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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이르는 길 2

Bollnow 2024. 5. 7. 09:18

5장 행복을 찾아서

 

1.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

 

우리는 매일매일 신문과 텔레비젼을 대하여 살아가고 있다. 사실 현대는 매스콤의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신문과 텔레비젼에는 언제나 착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함께 등장한다. 신문의 사회면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강도, 살인, 사기, 밀수 등에 관한 기사가 실리며 그러한 기사의 주인공 등은 악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보다 적은 양이기는 하지만 신문에는 또한 이웃을 도와준 이야기, 심장병 어린이를 치료해준 이야기, 불우한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한 이야기 등이 실리며 이러한 선행의 주인공들은 착한 사람으로 등장한다. 텔레비젼의 경우도 신문과 유사하다. 특히 매일 연속극에는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오랜 기간 동안 갖은 사연을 지닌 채 관계를 유지해오다가 결국에 가서는 내용적으로 선한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왜 우리는 사람들을 착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구분하며 또한 행동을 착한 행동과 악한 행동으로 구분하는가? 우선은 습관적으로 악한 행동과 착한 행동을 구분한다. 일상 생활 속에서 우리들은 거의 습관적으로 살아간다. 번화한 길거리에서 몇 사람이 짜고서 아무 일도 없는데 갑자기 하늘을 보면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이 없는가 하고 하늘을 쳐다본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심리적인 사실이다. 대화를 나누고 있는 좌석에서 어떤 친구가 나는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그 김씨라는 인간은 아주 나쁜 놈이고 악한 놈이야! 그 인간은 남을 배신만 하고 그뿐만 아니라 남을 이유없이 해치고 자기 이익밖에 생각하는 것이 없는 놈이야!"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 후 우연한 기회에 친구가 이야기했던 김씨를 만날 경우 나는 김씨가 아마도 나쁜 사람일지 모를 거라고 경계하게 되기가 십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습관적으로만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나는 김씨와 사귀면서 점차로 나 자신의 판단에 의하여 김씨가 과연 선한지 아니면 악한 지를 스스로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과 나누는 대화를 돌이켜보기로 하겠다.

"최양, 자네는 오늘 아침 버스를 타거나 아니면 걸어서 학교에 왔겠지? 물론 내일도 그렇게 하겠지?"

""

"자네 집이 수유리 쪽이거나 아마 버스를 타고 왔을 거야. 왜 버스를 탔다고 생각하는가? 내 물음이 너무 어처구니없겠지만 대화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진지하게 답해 주기 바라네."

"그거야 물론 학교에 오기 위해서지요."

"여러분, 정신 이상이 아니고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버스를 탈 경우 직장에 가거나 놀러가거나 아니면 학교에 오기 위해서 버스를 탑니다. 그렇다면 최양, 학교에는 왜 와서 앉아 있는가?"

"마찬가지 질문인데요. 공부하러 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공부는 왜 하는가?"

"보다 좋은 직장도 얻고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서 공부합니다."

", 최양, 시간 여유를 가지고 좀더 생각해보세. 왜 공부를 하는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좋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사람이나 돈을 많이 가진 사람을 훌륭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있네. 최양, 자네가 원하는 훌륭한 사람은 그러한 사람인가 또는 어떤 다른 유형의 사람인가?"

"제가 생각하는 훌륭한 사람은 사회에서의 위치가 어떻든 간에 선하게 사사람입니다."

"최양, 자네는 이제 우리들이 대화하는 문제의 핵심에 거의 다 와 있다고 생각하네. 선한 사람은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일까?"

위의 대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 인간은 행복을 찾아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가지각색이어서 간단히 이야기하기란 힘들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에 정성을 쏟으면 행복하리라고 생각한다. 또 어떤 사람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면 행복해지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앞의 대화에서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든지간에 선하게 사는 것이 행복하리라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선하게 사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당연히 제기되기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선이란 무엇인가 하고 묻게 된다. 선과 악이 무엇이며 그 관계는 어떤가에 관해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매우 많은 이론들이 전개되어왔다. 나는 여기에서 그러한 이론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일은 피하고 지금까지 논의하여온 맥락에 따라서 선과 악의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선과 악은 도덕의 문제이자 윤리의 문제이다. 선과 악은 도한 가치 있음과 가치 없음으로도 이야기될 수 있다. 나보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에게 공감하여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줄 때 나의 행위는 가치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친구에게 꾼 돈을 갚지 않을 때 내 행동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신과 악은 행동의 문제이다. 앎의 문제가 참다움과 거짓됨으로 나뉜다면 윤리적인 문제는 선과 악으로 나뉘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반성되지 않은 선과 악은 실상 나 개인의 직접적인 이해에 깊이 상관된다. 어떤 사람이 피해를 입으면서도 나를 위해서 헌신하거나 나에게 도움이 될 때 나는 "그 사람은 참으로 착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또 내가 부당한 이익을 몰래 취하려고 했을 때 정당하게 그것을 지적하고 시정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는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라고 말한다. 매일매일의 삶에서는 어리숙한 사람이 착한 사람으로 그리고 정당하게 합리적으로 행동하려는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일컬어지기가 일쑤이다. 이렇게 선과 악을 구분하는 것은 습관적인 구분에 지나지 않는다. 반성된 의미의 선과 악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만일 "당신의 이익 추구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과연 착하고, 방해가 되는 사람은 악한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 곧 당위를 행하면 그러한 행동을 선하다고 하며 그렇지 않으면 악하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행동이 조화를 이루면 그것은 선이요,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악이다.

그러한 뜻에서 최상의 선은 곧 행복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물론 나는 여기에서 절대적인 선이나 절대적인 행복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삶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지속성이 있으며 조화를 이루는 행동을 할 때 그 행동은 선하다. 그 반면에 순간마다 변화하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행동은 악하다.

쉽게 말해서 선이란 행동의 충만함이며 삶 전체와의 일치이다. 예컨대 내가 어떤 여인을 사랑한다고 하자. 만일 내가 그 여인의 돈을 탐내어 사랑한다면 그 행위는 선한 것인가? 내가 몸매만을 탐내어 그 여인을 사랑한다면 내가 사랑하는 행위는 선한 것인가? 내가 어리숙하고 그 여인이 총명하므로 그것을 이용하려고 그 여인을 사랑한다면 그 행위는 선한 것인가?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인격과 인격으로서 이해하며 공감할 때라야만 그 여인에 대한 나의 사랑은 선할 것이다. 그러기에 선이란 삶 전체와의 일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일까? 기독교나 불교와 같은 종교에서는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으로 가고 악한 행동을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간다고 흔히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인간의 착한 심정을 기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가르침에서는 천국이 왜 선한 세계이고 지옥이 왜 악한 세계인가 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앞에서 선이 삶 전체의 조화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행동의 완전함을 선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선행을 했을 때 학교나 사회 단체에서는 그 사람에게 보상을 주며 어떤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형벌을 가한다. 선을 행동의 완전함이라고 한다면 악은 행동의 부조화요 불완전함이다. 나의 삶이 충만할 때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다. 그러나 나의 삶이 결핍되었을 때 나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병들어 있다. 선과 악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일상적인 종교에서 가르치는 것처럼 선은 천국에서 내려오고 악은 지옥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은 우리들의 삶 자체에 같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행동이 조화롭고 충만할 때 그것은 선이라고 일컬어지며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결핍될 때 그것은 악이라고 일컬어진다. 따라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곧 악한 행동을 했을 때 그 행동은 결핍된 행동이므로 그 행동을 충만하게 해주어야 선의 실행이 가능할 수밖에 없다. 죄인을 처벌한다는 생각은 원한 감정이나 복수 감정에서 나온다. 죄인은 결핍된 행동을 행하였으므로 처벌할 것이 아니라 행동을 수정시키거나 개선시킴으로써 행동을 조화롭게 그리고 충만하게 만들어주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범죄를 범한 사람의 행동을 교정하는 장소를 형무소라고 부르는 것이다.

선과 악이 삶 자체에 있으므로 선한 사람이 악하게도 되고 악한 사람이 선하게도 된다. 만일 선가 악이 전혀 별개의 것이라면 선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선한 것이고 악한 사람은 어디까지나 악한 것이므로 교육은 전적으로 무의미해질 것이다.

선은 삶의 충만함이다. 선과 앎과 아름다움은 하나의 지혜는 결국 삶의 행복에 일치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존재 방식이 아닐 수 없다.

 

2. 이론과 실천

 

일반적으로 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이론가라고 부르고 묵묵히 할 일만 하는 사람을 실천가라고 부른다. 고금동서를 통하여 이론과 실천의 문제는 학문뿐만 아니라 삶 자체에서 중요한 문제로 거론되어 왔다.

우리나라 이씨 조선 때 4번에 걸쳐서 많은 목숨을 처참하게 희생시킨 사화들은 공리공담이 빚어낸 결과이다. 물론 이기론의 근거는 철학적임이 명백하지만, 그것이 개념의 유희에 극단적으로 빠지게 되면 공허한 이론에 흐르게 되어 사람들을 무리 짓게 하여 현실적으로 서로 모함을 하게 되고 실천적인 삶의 건설은 전혀 무의미해진다. 공허한 이론을 배격하고 이론과 실천의 조화를 꾀하는 것이 선한 삶의 구축하는 방책이라고 보아 양지양능을 주창하는 입장이 중국에서 일어났으며 그것은 우리나라에도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다. 양지는 참다운 이론이며 양능은 선한, 곧 가치 있는 실천적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현대를 진단할 때 현대는 극단적으로 이론이 우세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것은 서구적인 분석적 사고가 오늘날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론적 분석의 결과 #1자연 과학이 극도로 발달하여 자연 과학 만능의 시대가 만들어졌고 #2종래에는 통일을 이루었던 예술 종교 학문 등이 극단적으로 세분화되었으며 #3사회마저 분업화되어 극심한 계층 형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따지고보면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산업 공해라든가 전쟁의 위험 등은 분석적 이론, 다시 말해서 자연 과학이 극단적으로 발전한 결과에서 생긴 것이다. 이론이 실천을 도외시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이처럼 부정적이지 않을 수 없다. 바람직한 삶은 이론과 실천의 조화에서 기대되기 마련이다.

서구적인 삶의 방식이 다분히 이론적이라면 전통적으로 동양적인, 특히 한국적인 삶의 방식은 실천적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4계절에 맞추어 사는 태도는 추상적인 이론적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근대 이후 서구 문물이 쏟아져 들어올 때 우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석적 사고방식을 결여하고 있던 우리들에게 거의 강압적으로 분석적 이론이 밀려들어왔으며 드디어는 우리들의 삶의 방식이 분석적인 사고에 물들게 되었다. 우리는 결국 극에서 극으로 전환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결혼관 하나를 예로 들어보기로 하자. 전통적인 결혼관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두 사람보다는 두 집안을 우선적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두 사람만의 삶을 염두에 두는 것이 보통이다.

삶에 있어서 실천만을 중시한다면 비록 전체는 조용히 바라본다고 할지라도 발전이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으며, 이론만을 중시한다면 부분적이고도 극단적인 발전은 보장된다고 할지라도 삶 전체에 대한 안목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실천 없는 이론은 극단적이며 이론없는 실천은 답보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론과 실천이 조화될 때 비로소 이론은 실천의 근거를 제시하고 실천은 이론을 현실화시킴으로써 조화로운 삶의 전체성이 구성될 수 있다. 조화로운 삶의 전체성이 구성될 때 선한 삶이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우리들은 행복을 찾아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여기에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론을 중시하는 입장과 실천을 중시하는 입장을 각각 살펴보기로 하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인간의 성품을 덕이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실천적인 덕을 통하여 인간은 행복에 이룰 수 있다. 사실 가정이나 직장에서 우리들은 실천적인 행동을 통하여 인간관계의 조화를 꾸미며 스스로 평온함을 찾는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인 덕이란 이성적인 사고를 통해서만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실천적인 덕에 의해 선한 행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필연적으로 앞서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천적인 덕에 선행하여야 하는 것은 이론적인 덕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간단히 말해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가장 기본적이 것은 이론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론과 실천이 나뉘어지며 여기에서 실천보다는 이론이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이라고 하는 주장이 성립한다. 이러한 이론은 서구적인 전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공리주의라든가 마르크스주의도 부분적 현실적인 삶을 분석하여 모든 사람의 이익 또는 공동 생산이 행복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기초라고 주장하지만 (이들도 서구적인 전통에 충실히 서 있으므로) 동양에서는 실천적으로 행복에 도달하려고 하지 특정한 이론을 내세워서 행복을 실현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실천을 중시하는 대표적인 입장은 칸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앎의 장에서 칸트의 인식론과 윤리관을 어느 정도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핵심적인 것만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겠다. 칸트에 의하면 감성의 틀과 오성의 틀에 의해서 우리의 앎이 형성된다. 그러나 실천적인 행동은 이러한 형식적인 틀과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다. 앎은 일정한 틀과 제한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행동은 이 틀을 넘어선다. 따라서 실천은 이론보다 앞선다는 결론이 성립한다. 이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과는 다르지만 역시 실천과 이론을 분리된 것으로 보기 대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앎의 세계와 행동의 세계를 서로 전혀 다른 것으로 볼 경우 어떤 것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하여 우선적인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앎과 행동이 인간이 삶에서 전체적인 하나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들이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실천과 이론 중에서 어떤 것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선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론과 실천의 조화가 이루어지는 곳에서만 비로소 삶 자체가 윤택해질 수 있으며 행복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3. 의무와 자율

 

인간이라고 하는 낱말은 "사람들 사이"를 가리킨다. 이것은 인간이 상호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삶을 영위하여 가고 있음을 뜻한다. 인간이란 한마디로 "관계 존재"이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인간이 세계를 살아간다는 것은 인간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것을 뜻한다.

예컨대 한 학생이 있다고 하자. 이 학생의 의무는 무엇인가? 학생의 의무는 물론 공부하는 것이다. 어떤 회사의 사무원이 있을 때 이 사무원의 의무는 사무를 충실히 보는 것이다. 학교라는 사회를 전제로 할 때 학생의 의무는 공부하는 것이지만 이 학생 편에서 보면 공부하는 것은 동시에 이 학생의 자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무원의 편에서 볼 때 사무를 충실히 보는 것은 이 사무원의 자율이다. 의무는 사회 안에서 개인이 마땅히 하여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이고 자율은 한 개인이 인격체로서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의무와 자율은 똑같은 것으로서 어느 편에 서서 보는가에 따라서 의무라고 하기도 하고 자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율을 동반하지 않는 의무는 참다운 의무가 될 수 없으며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 자율 역시 참다운 자율이 될 수 없다. 자율을 동반하지 않는 의무는 구속이다. 마찬가지로 의무를 동반하지 않는 자율은 방조에 지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에 다니는 딸에게 "너는 하루에 꼬박 4시간씩 네 방에서 공부를 해야만 한다. 그것은 너의 의무이다"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명령이자 구속이다. 그렇게 말하는 어머니나 아버지는 자신이 공부를 잘하지 못한 과거의 콤플렉스를 어린아이를 통하여 보상받으려고 하거나 아니면 다른 특정한 동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만일 초등학교 3학년 아이가 그러한 명령을 따른다면 그것은 또한 복종이자 맹목적인 굴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론과 실천의 조화가 윤리적인 행위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이성적으로 반성되지 않은 명령이나 또는 실천은 맹목적이므로 그러한 명령이나 그 명령의 실천은 구속과 맹종에 불과하다.

사회 윤리적으로 볼 때 역사적 의식이 아직 제대로 꽃피지 못한 후진국 사회라든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우리들은 구속과 굴종이 마치 윤리적인 척도인 양 실행되고 있는 사실을 접할 수 있다. 우간다, 필리핀, 페루, 아르헨티나 같은 곳에서는 어떤 개인이 마치 홀로 국가를 이끌어가는 것과도 같은 행동을 하면서 국민들도 하여금 이 개인을 숭배하는 것이 참다운 의무라고 믿게 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태는 국민의 자발성을 전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생긴다.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에서는 특정한 당, 예컨대 사회당이나 공산당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이 국민의 자발적인 사고와 행동을 도외시하는 처사임에 틀림없다.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인간의 자발성을 일깨우기 위한 말이다. 자발성은 자기반성을 포함한다. 자기반성이 결여된 의무란 헛된 의무이며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이 단지 이익 추구를 위하여 이용하기 위한 위장된 의무에 불과하다. 한 인간이 인격체 및 주체로서 "이 일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내가 마땅히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스스로 결단하여 행위할 때 우리들은 그 사람이 자신의 의무를 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인간 상호 관계 안에서만 자신의 삶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것도 그 관계에 있어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반성하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고 구성하는 삶을 이끌어나갈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 인간의 행위는 결핍으로부터 충만함으로 전환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적 사회적 선이 보장될 수 있다.

 

4. 중용의 미덕

 

우리들은 보통 선한 삶은 덕있는 삶이라고 말한다. 의무와 자율이 조화된 삶을 선한 삶이라고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의무와 자율의 조화를 무엇이라고 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의무와 자율의 조화를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중용이다. 실천적인 가치의 절정을 우리는 중용이라고 부른다. 중용이란 다시 말해서 조화된 삶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천명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 성을 따르는 것을 일컬어 도라고 한다. 도를 닦는 것을 일컬어 교라고 한다.

위의 인용문을 보면 조화로운 삶이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천명이란 하늘이 명령한 것이니 세계의 근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유교의 입장에서 보면 천명은 곧 천일 것이고, 불교적인 의미에서는 불법이요, 도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무위자연이나 도이고,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하느님이다. "천명을 일컬어 성이라고 한다"에서 성이란 원리를 말한다. 세계의 근원은 다름 아닌 세상의 원리이다.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 봄이 오면 만물이 소생하고 겨울이 오면 만물이 동면하는 것, 인간이 죽는 것, 이러한 모든 것들이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행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원리, 곧 성에 의한다는 내용이 이 말 속에 들어 있다. 이것은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인 설명이다.

다음으로 "성을 따르는 것을 일컬어 교라고 한다"라는 귀절을 살펴보자.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의 원리를 따른다는 것은 세계 원리에 맞추어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을 다시 해석한다면 세계 원리에 따르는 인간의 행동이 선한 것이라는 의미가 성립한다. 따른다는 것은 동적인 행동을 뜻하고, 동적인 행동이 세계 원리를 따를 때 그것은 "참다운 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부분은 인간의 삶에 관한 윤리학적인 의미를 밝혀준다. 따라서 존재론과 윤리학이 아무런 관계도 없이 따로따로 이야기될 수 없다는 것이 여기에서 드러난다. 왜냐하면 세계 원리를 따를 때 비로소 인간의 행동은 참다운 길을 찾아서 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도를 닦는 것을 일컬어 교라고 한다"는 귀절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말은 행위와 앎이 서로 걸맞아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도를 닦는 것은 행위지만 이것은 바로 가르침이다. 따라서 실천과 이론이 조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점이 여기에서 밝혀진다. 위에서 인용한 <중용> 첫머리의 글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근원을 일컬어 세계 원리라고 한다. 세계 원리를 따르는 것을 일컬어 참다운 길이라고 한다. 참다운 길을 닦는 것을 일컬어 참다운 가르침이라고 한다." 이 말 전체를 통하여 보면 존재론과 윤리학과 인식론이 유기적으로 전체적인 조화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러한 조화를 이루게끔 하는 핵심은 무엇인가?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게 하는 행위의 핵심은 중용이다. 우리는 보통 중용을 #1 어떤 상황을 적당히 마무리 짓는 것 #2 어떤 상황에서 극단과 극단의 가운데에 위치하는 것 #3 가치론적인 절정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적당히 마무리 짓는 행위라든가 어떤 상황의 극단과 극단에서 중간에 해당하는 입장을 취하는 행동은 단지 약삭빠른 처신에 지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행위는 오직 개인만의 편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의무와 자율을 무시한다.

그러므로 자기반성과 자기 결단에 의한 의한 행위는 모름지기 가치론적인 결정과 일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흔히 주용을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 또는 "산술적인 중간이 아니라 가치론적인 정점"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전쟁이 일어나서 내가 병사로서 전쟁에 참여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참다운 용기는 어떠한 것일까? 만일 참다운 용기를 산술적인 중간의 중용이라고 한다면 이때의 용기는 몸을 바쳐 싸우는 것과 비겁하게 도망가는 행동의 중간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참다운 용기는 결코 산술적인 중간일 수 없다. 전쟁터에서는 전진해야 할 상황에서는 몸을 바쳐서 돌진하며 후퇴하여야 할 상황에서는 지혜롭게 후퇴하는 것이 참다운 용기이자 가치론적인 절정으로서의 중용이다.

따라서 중용은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구성하며 또한 인간의 삶을 선하게 하는 미덕이다. 중용은 삶의 전체적인 조화를 구성하며 또한 인간의 삶을 선하게 하는 미덕이다. 중용은 미덕에 의해서 인간은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5. 양심

 

앞에서 나는 인간의 행동은 중용을 통하여 결핍을 충만으로, 곧 악을 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면 중용을 이루는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인간의 내면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양심이다.

인간은 무엇을 살아가는가? 인간은 스스로 매일매일의 삶을 살아간다. 인간은 세계를 살아간다. 그러면 인간의 의식이 최초로 전개되는 세계는 어떠한 세계인가? 성숙하지 못한 의식에 최초로 등장하는 세계는 일상성이다. 일상성의 특징은 자기반성이 결여된 무의미한 반복이다. 일상성의 가장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그러께 아침 나는 밥을 먹었다. 매우 맛있게 먹었다. 어제 아침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감기 기운 때문에 별로 맛있게 먹지 못하였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밥을 먹었다. 이처럼 일상성이란 아직 자기의식의 과정으로 지양되지 못한 삶의 상태이다. 일상성의 특징은 반복이며 그것은 "지껄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지껄임은 "지나침"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우리는 ""의 내면이나 세계의 원리를 깊이 음미하지 않고 매일매일을 "지나치며" 살아가고 있다.

