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분석 강의 4
스물세 번째 강의 : 중상 형성의 길
신사 숙녀 여러분! 문외한들은 병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이 증상들이며, 치유는 증상들이 제거되는 것이라고 여깁니다. 의사는 증상들을 질병과 구별하는 것을 중시합니다. 그리고 증상 들을 제거했다고 해서 아직 병이 치유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증상들이 제거된 후에도 병에 관한 어떤 구체적인 흔적이 남았다면, 그것은 새로운 증상들을 형성할 수 있다는 능력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부터 문외한의 입장에 설 생각입니다. 그리고 증상들에 대한 탐구를 병에 대한 이해와 동일한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심리적인 (혹은 심인성의) 증상들과 심리적인 질병 상태만을 다룰 것입니다. 증상들은 생활 전체에 걸쳐서 받게 되는 해롭거나 최소한 무익한 행위들이며, 사람들을 괴롭히기 때문에 자주 불평을 만듭니다. 즉 증상들은 불쾌감이나 고통과 연결되어있는 것입니다. 증상들로 인한 중요한 손해들은 증상들 자체를 촉발시키는데 심리적인 소모가 심하고 또 나아가서 증상들과 씨름하는 데 필수적으로 드는 심리적인 비용을 포함합니다. 이 두 가지 비용들은 증상이 확산될 때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심리적 에너지를 엄청나게 고갈시키고, 그 결과 모든 중요한 인새으이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심적 에너지의 가동을 마비시킵니다. 이 같은 결과는 주로 증상 형성에 사용된 에너지의 양에 의해서 좌우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질병에 걸려 있는 상태>라는 개념이 본질적으로 실질적인 개념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병들어 있는 것이라고, 즉 신경증 상태에 놓여 있다고 쉽게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증상 형성을 위한 조건들은 정상인들도 가지고 있으며, 이를 입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경증 증상들이 리비도를 새로운 방식으로 만족시키고 할 때 생겨나는 심리적 갈등의 결과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둘로 나뉘어졌던 힘들이 증상들 속에서 다시 뭉친 것입니다. 이 두 힘들은 동시에 증상 형성이란 타협을 통해서 화해한 것입니다. 그래서 증상 역시 저항을 할 수 있습니다. 증상은 양쪽에서 지탱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갈등을 빚어내는 두 당사자들 가운데 하나가 현실에서 거부당한 불만족스러운 리비도이며, 이 리비도는 이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다른 방법들을 강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이 너무도 가혹하면, 비록 리비도가 좌절당한 대상이 아닌 다른 대상을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결국은 퇴행이라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리비도는 이미 극복했던 성적 조직 체계들 중의 한 단계에서 만족을 찾거나, 아니면 과거에 이미 포기했던 대상들 중에서 하나를 다시 추구해야만 합니다. 리비도는 퇴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발달과정 뒤에 남겼던 고착에 의해 유혹받습니다.
이제 도착에 이르는 길과 신경증을 향한 길이 나뉘어집니다. 이 같은 퇴행들이 자아의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으면, 신경증으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리비도는, 물론 더 이상 정상적인 만족은 아니지만, 모종의 현실적인 만족에 도달합니다. 반면에 자아는 비단 의식뿐만이 아니라, 운동 신경의 자극을 좌우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서 심리적으로 추구하는 것들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아가 이를 퇴행들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 갈등이 생겨납니다. 리비도는 이렇게 스스로 저지된 상태에서, 쾌락 원칙에 따라 충당된 에너지를 배출시킬 수 있는 어떤 다른 출구를 찾아야 합니다. 리비도는 자아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렇게 회피함으로써 리비도는 현재 자신이 거슬러 가고 있는 발달과정에 고착하는 것이 허용되지만, 한편으로 자아는 이러한 고착들에 맞서서 나름대로 억압의 방식을 통해서 자신을 보호해 왔던 것입니다. 리비도는 발달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는 과정에서 이런 억압되었던 지점들에 리비도를 집중함으로써, 자아와 자아의 법칙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리비도는 이 자아의 영향하에 획득했던 모든 교육의 가르침도 포기해야만 합니다. 만족이 눈짓하는 한 리비도는 조절할 수 있습니다. 안팎으로 좌절을 당하고, 그 이중적인 압박을 받는 리비도는 반항적이 되었으며,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이 모습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 리비도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리비도가 자신의 에너지를 집중하면서 전이시키고 있는 표상들은 무의식의 조직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 표상들은 특히 압축과 전위Verschiebung라는 바로 무의식에서만 가능한 과정들의 영향하에 놓이게 됩니다. 이로써 꿈-형성에서 나타나는 것과 완전히 동일한 관계들이 만들어집니다. 무의식적인 욕망 공상을 충족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무의식 속에서 완성된 본래의 꿈이 검열의 과제를 수행하며 무의식과의 타협이란 형식을 빌어 외현적 꿈을 형성하는 (전)의식의 일부 활동과 서로 마주치게 되는 것처럼 무의식 속에서 리비도를 대표하는 것은 전의식적인 자아의 힘을 계산에 넣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아 속에서 리비도를 대표하는 것에 대해 일어난 반발은 <리비도 반대 집중Gegenbesetzung>으로서 리비도를 좇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리비도가 표현 방식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자아의 반발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그런 표현이 선택됩니다. 그러므로 증상은 무의식적인 리비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거듭된 왜곡의 결과입니다. 증상은 결국 두 개의 서로 완전히 모순된 의미들을 지니고 있는, 인위적으로 선택된 모호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로 이 마지막 관점과 관련해서 꿈-형성과 증상 형성 과정 간의 차이를 유일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꿈-형성에서 전의식의 의도는 잠을 계속 자는 것이며, 이를 방해하는 어떠한 내용도 의식으로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무의식적인 욕망의 자극에 대해서 <아니야, 그 반대야!>라고 날카로운 경고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잠자는 사람의 상황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기 때문에 전의식은 좀 더 관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습니다. 현실로 향하는 출구는 수면 상태에 의해서만 차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갈등이란 조건들에서 리비도가 회피할 수 있었던 것은 고착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퇴행적인 리비도 집중, 즉 이 고착들은 억압을 우회해 가면서 리비도를 배출하거나, 혹은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타협의 조건은 준수되어야 합니다. 리비도는 무의식과 옛날 것에 대한 고착들이란 우회의 과정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매우 제한되고 거의 감지할 수도 없는 정도이기는 하지만 일단 현실적인 만족에 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나는 이 최종적 결말에 관해 두 가지 사실만은 언급할 생각입니다. 첫째, 여러분은 여기서 한편으로는 자아와 의식, 그리고 현실이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주목하기 바랍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서로 연결되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물론 이들이 처음부터 서로 연결되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여기서 말한 모든 것과 나중에 말하게 될 내용들은 모두 히스테리 성 신경증 환자들의 증상 형성에만 관련된다는 나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기 바랍니다.
그런데 리비도는 억압을 극복하고 넘어서는 데 필요한 고착을 어디서 찾아내는 것일까? 리비도는 그것을 유아기의 성생활이나 유아기의 성적 체험들 속에서 발견합니다. 즉 어린 시절에 버려졌던 부분적인 성적 만족을 위한 노력들이나, 포기했던 성적 대상들에서 발견하는 것입니다. 결국 리비도는 이런 것들로 다시 되돌아갑니다. 이 어린 시절의 의미는 이중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타고난 기질속에 가지고 있는 충동의 방향성들이 처음 나타나며, 두 번째로 외부의 영향들이나 우연적인 체험들에 의해서 그가 지닌 다른 충동들은 처음으로 일깨워지고 활성화됩니다. 이 같은 두 가지 요인들로 구별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타고난 기질이 표현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떤 비판적인 반론도 있을 수 없지만, 분석적 경험에 의하면 우리는 어린 시절의 전적으로 우연한 체험들이 리비도 고착을 흔적으로 뒤에 남긴다는 사실을 바로 수용해야만 합니다. 나는 이런 가정에 대해서도 역시 어떠한 이론적인 난점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기질적 요인들 역시 확실히 앞선 선조들의 체험들의 잔재인 것이며 이 역시 한때는 습득된 형질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습득 과정이 없이는 유전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유전으로 이어지는 기질의 습득 과정이 바로 우리가 관찰한 세대에 이르러서 종결된다는 것이 가능합니까? 그러나 유아기 시절의 체험들이 지니는 의미는, 종종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것처럼 선조들의 체험이나 성년기의 체험이 지니는 의미에 비해서 완전히 무시해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유아기의 체험들은 그와는 반대로 각별한 평가를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체험들은 발달과정이 완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욱더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정황에 의해서 외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룩스 w.roux(빌렘 룩스 (1850-1924). 독일의 해부학자)와 다른 학자들의 발달 기제에 관한 연구들은 세포가 분열하는 과정에 있는 수정란을 바늘로 찌를 경우, 심각한 발달상의 장해를 가져온다는 점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애벌래나 다 성장한 동물이 그런 상처를 입을 경우에는 별다른 장애 없이 견디어 낼 것입니다.
우리는 성인들의 리비도 고착을 기질적 요인을 대표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을 신경증 병인론을 정식화하는 과정에서 도입했습니다. 리비도 고착은 이제 두 가지 계기들로 다시 나뉘어집니다. 하나는 유전적 기질이며, 다른 하나는 아주 어린 시절에 습득한 기질입니다. 우리는, 학생에게 도식적인 설명이 항상 환영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앞서 설명한 내용들 사이의 관계는 하나의 도식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유전적인 성의 기질의 구성 방식은 이러저러한 부분적인 충동들이 독립적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혹은 다른 충동들과 함께 특별히 강해질 수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양상을 보입니다. 유아기적 체험이라는 요인과 함께 성적 기질의 구성 방식이란 요인은 다시금 일종의 <상보적 계열>을 구축합니다. 이는 우리에게 처음 알려진 성인의 기질과 우연적 체험 사이에 형성된 상보적 계열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 양쪽에서 모두 동일한 극단적인 사례들이 존재하며, 대리라과 하는 동일한 관계들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제기되는 물음은, 리비도 퇴행들 중에서 가장 현저하게 눈에 띄는 퇴행, 즉 성적 조직 체계의 초기 단계들로의 퇴행이 과연 유전적 기질이라는 계기에 의해서 전적으로 조건 지을 수 있는 것인가 아닌가의 여부입니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신경증 질병의 좀 더 다양한 유형들을 고찰한 다음에 시도하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잠시 주목해야 하는 분석적 연구의 결과는, 신경증 환자들의 리비도가 자신들의 유아기적 성 체험들에 얽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유아기의 성적 체험들은 사람의 일생과 질병에 대해서 엄청난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합니다. 치료의 작업을 고려하더라도, 그 중요성은 전혀 감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치료상의 과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기서 오해의 위험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챕니다. 다름 아니라, 우리는 인생을 너무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신경증이라는 상황에만 입각해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유아기의 체험들이 지니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한해야만 합니다. 즉 리비도는 자신이 후에 도달한 지점에서 추방된 다음, 퇴행적으로 유아기의 체험들로 되돌아갔다는 사실을 감안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입장을 정반대로 바꾸어서 보면, 리비도의 체험들이 그 당시에는 전혀 어떤 의미를 지니지 못했으며, 비로소 퇴행에 의해서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결론이 설득력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그런 대안들에 대해서 이미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설명하는 기회에 이미 입장을 표명했으며, 여러분은 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번에도 우리가 결단을 내리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유아기의 체험들이 리비도 집중되고, 병인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은 대체로 리비도 퇴행에 의해서 강화됩니다. 이 같은 언급은 의심의 여지 없이 옳지만, 만약 이를 유일한 판단의 기준으로 채택한다면 잘못된 추론으로 연결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관찰을 통해서, 유아기의 체험들은 그 자체의 고유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며, 이미 유년기에 그 의미가 입증된다는 사실을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린이의 신경증도 있습니다. 이 경우 질병은 외상적 체험들의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시간적으로 거슬러가는 지연의 계기는 필연적으로 매우 억제 되어 있거나, 완전히 누락됩니다. 이러한 유아기의 신경증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우리는 성인 신경증에 관한 많은 위험한 오래들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아이들의 꿈들이 성인들의 꿈들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것과 같습니다.([늑대인간-유아기 노이로제에 관하여](프로이트 전집 11, 열린책들) 참조.) 아이들의 신경증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자주, 훨씬 자주 발생합니다. 아이들의 신셩증은 종종 간과되기도 하며, 나쁜 버릇이나 무례함의 표시로 치부함니다. 그래서 종종 가정 교육을 담당하고 권위 있는 사람들은 이를 일방적으로 억누르려고 하지만, 나중에 돌이켜 보면 그것이 신경증이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질병인지는 다른 기회에 알게 될 것입니다. 성장한 후에 나타난 성인의 신경증을 분석해 보면, 대체로 그것은 과거에 직접 비롯된 것임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이미 말한 것처럼, 이러한 유아기의 신경증 증세가 중단되지 않고 일생에 걸친 질환으로 지속되는 사례들도 있습니다. 소아 신경증의 몇가지 사례들을 아이들에게서-이들이 병에 걸린 상태에서-직접 분석할 수 있었습니다. ([다섯 살바기 꼬마 한스의 공포증 분석] 참조) 하지만 우리를 만족시켜 주는, 더욱 자주 접할 수 있었던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성인이 된 후에 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소아 신경증 증세를 추후에 확인시켜 주었는데, 그 경우에 우리는 일부 견해를 정정하고 몇 가지 사항들을 유의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두 번째 말해야 하는 것은, 리비도를 끌어들일 만한 것이 없을 텐데도, 리비도가 그렇게도 규칙적으로 어린 시절로 되돌아간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입니다. 우리는 발달과정의 어느 특정한 단계들로 고착이 가능하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고착은 리비도적인 에너지의 일정한 양이 특정 단계에 압축, 유지됨으로써만 성립합니다. 결국 내가 여러분에게 지적하고 싶은 것은 여기서 유아기와 그 후의 체험들이 보여 주는 강도와 병인으로서의 의미 사이에는 우리가 앞에서 탐구한 계열들과 유사한 상보적 관계가 성립한다는 사실입니다. 병의 중대한 원인이 유년기의 성적 체험들인 경우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 시기의 인상들은 분명히 외상적인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또 이런 사례들의 경우, 환자가 평균적인 성적 기질을 갖고 있으며, 성적으로 아직 성숙하지 못했다는 사실들 외에 다른 말로 이 병의 원인을 보충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 외에도 다른 사레들이 있는데, 여기서는 모든 역점이 후년기의 갈등에 놓여집니다. 그리고 유년기의 인상들을 분석에서 강조할 경우, 그것은 대체로 퇴행의 결과로 이해됩니다. 따라서 <발달 장애>와 <퇴행>이라는 극단적인 사례들이 있으며, 이 극단들 사이에 두 가지 계기들이 모든 가능한 비율로 함께 배합된 사례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사실들은 어린이의 성적 발달과정에 일찍이 개입함으로써 신경증을 예방하려는 교육학적 관심을 어느 정도 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로 유아기의 성적 체험들을 주목하는 한, 이 발달과정을 지연시키고 그러한 체험들을 아이들이 하지 못하도록 배려함으로써 신경증 질병의 예방을 위한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신경증들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조건들이 복잡하며, 단 하나의 요인만을 고려하는 것으로는 일반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엄격하게 보호하는 것은 가치를 잃어버립니다. 왜냐하면 그런 조치는 아이들의 타고난 기질적 요인에 대해서는 무력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교육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젤 시해ㅇ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우며 다음 두 가지 새로운 위험들을 수반하는데 이들은 그렇게 과소평가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 엄격한 조치는 목표를 초과 달성하는 수도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결과적으로 오히려 아이에게 해를 끼칠 수 있는 정도로 과도한 성의 억압을 강요하는 경우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사춘기에 밀어닥칠 것으로 예상되는 성적 요구들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인생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성에서 어느 정도 예방해야 좋은지, 그리고 현실에 대한 인식 자체를 바꾸는 것이 신경증의 예방을 위한 더 나은 방책인지 여부가 대체로 불확실합니다.
이제 증상들에 대해서 다시 살펴봅시다. 증상들은 좌절된 만족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이는 결국 리비도 퇴행은 대상 선택이나 성적 조직 체계와 관련해서 초기의 발달 단계로 되돌아간다는 행위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신경증 환자들이 자신의 과거 중에서 어느 특정한 시기에 고착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 시기가 리비도가 만족을 누렸던, 행복했던 시기임을 압니다. 이제 그 시기가 리비도가 만족을 누렸던, 행복했던 시기임을 압니다. 신경증 환자는 그 같은 시기를 찾을 수 있을 때까지 계속 자신의 인생사를 뒤적입니다. 그는 자신이 기억하거나 혹은 후에 받은 자극들에 의해 연상될 수 있는 유아기까지도 거슬러 올라갑니다. 증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발달 초기의 유아기에 느꼈던 만족의 유형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이때의 증상은 갈등에서 기인하는 검열에 의해서 왜곡되고, 대체로 고통스러운 느낌으로 반전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이 증상은 신경증에 걸렸을 때 원인으로 작용한 요인들과 뒤섞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증상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의 유형은 뒤섞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증상이 가져다주는 만족감의 유형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낯설게 느껴집니다.
이 만족감이 환자 자신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그 자신은 만족을 오히려 고통으로 느끼고 불평하는데, 이런 정황들은 일단 고려하지 맙시다. 이처럼 만족을 고통으로 바꾸어 느끼는 현상 자체는 증상을 형성하도록 합력을 행사했던 심리적 갈등에 속합니다. 한때 그 사람에게 만족을 주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저항과 거부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감성의 변화가 눈에 띄지는 않지만 많은 점을 시사해 주는 증상의 한 전형적 사례가 있습니다. 탐욕스럽게 어머니의 유방에서 젖을 빨던 아이가 몇 년 후에 젖을 먹지 않으려고 심하게 반발할 수 있는데, 이를 교육을 통해 극복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만약 젖이나 젖이 들어간 다른 음료를 얇은 피부 같은 것으로 덮개를 씌워 아이에게 주면, 아이의 반감은 혐오감으로까지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 피부와 흡사한 덮개가 언젠가 자신이 그다지도 원했던 어머니의 유방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아마 부정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사이에는 물론 이유 과정에서 외상적으로 작용했던 체험이 놓여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증상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도록 만들고, 또 리비도의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증상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게 하는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증상들은 우리가 정상적으로 만족이란 현상에서 흔히 기대하는 모든 것들은 전혀 연상시키지 않습니다. 증상들은 대개 대상들을 도외시하고, 외부의 현실과의 관계를 포기합니다. 우리는 이를 현실원칙에 등을 돌리고, 쾌락 원칙으로 되돌아간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적 충동에 최초의 만족들을 제공했던 더욱 확대된 형태의 자가성애주의 Autoerotismus 같은 형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가성애주의란 외부의 세계를 변화시키는 대신에 자신의 행위가 등장하는데, 달리 표현하면 행위가 아니라 단지 적응을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계통 발생적 견지에서 매우 중요한 현상인 퇴행과 상응합니다. 우리는 증상 형성에 관한 분석적 연구들에 의해서 새로운 사실을 경험하게 되는데, 앞의 현상은 이러한 새로운 사실들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증상이 형성되는 데 꿈-형성과 같은 동일한 무의식의 과정들인 압축 Verdichtung과 전위Verschiebung가 함께 작용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증상은 꿈과 마찬가지로, 만족감을 충족시켜 준 모종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유아기와 흡사한 유형의 만족은 극도의 압축에 의해서 단 하나의 유일한 감각이나 신경 자극을 통한 만족의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 극단적인 전위에 의해서 전체적인 리비도 복합체die libidinose Komplex 중에서 하나의 작은 개별적인 부분에 대한 만족으로 제한됩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증상들 속에서 미리 추정했고 또 매번 입증되었던 리비도의 만족을 발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해도 그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아직도 무언가 새로운 사실들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놀랄 만하고 혼란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증상들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서 유아기의 체험들에 고착하며, 이로부터 증상들이 형성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놀라운 점은 이 유아기의 장면들이 더 이상 진실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대부분의 사례들에서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별적인 사례들을 살펴보면 개인의 역사적 진실과도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여러분은 다른 발견도 아닌 바로 이 발견이야말로 그 같은 결과로 인도한 분석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거나, 아니면 환자의 신빙성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분석과 신경증에 대한 모든 이해는 환자 자신의 언급들 위에 구축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도 우리를 매우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태가 아직 더 있습니다. 만약 분석에 의해서 겉으로 드러난 유아기의 체험들이 항상 사실이었다면, 우리는 확실한 토대 위에서 움직인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그런 허위가 조직적으로 만들어졌고, 환자가 꾸며 낸 것이거나 상상한 것으로 드러났다면, 우리는 이 같은 불안정한 토대를 떠나서 다른 연구의 기반을 찾아서 스스로를 구출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쪽저쪽 다 틀렸습니다. 사태 자체는 분명히 이렇습니다. 분석에 의해서 구성되거나 기억된 유아기의 체험들은 한편으로 분명히 거짓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경우에는 틀림없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례들에서 참과 거짓은 뒤섞여 있습니다. 증상들은 결국 실제로 일어난 체험들을 표현한 것이며, 이런 체험들이 리비도 고착에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환자의 상상에 의한 표현들이 섞여 있는데, 이는 병인론에서 고려하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한 서술들의 성격을 제대로 간파한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우리는 아마도 문제 해결의 열쇠를 이와 유사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이전부터 지니고 있으며, 모든 분석이 행해지기 전에 의식적으로 지니고 다니는 개별적인 유년기의 기억들은 마찬가지로 허위로 꾸며진 것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풍부한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기억의 오류를 입증한 실망은 분석 때문이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환자의 책임이라는 최소한의 안도감을 느끼게 됩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무엇이 이처럼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현실을 경시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즉 현실과 환상의 차이를 무시했던 것입니다. 꾸면낸 이야기들을 가지고 환자가 우리와 마주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모욕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현실과 허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현실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평가를 요구할 만합니다. 물론 환자도 자신이 정상적으로 사유할 때는 같은 관점을 유지합니다. 환자의 어린 시절의 체험들을 묘사한 것이 욕망의 상황인데, 그는 증상들의 배후에 있는 이러한 상황들을 짐작케 해주는 자료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 우리는 처음에 그 자료가 과연 사실인지 아니면 상상에 불과한 것인지 의심하게 됩니다. 나중에 우리는 일정한 특징들에 의거해서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결과를 환자에게 통보해야 하는 과제를 지닙니다. 이런 작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결코 어려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만약 우리가 처음부터, 당신은 마치 모든 종족들이 전설을 만들에 냄으로써 그들의 잊혀졌던 선사 시대를 꾸며대는 것처럼, 자신의 유년기를 덮고 있던 환상들을 지금 들추어내고 있는 중이라고 말한다면, 대화의 주제를 계속해서 설명하고자 하는 환자의 관심이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갑자기 사라져 버리는 것을 우리는 경험합니다. 그 역시 현실 자체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며, 모든 <꾸며 내 이야기들>을 경멸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를 이 부분의 작업이 종료될 때까지 내버려 둔다면, 다시 말해서 그의 어린 시절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우리는 탐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그가 믿도록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위험 부담을 지게 됩니다. 즉 그는 나중에 우리의 오류를 비난하고 우리가 마치 너무 쉽게 자신의 말을 믿어 버렸다고 여기고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환상과 현실을 동등하게 다루고, 일단 규명하고자 하는 유년기의 체험들이 어느 것에 속하는지 개의치 말자는 제안에 대해서 그는 시간이 많이 지나더라도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대하는 것이 그런 심리적 산물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유일하게 옳은 태도입니다. 그러한 심리적 결과물 역시 일종의 현실성을 지닙니다. 환자가 그러한 환상의 결과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 자체는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가 이런 환상들의 내용을 실제로 체험한 것처럼 느낀다면, 이런 사실은 그의 신경증과 관련해서 결코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러한 환상들은 <물리적> 실재 masterpiece Realitat와 대립하는 <심리적> 실재psychische Realitat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서히 <신경증의 세계에서는 심리적 실재가 결정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신경증 환자의 유년기에 항상 반복되고 단골로 등장하는 것들 가운데, 몇 가지는 특히 중요합니다. 따라서 나는 이러한 것들은 다른 체험들과 달리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종류의 대표적 전형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부모의 성행위를 목격했던 사건, 성인이 자기를 유혹했던 일, 그리고 성기를 거세하겠다는 위협 등입니다. 이런 사건들이 결코 어떤 현실적인 사건으로 실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면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은 정반대로 종종 나이 많은 친척들에 대한 탐문 조사를 통해서 반론의 여지 없이 확인됩니다. 가령 조그만 사내아이는 자신의 음경을 가지고 버릇 없이 장난을 치기 시작하면서도, 그런 행위는 드러내 놓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아직 모릅니다. 이때 부모나 보모가 그의 음경이나 아니면 죄를 저지른 손을 잘라 버리겠다고 위협하는 일은 드물지 않게 일어납니다. 나중에 부모에게 물어보면, 그들은 종종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즉 자신들은 그렇게 겁을 줌으로써 무언가 목적에 부합되는 행위를 했다고 스스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위협에 대해서 정확하고 뚜렷하게 기억합니다. 특히 그 위협이 나이가 든 이후의 일인 경우에는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만약 어머니나 혹은 다른 여자가 위협할 때, 이 여자들은 실제의 처벌은 대개 아버지나 혹은 의사가 담당할 것이라고 미루기도 합니다. 프랑크푸르트의 소아과 의사인 호프만Hoffman의 유명한 작품, '더벅머리 페터'에서 여러분은 거세의 위협이 지독하게 손가락을 빠는 행위에 대한 벌로 엄지손가락을 잘라 버리겠다는 좀 더 완화된 형태의 협박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소아과 의사 호프만은 어린 시절의 성적인 콤플렉스나 다른 콤플렉스를 잘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거세 위협Kastrationsdrohung이 신경증 환자들의 분석에서 나타나는 것만큼 자주 아이들에게서 발견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이로써 아이가 그러한 위협을 여러 요인들, 즉 암시나 자가 성애적인 만족이 금지되어 있는 지식의 도움으로, 그리고 여성의 성 기관을 보았을 때 받은 인상 등을 바탕으로 환상 속에서 종합했다고 믿어 버립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대개 어린아이들이 사물을 이해하거나 기억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런 아이들도 무산 계급에 속한 가정이 아닌 다른 가정에서 부모나 다른 성인들 간의 성행위를 목격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추후에' 이런 인상을 이해하고, 이에 대해 반응할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배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성교를 아주 자세하게, 관찰이 불가능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서술할 경우, 혹은 아이가 성교를 동물들의 성교 행위처럼more ferarum 뒤에서 행위 하는 것으로 묘사할 경우에-이렇게 묘사하는 사례들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우리는 이 같은 환상이 동물들(개들)의 성교에 대한 관찰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보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의 동기는 사춘기 시절에 보고 싶은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에 생긴 불만족스러웠던 호기심에 의해 발동한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호기심 가운데 극단적인 것은 자신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자궁 속에 있는 동안 부모의 성교를 관찰했다는 환상입니다. 특별히 관심을 끄는 것은 자신이 유혹을 받았다는 환상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사건에 대한 기억인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처럼 환상 속에서 유혹을 받는 일은 현실 속에서는 분석의 결과들을 처음 접했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드물게 벌어집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거나 동년배의 아이들에 의해서 유혹 당하는 경우가 성인들에 의한 유혹보다 더 자주 발생합니다. 그리고 만약 소녀들이 자신들의 유년기 시절에 있었던 일들을 끄집어내면서 아버지가 자신을 유혹했다고 말한다면, 그런 비난은 환상에 불과하고, 또 그런 말을 하게끔 만드는 동기 역시 의심의 여지 없이 분명합니다. 실제로 유혹받은 것도 아니면서 받았다고 여기는 환상을 통해서 아이는 일반적으로 자신의 성적 행위의 단계에서 자가성애적인 시기를 은폐합니다. 아이는 자신이 원했던 대상이 이와 같은 최초의 시기에 속하는 것이라고 상상함으로써 자위행위에 대란 수치심을 느끼지 않아도 됩니다. 또한 여러분은 가까운 남자 친척이 아이를 성적으로 학대하는 일들이 전적으로 환상에 속한다고 믿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그런 관계들이 실제로 일어났으며, 반론의 여지없이 확인할 수 있는 사례들을 취급했을 것입니다. 단지 그런 사건들은 유년기의 후반부에 일어나지만, 좀 더 이른 식의 일들인 것처럼 기억되었을 뿐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이 말하는 그 같은 사건들이 어떤 형태로든 필연적으로 신경증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건에 해당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그런 일들이 현실 속에서 존재했다면 나름대로 괜찮습니다. 현실이 그런 일들을 허용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암시들에 의거해서 만들어지고 상상에 의해서 보완된 내용일 뿐입니다. 결과는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유년기의 사건들은 물론 상당 부분 환상의 결과일 수도 있고, 혹은 실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만, 환상과 현실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우리는 오늘날까지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우리가 그렇게도 자주 언급했던 상보적 관계들 중의 하나가 설립합니다. 그렇지만 이 상보적 관계는 우리가 알고 있던 관계들 중에서 가장 이상한 것입니다. 이 같은 상상을 하고 싶어 하는 욕구나 상상의 재료들은 어디서 연유한 것입니까? 충동의 원천들이 무엇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매번 마다 같은 환상들이 동일한 내용과 함께 만들어지는 현상은 해명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답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이를 상당히 과감한 견해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나는 유년기의 환상과 몇 가지 다른 환상들을 '원초적 환상Urphantasie'이라고 부를 생각입니다. 원초적 환상은 계통 발생적인 역사의 유산입니다. 개인의 체험이 지나치게 성숙하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을 때, 개인은 원초적 환상들을 통해서 자신만의 체험을 넘어 태고시대의 체험에 도달합니다. 우리는 분석하는 과정에서 오늘날 상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환자가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에 접하게 됩니다. 그 중에는 아이들이 유혹을 받았다는 체험, 부모의 성교를 관찰함으로써 성적 자극이 촉발되는 체험, 거세해버리 겠다는 위협이나 거세당했다는 체험 등이 포함되는데, 이런 내용들은 사람들이 가족을 구성해서 살았던 태고 시대에는 한때 현실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 상상을 하는 아이는 단지 개인적으로 모르고 있는 진실을 역사 이전Vgeschichte의 사실로 채워 넣을 뿐입니다. 우리는 신경증 심리학이 인간의 발달과정에 대해서 다른 모든 경로들을 통해서 확보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고대의 유산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의심에 봉착합니다.
