있으랴! 이것을 가장 많이 경험하는 것은 오직 영혼이 우리들의 내부에 있는 생명을 짓밟아버려 여러 가지 허위(虛僞)에 가리워지지 않은 유년시절에 한하는 일이고, 이 축복된 감동의 정서(情緖)에 유혹(誘惑)되면 사람은 모든 것, 가까운 자도,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도, 악한 자들도, 적도, 개도, 말도, 풀도 사랑하고 싶고, 그 마음에는 오직 한 가지 일, 즉 만인을 위해서 좋고 생명 있는 것은 모두 행복되리라고만 바라는 소원을 낳고 더욱 만인을 위해서 좋도록 스스로 애쓰는 일을 바라게 되고, 온갖 살아 있는 것이 모두 환희에 가득 차 있도록 자기 자신의 생명마저도 바치고 싶은 생각이 일어나는 것이다. 즉 이것이야말로 아니 오직 이 하나만이 그 속에 인간의 목숨을 지니는 사랑인 것이다.
이 사랑, 즉 그 속에서만 생명이 깃든 이 사랑은 인간의 영혼 속에서 우리들이 사랑하고 부르는 인간의 여러 가지 육욕의 움틈, 참된 사랑과 비슷한 잡초의 어지러운 움 속에 섞여서 겨우 눈에 띠일 정도의 부드러운 움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또 그 사람 자신에게도, 장차는 새들의 보금자리라도 될 이 훌륭한 나무가 틀림없이 성장할 움돋이와 모든 다른 움돋이와는 전혀 다른 것 같이 생각된다. 그뿐이랴! 사람들은 처음에는 성장이 빠른 잡초의 움돋이를 오히려 사랑해 주는 경향이 있고, 유일한 것이 움돋이는 시들고 말라 죽는다. 그러나 그쯤은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그 이상으로 흔히 있는 더욱 몹쓸 일은 사람들이 이러한 움돋이 속에 사랑이라고 불리우는 단 한대뿐인 참된 생명이 있는 움돋이가 있음을 듣고 중요한 그것을 짓밟으면서, 그 대신 잡초의 다른 움돋이를 사랑이라 부르고 키우기 시작하는 일이다. 아니 더욱 나쁜 일은 사람들이 거칠은 손으로 그 움돋이를 잡고 이렇게 외친다. "그래, 이것이다. 우리들은 그것을 찾았다. 우리들은 이제야 그것을 알았다. 어때 이것을 한번 키워 보자. 사랑이다. 사랑이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감정이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그것을 바꾸어 심기도 하고, 휘어 고쳐보기도 하고, 그것을 잡아채고, 문질러 버리는 동안에 그 움이 꽃도 피지 못하게 하고 아주 말라버리게 한다. 그러면 그들이나 다른 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모두 어리석은 것이다. 무의미한 짓이다. 센티멘탈리즘이다. 그러나 사랑의 움이 움돋이 할 때는 약간의 손질에도 견디지 못하리만큼 부드럽지만 성장해서는 비로소 굳센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서 하는 것은 모조리 나쁜 결과를 줄 따름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나, 즉 그의 성장을 도와주는 유일한 것인 이성의 태양을 그로부터 가리우지 않게 하는 일 뿐이다.
9 육체의 죽음과 죽음의 공포
생존이 불가능한 개선(改善)으로 지향된 사람들의 고투(苦鬪)는 유일하고 참된 생활의 가능성을 그들로부터 빼앗는 것이다.
오직 동물적 생존의 덧없음과, 거짓을 아는 일과, 자기 속에 유일한 사랑의 참된 생명을 해방시키는 일만이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 더구나 이 행복을 얻고자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생존이 개성이 서서히 이어지는 멸망과 피하기 어려운 개성의 죽음으로서 접근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은 그 생존의 기간을 통해서 이 멸망되어 가는 개성을 공고히 하고, 그 육욕을 만족시키고, 인생의 유일한 행복, 즉 사랑의 가능을 자기에게서 빼앗아가기 위해서 갖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아니 그저 그것에만 몰두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의 활동은 생존의 전 기간을 통해서 그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열락(悅樂)의 획득과 고통으로부터의 자기 구출, 또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도피에 지향되고 있다.
그러나 열락의 증가는 쟁투(爭鬪)의 긴장과 고통에 대한 감각을 증대시키고 죽음을 다가오게 하는 것이다. 죽음의 접근을 자기로부터 숨기려 함에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다. 즉 열락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그러나 열락의 증가는 그 한도에 도달하면, 그 이상으로 증대되는 일은 없고, 도리어 고통으로 변형되고 나중에는 그저 고통에 대한 감각과 고통 속으로부터 점점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만이 남을 따름이다. 이와 같이해서 거짓된 순환이 나타난다. 하나가 다른 것이 원인이 되고, 또 다른 하나가 다른 것을 조장시킨다.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된 공포는, 그들에게 열락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일이 (부유한 생활의 모든 열락) 그 성질상 만인에게 골고루 배분될 수 없는 것이므로 남에게서 그것을 빼앗지 않으면 안 된다. 폭력과 악으로써, 더구나 사랑의 원천인 사람들에 대한 호감(好感)의 가능성을 없앰으로써 획득해야 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연락은 항상 사랑과는 상반되는 것이며, 그 정도가 더하면 더할수록 사람들에게 허용된 유일한 행복인 사랑은 더욱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합리적 의식이 인정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지는 않다. 즉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명백한 동물아의 이성에 대한 복종으로서―인간에게 만인에 대한 호의를 자유롭게 해방시키는 그 부단한 복종으로서―또한 그 결과 나타나는 사랑의 활동으로는 이해되지 않고 있다. 도리어 인생은 다만 만인에 대한 호의의 가능을 배제하는 일시적인 육체적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선교를 신봉(信奉)하고 일정한 생존조건을 조직하는데 그 이성을 지향하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 인생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일은, 그 생존의 보다 나은 외적 장비(外的裝備)에서 생기는 것 같이 여겨진다. 그러나 그를 생존의 보다 나은 외적 장비는 사랑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것, 사람들에 대한 큰 폭압과 관계가 깊은 것이다. 자연히 그들의 장비가 우월하면 할수록 그들에게 남는 사랑의 가능, 생활의 가능은 더욱더 적어지는 것이다.
인간은 그 이성을 동물적 생존의 행복이 만인에게 골고루 영(零) 임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용하지 않고, 그 영을 증감(增減)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이 영의 가상적 증가나 증대를 향해서 아직 응용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이성을 모조리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무(無), 즉 영은 아무리 거기에 영을 더해도 마침내는 다른 모든 영과 같은 영으로 끝남을 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은 또 모든 사람들의 동물아의 생존은 똑같이 불행한 것이며 어떠한 외적 조건으로써 하더라도 행복하게 될 수 없는 것이라 함을 보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어떠한 존재도 육체적 존재로서는 다른 존재 이상으로 행복하게 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이것은 마치 호수(湖水)의 표면은 어디로 가든지 일정한 수준(水準) 이상으로 물을 높일 수 없는 것과 법칙에 의하는 것임을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자기의 이성을 왜곡(歪曲)해 버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보지 않고, 그 왜곡된 이성을 이 불가능한 일에 이용하고 있다. 그리고 호수면의 군데군데에 물을 높이 하려는 이 불가능한 사업 속에―목욕하는 아이들이 "삐이루를 만든다."라고 하면서 목욕하는 것과 같은 일 속에―그들의 생존은 모조리 지나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생존은 많든 적든 간에 좋고 행복스러운 것으로 여겨진다. 가난한 노동자나 병자의 생존은 ―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것은 나쁘고 불행한 것이다. 부자나 건강한 사람의 생존은 좋고 행복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이성의 전력으로 나쁘고, 불행하고, 가난하고, 병적인 존재를 몰아 버리고, 자신을 위해서 좋고, 부유하고, 건강스러운 생존을 건설하는데 경주하고 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몇 차례고 이와 같이하여, 이러한 여러 가지의 가장 행복스러운 생활을 조직하고 지탱하는 방법을 만들어 내기에 속이 썩히면서, 이 상상적 최고(그들은 그 동물적 생존을 이렇게 부른다) 생활의 프로그램을 자손에게 전한다. 어떤 자들은 남들 앞에서 그들이 양친의 시설(施設)에서 물려받은 그 행복한 생활을 될 수 있는 대로 잘 유지하도록 애쓰고, 혹은 새롭고 한층 더 행복한 생활을 만들어 보려고 애쓴다. 사람들에게는 이어받은 생존의 조직을 유지하거나, 또는 그들의 생각에는 보다 나은 새로운 생활을 만들어 냄으로써 그 무엇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사람들은 이 속임수 속에서 서로 지지(支持)하면서, 때로는 그들 자신에게도 뚜렷하게 무의미한 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물장난 치기 속에 인생이 있다고 진정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늘 진리의 가르침 속에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생활의 실례에서도, 더욱이 자기 자신의 진정된 마음 속에서도, 이성과 사랑의 소리가 끝까지 절대로 사라지는 일이 없는 마음속에서도, 부단(不斷)히 듣고 있는 참된 생활로의 부르짖음에 조소(嘲笑)로써 외면하리만큼 그러한 생각을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즉 놀라운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 이성과 사랑 생활의 가능성을 가진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길이 타오르는 외양간에서 끌려 나오는 양 떼의 위치에 자기 몸을 두는 것이다. 양 떼는 사람들이 그들을 불 속으로 던지는 줄로만 알고 죽을힘을 다해서 그들을 구해 내려는
사람들과 싸우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사람들은 그것으로부터 나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을 괴롭히고, 그들만이 가능한 행복과 생활을 스스로 없애버리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풀기 어려운 인생의 모순된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죽음은 없다"고 진리의 목소리는 외친다. "부활(復活)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고 살 것이다. 무릇 나에게서 살고,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는 일이 없다. 너희들은 이러함을 믿느냐?"
"죽음은 없다"고 세계의 모든 위대한 스승들은 말씀하셨다. 인생의 의의를 이해하는 수백만의 사람들도 역시 같은 말을 하고, 또 스스로의 생활로써 그것을 입증(立證)하고 있다. 그리고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의식이 분명한 순간에 있어서는 그 영혼 속에서 그와 같은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죽음을 보고 그것을 믿는 것이다.
"어찌 죽음이 없을 것인가?"라고 그들은 분연(忿然)히 화가 나서 그렇게 말한다.
"그것은 궤변(詭辯)이다. 죽음은 우리들 눈 앞에 있다. 죽음은 수백만의 인간을 쓰러뜨렸다. 우리들을 역시 쓰러뜨릴 것이다. 너희들이 아무리 죽음이 없다고 우겨대도 죽음은 여전히 있는 것이다. 그래, 이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이다. 마치 정신병자가 그를 위협(威脅)하는 환영(幻影)을 보는 것과도 같이 그는 그 환영에 손을 댈 수는 없다. 환영은 일찍이 한 번도 그에게 손을 댄 일도 없다. 환영이 품은 목적에 대해서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가상적(假像的) 환영을 두려워하고 괴로워한 나머지 생명의 기능마저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죽음의 경우도 이것과 이치가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죽음을 알지도 못하고 또 결코 그것을 알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인가?
"죽음은 아직 한 번도 나를 사로잡은 일이 없으나 어느 땐가 사로잡을 것이다. 나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나를 사로잡아서 멸망시켜 버릴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무섭다"고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자들은 말하는 것이다.
만약 그릇된 인생관을 품고 있는 자가 냉정하게 사고할 수 있어서 그들이 인생에 대해서 품고 있는 관념의 근저를 올바르게 생각한다면,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즉 만물 속에 부단히 생기고 있음을 내가 목격하고, 또 내가 죽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변화가 나의 육체적 생존에 나타나는 일에는 아무런 불쾌한 일이나 두려운 일도 없다는 결론으로....... .
나는 죽는다. 거기에 무슨 두려운 일이 있으랴? 첫째로 나의 육체적 생존 속에는 일찍이 어느 정도의 변화가 생기고, 또 현재도 생기고 있는 건지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그러하거늘 나는 왜 아직 일어나지도 않는 이 변화를 두려워할까? 게다가 이 변화 속에는 나의 이성이나 경험에 거역(拒逆)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뿐더러 나에게는 생애를 통해서 내가 끊임없이 나의 공상 속에서 동물의 죽음이든 인간의 죽음이든 죽음은 생명의 필수적인 것이며 때로는 편리한 조건이기도 하다고 생각해 왔고, 현재도 역시 생각하고 있을 만큼 알기 쉬운 친근성이 있는 자연적인 일이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단 말인가?
엄밀히 말해서 이론적인 인생관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을 따름이다. 그 하나는 거짓의 인생관이어서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나의 육체에 생기는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인생으로 보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의 그것은 진실이다. 그러나 둘 다 마찬가지로 이론적이고 사람은 그 어느 쪽을 취하든 자유이나, 어느 쪽이든 죽음의 공포는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첫째를 보면, 인생을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육체의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서 해석하고 있는 거짓된 견해는 세계의 현상처럼 오랜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듯이 현재의 유물적 과학(唯物的 科學)이나 철학에 의해서 만들어진 인생관은 아니다. 현대의 과학과 철학은 그저 이 견해를 그 극한에까지 추진(推進)시켰을 뿐이고, 그 결과로서 이 견해가 인간의 자연적인 근본 요구에 대해서 적합하지 못하게 되었음이 한층 명료(明瞭)하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양의 최저 단계에서는 사람들이 극히 낡은 원시적 견해(見解)이다. 그것은 중국인 사이에도 불교도 사이에도, 유태인 사이에도,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잠언(箴言) 속에도 표현되어있는 것이다.
이 견해를 실제의 말로서 표현하면 이렇게 된다. 인생, 이것은 공간과 시간에 나타난 물질력의 우연한 장난이다. 우리들이 의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생명이 아니라 생명이 그 의식 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어떤 종류의 감정의 기만(欺瞞)이다. 의식이라 함은 물질의 일정한 상태 아래의 그 속에서 번쩍이는 불꽃이다. 이 불꽃은 타올라 한창 타고 다시 어두워져서 마침내는 아주 꺼져버린다. 이 불꽃, 즉 두 개의 시간적 무한 사이에 있어서 일정한 시간 동안만 물질에 의해서 경험되는 의식은 본디 무(無)이다. 의식이 자기 자신을 보고, 무한의 세계를 보고, 자기 자신 및 무한의 세계를 판단하고, 이 세계의 모든 우연의 장난을 보고, 특히 중요한 것은 어떤 우연하지 않은 것에 대조시켜서 이 장난을 우연이라고 부르고 있음에도 불고하고, 이 의식은 본질적으로 단순히 죽은 물질의 산물이고, 하동의 흔적, 하등의 의의를 남기지 않고, 일어나자마자 곧 꺼져버리는 환영이다. 일체는 한없이 변화하는 물질의 소산(所産)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이라고 불리우는 것도 단순히 죽은 물질의 일정한 상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인생에 대한 하나의 견해이다.
