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불평등 기원론
인간 불평등 기원론
Jean Jacques Rousseau
차례
즈네브공화국에 바치는 글
머리말
총론
제1부
제2부
디종의 아카데미가 제기한 문제, '인간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그것은 자연법에 따라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관한 논문
자연이라는 것을, 부패한 인간들 속에서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인간들 속에서 고찰해야 한다. --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즈네브 공화국에 바치는 글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고귀한 경들이여!
자기 조국에 대해 그 조국이 인정할 만한 경의를 표시하는 것은 덕망 높은 시민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에, 나는 여러분에게 공공연한 경의를 표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되려고 30년 전부터 노력해 왔습니다. 그런데 부족했던 나의 노력을 보충해준 운 좋은 이번 기회는, 나로 하여금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권리보다도 나를 고무시킨 정열 때문에 가능했다는 행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당신들과 더불어 태어난 나는, 자연이 인간에게 베풀어준 평등과 인간이 스스로 만든 불평등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어떻게 저 깊은 예지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 예지에 따라 이 나라에서는 자연의 평등과 인간의 불평등이 훌륭하게 조화되어, 자연법에 가장 합치되고 사회와 공공질서의 유지, 그리고 개인의 행복에 가장 유익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부의 구성에 대해 양식이 명령할 수 있는 최상의 법칙들을 찾는다고 할 때, 그것들이 모두 당신들의 정부에서 실천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내가 여러분의 공화국 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모든 국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장점을 갖고 있으며, 또한 그 폐단을 가장 슬기롭게 방지해 왔다고 생각되는 국민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은 인간 사회의 그림책을 바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것입니다.
만일 자기의 출생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인간 능력의 범위 내에서, 다시 말하면 훌륭히 통치될 수 있는 한계 안에서 각자가 능력에 상응하는 직업을 갖고, 따라서 각자 자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으며 아무도 자기의 직무를 남에게 맡길 필요가 없는 그런 규모의 사회를 택했을 것입니다.
그런 국가라면 개개인이 서로 가까이 사귀게 되므로, 은밀하게 저지른 악덕이나 숨은 미덕도 사람들의 심판과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조국애는 서로 만나거나 알고 지내는 바람직한 관습에 따라, 땅에 대한 애착보다 오히려 시민에 대한 사랑이 될 것입니다.
나는 국가 기관이 항상 전체 인민이 행복을 지향하는 그러한 목적을 향해 나가도록, 주권자와 인민이 오직 하나로 일치되는 이해를 갖는 나라에 태어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인민과 주권자가 동일한 인간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므로, 결과적으로 나는 현명하게 조화된 민주적인 정부 아래 태어나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나는 자유로이, 다시 말하면 나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법률이라는 명예로운 속박에 복종하여 살다가 죽을 수 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이 유익하고도 달가운 속박이야말로, 제 아무리 자존심 강한 사람일지라도--그 외에는 어떤 속박도 받지 않을 터이므로--군소리 없이 받아 들일 성질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이면 누구나 한 국가 안에서 살아가는 이상 자기가 법률을 초월하는 존재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기를 희망하며, 한편 국가 밖에 있는 사람이 무리하게 국가에 법률을 강요하여 그것을 인정하도록 하는 일이 없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부의 구성이 어떻게 되어 있든 간에, 만일 그 정부의 관할권 안에 법률을 지키지 않는 자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 나머지 사람은 반드시 그런 사람의 의견을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한 사람의 인민의 통치자 외에 또 한 사람의 국외 통치자가 있다고 하면, 두 사람이 아무리 권력을 나누어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둘에게 다 인민이 잘 복종하거나 나라가 잘 통치되어 가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법률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나는 새로운 제도의 공화국에 살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면한 필요에 부합되지 않게 정부가 구성되어 새로운 시민들에게는 적합하지 않거나 시민들 쪽이 새로운 정부에 적합하지 못하여, 결국 그와 같은 국가는 태어나자마자 흔들려 붕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유란 영양이 풍부한 음식이거나 진한 포도주와 같은 것이라서, 거기에 익숙해 있는 튼튼한 체질을 기르는 데는 적합하지만 거기에 맞지 않는 허약한 체질은 압도하고 파괴하거나 취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일단 군주에 대한 복종에 길든 국민은, 이미 군주 없이는 마음이 놓이지를 않습니다. 만일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그들은 자유로부터 점점 멀어질 뿐입니다. 왜냐하면, 참된 자유와는 반대되는 방종을 자유라고 착각하므로, 그들이 혁명을 한다고 해도 거의 언제나 자기들을 채우고 있는 족쇄를 무겁게 만들어 버릴 뿐인 선동가들에게 자기 몸을 내맡겨 버리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운 국민의 전형적 본보기인 로마인들까지도, 타르퀴니우스가의 압제에서 벗어났을 때 자치를 운영해 나갈 능력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로마인은 타르퀴니우스가에서 강요한 노예상태와 굴욕적인 고역으로 말미암아 타락해 버렸으므로, 처음에는 최대의 지혜를 기울려 돌보아 주면서 통치해야 하는 어리석은 백성의 무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리하여 압제 아래에서 무기력해졌다기보다는 차라리 어리석게 되어 버린 이들 영혼은 건강에 좋은 자유로운 공기를 마시는 데 조금씩 익숙해지자, 드디어 로마인을 모든 인민 중에서 가장 존경할 만한 인민들로 만든 저 엄격한 도덕 관념과 자랑스러운 용기를 차차 획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조국을 위해 행복하고 평온한 공화국을 찾을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그 공화국은 태고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릴 정도로 그 기원이 아득하고,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용기와 조국애를 발휘하고 그것을 강화시키는 데 알맞은 공격밖에 받은 적이 없는 그런 곳입니다. 그 시민들은 오래 전부터 현명한 독립에 길들여져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그 자유를 누리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나는, 다행히도 무기력하기 때문에 잔인한 정복욕에 사로잡히지 않고 지리적으로 유리되어 다른 나라에 의해 정복될 우려가 없는 조국, 즉 몇몇 인민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지만 어느 인민도 침략할 엄두를 내지 않으며 그들 인민 모두가 다른 인민들로부터 침략을 받지 않도록 하는 데 관심을 갖는 자유로운 도시, 한마디로 말하면 이웃 나라의 야심을 조금도 유발하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는 이웃 나라의 원조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공화국을 택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공화국은 그와 같이 행복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기 자신 이외에는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만일 그 시민들이 군사 훈련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방위에 필요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진정으로 자유에 부합되며 자유를 사랑하는 저 무사다운 열정과 자랑스러운 용기를 그들 내부에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또한 모든 시민이 입법권을 공유하는 나라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동일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과연 어떤 조건이 자기들에게 적합한가 하는 문제를 시민들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로마인들이 실시한 바 있는 인민투표(plebiscito)는 인정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투표에서는 국가의 통치자나 국가의 보전에 가장 깊숙이 관여한 사람들이 국가의 흥망을 좌우하는 토의에서 제외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터무니없는 모순이지만, 위정자들이 일반 시민까지도 갖고 있었던 권리를 박탈당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나는 그것과 상반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원하게 됩니다. 즉 사사로운 이득을 꾀하기 위한 어설픈 계획이나 아테네 사람들을 결국 멸망으로 인도한 위험한 개혁을 중단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법률을 제안할 수 있는 권리를 아무에게나 부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권리는 위정자만이 행사할 수 있으며 아울러 위정자들이 그 권리를 매우 신중하게 행사하도록 규제해야 합니다.
한편, 국민도 그 법률을 경솔히 찬성해서는 안 되고 법률의 공포는 엄정한 절차를 거쳐야 하며, 따라서 국가의 조직이 법률에 의해 전복되기 전에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민들이 확신할 수 있을 만한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법률이 신성하고 존중할 만한 것이 되는 이유는 그 법률이 매우 오래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인민은 날마다 법률이 달라지면 마침내는 그것을 소홀히 여기고 개선한다는 구실로 구습을 무시하는 데 익숙해지게 되며, 그럼으로써 조그마한 악을 시정하려다가 오히려 큰 악을 초래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특히 인민이 위정자 같은 것은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거나 위정자에게는 일시적인 권력만 떼어주면 된다고 생각하여, 경솔하게도 시민에 관한 공무의 관리와 그 법률의 집행을 자기들이 맡으려고 하는 공화국은, 통치가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 이를 피했을 것입니다. 직접 자연상태에서 출발한 최초의 엉성한 정부 구성은 이와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며, 아테네 공화국을 멸망으로 이끈 결함의 하나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다음과 같은 공화국이라면 서슴지 않고 택했을 것입니다. 즉 개개인이 법률에 동의하는 일과 의회에서 가장 중요한 국사나 통치자의 제안을 결정하는 일에 만족하며, 위신 있는 법정을 확립하고 주의 깊게 그 관할을 구분하며, 재판의 관리와 국가의 통치를 위해 인민 가운데서 가장 유능하고 공정한 사람들을 해마다 선출하는 공화국, 그리고 위정자들의 미덕은 바로 국민이 지혜롭다는 증거가 되어 양자가 서로 존중하는 공화국을 택했을 것입니다.
그런 경우, 불행한 오해 때문에 공공의 평화가 흔들릴지라도, 그와 같이 어둡고 오류로 얼룩진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절제와 상호 신뢰, 법률에 대해 공동으로 경의를 표하는 일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것은 성실하고 영구적인 화해의 조짐이며 보장이기도 합니다.
너그럽고 존경하기에 부족함 없는 경들이여, 이상과 같은 점이 내가 택한 조국에 요구했으리라 생각되는 여러 가지 장점들입니다. 이에 덧붙여서 만일 하느님이 유리한 지세나 온화한 기후, 비옥한 땅,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까지 보태주셨더라면, 나는 이 복된 조국에서 더할 나위 없는 행복, 즉 이런 모든 평화로운 축복을 만끽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또한 이웃과 사이좋게 어울려 평화롭게 살면서, 그들에 대하여 그들의 관례에 따라 자비와 우애 등 모든 덕을 베풀기를 바랐을 것이고, 훌륭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성실하고 덕망 높은 애국자로서 명예로운 업적을 후세에 남기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설령, 내가 그다지 행복하지 못하거나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시기가 너무 늦었거나 하여 청년 시절에 경솔하게 잃었던 안식과 평화를 외국에서 병으로 늙어 헛되이 놓치더라도, 나는 적어도 고국에서는 실행할 수 없었던 위와 같은 견해를 마음속에 품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동포 시민에 대해 사심 없고 두터운 애정을 느끼면서 진심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친애하는 동포 시민 여러분, 아니 형제 여러분, 혈연과 법률이 우리들 대부분을 결합하고 있으므로, 내가 당신들을 생각할 때마다 당신들이 받고 있는 모든 혜택을 아울러 생각하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아마도 당신들 가운에 어느 누구도 그 혜택을 잃어버린 나만큼은 그 가치를 절실히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들의 정치, 사회적인 처지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인간만사의 본성에 비추어 볼 때, 더 이상 좋은 처지가 허용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어떤 정부를 보더라도 국가의 가장 큰 이익을 확보하는 것이 문제가 될 경우, 모든 것은 관념상의 계획, 그리고 기껏해야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에게는 행복이 마련되어 있어서 그것을 즐기기만 하면 됩니다. 당신들이 완전히 행복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행복에 만족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무력에 호소하여 손에 넣거나 되찾고 용기와 지혜로 2세기 동안 유지해 온 당신들의 주권은, 드디어 완전하고도 광범위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명예로운 계약이 당신들의 한계를 정하고 당신들의 권리를 보증하며 안정된 생활을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들의 헌법은 훌륭합니다. 그 헌법은 숭고한 이성이 명한 것이며 우애와 존경심을 가진 열강들에 의해 보장되어 있습니다. 당신네 나라에는 걱정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전쟁이나 정복자를 결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스스로가 만든 훌륭한 법률 이외에는 주인이 없으며, 그것은 당신들이 선출한 공정한 위정자들에 위해 시행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무기력 때문에 연약해지거나, 헛된 향락으로 참된 행복과 견실한 덕에 대한 사랑을 잃을 만큼 부유하지도 않습니다. 또 당신들의 생산 기술로 손에 넣는 것 이상으로 외국에 원조를 요구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 귀중한 자유는, 큰 나라에서는 국민들의 무거운 세금으로 겨우 유지되고 있지만 당신들은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아무런 희생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민들의 행복을 위해, 그리고 여러 나라 국민의 모범으로서 매우 현명하고도 행복하게 구성된 공화국이여, 부디 영원히 존속할지어다. 이것이야말로 당신들이 완수해야 할 유일한 소원이자 유일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서는 조상들이 당신들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나, 앞으로 그것을 선용하는 지혜로써 행복을 영속시키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당신들의 영원한 단결과 법률의 준수, 그리고 법률의 집행자에 대한 존경이 당신들의 안전과 생활을 좌우하게 됩니다. 만일 당신들 사이에 조금이라고 원망이나 의혹의 싹이 남아 있다면, 그것을 조만간 당신들의 불행과 국가의 멸망을 초래할 불길한 씨앗으로 간주하고 얼른 없애 버리십시오.
나는 당신들이 모두 자기의 마음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당신들의 은밀한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를 바랍니다. 세계에서 당신들의 위정자만큼 공정하고 지혜롭고 존경할 만한 사람들의 집단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여러분 가운데 있을까요? 당신들의 위정자들은 모두 중용의 덕과 소박한 풍습, 법률에 대한 존경과 성실한 화해의 모범을 당신들에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그와 같은 현명한 위정자들에 대해서는 이성이 미덕에게 바쳐야 하는 유익한 신뢰를 아낌없이 바치십시오. 즉 당신들이 스스로 선출한 그들은 그 선출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당신들이 요직에 앉힌 사람들이 받아야 할 명예도 반드시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돌아오게 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법률의 효력과 그 옹호자의 권력이 정지되는 곳에서는 어느 누구도 안전과 자유를 누릴 수 없다는 것을 모를 만큼 무지한 사람은 당신들 가운데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들이 참된 이득과 의무와 아울러 도리를 위해 기꺼이 올바른 자신을 가지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는 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정체의 유지에 무관심한 것은 혐오해야 할 죄악이므로, 당신들 가운데 가장 유식하고 열의가 있는 사람들의 현명한 의견이 필요한 경우에 이를 무시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공평과 중용과 존경할 만한 엄격한 기품으로 당신들의 행동을 자제하고, 자기 자신의 자유뿐만 아니라 자기의 영광을 수호하려는 자랑스럽고도 겸허한 국민의 모범을 여러분들은 온 세계에 보여줘야 합니다. 특히 악의를 품은 해석이나 독기가 서린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이것은 나의 마지막 충고입니다. 그런 해석이나 말 속에 숨은 동기는 때때로 그 목적인 행위보다 더욱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도독이 가까이 접근하지 않으면 절대로 짖지 않는 선량하고 충실한 개가 일단 짖기 시작하면 온 집안 식구들이 잠에서 깨어나 신속하게 경계태세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사람들의 안식을 방해하면서도 막상 정확한 경보가 필요한 경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개는 사람들이 좋아할 리 없습니다."
너그럽고 존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들이여, 품위 있고 존경할 만한 자유로운 국민의 위정자들이여, 내가 특별히 당신들에게 나의 경의와 의무를 표시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만일 이 세상에 사람들의 이름을 널리 드날리기에 합당한 지위가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재능과 덕이 있기 때문에 얻은 지위이며 당신들 자신에게 어울리는 지위, 즉 동포 시민들이 당신들을 올려놓은 지위 바로 그것입니다.
시민들의 가치는 당신들의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을 다스릴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들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선출되었으므로, 다른 위정자들보다 더욱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인민, 특히 자기들을 다스릴 수 있는 명예를 당신에게 부여한 인민은 뛰어난 지혜와 이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여러 나라의 민중보다 훌륭하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가장 훌륭한 기록으로 남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 예, 그리고 언제나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한 예를 여기 응용하는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나에게 이 세상의 삶을 주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당신들을 존경하라고 가르쳐준 한 덕망 높은 시민을 생각할 적마다, 나는 큰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그가 자기 손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자신의 영혼을 가장 숭고한 진리를 향해 고양시키려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의 앞에는 생업을 위한 도구와 함께 타키투스나 플루타르코스, 그리고 그로티우스의 저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옆에는 한 귀여운 아들이 대대의 어느 아버지보다도 가장 훌륭한 아버지에게서 애정 어린 교육을 받으면서도 너무나 빈약한 결실밖에 올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어리석은 내 청춘의 미혹이 한동안 그처럼 현명한 가르침을 잊어버리게 했으나 드디어 나는, 인간이 아무리 악에 빠지기 쉬운 경향을 갖고 있더라도 사랑이 담긴 교육이 영원히 헛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행복한 심정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너그럽고 존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들이여, 당신들이 통치하는 나라에 태어난 시민들, 아니 평범한 주민들일지라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다른 나라들 사이에서는 직인이나 하층민이라는 명칭으로 말미암아 그처럼 비천하고 그릇되이 인식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교양 있고 사리 분별에 밝은 사람들입니다.
거리낌 없이 고백하지만, 나의 부친은 다른 동포 시민들에 비해 조금도 훌륭한 점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느 사람과 똑같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곳에 가나 그는 있는 그대로의 생김새로 훌륭한 사람들로부터 교제해줄 것을 요청 받고 같이 사귀었으며 오히려 그들보다 더 교양 있기도 했습니다.
이런 품성을 지닌 사람들이 당신들로부터 과연 어떤 경의를 받을 수 있는지는 내가 말할 것이 못 되며, 또 고맙게도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그들은 교육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천부의 권리에 있어서도 당신들과 대등하며, 당신들보다 낮은 지위에 머물러 있음은 스스로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당신들의 가치를 정당하게 인정하고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도 그들에 대해 일종의 감사를 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당신들이, 그들에 대해 최대한 솔직하고 너그러운 태도를 취함으로써 법률의 집행자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고압적인 태도를 완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며, 또 그들이 당신들에게 해야 할 복종이나 존중에 대해 당신들이 얼마나 경의와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를 잘 알고, 이에 만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정의와 지혜에 충만한 행위이며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도록 잊어버려야 하는 여러 가지 불행한 사건에 대한 기억을 떨쳐 버리는 데 큼 도움이 되는 행위입니다.
아울러 공정하고 고귀한 인민이 자기의 의무를 흔쾌히 수행하고 자연스럽게 당신들을 존경하게 되며, 자기의 권리를 가장 열심히 강조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들의 권리를 가장 존중하도록 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그것은 더욱 정당한 행위하고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이 그 사회의 영광과 행복을 존중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못 됩니다.
그리고 자기들을 보다 신성하고 숭고한 조국의 위정자, 아니 오히려 지배자로 간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들을 양육하고 있는 지상의 조국에 대해 어떤 애정을 표시하는 것은 인간의 평화를 위해서 매우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보기 드문 예외를 내세워 법률에 따라 허용된 신성한 교의를 받아들이는 저 열성적인 사람들, 즉 존경할 만한 영혼의 목자들을 우리들 가운데 가장 훌륭한 시민들의 대열에 끼게 하는 것은, 나로서는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이들의 생기에 넘치는 훌륭한 열변은 복음서의 격률을 차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 넣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제나 솔선수범하여 그 일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지만, 즈네브에서는 훌륭한 설교의 기법에 대해 연구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너무 자주 보았으므로, 기독교 정신이나 풍속의 신성함,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태도나 타임에 대한 관용이 우리 목자들을 어느 정도 지배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신학자와 문학자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와 같은 완전한 결합의 유일한 실례를 보여주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즈네브뿐일 것입니다. 내가 즈네브의 영원한 평화에 대해 희망을 걸고 있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그들의 지혜와 절제 때문이며 국가의 번영에 대한 그들의 열의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저주받고 야만스러운 사람들의 가혹한 격률에 대해 얼마나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가를 놀라움과 존경이 뒤섞인 기쁨을 느끼면서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역사는 여러 차례에 걸쳐 그 실례를 보여주고 있으며, 또 그들은 이른바 하느님의 권리,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익을 주장하기 위해 인간의 피를 별로 아끼지 않았는데, 그것은 자기들의 피가 언제나 존중된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나는 공화국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남자들의 행복을 조성하고 친절과 지혜로 나라의 평온과 양속을 유지하고 있는 저 귀중한 나머지 절반의 여자들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상냥하고 정숙한 여성 시민 여러분, 우리네 남성들을 지배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입니다. 부부의 결합에 따라서만 발휘되는 당신들의 순결한 힘이 오로지 국가의 영광과 공공의 행복을 위해서만 쓰인다면 우리는 매우 행복할 것입니다.
스파르타에서는 여성들이 명령을 내렸던 것처럼 즈네브에서도 당신들이 명령을 내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상냥한 아내의 입에서 나오는 명예와 이성의 목소리에 어떤 야만스러운 남자가 저항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조용히 광채를 발하고 있는 당신들의 아름다움을 더하는 데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당신들의 간소하고 겸손한 옷차림을 보고 나서 헛된 사치를 경멸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당신들의 완곡한 영향과 천진스럽고 상냥한 다스림으로써 국가에는 법률에 대한 사랑을, 시민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결합을 유지하게 하며 흩어져 있는 가족들을 행복한 결혼으로 결합시키고, 특히 우리 나라의 젊은이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몸에 익히는 악습을 설득력 있는 부드러운 훈계와 품위 있는 온화한 대화로써 시정하는 것 역시 당신들이 할 일입니다.
젊은이들은 외국에서, 배울 수 잇는 일들이 산더미 같이 많은데도 타락한 여자들 사이에서 익힌 어린애 같은 태도와 우스꽝스러운 모순과 더불어 뭔지 잘 알 수 없는 이른바 위대한 것에 대한 찬미만을 가지고 돌아오는데, 그것은 굴종에 대한 보잘것없는 보상에 지나지 않으며, 결코 엄숙한 자유와 견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언제나 지금과 같이 양 속의 순결한 수호자이자 평화의 부드러운 옹호자가 되어 주십시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의무와 미덕을 위해 어디까지나 심성과 자연의 권리를 굽힘 없이 주장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상과 같은 보증을 토대로 하면 시민들의 공통된 행복과 공화국의 영광에 대한 나의 희망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유리한 조건을 모두 갖고 있어도 이 공화국은 대다수의 사람들의 눈을 멀게 하는 저 화려함으로 빛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와 같은 호화로움을 찾는 유치하고도 불행한 취미는 행복과 자유의 가장 나쁜 적입니다.