여러분! 마지막에 언급한 사항들은 우리로 하여금 앞에서 '환상Phantasie'이라고 부른 정신 활동의 생성과정과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만듭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것처럼, 환상이 정신 활동에서 어떠한 위상을 지니는지 규명된 것은 아닙니다만, 일반적으로 높이 평가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 나는 여러분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인간의 자아는 외부세계에서 닥치는 곤경의 영향에 의해서 서서히 현실을 인정하고, 현실원칙을 따르도록 교육을 받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가 추구하는 쾌락은 성적인 것만은 아니며, 쾌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대상들이나 목표들을 잠정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포기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쾌락을 포기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항상 어렵게 받아들여집니다. 그는 일종의 보상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쾌락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포기했던 정신 활동의 영역을 따로 마련해 놓습니다. 그러한 내용들이 보관된 영역에서는 현실에 뿌리를 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도 않고, 우리가 현실성 검사Realitatsprafung라고 부르는 절차가 적용되지 않습니다. 모든 충동은 곧바로 욕망이 성취되었다는 표상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의 체험이 현실이 아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뚜렷하게 인식하더라도, 환상에 의한 욕망의 충족에 계속 머물러 있음으로써 의심의 여지 없이 일종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상상의 행위에 의해서 사람들은 자신이 현실 속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던, 외적 강제로부터 지속적으로 자유로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는 가끔 쾌락의 동물이 되었다가, 또다시 이성적인 존재로 돌아오는 과정을 되풀이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현실에서 취할 수 있는 보잘것없는 만족감만으로는 살아가기 곤란합니다. 언젠가 홀타네Th.Fontane는 '보호해 주는 장치들이 없으면 되는 일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상상이라는 심리 세계의 창조물은 '삼림 보호 구역'이나 '자연 보호 공원'과 같은 지역을 설정하는 행위와 완전히 같습니다. 경작하는 행위나 자동차의 통행, 그리고 산업 시설에 의해서 땅의 원래 모습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변화할 수 있는데, 이런 위협에 처한 곳들을 보호 구역으로 설정합니다. 자연 보호 공원은 이런 오래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유감스럽게도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자연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모든 것은 그 구역 안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성장하고 싶은 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쓸모없거나 해로운 것조차 자랍니다. 그 같은 현실 원칙에서 벗어난 보호 구역이 환상이란 심리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상상을 만들어 내는 것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소위 '백일몽'입니다. 백일몽은 극심한 욕망, 터무니없이 과도한 성적 욕망들의 관념적인 만족으로서, 현실에 의해서 욕망을 절제하고, 인내해야 할수록 더욱더 무성해집니다. 환상을 통해 느끼는 행복감의 본질은 현실의 동의 없이도 쾌락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자주성의 표현으로서, 백일몽을 통해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런 백일몽들이 반에 꾸는 꿈들의 핵심이며 전형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밤의 꿈들은 근본적으로는 왜곡된 백일몽에 지나지 않습니다. 밤의 꿈은 반이 되어 자유로워진 본능 충동들에 의해 만들어진 정신 활동이 밤의 형식에 의해 왜곡된 백일몽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미 백일몽 역시 반드시 의식되지는 않으며, 무의식적인 백일몽들도 존재한다는 생각에 접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무의식적인 백일몽들은 신경증 증상들의 원천이자 밤의 꿈들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서 여러분은 증상 형성과 관련해서 환상이 지니는 의미를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좌절의 경우, 퇴행적으로 자신이 과거에 포기했던 지점들을 다시 리비도 집중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리비도는 과거의 포기했던 지점들을 다시 리비도 집중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리비도는 과거의 포기했던 지점에 일정량의 심리적 에너지를 가지고 고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우리는 취소하거나 수정하지 않겠지만, 한 가지 중간에 첨가할 부분이 있습니다. 리비도는 자신이 고착할 수 있는 지점들을 어떻게 찾아 나설 수 있습니까? 모든 의미에서 완전히 포기되었던 대상들과 리비도의 방향들을, 리비도가 아직 모든 의미에서 완전히 포기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리비도나 리비도에서 파생된 것들은 아직 일정한 강도를 유지하면서 환상의 표상들 속에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리비도는 모든 억압된 고착들로 연결된 길을 발견하기 위해서 단지 환상의 세계 속으로 후퇴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처럼 상상하는 행위는 관용되었으며, 결국 환상은 이런 상태를 즐긴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환상과 자아 사이의 대립들이 아무리 첨예하더라도, 일정한 조건이 지켜지는 한 이들은 서로 갈등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양적인' 성격의 조건이지만, 이제 리비도의 도움으로 환상들에 의해 집중된 에너지의 양이 증가하는데, 그 결과 상상의 표상들은 자기 주장이 강해져서 현실 속에서 자신을 관철시키려는 충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서 환상들과 자아 사이의 갈등이 불가피해집니다. 그런 환상들은 과거에 전의식 적이었건, 의식적이었건 관계없이, 이제는 모두 자아에 의해서는 억압을 당하고, 무의식에 의해서는 유혹의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리비도는 현재 무의식적 상태로 존재하는 상상들에서 벗어나 무의식 속에 있는 자신들의 발원지, 죽 자기 자신이 고착했던 지점들로 되돌아갑니다.
리비도가 환상의 세계로 돌아가는 단계는 증상 형성 과정에 앞선 중간 단계이며, 특별히 다른 명칭을 부여받아야 합니다. 융C. G. Jung은 이에 대해서 매우 적절하게 '내향성Introversion'이라는 이름을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그 표현을 목적에 부합되지 않게 다른 의미로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내향성의 의미를, 현실적인 만족의 가능성들을 외면하고 지금까지는 관용되었던 환상들에 대한 리비도 과잉 집중Uberbesetzung 현상으로 확정할 생각입니다. 내향적인 사람은 아직 신경증 환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병에 걸리기 쉬운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심리적 힘들 간의 균형이 깨지고, 만약 정체된 리비도의 다른 출구들을 찾지 못한다면, 그에게 증상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향적 단계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서 신경증에 의한 만족은 비현실적인 특성을 지니게 되고, 상상과 현실의 차이는 무시됩니다.
여러분은 내가 방금 설명한 내용들을 통해서 병인론의 체계적인 틀 속에 새로운 요인을 도입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챘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제의 관건인 에너지들의 양, 즉 에너지의 크기라는 요인입니다. 우리는 이 요인을 도처에서 고려해야만 합니다. 병인론적 조건들에 대한 질적인 분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혹 달리 표현한다면, 이 심리적 과정들을 단지 '역동적인' 관점에서만 파악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즉 '경제적인' 관점에 입각해서 파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너지의 리비도 집중이 일정한 강도에 도달하기 전에는, 이 두 충동들 간의 갈등이 분출되지 않는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물론 갈등의 내용적 조건은 이미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질적 요인들이 지니는 병인으로서의 의미는, 기질 속에 존재하는 부분 충동들 가운데 어떤 부분 충동이 '더 많은'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모든 사람들의 기질이 질적으로는 동일하며, 단지 양적인 관계들만 서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경증 질환에 대한 저항력과 관련해서도 이 양적인 계기는 적지 않게 결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문제의 관건은, 사용되지 않은 리비도 중에서 '어느 정도의 분량'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보유할 수 있는가의 여부입니다. 그리고 리비도 중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성이 아닌 승화라는 목표들을 지향하도록 조종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질적인 관점에서 정신 활동의 궁극적 목표는 쾌락을 구하고 불쾌감을 피하려는 충동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목표는 심리적 기제 속에서 작용하는 흥분의 양(자극의 양)을 통제하고, 불쾌감의 원인인 정체 현상을 지연시켜야 하는 과제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에게 신경증 환자의 증상 형성에 대해 이 정도로만 언급할 생각입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즉 내가 여기서 말한 모든 언급들은 오직 히스테리 환자의 증상 형성에만 해당된다는 것입니다. 비록 원칙들은 계속 유지된다고 하더라도, 강박신경증의 경우 많은 다른 사실들이 발견됩니다. 충동의 요구에 반대하는 리비도 반대 집중을 우리는 이미 히스테리를 다루면서 언급했는데, 리비도 반대 집중 과정은 강박신경증의 사례들에서 더욱 강하게 발견되며, 소위 '반동 형성Reaktionsbildung'을 통해서 임상의 상태를 좌우합니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편차를 보이거나 혹은 좀 더 폭넓은 편차를 보이는 다른 신경증들을 발견합니다. 다른 신경증들의 경우, 증상형성의 기제Mechanism에 관한 연구는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완결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나와 헤어지기 전에, 환상 활동이 지닌 한 측면에 대해서 잠시 동안 주목해 주기를 바랍니다. 환상 활동의 이 같은 측면은 일반의 폭넓은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환상에서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내향적인 사람이며, 이런 사람들은 신경증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예술가는 매우 강한 충동의 욕구들에 의해서 움직이며, 명예, 권력, 부, 명성, 그리고 여성들의 사랑을 갈구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런 만족에 도달할 수 있는 수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술가는 다른 불만족스러운 상태에 놓인 사람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등을 돌리고, 리비도를 포함하는 모든 자신의 관심을 자신의 환상에 의한 욕망의 형상화에 쏟게 되는데, 여기에서 신경증으로 통하는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완전히 신경증으로 귀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종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신경증이 예술가들의 작업 능력에 얼마나 자주 부분적인 장애를 일으키는지에 관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습니다. 아마도 거의 확실하게 예술가들의 기질에는 승화를 향한 강렬한 힘과 함께, 갈등을 좌우하는 억압에는 취약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이 현실로 되돌아가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술가들만이 환상 활동으로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환상의 중간 영역은 인간의 보편적인 동의에 의해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스스로 궁핍하다고 느끼는 모든 사람들은 그로부터 위안과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그런데 예술가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환상이라는 원천에서 쾌락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억압하고 있는 엄격함은 그들로 하여금 가끔 찾아오는 백일몽들로 만족하도록 몰아갑니다. 백일몽들은 그러나 아직 의식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진짜 예술가라면, 그는 더욱 많은 능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첫째로, 자신의 백일몽의 내용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개인적인 것들을 걸러내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또한 예술가는 백일몽이 경멸스러운 원천들에서 연유했다는 사실이 쉽게 드러나지 않을 때까지, 그 내용을 완화시켜 표현할 줄도 압니다. 나아가서 드는 특정한 소재를 자신이 상상한 표상에 그대로 부합되는 형상을 갖출 때까지 가공할 수 있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 그는 자신의 무의식적 상상의 표현을 통해서 큰 기쁨을 느낍니다. 그래서 그런 예술적 표현들은 취소한 일시적이나마 억압들을 능가하고 지양합니다.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해 낼 수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이 접근도 할 수 없게 된 무의식이란 쾌락의 원천에서 다시 위로와 위안을 이끌어 낼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이렇게 해서 예술가는 다른 사람들의 감사와 경탄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상을 통해서 처음에는 오로지 상상 속에서만 달성할 수 있었던 것에 도달합니다. 즉 명예와 권력, 그리고 여성들의 사랑까지도.
스물네 번째 강의 : 일상적인 신경질환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지난 강의에서 아주 어려운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제 당분간 그 문제를 떠나서 여러분 자신의 문제로 관심을 돌려 볼 생각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불만족스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정신분석 입문)에서 다른 것을 연상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론이 아니라 인생의 풍부한 사례들에 대해서 듣게 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언젠가 한 번 내가 여러분에게 '일 층과 이 층'이란 사례를 소개했을 때는, 신경증들의 원인에 대해서 무언가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다만 그 사례가 실제의 관찰에 근거한 것이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혹은 내가 여러분에게 처음 두 가지 증상들을 설명하면서 그것을 해명하고 또 환자의 인생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자세히 보여 주었을 때, 여러분은 증상들의 <의미>가 스스로에게 분명해졌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다만 여러분은 그 두 사례들 역시 지어낸 것이 아니기를 바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런 방식으로 계속 진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대신에 나는 여러분에게 아주 포괄적이며, 전체적으로 가늠하기 어려운 이론들을 소개했습니다. 그 이론들은 결코 완전한 것들도 아니며, 항상 새로운 내용들이 첨가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론에 관한 작업은, 아직 여러분들에게 설명하지 않았던 개념들을 수단으로 진행될 때도 있었습니다. 또 이론들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서술적 표현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관점으로 넘어갔으며, 여기서 다시 소위 <경제적>이라고 불리는 관점으로 이행해 갔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기서 사용된 기술적인 용어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개념들이 같은 의미를 지니는지, 그리고 단지 듣기 종은 표현이라는 이유에서 이러한 표현들을 바꾸어 가며 사용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또 쾌락 원칙이나 현실 원칙과 같은 매우 포괄적인 관점들이 계통 발생적으로 습득한 것들과 함께 여러분 앞에 제시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내용을 소개하는 대신에 나는 여러분의 기대와 항상 동떨어진 무언가를 여러분의 눈앞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게 했던 것입니다.
정신분석 입문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왜 내가 여러분 자신이 신경과민이라고 알고 있고, 이미 오래전에 열 분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이를테면, 신경질적인 사람들의 본래적인 성질들인 인간관계나 외부의 영향들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 과민성, 예측 불가능성, 무능력함 등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왜 여러분을 단계적으로 난해하고 극단적인 현상들에 관한 문제들로 인도하지 않았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말이 절대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서술기법에 바보같이 취해서, 서술상의 모든 결점들도 보기에 따라서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강변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심지어 여러분에게 득이 된다면 다른 방식으로 서술할 수도 있었다고 여깁니다. 또한 그렇게 하던 의도대로 작업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다루는 소재들 자체 속에는 종종, 서술하는 사람들 자신을 조종하고 원래 갖고 있었던 의도들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심지어 잘 알고 있는 자료들을 배열하는 것과 같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작업도 저자의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료들 자체의 속성에 의해서 저절로 자료들이 정돈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어떻게 다른 방식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서술되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정식분석 입문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왜 내가 여러분 자신이 신경과민이라고 알고 있고, 이미 오래전에 여러분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것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요? 이를테면, 신경질적인 사람들의 본래적인 성질들인 인간관계나 외부의 영향들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반응들, 과민성, 예측 불가능성, 무능력함 등과 같은 것들 말입니다. 왜 여러분을 단계적으로 좀 더 단순하고 일상적인 신경질의 유형들에서 시작해서 신경질의 난해하고 극단적인 형상들에 관한 문제들로 인도하지 않았는지 물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의 말이 절대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서술기법에 바보같이 취해서, 서술상의 모든 결점들도 보기에 따라서는 특별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고 강변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심지어 여러분에게 득이 된다면 다른 방식으로 서술할 수도 있었다고 여깁니다.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 원래 나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이 처음 파악했던 의도대로 작업을 진행할 수는 없습니다. 다루는 소재들 자체 속에는 종종, 서술하는 사람들 자신을 조종하고 원래 갖고 있었던 의도들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심지어 잘 알고 있는 자료들을 배열하는 것과 같은 거의 눈에 띄지도 않는 작업도 저자의 의도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료들 자체의 속성에 의해서 저절로 자료들이 정돈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중에 가서야 어떻게 다른 방식이 아닌 이런 방식으로 서술되었는지 물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서술된 이유들 중의 하나는 <정신분석 입문 강의>란 제목이 신경증을 다루어야 하는 이 부분에 더 이상 들어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 입문은 실수행위나 꿈에 대한 연구의 결과를 다루어야 합니다. 신경증론은 정신분석학 그 자체입니다. 나는 신경증론의 내용을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지금처럼 축약된 형태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소개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문제의 관건은 여러분에게 증상들의 의미와 증상의 의의를 증상 형성의 외적이며 내적인 조건들과 증상 형성의 기제와 관련해서 소개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르치고 있는 핵심적인 내용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리비도나 리비도의 발달과정에 관해 많은 내용들을 말해야 했으며, 자아에 대해서도 일부 언급해야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입문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사영하는 기법의 전체 조건들이나, 무의식과 억압(저항)을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준비가 된 상태였습니다. 여러분은 이어지는 강의들 중의 한 강의를 통해서 정신분석의 작업이 어느 부분에서 유기적으로 발전해 갈 수 있는지 알게 됩니다. 잠정적으로 나는 여러분에게, 이 모든 지식들을 소위 전이신경증이라고 불리는 신경과민성 감정들을 보이는 일부 집단이 연구에서 확보했다는 사실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나는 증상 형성의 기제를 오직 히스테리 성신경증의 경우에 국한해서 추적했습니다. 설혹 여러분이 확실한 지식을 확보하거나 모든 개별적인 사항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최소한 정신분석이 어떤 수단들을 가지고 작업하며, 어떤 물음들을 공략하고, 또 어떤 결과들을 제공했는지에 관한 하나의 표상만이라도 지닐 수 있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신경증에 애해 서술하는 과정에서 신경질적인 사람들의 태도부터 다루는 것이 좋겠다는 나의 희망을 밝혔습니다. 즉 그들이 어떻게 신경증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어떻게 스스로를 신경증에서 장어하고 적응하는가에 대한 서술부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흥미롭고, 알아볼 만한 가치가 있는 소재입니다. 게다가 그다지 어렵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무의식을 발견하지 못할 위험 부담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럼 방식의 서술에서는 리비도의 중요한 의미가 간과되고 모든 사태들은 신경증 환자의 장에 나타나는 방식대로 판단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자아라는 심판관이 내리는 판정은 전혀 신뢰할 수 없으며, 불공정합니다. 자아는 바로 무의식을 부정하고 억압된 것으로 밀쳐내는 힘인데, 자아가 무의식을 공평하게 다룰 수 있으리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 억압된 것들 중에 일차적으로 성의 거부된 요구들이 속해 있습니다. 우리가 그 요구들의 범위와 의미에 대한 지식을 자아의 입장에서는 전혀 알아낼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억압의 관점이 부각된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 싸우고 있는 두 당파들 중의 하나를 논쟁의 심판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받았는데, 하물며 당사자들 중에서 더 우세한 쪽을 심판관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우리는 자아가 표명하는 내용들에 의해서 그릇된 길로 인도되지 않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아의 말을 믿기 원한다면, 자아가 모든 영역에서 능동적이고 자아 자신이 증상들도 원하고 만들어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아가 상당한 정도로 수동적인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를 숨기고 미화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자아는 감히 이런 시도를 되풀리 할 수 없습니다. 강박신경증의 증상들에서 자아는 무언가 낯선 것이 자기와 맞서고 있으며, 이를 오직 힘겹게 방어할 수 있을 뿐임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경고들을 가슴에 새기지 않고, 자아의 거짓된 증언을 사실 자체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당연히 문제를 너무도 쉽게 처리해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정신분석학이 무의식과 성, 그리고 자아의 수동성을 강조할 때 직면했던 그 모든 저항들을 피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알프레드 아들러처럼, <신경증적인 성격>이 신경증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증상 형성의 단 한 가지 사항이나, 단 하나의 꿈에 대해서조차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을 것입니다. <신경증과 증상 형성에 대해서 자아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쳤는지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정신분석에 의해서 규명된 계기들을 거칠게 무시해서는 안 되겠지요?>나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확실히 그것은 가능합니다. 그런 작업은 언젠가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과제들에서 시작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이 작업하는 방향과 틀립니다. 이런 과제를 정신분석학이 언제쯤 다루어야 할지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연구한 신경증 사례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나르시시즘적> 신경증이라고 부릅니다. 이 질환들을 분석적으로 다루게 되면 신경증의 질병에 자아가 참여하는 과정을 공정하고 신뢰할 만한 방식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경증에 대해서 자아가 맺고 있는 관계들 중의 하나는 너무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처음부터 고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관계는 어떤 경우에도 빠짐없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오늘날에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외상성 신경증>이라는 질환에서 가장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여러분은 모든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단지 여기저기서 각기 다른 계기가 증상을 형성하는 주요 역할을 부여받습니다. 이는 마치 연극배우들의 집단과 같습니다. 이 집단에 속한 모든 배우는 자신에게 고유한 역할이 주어져 있습니다. 영웅, 막역한 친구, 음모꾼 등과 같은 역할입니다. 그러나 모든 배우는 자신의 자선 공연에서는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증상들로 모습을 바꾸는 상상들은 히스테리의 경우에서 가장 분명히 포착할 수 있습니다. 강박신경증 환자의 모습을 지배하는 것은 리비도 반대 집중이거나, 혹은 자아에 의한 반동 형성들입니다. 우리가 꿈에 대한 설명에서 <이차 가공>이라고 부른 현상은, 편집증과 같은 신경증들에서 망상의 형태로 가장 현저하게 나타납니다.
이처럼 외상적인 신경증들 중에서 특히 전쟁의 공포에 의해서 생긴 신경증의 경우, 자기 탐닉적이며 보호와 이익을 추구하는 자아의 동기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자아의 동기만으로 병에 걸리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지도 않으며 일단 걸리게 되면 병적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는데 기여합니다. 이러한 동기는 자아를 위험한 계기들에서 보호하려는 데서 발동합니다. 한편, 이런 위험이 반복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거나, 아니면 지나가 버린 위험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때까지는 자아가 치유되는 것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는 모든 다른 사례들의 경우, 신경증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이미 증상 역시 자아에 의해서 지탱된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증상은 억압하는 자아의 경향성에 갈등을 처리하는 것은, 가장 편하고 쾌락 원칙에도 가장 잘 들어맞는 방법입니다. 증상 형성에 의해서 확실히 자아는 부담스럽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내적인 작업을 면제받습니다. 그렇습니다. 갈등이 신경증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장 덜 해롭고 사회적으로도 가장 감내할 만한 해결책으로 부각되는 그런 사례들이 있으며, 이는 의사들조차 시인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의사 자신이 스스로 투쟁했던 질병의 입장에 서서 질병의 편을 드는 경우가 있다는 말을 들어도 놀라지 마십시오. 의사는 인생의 모든 상황에 반해서 사람들의 건강을 광적으로 지켜 주어야 하는 역할을 강요받을 수 없습니다. 그는 이 세상에 신경증과 같은 고통뿐만 아니라, 현실적이며 모면할 길 없는 고통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 현실의 필연성에 의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건강을 대가로 치루어야만 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의사는 한 개인의 그 같은 희생을 통해서 종종 다른 많은 사람들의 엄청난 불행을 막을 수도 있다는 것을 체험합니다. 만약 신경증 환자가 매번 갈등에 직면할 때마다 <질병으로 도피>하는 길을 택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많은 경우 이 같은 도피는 완전히 정당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태를 인식한 의사는 침묵하면서 뒤로 물러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논의에서는 이런 예외적인 사례들을 고려하지 맙시다. 일상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신경증으로 도피함으로써 일종의 내부적인 <질병에 의한 이득>이 자아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생의 여러 상황에서 질병에 의한 이러한 이득에는 구체적이며 외적인 이득이 포함되어있습니다. 이런 유형들 가운데 가장 빈번한 사례를 살펴봅시다. 자신의 남편에 의해서 거칠게 취급받고 무자비하게 이용당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자신의 기질이나 상황이 허용하는 경우, 거의 규칙적으로 신경증이라는 탈출구를 찾아 나섰습니다. 이를테면, 그녀가 비밀리에 어떤 다른 남자에게서 위로를 받기에는 지나치게 겁이 많거나 도덕적인 경우, 그리고 그녀가 모든 방해를 무릅쓰고 남편과 헤어질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한 경우 그녀는 신경증으로 도피합니다. 또 그녀가 자신의 생계를 스스로 유지하거나 더 나은 남자를 얻을 수 있는 전망이 없어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자신의 성적인 목적에 의해서 이 폭력적인 남편에 아직 매달린다면 신경증이라는 탈출구를 찾아 나서게 됩니다. 그녀의 병은 이제 지나치게 강한 남편에 대한 투쟁에서 무기로 작용합니다. 이 무기를 그녀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복수를 위해서 잘못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서 불평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질병에 대해서는 불평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의사에게서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을 발견합니다. 그녀는 평소에는 아무 배려도 할 줄 모르는 남자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자신을 위해 경비를 지출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외출도 허락받을 뿐만 아니라, 집 밖으로 외출하는 동안에는 결혼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도 있습니다. 병에 걸림으로써 얻어지는 외적인 이득이나 우연한 이득이 대단한 경우, 그리고 현실적으로 대체할 만한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경우, 여러분은 치료에 의해서 신경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가능성을 너무 놓게 설정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지금 질병의 이득에 대해 설명한 것은 바로 내가 좀 전에 배척했던 견해, 즉 자아 자체가 신경증을 원하고 또 만든다는 견해를 오히려 지지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느냐고 말하면서, 여러분은 나를 비난할 것입니다. 여러분, 서두르지 마십시오. 아마도 그 설명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것일 수 있습니다. 즉 자아는 신경증을 저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신경증을 그냥 감수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신경증에서 무언가 다른 상황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로부터 최선의 상황을 만들어 내려는 시도로 이해됩니다. 다만 이는 사태의 한쪽 면에 지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논한 것은 만족스러운 부분입니다. 신경증이 이득을 가져다주는 한, 아마도 자아는 신경증 상태에 대해서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익만이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로 자아가 신경증에 개입함으로써 손해를 보았다는 것이 곧 드러납니다. 그리고 증상들에 수반하는 고통스러운 느낌들은 아마 갈등에서 비롯하는 고뇌의 동등한 대리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불쾌감의 총량도 늘어났을 것입니다. 자아는 증상들에서 기인하는 이 불쾌감을 벗어 버리고 싶어 합니다만, 질병을 통해서 얻는 이득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자아는 스스로 믿었던 것만큼 그렇게 능동적이지는 못했음이 드러납니다. 그리고 이를 잘 기억해 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의사로서 신경증 환자들을 접한다면, 자신의 질병에 대해서 가장 심하게 불평했던 사람들이 의사의 치료 요법에 대해서 가장 적극적으로 응하고, 저항도 가장 적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당장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질병의 이득을 가져오는 데 기여하는 모든 것들이 억압의 저항을 강화하고 치료의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우리는 위 증상에 수반하는 질병의 이득과 함께 나중에 생기는 다른 형태의 이득을 첨가해야만 합니다. 만약 질병과 같은 심리적 조직 체계가 오랜 기간 동안 자리를 잡게 된다면, 그 질병은 마침내 일종의 자립적인 존재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질병은 일종의 자기 보존 본능 같은 것을 나타냅니다. 또 질병과 정신생활의 다른 부분들 사이에는 일종의 공조체제가 형성됩니다. 질병과 함께 살아가기로 작정한 심리적 요인들 가운데는 심지어 병에 대해서 오히려 적대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질병이 나름대로 쓸모와 용도가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그런 경우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래서 질병은 <이 차적 기능>을 획득하게 되고, 자신의 위상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병리학의 사례를 검토하는 대신에, 일상생활에서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한 유능한 노동자는 자신의 생계를 노동으로 유지했습니다만, 작업 중의 사고로 인해서 불구가 되었습니다. 노동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고를 당한 이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해 연금을 약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불구 상태를 구걸하는 데 써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비록 전보다 악화되기는 했지만, 그의 새로운 생활은 과거에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해주었던 능력을 앗아갔던 바로 그것에 의해서 지탱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의 형편없는 몰골을 원상태로 회복시켜 놓는다면, 여러분은 그의 생계 수단을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전에 했던 일을 다시 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신경증이라는 병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그 같은 <이차적인> 유용성과 상응하는 것은, <질병을 통한 이차적 이득>으로서 일차적인 이득에 첨가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여러분이 질병에서 얻는 이득의 실질적인 의미에 대해서 과소평가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이론적 관점에서 여러분이 지나치게 그 이득의 가치에 압도당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인정한 예외들은 제외하더라도, 질병의 이득은 항상 오버랜드가 '플리겐더 블레터에 실은 <동물들의 지혜>를 연상하게 합니다. 한 아랍인이 낙타를 타고 좁은 길을 가고 있었는데, 그 길의 한쪽 옆은 깎아지른 듯한 산비탈을 끼고 있었습니다. 길모퉁이를 돌아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당장 덤벼들 것 같은 기세로 웅크리고 있는 사자를 만났습니다. 그에게는 달리 피할 곳이 없었습니다. 한쪽은 깎아지른 산이었으며, 다른 쪽은 절벽이었습니다. 돌아갈 수도 도망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그러나 낙타는 달랐습니다. 낙타는 등에 탄 사람과 함께 절벽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사자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볼 도리밖에는 없었습니다. 신경증에 의해 제공되는 도움이라는 것도 대체로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증상 형성을 통해서 갈등을 해소하는 과정이 자동적으로 자행되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이 과정은 인생의 요구 사항들에 부응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며, 인간이 자신의 가장 탁월하고 훌륭한 능력들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했음을 뜻합니다. 만약 선택할 수만 있다면, 사람은 운명과의 정직한 투쟁을 통해서 패배하는 쪽을 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어떤 동기에서 신경증론을 일상적인 신경증에서부터 서술하지 않았는지 밝혀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그런 방식으로 서술했다면 신경증들의 성적인 원인을 입증하기가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여러분은 잘못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하려면, 전이신경증들의 경우 증상에 대한 해석에서부터 착수해야 합니다. 소위 <실제적 신경증>이라고 불리는 일상적인 형식들의 경우, 성적 생활이 병인으로서 지니는 의미는 명백하게 관찰을 통해서 입증할 수 있습니다. 이런 통찰에 나는 이미 20년 전에 도달했습니다. 언젠가 나에게, 왜 사람들이 신경증 환자들을 검사하면서 한결같이 그들의 성생활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당시에 나는 이 문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이 내게 지녔던 호감을 대가로 치렀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탐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미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경우, 신경증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명제를 제시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여기서 염두에 둔 것은 실제적 신경증이었습니다. 확실히, 이 명제는 개인 간의 차이점들을 너무 쉽게 간과하고 있습니다. 이 명제 역시 불확실한 의미를 함축하는데, 그 이유는 <정상적>이라는 판단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명제가 전체적인 방향을 제시해 준다는 점에서는 아직도 나름대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당시에 나는 신경증의 일정한 형식들과 특정한 성적 장애들 사이에 성립하는 특수한 관계들까지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나에게 만약 비슷한 환자들의 사례가 주어진다면, 동일한 결과가 반복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수음과 같은, 일종의 불완전한 성적 만족에 그쳐야 했던 사람들이 일정한 유형의 실제적 신경증에 걸린 여러 사례들을 종종 경험했습니다. 만약 그가 수음과 다르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문제가 있는 성적 행위에 빠지게 되면, 이 신경증은 즉각적으로 다른 형태의 신경증에 의해서 교체됩니다. 나는 이때 환자의 상태가 변화하면 그의 성적 생활 방식도 바뀌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환자들이 정직하지 못한 부분은 간파해 내고 그들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때까지 밀고 갔는데, 내가 당시에 배운 것은 이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의 추정이 옳다는 생각을 고집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환자들은 이럴 때 다른 의사들에게로 가버리곤 했습니다. 다른 의사들은 그들의 성생활에 대해서 그다지 열심히 캐묻지 않았던 것입니다.