이 견해는 아주 논리적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인간의 합리적 의식은 물질의 어떤 상태에 따르는 하나의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들이 자기의 의식에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그저 죽은 것뿐이다. 우리들이 생명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도 사실은 죽음의 장난이다. 이와 같은 인생관에 따르면 죽음은 결코 두려워할 것만이 아니고, 삶이야말로 부자연하고 불합리한 것으로서 두려운 것이 되는 것이다. 마치 불교도나 신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나 할트만 등이 보고 있듯이.
인생에 대한 또 하나의 견해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인생이란 그저 내가 내 자신 속에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항상 나의 생명을 내가 과거에 있었다든가 또는 장래에 있을 것이라든가 하는 식이 아니라 (나는 이런 식으로 나의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나는 현재 있다. ―언제 어디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 끝날 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의식하고 있다. 나의 생명의 의식에는 시간 및 공간의 관념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자연 이 견해에 따르면 모든 것이 반대가 된다. ―생명의 의식이 환영이 아니라, 모든 공간적인 것, 시간적인 것이 환영인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 생존은 시간적이며, 공간적인 휴지(休止)는 이 견해에 있어서는 아무런 실제적인 의의가 없고, 나의 참된 생명을 중단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교환할 수조차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견해에 있어서의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생관 중 그 어느 것이라도 사람들이 굳게 간직하고 있다면, 그 어느 쪽에도 죽음의 공포는 있을 리 없다.
동물적 존재라하더라도, 또 합리적 존재라 하더라도,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할 것까진 없다. 동물은 삶의 의식을 갖지 못하므로 죽음을 보는 일도 없는 것이지만, 합리적 존재는 삶의 의식을 갖지 못하므로 죽음을 보는 일도 없는 것이지만, 합리적 존재는 삶의 의식을 가지고 있으므로 동물아의 죽음에 있어서는 자연스럽고 결코 그칠줄 모르는 물질적 운동 이외에는 그 무엇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가 알지 못하는 죽음이 아니라, 그 동물적 존재도, 합리적 존재도, 다 같이 그것만을 알고 있는 삶이다. 사람들에게 죽음의 공포로 나타나는 감정은 그저 삶의 내적 모순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도깨비에 대한 공포가 병적 정신 상태의 의식에 지나지 않음과 마찬가지다.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리라. 죽을 것이리라. 내가 나의 생명이라 보고 있는 모든 것은 죽게 될 것이리라"고 어떤 목소리가 사람에게 말한다. "나는 존재한다"라고 다른 목소리가 말한다. "그리고 죽을 수는 없으며, 또 죽어서는 아니 된다. 나는 죽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죽어 가고 있다."
죽음 속에서가 아니라, 이 모순 속에서 육체의 죽음을 생각할 때 인간을 사로잡는 공포의 원인이 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사람이 그 동물적 생존의 휴지를 두려워하는 일에 있음이 아니라, 죽을 수 없는 또 죽어서는 안 될 것이 죽어 가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 생각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장래의 죽음에 관한 사상은 그저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죽음의 관념을 미래에 옮겨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장래의 육체적 죽음으로서 나타나는 환영은 죽음에 관한 사상의 깨우침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가져야 할 터인데 가지고 있지 않는 삶에 관한 사상의 깨우침이다. 이것은 무덤 속에서 삶에 깨우친 사람이 경험해야 할 감정과 비슷한 감정이다. 생명은 있다. 그런데 나는 죽음 속에 있다. 이것이 그것이다. 죽음이다. 즉 현재 있는 것, 있어야 할 것이 멸망되어 간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知慧)는 헝클어지고 마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가 죽음에서의 공포가 아니라 거짓된 삶의 공포라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인간이 때로는 죽음의 공포에서 자살한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육체의 죽음이라는 관념을 두려워함은 그들의 생명이 그것과 더불어 끝남을 두려워함이 아니라, 육체의 죽음이 그들에게 그들이 갖고 있지 않는 참된 생활의 필성(弼成)을 분명히 가르쳐주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것 때문에 인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상기하기를 그렇게 싫어하는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상기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그들이 합리적 의식의 요구에 따라서 생활하고 있지 않다 함을 고백함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들이 그것을 두려워함은 죽음이 그들에게 공허와 암흑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공허와 암흑으로 보는 것은 그들이 삶을 보지 않기 때문임에 불과하다.
육체의 죽음은 공간적 육체와 시간적 의식을 멸망시키기는 하나, 생명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세계에 대한 각 존재의 특수한 관계를 멸망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생명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그들을 놀라게 하는 환영에 한 걸음 다가가서 그것을 만져 보기만 해도, 그들로서도 환영은 끝내 환영이고 실재가 아님을 간파할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항상 사람들 중에서 그들이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그들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그렇게 그들은 느끼고 있다―자기의 특수한 자아(自我)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자기가 죽으면 육체는 해체(解體)되고 자기의 자아는 멸망할 것이다. 자기의 이 자아는 자기의 육체 속에 몇 해를 두고 살고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 자아를 존중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아는 그들의 육체적 생활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육체적 생활의 절멸과 더불어 그것도 멸망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 결론은 극히 보편적인 것이고 그것에 관해서 의심 따위를 품은 사람은 결코 없을 정도의 것이지만, 사실은 그들 제멋대로의 결론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물질주의자나 정신주의자라고 자부를 하면서도 그들의 자아는 몇 해든 그 살아온 육체의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아주 젖어버렸으므로, 그들의 머리에는 그러한 단정의 가부(可否)를 확인해 보려는 생각조차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나는 59년 동안 살아왔다. 그동안 내내 나는 나의 육체에서 자기 자신을 의식해 왔다. 그리고 내가 나를 의식하는 이 일이야말로 나의 생활이었다고 내게는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내게 그렇게 생각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내가 살아온 것은 59년도, 5만 9천 년도, 59초도 아니다. 나의 육체는 비록 그것이 그 생존의 시간이라 하더라도 절대로 나의 자아의 생명을 결정짓지는 못한다. 만약 생활의 각 순간에 있어서 나의 의식 내에서 나라는 것은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생각도 하고 느끼기도 하는 어떤 것, 즉 세계에 대해서 전혀 특수한 모습으로 상대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라고. 그리고 나는 그저 이것만을 자기의 자아로 인정한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언제 어디서 나는 태어났을까? 언제 어디서 나는 현재 생각하듯이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 시작도 했다든가 함에 대해서 나는 좀처럼 아는 바가 없다. 나의 의식은 나에게 그저 이렇게 말할 따름이다. "나는 존재한다. 나는 내가 세계에 대해서 현재 있는 것 같은 관계를 가지고 여기에 있다"라고. 나의 출생, 나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의 많은 시간, 중년 시절 기타 매우 가까운 시절의 일에 관해서도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일이 있다. 만약 내가 무엇인가 기억하고 있다던가 혹은 나의 과거 중에서 무엇인지 상기(想起)한다 하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또 상기하는 것은 거의 남에게 관해서나 다른 사람에게서 들은 것을 상기하는 식이다. 그리고 보니 나는 어떠한 근거를 가지고 나의 생존의 모든 기간을 통해 내가 항상 하나의 나였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첫째로 나 일개의 육체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 나의 육체는 언제나 무엇인가, 비물질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통해서 부단히 흐르고 있는, 그리고 이 무엇을 통해서 흐르고 있는 육체를 나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하나의 물질이었고, 현재도 역시 그렇다. 나의 전 육체는 몇십 번이고 변화해 왔다. 그 어느 하나도 옛 모양을 남기고 있는 것이 없다. 근육도, 내장도, 골격도, 모든 것은 변화되어왔다.
나의 육체가 하나인 것은 그저 변화해서 마지않는 이 모든 육체를 하나의 것,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어떤 비물질적인 것이었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비물질적인 그 무엇이란 우리들이 의식이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즉 그것 하나가 모든 육체를 함께 지탱해서 그것을 하나의 것,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다른 만물로부터 구별하는 이 의식이 없다면 나는 나의 생명도, 남의 생명도, 그 무엇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에 언뜻 생각하면은 모든 근본인 의식이 영원불변의 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이다. 의식도 역시 변하기 쉬운 것이다. 전 생애를 통해서 지금도 수면(睡眠)이라는 현상이 되풀이되고 있다. 그것이 우리들에게는 누구나 매일 수면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극히 간단한 일같이 생각되나, 만약 수면 중에는 전혀 의식이 중단되는 때도 가끔 있다 함을 인정치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시인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된다.
날마다 깊이 수면을 하는 동안에는 의식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가 후에 또다시 회복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에도 이 의식은 육체의 모든 것을 함께 유지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서 인식하는 유일한 근거다. 이를테면 의식의 정지(停止)와 더불어 육체도 또한 해체(解體)되고 그 독립성을 잃어버려야만 될 것 같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자연적 수면에서도, 인위적 수면에서도 결코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육체의 모든 것을 하나로 유지하고 있는 의식의 정기적(定期的)으로 상실되어 육체는 궤멸(潰滅)해 버리지 않을뿐더러, 이 의식은 그 위에도 또 육체와 마찬가지로 변화한다. 10년 전하고 현재는 나의 육체의 물질 중에 무엇 하나도 공통된 것이 없는 것처럼, 즉 같은 육체가 아닌 것처럼 내 속에도 같은 의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세 살 때의 나의 의식과 현재의 나의 의식은 지금의 나의 육체의 물질과 30년 전의 그것이 변해버린 것처럼 되어 버렸다. 의식은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수 없이 적게 나눌 수 있는 연속적인 의식의 열(列)이다.
그러므로 육체를 하나로 유지하고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의식도 실재적인 것이 아니라, 중단되기도 하고, 변화되기도 하고 그 무엇인 것이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듯이 자기 하나만이 의식이라는 것은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육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인간에게는 같은 육체도 없고,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이 육체를 구별하는 것도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생애를 통해서 항상 하나인 의식은 없고, 있는 것은 그저 서로 무엇으로 선가 매여져 있는 연속적 의식의 일련(一連)인 것이다. 그러나 역시 인간은 자기를 자기로서 느끼는 것이다.
우리들의 육체는 같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변화되는 그 육체를 같은 우리들의 것으로서 인식함은 시간적 연속이 아니라 그저 변화하고 있는 의식의 일련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미 몇 번이고 이들 육체의 의식을 잃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부단히 육체를 잃고 나날이 잠잘 때마다 의식을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매일, 매시간, 자신 속에 이 의식의 변화를 느끼면서도 좀처럼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들이 죽음에 의해서 잃게 됨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자아라는 것이 있다고 하면, 그 자아는 우리들이 자기의 것이라고 부르고 있는 이 육체에 있음이 아니라, 무엇인지 더욱 다르게 연속되는 의식의 전열(全列)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그 무엇 속에 있어야만 되는 것으로 된다.
그렇다면 이 시간적으로 연속되고 있는 모든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나의 근본적인 이 특수한 자아, 나의 육체의 생존이나 그 속에 생기는 의식의 열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시간적으로 연속되는 여러 가지 의식을 마치 축(軸)이라도 끼듯이 하나하나 끼고 가는 이 특수한 자아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극히 심원(深遠)하고 현명(賢明)한 것 같이 여겨진다. 더구나 그것에 대한 답을 알지 못하거나, 하루에 20번 쯤은 그 대답을 입에 떠올리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좋아. 저것은 싫어." 이 말은 극히 간단하기는 하나, 그 속에야말로 일체의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특수한 자아란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결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을 싫어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자아인 것이다. 왜 한사람은 이것을 좋아하는 데 다른 사람은 좋아하지 않는가? 그것을 알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구나 이 한가지 일이야말로 각 개인의 생명의 근본를 이루고 시간적으로 달라지는 각 개인의 의식 상태를 하나로 매어주는 그것이다. 외계는 만인의 위에 똑같이 작용하지만, 사람들이 받는 인상(印象)은 전혀 같은 조건에 있는 사람에 있어서까지도 무한하게 세별(細別)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인상의 수에 의해서나 그들의 힘에 의해서도 끝없이 여러 가지다. 그리고 이러한 인상으로부터 각자의 연속적 의식의 일련은 꾸며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모든 연속적 의식이 결합하는 것은 그저 같은 사실에 있어서도 어떤 인상은 그의 의식의 작용하고 다른 인상은 작용하지 않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어떤 인상이 사람에게 작용하지 않는 것은 그저 그가 이것은 조금이나마 좋아하지만, 저것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임에 자나지 않는다.
그저 사랑이 많고 적은 정도의 결과로서만 어떤 연속(連續)의 의식(意識)이 인간 속에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것을 조금이라도 사랑하고 다른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특질만이 흩어지고 끊어지는 모든 의식을 하나로 모으는 인간이 특수한 근본적 자아인 것이다. 그러나 이 특질은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도 발달되는 것이기는 하나 우리들에게는 보이지도 않고 알 수 없는 과거 속으로부터 이미 완성된 것으로서, 이 생활 속에서 우리들에게 가져온 것이다.
어떤 것은 조금이나마 사랑하고 다른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인간의 이 특질은 흔히 성격이라고 불리운다. 그리고 이 말에 의해서 가끔 이해되는 것은, 곳과 때의 어떤 조건의 결과를 형성하는 각 개인의 성질의 특수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조금이나마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이간의 특질은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와 반대로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이 사람에게 작용하기도 하고 않기도 하는 것은, 인간이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어떤 것을 사랑하고 다른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극히 결정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일로부터 만이 똑같은 공간적 시간적 조건 속에 태어나서 키워진 사람들이 그 내적 자아에 있어서는 극단으로 상반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따위 일이 가끔 일어나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우리들의 육체 속에 결합되어 있는 제각기 서로 다른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켜 주는 것은, 공간적 내지 시간적 조건에서 독립된 것이기는 하나 극히 한정적인 그 무엇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들의 손으로서 공간도 시간도 넘어선 영역으로부터 이 세계에 가져온 것이다. 세계에 대한 어떤 특수한 관계 속에 이루어지는 이 무엇이야말로 나의 참된 현실적 자아이다. 내가 나를 이해하는 것은 이 근본적 특질로서이다. 내가 남을 아는 것도 (만약 그들을 안 다치고), 그것은 그저 세계에 대한 일종의 특수한 관계로서 만이다. 사람들과 진실한 정신적 내왕으로 들어갈 때에 사람들은, 그들의 외관에 좌우됨이 없이 곧 그들의 본성(本性) 속으로 들어가서 그들의 세계에 대한 관계는 어떤가, 무엇을 어느 정도로 그들이 사랑하고 있는가, 또 사랑하지 않는가를 알려고 애쓸 것이다.
