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행운의 과학적 발견 이야기 1
제1장 사상 최초의 스트리킹
제2장 신세계가 열리다
제3장 말라리아에 걸린 인디언과 킨키나나무
제4장. 사과는 왜 수직으로 떨어지는가?
제5장. 개구리의 다리와 전지
제6장. 우유 짜는 여인과 천연두 왁친
제7장. 원소발견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
제8장. 마취제 발견의 영예를 둘러싼 투쟁
제9장. 유기화학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다
제10장. 영상기록의 시작
제11장. 천연고무와 합성고무
제12장. 분자도 좌수형과 우수형은 크게 다르다
제13장. 합성 연료와 합성 안료를 둘러싸고
제14장. 꿈에 의해 탄생한 분자의 구조식
제1장 사상 최초의 스트리킹
희랍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기원전 3세기 시라큐스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지레 즉, 아르키메데스의 나선양수기(이것은 지금도 이집트에서 나일강의 물을 관계용으로 양수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의 발명과 그 유명한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라고 이름 지어진 유체정역학의 법칙 등을 발견한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아르키메데스가 공중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뛰어나와, 시라큐스의 거리를 "유레카! 유레카!(알았다! 알았다!)"라고 외치면서 대낮에 거리로 달려나갔다는 일화는 너무도 유명하다. 아르키메데스는 무엇을 발견했는가? 너무 급하게 뛰어나가느라고 옷을 입는 것조차 잊게 할 정도로 그를 흥분시킨 것은 무엇이었던가? 이 질문의 대답에는 아르키메데스가 그날 목욕탕에 들어갈 때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시라큐스의 왕이면서 아르키메데스의 가까운 친구이자 아마도 친척이었을 히에로 왕은 금 세공사에게 순금 왕관을 만들도록 의뢰했었다. 완성된 왕관을 받아든 왕은 금 세공사가 순금을 전부 왕관에 사용했는지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금 세공사가 순금 대신에 은이나 동같은 그다지 귀중하지 않은 금속을 섞어 쓰고 그 여분의 황금을 횡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금에 은이나 동을 썩는 방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이와 같은 혼합물, 즉 합금은 제법 많은 양의 다른 금속이 섞여 있어도 순금과 다름없이 호화로운 황금색을 발한다. 순금은 24K라고도 한다. 장식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은 14K로서, 순금 58%와 다른 금속 42%를 썩어 만든 합금인데 거의 식별할 수가 없다고 한다. 히에로 왕은 당시 유명한 수학자이자 친구인 아르키메데스를 불러서 이 왕관이 진짜 황금인지, 그래서 금 세공사에게 건네준 귀중한 황금이 전량 사용되었는지를 조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기원전 3세기 무렵에 화학분석법은 수학만큼 발달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유능한 수학자이자 기술자였던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이전에 구나 원주 같이 규칙적인 입체의 부피를 구하는 계산식을 풀이했었다. 그는 히에로 왕의 왕관 부피만 알 수 있다면 왕관 전체가 순금인지 다른 금속하고 합금된 것인지를 판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물속에 발을 넣는 순간, 욕조 가장자리에서 넘치는 물을 보게 죄자 넘치는 물의 부피는 자기 몸 중에서 물속에 들어간 부분의 부피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그는 자신의 발이나 왕관처럼 불규칙한 물체의 부피를 계산하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물을 가득 채운 용기 속에 왕관을 넣고 넘친 물의 양을 계측해 보았다. 넘친 물의 양은 왕관의 부피와 똑같았다. 히에로가 금 세공사에게 5파운드(2.27키로그램)의 순금을 주었다고 치자. 이 입방체의 한 변은 4.9센치미터, 부피는 118세제곱센치미터 이다. 만일에 금 세공사가 이 황금을 전량 사용하고 다른 금속을 섞지 않았다면 왕관의 무게는 2.27키로그램이 되어야 하며, 그 부피는 형태가 다르더라도 본래 입방체와 같은 118세제곱센치미터이어야 한다. 만일 금 세공사가 금을 절반만 사용하고 나머지 1.135키로그램을 같은 무게의 은으로 대용했다면 합금인 왕관의 무게가 2.27키로그램이 되더라고 그 부피는 달라지는 것이다.
은의 밀도는 순금의 절반 정도니까 만일 왕관의 부피를 계측할 수 있다면 그것은 118세제곱센치미터보다 커야 옳을 것이다. 밀도라는 것은 물질의 단위부피당 무게(정확하게는 질량)로, 금의 밀도는 금속 중에서 가장 크다. 금의 밀도는 1세제곱센치미터당 19.3그램, 은은 10.5그램, 동은 더 작아서 1세제곱센치미터당 8.9그램이다. 그러무로 금 50%와 은 50%로 된 2.27키로그램의 왕관의 부피는 167세제곱센치미터가 되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공중목욕탕에서 우연한 발견을 한 후, 히에로 왕의 새 왕관 부피를 제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왕관을 물속에 넣어서 용기 밖으로 배출되는 물의 부피를 재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결국 왕관의 부피가 순금으로 되었을 경우보다 훨씬 부피가 큰 것을 알아차린 왕은 그 부정직한 금 세공사를 재판에 걸어 처형했다. 아르키메데스에게는 행운의 발견(세렌디피티)이었으나 금 세공사에게는 행운이 아닌 불행이었던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옷도 입지 않고 목욕탕에서 알몸으로 뛰쳐나갈 정도로 흥분한 원인은 어디에 있던가? 그것은 바로 어떤 형태의 고체라도 그 부피를 잴 수 있다는 획기적인 방법을 세렌디피적으로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제2장 신세계가 열리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콜럼버스는 동양으로 향하는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해 서쪽으로 항해하다가 동양이 아닌 신세계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이 발견은 분명 우연이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행운이기도 했지만 이것을 과연 세렌디피티라고 할 수 있을까? 콜럼버스의 탐험담에는 그의 유명한 항해만큼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연의 요소가 몇 가지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46년경 이탈리아의 제노바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비아에서 수학과 해양천문학을 비롯한 자연과학을 공부했다. 아들인 페르난도가 쓴 전기에 의하면 콜럼버스가 처음 배를 탄 것은 15세 무렵으로 그리스에서 포르투칼, 스페인, 잉글랜드, 아이슬란드까지 간 것 같다.
그는 포르투칼에서, 유럽이나 아프리카 서쪽인 대서양을 처음 탐험한 헨리 항해와의 소유로 되어있는 배의 선장 딸과 결혼했다. 콜럼버스는 장인과 다른 선원들의 해도들을 공부하여 동양으로 이르는 새로운 항로를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항해해서 찾아내고 싶어했다. 현대의 탐험가 투르 하이여달에 의하면 콜럼버스보다 4세기쯤 전에 그린랜드의 노르웨이 사제가 로마 교황청으로 보낸 편지 내용을 콜럼버스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는 서쪽으로 항해를 해서 육지를 발견했다고 쓰여 있었다.
콜럼버스는 자신이 계획하고 있는 야심적인 탐험에는 왕가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당시 포르투칼이나 스페인, 프랑스, 잉글랜드 등을 통치하고 있던 군주들에게 원조를 청원했다.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이 청원을 거절하였지만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과 페르디난드왕은 콜럼버스의 청원을 들어 주었다. 그 결과 신대륙의 대부분이 영국이 아닌 스페인의 것이 되었다.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 발견에서 또 하나의 우연은 지구의 크기에 관한 추정의 오판이었다. 지구는 공처럼 둥근모양이라는 콜럼버스의 신념은 옳았으나 그 크기를 너무 과소평가해서 아시아 대륙이 스페인보다 조금 더 크고 스페인의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긔 추정은 당시 가장 신뢰받고 있던 지구의에 기인된 것이었으나, 그 지구의의 설계자인 마틴 베하임인 지구 둘레계산에 프톨레미의 계산법을 사용했으며, 그것은 사실상의 값보다 25%나 작은 것이었다(베하임의 지구의는 현존해 있으며 지금은 독일의 누렘베르크 박물관에 있다). 약 3,000마일의 항해 끝에 여러섬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이것들을 일본의 남쪽에 있는 동인도에 속한 것으로 간주했으며, 어째서 일본을 보지 못했을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현지인을 인디언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이에 유래되고 있으나 실제로 동인도나 일본은 수천 마일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콜럼버스에 의한 신대륙의 발견은 세렌디피티의 한 예일까? 나는 이제까지 몇몇 사건들을 세렌디피티적 별견으로 바꿔가는데 있어서 통찰력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콜럼버스는 분명 용감한 탐험가였으나, 자신이 발견한 것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통찰력은 결여 되었다고 본다. 반면 아르키메데스는 그이 세렌디피티적 발견을 왕관의 부피를 아는 데 적용함으로써 놀라운 통찰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죽는 날까지 신대륙을 발견한 사실을 모르고 동양의 일부로 알고 있었다. 또한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한 이익을 얻지도 못했다. 지원자이던 스페인 왕가로부터 일시적인 찬사와 갈채는 얻었으나 동양으로부터 거대한 부를 얻으려던 콜럼버스 자신과 왕가의 목표는 현실화되지 못했다. 콜럼버스의 영광은 일시적인 것으로, 그는 불운한 사람으로 기억된 채 이 세상을 떠났다. 콜럼버스는 동양과 그 부를 향하는 지름길을 찾으려고 노력했으나 자기가 실제로 발견한 것은 다른 것이었으며, 그것마저도 끝내 이용하지 못했다. 콜럼버스에 의한 발견을 우리가 세렌디피티라고 부를 수 있는 행운을 이 탐험가에 의한 역사적인 우연의 발견보다도 훨씬 후에 신세계에서 꽃핀 문명의 발달에서 정당화 될 수 있을 것일게다.
제3장 말라리아에 걸린 인디언과 킨키나나무.
키니네(quinine)의 기원은 매우 애매하여 전설인지 사실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유럽에 널리 알려져 있는 바에 의하면 스페인령의 페루 총독의 처 친천(Chinchon)백작부인이 페루산 나무의 껍질 엑스(추출물)로 치료를 했다고 한다. 이 효능에 놀란 부인은 1638년 이 나무껍질을 스페인으로 가지고 돌아와서 키니네의 효용을 유럽에 널리 보급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1942년 스웨덴의 식물학자 린네는 이 약용나무껍질을 채취한 나무를 '킨키나나무(cinchona)'라고 명명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이름에 관해서는 두 가지 잘못된 것이 있다. 그 하나는 린네로 친천 백작부인과 관련지어 이름을 붙였다고 했는데 철자를 잘못 알아 처음의 h를 빠뜨린 채 표기했던 것이다. 또 하나, 백작부인은 전혀 말라리아에 걸려있지 않았으며 킨나무의 껍질을 스페인으로 가져오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녀는 스페인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콜럼버스의 카르타헤나에서 사망했다.
키니네가 말라리아의 치료에 사용된 최초의 확실한 기록은 1630년경 리마에서 예수회의 선교사에서 사용된 것으로서 그 때문에 린네보다 100년이나 전에 이 약용 나무껍질에는 '예수회 선교사의 나무껍질'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 예수회 선교사들이 말라리아에 대한 이 나무껍질의 효능을 인디언에게 배웠는지 지금으로서는 확인하기가 불가능하지만 킨키나나무 껍질의 약효가 우연히 발견된 것에 관한 옛 전설은 그럴싸하게 전해진다. 전설에 의하면 열병으로 몸을 휘청거리며 안데스 고지의 정글에서 길을 읽은 한 인디언이 그 주인공이다. 콜롬비아에서 볼리비아에 걸쳐 해발 1,500미터 이상의 온난하고 습도 높은 경사면에는 인디언들이 '키나키나'라고 부르는 여러 종류의 킨키나나무가 자생하고 있었다. 나무 사이를 휘청거리면서 걷던 인디언이 물웅덩이를 발견하여 그 물을 마셨다. 한 모금 마신 물은 입에 몹시 썼는데 그것은 그 물이 겉에 있는 독성분을 가진 킨키나나무의 껍질로 오염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설령 죽는 한이 있다 하더라고 목이 타는 듯한 갈증과 열을 다스리는 일이 더 급했다. 그래서 그는 단숨에 물을 마셔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생명에는 별 이상이 없었다. 그뿐이 아니라 오히려 열이 내리고 원기가 회복되어 제대로 길을 찾아서 자기네 마을로 돌아갔다. 그는 친척과 친구들에게 이 기적적으로 회복된 이야기를 했다. 그 후, 인디언들은 심한 열병을 앓으면 킨키나나무의 껍질에서 얻은 추출물을 사용했다. 바로 이 열병이 말라리아이며, 나무껍질에 함유된 화학물질은 키니네였던 것이다. 이 발견 소식은 널리 퍼지고 17세기 초에는 예수회 선교사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전설이 사실이라면 원시사회에서도 통찰력만 있으면 우연한 발견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값진 발견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증명하게 되는 셈이다.
이 전설의 신빙성을 증명할 수는 없으나 비슷한 일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과는 이 전설처럼 운이 좋은 경우도 있었지만 약리작용이 있는 천연의 물질에 처음 접한 사람이 죽거나 해를 입는 그런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해설)키니네에 의한 말라리아의 치료는 전염병에 대하여 화학물질을 사용하여 최초로 성공한 예이다(유럽에 키니네를 약으로 소개한 역사와 남미에서 동남아시아로 킨키나나무를 이식한 역사에 관해서는 이 책 부록에 나와있는 실버만의 저서를 볼 것). 킨키나나무 껍질 속에 있는 항말라리아 활성물질인 키니네가 프랑스의 화학자 펠르티에와 카벤토에 의해서 분리된 것은 1820년의 일이었으며, 화학구조가 확실하게 결정된 것은 1908년, 그리고 실험실에서 합성된 것은 1944년이었다(1856년에 키니네 합성의 소박한 시도로부터 시작되는 세렌디피티적 발견 이야기는 제13장의 윌리엄 퍼킨과 모브의 이야기를 참조할 것).
말라리아는 근년에 선진국에서 살충제에 의한 모기의 발생을 억제하면서 근절시켰는데, 세계적으로 불 때 아직도 넓은 지역에 걸쳐 치명적인 병이다(말라리아 원충은 환자에 감염된 혈액에 있다가 어떤 종류의 모기를 매개로 해서 다른 사람에게 옮겨 간다). 역사상에 기록된 모든 정쟁에 의한 사망자의 수보다도 말라리아에 의한 사망자 수가 더 많으며 이 무서운 병을 억제하는 약이나 살충제의 가치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새나 기타 동물에 미치는 살충제의 해가 최근에 강조되고 있으나 살충제를 사용함으로써 구원받은 몇만이라는 인명을 견주어 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특히 초기의 것처럼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는 새로운 살충제를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키니네는 국제정치에서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남미산 킨키나나무의 입수난 때문에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 등에 나무가 이식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키니네의 공급이 중단된 독일은 합성대체품 제조에 전력을 다했다. 그중에서 성공한 것의 하나가 아테브린(일명, 키나크린)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북아프리카나 남태평양에 있는 섬들의 정글 등, 말라리아를 매개로 하는 모기의 번식지에서 싸우고 있었으나 킨키나나무 재배지는 일본군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래서 미국은 유효한 합성 항 말라리아제를 개발해야 할 필요에 쫓기게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미국 측의 포로가 된 이탈리아 병사가 항말라리아제로 여겨지는 환약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환약은 흰색으로 아테브린의 고운 노랑색이 아니었다. 입수된 환약은 미국으로 보내져서 신중하게 분석되었다. 그 결과 그것은 아테브린을 개발한 독일의 같은 연구소에서 만들어졌고 같은 독일의 특허에 의해 감추어진 클로로킨이라는 다른 항말라리아제라는 것이 판명되었다. 약효 실험에서 클로로킨은 키나크린과 같은 양으로도 그 효력은 10배이며 부작용도 적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클로로킨은 흰색이다. 태평양지역의 미군은 당시 키나크린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그 약을 개발한 독일 회사의 미국 제휴회사인 윈스롭 사에서 아테브린이라는 상품명으로 납품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 병사는 키나크린이라는 환약을 언제나 복용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명한 일본의 라디오 선전원 '도쿄 로즈'가 키나크린은 피부색을 누렇게 할 뿐만 아니라 성불능이 된다고 말하여 이를 믿게 만들었다.
전자는 옳은 말이지만 후자는 틀린 말임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이 환약을 복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군이 뉴기니아에 상륙했던 2주일 동안에 전 병력의 95%가 말라리아를 앓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리노이 대학의 의약연구위원회에서 정부의 항 말라리아 계획에 참가했던 우리는 이 계획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인식시키기 의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군사적 의미로 말라리아에 걸린 1,000명의 해병대원은 1,000명의 전사한 해병대원보다도 간호하는 데에 인력이 더 많이 들기 때문에 더 안 좋은 것이라고 들었다. 클로로킨이 아케브린보다도 복용량 당의 효과가 높으며 황달에 걸린 것 같은 현상도 안생기는 또 하나의 중요한 장정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때가 마침 그 무렵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이탈리아군은 북아프리카에서 아테브린이 아닌 클로로킨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유로는 독일의 약리 테스트 결과 클로로킨 쪽이 효과가 낮았기 때문에 독일군은 추축 연합군인 이탈리아에게는 클로로킨을 제공하고 아테브린은 자신들을 위해서 남겨두었다는 것이다. 독일인은 화학자로서는 우수했으나 약리학자로서는 미흡했던 것 같다.
미국에서의 약리 테스트는 클로로킨이 우수한 약이라는 것을 밝혀냈으므로 클로로킨의 개발이 우리의 항말라리아 계획에 우선 과제가 되었다. 학위를 취득하고 바로 계획에 참가했던 나는 클로로킨의 새로운 합성법을 개발해 줄 것을 요청받았다. 독일에서 하는 방법으로는 순수한 클로로킨을 얻기가 어려웠으며, 독일이 클로로킨보다 아테브린을 좋아한 또 하나의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지금도 결정적인 실험에서 클로로킨 합성의 중간체인 아름다운 흰색 결정이 비등용액에서 석출되었을 때에 느낀 흥분을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 클로로킨을 아직 1그램도 합성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 나의 연구책임자이던 찰스 C. 프라이스 교수와 나는 열차로 버팔로에 갔다. 거기서 우리는 군대 공급용 약의 대량생산을 목표로 우리의 합성법을 대량화시키는 문제에 대해서 생산공장 담당의 화학자와 상담했다. 이 합성법은 대성공을 거두어 프라이스 교수와 나는 미국 정부의 이름으로 특허를 취득하여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수 톤의 클로로킨을 이 방법으로 제조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떤 때는 병원에서 진행 중인 임상실험에 충분한 양의 약을 공급하기 위해 프라이스 교수 외에 박사급 연구원과 대학원까지 합해서 10여 명이던 항 말라리아 연구그룹 전원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교대로 일했다. 금요일 오후 늦게 뉴욕에서 걸려 온 전화에서 약효시험 중인 환자를 위한 약의 재고가 거의 바닥이 났다는 소리를 듣고 월요일까지 임시 대용기구로 우리의 할당분을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식은 땀이 난다.