일상성은 매일매일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장 눈에 띄는 존재 방식이다. 그러나 일상성은 현실성이 아니라 단지 가능성이다. 왜냐하면 일상성 속에서는 인간의 삶 전체가 현실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적 의식과 행위가 가미된 음식이 아니라 단순한 "먹이"로서의 음식을 먹는 행위는 반복하기 마련이므로 일상성이고 가능적일 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양심 역시 인간의 존재 방식 중 하나이다.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양심의 형태를 몇가지 살펴보기로 하자. 일상성 속에서 나타나는 양심 역시 피상적이며 반복적이어서 무의미한 것이다.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물건을 조금 훔친다고 해도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다", "나는 권력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소유물을 어느 정도 가져도 그것은 내 양심에 거슬리지 않는다", "나는 상인이므로 상품에 가능한 많은 이익을 붙여서 판다고 할지라고 내 양심에 위배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일상 생활에서 우리는 양심을 인간의 가장 내면적이고도 본질적인 품성으로 생각한다. 비록 "너는 양심도 없는 인간이다"라고 표현하는 경우일지라도 이 말은 양심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태도는 양심에 어긋난다"는 표현을 일상적으로 묘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양심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가정하여 "어떻든 내 양심은 떳떳하다", "양심에 심한 가책을 받는다"라는 말을 흔히 반복적으로 내뱉는다.

우리들은 그러나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져볼 수 있다. 양심은 과연 인간의 내면에 실재하는 것인가?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은 신념으로서 존재한다.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이 실재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성 자체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권력이 있으므로 다른 사람의 소유물을 내가 차지하더라도 내 양심은 떳떳하다"라고 할 때의 양심은 마치 사막의 신기루와 같이 껍질만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내면적 본질적인 양심이 아니라 자기변명이자 합리화이며, 자기기만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양심의 이중성을 엿볼 수 있다.

양심은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든 실존적이든간에 "부름"이다. 일상성으로서의 부름은 지껄임이다. 지껄임은 아직 말이 되지 못한 것으로서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지껄임은 지나쳐가는 피상적인 소리임에 비하여 말은 인간과 인간의 그리고 한 인간의 내면적인 대화를 그 안에 간직하고 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소리 및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은 자기 변명 자기 합리화의 형태를 취하기 마련이다.

자기 변명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을 망각한 허위와 가면이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은 스스로의 삶을 결단하는 행위이다. 스스로의 삶을 결단하는 일은 인간을 인격체이게끔 하며 인간의 실존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은 결국 "자유의 부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삶을 결단하는 행위는 물질문명이 판을 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너무나도 무거운 짐이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유로부터 도피하고자 한다. 일상적인 양심은 한낱 자기변명이다. 자기변명은 "자기"로부터의 도피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은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며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러한 고통을 피하고 망각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응시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애매함" 속에 "던져진" 채로 "지껄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말의 언표된 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야임은 불려진 것에 대하여 무엇을 부르는가? 엄밀히 말해서-아무것도 부르지 않는다. 부름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세계의 사건에 관하여 아무런 정보도 제공하지 않고, 아무것도 설명할 것을 가지지 않는다. 적어도 부름은 불려진 자신 안에서 '자기 대화'를 개방하고자 한다."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은 아직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한 일상성에 물들어 있다. 그것은 오로지 자기 변명으로서 삶의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못한다. 수단과 목적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기 변명은 상대적이자 우연적이다. 우리들은 사실이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류 대학을 나왔고 우리 집은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내 장래는 탄탄하다"라고 지껄이는 사람들을 대할 수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지껄임과는 전혀 다르게 "나는 나이를 먹었고 지위가 높으니 나이 어린 자는 내 말을 들어야 하고 지위가 낮은 자는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지껄이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우리들은 다시 한번 "과연 양심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양심이 실로 존재하는 것인가?라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적인 양심은 흔히 권위로 또는 경제적 부로 아니면 지식의 축적으로 대치되고 있으며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각 개인의 이기적인 편익을 위한 "동굴"로 대치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일상적인 차원의 양심은 습관적인 신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한걸음 한걸음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스스로 물을 때 지금까지의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은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으로 전환한다. 자기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가 자기 자신을 응시하기 시작할 때 자기 변명과 작 합리화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고통과 고뇌 앞에서 서서히 무화하고 침묵으로 전환한다. 침묵이 가면을 쓸 때 자기 변명으로 변하며, 침묵이 허위로 물들 때 그것은 자기 합리화로 변한다. 자기 합리화를 시키는 절도범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수년 전에 잠깐 실수로 교도소에 들어갔다는 사실로 인하여 취직이 어려워지자 다시 범행을 저지르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회가 나를 냉대하므로 내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작은 절도 행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지껄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양심에 그러한 절도 행위가 위배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가 한 인격체로서의 자신을 반성하여 자신의 조화로운 삶을 결단한다면, 그는 지금까지의 헛된 양심을 벗어던지고 침묵에 직면할 것이다. 지껄임은 삶을 지나쳐버리게 하지만 침묵은 삶을 결단하게 해준다. "침묵은 금이다"라고 하는 말의 참다운 의미는 바로 이 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침묵으로서의 양심, 그것은 지껄임으로서의 양심을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으로서의 양심으로 전환시켜주는 동적인 양심의 계기이다.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아직 내면적인 양심을 개방시켜 주지는 않을지라고 한 인간이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전체적인 현실성으로 전환 가능하게 해주는 힘이다.

의식은 매일매일을 지나쳐 버리는 의식이기를 그치고 스스로를 투시하는 자기 의식으로 전환할 때라야만 내면적인 양심의 힘이 움직일 수 있다. 그러므로 의식의 경악과 침묵의 힘이 없다면 지껄임은 무한히 반복하는 순환의 잠에서 깨어날 수 없다. 따라서 내용적으로 "양심은 유일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침묵의 양식으로 말한다."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더 이상 "호기심"을 가지고 "애매함" 속에서 "던져진" 채로 지껄이지 않는다. 앞에서 몇 차례 말한 것처럼 지껄이는 것은 가면과 허위이며 자기변명과 자기 합리화이다.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더 이상 지껄이거나 소리 지르지 않고 "말한다."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침묵 속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응시하며 말한다.

인간의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더 이상 가면과 허위가 아닌 존재, 자신의 결단에 의하여 행위하는 실존, 자기 변명과 자기 합리화를 무화시키며 경악하는 존재,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기 자신의 존재 가능성이 아닌가? 그러나 존재 가능성은 아직도 개방된 존재가 아니다. 의식이 무에 직면하여 있을 때 의식은 곧 존재 가능성에 직면한다. 다시 말해서 의식이 매일매일의 일상성을 무의미한 것으로 발견할 때 의식은 곧 삶의 전체성 앞에 서게 된다. 존재 가능성에 직면한 의식은 갈등하는 양심이다. 양심은 이중성을 가지고 여전히 허위와 가면의 탈을 쓸 것인가 아니면 본래의 내면적인 모습을 드러낼 것인가의 갈등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상성과 "자신의 삶"의 갈등 속에서 양심은 지껄임을 던져버리고 자기 자신을 부른다. 이제 양심이 부르는 것이 내면적 자아이고, 조화로운 삶이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양심은 한 인간의 내면적 완성을 부른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스스로를 부르는 양심의 고뇌를 망각하기 위하여 때로는 종교적인 신을 갈구하고 대로는 생물학적인 본능에 호소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양심은 전능하신 신이 부여한 것이니 신의 말씀을 따르자"라든가 아니면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이므로 양심이란 가장 기본적인 생물학적 충동에 불과하다"고 외친다. 외침과 지껄임은 둘 다 똑같이 우연성 반복성 상대성에 물들어 있다.

그러나 침묵으로서의 양심이 자신의 갈등을 의식할 때 "부름은 나로부터 나와서 나를 넘어서며 나에게로 다가온다." 자기 자신을 향한 부름은 바로 나를 향한 부름이다. 침묵 속에서의 부름은 나의 안과 나의 밖에 울려퍼지는, 삶 전체를 향한 부름이 아닐 수 없다. 더 나아가서 "양심은 관심의 부름으로서 스스로 나타난다." 일상성과 내면적 양심 사이의 갈등은 곧 인간의 관심이다. 관심은 침묵 안에서 말한다. 관심은 "애매함" 속에 전락하여 "호기심"을 가지고 지껄이는 일상적인 개인을 지시하며 나아가서 동시에 자유에 의하여 결단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말하기도 한다. 양심의 이중성은 곧 관심의 이중성을 암시하여 준다. 그러므로 침묵으로서의 양심은 갈등이며 동시에 갈등은 "관심의 부름"이다. 만일 갈등이 전혀 없는 양심이 있다면 그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양심이란 결단하는 힘이며 그와 같은 힘은 언제나 갈등 앞에서 결단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등은 애매함을 명백함으로 전락을 상승으로 그리고 호기심을 명상으로 전환시키는 힘이다. 그러므로 갈등과 모순의 극복은 오로지 갈등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갈등이 없는 세계는 유토피아에 지나지 않는다.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향은 공상 속에서 그리고 인형과 기계의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앞에서 나는 양심은 관심의 부름이자 갈등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양심은 항상 죄책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떳떳할 때나 떳떳하지 못할 때나 양심은 죄책감에 직면한다.

이른 새벽 안개 자욱한 호수가를 거닐면서 나는 무엇을 듣는다? 가벼운 바람 소리와 갈매기의 날카로운 울음을 듣는다. 대낮의 평화 시장 좁은 골목을 지나면서 나는 무엇을 듣는가? 장사꾼들의 드높은 목소리를 듣는다. 눈 쌓인 겨울 해변을 산책하면서 나는 무엇을 듣는가? 파도 소리와 눈망울이 큰 연인의 다정한 음성을 듣는다. 그러나 호숫가에서, 시장 골목에서 그리고 겨울 해변에서 내가 듣는 것이 과연 바람 소리, 장사꾼의 목소리, 파도 소리인가? 내가 가장 깊숙한 내면의 침묵으로 침잠할 때 나는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호숫가에서 시장에서 그리고 겨울 해변에서 나는 무엇을 듣는가? 나는 오직 나 자신만을 듣는다. 참다운 양심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자기 자신의 부름"이며 "자기 자신의 들음"이다.

나 자신의 부름이나 나 자신을 제대로 부르지 못할 때 죄책감이 생긴다. 사실은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송모씨는 제 분수를 모르고 좌충우돌하며 지껄이고 돌아다닌다" 라거나 "기모씨는 어떤 지위에 올랐다 하면 작은 지위라도 굉장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 지위를 휘두른다"라거나 "박모양의 성적이 탁월한 것은 그녀가 시험 때마다 남몰래 부정 행위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경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당연히 죄책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우리가 스스로의 경험을 되살려볼 때 우리들 자신이 앞에서 말한 이야기를 지껄일 때가 많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비해서 어떤 사태에 대한 죄책감이 있을 수 있다. "사실과는 전혀 달리 나의 아버님은 괜찮은 회사의 사장님이시다"라거나 "내 조상은 양반이다"라고 말할 경우 다른 사람보다는 오히려 어떤 사태를 가면화하여 자기 변명을 함으로써 우리는 죄책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양심과 죄책감은 서로 모순되는 것인가 아니면 일치되는 것인가? 죄책감은 양심의 한 계기이다. 죄책감으로 인하여 양심은 스스로를 확인한다. 물론 일상성 안에서는 이와 같은 말이 성립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은 죄책감을 은폐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본래적인 행동 방식에 대한 반성 내지 판단력은 곧 죄책감이다. 죄책감은 나 자신의 부름을 내가 듣지 못할 경우 나 자신이 들을 수 있게 해주는 의식의 힘이다.

죄책감은 양심의 본래성을 개방시켜 준다. 죄책감이 없다면 나의 존재는 무의미하여진다. 죄책감이 잠자는 일상성 안에서는 나와 너와 우리가 모두 평균인이며 1차원적인 존재이다. 1차원적인 인간은 본능적. 이기적이며 단지 사회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죄책감은 자신을 반성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주체로서의 인간은 어느 곳에서 반성을 하는가? 주체로서의 인간은 공동 존재 안에서, 곧 인간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반성한다. 죄책감은 사회 속의 부속품이 아니라 나와 너와 우리인 주체로서의 인간 공동 존재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때 죄책감은 세계 확인이요, 자기 존재의 확인이며, 동시에 양심의 확인이다. 양심이 자기 자신의 부름이라면 죄책감은 자기 자신의 들음이다.

양심이 조화로운 삶 전체를 구성한다. 따라서 양심은 삶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다. 양심은 우선 지껄임으로서 양심 자체를 지양시키며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자신의 계기인 죄책감을 전개한다. 양심은 한편으로 자기변명과 자기기만을 극복하여 또 한편으로는 자유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의무와 자율도 역시 양심 때문에 가능하다.

일상성으로서의 양심은 허무이다. 허무가 허무로 정지한 상태는 반복적인 매일매일의 삶이다. 허무의 양심은 자기변명이자 자기기만이다. 양심은 결국 인간이 자신의 삶을 결단하는 실존적인 연관성에서 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양심은 인간의 주체성의 부름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나 자신의 부름이자 나 자신의 들음이다. 왜냐하면 참다운 부름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참다운 들음이 있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의 부름과나 자신의 들음은 행복을 향한 인간의 행위이다. 나 자신의 부름과 나 자신의 들음이 없는 곳에는 언제나 허무와 죽음만이 커다란 입을 벌리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6장 말의 뜻

 

1. 언어가 나타나는 현상

 

우리 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이 있다. 언어를 놓고 이야기할 경우 등잔은 일상적인 삶이요, 밑은 언어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에서 시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일 아무도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떤 질문자에게 대답해야 한다면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일상적인 삶을 우리는 등잔 빛처럼 환하게 밝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상적인 삶은 애매함에 물들어 있으며 몽롱한 안개에 휩싸여 있다. 돌이 지난 어린아이로부터 팔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말을 하며 지구사의 어떤 종족이든 언어를 가지고 있다. 확실히 언어는 인간을 다른 존재들과 구분하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나 우리들이 일단 언어 현상을 반성해보면 아우구스티누스가 시간에 관하여 말했던 것과 똑같은 난점에 직면하여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아무도 언어에 관하여 나에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어떤 묻는 이에게 답하여 한다면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우리들의 삶에서 언어는 이중성을 띠고 있다. 우리들은 #1 일생 생활에서 마치 언어에 관하여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하며 행동하지만 #2 실상 언어의 본질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알려지지 않고 신뢰받는 것"이다. 우리는 언어를 깊이 신뢰하고 있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나눌 수 있다. "너 오늘 그 철학책 읽었니?" ", 조금 읽어보았는데 어떤 부분은 쉽고 이해도 잘되지만 어떤 부분은 공허한 내용만 있었어."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언어란 무엇이냐고 물으면 그들은 정확한 답을 제대로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일상생활에서 언어를 깊이 신뢰하고 있으면서도 본질적으로는 언어가 무엇인가 알지 못하고 있다.

언어는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언어는 #1 감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기호로서 #2 사고 작용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3 대상이나 사태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지시한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세 가지 특징을 가지지 않은 것은 언어라고 말할 수 없다. 언어는 소리 나는 말이나 눈으로 읽음으로써 머리로 생각하여 그 말이나 글이 어떤 대상이나 사태를 지칭하는지 알게 된다. "외침, 휘파람, 나팔 부는 소리, 시끄러운 잡음 등은 전혀 언어가 아니며 자연음이 되울리는 소리와 앵무새의 소리 흉내도 마찬가지로 언어가 아니다. 내가 듣거나 말하는 소리 속에서 대상과 의미에 대한 나의 의도를 완성할 경우에 비로소 언어가 존재한다. 내가 그처럼 소리 속에서 나와 떨어져 있는 대상을 생각하고 있는 사실은 언어의 근본 현상이다 내가 말하는 소리는 소리 이상일뿐만 아니라 소리 형상이다." 이 인용문에서 우리들은 언어가 바로 음의 형상이며 글의 형상임을 알 수 있다. 바람 소리나 비행기 소리, 고양이 울음 등은 대상이나 사태의 의미를 전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고도 동반하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글을 보면 더 확실히 알게 된다. 모든 글은 대상과 사태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과 글에서 우리들은 대상의 의미를 찾는다. 왜냐하면 말과 글로 이루어진 언어는 대상과 감각과 사고의 관계에서 대상의 의미를 지칭하는 형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보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언어는 두 가지 관계, 곧 외적인 관계와 내적인 관계를 가진다. 언어의 외적인 관계는 감각이며 언어의 내적인 관계는 사고이다. 언어가 감각 및 사고와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가를 살피기 위하여 여기 한 편의 시를 예로 들어보자.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흑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섭 이슬에 함초롬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 <향수> 전문

이 시에서 우리들은 "넓은 벌 동쪽 끝으로"라는 첫머리부터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라는 끝 귀절까지 시각에 의존하여 읽는다. 눈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생각한다. 나는 여기에서 생각, 곧 사고의 의미를 넓게 풀이한다. 좁은 의미의 사고는 논리적인 사고일 뿐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생각은 논리적인 사고뿐만 아니라 느낌과 상상과 합리적 이성적 사고까지 모두 포함한다. 감각과 사고가 맞부딪힐 때 언어가 구성되며 또한 거꾸로 언어에 의해서 감각과 사고가 맞부딪혀서 언어의 의미가 떠오른다.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 "금빛 게으른 울음" 등은 무의미한 기호가 아니라 생생한 대상의 모습과 그 모습에 대한 인간의 넘쳐흐르는 느낌이 담겨 있는 의미있는 언어로서의 글이다. 시골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사철 발벗은 아내"라든가 "따가운 햇살", "흐릿한 불빛" 등의 의미를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는 감각과 사고의 유기적인 상호 관계에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언어가 제아무리 풍부한 대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지칭한다고 할지라도 언어는 기호라는 사실이다. 우리들은 사고에 의해서 기호를 구성하며 또 한편으로 언어라는 기호는 우리들이 사고를 구성한다. 편의상 다음의 시를 인용하여 언어와 사고의 순환 관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

앞 강물, 뒷 강물

흐르는 물은

어서 따라오라고 따라가자고

흘러도 연다라 흐릅니다려.

김소월 <가는 길>

나의 생각은 "저 산에도 까마귀, 들에 까마귀"라는 기호를 구성한다. 이 기호는 정지한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사고를 다시금 구성하게 해준다. 그리하여 나의 사고는 "서산에는 해진다고 지저귑니다"라는 내용을 다시금 언어로 구성하게 된다. "앞 강물, 뒷 강물"로부터 "흘러도 연다라 흐릅니다려"까지를 보아도 언어와 사고가 순환적으로 상호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언어와 사고는 동일한 차원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2. 말과 생각

 

신화라든가 전설에 등장하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심지어는 바위까지도 말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식물과 동물 그리고 바위를 인간이 의인화시켰을 때 가능하다. 말이란 대상이나 사태를 생각에 의해서 구성할 때 비로소 의미있는 언어가 된다.

우리들은 인간의 사고와 언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사고는 대상과 사태를 구성하며 창조하는 힘으로서 대상과 사태에 의미를 부여하고 #2 그러므로 사고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구성되는 언어도 대상과 사태를 부차적으로 구성하여 형태화한다. 언어와 사고가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는 다음의 예를 보면 쉽사리 알 수 있다. "빵세"라는 불란서 말이 있다. "생각"이라는 우리말은 누구나가 알고 있다. 그러나 불어에 낯선 사람은 "빵세"라는 단어를 무의미한 것으로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이 단어에 있어서 언어와 사고의 긴밀성이 아직 드러나지 않고 은폐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어에 낯선 사람이 "생각한다"라는 동사를 불어로는 "빵세르"라고 하며 이것의 명사형인 "생가""빵세"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지금까지 은폐되어 있던 언어와 사고와의 관계는 명백히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어떤 언어이든 사고와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자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는 마로가 글로 이루어지며 말과 금은 우리들이 감각적인 "들음"""에 의해서 1차적으로 성립한다. 그러나 동시에 사고가 작용함으로 인하여 말과 글이 의미를 가지게 된다. 사고가 포함되지 않은 말이나 글은 죽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빵세"의 예를 보았는데 이 단어가 전혀 사고를 동반하지 않을 때는 의미를 상실한다. "빵세"라는 단어가 사고를 접할 때 "생각"이라는 의미를 비로소 가진다. 이러한 사실은 내가 가끔 교실에서 학생들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발견된다.

"김양, 내가 지금 손에 어떤 것을 들고 있네. 자네도 그것을 분명히 보고 있네. 자네는 무엇을 보는가?"

"책을 봅니다."

"김양, 좋아. 우리들은 누구나가 책을 본다고 말하겠지. 그러나 좀 더 생각해보면 책이라고 우리가 말할 때 그것은 ''이라는 글이나 ''이라고 말하는 소리일세. 내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이라는 글이나 소리 나는 말이 아니고 물건이네. 그렇다면 김양, 자네는 무엇을 보는가?"

"......"

우리들이 보는 것은 푸른색과 네모난 형태이다. 만일 만져본다면 딱딱하면서도 매끄럽다고 느낄 것이다. 펼쳐보면 인쇄된 글자들이 있다. 우리들의 사고는 이러한 요소들을 종합하여 "나는 지금 책을 보고 있다"고 결정한다. 우리들은 사실 색깔이나 형태를 볼 뿐이고 ""이라는 개념으로서의 언어는 사고에 의해서 구성된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먼저 인간의 사고가 있는 다음에 언어가 구성된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언어를 통해서 생각하고 또한 생각에 의해서 언어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언어 자체가 사고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언어와 사고는 순화 관계를 이룬다.

언어와 사고의 순환 관계에서 나타나는 것은 의미이다. 만일 언어가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언어이다. 의미는 동적인 것이다. "저 사람", "이 장미꽃" 등은 의미를 우리들에게 전달한다. 소리로 된 말과 쓰여진 글은 의미 전달의 매개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언어는 대상을 의미화하여 나 안에서 그리고 나와 남 사이에서 의미를 전달함으로써 인간 관계를 성립시키며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대화란 언어를 통하여 성립하는 의미 전달이다.

 

3. 대화

 

사람은 말하는 존재이다. 동시에 사람은 생각하고 행위 하는 존재이다.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말로 표현한다. 사람은 ""의 생각과 행위를 ""에게 말로 표현한다. 이때 말은 벌써 관계가 된다. "관계"로서의 말은 대화이다.