당시에 나는 신경증적 질환이 항상 성생활에 의해서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물론 직접적으로 성적인 장애 때문에 병에 걸렸던 사람도 있습니다만, 어떤 다른 사람은 재산을 잃어버리거나 그를 기진맥진하게 만든 신체 기관의 질병을 겪었기 때문에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 같은 다양한 경우들은 우리가 자아와 리비도 사이에 추정했던 상호관계들을 파악한 후에야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아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수록 앞의 다양한 사례들에 대한 설명도 더욱더 만족스러울 수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신경증 질환에 걸리는 것은 그의 자아가 리비도를 어떤 형태로든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강하면 강할수록 그가 이 과제를 처리하는 것도 쉬워집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자아가 약해지기만 하면 리비도의 요구가 엄청나게 많아지는 효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으며, 결국 신경증이라는 병에 걸리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자아와 리비도 사이에는 다른 더욱 밀접한 관계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 관계들은 아직 우리들의 시야에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것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규명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떤 경로로 병에 들건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신경증의 증상들은 리비도에 의해서 일어나며, 이는 리비도의 비정상적인 사용을 보여 준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여러분이 실제적 신경증의 증상들과 정신신경증의 증상들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에 대해서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정신신경증의 첫 번째 집단인 전이신경증에 대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자세히 다루어 왔습니다. 두 가지 경우에 모두 증상들은 리비도에서 발생하며, 결국 증상들은 리비도의 비정상적인 사용에 기인하는 대리 만족입니다. 그러나 실제적 신경증의 증상들인 두통, 고통스러운 감각, 특정 기관의 흥분 상태, 신체 기능의 약화나 장애 등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즉 이런 증상들은 그 어떤 심리적 의미도 없습니다. 그 증상들은 히스테리 증상들처럼 단지 신체에만 주로 나타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신체의 물리적인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전개될 때, 우리가 알았던 모든 복잡한 심리적 메커니즘들은 고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신체의 물리적 과정들은 실제로 우리가 정신신경증의 증상들로 오랫동안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신체의 증상들은 우리가 마음속에서 작용하는 힘으로 알고 있던 리비도의 사용 방식과 어떻게 대응될 수 있습니까? 여러분, 그것은 매우 단순합니다. 여러분은 정신분석학에 대해 가해졌던 최초의 비난들 중에서 하나를 다시 상기해 주기 바랍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정신분석이 신경증 현상들에 관한 순수 심리학적 이론을 추구한다고 말했으며, 그런 시도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심리학적 이론들이 결코 질병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성적인 기능이 순전히 심리적인 것도 아니며, 또 단순히 신체적인 현상도 아니라는 사실을 곧잘 망각합니다. 성 기능은 신체와 정신 활동 모두에 영향을 미칩니다. 만약 우리가 정신신경증의 증상들을 통해서 심리적인 영향력과 관련한 장애가 발생했음을 알았다면, 실제적 신경증에서 성 기능의 직접적이며 신체적인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실제적 신경증의 이해와 관련해서 임상 의학은 가치 있고 또 여러 연구자들이 인정한 지침들을 우리에게 제시해 줍니다. 실제적 신경증들은 그 증상의 세부 모습에서나, 그리고 모든 신체 기관의 조직들과 기능들에 미치는 영향의 특성에서, 신체 외부의 독극물에 의한 만성적인 영향이나, 독극물의 주입이 갑자기 중단되었을 때 보이는 중독, 금단 증상과 같은 병의 상태들과 분명히 비슷합니다. 바제도씨 병은 낯선 물질이 몸 안에 유입되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 자체의 신진 대사 과정에서 생기는 독성물질의 영향으로 간주할 수 있는데, 이 병의 발생 조건과 대조해보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형태의 질환들은 뚜렷한 관련성을 보입니다. 나는 이러한 유추 해석에 의해서, 신경증을 성적인 물질대사 과정에 장애가 발생한 결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성적 독성 물질이 생산 될 수 있거나 혹은 내적이며 외적인 심리적 상태들에 의해서 이 물질들을 올바르게 사용할 수 없는 경우도 있는데, 여기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일반 사람들은 성적인 요구의 본성을 흔히 그런 식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도취 상태>로 부릅니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랑의 묘약>을 마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랑의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확실히 외부적인 요인으로 옮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적인 자극이 아주 다양한 기관들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우리의 주장과 성감대의 영역에 대해서 상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우리에게 <성적 물질 대사>나, <성의 화학 작용>이라는 말은 별 내용이 없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으로 불리는 두 가지 성 물질들을 전제해야 하는지, 아니면 우리가 리비도의 모든 자극을 전달하는 물질로서 <단 하나의> 성적 독성 물질을 설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지, 전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구성한 정신분석학의 학설 체계는 사실상 상부 구조에 해당하며, 언젠가는 이를 뒷받침할 토대가 신체 기관에 대한 이론을 통해서 제시되어야 합니다.
정신분석학은 학문으로서 그것이 다루고 있는 학문의 소재에 의해서가 아니라, 작업의 기술적 방식에 의해서 성격 지워집니다. 우리는 정신분석학을 신경증론에 적용한 것처럼, 문화사나 종교 과학, 그리고 신화학 등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이들 학문들의 내용에 손상이 가지는 않습니다. 정신분석은 정신 활동에서 무의식을 발견하는 작업에 지나지 않고 또 그런 의도만을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적 신경증의 증상들은 거의 확실하게 직접적인 독성 물질의 나쁜 영향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실제적인 신경증들의 문제가 정신분석학을 공격하기 좋게 하는 구실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은 실제적 신경증을 규명하는 데 약간만 기여할 수 있을 따름이며, 그것을 규명하는 것은 생물학적이며 의학적인 연구의 과제로 넘어갔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왜 강의 자료들을 다른 방식이 아닌 이와 같은 형태로 선택했는지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신경증론의 입문>을 약속했다면, 실제적 신경증들의 단순한 형식들에서 시작해서 리비도의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더욱 복잡한 심리적 질환들로 넘어가는 방식이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른 길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첫 번째 방식이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른 길이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 첫 번째 방식을 택했더라면, 우리가 다양하게 체험한 내용들이나 혹은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어 온 사실들을 모두 종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신신경증의 상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정신분석이 가장 중요한 기술적인 보조 수단으로 채택될 수 있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분석 입문>을 의도했으며 또 그런 뜻으로 제목을 공표했습니다. 신경증에 대한 일정한 지식을 확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정신분석이 어떤 학문인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정신분석을 설명하는 데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실제적 신경증을 처음부터 전면에 부각시키지 않았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좀 더 유리한 선택을 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은 심층적인 의미를 지닌 전제들이나 포괄적인 연관성으로 인해서 모든 교양인들의 관심을 끌 만한 가치가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경증론은 다른 이론들과 마찬가지로 의학의 한 장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여러분은 우리가 실제적 신경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관심을 쏟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은 정당한 기대입니다. 정신신경증이 실제적 신경증과 맺고 있는 내밀한 임상적인 관련성만 생각해 보더라도 우리가 마땅히 그것에 관심을 가져야만 합니다. 따라서 나는 여러분에게 실제적 신경증은 세 가지 순수한 형식들로 구별된다고 설명할 생각입니다. <신경쇠약>, <불안신경증>,<우울증>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분류 방식에 대해서 반론이 없지는 않습니다. 이 명칭들은 모두 일상적으로 사용되지만, 그 내용 자체는 명확하지도 않고 항상 뒤바뀝니다. 어떤 의사들은 신경증 현상들의 현기증 나는 세계를 구획 지어 분류하거나, 임상적인 개별 사례들이나 개개의 환자들을 특별히 따로 구별하는 행위들을 거부합니다. 그리고 심지어 실제적 신경증과 정신신경증의 구별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의 태도가 너무 지나치며 학문의 진보를 위한 길을 포기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위에서 언급한 신경증의 형식들은 가끔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좀 더 자주 서로 뒤섞이고, 정신신경증의 증상들과 함께 나타납니다. 이런 현상이 출현한다고 해서 우리의 분류 방식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광물학에서 광석학과 암석학의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광물들은 개체로서 서술됩니다. 여기서는 물론 광물들이 종종 결정체의 형태로, 주변 환경과 확연하게 구별되어 나타나는 정확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암석들은 광물들이 뭉쳐진 것인데, 확실하게 말하면 우연히 결합한 것이 아니라, 암석의 일정한 생성 조건들에 의해서 형태를 갖춥니다. 신경증의 발달과정에 대한 신경증론의 설명은 아직 암석학의 경우와 비슷한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광물들과 비교되고 또 식별이 가능한 개개의 임상 사례들을 전체 집단에서 일단 분리한다면 확실히 올바른 작업을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적 신경증과 정신신경증의 증상들 사이에는 주목할 만한 연관성이 있는데, 이는 정신신경증의 증상이 형성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공헌을 하게 됩니다. 즉 실제적 신경증의 증상은 종종 정신신경증의 핵심이자 전 단계입니다. 그런 관계는 가장 분명하게, 신경쇠약과 전환신경증으로 불리는 전이신경증 사이에서, 그리고 불안신경증과 불안 히스테리 사이에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다루게 될, 조발성 치매와 편집증을 포괄하는 이상 정신 같은 신경증의 형식들과 우울증 사이에서도 그런 관계를 아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검토할 사례는 히스테리 성 두통과 요통입니다. 분석을 해 보면, 이 증세가 압축과 전위를 통해서 일련의 리비도적인 상상들이나 기억들을 대리 만족시켜 준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 같은 고통은 한때 현실로 나타났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당시 이 고통은 직접적인 성적 독성 물질에 의한 증상으로서 리비도적 자극이 신체를 통해서 표현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히스테리의 증상들이 그런 핵심적 요인을 지닌다고 주장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가 아주 자주 일어나며, 리비도적 자극이-그것이 정상적으로 작용하든, 아니면 병의 원인으로 작용하든 관계없이-신체에 주는 모든 영향들이 바로 히스테리의 증상을 형성하도록 도와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신체에 미치는 모든 영향들은, 마치 조개가 진주모의 각질층을 두텁게 감쌀 때 사용하는 모래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성행위에 수반되는, 일시적인 성적 자극의 증후들은 정신신경증에 의해서 이와 비슷하게 증상 형성의 가장 편리하고 적절한 재료로 사용됩니다.
이와 유사한 과정은 진단, 치료와 관련해서 특별한 관심을 불러일으킵니다. 급격한 신경증의 확산에 의해서 고통을 받지 않더라고 신경증의 기질을 지닌 사람들에게도 병적인 신체상의 변화-가령 염증이나 상처-가 증상 형성을 자극합니다. 이러한 증상을 오직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장악하기 위해서 기다려 왔던 모든 무의식적인 상상들의 대표자로 만들어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경우에 의사는 이러저러한 치료의 요법을 번갈아 가며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신경증이 소란스럽게 활동하는 것을 내버려둔 채, 신체 기관상의 병인만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신경증을 치료하면서도 신체 기관상의 병인은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저러한 치료의 방법들은 때에 따라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나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그런 복합적인 증세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지침들을 거의 제시할 수 없습니다.
스물다섯 번째 강의 : 불안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들은 분명히 내가 지난 강의에서 일반적 신경증에 대해 여러분에게 말한 내용은 지금까지의 강의 내용들 중에서 가장 불완전하고, 가장 불충분한 것이었다고 간주하실 것입니다. 나는 그 점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엇보다 지난 강의에서 불안Angst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가장 의아스럽게 여기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신경증 환자들은 불안을 호소합니다. 그들은 불안 자체를 가장 끔찍한 고통으로 지적합니다. 실제로 불안은 그들에게 가장 엄청난 강도로 엄습하며, 그들로 하여금 아주 바보 같은 예방 조치들을 취하도록 강요합니다. 그러나 최소한 이 불안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축약된 형태로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나는 신경증 환자에게 나타나는 불안의 문제를 특히 분명하게 부각시키고, 그것에 대해 여러분 앞에서 자세하게 설명할 적정이었습니다.
불안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내가 여러분에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런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혹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감정 상태는 언젠가 자신의 체험을 통해서 직접 알고 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왜 바로 신경증 환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렇게도 여러 가지의 강렬한 불안을 느끼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그다지 심각하게 묻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일로 간주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물론 일상적으로 <신경질적nervous>이란 말과 <불안스러운angstlich>이란 말이 같은 의미를 지닌 것처럼 서로 바꾸어서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럴 수 있는 권리가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전혀 신경질적이 아닌 사람도 지극히 불안해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불안에 대한 경향이 발견되지 않는 많은 증상들에 의해서 시달리는 신경증 환자들도 있습니다.
상황이 어떠하든, 불안의 문제는 아주 다양하고, 중요한 물음들이 서로 만나는 일종의 접합점임이 분명합니다. 불안의 문제는 수수께끼와 같으며, 이 문제만 해결할 수 있다면 우리의 모든 정신생활의 문제들도 투명하게 밝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문제에 대한 완전한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확실히, 정신분석이 이 주제에 대해서도 대학의 강단 의학이 접근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리라고 기대할 것입니다. 강단 의학은 불안 상태가 어떤 해부학적인 경로를 통해서 촉발되는가에 대해서 무엇보다 먼저 관심을 가집니다. 그들은 골수의 한 부분인 연수(Medulla oblongata)가 자극을 받은 상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환자는 자신이 미주 신경(Nervus vagus)에 의해서 고통을 받고 있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연수는 매우 중요하고 아름다운 대상입니다. 그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나는 몇 년 전에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쳤는지 아주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나는, 불안을 심리학적으로 이해하는 과정에서 그 같은 자극을 전달하는 신경계에 대한 지식보다 더 쓸모가 없는 어떤 다른 지식을 찾기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신경증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도, 불안에 대해서만 일단 어느 정도 다룰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 불안을 <신경증성> 불안과는 반대로, <현실> 불안Realangst으로 표현해도 무리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현실적 불안은 우리에게 아주 합리적이며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불안으로 여겨집니다. 우리는 이 불안이 외부의 위험, 다시 말해서 예상했거나 예견했던 위협을 감지했을 때의 반응이며, 도망갈 때 나타나는 반사 작용Fluchtreflex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자기 보존 본능이 표현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안이 어떤 경우에, 즉 어떤 대상들과 어떤 상황에 직면했을 때 나타나는가는 자연히 외부 세계의 대한 우리의 지식의 수준과 함께 외부세계를 제어할 수 있는 우리의 힘에 대한 느낌에 대부분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미개인이 대포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일식에 대해서 불안해하는 모습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또 이와는 반대로 도구들을 다루고 일식과 같은 현상을 미리 예측할 수 있는 백인이 같은 조건하에서 불안해하지 않는 것도 이해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음으로 인해서 불안이 촉발한 미개인이 숲속에 난 짐승의 발자국을 보고 경악을 하는 반면, 야생 동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는 발자국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미개인은 발자국을 통해서 맹수가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험이 풍부한 선원은 작은 구름 떼만 하늘에서 보고도 놀랄 수 있지만, 무심한 승객에게는 마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름은 선원에게 폭풍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계속 생각해 보면, 현실 불안이 합리적이고 목적에도 부합한다는 판단은 근본적으로 수정되어야 합니다. 임박한 위기에 처했을 때 유일하게 목적에 부합하는 행동은 바로 위협의 정도를 자신의 힘과 냉철하게 견주어 보고 이에 따라 도망할 것인가 방어할 것인가, 혹은 가능하면 공격할 것인가의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며, 게다가 여기서 좋은 결과를 더욱 많이 기대하게 해주는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불안이 들어설 자리는 없습니다. 모든 일들은 어쨌든 일어나게 되어 있는 것이고 만약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 모든 일들을 아마도 좀 더 잘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론 불안을 지나치게 강하게 느낄 경우, 목적에도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때 불안은 도망가는 행위를 포함해서 모든 행동을 마비시킵니다. 대개 위험에 대한 반응은 불안의 효과와 방어 작용으로 구성됩니다. 놀란 동물은 불안해하면서 도망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목적에 부합된 행동은 <도망>이지 <불안에 떠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불안의 발생이 결코 목적에 부합되지 않는 무엇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아마도 불안의 상황을 자세히 분석한다면 좀 더 나은 통찰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불안한 상황의 첫 번째 요소는 위험에 대한 준비 상태Bereitschaft입니다. 이런 태도는 고조된 감각으로 예의 주시하는 행위와 운동 신경을 곤두세우는 데서 나타납니다. 이런 위험에 대한 준비 태세는 이론의 여지 없이 이익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인정됩니다. 그렇습니다. 오히려 준비 태세가 결여되어 있을 때, 심각한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지 모릅니다. 한편 이 준비 태세에서 이제 운동 신경을 통한 행동이 촉발됩니다. 일단은 도망을 고려하지만 더 높은 단계에서는 능동적 방어 태세가 갖추어집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가 불안 상태로 느끼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불안의 전개 과정이 단순한 징후나 산호를 포착하는 차원에 국한되면 될수록, 불안을 단지 예비하는 단계를 넘어서 직접 행동으로 이행해가는 과정이 더욱더 거침없이 진행되며, 나아가서는 전체적인 불안의 감정이 전체적으로 전개되는 과정도 목적에 더욱더 잘 부합하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불안에 대한 준비 태세는 목적에 부합되지만, 반면에 불안의 감정이 진행되는 과정은 불안이라고 불리는 현상들에서 목적과 배치되는 요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는 불안Angst과 공포Furcht, 경악Schreck과 같은 언어 사용의 방식들이 같은 의미를 지니는지 아닌 지의 여부에 대해서 자세히 묻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나는 단지 불안은 상태와 관계하고, 그 대상과는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반면에 공포는 바로 특정 대상에 대한 경각심을 뜻합니다. 경악은 이와 달리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처럼 보입니다. 즉 경악은 불안의 준비 태세를 통해서는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의 효과를 부각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을 느낌으로써 오히려 자신이 경악의 상태에 빠지는 것은 모면하려 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불안>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데 어느 정도의 다의성과 모호성의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간파했습니다. 대개 사람들은 불안을 주관적인 상태로 이해하는데,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은 <불안한 감정이 발생했음을> 사람들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상태는 감정Affekt이라고 불립니다. 그렇다면 이제 역동적인 의미에게 이 감정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어쨌든 여러 가지가 복합되어있는 복합체일 것입니다. 감정은 첫째 특정한 운동 기관의 신경 자극이나 방출 등을 포함합니다. 둘째로 특정한 감각들을 함축합니다. 이 감각들에는 두 가지 유형들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이미 발동한 운동성의 행위들에 대한 지각이며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쾌감이나 불쾌감입니다. 이 쾌감과 불쾌감이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감정의 기본적인 정서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나열함으로써 감정의 본질을 적중시켰다고 믿지 않습니다. 어떤 감정들의 경우 그것을 깊이 통찰하고 인식할수록, 그 감정의 틀을 유지해 주는 핵심은 특정하고 의미심장한 체험의 반복임이 드러납니다. 이 체험은 보편적인 성격을 띤, 한 개인이 아니라 그 개인이 속한 종족 자체 태곳적의 역사로 거슬러 가는, 아주 오래전의 인상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내 말을 여러분이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말한다면, 감정 상태는 히스테리 성 발작과 같은 방식으로 구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들은 과거에 대한 기억의 잔재입니다. 따라서 히스테리 성 발작은 새롭게 형성된 개인적인 감정과 비교할 만합니다. 그리고 정상적인 감정은 일반적이며 유전적으로 이어받은 히스테리의 표현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내가 여기서 감정들에 대해 말한 내용들이 정상적인 심리학도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고 간주하지 마십시오. 반대로 이 견해들은 정신분석학의 토대 위에서 나왔으며, 오직 이곳에서만 통용됩니다. 여러분이 심리학을 통해서 감정들에 대해 알고 있는 내용은, 예를 들어 제임스-랑게의 이론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정신분석학자에게 거의 이해도 안 되고, 따라서 여기서 논의할 만한 가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감정들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도 그다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이 어두운 영역 속에서 방향을 설정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입니다. 이제 나는 계속 설명하겠습니다. 불안의 감정이 인생 초기의 어떠한 체험을 반복이란 형태로 다시 되풀이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그것이 <출산 행위Geburtsakt>라고 말합니다. 출생의 과정에서는 불쾌감들과 분만 당시의 자극, 신체의 감각들이 무리 지어 나타납니다. 이는 생명의 위협을 초래하는 모든 경우의 전형이 되었으며, 이후부터 불안 상태로서의 공급(내적 호흡)이 중단됨으로써 엄청난 강도의 자극이 가해지는데, 이는 불안 체험의 원인이자 독성을 가진 최초의 불안이기도 합니다. 불안이란 이름은-협소함angustiae, Enge-호흡할 때 기도가 좁아지는 현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출생시에 현실적 상황의 결과 존재했고, 오늘날에는 감정 속에서 거의 규칙적으로 재생됩니다. 우리는 어머니에게서 분리될 때 발생하는 최초의 불안 상태가 많은 사실들을 암시한다고 여깁니다. 우리는 또, 최초의 불안 상태를 반복하려는 기질이 일련의 수많은 세대들을 거쳐 유기체의 기관에 너무도 철저하게 체화된 나머지, 한 개인이 불안의 감정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확신합니다.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나온> 전설적인 맥더프Macduff처럼, 분만 과정을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경우도 예외는 아닙니다. 포유동물들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의 경우에는 불안 상태의 전형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동물들의 경우, 어떤 감각의 복합체가 우리의 불안에 해당하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어떻게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출생의 과정이 불안 감정의 원천이자 전형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듣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사변은 여기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오히려 일반 민중의 소박한 생각에서 그것을 빌려왔습니다. 여러 해 전에 병원의 젊은 의사들과 한 식당에서 점심을 한 적이 있는데, 분만실의 한 조수가 지난번에 산파 시험을 치를 때 일어났던 재미있는 일화를 말해주었습니다. 만약 분만 시에 아이의 태변이 양수에 보인다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질문이 한 응시생에게 던져졌습니다. 그녀는 바로 답했습니다. <그건 아이가 불안해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녀는 웃음거리가 되었고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조용히 그녀의 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꾸밈없이 정확한 생각을 하고 있는 그 불쌍한 여자가 사태의 중요한 연관성을 들추어냈다고 추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신경증적 불안die neuroticsche Angst을 다루기로 합시다. 신경증 환자에게 불안은 어떤 새로운 유형의 현상들로 나타나고, 어떤 연관성을 보여 줍니까? 이에 대해서는 설명할 내용이 많습니다. 우리는 일단 일반적인 불안증으로서, 소위 부동성 불안frei flottierende Angst을 발견합니다. 이 불안은 어떤 방식으로든 모든 형태의 적합한 표상 내용에 그대로 달라붙을 준비가 갖추어져 있습니다. 또 판단에 영향을 미치거나, 특정한 기대감을 품게 만들고, 자신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엿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을 <기대 불안Erwartungsangst>, 혹은 <불안한 기대감>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유형의 불안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모든 가능성들 중에서 항상 가장 끔찍한 가능성을 예상합니다. 이들은 모든 우연을 불길한 사태의 조짐으로 해석하고, 모든 불확실성을 좋지 못한 의미로 이용합니다. 그 같은 불길함을 기대하고 싶어 하는 충동은 많은 사람들의 성격적 특징으로 나타나는데, 이런 성격만을 제외하면 이 사람들은 모두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이들이 지나치게 겁이 많다거나, 비관적이라고 흉을 봅니다. 그러나 현저하게 눈에 띄는 기대 불안은 대체로 신경증의 질환에 속합니다. 이를 나는 <볼안신경증>으로 명명하고, 실제적 신경증에 속하는 것으로 규정했습니다.