클로로킨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합성되어 테스트한 수천 가지에 이르는 신규화합물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클로로킨이나 또 다른 몇 가지의 합성 항말라리아제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에서도 사용되었다. 이런 약은 수년간 사용하면 약효가 떨어진다. 이는 말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 중에 이런 약에 대한 저항력이 있는 종류가 출현하기 때문이다. 키니네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내성이 출현하지 않기 때문에 이 천연의 약은 말라리아에 대한 투쟁에서 그 중요성을 읽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소 재미있는 해설을 한 가지 덧붙일까 한다. 영국이 인도를 정치적으로 그토록 오랬동안 지배한 것은 영국인이 진토닉을 매일같이 마신다는 습관이 그 이유라고 한다. 토닉이란 키니네 성분으로서 그 덕분에 영국인은 말라리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 한편 통치를 당하는 인도인의 대부분은 이 영국의 음료를 싫어해 말라리아의 열과 쇠약으로 고생했다고 한다.
제4장. 사과는 왜 수직으로 떨어지는가?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일에서 우주의 중요한 법칙을 찾아내는 사람은 그야말로 유례가 드문 비범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아이작 뉴턴 경은 영국 링컨셔의 울소프에서 1642년 크리스마스날에 태어났다. 뉴턴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3세 때 그의 어머니가 재혼하게 되자 그는 할머니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으며, 울소프에서 약 10키로미터 떨어진 그랜삼의 학교에 보내졌다. 어머니는 뉴턴이 14세 때 또다시 과부가 되어 울소프의 집으로 돌아왔다. 뉴턴은 지극히 보통 학생으로 학교생활도 평범하게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는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서 농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뉴턴은 농삿일보다도 수학이나 여러 가지 기계 따위를 다루는 일에 흥미가 있었다. 다행히도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대학 출신인 숙부가 뉴턴의 잠재능력을 인정하여 대학을 들어갈 수 있도록 학교에 다시 보내주었다.
뉴턴은 1661년 18세 때에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3년 동안 수학과 자연과학에서 그의 천재적 재능이 눈을 뜬 것 같다. 같은 무렵 런던에 페스트가 발생하여 이 역병이 더 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1665년 여름에 대학은 폐쇄되었다. 그해 초 학사학위를 취득한 뉴턴은 울소프로 돌아와 그곳에서 2년간 연구와 사색의 시간을 보낸 후, 다시 개강한 케임브리지로 돌아왔다.
광학, 수학, 인력 운동에 관한 물리학 등 각 분야에서 그가 기념비적 연구의 기초를 이미 대학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끝내놓았다는 설은 신빙성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본 뉴턴이 세렌디피티적인 착상을 한 후 1687년에 출판된 그의 저서 '프린시피아'에서 만유인력법칙을 완전한 형태로 주창하게 되기까지는 약 20년의 세월이 걸렸던 것이다(그와 같이 늦은 원인에 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다. 이 논쟁의 철저한 고찰에 대해서는 플로리안 카조리의 저서를 참조할 것).
뉴턴이 사과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것과 그 관찰결과에 관해서는 몇 가지의 사료에 적혀있다. 예를 들면 마틴 포크스(영국 학사원장), 볼테르(뉴턴의 질녀인 캐서린 바톤에게 들었다고 함), 존 콘뒤트(뉴턴의 친구로 후에 그의 질녀와 결혼), 윌리엄 스턱리(물리학자이면서 뉴턴의 친구) 등에 의한 것들이다. 불테르의 일화가 가장 잘 알려져 있으나 스턱리의 '아이작 뉴턴경 생애의 추억'(1752년)에 쓰여진 이야기 쪽이 더 신뢰성이 있는 것 같다. 뉴턴의 말년에 스턱리가 그를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 쓰여져 있다.
따뜻한 날 저녁 식사 후, 우리는 뜰로 나가 몇 그루의 사과나무 아래서 차를 마셨습니다. 뉴턴 경과 나, 단 둘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 그는 옛날에 만유인력에 관해서 생각하게 된 것도 이런 상황이었다고 회상하였습니다. 명상에 잠겨 앉아있을 때에 사과 한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본 것이 계기였다고 합니다.
왜? 어째서? 사과는 대지를 향해서 언제나 수직으로 떨어지는 것일까? 왜, 옆으로나 위쪽으로 가지 않고 언제나 지구의 중심을 향하는 것일까? 하고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분명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질에는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의 총 인력은 지구의 중심으로 향하는 것이며 옆으로는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과도 수직으로 즉, 지구의 중심을 향해서 떨어지는 것입니다. 물질끼리 서로 끌어당긴다면 그 힘은 물질의 양에 비례할 것입니다. 즉, 지구가 사과를 끌어당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과도 지구를 끌어당깁니다. 우리가 지금 중량이라고 하는 것처럼 이것은 힘이기 때문에 그 힘은 우주 전체에 전재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서서히 이 인력이라는 특성을 지구나 전체의 운동에 결부시켜 서로의 크기와 거리, 그리고 규칙적인 공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 특성과 최초로 천체에 주어진 진행 운동을 함께 생각함으로써 이들 순환궤도가 완전히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혹성이 떨어지는 일도 없고 전부가 하나의 중심으로 모아지지 않는 이유를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전 유럽을 놀라게 한 훌륭한 발견의 탄생 이야기입니다. 그는 이 발견으로 튼튼한 기초 위에서 자연철학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아이작 뉴턴전'(1934년)에서 L.T. 모어는 사과의 에피소드를 좀 더 창의적인 시각으로 보고 있다. 거기서 그는 그 사건이 뉴턴의 진리탐구에 대한 '준비된 마음'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다고 보고 세렌디피티적인 면을 강조해서 쓰고 있다.
그가 마침 대학을 졸업했을 무렵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소년시절에는 농장에서 그의 관심을 끈 유치한 문제들을 생각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으나 이제는 완전한 성인이 되어서 돌아왔으므로 이전과 같은 생활로 되돌아간다 하더라도 머릿속은 심원한 문제로 가득했으며, 그가 생각해 왔던 것은 미래에 있을 모든 사상의 방향을 변경할 정도였다. 여름의 긴 오후에는 옛날부터 있던 오래된 회색돌집 근처의 과수원에서 보냈다. 그 기념할 만한 날, 한 개의 사과가 그의 발 옆에 작은 소리를 내면서 뚝 떨어졌다. 그런 일은 평상시에도 흔히 있는 일이어서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아주 사소한 문제였다.
그러나 그 순간, 작은 스위치를 '탁'하고 켜면 커다란 기계가 육중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의 두뇌기능에 시동을 거는 자극이 있었던 것이다. 지구의 신비한 인력의 공간을 통해서 나무의 꼭대기나 산꼭대기, 또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새나 구름에까지 작용하고 있다면 그 인력은 달에까지 미칠 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달은 수평으로 던져진 돌처럼 지구를 향하여 낙하하고 있을 것이며, 그런데도 절대로 지표면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달의 고속운동이 수평선을 넘어서 아득히 먼 것으로 자신을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간단한 문제다. 그러나 발사체의 운동(추진력) 문제를 풀었던 갈릴레오도 달이 지구로 낙하하지 않을 만큼 충분한 고속을 유지하며 움직이고 있는 유일한 발사체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는 원심력과 운동의 법칙을 수식화한 호이겐스(네덜란드 과학자)도 그 비밀을 꿰뚫어 보지 못했다. 뉴턴의 재능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인력의 법칙을 고안했을 뿐만 아니라, 달이 그 궤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인력의 법칙이 작용하는가를 계산하는 일까지 스스로 생각해낸 점이다.
데이비드 브루스터 경의 '아이작 뉴턴 경의 생애, 저술 그리고 발견'이라는 전기에도 사과 이야기의 신빙성을 뒷받침하는 다음과 같은 저술이 있다. "나는 1814년에 그 사과나무를 보러갔고 그 나무의 뿌리를 한 조각 가지고 돌아왔다. 그 나무는 너무 썩어 1820년에 벌채하였고, 그 재목은 스토크 로키포드의 터너 씨에 의해 소중하게 보존되었다." 이와 같이 후에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 하나가 된 23세 젊은이의 머릿속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탄생하게 된 데에는 세렌디피티가 단단히 한몫한 셈이다.
제5장. 개구리의 다리와 전지
전지
이탈리아의 생리학자 루이지 갈바니가 처음으로 전류를 증명할 수 있는 발견을 했다고 일반적으로 믿고 있다. 갈바니는 1786년 해부학 개구리의 다리를 정전 발전기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 위에 놓자 경련하는 것을 발견했다(실제로는 같은 관찰이 30년 전에 플로리아노 칼다니에 의해 행해졌다).
그는 이 관찰을 '동물 전기'라 이름 지은 연구로 발전시켰다. 개구리의 다리를 놋쇠 갈고리로 철책에 매달아서 다리의 아랫부분이 다른 철책 부분에 닿게 되면 수축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이에 관해서도 거의 1세기 전에 네덜란드인 잔 스왐메르담이 관찰한 사실을 갈바니는 몰랐던 것 같다).
갈바니의 보고 내용에 대해 또 한사람의 이탈리아인 과학자(물리학자) 알레산드로 볼타가 흥미를 가졌다. 볼타는 철책에 매달린 개구리의 다리가 경련한 것은 동물 전기의 탓이 아니고 이 동물의 조직이 접촉하고 있었던 두 가지 다른 종류의 금속, 즉 주성분이 동인 놋쇠로 만들어진 갈고리와 철책 사이의 전위차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개구리의 근육과 신경은 당시 존재했던 어떠한 장치로도 검출할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한 전류를 검출할 수 있는 매우 민감한 검전기에 해당되었다.
볼타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실용적인 전지를 발명함으로써 종류가 다른 금속 간의 전위차라는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고, 1800년에 영국 학사원에 편지로 보고했다. 볼타의 전지는 이를테면 은과 아연이라는 두 종류의 금속을 젖은 두꺼운 종이로 막아서 만든 '셀(cell)'을 직렬로 이은 것이었다. 이와 같은(갈바니 식) 셀을 조합한 것이 전지이며 전지의 전압(볼트)은 이어 만든 셀의 수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전지는 최초로 실용화된 전류발생원이었다. 그 이전에는 정전 발전기밖에 알려져 있지 않았으며, 이는 고전압의 방전을 해도 정상전류를 공급하지는 못했다. 조잡해도 초기의 이러한 볼타 전지가 있었기 때문에 험프리 데이비 경에 의한 금속나트륨이나 칼륨의 발견 같은 중요한 전기 화학적 발견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전자기학.
18세기 말에 쿨롱은 힘이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법칙을 발견하였으며, 갈바니는 종류가 다른 금속끼리의 전기적 효과를 발견하였다(설명은 틀려있었으나). 그 후 볼타가 이를 올바르게 설명했다. 자기와 전기 사이의 매우 중요한 관련성에 관해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덴마크의 물리학자 에르스텟이 이 중요한 관련성을 발견한 것은 1820년이었다.
에르스텟은 나침반[자석] 위에 철사를 놓고 전류를 통하면 자침의 향방이 흔들린다는 것을 발견했다. 에르스텟의 저작에서는 강의 중에 실제로 이 발견을 했는지, 또는 발견을 강의의 형식으로 해보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이 발견은 바로 1825년의 윌리엄 스터지온(영국의 제화업자)에 의한 실용 전자석의 발명과 1831년 미국의 물리학자 조셉 헨리에 의한 개량으로 발전했다. 전자석이 초인종과 전보에서부터 전기모터에 이르기까지 온갖 응용으로 인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서는 세삼스럽게 재론하지 않겠다.
제6장. 우유 짜는 여인과 천연두 왁친.
수백만이라는 인명이 페니실린이나 설파닐아미드(소염제) 또는 기타 살균력이 있는 약제에 의해서 구제되어 왔다(이러한 사실에 관한 이야기는 제24장에 있다). 그러나 아마도 더 많은 인명이 왁친 접종에 의한 예방효과에 의해서 구제되어왔음이 틀림없다. 이 왁친 접종법도 역시 우연한 발견 중의 한 예이다. 19세기까지 천연두는 인류에게 큰 재앙의 하나였다.
사망자의 수로 따지자면 천연두에 필적하는 것은 말라리아와 페스트뿐일 것이다. 키니네아 합성 항 말라리아제에 의한 말라리아의 제압에 관해서는 이미 제 3장에서 설명한 바가 있다. 살충제도 이 병을 옮기는 모기를 구제하는 점에서 유효했다. 또한 페스트도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서 만연된다는 것을 알고부터는 선진국에서 위생설비를 개선함으로써 마침내 제압되었다.
E.L. 콤피어는 1957년 논문 '연구, 세렌디피티 및 정형외과 수술'에서 에드워드 젠너를 "수백만이라는 사람을 천연두라는 무서운 병으로부터 구출하고, 많은 사람들을 보기 흉한 용모에서 구제하게 된 왁친을 세상에 선사한 인물이다."라고 칭찬하고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젠너가 발명한 왁친은 연구실에서 무척 어렵고 힘들게 한 연구 결과라고 할 수는 없다. 19세 때 그는 우유를 짜던 여인에게서 자신은 우두에 걸렸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결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젠너가 의사가 된 후, 거의가 헛수고로 그치고 마는 천연두 치료 중 이 말을 상기했던 모양이다. 조사해 보았더니, 우유를 짜는 여인들이 천연두 환자를 간호한 경우에도 거의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래서 그의 머리에서는 치사율이 높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우두를 접종해 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야말로 세렌디피티였던 것이다. 우두가 천연두에 면역을 준다는 사실은 그의 노력에 의한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는 그 가치를 인정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뛰어난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젠너는 영국 구교회 목사의 아들로 1749년 글로스터셔의 버클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젠너가 6세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형이 그를 길렀다고 한다. 초등교육은 시골 학교에서 받았으나 오히려 거기서 그는 자연과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브리스톨 가까이에 있는 서드베리의 외과의사 다니엘 두들로 밑에서 본격적인 의학공부를 시작했다. 우유 짜는 여인에게 우두와 천연두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시기였다.
21세 때에 런던으로 가서 유명한 의사 존 헌터의 집에 기거하면서 2년 동안 공부했다. 이어서 조셉 뱅크스 경에게 고용되어, 1771년 쿡 선장의 첫 항해 때에 뱅크스가 채집한 동물의 표본을 만들거나 정리하는 일을 도왔다. 쿡 선장의 두 번째 항해에서는 탐험대의 박물학자라는 직을 권유받았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고 버클리에서 또는 첼트넘에서 의술연수를 계속했다. 그는 조류학, 지질학, 음악, 시작 등에도 흥미를 가졌다. 그러나 1792년까지는 의학에 전념할 것을 결심하였으며, 성 안드레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동안에 왁친 접종법의 아이디어가 점점 성숙해졌던 것 같다. 런던에 있을 때, 우두와 천연두와의 관련에 대해서 헌터에게 이야기했으나 헌터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775년에 젠너는 우두에 관하여 글로스터셔의 시골 사람들이 믿고 있는 이야기에 관해서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1780년까지 우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 중, 한 형태만이 천연두를 방지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또한 그 유효한 형태의 우두도 병의 특정 시기에 접종하지 않으면 효력이 없다는 것도 알았다.
그가 살고 있는 지역에는 천연두를 거의 볼 수 없었으므로 자기 생각을 시험해 볼 기회는 여간해서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우두에 걸린 우유 짜는 여인 손의 물질에서 농을 짜내고 그것을 런던으로 가지고 가서 의사들에게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의사들은 젠너가 생각한 아이디어의 중요성을 이해 못했다. 1796년 5월 젠너는 드디어 우유 짜는 여인의 손에 걸린 우두의 수포에서 채취한 농[고름]을 제임스 핍스라는 소년에게 접종했다. 그리고 그해 7월, 그 소년에게 천연두의 농을 신중하게 접종했다. 그 결과 젠너가 예상했던 대로 소년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던 것이다.
젠너는 어떻게 소년과 그의 부모에게 이 테스트를 받도록 설득했을까? 아마도 그 무렵에 그 지방에서 천연두가 창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대영 백과사전(1962년판, 12권 116쪽)의 '면역'항에는 이것을 납득할 수 있는 해설문이 다음과 같이 실려있다. "1796년의 천연두 왁친이 발명에 앞서 사람들은 이 병을 앓은 환자 피부의 발진에서 채취한 것을 접종함으로써 천연두에 대한 면역을 얻고 있었던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은 접종된 사람 중에는 천연두에 걸린 사람도 있었으나 이 병에 대한 공포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치사율이 높은 자연적 천연두에 걸리는 것보다 접종을 받아서 죽음의 위험성을 조금이라도 약화시키려는 사람이 많았다." 핍스 소년에게 접종함으로써 얻은 좋은 결과는 젠너에게 큰 용기를 갖게 했으나 이 성공을 발표하는 것은 두 번째 실험을 기다린 후 하기로 했다. 글로스터셔에서 천연두는 한동안 유행하지 않았으므로 다음 기회는 2년 후가 되었다.
두 번째의 우두 접종도 성공하여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젠너는 그의 성공을 발표하는 논문을 완성시키기는 했으나 먼저 런던으로 가서 그 방법을 되풀이해보기로 했다. 그러나 런던에서 3개월간 머무는 동안 아무에게도 접종을 하게끔 자신 있게 설득할 수 없었다. 그 후 젠너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이미 런던의 성 토마스 병원의 유명한 의사 헨리 클라인이 여러 접종에 성공했으며, 천연두에 우두가 효과가 있음을 주위의 전문 의사들에게 알렸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하여 젠너의 왁친 접종법은 더디게 받아들여졌다. 그 하나는 저명한 외과 의사 J. 잉겐하우스가 왁친 접종법을 혹독하게 비난함으로써 한동안 사람들에게 왁친 접종법에 대해서 편견을 갖게 했다. 둘째는 이와는 정반대로 왁친 접종법이 공을 서둘렀던 의사 조지 퍼슨이 충분한 지식과 경험도 없이 불순물로 오염된 접종 왁친을 공급하여 천연두를 닮은 발진이 발생한 사건이 있었다. 젠너는 퍼슨의 왁친이 오염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고 순수한 우두 왁친의 성공을 알리자 그 성공 뉴스는 금방 전 세계에 퍼졌다.