인간 사회에서 대화라는 관계에 의해 드러나는 현상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공감이다. 그것은 일체감이다. 또한 그것은 조화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 자신을 표현하고 또 표현하려고 애쓴다. 곧 대화를 하려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 안에서 일체감 내지는 조화를 얻으려고 한다. 이러한 태도는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이다. 그런데 일체감은, 곧 조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내가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고 하자. 만일 처음부터 끝까지 도음만 계속하거나 아니면 미음만 계속한다면 그것은 소나타도 아무 것도 아닐 것이다. 서로 전혀 상관없는 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룬다. 그것을 우리는 음악이라고 한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는 소화의 울림이다. 이 조화의 울림이 내 영혼의 들림에 일치할 때 나는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듣는다. 그저 피아노 소리만 듣거나 무작정 도취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음악이 아니라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의 본질이 "울림과 들림"의 음악성이라는 일체감 내지는 공감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화의 본질 또한 일체감 내지는 공감에 있다. 그러므로 ""만을 고집할 경우이거나 또는 ""만을 주장할 경우에는 대화의 형태가 일그러질 수밖에 없다. 대화가 자신의 모습을 상실하면 그것은 "소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한 송이 장미꽃이 있다고 하자. 잎과 줄기와 가시와 꽃이 건강할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운 장미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플라스틱으로 만든 한 송이 장미꽃을 우리가 아름다운 장미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제대로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 한 송이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그 본질을 생명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화야말로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꽃처럼 생명을 본질로 한다. 생명은 일체감이자 공감이다. 단지 형식에 불과하여 겉치레에만 그치는 말을 우리는 대화라고 하지 않고 "소리"라고 한다. 벌레가 우는 것을 벌레 소리라 하며 기계가 돌아가면서 내는 음을 기계 소리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도대체 어떤 사회에 살고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생명력 있는 대화"에 대한 절실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한마디로 우리는 물질문명의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이 물질을 더욱 발달시키고 금전이 금전을 더욱 풍요하게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피아노가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 붓이 한 폭의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실상 오늘날의 물질문명 사회에서 모든 것은 기술로 전락된 느낌을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물질을 위한 수단 내지는 기술이 된 느낌을 준다. 삶의 목적은 오늘날 과연 어디에 있으며 삶의 의미는 또한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삶의 의미를 그리고 세계의 의미를 체험하고 드러내기 위해서는 "자기반성"을 근거로 한 대화의 문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 대화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로 대화는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말이다. 두 번째 대화는 나와 너 사이의 말이다. 세 번째로 대화는 "세계 원리"의 표현이다. 첫 번째 의미의 대화는 일상적인 말이다. 이것은 "지껄임"이며 "지나침"이다. 지껄임과 지나침으로서의 말은 허위와 기만을 특징으로 가진다. 제아무리 조리가 있고 제아무리 질서 정연할지라도 어떤 이의 말이 내용을 결여하고 있으면 그것은 결국 지껄임이요, 지나침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동하는 대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나와 너 사이의 말은 반성이다. 나와 너 사이의 말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한다. 그리하여 나아가서 서로를 들여다보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도 나와 너를 넘어선 사회나 세계의 의미를 밝혀주지는 못한다. 그러기에 연인들 사이의 말과 우리들의 말은 서로의 이해를 안겨다주고 긍정적이며 달콤하기는 해도 냉정하지가 못하다.

대화의 본질은 "세계 원리"의 표현에 있다. 세계 원리의 표현이란 간단히 말해서 삶의 자기반성이다. 지껄임과 지나침으로서의 말이 가면을 벗으면 나와 너 사이의 말로 상승하며, 이것이 다시금 자기반성에 도달할 때 우리는 세계 원리의 표현인 대화를 체험한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원활한 대화에서 일체감을 소유할 수 있다. 원활한 대화란 조화로운 대화, 곧 생동하는 대화이다. 지껄임과 지나침으로서의 말에서 그리고 나와 너 사이의 말에서 가지는 우리의 의견은 흔히 잘못된 생각이기가 십상이다. 왜냐하면 이 두 단계에서 우리는 삶과 세계의 전체성을 보지 못하고 단순히 주관적인 내 세계 안에만, 아니면 주관적인 나를 정당화시킬 수 있는 "우리들의 세계" 안에만 머물기 때문이다. 자기반성이 아무런 계기도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못된 의견도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만날 때 비로소 자기반성을 향한 문이 열린다. 다시 말해서 부분적 피상적인 생각이 자기 전개를 하여 내면성 전체성을 향하여 눈을 뜰 때 삶의 의미와 세계 의미가 드러난다. 만일 우리가 대화의 본질이 자기반성에 있음을 알지 못하고 또한 자기반성을 향한 아무런 계기도 창조적으로 형성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무한한 수단으로서의 말에만 집착할 것이다. 곧 언제까지나 "지나침"으로서의 삶을 영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삶과 세계가 실로 모순에 가득 차 있음을 보고 경악하게 된다. 세계 원리의 표현으로서의 대화는, 곧 자기반성으로서의 대화는 늘 은폐되어 있고, 달변이나 능변, 곧 지껄임과 지나침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여진다. 어떠한 근거에서 이러한 현상이 가능할까? 왜 허위와 기만으로서의 달변과 능변이 대화의 행세를 버젓이 할 수 있는 것일까?

달변과 능변은 실로 이기심과 지배욕의 미화이다. 그것은 전체성과 조화를 보지 못하는 독단이다. 달변과 능변은 전혀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의견을 억지로 주관적인 틀에 이끌어들이려 한다. 그러기에 달변은 항상 내용보다는 겉치레를 더 아름답게 하기 마련이다. 달변은 아직 깨어나지 못한 자기 내면에서의 유희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것은 아무런 일체감을 불러일으킬 수 없는 "공허함"이다. 달변과 능변이 현실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형식과 겉치레가 화려한 때문이다. 달변과 능변이 현실을 지배하는 듯이 보이는 것은 형식과 겉치레가 화려한 때문이다. 달변과 능변이 참다운 대하가 되기 위해서는 형식과 겉치레 대신 내용과 생명력과 양심을 포함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분명히 "달변만이 좋은 의견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좋은 의견이란 참다운 사고이다. 사람의 존재 방식인 말은 대화로, 생각은 사고로 그리고 행위는 일로 나타난다. 이들은 각각 분리되지 않고 순환 구조를 형성한다. 따라서 사고와 대화가 없는 일은 죽은 일이다. 오늘날의 사회는 분업 사회이다. 기계적인 의미의 "분업"을 인간적인 의미로 전환시키는 분임제적 일로 순환시키는 곳에서 우리는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분임제의 일은 생동하는 대화를 내용으로 가지므로 폐쇄된 사회를 개방된 사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대화는 사람의 인격체적인 자기 전개이다. 자기 전개가 있는 곳에서만 이해가 가능하며 삶과 사회가 세계의 의미가 본질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 대화에 의해서만 사람은 세계에 대한 일체감 및 공감을 체험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화는 "관계"로서의 인간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부여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언어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4. 세계 구성과 말

 

하이데거에 의하면 "언어는 그 본질에 있어서 표현도 아니며 인간의 활동도 아니다." 이 말은 언어가 단지 형식적으로 정지되어 있는 껍질이 아니라 동적으로 의미를 간직하고 전달한다는 것을 나타내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는 말한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우리들은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도구를 제작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다"라는 표현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인간의 정의들을 모두 포함한다. 왜냐하면 말은 이미 생각 및 행동과 순환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왜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하여 인간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삶을 구성하며 나아가서는 세계를 구성한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은 언어의 집에서 거주한다>"

인간은 언어에 의해서 세계를 구성하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서 언어로 집을 만들고 그 안에서 산다. 이 말은 인간이 언어로써 대상을 파악한다는 뜻이다. 언어는 틀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어떤 것을 "나무"라고 언어화시키며 또 어떤 것을 ""이라고 언어화시킨다. 편의상 시 한 편을 예로 들어서 왜 언어가 존재의집인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서정주. -푸르른 날-

이 시에서 눈, , 꽃자리, , , 너 등이 모두 특정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정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은 각각의 대상이 고유한 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고유한 틀은 다름 아닌 "존재의 집"이며 동시에 언어이다. 고유한 틀은 언어라는 재료에 의하여 한 층 더 정교하게 꾸며진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그리운", "저기 저기 저" ... 등은 집의 모양을 구체적으로 장식한다. 이상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언어에 의하여 세계를 구성한다. 일단 세계가 구성되면, 인간은 관계 속에서 구성된 세계의 정보를 교환하면서 세계를 재구성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세계에 대한 인간의 체험과 표현과 이해의 순환적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들은 대상을 앎으로 인하여 대상을 특정한 틀(곧 언어)에 넣어 표현하고 따라서 대상을 전체적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대상의 체험은 곧 세계 구성이고 이 세계 구성은 표현에 의하여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전달되어 의사소통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언어의 사용이 부정확할 때 그리고 언어가 사고와 함께 조화를 이루지 못했을 때 #1 세계 구성이 불완전하므로 인간의 자기반성이 성취되지 못하고 #2 인간과 인간 사이에 대화가 제대로 성립하지 못하므로 현실적인 갈등이 심각해진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에 의하여 조화로운 세계 구성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인간 주체의 자기반성이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자기반성적인 주체로서의 인간에 의해서만 의미와 개성을 소유한 세계 구성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7장 자연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아름다움

 

1. 자연과 예술

 

우리들은 진리를 알고 선을 행하며 아름다움을 느낀다. 학문과 종교와 예술은 인간의 정신적인 삶을 구성하는 세 가지 세계이다. 여기에서 정신적인 삶이라고 하는 말은 일상적인 삶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삶은 하나의 전체적인 것이다. 전체적인 삶은 반복적인 것과 비반복적인 것으로 구분된다, 욕망의 본능에 따라서 매일 매일을 살아갈 때 그러한 삶은 반복적이며 일상적이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대부분의 삶은 일상적인 것에 물들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일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도 우리들은 변하지 않는 앎을 추구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학문의 세계를 구성한다. 또한 우리들은 세계의 근원으로서의 절대자에 대한 신앙을 가지려고 한다. 이때 종교의 세계가 성립한다. 그런가 하면 우리들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예술의 세계가 성립한다. 그렇다면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밝혀져야 할 것이고 다음으로 예술이 무엇인가가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둘에다 둘을 보태면 넷이다. 이것을 우리는 선하다고도 하지 않으며 아름답다고 하지도 않는다. 어떤 장관이 길거리의 거지를 똑같은 인격을 가진 인격체로 대하며 대화를 나눈다고 하자. 이것을 우리는 참다웁다고 하지 않으며 아름답다고 하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행동은 선한 행동에 속한다. 그러나 호수 가에 희고, 붉고 또한 노란색의 장미꽃이 활짝 피었다고 하자. 또한 아늑한 실내에 모짜르트의 피아노 소나타가 울려 퍼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우리들은 분명히 "아름다운 장미꽃"이니 또는 "아름다운 음악"이니 하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란 대상이 어떤 성격을 가지는가에 따라서 여러 가지 다른 조화된 느낌을 가지게 된다.

예컨대 내가 어떤 여인과 마주앉아서 대화를 한다고 가정해보자. 이 여인은 전형적인 한국 미인의 용모를 가지고 있으며 게다가 교양이 넘치고 천박한 맛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이 여인을 "우아한 여인"으로 느낀다. 이러한 경우의 아름다움은 우아미라 불리운다. 다음으로 숭고미를 이야기할 수 있다. 추사의 어떤 붓글씨 앞에 서서 이 붓글씨가 인간이 썼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경지를 보여준다고 하자. 이때 나는 숭고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다음으로 비장미를 들 수 있다. 고대 희랍의 비극이나 세익스피어의 비극에서 우리들은 비장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또한 풍자극이나 코메디 안에서 우리들은 해학미를 느낀다. 익살과 풍자가 비난과 욕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삶의 상황에 조화를 가져다줄 때 우리들은 해학미를 느낀다. 다음으로 추미를 꼽을 수 있다, 보통 아름다움과 추함은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추함이 아름다움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며 추함이 아름다움으로 승화될 때 우리는 추미를 느끼게 된다. 노트르담의 꼽추를 예로 들어보자. 꼽추는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에스메랄다를 사랑한다. 소설의 머리에서 우리는 꼽추의 일그러진 얼굴과 흉칙한 모습에서 아름다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추함만을 본다. 그러나 소설이 진행되는 사이에 꼽추의 한결같은 사랑과 에스메랄다의 무관심에 점차로 우리는 관심을 바꾸며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 비장미까지 느끼고 드디어는 꼽추를 더 이상 추하게 보지 않고 그에게 추미를 느낀다. 조화로운 느낌은 이처럼 대상의 성질 및 그 성질에 우리에게 어떻게 관계하느냐에 따라서 가지각색의 아름다움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아름다움은 크게 나눌 때 자연적 아름다움과 예술적 아름다움으로 구분된다.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함"의 뜻을 지닌다. 스스로 그러한 것의 아름다움이 바로 자연미이다. 그렇다면 자연미는 예술미와 대립되는 개념이다. 자연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설악산, 한려수도, 홍도 등의 경치에서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구름, , 나무 등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처럼 우리가 자연 대상으로부터 느끼는 아름다움은 자연미이다. 그러나 자연미와는 달리 인간의 의식이 현실적으로 자연을 변형시켜서 구성한 대상으로부터 우리는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예술미라고 일컬어진다.

인간은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며 그처럼 구성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인간이 세계를 조화롭게 구성하는 방식을 예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여기에서 다시 예술을 보다 쉽게 파악하기 위하여 내가 수업 시간에 학생과 나누는 대화를 인용해보기로 하자.

"우리는 인간의 의식 세계를 학문과 종교와 예술로 구분할 수 있는데 우선 예술을 놓고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그러면 어떤 사람을 예술가라고 할 수 있는지, , 송군, 이야기해보게."

"사회에서 인정하는 사람을 예술가라고 합니다."

"좋은 답이네. 예술가라고 하면 구체적으로 시인, 소설가, 음악가, 화가 등등으로 나눌 수 있네. 특정한 사회단체, 곧 소설가 협회와 같은 곳에서 나를 전혀 인정해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나를 멋대로 소설가라고 하지 못하며 남들도 나를 소설가라고 불러주지 않네. 그렇다면 여기 어떤 한국 시인이 있다고 생각해보세. 이 사람이 한국에서 시를 쓰며 시인으로 인정받다가 어떤 일로 해서 프랑스로 이민 가서 산다고 해보세. 이 사람은 프랑스 말은 전혀 못 하는 사람일세. 프랑스에서 이 사람을 시인이라고 인정할까?"

"한국 시인이라고는 인정하지만 프랑스 시인이라고는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답일세. 그러면 예술가는 반드시 사회가 인정해주어야만 예술가일 수 있을까?"

"......"

사실 모든 문제가 근원적인 물음에 도달하면 답을 찾기 힘들게 된다. 우리는 두 가지 차원에서 예술가를 이야기할 수 있다. #1 좁은 의미에서 특정 사회가 인정하는 예술가가 있으며 #2 넓은 의미에서 모든 인간을 예술가라 볼 수 있다. 김소월이나 서정주를 들먹일 때 그리고 김홍도며 김중업을 화가라 부를 때 이들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예술가들이다. 그러나 보다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누구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술가는 인간들 각자이다.

어린아이는 흥이 나면 노래를 읊조리고 노인도 마찬가지이다. 소년은 애타는 감정으로 그리움과 사모의 정을 편지에 담아서 등교 길에 한번 본 소녀에게 부친다. 그것은 이미 한 편의 시이다. 국민학교 1학년 꼬마는 아파트의 좁은 방 흰 벽에다 넓은 바다와 산과 구름을 제멋대로 그린다. 그것은 이미 한 폭의 그림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예술가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대상을 조화롭게 구성하며 그렇게 구성함으로써 아름다움을 느끼고 또한 아름다움을 누리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구성한다. 피아니스트의 예를 들어보자. 어떤 피아니스트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연주한다. 그의 연주 시간은 30분이 걸렸다. 그러나 30분의 연주 시간이라는 제한된 시간 안에서 피아니스트는 순간과 영원을 동시에 연주한다. 30분의 정해진 시간 속에서 피아니스트는 자신의 혼을 다하여 한 인간의 길고 짧은 삶을 연주하며 나아가서 끝을 알 수 없는 자연이 긴 세월을 연주한다. 피아니스트는 시간을 구성하며 시간을 창조한다. 그러면 화가는 어떤가? 어떤 화가가 유리창 만한 화폭에 산과 바다를 그렸다고 하자. 이 화가는 정해진 공간을 무한으로 구성하며 창조한다. 이렇게 볼 때 예술이란 인간이 그곳에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구성하는 세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2.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

 

여기에서 나는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소재로 하여 예술을 구성하는 인간의 두 가지 측면을 살펴보려고 하나. 다음의 글은 예술이 어떤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가를 잘 설명하여 준다.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으로 결합되어 있다." 니체는 아폴론적인 것은 ""으로 그리고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명정"으로 비유한다. 아폴론적인 것은 조용한 질서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꿈틀거리며 광란하는 운동을 나타낸다. 아폴론 신은 형식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단순히 논리적인 차원임에 비하여 디오니소스 신은 유기적인 삶의 힘을 지칭하는 동적인 차원을 타나낸다. 하나의 대상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다. 예컨대 장미꽃의 색깔과 향기, 형태는 외부적, 형식적인 것으로 아폴론적인 것에 해당한다. 그러나 장미꽃의 색깔을 빨갛게 만들며 향기를 내게끔 해주는 힘은 동적인 생명의 힘으로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에 해당한다.

아폴론은 수학적인 정밀함을 소유한 미술적 힘으로서 모든 대상을 형식적으로 나누어보며 대상에 질서를 부여한다. 즉 아폴론은 대상을 하나하나 개별화시키는 원리이다. 여기에 비하여 디오니소스는 대상들 전체를 하나로 통일시키는 내면적 삶의 원리로서 개별화를 파괴시킨다. 물론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비극의 두 요소이다. 니체는 비극의 형식을 구성하는 요소를 아폴론적인 것으로 보고 비극의 동적인 내용을 구성하는 요소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본다. 그리하여 그는 아폴론을 미술의 신으로 보며 디오니소스를 음악의 신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러한 니체의 입장을 모든 예술에 확장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술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된다. 디오니소스는 예술을 예술이게끔 하는 내면적인 힘이요, 아폴론은 예술의 표상에 해당한다. 니체가 말하는 표상은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것과 동일하다. 세계를 충동적이며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원인과 결과에 따라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으로 파악할 경우에 성립하는 것이 표상이다. 그러나 디오니소스는 예술을 구성하는 내면적 의지이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자면 "아폴론은 디오니소스의 집이다." 아폴론적인 것은 예술에 형식을 부여하는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예술에 동적인 내용을 부여해 준다. "모든 상징적인 힘들의 이러한 전체적인 모습을 벗기기 위하여 인간은 이미 상징적인 힘으로 자신을 상징적으로 언명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기표현의 정상에 도달하여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디튀람부스적인 디오니소스 숭배자는 오직 그 자신과 유사한 것에 의하여서만 이해되지 않는가! 원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지 않으며, 실로 그의 아폴론적인 의식이 오직 가면처럼 이 역동적인 세계를 그에게서 은폐시키는 것은 놀랍게도 그에게 전율이 뒤섞이는 것보다도 더 위대한 것이다."

우리들은 니체가 말하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예술을 구성하는 두 요소로 파악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을 구성하는 인간의 의식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는 형식을 부여하는 측면이요, 또 하나는 내용을 부여하는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떤 음악을 들을 경우, 음악 속에 들어있는 체험의 내용은 풍부하건만 형식이 부족한 것을 느낄 때가 있으며 그와는 정반대로 형식은 빈틈이 없지만 삶이 체험 내용이 빈곤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예술은 형식과 내용이 제대로 조화될 때 가장 아름다울 수 있고 따라서 우리가 그 앞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3. 아름다움과 삶의 목적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은 아름다운 시이다."라고 말할 때 시에 대한 나의 느낌은 이미 사고에 의하여 정리된 것이다. 어떤 느낌이 사고에 의하여 정리되면 그것은 이미 판단이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판단을 사실 판단, 가치판단 그리고 미 판단으로 구분한다.

보통 자연적 사실에 관한 앎의 문제는 사실 판단에 속한다. "수소와 산소가 화합하면 물이 된다", "비가 오면 땅이 젖는다" 등과 같이 주로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가져오는 사실을 규정하면 그러한 판단은 사실 판단에 속한다. 그러므로 사실 판단은 자연의 법칙을 기술하는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자연법칙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인간의 주관적인 느낌이나 믿음이 거의 작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들은 인과 법칙에 종속하는 자연현상을 사실 판단에 객관적으로 기술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현상에 관한 규정이 사실 판단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행동을 판단하는 규정은 가치판단이다. 사실 판단에서는 사실의 긍정이나 부정, 다시 말해서 사실의 참다움이나 거짓됨이 적용된다. 이에 비해서 가치판단에서는 행위의 선함과 악함이, 곰 행위의 참다움이나 거짓됨이 기술된다. 이에 비해서 가치판단에서는 행위의 선함과 악함이, 곧 행위의 옳음과 그릇됨이 기술된다. "네가 수재민을 위해서 기부한 행위는 선한 행위이다", "타인을 인격체로 대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이다" 등과 같이 행위의 가치문제를 규정하는 판단이 가치판단이다.

결국 선한 행위는 자유로운 행위이다. 그러므로 가치판단의 척도는 바로 자유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수재의 연금을 내거나 타인을 인격체로 대하는 행위가 선한 행위라면 그것은 바로 그러한 행위가 자유를 바탕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자유를 목적으로 삼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판단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판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법칙적인 자유와 자발적인 자유를 연관시켜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술이다.