불안의 두 번째 형식은 방금 설명한 것과 달리 오히려 심리적인 요인과 결부되어 있으며, 특정한 대상들이나 상황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는 매우 다양하고 종종 특이한 형태로 나타나는 <공포증Phobie>입니다. 저명한 미국의 심리학자인 스탠리 홀Stanley Hall은 얼마 전에 이 같은 일련의 공포증들에 화려한 그리스어로 된 명칭을 부여하는 수고를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집트 사람들이 열거한 열 가지의 재앙과 흡사하게 들렸는데, 다만 그 숫자만 열을 넘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자 여러분, 공포의 대상이나 내용이 될 만한 모든 것들을 들어 보십시오, 암흑, 바깥의 공기, 광장들, 고양이들, 거미들, 작은 벌레들, 뱀들, 쥐들, 벼락, 끝이 날카로운 물건들, 피, 닫힌 공간들, 인파, 고독, 다리를 건너는 일, 배와 기차로 여행하는 일 등입니다. 이 혼잡한 공포의 대상들을 정리하기 위한 첫 번째 작업을 통해서 세 가지 유형들이 구별됩니다. 공포심을 자아내는 많은 대상들과 상황들은 우리 같이 정상적인 사람들에게도 무언가 불길하고, 위험과 관련이 있는 대상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공포심들은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매우 과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뱀과 마주칠 때, 꺼림칙한 느낌을 가집니다. 뱀에 대한 공포심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윈은 비록 그가 두꺼운 유리창 덕분에 자신을 뱀에게서 보호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다가오는 뱀 앞에서 억누를 수 없었던 공포감을 매우 인상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두 번째 공포심의 유형들로는 다음 사례들이 있습니다. 이 공포심은 위험과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그것에 익숙해져서 과소평가하거나, 항상 염두에 두지는 않는 경우들이 해당합니다. 여기에는 대부분의 상황공포증Situationsphobie이 속합니다. 우리는 집에 있을 때보다 기차 여행 중에 충돌 사고와 같은 일을 당할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압니다. 또 배가 침몰해서 타고 가던 사람들 대부분이 익사하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위험들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며 불안을 느끼지 않고도 기차와 배로 여행을 다닙니다. 또한 다리를 건너는 순간에 다리가 무너져서 그 밑의 강물로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나서 위험으로조차 고려되지 못합니다. 고독하게 혼자 있는 동안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일정한 상황에서는 혼자 있는 것을 피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조건에서 일순간도 혼자 있지 못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파나 닫힌 공간, 천둥이나 번개가 치는 날씨 등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경증 환자들의 공포증에서 우리가 이상하게 느끼는 부분은 공포증의 내용이 아니라, 강도입니다. 공포증들과 같은 불안은 정말로 불가항력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신경증 환자들이 어떤 상황에서는 우리들도 불안을 느끼고 또 그들도 같은 이름을 부여하는 그런 사물들이나 대상들에 대해서는 전혀 불안해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자주 받았습니다.
공포증들 중에 세 번째 유형이 남아 있는데, 이를 우리는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만약 어떤 건장하게 생긴 성인이 불안에 떨면서 자신이 그렇게도 잘 알고 있고 또 본인이 출생한 도시의 거리나 광장에도 나다니지 못하는 경우, 우리는 어떻게 이 공포증들과 이를 성립시킨 위험과의 연관성을 밝혀낼 수 있겠습니까? 이 세 번째 유형에 속한 동물공포증Tierphobie들의 경우, 동물에 대해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반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양이를 만나기만 하면 꼭 유혹하거나 쓰다듬지 않고서는 지나칠 수 없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는 반증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자들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쥐도, 동시에 사람들이 부르는 애칭들의 순위에서 첫 번째를 차지합니다. 자기 애인에게 <생쥐 같다는> 말을 들을 때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많은 처녀들도 정작 같은 이름의 조그마한 동물을 목격하면 놀라서 소리칩니다. 거리공포증StraBenangst이나 광장공포증을 지닌 남자에 대해서 우리는 그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행동한다는 설명밖에 할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교육을 통해서 직접 그런 상황들은 위험하기 때문에 피해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그리고 광장공포증에 걸린 남자는 누군가 그와 함께 동반해서 광장에 나가면, 사실 불안을 느끼지 않습니다.
여기 서술한 불안의 두 가지 유형들, 즉 유동적인 기대 불안과 공포증들과 결부된 불안은 서로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가령 불안의 한 유형이 다른 유형보다 더 높은 단계의 불안은 아닙니다. 이 불안의 유형들은 단지 예외적으로 우연히 함께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장 강한 일반적인 불안의 감정이 반드시 공포증의 형태로 표현되지는 않습니다. 일생 동안 광장공포증으로 생활의 제한을 받는 사람들도 비관주의적인 기대 불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광장 불안이나 기차 불안과 같은 많은 공포증들은 성장한 다음에야 분명히 나타납니다. 다른 불안들, 가령 암흑과 천둥과 번개가 치는 날씨, 동물들에 대한 불안 등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존재합니다. 앞에서 거론한 유형의 불안은 심각한 질병으로서의 의미를 지닙니다. 후자의 경우는 특이한 성격이나 기분 상태로 인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후자의 유형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한 가지 대상이나 상황뿐만 아니라, 대체로 다른 비슷한 것들에 대해서도 불안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 공포증들이 모두 <불안 히스테리Angsthysterie>에 속한다고 첨언해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은 잘 아려진 전환 히스테리와 가까운 감정들 중의 하나로 간주해야 합니다.
신경증적 불안의 세 번째 유형은 우리에게 수수께끼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우리는 불안과 임박한 위험 사이의 연관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불안은, 예를 들어 히스테리 증상들에 수반하는 히스테리 성 불안이거나, 혹은 흥분 상태의 여러 임의적인 조건에서 발생하는 불안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흥분 상태에서 감정이 어떤 형태로든 표현될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정작 불안의 감정이 나타날 줄은 거의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불안이 표출되는 수가 있습니다. 또 다른 예는 우리나 환자 자신도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불안의 발작으로서 모든 조건들과 관계없이 무작정 불안해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위험이나 동기가 있는데 다면 환자가 이를 과장되게 받아들인 나머지 불안해한다고 해석할 만한 요인들은 주변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습니다. 이런 자발적인 발작들의 경우, 불안 상태라고 지칭할 수 있는 감정의 복합체는 여러 가지 요인들로 분해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발작의 전체적인 모습은 하나하나 개별적이며 강렬하게 나타나는 증상에 의해서 대표될 수 있습니다. 즉 이 증상은 경련, 현기증, 심장의 맥박이 강하게 뛰는 심계항진, 호흡 곤란 등으로 대표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불안으로 인식할 만한 일반적인 감정들은 여기서 나타나지 않거나 모호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안의 등가물들Angstaquivalente>이라고 표현하는 상태들은 모든 임상적이며 병인론적인 맥락에서 불안과 같이 취급할 수 있습니다.
이제 두 가지 물음들이 떠오릅니다. 위험이 전혀 역할을 하지 않거나 아주 사소한 역할만을 담당하는 신경증적 불안은, 전반적으로 위험에 대한 반응으로 간주되는 현실 불안Realangst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그리고 신경증적 불안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일단 우리는 다음과 같이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불안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무엇이 존재하리라는 것입니다.
신경증성 불안을 이해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암시들이 임상적인 관찰을 통해 제시됩니다. 이제 그 의미를 나는 여러분 앞에서 설명할 생각입니다.
(1) 기대 불안이나 일반적인 불안은 성생활의 특정한 과정들과 깊이 관련한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며 리비도의 일정한 사용 방식과 관련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유형의 가장 단순하고 많은 것을 시사하는 사례로 소위 욕구 불만 상태의 성적 자극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즉 이들은 자신들의 강렬한 성적 자극들을 충분히 배출해 낼 수 없었으며, 성행위를 만족스럽게 끝마무리하지 못합니다. 결국 약혼 상태의 남자들이나, 혹은 성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지나친 조심성으로 인해서 성행위를 중단하고,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편을 둔 여자들도 마찬가지 경험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리비도적 자극은 사라지고, 그 대신에 불안이 등장합니다. 불안은 기대 불안이나 발작, 혹은 발작과 동등한 의미를 지닌 감정의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임신 같은 것을 우려해서 성행위를 중단하는 행위는 그런 중단이 성생활의 일반적 관행으로 굳어질 경우, 일반적으로 남자들과 함께 특히 여성들에게 불안신경증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그와 같은 사례들을 접한 임상 의사들에게는 일차적으로 병의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충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잘못된 성생활이 교정될 경우 불안신경증도 사라지는 사례들을 무수히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한, 성적인 억제와 불안 상태들 사이에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정신분석과 거리가 먼 의사들도 더 이상 부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관계를 뒤집어서 이해하려는 시도들도 계속 나타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처음부터 불안한 감정에 기울어지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주저한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수동적인 성질을 지녔다고 할 수 있는 여자들의 성생활, 남자의 태도에 따라 결정되는 여성의 성생활은 결정적으로 그런 견해와 배치됩니다. 여자의 성격이 열정적일수록 성에 대해서도 더 적극적이고 더욱더 많은 만족을 느끼는데, 이런 여자일수록 남자의 성적 무능력이나 중절 성교에 대해서 더욱 확실하게 불안한 표현함으로써 반응합니다. 반면에 불감증에 걸린 여자나 리비도적 충동을 덜 느끼는 여자들에게는 그런 잘못된 취급이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의사들이 그렇게도 열심히 권하는 성적인 금욕은, 만족스럽게 배출되지 못한 리비도가 매우 강렬하고 리비도의 대부분이 승화를 통해서 처리되지 않았을 때만, 불안 상태가 발생하는 데 나름대로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어떤 사람이 병에 걸리는가의 여부는 항상 양적인 요인들에 달려 있습니다. 병이 아니라 성격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더라도, 사람들은 성적인 억제가 어느 정도의 불안이나 조심성과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을 쉽게 알아챌 수 있습니다. 반면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거나 용감한 성격은 성적인 욕구를 자유롭게 방임하는 태도를 수반합니다. 이런 관계들이 물론 상당 부분 다양한 문화적 영향력에 의해서 바뀌고 복잡해질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불안은 성적인 제약과 같은 맥락 속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리비도와 불안 사이에 발생학적 관계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를 입증하는 모든 관찰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사춘기나 폐경기처럼 불안의 증세를 촉발시키는 인생의 일정한 단계들이 있는데, 그런 시기에는 리비도가 급격하게 많이 생산됩니다. 대부분의 흥분한 상태에서는 리비도와 불안이 섞여 있는 현상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안에 의해서 리비도가 대체되는 것도 직접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을 보면서 우리가 받는 인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정상적인 사용이 억제된 리비도가 쌓이는 현상과, 둘째 대체로 여기서는 신체적인 과정들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불안이 리비도에서 발생하는지, 일단은 파악할 수 없습니다. 단지 리비도가 사라지고 불안만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2) 우리는 특히 히스테리와 같은 정신신경증의 분석을 통해서 두 번째 암시를 받습니다. 이 신경증 감정의 상태에 놓여 있을 때에는 불안이 증상들을 동반한 채 나타납니다. 그런데 증상과 결부되지 않은 발작성 불안이나, 지속적인 불안 상태도 가능합니다. 환자들은 무엇 때문에 자신들이 불안해하는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명백하게 이차적인 처리 과정을 통해서 죽는다거나, 미쳐 버린다거나, 졸도해서 쓰러질 것 같다는 등의 자기 신변의 공포증들과 자신들의 불안을 결부시킵니다. 만약 우리가 불안이나 불안이 수반된 증상들이 발생하는 상황을 분석해 보면, 어떤 정상적인 정신 과정이 빠져 버리고 그 자리가 불안 현상에 의해서 대체되었는지 대체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달리 표현한다면, 무의식적 과정이라는 것은 마치 아무 억압도 체험하지 않은 듯 거침없이 의식의 영역으로 나아가는 과정으로 구성할 수 있습니다. 이 과정은 특정한 감정에 의해서 수반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놀랍게도 이 정상적인 과정을 수반하는 감정이 억압을 경험하게 된 후에는 자신의 원래 성질과 무관하게 항상 불안으로 대체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히스테리 성 불안 상태를 직접 대면하게 될 때, 이 상태와 무의식적으로 연결된 것은 비슷한 성격의 자극들입니다. 여기에는 불안과 수치심, 당혹감 등과 함께 긍정적인 리비도의 흥분 상태는 물론 격분과 불쾌감 같은 적대적이며 공격적인 감정도 포함됩니다. 만약 감정에 속한 연상의 내용들이 억압을 받게 되면 흥분 상태의 감정들은 결국 모두 불안으로 대체되거나 혹은 대체될 수 있으며, 이로써 불안은 마치 어디서나 교환 가능한 화폐와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3) 강박 행위로 고통받는 환자들은 특이하게도 불안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우리의 세 번째 경험은 이들에 관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손을 씻거나 일정한 의식에 집착하는 등의 강박 행위를 할 때 우리가 방해하려고 노력한다면, 혹은 그들 자신이 이런 강박증에 속하는 행위들 중의 하나를 표기하려고 시도한다면, 그들은 끔찍하게 불안해하면서 강박 행위를 계속하지 않고서는 못 배깁니다. 우리는 불안이 강박 행위에 의해서 은폐되었고, 단지 불안을 모면하기 위해서 강박 행위를 했다는 것을 압니다. 따라서 강박신경증의 경우, 평소 같으면 나타났어야 할 불안이 증상이 형성됨으로써 대체됩니다 또 우리가 히스테리를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형태의 신경증에서도 같은 관계가 성립한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억압 과정의 결과는, 순전히 불안의 감정만을 발생시키거나 아니면 증상 형성을 수반하는 불안을 유발시킬 수도 있고, 이것도 아니면 불안이 없는 상태에서 더욱 완전한 증상을 형성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추상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증상들 자체가 발생하는 것은 오직 다른 방법으로는 모면할 수 없는 불안의 감정을 피해 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같은 견해를 따른다면 불안은 신경증 문제들에 대한 우리 관심의 한복판에 놓이게 됩니다.
우리는, 불안신경증에 대한 관찰을 통해서 리비도가 정상적인 사용 방식에서 벗어남으로써 불안이 발생하고, 또 그런 현상은 육체적인 과정의 토대 위에서 나타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히스테리와 강박신경증의 분석에 의해서 우리가 추가로 확인한 것은, 같은 결과를 낳는 동일한 회피의 과정은 정신 과정을 관장하는 다른 기관의 거부 작용에 의해서도 비롯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신경증적 불안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이 정도입니다. 물론 아직도 우리의 견해는 불확실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나는 더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다른 길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설정한 두 번째 과제는 비정상적으로 사용된 리비도인 신경증적 불안과, 위험에 대한 반응과 상응하는 현실 불안이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규명하는 일인데, 이 과제의 해결은 좀 더 어려워 보입니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사태들이 서로 무관하다고 여깁니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현실 불안의 감정과 신경증적 불안을 느끼는 감정을 서로 구별할 수 있는 그 어떤 수단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우리는 종종 자아와 리비도가 서로 대립한다고 주장했는데, 만약 이 대립을 전제한다면 우리가 추구한 연결을 궁극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불안은 자아가 위험에 반응할 때 발생하고 도피로 이어지는 신호입니다. 신경증적 불안의 경우 자아도 같은 식으로 도피를 시도하며, 그것은 자기 내부에서 발생한 위험을 마치 외부의 위험인 것처럼 취급하는 자신의 리비도의 요구로부터 도주하는 것과 같다는 견해가 상당히 타당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로써 불안이 나타나는 곳에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어떤 무엇이 존재할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는 충족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이런 유추 해석은 계속 확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외부의 위험에서 도망치려는 시도는 위험을 견디어 내고 방어하기 위한 목적에 부합하는 조치들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는 것처럼, 신경증적 불안은 불안을 묶어 놓는 증상 형성에 의해서 대체됩니다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이제 다른 데에 있습니다. 자아가 자신의 리비도에서 도피하는 것을 의미하는 불안은 바로 이 리비도 자체에서 발생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언급은 모호하지만, 한 사람의 리비도가 근본적으로는 그 사람 자신에게 속하며, 그 사람의 외부에 있는 어떤 것처럼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잊지 말도록 주지시키고 있습니다. 불안이 발생하는 과정의 위상학적 역동성은 아직 우리에게 불투명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어떠한 형태의 심리적 에너지들이 사용되는지, 그리고 어떠한 심리적 조직들에서 에너지들이 분출되는지 모호합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 물음에 대해서도 답변하겠다는 약속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다른 실마리들을 포기하지 않고 추적할 작정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직접 관찰한 내용과 분석적 연구를 활용해서 우리들의 사변적인 주장을 변호할 생각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에게 불안이 발생하는 과정과 공포증들과 연결된 신경증적 불안에 대해 주목할 생각입니다.
어린아이의 불안은 매우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경증적 불안인지 현실 불안인지 구별하기가 정말 어려운 듯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구별의 가치는 아이들 자신의 행동에 의해 의문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편으로 아이가 모든 낯선 사람들이나 새로운 상황들, 그리고 새로운 상황들, 그리고 새로운 물건들을 대할 때 불안해하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반응을 아주 쉽게 아이의 허약함이나 무지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결국 아이에게 현실 불안의 강한 경향성이 있다고 봅니다. 아이가 이런 불안을 천성적인 유산으로 가지고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 행동을 합목적적인 것으로 간주합니다. 아이는 아마도 그런 상황 속에서 단지 태곳적의 원시인이나 오늘날에도 존재하는 미개인의 행위를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원시인이나 미개인들은 자신들이 무지하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모든 새로운 것들은 물론, 오늘날 우리에게는 더 이상 불안을 발생시키지 않는, 우리에게는 친숙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도 불안을 느낍니다. 만약 아이의 공포증들 중에서 최소한 일부라도 우리가 인류의 발달과정에서 시원적 단계에 속한다고 여겼던 공포증들과 같은 것임이 드러난다면, 우리들이 기대했던 내용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모든 아이들이 동일한 정도로 불안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모든 가능한 대상들과 상황들에 처해서 특별히 수줍어하는 아이들은 바로 나중에 신경증의 증상을 보인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신경증의 기질은 결국 현실 불안에 대한 뚜렷한 경향성으로 모습을 드러냅니다. 불안이 더 우선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아이로 있을 때나 성인이 된 후에도 리비도가 증가하는 것에 대해서 불안해 하는데, 그 이유는 단지 이들이 모든 것에 대해서 불안해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불안이 리비도에서 발행한다는 견해는 이로써 거부됩니다. 그리고 현실 불안의 조건들을 계속 추적해 들어가면, 자기 자신의 허약함과 무기력에 대한 의식이-아들러의 표현을 따르면 열등감을 의미합니다-유년기에서부터 좀 더 성숙한 인생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는 경우, 결과적으로 신경증의 최종적인 근거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런 결론은 매우 단순하고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에 우리의 주목을 끌 만합니다. 무엇보다 이런 견해는 신경증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문제를 달리 설정하도록 만들 수 있습니다. 열등감과 함께 불안의 조건과 증상 형성이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지속된다는 것이 거의 확실함에도, 예외적으로 건강한 상태가 가능해진다면 오히려 이런 현상이 설명을 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의 불안을 세심하게 관찰해 본 결과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어린아이는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들에 대해서 불안해합니다. 낯선 상황들은 오직 그 속에 사람들이 등장할 때만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상들은 훨씬 나중에 고려됩니다. 그러나 이 낯선 사람들 앞에서 아이가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그들이 나쁜 의도를 갖고 있다고 아이가 여기거나, 자신의 약함과 그들의 강함을 비교하고서 그들이 자신의 존재와 안전,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위협한다고 확인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를 그처럼 사람들도 불신하고 세계를 지배하는 공격적 충동에 대해서 경악하는 그런 존재로 묘사한다면, 그것은 실로 황당한 이론적 구성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아이는 낯선 형상에 대해서 놀랍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사실은 어머니 같은 친숙하고 변형된 것은 사실 아이의 실망감과 바람입니다. 결국 사용할 수 없게 된 아이의 리비도는 더 이상 유동상태에 남아 있을 수 없는 상태에서 불안의 감정으로 배출됩니다. 어린아이가 이처럼 불안을 느끼는 전형적인 상황을 통해서 아이가 출생시에 최초로 겪었던 불안 상태의 조건, 즉 어머니에게서 분리되는 과정이 반복되는데, 이는 결코 우연일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갖는 최초의 상황공포증은 암흑과 고독함에 직면했을 때 발생합니다. 전자는 종종 일생 동안 남아 있습니다.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것은 자신이 사랑하고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 즉 어머니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어린이가 옆방에서 외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줌마, 제발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요. 나는 무서워요.>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네게 무슨 도움이 되겠니? 너는 나를 보지 못하잖아.> 아이가 답합니다. <누군가 말을 해주면 주위가 밝아져요.> 어둠 속에서의 동경은 결국 어둠에 대한 불안으로 변형됩니다. 우리는 이제, 신경증적 불안은 단지 이차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불안의 특수한 사례에 해당한다는 견해를 멀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현실 불안의 양상을 보이는 경우에도 사실은 신경증적 불안에서 나타나는 현상과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용되지 않는 리비도에서 불안이 발생한다는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아이가 제대로 된 현실 불안을 지니고 세상에 나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후에 공포증들의 조건들이 될 만한 모든 상황들, 가령 높은 곳이나 강물 위에 걸쳐진 좁은 다리들, 기차나 배를 타고 있는 경우 등에 대해서 아이는 전혀 불안을 보이지 않습니다. 아이는 모르면 모를수록 불안을 덜 느낍니다. 만약 생명을 보호하기도 하는 그런 본능들이 좀 더 많이 유전되었더라면 훨씬 바람직했을 것입니다. 그러했다면 아이가 이러저러한 위험에 방치되지 않도록 감시해야 하는 과제는 아주 쉬워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이는 처음에 자신의 힘들을 과대평가하고, 불안도 느끼지 않고 멋대로 행동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는 위험들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물가에서 뛰어놀기도 하고, 창문의 난간을 타고 오르며, 끝이 날카로운 물건들이나 불을 가지고 장난합니다. 간략하게 말해서 아이는 자신에게 해를 입히고, 자신을 보살피는 사람에게 꼭 걱정을 끼치는 모든 일들을 벌입니다. 마침내 현실 불안이 그에게서 발동한다면, 그것은 교육의 성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에게 교훈을 주는 체험을 아이 스스로 해 보도록 허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안에 대한 교육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남들이 그들에게 경고하지 않았던 위험들도 스스로 발견할 수 있는 아이들이 있다면, 그런 아이들은 리비도적인 욕구의 상당한 부분을 기질적으로 타고났거나 아주 일찍 리비도적인 만족에 잘못 길들여졌다고 충분히 해명할 수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 가운데 나중에 신경증 환자들이 나온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신경증의 발생을 제일 용이하게 만드는 요인은 리비도가 상당히 많이 적체되어있는 상태를 오랜 기간동안 버틸 수 없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기질적 요인도 적절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우리도 그런 요인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반대하는 경우는, 다만 이 요인의 중요성만을 지나치게 주장하고 다른 모든 요인들을 무시할 때, 그리고 관찰과 분석을 종합한 결과 기질적 요인이 해당되지 않거나 아니면 제일 나중에 고려되어야 하는 곳에서도 기질적 요인을 끌어들일 때입니다.
여러분, 아이들의 불안에 대한 관찰에서 나온 결론을 종합해 봅시다. 유아기의 불안은 현실 불안과는 거의 관련이 없지만, 성인들의 신경증적 불안과는 매우 가깝습니다. 후자와 마찬가지로 유아기의 불안은 사용되지 않은 리비도에서 발생하며,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을 외부의 사물이나 상황으로 대체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공포증>의 분석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새로운 내용들이 더 이상 없다는 말을 듣고 싶어 할 것입니다. 공포증의 경우에도 아이들의 불안과 같은 상황이 되풀이됩니다. 사용되지 않은 리비도가 계속해서 겉으로는 현실적 불안과 흡사한 모양으로 변형됩니다. 그래서 아주 조그마한 위험도 리비도의 요구들을 대신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런 일치는 그다지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유아기의 공포증들은, 우리가 <불안 히스테리>로 분류하고 있는, 또 성장한 후에 나타나는 공포증들의 전형일 뿐만 아니라, 그것의 직접적인 전제 조건이자 전주곡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히스테리 성 공포증은 유아기의 불안에서 비롯합니다. 비록 그 내용이 서로 다르고, 따라서 당연히 다른 명칭으로 불려야 하지만, 히스테리 성 불안은 유아기의 불안이 지속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감정들은 메커니즘이 서로 다릅니다. 성인들의 경우, 리비도가 불안으로 바뀌기 위해서는 희구의 대상인 리비도가 단지 일순간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성인들은 그런 리비도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유보하면서 보존하거나, 혹은 달리 사용하는 법을 이미 오래전에 배웠습니다. 그러나 만약 리비도가 억압을 체험했던 심리적인 자극에 속한다면, 아직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상황들이 재현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유아적인 공포증으로 퇴행함으로써 리비도에서 불안으로 편안하게 넘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듯이, 우리는 억압을 많이 다루었지만 항상 억압된 표상의 운명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추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쉽게 인식하고 서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억압된 표상에 매달려 있는 감정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에 관한 물음은 항상 제쳐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이 감정이 평소 정상적인 상태에서 어떤 특질을 항상 보여 왔는가와 관계없이, 일단은 불안으로 변화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감정의 변화는 억압 과정 전반에 걸쳐서 아주 중요한 부분에 속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그렇게 쉽게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인 표상들의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에서 무의식적인 감정들도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표상은 그것이 의식되었는가 아니면 무의식의 대상인가의 여부를 둘러싼, 유일한 차이를 제외하면 동일한 형태로 존재합니다. 즉 우리는 무엇이 무의식적 표상에 상응하는지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의 일종의 배출 과정으로서 표상과는 전혀 달리 판단해야 합니다. 무의식 속에서 감정에 상응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정신 과정들에 대한 우리의 전제들을 심층적으로 고찰하고 규명하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이런 작업을 수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불안의 발전이 무의식의 조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이런 인상은 계속 소중하게 간직할 생각입니다.
불안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좀 더 정확하게 말해서 불안이란 방식을 빌어서 리비도가 배출된다는 뜻이며, 나는 이것이 억압을 당할 리비도가 곧 겪게 될 운명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리비도가 처한 유일하고 최종적인 운명은 아니라는 사실을 첨가하고 싶습니다. 신경증에서는 이 같은 불안의 발전을 제어하려는 심리적 과정들이 발동하며 이런 시도들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서 성공합니다. 가령 공포증들의 경우 신경증 과정의 두 단계들이 분명히 구별됩니다. 첫 단계는 억압을 관장하며, 리비도가 외부의 위험과 연결된 불안으로 배출되도록 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마치 외부의 사태에 속한 것처럼 취급되는 리비도와의 접촉을 막기 위해 가능한 모든 예방과 안전 조치를 구축하는 일을 떠맡습니다. 억압은 자아가 위험스럽게 느끼는 리비도에서 도피하려는 시도와 상응합니다. 공포증은 외부의 위험에 대한 방호 조치와 비교될 수 있으며, 이때 외부의 위험은 두려움의 대상인 리비도를 대신합니다. 당연히 공포증의 형태로 구축된 방어 체계가 지닌 약점은 외부세계의 공격에 대비해서 철저히 강화된 요새라 하더라도 내부에서는 쉽게 공격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리비도의 위험을 외부로 투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다른 신경증들의 경우 불안이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한 다른 방어 체계들이 작동됩니다. 이 부분은 신경증 심리학의 아주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다만 이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설정한 강의 성격을 훨씬 벗어나고, 또 더욱 심층적인 전문 지식을 전제합니다. 나는 단지 한 가지 사실에 대해서만 언급하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미 <리비도 반대 집중>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자아는 리비도 반대 집중을 억압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유해야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억압 상태로 존속됩니다. 이 같은 리비도 반대 집중의 과제는 억압이 지나간 후에 불안의 발생에 대비하기 위한 다양한 형태의 방호 조치들을 강구하는 일입니다.