최종적으로 젠너에게 바쳐진 영예는 다음에 열거하는 예들로도 알수가 있다. 왁친 접종법을 올바르게 보급하기 위해 1803년 런던에서 왕립 젠너협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옥스퍼드대학은 1813년 젠너에게 명예 의학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독일에서는 제임스 핍스 소년에 대한 최초의 왁친 접종의 성공을 기념하여 그날을 축제일로 정했다. 그리고 영국의 재무대신이 젠너에게 2만 파운드의 찬조금을 보냈으며 인도에서는 그를 위한 모금이 7,383파운드에 이르렀다. 또 그로스타와 런던에 젠너의 조상이 세워졌다. 그리고 젠너의 중재로 나폴레옹이 2명의 영국인 포로를 석방시키며 "젠너의 이름으로 어떤 일이라도 거절할 수 없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설)젠너는 '왁친 접종법'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접종' 또는 '배리오레 왁치네'라는 말을 사용했다. 이 라틴어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소'의 소두창이다. 거의 1세기 동안 젠너의 우두 접종이 유일한 면역요법이었다.
1880년에 루이 파스퇴르는 한 번의 유행으로 프랑스 전국의 닭을 10%나 죽일 정도로 무서운 어떤 종류의 콜레라에 대한 면역요볍을 개발했다. 그는 먼저 이 병의 병원균을 분리시키고 독이 약한 형태로 배양했다. 그리고 이 배양균을 닭에 접종함으로써 이 악성인 병에 걸리지 않도록 면역시켰다. 이것은 원리적으로 젠너의 우두접종과 같은 것으로서 천연두의 바이러스가 소의 몸 속에서 독성이 약해지자 우두라는 형태가 되어서 우유 짜는 여인에게 전염되었던 것이다.
다음, 파스퇴르는 소나 양의 병인 탄저병에 맞서서 1881년에 세균을 분리했다. 그는 이 세균을 동물의 체온보다 높은 온도로 배양, 그것을 사용해서 동물을 경미한 탄저병에 걸리게 하고 나중에 진짜 병에 걸렸을 때에 면역성을 갖도록 하는, 접종용 시료를 만들었다. 파스퇴르는 예방접종의 일반법에 대하여 "위대한 영국인 젠너에 의해서 이루어진 공적과 무한한 이익에 경의를 표하며"라면서 '왁친 접종법'이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4년 후에 파스퇴르는 동물에서는 광견병이라고 하고, 인간인 경우에는 공수병이라고 하는 병의 왁친을 개발했다. 파스퇴르의 이 선구적인 업적은 젠너의 세렌디피티적 발견에 기인한 것으로, 면역요법을 매우 실용적인 학문으로 받아들여 전염병을 제어하는 방법을 폭발적으로 발전시키는 단서가 되었다. 인류의 건강에 이토록 큰 영향을 준 공헌은 일찍이 없었으며 굳이 찾아낸다면 항생물질의 개발이 예외일 수 있을 것이다. '근대 면역학의 실험적 기초'(1986)에서 클라크는 '면역요법의 정점이 되는 위업'은 천연두의 근절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금세기 전반에는 매년 2,300만 명의 환자가 보고되었으나 미국에서 천연두의 최후 증례는 1949년이었으며, 세계에서 확인된 최종 증례는 1977년 소말리아에서였다.
제7장. 원소발견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이야기.
초기 과학에서의 발견은 연구를 계획하는 데 이론이고 뭐고 없었기 때문에 그 대부분은 세렌디피티 또는 적어도 유사 세렌디피티였다. 과학자의 선구자격이던 연금술사는 여러 가지 것(거의 금속)을 황금으로 바꾸는 일을 추구했다. 그들은 이 변환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생각이 미치는 한 온갖 짓을 시도했다. 그들은 결코 성공은 못했을 지언정 당시의 사람들에게 마치 성공한 것처럼 납득시키기 위해 전력했다.
연금술사에게 '원소'란 불, 공기, 흙, 및 물이었다. 현재 우리는 '원소'라고 하는 물질의 근원적 형태가 100가지 정도 존재하며, 그것들이 우주의 구성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흔해빠진 원소도 있고 희귀한 원소도 있다. 약 16키로미터 정도 깊이까지의 지각은 주로(99.5%) 12가지 원소로 구성되어 있다. 5가지 원소가 91% 이상이며, 그것들은 많은 것으로부터 순차적으로 산소, 규소, 알루미늄, 철, 칼슘 순으로 되어있다. 만일에 해양과 대기를 포함시킨다면 수소와 질소가 가장 많이 존재하는 원소군에 든다(물에는 수소가 11%, 공기에는 질소가 76% 함유되어 있다).
역사적인 시대 구분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그리고 철기시대로 각기 도구나 기구를 만드는 데에 사용된 물질에 연관되어 이름이 붙여졌다. 청동은 동과 주석의 합금(혼합물)이며 때로는 다른 금속을 소량 함유하고 있다. 동과 주석은 넓은 지역에서 채취되어 양자를 녹여 합하면 각기 원래의 금속보다도 강한 합금이 된다. 동, 주석, 및 그 합금은 공기나 물에 의해서 부식되지 않으므로 도구, 무기, 식기나 기타 기구류를 만드는 데에 긴요하게 쓰인다. 놋쇠는 동과 아연의 합금이며 수 세기 전부터 알려져 있다. 철과 강(스틸, 즉 철과 탄소 및 기타 금속의 합금)을 만드는 일은 어려우며 따라서 최근에 와서야 가능하게 되었다.
가장 풍부하고 폭넓게 존재하는 알루미늄은 반응성이 너무 높기 때문에 단독으로 분리된 '원소'상태로는 산출되지 않는다. 동이나 은, 금과 달리 알루미늄은 다른 원소와 쉽게 화합한다. 안정된 금이나 은은 원소상태로 발견할 수 있으며 다른 금속에 비해서 그 아름다운 광택이 오래간다. 원소상태로는 산출되기 어려운 원소나 결합상태로밖에 존재하지 않는 원소의 발견은, 가장 존재량이 많은 원소인 산소의 경우를 포함하여 전적으로 우연이었다.
산소. 산소(oxygen)의 발견자로는 영국의 조셉 프리스트리와 스웨덴인 칼 빌헬름 셸레 두 사람이 알려져 있다. 셸레가 프리스트리보다 1년 이상 먼저 산소를 발견했다. 그러나 프르스트리가 1774년에 실시한 실험결과를 발표하고 새로운 '공기'라고 명명을 하며 독특한 성질을 보고할 때까지 셸레는 자기의 실험결과를 발표하지 않았다. 따라서 프리스트리쪽에 더 많은 공로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좀 특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1733년에 영국 리즈 가까이의 필드헤드에서 태어났다. 엄격한 칼빈교도의 가정에서 자라,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그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으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뿐 아니라 칼빈교로부터도 이단으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프리스트리는 1767년 34세로 리즈의 비국교회파 소속의 작은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윌리엄 피트 내각의 국무대신인 셸 번 백작의 사서인 동시에 문학 동호인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프리스트리는 빈번하게 런던을 여행했으며 한때 그곳에서 벤자민 프랭클린을 만나 과학에 대한 관심에 눈을 뜨게 되면서 평생 친구가 되었다. 장난삼아 과학에 손을 댔는데 그 즉시 과학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프리스트리는 훌륭한 관찰력을 갖춘 실험가이기도 했으나 과학적인 소양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가 실험에서 찾아낸 결론은 기묘한 것이 많았으며 그러다보니 때로는 오류도 있었다.
그는 리즈의 양조장 가까이에 살고 있었으며, 그 작업 특히 발효 중인 술의 액면 위에 감도는 기체에 호기심이 생겼다. 그가 이름 지은 '공기'가 액체 가까이에 가지고 간 나뭇조각의 불을 끈다거나 큰 통의 가장자리를 떠도는 기체와 연기의 혼합물이 '감돌면서 지면으로 가라앉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러한 관찰을 통해 그는 이 기체(이산화탄소)가 보통의 공기보다 무거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자기집 실험실에서 이 무거운 '공기'를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이것을 녹인 물은 짜릿하고 매우 상쾌한 맛이 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소다수나 다른 탄산이 들어있는 음료를 맛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소다수의 발명으로 1773년에 영국 학사원으로부터 메달을 수상했다.
이 기체에 관한 실험은 그로 하여금 다른 기체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침 이 무렵 그는 직경 30센치미터의 커다란 확대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것으로 햇볕의 초점을 모으면 물질을 고온으로 가열할 수 있었다. 그가 말하는 '공기'즉, 기체를 연구하는 데 있어서 프리스트리의 신기술은 기체를 수은 위에서 응집하는 장치였다. 밀폐된 유리용기 속의 액체수은 표면에 물질을 놓고 확대경으로 그것을 가열하여 기체가 생겼을 때 그것은 물에는 녹아도 수은에는 녹지 않기 때문에 수은 위에서 응집할 수가 있었다. 프리스트리가 이 방법으로 가열한 많은 물질 중에는 그가 '수은의 붉은 재'라 부른 산화수은이 있었다. 이 적색의 고체에 열을 가하자 분해되었으며, 액체 수은 위에 무색의 기체가 만들어졌다. 프리스트리는 이 기체를 촛불로 시험해 보았다. 그가 만든 많은 기체는 대개가 촛불을 껐다. 그가 후에 출판한 '여러 가지 공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이라는 책 속에 이 '공기'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기술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놀란 것은 이 공기 속에서 촛불이 매우 격렬한 불꽃으로 타올랐다는 사실이다... 시간이 지난 지금으로서는 이 실험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생각나지 않지만 그 결과에 대해 아무런 예상도 하지 못했던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만일 무언가 다른 목적에 사용하려던 촛불이 눈앞에 없었더라면 그 실험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빨갛게 된 나무조각은 그 속에서 불꽃을 튕기고, ...그리고 매우 빨리 타버렸다...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그 당시로서는 나도 알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 공기에 관한 실험과 관찰'의 서문에서 프리스트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 항의 내용은 나의 저서 중에서 몇 번인가 언급한 그 이상의 진실한 의견이라는 분명한 실례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과학연구를 크게 장려한다는 점에서 몇 번씩 되풀이해도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그 의견이란 바로 과학연구에서는 면밀한 계획과 미리 생각했던 이치보다도 우리가 우연이라고 하는 것, 즉 철학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미지의 원인에 의해 발생하는 우연한 사건의 관찰 덕이 휠씬 크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 이 장에서 열거한 실험을 시작할 때에는 실험을 통해 이것을 발견하게 되리라는 가정은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며, 만일 누군가에게 이 실험에 관해서 듣게 되었더라도 나에게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명백한 사실로 인해 내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더라도 매우 늦게, 망설이면서 어쩔 수 없이 따르게 되었을 것이다.
프리스트리는 새로운 '공기' 속에 있는 쥐가, 같은 부피의 보통 공기에 있는 쥐보다 두 배나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자신도 이 새로운 '공기'를 들여 마시고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내가 폐로 느낀 바, 그것은 보통 공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 후, 어쩐지 한동안 가슴이 가볍고 편한 것 같았다. 어쩌면 앞으로는 이 순수한 공기가 기호품으로 유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이것을 마실 수 있는 특혜를 받은 것은 두 마리의 쥐와 나 뿐이었다.
2개월 후, 프리스트리는 이 결과를 저명한 프랑스의 과학자 라보아제에게 알리고 라보아제는 프리스트리의 일을 되풀이 했을 뿐만 아니라 이 새로운 기체에 관해서 더 연구했다. 그는 이 기체가 새로운 원소라고 인정하여 1778년에 '산소'라는 이름을 재창했다. 산소란 희랍어로 '산을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데 라보아제는 모든 산이 산소를 함유하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다.
라보아제는 정밀한 저울을 사용해서 화학반응의 출발물과 생성물의 중량 변화를 측정한 최초의 인물이다. 이 방법으로 산화수은을 가열하면 산소가 나오면서 무게가 감소한다는 것, 그리고 그 감소량이 바로 기체의 무게라는 것 등을 증명했다. 그는 또한 그 반대의 현상인 금속을 공기 중에서 가열하면 공기 중에서 거두어들이는 산소의 분량에 해당하는 양만큼 금속의 무게가 증가된다는 것을 밝혔다. 그의 이와 같은 관찰결과는 그 유명한 '질량(물질)보존의 법칙'으로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물질은 창조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고, 단지 어떤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 뿐이다"(현재 우리는 아인슈타인이나 다른 근대과학자 덕분에 물질이 에너지로 변환한다는 것도 첨가하도록 이 법칙을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프리스트리에 의한 산소의 발견은 연소라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도록 했으며 '프로지스톤'설을 장사지내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프리스트리는 죽는 날까지 완고하게 프로지스톤을 지지했었다. 프로지스톤은 연소의 올바른 설명과는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1세기에 걸쳐 과학을 지배했었다. 연소는 산소와 다른 물질과의 화합으로써 신비적인 '프로지스톤'과 프리스트리가 그의 새로운 공기에 이름 지은 '탈프로지스톤 공기'와의 화합이 아니다. 근대과학이 정확한 연소이론과 질량보존의 법칙에서 비롯된다고 많은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다. 프리스트리는 산소와 관련해서 두 가지 더 우연한 관찰을 했다. 그것은 그의 해석의 능력을 넘어섰으나 적어도 그는 충분히 주의하면서 기록했으므로 후에 다른 사람들이 많은 덕을 보게 되었다.
확대경으로 산화수은을 가열해서 기체를 만드는 실험 이전에 프리스트리는 연소와 동물의 호흡, 그리고 식물과의 관계를 관찰했다. 그가 발견한 것은 촛불이 저절로 꺼질 때까지 태운 후, 다 써버린 공기 중에서 한동안 녹색 식물을 기르면 다시 연소된 상태를 보충하여 쥐가 살수 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즉, 그는 이산화탄소를 취하고 산소를 만들어내는 식물의 호흡을 관찰한 것인데, 이 과정이 이해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두 번째 관찰을 프리스트리는 "나의 예상 외의 모든 발견 중에서 가장 기묘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실험에 사용한 병의 벽면에 생긴 '녹색 물질'에 햇빛을 쬐면 기체가 발생한다는 관찰이었다. 그는 이 기체가 산화수은을 가열했을 때에 발생했던 기체와 같다는 것을 알았는데 자기가 '광합성'에 의한 산소의 생성을 최초로 관찰한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이 과정은 태양에 의해서 공급되는 에너지를 사용하여 이산화탄소와 물을 화합시켜서 유기물질(프리스트리의 녹색 물질)과 산소를 생성하는 것으로, 이 광합성 없이 생명은 지상에 존재할 수 없다.
(해설) 프리스트리는 종교와 정치 양면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설교에서 주창했을 뿐만 아니라 저서로도 발표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대단히 곤란을 겪었다. 종교상 이단이라는 고발뿐이라면 어떻게든 빠져나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거기에다 프랑스 혁명과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 알려졌던 것이다. 특히 마국의 독립에 강력하게 동정을 했기 때문에 폭도에 의해서 버밍햄의 그의 교회와 집은 불태워지고 말았다. 프리스트리는 가족을 런던으로 이사시킨 후 3년 동안 박해를 받다가 결국 1794년에 미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뉴욕으로 간 그는 클린턴 지사와 다른 고관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신학자, 과학자, 자유주의자로서 그의 명성은 아메리카 합중국이 갓 탄생한 식민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유니테리언 교회는 성직자의 지위를, 펜실바니아 대학에서는 화학교수직을 그에게 주었다. 토마스 제퍼슨은 버지니아대학의 설립에 대해 그에게 상의해 왔고 조지 워싱턴 대통령은 그를 파티에 초대했다.
그는 목사와 교수직을 거절하고 펜실바니아 중부의 개척지 노덤버랜드에서 조용한 은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생의 마지막 10년을 정원생활과 그를 위해 마련된 연구실에서 실험 삼매로 보냈다. 그는 결단코 프론지스톤설이 잘못된 이론이라고 믿지 않았으나 혹시 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갖고 있긴 했다. 그는 친구인 제퍼슨이 대통령이 된 1804년에 세상을 하직했다. 라보아제의 빛나는 생애는 유감스럽게도 프리스트리가 미국으로 건너간 같은 해에 파리의 기로틴(단두대)에서 종말을 고했다. 그는 과학자인 동시에 귀족지배계급을 위한 징세 청부인이었기 때문에 혁명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던 것이다. 한편 프리스트리는 반혁명주의자에게 박해당했으므로 프랑스인도 영국인도 이들 위대한 두 과학자를 생애 절정 시에는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영예를 칭송하게 된 것은 모두 사후의 일이었다.
요오드. 요오드(iodine)는 화학적으로는 염소에 가까운 원소이다. 소독약으로 사용되어 온 옥도정기는 이 요오드를 알콜에 녹인 것이다. 버나드 크르토와는 우연히 이 요오드를 발견하였다. 크르토와는 화학자 교육을 받고 파리의 공과대학에서 수년간 연구했으나 1804년 부친의 뒤를 이어받기로 하고 초석 공장을 파리 가까이에 건설했다. 나폴레옹이 탄약을 만드는 데에 초석(질산칼륨)을 필요로 했으므로 그의 사업은 번성했다. 질산의 칼륨성분은 보통 목탄에서 취하며 질산성분은 식물을 썩혀서 만들었다.
크르토와는 보다 값싼 칼륨원을 찾아 헤메다가 프랑스의 대서양에 밀려 올려진 해조 속에 이것이 함유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해조의 재에서 칼륨을 추출할 때 사용하는 탱크에는 찌꺼기가 고이므로 이따금 산으로 씻어야 했다. 1811년 어느 날, 탱크를 씻는데 평상시보다 진한 산을 사용했더니 놀라운 광경이 나타났다. 탱크에서 보라색 연기가 나면서 그 연기가 탱크의 차가운 면에 닿아서 검은 금속 광택의 결정이 생기는 것이었다. 그는 무언가 매우 진기한 현상이 일어났다고 생각하여 좀더 잘 조사하기 위해 이 기묘한 결정을 조금 모았다. 그는 이것이 산소하고는 화합되지 않으나 수소와 인하고는 화합된다는 것과, 암모니아와 결합시 폭발성 화합물을 만든다는 것을 알아냈다.
사업이 분주했으며 또한 실험설비도 없어서 크르토와는 이 새로운 물질에 관해서 그 이상 연구하지 못하고 파리의 공과대학에 있는 두 사람의 친구 데조름과 크레망에게 연구를 인계했다. 두 사람의 연구자는 1813년 12월에 발표된 논문을 통해 해조에서 얻은 흥미로운 새로운 물질에 관해서 설명했다.