만약 내가 개개의 동물, 즉 말 개 암소 등을 알고 그들과 진실한 정신 교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내가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은 그들의 겉모양에 의함이 아니라, 그들의 각각이 서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에 의해서 그들의 각각이 무엇을 어느 정도로 사랑하는가? 사랑하지 않는가? 그것도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을 아는 데 의한 것이다. 만약 내가 여러 가지 특수한 동물의 종족을 알고 있다고 하면, 엄밀히 따져서 내가 그들을 알고 있는 것은 그 외관에 의함이 아니라, 그들의 각각―사자 물고기 거미―세계에 대해서 공통된 관계를 보여주고 있는 사실에 의함이다. 모든 사자는 일반적으로 어떤 것을 좋아하고, 모든 물고기는 다른 것을 좋아하고, 모든 거미는 또 다른 것을 좋아한다. 그저 그들이 각각 다른 것을 좋아함으로써만이 그들은 나의 관념 속에서 다른 생물로서 식별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아직 이러한 동물의 하나하나의 세계에 대해서 그 특수한 관계로 식별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의 증거가 아니라, 그저 한 마리의 개개의 거미생활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가 내가 현재 있는 세계에 대한 관계와는 먼 것이라는 것, 따라서 나는 아직 실비 오 페리코가 개개의 거미를 이해했던 것처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데 그치는 것이다.
내가 나 자신에 관해서, 또 세계에 관해서 알고 있는 모든 일의 근본은 내가 현재 그 속에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이며, 그 결과로서 나는 세계에 대해서 각각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다른 생물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는 이 생활에 결정된 것도 아니고, 이 육체에 의해서 시작된 것도 아니고, 또 시간적으로 계속해서 일어나는 의식과 함께 시작된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나의 시간적 의식에 의해서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나의 육체는 멸망해 버릴지도 모르고, 나의 시간적 의식 그 자체도 절멸될지 모르지만, 내게는 일체의 것의 창조주인 나의 특수한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는 절멸될 리가 없다. 그것이 절멸될 리가 없음은 그것만이 오직 하나의 실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나는 나의 계속해서 일어나는 의식의 연속도 알지 못했을 것이며, 나의 육체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나의 생명도 다른 어떠한 생명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와 의식의 절멸은 이 생활에서 발생된 것도 시작된 것도 아닌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로서의 절멸(絶滅)의 증명(證明)이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사람들이 그들의 그릇된 인생관에 의해서 제한된 삶의 일부분을 인생으로 알고 있는 데서 생기는 것이다.
우리들은 육체의 죽음에 직면해서 시간 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열과 육체를 하나로 결합시키는 자기의 특수한 자아의 상실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나의 이 특수한 자아는 나의 출생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 아니므로, 어떤 시간적 의식의 중단이 모든 시간적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을 절멸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은 사실 육체를 결합시켜서 유지하고 있는 것, 즉 시간적 생명의 의식을 절멸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매일 수면을 취할 때마다 쉴새 없이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닌가? 문제는 육체의 죽음이 모든 연속적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 즉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를 절멸시키는 것인지 어쩐지 하는 한 가지 일에 있다. 그런데 이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모든 연속적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가 우리들의 육체적 생존과 더불어 생겨 나온 것이므로, 그것과 더불어 사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나의 의식을 기초로 해서 고찰해 보고, 나는 나의 모든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고 있는 것, 그것은―어떤 것에 대한 민감(敏感)과 다른 것에 대한 냉담(冷淡)이고, 그 결과 나의 내부에 하나는 남고 다른 하나는 사라져버리는 것이지만, ―즉 선에 대한 나의 사랑과 악에 대한 미움의 비율이지만―특히 나를 형성하고 있는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는 어떤 외적 원인의 산물이 아니라, 나의 생활의 다른 모든 현상의 근본적 원인임을 보는 것이다.
또 관찰을 기초로 해서 고찰할 때는, 최초 나에게는 나의 자아의 특수성의 원인이 나의 양친과 나와 나의 양친에게 영향을 주는 조건과의 특수성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더욱 추리를 해나간다면 나는 만약 나의 특수한 자아가 나의 양친과 양친에게 영향을 주었던 조건과의 특수성에 있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모두 나의 조상의 특수성 및 조상들의 생존 조건 속에 있는 것이 되고, 이와 같이하여 한없이, 즉 시간과 공간밖에 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특수한 자아는 공간과 시간밖에 생긴 것, 즉 내가 의식하고 있는 것, 그것임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그저 내게 기억되고 있는 이 모든 의식과, 나에게 기억되고 있는 생활에 선행하는 의식과 (플라톤이 말하듯이 또 우리들 모두가 자기 내부에 느끼고 있듯이) 결합하는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의 초(超) 시간적 초(超) 공간적 기초 속에만―이것 속, 이 기초 속, 세계에 대한 나의 특수한 관계 속에만―저 특수한 자아, 나의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멸망해 버릴까 두려워하는 저 특수한 자아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저 이것만이, 즉 의식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것, 인간의 특수한 자아인 그것은 시간을 초월해서 항상 과거에 있어서도 현재에 있어서도 존재하는 것이며, 중단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어떤 시간 내의 의식의 열(列) 뿐임을 이해해 둠이 필요하다. 이것은 육체의 죽음에 따르는 시간적으로 최후인 의식의 절멸은 날마다의 수면에 있어서와 같이 참된 인간적 자아를 멸망시킬 수는 없는 것이라 함을 분명히 해두기 위해서다. 첫째로 수면 중에는 죽음의 경우와 꼭 같은 일, 즉 시간적 의식의 중단이 생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잠자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지 않느냐? 인간이 잠자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음은―의식의 절멸은 죽음의 경우와 마찬가지임에도 불구하고―그는 잠들었어도 언제나 제대로 잠이 깨였으니까 이번도 틀림없이 깰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니다. (이 판단은 정확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는 첫 번 잠이 깰 수 있었으나 천한 번째는 깨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도 이런 식의 판단을 내린 적은 한 번도 없다. 이러한 판단은 그의 마음을 안심시키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인간의 그 참된 자아는 시간밖에 살고 있다는 것, 따라서 시간 속에 나타나는 그의 의식의 중단은 그의 생활을 파괴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는 까닭임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인간이 옛날 이야기에 있듯이 한꺼번에 천년이나 잠들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는 두 시간 잘 때와 마찬가지로 고요한 기분으로 잠 잘 것이다. 시간적이 아닌 참된 생명의 의식으로서 시간의 간격은 백만 년이나, 여덟 시간이나 거의 마찬 가지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생명에게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육체는 절멸한다. 오늘의 의식은 절멸한다.
그러나 자기 육체에 변화가 하나의 시간적 의식이 다른 의식으로 바뀌는 일에도, 인간은 이미 익숙해져도 괜찮을 때가 아닌가? 생각컨대 이러한 변화들은 인간이 철이 들 무렵부터 시작되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의 육체 변화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들 변화가 빨리 오기를 원하고 성장해서 어른이 되기를 원하고, 회복되기를 원하는 일이 아주 빈번하다. 인간은 하나의 붉은 고깃덩어리였다. 그리고 그의 의식은 모조리 밥통의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젠 수염을 기른 이성 있는 신사이거나 자라난 자식을 귀여워하는 부인이다. 육체에 있어서도, 의식에 있어서도 예전과 비슷한 것은 조금도 없지 않은가? 더구나 인간은 그를 지금의 상태로 이끈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환영한다. 그러면서도 다음에 닥쳐올 변화에 그 무엇이 두려운 것이 있을까? 절멸인가? 그러나 보라! 이들 모든 변화가 생기는 것,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참된 생활의 의식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육체의 탄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를 넘어서 시간을 넘은 곳으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하면 비록 그 무엇이든 시간적 혹은 공간적 변화가 그것을 넘은 곳에 있음을 절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인간은 그 생활의 사소하고 무의미한 단편에만 주목하고, 그 전체를 보려고 하지 않으며 오직 이 사소한 자기가 선택한 단편을 놓칠세라 애쓰고 있다. 이 일은 자신을 유리로 만들어진 것이라 생각하는 미치광이가 내던져지자"어머니"하고 외치고는 그 자리에서 숨이 넘어갔다는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생명을 가지기 위해서 인간은 공간과 시간 사이에 나타나는 그 하나의 작은 부분만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된다. 생명 전체를 파악하는 저에게는 그 이상으로 더욱 많이 주어지지만, 그 작은 한 부분만을 취하는 자는 이미 그가 가지고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인생은 세계에 대한 관계이다. 삶의 운동은 새로운 그리고 높은 관계의 결정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는 길이다.
우리들은 인생을 세계에 대한 어떤 관계로밖에는 이해할 수 없다. 우리들은 자기 내부의 생명을 이렇게 해석함과 동시에 다른 존재에 있어서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자기 내부의 생명을 이해함은 이미 세계에 존재하는 관계로서만이 아니라, 이성에 대한 동물아의 종속을 더욱더 크게 하는 일과 사랑의 표현 정도를 더욱 크게 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건설하는 일로 서다. 우리들이 자기 신상에서 보는 육체적 생존의 피할 수 없는 절멸은 우리들에게 우리들이 현재 있는 세계에 대한 관계가 불편의 것이 아니라는 것, 따라서 우리들은 다른 관계를 건설하지 않으면 아니 됨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의 건설, 즉 삶의 운동은 죽음의 관념을 절멸시킨다. 죽음이 나타남은 그저 자기의 생활을 세계에 대한 합리적 관계의 설정과 그 관계를 보다 큰 사랑 속에 나타냄으로써 자기의 생활을 인식하지 않고 이전과 같은 관계 속에, 즉 그가 날 때부터 품고 있는 어느 것을 사랑하고 어느 것을 미워한다는 정도의 관계 속에 머물려 있는 사람들에게 대해서만 이다.
인생은 끊임없는 운동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세계에 대해서 전과 같은 관계에 머무르고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품고 있던 것과 같은 사랑의 정도에 머물 때 그는 그 정지를 느끼고, 그의 앞에 비로소 죽음이 나타나는 것이다.
죽음은 그저 이러한 자들에게만 보이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의 생존은 그저 하나의 끊임없는 죽음이다. 그에게는 죽음이 미래의 것으로 보이고 두려울 뿐만 아니라 현재에 있어서도, 유년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의 사이에 점점 감소되어 가는 동물적 생활의 온갖 현상 속에 보이고 두려운 것이다. 왜냐하면 유년 시절에서 청춘기에 이르기까지의 생존의 진행은 언뜻 보면 힘의 일시적 증대인 양으로 보이나 실은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같은 사지(四肢)의 끊임없는 경화(硬化), 생활력의 쇠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쉴새 없이 눈앞에 죽음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무엇도 그를 죽음에서 구해 주지 못한다. 이러한 사람의 경우는 나날이 또 시간마다 나쁜 쪽으로만 나가고, 그 무엇도 그것을 잘해 줄 수 없다. 세계에 대한 그 특수한 관계, 어떤 것에 대한 사랑과 다른 것에 대한 미움이 이러한 사람에게는 그저 그 생존의 한 조건으로서만이 생각된다. 그리고 인생의 유일한 문제가―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건설, 사랑의 확대 등은 그에게는 쓸데없는 일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그의 전 생애는 오로지 불가능한 일 속에―피할 수 없는 생명력의 감소, 그 경화와 쇠퇴 및 노년과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헛수고 속에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 이러한 사람은 자기가 현재의 자기 생활 속으로 그 세계에 대한 특수한 관계를 가져왔음을 알고, 자기가 어떤 것을 사랑하고 다른 것을 미워함은 그에게는 감추어져 있는 과거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다. 그는 또 그의 생존 속에 그에 의해서 가져온 어떤 것을 사랑하고 다른 것을 미워하는 이 마음이야말로 그의 생명의 본질이라는 것, 이것은 그의 생명의 우연적 특성이 아니라 이 하나만이 삶의 운동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하나의 운동과 사랑의 증대 속에 자기의 생활을 두고 있는 것이다.
이 생활에서의 자기의 과거를 되돌아볼 때, 그는 자기가 알고 있는 자기의 의식의 연쇄(連鎖)로부터 세계에 대한 자기의 관계가 변화했음을 인정하고,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이 증가했음을 알고, 사랑의 힘과 영역이 끊임없이 개인적 생존의 쇠약에는 관계없이, 때로는 그것에 반비례해서 더욱더 많은 행복을 주면서 증대해 왔음을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과거에서 그 생명을 취하고 항상 그칠 새 없는 성장을 의식하면서 이것을 보지 못할 미래로 안락한 기분이 되어, 아니 기쁨조차 가지고 들고 나가는 것이다.
사람은 말한다. 질병 노년 쇠약 어린이로 되돌아감은 인간의 생명 혹은 의식의 절멸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어떠한 사람에게 대해서 그럴까? 나는 전설에 의한 노년에서 어린이로 되돌아간 사도 요한을 상상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는 그저 "형제여 서로 사랑하라!"고만 말했다는 것이다. 간신히 움직이는 백 살난 노인이 눈에 눈물이 글썽해서 쉴새 없이 그저 같은 두 마디의 말―"서로 사랑하라!" 이것만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 동물적 생존은 겨우 스쳐갈 뿐이고, 그것은 쉴새없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에서 먹히고, 육체적 인간의 생존 속으로는 이미 들어오지 못할 새로운 산 존재에게 먹혀버린 것이다.
인생을 참되게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질병이나 노년에 의해 그 생명이 쇠퇴함을 보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고뇌(苦惱)하는 것은 마치 빛을 향해서 걷는 사람이 빛으로 다가감에 따라서 자기의 그림자가 적어짐을 보고 고뇌하는 것과 매일반이다. 또 육체가 멸망된다고 해서 자기 생명의 절멸을 믿는 것은, 가득 찬 빛 속으로 들어감과 더불어 물체의 그림자가 사라짐을 보고 물체 그 자체의 소멸이 확실한 징조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와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그저 너무 오랫동안 물체의 그림자만을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 그림자를 물체 그것으로 생각하게 된 사람뿐이다.
자기를 공간적 시간적 생존에 있어서의 반영(反映)에 의해서가 아니고, 세계에 의해서 성장하는 사랑의 관계에 의해서 알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의 공간적 시간적 조건의 그림자의 소멸은 그저 빛의 보다 큰 비율의 징조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 생활을 그것으로써 이 생존으로의 첫걸음을 내딛고, 이 생활 속에서 사랑의 증가에 의해서 발달되어 온 세계에 대한 어떤 특수한 관계로서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자기의 절멸을 믿는 일은 마치 눈에 보이는 세계의 외적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대해서 그의 어머니가 그를 양배추 잎사귀 밑에서 주워온 것이라든지, 그의 육체가 갑자기 어디론지 날아가버리고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든지 함을 믿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생명은 이 세상에서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음의 미신은―다른 방면에서 보지 않더라도 우리들이 그것은 의식하고 있는 생명 그 자체의 본질에 따르면―한층 더 뚜렷해지는 것이다. 나의 벗, 나의 형제는 나와 마찬가지로 생활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와 마찬가지로 생활하기를 그쳤다. 그의 생명은 그의 의식이었고, 그의 육체적 생존조건 속에 발생하고 있었다. 즉 그의 의식의 현현(顯現)을 위해서는 장소도 시간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이치가 된다. 나의 형제는 있었다. 나는 그들과 교류(交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없고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할 수 없다.