우리는 예술이 곧 자연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예술이 바로 자유라고 할 수 없다. 예술은 자연적이면서 동시에 자유의 요소를 갖추고 있다. 예술의 형식은 자연적이지만 예술의 내용은 자발적인 자유이다. 예술의 자연적인 형식과 자발적 자유에 의한 내용의 결합은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그것은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 "신사임당의 우아한 난초 그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예술의 아름다움을 규정하므로 이 경우에 성립하는 판단은 미판단이다. 이상과 같이 볼 때 우리는 이론적 인식에 관한 판단을 사실 판단, 실천적 행위에 관한 판단을 가치판단 그리고 이론과 실천이 결합된 예술적 아름다움에 관한 판단을 미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다른 문제가 우리들 앞에 놓여 있다. 우리들은 맹목적으로 아름다움을 구성하며 또한 느끼는가? 우리들이 예술을 창조하고 감상하는 것은 식욕이나 성욕과 같이 기본적인 본능에 속하는 것인가? 이러한 물음은 정당한 물음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예술이란 이미 일상성을 순화시킨 정신세계의 창조 대상이기 때문이다. 예술의 정신적인 산물인 한에 있어서는 특정한 목적을 결여할 수 없다. 의식적인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행복이다. 인간은 학문을 통하여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며 종교를 통하여 선을 행하고자 하며 또한 예술을 통하여 아름다움을 구성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 여기 삶의 목적에 속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삶의 목적은 행복이며 행복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볼 때 갖가지 형태로 빛을 발하니 그것들은 앞에서 말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다. 이처럼 "하나가 여럿"인 이론은 율곡의 이일분수 이론을 살펴보면 쉽사리 이해가 될 수 있다. 율곡은 다음처럼 말한다. "일본지리는 이의 체이고 만수지리는 이의 용이다." 율곡은 세계의 근원인 태극을 본체와 현상으로 구분한다. 본체는 움직임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현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하나의 본체는 그 쓰임새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현상으로 나타나고 반대로 수없이 많은 현상들은 하나의 본체를 근원으로 가진다. 그르므로 "물은 그릇을 따라서 모나기도 둥글기도 하며 허공은 병에 따라서 작아지기도 하고 커지기도 한다."라는 말은 율곡의 이일분수설과 이통기국론을 잘 대변해준다. 이통기국론이란 이는 두루두루 통하며 기는 국한시킨다는 말이다. 우리는 율곡의 말을 따라서 삶의 목적인 행복은 하나이지만 그 현상은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술에 관하여 말할 때, 아름다움을 결여한 예술은 단지 형식적인 예술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이 예술적인 아름다움을 결여한 삶은 삶의 목적을 상실한 삶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장 종교에 관한 명상

 

1. 세계의 근원

 

스위스의 바젤에서 유럽 니체 철학회가 열리고 있을 때 뷔르츠부르크 대학의 교육학 교수 뵘이 연구 발표하는 중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하던 것으로 기억난다. "요사이 학생들은 수업에 성의가 없으며 가치관도 부족하고 미래에 대한 설계도 없다. 그러므로 교육하는 입장에 서 있는 교수들은 보다 더 강렬한 성의를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겠다." 뵘의 발표가 끝난 후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그에게 했다. "물론 가르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돌맹이 한 개, 한 포기의 잎새에도 무궁무진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요사이 학생들이 왜 그러한지를 우리가 먼저 알고 배우면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나의 이 말에는 다분히 동양적인 색채가 들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샤비니즘이든 토테미즘이든 간에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들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서구의 분석적인 과학 문명이 판을 치는 지금 어쩌면 우리들에게는 자연과 하나가 되려는 욕구가 더 강한 지도 모르겠다. 우리네 조상들은 자연을 고향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산과 강과 바다를 혹은 외경의 마음으로 혹은 친근한 마음으로 숭배하고 돌보아왔다. 인간은 누구나 눈에 보이는 현상 세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묻기 마련이다.

우리는 오늘날에도 주변에서 산신령을 믿거나 용왕님을 믿는 모습을 드물지 않게 살필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갑작스런 일을 당했거나 당황했을 때 "하느님 맙소사!"라고 소리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재난을 당했을 때 "하느님 우리 아들의 병을 꼭 낫게 해주십시요"라고 빈다. 이 경우 하느님은 #1 직접적으로 하늘을 의미하기도 하며 #2 간접적으로는 세계 근원을 뜻한다. 고대인들에게는 하늘이 아마도 외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해와 달과 구름이 있으며 바람을 일으켜 사계절이 있게 해주는 하늘이야말로 모든 것을 있게끔 하고 삼라만상을 좌우하는 세계의 근원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점차로 인간의 의식에는 보이는 현상으로서의 하늘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 근원이 삶을 좌우하는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 맙소사!"라든가 "하느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할 때의 하느님은 눈에 보이는 저 높은 하늘보다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근원을 뜻할 것이다. 고대의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현상을 신비롭게 생각하였으며 이러한 자연현상의 근원 내지 원인이 무엇인지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희랍이나 인도, 중국 등지에서는 삼라만상을 이루는 요소들을 물, , , 공기 등이라고 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물이 자연 세계를 만드는 근원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살아 있는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모두 물로 구성되어있으며 어디에나 흔한 것이 물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공기 과연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았다. 공기가 희박해지면 불이 되고 반대로 공기가 농축되면 수증기, , 흙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후에는 물, , , 공기의 네 요소가 만물을 만드는 원인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서 구체적인 감각적 앎으로부터 추상적인 사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서양에서는 우주 만물을 잊게 해주는 근원을 정신이라고 보는 견해가 생겼으며 중국에서는 태극이나 도를 만물의 근원이라고 보게 되었다. 이러한 견해는 눈에 보이는 원인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원인을 추구하려는 합리적인 생각을 동반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을 비롯하여 모든 현상들을 서로서로 의존하며 존재하는 존재자로 보게 되고 존재자들을 있게 해 주는 원인을 존재 자체 또는 존재로 보게 되었다. 서로서로 의존하는 것들이 존재자 임에 비하여 모든 존재자들의 원인인 존재는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으므로 실체라고도 일컬어진다. 세계 근원으로서의 정신이나 이성 또는 태극이나 도는 아리스토텔레스나 쿠자누스가 말하는 미인의 비유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어떤 장소에 아리따운 미녀가 있고 그녀의 주변에 수없이 많은 젊은이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미녀는 어떤 남자에게도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성들은 누구든지 혹시나 그 미녀가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을른지 또는 어떻게 하면 그녀의 사랑을 독점할지를 곰곰이 생각하며 들뜬 가슴으로 동요하게 될 것이다. 미인의 젊은 남성들을 전혀 움직이게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젊은 남성들은 모두가 크게 동요한다. 이 예를 보면 독립적인 실체와 실체에 의해서만 현상 세계에 있을 수 있는 존재자들의 의미 및 관계를 알 수 있다.

존재와 존재자의 문제를 탐구하는 분야를 넓게는 형이상학이라고 하며 좁게는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구체적으로 현상 세계에 있는 존재자들의 근원인 존재를 추상적 사고에 의해서 탐구하고자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세계근원을 절대자로 신앙하는 경향을 본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다. 이 경우 세계근원은 존재 자체가 아니라 전지전능한 신으로 전환한다. 존재론적인 존재 자체는 종교론적인 신과 동일한 것으로 그것은 바로 세계의 근원이다. 그러나 이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의 대상이다. 존재론적인 존재는 추상적 사고의 대상이며 종교적 신은 신앙의 대상이다. 다음절에서 우리는 종교의 일반적인 특성을 살피면서 특히 종교 문제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살펴보게 될 것이다.

 

2. 현대와 종교

 

현실은 인간 의식의 표현이다. 현실은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과학, 종교 등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들 다양한 현실의 모습은 서로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와 세계를 형성한다. 이들 현실은 바로 인간의 삶을 구성한다. 해마다 우리를 괴롭히는 가뭄과 물난리는 자연만의 파괴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만일 수백 년 전부터 산과 물에 대한 전략을 일과성 있게 꾸준히 밀어왔더라면 가뭄과 물난리는 어느 정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가뭄과 물난리는 우리들의 의식의 일부를 반영한다. 정치, 경제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접하고 있는 복잡하고 산만한 종교적 현실 역시 우리들의 의식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경우 다양한 현실의 모습들 가운데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종교적 현실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이라는 전체적 현실을 표현하는 가장 내면적이고도 근원적인 의식은 역시 종교적 의식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의식이나 예술적 의식에 앞서서 종교적 의식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 의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신화로부터 출발하여 이성의 세계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인간의 모든 삶의 형태는 근원적으로 신화와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점들을 미루어볼 때 종교적 의식은 한 사회 집단과 한 국가의 현실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들이 지금 종교의 문제점을 해결하여 핵심적인 내용을 얻으려 한다면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현실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들이 현학적인 철학책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공허한 개념들만을 길게 늘어놓거나 또는 단순히 무의미하게 개념을 분석하기만 하는 작업은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체험하는데 전혀 적합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직접적인 삶에서 전개되고 있는 종교적 현실을 구체적인 바탕 위에서 음미하고 반성함으로써 삶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그러한 종교적 현실을 표현하는 종교적 의식의 본질적 구조를 해명할 수 있다. 동시에 우리들은 미래 지향적인 차원에서 자기 창조적, 자기반성적인 종교적 의식의 자유와 자발성에 대한 보장을 획득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내면성을 무시한 종교는 단지 형식으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적 역사적으로 우리의 삶이 현실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장소는 20세기 후반의 한반도이다. 이 장소는 무수한 고난과 고통의 역사를 내포한 현대의 바람을 숨 쉬고 있다. 현대라는 개념은 일반적으로 산업사회, 물질문명, 이데올로기 집단 등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측면을 가진다고 볼 수 있기는 해도 오히려 부정적인 측면을 훨씬 더 강하게 포함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현대를 좌절, 소외, 인간성 상실의 시대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오늘날의 철학적 관심에서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종교적 현실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특히 #1 사업사회 안에서의 종교의 산업화 #2 물질문명 안에서의 종교의 도구화 #3 이데올로기 집단 안에서의 종교의 정치화 등이 우리가 직면하는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부정적인 현상은 종교의식, 다시 말해서 신앙심이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일상적 의식으로 전락하는 것을 뜻한다. 일상적 의식으로 변모해버린 종교의식이 나타내는 종교적 현실은 질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양적인 형식만을 소유하게 된다. 양적인 것은 집단적인 크기만을 자랑으로 여기며 언제나 측정 가능한 외부적 대상의 성질을 가지기 때문에 심원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수단으로 종속할 위험을 안고 있다.

우리들의 직접적, 구체적인 현실에 있어서 불교, 유교 그리고 기독교는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와 가치를 던져주고 있는가? 이들 종교가 나타내고 있는 현실은 역사, 지리적으로 무수한 모순과 갈등의 고통을 안고 있는 오늘 우리들의 삶에 과연 미래지향적인 방향 설정을 명확히 지시하여 주고 있는가? 어떤 특정한 종교적 현실이 결핍된 부정적 신앙심으로 가면적인 종교의식을 바탕으로 삼고 지나칠 정도로 극단적으로 사회화하거나 산업화하는 경향은 없는가? 또는 정치, 경제적인 도구나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는 경향은 없는가?

신앙은 원초적인 종교의식이다. 그러나 종교의식이 전체적으로 활짝 전개되지 못하고 단지 은폐되어 가능성만으로 머물러 있을 경우 종교가 산업화, 정치화, 사회화하는 경향은 거짓된 종교의식으로 나타나서 부정적인 그리고 결핍된 허위의 종교적 현실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와 같은 종교적 현실이 그럴듯한 가장 강한 주장과 함께 보장하는 미래 지향적인 삶은 자연히 헛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조화가 온갖 찬란한 색깔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싱싱한 내음과 생명을 결여하고 있는 것과도 같다.

현대인, 특히 오늘 이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우리들 현대인은 이미 오래전부터 본래적인 삶의 터전을 벗어나 고난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몽고와 중국과 일본의 잦은 침략 그리고 내부에서 일어난 무수한 정변과 사화 등은 어쩔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우리들 스스로의 의식이 불러일으킨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불교와 유교와 기독교가 지나치게 현실과 타협했던 역사적 사실 역시 우리들의 정신적 삶이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질서와 조화를 그리고 미래와 현재를 나아가서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보장해 줄 수 있는 종교적 현실과 이러한 현실을 전체적으로 표현해주는 내면적인 성실한 종교의식에 대한 격렬한 동경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의식인 신앙은 오직 주체적 인간의 자유와 자율에 의해서만 질서 있는 종교적 현실을 구성하고 창조하며 표현할 수 있다. 결핍된 그리고 부정적인 종교의식을 극복하고 전환시켜서 순환시키는 것이 절대적인 세계 근원에 대한 외경심 내지는 신앙을 내용으로 삼는 종교의식의 본질적인 과제이다. 이러한 과제는 결국 인간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주체적인 인격으로서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단할 때 성취될 수있는 성질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아직도 긍정적, 미래 지향적인 삶을 계획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정신적 요인들 중의 하나는 역시 불교, 유교 및 기독교적인 원초적 종교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또 우리들은 지나치게 많은 문제점들과 모순과 갈등이 누적되어 있는 지금 이곳의 우리들 스스로의 현실을 바라볼 때 종교에 관한 원초적 의식에 의하여 우리들의 지나간 역사적 현실이 얼마나 순화의 과정을 거칠 수 있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들 자신이 주체적인 인격으로서 과연 능동적으로 신앙을 순화시켜 왔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가까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볼 때 우리는 천주교가 여러 가지 난관을 극복하고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미래지향적인 삶의 조망을 던져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동시에 신교도 비록 천주교보다는 시대적으로 약간 뒤졌지만 일본의 지배 아래서 그리고 해방 전후와 6.25이후 오늘날까지 우리들의 삶에서 긍정적인 차원을 지향하여 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70년대로부터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부수적인 여건과 아울러 80년대 들어서면서 특히 우리들 주변에 거짓된 각양각색의 종교의식이 종교의 가면을 쓰고 산업화, 물질화, 이데올로기화에 편성하고 있는 경향을 우리들은 명백히 대할 수 있다. 우리들은 가까운 역사와 주변의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지금 이곳에서 종교가 인간의 삶에 대하여 가지는 의미를 분석하고 고찰함으로써 우리들의 종교의식을 보다 더 본래적인 것으로 지양시킬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원초적인 종교의식으로서의 조화 있는 신앙으로 순화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종교의식으로서의 신앙은 도구처럼 급속한 시간적 차원에서 인위적으로 제멋대로 제작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비록 유한한 시간적 차원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난다고 할지라도 인격의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의식에 의해서 창조되며 구성된다. 불교, 유교, 기독교의 경전에 나타나 있는 종교적 의식을 보더라도 그것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종교적 의식은 장구한 역사를 거쳐서 의식의 전개와 함께 꽃피우기 마련이다.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구성되는 종교의식이 은폐될 때 우리들은 스스로의 인격으로부터 도피하여 산업사회, 물질문명, 이데올로기 집단 속으로 들어가서 그 속의 한 요소 내지는 부속품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원초적인 종교의식을 망각하고 상실할 경우 인간은 더이상 자유와 자율에 의하여 행위 하는 인격 주체이기를 거치고 "무관심하게 지나쳐버리는 개인"으로 만족해 버리고 만다. 진지한 신앙심이 아니라 정치적 또는 경제적 목적을 위하여 교회에 나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과 종교와는 사실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다. 오늘을 절박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어떤 공간,시간적인 지점에 "있는지" 그리고 우리들이 "무엇인지"를 근원적으로 해명하여 참다운 인격 주체의 전체적인 삶을 구성하기 위하여 우리들은 현대인에게 있어서의 종교의 의미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종교는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인간의 삶을 좌우하는 정신적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3. 종교의 역할

 

인간의 행위가 목표와 방향을 상실할 경우 사회와 역사는 방황과 혼돈에 물들기 마련이고 따라서 좌절과 몰락 및 후퇴가 삶을 지배하게 된다. 사회와 역사만이 아니라 한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이 해야할 일을 망각하고 매일같이 노름과 음주를 계속한다면 그 결과는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앞에서 말한 인간 행위의 목표와 방향은 내면적, 유기적, 전체적인 목표와 방향을 지시한다. 제아무리 확고 부동한 목표와 방향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외형적이요 형식적인 것으로 그치고 만다면 그러한 목표와 방향은 인간의 삶에 하등의 가치나 의미도 부여해 주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가 확실한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여 놓고 전혀 실천적인 행위를 행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목표와 방향은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다.

넓게 현대 사회라는 전체적 입장을 염두에 둘 경우 그리고 좁게는 한국의 현실적인 종교의 위치와 역할을 돌이켜볼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한 느낌과 생각을 가지게 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어떤 특수한 종교의 교리나 의식에만 절대적으로 충실한 입장에 선다면 그때는 별다른 큰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우 우리들은 불교나 기독교의 어떤 한 종교를 맹신함으로써 다른 것을 보살필 여지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사태를 근원적으로 파악하고 탐구하기 위해서는 설령 어떤 특수한 한 종교를 신봉한다고 할지라도 종교 일반에 관한 보편적 필연적 요소를 추구하고자 하는 마음가짐을 지니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의 본질 및 근원에 관한 근본적인 탐구를 기초로 해서만 어떤 특수한 하나의 종교도 보편적이고 합리적인 바탕을 소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에 종교에 관하여 우리들이 일상적인 삶의 도처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현상을 가지고 몇 가지 물음을 던져 보기로 하자. 물론 여기에서 내가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종교의 종파나 집단을 지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일반적인 경향을 고찰하기 위한 것이다. 우선 어떤 종교 집단 및 그것을 이끌어나가는 이들이 어떤 교리를 근거로 삼고 있는가? 말하자면 보다 더 성숙하고 반성적인 교리인가 아니면 아직도 자연적인 성격을 여전히 띤 교리인가? 다음으로 한 종교는 어떤 전통을 소유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어떤 교리에 관한 물음과도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어떤 특수한 종교에 있어서 종교 정신의 역사적 배경이라는 의미를 결여한 우연적, 순간적인 감정과 선동을 근거 삼는 요소는 없는 것인가? 세 번째로는 한 종교는 어떠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가? 인간과 세계의 근원인 절대자에 대한 속죄와 사랑 및 자비의 의식을 소유하는가 아니면 단지 현실적 구체적인 인간으로서의 한 특수한 개인을 신격화, 절대화하는 것은 아닌가? 넷째로 종교는 공적인 사회나 국가에 대하여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대부분의 사이비 종교는 주관적, 독단적인 교리를 가진다. 어떤 사이비 종교는 물질, 육체적인 만족을 최대한으로 보장한다는 교리를 내세운다. 아니면 어떤 유사 종교는 유일한 인간을 초월하여 신선이나 선녀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주장한다. 이러한 교리는 인간성을 무시한 공허한 독단에 불과하다. 그러기에 첫 번째 물음을 던져본 것이다. 많은 유사 종교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전통을 날조하고 있다. 불교나 유교 또는 기독교의 이론들을 적당히 혼합하여 자기네 전통을 세우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역사의 전개와 함께 의식이 점차로 성숙함으로 인하여 종교의 전통이 확립될 수 있는 것이지 적당히 여러 이론을 혼합한다고 해서 타당한 전통이 갑자기 세워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종교적 정신이 점진적인 전개에 의하여 성숙한 전통은 자연적으로 어떤 한 종교에 고유한 의식을 구성해 주기 마련이다. 어떤 유사 종교에서는 불교, 유교, 기독교의 의식을 뒤범벅 하여 가장 완전한 의식인 것처럼 허풍을 떤다. 그러한 유사 종교는 그만큼 절대자에 대한 신앙의 전통을 결여한다. 따라서 세 번째 물음이 던져질 수 있다. 다음으로 네 번째 물음을 살펴보자. 대부분의 유사 종교는 공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공적으로 인정을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종교가 인간의 신앙심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소수의 특수한 집단만이 공감을 가지는 유사 종교는 그러므로 진정한 종교의 범위를 이탈한다.

나는 앞에서 종교의 일반적 현상에 관하여 몇 가지 물음을 던지고 그러한 물음을 제기하게 된 근거를 간단히 해명하였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들의 종교는, 그것이 기독교이든 불교이든 이슬람교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부정적이며 일상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많이 소유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가 부정적, 일상적인 측면을 향하여 극단적인 방향으로 전환할 경우 인간은 결국 미래지향적, 자기 결단적인 인격체로서의 인간성을 상실하고 한낱 개인 및 수단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신문지상을 통하여 우리는 신자 몇 명이 있는 교회는 얼마만큼의 액수에 거래된다는 기사를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교회는 전통적이며 정상적인 교회는 아닐지라도 종교가 지나치게 세속화하는 현상을 그러한 사실에서 엿볼 수 있다. 이제 우리들의 주제에 접근하기 앞서서 잠시 헤겔의 말을 인용해보기로 하자. "종교의 대상은 철학의 대상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객관성 자체에 있어서의 영원한 진리이다.. 즉 그 대상은 신이며 신 외의 아무 것도 아니요 신의 드러남이다. 철학은 세속의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지 않은 것의 인식이다. 또한 철학은 외부적인 양과 경험적 존재 및 삶의 인식이 아니라 영원한 것, 신인 것, 신의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것의 인식이다. 왜냐하면 이 본성은 계시되고 발전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철학은 종교를 드러내면서 자신을 드러내고 또한 자신을 드러내면서 종교를 드러낸다." 헤겔의 이러한 말은 얼핏 읽어서 이해가 가지 않는 이러한 개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헤겔의 이 말에서 종교와 철학이 서로 전혀 상관없이 절대적으로 단절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으며, 나아가서 동일한 차원에서 고찰될 수 있다는 암시가 은연중에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종교와 철학 양자는 단순히 일상적, 반복적인 삶의 양상이 아니라 일상성과 반복성이 자기 순화를 거쳐서 순화되고 성숙한 세계를 뜻하기 때문이다.

종교가 절대자에 대한 고도로 순환된 인간의 느낌과 행위를 내용으로 삼는다면 왜 그러한 종교가 종교 일반의 현상에 있어서 오늘날 바탕과 방향을 상실하고 있는지를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현실적인 종교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종교의 일반적, 필연적, 보편적 근거를 제시하는 일이 종교 철학의 과제이다. 왜냐하면 오직 현실적인 어떤 특정한 종파의 교리나 의식만을 고집하고 나열하는 처사는 신앙다운 신앙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인 신념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가 개인적인 신념에만 집착할 때 그것은 개방된 종교가 되지못하고 인간과 세계의 본질 및 근원을 은폐시키는 폐쇄적인 종교가 되기 때문이다. 근원적 원리가 폐쇄될 때 종교는 자신의 본질을 전개시키지 못하고 형식의 틀 안에서 질식하고 만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보는 유사종교나 또는 일부 교회에서 이러한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오직 자기네 종교만이 참다운 구원을 약속하는 유일한 종교이며 다른 종교 또는 옆에 서 있는 다른 교회는 구원의 길을 이탈하였다고 주장하는 입장은 종교의 보편성을 상실한 것이다. 보편적인 신앙만이 참다운 종교의 내용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종교의 위치와 역할은 어떤 것인가? 현대 사회나 종교, 이들은 모두 한마디 말로 간단히 정의될 수 있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현대 사회 그리고 종교라는 개념은 우리가 임의적으로 취급할 수 있는 눈앞에 뚜렷이 보이는 경험, 감각적 대상이 아니라 어떤 다른 존재보다도 복잡한 인간과 그의 근원을 중심으로 삼는 개념이다.