이때 우연히 험프리 데이비 경이 파리에 있었으므로 클레망은 이 불가사의한 물질을 데이비에게 조금 주었다. 당시 프랑스에서 매우 유명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인 게이 루삭이 그것을 듣고 어쩌면 중요한 발견을 영국인이 먼저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곧바로 크크토와에게 가서 결정샘플을 얻어갔다. 게이 루삭은 서둘러 연구에 열중한 결과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게 되었고, 희랍어로 보라빛을 뜻하는 이오드(iode)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데이비도 새로운 원소의 발견을 확인하여 이미 그 전에 명명되어 과학적으로 연관이 가까운 염소와 어미를 합해서 요오드라는 이름을 제안했다.
해조 속에 들어있는 요오드의 발견을 이해하는 데는 바닷물이 염화나트륨 이외에 다른 성분을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그것들 속에는 매우 소량이기는 하지만 요오드화나트륨과 요오드화칼륨이 함유되어 있다. 요오드화물의 소금은 생화학적 과정에 의해 해조 속에 농축되어 있기 때문에 해조가 태워지면 더욱 농축된다. 크르토와가 탱크의 세정에 사용했던 산이 옥화물의 소금을 원소상 요오드로 변환시키고 산과의 반응열에 의해 보라빛 증기가 되었으며, 증기가 차가운 표면에 닿자 직접결정이 되어 응축했던 것이다.
1813년 이 새로운 원소의 발견은 흥미진진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요하게 응용되기도 하였다. 1820년 제네바의 외과의사 장 프랑소와 코인데는 해조에서 채취한 요오드를 갑상선종의 치료에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갑상선종은 음식물 중의 요오드의 결핍에 의해 일어나는 병으로서, 갑상선 호르몬(티록신)의 생합성은 요오드를 필요로 한다. 갑상성 호르몬은 생체 내의 많은 화학반응의 속도를 제어하며, 일반적으로 이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생체의 움직임은 빨라진다.
식물 중에 요오드가 결핍되면 다량의 갑상선 호르몬을 만들기 위해 갑상선이 확대되면서 보충하려고 한다. 이 갑상선의 확대를 갑상선종이라고 부른다. 갑상선종은 해안 가까이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드문데, 그 이유는 해산물에서 요오드를 충분히 섭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안에서 떨어져 사는 사람들이 갑상선종을 예방하기 위해 보통의 소금(염화나트륨)에 요오드화나트륨을 소량 첨가하는 일은 현재 일반화 되어있다.
헬륨 및 기타 희귀가스. 헬륨이 발견된 곳은 지구상이 아니고 엉뚱하게도 태양에서다. 이 발견은 인류의 우주비행보다 휠씬 이전인 1868년으로 그것은 우연이었다. 1859년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화학자 빌헬름 분젠과 물리학자 로버트 키르호프 이 두 사람의 독일 과학자가 분광기라는 광학장치를 발명했다. 이 장치는 원소를 백열로 가열했을 때 발생하는 밝은 선의 스펙트럼을 볼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 장치를 사용해서 그들은 주기표의 '나트륨족'의 두 가지 새로운 원소인 세슘(cesium)과 루비듐(rubidium)을 1860년과 1861년에 밝혀냈다.
프랑스 무돈에 있는 천체물리학관측소 소장 피에르 옌센은 1868년 8월 18일 인도로 가서 일식을 관측하고 사진을 촬영했다. 그해 10월, 런던의 왕립과학대학의 천체물리학 교수 J. 노먼 록카는 특수한 망원경을 사용함으로써 일식 때가 아니더라도 태양 주의에서 빛을 발하는 가스인 스펙트라를 관측하여 이것을 측정, 기록했다. 또한 그는 태양에서 분출되는 막대한 양의 기체 중에서 수소로 보이는 스펙트럼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나트륨의 특징으로 알려진 2개의 황색선도 보였으나 그 이외에 그동안 알려진 어느 원소에도 해당되지 않는 3번째의 황색선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이 스펙트라가 태양을 에워싼 기체 중에는 존재하지만 지구상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은 원소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고 결론지었다. 그는 이것을 관측한 날인 1868년 10월 20일, 이 발견을 왕립학회에 전했다. 3일 후 와렌 드 라 루는 록카의 발견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보고했다.
한편 옌센은 8월 18일 인도에서 기록한 스펙트라를 연구하여 같은 새로운 황색 선을 발견하여 10월 20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 편지로 보고했으나, 록카의 편지가 드 라 루에 의해서 전해진 것보다 불과 몇 분 늦게 전해졌다. 관측은 옌센이 빨랐고 발표는 록카가 빨랐다. 이것 때문에 영예의 선취권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천문학자는 서로 선취권을 주장하지 않고 사이좋은 친구가 되었고, 프랑스 과학아카데미는 두 사람의 옆얼굴과 이름을 함께 새긴 기념 메달을 만들었다.
록카는 맨체스터대학의 화학교수인 프랑크랜드의 도움을 얻어 연구를 계속했다. 새로운 스펙트럼선이 새로운 원소에 속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어서 희랍어로 태양을 뜻하는 헤리오스(helios)에 연유시켜(helium)이라고 명명했다. 그 후, 지구상에서의 헬륨 탐색이 시작되었으나 아무런 증거도 얻지 못한 채 23년이 지났다. 1891년 미국 지질조사소의 W. H. 힐레브랜드는 우라늄 광석을 가열할 때 발생하는 기체의 스펙트럼을 관측했다. 기체는 거의가 질소였으나 스펙트럼 중 몇 개의 선은 질소의 성질이 아니었다. 런던의 윌리엄 렘지 경은 힐레브랜드의 보고서를 읽고 이 미지의 스펙트라선은 그와 레일리 경이 1년 전에 공기 중에서 발견한 진귀한 불활성 기체상인 원소 아르곤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다른 형의 우라늄광을 입수하여 힐레브랜드가 했던 것과 같이 처리해 보았더니 예상했던 대로 아르곤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질소에도 아르곤에도 없는 또 다른 황색의 스펙트럼선이 관측되었다.
처음에 그는 이 선이 불활성 기체 크립톤(이 이름은 나중에 붙여졌다)에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했으며, 이것을 아르곤과 관련이 있는 또 다른 불활성 기체로 생각했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한 스펙트럼 사진의 측정을 부탁하려고 이 기체의 샘플을 록카와 윌리엄 크록스 경에게 보냈더니 두 사람 모두 이 황색선의 파장이 태양 대기 중에 헬륨과 똑같이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렘지는 1895년 3월 26일 영국의 학사원과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양쪽에 지구상에서의 헬륨 발견에 관해서 편지를 보냈다. 윌리엄 렘지 경은 아르곤과 헬륨(지구상에서)등 기타 희귀가스의 발견으로 1904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다. 그는 1895년부터 1898년에 걸쳐서 크립톤, 제논, 네온을 발견하여 헬륨의 동족들로 주기율표의 제로족(새로운 정의로는 18족)의 행을 메웠던 것이다.
원소가 원자번호와 순환적(주기적)인 유사성에 의해서 배치되어 있는 주기율표에서 제로족의 행은 희귀한 가스원소에 해당된다. 원소의 주기율표를 고안한 주된 공로는 일반적으로 러시아인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에게 돌아갔다. 이 전에 제로족의 원소는 다른 원소와 결합되지 않으며, 결합력 즉, 원자가가 제로로 여겨졌으나 지금은 이들 원소도 쉽지는 않지만 다른 원소와 결합된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04년 헬륨은 그야말로 '희귀한' 가스였으나 1905년에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시 세렌디피티의 등장이다. 미국 캔자스 주 덱스터 가까이에 있는 천연가스를 증기발생기의 연료로 쓰기 위해 분출구에 두껑을 덮고 파이프로 운반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가스는 연소되지 않았다. 캔자스대학의 과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그 가스는 주로 질소였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약 2%의 헬륨을 함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텍사스주, 뉴멕시코주, 유타주 및 캐나다의 몇 개 주에 있는 많은 분출구에서 산출되는 가스가 소량의 헬륨을 함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현재 헬륨의 주요 산출지는 텍사스주 애머릴로의 가까이에 있다. 헬륨 함량은 약 1.8%로 낮지만 이 지방의 가스량은 매우 많아 세계의 헬륨 주요 공급원으로서 충분히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
(해설) 금세기 초엽부터 독일은 공기보다 가볍고 단단한 배를 개발하여 이를 설계한 페르디난드 폰 제펠린 백작의 이름을 따서 제펠린이라고 불렀다. 이들 비행선의 부양력은 수소에 의한 것이었다. 이 비행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정찰과 폭격용으로 사용되었으며 1930년대에는 상업 승객 수송에 사용되었다. 비행선의 수소 사용은 1936년 미국 뉴저지주 레이크허스트에 착륙하려던 힌덴부르크호의 대화재로 인해 막을 내렸다. 이 사고는 대기의 전류가 방전되어 수소에 점화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6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고는 상업 항공 사상 최초의 재난사고였다.
이와 유사한 비행선이 후에 독일에서 설계되어 헬륨으로 운행하도록 개량되었다. 그러나 국제정세의 긴장 때문에 헬륨생산을 독점하고 있던 미국은 헬륨의 수출을 거절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은 연식 소형 비행선을 대잠수함용과 연안 순시용으로 사용했으며, 이 부양력은 전부 헬륨에 의한 것이었다. 헬륨의 부양력은 수소의 93%로 다소 약하지만 헬륨 자체는 스스로 타거나 연소를 돕지 않으므로 화재의 위험은 전혀 없다. 공기보다 무거운 현대 비행기의 발달로 인해 여객수송용으로서 공기보다 가벼운 탈 것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축구경기장의 공중에 떠 있는, TV 카메라의 훌륭한 촬영기지로 마련된 연식 소형 비행선을 올려다볼 때마다 태양에서 또 이후에 지구상에서 세렌디피티적으로 발견된 진귀한 원소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제8장. 마취제 발견의 영예를 둘러싼 투쟁.
프리스트리가 산소를 발견(제7장)하기 2년 전인 1772년, 그가 자신의 '공기연구장치'로 발견하여 조사한 기체 중 하나가 아산화질소(N2O)이다. 이 기체는 무독성이지만 기묘한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을 흡입한 사람이 노래를 부르거나 싸움을 하거나 웃거나 하는 등 광태를 보이는 것이었다. 이 웃는다는 데서 아산화질소를 속칭 '웃음 가스'라고도 한다.
1798년 20세인 험프리 데이비스 토마스 베도우즈에 의해 영국의 브리스톨에 설립된 기체연구소에서 여러 가지 기체의 의학적 응용에 관한 연구를 담당하고 있었다.
다음 해 초에 데이비는 아산화질소를 좀 더 오래 흡입하면 일시적으로 의식을 잃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테스트를 해보고자 이 기체를 7분간 15리터를 흡입했더니 '완전히 취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자기 자신의 경험을 꽤 화려하게 보고했기 때문에 그와 연구소는 대단히 주목을 받게 되었고, 데이비는 1801년 런던으로 초대되어 왕립연구소에 일자리를 얻어 바로 그곳의 교수로 승격했다. 데이비가 유명해진 것은 주로 여러 가지 원소를 발견하여 그것들의 성질을 확인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그는 전기학의 천재 미첼 파라데이를 자기의 조수로 맞이하였으며 파라데이는 그의 뒤를 이어 왕립연구소의 교수가 되었다. 데이비는 34세로 나이트 작위를 받았다.
데이비는 아산화질소를 외과수술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시사했으나 그의 제언은 그 이상 진척되지 않았고 19세기 초엽의 아산화질소의 유일한 용도는 오락을 위한 것이었다. 1844년 코넥티카트 주 하트포드에서 오락용의 공개실험 장소에서 수술시 필요한 마취제를 발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콜톤이라는 실험자가 이 가스의 흡입을 원하는 희망자를 모집한 결과 여러 명이 응모했는데 그중에 치과의사 호레스 웰즈와 함께 왔던 사무엘 쿨리라 청년이 있었다. 가스를 흡입하자 쿨리는 날뛰기 시작하여 아무나 붙들고 난동하다가 비실대면서 쓰러졌다. 이 소동이 있은 후 그는 관객석으로 돌아가서 웰즈의 옆자리에 얌전하게 앉았다. 그런데 그의 주변 사람들이 쿨리의 의자 밑에 피가 고여있는 것을 보고 그의 다리에 심한 상처가 나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쿨리 자신은 이런 상처가 났는데도 통증을 느끼지 않았으며 후에 가스의 기운이 다 빠지고 난 후에야 통증을 느꼈다. 웰즈는 치과의사였으므로 이 사건의 중요성을 인식하였다. 그 당시 발치는 대단한 고통이었다. 만일 이 가스가 사람의 의식을 읽게 하고 쿨리의 경우처럼 심한 통증을 모르고 있을 수 있다면 무통 발치가 가능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웰즈는 바로 이 가능성을 시도해 보았다. 친구인 치과의사를 불러서 아산화질소를 흡입한 후 자신의 충치를 뽑도록 부탁했다. 이 실험적 발치는 몇 사람의 증인 앞에서 이루어졌다. 후에 이들 증인들은 웰즈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에 수술이 진행된 것을 보았다는 것과 웰즈가 의식을 회복했을 때 통증을 느끼지 않았다고 그가 언급한 것을 증언했다.
그 후에 웰즈는 보스톤에 있는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의 계단식 수술 견학용 교실에서 실연을 공개했다. 가스를 흡입하여 그것이 효력이 있는 동안에 발치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환자가 있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웰즈는 마취제의 약효가 돌기 전에 발치하도록 명령했다. 그 때문에 환자는 극도의 통증으로 절규했다. 비난당하며 계단교실을 쫓겨난 웰즈는 곧 치과를 페업하게 되었다.
웰즈가 실패를 한 2년 후, 1846년에 웰즈의 제자이자 후에 협력자이기도 한 윌리암 T. G. 모톤은 자기의 환자에게 아산화질소를 사용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웰즈가 불운한 실패를 한 후에도 환자에게 아산화질소를 사용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었다. 모톤이 말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당시 그의 협력자인 찰스 T. 잭슨에게 아산화질소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물어보았다. 잭슨은 아산화질소 대신에 에테르를 사용하도록 모톤에게 말했다.
잭슨에 의하면 그보다 이전에 마취제로 에테르를 사용한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1846년 9월 30일, 대성공적으로 모톤은 에테르 마취약을 사용해서 무통으로 환자의 치아를 뽑았다.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웰즈가 실패했던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다시 한번 실연을 공개할 허가를 얻었다. 이때 모톤은 에테르를 마취제로 사용하면서 환자 목에 나 있는 종양을 제거했다. 많은 사람이 이 역사에 남을 실연을 목격했으며 그 덕분에 이번에는 웰즈와 모톤과 잭슨 사이에 대단한 분쟁이 시작되었다(모톤이 사용한 휘발성 액체의 정식 화학명은 디에틸에테르이다. 이는 분류상 에테르로 알려져 있는 일군의 동족 화합물 중에서는 매우 흔한 것으로서 화학자가 아닌 사람이 '에테르'라고 말했을 때는 디에틸 에테르를 지칭하는 것이 보통이다).
잭슨은 아주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는 휠씬 이전에 에테르의 마취작용을 자기 자신이 경험했기 때문에 모톤에게 에테르를 사용하도록 실제로 설득했다고 주장했다. 1841년에서 1842년에 걸친 겨울에 그가 어떤 실험에서 염소를 사용하다가 그것을 넣어둔 용기가 깨져서 그 유독한 냄새 때문에 무척 혼이 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에테르와 암모니아를 번갈아 흡입하면 무척 편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좀 더 에테르를 흡입하자 목의 고통이 더욱 치유되어 거의 통증을 느끼지 않게 되면서 의식이 몽롱해졌다. 잭슨은 "나중에 이런 현상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감각신경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켜 공통을 느끼지 않고 외과수술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으로, 드디어 오랫동안 추구해 오던 발견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내 머리에서 번뜩였다"라고 말해다.
잭슨은 모톤 뿐만 아니라 웰즈와 데이비도 비난했다. 그는 이것을 발견한 것은 자기라고 주장했다. 잭슨, 웰즈, 모톤 간의 분쟁은 이어졌다. 논쟁의 해결을 위해 드디어 미국 연방의회까지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마취제 발견의 명예를 다투는 또 한 사람의 경쟁자가 나타났다.
네 번째인 이 경쟁자는 조지아주 제퍼슨에 사는 크로우퍼드 W. 롱 박사였다. 1840년대 초 미국 남부에서는 웰즈가 코넥티카트 주 하이포드에서 목격된 실연과 비슷한 아산화질소를 흡입하여 '붕 뜬 기분'이 되는 파티가 유행했다. 롱의 친구 몇 사람이 그에게 아산화질소를 요구했다. 롱은 그것은 없지만 에테르는 가지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 자신의 경험에도 에테르는 '기분을 들뜨게 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에테르를 가지고 자신들이 즐기고 나서 급사 일을 하고 있는 노예에게 시험해 보면 재미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을 싫어하는 노예와 실랑이를 하는 동안 실수로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바람에 에테르를 대량으로 흡입한 노예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설쳐대던 무리는 그 노예가 죽은 줄 알고 당황하면서 급히 롱 박사를 불렀다. 조사해보니 호흡도 맥박도 규칙적으로 정상이었으나 정신이 깨어나지 않았다. 몇 시간 후, 그의 정신이 깨어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웰즈와 마찬가지로 롱도 마취제(이 경우는 아산화질소가 아니고 에테르) 효력이 있는 동안에 환자를 수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롱 박사가 이 아아디어를 시험하는 기회는 1842년 3월 30일에 생겼는데 그는 에테르를 흡입시킨 환자의 목에서 두 개의 종양을 무통으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모톤이 보스턴에서 에테르 마취로 환자를 수술하기 4년 전이었다. 그 후, 롱은 그의 환자를 마취시키는 데 언제나 에테르를 사용했으나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어서 그의 발견을 선전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잭슨, 모톤, 웰즈 사이에서 논쟁이 벌어지자 롱의 친구들은 그의 선취권을 의회에 호소했다. 그러나 의회는 공식적인 판정을 거절했다. 웰즈는 사후이가는 하지만 1864년에 미국 치과학회로부터, 또 1870년에는 미국 의학학회로부터 미국에서 마취제를 발견한 사람이라는 결의를 얻었다. 모톤과 롱은 자기들의 수술에 에테르를 계속 사용했다. 에테르 마취 중 사고는 흔히 있었으므로 치과의사 의사들 중, 초 보수파들은 그 사용을 반대하여 실제로 모톤은 그 직을 그만둘 때까지 매우 성가신 괴로움을 받았다. 그는 1868년 뉴욕의 센트럴파크에서 의식불명인 채 발견되었으며, 누군가의 습격으로 여겨지는 부상으로 사망했다. 잭슨은 프로시아 보라매 훈장을 받은 것 외에 별로 인정받은 것 없이 1880년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크로우퍼드 롱은 1878년 자연사했다. 조지아주는 워싱턴 DC의 영예의 전당에 그의 조상을 세웠으며 그 비문에는 "1842년 3월 30일 미국 조지아주 잭슨카운티의 제퍼슨 시에서 수술용 마취제로 황산체테르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크로우포드 W. 롱에게 조지아주에서 바치다"라고 쓰여있다.(실은 이 황산에테르란 기술적으로 디에틸에테르였다.) 마취제로서의 아산화질소나 에테르의 발견은 세렌디피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발견의 하나이며, 이것처럼 인류에게 중요한 것도 흔치 않다. 또한 명예나 공적의 판정이 어려운 것도 달리 없었을 것이다.