"그와 우리들 사이에는 모든 연쇄(連鎖)가 끊긴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그가 없는 것이다. 우리들도 역시 뒤에 남는 자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어찌 그것이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생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외부적 교류가 두절(杜絶)된 것에서 죽음의 실재성의 가장 틀림없는 입증(立證)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친근한 사람들의 육체적 생존의 휴지(休止) 되는 것 이상으로 명백히 죽음에 대한 관념의 망상성(妄想性)을 씻어주는 것은 없다. 나의 형제는 죽었다. 무엇이 일어난 것인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의 관찰에 허용된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의 표현이 나의 눈 속에서 사라지고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그 무엇도 남지 않았다. 아직 나비가 되어 날아가지 않은 고치의 번데기는 곁에 텅 빈 깍지가 되어 딩굴고 있는 고치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지! 고치가 만약 생각할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이웃을 잃어도 그야말로 그 무엇으로서도 그것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나의 형제는 죽고 그 고치는 빈 깍지로 남아 있다. 나는 내가 여태껏 흔히 보아 오던 형태로는 그를 보지 못하나, 그가 나의 눈에서 사라진 것이 그에 대한 나의 관계를 아주 없애 버리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소위 말하자면 그에 대한 우리들의 추억이 남아 있다.
추억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손이나 얼굴이나 눈에 대한 추억이 아니라 그의 정신적 형상에 대한 추억이다.
이 추억이란 대체 무엇일까? 이 지극히 간단하고 이해하기 쉽게 생각되는 말은 대체 무엇일까? 결정체(結晶體) 동물의 형태가 사라진다. 추억은 결정체나 짐승 사이에는 없다. 그런데 내게는 나의 벗이나 형제애 대한 추억이 있다. 그리고 이 추억은 나의 벗이나 형제의 생활이 이성의 법칙과 일치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것이 사랑에 있어서 나타나는 일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더 뚜렷한 것이다. 이 추억은 결코 간단한 관념이 아니다. 이 추억은 일찍이 형제가 이 지상에서의 생존 중에 그 생활이 내게 작용한 것과 같이 내게 작용하는 그 무엇이다. 이 추억은 그의 생활을 에워싸고, 그가 그 육체적 생존에 있어서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작용한 것처럼 그 사후에도 다름없이 내게 작용하는, 눈에 보이지 않은 비물질적인 분위기(雰圍氣)이다. 이 추억은 내게서 그의 사후인 지금도 역시 생전에 내게서 요구하던 것과 같은 것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내게 이 추억은 그의 생전에 그것이 있었던 것보다도 그 사후에 한층 더 의무적인 것이 된다. 나의 형제에 깃들고 있던 이 생명력은 사라져버리지도 감소해 버리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이 같은 것으로서 조차도 남지 않고, 도리어 크게 되고, 이전보다 한층 힘차게 내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의 생명력은 그의 육체의 사후에 있어서도 그 생전과 같이 아니 그 이상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작용하는 것이다. 그 생명력을 나의 형제가 육체적으로 생존해 있던 때와 같이 나의 신상에 느끼면서, 나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내게 명시(明示)해 주는 그의 세계에 대한 관계를 가지고 어떠한 근거에서 내가 나의 죽는 형제는 이미 생명이 없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나는 말할 수 있다. 그는 일찍이 동물로서 살고 있던 세계에 대한 낮은 관계, 즉 현재 내가 아직도 그 속에 있는 낮은 관계에서 나와버린 것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전부다. 나는 또 말할 수 있다. 내게는 지금 그가 있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의 중심을 부정해 버릴 수 없다. 나는 사람이 나를 사로잡은 데 대해서 그 반사(反射)되는 표현만을 보아왔다. 그 반사되는 면이 어두워졌다. 나는 이미 그가 나를 어떻게 사로잡고 있는지 볼 수 없다. 그러나 아직 나의 전 존재로써 그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다는 것, 따라서 그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나의 죽은 형제, 내게는 보이지 않는 이 생명은 내게 작용할 뿐만 아니라, 내 속으로까지 들어온다. 그리고 그의 특수한 산 자아는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가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로 되는 것이다. 그는 마치 세계에 대한 관계를 건설함에 있어서 그가 올라갔던 계단에까지 나를 끌어 올려 주는 것 같기나 한 것 같다. 그리고 내게는 나의 특수한 산 자아로서 그가 나의 눈에서 사라지기는 했으나, 아직도 나를 뒤로 끌어당기면서 이미 한 걸음 딛고 있는 계단이 한층 더 분명히 보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서 나는 육체적 주음에 의해서 잠든 형제의 생명을 나를 위해서 의심한다. 따라서 그것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뿐이랴! 나의 눈에서 사라진 세계에 대한 생명의 이 작용을 관찰할 때 나는 더욱 확실히 나의 눈에서 사라진 이 생명의 실재성을 확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죽었다. 그러나 세계에 대한 그의 관계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의 생전과 마찬가지 아니 그 이상 몇 갑절 더한 힘을
가지고 작용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 작용은 이성과 사랑의 도수(度數)에 비례해서 모든 생물처럼 성장하고 증대해서 결코 정지하는 일이 없고, 또 중단될 줄도 모르는 것이다.
예수는 아득한 옛적에 죽었다. 그의 육체적 생존은 짧았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의 육체적 개성에 있어서는 분명한 관념조차도 가지고 있지 못할 정도이지만, 그의 합리적이고 사랑에 가득 찬 생명의 힘, 그의 세계에 대한―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닌―관계는 아직도 그의 이 세계에 대한 관계를 자기의 내부에 받아들여 그것에 의해서 생활하고 있는 수백만의 사람들 위에 작용하고 있다. 이 작용하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일찍이 예수의 육체적 생존과 결합해서 이 같은 그의 생명의 계속과 생장을 구성하고 있던 것은 대체 무엇이었던가? 우리들은 말한다. 이것은 예수의 생명이 아니라 그 결과이다라고. 그리고 아무리 뜻도 없는 이러한 말은 입에 올리면서 우리들로서는 우리들이 무엇인지, 이 힘은 살아있는 예수 자신이라 것 이상으로 뚜렷하고 확실한 것을 말한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일을, 자라서 떡갈나무가 된 도토리 주위에서 쉴새없이 일하고 있던 개미들도 틀림없이 말했을 것이다. 도토리는 자라서 떡갈나무가 되고, 그 뿌리로 땅을 꿰뚫고, 가지나 새로운 도토리를 떨어뜨리고 빛이나 비를 막아서 그 주위에 살고 있던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린다. 『그것은 도토리의 생명이 아니다"라고. 개미들은 말할 것이다. 우리들이 그 도토리를 끌고 굴속으로 들어갔을 때 이미 끝난 그의 생명의 결과다"라고.
나의 형제는 어제 죽었던 혹은 천년 전에 죽었다 한들, 그의 육체적 생존기 안에 작용한 그의 생명력 그 자체는 나의 눈에 보인 그의 일시적 육체적 생존의 이 힘이 중심이 우리들의 안전에서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내부에, 수백, 수천, 수백만의 사람들 내부에 한층 더 힘차게 작용을 계속하고 있다. 이것은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나는 내 앞에서 불타고 있는 풀의 빛을 본다. 이 풀은 다 타버렸으나 빛은 더할 따름이다. 나는 이 빛의 원인을 모르고서는 무엇이 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풀을 태운 것과 같은 불이 지금은 먼 숲이나 내게는 보이지도 않는 그 무엇을 태우고 있으리라는 것을 추측할 수는 있다. 게다가 이 빛은 내가 지금 그것을 볼 뿐만 아니라, 그 하나가 나를 인도해서 내게 생명을 주는 그러한 것이 된다. 나는 이 빛에 의해서 살고 있다. 어찌 그것을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이 생명력의 힘이 지금은 내게 보이지 않는 다른 중심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는 그 힘을 느끼고 그것에 의해서 움직이고, 그것에 의해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어떠한 것일까? 이 생명 그 자체는 어떠한 것인가? 나는 알 수 없다. 만약 추측하기를 좋아하고서 분규(紛糾)를 일으킴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나는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내가 인생의 합리적 이해를 구하고 있다면 명료 정확(明瞭正確)에 만족할 것이지, 애매(曖昧)한 제멋대로의 추측을 그것에 결부시켜서 모처럼의 명료 정확성을 해침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그것에 의해서 살고 있는 모든 일이 나 이전에 살아 있었음과 까마득한 옛적에 죽어버린 사람들의 생명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안다면, 따라서 생명의 법칙을 준봉하고, 동물아를 이성에 종속시키고, 사랑의 힘을 나타내온 모든 사람이 그 육체적 생존이 소멸한 뒤에도 남의 내부에 살아왔고 현재도 살아있음을 알면 충분한 것이다. 어리석고 무서운 죽음의 미신이 나를 결코 괴롭히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사후에까지 작용을 계속하는 힘을 남긴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들은 왜 이러한 사람들이 그 개성을 종속시키고 생명을 사랑에 양보하면서, 일찍이 생명의 절멸이 불가능함을 한번도 의심해 볼 수 없었고, 의심해 본 적도 없었는가 하는 이유를 관찰할 수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사람들의 생활 속에서 삶의 영원성에 대한 그의 신념의 근본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에 따라서 자기의 생활에 파고들어 자기 내부에서도 이러한 근본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는 말씀하셨다. 그는 생명의 환영(幻影)이 소멸된 뒤까지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그때 이미 그 육체적 생존은 항상 결코 멈추지 않을 참된 생활로 한 걸음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는 그 육체적 생존에 있어서 이미 그가 다가가고 있던 생명 중심으로부터의 광명(光明) 속에 살고 있었고, 생전에 벌써 이 빛이 광선이 그의 주위 사람들을 비치고 있음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개성을 부정하고 합리적 사랑의 생활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일을 역시 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활동―그것이 예수이든, 소크라테스이든, 선인이든, 이름도 없는 인간이든, 자기 희생자이든, 노인 청년 부인이든―그리고 그 활동의 범위가 아무리 좁든 간에 만약 그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개성을 부정하고 생활하고 있다면, 그는 이런 점으로 보아 이미 그 생애에 있어서 하등의 죽음이 없는 것이다. 또 그것을 확립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이 인생의 유일하고 긴요한 일로 되고 있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 있는 것이다.
자기의 생활을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과 사랑의 발현(發現)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 생활에 있어서 이미 한편으로 그가 다가가고 있는 생활의 새로운 중심의 빛을 보고, 다른 편으로는 이 빛이 그를 통해서 주위의 사람들 위에 일으키는 작용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한 가지 일이 그에게 생명의 불감성과 불멸성, 영원의 강화성(强化性)에 대한 의심할 바 없는 신앙을 준다. 불사(不死)에 대한 신앙은 그 누구에게서도 받을 수 없으며, 또 자신에게 불사를 설득할 수도 없다. 불사의 신앙이 있기 위해서는 우선 불사가 존재해야 할 것이며, 불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생활을 그것이 불사인 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미래의 생활을 믿을 수 있음은 그저 자기 인생의 노역(勞役)을 다할 그 생활 속에서 이젠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계를 건설한 사람이다.
죽음의 공포는 인간이 세계에 대한 여러 가지 관계를 혼동시키는 데서 생긴다.
그렇다. 만약 인생을 그 참된 의의에 있어서 생각해 본다면, 죽음의 이 이상스러운 공포는 무엇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는가를 이해하기조차 곤란해질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 일로서, 만약 그대가 도깨비 같은 것이 어두움 속에서 그대를 위협하는 것을 잘 살펴본다면 두 번 다시는 그 같은 유령 적인 공포를 일으키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밖에 없는 것을 잃는데 대한 공포는, 그저 인생이 인간에 대해서는 단순히 세계에 대한 그의 합리적 의식이 그에게는 알려져 있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특수한 관계 속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또 그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눈에는 보이는 두 가지 다른 관계, 즉 세계에 대한 그의 동물적 의식과 육체의 관계 속에 나타나 있는 일에서 생기는 것이다. 대체로 일체의 존재물이 인간에 대해서 나타나는 것은 첫째, 세계에 대한 그 합리적 의식의 관계로서, 둘째, 세계에 대한 그 동물적 의식의 관계로서, 셋째, 세계에 대한 그 육체의 물질적 관계로 서이다. 세계에 대한 그의 합리적 의식의 관계야말로 그의 유일한 생명임을 이해하지 않고, 인간은 자기의 생명이 아직도 세계에 대한 눈에 보이는 동물적 의식 및 물질의 관계 속에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개성 속에서 세계에 대한 그의 동물적 관계와 그를 조직하고 있는 물질의 관계가 깨뜨려짐과 동시에 세계에 대한 자기의 합리적 의식의 특수한 관계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자기 자신이 개인적 동물적 의식의 단계(段階)에까지 다달은 물질 운동에서 생기는 것 같이 여겨진다. 이 동물적 의식이 합리적 의식으로 바뀌고, 이윽고 이 합리적 의식이 쇠퇴(衰退)되고, 다시 이전의 동물적 의식으로 되돌아가서 마침내는 동물적 의식도 쇠퇴되어 처음에 그로부터 나왔던 죽은 물질로 환원(還元)된다는 식으로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자연 그에게는 세계에 대한 그의 합리적 이식의 관계도 이러한 견해에 의해서 무엇인가 일종의 우발적인 불필요하고 멸망 적인 그 무엇같이 여겨진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세계에 대한 그의 동물적 의식의 관계는 소멸할 리 없는 것, 동물적 의식은 그 종속 속에 영원히 자기를 계속시켜 나가는 것이 되고, 세계에 이르러서는 이미 결코 영구히 소멸하는 일이 없는 것으로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 그 합리적 의식은 단순히 영구적인 아닐 뿐더러 그저 무엇인지 불필요한 쓸데없는 것의 반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된다.
더구나 인간은 이와 같은 일이 있을 리 없음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거기에 죽음의 공포가 있는 것이다. 이 공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들은 동물적 의식으로써 그들의 합리적 의식인 동물적 인간의 불멸, 즉 그 종족, 자손의 불멸은 그들이 자기 내부에 가지고 있는 합리적 의식이 불멸에 대한 그 요구를 만족키시기에 족한 것이다 라고, 그렇게 자신에게 납득시키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또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생명이 갑자기 육체적 형태 속에 나타나서 그 속에서 소멸되어 다시 육체 속에 부활되고, 그리하여 살아나가는 것이라고 자기에게 납득시키려 한다. 그러나 그 어느 쪽을 믿든지 간에 생명을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의식의 관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들에게도 인간 종족의 계속이 그 특수한 자아의 영구성을 찾아내지 않는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함이 분명한 것이다. 새로이 시작되는 생활의 관념은 그 속에 생명 중단의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만약 생명이 이전에도 없었던 것, 부단히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면 금후에도 또 있을 리 없는 것이다.