방자한 젊은이들은 다른 고장에 가서 안이한 쾌락과 오랜 후회거리나 찾는 것이 좋겠지요. 허영심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 다른 고장에 가서 웅장한 궁전이나 주위의 아름다운 환경, 호화로운 가구나 화려한 연극, 그 밖에 무기력과 사치의 온갖 세련된 모습들에 대해 감탄하는 것이 좋겠지요. 이렇게 되면 즈네브에는 인간밖에 자랑할 게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나름대로의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쪽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어떤 것을 찬양하는 사람들보다도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너그럽고 존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들이여, 부디 당신들의 공통된 번영에 대해 내가 갖고 있는 관심의 이 경건한 증거를 똑같은 선의로써 받아 주십시오. 만일 내라 불행하게도 나의 진정을 이렇듯 격하게 토로하는 과정에서 어떤 경솔한 감격이라도 하여 핀잔받을 점이 있으면 진정한 애국자의 따뜻한 애정 탓으로, 그리고 당신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기쁨 이상을 바라지 않는 한 인간의 불타는 정열 탓으로 돌리어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너그럽고 존경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경들에게,
당신들의 비천하고 겸허한 종이며 동포 시민인
쟝 자크 루소
샹베리에서 1754년 6월 12일
머리말
나는 인간의 모든 지식 가운데서 가장 유용하지만 동시에 가장 뒤떨어져 있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델포이 신전에 새긴 글만으로도, 인간성에 대한 비평가들의 모든 두툼한 서적보다도 중요하고 어려운 교훈을 충분히 나타내고 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이 논문의 주제를 철학이 제출할 수 있는 가장 흥미 있는 문제의 하나로, 그리고 우리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철학자들이 해결하는 데에는 가장 까다로운 문제의 하나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 자체를 알지 못하면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평등의 기원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간은 지금까지 계속돼온 시대와 사물에 따라 인류의 본원적인 구조 속에서 일어났음에 틀림없는 모든 변화 가운데 자연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겠는가? 또한 인간 자신의 본질에 관련되는 것과 환경이나 인간의 진보로 인해 인간의 원시 상태에 덧붙여졌거나 그 자체를 변화시킨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겠는가?
시간과 더불어 폭풍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모습이 변했기 때문에 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맹수와 비슷한 글라우코스의 상처럼, 인간의 영혼은 사회 속에서 잇달아 일어나는 수많은 원인에 따라 많은 지식과 오류를 얻음으로써, 그리고 신체의 구조에 일어난 여러 가지 변화와 정념의 끊임없는 격동으로 말미암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모습이 변했다. 그리하여 이제 거기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언제나 일정한 불변의 원리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며 창조주의 손으로 새긴 저 거룩하고 엄숙한 단순성도 아니다. 거기에서는 다만 이성을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는 정념과, 망상에 빠져있는 오성의 기이한 대조만이 발견될 뿐이다.
그리고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인류의 모든 진보가 끊임없이 인간을 원시 상태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가 새로운 지식을 흡수할수록 모든 지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획득하는 수단이 상실된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을 연구한 탓에 인간을 알 수 없는 실정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이의 근원을, 인간의 구조에 끊임없이 일어난 그 변화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누구나 모두 인정하는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서로 평등하다. 그것은 마치 어떤 종류의 동물도, 여러 가지 물리적인 원인에 따라 오늘날 우리가 인정하는 것 같은 변종을 발생시키기 전에는 모두 평등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실제로 이 최초의 변화가 어떤 수단에 따라 일어났건 간에 그리고 동시에 같은 방법으로 종자의 모든 개체를 변질시켰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어떤 개체는 우수해지거나 열악해지기도 하고, 조금도 그 본성대로 고유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좋은 성질과 나쁜 성질을 획득하는 데 비해 어떤 개체는 무척 오랫동안 그 최초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인간들 사이에 생겨난 평등의 최초의 기원은 이러한 것이었으니, 그것을 일반적으로 논증한다는 것은 그 참된 원인을 정확하게 제시하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내가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되는 것을 이해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어느 정도의 추리를 시작했으며 어느 정도의 억측도 감히 해보았으나,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희망에서라기보다 문제를 분명히 하여 그것을 올바른 상태로 되돌리고자 하는 의도에서였다.
다른 사람들은 같은 길을 좀 더 쉽사리 앞서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종점에 도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현재 지니고 있는 성질 속에서 애초부터 있었던 것과 나중에 인위에 따라 덧붙여진 것을 구별해 내는 것, 더욱이 이미 존재하지 않거나 과거에도 도대체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결코 존재할 것 같지 않는 하나의 상태, 그리고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상태를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는 그런 상태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확실하게 관찰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결정하려는 사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철학을 필요로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음 문제의 올바른 해결은 현대의 아리스토텔레스나 플리니우스 같은 사람들이 다룰 만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인을 알려면 어떤 실험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 실험을 사회에서 행하는 수단은 무엇일까?"
나로서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지만, 그 주제를 충분히 고찰했으므로 미리 다음과 같이 답변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즉 아무리 위대한 철학자라 하더라도 그 실험을 지도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나지 않으며, 제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군주라고 할지라도 그 실험을 성공적으로 끝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양자의 협력을 기대하는 것, 특히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 그 양측에다 인내 또는 그보다 지식과 선의의 계속적인 협조를 기대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일 뿐이다.
이처럼 어려운, 그리고 오늘날까지 거의 아무도 미처 생각도 해보지 못한 이런 탐구야말로, 인간 사회의 진정한 기초에 대하여 알려고 하는 우리들의 노력을 가로막고 있는 많은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에게 남겨진 유일한 수단이다. 자연법의 참된 정의가 그 만큼 불확실하고 모호한 것은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러한 무지 때문이다. 왜냐하면, 뷔를라마키의 말처럼 법의 관념, 더구나 자연법의 관념은 분명히 인간의 본성에 관한 관념이기 때문이다. 그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인간의 이 본성 자체, 인간의 구조와 상태로부터 이 학문의 원리들을 연역해야 한다."
이 중요한 문제에 관해 논한 저자들 사이에서 거의 의견일치를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놀라움과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가장 진실한 저자 사이에서도 이 점에 관해 같은 의견을 가진 사람이 하나도 없다. 가장 기본적인 원리에 대해 마치 서로 모순을 빚어내기 위해 노력한 듯이 생각되는 고대의 철학자들과는 달리, 로마의 법률가들은 인간과 다른 모든 동물을 구별하지 않고 동일한 자연법에 묶어 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연법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이 다른 제3자에게 명하는 법칙보다 오히려 자연이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법칙을 더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는 그들 법률가들이 '법'이라는 말에 대해 부여하고 있는 특수한 의미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 경우에 그들은 이 법이라는 말을, 주로 자연이 생물의 공통된 보전을 위해 모든 생물 사이에 확립하고 있는 일반적인 관계를 나타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고대의 법학자들은 법이라는 이름 아래 도덕적인 존재, 즉 지적이고 자유로우며 다른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고찰된 존재에 부과되는 규칙밖에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그 결과 자연법의 범위를 이성이 주어진 유일한 동물, 즉 인간에 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법을 각각 자기류로 정의하여 매우 형이상학적인 원리 위에 세워 놓기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서도 이들 원리를 스스로 발견하기는커녕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조차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그러므로 이들 학자의 정의는 모두 언제나 서로 모순되어 있지만, 다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만은 일치하고 있다. 즉 위대한 추론가요 심원한 형이상학자가 아니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은 인간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사회 자체 속에서, 그리고 겨우 극소수의 인간들에 의해서만 발달해온 큰 지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뜻한다.
자연이 무엇인지 거의 모르고 '법'이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서도 거의 일치를 보지 못했으므로, 자연법의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책에서 볼 수 있는 정의는 모두 조금도 같지 않다는 단점 말고도, 그것들은 사람들이 자연적으로 지니지 못한 몇 가지 지식과 사람들이 자연상태에서 벗어난 뒤가 아니면 생각해 낼 수 없는 입장에서 내리고 있다는 결함을 지니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 쓸모가 있기 위해서는 서로가 일치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규칙의 탐구로부터 시작하고, 그 다음이 규칙을 모아 자연법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는데 그것을 널리 실시해 보니 결과가 좋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증거도 없다. 이것은 분명히 정의를 만들어 내서 자기 편리한 대로 사물의 자연을 설명하는 매우 안이한 방법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한, 자연이 받아들인 법 또는 그의 체질에 가장 적합한 법을 아무리 결정하려고 해도 모두 헛수고가 될 뿐이다. 우리가 이 법에 대해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법이 되기 위해서는 법의 강제를 받는 사람의 의지가 그 법에 복종할 수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연적이기 위해서는 그 법이 자연의 소리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인간을 이미 완성된 모습으로 보는 학술 서적을 제쳐두고 인간 영혼의 최초이자 가장 단순한 작용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는 거기에는 이성에 앞선 두 개의 원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우리의 안녕과 자기보존에 대해 스스로 큰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모든 감성적 존재, 주로 우리 동포가 죽거나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자연스러운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사교성의 원리를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자연법의 모든 규칙은 우리의 오성이 이 두 가지 원리 사이에 조성하는 일치와 조화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나중에 이성이 계속 발달하여 드디어 자연을 질식시켜 버렸을 때, 이성은 이들 규칙을 또 다른 기초 위에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학자를 인간으로 만들기 전에 인간을 철학자로 만들 필요가 결코 없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인간의 의무는 지혜의 힘으로 뒤늦게나마 깨달음으로써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연민이라는 내적 충동에 역행하지 않는 한 다른 인간에게도, 그리고 어떤 감성적인 존재에게도 결코 해를 주지 않을 것이다. 다만 자기보존을 앞세워야 할 당연한 경우는 별문제이다.
이 방법에 따라, 동물도 자연법에 관계되느냐 하는 옛부터의 논쟁도 역시 막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지식도 자유도 갖지 못한 동물들이 법칙을 알지 못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도 그 주어진 감성에 따라 어느 정도 우리의 자연에 관계가 있으므로, 우리는 그들도 자연법에 관여할 것이며 인간은 그들에 대해 어떤 의무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상 내가 동포에게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의무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그가 감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특질은 동물과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므로, 적어도 동물은 인간에 의해 학대받지 않을 권리를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본래적인 인간과 그 참된 욕구, 그리고 그 의무의 기본적인 원리에 대한 연구야말로 도덕적 불행 등의 기원이나 정치체의 진정한 토대, 그 구성원들 상호간의 권리, 그리고 중요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해명되어 있지 않은 무수한 문제들에 따르는 많은 어려움을 제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유효한 방법이다.
인간 사회를 냉정하게, 이해 관계에 사로잡히지 않은 눈으로 고찰하면, 그것은 무엇보다도 강자의 폭력과 약자의 억압상태만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전자의 냉혹성에 대해 반항하거나 후자의 맹목을 한탄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들 사이에서는, 지혜보다는 종종 우연에 따라 조성되고 약하다거나 강하다거나, 또는 부유하다거나 가난하다고 부르는 저 외면적인 관계처럼 불안정한 것은 없으므로, 인간이 만든 제도는 언뜻 보기에 허물어지기 쉬운 사상누각처럼 생각된다. 그것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건물을 싸고 있는 먼지와 모래를 제거해야만 비로소 건물이 서 있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보게 되어, 사람들은 그 토대에 대한 존중을 배우게 된다.
그런데 인간과 자연의 여러 가지 능력과 그 능력의 계속적인 발달에 대해 깊이 연구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은 현재의 사물 구성 속에서 신의 의지가 만들어 낸 것과 인간의 기술이 만들어 낸 것을 결코 구별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내가 검토하고 있는 이 중요한 문제에서 생기는 정치적, 도덕적인 탐구는 모두가 유용한 것이며, 여러 가지 형태의 가설적인 역사는 모든 점에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교훈이다.
우리가 만일 자기 혼자 내버려진 채 살아왔더라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 자비로운 눈길에 따라 우리의 제도를 바로잡고 그 제도에 흔들리지 않는 지위를 부여하여 그 제도에 그러한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을 때 일어나는 무질서를 예방하는 동시에, 우리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리라고 생각되었던 수단을 사용하여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준 신을 축복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신이 너에게 무엇이 되라고 명하였는지, 그리고 네가 인간 사회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총론
내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 대해서이다. 그런데 내가 검토하고 있는 문제는 내가 결국 인간들에게 말해야 함을 나 스스로에게 가르쳐 준다. 진리를 존중하기가 두려울 때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결코 제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현자들의 재촉을 받으며 그들 앞에서 자신 있게 인류를 위해 변호하고자 한다. 그리고 내가 나자신의 논제와 나 자신의 판단에 적합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내가 한 일을 불만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류에게 두 가지 불평등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하나는 자연적 또는 신체적인 불평등이다. 이것은 자연에 따라 정해진 것으로, 연령이나 건강이나 체력, 그리고 정신 또는 영혼의 자질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종의 약속에 좌우되고 사람들의 동의를 얻어 정해지며 적어도 그렇게 정당화되고 있으므로, 도덕적 또는 정치적 불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후자는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줌으로써 누리고 있는 여러 가지 특징으로, 예컨대 다른 사람보다 풍요하다거나 존경을 받고 있다거나 권력을 갖고 있다거나 사람들을 자기에게 복종시키는 특권으로 구성된다.
인간은 자연적인 불평등이 어디서 오는지 문제삼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말의 정의 자체 속에 어떤 본질적인 대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불평등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문제삼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명령을 내리는 사람 쪽이 그 명령에 복종하는 사람보다 반드시 뛰어난 인간인가, 그리고 한 인간에게 육체나 정신의 힘과 지혜나 미덕이 언제나 권력이나 부에 비례하여 주어지는가를 표현만 달리하여 묻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은 주인들이 방황하는 가운데 노예들끼리 토론하기에는 적합한 주제일지 모르지만, 진리를 탐구하는 이성적인 자유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다면 대체 이 논문에서는 정확히 말해서 무엇이 문제가 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사물이 진보하는 가운데 폭력에 이어 권리가 생기고 자연이 법에 굴복한 시기를 지적하는 것, 그로부터 연속되는 어떤 기적으로 인해 강자가 약자에게 봉사하고 인민이 현실의 행복을 대가로 하여 관념 속에서 안식을 찾으려고 결심했는가를 설명하는 일이다.
사회의 기초를 검토한 철학자들은 저마다 자연상태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를 느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거기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에 대하여 정의와 부정의 관념을 상정하기를 망설이지 않았으나, 인간이 이런 관념을 가졌음에 틀림없다는 것과 그 관념이 그에게 유용했으리라는 것까지도 증명해 보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자연권에 관하여 말하기를 각자는 자기에게 속하는 것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들은 '속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선 약자에 대한 권위(권력)를 강자에게 주면 여기서 바로 정부가 탄생된다고 주장했으나, 권력이나 정부라는 말의 의미가 사람들 사이에 알려질 때까지 지나갔던 시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았다.
끝으로 그들은 누구나 욕구, 탐욕, 압박, 욕망, 교만 등에 대해 끊임없이 논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자기들이 사회에서 얻은 관념을 자연상태 속에 옮겨 놓은 데 불과했다. 그들이 미개인에 대해 운운한 것은 결국 사회인에 대한 묘사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근대 철학자들은 자연상태의 존재에 대해서는 꿈에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서를 읽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최초의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지혜와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지 스스로가 이와 같은 자연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기독교 철학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지만, 모세의 책을 믿는다면 인간은 홍수 이전에도 순수한 자연상태에 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어떤 비정상적인 사건에 따라 다시 자연상태로 떨어진 셈이 된다. 이것은 변호하기가 대단히 어려우며 증명이 불가능한 역설이다.
그러므로 나는 우선 이 모든 사실을 무시하고 나가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문제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주제를 가지고 행할 수 있는 연구는, 역사적인 진리가 아니라 다만 가설적이고 조건적인 추리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추리는 사물의 진정한 기원을 표시하기보다 사물의 본질을 명시하는 데 적합하며, 또 우리의 자연 과학자들이 세계의 생성에 대해 매일같이 행하고 있는 추리와 유사하다.
종교가 우리에게 믿으라고 명령하는 바에 따르면, 하느님 자신이 만물을 창조하신 직후에 인간을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니, 인간이 불평등한 것은 하느님께서 그렇게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류를 홀로 내버려 두셨다면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인간과 인간을 에워싼 존재 사이의 자연(본성)만을 근거로 하여 추리하는 것은 종교도 금하고 있지 않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바요 내가 이 논문에서 검토하려는 것이다. 나의 주제는 인간일반에 관계가 있으므로, 나는 모든 국민에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을 사용하도록 힘쓰려고 한다. 아니 차라리 내가 언급하고 싶은 사람들만 등장시키기 위해, 일단 시간과 장소를 떠나 자기가 지금 아테네의 학원에서 선생들의 가르침을 외고 있으며, 플라톤이나 크세노크라테스와 같은 사람을 심사위원으로 하고 인류를 청중으로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오, 인간이여, 그대가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지 간에 내 말을 잘 들어다오. 제가 서술한 것은 거짓말쟁이인 그대의 동포들이 쓴 책 속에서가 아니라,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 내가 읽은 그대의 역사이다. 자연에서 비롯되는 것은 모두가 진실한 것이다. 거짓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무심코 인간의 견해를 섞었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이제부터 말하려고 하는 시대는 아득한 옛날이다. 그대는 원래의 모습에서 얼마나 많이 변한 셈인가? 나는 앞으로, 그대가 자연에서 받아들였으며 그대의 교육과 습관이 손상을 입힐 수 있었으되 파괴할 수는 없었던 바로 그 특질에 기초하여, 그대들 종의 생애를 표현해 보고자 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문득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러므로 그대에게도 그대의 종이 머물러 있었더라면 하고 생각되는 시대가 있을 것이다.
자기의 불행한 자손에게 더욱 큰 불만을 예고하고 있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 불만을 품고 있는 그대는, 아마 다시 한번 옛날로 돌아갔으면 하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이 감정은 그대의 최초의 조상에게는 찬사를 던지지만 그대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비판이 되며, 불행하게도 그대의 뒤에 태어나는 사람들에게는 공포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제1부
인간의 자연상태에 대해 잘 판단하려면, 인간을 그 기원에서 고찰하고 종의 최초의 발아 속에서 검토하는 것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나는 인간의 계속적인 발전을 통하여 그 신체적인 구조를 더듬어 보지는 않을 것이다. 요컨대 나는 인간이 오늘날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최초에 어떠했던지를 동물의 조직 속에서 탐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것처럼, 길게 자란 인간의 손톱은 아마도 최초에는 동물의 그것처럼 갈퀴같이 구부러져 있었을 것이라거나, 인간은 곰처럼 털로 뒤덮여 있었다거나, 네 말로 걸어다녔으므로 그 시선이 몇 발자국 앞의 지면으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관념이 가지는 성격과 한계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었을 것이라는 등등에 대해 나는 검토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와 같은 주제에 대해서는 막연한 상상으로 억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교해부학은 아직 그다지 발달되어 있지 않고 생물학자의 관찰은 아직 너무나 불확실하므로, 이런 토대 위에 견고한 추리의 기초를 세울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이 점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초자연적인 지식에 의지하지 않으며, 아울러 인간이 점차로 그 손발을 새로운 습성에 적응시키고 새로운 음식을 먹으면서부터 인간의 외면과 내면의 구조에 일어난 변화 또한 고려하지 않는다. 그 대신 인간은 어느 시대에도 오늘날 목격하는 것과 같은 구조, 즉 두 발로 걸어다니고 현재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손을 사용하며 지면 전체에 시선을 돌려 광대한 하늘을 쳐다보고 눈으로 그 넓이를 가늠해 보는 등의 구조를 가진다고 가정하자.
이와 같이 구성된 존재로부터 그가 받을 수 있었던 모든 초자연적인 재능과 오랜 세월에 걸친 진보를 통해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었던 모든 인위적인 능력을 제거해 버린다면, 요컨대 인간을 자연의 손에서 갓 나온 그대로의 상태에서 생각해 보면, 나는 거기서 어떤 동물보다도 약하고 그다지 민첩하지는 않지만 결국 어느 동물보다도 유리한 구조를 가진 한 동물을 떠올리게 된다. 그는 잣나무 아래서 배불리 먹고 샘물을 찾아 목을 축이며, 자기에게 먹을거리를 제공해준 이 나무 아래에다 잠자리를 마련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욕구는 충족될 수 있었다.
대지는 기름진 자연 그대로 방치되고 아직 도끼질을 받은 것이 없는 광대한 산림에 뒤덮여 모든 동물들에게 먹이창고와 은신처가 되어 있다. 인간은 이런 동물들 사이에 흩어져 살면서 그들이 살아가는 방법을 관찰하고 모방하여 동물의 본능까지 획득한다. 모든 동물이 자기에게 고유한 본능만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자기 고유의 본능은 전혀 없는 듯이 생각되는 인간은 모든 본능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다른 동물들이 각각 나눠 갖고 있는 여러 가지 먹이의 대부분을 마찬가지로 자기 먹이로 하여, 그 결과 어느 동물보다도 쉽사리 자기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찾아내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불순한 기후와 매서운 계절의 변화에 익숙해지고 피로를 이겨내도록 훈련을 받으며, 벌거벗은 몸으로 무기도 없이 다른 야수로부터 자기 생명이나 먹이를 지키거나 그들 앞에서 재빨리 도망쳐야 했으므로, 인간은 매우 건장한 체질을 갖게 되었다. 어린이들은 부친으로부터 건장한 체격을 물려받아 자람에 따라 부친이 한 것과 같은 훈련을 쌓음으로써 인류로 하여금 최대한의 건장한 체력을 얻게 했다.
이 경우에 자연은 스파르타의 법률이 그 나라 시민의 자녀들을 다루는 방식과 똑같이 인간들을 다루게 된다. 즉 자연은 훌륭한 체격을 가진 자들은 더욱 건장하게 만들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탈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 점에서 자연은 지금의 우리 사회와는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는 국가가 아이들을 양친의 무거운 짐이 되게 함으로써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차별하게 죽여 버리고 만다.