이제 공포증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만약 사람들이 공포증의 내용에 대해서만 설명하고자 한다면, 여러분은 그 같은 설명이 당연히 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이러저러한 물건이나 임의의 상황이 공포의 대상으로 설정된 연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공포증의 내용은 꿈에 대해서 외현적인 꿈의 전경이 지닌 것과 대강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물론 예외도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언급해야 하겠지만, 공포증들의 내용들 가운데는 스탠리 홀의 강조한 대로 계통 발생적인 유전에 의해서 불안의 대상들도 채택된 것들이 상당수 있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불안의 대상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오직 그것이 암시하는 상징적인 관계들로 인해서 위험과 결부될 수 있음을 시인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신경증 심리학의 물음들 중에서 불안의 문제가 얼마나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지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불안의 발생이 리비도의 운명들이나 무의식의 체계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확인하고서, 이에 대해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단 한 가지 사항에 대해서만 아무 관련이 없는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우리가 다루지 못한 부분입니다. 즉 현실 불안은 자아의 자기 보존 본능들이 표현된 것으로 평가되어야만 한다는, 엄연히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스물여섯 번째 강의 : 리비도 이론과 나르시시즘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자아 본능과 성 본능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되풀이해서 논했고, 바로 앞에서도 거론한 바 있습니다. 무엇보다 억압은 이 두 가지 본능들이 서로 대립해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적본능들이 형식적으로는 뒷전으로 내몰리지만, 퇴행이라는 우회의 방식을 통해서 만족을 추구하는데, 여기서 성적본능은 결코 공략될 수 없으며 자신의 패배에 대한 보상을 받는다는 사실도 드러났습니다. 이와 함께 우리는 이 두 본능들이 처음부터 현실에서 제기되는 곤경이란 이름의 교사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관계를 유지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같은 형태의 발달과정을 밟지 않고 현실원칙에 대해서도 동일한 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는 성 본능들이 자아 본능들보다 더 불안의 감정 상태와 아주 긴밀하게 밀착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이 결과는 오직 단 하나의 중요한 사항과 관련해서 불안전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점을 보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사실을 강조할 생각입니다. 즉 허기와 갈증과 같은 불만족은 두 가지 가장 기본적인 자기 보존 본능들인데, 이는 결코 불안의 감정으로 전환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이미 들었던 것처럼, 불만족스러운 리비도가 불안으로 전환되는 것은 가장 잘 알려지고 자주 관찰할 수 있는 현상에 속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 본능들과 성 본능들을 구별할 수 있는 우리의 정당한 권리는 전혀 흔들릴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개인의 특수한 활동성으로 간주되는 성생활의 존재와 함께 그런 구별도 이미 성립합니다. 단지 우리가 이 구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하는 점만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이 물음은 성 본능들이 신체적이며 심리적인 표현 속에서 우리가 이와 대립시킨 다른 본능들과 어떤 점에서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지, 그리고 이런 차이들에서 발생하는 결과들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관한 탐구의 결과에 따라서 답변될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두 본능들 사이에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는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주장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이 두 본능들을 단지 개인의 에너지 원천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또 이들이 근본적으로 하나인가, 아니면 본질적으로 다른가, 그리고 만약 하나라면 어디서부터 나뉘어지는가와 같은 논쟁은 개념적 차원에서 수행될 수 없으며, 이들의 배후에 있는 생물학적 사실들 위에서 전개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에 대해서 현재로는 아는 바가 적습니다. 우리가 설혹 좀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분석적 과제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별로 참작할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가 융이 시도했던 대로, 모든 본능들의 원초적 통일성을 강조하고, 이 모든 본능들 속에서 스스로를 표출하는 에너지를 <리비도>라고 명명한다 해도, 우리가 얻는 것은 분명히 거의 없습니다. 성적 기능은 그 어떤 인위적인 장치에 의해서도 정신 활동에서 배제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성적 리비도와 성과 관련이 없는 리비도에 대해서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리비도란 명칭은, 우리가 지금까지 익숙하게 사용한 대로 성생활을 충동하는 힘들로 계속 간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 본능과 자기 본존 본능 사이의 구별은 의심의 여지 없이 타당한 것이지만, 이런 구별을 어느 정도까지 적용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 제기됩니다. 그런데 나는 이 같은 물음이 정신분석학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정신분석학은 이런 물음을 다룰 수 있는 능력도 없습니다. 물론 생물학의 영역에서 그 같은 구별이 무언가 중요한 것이라는 여러 단초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은 살아 있는 유기체가 자신의 개체적 존재를 넘어서 종과의 연관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능입니다. 분명히 개체는 성의 기능을 발휘함으로써 자신의 다른 행위들을 통해서 얻는 것과 같은 유익한 효과만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개체가 예외적으로 강렬한 성 본능의 쾌감을 누리는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위협받거나 종종 목숨도 희생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또한 개체가 후손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구성하는 것 중에서 일부를 비축해 놓으려면 모든 다른 정상적인 경우와 구별되는 특이한 신진 대사 과정이 필요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개체는 자기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의 성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지만, 결과적으로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일련의 연속적인 세대 계열 가운데 하나의 삽화로 간주됩니다. 개체는 결국 실질적으로 영원불변하게 생존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유전 형질에 잠시 붙어 있는 부수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체는, 마치 자신을 초월해서 영속적으로 존재하는 세습 재산을 관리하는 일시적인 소유자와 같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한편 신경증을 정신분석학적으로 규명하는 데 그렇게 포괄적인 관점들이 요구되지는 않습니다. 성적본능과 자아 본능을 제각기 추적함으로써 우리는 일단의 전이신경증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확보했습니다. 우리는 전이신경증을 성적본능이 자기 보존 본능과 불화를 빚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달리 생물학적으로 표현하면-사실은 덜 정확한 표현이지만-자립적인 개체로서의 자아가 지닌 입장과 연속되는 세대 중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아가 지닌 입장들 사이의 갈등이라는 근본적인 상황에 의해서 전이신경증이 발생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분열은 인간에게만 나타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경증은 일반적으로 인간이 동물보다 앞설 수 있는 특권일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리비도가 지나치게 발달하고, 아마도 바로 이를 통해서 정신생활이 풍부하게 짜여짐으로써 그 같은 갈등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들이 만들어졌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이점이 또한 인간이 동물들과 함께하는 공동체적 관계를 넘어서 위대하게 진보할 수 있는 조건으로도 작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경증에 걸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지닌 다를 재능들의 이면에 불과한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단지 궤변에 불과하며, 우리들의 다음 과제에 대한 관심을 어긋나게 만들 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아 본능과 성 본능의 표현 방식들에 따라서 이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다고 전제하고서 작업했습니다. 전이신경증의 경우 이 전제는 어려움 없이 적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아가 자신의 성적 욕구의 대상들에 쏟는 에너지의 집중을 <리비도>라고 불렀습니다. 자기 보존 본능에서 촉발되는 모든 다른 에너지의 집중들은 <관심 Interesse>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우리는 리비도 집중과 그이 작동 방식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전이신경증들은 우리가 이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가장 유리한 소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아가 다른 조직 체계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어떻게 구성되고 기능하는가에 관해서 모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신경증의 장애들을 분석함으로써 자아의 그 같은 문제들에 대한 통찰이 가능할 것으로 추측할 뿐입니다.
우리는 일찍부터 정신분석적 관점들을 다른 감정들에 대해서도 확대 적용해 왔습니다. 이미 1908년에 아브라함은 나와 대화한 후에, (정신병으로 간주되는) 조발성 치매에서 나타나는 주되 특징은 <대상들에 대한 리비도 집중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히스테리와 조발성 치매 사이의 심리적, 성적 차이'). 이제 대상들에서 등을 돌린 치매 환자의 리비도는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물음이 제기됩니다. 아브라함은 망설이지 않고 <그것은 다시 자아를 지향한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이 같은 반성적 복귀>는 조발성 치매 환자에게 <과대 망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라고 말했습니다. 과대망상은 대체로 애정 생활에서 성적 대상들을 과대 평가하는 행위와 비교됩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정신병적 감정이 지닌 한 특징을 정상적인 애정 생활과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나는 여러분에게, 아브라함이 처음 언급한 견해들이 정신분석학에서 계속 인정되고 있으며 정신병에 대한 우리 입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우리가 대상들에 집중하고 있는 것으로 본 리비도가 한편으로는 이런 대상들을 통해서 만족을 획득하려는 시도의 표현으로 간주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대상들을 포기하고 그 대신에 자기 자신을 설정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서서히 익숙해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점차 일관되게 발전시켰습니다. 리비도를 이같이 처리하는 방식에 <나르시시즘NarziBmus>라는 명칭을 부여했으며, 우리는 이를 내케P. Nacke가 서술한 도착증들 중의 하나에서 빌어 왔습니다. 이 도착증의 경우, 성장한 개인은 자신의 몸에 대해서 가능한 한 모든 섬세한 방법을 동원해서 배려하는데, 대개 그런 배려는 다른 성적인 대상에 대해서 행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 경우 사람들은 그처럼 리비도가 다른 대상이 아닌 자기 몸과 자신에 대해 집착한다면, 그런 현상은 예외적이거나 사소한 사태는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이런 나르시시즘이 일반적이고 근원적인 상태일 것이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즉 나르시즘이 먼저 나타나고 나중에 가서야 그로부터 대상에 대한 사랑이 형성되는데, 그렇다고 해서 나르시시즘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라는 말이었습니다. 대상에 대한 리비도의 발생사는 많은 성적본능들이 처음에는 자신의 몸을 통한 만족감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는데, 사람들은 이 점을 다시 상기해야만 합니다. 이를 우리는 <자가성애적>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자가성애의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현실원칙에 적응하도록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과정에서 성이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도 상기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자가성애는 나르시즘적인 단계에서 리비도가 처리되는 성적 활동이었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우리는 자아 리비도 Ichibido와 대상 리비도 Objektlibido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성립한다고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를 여러분에게 동물학과의 비교를 통해서 설명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거의 분화되지 않은 원형질 덩어리 같은 아주 단순한 생물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생물은 위족이라고 부르는 돌기를 통해서 자기 몸의 원형질을 흘러 내보냅니다. 그러나 이 생물은 돌기들을 다시 몸 안으로 집어넣어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만들 수 있습니다. 돌기들을 펼치는 동작을 우리는 리비도가 대상들을 향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대부분의 리비도는 자아의 내부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정상적 상황에서는 자아 리비도가 거침 없이 대상 리비도로 전환하며, 이를 다시 자아의 내부로 흡수, 수용할 수도 있다고 간주합니다.
이런 견해들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제 일련의 여러 심리 상태들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아니, 좀 더 겸손하게 표현한다면 우리가 정상적인 생활에 속하는 것으로만 보았던 상태들, 이를테면 사랑에 빠진 상태나 신체상의 질병 상태, 수면 상태의 심리적 태도를 리비도 이론의 언어로 서술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수면 상태를 외부세계에서 벗어나서 수면이라는 욕구를 지향하는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우리는 밤의 정신 활동으로서 꿈속에 나타나는 내용들을 수면의 욕구에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전반적으로 이기적 동기에 의해 지배받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제 우리는, 잠자는 동안에 대상에 대한 리비도적인 집중과 이기적인 대상 리비도 집중들이 모두 다 포기되고, 자아로 복귀하는 과정이 진행된다는 사실을 리비도 이론의 의미에서 밝혔습니다. 이로써 수면을 통한 피로의 회복과 피로 자체의 성격을 새롭게 조명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매일 밤 잠잘 때마다 자궁의 내부에서 행복하게 고립되어있는 상황을 떠올리는데, 이런 그림은 이제 심리적 관점에서 완성됩니다. 잠자는 사람에게는 완전한 나르시시즘이라고 할 수 있는 리비도 분배의 원초적 상태가 재현됩니다. 즉 이때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자아의 내부에서 리비도와 자아의 관심이 합치된 상태에서 서로 구별된 수 없는 완전한 나르시시즘의 상태를 재현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다음 두 가지 상황들에 대해 언급해야겠습니다. 첫째, 나르시시즘과 이기주의는 개념적으로 어떻게 구별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나는, 나르시시즘이 이기주의를 리비도에 의해 보완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이기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단지 개인을 위한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에 대해 말할 때 사람들은 물론 리비도의 만족을 고려합니다. 이 두 가지를 실제적인 동기들로 제각기 분리해서 검토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절대적으로 이기적일 수도 있지만, 대상에 대한 리비도적인 만족이 자아가 원하는 것에 속할 경우, 집요하게 대상 리비도 집중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기주의는 대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자아가 그 어 떤 손상도 입지 않도록 유의합니다. 사람들은 이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대상에 대한 욕구를 거의 지니지 않음으로써, 아주 강한 나르시시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는 다시 직접적인 성적 만족을 추구하는 유형과, 성적 욕구에서 도출되었지만 좀 더 고상한 충동, 즉 우리가 종종 <감각적인 것>과 대립시키는 <사랑>의 충동으로 분류됩니다. 이기주의는 이 모든 관계들 속에서 당연하고, 변함 없는 요소로 작용하지만, 나르시시즘은 가변적인 요소입니다. 이기주의와 대립하는 <이타주의 Altruismus>는 개념적으로 대상 리비도 집중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타주의는 성적인 만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됩니다. 그러나 만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후자와 구별됩니다. 그러나 완전히 사랑에 빠진 상태에서 이타주의는 대상 리비도 집중과 일치합니다. 성적인 대상은 대체로 자아의 나르시시즘 중에서 일부를 자신에게로 향하게 만드는데, 이는 소위 대상에 대한 <성적 과대 평가> 와 같은 형상으로 드러납니다. 만약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서 성적인 대상을 향한 이타주의가 첨가된다면, 성적 대상의 힘은 지나치게 강해집니다. 즉 성적 대상은 자아를 흡수해 버립니다.
나는 지금까지 사실은 무미건조한 과학적 상상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설명을 뒤로 하고 내가 여러분에게 나르시시즘과 사랑에 빠진 상태의 리비도의 경제적 대립에 대한 시적 묘사를 소개하게 되면, 여러분의 기분도 전환될 것입니다. 나는 괴테의 '서동시집(Westostlicher Diwan>에 실린 시를 비려 오겠습니다.
줄라이카 민중도 노예도 승리자도,
그들은 항상 고백한다.
대지의 자녀들에게 허용된 최대의 행복은
오직 자신의 개성에 달려 있다고.
어떠한 인생도 살아갈 만한다
만약 사람이 자신을 상실하고 애태우지만 않는다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좋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생긴대로 남아 있을 수만 있다면.
하템 그럴수도 있겠지! 그렇게 여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나는 다른 길을 걷고 있어.
모든 지상의 행복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을
나는 찾았어, 오직 줄라이카에게서.
그녀가 자신을 나에게 아낌없이 내줄 때,
나 자신은 스스로에게 가치 있는 사람이 되었지.
그녀가 만약 나를 외면한다면,
순간이나마 나는 자신을 잃어버리지.
이제 하템과는 모든 것이 끝장이야.
그러나 나는 이미 마음을 바꾸었으니
나는 서둘러서 그녀가 사랑하는
우아한 사람이 되어야겠지.
두 번째 고찰은 꿈-이론을 보완해 주는 것입니다. 비록 자아에 종속된 모든 대상 리비도 집중이 수면을 취하기 위해 불러들여진다고 말하더라도, 만약 억압된 무의식이 자아에서 일정한 독립성을 확보함으로써 수면의 욕구에 순응하지 않고 자신의 리비도 집중 상태를 보존한다는 사실을 함께 고려하지 않는다면, 꿈-발생Traumentstehung은 설명될 수 없습니다. 비로소 그런 사실을 받아들일 때, 무의식이 밤 동안에 검열이 폐지되거나 느슨해지는 현상을 이용하고, 또 금지된 꿈의 욕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낮 동안의 기억 가운데 남아 있는 잔재들을 활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이해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낮 동안의 잔재들과 이 무의식이 이미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잠자고 싶은 욕망에 의해서 리비도를 불러들이는 것에 대해서 어느 한 특징을 꿈-형성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첨가할 생각입니다.
기질적인 질환과 고통스러운 자극, 그리고 신체 기관상의 염증 등 이처럼 분리된 리비도는 다시 자아의 내부에서 병든 신체의 부분에 확실하게 집중합니다. 그렇습니다. 이런 조건들에서는 리비도가 지신의 대상들에게서 물러서는 작용이 이기주의적 관심이 외부세계에 등을 돌리는 현상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감히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울증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울증의 경우, 우리가 보기에는 병든 것 같지 않은 기관이 동일한 방식으로 자아의 염려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계속 설명하고 싶은 유혹에 저항할 생각입니다. 또 대상 리비도가 자아로 옮겨갔다는 가설에 의해서 이해할 수 있거나 혹은 서술할 수 있는 다른 상황들도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서도 설명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다음 두 가지 반론들에 대해서 대응할 수밖에 없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한 여러분도 익히 들어 왔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첫째로, 왜 내가 잠잘 때나 병들어 있을 때나, 그리고 비슷한 상황들에서 일관되게 리비도와 관심을 구별하고, 성적본능들과 자아 본능들을 서로 구별하는지 대답해 달라고 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관찰하기에는 여기서 전반적으로 단 하나의 통일적인 에너지가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해도 문제없다는 것입니다. 또 이 에너지는 자유롭게 유동하며, 어떤 때는 대상에, 어떤 때는 곧바로 자아에 집중함으로써, 이러저러한 충동들에 모두 봉사할 수 있다고 여러분은 반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반론은, 어떻게 내가 감히 리비도가 대상들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것을 병리적 상태의 원인으로 취급할 수 있는가 하는 주장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상의 리비도가 자아의 리비도나 혹은, 자아의 에너지로 전환되는 그런 현상은 심리의 역동적인 세계의 정상적인 일상에서 매일 밤마다 되풀이되는 과정들에 속한다는 반론이 제기됩니다.
이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첫 번째 반론은 훌륭한 주장처럼 들립니다. 잠자거나 병들에 있거나, 혹은 사랑에 빠진 상태들에 대한 설명이 그 자체로서는 자아 리비도와 대상 리비도, 혹은 관심들에 대한 리비도를 서로 완전히 구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기서 우리의 견해를 뒷받침했던 연구의 결과를 간과했습니다. 우리는 그 연구 결과에 기초해서 이제 문제가 되고 있는 심리적 상황들을 살펴볼 생각입니다. 전이신경증을 발생시키는 갈등을 이해하자마자, 리비도와 관심, 즉 성적 본능과 자기 보존 본능을 구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이런 구별을 다시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전체는 곧 자아의 리비도를 함께 고려해야만 한다는 견해와 같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전제는 소위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들, 가령 조발성 치매Demenita pracecox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으로 여겨졌습니다. 즉 이런 전제에 근거해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적 신경증이 히스테리와 강박신경증 등과 어떤 점에서 비슷하고, 또 어떤 점에서 서로 다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의심의 여지 없이 확실한 것으로 입증한 내용들을 이제 질병과 수면, 그리고 사랑에 빠진 상태 등에 적용해 봅시다. 그 같은 적용의 가능성을 계속 검토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런 견해가 적용될 수 있는 범위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분석적 체험에 의해서 직접 도출되지 않은 유일한 주장은, 리비도가 대상들을 향하건 아니면 자신의 자아를 지향하건 변함 없이 존재하며, 결코 이기주의적인 관심으로 전환되거나 이와 반대되는 사태가 발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이미 비판적으로 평가했던, 성적본능들과 자아 본능들을 구별했던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이 구별이 설혹 더 이상 적용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우리는 새로운 탐구를 계속해 나가기 위해서라도 일단 이를 타당한 전제로 견지할 생각입니다.
여러분의 두 번째 반론 역시 정당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음의 방향성이 잘못되었습니다. 대상에 대한 리비도가 자아를 향함으로써 직접적인 의미에서의 병인이 발생하는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그런 현상이 취침하기 전에 항상 일어나고 깨어날 때에는 다시 원상태로 돌아간다는 것을 압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작은 원형질로 된 생물은 자신의 위족을 몸 안으로 집어넣지만, 다른 기회가 주어지면 다시 몸 밖으로 밀어냅니다. 그러나 만약 어떤 특정하고 강력한 과정이 대상들에서 리비도의 분리를 강요할 때에는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나르시시즘적인 된 리비도는 이때 대상들에서 물러설 수 있는 방법을 모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리비도가 움직이는 데 이 같은 장애가 발생할 경우, 병의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르시시즘적인 리비도가 일정한 정도 이상으로 쌓이는 것을 견디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대상 리비도 집중이 나타나게 되고, 자아는 리비도가 적체됨으로써 병에 걸리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서 자신의 리비도를 내보낼 수밖에 없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조발성 치매에 대해 자세히 다를 예정이었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리비도를 대상들에서 분리시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 과정이 억압의 과정과 비슷하고, 또 억압 과정의 한 측면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여러분은 이런 과정의 조건들이-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한-억압의 조건들과 거의 동일하다는 사시를 경험함으로써, 이미 여러분에게 익숙한 토대 위에 자신이 서 있음을 알게 됩니다. 동일한 갈등이 같은 힘들 사이에서 빚어집니다. 그 갈등의 결과가 가령 히스테리의 경우와 다른 양상을 보이더라도 그 이유는 오직 기질상의 차이때문입니다. 이 환자의 리비도가 발달하는 과정에서 취약한 부분은 다른 단계, 이를테면 결정적 의미를 지니는 고착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는 것처럼 고착은 증상을 형성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는 다른 장소에서 발원하는 것으로서 그곳은 아마도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의 단계일 것이라고 간주됩니다. 그리고 조발성 치매의 증세는 결과적으로 이 원초적인 나르시시즘의 단계로 되돌아갑니다. 우리가 모든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을 분석하면서, 리비도가 고착하고 있는 지점들이 히스테리나 강박신경증의 경우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는 발달 단계에 놓여 있다고 전제해야만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가 전이신경증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확보한 개념들이, 실제로는 훨씬 더 심각한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도 충분히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들 사이에는훨씬 더 많은 공통점들이 있으며, 모두 같은 계통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미 정신의학에 속하는 이 감정들을 전이신경증들에 대한 분석적 지식을 겸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규명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지 가늠할 수 있습니다.
조발성 치매의 증상이 나타나는 모습은 매우 변화무쌍하고, 리비도가 대상들에서 강제로 분리되고, 자아의 내부에서 나르시시즘적인 리비도의 형태로 축적될 때 발생하는 증상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다른 현상들이 있는데, 이들은 리비도가 다시 대상들로 돌아가려는 노력에서 연유합니다. 이런 리비도의 노력은 결국 회복이나 치유하려는 시도와 상응합니다. 이런 증상들은 심지어 가장 눈에 띄고 요란한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히스테리의 증상들과 확실히 비슷합니다. 혹은 아주 드물게 강박신경증과도 흡사한 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어느 모로 보나 다른 것들입니다. 조발성 치매의 경우 리비도는 다시 대상들로 되돌아가려고 시도하는데, 이런 노력을 통해서 리비도는 대상들에 대한 관념을 형성하고, 또 대상들에서 무언가를 실제로 얻어내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리비도가 붙잡고 있는 것은 단지 대상들의 그림자에 불고한 것으로, 대상에 속한 언어 표상Wortvorstellung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는 여기서 이에 대해 더 이상 말할 수 없습니다만, 대상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리비도의 태도는 의식적인 표상과 무의식적인 표상의 차이를 실제로 통찰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제 여러분을 분석적 작업의 성과가 곧 드러나게 될 영역으로 인도하겠습니다. 우리가 자아 리비도의 개념을 감히 사용하기로 한 다음부터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감정들을 역동적으로 규명하고, 동시에 자아의 이해를 통해서 정신생활에 대한 지식을 완성해야 한다는 과제가 부각되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자아 심리학의 근거는 자아의 지각에서 제공되는 자료가 아니라, 리비도의 경우처럼 자아의 장애와 파괴를 분석함으로써 확보됩니다. 우리가 리비도의 운명에 대해서 지금까지 알고 있는 자식은 전이신경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확보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위에서 언급한 좀 더 포괄적인 작업이 완성될 경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내용을 아마도 보잘것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작업이 아직 그 정도로 진척되지는 않았습니다. 전이신경증을 분석하는 데 동원되었던 기술로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들을 공략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곧 그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될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적 신경증을 어느 정도 탐구해 들어가자마자 우리는 항상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장벽과 마주치게 됩니다. 여러분은 전이신경증의 경우에도 그처럼 저항하는 장벽과 같은 한계에 직면했지만, 그런 한계를 하나씩 제거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의 저항은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기껏해야 장벽 너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호기심어린 눈길을 던질 수는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의 기술적 방법들은 다른 방법들에 의해서 대체되어야 합니다. 이처럼 다른 분석 방법으로 대체하는 것이 성공할지는 아직 모릅니다. 물론 우리에게 이 환자들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환자들은 여러 가지 형태로 자신을 표현하지만, 우리의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표현들을, 전이신경증 증상을 통해서 확보한 인식에 근거해서 잠정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연구의 초기 단계에서도 성과를 약속해 줄 만큼 서로 많은 점에서 일치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 이런 기술적 방법이 적용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우리가 연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예상되는 또 다른 어려움들을 추가로 언급할 수 있습니다. 나르시시즘적인 감정들과 함께 이와 관련된 정신병들은 오직 전이신경증들에 대한 분석적 연구에 의해서 훈련된 관찰자들을 통해서만 해명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신과 의사들은 정신분석을 연구하지 않고, 우리 정신분석가들은 정신병의 사례들을 별로 다루지 않습니다. 예비적인 과학으로서 정신분석학을 학습한 정신과 의사들의 새로운 세대가 비로소 자라나야 합니다. 그와 같은 시도는 현재 미국에서 처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아주 많은 지도적인 정신과 의사들이 학생들에게 정신분석학을 강의했으며, 정신병원의 원장들이나 감독자들은 자신의 환자들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관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몇 번에 걸쳐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의 벽 너머를 들여다볼 수 있는 행운을 누렸습니다. 그리고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확보했다고 믿는 몇 가지 사실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할 생각입니다.