어느 쪽 사람들에게도 지상의 생활은 물결이다. 죽은 물질로부터 개성이 만들어지고 개성으로부터 합리적 의식인 물결의 정점(頂点)이 만들어진다. 정상(頂上)까지 다 올라가 버리면 물결, 즉 합리적 의식과 개성은 처음 나왔던 위치로 내려가서 거기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어느 쪽 사람에게도 인간 생활은 눈에 보이는 생활이다. 사람은 생장하고 성숙해서 죽는다. 그 사후(死後)에 그에게 이미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 그의 뒤에 그로부터 남은 것, 자손 혹은 사업마저도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는 자신을 가엾이 여기고 자기 생활의 정지(停止)를 두려워한다. 그러나 이 지상에서 그의 육체로부터 시작되어 같은 지상에서 끝마쳐진 그의 이 생명, 이 같은 그 자신의 생명이 다시 부활되더라도 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사람은 만약 그가 이전에는 존재해 있지 않았더라도 갑자기 무(無)에서 생겨서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특수함이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또 나타날 리 없음을 알고 있다. 인간은 자기가 결코 생겨났음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 왔으며, 현재도 존재하고, 미래에도 또 존재하리라는 것을 인식했을 때 비로소 자기가 불사(不死)임을 아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생명이 물결이 아니라는 것, 이 생활에 있어서만 단순히 물결로서 나타나는 영원히 운동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자기의 불사를 믿는 것으로 된다.
나는 죽게 될 것이다. 나의 생명은 끝날 것이다. 이렇게 생각된다. 이 생각은 나를 괴롭히고 나를 위협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깝기 때문이다. 그러나 죽는다 함은 무엇이나? 대체 무엇이 아까운 것이냐? 가장 흔한 관찰점에서 보아 나라는 것은 무엇이냐? 우선 첫째로 나는 육체다. 그래서 어떻단 말인가? 그 때문에 나는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나는 그것이 아까운 것인가? 아무리해도 그런 것 같지 않다. 육체라는 물질은 언제 어디로 가든지 그 일부라도 상실되는 일은 없다. 그리고 보면 이 부분에서 나는 안전하다. 이 부분 때문에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완전히 유지될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라고 사람은 말할 것이다. 그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고, 내가 아까워하는 것은 레프 니코라이뷔치 이반 세미요누 치이다 라고......그러나 보라! 모든 사람은 20년 전의 그와는 전연 다른 사람이다. 사람은 날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내게 아까운 것인가? 아니다라고 사람은 말한다. 그렇지도 않다. 그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다. 아까운 것은 나라는 의식, 나의 자아이다라고......
그러나 이것이 그대의 의식이라 할지라도 항상 같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 아닌가? 여러 가지로 변화되어왔던 것이 아니냐. 1년 전에는 어떤 다른 것이었고, 10년 전에는 더 다른 그 무엇이었고, 그전에는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었다. 그대가 기억하는 한에서도 그것은 내내 변화를 계속해 왔다. 어찌 네게는 현재의 너의 의식이 그토록 마음에 드는 것이냐? 그것을 잃는 것이 어찌 그다지도 애석한가? 만약 그것이 너에게는 항상 동일한 것이었다면 그럴싸도 하겠으나, 그것은 항상 변화만 거듭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너는 그 처음을 모르고 그것을 발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너는 갑자기 그것에 끝이 없으라고, 지금 너의 내부에 있는 그 의식이 영원히 있으라고 바라는 것이다.
나는 철이 들기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끊임없이 진행해 왔다. 너는 네 자신이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면서 이 생활로 왔다. 그러나 너라는 특수한 자아로서 왔음을 알고 있다. 그로부터 나가고 더 나아가서 마침내 갈 길의 반쯤에 다달은 것인데, 거기서 갑자기 너는 기뻐하는 것도 아니고, 놀라는 것도 아니고, 멈추어 버리고, 거기서 움직이지 않겠다고 하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거기에 있던 것이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는 네가 나온 곳 조차도 역시 못 보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나온 것이 아닌가? 너는 입구로 들어왔으면서도 출구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다.
너의 모든 생활은 육체적 생존을 통한 행진이었다. 너는 나아갔다. 전진을 서둘렀다. 그런데 너는 갑자기 네가 끊임없이 해오던 일이 완성되는 것이 아까워졌다. 너는 육체의 죽음 때문에 생기는 너의 상태에 대한 큰 변화가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너의 출생에 있어서도 생겼던 것이다. 더구나 그런 일로부터 네게는 무엇 하나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뿐더러 도리어 네가 지금 그것과 헤어지기를 꺼릴 정도로 좋은 일이 생겼던 것이다.
대체 너를 위협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너는 말할 것이다. 네게는 현재의 사상 감정을 가지고 현재의 세계관을 가진 세계에 대한 현재의 관계를 가진 네가, 애석해하는 것이다라고.....
너는 세계에 대한 너의 관계가 상실됨을 두려워하고 있다. 이 관계란 대관절 어떠한 것일까? 그것은 무엇에 있을까?
만약 그것을 네가 먹거나, 마시거나, 번식하거나, 집을 짓거나, 옷을 입거나, 다른 사람들이나 짐승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교섭을 가지는 일에 있는 것이라면, 그것들은 모두 사고력 있는 동물로서의 만인의 인생에 대한 관계이며, 그 관계는 결코 소멸할 리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서 수백만이 되고, 그들의 종족은 불질의 각 조각과 마찬가지로 틀림없이 확실하게 보존될 것이다. 종족의 보존은 굉장한 힘을 가지고 모든 동물 속에 놓여진 것으로서,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아무런 걱정이 없으리만큼 견고(堅固)한 것이다. 만약 네가 동물이라면 네게는 두려워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만약 네가 물질이라면 너는 그 영원성에 있어서 더욱더 보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네가 동물 아닌 것이 상실됨을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네가 세계에 대한 특수한 합리적 관계를 가지고 네가 이 생존으로 걸어 들어온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그것이 너의 출생과 더불어 생긴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것은 네가 태어나온 동물체와는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죽음과도 교섭이 없어야 함을 알고 있는 것이다.
10 끝없는 생명의 움직임
눈에 보이는 생활은 생명의 끝없는 움직임의 일부분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지상생활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생활이 이렇게 생각된다.
나와 같이 살아있는 모든 인간은 이 세계에 있어서 세계에 대한 어떤 일정한 관계와 어느 정도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 자기를 본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처음에는 우리들의 생활이 세계에 대한 이 관계와 더불어 시작되는 것 같이 생각되지만, 나와 남들을 잘 관찰해보면 세계에 대한 이 관계와 각자의 사랑의 정도는 이 생활과 더불어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육체적 출생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감추어진 과거로부터 우리들의 손에 의해 이 생활 속으로 옮겨 들어온 것임을 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승에서 우리들 생활의 전 과정은, 쉴새 없는 우리들의 사랑의 증대 증강에 지나지 않은 것이며, 더구나 그것은 결코 정지하는 일이 없이 그저 육체의 죽음에 의해서 우리들의 눈으로부터 감춰지는데 지나지 않음을 볼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생활이 우리들에게는, 그 꼭대기와 밑변이 우리들의 마음의 눈으로부터 감추어진 원추형(圓錐形)의 한 단면(斷面)으로 생각된다. 원추형의 가장 좁은 부분은 우리들이 지금 겨우 다달은 인생에 대한 최고의 관계이다. 원추형의 이 기점(起點)―그 정점(頂點)―은 시간적으로는 나의 출생에 의해서 나로부터 감춰져 있고, 원추형의 밑변은 나의 육체적 생활에 있어서도, 육체적 죽음에 있어서도 장래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것에 의해서 나로부터 감추어져 있다. 나는 원추형의 정점도, 그 밑변도 보지 않으나, 내가 볼 수 있고, 나에게 이익이 있는 생활이 통하는 부분에 의해서 틀림없고 그 특질을 아는 것이다. 처음에 나에게는 원추형의 이 단면이 나의 모든 생활인 것 같이 여겨졌으나, 나의 참된 생활이 진행됨에 따라서 나는 더욱더 생생하고,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과거와의 연계(連繫)를 느끼는 것이었다. 다른 편으로 나는 이 근저(根底)가 어떻게 나에게 보이지 않는 미래에 입각(立脚)되어 있는가를 보고 더욱더 뚜렷하고 생생하게 미래와 나와의 연계를 느끼고, 눈에 보이는 나의 생활, 나의 지상 생활은 그저 나의 모든 생활의 하나의 적은 부분에 지나지 않고, 그 두 끝인 출생 전과 사후는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현재 나의 지성(知性)으로부터는 감추어져 있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따라서 육체적 사후에 눈에 보이는 생활이 정지된 것은, 출생 전의 생활이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출생 전에도 사후에도 존재한다는 명백한 지식을 나로부터 빼앗지는 못한다. 나는 나 이외의 세계에 대한 어떤 마련된 사랑의 특성을 가지고 인생으로 내딛고 있다. 육체적인 나의 생존은―길든 짧든―나에게 의해서 인생으로 가져오게 된 이 사랑의 증대를 위해서 끝난다.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나는 내가 출생 전에도 생활하였으며, 지금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서 살고 있는 이 현재의 순간이 끝난 뒤와 마찬가지로, 나의 육체적 죽음 이전 혹은 이후의 모든 순간 뒤에도 생활하리라는 것을 명백히 결론 짓는 것이다. 나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의(일반 생물이라도) 육체적 생존의 시작과 끝맺음을 생각해 볼 때, 나는 어떤 생활은 보다 길게 보이고, 다른 생활은 보다 짧게 보임을 본다. 하나의 생활은 먼저 나타나서 보다 길게 보이고, 다른 생활은 늦게 나타나서 매우 빨리 다시 내게서 감춰져버린다. 그러나 모든 것들 중에서 나는 모든 참된 생활의 항상 변함없는 법칙의 발현(發現), 생명의 빛의 편조(遍照)라고나 할 사랑의 증대를 보는 것이다. 조만간 나의 눈으로부터 인간 생활의 시간적 흐름을 감추어버릴 막이 내린다. 만인의 생명은 모두 같은 것이며,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시초도 끝장도 없다. 인간이 나의 눈에 보이는 이 생존의 조건 중에서 비교적 길게 살거나 짧게 사는 사실은, 그 참된 생활에 있어서 아무런 구별도 지을 수 없는 것이다. 내 앞에 열린 시야(視野)를 어떤 사람은 조금 오래 가로 질러갔다든가, 다른 사람은 조금 빨리 지나 갔다든가 하는 사실은 결코 나로 하여금 전자에게 참된 생활을 보다 많이, 후자에게는 보다 적게 돌릴 수 없는 것이다. 나는 만약 내가 창가를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하더라도, 그가 빨리 지나가든 천천히 지나가든 거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음을 확실히 알고 있다. 나는 또 그 사람은 내가 보기 전에도 존재했으며, 나의 시야로부터 사라져버린 뒤에도 존재를 계속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고 알고 있다.
그러나 어떤 자는 빨리 지나가고, 어떤 자는 느리게 지나감은 무슨 까닭일까? 이젠 메마르고 정신적으로 굳어져, 우리들이 보는 눈으로는 삶의 법칙, 즉 사랑의 증대를 시행할 힘도 없는 노인이 살아 있는데, 소년 청년 소녀 같은 정신적 노동력에 가득찬 사람이 왜 죽어 가는가? 우리들이 보는 눈으로서는 자기 내부에 겨우 인생에 대한 올바른 관계를 건설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왜 이 육체적 생활의 조건 밖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일까?
파스칼이나 고골리의 죽음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쉐니예나레르몬토프나 기타 장래에 대성(大成)이 기대되는 내적 노작(內的勞作)을 시작했을 따름이라고 여겨지는 수천 명의 사람들은 어찌 된 것이냐?
그러나 이것은 그저 우리들에게 그렇게 여겨질 따름이다. 누구라도 남의 손에 의해서 세계로 가져온 인생의 근저(根底)나, 그의 내부에서 완성된 삶의 운동이나, 이승에서의 삶의 운동에 대한 장해나, 특히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으나 가능성 있는 생활의 다른 조건, 저승에서 그 사람의 생활을 건설할 수 있는 따위의 조건에 관해서는 그 무엇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대장장이가 하는 일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들이 볼 때 편자는 벌써 다 되어 있는 것 같다.―그저 한 두어 번 두들기만 하면 될성싶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충분히 달궈지지 않았음을 알고, 부셔서 불 속으로 다시 집어넣는다.
그 사람 내부에서 참된 생활의 과업이 완성되었느냐, 어떤가를 우리들은 알 수 없다. 우리들이 그것을 아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에 관해서만 이다. 우리들에게는 사람이 죽지 않아도 좋을 때에 죽는 것 같이 여겨지나,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 인간이 죽은 것은 그저 그것이 그의 행복에 필요할 때뿐이다. 마치 인간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것은 그저 그것이 그의 행복에 필요한 때만인 것과도 같이.... .
사실 우리들은 인생이라는 말로 그 유사품이 아니라 인생 그 자체를 깨닫고 있다면, 또 만약 참된 인생이 모든 것의 근저라면, 그 근저는 그것이 만들어 낸 것에 의해서 좌우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원인이 결과로부터 만들어질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참된 생활의 흐름이 그 표현의 변화에 의해서 손상될 리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시작되어 아직 끝나지 않은 이승에서의 인간 생활 운동이, 그에게는 종기(腫氣)가 난다든가, 병균이 침입했다든가, 혹은 권총에 맞았다는 이유로 중단될 리 없는 것이다.
인간이 죽는 것은, 그저 이 세계에 있어서는 그의 참된 생활의 행복이 그 이상으로 증대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고, 허파가 나쁘다든가, 암(癌)이 생겼다든가, 저격(狙擊) 당했다든가, 폭탄의 세례를 받았다든가 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들에게는 보통 육체적 생활로 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불이나, 물이나, 감기나, 전차나, 질병이나, 폭탄으로 죽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같이 생각된다. 그러나 사람들이 생활을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조금 성실하게 생각해 보기만 한다면, 그것과는 반대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파멸적인 조건이 갖추어진 속에서, 도처에 살포(撒布)되어 있는 무수한 살인적인 세균에 둘러싸여 육체적 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인간에게는 실로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에게는 멸망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므로 이러한 파멸적인 조건 속에 있는 육체적 생활은 오히려 물질적인 뜻에서 보아도 극히 부자연스러운 그 무엇이다. 만약 우리들이 살아있다고 하면, 그것은 우리들이 자기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 내부에서 모든 이러한 조건을 종속시키는 인생의 과업이 완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살아있는 것은 우리들이 자기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생의 파업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과업이 끝나면, 이미 인간의 동물적 생활의 부단한 파멸을 멈출 힘은 아무도 없다. 이 파멸은 완성된다. 그리고 항상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가장 가까운 육체적 죽음의 원인의 하나가 우리들에게는 그 특별한 사인(死因)인 것 같이 생각되는 것이다.