그렇긴 해도 이들 두 개념의 근원적인 차원을 고찰할 경우 우리들은 현대 사회에서 차지하는 종교의 위치와 역할을 구성적으로 체계화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은 현실적, 내면적, 유기적, 동적인 차원에서 종교의 역할이라는 문제를 구성할 수 있다. 너와 나를 포함하는 우리들 모두는 "지금" 살고 있다. "지금 "을 우리는 현대라고 부른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장소는 현대의 산업사회이다. 현대의 산업사회를 날카롭게 바라볼 때 우리는 그 특징을 "과학적 정보""기술적 수단"에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심지어 우리들의 정신 활동마저도 과학적 정보와 기술적 수단에 의한 생산관계 및 생산구조에 예속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매일매일 신문과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하여 어디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새 기술에 의해서 어떤 상품이 나왔는지에 대한 정보를 우리들은 끊임없이 얻고 있다. 그러나 비록 현대 산업사회에서 정신활동과 인간성이 소외된 것처럼 보인다고 할지라도 다시금 긍정적인 삶의 전환을 시도함이 바로 인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시도가 없다면 인간의 삶과 세계는 공허한 것이 되겠기 때문이다.

앞에서 잠시 말한 현대인의 인간성의 상실은 오늘날 우리들이 저개발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선진국이든 간에 어디에서나 직접적으로 접하는 하나의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상황과 연관시켜볼때 가장 가까운 우리들의 주변에서 종교는 과연 어떠한 양상을 띠고 있는가? 비록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는 할지라도 인간의 사회화만 집단적으로 이행될 경우 사회는 공동사회의 형태를 상실하고 단지 이익사회의 형태만을 취할 우려가 있다. 자유와 자율을 지닌 인간성이 무너지고 사회집단에서 인간이 단지 기계적인 기능만을 수행한다면 인간의 미래는 인간성 상실 밖에 다른 것을 가져올 수 없다. 현대 산업사회는 고도의 이익사회이며 여기에서는 기독교나 불교나 이슬람교를 막론하고 종교마저도 이익사회의 중요한 요인을 이루고 있는 실정을 엿볼 수 있다. 현대 산업사회가 단지 정치, 경제, 사회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이익사회의 형태를 취할 경우 인간은 더이상 인격체이기를 포기하고 단지 사회의 수단에 불과한 개인으로 남게 된다.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는 종교 또는 인간의 삶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원초적 신앙이 아니라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에만 관계하게 된다.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종교를 #1 교리 #2 전통 #3 의식 #4 공공기관, 말하자면 사회 내지 국가와의 관계에서 고찰할 수 있다. 종교를 이러한 측면에서 고찰하여 종교의 근원적 현상 그리고 더 나아가서 종교의 근본원리를 밝히는 탐구가 바로 종교 철학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종교철학이란 인간의 주관성에 의해서 종교의 근원 세계를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관성이란 항상 변화하는 개인적 주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보편적, 필연적인 인간의 자기반성을 의미한다. 창조적 구성이란 삶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탐구이다.

만일 현대사회가 인간성의 상실을 의미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종교의 위기를 뜻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항상 종교는 인간의 주체적인 내면에서 근원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상 종교는 인간에게 있어서 삶의 가장 의미심장한 한 방식임에 틀림없다. 한 인간에게 있어서 종교는 그의 전 삶의 의미와 가치 및 방향을 좌우하는 요인이며 사회나 국가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종교란 간단히 말하자면 내면적인 인간 의식의 전개이다. 종교가 지나치게 사회화하여 은폐되느냐 아니면 인간의 자유와 걸맞게 개방되느냐 또는 종교가 정지된 상태로 남아있느냐 아니면 동적 유기적인 상태로 전진하느냐에 따라서 종교의 교리, 전통, 의식을 위시하여 인간과 사회와 국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미를 소유할 수 있다. 종교의 역할을 명백히 밝히기 위해서는 종교와 신학 및 철학의 개념을 보다 분명하게 해결할 필요가 있다. 종교라는 개념과 신학이라는 개념에 관해서 우리는 막연하고도 일상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좁은 의미에서 종교와 신학을 구분할 경우 종교는 앞에서 말한 대로 교리, 전통, 의식, 공적기관에 의해서 인정받은 신앙의 내용을 갖추고 있다. 여기에 비하여 신학은 특정한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종교를 이론적,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이다. 신학이라고 하면 흔히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좀더 넓게 말하면 신학은 종교 신학이 된다. 헤겔은 그의 초기 저서인 <민족 종교와 기독교에 관한 단편, 17931794>에서 객관적 종교와 주관적 종교로 구분하여 본다. 그는 인간의 형식적 지식의 뒷받침이 되는, 다시 말해서 추상적 논리가 주로 작용하는 종교를 객관적 종교라고 한다. 이것은 신학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신앙에 의해서 나와 절대자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절대자인 신은 탐구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이에 반하여 주관적 종교는 느낌과 행위에 직결된 것으로 세계근원의 내면에 들어가 생명력을 가지며 외부세계에 내면적 생명력을 불어넣는 종교이다. 이렇게 볼 때 신학은 객관적 종교에 그리고 신앙은 내면적인 느낌의 움직임이다. 나는 이제 종교 철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배르그송과 쉘링을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베르그송은 성숙한 그의 후기 저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종교를 정적 종교와 동적 종교로 구분한다. 정적 종교란 이미 형성되어 있는, 곧 사회제도 안에 일상적으로 시인되고 있는 종교이다, 그리고 동적 종교는 정적 종교에 생명력과 활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종교를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동적 종교는 종교에 있어서의 역동적, 창조적인 요인을 일컫는다. 베르그송을 다시 해석하자면 종교는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정적인 것으로 사회제도 안에서 굳어진 것이며 다른 하나는 동적인 것으로 굳어진 요소를 타파하고 생명을 환기시켜 주는 것이다. 이러한 종교의 이중적 성격을 우리는 종교의 역사와 아울러 우리 주변에서 접할 수 있다. 퇴폐한 카톨릭에 대항하여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적 종교를 동적 종교가 개선하려고 한 노력을 볼 수 있다. 우리 주변의 타락한 불교나 기독교를 부흥시키고 소생시키려는 움직임도 볼 수 있다. 앞에서 본 베르그송의 탐구 자세는 곧 인간과 세계의 본질 및 근원을 은폐로부터 개방으로 전환시키려는 삶의 유기적 구성이다. 그의 견해는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종교의 역할에 하나의 긍정적인 조망을 우리들에게 안겨다 준다.

우리들이 직접 접하고 있는 현대 사회의 종교의 역할에 다시금 또 하나의 긍정적인 조망을 부여하기 위하여 이제 잠시 쉘링의 종교 철학을 살펴보기로 하자. 쉘링은 그의 말년 저서의 <신화 철학><계시철학>을 통하여 자신의 종교 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헤겔이 그의 종교 철학에서 종교를 자연종교, 예술종교, 절대 종교의 단계로 구분하여 종교의 변증법적 발전단계를 논하고 있음에 비하여 쉘링은 신화와 계시에 관하여 종교의 성숙과정을 논한다. 근본적으로 볼 때 쉘링과 헤겔은 종교의 발전과정을 변증법적 역사 과정으로 고찰하는 점에서 서로 별 차이가 없다. 또한 쉘링이 종교를 신화로부터 계시로 전개시키고 있는 점은 헤겔이 종교를 자연종교로부터 절대 종교로 전환시키고 있는 점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보면 베르그송과 쉘링 및 헤겔 모두는 인간의 원초적인 의식의 발전과정이 종교의 발전단계에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언어와 사유와 행위는 정신적인 삶의 차원에서 동일성을 유지하면서 순환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언어는 사유를 그리고 사유는 또한 행위를 필연적으로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말하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행동한다. 이렇게 볼 때 쉘링이 종교의 성숙과정을 신화와 계시로 구분하여 보고 있는 점은 순환적인 변증법인 과정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여 준다. 왜냐하면 언어와 사유 및 행위가 본질적으로 삶과 세계의 근원에 관계하는 한에 있어서 언어와 사유와 행위가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그것은 신화의 단계에 있으며 비로소 의식이 완전히 현실적으로 자기 전개를 할 경우 언어와 사유와 행위는 개방되어 인간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계시에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쉘링이 뜻하는 신화는 절대자의 불완전함이 나타남이며 그가 말하는 계시는 우연적 신비적 사건이 아니라 절대자, 곧 삶과 세계의 근원 원리 자체의 드러남이다. 그러므로 일상적인 의미에서 하늘로부터 무슨 음성을 들었다거나 등줄기에 축복의 불꽃이 내려꽃히는 것을 체험했다고 하는 등의 이야기는 "계시"와는 전혀 상관없는 개인적인 상상에 불과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나 칸트가 말하는 인간 이성에 의한 신 존재의 증명은 재고찰될 여지가 있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절대자 신의 존재는 유한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증명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시는 이성적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을 가능하게 해주는 근거이다.

쉘링이나 헤겔 그리고 베르그송은 종교 철학에 논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기독교를 가장 성숙하고 완성된 종교, 곧 개방된 종교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인간 의식의 조화, 성숙, 그리고 완전한 자기 순화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경우 기독교가 또는 불교가 아니면 이슬랍교가 다시 말해서 어떤 특정한 종교가 가장 이상적,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은 독단과 편견을 면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특수하게 제한된 역사적, 지리적 전통을 배경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종교의 양상도 그 현실적인 모습은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불교나 이슬람교보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종교라고 주장하는 것 역시 #1 불교나 이슬람교의 내면적 측면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잘 모르기 때문이며 #2 기독교의 전통에만 젖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불교가 기독교보다 훨씬 더 종교적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어떤 종교이든 간에 교리와 전통 및 의식과 공적인 관계에서 어느 한 측면에만 지나치게 치우칠 때 그것은 개방된 창조적 종교가 되지 못하고 폐쇄된 형식적 종교의 성격을 띤다. 오늘날 우리들이 주변에서 흔히 대하는 유사종교들은 헛된 교리와 허황된 의식을 고집하는데 그러한 것은 폐쇄된 형식적 종교를 가장 잘 대변한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 종교가 "과학 정보와 기술 수단"의 지배 아래에서 단순히 기구화, 집단화할 때 종교의 역할은 지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어떤 특정한 교회에는 옷차림마저 화려한 사람들이 대부분 자가용을 타고 예배드리러 오므로 가난한 사람들은 감히 드나들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사회화와 사회의 인간화가 조화를 이룰 때 비로소 종교도 참다운 내용과 형태를 회복하기 마련이다. 이때 종교는 교리, 전통, 의식 및 공적 관계의 여러 가지 측면에서 내면적인 깊이를 가진 종교로 등장할 수 있다. 만일 종교가 오직 체계적인 신학으로 대치된다면 종교는 생명감 넘치는 신앙을 상실하여 형식화하며 의식만으로 대변될 때 사회의 단순한 제도로 고정되기 쉽다. 특히 유교는 이조를 통하여 사회제도를 형식화한 점이 많다. 또한 종교가 전통만으로 대변될 때 반성을 결여한 습관적인 일상성에 물들기 쉽다. 교회나 절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내용은 무시하고 오직 전통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또한 종교가 오직 공적 관계에서만 명맥을 유지할 경우 그것은 자칫하면 정치, 경제적인 도구와 수단이기를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들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들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수단적, 방법적 물음은 결코 종교를 내면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긍정적으로 지양시킬 수도 없다. "인간과 세계는 왜 있는가?"라는 근원 물음은 비로소 철학과 종교를 하나로 형성하여 종교 철학을 가능케 해준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의 근원, 곧 절대자에 대한 경건한 자세로서의 신앙은 바로 근원 진리에 대한 경건한 추구이자 예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불때 기도는 인간과 세계의 근원인 절대자에 대한 경건한 탐구 자세이지 결코 개인적 이익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행위가 아니다. 흔히 "나와 내 가정의 건강과 행운을 보살펴 주십시오". "오직 우리 교회만을 부흥하게 해주십시오"와 같은 외침은 이기적인 욕망의 표현이지 진정한 기도가 될 수 없다. 내면적인 영혼이 절대자를 부를 때 기도가 이루어진다. 종교는 한 인간과 사회와 민족 그리고 국가를 지배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가장 심원한 정신적 바탕을 구성하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순화될 때,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정신적 자세인 의식이 개방될 때 삶은 창조적이며 미래지향적일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가 극단적으로 사회화하면 종교의 본질은 은폐되고 또한 삶 자체도 폐쇄되어 목적과 방향을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성적 신앙의 근원 및 원리를 탐구하는 종교 철학적 관심은 인간의 삶이 부정적으로 등장하는 현대 산업사회에서 보다 본질적이고도 긍정적인 종교의 역할을 밝혀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긍정적, 창조적 종교만이 인간에게 미래지향적이며 인간과 세계의 내면성 및 전체적으로 드러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의 긍정성, 창조상은 어떤 특정한 종교만이 홀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전통적인 종교는 모두 제나름대로의 긍정성, 창조성을 가지고 있다. 종교적 의식이 항상 새롭게 자기반성과 아울러 자기 형성을 할 때 종교는 항상 은폐성과 형식성을 떨쳐버리고 창조적인 종교로 지양될 수 있다.

 

4. 무신론과 유신론

 

절대자, 곧 신에 관한 인간의 자세를 크게 나누어보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무신론이며 또 하나는 유신론이다. "나는 무신론자이다. 이 세상은 처음부터 그대로 있는 것이고 어떤 누군가 창조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믿으며 내 자신의 힘만을 믿는다"라는 주장과 유사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들 주변에서 우리는 #1 유신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과 #2 무신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 그리고 #3 유신론이나 무신론에 별 커다란 관심이 없이 매일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무리에 속하는 사람들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유신론이나 아니면 무신론 어느 입장을 선택하게 된다.

우선 무신론을 살펴본 다음에 유신론을 언급해보기로 하자. 유신론과 무신론의 구분은 종교적인 입장에 비하여 이러한 종교적 입장에 바탕이 되는 것은 관념론과 유물론이다. 이 두 견해는 세계의 근원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나누어진다. 관념론은 이성이나 정신을 세계의 근원이라고 본다. 예컨대 책상이나 돌을 쪼개어 보자. 우선 작은 알맹이인 분자로 분할될 것이고 다음은 원자 그리고 다음으로는 전자로 분할될 것이다. 전자를 더이상 쪼갤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분할한다면 그것은 "정신적인 힘"으로서 모든 대상들의 가장 근본적인 근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물질이라고 부르거나 대상들이라고 일컫는 것, 나아가서는 세계가 결국에 가서는 정신적인 힘들로 구성된 것이 된다. 이러한 입장이 바로 관념론 또는 유심론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대상의 최소 단위를 전자로 보고 전자를 물질이라고 할 경우 세계를 구성하는 근원은 물질이 된다. 유물론은 이러한 입장을 대변한다. 무신론은 유신론을 바탕으로 삼는다. 유물론은 형이상학적 입장이지만 이것이 종교적 자세로 전환하면 무신론이 된다. 무신론을 가장 잘 대변한다고 생각되는 니체와 마르크스를 살펴보기로 하자.

니체는 기독교적인 신을 부정한다. "신은 죽었다"고 하는 그의 말에서 신은 기독교적인 신이다. 그는 인간을 초월하고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는 기독교적인 신을 부정한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서 세계 근원을 찾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힘에의 의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들은 "힘에의 의지"가 종래의 기독교적인 신을 대치하고 있지 않은가라는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니체 자신의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물리적, 생물학적 그리고 경험적 근거에 의하여 삶의 과정이 이행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자각한 자를 초인이라고 부르는데, 초인은 세계를 새롭게 구성하는 자로서 그는 다름 아닌 세계의 목적이다.

이것은 가장 깊은 고통의 파악이다. 형태를 이루는 힘은 스스로 동요한다 개체의 개별화는 기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사실 개별자에게는 어떤 것이 끊임없이 흐른다. 개별자가 느끼는 것은 멀리 있는 목표를 향한 과정 속으로의 힘찬 몰입이다. 개별자의 행복 추구는 형태를 구성하는 힘들이 또 한편으로 함께 모여서 방해하지 않게끔 힘차게 하는 수단이다. 인간성이 아니라 초인이 목적이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1앞에서 말한 것처럼 종래의 기독교적인 절대자 신인가 또는 #2니체의 초인은 오히려 불교적인 불타와 가깝지 않은가라고 물을 수 있다. 니체의 초인은 분명히 기독교적인 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초인은 힘에의 의지를 내면에 소유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초인은 불타와 한층 더 가깝다. 왜냐하면 불타 역시 깨달은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타는 이 세상을 현상으로 보고 현상을 나타나게 하는 정신을 순화시켜서 무의 상태에서 깨달은 자임에 비하여 초인은 어디까지나 생물학적인 물리학적인 근거에서 "삶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니체의 초인과 불교의 불타는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 니체에게 있어서는 개별자인 인간이 힘에의 의지를 소유하고 자각할 때 초인이 된다. 초인은 인간을 초월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개별자 인간의 차원에 속한다.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가 물리적인 과정의 색채를 띠며 동시에 그것이 유기적인 삶으로까지 확장되는 사실을 다음의 인용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게다가 나는 한층 더 해결의 길을 걸어갔다 - 거기에서 나는 개별적인 새로운 힘의 원천을 발견하였다. 우리들은 파괴하여야만 한다 -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았다. 즉 개별적인 존재의 해결은 결코 - 보편적인 존재의 모사나 개별적인 예처럼 완성될 수 없다. 보편적인 해결에 관한 마비된 느낌과 불완전에 대립하여 나는 영겁 회귀를 지지한다.

니체가 이곳에서 말하는 영겁 회귀는 결코 신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힘이다. 보편적인 것은 형식적인 것으로서 인간의 의식이 거짓되게 날조한 것이며 니체에게는 개별적, 구체적인 것만이 참다운 것이다. 이러한 근거에서 니체는 보편적, 추상적인 절대자를 전제로 삼는 종교를 반대하며 특히 기독교적인 신을 부정한다. 니체는 자연 현상과 인간이 개별적인 것으로 영원히 회귀하는 사실이 바로 힘에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고 본다.

, 짜라투스트라여, 어떤 사람도 지니지 못했던 위대한 운명을 그대가 짊어진 것을 노래하며 새로운 노래가 그대의 영혼을 치료하라.

왜냐하면 오, 짜라투스트라여 그대의 짐승들은 그대가 누구이며 앞으로 무엇이 될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보아라, 그대는 영겁 회귀를 가르치는 자이니 이제 그것은 그대의 운명인가?

그대는 제일 처음으로 이 가르침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되니, 이 위대한 운명은 어찌 그대의 가장 큰 위험과 병이 아니겠는가! 보아라, 우리들은 그대가 모든 것은 영원히 회귀하며 우리들 자신도 영원히 회귀하고 이미 우리들은 무수히 회귀하고 있으며 모든 것이 우리와 함께 회귀한다는 것을 그대가 가르치고 있음을 안다.

그대는 다음의 사실을 가르친다. 즉 생성 변화의 위대한 해, 엄청나게 위대한 해가 있어서 우리들 자신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에서 동일하고 또한 우리들 자신은 가장 큰 것과 가장 작은 것에 있어서 위대한 매해마다 동일하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니체는 현상을 생성, 변화하는 것으로 보며 동시에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러기에 그가 보는 세계의 근원이란 인간의 내면에 그리고 어디에나 두루 퍼져있는 "힘에의 의지"이다. 이러한 힘에의 의지를 가장 잘 대변하는 자는 바로 초인이다.

니체의 초인은 결코 신이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여 사랑하고 힘에의 의지를 자각하여 자신의 삶을 선택하고 결단하는 자가 초인이기 때문에 초인은 실존적 인간이다. 실존적 인간은 천민이 지양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니체에게는 신이 차지할 장소가 있을 수 없다. 니체는 #1 생물학적, 물리학적인 의미에서 우주의 근원을 힘에의 의지로 보며 #2 힘에의 의지를 자각하고 소유한 자를 초인이라고 부르므로 그는 무신론을 대변하는 사람들 중의 한 삶이다.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마르크스는 전통적인 철학자들과는 달리 "세계를 해설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것도 경제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사회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가 바라보는 행복은 물질적인 욕구의 충족이다. 그르므로 그는 인간이 보다 더 물질적으로 충분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사회로 사회를 개혁시키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렇게 보면 마르크스가 보기에는 정신적 만족이란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물질적 만족이 해결된 다음에 부차적으로 뒤따라오는 것이 정신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물질적인 경제 구조를 하부 구조라고 하며 인간의 본질적인 구조라고 보고 정신적인 구조를 상부구조라 하며 인간 사회의 부차적인 구조로 본다. 마르크스는 대표적인 유물론자이자 무신론자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신 역시 정신적인 견지에서 만들어진 개념으로서 물질적인 욕구에 의해서 부차적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우리는 니체와 마르크스의 무신론을 살펴보았다. 무신론은 일반적으로 유물론을 바탕으로 가진다. 니체와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무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1 세계의 본질 또는 근원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며 #2 물질적인 것의 근원은 물질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고 #3 정신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작용현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4 사회 발전은 기계적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신론과 대립되는 주장, 곧 유신론은 종교를 소유한 모든 사람들이 지지하는 입장이며 대부분의 일상인들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는 견해이다. 우리들이 세계의 신비스러움을 인정하고 삶과 세계의 근원을 정신적인 존재로 생각할 경우 당연히 유신론이 성립된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주의하여야 할 점은 맹목적으로 단순하게 "신은 없다"라든가 아니면 "신은 존재한다"라고 간단히 주장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론과 실천이 조화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전체적인 삶을 체험하고 구성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무신론이라든가 유신론의 어느 한편을 고집하기에 앞서서 인간 주체로서의 삶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반성이 요구되며 동시에 그러한 반성과 아울러 삶과 세계를 유기적, 전체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삶과 세계의 근원을 부분적으로 살피면 무신론이나 유신론 가운데서 어느 한 편만을 고집하게 된다. 그것은 마치 빛나는 수정을 놓고 "저것은 빛이다"라고 하거나 "아니다, 저것은 돌멩이에 불과하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삶과 세계는 결국 무신론적인 현상이 유기론적인 근원을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빛과 돌멩이가 다름 아닌 빛나는 수정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5. 신의 존재 증명은 가능한가

 

우리들은 신에 관한 우리들의 자세를 세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으니 그것들은 #1 신앙의 측면 #2 신앙의 측면 그리고 #3종교 철학의 측면이다. 신앙의 측면에서 신이 어떤 존재이며 신은 과연 존재하는 가라는 물음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신앙을 독실하게 가진 사람은 경전의 내용을 그대로 믿으며 자신의 모든 외면적인 삶과 내면적인 신앙과 일치시킨다.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의 가장 깊은 종교적 느낌으로부터 자신을 신에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학의 경우는 다르다. 신학은 특정한 종교를 인정하는 한계 안에서 특정한 종교의 교리를 해석하고 응호하려는 입장을 가진다. 신학은 실천적인 믿음으로서의 신앙과는 달리 이미 이론의 세계에 속한다. 따라서 신학에서는 신의 존재를 이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전통적인 입장을 살펴보면 신 존재의 증명은 대체로 #1 본체론적 증명 #2 우주론적 증명 #3 목적론적 증명 #4 도덕적 증명 등으로 구분된다. 그러면 이들 각각을 간략히 살펴보기로 하자. 본체론적 증명은 존재론적 증명이라고도 부른다. "신은 전지전능하므로 완전한 자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개념으로서의 신이 존재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추론할 수 있다. 완전한 존재인 신 개념 자체로부터 신의 존재를 추론할 때 이것을 신 존재의 본체론적 증명이라고 한다.