편집증은 만성적, 계통적 정신착란인데, 이 질병의 유형들은 현재의 정신의학이 시도한 분류 방식에 따르면 그 위상이 불투명합니다. 여하튼 이 질병이 조발성 치매와 유사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나는 언젠가 편집증과 조발성 치매를 <이상정신>이라는 공통의 명칭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 바 있습니다. 편집증의 형식들은 그 내용에 따라서 과대망상, 추적망상Verfolgungswahn, 애정망상증(과대성욕증Erotomanie), 질투망상Einfersuchtswahn 등으로 서술됩니다. 우리는 정신병에 대한 설명이 정신의학에 의해서 시도되고 있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오래되고, 완전히 신뢰할 만한 가치는 없는 시도를 하나의 사례로서 여러분에게 언급할 수는 있습니다. 즉 하나의 증상이 지적인 합리화 과정eine intellektuelle Rationalisierung을 매개로 해서 다른 증상들에서 도출될 수 있다는 설명이 시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본래적인 성격적 경향에 의해서 자신이 남에게 추적을 받고 있다고 믿는 환자는 이로부터 그가 아주 중요한 사람임에 틀림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과대 망상증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분석적인 관점에 따르면, 과대망상은 대상 리비도 집중이 퇴각함으로써 직접적으로 파생된 자아의 확대로 간주되며, 또 근원적인 유아 초기의 단계로 돌아가는 이차적인 나르시시즘으로도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해망상Vorfolgunwahn의 사례들에서 사태의 다서가 될 만한 몇 가지 사실들을 관찰했습니다. 우선 대부분의 사례들에서 추적하는 사람은 추적을 받고 있는 사람과 동성이란 사실이 우리들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 사실은 별문제 없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몇 가지 사례들을 잘 연구해 보면, 환자가 정상이었을 당시 제일 사랑했던 동성의 사람이 병에 걸린 후에는 자신을 박해하고 추적하는 사람으로 뒤바뀐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비슷하게 알려진 특징들을 지닌 다른 사람으로 대체됨으로써 병은 계속 진전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는 선생이나 직장의 윗사람으로 대체됩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점증하는 사례들을 근거로 박해 편집증Paranoia persecutoria은 개인이 자신의 매우 강렬한 동성애적 자극에 대해 저항하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애정이 증오로 바뀔 경우, 그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사랑했으나 이제는 증오하는 대상의 생명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으며, 리비도적인 자극이 억압 과정의 일반적인 결과인 불안으로 전환하는 것과 상응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이와 관련해서 관찰했던 최근의 사례를 다시 한번 들어 보기 바랍니다. 어떤 젊은 의사는 자신의 고향에서 추방되었는데, 그 이유는 지금까지 자신의 가장 좋은 친구였으며 같은 도시의 대학 교수 아들이었던 사람을 죽이겠다고 위협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때의 자기 친구가 아주 나쁜의도와 악마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썼습니다. 또 최근 몇 년 동안 환자의 가족이 당했던 모든 불행이나 모든 가족 내의 불운이나 사회적 불운에 대해서도 그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악한 친구와 그 부친인 교수는 전쟁을 일으키고, 러시아 군을 국내로 불러들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수천 번씩 자신의 생명을 바쳐도 모자랄 지경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의 환자는 그 악인이 죽음으로써 모든 불행도 종식된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오랜 우정은 너무도 강렬해서, 심지어 자신의 적을 가까이서 쏠 수 있는 기회가 언젠가 주어졌을 때에도 환자의 손이 마비되고 말았을 정도였습니다. 내가 환자와 나눈 짧은 대화에서 이 두 사람 사이의 우정은 김나지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최소한 한 번은 우정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하룻밤을 같이 보내는 기회에 그들은 완전히 성적인 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우리 환자는 한 번도, 자신의 나이에 걸맞고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인품에도 부합되는 여성들에 대해서 연애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언젠가 아름답고 품위 있는 한 처녀와 약혼을 한 적이 있었지만, 곧 파혼하고 말았는데, 그것은 처녀가 약혼자에게서 그 어떤 애정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몇 년이 흐른 후에 그의 병은, 바로 그가 처음으로 한 여자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게 되었던 순간에 도졌습니다. 이 여자가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를 껴안았을 때, 그는 마치 자신의 머리를 날카롭게 절단하는 듯한 영문 모를 고통을 갑자기 받았습니다. 그는 이 느낌을 후에 마치 뇌를 해부해서 끄집어낼 때 절개하는 과정에서 겪는 고통과 같다고 해석했습니다. 마침 그의 친구가 병리 해부학자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바로 자기 친구가 이 여자를 보내 자기를 유혹하도록 사주했다는 생각을 서서히 하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그는 자신을 못살게 구는 다른 요인들을 발견해 냈습니다. 그는 옛 친구의 수작에 의해서 희생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하는 사람이 박해받는 사람과 다른 성을 지닌 사례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됩니까? 그런 사례들은 동성애적인 리비도에 저항하기 위해서 피해 망상증에 걸리게 된다는 우리의 설명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나는 얼마 전에 그런 사례를 하나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외견상의 모순에서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포착했습니다. 한 남자가 자신을 못살게 군다고 하소연하는 젊은 처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이 남자와 두 번에 걸쳐 함께 사랑을 나누었다고 시인했으며, 처음에는 어머니의 대용물로 여겨지는 여자에 대해 망상의 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남자와 두 번째 만난 이후 그녀의 병은 양상을 달리 해서, 그 여자에게로 향했던 망상을 이제는 남자에게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박해하는 사람이 동성이라는 조건은 결국 이 사례에서도 원래 대로 적용되었습니다. 변호사나 의사에게 호소하는 과정에서 그 처녀 환자는 자기 병의 이런 초기 단계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으며, 결국 편집증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모순되는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켰던 것입니다.
동성애자들이 성적 대상을 선택하는 방식은 원래 이성 사이의 사랑보다는 나르시시즘에 더 가깝습니다. 만약 원치 않는 강렬한 동성애의 자극이 거부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면, 나르시시즘으로 돌아가는 과정은 아주 쉬워집니다. 나는 지금까지 여러분에게 애정 생활의 근거에 대해 우리가 아는 한에서 말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이에 대해 계속해서 다룰 수는 없습니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단지, 대상 선택이라는 것은 나르시시즘적인 단계를 거친 후에 리비도가 발달하는 과정으로서 두 가지 상이한 유형들을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자아를 대신해서 그와 가장 비슷한 대상이 등장함으로써 <나르시시즘적인 유형NarzBtischer Typus>을 따르거나, 아니면 다른 인생의 욕구들을 만족시키는 데 쓸모있게 된 사람들이 리비도의 대상으로도 선택되는 <의존적 유형Anlehnungstypus>을 따르게 됩니다. 리비도가 대상을 선택하면서 강하게 나르시시즘적인 유형에 집착하는 경우 역시, 우리는 명백한 동성애의 기질이 있는 것으로 분류합니다.
내가 이번 학기의 첫 번째 강의에서 한 여자의 질투 망상을 설명한적이 있는데, 여러분은 이를 기억할 것입니다. 이제 거의 학기가 끝날 시기이기 때문에 여러분은 망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정신분석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지 분명 궁금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해서 여러분이 기대한 것만큼 말할 수 없습니다. 망상은 논리적인 논변들이나 현실적인 경험들에 의해서 파악할 수 없는데, 이는 무의식과 관련되어 있음으로 인해서 강박 관념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은 망상이나 강박 관념을 대신해서 표현해 주지만, 동시에 억압당합니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두 가지 감정들이 서로 다른 위상과 역학적 특징을 지니는 데 기인합니다.
한편 우울증에 대해서는 아주 다양한 임상적 유형들이 나타나는데, 우리는 편집증에서처럼 우울증의 경우에도 감정의 내적 구조를 통찰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습니다. 이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을 가차없이 고문하면서 스스로를 비난하는데, 우리는 이런 비난들이 원래는 다른 사람, 즉 그들이 잃어버렸거나 그이 잘못으로 인해서 자신에게 무가치해진 성적 대상들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우울증 환자가 비록 자신의 리비도를 대상으로부터 불러들였지만,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정신 과정에 의해서 그 대상을 장아 자체의 내부에 설정하고, 없는 정신 과정에 의해서 그 대상을 자아 자체의 내부에 설정하고, 동시에 자아에 투사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여기서 여러분에게 단지 대강의 모습만 서술할 수 있을 뿐이며, 위상학적이며 심리의 역학적 관점에 입각한 정돈된 설명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자신의 자아는 마치 포기된 대상처럼 취급되고 대상에게 가해져야 할 온갖 공격들과 복수심의 표현들로 고통을 받습니다. 우울증 환자들의 자살 충동 역시 환자가 애증이 섞여 있는 대상에 대한 분노만큼이나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도 동시에 절망한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욱 잘 이해됩니다. 다른 나르시시즘적인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우울증의 경우에도 감정생활의 한 특징이 아주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이를 우리는 블러일러가 명명한 이래로 양가감정으로 표현하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서로 대립하는, 즉 애정이나 증오와 같은 감정들을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 품는 경우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나는 이번 강의에서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에게 양가감정에 대해 설명할 수 없었습니다.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 외에도 히스테리 성 동일시가 있는데, 이는 우리에게 이미 오래전에 알려진 것입니다. 나는 이 두 가지 동일시의 차이점들에 대해서 몇 가지 명확한 규정들에 의거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울증의 주기적이며, 순환적인 형식들에 대해서는 여러분이 기꺼이 듣기를 원하는 일부 내용들을 설명할 생각입니다. 만약 상황이 유리하다면, 증상이 잠시 나타나지 않는 휴지기간에 분석적 치료를 통해서 동일한 감정 상태나 혹은 이와 대립하는 감정의 상태가 재현되지 않도록 예방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런 사례를 두 번에 걸쳐서 경험했습니다. 여기서 우울증이나 조병의 경우에도, 문제의 관건은 갈등을 특수한 방식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갈등의 전체 조건들은 대체로 다른 신경증들과 일치합니다. 여러분은 이 영역에서 정신분석학이 아직 더 경험해야만 하는 사실들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는 또한 여러분에게, 나르시시즘적인 감정들을 분석함으로써 자아가 어떤 요소에 의해 구성되었는지, 또 여러 개의 기관Instanz으로 이루어진 그 구조를 알아낼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습니다. 강의의 한 부분에서 우리는 이런 작업의 단초를 마련했습니다. 관찰 망상Bobochtungswahn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자아의 내부에 실제로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 기관은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비판하고, 또 비교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자아의 다른 부분과 대치합니다. 환자가 모든 자신의 행동들이 감사와 관찰의 대상이 되고 모든 자신의 생각들이 보고되거나 비판받는다고 불평할 때, 환자는 우리에게 아직 그 의미가 충분히 평가되지 못한 진리를 드러내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지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런 힘을 낯선 무엇으로서 자신이 외부에 설정하는 오류를 범할 뿐 입니다. 그는 자신을 관장하는 기관이 자아의 내부에서 작용한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힘은 현재의 자아와 그의 모든 행위들을 <이상적 자아Ideales-Ich>에 견줍니다. 그는 자신이 성장하는 동안 이와 같은 이상적 자아를 창조합니다. 또한 우리는 이런 창조물이 원초적인 유아기의 나르시시즘과 관련된, 자기 만족감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만족감은 유아기 이후부터 계속해서 그토록 많은 장애와 질병에 의해서 침해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관찰하는 기관을 우리는 자아의 검열관, 즉 양심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밤 동안에 꿈을 검열하는 일을 수행하며, 이로부터 용인될 수 없는 욕망의 자극들에 대한 억압이 발생합니다. 관찰 망상에서 이런 기능은 마비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능이 부모와 선생, 그리고 사회 환경 등의 영향에 의해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즉 이들처럼 모범적인 사람들 개개인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런 기관이 만들어 집니다.
이는 우리가 정신분석을 나르시시즘적인 감정들에 적용함으로써 지금까지 확보했던 결과들 중의 일부입니다. 이런 지식들이 확실히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지식의 영역에서 어느 정도 친숙해진 다음에야 달성할 수 있는 그런 정확성을 종종 결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우리의 이 모든 통찰들은 자아 리비도나 나르시시즘적인 리비도의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진 것들입니다. 이 개념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전이신경증들을 통해서 검증되었던 견해들을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들에 대해서도 확대 적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물을 것입니다. 나르시시즘적인 감정들이나 정신이상의 장애들을 모두 리비도 이론에 의해서 성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정신생활의 리비도적인 요인을 모든 경우에 질병의 원인으로 인정하고, 자기 보존 본능이란 기능상의 변화는 전혀 발병에 대해 책임이 없는 것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될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에 대한 결정은 나에게 그다지 급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결정을 내릴 만한 시점에 도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 결정을 조용히 학문적 연구가 진전되는 대로 내맡겨 놓을 수 있습니다. 나는 리비도적 본능들만이 병인으로 작용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며, 그 결과 리비도 이론이 아주 단순한 실제적 신경증에서부터 개인의 의식을 앗아가는 가장 심각한 정신 착란증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승리를 구가할 수 있다 해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리비도의 성격을 보여 주는 특징이, 필연성Ananke이라는 세계의 현실 밑에 종속되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나는 자아의 본능들이 리비도의 병인으로 작용하는 자극들에 의해서 이차적으로 함께 영향을 받아 불가피 하게 기능상의 장애를 받는 일이 얼마든지 발생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만약 아주 중한 정신병 환자의 경우, 자아 본능 자체가 일차적으로 착란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눈앞에서 드러나더라도 나는 우리들의 연구의 방향성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래의 연구에 의해서 이 문제는 결정이 나겠지만, 최소한 여러분에게는 특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내가 지난 번에 남겨두었던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서 잠시 동안 다시 불안의 문제로 돌아가는 것을 양해하기 바랍니다. 위험에 처한 상태에서 느끼는 현실 불안은 자기 보존 본능들이 표현된 것임에 틀림없으며, 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은 불안과 리비도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내용과 일치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불안의 감정이 이기주의적인 자아 본능에서가 아니라, 자아 리비도에 의해서 촉발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불안한 상태는 모든 경우에서 목적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부적합성은 불안의 상태가 고조될 때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불안 상태는 이때 유일하게 목적에 부합되고, 자기 본존에도 도움이 되는 도망을 가거나 방어하는 행동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현실 불안의 감정적 부분은 자아 리비도에 기인하는 것이며 여기서 이루어지는 행동은 자기 보존 본능에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면, 모든 이론적인 어려움은 제거됩니다. 한편 여러분은 사람이 불안을 느끼기 <때문에> 도망을 가는 것이라고 정말 믿습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불안을 느끼고, <그리고> 위험을 감지함으로써 일깨워진 공통적인 동기에 의해서 도망을 칩니다. 커다란 생명의 위험들을 견디어 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혀 불안해 하지도 않았으며, 단지 맹수를 상대로 총을 겨냥하는 것과 같은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확실히 목적에 가장 잘 부합하는 행동입니다.
스물일곱 번째 강의 : 전이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우리의 강의가 거의 끝나 가는 시점에서 여러분들에게는 일정한 기대감이 고조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대에 의해서 여러분이 잘못된 길로 인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내가 정신분석학적 소재들이 함축하는 모든 난점들을 자세히 소개하지 않았다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치료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그대로 강의를 마치려 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물론 정신분석 자체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은 바로 치료에 달려 있습니다. 나 역시 여러분과 이 주제를 다루지 않을 수가 없는데, 왜냐하면 여러분은 이 주제의 관찰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가 탐색한 질병들에 대해서 거의 확실하게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 머물고 말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치료의 목적들을 위해서 정신분석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기술적 지침을 기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여러분이 단지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정신분석학적 요법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작용하고, 어떤 일을 수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마땅히 그런 사실들을 경험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직접 그것에 대해 말해 줄 생각은 없으며, 여러분이 자신이 직접 알아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질병의 조건들에 대한 모든 본질적 내용은 물론,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모든 요인들에 대해서도 알았습니다. 여기서 치료의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유전적인 기질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자주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유전적인 기질에 관해서는 다른 학문의 영역에서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있으며, 우리가 거기에 대해 새로운 내용을 첨가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가 이 요인을 과소 평가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바로 치료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유전적 기질의 영향력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이 유전적 요인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또 이 요인은 우리에게 일종의 주어진 조건으로 남아 있으며, 우리들의 노력이 한계에 직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분석 작업 속에서 최우선 순위를 부여하려고 했던, 이른 유년기의 체험들의 영향이 있습니다. 이는 과거에 속하며, 우리가 일어나지 않았던 사태인 것처럼 만들 수도 없는 요인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현실적 좌절'이란 표현으로 정리했던 모든 사태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인생의 불행으로 사랑의 결핍도 이에서 발생합니다. 그런 사태들은 빈곤과 가정의 불화, 반려자의 불운한 선택, 불리한 사회적 상황들, 인륜적 요구들의 엄격함 들과 같은 요인들이며, 이들에 의해서 사람들은 압박을 받습니다. 물론 여기서 효과가 강력한 치료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지만 그런 요법은 빈Wien에 사는 사람들이 말하는 요셉 황제의 전면적인 개혁과 마찬가지로, 어떤 힘센 사람이 선의를 가지고 개입하는 행위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그런 힘센 사람의 의지 앞에서 사람들은 복종해야 하지만 또 모든 어려운 문제들도 사라집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실시하는 치료 요법의 수단으로 그와 같은 자선 행위를 끌어들인다면,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존재들입니까? 우리 자신은 가난하고, 사회적으로도 무기력할 뿐만 아니라, 의료 행위를 통해서 우리의 생계를 유지해야만 합니다. 다른 의사들은 다른 방법으로 치료하면서 의료비가 없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겠지만, 우리는 결코 그런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는 입장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요법은 그 대신에 시간이 많이 먹히고 오래 노력이 경주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도 위에서 설명한 질병의 요인들 중의 하나에 집착하면서, 바로 그 요인이 우리의 영향력이 미치는 공격 지점이 될 수 있다고 간주할 것입니다. 만약 사회가 도덕적인 절제를 요구함으로써 환자가 박탈감을 느낀다면, 치료의 방법으로 그런 한계들을 넘어서 환자가 행동하도록 용기를 주거나, 직접 그에 해당하는 지침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회가 매우 높게 평가하지만 상당히 자주 침해받는 도덕적 이상을 충족시키려는 시도를 포기하고, 환자에게 만족감과 쾌유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적으로 충분히 '즐김으로써' 건강해질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분석적 치료 방법은 보편적인 도덕성에 봉사하지 않는다는 질책을 받게 됩니다. 분석 요법이 환자 개개인들에게 베풀어주는 것은 보편적인 영역에서 앗아 온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신사 숙녀 여러분, 누가 그처럼 엉터리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까? 성적으로 즐기라는 충고는 분석적 요법에서 그 어떤 역할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이미 환자가 리비도적인 자극과 성적인 억압의 사이에서, 즉 감성적인 경향성과 금욕적인 경향성 사이에서 심하게 갈등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경향성들 중에서 하나가 상대방을 지배하고 승리하도록 도와주더라도 이 갈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물론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금욕적 경향이 우위를 차지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 결과는 바로, 억압된 성적 충동이 증상들을 통해서 배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 이와는 반대로 감성이 승리하도록 조치한다면, 배제되었던 성적인 억압은 증상들에 의해서 대체됩니다. 이 두 가지 결정들 중에서 어느 것도 내적인 갈등의 양상을 보이는 사례들은 아주 적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례들은 원래 분석적 치료 자체가 불필요합니다. 의사에 의해서 그런 영향을 받을 만한 사람들은 의사의 도움이 없더라도 같은 방책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물론 어떤 금욕적인 젊은이가 불법적인 성관계를 맺으려 하거나, 성적인 욕구 불만을 느낀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서 보상을 받기 원할 때, 대체로 의사나 혹은 심지어 정신분석가가 허락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대개 하나의 본질적인 사항을 간과합니다. 죽 신경증 환자들에게 병인으로 작용하는 갈등은 동일한 심리학적 토대 위에 놓여 있는 심리적 자극의 정상적인 투쟁과 다르다는 사실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갈등하는 힘들 중에 하나는 전의식과 의식의 단계로 내보내졌지만, 다른 힘은 무의식의 단계에 얽매여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갈등은 결코 해결될 수 없습니다. 투쟁하는 당사자들은 마치 잘 알려진 북극곰과 고래의 예처럼, 서로 거의 만날 수가 없습니다. 만약 이 두 당사자들이 동일한 지반 위에서 서로 만난다면 실제로 결판이 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이 치료 요법의 유일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인생의 중요한 상황에서 자문을 해주고 인도해주는 것이 분석의 역할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면, 잘못된 이야기를 들은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우리는 가능한 한 인생의 교사와 같은 역할을 맡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환자가 스스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정도 이상의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 역시 환자가 직업의 선택이나 경제적인 계획들, 결혼의 결정, 혹은 이혼 등과 같은 인생에서 중요한 모든 결단들을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뒤도 미루고 치료가 완료된 후에 결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견해는 여러분 자신이 예상했던 바와 아주 다르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아주 어린 사람들이나, 도움이 필요하고 연고가 없는 사람들의 경우에는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치료에 한계를 둘 수 없습니다. 이들의 경우 우리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교육자로서의 역할을 결합해서 수행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짊어지는 책임을 잘 의식해야 하며,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조심성을 지니고 행동해야 합니다.
신경증 환자들은 분석적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성의 자유를 누리라는 권고에 접한다는 비난이 있습니다만, 이런 비난에 대항해서 정신분석학을 변호하려는 나의 열심히 지나친 나머지 우리가 사회의 도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 환자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식의 정반대 되는 결론을 여러분이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와 같은 일은 역시 우리의 의도와는 거리가 멉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사회 개혁을 하려는 사람들이 아니며, 단지 관찰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판적인 시각에서 관찰할 수밖에 없으며, 관습적인 성도덕의 편을 드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가 성생활의 문제들을 실제로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사회가 인륜으로 부르는 것이 치를 만한 정도의 희생을 넘어서는 대가를 요구하며, 성에 관한 사회적 관행은 진실성에 바탕하지도 않으며, 현명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환자들이 이런 비판을 접하지 않도록 할 생각이 없으며, 다른 모든 사태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편견에서 해방된 사고에 익숙하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치료 요법이 완결된 후에 자주적으로 자기 스스로의 판단에 의거해서 완전한 성적인 자유분방함과 절대적인 금욕 사이의 중간적인 입장에서 택하게 된다면, 우리의 양심은 치료의 결과에 대해서 아무 부담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는 교육을 성공적으로 받은 사람은 반인륜적인 행동의 위험에서 자신을 계속 지킬 수 있습니다. 물론 그가 지닌 도덕의 기준은 사회의 일반적 관행과는 무언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신경증에 대한 금욕의 영향력을 과대 평가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적 좌절과 같은 상황은 리비도가 배출되지 못하고 적체되는 결과를 가져오는데, 오직 이런 경우에만 성행위와 같은 최소한의 노력을 통해서 병인이 되는 상황을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적인 자유분방함을 허락하는 조치를 통해서 정신분석의 치료 효과를 설명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다른 요인들에 대해서 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여러분의 잘못된 추측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하나의 사실을 언급함으로써 여러분을 올바른 길로 이끌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쓸모가 있는 것은 아마도 의식에 의해서 무의식을 대체하는 일이며, 이는 무의식을 의식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과 같습니다. 이는 당연히 옳은 말입니다. 우리는 무의식을 의식의 차원으로 끌어올림으로써 억압들과 함께 증상을 형성하도록 만드는 조건들을 제거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병인으로 작용하는 갈등 역시 어떤 형태로든 해결책이 강구될 수 있는 정상적인 갈등으로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환자의 다른 상태들이 아닌, 심리 상태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변화의 영향력이 미치는 만큼 우리들도 환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억압 혹은 억압과 유사한 정신 과정을 되돌릴 수 없다면, 우리의 치료를 적용할 대상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지향하는 목표는 다양한 공식들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는 작업이나 억압들의 제거, 그리고 상실된 기억의 복원 등과 같은 요인들은 모두 동일한 결과를 지향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도 이 같은 솔직한 고백에 대해서 불만족스러울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경증 환자가 건강해지는 과정을 달리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건강해진다는 것은 환자가 정신분석의 힘겨운 작업을 거친 후에 어떤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환자는 자신의 내부에 무의식적인 요소는 전보다 덜 지니는 대신 의식적인 것은 더욱 많이 지니게 되며, 이것이 치료가 가져온 모든 결과라고 여러분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아마도 그런 내적인 변화의 의미를 과소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치유된 신경증 환자는 실제로 다른 사람이 되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즉 환자의 상태는 가장 유리한 조건들에서 되어있을 법한 그러한 상태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성과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환자의 정신생활에 그처럼 사소한 듯이 보이는 변화를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는지 알게 된다면, 심리적인 수준에서 나타나는 그만한 차이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도 납득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인과적인 요법의 의미에 대해서 아는지 물어보기 위해서 나는 잠시 동안 본래의 주제에서 벗어나겠습니다. 즉 이 치료 요법은 질병의 현상들을 공략의 대상으로 설정하지 않고, 질병의 원인들을 제거하고자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정신분석은 일종의 인과적 요법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단순하지 않습니다만, 그런 물음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무가치하다는 확신을 심어 주는 기회를 제공해 주기는 합니다. 분석적 요법은 증상들의 제거를 우선적인 과제로 설정하지 않는 한, 인과적인 요법인 것처럼 보입니다. 다른 관점에서 여러분은 정신분석이 인과 요법은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억압들을 넘어서 전개되는 인과 관계들을 계속 추적한 결과, 본능적 소질에까지 도달했으며, 그 구성과 발달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변화되는 충동의 강도들이나 일탈 현상들까지도 검토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가 모종의 화학적인 방식들을 통해서 이런 심리적 기제에 개입할 수 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래서 그때마다 주어진 리비도의 양을 증가시키거나 혹은 감소시킬 수도 있고, 하나의 충동을 다른 충동들을 대신해서 강화한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이런 방식이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인과적 요법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의 분석은 병인의 탐색에 선행되는 재인식이라는 필수적인 작업을 수행해 왔습니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리비도의 과정들에 그 같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지, 현재로서는 언급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심리적인 요법으로 접근할 수 있는 인과 관계의 다른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우리들이 감지할 수 있는 현상들의 근원들은 아니지만, 증상들에서는 꽤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입니다. 즉 매우 특이한 상황들에 의해서 우리들에게 알려진 부분들입니다. 결국 우리는 환자의 무의식을 의식으로 대체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우리는 언젠가 그 작업이 아주 단순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무의식을 규명해 낸 다음에, 이를 환자에게 알려만 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그것이 근시안적인 오류임을 알아챘습니다. 무의식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그들이 알고 있는 지식과 같은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의 지식을 알려준다면, 그 지식을 자신의 무의식을 (대신해서)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옆에) 가져다 놓습니다. 그럼으로써 실제로 변화되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와 같은 무의식을 (지형학적)으로 연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의식은 기억 속에서 억압에 의해 그것이 발생했던 곳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이 억압이 제거될 경우, 무의식이 의식에 의해서 대체되는 과정은 순탄하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이제 그런 억압을 어떻게 제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의 과제는 여기서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합니다. 먼저 억압을 찾아내고, 이 억압을 유지하는 저항을 제거하는 일이 그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저항을 제거합니까? 다음과 같은 방식이 가능합니다. 억압을 일단 들추어내고, 환자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저항은 물론 우리가 해소하려고 시도하거나 과거에 발생했던 것과 동일한 억압에서 비롯합니다. 그것은 바로 불쾌한 자극을 억압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리비도 반대 집중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처음에 하려고 했던 일을 이제서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억압을 해석하고, 발견해 내서 환자에게 알려주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올바른 장소에 그런 일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리비도 반대 집중이나 저항은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에 속합니다. 이런 정황이 자아에게 의식되지는 않더라도 자아는 우리들을 도와주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의식)이란 말의 이중적인 의미가 문제가 되고 있음을 압니다. 즉 무의식은 한편으로는 현상으로서 이해되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체계로서 이해됩니다. 이는 매우 난해하고 불투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언급 역시 앞에서 말한 내용의 반복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이에 대해서 준비해 왔습니다. 우리는 이런 저항이 포기되고 리비도 반대 집중된 상태가 다시 사라질 것으로 기대하는데, 이는 해석을 통해서 자아가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만들 때 가능합니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어떤 충동의 힘들을 움직여야 합니까? 첫째로 건강해지고 싶어 하는 환자의 노력이 있으며, 이 노력이 환자로 하여금 우리와 함께 하는 공동작업에 참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둘째로 우리가 해석을 통해서 뒷받침하는 환자의 지적 능력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환자의 지성을 통해서 저항을 더욱 쉽게 인식하고, 억압된 것과 상응하며 무의식의 언어로 번역된 대응물도 더 용이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때 그것에 적합한 환자의 기대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관념들이 제공되어야 합니다. 만약 내가 여러분에게 (하늘을 보십시오. 저기 풍선이 보입니다)라고 말한다면, 단지 여러분에게 (무언가 있는지 둘러보십시오)라고 요구할 때보다 더 쉽게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처음 현미경을 쳐다보는 학생 역시 그가 관찰해야만 하는 것에 대해서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는 현미경 속에 있고 또 보이는 것일지라도 전혀 보지 못합니다. 이제 사실 자체에 대해 언급합시다. 히스테리들과 불안의 상태들, 강박신경증들과 같은 신경증 질환의 많은 형식들에도 우리의 전제들은 들어맞습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억압을 규명하거나 저항들을 발견해내고, 또 억압된 것을 해석함으로써 실제로 우리가 설정했던 과제들, 즉 저항들을 극복하고 억압을 제거하며, 또 무의식을 의식으로 전환하는 과제들이 해결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개개의 저항을 극복하기 위해서 환자의 심리 속에서 얼마나 심각한 투쟁이 전개되는지에 관한 명확한 인상을 지니게 됩니다. 즉 여러분은 리비도 반대 집중 상태를 유지하려는 동기와 이를 표기할 준비가 되어 있는 동기들 사이에 동일한 심리적인 토대 위에서 전개되는 정상적인 심리적 갈등에 대해서 뚜렷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전자는 과거에 억압을 관철시켰던 오래된 동기들입니다. 후자에는 나중에 새롭게 첨가된 동기들이 포함되어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갈등을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그러한 동기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로써 오랜 억압의 갈등을 다시 새롭게 부각시켜서 당시에 이미 결판이 났던 갈등의 해결 방식을 수정할 수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새로운 자료로 언급할 내용은 과거와 같은 해결의 방식이 질병을 초래했다는 충고와 함께 다른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할 경우에는 치료의 길이 열린다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과거에 처음 충동들을 거부한 다음부터 모든 정황들이 엄청나게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해야 합니다. 당시에 자아는 연약하고 어렸으며, 아마도 리비도의 요구를 위험한 것으로 비난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짐작됩니다. 하지만 오늘에 이르러서 자아는 강해지고, 경험도 풍부해졌습니다. 그리고 자아는 의사라는 조력자를 곁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롭게 재생된 갈등이 억압보다 나은 결과로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미 말한 대로 히스테리와 불안신경증, 그리고 강박신경증 등을 치료해서 성공할 경우 우리가 원칙적으로 옳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질병의 유형들도 있습니다. 이들의 경우 동일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치료 요법은 전혀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여기서는 자아와 리비도 사이의 원천적인 갈등이 문제가 되며, 이 갈등이 억압으로 연결됩니다. 물론 이 억압은 위상학적으로 달리 규정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도 환자의 인생에서 억압이 발생한 시점들을 추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동일한 절차를 적용하고, 같은 약속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또 환자 스스로 기대하고 있는 관념들을 알려줌으로써 도움을 베풀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여기서도 현재와 과거의 억압이 발생했던 시기가 시간적인 차이가 남으로써 갈등이 다른 방식으로 귀결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항이나 억압을 제거하지 못합니다. 편집증 환자들, 우울증 환자들, 그리고 조발성 치매에 걸린 환자들은 전반적으로 다루기가 불가능하며, 전혀 정신분석의 치료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그런 일이 발생합니까? 그것은 지적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어느 정도의 지적인 수행 능력은 우리 환자들에게 자연히 요구되며, 예를 들어 그렇게도 예민하게 여러 사실들을 결합해서 추리할 수 있는 편집증 환자들의 경우, 지능을 결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환자들은 지적인 능력을 제외한 다른 능력들 역시 겸비하고 있습니다. 가령 우울증 환자들은 자신이 병에 걸려 있으며, 이 때문에 심하게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의식을-이런 의식을 편집증 환자들에서 발견할 수는 없습니다.-아주 높은 수준에서 지니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울증 환자를 더 쉽게 치료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사실과 직면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거둔 성과를 실제로 그 모든 조건들과 관련해서 제대로 이해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가 검토한 히스테리 환자들과 강박신경증 환자들을 계속 살펴봅시다. 그러면 곧 우리가 전혀 예비하지 못했던 두 번째 사실이 드러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곧바로 이 환자들이 우리들에 대해서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론 치료 과정에서 관찰 대상으로 부각되었던 모든 충동의 힘들을 참작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환자 사이에 전개되는 상황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이해했기 때문에 마치 수학의 계산처럼 정확하게 파악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계산하는 과정에서 고려하지 않았던 다른 무엇이 여기에 끼어들었습니다. 이 같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 자체는 여러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나는 일단 가장 자주 등장하고 또 더욱 쉽게 이해될수 있는 유형을 서술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고통스러운 갈등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환자가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에 대해서 아주 특이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압니다. 이 사람과 관련된 모든 사항들이 그에게는 자기 자신의 문제들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며, 그 결과 환자는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따라서 일정기간 동안 의사와의 관계는 아주 순탄하게 형성됩니다. 그는 특별히 상냥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감사의 표시를 하려고 합니다. 또 환자는 세련되게 행동하고, 아마도 우리가 그에게서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장점들을 보입니다. 의사 역시 이때 환자에 대해서 좋은 생각을 지니게 되고, 바로 이처럼 아주 훌륭한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는 우연한 기회가 주어진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만약 의사가 환자의 친척들을 면담하게 될 경우, 그는 이 같은 호감을 자신과 환자 모두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만족감을 느낍니다. 환자는 집에서도 계속해서 의사를 칭찬하며 항상 그에게서 새로운 장점들을 발견된다고 추켜세웁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그는 선생님에게 완전히 빠졌습니다. 그는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모든 내용은 그에게 일종의 계시와도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런 말들로 환자의 가족들이 합창을 하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사태를 좀 더 예민하게 주시하는 사람들의 다른 목소리가 나옵니다. 즉 그가 다른 모든 일들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고 오직 선생님에 관한 말만 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주위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사가 자신에 대한 환자의 이런 평가를 겸손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즉 그런 평가는 환자가 의사에 대해서 품는 희망에도 기인하지만, 치료가 진행됨에 따라 자신의 지적인 차원이 놀라울 정도로 넓어지고 해방되는 체험을 하기 때문입니다. 분석은 이런 조건들에서 아주 탁월한 진전을 보입니다. 환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암시하는 말을 잘 이해하고, 치료 요법이 지시하는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골몰합니다. 기억하고 있는 내용들이나 돌연한 착상들이 그에게 샘솟듯 떠오르고, 자신의 정확하게 사실에 그대로 부합하는 해석을 통해서 의사를 놀라게 만듭니다. 바깥세상의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그다지도 맹렬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곤 했던 모든 심리학적인 새로운 사실들을 환자가 기꺼이 수용하는 것을 의사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확인하게 됩니다. 분석적인 작업이 진행되는 도중에 의사와 환자 사이의 협조가 잘 이루어진다는 것은, 질병의 상태가 어느 모로 보더라도 나아졌다는 객관적인 정황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이처럼 좋은 날씨가 항상 계속되라는 법은 없습니다. 언젠가는 궂은날이 오게 마련입니다.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제 어려운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환자는 자신에게 이제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환자는 더 이상 분석의 작업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환자는 그의 머리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을 말하고 절대 자신의 그런 행동을 스스로 비판하고서 말하기를 꺼려해서는 안 된다는 지침들을 쉽게 위반해 버립니다. 환자는 마치 자신이 치료를 받고 있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며, 의사와 앞서 맺은 계약 자체를 부정하는 듯이 보입니다. 분명히 환자는 자신만을 위해서 간직하고 싶어 하는 생각으로 가득합니다. 이는 치료를 위해서는 위험한 상황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엄청난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만약 우리가 다시 한번 상황을 규명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환자가 강렬하고 애정 어린 감정들을 의사에게 전이시킴으로서 장애 요인이 발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의사의 태도나 치료 과정에서 형성된 관계 등이 환자가 그런 감정들을 가지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런 정감이 표현되는 방식이나, 그런 애정어린 감정을 품게된 목적들은 두 당사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관계에 따라 달라집니다. 만약 젊은 처녀 환자와 젊은 의사의 관계라면 정상적인 연인관계와 같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한 처녀가 젊은 남자와 단둘이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의 내밀한 세계를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자신보다 우월하고 유리한 위치에 서서 도움을 베푸는 남자에게 빠지는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신경증에 걸린 처녀에게는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장애가 문제된다는 사실이 간과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의사와 환자의 개인적인 관계들이 여기서 가정하고 있는 사례와는 동떨어진 경우에도 동일한 감정적 관계들이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만약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더욱 더 우리에게 이상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만약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부인이 아직 독신으로 있는 의사에 대해 심각한 연정을 품게 되면, 그녀는 의사의 여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혼을 결심하거나, 혹은 사회적인 장애가 작용할 경우에도 망설이지 않고 그와 비밀스러운 애정관계를 맺으려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일들은 물론 정신분석을 제외한 다른 경우에서도 발생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과 소녀들이 하는 말들을 듣고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치료상의 문제에 대해서 아주 특이한 입장을 표명합니다. 이들은 오직 사랑에 의해서만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합니다. 치료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이들은 의사와의 교류를 통해서 자신들에게 지금까지의 신생이 가져다주지 않았던 선물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합니다. 단지 이런 희망 때문에 그들은 치료과정에서 그렇게도 많은 수고를 들이고,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쪽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추가할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믿기 어려웠을 모든 내용들이 그렇게도 쉽게 이해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같은 고백은 우리를 놀라게 만듭니다. 그런 고백은 우리의 계산을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어떻게 그렇게도 중요한 요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요?