우리들의 참된 생활은 존재한다. 우리들은 그 하나를 알고 있으며, 그 하나에 의해서 동물적 생활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그 유사품이 이미 불변의 법칙에 종속하고 있다면, 어찌 그 자신―그러한 유사품을 산출하는 본체가―의 법칙에 종속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들을 어리둥절케 하는 것은, 우리들의 참된 생활의 원인과 행위가 외적 현상에서의 원인과 행위를 보듯이 우리들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왜 한 사람은 그 자아의 특질을 가지고 삶에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삶에 들어감을 모르고, 또 왜 한 사람의 생활이 중단되고, 다른 한 사람의 생활이 그 뒤를 잇는가를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자신에게 묻는다. 우리들이 현재 있는 대로의 것으로서 태어난 어떤 원인이 나의 생존 이전에 있었을 것인가? 또 나의 사후(死後) 내가 지금처럼 혹은 어떻게 삶으로써 무엇이 생길 것인가? 그리하여 우리들은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이 얻어지지 않음을 슬퍼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지금 나의 생전에 있었던 것, 사후에 있을 것에 관해서 알 수 없다고 해서 슬퍼함은, 나의 시야 이외에 무엇이 있는 건지 볼 수 없다고 해서 슬퍼하는 것과 매일반이다. 만약 내게 나의 시야 밖의 것이 보이게 된다면, 시야 안의 것을 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나의 동물적 행복을 위해서 나의 주위의 것을 보는 일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내가 사물을 인식하는 수단인 이성(理性)에 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만약 내게 이성의 한계 밖의 것의 보이게 된다면, 나는 그 범위 내의 것을 볼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나의 참된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는 인생의 행복을 달성하는 수단으로서, 지금 여기서 나의 동물아를 무엇에 종속시킬 것인가를 아는 일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성이 내게 그것을 계시(啓示)해 준다. 이 생활에서의 유일한 길,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자기의 행복이 중단됨을 볼 수 없는 길을 계시(啓示)해 준다.
이성은 내게, 이 생활은 출생과 더불어 시작된 것도 아니고, 항상 존재하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것임을 분명히 지시하고 있다. 이 생활의 행복은 거기서 생장하고 확대해서, 이미 거기에 들어갈 수 없는 극한(極限)에까지 도달하면, 그때 비로소 여태껏 그의 증대를 제한하고 있던 모든 조건을 떠나서 다른 존재 속으로 옮아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성은 인간을 이 인생의 유일한 길에 놓아준다. 이 길은 사방에서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벽속에서 점점 넓어져 가는 원추형의 턴넬과도 같이 그의 앞 멀리, 생명과 그 행복의 의심 없는 무한성을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지상 생활의 고통을 설명하기 어려움은, 무엇보다 확실히 인간에 대해서 그의 생활이 출생에서 시작되어 죽음으로 끝나는 개인 생활이 아님을 입증해 준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거나 그것에 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두렵고, 목적이 없는 고통, 인간이 부딪히는 그 무엇으로써도 변명할 도리 없고 결코 피할 수 없는 고통은, 그저 그것 만으로서도 인생으로 돌린 모든 합리적 의의를 파괴해 버리기에 충분할 것이다.
나는 선량한 일, 분명 남을 위해서 유익한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갑자기 병마(病魔)가 나를 습격해서 나의 과업을 훼방(毁謗)하고, 아무런 뜻도 까닭도 없이 나를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군다. 기차선로의 나사못이 녹슬어 빠져나간 바로 그 날에, 그 기차의 그 차 칸에 하필 선량한 어머니인 부인이 타고 있었는데, 그 눈 앞에서 그녀의 자식이 깔려 죽는다. 마치 리스본이나 베르니가 서 있던 그 장소가 지진 때문에 무너져서 아무런 죄도 없는 수천 명의 목숨이 산 매장되고, 무서운 고통 속에서 죽어간다. 이러한 일은 도대체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사람을 놀라게 하고, 고통에 찬 이러한 아무 뜻도 없는 무참한 사건이 수없이 일어나는 것일까?
이론적인 설명으로는 그 무엇도 설명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일체 현상의 이론적 설명은 항상 문제의 핵심(核心)을 벗어나 그저 그 불가해함을 명시할 따름이다. 내가 병에 걸린 것은 어떤 병균이 내게로 날아왔기 때문이다. 아이가 어미니 눈 앞에서 깔려 죽은 것은 습기가 이러쿵저러쿵 쇠에 작용했기 때문이다. 베르니가 무너진 것은 이러이러한 지질학상의 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그러한 사람들이 그토록 무서운 고통을 받고, 나는 그러한 참변을 면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에 대한 해답은 없다. 그뿐더러 이성은 내게 대해서 한 사람이 그런 사건에 부딪히고, 다른 사람은 부딪히지 않는다는 법칙은 있지도 않고, 또 결코 있을 리도 없다는 것, 그러한 사건은 참으로 수없이 많다는 것, 그러므로 내가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나의 생명은 순간순간에, 가장 두려운 고통의 수 없는 사건에 폭로되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준다.
만약 자기의 생활을 개인적 존재로서만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세계관에서 필연적으로 생기는 결론만을 끄집어낸다고 하면, 그들은 한시라도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비유(比喩)적으로 말해서 만약 주인이 머슴을 쓸 때 그 머슴을 산채로 모닥불에 태운다든가 산채로 껍질을 벗긴다든가, 근육을 잡아 늘인다든가, 그 밖에 여러 가지 몸서리 치는 일, 그가 쓸려고 하는 사나이 눈앞에서 아무런 까닭도 원인도 없이 다른 머슴들에게 해 보이던 무서운 일을 마음 내키는 대로 언제라도 행할 권리를 가진다고 하면, 어떠한 머슴도 아마 그러한 주인에게 고용(雇用)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사람들이 실제로 이 인생을 그들이 하고 있는 것 같이 인생을 해석하고 있다면 항상 신변에서 보고, 그리고 자기도 언제 그 속으로 떨어질는지도 모르는 그 무엇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는 이 고통에 대한 공포 만으로서도, 그 중의 한 사람도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이와 같은 참혹하고 무의미한 고통에 가득 찬 생활로부터 벗어나는 여러 쉬운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고 있다. 고통을 탓하고 투덜대면서도 언제까지도 살아가고 있다.
이것은 이 생활에 고통보다는 열락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첫째로 단순히 추론(推論)뿐만 아니라, 인생의 철학적 연구는 지상의 모든 생활이 열락에 의해서는 도저히 살 수 없는 고통의 연속임을 분명히 증명해 주고 있으며, 둘째로는 우리들 모두가 자기 자신에 의해서나 남에 의해서 죽음을 때까지 가벼워질 가능성이 없는 쉴새 없이 더해가는 고통의 연속으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하지 않고, 삶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괴(奇怪)한 모순의 설명은 오직 하나다. 인간은 모두 그 영혼의 깊은 곳에서는 모든 고통이 그들 생활의 행복을 위해서 항상 필요하고 불가결인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그러한 고통을 예견(豫見)하거나, 그런 쓰라린 꼴을 당하면서 삶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이 고통에 반항하는 것은, 그저 자기 일신을 위한 행복을 요구하는 그릇된 인생관에 비추어 보고 뚜렷한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 이 행복의 파괴가 무엇인지, 일종의 불가해하고, 따라서 심히 위험스러운 것으로 생각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외 같이 해서 사람들은 고통 앞에서 몸을 떨고, 무엇인가 전혀 알 수 없는 것에 부딪히거나 한 것처럼 그것에 몹시 놀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인간은 모두 고통에 의해서 키워지고, 그의 전 생애는 그 자신이 경험하고, 그 자신이 다른 존재 위에 가하는 고통의 연속이므로 지금은 어지간히 고통에 길들어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무엇 때문에 이러한 고통이 있을까 라고들 자문(自問)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이 생각된다. 모든 인간이 언뜻 생각하기에는, 그의 열락이란 열락을 모두 다른 존재의 고통에 의해서 얻어진다는 것, 그의 모든 고통은 그의 열락을 위해서 불가결하다는 것, 고통 없이는 열락도 없다는 것, 고통과 열락은 그 하나가 다른 하나에 의해서 생기고 다른 하나는 그 하나를 위해서 필요한 두 개의 상반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면 고통은 웬 까닭이고, 무엇 때문인가? 라고 이성 있는 인간이 스스로 묻는 문제는 대관절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고통이 열락과 얽매여져 있음을 아는 인간이 왜, 고통은 웬 까닭이고, 무엇 때문인가? 라고는 자문하나, 열락은 웬 까닭이며, 열락 무엇 때문인가? 라고는 자문하지 않는 것일까?
동물 및 동물로서의 인간 생활은 모조리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이다. 동물 및 동물로서의 인간의 활동은 모조리 오직 고통에 의해서만이 일어난다. 고통은 활동을 일으키는 병적 감각이며, 그리고 이 활동이 그 병적 감각을 구축(驅逐)하고 열락의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하여 동물 및 동물로서의 인간 생활은 비단 고통에 의해서 손상될 뿐더러, 오직 고통에 의해서만이 완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인생을 움직이는 본체이며, 그로 말미암아 있어야 할 것인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고통은 왜? 무엇 때문에? 라고 물을 때, 그 사람은 대관절 무엇을 묻는 것일까? 동물은 그런 것을 묻지 않는다.
농어가 배가 고파서 잉어를 괴롭히고, 거미가 파리를 괴롭히고, 늑대가 양을 괴롭힐 때, 그들은 자기가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농어나, 거미나, 늑대도, 그들보다 강한 자로부터 그와 같은 고통을 받을 때에는 도망치거나, 반항하거나, 몸부림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기들에게 닥치는 것이 당연히 닥칠 것이라는 점에는 조금도 의심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도 남의 다리를 벤 싸움터에서 다리를 잘리었을 때, 그 치료에 정신없는 인간, 독방에 갇혔을 때는 될 수 있는 대로 시간을 잘 보내기에만 정신을 팔면서도 그 뒤에는 그 자신이 직접 혹은 간접으로 거기에 사람을 가두는 인간, 그를 잡아 찢으려는 늑대로부터 벗어나는 것에만 정신이 없으면서도 후에는 자기 자신이 수천 마리의 짐승을 잡아서 그것을 먹는 인간, 이러한 인간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을 당연히 일어나야 할 것이라고 시인할 수가 없다. 그가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마땅히 그래야 할 일이라고 시인할 수 없음은, 그러한 고통에 부딪히면서도 그때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일어날 일이 아닌 것이 일어나는 것 같이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늑대에게 잡아 먹히려고 하는 인간이 할 일은 늑대로부터 벗어나서 도망치는 일 밖에 무엇이 있을까? 합리적 존재인 인간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은 고통의 원인이 되는 죄를 인정하고, 그것을 참회하고, 진리를 아는 일이다.
동물은 그저 현재에 있어서만 고통을 받는 것이므로, 따라서 동물의 고통에 의해서 일으켜지는 활동은 현재의 자기 자신에게 지향되어, 충분히 그를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비단 현재에서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미래에서도 괴로워할 것이므로, 인간의 고통에 의해서 일으켜지는 활동이, 만약 그저 동물적 인간의 현재에만 지향될 때에는 그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저 고통의 원인과 결과에도 지향되고, 과거와 미래에도 지향되는 활동만이 괴로워하는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동물은 갇히면 우리에서 도망치려고 애쓴다. 또 다리를 다치면 그 아픈 데를 핥는다. 또 다른 짐승에게 먹힐 상 싶으면 날뛰고 도망친다. 그의 생활의 법칙은 외부로부터 파괴되는 것이므로 그는 자기의 활동을 그 회복에 집중시킨다. 그리하여 마땅히 있어야 할 일이 하여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나 자신이나 나의 가까운 사람이 감옥에 유폐(幽閉)되거나, 싸움터에서 다리를 잃거나, 혹은 늑대가 그를 위협할 때에는, 감옥으로부터 도망하거나, 다리의 치료나, 늑대로부터 도망치는 일로 지향되는 활동이 인간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왜냐하면 감옥의 유폐, 다리의 아픔, 늑대의 습격 등은 그저 나의 고통의 작은 부분을 이루고 있음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고통의 원인을 과거 속에서, 나나 다른 사람들의 미오(迷誤)속에서 본다. 그래서 만약 나의 활동이 고통의 원인인 미오에 지향되어 있지 않다면, 그리고 내가 그로부터 해방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므로, 그 고통이 있을 리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서, 현실에서만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도 삶의 가능을 빼앗아갈 정도의 무서운 양으로까지 증대되는 것이다.
동물에 대한 고통의 원인은 동물 생활의 법칙의 파괴다. 이 파괴는 고통의 의식으로서 표시되는 것이며, 법칙의 파괴에 의해서 환기(換起)되는 활동은 고통의 제거(除去)로 지향된다. 합리적 의식으로서의 고통의 원인은, 합리적 의식의 생활 법칙의 파괴다. 그리고 동물의 고통이 아픔으로 지향되는 활동을 환기시키고, 이 활동이 그 고통의 아픔을 제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리적 존재의 고통도 미오로 지향되는 활동을 환기시키고, 이 활동이 그 고통의 괴로움을 제거하는 것이다.
왜? 라든가 무엇 때문에? 라고 하는 고통의 경험 내지 상상에 즈음해서, 인간의 마음에 생기는 의문은 그저 인간이 고통에 의해서 자기 내부에 환기되어야 할 활동, 그 고통의 아픔을 제거해주는 활동을 인정하지 않았음을 지시하는 데 그친다. 그리고 실제 자기의 생활을 동물적 생존에 있다고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이 고통을 제거하는 활동은 있을 수 없다. 그가 자기의 생활을 이해하는 일이 좁으면 좁을수록 그것은 더욱더 적어지는 것이다.
개인적 생존은 인생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그 개인적 미오 속에서 개인적 고통의 원인을 찾아볼 때, 즉 그가 병들게 된 것은 독이 있는 것을 먹었기 때문이다. 그가 얻어맞은 것은 그가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굶주리고 헐벗은 것은 일하기 싫어했기 때문임을 이해할 때에, 그는 자기가 고통을 받는 것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 때문임을 알고, 앞으로 같은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의 활동을 미오 제거의 방향으로 지향하면서, 고통에 반항하는 일이 없이 마음 편히 때로는 기꺼이 그것을 견디어 내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 보이는 고통과 미오의 연계(連繫)의 한도를 넘는 고통이 이러한 사람에게 닥칠 때, 즉 그가 항상 개인적 활동밖에 있는 원인 때문에 고통을 받을 때, 또 그의 고통의 결과가 그에게도 또 다른 자아에게도 아무런 쓸모가 없을 때, 그러한 때면, 그는 자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에 물리우는 것 같은 느낌이 나서 급기야 이렇게 자문하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라고. 그리고 자기의 활동을 지향할 수 있을 목표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무의식적으로 고통에 반항하게 되는 것이어서, 결과가―때로는 그 둘다모두가―그로부터 공간 내지 시간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많다. 즉 그 고통이 무서운 괴로움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고통의 대부분은 늘 그 원인과 유전적 질병, 불행한 우연, 흉작(凶作), 철도사고, 화재, 지진 등등 죽음으로 끝나는 따위의 것이다.