우주론적 증명은 자연계의 운동에서 인과관계를 고찰할 때 성립한다.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상세계의 원인을 계속하여 추구하다 보면 결국에 가서는 제일 처음의 원인에 도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최초의 원인이 되는 보편자를 신의 존재로 증명할 경우 신 존재에 관한 우주론적 증명이 성립한다.

목적론적 증명은 물리, 신학적 증명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이 세계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 합목적성, 장엄함을 소유한 가장 조화로운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그처럼 세계를 만들어 놓은 신과 아울러 신의 섭리가 분명히 있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경우 성립하는 것이 신 존재에 관한 목적론적 증명이다.

인간에게는 도덕법칙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는 실천적인 행위의 차원에서는 반드시 양심이나 의무가 있어야만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절대적이며 성스러운 신의 존재를 필연적으로 전재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고 할 때 신 존재에 관한 도덕적 증명이 성립한다.

위에서 우리는 신 존재 증명에 관한 네 가지 이론을 살펴보았다. 나는 여기에서 이들이 타당한지 아닌지의 여부를 문제 삼지는 않겠다. 단지 신앙에서는 필요하지 않을지라도 이론적인 신학에서는 신 존재 증명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는 점을 밝히고 싶다. 왜냐하면 신앙은 절대자에 대한 믿음만을 문제로 삼지만 신학에서는 절대자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확인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과 신학의 문제는 종교철학에서 종합된다. 종교철학에서는 신앙과 아울러 신학의 근거가 해명되며 양자의 근거가 어떻게 종합되는지를 밝힌다. 넓게 보면 인간의 의식은 한편으로 절대자에 대한 느낌을 가지며 또 한편으로는 절대자의 존재를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이들 양자는 절대자의 계시에서 종합된다. 왜냐하면 절대자 신의 존재는 신앙에 의해서 믿어지며 또한 이성에 의해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론과 실천은 각각 분리된 영역으로 생각되지만 실은 삶의 두 측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과 신학 역시 절대자 신에 대한 인간의 행동 방식 중 두 측면이다. 인간이 인격체로서 자기반성과 세계 반성을 동반할 때 신학과 신앙은 하나인 삶의 근원을 해명하면서 동시에 창조적으로 구성할 수 있다.

 

 

9장 현실과 이상의 갈등

 

1. 현대의 사상적 상황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와 시간>을 출판한 것은 1927년이었다.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현대라는 시기를 20세기 초반부터 지금까지로 잡을 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현대의 산물이며 현대를 분석하고 진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이데거는 인간을 일상속에 물들어 있는 현존재로 보며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호기심, 지껄임, 애매성, 던져짐 등으로 지칭한다. 인간의 존재방식은 바로 인간이 살아가는 양상을 대변하여준다.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양상은 인간 의식의 표현이다. 의식의 표현은 사상이다. 일상인의 존재 방식을 지껄임, 애매함, 호기심, 던져짐 등으로 파악한 하이데거를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현대인이 살아가는 양상은 고대 중세 및 근대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사회체제가 물질문명과 국제 시장 경제 및 이데올로기 중심적인 정치 체제 등에 의하여 그 전의 것과는 질적으로 판이한 모습을 소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현대의 사상적 상황도 정치 경제 사회적인 특징들 속에 자신의 위치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과거 서구 사상의 맥락을 더듬어보자면(일반적으로 크게 볼 때 동양 사상도 이와 일치하는 점이 많을 것이다) 고대에는 윤리 신비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중세에는 전반적으로 종교적인 색채가 중심적이었고 근대에는 자연 과학적인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현대를 좌우하는 사상적 경향은 어떠한 것인가? 우리들은 이 물음에 대하여 #1 좁은 의미에서 사상적 경향을 철학에 한정시켜 볼 수 있으며 #2 넓은 의미에서는 사상적 경향을 철학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과학 사회 종교에까지 확대시켜서 언급할 수 있다.

현대 철학의 상황을 잡다하게 늘어놓자면 수많은 학파들과 경향들을 열거할 수 있겠지만, 우리들은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두 흐름을 지시함으로써 현대의 사상적 상황에 대한 윤곽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두 흐름은 브렌타노, 훗설, 하이데거, 샤르트르, 메를로 뽕띠로 이어지는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슐릭, 파이글, 카르납 등이 대변하는 논리적 실증주의이다. 전자는 여전히 인간의 이성에 치우치며 후자는 인간의 경험에 기운다, 우리들이 이 두 가지 현대의 철학적인 경향만을 살핀다면 현대 철학의 상황은 고대 중세 또는 근대의 철학적 상황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의 두 면을 고찰할 때 우리들은 현대의 철학적 상황의 피상적인 윤곽만을 알 수 있을 뿐이고 결코 그 내용을 붙잡을 수 없다. 고대나 중세 근대에는 어떤 한두 가지 철학의 경향이 두드러졌었고 따라서 그러한 사상을 반영하는 사회도 극심한 복잡성을 소유하지 않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들은 현대의 대표적인 두 철학적 경향으로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를 꼽았지만 현대 사회를 보다 더 강력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이들 전통적인 순수한 철학적 경향들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 경제적인 뿌리를 가지고 철학의 옷을 차려입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일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들은 넓은 의미에서 현대의 사상적 상황을 돌이켜볼 수 있다. 전통적인 철학을 이어오는 현상학적 실존주의와 논리적 실증주의라는 좁은 의미의 사상적 경향은 자신을 용해시키면서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리고 자연 과학이라는 넓은 의미의 사상적 상황에 자리를 양보한다. 이제 우리는 현대의 사상적 상황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기계주의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는 잠정적인 결론에 도달하였다. 앞으로의 역사를 통하여 과연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이 더욱더 강하게 인간의 삶을 지배할 것이지 아니면 인간이 더 이상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중지하고 그와 같은 이데올로기들을 좌우할 수 있는 지의 여부는 인간이 미래 존재를 결정하는 매우 의미심장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제 우리가 현대의 사상적 상황이 지금, 이곳에서 어떠한 형태를 띄우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에 직면할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이곳은 불교와 유교의 오랜 전통이 배인 곳이다. 비록 샤마니즘과 밀접히 결합되기는 했어도 이곳은 나름대로의 불교 유교적인 의식에 젖어있었다. "예수는 일어서서 도전적인 자세로 죽음을 맞이했음에 비하여 석가는 평온하게 앉은 자세로 죽음을 대하였다."는 스즈끼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대체로 유교 불교적인 사상은 역사의 시간적인 발전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하늘과 사람이 합일할 경우 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일 경우 인간은 이미 우주와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서구 사상에서는 인간은 절대자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며 그는 전 생애를 통하여 자연을 이용하여 배를 채우며 그 영광을 하느님에게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정치 경제 종교 학문적인 이데올로기의 직접적인 근원은 두말할 것도 없이 기독교 중심적인 서구 사상이다. "자연과의 조화"가 아니라 "자연을 이용"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삶는 서구 사상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과 신마저도 이용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지금, 이곳의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현대의 사상적 상황은 우리들의 삶을 더욱더 불안하게 만들며 절망에 빠지게 한다. 우리는 자연 및 우주와의 합일을 전통으로 지니면서도 자본주의 기계주의에 의하여 지배당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위험에서 한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앞에서 우리는 현대 사상의 맥락을 살펴보았고 현대의 사상적 상황이 인간을 무의미한 개인으로 전락시키며 불안과 절망으로 전락시킨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태는 #1 의식의 갈등 #2 현실과 이상의 괴리 #3 미래 지향적 의사소통 등의 문제를 고찰함으로써 자신의 핵심을 드러낼 수 있고 동시에 해결의 실마리를 어느 정도 제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2. 의식의 갈등

 

현대의 사상적 상황이 나타내 주는 것은 바로 다름 아닌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이다.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공산주의 자본주의 기계주의 앞에서 불안과 좌절을 맛보고 있다.이것은 곧 인간에게 있어서의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가장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는 현대의 사상적 상황의 근원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우리는 돌이나 나무가 또는 꽃이나 벌이 혹은 벌이나 달리 불안과 좌절에 휩싸인다고 말하지 않는다. 돌과 나무와 꽃과 벌...은 불안이나 좌절과는 상관이 없다. 그것들은 "그저 있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어떠한가? 인간은 "그저 있기만" 할 수가 없다. 그저 있기만 할 인간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고 시체에 불과하다. 인간은 그저 있기만 할 뿐만 아니라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 인간은 나와 너와 우리를 느끼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기 스스로 행동하며 나와 너 그리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의식 존재이다. 인간이 불안과 좌절과 절망을 체험하는 것은 곧 그가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마찬가지로 유기적 존재인 만은 분명하지만 인간은 의식한다는 점에서 다른 생물과 질적으로 구분된다. 물론 특정한 고등 동물들 역시 지능을 소유한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 돌고래, 코끼리, 유인원 등은 상당한 수준의 지능을 소유하고 있으며 이들 중 유인원은 간단한 기구를 제작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들은 외부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이나 내면적인 것을 대상화시킬 수 없다. 대상을 의식화하며 대상으로부터 추리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다. 예컨대 우리들은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꽃을 볼 때 그것을 꺾어서 방에 장식하겠다고 장미꽃을 의식화한다. 또는 장미꽃을 보면서 아름답고 청순한 여인을 연상한다. 이 예들에서 보아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은 나와 남을 느끼고 생각하며 말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의식은 인간을 인간다웁게 해준다. 의식은 삶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며 미래에 대한 설계를 약속해 준다. 의식은 삶의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해주며 미래에 대한 설계를 약속해 준다. 그러나 의식은 부정적인 힘도 가지고 있다. 의식은 #1 나를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며 #2 의식하는 나와 의식된 나를 분리시키고 #3 다양한 분리와 충돌은 의식의 갈등과 모순을 초래한다. 무엇보다도 특히 긍정적인 의식과 부정적인 의식의 충돌은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인간을 좌절 절망에 빠뜨리는 갈등이다. 현대의 사상적 맥락이 겪는 갈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의식이다.

의식은 스스로 분열한다. 그러므로 의식의 특징은 불확실성이다. 의식이 일단 확실성을 붙잡으면 그것으로 끝날 것 같지만 인간의 삶은 부단한 흐름이므로 새로운 상황에 처하면 이전의 의식의 확실성은 다시금 불확실성으로 전환하기 마련이다. 산수를 배우는 어린아이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어린 아이는 처음에 덧셈을 배운다. 어느 정도의 훈련기간이 지나면 어린아이는 웬만한 덧셈에 대해서는 확실성을 가진다. 그러나 다음 단계로 들어가 곱셈이나 나눗셈을 대할 어린아이는 다사 불확실성에 빠지지 않을 수 없다. 인간 의식의 역사는 결국 불확실성으로부터 확실성을 찾으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심화된 의식의 갈등은 사상적 맥락의 갈등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극단적인 삶의 갈등마저 초래하고 있다. 우리들은 물질적인 일상성에 물들어 매일매일을 숨쉬며 살아가고 있다. 선진국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기 판매와 이권이 오고 가는 예라든가 지금, 이곳에서 다반사처럼 벌어지고 있는 토지 건물 투기와 같은 예들을 들치지 않더라도 우리들의 삶의 온갖 목표가 마치 물질인 것처럼 전개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정신적인 기반에 대한 강한 갈구를 소유하며 동시에 정신적인 토대를 구축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인간의 삶이 갈등을 체험하는 것은 이와같은 의식의 이중구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의 의식이 기계적이며 획일적이라면 인간은 하등의 갈등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일단의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만일 인간이 극도로 정밀한 기계라면 인간에게는 절대적인 유토피아가 보장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기계는 어디까지나 기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고유한 이성이나 정신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인간이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자극(s-r)의 결과에 불과하다. 즉 말초 신경의 구심적인 자극-반응의 결과로 인간은 느끼고 생각하며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일 인간의 두뇌와 신체에 대한 구조가 분명하게 완전히 밝혀진다면 로보트처럼 인간을 조종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그러나 "인간의 두뇌와 신체에 대한 구조가 분명하게 완전히 밝혀진다면"이라는 문장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나는 몇 가지 물음을 다시 제기해보려고 한다. #1 인간의 두뇌와 신체의 구조가 완전히 밝혀진다면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인간의 구조와 신체 구조를 생리적으로 밝힌다는 것인가, 아니면 생리적일 뿐만 아니라 예술적 종교적 철학적으로도 밝힌다는 것인가? #2 인간의 두뇌와 신체를 무기물처럼 고정 불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가? #3 인식과 존재가 전적으로 일치할 수 있는가? 이와 같은 물음을 제기할 경우 극단적인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이 어떤 자세를 취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들은 #1 예술적 종교적 철학적이라는 표현은 생리적이라는 표형으로 환원되며 #2 무기물이나 유기물이나 원자와 분자들의 결합이고 #3 인식과 존재는 전적으로 일치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아무리 그렇게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자신이 문제에 접하여 실존적으로 불안과 좌절과 절망에 빠졌을 경우에도 그들은 그것이 단순히 기계작용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사태에 대한 설명은 하고 있되 사태를 이해하며 구성하고 있지 않다. 그들의 이론을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말초 신경과 중추 신경의 상호 작용에 의해 의식 현상이 발생한다면, 결국 인간의 육체는 동시에 정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간의 본질은 육체(기계적인)라든가 아니면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이다. 인간은 육체이자 정신이며 또한 육체와 정신은 의식을 구성하므로 인간은 의식이다. 육체와 정신은 인간의 이중성이며 바로 의식의 이중성이기도 하다. 인간의 의식은 하나의 통일적인 삶이면서도 동시에 육체와 정신이라는 이중적 구조이기도 하다. 의식이 부단히 흐르면서 통일적인 삶보다 자신의 이중성에 치중할 때 갈등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의식의 이중성은 단지 육체와 정신의 갈등만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대상과 나의 갈등, 나와 너와 우리의 갈등... 심지어는 집단과 집단의 갈등, 의식과 의식된 것과의 갈등마저도 초래한다.

의식의 자기 갈등에 대하여 보다 더 알기 쉬운 예를 들자면 그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서 나타난다.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가 같은 핏줄임을 알면서도 상호 질적으로 다른 개체이기를 주장한다. 차별성만이 강조되면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이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은 양면성을 소유하므로 인간의 자기 갈등은 필연적인 속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은 자연적인 차원에서 인과율의 지배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자발성의 차원에서 자연을 구성하기도 하므로 자신의 갈등을 절대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은 언제나 "줄타기 광대"의 본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은 자신의 갈등 속에서 갈등을 극복할 수 있으며 이와 같은 극복이야말로 인간 의식의 자발성에 우러나오는 극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유토피아를 꿈꾸는 것은 또 하나의 갈등이다. 논리적 실증주의와 현상학적 실존주의, 더 나아가서는 공산주의 자본주의 기계주의 등의 상호 갈등과 인간의 내면적인 정신 세계가 이들 이데올로기에 대하여 체험하는 갈등 등은 인간의 본성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삶의 갈등은 절대적으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말이 무의미한 진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의식의 갈등은 갈등 속에서만 해결을 구할 수 있다.

 

3.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인간의 삶의 모순, 구체적으로 말해서 현대사상의 갈 길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삶의 모순은 우리들에게 명백히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특히 학문 종교 정치 경제 기술 등이 이데올로기로 탈바꿈한 현대의 시점에서 인간은 이데올로기적인 현실과 인격체들의 구성으로 된 이상과의 사이에 있는 메꿀 수 없는 괴리를 직면한다.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연적 기능이 이성적 기능을 지배하려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성적 기능이 자연적 기능을 좌우하려는 것이 인간의 기본적인 구조이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사회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자연적인 도구 능력이 이성 능력을 지배함으로써 인간의 모든 존재 방식들이 이데올로기화하여 인격체로서의 인간은 이데올로기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실정이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인간의 이중성인 자연과 이상의 갈등을 근거로 삼으며 나아가서는 이데올로기적인 도구 기능과 이성적인 이상과의 모순으로 확장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정신 분석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의 근원은 본능에 있으며, 이 본능이 삶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본능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가지고 있을 때 삶 자체는 이미 내면에 스스로의 괴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폐쇄 사회를 부정하여 개방된 합리적인 사회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삶에 대한 본능이라고 할 때 본능의 창조적인 자발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성서나 불경에서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를 발견할 수 있다. 그와 같은 이야기는 비단 성서나 불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원하기만 한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단지 죽음에의 본능을 의식하고 삶에의 본능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자극이라든가 멀고 긴 인내가 필요할 따름이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 기술적인 현실은 지금, 이곳의 우리들을 질식시킬 정도로 무거운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로 억누르고 있다. 우리들이 집단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를 조종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정반대로 이데올로기가 우리들 인간을 조종한다. 이것은 확실히 인간 역사의 비극이다. 더우기나 이데올로기란 인간이 산출해낸 것이기에 한층 더 비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이곳의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더라고 누구나 할 것 없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적인 안정을 추구하면서도 그렇지 못한 현실에 처하여 있다. 모두가 최선의 전략과 정책을 모색하고 있지만 정확한 처방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과거에 대한 정리가 부족하며 미래 설계가 불확실하고 현재는 불안에 싸여 있다. "시간"에 의하여 "존재"가 은폐되어 있듯이 우리들에게는 "현실"에 의하여 "이상"이 가리워져 있다. 여기에서의 이상은 환상이나 공상과는 구분되는 개념이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는 헛된 공상이나 환상과 이상을 동일시하기 쉽다. 그러나 이상이란 인간 의식의 현실태 내지는 완성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상이란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또다른 각도에서 비록 현실에서 이상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합리적인 이상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점진적으로 붕괴시킬 수 있는 힘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4. 미래지향적 의사소통

 

우리의 문화 문명이 시간의 차원에서 진행되는 한에 있어서 우리들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미래 지향적인 의사소통에서 점차로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변증법에 의해서 세계를 설명하려 하였고 마르크스는 변증법에 의하여 세계를 개조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변증법은 분명히 세계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변화시킨다. 인간은 무엇으로써 이러한 변증법을 표현하는가? 인간은 행동에 의하여 변증법을 표현한다. 행동은 이해하고 표현하며 체험함으로써 자신을 변형시켜 나간다.

개인으로서의 인간들이 의식의 자발성을 반성할 때 개인은 인격체로 전환되며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인간 상호 간의 미래 지향적 의사소통에 맞설 수 있다. 미래 지향적 의사소통이란 인격체의 반성된 행동이다.

사실상 우리들은-자금,이곳에 제한시켜서 말할 경우-경제 문화 정치 종교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겪고 있다. 그 괴리가 너무도 지나치기에 우리들은 만성적으로 되어 무감각한 자신을 바라보기까지 한다. 간단히 요사이 대학가에서 많이 나도는 자율이라는 개념 하나만을 예로 들어보자. 자율이란 책임과 의무와 권리를 지닌 인격체의 자유로운 행동이다. 그러나 자율 개념을 사회와 대학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 한 개념에서도 우리들은 우리들이 처하고 있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과 이상의 갈등을 극복할 길은 전혀 없다는 말인가? 이미 이 절에서 그리고 앞부분에서 나는 갈등을 갈등 속에서 극복하는 것이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의 갈등의 극복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행복이라는 단어는 무의미한 것이기 때문이다.

 

5. 갈등의 극복은 가능한가

과연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는 것은 가능한가?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넓은 의미에서의 사상적인 맥락이 겪는 불협화음만은 아니다. 더 깊이 파헤쳐 보면 그것은 삶 자체의 괴리이며 인간 의식의 괴리이다. 그것은 또한 본능과 이성과의 괴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앞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암시적으로 언급된 것처럼 인간 의식의 이중성을 인정하지 않고 어느 한쪽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택할 때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더욱더 커지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나는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화가와 음악가의 예를 듦으로써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화가는 작은 화폭의 제한성 속에서 무한한 미술의 세계를 표현한다. 음악가 역시 제한된 시간 속에서 무한을 연주한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본질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인식할 때 인간 의식은 점차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이 자기반성을 할 때 비로소 의식은 부분과 전체에 대한 통찰력을 얻으며 자신을 행동으로 표현한다. 인간 의식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 대한 자기반성을 할 때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점차로 좁혀진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거리는 언제나 남아 있기 마련이다. 인간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중성을 소유하기 때문이다.