제9장. 유기화학이 의미를 갖기 시작하다.
실험실에서 합성된 매우 복잡한 화합물이라면 아마도 비타민 B12일 것이다. 1972년에 로버트 B. 우드워드와 알버트 에센모셔가 그 전합성을 발표했다. 이 전합성은 하버드와 취리히에서 19개국으로부터 참가한 100명이나 되는 화학자가 11년 동안 공동연구한 결과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 합성은 비타민 B12의 실용적인 제조법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연구 중에 개발된 새로운 반응, 기술, 이론을 생각하면 유기합성 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한편, 사상 처음으로 합성된 천연화합물인 요소는 휠씬 간단하다. 프리드리히 뵐러가 1828년 베를린의 그의 실험실에서 우연히 이를 합성했다.
요소는 1828년에는 대표적인 유기화합물로 알려져 있었다. 고명한 스웨덴의 화학자 베르젤리우스는 1807년경 '유기물'이라는 말의 의미를 정의했다. 그것은 식물이나 동물이라는 생물체에 의해서만 만들어지는 물질을 말하며, 생명이 없는 광물원에서 얻어지는 무기물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19세기 초엽, 이미 알려져 있는 모든 화합물들은 이 두 가지 종류의 어느 것인가로 나누어져 있었다. 무기물이라고 하는 것은 이를테면 보통의 금속 원소라든가 광물 중에서 볼 수 있는 화합물 따위로서 설탕이나 전분, 동물성 지방이라는 유기물보다 휠씬 간단했다. 유기물은 하나의 식물 또는 동물에서 다른 식물이나 동물로 유전이 가능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 생명력 이론(생기론)은 무기물을 실험실에서 합성할 수 있는 데 반하여 유기물은 최소한 무기재료가 아닌 한 실험실에서 합성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요소는 1828년에는 전형적인 유기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사실 뵐러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의학생이던 무렵 요중에 함유되어 있는 요소에 흥미를 가지고 개나 자기 자신의 요에서 요소를 추출하는 실험을 했다.
뵐러는 18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가까이의 에셔스하임 마을에서 태어났다. 프랑크푸르트의 김나지움(중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후에 자신이 시인했듯이 화학실험만 하느라고 다른 공부를 할 틈이 없었다. 자기 방을 실험실로 꾸미고 부엌의 석탄 아궁이에서 광석이나 약품을 가열했다고 하니 그의 어머니는 골치가 아팠을 것이다. 김나지움을 졸업한 젊은 뵐러는 마르부르크대학에 들어갔으나 집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곳 집주인에게 평판이 나빴다.
그 이유는 자기 방에서 실험만 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마르부르크 대학에 1년간 있다가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당시 독일에서 유명한 화학자 레오폴드 그멜린의 영향을 받았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는 의과를 졸업했으나 한때는 의사였던 그멜린의 권유로 임상의의 길을 단념하고 화학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멜린의 추천으로 뵐러는 베르젤리우스와 같이 연구하기 위해 스톡홀름으로 갔다. 그곳에서 단지 1년을 보냈지만 그는 베르젤리우스와 생애를 통한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하이델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잠시 베를린의 공업학교 교사직을 맡았다. 이는 일류대학의 직이 아니고 사실상 대도시 베를린의 야학 선생 같은 것이었으나 자기 자신의 실험실을 갖게 되어 그는 이것을 잘 활용했다. 1827년에 그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순수한 금속상태의 알루미늄을 생산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한 방법은 실용적이 아니어서 알루미늄이 공업용으로 생산되기에는 오하이오주 오버린대학의 한 미국인 학생에 의해서 전해법이 발명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이 장의 해설 참조).
이 베를린의 실험실에서 뵐러는 1828년 그의 명성을 유기화학의 역사에 새기게 되는 실험을 했다. 그는 전형적인 무기염인 시안화칼륨(청산가리)과 황산암모늄으로 그림 9-3과 같은 구조로 여겨지는 순수한 시안화암모늄을 만들려 했다. 두 가지 소금을 함께 가열하여 시안화암모늄이 함유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용액을 증발시켰다. 그러나 그가 얻은 백색결정은 개나 사람의 요로부터 이전에 가끔 취한 적이 있는 요소와 똑같았다. 그는 이것이 실지로 요소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예기치 않은 결과에 대해서 뵐러는 "무기물질에서 유기물질(소위 동물성 물질)을 인공적으로 제조하는 예가 되기 때문에 놀라운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뵐러와 그의 발견을 바로 알게 된 베르젤리우스에게도 이 놀라운 결과의 또 하나의 측면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시안화암모늄과 이것으로 만들어진 요소는 '이성체'였다. 이 '이성체'라는 말은 같은 원소를 같은 비율로 구성하고 있는 화합물군을 말하며 베르젤리우스가 희랍어의 '같은 부분'이라는 말에서 따온 표현이었다. 시안화암모늄과 요소는 양쪽 다 탄소원자 한 개, 산소원자 한 개 질소원자 두 개 그리고 수소원자 네 개를 가지고 있다. 뵐러와 베르젤리우스는 아무래도 이 합성이 생기론보다는 '이성체'에 미치는 영향에 더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뵐러에 의한 우연의 발견은 탄소화합물의 발전에 제동을 걸고 있던 생기론의 종언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그 시대의 다른 화학자들은 시안화칼륨이나 황산암모늄은 통상 무기물로 간주되고 있으나 뵐러가 사용한 것은 뿔이나 혈액과 같은 유기물로 만들어진 것으로서 원소가 아니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뵐러의 합성이 생기론을 페기시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1845년에 헤르만 콜베가 초산을 그 구성 원소인 탄소, 수소, 산소로 합성함으로써 결벽스러운 사람들도 겨우 생기론의 종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유기화학의 정의도 이들 화합물이 천연에서 얻어진 것인가 실험실에서 합성된 것인가에 상관없이 '탄소화합물의 화학'으로 되었다(현재 인정되고 있음).
뵐러는 그 후, 그의 나머지 인생을 유기화학에 전념하며 보낼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젊었을 때 광물에 대한 흥미가 있었던 그는 연구의 대부분을 무기화학 분야에 쏟았다. 1831년에 베를린을 떠나 캇셀의 다른 공업학교에 단기간 근무한 후, 1831년에 목표로 했던 독일의 일류대학인 괴팅겐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여기서 그는 친구이던 기센대학의 교수 유스투스 리비히와 공동으로 생애를 통해 매우 가치가 높은 연구를 몇 가지 했다.
뵐러가 괴팅겐대학 화학과의 평가를 높인 덕택에 전세계에서 화학자가 모여들었다. 1882년에 사망할 때까지 그는 괴팅겐대학에 있으면서 교육과 화학자의 연구지도, 교과서의 집필, 화학연구잡지의 편집 등에 종사했다.
뵐러는 괴팅겐대학에서 8,000명의 학생을 지도했다. 그들 중에 나중에 튀빙겐대학 교수가 된 루돌프 피티히가 있으며 이 피티히의 학생 중에 미국에서 온 아일러 렘센이 있었다. 렘센은 튀빙겐대학에서 공부한 후, 미국으로 돌아가서 존스 홉킨즈대학의 화학과를 유럽의 우수한 수준까지 끌어올렸다. 그리하여 그곳은 미국의 차세대 화학자를 길러내는 중심지가 되었다(존스 홉킨즈대학의 렘젠의 연구실에서 설탕의 대용품인 사카린이 우연히 발견된 이야기는 제22장에 설명되어 있다).
뵐러의 여러 가지 뛰어난 업적 중에서도 약관 27세 때 시안화암모늄을 가열하여 매우 간단한 화합물인 요소를 만든다는, 예상하지 못했던 이러한 합성은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서 단연 빛난다. 이 업적은 현대 유기화학 교과서에 대부분 쓰여 있다. 전형적인 무기화합물에서 전형적인 유기화합물의 합성은 생기론에 종지부를 찍고 합리적인 기반 위에 유기화학의 단서를 제공했던 것이다.
(해설) 뷜러 밑에서 공부하기 위해 괴팅겐대학으로 모인 전 세계의 수많은 화학자 중의 하나인 프랭크 F. 쥬엣은 미국으로 돌아가서 오하이오주의 오버린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1880년대에 쥬엣은 알루미늄이 매우 풍부한 금속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광석으로부터 이를 실용적인 방법으로 추출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학생들에게 가끔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었다. 독일에서 그의 선생이던 뵐러 교수가 이 금속을 제조한 최초의 사람이었으나 뵐러가 사용한 방법은 매우 어렵고 비경제적이었기 때문에 발견된 지 50년 이상이 지났는데도 아직 박물관의 진열대에 놓여있는 진귀품에 지나지 않다고 늘 학생들에게 말했다.
오버린대학에 쥬엣의 학생으로 찰스 마틴 홀이라는 한 시골 학생이 있었다. 그는 이 알루미늄에 관한 과제에 대하여 매력을 느끼고 광석에서 알루미늄을 추출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것을 결심하게 되었고 이것을 졸업 연구로 선택했다. 그 방법으로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점차 굳어져갔다. 그의 집 뒤쪽에 있는 헛간에서 급조 전지와 화로를 만들어 화로 속에서 빙정석이라는 광물을 용해한 후에 알루미늄 광석인 그 흔한 보크사이트를 첨가하자 보크사이트가 융용빙정석 속에 용해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혼합물에 전류를 통하게 하면 반갑게도 그 장치의 음극 주위에 은색 알루미늄 액체 덩어리가 모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빛나는 금속입자를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때까지 식자, 곧바로 쥬엣 교수한테 달려가서 의기양양하게 그것을 보였다. 이는 1886년 2월 23일로 뷜러가 순수한 알루미늄을 제조한 지 59년 후의 일이었다. 알루미늄의 실용적 제조법을 고안한 청년은 뵐러 제자의 제자였던 것이다. 수개월 후, 프랑스 청년인 P. L. T. 헤롤트가 같은 전해법을 고안했으나 그때는 이미 홀이 특허를 신청했으며 홀의 특허에 선취권이 인정되었다. 아메리칸알루미늄회사(ALCOA)는 홀의 소박한 실험에 의해 탄생되었으며 근본적으로 같은 전해법을 사용했다. 찰스 마틴 홀은 대부호가 되었다. 그가 사망했을 때, 유언으로 재산의 일부가 모교인 오버린대학에 기증되었다. 지금 누구라도 캠퍼스를 방문하면 마틴 홀이 그의 어머니 이름으로 헌납한 아름다운 강당과 화학 건물에 있는 그의 조각상(이전에는 캠퍼스 주변에 있었으나 학생들의 장난을 피하기 위해 이곳으로 옮겨졌다)과 캠퍼스에서 한 블록쯤 떨어진 곳에 있는 그의 생가를 볼 수 있다. 그의 조각상과 홀 가의 기념패는 그의 발견 덕분으로 전 세계에서 널리 이용할 수 있게 된, 그에게 잘 어울리는 금속, 즉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져 있다.
제10장. 영상기록의 시작.
독자 여러분께서는 조지 워싱턴의 사진을 본 적이 있습니까? 또 에이브라함 링컨의 사진은 얼마나 보았습니까? 성공적인 첫 사진술이 L.J.M. 다게르에 의해 발명된 것은 1835년으로 위싱톤이 사망한 후이고,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이었다. 이것이 발명되기 전에는 유명인의 초상도 화가의 수고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게르가 최초의 사진을 촬영하는 데 사용한 것은 '암상장치(camera obscura)'이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상자의 한쪽 끝에 렌즈가 있고 상이 초점을 맺는 위치에 간유리판을 장치한 것이었다. 암상장치는 수 세기 전에 발명된 것으로서 레오나르드 다 빈치가 1519년 이전에 기술하고 있으며, 1573년에는 E. 단티가 렌즈 뒤에 거울을 놓고 반전된 상을 다시 되돌리도록 고안하였다. 다게르 시절에는 유리판 위에 얇은 종이를 깔고 물체나 풍경을 추적하는 데 암상장치가 사용되고 있었다. 암상의 상을 고정시키려고 한 초기의 한 사람은 프랑스 사람 J. N. 니엡스였다. 그가 사용한 것은 아스팔트[유태역청]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빛에 노출되면 어떤 종류의 용매에도 잘 녹지 않게 된다. 이 방법으로 1822년경에 그는 암상장치를 사용해서 일단 내구성이 있는 상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이것이 세계 최초의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품상태가 만족스럽지 못했으며, 방법 역시 실용적이지 못했다. 한편 다게르는 빛에 분해되기 쉬운 것으로 알려져 있던 은염으로 실험했다. 니엡스가 하고 있는 일을 알게 된 다게르는 그를 만나 공동으로 일을 하기로 계약했다. 그러나 니엡스가 곧 사망(1833)했기 때문에 그의 아들 아이시도르와 금융상의 언급은 있었지만 일은 혼자서 진행하게 되었다.
다게르는 은으로 도금한 동판을 번쩍번쩍 닦아내고는 요오드의 증기에 갖다 대어 표면에 요오드화은의 얇은 층을 만들었다. 암상장치를 사용해서 이 판을 노광시키자 희미한 형상이 생겼다. 이 상을 짙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다시 한번 사용할 목적으로 희미하게 형상이 나타나 있는, 노광이 끝난 판을 씻어서 약품이 들어있는 선반에 넣어 두었다. 며칠 후 다시 그 판을 꺼내보니 놀랍게도 진한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이것은 지극히 우연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발견된 것은 다게르에게 '통찰력'과 '마음의 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선반 속의 약품 중에서 어느 것인가가 형상을 진하게 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선반에다가 노광한 요오드화은의 판을 놓아둔 채 약품을 하나씩 꺼냈다. 그런데 약품을 전부 꺼냈는데도 상이 진하게 나타나는 것이었다. 선반을 조사해보니 거기에 깨진 온도계에서 흘러나온 수은이 몇 방울 떨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
다게르는 수은의 증기가 상을 짙게 한 원인이라고 추정하여 그 즉시 실험하여 확인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은판사진'인 것이다. 그 후, 사진가들은 섭씨 75도 정도로 가열한 수은이 들어있는 컵 위에 노광한 판을 놓고 '잠상'을 현상하게 되었다. 다게르는 자신의 수은에 의한 발견에 관하여 "이미 수은화합물 실험을 하고 있었으므로 금속수은의 증기는 바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행운은 내가 그것을 잡을 수 있도록 인도했다"고 설명했다(한편 불행하게도 지금 잘 알려져 있는 수은 증기의 높은 독성 때문에 은판사진을 취급하는 많은 사진사가 심한 병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일찍 사망했다).
은판사진은 양화사진이었다. 요오드화은에 빛이 닿게 되면 그 부분이 광화학적 현상을 일으켜 변질되며, 원소 상의 은과 수은이 결합하게 되면 밝은 아말감(amalgam)이 생성된다. 광선이 닿지 않은 부분의 요오드화은은 다음 과정에서 씻겨 없어진다. 은-수은 아말감 부분은 은도금 판인 거울 속에서 어두운 배경을 반사시켜서 밝은 상을 만든다(만일 창공이나 광선 아래에서와 같은 밝은 배경에서 은판사진을 보면 상은 어둡게 되고 배경이 밝게 된다). 변화 안 된 요오드화은을 제거하는 방법은, 처음에는 단순히 일반 소금(염화나트륨) 물로 씻었으나 티오황산나트륨(소위 하이포)이 휠씬 좋은 정착액이라는 것이 알려져 바로 개량되았다. 은판사진은 금새 성공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주로 몇 사람의 저명한 파리 과학자들의 주목을 끌었기 때문이다. 그중의 한 사람이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사무국장인 프랑소와 장 아라고이다. 그는 1839년 8월 19일 아카데미회합에서 이 발명을 소개하고 다게르와 니엡스에게 상을 수여하도록 의회에 제안했다. 상은 실제로 수여되었으며, 이것은 국가의 자랑임과 동시에 이 방법이 다른 나라로 건너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을 것이다. 수상 덕분으로 이 새로운 사진술은 한층 널리 알려져 곧이어 프랑스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에서도 인기 절정에 도달했다. 실제로 프랑스 정부가 염려했던 대로 그 이용과 발전은 주로 미국에서 진행되었다.
다게르의 선구적인 업적이 있은 후, 사진술은 많이 개량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음화-양화법도 그중에 포함되어 있다. 일반 대중의 은판사진에 대한 매료는 19세기 중렵의 사진술에 엄청난 자극을 주었다. 은판사진과 그 발명가를 출범시칸 발견은 세렌디피티에 의한 것이었다.
제11장. 천연고무와 합성고무.
16세기 초엽, 콜럼버스를 비롯한 스페인 탐험가들은 남미의 인디언들이 어떤 나무에서 배어나온 라텍스(latex)라는 식물성 유탁액으로 공을 만들어 그것으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인디언이 라텍스로 사용한 것 중의 하나가 히비아(hevea)이며 라텍스를 주로 취한 나무는 히비아 고무나무(hevea brasiliensis)였다. 스페인 탐험가들이 약간의 이 '인도 고무'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산소의 발견자인 조셉 프리스트리가 연필로 쓴 것을 이것으로 문지르면 지울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까지는 적당한 사용처를 몰랐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고무(rubber)는 문지르다(rub)에서 유래한 것이며, 대수롭지 않지만 아직도 매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고무는 온도가 높아지면 부드러워지면서 끈적끈적해지고 온도가 낮아지면 굳어지거나 잘 부서졌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2세기가 지나도록 중요한 사용처를 발견하지 못했다. 인도 고무의 이용방법 중 하나로 스코틀랜드인 찰스 매킨토시가 알아낸 것은 두 장의 천에 고무를 칠하고 이것을 맛붙이는 방법이었다. 매킨토시는 이와 같이 해서 방수가 되는 이중의 천으로 레인코트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레인코트는 고안자의 이름을 따서 '매킨토시'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영국에서는 불려지고 있다.