자손에게, 몹쓸 질병으로 나타나는 것 같은 정열에, 몸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하는 교훈을 장래의 인류에게 주기 위해서 그것이 필요하다는 따위의 설명이나 혹은 기차의 구조를 개량해야 한다는 것이라든가, 불의 취급을 조심해야 한다든다 하는 설명은 인간에게 아무런 해답도 주지 못한다. 나는 남들이 이야기 해주는 설명에 나의 생활의 의의를 인정할 수는 없다. 나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나로서의 희구를 가지는 나의 생활이고, 남의 생활을 위한 설명은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설명은 그저 이야기 재료에 적합할 따름이고, 나를 위협해서 생활의 가능성을 빼앗는 고통의 무의미에 대한 이 공포를 덜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되는 데까지 어떻게 해서 내가 나의 미오로써 남을 괴롭히고, 나도 남의 미오에 의해서 괴로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더라도, 또 만약 일체의 고통은 사람들에 의해서, 어쨌든 이 생활 속에서 고쳐져야 할 미오에 대한 지시임을 그와 마찬가지로 간접적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아직도 그 무엇으로써도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의 큰 열(列)이 남아 있는 것이다. 숲속에서 늑대 떼가 어떤 사나이를 물어뜯는다. 어떤 사나이는 물에 빠져 죽든가, 얼어 죽든가, 불타 죽든가, 단순히 쓸쓸하게 병에 걸려서 죽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어느 때가 되든지 간에 그가 어떻게 괴로워했는지 알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그 누구에게 어떠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인가?
자기의 생활을 동물적 존재로서 이해하고 있는 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없고, 또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자에게 있어서 고통과 미오의 연쇄(連鎖)는 그저 그에게 보이는 현상 속에 있을 따름인데, 그 임종의 고통에 있어서의 이 연쇄는 이미 완전히 그의 심적 시각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다. 경험한 고통과 자기의 생활 사이에 연쇄를 시인하지 않고, 자기 고통의 대부분을 아무런 뜻도 없는 고통으로서 견디어 나간다, 혹은 우리들의 미오와 그 결과인 행위가 결국 어떠한 것이라 한들, 우리들의 죄가 어떠한 것이든지, 그 고통의 원인임을 인정하고 그 결과 우리들의 고통은 그것이 비록 어떠한 것이든 간에 우리들과 남들의 죄의 구원이며 속죄(贖罪)임을 인정하든가 하는 이 두 가지다. 고통에 대해서는 이 두 가지 관계만이 가능하다. 하나는 고통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 외적 의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태도이고, 또 다른 하나는 그것은 당연히 올 성질의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참된 생활에 대한 고통인 내적 의의를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태도, 그것이다. 첫째 것은, 나의 독립된 개인 생활의 행복의 행복으로 인정하는 데서 생긴다. 둘째 것은, 다른 사람들 및 그들의 존재가 행복과는 끊을 수 없는 결함 속에 있는 과거 및 미래의 나의 전 생활의 행복을 행복으로서 인정하는 데서 생긴다. 첫째 번 견해에 의하면, 고통은 아무런 설명도 없고 또 쉴새없이 증대할 뿐이고, 그 무엇으로써도 해결할 수 없는 절망과 독념(毒念) 이외에는 아무런 활동도 환기시키지 않는 것이다. 둘째 번 견해에 의하면, 고통은 참된 생활의 운동마저도 구성하는 활동 그 자체적 죄의식, 미오에서의 해방, 이성의 법칙에 대한 종속을 불러내는 것이다.
만약 인간이 이성이 없다고 한다면, 고통의 괴로움이 인간으로 하여금 그의 생활은 그의 개성 속으로 들어가 버릴 수 있는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의 개성은 그의 생활 중에서 눈에 보이는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의 개성 중에서 그에게 보이는 원인과 행동과의 외적 결함은, 인간의 합리적 의식에 의해서 항상 사람에게 알려져 있는 원인과 행동과의 내적 결함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을 좋든 싫든 인식시키는 것이다.
동물에게 공간적 및 시간적 조건 속에서만 보이는 미오와 고통의 연결은, 인간에게는 그러한 조건 외에도 그의 의식 내에서 항상 명료하다. 설사 어떠한 고통이 있다하더라도 인간은 항상 그것을 어떠한 죄든 자기의 죄의 결과로서 인정하고, 그리고 자기의 죄의 미오를 고통에서의 해방, 행복의 달성으로 인정한다.
인간의 모든 생활은 어린이의 첫날부터 고통을 통한 죄의 의식과 미오로부터의 자기 해방 속에서만 형성된다. 나는 진리의 어떤 지식을 가지고 이 생활 속으로 들어온 것이라는 것이며, 나의 내부에 있는 미오가 많으면 많을수록 나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많았다는 것과 내가 미오에서 해방되면 될수록 나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적고 내가 달성한 행복이 많았음을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내가 이 세계에서 가져가 버리는 진리의 지식, 설령 나의 최후에 임종의 고통이 주어져도 좋다. 그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내가 달성할 행복도 클 것임을 알고 있다.
고통의 고달픔을 경험하고 있는 것은, 그저 자기를 세계의 생활로부터 떼어서 세계에 고통을 가져온 자기의 죄를 인정치 않고, 자기를 죄 없는 자로 생각하는 탓으로 자기가 세계의 죄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서 반항의 기분을 가지고 있는 자뿐이다.
그리고 놀라운 일로서는 심적으로 이성에게 분명한 일, 그런 일은 인생의 유일하고 참된 활동인 사랑에 있어서도 확증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은 말한다. 자기들의 죄와 고통과, 세계의 죄와 고통과의 연결을 인정하고 있는 사람은 고통의 괴로움에서 해방된다고, 사랑은 사실에 있어서 그것을 확증하고 있다.
모든 인간 생활의 반은 고통 속에서 지나간다. 그 고통을 그는 괴로움으로 인정치 않을 뿐더러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자기의 행복으로 여기고 있으나 그것은 그저 그것이 미오의 결과로서, 또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덜 해주는 수단으로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인간은 고통의 고달픔을 많이 받고, 사랑이 많으면 많을수록 고통의 고달픔을 덜 받는 것이다. 오로지 사랑 속에만 모든 활동이 나타나 있는 완전무결(完全無缺)한 합리적 생활은 모든 고통의 가능성을 물리친다. 고통의 고달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조상에 대한, 자손에 대한 동시대인에 대한 사랑, 인간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을 결합시키는 사랑의 연쇄를 끊으려고 해 볼 때에만 맛보는 고통에 지나지 않는다.
육체의 고통은 사람들의 생활 및 행복의 불가결한 조건을 구성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아프다. 육체적으로 아프다. 이 아픔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라고 사람들은 묻는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필요할 뿐더러, 아픔이 없다면 우리들은 살아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아픈 짓을 했던 사람들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아픔을 적게 하고 그 아픔에서 생기는 행복을 될 수 있는 대로 크게 해준 사랑이다.
우리들이 가지는 아픔의 최초의 감각이 우리들의 육체를 보존하고, 그 동물적 생활을 계속해 나가기에 첫째이며 중대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아픔이 없다면, 우리들은 모두 어린아이었을 때 심심풀이로 자기의 육체를 아주 태워버리거나, 칼로 베어버렸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할 어느 누가 있을까? 육체의 아픔이야말로 동물아를 보호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아이들에게 흔히 보듯이, 아픔이 자아의 보호로서 소용될 수 있는 동안 이 아픔은 우리들의 합리적 의식이 충분히 발달되어 우리들의 고통이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그것에 반항할 때쯤 되어서 아픔을 느끼는 정도로 무서운 고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아픔은 동물과 어린 아기에 있어서는 극히 한정적인 소규모적인 것이어서, 결코 합리적 의식의 부여(賦與)된 생물 속에 다달은 만큼의 고통의 정도에까지 미치는 일은 결코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어린 아기에 있어서 벼룩에 약간 쏘이기만 해도, 때로는 내장기관을 파괴당하는 아픔에서 오는 것처럼 모질게 울부짖는 것을 본다. 그리고 이성이 없는 생물의 아픔은 그 기억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누구라도 어릴 때의 아픔의 고통을 상기해 보라. 그는 자기 내부에 그것에 관한 기억이 조금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상상 속으로 상기할 힘조차 없음을 알 것이다. 어린 아기나 동물의 고통을 목격하여 우리들이 받는 인상은, 그들의 고통보다 오히려 우리들이 더 고통스럽다. 이성을 갖지 못한 생물의 외적 표정은, 항상 고통 그것보다는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크므로, 우리들의 동정을 헤아릴 수 없으리만큼 크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이 현상은 마치 뇌병 열병 장질부사 기타 모든 고민에 있어서 볼 수 있는 것이다.
합리적 의식이 아직 깨우쳐지지 않고, 아픔이 그저 자아의 보호로서만 소용되는 시절에 있어서 고통은 그렇게 고달픈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에게 합리적 의식의 가능이 생긴 시절에 있어서의 아픔은 동물아를 이성에 종속시키는 수단이고, 이 의식의 깨우침 정도에 준해서 고통이 점점 고통으로 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들은 합리적 의식을 완전히 소유하게 됨에 이르러 비로소 고통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저 이 상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생활이 시작되고, 우리들이 고통이라고 부르는 생활 생태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상태에 있어서의 아픔의 감각은 최대량으로 신장(伸張)될 수도 있고, 최소량으로 축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사실 생리학을 공부하지 않는다고 해도 감수성에는 일정한 한도가 있다는 것, 아픔이 그 한도까지 세게 되면 감각이 정지되든가, 실신(失神) 무지각 발열(發熱) 혹은 죽음이 닥쳐 오든가 함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 그러므로 고통의 증가는 극히 정확한 한정량(限定量)을 가지고 있어서 그 한계 이상으로 나갈 수 없다. 그런데 아픔의 감각은 그것에 대한 우리들의 관계에 의해서 무한히 증대할 수도 있으며, 마찬가지로 무한히 축소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인간이 항상 아픔에 따르고, 그것을 마땅히 있어야 할 것으로 인정함으로써, 아픔을 무감각의 상태로까지 견디어 나가는 일에 기쁨을 느끼도록 인도할 수 있는 것임을 알고 있다. 순교자(殉敎者)는 말할 것도 없고, 불기둥(火主) 위에서 노래 부른 훗쓰는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한 사람들이 그저 자기의 용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소리도 안 내고, 떨지도 않고, 가장 고통스럽다고 하는 수술을 견디어 나가는 것이 아닌가? 아픔의 증가에는 한계가 있으나, 그 감각의 축소에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아픔의 고통은, 그의 생활을 육체적 생존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들에게는 아주 무서운 일이다. 고통의 고달픔을 없애기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의 힘이, 반대로 그저 고통을 증대시키는 일에만 지향되어 있을 때 어찌 그것이 두렵지 않을 수 있으랴?
신은 태초에 인간의 수명을 70년으로 정했으나, 후에 그것이 인간을 위해서 좋지 못함을 인정하여 현재처럼 고쳤다. 즉 인간이 그 사기(死期)를 알지 못하도록 정했다는 신화가 플라톤에게 있듯이, 인간은 처음에 아픔의 감각 없이 창조되었으나, 나중에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지금처럼 고쳤다는 신화가 있다는 사실의 합리성을 결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여러 신들이 인간을 고통의 감각 없이 창조하셨다면, 인간은 즉시 그것이 있도록 해달라고 원했을 것이다. 만약 출산의 고통이 없다면, 여자는 자식을 그 자식이 하나도 살아 남지 않을 것 같은 조건하에서 낳을 것이다. 어린아이나 젊은이들은 자기 스스로의 육체를 손상(損傷)하고, 어른은 과거에 살고 있던 남이나 현재 살고 있는 사람들의 미오는 말할 것도 없이, 주로 자기들의 미오조차 영구히 알지 못했을 것이고, 이 인생에서 그들이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 조차도 알지 못하며, 활동의 합리적 목적을 가지지도 못하고, 목전(目前)에 다가오는 육체의 죽음에 관해서의 관념과 융화할 수도 없으며, 사랑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을 이성의 법칙에 대한 자기의 개성의 종속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아픔은 다만 악이 아닐 뿐이고 그의 동물적 생활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합리적 생활에 있어서도 필요 불가결의 조건이다. 만약 아픔이 없다면 동물아는 자기의 법칙 위반에 대한 적당한 지시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 만약 합리적 의식이 고통을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인간은 진리를 모르고 자기의 법칙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반박자(反駁者)가 있어서 이것에 대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자기의 고통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자유지만, 남의 고통을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이러한 고통을 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고통이 아닌가.? 이렇게 사람들은 다소 농담조로 물을 것이다.
남의 고통? 즉 제군이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찍이 그친 일도 없으며, 또 현재도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간 및 세계는 현재 괴로워하고 있으며, 일찍이 괴로움을 그쳐본 일도 없다. 대관절 우리들은 오늘 비로소 이것을 안 것일까? 상이(傷痍), 불구(不具), 기아(饑餓), 감기, 질병 기타 여러 가지 불행한 우연, 특히 그것 없이는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을 출산(出産)―이러한 것은 모두 생존 상 불가결한 요건이 아닌가? 그리고 이 한가지 일, 즉 그것을 감소시키고, 그것을 구조하는 일, 이 일이야말로 인간들의 합리적 생활의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인생의 참된 활동은 실로 이 한 가지 일로 지향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개성의 고통과 인간 미오의 원인에 대한 이해 및 그것을 적게 하기 위한 활동, 이 일이야말로 인생 과업의 일체(一切)다. 만일 내가 인간이며 개성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결국 다른 개성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이다. 왜 나는 합리적 의식인가? 라고 묻는다면, 각 개인의 고통 속에서 고통 즉 미오의 일반적 원인을 보고, 자기와 남의 내부의 그것을 절멸시키기 위해서이다. 왜 그의 과업의 재료가 노동자에게는 고통으로 될 수 있는가? 마치 농부가 경작되지 않은 토지를 자기의 고통이라고 함과 마찬가지다. 경작되지 않은 토지가 고통이 되는 것은, 경작된 논밭을 보기는 좋아하면서도 그 논밭을 가는 일이 자기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농부들에게 한해서만인 것이다.
괴로워하는 자에 대한 직접적인 사람의 봉사와 고통, 미오의 일반적 원인 제거에 지향된 활동은 인간 앞에 서 있는 오직 하나의 기쁜 과업이고, 그의 생활의 구성 요소인 불멸의 행복을 그에게 주는 유일한 일이다.