미개인의 신체는 그가 알고 있는 유일한 도구이므로, 그는 그것을 가지고 오늘날 우리 신체로써는 연습 부족 때문에 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용도에 사용한다. 바로 이 미개인이 필요에 따라 얻지 않을 수 없는 힘과 민첩성이 우리에게는 결여되어 있는데, 그것은 실로 우리의 생활기술(산업)이 그것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도끼를 갖고 있었다면 그의 손목이 그처럼 튼튼한 가지를 꺾을 수 있었을까? 만일 투석기를 갖고 있었다면 그처럼 경쾌하게 나무에 기어오를 수 있었을까? 만일 말을 갖고 있었더라면 그처럼 재빨리 뛰어갈 수 있었을까?
이런 도구나 기계를 모두 신변에 거느릴 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문명인에게 주어 보라. 그러면 그는 미개인과 겨루어 쉽사리 이길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만일 당신들이 힘의 균형을 잃은 승부를 보고 싶다면, 쌍방을 알몸으로 만들어 무기 없이 대결시켜 보라. 그러면 당신들은 자기의 모든 힘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언제 어떤 일에도 대비할 수 있는 것, 이를테면 언제나 자기의 전부를 활용하는 것이 얼마나 유리한가를 곧 알 수 있을 것이다.
홉즈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담대하여 공격하고 싸우는 것밖에 몰랐다고 한다. 어느
유명한 철학자는 이와 반대 의견을 갖고 있다. 그리고 컴벌랜드나 푸펜도르프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즉 자연상태의 인간만큼 비겁한 자는 없다. 그는 언제나 덜덜 떨면서 바삭거리는 소리를 듣거나 조금만 무엇이 움직여도 곧 도망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가 알 수 없는 사물에 대해서는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가 당연히 기대해도 좋은 육체적인 행복이나 불행을 스스로 구별하지 못하거나 자기가 직면하고 있는 위험에 저항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가늠할 수 없을 경우에는 언제나, 눈앞에 나타나는 새로운 광경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바 없는 사실이다. 다만 자연상태에서는 모든 일이 매우 단조롭게 진행되지 때문에 토지의 표면도 거기 모이는 사람들의 정념이나 기분에 따라 일어나는 저 갑작스럽고 끊임없는 변화를 받는 일이 전혀 없으므로, 위에서와 같은 상황은 매우 드문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미개인은 동물 사이에 흩어져 살아가며 일찍부터 동물들과 힘을 겨루는 처지에 있으므로, 그는 곧 자기를 동물과 비교하게 된다. 그리고 동물이 힘에 있어서 우월한 이상으로 그가 지혜에 있어서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그는 동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버릇을 갖게 된다.
건장하고 민첩하고 용감한 미개인--그들은 모두가 그렇지만--의 한 사람을 돌과 적당한 몽둥이로 무장시켜 곰이나 늑대 한 마리와 겨루게 해보라. 그렇게 하면 적어도 위험은 서로에게 엇비슷할 것이다. 그와 같은 경험을 여러 번 되풀이한 뒤에는, 원래 서로 공격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야수들은 인간이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광포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자진해서 습격하는 일을 그만두게 될 것이다.
인간의 슬기 이상으로 힘이 강한 동물을 생각해 보자. 인간은 그런 동물에 대해서는 보다 약한 다른 동물의 입장에 놓이게 되지만, 모든 약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그럭저럭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경우에는 그들과 마찬가지로 발이 빠르고 나무 위에 거의 안전한 피난처를 갖고 있으므로, 언제 만나도 도망치거나 싸우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동물도 신변에 위협을 받거나 극도로 배고픔을 느끼는 경우 이외에는 본래 인간에 대해 싸움을 걸어오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으며, 또 어떤 종류는 자연의 섭리 상 다른 종류의 먹이가 되도록 정해져 있음을 말해 주는 것 같은 저 격렬한 적대감을 인간에게 보인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흑인이나 미개인들이 숲속에서 만나는 야수를 거의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분명히 이런 이유 때문이다. 베네수엘라의 카리브인은 특히 이 점에서는 완전히 안심하여 아무 불편도 느끼지 않고 살아간다. 프랑스와 코레알의 말에 따르면, 그들은 거의 벌거벗은 몸에다 활과 화살만 걸치고 태연스럽게 숲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야수에게 물려 죽은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일찍이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보다도 더욱 무서운 적으로서 인간이 자기를 방어하는 데 적절한 수단을 갖지 못하는 대상들은 어릴 때의 연약함과 유소 및 노쇠와 온갖 종류의 병인데, 이것은 모두 우리가 연약하다는 슬픈 증거다. 그 가운데 처음 두 가지는 모든 동물에게 공통되지만 마지막 것은 주로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유소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것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어머니는 언제나 가지 아기를 데리고 다니므로 동물의 암컷보다 아기를 기르기가 훨씬 쉽다. 동물의 암컷은 한편으로는 자기 먹이를 찾기 위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새끼들에게 젖을 먹여 기르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다녀야 한다. 인간의 어머니가 위험에 놓이게 되면 그녀와 함께 어린이도 목숨을 잃을 위험이 크지만, 이 위험에 새끼들이 오랫동안 자기 스스로 먹이를 찾을 능력일 없는 다른 동물에게도 공통된 현상이다.
그리고 유년 시절은, 우리가 동물의 그것보다 길더라도 수명이 그만큼 길기 때문에 그 점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거의 평등하다. 다만 유년 시절의 기간이나 출산되는 자식의 수에 대해서는 다른 법칙이 있지만, 그것은 내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아니다.
몸을 움직이거나 땀을 빼는 일이 거의 없는 노인은, 식욕도 음식물을 획득할 수 있는 능력도 모두 줄어든다. 그들은 미개한 생활 덕분에 중풍이나 류머티즘에 걸리지는 않지만, 노쇠는 다른 모든 질병과는 달리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으므로 나중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리고 자기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사라져 가는 것이다.
병에 대해서 말하자면, 나는 대부분의 건강한 사람들과 같이 의술을 비난하는 공허하고 그릇된 허풍 따위는 떨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나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이러한 의술이 상당히 발달하여 있는 지역보다 그것이 매우 등한시되고 있는 지역에서 더 짧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확실한 견해가 있을 수 있는가를 묻고자 한다.
만약 우리가 의술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치료법보다 더 많은 병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활 양식의 심한 불평등,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한 여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과중한 노동이 강요되는 심히 불평등한 생활양식, 쉽사리 자극하고 만족시킬 수 있는 식욕과 정욕, 부자에게 변비성의 영양을 제공하여 소화불량으로 괴롭히는 미식, 가난한 사람들의 조식--그나마도 그들은 때때로 굶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는 배가 터지도록 포식한다.--그리고 밤샘을 비롯한 여러 가지 부절제, 온갖 정념의 지나친 폭발, 정신적인 피로와 소모, 누구나 자주 경험하는, 영원토록 영혼을 좀먹는 무수한 비애와 고통, 이것들은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우리가, 자연이 명령한 간소하고 일정하고 고독한 생활 양식을 지켜나갔던들 아마도 이런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고 생각되는 상서롭지 못한 증거다.
만일 자연이 우리를 운명적으로 건강하도록 정했다면 이렇게 단언해도 좋으리라. 즉 사색은 자연에 위배되는 상태이며 명상하는 인간은 타락한 동물이라고. 미개인의 훌륭한 체격이나, 적어도 독한 술로 몸을 망치지 않은 사람들의 훌륭한 체격을 생각해 보면, 그리고 그들이 부상과 노쇠 이외에 거의 병을 모르고 산다는 것을 알면, 인간의 질병사는 정치, 사회의 역사를 더듬어 봄으로써 쉽사리 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실 플라톤의 견해다.
그는 트로이의 포위전 때에 포달레이리오스와 마카온이 처방했거나 인정한 몇 가지 약에 대해서나 그 약들이 일으킨 여러 가지 병에 대해서 당시의 사람들이 아직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켈수스는 오늘날 그 필요성이 분명하게 인식되고 있는 식이요법은 힙포크라테스에 위해 발명되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병의 원천이 거의 없었으므로, 자연상태의 인간에게는 약이 거의 필요 없었고 의사는 더욱 필요가 없었다. 인류는 이 점에서도 다른 어떤 동물보다 못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사냥꾼들이 사냥을 할 때 과연 허약한 동물들을 많이 보게 되는지 아닌지를 알아보기는 무척 쉽다. 심하게 다쳤거나 뼈가 부러졌을 경우에도 시간 이외에는 이렇다 할 의사도 없고 일상생활 이외에는 아무런 양생법도 없이 치유된 흔적을 갖고 있는 짐승들을 사냥꾼들은 자주 목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 동물은 절개수술로 고통을 당하지도 않고 약품에 중독되지도 않으며 금식으로 쇠약해지는 일도 없이 완전히 쾌유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적절히 사용하는 의약이 우리에게 아무리 유용하더라도, 자연치유 이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미개인이 자기의 병 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낳게 되는 경우와 비교해 볼 때, 미개인의 처지가 오히려 우리의 처지보다 더 낫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상 보는 현대인과 지금 말하고 있는 미개인을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자연은 자기가 돌보아야만 하는 동물을 특별히 보살핀다. 그것은 마치 자연이 얼마나 이 권리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말이나 고양이, 소나 당나귀까지도 우리네 집에 있을 때보다는 숲속에 있을 때 대체로 키가 크고 체격이 좋고 건장하며 힘도 세고 용기도 있다. 가축이 되어 버린 뒤에는 그런 이점을 대부분 잃어버린 이 짐승들을 우리가 아무리 소중히 돌보며 잘 키우려고 애써도, 그것은 오히려 그들을 퇴화시키는 결과가 되기 쉽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회화하고 노예화한 인간은 연약해지고 겁이 많아지고 비굴해진다. 게다가 여성화한 생활양식은 인간의 힘과 용기를 완전히 무력하게 만든다. 미개의 상태와 사육된 상태를 비교해 보면, 인간들 간의 차이가 동물들간의 차이보다 큰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동물은 자연에 의해 평등한 대우를 받으므로, 인간 스스로가 사육하는 동물보다 그들 자신에게 더 많은 안락을 제공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을 더욱 타락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벌거벗은 채 집도 없이 산다거나 그 밖에 지금의 인간들이 그처럼 필요하다고 믿고 있는 갖가지 무용지물들을 소유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 최초의 인류가 불행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그들 자신을 보존하는 데 큰 장해가 된다고는 더욱 말할 수 없다.
그들은 털이 많은 피부를 지니고 있지 못한 대신, 따뜻한 지방에서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추운 지방에서는 정복한 동물의 털가죽을 자기 소유로 만들 줄 안다. 달리는 데는 두 다리가 사용되고 자기 방어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두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
그들의 아기들은 걸음마가 더디고 몸동작도 늦게서야 익히게 된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으며, 이것은 어미가 쫓기게 되어 새끼를 버리거나 새끼들에게 보조를 맞춰야 하는 다른 동물보다 유리하다. 여기에는 몇 가지 예외가 있을지
모른다.
예컨대 니카라과 지방에 사는 어떤 동물의 경우가 그렇다. 여우와 비슷하게 생긴 이 동물은 인간의 손과 같은 발을 갖고 있다. 코레알의 말에 따르면, 이 동물의 아랫배에는 주머니가 달려 있어 어쩌다 어미가 쫓기게 될 경우에는 그 속에 새끼를 넣고 뛸 수 있다고 한다. 라에에 따르면, 멕시코에서 볼 수 있는 트라카찬이라는 동물의 암컷 역시 그런 주머니를 달고 있다고 한다.
나중에 다시 언급할 생각이지만, 요컨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저 진귀하고 우연한 상황의 일치를 가정하지 않는 한, 옷이나 가옥을 처음으로 만들어 낸 사람은 사실상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 낸 셈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까지 옷이나 집 없이도 그럭저럭 살아왔으며, 어른이 되니까 어릴 때부터 익숙해져 온 생활양식에 맞지 않아 견디기 힘들다는 것은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혼자 살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언제나 위험에 직면해 있는 미개인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잠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거의 생각하는 일이 없으며 생각하지 않을 때엔 언제나 졸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동물들처럼 언제나 가볍게 잠든 상태로 있다. 자기 자신의 보호가 미개인들의 가장 중요하고도 유일한 관심거리이므로, 그는 먹을거리를 얻기 위해서나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자기 몸을 수호하기 위한 공격과 방어에 밀접히 연관된 기능들을 단련시켜야 한다.
반대로 부드러움과 정욕에 의해서만 비로소 완성되는 기관은 조잡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이 때문에 그의 마음에는 어떤 섬세한 감정도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된다. 이 점에서 그의 감각은 분열되어 촉각, 미각은 극도로 둔해지는 반면, 시각, 청각, 후각은 대단히 예민해질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동물의 상태이며, 여행자들이 보고하는 바와 같이 대부분의 미개 민족이 처해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희망봉의 호텐토트인들은 네덜란드인이 망원경으로나 볼 수 있는 먼바다의 배를 육안으로 볼 수 있다고 해도 조금도 놀라운 일이 못 되며, 아메리카의 미개인들이 품종이 우수한 개와 마찬가지로 냄새를 맡아 스페인 사람을 추적하거나, 이 모든 야만 민족이 나체 생활에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고춧가루를 듬뿍 뿌려 먹거나 유럽인의 술을 물처럼 마시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이 못 된다.
지금까지 나는 물리적인 인간만을 고찰해 왔으나 이제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및 도덕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려고 한다. 우선 나는 모든 동물을 정밀한 기계로밖에는 보지 않는다. 자연은 그 기계가 스스로 작동할 수 있도록, 또한 어느 정도까지는 그것을 고장내거나 파괴하려는 경향이 있는 장애물을 모두 제거하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도록 그것에 감정을 부여하고 있다. 나는 인간이란 기계도 역시 그러하다고 본다. 다만, 동물의 활동에서는 자연이 모든 것을 행하는 데 반해 인간은 스스로가 자유로이 자연의 활동에 협력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즉 한편으로는 본능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행위에 따라 취사선택을 하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동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유리하다 하더라도 자기에게 정해진 규칙에서 벗어날 수 없으나, 인간은 종종 그 규칙을 벗어나 자신의 편견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하여 비둘기는 맛 좋은 고기가 가득 담긴 접시 옆에서도 굶어 죽고 고양이는 산더미처럼 쌓인 과일이나 곡식 위에서도 굶어 죽기 일쑤다. 그 동물들이 먹으려는 엄두만 낸다면 그 경멸하고 있는 음식으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 텐데도 굳이 먹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타락한 인간은 절제를 못한 탓으로 열병이나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 이유는, 마음이 감각을 변질시키고 자연이 침묵하고 있을 때에도 의지는 여전히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동물은 감각을 가지고 있으므로 관념 또한 가지게 마련이며, 어느 정도까지는 그 관염들을 서로 연관시키기도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은 동물과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몇몇 철학자들은 이 점을 강조하여, 어떤 경우에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보다 인간들 간의 차이가 더 크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을 동물과 구별짓는 것은 오성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특질이다.
자연은 모든 동물에게 명령하고 동물은 이에 따른다. 인간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그러나 그것에 복종할 것인지 저항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자기의 자유의지에 맡겨져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 자유의 의식을 통해 그의 영혼 속에 있는 영성이 나타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리학이 감각의 기제와 관념의 형성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서는 역학의 법칙만으론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한 영적인 행위만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인간과 동물의 차이에 대해 좀 더 논의의 여지가 남아 있다고 하더라도, 나는 양자를 이렇게 구별해도 아무도 이의를 달지 못할 또 하나의 매우 특수한 성질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완성해 가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그 능력이란, 환경의 도움을 얻어 다른 모든 능력을 점차로 발전시켜 가는 각 개인에게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에도 해당되는 능력이다.
이와는 달리 동물은 생후 몇 달이 지나면 한평생 변치 않는 모습을 갖추게 되며 그 종 전체를 보아도 천 년이 지나도 최초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러면 어찌하여 인간만이 늙어서 노망이 들기도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이와 같이 하여 원시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에, 즉 동물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므로 잃는 것도 없이 언제까지나 본능의 힘을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인간은 노쇠와 그 밖의 사고로 말미암아 그의 '완성능력(perfectibility)' 덕분에 얻게 된 모든 것을 잃어, 동물보다 더욱 저열한 상태로 다시 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양자를 분명히 구별하는 거의 무제한적인 이 능력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며, 평온하고 무사한 나날이 계속되는 저 원초적인 상태로부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을 이끌어낸다. 그리고 인간의 지식과 오류, 악덕과 미덕을 몇 세기의 흐름 속에서 부화시켜 드디어 인간을 그 자신과 자연에 대한 폭군으로 만드는 것도 바로 이 능력이다. 이 능력을 인정해야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리노코 강 연안의 인디언들이 자기네 자녀들의 관자놀이에 대는 판자를 어디에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처음으로 그 주민에게 제시해준 사람을 은인으로서 찬양해야만 한다면, 그것은 실로 충격적인 일이라고 하겠다. 그 판자는 적어도 어린이들의 어리석음과 본래의 행복 일부를 보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 의해 단지 본능만이 주어진 미개인,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에게 결핍되어 있을지 모르는 본능을 우선 보충하고 이어서 그 자신을 자연 이상으로 훨씬 높일 수 있는 능력으로써 보강하는 미개인은 처음에는 순수한 동물적인 기능만을 수행할 것이다. 즉 처음에는 보고 느끼는 기능만을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상태는 다른 모든 동물들과 공통된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사태가 조성되어 새로운 발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의지를 발동하는 것과 발동하지 않는 것, 욕망을 갖는 것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 그의 정신이 수행하는 최초이자 거의 유일한 작용이 될 것이다.
모럴리스트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인간의 오성은 정념의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우리의 이성은 실로 이 양자의 활동에 따라 완성된다. 우리가 사물을 알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즐기려고 하기 때문이다. 욕망도 공포도 느끼지 않는 자가 무엇 때문에 애써 이성을 발동시키려고 할 것인가?
정념도 그 기원은 우리의 욕망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지식을 통해 진보하여 간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관념에 의거하거나 다만 자연의 충동에 의거하지 않으면, 사물을 탐내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개인은 여러 가지 지식이 결핍되어 있으므로, 이 마지막 종류의 정념(충동)밖에 경험하지 못한다. 그의 욕망은 육체적인 욕구를 초월하지 않는다. 그가 세상에서 알고 있는 행복은 음식물과 이성과 휴식뿐이다. 그가 두려워하는 불행은 고통과 굶주림뿐이다. 나는 고통이라고 말할 뿐 죽음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동물은 죽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테니까. 죽음과 그 공포에 대한 지식이란 인간이 동물적인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에야 비로소 얻게 되는 것이다.
필요하다면 이 오성, 즉 세계의 모든 국민에게 있어서 오성의 진보는 자연으로부터 주어지거나 환경에 따라 그들에게 강요된 필요에 비례하며, 따라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도록 재촉하는 정념에 비례한다는 견해를, 나는 어렵지 않게 입증할 수 있다. 그것은 나일강의 범람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기술이 발달되어 널리 퍼져간 이집트의 예로써 증명할 수 있으며, 그리스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여러 가지 기술의 진보 과정을 통해서도 입증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의 경우, 그런 기술이 비옥한 에우르타스의 연안에서는 뿌리를 내리지 못 했는데 비해 아티카의 사막이나 바위 사이에서는 무럭무럭 자라나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말해서 북방의 여러 민족이 남방의 여러 민족보다 부지런하다는 사실도 우리는 알고 있다. 왜냐하면, 마치 자연이 땅에 주기를 거절한 비옥함을 대신 정신에 주어 사물을 평등하게 만들기라도 할 양이면, 북방 민족은 남방 민족에 비해 더욱 부지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치 못한 역사상의 증거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모든 것이 미개인들로 하여금 자기가 처한 상황을 변화시키려는 유혹과 수단 모두를 갖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과연 누가 모르겠는가? 그의 상상력은 아무것도 묘사하지 못하며 그의 마음은 자신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의 소소한 필수품은 쉽사리 손이 닿는 곳에 있으며 보다 높은 지식은 그가 얻으려고 원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기 때문에, 선견지명이라든지 호기심도 거의 가질 수 없다. 자연의 광경은 너무나 눈에 익숙하여 더 이상 그의 관심을 끌지 않게 된다. 보고 들은 것은 언제나 한결같으며, 같은 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기이한 것에도 놀라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보아온 것을 집중적으로 관찰하기 위해 인간이 필요로 하는 철학을 그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것으로도 교란시킬 수 없는 그의 마음은 오직 눈앞의 자기 생존에 대한 생각에만 몰두하여 곧 닥쳐올 장래의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가 세우는 계획은 그의 시야와 마찬가지로 좁아 기껏해야 그날 하루에 대한 것일 뿐이다. 오늘날의 카리브인도 이 정도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는 밤에 필요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아침에 자기 이불을 팔아버리지만, 저녁이 되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그 이불을 다시 사들인다.
이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할수록, 우리 눈에는 순수한 감각에서 가장 단순한 지식까지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 보인다. 그리고 인간이 상상력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필요한 자극도 없이 자기만의 힘으로 이처럼 큰 간격을 뛰어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인간이 태양 이외의 불을 보기까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던가! 인간이 불이라는 원소의 가장 흔한 용법을 배우기까지 또 얼마나 많은 갖가지 우연이 필요했던가! 불 피우는 기술을 얻기까지 몇 번이나 불을 꺼뜨렸던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비결을 알리지 못한 채 그 비결과 더불어 사라지고 말았던가!
농업의 경우는 어떤가. 농업은 많은 노동과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을 필요로 하며, 다른 많은 기술과 관련된다. 그것은 적어도 한 사회가 구성되어 있지 않으면 실행이 불가능한 기술이며, 그것 없이도 대지가 얼마든지 공급할 수 있는 식량이 아니라 우리의 입맛에 가장 적합한 식량을 능동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그런데 가령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자연의 생산물로는 이미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가정은 그러한 생활양식이 인구에게 대단히 유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정이다. 아울러 다음과 같은 경우도 가정해 보자. 대장간도 공장도 없어서 경작 도구는 하늘에서 떨어져 미개인들의 손에 쥐여지는가 하면, 이들이 저마다 쉴새 없이 계속되는 노동에 대해 느끼는
증오감을 극복하고 그들 스스로가 필요한 것은 일찌감치 예견할 줄 알며, 또 경작과 파종, 식수 등의 방법을 터득하고 보리 타작법과 포도주 제조 기술을 발견했다고 가정하자. 물론 이러한 일들은 모두 그들이 스스로 배웠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므로, 예컨대 신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고 하자.