고무나 고무 피복으로 만들어진 장화나 단화는 처음에 영국에서 생산하여 미국으로 수출하였으나, 1830년대 이후는 미국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겨울에는 딱딱해지고 여름에는 흐물거리면서 망가지는 구두에 미국인은 손을 들고 말았다. 이때 찰스 굿이어가 등장하게 된다.
굿이어는 1800년 미국 코넥티커트 주 뉴헤븐에서 그다지 성공하지 못한 상인 겸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젊은 굿이어는 고무를 온도변화에 둔감하게 하면 많은 용도에 유용하게 사용될 것이라는 가능성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 꿈에 사로잡힌 탓으로 그의 건강과 그의 가족이 소유했던 많지 않은 재산도 1830년부터 1839년 동안에 완전히 고갈되었다. 그동안에 그는 빚을 갚지 못해서 몇 번인가 투옥되기도 했다. 그는 의식주를 친척에게 의지하면서도 그 꿈에 집착했다. 그의 대실패 중에는 고무를 주입시켜서 만든 방수용 우편 가방을 정부에 납품한다는 거액의 계약을 했는데 우편가방은 공장에서 출고되기도 전에 열로 인해 녹아버려 모양이 망가지는 사건도 있었다.
비과학적인 방법까지 포함해서 온갖 방법으로 고무를 처리해 보았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우연히 고무와 유황의 혼합물을 뜨거운 난로에 가까이 대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고무는 녹지 않고 마치 가죽처럼 조금 탔을 뿐이었다. 그는 이 중대한 발견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의 딸이 나중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방안을 들락거리면서 저는 아버지가 고무의 한 조각을 불 가까이에 대고 있는 것을 얼핏 보았습니다. 동시에 저는 아버지가 무엇인가를 발견해서 무척 생기가 넘치시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버지는 고무 조각을 아주 추운 부엌문 바깥에 못을 박아 붙였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것을 집안으로 가지고 들어오신 아버지는 아주 흐믓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전날 밤 밖에 내걸기 전의 상태와 똑같은 유연성이 있었습니다(피어스 저 '찰스 굿이어의 생활과 발견들').
굿이어는 실험을 거듭하여 고무를 안정화시키는 데에 필요한 최적 온도와 가열시간을 결정했다. 그는 이 방법의 특허를 신청하여 1844년에 인정을 받았다. 이 방법의 명칭은 로마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발칸(Vulcan)'에 연유시켜 발카니제이션(한국어로는 가황)이라고 명명했다.
(해설) 고무를 유황과 함께 가열하면 유황의 원자는 고무의 고분자 사슬과 사슬을 연결시켜서 안정되게 하며, 고무의 매트릭스(matrix) 전체를 온도변화에 민감하지 않도록 한다. 윌폴의 정의를 엄밀히 분석하면 굿이어에 의한 가황법의 우연한 발견을 세렌디피티라고는 할 수 없다. 구하지도 않았던 무엇인가를 우연히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는 필사적으로 추구하고 있던 해답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었다. 서문에서 내가 밝혔던 바로 같이 아무리 찾아도 구하지 못했던 것이 운 좋게 발견으로 이어진 예는 많이 있다.
이러한 예는 윌폴이 세렌디피티라는 말로 표현하려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지만 역시 밀접하게 관련된 현상으로서 유사 세렌디피티라고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황법을 발견한 후에도 굿이어의 인생은 행복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는 자기의 특허를 지키기 위한 분쟁에 말려들어 다니엘 웹스터가 특허침해 사건에서 그의 변호에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1890년에 사망할 때까지 거액의 부채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가황법은 공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어 고무의 사용량을 격증시켰다. 1858년까지 제조된 고무제품의 액수는 약 500만 달러에 달했다. 굿이어 사를 포함한 고무공업회사가 1870년 및 그 이후에 오하이오주 애크론에 설립되었다. 더구나 이것은 타이어로서 오늘날 고무 사용량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승용차, 트럭, 비행기가 나타나기 이전의 일이었다.
합성고무. 상업적으로 성공한 최초의 두 가지 합성고무인 네오프렌(Neoprene)과 티오콜(Thiokol)은 둘 다 우연의 산물이었다. 네오프렌의 발견은 유사 세렌디피티적이었으며 티오콜의 발견은 세렌디피티라고 할 수 있다.
화학자들은 고무의 가열상태를 조절해 가면서 얻어진 단편들을 감정함으로써 고무분자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단편의 하나는 이소프렌이라는 5개의 탄소화합물인데 그것은 이중결합으로 구성되어 있다. 1920년 헤르만 스타우딩거는 유명한 논문을 통해 고무, 셀룰로오스(섬유소), 단백질 등의 중요한 천연물질과 비슷한 성질이 있는 어떤 합성물질들의 구조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들 물질은 간단한 유기화합물과는 전혀 다른 고분자 즉, 폴리머(polymer)라는 것이 그의 제안이었다(이것은 희랍어에서 유래된 것으로 Poly는 다수를, meros는 부분을 뜻한다). 고분자는 간단한 화합물에서와 같은 종류의 화학결합으로 계속해서 구성단위를 되풀이하는 거대분자인 것이다. 예를 들면 고무의 분자구조의 경우 매우 많은 이소프렌의 단량체(monomer)가 고무나무 속에서 생합성에 의해 연결되어, 고무의 거대한 고분자를 만들었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러한 천연고무의 구조식이 제안된 후, 나무에서 채취한 고무의 분자구조와 똑같은 탄성을 가지고 있는 합성고무의 제조가 여러 가지로 시도되었다. 이소프렌을 여러 가지 촉매로 처리하여 이것이 중합될 때, 고무와 비슷한 어떤 물질이 만들어지는지 연구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하여 스타우딩거의 이론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나, 분자구조의 미묘한 요인은 칼 지금러가 1953년에 입체 규칙성 촉매를 발견할 때까지 완전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이 세렌디피티적 발견은 제26장에서 설명했다). 천연고무는 이소프렌의 단량체 단위가 모두 'cis'형의 배열을 하고 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이 새로운 촉매를 사용하면 이것과 똑같은 cis형의 합성고무를 복제할 수가 있으나 이전의 촉매로는 시스(cis)형과 트란스(trans)형이 아무렇게나 섞여버렸다. 이 발견으로 비로소 천연고무와 거의 분별이 안되는 합성고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타이어나 기타제품에 천연고무를 사용하느냐 합성고무를 사용하느냐 하는 선택은 오로지 합성고무의 원료인 석유 가격에 따라 결정된다.
뒤퐁사의 잭슨연구소의 W. S. 캘콧트 박사는 니우랜드 신부가 노트르담대학에서 실시한 연구를 주목했다. 니우랜드는 카톨릭의 사제이자 노트르담대학의 학장이며 화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발표한 연구 결과에 의하면 화학식 C2H2의 탄화수소인 아세틸렌은 그 자신이 한 번 또는 두 번 부가반응을 하여 비닐아세틸렌(C4H4)과 디비닐아세틸렌(C6H6)을 만든다고 한다. 캘콧트는 이들 이량체나 삼량체가 천연고무의 구성단위인 이소프렌을 닮아서 합성고무를 만드는 데에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였다. 그는 뒤퐁 사의 몇몇 화학자들에게 이를 연구시켰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뒤퐁사의 고분자연구의 중심이 되어있던 중앙연구소의 소장인, 윌러스 카로더스에게로 갔다.
카로더스는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화학자 아놀드 콜린즈에게 니우랜드 방식으로 아세틸렌에서 얻은 천연 그대로의 혼합물을 정제하도록 했다. 콜린즈가 정제했더니 비닐아세틸렌도 디비닐아세틸렌도 아닌 니우랜드의 논문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은 소량의 액체가 분리되었다. 콜린즈는 이것을 버리지 않고 주말 동안 실험대의 한쪽 구석에 두었다. 그런데 월요일에 이 액채가 굳어 있어서 조사해 보았더니 이것은 고무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실험대 위에 떨어뜨리면 튕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고 캘콧트가 기대하고 예상했던 일이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고무제품을 분석해 보면 이것은 아세틸렌이 중합된 고분자탄화수소가 아니고 전혀 예상못한 염소를 함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이 염소는 니우랜드법으로 아세틸렌에서 이량체나 삼량체를 만들 때에 사용된 염산에 의한 것으로서 염산은 비닐아세틸렌에 첨가되어 있었다. 이 부가생성물은 이소프렌과의 유사성에서 클로로프렌(chloroprene)이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의 단량체 차이는 이소프렌의 메틸기(탄소 1개가 수소 3개에 결합된 구성단위, CH3)가 염소원자와 바뀌었을 뿐이다. 콜린즈의 실험대 위에 주말동안 두었던 것만으로 클로로프렌이 자연히 중합되어 만들어진 고무제품을 뒤퐁 사는 '네오프렌'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새로운 합성고무는 천연고무와 달라서 기름이나 가솔린, 오존 등에 놀라울 정도로 내성이 강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천연고무보다 휠씬 고가임에도 불구하고 뒤퐁사에서는 1930년에 이를 제조하여 시판해도 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네오프렌은 현재도 유익하게 사용되고 있고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 내구성을 살려서 공업용 호스, 구두창, 창문의 개스킷, 튼튼한 공업용 벨트, 전선 케이블의 커버 등에 사용되고 있다. 최근에 재미있는 용도로는 두 겹 가죽 벨트용 접착제가 있으며 흑색과 갈색 가죽의 사이를 꿰매지 않고 영구적으로 접착해서 앞뒤로 쓸 수 있는 2색 벨트를 만들 수 있다.
1924년에 J.C. 패트릭은 다량의 에틸렌과 산업공정에서 생기는 부산물 염소가스를 이용해서 유용한 어떤 물질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두 물질을 결합하면 2염화에틸렌이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패트릭은 수요성이 있는 에틸렌그리콜을 제조할 목적으로 2염화에틸렌과 여러 물질들과의 반응을 조사하고 있었다. 그가 조사한 물질 중에는 다황화나트륨이 있었다. 이것은 원하던 액체 글리콜 대신에 고무와 같은 반고체 물질을 얻게 되었다. 패트릭은 즉석에서 이 예상하지 못했던 고무물질의 잠재적인 가치를 깨닫고 대규모의 연구계획에 나섰다. 그 결과 바로 특허를 취득하였고 새로운 합성고무제조회사 설립으로 진전되었다.
패트릭이 설립한 티오콜화학회사는 1929년 티오콜A를 시장에 내놓았다. 이것은 천연고무와는 분자구조가 전혀 달랐으나 탄성은 뛰어났다. 네오프렌과 마찬가지로 내유성이 있다는 점에서 천연고무보다 우수했다. 그러나 큰 결점이 나타났는데, 바로 악취가 심한 것이었다. 티오콜 사와 다른 회사는 많은 종류의 다황화 고무를 제조했다. 그것들의 용도는 석유제품에 대해서 내구성이 있다는 것과 밀봉성이 좋은 점을 살린 것으로써 자동차 앞유리의 이음매칠을 한다든가 비행기 날개 속의 연료 탱크에 안감을 대는 것 등에 사용된다. 티오콜고무는 저온에서 내성이 강하므로 인공위성이나 우주선을 궤도로 쏘아 올리는 고체 로켓 연료의 결합재나 성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982년에 모르톤솔트 사가 티오콜 사를 매수해서 모르톤 티오콜사가 되었다. 이 두 회사는 합병 전부터 특수화학제품을 제조했으며 합병 후에도 계속했다. 모르톤 티오콜 사는 불운한 셔틀, 첼린저 우주 왕복선 제조의 주요계약자로서 제법 유명해졌다. 그러나 우주 왕복선 폭발의 원인이된 결함고무제 오링(O-ring)은 티오콜 다황화 고무제가 아니고 화학적으로는 테플론에 가까운 탄성체인 바이튼(Viton)제 였다.
제12장. 분자도 좌수형과 우수형은 크게 다르다.
루이 파스퇴르는 화학보다도 미생물학의 업적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화학자였으나 그가 유명해진 것은 아래와 같은 세균(박테리아)에 관한 연구 때문이다. 그는 와인이나 맥주의 제조에 있어 중요한 발효와 음식물의 부패(그가 고안한 우유의 저온살균법은 파스퇴르법이라고 명명되어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상처의 감염(리스터 경에 의한 수술시의 소독은 그의 연구를 응용한 것으로써 외과수술의 혁명이 되었다) 및 전염병(누에의 병에 관한 연구는 프랑스의 양잠업을 구제하고 광견병 왁친의 개발은 몇천 명이라는 인명을 죽음에서 구해냈다)등이 모두 세균의 작용임을 처음으로 증명한 것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화학에서의 업적이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해도 그의 명성에 손색이 없다. 1848년 파스퇴르가 25세 때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그는 와인이 발효될 때 통 속에 침전하는 포도산(racemicacid)의 소금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했다(라세미란 포도송이를 뜻하는 라틴어 recemus에서 유래하였다). 이미 아일하르트 미쳐리히라는 화학자가 포도산의 소금(소다와 암모니아로 처리해서 얻어지는 포도산의 암모니아 소다염)이 역시 와인의 통에서 발견된 주석산(tartaricacid)의 소금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고했다. 근소한 차이는 주석산 소금이 '광학활성'인데 반하여 라세미산의 염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주석산의 칼륨산염은 주석영으로 알려져 있다).
어떤 물질이 편광면을 회전시키는 힘이 있을 때, 그 물질을 광학활성이라고 한다. 파동의 원리에 의하면 보통의 빛은 모든 방향의 면 안에서 진동하는 파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결정은 필터작용을 하여 한 방향의 면 안에서 진동하는 빛만을 통과시키는데, 이때 나오는 빛을 편광이라고 한다.
1848년에는 수정의 결정이나 테레빈유, 또는 설탕물 등의 천연물질이 주석산의 소금처럼 편광을 회전시킨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으나 어떤 이유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편광회전을 조사, 측정하는 장치가 편광계이다. 어떤 물질이 편광면을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킬 때 이를 우선성 또는 양(+)의 선광도를 갖는다고 하며, 역으로 편광면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키는 물질은 좌선성 또는 음(-)의 선광도를 갖는다고 한다. 파스퇴르는 고민했다. 주석산의 소금과 포도산의 소금이 화학구조와 결정구조가 동일하지만 편광에 대해서는 성질이 달랐기 때문이다. 포도산의 소금은 아무런 현상도 일으키지 않는 데 반하여 주석산의 소금은 우선성이었다. 미쳐리히가 보고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실은 결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그것들은 우수와 좌수의 관계였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현미경을 보면서 핀셋으로 우수형의 결정과 좌수형의 결정으로 나누었다. 양쪽 형을 적당한 양만큼씩 나눈 파스퇴르가 다음에 한 것은 단순한 육감이었는지 아니면 천재의 번뜩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양쪽의 결정을 조금씩 따로따로 물에 녹여서 편광계의 편광경로로 차례차례 넣어 보았다. 그러자 좌수형 결정의 용액은 편광을 좌로 회전시키고 우수형 결정의 용액은 편광을 우로 회전시켰던 것이었다. '파스퇴르의 생애'(1902년간)의 저자 르네 발레리 라도에 따르면 젊은 과학자 파스퇴르는 자신의 발견에 흥분한 나머지 아르키케데스처럼 실험실을 뛰어나와 "해냈다!"고 외쳤다고 한다.
용액을 만들 때처럼 양쪽 형의 결정량을 측정해 보면 양쪽이 같은 양이면 정확하게 같은 각도만큼 회전시키고, 다만 그 방향만이 정반대였다. 또 우수형 결정의 회전 각도는 주석산염과 같이 용액의 회전 각도도 같았다. 즉, 파스퇴르는 그의 우수형 포도산의 소금이 사실은 우선성의 주석산염과 같은 것이라는 것과 그 좌수형 포도산염은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주석산염의 경상체(거울에 비쳐 반전된 형상)이라는 것을 증명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스퇴르는 두 종류의 결정을 같은 분량씩 혼합하여 그 용액이 예상했던 대로 광학 불활성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파스퇴르는 포도산염이 지닌 두 종류의 결정을 선별함으로써 화학자들이 현재 '라세미체의 분리'라고 부르는 유명한 실험을 최초로 했던 것이다[파스퇴르가 연구한 포도산(라세미산)에 연유하여 경상체끼리의 혼합물을 라세미체라고 한다]. 파스퇴르의 이 진귀한 결정학적 실험은 파리의 과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고, 곧이어 이 뉴스는 당시 매우 존경받고 있던 물리학자 잔 뱁티스트 비오에게도 전해졌다. 결정에 의한 편광회전의 근본적인 발견자이며 과학아카데미 회원이기도 했던 74세의 비오는 파스퇴르의 실험을 신용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에 보고하기 전에 비오는 파스퇴르에게 자기 눈앞에서 실험을 되풀이해보도록 했다. 파스퇴르는 이 요청에 따라 실험을 되풀이하고 비오는 결정을 만들기 위한 용액을 스스로 조제하기도 했다. 비오는 좌수형 결정이 편광을 좌로 회전시키는 것을 확인하자 더 이상 측정하는 것을 멈추고 젊은 파스퇴르의 팔을 잡고 감격하면서 "나는 평생 과학으로 살아왔지만 이토록 감격한 적은 없었네"라고 말했다.
다른 형의 결정을 분류하여 그것들의 용액이 편광면을 반대쪽으로 회전시키는 이론은 재치있기는 하지만 사소한 실험에 지나지 않았다. 어떤 물질이 편광계 속에서 편광면을 우나 좌로 회전시키는 데에 어떤 차이가 있다는 것일까?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로 볼 때, 파스퇴르의 실험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유기화합물이 분자의 레벨로 거울 형상(mirror-image)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즉 분자에는 좌. 우수성 또는 키랄리티라는 성질이 있음을 최초로 증명한 셈이다. 키랄리티란 희랍어로 '손'에서 나온 말이며 손이야말로 경상체의 가장 가까운 예라는 점에서 납득이 된다. 분자뿐만이 아니고 일반적인 물체도 키랄(chiral)인지 아키랄(키랄이 아닌 것)인지 생각할 수 있다. 이를테면 장갑은 키랄이지만 양말은 아키랄이다. 왜냐하면 양말은 좌우 어느 쪽이나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정의 결정은 용해되면 과학 활성이 없어지므로 파스퇴르의 실험 이전에는 과학자들이 수정의 결정형을 이용하여 편광에 대한 효과를 설명했었다. 그러나 테레빈유나 설탕수와 같은 액체의 광학활성의 설명은 할 수 없었다. 파스퇴르는 포도산염의 결정형의 차이가 이 소금분자의 형과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것들의 결정을 물에 녹이면 수정결정이 녹아서 결정구조가 파괴되는데도 불구하고 파스퇴르의 2종류의 소금결정 용액에서는 그래도 광학활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후에 파스퇴르는 포도산에서 분리된 소금을 각각 산의 형으로 바꾸고 그것들이 서로 이성질체의 관계인 좌수형(-)인 주석산과 우수형(+)의 주석산이라는 것을 밝혔다.