더 많은 경험을 할수록, 우리는 학문성과 관련해서 수치스럽다고 할 정도로 자신들의 견해를 수정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례들을 처음 접했을 때, 분석적 치료가 원래부터 의도하지도, 촉발시키지도 안은 우연한 결과에 의해서 장애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약 환자가 의사에게 그런 애정을 품는 일이 규칙적으로 모든 새로운 사례들에서 반복된다면, 그리고 만약 전혀 그런 일이 일어날 법하지 않은 망측스러운 상황에서도 계속 되풀이된다면, 가령 우리의 판단에 따르면 전혀 유혹 운운할 수도 없는 나이가 많은 여자 환자나 수염이 하얗게 난 남자에게도 그 같은 애정 관계가 발생한다면, 우리는 이를 치료의 장애를 가져오는 우발적인 요인으로만 볼 수는 없으며, 질병 상태의 본질 자체와 아주 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현상이 문제가 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됩니다.
우리가 결국 인정하기를 꺼려했던 새로운 사실은 <전이>라고 불려집니다. 우리는 한 사람으로서의 의사에게 감정들이 전이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치료 상황에 의해서 그런 감정들이 발생한다고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환자의 그런 감정 상태가 모두 다른 곳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며, 환자가 미리 준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석적 치료를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 바로 의사에게 그 감정을 전이시켰던 것으로 봅니다. 전이는 격정적인 사랑의 요구로 나타나거나, 혹은 좀 더 온건한 형태로도 나타납니다. 어린 처녀와 노인 사이에는 애인이 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대신해서, 의사가 자신을 사랑받는 딸로서 받아 주기를 바라는 욕구가 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 리비도적인 충동을 떨어질 수 없는, 그러나 이상적이며 감성을 초월한 우정의 관계를 맺자는 제안과 같은 완화된 형태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많은 여성들은 전이의 감정 상태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때까지 승화시키거나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그런 감정을 거칠고 가다듬어지지 않은 형태로, 그리고 대개는 달성될 수 없는 방식으로 표출합니다. 그러나 미들은 모두 근본적으로는 항상 동일할 것이며, 같은 연원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전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어떻게 분류해야 하는지 묻기 전에, 이를 더욱 완전하게 서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자 환자들의 경우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 경우에 사람들은 성적인 차이와 성적인 매력을 혐오스럽게 혼동함으로써 빚어지는 사태를 모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여자들의 경우와 크게 다른 바가 없다는 대답이 나옵니다. 가령 의사에 대해 집착하거나 그의 성격적인 장점들을 과대평가하는 것은 모두 같습니다. 또 의사가 관심 갖는 것에 대해서 질투심을 보이는 현상도 동일합니다. 남자와 남자 사이에서는 전이의 승화된 형태들이 훨씬 자주 나타나는 만큼, 직접적인 성적 요구는 드물게 나타납니다. 여기서는 충동의 요소들이 다른 방식으로 사용되며, 오히려 명시적인 동성애로 나타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의사는 전이의 한 특정한 형식이 여자 환자보다 남자 환자에게서 더 자주 나타나는 것을 관찰합니다. 이는 얼핏 보기에 지금까지 서술했던 내용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적대적이거나 <부정적인> 전이입니다.
일단 우리는 전이가 치료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환자에게 발생했다는 사실과 함께, 한동안은 분석 작업을 가장 강력하게 추진하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전이의 존재 자체를 감지할 수 없으며, 전이가 환자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분석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한 그것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전이가 저항으로 전환될 경우, 우리는 이를 주목하게 되도, 다음 두 가지 서로 다르며 상반된 조건들 하에서 치료에 대한 자신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첫째 전이가 애정의 충동으로 지나치게 강렬하게 표출될 경우, 환자의 내부에서 이에 반대하는 충동이 촉발됨으로써 전이가 성적인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증거가 노출됩니다. 그리고 둘째, 전이는 애정 충동이 아닌 적대적인 충동에서 비롯할 수 있습니다. 적대적인 감정들은 대체로 애정의 감정보다 나중에 등장하고 애정의 배후에서 나타납니다. 이 주 감정들은 동시에 병존함으로써 우리들 대부분이 다른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을 때 지니는 지배적인 감정인 감정의 이중성을 훌륭하게 반영합니다. 적대적인 감정들은 애정 어린 감정들과 마찬가지로 반항심의 감정적인 종속을 의미하며, 단지 후자와는 정반대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만 다를 뿐인 사태와 동일합니다. 의사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들이 <전이>로 불리워질 만하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치료 상황에 의해서 적대적 전이가 발생할 만한 중분한 동기가 주어지는 것은 분명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정적인 전이가 필연적으로 나타난다는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우리는 긍정적인 전이나 애정 어린 전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평가도 잘못되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전이는 어디서 비롯하며 어떤 어려움을 안겨 주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를 극복할 것이며, 어떤 유용한 결과들을 이로부터 궁극적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가에 관한 모든 문제들은 분석의 기술적 지침들을 논하는 과정에서 상세하게 다룰 수 있으며, 오늘을 다만 가볍게 언급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전이에서 비롯하는 환자의 요구 사항들에 굴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습니다. 그런 요구들에 대해 불친절하게 대하거나, 혹은 화를 내면서 거부한다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환자가 품고 있는 감정들이 현재의 상황에서 발생하거나 의사라는 개인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에 나타났던 것의 반복에 볼과하다는 사실을 그 자신에게 입증해 보임으로써 전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같은 방식으로 환자가 지닌 감정들의 반복이 회상의 형태로 바꾸어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애정의 감정으로 나타나건 적대적인 감정으로 나타나건 관계없이 그 경우에도 치료를 위협하는 가장 강력한 위협으로 여겨졌던 전이가 바로 치료의 가장 훌륭한 수단으로서 정신생활의 닫혀진 부분들을 여는데 기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이 이 같은 예상치 못했던 현상이 등장함으로써 느꼈던 당혹감을 해소시켜 주기 위해서 몇 마디 첨가할 생각입니다. 우리가 분석하려 했던 환자의 질병을 어떤 완결되었거나 경직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계속 성장하면서 마치 일종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계속 진전된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치료가 시작되었다고 해서 이 같은 진전이 멈추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만약 치료에 의해서 환자가 제압을 당한 후에는 질병의 모든 새로운 결과물들은 오직 단 하나의 부분, 즉 의사와의 관계에 집중됩니다. 전이는 그렇게 해서 나무의 목질과 피질 사이에 있는 형성층과 같은 것으로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이 형성 등에서부터 조직들이 생겨나고, 나무 둥치가 두꺼워집니다. 전이의 의미가 이처럼 확장되어야 환자의 기억들을 소재로 하는 작업이 뒷전으로 밀려납니다. 더 이상 환자의 오래된 질병이 문제가 아니라, 이를 대체하고 새롭게 형성되고 변형된 신경증이 문제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래된 감정이 발생해서 계속 성장하는 과정을 처음부터 추적한 결과 그 감정이 발생해서 계속 성장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었으며, 게다가 분석하는 사람 자신이 대상으로서 그 질병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질병을 특히 저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환자의 모든 증상들은 그 본래적인 의미를 상실했으며, 전이와 관계가 있는 새로운 의미를 지향하게 됩니다. 혹은 그와 같이 성공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바꿀 수 있었던 증상들만 남게 됩니다. 그러나 이 새롭게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신경증을 해결하는 과정은 치료 요법에 의해서 비로소 그 존재가 알려진 질병을 치료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치료 요법이 설정한 과제를 해결하는 작업과 동일합니다. 의사와 정상적인 관계를 지니면서 억압된 충동의 자극들에서 자유로워진 사람은, 의사가 만약 다시 개입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삶을 그대로 변함없이 유지할 수 있습니다.
히스테리와 불안 히스테리, 그리고 강박신경증에서 나타나는 전이는 치료하는 과정에서 이처럼 특이하고 핵심적인 의미를 지니며,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전이신경증>이라고 불리워질 만한 정당한 근거가 있습니다. 분석적 작업을 통해서 전이의 사실에 대한 완전한 근거가 있습니다. 분석적 작업을 통해서 전이의 사실에 대한 완전한 인상을 확보한 사람은 억압된 자극들이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들인지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억압된 자극들을 이런 신경증들의 증상들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자신들이 리비도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뚜렷하게 입증해 보일 수는 없습니다. 리비도적인 대리 만족들로서 증상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서 우리가 결정적으로 확신할 수 있었던 계기는 전이라는 현상의 소속을 분명히 한 다음부터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치유과정에 대해서 지난날 지녔던 역동적인 관점을 개선하고, 새로운 통찰과 조화시켜야 하는 충분한 근거를 갖고 있습니다. 만약 환자가 저항들과 정상적인 방식으로 갈등해야만 한다면, 우리도 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치유의 길로 이어질 수 있는 방향으로 결정이 내려지도록 매우 강력한 추진력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환자는 자신의 과거 상태를 반복하려고 마음먹고, 의식에 떠오른 것을 다시 억압할 수도 있습니다. 이 투쟁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환자 자신의 지적인 통찰이 아니라 환자가 의사에 대해서 지니는 관계일 뿐입니다. 환자 자신은 그런 일을 할만큼 충분히 강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환자의 전이가 양성으로 나타날 경우, 그것은 의사를 권위 있는 존재로 만들고 의사의 말이나 견해에 대한 믿음으로 전환됩니다. 만약 그런 전이가 발생하지 않거나 음성적인 형태로만 남아 있다면, 환자는 의사나 그의 논변들에 대해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됩니다. 의사에 대한 믿음은 여기서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사를 반복합니다. 그 믿음은 사랑에서 파생된 것이며, 일단 논변들에 의해서 뒷받침되거나 할 필요도 없습니다. 훨씬 후에 가서야 그런 논변들은 만약 자신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이 제기할 때 비로소 검토의 대상으로 채택됩니다. 이처럼 지지해 주는 힘이 없을 경우, 논변들도 전혀 효력을 지니지 못합니다. 즉 그런 논변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에서 한 번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사람은 오직 리비도적인 대상 집중을 할 수 있는 한 에서만 지적인 측면에서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최상의 분석적 기술을 사용하는 경우에도 환자의 나르시시즘이 형성된 정도에 비례해서 환자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또 이를 염려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대상 리비도 집중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돌릴 수 있는 능력은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주어져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신경증 환자들의 전이에 대한 충동은 단지 이런 일반적인 성질이 특이하게 강화된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처럼 널리 퍼져있고 또 중요한 인간의 특징이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사용되지도 않았다면 매우 기이한 일일 것입니다. 물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베른하임은 최면의 현상들에 대한 이론의 근거를 현혹되지 않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다음과 같은 명제로 표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암시에 걸릴 수 있다.> 그가 말한 암시란 전이에 대한 충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암시를 너무 좁게 해석한 결과 음성적인 전이를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해 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른하임은 암시가 본래 무엇을 의미하며 어떻게 발생하는지 전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암시는 그에게 일종의 근본적인 사태로서 받아들여졌지만 그 연원이 무엇인지 대해서는 전혀 입증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암시에 대해 반응하는 능력이 성과 리비도의 활동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분석의 기술에 최면술을 포함시키지 않았던 이유는 단지 전이의 모습 속에서 암시를 다시 발견하려고 했기 때문이며 이런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잠시 강의를 중단하고 여러분이 발언할 기회를 주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반대 목소리가 거세게 밀고 올라온 나머지, 스스로 발언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강의가 귀에 들어 갈 수도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마침내 선생님도 최면술사들처럼 암시의 조력을 빌어서 작업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말았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그럴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만약 암시만이 유일하게 효과가 있다면, 도대체 왜 번거롭게 과거에 대한 기억들을 통해서 우회를 하거나, 무의식을 발견하려 애쓰고, 또 왜곡을 해석하거나 재번역하려 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엄청난 노력과 시간, 존 등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 가령 정직한 최면술사가 하는 것처럼 증상들에 대해서 직접 최면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아가서 선생님이 밟았던 우회의 과정에서 확보한 수많은 심리학적인 발견들은 직접적인 암시를 통해서는 드러나지 않는 것들인데, 이를 근거로 선생님이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려고 하신다면, 그런 발견들 역시 암시의 결과, 즉 의도하지 않았던 암시의 결과가 아닙니까? 선생님은 이 부분에서 스스로 원하기도 했고 또 옳다고 여긴 내용들을 환자에게 강요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 나에게 제기한 비판은 아주 흥미로우며, 이에 대해서 대답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답변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다음에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곧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단지 말을 꺼냈던 내용만이라도 마쳐야 겠습니다. 나는 전이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치료를 위한 우리들의 노력이 왜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에 대해서는 전혀 효과가 없는지 여러분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언했습니다.
이것은 몇 마디의 말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수수께끼가 얼마나 쉽게 풀리는지 그리고 얼마나 모든 내용들이 서로 잘 들어맞는지 보게 될 것입니다. 관찰을 통해서 우리는 나르시시즘적인 신경증에 걸린 환자들은 전혀 전이의 능력을 지니지 못하거나, 지닌다 하더라도 단지 부족한 일부 능력만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들은 의사를 적대감때문이 아니라, 단지 무관심하기 때문에 거부합니다. 따라서 환자들은 의사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의사가 말한 내용에 대해서 냉담하며, 그 어떤 인상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환자들에게서는 관철시킬 수 있는 치유의 메커니즘, 즉 병인이 되는 갈등을 부각시키고 억압의 저항을 극복하는 일연의 조치를 그들에게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미 그들은 종종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병의 치유를 시도하지만 병적인 결과만을 낳을 뿐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어느 것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이 환자들에 대한 임상적인 인상들에 근거해서 우리는 이들이 대상 리비도 집중을 포기하고 대상 리비도를 자아 리비도로 대체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성질 때문에 우리는 이 환자들을 신경증 환자들의 첫 번째 집단들(히스테리, 불안 히스테리, 강박신경증)과 구별했습니다. 치료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환자들이 보이는 태도를 보면 이 같은 추측이 옳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이들은 전지의 현상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노력해도 이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으며, 치유할 수도 없습니다.
스물여덟 번째 강의: 분석 요법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우리가 무엇에 대해서 논의할지 알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영향력이 본질적으로 전이, 즉 암시에서 비롯한다고 우리가 시인한다면, 여러분은 직접적인 암시를 정신분석학적 요법에서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내게 물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암시가 그처럼 지배적인 의미를 지닌다면 우리들의 심리학적인 발견이 과연 계속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의심스럽다고 덧붙였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자세히 대답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직접적인 암시는 증상들의 표현과 대립하는 암시이며, 여러분의 권위와 병적 상태의 동기들 자체를 문제시하지 않고 단지 환자들이 증상들을 통해서 그것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요구할 뿐입니다. 이때 여러분이 환자에게 최면을 걸거나 아니면 그냥 두거나 아무 원칙적인 차이가 없습니다. 베른하임은 여기서 다시 그 특유의 날카로운 안목을 가지고, 암시는 최면술이란 현상의 본질에 해당하지만, 최면 자체는 암시가 성공해서 이미 암시된 상태임을 말해 준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특히 각성하고 있는 상태에서 암시를 걸었는데, 이는 최면 상태에서의 암시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물음과 관련해서 나의 경험담을 먼저 듣고 싶습니까, 아니면 이론적인 고찰을 먼저 듣고 싶습니까?
전자부터 다루기로 합시다. 나는 과거에 베른하임의 제자였습니다. 나는 1889년에 당시로 그를 찾아갔으며, 암시에 관한 그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나는 여러 해에 걸쳐서 최면술 요법을 익혔으며,. 처음에는 금지의 암시와 결합시켰으나 후에는 브로이어가 시도했던 환자에 대한 탐문 조사법과 결합시켰습니다. 따라서 나는 최면술이나 암시 요법의 성과들에 대해서 자신의 풍부한 경험에 근거해서 언급할 수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전해 오는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상적인 치료 요법이란 신속하고 신뢰할 만하며, 환자를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른하임의 방법은 물론 이들 요구 사항들 가운데 두 가지를 충족시켰습니다. 그 방법은 신속하게 들었는데, 분석적 방법에 비하면 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효과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최면 요법은 환자에게 힘도 들지 않고 불편을 안겨 주지도 않았습니다. 의사에게 그 방법은 장기적으로 볼 때 단조롭게 받아들여졌습니다. 모든 사례들에서 동일한 방법이 적용되었습니다. 즉 항상 같은 의식을 통해서, 극단적으로 상이한 증상들을 그 의미나 내용이 무엇인지는 파악하지 못한 채, 사라지게만 하면 그만입니다. 그것은 단순 작업으로서 결코 과학적인 행위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또 그것은 마술이나 주술, 그리고 주문을 연상시켰지만 환자의 이해관계를 고려한 결과 문제시되지 않았습니다. 세 번째로 최면 요법은 그 어떤 관점에서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방법이 적용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 잘 듣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거의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전혀 모릅니다. 이런 치료 과정상의 기복보다 더 우리를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치료의 효과가 지속적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환자의 말을 나중에 다시 들어보면, 일정한 기간이 지낸 후에는 같은 고통이 반복되거나 새로운 고통이 대신 나타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경우 다시 최면을 걸 수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조치의 배경에는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제기하는 경고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즉 환자에게 자주 최면 요법을 반복 사용함으로써 그의 자주성을 침해하거나, 마치 마약처럼 치료 요법에 길이 들도록 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였습니다. 확실히 여러 번에 걸쳐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성공한 적도 있습니다. 몇 번 시도하지도 않았지만, 완전하고 지속적인 성과를 거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한 결과가 나온 조건들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언젠가 나는 최면 요법을 단기간 사용해서 환자의 심각한 증세를 완전히 제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 환자는 내가 어떻게 한 것도 아닌데 나를 원망하기 시작했으며, 그다음부터 환자의 증세는 전혀 변화되지 않은 채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녀와 다시 화해하고 난 다음에 나는 그 증세를 휠씬 더 철저하게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녀가 두 번째로 나에 대한 소외감을 느끼자마자 심각한 상태가 다시 반복되어 발생했습니다. 또 다른 사례에 대한 경험을 말하면, 나는 한 여자 환자의 신경증적 상태를 최면을 통해서 수차에 걸쳐 반복해서 도와 준 적이 있는데, 내가 그녀의 아주 완강한 발작적 상태를 치료하는 도중에 갑자기 그녀는 나의 목을 자신의 팔로 감싸 버렸습니다. 이런 사실은 사람들이 원하건, 그렇지 않건 관계없이 암시적인 권위의 성격과 연원에 대한 물음과 씨름하도록 만듭니다.
나의 경험에 대한 언급은 이 정도로 충분합니다. 이 경험들은 우리가 직접적인 암시를 포기했다고 해서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무엇을 포기한 것과 마찬가지는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이제 우리는 몇 가지 언급을 첨가할 생각입니다. 최면술 요법을 시행하는 데에는 환자나 의사의 아주 사소한 노력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 요법은 아직도 의사들의 대부분이 수용하는 신경증에 대한 평가와 아주 잘 들어맞습니다. 의사는 신경증 환자에게 말합니다. <당신에게 부족한 것은 없습니다. 단지 신경증에 걸려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당신의 불편을 몇 마디의 말로 불과 몇 분 안에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다른 적절한 장치의 간접적인 도움을 빌지 않고 직접적으로 최소한의 힘을 사용함으로써 무거운 짐을 움직일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이해되며, 이런 주장은 역학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견해와 배치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을 서로 비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앞서 언급한 재주가 신경증 환자에게는 효과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런 논변 자체가 전혀 허점이 없지 않다는 점도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의 폭발>과 같은 현상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분석학을 통해서 확보했던 인식을 통해서 우리는 최면술의 암시와 정신분석학의 암시가 서로 어떻게 차이 나는지 다음과 같이 서술할 수 있습니다. 최면술의 요법은 정신생활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은폐하고, 덮어씌웁니다. 분석적 요법은 그 무엇인가를 펼쳐 보이고, 제거하려고 합니다. 전자는 화장술과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고, 후자는 외과 의사의 시술 방식과 같습니다. 전자는 중상들의 발생을 금지하기 위해 암시의 방법을 사용하고, 억압들을 강화합니다. 증상 형성으로 이어지는 그밖에 다른 모든 과정들은 그대로 변함 없이 남아 있습니다. 분석 요법은 증상들이 발생하는 갈등에 이르기까지 질병의 근원을 계속 추적해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이 해소되는 결과 자체에 변화를 주기 위해서 암시를 사용합니다. 최면술 요법은 환자 스스로는 활동하지 않도록 내버려 두고 환자를 변화시키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질병의 계기가 주어질 때마다 저항하지 못하고 항상 같은 방식으로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분석적 치유를 위해서는 의사나 환자가 모두 열심으로 작업해야만 합니다. 이런 집요한 작업을 통해서 내적인 저항들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 저항들을 극복함으로써 환자의 정신생활은 지속적으로 변화되어 더욱 고양된 차원에서 계속 발전하며, 나아가서 새로운 질병의 가능성들에서 자신을 계속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질병을 극복할 수 있는 작업은 분석적 치유의 본질적인 역할이며, 환자 자신의 그런 작업은 분석적 치유의 본질적인 역할이며, 환자 자신이 그런 작업을 수행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의사는 마치 <교육>과 같은 작용을 하는 암시의 도움을 빌어서 환자가 그런 작업을 수행하게 합니다. 따라서 정신분석적 치료는 일종의 <재교육>과 같다는 말은 옳습니다.