고통은 인간에게 오직 하나 있을 뿐이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강제적으로 좋든 싫든, 그에게는 유일한 행복이 있는 생활에 몸을 바치게 하는 고통이다. 이 고통은 자기와 전 세계의 죄악과 자기와 전 세계의 생활에 있어서의 모든 진리를, 그 누구라도 자기 자신의 손으로 실현해야 할 가능성(可能性), 아니 의무성(義務性)과의 사이에 생기는 모순의 의식이다. 이 고통을 없애는 것은 세계의 죄에 참여하고 자기의 죄를 보지 않도록 하며 나의 생활 및 세계 생활의 모든 진리를 실현할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의 가능성뿐만 아니라, 의무성을 믿지 않도록 해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첫째 것은, 그저 나의 고통을 더 할 따름이고, 둘째 것은, 내게서 사는 힘을 빼앗은 것이다. 이 고통을 없애는 것은 그저 인간에게 의식되어 있는 목적과 개인 생활과의 불균등을 절멸시키는 참된 생활의 의식과 활동뿐이다. 좋든 싫든 간에 인간은 그의 생활이 그 출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개인 생활에 의해서 제한되어 있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시인(是認)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에게 의식된 목적은 도달될 수 있는 목적이라는 것, 그것에 대한 노력 속에서 자기의 것을 더욱더 크게 의식되는 일에 자기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에 있어서 일체의 진리를 더욱더 크게 실현하는 일에, 전 세계의 생활과 끊을 수 없는 그의 생활의 과업이 현재 이루어져 있으며, 과거에도 이루어졌고, 장래에도 항상 이루어질 것임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합리적 의식이 아닐진대, 자기 생활의 의미에 관한 미오로부터 흘러나온 고통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간에 인간을 몰아서 인생의 유일한 참된 길, 즉 장해도 없고, 악도 없는 오직 하나의 길, 그 무엇에도 손상되지 않고, 처음도 끝도 있을 수 없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는 행복만이 있는 참된 길로 몰아넣은 것이다.
결론(結論)
인간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그리하여 그가 희구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다.
죽음과 고통의 형태로 나타나는 악이 사람에게 보임은, 그저 그가 육적(肉的) 동물적인 존재의 법칙을 자기의 생활 법칙으로 알고 있을 때만 이다.
그저 그가 인간이면서도 짐승의 정도로까지 타락할 때, 그때 비로소 그는 죽음과 고통을 보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은 도깨비처럼 여러 곳에서 그를 불러서 그의 앞에 열린 이성(理性)의 법칙에 따라 사랑 속에 표현되는 인간 생활의 오직 한 갈래의 본도(本道)로 그를 몰아넣는 것이다. 죽음과 고통은 그저 인간에 의해서 행해지는 자기 삶의 법칙에 대한 배반(背反)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의 법칙에 따라 사는 사람에게는 죽음도 고통도 있을 리 없는 것이다.
"모든 애쓰는 자,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내게로 오라. 내 너희들을 쉬게 하리라. 나의 명에를 잡고 내게서 배우라. 순하고 마음이 낮으므로 너희들은 마음에 편안을 얻으리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나의 짐은 가벼운 것이니라."(마태전 제11장 28∼30절).
인간의 생활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그가 희구하는 것은 그에게 주어진다. 즉 죽음으로 될 수 없는 삶과 악으로 될 수 없는 행복인 것이다.
'1'
흔히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들은 인생을 연구하는 데 있어 자기의 생활 의식에 의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기의 외부로부터 하고 있다고. 그러나 이것은 우리들이 사물을 볼 때 눈으로 보지 않고 일반적으로 자기의 외부로부터 보고 있다고 말함과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들이 사물을 자기 밖에서 보는 것은 우리들이 그것을 자기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인생을 자기 밖에서 보는 것은 그저 자기 자신 속에서 그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자기 눈으로 보는 대로밖에는 사물을 보지 않는다. 또 우리들은 자기 내부에서 아는 대로 밖에는 자기 밖의 생명에 정의(定義)를 내리지 않는다. 우리들은 자기 내부에 있는 생명을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 알고 있다. 따라서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의 정의를 제쳐놓고는 인생을 관찰할 수 없을 뿐더러 볼 수도 없는 것이다.
생물로서의 우리들 지식의 첫째가는 주요한 작용은 하나의 생물인 개념(槪念) 속에 여러 가지 것을 많이 포함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생물을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도 저것도 그저 우리들 모두에 의해서 똑같이 인정되고 있는 삶의 정의 기초 위에 있어서만이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말 탄 사람을 볼 때에 이것이 여러 생물도, 하나의 생물도 아님을 알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들이 사람과 말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부분을 관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과 말의 머리에서도, 족(足)에서도, 기타 여러 부분에서도 우리들이 자기 내부에 알고 있듯이 행복에 대한 개개의 희구를, 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또 말 탄 사람이 한 개의 생물이 아니라 두개의 생물임을 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우리들 자신 속에는 그저 하나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알고 있으나, 그를 속에는 두 개의 별다른 희구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저 이 한 가지 일에 의해서만이 우리들은 승마자와 말과의 결합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 말의 한 떼 속에 생명이 있다는 것, 새 곤충 나무 풀에도 생명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들이 말은 말대로 그의 행복을 원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자기의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 말 떼 속의 개개의 말도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 개개의 새 개개의 말똥벌레 나무 풀이 모두 자기의 행복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생물의 개별성(個別性)을 인정하지도 않고, 생물을 이해할 수도 전혀 없을 것이다. 기병의 1연대도 가축떼도, 새들도, 곤충들도, 식물도, 일체의 것은 바닷물에 보이는 물결처럼 되어 우리들에게는 전 세계가 우리들이 아무리 해도 생명을 찾아볼 수 없는 하나의 구별 없는 운동으로 되어 버릴 것이다.
만약 내가 말이나, 개나, 개에 붙어 있는 진드기나, 그 어느 것이라도 모두 생물임을 알고, 그들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저 말에도, 개에도, 진드기에도, 서로 다른 목적, 즉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다는 목적이 있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아는 것은 행복에 대해서 그들과 같은 희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의 나를 알고 있기 때문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행복에 대한 희구 속에 인생에 관한 모든 지식의 근저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내부에 느끼고 있는 행복에 대한 희구가 생명이며, 제각기 다른 인생의 표시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인생의 여하한 연구도 불가능하고, 인생에 대한 여하한 관찰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관찰은 이미 인생이 명료할 때 시작되는 것이다. 인생의 현상에 대한 여하한 관찰도 인생 그 자체를 정의할 수는 없다. (그릇된 과학이 상상하고 있듯이.)
사람들은 자기들의 의식 속에 찾아보는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어서 인생의 정의를 인정하지 않고, 진드기 속에서 이 희구를 아는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진드기가 희구하고 있는 그 행복의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 가상적 지식을 근거로 해서 그들은 관찰해 보고, 또 생명의 본질 그 자체에 관한 결론마저도 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외적 생명에 관한 나의 모든 개념은 행복에 대한 나의 희구의 의식을 근저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행복과 나의 생명이 무엇에 있는가를 아는 것만으로서 나는 다른 존재의 행복과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존재의 행복이나 생명은 자기의 그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는 미지(未知)인 것이요. 그리고 또 자신이 동경(憧憬)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는 알고 있는 그 행복에 극히 유사(類似)한 것 같은 그 자신의 목적을 획득(獲得)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딴 존재자에 대한 관찰, 그러한 관찰은 반복(反復)해 말하거니와 인생에 대한 나의 진정(眞正)한 지식을 속진(速進)시킬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그것은 나에게서 은폐하는데 역할이 된다.
자기 생활의 정의를 갖지 않고 다른 존재의 생활을 연구함은, 중심이 없이 원주(圓周)를 그리려 함과 매일반이다. 우선 중심으로서 움직일 수 없는 한 점을 정하고 나서 비로소 원이 둘레를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이 어떠한 형태를 그리더라도 중심이 없다면 원의 둘레는 있을 수 없는 것이다.
'2'
그릇된 과학은 인생에 수반되는 현상을 연구하고 그것으로 인생 그 자체를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가상하면서, 이 가상에 의해서 인생의 관념을 왜곡(歪曲)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학은 과학이 인생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현상을 오래 연구하면 할수록 그 연구하려고 하는 인생의 관념에서 더욱더 멀어져가는 것이다.
처음에는 젖먹이 동물이 연구되고, 다음에는 다른 동물 척추동물 어류 식물 산호(珊瑚) 세포 현미경적 유기체가 연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업은 마침내 생물과 무생물과의 구별, 유기체와 무기체와의 한계, 어떤 유기체와 다른 유기체와의 차이점이 없어져버리는 데까지 추진(推進)된다. 연구와 관찰의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서 도저히 관찰할 수 없는 것 따위까지 유도해 내기에 이른다. 인생의 비밀과 만유(萬有)의 설명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추측되기만 하는, 오늘 발견되었는가 하면 내일은 벌써 잊혀지는 것 같은 미생물(微生物) 따위에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모든 설명은 현미경적 존재 속에 포함되어있는 생물이나, 또 그 생활 속에 들어 있는 생물이라고 하는 식으로 무한히 작은 것 속에 있는 것 같이 생각된다. 마치 작은 것을 무한하게 나누는 일과 큰 것을 무한성은 그 무한성이 다르기나 하다는 듯이, 신비는 작은 것의 무한성이 끝까지 연구될 때 비로소 계시된다. 즉 바꾸어 말하면 영원히 계시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문제의 해결을 무한히 작은 것 속에서 발견한다. 이 생각이야말로 그 문제가 그릇되게 과해져 있다는 뚜렷한 증명이 되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미망(迷妄)의 최후 단계―연구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되어 있음을 분명히 표시하고 있는―이 단계가 과학의 승리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즉 맹목(盲目)의 최후 단계가 시력의 최고도라고 생각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길이 막혀버렸다. 그리고 길이 막혔다는 이 한 가지 일에 의해서 분명히 그들이 걸어온 길이 잘못임을 자기 앞에 입증했다. 더구나 그들의 열심에는 한도가 없다. 여기서 현미경을 조금 더 세게 하면 우리들은 무기물의 유기물로의 이전이나, 유기물로부터 심리적 생물로의 이전을 이해하고, 인생의 비밀은 모조리 우리들에게 계시되리라는 식이다.
사람들은 물체 대신에 그림자를 연구하고, 그들은 그 그림자를 연구하고 있는 바로 그 물체는 아예 잊어버린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면서 마침내는 암흑 속으로 기어들어 가서는 그림자가 짙다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의 의의는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 인간의 의식 속에 계시된다. 이 행복의 천명(闡明), 한층 적절하고 확실한 그 정의, 이것이 전 인류 생활의 주된 목적과 과업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과업은 곤란하므로, 즉 장난감이 아니라 노동이므로 사람들은 이 행복이 정의를 그것이 놓여 있는 곳, 즉 인간의 합리적 의식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곳곳에서―그저 그것이 표시되어 있는 장소 이외의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기에게 필요한 것에 대한 정확한 지시(指示)를 적은 글을 받아두었으면서도 그것을 읽을 재간이 없어서 그 글을 내던지고 만다는 사람마다, 내게 필요한 것을 모르느냐고 묻고 있는 사람의 행위와 비슷하다. 사람들은 인생의 정의를 도처에서 탐구한다. 그러나 다만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만은 도외시되고 있다. 인생의 정의, 즉 행복에 대한 동경(憧憬)으로 이것은 말살(抹殺)이 될 수 없는 문자로 인간의 영혼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전 인류가 자기들의 가장 현명한 대표자라는 형식으로 "너희 신을 알라"고 하는 희랍의 격언(格言)에서 비롯해서, 전혀 반대되는 이야기를 해오기도 하고, 오늘날에도 말하고 있으므로 해서 더욱더 이상스러운 일이라고 할 일이다. 모든 종교적 교양은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실제적 행복에 대한 희구로서의 인생의 정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3'
이성의 목소리는 점점 분명히 인간에게 들려오게 된다. 사람들은 점점 많이 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개인적 행복과 그릇된 의무로 인간을 부르는 소리보다 힘차게 될 때가 오고 있고, 아니 이미 와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유혹을 수반하는 개인 생활이 행복을 줄 수 없다 함이 더욱더 뚜렷해짐과 동시에, 다른 편으로는 사람들에 의해서 규정된 모든 부채반상(負債返償)이라는 것이 사실인즉, 인간이 그로부터 나온 합리적이며 행복한 기원에 대한 유일한 부채를 갚아야 할 지불의 기능을 사람에게서 빼앗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욱 뚜렷해진다. 어떤 합리적 설명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낡은 기만은, 벌써 닳아 끊어져 버렸으므로, 다시 거기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사람들은 곧잘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생각하지 말아. 우리들이 규정하는 의무를 믿으라. 개성은 너를 속일 것이다. 오직 신앙만이 너에게 인생의 참된 행복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믿으려 애써 보기도 하고, 또 믿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의 교섭(交涉)은 다른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믿고 있음을 그에게 가르쳐주고, 그 다른 일은 사람 나름으로 큰 행복을 주고 있음을 확증했다. 그래서 수많은 신앙 중에서 어느 신앙이 더 진실한 것인가 하는 의문을 어떻게 해서든지 해결해야 하는 판국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성이 있을 따름인 것이다.
인간이 항상 모든 것을 앎은 이성을 통해서이지 신앙을 통해서가 아니다. 한때는 인간이 무엇을 아는 것은 신앙을 통해서고,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고 단언해서 속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두 가지 신앙을 알게 되자, 그리고 그가 자기의 신앙을 찬미하듯이 다른 사람들이 다른 신앙을 찬미하는 것을 보게 되자, 그는 어찌해서든지 이성에 의해서 일을 해결해야 할 필요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불교도가 마호멧교를 알고 나서도 본디의 불교도대로 남아있는 것은, 결코 신앙에 의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서 그런 것이다. 그의 앞에 다른 신앙이 나타나서 자기의 신앙을 저버릴 것인가, 혹은 또 새로이 계시된 신앙을 버릴 것인가, 하는 무제가 생기게 되면, 이 문제는 불가피한 이성애 의해서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마호멧교를 알고서도 여전히 불교도로서 남아 있는 이상, 불타(佛陀)에 대한 이전의 맹목적 신앙은 이미 필연적으로 합리적 근거를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성을 제외하고 신앙에만 의해서 정신적 내용을 인간에게 주입(注入)시키려고 하는 현대의 시도(試圖)는 마치 그 자연의 수단(인간의 입)을 벌리지 아니하고 사람을 양육하려는 시도와 같다.
사람들의 교류는 그들 일동에게 공통되는 그 지식의 근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미 이전의 미오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더구나 죽은 자가 신의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 그리고 들은 자가 소생할 때가 오고 있는 것이다. 아니 벌써 와있는 것이다.
이 목소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목소리는 한 사람이 내는 목소리가 아니라 전 인류의 합리적 의식의 소리, 각 개인과 인류의 뛰어난 사람들과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목소리인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