(해설) 파스퇴르는 자기의 발견이 분자구조와 광학 활성간의 직접적인 관계를 시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편광면을 어는 한 방향으로 회전하는 분자와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는 분자하고의 관계는 물체와 그 경상체와의 관계와 같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원자가 모여서 어떻게 이같은 분자구조를 형성하게 되는가를 정확하게 살명할 수 있게 되는 데어는 25년 후, 두 사람의 젊은 화학자 환트 호프와 요셉 레벨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그동안에 파스퇴르의 관심은 생물학적인 문제로 바뀌었으며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포도산의 분석이라는 그의 선구적인 일은 분자구조의 키랄리티와 생물학적 활성과의 관계를 설명하여 다른 화학자들에게 연구에 관한 길을 열어 주었으며, 이는 그가 해낸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좌수형의 포도산[(-) 주석산]이 평광면을 시계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는 사실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지만 우수형의 비타민C[(+) 아스코르빅산]가 비타민이라는 데에 대하여 (-) 아스코르빅산은 생물학적인 작용이 없어 비타민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한 (+) 글루코오스(덱스트로즈)가 음식물인데 반해 (-) 글루코오스는 영양분이 없다든가, (-) 클로로마이세틴이 강력한 항생물질인데 (+) 클로로마이세틴은 그렇지가 않다거나, (-)아드레날린은 (+) 아드레날린에 비해서 홀몬의 활성이 몇 배나 높다든가 하는 문제도 모두 같은 의미가 있다.
분자의 키랄리티의 중요성을 보인 비극적인 예가 탈리도마이드 사건이다. 이 분자의 (+)형은 안전하고도 효과적인 입덧방지제로서 1950년대에 많은 임산부가 이 약제를 복용했는데 그 후, (-)형의 활성 돌연변이 유도물이라는 것이 화학자에 의해 밝혀졌다. 약제는 양쪽 형의 분자를 함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태아에게 심각한 폐해를 미쳤다. 파스퇴르가 결정형의 차이를 알아차리고 이를 선별하여 편광의 반대효과에 대한 의미에 관해서 추론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그의 천재성이 인정되지만 이 발견에도 세렌디피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발견을 함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우연이 두 가지나 겹쳤던 것이다. 첫째로 파스퇴르는 포도산의 나트륨암모늄염을 사용하였는데, 이 산의 수많은 염 중에서 경상형으로 결정되어 눈으로 볼 수 있거나 기계적으로 선별할 수 있었던 것은 거의 유일하게 이 염뿐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두 가지 형으로 나누어져 결정화되는 것은 섭씨 26도 이하인 때뿐이어서 26도 이상이면 모두 한 가지 형이 되어 광학활성은 일어나지 않는다. 파스퇴르는 소금 용액이 들어있는 플라스크 병을 썰렁한 파리의 그의 실험실 창가에다 두고 결정화가 충분히 진행되도록 이튿날까지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이것이다'라고 포도산염을 운 좋게 선택한 것과 썰렁한 파리의 기후가 아니었던들 파스퇴르의 이 위대한 발견이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파스퇴르는 세렌디피티의 은혜를 받은 다른 위인들과 마찬가지로 '우연'과 '우연적 발견'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감명깊게 말했다. "관찰의 세계에서 행운이란 오직 준비하고 기다리는 마음에 호의를 베푸는 법이다." 위대한 미국인 물리학자 조셉 헨리가 그보다도 이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도 같은 근본원리가 염두에 있었을 것이다. "위대한 발견의 씨는 언제나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뿌리를 내리는 것은 그것을 준비하며 기다리는 마음에 있을 뿐이다."
제13장. 합성 연료와 합성 안료를 둘러싸고
모브의 발견. 1856년 갓 18세가 된 윌리엄 퍼틴은 왕립대학(Royal College)의 부활절 휴가 동안에 자기 집 실험실에서 야심에 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키니네(quinine)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려 했던 것이다. 그는 유명한 독일인 화학자 A. W. 호프만 교수의 조수를 하고 있었다. 영국의 왕자 앨버트는 호프만을 왕립대학의 초대장으로 독일의 본에서 초청했다. 호프만은 강의 중에 말라리아에 유일하게 효과적인 이 키니네가 동인도에서 자라는 킨키나나무 껍질에서만 얻을 수 있으므로 키니네를 인공적으로 합성시킨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천연 키니네가 어떻게 해서 우연히 발견되었는가는 제3장을 참조할 것). 퍼킨은 제철공업의 값싼 부산물인 콜타르(coal tar)에서 나오는 톨루이딘(toluidine)을 원료로 해서 당시 유행했던 '가감법'에 의하여 키니네를 합성하려고 생각했다. '가감법'이란 출발원료와 목적원료의 단순한 분자식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알려져 있던 톨로이딘과 키니네의 분자식의 차이에서 퍼킨은 톨루이딘에 몇 개의 탄소 원자와 수소 원자를 가하고 그 후에 산소 원자를 몇 개 가해서 원소의 형과 수를 키니네와 같게 하면 키니네를 합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원자가 모여서 분자의 3차원 구조가 형성된다는 오거스트 케클레의 이론이 발표되기 수년 전의 일이었다(케클레와 분자구조에 관해서는 제14장을 참조할 것). 퍼킨의 계획이 얼마나 소박했는가는 키니네의 구조식 결정이 1908년에 있었으며 그 합성에 이르러서는 매우 우수한 화학자들의 도전을 1944년까지 받아 온 것만으로도 알만하다. 퍼킨은 계획한 대로 실험을 실시하여 처음에는 3개의 탄소와 4개의 수소를 아릴(allyl)기로 해서 톨로이딘에 가한 다음에 강력한 산화제인 2크롬산칼륨으로 처리했다. 그 결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가망이 없을 것 같은 적갈색의 진흙이었다. 그는 굴하지 않고 출발물을 좀더 간단한 아닐린(aniline)으로 바꾸어 보았다(실은 퍼킨이 사용한 아닐린은 소량의 톨루이딘을 함유하고 있으며 이것이 보라빛 염료의 합성에 필수였다). 이번에는 이전의 생성물보다도 더욱 가망성이 없을 것 같은 새까만 고체였다. 그러나 그것을 버리기 전에 살펴보니 이것을 씻어내기 위해서 사용한 물이나 알콜이 보랏빛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예상외의 결과에 흥미를 느낀 퍼킨이 이 보라색 용액을 조사해 보니 이것이 천을 물들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퍼킨은 바로 흑색 혼합물에서 보라색 염료를 추출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발견하여 이 합성 염료의 샘플을 영국의 유명한 염료공장으로 보내고 명주와 무명에 시험을 의뢰했다. 그 평가 결과, 명주에는 매우 유망하지만 무명에는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명에도 전 처리를 하면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
이와 같이 키니네를 합성하려던 소박한 시도가 우연히 인류 최초의 인공염료를 생산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었다. 젊은이다운 열의로 퍼킨은 자기가 만들어낸 염료의 특허를 취득하여 공장을 세우고 염료공업으로 나섰다. 염료업을 시작하는 것이 바보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던 그의 스승 호프만은 그가 학문의 세계에서 연구를 계속하길 희망했던 만큼 퍼킨을 전혀 응원하지 않았다. 대학교수인 본인(저자)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호프만이 잘못 생각한 것이다. 다행히도 퍼킨의 부친은 자산가였고 명석한 아들에게 크게 기대했다. 부친과 형제의 지원을 받으면서 퍼킨은 합성법을 공업적인 규모로까지 확대생산하는 동안에 산더미같은 많은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이 확대생산의 처음 무렵에는 폭발 사건도 더러 있었으며, 주철로 된 반응용기의 내용물이 너무 심하게 비등을 시작하면 용기에 냉수를 끼얹으며 그 반응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 때문에 공장직원이 수도 호스를 손에 들고 지켜야하는 그런 형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염료제조는 대성공이었다. 아닐린퍼플, 티리언퍼플, 모브(또는 모빙) 등으로 불리운 그의 염료는 퍽 널리 보급되었다. '모브'(mauve)란 프랑스에서 이 새로운 염료에 붙여진 이름인데 현재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이름이 되었다.
퍼킨의 발명 이전에는 내구성이 있는 보라색, 연보라색의 염료는 매우 고가의 것이었다. 기원전 1600년부터 사용되어 온 천연염료는 원래 티리언퍼플이라고 했으며 지중해에서 채취되는 조개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조개는 모으기가 어려워서 1그램의 염료를 만드는데 9,000개의 조개가 필요했다. 오직 왕가만이 이 염료를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보라색과 왕족과의 연계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퍼킨이 콜타르에서 내구성 있는 아름다운 보라색 염료를 합성한 덕분에 누구라도 이 색을 사용할 수 있는 가격이 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보라색은 바래기가 매우 쉬워 여성이 아침에 모자에 연 보라색 리본을 달고 외출하면 저녁 때는 붉은 색깔로 변해버리는 형편이었다.
모브의 성공은 합성염료공업 탄생의 계기가 되었으나 실제로 그 가능성을 간파하고 대규모로 발전시킨 사람은 영국인이 아니고 독일인이었다. 그건 그렇다 치고 퍼킨의 지도로 영국에서도 새로운 염료공업 발전이 급속히 진행되었으며, 최초의 공장이 건설되고 나서 겨우 6년 만에 영국 화학회가 콜타르에서 만들어지는 염료에 관한 강의를 그에게 의뢰할 정도였다. 퍼킨의 그 후의 인생은 영예가 충만한 것이었다. 영국학사회 회원으로 작위를 받았으며, 이어서 데이비상, 호프만상, 라보이제상을 받았다. 그리고 1906년 콜타르염료공업 설립 50주년에는 전세계에서 다수의 저명한 과학자가 출석하는 기념식이 있었으며 또한 영국 화학공업회의 미국 지회에는 미국인 화학자의 최고의 영예로써 퍼킨상이 마련되었다.
퍼킨에 의한 모브의 발명은 세렌디피티의 좋은 예이다. 그는 어떤 목적을 향해서 출발하여 우연한 행운 덕분에 휠씬 중요한 다른 결과에 도달했던 것이다. 1856년에 키니네를 합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기대하지 못했던 것이었으며, 설령 가능성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당시에 합성염료공업의 설립만큼 중요했다고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드워드와 윌리엄 폰 E. 도에링 등에 의한 키니네의 합성은 천재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실용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당시 미국은 말라리아가 만연되어있는 태평양지역에서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키니네 입수의 길은 단절되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드워드와 도에링의 합성이 실용적으로 키니네를 생산하지는 못했다.
(해설) 퍼킨이 개발해 공업적으로 생산한 또 하나의 중요한 콜타르염료는 몇 세기 동안 꼭두서니과의 식물 뿌리에서 채취한 적색염료인 알리자린이었다. 1868년에 독일의 칼 그레베와 칼 리베르만은 콜타르의 한 성분인 안트라센에서 알라자린 합성을 발표했다. 그레베와 리베르만의 이 합성법은 공업생산에는 비실용적이었으나 이 발표는 호프만 밑에서 연구하고 있을 때 안트라센을 취급한 적 있는 퍼킨의 흥미를 끌었다. 1년도 안 되어 퍼킨은 콜타르 안트라센에서 알리자린을 생산하여 1871년에는 연 생산 220톤에 이르렀다. 1874년에 퍼킨은 그의 공장을 매각했다. 36세에 그는 나머지 인생을 오로지 연구에만 몰두해도 될 정도의 재산가가 되어 있었다. 새로 집을 샀으나 모브를 발명했던 옛집은 연구실로 계속 사용했다. 여기서 그는 콜타르에서 최초의 향료인 쿠마린(coumarin)의 합성을 완성시켰다. 계피산 합성 때에 그가 사용한 방법은 아주 유용하며 퍼킨반응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1882년 아돌프 폰 바이엘은 염료 역사상 또하나의 기념비적인 그의 유명한 인디고합성의 출발물질을 제조하는 데 변화된 퍼킨반응을 사용했다. 콜타르 염료의 가치는 섬유의 염색에 그치지 않고 미생물 연구의 매개물 염색에서도 중요하다. 결핵이나 콜레라의 병원균이 발견된 것도 염색기술로 이들 염료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퍼킨에 의한 모브의 발명은 19세기 후반, 특히 독일에서 유기화학의 눈부신 발전의 출발점으로 인정되어왔다. 호프만이 독일로 귀국한 것이 으 급격한 발전에 분명히 관계가 있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케크레와 그의 화학구조론에 자극된 독일의 '방향족화학'의 발전이었을 것이다. 대부분 새로운 합성염료는 벤젠에 관련되는 방향족화합물이었다.
알리자린. 적색염료의 알리자린은 고대부터 알려져 왔으며 이집트인은 미이라를 싸는 천을 염색하는데 이를 사용했다. 알리자린은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종류의 꼭두서니과의 식물 뿌리에서 얻을 수 있다. 1886년에는 아직 알리자린의 화학구조도 알려져 있지 않고 베를린에 있는 바이엘의 연구실의 연구과제가 되었다. 수년 전 바이엘은 다른 천연염료인 인디고(다음 항을 참조)의 연구에 나섰다. 그 연구 중에는 바이엘는 복잡한 유기화합물에서 산소를 제거하여 이미 알려져 있는 간단한 화합물로 변환시키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였다. 그는 화합물을 아연분말과 함께 가열하는 이 방법이 알리자린에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바이엘의 젊은 조수이던 칼 그레베와 칼 리베르만이 실험해 본 결과 생산된 것은 콜타르의 성분으로 잘 알려진 탄화수소 안트라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가 있기 몇 년 전에 이미 케클레가 벤젠분자의 환상구조를 설명했었으므로 그들은 안트라센에 대해서 벤젠 3개를 붙인 구조식을 만들 수 있었다. 케클레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의 회화적인 분자구조설은 많은 유기화합물, 특히 알리자린과 같은 방향족화합물의 구조결정에 넓은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 후 그레베와 리베르만은 이 과정이 역반응으로 가는 계획을 세웠다. 즉 안트라센에 산소를 부가해서 알리자린을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현재는 잘못 생각한 것으로 인정된 어떤 가능한 화학반응을 계획한 것이었는데, 여기서 유사 세렌디피티가 일어났다. 그들이 이론에 맞지 않은 방법을 사용했는데도 불구하고 바로 천연의 알리자린과 일치되는 합성품을 만들 수가 있었다. 이것은 인간이 천연염료를 실험실에서 최초로 합성한 것이었다(퍼킨의 모브는 천연의 조개에서 취한 티리언퍼플과 색은 비슷하지만 화학식이 다른 새로운 물지이다). 이 실험실에서의 합성은 학문적 성과로서는 훌륭한 것이었으나 알리자린의 공업적 생산에는 전혀 적합하지 않았다. '바딧셰 아닐린과 소다공업회사(BASF)'의 기술자 하인리히 카로의 도움을 받아 그레베와 리베르만은 실용적이라고 생각되는 다른 방법을 여러 가지로 시도했다. 몇 번인가 실패한 후, 카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실험에 의해 표준 알리자린을 양질의 수량으로 바꿀 수 있는 구조불명의 중간체를 발견했다. 그 유사 세렌디피티적 합성법은 영국에서 퍼킨이 거의 같은 무렵에 독립적으로 발견한 것과 같은 것이었다. 합성 알리자린은 독일과 영국 두 나라에서 1871년에 시판이 시작되어 순식간에 천연염료를 대체하게 되었다.
망가진 온도계와 인디고. 청색염료인 인디고(Indigo)는 알리자린과 마찬가지로 고대문명 시대부터 알려져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말경까지 이 염료는 '쪽'이라는 식물에서 채취했다. 1897년 인도에서 쪽의 재배면적은 200만 에이커(약 8,000 평방킬로)에 이르렀다고 한다. 마침 그 무렵 독일의 화학회사가 이 염료를 합성하는 과정을 개발하여 합성품을 천연품보다 염가로 팔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천연인디고를 생산하고 있던 인도나 기타 나라들에서는 경제적 대변동이 일어났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 경제적 및 문화적 대변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실험 중에 온도계가 파손되는 우연한 사건에 도달하게 된다. 아돌프 폰 바이엘이 베를린대학에서 인디고의 화학구조 연구를 시작한 것은 1865년이었다. 1883년까지 그는 옳다고 여겨지는 구조를 추론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보통 유기화학자가 하는 대로 어떤 구조의 화합물을 합성해서 이것이 천연염료와 모든 점에서 일치하는가를 일일이 확인했다. 실제로 그는 몇 가지의 합성법을 연구하여 그중의 하나로 퍼킨반응도 써 보았지만 어느 것 하나 천연인디고와 가격 면에서 경쟁이 될 만한 합성염료의 공업적 생산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BASF의 칼 호이만이 처음으로 성공적인 공업용 합성을 개발시킨 것은 1893년의 일이었다. 이 합성이 성공한 것은 콜타르의 한 성분으로서 당시 제철공업의 페기물이나 다름없던 나프탈렌을 출발원료로 사용하기 시작한 때부터였다(철광석으로 철을 빼내는 데 코크스가 사용되고 있다. 코크스를 만들기 위해 석탄을 가열하면 점성이 높고 심한 냄새가 나는 흑색 액체인 콜타르가 흘러나오는데 이것을 어딘가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합성염료와 합성안료가 발명되고 나서야 이것이 유기체 출발물질의 풍부한 원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디고를 성공적인 공업용 합성으로 이끈 우연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BASF의 사퍼라는 화학자가 나프탈렌을 발연황산과 함께 가열할 때 실수로 온도계를 망가뜨리면서 그 속의 수은이 반응용기 속에 흘러 들어갔다. 사퍼는 반응이 언제나처럼 진척되지 않고 나프탈렌이 무수프탈산으로 변화한 것을 알아차렸다. 잘 조사해 보니 황산이 수은을 황산수은으로 변화시키고 이 황산수은이 나프탈렌을 무수프탈산으로 산화하는 촉매였다는 것을 알았다. 무수프탈산을 인디고로 변화시키는 것은 아주 쉬웠다. BASF는 1897년에 합성 인디고를 천연품보다 싼값으로 팔기 시작했다. 합성인디고를 제조하는 과정은 그 이후 점차 개량되어 천연인디고가 염료시장에서 이전과 같은 지위를 되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나스트랄 블루. 염료와 역사 속에서는 세렌디피티의 예를 많이 볼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모브나 알리자린, 또는 인디고 따위의 발견보다 훨씬 후인 1928년에 A. G. 댄드리지가 아름다운 청색안료를 발견했을 때에 일어났다. 안료라는 것은 다른 물질을 착색하는 데에 사용되는 불투명하고 불용성인 분말로서 염료하고는 구별된다. 안료는 주로 표면 보호와 장식용 도료, 인쇄잉크, 프라스틱, 고무 등에 사용된다.