나는 여러분이 암시를 치료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방식이, 최면술 요법만을 사용함으로써 가능한 방식과 어떤 점에서 다른지 분명히 이해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또한 암시를 전이로 전환시킴으로써 최면술 요법에서 눈에 띈 감정의 기복을 이해했습니다. 반면에 분석적 치료는 나름대로 설정된 한계의 내부에서는 예측이 가능한 요법이라는 사실도 이해했습니다. 최면을 사용함으로써 우리의 치료는 환자의 전이 능력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의 여부에 의해서 좌우되는데, 우리 자신이 이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면술을 적용하는 환자의 전이는 음성적이거나, 아니면 대부분의 경우처럼 이중적일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이한 태도를 유지함으로써 전이에서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릅니다. 정신분석에서 우리는 전이 자체와 씨름하고 전이와 맞서는 것을 해소시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항력을 발휘할 수 있는 수단들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암시의 힘을 이용해서 전혀 다른 효용성을 이끌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우리 자신이 장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환자가 자신의 임의대로 자기 암시를 하지 않고, 우리가 환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한에서 우리 자신이 그의 암시를 조종하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우리의 분석의 추동하는 힘이 전이라고 불리건, 임시라고 불리건 상관없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환자들에게 미치는 우리들의 영향력으로 인해서 우리가 발견한 사실들 자체의 객관성이 의심을 받게 된다고도 말할 것입니다. 치료에는 도움이 되는 것이 연구에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는 정신분석에 대해서 가장 자주 제기된 반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비록 그런 비난이 적절하지는 않더라도,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납득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비난이 정당하다면 정신분석학은 아주 특별히 잘 포장된, 매우 효과적인 암시의 기법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생활에 대해 영향력을 미치는 요인들이나 심리적인 역동성, 무의식 등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주장들을 가볍게 받아들이고 말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 자신의 타락한 상상 속에서 성적인 체험들의 의미와 관련하는 모든 연상 내용들을 성과 결부시킨 후에, 비록 그런 체험 자체를 권고한 것은 아닐지라도, 환자에게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믿도록 설득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비난들을 반박하는 데는 이론의 도움을 비는 것보다는 경험에 근거하는 것이 더 용이합니다. 정신분석을 직접 시행하는 사람은 환자에게 그런 방식으로 암시를 거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수도 없이 확인합니다. 물론 환자를 어떤 특정한 이론의 신봉자로 만들어서, 의사가 범할 수 있는 오류를 그도 범하게 내버려 두는 것은 쉽습니다. 이때 환자는 환자가 아닌 다른 사람, 이를테면 학생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환자의 지적인 차원에 영향을 줄 수는 있으나, 그의 질병 자체는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가 지닌 갈등을 해결하고 저항들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현실 감각과 일치 할 수 있는 기대의 관념들을 제공해 주어야만 합니다. 의사가 추측하는 것들 가운데 들어맞지 않는 사항은 분석 과정에서 다시 제거되거나 철회되어서 더욱 정확한 가설에 의해서 대체되어야만 합니다. 그와 같은 세밀한 기술을 사용해서 암시가 잠정적으로라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런 결과가 나타나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최초의 결과만으로 만족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례 자체의 모호한 내용들이 밝혀지지 않거나 결손된 기억들이 메워지지 않는다면, 그리고 나아가서 억압을 가져온 계기들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분석이 완료되었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너무 일찍 나타난 치료의 성과들이 분석적 작업을 촉진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방해한다는 점을 간파하고 있으며, 그런 성과를 낳게 만든 전이를 계속 되풀이해서 해체시킴으로써 성과들 역시 반복해서 무산시켜 버립니다. 이 마지막 특징이 사실상, 분석적 치료의 방법을 순전한 암시적 치료와 구별하도록 해주고, 분석적 작업의 결과들이 암시에 의한 성과라는 의심을 받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요인입니다. 모든 다른 암시적 치료에서 전이는 조심스럽게 보호받고, 있는 그대로 보존되어야 합니다. 반면 분석적 치료에서는 전이 자체가 치료의 대상이며, 전이가 나타나는 모든 형식들이 해체됩니다. 분석적 치유의 마지막 단계에 가서야 전이는 제거됩니다. 그리고 성과가 그제서야 나타나거나 지속된다면, 그것은 암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암시의 도움으로 내적 저향들을 극복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즉 환자 자체의 내부에서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개별적인 암시들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받는 방해는 아마도 우리가 치료하는 도중에 지속적으로 저항들과 싸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며, 그런 저항들은 음성적이며 (적대적인) 전이들로 변형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개 암시의 산물로 의심하는 분석의 개별적인 결과들 중에 상당수는 논란의 여지가 전무한 다른 사실들에 의해서도 입증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주는 사람들은 이 경우에 조발성 치매와 편집증 환자들이며, 이들은 당연히 암시의 영향을 받아 치료의 성과가 나타났다는 의혹과 전혀 무관하게 우리의 견해를 입증해 줍니다. 이 환자들이 그들의 의식의 차원에 떠올려진 상징 번역Symbolubersetzung이나 상상 등을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 주는 내용들은 전이신경증 환자들의 무의식에 대해 우리들이 조사한 결과와 잘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종종 의심을 받아 온 우리 해석의 객관적 타당성을 강화시켜 줍니다. 나는 여러분이 이 점들에 대해서는 분석을 신뢰해도 좋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제 치유의 메커니즘에 대한 우리의 서술을 리비더 이론의 형식을 빌어 설명함으로써 완결지어야겠습니다. 신경증 환자들은 즐거움도 느낄 수 없으며 행위의 능력도 없습니다. 즐거움을 느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리비도가 그 어떤 실제상의 대상을 지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일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리비도를 억압의 상태에서 유지하고 리비도가 밀려오는 것을 방어하기 위해서 그의 다른 에너지들을 상당 부분 동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의 자아와 리비도 사이의 갈등이 종식된다면, 그리고 그의 자아가 다시 리비도를 장악할 수 있다면, 그는 다시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치료의 과제는 결국 리비도가 그 시점에 자아에서 분리되어있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서 다시 자아에 봉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경증 환자의 리비도는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그것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리비도는 증상들에 묶여 있습니다. 증상들은 리비도에게 당시에는 유일하게 가능했던 대리 만족을 보장해 줍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증상들을 정복하고 해소할 필요가 있으며, 이는 바로 환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증상들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그 발생의 연원으로 거슬러 가야만 하며, 증상들을 불러일으킨 갈등을 새롭게 부각시키고, 당시에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본능의 힘들을 동원해서 증상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갈등이 해결되도록 조종해야 합니다. 억압 과정들을 이와같이 변경하는 작업은 부분적으로 오직 억압으로 이어졌던 이 과정들에 대한 기억 흔적Erinnerungsspur을 따라감으로써만 수행될 수 있으며, 이런 작업에서 결정적인 요인은 사람들이 의사와의 관계에서 <전이>란 방식을 통해 오랜 과거의 갈등을 새롭게 만들어 내고, 그런 관계 속에서 환자는 당시에 자신이 행동하고 싶었던 대로 행동하려고 의도합니다. 반면에 의사는 환자가 자신의 모든 동원 가능한 심리적인 힘들을 통해서 갈등이 다른 방식으로 결말이 나도록 요구합니다. 전이는 결국 상호 투쟁하는 모든 힘들이 서로 겨루는 전투장을 방불케 합니다.
모든 리비도는 리비도에 대한 모든 저항과 마찬가지로 의사와의 어느 특정한 관계에 집중됩니다. 여기서 증상들은 불가피하게 리비도에서 해방됩니다. 환자 자신이 갖고 있는 질병을 대신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감정 전이성 질환이 등장합니다. 즉 아주 다양하게 비현실적인 리비도의 대상들을 대신해서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공상적인 대상으로서 다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상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새로운 투쟁은 의사의 암시에 힘입어 최상의 심리적인 단계로까지 고조되며, 정상적인 심리적 갈등과 마찬가지 형태로 전개됩니다. 새롭게 등장한 억압을 모면함으로써 자아와 리비도 사이의 괴리도 종식되고, 인격체로서의 심리적 통일성도 다시 회복됩니다. 만약 리비도가 일시적으로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라는 대상에서 다시 벗어나게 되더라도 다시 과거의 대상인 증상들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리비도는 이제 자아의 영향권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치료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이 씨름해야 할 힘들은 한편으로는 리비도의 특정한 경향성들에 반하는 자아의 혐오감으로서, 이는 억압의 충동으로 표현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리비도의 강인함이나 끈기와 같은 것을 가리키며, 이는 한때 대상에 집중하여 기꺼이 놓아 주지 않으려는 경향성을 의미합니다.
치료의 작업은 두 단계들로 분리됩니다. 첫 번째 단계에서 모든 리비도는 증상에서 나와서 전이를 향해 밀치고 들어가서, 그곳에서 압축됩니다. 두 번째 단계는 이 새로운 대상을 둘러싼 투쟁이 벌어지는 과정이며 리비도는 이 대상에서 풀려납니다. 갈등이 좋은 결말을 맺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요구되는 변화는 억압을 이 새롭게 만들어진 갈등에서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새서 리비도는 무의식 속으로 도망치게 되고 다시 자아의 영향권에서 멀어질 수 없습니다. 이는 자아가 의사의 암시에 영향을 받아서 변화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자아는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꾸는 해석의 작업에 의해서 무의식을 대가로 점차 확장됩니다. 자아는 가르침에 의해서 리비도에 대해 좀 더 유화적이 되고 리비도에게 일정한 만족을 허용할 정도로 융통성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자아는 리비도의 요구들에 대해서도 리비도의 에너지 중에서 일부를 승화에 의해서 처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과거보다는 덜 주저하게 됩니다. 치료의 과정들이 이같은 이상적인 서술과 잘 부합될수록 정신분석적인 치료 역시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치료는 리비도가 운동성을 결여하고 있음으로 해서 한계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리비도는 자신의 대상에 대한 전이가 어느 정도 이상으로는 진전되지 못하도록 만드는 나르시시즘의 경직성입니다. 아마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통해서 치유의 과정이 보여 주는 역동성을 좀 더 자세히 조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전이에 의해서 리비도의 한 부분을 우리 쪽으로 끌어당김으로써 자아를 벗어난 리비도의 모든 것을 포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치료 도중에, 그리고 치료에 의해서 리비도의 분배가 이루어집니다만, 우리가 이로부터 병에 걸렸을 때 리비도의 분배가 이루어집니다만, 우리가 이로부터 병에 걸렸을 때 리비도가 어디에 귀속되는지 직접적인 결론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는 적절합니다. 만약 아버지에 대한 강한 전이의 감정을 의사에게 품는 환자의 상황을 재현한 다음 다시 해소함으로써 질병 자체를 성공적으로 치유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나 이로부터 환자가 과거에도 자신의 리비도를 아버지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결부시킴으로써 고통을 받은 적이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잘못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전이는 단지 전쟁터에 지나지 않으며, 이 바탕 위에서 우리는 리비도를 정복하는 것입니다. 환자의 리비도는 다른 지점들에서 이쪽을 향해서 옮겨져 있습니다. 이 전쟁터가 반드시 적의 가장 중요한 요새일 필요는 없습니다. 적의 중요 도시에 대한 방어는 수도의 성문 앞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전이를 다시 해소한 다음에서야 비로소, 질병을 앓고 있는 동안에도 유지되었던 리비도의 분배 방식을 머릿속에서 다시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리비도 이론의 관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꿈에 대한 마지막 언급을 할 수 있습니다. 신경증 환자들의 꿈은 그들의 잘못된 행위들이나 자유로운 연상들처럼 증상들의 의미를 알아내고, 리비도의 소재를 규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꿈들은 욕망 충족이란 형태로 나타나서 우리에게 어떤 욕망의 자극들이 억압되어 있으며, 어떤 대상들에 자아에서 벗어난 리비도가 매달려 있는지 보여 줍니다. 따라서 꿈들을 해석하는 것은 정신분석적 치료에서 큰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례들에 오랜 기간에 걸쳐 정신분석적 작업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수면 상태 자체가 억압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억압에 가해진 압력이 이처럼 완화됨으로써 꿈속에서 억압되었던 자극은 낮 동안에 증상을 통해서 가능한 정도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꿈을 연구함으로써 억압된 무의식을 이해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길이 열리는데, 자아에서도 벗어난 리비도는 바로 이 무의식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신경증 환자들의 꿈들은 그 어떤 본질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정상인들의 꿈과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도 그 꿈들은 서로 전혀 구별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신경증 환자들의 꿈을, 정상인들의 꿈들을 해석하는 데에도 별로 쓸모가 없는 그런 방식을 사용해서 파악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국 신경증과 건강한 상태의 차이가 오직 낮 동안에만 적용되며, 꿈-생활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신경증 환자들의 꿈들과 그들의 증상들 사이의 연관을 추적한 결과 일련의 가설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가설들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이 가설들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 역시 자신의 정신 생활에서 증상 형성의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과 같은, 꿈-형성을 가능케 하는 요인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건강한 사람도 억압을 만들어 내면,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양의 심리적 에너지를 동원한다는 것, 그의 무의식의 조직은 억압되고 아직 에너지에 의해 리비도 집중된 자극들도 은폐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리비도의 한 부분이 자아의 관할 영역에서 제외되었다>는 등의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즉 건강한 사람도 잠재적인 신경증 환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꿈은 그가 형성하고 있는 상태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분명 겉으로는 건강한 생활처럼 보이지만 그 같은 외관과 배치되는 현상, 즉 일련의 사소하고 실제로는 거의 중요하지 않은 신경증의 증상들이 도처에서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신경증을 동반한 건강함과 신경증 사이의 차이는 실용적 차원에만 국한되며, 그 사람이 충분한 정도로 인생의 즐거움을 느끼고 또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는지의 여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그 차이는 아마도 자유롭게 남아 있는 심리 에너지의 양과 억압에 의해서 묶여 있는 에너지의 양 사이의 상대적인 관계로 환원할 수 있으며, 질적인 차이가 아닌 양적인 차이로 간주됩니다. 이 같은 통찰은 신경증이 비록 기질적인 요인에 의해서 발생하지만 원칙적으로 치유될 수 있다는 확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며, 내가 이런 사실을 여러분에게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건강한 사람과 신경증 환자의 꿈들이 같다는 사실에서, 건강의 특징에 관한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도출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꿈 자체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즉 꿈은 신경증 증상들과의 관련성을 떠나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꿈의 본질은 꿈에서 생각한 내용들을 시원적인 표현의 형태로 번역함으로써 해결된다고 생가해서도 안 된다는 결론입니다. 또 우리는 꿈이 실제로 존재하는 리비도가 처리되는 방식이나 대상에 대한 리비도 집중 등을 보여 준다고 간주해야만 합니다.
우리의 강의는 이제 곧 끝나게 될 것입니다. 아마도 여러분은, 내가 정신분석학의 치료라는 제목의 장에서 이론적인 내용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치료가 진행될 때 요구되는 조건들이나 치료에 의해서 달성되는 결과들에 대해서는 전혀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가지 사항을 일부러 배제했습니다. 첫번재 사항을 다루지 않은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정신분석을 시술하기 위한 실용적인 처방을 제시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후자에 관해서는, 이를 다루지 않도록 만든 여러 가지 복합적인 동기들이 작용했습니다. 나는 강의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우리가 유리한 조건에서는 가장 탁월한 성과를 보이는 내과 치료의 영역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치료의 성과를 보일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도 동일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만약 내가 이에 대해 좀 더 장황하게 설명할 경우, 정신분석학을 깎아내리려는 목소리가 높아진 시점에서, 내가 정신분석학을 대중들에게 선전함으로써 그런 반론을 상쇄하려 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가를 겨냥한 반론은 공개적인 학술회의 석상에서도 거듭 제기되었으며, 이는 의사인 <동료들>에 의해서 다음과 같은 위협의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즉 분석적 방법의 실패나 해악들을 종합해 볼 때, 고통받는 대중들이 이 같은 치료 방법이 무가치하다는 사실에 대해 눈을 뜰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례들만을 종합하는 방식은, 그 같은 조치 자체가 악의적이며 공개적으로 비방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는 점은 제외하고라도, 분석의 치료 효과에 대한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습니다. 분석적 치려는, 여러분이 알다시피, 아직 연륜이 짧습니다. 분석적 치료의 기술을 확정할 수 있을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는 오직 분석 작업을 진행하면서 확정할 수밖에 없으며, 경험을 쌓아가고 그 영향을 받아 가면서 확정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을 전수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난점들에 의해서, 이 분야의 초보자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보다 훨씬 더 자기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 지속적인 학습을 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처음 몇 해동안의 성과에 의해서 분석적 치료의 능력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치료하는 과정에서 시도된 많은 방법들은 분석의 초기 단계에서 실패로 끝났는데, 그 이유는 분석의 방법이 전혀 적용될 수 없는 사례들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며, 그런 사례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분석 요건에 맞지 않기에 치료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이런 분석에 적합한 요건들 역시 시행착오의 과정을 통해서만 확보됩니다. 한참 진행된 편집증이나 조발성 치매의 사례들은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사람들은 처음부터 몰랐습니다. 그러나 분석의 방법을 모든 종류의 감정들에 실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초창기의 몇 년 동안 겪었던 실패들 가운데 대부분은 의사가 잘못했거나 적절치 못한 대상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라, 외부의 조건들이 불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불가피하고 극복할 수 없는 환자의 내적 저항에 대해서만 다루어 왔습니다. 분석에 대한 외적 저항들은 환자를 둘러싼 조건들이나 환경들에 의해서 생겨나는데, 이는 별로 이론적인 관심의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의미을 지닙니다. 정신분석적 치료는 외과의 시술과 같이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분석적 치료는 외과의 시술과 마찬가지로, 성공적인 수술 결과가 나오기에 유리한 조건들에서 시술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외과 의사가 수술하기 전에 어떤 조치들을 관례적으로 취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적적한 공간과 충분한 조명, 수술을 보조하는 인적 자원, 시술받는 사람의 친척이 수술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등의 조치들이 거론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환자의 모든 가족들이 함께 있고 이들이 수술하는 장면을 가까이서 코를 들이댈 정도로 지켜보면서 수술용 칼을 환자에게 들이댈 때마다 큰소리로 비명을 지른다면, 그런 상황에서 수술이 진행될 때 얼마나 많은 수술들이 성공적인 결과로 끝날지 여러분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정신분석적 치료에서 환자의 가족들이 사이에 끼여든다는 것은 특히 위험합니다. 게다가 이때 위가 직면하는 위험은 어떻게 대처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환자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저항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여기면서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비해야겠습니까? 환자의 가족들에 의해서 생기는 문제는 우리가 아무리 설명을 해주어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환자와 관련된 모든 사태에 대해서 거리를 두도록 그들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환자의 친척들과 함께 공조 체제를 가지려 해석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 환자가 의사를 불신할 수 있는 위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환자는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자신의 편에 서기를 요구할 수 있으며 이는 정당한 것입니다. 한 가족이 종종 어떤 불화에 의해서 분열되어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은 정신분석가의 입장에서, 환자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환자가 그대로 병에 걸려 있는 상태보다 건강해지는 것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더라도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신경증이 환자의 가족들 사이의 갈등과 연관된 경우-이런 사례들을 자주 발견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신의 이해와 환자의 회복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망설이지 않고 신속하게 결정합니다. 만약 남편이 치료 과정을 기꺼이 관찰하려고 들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아마도 이 기회에 자신의 잘못들이 계속해서 들추어질 것으로 그 자신이 옳게 예측하고 있기 때문이며, 이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이런 사례에 대해 놀라지는 않지만, 만약 우리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예정보다 일찍 중단된다 해도 자신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병에 걸린 부인의 저항에 남편의 저항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일을 착수했던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여러 사례들을 소개하는 대신에, 의사로서 환자에 대한 배려를 해야 되었기에 난처한 입장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단 하나의 사례만을 설명하겠습니다. 나는 여러 해 전에 한 젊은 처녀를 분석 요법으로 치료한 적이 있습니다. 이 처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불안감으로 인해서 거리에 나가지도 못하고 집에서는 혼자 머물어 있지 못했습니다. 이 환자는 서서히 자신의 사연을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상상은 자신의 어머니와 집안끼리 알고 지내는 한 부유한 남자 사이의 성관계를 우연히 목격함으로써 촉발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다지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매우 교묘하게 행동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집에 혼자 남아 있는 동안에 느끼는 불안감에서 자신을 지켜 줄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다고 고집했으며, 그녀가 외출을 하려고 시도하자 불안해하면서 문들을 가로막음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련의 행동을 통해서 그녀는 자신이 분석 요법을 받으면서 나에게 말했던 사실을 어머니에게 암시했습니다. 어머니 자신도 과거에 신경증에 걸린 적이 있었지만, 몇 년 전에 한 수치법 요양원을 다닌 후에 치유된 적이 있습니다. 바로 이 요양원에서 그녀가 문제의 남자를 알게 되었다고 감히 추정해도 좋습니다. 그녀는 이 남자를 통해서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딸의 불길 같은 성화 에 놀란 나머지 딸의 불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딸은 어머니를 붙잡아 놓고, 그녀가 자신의 애인과 관계하는 데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행동의 자유를 앗아가기 위해서 병에 걸렸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이 해로운 분석 치료를 더 이상 딸이 받지 못하도록 조치함으로써 속히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 처녀는 신경증 요양소로 보내졌고, 여러 해 동안 <정신분석 요법에 의해서 불쌍하게 희생당한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로부터 오랫동안 이 처녀에 대한 치료가 좋지 못한 결과로 끝나게 되었다는 이유로 나에 대해서도 나쁜 험담이 가해졌습니다. 나는 의사로서 환자의 사생활을 보호해야 하는 책무를 지켜야 한다는 믿음 때문에 계속 침묵해 왔습니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바로 그 요양소를 방문해서 광장공포증에 걸려 있던 처녀를 관찰했던 한 동료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 들었습니다. 즉 그 처녀의 어머니와 부유한 남자 친구 사이의 관계는 도시 전체에 알려졌으며, 아마도 처녀의 아버지인 그녀의 남편도 그 관계를 알고도 못 본 체했다는 것입니다. 결국 비밀 아닌 <비밀>로 인해서 치료가 희생되었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수많은 나라에서 환자들이 나에게 몰려옴으로써, 나는 고향 사람들의 평판이 어떻든 별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자신의 중요한 기본 생활과 관련해서 법적으로 독립적이지 않은 환자, 즉 타인에게 의존적인 환자는 치료하지 않는다는 규칙을 따랐습니다. 물론 그런 규칙을 모든 정신분석가들이 따르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환자의 친척에 대한 나의 경고를 들은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즉 환자들은 정신분석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들의 가족들에게서 격리되어야 하며, 결국 이 치료 요법은 신경증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요양원에서 거처하고 있는 환자들에게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그런 결론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약 환자들의 심신이 극도로 허약한 상태에 놓여 있지 않다면, 환자 스스로 씨름해야만 하는 인간관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치료받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다만 환자의 친척들이 다른 행동을 함으로써 이런 장점을 상쇄시키거나, 의사들의 노력에 대해서 절대로 맞서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우리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이 같은 요인들을 어떻게 앞서 말한 방침에 맞도록 조정할 수 있습니까! 당연히 여러분들 역시, 치료의 성과가 얼마나 환자의 사회적 환경이나 가족의 문화적 생활 수준 등에 의해서 좌우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치료가 실패로 끝난 사례들의 대부분을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는 외부의 계기들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 같은 상황에서는 정신분석학의 치료 효과에 대한 전망 자체도 불투명해지지 않습니까! 정신분석학에 대해 호의적인 사람들은 우리에게, 실패한 사례들과 함께 성공적인 사례들에 대한 통계를 제시함으로써 그런 비난을 상대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나는 그 충고를 아직 따르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런 통계가 서로 성질이 다른 일련의 사례들을 정리해 놓은 것이라면 별로 가치가 없다고 나는 밝혔습니다. 그리고 치료의 대상이었던 신경증성 질환의 사례들은 실제로 아주 다양한 관점에서 서로 같은 성질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사태 전체를 포괄적으로 검토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도 없었습니다. 즉 치유된 상태가 어느 정도 지속될지 판단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례들에 대해서는 그 경과에 대해 보고조차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자신의 병은 물론 치료 받는다는 사실조차 밝힐 수 없었던 사람들이 해당하며, 이들이 회복되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공포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하지 않은 가장 중요한 까닭은 사람들이 치료 요법이란 사안과 관련해서 전적으로 불합리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나 자신이 잘 알고 있으며, 그 결과 합리적인 수단을 통해서 그들에게 무언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치료 요법이 등장하면, 코흐Koch가 최초로 투베르쿨린을 결핵에 대한 처방으로 공개했을 때와 같이 열광적으로 환영하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하늘의 축복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제너Jenner의 면역 요법이 오늘날에도 화해가 불가능한 적대자들에 둘러싸인 것처럼, 뿌리깊은 불신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도 명백하게 일종의 선입견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아주 심각한 사례를 치료할 경우, 우리는 다음과 같은 투의 말을 접하게 됩니다. <그 사례가 정신분석학의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은 아니야. 그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원래 저절로 조병을 번갈아 겪었던 한 여자 환자가 우울증이 막 지나간 다음의 휴지 기간 동안 나의 치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었습니다. 3주가 지난 다음 그녀가 다시 조병에 걸리자, 모든 환자의 친척들과 함께 도움을 요청받은 의료계의 한 권위 있는 의사마저도 이 새로운 발작은 오직 그녀에 대한 정신분석의 결과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선입견들에 직면했을 때는 아무런 대책도 세울 수 없습니다. 또 다시 여러분은 전쟁중에 있는 민족들의 한 집단이 다른 집단에 대해서 품고 있는 선입견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이성적인 방책은 기다리면서 그런 선입견들이 저절로 사라지도록 시간에 내맡겨 놓은 것입니다. 언젠가 같은 사람들이 동일한 사태에 대해서 지금가지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지금 바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지, 그 이유는 어두운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분석적 치료 요법에 반대하는 선입견은 현재 사그러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분석적 이론들이 계속 확산되고, 많은 나라들에서 분석적으로 치료하는 의사들이 증가한다는 것이 그런 전망을 보장해 줍니다. 내가 젊은 의사였을 때 최면술의 암시 요법에 반대하는 의사들의 똑같은 분노에 함께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최면 요법은 오늘날 <명철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에 의해서 정신분석과 배치되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면술은 치료의 수단으로서 처음에 약속했던 바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우리 정신분석가들은 최면 요법의 적법한 후계자로 자처할 수 있으며, 그로부터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은 자극과 이론적인 계몽을 받았는지 잊어 벼려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정신분석학의 해로움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사실, 분석이 숙달되지 않은 방식으로 수행되거나 치료가 도중에 갑자기 중단됨으로써 일시적으로 심리적 갈등이 고조되는 현상에 국한됩니다. 우리가 환자들에게 조치하는 내용들에 대해서 여러분은 이미 들었으며, 우리들의 노력이 환자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이 판단할 수 있습니다. 분석을 악용할수 있는 여러 가지 가능성들이 있습니다. 게다가 특히 전이라는 치료 수단이 양심적이지 못한 의사의 손 안에 놓이게 된다면 위험합니다. 그러나 의료 수단이나 절차도 약용의 가능성에서 차단시킬 수 없습니다. 잘 듣지 않는 칼은 수술용으로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나의 강의도 이제 끝나 갑니다. 만약 내가 여러분 앞에서 행한 강의의 많은 결함들이 나의 마음을 심각하게 짓누른다고 고백한다면, 이는 단순히 늘상 하는 말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내가 유감스럽게 느낀 것은, 내가 한곳에서 짧게 언급한 주제를 다른 곳에서 다시 다루겠다고 그렇게도 자주 약속했건만,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체계적인 연관성이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현재 진행중인 사안에 대해서 보고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짤막하게 정리한 내용 자체도 완결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곳에서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자료를 이미 제시했습니다만, 내가 직접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단지 여러분에게 정신분석학을 이해시키고, 자극을 주려고 했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