어쨌거나 위와 같은 상황이 된다면, 수확기에 맞추어 가장 먼저 온 자--그것이 인간이건 짐승이건 간에--가 모두 수확해 가 버릴 밭을 애써 경작할 정도로 어리석은 인간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노동의 대가가 자기가 필요로 하면 할수록 더 획득하기 어려울 때, 누가 그런 노동에 일생을 바치려고 마음먹겠는가?
요컨대 토지가 그들 사이에 분배되어 있지 않은 이상, 다시 말해서 자연상태가 조금도 소멸되어있지 않는 한, 어떻게 그와 같은 상황에서 땅을 경작할 마음이 생기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철학자들이 가르쳐주는 것에 못지 않게 슬기로운 생각을 하는 한 사람의 미인을 가정해 보기로 하자. 한 사람의 철학자로 간주되는 이 미개인은 혼자서, 가장 숭고한 진리를 발견하고 질서를 사랑하는 마음이나 그 창조자의 의지에서 비롯된 정의와 진리의 격률을 아주 추상적인 추리를 통해 생각해 낸다고 하자. 지성과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우직함과 어리석음 못지 않게 이렇게 지혜와 지식을 갖춘 미개인을 상정한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없고 또 그것을 생각해낸 개인과 함께 소멸해 버리는 이와 같은 형이상학에서 인류가 어떻게 효용을 얻을 수 있겠는가? 숲속에서 동물들과 함께 뒤섞여 있는 인류가 무슨 진보를 할 수 있겠는가? 일정한 거처도 없고 서로 상대방을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한평생 두 번 다시 만날까말까 할 처지에서 서로 얼굴을 익히지도 못하고 대화하는 일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발전시키고 서로 일깨워 줄 수 있겠는가?
말을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관념을 얻고 있으며, 문법이 얼마나 정신 작용을 잘 훈련시켜 원활하게 만드는지를 생각해 보라. 그리고 최초로 언어를 발명하기 위해 쏟았을 것이 분명한, 상상을 초월한 노고와 무한한 시간을 생각해 보라. 또한 이와 같은 고찰을 먼저의 고찰에 결부시켜 보라. 그렇게 하면, 인간의 정신 속에서 이러한 언어의 작용을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수천 세기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어의 기원에 관한 몇 가지 어려움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나의 의견을 완전히 확인해 주는 콩디약 신부의 연구를 인용하거나 되풀이하는 것으로 그치려고 한다. 그러나 이 철학자가 기호설정의 기원에 대해 스스로가 제기했던 문제점을 해결하는 방법을 생각하면, 그는 내가 의문시하고 있는 점, 즉 언어의 발명자들 사이에 이미 일종의 사회가 성립되어 있었다는 점을 가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므로, 나는 그의 고찰을 참고하면서도 그와 똑같이 어려운 문제를 나의 주제에 적합하도록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여기에 나 자신의 고찰을 첨가하고자 한다.
맨 처음에 부딪히는 어려움은, 어떻게 하여 언어가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서로 아무런 의사 소통도 없고 그럴 필요도 전혀 없었다면, 다시 말해서 언어의 발생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 발명의 필요성이나 가능성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 사이의 가정적인 의사 소통에서 언어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서는 조금도 반론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못하며, 이미 일부의 사람들이 저지른 오류를 다시 밟게 되는 셈이다. 그것은, 자연상태에 대해 추리할 경우에 사회 속에서 얻은 관념을 통해서 보기 때문에 가족은 언제나 같은 집안에 모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동시에 그 성원이 많은 공통된 이해관계에 따라 결합되어 있는 우리의 가족들에게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친밀하고 영속적인 결합을 서로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와는 반대로 원시상태에서는 집도 재산도 없고, 우연한 기회에 하룻밤을 함께 지내기 위해 거처를 정하고는 했다. 그리하여 남성과 여성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욕망에 따라 우연히 결합했으므로, 언어는 그들이 주고받아야 하는 의사 소통의 도구로서는 그다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헤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었다. 어머니는 맨 처음에 자기 자신의 필요를 위해 아기에게 젖을 먹였다. 이와 같이 젖을 먹이는 습관이 붙게 되자 점차 자식들이 귀엽게 생각되어 이번에는 아이들을 위해 젖을 먹이게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나 자기 자신의 먹이를 찾아낼 만한 힘을 갖게 되자 곧 그들은 어머니를 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서로의 모습을 잊어 버리지만 않으면 되었기 때문에, 마침내는 그들은 서로 모습을 기억하는 일조차 없게 되었다.
이때 유의해야 할 것은, 자식은 그 모든 욕구를 어머니에게 전해야 하기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에 대해 할말보다는 자식이 어머니에게 할말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언어를 발명하기 위해 더욱 많이 노력해야 하는 것은 자식 쪽이며 사용한 언어는 거의가 자기 자신이 손수 지어낸 것이 되게 마련이었다.
그 결과, 언어는 그것을 말하는 사람들의 수만큼 늘어나며 어떤 독특한 어법에 대해 훈련시킬 시간 여유를 주지 않는 정처없는 방황의 생활이 이것을 더욱 조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린애가 어머니에게 어떤 것을 요구하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말을 어머니가 어린애에게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이미 정해진 말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를 보여주기는 하지만 말 자체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는 조금도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 첫째의 어려움이 일단 극복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리고 순수한 자연상태와 언어의 필요 사이에 놓여 있는 먼 거리를 뛰어넘어 일단 말(parole)이 필요했다고 가정하고 이제 어떻게 해서 그것이 확립되었는지를 탐구해 보자.
이것은 전보다 더욱 까다로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말이 필요했다면, 그들은 말하는 기술을 발견하기 위해 생각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인간의 음성이 우리의 관념을 관습적으로 대변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는가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관념에 대한 이 관습의 대변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는 우리가 여전히 탐구해야 할 과제다.
관념은 감각적인 대상을 전혀 갖지 않으므로 거동이나 목소리로는 나타낼 수 없다. 그러므로 사상을 전달하여 정신과 정신 사이의 교류를 확립하는 기술의 발생에 대해서는 겨우 가능한 한에서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 숭고한 기술은 비록 그 기원으로부터는 멀리 떠나 있지만 철학자들은 그것이 완성되기까지는 아직도 엄청난 거리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설사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가 이 기술을 위하여 중지되었다 하더라도, 또한 그릇된 편견이 학계(아카데미)에서 사라져 버리거나 그 앞에서 침묵하며 아울러 학계가 몇 세기에 걸쳐서 이 까다롭기 짝이 없는 대상에 끊임없이 전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 그 기술이 완성될 것이라고 단언할 만큼 대담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간의 최초의 말,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정력적인 말, 즉 모여든 사람들을 설득하기 전에 인간에게 필요했던 유일한 말은 단순한 자연의 외침이었다. 이 외침은 절박한 경우에는 도움을 바라고 심한 고통을 당했을 때에는 위안을 요청하기 위해 일종의 본능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가장 온화한 감정이 지배하는 일반적인 생활의 분위기 속에서는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인간의 관념이 확대되고 증가하기 시작하여 사람들 사이에 더욱 긴밀한 교섭이 이루어졌을 때 그들은 더욱 많은 기호와 더욱 광범위한 언어를 요구했다. 그들은 더욱 큰 소리로 외치고 거기에 몸짓까지 덧붙였다. 몸짓은 그 본성으로 보아 더욱 표현적이며, 그 의미는 이전의 형태에 의존하는 정도가 적었다. 즉 그들은 눈에 보이는 움직이는 사물은 몸짓으로 표현하고, 귀에 들리는 것은 그것과 흡사한 소리로 표현했다.
그러나 몸짓은, 눈앞에 있고 묘사하기 쉬운 대상과 눈에 보이는 행위 이외에는 의사 표시가 거의 불가능하여 어둠 속이나 다른 물체에 가려 있을 경우에는 쓸모가 없으므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못하고, 주의를 환기하기보다는 오히려 주의를 강요하는 것이므로, 사람들은 드디어 거동 대신에 음성을 음절로 나눠서 발음하는 것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이 음성의 구분은 어떤 특정한 관념에 대해 동일한 대응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정해진 기호로써 그런 관념들을 모두 표시하는 데는 더욱 적합한 것이다.
이와 같은 대치는 공통된 동의에 따라야 했으며, 또한 아직 조금도 연습하지 않은 둔한 기관을 갖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실행하기가 매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서는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방법으로만 행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이 전원 일치의 동의에는 적절한 동기가 있어야 하며 언어의 용법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언어의 절실한 요청을 자각해야만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사용한 최초의 단어는, 사람들의 정신 속에서는 이미 형성되어 언어로 쓰이고 있는 단어보다 훨씬 넓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말을 그 구성 부분(품사)으로 나눌 줄 몰랐으므로 그들은 우선 각각의 낱말에 문장 전체의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주어와 술어, 동사와 명사를 구별하기 시작했을 때--이것만도 상당한 재능을 발휘하여 노력한 결과이지만--처음에는 명사 속에 고유명사밖에 없었으며 부정법의 현재가 동사의 유일한 시작이었다. 형용사에 대하여 말하면, 그 관념은 큰 어려움을 겪은 끝에 겨우 발달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형용사도 추상적인 말이며, 추상은 알기 어렵고 자연스럽지 못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각각의 사물은 그 속이나 종에는 관계없이 특정한 이름을 가졌다. 그 이름을 맨 처음에 정한 자들은 그런 것을 구별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개체는 마치 자연의 화면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립된 것으로서 그들의 정신에 나타났다.
가령, 한 그루의 잣나무가 A라고 불렸다면 다른 잣나무는 B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두 개의 사물에서 비롯되는 최초의 관념은 양자가 같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의 공통점을 관찰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식이 한정되어 있을수록 어휘는 점점 확대되어 갔다. 용어 전체에 따르는 이와 같은 장애는 쉽사리 제거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존재를 공통된 종에 따른 명칭으로 배열하기 위해서는 그런 존재의 특성과 상위점을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관찰과 정의, 다시 말하면 그 시대의 사람들이 지닐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폭넓은 생물학과 형이상학이 필요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반 관념은 많은 말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인식될 수 없으며, 오성은 문장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파악될 수 없다. 동물이 그와 같은 관념을 형성할 수 없고 거기 의존하는 자기완성의 능력을 얻을 수 없는 이유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 마리의 원숭이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한 그루의 호두나무에서 다른 그루의 호두나무로 옮겨갈 때, 이런 과일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갖고 있어서 그 원형을 이 두 개의 개체와 비교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분명히 그렇지 않다. 다만 원숭이가 한 호두를 보았기 때문에 그 호두에서 받은 감각을 기억에 되살리고, 그 원숭이의 눈이 어느 정도 변용되어 그의 미각이 장차 받아들이려고 하는 변화를 그의 미각에 알릴 뿐이다.
모든 일반적인 관념은 순전히 지적인 것이다. 조금이라도 거기에 상상이 섞이면, 그 관념은 곧 개별적인 것이 된다. 나무 일반의 이미지를 머리에 그려보라. 당신들은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신들의 의지와는 반대로, 작거나 크거나 잎사귀가 듬성하거나 무성하거나, 또는 색깔이 옅거나 짙은 나무를 제각기 그려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나무에 공통된 것 이상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면 이미 그것은 나무라고 할 수 없다.
순수한 추상적인 존재는 마찬가지로 마음속에 떠오르거나 언어에 따라서만 생각된다. 삼각형의 정의만이 삼각형의 참된 관념을 준다. 당신들이 마음속에 하나의 삼각형을 그리자마자, 그것은 하나의 특정한 삼각형이지 이미 다른 삼각형은 아니게 된다. 그리고 당신들은 마음속에서 그 삼각형의 선을 분명히 하거나 면에 색깔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일반적인 관념을 갖기 위해서는 문장으로 나타내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상상이 멈추자마자 정신은 말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벌써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만일 최초의 발명자들이 그들의 기존 관념에 따라서만 명칭을 부여할 수 있었다면 결과적으로 최초의 명사는 고유명사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생각해 내지 못한 방법에 따라 우리의 새로운 문법학자들이 그들의 관념을 확대하여 그들의 용어를 일반화하기 시작했을 때, 발명자들의 무지로 말미암아 이 방법은 매우 좁은 범위로 국한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처음에 속이나 종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개체의 명칭을 함부로 많이 만든 것처럼, 이번에는 여러 가지 존재를 그 상위점에 따라 고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속이나 종의 수를 터무니없이 적게 만들었다.
구분을 세밀히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경험과 지식이, 그리고 그들이 사용하기를 원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연구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도 우리의 관찰에서 벗어나 있던 새로운 종이 매일같이 발견된다면 얼마나 많은 종들이 사물을 최초의 외관으로써만 판단하던 사람들에게 가려져 있었던가를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가장 기본적인 분류와 가장 일반적인 개념도 역시 그들의 주의를 받지 못했었음에 틀림없다. 예컨대 그들은 어떻게 물질, 정신, 신체, 양식, 형태, 운동이라는 말을 생각하고 이해하게 되었을까? 우리의 철학자들은 이런 말을 오래전부터 사용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데 매우 고심해 왔다. 그리고 이런 말들을 결합한 관념은 순전히 형이상학적인 것이므로, 그들 미개인은 자연 속에서 그 원형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잠시 멈추고자 한다. 그리고 내 논문의 심사원들에게 여기서 이 글을 읽는 것을 중지해 주도록 요청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명사만의 발명을 근거로 하여, 다시 말해서 말 가운데 가장 발견하기 쉬운 부분을 근거로 하여, 언어가 사람들의 모든 사상을 나타내거나 일정한 불변의 형태를 취하거나 대중들 사이에서 사용되어 사회에 영향을 주기에 이르기까지 아직 언어에 남아 있는 도정을 고찰해 주기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수나 추상어나 동사의 부정사법이나 단음철어나 통사법을 발견하고 문장과 추리를 연결시킴으로써 말에 논리를 부여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지식이 필요했었던가를 생각해 보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리고 나 자신은 점점 더 증대해 가는 곤란에 두려움을 느끼는 동시에 언어가 순전히 인간적인 필요에 따라 탄생되고 확립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거의 입증되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어려운 문제의 논의는 그것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에게 넘겨주려고 한다. 즉 언어가 제정되기 위해서는 이미 결합한 사회가 필요하다는 것과, 사회가 이루어지려면 이미 발명된 언어가 필요한데 이 가운데서 어느 것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이다.
이와 같은 기원의 문제는, 자연이 사람들을 서로의 욕구에 따라 접근시키고 그들에게 언어의 사용을 쉽게 하기 위한 배려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보아, 자연이 얼마나 그들의 사교성을 마련하는 일에 인색하였으며, 또한 그들이 이와 같은 욕구를 위해 시도한 모든 일에 대하여 자연이 기여한 바가 얼마나 적었던가를 알게 한다.
실제로 이와 같은 원시상태에서 원숭이나 늑대가 그 동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 오히려 인간 쪽이 다른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이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설사 그 필요가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어떤 동기에 따라 다른 인간이 이 필요를 충족시켜 주며 최후의 경우에 어떻게 해서 그들이 서로 조건을 결정할 수 있었던가를 생각해 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상태에 놓인 인간처럼 비참한 경우는 없을 것이라고 되풀이하여 일컬어지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또한 내가 입증했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만일 인간이 몇 세기가 지난 뒤에 비로소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사실이라면, 자연을 탓할 일이지 자연이 그렇게 만든 인간을 탓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만일 이 '비참한'이라는 말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그 말은 아무 의미도 지니고 있지 못하거나 처참한 궁핍과 심신의 괴로움만을 의미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나는 마음이 평화롭고 신체가 건강한 자유로운 존재의 비참함이 어떤 종류의 것인가를 설명해 주고자 한다.
나는 사회생활과 자연생활의 어느 쪽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보다 더 참기 어려운 것이 되기 쉬운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거의 자기 삶을 될 수 있는 대로 포기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을 합쳐 보아도, 간신히 이 무질서를 막고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자유로운 상태에 있는 미개인이 일찍이 삶을 한탄하여 자살하려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러므로 좀더 겸허한 마음으로 어느 쪽이 과연 비참한가를 판단해 보기 바란다.
이와 반대로 지식의 빛에 눈이 어두워지고 정념에 시달려 자기 처지와는 다른 처지에 대해 추리하는 미개인이 있었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것이 없을 것이다. 미개인이 잠재적으로 갖고 있던 능력은 그것을 사용할 기회가 있을 때 비로소 발달하게 된 것이 분명한데, 이것은 매우 총명한 신의 섭리에 따른 것이다. 또 그것은 그러한 능력이 적당한 시기에 먼저 나타나 그들에게 없어도 무방한 것이 되지 않으면 무거운 짐이 되거나, 또는 적당한 시기를 맞추지 못하여 필요할 때에 쓸모가 없게 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그는 자연상태에서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을 모두 본능 속에 갖고 있으면, 사회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것을 훈련된 이성 속에 갖고 있었다.
우선 이런 상태에 있는 인간들은 서로 간에 도덕적인 관계도 분명한 의무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선인일 수도 악인일 수도 없었으며 악덕도 미덕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런 말을 물리적인 의미로 해석하여, 개인의 자기보존에 해가 되는 성질의 것을 악덕이라고 부르고 자기보존에 유용한 것을 미덕이라고 부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는데, 그 경우에는 다만 자연의 충동에 가장 거역하지 않는 사람을 가장 유덕한 사람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단어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고서, 공평한 저울을 손에 들고 다음과 같은 상황을 검토하기까지는 그러한 상태에 대하여 우리가 범하기 쉬운 성급한 판단을 중지하고 우리의 선입견을 믿지 않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명인 사이에도 악덕보다 미덕이 더 많은지, 또는 그들의 미덕은 그 악덕이 해로운 이상으로 유익한 것인지, 또는 그들이 가진 지식의 진보는 그들이 서로 행해야 할 선을 배우는 데 따라서 피차에 행하게 마련인 악을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는지, 요컨대 보편적인 의존관계에 복종하여 그들에게 무엇 하나 줄 의무가 없는 사람들에게서 모든 것을 받아내야 하는 처지보다는, 누구에 대해서도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을 기대하지 않는 편이 그들에게 더욱 행복한 처지가 아닐지를 미리 검토해 보아야 한다.
특히, 홉즈와 같이, 인간은 선에 대해 아무 관념도 갖고 있지 않으므로 본래 악하다거나, 또는 미덕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악에 빠지기 쉽다거나, 동료에 대한 봉사를 의무로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거부한다거나, 또는 인간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소유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리석게도 자기가 우주 전체의 유일한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등등의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한다.
홉즈는 자연법에 관한 근대의 모든 정의에 담겨 있는 결함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정의에서 도출해낸 결과는 그 자신도 역시 그것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기가 정한 원리에 대해 추리할 때, 자연상태란 우리의 자기보존을 위한 배려가 타인의 보존을 위해서는 가장 해를 미치지 않는 상태이므로, 이와 같은 상태는 평화롭게 살아가는 데 가장 적합하며 인류에게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고 말했어야 옳았다. 그런데 그는 미개인의 자기보존을 위한 배려의 하나로서, 그 자체 사회의 산물이며 법률의 제정을 필요하게 만든 수많은 정념을 만족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부당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에, 오히려 그 반대가 되는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악인이란 건장한 어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개인이 건장한 어린이인지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또 설사 이것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는 거기서 어떤 결론을 내릴 수 있겠는가?
건장한 미개인이 만일 연약한 사람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고 있다면, 그는 어떤 터무니없는 짓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에게 젖을 늦게 준다고 해서 어머니를 때리고 동생이 자기 비위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목을 조르며 다른 사람의 다리가 자기에게 부딪치거나 방해가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다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장하면서도 타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자연상태에서는 두 가지 모순된 가정이다. 타인에게 의지하고 있을 때에는 인간은 연약한 법이다. 그리고 건장하게 되기 전에 그는 자유로워진다.
홉즈는, 우리 법률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개인이 이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그 원인이, 바로 홉지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미개인이 그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따라서 미개인들은 선인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그들은 악인이 아니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로 하여금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지식의 발달이나 법의 구속이 아니라, 정념의 평온과 악덕을 모르는 데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악한 일을 모른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선한 일을 알고 있다는 것보다 유익하다."
게다가 홉즈가 지나쳐 버린 원리가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는 인간의 자존심이
크게 완화되도록, 또는 이 자존심이 생기기 전에는 자기보존의 욕구가 완화되도록 인류에게 주어진 원리인데,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동포의 괴로움을 보고 싶지 않다는 선천적인 감정에서 자기 행복에 대한 욕구를 완화하게 된다.