 

 

10장 고뇌와 병과 죽음

 

1. 고뇌하는 삶

 

인간은 유한한 시간적 존재이다. 우리는 눈 앞에 전개되고 있는 풀 곤충 새 나무 짐승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태어났다가 죽기 마련이다. 태어나고 죽으면서 인간은 한편으로는 영원이라는 극단을 또 한편으로는 허무라는 극단을 맞대하고 있다. 니체는 인간을 "신과 짐승 사이의 중간존재"라고 말했지만 이것을 다시 풀어서 말하면 인간은 "영원과 허무 사이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삶은 영원도 아니고 허무도 아니지만 영원과 허무 사이의 삶이므로 이미 영원과 허무에 물들어 있다. 우리들은 매일매일 반복하여 세상을 무의미하게 "지나치며" 살아가고 있다. 일상 생활의 특징인 "지나침"을 우리는 일상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장소는 일상성이다. 나는 반복되는 일상성을 반복하기만 할 뿐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일상성은 허무로 충만되어 있다. 우리들이 서서히 일상성을 빠져나오기 시작할 때 일상성은 고뇌와 고통으로 물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인간은 우선 감각적인 환경 속에서 갖가지 다양한 삶의 모습을 대하고 있다. 매일매일의 생활을 통하여 우리는 인간은 "무엇"을 듣고 보고 만지고 맛보며 또한 이 "무엇"을 생각하고 행동하며 말한다. "무엇"은 감각적인 환경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은 일정한 안정된 모습을 소유하지 않는다. 예컨대 어제의 친구나 애인의 모습은 그저께의 모습과 다르며, 오늘날 그들의 모습은 어제의 모습과 다르다. 삶과 세계에 대한 나의 앎도 어제는 확실한 듯했으나 오늘은 전혀 불확실한 것으로 나타난다. 하느님에 대한 신앙으로서의 나의 믿음이 지난날에는 불변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근거 없이 흔들리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변하는 "무엇"을 알려고 하고 믿으려고 하며 느끼려고 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모든 노력을 기울여 학문과 종교와 예술의 세계를 구축하려고 한다.

"무엇"은 인간의 삶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피안의 세계에 자리 잡고 있는 인간과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여기와 지금이라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떠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를 때 그것은 출생 이전이나 또는 사망 이후의 신비스러운 피안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제한되고 규정되어진 여기, 지금의 삶을 가리킨다. 인간의 역사가 시작되기 전인 고생대나 십만 년 또는 백만 전 후의 미래가 거론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금, 이곳의 인간 삶과 연관된 한에서만 이야기될 수 있다. 우리들의 현실적인 삶은 지나간 날 그곳의 삶과 아울러 앞날 저곳의 삶을 함께 머금고 있다.

우리들 인간의 삶은 여기, 지금의 삶임을 면할 수 없다. 여기는 저기와 저기를 넘나들며 지금은 아까와 이따가를 오락가락한다. 여기이면서 저기와 거기를 엿보고 저기와 거기는 언제나 여기라는 장소에서 저기와 거기라는 명칭을 획득한다. 따라서 여기와 지금은 변치 않는 영원한 공간과 시간이 아니라 갈등하는 여기와 지금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의식은 바로 여기,지금의 구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갈등하는 의식이다. 지금이 아까와 이따가를 오락가락하고 여기가 거기와 저기를 넘나드는 데서부터 인간의 의식에서, 인간의 삶에서 고통과 고뇌의 싹이 트기 시작한다. 인간은 고뇌와 고통으로 휩싸인 존재이다. 고뇌는 시간적인 아픔이며 고통은 공간적인 아픔이다. 물론 고뇌와 고통은 주어진 시간,공간 안에서의 삶의 일상성인 아픔이지만, 고뇌는 흐름 속에서의 아픔이고 고통은 주로 특정한 육체적인 부분에서 생기는 아픔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일정한 상황에서 고뇌하며 육체의 일정한 부분에서 고통을 느낀다. 가정과 나라가 불안할 때, 애인의 마음이 변했을 때, 나의 장래가 불확실할 때 고뇌하며, 머리나 배나 팔다리에 이상이 왔을 때 고통을 느낀다.

고뇌와 고통의 본질적인 현상은 다름 아닌 병에 집약된다. 인간의 삶은 고뇌와 고통이라는 일상적인 갈등과 모순 속에 던져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너나 할 것 없이 우리들 각자는 절대적인 행복과 영원한 절대자의 꿈속을 동경하여 마지않는다.

일상적인 삶의 세계 안에서 모든 사람은 고뇌를 넘어서서 환희의 차원으로 고통을 극복하여 기쁨의 세계로 그리고 병을 극복하여 건강한 상태로 전환하고 상승하려고 갈망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연 인간은 병의 현상을 뛰어넘어 영원히 건강한 상태에 안주할 수 있을까? 고뇌와 고통, 즉 병은 언제까지나 변치 않는 부정적인 측면에서의 일상성으로 머무를 수 있을까? 이러한 물음은 어둠 없이 밝음이 그리고 밝음 없이 어둠이 있겠느냐는 물음과 같은 성질의 물음이다. 이와 같은 물음을 되뇌이면서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층 더 병과 환자라는 일상적인 현상에 관한 본질적 해명이 도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직접적 현실적인 삶에서 우리는 보다 더 삶의 현상을 가깝게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무엇"을 그리고 "어떤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떤 것"은 감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일상성이다. 왜냐하면 자기반성의 여지가 가능치 않은 감각의 세계에서 인간과 인간이 마주 대하고 있는 대상, 나아가서는 인간들이 직면하고 있는 무수한 대상들이 존재하는 방식은 한낱 묵묵히 있기만 하고 아무런 생명력있는 의미를 가져다줄 수 없는 환경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환경은 그저 있어서 그 속에서는 하등의 자기의식도 발생하지 않는다. 환경을 대표하는 것은 반복하는 일상성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환경은 기능적인 세계이다. 보다 많이, 보다 빨리, 보다 배부르게 작용만 하면 그것으로 족한 차원이 기능 및 작용의 세계이다. 우리들은 현대를 어느 때보다도 일상성에 극단적으로 물들어 있는 시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현대는 기능의 사회, 작용의 세계가 인간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기능의 차원에서는 질이 아니라 양이 중요한 것으로 등장한다. 기능의 세계에서는 참다움과 허위, 좋음과 나쁨, 옮음과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이 2차적인 것으로 된다. 그러나 인간은 기능으로 향하는 의식과 아울러 기능과는 반대로 인격체인 주체로 향하는 의식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이며 자기 결단을 할 수 있는 실존적 존재일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어떤 것"이 단지 환경으로만 그칠 수 없고 오히려 그것이 일상성이라는 개념을 짊어지고 고뇌와 고통의 균열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 수단적인 기능 이외에 반성하는 의식을 소유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이다.

시간적 아픔 그리고 공간적 아픔이 의식화 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고뇌 및 고통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환경 및 일상성은 이미 이중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감각적 대상으로서의 무기적인 의미와 스스로를 부정하여 전체성의 세계로 부상하기 시작하는 고뇌와 고통이라는 개방적 측면에서의 유기적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고뇌와 고통은 벌써 균열하기 시작하는 삶을 보여준다. 삶의 일상성이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할 때 고뇌와 고통의 진통이 시작된다.

병은 병든 인간, 곧 환자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환자와 병은 따로따로 분리되어서 고찰될 수 없다. 좁은 의미에서의 환자란 정신적 내지 육체적 질병에 걸린 사람을 말한다. 그러나 넓은 의미에서의 환자란 지금까지 자기에게 친숙했던 세계 관계 및 삶의 방향을 상실한 자를 말한다. 환자의 특징은 세계 상실과 세계 소외에 있다.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하여 암 환자의 예를 들어보기로 하자. 환자이기 이전의 건강한 이 사람에게는 항상 친밀하게 느껴지는 가족과 친지와 벗들과 안정된 직장이 있었다. 이 사람이 암에 걸린 후 상황은 어떻게 변하는가? 지금까지 전혀 거리감 없이 친했던 가족 친지 직장 등의 대상들은 모두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위치하게 되고 그는 그러한 세계로부터 이탈되고 만다. 환자는 제일 먼저 환경으로서의 일상성 중에서 가장 일상적인 허무 앞에 서서 허무를 체험한다. 이제 환자에게는 지금까지의 삶이 "아무것도 아닌 것", 곧 허무로 체험된다. 다음으로 환자는 여기,지금에서 거기와 저기 그리고 아까와 이따가를 흔들거리며 오락가락하는 그림자 앞에서 점차로 불안해진다. 지금까지의 세계에 대한 자신의 관계 태도 해답 등 모든 것은 끊임없이 동요하게 되고 따라서 그는 현기증 앞에 자신을 내어 맡길수밖에 없다. 신체의 어느 특정한 부분이 공간적으로 아프든 아니면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적 흐름으로서의 사건 앞에서 정신적으로 아프든간에 고뇌와 고통은 이전에는 환자가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병이라는 무겁고도 어두운 그림자로 다가와 그를 짓누른다. 병은 죽음이라는 입을 벌리고 허무와 절망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환자의 내면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우리는 환희 앞에서는 환호하지만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 한 발짝씩 다가오는 병 앞에서는 창백한 모습으로 불안에 떨지 않을 수 없다.

병은 환자에게 너무 낯선 것으로 다가온다. 병의 어두운 그림자 앞에서 환자는 아무런 선택도 결단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생명력이 꿈틀거리는 자유, 다시 말해서 모순과 갈등 속에서 과감히 스스로의 삶의 방향과 의미를 결단할 수 있는 내면적 자유가 그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것처럼만 보인다.

병의 현상을 철학적인 차원에서 고찰하는 것은 의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인 차이가 있다. 의학 심리학 사회학에서는 병을 부분적인 현상으로 취급하지만 철학의 차원에서는 삶과 세계라는 전체적인 연관성에서 병을 탐구한다. 그러므로 병을 인간의 삶 및 세계라는 전체적 차원과 연관시켜서 고찰할 경우에만 병의 참다운 본질적 모습이 드러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생명을 내포하고 있는 씨앗이 늘 씨앗이라는 고정 불변하는 환경으로만 정지하여 있지 않음과 마찬가지이다. 씨앗은 싹을 내고 싹은 가지와 잎과 꽃으로 스스로를 펼쳐나가서 드디어는 다시금 새로운 씨앗을 맺게 된다. 다시금 자신으로 돌아온 씨앗은 전체를 체험한 씨앗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 보자면 인간의 삶은 근본적으로 병에 물들어 있는 삶이다. 공간은 무한히 연장되고 시간은 예견할 수 없이 변화하여 인간의 삶에는 고뇌와 고통이 쌓이기 마련이다.

인간의 삶은 언제나 밖에 드러난 상황에 스스로를 맡기고 있다. 따라서 환자는 병이 깊어갈수록 매일의 생활에서 자신에게 익숙해 있던 상황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드디어 환자는 세계 소외를 맛보지 않을 수 없다. 그에게는 지금까지 친숙했던 세계가 전혀 낯선 것으로 허무와 죽음의 입을 벌리고 다가온다.

그러나 병이 극단적으로 깊어져서 삶 속에서 절규로 등장할 때 환자는 이제야 비로소 병의 의미를 그리고 세계의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 병이 극단적으로 깊어지면 병은 환자의 가장 내면에 감추어진 자기반성을 촉발시킨다. 환자는 지금까지 일상성 속에서 망각했던 자기반성의 힘을 환기시키고 서서히 병과 삶의 의미를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는 "어떤 것"으로서의 병이 도대체 무엇이며 왜 존재하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병이란 전체성으로서의 세계안에서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일까? 병이란 또한 오로지 끊이지 않고 허무와 죽음을 향하여 치달리는 삶의 부정적인 측면인가?

그러나 병은 인간의 삶에서 이중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다. 절대적인 허무나 절대적인 삶이 무의미하듯이 절대적인 병이나 절대적인 건강 역시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존재 방식은 삶의 전체적인 "관계" 안에서 비로소 의미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은 언제나 건강을 전제로 하며 또한 건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병의 이중성에 눈길을 돌리는 일은 앞에서의 물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여 줄 수 있을 것이다.

 

2. 근원적 고뇌는 무엇인가?

 

인간의 삶은 본래부터 병의 현상에 던져져 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젖먹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이상적 절대적으로 완전무결하게 건강한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의학적, 물리적, 심리적으로만 인간이 병에 던져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인간은 쉴 사이 없이 병이라고 하는 한계 상황 속에서 신음하고 절규한다. 병은 인간 존재의 결핍이자 전체적인 삶의 부조화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누구나가 건강을 추구하려고 애쓴다.

오직 의학적인 측면에서만 볼 경우, 육체의 특수한 부분에 생긴 병을 치료하면 인간이 건강을 되찾는다고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어쩔 수 없이 다시금 병에 걸리고 마는 것이 인간이 짊어진 숙명이 아닌가? "죽음"은 너무나도 확실히 이 점을 대변하여주는 현상이다. 단지 생리학적인 차원에서만 말하자면 죽음이 그 겉모습을 최종적으로 드러내 주는 현상은 주검 다시 말해서 시체이며, 이 포기된 삶으로서의 시체 앞에서 인간은 아무런 할 말도 찾을 수 없고 오직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시체는 인간의 삶이 다시금 무의미한 자연 환경으로 복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병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그것이 포기된 삶으로서의 시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유기적인 삶 속에서의 병만이 심연인 죽음의 의미를 환기시킴으로써 건강한 삶을 향한 전환점을 마련하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은 부정적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으며, 이 경우 부정적 차원을 우리는 병이라고 부르고 긍정적 차원을 건강이라고 부른다. 인간의 삶은 부정적 차원이거나 긍정적 차원의 어느 특정한 한쪽에 정지하지 않은 채 쉼 없이 양쪽을 넘나든다. 건강한 사람은 스스로의 건강한 일상성 속에서 자신감을 가지므로 스스로를 상실하고 있기가 십상이어서 모르는 사이에 병들게 된다. 병든 환자는 세계 소외, 세계 상실이라는 고독에 사로잡혀 고독의 의미를 물으며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갈증과 동경"에 사로잡힌다. 확실히 병과 건강을 직선적, 평면적으로만 구분하는 일은 일상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사고방식에서만 가능하다. 병과 건강을 오로지 절대적인 두 가지 상황으로만 여겨서 양자를 전혀 다른 것으로 분리시켜서 구분한다면 단지 무의미하기만한 피안의 세계 이외의 다른 것을 구할 길이 없다. 이는 마치 어둠이 밝음과는 전혀 상관없이 항상 어둠 홀로 존재한다는 말과 같이 피상적인 의미 밖에 다른 어떤 것도 제시할 수 없다. 우리들이 단순하게 감각 경험을 근거로 사고한다면 이 세계에 관한 설명은 유물론으로 족하겠지만, 삶과 세계는 본질적으로 유기적인 구조를 소유한다고 생각할 경우 우리들은 동적인 전체성으로서의 삶과 세계를 대하게 된다.

병은 확실히 삶의 부정적인 측면으로서 그것은 인간이 파괴하고 뛰쳐나오지 않으면 안 되는 그림자로서의 가면이며, 이에 반하여 건강은 삶이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듯이 보이는 이상이다. 인간의 삶은 병이라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병의 가면과 건강의 이상 사이를 방황한다. 병과 마찬가지로 건강 역시 평면적이며 일차원적인 인간의 사고 대상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만이 건강하고자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에 백사 한 마리와 산삼 한 뿌리를 먹어치우며 진시황처럼 영겁을 살고자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도 결국에 가서는 시체의 그림자인 병에 갇히게 되어 주검으로 변모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있다. 영원한 삶이란 병과 죽음을 자각하여 극복함으로써 얻어질 수 있다. 영원한 삶이란 병과 죽음을 나의 체험으로 순화시키며 인정할 경우에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죽음을 죽음답게 맞이할 때에만 영원한 삶이 성립한다는 역설이 생긴다. 건강이 무엇이며 그리고 건강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없이 그저 맹목적으로 건강해지려고만 하는 인간이 있다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으로서의 자기 집착적인 원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는 결국 삶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밖에 보지 못하는 병에 걸리게 된다.

지금까지 나는 고뇌와 고통으로서의 병이 지니는 이중적 의미를 제시하기 위하여 간접적으로 병과 건강을 비교하여 보았다. 병은 물론이요, 건강 그리고 인간의 삶 자체도 벌써 이중적이다. 그것은 흡사 빛이 어둠과 밝음의 이중성을 띠고 있음과 마찬가지이다. 빛이 그 근원에 있어서는 운동이듯이 삶도 그 근원에 있어서는 생명으로서의 운동이다. 삶은 겉으로 보기에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는 다시 어디론가 흘러간다. 인간의 삶은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아름다움과 추함, 옳음과 그름, 참다움과 헛됨, 포만과 기아, 조화와 부조화가 엇갈려 동요하는 하나의 흐름이다.

"삶은 왜 흐르는가? 삶의 근원적 고뇌는 무엇인가? 이 물음은 고뇌와 고통으로서의 병을 간단히 삶의 고뇌라는 현상으로 집약시키면서 그 근원을 묻는 물음이다. 그러면 인간의 삶은 왜 고뇌에 물들어 있는가? "흐름" 때문에 그러하다. "흐름"은 무엇을 뜻하는가? "흐름"은 곧 시간을 말한다. 흐름이 시간을 가리킨다는 말에는 벌써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 또한 포함되어 있다. 왜냐하면 공간이란 근본적으로 시간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은 언제나 지금이라는 흐름 속에서의 이곳으로서 흐름을 떠나서는 도저히 성립할 수 없는 개념이다. "저 광화문"이라고 할 때 그것은 세워질 때 그리고 사람들이 볼 때와 같은 시간을 동반한 공간으로서, 시간을 독립한 "저 광화문"이란 있을 수 없다.

삶의 근원적 고뇌는 무엇인가? 그것은 흐름으로서의 시간 공간을 의미한다. 흐름으로서의 시간 공간은 다시 말해서 인간의 제한성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인간은 유한하게 제한된 존재이다. 인간은 이곳과 지금이라는 공간 시간에 제한되어 있다. 제한되어 있으므로 건강하다가도 병에 걸려 고뇌로 신음하고 고통으로 몸부림치며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병으로부터 건강을 되찾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그러기에 인간은 무의미하게 반복하여 지나치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의 고뇌를 의식할 때 그는 어떠한 자세를 가지는가?

인간의 의식은 시간 공간의 제한성을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시간 공간이야말로 삶의 근원적인 고뇌이기 때문이다. 시간 공간이야말로 자기반성을 도외시하는 인간의 자기 집착의 근거이다. 자기 집착으로 인하여 인간은 병과 건강을 분리시켜 보며 또한 삶과 세계의 전체성 및 근원은 보지 못한다. 우리는 들에 핀 한 송이 꽃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으며, 절대자인 하느님이 건강하다거나 병들었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꽃이나 절대자는 시간, 공간의 제한성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시간 공간은 인간의 의식이다. 의식의 제한성은 시간 공간으로 나타난다. 제한된 의식은 스스로를 무한으로 확장시키려 한다. 이때 인간의 삶은 고뇌와 고통, 곧 병에 물든 것으로 나타난다. 인간은 역사 이래로 신화를 창조하여 영웅적, 역사적 행위를 묘사하고 동화와 전설을 엮어서 유한성을 초월한 세계를 동경하고 갈망하여왔다. 그것은 모두 인간이 자신의 제한된 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렇다고 인간이 과연 들에 핀 한 송이 꽃이 될 수 있을까? 시인이나 화가는 직관에 의하여 잠시 꽃과 하나가 되지만 다시금 시간,공간에 제한된 자신의 의식적인 삶으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시간,공간을 넘어선 절대자 하느님의 자리에 군림할 수 있을까? 도대체 인간은 이곳과 지금이라는 유한한 세계를 탈피하여 무한성의 세계에 영원히 안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까? 니체의 초인은 다지 이상적인 안간으로서 그것은 비현실적인 존재가 아닌가? 불교에서 말하는 불타는 어떠한가? 불타는 인간을 초월한 자가 아니라 여전히 인간으로서 고뇌와 고통을 처절하게 체험함으로써 병과 건강을 조화시키는 자가 아닌가?

 

3. 병의 의미

 

인간의 현실적인 삶은 출생으로 시작하여 시체로 그 끝을 장식한다. 실상 삶 이전과 죽음 이후의 문제는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던져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과 세계는 삶으로서의 인간과 세계일 때라야만 의미를 간직할 뿐, 출생 이전과 시체 이후에 인간과 세계는 침묵 및 공허 속에 정지하여 있기 때문이다. 출생 이전과 시체 이후가 의미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 시간들이 어디까지나 삶에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출생 이전과 시체 이후는 오직 역사성 안에서만 인간의 삶에 또 다른 의미를 제시해 줄 수 있다.

근원적인 고뇌로서의 제한성인 이곳과 지금은 실로 어디에서 가능한가? 이미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것은 말없이 들에 핀 한 송이 꽃이나 또는 아득한 피안의 세계에 홀로 있는 하느님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 뿐만아니라 자기반성으로서의 의식이 결여된 개인에게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개인은 오직 기능 세계속에서 생존을 위한 보다 많은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개인이란 개성을 결여하여 아무런 구분점도 가지지 않은 평균인이다. 그러므로 개인에게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한성에 관한 의식마저도 결여되어 있다.

제한성은 이미 모순과 갈등을 의미한다. 이곳과 지금의 제한성은 한편으로는 영원 앞에서 또 한편으로는 허무 앞에서 전율하여 갈등한다. 제한성은 인간의 삶에서 이미 갈등과 모순을 뜻하며 갈등 앞에서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인간의 자유를 전제로 한다. 기능적, 수단적 개인이란 비록 그가 인간이라고 불리워질지라도 전혀 자유 의식과는 상관없이 일상적 습관 안에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이다. 인간은 누구나 각자가 개인의 측면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과연 개인으로부터 스스로를 주체로서의 인격체로 고양시키고 순화시킬 수 있는지 아니면 그렇지 못하고 늘 개인에 머물러 있는지가 문제이다. 만일 인간이 언제까지나 개인에 머물고 만다면 그러한 인간이 집단적으로 구성하는 사회는 짐승의 사회거나 아니면 기계들의 집단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자유에 대한 의식을 결여하고 단순한 생존을 위한 이익만을 추수하는 차원에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삶에서 자신을 의식의 세계로, 곧 자기반성의 세계로 승화시킬 때 인간은 개인이라는 무의미한 환경으로부터 의미를 포함하는 인격체로서의 주체로 전환한다. 여기에서의 의미는 생생한 삶과 세계의 근원에 대한 사유를 말한다. 물론 인간은 그저 환경에 불과한 개인으로 좌절하여 몰락할 수도 있고 개인으로부터 주체로 전환할 수도 있다. 개인이 주체로 승화되지 못하고 자연환경으로 남아 있는다면 개인은 단지 기능만을 소유한 공허한 존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삶을 전체적인 삶으로 구성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세계 의미를 개방시켜서 보여줄 수 있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일 뿐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있어서만 인간의 근원적 고뇌인 시간 공간이, 다시 말해서 병이 세계 의미의 체험을 안겨다 줄 수 있다. 의식은 시간, 공간의 제한성을 반성함으로써 시간, 공간의 의미를 이해하여 시간 공간을 초월한다. 의식이 스스로 제한되어 있음을 자각할 때 이미 제한성은 파괴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의식은 시간 공간의 제한성 안에서 시간 공간을 반성함으로써 무한성을 체험한다.