댄드리지는 스코틀랜드 염료회사의 화학자로 제철용기 속에서 용해된 무수프탈산에 암모니아를 첨가하여 프탈리미드(phthalimide)를 제조하는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프탈리미드와 무수프탈산이라는 말은 모두 나프탈렌에서 유래되었다). 댄드리지는 용기벽이나 뚜껑에 청색 결정이 부착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흥미를 느껴 조사해 보기로 했다. 댄드리지 등이 연구한 결과 청색 결정은 용기인 철과 그 안에 있는 내용물의 화학반응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과 철 대신에 니켈이나 동 등 다른 금속이 반응하면 다른 안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다.
1929년 스코틀랜드 염료회사의 모회사인 임페리얼화학 공업사는 런던의 임페리얼대학 린스테드 교수에게 이 안료의 샘플을 보냈으며 교수는 학문적으로 흥미로울 것이라 생각하여 연구를 시작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린스테드와 그의 공동연구자들은 이들 염료의 화학구조를 결정해서 프탈로시안이라는 이름을 붙여 1934년에 일련의 연구 논문으로 보고했다. 이 연구와 1935년 로버트슨에 의한 X선 결정 해석 결과, 동을 함유한 안료의 구조식이 정해졌다. 크론쇼우는 '프탈로시안 발견에 관한 총설'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프탈로시안류의 존재는 예상하지 못했으며, 아마도 예상할 수도 없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탈로시안류가 발견되어 분자구조도 확인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이 화합물의 필연성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 물질의 생성은 얼마나 경탄스러운가! 적당한 반응온도에서 동과 같은 금속과 함께 꼭 필요한 4개의 성분이 제자리로 재빨리 움직이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프탈로시안의 구조는 혈액 중의 색소성분인 헤민[중심금속은 동(Cu)대신에 철(Fe)로 되어있다]이나 녹색 식물의 색소 성분인 클로필[중심금속은 마그네슘(Mg)]와 비슷하다. 이 안료는 학문적으로 중요할 뿐만 아니라 실용성도 높다. 린스테드와 공동연구자들은 1933년부터 1942년까지 26개의 특허를 얻었으며 그 후에도 많은 특허를 취득했다. 화합물 중 철 원자를 동으로 바꾸어 놓으면 더욱 좋은 청색 안료를 얻게 되며 이 '모나스트랄 블루(monastral blue)'는 컬러 인쇄에 3원색 프로세스용 청색 안료로서는 현재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것이다. 또한 프탈로시안 동속의 수소 원자 몇 개를 염소원자로 바꾸면 훌륭한 녹색 안료가 된다.
프탈로시안 안료는 인쇄잉크, 그림물감, 페인트, 락카 등 색소 재료로서 고가인 것이 많다. 레이온이나 아세테이트의 염색에도 사용된다. 이와 같이 고가인 안료도 우연과 통찰력에 의한 발견 즉, 세렌디피티의 좋은 한 예이다.
제14장. 꿈에 의해 탄생한 분자의 구조식.
18세기 초 무렵 런던에서는 극장이나 공공장소의 조명은 경유(고래기름)에서 얻은 가스를 사용했었다. 배달하기 위해 이 가스를 탱크에 압축하면 휘발성이면서 향기가 좋은 액체가 분리된다. 유명한 화학자 마이켈 패러데이는 이 액체를 조사해 보고, 1825년경 이것이 거의 같은 비율의 탄소와 수소로만 이루어져 있음을 발견했다. 한참 후에야 벤젠이라고 이름 지어진 이 액체가 코크스를 만들 때에 석탄에서 증류되는 타르의 한 성분이라는 것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관련된 방향족 화학물은 여러 천연자원에서 발견되었다.
벤젠의 이 특이한 성질 때문에 화학자들 사이에는 이론상의 중요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탄소원자에 대한 수소원자의 비율이 낮은 탄소와 수소만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화합물은 대체로 벤젠하고는 성질이 달랐다(벤젠의 경우 분자식은 C6H6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비율은 1대1이다). 이와 같은 화합물을 수소에 관해서 불포화라고 한다. 즉, 이와 같은 화합물에는 수소의 몇 분자가 부가되기 쉬운데 벤젠은 부가가 잘 되지 않는다. 벤젠에는 이 외에도 기묘한 성질이 있어서 1865년까지 아무도 벤젠의 적당한 구조식을 고안한 사람은 없었다. 그것을 고안한 사람이 프리드리히 A. 케클레였다. 케클레는 1829년 독일의 다름슈타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건축을 배울 생각으로 기센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기센대학에서 유스투스 폰리비히의 정열적인 강의에 크게 영향을 받아 일생을 화학에 바칠 것을 결심했다. 그는 기센대학에서 파리대학으로 옮겨 안드레 듀마와 부르츠에게 배운 후 영국으로 건너가서 당시 최고이던 영국인 화학자들과 함께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독일로 돌아와서 처음에는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교단에 섰고, 이어서 1858년 벨기에의 겐트대학의 화학과 교수가 되었다. 겐트대학에는 1865년까지 있었으나 그 해 본대학에서 불러 A.W. 호프만의 후임교수가 되었다. 그는 1896년에 사망할 때까지 본대학에 있었다. 그 해는 알프레드 노벨이 사망한 해이기도 했으나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최초의 다섯 사람 중 세 사람(1901년 환트 호프, 1902년 에밀 피셔 및 1905년의 아돌프 폰 바이엘)은 그의 제자들이었다. 케클레는 19세기의 대단히 뛰어난 화학 교육자로도 알려져 있다.
교육자로서의 명성은 차치하고라도 화학자 사이에서 케클레를 아주 유명하게 한 것은 유기화합물의 분자구조에 관한 그의 이론이다. 1858년 이전의 유기화학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암흑 속에서 연구를 했었다. 즉 설령 무언가 획기적인 일을 해내려해도 연구대상의 물질이 어떤 것인가에 관해서 분자의 모양을 마음속에 그려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1828년 프리드리히 뵐러는 요소와 시안화암모늄이 모두 탄소, 수소, 산소, 질소를 1:4:1:2의 비율로 함유하고 있는데도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밝혔다(제 9장 참조). 이것들을 오늘날 이성체라고 하는데 같은 수의 같은 원자로 연결되어 있는데도 어떻게 다른지 그 당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1865년 케클레에 의해 벤젠에 관한, 납득할 수 있는 구조식이 제안된 것은 학계에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따라서 그 식이 발표된 후 25주년이 되는 1890년에 베를린의 시청에서 성대한 축제가 개최된 것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독일에서의 합성염료 공업의 발전과 19세기 후반의 유기화학의 눈부신 개화는 케클레와 그의 제자, 동료들에 의해서 발전된 구조론에 의한 바가 크다. 축제에서 케클레의 강연은 독일의 저명한 화학잡지에 발표되었다. 다음 인용문은 그때 케클레가 말한 화학구조의 일반이론으로서 이 이론의 발견 100주년을 맞이한 1958년에 출판되었다.
여러분께서는 벤젠 이론의 탄생 기념 축제를 축하해 주고 계시지만 먼저 제가 말씀드려야 할 것은 저에게 벤젠이론은 단순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원자의 원자가와 그 결합의 본질은 제가 만들어 낸 사고방식의 매우 명백한 결과인 것입니다. 사용되고 있지 않은 원자가는 달리 어떻게 처분 되었을까요? 런던에 있을 때 저는 클레이 팜 로드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종종 친구인 휴고 뮬러와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곤 하였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대부분 제가 좋아하는 화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기분 좋은 여름날 밤 제가 타고 온 막차인 버스는 인적이 끊긴 거리를 달렸으며 저는 언제나처럼 위층자리(런던의 이층버스)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몽상에 빠졌으며 원자들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뛰어놀고 있었습니다. 그 아주 작은 생물들이 나의 꿈속에 나타날 때는 언제나 똑같은 몸짓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그것들의 움직임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작은 것 두 개가 짝을 짓기도 하고, 큰 것이 적은 것 두 개를 끌어안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좀더 큰 것은 작은 것을 세 개 또는 네 개를 붙들면서 전체는 눈이 돌 정도로 격렬한 운동을 계속하는 것이 몇 번이고 보였습니다. 큰 곳이 사슬을 만들고 작은 것은 사슬의 끄트머리를 끌고 있는 것도 보였습니다... 차장의 안내 방송이 저를 꿈에서 깨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은 이 꿈의 윤곽을 종이에 스케치하면서 보냈습니다. 이것이 구조론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벤젠이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겐트대학에 있을 때 저는 한길 가의 조촐한 독신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으며 저의 서재는 햇빛이 닿지 않는 좁은 골목길에 접해 있었습니다... 저는 앉아서 교과서에 필요한 것을 써 넣고 있었는데 작업이 지지부진했습니다. 다른 일에 신경이 쓰였던 것이었습니다. 의자를 난로 쪽으로 향하게 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라자 또 제 눈앞에서 원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또 제 눈앞에서 원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때는 작은 것들이 뒤쪽에 얌전히 있었습니다. 이런 일이 가끔 있었기 때문에 제 마음의 눈도 예민해져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큰 구조까지 식별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따금 길다란 열이 마치 뱀처럼 얽히고설키면서 찰싹 달라붙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셈인지 뱀 한 마리가 자신의 꼬리를 물로 마치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었습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하듯이 눈을 떴습니다. 그날 밤도 저는 이 가설을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에 관해 생각하며 보냈습니다.
런던에서의 버스 안과 겐트대학 시절 난로 앞에서의 케클레의 꿈은 유기분자의 구조에 관한 심원한 이론으로 진전되어 과학의 진보에 매우 값진 것이 되었다. 첫 번째 꿈에서 원자가 '사슬을 만들고', '큰 것이 작은 것을 두 개 끌어안기도 하고', '좀더 큰 것은 작은 것을 서너 개 붙들고' 있는 것을 보고 케클레는 탄소 원자가 수소 원자나 기타 원자와 결합하면 서로서로 사슬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제안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메탄올이나 에탄올의 분자식은 간단히 CH4O와 C2H6O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 구조식은 그림 14-1과 14-2처럼 표시된다. 마찬가지로 요소의 구조식은 그림 14-3처럼 그려지며 한편 시안화암모늄은 그림 14-4와 같이 된다.
뱀이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던 두 번째 꿈에서 케클레는 6개의 탄소가 한 고리를 만들고 있는 벤젠의 환상구조를 제안했다. 그림 14-1에서 14-4까지 탄소는 다른 원자와 4개의 선으로 맺어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개중에는 산소(O)나 질소(N)등의 원자와 2개의 선으로 연결되어있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처음 꿈의 결과 '탄소가 모든 화합물 속에서 4가이다'라는 케클레의 제안을 뜻한다. 제각기 한 개의 수소 원자와 결합한 6개의 탄소 원자가 한 고리를 만들고 있는 벤젠의 식으로는 각각의 탄소원자로부터 양측의 탄소 원자와 1개의 수소원자로 구성된 합계 3개의 선(원자가)밖에 나와있지 않으므로 그림 14-5에 표시한 바와 같이 어딘가에 이중결합을 할 필요가 있다. 케클레가 그의 분자식으로 '사용되지 않는 원자가'를 처리한 것도 이 방법이었다.
많은 화학자가 이 환상구조식을 받아들여 높이 평가했으나 이 식에는 결점이 있지 않겠느냐고 지적한 사람도 있다. 만약에 두 개의 이웃한 수소 원자를 다른 원자로 바꾸어 놓았을 때 그 두 개의 원자를 결합하고 있는 탄소가 이중결합으로 맺어졌는가 또는 단일결합으로 맺어졌는가에 따라서 두 개의 이성체가 생기게 된다. 케클레는 이와 같은 이성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환상구조에 관한 그의 개념을 수정하여 환상구조는 환을 구성하는 탄소 원자 사이에서 이중결합과 단일결합이 빠른 속도로 교환되고 있는 것이라고 제안했다. 따라서 이성체는 서로 바뀌고 있어서 분리될 수가 없는 것이다. 1865년부터 1890년 동안에 그 외에도 벤젠에 대한 그럴듯한 구조식이 제안되었으나 실험적인 증명으로 버티어 나온 것은 케클레의 식뿐이었다. 벤젠의 구조와 기타 수천 가지 종류의 방향족 화합물의 구조에 관한 케클레의 관점은(전자의 발견이 케클레의 구조식 25주년 기념식이 있었던 수년 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원자간의 전자적 결합이라는 양자역학 개념에 근거를 둔 현대의 관점과 일치한다.
케클레의 꿈이야기와 그 꿈이 그의 분자구조론에 대한 역할에 관해서는 많은 비판도 있었고 의문을 품은 사람도 있었다. 케클레는 1860년대의 그의 논문에서 꿈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당시 많은 과학자들이 공식적인 논문에서 자기의 아이디어가 어디서 왔는지 일일이 쓰지 않았으며 실제로 있었던 일과는 거의 역순으로 자료를 제시하기도 했었다. 우연, 상상 또는 꿈이라는 것은 이따금 위대한 발견의 중요한 요소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발견의 단서에 지나지 않는다. 케클레가 초기의 논문에서는 그의 분자구조설이 꿈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숨기고 기념축제의 강연을 통해 비로소 이를 인정했다고 해서 조금도 놀라거나 의심할 필요는 없다. 그 강연 중에서 위대한 과학자이자 몽상가이기도 했던 케클레의 특징이 나타난 대목을 인용해 보기로 한다. 여러분 꿈꾸기를 배웁시다. 꿈을 꿈으로 해서 우리는 아마도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이성으로 잘 살펴볼 수 있을 때까지 그 꿈을 발표하는 것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노벨상이 시작된 것은 케클레가 사망한 후였으므로 그는 수상하지 못했으나 그야말로 노벨이 기대했던 바로 그런 인물이었다.
노벨을 사망하기 수개월 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달성하기 어려운 꿈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을 돕고 싶습니다." 염료의 개발뿐만 아니라 이를테면 설파제나 아스피린과 같은 의약, 고옥탄가 가솔린, 합성세제, 플라스틱, 그리고 폴리에스텔섬유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케클레가 벤젠의 구조식에 의해 기초를 구축한 방향족 화학의 성과인 것이다. (해설) 1921년 생리학자 옷토 레뷔는 화학물질에 의한 신경 자극의 액성 전달을 발견했다. U.바이스와 R.A. 브라운에 따르면 이 아이디어는 레뷔가 잠을 자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일어난 꿈에서 얻었다고 한다. 처음 꿈을 꿨을 때는 깨어났다가 금방 다시 잠이 들었기 때문에 아침에 눈떴을 때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두 번째 꿈을 꾼 레뷔는 깨어나자마자 그대로 실험실로 가서 꿈속에서 생각했던 간단하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실험을 했다. 케클레와 마찬가지로 레뷔도 그의 연구기초가 된 아이디어의 기원에 관해서 곧바로 공표하지 않았으나 케클레와 달라서 그는 친구와 가족에게는 바로 설명했으므로 이 일에 관해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레뷔의 딸은 부친이 꿈에서 비롯된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을 것이라고 렐뷔의 동료가 예언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의 예언대로 레뷔는 H. H. 데일과 함께 1936년도의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수상 강연에서는 꿈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바이스와 브라운은 "레뷔가 발견하게 된 배경에는 케클레가 말한 바와 같이 과학연구에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가 꿈속에서 실제로 얻을 수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이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또 19세기의 위대한 철학자이며 생리학자이기도 한 헤름홀츠가 성과가 좋은 아이디어는 "아침에 잠에서 깼을 무렵에 머리에 떠오르는 일이 많았다"고 말한 사실도 지적했다. 내 경험에 의하면 상상력과 기억력은 꿈이나 또는 이에 가까운 상태(백일몽?)인 때에 가장 활발하다. 대학의 내 연구실에서 책상 앞에 앉았을 때 중요한 아이디어가 떠오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한 아이디어는 헤름홀츠가 말한 바와 같이 아침시간이나 비행기, 버스안, 아니면 산보를 하거나 무심코 터벅터벅 걸을 때, 또는 샤워를 하거나 음악을 즐기고 있을 때에 문뜩 떠오르는 것이었다. 식물에 의한 광합성을 설명하여 1961년도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 멜빈 칼빈은 이 문제의 열쇠를 생각해 냈을 때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산화탄소의 광합성 순환에 대한 기본적인 양상의 하나를 깨달았을 때를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아주 기묘하게도 그야말로 순간이었습니다. 어느 날 나의 아내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동안 나는 차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전에 알고 있었던 모든 사실과 모순되는 어떤 기본적인 정보를 연구실에서 얻어서 몇 개월 동안 그대로 있었습니다. 주차금지구역에 세워두었던 승용차 핸들 앞에 앉아 있었을 때 미처 생각 못 했던 화합물이 떠올랐습니다. 그것은 아주 갑작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몇 초 동안에 탄소의 경로가 순환하고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것은 30초 정도의 짧은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인스피레인션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다만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합니다.
1964년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찰스 H. 타운즈는 "레이저는 어느 아름다운 봄날 아침 워싱톤 DC의 공원 벤치에서 탄생했습니다. 프랭클린 공원에서 진달래를 보면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분자에서 매우 순수한 형의 전자파를 끌어내는 실용적인 방법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입니다"라고 술회한다. 캘리포니아공과대학 교수이자 1891년도 노벨생리학상 수상자인 신경 생물학자 로저 스페리는 간질병 환자의 뇌 양쪽 반구를 수술로 분리하여 연구했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이 장에서 밝힌 바와 같은 상황이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인스피레인션은 뇌의 우측에서 오는 것이며 또한 어떤 사람들에 의하면 우뇌의 사고는 의식적으로 육성되기도 하고 훈련되기도 한다고 한다. 꿈이나 백일몽이 제아무리 귀중하다고 해도 케클레의 인용문에 있는 바와 같이 꿈이란 내려 쪼이는 햇볕 아래에서 음미되어 테스트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틀림없다. 밤이건 낮이건 한순간의 섬광과 같이 떠오른 아이디어도 몇 날 몇 달 또는 몇 년 동안 어렵게 노력한 결과 비로소 참다운 결실을 맺는 것이다. 이와 같이 꿈에서 시작된 발견은 세렌디피티에 포함시킨 것은 이것들이 통상 같은 부류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꿈이나 인스피레이션이 우연인지 어떤지에 관해서는 의논이 분분하기도 하지만, 만일 누군가가 꿈에 의해서 행동하고 케클레나 레뷔, 칼빈, 타운즈 등과 같이 훌륭한 발견을 했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행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