나는 인간의 미덕을 아무리 부정하는 자(맨데빌)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유일한 자연적인 미덕을 인정한다고 해서 내가 어떤 만큼 모순을 범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나는 동정심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들처럼 연약하고 여러 가지 불행에 빠지기 쉬운 인간들에게는 걸맞은 성향이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반성에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보편적이고 그만큼 인간에게 유용한 덕이며, 또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동물들도 뚜렷한 징후를 보이는 경우가 있다. 어미가 새끼에 대해 애정을 갖고 그 새끼를 지키려고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물론, 말이 등에서 떨어진 사람을 발로 밟지 않는다는 것 등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동물은 동류의 시체 곁을 지나갈 때에는 으레 불안을 느낀다. 그중에는 일종의 매장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도살장으로 들어가는 가축의 슬픈 듯한 신음 소리는 그가 뼈아프게 느낀 두려운 광경에서 받은 인상이 어떠했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꿀벌 이야기"의 저자가 인간을 동정심이 많고 감수성이 풍부한 존재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예로 한 비통한 죄수의 모습을 쓰기 위해 그가 냉정하고 치밀한 문체에서 이탈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기뻐한다. 그 죄수는 감옥 밖에서 한 마리의 야수가 한 어린애를 그 어머니의 젖가슴으로부터 빼앗아, 날카로운 이빨로 그 아이의 연약한 손발을 물어뜯고, 꿈틀거리는 내장을 발톱으로 찢어발기는 것을 바라본다. 전혀 개인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이 목격자도 어찌 마음에 큰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광경을 보고 기절한 어머니에게나 곧 숨이 넘어가려는 어린애에게 아무런 구제의 손길도 뻗칠 수 없는 사실에 어찌 고뇌를 느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것은 모든 반성에 앞서는 순수한 충동이며, 또 아무리 타락한 풍속이라 하더라도 파괴하기 어려운 자연적 연민의 힘이다. 그 증거로 극장에서는 날마다, 만이 폭군의 위치에 있었더라면 적의 고통을 더욱 무섭게 할 포악한 자가 불우한 사람의 재난을 보고 동정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 인간은 자기가 일으키지 않은 불행에 대해 감수성이 매우 예민하던 저 잔인한 술라와 비슷하며, 또한 자기의 명령으로 날마다 죽어가는 많은 시민들의 울음소리를 태연히 귓전으로 흘리면서 (무대의) 안드로마코스나 프리아모스에게 동정하여 우는 것을 남들이 보지 않을까 하여 어떤 비극의 상연에도 가볼 용기를 내지 않던 저 펠로스의 알렉산드로스와도 비슷하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이야말로 인류가 자연에게서 물려받은 눈물겨운 선물의 증거이다. --유베나리스, "풍자" 제15권 제5장 131--133행
맨데빌은 만일 자연이 인간에게 이성을 밑받침하는 동정심을 주지 않았던들, 인간은 그 모든 도덕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한갓 괴물에 지나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그는 이 유일한 특징으로부터 그가 인간에게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 모든 사회적인 미덕이 비롯되는 것은 알지 못했다. 사실상 관대함이나 자비 또는 인간애란 약자나 죄인 또는 인류 일반에게 적용된 동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친절이나 우정까지도 그것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특정의 대상에 쏠린 변함없는 동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떤 사람이 괴로움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바고 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동정이란 괴로워하는 처지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이 감정은 미개인들 사이에서는 뚜렷하지 않지만 생생하게 드러나 있고, 문명인들 사이에서는 발달되어 있지만 약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와 같은 사실은 결과적으로 나의 주장이 올바름을 확인해 줄 따름이다.
사실, 동정은 고통을 목격하고 있는 동물이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동물과 내면적으로 깊이 동화할수록 점점 강해질 것이다. 그런데 이 일체화는 추리의 상태에서보다 자연상태에서 내면적으로 훨씬 깊었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자존심을 낳는 것은 이성이며, 그것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반성이다. 이 반성에 따라 인간은 자신을 돌아보면서 자기를 훼방하고 괴롭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난다.
인간을 고립시키는 것은 철학이다. 철학 덕분에 인간은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너는 죽을 테면 죽어라. 나는 안전하다"고 몰래 중얼거린다. 철학자의 단잠을 깨워 그로 하여금 침상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은 벌써 사회 전체에 걸친 위험이 될 뿐이다. 사람들이 철학자의 창문 밑에서 그들의 동포를 살해하더라도 철학자에게서 책망을 받는 일은 없다. 살해되는 자와 일체가 되려고 마음속에서 반항하는 자연(동정심)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그는 자기 귀에 두 손을 대고 조금만 이치를 따지면 된다.
미개인에게는 이와 같은 훌륭한 재능이 없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지혜와 이성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언제나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인류 최초의 감정에 경솔히 몸을 내맡긴다. 농민들이 소란을 부리거나 거리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 모여드는 것은 하류층뿐이며, 조심성이 있는 사람은 슬쩍 외면을 한다. 싸움을 말려서 신사 분들이 서로 살해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도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나 거리의 아낙네들이다.
그러므로 동정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은 각 개인이 자기애의 활동을 조절하고 종 전체의 상호 보호에 협력하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괴로워하는 사람을 보고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도 그를 도우려고 나서는 것은 바로 동정 때문이다. 그리고 자연상태에서는 법률과 풍속과 미덕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동정이며, 그 아름다운 목소리에는 누구나 거역하려고 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건장한 모든 미개인이 어딘가 밖에서 자기의 생활 물자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면, 연약한 어린이나 병약한 노인들이 애써 손에 넣은 생활 물자를 빼앗으려는 엄두조차 내지 않는 것이 동정이다. "남이 해주길 바라는 대로 남에게 행하라"는 합리적인 정의의 저 숭고한 격률 대신에, 그다지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아마도 그보다 더 유용한 저 자연의 선에 대한 또 하나의 격률, "타인의 불행을 되도록 적게 하고 그대의 행복을 줄여라"를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품게 하는 것이 동정이다.
요컨대 교육에 대한 여러 가지 격률과는 별 관계가 없더라도 인간이 악을 행하였을 때 느끼는 혐오감의 원인은 정밀한 이론 속에서보다 오히려 자연의 감정 속에서 구해야 한다. 이성에 따라 덕을 얻는 것은 소크라테스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속하는 일일지 모르지만, 만일 인류의 보존이 인류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추리에만 의존해 있었더라면 인류는 벌써 지상에서 자취를 감추었을 것이다.
그다지 활발하지 않은 정념과 대단히 유효한 자제력을 가진 당시의 사람들은, 사악하기보다는 야성적이며 타인을 해치고 싶은 마음보다는 타인에게서 입을지 모르는 피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는 데 더욱 신경을 쓰고 있었으므로 위험함 분쟁에 휩쓸릴 우려는 없었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교섭도 없었다. 따라서 허영심도 존경심도 높은 평가도 경멸도 모르고 지냈다. 그리고 그들은 남의 것과 자기 것이라는 관념이 전혀 없었고, 정의에 대한 참된 관념도 갖고 있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자기들이 폭행을 당할지라도 쉽게 보상받을 수 있는 손해라고만 생각했지, 처벌해야 하는 부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돌을 던지면 덤벼드는 개처럼 본능적으로 무의식중에 저지르는 경우는 별도로 치고, 보복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의 싸움은 먹을 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라도 있지 않는 한, 피를 흘리는 결과를 가져오는 일은 매우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더욱 위험한 일이 한 가지 머리에 떠오른다.
인간의 마음을 움직이는 여러 가지 정념 속에는 서로 이성을 그리워하는 불타는 정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모든 장애를 물리치며, 본래는 인류를 보존하기 위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면 인류를 파멸로 인도하기에 알맞다고 생각될 만큼 무서운 정념이다. 만일 이 방자하고 포악한 격정에 사로잡혀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억제할 줄도 몰라 날마다 피를 흘리면서까지 색정을 위해 싸운다면 인간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우선 정념이 격하면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법률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그 정념이 날마다 우리들 사이에서 일으키고 있는 무질서와 범죄가 이 점에 대한 법률이 불충분함을 이미 보여주고 있지만, 그러한 무질서가 법률 자체와 함께 생긴 것이 아닌지 검토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우에 만일 법률이 그런 무질서를 억제할지라도 그 법률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도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법률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을 해악을 억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선 연애 감정 속에 깃들여 있는 정신적인 것과 육체적인 것을 구별하도록 하자. 육체적인
것이란 이성끼리 서로 결합시키는 바로 일반적인 욕망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것이란 그 욕구를 결정하여 그것을 주로 유일한 대상에 고정시키거나 또는 적어도 그 선택된 대상을 위해 더욱 고도의 정력을 그 욕구에 쏟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인 것이란 사회적 관례에서 생기는 인위적인 감정으로, 부인들이 자기의 지배력을 확립하고 본래 복종해야 할 성을 우위에 두기 위해 이 감정을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교묘히 찬양한다는 사실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이 감정은 미개인들은 결코 가질 수 없는 어떤 가치 또는 미의 관념과 미개인들은 전혀 행할 수 없는 '비교'에 의거해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거의 무가치한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정신이 질서 있고 균형 잡힌 추상적인 관념을 가질 수 없었던 것처럼, 그들의 심정이 이와 같은 관념을 적용함으로써 무의식중에 발생할 수 있는 감탄이나 연애 감정을 품는다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이 그에게 심어준 성격에 따를 뿐이며, 자기가 얻지 못한 취미에는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여성이면 누구나 족한 것이다.
연애의 생리적인 욕구만을 느낄 뿐 감정을 격화시키거나 어려움을 무릅쓰는 저 사랑의 선택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행복한 사람들은, 심한 애욕을 그다지 자주 또는 강하게 느끼지 않으며, 따라서 서로 싸우는 일도 드물고 또 설사 싸우더라도 그다지 잔인한 국면에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심한 해악을 미치는 상상도 미개인의 마음에는 조금도 일어나지 않는다. 각자는 조용히 자연적인 충동을 기다리며, 열광하기보다는 차라리 쾌감을 느끼면서 상대에게 비자발적으로 몸을 내맡긴다.
욕구가 충족되면 그 욕망은 자연히 해소된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연애도 그토록 인간에게 많은 재앙을 가져오게 만드는 저 격렬한 열광을 사회 속에서 획득하게 되었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개인은 그 야수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서로 살육을 거듭할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견해가 경험에 위배되는 만큼 더욱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또한 현존하는 모든 민족 가운데 현재까지 자연상태를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민족인 카리브인들은 언제나 이 연애 감정이 더욱 활발히 움직이는 듯이 보이는,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기후 속에서 살아 가는데도 매우 평온하며 연애 감정 때문에 질투를 느끼는 일도 매우 드물다는 예만 보더라도 더욱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어떤 동물들은, 암컷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수컷들이 치열하게 싸우는 바람에 언제나 보금자리가 피투성이가 되는가 하면, 봄에는 숲속에서 수컷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 오기도 한다. 이것을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자연이 양성의 상대적인 힘 속에 인간 사이의 그것과는 다른 관계를 분명히 설정해 놓은 종은 제외시키고 논해야 한다. 그러므로 수탉의 싸움으로부터 귀납된 결론은 인류에게는 맞지 않는다.
암컷과 수컷의 비율이 가장 잘 지켜지고 있는 종에 있어서 수컷의 수에 비해 암컷의 수가 아주 적거나 암컷이 일정한 기간 이외에는 수컷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경우,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투쟁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제2의 원인도 결국은 제1의 원인에 귀착된다. 왜냐하면, 가령 어떤 암컷이든지 1년 동안에 겨우 두 달 동안만 수컷의 접근을 허용한다면 결국 암컷의 수는 수컷의 6분의 1밖에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경우의 어느 쪽도 인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은 대체로 남성의 수보다 여성의 수가 많으며, 미개인들 사이에서도 여성이 다른 종의 암컷처럼 정열의 시기와 거부의 시기를 따로 갖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 몇몇 동물 사이에서는 종 전체가 동시에 흥분 상태에 들어가므로 공통의 열광과 소란과 무직서와 투쟁의 한때가 찾아온다. 이것은 연애가 결코 주기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인류 사이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동물이 암컷을 손에 넣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것과 같은 일이 자연상태 속의 인간에게도 일어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그리고 설사 그와 같은 결론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분쟁을 함으로써 다른 동물이 파멸되어 버리는 일은 없으므로 적어도 그것이 우리 인류에게 혐오스러운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그와 같은 분쟁에서 오는 손해는 사회 속에서보다 자연상태에서 훨씬 적으리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아직 풍기가 어느 정도 존중되고 있기 때문에 연애하는 남자의 결투나 살인, 그 밖의 더욱 잔인한 사건이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나라들, 영원한 정절의 의무가 다만 간통하는 자를 만들어 내는 데 유용할 뿐이며 정조와 명예의 법률 자체가 필연적으로 음탕을 조장하고 낙태를 증가시키고 있는 나라들에서 그러하다.
결론을 내려 보자. 미개인은 숲속을 헤매며 기술도 없고 언어도 집도 없다. 전쟁도 하지 않고 동맹도 맺지 않을 뿐더러 동포의 도움도 전혀 필요로 하지 않고 그들을 조금도 해치려고 하지 않는다. 개개인을 판별조차 하지 않는 미개인들은 자족적이며 극히 사소한 정념에 따를 뿐, 자기가 처한 경우에 알맞은 것 이외에는 어떠한 감정이나 지식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참된 욕망만을 느끼고, 눈으로 보아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것 이외에는 모두 무시해 버렸다. 그의 지성은 허영심과 마찬가지로 발달하지 못하였다. 우연히 어떤 발견을 사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식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미개인이 그 발견을 남에게 전한다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렇게 되니 기술은 발명자와 함께 사라져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교육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아무런 진보도 없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세대가 이어져 갈 뿐이었다. 그리고 각각의 세대는 언제나 같은 지점에서 출발하므로 하고많은 세기가 초기의 원시적인 상태 속에서 지나가 버렸다. 종은 이미 늙어 버렸는데, 인간은 언제까지나 어린아이 그대로였다.
내가 이와 같은 원시 상태의 가정에 대해 이처럼 길게 언급하는 것은, 오랜 오류와 뿌리 깊은 편견을 타파하기 위해 근원까지 파고 들어가, 불펑등이 설사 자연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근대의 저술가들이 주장하는 바가 얼마나 비현실적이며 설득력을 가질 수 없는가를 참된 자연상태의 화면 속에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을 구별하는 차이 가운데서 몇몇은 자연적인 것으로 생각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관습 속에서 채택하는 여러 가지 생활양식의 산물이라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강한 체질이냐 약한 체질이냐, 이로 말미암아 힘이 강하냐 약하냐 하는 것은 최초의 체질에서 비롯된다기보다 오히려 그 육성 방법이 엄격한가 아니면 유약한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정신력도 마찬가지이다.
교육은 교양이 있는 정신과 교양이 없는 정신 사이에 차이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전자 사이에도 교양에 비례하여 차이가 난다. 왜냐하면, 거인과 노인이 같은 길을 걸어갈 때 두 사람 다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디뎌 놓을 적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회의 여러 계급을 지배하고 있는 교육과 생활양식의 놀라운 다양성을.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생활을 하며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동물이나 미개인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미개인의 생활에서 볼 수 있는 단순성이나 획일성과 비교해 보면, 인간과 자연상태에서는 사회화 상태보다 훨씬 적으며, 아울러 자연의 불평등이 인류에게 있어서는 제도의 불평등에 따라 한층 증대되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이 인간에게 혜택을 베풀어 줄 때, 흔히 말하는 바와 같이 어떤 사람들에게 치우치게 베푼다고 하더라도 그들 사이에 어떠한 상호 관계도 허용하지 않는 상태라면, 가장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들일지라도 남을 희생함으로써 대체 어떤 이익을 얻을 수 있겠는가? 연애가 전혀 없는 곳에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지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거래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무슨 책략이 필요하겠는가? 나는 언제나 강자는 으레 약자를 억압하게 마련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억압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자가 폭력으로 지배하면, 다른 사람들은 다만 그 주먹에 굴복하여 한탄하면서 시달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미개인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들에게는 복종과 지배가 무엇인지 이해시키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어떤 사람이 남이 따온 과일이나 잡아 온 먹이 또는 은신처인 동굴을 빼앗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어떻게 남들을 복종시킬 수 있겠는가? 게다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어떤 주종관계의 사슬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한 나무에서 쫓겨났다면 그때는 다른 나무로 옮겨가면 그만이다. 어떤 장소에서 괴로움을 당하다 못하여 다른 장소로 옮겨가는데 그것을 누가 방해하겠는가? 또 나보다 힘이 강하고 게다가 상당히 타락하고 게으르며 사납기까지 한 사나이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나에게 생활 재료를 제공하라고 강요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는 잠시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자는 동안에도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나를 자기에게 꼼짝없이 매어두려고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도망치거나 그를 잡아 죽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자기가 피하려고 하는 고통이나 그가 나에게 주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자진하여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더라도 그의 경계가 잠시나마 해이해지거나 뜻하지 않은 소리에 얼굴을 돌리기라도 하면, 나는 재빨리 숲속으로 30보쯤 뛰어갈 수 있다. 그리하여 나를 얽어맨 사슬은 끊어지고 그는 두 번 다시 나를 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런 세세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지 않아도, 주종관계란 사람들의 상호의존과 그들을 결합시키는 서로의 욕구가 있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복종시킨다는 것은, 미리 그를 다른 사람이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처지에 두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처지는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으므로, 거기서는 누구나 구속에서 떠나 자유의 몸이며 강자의 법률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불평등은 자연상태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으며 그 영향도 거의 무에 가깝다는 것을 증명했으므로, 이제부터는 그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을 인간 정신의 연속적인 진보 속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자기완성 능력이나 사회적인 미덕, 그밖에 자연인이 잠재적으로 받은 여러 가지 능력이 그 자체만으로 결코 발전할 수 없으며, 그 발전을 위해서는 외부적인 원인--그것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으나, 그것이 없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원시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의 우연한 협력이 필요했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므로, 다음에는 인간이 종을 손상시킴으로써 이성을 완성하고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듦으로써 사악하게 하며 마침내는 인간과 세계를 까마득한 출발점으로부터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지점까지 끌고 올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우연을 고찰하여 결합시켜야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기술하고자 하는 사건들은 형태를 달리하여 발생할 수 있는 것이므로, 추측 말고는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음을 밝혀 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추측은, 그것이 사물의 본성에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개연성 있는 것이며 진리의 발견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때, 논거로서 존립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추측을 통해 내가 연역하려고 하는 결론은 단지 억측에 지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앞에서 확립한 여러 가지 원리에 따르는 한 같은 결론을 제공하지 않는, 또 내가 그것으로부터 같은 결론을 도출할 수 없는 무엇인가 다른 체계를 만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으로써 다음 문제들을 논하지 않은 데 대한 충분한 변명이 될 것이다. 즉 사안의 진실성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떻게 풀릴 것인가 하는 점과, 아주 사소한 원인도 끊임없이 작용하면 놀라운 힘을 미치게 되며 어떤 가설은 사실과 같은 정도의 확실성을 부여받을 수 없는 한편 그것을 파괴할 수도 없다는 점, 그리고 두 가지 사실이 현실적으로 주어지고 그것이 알 수 없거나 그러리라 간주되고 있는 일련의 중간적인 사실에 따라 연결되어야 하고 그것을 연결 짓는 사실을 제시해야 할 때, 역사가 있을 경우는 역사의 범주 속에 있으며 역사에서 풀 수 없을 때는 철학의 범주에서 그것과 같은 목적에 이를 수 있는 유사한 사실을 결정해야 한다는 점, 끝으로 여러 가지 사안의 경우에 보통 사람들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소수의 각기 다른 분류로 사실을 축소시키는 유사성의 영향에 대한 점이다.
이런 논점들이 우리 심사원 여러분에게 참고 자료로 제공될 수 있다면, 그래서 일반 독자들이 그것을 고찰하지 않아도 무방하도록 정리된다면 나로서는 그것으로 만족이다.
제2부
어떤 토지에 울타리를 두르고 "이것은 내 땅이다" 하고 선언할 생각을 가졌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믿을 만큼 단순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최초의 사람은 시민 사회의 진정한 창립자였다. 그 말뚝을 뽑아 버리거나 도랑을 메우면서, "그런 사기꾼의 말을 듣지 마시오. 이 땅에서 나는 온갖 곡식과 과일들은 모두 만인의 것이며 대지는 어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면, 여러분은 신세를 망치게 됩니다." 하고 동포들을 향해 외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얼마나 많은 범죄와 전쟁과 살인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참상과 공포로부터 인류를 구제해 주었을 것인가?
그러나 그 무렵에 이미 사태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없는 데까지 이르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이 사유의 관념은 순차적으로만 발생할 수 있었던 그 이전의 많은 관념에 의존해 있으며, 인간의 정신 속에 갑자기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인류가 자연상태의 이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상당한 진보가 이루어져 다양한 생활 기술을 획득하고 많은 지식을 축적하여 그것을 시대에서 시대로 전달하고 증가시켜 와야만 했다. 그러므로 다시 새롭게 고찰하여 가장 자연적인 순서에 따라 서서히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사건과 지식을 오직 하나의 논점으로 집중시켜 살펴보기로 하자.
인간이 가진 최초의 감정은 자기의 생존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의 최초의 배려는 자기 보존에 대한 것이다. 땅에서 나는 생산물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했다. 그리고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이용하게 되었다. 굶주림이나 그 밖의 욕구가 그에게 그때그때 다른 생활 방법을 경험하게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자기의 종을 영원히 번식시키도록 하는 방법이다. 마음에서 우러난 감정이 전혀 없는 이 맹목적인 경향은 다만 하나의 순수한 동물적인 행위밖에 낳지 못했다. 욕망이 충족되면 남성과 여성은 이미 서로를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자식들까지도 어머니 없이 살 수 있게 되면, 곧 어머니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다.
이것이 원시의 인간 상태였다. 최초에는 순수한 감각에 국한되며, 자연이 준 선물을 거의 이용하지 않고 자연에서 아무것도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동물의 생활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그러자 이윽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나타나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나무가 높아서 그 과일에 손이 닿지 않는가 하면, 동물들끼리 같은 과일을 따 먹으려고 경쟁을 벌이기도 하고 목숨을 빼앗으려는 사나운 동물이 노려보기도 했으므로, 그는 신체의 훈련에 힘써야만 했다. 동작을 민첩하게 하고 빨리 달려야 했으며 싸울 때는 강해야만 했다. 이윽고 나뭇가지나 돌과 같은 자연의 무기가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는 자연의 장해를 극복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다른 동물과 싸우기도 했으며, 자기의 생활 수단을 놓고 다른 사람과 싸우는가 하면 강자에게 양보해야만 했던 것을 다른 데서 보충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했다.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고충도 늘어났다. 토지나 기후 또는 계절이 차이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생활양식에 차이를 가져오게 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짓밟아 버리는 불모의 세월이나 장기간에 걸친 엄동이나 찌는 듯한 여름이 그들에게 새로운 생활 방법을 강요했다. 바다나
강가에서 그들은 실과 바늘을 발명하여 어부가 되고 어식 민족이 되었다. 숲속에서는 활과 화살을 만들어 사냥꾼이 되고 전사가 되었다. 추운 지방에서는 자기가 잡아 온 동물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었다. 우레나 화산 또는 어떤 행운에 따라 그들은 불을 알게 되었고 그것을 추운 겨울에 대비하는 새로운 수단으로 삼았다. 그들은 이 원소를 보존하고 이것을 다시 생산하여 마침내는 지금까지 날것으로 먹던 고기를 조리하는 방법까지 배우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 사물을 스스로에게 또 인간 상호 간에 되풀이하여 적용한 결과, 인간의 정신 속에는 자연히 어떤 관계에 대한 지각이 생기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이들 대소, 강약, 지속, 비겁, 대담 등과 같은 말이나 무의식중에 필요에 따라 비교되는 개념에 따라 표현하는 관계는 마침내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반성,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무의식적인 신중함을 낳게 했는데 그것이 그의 안전에 가장 필요한 경각심을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이와 같은 발전의 결과인 새로운 지식은, 다른 동물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인간에게 자각하게 함으로써 그 우월성을 더욱 증가시켰다. 인간은 동물들에게 올가미를 씌우는 방법을 연습하고 여러 가지 계략으로 그들을 속였다. 그리고 몇몇 동물은 싸우는 힘에 있어서나 달리는 속도에 있어서는 인간을 능가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간은 자기에게 유용한 동물에 대해서는 그 주인이 되고 자기에게 해를 주는 동물에 대해서는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이리하여 인간은 스스로에게 눈길을 보냄으로써 그의 마음속에는 비로소 자존심이 생겨나게 되었고, 존재의 서열을 거의 구분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인류라는 자기의 종이 가장 높은 서열에 위치한다고 생각함으로써 일찍이 개인으로서도 우수함을 요구하려는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당시 그와 다른 인간들과의 관계는 현재 우리 동포들의 관계와는 달라서 다른 동물들만큼 교섭이 빈번하지는 않았으나, 그 동포들이 그의 관찰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그는 동포들 사이나 이성과 자기 자신 사이에서 나타난 일치점에 따라 자신이 아직 느끼지 못했던 일치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자기도 같은 처지에 있었더라면 의당 그렇게 했을 것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감정이 자기와 같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 중요한 진리가 그의 머릿속에 확립되자, 추론법과 마찬가지로 확실하고 그보다 더욱 재빠른 예감에 따라 그들은 규칙을 지키게 되었다. 이 규칙은 그가 자기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그들과 함께 지키기에 합당한 것이었다.