개인은 단지 심리 사회 정치 경제적으로 단순히 수단적인 존재에 그치므로 선택이라든가 자기반성으로서의 자유가 불가능하다. 게다가 자발적인 신앙이라든가 예술적 창조도 개인에게는 불가능하다. 또한 개인은 늘 주관의 딱딱한 껍질에 갇혀 있으므로 삶과 세계의 근원에 관한 앎도 그에게는 전혀 불가능하다. 만일 개인에게 자기반성으로서의 앎, 예술적 창조 및 종교적 신앙인 믿음이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단지 외형적 습관에 불과한 지능적 반복과 흉내 및 이기적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

주체로서의 인간에게만 자기반성인 주관성이 가능하며 이 주관성은 병의 근원 성격을 해명하여 줄 수 있는 특징을 가진다. 왜냐하면 주관성은 모순과 갈등, 곧 시간과 공간의 제한성 속에서 그 의미를 묻고 답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로운 자발성이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인간은 자유에 의하여 병의 원리를 묻고 그 원리를 통하여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결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관성이 바로 자유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비하여 주관은 개인의 특정한 의식 상태를 말한다. 주관은 모순도 모르고 갈등도 모른다. 주관에게는 모든 것이 양적인 것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므로 주관에는 선택도 자유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주관은 개인으로서 오직 감각적 환경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주관은 습관적인 삶을 대변하는 개인으로서 자연 환경에 던져져 있으며 매일매일의 삶을 지나쳐갈 뿐이다.

주관성은 삶의 본질로서의 인간성을 그리고 나아가서는 자기 사유를 가리킨다. "모든 마음은 불타의 마음"이라든가 "존재하는 것은 오직 일자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생각할 수 없다"는 귀절들을 상기하지 않더라도, 주체인 인간만이 모든 것이 있을 수 있는 근거로서의 원리를 체험 속에서 밝히고 구성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는 필연적 창조적 자유를 생명으로 소유하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인간만이 자기반성에 의하여 삶을 환경에서 상황으로 그리고 다시금 상황에서 체험으로 지양시키고 승화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병은 주체로서의 인간에게 한낱 부정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인 이중적 차원을 넘어서서 그 근원을 드러내고 세계 체험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세계 체험은 자아와 삶 및 세계의 구성 그리고 확인이다. 병의 세계 체험은 전체성으로서의 세계 의미를 개방한다. 세계 의미로서의 병은 지금까지 환자가 전혀 예기치 못했고 체험하지 못했던 원래의 사람이 지닌 참모습을 개방하여 구성해주며 한자를 개인의 차원으로부터 자유로운 주체의 차원으로 승화시켜 준다. 그러므로 환자가 단지 건강해지려고만 욕구할 경우 반복하는 일상성이 지배하게 되고, 그와 반대로 환자가 병과 건강의 제한성을 반성하여 삶의 의미를 물을 때 지금까지 소외당하고 상실되었던 세계가 조화로운 새 모습으로 환자에게 다가온다. 환자는 극단적 절망적인 병의 상황에서 병의 의미를 체험함으로써 병과 건강의 제한성을 극복하여 자신의 삶을 결단함으로써 세계 의미를 체험한다.

 

4. 삶의 전환점

 

시간 공간의 제한성, 다시 말해서 유한성은 넓은 의미에 있어서 인간뿐만 아니라 세계 자체의 근원적 고뇌이다. 비록 유한성이 무한한 의지로 본래의 형태를 취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한성의 껍질을 짊어지고 다니므로 제한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세계는 고뇌와 소통에 충만하여 방향을 상실하고 제멋대로 흘러가는 것으로 모습을 나타낸다.

병이란 우선 지금, 이곳의 인간이 고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현상으로 다룰 수 있지만, 그러한 의미의 병은 삶의 부분적 측면밖에 해명해주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병은 세계 체험에서 내면적 의미의 계기가 되는 병이다. 유한성으로서의 병이 세계 체험의 계기로 전환할 때 유한성은 이미 서서히 껍질을 벗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유한성이라는 시간은, 물론 공간도 포함하여, 그 의미를 결국 시간을 시간이게끔 하는 근원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유한성의 근원을 유한성에서 찾는다면 그러한 노력은 헛수고로 그치고 만다. 유한성은 자신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한히 유한성 안에서 순환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한성이 자신을 의식할 때 어떻게 유한성이 스스로를 지양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는 음악을 시간 예술이라고 부르고 미술을 공간 예술이라고 부른다. 음악 한 가지만을 예로 들 경우 분명히 음악은 시간의 흐름이라는 제한성 안에서만 가능한 예술이다. 음을 위시하여 박자와 멜러디와 화음 모두가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성립한다. 또한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소리의 "울림""들림"이 제한성 안에서 형성되지 않는다면 음악이라는 예술은 도저히 불가능할 것이다. 시간은 유한성이며 제한성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듯이 시간의 유한성에 의해서만 성립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음악은 무한성, 곧 영원성에서 가능하다는 말인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의식은 시간의 제한성을 제한성으로 인식함으로써 음악에 의하여 제한성을 무한성으로 지양시킨다. 무한성이나 영원성은 사실 절대자인 신의 세계에 속할 것이다. 신이 음악을 창작한다고는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울림""들림"으로서의 음악은 인간 주체의 삶에만 가능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중간존재로서 오직 인간 주체에 의해서만 유한성으로 지양될 수 있다.

음악은 시간이 제한성 속에서 인간의 질서있는 미적 행위에 의하여 창조되는 예술이다. 인간의 창조적 표현인 예술에서 우리는 암암리에 음악의 두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음악은 확실히 시간의 제약을 받는 예술이다. 그러나 창조한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음악이 시간을 연주함을 뜻한다. 음악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창조한다. 조각가는 진흙이나 석고라는 공간의 제한을 받지만 진흙과 석고로써 무한한 공간을 창조한다. 음악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미술이 공간 속에서 공간을 창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음악은 시간 속에서 시간을 창조한다. 음악은 시간에 제한되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음악은 시간을 유회하며 시간을 지배한다. 왜 그러한가? 음악은 인간 주체에게 가능한 예술로서 인간은 음악을 통하여 삶의 조화 및 자유라는 세계 의미를 체험하여 행위로 옮기기 때문이다. 5분도 안 걸리는 <한오백년>의 구성진 가락은 수백 년의 시간을 창조하며 베토벤의 <전원 교향악>역시 한 시간도 안 되는 시간 속에서 영원을 연주한다. 인간의 근원적인 의식은 자신을 전개시키고 지양시키면서 유한을 무한으로 확장시키는 정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시간은 결코 제한성의 한 면이라든가 또는 영원성의 한 면에서 인간에게 참다운 세계 체험의 의미를 가져다줄 수 없다. 오직 주관과 객관의 가능 근거를 해명하여줄 수 있는 인간 주체에서만 시간의 근원이 밝혀질 수 있다.

음악과 미술의 예에서 본것과 마찬가지로 병이 시간 공간이라는 제한성에만 정착하여 있지 않고, 병의 근원적 현상인 시간 공간의 제한성이 인간 주체의 자기반성을 거칠 경우 병은 우리들의 삶에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등장한다. 병은 이 경우 제한성이 무엇인지, 시간과 공간이 무엇인지, 그리고 고뇌와 고통이 무엇인지 이 모든 것들을 세계 체험의 형태로 인간 주체에게 제공해준다.

이제 병은 더 이상 현실 세계의 정신적 육체적 아픔이 아니라 세계의 근원적 원리에 관한 암호로 등장한다. 암호는 상징이다. 상징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 관한 상징이다. 사실 일상성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삶의 모든 존재 방식은 "상징적 형성"이 아닐 수 없다. 상징적 형성이란 인간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영역들이 그 자체로 참이 아니라 " 어떤 것"에 대한 형성임을 말한다. 상징적 형성은 따라서 암호이다. 우리들의 언어 행동을 위시하여 예술적 표현, 종교적 의식 등은 모두" 어떤 것"에 대한 인간의 존재 방식을 나타낸다. 인간은 상징을 형성하는 존재이다. 물리적, 의학적 의미의 병은 상징적 형성인 암호로서의 병에 의하여 세계 체험으로 전환한다. 인간 주체는 처절한 만큼 깊은 병의 심연 속에서 고독을 절규하며 개인으로 전락하여 삶을 포기하든가 아니면 유한성과 무한성의 갈등을 극복하여 병을 세계 개방성으로 전환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병이 환경으로서의 개인적 삶으로부터 세계 체험으로서의 내면적 삶으로 전환하는 곳에서만 삶의 자유가 보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에 있어서 병이 전환점이라고 할 경우 이 전환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가? 전환점은 "어떤 것"으로 향한 전환점이다. 전환점에서의 "어떤 것"은 더 이상 주체 인간과 전혀 상관없는 환경에 불과한 개인적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주체가 체험하는 세계 의미이다. 인간 주체는 자유에 의하여 모순과 갈등의 선택 앞에서 결단한 자기반성에 의하여 세계 의미를 접근하고 해명하며 구성할 수 있다. 그러면 자기반성으로서의 병의 전환점이 성립하는 곳은 어디인가? 그곳은 다름 아닌 시간성이다. 시간성은 인간의 내면 의식으로서 이 의식에 의하여 세계 의미가 해명된다. 시간성의 의식은 과거, 현재, 미래를 시간이게끔 하는 근원이다.

인간은 언제나 고뇌와 병과 죽음에 직면하여 있다. 고뇌는 병을 그리고 병은 죽음을 내포한다. 죽음은 허무의 상징이다. 인간 주체가 병을 병으로, 고뇌는 고뇌를 그리고 죽음을 죽음으로 시인할 때 인간은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인간 주체는 병과 죽음의 허무를 세계 의미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인간이 주체일 수 있는 근거는, 그가 자신의 자유와 양심에 의하여 고뇌와 병과 죽음 속에서 자신의 삶을 결단함으로써 세계 의미를 창조하는 데 있다.

 

 

1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1. 주체로서의 인간

 

우리들은 매일매일을 반복적으로 살아가다가 문득 "인간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바람과 돌은 그저 있다. 풀과 나무는 자손을 퍼뜨리며 자연의 흐름을 따라서 생존한다. 벌레나 짐승도 짧고 긴 인생을 바쁘게 보내며 자연을 형성한다. 물론 인간도 넓은 의미에서는 자연을 형성하고 자연의 흐름에 따라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은 #1 변화 무상한 집단 사회를 이루고 그 속에서 #2 윤리, 종교, 예술, 학문의 세계를 창조하며 따라서 #3 갖가지로 자연을 대상화시키면서 완전한 삶과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발전" 개념에 집착한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정의한 글들은 동서고금을 통하여 무수히 많다. 어떤 사람은 이성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행동을 또 어떤 사람은 정치를 인간의 특징이라고 주장한다. 막스 쉘러는 서구의 역사를 통하여 등장하는 인간관의 유형을 다섯 가지 분류하고 그것들은 각각 일면성을 지니므로 종합적, 전체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본질이 탐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다섯 가지 인간의 유형들은 각각 다음과 같다. #1 신을 추구하는 존재인 종교적 인간 #2 이성을 본성으로 소유한 사유인 #3 실증과학을 근거하는 공작인 #4 이성을 부정하고 의지를 삶의 본질로 보는 디오니소스적 인간 #5 현존재로서의 인간의 초월을 주장하는 초인. 쉘러는 인간을 이처럼 고찰하는 것은 인간의 특정한 어느 한 측면만을 강조하는 것으로 본다. 사실 인간을 유물론적이라고 보거나 유심론적으로 보는 것도 쉘러의 말과 마찬가지로 피상적인 견해이다. 인간은 소우주로서의 세계를 자기안에 머금고 있다. 비록 상식적인 개인으로서의 인간이라고 할지라도 이미 그는 자기만의 고유한 삶을 내면에 가능성으로서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실현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모든 마음은 불타의 마음"이라는 말이나 "이는 하나이지만 나뉘어지면 여러 가지가 된다"는 말은 바로 인간이면 누구든지 "고유한 삶"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고유한 삶은 주체이다. 주체란 자기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인간을 말한다. 따라서 주체의 근거는 자유의지이다. 고대의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면서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살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자연이 그들의 안식처이자 보금자리였으므로 자연을 외경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숭배까지 하였다. 그들은 산과 바다를 신령한 것으로 모시기도 했으며 곰이나 호랑이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받들기도 하였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면서 인간의 의식은 외부로부터 내면으로 방향을 돌림으로써 가능적인 자유의지를 현실화시키기 시작하였다. 인류의 역사는 한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과 흡사하다. 어린아이는 바깥 세계에만 눈길을 돌리며 모든 것을 신기하게 바라본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물으며 내면세계에 침잠한다. 그러다가 중장년에 달한 사람들은 외면과 내면의 조화를 이루고자 한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중세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이 종교에 의존했던 시기이다. 그러나 근대와 아울러 인간은 자신을 바라보며 전체적인 관점에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이나 신의 종속물 내지 노예가 아니라 외부적인 것과 내면적인 것을 대상화시키면서 스스로의 삶과 세계를 선택하고 결단하는 주체가 되었다. 만일 어떤 인간이 아직도 자신의 삶과 세계를 선택, 결단하지 못한다면 그는 아직도 주체를 현실화시키지 못한 채로 가능성으로서의 주체만을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구성하는 사회역시 모든 상황이 혼란 속에 뒤얽혀 있으므로 오랜 역사의 과정을 기다리면서 주체의 현실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능성으로든 아니면 현실성으로든 간에 인간은 주체이며 주체인 한에서 인격을 소유한다. 만일 인간 각자가 자신의 삶을 포기한다면 그러한 사람은 더 이상 주체일 수 없다. 그러나 제아무리 자유가 무겁고 힘든 짐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인간은 자유에 대한 갈망과 동경을 가짐으로써 자신이 주체임을 확인한다. 왜냐하면 그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주체이므로 악으로부터 선으로, 허위로부터 진리로 그리고 그름으로부터 옳음으로 또한 추함으로부터 아름다움으로 삶을 전환시키고자 한다. 인간은 주체이므로 환경을 상황으로 그리고 상황을 체험으로 지양시키면서 무수한 모순과 갈등 속에서 그러한 갈등과 모순을 극복하고자 한다. 인간은 주체이기 때문에 자신의 자유를 근거로 하여 미움 속에서 사랑을 갈구하며 전쟁 속에서 평화를 동경한다. 인간 주체는 평균인을 벗어나서 자기 자신의 개성을 가진다. 인간 주체는 고유한 개성에 의하여 역사의 맥락을 이어가면서 사회에 질서를 부여한다. 주체란 결국 자기 자신의 고유한 삶을 창조하고 구성하는 인간이다.

 

2. 자기반성

일반적으로 반성이라고 하면 그것은 도덕적 반성을 뜻한다. 누구나 초등학교 시절 교실 앞에 서서 벌을 받으면서 반성하던 생각이 날 것이다. 또는 다음에는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지 라든가 아니면 다음에는 친구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야지 하고 반성한다. 도덕적 반성은 제한된 사회습관 안에서 특정한 가치관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적인 전체성을 바라볼 줄 안다. 내면의 세계성을 바라볼 때 이미 자아는 세계를 포함하며 또한 삶과 세계의 근원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세계 근원을 돌아보는 것"을 자기반성이라고 한다. 인간은 자기반성에 의하여 가능성으로서의 자아를 성숙한 주체로 형성한다. 왜냐하면 자기반성은 은폐된 것을 개방된 것으로 전개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삶과 세계를 역사성으로 표현한다. 표현된 역사성은 문화로 나타나며 문화는 시간적 형태적으로 다양한 형태를 소유한다.

인간은 주체라는 점에서 다른 존재들과 구분된다. 인간이 주체일 수 있는 근거는 자기반성이다. 인간은 자기반성에 의하여 #1 환경 속에서 대상을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서 대상화하며 #2 자아를 다시금 생각하는 자아와 생각되는 자아로 구분하고 #3 더 나아가서는 자아와 대상의 공통적인 세계 근원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반성에 의하여 예술, 종교 및 학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표현하며 동시에 삶 속에서 세계 근원을 표현하고 이해하며 체험한다.

한 마리의 새나 나비는 들에 있으면서 들의 일부를 이루지만, 인간은 이미 자신과 들을 구분하여 들을 대상화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나는 들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은 "내가 들에 있는 것을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3중의 사고가 가능하다. "들에 있다고 생각하는 나를 생각한다"고 인간은 말한다. 물론 다시 한번 생각한다고 첨가할 수 있기는 하나 그것은 단순한 반복이므로 인간은 대상과 자신을 3중적으로 생각한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자기반성은 단지 기계적이며 형식적인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감각과 느낌과 사고의 통일적인 구조를 가지고 삶과 세계를 파악하면서 동시에 구성한다. 자기반성이 결여된 삶은 무질서와 혼돈에 충만하여 자기반성의 의식이 활동할 때까지 길고 긴 미로를 방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결국 역사, 정치, 경제, 문화적인 현실은 자기반성적인 의식의 거짓 없는 표현이다.

 

3. 자유와 결단

 

자기반성이 결여된 인간의 행동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로 나타난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는 현대인을 특징짓는 하나의 개념이기도 하다. 바로 우리 집에서 그리고 옆집에서 "자유로부터의 도피" 현상을 쉽사리 관찰할 수 있다. 어린아이들은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남들이 하는 대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어린아이 자신은 원하지 않아도 미술학원에서, 피아노 학원에 또는 콤퓨터 학원에 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그런 곳에 다녀야 하는지가 그들에겐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못한다. 다른 아이들이 다니고 부모가 다니라고 하니까 다닌다. 그들이 커서 대학생이 된다. 그들은 "내가 꼭 대학엘 가야만 하는가? 아니면 대학에 가지 않고 다른 어떤 것을 하여야만 하는가?"라는 자기 나름대로의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서 남들이 대학에 가고 부모들이 가라니까 대학엘 들어간다. 결혼도 마찬가지이고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삶은 나의 삶이라기보다는 "지나쳐버리는" 삶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우리들은 현대인의 인간 상실이라든가 소외를 이야기한다. 지나쳐버리는 삶에는 자유와 결단이 은폐되어 있다. 그러나 지나쳐버리는 삶이 극단적인 무의미와 허무에 직면할 때 자유 의식은 더 이상 암흑 속에 머물지 않고 결단하는 의지로 전환하기 시작한다.

만일 인간에게 자유가 없다면 세상은 기계와 같은 로보트 인간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며 삶의 순간순간은 결단할 하등의 필요 없이 정해진 프로그램에 의해서 삶 아닌 물질의 인과적 운동이 지루하게 연속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을 표현하고자 하며 또한 자신과 남을 연결하여 관계 속에서 대화하고자 한다. 자유,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반성을 가능하게 해주는 가장 기본적인 힘이다. 인간은 자유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결단할 수 있다. 자유는 인간에게 삶과 세계의 근원을 추구하게 해주는 필연적인 힘이며 또한 주체를 구성하게 해주는 가장 내면적인 힘이다.

 

4. 양심과 세계 구성

 

윤리적인 차원에서 볼 때 자유는 양심이다. 5"행복을 찾아서"에서 나는 양심을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의 "부름""들음"이라고 말하였다. 양심은 자기 반기 반성을 확인하는 부름과 들음이다. 나 자신의 부름과 들음 속에서 우리들은 나의 존재 근거와 타인의 존재 근거를 들으며 부른다. 양심은 나의 내면의 부름과 들음으로서 그것은 인간을 관계로 성립시켜준다. 그리하여 관계로서의 인간은 의무와 자율과 권리를 필연적으로 소유한다.

우리들은 꽃과 나무를 알고 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며 음악과 미술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우리는 "부름""들음"의 내면적인 운동에 의하여 알고 믿으며 느낀다. 들에 핀 한 송이 꽃은 우리들이 그것을 꽃으로 알기 이전에는 꽃이 아니라 그저 어떤 것에 불과하다. 자아 내면 깊숙이 숨어있는 부름과 들음은 그저 어떤 것을 꽃으로 구성하게 한다. 우리가 꽃으로 대상화함으로써 아는 것은 결국 꽃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반성은 나 자신의 "부름""들음"에 의하여 성립한다. 부름과 들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계를 포함한 나 자신을 부르고 듣는 것이다. 절대자 신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신을 부르며 신의 음성을 듣지 못할 때 신 역시 그저 어떤 것이나 아니면 허무에 불과하다. 인간이 자신을 부르고 들을 때, 인간은 세계 근원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절대자 신에 대한 신앙을 소유한다. 인간은 절대자 신의 음성이 부르는 것을 듣는다. 그러므로 인간은 부름과 들음의 양심을 통하여 종교 세계를 구성한다.

예술의 세계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을 부르며 듣는다. 제한된 시간과 공간은 양심의 부름과 들음을 통하여 유한성과 무한성의 이중적 성격을 가짐으로써 유한한 시간속에 영원한 멜러디를 그리고 제한된 공간 속에 무한한 색깔과 형태를 소유하게 된다. 자아의 부름과 들음은 인간의식의 가장 원초적인 동적인 힘이다. 그것은 본능적인 충동에 물들어 있으면서도 충동과는 또다른 인간의 존재 근거를 제공해주는 근원적인 힘이다.

양심의 부름과 들음에 의하여 인간은 세계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변형시킨다. 그러나 한층 더 나아가서는 인간은 세계를 구성한다. 인간의 세계 구성은 임의적인 것이 아니라 양심의 부름과 들음에 의한 필연적 창조작업에 속한다. 앞에서 우리들은 인간이 어떻게 학문과 종교와 예술의 세계를 구성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인간의 자아의 부름과 들음에 의하여 자기 자신을 구성하면서 동시에 삶과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각 인간의 삶의 구성에 대한 자유와 책임은 각각의 인간 주체에게 있는 것이다. 삶과 세계의 전체성 및 미래 지향성이 보장될 수 있는 장소는 인간의 양심 이외에는 어떤 다른 곳에도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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