안락의 추구가 인간 행위의 유일한 원동력임을 경험에 따라 배우게 된 인간은, 공통된 이해관계에서 동포의 도움에 의지해야 하는 경우와 그보다는 드물지만 경쟁을 위해 그들을 경계해야 하는 경우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의 경우에, 그는 가축의 무리들처럼 동포들과 결합하거나 기껏해야 일종의 자유로운 협동에 따라 결합하였다. 그 협동은 아무도 구속하지 않고, 그 협동을 이루게 한 일시적인 요구가 존재하는 동안만 지속되었다. 둘째의 경우, 각자는 만일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되면 때로는 폭력에 호소하기도 하고 또는 자기가 약하다고 느끼면 재주나 교지를 써서 이득을 얻으려고 노력했다.
이와 같이 해서 사람들은 어느새 피차 약속을 지키는 것이 서로 이득이 된다는 것을 어느 정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만 현재 눈앞에 보이는 이득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경우에만 국한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앞을 내다본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먼 장래의 일에 마음을 쓰기는커녕 내일의 일도 생각지 않았다.
가령, 사슴을 잡으려고 할 경우에 각자가 자기 위치를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만일 토끼 한 마리가 마침 어떤 사람의 손에 닿는 곳을 지나간다면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토끼를 쫓아 가서 붙잡아 버린다. 그 때문에 자기 동료가 사슴을 놓치게 된다는 사실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와 같은 교섭을 하는 데도, 인간과 거의 비슷하게 떼를 지어 사는 새나 원숭이들보다 세련된 언어가 필요하지 않았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음절이 분명치 않은 외침과 많은 시늉, 그리고 몇몇 모방음이 오랫동안 일반적인 언어를 구성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느 지방에서나 내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이 어떻게 정해졌는가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지만 약간의 분절된 관습적인 음이 첨가됨으로써 그 지방 특유의 언어가 생겨났다. 그러나 그것들은 조잡하고 불완전했다. 그 언어는 오늘날에도 많은 미개 국민이 쓰고 있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시간의 급박한 흐름으로 내가 할 말은 많아지고 초기에 있어서의 진보는 거의 눈에 띄지 않으므로 나는 여러 세기를 화살처럼 날아다닌다. 왜냐하면, 사건의 연속이 느릴수록 그 묘사는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초기의 진보로 말미암아 인간은 더욱 신속히 발전하게 되었다. 정신이 계몽됨에 따라 기능이 점점 향상되었다. 머지않아 되는 대로 아무 나무 아래에서 잠들거나 동굴 속에 틀어박히거나 하지 않게 된 인간들은 견고하고 잘 드는 돌도끼와 같은 것을 만들기도 하였는데, 그것은 나무를 자르거나 흙을 파거나 나뭇가지로 오두막을 만드는 데 쓸모가 있었다. 점차로 사람들은 그 오두막에 진흙 같은 것으로 벽을 바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가 바로 가족이 형성되고 그 구별이 생겼으며 일종의 사유재산을 도입한 최초의 혁명 시대이다. 그리고 그 사유재산은 이미 여러 차례 싸움의 원인이 되었을 것임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러나 처음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그것을 스스로 지켜 나갈 힘이 있다고 느낀 것은 아마도 강자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약자들로서는 그들을 몰아내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모방하는 것이 보다 간단하고 실속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전부터 오두막을 갖고 있던 자들로 말하면, 아무도 이웃의 오두막을 빼앗아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자기 것이 아니라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빼앗으려면 그곳에 살고 있는 가족들과 큰 싸움을 벌이는 모험을 감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자식이 공통된 거처에서 함께 사는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자 처음으로 인간의 마음이 넓어지게 되었다. 함께 생활하는 습성이 가장 친밀한 감정이라 할 수 있는 부부애와 부성애를 낳게 했다. 어떤 가족이든 상호간의 애착과 자유가 그 유일한 유대가 되어 있으므로, 더욱 긴밀히 결합된 하나의 작은 사회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동일했던 남녀의 생활 양식 속에 처음으로 차이가 생기게 되었다. 여성들은 점점 집안에 머물러 있게 되고 오두막과 어린 것들을 돌보는데 익숙해졌으며 남성들은 가족의 생활용품을 찾으러 나갔다. 남성과 여성은 전보다 다소 유약한 생활로 말미암아 그 사나움과 원기를 어느 정도 잃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각자가 뿔뿔이 헤어지면 전과 같이 야수와 싸우기가 불리하지만, 그 대신 공동으로 이 야수들과 싸우기 위해 모이는 일은 전보다 쉬워졌다.
이 새로운 환경 속에서 간소하고 독립된 생활을 하여 매우 한정된 욕구와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발명한 도구를 가진 사람들은 많은 여가를 즐길 수 있었고 그들의 선조들이 알지 못했던 즐거움을 얻기 위해 이 여가를 활용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무의식중에 스스로에게 부과한 최초의 속박이며, 그들이 자손을 위해 마련한 불행의 시초가 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기의 육체와 정신을 연약하게 만들어 갔을 뿐만 아니라 그 안락이 습관이 되자 별다른 기쁨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동시에 그 안락이 실질적인 욕구로 변질되어 버렸으므로, 그것이 없는 고통은 그것이 있을 때 즐거웠던 만큼 더욱 심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안락을 누려도 별로 행복하지 않은 반면에 그것을 잃으면 몹시 불행해졌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각 가족들 속에서 어떻게 하여 무의식중에 말이 사용되어 일정한 언어로 완성되었는가를 전보다 좀더 잘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어떻게 해서 여러 가지 특수한 원인이 언어를 점점 더 필요하게 만듦으로써 언어를 널리 보급시키고 그 발달을 촉진시켜 왔는지 추측할 수도 있다.
큰 홍수나 지진이 인간이 살고 있는 지역을 물과 낭떠러지로 에워쌌다. 지각의 변천이 대륙의 몇몇 부분을 잘라내어 섬으로 만들었다. 대륙의 삼림 속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사람들 사이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섬에서 서로 가까이하면서 함께 살아야 했던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공통된 방언이 형성되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섬의 주민들이 처음으로 항해를 했을 때 대륙에 사는 사람들에게 언어의 사용법을 퍼뜨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회와 언어는 섬에서 비롯되었으며 대륙에 알려지기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는 주장은 적어도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이제 모든 것이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숲속을 방황하던 사람들도 보다 안정된 장소를 얻게 되었으므로 점차 서로 근접하여 무리를 이루고 드디어 각 지방에서 개개의 국가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규칙이나 법률에 따라서가 아니라 풍속과 성격에 따라, 즉 같은 생활 양식이나 음식에 따라 또는 기후의 공통된 영향에 따라 결합되어 있다. 끊임없이 이웃이 되어가는 상태는 드디어 각각 다른 가족간의 결합을 촉진시키게 마련이다.
젊은 남녀들이 이웃이 되어 오두막에 살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자연이 요구하는 일시적인 성적 교섭이, 거듭되는 상호 왕래로 말미암아 즐겁고 영속적인 또 다른 교섭을 낳게 된다. 사람들은 이제 여러 가지 사물을 고찰하고 비교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가치와 미의 관점을 얻게 되고 그것이 다시 좋고 나쁨에 대한 감정을 낳는다. 서로 자주 만나는 동안에 사람들은 벌써 서로 만나지 않고서는 살지 못할 지경이 된다. 정신 속에 일종의 부드럽고 달콤한 감정이 흘러들어, 때때로 극히 사소한 반박을 받게 되면 격렬한 분노를 느낀다. 사랑과 함께 질투가 싹튼다. 불화가 승리를 차지하면 정열 가운데 가장 감미로운 것이 인간의 피로 얼룩지게 된다.
여러 가지 관념이나 감정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정신과 마음이 훈련됨에 따라서, 인류는 점차로 유순해지며 결합이 확대되고 유대가 강화되었다. 사람들은 오두막 앞이나 큰 나무 주위에 자주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연애와 여가의 소산이라 할 수 있는 노래와 춤이, 틈을 내어 모여든 남녀의 즐거움이라기보다는 일거리가 되었다. 그리하여 저마다 남을 주목하고 자기도 주목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여, 이윽고 남들에게서 존경을 받는 것이 하나의 가치를 갖게 되었다. 노래를 가장 아름답게 부르고 춤을 가장 잘 추거나 얼굴이 가장 잘생긴 사람, 가장 억센 사람, 재주가 가장 뛰어난 사람 또는 말을 가장 유창하게 하는 사람이 존경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불평등을 향한, 그리고 악덕으로 가는 첫걸음이기도 했다. 그 최초의 선택을 통해 한편으로는 허영과 경멸이, 또 한편으로는 수치와 선망이 생겨났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효모에서 생긴 발효소가 마침내 행복과 순결에 대해 불길한 합성물을 낳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을 평가하기 시작하여 존경이라는 관념이 그들의 마음속에 형성되자마자,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에겐 존경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면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예의 범절의 의무가 심지어는 미개인들 사이에서도 생기게 되었으며, 고의적인 범행은 모두 모욕으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피해자는 그 범행으로 초래되는 손해는 물론이거니와 그 피해 자체보다도 더 감정을 상하게 하는 자기의 인격에 대한 모욕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나 자기가 받은 모욕에 대하여 자기가 만족할 만큼 벌을 가했으므로 복수도 더욱 포악해지고 살생까지 저지르게 되어 인간은 한층 잔인하게 되었다.
이것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대부분의 미개 민족이 도달한 단계였다. 그리고 적지 않은 몇몇 사람들은 여러 가지 관념들을 충분히 구별하지 못하고 또 이들 민족이 이미 최초의 자연상태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은 본래 잔인하므로 이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규제와 단속이 필요하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한편 원시상태에 있는 사람만큼 온순한 자는 없었다. 당시의 사람들은 자연에 의해 짐승들의 어리석음과 사회인의 꺼림칙한 지식의 중간에 놓여져 본능과 이성에 따라 자기를 위협하는 악으로부터 몸을 수호하는 데 그치고, 자연스러운 연민으로 인해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억제할 수 있었으며 남에게 피해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을 해칠 마음이 우러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현자 로크의 격언과 같이 사유가 없는 곳에 범죄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사회가 시작되고 어느덧 사람들 사이에 여러 가지 관계가 형성되기에 이르자 그들에게는 원시적 구조에서 물려받은 것과는 상이한 성질이 요구되었으며, 도덕이 인간의 행위 속에 도입되기 시작하였다는 점, 그리고 법률이 있기 전에는 각자가 자기가 받은 보복의 유일한 판정자이고 복수자였으므로 순수한 자연상태에 적합했던 선은 새로운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게 되었으며, 범행의 기회가 점점 많아짐에 따라 처벌은 더욱 엄해질 수밖에 없었고 복수의 두려움이 법의 제재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점 등에 유의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전보다는 인간들의 인내심도 약해지고 자연적인 연민도 이미 다소간의 변질을 보이고 있었지만, 이 인간 능력의 발달 시기는 원시상태의 게으름과 현대의 이기주의가 낳은 맹렬한 활동 사이에서 올바른 중용을 유지하였으므로 가장 행복하고 가장 견실한 시기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수록 이 상태가 가장 혁명이 일어나기 어려운, 인간에게 최고로 바람직한 상태였다는 사실, 그리고 인간의 공동이익을 위해서는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던 혐오스러운 우연에 의하지 않았던들 인간은 이 상태에서 이탈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미개인 대부분이 이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인류가 영원히 이 상태에 머물러 있도록 만들어져 있다는 점과 이 상태는 참으로 세계의 청년기라는 점, 그리고 이후의 모든 진보는 표면상으로는 그만큼 개체의 완성으로 향하면서도 사실상 종의 노쇠로 향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처럼 생각된다.
누추한 오두막에서 살고 있는 한, 그리고 짐승 가죽을 가시나 물고기 뼈로 꿰매어 옷을 만들거나 새털이나 조개껍데기로 몸을 치장하고 몸에 울긋불긋 색을 칠하며 활이나 화살을 만들거나 다듬고 잘 드는 돌칼로 몇 개의 고기잡이용 카누나 조잡한 악기를 만드는 데 그치는 한, 요컨대 다른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지 않으며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나 기술에만 전념하는 한, 인간은 그 본성에 따라 자유롭고 건장하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서로 독립된 상태에서 교제를 나누는 즐거움을 계속해서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인간이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되자마자, 그리고 한 사람이 두 사람분의 저축을 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느끼자마자, 평등은 소멸되고 사유가 도입되었으며 노동이 필요하게 되었다. 게다가 광대한 산림은 아름다운 평야로 변했으며 그 평야를 사람들의 땀으로 기름지게 만들어야 했고 머지않아 그곳에서 수확과 함께 노예제도와 빈곤이 싹트고 자라는 것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야금과 농업은 이러한 거대한 혁명을 낳은 두 가지 기술이었다. 시인의 눈에는 인간을 개화시키고 아울러 인류를 타락시킨 장본인은 금과 은이지만, 철학자가 볼 때 그것은 철과 밀이다. 따라서 그 어느 것도 아메리카의 미개인들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덕분에 그들은 여전히 미개인으로 남아 있었다. 다른 민족도 이 기술의 한쪽에만 힘을 기울였던들 여전히 야만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럽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 비해 보다 빠르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보다 꾸준하게 보다 고도로 문명화된 가장 큰 이유의 하나는, 아마도 철뿐만 아니라 밀도 역시 유럽에서 가장 많이 생산해 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어떻게 철을 알고 사용하게 되었는가를 추측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도 알지 못한 채 광산에서 철광석을 캐내고 용융시키는 방법을 스스로 생각해 내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광산은 나무도 풀도 없는 불모의 땅에서나 찾아볼 수 있으며 자연이 우리에게 치명적인 비밀을 알리지 않으려고 무척 고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우연히 불이 일어났기 때문에 그 방법이 발견됐다고 말할 수도 없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용해된 금속성의 물질을 토해내어 관찰자들에게 이 자연의 작용을 모방하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으리라고 추측되는 화산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아울러 우리는, 그들이 그토록 어려운 일을 계속하여 언젠가는 그로부터 얻어 볼 수 있는 이익을 그토록 오랜 옛날부터 예상했다면, 그들에겐 이만 저만한 용기와 선견지명이 있지 않았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자질은, 그들의 정신 속에 애초에 상정되고 있었던 상태보다 더욱 많은 경험이 쌓이지 않으면 거의 육성될 수 없는 것이다.
농업의 경우는 어떤가. 농업의 실행이 확립되기 훨씬 이전에도 그 원리는 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나무나 풀에서 생활용품을 얻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고 있었으므로, 자연이 식물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방법을 그들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본격적인 농업 생산은 아마도 훨씬 나중에야 이뤄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냥이나 낚시질과 함께 인간에게 식품을 제공해온 나무가 인간의 손길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밀의 사용법을 몰랐거나 그것을 재배할 도구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것 말고도 장래의 필요를 내다볼 힘이 없었거나 자기 노동의 산물을 타인이 빼앗아 가지 못하도록 막는 수단이 없었거나 했기 때문이다.
전보다 슬기로워진 그들은 날카로운 돌과 뽀족한 막대기를 가지고 자기 오두막 주위에 몇 포기의 야채나 풀뿌리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은 밀의 재배법을 알고 대량으로 수확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갖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농사일에서 나중에 더 많은 수확을 얻기 위해서는 처음에는 얼마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이러한 마음가짐은 앞에서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저녁에 필요한 물건을 아침에 생각해 내는 데도 몹시 애를 써야 하는 미개인의 정신 수준으로서는 아주 생소한 것이었다.
인류가 농업 기술의 연마에 전념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다른 여러 가지 기술의 발명이 필요했다, 철을 녹이고 단련하기 위해 사람의 손이 필요하게 되자, 곧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또 다른 사람이 필요했다. 노동자의 인원수가 증가할수록 생활 물자를 제공하기 위한 일손은 점점 적어지는 반면에 그것을 소비하는 입은 늘어만 갔다. 자기가 생산한 철을 식량과 교환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해 내기 위해 철의 이용 방법을 발견해 내고자 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경작과 농업 기술이, 다른 한편으로는 금속을 가공하고 그 용도를 넓히는 방법이 확립되었다.
토지의 경작은 필연적으로 토지의 분배라는 문제를 가져왔으며, 일단 사유재산이 인정되자 비로소 정의의 규칙이 생겼다. 각자의 소유를 확인해 주기 위해서는 먼저 각자가 무엇인가를 소유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비로소 미래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사람들은, 누구나 장차 잃을지도 모르는 재산을 어느 정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됨에 따라 자기가 남에게 끼칠지도 모르는 피해가 자기에게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음을 걱정하게 되었다.
이제 막 생겨난 사유의 관념이 육체 노동 이외의 것에서 유래한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으니만큼, 이러한 기원은 더욱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이유는, 자기가 직접 만들지 않은 것을 자기 소유로 만들기 위해서 과연 인간은 자기의 육체 노동 말고 도대체 무엇을 구 물건에 가할 수 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경작자에게 그가 경작한 토지의 산물을 적어도 수확기까지 소유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 다시 말하면 토지에 대한 권리를 해마다 보유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오직 그 자신의 노동뿐이다.
이와 같이 계속적인 점유가 반복되면 그것은 쉽사리 사유로 전환된다. 그로티우스에 따르면, 고대인들은 케레스에게 입법자라는 명칭을 주고, 이 여신에게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올린 제전에 '테스모포리아'라는 명칭을 부여함으로써, 토지의 분배가 새로운 종류의 권리, 즉 자연법에서 생겨난 권리와는 다른 사유라는 권리를 창출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만일 사람들의 재능이 균등하여 예컨대 철의 사용과 식량의 소비가 언제나 정확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면 모든 사물은 이 상태에서 언제까지나 평등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평등을 유지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곧 붕괴되었다. 힘이 센 사람은 보다 더 많은 일을 하였고 손재주가 있는 사람은 자기의 노동을 교묘히 이용하였으며 머리 좋은 사람들은 노동을 절감시키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경작자는 더욱 많은 철을 필요로 하였고 대장장이는 더욱 많은 밀을 필요로 했다. 그리하여 똑같이 일을 하면서도 어떤 사람은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으나 어떤 사람은 간신히 먹고 살 수 있을 뿐인 지경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하여 자연의 불평등은 새로운 원인의 결합에 따른 불평등과 더불어 부지불식간에 발전되었으며, 상황의 차이에 따라 발전한 사람들 사이의 차이는 더욱 현저해지고 더욱 오랫동안 지속되어 사람들의 운명에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면 그 뒤의 일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나는 계속되는 기술의 발명이나 언어의 발달, 재능의 시험과 활용, 재산의 불평등, 부의 이용 또는 남용, 그리고 그 뒤에 계속되는 일체의 왜곡에 대해서는 일일이 서술하지 않았다. 그 정도는 각자가 쉽사리 보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 새로운 질서 속에 놓인 인류를 일별해 보는 데 그치고자 한다.
보라! 우리 인간의 모든 능력은 발전하였고 기억력과 상상력은 마음껏 나래를 폈으며, 이기심은 이해에 눈뜨고 이성은 활발하게 되었으며, 정신은 도달할 수 있는 한 거의 완성의 정점에 도달해 있다. 이제야 자연의 모든 요소는 활동을 시작하여, 각자의 지위와 운명은 재산의 다과나 다른 사람에게 봉사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힘뿐만 아니라 정신이나 아름다움, 체력, 능력, 장점이나 재능 등에 기초해서도 확립되어 있다.
그리고 이런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라야 남의 존경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 소질들을 실제로 갖추거나 적어도 갖고 있는 체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는 자신의 실제 상태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실체와 외관이 전혀 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구별을 통하여 그럴듯한 위엄과 기만적인 책략과 이에 따르는 모든 악덕이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한편 이전에는 자유롭게 독립하여 살아가던 인간이 이제는 무수한 새로운 욕구로 말미암아, 이를테면 자연 전체에 특히 그 동포에게 복종하게 되어, 결국 그는 그 동포의 주인이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노예가 되었다. 즉 그가 부유하다면 동포에 대한 봉사가 필요하고 가난하다면 동포의 원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중간쯤 되는 자도 동포가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언제나 그 동포가 자기 운명에 관심을 갖도록, 실질적으로나 표면상으로 그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것이 자기들의 이익이라는 생각을 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결과, 그는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만적이고 교활하며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는 난폭하고 냉혹하다. 그리고 자기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협하여 복종시킬 수 없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자기에게는 그리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섰을 때 그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을 악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탐욕스러운 야심이나 절박한 필요에서라기보다는 남보다 우위에 서고 싶어 자기 재산을 늘리고자 하는 갈망 때문에 인간은 서로를 해치려고 하는 옳지 못한 방향으로 기울게 된다.
게다가 더욱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때때로 친절로 위장된 가면을 쓰는 경우가 있는 만큼 더욱 위험하다고 할 수 있는 은밀한 질투심이 일어나게 된다. 요컨대 한편으로는 경쟁과 대항심이,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의 대립이 있게 되는데 이 모두가 남을 희생시켜 자기 이익을 도모하려는 은밀한 욕망일 뿐이다. 이 모든 악은 사유가 낳은 최초의 결과이며 이제 자라나기 시작한 불평등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는 동반자이다.
부를 나타내는 기호(화폐)가 발명되기 전에는 부는 주로 토지와 가축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유일한 재산이었다. 그런데 상속 재산의 수나 범위가 아울러 증대되어 땅 전체를 덮고 서로 경계를 접하게 되자, 타인을 희생시키지 않고서는 이미 자기 재산을 늘릴 수 없게 된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무력했거나 무관심했기에 제대로 상속을 받지 못한 자들은, 주위에서는 모두 변화되고 있는데 그들만이 전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지만, 가난뱅이가 되어 부득이 자기의 생활용품을 부자에게서 얻거나 빼앗아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사람들 각자의 다양한 성격에 따라 지배와 굴종 또는 폭력과 약탈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한편, 부유한 자 쪽에서도 남을 지배하는 즐거움을 알게 되자 그들은 곧 다른 모든 쾌락을 경멸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부자들은 새로운 노예를 얻기 위해 기종의 노예를 부려 이웃 사람들을 정복하고 예속시키려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일단 사람의 고기 맛을 알게 된 저 굶주린 늑대가 다른 먹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인간을 잡아먹으려는 생각만을 하는 것과 같았다.
이렇게 해서 가장 강한 자 또는 가장 가난한 자가 그의 힘 또는 빈곤을 타인의 재산에 대한 일종의 권리--그들이 볼 때 고유권과 등가인--로 전환함에 따라 평등은 깨어져 버렸고 뒤이어 더욱 무서운 무질서가 초래되었다. 즉 이렇게 해서 부자의 횡령과 가난한 자의 약탈과 만인이 방종한 정념이, 자연스러운 연민의 정과 아직은 약한 정의의 목소리를 질식시켜 사람들을 욕심쟁이와 야심가와 악한으로 만들었다. 가장 강한 자의 권리와 최초 점유자의 권리 사이에 끊임없이 분쟁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투쟁과 살해에 따라 종식될 수밖에 없었다.
갓 태어난 사회화 상태는 더할 나위 없이 무서운 전쟁상태로 변해 버렸다. 타락하고 비탄에 빠진 인류는 이미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었고 불행하게도 스스로 얻은 것을 버릴 수도 없게 되었으며, 자기에게 명예를 가져다주는 모든 능력을 남용함으로써 치욕만을 더하게 되어 드디어는 스스로 멸망 직전에 이르렀다.
이토록 새로운 악에 따라, 부유한 자도 가난한 자도 오직 재물에서 떠나기를 원하며 일찍이 탐내던 것을 이제 와서는 혐오한다. -- 오비디우스, "변신보" 제11권 제5장 127행
인간이 이와 같은 비참한 상태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재해에 대하여 반성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부자들은 자기들만이 일체의 비용을 부담해온 지루한 전쟁이 결국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손해만을 주었는가를 곧 깨달았을 것이다. 그 전쟁에서 생명의 위험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것이었지만 재산의 위험은 개인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그 횡령에 어떤 색채를 부여하든 그것은 단지 일시적이고 부당한 권리를 내세우고 있는데 불과하며, 또 그 횡령은 오직 힘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것을 다시 힘에 의해 약탈당해도 그들에게는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간계나 술책만으로 부자가 된 자도 자기의 사유재산에 대해 좀 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울 수는 거의 없었다. 예컨대 "이 울타리를 세운 것은 나다. 나는 내 노동으로 이 땅을 손에 넣었다"고 우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누가 당신에게 경계선을 정해주었느냐고 누군가가 그에게 대꾸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당신에게 요청한 적도 없는 것을 무슨 권리로 우리에게 하도록 요구하느냐?" 고 하거나 "당신은 주체를 못 할 정도로 많이 갖고 있지만 그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당신의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는가?" 또는 "당신이 자기 몫 이상을 공동의 생활용품으로부터 취하여 그것을 소유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만장일치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자 자기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효과적인 논리도 없고 충분한 자위력도 없으며, 사람 한 명쯤은 쉽사리 짓밟아 버릴 수는 있어도 도적의 무리에게는 오히려 짓밟힘을 당하기도 하며, 피차의 질투심 때문에 약탈이라는 공통된 목적으로 뭉쳐진 적에 대항하여 자기의 동지들을 규합할 수도 없어 혼자서 여럿을 상대해야 하는 이 부자는, 드디어 절실한 필요에 따라 일찍이 인간이 궁리해 내지 못했던 가장 심오한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를 공격한 자들의 힘을 자기를 위해 사용하고, 자기의 적을 자기의 방어자로 만드는 일이다. 이 계획은 자연법이 자기에게 불리한 입장에 있는 만큼 자기에게 유리한 다른 격률을 그들에게 주입하거나 다른 제도를 그들에게 마련해 주자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의도에서, 모든 이웃 사람들이 서로 적대하여 무장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소유를 그들의 욕구와 마찬가지로 부담스럽게 만드는 상황, 즉 부유함이나 가난함 속에서 모두가 안전을 바랄 수 없는 상황의 두려움을 그들에게 설명하고 나서, 부자는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웃 사람들을 이용할 수 있는 그럴듯한 이유를 쉽사리 찾아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약자를 억압으로부터 보호하고 야심가를 억제하며 각자에게 그의 소유를 확실히 해주기 위해 단결하자. 정의와 평화의 규칙을 정하자.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하며 어느 쪽도 두둔함이 없이 강자와 약자를 평등하게 피차의 의무에 따르게 하여, 이를테면 운명의 장난을 보상하려는 규칙이다. 요컨대 우리의 힘을 스스로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리지 말고 그것을 하나의 최고권력에 집중시키자. 현명한 법에 따라 우리를 다스리고 사회의 모든 성원을 보호 방위하며 공동의 적을 물리치고 영원히 우리를 단합시키는 권력으로!"
야만스럽고 기만당하기 쉬운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이런 설명조차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들 사이에 피차 해결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중재자를 꼭 필요로 하기는 했으며, 욕심과 야심이 지나쳐 통솔자 없이는 더 이상 생활을 유지해 나갈 수도 없는 실정이었다. 누구나 자기 자유를 지켜나갈 심산이었으나, 사실은 스스로가 쇠사슬을 향해 달려가는 꼴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정치제도의 이점을 인식할 만한 이성은 갖고 있었지만, 거기 따르는 위험을 내다볼 만큼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험을 가장 잘 통찰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을 이용하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다. 게다가 가장 현명한 자들까지도, 마치 부상자가 신체의 나머지 부분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잘라내지 않을 수 없듯이 자기들이 갖고 있는 자유의 일부를 다른 부분을 보존하기 위해 희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회와 법률의 기원은 결국 이와 같은 것이었거나 당연히 이러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사회와 법률은 약자에게는 새로운 구속을 부여하고 부유한 자에게는 새로운 힘을 줌으로써 자연의 자유를 영원히 파괴해 버리는가 하면, 사유와 불평등의 법률을 영구히 고정시키고 교묘한 약탈을 당연한 권리로 확립시켜 몇몇 야심가들의 이익을 위해 온 인류를 영원한 노동과 예속과 빈곤에 복종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한 사회가 성립하기 이해서는 다른 많은 사회의 성립이 필요하다는 것, 또 단결된 힘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스스로도 역시 단결해야 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사회는 급속도로 그 수가 증가하고 영역이 확대되어 이윽고 지구 표면 전체를 뒤덮어 버렸다. 그리하여 세상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속박에서 해방될 수 없게 되었으며, 누구에게나 자기 머리 위에 매달려 있는 검이 떨어질 때 목을 움츠려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내기란 벌써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
이렇게 하여 시민법이 각 공동체 성원들의 공통된 규칙이 되었으므로, 자연법은 서로 다른 사회 사이에서만 유지되었다. 이로써 자연법은 암묵적인 약속에 따라 국제법이란 명칭으로 통상을 가능하게 하고 자연의 연민을 대신하여 인간에게 봉사한다는 제한된 자격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자연의 연민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행사하고 있던 거의 모든 힘을 사회와 사회 사이에서는 상실하고 말았기 때문에, 이미 여러 민족을 구분 짓고 있는 상상에 따른 경계선을 뛰어넘어 그들을 창조한 최고의 존재를 본떠서 인류 전체를 선의 가운데 포옹하려는 몇몇 위대한 세계 시민적인 인간의 영혼 속에서만 존재할 따름이었다.
이와 같이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여전히 자연상태에 머물러 잇는 다양한 정치체들은 이윽고 각 개인이 그 자연상태에서 벗어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편을 느끼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태는 그들 대규모 단체 사이에서는, 그 구성원 각 개인 사이에서 있었던 것보다 더욱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자연을 전율케 하고 이성의 숨통을 막는 국민 간의 전쟁이나 전투, 살육, 복수, 그리고 인간의 유혈로 얻은 명예를 미덕으로 간주하는 저 두려운 편견이 이러한 상태에서 생겨나게 되었다.
가장 성실한 사람들조차도, 필요하다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하나의 의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마침내는 이렇다 할 이유도 없이 서로 수천 명씩 살해하며 자연상태의 인간들일 지구의 온 지역에서 몇 세기에 걸쳐 자행한 것보다 더 많은 살육이 이제는 하루 동안의 전투 가운데 일어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도시가 점령되었을 때는 더욱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가 서로 다른 사회로 분할된 데서 예상할 수 있었든 최초의 결과이다. 그러면 화제를 바꾸어 이러한 사회들의 제도에 대하여 알아보기로 하자.
나는 몇몇 사람들이, 정치적 사회 국가는 강자의 정복이나 약자의 단결에서 유래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위에서 든 원인 가운데 어느 것을 택해도 내가 여기서 증명하려고 하는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러나 지금 내가 말하는 원인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로, 앞에서 말한 강자의 정복이란 경우에, 정복의 권리는 그 자체 아무런 권리도 아니므로 다른 권리를 설정할 근거가 될 수 없었다.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를 구가하던 국민이 자진하여 정복자를 자기의 우두머리로 선택하지 않는 한 그 정복자와 피정복자인 국민은 언제까지나 서로 전쟁상태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때까지는 설사 항복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폭력에 따라 강요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조금 전에 든 가설에서는 진정한 사회나 정치, 그리고 강자의 법 이외의 어떤 법률도 존재할 수 없다.
둘째로, 약자의 단결이라는 경우를 놓고 볼 때, 이 강하고 약하다는 말 자체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소유권 또는 선점권의 확립과 정치적 지배의 확립 사이에 놓인 중간 시기에서는 '강하다'거나 '약하다'는 말보다 '가난하다'거나 '부유하다'는 말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법률이 생기기 전에는, 누군가가 자기와 동등한 자를 복종시키려고 한다면 상대방의 재산을 빼앗거나 자기 재산을 얼마간 상대방에게 나눠주는 도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로, 자유 이외에는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가난한 자가 그들이 교환 조건으로 얻은 것은 전혀 없는데도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재산을 자진하여 포기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이와 반대로 부자는, 이를테면 자기 재산의 모든 부분에 대하여 민감하므로 그들에게 손해를 주는 편이 훨씬 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손해를 면하기 위해 더욱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요컨대 사물의 발생은 그것으로 말미암아 손해를 입는 사람들보다는 덕을 보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는 정부는 질서가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철학과 경험의 부족으로 눈앞의 불편을 없애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 밖의 불편에 대해서는 그것이 코앞에 닥친 뒤에야 겨우 시정할 생각을 했다. 가장 현명한 입법자들이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불구하고 정치상태는 언제나 불안정했다. 왜냐하면, 국가의 정치상태는 거의 우연의 소산이며 출발부터가 좋지 않았던 까닭에 시간이 흐름에 따라 결점이 발견되고 해결 방법이 시사되었지만 원초적인 결함을 보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훌륭한 건물을 세우기 위해서는 류쿠르고스가 스파르타에서 한 것처럼 우선 부지를 청소하고 모든 낡은 건축 재료를 제거해야 하는데, 사람들은 언제나 수리만 해나갔다. 초기의 사회는 모든 개인이 준수할 것을 서약하며 온 공동체가 그 서약의 이행을 보증하는 몇 가지 규약만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조직이 얼마나 무력하며, 또한 공중만이 증인이자 재판관이어야 했을 때 범죄자들이 얼마나 손쉽게 판결이나 형벌을 피할 수 있었는가는 경험을 해야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사람들이 이렇듯 수월하게 법망을 벗어날 수 있게 되고 게다가 불편과 무질서가 끊임없이 증가하게 되자 드디어 사람들은 위험스럽게도 동적인 권위를 사적인 개인에게 위임하고 국민의 의결 사항에 대한 복종을 위정자들에 대한 복종으로 강요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연합체가 결성되기 전에 통치자가 먼저 선출되었다거나 법률보다 앞서서 법률의 집행자가 존재했다는 것은 반박할 가치도 없는 가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애당초 아무런 미련 없이 절대군주에게 무조건 몸을 내맡겼다거나, 또는 자존심 세고 쉽게 복종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공동의 안정을 위해 생각해 낸 최초의 수단이 노예 상태 속에 뛰어드는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이치에 맞는 이야기라고 할 수 없다. 실제로 그들이 억압으로부터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러니까 그들의 존재 요소인 재산이나 자유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자기보다 높은 인간을 내세우려 하겠는가?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사태는 한쪽이 다른 쪽의 자의에 맡겨지는 것이므로, 통치자의 도움을 빌어 지키려고 했던 것들을 모두 통치자의 손에 완전히 맡겨 버린 것은 양식에 위배되는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처럼 소중한 권리를 양도한 대가로 그들은 과연 통치자로부터 이와 대등한 그 무엇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만일 그 통치자가 국민의 안전한 생활을 수호한다는 구실로 그 권리를 자기에게 양도하라고 말하기라도 했다면, 그는 곧 우화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답변을 듣게 되었을 것이다. "적이 우리에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인민들이 통치자를 세우는 이유는 자기들을 그 우두머리에게 예속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것은 모든 국법의 기본적인 격률이다.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에게, "제가 왕후를 섬기는 것은 주인을 갖게 될까 두려워서입니다" 하고 말했다.
자유에 대한 사랑에 관하여 정치가들은 철학자들이 자연상태에 대해 말한 것과 같은 궤변을 곧잘 늘어놓는다. 그들은 자기 눈에 보이는 사물을 가지고 아직 본 적이 없는 전혀 상이한 사태를 판단한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이 노예 상태를 참아 나가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예속에 이끌리는 자연적인 성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유란 순결이나 미덕과 같은 것으로서 인간이 그것을 지니고 있을 때만 그 가치를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을 잃어버리면 그것에 대한 취미도 곧 잃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은 생각해 보지도 않는다. 기원전 5세기경의 스파르타 장군인 브라시다스는 스파르타의 생활을 페르세폴리스의 생활과 비교하는 태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네 나라의 행복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당신은 우리나라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오."
잘 훈련된 말은 참을성이 강하여 채찍이나 박차를 잘 견디지만, 길들이지 못한 말은 재갈만 가까이 대도 갈기를 곤두세우고 발버둥을 치며 날뛰기 쉽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래인은 문명인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이는 멍에를 향해 절대로 목을 내밀지 않는다. 그리고 평온한 굴종보다는 파란만장한 자유를 택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굴종에의 자연적인 성향이 있는지의 여부를 노예가 되어 버린 민중의 타락에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니라, 모든 자유인들이 억압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행한 기적적인 행동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나는 전자가 쇠사슬에 매어 누리고 있는 평화와 안식을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며 "비참하기 짝이 없는 굴종을 평화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자유를 잃어버린 사람들로부터 심한 멸시를 받고 있는 저 자유라는 유일한 재산을 지키기 위해 쾌락과 안식, 부와 권력, 심지어는 생병까지도 희생시키는 것을 볼 때, 그리고 자유롭게 태어난 동물이 속박을 몹시 싫어하여 우리의 쇠창살에 머리를 부딪는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또한 벌거벗은 많은 미개인들이 유럽인의 관능적인 쾌락을 경멸하고 오로지 자기들의 독립을 지켜나가려고 굶주림과 불, 칼과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볼 때, 자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은 노예들이 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몇몇 사람들이 전제 정치와 모든 사회가 그로부터 발생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부권에 대해 말한다면, 로크나 시드니의 반증을 이용할 것도 없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점을 유의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즉 이 세상에 온건한 권력처럼 전제 정치의 잔인한 정신에서 거리가 먼 것은 없다. 그것은 명령하는 자보다도 복종하는 자의 이익을 더 많이 염두에 두고 있다. 그리고 자연법에 따르면, 부친은 그의 도움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동안만 그들의 주인이며, 이 기간이 지나면 양자는 평등해지게 된다. 자식은 부친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며, 아버지를 존경할 의무는 있어도 그에게 복종할 의무는 없게 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은혜에 대해서는 분명히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누구라도 그것을 강요할 권리는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치사회(국가)는 아버지의 권력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권력이 주로 정치사회로부터 유래한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자식들이 그의 곁에서 모여 살 때까지는 아버지로 인정되지 못했다. 아버지가 사실상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는 재산은 자식들이 그에게 의존하도록 매어두기 위한 사슬이다. 그리고 자식들이 아버지의 의지에 언제나 경의를 표시하여 재산 상속을 받을 만하다고 생각되지 않는다면, 아버지는 자기 뜻대로 그들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국민들은 그 전제군주로부터 이와 비슷한 혜택을 기대할 수 있기는커녕, 그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이 모두 군주의 것이거나 또는 적어도 군주가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으므로 그들은 자기 재산 가운데서 군주가 적산하듯 주는 것을 하나의 은혜로 받아들여야 할 입장에 서게 되었다. 군주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그들을 살려주는 것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셈이다.
이와 같이 권리를 통해 사실을 검토해 나가면, 전제 정치의 자발적인 성립이라는 주장에는 확실성이나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양자 가운데 어느 한쪽에만 의무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아무런 부담도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 쪽만이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어 있는 이러한 계약의 유효성을 내세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고 하겠다. 이 저주스러운 제도는 오늘날에도 현명하고 선량한 군주들, 특히 프랑스 국왕들의 제도와는 매우 인연이 먼 이야기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 국왕들이 내린 칙령의 곳곳에, 특히 루이 14세의 명령에 따라 1667년에 왕의 이름으로 발표된 유명한 칙령의 다음과 같은 문장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권자는 그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 반대의 명제가 국제법의 진리이며, 아첨배들이 수시로 이 진리를 공격할 때에도 선량한 군주들은 언제나 이것을 국가의 수호신으로 옹호했다, 현자 플라톤과 더불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 일이겠는가? '국왕의 완전한 행복은, 군주가 그 신민의 신임을 얻어 신민들이 복종하고 군주는 법률에 복종하며 그 법률은 공정하고 언제나 공공의 복지를 지향하는 데 있다.'"
여기서 나는, 자유는 인간의 여러 가지 능력 가운데서도 가장 고귀한 것이므로 잔인하고 무분별한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이 대지의 창조주가 부여한 가장 귀중한 것을 무작정 버려두거나 창조주가 금하고 있는 모든 죄악을 마구 저지르는 행위는, 인간의 자연성을 타락시켜 짐승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며 자기 존재의 창조자마저 욕되게 되지 않을까를 따질 생각은 없다. 또한 이 숭고한 장인이 볼 때 자기가 만든 아름다운 작품이 파괴당하는 광경을 보는 것보다 그것에 대한 자신의 명예가 손상 당하는 것에 더 큰 분노를 느끼지 않을까를 규명할 생각도 없다.
로크의 뒤를 이어, "어떤 사람도 자기를 제멋대로 다루는 전제적인 권력에 굴종할 정도로 자기의 자유를 팔아 넘길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기 소유가 아닌 자기 생명을 팔아넘기는 일이 될 것이므로" 하고 선언한 바르베라크의 권위 있는 말도 원한다면 무시하겠다. 다만 이렇게까지 자기의 품위를 떨어뜨려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이 무슨 권리로 자손을 똑같은 불명예에 복종시킬 수 있는지, 또는 자손들이 그들의 은혜를 입어 얻게 된 것이 아닌 자유라는 재보--세상을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없다면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를 그들은 무슨 권리로 자손들 대신 버려둘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한다.
푸펜도르프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합의나 계약에 따라 재산을 남에게 양보하듯 누군가를 위해 자기의 자유를 버릴 수도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추리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첫째로 내가 양도하는 재산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 되며 그것이 남용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으나, 남이 내 자유를 남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중요한 일이며, 억지로 강요되어 저지르는 악에 대해 책임을 질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범죄의 도구가 되는 위험을 무릅쓸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소유권은 사람 사이의 합의와 제도에 불과하므로 누구나 자기의 소유물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데 반해 생명의 자유와 같은 천부적인 선물은 그렇지 않다. 그것들은 누구나 소유할 수 있지만 그것을 버릴 권리까지 있는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즉 양자 가운데 한 쪽을 제거하면 인간의 품위는 저하되고, 다른 쪽을 제거하면 인간의 존재는 소멸된다. 이 세상의 어떤 재산으로도 그 양자 가운데 어느 것도 보상할 수 없으므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것을 내버리려고 하는 것은 자연과 이성을 동시에 침해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설사 사람들이 재산과 마찬가지로 자유 또한 양도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권리를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부친의 재산을 향유하게 된 자식들에게는 그 차이가 상당할 것이다. 자유는 그들이 인간이라는 자격으로 자연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던 선물이므로, 어느 부모에게도 자식들로부터 이 자유를 빼앗을 수 있는 권리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예제도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자연에 거역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이 권리를 영속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을 변경시켜야만 한다.
법률가들은 노예의 자식들이란 태어나면서부터 노예가 된다고 엄숙히 선고하였는데, 이것은 바꿔 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서 태어나지 않는다고 단정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렇게 볼 때 정부는 단지 전제적인 권력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제적인 권력은 정치의 타락이 극에 달한 형태에 불과하며 결국은 정부를 유일한 강자의 법으로 이끌고 말지만, 애당초 그런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정부가 세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정부가 이런 방식으로 세워졌다고 한다면 그 권력은 본래 비합법적인 것이므로 사회의 제반 법률에 대해서도, 결과적으로 제도의 불평등에 대해서도 적절한 기초를 제공해 줄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정부의 기본적인 계약이 갖는 성질에 대해서는 깊이 들어가지 않고, 여기서는 다만 세상의 통념을 채택하는 데 그치고자 한다. 그것은 정치적 집단의 성립을 인민과 그들이 택한 통치자 사이의 현실적인 계약이라고 보는 견해다. 이 계약의 양 당사자는 그 속에 명시된 법규들을 준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쌍방의 결합은 확고하게 된다.
인민은 사회적인 관계라는 측면에서는 그들 모두의 의지를 오직 하나의 의지로 결합시켰으므로, 이 의지가 표명되고 있는 모든 조항은 각각 기본적인 법률이 되어 국가의 전체 성원들에게 예외없이 의무를 부가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법률의 집행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위정자의 선택과 그 권력을 규정하고 있다. 이 권력은 정치 구조(constitution)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이면 어느 것에나 적용되지만 그것을 변경까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법률과 그 집행자들을 존경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명예가 주어지고, 위정자에게는 그들이 선정을 위해 기울인 노고에 대한 보상으로서 여러 가지 특권이 부가된다. 그 대신 위정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권력을 오직 위탁자의 의향에 따라 행사하고, 각자가 자기의 소유물을 언제나 안전하게 향유할 수 있게 하며, 어떤 경우에도 자기의 이익보다는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가 갖는 폐해를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알게 되거나 인간의 마음을 통해 예상하기 전에는 이 정치 구조의 유지를 감시하는 임무를 받은 자들이 그 유지에 가장 큰 이해관계를 갖는 만큼, 그 정치 구조는 가장 훌륭한 것으로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위정자의 직분과 그 권리는 오직 기본적인 법률을 토대로 해야만 성립될 수 있으므로, 그 법률이 폐기되기라도 하면 위정자는 곧 비합법적이 되며 국민이 그들에게 복종할 의무는 이미 없어져 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가의 본질을 구성한 것은 위정자가 아니라 법이므로 각자는 당연한 권리에 따라 자연적인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적어도 이 점에 대해 조금이라도 주의를 기울여 반성한다면, 그것은 새로운 사실에 따라 확인될 것이다. 아울러 계약이 갖는 본질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언제고 취소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가령 계약자의 충실한 이행을 보증하거나 그들에게 피차의 약속을 이행하도록 강요할 수 있는 우월한 권력이 없다면, 계약 당사자만이 자기들의 소송을 판결하는 심판자로 남게 되고, 당사자는 상대가 그 계약 조건을 어기거나 그 조건이 자기에게 적합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면 언제고 곧 계약을 취소할 권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폐기의 권리는 이 원리에 입각하는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제도의 인간적인 요소만을 생각해 볼 때 일체의 권력을 장악하고 그 계약에서 오는 모든 이익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는 위정자가 권력을 버릴 권리마저 보유하고 있다면, 통치자들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해야 하는 인민들에게 종속을 벗어날 권리가 있음은 더욱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위험한 권력이 필연적으로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불화와 끊임없는 혼란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분명히 해주고 있다. 즉 인간의 정부는 단순한 이성보다 더욱 견고한 토대를 얼마나 필요로 하고 있었는가, 그리고 주권을 행사하는 위험스러운 권리를 신민들로부터 박탈할 수 있는 저 신성불가침의 성격을 주권의 권위에 부여하기 위해 신의 의지가 개입되는 것이 얼마나 공공의 안녕에 필요했던가 하는 점이다.
비록 이 점을 제외하고는 종교가 인간에게 베풀어준 이득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도 모든 인간이 종교를 다소의 폐해까지도 포함하여 소중히 생각하고 발전시켜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는 광신 때문에 흘려야 했던 피보다 훨씬 많은 피를 절약하게 해주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내린 가설의 실마리를 풀어보자.
여러 가지 정부의 형태는 그 기원을 살펴보면, 그것이 수립되는 시기에 개개인 사이에서 볼 수 있었던 불평등의 크고 작은 차이에서 비롯된다. 능력이나 덕망, 재산인 개인적인 영향력에 있어서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만이 위정자로 선출되고 이로써 국가는 군주정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만일 다 같이 출중하지만 서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사람들이 몇 명 있다면, 그들은 함께 선출되어 귀족정을 형성하였다. 재산이나 재능이 그다지 불균형을 이루지 않고 자연상태에서 그리 멀리 이탈하지 않은 사람들은, 최고의 행정권을 공동으로 보유하는 민주정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이 형태 가운데서 어는 것이 사람들에게 가장 유리한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증명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법률에만 복종했고 어떤 사람들은 결국 주인에게 굴복했다. 시민들은 자기의 자유를 수호하려고 했다. 그리고 신민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지 못한 행복을 남들이 누리는 데 분개하여 이웃 사람들로부터 자유를 빼앗을 궁리만 했다. 요컨대 한쪽에는 부와 정복이 일어났고 다른 쪽에는 행복과 덕이 일어났다. 이와같이 정부 형태는 서로 달랐지만 누가 어떤 관직을 맡을 것인가는 처음에는 모두 선거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부가 아직 우세한 힘을 갖지 못했을 때는 자연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재능과, 일에 있어서는 경험을, 토의에 있어서는 침착성을 보여주는 노령층에게 우선권이 주어졌다.
헤브라이인 장로들, 스파르타의 게론테스, 로마의 원로원, 그리고 우리의 세뇨르(Seigneur)라는 말의 어원 자체가 옛날에는 노인층이 얼마나 존경받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선거를 하면 으레 노인들이 뽑히게 되었고 그럴수록 선거를 빈번하게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이에 따르는 폐단도 점점 심각해지게 되었다. 즉 어느새 협잡이 개입되고 도당이 형성되어 당파의 갈등이 심해졌으며 마침내는 내란이 일어나 시민들의 피가 국가의 행복을 참칭하는 자들을 위해 바쳐지고 사람들은 다시 옛날의 무정부 상태로 굴러떨어질 지경에 이르렀다.
야심에 찬 통치자들은 이와 같은 사태를 이용하여, 자기 가족의 테두리 속에 지위와 직권을 영구화하였다. 인민은 이미 종속과 휴식과 생활의 안락에 길들여져 있었고 이미 쇠사슬을 끊을 만한 힘도 없었으므로 자기들의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 그 예속상태를 강화하는 데 동의했다. 이와 같이 하여 세습제를 확립시킨 통치자들은 위정자의 직분을 가산처럼 생각했으며, 애당초 국가의 행정관에 지나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스스로를 국가의 소유자로 보는 데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동포 시민들을 노예라고 부르고 그들을 가축처럼 자기 소유물로 생각하며 스스로를 신과 동등한 존재, 즉 '왕 중의 왕'으로 자칭하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이 모든 변혁 속에서 어떻게 불평등이 발달해 왔는가를 더듬어 보면, 법률과 소유권의 설정이 그 제1기이고 관직의 설정이 제2기이며, 끝으로 제3기는 합법적인 권력에서 전제적인 권력으로 변화하는 시기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부자와 가난뱅이의 상태가 제1기에서 용인되고, 강자와 약자의 상태는 제2기에서, 그리고 제3기에서 주인과 노예의 상태가 용인되었는데, 이 제3의 시기가 바로 불평등의 최후 단계이며 결국은 다른 모든 시기가 귀착되는 한계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새로운 변혁들이 일어나 정부를 완전히 해체시키거나 이것을 합법적인 제도로 접근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이 진보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체의 성립 동기보다는 오히려 현실 속에서 취하는 형태와 그것이 나중에 일으키는 여러 가지 장해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제도를 필요로 하게 만드는 악덕은 사회제도의 남용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악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스파르타--이곳에서는 법률이 주로 아동의 교육을 감독하는 데만 관계되며, 류쿠르고스가 따로이 법률을 제정할 필요가 거의 없을 만큼 미풍양속을 세워 놓았다. 법률은 대체로 정념만큼은 강하지 못하므로 인간을 억제할 수는 있지만 변화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를 유일한 예외로 간주하면, 부패하지도 변질되지도 않고 언제나 정확하게 그 제정의 목적에 따라 운영되는 정부는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는 데 세워졌다고 볼 수 있으며, 또 아무도 법망에서 벗어나지 않고 위정자의 직분을 남용하지도 않는 나라는 위정자도 법률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상의 차별은 필연적으로 시민들 사이에 차별을 가져온다. 인민과 통치자들 사이에 증가되어 가는 불평등은 이윽고 개개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감지되며, 정념이나 재능에 따라 그리고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남용된다. 위정자는 비합법적으로 권력을 탈취할 경우에 그 일부를 양도해 주어야 하는 부하를 만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시민들이 압제를 용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맹목적인 야심에 이끌려 자기 위보다는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독립보다는 권위에 복종하는 편을 더 좋아하고 그들이 타인을 쇠사슬에 묶기 위해 자진하여 쇠사슬에 묶이는 데 동의하는 동안뿐이다.
인간을 부리려는 야심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자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또 아무리 교묘한 정치가라도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예속시키는 데 성공을 거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운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기에게 유리하게 되느냐 불리하게 되느냐에 따라서 거의 무작정 지배하기도 하고 봉사하기도 하는 야심가이자 비겁한 자들 사이에서는 불평등이 얼마든지 확대되어 간다. 그리하여 인민의 눈이 멀어 지도자들이 가장 열등한 자들을 향해 "위대할지어다, 그대와 그대의 가문은!" 하고 한마디 던지기만 하면, 곧 그는 자기 눈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서 멀어질수록 점점 지위가 올라갔다. 원인이 모호하고 불확실할수록 결과는 점점 위대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일가 가운데 게으른 자의 수가
많아질수록 가문은 점점 유명해졌다.
여기서 좀 더 상세히 들어간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것을 쉽사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설사 정부가 간섭하지 않더라도 개개의 인간이 동일한 사회 속에 결합되어 서로 비교하고 끊임없이 이용하는 가운데 찾아볼 수 있는 차별을 고려하게 되면, 곧 그들 사이에 신용과 권위의 불평등이 불가피하게 생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차별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통상 부, 신분, 지위, 권력, 개인적인 장점이 주요한 구분이 되며 여기에 따라 사람들은 사회 속의 자기 위치를 차지하므로, 나는 이들 서로 다른 세력의 조화나 충돌이 국가 구성의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가장 정확한 자료임을 증명할 수 있다. 즉 이 네 가지 불평등 속에서 개인적인 성질의 것이 다른 모든 것의 기원이므로, 나는 부가 다른 불평등들이 귀착되는 근원적인 불평등임을 보여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가장 직접적인 안락을 위해 유용하며 가장 쉽사리 전할 수 있으므로 인간은 그 밖의 모든 것을 사들이기 위해 이 부를 자유롭게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서만 우리는 각 민족이 원시제도로부터 떨어져 있는 정도와 타락의 궁극점으로 향하게 된 과정을 상당히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다. 나는 모든 사람을 번민하게 만드는 저 평판과 명예와 특권에 대한 보편적인 욕구가 얼마나 자주 재능이나 능력을 훈련시키고 비교하는지를, 그리고 그 욕구가 얼마나 정념을 자극하고 증대시키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욕구가 얼마나 사람들을 서로 경쟁하게 하고 대항하게 하는지, 아니면 차라리 그들을 적대시켜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언제나 같은 투기장을 달리게 함으로써 날마다 얼마나 많은 실패와 성공, 그리고 재앙을 불러일으키고 있는지를 보여줄 수도 있다. 그리고 자기를 내세우고 싶어하는 열망, 거의 언제나 우리를 흥분하게 하는 저 남보다 돋보이려는 열광 덕분에 우리는 인간 속에 있는 최선의 것과 최악의 것, 즉 우리의 미덕과 악덕, 우리의 학문과 오류, 정복자와 철학자를 동시에 가질 수 있음을, 다시 말해서 소수의 선한 것과 더불어 다수의 악한 것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다.
끝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것도 증명해 보이려고 한다. 즉 대다수의 사람들이 암담함과 비참함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몇몇 권력자와 부자가 권세와 부의 절정을 누리고 있다는 것은, 여타의 사람들이 없어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것만큼 후자가 이것을 향유하고 있기 때문이며, 인민의 불행이 끝나는 순간 아무런 조건이 바뀌지 않더라도 그들의 행복도 끝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목들은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큰 저술의 소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저술에서는 자연상태의 여러 가지 권리와 비교하여 유리한 점과 불리한 점이 모두 평가될 것이며, 그런 정부의 본질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여러 가지 변혁에 따라, 오늘날까지 불평등이 보여 왔고 또한 앞으로 몇 세기에 걸쳐서 보여줄지 모를 모든 상이한 양상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될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대비하여 애쓴 결과 오히려 내부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억압이 끊임없이 증대되는 가운데, 억압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억압이 과연 어디까지 미칠 것이며, 또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합법적인 수단이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가를 전혀 모르고 있음도 아울러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시민의 권리나 인민의 자유가 조금씩 사라져 가고, 약자들의 요구가 반항 어린 불평으로 취급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 수완으로, 공동의 이해를 수호하는 명예를 인민들 가운데 돈으로 고용한 부분에만 부여함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과세의 필요성이 생기며 실망한 농민이 평화로울 때에도 자기 밭을 떠나 삽 대신 칼을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명예에 관해서도 불길하고 기묘한 규칙이 생길 것이다. 조국의 방위자가 마침내 조국의 적이 되어 동포 시민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들이 자기 나라의 억압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그대가 많이 우리를 향해 우리 형제의 가슴에, 우리 부친의 목에, 또는 임신한 내 아내의 배에 단검을 꽂으라고 명령한다면, 비록 본의는 아니더라도 우리에게 못 할 짓은 없노라. --루카수스, "파르사르스" 제1편 37~38행
신분과 재산의 불평등, 정념과 재능의 차이, 무익한 기술과 해로운 기술, 보잘것없는 학문으로부터 이성에도 위배되고 행복과 덕에도 한결같이 위배되는 무수한 편견이 생겨날 것이다. 우리는 집결되어있는 사람들을 분리시켜 약하게 만들 수 있다면, 겉으로는 조화를 이루는 듯이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분열의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라면, 또한 권리나 이해의 대립을 통해 여러 계급들에게 서로의 불신과 증오감을 불어넣음에 따라서 그 여러 계급을 억압하는 권력을 강화할 수 있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조장하는 통치자들도 볼 수 있다.
바로 이 무질서의 변혁 속에서 그 추악한 머리를 내밀게 되는 전제 정치는 국가의 어느 부문이건 훌륭하고 건전한 것이 눈에 띄면 닥치는 대로 삼켜 버려 마침내는 법률과 국민까지 발아래 짓밟고 국가의 폐허 위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이 최후의 변화가 일어나기 전의 기대는 혼란과 재해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은 전제 정치라는 괴물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려 인민은 이미 통치자도 법률도 갖지 못하게 되고 오직 전제군주만을 갖게 된다. 이 순간부터는 풍습이나 미덕이 문제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명예에 대하여 아무런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전제 정치가 지배하는 곳에서는 전제군주 이외에는 다른 어떤 주인도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전제 정치가 입을 열자마자, 거기에는 고려해야 할 성실이나 의무는 이미 없고 극도로 맹목적인 복종만이 노예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미덕이 된다.
이것이 불평등의 마지막 도달점이며, 한 바퀴 돌아서 우리가 출발한 기점에 닿게 되는 종국의 지점이다. 여기서는 모든 개인이 다시 평등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이며 신민은 벌써 주인의 의지 이외에는 아무런 법률도 갖지 않고, 주인은 자기의 정념 이외에는 아무 규범도 갖지 않으므로 선의 관념이나 정의의 원리가 다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는 모든 일이 다만 최강자의 법률로, 다시 말하면 하나의 새로운 자연상태로 환원되어 있는데, 이 자연상태가 이전의 자연상태와 다른 점은, 후자가 순수한 자연상태인 데 비해 전자는 지나치게 부패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상태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으며 정부의 계약은 전제 정치에 따라 파기되어 있으므로, 전제군주는 자기가 최강자로 있는 동안만 지배자이며, 사람들이 그를 추방하려고 한다면 그는 그들의 이러한 폭력에 대해 전혀 저항할 수 없게 된다.
술탄을 죽이거나 퇴위시키는 폭동도, 그가 전에 신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제멋대로 처리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행위이다. 오직 힘만이 그를 지탱하고 있으므로 그를 타도하는 것도 힘뿐이다. 모든 일은 이와 같이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빈번한 혁명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아무도 타인의 부정을 한탄할 수 없으며, 다만 자기 자신의 경솔과 그 불행을 한탄할 뿐이다.
이렇게 해서 인간을 자연상태에서 사회화 상태로 이끌었음에 틀림없는, 망각되고 상실된 행로를 찾아내고 추적한다면, 내가 방금 보여준 중간적인 상태들과 더불어 시간에 쫓겨 생략했거나 나의 상상이 미치지 못한 상태들을 복원한다면, 조심스러운 독자는 누구나 이 자연과 사회의 두 상태를 떼어놓는 광대한 공간에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독자들은 다름 아닌 이러한 완만한 연속운동 속에서 철학자들이 해결할 수 없는 무수한 도덕적, 정치적 문제의 해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에 따라 인간들도 서로 다르므로, 독자들은 디오게네스가 인간을 한 사람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존재하기 이전 시대의 인간을 자기와 같은 시대의 인간 속에서 찾았던 데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독자들은, 카토는 자기 시대에 적합한 인물이 못 되었기 때문에 로마 및 자유와 함께 멸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위대했던 이 인물은 5백 년 전에 태어났더라면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세계를 놀라게 하는 데 그치고 말았던 것이다.
요컨대 인간의 정신과 정념이 얼마나 부지불식간에 바로 자신들의 본성을 변질시키는지, 왜 우리의 욕망과 쾌락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새로운 대상을 원하는지, 어찌하여 원초적인 인간이 점차 소멸돼 가고 사회가 우리들의 눈에 이들 모든 새로운 관계의 산물이자 자연 속에 아무런 참된 토대도 갖지 않은 부자연스러운 인간과 거짓 정념의 결합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인지를 독자들은 모두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우리가 반성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관찰에 따라 완전히 확인할 수 있다. 즉 미개인과 문명인은 심정과 기질이 근본적으로 크게 다르기 때문에, 한쪽에게 최고의 행복을 주는 것이 다른 쪽은 절망에 빠뜨릴 정도다. 전자는 다만 안식과 자유만을 호흡하고 무위도식만을 바란다. 그런가 하면 스토아학파의 완전한 평정(아타락시아)까지도 미개인의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깊은 무관심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와 반대로 문명인은 어제나 활동적이고 땀을 흘리면서 돌아다니며, 더욱 힘든 일을 찾기 위해 노심초사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일한다. 때때로 살기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는 경우도 있으며, 불후의 명성을 얻기 위해 삶을 버리기도 한다. 그는 자기가 미워하는 권력자나 경멸하는 부자들에게 아첨하여 그들로부터 봉사하는 명예를 얻기 위해서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자기의 비열함과 그들의 보호를 의기양양하게 자랑한다. 그리고 자기의 노예 상태를 과시하고 그런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자들을 경멸한다.
유럽의 대신들이 하는 일--비록 힘은 들지만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은 카리브인에게 과연 어떻게 보일 것인가? 이 게으른 미개인은 선행을 하고 있다는 즐거움을 가지고도 위안받을 수 없는 그같은 두려운 생활보다는 차라리 비참하게 죽는 것을 선택하리라. 그러나 카리브인들의 경우,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권력과 명성에 신경을 쓰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정신 속에서 '권력'과 '명성'이라는 말이 일정한 의미를 가져야 할 것이며, 또 자기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평판을 상당히 중요시하여 자기 자신보다 오히려 타인이 입증해 주는 것에 행복을 느끼고 만족할 수 있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 모든 차이의 진정한 원인은 바로 이런 데 있다. 즉 미래인은 자기 자신 속에서 살고 있는데, 사회인은 언제나 자기의 외부에 존재하며 타인의 의견 속에서만 살아간다. 그리고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느낌은 타인의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훌륭한 도덕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경향으로 말미암아 선악에 대해 그렇게까지 무관심하게 되어 버렸으며, 그 어느 것이나 외관만이 중시되었기 때문에 명예나 우정이나 도덕, 그리고 때때로 악덕까지도 그것을 자랑할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하게 되어,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인공적이고 가식적이 되어 버렸는가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요컨대 그처럼 많은 철학이나 인간애나 예절이나 숭고한 격언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언제나 나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타인에게는 던지면서도 스스로에게는 묻지 않으며, 기만적이고 경박한 외관, 즉 덕이 없는 명예, 지혜 없는 이성, 행복 없는 쾌락을 갖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를 따지는 것은 나의 주제에 속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그것은 조금도 인간의 본원적인 상태가 아니며, 이와 같이 우리의 자연적인 경향을 모두 변형, 변질시키는 것은 사회의 정신과 사회가 낳은 불평등이라는 것을 입증하기만 하면 된다.
지금까지 나는 불평등의 기원과 발전, 정치적인 사회의 성립과 폐해를, 인간의 본성에서 연역할 수 있는 한, 오로지 이성의 빛에 따라 그리고 통치권에 대해 신권의 재가를 내리는 신성한 교의와는 무관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을 통해 우리는, 불평등은 자연상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인간 능력의 발달과 정신의 진보에 따라 성장, 강화되며 소유권과 법률 제정에 따라 안정되고 합법화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실정법에 따라서만 인정되는 인위적 불평등은, 그것이 신체적 불평등과 균형이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언제나 자연법에 위배된다는 결론도 나오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모든 문명국 사이에 널리 유포되어 있는 불평등의 형태를 이 점과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충분한 해답을 내려준다. 왜냐하면, 자연법을 어떻게 규정하건 간에, 아이들이 늙은이에게 명령을 내리거나 어리석은 자가 현명한 인간을 지도하거나,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활필수품도 손에 넣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데 몇몇 사람들만 흥청거리며 살아가거나 하는 등등은 모두 분명히 자연법에 위배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